‘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 (16:15-20)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5-20) And the sons of Israel saw, and they said a man to his brother, What is this [Man hoc]? for they knew not what it was. And Moses said unto them, This is the bread which Jehovah hath given you to eat. This is the word that Jehovah hath commanded, Gather ye of it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 omer a head, according to the number of your souls, take ye everyone for him who is in his tent. And the sons of Israel did so, and they gathered, collecting for the numerous and the few. And they measured it with the omer, and it made nothing over for the numerous; and for the few there was no lack; they gathered everyone according to his eating. And Moses said unto them, Let no one make a residue of it till the morning. And they heard not unto Moses; and men made a residue of it until the morning, and it bred worms and stank, and Moses was angry with them (Exod. 16:15-20).

 

 

오늘 본문을 좀 더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출16 1절로 14절까지를 먼저 좀 보겠습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14)

 

만나’(히브리어: מָן, 그리스어: μάννα)는 15절의 ‘이것이 무엇이냐’를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아침에 처음 보는 그걸 보고 이게 뭐지? 서로 묻던 그 의문문이 그대로 ‘만나’라는 이름이 된 것이지요.

 

만나는 영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을 뜻합니다. 그것을 진리의 선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영적 교회의 사람들에게 내려 주신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진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라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영적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영적 교회에는 처음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 이 교회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4장 아벨과 가인에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를, 가인은 신앙(faith)을 말합니다. 원래 주님은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기를 원하셨지만, 가인이라는 사람들, 즉 신앙, 신앙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했는데, 이걸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절)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이런 가인을 어떻게 해버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주님은 인류 역사가 결국 가인 쪽으로 흐를 것을 아시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십니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4, 15절)

 

그러니까 주님은 이런 가인들일지라도 그 쥐고 있는 신앙, 즉 진리를 통해 결국은 다시 체어리티를 회복, 체어리티와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되게 하시려는 장구한 계획, 그것이 곧 인류의 역사가 되는 그런 계획을 섭리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주님은 먼저 진리를 주시고, 그다음 그 진리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게끔 하십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만드시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실까요? 진리를 모르면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뭐가 참이고 뭐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그때 주님은 선이나 선한 애정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만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리의 선입니다. 진리면 진리고 선이면 선이지, 왜 진리의 선이라고 하냐면 이 선은 진리를 통해 얻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겉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그 속을 보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선이 담긴 진리인 것이지요. 진리로 말미암는 선이라고도 해도 됩니다. 선은 능력입니다. 선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 이 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진리, 앉은뱅이 신앙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거듭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진리의 선을 받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그것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때 일어나는 삶의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악과 거짓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대부분 나는 항상 경우가 밝다, 나는 항상 옳다, 나는 참 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실상은 정반대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이제 진리의 선, 선한 진리라는 빛이 비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어두워서 안 보이던 것들, 내 안의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깜깜한 데서 밤을 보내며, 아, 참 좋다, 여기는 무슨 호텔 같아 했는데 정작 아침 동이 틀 때 보니 자기가 쓰레기 더미들 가운데 있었던 걸 알게 되는, 그런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그런 악하고 거짓된 것을 몰아내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동안은 악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걸 끊는 게 어려웠는데, 이제는 그걸 끊어낼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의 선은 설교나 말씀을 통해 배우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의 선, 선한 진리 안에는 주님이 계세요. 그래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끓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집니다. 세 번째 일어나는 변화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선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 우리는 어땠습니까? 무슨 선한 일을 하든 반드시 돌아오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뭘 얻어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아무 대가 없이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입니다.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이러한 모든 일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라는, 즉 진리의 선, 선한 진리를 받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이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과 그것에 수반되는 은근한, 은은한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만 익숙해 있고,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살면서 빠르고 자극적인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체로 시골의 단순하고 느리게 사는 삶의 기쁨, 소확행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두 가지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 앞에 한 오멜 씩 거두라’입니다.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말씀은 각자의 분량에 맞게 선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오멜(omer) 씩 거두라는 말씀은, 오멜은 곡식 같은 걸 측정하는 단위인데, 성경에는 오멜이란 것도 있고, 에바라는 것도 있습니다.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오멜은 속뜻으로는 충분한 것을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 ‘’(10)이란 수는 충분하다는 속뜻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배수나 분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에바의 십 분의 일인 한 오멜 역시 충분하다(enough for)라는 속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되 한 사람에 한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맞게 선을 주시되 충분한 양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 그러니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다르지만,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분량은 어떤 식으로 정해질까요? 그것은 개개인이 행하는 선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선을 행하더라도 얼마만큼 진리를 따라 행하는가에 따라서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또 선과 결합한 진리가 얼마나 내적인 진리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리에도 외적인 진리가 있고, 내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내적인 진리는 주님과 보다 가까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 가운데 있는 진리가 보다 내적인 진리일수록 선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따라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을 선의 분량을 정해주십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천국의 어떤 사실들입니다.

 

한 천국 안의 천사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지 않고, 그들의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선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공동체로 나뉘어 있다. 같은 선을 지닌 천사들이 한 공동체를 이룬다. 천국의 선은 무한히 다양하며, 각 천사마다 선이 다르다.주44 (HH.41)

 

주44.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하며, 그 어떤 것도 결코 다른 것과 똑같지 않다 (AC. 7236, 9002). 천국에는 그래서 무한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AC. 684, 690, 3744, 5598, 7236). 천국의 무한한 다양성은 선의 다양성이다 (AC. 3744, 4005, 7236, 7833, 7836, 9002). 이들 다양성은 다양한 진리를 통해 존재하며, 각 천사의 선은 이들로부터 나온다 (AC. 3470, 3804, 4149, 6917, 7236). 천국의 모든 공동체와 어느 한 공동체 내 모든 천사가 서로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AC. 690, 3241, 3519, 3804, 3986, 4067, 4149, 4263, 7236, 7833, 78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된다 (AC. 457, 3986).

 

천국의 천사 공동체들은 그 선이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만큼 서로 떨어져 있다. 영계에서 거리는 오직 사람의 내면 상태의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사랑의 상태가 다르면 거리가 생긴다. 많이 다른 사람들은 멀리, 약간 다르면 조금 떨어져 있다. 유사성이 그들을 함께 있게 하는 것이다.주45 (HH.42)

 

주45. 천국 모든 공동체는 그들 생명의 상태 차이,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 차이에 따라 어떤 일정한 위치가 정해진다 (AC. 1274, 3638, 3639). 저세상, 곧 영들의 세계에 있는, 거리, 상황, 장소 및 시공간에 관한 놀라운 것들 (AC. 1273–1277)

 

한 공동체 내 천사들은 모두 서로 간에 위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는데, 보다 완전한 천사들, 즉 선에 있어 뛰어난, 그래서 사랑, 지혜, 지성에 있어 뛰어난 천사들은 가운데 중앙으로, 덜한 천사들은 그 완전함이 덜한 정도에 따라 주변으로 빙 둘러 퍼지게 된다. 이 배열은 마치 중앙의 빛이 주변으로 퍼져 감소하는 것과 같으며, 중앙에 있는 천사들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주변으로 퍼져 있는 천사들은 점점 더 희미한 빛에 있는 것과 같다. (HH.43) //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두 번째 명령은,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입니다. 여기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는 자기 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선의 공동체(society)를 뜻합니다. ‘선의 공동체’란 무엇일까요? 선의 공동체는 천국에서는 천사들의 사회가 선의 공동체이구요, 지상에서는 교회가 선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연대가 바로 선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만나를 거두라는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쓰지 말고, 교회를 위하여 쓰라는 말씀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모든 사람과 서로 나누라는 것이죠.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이 주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고, 또 모든 사람의 선이 끊임없이 내게로 흘러오는 그런 관계 속에서 주님의 교회는 점점 천국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걸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입니다.

 

앞의 두 가름에서,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각 공동체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밝혔다. 각 천사도 이와 똑같다는 것은 거기 설명한 원리에 따른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천국이 가장 큰 형태의 사람이고, 각 공동체가 작은 형태의 사람이듯이 천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사람인 것이다. 천국 형태처럼 지극히 완벽한 형태는 전체와 부분이 서로 같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천국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곳이라는 데 있다. 천국의 모든 것은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며, 각 구성원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그 나누어짐에 의해 받기 때문이다. 앞의 해당 가름에서 말했듯이, 천사는 그처럼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가장 작은 형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가 천국을 받아들이는 한, 그릇이며 천국이고 천사이다. (HH.73) //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말씀은 각자의 분량대로, 각자의 그릇대로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중심에 계시는 분들은 선을 많이 받을 것이고, 반면에 변두리에 계신 분들은 선을 조금밖에 받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이분들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천국과 연결된 분들이시라면, 아래 천사들처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HH.278)

 

여기 ‘필요한 만큼’이란 주님이 맡기신 어떤 쓰임새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마다 가진 잔의 크기는 달라도 그 모든 잔을 주님은 넘치게 채우시기 때문에, 저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는 데가 천국입니다. //

 

그러면 누가 교회 중심에 계시고, 누가 변두리에 계실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만큼 우리는 교회의 중심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발언권이 세고 영향력이 있다고 해서 꼭 교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구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선을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만약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모두 이웃과 나누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마 매일 매일을 만족하면서 살 것입니다.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아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자기 본성에서 떨어져 있는 정도만큼 주께서 그들에게 들어가신다. (HH.278) //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같이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마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이 뜻대로 되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반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지나치게 절망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도 오만하지 않구요, 비천한 자리에 내려와 앉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매일 먹을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말씀하신 데에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더러는 순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내일 먹을 게 걱정되어 다 안 먹고 남겨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려는 것이구요, 주님의 것을 자기 창고에 쌓아 두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진리를 실천하고 선을 행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선 안에, 즉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났다고 말합니다. 벌레는 주님의 선이 아닌 인간의 선 안에 들어있는 거짓입니다. 그리고 악취가 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행하는 선은 결국 불결한 선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천국 선이 아니라 지옥 선으로 바뀐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악취가 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분명히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아침까지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리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잘못하더라도 성을 내시거나 보복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며,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진리에 등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진리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들의 그런 모습을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로 표현하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주님이 선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에게 만나를 줄 터이니 이 두 가지는 꼭 지키라 하십니다. 그 하나는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자기 분량 이상으로 거두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 보기에만 선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악하고 거짓된 것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29절에서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옷을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인들의 노력과 지혜가 들어갔겠습니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만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엇을 섞지 말고 주님 주시는 선 그대로를 가지고 행하라 하시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다른 하나는, 자기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라고 하시는데요,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선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쌓아 두지 말고 이웃과 교회를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을 자기 곳간에 쌓아 두는 일은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이 땅을, 이 교회를 주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각자의 분량에 맞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 마태복음 6장 28절로 34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28-34)

 

아멘

 

원본

2016-04-1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5-11(D1)-주일예배(2597, 출16,15-20), ‘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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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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