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 곧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 (출16:21-24)
21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출16:21-24) And they gathered it morning by morning, everyone according to the mouth of his eating; and the sun grew hot and it melted. And it was that on the sixth day they gathered bread double, two omers for each one; and all the princes of the assemblage came and told Moses. And he said unto them, This is what Jehovah spake, A rest, a sabbath holy to Jehovah, is the morrow; what ye will bake, bake ye; and what ye will boil, boil ye; and all that is left over, this lay ye by for you to keep until the morning. And they laid it by till the morning, as Moses commanded, and it did not stink, and the worm was not in it. (Exod. 16:21-24)
※ 지난주부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1장이 아닌 16장부터 갑자기 시작하는 이유는 그 앞부분 원본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은 훗날 제 역량이 준비가 되고, 주님의 허락 있으시면 그때 마저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16장을 1절부터 지난주 본문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16:1-20)
※ 이스라엘의 어느 한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오시는 성지순례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광야 체험 코스를 반드시 권하신다고 합니다. 자동차로 한 바퀴 휙 둘러보고 갈 요량으로 가이드를 부탁하시는 분들에겐 절대 사양하신다고 하네요. 이스라엘은 광야의 백성이기 때문에 광야를 자동차 타고 대충 둘러보는 걸로는 참된 순례의 정신을 놓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직접 두 발로 하루를 걸어보아야, 예를 들면, 오늘 이 출애굽기 16장 같은 본문, 그러니까 왜 이들이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지 하는 그 정황이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 선교사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다음 말씀들을 보면 실제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한낮 광야 그 타는 열기에서는 구름 기둥으로, 한밤 광야 그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에서는 불 기둥으로 돌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13:21-22)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민14:14)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9:19)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처럼 자기 자녀를 훈련을 빙자, 혹독하게 인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인생들이 겪는 혹독함은 불의의 사고 등을 제외하면 거의 본인들이 자초하는 것이며, 그 불의의 사고라는 것조차도 다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우주에서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범사 주님을 의뢰하는 자녀들에게 셀 수 없이 많은 돌봄과 보살핌의 약속을 하시는 분입니다. //
만나는 주님이 당신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고 새 교회에서는 가르칩니다.
※ ‘선한 진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 안에 선이 들어있다는 의미라면 말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통해서나 또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배운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는 지식일 뿐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전에 알았던 진리가 단순히 지식에 그쳤다면 이 진리의 선, 곧 선한 진리는 그 안에 선이 들어있는 진리인 것입니다. 지식적인 선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선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선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삶으로 옮기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될 때는 주님을 향한 간절히 매달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긴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만나라고 하는 진리의 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이 있는 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그전에는 잘 변하지가 않아요. 진리 속에 들어있는 선의 능력이 우리를 그렇게 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를 받아먹으면 이전에 즐기던 악한 것, 거짓된 습관들을 더 이상 즐거워하지 않게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주님보다 나를 더 믿었다면 이제는 나보다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만나를 받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들입니다.
21절입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기서 ‘아침마다’의 속뜻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일단 진리의 선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지요.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선을 받는다는 뜻인데요, 그러니까 각 사람의 역량, 곧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 즉시 생활로 옮기는 사람의 역량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선을 많이 주세요. 흘러들어오는 선을 방해할 무슨 장애물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선을 받아서 그것을 생활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습니다.
※ 사실은 안 주시는 게 아니라 본인이 못 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하늘을 향한 창문이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자꾸 더럽히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본인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분량이라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삶으로 살아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능력에 따라 만나를 받는 분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다음은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의 속뜻입니다. 말씀에서 햇볕은 보통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반대니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concupiscence)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은 우리 마음에 세상적 욕망이 뜨겁게 일어날 때, 즉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뜨거울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 일단 선의 물꼬가 터지면 그때부터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선이 흘러들어오는데, 그러나 그 선의 유입이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많이, 어떨 때는 잠시 중단될 때도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 때에는 선이 많이 흘러들어오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욕망이 많을 때에는 선의 흐름이 중단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의 목적에 충실할 때, 즉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일을 내게 주신 주님의 목적 자체에만 충실할 때, 그때는 주님으로부터 선이 활발하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일을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려 하거나, 그 일의 결과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할 때는 선이 흘러들어오다가 딱 멈춥니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는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선의 흐름을 그때그때 조절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기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우리의 인생은 천국을 향한 준비 과정이며, 그래서 현재 거듭남의 풀코스를 밟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역시 날마다 주시는 주님의 만나를 소홀히 여기는데요,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4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10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민11:4-6, 10)
그들은 만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릴 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며, 그리고 만나 속에는 온갖 순진함과 평화, 안전과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갓난아이와 어린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며 돌보듯 주님에게 만나는 그런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 우리도 주님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하며, 천국보다는 세상 것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걸 몰랐습니다. 하늘의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5)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하찮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선이나 진리는 청정한 공기와 물, 그리고 화창한 봄날의 햇볕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많을 때는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잠시 마음을 비우고 그것을 바라볼 때, 아니면 가끔 도시를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오염되지 않은 공기와 물을 대할 때 우리는 그것이 생명같이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선이나 진리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자의 내면 상태를 보시고, 그것에 따라 선의 흐름을 조절하십니다.
22절입니다.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여섯째 날’은 영적인 어떤 상태의 마지막 단계를 뜻합니다. 그다음 날이 하나의 상태를 마무리하는 날, 즉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나는 동안 수많은 영적 상태를 거칩니다. 그리고 하나의 상태 안에서도 여러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마치 일주일에 일곱 날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첫째 날이 지나면 둘째 날이, 둘째 날이 지나면 셋째 날이, 그렇게 해서 여섯째 날이 지나야 하나의 상태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수많은 진리와 선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큰 목걸이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그 여섯째 날인 마지막 단계에 주님은 평소보다 만나를 두 배로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겉뜻으로는 다음 날은 쉬는 날이니까 두 배로 거두라는 뜻이지만 속뜻은 다릅니다. 둘이라는 숫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둘’이란 숫자의 속뜻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두 배를 거두라는 말씀은 그동안 주님이 주셨던 선과 진리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계속 먹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 선을 가지고 계속해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과 반대되는 악이 계속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매일 먹는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이구요, 또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그전, 그러니까 만나를 받기 전에는, 영적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의 능력에 힘입어 싸움이 시작되면 거의 이깁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확실히 결합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싸움에서 이긴다고는 하는데, 때로는 완전히 이기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냐 하면 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때, 그때에는 완전히 이기는 게 아닙니다. 또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에 입각해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생각대로 선을 행할 때인데요, 주님의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선을 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사기 백성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실제로는 선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이 많은 상태에서는 아직 선과 진리가 결합되었다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이제까지의 내적 싸움과 수고를 묶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주시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그것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을 거둔지라’의 속뜻, 곧 선과 진리의 결합을 준비하라, 안식일을 준비하라시는 뜻입니다.
‘각 사람이 두 오멜씩 거둔지라’의 속뜻인데요, 여기서 ‘오멜’은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한 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능력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두 오멜씩 거두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내가 너희에게 줄 터이니 그것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데도 마지막 단계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죠.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인 일도 그렇습니다. 마지막 한고비만 넘기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까지 잘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지금까지 잘했으니 이제 한고비만 넘기자’, 그리고 ‘내가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 유종의 미를 거두어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 앞에 두 오멜 씩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마지막 단계를 넘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안식일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장 높은 의미는, 주님 안에 신적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Divine Human in the Lord)을 의미합니다. 우리 내면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것은 원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안에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낼 수도, 거듭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 내는 모든 능력이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지옥과의 싸움을 온전히 이기지 못하시고, 그래서 주님의 인성 안에 여전히 육신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인성, 즉 유전악에 속한 것이 남아있었다면 주님이 과연 완전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주님에게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옥과 싸워 온전히 이기심으로 불완전한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오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 정말 정말 중요하였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거룩한 인간이시며, 거룩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이란 의미는 주님 안에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이구요,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하나 되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걸 위해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었구요,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위한 씨앗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그 씨앗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곧 영적 싸움이 이제 더 이상 없으니 ‘휴일’이라 하시고, 선과 진리가 결합했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를 말하구요, 우리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 그렇게 해서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가 거룩한 것입니다.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울 것을 굽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불’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물’은 진리이며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안식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와 선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을 위해 이 두 가지를 준비하라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함께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신앙만으로는, 즉 ‘오직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바탕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선 없는 진리는 너무나 무섭고 살벌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와 선을 하나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의 속뜻입니다. ‘나머지’라는 것은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선과 진리인데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선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처럼 즐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부터 내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도 사실은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다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항상 ‘이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냥 하는 거야. 주님의 명령이니까...’ 하면서 한다면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할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아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늘 나쁘게 말하지만, 그러나 자아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며, 자아가 없으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아의 기쁨을 존중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선과 진리를 행하면서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기쁘고 즐겁게 여기길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내가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그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아, 잘난체하고 나만 잘되려는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구요, 거듭남에 따라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천국적 자아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자아를 그냥 계속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거듭남을 위한 수고와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떠날 때까지 타고난 이기적 자아를 가지고 살겠지요. 그러나 거듭나기 위해 싸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신앙인들은 거듭남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습니다. 그 천국적 자아를 통해 우리는 마치 자기가 선을 행하는 것 같은 기분과 그것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습니다. 왜 거역했을까요?
※ 아마도 ‘내일 염려’(care for the morrow) 때문이겠죠.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내일 또 주신다시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덜 먹고 아침까지 남깁니다. 오늘 다 먹었다가 혹시 내일 안 주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 말입니다. 다음은 천국 천사들의, 이 ‘내일 염려’에 대한 글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그들은 내일 염려라 부르고, 그것은 삶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잃거나 못 받을까 봐 근심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HH.278:2)
욕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7, 18절에,
17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랬더니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구요, 악취가 풍겼습니다.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만나를 남겨두는 행위는 주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대로 선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선이 아닙니다. 그러니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겠죠. ‘악취’라는 것은 그 행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악한 의도입니다. 여기서 악한 의도란 자기만 생각하는 것, 이기적인 의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마치 선을 행하는 것 같이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기를 생각하는 것, 즉 자기를 높이려 한다거나 자기를 선하게 포장하려 하는 그런 의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악취입니다. 그런데 악취가 나는 곳에는 보통은 또 벌레도 생기는데요, 그래서 ‘벌레’는 악한 의도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철저히 금하시고,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다릅니다. 주님은 5절에,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안식일을 위해 갑절의 만나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행위는 순수한 선이며 진리입니다. 그래서 벌레가 생기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영적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만나는 진리이기도 하고, 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만나 속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넘어서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들을 만나를 통해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우리가 만나를 받기 시작할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밋밋하게 느끼고요, 여전히 세상에서 오는 자극적인 즐거움들을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속 자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구요, 그래서 자아로부터 수시로 욕망이 올라온다는 증거입니다. 그 욕망 가운데는 흔히 생각하는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욕망도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욕망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할 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욕망이 사실은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망 가운데 있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흐름이 중단될 때, 그때 우리는 행복할까요? 욕망을 따라 사니까 행복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공기가 부족하거나 물이 없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불안하고 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며, 무언지 모르는 불편함이 있구요, 그리고 실질적인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다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선하고 진실한 것들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일같이 영적으로 끌어올리며,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살아가는 동력을 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영적 아침을 열어주시고, 만나를 우리 마음의 지면 위로 하얗게 내려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만나가 주는 평화와 순수함을 느낄 수 있고, 또 무언가 모르는 안정감과 은근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당신의 생명인 선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선과 진리를 우리 속에서 하나로 만들라는 뜻이며, 그렇게 해서 주님과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 새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것은 선과 진리가 우리 의지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늘 진리에 입각해서, 즉 주님 주신 진리에 기초해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의 선과 연관된 진리가 결합하는 일이 거듭나는 동안에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주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하나 되기를 바라세요. 그래서 주님은 오늘 23절에,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이구요,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처럼 소유하기를 원하시고, 또 그것을 우리가 즐기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그런 마음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늘 새겨야 할 줄로 압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교우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6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56:6-7)
아멘
※ 설교가 길다고 다들 시험 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꼭 원고를 함께 제공하는데요, 그 이유는 첫째, 설교 중 제가 무슨 사사로운 말을 할까 봐서이고, 둘째, 설교 중 다들 메시지보다는 설교자를 주목할까 봐서입니다. 일점일획도 모두 주님의 말씀입니다. 놓치시지 말기 바랍니다.
원본
2016-05-1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1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즐겨찾기 > 한결같은교회.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일예배(2025/5/11, 출16:15-20), ‘만나’, 그리고 함께 주신 두 계명 (3) | 2025.05.11 |
---|---|
주일예배(2025/5/4,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의 속뜻 (3) | 2025.05.04 |
주일예배(2025/4/27, 창18:10), '우리의 이성(理性, the rational)이 거듭나야 하는 이유' (2) | 2025.04.26 |
주일예배(2025/4/20, 눅24:1-12, 부활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1) | 2025.04.20 |
주일예배(2025/4/13, 눅1:18-25), '말을 못 하게 된 사가랴' (2) | 2025.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