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의 속뜻 (출16:25-29)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16:25-29) And Moses said, Eat ye this today, because today is a sabbath to Jehovah, today ye shall not find it in the field. Six days ye shall gather it, and on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it shall not be in it. And it was on the seventh day, there went out some of the people for to gather, and they found none. And Jehovah said unto Moses, How long do ye refuse to keep My commandments and My laws? See ye, because Jehovah hath given you the sabbath, therefore He giveth you on the sixth day the bread of two days; rest ye everyone in his place, let no one go forth from his place on the seventh day (Exdo. 16:25-29).
오늘은 안식일의 속뜻인 선과 진리의 결합(the sabbath, the conjunction of good and truth)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16번 글 중, 오늘 본문 29절에 나오는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에 대한 주석 일부 인용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더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진리들은 스스로는 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과, 선이 진리들을 채택, 자기들 곁에 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 마치 내적 시야 아래 펼쳐진 밭처럼 있는데요,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이 이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과 일치하는 진리들 가운데서 골라 스스로를 그 진리들하고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있는 진리들은 위에 있는 선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는데요, 이는 완전히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더 낮은 것이 더 높은 것으로 흘러가겠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 man must know further that truths do not of themselves enter into good, but that good adopts truths and adjoins them to itself; for the truths of faith lie in the memory of a man as in a field extended beneath the interior sight. Good from the Lord flows in through this sight, and chooses from them, and conjoins with itself the truths which are in agreement with it. The truths which lie beneath cannot flow into the good which is above; for it is quite contrary to order, and even impossible, for the lower to flow into the higher. (AC.8516:2)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거나 하면서 배우는 진리들은 늘 말씀드리지만 기억이라는 창고에 저장되는데, 진리들이 이 창고 안에 차곡차곡 어떤 질서에 따라 저장되는 모습은 내적 시야(the interior sight)로 볼 때는 마치 들판에 진리들이 있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내적 시야로 거기 있는 진리들을 마치 스캔하듯 훑고 나서 필요한 진리를 선택,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사는 모습인데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진리를 가지고 삶에 적용하려 할 때, 그때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있는데, 이 선이 바로 ‘만나’라는 선입니다. 그런데 이 만나라는 선은 내적 시야를 통해 흘러들어오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진리들 가운데 자기와 맞는 것을 선택, 그것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러니까 만나, 즉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은 처음부터 진리와 결합한 상태가 아니고, 들어올 땐 선으로 들어와서는 나중에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결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결합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진리를 준비하면 그때 주님이 선을 보내주시고, 그러면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진리를 보통 신앙의 진리라고 하는데, 사람이 신앙하고, 그러므로 삶의 규범으로 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 진리를 준비해야 합니다.
※ 참고로 주님은 우리가 이 진리를 좋게 여기도록 여러 즐겁고 기쁜 일들(things that are pleasant and delightful)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고 원하는 만큼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여러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데요,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약속대로 ‘즐겁고 기쁜’ 일들을 허락하셔서 이 진리들이, 그리고 그 지식들이 우리 안에 스며들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말씀들을 붙들고 살았더니 내 삶이 형통하네!’ 깨닫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배우기는 선은 의지(will) 안으로 들어오고, 진리는 이해(understanding) 안으로 들어온다고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가지 그릇인 이해와 의지가 있는데, 이때 이해는 진리를, 의지는 선을 받는 그릇이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만나라고 하는 선은 의지가 아닌, 이해로 들어온다고 하네요.
※ 영어 understanding에 대한 ‘이해’(理解)라는 번역이 좀 이상하시면 ‘이성’(理性)으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understanding을 ‘이해력’, ‘사고력’, 혹은 ‘이해하는 능력’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냥 곧이곧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하고는 반대인데요,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아직 진리와 결합한 선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그러니까 처음부터 의지 안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을 먼저 이해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이해 가운데 있는 진리와 결합하도록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마치 모종 옮기듯 의지 안으로 옮겨심어 주시지요.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는 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나가 이해 가운데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해(understanding)의 본성상 이해와 진리는 어울리지만, 이해와 선은 안 어울려요. 그래서 만나는 선 상태로 처음부터 이해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나가 이해 가운데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단 진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주님은 만나라는 선에게 진리의 옷을 입혀주시는데, 겉으로 볼 때 진리처럼 보이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씀에서 만나를 ‘작고 둥글다’ 하신 것입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16:14)
작다는 건 진리의 특성을, 둥글다는 건 선의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만나는 겉으로 보면 진리처럼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선인, 그런 것입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얻어 온전히 우리 걸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만나가 밤새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아침에 그냥 받아먹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만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받아먹는 것입니다. 이 만나를 먹는 과정이 곧 우리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 하나 되는 과정입니다.
25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안식일 이전에 만나를 얻는 상황과 안식일 이후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듭나기 전. 즉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전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과, 거듭난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05번 글 일부 인용입니다.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에 대한 주석입니다.
거듭나기 전 사람은 진리로 행하여 선을 얻습니다(is acquired). 진리는 사람의 의지가 되며, 그렇게 해서 그의 생명이 될 때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선으로 행하여 진리를 얻습니다(are procured). 거듭나기 전 사람은 복종으로(from obedience) 행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애정(from affection)으로 행합니다. 이 둘의 상태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전자는 진리가 다스리지만, 후자는 선이 다스립니다. 그러니까 전자에서는 사람은 내려다보거나 뒤를 돌아보지만, 후자에서는 올려다보거나 앞을 봅니다. 사람이 후자의 상태, 곧 애정으로 행할 때, 그는 더 이상 뒤돌아보는 것도, 진리로 선을 행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주님이 그의 선 안으로 들어오셔서 선을 가지고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그가 뒤돌아보거나 진리로 선을 행하려 하면, 그는 자신으로 말미암아(from his own)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이지만, 선으로 행하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truth, but through it good is acquired; for truth becomes good with him when it becomes of his will, and thus of his life; but after regeneration he acts from good, and through it truths are procured. Before regeneration man acts from obedience; but after regeneration from affection. These two states are inverse to each other; for in the former state truth rules, but in the latter good rules; or, in the former state man looks downward or backward, but in the latter upward or forward. When a man is in the latter state, that is, when he acts from affection, he is no longer allowed to look back, and to do good from truth, for at that time the Lord flows into the good with him, and leads him by means of the good. If at that time he were to look back, or were to do good from truth, he would act from his own; for he who acts from truth leads himself, whereas he who acts from good is led by the Lord. (AC.8505)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에 대한 복종심, 또는 의무감으로 선을 행하지만, 거듭난 다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요, 왜냐하면 거듭난 다음에는 진리와 결합한 선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에 따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선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통해 선을 얻지만, 거듭난 후에는 선을 통해 진리를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후에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선과 진리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원하는 대로 행할 때마다 그것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지혜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후에는 점점 지혜가 많아집니다. 그것이 안식일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6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같은 말씀이 반복되는데요, 다음은 우리의 일상 중에서 거듭남을 살펴본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동안 갖고 있던 좋지 않은 습관들이 진리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 좋지 않은 습관이란 반복되는 말투와 표정, 태도와 행동 같은 것이며, 또 그런 습관의 바탕에는 개인의 취향과 애정, 신념 같은 것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작은 습관이 바뀌려면 그 습관을 형성하는 수많은 요소가 모두 진리와 선으로 바뀌어야 하지요. 이를테면 습관의 바탕에 있는 신념들은 진리로 교체되어야 하고, 애정이나 취향 같은 것은 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잘못된 애정이나 신념들이 주님에 의해 하나씩 선하고 진실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엿새 동안 만나를 먹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변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레째 되는 날 하나의 습관이 완전히 교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은 마치 진리와 선으로 만들어진 구슬들을 하나씩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인체의 장기 중 하나라도 병들어 있으며 나머지 모든 장기가 불안정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일이 생깁니다.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것도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 말씀을 읽으시는 분들은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원망하시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거나 원망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주님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요, 그것이 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나의 존재가 희미해졌구나’라고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 안에 주님이 계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려 하면 안 되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의 아집, 고집을 꺾어야 하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로부터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이 얼마나 악한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들은 대개는 오만하고 위선적이며, 탐욕스럽고, 그리고 나 외에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함부로 대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심각하게 느낄 때 우리는 진심으로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연결되고, 그때 주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를 느낄 때, 우리 안에는 따뜻함이라든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 또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같은 것으로 채워집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희미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9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째 날에는 각자의 처소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식일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평화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의도를 버리는 것이고, 오직 주님의 인도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할 때, 혼란이 오고 불화가 생기며, 평화가 깨집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은 사실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고, 주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의 축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고, 그러므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 규례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3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2, 3)
주님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죽이라’는 말씀은 정말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피우는 불이나 인간이 하는 일은 모두 자아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집착이며,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집에 머물러 있으라, 불도 피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왜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까요? 첫 번 말씀은 자기의 의도를 버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배우면서 교우님들 가운데는 이 말씀이 과연 나와 관련이 있는가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내적 싸움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안식일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거듭남이 쌓여서 완전한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마다 이미 조금씩은 거듭나 있거나 어떤 부분에서는 안식일에 가까운 상태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이제 이전처럼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리를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려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나를 주장하시기를 바라면서 주님께 집중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도 내가 원하는 걸 구하기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말씀 하나를 가지고 조용히 묵상하는 습관을 가져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되면, 무슨 일을 하든 기억 속에 있는 진리로 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정으로 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한 것이 흘러들어와 기억 속에 있는 진리들과 하나로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원한 것 같이 여겨졌던 이 안식일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교훈을 주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안식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과 불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그것만 준비한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안식일의 떡을 구워주시고, 안식일의 고기를 삶아 주십니다. 모든 분께 이런 안식일의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24:15, 17-18)
31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롯의 처를 기억하라 (눅17:31-32)
아멘
원본
2016-05-2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5-2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 혹시 시간 되시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관련 내용들을 틈틈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목차' (Contents)
‘목차’ Contents Editor’s Preface ‘저자 서문’ (Author’s Preface, 1)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HH는 'Heaven and Hell'의 약어(略語)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공용 약어가 있습
heavenanditswondersandhel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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