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17:1-4) And all the assemblage of the sons of Israel journeyed from the wilderness of Sin, after their journeys 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 and they encamped in Rephidim; and there was no water for the people to drink. And the people quarreled with Moses, and they said, Give ye us water and we will drink. And Moses said to them, Why quarrel ye with me? why do ye tempt Jehovah? And the people thirsted there for the waters; and the people murmured against Moses, and said, Wherefore is this, that thou hast made us come up out of Egypt, 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And Moses cried unto Jehovah, saying, What shall I do to this people? a little more and they stone me (Exdo. 17:1-4).

 

 

오늘은 제가 37년 전인 198868일, 당시 삼성그룹 공채 29기에 합격, 아침에 서울 소공동 삼성물산 앞 주차장에 모여 수십 대 버스에 나눠타고, 용인 자연농원 내 삼성종합연수원으로 들어가던 날입니다.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마치 영상 보듯 생생한데요, 요단을 건너기 전, 지난 40년 광야 세월을 회상하며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에게 거듭 여호와의 말씀을 신명(申命)하는 모세의 심경을 조금 알듯도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지난 37년간의 저의 지난날을 조금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신 광야(the wilderness of Sin)를 떠난다는 것은 두 번째 시험인 선과 관련된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가까이 가는 과정, 즉 거듭나는 과정은 이렇게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른 시험이 시작됩니다. 보통은 한번은 선(good)에 관한, 한번은 진리(truth)에 관한 시험이 옵니다.

 

※ 진리 안에 있다 보면 그 진리와 관련된 선이 필요해져서이고요, 선을 행하다 보면 이번엔 관련된 진리가 필요해져서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보완, 공급,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according to the mouth of Jehovah)라는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주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는 대로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섭리는 진리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기본적으로는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만, 그러나 진리가 삶의 아주 미세한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라면, 섭리는 인간의 구원 전체를 바라보시는 역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내다보시는 주님의 통찰, 예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리는 이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대강의 흐름과 원칙 정도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일은 항상 앞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발 물러서기도 하고요, 또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기도 합니다. 여기 지금 가나안까지 해안을 따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로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 주님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40년 광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3:17, 18)

 

주님은 그렇게 각 사람의 성품이나 영적인 특성들을 모두 내다보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심지어는 조상부터 후손까지를 모두 내다보시고 섭리하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저도 주님의 섭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라는 책에서는 섭리의 원칙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 보통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면 이 정도의 가이드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무슨 점이나 사주(四柱) 같은 거 없이 오직 부모의 인도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런 걸 찾는 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 ‘하나님의 섭리’는 스베덴보리 저, ‘Angelic Wisdom about Divine Providence’(1764, 라틴)를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라틴)의 속편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모든 피조물을 어떻게 살피시는가, 어떻게 감독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가게도 하시는데요, 그것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때로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섭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주님의 섭리 따라가는 걸 1절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라고 한 것입니다.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은 ‘르비딤’(Rephidim)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 역시 광야에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르비딤도 또 하나의 시험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광야는 시험(temptation)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 광야에서의 시험이 선에 관한 시험이었다면, 이번 시험은 진리에 관한 시험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에게 마실 물이 없었다고 했기 때문이며, 물의 속뜻은 진리이기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에는 이스라엘이 거기서 장막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친다는 것은 시험을 대비,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를 주님이 질서 있게 배치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앞두고 군대가 진을 치는데, 군사들이나 병기를 일정한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왜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질서에 맞춰 서로 유기적으로 묶으실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만 시험 중에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들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도 선수 각각의 포지션이 있고, 얼핏 보면 서로 따로 떨어져 아무렇게나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전략에 따라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상대방의 공격에 수시로 방어선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것처럼 주님도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셔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든지 장막을 쳤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 중에 힘들어 비록 불평과 불만, 원망을 하더라도 주님 주신 어떤 선 안에서, 어떤 울타리 안에서 한다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주님은 우리 안에 장막을 치실 수 없으시고, 그러면 우리는 내면에 준비된 뭐가 없어 굉장히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 싸울 수 있는 무기, 곧 말씀 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이 모세와 다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생활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리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의 진리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데요, 회의를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믿었던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갈등하는 것이 모세와 다투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시험이 깊어질수록 진리에 대한 갈등이나 회의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봅니다. 그때 우리는 아! 이 행동이 진리와 거리가 먼 것이었구나! 깨닫게 되지요.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진리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 아마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계시를 이웃이나 친지, 지인에게 전할 때 경험하는 걸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방금 말씀하신 저런 단계를 밟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행함 없이 전할 경우, 더욱 그렇지요.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진리에 대한 원칙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는 삶의 구체적인 상황, 즉 인간관계라든지, 그 밖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 나는 진리에 대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 주님에게 진리를 구하게 되지요. 이 일련의 과정이 이스라엘이 물이 부족하다고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왜 생길까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신앙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웃사랑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내면에서 선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집니다. 그런데 선에 대한 애정이 커지면 그만큼 다시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마치 남자가 장성하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선이 자기 짝이 될 진리를 그리워하는 것인데요, 그때 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리의 부족을 느낍니다. 그때의 시험이 바로 진리 시험입니다. 이와 같이 이웃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진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이런 영적 시험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르비딤에서의 시험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 말씀은 시험 가운데서 진리에 대해 불평을 하더라도 도를 넘어서면, 곧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질적으로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불평하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성에 대해 불경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자포자기하는 마음도 들고요, 내가 이 진리를 왜 알았을까? 차라리 몰랐더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심하게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들이 목이 말라서 물을 찾게 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 시험의 고통이 심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중에 백성들이 모세에게 우리를 왜 애굽에서 인도해 냈느냐고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 말은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 가운데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 욕심, 돈과 소유, 명예와 권력 등에 대한 욕심 같은 그런 욕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유로운 삶이 아니며, 그 실체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삶입니다. 애굽에서 산다는 것이 이런 건데도 불구, 그러나 시험이 깊어지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내가 진리를 몰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영적 싸움, 영적 전쟁은 치열합니다. 그리고 또 시험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가 내 안에 그나마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말이지요.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모습으로 살 수 있는데, 그마저 없어지면 속으로는 짐승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to make me die, and my sons, and my cattle, with thirst?)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me), 자녀(my sons), 가축(my cattle)’은 우리 내면에 있는 영적 자산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자녀와 가축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 자산인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죽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 새로운 진리가 계속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른 영적 자산들, 곧 선이라든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그런 것들마저 위축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라고 모세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 시험이 너무 극심하면 주님의 진리마저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시험을 대비, 평소에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비록 시험이 저를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순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시험 중에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부디 원하옵기는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살짝살짝 주님의 진리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제 숨구멍을 열어주시옵소서...

 

4절, 오늘 본문 끝 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모세는 진리이신 주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진리가 주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선 자체이신 주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중재(intercession)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교회를 사모하는 새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새 교회에서 가르치는 중재는 다음과 같은데요,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중재합니다(continually intercedes). 그것은 신적 사랑(Divine love)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인데요,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신적 진리이셨습니다(was the Divine truth)만, 그러나 부활을 통해 영화하신(was glorified) 후부터는 주님은 신적 선이십니다(is the Divine good).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the Father)는 속뜻으로 신적 선이십니다. 그리고 ‘아들’(the Son)은 신적 진리시지요. 신적 진리는 신적 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여기에 끊임없는 중재(continual intercession)가 있는데, 이걸 우리 식대로 표현, 아들이 인간을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신다 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한테 이해가 되나 저런 앞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천국의 비밀8573, 출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A secret that lies still more interiorly hidden in the word “intercession,” shall also be told.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Lord continually intercedes in the manner described, because it proceeds from the Divine love.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the Divine truth; but since He was glorified, which was effected when He rose again, He is the Divine good (n. 7499). It is the Divine good which is meant in the Word in the internal sense by “the Father,”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meant by “the Son” (n. 2803, 3704, 7499). And as in the Divine truth, which proceeds from the Divine good, there is continual intercession, therefore it is said that the Son entreats the Father, and intercedes for man. This latter idea could be apprehended by man, but the former with difficulty. (AC.8573)

 

※ 저 하늘의 해처럼, 그러니까 해가 변함없이 지상에 열과 빛을 말없이 공급하는 것처럼 주님의 중재는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처럼,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처럼, 자기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는, 즉 이 모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모든 체어리티의 사람들처럼 은은히 말없이 조용히 끝까지 사랑과 자비를 거두지 않는, 이런 게 중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는 말은 시험이 좀 더 깊어지면 신앙인들이 진리를 모독하는 상황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모독한다는 것은 시험 가운데서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럴 때 진리를 모독하게 되는데요, 모독이란 알면서 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주님은 지금 그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세의 말 속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관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재하는 진리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주님의 자비와 연민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선을 행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그때 지옥은 진리가 충족되는 것을 방해하고 공격하는데 주님은 그 시험을 오히려 이용하세요. 그래서 시험 가운데서 선이나 진리의 부족을 절실히 깨닫게 하시고요,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게 하십니다. 방해가 크면 클수록 간절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시험을 극복할 때, 우리 안에 선과 진리는 더 풍부해지며, 한 차원 더 높아집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주님 자신에게로 끌어 올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한 시련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는 그것을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채워나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처럼 그렇게 극심한 시험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을 것 같은 고비, 앞이 안 보이는 시기를 계속 걸어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험 가운데 주님의 목적이 매번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 이 사실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는, 모든 시험은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며, 그걸 통해 나로 하여금 거듭남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도구일 뿐이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81:7)

 

아멘

 

원본

2016-07-03(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08(D1)-주일예배(2601, 출17,1-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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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렙의 반석이신 주님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And Jehovah said unto Moses, Pass on before the people, 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 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 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 and thou shalt smite the rock, 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 that the people may drink. 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 (Exdo. 17:5, 6)

 

 

그동안 여러 해 제 설교는 저의 오리지날 설교가 아니고, 지금은 은퇴하신,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여 우리 교회에 맞게 좀 다듬는 설교였습니다. 물론 사전 허락하에 말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 역량, 곧 말씀을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으로 푸는 역량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하지만, 그러나 몇 주 전부터 이제는 네 힘으로 하라시는 주님의 어떤 퍼셉션이 있으셔요... 그래서 순종, 조금 준비와 연습을 거쳐 오늘부터 이렇게 저의 첫 속뜻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등 안정화 기간이 예상됩니다. 정성을 다하겠사오니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의 다른 모든 설교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 본문은 모두 스베덴보리의 속뜻 주석인 Arcana CoelestiaApocalypse Explained’(혹은Apocalypse Revealed’)를 가지고 준비합니다. 즉 이 주석들의 설명을 좀 더 쉽게 풀어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18 10월 이후 설교들부터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의 오리지날 설교는 아니었어도 말이지요.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말씀을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존재여서 모든 걸 내적으로 보는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 사람을 볼 때 그들 눈에는 사람의 육은 안 보이고 영, 곧 사람의 속만 보이며, 사람의 어떤 행위도 그 겉은 안 보이고 대신 그 속, 그 동기와 의도만 보이는 식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와 유익은 참 많고, 그리고 큽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사후 우리가 가게 될 나라가 그런 나라, 그러니까 겉이 아닌 속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나라 이민을 고려할 때, 미리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을 속뜻으로 읽게 되면 시작되는 가장 큰 변화는 그동안 글자로만 있던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미지의 세계요, 그저 막연했던, 그저 좋은 내용들이기만 했던 말씀의 글자들이 말입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 매력적이어서 마치 ‘극히 값진 진주(13:46)를 발견한 사람처럼,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13:44)를 발견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데요,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그러나 아무나 지금 내가 하는 이 풀이가 속뜻이다 하면 곤란하므로, 주님은 280년 전인 1745년 어느 날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나이 57세 때 그를 찾아오신 후, 1772년 그를 데려가실 때까지 27년간 영계 구석구석, 그리고 수많은 천사와 영들을 만나게 하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라틴어로 기록하게 하셨는데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Arcana Coelestia’(1749-1756, ‘천국의 비밀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출애굽기를 속뜻으로 풀이한 주석인데요,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이 주석을 집필할 때 주님이 곁에서 말씀하시고, 자기는 그걸 받아적기만 했다고, 자기는 그때 그 어떠한 세상 도서도 참고하지 않았고, 자기 책상 위엔 오직 속뜻 성경 한 권과 속뜻 사전 한 권, 그리고 펜과 종이, 잉크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이 곧 이 주석의 영적 권위를 드러내는데요, 이는 곧 신구약 말씀들이 기록되던 정황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현 성경 66권 중 ‘말씀’은 구약 29권, 신약 5권, 총 34권뿐입니다.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기 때문인데요, 속뜻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주석을 온전히, 그리고 쉽게 풀어 전하는 게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여기에 무슨 개인적 사사로움을 보태어 마치 저의 무슨 그럴듯한 새로운 저작인양하는 행태는 추호도 사양할 작정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가장 힘쓰는 건 끊임없는 하늘의 퍼셉션(perception)입니다. 푸는 것도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작합니다.

 

지난 본문 끝 절인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아주 다급한 상황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인 5절로 6절입니다. 먼저 5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여기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첫째, ‘백성 앞을 지나서’, 둘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그리고 끝으로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입니다. 이 말씀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백성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 the people)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가르쳐야 한다(he should lead and teach them)는 것입니다. ‘모세(Moses)의 속뜻은 ‘신성, 곧 여호와로 말미암는 진리(truth from the Divine)이며, 이스라엘 자손을 표상하고 있는 ‘백성’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church)을 의미하고, ‘앞을 지나서(pass on before)는 이끄는 것, 곧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영적으로 인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지금 이 백성, 곧 영적 교회에 속한 이들 이스라엘은 물, 곧 진리가 없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며, 그래서 신성한 진리를 표상하는 모세가 이들을 이끌고 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백성 앞을 지나서’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험을 당하여 주님께 도우심(aid,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을 구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의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진리가 아니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즉각적으로 행동합니다.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이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니까요. 그래서 무슨 망설임도 없습니다. 머리로는 혹 아, 먼저 주님께 여쭈어야 하는데, 먼저 기도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데 할지 몰라도 그러나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저부터도 우선 그럴 때가 많으니까요...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요만큼의 시간도 우리는 주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and take with thee of the elders of Israel)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from primary truths)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속뜻은, ‘선에 일치하고 진리와 일치하는, 지혜와 지성에 속한 으뜸되는 것들(the primary things of wisdom and intelligence which are in agreement with good and with truth)이며, 이는 곧 ‘으뜸되는 진리들, 주된 진리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백성’, 곧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 하였습니다. 영적 교회는 그 메인이 진리입니다.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는 선이고요. 영적 교회는 신앙이 주된 교회이고, 천적 교회는 사랑이 주된 교회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도 신앙과 진리, 말씀을 우선하는 교회는 좀 날카롭고 예민하며 판단하지만, 사랑과 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우선하는 교회는 한결 따뜻하고, 넉넉하여 품어줍니다. 어느 게 맞다, 틀리다가 아니고, 두 교회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며, 이는 곧 두 천국의 특성, 두 천국 천사들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으뜸되는 진리의 예를 하나 살피고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으뜸되는 진리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바로 아래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하는데요,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우리는 어떤 크고 작은 선을 행할 때 대체로 어떤 진리를 가지고 합니다. 가령 교회 봉사를 나가는 경우인데요, 교회 봉사, 즉 어떤 섬김이든 그 자체로는 참 좋은 일이나 그 동기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쉬고픈데 맡은 직급이 있어 억지로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 곧 그 동기를 볼 수 없으므로 이 경우, 우리는 그 겉만 보고 저분은 참 귀하시다 합니다. 또한 다른 경우는, 이 경우 역시 좀 쉬고 싶은 건 같은데, 그러나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고, 후자는 주님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개인적인 사사로움은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와 이웃, 나라와 민족을 섬기는 것, 일상생활 속 크고 작은 모든 상황, 즉 시험들 가운데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는 사람입니다. 즉 시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 가장 큰 진리, 가장 으뜸되는 귀한 계명인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억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and thy rod, wherewith thou smotest the river, take in thine hand, and go)입니다. 먼저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인데요, 이 표현은 ‘거짓들을 소멸시켜 버린 신성한 능력, 힘(the Divine power by which falsities had been dissipated)을 말합니다. ‘지팡이(a rod)는 힘, 곧 신성한 능력을 가리키는데, 특히 이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모세는 신성한 진리이신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기 때문이며, 또 한 가지, ‘’, 여기 애굽의 강인 나일강은 ‘거짓(falsity)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라는 표현으로 ‘거짓의 소멸(the dissipation of falsity)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신성한 능력으로 거짓들은 소멸되기 때문이지요. 이 진리는 ‘호렙산 반석에서 나오는 물(the water out of the rock in Horeb)을 말합니다. 다음은 ‘손에 잡고 가라(take in thine hand, and go)인데요, 이 표현은 ‘그걸 가지고 권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어떤 무장(that equipped therewith he should perform the mandate)을 말합니다.

 

진리의 부족과 결핍으로 야기되는 시험 앞에서 우리는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대선 결과와, 그 전에도 여러 번 부정선거로 인한, 진실이 거짓에 먹히는, 이 되풀이되는 현실은 어쩌면 우리 민족, 특히 우리 신앙인들과 그 가운데 특별히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이 ‘오직 지난날 우리에게 행하신 주님의 순전하신 진리의 힘과 능력을 기억, 거기에만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께 속한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 세월을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의 지난날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있다면 단연 대학 졸업 후 감히 삼성 그룹공채에 지원, 합격한 일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졸업 평점이 아주 낮아 삼성에 응시원서를 낸다는 건 언감생심, 그래서 처음엔 여러 중소기업 위주로 원서를 냈으나 아무 데서도 연락오는 데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1988년 당시, 전자공학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 한 달을 주님께 부르짖었는데요, 제 동기들은 이미 엘지, 현대, 대우 등 대기업 여기저기 들어가 신입사원 입문 교육들을 받고 있을 때였지요. 비록 그땐 지금처럼 말씀의 속뜻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오직 네비게이토식 성경 암송과 제자 훈련, 제자 양육이 신앙의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달을 골방에서 보냈더니 뭔가 걸러지고 깨끗해지는 느낌과 함께 주님께 백지수표를 내어드릴 수 있는 심정이 되더군요. 그날 오전 기도 후 오늘 조간 1면 하단을 보라시는 분명한 음성인지 생각인지 하여튼,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게 바로 퍼셉션(perception)인데, 그래서 현관에 놓인 중앙일보를 펼쳐 그 1면 하단을 보니 ‘삼성그룹공채 29기 2, 3차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있더군요. 그때 솔직히 숨이 좀 막혔으나 눈 딱 감고 순종, 용기를 내어 응시했던 것입니다. 특히 1차 서류전형이라 졸업 평점이 아주 낮은 저로서는 보나마나였거든요. 그러나 적성 검사를 마치고, 사장단 면접과 실제 면접관들 대상 다면 면접 때, 그때그때 대답할 말을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결국 ‘합격’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201이었다는군요. 그날의 감동,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일은 지금 모세와 이스라엘의 르비딤 시험 같은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후 제 삶의 여러 고비마다 주님이 지난날 내 앞이 캄캄했을 때 내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 힘을 낼 수 있었던 정말 고맙고 감사한 개인적 사례여서 특별히 나눴습니다. 지금 모세에게도 주님은 출애굽 전 그와 함께하셨던 열 가지 재앙 중 물을 피로 변케 하셨던 때를 기억하게 하시고 용기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6절입니다.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먼저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Behold I stand before thee there upon the rock in Horeb)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입니다. 여기 ‘반석(a rock)의 의미가 ‘신앙, 여기서는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 혹은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faith, here faith from the Lord, or the Lord in respect to faith)이기 때문인데, 여호와, 즉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그 반석 위에 서리니’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호렙(Horeb)은 ‘신성한 법(the Divine Law)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들로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속뜻은 ‘그분의 법, 곧 말씀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진리들에 응답하시는 주님(the Lord in respect to the truths of faith which are from His law, or the Word)입니다.

 

여기서 잠깐, ‘반석’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요, 잠깐 저 유명한 ‘베드로와 천국 열쇠’ 본문을 좀 보고 가겠습니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18, 19)

 

로마 카톨릭은 이 본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대로 천국 열쇠를 주셨고, 그리고 자기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니 당연히 자기들한테 이 천국 열쇠의 권한, 곧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권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황한테 이런 권한,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이 경우인데요, 사실 이 오류는 교회사, 세계사 전체에 절대 가볍지 않은 큰 상흔을 남겼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한 인간 베드로에게 저런 엄청난 권세를 주신 적이 없으신데요, 이는 여기서 말씀하신 ‘반석’의 의미, 곧 그 속뜻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반석(rock)의 의미는 ‘신앙에 관한 주님, 그리고 또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신앙(the Lord as to faith, and also the faith which is from the Lord)입니다. 즉 신앙을 말할 땐 주님을, 그리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반석이시며,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은 우리 것, 곧 우리가 잘나서 우리한테서 나온 게 아니라 주님의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즉 우리의 이 신앙 역시 주님이 주신 것이며, 주님이 주신 신앙으로 우리는 주님을 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일체 무슨 사사로움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대단히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신성한 진리조차 거기에 인간의 무슨 사사로움이 섞이면 이토록 타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주님의 순결하신 진리에 우리의 무얼 섞으려는, 적당히 섞어 자신의 무슨 목적을 관철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사후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의 의미는 우리 신앙생활의 반석을 주님께 둘 때, 이스라엘이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신앙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두리번거리거나 주님이 주신 이 신앙의 진리들에다가 잔머리를 굴리며 세상에서 배운 뭘 섞는 짓을 하면 안 되겠습니다.

 

다음은 ‘너는 그 반석을 치라(and thou shalt smite the rock)입니다. 이는 ‘to entreat urgently from a humble heart’, 곧 ‘절박한 심정으로, 그러나 겸손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석을 치는 것입니다.

 

이번 이 르비딤 시험을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로 요약하지만, 아래 민수기 본문은 같은 사건을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오늘 이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주님은 분명히 ‘겸손한 마음(a humble heart)을 명령하셨음에도 아래 민수기 본문을 보면, 실제로 모세와 아론은 그때 ‘완악한 마음(a hard heart)이었다는 것입니다.

 

10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0:10-12)

 

참고로, 이때 모세와 아론은 ‘신성한 진리에 관한 주님(he Lord as to Divine truth)을 표상하는 게 아니라 ‘저들의 지도자들한테서 볼 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나치게 종교적인 모습(the religiosity of that nation whose leaders and heads they were)을 의미합니다. 이런 종교성은 필연적으로 완악함을 나타내게 되지요.

 

한 가지, 위 본문은 얼핏 여호와께서 저들을 저주하시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으나, 그러나 절대 그런 게 아니고, 오히려 주님은 정성을 다해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expostulated) 것입니다. 차근차근 부드럽게 넌지시(was intimated to him) 말이지요. 주님은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시거나 누구에게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멘!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and there shall come waters out of it)와 ‘백성이 마시리라(that the people may drink)의 속뜻은 각각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the truths of faith are from Him)과 ‘그들을 기운 차리게 하고,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which shall refresh them and give them spiritual life)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and Moses did so before the eyes of the elders of Israel)의 속뜻은, ‘으뜸되는 진리들로 인한 결과(the effect by means of primary truths)입니다.

 

이들 풀이는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로 자명, 생략합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영적 깨달음’이나 ‘영안이 열림’, 혹은 ‘내면이 밝아지는 것(enlightenment)은 모두 이들로 인한 효과라는 것입니다. 그들, 곧 으뜸되는 진리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들, 이걸 ‘2차적 진리(secondary)라고 하는데, 이것들이 이제 밝히 깨달아진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건 알겠는데 실제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를 그동안은 잘 몰랐다면,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우리 신앙의 반석으로 믿고, 모든 것을 반석 되신 주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즉 현재 천사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인데, 그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 아주 해처럼 빛나는 명료함과 능력, 그리고 지혜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입니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17:5, 6)

 

지금까지 시험을 만난 이스라엘과 모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 속뜻으로 살폈습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을 거듭 되새김질하셔서 그럴수록 속 심령이 뜨거워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1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15(D1)-주일예배(2602, 출17,5, 6, AC.8576-8585), '호렙의 반석이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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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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