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He who wishes to be saved must confess his sins and do repentance.
(AC.8387)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철저한 숙지, 그걸 자기 안에서 보고 시인, 그 결과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 후,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이런 게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To confess sins is to become thoroughly acquainted with evils, to see them in oneself, to acknowledge them, to regard oneself as guilty, and to condemn oneself on account of them. When this is done before God, it is to confess sins.
(AC.8388)
회개한다는 건, 사람이 그렇게 죄를 고백 및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겸손하게 간구한 후, 그런 죄짓는 걸 그치고,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To do repentance is after one has thus confessed his sins and from a humble heart has made supplication for their forgiveness, to desist from them and to lead a new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AC.8389)
그가 자신은 남들과 같이 죄인임을 그저 시인만 할 뿐인,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악에 대해 유죄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조사하지는 않는, 즉 자신의 죄를 직시하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고백이라는 걸 하긴 하지만, 그러나 회개의 고백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전에 하던 대로 후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He who merely acknowledges that he is a sinner like all others, and who regards himself as guilty of all evils, and does not examine himself—that is, see his sins—does indeed make confession, but not the confession of repentance, for he lives afterward as he had done before.
(AC.8390)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회개하는데요,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반성, 시인 및 대적,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넘어지지만, 주님에 의해서는 계속해서 일으키심을 얻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망을 품고 악한 걸 생각할 때는 넘어지지만, 그러나 악을 대적할 때는, 그리고 그 결과 악을 행하지 않을 때는 주님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게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넘어지나 주님은 이 또한 끊임없이 이들을 일으키시는데요, 그러나 이는 그들로 하여금 모든 지옥 중 가장 끔찍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심일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자신들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만큼이며,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좀 더 온화한 지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일 뿐입니다.He who leads a life of faith does repentance daily; for he reflects upon the evils that are in him, acknowledges them, guards himself against them, and supplicates the Lord for aid. For from himself man is continually falling, but is continually being raised up by the Lord. He falls from himself when he thinks what is evil with desire; and he is raised up by the Lord when he resists evil, and consequently does not do it. Such is the state with all who are in good; but they who are in evil are continually falling, and also are continually being uplifted by the Lord; but this to prevent them from falling into the most grievous hell of all, whither from themselves they incline with all their might; thus in truth uplifting them into a milder hell.
(AC.8391)
자유롭게 행한 회개는 도움이 되지만, 무슨 강압적 상태 속에서 행한 회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압적 상태라는 건, 무슨 큰 병에 걸린 상태라든지, 불행이 닥쳐 몹시 낙담한 상태, 혹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 등, 한 마디로, 건전한 이성의 사용을 방해하는 모든 두려움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강압적 상태에 놓이게 된 악인은 회개를 약속, 선행을 하여 자유로운 상태가 되지만,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전의 그 악한 생활로 돌아갑니다. 선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가 정복하는 유혹의 상태가 될 뿐입니다.The repentance that is done in a state of freedom avails; but that which is done in a state of compulsion avails not. A state of compulsion is a state of sickness, a state of dejection of mind from misfortune, a state of imminent death; in a word, every state of fear which takes away the use of sound reason. When an evil man who in a state of compulsion promises repentance and also does what is good, comes into a state of freedom, he returns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The case is otherwise with a good man, such states being to him states of temptation in which he conquers.
(AC.8392)
입으로 하는 회개, 그리고 삶이 받쳐주지 않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는 그런 걸로가 아닌, 삶의 회개, 생활의 회개로 용서받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죄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은 자비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앙의 계명들을 따라 살지 않는 이상은 죄는 그에게서 제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들 계명에 따라 사는 만큼 그의 죄는 제거되며, 그의 죄가 제거되는 만큼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에서 물러나 선에 머물게 됩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몸 안에 살면서 악에 저항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악에서 물러날 수 있으며, 그가 이 세상 삶을 통해 애정으로 선을 행한 만큼 그는 저세상에서도 선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죄 사함이라는 게 뭔지, 그리고 그게 어디서 오는 건지를 보여 줍니다. 그밖에 무슨 다른 방식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믿는 사람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Repentance of the mouth and not of the life is not repentance. Sins are not forgiven through repentance of the mouth, but through repentance of the life. Sins are continually being forgiven man by the Lord, for He is mercy itself; but sins adhere to the man, however much he may suppose that they have been forgiven, nor are they removed from him except through a life according to the commands of faith. So far as he lives according to these commands, so far his sins are removed; and so far as they are removed, so far they have been forgiven. For by the Lord man is withheld from evil, and is held in good; and he is so far able to be withheld from evil in the other life,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resisted evil; and he is so far able to be held in good then, as in the life of the body he has done what is good from affection. This shows what the forgiveness of sins is, and whence it is. He who believes that sins are forgiven in any other way, is much mistaken.
(AC.8393)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 죄를 시인하며 회개한 후에는 생의 마지막까지 선 안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중에 이전 악한 삶으로 돌아가 거기 빠지게 되면, 그게 바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건데요, 그때 그는 악을 선으로 결합, 그 결과 그의 나중 상태는 이전 상태보다 더 나빠집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After a man has examined himself, and has acknowledged his sins, and has done repentance, he must remain constant in good up to the end of life. If however he afterward falls back into his former life of evil, and embraces it, he commits profanation, for he then conjoins evil with good, and consequently his latter state becomes worse than his former 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43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When the unclean spirit goeth out of a man he walketh through dry places, seeking rest, but findeth none; then he saith, I will return into my house whence I came out; and when he is come, and findeth it empty, and swept, and garnished for him, then goeth he, and joineth to himself seven other spirits worse than himself, and having entered in they dwell there; and the last things of the man become worse than the first (Matt. 12:43–4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6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8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Gen. 1:6-8)
지난주부터 시작한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그 두 번째 시간, 곧 둘째 날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비록 모든 사람은 처음부터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창조되지만,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 곧 ‘공허’와 ‘혼돈’, ‘흑암’의 상태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구분이 안 되며, 이런 상태에서는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빛’이 비추었고, 드디어 그 구분이 시작됩니다. ‘궁창’(穹蒼, the expanse)은 속 사람, ‘물과 물’(the waters in the waters)은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the 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the 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을 말합니다.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거듭남의 시작은 뒤섞여있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분되고 분리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뒤엉킨 채로 가라앉아 있으므로, 먼저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이 언급되고, 이어서 ‘궁창 위의 물’(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이 언급됩니다. 전자는 세상에서 학습으로 습득한 지식이고, 후자는 영적 천적 지식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지식입니다. 자기 안에 거듭남이 시작, 진행되면서 사람은 속 사람이라는 게 있다는 것과 거기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듭남이 시작되었으면서도 사람은 여전히 제 잘난 맛, 즉 선도 진리도 자기한테서 말미암는 줄로 알고 살지만, 주님은 아직은 그걸 특별히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이제 막 발걸음을 겨우 뗀 단계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여기시며, 오히려 그 모든 미숙함을 주님 쪽으로 끊임없이 인도하시고 끌어당기십니다.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아직 거듭남 중인 사람한테는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호칭은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 중 진리에 관한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선에 관한 호칭은 ‘여호와’입니다. 거듭남 중인 사람은 일단 진리로 인도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주님의 호칭이 모두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 호칭은 2장 3절까지 계속되다가 2장 4절부터는 그 호칭이 ‘여호와’로 바뀝니다. 일곱째 날은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이며, 이때부터는 선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궁창은 속 사람을 말합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거듭남의 최종 목표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그 상태가 늘 하하호호 상태가 아닙니다. 새벽, 아침, 정오, 오후, 저녁 순으로 그 상태가 바뀌지만, 그러나 밤이라는 상태는 없습니다. 밤이라는 상태는 사랑이나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상태는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사들의 상태 관련,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아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17장, ‘천사들의 상태변화’(Changes of State of the Angels in Heaven, 154-161)를 읽어보세요.
오늘은 특별히 ‘궁창’(穹蒼, the expanse), 곧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 대해 살피고자 합니다. ‘궁창’의 속뜻이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에 관한 걸 주일설교 원고 몇 장으로 다 살피는 건 불가능합니다. 주님도 따로 한 날을 할애하셨던 만큼 엄청난, 그리고 아주 근본적인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 사람을 사전적으로 살피는 건 앞으로 두고두고 틈날 때마다 계속하기로 하고요, 오늘은 그 전체적인 개요와 배경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의 질문입니다. 주님은 왜 사람 안에 이 ‘궁창’이라는 것, 곧 ‘속 사람’이라는 것을 만드셨을까? 주님은 왜 사람을 ‘영’과 ‘육’으로, 즉 ‘속 사람’, ‘겉 사람’이라는 이런 이중구조로 디자인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 즉 물질이 아니시며, 그래서 주님의 나라는 영의 나라, 곧 속 사람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질, 곧 사람의 몸은 영을 담는 그릇이며, 사람의 영이 몸이라는 옷을 입고 자연계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도구, 수단입니다. 그래서 자연계, 곧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이 다 되면, 그동안 입고 있던 이 몸이라는 옷을 벗고, 오직 영만의 나라, 영으로만 사는 나라로 돌아가는데, 이것을 세상에서는 죽음이라 하며, 사망, 임종, 별세, 사별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합니다. 문제는 저세상은 천국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옥도 있어요. 살아생전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사후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데, 그때 보는 것이 바로 사람의 영, 곧 속 사람입니다. 이 속 사람의 상태가 세상 떠날 때까지 잘 준비되어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이면 천국으로, 그렇지 못하면, 즉 지옥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이면 지옥으로 갑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은 모든 사람이 사후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전 생애에 걸쳐 그와 동행하시며, 그의 속 사람이 천국 갈 상태가 되도록 그의 평생 끝까지 도우십니다. 그래서 사실 모든 사람이 웬만하면 다 쉽게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옥 가기가 무척 어려울 정도입니다. 시험 볼 때 일부러 빵점 맞기가 정말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사후 영원한 운명이 바로 이 속 사람의 상태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 창조의 여러 단계, 곧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에서 이 속 사람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계와 자연계는 모두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고유 본성을 따르게 됩니다. 마치 어떤 작품이 그 작가를 반영하듯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주님의 고유 본성을 신성(神性, the Divine)이라 합니다. 주님의 신성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천국도 천적 나라와 영적 나라로 나뉘는데요, 다음은 관련 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을 더 내적으로(內的, more interiorly)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天的, celestial angels)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라 한다.주28
주28. 천국은 전체적으로 두 나라, 곧 천적 나라와 영적 나라로 나누어진다 (AC.3887, 4138). 천적 나라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마음으로 원하는 파트(voluntary part), 곧 의지(will) 안으로 받는다. 그래서 영적 천사들, 곧 주님의 신성을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 즉 이해(understanding) 안으로 받는 천사들보다 훨씬 더 내적이다 (AC.5113, 6367, 8521, 9936, 9995, 10124).
(HH.21,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
이에 따라 사람의 이중구조가 시작되는데, 먼저는 영과 육으로, 다음 영, 곧 속 사람은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사람의 이 구조와 관련, 사람과 천국, 사람과 지옥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글들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주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주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HH.292,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
지옥과 교통하는 영들 역시 사람에게 와있는 이유는, 사람이 모든 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의 생명이 전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동질의 영이 함께 있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도 없고, 사실상 그의 악에서 떠날 수도, 개선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자아의 생명 안에 머물고, 동시에 선한 영들에 의해서 거기서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양쪽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고, 균형이 유지되기 때문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악에서 떠날 수 있고, 선 쪽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선이 사람 안에 심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전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사람은 지옥 측 영들이 한쪽에서 작용하고, 천국 측 영들이 다른 한쪽에서 작용하는 그 중간에 있을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타고난 것에 들어 있고, 따라서 자기 본성에 들어 있는 한, 만일 악 안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또 사람에게 자유가 없으면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다. 강제로 하는 것은 오래 남지 않는다. 사람이 자유 안에서 받아들이는 선은 그의 의지 안에 심어져 그 자신의 것처럼 된다.주205 이런 이유로 사람은 지옥과 교통하고, 또 천국과 교통하는 것이다.
주205. 모든 자유는 사랑과 애정에 관련되는데, 이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하기 때문이다 (AC.2870, 3158, 8987, 8990, 9585, 9591). 자유라는 것은 사람의 사랑에 속하듯 사람의 생명에도 속한다 (AC.2873). 자유로 말미암은 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사람의 고유 본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AC.2880). 사람은 그가 개혁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 (AC.1937, 1947, 2876, 2881, 3145, 3146, 3158, 4031, 8700). 안 그러면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사람 안에 심길 수 없고, 겉으로 보기에 그의 고유 본성처럼 보일 수 없다 (AC.2877, 2879, 2880, 2883, 8700). 강요로 말미암는 그 어떤 것도 사람하고 결합되지 않는다 (AC.2875, 8700). 만일 사람이 강요에 의해 개혁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개혁될 것이다 (AC.2881). 개혁에 있어 강요는 해로운 것이다 (AC.4031). 강요의 상태들 (AC.8392).
(HH.293,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
좀 깊어 보이는 이런 글들을 이렇게 앞당겨 소개하는 이유는, 이런 사실들을 미리 알고 있으면, 우리 속 사람을 잘 관리하는 일에 백 번 유익하기 때문인데, 우선 저부터도, 혹시 어떤 안 좋은 기억이나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에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한발 물러납니다. 그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와있는 악한 영들이 하는 것인 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이 삶의 전반에 적용, 충분히 숙달되면서 예전의 그 흐릿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궁창, 곧 속 사람을 들여다보는 오늘, 처음부터 이런 깊은 글들을 인용,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런 걸 오픈하신 주님의 뜻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다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누가복음 15장, 소위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11-24)
이 비유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의뢰하던 겉의 것들, 곧 처음엔 재산, 나중엔 일자리를 통한 벌이, 곧 요즘으로 말하면 일용직, 막노동마저 어려워 굶어 죽게 되자 비로소 그의 입에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는, 곧 속에 속한 것들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지난주 말씀드린 리메인스입니다. 겉의 것들이 죽은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깨어나는, 주님이 이때 쓰시려고 우리 안에 유아 시절부터 차곡차곡 소중히 쟁여오신다는 리메인스 말입니다. 온통 겉 사람의 삶에만 정신 못 차리며 살아온 우리는 이 리메인스로 말미암아 비로소 속 사람의 존재를 지각, 각성하여 새 삶, 곧 거듭남의 삶, 그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역시 속 사람 관련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사후 전개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후세계, 곧 영계는 겉 사람인 이 육을 벗고, 오직 속 사람으로만 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람의 사후 첫 번째 상태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기 전에 거치는 세 상태가 있다. 첫째 상태는 사람의 외면의 상태(the state of his exteriors)이고, 둘째 상태는 그의 내면의 상태(the state of his interiors)이고, 셋째 상태는 준비하는 상태(state of preparation)이다. 이런 상태들을 사람은 중간 영계(the world of spirits, 영들의 세계)에서 거친다. 그러나 이런 상태들을 거치지 않고,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올라가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곧바로 천국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거듭남이 완료되어 천국에 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자연적인 불순한 것을 몸과 함께 벗어버리기만 하면 되도록 거듭남이 완료되고 준비된 사람들은 즉시 천사들이 천국으로 데려간다. 죽은 뒤 곧 그렇게 올라가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반면, 내면은 사악하면서 겉으로는 선을 가장한 사람들, 그렇게 선을 속임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악함을 속임수로 가득 채운 사람들은 곧바로 지옥에 떨어진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죽은 뒤 즉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가장 기만적인 자 중 하나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 한 채였고, 다른 자들은 또 다른 식으로 떨어졌다. 죽은 다음 곧바로 동굴로 던져져 중간 영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는 영들이 있다. 이들은 차례로 동굴에서 끌려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이들은 겉으로는 사회적 규범을 지켰지만, 이웃에 대한 행위의 의도가 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중간 영계에 머물면서 신적 질서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되는 준비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다.
(HH.491, 51장, ‘사람의 사후 첫 번째 상태’)
그리고 다음은 잠깐, 윗글에 나온 ‘중간 영계’에 관한 글입니다. 이 중간 영계에 관한 이해가 같이 좀 필요한 이유는 이 사후 상태들에 대한 것들이 모두 이 중간 영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중간 영계는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사이의 지역, 즉 상태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다. 여기서 필요한 만큼 머물고 난 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에 던져진다.
(HH.421, 44장, ‘영들의 세계란 무엇인가’)
중간 영계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역이며, 또한 사람의 사후의 중간 상태다. 나는 천국이 그 위에 있고, 지옥은 그 아래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중간 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있는 영들은 아직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않은 상태임을 보고 그것이 중간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은 바로 그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다. 또 사람 안의 지옥은 그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이 하나 된 상태다. 영인 안에서 선이 진리와 하나 되면 그는 천국에 이른다. 이미 말했듯이 그 하나 됨이 사람 안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악이 거짓과 하나 되면 그는 지옥에 이른다. 그 하나 됨이 사람 안의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 됨의 과정은 중간 영계에서 일어난다. 사람은 그때 중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을 사고력과 의지의 하나 됨이라 해도 같은 말이다.
(HH.422, 44장, ‘영들의 세계란 무엇인가’)
아, 그리고 이 ‘중간 영계’ 얘기만 나오면 늘 바로잡느라 말씀드리는 ‘연옥’ 얘기인데요, 아래 링크를 참고하셔서 혼동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사후 둘째 상태를 자기 내면의 상태(the state of his interiors)라고 부른다. 그때 사람은 자기 마음의 내면(the interiors of his mind), 즉 그의 의지와 사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첫째 상태에 있을 때 그 안에 있었던 외면들(exteriors)은 이때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 사람의 말과 행동과 생활을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에게 외면과 내면, 즉 생각과 의도의 겉과 속(exterior and interior)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사람이 남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나 들리는 말에 의해 그들을 판단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그들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으며, 그들이 악하더라도 그들을 대할 때는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는 사실로 이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자기 생각과 의도와 전연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식적인 사람이나 아첨하는 사람들, 그리고 위선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 천국, 영혼 구원, 교회의 진리, 나라의 유익과 이웃에 대해서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난 듯이 말하지만, 진심으로는 그렇게 믿지 않으며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것이다.
[2] 이 모든 사실로 분명해지는 것은 사람에게는 겉과 속이 있다는 것, 속 생각으로는 다른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 겉 생각에서 나온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내면이 외면으로 흘러들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기 때문에 속 생각과 겉 생각이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속 생각과 겉 생각이 상응으로 하나가 되도록 창조되었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 안에서는 실제로 그 두 생각은 하나가 된다. 그들은 생각도 말도 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의 속 생각과 겉 생각은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들이 악한 생각을 하면서 선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질서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 그들에게는 선이 바깥으로 밀려나 있고, 악이 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악이 선을 지배하여 종으로 부리는데 이는 그들의 사랑과 동일한 악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선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들이 추구하고 행하는 선 안에 악한 목적이 들어 있으므로, 그들의 내면을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 아무리 겉으로 선하게 보여도, 그들의 선은 분명 선이 아니며 악에 오염되어 있다.
[3] 선한 사람들은 이와 다르다. 그들에게는 질서가 바로 되어 있다. 속 생각에서 나온 선이 겉 생각으로 흘러들고, 거기서 말과 행동 속으로 흘러든다. 사람은 원래 이 질서에 맞게 창조되었다. 천국의 빛 안에 있으면 사람의 내면은 그 질서대로 되어 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이고, 따라서 천국 안의 주님이시므로 (126–140항), 천국의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밝힌 것은 모든 사람에게 속 생각과 겉 생각이 있고, 그 둘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말에는 의지도 포함된다. 생각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고, 의지 없는 생각이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람의 외면의 상태와 내면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HH.499, 52장, ‘사람의 사후 두 번째 상태’)
끝으로, 사람의 사후 세 번째 상태가 있지만, 이는 오직 천국 갈 사람에게만 해당되며, 관련 장 링크로 대신합니다.
위 각 상태에 대한 글들은 모두 해당 장 첫 번째 글들입니다. 그 후속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각각의 장 링크를 따라가 계속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러 번이요!
오늘은 창조 그 두 번째 날, 곧 거듭남 그 두 번째 상태를 살폈습니다. 특히 ‘궁창’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궁창의 속뜻은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람 창조 이야기의 목적은 결국 천국을 사람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이며, 그래서 이 ‘궁창’, 곧 ‘속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결국 이 속 사람의 상태를 준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속 사람이 주님의 이 대하드라마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임을 기억, 자나 깨나 자신의 속 사람 상태에 공을 들이시는 삶과 일상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그들은 많든 적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진다는 것을, 즉 조금 필요한 사람은 조금 받고, 많이 필요한 사람은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HH.278, 31장, ‘천국 천사들의 순진한 상태’)
그리고 영계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
같은 원리로, 영계에서는 누가 어떤 사람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실현된다. 그 사람이 그를 생각 속에서 보고, 그 사람의 상태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누가 어떤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면 서로 떨어지게 된다. 모든 반감은 상반된 애정과 생각의 불일치에서 오기 때문에, 영계에서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의견이 같으면 서로의 눈에 보이고, 의견이 달라지는 즉시 시야에서 사라진다.(HH.194, 22장, ‘천국의 공간’)
유대인들, 특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성경을 자기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예수’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요? 지난 2천 년 교회사뿐 아니라 구약 선지서들을 보아도 마이노러티(minority)들은 늘 당시 머조러티(majority)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아왔으므로 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이런 일이 막상 저에게 일어나는 걸 볼 때, 마음이 참 거시기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혼자 산 걸까요? 그저 주님의 무슨 섭리 있으심이겠지 하고는 저는 오늘도 제게 맡기신 소명에만 집중합니다.
아침에 읽은 글 하나
‘핏소리’(the voice of bloods)(10절)는 체어리티가 사라졌음을, ‘땅에서 저주를’(the curse from the ground)(11절)은 왜곡된 교리를,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12절)는 거기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각각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원하여 주님을 외면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망이라는 위험에 빠졌습니다(13-14절).그러나 체어리티가 이식되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신앙은 불가침의 것이 되었습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the mark set upon Cain)는 이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15절). (AC.330, 창4, 개요)
그러니까 ‘천적인 교회, 혹은 천적 인간은 신앙도 사랑으로, 즉 교리가 달라도 사랑부터 하는 반면, 영적인 교회, 혹은 영적 인간은 사랑도 신앙으로, 즉 일단 신앙으로 사랑을 학습한 후 하기 때문’이라는, 전에 제가 첨부한 설명글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처음 알게 된 8년 전만 해도 ‘상응’이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냥 일상 용어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술 그 밑바탕에 깔린, 그러니까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원리라는 건 몰랐다는 말씀인데요, 그의 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김은경 역)을 중심으로 그 관련 내용들을 좀 살펴보면,
먼저, 서문입니다.
...이 말씀(마24:29-31)을 글자 그대로(the sense of the letter) 해석하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the final judgment)이라 부르는 마지막 날에 이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나리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며, 주의 징조가 하늘에 나타나고, 주께서 나팔 든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믿게 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구절에서 예언되었듯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파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긴다고 믿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세부에 숨겨진 속뜻(the arcana)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속뜻(an internal sense)이 있다.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보면, 자연적 차원, 세상의 일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뜻은 영적 차원, 천국의 일을 다루고 있다. 더욱이 이것은 각 구절만이 아니라 각 낱말에도 해당되는 사실이다.주3 성경은 그 지극히 세밀한 부분까지 내적인 뜻을 담게 할 목적으로 오직 상응(correspondences)으로만 쓰였기 때문이다.주4
주3. 말씀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속뜻, 혹은 영적인 뜻이 있다(AC.1143, 1984, 2135, 2333, 2395, 2495, 4442, 9048, 9063, 9086).
※ 여기 이 HH.1, AC.1143 같은 표기는 각각 Heaven and Hell 1번 글, Arcana Coelestia 1143번 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국제적 약어가 있어 그 약어로 보통은 표기합니다. 마치 신구약 성경을 그 약어로 표기하듯 말입니다.
주4. 말씀은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 안에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어떤 영적인 의미들을 갖게 된다(AC.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저자 서문, HH.1)
다음은 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 간에는 어떤 상응이 존재한다’(HH.87-102)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인지 모르고 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이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으로 인해 천국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 것에만 관심이 있다. 세상 것이 그의 외적 감각(the external senses)을 즐겁게 하고, 그의 성향(the natural longings)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적 감각(the internal senses)과 정신(the mind)을 만족케 하는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너무 고차원적이라고 거부한다. 고대인들(the ancient people)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상응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이 가장 중요한 지식이었다. 상응의 지식에 의해 그들은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를 얻었고, 상응의 지식은 천사들의 지식이므로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상응 지식에 의해 천국과 교통했다. 가장 오래전 사람들인 태고인(太古人)들은 천적인 사람들(天的, celestial men)이었으므로 천사들처럼 상응 자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천사와 대화했고, 주님도 자주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지금은 상응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상실되어 상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주72
주72. 상응의 지식은 그 밖의 다른 지식을 얼마나 초월하는가(AC.4280)상응 지식은 태고인의 지식 중 첫째였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잊어버린 지식이 되었다(AC.3021, 3419, 4280, 4749, 4844, 4964, 4966, 6004, 7729, 10252).상응 지식은 동방 여러 나라들과 이집트에서 번창했다(AC.5702, 6692, 7097, 7779, 9391, 10407).
(HH.87)
그러므로 상응의 개념과 본질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a perception of what correspondence is)을 모르면, 영계(the spiritual world), 영계에서 자연계(the natural world)로 흘러드는 입류(inflow), 영계와 자연계의 상관관계, 사람의 영혼(the spirit of man, which is called the soul)과 그것이 몸에 작용하는 방식, 사람의 사후 상태(man’s state after death) 등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응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나올 내용의 기초이기도 하다.
(HH.88)
먼저 상응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자연계 전체는 영계에 상응하는데, 단지 일반적으로만이 아니라 세부적인 모든 것이 상응한다. 따라서 영계로부터 나와서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계와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생겨나고(springs from) 영계에 의해 지속된다(has permanent existence from)는 것이다. 이 관계는 정확히 결과와 원인의 관계와 같다. 여기서 자연계는 태양 아래 그 빛과 열을 받는 모든 것과 그 전체 범위를 말한다. 거기서 형성돼 지속되는 모든 것이 자연계에 속한다. 그러나 영계는 천국을 말하고, 천국의 모든 것은 영계에 속한다.
(HH.89)
사람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위 57번 글 참조)이자 자연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영계와 자연계가 공존한다. 그의 마음에 속하는 내적 차원(the interior things), 즉 사고력과 의지(understanding and will)에 관계되는 것은 그의 영계를 이루고, 몸에 속하는 외적 차원, 즉 몸의 감각과 행동에 관계되는 것은 자연계를 이룬다. 따라서 그의 영계에서 비롯된 그의 자연계에 속한 것은 모두 그 사람의 영계의 상응이다.
(HH.90)
사람의 얼굴을 보면 상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꾸밈없는 얼굴에는 그 마음의 모든 성정(all the affections of the mind)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얼굴을 마음의 표지(the index of the mind)라 부른다. 즉 얼굴은 자연계에 드러난, 사람의 영계인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사람의 사고력에 속한 것(what pertains to the understanding)은 그의 말에 나타나고, 의지에 속한 것은 몸의 행동에 나타난다. 따라서 얼굴이건 말이나 행동이건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상응이다.
(HH.91)
이러한 관찰로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속 사람은 영적이고, 겉 사람은 자연적이다. 또한 양쪽은 천국이 이 세상과 다른 것처럼 서로 구별된다. 나아가서 겉 사람, 즉 자연적 사람 안에 형성되고 지속되는(take place and come forth) 모든 것은 속 사람, 즉 영적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HH.92)
속 사람, 즉 영적 사람과 겉 사람, 즉 자연적 사람 간의 상응에 대해서는 이만 줄이고, 이제 천국 전체와 사람의 각 부분과의 상응을 다루겠다.
(HH.93)
앞에서 천국에 관해 말한 것을 상기해 보자. 천국 전체는 한 사람의 모습이고,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이라 불린다. 천국을 이루는 천사 공동체들은 사람의 사지와 기관과 내장의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머리, 가슴, 팔 등과 그 안의 세부를 이루는 공동체가 각기 다르다 (위 59 - 72 참조). 결과적으로, 천국의 어느 한 부위를 이루는 공동체는 사람의 그 부위에 상응한다. 즉 천국의 머리 부분에 있는 공동체는 사람의 머리에, 가슴은 가슴에, 팔은 팔에, 이런 식으로 몸 각 부분이 천국과 상응한다. 이 상응으로 인해 사람은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permanent existence) 것이다. 사람에게는 천국 아닌 어떤 존재의 근원도 없기 때문이다.
(HH.94)
또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어 각각 천적 나라, 영적 나라로 불린다는 것도 앞서 밝혔다. 천적 나라는 사람의 심장과 심장에 관계된 몸 안의 모든 것에 상응한다. 영적 나라는 폐와 폐에 관계된 몸 안의 모든 것에 상응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렇게 천국의 두 나라로 말미암은 심장과 폐는, 심장은 동맥과 정맥을 통해, 폐는 신경과 운동섬유를 통해 연합하여 모든 작동과 움직임에 관련된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의 영적 사람, 즉 영계에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의지이고, 또 하나는 사고력(the understanding)이다. 의지는 선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사고력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통해 다스린다. 이 두 나라는 실제로 몸속 심장과 폐에 상응한다. 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천적 나라는 천국의 의지 부분(the voluntary part)이고, 거기서는 사랑의 선이 주관한다. 영적 나라는 천국의 지성(the intellectual part)을 담당하고, 거기서는 진리가 다스린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심장과 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 상응으로 인해 성경 말씀의 심장은 의지와 사랑의 선을, 폐의 호흡은 사고력과 신앙의 진리를 의미한다. 같은 이유로, 애정이 실제 심장 안에 있지도, 거기서 나오지도 않는데도 사람들은 애정이 심장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주73
주73. 심장과 폐와 가장 큰 사람, 곧 천국 간 상응, 경험으로부터(AC.3883–3896)심장은 천적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폐는 영적 나라 안에 있는 것들과 상응한다(AC.3885–3887).심장의 것과 같은, 그리고 폐의 것과 같은, 그러나 내적인(interior) 맥박과 호흡이 천국에 있다(AC.3884, 3885, 3887). 심장의 펄스는 사랑의 상태에 따라, 그리고 호흡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상태에 따라 다양하다(AC.3886, 3887, 3889). 말씀에서 ‘심장’은 의지를, 그리고 ‘심장으로부터’는 의지로부터를 의미한다(AC.2930, 7542, 8910, 9113, 10336). 말씀에서 ‘심장’은 또한 사랑을, 그리고 ‘심장으로부터’는 사랑으로부터를 의미한다 (AC.7542, 9050, 10336).
(HH.95)
천국의 두 나라와 심장과 폐와의 상응은 천국과 사람 간의 일반적인 상응이다. 그보다 덜 일반적인 상응이 몸의 사지와 기관과 내장에 이루어진다. 그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천국, 즉 ‘가장 큰 사람’의 머리 부분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덕목(every good)에서 남보다 뛰어나다. 즉 그들은 사랑, 평화, 순수, 지혜, 지성,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과 행복 속에 있다. 이런 것이 사람의 머리와 머리에 속하는 것들로 유입되고, 그에 상응한다. 천국, 즉 ‘가장 큰 사람’의 가슴 부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 사랑과 신앙의 선에 거하고, 위와 같은 식으로 사람의 가슴에 유입되며, 그에 상응한다. 한편 천국, 즉 ‘가장 큰 사람’의 허리와 생식 기관(the organs devoted to generation)을 이루는 사람들은 결혼애(marriage love) 안에 산다. 발 부위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의 가장 낮은 선인 영적-자연적 선 안에 있다. 팔과 손 부위에 있는 이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의 능력을, 눈 부위의 사람들은 사고력을, 귀 부위 사람들은 주의력과 복종을, 코 부위 사람들은 지각을, 입과 혀 부위 사람들은 사고와 지각을 이용한 대화 능력을 담당한다. 신장 부위 사람들은 조사하고, 분별하고, 교정하는 진리 안에 거한다. 간장, 췌장, 비장 부위 사람들은 선과 진리의 다양한 정화 능력 안에 있다. 그 밖에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같은 부위에 유입되고, 그 부위와 상응하는 것이다. 천국의 이러한 입류는 몸의 각 부위의 기능과 쓰임새 안으로 들어간다. 쓰임새는 영계로부터 오기 때문에 자연계에 있는 사물을 통해 형체를 갖추고, 그리하여 스스로를 결과 안에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인해 상응이 존재한다.
(HH.96)
이런 까닭에, 성경에 나오는 사지, 기관, 내장에도 위와 같은 의미가 있다. 성경 안의 모든 것은 상응에 따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리’는 지성과 지혜, ‘가슴’은 이웃 사랑, ‘허리’는 결혼애, ‘팔과 손’은 진리의 힘, ‘발’은 자연성, ‘눈’은 사고 능력, ‘코’는 감지 능력(perception), ‘귀’는 순종, ‘콩팥’은 진리의 검토를 각각 의미한다.주74 또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도 명석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보통 ‘머리가 있다’고 하고, 인자한 사람을 ‘가슴이 푸근하다’, 사고력이 뛰어나면, ‘눈이 날카롭다’, 느낌으로 알아채기를 잘하면, ‘냄새를 잘 맡는다’, 능력이 있으면, ‘팔이 길다’, 사랑으로 바라는 것을 ‘심장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일반적 표현이 상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 영계에서 온 것이다.
천국의 모든 것이 사람의 모든 것과 그렇게 상응한다는 것을 나는 많은 체험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체험이 셀 수 없이 많아서 이것이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모든 체험을 다 기록할 필요도 없지만, 분량 때문에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이라는 책에 상응, 표상(representations), 영계에서 자연계로의 입류(influx), 영과 육의 상호 작용 등을 다룬 부분에 이미 기록한 바 있다.주75
주75. 몸의 모든 지체와 가장 큰 사람, 곧 천국 간 상응, 일반적이든 세부적이든, 경험에 의한 기록 (AC.3021, 3624–3649, 3741–3750, 3883–3895, 4039–4054, 4218–4228, 4318–4331, 4403–4421, 4523–4533, 4622–4633, 4652–4660, 4791–4805, 4931–4953, 5050–5061, 5171–5189, 5377–5396, 5552–5573, 5711–5727, 10030). 영계에서 자연계로, 즉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의 입류 및 영혼에서 몸의 모든 것으로의 입류, 경험을 통한 기록 (AC.6053–6058, 6189–6215, 6307–6326, 6466–6495, 6598–6626). 영혼과 육체 간 상호 작용, 경험에 의한 기록 (AC.6053–6058, 6189–6215, 6307–6327, 6466–6495, 6598–6626).
(HH.98)
사람 몸에 속한 모든 것이 천국의 모든 것과 상응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천국의 형상인 까닭은 외적 형태 때문이 아니라 내적 형태(internal form) 때문이다. 사람의 내면(interiors)은 천국을 받고, 외면은 세상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내면이 천국을 받아들이면, 그는 가장 큰 형상을 따르는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이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천국이 아니고, 가장 큰 형상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외면은 세상을 받기 때문에, 물질계의 원리(the order of the world)를 따를 수 있고, 따라서 다양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다. 몸에 속한 외적인 아름다움(outward beauty)은 부모와 태내에서의 형성으로 비롯되고, 그 후 세상의 일반적 입류(general influx from the world)에 의해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는 그의 영체의 모습과 크게 다를 수가 있다. 나는 여러 번 사람 속의 영을 보도록 허락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겉모습은 아릅답고 매력적이었지만, 그 영은 일그러지고, 어둡고 괴물 같아(deformed, black and monstrous) 가히 지옥의 형상이라 할 만큼 결코 천국 형상은 아니었다. 한편 다른 이들은 겉모습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 영은 매우 아름답고 맑고 천사 같았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세상에 살 때 몸 안에 있던 영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HH.99)
그러나 상응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훨씬 광범위하게 확장된다. 천국들 사이에 상응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내적인 삼층천에 중간인 이층천이 상응하고, 그 이층천에 가장 외적인 일층천이 상응하며, 이는 사람의 사지, 기관, 내장 등 몸의 형태에 상응한다. 따라서 천국이 최종적으로 끝맺는 곳, 즉 천국이 확립되는 바탕이 사람의 몸인 것이다. 이 신비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다룰 것이다.
(HH.100)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 천국과의 모든 상응은 바로 주님의 신적 인성(the Lord’s Divine human)과의 상응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있고, 주님이 천국이시기 때문이다. 신적 인성이 세상의 모든 것에 유입되지 않으면, 사람도 천사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보아도 왜 주님이 사람이 되셨고, 당신의 신성을 완전히 인성으로 입히셨는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천국의 기초인 인간이 질서를 약화시키고 파괴하여 주님 오시기 전의 신적 인성으로는 더 이상 만물을 유지하실 수 없게 되었었기 때문이다. 주님 오시기 전의 신적 인성이 어떠했고, 당시 천국의 상태가 어땠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부록에 발췌되어 있다.
(HH.101)
모든 것의 근원이 신성이 아니라 자연이라고 여기고, 천국의 수많은 경이가 집결된 사람의 몸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천사들은 매우 놀란다. 사람이 조금만 그 마음을 고양하면, 모든 것이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연계는 단지 영계의 옷이자 영계가 그 상응하는 형태로 질서의 외적인 최종단계(the outmost of order)에 드러난 것임을 알 수 있는데도, 사람의 지성(the rational part of man)이 자연에서 발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천사들은 더욱 놀란다. 천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어둠 속에서는 보지만 빛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올빼미에 비유한다.
(HH.102)
내용이 너무 길어져 지치실 것 같아 여기서,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 12장으로 끊겠습니다. 혹시 갑작스런 중단이 아쉬우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그다음 내용들을 향해 계속 나아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12장 제목처럼,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 사이에 어떤 상응이라는 게 있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말입니다. 이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초창기, 그러니까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한 그다음 해, 그러니까 7년 전이네요. 제가 속했던 어느 수도원의 새해 원단 금식 프로그램에 참석, 그 수도원을 도우시던 참 신실하신 장로님과 천국 이야기를 하던 중, 제가 너무 천진난만하게 ‘장로님, 천국 전체 모습은 우리 사람처럼 생겼어요’라는 말씀을 드렸다가 그만... 이후 그분이 저를 계속 피하시는 바람에 다시는 그분과 교제할 수 없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입니다. 어휴...
다음은 이 ‘상응’ 관련, 제게 한 발 더 성큼 나아가게 한 아르카나입니다.
상응에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는데요, 이 상응을 따라 땅에서 행해지는 것은 하늘에서도 소용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the Divine)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상응 안에 있는 건데요, 그래서 신성, 곧 주님이 이들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신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상응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천국에 있는 것들과 상응하도록 기록되었고, 그 결과 말씀에 신성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천국과 이 세상, 곧 하늘과 땅을 결합하게 하는데요, 땅에서 말씀이 읽힐 때, 천국 천사들은 그 속뜻 안에 있는 거룩함 가운데로 들어가기 때문, 곧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AC.8615:3, 출17:12, ‘해가 지도록’)
특히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상응으로 행해진 것’(All the miracles recorded in the Word were done by means of correspondences)이라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이때가 지난 6월 22일 주일예배 설교이니 이제 한 달쯤 되어가네요. 지난 한 달 매 순간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솔직히 저는 아직 상응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상응에 대한 기술, 기록을 읽을 땐 이해가 되는 듯하나 일상 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원합니다. 오, 주님, 저로 하여금 상응 아래 살게 하여 주세요. 남은 삶을 상응으로 살게 하여 주세요. 그래서 저의 영육간 모든 것이 상응의 권능, 곧 천국의 해당 공동체들의 활기와 생명 힘입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기도를 시작한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 나중에 절대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님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나누는 걸 좀 자제하겠습니다.
끝으로, 쓰임새는 상응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이와 관련된 글 하나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천국과 세상이 상응에 의해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언급하겠다. 주의 나라는 목적의 나라(a kingdom of ends)이고, 그 목적은 쓰임새(uses)다. 쓰임새의 나라(a kingdom of uses)이고, 그 쓰임새가 목적이라고 해도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어디에서나 쓰임새가 물질의 옷을 입고 행동, 또는 결과로 나타나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것은 먼저 천국에, 그 다음엔 이 세상에, 단계적이고 연속적으로 내려와 자연계의 최종단계에 이른다. 따라서 쓰임새를 통해 자연계와 영계, 즉 세상과 천국이 상응하고 결합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쓰임새가 입고 있는 형상은 그것이 쓰임새의 형상인 정도만큼만(just to the extent that they are forms of uses) 상응이 되고, 결합의 수단이 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 중 질서에 맞는 것은 모두 쓰임새의 형태이고, 쓰이기 위해 그 용도대로 형성된 결과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계의 존재들이 상응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가 신적 질서(Divine order)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도만큼만 그의 행위는 쓰임새의 형상이 되고, 또 그를 천국과 연결시켜 주는 상응물이 된다.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to perform uses).주83 나아가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자연계를 영계에 연결하는 수단, 즉 결합의 매개체(the medium of conjunction)라는 사실이다 (위 57번 글 참조).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인 정도에 따라 그만큼 결합의 매체가 되고, 반면 자연적이기만 하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결합의 매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을 통하지 않아도 따로 신성의 입류(a Divine influx)가 계속 세상으로 흘러들며, 이 입류는 사람의 물질적 측면 안으로는 유입되지만, 사람의 합리적 기능(man’s rational faculty) 안으로는 유입되지 않는다.
주83. 모든 선은 쓰임새로부터, 그리고 쓰임새를 따라 그 즐거움과 퀄러티를 가지는데, 그래서 이런 게 쓰임새이고, 이런 게 선이다 (AC.3049, 4984, 7038). 천사들의 생명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 즉 쓰임새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AC.454). 주님이, 그리고 그 결과 천사들이 사람에 관해 보는 것은 오직 그 목적, 곧 쓰임새다 (AC.1317, 1645, 5854). 주님의 나라는 쓰임새의 나라, 곧 목적의 나라이다(AC.454, 696, 1103, 3645, 4054, 7038).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이다 (AC.7038). 사람한테 있어 개별적인, 그리고 전체적인 일이란 쓰임새를 수행해 온 일이다(AC.3626, 4104, 5189, 9297). 또한 쓰임새로부터, 즉 쓰임새는 사람 안의 장기(臟器)들, 바로 쓰임새가 수행되는 장기들보다 우선하는데, 쓰임새란 주님의 흘러들어오심으로부터 천국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AC.4223, 4926). 더욱이 사람의 내면은, 이는 그의 마음으로 구성되는데, 그가 성숙해지면서 쓰임새로 말미암아, 그리고 쓰임새를 위해 형성된다 (AC.1964, 6815, 9297). 결론적으로, 사람은 쓰임새와 함께하는 그런 존재이다 (AC.1568, 3570, 4054, 6571, 6935, 6938, 10284). 쓰임새란 쓰임새를 위한 목적이다(AC.3565, 4054, 4104, 6815). 쓰임새는 처음이자 나중, 곧 사람의 모든 것이다 (AC.1964).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 1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 1:1-5)
오늘부터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 총 90장을 달에 한 장씩 하면 살짝 여유롭게 8년 걸립니다. 가끔 절기 설교도 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 창, 출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가 10,837이니 매주 평균 30여 개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마칠 때쯤이면 제 나이 7학년 초중반이 될 테니 아예 할 때 번역도 병행해야 하고 말입니다. 이런 걸 스베덴보리는 8년에 걸쳐 기록했군요. 신기하네요. 기록도 8년, 번역 및 설교도 8년... 컴퓨터도 없던 시절, 오직 종이와 펜으로만 모든 걸 해야만 했던 시절,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풀이를 딕테이션하느라 보냈을 스베덴보리의 8년의 일상이 어땠을지가 눈에 선합니다. 그의 나이 61세에 시작한 일입니다. 더더욱 그는 거의 매일 주님의 부르심으로 영계 체험을 병행하는 가운데 절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부족했을 텐데... 하루하루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았음을 안 보고도 알겠습니다. 주님이 250년 전 스베덴보리와 함께하신 것처럼, 오늘 제게도 그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로 5절, 첫째 날 본문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래도 당분간은 전반적인 배경 이야기를 중간중간 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도 마치 하얀 백지 위에 점과 선 그려나가듯 처음엔 매우 조금씩, 가급적 자세한 설명, 깊은 배경 이야기는 자제하면서 살살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주님은 맨 처음, 아직 거듭남도 시작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의 안에 속 사람을 지으시며, 거듭남의 전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는 그의 안에 선도 진리도 전혀 파종되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 곧 영적 천적인 모든 것(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아주 무지합니다.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에 완전히 잠겨 있는데, 그래서 빛이라는 게 전혀 없어 매우 어둡습니다. 천사들이 이런 사람을 보면 그냥 까만 덩어리로만 보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라 사람의 내면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모르게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도 하는, 곧 그의 안에 참과 선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그러니까 주님의 것을 차곡차곡 소중히 쌓아 보관해 오셨는데, 이런 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리메인스라고 하는 것은 그의 겉의 삶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그러니까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3, 4절,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거듭남이 시작되어 그 첫 번째 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의 첫 번째 변화는 그가 비로소 참과 선을 인식, 이것이 뭔가 더 높은 것이라는 걸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는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걸 선으로, 그리고 이런 사랑에 우호적인 걸 진리로 여기는 뒤집힌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랬던 그가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그는 빛 가운데로 들어가 비로소 자기가 알던 선은 선이 아닌 악이며, 진리 역시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곧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4, 5절, 4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light)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good)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반면,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것입니다. 빛은 주님으로, 어둠은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낮’(day)이지만, 사람에게 속하는 것, 사람의 본성(own, proprium)과 관련되는 건 모두 ‘밤’(night)입니다. ‘저녁’(evening)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를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morning)은 모든 이후 상태(every subsequent state)입니다.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에 속하는 상태이지요. ‘저녁’은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아침’은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속뜻을 몇 줄 문장으로만 적으면 좀 어리둥절하실 것 같아 설명과 함께 풀어 적어보았습니다.
오늘 전할 메시지들이 이미 이 풀어쓴 속뜻 안에 다 들어있는데요, 저는 오늘 특별히 이 ‘리메인스’(remains)라는 것에 주목했으면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주님의 자비가 바로 이 ‘리메인스’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에 영어 ‘remains’를 그냥 일반명사화해서 그대로 명명하는 게 좀 특이했는데요, 다음은 이와 관련, 전에 제가 정리한 글들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AC.8 설명, ‘리메인스’(remains)에 관하여 (2024/6/1)
그러니까 유형(有形),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짜라 믿고, 그런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아, 무형(無形), 즉 보다 가치로운 삶, 윤리, 도덕, 사람다움, 더 나아가 영적인 삶이라는 게 있구나!’ 깨닫는 걸 말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 첫 계기가 고3 때 모친 교통사고 별세가 아니었나 합니다. 저는 그전까지는 아인슈타인처럼 대학교수가 되어 캠퍼스 내 교수 사택에서 살며, 평생 학자의 길을 걷는 걸 목표로 하였었으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별(死別)로, 그동안 추구하던 삶에 대해 ‘아, 내게 있는 이 모든 것, 내가 꽉 쥐고 있는 이것들은 언제든 갑자기 나를 떠날 수 있는 것들이구나!’ 깨닫게 되었고, 이후 그전까진 한 사람의 흔한 모태(母胎) 신앙인, 그러니까 교회를 그냥 일종의 문화생활, 써클 활동 정도로만 다니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요, 곧 관점의 변화, 전엔 내 삶의 행복을 위해 신앙은 그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옵션이었다면, 이후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옵션을 선택한 후, 그 안에서 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표현들이 살짝 좀 이상하지요? ‘신앙을 이용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라... 그러니까 신앙도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이고, 말씀 가까이하는 것도 내가 병 낫고, 복 받고, 내 삶의 형통과 핏줄들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내 두드러진 활동, 우아하고 세련된 매너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받는 걸 좋아하면서 하는 신앙생활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게 다 조금씩은 필요한 거긴 하지만, 뭔가 좀 이상하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사후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네, 아직 이런 상태가 바로 한 사람의 거듭남 초기 상태이며, 기특하게도 신앙생활이라는 걸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머리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가슴 신앙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죠.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그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순서로밖에는 진행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잘난 체와 실수를 허락하십니다. 제가 선을 넘지 않도록 보살피시면서 말이죠...
고3, 대1 때 시작된 이런 상태변화가 6학년 3반이 된 지금 돌아보면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때그때 혹시 필요하면 더 나누겠습니다.
오늘 내용대로라면, 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앞부분,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15:11-19)
에서, ‘스스로 돌이켜’ 부분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는 부분들이 바로 이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두신 리메인스를 주님이 이때 꺼내쓰신 예가 아닐까 싶고,
또,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아담으로 시작, 나중에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이 교회의 변질과 타락, 황폐화로 인한, 자기 사랑, 세상 사람의 광풍 한 가운데 종말의 때에 등장하는 ‘노아’ 말인데요, 이 ‘노아’가 바로 첫 교회시대인 태고교회의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한 개인에 있어 리메인스가 하는 저런 역할처럼 말입니다.
참고로, 창세기 아브라함 전까지는 그 등장하는 모든 인물명은 사실은 신앙명, 교리명, 교회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아담’하면 ‘아담’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셋’하면 ‘셋’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등등 말이죠. ‘노아’ 역시 그 당시 정말 희귀했던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신앙을 끝까지 붙든 사람들과 그 교회, 그 신앙을 말합니다. 그런 신앙의 사람들, 그런 교회를 ‘노아’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이지요. //
두 번째 글입니다.
‘십일조’의 속뜻 (2025/3/11)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헌금 생활 중 십일조에 대하여, 그 아르카나(arcana, 秘義, 속뜻)에 대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거의 첫 본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창세기 14장, 아브람이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린 부분입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7-20)
여기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에 나오는 이 ‘십 분의 일’에 관하여, 창세기 주석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38번 글을 보면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일조(tithes)가 리메인스(remains)를 상징한다, 가리킨다는 사실은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인애)의 모든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모든 상태, 이웃 사랑의 모든 상태를 말하며,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의 모든 상태, 곧 천국의 모든 상태이며, 주님은 이런 상태, 이런 리메인스를 거듭남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이 상태들이 사람에게 그 유아기 때부터 주어져 어른이 되면서 점점 줄어들지만, 그러다가 거듭남이 시작되면 사람은 다시 이번에는 새로운 리메인스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입니다. 사람이 진정 사람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리메인스로부터, 또는 리메인스에 의해서이며, 만약 사람에게 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태가 없다면, 그래서 결국 순진함의 상태가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그때는 오히려 짐승보다도 더 최악이 됩니다. 사람은 순진함이 있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생명의 다른 상태들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말하는 리메인스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얻는 리메인스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후,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를 가지고 이 리메인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랑의 모든 상태, 곧 사랑의 모든 천적인 것들인데, 주님도 마리아로 유전한 인성을 입고 계신 동안은 지속적인 싸움과 이김을 통해서 힘들게 습득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은 끊임없이 주님의 신적 본성과 결합하셨고,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인성이 사랑, 곧 생명 그 자체, 곧 여호와가 되실 때까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스베덴보리의 글들은 천계(天界), 초월적 지혜의 나라의 일을 매우 제한적인 지상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지, 원문은 사실 이보다 더 간략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 글과 글 사이 무슨 배경지식이 없으면 한 번에 이해하기가 다소 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위 주석을 아래 제가 이해한 바로 좀 쉽게 풀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듭남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단은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리메인스라는 것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어떻게든 결국 선 쪽으로 기울어지는데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끝까지 주님을 거절하여 선보다는 악을, 천국보다는 지옥을 선택, 결국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며, 일단 거듭남이 시작되면 이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두 번째 리메인스를 또 선물로 받습니다. 이 선물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발자국을 떼는 것이지요. 사람은 주님의 선물, 주님의 호의, 주님의 돌보심 없이는 결코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탐욕과 거짓의 덩어리, 곧 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 아, 그리고 참고로, 우리 특히 개신교인들은 사람의 거듭남의 시작을 그가 예수님 영접 기도를 따라 했을 때부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거듭남이 언제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우리 주변에 교회를 안 다니는 데도 선한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입니다. 사람 안에 주님이 넣어 두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리메인스라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십 분의 일’로 표현된,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십일조’라 일컫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슨 이쁜 짓을 하고, 무슨 기특한 행실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안에 넣어 두신 이 리메인스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으로 멜기세덱, 곧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주님, 이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제가 롯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례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멜기세덱 본문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돌라오멜, 소돔왕, 그리고 롯과 아브람의 속뜻, 그 아르카나가 무엇이며, 그들 간 전쟁과 그 결과, 그리고 멜기세덱과 그가 들고 온 ‘떡과 포도주’의 아르카나가 무엇인지 등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내용이 깊어지므로 다음에 기회 있을 때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간략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도 인성을 입고 오셔서 처음에는 외견상의 선과 진리(apparent good and truth), 겉으로 보기엔 선이요,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것, 가짜인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과 그돌라오멜 간 전쟁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그돌라오멜은 외견상 진리를,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각각 가리킵니다. 겉 사람과 합리성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겉 사람이 합리성을 떠나 가짜 진리에게 사로잡힌 것을 롯이 아브람을 떠나 소돔에 있다가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주님이 이 가짜들과 싸워 이기신 후, 주님의 겉 사람이 속 사람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된 것을 아브람이 롯을 데리고 멜기세덱을 만난 것과 그의 ‘떡과 포도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네,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라도 소개를 하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The Word)은 정말 철저하게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아르카나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4장 28, 29절입니다.
28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
‘십 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이 ‘십 분의 일’을 가지고 레위인과 객,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십니다. 이들은 겉뜻으로도 그렇지만 속뜻으로도 영적 결핍을 뜻합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두 번째 리메인스를 가지고 이런 영적 결핍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듭남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는 정말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이웃들에게 있는 이 영적 결핍들을 돌아보고 채워주는 일에 이 두 번째 리메인스를 열심히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본문을 통해, 그리고 오늘 주님 말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먼저,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 헌금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헌금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넣어주신 선한 능력, 리메인스를 잘, 그리고 열심히 사용하여 더욱 주님으로부터 더욱더 많은 리메인스가 우리 속 사람 안에 공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개념이 아닌, 주님의 것이 우리 안에 쌓이는 개념입니다.
말라기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여기 ‘시험하여’는 ‘증명하여’(prove, verify)라는 뜻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라,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더욱더 넘치게 주님의 리메인스를 공급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넘치는 리메인스로 우리는 더욱더 쉽게 거듭남의 여정, 곧 영적 싸움을 싸울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내 것을 드리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리메인스라는 것을 우리는 두 번 다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악을 이겨 낼 근본 능력을 우리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며, 영적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며 사는 삶은 복된 삶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게 되며, 우리가 드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 안에 리메인스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본문, 주님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외적인 십일조입니다. 정의와 긍휼, 믿음의 십일조는 내적인 십일조입니다.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외적 십일조는 내적 십일조가 겉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할 수 없고, 반대로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참고로, 오늘 본문 중 리메인스가 나오는 부분은 2절,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푸는 설교는 아마 처음이시지들 싶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주로 천지창조의 관점으로만 보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말씀을 그런 무슨 역사 다큐로 기록하는 거는 관심 없으시고, 대신 사람의 거듭남의 여러 단계를 당시 고대인들의 언어 습관을 따라 재미있게 표상, 상징하기를 원하셔서 오직 상응으로만 기록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아는 천지창조의 육일을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단계로 그리신 것이지요. 우리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이 참 다릅니다.
말씀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며, 그래서 거기엔 주님의 주된 관심, 즉 주님과 천국, 교회, 그리고 종교적 신앙에 관한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조차도 모두 그 안에 이런 내적 의미들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아르카나(arcana, 라틴, secret, 秘義)라 합니다. 아르카나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기 때문에 신성(Divine)하며, 생명이 있고, 그래서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성경만 말씀입니다. 성경 66권 중,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29권),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5권) (AC.10325), 이렇게 34권만 말씀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줄은 알지만, 실제로 자기 영을 보신 분은 없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말씀 또한 그렇게 영과 육으로, 곧 속뜻과 겉뜻으로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영을 처음 보면 무척 낯설 것 같은데, 그런 것처럼 말씀 또한 그 속뜻이 이렇게 낯선 건 어쩌면 당연하지 싶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사모함으로 이 간격이 빠르게 좁혀질 줄 믿습니다.
참고로, 우리가 말씀을 속뜻으로 읽고자 하는 이유는, 첫째는, 우리가 곧 가게 될 본향 언어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둘째는, 오리지날 주님의 마음을 알고, 남은 삶을 그렇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말씀을 겉뜻으로 읽어온 지난날은 끝없이 원어가 어떠니, 누가 이걸 어떻게 풀었니 하는 연속이었습니다. 말씀은 세상 지식으로 푸는 게 아닙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4:1-17)
이 가인 본문을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에서는 글 번호 AC.324-403에 걸쳐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곧 여호와는 왜 친 아우를 살해한 자를 보호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시는,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의 속뜻에만 주목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도 사실 여러 아르카나가 있어, 그리고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하나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심지어 그 신앙이, 분리된 신앙, 곧 사랑 따로 신앙 따로 신앙일지라도 신앙에 대한 폭행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는 이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 창세기 첫 열한 장, 곧 1장부터 11장까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바에 의하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여기는 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토리텔링식 역사 서술 방식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가 45, 6억 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특히 날 수, 연 수의 의미가 상태들과 그 변화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비록 총 11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년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출발, 그 첫 등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 확인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의 등장부터입니다. 참고로, 그래서 창11까지 말씀에 나오는 인명들은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이름으로 부른 교회, 교리, 신앙을 말합니다. 즉 예를 들면, 므두셀라가 969세를 살았다는 건, 므두셀라라는 교회, 혹은 교리나 신앙이 숫자 969로 표현하는 어떤 장구한 세월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일곱째 날, 곧 안식일 상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이는 곧 태고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입니다. 여기 사랑과 신앙은 주님 사랑, 주님 신앙을 말합니다. 이때는 주님 사랑 안에서만 주님 신앙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태고교회가 시간이 흐르자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곧 가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올인하는 대신 주님을 연구하는 일에 올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신비를 탐구, 그걸 교리화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당연히 이들의 삶은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를 소홀히 하는 삶이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오리지날 태고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단(heresy)이었습니다.
반면, 이런 중에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아벨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이라는 교회는, 당연한 얘기지만, 주님이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교회가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이 둘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는 교회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가인이라는 교회는 그럼에도 돌이키는 대신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자신들한테서 완전히 끊어내었는데, 즉 박탈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제 끔찍한 삶이 펼쳐지는데요, 그러자 가인은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소연합니다. 사람은, 교회는 오직 체어리티로만 주님과 결합하는데, 이 유일한 연결고리를 끊어냈으니, 즉 스스로 박탈하고 말았으니, 이제는 철저히 악과 거짓만 남은 상태로 큰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자 주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그걸 이제 알았냐? 너는 선을 넘었으니 어쩔 수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니 나는 모르겠다 보통 이럴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주님은 이런 가인일지라도 그를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가인은 형제 살해범, 곧 이단인데도 말입니다.
이 아르카나의 결론만 말씀드리면, 주님의 섭리는 이후 인류의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벨의 길이 아닌, 결국 가인의 길을 걷게 될 걸 아시고, 비록 그가 이단이지만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셔서, 그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큰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의 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현 안에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배경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기에는 무리여서 그냥 이렇게만 넘어가겠습니다.
※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에 나오는 ‘아담’(the 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 19절에 나오는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상징된 새 교회를, 이름이 셋(Seth)인 그녀의 ‘아들’(son)은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새로운 아들이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인에 대하여 이런 섭리를 갖고 계시는데, 이런 주님의 계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인은 이단이야, 가인은 아벨을 죽였어, 그러므로 가인을 죽여야 해 하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주님 보실 때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곧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단지 가인에 대한 소멸만 막으셨을 뿐, 그에 대한 저주는 계속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 저 같으면 시작부터 헝클어져서 에이, 파토났네... 그냥 다 리셋하고, 첨부터 다시 하지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정말 번거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신 신(The Divine)이십니다. 그런 분이 또 사랑의 신이신 게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단을 대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첫째,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교리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개신교 교리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신앙 따로 체어리티 따로의 삶,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이 보실 땐, 그가 오히려 가인의 후예, 곧 정통 이단입니다. 반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의 삶을 산다면, 그는 주님 보실 때 아벨의 후손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분들은 혹시 생전에 회심하지 못해도 사후, 돕는 천사들에 의해 재교육받고,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은 생전에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이지,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무슨 라이센스만 취득하면 무조건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단에 속했다고 강제로 무릎 꿇리고, 개종 기도를 시키고, 강요와 윽박, 협박과 위협을 가하는 것은 신앙에 대한 폭행이며, 주님에 대한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일을 주도한 개신교인은 아멘, 할렐루야! 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길 잃은 어린양을 구원시켰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착하고 신실할수록, 그리고 굳은 신념의 소유자일수록 더욱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인데요, 자기가 하는 일이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 선과 진리를 오직 학습으로만 알고, 퍼셉션(perception, 천사들과 주님 간 커뮤니케이션 방법), 곧 하늘의 음성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더라도 혹시 주님은? 하며 늘 주님의 눈치 볼 줄은 알아야 합니다. 저런 개신교인은, 아니 어느 종교라 하더라도 자기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평소 그의 삶의 태도가 주님 앞에 어떤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1:9)
천사장 미가엘조차도 심지어 마귀에 관한 일조차 주님 앞에 조심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몰라서 그럴 수는 있으나 겸손해야 합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늘 주님을 경외하며, 모든 언변과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경외란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인같은 이단도 주님은 존중하셨거늘, 만일 내가 함부로 대하는 이 사람의 신앙이 오히려 아벨의 신앙이라면, 나중에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유대인들도 신념의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되었고, 사울 시절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핍박, 박해하였으나 결국 거꾸러지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을 살펴보고 그 열매가 아벨의 열매이면, 비록 내가 믿는 교리와 다르더라도 시비, 훼방, 간섭 등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오히려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기 할 도리’는 심지어 전도, 선교, 목회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인데, 이 속 사람은‘자기 할 도리’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굳은 신념으로 함부로 사는 사람보다는 사랑으로 늘 주님 뒤에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랑보다 더 강력한 신념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에 있어 항상 나의 이 말과 글, 행위와 행실로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울 시절 바울처럼 바보같이 나의 이 열심으로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기에 주님이 느껴지는가, 사람들이 내 말, 내 글, 곧 일상 중 나를 접하고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 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15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16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14And Jehovah said unto Moses, write this for a memorial in the book, and put it in the ears of Joshua, that blotting I will blot out the memory of Amalek from under the heavens. 15And Moses built an altar, and called the name of it Jehovahnissi. 16And he said, Because there is a hand against the throne of Jah, Jehovah shall have war against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우리 주변의 악과 거짓에 대하여 보통은 그는 악하다, 그는 거짓되다 정도로만 표현하는 데 비해 이 아말렉은 그 정도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한마디로 거짓입니다. 보통은 진리가 선을 담는 그릇이듯 거짓도 악을 담는 그릇일 뿐인데, 이 거짓은 얼마나 지독한지 거짓 자체가 악일 정도인 거짓으로, 그 대표적인 속성은 은밀하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대부분 겉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눈치조차 챌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이상한, 분명 100% 부정인데도 언론도, 정치권도 아무도 말을 안 하는, 그래서 정말 이상한, 그래서 은밀하게 전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망치고 있는 이 ‘부정선거’라는 이슈도 이 아말렉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만 비로소 보일 정도로 이 거짓은 은밀한 거짓입니다. 이 덫에 걸리면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어설픈 신앙으로 적당히 겉과 속 사이를 왔다리갔다리 하는 신앙으로는 말입니다. 평범한 악과 거짓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나 이 아말렉이라는 덫은 오직 100%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The Lord’s Divine Truth)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천사들의 아주 흥미로운 한 가지 속성입니다. (HH.278)
또한 그들은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 오직 모든 것을 살피시고 영원한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also they do not themselves know what is good for them, the Lord alone knowing this, who looks in all things that he provides to what is eternal.
그들이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받는 모든 것의 근원을 주께 돌리기 때문에, 자기 본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다.As they love nothing so much as to be led of the Lord, attributing all things they receive to him, they are kept apart from what is their own [proprium];
저는 아말렉을 생각할 때 늘 이런 천사들의 모습, 속성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제 역량이 아직 많이 미흡할지라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천사들처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도록 철저히 제거되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싸우는 진리(truth fighting against this falsity, 여호수아)가 듣고 종신(終身)토록 기억할 수 있도록 그를 도우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14절)
내면의 악에 속한 거짓의 사람들과 하는 이 계속되는 전쟁 중에서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예배 안에서 주님의 지시를 기억한다면 말입니다.(15절)
그들은 주님의 영적 나라(the Lord’s spiritual kingdom)에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기 때문에, 주님의 신성하신 능력(the Lord’s Divine power)으로 그들은 멍에 아래 끌려가 지옥에 던져져 다시는 그곳에서 기어 나올 수 없습니다.(16절)
오늘 본문이 왜 이런 속뜻을 갖는지는 함께 첨부하는 주석본 원고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 역시 이 전체 주석을 다 살피기에는 너무 무리여서 몇 가지만 살피겠습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write this for a memorial in the book
※ 여기서는 ‘책’에 대한 특별한 의미만 보고 가겠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생명책의 속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이 심판받게 될 책들의 속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하늘에 그런 책들이 있으며, 거기에는 모든 사람의 행위와 그 기억이 보존되어 있다고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라는 말씀을 보면, 사실 이 구절에 나오는 ‘책들’(books)은 우리가 아는 일반 종이책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생전에 행한 모든 일에 대한 기억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생전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의 기억, 곧 자기의 생명책을 내세에 가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AC.2474).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주265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이에 죽은 뒤의 기억에 관한 특기할 만한 점을 덧붙인다. 다만 전반적인 것뿐 아니라 아주 미세한 구체적인 것까지도 기억에 들어간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 것과 같은 저술을 담은 책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저자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고,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쓴 책에서 단 한 글자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의 기억에서는 아주 극미한 것까지, 심지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상실한 기억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했다. 사람에게는 외적 기억과 내적 기억이 있는데, 외적 기억은 사람의 자연체에 속해 있고, 내적 기억은 그 사람의 영체에 속해 있다. 사람이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고, 심지어 듣고 본 것도 아주 세밀한 것까지 그의 내적, 즉 영적 기억에 새겨지고,주266 거기 새겨진 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 모든 것은 영과 영체의 사지에 새겨지고, 그렇게 해서 그 의지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에 따라 영의 모습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순되게 들리고, 따라서 믿기 어려운 말임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속으로 생각하고, 비밀리에 행한 것이 행여 죽은 뒤에 감춰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낱낱이 백일하에 공개된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 3)(HH.463) //
주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사람을 그의 행위를 따라 심판할 수 없습니다. 모든 행위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최종 원인, 숨은 동기, 이유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사람은 이들 동기, 이유로 심판받으며, 주님 말고는 아무도 그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그분께만 속한 일입니다.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that blotting I will blot out the memory of Amalek from under the heavens
※ 여기는 내용이 중요하여 전부를 보겠습니다.
‘아말렉을 없이하여 기억도 못 하게 하다’(blotting out the memory of Amalek)의 의미가 아말렉, 곧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을 제거하는 것인 이유는, 이것, 곧 이 아말렉은 제거는 할 수 있지만, 지울 수는, 없앨 수는 없기(can be removed, but cannot be blotted out) 때문입니다. 이 거짓은 영원히 사는 지옥 정령들(infernal genii), 곧 악마들한테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AC.8593). 주님은 이들을 제거, 영적 교회 사람들한테로 흘러들지(flowing into) 못 하도록 막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이들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한 사람들의 사고(thoughts), 생각 속으로는 흘러들지 않기 때문에, 즉 지옥 악령들(infernal spirits)이 하듯 신앙에 관한 것 속으로는 흘러들지 않고, 대신 의지(the will)에 속한 사람들의 애정(affections) 속으로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체어리티(charity)에 관한 것들 속으로는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은밀하게 진행되어 어디에도 이런 일이 그들로 말미암았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인데요, 그런 까닭에, 만일 이들이 영적 교회 사람 안으로 흘러들면, 이 사람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 사람의 진리와 선에 관한 애정들을 왜곡시켜 그를 완전히 타락시킬 것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 지옥 정령급 악마들은 주님에 의해 주님의 영적 나라 사람들을 건드릴 수 없도록, 즉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도록 제거, 곧 조치 되는 것입니다.
더욱 알아야 하는 것은, 영적 교회 사람한테는 새로운 의지가 그 지적 파트(the intellectual part)에 심겼다는 사실인데요 (AC.895, 927, 1023, 1043, 1044, 2256, 4328, 4493, 5113), 만일 이들 정령들, 그러니까 이들 삼층 지옥 악마들에게 이곳으로 흘러들어도 된다는 허락만 나면, 이들은 저 영적 교회를 철저히 파괴할 겁니다. 이들은 또 옛 의지의 유전 악 안으로도 들어가 그걸 다시 열어보려 하지만, 그러나 그 악은 여전히 닫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AC.986, 1667, 2308 참조). 이들 지옥 정령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제거가 이런 식으로 시행됩니다. 이들의 거짓은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자체가 악이며, 이런 악은 실제로 지적 파트 안으로는 유입될 수 없고, 대신 의지 파트 안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 교회 사람의 새로운 의지는 지적 파트 안에 심겼기 때문에, 이들 정령들은 여기로는 흘러들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는 모든 유입에서 제거가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모든 지적인 것에 대해 이들 정령들이 더욱 황폐해지도록 하십니다.
※ 지옥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봐야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즉 미리 아시는 주님은 그들과 직접 싸우시는 대신 전체 설계를 고치셔서 저들로 하여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게 하십니다.
※ 다음은 위 참조 글들 중 일부 인용입니다.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the waters were dried up from off the earth (창8:13)
이 표현의 속뜻은 ‘그러자 거짓들이 나타나지 않았다’(falsities did not then appear)인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드린 말씀에 있습니다. 특별히 의미하는 바는, 거짓들이 이 교회에 속한 사람의 의지에 관한 것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땅’(the earth)은 여기서는 인간의 의지를 의미하는데, 이는 탐욕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라고 한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의 ‘지면’(ground)은 그의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있습니다. 여기엔 진리들이 파종되어 있지요. 진리들은 절대로 의지 파트(will part)에 파종되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있어 이 의지 파트는 지적 파트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같은 구절 끝에 가서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로 바뀝니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면은 그의 의지 안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주님은 선들을 파종하셨고, 그러자 그 선들로부터 인간은 진리를 알고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방법이 현재까지도 이어졌다면, 인간은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요, 인간의 의지가 철저하게 부패,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종을 인간의 의지 파트에 하는 경우와, 아니면 지금처럼, 그의 지적 파트에 하는 경우가 어떤 건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해집니다. 태고 교회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의 유아기 때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퍼셉션이 시작, 계시들이 주어졌는데, 놀라운 것은, 이들 계시가 그의 의지 파트에 파종되었기에 그는 새로운 가르침 없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걸 지각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알아야 할, 그러나 여전히 그 모든 애를 써서도 그 천분의 일도 알 수 없는 모든 특별하고 특이한 것들을 그는 하나의 일반 원리로부터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반면,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는, 그는 현재 배우고 있는 것밖에는 모르며, 이런 식으로 자기가 아는 걸 참이라 붙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심지어 거짓된 걸 배워도 그것이 자기 마음에 참이라 여겨지면 그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무슨 다른 퍼셉션이 없어, 그냥 그것이 그렇다고 설득되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양심으로부터 어떤 딕테이트를 받지만, 이 딕테이트라는 게, 어떤 게 참인 이유는,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학습했기 때문이라는, 참 어처구니없는 거라는 거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그들의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며, 거짓된 것에 관한 양심을 가진 자들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이것이 오늘날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신앙을 학습한 사람들의 영적 실상이며, 정말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사후 이런 정령들, 그러니까 삼층 지옥 악마들이 되는데요, 이들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고, 이런 악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크게 기뻐하며, 악을 행하면서도 은밀하게, 그리고 타인을 이용해서 하는, 그래서 아무도 이런 짓을 자기들이 하는 줄을 모르게 최대한 조심하면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친구 같고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는데요, 이들의 평소 말과 일상생활을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은 위선자요, 그 속은 사기성이 농후한 호랑이들입니다.(AC.895, 창8:13)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and called the name of it Jehovah-nissi
※ 여기서는 특별히 민수기 유명한 놋뱀 본문만 보겠습니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8, 9)
놋뱀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은 요3:14, 15를 보세요. 이 역시도 보호를 의미함이 분명한데요,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봄으로써 나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신앙으로 거짓의 악으로부터 치유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 15)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and he said, Because there is a hand against the throne of Jah
※ 한글 성경에는 단순히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이라고만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은 ‘여호와의 보좌를 대적하고자 하기에’라는 본문이 생략된 것입니다. 이 내용 역시 중요하여 전체를 보겠습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그들이 주님의 영적 나라에 폭력을 행사하기 원하기 때문에’(because they wish to do violence to the Lord’s spiritual kingdom)인데, 그 이유는, ‘누구에게 손대는 것’(a hand against anyone)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야(Jah)의 보좌’(the throne of Jah)는 주님의 영적 나라를 각각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야(Jah)의 보좌’가 주님의 영적 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은, ‘보좌’라는 말은 주님의 왕권(royalty)을 서술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적 나라는 그분의 왕권과 상응합니다. 주님에 관한 서술 관련,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직(priesthood), 다른 하나는 왕권(royalty)입니다. 천적 나라는 그분의 성직, 영적 나라는 그분의 왕권에 상응합니다. 주님을 신성하신 선(Divine good) 관련해서는 ‘제사장’(Priest)으로, 신성하신 진리(Divine truth) 관련해서는 ‘왕’(King)으로 부릅니다. 이 후자, 곧 신성하신 진리는 ‘그리스도’(Christ)라는 이름에, 전자인 신성하신 선은 ‘예수’(Jesus)라는 이름에 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AC.1728, 2015, 3004, 3009, 6148 참조). ‘보좌’는 주님의 왕권, 그러니까 주님의 영적 나라에 관한 서술에 사용됩니다. ‘야’(Jah)도 같습니다 (‘보좌’의 의미는 AC.5213, ‘야’는 AC.8267 참조).
주제 자체, 즉 아말렉으로 표상되는 자들, 이들은 내면의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 안에 있는 지옥 정령들인데, 이들이 주님의 영적 나라에 대해 폭력 행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위에서(AC.8593, 8622) 이미 보았습니다. 이런 악의 거짓(the falsity of this evil)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그분 안에 있는 인성(the human in Himself)을 신성(Divine)으로 만드시기 전까지는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지옥에 갇혔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은 신앙의 진리에 대해 모호함 가운데 있으며,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도 교회가 그렇게 말해와서지, 그가 그걸 진리로 지각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진리는 선이 되며, 결국은 양심 문제가 됩니다. 만약 악성 정령들(malignant genii)이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모호함 가운데로 흘러들게 되면, 이들은 수천 가지 방식으로 저들의 양심을 파괴할 것입니다. 이들은 거기 있는 신앙의 진리를 상대로 행동하지 않고, 저들의 애정 그 자체를 상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디서든지 선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감지되는 순간, 잽싸게 그것을 왜곡, 절대 감지될 수 없도록 은폐합니다. 이들은 바로 그 목적을 공격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악의(malignity)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지만, 뼛속 깊이 관통하는, 안 보이는 죽음의 독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 정령들에 관해서는 각 장 끝에서 다루는 주님의 자비에 관한 경험을 말씀드릴 때 더 다루겠습니다.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Jehovah shall have war against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이 표현의 속뜻은 ‘그들은 멍에 아래 끌려가 지옥에 던져지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 때문에 결코 기어 나올 수 없음’(they were brought under the yoke and were cast into hell, from which by reason of the Lord’s Divine power they can never rise up)인데, 그 이유는, ‘여호와가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의 의미는 지옥으로 던진다는 것이고, ‘대대로’(from generation to generation)의 의미는 영원히 그 상태에 있게 되며,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다시 기어 나올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 때문이라는 것은 바로 위 AC.8625 참조) ‘여호와가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의 의미가 지옥으로 던진다는 의미인 것은, 이것이 영원한 승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지옥 정령들은 절대 결코 여호와, 곧 주님을 상대로 전쟁하거나 싸울 수 없습니다. 가끔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예속시키느라 그들은 싸우고, 심지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여호와(the Divine)를 상대로 대항할 힘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신성하신 파워(Divine power), 주님의 능력이 실린 단 한 번의 끄덕임으로도 저들 악마의 무리 전체가, 심지어 그 수가 수천수만(myriads of myriads)이라 할지라도 즉시 제압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저들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저들의 행위가 무슨 쓰임새가 있는 한은, 저들의 악이 주님에 의해 선으로 바뀔 수 있는 한은 말이지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주님의 자비로 다른 데에서 다루겠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Jehovah having war with Amalek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가 의미하는 바는 저들을 사로잡아 지옥에 던짐이며, 주님의 신성하신 파워로 그들은 그곳에서 결코 기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지난 4주에 걸친 아말렉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1. 겉과 속, 내적(internal), 외적(external), 내면(interior), 외면(exterior)이라는 게 뭔지, 이게 왜 중요한 건지
2. 다른 건 진리를 공격하는데 유독 이 아말렉이라는 거짓은 왜 선을 공격한다는 건지, 다른 말로는 왜 이해(understanding)가 아닌 의지(will)를 공격한다는 건지
3. 주님이 홍수 이후 인류에게는 왜 그의 의지 파트(will part)가 아닌,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에 새 의지를 임플란트하셨다는 건지
4. 홍수 전 인류와 홍수 후 인류의 차이가 뭔지, 도대체 홍수를 초래한 태고교회 후손들은 사람 안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무슨 짓을 했길래 주님이 사람 안의 설계를 변경하셔야만 했는지
등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느끼시겠지만, 이들 내용은 결코 간단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몇 줄 문장으로 답할 수 있는 내용이면 굳이 창세기, 출애굽기 풀이를 총 10,837개의 글, 전체 8권의 볼륨, 8년(1749-1756)에 걸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신이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조금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수십 권의 저작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출 속뜻 주석, 라틴)에서 출발합니다. 이 저작을 어떤 주제, 어떤 안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때마다 새로운 책이 정돈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 책, 이 저작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래서 이제 다음 주부터 이 대하(大河)와도 같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강해’를 시작합니다. 다만 그 내용의 장구함으로 인해 일일이 살폈다가는 제 기력이 다할 때까지 끝을 못 볼 것 같아 그건 그때마다 원고로 대신하고 대략적으로 묶어 설교하겠습니다. 다만 이 일에 한결같이 정주행할 수 있도록 주님이 제 주변 안팎을 고요하게 다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복음서에 보면 가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비유, 돌아온 탕자 비유 등 정말 명쾌, 명료한 쉬운 풀이로 배움과 상관없이 누구나 천국 이 어려운 아르카나를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치셨지만, 그러나 그런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 없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안 들으려고 귀를 틀어막고, 마음에 커텐을 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님도 어찌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억지로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 곧 내면을 열고, 다가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들릴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아멘!
이건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부모, 자식, 심지어는 손주들 등 핏줄과, 그리고 혈육까지도, 정말 사랑한다면 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보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지옥은 평소 눈여겨봐 뒀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아주 집중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공격, 그들을 통해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더 하며, 애정이 진할수록 더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주님, 사랑해요 고백해도 우리의 겉과 속이 다르면, 그 고백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애지중지, 그냥 자식 일이라고, 그냥 손주 일이라고 부주의하게 눈 돌아갔다가는 큰일납니다. 내가 꾹 참고 시치미 뗐더라면, 그 순간 주님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지옥의 공격 대상에서 비껴갈 수 있었던 자녀가, 손주가, 부모님이, 나의 부주의로 내가 사실은 주님보다 이들을 더 사랑한다는 게 들통나는 바람에 발각, 지옥의 공격 대상이 되어 시달림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장 안전하게 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이들을 모두 이들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응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면 그 사랑은 안전하며, 보호받습니다. 즉 그때는 지옥이 이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본인들이 자초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핏줄을 비롯, 모든 걸 상응으로 사랑해야 안전하다는 것은, 그래야 우리가 선을 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데,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그저 우리는 우리 할 도리만 다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들이, 설령 악령들의 부추김을 받아 우리에게 못되게 굴어도 우리는 주님 앞에 자기 할 도리만 다하고 물러나면 되기 때문에, 지옥 입장에선 도무지 무슨 엿볼 틈이 생기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은, 천국과 지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천국에,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아르카나(arcana, 秘義, secret)인데요, 여기엔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능력이 깃들어 있어,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기적 또한 이 상응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저는 상응으로 살기 원합니다 하는 기도를 늘 하면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기도에는 정말 많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얘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부모님을, 내가 남편을, 내가 아내를, 내가 그동안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데, 내가, 내가, 내가... 이런 생각이 들면, 언제든 화들짝,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오는, 악한 영들의 부추김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이런 부추김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우리는 그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간에 돌이키지 않으면, 물거품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기울인 모든 사랑과 헌신, 정성과 힘의 공로를 모두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천사들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공로로 돌릴수록 그는 천국이며 천사이지만, 모든 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수록 그는 지옥이며, 악령입니다.
핏줄이, 혈육이 저 정도니 돈, 건강, 성취와 보람, 자랑, 명예, 권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 삶의 가장 첫 자리, 그리고 삶의 영 순위에 주님을 모시는 사람은 지옥이 학을 떼고 물러납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저런 여러 영역을 아무리 찔러봐야 끄떡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1:22)
그 결과는 나는 물론이요, 내 주변도 평안합니다. 공격 대상을 찾는 지옥의 스캐닝에 포착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적어도 나랑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말이지요. 이것이 내 모든 핏줄을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이며, 그들을 주님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다음 계명에 들어있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 38)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 5)
10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출17:10-13) 10And Joshua did as Moses had said to him, in fighting against Amalek; and Moses, and Aaron, and Hur went up to the top of the hill. 11And it was, when Moses lifted up his hand, that Israel prevailed; and when he let down his hand, that Amalek prevailed. 12And Moses’ hands were heavy, and they took a stone, and put it under him, and he sat upon it; and Aaron and Hur held up his hands, one on one side, and the other on the other; and it was, his hands were steady until the setting of the sun. 13And Joshua weakened Amalek and his people with the edge of the sword. (Exdo. 17:10-13)
위 본문에 대한, 지난주와 같은 주석 번역본은 설명 포함 총 19 페이지나 되어 오늘은 따로 그중에서 하나의 대지만 뽑아 본문을 준비했습니다. 이 19 페이지 원본도 제 블로그 이번 주 설교 본문 하단에 이 설교와 함께 첨부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내려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은 다음과 같습니다.
싸우는 진리(fighting truth, Joshua)가 신성하신 진리(Divine truth, Moses)의 가르침을 받아 그대로 행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들(the falsities from interior evil, Amalek)을, 연속적인 질서, 순서로 나타나는 신성하신 진리들(Moses, Aaron, and Hur)과 함께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안에서 말입니다.(10절)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신앙이 주님을 향할 때는 싸우는 진리가 이기고, 주님으로부터 떠나 자신과 세상을 향할 때는 거짓이 이겼습니다.(11절)
주님을 향해 위를 바라보는 힘이 빠지자, 함께한 진리들이 질서, 순서대로 맨 끝단에 있는 신성하신 진리로 하여금 맨 첫 단에 있는 진리와 상응하게 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모든 방향에서 싸우는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 곧 그때의 힘과 파워의 세기, 강함을 유지하게 하였고, 그 결과,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과 싸우는 상태가 그쳤습니다.(12절)
싸우는 진리를 가지고,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는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의 힘을 줄어들게 한 것입니다.(13절)
속뜻이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오래전, 그때 계시록이었나? 하여튼 어떤 분이 정돈한 이런 속뜻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얼마나 어리둥절, 당황,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우리말 문장이긴 한데... 제겐 마치 무슨 암호문 같았기 때문이지요. 벌써 7년 전이군요. 말씀에 속뜻이라는 게 담겼다는 말을 생전 처음 듣던 때였으니 뭐... ㅎㅎㅎ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해서 저런 속뜻을 갖게 되는지 그 자세한 설명, 주석이 필요하신 분은 오늘 블로그에 첨부하는 주석본 파일도 함께 내려받아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위 속뜻 역시 얼른 와닿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며, 몇 번 정독하시다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시지 싶습니다.
저는 이 속뜻 가운데서 오늘은 특별히 다음 한 가지만 뽑아 비교적 짧게 나누고 싶습니다.
아말렉이라는, 급(級)이 다른 거짓을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싸워야 한다.
그럼 시작합니다.
아말렉이라는, 급이 다른 거짓을 상대할 때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싸워야 한다.
아말렉을 가리켜 ‘급이 다른 거짓’이라 했는데, 왜 이런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쓰는지는 지난 2주에 걸쳐 다룬 다음 내용들을 보시면 됩니다.
아말렉의 속뜻은 ‘the falsity from interior evil’, 즉 ‘내면의 악으로 말미암는 거짓’입니다.
내면의 악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 안에 봉인된, 사람 속에 있는 것으로, 사람의 의지 안에,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의 생각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겉으로는,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이나 말, 표정 같은 걸로는 도무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이런 걸 몰래 감출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연구하는데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짐짓 영예와 공정, 정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양, 짐짓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양 꾸미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하면 악을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그래야 탄로가 나지 않을 텐데 하는 것밖에는 궁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악에 색을 입혀 마치 악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요,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이런 걸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몰래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내면의 악’(interior evil)이라 하며,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악한 정령(精靈)들’(evil genii)이라 합니다. 사후 세상에서 이들은 ‘외면의 악’(exterior evil) 가운데 있는, ‘영들’(spirits)이라 하는 자들하고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습니다.(AC.8593:1)
이 악에서 나오는 거짓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이 거짓은 악한 영들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하고는 다릅니다. 이 거짓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인데, 이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 공격하는 대상이 신앙의 진리들이 아닌, 신앙의 선들입니다. 이들은 타락한 애정들(depraved affections)을 가지고 액션을 취하는데요, 그걸로 이들은 선한 생각들을 왜곡시키는데, 그 방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양심에 진짜 감쪽같이 어떤 액션을 취해 비뚤어진 양심이 되게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타락한 애정을 호흡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이들 지옥의 정령급들은 사람을 공격할 때 절대 공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주 완강하게 저항할 것 같을 때도 말이지요. 대신 가만히 보다가 그가 낙심, 거의 포기할 것 같다 싶을 때, 그때 갑자기 공격, 그를 밀어 넘어뜨려 그로 하여금 완전히 끝장나게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넘어뜨린 아말렉인데요,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를 등지게 되고, 그 결과 가나안 땅 여러 족속을 두려워하게 됩니다.(AC.8593:2)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두 호칭이 있는데, 하나는, ‘영’(spirit)이고, 다른 하나는 ‘정령’(genii)입니다. 전자를 보통 ‘악령’이라 하고, 후자를 보통 ‘악마’라고 합니다. 악령들은 ‘사탄’이라고 부르는 앞쪽 지옥에 살고, 악마들은 ‘마귀’라고 부르는 뒤쪽 지옥에 삽니다. 앞쪽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뒤쪽 지옥에 사는 사람들보다 덜 악합니다. 참고로, ‘사탄’, ‘마귀’는 어떤 우두머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지옥 내 지역을 말합니다. 보통 등장하는 대적들, 가령 애굽의 바로나 가나안 일곱 족속은 앞쪽 지옥을, 이 아말렉은 뒤쪽 지옥을 말합니다. 악령들은 진리를 공격하지만, 악마들은 선을 공격합니다. 이들이 지금 보고 있는 아말렉입니다. 주님은 이 두 지옥을 분리하셨습니다. 악령들의 지옥을 악마들의 지옥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악마들이 악령들의 지옥에 흘러들면, 악령들의 지옥은 초토화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주님이 지옥을 보호하신다 하는가 하실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지옥에 갔어도 주님은 그들 역시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상 6/22 설교 인용)
네, 우선은 이 정도면 왜 아말렉을 가리켜 ‘급이 다르다’ 하는지 아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말렉류가 사는 마귀라는 지옥은 삼층천 천적 천국에 대응하고요, 평범한(?) 악령들이 사는 사탄이라는 지옥은 이층천 영적 천국과 대응하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정말 아주 지독한 자들이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사랑이신 주님도 적어도 겉 글자 상으로는 이들을 가리켜 ‘내가 아말렉을 없이 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14절),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16절)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 아말렉 마지막 시간 때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에서 이런 자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에서는 알려주고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곧 신성하신 진리,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말합니다.
유튜브와 구글,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전 세계 뉴스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며, 각종 AI의 등장으로 설교조차 본문과 주제만 주면, AI가 그럴듯하게 몇 초 만에 만들어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전 분야 모든 지식이 터질 듯이 넘쳐나는 이 시대이지만, 그러나 아말렉과 하는 이런 류의 전쟁은 영적 전쟁입니다. 육은 육, 영은 영입니다. 아말렉 류를 세상 지식과 지성, 진리로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 말씀으로 돌아가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몇몇 유튜버들은 주님이 주신 통찰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거짓의 흐름 그 배후를 중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 역시 주님 주신 통찰력으로 그렇게 보고 있고, 미국이 가진 힘, 곧 주님이 주신 힘으로 중국을 상대, 마치 천국 천사들이 지옥 악령들과 악마들을 상대하듯 그렇게 중국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 악과 거짓의 나라들이 사용하는 주요 수단들 중 거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저비용 고효율 수단인 부정선거이며, 이를 통해 전 세계 만만한 국가들 거의 모두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옥이 전략을 바꾼 것인데요,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얘깁니다만, 그러나 그동안 아무도 몰랐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선거 주무 부처인 중앙선관위가 발표하는 숫자들을 들여다본 몇몇 천재 재야 의인들로 인해,사전투표와 본투표 간 너무나 이상한 괴리 현상, 통계학상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과 패턴이 발견되었는데, 이분들은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매진, 결국 그 전모, 곧 전국 선거구마다 자기네 후보가 얼마를 지고 있으면 얼마를 보탠다는 식의 비율로 숫자를 건드린 정황들이 모조리 드러났지요. 그리고 이 조작된 숫자를 맞추기 위해 가짜 투표지를 대량으로 투표함에 넣는 등 여러 무리한 시도들이 발각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느 방송이나 언론, 심지어 검찰도, 경찰도, 아니 우리 쪽인 줄 알았던 국회의원들조차 입을 꾹 다물고 모른체 하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제보를 하고, 고소, 고발을 해도 말입니다. 중앙선관위를 보호하는 대법원, 그리고 이런 것이 공론화되어 여론 형성되는 걸 막기 위해 미리부터 각종 방송과 언론을 장악, 국민을 귀머거리 만들고 소경 되게 해 온, 뭔가 좀 더 그 뒤에 큰 손이 있음이 느껴지는 상황이 계속되고... 더더욱 부정선거로 입법부를 장악, 자유 민주주의의 맹점인 다수결 원칙을 악용, 멀쩡한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의 손, 발을 예산을 동결해서 꽁꽁 묶어 끝내 계엄을 일으킬 수 밖에 없게 만들더니 계엄이 터지자 올커니 하면서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역이용, 결국은 탄핵과 조기 대선, 그리고 역시 부정선거로 대통령의 자리를 탈취, 현재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권모술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여러 지옥들도 방문하며, 그곳 악령들과 악마들하고도 교류(?)를 가졌는데, 특히 그곳 악마들의 경우, 그 기상천외함이 얼마나 놀라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고, 주님도 그 내용들 기록하는 것을 절대 금하셨습니다. 그때가 대략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이니... 그때는 경악할 악한 모략과 계략이 지금은 이렇게 드러날 정도로 세상이 악해졌나 봅니다.
이상이 오늘날 서서히, 아니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대의 아말렉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아말렉이 있고, 이렇게 거대한 아말렉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르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대응 방법은 단 하나, 오직 주님의 가르침, 그 신성하신 진리입니다. 저들의 모든 기상천외한 방법들은 모두 지옥에서, 그것도 정령급인 악마들의 지옥인 삼층 지옥, 마귀라는 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살아있으나 이미 저들에게 잠식된, 그래서 언제든 죽으면 바로 저 가장 깊은 지옥으로 가게 될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The Lord’s Divine truth)인가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시는 진리가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입니다. 지난주 말씀드렸듯 이 진리는 여섯 단계로 되어 있는데, 그 가장 마지막 단계가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곧 ‘말씀’(The Word)입니다. 현 성경을 이루는 66권 중 말씀은 34권으로 주님의 아르카나가 담긴 것만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아르카나가 담긴 이 34권의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 관련 인용입니다.
참고로, 성경 66권 중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것만 ‘말씀’(The Word)이며, 이는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합 29권,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 합 5권 해서 총 34권입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신구약 32권을 성경에 포함하신 이유는 신앙생활에 유익한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글은 그저 참고만 해야지 여기서 무슨 교리를 뽑아내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은, 인간의 글, 사람의 글이기 때문입니다.(6/22 설교 인용)
비록 아직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이 많이 낯설어도 몇 가지 원칙, 곧
첫째, 주님을 사랑하면서 말씀 읽기
둘째, 말씀 읽는 동안 주님이 내 영적 역량에 맞춰 서서히 내 영의 눈과 귀 열어주실 것을 믿고 온전히 맡기기. 마치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부모의 인도를 따르듯
셋째, 매일 읽기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입니다. 주님 사랑이 내 삶과 일상 가운데 첫째가 되면, 이후 모든 게 거기에 맞춰 교통 정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도 중요한데, 모든 천국적인 것은 이노센스(innocence), 즉 천진난만, 순진무구, 어린아이 같음 안에 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어린아이 상태가 아니면 어떠한 천국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말씀을 읽을 땐 나만 읽는 게 아닙니다. 내게 와있는 천사들도 내 육안을 통해 함께 읽습니다. 다만 나는 겉 글자를, 천사들은 속뜻, 곧 거기 담긴 아르카나를 읽습니다. 이때 내가 속뜻 알기를 간절히 원하면, 바로 이때가 천사들과 내가 하나 되는 때이며, 이때 천사들이 이해하는 바가 내 안에 흘러들어옵니다. 이것이 영안(靈眼)이 열리고, 영이(靈耳)가 들리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가 원해야만’ 일어납니다. 그것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리고 우리 사는 이 자연계이든 말입니다.
중요한 게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론과 훌이 모세와 함께하듯, 우리가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를 붙들 때, 그때 우리를 돕는 진리들도 함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역시 주님의 신성하신 진리들이지만, 이들은 간접 진리입니다. 저에게는 이들이 곧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 역시 여느 성경의 저자들처럼 자기의 모든 경험을 주님의 명령으로 기록했지만 말입니다. 그의 저작들 중 특별히 ‘천국과 지옥’이 중요합니다. 제게는 이 책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주석처럼 여겨지는데요, 이 책을 정말 여러 번 읽었고, 그 번역본을 아예 통째로 타이핑, 수시 검색을 통해 아주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 좌우에서 모세를 보좌하듯 저에게는 이 책이 말씀의 속뜻을 든든히 보좌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그 일점일획까지도 천국과의 상응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그리고 지옥과 그 중간 상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산꼭대기에 올랐듯 이 모든 것이 능력이 되려면, 일상이 체어리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를 꼭 기억하셔서 부디 이 큰 싸움에서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글 제목을 이렇게정하고 보니 어쩌면 제목 때문에라도 좀 꺼림칙해 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ㅎㅎㅎ
저는 61년 소띠생입니다. 요즘은 만 나이를 쓴다죠? 그러니까 만으로는... 네이버 만나이 계산기로 보니 만 63세로 나오네요. 연나이는 64세...
여전히 8, 9학년 분들 앞에서는 유치원이요, 초등학생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슬슬 ‘내가 그동안 살아 보니...’ 뭐, 이런 비슷한 표현을 쓸 수 있는 나이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잘못하고, 또 잘못된 선택을 했던 순간들, 제가 비겁했던 순간들, 제가 정말 정신이 잠깐 나갔었던 순간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관련 되신 분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삶을 정리하는 분들이나 하실 법한 말씀을 하세요? 하실 수도 있겠으나, 그런 건 아니고... 다만 잠시 제게 천국의 빛이 비쳐 정신이 돌아온 게 아닐까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은 온 천국을 비춘 후, 중간 지역, 중간 상태에 있는 영들의 세계와, 그리고 우리 사는 이 자연계 및 온 우주를 비춘 후, 맨 끝단 저 지옥까지 비춘다고 하는데요, 모든 주님의 빛이 닿는 곳은 이 주님의 빛으로 생명 활동이 일어나지만, 저 지옥만은 예외인 게, 저곳은 주님의 빛이 자기들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빽빽한 어둠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랍니다. 그럼에도 가끔 그 철통같은 방어막을 뚫고 한 줄기 빛이 비칠 때가 있는데, 빛 없을 땐 다들 정신 나간 상태에 있던 지옥의 악령들이라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잠시, 잠깐이나마 정신이 돌아와 바른 소리들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이런 상태인 건가요? 아이고..., ㅎㅎㅎㅎㅎ
고3 때 돌아가신 어머니(18생), 대학 졸업 때 부름 받으신 아버지(07생), 삼성 그만두던 해 떠나신 수원 셋째 형님(46생), 어제가 벌써 9주기였던 김해 큰형님(33생) 등 직계 혈육만도 벌써...
친, 인척과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교연(교회 관련) 등으로 지난 세월 알고 지낸, 그러나 이미 제 곁을 떠나신 분들 모두 세면 그 얼굴이 떠오르는 분들만도 수십 명이나 되시네요...
이분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들 계실까요? 대부분 천국에 계시지 싶지만, 의외로 지옥에 계신 분들도, 그리고 아직 확정이 안 되어 중간 상태로 대기 중인 분들도 계시지 싶습니다. 이곳은 대체로 최장 30년 정도 계신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 중간 상태는 천국, 혹은 지옥을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곳인데요, 그러니까 천국 가실 분인데 천국에는 도무지 쓸데없는 악과 거짓이 들러붙어 있어 그걸 떼어내는 중이시거나, 지옥 가실 분인데, 지옥에는 도무지 쓸데없는 선과 진리가 들러붙어 있어 역시 그걸 떼어내는 중이신 분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입니다. 떼어낼 게 적을수록 대기 시간이 짧아집니다. 카톨릭의 연옥하고는 완전히 다른 뎁니다. 여기는 사실이지만, 연옥은 허구입니다.
저희가 거의 매일 이용하는 동네 마트가 있는데, 거기 공용주차장 곁에 ‘공주 칼국수’라는 데가 있어요. 전에 저의 30년 지기 절친이 칼국수를 참 좋아해서 아주 자주 칼국수 맛집 탐방을 여기저기 같이 다녔는데, 이 집에도 그 친구와 들러 배부르게 먹고 했던 순간들이 영상처럼 지나갑니다. 몇 해 전 갑자기 제 곁을 떠났는데요, 주님을 정말 사랑하여 많은 작은 교회들을 돌보던, 정말 의로움과 올바름의 사람이었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정말 많이 그립네요...
점점 더 세상일에서 눈을 돌려 주님과 천국을 바라봅니다.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수록 여러 가지 내려놓는 게 점점 쉬워지고, 그래서 많은 성인, 성현들이 임종의 때, 그저 옷 한 벌, 누울 자리 하나, 그리고 성경책 한 권으로 삶을 마감하곤 했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내면이 활짝 열려 내면의 나라, 속 사람의 나라, 주님과 천국 천사들의 나라 사모하며 남은 삶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