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은 앞에 있었던 ‘마할랄렐’(Mahalalel)이라는 교회와, 뒤에 이어질 ‘에녹’(Enoch)이라는 교회로부터 알 수 있는데, 야렛은 이 두 교회 사이에 위치한 중간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전개에서 ‘말해지지 않은, 즉 언급되지 않은 단계의 의미를 읽는 법’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렛의 교회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중요하지 않거나 비어 있는 단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앞선 교회와 뒤따르는 교회 사이에 놓인 위치 자체가 그 성격을 드러낸다고 말해요.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마할랄렐은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한 단계였고, 에녹은 그 이후에 무엇인가가 특별히 보존되는 단계로 등장합니다.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인 야렛은, 한쪽으로는 진리 중심의 경향이 더욱 굳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퍼셉션의 보존이 필요해질 만큼 약화되는 ‘과도기적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교회 상태를 항상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갑자기 생겨나거나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다음 상태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야렛의 성격은 그 자체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앞뒤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해석의 책임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읽기를 요구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적용해 보라는 초대입니다. 마할랄렐에서 드러난 경향이 야렛에서 더 진행되었고, 그 결과 에녹이라는 보존의 단계가 필요해졌다는 흐름을 읽도록 이끕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교회 역사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는 뚜렷한 특징이나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시기가 앞선 변화의 연장선에 있고, 이후의 중요한 전환을 준비하는 자리라면,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야렛의 교회는 바로 그런 상태를 상징합니다. 눈에 띄는 새로운 특징은 없지만, 이전의 변화가 누적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긴장과 무게를 품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이미 결정되고 그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AC.514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통해 말하는 구절입니다.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교회 상태의 연속성과 점진성을 더 강하게 증언합니다. 야렛은 독립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앞선 마할랄렐과 뒤이은 에녹 사이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중간 단계였다는 것이지요.

 

 

 

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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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결하지만, 태고교회의 전개가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교회의 상태만을 지목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이름 = 교회 상태’라는 해석 원리를 충분히 익혔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야렛(Jared)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퍼셉션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외적 구조와 매개에 크게 의존하는 단계였습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중심의 생명은 더 두꺼운 외피 속에 감싸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단계까지는 아직 퍼셉션의 잔존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에녹(Enoch)으로 상징되는 일곱 번째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이름의 등장은 이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지요. 에녹은 곧 ‘보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퍼셉션이 계속 약화되는 흐름 속에서 주님께서 어떤 것을 ‘따로 보존하시는 단계’가 시작된다는 암시가 여기서 처음 주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513은 단순한 목록의 연장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말기에 접어들며 ‘질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글’입니다.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로 넘어가면서, 교회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만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지점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전승’이 아니라 ‘의도적인 보존’이라는 방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전환은 신앙 공동체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익숙하게 발견됩니다. 어떤 단계까지는 살아 있는 인식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것을 그대로 두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새로움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는, 즉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등장은 쇠퇴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신호입니다. 퍼셉션이 약해졌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해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신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곧 이어질 에녹에 대한 설명이 훨씬 깊이 있게 읽히게 됩니다.

 

결국 AC.513은 태고교회의 연속성 안에서, 단순한 다음 단계의 언급을 넘어, ‘보존의 섭리가 시작되는 문턱’을 가리키는 글입니다. 짧지만, 이후 전개 전체의 방향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어요.

 

 

 

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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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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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6, 17)

 

AC.512

 

이 말씀도 앞에 나온 유사한 말씀들과 동일합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앞에서 반복되어 온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보다 이미 제시된 틀 안에서 이 구절을 읽어야 함을 조용히 상기시켜요. 즉, 여기서 언급되는 표현들도 모두 시간이나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퍼셉션의 변화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앞선 구절들에서 ‘’, ‘’의 숫자,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 모두 상태의 언어였던 것처럼, 이 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반복은 설명의 부족이 아니라, 독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붙들어 주는 장치예요. 성경을 다시 문자적 이해로 끌어당기려는 유혹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해석의 속도를 잠시 늦추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새롭고 인상적인 해석을 계속 덧붙이기보다, 이미 밝혀진 원리가 지금 읽는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초대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힘은 새로운 정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가 상태에 따라 반복해서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마할랄렐 이후의 교회 상태도 앞선 단계들과 동일한 법칙 아래 놓여 있으며, 퍼셉션의 일반화와 쓰임새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AC.512는 해설을 멈추는 글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읽어 온 방식 그대로, 상태를 중심에 두고,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 그리고 쓰임새의 변화를 함께 보라는 조용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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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명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나 쓰임새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의 능력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마할랄렐’(Mahalalel)이라 불리는 교회를 이루었던 이들의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그러한 상태였는데, 이는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이들 가운데서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알려진 바입니다. As the perceptive faculty decreased, and from being more particular or distinct, became more general or obscure, so also did the life of love or of uses; for as is the life of love or of uses, so is the perceptive faculty. From good to know truth is celestial; the life of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Mahalalel” was such that they preferred the delight from truths to the delight from uses, as has been given me to know by experience among their lik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퍼셉션의 변화가 단지 인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방향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이동할 때, 그에 따라 삶의 중심도 함께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다룹니다. 사랑의 생명이 바뀌면 퍼셉션도 바뀌고, 퍼셉션이 바뀌면 사랑의 생명도 바뀐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생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더 초기 상태에서는 쓰임새, 곧 선을 행하고 진리를 살아내는 데서 자연스러운 기쁨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때 퍼셉션은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질서라고 부릅니다. 선이 먼저 있고, 진리는 그 선이 자신을 알게 하는 빛과 같았어요.

 

그러나 ‘마할랄렐(Mahalalel)의 교회에 이르면, 이 질서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들의 삶에서는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더 앞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분별하는 것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지요. 이것은 곧 삶의 무게중심이 행함에서 앎으로 조금씩 이동했음을 뜻합니다.

 

이 변화는 갑작스러운 전도나 타락이 아닙니다. 여전히 선을 사랑하고, 여전히 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기쁨의 근원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을 아주 섬세하게 짚습니다. 쓰임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쓰임새보다 진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퍼셉션은 더 이상 개별적이고 살아 있는 분별이라기보다, 점차 일반적이고 덜 생생한 인식으로 변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해요.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판단 기준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길 때, 곧 쓰임새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할 때 퍼셉션은 살아 있습니다만, 반대로 진리가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 될 때, 퍼셉션은 점차 분명함을 잃게 됩니다.

 

이 글에서 인상적인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내용을 단순한 이론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저세상, 곧 영계에서 ‘마할랄렐’과 같은 상태에 속한 이들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 경험에 따르면, 그들은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 상태의 차이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과 성향으로 드러난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날카로운 자기 점검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앙 안에서 어디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가요, 아니면 그 말씀이 삶에서 쓰임새로 드러날 때의 기쁨인가요.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순서와 중심은 신앙의 상태를 깊이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변화는 익숙하게 나타납니다. 어느 시기에는 봉사와 실천이 자연스럽고 기쁘게 느껴지다가, 또 어느 시기에는 말씀 공부와 이해가 더 즐거워질 수 있어요.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때 퍼셉션이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라고 초대합니다. 앎이 삶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삶이 앎을 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지요.

 

결국 AC.511은 태고교회의 다섯 번째 단계에서 나타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일반화되면서,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생명도 함께 변했고, 그 결과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더 선호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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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ahalalel” is signified, as before said, a fifth church; by “Jared” a six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태고교회의 흐름이 계속해서 ‘끊김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자리예요. 스베덴보리는 ‘마할랄렐(Mahalalel)과 ‘야렛(Jared)을 더 이상 개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교회 상태의 연속으로만 언급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해석의 방향을 충분히 익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게난 이후에 형성된 상태를 이어받습니다.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고, 삶의 세부를 즉각적으로 비추기보다는 보다 넓은 틀 안에서 작동하는 단계에 해당해요.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그 분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줄어들어 있습니다.

 

야렛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교회를 설명할 때도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직 노아로 대표되는 결정적 전환 이전이며, 퍼셉션의 잔존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점점 더 외적인 구조와 매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처럼 숫자가 늘어날수록 교회는 점점 더 바깥쪽 층위로 이동합니다. 이는 열매의 알맹이에서 막질로, 더 두꺼운 외피로 옮겨가는 과정과 닮아 있어요. 중심의 생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감싸는 구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생명은 직접 드러나기보다 보호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짧은 글은 신앙의 지속과 변화에 대해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변화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단절이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아요. 마할랄렐과 야렛의 교회는 이전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그 상태에 맞는 쓰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 해석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의미’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지만, 바로 그 침묵 속에서 흐름을 읽도록 초대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따라가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회의 성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단계들은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이 비교적 안정되고 체계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즉각적인 분별의 예민함은 줄어들 수 있어요.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태를 부정하거나 억지로 되돌리려 하기보다, 그 상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퍼셉션과 쓰임새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결국 AC.510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섯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단한 말로 확인해 줍니다. 이름은 달라지고 상태는 변하지만, 흐름은 끊어지지 않았어요. 이 점을 기억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에녹과 노아의 교회도 훨씬 입체적으로 읽히게 됩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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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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