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시간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첫째 장에서 이미 보인 바 있는데,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말씀에서는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고 부르는 일이 매우 흔하며, 이것은 현재 절과 그 뒤에 이어지는 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간들의 일반적인 상태들 또한 ‘날들’에 의해 의미됩니다. 여기에 ‘해들’(years)이 더해질 때에는, 해의 계절들에 의해 상태들의 성질들이 의미되며, 따라서 특별한 의미에서의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태고 사람들에게는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하는 그들만의 숫자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셋’(three), ‘일곱’(seven), ‘열’(ten), ‘열둘’(twelve)과, 이것들과 다른 숫자들이 결합된 많은 숫자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숫자들을 통해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 안에는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아르카나(arcana, 秘義, arcanum의 복수)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의 상태들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자 계산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말씀의 많은 부분들, 특히 예언서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유대 교회의 의식들 안에서도 시간과 분량에 관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제사, 소제, 봉헌물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적용되는 방식에 따라, 어디에서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팔백’(eight hundred)이라는 숫자와, 다음 절에 나오는 ‘구백삼십’(nine hundred and thirty)이라는 숫자, 그리고 이어지는 절들에 나오는 연수의 숫자들 속에 포함된 것들, 곧 그들의 교회의 상태 변화들이 그들의 전반적인 상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 작업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일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이 숫자들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7에서 다시 한번 ‘’과 ‘’, 그리고 숫자에 관한 성경적 언어의 본질을 정리하며, 창세기 5장이 결코 연대기적 기록이 아님을 확증합니다. 그는 이미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날들’이 문자적 하루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을 보였다고 상기시키며,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곧 성경에서 ‘’은 언제나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어떤 상태가 지배하고 있는가’를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말씀에서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흔하다는 설명은, 창세기 5장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모든 날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가 됩니다. 이 표현은 그 사람이 며칠을 살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가 어떤 성격으로 존재했는지를 요약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날들’이 시간들의 일반적인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전체적인 분위기, 방향, 중심 성질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기에 ‘해들’이 더해질 때, 의미는 한층 더 구체화됩니다. ‘’는 계절을 포함하는 시간 단위이기 때문에, 상태의 ‘성질’, 곧 그 상태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났는지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날들’이 큰 틀의 상태를 말한다면, ‘해들’은 그 안에서 일어난 ‘세부적인 변화와 국면’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날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상태들이고, ‘해들’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상태들이라고 구분합니다.

 

이제 논의는 숫자 자체로 옮겨갑니다. 태고 사람들에게는 교회와 관련된 의미를 담아 표현하던 숫자 체계가 있었습니다. ‘’, ‘일곱’, ‘’, ‘열둘’과 같은 숫자들은 단순한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적 언어’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숫자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수들 역시 교회의 상태 변화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숫자들 안에 많은 비의(秘義, 숨은 뜻)들, 곧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숫자들이 하나의 ‘기록’이자 ‘계산’이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상태가 무질서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정확한 질서와 단계’를 따라 변화해 갔음을 뜻합니다. 숫자는 그 질서를 인간의 언어로 남긴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은 생물학적 수명이 아니라, 교회가 거쳐 간 상태들의 질서를 기록한 표식들입니다.

 

이와 같은 숫자의 사용은 예언서들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며, 유대 교회의 의식들 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제사와 소제, 봉헌물에 사용된 시간과 분량의 숫자들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숫자는 적용되는 방식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지만, 언제나 교회의 내적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동일한 상징 언어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팔백’, ‘구백삼십’과 같은 큰 숫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절들에 나오는 연수의 숫자들에 담긴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은 각각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그리고 그 변화가 전체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들은 단독으로 이해될 수 없고, 전체 구조 안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예고를 합니다. 곧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는 단순 숫자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숫자 언어는 임의적인 암호가 아니라, ‘체계적인 질서 언어’이며, 그 기초를 알 때에만 비로소 전체를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487은 창세기 5장을 읽는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재정립합니다. 숫자는 연대가 아니라 상태이며,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질서가 중요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는 더 이상 낯선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태어나고, 머물고,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정밀한 영적 기록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88, 창5:4, '날'(day) 상태, '해'(year)는 거기 담긴 성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해들’(years)이 특별한 의미에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bygrace.kr

 

AC.486,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 ‘아담은 팔백 년을 지내며’(the days of man were ei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5:3)

 

AC.486

 

‘아담은 팔백 년을 지내며’(the days of man were eight hundred years)의 영어 표현에 나오는 ‘날들’(days)은 일반적으로 시간(times)과 상태(states)를 의미하고, ‘해들’(years)은 특별한 의미에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며,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인식, 즉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6에서 창세기 5장의 표현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 시간 및 생육과 번성에 관한 언어가 결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아담은 팔백 년을 지내며(the days of man were eight hundred years)의 영어 표현에 나오는 날들(days)과 ‘해들(years), 그리고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모두 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과 가족의 확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상태 안에서 무엇이 인식되고 보존되었는지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5장을 역사로 읽으려는 시도를 단호히 차단하고, 상태의 역사로 읽도록 방향을 고정합니다.

 

먼저 ‘날들’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포괄적입니다. ‘날들’은 어떤 특정한 순간이나 길이를 가리키기보다, ‘하나의 전반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하루, 여러 날, 혹은 어떤 날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그때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신앙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그의 모든 날들(the days of man)은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가 어떤 성격으로 존재했는지를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해들’은 그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날들’이 전체적인 분위기와 방향을 말한다면, ‘해들’은 그 안에서 드러난 ‘특정한 국면과 변화의 단계’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앞서 ‘’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하며,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이 모두 상태의 차이를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몇 해를 살았다’는 표현은, 교회가 어떤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했는지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제 ‘아들들과 딸들’, 곧 ‘자녀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자녀들’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그들이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교회 상태에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의 퍼셉션과 선의 퍼셉션이 계속해서 생겨났음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가 살아 있었고, 단순히 유지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풍성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이 점은 창세기 5장의 족보 전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족보가 단지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반복’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생물학적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이 족보는 각 교회 상태가 어떤 진리와 선을 퍼셉션했는지, 그리고 그 퍼셉션이 얼마나 풍성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아들들’은 이해력 안에서 형성된 진리의 퍼셉션들이고, ‘딸들’은 의지 안에서 형성된 선의 퍼셉션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진리들과 선들이 ‘배워서 축적된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와 그 계승 교회들의 특징은, 진리와 선이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퍼셉션으로 알았던 진리들과 선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퍼셉션이 사라질 때, 교회는 더 이상 ‘아들들과 딸들’을 낳지 못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자녀들’을 낳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활동과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진리의 퍼셉션과 선의 퍼셉션이 실제로 태어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생명력을 숫자나 규모로 판단하지 않고, ‘퍼셉션의 출산 여부’로 판단합니다.

 

또한 ‘날들’과 ‘해들’의 구분은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긴 시간의 신앙생활을 자랑하지만, 성경은 묻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그리고 그 상태 안에서 어떤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었는가를 묻습니다. 짧은 날들이라도 깊은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었던 것이고, 긴 해들이었더라도 퍼셉션이 없었다면, 그것은 공허한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AC.486은 창세기 5장의 언어를 완전히 전환시켜 줍니다. 시간은 연대가 아니라 상태이고, 출산은 생물학이 아니라 퍼셉션이며, 족보는 혈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기록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창세기 5장을 더 이상 건너뛰고 싶은 장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이 장은, 교회가 살아 있었던 시절의 ‘가장 섬세한 생명 기록’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87, 창5:4, '날'(day), '해'(year), 단순 숫자, 복합 숫자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시간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첫째 장에서 이미 보인 바 있는데, 거기서 창조의 ‘날들

bygrace.kr

 

AC.485, 창5:3, 창4, 창5에 반복되는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앞서 위에서(창4:25)말한 교회와는 다른 교회임은 AC.4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 오늘 부를 찬송가는 순서대로 찬550,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과 찬553, ‘새해 아침 환히 밝았네’입니다.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1-3)

 

위 본문을 아래

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0.33MB
성찬.pdf
0.14MB

 

 

https://youtu.be/ATzHWYj8mBA

 

 

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