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nine hundred and sixty and nine years, and he died. (5:26, 27)

 

AC.525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These word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이 본문은 창세기 5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서술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형식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장수 기록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AC.525에서 이 모든 표현이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합니다. 즉, 여기에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이미 확립된 내적 의미가 다시 적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서 ‘살다’, ‘’, ‘자녀’, ‘죽었다’라는 표현은 모두 시간이나 생물학적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 즉 ‘’와 ‘’은 여전히 교회의 상태와 그 지속을 뜻하고, ‘자녀’, 곧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가 지니고 있던 진리들과 선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죽었더라’라는 표현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에 고유하던 퍼셉션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므두셀라의 경우, 앞서 설명된 대로 그는 태고교회 말기에 속한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이 시점에서 퍼셉션은 이미 매우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으며, 더 이상 미세한 분별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그의 교회적 성격을 새롭게 설명하지 않고, 앞서 반복된 형식 그대로만 기록됩니다. 설명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상태가 이미 단순해졌기 때문에 같은 틀로 충분해진 것입니다.

 

라멕을 낳았다’는 말은 또 하나의 교회 상태가 그로부터 이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는 혈통의 계승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연속은 더 높은 단계로의 진보가 아니라, 점진적인 약화와 이동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전체에는 발전의 긴장감보다는,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듯한 정리의 느낌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AC.525에서 ‘These words have a like signification’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독자에게, 이 본문을 특별하게 해석하려 애쓰지 말고, 이미 앞에서 배운 해석의 틀을 그대로 적용하라고 안내하는 것입니다. 날은 상태이고, 해는 그 상태의 성격이며,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와 선이고, 죽음은 퍼셉션 상태의 종결이라는 원칙이 여기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메시지의 강조입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패턴 속에서 조금씩 약해지고, 점점 외적인 방식으로 이동해 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말기는 극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조용한 반복 속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이 AC.525는 새로운 교훈을 덧붙이기보다는, 지금까지 읽어 온 내용을 스스로 적용해 보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더 이상 해설에만 의존하지 않고, 창세기 족보의 반복 속에서도 교회의 상태 변화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AC.524, 창5:25, ‘퍼셉션 관련, 연명 단계에 접어든 교회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창5:25) AC.524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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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5:25)

 

AC.524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하는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완전성(perfection)은 감소하였고, 그와 함께 지혜와 지성도 감소하였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해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 전체의 흐름을 정리하는 ‘결정적인 평가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일부러 이 교회의 ‘구체적 성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상태가 다음 교회인 ‘노아’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교회는 독자적인 특징을 논할 만큼의 고유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이에요.

 

앞선 교회들에서는 각 이름마다 퍼셉션의 미묘한 차이가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더 천적이었고, 어떤 교회는 퍼셉션이 보다 일반화되었으며, 어떤 교회는 교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분조차 생략됩니다. 이는 퍼셉션이 이미 충분히 약화되어, 더 이상 미세한 차이를 논할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퍼셉션을 ‘일반적이고 흐릿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말은, 분별이 넓은 범주로만 작동하고, 더 이상 구체적인 상황과 상태를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흐릿하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분명히 보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지만, 빛이 직접적으로 비추는 상태도 아닙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 ‘대략적인 방향만 짐작하는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문장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는 ‘노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성격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노아 교회’를 통해 거꾸로 그 상태를 이해하라고 안내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들이 이미 다음 시대의 교회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이 시점에서 태고교회는 더 이상 완전히 태고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새로운 교회로 넘어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완전성의 감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성은 도덕적 완전함이나 윤리적 흠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퍼셉션의 선명함, 즉 선과 진리를 직접 인식하는 능력의 완전성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약해질수록, 교회는 점점 더 외적인 방식에 의존하게 되고, 그만큼 내적인 생명은 줄어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완전성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의 감소’를 나란히 언급합니다. 지혜는 선에 대한 인식이고, 지성은 진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흐릿해질수록, 지혜는 감각적인 선이나 전통적인 선으로 바뀌고, 지성은 추론과 기억에 의존하는 이해로 바뀝니다. 이는 능력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인식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변화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끝이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인식 방식이 바뀌는 전환’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퍼셉션이 줄어들수록, 인간은 더 많은 설명과 규범과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패라기보다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새로운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무겁습니다. 태고교회는 여기서 사실상 막을 내리고, 이후 인류는 더 이상 ‘즉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워서 아는 교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노아’는 그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이름이며, 이 교회는 그 문 앞에 서 있는 마지막 태고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AC.524는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창세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리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C.525, 창5:26-27,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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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3, 창5: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C.523-524)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 (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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