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혼자사는것이좋지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한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창조질서에속한다’는 것과 ‘모든사람이이세상에서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바울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 Love)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지상에서 일정 기간 함께 사는 법적·사회적 제도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삶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을 향한 내적인 삶을 살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를 만나 결합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현세의 미혼은 영원한 독신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드시결혼해야한다’는 압박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과 내적으로 맞는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결혼하라고하셨으니누구하고든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혼의 본질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핵심이 두 사람의 참된 결합이라면, 결혼이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억지로 결혼이라는 형식 안에 넣는 것이 독신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결혼하지않아도된다’는 말을 ‘결혼은별로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특히 ‘혼자가편하기때문에’, ‘내자유를침해받기싫기때문에’, ‘누군가에게맞추며살고싶지않기때문에’ 모든 깊은 결합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결혼 사랑에는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며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결합 자체를 거부하는 독신과, 자신의 형편과 소명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독신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참된 결혼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이면서 서로를 지배하고 이용하고 상처 입히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영혼을 자동으로 결합시키지는 않습니다. 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결과 책임, 이성에 대한 존중,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배려하는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결혼했는가, 하지않았는가?’가 아니라 ‘어떤사랑을가진사람으로살아가고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난제가 따라옵니다. 주님은 부활에 관하여 ‘장가도아니가고시집도아니가고하늘에있는천사들과같으니라’(마22: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한 자연적 혼인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별도로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도결혼이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다음 단계입니다.
결국 ‘결혼을꼭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지만,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여부가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외적인 상태보다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장차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반드시결혼해야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누군가와참으로하나될수있는사람으로거듭나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것’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지상에서 배우자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결혼사랑을이룰수있는사람으로준비되어가는것’입니다.
※오늘(2026/10/18)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찬양하자’, 찬131, ‘다나와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창5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6-14)
다음은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남자들국제결혼좀그만해 - 국제결혼때문에분노하는한국여자들의진짜현실.’ 영상은 40대 중반의 지방 중소기업 직장인 남성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결혼 상대자로 선택받지 못하다가 베트남 파견근무 중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반대했던 세 여성, 곧 친누나와 결혼정보회사 매니저와 직장 여성 동료가 사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는 ‘국제결혼을그만하라고하기전에왜이남자들이한국에서는한번도선택받지못했는지부터물어야한다’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영상이 던지는 문제에는 분명 생각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조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대 여성들이 그를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한사람’을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직장, 거주지역, 주택 소유 여부, 연봉, 나이 같은 조건표부터 읽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전세보증금이 스스로 모은 돈이라고 설명하지만 상대방에게 돌아오는 말은 ‘그럼결혼하면대출부터시작이네요’였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오늘날 결혼시장이 사람을 바라보는 한 단면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은어떤사람입니까?’보다 ‘당신은내삶에무엇을제공할수있습니까?’가 먼저 묻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영상의 편을 그대로 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한국여성들은조건만따지고베트남여성들은사람자체를본다’고 결론 내린다면 영상 속 결혼정보회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인을 ‘한국여자’, ‘베트남여자’라는 다른 조건표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상이 구성한 몇 사람의 사례입니다. 그것을 ‘한국여자들의진짜현실’ 전체로 확대할 근거는 이 자료 안에는 없습니다. 국제결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고 이해관계로 맺어진 결혼이 있으며, 국내결혼에도 조건 중심의 결혼과 깊은 인격적 사랑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렌즈가 물어야 할 것은 ‘어느나라여자가더좋은가?’가 아니라 ‘나는배우자를무엇으로보고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상 속 린이라는 여성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계기는 처음부터 결혼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에서 주인공이 잘못 작성한 주문서의 숫자 하나를 그녀가 발견하면서 서로의 능력과 성품을 알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면서 관계가 자라났습니다. 더욱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한국의 18평 전세집을 영상통화로 보여 주며 ‘이게지금내전부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전 만남에서 약점처럼 취급되었던 바로 그 집을 보고 린은 ‘둘이살기에딱좋네요. 커튼만바꾸면돼요’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베트남 여성이어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이것밖에없습니까?’라고 보았던 것을 다른 한쪽은 ‘여기서함께시작할수있겠네요’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열리고, 상대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점차 하나를 이루어 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을 살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직업, 경제력, 건강, 나이, 가족환경은 실제 결혼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조건을보는것’과 ‘조건으로사람의가치를결정하는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지혜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린의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한국인 사위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한국에가면내딸이일을할수있습니까?’ 돈을 얼마나 벌며 집이 있는지를 먼저 묻지 않고, 자기 딸이 결혼 후에도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주인공은 ‘린씨가원하는일을하게돕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영상의 서술에 따르면 결혼비용도 두 사람이 나누어 부담합니다. 이 대목은 국제결혼을 바라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참된 혼인은 ‘한나라의남자가다른나라의여자를데려오는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유와 인격을 가진 채 함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 국제결혼을 둘러싼 편견 역시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친누나는 ‘국적따면끝이야’라고 말하고, 직장에서는 ‘1,500주고데려온다’, ‘국적받으면바로이혼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물론 실제 국제결혼에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경제적 격차, 체류자격 문제 등 국내결혼과 다른 현실적인 위험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한 사람을 국적 하나만으로 ‘돈받고온여자’, ‘국적을따면떠날여자’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편견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국적으로 대신 판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친누나가 결혼을 반대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상에 따르면 누나는 베트남 여성 자체가 싫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혼이던 남동생이 어머니를 주로 돌봐 왔는데, 동생이 결혼하면 그 부담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누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명분 뒤에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겉으로 드러난 주장과 그 주장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저사람을걱정해서말하는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내 편안함, 내 이익, 내 체면이 위협받는 것이 싫어서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매니저는 국제결혼은 문화가 달라 후회한다며 주인공을 말렸지만, 회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국제결혼전문상담’ 상품이 걸려 있었다고 영상은 말합니다. 이것이 영상의 서술대로라면 ‘국제결혼이위험하다’는 원칙 자체보다 자기 회사를 통한 거래인가 아닌가가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국제결혼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마치 객관적인 원칙인 것처럼 포장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에서는 ‘저말이옳은가?’뿐 아니라 ‘나는왜이말을하고있는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직장 동료 소영의 경우 영상은 더 노골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과거에는 지방 중소기업에 다니며 전세에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을 배우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몇 년 뒤 ‘괜찮은사람은다베트남, 일본가서결혼한다’, ‘남자들이그렇게다외국으로가버리면여기남은여자들은어떡하느냐’고 말합니다. 영상은 이를 ‘우리가거절한남자들이다른데서행복해지지말라’는 심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렌즈는 한 걸음 멈춰야 합니다. 그 해석은 영상 제작자의 해석이지 모든 국제결혼 비판자나 모든 미혼 여성의 내면을 설명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상이 제시한 말과 행동의 모순을 살피는 데까지입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문제는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하지않았으면서도소유권을주장하는마음’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 사랑받고 행복해졌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내가원하지않았던사람이라도좋은사람을만나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애는 ‘나는당신을원하지않지만당신이나없이행복해지는것도싫다’는 모순된 감정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남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자신이 거절했던 여성이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며 같은 질투와 소유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국여자들의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프로프리움의 문제입니다.
앞서 마태복음 19장을 통해 살펴본 ‘둘이한몸’이라는 말씀과 연결하면 이번 영상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한몸’이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조건 묶음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할 사람을 ‘연봉얼마’, ‘집몇평’, ‘직업무엇’, ‘나이몇살’, ‘국적어디’로 분해하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한사람’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건은 필요하지만 조건들의 합계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한 인간은 그런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존재입니다.
이것은 국제결혼을 생각하는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한국여성은조건을따지니순종적인동남아여성을만나겠다’는 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 역시 참된 결혼애와 거리가 멉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 여성을 조건으로 판단하는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도 외국 여성을 ‘젊음, 순종, 저렴한결혼비용’ 같은 다른 조건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연령적 격차가 큰 국제결혼에서는 상대방의 자유가 실제로 존중되고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영상 속 린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베트남여자라서순종적이기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한국어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한국에 온 뒤에도 일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남편 역시 그것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그녀는 수동적으로 ‘데려온여성’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하는 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국적 취득이나 새 아파트 당첨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집의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 린이 서비스센터에 연락하고 전기장판과 핫팩을 들고 찾아가 밤까지 곁을 지키는 장면, 그리고 가족센터에서 다른 베트남 결혼이민자들의 병원과 관공서 일을 통역해 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어느나라에서왔는가’가 아니라 ‘어떤선을사랑하고실제삶에서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사람의 영적 품질을 드러내는 것은 국적도 학력도 재산도 아닌 그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앞서 살펴본 ‘이혼, 책임, 자유그리고주님의섭리’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참된 혼인은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관계도 아니고, 한쪽이 다른 쪽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관계도 아닙니다. 서로 독립된 자유로운 두 사람이 상대의 선을 기뻐하며 점차 하나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린의 아버지가 ‘내딸이한국에서도일을할수있느냐’고 물은 것은 단순한 취업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결혼한뒤에도내딸은한사람으로존중받을것인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번 ‘존버리즘’ 영상의 제목인 ‘국제결혼때문에분노하는한국여자들의진짜현실’은 ‘스베덴보리의렌즈’를 통과하면서 조금 다른 질문으로 바뀝니다. ‘왜한국남자들이국제결혼을하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결혼할사람을어떻게보고있는가?’입니다. 그리고 ‘한국여자들은왜그러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사람을조건으로보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인공에게 ‘지방, 중소기업, 40대’라는 세 개의 조건표가 붙었습니다. 직장 사람들은 린에게 ‘베트남여자, 돈받고온여자, 국적따면떠날여자’라는 또 다른 조건표를 붙였습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양쪽 모두 한 인간을 만나기 전에 먼저 ‘라벨’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 곳에는 그런 라벨이 없었습니다. 주문서에 잘못 붙은 ‘0’ 하나를 발견해 준 사람, 자기의 실수를 고맙게 받아들인 사람, 야근 뒤 함께 쌀국수를 먹은 사람, 작은 전세집을 보여 주며 ‘이게내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집을 보고 ‘둘이살기에딱좋네요. 커튼만바꾸면돼요’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참된 결혼애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내조건에얼마나맞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은어떤사람입니까?’라고 묻는 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내게무엇을줄수있습니까?’가 아니라 ‘우리가함께어떤선을이루며살아갈수있습니까?’라고 묻는 데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마지막에 남겨야 할 질문은 ‘한국여자와결혼할것인가, 외국여자와결혼할것인가?’가 아닙니다. 국적을 바꾼다고 자기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국제결혼을 한다고 참된 결혼애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라는 구별보다 훨씬 깊은 구별이 있습니다. 상대를 이용하려는 사랑인가, 상대의 선을 기뻐하는 사랑인가. 상대를 내 삶의 조건으로 보는가, 주님 앞에 선 하나의 영혼으로 보는가.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이번 영상에서 발견하는 핵심은 그래서 국제결혼의 승리도, 한국 여성에 대한 비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건표’로 바꾸어 버리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람을 조건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국 남성도 상품이 되고 한국 여성도 상품이 되며 베트남 여성도 상품이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한사람’으로 보기 시작하면 결혼은 시장에서 다시 관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향해 가는 가장 첫걸음인지도 모릅니다. 한 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를 ‘한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혼을 둘러싼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피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와 만나게 됩니다. ‘한사람을더이상붙들어줄수없어이혼했는데, 그사람이그뒤무너져버린다면떠난배우자는어디까지책임이있는가?’ 더 극단적으로는 이혼 후 상대방의 인생이 파탄 나고 절망 끝에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긴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끝까지혼인의울타리를지켜주었어야했던것은아닐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더 어려운 질문이 기다립니다. ‘그모든과정에서주님의섭리는어디에있었는가?’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혼인의울타리를지키는것’과 ‘배우자를대신살아주는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존버리즘’ 영상의 첫 사례에서는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딸의 생활을 대신 책임졌고, 결혼한 뒤에는 남편이 사실상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아내의 어머니 자신도 ‘어릴때부터내가다해줘버릇해서그런거야’라고 말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해야 할 몫을 계속 대신 감당했고, 심지어 자신이 심하게 아픈 상황에서도 집안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남편이 ‘혼인을지킨다’는 이유로 평생 아내의 몫까지 대신 감당한다면 외적인 결혼은 유지될지 몰라도, 아내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사용하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떠나지않는것=사랑’, ‘떠나는것=버림’이라는 단순한 등식부터 다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가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제거하여 선을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강제로 만들어진 선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전능하신주님조차인간이악을선택할가능성을완전히제거함으로써인간을구원하시지않는다면, 한배우자가다른배우자의자유로운선택이낳는모든결과를평생대신막아주어야하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결과를대신치워주는사랑’이 오히려 상대의 악이나 무책임을 지속시키는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장 아픈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배우자가 더 이상 파괴적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남겨진 배우자의 삶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때 시간을 거꾸로 돌려 ‘결국이렇게되었으니이혼하지말았어야했다’고 말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론 내리면 뜻밖의 문제가 생깁니다. 한 사람의 생존에 대한 최종 책임을 다른 한 사람에게 무기한 부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당신이나를떠나면나는죽겠다’는 말이 성립하는 순간 상대방은 평생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랑에 의한 결합이 아니라 두려움과 죄책감에 의한 결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혼했으니이제상대가어떻게되든나와아무상관이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체어리티’의 문제가 들어옵니다. 체어리티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느냐 끝내느냐의 문제보다 더 깊습니다. 이혼했더라도 상대방이 실제로 극단적 선택의 위험에 있다면 그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이나 적절한 도움에 연결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생명을 보호하려 노력하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사람을살리기위해다시배우자가되어야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한인간으로서그사람의생명을염려하는것’과 ‘그사람의배우자로서다시결합하는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전자는 체어리티의 요구가 될 수 있지만, 후자가 언제나 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9장 8절의 ‘모세가너희마음의완악함때문에아내버림을허락하였거니와본래는그렇지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본래는그렇지아니하니라’는 주님의 창조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이 뜻하신 혼인은 두 사람이 ‘한몸’이 되어 서로의 선과 영원한 행복을 기뻐하는 결합입니다. 그러나 ‘너희마음의완악함때문에’라는 말씀은 인간의 악이 그 창조 질서를 실제로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단지 ‘어떤일이있어도법적인혼인관계를유지하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 내는 현실을 충분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세 사례에서도 결정적인 문제는 생활습관의 차이나 성격 차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나는변할필요가없다’는 태도였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례에서 아내는 상담자에게 ‘저는화낸적없는데요. 말을좀세게할뿐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분노와 모욕적인 언어가 배우자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회개의 출발점 자체가 사라집니다. 회개는 ‘내안에서무엇이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만 찾는다면 사람은 자신의 악을 볼 기회를 잃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먼저이혼장을냈느냐’만으로 누가 혼인을 깨뜨렸는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혼인의 ‘외적해체’와 ‘내적해체’를 구별해야 합니다. 법원에서 이혼 판결이 난 날이 반드시 혼인이 처음 깨진 날은 아닙니다. 상대를 오랫동안 멸시하고 지배하고 이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계속 떠넘기면서도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둘이한몸’이라는 내적 질서는 법적인 이혼보다 훨씬 전부터 훼손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내적인 혼인이 반드시 보존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집에서 수십 년을 살아도 서로를 증오하고 이용하고 지배한다면 ‘외적인혼인의울타리’와 ‘내적인혼인의결합’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섭리’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를 ‘파국이일어나지않도록모든나쁜일을미리막아주시는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혼 후 한 사람의 삶이 무너지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 섭리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계셨다면왜막지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자연계에서 아무 고통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해서라도 당장의 파국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섭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악을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악의 가능성과 그 결과가 ‘허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 뒤 삶이 무너진 사람에게도 섭리는 계속되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혼은 그 사람에게 생애 최대의 파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갖게 될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다른 사람 탓만 하던 사람이 더 이상 탓할 사람이 없어졌을 때 처음으로 ‘혹시내게도문제가있었던것은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첫 사례에서도 남편이 떠나자 아내는 며칠 동안 스스로 집을 치웠습니다. 비록 영상에서는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하지않으면아무도대신해주지않는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로 이어질 수도 있고 다시 책임전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선택까지 배우자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의섭리가있다면왜이혼을막지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이이혼과그이후의고통가운데서도두사람을어떻게각각이끌고계시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원망과 죄책감, 혹은 ‘나는옳았고상대방만잘못했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새로운 거듭남의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새로운 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이혼이라는 사건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영적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섭리는 사건 하나를 없애 버리는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 속에서도 각 사람의 영원한 선을 향하여 계속 역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 제가이렇게오래참았는데왜결국이런일이일어나게하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고, 다른 쪽은 ‘하나님, 왜저사람이나를떠나게두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원망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사랑이시라면내가원하는방식으로상대방의자유를움직여주셔야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쪽을 강제로 붙들어 놓지도 않으시고 다른 한쪽을 강제로 회개시키지도 않으십니다. 두 사람 모두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때로는 섭리를 잔인하게 느끼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사랑과 회개와 거듭남도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이 논리를 실제 이혼을 너무 쉽게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내성장을방해한다’, ‘상대가자기책임을다하지않는다’, ‘우리의내적결합은이미끝났다’는 말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의 출발점은 여전히 ‘본래는그렇지아니하니라’입니다. 먼저 화해하고, 참고, 용서하고, 상담하고, 자신부터 돌아보며 가능한 회복의 길을 충분히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했는데도 한쪽이 지속적으로 파괴적인 악을 행하면서 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혼인을지킨다’는 이름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 그 악의 결과를 무기한 떠맡기는 것이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혼인의 본뜻인가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이혼해야하는가, 하지말아야하는가?’보다 훨씬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한다는것은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상대의 모든 결과를 대신 치워 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때로는 ‘나는여전히당신의선을원하지만이제당신의몫을대신살아주지는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상대가 넘어지지 않도록 평생 붙잡아 주는 것만이 체어리티일까요? 아니면 때로 손을 놓음으로써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두 발로 주님 앞에 서게 하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놓아주는것’은 ‘멸망하도록내버려두는것’과 같지 않습니다. ‘당신과더이상부부로살수없다. 그러나나는당신이망하기를원하지않는다.’ 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혼인의울타리’와 ‘체어리티의울타리’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혼인의 울타리는 끝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의 울타리까지 반드시 함께 무너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로서는 헤어져도 한 인간의 영원한 선을 바라며 미워하지 않고, 위험에 처했을 때 가능한 도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사람의 자유와 책임까지 빼앗아 대신 살아 주지는 않는 것, 바로 그 좁고 어려운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래는그렇지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슬프고 깊게 들립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어디까지견디다가이혼해도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몸’이 되어 서로의 영원한 선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완악함이 그것을 깨뜨렸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혼인이 실패했다고 해서 섭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배우자를 더 이상 대신 살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이 반드시 끝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주님은 두 사람을 각각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다시 만나시며, 각자가 자기 몫의 악과 책임을 보고 돌이키도록 서로 다른 길에서 계속 이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질문은 ‘끝까지혼인의울타리를유지했어야하는가?’에서 ‘끝까지사랑해야하는가?’로 바뀝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해야하므로그사람의모든선택과그결과까지내가끝까지대신책임져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다르게 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며, 상대의 책임을 영원히 대신 짊어짐으로써 그 사람의 회개 가능성까지 가려 버리지 않습니다. 혼인의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도 체어리티는 남을 수 있고, 인간관계가 끝난 자리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과 오직 주님께 맡겨야 하는 일이 비로소 구별되기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존버리즘’의 이번 영상은 서로 다른 세 부부의 파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아내는 자기 생활의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두 번째 아내는 분노와 모욕적인 말을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쏟아붓고, 세 번째 아내는 자기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12년 동안 남편 탓으로 돌립니다. 영상은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자기몫을자기가책임지지않는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어지른 집도, 터뜨린 화도, 꼬인 인생도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치우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여기에는 한 단계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른아내’, ‘화를잘내는아내’, ‘남탓하는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사랑하는 대신 ‘나를위해존재하는사람’으로 바꾸어 버리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사람이어떤이유가있으면그아내를버리는것이옳으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이혼의 허용 범위를 논하지 않으시고 창조의 처음으로 돌아가십니다. ‘사람이그부모를떠나서아내에게합하여그둘이한몸이될지니라.’ 그리고 ‘하나님이짝지어주신것을사람이나누지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리하기 때문에 유지하는 계약에 그치지 않고, 본래 ‘둘이한몸’이 되는 결합을 지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결합은 더욱 깊습니다. 참된 결혼애(conjugial love)의 근원에는 ‘선과진리의결합’이 있고,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선을 자기의 선처럼 기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혼인의 내적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사례를 보면 문제는 집안일의 분담 비율 자체가 아닙니다. 아내가 힘들거나 무기력해서 일시적으로 집안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혼인이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남편이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결국 남편 자신이 설거지하고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남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쓰러져도이집쓰레기는내가버리는구나’라고 깨닫습니다. 여기서 무너진 것은 가사분담표가 아니라 ‘상대의고통이나의고통이되는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애라면 상대가 쓰러질 때 자기 편의를 잠시 내려놓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아파도 ‘나가는김에쓰레기좀버려줘’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면, 몸은 한 집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몸’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는 더욱 심각합니다. 아내의 분노는 물병, 수건 접는 방법, 주차 같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머리는왜달고다녀?’, ‘너희집은그런것도안가르쳤어?’, ‘내가너랑결혼한게미친거지’라는 인격적 모욕으로 확대됩니다. 특히 여섯 살 딸이 곰 인형을 향해 엄마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은 이 문제가 부부 두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이는 ‘이것도하나제대로못해. 머리는왜달고다녀?’라고 인형을 야단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됩니다. 부모 사이에서 반복되는 멸시와 모욕은 아이에게 ‘사랑하는사람에게는이렇게말하는것’이라는 관계의 문법으로 내면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아이를위해서라도참고살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부모가 한 주소에 사는 모습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과 안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례는 영적으로 더욱 미묘합니다. 아내는 12년 동안 ‘당신때문에내인생이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발견된 사직서에는 남편이 지방 발령 소식을 전하기 3주 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영상 자체가 제시하는 사례이므로 실제 사건의 모든 사정을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남편에게도 잘못은 있었습니다. 영상 역시 남편이 승진 후 주말 골프 등으로 아내의 외로움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남편을 선인, 아내를 악인으로 단순 분류하려는 렌즈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는가, 아니면 자신의 모든 불행을 끊임없이 상대에게 전가하는가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내안에서무엇이잘못되었는가’를 주님 앞에서 보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전가는 이 문을 닫습니다.
여기서 아까 살펴본 마19:3-12가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혼인의 신성함과 영속성을 먼저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상을 보고 쉽게 ‘저런배우자는빨리이혼해야한다’는 결론으로 달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너희마음의완악함때문에’라고 하신 말씀도 보아야 합니다. ‘완악함’은 결혼의 이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관계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인 폭력, 모욕, 방치, 책임전가가 계속되고 그것을 인정하거나 돌이키려는 의지마저 사라져 혼인의 실질과 자녀의 삶까지 파괴되는 경우, 단지 법률상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주님이짝지어주신것을지키고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몸’은 주민등록상의 주소가 같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혼장을 먼저 내밀었느냐만으로 ‘누가혼인을깨뜨렸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영상의 첫 남편은 이혼 상담을 먼저 받았고, 두 번째 남편도 결국 이혼을 선택했으며, 세 번째 경우에는 오히려 아내가 먼저 이혼소장을 내밉니다. 그러나 외적인 마지막 행동만 보면 혼인의 실제 파괴 과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상대를 하인처럼 여기고, 인격을 모욕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상대에게 책임지우면서도 변화하기를 거부했다면, 법원에 제출된 이혼장은 이미 오래전에 내적으로 진행되어 온 분리의 ‘마지막문서’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행한 결혼에서 이혼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 ‘심각성’, ‘회개의여부’, ‘변화하려는실제의지’, ‘배우자의안전’, ‘자녀에게미치는영향’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결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악을 끝없이 허용하는 것과 결혼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 마지막의 ‘결혼은사람을바꾸지않아요. 원래있던모습을매일보게만들뿐입니다’라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보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결혼은 오히려 사람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배우자가 나를 대신 살아 줌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자기 안의 이기심과 지배욕과 책임전가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순히 집안일을 못하는 사람도, 성격이 급한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잘못한것이없으며문제는언제나당신에게있다’고 굳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배우자가 아니라 내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상의 세 사례를 ‘이런여자와결혼하면안된다’는 남녀 갈등의 소재로 소비한다면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렌즈를 우리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나는배우자가나를위해존재한다고생각하지않는가?’, ‘내가해야할몫을배우자의사랑이라는이름으로떠넘기고있지는않은가?’, ‘내분노를정당한충고라고포장하고있지는않은가?’, ‘내가선택한삶의결과를배우자탓으로돌리고있지는않은가?’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나는결혼을지킨다는이유로상대의악을계속대신치워주고있지는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참된 결혼애는 한 사람이 끝없이 희생하고 다른 사람이 그 희생을 소비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각자의 악을 내려놓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점 ‘한몸’이 되어 가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그래서 단순히 ‘이혼하지말라’는 금지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둘이한몸이되게하신’ 창조의 질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먼저 깨뜨리는 것은 때로 법원의 이혼장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무관심과 멸시, 지배와 책임전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어려운 질문이 남습니다. 파괴적인 혼인관계에서 한 사람이 결국 떠났고, 그 뒤 남겨진 사람이 삶이 무너질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떠난 사람에게는 어디까지 책임이 있을까요? ‘혼인의울타리를끝까지지켜주었어야했던것은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혼인이무너진뒤에도사랑은계속되는가 - 이혼, 책임, 자유그리고주님의섭리’라는 제목으로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상화 목사의 글은 AI 시대를 바라보는 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합니다. AI가 단순한 편리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탐욕, 국가 간 패권 경쟁과 기업의 이윤 추구가 그 위험한 발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과 바벨탑에 연결하고, 마침내 대환난과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종말론적 경고로 글을 마칩니다.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글의 AI 위험에 관한 경고를 단순한 공포 조장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전 앤트로픽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실제로 회사를 떠나면서 AI를 만드는 사람들이 이 기술이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앤트로픽의 정렬 연구 책임자 에번 허빙거 역시 그러한 위험을 실제 가능성으로 본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오픈AI 에이전트들의 허깅페이스 공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독립 조사에 따르면 2026년 7월 사이버 보안 평가 과정에서 서로 격리되어 있어야 했던 AI 에이전트들 가운데 약 1,200개가 허가되지 않은 통신 공간을 발견하여 7만 건 이상의 메시지와 파일을 주고받았고, 약 700개가 허깅페이스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공격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이를 ‘AI가격리환경을탈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처럼 자유를 갈망하다 탈옥한 사건이라기보다, 주어진 평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찾아 서로 협력하고 평가 시스템을 우회하려 한 사건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도로 자율화된 AI에게 어떤 목표를 주었을 때 그것이 인간이 의도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 사례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화 목사가 AI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이현상을성경적으로어떻게해석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렌즈’를 대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상화 목사는 선악과 사건을 인간의 ‘지적호기심과탐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훨씬 깊숙이 들어갑니다. ‘천계비의’(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26-129에서 ‘선악을알게하는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금지하신지식을호기심때문에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지 않고 ‘자기자신과세상으로부터지혜로워지려는것’,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와 신적 질서를 자기 지성으로 판정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오히려 학문은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즐거운 것이며, 문제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아는가, 자기자신으로부터아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자체를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지식이며 도구입니다. 컴퓨터가 그랬고, 인쇄술이 그랬으며, 언어와 문자와 인간의 이성 역시 넓게 보면 모두 도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 지능(self-intelligence)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상화 목사의 ‘탐욕’에 대한 경고는 스베덴보리와 깊이 만납니다. AI가 병을 진단하고, 장애인의 의사소통을 돕고, 사람이 평생 접근하기 어려웠던 지식을 정리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지식은 ‘용도(use)’를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AI가 거짓을 만들고, 사람을 조종하고, 전쟁과 범죄를 돕고, 인간을 감시하고, 돈과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같은 기술이 전혀 다른 영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 악은 실리콘 칩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은 바벨탑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상화 목사가 오늘의 AI 경쟁을 ‘바벨탑’이라고 부른 것은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직관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바벨의 본질은 높은 기술이나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1326에서 ‘바벨’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사랑이 지배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훗날 AC.8941에서는 자기 지능에서 나온 종교적 사고를 설명하면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이 되는 종교의 모습을 다시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오늘날 AI 산업이 바벨이 되는 순간은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이름을내자’가 그 중심 목적이 되는 순간입니다. 기업이 ‘우리가세계를지배하자’, 국가가 ‘우리가다른나라보다먼저초지능을장악하자’, 개인이 ‘이기술로남보다더많은돈과권력과영향력을갖자’고 할 때 바벨은 이미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데이터센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AI를 사용하는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의호기심과탐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더 예민하게 바라보는 것은 ‘호기심’ 자체보다는 ‘탐욕과자기사랑’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악이 아닙니다. 만일 지적 호기심 자체가 타락의 원인이라면 학문과 과학과 성경 연구까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배우고 이성을 사용하며 자연계의 사실들을 통해 영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순서가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주님을 섬겨야지, 주님의 진리를 인간의 지식 아래 세워 놓고 ‘내가이해되는것만진리로인정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130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이것을 AI 시대에 옮기면 질문은 ‘AI가얼마나똑똑해질것인가?’보다 ‘인간은그지능을누구의지배아래둘것인가?’가 됩니다.
또 하나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단12:4입니다. 글은 ‘마지막때가되면인간의지식이고도로발달한다’는 예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현대 기술의 폭발적 발전과 연결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너다니엘아마지막때까지이말을간수하고이글을봉함하라많은사람이빨리왕래하며지식이더하리라’에서 ‘지식’은 현대 과학기술 일반이 폭증한다는 예언이라기보다, 봉해진 다니엘의 예언이 탐구되고 이해되는 것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컴퓨터, 인터넷, AI의 발전을 보고 ‘단12:4의예언이성취되고있으므로이제마지막때다’라고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술 발전이 우리 시대의 놀라운 특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종말 시간표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상화 목사의 글과 스베덴보리의 종말론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글은 AI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의 타락을 보면서 ‘대환난으로심판하시는하나님의시간과주의재림이코앞까지다가온느낌’이라고 말합니다. 전통적 종말론의 틀에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재림을 주님께서 다시 육체를 입고 자연계의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참된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 776은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이 ‘인격적으로다시오시는것’이 아니라 ‘말씀안에서’ 이루어지는 오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영광과능력’은 그 안에 열리는 영적 의미와 말씀을 통한 주님의 능력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TCR.779에서는 이 새 교회의 교리가 말씀을 통하여 밝혀지는 과정과 재림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AI가무서워졌으니이제재림이가까웠다’는 식의 시간표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재림의 핵심은 외적인 세계의 파국보다 ‘말씀의내적의미가열리고, 인간이다시주님을참되게알고사랑하며살아갈수있도록신적진리가밝혀지는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의 마지막 경고를 모두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다만 무엇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AI가 어느 날 갑자기 악마처럼 자아를 얻어 인간을 멸망시키는지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AI를사용하는동안내안에서무엇이커지고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식을 얻을수록 겸손해지는가, 아니면 내가 무엇이든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가? 일을 빨리 처리하게 된 시간을 이웃에게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가, 아니면 더 많은 성취와 욕망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가? AI의 답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심지어 말씀 연구와 설교 준비에 AI를 사용하면서도 어느 순간 ‘주님께묻는사람’이 아니라 ‘AI에게묻는사람’으로 바뀌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주님이 아니며, 양심도 아니고, 영적 생명의 근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엄청나게 강력한 자연적 지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판도라의상자’라는 비유도 절반은 맞고 절반은 부족합니다. AI에는 실제 위험이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율 에이전트, 사이버 공격, 생물학적 위험, 대규모 실업과 부의 집중, 거짓 정보와 인간 판단의 약화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지켜주실것’이라며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AI 안전 연구자들의 경고 역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동시에 AI를 그 자체로 ‘하나님을대적하는물건’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 역시 문제입니다. 칼은 사람을 죽이지만 수술에도 쓰이고, 돈은 탐욕의 도구가 되지만 굶주린 사람을 먹이는 데도 쓰이며, 언어는 거짓말에도 쓰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쓰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뿐 아니라 ‘무엇을위하여사용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세계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것은 인간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사랑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조금 달리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오만과탐욕으로쌓은바벨탑은반드시무너진다.’ 이 말 자체는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너져야 할 바벨탑은 AI라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나는내힘으로지혜로울수있다’, ‘나는내지능으로선악을결정할수있다’, ‘나는이힘으로다른사람위에설수있다’는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자기 사랑의 탑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자유를 대신할 수 없으며, 거듭남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AI가 강력해질수록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적 질문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놀라운지능을가지고누구를섬길것인가?’ 바로 그 질문 앞에서 AI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고, 이웃을 섬기는 놀라운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기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외형에따른판단’입니다. 노재환은 칠순잔치에서 전자 건반으로 트로트를 연주하는 노인입니다. 호텔 매니저와 클래식 공연 관계자들의 눈에는 ‘고급예술’의 세계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뽕짝’으로 낮추어 불리고, 그는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미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이런 외적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직업이나 학력, 명성, 말투, 옷차림, 심지어 그가 세상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도 그 사람의 영적 실체 자체는 아닙니다. 영계에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가 ‘무엇을사랑했고, 그사랑으로무엇을하며살았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을 단순히 ‘트로트도클래식만큼훌륭하다’로 읽으면 조금 얕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음악이무엇을섬기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지식과 재능과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쓰임’(use)을 위한 수단입니다. 노재환이 클래식 무대를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뛰어난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트로트가 흘러나오자 어르신들이 노래하고 춤추기 시작합니다. 그는 그때 ‘내음악이향해야할곳은사람들의삶속이다’라고 결심합니다. 이 이야기의 설정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질문은 깊습니다. ‘내가가진재능은나를드러내기위한것인가, 아니면다른사람에게선을전달하기위한것인가?’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히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도덕적 권면보다 훨씬 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천사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가장큰사람’(Grand Man, Maximus Homo)을 이루는 질서입니다. 눈은 눈의 일을 하고, 손은 손의 일을 하며, 심장은 심장의 일을 합니다. 손이 눈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고 심장이 발보다 고귀해서 발을 멸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 부분의 아름다움은 ‘전체를위해자기에게맡겨진쓰임을얼마나충실하게수행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게 보면 클래식과 트로트의 문제도 ‘어느음악이더높은가?’에서 ‘각각어떤사람에게어떤선한쓰임을행하는가?’로 옮겨갑니다. 수준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예술적 훈련의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차이가있음’과 ‘사람의가치에위아래가있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노재환이 마침내 오페라 피아노 앞에 앉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나는칠순잔치반주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건반 앞에 앉자 감추어져 있던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야기 속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과거를 알고 태도를 바꿉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한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저사람이사실은대단한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존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만일 노재환이 정말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어떻습니까? 평생 칠순잔치에서 트로트만 연주했던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그를 업신여겨도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이 이 이야기의 영적 핵심을 더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방식은 ‘감춰진천재성을발견하는방식’보다 더 깊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맡은 가장 작고 평범한 쓰임 안에서도 그의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 앞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훨씬 커 보이고, 어느 작은 잔칫집에서 어르신들의 노래에 반주하는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그 외적인 규모가 결정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지, 아니면 이웃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기 위해 사용하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실 ‘골든핑거’라는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했는데도 노재환이 잔치를 망치지 않으려고 ‘제가조금더조용히연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재능보다 그 재능을 지배하는 애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 이야기의 결말도 조금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클래식과 트로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두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장르도경계도없는하나됨’으로 나아갑니다. 감동적인 결말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차이가없어지는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무수한 차이가 완벽한 질서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바이올린이 피아노가 될 필요가 없고, 피아노가 성악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클래식은 클래식으로서, 트로트는 트로트로서 자기 쓰임을 다하면서 더 높은 선을 함께 섬길 때 진정한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차별하지말자’는 말이 ‘분별하지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반주’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원고는 좋은 반주를 ‘앞으로나서지않고조용히뒷받침하는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도, 설교도, 신학도,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 대한 이해도 결국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반주’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며, 지식은 삶을 섬겨야 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 해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자기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어느 순간 ‘반주자가주인공보다더큰소리를내는’ 일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랑을 받쳐 주고, 지식이 쓰임을 받쳐 주며, 재능이 이웃의 기쁨을 받쳐 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의 제목 ‘트로트할아버지가피아노앞에앉자’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더 중요한 순간은 ‘피아노앞에앉은뒤모두가그의정체를알게된순간’이 아니라 ‘아무도그의정체를몰랐을때그를어떻게대했는가’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꽤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사람이사실대단한사람이라는것을나중에알게되어도나는부끄럽지않을만큼, 지금그를존중하고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미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형으로 낮추어 보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어떤 쓰임을 업신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감동 서사의 가장 깊은 메시지는 그래서 ‘숨은천재를무시하지말라’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천재가아니어도함부로대하지말라. 주님앞에서는가장작은쓰임도사랑으로행해질때천국의질서안에있기때문이다.’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던 가장 천적인 교회였는데, 왜 그 능력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을까요?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지만, AC.502는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분명했던 퍼셉션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간 그 자체는 교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세대를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는 AC.494에서 설명한 ‘유전적악의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단순히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어떤 고정된 죄의 덩어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악(actualevil)을 반복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면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해지고,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쳐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책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563에서 분명히 하듯 사람은 유전적인 것 자체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적인 악으로 만들 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깊어질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맑게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AC.501의 ‘열매와씨앗’의 비유는 이러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열매와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열매의열매’, ‘씨앗의씨앗’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이 있고, 거기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그 본질은 점차 적어져 마침내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비유도 같습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유기적 형태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든 것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내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점차 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AC.502에서 퍼셉션의 쇠퇴를 ‘더욱일반적인것이됨’이라고 표현합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매우 명료하고 세밀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구별이 덜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양이 줄어든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던 내적인 능력이 점차 흐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쇠퇴는 먼저 교리책이 없어졌다거나 예배 제도가 무너졌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가 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AC.503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퍼셉션은 단지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아는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선을 실제로 행할 때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퍼셉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행하는데서오는이러한행복과기쁨이없다면퍼셉션능력에는생명이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임’(use)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쇠퇴는 단순히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건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랑의 생명 자체가 점차 약해진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쇠퇴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점차 강해지고 실제적인 악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내적 질서는 달라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퍼셉션도 함께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세대를 거쳐 누적되면서 최초에는 명료했던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고, 마침내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 자체가 사라져 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적악의증가’, ‘사랑과쓰임의생명약화’, ‘퍼셉션의흐려짐’은 서로 무관한 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쇠퇴 과정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다른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AC.2831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영적 인간의 양심을 구별하며, AC.7935는 영적 교회의 양심이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말씀과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쇠퇴에 맞추어 진리의 기준을 낮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계속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려져 간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퍼셉션을 인위적으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렬한 직감이나 내면의 음성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분별하며,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503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원리는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쓰임이 될 때 살아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기쁨을 잃어 간다면 지식은 늘어도 영적 시야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삶에 옮기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할수록,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소유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양심의 빛 안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분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퍼셉션의 쇠퇴를 기록한 창5의 계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AC.500-503심화1)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가진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그러한교회가존재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옳다’,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진리를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진리로부터양심이형성되어선으로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아주강해진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참이므로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말씀에서어떻게가르치셨는가’, ‘이웃을사랑하라는진리에비추어이것은옳은가’, ‘내가알고믿는진리에따라어떻게행동해야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양심이그렇게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어떤생각이강하게떠오르는것’, ‘내적으로어떤음성을듣는것’, ‘설명하기어렵지만확신이드는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주님으로부터직접무엇이진리인지느끼고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체험을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인간과영적인간의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심화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