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3.심화

 

5. ‘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5:21 구절이 AC.23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날들(days)이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영적 상태들’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3 전체의 목적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시간 단위가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들로 이해하게 하는 데 있는데, 이 구절은 그 점을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 예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지나간 좋은 시절을 다시 돌려 달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시간 회귀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날들’은 과거의 연대가 아니라, ‘과거에 가졌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즉, 이 기도는 예전 시간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회복시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황폐와 어둠 속에 떨어진 사람이, 다시 주님께 향하던 생명의 상태, 신앙과 사랑이 살아 있던 상태로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앞부분의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변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사람을 돌이키실 때 가능한 회복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재창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표현은 AC 전체에서 자주 등장하는 태고의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가장 순수하고 살아 있던 상태로 보는데, 여기서의 옛적 역시 그런 더 깊고 순전한 상태를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민족적 회복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원래 질서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AC.23에 인용하여, 말씀의 날들’이 언제나 상태 중심의 언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창세기 1장의 첫째 날’, ‘둘째 날’도 마찬가지로, 우주의 시간표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께서 새롭게 하시는 영적 상태들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레미야 애가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는 결국 창세기의 날들’과 같은 언어이며, 둘 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다시 생명을 일으키시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AC.23, 창1:5, '날은 곧 상태다 : 시간 너머에서 읽는 거듭남의 리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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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심화 4, ‘렘33:20, 25’

AC.23.심화 4. ‘렘33:20, 25’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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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심화

 

4. ‘33:20, 25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이 예레미야 33장 구절이 AC.23에 인용된 이유는, ‘낮과 밤’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의 규례(ordinances)’이며, 따라서 말씀에서 (day)은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들’을 문자적 시간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로 읽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인용하는데, 이 예레미야 구절은 특히 낮과 밤의 교대 자체가 영적 질서의 상징’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낮에 대한 나의 언약’,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낮과 밤이 단순한 천체 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언약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낮과 밤의 반복은 우주의 기계적 순환이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 관통하는 신적 질서의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은 선과 진리의 상태, 곧 신앙과 주님의 빛이 있는 상태를 뜻하고, ‘’은 그 반대 상태, 곧 어둠과 시험, 혹은 진리가 약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낮과 밤의 언약’은 인간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빛과 어둠, 위로와 황폐, 시험과 회복이 질서 있게 교대되는 섭리의 법칙을 가리킵니다.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낮과 밤은 그 계절과 때’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이는 영적 상태에도 정해진 질서와 시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항상 같은 밝기 속에 머물 수 없으며, 교회 역시 늘 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아침과 저녁, 봄과 겨울 같은 교대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대는 무질서가 아니라 주님의 언약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25절의 천지의 법칙(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이라는 표현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7에서도 이 규례(ordinances)를 영적 상태의 교대를 다스리는 신적 질서로 설명합니다. 하늘과 땅의 법칙이 무너지지 않는 한, 낮과 밤의 질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인간 거듭남의 질서 역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3에 인용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날들’이 단순한 창조 주간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영적 상태 변화의 질서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낮과 밤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영혼 안에서 반복되는 빛과 어둠, 신앙과 시험, 회복과 황폐의 상태들을 뜻하며, 그 모든 교대는 주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AC.23, 심화 5, ‘애5:21’

AC.23.심화 5. ‘애5: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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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심화 3, ‘렘6:4’

AC.23.심화 3. ‘렘6:4’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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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심화

 

3. ‘6:4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6:4 구절이 AC.23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day)이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들’을 거듭남의 상태들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예레미야 구절은 바로 그 해석 원리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예문입니다.

 

본문에서 핵심 표현은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어졌다’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장면이지만, 선지서의 문맥에서는 단순한 일몰 묘사가 아닙니다. 여기서 ’은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를 뜻하고, ‘날이 기울어 간다’는 것은 진리와 선의 빛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저녁 그늘이 길어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AC.22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저녁’을 신앙이 약화되거나 없는 상태, 곧 거짓과 혼합의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저녁 그림자가 길어진다는 것은, 영적 어둠과 거짓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앞부분의 정오에 올라가자’는 말도 상응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정오는 하루 중 빛이 가장 강한 때를 뜻하므로, 영적으로는 진리가 가장 밝게 드러난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곧이어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한때 빛 가운데 있었으나 이제 황폐와 어둠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이 구절 전체는 단순한 전쟁의 긴박함이나 하루의 경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 곧 빛에서 어둠으로 이동하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AC.23에 인용하여, 말씀의 ’이라는 표현이 언제나 상태 중심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창세기 1장의 첫째 날’, ‘둘째 날 역시 단순한 시간 계산이 아니라, 빛과 어둠, 신앙과 거짓, 질서와 혼란 사이를 오가는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3, 심화 4, ‘렘33:20, 25’

AC.23.심화 4. ‘렘33:20, 25’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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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심화

 

2. ‘23:7, 15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이사야 23장 구절이 AC.23에 인용된 이유 역시, 말씀에서 (day)이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상태와 시대’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시간 단위가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들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선지서에서 ’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연속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3장도 그 중요한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심은 옛날(ancient days), ‘그날(that day), 그리고 한 왕의 날들(the days of one king)이라는 표현들입니다. 본문은 두로(Tyre)에 대한 예언인데, 문자적으로 보면 한 도시의 역사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들 안에서 시간 자체보다 상태와 시대’를 읽습니다.

 

먼저 7절의 옛날에 건설된(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의 날들(ancient days) AC 전체에서 자주 태고교회’의 상태, 곧 인간과 교회가 주님과 더 가까웠던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은 연대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시대입니다.

 

이어 15절에서는 그날부터 두로가 칠십 년 동안 잊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날’은 하루의 시작 시점이 아니라, 어떤 영적 상태가 시작되는 시대를 뜻합니다. 두로는 말씀에서 흔히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상징하는데, 두로가 잊혀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참된 지식이 생명을 잃고 황폐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한 왕의 날들에 따라(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특정 왕의 재위 기간을 문자적으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 왕이 대표하는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왕은 흔히 진리 혹은 진리의 통치를 상징하므로, ‘한 왕의 날들’은 단순한 시간 길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질서와 상태의 기간을 뜻하게 됩니다.

 

 칠십 년 역시 단순한 숫자보다 충분한 기간’, 혹은 황폐와 회복을 위한 완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 전체는 도시의 정치사라기보다, 지식이 쇠퇴하고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3에 인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은 계속해서 어떤 상태와 시대를 뜻하고 있으며, 창세기 1장의 날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첫째 날’, ‘둘째 날’은 우주의 시간 계산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의 단계들이라는 점을 이사야의 용례를 통해 다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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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심화

 

1. ‘13:6, 9,13, 22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이 이사야 13장 구절이 AC.23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day)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24시간의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영적 상태와 시대 전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첫째 날’, ‘둘째 날 등을 문자적인 시간 단위로 읽지 않고,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지서들에서 ’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예로 드는 것입니다.

 

이사야 13장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어떤 특정 하루에 재앙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문의 내용은 단 하루의 사건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거대한 상태 변화를 묘사합니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려 제자리에서 떠나며’, ‘황폐함이 임하고’, ‘죄인들이 멸망한다’는 표현들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내면 전체의 영적 상태 변화, 곧 심판과 황폐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곧 (time)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실제로 22절에서는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병렬적으로 말합니다. 이는 말씀 안에서 ’이 물리적 하루보다 훨씬 넓은 의미, 곧 어떤 영적 시대나 상태를 뜻한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날’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미래 재난의 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교회의 상태가 드러나고, 주님의 질서 앞에서 판별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분노’와 진노 같은 표현도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상태를 인간 편에서 느끼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린다’는 말은 AC 전체의 상응 구조 안에서 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은 내적 차원, 땅은 외적 차원을 뜻하므로,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영적 상태 변화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만일 성경 전체에서 ’이 시대와 상태를 뜻하는 데 사용된다면, 창세기 1장의  역시 단순한 물리적 하루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AC.23에서 입증하려고 합니다.

 

결국 이사야 13장이 AC.23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라는 표현이 본질적으로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와 시대’를 뜻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통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우주의 시간표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히게 되는 것입니다.

 

 

 

AC.23, 심화 2, ‘사23: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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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은 곧 상태다 : 시간 너머에서 읽는 거듭남의 리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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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심화

 

3. ‘8:14, 26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이 다니엘 8장 구절이 AC.22에 인용된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하루의 시간 구분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저녁’은 신앙이 없는 상태, 곧 거짓과 황폐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의 빛이 다시 비치는 신앙과 진리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니엘 8장의 ‘주야’,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표현은 바로 이 영적 리듬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본문의 중심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일정 기간 후 성전이 회복된다는 예언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 변화로 읽습니다. 여기서 ‘성소’는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 곧 인간 안의 거룩한 영역, 혹은 교회 자체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럽혀지고 황폐해진 상태가 바로 ‘저녁’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아침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밤이 지나고 해가 뜬다는 뜻이 아니라, 황폐와 어둠의 상태가 끝나고, 다시 진리와 신앙의 빛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AC.22에서 말한 ‘아침’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곧 ‘아침’은 언제나 주님의 오심과 연결되며, 그 오심은 죽어 있던 영적 상태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저녁’이 먼저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이나 교회는 먼저 자기 힘과 자기 지혜 안에서 황폐함을 경험하게 되고, 그 뒤에야 비로소 주님의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됩니다. 그래서 ‘저녁  아침’이라는 구조는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라, 거듭남의 필수 질서입니다.

 

또한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이 다시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소는 본래 주님의 임재의 자리인데, 거짓과 자기 사랑으로 어두워졌던 상태가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다시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그 중심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침’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다’고 하는 말씀은, 이런 영적 교대가 우연이나 감정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있는 확고한 질서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즉, 밤이 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며, 저녁은 반드시 아침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결국 AC.22에서 이 다니엘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성경 전체에서 ‘저녁과 아침’이라는 언어가 반복해서 ‘영적 황폐와 회복’, ‘신앙 상실과 재생’, ‘주님의 오심에 의한 새 창조’를 뜻하는 상응 언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한 우주적 시간 기록이 아니라, 다니엘서에서도 반복되는 ‘거듭남과 회복의 리듬’인 것입니다.

 

 

 

AC.22, 창1:5,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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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심화 2, ‘삼하23:2-4’

AC.22.심화 2. ‘삼하23:2-4’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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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심화

 

2. ‘삼하23:2-4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이 사무엘하 23장 구절이 AC.22에 인용된 이유는, ‘아침(morning)이 단순한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로 인해 진리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저녁’은 신앙이 없는 상태, 곧 어둠과 거짓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의 빛이 임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아침’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고 생생하게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이 다윗의 마지막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은 먼저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이어지는 묘사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영적 상태에 대한 계시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가 묘사되는데, AC의 흐름에서 이런 사람은 단순한 정치적 통치자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온 거듭난 인간, 혹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합니다.

 

그다음 등장하는 핵심 이미지가 바로 돋는 해의 아침 빛’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sun)는 언제나 사랑, 특히 주님의 사랑을 뜻하고, 그 해에서 나오는 빛은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아침 빛’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가 인간 안에 비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AC.22에서 말하는 아침’의 본질입니다.

 

또한 구름 없는 아침’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구름은 종종 문자적, 외적, 혹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름이 없습니다. 이는 진리가 가려지지 않고 맑게 비치는 상태, 곧 혼합과 어둠이 물러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저녁과 밤을 지나 마침내 주님의 빛이 방해받지 않고 비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이라는 표현은 AC.22의 핵심과 직접 연결됩니다. 비는 진리의 유입을, 광선은 주님의 빛을 뜻하며, 새 풀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새로운 생명과 선한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빛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오면, 그 결과로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특히 이 이미지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폭력적 단절이나 즉각적 완성으로 보지 않습니다. 새 풀이 돋아나는 것처럼, 생명은 조용하고 질서 있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AC.22에서 말한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이동’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감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구절이 AC.22에 인용된 이유는, ‘아침’이라는 상징을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 비추어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상태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이 시적 묘사는,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단순한 하루의 반복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회복과 거듭남의 리듬이라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증언하는 본문인 것입니다.

 

 

 

AC.22, 심화 1, ‘저녁, 아침 설명과 단8:14, 26 인용’

AC.22.심화 1. ‘저녁, 아침 설명과 단8:14, 26 인용’ AC.22,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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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4. ‘1:1, 3-4, 9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이 요한복음 1장 구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단순한 물리적 빛의 창조가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진리의 유입을 뜻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의 첫 단계에 들어설 때, 비로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고 설명했는데, 요한복음 1장은 바로 그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본문입니다.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선언은, 창세기 1장의 태초’를 다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the Word)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주님과 분리된 무엇이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는 물질 우주를 만드는 사건 이전에, 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 읽혀야 합니다.

 

이어지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만물’은 단지 자연계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모든 영적 질서까지 포함합니다. 즉, 거듭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 역시 말씀, 곧 주님의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AC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모두 이 말씀의 역사’에 의해 진행됩니다.

 

특히 AC.20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과 빛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빛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며, 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는 ’으로 경험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리를 보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계몽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스며들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는 말은 단순히 우주 공간에 광자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처음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AC.20에서 말하는 빛의 최초 침투’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그 빛 안에서 자기 선이 사실은 선이 아니었음을 보고, 동시에 주님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흐름도 AC.20의 문맥과 깊이 연결됩니다. 거듭남 이전 인간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이 와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참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춥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 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먼저 비추시는 주님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결국 AC.20에서 이 요한복음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빛은 물리적 빛 이전에,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이며, 말씀의 빛이며, 인간 안에서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는 진리의 빛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의 속뜻을 해설하는 복음서적 열쇠 역할을 합니다.  창조의 빛’은 곧 말씀의 빛’이며, 그 빛은 결국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 선이 무너지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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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심화

 

3. ‘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이 요한복음 8 24절이 AC.20에 인용된 이유는, 거듭남의 첫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단순한 도덕 개선이나 종교적 관심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으로 빛 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동시에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 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그이다(I am)라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채 머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AC.20의 흐름에서 보면, 거듭남 이전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사람은 처음으로 내 기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이 자기 밖에, 곧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요8:24가 결정적으로 들어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고, 결국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보다 먼저, 영적 죽음을 뜻합니다.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주님이 그이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AC.20에서 말하는 빛의 최초 침투’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 거듭남의 출발 조건을 말하는 말씀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믿음’을 단순한 교리 동의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믿음은 주님의 존재와 본질을 인정하고,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향 전환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식의 협박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안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영적 원리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혀야 합니다.

 

결국 AC.20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거듭남의 첫 빛은 언제나 주님 인식’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 이어서 주님만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이 죄와 어둠에서 생명과 빛으로 넘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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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심화

 

3. ‘51:9-11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 이사야 51장 구절이 AC.18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절의 깊음(deep),  깊음 위의 흑암’이 단순한 바다나 물리적 심연이 아니라, 거듭나기 이전 인간 안에 있는 욕망과 거짓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바다’, ‘깊은 물’, ‘’, 그리고 구속받은 자들이 건너가는 길’이라는 이미지들을 통해, 창조와 구원이 동일한 영적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먼저 이 본문은 단순히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는 시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는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속뜻에서 이것을 거듭남 이전의 혼돈 상태로부터 인간을 건져 내시는 주님의 역사’로 읽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깊은 물’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깊은 혼란과 시험의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dragon)이나 바다 괴물’은 흔히 자기 사랑과 거짓,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교만한 추론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가장 깊고 원초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AC.18에서 말한 깊음’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세기 1 2절의 깊음’은 아직 질서 잡히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거짓의 심연이며, 이사야는 그것을 바다의 깊은 물’과 ’이라는 상징으로 다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다를 말리시고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셨다’는 표현도 결정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의 혼돈과 시험 가운데 ’을 내신다는 뜻입니다. 즉, 거듭남은 혼돈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깊음 한가운데서 주님께서 길을 여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깊음’이 단지 부정적 상태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영이 움직이시기 시작하는 자리라는 점을 말하려 했습니다.

 

이어지는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말은, 거듭남의 결과를 뜻합니다. ‘시온’은 주님과의 사랑의 상태, 곧 회복된 교회와 회복된 인간 내면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깊은 물을 건넌다는 것은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 상태에서 질서와 평안의 상태로 이동하는 영적 여정을 뜻합니다.

 

결국 이 본문이 AC.18에 인용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깊음’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우주론적 바다가 아니라 인간 안의 영적 혼돈 상태이며, 주님은 바로 그 깊음 속에서 길을 내시고 사람을 구속하여 새 창조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이사야 51장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와 출애굽과 거듭남은 모두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혼돈의 깊음  주님의 역사  길의 열림  구속받은 자의 귀환’이라는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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