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

즐겨찾기/블로그 2025. 9. 18. 09:39

휴거 (2025/9/18)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4:31)

 

AC.4060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막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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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2025/9/17)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위 구절들에 ‘일곱(7)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처럼 말씀 전반에 의외로 숫자가 참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6:2)

 

이 호세아 말씀에는 ‘이틀(2), ‘셋째(3)라는 숫자들이 나오며, 무엇보다 창세기 1장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8)

 

식으로 ‘여섯(6)째 날까지 계속 숫자들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23:44)

 

이 구절에는 ‘(6) 시와 ‘(9) 시가 나옵니다.

 

이렇게 단순 숫자들이 있는가 하면 ‘십일조(10), ‘열두 지파, 열두 제자, 열두 문, 열두 돌(12), ‘40일 정탐, 40년 광야 생활, 40일 금식(40), ‘측량한 성곽 규빗수(144), ‘일천 번제, 천 년(1000), ‘지파별 인침 받은 자의 수(144000) 등이 나오고, 그리고 창5 아담의 계보 장엔 아담, ‘구백삼십(930) 세, 셋, ‘구백십이(912) 세...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의 경우, ‘구백육십구(969) 세 등 복합 숫자들과 큰 숫자들이 나옵니다.

 

이 숫자들은 그냥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은 모두 천국과의 상응으로 기록된 것으로 이 숫자들 역시 그 안에 형언할 수 없는 아르카나가 담겨 있습니다.

 

참고로, 저 창5 아담 계보의 경우, 저마다 누렸다는 저 향년은 그 어느 특정 개인이 저 나이 되도록 살다 갔다는 뜻이 아니라 저 이름으로 일컫던 교회가 저 숫자에 담긴 ‘상태와 그 변화’를 겪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969세라 해서 실제 969년 동안 존재했다,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므두셀라’라는 교회, 또는 교리나 어떤 신학적 입장이 969라는 숫자로 표현해야만 하는 어떤 장구한 상태변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저 숫자가 실제 역사로 얼마나 되는 기간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질학적 지구의 나이, 그리고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들의 발견 등을 고려할 때, 아주 장구한 세월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32)

 

이 역시 ‘노아’라는 교회에서 ‘오백(500)이라는 어떤 상태변화 후에, ‘셈, 함, 야벳’이라는 세 종류의 교회가 나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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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사람의 변화 (2025/9/16)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91)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 그리고 그의 아들 유도지와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키운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 범상치 않은 등장 및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모함,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그러니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사람이 변해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지요.

 

AC.91번 글을 읽으며,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특히 저 유도지의 변화와도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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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영적, 천적 (2025/9/15)

 

영어로는 natural, spiritual, celestial(heavenly)로 표기할 수 있는 이 세 종류의 상태는 곧 사람을 영적으로 구분한 상태이며, 각각 일층천, 이층천, 삼층천에 상응하지만, 한편으론 ‘거듭남’의 관점에서 본 구분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건 거의 책을 쓰는 수준이 될 것 같아 아주 단순하게 비유적으로만 살짝 말씀드립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그래서 여전히 흙이 묻어 있고 아직 다듬지 않은 거친 채소나 농장의 과일, 그리고 육류나 생선 등의 식재료들의 상태, 바로 이 상태를 가리켜 자연적이라 하며, 영적으로는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창1:2의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 상태를 말합니다.

다음은 저런 식재료들을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상태, 이 상태를 가리켜 영적이라 하며, 창1:3-31의 천지창조의 육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를 말합니다. 첫째 날, 둘째 날... 등으로 구분한 이 순서를 따라 사람은 점점 성숙, 마침내 거듭남의 최종단계, 그러니까 이제 요리를 시작해도 될 단계가 됩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어도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아름다운 요리가 되려면 결정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 곧 창조주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이 사랑의 열로 변화된 최종 상태, 이 상태가 바로 천적이라는 상태입니다. 창2:1-17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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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두 번째 시간으로, 원래 본문은 24절로 17절, 제목은 ‘에덴동산의 속뜻’이지만 한 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길어 세 등분, 3주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 4절로 9절,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과 인용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4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89

‘하늘과 땅의 내력’(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 즉 천적 인간을 빚으신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천적 인간을 빚으심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이상 5),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7), 나중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19) 등 이들에 대한 지으심은 이미 앞 장에서 다룬 내용들임에도 불구, 여기서 다시 다루는 걸 보면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 사실들을 보면 더 분명한데요, 먼저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선 ‘땅’(ground)과 ‘들’(field)(5)을 함께 언급하는 반면, 앞에선 ‘땅’(earth)만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는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빚으심(reformation), 곧 개혁이 영적 인간의 경우는 ‘땅’, 즉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은,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 이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즉 ‘하늘’에서 시작한다는 것 등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과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인 ‘하나님’이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어떤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

 

5, 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90

‘들의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걸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사람이 아직 영적(靈的, spiritual)일 동안은 ‘땅’(earth)이라고 하지만,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 되면 ‘땅’(ground) 및 ‘들’(field)이라고 합니다. 바로 뒤에 ‘안개’(mist)로 언급되는 ‘비’(rain)는 싸움이 그친 뒤 오는 천국 평화의 평온함, 고요함(the tranquility of peace, the peaceful calm)을 말합니다.

 

91

그러나 여기 이런 것들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그 상태가 바뀌어 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지각할 수조차 없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춰진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87 참조)

※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와 그의 아들 유도지, 그리고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기르는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한 등장과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게 되지요. 이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87번 글 앞부분 인용입니다.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the sabbath), 즉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인데, 이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나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고, 또한 그동안 전투를 치른 장본인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쉬시는 것, 곧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

※ 거듭 성 프란치스코(1182(?)-1226)나 성 분도 요셉 라브르(1748-1783) 같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이들의 전기를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알지도, 또 스베덴보리처럼 무슨 영계를 수십 년 왕래하며 체험한 바도 없지만, 그리고 지금 이런 아르카나도 접한 적 없지만, 참으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하나 됨, 합일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 ‘안개’가 바로 이 평온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증기와도 같아서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것과 같지요.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라 하는 것들, 특별히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마음과 기억, 곧 이성적인 생각들과 팩트 기반 지식에 속한 것들이 이 평온함, 평화의 샘(the offspring of peace)에서 나옵니다.

※ 땅에 비가 내리고 안개로 축축해져야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자라듯 사람도 심령 상태가 평화, 평온해야 하늘에 기반을 둔 학습 능력과 합리적인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 이 번역의 일만 놓고 보아도 분명합니다. 나랏일과 여타 사적 일로 마음이 힘들면 번역도 잘 안 되지만, 심령이 평안하면 주님의 빛도 훨씬 더 환하게 느껴지며, 번역도 참 잘 되기 때문입니다.

 

92

탐욕과 거짓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나 불안이 사라질 때, 겉 사람이 맛보는 천국의 평화, 평온의 어떠함은 천국 평화의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32장, ‘천국 안의 평화의 상태’ 284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천사들이 누리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은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도 없다. 사람의 지각 능력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고 기능이 몸에서 들려 올라가 영의 차원에 머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천사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천국의 평화가 느껴진 것도 그런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평화를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 부적합하여 그 평화 그대로를 말로 옮길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안에 비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그런 건데, 단순히 싸움이 끝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뻗어 나가며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생명입니다. 평화의 기쁨에서 그 생명이 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이때 이 상태에서 생깁니다.

 

93

천적 인간의 상태, 이 사람한테 선물로 주어진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 곧 비가 내려 대지가 리프레쉬 되는 걸로 표현된 상태, 그리고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노릇한 데서 구원받은 상태 등 이런 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인데, 그래서 에스겔에서 주님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34:25-27, 31)

그리고 이런 효과가 ‘셋째 날’에도 있다는 말씀이 호세아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일곱째 날’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2-3)

※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역시 그 속뜻이 있는데, 특히 ‘7’(일곱)처럼 ‘3’(셋)과 ‘12’(열둘)가 비슷하게 ‘완전함’, ‘전부’ 등의 뜻을 갖습니다.

이 상태를 비유하여 ‘들의 풀’(the growth of the field)이라 함을 에스겔, 고대교회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16:7)

이렇게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60:21)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94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를 보면, 그의 겉 사람은 전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95

앞의 두 구절, 즉 5, 6절에서는 겉 사람의 생명, 즉 그의 신앙의 생명,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의 생명, 의지의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사실은 그를 따르며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고, 그래서 겉 사람은 아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어가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또한 ‘사람’이 됩니다. 그를 준비시키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 거듭,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 그의 생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인간이라 한다면, 채소, 과일 등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은 영적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요리가 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며, 그렇게 해서 나오는 최종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9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코’(nostrils, 콧구멍)는 향기(odor)의 결과 감사했던 모든 것, 곧 어떤 ‘향기로운 아이디어’(the idea of fragrance)가 떠오를 때 맛보는 모든 즐거운 걸 말합니다. 여기서 향기는 퍼셉션(perception)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 가령,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s)나 주님, 주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들에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을 무척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곧 주님이 임명하신 자를 가리켜 ‘콧김’(4:20)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97

생명을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지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후에 그 후손들로 내려오면서 연속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또한 요한복음에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3:8)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8

‘동산’(a 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Eden)은 사랑을, ‘동방’(the east)은 주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 eastward)은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천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말합니다.

 

99

영적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나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억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이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지각합니다(perceives). 영적 인간일 동안 이때까지 뒤집혔었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 회복되었다는 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 혹은 사람을 가리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으로는, 이는 또한 보편적인(universal) 뜻이기도 한데, 바로 주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곳이지요. 그때 아직 지상에 있는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도 모두 열린(open)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 생명은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100

‘동산’은 지성, ‘에덴’은 사랑이라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51:3)

여기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나 사랑과 관련된 것들인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나 이해에 속한 것들에 관한 표현입니다. 전자는 ‘에덴’, 후자는 ‘동산’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 ‘에덴동산’에서 ‘에덴’은 천적인 것에, ‘동산’은 영적인 것에 각각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101

주님이 ‘동’(, the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거룩한 관습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동’이셨기 때문입니다.

※ 어떤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키워드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2

‘나무’(A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a 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 곧 진리를 알게 하는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a 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 곧 선을 알게 하는 퍼셉션을,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 즉 그저 기억일 뿐인 지식, 그러니까 감각적 증거,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103

여기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상징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달라지는데,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4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이 주석의 작성 연대는 1749-1756) 유럽을 말하지만, 퍼셉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건 270여 년이 지난 오늘날(2025년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 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 여부에 대한 어떤 내적 감각(a certain internal sensation)으로, 태고교회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던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이 퍼셉션은 정말 완벽한데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생각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한테는 이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 모르고,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the faith thence derived)이란, 신앙은 신앙인데 사랑으로 말미암는 신앙,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가슴 신앙을 말합니다. 지식에서만 나오는 신앙, 즉 머리 신앙이 아니고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the 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과 천사한테 있어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그러니까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소유, 그 소유권이 주님한테 있는 것들 중 메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록 기술(記述), 즉 적기는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러나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흔히들 이걸 의지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의지는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 가운데’인 반면,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그저 탐욕만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말미암는,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입니다.

 

106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 ‘생명나무’, 곧 사랑 및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 등,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의 속뜻 (1)을 번역,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이 천적 인간을 어떻게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어떻게 만드시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느끼셨겠지만 우리의 이 주일설교는 일반적인 설교와 다릅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무슨 주석 낭독회에 가까운데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이렇게 방향을 잡은 이유는, 원전을 건드리기 싫어서입니다. 어쭙잖은 저의 역량으로 괜히 임의로 풀다가 큰 사고를 칠까 봐서이지요. 역시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49-1756)라는 주석을 주님의 말씀과 거의 동급으로 봅니다. 이 주석이 기록된 방식 때문인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주석은 주님이 직접 곁에서 계시하시고 스베덴보리는 그걸 그대로 받아적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 곧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주님은 그런 중에도 술자(述者), 곧 받아적는 사람의 퍼스낼러티를 허용하셔서 술자, 이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의 어떤 특성들이 군데군데 스며드는 걸 허용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주일 설교는 마치 굉장한 고액 강의를 수강하듯 들으시며 복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라고 이 원고와 함께 제 블로그에도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이기 때문인데요, 누구하고는 한 끼 점심 식사 하는데 10억이라는 데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만 숨을 못 쉬어도 죽는 이 대기 속 공기, 산소를 그러나 주님은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거저 우리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주시지요.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걸 고마워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말씀에 대한, 그리고 이 아르카나 설교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여 드리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4-9)

여러 번 복습하시면서 가급적 본문도 줄줄 외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설교
2025-09-1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14(D1)-주일예배(2615, 창2,4-9, AC.89-106),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pdf
0.54MB
창2,4-9, AC.89-106.pdf
0.54MB

 

 

주일예배(2025/9/7, 창2:1-3),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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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의 속뜻 (2025/9/1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유명한 ‘선악과’ 본문입니다. 이 본문의 속뜻은,

 

...참됨과 선함에 익숙해지는 데 있어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는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는 건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조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AC.126)

 

인데요, 여기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에 관한 설명을 아래 곁들입니다.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은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의존,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일체의 것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십일 금식기도나 천일 예배, 불교의 참선, 면벽 수련(달마의 구 년 면벽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삼천 배, 오천 배 같은 불교의 절하는 법), 하안거, 동안거 등은 물론, 다양한 종교의 각종 종교적 수행 등인데요, 이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 五慾: 수면욕, 식욕, 색욕, 명예욕, 재물욕, 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慾), 애(愛)) 문제를 좀 어떻게 건드려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신앙의 신비를 좀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 지식, 곧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여 학자가 되더니 그 지식으로 신의 세계에 발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극 초월적 극기 수행을 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오만가지 세상 지식을 머리가 터질 듯이 추구하여 다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구원을 추구한다거나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위에서 밝힌 대로 신앙의 천적인 면만 파괴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 가령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하는 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이런 수도적 삶을 추구한 게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기에도 너무 바빠 자기를 사랑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는 사람들을 영생, 영혼 구원 등의 관점으로 나누면 대략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그 첫째는, 신앙생활을 일종의 사후 대비 보험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쪽 발은 이생, 다른 발은 저생에 걸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 중심의 삶을 사는 거엔 그닥 관심이 없으며, 그렇다고 무슨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걸 몹시 불편해 하며, 웬만하면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잘 살다가 천국 가는 게 좋은 거 아니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균형 잡힌 영성’이니 건강한 신앙생활’이니 하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둘째는,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대체로 차갑고 딱딱하며, 날이 서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 이지적이지만 사실은 사랑보다는 신앙과 그 교리를 늘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주님을 추구하다가 덤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한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주 희귀하며 이런 분들이 계셔서 한 도시가, 한 나라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마치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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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특히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2025/9/10)

 

제목 그대롭니다.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각종 금은보화, 보물이 가득한 집에 열쇠 없는, 그래서 절대 열 수 없는 큰 자물쇠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열쇠가 없으니 아무리 값비싼 재물이 가득해도 열고 들어갈 수가 없고, 결국 그런 집, 그런 창고가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어떻게 자식이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하겠나, 어떻게 자기 부모를 수치스러워하겠나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요, 가령, 부모, 특히 아버지가 너무 무책임하여 자기 하고픈 것만 하며 사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이럴 경우, 연약한 어머니가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자녀는 장성한 후에 그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수 있지요. 본인도 괴로워하면서 말입니다.  

 

※ 위 경우는 주님의 부르심 있어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일어난 일이라 부득이하였고, 이후 더욱 크신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의 책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러면 안 됩니다. 뭐 당연한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하나님의 대리인, 그러니까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의 모습으로 지금 내 곁에, 지금까지 내 삶 가운데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아버지에 대한 나의 태도가 곧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며, 그렇다면 천국 창고인 저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 곧 지상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됩니다. 마치 어느 나라 대사에 대한 태도가 그를 파송한 그 나라에 대한 태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비유하자면 저마다 하늘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이 보물 창고를 열고 거기 가득한 보물을 꺼내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저마다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는 이 창고를 여는 열쇠는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인 마음에 들어야 그 창고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아버지를 주시고, 그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5, 48)

 

굳이 세상 아버지가 꼭 선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그 아버지를 하나님의 표상,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죄를 굳이 자식인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런 부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큰 불경이 되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지상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상과 벌은 하나님이 따로 매기실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그간 살면서 봐온 정말 맘에 안 드는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더라도 눈 딱 감고 자식 된 도리, 주께 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동하여 기꺼이 그 창고 열쇠를 주실 것입니다. 삶이 계속 막히고, 경제적 어려움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싶으면 이 ‘아버지’라는, ‘부모’라는 일종의 치트 키를 잘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치트 기마저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6:5-8)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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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도무지 절제할 수 없다면 (2025/9/9)

 

잠깐 쉰다고 무심코 스마트폰이나 PC를 켜 웹툰이나 유튜브, 인터넷이나 게임 등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영적 실상을 알게 되면 정신이 번쩍 나는 아주 안타까운 습관입니다. 우리는 못 느끼지만, 이때 하늘, 곧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천국 입류(入流, influx)의 유입이 끊기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옥의 각종 위험에 노출,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멀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걸로 창세기부터 말씀을 읽거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말씀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겉 글자 안에 담아두신 속뜻, 천국 천사들이 사용하는 성경은 이 아르카나로 기록되어 있음)를 통해 크게 감동, 주님이 자기들한테 주신 큰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를 지켜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더 이상 무방비 상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상하게 일상 중 일이 계속 꼬이고, 악과 거짓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며,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지금 내 상태가 지옥 영들이 가까이하기 알맞은 상태는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 지옥은 모두 상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천국이 내게 열릴 수도, 지옥이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일상 중에도 늘 천국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늘 천국과 연결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말씀 생활입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 게임 등으로 보내는 시간들이 제법들 되실 텐데, 이제는 의지를 사용하셔서 조금씩 스마트폰의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의 일상들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리하게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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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창2:3까지를 창1로 했어야 하는 이유 (2025/9/8)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이거나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창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무슨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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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1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Gen. 2:1-3)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23절까지를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이거나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한테는 주님의 신성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게 이 2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참고로 이 두 호칭은 각각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첫 시간, 천지창조 일곱째 날, 곧 거듭남 일곱 번째 상태인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C.82-83)

 

이 말씀은 인간이 이제 영적으로 ‘여섯째 날’이 되었음을, 즉 ‘여섯째 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영적임을 의미합니다. ‘천’(, heaven)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곧 내적 존재(inner being)를, ‘지’(, earth)는 그의 겉 사람(external), 즉 외적 존재(outer being)를 말합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이는 앞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상징된 것입니다...

(AC.82)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합니다. 이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 즉 협력, 제휴, 힘을 합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랑, 즉 천적 원칙(the celestial principle)이 주요 원리(the principal)가 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나 영적인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보다는 사랑이, 영적인 거보다는 천적인 거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곧 천적인 걸 우선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C.84-88)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 heavenly person)이 ‘일곱째 날’입니다. 주님이 육 일간 일하신 결과이기에 이 천적 인간을 가리켜 ‘그가 하시던 일’(his work)이라고 합니다. 그때 모든 전투, 곧 갈등, 충돌이 그치며, 그 결과 그런 주님의 상태를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to 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을 특별히 성별(聖別), 히브리어로 ‘안식’(rest)이라는 뜻의 ‘שבת’(샤바트, the sabbath)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으로 사람은 창조되고(created), 형성되며(formed) 만들어집니다(made). 이 모든 것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AC.8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 없는 아르카나(arcana, 秘義)입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고, 영적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거의 없습니다.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이런 무지의 결과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습니다. 일곱째 날 관련,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sabbath)인 것과 관련, 주님은 자신이 진정한 안식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이는 주님이 참 인간이시며, 진정한 안식일이심을 의미합니다.

 

49번 글(1:26)에,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구성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한테도 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참 인간, 참 사람은 오직 홀로 주님 한 분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하십니다.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주님의 안식일(the sabbath of the Lord)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주님의 안식일을 후대의 모든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이어지는 가장 내적(inmost) 교회들, 즉 후대 교회들의, 주님과 가장 가까운, 가장 깊은 부분 역시 안식일이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거듭나는 사람 역시 그가 천적이 되면, 즉 그가 천국 본성을 발전시키면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그가 주님의 모양(a likeness of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육 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59번 글(1:30) 일부 인용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것들이 유대교회에서 육 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도입된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표상(representative)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명이 궤(the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표상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으로는 영적 전투와 시험(combats and temptations)을, 그리고 궤가 쉬는 것으로는 일종의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를 표상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10:35-36)

 

위 민수기 본문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쉴 곳을 찾은’(10:33) 것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라 하였습니다.

 

[3] 천적 인간의 쉼(The rest of the celestial man)을 이사야에서는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 quality)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his own desire), 즉 욕망이 아닌,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good pleasure), 곧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이것이 그의 ‘즐거움’(desire)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internal peace and happiness)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의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의 의미입니다.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천적 인간의 다른 표현입니다.

(AC.85)

 

 

‘여섯째 날’이 된(has become)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is beginning to be) 상태를 여기서 먼저 다루고 있는데, 이때가 유대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저녁부터 지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입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 유대인의 안식일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 일몰부터 일곱째 날인 토요일 일몰까지입니다. 이와 관련된 걸 하나 말씀드리면, 유대 지역 일몰이 보통 오후 5시라고 할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때가 오후 3시쯤이라 두 시간 만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아주 촉박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관련 본문들을 읽으시면 한결 와닿으실 겁니다. 하나 더, 유대인들은 결코 월요일, 화요일... 같은 요일 명칭을 쓰지 않습니다. 그 영어식 표현의 유래가 고대 앵글로 색슨계 신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창세기 1장 표현대로 첫째 날, 둘째 날... 같은 명칭을 사용합니다.

(AC.86)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the sabbath) 또는 ‘쉼’(the 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전투가 그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전투를 치른 장본인, 당사자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 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 두 곳에서 각각 파송된 천사들과 지옥의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천사 둘과 지옥의 영 둘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다가 이때, 즉,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옥의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AC.87)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has fought for),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has created, formed, and made)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하는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혹은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AC.88)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첫 번째 시간인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안식일 관련, 우리가 흔히 오해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바로잡으면서, 이것을 오늘의 결론 삼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17:24-25)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말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설교

2025-09-0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9-07(D1)-주일예배(2614, 창2,1-3, AC.82-88),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pdf
0.41MB
창2,1-3, AC.82-88.pdf
0.44MB

 

 

주일예배(2025/9/14, 창2:4-9),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의 속뜻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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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8/31, 창1:24-31),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

‘여섯째 날, 땅의 생물과 사람 창조’의 속뜻 (2)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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