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년 같은)가 그 속뜻으로는 무엇을 뜻하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겉뜻의 의미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세속적 향년, 그러니까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즉 아담이 죽을 때 나이가 구백삼십 살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 장부터 12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의 겉뜻대로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나 각각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름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숫자들에도 해당됩니다. 말씀에서는 숫자 삼과 숫자 칠이 자주 언급되는데, 어디에서 나타나든 그것들은 시간이나 다른 것들이 포함하거나 표상하는 상태에 관하여 어떤 거룩한 것, 혹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가장 짧은 시간 간격에서나 가장 긴 시간 간격에서나 동일합니다. 부분이 전체에 속하듯이, 가장 작은 것들도 가장 큰 것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혹은 가장 큰 것이 그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올바르게 나아오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닮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서 말하기를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여기서 가장 짧은 간격과 가장 긴 간격이 모두 의미되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는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여기서 ‘수년 내에’(midst of the years)는 주님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짧은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의 주님의 오심을 뜻하고, 긴 간격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새로 일어날 때를 뜻합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서에서는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라고도 불립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탄이 결박된 천 년(20:2, 7)과 첫째 부활의 천 년(20:4-6)도 결코 글자 그대로의 천 년을 뜻하지 않고, 그 상태들을 뜻합니다.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날’(days)이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듯이, ‘해’(years)도 그러하며, 그 상태들은 해의 숫자로 묘사됩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20:4-6)

 

이로부터 이 장에 나오는 시간들도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교회는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2에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연수’와 ‘수명’에 대한 오랜 오해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이 장의 연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도 그 내적 의미, 곧 속뜻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자적 의미에 머물러, 이 숫자들을 세속적 연대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는 겉으로 보이는 역사 서술과 달리,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 읽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구간’입니다. 이 구간은 인물 이름뿐 아니라, 숫자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 단위가 아니라, ‘상태를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숫자 삼과 숫자 칠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숫자들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든, 시간이나 사건이 포함하고 있는 ‘거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의미가 짧은 시간과 긴 시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삼 일이든 삼 년이든, 혹은 칠 일이든 일곱 세대든,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길이가 아니라 ‘상태의 성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부분과 전체의 닮음’으로 설명합니다. 가장 작은 시간의 단위와 가장 큰 시간의 단위는 서로 닮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고, 큰 것이 다시 작은 것들 속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 시간에 담긴 상태가 중요합니다. 이 닮음의 원리가 없으면, 말씀은 내적으로 하나의 질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삼 년’과 ‘일 년’의 예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다른 기간이지만, 내적으로는 동일한 종류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완성되거나 소진되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서에서 말하는 ‘수년 내에’는 연대의 중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 곧 주님이 인간과 교회 안에 새롭게 임재하시는 결정적인 순간을 뜻합니다.

 

이 ‘오심’은 한 번의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짧은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마다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의미하고, 긴 간격에서는 교회가 쇠퇴한 뒤 다시 일어날 때 주님이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구속할 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특정 연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 년’도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탄이 결박된 천 년, 첫째 부활의 천 년은 문자적인 기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영적 상태의 지속’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이 상태를 나타내듯이, ‘’ 역시 상태를 나타내며, 숫자는 그 상태의 성격과 완결성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숫자를 문자 그대로 붙잡으면, 말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원리를 창세기 5장에 적용하면, 족보에 나오는 긴 수명과 연수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생물학적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교회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를 나타냅니다. 각 교회는 서로 다른 인식의 상태에 있었고, 그 차이는 타고난 성향과 삶을 통해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서 나왔습니다. 숫자는 바로 그 차이를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AC.482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읽는 시선을 바꾸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성경은 언제나 ‘어떤 상태였는가’를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입니다.

 

결국 AC.482는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이 교회의 생애를 기록한 ‘영적 지도’임을 밝혀 줍니다. 그 숫자들은 시간의 길이를 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온 길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처럼 보이던 이 장은 더 이상 난해한 기록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태어나고, 머물고,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영적 증언’으로 읽히게 됩니다.

 

 

 

AC.481, 창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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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5:3)

 

AC.481

 

‘백삼십 세’(hundred and thirty years)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새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양’(likeness)은 신앙과,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교회를 가리켜 ‘셋’(Seth)이라고 했습니다. By a “hundred and thirty years” there is signified the time before the rise of a new church, which, being not very unlike the most ancient, is said to be born “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 but the term “likeness” has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This church was called “Seth.”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1에서 창세기 53절의 ‘백삼십 세’라는 숫자를 단순한 연대 표시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이 숫자가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와 기간’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시계로 잰 시간이나 인간의 수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쇠퇴한 이후 새로운 교회가 준비되는 영적 공백의 기간’을 뜻합니다. 이 기간은 단절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준비의 결과로 등장한 교회가 바로 ‘’으로 대표되는 새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를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이는 두 교회가 동일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질적 방향과 근원에서 연속성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주님께서는 그 교회의 선과 진리의 잔존,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셨고, 그 리메인스 위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셋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태고교회의 단절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연속’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이라는 표현을 매우 섬세하게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는 개인 아담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상태 전체’입니다. 새 교회는 태고교회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련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련됩니다. 이 구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일반적인 도식과는 반대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계승의 관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본질은 사랑이 신앙을 낳는 구조였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셋으로 대표되는 새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신앙이 이전보다 더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다면, 셋의 교회에서는 ‘신앙이 의식적으로 인식되고 보존되어야 할 요소’로 부각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역시 태고교회의 ‘모양’과 ‘형상’을 따랐지만, 그 강조점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섭리적인 전환’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교회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여전히 사랑과 신앙을 지녔지만, 더 이상 즉각적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 ‘신앙을 통해 사랑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점에서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동일하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백삼십 세’라는 상징은 바로 이 전환에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짧은 순간의 변화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던 영적 성숙과 재배치의 기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를 즉시 대체하지 않으셨고, 그 안에 남아 있던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교회가 설 수 있도록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기다림의 시간이며, 동시에 소망의 시간입니다.

 

마침내 이 새 교회는 ‘’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라는 이름에는 ‘두었다’, ‘세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우연한 이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우신 교회’임을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태고교회의 순수한 상태는 지나갔지만, 주님께서는 인간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셋의 교회는 바로 그 응답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교회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은 반드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공백의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백삼십 년’의 시간은, 사실상 ‘주님의 가장 조용한 일하심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끝에 주님은 늘 ‘’을 일으키십니다.

 

결국 AC.481은 교회의 역사가 단절과 실패의 연속이 아니라, ‘보존과 재창조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태고교회가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만 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태어날 토양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토양 위에 주님께서는 셋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질서는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교회와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AC.482, 창5:3, ‘세’(years), ‘년’(numbers of years)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세’(years, 백삼십 세, 구백삼십 세 같은)와 ‘연수’(numbers of years, 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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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사람'이라 일컬으신 시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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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것은 첫째 장(1:26, 27)에서도 또한 분명히 드러나는데, 이는 여섯째 날의 끝, 다시 말해 안식일의 저녁에 해당하며, 곧 안식일, 곧 일곱째 날이 시작될 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이는 앞에서 보인 바와 같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ppears also from the first chapter (Gen.1:26–27), that i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which answers to the evening of the sabbath, or when the sabbath or seventh day began; for the seventh day, or sabbath, is the celestial man, as was shown above.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6, 27)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0에서 ‘사람이라 불린 날’이 언제인지를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직접 연결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불렸다’고 말하는데, 이날은 막연한 어느 하루가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 곧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문턱’입니다. 이 시점은 시간적으로는 하루의 저녁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단순한 휴식의 날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줍니다. 빛이 생기고, 구분이 이루어지고, 생명이 질서 잡히는 모든 과정은 결국 한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목적은 인간이 주님 안에서 ‘안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피곤함에서의 쉼이 아니라, ‘내적 갈등이 사라지고 사랑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인간’이라 부르며, 바로 이 상태가 일곱째 날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사람이라 불렸다’는 선언은 여섯째 날의 한가운데서가 아니라, ‘여섯째 날이 마무리되고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시점’에 주어집니다. 이는 사람이 단지 영적 상태로 형성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 영적 상태가 완성되어 천적 상태로 들어갈 때 비로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에 해당하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형성 과정의 중간이 아니라, ‘완성의 문턱’에서 주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안식일의 저녁’이라는 표현으로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저녁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입니다. 여섯째 날의 저녁은 모든 형성의 노력이 끝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 전환점에서 인간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애쓰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사는 존재’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성경이 그를 ‘사람’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26, 27절의 표현도 새롭게 읽힙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그들’로 표현이 바뀌는 이유는, 이 ‘사람’이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곧 교회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완성되어 안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성경은 그들을 한 이름으로, 곧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는 곧 태고교회가 천적 상태에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여섯째 날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일곱째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 날은 필요하고 귀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단계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진리를 배우고, 분별하고, 싸우는 모든 과정은 결국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신앙생활이 언제나 긴장과 분투로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여섯째 날의 저녁을 통과하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안식일을 ‘천적 인간’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앙의 목표를 분명히 합니다. 그 목표는 더 많은 지식이나 더 엄격한 규범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내적 평안과 일치’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주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흘러나오는 상태, 그것이 안식이며, 그것이 참된 ‘사람’의 상태입니다.

 

결국 AC.480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그 전환은, 지금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영적 여정입니다. 사람이 ‘사람이라 불리는 날’은, 주님 안에서 마침내 안식에 이르는 날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안식일은 더 이상 율법의 규정이 아니라, ‘사람됨이 완성되는 은혜의 상태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79, 창5:2,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와 '사람'이라는 이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부르기’(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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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79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는 말씀에서 사물의 성질을 안다는 걸 의미하며, 이는 앞에서 보인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성질과 관련되는데, 이는 사람이 흙에서 취해졌다는 것, 곧 주님에 의해 거듭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Adam)이라는 말은 ‘땅’(ground)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man)이 되었습니다. By “calling a name,” or “calling by name,” is signified in the Word to know the quality of things, as was shown above, and in the present case it has relation to the qual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denoting that man was taken from the ground, or regenerated by the Lord, for the word “Adam” means “ground”; and that afterwards when he was made celestial he became most eminently “man,” by virtue of faith originating in love to the Lord.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9에서 ‘이름 부르기’라는 성경의 표현이 단순한 호칭 행위가 아니라, ‘어떤 것의 성질을 안다’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라벨이 아니라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존재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건, 그 존재를 외적으로 지칭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상태이며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밝히신다’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지 않으면,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 부르심’의 장면들은 단순한 서술로 흘러가 버립니다.

 

이 원리가 창세기 5장에 적용될 때,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의 성질 전체를 규정하는 선언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신 대상은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가 어떤 성질을 지닌 교회인지, 어떤 근원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름 부르기’를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이라는 이름의 어원을 다시 끌어옵니다.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ground)을 뜻합니다. 이는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연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 의해 거듭났다는 영적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은 인간의 외적 상태, 곧 자연적 인간을 뜻하며, 그 땅에서 취해졌다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이라는 이름은 ‘자연적 상태에 있다가 부름을 받아 거듭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상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을 거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에서 취해진 존재였고,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의 상태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은 곧 주님의 역사로 이어져, 점차 영적 상태를 거쳐 천적 상태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 전환 과정 전체가 바로 태고교회의 형성 과정이며, 그 성질을 집약한 이름이 ‘아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태고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졌을 때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탁월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준에 가장 부합했다’는 뜻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참된 ‘사람’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지닌 존재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바로 이 신앙을 살았기에, 성경은 그들을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신앙은 지식에서 출발한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 신앙’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곧바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갈등이나 분투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AC.479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름’과 ‘정체성’을 외적 기준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나 ‘내적 성질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가는, 우리가 어떤 성질의 삶을 살고 있는가와 직결됩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이 태고교회의 성질을 드러냈듯이, 오늘날 우리의 삶 역시 주님 앞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남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죄책에서 벗어나는 경험이 아니라, ‘자연적 상태에서 불러내어 주님 중심의 상태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적은 단순히 영적 인간이 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을 사는 천적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 길 위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성경이 말하는 가장 깊은 의미의 ‘사람’이 됩니다.

 

결국 AC.479는 ‘이름을 부르기’라는 짧은 표현 속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본질을 함께 담아냅니다. 태고교회는 땅에서 취해졌으나,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었고, 마침내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으로 가장 탁월한 의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질서는 과거의 한 교회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각자의 영적 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주님의 질서입니다.

 

 

 

AC.480, 창5:2, '사람'이라 일컬으신 시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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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사람’이라는 뜻의 보통명사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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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78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אָדָם)이 ‘사람’(man)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유명사로서 ‘아담’이라 불린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라 불렸다는 사실은 이 구절과 앞선 구절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그가 때때로 단수로 말해지지 않고 복수로 말해지기도 하며, 또한 이 명칭이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람’이라 불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He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첫째 장에서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게 하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1:26)라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가 인류 최초의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The reason why he is called “Adam” is that the Hebrew word “Adam” signifies “man”; but that he is never properly called “Adam” by name, but “man,” is very evident from this passage and also from former ones, in that [in some cases] he is not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but in the plural, and also from the fact that the term is predicated of both the man and the woman, both together being called “man.” That it is predicated of both, everyone may see from the words, for it is said, “He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nd in like manner in the first chapt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Gen. 1:26) Hence also it may appear that the subject treated of is not the creation of some one man who was the first of mankind, but the most ancient church.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8에서 ‘아담’이라는 이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를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성경 자체가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본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아담’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기보다, ‘인간됨의 상태’, 혹은 ‘교회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점은 본문에서 여러 방식으로 확인됩니다. 먼저, ‘아담’이 단수로만 사용되지 않고 복수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때때로 ‘’라고 말하지만, 곧이어 ‘그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한 개인을 염두에 두고는 설명될 수 없는 문법입니다. 또한 ‘사람’이라는 명칭이 남자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 역시 결정적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표현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의 ‘사람’으로 불렸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창세기 126절과 연결합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라는 말씀에서, ‘사람’은 단수로 말해지지만, 곧바로 ‘그들’이라는 복수 대명사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성경이 한 개인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공동적 존재’, 곧 하나의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점에서 AC.478은 창세기 1–5장을 읽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킵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인류 최초의 남성 한 명’의 탄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역사책처럼 ‘첫 인간이 누구였는가’를 밝히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처음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가 형성된 상태 전체를 가리켜 성경은 ‘사람’, 곧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아담’에게 남자와 여자가 함께 포함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앞선 해설에서 보았듯이, 남자와 여자는 신앙과 사랑, 이해력과 의지의 결합을 뜻합니다. 이 둘이 결혼된 상태가 바로 교회이며, 그 상태 전체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둘을 넘어선 하나의 상태입니다. ‘아담’은 개인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이 관점은 성경의 많은 난제를 풀어 줍니다. 예를 들어, ‘아담’이 어디에 살았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실제로 몇 살까지 살았는지 같은 질문들은 이 해석 앞에서 더 이상 핵심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상태’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곧바로 인식하던 천적 교회였고, 그 전체 상태를 성경은 ‘아담’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출발점입니다.

 

AC.478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생물학적 정의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단지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존재’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지 않은 인간은 성경적 의미에서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결합이 이루어진 곳에는 언제나 ‘사람’, 곧 교회가 존재합니다.

 

결국 AC.478은 창세기 1–5장이 한 개인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임을 분명히 합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인류 최초의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었던 교회의 이름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창세기는 더 이상 과학이나 역사와 경쟁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됨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깊이 말하는 책’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79, 창5:2,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와 '사람'이라는 이름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 ‘이름 부르기’(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부르기’(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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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주님을 닮은 상태여야 ‘사람’(man)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 ‘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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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77

 

‘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여러 차례 말하고 또 보였습니다. 이는 최고 의미에서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천적 교회가 ‘사람’이라 불리는데, 이는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며, 또한 여기에서 영적 교회도 이후에 ‘사람’이라 불리는데, 이는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인간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라 불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해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며, 그에 따라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참된 구별은 주님을 사랑하는 데 근거한 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That “man” is the most ancient church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for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lone is man. From this the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as being a likeness, and from this the spiritual church is afterwards so called because it was an image. But in a general sense everyone is called a man who has human understanding; for man is man by virtue of understanding, and according thereto one person is more a man than another, although the distinction of one man from another ought to be made according to his faith as grounded in love to the Lord.

 

[2] 태고교회와 모든 참된 교회,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한 자들, 곧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한 신앙으로 사는 자들이 특별히 ‘사람’이라 불린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겔서에서 말하기를,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and every true church, and hence those who are of the church, or who live from love to the Lord and from faith in him, are especially called “ma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0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36:10-12) I will cause man to multiply upon you, all the house of Israel, all of it; I will cause to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that they may be multiplied and bear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ccording to your antiquities; and I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my people Israel, (Ezek. 36:10–12)

 

여기서 ‘전 지위’(antiquiti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고대 교회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house of Israel)과 ‘내 백성 이스라엘’(people Israel)은 원시 교회, 곧 이방인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교회가 ‘사람’(man)이라 불립니다. where by “antiquities”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es; by the “house of Israel” and “people Israel,” the primitive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ll which churches are called “man.”

 

[3] 신명기에서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So in Moses:

 

7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8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32:7, 8) Remember the days of eternity, understand ye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when the most high would give the nations an inheritance, when he would set apart the sons of man, he set the bounds of the people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Deut. 32:7–8)

 

여기서 ‘옛날’(days of eternity)은 태고교회를, ‘역대’(generation and generation)는 고대 교회들을 의미하며, ‘인종’(sons of man)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던 자들을 의미하는데, 이 신앙이 곧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number of the sons of Israel)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사람’(man)이라 불린다는 것도 예레미야서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where by the “days of eternity” is meant the most ancient church; by “generation and generation,” the ancient churches; the “sons of man” are those who were in faith toward the Lord, which faith is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That a regenerate person is called “man,” appears from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empty and void;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여기서 ‘땅’(earth)은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을, ‘하늘’(heaven)은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을, ‘사람’(man)은 선에 대한 사랑을, ‘공중의 새’(birds of the heavens)는 진리에 대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where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heaven” the internal; “man” the love of good; the “birds of the heavens” the understanding of truth.

 

[4] 또다시 말하기를, Again: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31:27) Behold the days come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Jer. 31:27)

 

여기서 ‘사람’(man)은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을, ‘짐승’(beast)은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말하기를, where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beast” the external. In Isaiah: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2:22) Cease ye from man in whose nostrils is breath, for wherein is he to be accounted of, (Isa. 2:22)

 

여기서 ‘인생’(man)은 교회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 말하기를, where by “man” is signified a man of the church. Again: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2) Jehovah shall remove man far away, and many things shall be left in the midst of the land, (Isa. 6:12)

 

이는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사람의 황폐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speaking of the vastation of man, in that there should no longer exist either good or truth. Again: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24:6) The inhabitants of the earth shall be burned, and man shall be left very little, (Isa. 24:6)

 

여기서 ‘자’(man)는 신앙을 가진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 where “man” signifies those who have faith. Again: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9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33:8, 9) The paths have been desolated, the farer on the path hath ceased, he hath made vain the covenant, he hath despised the cities, he hath not regarded man, the earth mourneth and languisheth, (Isa. 33:8–9)

 

여기서 ‘사람’은 히브리어로 ‘에노스’(Enosh)라 불립니다. 또 denoting the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Enosh.” Again: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precious than fine gold, and a man than the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moved out of her place, (Isa. 13:12–13)

 

여기서 처음의 ‘사람’은 ‘에노스’(Enosh)이고, 두 번째의 ‘사람’은 ‘아담’(Adam)입니다. where the word for man in the first place is “Enosh,” and in the second is “Adam.”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7에서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의미를 담아냅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사람’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해 왔는데, 그 이유를 여기서 분명히 밝힙니다. 그 근원에는 ‘최고 의미에서 오직 주님 자신만이 참된 사람’이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사람됨의 기준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지혜 그 자체이시며, 모든 참된 인간성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본래 주님께 속한 이름입니다.

 

이 점에서 천적 교회가 ‘사람’이라 불리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천적 교회는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교회 안에 그대로 살아 있는 상태가 천적 교회이며, 이때 교회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라 불립니다. 이어서 영적 교회도 ‘사람’이라 불리는데, 이는 그들이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교회는 완전한 모양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여전히 주님의 진리를 통해 그분을 닮아 가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내려와 일반적인 의미의 ‘사람’을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해력을 가진 모든 인간이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해력으로 인해 인간이 되며, 이 이해력의 정도에 따라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더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즉시 중요한 단서를 붙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구별은 지적 능력이나 사고력의 차이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데 근거한 신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력은 사람됨의 바탕이지만, 사랑에 뿌리내리지 않은 이해력은 참된 의미에서의 ‘사람’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을 번성하게 하신다’는 표현이 단순히 인구 증가를 뜻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전 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고대 교회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과 ‘내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인 교회를 가리키며, 이 모든 교회가 ‘사람’이라 불립니다. 이는 교회가 서로 다른 시대와 형식을 가졌을지라도,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을 때 동일하게 ‘사람’이라 불린다는 뜻입니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옛날’과 ‘역대의 연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태고교회와 고대 교회들의 흐름 속에서, ‘인종’은 주님을 향한 신앙 안에 있던 자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사상 체계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로 표현될 만큼 질서와 충만함을 가진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신앙과 사랑의 질서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지닌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서의 표현은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이 없으며’라는 말은 인간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선에 대한 사랑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과 ‘하늘’이 황폐해지고, ‘공중의 새’, 곧 진리에 대한 이해가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사람이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사람의 씨’를 뿌리신다는 말은,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을 다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여러 구절들도 같은 원리를 반복합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 일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람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상태에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나 ‘남은 자가 적도다’라는 표현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는 황폐의 상태를 말합니다. 반대로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앙을 지닌 자가 얼마나 귀한지를 강조합니다. 여기서 ‘에노스’와 ‘아담’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는 것도, 인간의 연약함과 본래적 이상이 동시에 대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AC.477이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사람’이란 생물학적 종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영적 이름’입니다.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린 것은 그들이 주님을 닮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후의 모든 참된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자들도 같은 이유로 ‘사람’이라 불립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사람됨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상실되며,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증언하는 책’으로 읽히게 됩니다.

 

 

 

AC.478, 창5:2,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사람’이라는 뜻의 보통명사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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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사람’(homo)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로 말하는 것이 신앙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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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5:2)

 

AC.476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로 말하는 것이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선언되고 증명되었습니다. 곧 남자, 또는 사람(vir)은 이해력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뜻하고, 여자 또는 여인은 의지,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며, 따라서 사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생명을 의미하는 이름인 하와라 불렸는데, 생명은 오직 사랑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에 의해 교회도 의미되며, 이는 이미 앞에서 보인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남자에 의해 교회의 사람(vir)이 의미됩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것은 교회가 영적 상태에 있었고, 그 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진 때의 상태이므로, ‘여자’(female)보다 ‘남자’(male)가 먼저 언급되는데, 이는 창세기 126–27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은 영적 인간과 관련되지만, 그 후 결혼이 이루어질 때, 곧 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질 때에는 더 이상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둘을 함께 의미하는 ‘사람’(homo)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곧바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and he called their name man)는 말이 뒤따르는데, 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That by “male and 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was declared and proved above, where it was shown that the male or man [vir]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belongs to it, consequently everything of faith; and that the female or woman signifies the will, or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consequently whatever has relation to love; wherefore she was called Eve, a name signifying life, which is of love alone. By the female therefore is also signified the church, as has been previously shown; and by the male, a man [vir] of the church. The subject here is the state of the church when it was spiritual, and which was afterwards made celestial, wherefore “male” is mentioned before “female,” as also in chapter 1:26–27. The expression to “create” also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man; but afterwards when the marriage has been effected, that is, when the church has been made celestial, it is not said “male and female,” but “man” [homo], who, by reason of their marriage, signifies both; wherefore it presently follows, “and he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church.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6, 27)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6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교회의 내적 구조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앞서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미 충분히 증명했다고 말하면서, 이제 그 이유를 인간 내면의 구조로부터 풀어냅니다. 남자, 곧 사람(vir)은 이해력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뜻하며, 이는 곧 신앙의 영역입니다. 반면에 여자, 곧 여인은 의지와 그에 속한 모든 것을 뜻하며, 이는 사랑의 영역입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쌍이며, 교회의 생명은 바로 이 결합에서 나옵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남자와 여자를 역할이나 지위의 차이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이해력(understanding)과 ‘의지(will)라는 두 근본 기능으로 나누고, 그 각각이 신앙과 사랑에 상응한다고 말합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능력이고,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인간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를 이해하되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머리에 머무는 지식이 되고, 사랑은 있으나 진리가 없으면 그것은 방향 없는 열정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말하며, 교회를 이 둘의 결혼으로 표현합니다.

 

이 맥락에서 여자가 ‘하와’라 불린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생명’을 뜻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오직 사랑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생명을 비추는 빛이지만, 생명 자체는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생명을 상징하고, 나아가 교회 자체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지만, 그 진리가 생명이 되려면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 때문에 여자는 교회를 의미하고, 남자는 교회의 사람(vir), 곧 그 교회 안에서 신앙의 역할을 맡은 자를 의미합니다.

 

AC.476은 또한 성경의 표현 순서에 주목하게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시점은 교회가 아직 영적 상태에 있었고, 그 후에 천적 상태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언급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126–27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영적 상태에서는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먼저 나타나기 때문에, 이해력과 신앙이 앞서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사랑보다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성장의 순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시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을 끌어옵니다. 이 말은 영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새롭게 세워질 때, 그는 ‘창조’됩니다. 그러나 그 이후,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질 때, 곧 교회가 천적 상태로 만들어질 때에는 표현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남자와 여자’라고 하지 않고, ‘사람(homo)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기능, 곧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하나로 결합되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말이 뒤따릅니다. 여기서 ‘사람’은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혼된 상태, 이해력과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상태가 바로 참된 인간이며, 참된 교회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신앙이 따로 말하지 않고, 사랑이 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생명으로 나타납니다.

 

AC.476은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사람’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신앙과 사랑을 말로는 함께 이야기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바로 이 ‘사람’의 상태를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생명이었고,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AC.476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신앙만으로도, 사랑만으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직 신앙과 사랑이 결혼될 때에만 존재하며, 그 결혼이 완성될 때 성경은 더 이상 ‘남자와 여자’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의 이름으로 ‘사람’이라 부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창세기 5장의 짧은 표현 하나하나가 교회의 깊은 비밀을 드러내는 언어로 살아나게 됩니다.

 

 

 

AC.477, 창5:2, 주님을 닮은 상태여야 ‘사람’(man)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 ‘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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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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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hey were created. (5:2)

 

AC.475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로 말하는 것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의미하며,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calling their name man)는 말은 그들이 교회였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특별한 의미에서 ‘사람’(man, homo)이라고 불립니다. By “male and 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by “calling their name man,” is signified that they were the church, which, in an especial sense, is called “man” [homo].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5에서 창세기 52절의 짧은 표현 속에 담긴 교회의 본질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남자는 신앙, 곧 진리를 의미하고, 여자는 사랑, 곧 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 발생하는 영적 구조에 관한 말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곳에는 교회도, 생명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결혼은 단순한 협력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결합이며, 어느 한쪽이 빠지면 다른 한쪽도 그 본래의 성격을 잃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차갑고 메마른 지식으로 남고, 신앙 없는 사랑은 방향을 잃은 감정으로 흩어집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결합이 가장 온전하게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언제나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은 신앙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는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단순히 인간 개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람(homo)은 ‘신앙과 사랑이 결혼된 상태’, 곧 교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는 것은, 그들이 단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곧 교회 자체였다’는 선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매우 독특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태고교회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삶, 사고, 사랑, 인식 전체가 교회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교회에 ‘출석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살면서 곧 교회였고, 사랑하며 곧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다’는 말에 담긴 깊은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에서 ‘특별한 의미에서 교회가 사람이라고 불린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성은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단지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혹은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참된 의미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인간은 주님을 향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혼된 상태에서만 나타납니다. 이 결합이 깨어지면,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성경적 의미에서의 ‘사람’은 더 이상 아닙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을 둘로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구조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신앙과 사랑의 결합으로 존재하며, 이 결합이 있을 때에만 ‘사람’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이 결합이 가장 온전했던 시대였기에,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한 이름으로, 곧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사랑과 결혼되어 있는가, 아니면 분리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사랑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신앙의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다시 결합될 때, 교회는 다시 ‘사람’이 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생명이 되고, 제도가 아니라 관계가 됩니다.

 

결국 AC.475는 교회의 정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줍니다. ‘교회란 신앙과 사랑이 결혼된 상태이며, 그 상태가 곧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이 정의가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교회였고, 그래서 창세기 5장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남자와 여자’라는 성경의 표현은 단순한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언어로 살아나게 됩니다.

 

 

 

AC.476, 창5:2,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사람’(homo)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로 말하는 것이 신앙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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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태고교회의 ‘번성’(propagation)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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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르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번성과 계승은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Since therefore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birth or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is first described as coming from a spiritual to a celestial state, for the propagations follow from thi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4에서 창세기 5장의 전체 흐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이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단순한 ‘사람의 출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출생’, 곧 교회가 어떻게 생겨나고 이어졌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번성(propagation)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이란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상태가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계승의 원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5장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시작이 어떤 질서를 따라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출생을 ‘먼저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이르는 것’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출발점은 이미 완성된 천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태고교회의 인간도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영적 인간으로 세워진 다음, 그 영적 상태가 성숙하여 천적 상태로 이르렀습니다. 이 질서가 먼저 분명히 제시되지 않으면,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번성’과 ‘계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모든 번성과 계승은 상태의 질서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제도를 통해 퍼지는 것이 아니고, 혈통을 통해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내적 상태의 전달’을 통해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영적 상태로 세워지고, 그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성숙될 때, 비로소 그 상태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번성은 여기에서 나온다’고 단정합니다.

 

이 원리는 태고교회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태고교회의 ‘’, ‘가족’, ‘민족’은 우연히 생겨난 사회적 단위가 아니라, ‘이 영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확장된 결과’였습니다. 한 집은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인식이 천적 상태에 이른 공동체였고, 그 집의 영적 성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가족과 민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성숙되지 못했다면, 번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교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474는 ‘왜 창세기 5장이 먼저 형상과 모양, 곧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말하는가’를 분명히 설명해 줍니다. 성경은 곧바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이야기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이 어떤 상태로 만들어졌는지를 밝히고, 그 상태가 어떤 완성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 다음에야 비로소 번성과 계승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 순서가 아니라, ‘교회가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는 질서입니다.

 

설교적으로 보면,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성장을 숫자나 활동의 확장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교회의 참된 번성은 언제나 ‘영적 상태의 성숙’에서 시작됩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방향을 향해 자라지 않는다면, 외적인 확장은 있어도 내적인 계승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적 상태가 주님 안에서 깊어질 때, 교회는 비록 작아 보여도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열매’와 ‘전달력’은 노력의 많고 적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영적 상태로 세워지고, 그 영적 상태가 사랑 안에서 성숙해 가는 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천적 방향을 향해 가지 않는 영성은 머무를 수는 있어도 퍼질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번성’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결국 AC.474는 창세기 5장을 읽는 하나의 큰 관점을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의 출생과 계승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질서의 결과였습니다. 먼저 영적 인간이 세워지고,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로 완성되며, 그 완성된 상태에서 교회의 번성과 계승이 흘러나옵니다. 이 질서를 이해할 때, 창세기 5장은 더 이상 족보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살아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지도’가 됩니다.

 

 

 

AC.475, 창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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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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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3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영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보였습니다. ‘형상’(image)은 ‘모양’(likeness)을 위한 준비 단계이며, ‘모양’은 실제적인 복제(real replica)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으로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That a “likeness of God” is a celestial man, and an “image of God,” a spiritual man, has also been previously shown. An “image” is preparatory to a “likeness,” and a “likeness” is a real replica, for a celestial man is entirely governed by the Lord, as his “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6)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3에서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아주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인간을 뜻하고, ‘하나님의 모양’은 천적 인간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선 해설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지만, 여기서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한층 더 깊이 드러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형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모양’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준비 단계라는 점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선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배운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정해 갑니다. 이 상태는 매우 중요하고 귀하지만, 아직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와 ‘주님’이 구분되어 있고, 진리를 따르기 위한 선택과 싸움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형상(image)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모양(likeness)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준비 단계가 아니라, ‘실제적인 복제(real replica)입니다. 여기서 복제라는 말은 외형적인 모방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인간 안에서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선을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선을 인식하고 행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계산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자연스럽게 살아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가리켜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적으로’라는 말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에 묶여 있을 때가 진정한 속박이며, 주님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움직일 때가 참된 자유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께 강제로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뜻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님의 모양’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상’과 ‘모양’의 관계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형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형상은 모양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모양을 향해 성숙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류의 대부분은 이 사다리의 위쪽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만이 이 ‘모양’의 상태, 곧 천적 상태에 이르렀고, 이후의 교회들은 주로 ‘형상’의 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이 점에서 AC.473은 우리 신앙을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상’의 상태, 곧 진리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준비’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신앙적 선택을 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한 방향을 향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전적으로 다스림 받는 삶, 다시 말해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 그대로 이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지 ‘알고 애쓰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점점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합니다. 형상에 머물면 신앙은 긴장과 분투의 연속이지만, 모양을 향해 나아갈수록 신앙은 평안과 일치의 성격을 띱니다.

 

결국 AC.473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형상’으로만 두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형상은 모양을 향한 길이며, 모양은 인간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실제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는 이 모양의 상태를 살았고,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형상대로, 모양대로’라는 성경의 표현은 더 이상 추상적인 찬사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여정을 정확히 가리키는 언어가 됩니다.

 

 

 

AC.474, 창5:1, 태고교회의 ‘번성’(propagation)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의 출생, 곧 ‘번성’(propagation)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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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하다’(create), ‘빚다’(form), ‘만들다’(make)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day in which God created man)가 그가 영적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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