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사랑하여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거나(loves the Word and lives in charity), 기록된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simplicity of heart)으로 믿으며, 신앙에 관한 속뜻 진리(the truth of faith which is in the internal sense)에 반(反)하는 원칙들을 세운 적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읽는 동안 그에게 와있는 천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천사들의 눈앞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every particular)이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지각됩니다. 이 생명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말씀은 이 생명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내려왔을 때 태어난(from which the Word had birth)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사들 앞에 펼쳐지는 이 말씀 속 생명의 향연은 너무나 아름답고(beauty), 너무나 유쾌한 것(pleasantness)인데, 아울러 그때 그들의 모든 상태에 맞춰 형용할 수 없는 다채로움을 가진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과 함께 펼쳐집니다.
주님의 기록된 말씀은 비록 글자 상으로는, 즉 지상 인간의 언어로는 대충(crude) 살짝 조잡, 세련되지 못해 보여도 그 안에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 앞에(before good spirits, and before angels) 확 펼쳐지는 영적 천적인 것들(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로 충만한데, 그것은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말씀’은 성경 66권 중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 곧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가 담긴 말씀들을 말하는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습니다. 그 가운데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29권),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5권)(AC.10325)만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말씀을 사랑하여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거나 기록된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믿으며, 신앙에 관한 속뜻 진리에 반하는 원칙들을 세우는 일 없이’ 읽는 사람한테는 그가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가 위 목록에 없는 성경들을 읽을 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없기 때문인데 그때는 그에게 와 있는 천사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내적 생명만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는 비록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을 읽지만 우리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를 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말씀을 겉뜻으로 읽을지라도 우리 안의 천사들은 속뜻으로 읽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 힘써 창세기를, 힘써 출애굽기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속 사람 안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예를 들면, 속 사람의 강건함이 겉 사람의 육체, 몸의 강건함으로, 속 사람의 아름다움이 겉 사람의 얼굴빛과 피부로, 속 사람의 지혜와 지성이 겉 사람의 총명과 아이디어로 등등 속 사람의 충만함이 겉 사람의 모든 눈부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하나에서 열까지 천국과의 상응으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사람의 몸은 천국과 일대일 상응하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 생활을 통해 천국의 모든 부요와 능력이 내 삶,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천국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긴 명절 연휴, 가급적 저마다의 무슨 골방을 찾아 바이블 리딩의 시간 가지시기를 적극 권합니다.
‘복’(福, blessing)은 주고 안 주고의 문제, 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히 모든 것을 가령 자연계의 경우, 마치 저 하늘의 해가 그 빛과 열을 대지에 복사(輻射)하듯 아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저 햇볕을 받기 위해 볕을 쬐러 나가거나 커텐을 젖혀 방 안에 쏟아져 들어오게 하거나 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한테는 누구나 차별 없이 햇볕은 환히, 그리고 풍성히 비칩니다.
‘복’은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즉, 그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상태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는 것처럼 ‘복’은 주님으로부터 출발, ‘선택’하는 사람의 속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가며, 그렇게 해서 그의 겉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영계는 ‘상태’의 나라라 한 방에 뭐가 해결되거나 하는 건 별로 없습니다.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025년 가을, 저는 지금은 그동안 일종의 사명감으로 여러 해 거의 매일 해 온 SNS 사적 나눔에서도 물러나 은둔, 오직 스베덴보리의 저작들(Writings) 번역 및 이 블로그, 그리고 이 모든 걸 주일 설교 원고로 정돈하는 데에만 집중, 남은 삶을 올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수년간 마음 씀이 한순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걸 보면서 스베덴보리처럼 이 모든 나눔과 오픈 역시 오직 주님의 허락하에서만 진행되어야 함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 가령 이사야나 예레미야들 역시 그 받아적는 말씀들이 언제 사용될 줄 알고 받아적고 있었을까요? 모세의 오경이나 다윗의 시편, 그리고 다른 대선지서들과 많은 소선지서들은? 주님의 복음서들과 계시록은 또 어땠을까요?
저는 오직 주님 힘 주심을 의지하여 기록으로 남길 뿐 그걸 나중에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주님이 하실 일입니다...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네 번째 시간으로, 15절로 17절,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 시간입니다.
먼저 그 개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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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그런 일종의 동산입니다. 이 사람이 동산 안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습니다. 이 동산은 그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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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이 주시는 모든 퍼셉션을 가지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세상의 것을 가지고 그러거나, 감각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하거나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16, 17절)
아래부터 오늘 본문입니다.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22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천적 인간의 모든 걸 말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는 그가 그 모든 걸 누리게는 하셨으나 자신의 걸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 천사들은 무엇을 자기 걸로 소유하는 덴 별 관심이 없고 대신 그 쓰임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즉 주님께 무엇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걸 왜 주셨을까? 왜 허락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주신 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쓰임새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글들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9장, ‘천국의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357-365) 일부 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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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주236 따라서 천국에서 그들의 부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쓰임새와 일치한다. 선한 쓰임새란, 자신과 가족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훨씬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한 쓰임새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람이 나태한 생활에 빠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태한 생활은 사람의 생각을 그 타고난 악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에 해롭다. 쓰임새는 그 안에 신성을 담고 있는 만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신과 천국을 바라보고, 이 쓰임새에서 유익을 찾으며, 재물은 오직 부수적 유익으로 여기는 정도만큼 선하다.
주236. 모든 선에는 쓰임새에서 오는, 그리고 쓰임새에 따른 기쁨이 있다(AC.3049, 4984, 7038). 또 그 퀄러티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그러니까 쓰임새가 그런, 그런 것이 선이라는 말이다(AC.3049). 삶의 모든 행복과 기쁨은 쓰임새에서 온다(AC.997). 일반적으로 삶이라는 것은 쓰임새의 삶이다(AC.1964). 천사의 삶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으로, 그래서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로 이루어진다(AC.454).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는 목적들은, 그게 곧 쓰임새들인데, 주님과, 그래서 천사들이 관심 있어 하는 유일한 것들이다(AC.1317, 1645, 5844). 주님의 나라는 쓰임새들의 나라다(AC.454, 696, 1103, 3645, 4054, 7038). 쓰임새를 수행하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AC.7038). 모든 사람의 캐릭터는 그가 수행하는 쓰임새들의 캐릭터와 같다(AC.4054, 6815). 그 예 (AC.7038)
362
그러나 신을 믿지 않고, 그 마음에서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을 내버린 부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이와 반대다. 그들은 지옥에 있으며, 더러움과 비참함과 궁핍함 속에 있다. 그들이 목적으로 사랑한 재물이 그런 것으로 변한다. 또 단지 재물뿐 아니라 그 재물의 쓰임새 자체도 그렇게 변하는데, 그들의 재물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쾌락에 빠지며, 부도덕한 일에 더 많이, 더 자유롭게 몰두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 아니면 그들이 업신여기는 이웃들보다 높아지기 위해서 쓰였던 것이다. 그런 재물과 그 쓰임새에는 영적인 것은 전혀 없고, 물질적인 것만 들어 있기 때문에, 불결한 것으로 변한다. 부와 그 쓰임새 안에 있는 영적인 목적은 마치 몸 안에 있는 영혼과 같고, 습한 땅이 받는 창공의 빛과 같다. 위와 같은 재물과 쓰임새는 영혼이 떠난 몸이나 창공의 빛을 받지 못한 습지처럼 썩는다.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 천국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은 이와 같다.
천적 인간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가 그 사실을 지각하기(perceives) 때문이지요. 영적 인간 역시 그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입으로 합니다. 그가 그걸 말씀으로부터 배웠기(has learned) 때문입니다.
※ ‘perceive’와 ‘learn’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전자는 천국, 곧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노력으로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전자는 그 답이 하늘에서 오는 것이고, 후자는 그 답을 세상에서 찾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육적(肉的, corporeal)인 인간은 그 사실을 인정(acknowledge)도, 마지못한 시인(admit)도 안 합니다. 자기가 가진 건 뭐든지 ‘이건 내 거야’(his own)라 하며, 만일 그걸 잃게 되면 자기는 완전히 끝나는 줄로 압니다.
124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은 사람에게 속한 게 아닌, 주님에게 속한 거라는 사실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걸 보면 분명한데요,
※ ‘지혜,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을 앞 구절들에서는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으로 표상했지요.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마21:33) 집주인으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마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 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3:27)
이것이 과연 그렇다는 건 천국 아르카나를 아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한테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of every tree of the garden)는 네가 임의로 먹되
※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르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들이 말씀 안에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 비슷한 표현이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에 나옵니다. 본 절인 창2:16에서는 ‘나무’(every tree)만 나오지만, 이 창3:2에서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라 하여 ‘열매’까지 나오는 이유는, 전자는 퍼셉션을 가리키지만, 후자는 그 퍼셉션에 의한 산물, 곧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계승된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창3:1-13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 그러니까 주님 사랑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기 사랑으로 기울던 태고교회의 두 번째 상태(창2:18-25)에서 조금 더 위험해져 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점점 더 계속해서 심화, 아래 말씀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하고, 그들의 본성에는 대신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만 남았는데, 안 그러면, 이들은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AC.285)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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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다룬 16절 설명과 함께 이 말씀을 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됨과 선함에 익숙해지는 데 있어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는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는 건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조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은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의존,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모든 노력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십일 금식기도나 천일 예배, 불교의 참선, 면벽 수련(달마의 구 년 면벽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삼천 배, 오천 배 같은 불교의 절하는 법), 하안거, 동안거 등은 물론, 다양한 종교의 각종 종교적 수행 등인데요, 이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 五慾: 수면욕, 식욕, 색욕, 명예욕, 재물욕, 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慾), 애(愛)) 문제를 좀 어떻게 건드려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신앙의 신비를 좀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 지식, 곧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여 학자가 되더니 그 지식으로 신의 세계에 발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극 초월적 극기 수행을 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오만가지 세상 지식을 머리가 터질 듯이 추구하여 다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구원을 추구한다거나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위에서 밝힌 대로 신앙의 천적인 면만 파괴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 가령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하는 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저런 수도적 삶을 추구한 게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기에도 너무 바빠 자기를 사랑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2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 지식에 의존하여 들여다보고자 함, 이것이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와 그를 계승한 후손의 몰락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교회가 몰락하는 원인입니다. 여기서 거짓들뿐 아니라 삶의 악들 또한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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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이고 육적(肉的)인, 곧 세상과 몸의 지배 아래 사는 사람은 속으로 말하길, ‘신앙 및 신앙 관련된 모든 것에 있어 만일 내 감각이 나를 가르쳐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지 않거나 팩트가 나를 가르쳐 나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하지 않으면, 나는 안 믿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적인 것, 곧 세상에서 참이라 여겨지는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충돌할 리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은 천적이며 신에 속한 것(what is celestial and Divine)에 대해 자신의 감각을 가지고 좀 배우려고 하는데, 이런 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지혜를 얻고자 감각적 증거를 의존하면 할수록 사실은 자신을 더욱더 소경이 되게 할 뿐이기 때문이지요. 결국에는 아무 것도, 심지어 거기 영적인 어떤 것, 혹은 영생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결과는 처음 그가 세웠던 원리, 출발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선, 악과 관련된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걸 먹으면 먹을수록, 그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지혜를 구하되 주님으로는 오케이지만 세상으로는 아니기를 원하는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the Word)에서 말씀하신 것들은 반드시 믿어야 해, 왜냐하면 진리이니까!’ 그리고 이 원칙에 따라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정합니다. 그는 이성적 논쟁, 팩트 기반 지식, 감각적 증거, 그리고 물리적 현상을 확신하는 데 사용하며, 반대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은 뭐든지 옆으로 치워버립니다.
129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은, 사람은 자기가 가정하고 있는 원리, 원칙들, 심지어 그것들이 완전히 거짓이어도 이상하게 그것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이성(reasoning), 이 경우는 차라리 궤변인데, 이것들은 저 거짓들에 대해 역시 호의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을 지지하려는 수많은 고려 사항, 끝없는 뒷받침 논리를 끌어내어 분명 거짓임에도 불구, 그 생각을 컨펌(confirm), 곧 굳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좌파 왜 하세요? 페미(feminism, 여성주의)세요? 아니면 공산당이세요? 아니면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세요? 뭐 때문에 좌파를 하시는 거예요? 중국 화교세요? 아니면 대진연(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세요? 간첩이세요? 쿠바인이세요?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세요? 아니면 성소수자세요? 전라도세요? 약쟁이세요? 마약 판매 밀수범이세요? 음주 운전하셨어요? 뭐 때문에 좌파를 하시는 거예요? 25만 원 없으세요? 일 안 하세요? 세금 안 내세요? 태양광 사업하세요? 혹시 중국인하고 결혼하셨어요? 날강도세요? 공짜 좋아하세요? 평생 전월세 사실 거예요? 아니 도대체 좌파를 왜 하는 거예요? 아니면 혹시 간첩님이세요? 진짜 자유가 싫으세요? 도박하세요? 왜 나라를 공짜 밥 먹듯 함부로 하려고 하세요? 사회주의자세요? 김정은 시진핑 존경하세요? 이재명을 사모하세요? 아니면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세요? 종북 빨갱이 맞나요? 코피 꺼리 주시나요? 종간 사상하세요? 문익환 목사랑 교회 다니셨나요? 광주 학살범한테 10구 훈장 욕심난 거 맞죠? 설마 조카가 살인범이신가요? 이거 지금의 좌파잖아요. 좌파 왜 하세요?
이 글은 현 시국 관련 글이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사상적 기원이 같아 인용합니다. 대한민국뿐 아닙니다. 미국도, 프랑스도 세상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집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보니 이런 걸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라고, 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전 세계 정치지도자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 하더군요. 그 예 중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맹목적 그린 에너지 추구와 이민자 허용이라고 합니다. //
이런 이유로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믿어서는 안 돼’라는 걸 하나의 원칙으로 정한 사람은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은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무슨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 즉 주님의 말씀으로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그러면 이후 모든 것이 뒤따르면서 이 사람은 눈이 밝아지는데, 심지어 이성(理性)에 관한 것들, 그리고 그동안 습득한 기억-지식에 관한 것들도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과학이라는 것을 배우면 안 된다가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아주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세상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면 안 된다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있는 학자들은 대신 다음의 원리, 곧 ‘주님 말씀을 믿기’라는 원리로 해야 하는데, 그래서 가능한 한 자연적 진리들을 가지고 영적 천적 진리들을 확증, 컨펌하되 학자들 세계에서 쓰는 그런 용어들을 써서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출발점은 주님이셔야 합니다.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고요.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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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 즉 지혜를 주님이 아닌 세상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 ‘동산’(garden)은 감각 및 기억-지식에 속한 것, 곧 감각적 증거와 팩트 기반 정보입니다. 그에게 있어 ‘에덴’(Eden)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그의 ‘동쪽’(east)은 서쪽, 즉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가 가진 모든 기억-지식, 곧 그가 배운 모든 팩트 기반 지식인데, 이는 지긋지긋한 지식, 끔찍한 지식입니다. 그의 ‘두 번째 강’(second river), 거기가 ‘앗수르’(Assyria)인데, 정신 나간 이성질(理性질, reasoning)과 그로 인해 생산되는 거짓입니다. 그의 ‘세 번째 강’, 거기는 ‘에디오피아’(Ethiopia), 곧 ‘구스’(Cush)인데, 이것은 악과 거짓을 옹호하는 원리들입니다. 이 원리들은 저런 이성질 가운데서 발전된 건데, 이 원리들이 그가 가진 신앙의 교리문답서입니다. 그의 ‘네 번째 강’은 이런 일련의 결과로 나오는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걸 ‘마술’(magic)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왜 ‘애굽’(Egypt)을 가리켜 기억-지식, 곧 학구적 학식이라 하는지, 왜 오컬트(occult) 지식, 곧 주술적 지식이라 하는지, 그리고 후에 왜 이것을 마술로 채택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 여기저기서 볼 수 있듯, 그가 이런 지혜로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모든 게 정확히 정반대임을 봅니다. 영계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하든지, 아니면 등을 돌리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 에스겔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겔29: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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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창세기 2장 네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 선악과’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2 두 번째 단락(창2:18-25)을 시작합니다. 첫 번째 단락(창2:1-17)이 상태변화, 곧 영적(靈的, spiritual) 상태에서 천적(天的, celestial) 상태로 변화한 태고교회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단락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져 간, 곧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살고파 하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창1은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한 영적 인간 이야기, 곧 한 사람의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마치기 앞서 한 말씀 더 드리면, 창세기 4장만 되어도 그 진도 따라가기가 정말 쉽지 않을 터이니 아직 2장 하고 있을 때 부지런히 복습, 이 내용을 나름 충분히 이해들을 하셔야 합니다. 창1, 2, 3에 대한 이해가 이후 모든 내용 전개에 기초가 되기 때문인데요, 지금 이 창, 출 속뜻 강해 설교는 대략 10년 마라톤으로 정한 것입니다. 절대 그냥 누가 저절로 떠먹여 줄 줄로 아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속 사람 문제는 본인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빛 비추심을 늘 구하면서 이해가 될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읽고 또 읽고 하셔야 합니다. 세상 그 많은 지식으로는 천국 갈 수 없어도 이 걸로는 능히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속화’란, 세상 것, 세상, 세속적 가치관으로 천국에 대한 걸 유추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했으니 천국 가면 아랫사람들을 많이 두고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겠네, 천국은 날마다 잔치하는 곳이라 했으니 날마다 큰 연회 베풀어 가장 기름진 음식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겠네, 천국 길은 황금길이요 집은 보석 집이라 했으니 황금을 비롯 각종 보석 등 나는 큰 부자가 되겠네 하는 식으로 천국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세속화는 사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현대문명의 시대인 오늘날에 생긴 게 아니라 그 기원이 아득히 먼 옛날, 곧 태고교회 그 후손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고교회의 선조들한테는 감각과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비유하자면, 오직 천국의 어떠함을 알게 해주는 일종의 모델하우스요 운전할 때 쓰는 네비일 뿐이었지만, 점점 자기 본위로 가라앉아간 그 후손들한테는 반대로 이 모든 감각적인 것이 오히려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한테는 한낱 도구였던 것들이 말이지요.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걸 이걸 가지고 이성질(理性질, reason)을 하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태고인들은 천적(天的, celestial), 그러니까 상응 능력이 있어서, 땅 위 온 세상 만물을 눈으로, 곧 육안(肉眼)으로 보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물이 가리키고 표상하는, 천국에 있는 어떤 신성한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상응의 사람들이 되면 일단 세상에서 추구하던 모든 세속적인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게 됩니다. 즉 무슨 세상 지위를 탐하거나 무슨 세상 것을 누리려 하거나 소유하려 하는 모든 노력을 더 이상 일절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의 저급함과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의 차이를 알았기 때문이지요.
대신 그것들의 쓰임새에만 집중합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셔도, 또 무슨 누림이나 소유를 많게 하셔도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합니다. ‘왜 나를 이 자리에 오르게 하셨을까?’,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게 하실까?’, ‘왜 내게 이런 재산과 명예를 허락하실까?’ 등등 말이죠. 천국 천사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들의 시각(sight)은 그저 창문 역할, 안경 역할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 뭘 봤는지를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말(speech)이었습니다... (AC.241)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of every tree of the garden)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
우리말 번역은 원문에는 없는 ‘열매’를 추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함으로써 아르카나가 더욱 흐릿하게, 안 보이게 하는 아주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성경 번역자들이 말씀 안에는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한다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에 나옵니다. 위 창2:16에서는 ‘나무’(every tree)만 나오지만, 이 창3:2에서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라 하여 ‘열매’까지 나오는 이유는, 전자는 퍼셉션을 가리키지만, 후자는 그 퍼셉션에 의한 산물, 곧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계승된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3:1-13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 그러니까 주님 사랑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기 사랑으로 기울던 태고교회의 두 번째 상태(창2:18-25)에서 조금 더 위험해져 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점점 더 계속해서 심화, 아래 말씀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으로,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지식을 박탈당하고, 그들의 본성에는 대신 아주 더러운 사랑들과 신념들(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만 남았는데, 안 그러면, 이들은 신앙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AC.285)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모세는 모세오경을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그 긴 내용, 특히 레위기는 그 자세한 묘사와 구체적 상황에 있어 거의 하이라이트인데... 그 길고 자세한 내용을 녹음기도 없던 시절, 어떻게 다 기억하고 기록했을까요? 지금처럼 메모를 위한 간편한 필기도구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모세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억력 천재였을까요? 요셉은, 다니엘은 어떻게 그 은밀한 꿈을 듣거나 듣지도 않고 풀 수 있었을까요? 또한 다음 요한복음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하나 더 있는데요, 저는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남기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49-1756, 라틴, 총 10,837개의 글)를 지금 8년째 읽고, 번역 및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주석은 총 10,837개의 글로 된 대 저작입니다. 제가 정말 놀라고 또 놀라는 것은, 글의 내용상 어떤 보충 설명이 필요할 때 이를 위해 해당 부분에 괄호가 등장하고 그 안에 해당 글 번호들이 주욱 나열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말씀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속뜻, 즉 영적인 뜻이 있다(AC.1143, 1984, 2135, 2333, 2395, 2495, 4442, 9048, 9063, 9086).
즉, 저 글들을 더 참고하면 더욱 깊고 풍성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런 걸 할 수 있으려면 저 10,837개의 글의 무슨 키워드들을 다 메모하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건데... 컴퓨터도 없던 시절, 그래서 지금처럼 ‘검색’이란 걸 할 수도 없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그리고 그가 거의 매일 영계를 다녀오느라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다는 사실 또한 감안하면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계 3대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게 과연 머리만 좋다고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이 모든 것이 다 퍼셉션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처음 눈을 뜬다고 바로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 충만한 이 퍼셉션을 지각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사람이 영계에서 처음 눈을 뜰 때, 돕는 천사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로 그의 눈을 열어 천국의 빛, 곧 이 퍼셉션을 받아들일 수 있게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궁금한 일이 생기면 바로 어떤 답을 내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퍼셉션, 곧 지각을 하는 것이지요. 어떤 궁금한 걸 알기 위해 무슨 도서관을 찾거나 뭘 검색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에덴동산에 나오는 나무들이 표상하는 바가 바로 이 퍼셉션입니다. 그래서 거기 나오는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은 관련 퍼셉션이 시작되는, 즉 관련 퍼셉션으로 살아가는 걸 말하는 것이지요. 즉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천적 능력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세상 지식의 섭취 역시 중요하지만,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며, 속 사람의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에 천적 생명을 불어넣는 퍼셉션의 추구는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영적 능력, 역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래 회막 기구를 만들게 하신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말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3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4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6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7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8상과 그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9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10제사직을 행할 때에 입는 정교하게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의 아들들의 옷과 11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31:1-11)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쓸 모든 일을 할 줄 알게 하신 자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할 것이니라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곧 그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그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자를 부르매(출36:1, 2)
이들은 단순히 일만 잘하는 장인이었던 게 아니라 회막 각 기구에 담긴 속뜻, 곧 아르카나를 깊이 알았던 사람들이었는데요, 우리도 세상 살면서 익힌 여러 전문 기술이 기름 부음을 받아 거기 담긴 상응 비밀을 아는 전문가들이 되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주님께 상달될 수 있는 그런 쓰임새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예배,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