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천적 인간이‘일곱째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일곱째날’과‘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다른삶의본성이무엇인지알지못하면결코알수없는’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그렇다면주님께서는왜천적인간의본성을처음부터모든사람에게명백하게설명하지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AC.85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AC.85는‘왜이아르카나가알려지지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왜주님께서그것을더일찍명시적으로계시하지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인간의 수용 상태,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속뜻의 보존,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속뜻이처음부터명백하게쓰여있었다면교회사적혼란이없었을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지금까지알려지지않았다’,‘밝히는것이허락되었다’,‘이것은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그때마다‘왜이제야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보다 더 깊은 질문,곧‘왜이러한영적실재가오랫동안알려지지않도록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앞으로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AC.85심화1)
AC영어 원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작은 따옴표 문제가 눈에 들어옵니다.AC.83의Potts영어는‘whenmanhasbecomethe“sixthday”’라고 되어 있습니다.왜‘“thesixthday”’가 아니라 정관사‘the’를 따옴표 밖에 두고‘“sixthday”’만 묶었을까요?두 표기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이 차이에 별도의 교리적 또는 상응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the“sixthday”’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sixthday라는상징자체를특별히강조한다’거나,반대로‘“thesixthday”’라고 되어 있으면‘정관사까지포함한특정상태전체’를 강조한다고 구별할 충분한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는 영어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영어로 쓴 문장이 아니라 라틴어 원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문입니다.따라서 영어의 따옴표 위치에는 번역자와 편집자의 판단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특히 영어에서는 어떤 명사구 가운데 핵심 표현만 인용하거나 특별한 용법으로 표시하면서 관사나 다른 문법 요소를 따옴표 밖에 둘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따옴표가‘the’를 포함했는지 여부만으로 속뜻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AC.83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따옴표의 범위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여섯째날’을 문자적인 하루가 아닌 사람의 상태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그는 사람이‘여섯째날’이 되었을 때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이‘다이루어졌다’고 하며,그 이유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따라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the’가 따옴표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아니라‘여섯째날’이라는 표현이 이 문맥에서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AC영어 원문을 읽을 때에도 유용한 원칙입니다.Potts영어의 따옴표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말씀의 어떤 표현을 집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그래서 현재 번역에서도 영어 원문이 실제로 따옴표로 표시한 핵심 표현을 한국어와 함께 보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영어 번역문의 따옴표 위치 자체를 새로운 상응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최종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영어 번역의 문장부호보다 라틴어 원문을 우선해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Potts영어는 매우 중요한 번역 자료이지만,따옴표와 같은 편집 요소까지 모두 스베덴보리 자신의 신학적 의도를 직접 나타낸다고 전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따라서 번역상의 중요한 의미 차이가 의심될 때에는 라틴어 어휘와 문법을 확인하고,영어의 문장부호는 그다음 참고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the‘sixthday’’와‘‘thesixthday’’를 서로 다른 영적 상태나 서로 다른 상응으로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AC.83에서 중요한 것은‘여섯째날’이 단순한 시간 표시를 넘어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를 가리키며,그 상태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영어 따옴표는 그 표현을 알아보도록 돕는 표지로 사용하되,따옴표의 범위 자체에서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AC.83심화1)
사13:12에서 여호와께서는‘내가사람을순금보다희소하게하며인생을오빌의금보다희귀하게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는 것이 인간의 악 때문이라면,왜 말씀은 마치 주님께서 직접 사람을 희귀하게 만드시는 것처럼‘내가’그렇게 하겠다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먼저AC.82자체가 이 질문에 직접 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사13:12-13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하늘’과‘땅’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따라서AC.82만 가지고‘내가사람을희귀하게한다’는 표현의 속뜻을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AC를 계속 읽다 보면 반복해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말씀에는 주님께서 노하시고,벌하시고,멸하시며,때로는 인간에게 악한 결과를 직접 가져오시는 것처럼 표현되는 곳들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이러한 표현을 말씀의 외적인 나타남과 인간에게 보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주님에게서는 선과 진리만 나오지만,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주님께서하신다’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하나는 말씀의 문자에 실제로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고,다른 하나는 그 표현으로부터‘그러므로악이나파괴의근원이주님이다’라고 결론짓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가르침에서는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악과 거짓의 근원을 주님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허용’이라는 문제도 나중에 중요하게 등장합니다.주님께서는 악을 원하시거나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지만,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안에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그러나‘허용한다’는 것은 악을 승인하거나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와 분리된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며,주님께서는 허용되는 것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목적을 향하여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러한appearance와permission에 관한 전체 교리를 사13:12한 절에 곧바로 대입하여‘이구절의뜻은정확히이것이다’라고 확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지금AC.82에서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하늘’과‘땅’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다는 증거로 인용했다는 것입니다.‘내가사람을희귀하게하며’라는 표현이 왜 이런 형식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생겨난 정당한 독자 질문이지만,그 답은AC전체에서 말씀의 표현 방식과 신적 섭리를 더 배우면서 점차 분명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심화에서 먼저 기억할 원칙은 간단합니다.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떤 악한 결과를 직접 일으키시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악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동시에 문자에 기록된‘내가하리라’라는 표현을 임의로‘사실은주님이하지않으셨다’고 지워 버려서도 안 됩니다.먼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존중하여 읽고,그 표현이 속뜻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해당 원리를 설명하는 곳들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13:12의 질문은 단순히 하나의 난해한 구절을 해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앞으로AC를 읽으면서‘왜주님께서이렇게하신다고기록되어있을까?’라는 질문을 만날 때마다,문자에 나타난 표현과 주님의 실제 본성,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신적 허용 및 섭리의 관계를 성급하게 혼합하지 않고 구별하여 읽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AC.82심화1)
창2:16-17을 개역개정과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개역개정은‘동산각종나무의열매는네가임의로먹되’, ‘선악을알게하는나무의열매는먹지말라’고 번역합니다.그런데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Ofeverytreeofthegardeneatingthoumayesteat’, ‘ofthetreeoftheknowledgeofgoodandevil,thoushaltnoteatofit’이라고 되어 있어‘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문자적으로는‘동산의모든나무에서너는먹을수있다’, ‘선악을알게하는나무에서는먹지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따라서AC에 실린 영어가‘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나무에서먹는다’또는 문맥에 따라‘나무를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개역개정의‘나무의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따라서‘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개역개정의‘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열매’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나무의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그러나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AC의 영어가 실제로‘나무에서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오히려‘성경번역’과‘AC의속뜻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AC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AC.80심화1)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AC.67부터 이러한 표현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이제AC.71에서는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 것까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합니다.그렇다면 이‘허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주님께서 직접‘이제이것을기록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AC.71자체가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이 번호에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도 없고,천사가 지시했다는 말도 없으며,퍼셉션이나 유입을 통해 알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따라서‘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만 가지고 그 전달 방식을 하나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합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할 때에는 그렇게 말합니다.AC.67에서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고,AC.70에서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과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그런데‘허락’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알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적어도AC.71까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그의 기록에 더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스베덴보리가그렇게느꼈다’는 정도로 낮추어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그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이나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그는 일관되게‘주님의신적자비’와‘허락’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 모든 일을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답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입니다.첫째,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일을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습니다.둘째,그 허락이 매번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AC.71이 말하지 않습니다.직접적인 말씀인지,영적 교통 가운데 주어진 인식인지,다른 어떤 방식인지 이 한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읽으면‘허락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신비화할 필요도 없고,반대로 단순한 문학적 겸손의 표현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그리고 그 표현은 독자에게 그의 자기 이해를 보여 줍니다.그는 자신을 말씀의 아르카나와 다른 삶의 실상을 스스로 발견하여 발표하는 독립적인 탐구자로 제시하지 않고,그것들을 알고 보고 밝히도록 허락받은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그의 기록을 더 읽으면서 이러한‘허락’의 성격을 밝혀 주는 직접적인 설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이해를 더 넓힐 수 있습니다.그러나AC.71의 독자는 아직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는‘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그러나‘어떻게허락되었는가’는 여기서 말하지 않았습니다.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증언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AC.71심화1)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인데,이는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입니다.’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천적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천적기원들’,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천적인것의근원이어디에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곧 주님의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주님의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천적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천사가 천사인 까닭도,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AC.162가‘온천국은하나의천적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기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본문도‘주님께서천국과천적인간의모든것안에서모든것이시므로,천국과천적인간은그분으로말미암아천적이라한다’고 설명합니다.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혼인의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AC.162가 천적 혼인을‘한분주님과하나의천국,곧머리가주님이신하나의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오직주님만이천적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근원은인간에게있지않고주님에게있다’는 것입니다.(AC.162심화1)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여기서 처음으로‘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AC.161은 그 답을‘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AC.149에서는 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오직 주님의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인간은‘생명의기관’이라고 했습니다.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내가생각하고느끼고행동한다고경험하는것은무엇인가?모든생명이주님으로부터온다면나의삶은어디에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AC.161이‘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아주 평범한‘행위’하나를 예로 듭니다.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이들은 구별됩니다.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이부분은속사람이고이부분은겉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하나의 삶,하나의 의지,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이것이AC.161이 말하는‘하나로서활동하고하나처럼보이는’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곧 자기들의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고,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인간의proprium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신부와아내’라고까지 했으며,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나라는존재가점점없어지는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주님께서안에서움직이시고인간은밖에서수동적으로따라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천적·영적 생명과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내삶을내삶으로살아가지만,그생명의근원은나자신에게있지않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이것이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AC.161심화1)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전부터서로구별되는세신적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본래부터인간의이해를초월할만큼모순적인신비인가, 아니면교회가하나님을세영원한위격으로설명하면서이해하기어려워진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세신적인격의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한분이며삼위일체가있다’고 말하지만, ‘그셋이어디에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장 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장 24절의 ‘한몸’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연합된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장 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것은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형상을따라우리의모양대로우리가사람을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아니었던겁니다’, ‘하나님안에는이미서로대화하고의논하시는우리가계셨던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대화하고의논하시는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한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세분이같은순간에각자의자리에서동시에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인3역’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인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서로구별되는세신적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전부터존재하던세인격이잠시한장면에동시에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빛, 열, 생명을살리는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다가오시는모습은셋이지만그본질은완전히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계획하고, 성자가실행하고, 성령이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한분이계획하고, 성자라는다른분이지상으로내려와값을치르고, 성령이라는또다른분이그것을인간에게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그한번의죽음으로우리의값을단번에그리고영원히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일상에서누리는다섯가지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아버지, 오늘하루를주관해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사랑을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저를인도해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한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주예수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기도할때마다삼위일체하나님전체와만나고있는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세분이동시에기도를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한분주님안에신성의충만이있기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사랑이시다. 그런데혼자서는사랑할수없다. 그러므로창조이전부터성부와성자와성령께서서로사랑하고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되기위해하나님안에최소한복수의인격이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잘못가르치는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한분’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완벽하게하나로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버리지말라. 그러나그삼위를세영원한인격에게나누지말라. 그삼위는한분주예수그리스도안에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세분이어떻게하나가되는가?’에서 ‘한분하나님안에서성부와성자와성령의삼위가어떻게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아직도어려운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어려운까닭은반드시하나님자체가모순적인신비이기때문만은아닙니다. 우리는오랫동안한분이라고고백하면서세분을생각하도록배워왔기때문일수도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삼위일체를없애지않습니다. 오히려흩어져있던삼위를다시한분주님안에모읍니다. 그때성부께갈것인가, 성자께갈것인가, 성령께구할것인가하는신자의오래된혼란도새로운빛아래놓입니다. 주예수그리스도께나아가면됩니다. 그분안에신성의모든충만이있기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안개를걷어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세분이어떻게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셋이한분주님안에서어떻게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장 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구하는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근심이없게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게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잘되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남을아프게하는사람이되지않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수고로이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자음순서를바꾼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이름과고통을뜻하는오체브사이에의도적인말놀이가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와 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나를아프게하지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와 HCSB 계열은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고통을야기하지않게해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번역이저처럼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itmaynotgrieveme’, 곧 ‘그것이나를근심하게하지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Imaynotcause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악에서지켜주시고’, ‘재앙으로부터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자체가여러해석의가능성을가지고있으며, 그가운데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이해도실제번역전통속에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남에게고통을주지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고통이오지않게해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가 ‘내소유를더늘려주십시오’, ‘나를더유명하게만들어주십시오’, ‘내사역을남들보다크게만들어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구했느냐, 복을구하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복의중심에누가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더인정받게해주십시오’, ‘내이름이더높아지게해주십시오’, ‘내가다른사람보다성공하게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더많은사람에게선을행할수있게하시고, 더큰책임을감당하게하시며, 주님께받은것을더넓게쓰게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다른사람에게고통을주지않게해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섭리’ 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기독교’ 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나쁜일이생기지않도록해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제안에있는악이다른사람에게흘러나가지못하게해주십시오. 제말과행동과욕망때문에다른사람이상처받지않게해주십시오. 그리고그악을단순히억제하는데서끝나지않고, 그것이주님께죄임을보고돌이키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사람이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섭리’(Divine Providence, 1764)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남에게피해를안끼치도록제성격을잘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손이나와함께하사, 제가악을행하지않도록하시고, 제안에서악을일으키는것까지주님께서다스려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손으로나를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넓혀주십시오’와 ‘주의손이나와함께하게하십시오’와 ‘악에서지켜주십시오’와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게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주신선과진리의삶의영역을넓혀주십시오. 그러나그것을제힘으로소유하려하지않게하시고, 언제나주님의손이저와함께하게하십시오. 제안의악이그넓어진지경안으로흘러들지않게하시며, 제가받은능력과영향력이오히려다른사람을상하게하는도구가되지않게해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장 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기도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지경을넓혀내것을크게해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제게맡기실수있는쓰임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다른사람들에게고통을주지않도록그런내가될수있도록인도해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사람이나에게상처를주었습니다’, ‘저사람때문에내가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사람의악’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내안의악’입니다. ‘나는누구에게고통을주고있지는않은가? 내proprium의자존심과지배욕과인정욕과탐욕과분노와냉혹함때문에가까운사람이힘들어하고있지는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내성격이원래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주님께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고통을당하지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와 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고통이없게하옵소서’와 ‘내가고통을주지않게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저를보호하여주십시오. 그러나무엇보다제가악의통로가되지않게하십시오. 제지경을넓혀주십시오. 그러나그것이제proprium의지경이아니라주님의선과진리가흘러갈쓰임의지경이되게하십시오. 주의손이저와함께하시되, 그손으로제주변의장애물만치워달라고하지않게하시고, 먼저제안의악을보게하시며그것을죄로여겨피하게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없는인생과성공을보장받는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받을수록더선한사람이되게하시고, 지경이넓어질수록더많은쓰임을감당하게하시며, 힘이커질수록아무도해치지않게하시고, 무엇보다그모든과정에서주님의손을떠나지않게해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사그를만나는모든사람에게서죽임을면하게하시니라’(JehovahsetamarkonCain,lestanyoneshouldsmitehim)는주님께서신앙을특별한방식으로구별하셔서그것이보존되게하셨음을의미합니다.이것은‘표’(mark)와어떤사람에게‘표를하는것’(settingamark)이구별하는수단을의미한다는데서분명합니다.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That “JehovahsetamarkonCain,lestanyoneshouldsmite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a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Thus in Ezekiel:
여기서‘이마에표를하는것’(markingouttheforeheads)은실제로그들의머리앞부분에어떤표나선을그린다는뜻이아니라,그들을다른사람들과구별하는것을의미합니다.이와같이계시록에서도where by “markingoutthe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So in John, it is said that
같은것이유대교회에서는첫째이자큰계명을손과이마에매는것으로표상되었습니다.이에관하여신명기에서는다음과같이읽습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이것으로사랑에관한계명을다른모든계명보다구별해야한다는것이표상되었습니다.이로부터‘손과이마에표를하는것’(markingthehandandtheforehead)의의미가분명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thehandandtheforehead” becomes manifest.
이구절들로부터이제‘표’의의미가분명합니다.그러므로가인이라하는어떤특정한한사람에게실제로어떤표가주어졌다고생각해서는안됩니다.말씀의속뜻에는문자적의미에담긴것과는전혀다른것들이들어있기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AC.396은 ‘가인의표’가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확증합니다. 앞의 AC.392에서는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셨다’는 것이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먼저 밝혔습니다. AC.393-395에서는 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에서는 ‘표’라는 말 자체가 말씀에서 실제로 ‘구별’을 의미하는지를 에스겔, 계시록, 신명기, 이사야, 시편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가장 먼저 인용되는 겔9:4는 이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실제 머리 앞부분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그리는 것으로 읽지 않고,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것’으로 풀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표의 외형이 아니라 그 표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4장의 가인의 표 역시 같은 원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계9:4의 ‘이마에하나님의인침을받지아니한사람들’도 같은 증거로 제시됩니다. 여기서도 이마에 있는 표는 사람을 영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표’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표시라기보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도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붙은 특이한 신체 표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계13:16의 ‘손과이마에표’가 언급되고, 이어 유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도록 한 규례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표상을 ‘사랑에관한계명을다른모든계명보다구별하는것’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신6장의 ‘마음을다하고뜻을다하고힘을다하여네하나님여호와를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이자 큰 계명으로 구별되어야 했으며, 그것을 손과 이마에 두는 행위가 바로 그 구별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우위에 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표’의 의미를 확증하면서 다시 ‘사랑에관한계명’을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표상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이 보존되는 목적은 신앙이 홀로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주된 것으로 인정하는 올바른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손’과 ‘이마’의 세부 상응을 이번 번호에서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증명하려는 것은 ‘표를한다=구별한다’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손과 이마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별도 심화로 펼치기보다, 사랑에 관한 첫째 계명을 다른 모든 것보다 구별하는 표상이었다는 본문의 논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의 사66:18-19와 시86:16-17도 같은 목적을 가집니다. ‘표’를 세우거나 ‘은총의표적’을 보이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상태가 다른 것과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서로 다른 독립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사실, 곧 말씀에서 ‘표’와 ‘표를하는것’이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인용군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여호와께서가인에게표를주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분리를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AC.393-394에서 설명했듯이 인류는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에는 신앙의 지식을 먼저 듣고 배운 뒤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AC.395에서 그 보존이 왜 거룩한 문제였는지도 설명되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칠배’의 벌이 있다고 한 것은 일곱이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이후의 구원을 위한 쓰임으로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AC.396의 ‘표’는 바로 그 특별한 구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표’에는 ‘구별’과 ‘보존’이라는 두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그렇게 구별하신 목적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하나님이가인을벌하시면서동시에보호하셨다’는 도덕적 이야기로만 읽으면 이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속뜻에서는 인류의 영적 상태가 낮아진 뒤에도 주님께서 앞으로 구원에 쓰일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번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문자적 독법에 경계를 세웁니다. ‘가인이라하는어떤특정한한사람에게실제로어떤표가주어졌다고생각해서는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표가어떤모양이었는지알수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예 그런 질문 자체가 속뜻의 초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해석하고 있는 가인은 한 개인의 전기적 인물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회적·영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창1-11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독법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의표가피부색이었을까,흉터였을까,어떤초자연적인표시였을까?’라고 추측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에서 찾는 아르카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떤표였는가?’라는 외적 모양이 아니라 ‘왜표가주어졌는가?’라는 영적 기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마지막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와 구별되는 속뜻이 있으며, 지금 자신이 해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속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초점은 역사적·고고학적으로 가인의 몸에 어떤 표가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셨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92-396을 한꺼번에 보면 이제 ‘가인의표’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완성됩니다. AC.392에서 가인을 죽이는 것이 모독이고 표는 신앙의 특별한 구별과 보존이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AC.393에서는 인간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AC.394에서는 바로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신앙이 보존되었다고 밝혔고, AC.395에서는 ‘칠배’의 ‘일곱’이 그 보존의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성격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은 ‘표’ 자체가 말씀에서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결국 가인의 표는 ‘가인의죄를눈에보이게표시한낙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타락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위한 수단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신앙 자체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사람이 신앙의 지식을 듣고 배우며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표’에서 궁극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가인의 몸에 새겨진 어떤 신비한 표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끊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존 섭리입니다. (AC.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