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심화

 

7. ‘60:1-3, 20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인용된 에스겔 32장, 이사야 13장, 요엘 2장이 해, 달, 별이 어두워지는 부정적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이사야 60장은 그 반대로 해, 달, 빛이 충만한 회복된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각각 사랑, 신앙,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응이 참되다는 것은 그것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될 때 비로소 확증됩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구절들을 인용한 뒤, 이제는 해와 달이 영원히 빛나는 구절을 인용하여 같은 상응을 긍정적인 측면에서도 증명합니다.

 

이사야 60장의 첫머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빛은 자연광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어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운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와 인류가 거짓과 무지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영적 상태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특히 AC.31의 핵심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 20절입니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임이라.’ 만일 해와 달이 문자 그대로의 천체라면, 이 말씀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자연계의 태양과 달은 언제나 뜨고 지며, 차고 기우는 것이 창조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해와 달은 영적인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해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해가 다시는 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더 이상 소멸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달은 신앙입니다. 따라서 달이 물러가지 아니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계속 유지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본문 자체가 설명합니다.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즉 해와 달의 빛 자체가 아니라, 그 빛의 근원이신 주님이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31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고,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으며, 모든 진리의 빛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황폐한 교회가 아니라 회복된 교회를 묘사합니다. 사랑이 살아 있고, 신앙이 살아 있으며, 진리의 빛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앞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는다’는 구절들이 사랑과 신앙의 소멸을 의미했다면, 여기서 해가 지지 않고 달이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결국 AC.31에서 사60:1-3, 20이 인용된 이유는, 해가 사랑을, 달이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회복과 영광의 상태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앞의 선지서들이 해와 달의 소멸을 통해 교회의 황폐를 묘사했다면, 이사야 60장은 해와 달의 영원한 빛을 통해 주님의 새 교회와 거듭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31에서 가장 아름다운 긍정적 증거 가운데 하나로 사용됩니다.

 

 

 

AC.31, 심화 6, ‘욜2:1-2, 10’

AC.31.심화 6. ‘욜2:1-2, 10’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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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1-2, 10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 역시 앞의 에스겔 32장과 이사야 13장의 경우와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자연계의 천체가 아니라 영적 실재들, 곧 사랑과 신앙과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엘 2장은 그 증거로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이 장은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을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날’을 ‘어둡고 캄캄한 날’,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묘사합니다. 만일 이것이 문자 그대로의 자연 현상이라면, 왜 그것이 영적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는 문맥 속에서 나오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이 사라진 상태를 묘사하는 상응 언어로 봅니다.

 

AC.31의 관점에서 보면,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둔다’는 말은 교회의 영적 생명이 소멸된 상태를 뜻합니다. 해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해가 검어진다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된 상태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지만, 사랑이라는 본질적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달이 캄캄해진다는 것은 신앙이 빛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는 것이므로,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함께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해와 달은 언제나 함께 어두워집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별들이 빛을 거둔다는 것은 진리의 지식들이 더 이상 사람을 인도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의 문자와 교리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안의 생명과 빛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본문 초반에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심판의 군대가 밀려오는 모습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교회의 마지막 어둠과 동시에 새로운 빛의 시작도 암시합니다. 그래서 요엘서는 단순한 멸망의 예언이 아니라, 황폐 이후의 회복을 준비하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결국 AC.31에서 욜2:1-2, 10이 인용된 이유는, 사랑이 사라질 때 해가 어두워지고, 신앙이 죽을 때 달이 빛을 잃으며, 진리의 지식들이 무력해질 때 별들이 빛을 거두는 것으로 말씀에서 일관되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의 해, 달, 별이 사랑, 신앙, 진리의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것들이 사라지는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1, 심화 7, ‘사60:1-3, 20’

AC.31.심화 7. ‘사60:1-3, 20’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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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5, ‘사13:9-10’

AC.31.심화 5. ‘사13:9-10’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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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3:9-10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13:9-10 AC.31에 인용된 이유도 겔32:7-8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자연계의 천체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요소들, 곧 사랑, 신앙,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이사야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의 날에 실제 하늘의 별들이 빛을 잃고, 태양과 달이 어두워지는 우주적 재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황폐의 묘사로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땅의 황폐함’은 단순한 자연계의 파괴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31의 관점에서 보면, ‘별들이 빛을 내지 아니한다’는 것은 신앙의 지식들이 더 이상 사람을 비추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말씀의 진리들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살아 있는 빛으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마치 별은 있는데 빛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라는 말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해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교회 안에서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영적 생명의 근원 자체가 사라진 것이므로, 나머지 모든 것도 함께 어두워집니다.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은 신앙이 빛을 잃는 상태를 뜻합니다. 달은 본래 해의 빛을 받아 비추므로, 사랑이 소멸되면 신앙도 필연적으로 어두워집니다. 이것은 AC.30-31 전체의 핵심 논리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넷째 날의 광명체들에 대한 상응을 역으로 증명합니다. 창세기에서는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는 긍정적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이사야에서는 그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부정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만일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며, 별이 진리의 지식이라면, 사랑이 소멸되고, 신앙이 죽고, 진리의 지식이 무력해질 때,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진다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게 됩니다.

 

결국 AC.31에서 사13:9-10 교회가 황폐해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사랑이며, 그 결과 신앙과 진리의 지식들도 함께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 반대 상태를 통해 설명하는 대표적인 증거 구절인 것입니다.

 

 

 

AC.31, 심화 6, ‘욜2:1-2, 10’

AC.31.심화 6. ‘욜2:1-2, 10’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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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4, ‘겔32:7-8’

AC.31.심화 4. ‘겔32:7-8’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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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2:7-8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이 AC.31에 인용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각각 사랑, 신앙, 그리고 신앙의 지식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30에서는 해를 사랑으로, 달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어 AC.31에서는 그 반대 상태,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교회가 황폐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때 사랑은 사라지고, 신앙은 빛을 잃으며, 진리의 지식들도 어두워집니다. 바로 이것을 에스겔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이 구절은 우주적 재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계의 파괴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만일 실제 태양과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특정 지역인 애굽 왕 바로에 대한 심판 예언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해와 달과 별은 영적인 것들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진다는 것은 사랑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영계의 태양과 같기 때문입니다. 달이 빛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오는 빛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별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신앙의 지식들과 진리들이 더 이상 사람을 인도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AC.31의 논지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은 사랑에서 빛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달이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이, 신앙도 사랑에서 생명과 빛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함께 어두워집니다. 이것이 에스겔의 해와 달과 별이 모두 함께 어두워지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심판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설명하면서, 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며, 별이 지식인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 구절로 사용된 것입니다. 만약 해와 달이 실제 천체만을 의미한다면, 사랑과 신앙이 사라진 상태를 설명하는 수많은 선지서의 표현들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AC.31에서 겔32:7-8은 ‘사랑이 소멸되면 신앙도 빛을 잃고, 진리의 지식들도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긍정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 빛이 꺼졌을 때의 상태’를 통해 역으로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AC.31, 심화 5, ‘사13:9-10’

AC.31.심화 5. ‘사13:9-10’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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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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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 [3]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키고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이 규례의 상응, 상징, 그 내적 의미는 몰랐다고 어디서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요?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같은 질문을 여러 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어떻게 사람이 어떤 규례를 그렇게 철저히 지키면서도 그 내적 의미는 전혀 모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이 특별히 이상해서라기보다 ‘주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역사적 섭리의 한 형태’였습니다.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교회’가 아니라 ‘표상 교회(representative church), 곧 ‘상응을 행위로 보존하는 교회’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교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를 ‘representative church’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외적 행위와 의식이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조직된 교회’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제사, 절기, 성막, 등불, 제사장 의복, 번제, 향, 절기 등은 모두 천국의 것들을 상징하는 ‘살아 있는 상징 체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징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점이 처음에는 조금 역설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 상징의 내적 의미를 알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자기 욕망과 결합시키거나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면 그 표상 기능 자체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단지 ‘외적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하셨고, 그 의미는 천사들이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은 행위를 하고, 천사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식으로 ‘지상과 천국이 연결되는 구조’가 형성된 것입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등불을 켜 두라’는 규례(27:20, 21, 24:2-4)가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단순히 ‘성막에서 꺼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의식 규례’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사장들은 밤새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채우고 심지를 관리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장면을 전혀 다른 의미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는 신앙의 빛’, 곧 교회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을 의미했습니다. ‘저녁’은 신앙이 약해지는 상태를, ‘아침’은 신앙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교회가 어둠 속에 있어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주님이 보존하신다’는 상징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그렇게 의미도 모르면서 규례를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다시 남습니다. 사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인간은 종종 어떤 제도나 의식을 ‘그 의미보다 전통 때문에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의식을 행하면서 그 상징적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혼식의 여러 의식, 장례식의 절차, 심지어 교회의 예배 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깊이 이해하지 못해도 전통과 권위를 따라 계속 행합니다.

 

유대교회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규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것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 자체’가 더 중요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유대 민족의 특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규례를 매우 엄격하게 지켰지만, 내적 의미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외적 엄격함 때문에 오히려 ‘표상 기능은 완전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섭리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상태가 충분히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았을 때는,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상징과 표상을 통해 보존’하십니다. 그러다가 인간이 그것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내적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역할을 자신이 맡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에서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상을 행했지만, 천사들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창세기 AC를 읽을 때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이 생깁니다. 말씀의 문자적 사건이나 규례들은 단순히 과거의 종교 제도가 아니라, ‘천국과 연결된 상응 체계’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체계를 외적으로 유지했고, 천사들은 그 내적 의미를 보았으며, 오늘날 우리는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의미를 다시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이라도 시대에 따라 ‘외적 실행  상징적 보존  내적 이해’라는 다른 단계로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지키면서 의미를 몰랐을까?’ 하는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표상 교회의 본질을 정확히 짚은 질문’입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표상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 표상 덕분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등불은 단지 성막의 등불이 아니라, ‘말씀 속에 숨겨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보존된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AC.31, 심화 4, ‘겔32:7-8’

AC.31.심화 4. ‘겔32:7-8’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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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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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2]에서 사60:1-3, 20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회라고 하는데, 만일 이 교회를 말하는 거라면, 어휴, 그 시기가 너무도 앞서는 것 같아요...

 

AC.31 [2]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며 말하는 ‘새 교회’라는 표현은 처음 읽을 때, 많은 분들이 당혹스럽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특히 ‘새 예루살렘 교리’나 ‘참된 기독교’ 등을 떠올리면 곧바로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New Church)’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AC 초반부 문맥에서는 이 표현을 조금 더 넓고 원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역사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특정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는 교회의 상태’, 곧 ‘빛이 다시 시작되는 영적 시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먼저 AC 전체에서 ‘교회(church)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어떤 제도나 교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교회는 ‘주님을 알고 그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 다시 말해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이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번 존재했습니다.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 고대교회(Ancient Church), 히브리교회,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가 차례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이 교회들은 각각 하나의 시대를 이루다가 점차 쇠퇴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단순히 특정 시대의 예언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사야 60 1–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도시나 민족의 번영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나라들’과 ‘왕들’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어둠 속에 있던 교회에 다시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1에서 말하는 ‘새 교회’는 반드시 먼 미래에만 나타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무너지고 난 뒤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실 때마다 나타나는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도 여러 곳에서 이사야의 예언들이 한 번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시대 속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는 특정 역사 사건이 아니라 ‘영적 질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새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체계 전체를 보면,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결국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는 ‘주님이 세우실 마지막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 초반부에서는 아직 그 역사적 적용을 강조하기보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교회의 regeneration을 동시에 묘사한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새 교회’라는 표현은 ‘어둠 속에서 빛이 시작되는 교회의 상태’를 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변화가 항상 ‘사람의 거듭남과 평행’한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어둠 속에 빛이 나타나는 장면은 한 개인의 거듭남의 시작을 나타내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AC.31에서 이사야 60장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세기에서 말하는 ‘빛이 있으라’라는 사건이 단순한 자연 창조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아직 오지 않은 어떤 먼 미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너무 좁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교회’는 더 근본적으로 ‘주님이 진리의 빛을 다시 일으키시는 상태’, 곧 ‘교회가 새롭게 되는 영적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 원리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나타났고, 스베덴보리는 그 원리가 마지막으로 완전히 나타나는 형태를 ‘새 예루살렘 교회’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1의 문맥에서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창세기에서 ‘’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의 시작을 말할 뿐 아니라, ‘어둠에 빠진 교회 가운데 주님이 다시 진리의 빛을 일으키시는 사건’, 곧 교회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0장을 인용하여 그것을 ‘새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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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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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 인간이 감각과 지식만을 의지할 때, 사랑과 신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된다는 해설도 있지만... 좀 더 와닿는 사례로 설명해 주세요.

 

AC.31에서 말하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ings of sense’와 ‘mere knowledge’를 구분하여 말합니다. ‘things of sense’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mere knowledge’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삶과 연결되지 않은 지식’, 곧 머리로만 알고 있는 정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사랑과 신앙이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실제 삶에서 느껴지는 사례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감각 중심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판단할 때 항상 ‘눈으로 확인되는 것만이 진짜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영적 삶을 이야기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잖아.’ 또는 ‘천국이나 영혼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으니 믿기 어렵다.’ 이런 사고는 단순히 질문을 하는 수준을 넘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가 계속되면 점차 영적인 것 자체에 관심이 줄어들고, 결국 사랑과 신앙이 마음에서 힘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things of sense’의 영향입니다.

 

두 번째는 지식이 많지만, 그것이 삶과 연결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교리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실제 삶에서 사랑이나 선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점점 ‘차갑고 분석적인 정보’가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교리는 맞고 저 교리는 틀리다’는 식으로 논쟁은 잘하지만, 정작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지식이 많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더 메마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mere knowledge’라고 부르는 상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현대 생활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성공과 효율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나 사랑도 결국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이익을 주는가’라는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내 인간관계나 사회적 위치에 도움이 되는가’ 같은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런 사고가 계속되면 사랑이나 신앙은 점점 ‘도구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됩니다. 이 역시 감각과 지식 중심 사고가 신앙을 약화시키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어떤 성도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 지식을 많이 배우고, 또 세상의 논리로 신앙을 계속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순간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기적 이야기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이런 질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만약 그 질문이 계속 ‘의심과 냉소만을 키우는 방향’으로 흐르면 결국 신앙의 따뜻한 중심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머리는 점점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지만,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지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mere knowledge’, 곧 삶과 분리된 상태가 될 때입니다.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신앙을 살리는 빛이 아니라 마음을 건조하게 만드는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정한 질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반드시 ‘사랑과 삶 속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지식은 더 이상 ‘mere knowledge’가 아니라 ‘living knowledge’, 곧 살아 있는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감각 세계 역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질서를 보며 주님을 인식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AC.31이 말하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경고입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과 머리 지식만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랑과 신앙이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면, 그것은 오히려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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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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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심화

 

2.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3:36 AC.30에 인용된 이유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 가운데 특별히 ‘’로 상징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30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는 사랑을, 달은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참된 신앙은 결코 사랑과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단순히 ‘믿는 것’, ‘교리를 인정하는 것’, ‘올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것은 신앙의 외형일 뿐이며, 참된 신앙은 반드시 사랑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요3:36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구절은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후반부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believeth not’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의 의미는 단순히 ‘믿지 않는다’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는다’에 더 가깝습니다. 즉 주님은 여기서 단순한 지적 믿음과 실제 삶의 순종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 ‘믿음’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순종’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앙이 단순한 생각이나 교리적 동의라면, 왜 주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영생에서 제외하셨겠습니까? 이는 참된 신앙이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야 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AC.30에서 이 구절은 ‘신앙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달이 해의 빛을 잃은 것과 같고, 삶의 순종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는 신앙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은 사랑과 결합된 신앙이며, 이것이 넷째 날의 달이 해로부터 빛을 받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결국 AC.30에서 요3:36은 단순히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증거 구절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사랑과 순종을 포함하며, 그런 신앙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넷째 날의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AC.30의 핵심 주제입니다.

 

 

 

AC.30, 창1:14-1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생명 얻은 신앙이 다스리는 넷째 날’(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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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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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이게 무슨 뜻인가요?

 

AC.30 [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원리 하나를 아주 압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그대로 보면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태양빛이 어떤 대상에 비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연적인 비유부터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태양 빛이 창문, 물, 나뭇잎, 돌 등에 비치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 위에서는 반짝이고, 잎에서는 녹색으로 보이고, 거울에서는 강하게 반사됩니다. 그래서 마치 그 빛이 그 물건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빛의 근원은 그 물건들이 아니라 ‘태양’입니다. 물건들은 단지 빛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마음에서 선과 진리가 나타나는 방식도 바로 이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적용해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사람이 어떤 선한 생각을 하거나 진리를 이해할 때, 그것은 마치 그 생각과 선이 ‘자기 안에서 생겨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실제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의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는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물체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확신해 버리면, 인간은 쉽게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지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행하고 이해할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제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앞서 나누었던 ‘inanimate’와 ‘animate’의 구분과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설명이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이해가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결심합니다. 그때 그는 ‘내가 이렇게 선한 결정을 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결정은 그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선한 마음과 판단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이고, 그 빛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AC.30 [3]의 문장은 결국 인간과 주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이해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 기관’입니다. 선과 진리는 그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은 마치 태양 빛이 사물 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과 진리를 실제로 행하고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C.30, 창1:14-1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생명 얻은 신앙이 다스리는 넷째 날’(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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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9. ‘17:20-21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0, 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 눅17:20-21 AC.29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11절의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결국 사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9에서 스베덴보리는 씨를 신앙의 진리로, 열매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설명하는데,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사람 안에 천국이 형성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로 인용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사건이나 정치적 왕국, 혹은 눈에 보이는 변화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본질적으로 외부 세계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을 거듭남의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창조는 밖에서 일어난 우주적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더 깊게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AC.29의 주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씨가 땅에 뿌려진다는 것은 진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는 것이고, 그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존재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왜 창세기에서 식물의 창조가 중요한지를 설명해 줍니다. 씨와 열매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되는 방식입니다. 먼저 진리가 심어지고, 그 진리가 자라며, 마침내 선한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는 단순한 신앙과 체어리티를 넘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은 거듭남이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씨가 땅속에서 자라는 동안 사람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가리킬 수 있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내면에서 조용히 일하시며, 진리를 심고, 사랑을 자라게 하시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관찰의 대상이라기보다 체험과 삶의 대상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에 인용한 이유는, 창세기 1장의 씨와 열매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의 최종 결과인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씨는 말씀의 진리이고, 열매는 체어리티의 삶이며, 그렇게 형성되는 새로운 내적 상태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식물 창조가 사실은 사람 안에 천국이 세워지는 거듭남의 과정을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 본문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AC.29, 심화 8, ‘막4:26-28’

AC.29.심화 8. ‘막4:26-28’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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