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므온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 21절은 누가복음 전체 강해 원본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2-2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10월이 왔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기 예수의 부모가 관례에 따라서 첫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22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정결 예식의 날이란 레위기 12장 6절과 7절에 나오는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아기를 출산한 여인에 대한 규례인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6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7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레12:6-7)

 

이 말씀에서 아기를 낳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선한 애정 안으로 진리로 오실 때, 속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시 겉 사람 안에 새로운 선과 진리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 안에 태어나는 새로운 선과 진리란, 악한 습관을 끊는 것이고, 이웃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 태어나는 아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겉으로 보면 경건하고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 행위 안에도 사실은 자아에 속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선을 행한다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선과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아에 속한 이런 불순한 것들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바로 출산한 여인이 견뎌야 하는 정결의 기한입니다. 말씀에는 그 기간을 아들을 낳을 경우, 7일로 정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말씀에서 7일이란 물리적인 7일이 아니고요, 불결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 그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정결의 기한이 찬 다음에 당신께 속죄제를 드리라 하셨습니다. 속죄제란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동안 자아에 속한 불순한 것으로 주님을 예배한 것에 대한 반성을 담아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속죄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내아이를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시켰다는 것과 아들을 낳은 여인이 7일의 정결 기한 후에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여기 ‘주의 율법’이란 출애굽기 22장 29절에 나오는 말씀, 즉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출22:29)

 

라는 말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장자를 거룩하다 하시고, 또 당신의 것이라 하셨을까요? ‘장자’(長子), 즉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처음 난 아들’은 사랑이 있는 신앙, 또는 체어리티(charity)를 바탕으로 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는 사랑 또는 체어리티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나 체어리티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악이며,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악들은 주님의 신성한 빛이 흘러들어올 때, 그냥 흩어져 버리고 맙니다. 마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지, 어둠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래서 태는 사랑이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태어난 진리와 신앙, 그것이 장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있던 신앙, 또는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는 신앙이고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 생긴 신앙은 사랑이 있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장자라고 하고,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이제 새로 생긴 신앙, 즉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예배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릴까요? ‘예루살렘’은 천적 영적 교회(celestial spiritual church)를 나타냅니다. 천적 영적 교회란 사랑이 있는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란 뜻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사랑과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일반적으로 ‘’는 진리나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둘기’는 선과 진리를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 한 쌍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선 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을 한데 묶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런 규례를 정해주셨는지는 할례 시킨 아이와 정결의 기한이 지난 여인의 영적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영적으로 할례를 받고, 정결의 기한이 지나야 비로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비둘기 한 쌍을 가지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이제 진리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끔찍이도 준수하는 율법에 사실은 이런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것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규례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적 의미 없는 외적 행위만으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 가령 이런 것이죠. 누가복음 18장 세리의 기도 본문입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를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만의 교리가 생겨난 것이며, 그 결과 구원은 체어리티의 삶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 믿게 된 것입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루터를 만나 이 주제를 가지고 나눈 대화입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796번 글입니다.

 

루터(Luther)

 

그는 영계에 처음 들어오면서부터 자기의 독단 교리(dogmas)의 극렬한 창조자였고, 변론자였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이 오는 수에 따라 그 열정이 더해갔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아이슬레벤(Eisleben)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집 한 채가 주어졌고, 거기서 추종자들이 와서 그의 의견과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자기 자리에 가깝게 또는 멀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이야기를 계속했으나, 간혹 그는 자기의 설교자로서의 인기에 의해서 청중들에게 마법을 거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술법은 고대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아주 강력해서 영계에서는 모든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아애(the love of self)로부터 발생하고, 발언자로 하여금 그의 반대자의 의견뿐 아니라, 그 인격까지 공격하도록 강요된다. 그러므로 이 술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의 청중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그의 예전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1757년에 영계에서 행해진 최후 심판의 때까지, 루터가 살아온 생활 상태였다. 그 이듬해에 그는 처음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겨졌으며, 따라서 동시에 그의 심정 상태도 변해졌다. 그리고 내가 자연계에 있으면서 영계 안에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을 듣고, 여러 번 추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몇몇의 질문들을 하고 내 대답들을 듣고는, 그가 지금 옛 교회의 종말과 다니엘서와 복음서들 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것을 지각했다. 그는 또한 이 새 교회가 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표상되었음과, 또 천국 한 가운데를 나는 천사가 지상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전파한 영원한 복음으로 표상되었음도 지각했다(계14:6). 처음에는 그는 격분해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나 곧 새 하늘이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마28:18)에 의하여 주님만을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자들로써 형성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때 그는 욕설을 중지하고 나 있는 곳을 찾았으며, 나와 전보다 친숙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독단교리(his chief dogma of justification by faith alone)가 말씀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총명에서 창안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을 때, 주님, 인애, 참 믿음, 자유의지,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 말씀에 의하여 교육받기를 원했다.

 

마침내 새 교회가 기초를 놓아야 할 진리들에 찬성하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때에 날마다 나와 함께 있었으며, 그가 새 교회의 진리들을 받아들임에 따라, 가끔 자기의 옛 견해가 말씀에 직접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독단교리들, 즉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의 자유의지의 부정, 체어리티의 영적 본질의 부정 등을 설교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왜냐하면 내 목적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목적이 관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내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한 미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며, 그들이 이 독단교리들 안에 내포된 명확한 성경 말씀과의 모순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요.’ 여기서 그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약간의 유명한 교리학자들을 향해서 경멸의 눈길을 던졌다.

 

나는 검문하는 천사들(the examining angels)에게 루터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로 자신들의 믿음을 굳힌 많은 다른 자들보다, 훨씬 전에 회심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어서 기독교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체어리티의 중요성에 관한 교리에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글로나 설교로 체어리티를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었던 이유다. 즉 믿음만이라는 교리가 그의 겉 사람에게는 심겼으나, 그의 내적, 영적 속 사람(영혼) 속에는 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믿음만에 의한 이신득의에 찬동하는 교리로 체어리티의 영적 특성에 반대하고, 스스로 그 교리에 굳어진 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삭소니(Saxony) 후작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는 루터와 세상에서 사귄 사람이었다. 그는 루터가 특히 체어리티를 믿음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난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왜냐하면 루터는 체어리티를 믿음과 분리시켰고, 체어리티가 아니라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결합해서 구원의 방편이라고 제시한다. 바울은 체어리티를 믿음 위에 놓고 말하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 때문에 다르게 할 수 없었고, 일반적인 대답을 했다고 부언했다. 이 후작은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있다. //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내적 의미와 동떨어진 율법의 모든 외적 행위,

 

※ 그러니까 위 성전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던, 이런 율법 준수의 동기가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 자기 자랑이었던,

 

그런 영혼 없는 율법 행위를 부정했을 뿐, 체어리티의 삶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할례는 모세 율법에서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행위를 모르는 상태, 즉 이 할례를 명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할례받는 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합니까? 믿음만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그냥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말을 ‘오직 믿음’ 교리의 근거로 삼는 것은 그의 의도를 철저히 왜곡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규례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되며, 그렇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되 속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예루살렘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인들의 내면에 세워진 천적 영적 교회입니다. 즉 사랑과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을 천적 영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사람의 내면으로 주님이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회는 신앙만 있는 교회가 아니고요, 사랑과 신앙에 기초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다는 시므온은 누구를 말할까요? 전 시간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인과 연관 짓지 않고, 이름 자체가 가지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므온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시므온은 야곱의 아내 레아가 낳은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시므온’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레아가 시므온을 낳았을 때 말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창세기 29장 33절 말씀입니다. 레아가 말하기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이 말씀에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은 신앙은 있는데 그에 따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죠. 그런 상태가 바로 시므온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을 붙들고 힘겨워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새로운 신앙이란 전처럼 이성에 속한 신앙이 아니고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머릿속에만 있던 신앙을 의지 가운데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머리 신앙이 가슴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렇지 못했죠. 이성에 속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머리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정작 행동하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의지 가운데 신앙을 심어주실 때, 우리는 그 새로운 신앙에 따라 능동적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시므온이란 의미는 의지에 속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시험에서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지혜롭고 강단 있게 주님의 뜻을 받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을 오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시므온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즉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가 곧 시므온이라는 새로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주님이 이스라엘에 주시는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새로운 신앙을 통해 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랑의 기쁨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시므온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때부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의 시므온이라는 신앙이 성령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그냥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주의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의 그리스도’는 그냥 진리로 오신 주님이 아니고요, 부활하셔서 당신 안에 여호와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신 신적 인성(Divine Human)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라는 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부터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주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리스도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에 대해 주라고 부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병자를 고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내가 여호와다!’ 하시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주 그리스도라는 말은 당신 안의 신적 진리와, 여호와이신 신적 선이 하나가 되신 주님, 즉 신적 진리로부터 신적 선이 되신 주님을 나타내고요, 그러므로 주님의 신적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이라고 했는데, 이 ‘본다’는 말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시므온에게 하신 말씀, 즉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너의 영이 죽지 않고 결국 주님의 신적 인성을 믿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믿지, 그분 안에 여호와의 신성이 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이 진리를 아는 많은 분들 가운데도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이 여호와이심을 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삶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신적 선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분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주님이세요. 그리고 체어리티 역시 주님이세요. 그러므로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신 주님과 사랑이신 주님을 분리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요, 영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영으로 주님의 인성 안에 신성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신앙으로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성령이 시므온에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지시하시는 것은 ‘네가 주님의 신적 인성을 반드시 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통해 아기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 가운데 있는 신앙인들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그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예수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신적 선이신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율법의 관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이 신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나, 내면의 교회 안에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일이나, 그의 신앙이 이성에 속한 신앙에서 의지에 속한 신앙으로 바뀌는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통해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나,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질서에 따라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내면에 주님이 오신 사람들의 거듭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과 아기 어머니가 정결의 기한을 채우는 것은 모두 주님이 오신 다음에 삶의 행위 가운데 있는 불순한 것들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 생기는 신앙, 즉 의지에 속한 신앙을 본문에서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서 그것이 의지에 심어질 때 비로소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본래 시므온은 레아의 첫 번째 아들 르우벤 다음에 태어난 두 번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영적 의미로 이성에 속한 신앙을 뜻합니다. 즉 머리에 들어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죠. 처음에 신앙은 그렇게 사람의 이성 가운데 씨가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신앙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할 때, 주님께서는 이성 가운데 있는 신앙을 의지라는 밭으로 마치 모종 옮기듯 옮겨주십니다. 그것이 레아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뜻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이름도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시므온의 상태일 때, 우리는 비로소 영으로 주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체어리티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때 레아는 세 번째 아들 레위를 낳죠. 레위는 체어리티의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시험 가운데서 불안을 느낍니다. 자신의 영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도 시험이 많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시험이 깊어지면,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세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주님의 예언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주께서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신적 인성이신 주님을 우리들의 영으로 믿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가호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시89:26)

 

아멘

 

 

 

원본

2016-10-0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0(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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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이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2:8-20)

 

 

베들레헴은 새로운 상태에서의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을 뜻한다. 이 상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있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천적인 것에 속한 영적인 것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고, 그러므로 선에서 비롯한 진리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6247, 이순철 역) ...from the signification of “Bethlehem,” as being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n a new state (see n. 4594), thus a state of new affection of truth and good; for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is the truth of good, thus the affection of truth from good. (AC.6247, Clowes 역)

 

※ 윗글은 아래 창세기 48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48:7)

 

 

※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앞부분이 좀 겹칩니다. 원래대로라면 15절부터 새로운 본문이어야 하는데, 아마 21절까지 말이지요, 이상하게 이 부분에 대한 설교 원본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여러 성탄절 본문 중 여기에 근접한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새 교회의 모든 성도님과 함께 주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약의 예언서에는 주님의 탄생을 예언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했고, 또 미가서 5장 2절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나 미가 선지자나 주님 오시기 전, 약 700년 전의 사람들인 걸 감안하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탄생하시던 날, 주님께 경배를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멀리 시리아에서 온 동방박사들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목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8절,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밤에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밤은 주님이 오실 당시 유대교회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상태입니다. 유대교회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인애(仁愛, charity)를 지키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본문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 태고교회부터 시작,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현 기독교회 역시 각 교회 시대의 종말마다 소위 ‘남은 자’(remnant),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 주님이 그때그때 새 교회를 일으키시기 위해 사용하신 소수의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그중 일부가 바로 이 ‘목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잇는 ‘노아’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는 어느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그 시대 특정 신앙이나 교리, 교회를 일컫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등장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비롯한 선을 뜻하고, ‘목자’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 앞에 주님의 천사들이 나타나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데요, 그러자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말씀에서는 주님이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들의 모습을, 떨거나 죽은 사람처럼 되거나, 또는 온몸의 기운이 빠진 걸로 기술하는데요, 가령, 다니엘 같은 경우입니다. 다니엘서 10장 4절로 12절입니다.

 

4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 5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8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 10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11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12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단10:4-12)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죽은 자처럼 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주님의 위엄 앞에서 그들의 자아가 완전히 굴복하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처럼 된다는 것은 마치 자아가 없는 것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으로 보면 지극히 경건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께서 오셔서 그를 새롭게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성(聖) 문서에서는, 주님을 만날 때의 떨림을 거룩한 떨림, 또는 거룩한 전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떠는 사람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 위 ‘(聖) 문서’라는 용어는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후부터 기록한, 그러니까 주님이 그의 손을 빌려 기록하신 저작들(Writings)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천국에서 듣고 본 모든 경험과 남기는 이 모든 기록은 오직 주님의 허락으로 하는 것이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을 자기는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기록들에 대하여 ‘’(聖)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안 되죠. 감히 말입니다! 이 형용은 오직 주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새롭게 된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의 동네에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여러 성품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안에 영이 있고 몸이 있으며,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나오는 능력이나 에너지, 기운이 있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영과 몸과 영으로부터 몸을 통해 발산되는 에너지와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인 것입니다. 목자들처럼 마음속에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진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는 진리를 끌어당겨 자신과 하나로 만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진리를 배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해치려 했던 것도 그들의 내면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고, 거짓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폄하하고 비난합니다. 인력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그러니까 베들레헴에 가면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있을 것인데, 그 아기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는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여관’(inn)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인 교회를 뜻하고, ‘’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여관에 방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교리 안에서 진리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참된 교리가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안에 주님이 계실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불가피하게 외양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말씀에서 ‘’(horse)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유’(manger)는 말이 먹이를 먹는 곳이므로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말구유에 누워계시는 주님은 신앙인들의 지성을 먹이는, 교리라는 진리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감싸고 있는 강보는 무슨 뜻일까요? ‘강보’는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나오는 첫 번째 진리를 뜻합니다. 그것은 태양의 뜨거운 불에서 나오는 첫 번째 빛과 같이 순수하고 밝은 진리입니다. 태양에서 처음 나오는 빛은 우주공간과 대기권을 차례로 지나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그러니 그 빛과 열기가 얼마나 희석되겠습니까? 주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신성에서 나오는 처음 진리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각자의 영적 상태에 맞도록 주님에 의해 그 빛과 열기가 조절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원형은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바로 나온 진리, 즉 순진무구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곧 주님이십니다.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지극히 높은 곳’은 하늘에서는 천국이요, 사람 안에서는 속 사람입니다. 또 ‘’은 지상에서는 교회이며, 사람 안에서는 겉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는 하늘과 땅에서 주님을 여호와로 인정하는 사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와 영광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아기로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지옥의 악과 거짓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한 것입니다.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하되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합니다. 구유에 계신 주님을 직접 뵙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진리를 깨우치는 것처럼, 우리도 천사를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것이 천사를 통해 얻은 생각인지 인간의 생각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씀의 속뜻 진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목자들이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베들레헴’은 자연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인 합리적 진리와, 말씀의 문자적 뜻인 자연적 진리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간자적 진리, 즉 선에 속한 진리(truth of good)나 선이 있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는 선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선의 진리, 선에 속한 진리, 선을 동반한 진리라고 하는 이유는, 이 진리는 주님이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심어놓으신, 체어리티라고 하는 선 안에서 자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 문서에서는 그것을 선이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자연적 진리 상태에 계속 머물러만 있을 뿐, 선의 진리, 즉 선에 속한, 선을 동반한, 참 신앙의 진리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드디어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유에 계신 주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로부터 들은 진리가 사실임을 확인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바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다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자들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행하면서 전할 때, 그들의 진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목자들이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겼다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봤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뜻하고, 들었다는 것은 진리에 순종해 행동으로 옮겼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이렇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리를 깨우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실천할 때,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제일 먼저 당신의 탄생을 알린 사람들은 지위가 높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양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자들은 주님이 주신 사랑과 체어리티를 지키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오십니다. 주님은 사랑 없는 믿음 안에 계시지 않고, 사랑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목자들에게 오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의 속뜻이라는 순수한 진리로 오셨습니다. 말씀의 속뜻 진리 안에는 문자적인 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 선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양들을 지킬 수 있으며, 또한 매일 같이 새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한 것처럼 우리도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진리는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결합한 선한 삶으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새 교회에 맡기신 사명은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빛이 없던 각자의 등불들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덮은 재앙의 어둠이 걷힐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새 교회의 모든 성도가 주님 앞에 그런 충직한 목자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성도님들과 가정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12:42)

 

아멘

 

원본

2020-12-2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8(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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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신 이유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2:8-14)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인들이 거듭나는 동안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습니다. 내적 의미로 볼 때, 주님의 탄생은 신앙인들의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신앙한다고 해서 모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이 있어야, 그래야 진짜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껍질만 있고 과육은 없는 열매와 같으며, 그러므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행하더라도 진리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목적, 개인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런 신앙 가운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자기를 내려놓는 일이 힘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 안에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언제 오실까요? 8절입니다.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킬 때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지역’은 본래, 그러니까 그 속뜻은 이웃을 뜻합니다. 얼핏 전혀 다른 뜻이지요. 아마 사람이 어떤 지역에 사는 모습이 그 지역 이웃들과 함께 사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지역은 교회를 뜻합니다. 지역이 이웃을 뜻하면서, 또한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누구일까요? ‘목자’는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고, 선한 삶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자는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직자나 목회자가 아니고요, 신앙인 중에 마음속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입니다. ‘’은 무슨 뜻입니까? 순진함, 또는 순수한 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양은 진리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순진한 애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그 지역에 목자들’이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시로 변하는 영적 상황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웁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로 표현했습니다.

 

※ 여기서 잠깐, 본문 중 ‘밖에서’라는 표현 관련, 매우 흥미로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15장, ‘예수님은 언제 태어나셨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과연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근거가 있을까? 다행히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에 나온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밤에도 성실하게 양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목자들은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 문화의 주류 사회에 들지 못하고, 그때까지도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으로서 최하류 계층이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땅은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1)

 

우리에게 헤롯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유대 땅의 지정학적 이점을 잘 살려 상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했다.

 

집 지을 땅과 농사지을 농경지가 점점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로 밀려나야 했다. 비록 돌과 바위가 많은 광야라지만 비가 오는 6개월의 우기 동안에는 작은 풀들이 돋아나 그런대로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길 수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나머지 6개월간의 건기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가축들과 함께 광야로 쫓겨난 목자들에게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건기가 시작되는 유월절부터 7주 동안만 잘 버티면, 이후 목자들이 가축들과 함께 농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보리 추수기인 유월절과 그로부터 7주 후인 칠칠절은 밀 추수기였다. 밀 추수가 끝난 칠칠절 이후부터 다음 해 농경 사이클이 시작되어 쟁기질을 해야 하는 초막절 전후까지는 농경지가 목자들에게 오픈되었던 것이다.

 

목자들은 칠칠절 이후 가축들을 데리고 농경지에 들어갔고, 그곳에는 밀 추수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밀 밑동이 있었다. 이것을 가축들에게 먹이며, 목자들은 밀밭 사이에서 난 뽕나무를 배양해 주어 밀밭 주인에게 상응하는 보답을 했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라이프 사이클을 이해할 때 자신을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소개한 아모스 선지자의 알쏭달쏭한 직업이 이해된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암7:14)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당시에 목자들이 밖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눅2:8)

 

아기 예수 탄생과 관련된 크리스마스 시즌의 비밀은 바로 ‘밖에서’란 단어에 있다. 과연 ‘밖에서’라는 말은 뭘까? 집 바깥을 말하는 걸까? 양들을 집 안에서 칠 수 없으므로, 단순히 바깥(outside)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우리말 성경에 ‘밖에서’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아그라울레오’(ἀγραυλέω)인데, 이는 단순한 바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지의 들판’(agricultural field)을 의미한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할 때 목자들은 황량한 광야가 아니라 농경지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목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감안하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목자들이 가축을 데리고 농경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기간, 측 칠칠절(6월경) 이후부터 초막절(10월경) 사이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중략)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이 단지 유대인들의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여호와의 절기’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들이 암호화되어 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분명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7개의 절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칠칠절 이후부터 초막절 사이에 들어가는 절기는 단지 두 개뿐이다. 바로 신년(나팔절)과 대 속죄일이다. 그러면 두 절기 가운데 크리스마스와 가장 부합하는 절기는 무엇일까? 바로 신년일 것이다. 신년은 영광의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나팔을 불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년! 이 신년이야말로 영원 전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의 몸으로 탄생함으로써 인류 구속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영광의 나팔을 불기에 가장 합당한 날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영광의 팡파르를 울리며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다. //

 

하루 중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우리의 영적 상태도 수시로 변합니다. 늘 같지가 않은 것이죠. 낮은 어떤 때입니까? ‘’은 진리의 빛 안에 있는 때입니다. 진리의 빛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으면 이해가 잘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이해한 진리로 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낮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 빛이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말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비춰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가 밤입니다. 그래서 밤을 다른 말로는 시험의 기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를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자신과 싸우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밤에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는 목자들입니다. 이런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9절입니다.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말씀에서 ‘주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 곧 천사는 진리를 뜻합니다. 천사가 왜 진리를 뜻할까요?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온전히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자기 생각을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서 천사는 진리를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 아래는 위 ‘그들, 즉 천사들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5장, ‘천국과 지옥은 인류로 말미암는다’(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311-317)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In the Christian world it is wholly unknown that heaven and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for it is believed that in the beginning angels were created and heaven was thus formed; also that the devil or satan was an angel of light, but having rebelled he was cast down with his crew, and thus hell was formed. The angels never cease to wonder at such a belief in the Christian world, and still more that nothing is really known about heaven, when in fact that is the primary principle of all doctrine in the church. But since such ignorance prevails they rejoice in heart that it has pleased the Lord to reveal to mankind at this time many things about heaven and about hell, thereby dispelling as far as possible the darkness that has been daily increasing because the church has come to its end.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 각 지옥의 속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They wish for this reason that I should declare from their lips that in the entire heaven there is not a single angel who was created such from the beginning, nor in hell any devil who was created an angel of light and cast down; but that all, both in heaven and in hell, are from the human race; in heaven those who lived in the world in heavenly love and belief, in hell those who lived in infernal love and belief, also that it is hell taken as a whole that is called the devil and satan—the name devil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behind,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genii, and the name satan being given to the hell that is in front, where those are that are called evil spirits. The character of these hells will be described in the following pages.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 The angels said that the Christian world had gathered such a belief about those in heaven and those in hell from some passages in the Word understood according to the mere sense of the letter not illustrated and explained by genuine doctrine from the Word; yet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until illuminated by genuine doctrine, draws the mind in different directions, and this begets ignorance, heresies, and errors. (HH.311) //

 

※ 그리고 하나 더, 여기 목자들이 천사들을 본 걸로 나오는데, 과연 자연계, 물질계의 존재가 영계의 존재를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지, 이런 궁금점에 관한 아랫글을 참고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천사를 볼 수 없고, 사람 안에 있는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은 영계에 있고, 육신은 물질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자기와 동질의 것 밖에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진 대로, 눈이라는 신체 기관은 조야(粗野)해서 확대경 없이는 물질계의 미세한 것들도 볼 수 없다. 하물며 물질의 영역을 초월한 영계를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육안에서 떠나 그 영안이 열리면 영계를 볼 수 있다. 주님이 영계를 보여주시고자 하면 언제든지 즉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때 사람은 자기 육안(肉眼)으로 보고 있다고 여긴다. 아브라함, 롯, 마노아(삿13, 삼손의 아비) 등 선지자들이 천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봤을 때나 내가 천사들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이 이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사람들’(seers)이라 하고, ‘그들의 눈이 열렸다’(to have their eyes opened)고 했으며(삼상9:9, 민24:3), 또 이렇게 영계를 보게 하시는 것을 ‘그 눈을 여신다’(opening their eyes)라고 표현한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기록이 그 예이다. But it must be remembered that a man cannot see angels with his bodily eyes, but only with the eyes of the spirit within him, because his spirit is in the spiritual world, and all things of the body are in the natural world. Like sees like from being like. Moreover, as the bodily organ of sight, which is the eye, is too gross, as everyone knows, to see even the smaller things of nature except through magnifying glasses, still less can it see what is above the sphere of nature, as all things in the spiritual world are. Nevertheless these things can be seen by man when he has been withdrawn from the sight of the body, and the sight of his spirit has been opened; and this can be effected instantly whenever it is the pleasure of the Lord that man should see these things; and in that case man does not know but what he is seeing them with his bodily eyes. Thus were angels seen by Abraham, Lot, Manoah, and the prophets; and thus, too, the Lord was seen by the disciples after the resurrection; and in the same way angels have been seen by me. Because the prophets saw in this way they were called “seers,” and were said “to have their eyes opened” (1 Sam. 9:9; Num. 24:3); and enabling them to see thus was called “opening their eyes,” as with Elisha’s servant, of whom we rea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Elisha prayed and said, Jehovah, I pray Thee open his eyes that he may see; and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young man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HH.76, 김은경 역) //

 

또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임재하실 때,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가 마치 밝은 영광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빛과 함께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 속뜻으로는, 진리이신 주님이 선한 신앙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그랬고요, 사가랴도, 마리아도 주님을 만날 때, 그러니까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을 만날 때에 그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올 때에는 누구나 마음이 크게 동요되고요, 심지어 전율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 저는 아직 이 정도의 체험은 아니지만, 나름 충격적인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원 목사의 저서, ‘대적기도’를 읽고, 잠자리에 누워 ‘귀신아!’ 따라 해 보다가 내 안에 숨어든 악령을 어렴풋이 보게 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12월 15일 주일 밤에 있었던 일인데, 다음은 그날의 일지에 적힌 내용입니다.

 

자정 즈음, 다시 치통 시작, 잠결에 ‘귀신아!’ 하였더니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오래도록 지속, 정원 목사님이 대적기도 책에서 기술한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 내 안에 뭔가가 숨어 있다가 들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느낌 받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는데 혀가 꼬여서 발음이 잘 안됨, 아내, 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고 대적기도 중인 나를 계속 흔들어 댐... 전율이 잦아들 즈음, 치통도 사라짐, 책의 내용 그대로여서 너무 신기, 아내에게 자초지종 설명

 

제 안에서 몰래 활동하던 악한 영이 그만 갑자기 들키는 바람에 저쪽 주방 정수기 쪽으로 황급히 숨는 무슨 다급함이었지요. 형체는 그냥 검은 그림자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좀 창피한(?) 체험이긴 한데, 이 일로 수년 후,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에서 아랫글을 읽었을 때,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 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HH.292, 김은경 역) With every individual there are good spirits and evil spirits. Through good spirits man has conjunction with heaven, and through evil spirits with hell. These spirits are in the world of spirits, which lies midway between heaven and hell. This world will be described particularly hereafter. When these spirits come to a man they enter into his entire memory, and thus into his entire thought, evil spirits into the evi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nd good spirits into the good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These spirits have no knowledge whatever that they are with man; but when they are with him they believe that all things of his memory and thought are their own; neither do they see the man, because nothing that is in our solar world falls into their sight. The Lord exercises the greatest care that spirits may not know that they are with man; for if they knew it they would talk with him, and in that case evil spirits would destroy him; for evil spirits, being joined with hell, desire nothing so much as to destroy man, not alone his soul, that is, his faith and love, but also his body. It is otherwise when spirits do not talk with man, in which case they are not awar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also what they are saying among themselves is from man; for although it is from man that they talk with one another, they believe that what they are thinking and saying is their own, and everyone esteems and loves what is his own. In this way spirits are constrained to love and esteem man, although they do not know it. That such is the conjunction of spirits with man has become so well known to me from a continual experience of many years that nothing is better known to me. (HH.292) //

 

말씀에서는 그 전율을 두려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런 식으로 표현할까요? 그것에 대해서 ‘계시록 해설’ 677번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 시에 느끼는 공포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 때문에 내면의 영적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즉 악과 거짓들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선과 진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순철 역) Again, “terror” signifies in the spiritual sense terror on account of evils and falsities that are from hell, for these terrify the spiritual man, because they are the opposites of the goods and truths, which the spiritual man loves and the loss of which he fears. (AE.677)

 

※ 위 내용은 아래 계시록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Ager 역입니다.

 

그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 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계11:13) //

 

그냥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 내면의 속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우리 속에 있는 악과 거짓들이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행여 더럽힐까? 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두 아시는 것처럼 사람의 내면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겉 사람이 얼마나 세상의 유혹에 잘 넘어갈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실 때 행여 주님을 더럽히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을 자기도 모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천사가 말했습니다.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실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내가 너희를 지켜줄 터이니 더 이상 겁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었던 생명의 소생을 의미합니다. 영적 의미로 생명의 소생은 어떤 것입니까? 그동안 세상 유혹에 자주 넘어지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의지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다고 해서 한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계시록 속뜻’ 56번 글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공포가 사람을 덮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생명의 소생을 알리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의 자아의 생명의 자리로 들어올 때, 거룩한 공포를 느끼는데, 그것은 가끔 마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전율이나 소름과 합쳐진다. 사람의 자아의 생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데, 그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한다. 사람이 후자의 생명 안에 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주님이 전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시록 속뜻 56, 이순철 역) And as a holy fear seized him, the Lord said, on his being resuscitated, “Fear not.” Holy fear, which sometimes is joined with a sacred tremor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sometimes with horripilation, supervenes, when life enters from the Lord in place of one’s own life. One’s own life is to look from one’s self to the Lord, but life from the Lord is to look from the Lord to the Lord and yet as if from himself. When man is in this latter life, he sees that he himself is not anything, but the Lord only. (AR.56)

 

※ 위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56번 글은 아래 계시록 1장 17절 말씀,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1:17)

 

에 대한 주석이며, 영역은 Whitehead 역입니다. 참고하세요. //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요. 신앙생활 하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교회에 오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주님으로부터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시련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사는 또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좋은 소식’이란 주님이 오셔서 당신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진리가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진리는 자기 스스로를 증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는 직업상 진리를 전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말로 진리를 증거하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말함과 함께 그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때 각자의 삶을 통해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때 진리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때 감동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의 능력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셨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스스로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천사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와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스스로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오실까? 주님이 완고한 나의 성품을 바꾸어 주실까?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그러한 확신이 생깁니다. 안 되는 것이 되기 시작하니까요.

 

11절과 12절에서는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말씀에서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주님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베들레헴은 새로운 진리, 즉 선을 동반한 진리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진리가 선 없는 진리였다면 베들레헴에 태어나는 진리는 선을 동반한 진리라는 것이죠. 그 새로운 진리가 강보에 쌓여 누워계신 주님이세요. 지난 시간에도 설명드린 것처럼, ‘강보’는 순진무구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즉 선과 하나가 된 진리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즉 다윗의 동네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곳입니다. 베들레헴이 사람의 내면 어디쯤에 있는지는 천국의 비밀 4592번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냐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데, 베냐민이 태어난 곳 베들레헴이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쯤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보통 자연적 사람이라고 하는 겉 사람이 있고요, 영적 사람이라고 불리는 속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더 깊은 곳에 천적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내면의 의식, 천적 의식과 영적 의식, 그리고 자연적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냐 하면, 그래야 주님의 생명인 선과 진리가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바깥쪽인 삶으로, 일상생활로 흘러나오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천적 사람과 영적 사람, 자연적 사람이 서로 소통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하면, 베들레헴은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의 중간에 있으며, 그곳에 주님께서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오셔야 영적 사람과 천적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 전 상태는 어떻습니까? 영적 사람과 자연적 사람 간 연결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천적, 영적, 자연적 사람이 모두 통하기 시작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 위 4592번 글은 아래 창세기 말씀에 대한 주석이며, 관련 영역은 Clowes 역입니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창35:18)

 

All men whatever are born natural, with the power of becoming either celestial or spiritual; but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and for this reason he was born at Bethlehem, where is the boundary of the land of Benjamin, for by “Bethlehem” is signifi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and by Benjamin is represented the spiritual of the celestial. The reason why the Lord alone was born spiritual celestial is that the Divine was in him. (AC.4592)

 

그러면 그 변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람마다 고질병처럼 해결되지 않는 영적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해결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적 기쁨을 위해서 진리를 추구했다면, 이제는 지혜를 얻기 위해 진리를 추구합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그러한 변화를 느낄 때, 주님이 우리 내면에 오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다윗의 동네에 강보에 쌓인 아기를 보았을 때 그것이 주님이 오신 표적이니라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 너무 많습니다. 시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거나, 또 진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이해하니, 그러한 모든 시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너무나 고마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찬송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찬송 받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인간을 위해 찬송 받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우리 자아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악이며, 오직 주님만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찬송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시험에 맞서 싸우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 싸우는 그런 혹독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목자들은 그러한 시험들을 꿋꿋하게 버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한 진리로 오십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비로소 하나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평화가 무엇입니까? 시험에서 이길 때 자연히 찾아오는 상태, 그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께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아멘

 

 

원본

2016-09-0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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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보통은 성탄절에 드리는 말씀을 8월에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로마 황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 BC.100-34)의 이름(姓)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성도님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인구를 조사한다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그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릿감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아람 지역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 지역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의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능력,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 지역에서 만나는 것은 이런 합리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city)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이 동네(city)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는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천국에 있는 이교도들, 즉 교회 밖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HH.318, 김은경 역) //

 

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 하고요, ‘요셉이 호적 하러 간 곳은 유대 땅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이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은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적 능력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과 마리아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 동네로 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7절입니다.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고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것을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요,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아멘

 

 

원본

2016-08-07(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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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예언 (2)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1:76-80)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누가복음 1장 76절에서 8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사가랴의 예언 나머지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가랴는 글자의 뜻으로 보면 침례(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의 아버지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해 선택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말씀을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 같은 사람이고요,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택하신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 본래 ‘침례(浸禮) 요한’이라는 표기가 맞지만, 현 신약 성경에 ‘세례(洗禮) 요한’으로 되어 있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후 ‘세례 요한’으로 하겠습니다. 헬라어 원전엔 ‘밥티조’, 곧 ‘침례’가 맞습니다.

 

말씀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에 대해 계시록 1장 1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1:1)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계시를 받는 사람은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속뜻으로 보면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나타냅니다.

 

※ 각 이름마다 그에 상응하는 속뜻이 있는데요, 가령, ‘베드로’(Peter)는 신앙(faith)을, ‘야고보’(James)는 체어리티(charity)를, 그리고 ‘요한’(John)은 체어리티의 선이나 사랑의 선을 상응, 표상하는 식입니다.

 

※ 아래 글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 관련, 매우 참신한 내용이라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새로운 말씀을 계시받는 사가랴 역시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가랴가 사랑의 선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5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눅1:5-8)

 

위 본문에서 그를 의인 또는 제사장이라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의인이나 제사장은 사랑의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가랴가 오늘 예언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 선택되어 말씀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 이웃들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가랴가 예언한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세상에 오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전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인류에게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목적은,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구하시고, 그러므로 그들이 성결과 의로 주님을 섬기게 하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계속되는 예언에서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할 한 선지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사가랴가 낳은 아이 요한, 즉 새로운 말씀입니다. 본문 76절입니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이 아이는 물론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요한에 대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했고, 그가 먼저 세상에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상적인 의미로는 교회의 교리 자체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의미에서 선지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것에 대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장 21절로 2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21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1:21-27)

 

요한은 자신에 대해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주님이시며, 자신은 그저 주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을 가장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이신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표상하는 것은 그가 낙타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었다는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말씀에서 털이나 메뚜기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의 뜻으로서, 말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털이나 피부는 사람의 가장 바깥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은 영적으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나타내지요. 그래서 요한은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인 글자로 표현된 말씀을 표상합니다. 그러면 꿀은 무엇일까요? 꿀은 말씀의 진리를 배울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외적인 기쁨과 내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외적인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깨달을 때 느끼는 기쁨이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면 내적 기쁨은 무엇입니까? 내적인 기쁨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진리를 삶으로 살아낼 때, 주님으로부터 평화가 오고, 안정감이 오고, 그리고 자유가 옵니다. 그것이 바로 내적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은 ‘천국의 비밀’ 8028번 글입니다.

 

천사들이 오려고 할 때, 먼저 한 영을 보내 길을 준비하는 것은 천국의 질서이고, 그로 말미암은 세상의 질서이다. 그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고 권고하며, 그렇게 해서 그들이 천사들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순철 역) From this it could be seen how the case is with the order in heaven, and from this in the world; namely that when angels are about to come, a spirit is sent before to prepare the way, and that he excites fear, and gives admonition to receive the angels courteously; (AC.8028)

 

그러니까 주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아니면 천사들을 통해 오실 때, 그때 어떤 영을 보내 주님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질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그런 질서를 만드셨을까요? 주님이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면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전하는 진리의 대언자입니다. 그래서 천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면, 그것은 진리에 대항하는 것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크나큰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질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례 요한, 즉 말씀을 세상에 먼저 보내 당신의 길을 예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함부로 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4장 5,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주님은 인간이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고 해서 저주를 내리시는, 그런 악한 신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주님에 대해 악을 행함으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셔서 요한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 한 것은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요한과 엘리야는 모두 말씀으로서 주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77절입니다.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보통 말씀에서는 ‘백성’과 ‘나라’라는 말을 함께 사용합니다. ‘백성’은 진리를, ‘나라’는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는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의 역할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주님을 믿도록, 주님을 신앙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원본의 ‘믿음’을 가급적 ‘신앙’으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 교리에 익숙하신 분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스베덴보리의 많은 저작들을 보아도 대부분 ‘faith’를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믿음’ 하면 왠지 ‘오직 믿음’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맥에 따라서는 ‘믿음’을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원본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3:11)

 

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말씀을 통해 인류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거듭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신앙 가운데로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안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가 흘러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불은 사랑이나 선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나라라 하지 않고, 그냥 ‘주의 백성’이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나라’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은 진리이지만, ‘성령과 불’은 거기에 담기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지 않고, 그들이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지식을 알게 한다’라고 했는데요, 이 ‘구원의 지식’(the knowledge of salvation)이라는 표현은 영어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 위 77절 영어 번역은, to give the knowledge of salvation to His people for the forgiveness of their sins, 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은 사람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의 핵심인 죄 사함과 구원의 문제는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생활 속에서도 늘 부정한 것을 물로 씻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하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제자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죄라는 게 물로 씻어지듯 순식간에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저 유대교회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만으로도 죄가 씻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는 임종 시,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 그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가르치는데요, 그것은 저 유대인들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죄라는 것은 신앙의 고백만으로는 절대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신앙과 그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이 말씀에서 진리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리고 영은 신앙에 따른 삶을 뜻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된, ‘천국의 비밀’ 5398번 글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 거의 모르는 까닭은, 그들이 죄 사함과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말은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죄는 순간적으로 씻어진다고 믿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물로 몸의 더러운 것이 씻어지듯 그들도 그렇게 씻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그리고 사람은 신앙만으로, 그리고 순간의 확신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죄는 어떤 방법으로도 씻기지 않으며,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 가운데 있을 때 떨어져 나가거나 거절되어 한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기승을 부리지 못할 뿐이다. 계속해서 악을 내쳐야 한다.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they who are of the church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that it is scarcely anything. They do not even know that regeneration goes on through the whole course of life of one who is being regenerated, and that it is continued in the other life; or that the arcana of regeneration are so innumerable that scarcely a ten thousandth part of them can be known by the angels, and that those they do know are what effect their intelligence and wisdom. The reason why they who are of the church at this day know so little about regeneration is that they talk so much about remission of sins and about justification, and believe that sins are remitted in a moment, and some that they are wiped away like filth from the body by water, and that man is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the confidence of a single moment. The reason why the men of the church so believe is that they do not know what sin or evil is. If they knew this, they would know that sins can by no means be wiped away from anyone, but that when the man is kept in good by the Lord they are separated or rejected to the sides so as not to rise up, and that this cannot be effected unless evil is continually cast out, and this by means which are unlimited in number, and for the most part unutterable. (AC.5398)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이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만으로 순간적으로 죄가 씻어진다고 믿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악의 유혹을 끊임없이 거절함으로써 중심에 있던 악들이 옆으로 밀려나 다시는 기승을 부리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죄 사함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구원받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78, 79절에서는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말합니다.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먼저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서 비롯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님을 알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는데요, 바로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해는 주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 곧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를 일으키시고 그들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고 하십니다. 말씀에서 ‘앉아 있다’는 표현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의지의 상태, 즉 그의 생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생명이신 주님이 각 사람의 신앙 가운데로 오시기 전에는 그의 생명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것을 말씀에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세요. 여기서 발은 사람의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자연적 삶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평화는 주님과 하나가 될 때 느끼는 내적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 삶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고요,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기쁨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믿을 때,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세요. 그리고 자연적인 삶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천국의 기쁨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

 

끝으로 80절입니다.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사람들, 또는 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는 그냥 요한이 장성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말씀이 각자의 내면에서 신실한 신앙이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 신앙이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의 내면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기 전에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삶으로 옮기기 전에는 아직 이스라엘, 즉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교회가 아니라 빈 들, 그러니까 광야와 같다는 것이지요. 신앙의 지식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진리는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아이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과 오늘, 두 번에 걸쳐 사가랴의 예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은 세상에 오실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주님 말씀에 의하면,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였고, 오리라 한 엘리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주님을 표상했으며, 또한 요한 이후에는 다시는 선지자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오셔서 구원을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요한이 세상에 온 목적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래전부터 요한이 만들어 놓은 길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즉 아직 요한의 가르침 아래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요한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면 아직도 신앙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거듭남의 상태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아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되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서 요한의 때가 물러가고 주님의 때가 열립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5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16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사32:15-16)

 

아멘

 

원본

2016-07-24(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3(D6)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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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1-23)

 

 

※ 오늘은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 여자를 만드셨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창세기 본문을 통해, 과연 이 본문의 속뜻, 겉 글자의 뜻이 아닌, 거기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무엇인지, 특히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거의 모든 결혼식이나 결혼 관련 글마다 언급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과연 무슨 뜻인지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본문은 사람 안의 두 자아(自我, self, own, proprium 라틴, 본성)에 대한 내용인데요, 처음 주신 자아가 본래의 기능을 못 하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자아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것입니다.

 

※ 이 자아는 ‘본성’(本性)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초창기 영역에서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어 역본인 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자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 교회의 교리는 자아는 악 그 자체라고 하고,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아는 정말 그렇게 악한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인데, 거듭나기 전의 자아가 있고,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를 악하다 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자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죽은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 ‘’(惡, evil)이란 주님에 대한 안 좋은 태도로서, 사람이 자기 본성을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안 좋은 것은, 이것으로 인해 주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가 헝클어지고,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 아래는 본문 중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만드시고’에 관한 글입니다.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AC.153, 변일국 역)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전자를 지옥적 자아라고 부르고, 후자를 천국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지옥적 자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주님이 도와주시려 해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옥적 자아를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을 주셨을까요? 자아는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종의 자발성(voluntary)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당신에게 종속된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다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창조물 가운데 인간 말고는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자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1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이 들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상태인데요, 그것이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비뼈를 하나 취하셨습니다. 갈비뼈는 인간의 첫 자아로,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자아를 뜻합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갈비뼈에 비유했습니다. 갈비뼈의 단단하면서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모양이 자아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위 말씀에 대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148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런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입니다. (AC.148, 변일국 역)

 

주님께서 갈빗대 하나를 들어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셨습니다. 살은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자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 있는 자아인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뼈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표현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아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자아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아를 소유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높이면서 다른 사람은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모든 사람과 화합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빗대 일부가 살로 채워졌다는 것은 생명 없는 죽은 자아가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바뀌게 되면 사람도 따라 바뀝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만 좇던 사람이 점차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살피면서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가 생긴다는 것은, 잠들어 있던 사람이 깨어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호와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빗대’는 거듭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뜻합니다. 따라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가 지옥적 자아에서 천국적 자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시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처음부터 천국적인 자아를 주시지 않고, 지옥적 자아를 주시고 나서 천국적 자아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에게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이웃 사랑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애정에 맞는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허락하시고, 거듭나려고 애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천국적인 자아를 주십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456번 글 3번 항 인용입니다. 역시 같은 질문, 즉 ‘왜 주님은 처음부터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으시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아있으며,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의 모든 촉감이 살아있는 똑같은 사람임을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놀라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산 모든 사람이 저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람의 이러한 사후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또 그들은 교회의 신앙에 있어 이토록 핵심적인 사실을 왜 사람들에게 환상으로라도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천국에서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주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보다 쉬운 일은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되는 거짓을 확고히 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 안에 있을 때, 환상으로 무엇을 확신시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믿겠지만, 나중에 부인하게 되고, 그것은 진리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믿다가 나중에 부인하는 것이 모독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독한 사람들은 모든 지옥 중에서도 가장 낮은 무서운 지옥에 가게 된다. (HH.456:3, 김은경 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가셨을 때 아담이 한 말입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여자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겉 사람 안으로 새로운 자아를 보내 주실 때의 자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겉 사람 안에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뼈 중의 뼈는 겉 사람 안에 본래부터 있던 지옥적 자아를 말하고, 살 중의 살은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자아도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공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지옥적 자아가 천국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서고, 어느 때는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섭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완전히 누를 때, 인간은 비로소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담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천국적 자아를 통해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것’은 거듭나고자 힘쓰는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뜻하고, ‘남자’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잘못된 번역이고, ‘아내’(wife)가 맞습니다. 그리고 본문 원전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한 것은 완전히 거듭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는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처럼 속 사람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의 자아를 아내라고 부를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하게 결합한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거듭나는 데 있어서 자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주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76번 글 2번 항은, ‘자아가 없다면 아무도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인애에 관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76:2, 이순철 역) As good and truth so appear, so do all things of the church and of heaven, and all things of love and wisdom, and all things of charity and faith; yet none of them is man’s. No one can receive them from the Lord unless it seems to him that he perceives them for himself. (DP.76:2)

 

※ 위 문장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5장, ‘사람이 이성으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법칙 중 하나다’(It Is a Law of Divine Providence That Man Shall Act from Freedom According to Reas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자아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거듭나기 전의 자아로 지옥적 자아이고, 또 하나는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시는 천국적 자아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아는 천국적 자아이며, 그 전의 자아는 자아의 외관(appearance of proprium)일 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적 자아가 생기기 전의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자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적 자아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인간의 자아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매 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지옥적 자아를 딛고, 천국적 자아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이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부단히 천국적 자아를 획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일이며,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37:5)

 

아멘

 

 

2021-1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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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0.2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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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의 예언 (1)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1:67-75)

 

 

사가랴는 아이가 태어난 지 팔 일째 되는 날,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혀가 풀리면서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이어지는 본문 67절로 75절입니다.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아시는 것처럼, 사가랴는 천사를 만난 다음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는데요, 천사가 전하는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아이의 할례 때,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적은 후에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영적 의미로 어떤 뜻일까요? 그것에 대해 우리는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씀을 나눴는데요, 그동안 사가랴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 속뜻으로는 사가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변화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인 것인데요, 이를테면,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받는 것이며, 말씀을 통해 새로운 신앙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는 것은 신앙의 결실을 보는 것, 다시 말하면, 신앙으로 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의 내면에 선을 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사가랴라 하지 않고, ‘그 부친 사가랴’라 하는데요, 이는 새삼스럽게 사가랴가 요한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선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선을 뜻하는 까닭은,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태양의 열기로부터 빛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선이 진리보다 앞선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서는 선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는 표현은, 사가랴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있는 선 가운데로 진리가 흘러들어와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가랴는 예언을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다음에는 진리를 바탕으로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따르고요, 그러고 나면, 다시 그 선을 통해 이번에는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사실입니다.

 

※ 이순철 목사님은 2016년 당시 청주 새 교회 담임을 하시면서 격주로,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출애굽기를 격주로 강해하셨는데요, 위 말씀은 이런 배경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처음에는 진리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이 끝나자 곧 선의 시험이 왔고요, 그러고 나서 다시 진리의 시험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진리의 시험과 선의 시험이 반복되면서, 주님으로부터 한번은 진리를 획득하고, 한번은 선을 획득하는 과정이 계속됩니다. 그런 식으로 내면에서 끊임없이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들, 즉 사가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요, 그에게 예언을 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했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가랴의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사가랴의 예언은 한마디로, 성령이 사가랴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오실 주님을 증언하는 것인데요, 이제 그 증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68절입니다.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그냥 하나님을 찬송하라 하지 않고,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실 주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 자신을 한 번도 여호와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셨다면, 주님은 아마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인들로부터 큰 화를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 하시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우회적으로만 밝히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2장 29절인데요,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12:29-30)

 

여기서 ‘’라는 표현은 주님 자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님에 대해 ‘’라고 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 5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4-5)

 

앞에서 마가복음 12장 29절의 말씀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만 구약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주님이라고 바꾼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오신 주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진리이기 때문에, 오늘 사가랴는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69, 70절에서 사가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말씀은 모두 세상에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은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진리로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인데요, ‘다윗의 집’은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뿔’은 진리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하신 것이지요. 사가랴는 계속해서,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서에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일관되게 밝히신 진리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 주님께서 줄곧 계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은 어떤 것입니까?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주님은 유대교회가 타락해 종말로 치달을 때, 그리고 교회가 만들어내는 악과 거짓 진리가 인간의 양심을 질식시킬 때, 그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내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말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72절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는 모든 일은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한순간도 인간을 미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죄를 짓거나 할 때, 주님께서 벌을 내리시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때가 많은데요, 그런데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요, 인간들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을 내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가엾게 여기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함이 가엾고요,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넘어지고, 좌절하는 모습을 측은히,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기억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9849번 글에서는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은 가엽게 여기시는 것이며, 그러므로 당신의 자비로 보호하시고 구해내시는 것을 뜻한다. (이순철 역) remembering,” when said of the Lord, denotes to have compassion, and thus from mercy to preserve or deliver

 

주님은 긍휼과 자비로 그렇게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거룩한 언약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해서 인간을 모두 빠짐없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여기서 ‘우리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서 주님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기서 아브라함은 천적인 것,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태고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일은 오직 주님만을 사랑했던 태고교회 이래로 줄곧 주님께서 맹세하신 일입니다. 인간이 하는 맹세는 거짓이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맹세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리입니다. 맹세라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진리를 맹세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7,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주님에 관한 모든 예언은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잠재적으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일 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그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이렇게 자연적인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삶의 구체적 행위 가운데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심으로써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하셨는데요, 여기서 율법은 모세가 기록한 말씀이고요, 선지자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나 선지자는 바로 주님의 말씀 전체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의 진리를 실현키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원수의 손’이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악과 거짓의 위세를 뜻합니다. ‘원수의 손’이라고 할 때, 손은 능력을 뜻합니다. 악과 거짓에게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영적 싸움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만으로 대처하고자 할 때에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 앞에서는 마치 바람 앞에 티끌처럼, 먼지처럼, 그리고 빛 앞에 짙은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것이 악과 거짓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악과 거짓이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위력적이며, 두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운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앞에는 홍해가 버티고 있고, 뒤로는 애굽의 기병과 전차가 쏜살같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신앙인들은 영적 시험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는 위기의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압도하는 악과 거짓의 위력 앞에서 우리는 늘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 2826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순철 역) to “fear” is to distrust, or not to have faith and love.

 

저는 가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외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다만 저 자신을 믿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아직 주님보다는 나를 더 신뢰하고, 주님보다는 세상의 감각적인 것들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 분명히 보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라며 절망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네가 종신토록 내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든든하고 마음에 힘이 되었습니다. ‘성결과 의로 섬긴다’는 것은 ‘신앙과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성결하다’는 것은 진리, 또는 신앙에 대해 하는 말이고요, ‘의롭다’는 말은 사랑, 또는 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결과 의로 섬기는 것, 두려움 없이 섬기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시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자기 마음속 애정을 늘 살피면서 자아가 하려는 일을 끊임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몇 주 동안, 사가랴가 겪은 일들은 어쩌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진리를 믿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사가랴와 같이 성령이 함께 하시고,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주신 진리를 그대로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전하는 것이 꼭 말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성령이 저절로 역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 아마 그것이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예언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며, 그러므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전하려고 하다 실패했던 지난날 여러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지 않고, 내가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가랴의 입을 통해 성령이 가르치신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오신 주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우리는 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진리로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며, 아버지는 주님 안에 신적 선으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언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주 오래전, 아담으로 상징되는 태고교회 때부터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신 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맹세를 지키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가랴의 세 번째 예언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려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종신토록’이란 말과, ‘두려움 없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한결같지 않고, 또 늘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요, 나의 자아가 어디로 움직일지 몰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합니다. 각 사람에게 오셔서 타고난 자아를 천국의 자아로 바꾸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의와 성결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가랴를 통한 성령의 은혜가 우리 성도님께도 꼭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아멘

 

 

원본

2016-07-10(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2(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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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눅1:57-66)

 

창세기 30장 1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창30:1)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너무 분해 야곱을 해치려고 했고,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로 피신,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삼촌의 딸들인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야곱은 레아보다는 동생 라헬을 더 사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하는 것입니다. 라헬의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라헬은 ‘내적 진리에 대한 사랑’(the affection of interior truth)(AC.3782, 창29:6)을 뜻한다고 새 교회 가르침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배우기를 좋아하고, 또 실천하려고 애쓴다면 우리 안에는 라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라헬이 아이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가 없다는 것은 진리의 결실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내적 진리를 알기는 아는데, 아직 그 진리에 따라 제대로 살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일수록 그것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할 때 상심이 큽니다. 그것은 새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다 경험해 보신 일일 것이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안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엘리사벳 역시 라헬이 그랬던 것처럼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엘리사벳의 속뜻은 ‘주님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러나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참된 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불가능하겠지요. 진리를 모르니까요. 따라서 믿음, 곧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엘리사벳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 역시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정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이제 잘못된 교회 안에 있는 엘리사벳과 같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이 낳는 아이는 바로 ‘새 교회를 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타락한 교회 안에 있지만, 그럼에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 교회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며, 그들이 그 말씀에 따라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해산할 기한이 차서’는 무슨 뜻일까요?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나에게 새 교회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덥석 받아들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이해할 것이 있고, 그러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그것이 바로 ‘해산할 기한’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은 비로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여기서 ‘이웃과 친족’은,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 속뜻입니다. 선이 비슷하다는 것은 애정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일이 저마다 있듯, 교회를 섬긴다고 해도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요, 그 좋아하는 비슷한 점이 바로 선이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가 비슷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있는데, 교회를 섬김에 있어 하는 일이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일하는 방법이나 순서 같은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개중에 그 방법이나 질서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 잘 맞는 것이죠. 그런 것이 진리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는 무슨 뜻일까요?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신 것’을 의미하고요, 그걸 들었다는 것은 ‘그들, 즉 엘리사벳과 비슷한 종류의 선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듣고’는 순종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도 새로운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라는 이 말씀은 속뜻으로는 엘리사벳으로 표상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말씀이 비슷한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점점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런 식으로 신념과 애정이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마치 하나의 물결이 또 다른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또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끊임없이 퍼져나갑니다. 그것이 ‘함께 즐거워하더라’의 의미입니다.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팔 일’은 영적으로 하나의 상태가 끝나고, 다시 새로운 상태가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일주일은 하나의 상태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고, 팔 일째는 그 일주일이 끝난 다음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 일째가 되기 전 일주일이란 기간은 사람들이 새로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기간이고요, 그리고 팔 일째 되는 날은 그들의 영적 상태가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진리들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많았는데요, 그러니 그걸 버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저 역시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는데요, 그러니까 장로교 통합 측에서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게 된 저는, 그러고는 결국 침례교 신학을 하고, 침례교회 목사가 된 저는 오십 대 후반까지 쌓아온 모든 신앙의 관계를 접어야 하는, 그리고 등돌림과 외면을 당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형제들을 비롯한 혈육들로부터도 말이지요! 저 역시도 처음에 큰 걸림돌이었던 이슈들이 있었는데요, 그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첫째, 성경 66권이 다 말씀’(The Word)이 아니고, 그 안에 속뜻이 들어있는 성경이라야 말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안에 속뜻, 곧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가 들어있는 성경만 읽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성경은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래서 구약에서는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29권만, 신약에서는 , , , , 등 총 5권만 말씀이라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지요. 왜냐 하면, 현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은 열에 아홉, 모두 사도들, 특히 바울 사도의 서신서에서 추출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그동안 그 안에 주님의 아르카나가 없는, 인간의 창작물을 가지고 구원 교리의 터를 파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은 것인데... 이렇게 허망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둘째, 천국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실상이 충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첫째 목표는 천국 가는 건데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너무나 막연하고 무지한 상태이지요. 이런 사실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를 불러 27년간 영계 체험을 하게 하신 주님의 기록, 곧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매우 낯선 내용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마치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쑤욱 쑥 받아들였습니다,)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었는지, 제가 전하는 여러 사실에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셋째, ‘겉 사람’, ‘속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써 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 속 사람의 상태로 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살면서 이 속 사람을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시키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 충격적이지 않나요?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런 많은, 그리고 마치 새 술은 새 부대에가 떠오르는 듯한, 이 사고의 대전환 앞에 저는 정말 여러 해 많은 안팎의 고민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저를 제가 소화할 수 있는 페이스에 발맞춰 제 곁에서 저와 동행하시고, 끝까지, 그리고 지금도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지금은 그런 고민이나 고통은 없고, 밝고 환한 빛 가운데 걸어감을 생생히 느낍니다. 여전히 궁금한 것들은 몇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

 

그 진리를 얻기까지 들어간 시간과 노력들이 아깝기도 하고, 또 그중에는 최선의 진리는 아니라도 여전히 진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서로 섞이게 되는데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최선의 것이 나타나면 차선의 것은 모두 버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마태복음 9장 17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9:17)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창세기 17장에서는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17:12)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사상 가운데는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비(非) 진리, 또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온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씻어내라고 하세요. 그것이 모든 남자로 할례받게 하는 것이고,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는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 안에 인간적인 것, 진리 아닌 것들이 섞여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없습니다. 팔 일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아버지는 대개는 주님,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의 의미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아버지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예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 안에 자아에 속한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아직 할례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사실 진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는 누구나 그의 자아를 통해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진리를 찾고 배웁니다. 그때의 진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 안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심지어는 이웃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도 자기 사랑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순수하게 이웃을 위해 진리를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할례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할례를 통해 자아에 속한 것을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지으려고 하자 아이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합니다. 60절로 63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그러자 사람들이 이번에는 사가랴에게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묻습니다. 그러자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더니 거기에다 요한이라 썼습니다.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쓴 이유는,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사가랴는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와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내면에 교회를 이룬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속뜻으로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즉 엘리사벳은 교회를 이루는 진리를, 남편 사가랴는 교회를 이루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60절에서는 엘리사벳이 ‘대답하여’라 했고, 63절, 사가랴에 대해서는 ‘서판을 달라 하여 쓰매’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요? 말씀에서 ‘대답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진리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대답했다고 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그런 관례에 포함된, 자기 안에도 있는 이기적인 사랑을 보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즉 원래는 자기도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이며,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 곧 주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인 것이지요. 주님의 뜻은 아이의 이름을 주님 사랑에서 나오는 이웃 사랑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이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즉 이기적인 사랑은 몰아내고,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짓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those who are in the good of love)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생명 안에 그의 삶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서판’은 각 사람의 내면에 있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자주 생명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서판’, 또는 ‘생명책’은 개인의 영적 생명입니다. 그 생명 안에는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 그대로 기록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 (461-469) 중 463번 글에 나오는, ‘생명책’ 관련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사후 사람의 행위가 드러날 때, 조사하는 일을 맡은 천사는 사람의 얼굴을 살핀다. 이어 양손의 손가락에서 시작해 전신을 살펴본다. 내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사고와 의지에 속한 모든 것은 뇌에 새겨져 있다. 뇌에 그 출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신에도 새겨지는데, 이는 사고와 의지의 모든 것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몸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나가고, 가장 말초적인 것에 종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지와 그에 따른 생각에서 나와 기억에 새겨진 모든 것은 단지 뇌에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새겨지는 것이며, 몸의 각 부분의 질서에 따라 거기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사람 전체가 그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똑같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악인은 그의 악이고, 선인은 그의 선인 것이다. 말씀에 나오는 사람의 생명책이 의미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행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그 사람 전체에 새겨져 있어 그 기억에서 불러일으키면 책 읽듯이 읽을 수 있고, 천국의 빛으로 그 영을 비추면 그 모든 것이 영상으로 나타난다. (HH.463, 김은경 역)

 

따라서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는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성격이 그대로 그의 생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시 말하면, 사가랴는 지금 새로운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판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실천하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의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책에 진리를 기록하는 일은 선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썼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이란 이름은 ‘이웃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는 아이의 이름을, 한 사람은 요한이라고 ‘대답’했고요,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서판’에다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그들이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인 후에, 그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혀가 풀리며’는 사람의 이성이 주님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빛이 흘러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혀는 우리의 이성, 또는 이해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의해 이성이 밝아질 때, 우리는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주님을 찬송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혀가 풀리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나요? 주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신앙으로, 또는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사가랴가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을 자기의 신앙으로 온전히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는 사가랴가 혀가 풀리고 주님을 찬송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천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가랴가 말을 하는 것은 신실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사가랴의 신앙 고백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는 본래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 용어로 유다는 천적(天的)인 교회를 나타내고요, 이스라엘은 영적인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유다는 가장 순수한 교회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잘못된 교회, 무너져가는 교회를 뜻하지요. 그리고 유대 산골이라고 할 때 산골은 그 잘못된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사람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산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큰 산이 아니라 나지막한 산, 영어로는 ‘’(hill)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퍼졌다는 말씀은,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말씀이 기존 교회 안의 선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듣는 사람들이 이 말을 모두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마음에 둔다는 것은 각자의 의지에 새기는 것입니다. 마음은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본래 선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은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아이는 바로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는 누구나 자아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원을 생각하고요, 또 자기의 지성으로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신앙을 불완전하고 나약한 신앙에서 시작, 점차 견실하고 확고한 신앙으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질 때, 주님께서는 ‘진리를 너희 것으로 삼지 말고, 내게로 돌리라’ 하세요. 오늘 말씀에서 ‘팔 일째 아이가 받는 할례’의 의미 가운데는 주님의 그러한 뜻과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기의 진리 안에 있는 애정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의 사랑은 버리고, 대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나를 구원하는 진리일 뿐 아니라 이웃을 구원하는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는 사가랴-엘리사벳 부부의 아이가 할례를 받는 것으로 표현했고요, 팔 일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 이름을 따르지 않고, 요한이라 짓는 것 역시 그런 뜻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님들께서 자신의 진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꼭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통해 팔 일째, 즉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아멘

 

원본

2016-06-26(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01(D4)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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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찬송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1:46-56)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걱정과 공포 같은 자연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영적인 두려움은 모든 영적 사랑 안에 내재되어 있고, 또한 사랑의 질과 양에 따라 달라지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시지 않으며, 그의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여 지옥에 던지시지도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시고,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천국에 있는 당신께로 들어 올리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은 그가 삶의 악과 교리의 거짓으로 인해 자기 안의 신적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거나 그것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계시록 해설 696.23, 이순철 역) Jesus said, Fear not them who are able to kill the body but are not able to kill the soul; rather fear Him who is able to destroy both body and soul in Gehenna (Matt. 10:28). Here, however, “to fear” signifies to have a fear of dying spiritually, thence a natural fear, which is fearfulness and dread; but spiritual fear is a holy fear that abides within every spiritual love variously according to the quality and quantity of the love. In such a fear is the spiritual man, and he knows that the Lord does not do evil to anyone, much less does He destroy anyone as to body and soul in Gehenna, but that He does good to all and desires to raise up everyone as to body and soul into heaven to Himself. This is why the fear of the spiritual man is a holy fear lest by the evil of life and the falsity of doctrine man should turn away, and thus do harm to that Divine love in himself. (AE.696.23)

 

 

오늘은 계속해서 누가복음 1장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처음 만났을 때,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아이가 뛰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단순히 천사가 예언한 일들을 마리아가 확인하는 그 정도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이 이방인들을 통해 세우시는 새 교회를 표상하구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는 새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마리아가 부르는 찬송은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말씀을 통해 교리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졌을 때,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겼을 것이며, 또 살아계신 주님의 섭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저 또한 처음 새 교회 말씀을 대했을 때,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이다, 이런 교회야말로 진짜 교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6, 47절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는 그냥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지 않고, 영혼과 마음으로 찬양한다고 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영혼’, ‘마음’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래 표현은 ‘’, ‘’입니다. 마리아는 왜 혼과 영으로 찬송한다고 했을까요?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혼과 영에 대해 명확하게 구별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혼과 영은 사람의 영적 생명이다’라고만 말합니다.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두 개의 그릇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will, 마음먹는 능력)라는 그릇이구요, 하나는 ‘이성’(understanding,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그릇입니다. 새 교회 교인들은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담는 그릇이고, 의지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명은 자존심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혼과 영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6054번 글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면 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혼을 사람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이순철 역) But lest in consequence of the conjectures and hypotheses about it, the word “soul” should give rise to the idea of the unknown, it is better to say man’s “spirit,” or if you prefer it, the “interior man,” (AC.6054.2)

 

이 말은 사람의 혼과 영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혼과 영을 구별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혼과 영으로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때 혼은 믿음 또는 진리의 생명을 의미하구요, 영은 사랑 또는 선의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혼으로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고, 영으로는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에서 찬송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은 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찬송한다고 할 때는 믿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구요, 기뻐한다는 것은 선한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으로는 주님을 기뻐한다고 하고, 혼으로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한 말은 ‘내가 믿음과 선한 삶으로 주님을 예배합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4장 23절에도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혼과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구요, 더 쉽게 표현하면, 진리와 선한 삶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바로 마리아와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새 교회를 표상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사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은 비록 새 교회라 하더라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때만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뻐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아의 애정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애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더러 있어도 주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겸손하지 못해서입니다. 조금 전 본문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비천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지, 결코 교만한 자를 돕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겸손하지 못하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손을 뿌리치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그런 상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도 주님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48절에서 마리아는 그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스스로 자기는 비천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여자로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이유입니다. 누구나 겉으로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겸손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압니다. 만약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일상생활에서 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발끈, 반드시 보복하려는 사람들이라면, 계속해서 주님의 도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말씀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의 지성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칭 겸손하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주님이 보시기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주님을 찬송할 뿐만 아니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리 주님을 기뻐하려고 해도, 아무리 주야로 말씀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하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49절에

 

49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한 것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위와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셔서 큰일을 행하시는데요, 다만 우리가 겸손할 때만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찬송은 계속됩니다.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마리아는 이번에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긍휼하심이 이른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죽을 것 같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나 화를 당할까 봐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두려움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두려움은 내 삶의 행위가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지는 않을까, 주님의 사랑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근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영적 두려움이며,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에게 주님의 능하심이 큰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그분의 긍휼과 능력이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1절에서 마리아가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라고 한 것이 그 말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주님의 능하심이 큰일을 내게 이루셨다는 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팔’은 곧 주님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백번이면 백번 다 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때는 항상 이깁니다. 그래서 사람은 겸손해야 하고,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서 우리 앞에 있는 영적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 그러니까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상태,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고도 연결되는데요, ‘주님, 제게도 복을 주세요’라며, 안수를 통해 복 받기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주님께 복을 구하는 것이 나쁘거나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안전하며, 확실하고 영원하지요. 문제는, 주님의 복은 위 주님의 능력처럼 우리 속 사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복을 허락하셔도 정작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그 복을 받을 수 없는 상태라면, 그러니까 그 복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그런 상태라면, 그 복은 우리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주님의 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면, 그 원인을 밖이 아닌, 내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정작 내 방 커텐을 꼭꼭 쳐서 빛이 조금도 못 들어오게 해놓고는 계속해서 ‘내 방이 어두워, 내 방이 어두워’ 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51절로 53절입니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위 본문에서는 구원을 가로막는 영적 장애물들을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는 우리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내면에도 그런 것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을 오직 주님께만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작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즉 나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속에는 선하고 진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작은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 아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2장,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 10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세상에 살 때 자기가 행한 선과 믿어온 진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또는 자기 것이 되었다고 확신한 영들이 있다. 선행을 자기 공로로 여기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그런 신념이 있다. 그런 영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천사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도둑이라 여겨 피한다. 어리석다는 이유는, 그 영들의 관심사가 신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도둑이라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것을 가로채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천사들 안에 있는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는 천국의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다. (HH.10, 김은경 역) Such spirits as have confirmed themselves during their life in the world in the belief that the good they do and the truth they believe is from themselves, or is appropriated to them as their own (which is the belief of all who place merit in good actions and claim righteousness to themselves) are not received into heaven. Angels avoid them. They look upon them as stupid and as thieves; as stupid because they continually have themselves in view and not the Divine; and as thieves because they steal from the Lord what is his. These are averse to the belief of heaven,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in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HH.10)

 

그러면 ‘부자’는 또 누굽니까? 부자는 진리에 대해 많이 알고는 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부자입니다. 마치 주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같은 그런 사람이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셔서 그런 것들을 다 몰아내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없어진 다음, 그 빈자리를 구원에 필요한 덕목들로 채워 주셔야 합니다. 위 본문에서는 구원에 필요한 덕목들을 ‘비천한 자’, ‘주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비천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비천한 자는 내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고,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의해 우리 안에 이 ‘비천한 자’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항상 내가 잘난 줄 알고, 그래서 자신의 지혜에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짐작하시는 대로, 이런 상태로는, 즉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이래서는 시험이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는 지옥을 닮아서 지옥의 기운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지요.

 

또 ‘주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 배우기를 항상 갈망하고,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통하려고 할 때, 주님으로부터 온갖 선하고 진실한 것들이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주린 자가 말씀을 소유할 때, 우리 안의 주린 자가 주님으로부터 지식을 배울 때, 그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되며, 삶을 바꾸는 지식이 됩니다. 반면에 부자의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입니다. 그것은 쓰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을 창고에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54, 55절에서 마리아는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의 자손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들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은 말 그대로 기억만 하신다, 안 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 이래로 주님께서 일관되게 약속하셨던 일입니다. 주님은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를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조상은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은 그 일이 태고교회 이래로 주님께서 계속 약속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석 달’에서 이 ‘’(3,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마리아로 표상되는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 말씀을 통해 새 교회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섭리에 의해 새 교회의 사람들에게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 말씀을 통해 교리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기간과 과정이 바로 ‘석 달’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이제 새로운 말씀을 배우는 단계가 끝나고, 삶으로 옮기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교회 사람들은 말씀을 배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배운 말씀을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의 속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마리아가 주님께 드리는 찬송은 모든 새 교회인들이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는 찬송입니다. 입술만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삶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찬송한다고 했고, 또한 주님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봐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기뻐한다면 절대 뒤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뒤를 돌아본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찬송을 들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제까지 네가 겸손하지 못했고, 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또 겸손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능력의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를 몰아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소서, 주린 자를 먹이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시고, 이제 그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6-27)

 

아멘

 

원본

2016-06-05(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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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1:39-45)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1절)

 

하였고, 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36절)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반대로 아기를 가지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는 그들이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7절)

 

는 천사의 말을 듣고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37절)

 

답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떠나가자 엘리사벳을 만나러 갑니다. 아마 엘리사벳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가서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으로 표상(表象)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어떤 사람들을 나타낼까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모두 천적인 선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천적(天的, celestial)이다, 영적이다, 그리고 자연적이다 라는 말, 표현, 용어들은 새 교회에서는 정말 많이 사용하는 표현들인데요, 다른 곳에서는 듣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굉장히 생소하기까지 한 용어들입니다. 이 용어들은 사랑의 단계, 정도(degree)를 나타내는 표현들인데요, 그러니까 천적이라는 표현은 주님, 즉 선(善, good)을 사랑하는 단계이구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 이 ‘이웃, 즉 진리를 사랑한다’는 게 좀 낯설 수 있어 보충 설명드립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15번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김은경 역) In heaven loving the Lord does not mean loving him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it means loving the good that is from him; and to love good is to will and do good from love; and to love the neighbor does not mean loving a companion in respect to his person, but loving the truth that is from the Word; and to love truth is to will and do it.

 

또 자연적이라는 말은 세상 법도나 학문 같은 것, 그 밖의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천적 선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선을 행하되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해서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이렇게 천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을 친척(天的, celestial, heavenly)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그들은 실제로도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그들을 특별히 친척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친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있는 선의 특성이 서로 비슷한 것이 마치 친척 간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서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 다를까요? 엘리사벳은, 속뜻으로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구요, 마리아 역시 속뜻으로는 이방인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은, 마리아로 표현되는 이방인은 단순히 교회 밖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구요, 기존 교회,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거짓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마리아와 같은 이방인들입니다. 예를 들면, 오직 믿음, 그러니까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거나, 말로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성령 따로 세 분 하나님을 믿는 그런 믿음하고는 타협하지 않는, 그런 믿음, 그런 신앙과 교리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방인’의 속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왜 이방인들을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왜 새 교회를 이방인들과 함께 세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이에 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천국과 지옥’을 정독(精讀)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새 교회 교리에 관한 일종의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출발은 천국에 관한 사실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진 것은 잘못된 신앙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기존의 낡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말씀을 가지고는 왜 안 될까요? 기존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왜곡, 뭔가를 보태서 섞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교회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소위 장로의 전통이라는 계율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 일단 이 모든 오류의 출발은 현 기독교회가 그 주된 교리를 주님의 말씀이 아닌, 사도들의 편지에서 뽑아냈기 때문입니다. 교리, 즉 신앙은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만 나와야 합니다. 현 66권 성경 중 주님의 말씀과 말씀 아닌 것에 관한 글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https://bygrace.kr/1027)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선하게 살아라.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가르칩니다. 이것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수용할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에 아무리 투철해도 정작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즉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잠깐 허락을 받아 들어간들 금방 못 견디고 스스로 뛰쳐나오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신교의 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거짓이요, 오류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긴 일기를 보면, 스베덴보리가 영계에 들어가 주님의 허락으로 많은 역사적 인물들도 만났는데, 그중에 마틴 루터도 있었답니다. 그가 루터와 이 ‘오직 믿음’ 교리에 대하여 대화하던 중 그의 대답,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 순전히 내가 고안한 것인데, 당시 카톨릭과 교리적 어떤 선명성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런 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참고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엘리사벳과 사가랴 같은 사람, 즉 기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말씀이란 유대교회 말기에는 신약, 즉 주님 친히 말씀하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말씀이구요,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는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에게 주시는 아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 인류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그 대신 세워질 새 교회를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이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누구일까요? 마리아의 아이는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는 말씀이 없는 곳에는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침례(세례) 요한으로 표상되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의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지상에 세우시는 새 교회 가운데 첫 번째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受胎告知, Annunciation)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천사는 왜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렸을까요? 마리아로 상징되는 새 교회의 사람들을 새로운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말씀, 새로운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를 생각해 보시죠. 어떤 분은 책을 통해서, 어떤 분은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새 진리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이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엘리사벳의 수태를 알린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인도를 통해 마리아는 이제 서둘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출발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문 39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움직였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그런 모습은 선한 이방인이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먼저 산골로 갔습니다. 산골은 영어로는 hill country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작은 산이 있는 시골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작은 산은 무슨 뜻일까요? 큰 산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면, 작은 산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골 마을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산골로 가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기존 교회 안에 이웃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왜 마리아는 그들에게 갔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려 줘도 잘 이해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말씀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나, 교회에 다녔다가 그곳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회의를 느껴 교회에서 멀어진 분들에게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과 사가랴에게 말씀을 주시고, 이제 마리아가 그들에게 달려가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마리아가 마침내 유대의 어느 동네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유대는 천적인 것을 뜻하고,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유대의 동네란 천적인 교리를 말합니다. 천적 교리는 그 교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통해 새로운 말씀을 알게 되고, 다시 그것을 통해 가장 깊고 순수한 교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유대의 동네에 당도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면서 엘리사벳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40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인사를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의무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웃의 집을 방문할 때는 인사하라, 평화를 빌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우리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인사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10:12-13)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한 인사는 마리아에게 있는 주님의 평화가 엘리사벳과 그 아기에게 전해지는 것이구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받았을 때 복중(腹中)에서 아이가 뛰었습니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중의 아이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뛰었다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인 마리아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정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는 주님이 세우실 새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은 주님께서 당신의 새 교회에 새로운 말씀을 주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새로운 말씀을 통해 주님은 내적 진리로 당신의 교회에 오시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존의 교회에는 주님이 계실 곳이 없는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처음 오실 때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주님은 새로운 말씀으로 다시 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42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42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엘리사벳이 축복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마리아를 축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고 했는데, 그것 역시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것과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서 뛰어놀았다는 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주님의 거룩한 열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아기가 복중에 뛰는 것은 말씀이신 주님이 당신의 교회와 하나 되고자 하시는 열성이구요,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한 것은 주님의 열성이 당신의 교회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엘리사벳을 통해서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축복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축복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 16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를 저주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인간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숙명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여자란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진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교회는 인간의 자아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임신하는 고통과 자식을 낳는 수고는 무슨 뜻일까요? 교회가 진정한 진리를 얻기까지 견디고 이겨야 할 내적 싸움과 온갖 걱정을 나타냅니다. 그것이 아기를 낳는 수고와 임신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진정한 진리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 이 누가복음 속뜻 강해가 진행될 동안 사실은 출애굽기 속뜻 강해 역시 병행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진정한 진리를 ‘만나’로 표현합니다. 만나는 책에서 배우거나 설교를 통해 듣는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말씀을 통해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 바로 진정한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선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진리는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고난 자아를 부단히 깎아 내고, 깎아 내고, 잘라내고, 잘라내는 그런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가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부단한 내적 싸움과 인고(忍苦)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징계처럼 내리신 이 말씀은 교회의 험난한 역사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 주님에 대한 호칭 변화에 주목해 보세요. 창세기 1장은 ‘하나님’만 나오지만, 창세기 2장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러다 다시 ‘여호와’만 나오고, 또 ‘하나님’만 나옵니다. 다음은 주님의 여러 호칭에 관해 짧게 요약해 본 글입니다.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여호와’, 진리에 대한 호칭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의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은 ‘예수’, 진리에 대한 호칭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한 더욱 깊은 내용은 아래 제 블로그 글을 참고하세요.

 

AC.14 설명, 주님의 ‘호칭’ 관련’ (https://bygrace.kr/2637)

 

그런데 오늘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까지 교회가 겪었던 모든 싸움과 수고의 결실을 이제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이 교회의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을 예고하는 그런 말씀이라면, 이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은 교회의 그 모든 흥망성쇠의 결실을 너를 통해 맺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마리아로 상징되는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마지막 교회이구요,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서 ‘네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입니다. 그리고 태중의 아이는 그 교회에 내적 진리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43절에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또 말했습니다.

 

43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역시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사벳이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하는 것은, 참된 말씀을 아는 엘리사벳 같은 사람들이 이제 낡고 병든 교회를 떠나는 것이구요. 그러므로 내적 진리가 있는 새 교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본 마리아와의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의 의미를 우리들의 얕은 믿음으로 어떻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글자로 된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것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엘리사벳이 잉태한 아기, 즉 새로운 말씀이 마리아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말씀이 전해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물론 그들에게도 진리를 주십니다. 어떤 식으로 주실까요?. 다양한 종교의 교리나 세상의 상식들을 통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들은 진정한 진리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진리를 가지고도 선하게 살면 자기 자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교회로서의 사명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삶을 통해 이웃들에게 주님의 진리를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인류를 모두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뜻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선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물론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 보면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이방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엘리사벳에게로 인도하시고, 그를 통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받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입장에서 본 엘리사벳과의 만남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벳과 사가랴 부부는 참된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여전히 기존의 교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기존 교회에 머무는 것은 기존의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진리 전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진리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진리와 그동안 자기가 갖고 있던 진리를 함께 섞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진리들이 어떻게 될까요? 진리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이, 말하자면 기존의 교회에 아직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마리아를 만나는 것은, 낡은 교회를 떠나 순수한 교회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권고를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가 나에게 나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새 교회가 나에게 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이것은 주님이 세우신 새 교회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말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믿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새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진리에 따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분들이 주변에는 많습니다.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새 진리를 위해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오로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새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새 교회는 에덴동산 이래 인류가 감당했던 모든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로 인도된 모든 성도님들께 주님의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사2:2)

 

아멘

 

원본

2016-05-22(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2-27(D2)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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