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5:4-20)

 

이 본문을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2026-01-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3, 26. 창5.2, 2026-01-11(D1)-주일예배(창5,4-20, AC.486-515),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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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04, 창5:1-3, 신년예배,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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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은 앞에 있었던 ‘마할랄렐’(Mahalalel)이라는 교회와, 뒤에 이어질 ‘에녹’(Enoch)이라는 교회로부터 알 수 있는데, 야렛은 이 두 교회 사이에 위치한 중간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전개에서 ‘말해지지 않은, 즉 언급되지 않은 단계의 의미를 읽는 법’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렛의 교회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중요하지 않거나 비어 있는 단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앞선 교회와 뒤따르는 교회 사이에 놓인 위치 자체가 그 성격을 드러낸다고 말해요.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마할랄렐은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한 단계였고, 에녹은 그 이후에 무엇인가가 특별히 보존되는 단계로 등장합니다.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인 야렛은, 한쪽으로는 진리 중심의 경향이 더욱 굳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퍼셉션의 보존이 필요해질 만큼 약화되는 ‘과도기적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교회 상태를 항상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갑자기 생겨나거나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다음 상태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야렛의 성격은 그 자체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앞뒤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해석의 책임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읽기를 요구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적용해 보라는 초대입니다. 마할랄렐에서 드러난 경향이 야렛에서 더 진행되었고, 그 결과 에녹이라는 보존의 단계가 필요해졌다는 흐름을 읽도록 이끕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교회 역사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는 뚜렷한 특징이나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시기가 앞선 변화의 연장선에 있고, 이후의 중요한 전환을 준비하는 자리라면,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야렛의 교회는 바로 그런 상태를 상징합니다. 눈에 띄는 새로운 특징은 없지만, 이전의 변화가 누적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긴장과 무게를 품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이미 결정되고 그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AC.514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통해 말하는 구절입니다.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교회 상태의 연속성과 점진성을 더 강하게 증언합니다. 야렛은 독립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앞선 마할랄렐과 뒤이은 에녹 사이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중간 단계였다는 것이지요.

 

 

 

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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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결하지만, 태고교회의 전개가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교회의 상태만을 지목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이름 = 교회 상태’라는 해석 원리를 충분히 익혔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야렛(Jared)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퍼셉션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외적 구조와 매개에 크게 의존하는 단계였습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중심의 생명은 더 두꺼운 외피 속에 감싸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단계까지는 아직 퍼셉션의 잔존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에녹(Enoch)으로 상징되는 일곱 번째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이름의 등장은 이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지요. 에녹은 곧 ‘보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퍼셉션이 계속 약화되는 흐름 속에서 주님께서 어떤 것을 ‘따로 보존하시는 단계’가 시작된다는 암시가 여기서 처음 주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513은 단순한 목록의 연장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말기에 접어들며 ‘질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글’입니다.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로 넘어가면서, 교회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만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지점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전승’이 아니라 ‘의도적인 보존’이라는 방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전환은 신앙 공동체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익숙하게 발견됩니다. 어떤 단계까지는 살아 있는 인식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것을 그대로 두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새로움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는, 즉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등장은 쇠퇴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신호입니다. 퍼셉션이 약해졌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해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신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곧 이어질 에녹에 대한 설명이 훨씬 깊이 있게 읽히게 됩니다.

 

결국 AC.513은 태고교회의 연속성 안에서, 단순한 다음 단계의 언급을 넘어, ‘보존의 섭리가 시작되는 문턱’을 가리키는 글입니다. 짧지만, 이후 전개 전체의 방향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어요.

 

 

 

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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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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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alel were eight hundred ninety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6, 17)

 

AC.512

 

이 말씀도 앞에 나온 유사한 말씀들과 동일합니다. It is the same with these words as with the like words before.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앞에서 반복되어 온 해석 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보다 이미 제시된 틀 안에서 이 구절을 읽어야 함을 조용히 상기시켜요. 즉, 여기서 언급되는 표현들도 모두 시간이나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퍼셉션의 변화를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앞선 구절들에서 ‘’, ‘’의 숫자,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 모두 상태의 언어였던 것처럼, 이 구절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반복은 설명의 부족이 아니라, 독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붙들어 주는 장치예요. 성경을 다시 문자적 이해로 끌어당기려는 유혹을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해석의 속도를 잠시 늦추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새롭고 인상적인 해석을 계속 덧붙이기보다, 이미 밝혀진 원리가 지금 읽는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초대라는 말입니다. 말씀의 힘은 새로운 정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가 상태에 따라 반복해서 작동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마할랄렐 이후의 교회 상태도 앞선 단계들과 동일한 법칙 아래 놓여 있으며, 퍼셉션의 일반화와 쓰임새의 변화라는 큰 흐름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국 AC.512는 해설을 멈추는 글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읽어 온 방식 그대로, 상태를 중심에 두고,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 그리고 쓰임새의 변화를 함께 보라는 조용한 확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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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명 또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생명이나 쓰임새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의 능력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 ‘마할랄렐’(Mahalalel)이라 불리는 교회를 이루었던 이들의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로부터 오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그러한 상태였는데, 이는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이들 가운데서의 경험을 통해 나에게 알려진 바입니다. As the perceptive faculty decreased, and from being more particular or distinct, became more general or obscure, so also did the life of love or of uses; for as is the life of love or of uses, so is the perceptive faculty. From good to know truth is celestial; the life of those who constituted the church called “Mahalalel” was such that they preferred the delight from truths to the delight from uses, as has been given me to know by experience among their lik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퍼셉션의 변화가 단지 인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방향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이동할 때, 그에 따라 삶의 중심도 함께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다룹니다. 사랑의 생명이 바뀌면 퍼셉션도 바뀌고, 퍼셉션이 바뀌면 사랑의 생명도 바뀐다고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생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디에서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더 초기 상태에서는 쓰임새, 곧 선을 행하고 진리를 살아내는 데서 자연스러운 기쁨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때 퍼셉션은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질서라고 부릅니다. 선이 먼저 있고, 진리는 그 선이 자신을 알게 하는 빛과 같았어요.

 

그러나 ‘마할랄렐(Mahalalel)의 교회에 이르면, 이 질서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들의 삶에서는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더 앞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분별하는 것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지요. 이것은 곧 삶의 무게중심이 행함에서 앎으로 조금씩 이동했음을 뜻합니다.

 

이 변화는 갑작스러운 전도나 타락이 아닙니다. 여전히 선을 사랑하고, 여전히 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기쁨의 근원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스베덴보리는 이 지점을 아주 섬세하게 짚습니다. 쓰임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쓰임새보다 진리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퍼셉션은 더 이상 개별적이고 살아 있는 분별이라기보다, 점차 일반적이고 덜 생생한 인식으로 변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이 천적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해요.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판단 기준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길 때, 곧 쓰임새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할 때 퍼셉션은 살아 있습니다만, 반대로 진리가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 될 때, 퍼셉션은 점차 분명함을 잃게 됩니다.

 

이 글에서 인상적인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내용을 단순한 이론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저세상, 곧 영계에서 ‘마할랄렐’과 같은 상태에 속한 이들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 경험에 따르면, 그들은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선호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 상태의 차이가 단지 개념이 아니라, 실제 삶과 성향으로 드러난다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매우 날카로운 자기 점검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앙 안에서 어디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만족인가요, 아니면 그 말씀이 삶에서 쓰임새로 드러날 때의 기쁨인가요. 둘 다 중요하지만, 그 순서와 중심은 신앙의 상태를 깊이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변화는 익숙하게 나타납니다. 어느 시기에는 봉사와 실천이 자연스럽고 기쁘게 느껴지다가, 또 어느 시기에는 말씀 공부와 이해가 더 즐거워질 수 있어요.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때 퍼셉션이 어떤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라고 초대합니다. 앎이 삶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삶이 앎을 섬기고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이지요.

 

결국 AC.511은 태고교회의 다섯 번째 단계에서 나타난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일반화되면서, 사랑의 생명과 쓰임새의 생명도 함께 변했고, 그 결과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더 선호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정직한 거울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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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ahalalel” is signified, as before said, a fifth church; by “Jared” a six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태고교회의 흐름이 계속해서 ‘끊김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는 자리예요. 스베덴보리는 ‘마할랄렐(Mahalalel)과 ‘야렛(Jared)을 더 이상 개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교회 상태의 연속으로만 언급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해석의 방향을 충분히 익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게난 이후에 형성된 상태를 이어받습니다.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미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고, 삶의 세부를 즉각적으로 비추기보다는 보다 넓은 틀 안에서 작동하는 단계에 해당해요. 이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그 분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줄어들어 있습니다.

 

야렛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섯 번째 교회를 설명할 때도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아직 노아로 대표되는 결정적 전환 이전이며, 퍼셉션의 잔존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점점 더 외적인 구조와 매개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처럼 숫자가 늘어날수록 교회는 점점 더 바깥쪽 층위로 이동합니다. 이는 열매의 알맹이에서 막질로, 더 두꺼운 외피로 옮겨가는 과정과 닮아 있어요. 중심의 생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그것을 감싸는 구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생명은 직접 드러나기보다 보호 속에 머물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짧은 글은 신앙의 지속과 변화에 대해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변화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단절이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아요. 마할랄렐과 야렛의 교회는 이전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그 상태에 맞는 쓰임새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 해석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의 의미’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많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지만, 바로 그 침묵 속에서 흐름을 읽도록 초대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따라가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교회의 성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단계들은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이 비교적 안정되고 체계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즉각적인 분별의 예민함은 줄어들 수 있어요.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상태를 부정하거나 억지로 되돌리려 하기보다, 그 상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퍼셉션과 쓰임새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결국 AC.510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섯 번째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단한 말로 확인해 줍니다. 이름은 달라지고 상태는 변하지만, 흐름은 끊어지지 않았어요. 이 점을 기억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에녹과 노아의 교회도 훨씬 입체적으로 읽히게 됩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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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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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입니다. It is here only to be remarked, that all things are determined by their relation to the state of the church.

 

 

해설

 

이 글은 분량은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 전체를 떠받치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어요. 그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표현도 그 자체로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정해진다고 봅니다. 이 점을 놓치면, 성경은 쉽게 평면적인 기록으로 보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상태란 제도나 조직의 외형을 뜻하지 않아요. 그 안에 살아 있는 퍼셉션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같은 말씀이 주어져도, 교회의 퍼셉션이 살아 있고 분명할 때와, 퍼셉션이 일반화되었을 때는 그 말씀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표현 자체보다 상태와의 관계를 먼저 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이름들, 날과 해의 숫자들,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대한 표현까지도, 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아요. 상태를 보지 않고 읽으면 그저 족보처럼 보이지만, 상태를 중심에 두고 읽으면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이동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말해 보자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표현도 단독으로 선이나 진리, 생명이나 소멸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져요. 같은 ‘’이라는 말도 어떤 상태에서는 새 생명의 시작을 가리키고, 다른 상태에서는 쇠퇴나 끝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의미는 표현 안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원리는 아주 실제적인 기준이 됩니다. 같은 본문을 설교하더라도, 회중의 상태가 다르면 강조점과 적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설교자가 임의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상태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 해석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방식으로 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돼요.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날에는 위로로 다가오고, 어떤 날에는 마음을 찌르는 경고로 들립니다. 말씀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은 상태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AC.509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표현을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지금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상태로 이 말씀을 듣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라는 초대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상태에 따라 말하는 말씀이 됩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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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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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an were nine hundred and ten years, and he died. (5:13, 14)

 

AC.508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퍼셉션하던 진리와 선들을 의미하는데, 다만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그가 ‘죽었더라’(died)는 말 역시 이와 같이 그러한 퍼셉션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have the same signification here as before. “Sons and daughters” here also signify truths and goods, whereof the members of the church had a perception, but in a more general manner. That he “died” signifies in like manner the cessation of such a state of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507에서 제시된 변화의 흐름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확인해 줍니다.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다시 말하는 것은, ‘게난(Kenan) 이후의 교회 상태에서도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상태의 개념으로 읽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태고교회의 전개는 언제나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 하며, 연대기적 숫자 계산만으로는 본질인 각 교회의 상태 변화, 곧 퍼셉션의 성격과 그 변화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자녀들’, 곧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여기서도 진리와 선들을 뜻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덧붙여집니다. 그것은 이 진리와 선들이 이제는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퍼셉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진리와 선이 보다 개별적이고 분명하게 인식되었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그러한 인식은 점차 포괄적이고 덜 세밀한 형태를 띠게 됩니다.

 

이 일반화는 퍼셉션의 상실이 아니라, 퍼셉션의 성격 변화입니다. 여전히 교회 안에는 진리와 선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즉각적이거나 생생하지 않습니다.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변화는 게난의 교회에서 시작되어 이후의 교회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 위 볼드체 문장은 이 해설 끝을 참조하세요.

 

그가 ‘죽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상태 변화의 종결을 가리킵니다. 이는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 방식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퍼셉션 양식이 역할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계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상태로서 끝에 이릅니다. AC.508은 이 과정을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독자가 이미 익숙해진 해석 틀을 계속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가 언제나 급격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진리와 선이 말해지고, 그것들이 일정한 쓰임새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퍼셉션의 성격은 이미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상태의 변화를 단순한 지속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가 진리와 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그 교회의 생명 상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같은 진리와 선이라도, 분명하게 퍼셉션되는지, 아니면 일반적으로만 인식되는지에 따라 교회의 상태는 크게 달라집니다. AC.508은 이 차이를 짧은 문장 안에 분명히 담아냅니다.

 

개인의 신앙에서도 이 흐름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매우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닿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이 점차 원칙이나 개념의 수준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때 신앙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퍼셉션의 방식은 이미 바뀌어 있습니다. AC.508은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러운 상태의 이동으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결국 이 글은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퍼셉션 상태가 어떻게 일반화되고, 그 상태가 마침내 끝에 이르는지를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이 반복을 통해 독자는 창세기 5장을 읽는 눈을 더욱 안정적으로 갖추게 되며, 이후에 이어질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을 준비된 마음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 아래는 위 ‘대신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하며, 개별 상황에 대한 분별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제공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하던 상태에서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갈 때,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인식의 직접성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가 거의 설명 없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그 안에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사랑에 속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이때의 퍼셉션은 판단 이전에 이미 방향을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면 이러한 직접성이 점차 약해집니다. 이제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판단하기 위해 생각하고, 기억해 둔 기준을 떠올리고, 말씀이나 교훈을 적용하며,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해져요. 이것이 위 해설에서 말한 ‘더 많은 매개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과 개념, 규칙과 교리 같은 것들이 판단의 중간 단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변화는 곧 인식의 초점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퍼셉션이 분명할 때는 각 상황이 고유하게 보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선이 무엇인지, 이 선택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무엇인지가 상황마다 다르게 분별되었어요. 같은 원칙이라도 적용 방식은 매번 달랐고, 그 차이가 자연스럽게 인식되었습니다. 마치 다음 주님에 대한 말씀처럼 말입니다.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2:24, 25)

 

하지만 퍼셉션이 일반화되면, 개별 상황을 세밀하게 분별하기보다 이미 형성된 이해의 틀 안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때 판단은 ‘이건 원칙적으로 옳다’, ‘이건 성경적으로 맞다’, ‘이건 교리와 어긋난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쉬워요. 이런 판단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공동체와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 다만 이 방식은 상황 고유의 미묘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을 지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이해된다’는 표현은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분별로 즉각 인식되기보다, 이미 갖추어진 틀 안에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뜻이에요.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 퍼셉션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어떤 분들이 ‘이건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건 마음이 불편해요’라고 말합니다. 설명은 잘 못 하지만 방향은 분명한 경우지요. 시간이 지나면 표현은 달라집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원칙상으로는’, ‘교리적으로는’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로 옮겨갔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 채, 틀과 원칙 자체를 생명으로 착각할 때 생깁니다. 틀은 필요하지만, 틀만 남고 살아 있는 분별이 사라지면 퍼셉션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조심스럽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퍼셉션이 일반화된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방식이 직접적 분별에서 매개와 해석을 거치는 방식으로 바뀌고, 그 결과 개별 상황의 고유함보다는 이미 형성된 전체적인 이해 틀 안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 상태를 비추는 매우 실제적인 통찰이기도 합니다.

 

 

 

AC.509, 창5:13-14, ‘모든 것은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따라’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3, 14) AC.509 여기서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것들이 교회의 상태와의 관계에 따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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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7, 창5:12, ‘게난’,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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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5:12)

 

AC.507

 

‘게난’(Kenan)이라 하는 교회는, 앞의 세 더 완전한 교회들 가운데에 그렇게 많이 포함시킬 수는 없는데, 이는 이전의 교회들에서는 분명하던 퍼셉션이 이제는 일반적인 것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매나 씨앗의 알맹이에 비해 처음의 부드러운 막질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같은데, 이러한 상태는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뒤따르는 내용, 곧 ‘에녹’(Enoch)과 ‘노아’(Noah)라 하는 교회들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e church called “Kenan” is not to be so much reckoned among those three more perfect ones, inasmuch as perception, which in the former churches had been distinct, began now to become general, comparatively as are the first and softer membranes relatively to the kernel of fruits or seeds; which state is not indeed described, but still is apparent from what follows, as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es called “Enoch” and “Noah.”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내부 구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의 교회를 앞선 세 교회와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태고교회의 흐름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게난의 교회를 태고교회 내부에 남아 있으되, 이미 ‘퍼셉션의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한 상태’로 봅니다.

 

앞선 세 교회에서는 퍼셉션이 분명했습니다. 선과 진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인식되었고, 그 인식은 삶의 방향과 선택을 자연스럽게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게난이라는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더 이상 그렇게 분명하지 않고, 점차 일반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는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작동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다시 열매와 씨앗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앞선 세 교회는 알맹이에 가까웠다면, 게난의 교회는 알맹이를 둘러싼 첫 번째이자 비교적 부드러운 막질에 해당합니다. 이 막질은 알맹이보다 덜 본질적이지만, 여전히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맹이를 보호하고, 바깥으로의 전개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상태가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부러 게난의 교회를 길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독자가 뒤에 나올 에녹과 노아에 대한 설명을 통해, 게난의 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파악하도록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이 항상 즉각적인 설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뒤 맥락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퍼셉션은 먼저 분명함을 잃고 일반화되며, 그 다음 단계에서야 보다 뚜렷한 변화가 드러납니다. 게난의 교회는 바로 그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직은 알맹이와의 연결이 유지되고 있지만,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변화를 섬세하게 분별하도록 요구합니다. 신앙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교회의 형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상태가 이전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퍼셉션이 분명한 상태에서 일반적인 상태로 옮겨가는 변화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의 평가 기준을 다시 한번 조정합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가장 완전한 교회’로 불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으며, 나름의 쓰임새를 지닙니다.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상태는 중심이 되고, 어떤 상태는 보호와 연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글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퍼셉션이 매우 분명하여 거의 망설임 없이 선을 선택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 분명함이 줄어들고 더 일반적인 기준과 생각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신앙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결국 AC.507은 태고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미세한 변화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게난의 교회는 더 이상 알맹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알맹이를 둘러싼 첫 막질로서 여전히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이 유지되는 한, 이후에 나타날 더 외적인 교회 상태들도 그 근원을 잃지 않게 됩니다.

 

 

 

AC.508, 창5:13-14,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 세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Kenan lived after he begat Mahalalel eight hundred and fo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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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6, 창5: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창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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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And Kenan lived seventy years, and begat Mahalalel. (5:12)

 

AC.506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and by “Mahalalel” a fif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의 전개 방식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게난(Kenan)과 ‘마할랄렐(Mahalalel)을 개인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앞선 경우들과 동일하게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로 이해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이름들이 일관되게 교회들의 연속을 가리킨다는 해석 원리가 여기서도 흔들림 없이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게난으로 상징되는 네 번째 교회는, 에노스 이후에 나타난 상태를 대표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태고교회의 흐름은 퍼셉션이 점차 덜 분명해지고 더 일반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게난의 교회 역시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에 속하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선명함은 앞선 교회들보다 더 약화된 상태에 해당합니다.

 

마할랄렐로 상징되는 다섯 번째 교회는 그 다음 단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해석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은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각 단계는 퍼셉션의 정도와 작동 방식에 차이를 가질 뿐, 동일한 생명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 간결한 진술은 태고교회의 쇠퇴가 급격한 단절이나 붕괴가 아니라, 매우 점진적인 변화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교회라는 표현은 단순한 번호 매김이 아니라, 퍼셉션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와 같습니다. 각 교회는 이전 교회가 지니고 있던 생명의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으며, 다만 그것이 더 외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이 글은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줍니다. 신앙과 교회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진행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번호의 교회에 속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상태 안에서 퍼셉션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 있는가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성급하게 의미를 과도하게 채워 넣지 말라는 암묵적인 가르침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고, 어떤 이름들에 대해서는 한 문장으로만 처리합니다. 이는 모든 교회 상태가 동일한 비중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상태가 전체 흐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구조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상태는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지만, 어떤 상태는 그 전환 이후의 지속과 정착을 보여 주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게난과 마할랄렐은 바로 그러한 지속과 진행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AC.50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줍니다. 네 번째 교회와 다섯 번째 교회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태고교회의 생명이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글은 그 연속성을 놓치지 말라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안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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