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0은 곧이어 ‘안개’라 하는 ‘비’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평온’이라고 합니다. 자연계의 비와 안개가 왜 사람의 내적인 평화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AC.90만 읽으면 스베덴보리는 우선 그 의미를 선언할 뿐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AC.91에서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평온은 ‘속사람으로부터겉사람을적시고이슬로촉촉하게하는수증기와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의 핵심은 단순히 물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혹은 안으로부터 내려와 메마른 것을 적시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자라게 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싸움이 그칩니다.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에게 미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비와 안개가 지면을 적시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평화의평온’은 단순히 싸움이 사라져 조용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AC.92에서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여, 그 평온은 단지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비와 안개는 바로 이처럼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생명이 미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를 단순히 ‘평화’라는 단어와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상응의 모습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메마른 지면이 스스로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비와 안개에 의해 적셔지고, 그렇게 적셔진 지면에서 식물이 자랍니다.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아 그 안에서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 점에서 AC.90의 비와 안개는 AC.87-92의 흐름을 하나로 이어 줍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시고, 싸움이 그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바로 서고, 그때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부터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비와 안개는 단순한 고요함의 표상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사람 안에 흘러들어 새로운 것을 자라게 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90심화2)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한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겉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 명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이 차이는 AC.89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 곧 ‘땅’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겉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AC.90에서 그 달라진 상태의 겉 사람을 ‘지면’과 ‘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지면’, ‘들’이라는 세 단어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의미표를 만들라는 뜻은 아닙니다. AC.90이 직접 알려 주는 것은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힌 범위 안에서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지면’과 ‘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줄까요?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제 그 ‘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0은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이라고 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받아 산출하는 영역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AC.91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자 거기에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됩니다. 따라서 ‘지면’과 ‘들’은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생명 있는 것을 산출하는 겉 사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지면’과 ‘들’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을 단순한 어휘 변화로 볼 수 없습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고, 그 결과 겉 사람도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그곳에서 흘러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열매 맺는 ‘지면’과 ‘들’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땅은언제나영적인간의겉사람이고,지면과들은언제나천적인간의겉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과 주제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90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이 문맥에서 겉 사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말씀의 표현도 ‘땅’에서 ‘지면’과 ‘들’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AC.90심화1)
※오늘(2026/09/27)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크신사랑’, 찬95,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시며’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19-24)
제목은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이며, 다음은‘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앞의 영상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질문은 ‘우리는정말한팀인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옮겨 부모의 자리에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결혼한내자녀와그배우자가한팀이되도록나는얼마나잘물러나주고있는가?’입니다. 영상에는 시어머니의 말, 장모의 개입, 명절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용돈, 육아, 제사와 친척 관계 등 수많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켜고 부모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영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사랑하는것’과 ‘자녀를내삶의연장으로붙들고있는것’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관하여 매우 놀라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이러므로남자가부모를떠나그의아내와합하여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창2:24). 여기에는 ‘떠남’이 먼저 있고 ‘합함’이 있으며 그 결과 ‘한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부모와 자녀가 하나의 가정이었다면 이제 그 자녀는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2:24의 ‘떠남’은 자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면 부모 역시 자녀가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의 결합에서 찾습니다. 두 사람이 단순히 한집에서 사는 것을 넘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가되고자하는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결합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 딸과 사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우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린 시절에는 보호하고 가르치고 개입하는 사랑이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상당 부분 ‘물러남으로써보호하는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부모에게는 자녀의 결혼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아들이었고, 딸은 사위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딸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수많은 기억과 희생과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혼 후에도 ‘내아들’, ‘내딸’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자녀에게는 이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의남편’, ‘누군가의아내’입니다. 부모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악의가 전혀 없어도 자녀의 결혼생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이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이번에는언제오니?’, ‘몇시에올거니?’, ‘자고갈거지?’, ‘큰아버지가오시는데얼굴은보고가야지’, ‘명절인데이정도는해야하지않니?’ 각각의 말만 떼어 놓으면 크게 잘못된 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요구가 양가에서 동시에 들어오면 자녀 부부는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조금만더있다가라’는 한마디이지만, 자녀의 배우자에게는 ‘우리친정보다시댁이항상우선이다’ 또는 그 반대의 메시지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런 작은 요구들이 반복되면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부모가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나는요구하지않았다’는 자기평가입니다. 직접 ‘우리집부터와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운한 표정, 반복되는 질문,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 ‘옛날에는다그랬다’는 말, 늦게 왔을 때의 냉랭함으로 충분히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알기 때문에 부모가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거듭남은 말만 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원하는대로해주어야사랑받는다고느끼는마음’ 자체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이기심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외형을 입을 때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가족인데이정도는해야지’, ‘부모에게효도하는것이당연하지’, ‘우리가너를어떻게키웠는데’, ‘명절에가족이모이는게뭐가나쁘니?’ 모두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자녀의 자유와 새 가정을 존중하는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부모이니이정도는받을권리가있다’는 자기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내적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아들이효도하고싶은데며느리가일을하고, 딸이효도하고싶은데사위가비용을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차린 명절상을 받으면서 ‘우리아들이참효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효도의 상당 부분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딸이 부모에게 좋은 선물을 해왔을 때도 그 비용과 준비가 사위에게 어떤 부담이 되었는지 부모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의 효도를 기쁘게 받는 것과 자녀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먼저 ‘너희가무리하면서까지하지않아도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가족 사랑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사위를 ‘우리집사람이되었으니우리집방식에따라야하는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집안으로 편입되어 그 집안의 관습에 복종하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집은원래이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새로운 가족에게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이 사랑을 돕는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전통 때문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면 부모 역시 그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대 극단입니다. 자녀가 결혼했다고 부모의 지혜와 경험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조언할 수 있고 걱정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언’과 ‘지배’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조언은 상대에게 자유를 남겨 둡니다. 지배는 내가 원하는 결론을 상대가 선택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내생각은이렇지만결정은너희둘이잘의논해서해라’라고 말하고 실제로 다른 결정을 했을 때도 그것을 존중할 수 있다면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너희가알아서해라’라고 말해 놓고 다른 선택을 하면 서운함과 냉대로 대한다면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부모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부 사이의 갈등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자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때 부모의 본능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끝날 수 있어도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다음 날 배우자와 화해했는데 부모는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가 배우자를 흉볼 때 무조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힘들었겠구나. 그래도그문제는너희둘이잘이야기해보아라’ 하고 자녀를 다시 배우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 결혼을 보호하는 부모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고, 자녀의 배우자와 경쟁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배우자를 우선할 때 배신당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자기성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는 붙잡아 주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놓아주는 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가 ‘이번명절에는처가부터가겠습니다’, ‘이번에는여행을가려고합니다’, ‘제사는이렇게간소화했으면합니다’, ‘이번에는오래있지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의 마음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서운함을 자녀에게 죄책감으로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필 것인가입니다. ‘왜나는아이들이오지않으면이렇게섭섭한가? 내가원하는가족의모습을아이들에게강요하고있지는않은가? 아이들이나를사랑한다는증거를특정한방식으로확인받으려하고있지는않은가?’ 이런 질문이 부모 자신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자녀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내며느리’, ‘내사위’이기 이전에 자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며느리나 사위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면 결국 자녀에게 두 충성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가 배우자를 보호하면 ‘결혼하더니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2:24의 질서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혼적 결합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우리때문에너희둘이싸우지는마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일은우리가감당할테니너희가정을먼저잘세워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안심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배우자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부모, 이것은 결코 작은 영적 성숙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 공경의 의미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는 것과 자녀가 자유롭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강요된 효도는 외적 행동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 부부의 자유와 경계를 존중하면 오히려 자녀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랑은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자유를 줄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제로 사랑을 받아내지 않으시는 이유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명절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아이들이몇시에왔는가’, ‘얼마짜리선물을가져왔는가’, ‘며느리가음식을얼마나했는가’, ‘사위가얼마나오래앉아있었는가’를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이들의결혼을평안하게해주는부모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너도앉아서쉬어라’라고 말하고, 사위가 불편하게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녀 부부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그래, 얼른가봐라’ 하고 보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매우 실제적인 체어리티입니다. 거창한 신앙 고백보다 이런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랑의 질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상의 핵심 질문은 ‘왜요즘자녀들은명절을힘들어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자녀가결혼한뒤에도여전히부모-자녀관계가그들의삶에서가장우선이어야한다고생각하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그리고 ‘내가섭섭하지않기위해자녀의배우자가희생하도록요구하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이런 불편한 자기 발견을 통과합니다.
창2:24의 ‘부모를떠나그의아내와합하여’라는 말씀은 그래서 자녀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떠날용기’를 요구하고 부모에게는 ‘보낼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떠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부모가 보내는 것 역시 거듭남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손을 잡아 주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결혼한 자녀에게는 그 손을 조금씩 놓아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아이는내소유가아니라주님께속한한사람이며, 이제배우자와함께새로운삶을이루어가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모의 가장 큰 성공은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를 가장 먼저 찾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딸과 사위가 서로를 보호하며, 그들의 아이들이 평안한 가정 안에서 자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그 결혼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집에먼저와라’보다 ‘너희둘이의논해서편한대로해라’, ‘며느리가이것도안하느냐’보다 ‘너희둘이행복하게살아라’, ‘결혼하더니자식이변했다’보다 ‘이제정말자기가정을이루어가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 해결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주님의 손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품는 사랑이었다가, 가르치는 사랑이 되고, 기다리는 사랑이 되며, 마침내 놓아주고 축복하는 사랑으로 성숙해 갑니다. 어쩌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한 장면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자녀를얼마나붙잡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안에서얼마나자유롭게놓아줄수있는가.’ 자녀의 결혼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창4:24의 표현은 ‘일흔일곱배’이고, 마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번씩일곱번’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무한한자비,다른하나는무한한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심화1)
그리고여기서라멕이‘일흔일곱배로보복을받을것’(beavengedseventyandsevenfold)이라는말은지극히거룩한것을침해했기때문에정죄가있다는뜻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 “beavengedseventyandsevenfold” 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해설
AC.433은 앞의 AC.432에서 ‘일흔일곱배의보복’이 정죄를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 번호에서는 라멕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왜 그러한 상태를 하필 ‘일흔일곱배’라는 수로 표현하는지, 말씀에서 ‘일곱’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4:15로 돌아갑니다. 가인이 ‘일곱배로보복을받을것’이라는 말은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를 ‘일곱째날’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엿새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설명하면서, 그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의 거룩함은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칙도 덧붙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하지만, 그 거룩함은 ‘다루는대상에따라’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관해 일곱이라고 말하는지, 그 구절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을 놓치면 말씀의 숫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일정한 뜻으로만 대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일흔’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한 시대를 십 년으로 나타내므로,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표현할 때 ‘일흔일곱배’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흔이나 일흔일곱을 실제 연수나 형벌의 횟수로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수들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8:22를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용서의 횟수에 상한선을 정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가 용서와 연결되는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의 보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다루는대상에따라’라는 원칙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의미는 끝없는 용서이고, 창세기에서 밝히는 의미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숫자 표현을 단순히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룩함의 의미가 각 구절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AC.432와 연결하면, 라멕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상태가 왜 ‘일흔일곱배’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일흔일곱 배를 실제 형벌의 배율로 계산하거나,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는 속뜻과 다릅니다. (AC.433해설)
심화
1.‘일곱번이아니라일흔번씩일곱번까지용서하라는말씀은왜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창4:24의 표현은 ‘일흔일곱배’이고, 마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번씩일곱번’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무한한자비,다른하나는무한한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심화1)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멕에게 훨씬 더 큰 보복이 가해진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주님께서라멕에게일흔일곱배로복수하신다는뜻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AC.432는 이 표현을 ‘정죄’라고 풀이합니다. 이 짧은 설명을 이해하려면 문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번 번호는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실제 형벌의 횟수나 배율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으며, 그로 인해 정죄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죄가 곧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의 핵심은 정확한 수량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성모독과 그에 따른 정죄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단어만을 근거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원한을 품고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속뜻은 정죄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님의 분노나 정죄의 작용에 관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복’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한 더 넓은 설명은 관련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보복을 정죄라고 풀이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붙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를 비교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의 AC.396에서는 가인의 표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이 그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킨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가인에게서 다룬 신앙의 문제와 라멕에게서 드러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단순히 숫자만으로 계산하여 영적 상태의 정확한 크기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정죄’라는 표현을 곧바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신앙에 관한 의문이 생기거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자신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받는 상태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와 신성모독의 상태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각 개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판단하도록 주어진 설명은 아닙니다.
결국 ‘일흔일곱배의보복’은 AC.432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실제 보복의 횟수로 계산하거나 주님의 인간적인 분노로 곧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이 가리키는 영적 상태를 밝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AC.432심화2)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성모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번 번호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앞의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이 이 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은 단순히 입으로 거룩한 것을 비난하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거룩한 것들이 소멸되는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신앙을소멸시켰다’는 말과 ‘신앙이약해졌다’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거나, 의심과 혼란을 겪거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곧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을죽였다’고 한 표현이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신성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훨씬더큰’ 신성모독일까요? AC.432는 그 이유를 길게 논증하지 않지만,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중요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소멸된 데 이어,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소멸이 그 신앙과 연결된 사랑의 소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체어리티가 참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에는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그것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밝혀 온 체어리티의 의미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쉽게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라멕처럼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32는 말씀의 속뜻에서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 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국 AC.432에서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단지 보존해야 할 지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신앙과 연결된 체어리티까지 함께 살펴보게 합니다. (AC.432심화1)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말씀은그들이‘가인’(Cain)이나타내는신앙을소멸시켰다는뜻입니다.그신앙에폭력을가하는것은신성모독이었습니다.동시에그들은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소멸시켰는데,이는훨씬더큰신성모독이었습니다.이로인해정죄가있었으며,이것이곧‘일흔일곱배의보복’(seventyandsevenfold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 “Cain,” 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 “seventyandsevenfold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의 ‘가인을위하여는벌이칠배일진대라멕을위하여는벌이칠십칠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통해태어나야할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과 ‘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더이상성한곳이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더큰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해설)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표현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이 상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가 등장하고, 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431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신체적 상처의 묘사가 라멕의 영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라멕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한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431에서는 사람에게 연결된 상처가 신앙의 황폐를, 어린아이에게 연결된 타박상이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에서 상처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이 입은 육체적 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더 넓은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상처가 한 곳에만 있다면 몸의 다른 부분은 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바닥과 머리의 개별 상응을 새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묘사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나타내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상처’, ‘타박상’, ‘종기’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신앙에, 타박상을 체어리티에, 종기를 그 둘 모두에 연결합니다. 우리 눈에는 모두 몸이 상한 모습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을 알면 이사야의 말씀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면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곳이없다’는 말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 이것을 자신이 겪는 모든 신앙의 흔들림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경험이 곧 라멕의 황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31은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와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의 표현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연약함을 이 본문만으로 최종 판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상처를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AC.431이 그 상태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에서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특정한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은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황폐의 심각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덧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바닥에서머리까지성한곳이없다’는 말씀은 AC.431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보여 주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멕의 ‘상처’와 ‘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내며, 이사야의 ‘종기’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따로 떼어 놓은 채 교회의 온전함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AC.431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