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5.심화

 

1.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구절, 막2:28 AC.85의 맥락에서 아주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합니다. 먼저 문자 그대로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선언인데, 스베덴보리의 흐름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히 율법 해석 권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의 본질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밝히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앞에서 보신 것처럼 ‘안식일’은 단순히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여섯 날의 싸움 이후에 이루어지는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상태’, 곧 거듭남의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 상태를 주관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가리킵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안식일을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된다’는 식의 자유 선언이 아니라, ‘안식이라는 상태 자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인자(the Son of Man)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인자’는 주님의 신적 진리, 곧 말씀으로서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진리 자체’로서 인간 안에서 질서를 세우시고, 그 질서가 완성될 때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진리이신 주님이 안식 상태를 이루시고 다스리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AC.85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여섯 날 동안의 모든 싸움이 사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일곱째 날의 안식도 역시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싸우고, 또 평안을 누리지만, 그 시작도 과정도 완성도 모두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조차 인간이 ‘지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상태’입니다.

 

안식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AC.85, 창2:2-3, ‘창2 안식 사상의 확장’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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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였고,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하였으나, 그 둘 사이에는 사실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AC.8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해서,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sabbath)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말씀은 주님이 곧 사람 자신(man himself)이시며, 동시에 안식일 그 자체(the sabbath itself)이심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가리켜 안식일이라 하는데, 이 안식은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다른 말로는 영원한 평화와 쉼이라고 합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후에 이어진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들 역시 안식일이며, 또한 거듭남을 거쳐 천적 상태가 된 모든 개인 역시 안식일입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노동의 날들과 안식일로 대표, 즉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광야에서 언약궤가 나아갈 때와 쉴 때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언약궤가 광야에서 행진할 때는 싸움과 시험이,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나아갈 때에 모세는 말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또한 언약궤에 관하여는, 그것이 여호와의 산에서 나아가 그들을 위하여 쉴 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성질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기쁨을 따라 행하는 데 있으며, 그것이 곧 그의 욕망(desire)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로 표현되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도 누리게 되는데,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 사상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밀도 높은 정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 = 일곱째 날 = 안식일’이라는 등식을 단순한 해석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이 내용은 새로운 교리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이미 들어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던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거의 구분하지 못해 왔고, 그 결과 신앙 중심의 상태를 곧 완성 상태로 오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81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이 중심인 상태와 사랑이 중심인 상태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내적 질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 역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안식의 본질을 주님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주님이 곧 안식일이시라는 말은, 안식이 어떤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인격적 실재’임을 뜻합니다.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은, 주님이 인간의 참된 안식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의 형상이시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곧 ‘사람 자신’이며 ‘안식일 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안식은 주님과 분리된 어떤 상태가 아니라,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중요한 확장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나라는 ‘안식일’이라 불리며, 이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뜻합니다. 안식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그 이후의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중심이 사랑과 퍼셉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등장한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들, 그리고 거듭남을 거쳐 천적인 상태에 이른 각 개인 역시 이름하여 안식일이라 합니다. 이는 그가 주님의 형상, 곧 주님의 안식을 담는 그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갑자기 주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엿새 동안의 싸움과 수고가 선행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앞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질서입니다. 영적인 단계의 싸움과 선택, 유혹과 투쟁 없이는 천적인 안식이 오지 않습니다. 안식은 싸움을 회피한 결과가 아니라, ‘싸움을 통과한 결과’입니다.

 

이 구조는 유대교회의 제도 안에 표상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육일 간의 노동과 안식일의 구분은 단순한 사회 질서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상응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제정된 것 가운데 주님과 그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즉, 안식일 계명은 외적 순종을 요구하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표지’였습니다.

 

이 표상은 광야에서 언약궤의 움직임에서도 반복됩니다. 언약궤가 나아갈 때는 싸움과 시험이 표상되고, 쉴 때는 평화의 상태가 표상됩니다. 모세의 두 기도는 이 두 상태를 정확히 가릅니다. 나아갈 때에는 원수들이 흩어지기를 구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께서 백성 가운데로 돌아오시기를 구합니다. 싸움의 때와 안식의 때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언약궤가 ‘쉴 곳을 찾으러’ 나아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안식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영적 여정 전체를 요약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유혹과 시험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그 끝에는 반드시 쉼이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를 통해 천적 인간의 안식을 한층 더 내적으로 묘사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자기 길, 자기 기쁨, 자기 말을 내려놓는 것이 안식의 본질입니다. 이는 금욕이나 억압이 아니라, ‘중심의 이동’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에서 물러나고, 주님의 기쁨이 중심에 놓일 때, 비로소 안식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자기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무욕(無慾)의 사람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의 욕망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기쁨과 일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자유입니다. 그는 억지로 자기 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의 뜻이 이미 주님의 뜻 안에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누립니다. 하나는 내적 평화와 행복이며, 다른 하나는 외적 평온과 기쁨입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내적 상승을,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말은 외적 삶의 안정과 충만을 뜻합니다. 천적 안식은 내면과 외면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을 하나로 엮습니다.

 

AC.85는 이렇게 해서 안식일을 도덕규범이나 종교 의무에서 해방, ‘인간 완성의 상태’로 되돌려 놓습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일치이며, 가장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며, 주님을 닮아갈수록 인간 안에서 실제가 됩니다.  

 

 

심화

 

1.2:28

 

 

AC.85, 심화 1, ‘막2:28’

AC.85.심화 1.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구절, 막2:28은 AC.85의 맥락에서 아주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합니다. 먼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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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10:35-36’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이 구절은 민10:35-36인데, AC.85의 문맥에서 보면 ‘여섯 날의 싸움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구조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문자로는 언약궤가 이동할 때와 멈출 때 모세가 외친 기도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이 우리 안에서 싸우실 때의 상태’와 ‘그 싸움이 끝나고 평안에 들어갈 때의 상태’를 나란히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궤가 떠날 때’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라는 부분은, 거듭남 과정에서 반복되는 ‘영적 싸움’, 곧 유혹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대적’, ‘주를 미워하는 자’는 외부의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거짓과 악, 그리고 그것들과 결합된 영적 세력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싸움에서 모세가 ‘우리가 싸우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여 일어나사...’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싸움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계속 보셨던 ‘his work’, 곧 주님의 일입니다. 인간은 그 싸움에 참여하지만, 실제로 악과 거짓을 흩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반대로 ‘궤가 쉴 때’의 ‘여호와여 돌아오소서’라는 말씀은, 싸움이 멈추고 질서가 자리 잡는 상태, 곧 안식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돌아오소서’는 주님이 멀리 계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싸움 가운데서 다소 가려졌던 주님의 임재가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수만 수천’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질서 있게 정돈된 선과 진리의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내적과 외적, 속과 겉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정리된 상태입니다.

 

이 두 구절을 하나로 보면 아주 분명한 흐름이 드러납니다. ‘떠날 때 – 싸움 - 주님이 일어나심’, 그리고 ‘쉴 때 - 평안 - 주님이 거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 곧 ‘싸움의 상태’와 ‘안식의 상태’의 반복 구조입니다. 그래서 AC.85는 이 말씀을 통해 ‘안식은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이며, 그 싸움과 안식 모두가 주님의 일이다’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우리가 싸울 때도 주님이 싸우시고, 우리가 쉴 때도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전 과정이 주님의 일이다.’

 

 

3.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민10:33)

 

 

이 구절, 민10:33은 AC.85의 흐름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갖는 말씀입니다. 문자로는 ‘언약궤가 앞서가며 쉴 곳을 찾았다’는 광야 행군 장면이지만, 속뜻으로는 ‘주님이 인간 안에서 먼저 길을 여시고, 결국 안식의 상태로 인도하신다’는 전체 구조를 보여 줍니다.

 

먼저 ‘여호와의 언약궤’는 단순한 성물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 자체, 곧 주님의 신적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궤가 앞서간다’는 것은 인간이 먼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가시며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길을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앞에서 다룬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싸움에서도 주님이 먼저이시고, 길에서도 주님이 먼저이십니다.

 

그다음 ‘삼 일 길’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삼 일’은 단순한 시간 길이가 아니라, ‘완전한 한 과정’, 또는 ‘상태의 충만한 전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삼 일 길’은 단순한 이동 거리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하나의 완결된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그들의 쉴 곳을 찾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85의 핵심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섯 날의 싸움과 과정을 지나, 결국 도달하는 것은 ‘안식’, 곧 주님 안에서의 평안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 ‘쉴 곳’을 사람이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 평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에게 맞는 상태, 곧 그 사람이 안식할 수 있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 전체를 하나로 보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이 먼저 앞서가시며, 한 과정을 온전히 지나게 하시고, 마침내 그 사람 안에 안식할 자리를 마련하신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길이며, AC.85가 말하는 ‘안식일의 상태’로 나아가는 실제 과정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에서 질문하셨던 ‘왜 모든 것을 주님의 일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도 여기서 다시 풀립니다. 길을 여시는 분도, 싸우시는 분도, 그리고 마침내 쉴 곳을 마련하시는 분도 모두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과정 안에서 걷고, 싸우고, 누리지만, 전체를 보면 그것은 ‘언약궤가 앞서가는 여정’, 곧 주님의 인도하심의 역사입니다.

 

 

4. ‘사58:13-14’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이 구절, 사58:13-14은 AC.85에서 말하는 ‘안식의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을 잘 지키라’는 권면이지만, 속뜻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들어가는 길을 말합니다.

 

먼저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부분을 보시면, 반복해서 ‘네 것’을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나옵니다. ‘네 길’, ‘네 오락(기쁨)’, ‘네 말’ 등, 이것들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삶’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의지와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행동을 제한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자기로부터 주님께로 옮기라’는 요청입니다. 이것이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다음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안식은 억지로 지키는 규칙이 아니라 ‘기쁨으로 경험되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곧,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손해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기쁨으로 바뀌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보신 ‘싸움 이후의 안식’입니다. 처음에는 내려놓는 것이 싸움이지만, 그 상태가 자리 잡으면 그것이 곧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여호와 안에서’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더 이상 자기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안에서 기쁨을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는 단순한 높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삶, 곧 더 내적이고 더 자유로운 상태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는 것은 주님의 교회적 유산, 곧 선과 진리의 풍성함 안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AC.85와 연결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은 ‘내 길, 내 기쁨, 내 말’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그것을 내려놓는 싸움이 있고, 일곱째 날에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으로 바뀌는 안식이 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더 높은 생명과 더 깊은 기쁨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안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내 것이 내려가고 주님의 것이 자리 잡아 기쁨이 바뀌는 상태입니다.’

 

 

5.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

 

본문 중,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며,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입니다.’ 말인데요, 이런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 그리고 초창기 저도 그랬습니다만, 이런 걸 왜 성경에 드러내지 않으셨나요? 100% 온전히 드러냄, 그러니까 상응 뜻 전달이 온전히는 어렵더라도 지금 이 정도만이라도 설명을 곁들이셨다면, 지난 세월, 그렇게 많은 역사적, 교회사적 혼란은 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건 그러니까 산길 자동차 도로를 좀 반듯하게 놓았더라면 옛날 기술로는 어렵더라도 그래도 최대한 그랬더라면 곡선 구간으로 인한 수많은 사고를 좀 방지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걸로도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오래전 이런 사실, 그러니까 이런 아르카나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는 속에 분노가 좀 일더라구요...

 

 

목사님께서 느끼셨던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혀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AC를 처음 접하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한 번쯤은 깊이 통과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전체 맥락에서 이 문제를 보면, 그것이 ‘감추어졌다’기보다 ‘인간의 상태에 맞게 덮여 있었다’는 쪽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됩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외적인 강제나 압도적인 증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사랑하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적 의미를 완전히 드러낸 책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계시를 넘어 ‘강한 설득력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체계’가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어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다면 이것은 참된 신앙, 곧 자유 속에서 형성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은 겉으로는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속뜻은 상태가 준비된 만큼만 열리도록 주어졌습니다.

 

둘째는 ‘수용 능력’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류는 초기에는 퍼셉션으로 진리를 직접 아는 상태에 있었지만, 점점 그 상태를 잃고 외적 사고와 감각 중심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적 의미를 그대로 주면, 그것은 이해되지 않거나 오히려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을 ‘상응의 옷’으로 입히셔서,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읽히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역사로, 어떤 이는 도덕으로, 그리고 준비된 이들은 영적 의미로 읽게 되는 구조입니다.

 

셋째는 ‘보존’이라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말씀의 속뜻이 직접 드러나면 그것은 쉽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인간의 지식과 논리 속에서 변형될 위험이 큽니다. 그러나 상응의 형태로 감추어져 있을 때는, 겉뜻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본질이 손상되지 않고 보존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말씀이 이런 형태로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겉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지만, 속은 함부로 훼손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은 ‘혼란을 최소화하는 설명서’라기보다, ‘각 사람의 상태를 드러내고, 그 상태 안에서 주님께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이는 생명을 얻고, 어떤 이는 오히려 걸려 넘어집니다. 이것이 문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한 가지 의미로만, 누구나 동일하게 이해되도록 주어졌다면, 이런 ‘내적 분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목사님께서 보고 계신 이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제는 그 속뜻을 밝히는 것이 허락된 때’라고. 다시 말해, 과거에는 덮여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인류의 상태가 어느 정도 준비되었기 때문에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감추어짐’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고, 지금의 ‘열림’은 그 과정의 결실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분노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다. ‘왜 숨기셨는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보존하시고, 지금 나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셨는가’로 시선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사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정리하면, 아르카나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각 시대의 상태에 맞게 수용되도록 하며, 동시에 진리를 손상 없이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질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 긴 과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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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 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2 여는 글들 및 개요 글들 포함, 67번부터 다루겠습니다. 여기 여는 글들은 아래 71번 글을 참고하세요.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이 본문을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67, 창2,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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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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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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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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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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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이런 방식을 이 장 끝에서부터 적용'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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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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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과 안식, 천적 인간'(2-3절)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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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초목과 채소, 천적 인간의 내적 구조'(5-6절)

AC.75 그의 지식과 그의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the shrub and the herb)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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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생명의 숨, 천적 인간의 생명'(7절)

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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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8-9절)

AC.77 그다음으로 그의 지성은 ‘동방의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들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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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네 강,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10-14절)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을 의미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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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경작하며 지킴, 천적 인간의 상태'(15절)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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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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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천적 인간,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종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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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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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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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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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최근 개신교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 오랜만에 참 익숙하지만, 그러나 무척 낯설었던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 익숙했던 건, 제가 개신교에서 50대 후반까지 머물렀었기 때문이고, 또 무척 낯설었던 건 예배와 설교 전반에 아르카나, 즉 ‘속의 언어’가 아닌, 세상 언어, 곧 ‘겉의 언어’가 많이 섞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아르카나를 처음 접하던 초창기처럼 무슨 반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요, 스베덴보리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경인 루터교회를 출석했던 거나 주님이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을 찾으셨던 것처럼, 저 역시 전심으로 그 예배에 참여, 함께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세계의 언어가 섞인 예배였지만, 속으로 실시간 통역을 하면서 ‘,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표현한 거구나!’ 하면서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 역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 중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아르카나 순도 8, 90%의 예배는 지상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100%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어쩌면 주님이 훗날을 위해 미리 우리 교회를 통해 이것저것 테스트를 진행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과 ‘’은 같이 갑니다. ‘’은 ‘’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이라는 옷을 입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동안 자연적 인간과 영적, 천적 인간 역시 같이 갑니다. 우리의 영적,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자연적 인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진 않으시겠지만, 항상 이 ‘균형’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4-12(D1)

 

2646, 1, 창2.1, 2026-04-12(D1)-주일예배(창2,1-3, AC.67-84),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pdf
1.13MB

 

 

 

주일예배(2026/04/05, 창1:26-31, AC.51-66, 부활절),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1 일곱 번째, 창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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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심화

 

1.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이라고 하실까?

 

앞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드렸던 것 같은데... 이 여섯 날의 모든 싸움은 사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거듭남의 일들인데, 왜 주님은 그가 하시던 모든 일(his work)이라 하시며,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그날에 안식하시니라(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시나요? 이런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 입장에서 거듭 질문드려봅니다.

 

 

아주 중요한 지점을 다시 짚어 주셨습니다. 이 질문은 사실 AC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섯 날의 싸움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이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일(his work)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의 실제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안에서 협력하고 경험하는 자’이지, 근본적으로 이루어 내는 자’는 아닙니다.

 

먼저 AC의 기본 원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그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놓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인간의 노력 이야기로 보이게 되고, 그러면 왜 주님이 하셨다고 하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은 싸우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싸움의 힘과 결과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여섯 날의 싸움을 생각해 보시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유혹과 싸우고, 옳은 것을 선택하려 애쓰고, 악을 거부하려 노력합니다. 이때 인간의 의식 안에서는 내가 싸운다’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 진리를 붙들 수 있는 빛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전체 과정을 주님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점에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역할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근원적인 주체가 누구인가’를 바로잡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싸워야 하고, 선택해야 하며,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전체를 놓고 보면 그것은 주님의 역사(役事)’입니다.

 

이제 안식(rest)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것도 같은 원리 안에서 이해됩니다. 여섯 날 동안은 싸움과 분리가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빛과 어둠이 나뉘고, 선과 악이 구분되고, 진리와 거짓이 갈라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섯째 날이 지나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면, 더 이상 같은 방식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  평안과 일치의 상태’가 옵니다. 이것이 일곱째 날’, 곧 안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안식하셨다’는 말은, 주님이 피곤해서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의 거듭남의 주된 싸움이 마쳐지고, 이제 질서와 평안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일이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단계의 일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처음 접하시는 분들께 설명하실 때는 이렇게 풀어 주시면 가장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싸우는 것은 맞지만,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그 모든 일을 주님의 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싸움을 잘 마치면, 주님이 우리 안에 평안을 주시는데, 그것을 안식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여섯 날의 싸움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우리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본질과 결과에서는 주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완성될 때, 주님이 그 안에서 안식하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주권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질서 안에서 함께 서게 됩니다.

 

 

 

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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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셨으므로, 그것을 그가 하시던 모든 일(his work)이라 하며, 모든 싸움이 그때 그치게 되므로, 주님께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그날에 안식하시니라(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שבת(샤바트, the sabbath)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며,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이 글은 창2:1-3에 대한 해설 가운데서도, 앞선 모든 논의를 하나의 고요한 결론으로 이끄는 자리입니다. AC.83이 ‘다 이루어짐’의 의미를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설명했다면, AC.84는 그 결합이 도달하는 최종 상태를 ‘일곱째 날’이라는 이름으로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은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라, ‘과정이 안식으로 전환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일곱째 날’을 천적 인간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인간 내적 상태의 이름입니다. 엿새 동안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말은, 인간 안에서 질서가 세워지고, 진리가 밝혀지며, 싸움이 계속되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은 창조의 수고이며, 동시에 인간 거듭남의 긴 여정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이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모든 싸움이 그칩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외적 갈등이 아니라, ‘악과 거짓에 맞서 진리를 선택해야 했던 내적 투쟁’을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이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이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것들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이 안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활동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명과 선이 ‘방해받지 않고 사람 안에서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더 이상 저항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안식입니다.

 

이로 인해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됩니다.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질서가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안식일의 거룩함을 규칙이나 계명에서 찾지 않고,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안식의 상태에 이를 때, 그날은 거룩해집니다. 거룩함은 시간에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상태에 붙어 있는 속성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라는 말의 어원이 ‘’을 뜻하는 히브리어 ‘שבת(샤바트, the sabbath)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단순한 어학 정보가 아닙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이 ‘행위의 중단이 아니라 싸움의 중단’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뜻이며,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며,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세 동사, create, form, make는 우연한 반복이 아닙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어짐은 실제 삶으로의 구현입니다. 즉, 사람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목적 - 질서 - 삶이라는 단계를 거쳐 안식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마지막 문장, ‘이러한 사실들은 말씀을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라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특유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교리를 제시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씀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을, 그 내적 질서에 따라 풀어 보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논증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자명함의 선언’으로 마칩니다.

 

AC.84에 이르면, 창세기 1, 2장은 더 이상 우주의 기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어떻게 ‘죽은 상태’에서 시작하여, 영적 상태를 거쳐, 마침내 천적 상태, 곧 안식의 상태에 이르는가에 대한 ‘완결된 인간학적 서사’입니다. 그리고 이 서사의 끝은 활동이 아니라, 쉼입니다. 그러나 그 쉼은 공허가 아니라, 가장 충만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창세기 2장의 첫 단락은 사실상 하나의 완전한 원을 이룹니다. 시작은 ‘다 이루어짐’이었고, 끝은 ‘안식’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설명은, 왜 이 마침이 안식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심화

 

1.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이라고 하실까?

 

 

AC.84, 심화 1, 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이라고 하실까?

AC.84.심화 1. 왜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이라고 하실까? 앞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드렸던 것 같은데... 이 여섯 날의 모든 싸움은 사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거듭남의 일들인데, 왜 주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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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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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심화

 

1. the sixth day the sixth day

 

그동안 참 궁금했는데요,  AC영역에 보면,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처럼, the sixth day,”식으로 “”를 씌우나요? the sixth day,”가 아니고 말입니다. 저 위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도 그렇고, to be finished,”도 그래요. the sixth day the sixth day의 차이가 뭔가요?

 

 

이건 단순한 따옴표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를 하나의 의미 단위로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the “sixth day sixth day라는 표현 자체를 하나의 상징 개념으로 묶는 것이고, the sixth day the까지 포함해서 전체 구절을 하나의 인용, 상징 단위로 묶는 것입니다. 즉, 기능은 비슷하지만 ‘묶는 범위’와 ‘강조 지점’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먼저 the “sixth day를 보면, the는 문법적으로 그냥 붙어 있는 정관사이고, 실제로 강조되거나 상징 단위로 처리되는 것은 sixth day입니다. 이 경우 핵심은 sixth day라는 표현이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특정 상태(거듭남의 여섯째 단계)’를 가리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sixth day에 집중됩니다.

 

반면 the sixth day라고 하면, the까지 포함된 전체 구절이 하나의 덩어리로 묶입니다. 이 경우는 ‘여섯째 날이라는 그 특정한 상태 전체’를 하나의 개념으로 강조하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즉, sixth day라는 말 자체뿐 아니라, 그것이 ‘정해진, 특정한 단계’라는 점까지 함께 포괄해서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의 글에서 이 두 표현이 항상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틴어 원문에서는 이런 차이가 지금 우리가 보는 영어 번역만큼 미묘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영어 번역자(: Potts)가 읽기와 이해를 돕기 위해 따옴표를 배치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뉘앙스를 잡자면 이렇게 정리하실 수 있습니다. the “sixth day sixth day라는 표현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있고, the sixth day는 ‘그 여섯째 날이라는 상태 전체’를 하나의 완결된 개념으로 묶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AC를 읽으실 때 실제로 중요한 것은, 따옴표가 어디까지 붙었느냐의 미세한 차이보다, ‘이 표현이 지금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응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신호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신호를 잡으시면, the “sixth day the sixth day든 결국 같은 방향, 곧 ‘시간이 아니라 상태’로 열리게 됩니다.

 

 

 

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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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AC.83

 

천지와 만물(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룰 때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 원리가 아니라 천적 원리가 주가 되기 시작하며, 이것이 곧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이 글은 창2:1의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을,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질서의 완성’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을, 어떤 일이 끝났다는 선언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상태 선언’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육일 창조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직 ‘일곱째 날’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섯째 날은 완성 직전의 상태이며, ‘전환이 가능한 마지막 지점’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마침’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그것은 지식의 충만이나 이해의 완성에 있지 않습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었는가’에 있습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사랑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 아직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반대로,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면, 비로소 하늘과 땅,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결합됩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순간, 더 이상 신앙이 주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명확하게 말합니다.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 원리가 아니라 천적 원리가’ 중심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리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앞에서 끌고 가지 않고,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 전환이 바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을 가장 온전한 자리에 둔 사람입니다.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고 보호하며 밝히는 역할을 하고, 사랑은 삶 전체를 움직이는 중심이 됩니다. 이 질서가 세워질 때,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분열이나 긴장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을, 정지나 완결의 의미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안식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날에 모든 것이 마쳐질 때, 일곱째 날의 안식이 가능해집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안식은 결코 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여전히 판단과 갈등, 자기중심의 움직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신앙 중심 신앙생활의 한계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신앙이 주된 원리로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여전히 ‘영적 인간’의 단계에 머뭅니다. 이는 귀하고 필수적인 단계이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목적지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 곧 천적 상태입니다. AC.83은 그 목적지의 문턱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여기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창세기 1, 2장의 구조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창세기 1장은 신앙이 형성되고 질서 잡히는 과정, 곧 여섯째 날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장은 그 신앙 위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어 안식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AC.83은 이 두 장을 하나의 영적 과정으로 연결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짧지만, 무게는 큽니다.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 속에, 인간 거듭남의 전체 구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이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지금 내 안에서는 무엇이 주된 원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신앙이 앞서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 앞서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83은 판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신앙이 사랑 안에서 쉬게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천지와 만물’이 비로소 ‘다 이루어집니다.’

 

심화

 

1. the sixth day the sixth day

 

 

AC.83, 심화 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

AC.83.심화 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 그동안 참 궁금했는데요, 이 AC영역에 보면,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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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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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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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심화

 

3. appearance permission

 

주님은 왜 거의 다 내가 하는 거라고 하시나요? 그러니까 위 사13:12도 보면,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라고 하시면서, 천적 인간이 희귀해지는 걸 마치 주님 책임인 것처럼 기술하시네요... 주님은 왜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시나요?

 

 

아주 핵심을 건드리신 질문입니다. 이 부분은 처음 접하면 거의 누구나 한 번은 걸려 넘어지는 지점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다’고 표현되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로는 주님이 허락하신다’, ‘주님이 질서 안에서 그렇게 되도록 두신다’는 뜻을 포함한 외형적 표현(appearance)입니다. 이 점을 풀지 않으면, 주님이 선도 하시고, 악도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이 생깁니다.

 

먼저 원칙부터 분명히 하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선과 진리만을 주시며, 악과 거짓은 결코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에는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겠다’, ‘내가 하늘을 진동시키겠다’처럼 마치 주님이 직접 파괴하거나 감소시키는 것처럼 표현될까요?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표현한 방식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주님이 멀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생명과 빛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체감에서는 이것이 주님이 나를 치셨다’, ‘주님이 이렇게 만드셨다’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느끼는 방식,  겉으로 보이는 대로 말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외형에 따른 말씀’입니다.

 

이 점을 AC의 맥락으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천적 인간이 희귀해진다’는 것은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점점 감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상태로 기울어지면서 퍼셉션을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모든 질서는 여전히 주님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전체를 놓고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곧, ‘직접 원인’이 아니라 최종적인 질서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허용(permission)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악으로 기울어질 가능성도 함께 허용하십니다. 그런데 이 허용은 방치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가능한 한 선으로 이끄시려는 섭리와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모든 과정을 하나로 묶어 주님이 하신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태양은 항상 빛을 비추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면 어둠 속에 들어갑니다. 이때 사람 입장에서는 빛이 사라졌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할 때는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표현 방식이 바로 이런 종류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사13:12 내가 사람을 희귀하게 하겠다’는 말씀도 이렇게 읽으시면 정확해집니다. ‘사람이 참된 인간 상태에서 멀어질 때, 그 결과로 참된 인간이 희귀해지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 전체 질서는 주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성경에서 주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이 악까지 직접 행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과조차도 주님의 질서와 섭리 아래 있음을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속뜻에서는 주님은 오직 선만을 주시고, 악은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원칙을 함께 보셔야 전체가 풀리게 됩니다.

 

 

 

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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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심화 2, ‘사51:13, 16’

AC.82.심화 2. ‘사51:13, 16’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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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심화

 

2. 51:13, 16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 구절 역시 Book of Isaiah의 문자만 보면 창조주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말씀’이지만, Arcana Coelestia의 흐름 안에서 보면 훨씬 더 깊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새 창조(거듭남)’를 말하는 구절로 읽히게 됩니다.

 

먼저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주 창조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내적과 외적 질서를 세우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람의 속 사람,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이고, ‘’은 겉 사람, 곧 삶과 행위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곧 새로운 의지와 삶의 기반을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이 주님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과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학대자의 분노를 종일 두려워한다’고 하는데, 여기서 학대자’는 외적 상황이나 사람만을 뜻하기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거짓과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외적 힘들, 환경, 사람, 심지어 자기 생각에까지 지배당하며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반면 16절에서는 완전히 반대의 상태가 펼쳐집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라는 것은 진리가 그 사람의 이해 안에 들어와 말과 삶으로 표현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다’는 것은 주님의 능력과 보호 아래 두신다는 뜻인데, 이것은 단순한 보호를 넘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한다’고 반복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구조를 보여 줍니다. 처음의 하늘과 땅’은 잊어버린 상태 속에서 흔들리는 질서이고, 뒤의 하늘과 땅’은 주님의 말씀과 보호 안에서 다시 세워지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즉, 같은 표현이지만 전자는 무너진 상태’, 후자는 재창조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는 선언은 이 모든 과정의 결론입니다. ‘시온’은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회를 의미하고, ‘내 백성’은 진리 안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인간 안에 하늘과 땅을 새롭게 세우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참으로 주님의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정리하면, 이 구절은 창조주를 잊고 외적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과 보호 안에서 내적과 외적 질서가 새롭게 세워지는 상태’로의 전환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전체 과정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이사야의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회복 예언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 사람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적 현실로 살아나게 됩니다.

 

 

 

AC.82, 심화 1, ‘사13:12-13’

AC.82.심화 1. ‘사13:12-13’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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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심화

 

1. 13:12-13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이 구절은 사13의 문자적 의미만 보면 바벨론 심판의 강한 예언처럼 보이지만, AC.8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인간의 희귀함’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는 말은 단순히 인구가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 곧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인간 상태가 거의 사라진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순금’, ‘오빌의 금’은 단순한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사랑의 가장 순수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은 언제나 사랑, 특히 주님께 대한 사랑, 곧 천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금보다 희귀하다’는 것은, 참된 인간됨, 곧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드물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AC.82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 곧 퍼셉션으로 선을 보는 인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맥락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이어지는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라는 표현도 물리적 우주 붕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늘’은 인간의 내적,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을, ‘’은 외적 삶과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내적과 외적 질서가 무너지는 상태’, 곧 신앙과 삶 전체의 근본적인 붕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참된 사랑이 사라질 때 인간 존재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단순한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왜 천적 인간이 희귀해지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퍼셉션이 사라지며, 그 결과 인간의 내적 하늘과 외적 땅이 함께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참된 인간 상태가 얼마나 귀하고, 또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목사님께서 보시기에 이 구절이 AC.82와 연결되는 핵심은 결국 이것입니다. ‘사람’이란 단순히 인간 종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결합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하며, 그 상태가 사라질 때 비로소 성경은 그것을 ‘금보다 더 희귀하다’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읽으시면, 이사야의 강한 표현들이 단순한 역사적 예언을 넘어,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AC.82, 심화 2, ‘사51:13, 16’

AC.82.심화 2. ‘사51:13, 16’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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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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