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8, 9)

 

AC.77

 

그다음으로 그의 지성은 ‘동방의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들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들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knowledge [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본격적으로 ‘천적 인간의 내적 풍경’을 펼쳐 보이는 지점입니다. AC.76에서 생명의 근원이 주님으로부터 ‘불어넣어짐’으로 주어진 뒤, AC.77에서는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지성의 형태로 어떻게 펼쳐지는가’가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성을 추상적 사고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의 ‘동산’으로 그립니다. 이는 지성이 구조이기 이전에 ‘살아 있는 환경’임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는 표현은 우연한 방향 지시가 아닙니다. 동쪽은 언제나 주님과 사랑이 있는 방향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율적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사랑을 향해 열려 있는 인식의 공간’입니다. 그의 지성은 중립적이거나 냉정한 판단의 장이 아니라, 사랑의 빛 안에서 작동하는 이해입니다.

 

이 동산 안에 있는 나무들은 지성의 내용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지식이나 개념으로 불리지 않고, ‘퍼셉션(perception)으로 불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상태로서 주어지는 인식’입니다. 천적 인간은 진리를 논증으로 파악하지 않고, 선과 진리를 보듯이 압니다. 그래서 그의 지성은 축적된 정보의 창고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들이 자라는 동산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설명은, 진리가 이 사람에게 부담이나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대상’임을 보여 줍니다. 그는 진리를 보기 싫어서 억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는 그의 눈에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는 진리가 이미 선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차갑고 딱딱하지만, 선 안에 있는 진리는 보기에도 즐겁습니다.

 

한편,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을 뜻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을 단지 옳다고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으로 살아갑니다’. 선은 그에게 외적 규범이 아니라, 내적 양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을 행하면서도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음식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동산의 중심에 있는 두 나무를 짚습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천적 인간의 중심이며, 그의 모든 인식과 행위는 이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사랑이 지성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지성은 사랑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랑을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knowledge [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지식의 차원에 머무는 진리’를 뜻합니다. 신앙은 필요하지만,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신앙은 생명나무를 보좌하는 위치에 놓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길 때, 그것은 건강하지만, 신앙이 사랑을 대신하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 대비는 곧 창세기 3장에서 드러날 긴장, 곧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천적 지성의 핵심 구조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중심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 진리는 아름답고, 선은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뀌면, 같은 나무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창세기 2장은 아직 어떤 갈등도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질서 안에 있고, 조화롭습니다. 에덴의 동산은 분열되지 않은 지성의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이상화, 즉 이상적으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지성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조용히 드러냅니다.

 

AC.77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글이면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지성은 지금 어떤 동산인가, 그 중심에는 어떤 나무가 서 있는가 하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신앙이 중심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랑이 중심에 서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AC.76, 창2:1-17 개요, 주님의 ‘불어넣으심’(breathing)으로 오는 생명(삶)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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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2:7)

 

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중심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AC.76은 그 모든 것의 근원인 ‘생명 자체가 어디서 오는가’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능력이나 구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가지로 설명합니다. ‘불어넣어짐(the breathing)입니다. 생명은 생성되거나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생물학적 호흡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숨은 곧 ‘영적 생명의 흐름’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육체가 살 수 없듯이, 주님의 숨이 사람 안에 불어오지 않으면 그 어떤 지식과 이성도 참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불어넣다’는 동작은 매우 친밀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멀리서 명령하거나 외부에서 조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 가까이 다가와, 직접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이 장면은 창조의 기술적 순간이 아니라, ‘관계의 순간’입니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주님과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연결이 곧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쓴 ‘breath of lives’, 곧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에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생명이 단일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사람 안에는 여러 층위의 생명이 동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 감각의 생명, 사고의 생명,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명은 각각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입니다. 그 근원이 바로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 AC.76은 앞선 AC.73-74와 깊이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의 사람이며, 주님의 안식이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의 흐름이 방해 없이 통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천적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는 긴장이나 자기 점검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숨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고요함이 있고, 그의 행위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생명을 소유 개념에서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흔히 ‘내 생명’, ‘내 삶’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표현은 근본적으로 부정확합니다. 생명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할수록, 그는 그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수록, 그는 더 충만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이 ‘불어넣어짐’의 이미지는 사후 생명(삶)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서 AC.70에서 ‘죽음은 생명(삶)의 계속’이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이 숨이 끊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적 호흡이 멈출 때, ‘영적 호흡은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으며, 그 생명(삶)은 여전히 주님의 숨에 의해 유지됩니다. AC.76은 이 사실을 창조의 장면 속에 미리 새겨 넣습니다.

 

결국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모든 후속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삶은 모두 이 생명의 숨이 계속해서 불어오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상징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나 신화적 이미지로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 AC.76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하느냐 이전에, ‘어디서 숨 쉬느냐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는 주님의 숨으로 삽니다. 그 숨이 그 안에 머무는 한, 그의 삶은 살아 있으며, 그의 안식은 실제입니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네 종류 나무의 속뜻' (8-9절)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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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 (5-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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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2:5, 6)

 

AC.75

 

그의 지식과 그의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채소(the shrub and the herb)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이제 본격적으로 ‘천적 인간의 내적 구조’를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관문입니다. AC.74에서 천적 인간이 곧 ‘일곱째 날’이며 주님의 안식이라고 선언되었다면, AC.75는 그 안식의 상태 안에서 ‘인간의 인식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설명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자연적 이미지, 곧 관목과 채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scientificum’과 ‘rationale’라는 두 층위로 구분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능력의 나열이 아닙니다. ‘scientificum’은 경험과 학습을 통해 쌓인 지식, 다시 말해 겉 사람의 기억과 사고 재료에 해당합니다. 반면 ‘rationale’는 그러한 지식이 질서 잡혀 이해로 올라간 상태, 곧 이성이 작동하는 영역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도 이 두 가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자리 잡습니다.

 

이 지식과 이성이 ‘땅에서 난 관목과 채소’로 묘사된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나무가 아니라 관목과 채소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삶에서 지식과 이성이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나무는 높이 자라고 눈에 띄는 존재이지만, 관목과 채소는 땅 가까이에서 자라며 삶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은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고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이 관목과 채소가 ‘안개에 의해 적셔진다’는 표현입니다. 창2:5-6 본문을 보면, 안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달리, 땅에서 은밀히 올라와 전체를 적시는 작용을 상징합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입니다.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외적 교훈의 강압으로 형성되지 않고, 사랑의 상태 안에서 자연스럽게 적셔지고 자라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영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진리가 먼저 주어지고, 그 진리를 이해하고 따르기 위해 이성과 지식이 적극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선이 먼저이며, 지식과 이성은 그 선을 표현하고 실행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합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지식을 ‘쌓는다’거나 이성을 ‘단련한다’는 감각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안개처럼 스며드는 생명에 의해 충분히 공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천적 상태가 결코 ‘무지의 상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들을 가장 바른 자리에 둔 사람입니다. 지식은 사랑을 섬기고, 이성은 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지식은 날카롭기보다 온화하고, 그의 이성은 논쟁적이기보다 투명합니다. 관목과 채소가 땅을 덮듯, 그의 인식은 삶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습니다.

 

이제 창세기 2장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더 이상 지식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 지식과 이성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고, 안개가 땅을 적십니다. 이는 천적 삶의 인식 구조가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주입되는 방식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방식’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75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은 나무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는가, 아니면 관목과 채소처럼 삶을 섬기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지식과 이성이 제자리를 찾을 때 인간이 얼마나 고요하고 충만해질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 줍니다.

 

 

 

AC.76, 창2:1-17 개요, 주님의 ‘불어넣으심’(breathing)으로 오는 생명(삶)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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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 안식'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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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해설

 

이 문장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깊은 정점 중 하나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이 ‘죽음에서 소생됨’, ‘영적 상태로 들어감’, 그리고 ‘천적 상태로 나아감’이라는 상승의 운동이었다면, AC.74는 그 운동이 도달하는 ‘멈춤의 지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멈춤은 정지나 공백이 아니라, 완성과 평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멈춤은 ‘일곱째 날’이며, ‘주님이 쉬시는 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곧바로 ‘일곱째 날’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언제나 움직임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싸움과 수고가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대적하고, 질서를 세워 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쉬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일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이해와 판단, 선택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주님의 선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이해는 그 선을 섬기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은 여섯 날의 창조로 끝나지만, 그 끝은 완결이 아니라 ‘문턱’입니다. 창세기 21절로 3절에서 비로소 ‘안식’이 언급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동일합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서 곧바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는 여전히 진리 중심의 삶이며, 싸움과 선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은 더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그 특징을 길게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곱째 날’이라는 말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날이 아니고, 물과 물을 가르는 날도 아니며, 생명을 만들어 내는 날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천적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 안에서,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순히 ‘행복한 곳’이나 ‘보상의 장소’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진리를 따르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이렇게 보면, AC.74는 독자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여섯째 날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일곱째 날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2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인간을 결국 ‘안식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식은 삶을 포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삶이 가장 온전히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AC.74는 다음에 이어질 모든 설명의 기준점이 됩니다. 이후에 나오는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일곱째 날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주님은 그 안에서 어떻게 거하시는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이제 펼쳐질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흐름에서 AC.74는 매우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수고의 신앙에서 안식의 신앙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spiritual(영적)에서 celestial(천적)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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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논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AC.72까지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예고하는 문턱이었다면, AC.73은 이제 그 영원한 삶 안에서도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깊어지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도 분명한 단계와 질서, 그리고 성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어있음’은 무엇보다도 ‘영적 무감각과 분리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적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후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이 된 뒤에, 그다음 단계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많은 신학적 전통에서는 영적 상태 자체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상태는 ‘중간 단계’입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신앙의 질서 안에 들어선 상태는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입니다.

 

천적인 상태란, 진리를 ‘아는 상태’를 넘어, 선을 ‘사는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이 주로 이해와 분별의 차원에 서 있다면,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상태에서는 진리가 앞서고 선이 그 뒤를 따르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선이 중심이 되고 진리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담깁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사후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영적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천적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 먼저 길이 열리고, 그다음에야 사랑이 그 길을 따라 깊어집니다. 이는 창1에서 빛이 먼저 창조되고, 그다음에 생명이 질서 잡히는 구조와 정확히 상응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1을 다루면서, 그 동일한 구조가 사후 삶과 거듭남의 내적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AC.73이 단지 일반론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해설하고 있는 본문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창2:1에서 말하는 ‘다 이루어졌다’는 상태는, 단순히 영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인 천적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졌음을 포함합니다. 즉, 창2는 영적 인간을 넘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과 창2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장은 주로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다루고, 2장은 그 영적 상태 위에서 ‘천적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다룹니다. AC.73은 바로 이 전환점을 독자에게 명확히 짚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부터 읽게 될 내용은 더 이상 단순한 분별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오해를 조용히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곧바로 완성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후 삶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이 땅에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집니다. 사후 세계는 보상과 처벌의 무대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결국 AC.73은 아주 짧은 문장 안에서, 창조–거듭남–사후 삶이라는 세 층위를 하나로 겹쳐 놓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이 질서는, 태고교회의 구조이자, 개인의 거듭남의 구조이며, 사후 삶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서를 지금부터 창2를 통해 차분히,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 가려 합니다.

 

 

 

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 안식'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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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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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이정표’와 같습니다.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내용들을 본문 한가운데에 넣지 않고 장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는 그 설명을 실제로 실행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글의 구조가 이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장의 끝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에 대한 설명을 말씀 해설의 중심부에 끼워 넣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에 둡니다. 이는 사후 삶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끝은 결론이자 독자가 지금까지 읽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삶의 실제로 연결시키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뒤에야, 그 말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전히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설명하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AC.67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후 삶에 대한 이 설명은 흥미로운 부록도, 개인적 체험담도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지금 이 위치에 놓이도록 허락된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다시 한번 정의합니다. 그는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수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른 삶 안으로 옮겨지는 상태입니다.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단순히 ‘다음 세계’나 ‘저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차원임을 뜻합니다.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삶의 참된 자리로 들어간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의 기대를 조용히 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나 공포스러운 심판 이야기를 예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즉, 과정과 질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에 이어질 설명들이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질서 있는 묘사’가 될 것임을 미리 알려줍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이 글의 위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분명해집니다. AC.67에서는 ‘왜 내가 말할 수 있는가’를 밝혔고, AC.68에서는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은 본래 그렇게 창조되었다’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라는 핵심을 제시했으며, AC.71에서는 ‘이 모든 것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72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말합니다. ‘이제 실제로 그것을 말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72는 내용보다도 ‘전환의 의미’가 더 큰 단락입니다. 이 글을 기점으로, 아르카나는 추상적 전제와 선언의 영역을 지나,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사후 삶의 묘사’로 들어갑니다. 독자는 더 이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그러한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짧은 글은 마치 문턱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준비였고, 여기서부터는 실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문턱 앞에서 독자에게 묻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알립니다. ‘이제 말할 것이다.’ 그 말이 어떤 삶의 이해를 요구하게 될지는, 다음 단락들에서 점점 분명해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spiritual(영적)에서 celestial(천적)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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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이런 증언을 말씀 본문 앞뒤에 넣는 이유'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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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리고 그밖에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로서,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증언과 내용 전개를 잠시 멈추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는 방식 자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메타적 설명입니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으로 말하는가’를 밝힙니다. 이 한 문장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가르쳐 주는 안내문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글들에서 사후 삶, 영적 교통, 소생의 상태 같은 내용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런 내용들을 성경 본문 해설 한가운데에 그대로 끼워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던 독자의 인식 흐름이 끊기게 되고, 성경 본문과 증언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 본문을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다시 말해 그 어떤 독자에게도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거나 본문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그 고유한 흐름과 질서를 따라 해설되어야 하며, 개인적 증언이나 추가 설명은 그 질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식이 바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는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구조입니다.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그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이, 즉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그 내적 의미만이 놓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르카나는 하나의 혼합된 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가 질서 있게 공존하는 책’이 됩니다.

 

또한 그는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분리된 부록처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본문 해설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등장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기능적으로 배치됩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지 않고, ‘말씀의 질서가 허락하는 만큼만’ 드러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이 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배열의 권한조차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뿐 아니라, 어디에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까지도 허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스스로를 계시의 주체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봉사하는 증언자’로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이해하면, 아르카나를 읽다가 느끼게 되는 독특한 리듬, 그러니까 본문 해설과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교차하면서도 결코 뒤섞이지 않는 리듬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글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차원을 동시에 붙잡으려다 모두 놓쳐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C.71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책을 서두르지 말라’, ‘각 층위를 그 자리에 두고 읽으라’, ‘말씀과 증언을 섞지 말고, 연결하되 혼동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단지 아르카나를 위한 독서 지침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 전체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앞선 AC.70에서 ‘죽음은 삶의 계속, 연속’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제시되었다면, AC.71은 그 주제를 어떻게 질서 있게 풀어 갈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용의 진실성만큼이나, 그것을 담는 형식과 위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AC.72, 창2 앞,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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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사람이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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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 거부’,장기 기증’,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어떤 조언을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묶어 주셨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장기 기증’, ‘무빈소 장례’는 모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을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이런 제도를 언급했는가?’라는 1차 질문을 넘어서, ‘그가 영계, 죽음, 몸, 장례를 바라보는 일관된 원리’에 따라 각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하여

 

생명은 기계적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전이’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이 몸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 생명은 심장, 호흡, 기계적 기능에 있지 않다

* 생명은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 있다

* 육체는 영이 머무는 동안만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의식도 없고, 내적 삶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오직 기계적 연장만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을 ‘신앙적 의무’로 무한히 연장해야 할 이유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의 연장을 ‘자연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데, 육체만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은 신적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즉, ‘연명 치료 거부는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자연스럽게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장기 기증에 대하여

 

몸은 영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맡겨진 도구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사후의 사람은 이 땅의 육체와는 아무런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영적 몸’’이며, 지상의 심장, 간, 각막, 피부와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749-1756)에서 말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개념을 빌리면,

 

* 육체는 ‘상응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영의 상태이며, 사랑의 질(, quality)이다

 

따라서 ‘사후에 육체 일부가 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는 몸은 그 사람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자연계에 남긴 흔적이다

 

장기 기증은

 

*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 부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 오히려 ‘이웃 사랑의 자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죽은 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스베덴보리는 장례 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 그는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난다

* 그리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된다

 

즉, ‘빈소에 누워 있는 육체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 ‘남은 자들의 정서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 과도한 형식

* 체면을 위한 장례

* 슬픔을 연출하는 절차

 

이런 것들은 필수가 아닙니다.

 

무빈소 장례’는 충분히 스베덴보리적 정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추모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각자가 마음에서 주님 앞에 고인을 맡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영적인 의미는 충만합니다.

 

 

4.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연명 치료 거부 → ‘영의 자유를 존중하라

* 장기 기증 → ‘육체를 사랑의 마지막 도구로 내어주라

* 무빈소 장례 → ‘죽은 이를 땅에 붙잡아 두지 말라

 

이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선택이 죽음을 부정하려는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의 연속을 신뢰하는 태도인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진짜 신앙은 죽음 이후를 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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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자기들이 그랬듯, 또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연속(a continuation of life)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서론의 방향을 분명히 바꿉니다. AC.67-69가 ‘이런 증언이 가능한 이유’와 ‘인간 본성의 구조’를 설명했다면, AC.70은 그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밝힙니다. 그 첫 주제가 바로 ‘사람이 소생될 때’, 다시 말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단절이나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음을 ‘들어감’으로, 곧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표현은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깨어남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죽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던 상태가 ‘다른 방식으로 의식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씁니다.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증언이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그래서 더 충격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사후에 다시 말하고, 함께 있었으며, 그 시간이 하루나 한 주가 아니라 ‘여러 달’, 심지어 ‘거의 일 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였습니다. 이는 사후 세계가 막연한 안개 속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 기억,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 삶’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감상이나 신비적 분위기를 전혀 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합니다. 그 담담함 자체가 이 경험을 ‘비범한 사건’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로 제시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듯, 그는 ‘나는 그들과 말했고, 함께 지냈다’고 말합니다. 이 어조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진술의 무게를 크게 만듭니다.

 

사후에 만난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책망이나 비난도 없습니다. 다만 순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후의 삶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기에, 그것을 부정하던 과거의 자신과 타인의 상태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신을 지적하지만, 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지의 문제’, 더 정확히는 ‘겉 사람에 너무 깊이 잠긴 상태의 결과’로 암시합니다. 육체의 감각과 세상의 질서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으면, 생명이 그 너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육체를 벗어나면, 그 불신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긴 공백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과 사후 삶 사이에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사후관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다른 국면입니다. 끊어지는 것은 육체와의 관계이지, 의식과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다른 삶의 양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낯선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형성되어 온 삶의 성향과 애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AC.70은 그래서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죽음을 끝으로 이해한다면,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집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지속, 연속’으로 이해한다면, 이 땅의 삶은 준비이자 전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아르카나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를 이 글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삶은 다음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AC.67-69가 ‘말씀이 왜 다른 삶, 즉 사후 시작되는 삶을 향하는가’를 설명했다면, AC.70은 이제 그 다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실제 경험에 근거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르카나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으로 전개됩니다.

 

 

 

AC.69, 창2 앞,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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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AC.70, 창2 앞, '사람이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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