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가 너무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은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본성(genius)에 관한 것인데, 그들의 본성은 홍수 이후를 살았던 사람들의 것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간략히 말하면, 태고 교회를 이루었던 그들의 첫 조상들은 천적 인간들이었으며, 따라서 천적 씨(seeds)가 그들 안에 심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 안에도 천적 기원에서 나온 씨가 남아 있었습니다. 천적 기원의 씨란,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려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걸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의지와 이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 또는 선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태고 사람들은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한 것들을 직접 지각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계통의 후손들에게는 동일한 천적 기원의 씨가 반드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이 진리와 선에서 떨어지는(falling away)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철저히 왜곡, 사후에도 거의 회복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씨는 없고, 영적 씨만 가진 사람들은 이와 다릅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오늘날 사람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없으며, 따라서 선을 향한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할 수 있는 능력, 곧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에 관한 지식과 그로부터 생기는 선을 기초로 양심을 사람 안에 서서히 심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어느 정도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만 그 길은 천적 인간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입니다.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없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어떤 삶이 흘러나오는지, 그리고 그 결과 사후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해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언급한 뒤,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후대 사람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홍수 심판의 이유를 도덕적 차원보다 인간의 영적 구조라는 차원에서 밝히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는 단순한 재능이나 성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놓으신 영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 그 씨는 천적 기원이었으므로, 사랑이 인간 존재 전체를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진리는 그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추론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된 ‘퍼셉션’의 본질입니다.

 

이 때문에 태고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지와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일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험합니다. 이해로는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가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선을 원하면서도 아직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분열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이해를 이끌었고, 이해는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의지와 이해는 서로 다른 기능이면서도 하나의 생명처럼 작용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죄가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위험했던 것은 일시적인 유혹이나 순간적인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이 반복적으로 받아들여져 마침내 의지 자체의 생명이 되어 버릴 때, 인간 존재 전체가 함께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지만,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었으므로, 그 중심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면 이해와 삶 전체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가 변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경우 ‘사후에도 거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 자체가 완전히 부패,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일 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홍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영적 씨’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대신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과정 속에서 양심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는 사랑에서 진리로 나아갔다면, 홍수 이후의 교회는 진리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주님의 섭리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영적 인간의 길’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양심을 주님께서 서서히 심어 주신다’는 부분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도덕성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진리 안에 선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던 직접적인 지각보다 낮은 단계의 생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구원의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홍수 이후의 인간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의 길을 선물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사람들조차도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현대 신학은 인간을 죄인과 의인, 또는 신자와 불신자의 관점에서는 자주 설명하지만, 인간의 내적 구조가 천적인지 영적인지, 의지와 이해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사후의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러한 구분은 인간론과 구원론 전체를 이해하는 기초입니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이후 사람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어떤 길을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인도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조금씩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거듭남은 순간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주님의 섭리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긴 여정인 것입니다.

 

 

 

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9.심화

 

3.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스베덴보리가 AC.309에서 나3:3을 인용하는 이유 역시 앞에서 인용한 에스겔과 같은 맥락입니다. 곧 ‘’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진리를 대적하고 파괴하는 ‘거짓’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훔의 예언은 니느웨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거짓과 악이 극에 달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구절은 ‘기병’, ‘’, ‘’, 그리고 ‘죽임당한 자의 떼’를 차례로 묘사합니다. 겉으로는 전쟁의 참상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군사적 표현들을 모두 영적 싸움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은 진리를 베어 쓰러뜨리는 거짓을, ‘’은 그 거짓을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확증하는 거짓된 논증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칼과 창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거짓이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구절 첫머리에 나오는 ‘기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능력 또는 지성의 능력을 의미하며, ‘기병’은 그 이해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 능력을 움직이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니느웨의 심판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의 ‘기병’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위하여 지성을 사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지성이 진리의 인도를 받을 때는 천국을 섬기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복종할 때는 거짓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이어지는 ‘죽임당한 자의 떼’ 역시 문자적인 전사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 특별히 진리와 선이 거짓과 악에 의해 소멸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죽임당한 자의 떼’는 거짓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황폐하게 된 사람들과 교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AC.309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짓 때문에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상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한 겔21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이 번개처럼 번뜩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성문마다 두려움을 두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면, 나훔에서는 ‘’과 ‘’이 수많은 죽임을 가져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두 예언 모두 공통적으로 거짓이 교회를 황폐하게 하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러 예언들을 나란히 인용, ‘’이 거짓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어느 한 구절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상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C.309에서 나3:3을 인용하는 이유는, ‘’과 ‘’으로 대표되는 거짓과 거짓된 논증이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전쟁의 무기들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이 이해하는 능력을 왜곡하고 진리를 공격, 마침내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언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bygrace.kr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9.심화

 

2. ‘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AC.309에서 스베덴보리가 겔21의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의 영적 의미를 더욱 강하게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은 문자적인 전쟁 무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으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특히 자기 사랑과 거짓된 설득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예언 전체는 거짓이 인간의 내면과 교회를 어떻게 철저히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매우 생생한 상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라는 표현들은 모두 거짓의 파괴력이 극도로 증대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이 진리와 싸우는 거짓, 또는 거짓으로 인해 진리가 파괴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칼이 반복하여 언급되고,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은 거짓이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어 사람의 선과 진리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 또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번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표현 모두 거짓의 파괴력이 사람의 가장 깊은 삶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침실’이나 ‘내실’ 자체의 상응을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거짓이 인간을 부분적으로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장악, 황폐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표현은 바로 AC.309의 논지를 직접 뒷받침합니다. ‘낙담’은 선에 대한 의지와 진리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많이 엎드러지게’라는 것은 거짓으로 인해 악과 오류가 계속 증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성문’은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 곧 교리와 이성의 출입구를 의미하는데, 모든 성문에 칼이 놓였다는 것은 진리가 들어올 통로 자체가 거짓에 의해 점령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단순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인간의 전 존재를 황폐하게 만드는 영적 상태를 단계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AC.309 전체의 결론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은 ‘그들이 낙담하여’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거짓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것을 확증하는 것들만 보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바로 이러한 영적 황폐함을 예언자의 언어로 묘사한 대표적인 본문인 것입니다. 칼이 번개처럼 번뜩이고, 살육이 커지고, 마음이 녹으며, 넘어짐이 많아지고, 성문마다 칼의 공포가 놓이는 일련의 모습은 모두 거짓이 인간의 영적 생명을 철저히 파괴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에스겔의 ‘’에 관한 예언이 그가 설명하고 있는 ‘거짓으로 인한 황폐함’의 가장 강력한 성경적 증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칼의 물리적 움직임이나 전쟁 장면 자체가 아니라, 거짓이 사람의 마음과 이성, 그리고 진리가 드나드는 모든 통로를 점령, 영적 생명을 무너뜨리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AC.309에서 겔21을 길게 인용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AC.309, 심화 3, ‘나3:3’

AC.309.심화 3.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

bygrace.kr

 

AC.309,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에 해당하는 ‘침실’이나 ‘은밀한 방’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역개정이 어떤 말을 빠뜨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번역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절 번호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09의 영어본은 이 대목을 겔21:14-15로 표시하지만, 유대교식 히브리어 성경의 장절 체계에서는 겔21:19-20에 해당합니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앞 장 끝부분의 다섯 절을 겔21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절 번호가 다섯 절씩 차이 납니다. 개역개정의 겔21:14에 나오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라는 부분이 바로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와 대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해당 표현 자체는 존재하며, 개역개정은 그것을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히브리어는 ‘הַחֹדֶרֶת לָהֶם’, 곧 ‘하호데레트 라헴’입니다. ‘하호데레트’는 동사 ‘חדר’에서 나온 여성 단수 분사형인데, 이 동사는 ‘안으로 들어가다’, ‘꿰뚫고 들어가다’라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문맥에 따라 ‘둘러싸다’, ‘사방에서 죄어 오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일부 영어 역본은 칼이 그들의 내실 또는 은밀한 방 안으로 들어간다고 번역한 반면, 여러 현대 역본은 칼이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들이닥친다고 번역합니다. 실제로 KJV는 ‘privy chambers’로, Young의 직역본은 ‘inner chamber’로 옮기지만, 다른 현대 역본들은 ‘surrounds them’ 또는 ‘closing in on every side’로 처리합니다.

 

따라서 Potts 영어본의 ‘bed chambers’는 히브리어 본문에 ‘’을 뜻하는 별도의 명사가 명백하게 적혀 있기 때문에 생긴 번역이라기보다, ‘하호데레트’라는 동사의 의미를 안쪽으로 침입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번역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는 같은 동사를 칼이 그들을 사방에서 둘러싸며 몰아붙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는 원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원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난해한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AC 연구상 더욱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작성한 영어가 아니라 Potts 영어 번역에 들어 있는 문구입니다.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영어 문구만 보고 스베덴보리의 라틴 원문에도 반드시 ‘침실’이나 ‘내실’에 해당하는 명사가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Potts가 라틴 문장을 그대로 직역했을 수도 있지만, 성경 인용 부분을 당시 영어 독자들에게 익숙한 전통적 성경 문구에 맞추어 표현했을 가능성도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정확한 비교 순서는 ‘AC 라틴 원문’, ‘Potts 영어 번역’, ‘히브리어 성경 본문’, ‘개역개정’이어야 합니다. AC.309의 라틴 원문이 존재하는 것은 확인되지만, 현재 확보한 온라인 자료에서는 해당 라틴 인용문의 세부 문구까지 안정적으로 열람되지 않아, 라틴 원문에 ‘침실’이라는 명사가 실제로 들어 있다고 여기서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AC.309의 한국어 번역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칼이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는 공간적 세부를 특별히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09에서 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칼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들만 보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표현을 존중하여 ‘크게 살육하는 칼이 사람들을 에워싼다’고 옮겨도 AC.309의 논지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뒤의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Potts 영어본을 직접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크게 살육하는 칼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한다’로 옮기는 절충안도 가능합니다. 이 번역은 영어의 ‘bed chambers’를 문자적으로 ‘침실’이라고 옮겨 독자에게 불필요한 공간 이미지를 주는 대신, 그 전통적 번역이 담고 있는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뜻을 살립니다. 그러나 AC.309 해설에서 그들의 ‘침실’이나 ‘내실’을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이라고 곧바로 상응 풀이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그 문구를 따로 해석하지 않았고, 바로 뒤에서 설명하는 것은 ‘’과 ‘넘어짐’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은밀한 방’을 사람의 내면이라고 단정적으로 확장한 것은 본문이 직접 말한 범위를 넘어간 해설이었습니다.

 

심화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개역개정에서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개역개정이 어떤 구절을 생략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하호데레트 라헴’을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일부 역본은 이를 ‘그들의 내실까지 들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현대의 여러 역본은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몰아붙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Potts의 영어 표현을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문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309에서 이 인용의 핵심은 칼이 어느 물리적 장소로 들어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과 persuasion이 사람을 철저히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어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을 따르거나, Potts의 뉘앙스를 보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bygrace.kr

 

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는 자기 사랑(self love)과 거기서 비롯되는 광적 탐욕과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결국 육적, 세상적인 것들로 끌려 내려갑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매우 많은 구절로 입증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모두 인용한다면 여러 쪽에 이를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스겔의 말씀만 인용하겠습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 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여기서 (sword)은 사람이 황폐해져 더 이상 선과 진리를 전혀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만 보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많이 엎드러지게(multiplying offenses)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훔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해설

 

AC.309AC.308에서 설명한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의 의미를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하는 글입니다. 앞에서는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고 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런 보호가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침범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 자체보다도, 자기 사랑이 만들어 내는 영적 상태를 더욱 강조합니다. 그는 그것을 ‘광적 탐욕과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소유하려는 내적 충동이며, 확신은 그러한 욕망에서 생겨난 거짓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논리적 검토나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사람을 자기 생각 속에 가두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의 신비를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높이고,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가장 높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육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결국 위를 향해 올라가려 하지만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겔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칼은 단순한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칼은 진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진리가 완전히 왜곡되었을 때에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힘도 의미합니다. 본문의 칼은 후자의 의미입니다. 사람 안에 남아 있어야 할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짓이 차지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칼이 번개처럼 번쩍인다는 표현은 거짓이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방은 사람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거짓이 단순히 겉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선과 진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 사랑이 원하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이 황폐해졌다는 뜻입니다.

 

많이 엎드러지게’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넘어짐은 단순한 실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영적 전도(顚倒)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진리를 접할수록 오히려 그것을 왜곡, 자신의 거짓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를 잘못된 상태에서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3을 인용한 이유도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번쩍이는 칼과 빛나는 창, 그리고 수많은 죽임당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이는 거짓 교리와 왜곡된 추론이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이는 신비를 탐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이끌린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를 다루는 태도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창3의 ‘두루 도는 불 칼’은 단순한 형벌의 상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제한 없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한다면, 가장 거룩한 진리마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의 모독, profanation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루 도는 불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것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멀리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자비의 섭리였습니다.

 

AC.309의 핵심은 두루 도는 불 칼이 자기 사랑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 불 칼은 자기 사랑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광적 탐욕과 확신이 거룩한 진리 속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주님의 신적 보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칼과 나훔의 칼은 모두 자기 사랑이 진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창세기의 두루 도는 불 칼은 그러한 황폐가 생명나무에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

bygrace.kr

 

2. ‘21:9-10, 14-15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bygrace.kr

 

3. ‘3:3

 

 

AC.309, 심화 3, ‘나3:3’

AC.309.심화 3.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

bygrace.kr

 

 

 

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bygrace.kr

 

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8.심화

 

8. ‘10:2, 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10:2, 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섭리가 심판과 정결의 역사까지도 질서 있게 집행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의 겔9가 보호와 구별의 질서를 보여준다면, 겔10은 그 보호가 끝난 후, 교회의 황폐함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장면 역시 창3:24의 그룹과 동일한 영적 원리를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에 AC.308에서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그룹 아래, 바퀴 사이에 있는 불을 손에 가득 담아 예루살렘 위에 흩뿌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어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에서 그것을 가져다가 세마포 입은 사람의 손에 건네줍니다. 말씀의 겉뜻만 보면 이것은 심판을 위한 불 전달 장면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거룩한 것이 이미 스스로를 거부한 교회에 더 이상 그대로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은 단순한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최종적으로 분리하는 신적 작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이 그룹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심판 자체가 그룹의 본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마저도 주님의 신적 섭리 아래 질서 있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앞선 출애굽기에서는 같은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렸고, 민수기에서는 같은 곳에서 모세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같은 거룩한 중심에서 심판을 위한 불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성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상태가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이 점은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배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겔10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거룩한 것이 끝까지 profanation 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이미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을 분리하심으로써 더 이상의 profanation을 막으십니다. 따라서 심판 역시 보호의 반대가 아니라 보호를 완성하는 신적 섭리의 한 작용입니다.

 

본문에서 그룹이 직접 손을 내밀어 불을 건네주는 장면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그룹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신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심판과 모든 분리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룹을 신적 섭리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불은 말씀의 속뜻에서 언제나 사랑과 연결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불은 본래 신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따뜻함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흩뿌려지는 불은 주님의 사랑 자체가 변하여 진노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을 거부한 교회의 상태가 그 사랑을 심판으로 경험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 역시 신적 섭리의 질서입니다.

 

9와 겔10을 함께 살펴보면 AC.308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9장에서는 먼저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하여 보호하셨고, 10장에서는 그 보호가 이루어진 후 심판이 진행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보존이 먼저이고, 심판은 그다음입니다. 선한 것을 먼저 보호하신 후, 악을 분리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역사 방식입니다. 그룹은 바로 이 질서를 대표합니다.

 

10:2, 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생명나무나 언약궤를 지키는 존재를 넘어, 주님의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끝까지 보호하시며, 필요할 때에는 심판과 분리까지도 질서 있게 집행하시는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나는 그룹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장면 속에 등장하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모두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고 profanation을 막으시며,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질서 있게 분리하시는 주님의 자비롭고 완전한 섭리를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bygrace.kr

 

AC.308, 심화 7, ‘겔9:3-7’

AC.308.심화 7. ‘겔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8.심화

 

7. ‘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9:3-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를 장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회의 가장 거룩한 것들을 보호하시며, 동시에 심판과 구원의 질서를 집행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표상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24에서는 그룹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성막과 성전에서는 언약궤와 속죄소를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겔9에서는 타락한 교회 가운데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다양한 장면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영적 원리를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에 이 본문을 AC.308에 함께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주님의 임재가 그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룹이 주님의 영광을 대신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거룩하게 보존되고 나타나는 영역을 지키는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임재가 언제나 섭리의 보호 아래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예루살렘 가운데를 다니며,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해 탄식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립니다. 그 후 다른 자들은 표 없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집행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겉으로 보면 무서운 심판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심판 이전에 먼저 보존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먼저 보호받을 사람들이 구별되고, 그다음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룹이 표상하는 신적 섭리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먼저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그 후에 악을 분리하십니다.

 

이 원리는 창3:2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 역시 먼저 생명나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영원히 내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겔9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먼저 표를 받은 사람들이 보호되고, 그 후에 심판이 시행됩니다. 따라서 그룹은 단순히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심판 가운데서도 선한 것을 먼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특히 이마에 표를 받는 장면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마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랑과 의지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표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 표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 보호받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룹을 신적 섭리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처벌하는 데 먼저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보존하는 데 먼저 목적을 두십니다.

 

본문에서 성전까지 더럽혀지고 뜰이 시체로 가득 차는 모습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역사적인 학살 장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내적 거룩함이 완전히 황폐해졌음을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거룩한 것이 스스로 거룩함을 잃었을 때에는 그것이 더 이상 거룩한 것으로 남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것 역시 신적 섭리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더 큰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보호입니다. 이 점에서도 에덴동산의 그룹과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25:22와 민7:89에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거기서는 보호와 계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겔9에서는 같은 그룹이 보호와 심판의 질서를 함께 나타냅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참된 계시를 보존하는 것도,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모두 동일한 신적 섭리의 서로 다른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08은 여러 본문을 나란히 인용, 그룹의 기능을 하나의 일관된 원리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 장면은 최후의 심판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심판은 선과 악을 뒤섞인 상태로 두지 않습니다. 먼저 선한 것을 보호하고 분리한 다음, 악한 것을 악한 것끼리 모이게 하십니다. 이러한 분리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모두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신적 섭리입니다. 그룹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보호의 질서를 대표합니다.

 

9:3-7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거룩한 장소를 지키는 존재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교회의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선한 사람들을 먼저 보존,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질서 있게 분리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의 에덴동산, 출애굽기의 성막, 솔로몬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와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한결같이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고,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AC.308, 심화 8, ‘겔10:2, 7’

AC.308.심화 8. ‘겔10:2, 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

bygrace.kr

 

AC.308, 심화 6, ‘민7:89’

AC.308.심화 6. ‘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8.심화

 

6.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7:89)

 

 

7:89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출25:22에서 주신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출25에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민7에서는 그 약속이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을 때, 실제로 주님의 음성이 바로 그곳에서 들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룹이 단순한 장식이나 성막의 예술적 요소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계시가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실제 사건을 통해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 위치가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은 단순히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음성은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는 주님의 임재가 언약궤 자체나 그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표상하는 속죄소와 그것을 보호하는 그룹들이 이루는 거룩한 질서 가운데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룹은 계시의 근원이 아니라 계시가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AC.308의 중심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룹의 의미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은 보호를 곧 접근 금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민7:89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의 역할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영원히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계시가 이루어지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구절은 창3:24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AC.308은 그것이 영원한 차단이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보호라고 설명합니다. 민7:89는 그 보호의 참된 목적을 실제 사건으로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은 사람이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께서 준비된 사람과 만나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생명의 길을 폐쇄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길이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지키는 존재입니다.

 

25:22와 민7:89의 관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출25:22는 주님의 약속이고, 민7:89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는 앞으로 이루어질 질서를 선언하고, 다른 하나는 그 질서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AC.308에서 두 본문을 함께 인용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한 상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 표상하는 신적 섭리가 실제 계시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참된 계시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그룹이 아니며, 속죄소도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룹은 그 거룩한 임재와 계시가 사람의 proprium이나 감각적 추론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계시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며, 그룹은 그 계시가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주님께 말씀드리려 했을 때, 그는 자기 생각이나 추론 속에서 답을 얻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주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질서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진리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는 상응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으로 거룩한 것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는 거룩한 질서 안에서만 참된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민7:89 AC.308의 의미를 가장 실제적으로 입증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하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보존함으로써 사람이 올바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자비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건은, 그룹이 단순한 수호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7, ‘겔9:3-7’

AC.308.심화 7. ‘겔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

bygrace.kr

 

AC.308, 심화 5, ‘출25:22’

AC.308.심화 5.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출25:22가 AC.308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8.심화

 

5.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25:22)

 

 

25:2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장소가 바로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룹들이 단순한 장식이나 수호 천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308은 그룹들의 본질적인 의미를 ‘주님께서 사람이 거룩한 것에 무질서하게 접근, 그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신적 섭리’로 설명하는데, 이 구절은 그 섭리가 단순히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오히려 사람과 주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증거궤 안에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룹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죄소 위, 곧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룹들이 주님의 임재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시는 그룹들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룹들이 지키고 있는 거룩한 중심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속죄소(the mercy seat)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속죄소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자비와 신적 인성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모든 신적 계시와 모든 진리는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자리를 그룹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그 자비가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주님의 섭리가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만일 그룹들이 사람을 무조건 내쫓거나 접근을 영원히 차단하는 존재라면, 주님의 음성도 그들 밖에서 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그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만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308은 그 의미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룹들은 생명나무를 없애거나 접근을 영원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생명의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출25:22는 바로 그 보호의 적극적인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보호를 위한 제한’이라는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은 흔히 제한을 자유의 박탈로 생각하지만, 말씀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거룩한 것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그룹은 길을 닫는 존재가 아니라, 길을 보존하여 지키는 존재입니다. 출25:22에서 주님의 음성이 그룹들 사이에서 들렸다는 것은, 보호와 계시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섭리 안에서 함께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룹들을 볼 수 있었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정해진 질서와 의식을 따라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멀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한 질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질서 안에서 주어졌으며, 그 질서를 벗어난 접근은 거룩한 것을 profane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25:22는 또한 왕상6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광야 시대의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 위의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위를 다시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이 내소 전체를 덮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여전히 속죄소와 그룹들 사이에서 상징되었지만, 이제는 내소 전체가 거대한 그룹들의 보호 아래 놓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계시와 임재가 여전히 같은 중심에서 나오지만, 그 거룩함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더욱 풍성하고 완전하게 표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는 말씀은 AC.308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룩한 것 밖에 영원히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곳을 마련하시고, 그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룹들로 지키게 하십니다. 만일 거룩한 것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것을 받아 생명을 얻는 대신 오히려 profane, 더 큰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계시를 막는 장벽이 아니라, 참된 계시가 계속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25:22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바로 그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사람이 장차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자비의 섭리임을 가장 아름답게 증언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6, ‘민7:89’

AC.308.심화 6. ‘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

bygrace.kr

 

AC.308, 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AC.308.심화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8.심화

 

4. ‘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왕상6:27)

 

위 구절 표현 말인데요, 저런 상태에서 어떻게 출25:20처럼 두 그룹이 서로 마주 보고 속죄소를 향할 수 있나요?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누구나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왕상6:27은 거대한 두 그룹의 날개가 한쪽은 양쪽 벽에 닿고, 다른 한쪽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출25:20에서는 그룹들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고 동시에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도 같은 자세였다면, 과연 저런 날개의 배치 속에서 서로 마주 보고 속죄소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이 의문은 왕상6과 출25가 같은 그룹을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본문은 서로 다른 그룹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25의 그룹들은 모세 시대에 언약궤와 함께 제작된 작은 금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속죄소 양쪽 끝에 붙어 있었으며, 얼굴은 서로를 향하고 시선은 아래의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세는 출25:20이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왕상6의 그룹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새로 만든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입니다. 높이가 각각 십 규빗에 이르렀으며, 날개를 펼치면 내소의 벽에서 벽까지 닿을 만큼 컸습니다. 이들은 언약궤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내소 안에 독립적으로 세워진 거대한 형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출25의 작은 그룹들과는 용도와 위치가 서로 달랐습니다.

 

이 사실은 왕상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제사장들은 광야 시대부터 내려오던 바로 그 언약궤를 내소로 옮겼습니다. 왕상8:6-7은 언약궤가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룹들은 왕상6에서 새로 만든 거대한 그룹들입니다. 즉 언약궤는 거대한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였지만, 언약궤 자체에는 이미 모세 시대부터 있던 속죄소와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의 내소에는 실제로 두 종류의 그룹이 함께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는 언약궤의 일부인 작은 금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얼굴은 서로를, 그리고 시선은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솔로몬이 새로 세운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내소 전체를 덮는 상징적인 보호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왕상6은 날개의 위치만 설명할 뿐, 얼굴의 방향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기록한 대하3:13은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더 제공합니다. 거기에는 ‘그룹들의 얼굴이 외소를 향하였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거대한 그룹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기보다 성소, 곧 외소를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장 충실합니다.

 

이렇게 보면 출25와 왕상6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출25의 작은 그룹들은 언약궤 위에서 서로 얼굴을 향하고,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은 내소 안에 서서 펼친 날개로 언약궤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소 위의 작은 그룹들과 내소를 덮는 큰 그룹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AC.308의 인용 의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룹들의 자세나 조형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라는 표상이 어디에 놓여 있든 동일하게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밝히려 합니다. 속죄소 위 작은 그룹은 가장 내적 거룩함을 직접 보호하는 섭리를 나타내고, 솔로몬 성전 거대한 그룹은 그 거룩함뿐 아니라 내소 전체를 감싸 보호하는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출25와 왕상6은 서로 충돌하는 본문이 아니라, 동일한 영적 진리가 더욱 풍성하고 확대된 모습으로 표현된 본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08, 심화 5, ‘출25:22’

AC.308.심화 5.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출25:22가 AC.308에

bygrace.kr

 

AC.308, 심화 3, ‘왕상6:23-29, 32’

AC.308.심화 3. ‘왕상6:23-29, 32’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3' 카테고리의 다른 글

AC.308, 심화 6, ‘민7:89’  (0) 2026.07.28
AC.308, 심화 5, ‘출25:22’  (0) 2026.07.28
AC.308, 심화 3, ‘왕상6:23-29, 32’  (0) 2026.07.28
AC.308, 심화 2, ‘출26:1, 31’  (0) 2026.07.28
AC.308, 심화 1, ‘출25:18-21’  (0) 2026.07.28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