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2:5, 6)

 

AC.90

 

들에는 초목(shrub of the field) 밭에는 채소(herb of the field)는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그가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earth)이라 하지만, 천적 상태가 되면 (ground)이라 하고, 또한 (field)이라 합니다. 곧이어 안개(mist)라 하게 될 (rain), 싸움이 그친 뒤에 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이 글은 창2:5-6에 나오는 자연적 이미지들을,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아주 간결하게 풀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초목(shrub)과 ‘채소(herb)를 식물학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읽습니다. 즉, 이는 행동, 말, 습관, 외적 사고, 삶의 열매 전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겉 사람’한테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폄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겉 사람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열매의 성격은, 겉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겉 사람이라도, 영적 상태일 때와 천적 상태일 때 부르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영적 상태에 있을 때, 겉 사람은 ‘’이라 합니다. 땅은 아직 경작의 방향이 외부 규범과 진리 중심으로 잡혀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겉 사람은 아직도 싸움과 선택, 분별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산출하는 것들, 곧 ‘초목’과 ‘채소’는 존재할 수는 있지만, 아직 풍성하거나 안정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겉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가면, 더 이상 ‘’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ground) 혹은 ‘(field)이라 합니다. 이는 단어 하나의 변화가 아니라, ‘겉 사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밭은 이미 목적과 질서가 정해진 땅입니다. 씨가 무엇인지 알고, 어디에 뿌려야 하는지가 분명한 상태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속 사람의 사랑과 퍼셉션을 그대로 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이 차이는,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 이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는 애써 만들어낸 선이 아니라, ‘속에서 흘러나온 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는 억지로 키운 식물이 아니라, 제때에 자연스럽게 자라는 생명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와 ‘안개’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 변화의 정서를 섬세하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영적 단계에서의 교훈이나 진리의 강한 주입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안개’라 불릴 만큼 부드러운 것입니다. 이 안개는 싸움이 그친 뒤에 찾아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뜻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오는 평화는, 감정의 고조나 강렬한 체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용하고, 넓게 퍼지며, 모든 것을 적셔 주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성취의 흥분이 아니라, ‘질서가 자리를 잡았을 때의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이 안개는 겉 사람을 적십니다. 밭이 된 겉 사람은 이 평화의 평온함을 그대로 받아, 무리 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더 이상 비가 내려야만 살 수 있는 메마른 땅이 아니라, 이미 수분을 머금은 밭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긴장이나 계산에서 나오지 않고, 평온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AC.9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문제의 영역이 아니라, ‘표현의 영역’이 된다고 말입니다. 싸움은 이미 끝났고, 평화는 안개처럼 조용히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평온함 속에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속 사람의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글은 짧지만, 천적 삶의 분위기를 가장 잘 전해 주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천적 상태는 웅장하거나 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조용하고 안정된 생명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온 지면을 적시는’ 안개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립니다.

 

 

 

AC.89, 창2:4, ‘창2의 시작점’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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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용의 영어 표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작용’이라는 말은 특정 어떤 단어 하나를 직역한 것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핵심 용어를 한국어로 묶어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 번역’입니다. 그래서 영어 원어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가장 자주 대응되는 영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operation

 

이 단어는 작용’, ‘역사’, ‘활동’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냅니다. 주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시는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시는가를 말할 때 쓰입니다. 예를 들어 the operation of the Divine 같은 표현은 신적 작용’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집니다.

 

둘째, ‘working, works

 

성경에서도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 ‘그가 하시는 일들’, ‘역사하시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AC에서 his work’라고 할 때도 단순한 ’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전체’, 곧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셋째, ‘influx

 

이건 스베덴보리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흘러들어옴’인데,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풀 때는 내적 작용’, ‘영적 영향’으로 설명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으로 들어와 실제 변화를 일으킬 때의 핵심 메커니즘을 말합니다.

 

넷째, ‘proceeding

 

발출’, ‘나아감’이라는 뜻인데, 특히 성령’이나 신적 진리의 나옴’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작용’의 한 형태입니다.

 

다섯째, ‘effect, activity

 

조금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어떤 원인이 실제로 나타난 결과나 활동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이것 역시 문맥에 따라 작용’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제가 위에서 사용한 작용’이라는 말은, operation, working, works, influx, proceeding 등, 이런 여러 영어 개념을 한데 묶어 설명하기 위한 한국어 표현입니다.

 

작용’이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로 인간 안에 들어와 변화와 삶으로 나타나는 모든 방식’이다.

 

즉, 단어 하나에 딱 대응시키기보다, ‘주님의 살아 있는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보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9, 창2:4, ‘창2의 시작점’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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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심화 2, ‘작용’

AC.89.심화 2. ‘작용’ 위 설명 중,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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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용

 

위 설명 중,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고 인간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들입니다처럼, 자주 이 작용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 표현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작용’이라는 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말씀 전체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작용’이란 주님이 실제로 무엇을 하시는가, 그리고 그것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 즉, 무엇이신가가 아니라 활동’, 그러니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측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금 더 풀어드리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구조는 언제나 이 두 축입니다. ‘주님은 무엇이신가’, 그러니까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이신 축과, ‘그 주님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축 말입니다. 여기서 작용’은 바로 두 번째, 곧 주님의 신적 속성이 실제로 인간 안에 흘러들어와 변화와 삶으로 나타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존재에 관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인간 안에 들어와 용서하게 만들고’, ‘이웃을 생각하게 하고’, ‘자기를 내려놓게 하는 실제 변화로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그 사랑의 작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진리’이시라는 것은 존재에 관한 말이고, 그 진리가 인간 안에서 깨닫게 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고’, ‘삶을 바로잡게 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진리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같은 주님이시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모습’이 강조되고, 어떤 문맥에서는 진리로 인도하시는 모습’이 강조되며, 또 어떤 때는 악과 싸우시는 모습’, ‘구원하시는 모습’, ‘위로하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이 각각이 바로 작용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달라집니다. ‘구주’는 구원하시는 작용, ‘’는 다스리시는 작용, ‘인자’는 진리로 나타나시는 작용, ‘성령’은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작용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작용’은 주님 쪽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체험되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같은 주님의 작용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깨달음’으로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망’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작용’이라는 말에는 주님의 활동’과 그것이 인간 안에서 경험되는 양상’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걸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태양’입니다. 태양 자체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태양은 빛으로도 작용하고, 열로도 작용합니다. 그리고 같은 태양 빛이라도 어떤 식물에는 생명을 주고, 어떤 것에는 마르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태양이 여럿이어서가 아니라, 하나의 태양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이면서도 다양한 작용으로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드린 그 문장을 다시 풀어 쓰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이끄시고, 싸우시고, 구원하시는 여러 방식의 실제 역사하심이 있으며, 성경의 여러 호칭은 바로 그 다양한 역사하심을 가리키는 이름들이다.’ 이것이 작용’이라는 말의 실제 내용입니다.

 

작용이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AC.89, 심화 3, ‘작용’의 영어 표현

AC.89.심화 3. ‘작용’의 영어 표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작용’이라는 말은 특정 어떤 단어 하나를 직역한 것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핵심 용어를 한국어로 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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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심화 1, ‘주님의 호칭들’

AC.89.심화 1. ‘주님의 호칭들’ 주님의 호칭들, 즉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성령’,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에 대해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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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의 호칭들

 

주님의 호칭들,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 ‘구주’, ‘성령’,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같은 주님을 가리키는 듯한 여러 호칭이 계속 나오는데,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가’, ‘왜 어떤 때는 여호와라 하고, 어떤 때는 주라 하며, 어떤 때는 아들이라 하는가’라고 하면서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고 인간이 그분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이름들입니다. 다시 말해, 인격이 여럿이라서 이름이 여럿인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충만한 실재가 너무 깊고 넓기 때문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여호와’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계시는 분’, ‘존재 자체이신 분’, 곧 신적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순한 신의 호칭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사랑과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순수한 신적 존재 자체를 직접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무한하고 너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실 때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셔야 했고, 그 완전한 나타나심이 바로 성육신,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와 예수는 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인성 안에 오신 한 분이십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것은 매우 자주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대개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 또는 ‘신적 존재와 신적 나타나심’이 함께 작용하는 맥락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가 보다 존재와 사랑의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다면,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 말씀과 판단의 측면을 더 강하게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언제나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여호와’는 사랑의 이름, ‘하나님’은 진리의 이름으로 더 자주 작용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함께 부를 때는, 사랑과 진리, 선과 지혜, 존재와 질서가 하나로 결합된 주님의 충만한 작용을 암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세기 2장 이후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도, 단순 창조가 아니라 이제 인간과의 보다 인격적이고 질서 있는 관계, 곧 거듭남과 동행의 질서가 전개되기 시작하기 때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인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름 자체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특히 인간과 가까이 계시며, 인간의 상태 속으로 들어오셔서 실제로 구원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단순히 법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의 본성을 영화롭게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역사 속에 오셔서 싸우시고 이기시고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충만한 뜻을 가진 호칭으로서, 특히 ‘신적 진리’, ‘말씀’, ‘기름부음 받은 진리의 통치’를 더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구원하시는 주님과 진리로 통치하시는 메시아가 하나라는 뜻이 함께 담깁니다.

 

’라는 호칭은 신약과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서는 ‘’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 실제로 ‘’를 거의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며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는 매우 친밀하면서도 권위 있는 이름입니다. ‘여호와’가 다소 장엄하고 근원적 이름이라면, ‘’는 그 여호와께서 이제 구원과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서 인간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문장들, 특히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같은 표현에서는 ‘’가 곧 우리와 관계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신학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가장 살아 있는 호칭이 바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주’는 말 그대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이 말도 단지 ‘벌에서 건져내는 자’ 정도로 생각하시면 너무 약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인간 안의 지옥적 질서가 깨지고, 주님의 질서가 그 안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주’란, 우리 대신 서류를 처리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간 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시며, 거듭남과 안식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주’라는 호칭에는 주님의 전투, 승리, 해방, 회복, 새 창조의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이름이라면, ‘구주’는 그 이름의 기능과 사역을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입니다. 전통 교회에서는 흔히 이것을 서로 다른 두 인격처럼 받아들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한 분 주님 안의 ‘신성 자체’와 ‘신성이 입으신 인성’의 관계로 봅니다. 곧 ‘아버지’는 주님 안의 보이지 않는 신성, 근원적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 나타난 신적 인간, 곧 성육신하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은, 마치 하늘에 두 신적 인격이 따로 계셔서 한 분이 다른 분을 파송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보이는 인성으로 세상에 나타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도, 단지 두 분이 대화하신 장면이라기보다, 아직 완전히 영화롭게 되기 전의 인성이 그 안의 신성과 연합되어 가는 실제 과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부활 이후에는 이 구별이 점점 ‘한 분 주님 안의 완전한 연합’으로 수렴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도 바로 이 방향에서 이해됩니다.

 

아들’ 가운데서도 특히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법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주님의 ‘신적 인성’, 또는 주님의 신성이 드러난 인성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인자’는 주로 ‘신적 진리’, 곧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진리의 거절, 말씀의 수난, 심판, 계시, 구름을 타고 오심 같은 말씀을 하실 때 ‘인자’라는 호칭이 자주 쓰입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간적 겸손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서의 배경까지 포함해 ‘말씀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진리로 오시는 주님’, ‘심판하시는 진리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깊은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하실 때, 그것은 단지 ‘나도 권리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신적 진리이신 주님 자신이 안식의 본질이며 주관자이시다’는 선언으로 열립니다.

 

성령’도 별도의 세 번째 인격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발출’, ‘주님의 실제 작용’,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향’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가 신성 자체이고, ‘아들’이 그 신성이 보이게 나타난 신적 인성이라면,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천국과 교회와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살아 있는 숨결, 진리의 유출, 거룩한 활동이라고 이해됩니다. 주님께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도, 떠나시는 주님 대신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신 후 더 내적으로, 더 보편적으로, 더 능력 있게 자신을 역사하시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제 이 여러 호칭을 한데 묶으면, 대체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존재 자체이신 주님의 가장 근원적 이름이고,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의 측면에서 보이는 이름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된 충만한 이름입니다. ‘예수’는 구원하시는 인성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진리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의 이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진리의 통치가 하나이신 주님입니다. ‘’는 인간에게 가까이 계셔서 실제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이름이고, ‘구주’는 지옥과 악에서 건져내시는 사역적 이름입니다. ‘아버지’는 그 안의 신성 자체, ‘아들’은 나타난 신적 인성, ‘인자’는 말씀과 신적 진리로 나타나시는 주님,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되어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향입니다.

 

성경과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주님에 관한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신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누구이시며,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고,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 주는 이름들입니다.’

 

이 한 문장을 붙들고 읽으시면, 호칭이 바뀔 때마다 ‘주님 안의 어떤 측면이 지금 강조되는가’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AC.89의 문맥에서는 특별히 이 점이 중요합니다. 창조, 거듭남, 안식, 구원, 말씀, 진리, 자비, 심판, 위로, 인도,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바로 이 다양한 호칭들을 통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9, 심화 2, ‘작용’

AC.89.심화 2. ‘작용’ 위 설명 중,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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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창2:4, ‘창2의 시작점’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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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입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 매우 분명한데요,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다는 말과,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그러하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과, 그 뒤에 모든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한 말도 그러합니다. 이는 그들의 형성이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다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사실로부터 더욱 분명해집니다. 곧 이제 처음으로 주님의 호칭을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의 구절들, 즉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단지 하나님(God)으로만 부르셨지요. 또한 이제는 (ground)(field)이 언급되는데, 앞의 구절들에서는 오직 (earth)만 언급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절에서는 하늘(heaven)이 먼저 언급된 뒤에 (earth)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earth)이 먼저 나오고 하늘(heaven)이 뒤따릅니다. 그 이유는 (earth)이 겉 사람을, 하늘(heaven)이 속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earth), 곧 겉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 하늘(heaven)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이 어디에서 새롭게 시작되는지를 분명히 선언하는 전환점입니다. 창2:4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내력’이라는 표현은, 흔히 창조 기사 전체의 요약이나 반복으로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력(nativities)은 시간적 족보가 아니라, ‘상태의 형성과 전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내력’을 천적 인간의 형성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사소한 문장 배열이나 단어 선택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본문 전체의 구조 속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아직 풀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한 자연 상태의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형성이 아직 외적 단계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고, 그 뒤에 짐승과 새를 만드셨다고 다시 말하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는 앞 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되는 이유는, ‘같은 외적 형상이지만 전혀 다른 내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었어도, 그 안에서 언급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앞 장, 곧 영적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주님이 단지 ‘하나님’으로만 불리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이름의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사랑과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은 진리와 질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과 ‘’이 함께 언급되는 점도 중요합니다. 앞 장에서는 오직 ‘’만 언급되었습니다. ‘’은 겉 사람을 뜻하지만, ‘’은 그 겉 사람 안에서 이미 경작과 수용이 가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이미 속 사람의 질서에 의해 준비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의 섬세한 표지는 단어의 순서입니다. 이 절에서는 ‘하늘’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이 나옵니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이 먼저 나오고 ‘하늘’이 뒤따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의 변화마저도 의미 없는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형성의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로 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겉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즉, 행동과 사고의 외적 질서가 먼저 정돈되고, 그 뒤에 속 사람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반대입니다.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됩니다. 사랑과 퍼셉션이 먼저 주어지고, 그다음에 겉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두 종류의 사람이 단지 성숙도의 차이가 아니라, ‘형성의 방식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외적 순종과 진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만, 천적 인간은 속에서 주어진 생명과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AC.8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앞 장의 연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반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창세기 2장은 반복이 아니라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이야기’로 열립니다.

 

이 지점부터 창세기 2장은, 더 이상 질서가 세워지는 과정을 말하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생명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AC.89는 그 문을 여는 문장입니다.  

 

 

심화

 

1.주님의 호칭들

 

 

AC.89, 심화 1, ‘주님의 호칭들’

AC.89.심화 1. ‘주님의 호칭들’ 주님의 호칭들, 즉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성령’,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에 대해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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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작용

 

 

AC.89, 심화 2, ‘작용’

AC.89.심화 2. ‘작용’ 위 설명 중, ‘스베덴보리에게 이 여러 호칭은 ‘서로 다른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 작용, 나타나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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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작용의 영어 표현

 

 

AC.89, 심화 3, ‘작용’의 영어 표현

AC.89.심화 3. ‘작용’의 영어 표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작용’이라는 말은 특정 어떤 단어 하나를 직역한 것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핵심 용어를 한국어로 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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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초목과 채소’,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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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안식’, 정체성의 변화, '하나님의 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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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심화

 

2.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이 구절, Book of Isaiah 43:7 AC.88의 흐름에서 매우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앞서 보신 사45의 말씀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원리를 말한다면, 이 구절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먼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라는 표현부터 보시면,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주님의 본성과 속성’, 곧 사랑과 진리 전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또는 ‘주님과 결합된 상태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주님과 연결된 상태의 인간을 말합니다.

 

그다음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영광(glory)은 언제나 ‘신적 진리의 빛’, 곧 진리가 드러나고 빛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주님의 진리가 그 안에서 드러나고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고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가 지었고(formed) 내가 만들었느니라(made)’라는 반복도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이중 표현을 단순한 강조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형성하다(formed)는 내적 인간, 곧 의지와 사랑의 영역을, ‘만들다(made)는 외적 인간, 곧 삶과 행위의 영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이 인간의 속과 겉, 내적과 외적 전체를 모두 지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AC.88의 주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듭남의 과정, 그러니까 싸움, 변화, 안식 등은 모두 주님의 창조와 같은 성격을 가지며, 그 목적은 ‘주님의 영광’, 곧 진리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서 드러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이 한 문장이 사43:7 AC.88의 핵심을 아주 선명하게 담아 줍니다.

 

 

 

AC.88, 심화 1, ‘사45:11-12,18, 21’

AC.87.심화 1. ‘사45:11-12,18, 21’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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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심화

 

1. 45:11-12,18, 21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 구절은 Book of Isaiah 45장의 말씀으로, AC.88의 문맥에서는 ‘거듭남과 안식의 모든 과정이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강하게 선언하는 대표 구절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절대 선언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흐름 안에서는 이것이 곧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재창조의 주체도 오직 주님뿐이다’라는 뜻으로 열립니다.

 

먼저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하늘을 펴고...’라는 반복은 단순한 우주 창조의 회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람의 속 사람, 곧 사랑과 의지의 영역이고, ‘’은 겉 사람, 곧 삶과 행위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이 인간 안에 내적, 외적 질서를 세우신다’, 곧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AC.82-85에서 계속 강조된 ‘여섯 날의 일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모두 주님의 일’이라는 주제가 여기서 다시 확증됩니다.

 

이어지는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지으셨다’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인간의 상태가 본래 ‘질서 있고 거할 수 있는 상태’, 곧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상태로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혼돈’은 질서가 무너진 상태, 곧 거듭남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창조 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인간을 결국 안식의 상태, 곧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상태로 이끄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핵심은 반복되는 이 선언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것은 단순한 유일신 사상이 아니라, AC의 문맥에서는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즉, 싸움도, 이김도, 질서의 회복도, 안식도 모두 주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11절의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는 표현도 의미가 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마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심지어 주님의 일까지 판단하고 지시하려는 상태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일은 인간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시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 전체를 AC.88의 흐름 안에서 한 문장으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안의 새 하늘과 새 땅도 오직 주님이 이루신다.’ 그래서 앞에서 계속 목사님께서 질문하셨던 그 문제, 곧 왜 모든 것을 ‘주님이 하신다’고 하시는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성경적 답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는 일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실 때와 똑같이 주님이 다시 지으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창조와 거듭남, 그리고 안식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면서 AC.88의 의미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AC.88, 심화 2, ‘사43:7’

AC.87.심화 2. ‘사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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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안식’, 정체성의 변화, '하나님의 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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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상태가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work of God)이라고 합니다. 이는 오직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라고 하시고,  그의 하시던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라고 하시는 등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은 여러 차례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불립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위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라는 말씀처럼 구별되어 사용되었고, 같은 이사야 다른 곳에서도 동일하게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예컨대,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이러한 구별은 창세기 앞 장과 본 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여기 본문에서도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라고 표현됩니다. 내적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언제나 서로 구별된 뜻을 전달하며, 주님을 창조자(creator), ‘지으신 이(former), ‘만드시는 이(maker)로 부르는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안식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더 깊은 중심으로 끌어당깁니다. AC.87이 싸움의 종식과 주님의 싸우심을 강조했다면, AC.88은 그 결과로서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바뀌는가’를 다룹니다.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는 말은, 그가 이제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이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싸운 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물 역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외적 업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람 자신이 곧 주님의 일이며,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마치셨다’는 말과 ‘그의 모든 일에서 쉬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반복은 강조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일은 외부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의 새 창조이며, 그 일이 마쳐질 때에 안식이 옵니다. 안식은 일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옵니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선지서들을 폭넓게 인용합니다. 사람을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의 일’이라 부르는 표현들은, 인간을 독립적 존재로 세우려는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특히 이사야에서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내 손의 일’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거듭남이 자기 계발이나 도덕적 향상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창조 행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학적 변주나 수사적 반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 세 표현이 각각 ‘서로 다른 내적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창조는 목적의 설정이고, 형성은 질서의 구성이며, 만들기는 실제 삶의 실현입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1–2장의 전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사야의 구절에서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형성하며, 그것을 거주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은, 우주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뜻하며, 거주하게 만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새 창조는 단지 새출발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다시 세워지는 일’입니다.

 

이 모든 논의는 한 결론으로 모입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이라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동의하고 받아들이며 따르지만, 창조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창조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로 부르는 모든 표현은, 각각 다른 국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이라는 진리입니다.

 

AC.88은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제합니다. 안식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일이 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며, 나는 ‘하나님의 일’로서 쉬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안식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안정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안정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심화

 

1.45:11-12,18, 21

 

 

AC.88, 심화 1, ‘사45:11-12,18, 21’

AC.87.심화 1. ‘사45:11-12,18, 21’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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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7

 

 

AC.88, 심화 2, ‘사43:7’

AC.87.심화 2. ‘사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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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창2:4, ‘창2의 시작점’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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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창2:2-3, 영계의 질서로 본 '안식'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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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심화

 

1. 선한 영들

 

AC.50 본문에,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라는 내용이 나오며, 이에 대해  AC.50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에서, 여기서 말하는 두 영은 악한 영들을 말하는 거지요?’라고 물었더니 ChatGPT 당신의 대답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 이해하신 방향이 맞습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히 정리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항상 두 종류의 영적 존재, 곧 악한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으며, 거듭남의 여부에 따라 이들의 존재 여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과 영향력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두 영은 일반적으로 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AC.87 본문에 나오는 선한 영들은 갑자기 어디서 등장하는 건가요?

 

 

아주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질문입니다. 이 부분은 한 번 정리해 두면 이후 AC 읽기가 훨씬 또렷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50에서 말하는 ‘두 영’과 AC.87에서 말하는 ‘선한 영들’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같은 영들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상태 차이와 역할 차이’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 것입니다.

 

먼저 구조를 분명히 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기본 구도는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이 두 영역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영들(spirits)과 연결되고, 천사들(angels)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들’이라는 말 자체가 꼭 ‘악한 영’만을 뜻하는 고정 용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들(the world of spirits에 속한 존재들)’은 선한 상태의 영도 있고, 악한 상태의 영도 있습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의식과 더 가까운 층위에는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영들’, 곧 혼합된 상태 또는 악으로 기운 영들이 많기 때문에, AC.50에서는 설명을 단순화하여 ‘두 영’을 사실상 ‘악한 영들’ 쪽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AC.87에서는 관점을 조금 더 넓혀서, ‘영들 가운데에도 선한 영들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갑자기 새로 등장한 존재가 아니라, ‘원래부터 있던 범주를 다른 면에서 조명한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명확히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천사’는 이미 거듭남이 완성된 존재들, 곧 천국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둘째, ‘영들’은 그보다 아래 단계, 곧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은 상태, 또는 인간과 더 가까운 층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영들’ 안에는 선한 영들, 악한 영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셋째, 인간과의 실제 관계를 보면, 악한 영들은 인간의 낮은 본성과 결합하려 하고, 선한 영들은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이끄는 쪽에 서며, 천사들은 더 높은 차원에서 주님의 질서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AC.50에서는 ‘두 영 + 두 천사’라는 틀로 간단히 설명하면서, 실제 체감되는 긴장 구조, 곧 악과의 싸움을 강조한 것이고, AC.87에서는 그 ‘영들’ 안에도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더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영들은 한 종류가 아니라, 그 안에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함께 있으며, 인간은 이 둘 사이의 영향 속에서 살고, 그 위에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질문하신 ‘선한 영들이 어디서 갑자기 등장했는가?’에 대한 답은, ‘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원래 영들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AC.50에서는 악한 쪽이 강조되었고, AC.87에서는 선한 쪽까지 풀어 설명된 것’입니다.

 

이 구분이 잡히시면 이후 AC에서 ‘영들’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 훨씬 자유로워지십니다. 어떤 문맥에서는 거의 ‘악한 영들’처럼 쓰이고, 어떤 문맥에서는 ‘선한 영들’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체 구조 위에 ‘천사들’이 놓여 있다고 보시면, 인간의 영적 환경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87, 창2:2-3, 영계의 질서로 본 '안식'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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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7

 

천적 인간을 안식일(sabbath),  (rest)이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천적 상태가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고 멀리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쉬셨다(rested)고 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이 글은 안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영계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명확히 드러냅니다. 앞선 글들에서 안식은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완성된 상태로 설명되었는데, AC.87에서는 그 결과가 영적 교통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즉, 안식은 단지 인간 내부의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계와의 관계 자체가 달라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안식이라 불리는 이유를 ‘싸움의 종식’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란, 앞서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던 유혹과 시험, 곧 악과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 싸움이 필연적이며 지속적입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 이르면, 그 싸움은 더 이상 중심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위협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이미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변화는 영계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더 나아가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옵니다. 이는 천적 상태가 단지 ‘조금 더 선한 상태’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교통의 영역’에 속함을 뜻합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습니다. 이는 힘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성질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이 붙들 수 있는 공명점이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진술이 나옵니다. 싸움은 사람이 수행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싸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영적 인간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혹의 시간에 인간이 느끼는 긴장과 고통은 실제이지만, ‘결정적인 힘은 언제나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저항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싸움 자체의 수행은 주님께서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은 인간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람이 모든 싸움을 잘 해냈기 때문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싸움을 끝내신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이 쉬셨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활동을 중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저항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자리를 잡았기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받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안식에 대한 인간 중심적 오해를 단호하게 교정합니다. 안식은 내가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안정되었다는 표지’입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는 말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제 하늘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호응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안식은 심리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입니다.

 

또한 이 설명은 천적 인간의 겸손을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그가 안식에 이르렀다고 해서, 자신을 싸움의 승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싸움이 끝났음을 알지만, 그 싸움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선과 생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내적 평화입니다.

 

AC.87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은 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는 주님으로 채워졌고, 주님의 임재가 충만할 때, 싸움은 자연스럽게 끝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안식일은 더 이상 계명의 항목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도록 창조된 궁극의 상태’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말해지는 ‘’은, 가장 깊은 생명의 활동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온전한 생명이 아무런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심화

 

1.선한 영들

 

 

AC.87, 심화 1, ‘선한 영들’

AC.87.심화 1. ‘선한 영들’ AC.50 본문에,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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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안식’, 정체성의 변화, '하나님의 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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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 창2:2-3, ‘안식’의 구조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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