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5:9)

 

AC.500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에노스’(Enosh)는 ‘셋’(Seth)이라는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지만, 그래도 역시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 그러니까 앞선 교회들을 계속해서 계승하는 교회입니다. By “Enos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third church, still less celestial than the church “Seth,”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by “Kenan” is signified a fourth church, which succeeded the former ones.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 내부의 ‘연속적 분화’를 한눈에 보여 주는 요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Enosh)와 ‘게난(Kenan)을 개인의 이름으로 취급하지 않고, ‘각각 고유한 교회 상태’로 명확히 규정합니다. 특히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는 반복은, 변화가 곧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태고교회의 생명은 한순간에 끊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상태 변화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먼저 에노스는 셋의 교회보다 ‘더 덜 천적(still less celestial)인 세 번째 교회로 설명됩니다. 이는 사랑의 선이 중심이던 초기 상태에서, 신앙의 이해가 점차 더 전면에 나서는 방향으로 이동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퍼셉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퍼셉션은 존재하지만, 그 즉각성과 충만함은 약화되었고, 더 많은 반성과 매개를 필요로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단계는 태고교회의 내부에서 일어난 ‘질적 변화의 축적’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게난(Kenan)은 네 번째 교회로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앞선 교회들을 계승했다’고만 말합니다. 이 간결함은 의도적입니다. 이미 확립된 원리, 곧 교회는 이전 교회의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파생된다’는 점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난의 교회는 에노스의 교회가 지닌 성격을 바탕으로 하여, 또 하나의 다른 상태를 형성합니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덜 천적’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지만, 그것이 가치 판단이나 도덕적 낙인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단계도 ‘거짓 교회’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각 단계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고 인도된 상태’로 봅니다. 태고교회의 변화는 실패의 연속이 아니라, 인간 상태에 맞추어 조정된 인도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단계적 분화는 유전적 악의 누적과도 연결됩니다. 세대를 거치며 유전적 악이 더해질수록, 초기의 즉각적 퍼셉션, 즉 맑고 또렷한 퍼셉션은 유지되기 어려워집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덜 천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변화 속에서도 주님은 각 단계에 맞는 교회 상태를 일으키십니다. 에노스의 교회가 그러했고, 게난의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설교적으로 보면, 이 문단은 교회의 역사를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형태, 곧 퍼셉션 형태의 변화’로 읽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처음이 가장 순수했고, 이후는 계속 나빠졌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만, 스베덴보리는 훨씬 섬세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각 교회는 그 시대와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고, 퍼셉션 역시 그에 상응하는 형태로 유지되었습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신앙 안에서도 ‘셋의 상태’, ‘에노스의 상태’, ‘게난의 상태’와 같은 단계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사랑이 중심이 되고, 어떤 시기에는 이해와 분별이 더 전면에 나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단계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 단계 안에서도 여전히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교회 간의 비교를 경계하게 합니다. 더 천적이냐, 덜 천적이냐 하는 것은 상대적 표현일 뿐, 우열의 판단 기준이 아닙니다. 각 교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유한 역할과 위치를 지닙니다. 에노스의 교회와 게난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와 동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도 않습니다. 점점 종말, 곧 노아의 홍수를 향해 가고 있지만 말입니다.

 

결국 AC.500은 태고교회가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여러 상태들의 연속체였음’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이 연속체의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으며, 그 퍼셉션은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가능한 한 오래 유지되도록 인도되었습니다. 비록 갈수록 희미해졌지만 말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더 이상 낯선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모했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로 읽히게 됩니다.

 

 

 

AC.499, 창5:7-8,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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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5:7, 8)

 

AC.499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은 여기서도 앞에서와 같이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 또한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가 ‘죽었더라’(died)는 진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해설

 

이 글은 AC.492에서 AC.498까지 이어진 해석을 하나로 묶어 주는 정리 문장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이미 확립된 해석 원리가 여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부분적으로만 상징적이거나, 어떤 구절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식의 혼합 해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이 다시 언급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연대적 시간 해석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차단합니다. 앞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날과 해는 교회의 지속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흐름과 질서’를 말합니다. AC.499는 이 원리가 예외 없이 계속 적용됨을 확인합니다.

 

자녀들(sons and daughters)에 대한 언급도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생물학적 자녀가 아니라, 그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이 ‘항상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자녀들을 낳았으며’라는 말은, 그 교회가 여전히 영적으로 생산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그가 ‘죽었더라(died)는 진술 역시 앞에서 설명된 의미와 동일합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뜻하지 않고,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AC.499는 이 점을 반복함으로써, 창세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퍼셉션의 유지와 소멸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반복은 불필요한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 번이라도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가 이 족보를 읽지 않도록, 같은 원리를 여러 번 확인시킵니다. 특히 ‘죽었다’는 표현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육체의 죽음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앞선 해석을 그대로 다시 적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이 문단은 교회의 생명과 죽음을 판단하는 기준을 명확히 고정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의 존속이나 인원의 지속이 아니라, ‘퍼셉션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날과 해의 상태를 지나며 자녀들, 곧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리는 태고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AC.499를 통해,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들에도 동일한 해석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즉, 교회사는 외형의 흥망이 아니라, ‘퍼셉션 변화사’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교회든, 퍼셉션이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 있고, 퍼셉션이 소멸되면 그 교회는 죽은 것입니다.

 

설교적으로 이 문단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지닙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죽음을 출석 감소나 사회적 영향력 상실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준은 전혀 다릅니다. 퍼셉션이 사라지고,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교회의 죽음입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생명 가운데 있습니다.

 

또한 개인의 신앙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날과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상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진리와 선이 풍성히 퍼셉션되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것이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AC.499는 이러한 변화를 도덕적 실패로만 해석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로 읽도록 인도합니다.

 

결국 AC.499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독자에게 하나의 안정된 해석 틀을 제공합니다. 날과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은 모두 같은 언어 체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이 틀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반복 속에서 지루함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리듬을 읽게 됩니다.

 

 

 

AC.498, 창5:6,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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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이 문단은 짧지만, 창세기 5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원리를 다시 한번 명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을, 개인의 출생으로 읽지 말고 ‘교회의 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 근거는 단순합니다. 이 장에서 등장하는 이름들은 어느 것도 개인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직 ‘교회의 상태들’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진술은 앞선 모든 해석을 한 줄로 요약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 이름들이 개인이라면, 창세기 5장은 긴 수명과 혈통을 기록한 고대 연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름들이 교회라면, 이 장은 태고교회가 어떻게 여러 상태로 분화되고, 그 상태들이 어떻게 서로를 ‘낳으며’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계보’가 됩니다. AC.498은 후자의 관점을 확정합니다.

 

낳았다’는 말이 교회의 계승을 뜻한다는 점은, 앞서 반복적으로 확립된 원리입니다.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한 상태 안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다음 상태로 전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전이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외형의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이동’에 초점이 있습니다.

 

에노스(Enosh)라는 이름 자체도 이 점을 보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에노스’가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 상태, 곧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더해진 상태와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셋의 교회보다 한 단계 더 내려온, 그러니까 더 흐릿해진 상태를 암시합니다. 즉, 에노스의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 안에 있지만, 퍼셉션의 즉각성과 충만함, 또렷함은 더 약화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약화가 곧바로 죽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에노스의 교회 역시 살아 있는 교회였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퍼셉션은 이전보다 덜 직접적이고, 더 많은 반성과 매개를 필요로 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변화는 항상 단계적이며, 각 단계는 저마다 고유한 성격을 지닙니다.

 

AC.498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이 장 전체의 해석 원리의 일관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부분적 상징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담, 셋, 에노스, 그 이후의 모든 이름들은 동일한 규칙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일관성이 무너지면, 장 전체의 구조도 함께 무너집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교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태의 연속’이라는 것이지요. 한 교회가 다음 교회를 낳는다는 말은, 오늘의 교회가 내일의 교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상태를 위한 씨앗을 품습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이름’의 상태들이 있습니다. 어떤 시기의 신앙은 셋과 같고, 어떤 시기는 에노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가 곧바로 실패나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표지’일 수 있습니다. 질러갈 걸 좀 돌아가는 걸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 인생이 끝에 가서 아주 잃어버리는 인생이 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결국 AC.498은 창세기 5장을 읽는 독자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장을 개인들의 전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생명사가 기록된 말씀, 곧 교회의 영적 계보로 읽을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교회와 신앙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있는 상태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말은 더 이상 낯선 족보 문장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어지는 교회의 맥박’으로 들리게 됩니다.

 

 

 

AC.499, 창5:7-8,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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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7, 창5:6, '교회의 쇠퇴와 회복은 점진적으로'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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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5:6)

 

AC.497

 

‘셋’(Seth)이 부모 교회인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라는 사실은, 셋에 관해 위에서 말한 내용(3)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5:3)

 

교회들의 경우는, 우리가 말해 온 바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진적으로,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쇠퇴하게 됩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이 글은 AC.496에서 제시된 진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원리를 보다 일반적인 교회론으로 확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이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이며,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라는 점을 새로운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제 그것을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 원리’로 정식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는 규정입니다. 이는 교회의 변화가 흑백 논리로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로 전락한 것도 아닙니다. 본질은 유지되었으되, 그 강도와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퍼셉션이 작동하는 깊이와 즉시성이 부모 교회에 비해서 좀 약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개인의 타락이나 도덕적 실패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들의 경우는 점진적으로 쇠퇴한다’고 말하며, 이 쇠퇴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필연적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 특히 유전적 악의 축적이라는 원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순수한 상태로 시작하지만, 세대를 거치며 그 순수함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 ‘점진적 쇠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급격한 붕괴나 단번의 배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세한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본질적인 것들이 조금씩 약화 되는 식이었지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이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고, 그렇게 해서 퍼셉션이 처음처럼 즉각적이고 또렷하기보다는 덜 즉각적, 덜 또렷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지요. 셋의 교회는 바로 이런 변화의 초기 단계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쇠퇴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들(essentials)이란 교회의 생명, 곧 주님과의 직접적인 연결과 퍼셉션을 말합니다. 외적 형식이나 제도는 여전히 유지될 수 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약화 될 때, 교회는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쇠퇴는 외적 변화보다 ‘내적 생명의 변화’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역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모든 교회의 운명을 암시합니다. 태고교회 다음에 등장하는 교회들 역시, 동일한 원리에 따라 시작과 전성기, 그리고 쇠퇴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차이는 형태와 정도일 뿐, 그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셋의 교회는 단순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라, ‘교회 변화의 전형’을 보여 주는 그 첫 사례가 됩니다.

 

이 말씀은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쇠퇴를 특정 사건이나 외부 환경 탓으로만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쇠퇴는 내부에서, 그것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서서히 진행됩니다. 퍼셉션이 약화되고, 사랑이 덜 중심이 될 때, 교회는 이미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진술은 절망적인 숙명론으로 흐르지는 않습니다. 쇠퇴가 점진적이라는 말은, ‘회복 역시 단계적으로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교회를 단번에 버리지 않으시고, 가능한 한 오래 생명을 유지하도록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초기의 열정과 사랑이 시간이 지나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그 변화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셋의 교회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결국 AC.497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단계인 셋의 교회를 통해,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단절이나 파멸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본질의 약화’입니다. 이 인식을 가질 때, 우리는 교회의 역사와 오늘의 교회를 보다 차분하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AC.496, 창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에 비해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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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5:6)

 

AC.496

 

‘셋’(Seth)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에 비해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교회입니다. ‘백오 세에’(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앞에서와 같이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고’(begat Enosh)는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고 하는 또 다른 교회가 이어졌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내부 분화를 매우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요약합니다. ‘(Seth)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내부에서 나타난 ‘두 번째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이 교회를 ‘덜 천적이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규정함으로써, 단절이 아니라 연속 속의 변화임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는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를 거치며 여러 상태로 분화된 것입니다.

 

덜 천적(less celestial)이라는 표현은 퇴보나 타락을 곧바로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사랑과 결합한 신앙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방향으로의 이동을 가리킵니다. 즉, 셋의 교회는 여전히 퍼셉션을 지니고 있었지만,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처럼 전적으로 사랑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하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의 범주 안에 속하며, 그 생명은 퍼셉션에 있었습니다.

 

백오 세(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앞서 반복적으로 확립된 원리에 따르면 연대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대신 셋의 교회가 ‘어떤 시간과 상태를 거쳐 유지되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의 성격을 암시하지만, 핵심은 길이가 아니라 질, 곧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날 때 보이는 속뜻입니다. 셋의 교회는 일정한 기간 동안 고유한 상태를 유지했고, 그 상태 안에서 다음 교회가 준비되었습니다.

 

이어지는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Seth begat Enosh)는 셋의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출현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다’는 말은 생물학적 출산이 아니라, ‘영적 전이와 계승’을 뜻합니다. 한 교회의 상태 안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다음 교회 상태로 이어지는 과정을, 성경은 출산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다음 교회는 셋의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 자체가 상태의 변화와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변화 역시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점차 다른 형태로 표현되며, 각 단계마다 새로운 교회 상태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5장의 족보는,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영적 계보’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단순한 붕괴로 이해하는 관점을 교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쇠퇴를 ‘갑작스러운 상실’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와 이동’으로 설명합니다. 셋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부모 교회보다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 있었고, 그 관계는 퍼셉션으로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변화는 타락이라기보다, 다른 형태의 질서로의 이동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신앙의 상태는 동일하게 유지되지 않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사랑이 중심이 되고, 어떤 시기에는 신앙의 이해가 더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태의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셋이라는 교회가 에노스라는 교회를 낳았다는 말은, 살아 있는 신앙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합니다. 반대로 퍼셉션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낳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신앙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이유입니다.

 

결국 AC.496은 태고교회의 연속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셋은 태고교회의 두 번째 교회로서, 부모 교회와 다른 성격을 지녔지만, 여전히 같은 생명의 흐름 안에 있었습니다. 그 흐름의 핵심은 퍼셉션이며, 그 퍼셉션이 이어지는 한, 교회는 형태를 달리하며 계속해서 ‘낳고’ 이어집니다.

 

 

 

AC.495, 창5:5, '교회의 쇠퇴와 퍼셉션의 관계'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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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했는지는,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그런 교회는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러니까 곧 그 구성원들이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마치 지금도 천사들이 천국에서 퍼셉션으로 아는 것처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가 무엇인가를 본인 힘으로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선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아는 것입니다. 삶으로 확증된 신앙 고백을 통해,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볼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설명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해의 관문과도 같은 선언입니다. 태고교회는 제도나 교리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태고교회를 이상적으로 그리거나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교회의 본질이 오늘날의 신앙 형태와는 질적으로 달랐음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주로 가르침과 교리, 학습과 이해를 통해 진리를 접하지만, 태고교회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 이전에,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하는,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직접 아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퍼셉션은 감정이나 직관과 같은 모호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여 선과 진리를 정하지 않았고, 사회적 합의나 관습을 기준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내적 연결 안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제시됩니다. 퍼셉션의 대상은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정치적 정의나 사회적 윤리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깊은 차원, 곧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선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주님께 속한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인지를 살아 있는 현실로 퍼셉션, 즉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천사들의 상태에 비유됩니다. 천사들은 선과 진리를 추론하거나 토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것들을 곧바로 인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천사적 상태와 유사한 방식으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교회’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퍼셉션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그는 그 기준을 ‘삶으로 확증된 신앙 고백’에서 찾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퍼셉션은 말이나 지식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이 실제 삶과 일치하는지를 보면, 그 안에 퍼셉션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은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단순히 알고 끝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아 냅니다. 태고교회의 쇠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대를 거치며 퍼셉션은 점차 약화되었고, 신앙은 점점 더 말과 형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 고백이 줄어들었고, 퍼셉션의 교회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신앙을 얼마나 많이 말하고,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이전에, 그것을 얼마나 살아 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퍼셉션은 과거의 신화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안에서 여전히 가능한 상태입니다. 다만 그 방식은 태고교회와 다를 뿐입니다.

 

결국 AC.495는 태고교회의 쇠퇴를 설명하는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제도나 전통, 지식 축적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 내는 삶’에 있습니다. 이 기준을 잃을 때, 교회는 겉으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에서는 이미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AC.494, 창5:5, '죽었더라', 해당 교회의 퍼셉션이 끝난 상태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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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1, 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또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의 경우에는 감소하고 퇴화하며, 본래의 온전함을 잃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각 세대의 부모는 자신이 물려받은 악에 더하여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이지요. 부모 안에 있는 모든 실제적 악은 일종의 성질을 입게 되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그들에게는 자연적인 것이 되며, 이렇게 형성된 악은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적 악에 더해져 자녀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후손들에게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전적 악은 후대에 이르면 매우 크게 증가하는데, 이것이 사실임은 자녀들의 악한 성향이 그 조상들의 성향과 정확히 닮아 있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아담에게서 우리에게 주입되었다고 주장되는 어떤 악 외에는 유전적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AC.313 참조). 진실은 이렇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로 유전적 악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자신이 물려받은 악들에 더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악은 축적되고, 모든 후손 안에 머물게 되며,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자들 안에서만 그것이 줄어듭니다. 모든 교회의 퇴화의 주된 원인이 바로 이것이며, 태고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죽었다’는 표현은 이 글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신학적 전환점을 이룹니다. 앞선 글들에서 스베덴보리는 ‘’과 ‘’를 통해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 주었고, 이제 AC.494에서는 그 변화의 종착점을 ‘죽음’이라는 말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나 공동체의 해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고교회를 특징지었던 ‘퍼셉션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죽다’라는 말의 의미를 ‘어떤 것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는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사데 교회는 외적으로는 살아 있는 교회처럼 보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죽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조직이나 활동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던 생명의 본질, 곧 퍼셉션과 그로부터 나온 삶이 더 이상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서 ‘어머니가 다른 땅에서 죽는다’는 표현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가 ‘죽는다’는 말은, 그 교회가 더 이상 본래의 성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상태로 전락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죽음은 항상 상태의 변화, 특히 ‘영적 생명의 상실’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원인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교회가 퇴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로부터 악을 물려받을 뿐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실제적인 악을 더하여 다음 세대에 전합니다. 이렇게 실제적 악이 반복되면, 그것은 점차 성향과 습관이 되어 자연적인 것처럼 굳어집니다. 이로 인해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고 증폭됩니다.

 

이 설명에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유전적 악을 단일한 기원에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유전적 악이 ‘아담에게서 한 번 주입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이 견해를 단호히 부정합니다. 유전적 악은 단순히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실제적인 죄들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강화’됩니다. 그래서 유전적 악은 고정된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축적되는 것입니다.

 

이 누적의 결과는 후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자손들의 악한 성향이 조상들의 성향과 닮아 있다는 사실은, 유전적 악의 축적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태고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가장 순수한 퍼셉션으로 시작했지만, 세대를 거치며 유전적 악이 증가했고, 그 결과 퍼셉션은 점차 흐려졌습니다. 마침내 성경은 그 상태를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절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자들 안에서만 줄어듭니다. 다시 말해, 퇴화는 필연적이지만, 회복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죽음은 주님의 섭리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교회가 필요해졌음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퇴화의 주된 원인이 동일하다는 마지막 진술은, 이 논의를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직접 연결합니다. 태고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는 유전적 악의 증가로 인해 퇴화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제도나 전통의 유지에 있지 않고, 퍼셉션의 회복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도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상태’입니다.

 

결국 AC.494는 창세기 5장의 ‘죽었다’는 말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생명은 퍼셉션이며, 죽음은 퍼셉션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기준을 붙들 때, 태고교회의 종말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필연적인 전환으로 이해됩니다.

 

 

 

AC.493, 창5:5,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나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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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간과 분량(measures)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만 덧붙일 수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숫자들이 적용될 때에는, 날과 해의 숫자들뿐 아니라 분량의 숫자들까지도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날 때 그 숫자가 지닌 속뜻에 따라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이 거룩하다고 말하는 경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 희년이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어야 했던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었고 주님의 사도들도 그와 같았던 것, 칠십 인의 장로들이 있었고 주님의 제자들도 그 수만큼 있었던 것,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경우들에서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물러나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러날 때, 숫자들의 속뜻에 의해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s)과 ‘(years)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반복해서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말하며, 논의를 한 단계 더 깊은 곳으로 옮깁니다. 이제 질문은 ‘왜 성경이 굳이 숫자를 사용하는가’로 이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자연의 최외층(the ultimates of nature, 맨 끝단), 곧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시간과 분량(measures), 그리고 숫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말씀도 그 틀을 빌려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숫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숫자가 세속적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숫자는 시간과 분량에서 ‘추상(abstractedly), 즉 물러납니다. 다시 말해, 숫자는 그것이 적용된 외적 대상과 분리되어,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내는 표지가 됩니다. 날과 해, 길이와 무게는 외적 형식일 뿐이며,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의 많은 제도와 규례는 이해 불가능한 부담으로 남게 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노동 규칙이나 휴식 제도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상태를 향해 물러날 때, 여섯은 준비와 수고의 상태를, 일곱은 완성과 거룩의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완성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지가 됩니다.

 

희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흔아홉 해마다 선포되고 쉰째 해에 거행되는 희년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고대 사회의 독특한 사회 제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이 물러날 때, 희년은 해방과 회복, 곧 교회 상태의 새출발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도가 아니라, ‘회복의 상태가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희년은 숫자로 기억되지만, 그 본질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주님의 열두 사도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됩니다. 이 숫자는 우연이나 행정적 편의의 결과가 아닙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교회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파의 수와 사도의 수가 같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서 위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교회 상태의 완전성’입니다.

 

칠십 장로와 칠십 제자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숫자는 충만함과 확장을 의미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장로들이든 제자들이든, 그 숫자가 말하는 것은 조직의 규모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사역의 범위와 충만함입니다. 숫자는 그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성경 전반에서 숫자가 적용된 많은 사례들을 열거하며, 공통된 원리를 분명히 합니다. 숫자는 외적으로는 시간과 분량에 붙어있지만, 내적으로는 언제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숫자가 대상에서 물러날 때, 비로소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깊이가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끝없는 규칙과 계산의 집합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읽는 데 결정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그곳에 나오는 날과 해, 그리고 수백 년에 이르는 숫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왔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숫자는 그 상태들의 질서와 흐름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표시한 기호입니다.

 

결국 AC.493은 성경을 읽는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한번 교정합니다. 성경의 숫자를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보다 ‘어떤 상태로 지속’이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합니다. 그럴 때 숫자는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말씀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숫자가 시간과 분량에서 물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언어로 우리 앞에 서게 됩니다.

 

 

 

AC.494, 창5:5, '죽었더라', 해당 교회의 퍼셉션이 끝난 상태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말의 의미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임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로부터 분명해집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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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2, 창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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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더라’는 말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창세기 5장, 더 정확히 말하면 태고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여러 글에서 ‘(days)과 ‘(years)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증해 왔고, 여기 AC.492에서는 그 논의를 한 지점으로 수렴시킵니다. 이제 더 이상 숫자나 기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태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과 ‘’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었더라’는 표현 앞에 자연스럽게 생물학적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호하게 방향을 바꿉니다.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사람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를 특징짓던 즉각적이고 분명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고, 그 퍼셉션이 그들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퍼셉션이 사라지는 순간,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사회와 문화도 지속되었겠지만, 교회의 생명은 그 시점에서 끝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종말을 어떤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죽음’은 한순간에 일어난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고 흐려진 끝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과정을 ‘’과 ‘’라는 언어로 천천히 보여 주다가,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것은 연대기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종결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미 앞에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셨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한 형태의 교회가 끝나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시작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서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죽음은 단순히 활동이 줄어들거나 제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곧 진리와 선을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이 사라질 때, 성경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규모가 작고 외적으로 미약해 보여도, 퍼셉션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태고교회의 죽음은 외형의 붕괴가 아니라, 퍼셉션의 소멸이었고, 오늘날 교회의 생명 역시 같은 기준으로 판단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5장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개인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태고교회적 상태가 있을 수 있고, 그 상태는 퍼셉션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이 사라지고,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상태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른 방식의 인도, 다른 단계의 신앙이 시작됩니다.

 

결국 AC.492는 창세기 5장의 한 절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생명은 퍼셉션이며, 죽음은 퍼셉션의 상실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족보의 끝에 나오는 ‘죽었다’는 말을 더 이상 두려운 말로 읽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한 상태의 완결’을 알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AC.493, 창5:5, '숫자'의 겉뜻에서 물러나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days)과 ‘해’(years)가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숫자를 적용할 수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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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1, 창5:4, '자녀들'은 해당 교회의 퍼셉션을 반영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4, 7, 10, 13, 16, 19, 26, 30절)에서도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은 동일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곧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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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91

 

이 장(4, 7, 10, 13, 16, 19, 26, 30)에서도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은 동일한 것들을 의미하는데, 곧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히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태고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태고교회는 모든 다른 교회들과 그 뒤를 잇는 교회들의 주된 교회요 부모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선 AC.489AC.490에서 설명한 내용을 창세기 5장 전체에 직접 적용합니다. 즉, ‘아들들’과 ‘딸들’이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한다는 원리는 부분적인 해석이 아니라, 이 장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전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 5장 곳곳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자녀(子女)’, 즉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표현은 모두 같은 의미 울타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의미는 언제나 교회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문장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진리와 선이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와 선은 항상 어떤 교회 상태 안에서 태어나고, 그 교회의 성질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에서는 순수한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혼합된 진리와 왜곡된 선이 나타납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교회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특히 AC.491은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이 ‘분명히 퍼셉션되었던 것들’, 즉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독특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태고교회의 진리와 선은 추론이나 학습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퍼셉션된 것이었고, 그 퍼셉션은 매우 분명하고 생생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은 흐릿한 개념이나 불완전한 교리가 아니라, 살아 있고 분명한 진리와 선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모든 다른 교회들과 그 뒤를 잇는 교회들의 주된 교회요 부모 교회’라고 불립니다. 이는 연대기적 의미에서의 첫 교회라는 뜻을 넘어, ‘질적인 기준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후의 모든 교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태고교회의 상태에서 멀어지거나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후 교회들의 진리와 선은 점점 덜 퍼셉션되고, 점점 더 외적 형식과 교리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부모 교회’라는 표현에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진리와 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의 교회, 그 이후의 교회들 역시 여전히 진리와 선을 가졌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동일한 강도의 퍼셉션 안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의 진리와 선은 태고교회라는 원형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AC.491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건강성을 외적 활동이나 조직, 영향력으로 판단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아들들과 딸들이 태어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떤 진리와 어떤 선이 실제로 퍼셉션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는 규모나 전통도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개인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 안에도 하나의 ‘교회 상태’가 있으며, 그 상태에 따라 그 사람 안에서 태어나는 진리와 선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진리와 선이 분명하고 생동감 있게 형성되지만, 퍼셉션이 약해질수록 그것들은 점점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퍼셉션이 살아 있는가’에 있습니다.

 

결국 AC.491은 창세기 5장을 하나의 거대한 생명 기록으로 보게 합니다. 그 기록은 개인들의 출생과 사망을 나열하는 문서가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부모 교회로부터 시작된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계보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이 족보를 더 이상 멀게 느끼지 않고,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비추는 거울로 읽게 됩니다.

 

 

 

AC.492, 창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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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0, 창5:4, ‘딸’(daughter)을 교회라고 하는 이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 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에서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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