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 들으면 상당히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상티어’, ‘중티어’, ‘하티어’로 나누고, 남자의 키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경제력과 노후 준비를 하나하나 따진 뒤 어느 등급에 속하는지를 정합니다. 여자 역시 나이와 외모, 학력, 직업, 연봉, 자산, 부모의 재산과 노후 준비 등을 놓고 같은 방식으로 분류합니다. 심지어 어떤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상에서 중으로 내려간다’, ‘하에서 중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격으로 보는 데 익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상을 곧바로 ‘사람을 돈과 외모로 평가하는 세속적인 이야기’라고 밀어내기 전에 한 가지는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상은 ‘사람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신학 강의가 아니라, 결혼정보회사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이 어떤 조건으로 서로를 선택하고 거절하는지를 오랫동안 관찰한 사람이 그 현실을 설명하는 영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이 보여 주는 ‘결혼 시장의 민낯’에는 상당한 현실성이 있습니다. 실제 결혼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고, 집을 마련하고, 돈을 벌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양가 부모와 관계를 맺으며 수십 년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직업이나 경제력, 건강, 성격, 가정환경, 부모의 노후 문제 등을 살펴보는 것 자체를 탐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이 사람과 실제 생활을 함께 감당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책임 있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지상생활의 외적인 조건 자체는 무가치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적인 것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보다 위에 올라가 사람 전체의 가치를 결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육각형’입니다. 남자 상티어의 사례로 제시된 사람은 35세, 178cm, 연세대 공대 졸업, 유명 IT 대기업 과장, 연봉 15천만 원, 순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 보유, 부모 역시 안정적인 직업에서 은퇴했고 노후 준비도 끝난 사람입니다. 진행자는 이런 사람을 어느 한 곳도 특별히 걸리는 것이 없는 ‘큰 육각형’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외모와 키는 좋지만 연봉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은 ‘작은 육각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이 육각형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는 항목이 거의 없습니다. 정직한가, 따뜻한가, 책임감이 있는가, 배우자를 존중하는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가,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가, 배우자가 병들거나 실패했을 때도 곁을 지킬 사람인가 하는 것은 육각형의 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져와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있으며, 결국 사람은 자신이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적 모습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대단히 성공하고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드러날 수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던 사람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사람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학벌도, 직함도, 통장 잔고도, 부동산도, 부모의 사회적 지위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형성된 ‘사랑의 성품’은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정말 중요한 ‘결혼 티어’는 무엇일까요?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상티어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상대의 행복을 자기 행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재산이 10억인지 1억인지보다 돈을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며, 좋은 직장에 다니는가보다 맡은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가보다 그 아름다움을 자기 우월감과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감사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추상적인 종교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조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0세 남자가 모은 돈이 500만 원이고 부모의 노후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면 결혼을 생각하는 상대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39세 여성이 월세로 살고 있고 부모의 노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 역시 실제 결혼생활에서 고려할 현실적인 요소입니다. 여기서 ‘사랑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조건을 ‘현실적인 고려 사항’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등급’으로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와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하티어 인간이다’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습니다.

 

영상에서 남녀를 평가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도 흥미롭습니다. 남성은 직업, 연봉, 자산, 학력, 키, 외모, 부모의 경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여성에게는 특히 나이와 외모가 강력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33세에 대기업에 다니고 연봉 8천만 원, 순자산 3억 원에 본인 명의 오피스텔까지 있는 여성도 ‘중티어’로 분류되고, 39세 여성에게는 학력이나 연봉이 조금 더 좋아지는 정도로는 ‘하티어’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요소로 ‘예쁨’을 반복해서 제시합니다. 이것은 이 영상이 만들어 낸 규칙이라기보다, 진행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결혼 시장에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선택을 압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영상 자체보다 그 영상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욕망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이러니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은 조건으로 평가받기를 싫어하면서 상대는 조건으로 평가합니다. 남자는 자신의 연봉과 자산만 보는 여성을 싫어하면서 젊고 예쁜 여성을 원할 수 있고, 여자는 자신의 나이와 외모만 보는 남성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상대 남성에게 높은 연봉과 안정된 직업과 자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나라는 사람 전체를 봐 달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상대를 몇 개의 조건으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proprium이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좋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욕구가 먼저 서고,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 관한 가르침은 여기에서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참된 결혼은 ‘내게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확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두 사람이 서로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어 가는 데서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나 생활 공동체로만 보지 않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과 연결해서 봅니다. 그래서 참된 결혼애에서는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점점 분리되지 않게 됩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에서 더 나아가 ‘당신이 행복한 것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상태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 연애 감정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상티어’라는 개념도 뒤집힙니다. 세상에서 상티어인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 의미에서도 상티어인 것은 아닙니다. 연봉 15천만 원에 자산 10억 원, 서울 아파트와 좋은 학벌을 갖추었더라도 배우자를 자기 성공의 장식품처럼 여기고, 상대가 늙거나 병들거나 사회적 지위를 잃었을 때 사랑이 식어 버린다면 그 결혼의 내적 토대는 매우 약합니다. 반대로 연봉 3천만 원대의 평범한 직장인이고 아직 큰 재산이 없더라도 정직하게 일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배우자를 존중하고, 어려울 때 함께 견디며, 자신의 욕망보다 가정의 선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선한 것도 아니고 부유하다고 해서 악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초점은 언제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랑의 질서에 있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상에서는 ‘예쁘면 된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현실의 결혼 시장에서는 실제로 외모가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끌림이 있고 결혼에서 육체적 매력 역시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은 훨씬 흥미롭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한 애정과 지혜가 얼굴과 몸짓에까지 나타납니다. 지상에서는 화장과 성형과 옷과 젊음으로 외적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를 영원히 감출 수 없습니다. 결국 ‘어떤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보다 ‘어떤 사랑을 가지고 살아왔는가’가 그 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상에서 말하는 ‘39’라는 숫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 시장에서는 나이가 올라갈수록 특히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출산 가능성이나 사람들이 선호하는 연령대와 연결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까지 나이에 따라 내려가는 것은 아닙니다. 26세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39세 여성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연봉 15천만 원인 남성이 연봉 32백만 원인 남성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높은 등급의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시장에서의 ‘희소가치’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장의 언어로 사람의 영혼까지 가격표를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장은 오히려 ‘결혼 시장의 민낯을 봐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맞는 말입니다. 현실을 모른 채 이상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민낯’을 보았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분류하고 있는가, 왜 남자는 여자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리고 그 욕망 가운데 어디까지가 창조 질서 안의 자연스러운 필요이고 어디부터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변질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분별이 시작됩니다.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영상을 본다면 ‘나는 어느 티어인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어떤 배우자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배우자가 되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입니다. 내가 상티어 상대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는 돈을 얼마나 모았는가뿐 아니라 돈을 책임 있게 다룰 줄 아는가, 좋은 직장을 얻었는가뿐 아니라 맡은 일에 충실한가, 외모를 얼마나 관리했는가뿐 아니라 상대의 늙어가는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는가뿐 아니라 배우자의 부모를 존중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 용지에는 들어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실제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훨씬 오래 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은 아주 현실적인 힘을 갖습니다. 결혼은 결혼식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계속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5세에 ‘큰 육각형’이었던 사람도 50세에 직장을 잃을 수 있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으며,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26세의 아름다운 얼굴도 60세와 70세가 되면 변합니다. 부모의 재산도 사라질 수 있고 서울 아파트의 가격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결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이런 조건뿐이라면 조건이 무너질 때 관계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오랜 세월 형성된 선한 애정과 신뢰, 존중과 책임, 그리고 서로의 영적 선을 바라는 사랑이 있다면 외적인 조건이 변해도 결혼의 더 깊은 부분은 오히려 강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상이 보여 주는 ‘··’는 틀렸다기보다 매우 제한된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정보회사가 실제 매칭을 위해 사용하는 지도에는 분명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 전체를 설명하는 지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그 지도에는 사람의 영혼이 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봉 15’, ‘순자산 10’, ‘강남 아파트’, ‘해외 명문대’, ‘167cm의 예쁜 외모’ 같은 항목은 적을 수 있지만, ‘이 사람은 배우자가 아플 때 밤새 곁을 지킬 사람인가’, ‘자신이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돈 앞에서 양심을 버리지 않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상대의 행복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같은 것은 숫자로 적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긴 결혼생활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보고 난 뒤 남는 결론은 ‘결혼정보회사의 티어 분류는 나쁘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조건의 세계에서는 그런 분류가 생겨날 수밖에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그것을 인간의 참된 가치와 혼동하지 말자’에 가깝습니다. 외적인 조건은 결혼을 시작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결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두 사람 안에 형성된 내적인 것입니다. 외모는 만남의 문을 열 수 있고, 경제력은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좋은 가정환경은 결혼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두 영혼이 하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상의 표현을 빌려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상티어일까?’ 아마 이 질문에 연봉과 학벌과 자산을 적는 칸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얼굴 뒤에 어떤 애정이 자리 잡았는지,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얼마나 정직하고 유용한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좋은 배우자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배우자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어 주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결혼 시장에서 말하는 ‘큰 육각형’보다 더 귀한 육각형이 있다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함, 진실함, 책임, 절제, 배려, 그리고 상대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랑.’ 이것들은 결혼정보회사의 프로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을 영원한 결합으로 자라게 하는 훨씬 본질적인 조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와 결혼했는가’가 성공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결혼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 영상의 ‘··하 티어’를 넘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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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SY.73, 강문호 수도사, ‘사과나무와 하나님의 섭리’ (2019122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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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아벨(Abel)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창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 “Abel.” Those were said to “till the ground” 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앞의 AC.341에서 제시했던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 가운데 이제 두 번째 표현, 곧 가인이 ‘농사하는 자’였다는 말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3-344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이며, 신앙과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반대편에 있는 ‘농사하는 자’는 체어리티 없이 신앙에 속한 것만을 붙드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농사하는 자’ 또는 ‘땅을 경작하는 자’ 자체가 언제나 나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실제로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한 사30:23에서는 땅에 씨를 뿌리고, 그 땅에서 양식이 나는 모습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 ‘목축=’이라는 식으로 자연적 직업 자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창3에서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난 사람이 ‘땅을 경작하는’ 상태가 서로 연결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후의 이야기 자체에서 확인합니다. 첫째,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이 결정적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속뜻으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무리 신앙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이는 데서 최종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결론과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AC.344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체어리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바로 그런 신앙의 모습을 ‘농사하는 자’ 가인을 통해 보여 줍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목적지인 체어리티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를 단순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겉으로는 신앙이 상당히 많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알고, 신앙을 고백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열심히 논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AC.345가 창3:19, 23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창3에서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퍼셉션 가운데 살아가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상태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전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고, 더 낮고 외적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AC.345는 바로 그 상태와 가인의 ‘농사하는 자’를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노동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시선이 주님과 천적인 것에서 육체와 세상적인 것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종교적인 것을 알고,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다루는 중심이 더 외적인 차원으로 내려갑니다.

 

이렇게 보면 창3과 창4 사이의 연결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경작하게 되고, 창4에서는 가인이 바로 ‘농사하는 자’가 됩니다.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시간 순서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말씀의 내적 연결에서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창3이 보여 준 인간의 내적 하강이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계속 주의해 온 점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이후 셋 계열을 자연적인 족보의 시간 순서만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창3의 ‘땅을 경작함’에서 창4의 가인이 역사적으로 곧바로 생겨났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보여 주는 것은 ‘영적 상태의 연결’입니다. 에덴으로 나타낸 천적 상태에서 멀어져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는 상태와,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외적인 것으로 다루는 가인의 상태 사이에 내적인 친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바라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 사는 동안 먹고 일하고 재산을 관리하며 세상적인 지식도 배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곧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긴다면 질서 안에 있지만, 영적인 것까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의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344가 이미 보여 주었듯 그것들은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가 사람을 선으로 이끌고, 신앙이 사랑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단이 목적이 되고, 결국 체어리티라는 본래 목적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단지 신앙과 사랑을 ‘구별’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가 독립이 되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창4에서 아벨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AC.338부터 계속 설명해 온 ‘가인의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AC.345는 따라서 ‘농사하는 자’라는 짧은 표현을 통해 매우 중요한 대비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행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점점 외적인 것이 됩니다.

 

결국 AC.345의 핵심은 ‘신앙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고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낸다면 아무리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어도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도 그 신앙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AC.345가 보여 주는 가인의 상태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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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4

 

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그리고 교리(doctrine of faith)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12:28-35; 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 신앙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한 단어로 말하면 ‘체어리티’입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풀어 설명하면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신앙의 교리’를 함께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읽고 여러 사실을 배우며, 그것을 이해하고, 서로 연결하여 교리로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이나 교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그 답이 바로 이어집니다.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목적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맞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랑과 용서, 겸손과 정직에 관하여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이 그의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AC.344의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 되게 한다’는 표현에는 거듭남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해 우리의 사랑과 의지,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시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거듭남의 수단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상징했습니다. AC.344는 그 흐름을 교리적으로 다시 설명하는 셈입니다. 신앙은 신앙으로 끝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고, 그 삶 안에서 체어리티가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 옆에 놓인 여러 교리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모든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중심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배우고, 주님에 관하여 배우고, 말씀과 계명, 그리고 천국에 관하여 배우는 것도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막12:28-35와 마22:34-39을 인용합니다. 두 본문 모두 모든 계명의 중심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마22:37-40에서 주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한 것은 자신의 독자적인 윤리적 주장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사랑으로 모으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다고 해서 신앙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선의나 감정만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에게 무엇이 선인지 가르치고, 그 선으로 가는 길을 밝혀 줍니다. 다만 길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진리가 길이라면 체어리티의 삶은 그 길이 우리를 데려가야 할 곳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앤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떼어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가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벨은 바로 그 잃어버린 목적을 나타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과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두 요소가 서로 갈라진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주어진 것인데,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 자체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대단히 강합니다. ‘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 부족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해도 그것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삶으로 데려가지 못한다면, 영적인 관점에서는 그 안에 있어야 할 생명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가인의 ‘분리’를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비유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잘 사랑하며 살기 위해 ‘부부생활 준수 사항 20가지’를 만들었다고 해 봅시다. 처음에는 그 규칙이 사랑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사라지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고, 당신은 16개밖에 지키지 않았다’는 계산만 남는다면, 규칙은 남아 있어도 그 규칙이 존재했던 목적은 사라진 것입니다. 규칙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규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정확한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사람을 자기 교리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 따라 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44는 ‘교리가 중요한가, 체어리티가 중요한가?’라는 양자택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는 무엇을 위해 중요한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답이 ‘체어리티’입니다.

 

이 점은 AC를 읽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등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놀랍고 귀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더 온유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이웃의 선을 더 바라게 하고, 주님께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지식 역시 목적지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4의 핵심은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구호가 아닙니다. 훨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억 지식(scientia)과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교리(doctrina)는 모두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람은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그의 삶의 성질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AC.344는 가인의 오류를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서 드러냅니다. 가인은 신앙을 너무 귀하게 여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라는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텅 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참된 신앙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무엇을 믿는 사람’에 그치지 않고, ‘그 믿음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에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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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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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껏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이슬비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에는 햇볕을, 또 적당한 바람을, 나무가 커진 뒤에는 충분한 소낙비를 구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서리가 알곡을 여물게 한다고 생각하여 적당한 서리까지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도사는 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기가 판단하여 그때그때 하나님께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를 맞은 사과나무가 얼어 죽어 버립니다. 수도사는 실망합니다. 자신은 사과나무가 잘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이 수도사가 이웃 수도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놀란 수도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 길렀느냐고 묻자 다른 수도사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제일 잘 아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을, 가장 적당한 양만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시오.’ 그는 이슬비와 햇볕과 바람과 소낙비와 서리의 시기와 양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사과나무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도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짧은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은 ‘신적 섭리’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잘못은 기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비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햇볕이 필요하며, 이제는 바람이 필요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소낙비가 필요하고, 가을에는 서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계획은 이미 사람이 세워 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해 주시는 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좋은 결과를 정해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풀려야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해야 하며, 이 문은 열리고, 저 문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받아 내는 것’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었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나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그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보고 있는 한순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성공과 문제 해결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일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이 잘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유익한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영원을 보십니다. 바로 이 시야의 차이가 첫 번째 수도사와 두 번째 수도사의 차이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구한 ‘햇볕’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겨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맑은 날만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좌절도,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과 고통을 만들어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사과나무는 인간의 거듭남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하며 계절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성장 역시 한 가지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로받을 때도 있고, 시험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으며, 말씀의 진리가 밝게 이해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만 떼어 놓고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험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평온할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될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며,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내 안의 proprium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응답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보여 주기도 합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사과나무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목적 속에도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proprium은 노골적인 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과 선한 일 속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위해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과까지 결정한 다음 주님께 그 계획을 승인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악한 욕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다’는 자기 지혜까지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수도사의 태도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를 믿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라면 계절을 살펴야 하고,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야 하며, 맡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물도 주고 가지도 돌봐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결과까지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섭리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판단하되 내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되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손을 묶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즉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장면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체 이야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 1516절,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앞선 다섯 번째 ‘연못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의 중심이 ‘주님 안에 거하라’였다면 이번 영상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목적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열매’는 특히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는 선, 곧 선한 행위와 쓰임에 상응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진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고,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사역의 결과가 많아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자기 욕심을 덜 따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열매는 단순히 ‘사과’가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 삶에서 맺히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돌보지만,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인간이 해야 할 고백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도 다시 연결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목적은 세상의 조건을 내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나 자신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슬비를 주십시오. 햇볕을 주십시오. 바람을 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기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충실히 행하게 하시며,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를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들으면 참 편안합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는 무책임의 말이 아니라 신뢰의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고 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몫과 주님의 몫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선을 행하고, 전체의 결과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근심은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 가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짐까지 오늘 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체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의 빛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한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필요한 빛을 다시 주십니다. 이것이 섭리 아래 사는 사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수도사의 차이는 ‘기도한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다 기도했습니다. 차이는 ‘내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니 저는 제 몫을 행하며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기도 사이에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결과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기도이고, 후자는 결과를 주님의 지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조금씩 옮겨갈 것입니다.

 

이번 ‘사과나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선을 충실히 행하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내일과 영원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도사의 기도와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아주 짧은 차이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에서 ‘주님, 주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은 몇 글자밖에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는 proprium에서 섭리로, 자기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로 옮겨가는 긴 거듭남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나무를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기도는 결국 주님께 무엇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 그 선한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는 일이 되어 갑니다.

 

 

 

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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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2, 강문호 수도사, ‘수도와 연못 - 주님 안에 거하기’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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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AC.34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40:11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자’와 ‘양 떼’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참된 목자의 원형이 바로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3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에 안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목자직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사람인 목자는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 쓰임을 맡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목자가 하는 일이 네 가지 동사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모으시며’, 품에 ‘안으시고’, 연약한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목자의 역할이 단순히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 주는 ‘가르침’에 머물지 않습니다.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에서 말하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것’이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먼저 ‘양 떼를 먹이신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양은 목자가 제공하는 먹이를 먹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적 생명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참된 목자는 자기 생각이나 자기 지혜로 사람을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이 그것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AC.343의 문맥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목자를 단순히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 양을 먹이는 목적은 그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이 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신앙에 속한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신앙이 삶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되도록 인도합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입니다. AC.343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40:11에서는 바로 그 주님께서 어린 양들을 ‘모으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처럼 보여 줍니다.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는 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으고,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결합합니다.

 

품에 안으신다’는 표현은 그 결합의 성질을 더욱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외적인 명령과 강제로 몰아붙이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십니다. 여기에는 보호와 사랑, 그리고 각자의 연약함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인도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영적 인도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를 살피면서 선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양을 똑같은 속도로 몰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양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합니다. 어린 양에게 필요한 돌봄과 새끼를 돌보는 어미에게 필요한 인도가 서로 다르듯,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수용 능력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목자직에는 진리뿐 아니라 지혜로운 배려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40:11은 목회에 대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목자는 양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모으는 사람이며, 자기 교리적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 주님의 선으로 살아가도록 먹이는 사람입니다. 또한 연약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품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권위도 궁극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주님의 목자직을 섬기는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가인과 아벨의 문맥에서 읽으면 더욱 의미가 깊어집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이며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사40:11에서는 주님 자신이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아벨의 ‘양 치는 자’라는 모습은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 그 체어리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40:11의 목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모으고’, ‘품고’, ‘인도합니다’. 이것은 AC.343 마지막의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하지만, 체어리티의 부재는 흩고 분리한다’는 말과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가인은 흩어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목자이신 주님은 모으는 방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C.343의 여러 인용 구절 가운데 사40:11을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가장 큰 구절로 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목자 = 인도하는 자, 양 떼 = 인도받는 자’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 참된 목자인가’,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 ‘그 인도는 어떤 성질을 가지는가’, 그리고 ‘체어리티가 왜 모음과 결합을 이루는가’까지 한 장면 안에서 보여 줍니다.

 

결국 사40:11 AC.343에서 인용한 이유는 ‘양 치는 자’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선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 떼를 먹이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자의 상태에 맞추어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양 치는 자’란 결국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받아 이웃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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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3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양 떼가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 “shepherd of the flock” 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 “shepherd,” 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 “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 “shepherd” and “flock” 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다윗의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 (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양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양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 “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 “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양 치는 자’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의 ‘목자와 양 떼’라는 표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3은 왜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지를 구약과 신약 전체에 익숙한 목자의 표상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아주 간단한 정의를 제시합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양 떼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목자의 역할은 주로 ‘가르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중요한 조건을 붙입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 이것이 AC.343 전체를 읽는 열쇠입니다.

 

즉 목자의 본질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사람들을 열심히 지도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과 인도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도 사람이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목자의 가르침은 진리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향해야 할 곳은 체어리티의 선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에서 살펴본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놀랍도록 잘 연결됩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상징했습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르우벤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참인지를 알고 인정하게 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며, 마침내 그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돕습니다. 그러므로 AC.342가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면, AC.343은 목자가 사람을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생깁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가르쳤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게 되고,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갈라서게 된다면 그 가르침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배우면서 사람 안에 겸손과 선의와 용서와 섬김이 자라나고, 무엇이 참으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여 행하려 한다면 그 진리는 자신의 목적지인 체어리티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343이 ‘사랑만 있으면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는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선인지를 알아야 선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운 데 있었음을 생각하면, AC.343의 목자에 관한 설명은 창4의 중심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말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양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목자의 설교를 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라 선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를 판단하는 기준이 ‘체어리티의 선’에 놓여 있습니다.

 

이어지는 성경 구절들은 이 원리를 여러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사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의 소산의 양식’을 풍성하게 하시며, 가축을 넓은 목장에서 먹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에게 먹이를 준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제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선을 공급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40:11은 이 모습을 더욱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참된 목자직의 원형이 주님 자신에게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목자라고 하는 것도 본래 자기에게 양 떼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주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주님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80:1에서는 아예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부르며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목자직의 중심에는 결국 주님의 인도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며, 목자는 그 인도에 쓰임을 받습니다. 이것을 잊는 순간 목자는 양 떼를 주님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43의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설명을 하나의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모인다’는 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참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를 향한 선의가 없다면 내적으로는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차이가 있어도 서로의 선을 바라고, 주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는 결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다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결국 ‘분리’가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작은 분리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진행되면서 가인은 자기 형제 아벨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마침내 그를 죽입니다. AC.343의 마지막 원리를 창4 전체에 적용하면, 가인의 역사는 ‘체어리티가 사라질수록 분리와 흩어짐이 깊어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교회의 일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가장 깊은 힘은 모든 사람이 모든 교리적 세부 사항에서 똑같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는 중요하고, 교리적 오류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실제로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선을 품고, 그가 주님 안에서 잘되기를 바라며, 진리를 자기 우월성을 증명하는 무기가 아니라 이웃의 선을 위한 빛으로 사용하는 데서 참된 결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AC.343의 마지막 문장은 목회자에게도, 성도에게도 상당히 엄중한 자기 점검의 기준이 됩니다. 내가 전하고 붙들고 있는 진리가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며, 사람을 밀어내게 하는가? 내가 진리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것은 아닌가? 반대로 체어리티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흐리면서 참된 선으로 인도하는 일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AC.343은 진리와 체어리티 어느 하나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사람을 인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양 치는 자’ 아벨의 의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아벨은 단순히 ‘착한 쪽’, 가인은 ‘나쁜 쪽’이라는 대비가 아닙니다. 아벨은 신앙이 본래 향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양 치는 자’라는 그의 모습은 그 선을 돌보고, 먹이며, 삶으로 행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체어리티라는 한 덕목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자신의 목적을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AC.343의 핵심은 ‘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되 진리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참된 양 떼 역시 단순히 듣고 아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며, 그 선으로 인도받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가 ‘모임과 결합’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하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아무리 신앙을 크게 외쳐도 결국 분리와 흩어짐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자와 양 떼에 관한 해설이면서 동시에 창4의 가인과 아벨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할 때는 모이고 결합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는 흩어지고 갈라집니다.’ 이것이 ‘양 치는 자’ 아벨을 통해 말씀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40:11)

 

 

AC.343, 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AC.343.심화 1.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시는 주님’ (사40: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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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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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AC.342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2-34의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출생을 한꺼번에 인용한 이유는, 교회가 낳는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 신앙’과 체어리티’이며,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는 질서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340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 가운데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의 예로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구절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통해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고 말하며 첫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합니다. 르우벤이라는 이름에는 보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해설까지 연결해서 보면 ’은 이해성, 그러니까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으로 진리를 보고 인정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르우벤은 진리를 보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신앙의 첫 단계를 나타냅니다. AC.342에서는 이 복잡한 내용을 길게 풀지 않고 간단히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한다’고 정리합니다.

 

그다음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레아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말하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합니다. 시므온은 듣다’와 연결된 이름입니다. 말씀에서 듣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들은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말을 들었다’와 말을 들었다가 그대로 했다’를 구별하듯, 영적인 의미에서 참으로 듣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옮기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르우벤에서 보고 인정한 신앙’이 시므온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셋째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창29:34의 표현이 특히 중요합니다. 레아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말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합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연합하다’, ‘결합하다’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별도로 하나 더 덧붙이는 덕목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가 사람의 삶과 사랑에 결합되는 데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 이름을 차례로 놓으면 AC.342의 핵심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르우벤’에서는 진리를 보고 인정합니다. ‘시므온’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여 행합니다. ‘레위’에서는 그렇게 행하던 선이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앎과 인정  행함  사랑과의 결합’이라는 흐름입니다. 이것이 AC.342가 창29:32-34 전체를 한꺼번에 인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먼저 지식으로 신앙을 얻고, 그다음 행동을 충분히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신앙과 체어리티를 결합하십니다. 따라서 르우벤에서 레위로 나아가는 과정 전체가 거듭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 점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41-342에서 가인과 아벨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질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보여 줍니다. 신앙은 행위로 나아가고,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가인’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지 않고 사랑에서 자신을 떼어 내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려고 합니다. 정상적인 길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인데, 가인은 그 길을 거부하고 신앙 자체에 머물려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형제’인 아벨, 곧 체어리티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2에서 왜 하필 레아의 첫 세 아들’을 가져왔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각각 상징하는 성경 인물을 하나씩 찾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세 아들이 출생의 순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르우벤에서 시작된 것이 시므온을 거쳐 레위에 이릅니다. 즉 말씀의 계보 자체가 신앙이 삶으로 들어가 체어리티에 이르는 질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히 레위의 연합’이라는 의미는 AC.342의 전체 내용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진리를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의 삶에 들어와 선이 되고, 그 선이 사랑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마침내 사랑과 연합하는 것’에 이릅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시므온을 지나 레위에 이르는 흐름은 단순한 세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거듭남의 방향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하나의 작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하므로, 레위 지파가 맡은 제사장직 역시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섬기는 일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다시 아벨의 양 치는 자’와 연결됩니다. 아벨도 체어리티를 상징하고, 레위도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두 경우 모두 양 치는 자’라는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341 형제’라는 표현도 더욱 깊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경쟁하는 두 교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에 이르도록 주어진 것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이 생명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한 것은 단순한 가족관계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창29:32-34 AC.342에서 인용한 이유는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라는 세 단계의 연결을 통해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는 정상적인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정상적인 질서를 옆에 놓아 보면 가인’의 문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인의 잘못은 신앙을 가진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신앙은 아벨, 곧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했는데, 오히려 체어리티에서 자신을 분리하고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구절을 AC.342의 문맥에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르우벤에서 신앙이 시작되고, 시므온에서 그 신앙이 삶으로 나아가며, 레위에서 마침내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여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걸어야 했지만 걷지 않은 길이며, 동시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 선을 우리의 사랑과 결합하시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가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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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난 레아의 첫 아들들도 같은 것을 상징합니다. ‘르우벤(Reuben)은 신앙을, ‘시므온(Simeon)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는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를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 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 “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 “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의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형제가 이를 상징한다’는 설명에 성경 안의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매우 흥미롭게도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을 통해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가 실제로 아이를 낳는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것들을 잉태와 출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할 것은 주님을 향한 신앙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이며, 결국 교회의 모든 교리와 삶도 이 둘을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라는 두 가지를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가인의 문제를 통해 계속 살펴보았듯,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는 순간 본래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AC.342가 레아의 세 아들을 가져오는 이유도 오히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0에서 르우벤의 이름을 다룬 것과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AC.340에서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말과 ‘르우벤’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통해 고대인들이 이름에 어떤 상태와 의미를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 AC.34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르우벤이 신앙을 상징한다고 밝힙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 단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에서 나타난 신앙이 시므온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 다음에 행동하고, 그다음에 착한 사람이 된다’는 외적인 단계의 나열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실제로 행하면서, 그 진리가 점차 사람의 의지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주님의 뜻이므로 해야 한다’고 알고 행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여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그때 선은 더 이상 외적인 의무에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이 됩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흐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신앙이 있고, 그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앞 단계가 뒤 단계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체어리티에 이르렀다고 신앙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목적과 생명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나아가고, 신앙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둘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이 점에서 AC.342는 우리가 앞서 살펴본 태고교회와 오늘날 교회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습니다.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의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행하며, 그 신앙으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특히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상징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제사장직의 본질은 지위나 종교적 권력에 있지 않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레위와 제사장직이 연결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다시 아벨에게 돌아옵니다.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바로 그 때문에 ‘양 치는 자’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위 - 체어리티 제사장직 양 치는 자’와 ‘아벨 체어리티 양 치는 자’가 서로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부분에서 같은 영적 질서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양 치는 자’라는 표현을 제사장직과 연결하면 체어리티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목자는 양을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먹이고, 돌보고,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제사장직과 목회 역시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선을 돌보는 쓰임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는 단순히 선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웃의 영적 선을 위하여 실제로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42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단순한 가족 호칭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가인과 아벨이 ‘형제’라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씀의 이야기 구조 자체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후 가인이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훨씬 무겁게 다가옵니다. 속뜻으로는 신앙이 ‘내가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이라면 바로 그 ‘형제’를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AC.341이 이미 단호하게 말했듯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단지 자기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도 잃게 됩니다.

 

AC.342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와 ‘가인 아벨’의 관계를 함께 볼 때 드러나는 대조입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 마침내 체어리티에 이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야 할 정상적인 방향입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나타나는 흐름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대신 자신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키려 합니다. 결국 체어리티라는 ‘형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AC.342는 가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역으로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신앙의 목적지는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 가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며, 아는 것은 행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행하는 것은 마침내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이 길을 걸으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질서가 나타나지만, 신앙이 자기 자신을 목적 삼으면 ‘가인’의 길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342는 매우 짧지만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고, 마침내 그 선을 사랑하여 기꺼이 행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더 이상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삶을 이루게 됩니다.

 

결국 AC.342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입니다. 머릿속의 신앙으로 머물러 있는가, 삶의 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행동이 점차 사랑과 체어리티가 되어 가고 있는가?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것이 ‘아벨’을 신앙의 ‘형제’라고 한 깊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창29:32-34)

 

 

AC.342, 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AC.342.심화 1.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 (창29:32-34)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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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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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 백여 마리가 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의 제안으로 연못 바닥에 자갈을 깔고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불러 연못을 수리하려면 먼저 그 안의 물고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직접 연못 안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손이 죽이려는 손이 아니라 살리려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도망가는 물고기들을 보며 속으로 ‘, 이놈들아. 잡혀라. 안 잡히면 포클레인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이 짧은 장면이 이번 영상 전체를 여는 하나의 영적 비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먼저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섭리라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며,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던 자리에서 갑자기 옮겨지는 것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연못 속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자기를 붙잡는 손은 위협입니다. 그러나 연못 밖에서 전체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입니다. 물고기는 곧 포클레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지만 사람은 압니다. 이 작은 차이에서 인간과 주님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눈앞의 순간을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실패를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선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는 붙잡힘이었지만 실상은 구원이었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연못을 수리하는 동안 물고기들은 수도원에서 가장 큰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에 임시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넓은 연못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목욕탕은 답답했는지 자꾸 물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넣으며 또 말합니다. ‘나오면 죽어. 물 안에 있어.’ 여기서 두 번째 영적 그림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잡혀야 산다’였고, 이제는 ‘안에 있어야 산다’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15장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도, 생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서 마치 그것이 인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날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점점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지는 실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악을 피해야 하며,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쓰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선을 행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표현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물론 주님께 붙잡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존중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 자유롭게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붙잡는 울타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거짓을 버려라’, ‘탐욕을 버려라’ 하는 말씀들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계명들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였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속박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질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님의 계명은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악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몇 순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자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자유다’, ‘내 판단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지의 모습입니다. 가지가 ‘나는 이제 줄기가 필요 없다’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과 자기 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이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한 사람의 인상적인 목회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에서 어떤 오해가 생겨 약 십 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당이 굿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여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나는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는데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리메인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남겨 두시고 보존하십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감동,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을 찾았던 경험 등은 모두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과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사람의 깊은 내면에 보존하시며,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때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과 아무 관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과거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한 말씀을 듣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다가 오래전에 묻혀 있던 것이 갑자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주님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중심은 기이한 현상 자체보다 ‘십 년 동안 기다리신 주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메시지가 참 따뜻해집니다. 인간은 주님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쉽게 놓지 않으십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끝까지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흘러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적 섭리는 모든 순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이 돌아설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시고,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보존하시며,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이 사람의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로 들립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태양을 예로 듭니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태양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은 사랑에, 빛은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의 열과 빛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연못의 물과 포도나무와 가지와 태양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환경이고, 가지에게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이며, 자연계의 생명에게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적 생명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사의 삶을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말이 전체 이야기를 잘 정리해 줍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수도는 결국 매일의 삶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 한복판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붙잡는다’는 말 역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붙잡을수록 이웃을 더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때 그것이 체어리티가 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신앙은 결국 그의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잡혀서 살아라’라는 강렬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붙어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라’로 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붙잡힘 거함 열매 맺음’입니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삶이 됩니다.

 

연못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금붕어에게 자신을 붙잡는 손이 살리는 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으며,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물고기처럼 억지로 붙잡혀 옮겨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며 스스로 그 손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연못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듯,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며, 거듭남이란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면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열매로 돌려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못 속에서 주님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도, 좁고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심지어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연못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섭리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말씀의 깊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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