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3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같은 신앙의 진리인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 이것은 천주교가 가르치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終身童貞, Perpetual Virginity of Mary)에 관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남자와 관계없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그의 동정성이 보존되었으며, 출산 이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영원한 동정녀’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이파르테노스’(Aeiparthenos)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역사였으며, 마리아의 몸과 삶이 그 특별한 소명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되었다는 신앙적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정녀였다고 분명히 증언하지만, 출산하는 순간의 신체적 상태와 그 이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칠까요?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은 누구였을까요? 무엇보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이 주님의 신성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진리일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와 요셉의 사생활에 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직접 증언하는 사실과 교회가 후대에 확정한 교리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동정과 결혼을 어떤 영적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경의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 및 상응의 가르침을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6–507항에 나타납니다. 496항은 예수님께서 인간 남성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고 설명합니다. 499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보존되었다고 가르치며, 500항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 친족들이었다고 해석합니다. 501항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세 가지 주장으로 구별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기 전까지의 동정(virginitas ante partum)이고, 둘째는 예수님을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보존된 동정(virginitas in partu)이며, 셋째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도 지속된 동정(virginitas post partum)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의 교리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성경적 근거와 신학적 의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특히 첫째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반면, 둘째와 셋째는 마리아의 출산 과정과 이후 삶에 관한 추가적인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세 가지 모두를 신앙의 진리로 고백하지만, 이를 검토하는 우리는 각각의 근거와 의미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천주교가 평생 동정을 단순한 신체적 순결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께 대한 전적 헌신의 표지로 이해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교리서 506항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의심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 상태의 표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교리를 단순히 신체적인 동정 여부에 집착하는 가르침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출산 전 동정에 관해서는 성경의 증언이 매우 분명합니다. 마1:18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마1:20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눅1:34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고 묻고, 눅1:35에서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잉태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48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이러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특별한 질서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마리아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습니다. 주님은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으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단순히 놀라운 기적이나 마리아의 순결을 보여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기원과 직접 연결되는 성육신의 본질적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사실을 부정하면 주님의 출생을 일반 인간의 출생과 구별하는 중요한 근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까지 동정녀였다는 사실은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산하는 순간에도 마리아의 신체적 동정성이 온전히 보존되었다는 두 번째 주장은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는 주님의 탄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손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룩하게 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출생이 일반적 출산과 달랐다는 특별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렇다고 천주교가 주님께서 실제 인간의 몸을 취하지 않으셨다거나 출생 자체가 단순한 환상이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주님께서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출생이 마리아의 동정성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실제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증언할 뿐, 출산 순간의 구체적인 신체적 과정이나 마리아의 신체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눅2:7은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 출산이 일반적인 신체적 출산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동정녀 잉태와 신적 기원을 중요하게 설명하지만, 확인되는 주요 직접 본문만으로는 마리아가 출산하는 순간에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는지에 관한 별도의 교리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출산 중 동정이 반드시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지만, 이를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직접적인 근거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가 신학적으로 확정한 내용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출산 후의 평생 동정은 성경 해석에서 더욱 직접적인 논쟁을 일으킵니다. 마13:55-56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형제들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자매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막6:3에도 같은 취지의 기록이 나타나며, 막3:31-35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을 찾아온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1:19에서 바울은 야고보를 ‘주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표현을 일반적인 가족관계의 문맥에서 읽으면 예수님께 실제 형제자매들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들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다른 자녀들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엄밀한 가족관계의 용어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가까운 친족을 형제라고 부르는 관습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리서 500항은 야고보와 요셉이 다른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이 마리아의 다른 출산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들이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이었다는 해석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 표현만으로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이들이 모두 친족이었다는 천주교의 해석 역시 성경이 직접 명시한 관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결국 복음서의 가족관계 표현을 해석할 때에는 그 문맥과 언어적 관습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어느 한쪽의 결론을 처음부터 확정된 사실로 놓고 본문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1:25 역시 중요한 논쟁의 대상입니다. 이 말씀은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낳기까지’라는 표현을 근거로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특정 시점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이후에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1:25는 예수님의 출생 이전에 요셉과 마리아가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출산 이후의 결혼생활을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눅2:7의 ‘첫아들’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아들이라는 말이 반드시 둘째나 셋째 아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처음 태어난 아들은 후속 자녀의 유무와 관계없이 특별한 지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들은 마리아가 이후 다른 자녀들을 낳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 가능성을 곧바로 역사적으로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평생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도 이 본문들만으로 직접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지지하는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2세기의 ‘야고보 원복음서’(Protoevangelium of James) 같은 외경 문헌에서도 마리아의 특별한 동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정경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습니다. 4세기에는 헬비디우스가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본문을 근거로 마리아의 출산 후 결혼생활을 주장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반대하여 평생 동정을 옹호했습니다. 이 논쟁은 후대 교회에서 동정과 결혼의 영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생 동정은 천주교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라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속하지만, 오랜 전통 자체가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사실과, 마리아의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까지 직접 확정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에 관한 교리’ DP.48과 TCR.92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들에서 마리아가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마리아의 동정성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는가보다, 주님께서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셨으며, 마리아에게서는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의 본질적인 진리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있으며, 마리아의 출산 이후 생활에 관한 추가적인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평생 동정의 세 측면을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직접적 가르침에서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의 가능성과 신앙적으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교리의 확실성은 서로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볼 문제는 성경에서 ‘동정녀’(童貞女, virgin)가 지니는 영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3081에서 창24:16에 등장하는 리브가가 동정녀이며, 남자가 그를 알지 못했다는 말씀을 해설합니다. 그는 동정녀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나타내며,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결합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남자가 알지 못했다’는 표현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동정녀는 단순히 육체적 성경험이 없는 상태를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순수한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신적 생명의 근원이 인간 남성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동정녀의 상응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해석의 범위를 정확하게 지켜야 합니다. AC.3081은 리브가에 관한 말씀의 속뜻을 해설하는 본문이지 마리아의 평생 동정 여부를 직접 판정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를 마리아 교리에 적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신학적 적용이지, 그가 마리아의 출산 후 동정을 직접 인정하거나 부정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처럼 문자적인 역사적 사실과 말씀의 속뜻을 구별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해석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를 이해하면 육체적인 동정과 영적인 순결을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정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자동으로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고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영적 순결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결혼애’(Conjugial Love, CL, 1768) CL.154에서 결혼을 부정한 상태로 여기는 사람들은 참된 순결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CL.155에서는 평생 독신을 서약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된 순결을 보증하지 않으며, 참된 결혼생활에 대한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CL.156에서는 결혼생활이 독신생활보다 선호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결혼애가 영적 선과 진리의 결합에 상응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한 사랑이라는 그의 결혼관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결혼은 인간의 영적 삶을 더럽히는 낮은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혜가 결합하는 중요한 삶의 형태입니다. 물론 독신이나 동정의 삶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간다면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정생활 자체가 결혼생활보다 본질적으로 더 거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는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요셉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었다면 그의 거룩함이 훼손되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참된 결혼애는 거룩한 사랑이며, 정상적인 부부관계 자체는 죄나 영적인 오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결혼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부관계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인을 ‘성사’(聖事, sacrament)로 인정하며, 배우자 사이의 사랑과 자녀의 출산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질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평생 동정 교리를 결혼에 대한 멸시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동정을 일반적인 결혼생활에 대한 부정으로 설명하기보다, 주님의 성육신이라는 유일한 사건에 온전히 봉헌된 특별한 소명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소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출산 중의 신체적 상태와 출산 이후의 모든 부부관계까지 신앙의 필수적인 진리로 확정해야 하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나 결혼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3:31-35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영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참된 관계가 혈연이나 외적 조건보다 깊은 영적 차원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의 신체적 상태에 관한 추정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믿음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오늘 우리의 신앙에 던지는 질문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신적 생명을 받으시고,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일반 인간과 달리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리아가 어떤 신체적 상태를 유지했으며, 요셉과 어떠한 결혼생활을 했는지는 주님의 신적 기원과 인성 영화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같은 방식으로 요구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주님께서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이며, 마리아의 출산 순간과 이후 생활에 관한 세부 사항은 그만큼 직접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무조건 입증하거나 반박하는 데 있지 않고, 동정녀에게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영적 출생 역시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이 거짓과 악에서 돌아서고 순수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 안에 천국의 생명을 이루십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순결은 단순한 육체적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거짓과 악으로 더럽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SL.RC.033 해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전과 낳을 때와 낳은 후에도 평생 동정녀였다’라는 명제에는 구별하여 판단해야 할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인간 아버지의 개입 없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셨다는 출산 전 동정은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며,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도 중요한 신적 진리입니다. 둘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는 순간에도 신체적인 동정성을 보존했다는 출산 중 동정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이지만, 성경은 그 구체적인 출산 과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요셉과 부부관계를 맺지 않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는 출산 후 동정 역시 오랜 교회 전통에 근거하지만, 성경만으로 그 역사적 사실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음서의 형제자매 언급은 마리아에게 다른 자녀들이 있었다는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친족관계에 관한 다른 해석도 존재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 역시 이 문제를 명확히 해결한다고 주장할 근거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가 실제로 평생 동정녀였을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존중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증언하는 동정녀 잉태와, 출산 중 및 출산 후 동정에 관한 후대의 교리적 확정을 동일한 수준의 직접적 신적 증언으로 취급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육체적 동정 자체를 결혼생활보다 자동으로 더 높은 거룩함의 조건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동정녀의 속뜻은 거짓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와 선과 진리의 결합에 관계되며, 참된 거룩함은 외적 신체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출산 전후 생활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오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구속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RC.032.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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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이것은 천주교의 대표적 마리아 교리 가운데 하나인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라틴어로는 ‘콘켑티오 임마쿨라타’(conceptio immaculata)라고 하며, 오늘날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로 ‘원죄 없으신 잉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 비로소 특별히 거룩해졌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 자신이 어머니 안에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으며, 평생 어떠한 개인적인 죄도 짓지 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마리아가 특별히 준비되었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모든 인간이 죄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면 어떻게 마리아 한 사람만은 처음부터 원죄 없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죄 없으신 거룩한 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어머니 역시 원죄가 없어야 했던 것일까요? 무엇보다 마리아가 특별한 은총으로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마리아 개인의 거룩함을 넘어, 주님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였으며,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의 성향과 주님께서 이루신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검토하려면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유전악과 주님의 구속 및 영화의 질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무염시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염시태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 자신입니다. 이 교리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교황령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확정했습니다. 그 내용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원죄’(原罪, original sin)의 모든 더러움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가 마리아를 구원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에 따르면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하여 구원받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달리 죄에 빠진 다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되는 특별한 방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흔히 ‘예방적 구속’(preservative redemp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마리아는 구원이 필요 없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마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90–493항에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491항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설명하고, 492항은 그 특별한 거룩함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493항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생 모든 개인적인 죄에서 자유로웠다고 밝힙니다. 여기에는 구별해야 할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 생애 동안 실제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 둘을 연결하면서 마리아가 구원자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성육신에 합당하도록 준비되었다’라는 신학적 설명과 ‘주님께서 성육신하시려면 반드시 죄 없는 어머니가 필요했다’라는 논리적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으로 설명하지, 하느님께서 원죄 없는 어머니가 없으면 성육신하실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마리아의 이러한 특별한 보존이 실제로 계시된 진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염시태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과정도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으로 이해하였으며,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을 대비하는 신학적 해석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교리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립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 서방교회에서는 마리아의 거룩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원죄에서 정화되었는가를 놓고 신학적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한다는 가르침과 마리아의 특별한 무죄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미리 죄에서 보존되었다는 신학적 설명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이후 무염시태 교리를 정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과정을 새로운 교리를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신앙의 유산을 점차 명확하게 이해한 과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 그 교리가 신적 계시에 근거한 진리인지는 구별하여 검토해야 합니다. 어떤 교리가 오랜 논쟁을 거쳐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바로 성경의 속뜻에 포함된 신적 진리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무염시태의 근거로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는 눅1:28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인사하며, 주께서 그와 함께하신다고 전합니다. 가톨릭 신학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케카리토메네’(kecharitōmenē)를 중요하게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은총을 받은 상태를 나타내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충만하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은총이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역사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근거는 창3:15입니다. 천주교는 뱀과 여자, 그리고 그 후손 사이의 적대 관계를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연결하여 이해하며, 마리아를 ‘새 하와’(New Eve)로 해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순종을 구원의 역사와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본문 자체가 마리아에게 유전적 악의 성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까지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의 인물과 사건들은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와 인간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담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후대의 특정 교리에 단순히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 명시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통하여 도출한 결론을 구별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교리가 곧바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무염시태론과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에서 인간에게 전해지는 악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최초의 인간 아담이 지은 한 번의 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 evil)은 부모와 조부모, 여러 세대의 조상들이 실제적인 삶에서 형성한 악한 성향이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성향은 인간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면서 실제적인 악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456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부모에게서 유전악을 물려받지만, 그 유전적 성향 자체 때문에 실제적 죄를 범한 사람으로 책망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악을 선택하고 행할 때, 그 실제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악을 향한 성향과 관계되며, 이미 개인적으로 범한 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주장과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주교의 원죄를 스베덴보리의 유전악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아담의 죄에 대한 후손 개개인의 직접적인 개인적 책임이나 단순한 법적 죄책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원죄는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에 전해진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인간이 스스로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물려받은 상태입니다. 교리서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상처를 입었으며,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영향을 받고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죄로 기우는 성향을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세례로 원죄가 제거된 사람에게도 이러한 성향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서로 관련된 문제를 다루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닙니다. 가톨릭의 무염시태가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존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의 유전적 성향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가톨릭의 원죄 개념에 따른 무염시태가 곧바로 논리적으로 반박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야 두 전통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염시태를 검토할 때, 가장 결정적인 본문은 AC.1573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항목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겉 사람 안에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유전악이 있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오는 유전악은 전혀 없었지만, 인간 어머니인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외적 인성에는 유전적 악이 있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AC.1573은 이러한 모성적 유전성이 주님께서 실제로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유전악을 취하셨다는 사실과 실제로 죄를 지으셨다는 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실제적인 악을 행하셨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통하여 시험을 받으셨지만,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으며, 그분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영화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주님께서는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그 인성을 점차 신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가 특별히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AC.456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일반 인간이 거듭날 때, 유전악과 실제적인 악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 악은 주님의 섭리에 의하여 분리되고 주변으로 물러나며, 인간은 주님께서 그를 악으로부터 붙드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만큼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인간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선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조차 자신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은 악과 거짓이며, 그들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반 인간과 전혀 다른 일을 이루셨습니다. AC.4564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악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일반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주님의 영화 사이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악에서 분리되고 선 안에 보존되지만, 주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전적 악을 완전히 제거하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성육신과 구속의 핵심은 마리아의 무죄한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취하신 인성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주님의 시험과 구속의 관계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히4:15는 주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시험받으셨다는 사실과 죄 없으셨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그 시험에 굴복하여 죄를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시험을 단순히 인간에게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세력과 싸우시고, 그들을 이기심으로써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으며, 동시에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자연적 인성은 이러한 시험이 실제로 일어나는 자리였으며,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악의 성향을 취하셨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주님의 거룩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왜 실제적인 시험을 받으셨으며 어떻게 구속과 영화를 이루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님의 성육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성육신론에서 도출되는 판단이지, AC.1573 자체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라는 후대의 가톨릭 교리를 명시적으로 논박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문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그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염시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가 실제로 많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을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리아가 지상 생애 동안 어떤 구체적인 죄를 범했는지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마리아의 일생과 그의 모든 내적 상태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염시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특별히 죄 많은 사람으로 묘사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천사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한 복된 여인입니다. 눅1:38에서 그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천주교는 이러한 고백이 무염시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미리 구속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마리아에게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가 주님의 은총을 받고 거룩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인간의 거룩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어떤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참된 선과 거룩함의 근원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선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 거룩한 삶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천국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 자체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피조물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마리아의 거룩함을 하느님에게서 독립된 속성으로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모든 은총과 거룩함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거룩함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보존되었다는 특별한 상태를 신적으로 계시된 진리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이러한 특별한 무죄 상태를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유전적 인간성을 취하신 주님의 시험과 영화에 신학적 무게중심을 둡니다. 또한 그가 설명하는 거듭남의 질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보다, 주님께서 그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어떻게 다루시고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가에 더욱 집중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를 찬양했다는 사실도 귀중한 진리입니다. 또한 천주교가 마리아의 특별한 거룩함을 그의 독립적인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근거한다고 가르치는 점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으며, 평생 모든 실제적인 죄에서도 자유로웠다는 주장은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이 교리를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고, 그 유전적인 것을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완전히 제거하시고, 인성을 영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마리아가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특별한 상태에 있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인간이지만, 성육신의 능력과 구속의 완성은 오직 주님께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특별한 신분이나 거룩함을 선언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중심에는 마리아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의 출생과 거룩함을 바라보는 데 머무르기보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거듭남의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유전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선과 진리의 생명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의 유전적 한계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그것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주시며, 그들이 천국의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가장 위대한 신비는 마리아의 특별한 출생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인간의 구원과 거룩함의 유일한 근원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2 해설)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되었으며, 모든 참된 거룩함과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무염시태를 마리아가 구속이 필요 없는 독립적인 존재였다는 뜻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구속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에서 완전히 보존되었고 평생 개인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넘어서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573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유전악을 취하셨다고 직접 가르치며, AC.4564에서는 주님께서 그 유전적인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자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가톨릭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므로, 두 교리의 차이를 단순한 직접적 모순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가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필수적인 전제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존중하거나 그의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과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확증되지 않는 특별한 무죄의 출생 상태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신적 진리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마리아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자신의 능력으로 영화하셨고, 모든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구원의 근원 역시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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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3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 주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칭호인가, 영화된 주님의 본성을 혼동하는 표현인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 이 명제는 천주교의 마리아 교리를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신학적 출발점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은 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낳은 어머니이며, 교회가 특별한 공경을 드리는 복된 여인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이 칭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중요한 신앙 표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의문이 생깁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어머니를 가지실 수 있는가?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말은 그가 신성의 근원이라는 뜻인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한 인간 여성에게 지나치게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하느님의 신성을 만들어 냈거나 하느님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를 검토하려면 이 칭호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확립되었는지 이해하고,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성육신과 인성의 영화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은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466항과 495항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교리서 495항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육신으로 낳은 분이 성부의 영원한 아들, 곧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테오토코스’(Theotokos)이며,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낳은 이’ 또는 ‘하느님을 출산한 이’로 번역됩니다. 이 칭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중요한 교리적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논쟁의 핵심은 마리아 개인을 얼마나 높이 공경해야 하는가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신적 말씀과 특별히 결합한 별개의 인간 인격이 아니라, 신적 말씀이 친히 인간이 되신 한 위격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단순히 어떤 독립적인 인간 인격의 어머니이고, 그 인간 안에 하느님이 별도로 거하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마리아가 신성의 기원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교리서 466항은 신적 말씀의 본성이나 신성이 마리아에게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신적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육신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우선 마리아론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칭호를 처음부터 마리아 숭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표현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보호하려 한 핵심적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을 신적 말씀과 분리된 독립적 인간 인격으로 이해한다면,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어느 인간과 특별히 결합하신 사건으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테오토코스’라는 칭호의 본래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칭호는 천주교뿐 아니라 정교회와 상당수 개신교 신학 전통에서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칭호가 올바른 그리스도론적 의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칭호로부터 발전한 모든 후속 마리아 교리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후 마리아의 특별한 지위와 공경을 설명하는 신학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칭호의 본래 의미와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한 마리아 공경 및 신심 체계를 구별해야 합니다. 후대의 신학적 발전을 비판하기 위하여 처음 칭호에 담긴 진리까지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처음 칭호가 지닌 정당성을 근거로 그 이후의 모든 교리를 자동으로 인정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눅1:31-35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43절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천주교가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인용하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의 ‘내 주의 어머니’라는 표현과 후대에 확립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리적 칭호는 그 역사적·신학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으며, 그분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지만, 마리아가 신성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또한 46절, 47절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스스로 신적 지위를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이 보여 주는 마리아의 복됨은 그가 신성의 근원이 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92에서 그는 주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분의 영혼은 마리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일반 인간처럼 인간 아버지에게서 생명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혼은 신성 자체이며,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것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한 자연적 인성이었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일반 인간의 출생과 주님의 성육신을 구별하면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이신 여호와로부터 신성을,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분리된 두 신적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며, 아들은 그 신성이 인간에게 나타나기 위하여 취하신 인성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도록 자연적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지만, 주님의 신성을 낳거나 그 신성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마리아를 신성의 기원으로 이해하지 않는 천주교의 공식 설명과 중요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두 전통의 차이는 성육신의 출발점보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DL.35와 TCR.102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점차 벗으시고, 그분 안에 계신 신성으로부터 오는 인성을 입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벗으셨다’는 표현을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단순히 버리시고, 신성만 남기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싸움을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유한하고 자연적인 인간적 요소를 극복하시고, 그 인성을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 영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화는 신성이 인간 안에 머무는 정도의 결합이 아니라, 인성 자체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영화 이후에도 영원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성의 상태에 머물러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며, 그분은 신적 인성으로 영원히 계십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전통적 그리스도론과 중요한 차이를 보입니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고, 신성과 인성이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고백하지만, 그 인격 안에서 인성이 영화되는 방식과 최종적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102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인들이 주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아들이시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잘못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아들이셨다는 사실은 참되지만, 영화 이후에도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적인 것에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에서는 더 이상 참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요2:4와 19:26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말씀들을 이러한 구별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 본문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여자여’라는 호칭 자체가 모자 관계의 부정이나 무례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요19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의 장래를 돌보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만으로 주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 마리아와의 자연적 모자 관계를 부정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 인성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의 직접적인 진술과 스베덴보리의 인성 영화론에 근거한 해석을 구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입장은 TCR.94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는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이해가 주님의 신성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에서 마리아를 다른 성인들보다 높이고 성인들의 여왕으로 공경하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신심이 지나치게 발전하면 주님을 영원한 신적 존재로 이해하기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자연적 인간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비판이 향하는 대상을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에서 감당한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정체성을 자연적 모자 관계 안에 가두거나, 마리아에게 지나친 종교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주님의 유일한 신성을 흐리게 만드는 이해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또한 TCR.94에 나타나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강한 비판은 스베덴보리가 18세기의 종교적 상황을 바라보며 제시한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를 오늘날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이라고 가르친다는 주장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과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를 피조물로 인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신이라고 선언했는가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부여한 특별한 칭호와 공경이 실제 신앙생활에서 주님을 향한 예배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앞으로 다룰 마리아의 여러 교리와 신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마리아에 관한 특별한 영적 경험도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이 흰옷을 입고 나타난 마리아를 보았으며,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고 주님께서 자신에게서 태어나셨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또한 마리아는 주님 안에 모든 신성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여전히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첫째,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적 증언과 동일한 종류의 자료로 제시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마리아의 말 가운데 주님께서 ‘하나님이 되셨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원래 신적 존재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하나님이 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에서 주님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신성 자체였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변화는 신성의 획득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의 영화입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면 TCR.827은 마리아를 주님의 신성과 구별되는 피조물로 이해하며, 천국에서도 그가 오직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보는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보여 줍니다. 특히 이 기록은 마리아에 대한 그의 평가가 단순한 역사적 인물에 관한 논평이 아니라, 영화된 주님과 천국의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판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 칭호를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신적 위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 칭호 자체가 마리아를 신성의 근원으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문제는 영화 이후의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자연적 인성을 취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참되지만, 그분은 그 인성을 영화하여 온전히 신적 인성으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진술과 ‘영화된 주님은 지금도 마리아의 아들이시다’라는 영원한 관계에 관한 진술은 같은 의미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마리아가 신성을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그런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성이 어떻게 영화되었으며, 그 영화 이후 자연적 모자 관계를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계속 말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성육신하신 신적 위격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지속적으로 고백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화된 주님의 인성이 더 이상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인간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두 전통 사이의 실제적인 신학적 쟁점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했다고 해서 마리아라는 인물의 신앙과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눅1:48에서 마리아는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복된 여인으로 기억하고 그에게 맡겨진 거룩한 쓰임을 존중하는 것은 성경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의 복됨을 이해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역할이 마리아에게 독립적인 신적 권위나 구원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국의 모든 천사와 사람은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받은 인간이며, 그분을 예배하는 천국의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존중하는 신앙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인도한다면 그 안에는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중이 마리아를 주님께 나아가는 데 필요한 별도의 중재자나 특별한 영적 권위자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근거는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무염시태와 성모 승천, 하늘의 여왕, 마리아의 전구와 공경을 다룰 때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동시에 이 문제는 천주교만이 아니라 개신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개신교 신자들 역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나란히 존재하시는 별개의 신적 존재로 생각하거나, 성육신 이후에도 신성과 인성이 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해 역시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며, 아들은 그 신성이 세상에 나타나신 인성과 관계되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작용과 관계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된 세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모성에 관한 질문도 결국 우리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지식을 자신의 영적 우월감으로 삼는다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깊은 진리를 배우고도 그 진리가 지향하는 사랑과 겸손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아는 목적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신학적 위치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리아가 보여 준 믿음의 가장 귀중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46절, 47절에서는 자신을 높이는 대신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은 그가 주님보다 높은 영적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쓰임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눅8:21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 혈연관계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영적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길은 그에게서 주님의 영광을 나누어 받는 특별한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 성육신의 신비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가 보여 준 순종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여인이었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여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신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참된 신앙은 마리아에게서 멈추지 않고, 마리아가 자신의 하나님이자 구주로 찬양했던 바로 그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SL.RC.031 해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다’라는 명제에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이시라는 중요한 그리스도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칭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확립되었으며, 천주교는 마리아가 신성의 근원이라거나 하느님보다 높은 존재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명제 자체를 마리아를 신격화한 오류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마리아가 주님께 자연적인 인성을 제공한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영화 이후에도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인성을 지니신 채 영원히 그의 아들이시라는 이해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시고, 아버지이신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마리아가 신성을 낳았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의 인성의 영화와 그 이후 마리아의 모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류의 핵심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영화된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관계로 계속 적용하거나, 그 관계에서 마리아의 특별한 영적 권위와 구원적 역할을 확대하여 도출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후대의 마리아 공경과 전구에 관한 문제는 이 칭호 자체와 구별하여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는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며 존중받아야 할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이지만, 모든 신적 생명과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이 명제를 이해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그 인성을 영화하여 영원한 신적 인간이 되신 주님의 유일한 신성과 영광을 올바르게 아는 데 있습니다.

 

 

 

RC.032.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SL.RC.032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마리아는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 없이 보존되었다’ - 무염시태는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진리인가? ‘마리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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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 AC.320-448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 소개

 

‘창4, AC.320-448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가운데 창세기 4장에 해당하는 AC.324-442를 중심으로, 그 앞뒤에 배치된 사후의 삶과 영에 관한 설명인 AC.320-323과 AC.443-448까지 번역하고 해설한 책입니다. 전체 593쪽에 걸쳐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 메인 해설, 필요한 주제에 대한 심화를 함께 수록했습니다. 창세기 4장은 흔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최초의 형제 살인 사건과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셋과 에노스의 출생을 기록한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한 가정에서 일어난 비극이나 초기 인류의 계보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신앙이 마침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소멸시키며, 그러한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시는 영적 역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신앙이 무엇을 알고 고백하는가에 머무르지 않고, 그 신앙 안에 어떤 사랑이 살아 있는지를 묻는 책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그렇게 거듭난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이 점차 주님에게서 오는 지혜보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신뢰하고,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면서 본래의 질서에서 멀어지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4장은 이러한 변화가 신앙과 예배, 교리와 삶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기 시작하면 신앙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관한 말과 교리는 남아 있으면서, 그 안에서 사랑이 점차 밀려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심각한 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이 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아벨을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개별적인 자선 활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선을 원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자신의 관계와 일을 바르게 이루려는 사랑이며, 실제 삶에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단순히 신앙 지식이 많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를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지식과 고백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만으로 신앙의 전부가 될 때 생깁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은 신앙과 사랑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래 함께 있어야 할 것이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나고 아벨이 그 뒤에 태어난다는 순서도 이러한 문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의 지식이 먼저이고 사랑의 실천이 나중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배우는가 하는 순서와 무엇이 신앙의 생명인가 하는 질서는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을 배운 뒤 선택적으로 덧붙이는 장식이 아닙니다. 신앙이 살아 있도록 하는 내적인 생명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구별을 통해, 신앙에 관하여 많이 안다는 사실과 그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이 장 전체를 읽는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는 장면에서는 예배의 내적인 성격이 드러납니다. 겉뜻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예물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제물은 받으시고 다른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를 예물의 재료나 직업의 차이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가 어떤 마음과 사랑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같은 종교적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인정받으려는 마음과 자기 의가 중심에 있는가에 따라 내적인 성격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하나님께 인정받을 특별한 예물의 종류를 찾게 하기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신앙고백의 내면을 돌아보게 합니다. 입술의 말과 외적인 정성 안에 어떤 생명이 담겨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하는 모습은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나타나는 내적인 반응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신앙과 예배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자신이 기대한 방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분노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열심인지, 자신의 우월함과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마음인지 살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은 이러한 내적 상태를 드러내며, 악이 인간을 지배하기 전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루어야 하는 문제로 독자를 이끕니다. 이 책은 가인을 단순히 우리와 다른 악한 사람으로 멀리 두기보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분노와 자기 사랑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살펴보게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이 장의 가장 비극적인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말은 종교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이웃을 미워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을 사랑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구원이나 참된 신앙에 관계없는 것으로 밀어낼 때, 신앙 안에서 사랑이 설 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리는 남아 있어도 그 교리가 지향해야 할 생명은 약해집니다. 이 해석을 따라 읽으면 아벨의 죽음은 과거에 일어난 한 번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확신이 오히려 이웃을 향한 무관심과 냉혹함을 정당화하는 곳에서도 그 영적인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가인의 대답은 그러한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웃의 삶과 고통을 자신의 관심 밖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이웃을 향한 사랑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이 장면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태도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모든 사람의 삶을 대신 책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의 선을 원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선을 행하는 일까지 신앙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인의 대답은 바로 그 관계를 끊어 버리려는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는 말씀과 가인이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도 이러한 내적인 흐름에서 설명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단지 좋은 덕목 하나가 부족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제거된 신앙은 스스로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참된 영적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가인이 땅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주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유리하며 방황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거주지의 상실을 넘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에 관한 안정된 방향을 잃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 책은 이러한 말씀들을 주님의 자의적인 분노로만 읽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무너질 때 인간이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의 이야기는 가인에 대한 정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만나는 사람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십니다.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는데도, 주님께서는 신앙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가르침이 보존되어야 그것을 통해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도 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사랑 없는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표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너뜨린 질서 가운데서도 회복에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깊은 배려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면서도, 그 인간을 다시 선으로 이끄는 데 필요한 길을 지키십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 체계로 확대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어지는 후손들의 이름은 단순한 가계의 목록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적 흐름이 변해 가는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성경의 이름들을 읽는 방식도 중요해집니다. 같은 이름이 다른 장에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동일한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4의 에녹과 창5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된 에녹은 각각의 문맥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 책은 이름 하나에 고정된 뜻을 붙여 모든 곳에 적용하기보다, 그 이름이 어떤 계열에 속하고 어떤 흐름 속에 등장하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상응을 이해한다는 것은 낱말의 뜻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 읽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은 상태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그 결과는 신앙 자체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지키겠다고 하면서 사랑을 밀어냈는데, 마침내 신앙도 보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라멕이 사람과 소년을 죽였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심각한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단순히 옛사람의 폭력적인 자랑으로만 읽으면 장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인 문제를 놓치기 쉽습니다. 신앙을 참된 신앙이게 하는 생명을 제거한 채 그 이름과 외형만 지키려 할 때, 인간의 내면에는 무엇이 남는가 하는 질문이 여기에서 제기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계보 안에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겉뜻에서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생활, 악기를 다루는 일, 금속을 가공하는 기술의 기원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각각 사랑과 선, 신앙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이 자연적인 삶에 나타나는 차원과 관계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4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쇠퇴만 이어지는 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내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선과 진리를 마련하십니다. 또한 교회의 생명은 내적인 사랑이나 교리적 이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무르지 않고, 외적인 삶에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생각하게 합니다.

 

창4:25에서 셋이 태어나는 장면은 이러한 회복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주님께서 새롭게 주신 신앙으로 설명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나타내고 셋도 신앙을 나타내지만, 그 둘의 성격은 같지 않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반면 셋은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게 하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장의 결론은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여 사랑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진리를 배우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과,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셋의 등장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열어 주시는 새로운 길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나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삼는 교회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가르침을 소홀히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가르침이 무엇을 위해 주어지는지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인정하며 예배하는 모든 일이 이웃을 향한 선한 사랑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단순히 특정한 호칭을 입으로 말하는 행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어떻게 인정하며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4장은 사랑을 소멸시킨 신앙의 비극에서 시작하여, 신앙을 통해 사랑이 다시 심어지고 예배의 내적인 생명이 회복되는 방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가 쇠퇴한 이후에는 신앙의 가르침을 통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길이 중요해집니다. 이것은 사랑보다 지식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진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그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사랑의 삶을 열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전의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곧 모든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아시며,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다시 인도하십니다. 이 장의 교회사는 인간의 실패를 보여 주면서도, 그 실패보다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지혜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책의 앞부분인 AC.320-323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삶이 계속된다는 설명을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 갓 들어온 사람이 자신이 여전히 이 세상에 있고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기록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삶이 계속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놀란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의 감각과 사고와 언어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후의 인간을 감각도 인격도 없는 희미한 존재로 상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감각과 사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곧 사랑과 지혜가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을 지각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의 문제와, 무엇을 사랑하며 그 능력을 사용하는가 하는 삶의 문제는 구별해야 합니다.

 

책의 마지막인 AC.443-448에서는 사람들이 생전에 영혼이나 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관한 사례들을 살펴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을 단순한 생각이나 아무런 실체도 없는 관념으로 이해하는 견해를 비판하며, 영이 실제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이 유기적인 실체라는 말은 영이 자연적인 육체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은 별도의 심화를 통해 영적인 실체와 자연적인 물질을 구별하면서, 영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과 영을 지상의 물체처럼 상상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봅니다. 또한 자신이 여전히 육체 안에 있다고 믿었던 영들의 사례와 생전의 지인들과 나누었다는 대화를 통해, 사후의 삶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이러한 기록은 그의 영계 경험에 관한 증언으로 읽으며, 원문이 말하는 내용과 해설자가 덧붙이는 설명을 구별하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4장 본문과 그 앞뒤의 영계 경험 기록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인간의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만납니다. 본문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남아 있어도 사랑이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봅니다. 영계 경험 기록에서는 육체가 사라져도 인간의 감각과 생각과 내적인 삶이 계속된다는 설명을 읽습니다. 이 두 부분을 함께 읽으면 눈에 보이는 외형이나 말로 고백하는 내용만으로 인간의 생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자신이 아는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이웃에게 어떤 마음으로 행동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사후의 삶에 관심을 갖는 일과 오늘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서로 동떨어진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 형성되는 내적인 삶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하나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번 책에서 메인 해설과 심화를 함께 마련한 이유도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메인 해설에서는 각 번호의 논점을 충분히 설명하고, 본문의 흐름과 필요한 개념을 그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사랑의 관계, 교회 상태의 변화, 상응을 읽는 방법, 영적인 실체와 자연적인 육체의 차이처럼 독자가 별도로 질문할 수 있는 문제들은 필요한 곳에서 심화로 살펴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설명의 양 자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 읽는 독자가 표현의 낯섦 때문에 핵심을 놓치지 않도록 돕는 것입니다. 또한 가인과 아벨, 성읍과 계보, 악기와 금속 등의 의미를 단순한 상징 목록으로 제시하기보다, 그 각각이 장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말씀의 속뜻은 독특한 지식을 모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신앙과 삶을 비추는 가르침으로 읽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가인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 앞서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도록 권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쉽게 특정한 교리나 교회, 또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사랑을 강조하는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냉정할 수 있고, 진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앙 지식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아는 진리에 따라 정직하게 살고 이웃의 선을 위해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믿는다고 말하는 진리가 실제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은 이러한 질문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찰이 자기 정죄나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 주님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 신앙을 통해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일과 셋을 주시는 일은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무너진 인간을 다시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진리를 잘못 사용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가능한 회복의 길을 지키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안에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는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이웃에게 해야 할 작은 선을 행하며, 주님께 사랑의 생명을 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밝히면서도, 인간을 다시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창4, AC.320-448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신앙 안에 사랑을 다시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책입니다. 가인과 아벨, 받아들여지는 예배와 그렇지 않은 예배, 아벨의 핏소리와 가인의 방황, 가인을 보호하는 표, 성읍과 후손들의 계보, 라멕의 황폐한 상태, 새로운 교회를 위한 준비, 셋과 에노스를 통한 회복, 그리고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인간의 삶이 이 한 권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을 연결하는 중심에는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은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익숙해지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 해석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고, 자신이 받은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이어 가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나의 신앙 안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은 살아 있는가?’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설명할 수 있고, 어떤 교리가 옳은지 논증할 수 있으며, 오랫동안 예배를 드려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안에서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아우에 대한 물음 앞에서 책임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사랑을 심을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살아 있는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오늘의 관계와 일 속에서 실천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4, AC.320-448 - 20261101, 본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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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with ChatGPT (20261027)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 소개 ‘창3, AC.182-319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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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V.001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잠언 100선 |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1:7)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자신의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

 

사람은 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복잡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부하고, 경험을 쌓고, 책을 읽고,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지혜의 출발점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참된 영적 지혜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까요?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디에서 비롯되며, 그 지혜가 어떻게 사랑과 결합되고,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잠1:7이 놓인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1:1-6은 이 책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행하는 법과 의와 공평과 정직을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을 밝힌 직후 7절에서는 그 모든 배움의 기초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경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아’(יִרְאָה)는 두려움뿐 아니라 경건한 존경과 경외심을 포함하며, ‘근본’에 해당하는 ‘레쉬트’(רֵאשִׁית)는 시작과 으뜸가는 것을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지식’에 해당하는 ‘다아트’(דַּעַת)는 단순한 정보의 축적을 넘어 삶에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실제적인 앎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모든 학문적 지식을 저절로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을 인정할 때 다른 모든 지식도 올바른 목적을 향해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자신이 아는 것을 어떤 사랑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 죄를 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옥에 갈까 두렵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삼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을 억제하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참된 경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잘못을 피하는 아이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잘못을 피하는 아이를 생각해 보면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아이의 외적 행동은 같을 수 있지만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 동기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2826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특히 AC.2826:13에서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예배, 신앙의 선에서 비롯된 예배, 사랑의 선에서 비롯된 예배를 구별합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지만, 거룩한 경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거스르거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반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AC.3718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의 관계를 음식과 소금에 비유합니다. 거룩한 경외가 없는 사랑은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싱거우며, 거룩한 경외가 있는 사랑은 적절하게 간을 한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 사람은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더욱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구원이 위태로워질까 두려워 악을 피하는 상태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 자체를 싫어하고 멀리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면 잠언이 왜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지혜는 인간 자신의 이해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65-275에서 그는 천사들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다고 설명하면서, 그 근원을 천국의 빛과 열에서 찾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이며, 천국의 열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선입니다. 천사들은 이 빛과 열을 받아들이는 만큼 지혜로워집니다. 특히 HH.268에서는 천국의 사랑이 자신의 선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혜가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존재에게 유익을 주려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사들의 지혜조차 그들 자신의 소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지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주체로 살아가지만, 그 모든 능력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성을 무시하거나 판단 능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해를 성실하게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님을 인정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뜻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능력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여기며 그것을 자기 소유와 공로로 삼으려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성향은 노골적인 교만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도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경험과 공부를 통해 탁월한 판단력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여러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불필요하게 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을 통해 얻은 판단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연구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확인하려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을 향한 겸손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해와 지혜를 감사히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잠1:7 후반부가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잠언이 말하는 미련함은 단순히 지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배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윌림’(אֱוִילִים)은 지혜와 교정을 거부하는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방어하거나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 주어져도 그 지식이 내적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이 이미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뿐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도 살핍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있는지 검토하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비판과 훈계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당한 요구와 잘못된 가르침은 분별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는 맹목적 복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하는 완고함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선과 진리의 궁극적 근원이심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그 기준 아래에서 살피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세상에서 발휘되는 지혜와 영적 지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어려운 이웃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능력, 선한 행동을 무가치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과 지옥’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물론 그의 신학에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을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지혜와 선한 삶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지혜와 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지혜를 더 의지하고 이웃을 위한 선을 외면한다면, 그는 아직 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그 고백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행동으로 나타나는가를 통해 확인됩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자신의 내적 상태를 살피는 데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분노하거나 상처받았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집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자신이 오랫동안 희생하고 책임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불평을 부당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가 정말로 선과 진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지 살펴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마음 안에 이웃을 위한 사랑이 있는지, 아니면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있는지도 돌아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모두 용납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말씀의 빛 아래에 놓고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올바른지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서 인간이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깨달은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와 책임을 다하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지혜와 사랑의 관계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자체로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그것을 배우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제 삶에서 선한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사랑과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서 선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 행동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최종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들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참된 지혜는 옳은 답을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가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키도록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보다 그 진리가 얼마나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이 말씀은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더욱 실제적인 질문이 됩니다. 배우자와 의견이 충돌할 때 우리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서로를 이해하고 더 선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때에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상대방에게 되갚아 주려 합니까, 아니면 무엇이 정직하고 지혜로운 선택인지 분별하려 합니까? 교회에서 자신과 신앙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오류를 드러내어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상대방의 양심과 형편을 존중하려 합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양보하는 사람도 아니고, 갈등을 무조건 피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분노와 욕망이 판단을 지배하지 않도록 살피며,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묻습니다. 또한 잘못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정죄하거나 절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잘못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불필요한 비난을 삼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과하는 작은 행동들이 모두 이러한 삶의 일부입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지혜를 얻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러한 일상의 선택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의지 안에 점차 자리 잡는 과정입니다.

 

결국 잠1:7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으며, 인간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영적 지혜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경외는 두려움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랑과 결합된 거룩한 경외로 변화합니다. 또한 미련함은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고 지혜와 훈계를 거부하는 완고함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의해 끊임없이 교정되고 깊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를 알게 된 것을 자랑하기보다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살피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적 상태를 돌아보고, 자신의 유익을 넘어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찾습니다. 참된 지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옳은 판단을 내리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거나 종교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선과 진리에 반하는 악을 멀리하려는 거룩한 마음입니다. 또한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는 말씀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된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고 교정을 거부하는 것은 미련함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지혜는 지식의 축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인간의 의지와 삶을 변화시키는 거듭남 안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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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갈림길에서 읽는 잠언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법

 

살다 보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상대방의 부당한 태도로 자신의 앞날까지 불안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참고 견디는 것이 믿음인가, 아니면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선택이란 반드시 더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선악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지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분별했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정직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며, 자신도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22:3) 잠언은 위험을 알아보고 피하는 사람을 슬기롭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고통을 무조건 참는 것이 성경적 인내는 아닙니다. 실제로 위험하거나 부당한 관계가 반복된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물론 일시적인 갈등과 지속적인 위협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험이 분명한데도 믿음이라는 이유로 계속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판단력과 분별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선한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참된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가 단순한 호의나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사랑에는 무엇이 상대방과 공동체를 위한 선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함께해야 합니다. 악을 방치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고, 복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과 계속 함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또한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14:15) 갈등이 깊어지면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분노 때문에 성급하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상황을 신중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와 그 결과를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과 직접 부딪힐수록 갈등이 커진다면 적절한 공식 절차나 제삼자의 도움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것은 상대방을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면서도 자신의 책임과 권리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신중함은 결정을 끝없이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확인한 뒤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특별한 응답만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여 진리를 분별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판단과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기도하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준비도 해야 합니다. 가능한 길을 살피고, 각 선택의 결과를 생각하며, 정직하고 책임 있는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반드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선택이 모두 정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어떤 동기로,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느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은 사랑과 의지에 관계되고, 진리는 지혜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선한 의도가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며,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이기심이나 복수심을 위해 사용한다면 참된 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선한 의도이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행동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생각은 정당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상대방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참으로 선한가?’와 함께 ‘그 선을 이루려는 방법도 진실하고 지혜로운가?’를 물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진리가 결합할 때 나타납니다.

 

결국 성경적인 삶이란 언제나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거나 더 많은 고통을 견디는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머무르는 것이 인내이고, 때로는 떠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때로는 정당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선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잠언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고 말씀합니다. 이는 자신의 판단을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신 주님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행동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부당하게 행동하더라도 자신까지 부당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지혜로 분별하고 주님께 받은 자유로 선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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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4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RC.004.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 이 명제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바라보는 신앙적 확신과, 그 확신이 자칫 잘못 이해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영적인 위험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연속체로 이해하며,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총이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에게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종교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 안에 머물며, 교회가 보존해 온 신앙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성사와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전승된 신앙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대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려는 귀중한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교회가 참된 신앙을 가르치고 보존하는 공동체라는 사실과, 그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 실제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과연 같은 것일까요? 바른 교회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가르침이 자신의 내면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특정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제도적 권위가 그 구성원 개개인의 영적 상태를 보증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천주교의 교회론뿐 아니라, 인간이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무엇을 신앙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36–838항은 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설명하면서, 신앙고백과 성사와 교회 통치 및 친교의 유대 안에서 교회와 온전히 결합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제837항은 교회에 온전히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체어리티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합니다. 그 사람은 교회의 품 안에 외적으로 머물러 있을 뿐, 마음으로는 참되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14항 역시 같은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또한 이 문헌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받은 은총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과 성사생활이 인간 안에서 사랑과 선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라는 명제를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로 단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명제는 교회가 보존하고 전달하는 구원의 수단들에 대한 신뢰가, 일부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신앙 상태에 대한 확신으로 옮겨질 때 발생할 수 있는 신앙적 통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공식 교리가 이러한 위험을 경계한다고 해서, 교회 소속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권위, 전통과 규모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공동체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라고 이해하고,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적 계승과 신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면, 그 안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이 올바른 신앙의 길 위에 있다는 확신을 갖기 쉽습니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신앙의 안정과 지속성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확신의 근거가 점차 주님과의 실제적 결합에서 교회 제도에 대한 소속감으로 이동할 때입니다. 처음에는 ‘우리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가르치므로 나는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우리 교회는 참된 교회이므로 나는 이미 참된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다릅니다. 앞의 문장은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야 할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뒤의 문장은 교회의 권위와 정통성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에서, 자신이 어느 공동체에 속하고 어떤 가르침을 인정하는가의 문제로 옮겨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교회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에서, 인간이 자신의 영적 안전을 확인하는 외적 근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위험을 이미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어지는 22절과 23절에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주님께서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으로 종교적 활동을 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에 거해야 참으로 자신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참된 제자의 표지는 단순히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말씀 안에 거한다는 데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역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참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 기준은 외적인 종교적 정체성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인정하는 일이 실제적인 순종과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아무리 귀중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의 마음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에게 주어진 진리는 아직 온전한 영적 생명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참된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과 참된 교회의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NJHD.241–248에 걸쳐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룹니다. 특히 NJHD.242는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에 있으며, 말씀은 인간이 그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NJHD.243에서는 교회가 존재하려면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가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는 사람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를 무시하거나 올바른 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려면 교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인간 안에 교회를 이루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을 향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이해에 지식으로만 머물고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직 참된 교회의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 역시 단순히 진리를 인정하는 생각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적인 삶의 원리가 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천주교회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과 동의만으로 참된 신앙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교회의 기준은 교리적 소속이 아니라,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NJHD.242–243 해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1798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들이 교리적인 차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및 그 밖의 여러 이름으로 구별되어 왔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회들을 구별하실 때 그 결정적인 기준은 단순히 서로 다른 교리적 명칭이 아니라, 그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그는 교회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교리의 차이로 발생하는 분열과 적대감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서로 다른 교리들이 모두 동일하게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리는 여전히 진리와 오류의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하며, 잘못된 교리는 인간의 삶과 신앙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차이를 근거로 다른 공동체 전체를 배척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만을 참된 신앙의 유일한 보유자로 여기는 태도는 주님의 교회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기준입니다. 그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답게, 곧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살아갈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명칭과 역사적 계보, 교리적 정체성이 참된 신앙의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다른 교회들을 잘못된 공동체로 판단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삶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적 이해에 일정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참된 교회의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AC.1798 해설)

 

스베덴보리는 AC.8152에서 이 문제를 한층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가 본질적인 것이며, 교리와 삶에서도 그것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리를 삶과 분리하는 사람들은 참된 영적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교회를 이루는 것은 삶이지 교리 자체가 아니며, 교리는 삶이 되는 만큼 교회를 이룬다고 밝힙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매우 깊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 안에 저장된 진리는 아직 그 자체로 인간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진리를 얼마든지 설명하고 가르치면서도 실제로는 그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멸시한다면, 그의 이해 안에는 사랑에 관한 진리가 있을지라도 의지 안에는 그 사랑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가 아는 진리가 이미 그의 삶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주님의 교회가 어느 한 장소나 공동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더 이상 인간이 외적으로 가입하는 조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각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표현되는 영적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결합할 때 주님의 보편적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참된 신앙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참된 신앙이 그 사람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보증은 될 수 없습니다. (AC.8152 해설)

 

그렇다면 천주교회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전통, 성사와 전례, 수도생활과 자선활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러한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외적 질서와 형식을 통하여 영적인 것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예배의 질서는 인간이 일상적 생각에서 벗어나 주님께 마음을 향하도록 도울 수 있으며, 오랫동안 전해져 온 기도문은 신앙을 표현하는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도록 도울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선과 봉사는 이웃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수단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내적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그 영적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이웃을 멸시할 수 있고, 오랜 시간 기도하면서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교회의 권위를 열심히 옹호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사랑과 겸손에서는 멀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은 어느 종교 공동체에나 존재하며, 특정 천주교 신자들의 실제 내면을 단정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활동의 외적 모습과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의 가능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는 자신이 배운 교리를 모두 깊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교회는 단순한 신분의 보증이 아니라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실제적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러한 내적 차이를 중요하게 봅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영적 상태는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그 차이는 외적인 종교적 지위보다 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삶의 방향에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미묘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천주교회가 교회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 없는 교회 소속은 구원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837항의 설명은, 교리와 삶을 분리해서는 참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주장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전통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 안에 신앙과 성사와 교회 통치의 온전한 질서가 보존되어 있다고 가르치며, 이러한 교회적 일치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결합에 두며, 외적인 교회의 소속 여부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강조합니다. 이 차이는 교회 제도의 가치를 인정하는가 부정하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제도의 영적 가치를 어디까지 인정하며, 그것이 인간의 내적 신앙과 어떤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도 외적 소속만으로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므로, 이번 명제에서 오류로 지적해야 할 대상은 천주교회의 모든 교회론이 아닙니다. 교회가 지닌 권위와 은총의 수단에 대한 신뢰를 자신의 내적 신앙 상태에 대한 보증으로 바꾸어 놓는 이해, 바로 그것이 핵심적인 검토 대상입니다. 교회가 참된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그 교회에 속한 사람 모두가 그 진리에 따라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돌아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주교 밖의 신앙생활도 생각하게 됩니다. 개신교 신자 역시 자신이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나, 오랫동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해 왔다는 사실에서 신앙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정통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안수를 받았으며 오랜 세월 말씀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성숙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외적 경력과 지위가 그 사람 안의 참된 신앙을 자동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로운 교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도 같은 경고가 적용됩니다. 자신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알고, 내적 의미와 상응의 원리를 이해하며, 다른 기독교 전통의 교리적 문제까지 분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더 높은 영적 위치에 놓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순간 그는 참된 교회에 관한 진리를 배웠으면서도 그 진리의 핵심에서 멀어질 위험에 놓입니다. ‘프로프리움’(proprium)은 종교적인 이름과 지식을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를 많이 알게 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자기 안의 악을 더욱 세밀하게 발견하고,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살아가야 할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교회에 속해 있는가도 중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회를 통하여 배운 진리가 실제로 자신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어떤 생명으로 자라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참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공동체를 내려다보는 기준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 참된 신앙의 중요한 보증이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교회 공동체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실천하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돕는 귀중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오랜 세월 전승된 신앙의 가르침과 예배의 질서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이러한 교회적 소속과 신앙의 외적 질서를 참된 신앙 자체의 보증으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과 교회가 자기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앞의 것은 외적 관계와 소속의 문제이지만, 뒤의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적 삶으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특정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 있다고 여기지 않으시며, 반대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서 참된 선과 진리를 발견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아시며,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그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된 신앙의 보증을 찾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명칭이나 역사적 권위, 종교적 지위와 경력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실제적인 거듭남과 그 열매에서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영적 상태조차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러한 열매를 근거로 자신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선언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자신의 사랑이 점차 자신에게서 주님과 이웃에게로 향하도록 살아가는 것이 참된 신앙의 길임은 분명합니다. 결국 교회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은 ‘당신은 우리 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안전합니다’라는 확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지금도 인도하고 계십니다’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천주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참된 신앙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참된 신앙의 보증은 외적 교회 소속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RC.003.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SL.RC.003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 말은 천주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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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11/01,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33, ‘하나님의 말씀으로’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21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516번에서 522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제목은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퍼셉션의 쇠퇴가 단순한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난주에는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에녹에 이르러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단계가 나타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에녹 교회의 특별한 역할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후대를 위한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에 주목하며,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6-522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으며,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서 퍼셉션도 점차 흐려졌습니다.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는 새로운 단계가 나타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21-24, AC.516-522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는 독특한 기록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창5의 여러 교회는 모두 ‘죽었더라’는 말씀으로 끝났지만, 에녹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왜 에녹의 교리를 후대를 위해 보존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1절은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6에 따르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낳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생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에녹은 앞선 교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알았지만,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흐려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에녹이라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이 나타납니다.

 

22절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AC.518-5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다’(walk with God)는 것이 ‘신앙에 관한 교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에녹’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이 만든 교리 역시 에녹이라고 불렀으며,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도 ‘가르치다’(instruct)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교리를 만든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의 교리가 인간의 추론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진리 체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교리의 내용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이미 퍼셉션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알던 선과 진리를 이제 후대 사람들이 배우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교리의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AC.519는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를 구별합니다. 전자는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사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사랑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하나님’이 주로 신앙과 진리에, ‘여호와’가 사랑과 선에 관계되는 구별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단지 교리를 만들고 가르쳤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에녹의 교리로부터 진리들과 선들에 관한 여러 교리적인 것들이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리의 본래 목적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리는 진리를 많이 알고 설명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에녹의 교리 역시 단순히 지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선과 진리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23절과 24절은 에녹의 특별한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C.520에 따르면 에녹의 삼백육십오 년은 그들의 때와 상태가 비교적 적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에녹의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다른 교회들의 마지막에는 ‘죽었더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에녹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그 교회와 함께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리가 남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교리를 특별히 보존해야 했을까요? AC.521에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를 통해 배우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celestial man)은 주님께서 내적인 길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미 퍼셉션으로 알고 있는 것을 외적인 교리를 통해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퍼셉션을 손상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리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은 외적인 길, 곧 신체의 감각을 통해 지식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인식 방식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교리 자체가 악하거나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내적인 빛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했지만, 후대의 인간은 먼저 외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근원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 능력이 장차 소멸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를 에녹을 통해 교리로 정리하게 하시고, 후대를 위해 보존하셨습니다. AC.521은 후대의 인간이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전처럼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진리의 빛 밖에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길에서 출발하더라도 다시 내적인 빛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AC.522에서는 에녹 교회 자체의 퍼셉션이 어떠했는지도 밝혀집니다. 그것은 ‘아무런 명료함이 없는 일종의 일반적이고 흐릿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점차 자기 바깥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에녹의 교리 형성이 단순히 학문적 관심이나 지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명료하게 퍼셉션하던 능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외적인 교리를 통해 그것들을 알고 분별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6-522를 하나로 모아 보면, 에녹에게서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퍼셉션의 쇠퇴와 교리의 출현’입니다. 에녹 교회에 이르러 퍼셉션은 매우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으며, 이전에 직접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둘째는 ‘후대의 쓰임을 위한 교리의 보존’입니다. 에녹의 교리는 당시 사람들의 필요보다 장차 퍼셉션을 잃게 될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에녹이라는 교회 자체는 지나가더라도, 그 교회가 정리한 선과 진리는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남겨진 것입니다.

 

셋째는 ‘내적인 길에서 외적인 길로의 변화’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후대의 인간은 외적으로 교리를 배우는 데서 출발하여 내적인 빛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에서 주님의 깊은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천적 상태를 유지하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대책을 마련하신 것이 아닙니다.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이미 다음 시대를 위한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해도 선과 진리를 향한 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들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마련하시고 계속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달라지는 것은 인간의 상태이지,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교리를 배우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점차 이해해 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느낌이나 확신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기보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과 참된 교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삶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리 자체가 우리의 최종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에녹의 교리를 보존하신 것은 후대 사람들이 단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리를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로 선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난주 마할랄렐 교회에서 배운 가르침과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진리를 아는 기쁨보다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을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교리는 우리의 머릿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는 일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삶으로 이어질 때, 그 교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오늘은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그 속뜻을 깨닫는 목적은 결국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성찬에서도 중요한 것은 외적인 예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나타내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우는 모든 진리가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고 그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21-24는 단지 에녹이라는 특별한 인물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그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시고, 후대 사람들이 다시 진리의 빛으로 나아갈 길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오늘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사라져도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는 사라지지 않으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미리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교리를 통해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성찬을 통해 주님과의 결합을 새롭게 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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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7, 창5:21, ‘에녹’(Enoch) 이야기를 시작하며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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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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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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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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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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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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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21-24, AC.516-522 중 리딩 필독 세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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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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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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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8) 리딩 본문(창5:25-27, AC.523-525)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5-27, AC.523-525를 통하여 ‘므두셀라’(Methuselah) 교회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므두셀라는 에녹의 뒤를 이은 여덟 번째 교회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교회입니다. 성경은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고,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계보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에녹에서 므두셀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에 이어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1-01(D1)

 

2675, 4, 창5.4, 2026-11-01(D1)-주일예배(창5,21-24, AC.516-522, 성찬), ‘에녹’.pdf
0.66MB
성찬.pdf
0.12MB

 

 

 

주일예배(2026/10/25, 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

※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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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녹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5에서 에녹의 마지막은 다른 족장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아담에서 야렛까지는 모두 ‘죽었더라’로 끝나지만, 에녹에게는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히11:5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흔히 에녹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특별한 인물이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AC.520-52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5:24의 속뜻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것은 에녹이 만든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에녹이라는 개인이 하나님께 옮겨졌다는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일까요? 여기서는 먼저 AC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5를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개별 인물들의 전기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들을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로 해석하고, 그들의 ‘날들’과 ‘연수’를 교회의 때와 상태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 역시 같은 흐름 안에서 에녹 교회의 상태와 그 교회가 남긴 교리의 운명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그 속뜻의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AC.519에 따르면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목적은 후대 사람들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AC.520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가 이 신앙에 관한 교리를 나타내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것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521은 그 이유까지 밝힙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소멸하고, 이후의 인류가 교리를 통해 선과 진리를 배워야 할 것을 예견하셨으므로 에녹의 교리를 보존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에서 ‘데려가심’의 핵심은 ‘사라짐’이 아니라 ‘보존’입니다.

 

이것은 에녹에게 왜 다른 족장들과 달리 ‘죽었더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창5에서 ‘죽음’은 각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에녹의 경우에는 그 교회가 형성한 것이 그 상태의 종말과 함께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에녹이라는 교회 자체의 시대는 지나가더라도 그들이 정리한 교리는 후대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에녹에 대해 단순히 ‘죽었더라’고 하지 않고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다’라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한 교회의 소멸보다 그 교회가 남긴 것을 주님께서 거두어 보존하셨다는 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속뜻을 곧바로 ‘그러므로 에녹이라는 개인도 없었고, 에녹이 하나님께 옮겨지는 사건도 전혀 없었다’는 명제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20-5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고 있는 것은 창5:24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 구절의 모든 역사적·문자적 가능성을 하나씩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 말씀이 천국적 의미에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 개인 에녹의 역사성이나 그에게 일어난 자연적 사건의 세부를 우리가 대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AC의 해석에서 창5:24의 중심적인 속뜻이 ‘에녹 교리의 보존’이라는 사실입니다.

 

히11:5은 이 문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신약은 창5:24를 인용하면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 말하고 그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따라 에녹을 신앙의 인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창5:24 안에 더 깊은 속뜻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에서는 문자적 의미와 내적 의미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문자적 의미는 내적 의미를 담고 지탱하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히11이 문자적 의미에서 에녹의 믿음과 옮겨짐을 말한다고 해서, 창세기의 속뜻에서 에녹이 한 교회와 그 교리의 보존을 나타낸다는 설명이 자동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도 두 층위를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히11:5이 강조하는 것은 에녹의 믿음이며, AC.520-521이 강조하는 것은 에녹으로 의미된 교리의 보존입니다. 전자는 신약이 문자적 서술을 사용하여 믿음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고, 후자는 창세기의 계보 안에 들어 있는 교회사의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에녹이 실제로 옮겨졌다고 했으니 AC의 해석은 틀렸다’거나, 반대로 ‘AC가 교리의 보존이라고 했으니 히브리서의 에녹 이야기는 역사적 의미가 없다’고 어느 한쪽을 성급하게 지워 버리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AC.520-522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에녹의 시대에는 이미 퍼셉션이 매우 약해져 있었습니다. AC.522에 따르면 그들의 퍼셉션은 ‘아무런 명료함이 없는 일종의 일반적이고 흐릿한 퍼셉션’이었으며, 그래서 마음은 자기 바깥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변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를 아셨습니다. 언젠가 인간은 태고교회처럼 내적인 길을 통해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교리의 형태로 보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옮겨짐’을 속뜻에서 바라보면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상태가 쇠퇴하여 어떤 영적 능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능력과 함께 모든 선과 진리가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누렸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던 것이 에녹을 통해 교리가 되었고, 그 교리는 퍼셉션을 잃게 될 후대 사람들이 다시 선과 진리를 배울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이 AC.521이 말하는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AC의 속뜻을 따라 답하면, ‘주님께서 에녹으로 의미된 교리를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에녹이 어디로 갔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남기셨는가입니다. 퍼셉션의 시대가 저물어도 주님은 그 시대에 주셨던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의 상태는 변하고 교회의 형태도 바뀌지만,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고 보존하시는 분, AC.520-522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은 바로 그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520-522 심화 1)

 

 

 

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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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고 보존해야 했는가?’

 

AC.519에서 에녹 교회의 사람들이 한 일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모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어야 했을까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있다면 기록된 교리나 외적인 기준은 오히려 불필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46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에녹이 만든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교리는 현재의 필요보다 ‘미래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5의 교회들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그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명료하게 퍼셉션했지만, 후대 교회로 내려가면서 퍼셉션은 점차 더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습니다. 게난에 이르면 그 변화가 분명해지고,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가 나타났으며,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C.519의 한 표현이 중요해집니다. 에녹의 사람들이 교리를 만든 목적은 그것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아는 기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람 안에 그러한 분별의 기준이 살아 있었습니다.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이 자기 생각과 욕망을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했던 것들을 보존하여,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에녹의 교리는 바로 이러한 필요에 응답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퍼셉션에서 교리로의 변화에는 두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이것은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이제는 외적으로 주어진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의 내적 능력을 잃어 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에 이르는 길까지 닫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방식에 맞추어 그 길을 새롭게 마련하십니다. 직접 퍼셉션할 수 있을 때에는 퍼셉션으로 인도하시고,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주신 선과 진리를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가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게 하십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져도 주님의 인도하심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에녹의 교리는 인간이 머리로 만들어 낸 추상적인 신학 체계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 재료는 앞선 교회들이 실제로 ‘퍼셉션했던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었고, 그다음 그것이 교리의 형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질서는 ‘교리에서 생명으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교리로 보존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교리를 배우게 되었을 때에도 목적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통해 다시 선을 알고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이 점은 AC.519가 ‘하나님과 동행하다’를 단순히 ‘교리를 알다’라고 하지 않고,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사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녹에게 교리는 박물관에 보관된 과거의 퍼셉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르치며, 그에 따라 살아가기 위한 기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는 순간 에녹이 교리를 만든 본래 목적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 동행함’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삶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말씀과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적용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이렇게 느껴진다’, ‘내 안에서 이런 확신이 든다’는 것 자체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과 말씀으로부터 나온 참된 교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에녹의 교리가 필요해진 이유 자체가 인간의 내적 퍼셉션이 더 이상 안전한 기준이 될 수 없게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오늘날 개인의 직감이나 강한 내적 확신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그것을 말씀이나 교리보다 앞세우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삶과 분리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할랄렐 교회에서 보았듯이 쓰임의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질서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교리는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그것에 따라 살도록 주어진 것이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교리가 퍼셉션을 대신하게 된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식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그 선이 삶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은 태고교회의 쇠퇴 과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놀라운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교회입니다. 인간에게서 어떤 내적 능력이 사라져 갈 때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선과 진리까지 사라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한 시대가 직접 받을 수 있었던 것을 다음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옮겨 보존하십니다. 퍼셉션으로 받았던 것이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후대에게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출현은 단순히 ‘퍼셉션의 시대가 끝나고 교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교회사적 변화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그 상태에 맞는 방법으로 계속 다가오시며, 사람이 다시 선과 진리를 알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씀 안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보존과 인도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AC.518-519 심화 1)

 

 

 

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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