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천사들처럼 읽을 수 있으려면 (2024/11/19)

 

천사들은 내적(內的, internal, 속, 영) 존재들이어서 우리가 읽는 이 말씀(The Word, 성경 66권 중 그 안에 속뜻, 즉 아르카나가 담긴 성경들)도 우리처럼 외적(外的, external, 겉, 육)으로 읽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읽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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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신의 외모는 평생 보아오고 있어 잘 알지만, 자신의 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잘 모르듯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겉 글자만 평생 읽어 왔지 말씀의 영, 곧 말씀의 겉 글자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秘義)는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어 거의 모르지요.

 

그러면 왜 천사들처럼 말씀을 읽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사후(死後), 이어질 삶 때문입니다. 뭐, 짐작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민을 앞둔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요, 다른 나라로 살러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지금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일에 계속 목숨 걸기보다는 앞으로 가서 살게 될 나라를 더 공부하고 준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떠나기 전까지 어느 정도는 계속 병행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런 겁니다. 그래서 천국 천사들은 말씀을 어떻게 읽나 알아보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도 부지런히 그들처럼 말씀 읽는 법을 익혀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천국에 대해, 먼저 어떻게 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어떤 삶인지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무래도 안 가 본 우리 중 누구들보다 주님의 허락으로 미리 가 본 사람이 전하는 그곳 현지 생생한 소식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 곧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마지막 때에 이 모든 걸 삼백 년 전에 미리 준비하셨다는 사실! 여러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 사람이 바로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입니다. 이분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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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님의 섭리로 스베덴보리를 한 지 어느덧 7년 된 지금, 제가 깊이 느끼는 한 가지는, 이 길을 수십 년 전부터 앞서가신 분들의 말씀처럼 이 계시, 이 가르침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네, 정말 어렵습니다. 육체 안에서 평생 겉의 삶, 외적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내적 존재인 천사들의 말이 와닿을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내적’이라는 게 어떤 건지 가늠이 되시나요? 네, 정말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심지어 저는 이 길을 걷기 전, 몇 번의 영적 체험 및 수도원 공부를 먼저 여러 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위 ‘입문’(入門)을 위한 순서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이 순서는 사실은 주님이 저를 이끄신 순서이기도 합니다.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을 리딩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여러 번!

 

 

HH.1, '저자 서문(序文)'(Author’s Preface)(HH.1)

※ 주께서 마지막 날(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에 관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 HH : Heaven and Hell ※ 본 번역은 김은경 역입니다. 단, 주석들은 원 John C. Ager 주석들이며, 저의 번역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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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종이책이 필요하시면, 아래로 가셔서 구입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김은경 역을 추천하는 이유는 제가 이 번역으로 읽었기 때문인데, 실제로도 여러 번역 중 저한테는 이게 제일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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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꼭 좀 당부드리고픈 것은, 이 책을 읽으실 때마다 문장 문장, 쉬지 말고 주님의 빛 비추심을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천국에 관한 기록들, 소식과 사실들은 천국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의 빛, 곧 신적 진리(Divine Truth)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스베덴보리 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The heavenly arcana contained in the Holy Scripture or Word of the Lord unfolded, beginning with the book of Genesis,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리딩을 병행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와 너무나 달라 당혹스러우시기까지 하겠지만 말입니다.

 

 

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AC.1-5)

1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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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저는 위 첫 번째 책은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기를 한글과 영어로 대략 열 번 이상은 한 것 같고, 두 번째 책은 창3까지는 번역을 끝냈고, 창4부터는 일단 리딩부터 쭉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가지, 7년이나 되었음에도 겨우 요만큼 밖에 진도를 못 나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물론 다른 많은 저작 역시 병행하여 읽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아,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저작들(Writings)은 아래 글에 가시면 접하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서들(Writings)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저서목록(Writings)입니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사람 중 가장 지능이 높은 사람으로 기네스 북에는 밀턴, 괴테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전에 가장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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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위 제 블로그에 올렸으니 우선은 이걸로 읽으시고, 나중에 책 제본 나오면 그때 종이책으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위 두번 째 책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번역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영어가 좀 되시면 그냥 영어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나오는 여러 AI 번역기로 번역을 하셔도 이게 다분히 영서(靈書)라 좀 손이 많이 가실 겁니다.

 

다음은 리딩 및 번역을 제가 어떻게 중도포기 안 하고 계속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있을까를 몇 줄로 요약한 것입니다.

 

첫째, 처음엔 수도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 제가 이 사람의 글 읽는 것이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요? 제가 무슨 이단의 글을 읽는 건 아니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이 저를 말려주시고, 이 길로부터 저를 지켜 보호하여 주세요...’ 하는 기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만큼 충격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말씀을 겉 글자가 아닌, 거기 담긴 영으로 읽는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둘째, 계시(啓示)는 내면이 열리는 만큼만 보입니다. 계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진리(Divine Truth)의 빛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데, 그럴려면 내면이 열려 그 빛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한번은 주님이 맹인을 고치실 때, 그가 단번에 낫지 않아 다시 안수하신 후라야 그가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창세기 처음 세 장을 한 일곱 번 정도 번역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머리 신앙의 사람, 내면의 열림이 매우 더딘 사람이었답니다.

 

셋째, 이 길을 걸은 지 7년, 제게 가장 큰 보람과 상급, 영광과 감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거의 마치 천사들처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에 허락하셨던 퍼셉션(perception, 태고교회에 허락하셨던, 지금도 천국 주님과 천사들 사이 사용하는 내적 커뮤니케이션 능력, 주님의 신성을 지각할 수 있는 역량)을 나름 아직은 좀 일반적이지만, 아니 매우 여전히 투박하지만, 그러나 아주 조금이라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영적 역량의 회복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있어야 천국에 충만한 주님의 신성(The Divine)을 알 수 있는데, 그 결과 주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정말 정말 확실히, 투명하게, 천사들처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습으로 얻는 게 아닌, 주님이 거저 주시는,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 외에도 많지만, 우선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분명한 건, 저는 7년을 한결같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매일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길을 걸으며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ㅎㅎㅎ

 

그럼에도 여러분, 천사들처럼 말씀을 영으로, 즉 속뜻으로 읽는 법을 익혀 다시 오실, 사실은 말씀의 속뜻으로 이미 오신, 주님의 새 교회, 계시록 주님의 새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그렇다고 말씀을 겉 글자로 읽는 것이 무슨 나쁘다거나 틀렸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아직 내면이 열리지 않아 지상의 언어로밖에는, 기록된 겉 글자로밖에는 읽을 수 없는 99.999%의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말씀을 가까이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겉 글자는 그릇이요, 속뜻은 거기 담기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릇 또한 매우 중요하며,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며, 주님을 향한 애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겉 글자로도 충분히 일상에서 선을 행하며, 그로 말미암은 진리를 깨달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면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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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26-33)

 

 

‘잉태하지 못한 자’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AE.710:8, 이순철 역) the barren,” and “the bellies that have not borne,”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that is, truths from the good of love, and “the breasts that have not given suck” signify those who have not received genuine 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 (AE.710:8)

 

 

유대 성직자들의 요구로 주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는 여러 번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눅23:4)

 

14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눅23:14-15)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눅23:22)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고, 마침내 빌라도는 손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저들 손에 맡겨 저들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26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주님은 그 전날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되던 때부터 날밤을 새우시며 욕을 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무거운 십자가로 기진하셨고, 주님의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행인 중에서 시몬이라는 사람을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말씀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본문에는 시몬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킹 제임스 영어 성경 표현이고,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에는 밭에서 온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새 교회에서 사용하는 영어 성경은 스베덴보리가 히브리, 헬라 성경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 성경을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존 성경을 속뜻을 염두에 두고 번역,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그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기존 성경에서 너무 엉뚱하게, 즉 원어대로 번역하기엔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손을 댄 그런 부분들만 바로 잡았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창세기 2장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같은 부분인데요, 원래대로라면 ‘열매’를 빼고 그냥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해야 합니다. 여기 ‘나무’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속뜻을 알 수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는 게 너무 이상한 나머지 살짝 보조 설명을 추가한 건데, 이렇게 되면 살짝 정도가 아니라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새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누가복음에는 지금 주님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일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문제는 사 복음서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복음에는 누락된 다른 일들도 많은데, 그 일이 다 일어나기에는 세 시간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함은 만약 이 모든 일이 당일에 일어났다 가정할 경우, 이제 오전 아홉 시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몇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 일부 인용입니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 저) 인용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금요일 새벽에 체포되신 후 금요일 아침에 심자가형을 언도받았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오전 9시였다. 그렇다면 금요일 새벽 체포된 시간이 대략 동틀녘인 6시라고 할 때, 새벽 6시부터 아침 9시까지의 짧은 3시간 동안 다음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안나스의 심문 - 가야바의 심문 - 산헤드린의 유죄 판결 - 유다의 후회와 죽음 - 1차 빌라도의 심문 -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2차 빌라도의 심문 - 십자가형 언도 - 로마 군병들의 조롱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심 - 도중에 쓰러지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짐 -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

 

※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지상 만물이 모두 그 내적 의미로만 보입니다. 예를 들면, 지상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 역시 그들 눈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즉 그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 여부에 따라 빛으로, 또는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식이지요. 심지어 갓난아이조차 그렇습니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모, 출신 지역이나 배경 등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들에겐 ‘시몬’이라는 이름의 내적 의미만 보이지, 그가 베드로인지, 여기 구레네 시몬인지는 중요하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시간(time) 개념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은 시공간의 나라가 아닌,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까닭은, 밭은 진리의 씨가 뿌려지는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이 밭에서 왔다는 것은 그가 교회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몬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시몬은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 의하면 주님은 세상에서의 모든 시험을 홀로 싸워 이기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왜 시몬이 주님의 시험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시험을 통한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원인과 결과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영화가 없으면 인간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시험을 당할 때 혼자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과 함께 싸우기 때문이며, 셋째, 시험에 관한 이런 진실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야 주님과 함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주님께서 처형장으로 끌려가실 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슬퍼했습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뜻으로만 보면, 이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좀 다른데요, 속뜻으로는, 이들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 또는 더 나아가 말세에 타락한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여자’, ‘여인’은 교회를 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통곡하고 슬퍼했을까요? 영적 의미로, 통곡하는 건 교회 안에 사랑이 없다는 뜻이고, 애통해하는 건 교회 안에 진정한 진리, 또는 진정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교회로부터 신성한 선과 진리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가며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것,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것’은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앞 절에 나오는 여인이나 여기 ‘예루살렘의 딸들’은 모두 마지막 때 기울어져 가는 교회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는 교회들이 생산해 내는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시는 것은 앞으로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킬 때, 필연적으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이 말씀에 대해 ‘계시록 해설’ 710번 글 8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는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은 인애(仁愛, 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오래전부터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왜 그랬는지 짐작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에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자연적인 의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겁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love)와 인애의 선에 속한 진리(truths from the good of charity)의 차이는 뭘까요? 전자는 진리의 바탕에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 즉 인애, 체어리티(charity)의 선에 속한 진리는 진리의 바탕에 이웃 사랑, 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을 할 때 그 일의 목적인 선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일의 절차와 방법인 진리를 따집니다. 그에 비해 이웃 사랑에 속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일의 목적이나 유익 같은 선보다는 절차와 방법의 합리성, 즉 진리를 먼저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영적인 진리입니다. 즉 사랑의 선에 속한 진리와 체어리티의 선에 속한 진리가 영적 진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아기를 출산하지 못했거나, 젖을 먹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영적 진리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즉 교회 밖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교회 밖의 사람들도 어쨌든 진리를 가졌을 텐데, 그렇다면 그들이 가진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적인 진리라기보다는 도덕적 진리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이웃이 누군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방 종교의 진리는 모호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모호하면 그에 따라 삶도 모호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복이 있다 하신 이유는, 영적 진리를 알고도 더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채 도덕적으로 사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자의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후자의 사람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인데, 전자의 사람은 속 사람이 영원히 뒤집히는 상태가 되지만, 후자의 사람은 사후 살짝 교정 및 떼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때는 부활하신 주님이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시는 때이며,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다시 오신 주님으로 표상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신성한 내적 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적 진리로 충만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바로 다시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친히 낡고 부패한 교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대적하던 교회들은 참된 진리의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악 속에 숨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본문에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한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산은 본래 사랑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인간의 악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진리를 마주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악에 숨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것입니다.

 

31푸른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천국의 천사들조차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의 빛을 직접 날 것으로 마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천사와 사람에게 맞는 순화된 빛으로 오십니다. 그럴진대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빛을 마주 대하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끝으로 32절과 3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주님의 고난의 장소는 해골, 즉 골고다라 하는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곳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셨을까요? 해골은 머리를 둘러싼 뼈이고, 뼈는 영적으로 가장 차원이 낮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여기서 해골은 이른바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기억 지식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거짓 및 온갖 욕망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셨고, 결국 이기셨습니다.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 강도도 함께 달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도는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모든 인간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본성은 모두 강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관련, 마태복음 25장 32, 3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2-33)

 

여기서 오른편 양은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왼편 염소는 그 반대, 즉 끝까지 진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인정하고 시험에 동참한 자는 구원을 받았고, 반대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한 자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과 주님과 십자가를 함께 짐으로써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를 봤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모두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중에도 생명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일까요?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해관계가 생기면 주님을 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하는 건 아닐까요? 진리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얕은 지식을 내세워 오히려 진리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까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우러러보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본성은 본시 강도와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서 입으신 인성 안에도 그런 본성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시험은 그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싸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인류에게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의지해 나를 버리는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렵게 찾은 이 진리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65:19)

 

아멘.

 

 

2023-03-0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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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7(D1)-주일예배(2570, 눅23,26-33),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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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진 정확히 잘 모르겠는데... 어느 날 이 생각, 곧 언어 생활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하며, 깊이 고민 중에 불쑥 다음과 같은 내적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어라. 물론 사랑 안에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주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드리는 게 참 사랑이요, 참 신앙고백임을 알겠고, 가족을 포함한 이웃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 그들의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라면 하실 법한 말을 해주는 게 이웃 사랑임을 알겠더군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모를 때에도 잠깐 주님께 마음을 모으면 과연 해야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심을, 그리고 그때 그 말을 하면, 그 말을 통해 상황이 놀랍게 달라지고 정돈되는 걸 여러 번, 지금도 계속 확인하고 있습니다. 흡사 다음과 같은 주님 말씀하고도 연결이 되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주님이 듣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주님 사랑, 이웃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것은 이웃 사랑, 자기가 하고픈 말을 하는 건 자기 사랑, 세상이 듣고픈 말을 하는 건 세상 사랑...

 

아무리 내 생각에 지금 이 말은 저 사람에게 꼭 필요해 싶더라도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오히려 주님의 진리인 말씀이 모독을 당할 수 있으니 주의,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주님은 입을 열지 말 것을, 대신 그 상태에서 상대방이 듣기 원하는 말, 곧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춰 말할 것을 명하셨고, 지나고 보면 과연 그러길 잘했다 싶었던 때가 많습니다. 주님도 아시지요. 그러나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맞는 말이고, 귀한 권면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소화할 수 없는 상태라면 오히려 그에게 상처가 되며, 더 나아가 폭언, 폭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천국도 우리는 일층천 갈 바엔 이층천을, 이층천 갈 바엔 삼층천 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그러나 고작(?) 일층천까지만 그 내면이 열린 사람한테 덜컥 이층천 입장을 허락, 그로 하여금 좋다고 이층천에 들어서게 하면, 그는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보이고 숨이 막히며 머리가 깨질 듯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얼른 뛰쳐나와 다시 자신의 천국인 일층천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이층천엔 일층천보다 더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그의 내면이 일층천까지만 열려 있기 때문에, 이층천을 볼 수도, 이층천 지혜를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삼층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당 천국은 그에 해당하는 단계의 내면이 열려야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에게 맞추시며, 우리를 안 아프게 주님께로 구부리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의 속뜻처럼 말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42:3)의 속뜻 (2024/2/4)

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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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또한 어떤 면에서는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이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과 지혜, 섭리와도 연결이 됩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을 보호하시는 주님 (2024/10/30)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창세기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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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없음)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눅23:13-25)

 

 

헤롯에게 보냈던 예수를 그러나 헤롯이 다시 자기에게 돌려보내자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 그리고 백성을 불러 모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4절로 16절 말씀입니다.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대제사장과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모두 일종의 왕이고, 왕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총독 빌라도, 그리고 헤롯 왕은 당시 유대인들을 자연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 등급)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은 교회에 속한 진리를 나타내고, 빌라도는 세상의 법을, 헤롯 왕은 이방 종교의 진리나 도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진리가 여러 등차로 존재하는 것과 관련, ‘계시록 해설’ 351번 글의 2번 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흘러나온다. 즉 말씀으로부터 중심이 되는 빛이 나와 주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간다. (AE.351:2,이순철 역) The light of heaven, or the light in which are the angels of heaven who are from this earth, is from the Lord by means of the Word; from this as from a center light is diffused into the circumferences in every direction, thus to those who are there, who, as was said, are the Gentiles that are outside of our church. (AE.351:2)

 

그러니까 신성한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제일 먼저 말씀이 있는 교회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다른 종교의 교리 안으로 들어가며, 마지막에는 세상의 법과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그런 식으로 각 사람에게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갖고 있는 교회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교회가 불순한 의도로 말씀을 마음대로 조작한다면 말입니다. 그때는 교회의 말씀 가운데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회 곳곳으로 연결된 진리의 통로 또한 막힙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교회로부터 배척당하시고, 그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핍박받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진리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장 높은 진리인 교회의 진리가 가장 낮고 비천한 진리가 되고,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의 법이 가장 높은 진리가 되어 진리의 질서가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로 오신 주님을 지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주님을 죽이려 하고, 세상의 법과 도덕을 표상하는 빌라도와 헤롯이 오히려 주님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때리는 것’은 교회, 곧 유대인의 생각대로 진리를 곡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때려서 놓아주겠다’라는 건 진리를 아주 없애버리지는 않고, 그들 입맛에 맞게 고치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간혹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객관적으로는 분명한 진리임에도 불구, 그건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니 애초에 씨를 말려야 한다 주장하는 우매한 대중이 있습니다. 그때 공정해야 할 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지요. 그리고 진리를 아주 없애지는 않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하게 고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진리일지 모르나 세태에는 맞지 않으니 대중의 취향에 맞게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때려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18절과 19절에서 무리가 소리칩니다.

 

※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0명에 대제사장 포함,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이 무리를 유월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 전체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8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주님 당시 유대 유월절 관례 중 하나는 사형수 하나를 풀어주는 게 있었는데, 그래서 빌라도는 이를 이용, 주님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세상 잣대로 심판한다는 게 내심 찜찜하기도 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며, 그의 아내가 이른 아침, 급히 사람을 보내 이 예수라는 사람은 의인이니 그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그로 인해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가장 낮은 세상 법으로 가장 높은 신성한 법을 심판하는 일이었는데, 이를 직감적으로 안 빌라도는 어떻게 하든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때려 놓아주면 어떻겠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라며, 무리가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주님 당시 아람어 ‘바르아빠’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아들’이란 영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아버지는 선, 아들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라바는 그 반대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즉 악의적인 거짓이 바로 바라바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이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에 관련되었다는 건 참된 교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속뜻으로 성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민란이나 살인은 교리를 왜곡하는 짓, 이를테면 참된 교리로부터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빼고, 믿음만 남겨 놓는 것입니다. 믿음, 즉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며, 중요한 건 거기 담기는 내용, 즉 체어리티인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민란이며, 바라바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거짓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님을 없애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 하는 것은 말세에 부패한 교회들이 체어리티의 교리를 없애고, 믿음만의 교리, ‘오직 믿음’의 교리만이 구원의 진리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의 지성이 마비될 때, 대중은 정의를 거짓으로 몰아 핍박하고, 반대로 거짓을 정의의 자리에 올려놓고 추앙합니다. 가치가 전도되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그것이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는 일입니다.

 

※ 2024년 11월 현재,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차기 대통령감으로 이재명을 가장 선호하는 것과, 그리고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좌파 성향을 보이는 걸 보면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영적 기상도와 그 실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빌라도는 계속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것을 21절과 2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세상의 법으로 교회의 진리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흔치는 않으나 가끔 있었던 일입니다. 예를 들면, 4세기 초인 325년에 니케아의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의 별궁인 니케아에서 기독교 공의회를 열어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파를 교회에서 축출하고 삼위일체 신앙을 확립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이후, 로마 황제가 교회의 일에 관여했던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교회의 비진리를 단죄한 사건이었고, 비교적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11세기 초인 1095년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로마의 황제와 가톨릭교회가 야합한 반 지성적인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와 교회의 진리를 말살하는 것 역시 지극히 반 지성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로 상징되는 참된 진리를 말살하는 게 옳지 않다 생각했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라며 무리를 끝까지 설득했습니다. 본문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세 번 말했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셋이라는 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는 계속해서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23절에는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고 말합니다. 무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함으로써 참된 진리를 완전하게 파괴하고 죽여 없애길 원했습니다. 결국 빌라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풀어주고, 주님을 그들에게 넘겨 뜻대로 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리는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악한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마지막 때는 모든 교회가 사랑과 체어리티의 신앙을 버리고 오로지 믿음만의 신앙, ‘오직 믿음’ 신앙을 고집합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대교회가 주님을 죽이고, 바라바 살리는 걸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949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만 있고 인애의 선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성질이 까다롭고, 어떤 일도 참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적대시하고, 벌하려고 하며, 동정심이 없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맞추기보다 그들의 마음을 굽힐 궁리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을 선으로부터 보지 않고 진리로부터 바라보기 때문이다. (AC.1949:2, 창16:12, 이순철 역) The man whose rational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s solely in truth—even though it be the truth of faith—and who is not at the same time in the good of charity, is altogether of such a character. He is a morose man, will bear nothing, is against all, regards everybody as being in falsity, is ready to rebuke, to chastise, and to punish; has no pity, and does not apply or adapt himself to others and study to bend their minds; for he looks at everything from truth, and at nothing from good. (AC.1949:2)

 

이 구절을 읽으며 이건 나의 모습인데...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가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상태에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거듭나는 과정에서 사람은 두 가지 합리성(rational)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위 내용은 첫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때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고, 오직 진리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두 번째 단계의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합리성은 진리와 사랑이 함께 있는 합리성입니다. 말씀에서는 전자의 합리성을 들나귀(창16:12), 또는 이스마엘로 표현하고, 후자의 진정한 합리성을 이삭으로 표현합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삭으로 표현되는, 지혜로우면서도 따뜻한 합리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 신앙을 버리면 햇볕이 들지 않는 방처럼, 또는 주님을 죽인 유대인들처럼 점점 더 차갑고 잔인해질 것입니다.

 

※ 오늘날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오직 믿음’(Faith Alone)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저렇지는 않습니다. 저 역시 어려서는 개신교 장로교회 통합측, 커서는 개신교 침례교회에 속해서 나름 개신교를 경험했지만, 대부분은 사랑, 그러니까 체어리티 몇 %, 신앙, 그러니까 교리 몇 % 식으로 구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저 정도의 사람들은 스베덴보리 당시 여전히 문제가 많은 교황파 사람들 중 리더십들 내지는 개혁교회 내 소수의 극단적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역시 확실한 건,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안에도 사실 얼음장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그런 게 무슨 신념이나 신조라고 한번 어긋난 사람은 다시는 보려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기와 같은 입장이어야만 사랑하는 그런 상황이지요. 타 종교는 물론, 심지어 같은 개신교, 같은 교파와 교단, 심지어 한 교회 안에서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오직 적과 아군만 존재하는, 참으로 숨 막히는 그런 곳이 바로 오늘 대한민국 개신교입니다. 그러니까 서운한 걸 풀고,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용서와 화해, 양보와 물러남 등을 기꺼이 하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옳으니까 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쉽지 않은, 오늘날 대한민국 개신교 내 ‘오직 믿음’을 목숨 걸고 지키는 사람들의 현주소요, 진면목인 것입니다. 참 부끄럽지만, 오히려 타종교인들 중에 정감넘치고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비록 그들에겐 참 진리, 곧 말씀이 없어 그 빛이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흐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나 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알면서 범하기 때문에 더러워지지만,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더러워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나라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런 양상은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고, 교회를 통해 사회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진리의 흐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그 질서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대안은 계시록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예언된 마지막 교회의 진리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진리로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새로운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얼음장 같은 이 사회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역사가 새 교회로부터 불길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렘14:22)

 

아멘

 

2023-02-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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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11-10(D1)-주일예배(2569, 눅23,13-25), '교회에게 버림받으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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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1-24)

 

에녹(Enoch)은 아담(사람, man)부터 시작, 일곱 번째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입니다. 태고교회 첫 번째 교회인 아담부터 셋, 에노스까지, 이 세 교회는 비유하자면, 태고교회라는 방 전체를 한 가운데서 환히 비추는 등과 같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핵은 첫 번째 교회인 아담이지요.

 

비록 등이 한 가운데서 방을 비추지만 둘레로, 주변으로 갈수록 흐릿, 어두워지는 것처럼 태고교회도 후대로 갈수록 그렇게 어두워지다가 끝에 가서는 홍수로 종말을 고합니다. 노아는 태고교회와 홍수, 그리고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잇는 아주 특별한 교회이지만, 그러나 태고교회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퍼셉션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 첫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오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던 중 끝에서 두 번째인 이 에녹에 대하여, 평소 우리가 알던 그 경건해(?) 보이는 겉뜻과는 많이 다른, 그 속뜻을 좀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읽는 에녹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는 지금은 사라진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지금은 거의 이해 불가한 내적 커뮤니케이션이 있던 때였으므로, 그리고 주님은 인류를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연결되게 하셨으므로, 태고교회가 어두워져 간다는 건, 점점 그 퍼셉션이 희미해져 간다는, 그러므로 서서히 무언가로 그걸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 곧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두 가지, 그러니까 주님 음성을 직접 듣는 방법과, 잘 정돈된 교리를 학습하여 듣는 간접 방법이 있는데, 얼핏 느껴지시는 대로, 이 둘은 그 근본이 아주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퍼셉션, 내적 음성으로 아는 것이고, 후자는 학습을 통해 지식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하여 삼층천을 이루고, 후자는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이층천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태고교회 일곱 번째 후손인 에녹 정도 되자, 아직 주님 음성 듣는 퍼셉션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너무 희미해져서, 두루뭉술 일반적으로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는 알쏭달쏭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고, 이쯤에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 그동안 퍼셉션으로 알던 주님의 신성, 곧 선과 진리를 글로 정돈, 교리화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짓(?)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 에녹이라는 교회입니다. 위 본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To walk with God)라는 표현들의 속뜻이 바로 이겁니다.

 

나름 필요에 의해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퍼셉션으로만 사람들은 주님과 연결되어야 하였으므로, 이들이 만든 교리를 주님은 이때는 사용을 금하시고, 나중을 위해 따로 보관하셔야 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의 속뜻입니다. 

 

인류는 곧 지금 태고교회처럼 하나님과 천사들 간 다이렉트로 하는 퍼셉션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홍수 후 주님은 대신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인 ‘양심’으로 주님과 연결되게 하셨고, 이후 인류는 퍼셉션이 아닌, 학습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를 위해 이 에녹이라는 교회가 수고하여 만든 교리를 따로 보관하신 것이지요.

 

어떠신가요? 말씀의 겉뜻과 그 속뜻이 참 다르지요? 저 자신,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번역을 하다가 좀 충격을 받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말씀이어서 이렇게 나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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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23:7-9)

 

이런 상황이 앞서도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였는데요, 다음은 그 본문입니다.

 

63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눅22:63-65)

 

즉, 헤롯이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란 거’나 여기, 지키는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한 거나 같은 건데요, 그러니까 창조주요, 모든 내적인 것(內的,  internal, 속)의 주되신 분을 육안으로 뵙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저 내적인 걸 담는, 속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외적인 거(外的,  external, 겉), 여기서는 무슨 마술이나 신통력같이 좀 극단적으로 표현된, 이런 걸 추구하다가 그만 날려버린다는 측면에서 말이지요.

 

신앙생활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적의 유익은 분명합니다. 비록 내적 신앙에 대해 잘 모르셔도 그 본 바탕이 선하고 진실하신 분들은 그 구하는 외적인 것들의 기저에 이미 내적인 것들이 깔려있어 이런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고, 그것이 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이 세상 삶에서는 이 정도가 무난한 신앙생활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내면이 열린 분들, 참으로 주님의 내적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분들은 보통은 기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사들이 우리처럼 무슨 금식기도나 철야기도, 산기도, 대적기도, 방언기도, 안수기도, 예언기도 및 치유기도 같은 걸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적 존재들이어서 주님 앞에 늘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터라 존재 자체가 늘 기도이며, 그래서 늘 능력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로 하여금 늘 주님을 향하게, 늘 자기 앞에 있어 주님의 현존을 경험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런 내적 신앙이 뭔지 모르시면서, 그리고 나는 신앙인이다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깊게 가라앉아 저런 겉의 것들을 추구하시는 분들한테는 저런 기적과 이적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가장 내적이신 주님, 가장 인모스트(inmost)하신 주님 대신 제법 그럴듯하신 주님을 찾게 만들기 때문인데요. 마치 그럴듯한 메시아를 구했던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기적과 관련된 우리 기도 중에 그 응답이 무응답이어서 어리둥절하신 분들은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속 사람의 주이신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속 사람의 나라로, 우리 속 사람의 상태가 주님의 나라, 곧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라야 임하는 나라입니다. 주님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2)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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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눅23:1-2)

 

일단 저들의 고발은 사실이 아닙니다. 주님은 위 제목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는 하셨지 금하신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바리새인들이 놓은 덫 때문에 할 수 없이 하신 말씀이시고요.

 

저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위 가짜 뉴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지금은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저들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예수를 죽이고는 싶은데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인 지금은 자기들한테는 사형집행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성전 뜰 안으로 무단침입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마침 이 유명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가 나왔으니 이 말씀의 속뜻, 그 내적 의미를 잠깐 살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적어봅니다.

 

가이사, 즉 케사르(Caesar, 라틴)는 당시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입니다. 헬라어 카이사르(Καῖσαρ)를 라틴으로 읽은 것이지요. 말씀에서 왕이나 황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는 세상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자연적 삶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는 하늘 진리, 법 따르는 것, 곧 영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하늘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치 우리 육체가 영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또는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하신 이 말씀은 세상에서 세상 법도를 따라 자연적 삶을 살되 그 안에 하늘의 법, 곧 영적인 삶을 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둘의 조화를 말씀하신 것이지, 결코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법도를 따라 살되 반드시 그 안에 하늘의 법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택, 무슨 행위를 했으면, 그 이유와 동기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말씀에서 ‘하나님’은 주님의 신성 중 진리 관련 호칭이고, ‘여호와는 선 관련 호칭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호칭 관련, 1과 창2를 유심히 비교해 보세요. 거기 보면 창1에는 하나님만 나오는 반면, 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오는데요, 여기엔 정말 깊은 아르카나(라틴, Arcana, 秘義)가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나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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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눅23:1-12)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 당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보이신 후에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기도 하셨고요. 심지어 변화산에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셨고, 그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음에도, 그런데도 주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7:9)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만약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도 전에 유대의 대제사장들의 무리에게 붙잡혀 해를 입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과 같은 메시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을 빠짐없이 이루셨습니다. 어떤 것은 문자적인 뜻 그대로 이루셨고, 또 어떤 것은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습니다. 문자의 뜻 안에 있는 내적 의미로 이루셨다는 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 63장 4절에는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이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는 시험 가운데서 주님 홀로 싸우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예레미야 46장 10절에는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주님이 이루셨다는 구약의 예언들은 대개는 내적, 외적으로 닥치는 수많은 시험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이 있기까지 당신이 메시아이며 왕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셨습니다.

 

그러셨던 주님이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이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눅22:70)라고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간접적으로 시인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이들은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라면서 주님을 죽이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 빌라도에게 주님을 데려가 고발합니다.

 

※ 이들이 주님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데려간 것은,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비록 나름의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나 이방인이 성전 안뜰을 함부로 들어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형 집행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는 마침 유월절이라 평소엔 저쪽 지중해 해안가 가이사랴에서 대왕 헤롯의 궁전을 관저로 삼아 지내지만, 이 기간엔 예루살렘에 와 전반적인 치안 살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지내는 건 유독 이때 참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며, 만에 하나 이때 로마에 대항하는 민란이라도 나는 날이면, 총독의 목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 1, 2절입니다.

 

1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백성을 속이시거나 미혹하신 적이 없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22:17)라고 물었고, 주님은 그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셨지요. 가이사는 로마의 왕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를 섬기는 건 세상 법도를 따르는 삶, 즉 자연적 삶입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늘의 법을 따르는 삶이며, 영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조화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삶을 위해 자연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되고, 자연적 삶을 위해 영적 삶을 버려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연적 삶은 영적 삶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 것이고,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신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가 바로 자연적 삶 속에 담아야 할 영적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3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말씀에서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유대는 주님에 대한 사랑, 또는 선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선에 대한 사랑이 같은 뜻인 이유는,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한 것은 속뜻으로는 ‘네가 선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이냐’ 또는 ‘네가 선을 동반한 진리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선 그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진리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볼 때 아무리 봐도 주님에게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고발한 자들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심하게 소리 지르며,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 여기 이 ‘무리’는 두 부류, 곧 하나는 아까 새벽녘 급히 소집된 산헤드린 공의회 사형 의결 정족수인 23명과, 미리 매수해 놓은 시정잡배들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산헤드린의 경우, 총 71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귀족 가문 계열인 사두개 제사장 그룹과, 서민, 즉 흑수저 출신인 바리새 그룹의 두 파가 서로 오랜 세월 대립, 원수처럼 지내오던 터라, 그리고 바리새들 중엔 주님께 무척 호의적인 사람들도 여럿 있었던 터라 아무래도 바리새쪽 의원들을 부르기엔 좀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며, 거리 불량배들이야 뭐 부리기가 손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갈릴리는 이방인,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유대는 여기서는 유대교회 사람들을 뜻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말씀의 맥락에 따라 그 속뜻, 그러니까 내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주님이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회 사람들에게까지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재판하는 것이 내심 부담스럽고 불편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주님은 의로운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무슨 형사 사건이 아니라 단지 무슨 신학적, 철학적인 문제요, 저들의 그저 질투심 어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당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왕에게로 주님을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6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이 헤롯은 아버지 대왕 헤롯의 아들로서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아버지 대왕 헤롯이 다스리던 유대 땅을 그가 죽은 후, 로마는 삼 분할, 세 아들에게 나눠 주었고, 그중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을 맡았으나 이 기간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다는 걸 빌라도는 알고 있습니다. 전에 세례(침례) 요한의 목을 잘라 헤로디아의 딸에게 준 자가 바로 이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주님을 심판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 그리고 총독 빌라도, 끝으로 헤롯 왕은 영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겁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는 이들이 누군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대제사장들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은 세상을 다스리는, 등차(等差, degree)가 다른 세 가지 진리를 나타낸다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대제사장들의 무리는 교회의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하고, 총독 빌라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진리, 즉 세상의 법을 뜻하며, 갈릴리의 왕 헤롯은 이방 종교의 진리, 또는 도덕적 진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들 중 ‘말씀에 관한 교리’ 27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있다. 처음의 것은 중간의 것을 거쳐 마지막의 것에 이르러 실체가 드러나며 존재한다. 그래서 마지막의 것은 기초이며 그릇이다. (이순철 역) In every Divine work there is a first, a middle, and a last (or ultimate); and the first passes through the middle to the last (or ultimate), and so comes into manifest being and subsists. Hence the last or ultimate is the basis. But the first is in the middle, and through the middle in the ultimate; so that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as the ultimate is the container and the basis, it is also the support. (SS.27)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할 때는 교회의 진리가 처음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는 중간 것,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의 법이 있습니다. 진리의 질서가 그러할 때, 하나님의 진리가 도덕적 진리를 거쳐 세상 법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통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차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반대로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 질서가 반대가 됩니다. 즉 가장 낮은 진리인 세상 법이 처음의 것이 되고, 도덕적 진리가 중간 것, 교회의 진리가 가장 마지막 것이 되지요. 이런 경우에는 교회의 진리가 세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나쁜 풍조가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헤롯에게 차례로 심판받고 모욕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렇게 참된 진리가 거짓 진리에 의해 박해를 당합니다.

 

헤롯은 주님에게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그것에 대해 9절과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교회가 부패하면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또한 부패하게 됩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빛이 교회를 통해 윤리와 도덕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주님으로부터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결국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빛나는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습니다. 말씀에서 옷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주님께 빛나는 옷을 입혔다는 것은 얼핏 보면 주님을 인정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패한 윤리와 도덕이 그들 앞에 나타난 참된 진리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애 동안 참된 진리를 만난다는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지어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음은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문득 서울교회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교회 건축이 시작될 무렵인데 좀처럼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니 주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문제가 풀리긴 했으나 그로 인해 8개월이면 끝날 공사가 3년을 끌었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진리가 견뎌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나 종교가 어지러워지면 세상의 법이나 풍조 또한 어지러워집니다.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진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마치 심장과 폐로부터 흘러나오는 깨끗한 피가 인체의 말단까지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런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는 그 질서가 거꾸로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대제사장들의 무리와 빌라도, 그리고 헤롯에게 차례로 불려 다니며 심판받고 모욕당하는 것은 진리의 질서가 거꾸로 될 때 생기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각자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낮은 진리는 더 높은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일을 하면서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뿐 아니라 일하는 방법과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모든 행위는 주님과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부터 시작해 진리를 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한 진리의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2:10)

 

아멘

 

2023-02-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11-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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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D1)-주일예배(2568, 눅23,1-12), '대제사장들의 무리, 총독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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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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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5)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겉뜻들과는 달리 어떤 속뜻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령, 3이라는 숫자, 7이라는 숫자, 10이라는 숫자, 12라든지, 40이라든지, 100이라든지, 더 나아가 계시록에 나오는 1,000, 144,000 등... 1에서 9까지의 숫자들의 의미는 두 자릿수, 세 자릿수 등 복합수가 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 예를 들면, 책 한 권 분량의 의미가 어떤 큰 숫자 하나로 표현될 정도로 깊은 의미들을 지니게 됩니다. 천사들한테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의 나라와는 달리 천국은 상태와 그 상태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저 숫자들 역시 어떤 상태와 그 변화를 나타내는 쓰임새를 가지며, 그래서 말씀 역시 천사들은 그렇게 이해하며 읽는데요,

 

그러니까 이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의 의미는, 아담이라는 첫 번째 태고교회에 ‘구백삼십’(930)으로 표현되는 어떤 수많은 상태와 그 변화가 있었으며, 그후 이 교회의 퍼셉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퍼셉션으로 늘 주님과 연결된 상태가 살아있는 상태인데, 그러므로 교회에 이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곧 그 교회는 죽었다, 그 교회의 쓰임새가 다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퍼셉션(perception)이란 천국에서 주님과 천사들 간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an internal dictate)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창3:8) 같은 것이지요.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직까진 그래도 존재했던 시기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라 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이 시작된 때를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라 합니다. 새로운 방식은 양심(conscience)입니다. 즉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그 이후 사람들은 이전 선조들이 누렸던 방식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저급한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내면이 열린 사람들, 즉 삶이 받쳐주는 신앙인들은 이 퍼셉션으로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학습하지 않고도 지금 이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는지 여부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내 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처럼 말입니다.  

 

이 ‘구백삼십’을 비롯, 노아의 홍수 전까지 존재했던 태고교회 전체 기간이 실제로,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얼마만큼 존속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구의 나이가 45, 6억 년이나 되고, 그 사이 오늘날 고고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소위 오파츠(Out-of-place artifacts, OOPARTS)라는 것들이 발견되는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주님도 굳이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시지는 않는, 그런 어떤 장구한 세월이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인 아담은 그동안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 중 주님이 가장 사랑하신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천적(celestial) 교회, 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2장 3절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반면, 창5에 쭉 나열되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및 므두셀라 등 이후 노아로 연결되는 교회들은,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점점 황폐해져서 결국 대홍수, 노아의 홍수로 표현되는 첫 번째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교회들입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건, 교회 안에 주님의 신성, 곧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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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은 자기 제사를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그 이유를 말씀하셨으나 결국 그는 들에 있을 때 아우 아벨을 쳐죽이지요. 이 정도로도 그의 악은 충분한데 심지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시는 여호와 앞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 대답하는 등 정말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그랬던 그가, 여호와의 설명, 곧 그가 자초한, 앞으로 전개될 삶의 무게 앞에 절망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자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시며, 사람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십니까?

 

다음은 말씀을 속뜻, 즉 내적 의미로 읽는 천사들이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이렇게 밖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아벨은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 신앙,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faith without charity)을 말합니다. 가인의 제사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며, 그래서 주님이 결코 받으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이 가인의 역사로 흐를 걸 아시고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서 아벨이라는 신앙을 일으키실 것을 섭리하셨으며, 그래서 이 가인 신앙을 보호하기로 하시고,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이 신앙을 건드리면 그걸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으로 보겠다 하신 것입니다.

 

타인의 신앙이 나와 다르다 하여 함부로 말로, 행동으로 그의 신앙에 폭행을 가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 역시 주님이 공을 들이시는 사람이며, 나만 가만히 있으면, 즉 훼방을 놓지 않으면, 그는 어쩌면 주님의 인도대로 체어리티의 사람, 아벨 신앙의 후손이 될 수도, 그러니까 지금은 신앙 따로, 사랑 따로의 신앙인이지만, 그의 안에 신앙심이라는 게 남아있기만 하면 주님은 그걸 가지고 일을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창세기 1장부터 쭉 읽다 보면, 아직 지상에 사람은 가인까지 셋뿐인데, 아벨은 죽었으므로, 갑자기 가인의 입에서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나중엔 놋 땅에 거주하며 아내까지 얻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요?

 

천사들은 창세기 11장 아브람 전까지는 그 등장인물들을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부르던 교회로 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이름으로 부르던 신앙이나 교리로 보지요. 참고로 아브람 전까지는 실제 역사가 아니며, 그 전까지의 장구한 역사(※ 참고로, 저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을 받아들입니다)를 일종의 스토리처럼 엮은 것입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AC.66, 창1 뒤,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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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담, 가인, 아벨 등은 모두 교회를 말합니다. 즉 아담이라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서 두 종류의 신앙이 일어났는데, 그 하나가 가인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 다른 하나는 아벨이라는 신앙을 가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특별히 에벨(창11) 전까지 등장하는 인명(人名)들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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