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2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는 건,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sensuous part)가 타락의 원인임을 깨달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뱀이 모든 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았다’(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는 건, 그들의 감각 파트가 천적인 것들로부터 등을 돌려 몸에 속한 것들을 향했으며, 그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게 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기서 ‘짐승’(beast)과 ‘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와 같이 애정(affections)을 의미합니다. ‘배로 기어간다’(serpent going upon its belly)는 건, 그들의 감각 파트가 더 이상 하늘의 것들을 바라볼 수 없고, 오직 몸과 땅의 것들만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평생 흙을 먹는다’(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는 건, 그들의 감각 파트가 몸과 땅에 속한 것들 외에는 아무 걸로도 살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곧 지옥 상태(infernal state)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By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at they perceived their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and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signify affections, as before. The “serpent going upon its belly”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could no longer look upward to the things of heaven, but only downward, to those of the body and the earth. Its “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became such that it could not live from anything but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e earth, that is to say, it became infernal.

 

 

해설

 

이 글은 창3:14에 담긴 상징들을 하나씩 해설하면서, 감각적 인간이 어떻게 영적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는 건, 실제 뱀과의 대화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어느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들이 감각과 자기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한 결과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감각 파트는 원래 인간 안에서 가장 바깥 단계에 있으며, 위로는 이성(rational)을 섬기고, 더 위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감각이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뱀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게 아니라, 하늘의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배로 기어간다’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원래 인간의 내적 시선은 위를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천국과 주님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주인이 되자 시선이 완전히 아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관심의 중심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세상, 이익과 소유, 감각적 만족이 됩니다. 이것이 ‘배로 기어간다’는 상징의 내적 의미입니다.

 

특히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매우 강렬합니다. 성경에서 흙은 종종 가장 낮은 차원의 것, 곧 순전히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흙을 먹는다는 건, 더 이상 하늘의 선과 진리로 양육되지 못하고, 오직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양식으로 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영적인 것에는 흥미를 잃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만을 실재로 여기게 되면, 바로 이런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AC.242는 단순히 뱀의 형벌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방향 전환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원래는 위를 바라보던 존재가 아래만 바라보게 되었고, 하늘의 양식을 먹던 존재가 흙을 먹게 되었으며, 주님의 빛 아래 살던 존재가 몸과 세상의 것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감각적 인간의 타락이며, 동시에 지옥 상태의 본질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41, 창3:14-19, ‘배경’

배경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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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시각은 단지 도구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고, 그들의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상태였는지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때, 실제로는 단어들을 듣고 있지만 마치 듣지 않는 것처럼 그 의미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단어의 의미조차 넘어서 그 안에 담긴 더 보편적인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 있는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땅 위 사물들을 볼 때, 그것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붙잡혔고, 그 사물들 자체를 생각하였으며, 그것들로부터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을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감각적인 것(the sensuous)이 주된 것이 되었고, 조상들에게서처럼 단지 도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과 땅에 속한 것이 주된 것이 되면, 사람은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하늘의 일들을 추론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를 눈멀게 합니다. 이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뜻은 듣지 않고 단어들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그 의미의 전체적인 취지는 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단 한 단어, 심지어 문법적인 특징 하나만 가지고도 그 사람이 말한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being celestial men, were so constituted that every object they beheld in the world or upon the face of the earth, they indeed saw, but they thought about the heavenly and Divine things the objects signified or represented. Their sight was merely an instrumental agency, and so consequently was their speech. Anyone may know how this was from his own experience, for if he attends closely to the meaning of a speaker’s words, he does indeed hear the words, but is as if he did not hear them, taking in only the sense; and one who thinks more deeply does not attend even to the sense of the words, but to a more universal sense. But the posterities that are here treated of were not like their fathers, for when they beheld the objects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as they loved them, their minds cleaved to them, and they thought about them, and from them about things heavenly and Divine. Thus with them what is sensuous began to be the principal, and not as with their fathers the instrumental. And when that which is of the world and of the earth becomes the principal, then men reason from this about the things of heaven, and so blind themselves. How this is may also be known by anyone from his own experience; for he who attends to the words of a speaker, and not to the sense of the words, takes in but little of the sense, and still less of the universal import of the sense, and sometimes judges of all that a man says from a single word, or even from a grammatical peculiarity.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타락의 본질을 단순히 악한 행동이 아니라 ‘보는 방식의 변화’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눈으로 나무를 보았지만, 나무 자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통해 생명과 성장, 그리고 주님의 질서를 보았습니다. 태양을 보면서는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였고, 빛을 보면서는 신적 진리를 생각하였습니다. 꽃을 보면서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결실을 보면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자연계는 목적이 아니라 창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창문을 본 것이 아니라 창문 너머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각은 주된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물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곧 생각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을 통해 천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자연계가 더 이상 상응(correspondence)의 세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최종 실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감각적인 게(the sensuous) 주인이 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원래는 영적인 것이 위에 있고, 감각적인 것은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그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매우 흥미로운 예를 듭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보통 단어 자체보다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의미는 보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에만 집착한다면, 그는 말의 진정한 뜻을 놓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단어 하나나 문법 하나를 붙잡고 전체 내용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적인 삶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의미를 보았고, 후손들은 단어를 보았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상응되는 실체를 보았고, 후손들은 외형을 보았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국을 보았고, 후손들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C.241은 단순히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타락은 먼저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데서 시작, 그다음에는 보는 방식이 바뀌며, 결국에는 도구가 주인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세상을 보면서 하늘을 보았지만, 그 후손들은 하늘을 생각한다 하면서도 결국 세상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감각은 도구가 아니라 주인이 되었고, 인간은 하늘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AC.242,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AC.242-249)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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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0, 창3:14-19, ‘19절 개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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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9)



AC.240

 

다음으로는 그들이 신앙(faith)과 사랑(love)에 속한 모든 것에 혐오(aversion)를 갖게 된 상태가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man)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도 묘사됩니다. (19절) Next, their aversion to everything of faith and love; and that thus from being man they became not men. (verse 19)

 

 

해설

 

이 글은 AC.239의 연장선에 있으며,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엄중한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결과로 나타난 영적 상태가 설명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에 혐오를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의심했고, 다음에는 자기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는 신앙과 사랑 자체를 싫어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의 중요한 법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에 오래 머물면, 나중에는 진리 자체를 불편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체어리티(charity)와 이웃 사랑은 부담스럽고 거슬리는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한 무관심이었던 것이 점차 반감으로, 그리고 마침내 혐오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외형이나 지능, 언어 능력이 인간성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 관점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신앙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성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보면, 그는 인간(homo)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끊고, 사랑과 신앙을 거부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추구하게 되면, 외적으로는 인간일지라도 내적으로는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이 점은 AC.239에서 언급된 ‘짐승 같은 본성’과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진리와 사랑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높은 차원을 잃어버리고 본능과 욕망만을 따라 살게 되면, 영적으로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40은 단순한 도덕적 비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사랑에 대한 혐오가 생기면, 바로 그 인간성의 핵심이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AC.240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몇 가지 진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사랑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영적 의미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을 가리켜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의 최종 단계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의 변질임을 보여주는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AC.241, 창3:14-19, ‘배경’

배경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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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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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3:18)



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묘사되며, 또한 그들의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도 묘사됩니다. (18절) The curse and vastation are described, and also their ferine nature. (verse 18)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18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해설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곧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먼저 ‘저주’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미워하시거나 벌을 내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AC.223 등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질수록 인간 안의 선과 진리가 점점 말라 가는 상태가 바로 저주입니다.

 

다음으로 ‘황폐’(vastation)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황폐란 단순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제거되어 텅 비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완전히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밝은 지각(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연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감각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그 선과 진리가 하나씩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AC.239는 바로 그 과정을 ‘황폐’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ferine’은 야생 짐승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의해 인도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면 점차 더 낮은 수준의 욕망과 충동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과 짐승의 가장 큰 차이를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AC.238에서 보았듯이 이성이 추론(ratiocination)으로 타락하고, AC.239에서 선과 진리가 황폐되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더 본능과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짐승 같은 본성’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실제 동물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여전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기 사랑에 완전히 지배된 사람들을 영적으로는 맹수나 독사와 비슷한 상태로 설명하곤 합니다.

 

따라서 AC.239는 창3의 타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간 요약과 같습니다.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로 저주가 생기고, 그 저주로 인해 선과 진리가 황폐되며,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갑니다.

 

이처럼 AC.239는 단순히 형벌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저주는 그 결과이고, 황폐는 그 과정이며, 짐승 같은 본성은 그 최종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AC.240, 창3:14-19, ‘19절 개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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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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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3:17)



AC.238

 

그다음에는 이성(rational)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가 묘사됩니다. 곧 그것이 동의(consent)하였고, 그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였으며, 지옥(infernal)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참된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17절) The quality of the rational is then described, in that it consented, and thus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so that reason no longer remained, but ratiocination. (verse 17)

 

 

해설

 

이 글은 AC.237의 연속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교회를 의미하는 ‘여자’가 own을 사랑하게 되어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여자를 다스려야 했던 ‘이성’(rational) 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원래 이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이성(reason)은 자기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주님의 빛 아래 있을 때 가장 건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성은 의지와 애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동의(consent)하였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타락입니다. 감각이 먼저 유혹했고, 의지가 그것을 좋아했으며, 마지막으로 이성이 그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저주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성이 자신의 본래 기능을 버리고, 자기 사랑과 감각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지옥 상태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reason’과 ‘ratiocination’의 차이입니다. 한국어로는 둘 다 ‘이성’ 또는 ‘추리’로 번역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단어를 엄격히 구분합니다.

 

‘Reason’은 주님의 빛 안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참된 이성입니다. 반면 ‘ratiocination’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하는 추론입니다. 다시 말해, reason은 진리를 찾기 위해 생각하지만, ratiocination은 자기 생각을 옹호하기 위해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겸손한 사람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reason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 생각이 왜 옳은가?’를 증명하려 합니다. 이것은 ratiocination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타락 이후 인간에게 이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이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끝없는 추론과 논쟁이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AC.238은 AC.229-233의 내용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각을 신뢰했고, 다음에는 own을 사랑했으며, 이제는 그 잘못된 사랑을 이성이 정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진리를 찾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잘못된 전제 위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성을 진리를 향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이것이 AC.238의 핵심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의지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성까지도 그 타락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이성(reason)은 남아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추론(ratiocination)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인간 정신이 지옥 상태로 떨어지는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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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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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3:16)



AC.237

 

교회는 또한 ‘여자’(the woman)에 의해 더 자세히 묘사됩니다. 이 여자는 자기 자신(self) 또는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rational)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16절) The church is further described by the “woman,” which so loved self or the own as to be no longer capable of apprehending truth, although a rational was given them that should “rule”. (verse 16)

 

 

해설

 

이 글은 창3:16의 내적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교회(church)의 한 상태로 봅니다. 이전에도 그는 ‘남자’(man)를 이해(understanding) 또는 이성(rational)과 관련하여 설명했고, ‘여자’(woman)를 의지(will) 또는 애정(affection)과 관련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점차 own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perception)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면서 사랑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향하던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자가 own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존감이나 자기 보존 본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자기 판단과 자기 욕망을 최고로 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진리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왜곡되면 이해도 왜곡됩니다. 자기 사랑이 강해질수록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 보기 어려워집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보다,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지각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이성’(rational)은 남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AC.237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는 이성이 주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스린다’(rule)는 건 억압하거나 강제한다는 게 아닙니다. 의지와 애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초기에는 사랑 자체가 주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이성적 통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왜곡되기 시작하자,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이성이라는 새로운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celestial man)과 영적 인간(spiritual man)을 구분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전자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후자의 상태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AC.237은 단순한 심판 말씀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잃어버린 교회의 비극을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아직 이성이라는 수단을 남겨 두셨다는 희망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타락 이후 인간 상태의 중요한 변화를 설명합니다. 본래 인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own이 사랑의 중심이 되자 그 지각은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이성(rational)을 주셔서, 비록 예전처럼 직접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진리를 배우고 분별하며,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것이 AC.237에서 ‘여자’와 ‘다스리는 이성’이 의미하는 깊은 뜻입니다.

 

 

 

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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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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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3:15)



AC.236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절) Therefore to prevent all mankind from rushing into hell, the Lord promised that he would come into the world. (verse 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3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희망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기 사랑이 생겼고,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점점 더 own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결과 태고교회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236에 이르면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이제 주님께서 하실 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류는 단순히 약간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rushing into hell)’할 정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과장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중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스럽게 지옥적 사랑들,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계속 타락하면, 결국 인간은 천국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강림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개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만일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과 천국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3:15는 흔히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고 불립니다. 타락 직후에 이미 구원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막 넘어졌을 때, 주님은 이미 회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는 이 약속이 단순히 미래의 한 사건 예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주님을 떠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인간을 되찾기 위한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이며, 인간의 실패보다 더 강한 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였습니다.

 

이 점에서 AC.236은 AC.223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지만, 주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돌아섰지만, 주님은 인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최종 표현이 바로 성육신(Incarnation), 곧 주님의 세상 강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창3:15는 단순한 예언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을 미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첫 부분에서 이미 복음의 핵심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타락했지만, 주님은 모든 인류가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친히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AC.236은 창세기 3장의 어두운 흐름 속에 처음 비치는 새벽빛과 같습니다. 타락 이야기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역사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미 주님의 구원 계획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창3은 단순히 죄의 시작에 관한 장이 아니라, 동시에 구원의 시작이 선포되는 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AC.237, 창3:14-19, ‘16절 개요’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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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5, 창3:14-19, ‘14절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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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35

 

감각(the senses)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 파트, 이걸 (serpent)이라 한 건데, 이 감각 파트는 스스로를 저주하였고, 지옥(infernal)이 되었습니다. (14) Being unwilling to believe anything that could not be apprehende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which is the “serpent”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verse 14)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AC.229-233에서 계속 설명해 온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실제 뱀이 저주를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의 감각 수준(sensuous level)이 자기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자연계를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감각이 최종 판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감각은 이해를 섬기고, 이해는 신앙을 섬기며, 신앙은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면서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러하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뱀의 상태라고 봅니다. 감각은 본래 가장 바깥 단계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위에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점점 부정되고, 결국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 실재처럼 보이게 됩니다.

 

특히 AC.235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스스로를 저주하였다’(cursed itself)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이전 AC.223에서도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주님께서 어떤 존재를 미워하시거나 벌하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초래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사람이 태양을 등지고, 깊은 동굴로 들어간 뒤 어둠에 갇혔다고 해서 태양이 그 사람을 벌한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는 스스로 빛을 떠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뱀의 저주도 이와 같은 원리로 이해합니다. 감각이 주님과 신앙을 섬기는 자리에 머물렀다면 선한 도구가 되었겠지만, 스스로 주인이 되려 했기 때문에, 결국 지옥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5는 단순히 뱀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경고입니다. 인간이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앙 위에 두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단지 ‘확인해 보고 믿겠다’는 정도로 시작, 결국에는 ‘감각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은 사라지고, 몸과 세상만 남게 됩니다.

 

따라서 AC.235의 핵심은 ‘감각을 사용하지 말라’가 아니라, ‘감각을 주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각은 훌륭한 종이 될 수 있지만, 본래 자리를 벗어나면 나쁜 주인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바로 이 점에서 넘어졌고, 그 결과 감각적 인간은 스스로를 저주, 지옥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36, 창3:14-19, ‘15절 개요’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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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4, 창3:14-19, ‘창3:14-19 본문, 개요’(AC.234-279)

창3:14-1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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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1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4-19)

 

개요

 

AC.234

 

여기서는 홍수(the flood)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그 이후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교회가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 예언됩니다. 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 is here described; and as at that time the church utterly destroyed itself, it is foretold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and save the human rac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3장의 해설이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 전체의 역사와 운명을 다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창3의 여러 장면들을 통해 태고교회 후손들이 어떻게 점차 타락해 갔는지를 설명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사랑이 생겼고, 다음에는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지각(perception)은 약해지고,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게 되더니, 결국 자신들의 own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AC.234에 이르면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이 단순한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붕괴 과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붕괴는 일시적인 약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utterly destroyed itself) 표현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파괴되었다’가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였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몰락은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제나 인간이 먼저 주님을 떠났고, 진리를 거부했으며,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AC.223에서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신다’고 했던 원리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경우 그 결과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홍수 직전의 사람들은 자기 사랑과 거짓 확신 속에 깊이 빠져 있었고, 천국으로부터 오는 영향(influx)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홍수를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 예언된다.’

 

창세기 3장은 보통 타락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한 타락의 기록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타락과 함께 이미 구원의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를 완전히 구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가 무너졌고, 그 뒤의 고대교회도 결국 쇠퇴했으며, 유대교회도 타락했습니다. 인간은 반복해서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단순히 예언자나 천사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성육신(Incarnation)을 인류 역사의 중심 사건으로 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직접 인간성, 그러니까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234는 매우 감동적인 글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간의 실패 이야기였습니다. own, 자기 사랑, 감각의 지배, 신앙의 상실, 체어리티의 소멸, 영적 어둠의 확대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으로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파괴했지만, 즉 파괴를 자초했지만, 주님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반복해서 넘어졌지만, 주님은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창3의 가장 깊은 의미는 단순히 ‘인간이 타락했다’가 아니라,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 주님은 구원을 준비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234는 창세기 3장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열쇠와 같습니다. 이 장은 죄의 시작을 말하는 동시에, 장차 오실 주님에 의한 회복의 시작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주님의 구원 계획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이 짧은 글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35, 창3:14-19, ‘14절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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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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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6/2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6, ‘주 예수 이름 높이어’, 82, ‘성부의 어린 양이입니다.

 

오늘 3 네 번째, 본문은 창3:8-13이고, AC 글 번호로는 218번에서 233입니다.  

 

먼저 본문,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6-7)

 

제목은

 

네가 어디 있느냐 - 타락 이후에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며, 다음은 AC.218-233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할 본문 전체의 큰 흐름은 창세기 38절로 13절까지, 곧 타락한 인간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숨는 장면에서 시작,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그리고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인간 내면의 구조까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숲속에 숨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퍼셉션을 잃어 가면서도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은 상태, 곧 마지막 남은 퍼셉션과 자연적 선 가운데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글인 AC.218은 이 장면을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퍼셉션의 마지막 흔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먼저 8절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귀로 들리는 외적 소리가 아니라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 곧 사람 안에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희미한 잔재로 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지만, 타락이 진행되자 그 지각, 즉 퍼셉션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마치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음성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기쁨으로 듣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듣습니다. 이는 주님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님의 음성이 순수한 상태에서는 평안과 기쁨이지만, 악을 의식하는 상태에서는 책망과 두려움으로 경험됩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는 단순한 저녁 시간이 아니라, 교회가 아직 완전한 밤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낮의 빛을 잃어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어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입니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숨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이 숨음은 절망의 표시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도 주님의 진노를 피해 달아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사랑, 모든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피한 것은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자비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자비의 얼굴을 피하다니요! 문제는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랑의 빛조차 불편하게 느끼며, 자기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참고로,자비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은혜는 머리가 겸손한 사람들이 찾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적 선 안으로 물러난 상태로 봅니다. 이미 천적 이노센스와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자연적 선은 완전한 영적 선은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줄 알고, 악을 악으로 느끼며,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선한 바탕입니다. 특히 나무가 단수로 언급되는 것은, 이전에는 많았던 퍼셉션의 풍성함이 이제 거의 사라지고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처럼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본문의 해당 부분도 수많은 퍼셉션 가운데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9절과 10절에서는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이 아담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상태를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강제로 회개시키지 않으십니다. 먼저 사람에게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시고, 스스로 말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너는 지금 어떤 사랑 안에 있느냐?’,너는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상태를 묻는 영적 질문입니다.

 

AC.227228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 양심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늘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악과 거짓으로 끌어가려 할 때, 천사들은 그것을 막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려 합니다. 이때 사람 안에는 내적 전투가 일어나며,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에게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사람에게는 양심으로,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내적 딕테이트로 느껴집니다. 천사들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생각과 애정이 신앙의 진리사랑의 선에 맞는지, 반대되는지를 사람 자신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지각합니다.

 

11절로 13절에서는 책임 전가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네가 먹었느냐?’ 물으시자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변명 장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보고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이성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이 감각 파트에게 속임을 당했고, 결국 주님과 말씀을 그대로 믿기보다 먼저 자기 감각과 자기 판단으로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이후 AC.230-232는 그 타락의 뿌리를 더 넓게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말기의 주된 악은 세상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곧 재물을 쌓으려는 욕망보다, 자기 판단을 주님의 말씀보다 높이 두려는 욕망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악이 모든 시대의 교회에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홍수 이전 교회, 홍수 이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주님 이후의 교회,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까지, 근본 악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믿는 것입니다.

 

AC.232는 이 문제를 현대적으로 더 무겁게 만듭니다. 옛사람들은 감각으로 불신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기억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그 불신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 주님을 섬기려 하는 대신, 주님을 재판하는 법정이 될 때 어둠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AI와 과학 문명의 시대에도 매우 날카롭게 들립니다. 문제는 지식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으로 주님 없이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AC.233은 이 흐름의 결론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계의 작은 것 하나도 완전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영적이고 천적인 생명의 신비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사람은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악으로 기울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임을 집니다. 반대로 선은 천사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 구조는 감각적 사고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인간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함께 보존되는 핵심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뒤에도 곧바로 완전히 버려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퍼셉션과 자연적 선을 통해 여전히 들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악을 의식할 때, 주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두려워하고 숨습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을 정죄하기보다 먼저 부르시고, 스스로 자기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자기 감각과 자기 지식을 주님보다 위에 두면, 그 희미한 빛마저 어둠으로 바뀌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지 에덴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너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감각과 자기 지식 속에 숨어 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아래는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전체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18,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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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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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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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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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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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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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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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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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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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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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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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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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0, 창3:11-13,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랑’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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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1, 창3:11-13, ‘모든 교회 시대를 꿰뚫는 근본 악의 뿌리’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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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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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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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링크들 중 오늘 예배 때 시간 관계상 리딩을 위한 선별 글들입니다.

 

 

AC.218,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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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심화 1, ‘민6:25-26’

AC.222.심화 1. ‘민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 26) Jehovah make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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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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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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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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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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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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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오늘 우리는 에덴동산에 숨은 아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과 자기 생각 속에 숨어 주님의 음성보다 우리 자신의 판단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며, 오늘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랑으로 부르고 계심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과 진리를 지켜 주시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지식과 판단보다 주님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하시고, 숨거나 변명하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이시며 빛과 평화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28(D1)

 

2657, 4, 창3.4, 2026-06-28(D1)-주일예배(창3,8-13, AC.218-233), ‘네가 어디 있느냐 - 타락 이후에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pdf
0.97MB

 

 

 

주일예배(2026/06/21, 창3:6-7, AC.207-217),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

※ 오늘(2026/06/2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5, ‘큰 영화로신 주’, 찬81, ‘주는 귀한 보배’입니다. 오늘은 창3 세 번째, 본문은 창3:6-7이고, AC 글 번호로는 207번에서 217번입니다. 먼저 본문, 6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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