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모든사람안에리메인스를보존하지않으신다면그는필연적으로영원히멸망할수밖에없습니다.영적생명과천적생명이리메인스안에있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사라진것처럼보이는가운데서도주님께서보존하시는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없으면영원히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있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생명과천적생명이리메인스안에있다’고 말합니다. (AC.468심화)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시청자의 감정을 한쪽으로 강하게 끌고 갑니다. 결혼 전에는 ‘요즘누가외벌이를해? 나도300버는데그걸왜놔?’라고 말했던 아내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월급 380만 원으로 세 식구의 생활비와 대출을 감당하면서 점심값까지 아끼는데, 아내는 어린이집 등원 후 친구들과 카페와 브런치 식당을 다니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제주 여행까지 갑니다. 영상 첫 장면부터 남편의 통장에는 11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가얼마나힘든줄알아? 나요즘숨돌릴틈이하나도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시청자가 남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먼저 영상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즘여자들은편하게살려고전업주부가되려한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자체도 육아 때문에 실제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삶의 형태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에 영상이 정확하게 짚듯이 ‘문제는전업주부라는선택이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한 사람이 ‘나는아이를낳으면집에서아이를키우며살고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동의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상의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맞벌이냐외벌이냐’가 아니라 ‘진실이있었느냐’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혼자 벌어 대출을 갚고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둘다계속일하는거맞지?’라고 명시적으로 확인합니다. 아내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그 대답을 기초로 결혼 후의 경제생활을 계산했고, 실제 신혼 1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적금을 붓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연애 중 흘려들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결혼생활의 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후반부에서 아내는 마침내 ‘나다시회사다니고싶지않아. 애때문이아니야. 그냥그 길로돌아가기싫어’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아팠던 것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결혼전에이말을들었다면적어도선택이라도할수있었을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참된 자유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선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춘 채 그의 선택을 받아냈다면 외형적으로는 상대가 자유롭게 결정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유의 토대는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하지않는예의’ 정도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아이를낳으면직장을그만두고싶다’, ‘나는외벌이를감당할자신이없다’, ‘나는자녀를꼭원한다’, ‘나는부모를모시고살고싶다’, ‘나는빚이이만큼있다’ 같은 문제들은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혀야 합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을 얻기 위해 상대가 싫어할 만한 사실을 감추는 순간, 사랑은 이미 상대를 위한 사랑보다 ‘내가원하는것을얻으려는사랑’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아주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proprium은 언제나 ‘나는이기적이다’라는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처음에는 ‘돌까지’라는 이유가 있었고, 돌이 지나자 ‘두돌까지’, 다시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아프면누가데리러가느냐’, ‘경력단절여성을누가뽑아주느냐’라는 새로운 이유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내면의 실제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나는다시회사에다니고싶지않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이유를 나중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육아, 건강, 가족, 희생처럼 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편하고싶다’고 말하면 양심에 걸리지만 ‘아이를위해서다’라고 말하면 스스로도 선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외적 명분보다 그 아래 있는 사랑, 곧 ‘무엇을위해이것을원하는가’를 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명분보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상 속 아내의 지난 3년을 ‘놀았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출산과 초기 육아가 실제로 매우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은 영상 자체도 인정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 1년 동안 남편 역시 아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의 문제를 ‘밖에서돈을벌지않으면일을하지않는것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안의 노동 역시 실제 노동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시장가격보다 그 노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 사이의 ‘공동의짐’이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도 처음부터 반드시 월 300만 원짜리 정규직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월 100만 원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영상의 표현대로 ‘우리집돈문제를둘이같이들고있다는감각’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모든 일을 정확히 50 대 50으로 나누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한 사람이 돈을 더 벌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육아를 더 맡을 수 있으며, 질병이나 실직이 생기면 한쪽이 거의 전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똑같으냐가 아니라 ‘우리가이것을함께지고있느냐’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결혼의 핵심 역시 두 사람이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되고자하는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생활에서 돈은 ‘당신돈’과 ‘내가쓸돈’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육아 역시 ‘당신이맡아야할일’이 될 수 없으며, 집안일 역시 한 사람의 고정된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형편과 능력과 시기에 따라 역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의삶’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속 가장 심각한 장면은 어쩌면 카페도 필라테스도 제주 여행도 아닙니다. 아내가 ‘당신월급으로못사는것도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 안에서는 남편의 노동이 이미 ‘우리가정을위해한사람이감당하는희생’이 아니라 그냥 매달 들어오는 380만 원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편이 점심값 6천 원을 아끼고, 야근하고, 막차를 타기 위해 뛰고, 회사에서 자리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인 월급만 남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감동주는일본여자와눈치주는한국여자’ 영상과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그 영상의 핵심은 ‘상대가한일을알아봐주는가’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도 남편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이 배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는 외벌이 남편들이 ‘수고했다’보다 ‘당신이뭘아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결국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업주부의 가사와 육아를 남편이 ‘집에서하는게뭐가힘들어?’라고 말한다면 정확히 같은 오류입니다. 배우자의 수고를 보지 않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도 당연하지 않고 아내의 밥과 빨래와 육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나는원래해야할일을하고있고당신도원래해야할일을하는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지고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바뀌기 쉽습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또 하나 나타나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친구남편들은그런거안따져’, ‘지은이남편은애어린이집보내면필라테스라도다니라고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에 따르면 그 비교 대상의 경제적 조건은 이 가정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비교의 문제는 다른 가정의 ‘결과’만 가져오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집의 여행, 자동차, 주택, 육아 방식, 소비 수준만 바라보면 내 배우자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 안에서 체어리티를 매우 빠르게 말라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힘들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남편도 생계 때문에 두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쳤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가더힘든가’를 판정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나도힘들어’라고 상대의 고통을 덮기 전에 ‘당신도힘들었구나’를 말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영상의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그래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가계부 전체를 식탁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석달안에하루네시간이든재택이든일을시작하자’, ‘그때까지가족카드한도를줄이자’, ‘일을시작하면등원과주말오전은내가맡고아이가아프면연차를번갈아쓰자’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이아내를굴복시켰다’고 읽을 장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영상의 서사 안에서는 그동안 감정과 변명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현실의숫자와구체적인역할’ 앞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에도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결혼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명령과 압박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입니다. 가계의 실제 형편을 함께 보고, 서로의 수고를 정확하게 말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진실하게 밝힌 뒤 두 사람이 자유롭게 공동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내가돈을버니내말을들어라’도 잘못이고 ‘내가아이를낳고키웠으니당신이모든경제적책임을져라’도 잘못입니다. 둘 다 자신의 기여를 상대를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어쩌면 돈도, 직장도, 카페도 아닙니다. ‘결혼전에알았더라면선택할수있었을텐데’라는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은 상대의 자유로운 ‘예’를 받아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예’를 얻기 위해 중요한 진실을 감춘다면 상대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보여준 사람에게 ‘예’라고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말을하면이사람이나와결혼하지않을지도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맞벌이할거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돈을무엇이라고생각하는가?’, ‘아이를낳으면누가어느정도일을줄일것인가?’, ‘한사람이직장을그만두고싶어지면어떻게결정할것인가?’, ‘가사와육아는어떻게나눌것인가?’, ‘부모의도움은어디까지받을것인가?’, ‘소비수준을어디에맞출것인가?’ 같은 질문입니다. 영상은 날짜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모든 미래를 계약서처럼 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결국 이 영상의 제목도 조금 달라집니다. ‘왜이여자는전업주부를원하게되었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배우자에게내진짜욕구를얼마나정직하게보여주고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내가원하는것을얻기위해선한명분을이용하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이것은 영상 속 아내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거듭남은 자기 욕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진실의 빛 가운데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는직장에돌아가기싫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외벌이를감당하기두렵다’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두려움과 욕구를 진리 가운데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삶’을 함께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월 380만 원도, 61만 원의 카페와 브런치 비용도, 1억 800만 원의 사라진 소득도 아닐 것입니다. 숫자는 문제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당신이알고선택할수있도록나는나자신을진실하게보여주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실한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당신책임’, ‘내책임’을 넘어 ‘우리의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결혼은 비로소 한 몸의 질서를 향해 갑니다. 한 사람이 돈을 벌든 둘이 벌든, 한 사람이 아이를 더 돌보든 둘이 정확히 나누든 그것은 가정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안에 진실과 자유와 상호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혼의 핵심은 ‘누가더많이했는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자기성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원하고 함께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쓰임을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교리=고대말씀=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말씀’(Ancient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전쟁기’와 수10:13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계시와퍼셉션이후대를위해보존되고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책을한권써두었고그것이그대로전해져모세오경이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계시와퍼셉션→에녹이라하는교회의교리화와보존→고대교회에서의전승과발전→고대의말씀과여러기록및전승→모세가사용한고대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정돈한교리가그대로모세오경이된것이아니라,태고교회의계시와퍼셉션을후대에전달하기위해보존한에녹의사역이고대교회의오랜전승을거쳐훗날말씀의기록으로이어지는큰섭리적흐름의한중요한출발점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심화)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셋을낳고,셋은에노스를낳고,에노스는게난을낳고...’ 하는 식으로 이름과 나이, 출생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을 때 이 이름들을 사람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AC.46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이장의이름들은사람을뜻하는것이아닌,다른어떤것들을뜻하는데,여기서는교리들또는교회들을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5의 문자적 형태를 부정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말씀의 속뜻으로는 이 족보가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본문이족보형식으로기록되어있다’는 것과 ‘속뜻으로그이름들이무엇을의미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AC.460-468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했는지를 읽습니다. 따라서 AC.461의 ‘사람’은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AC.462의 ‘셋’은 그보다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를, AC.463의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를, AC.465의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AC.466의 ‘노아’는 열 번째 교회이자 새로운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창5의 족보 전체가 속뜻으로는 ‘교회의계승과상태변화의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와 창5를 읽을 때 생기는 중요한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등장한 뒤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창5의 속뜻에서는 셋이 태고교회에 바로 이어지는 ‘두번째교회’라고 합니다. 만일 창4와 창5를 하나의 평면적인 연대기적 족보로만 읽으면서 동시에 각 이름을 교회의 순번으로 대응시키려 한다면 이 둘은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읽는 속뜻의 층위에서는 창4와 창5가 각각 교회의 서로 다른 영적 역사를 펼쳐 보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어떤 이름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나온다는 문자적 서술 순서를 그대로 창5의 ‘첫번째교회,두번째교회...’라는 영적 계승 순서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68은 이 문제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앞 장, 곧 창4에서 이름들이 ‘이단과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이미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창5의 이름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어떤것들’, 여기서는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이름으로 표현되는 영적 성질과 상태를 담을 수 있다는 상응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에녹’, ‘라멕’, ‘노아’라는 이름을 만날 때 속뜻이 묻는 첫 질문은 ‘이사람에게역사적으로무슨일이있었는가?’가 아니라 ‘이이름을통하여말씀은어떤교회상태를나타내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아담,셋,에녹,노아라는역사적인물은존재하지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AC.460-468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속뜻으로는이이름들이사람을의미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성 자체에 관한 질문과 속뜻으로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우리가 AC를 따라갈 때 우선 붙들어야 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문자적 본문은 족보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속뜻은 교회와 교리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5의 놀라울 정도로 반복적인 형식도 새롭게 보입니다.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고, 낳았다고 하고, 다시 살았다고 하고, 마침내 죽었다고 하는 동일한 구조가 계속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족보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서 시작된 어떤 영적 상태가 다음 교회로 전달되고 변화하며 마침내 쇠퇴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각 이름과 수, 그리고 ‘낳음’과 ‘죽음’의 표현은 이후 본문 해설에서 각각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라는 관점에서 풀리게 됩니다.
결국 창5의 이름들을 교회와 교리로 읽는 것은 문자적 본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더 깊은 말씀의 흐름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표면에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낳는 족보가 있고, 그 안에는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의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끝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리메인스가 남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고대인의 명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어 가시고 쇠퇴 가운데서도 어떻게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게 하는 열쇠입니다. (AC.460-468심화)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상당히 자극적인 대비로 시작합니다. 같은 남자가 한국에서는 늘 부족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고마움을 받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자 친구에게 한국인 여자 친구는 ‘괜찮아? 근데오늘내친구생일모임은어떡하지?’라고 묻고, 일본인 여자 친구는 죽과 음료를 들고 찾아옵니다. 영상은 이 두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 ‘눈치주던한국여자’와 ‘감동주던일본여자’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여자와일본여자는본질적으로이렇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사례이며, 국적이나 민족 전체의 영적 성향을 이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례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을받는방식과사랑을주는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속 첫 번째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끊임없이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100일에는 꽃다발이 아니라 목걸이를 알아서 준비해야 했고, 친구 모임에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알아내야 했으며, 조용하면 ‘어렵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버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행동을 고쳐도 그 변화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새로운 부족함이 다시 발견됩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연애를하는건지매일시험을보는건지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요구가 비교적 명확하고, 상대가 베푼 작은 행동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표현하며, 잘못했을 때도 무엇이 서운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지를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을 원하고 그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천국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상대가나를어떻게대하는가’를 계산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나는상대에게어떤선이될수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랑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됩니다.
영상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 바로 ‘사랑을확인받으려는사랑’입니다. 은정 씨 역시 성우 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영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다 상대가 알아서 맞혀주기를 원했습니다. 맞히면 당연한 것이 되고 틀리면 서운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연애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proprium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사랑한다면이것쯤은알아야지’, ‘나를사랑한다면이정도는해야지’, ‘다른남자친구들은한다는데왜당신은못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안에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나를얼마나사랑하는가’라는 척도로 계속 환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에서 반복되는 ‘비교’는 영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친구남자친구는이것을해줬다’, ‘다른남자들은다한다’, ‘언니남자친구는이것도보냈다’는 말입니다. 비교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여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당신이어서’ 기뻐하는 것인데, 비교는 ‘다른사람보다당신이얼마나잘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지속되면 선물도 선물이 아니게 되고, 배려도 배려가 아니게 되며,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조차 점차 의무가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김치먹고싶다고하셔서요’, ‘오늘우산씌워줘서고마워요’, ‘예약까지알아봐줘서고마워요’ 같은 아주 작은 반응입니다.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우산을 씌워주느라 젖은 어깨를 알아보고, 맛없는 식당에서도 결과보다 예약하고 준비한 마음을 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성우 씨가 일본인 여자 친구와의 차이를 ‘그사람은내가한걸알아봐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선을 가장 쉽게 ‘당연한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출퇴근길 배려가 몇 년 뒤에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감사했던 식사 준비와 설거지와 육아와 경제적 책임이 시간이 흐르면 ‘원래당신이해야하는일’이 됩니다. 영상도 정확히 이것을 지적합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명절에 운전하는 것 등이 어느 순간 모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감사는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받은 선을 ‘내가당연히받을몫’으로 보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밥을 해주는 것도, 돈을 벌어오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플 때 돌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 나를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상대는 ‘내필요를충족시키는사람’에서 ‘나에게선을베풀고있는한사람’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마워’라는 짧은 말은 관계 안에서 proprium의 지배를 약하게 만드는 매우 작은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 만든 김치찌개가 맛이 없었는데 유이 씨는 한 그릇을 다 먹고 ‘한국사람이해준김치찌개처음먹어봐요. 다음에또해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연습하고 나중에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를움직이는여자화법’ 정도로 읽으면 너무 얕습니다. 사랑이 상대 안의 선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선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비난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작은 선을 누군가 알아봐줄 때 훨씬 자유롭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유이 씨처럼 무조건 칭찬하고 참고 맞춰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상에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반례가 있습니다. 성우 씨가 약속을 잊고 술자리에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을 때 유이 씨는 ‘괜찮아요’라고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는조금서운했어요. 다음에늦으면먼저연락해줘요’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 일본 전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다만 ‘틀린것을알려주되창피하지않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핵심은 ‘남자는칭찬해야말을듣는다’도 아니고 ‘일본여자는한국여자보다남자를잘다룬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사랑하는사람의선을보고있는가, 아니면부족한것만찾고있는가?’입니다. 상대에게 열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부족함이 있을 때 proprium은 이상하게도 그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면 잠시 감사하는 대신 열한 번째 부족함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계속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의 수많은 수고를 ‘원래아내가하는것’으로 만들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수고를 ‘원래남편이하는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효도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교인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으며 교인도 목회자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함’은 감사가 사라지는 자리이며, 감사가 사라지면 관계는 조금씩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변하기 쉽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성우 씨 자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는 ‘안하면서운하다고할까봐’ 행동했지만 도쿄에서는 ‘하고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데려다주고 싶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요리하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합니다. 데려다주고, 선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념일을 챙깁니다. 그러나 내적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의무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기쁨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어떤사랑에서그것을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결혼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되고자하는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의 기대를 완벽하게 읽고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알려고 하고,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며, 받은 선에는 감사하고, 잘못은 사랑 안에서 바로잡으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자기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상 제목의 ‘감동주는일본여자와눈치주는한국여자’라는 구도는 ‘스베덴보리의렌즈’ 앞에서는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국적을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랑입니다. ‘내가얼마나사랑받는지끊임없이확인하려는사랑’과 ‘상대에게서오는작은선을발견하고기뻐하는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은 한국인 안에도, 일본인 안에도, 남자 안에도, 여자 안에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가 해준 작은 일을 보고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그정도는당연한것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의 실수를 부드럽게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것도몰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어떤여자를만나야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사랑하는사람에게어떤사람이되어가고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비추는 마지막 지점은 주님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서 작은 선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넘어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배우자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것,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것, 아픈 나를 돌보았다는 것, 서툰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내 말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들어오는 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남자는거창한대접을받고싶은게아니다’라는 결론도 조금 넓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베푼 작은 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았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고마워’, ‘오늘수고했어’, ‘당신이해줘서좋았어’, ‘그때내가힘든걸알아줘서고마웠어.’ 이런 말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존재와 선을 ‘내가보고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오래된 관계가 메말라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움이 많아졌을 때보다 ‘고마운것이없어졌을때’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마운 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거창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사람이 해준 아주 작은 일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이것밖에못하지?’에서 ‘이것도해주었구나’로 시선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둘 문장은 ‘한국여자와일본여자는다르다’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은정씨는사랑을확인받으려했고유이씨는사랑을알아봐줬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그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나는지금사랑을확인받으려고하는가, 아니면내곁에이미와있는사랑을알아보고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 가는 두 사람만 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다아니고, 훨씬더내적인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아우라가강해서악령이접근하지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진리의입류(influx)를통한영적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자신의힘으로싸우는것이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아우라범위를악령들이침범하기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않는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천사를통해임하는주님의선과진리의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거짓, 선과악의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실제무기고가있고천사들이칼을차고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생각과내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안의악·거짓·두려움·절망을자극 → 인간←선·진리·소망을일깨움←천사←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대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선과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파괴하여악을제거하려는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더이상다른존재를해치지못하도록억제하고분리하여질서를회복하는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통하여흘러드는주님의선과진리의스피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을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단순히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것은 우리가 주인공의 행동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된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먼저 무고한 사람이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며, 가해자들이 그 틈을 빠져나가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러고는 비질란테를 등장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를치우는사람’, ‘무력한사람들을돕는진짜기사’라고 환호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관객에게 위험한 질문 하나를 건넵니다. ‘법이정의를실현하지못한다면누군가는대신해야하지않는가?’
이 질문이 강력한 까닭은 그 출발점에 분명한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입니다. 강간과 살인, 폭력과 약탈을 ‘그사람에게도사정이있었을것’이라는 말로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체어리티는 악이 계속해서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포함합니다. 사회의 법과 재판과 형벌도 이런 관점에서는 단순한 세속 제도가 아니라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는 렌즈가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보고, 그것을 제어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 중간의 피해자 장면은 특히 곤혹스럽습니다. 비질란테는 피해자에게 재판이 몇 년이나 걸릴 수 있고, 그동안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계속 증언해야 하며,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것이당신이원하는정의입니까?’ 이어서 ‘정의를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그렇다면저사람이처리하는편이낫지않은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악에대한분노’와 ‘악인에대한증오’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지점까지 서로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 악 때문에 사람이 파괴되고 이웃이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을 증오하면서 그의 고통과 파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중심은 더 이상 ‘이웃을악에서보호하는것’이 아니라 ‘내가저사람에게고통을돌려주는것’으로 이동합니다. 정의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복수의 쾌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섬뜩한 것은 바로 이 변화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합니다. 다음에는 범죄자를 응징합니다. 그러다가 경찰에게까지 ‘나를방해하면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집행한다고 시작한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이 정의인지 결정하고, 누가 악인인지 판결하고, 형량까지 정하며, 마침내 자신을 막는 공권력까지 제거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장면은 판사를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비질란테는 미성년자를 집단 성폭행한 가해자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은 책임을 판사에게 묻습니다. 영화 속 판사는 이들의 범죄를 사회 통합의 실패와 연결하고 가해자들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러자 비질란테는 그 판사를 피해자를 해친 사람들과 사실상 같은 편에 놓습니다. 관객의 분노를 극대화하도록 만들어진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것과 ‘그러므로내가그판사를심판할권리가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개인에게 최종 심판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질서의 실패가 ‘나자신이질서가되어도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비질란테는 자기가 싸우던 악의 논리를 닮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영화는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정황을 일부러 제시합니다. 한 사람은 피해자가 옷을 그렇게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비질란테는 그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합니다. 결국 감옥을 피했던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죽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고 ‘저런자들은마땅히벌을받아야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와, 그들이 고통받고 죽는 모습을 즐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관객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지금정의가회복되기를바라는가, 아니면저인간들이처참하게당하는모습을보고싶은가?’ 두 마음은 겉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복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은 악인을 미워해서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사랑과 선이며, 심판조차도 질서를 회복하고 선한 자들을 악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 역시 ‘당한만큼갚아주시는’ 신적 보복이라기보다 악이 다른 존재를 무제한으로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질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도 형벌의 정당성은 ‘저사람이얼마나고통받아야내분이풀리는가’가 아니라 ‘악을어떻게억제하고무고한이웃을어떻게보호하며무너진질서를어떻게회복할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엄한 형벌이라도 그 내면의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함’이나 ‘봐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어쩌면 비질란테만이 아닙니다. ‘그를환호하는사람들’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영화를 보면서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되는 ‘우리자신’입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저런사람이필요하다’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proprium은 기묘합니다. 처음에는 ‘무고한사람을보호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악인은반드시벌을받아야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걸음에서 ‘그러므로내가그에게고통을주어도된다’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고통받는것을보니속이시원하다’가 됩니다. 이때 선과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내면에는 이미 복수와 증오가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나는악이다’라고 말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는정의다’라는 얼굴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그러니분노해서는안된다’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 역시 너무 단순합니다. 무고한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이 살해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데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을 반드시 영적 성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이웃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거부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악이멈추기를원하는가’, 아니면 ‘악한사람이파멸하기를원하는가.’ 전자는 질서를 향하고 후자는 복수를 향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마음에서는 이 둘이 너무나 쉽게 섞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고 즉시 성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티즌비질란테’가 ‘스베덴보리의렌즈’ 앞에서 던지는 질문은 ‘저비질란테가옳은가, 법원이옳은가?’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불편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악을미워하는가, 아니면악인을미워하는가?’, ‘나는피해자가보호받기를원하는가, 아니면가해자가고통받는것을보고싶은가?’, ‘나는정의를원하는가, 아니면정의라는이름으로나의분노가허락받기를원하는가?’
이 구별 앞에서는 저 역시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악행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법이 그것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렌즈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악을 선이라 하지 않되 악인을 향한 증오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복수를 정의로 착각하지도 않으며, 필요한 형벌과 질서는 단호하게 세우되 인간의 최종적인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이 잔혹하고 불편한 영화를 통과하며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분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역설은 이것입니다. ‘악과싸우는동안, 그악이내안으로들어오지않게하는것.’ 그것이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AC.443-448을 모두 읽고 나면 한 가지 큰 질문이 남습니다. 육체는 죽어 땅에 남는데도 사후의 존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며 자신을 여전히 ‘나’라고 느낀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을 계속 같은 사람으로 있게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영혼이죽지않는다’는 문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여섯 글에서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희미한 의식이나 기억의 흔적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다른 사람을 만나며 감각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AC.443은 먼저 육체가 사라지면 생명도 희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그 사람은 생명이 몸에 있고 영은 일종의 희미한 환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는 오히려 영들과 천사들이 더 큰 빛과 지성과 지혜 가운데 있으며, 그 지각 역시 매우 분명하다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나’의 의식과 지각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AC.444-446은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관념을 바로잡습니다. 영은 단순한 ‘생각’이나 아무런 실체도 없는 추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을 ‘유기적실체’라고 하며, 연장과 실체를 모두 제거하여 결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관념을 비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남는 것이 단순히 한 사람의 생각이나 기억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고 기억하고 지각하는 바로 그 주체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AC.447에서 이 사실은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자신의생명에있어서는영’이라고 말합니다. 몸은 사람이 땅 위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며, 살과 뼈 자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떠난 초보 영도 여전히 보고 듣고 대화할 수 있었고, 자신이 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나는영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서 육체는 사라졌지만, 자신을 ‘나’라고 느끼며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AC.448에 이르면 이 모든 설명이 실제 인물들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로 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몇 달에서 몇 년 동안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상에서 알았던 친구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싶어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고, 지상의 관계를 기억했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체험 안에서는 육체의 죽음이 개인의 정체성을 지워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눈에 보이는 육체와 거의 동일하게 생각한다면 육체가 죽는 순간 그 사람도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43-448의 관점에서는 육체가 ‘사람자체’라기보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몸입니다. 보고 듣고 원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의식하는 주체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다고 해서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통해 살아가던 그 영적 주체가 계속 살아갑니다.
이것은 ‘영혼은죽지않는다’는 표현보다 훨씬 생생한 사후관을 보여 줍니다. 흔히 ‘영혼’이라고 하면 육체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무엇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사후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보고 듣고 생각하며 대화하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합니다. AC.448에서 삶이 ‘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 옮겨 간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인간성이 줄어드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명과 지각이 더욱 분명해지는 방향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AC.443-448만으로 사후 인간의 모든 상태를 동일하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48은 ‘주님을신앙하는사람들’이 ‘더욱더밝아지는삶’으로 들어간다고 별도로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영의 영적 상태와 행복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단락이 일관되게 밝히는 핵심은 선악이나 천국과 지옥의 모든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육체의 죽음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443-448이 보여 주는 사후의 연속성은 ‘무언가가살아남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살아남는 것은 바로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며 자신을 ‘나’라고 지각하는 인간 자신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의 질문은 ‘죽으면내영혼이남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여기서살아있는나자신은본질적으로누구인가?’로 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답은 AC.447의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생명에있어서는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뒤에도 어떤 희미한 흔적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AC.448심화1)
AC.444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영은 ‘유기적’이며, 곧 ‘유기적실체’(organicsubstance)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오히려 이 표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영이 유기적 실체라면 육체처럼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영에게도 눈이나 뇌 같은 기관이 있다는 뜻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러나 먼저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반박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은 영에게 아무런 연장(extension)도 없다고 생각했고, 결국 영을 ‘생각’ 그 자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생각하는존재’와 ‘생각’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베덴보리는 그 사람이 지금 영이 된 상태에서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매우 섬세하게 촉각을 느끼며, 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영은 단순히 남아 있는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생각하고 감각하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기적실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육체의 시각에는 눈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내적시각,곧생각’에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어떤 실체적 토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생각이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은 채 허공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각하는 주체 역시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영을 ‘유기적실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뇌를 예로 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혼이나 영이 아무런 유기적 토대도 필요 없는 ‘생각자체’라면, 인간에게 내적 감각의 기관인 그토록 큰 뇌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영혼이 근육에 작용하여 다양한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점도 제시합니다. 여기서 그의 논지는 영혼을 육체의 어느 한 부분과 동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생각하며 작용하는 존재를 아무런 구조도 실체도 없는 추상적인 ‘생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AC.444만으로 ‘유기적실체’를 자연계의 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영이 어떤 종류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는지, 영적 기관과 육체적 기관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영의 연장은 자연적 공간의 연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까지 이 한 글에서 답하려 한다면 본문보다 앞서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이 ‘아무것도아닌것’이나 ‘순수한생각’이 아니라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므로 AC.444에서 ‘유기적실체’라는 표현의 핵심은 먼저 영의 ‘실재성’에 있습니다.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육체이고, 죽으면 그 생각만 희미하게 남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고 원하고 느끼는 ‘나’의 생명 자체가 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영을 단순한 생각이라고 하는 관념을 그토록 강하게 바로잡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은 생각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하는존재’이며, 바로 그 존재가 실제로 살아 있고 감각하며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AC.444심화1)
영혼 또는 영에 관하여 그들이 육체의 삶 동안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영들과의 체험에서 얻은 몇 가지 사례
AC.448
나는이세상에서알고지냈던많은사람들과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것도오랫동안,곧몇달에서몇년에걸쳐서그렇게했습니다.비록내적인음성이기는하지만,이세상의친구들과이야기할때처럼분명한음성으로대화를나누었습니다.때로우리대화의주제는사후인간의상태였습니다.그들은육체의삶이끝난뒤에도사람이이와같이살아간다는사실을육체의삶동안에는아무도알지못하거나믿지않는다는것을몹시놀라워했습니다.그런데실제로는삶이계속되며,그것도사람이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옮겨가는방식으로계속되고,주님을신앙하는사람들은더욱더밝아지는삶으로들어간다고했습니다. 그들은자신들이살아있다는사실을친구들에게알려달라고,그리고내가이곳에있는그들의친구들의상태에관해그들에게여러가지를이야기해주었던것처럼,자신들의상태가어떠한지도글로써서친구들에게알려달라고부탁했습니다.그러나나는그들의친구들에게이런것을말하거나글로써보낸다해도믿지않을것이며,오히려망상이라고하고비웃으며,믿기전에표적이나기적을요구할것이므로,나는단지그들의조롱거리가될뿐이라고대답했습니다. 그리고이런일들이참되다는것을믿을사람은아마도매우적을것입니다.사람들은마음속으로영들의존재를부정하며,그것을부정하지않는사람들조차누군가가영들과대화할수있다는말은들으려하지않기때문입니다. 고대에는영들에관하여이와같은불신의상태가없었습니다.그러나오늘날은그렇습니다.사람들은터무니없는추론(crazyratiocination)을통해영이무엇인지를알아내려고하며,자신들의정의와가정으로영에게서모든감각을빼앗아버립니다.그리고더학식있는사람이되고자할수록더욱그렇게합니다. I have conversed with many who had been known to me in this life (and this I have done for a long time—for months and years), in as clear a voice, although an inward one, as with friends in this world.The subject of our conversation has sometimes been the state of man after death, and they have wondered exceedingly that during the bodily life no one knows or believes that he is so to live when the bodily life is over, when yet there is then a continuation of life, and such a continuation that the man passes from an obscure life into a clear one, and those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into a life that is more and more clear.They have desired me to tell their friends that they are alive, and to write and tell them what their condition is, even as I had related to themselves many things about that of their friends here.But I replied that were I to tell their friends such things, or to write to them about them, they would not believe, but would call them delusions, would scoff at them, and would ask for signs or miracles before they would believe; and I should merely expose myself to their derision.And that these things are true, perchance but few will believe.For at heart men deny the existence of spirits, and even those who do not deny it are unwilling to hear that anyone can speak with spirits.In ancient times there was no such state of belief in regard to spirits, but so it is now when by crazy ratiocination men try to find out what spirits are, and by their definitions and suppositions deprive them of all the senses, and do this the more, the more learned they desire to be.
해설
AC.448은 AC.443부터 이어져 온 체험 기록을 마무리하면서, 이 단락 전체의 출발점이었던 ‘사후에도인간은실제로살아있는가?’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일반적인 영들과의 대화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 그들과 다시 대화했다고 보고하는 체험을 제시합니다. 더욱이 그것이 잠깐의 체험이 아니라 ‘몇달에서몇년’에 걸쳐 계속되었고, 비록 ‘내적인음성’이지만 이 세상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처럼 분명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체험으로 보고하는 증언이라는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크게 놀라워한 것은 단순히 ‘죽은뒤에도삶이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 안에 살 때에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이처럼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놀라워했습니다. 그들 자신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며, 생각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47의 초보 영이 자신이 이미 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던 장면과도 이어집니다. 육체의 삶 동안에는 몸을 자기 존재 자체와 너무 강하게 동일시하기 때문에, 몸을 벗고도 ‘나’가 그대로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후의 삶을 ‘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fromanobscurelifeintoaclearone)옮겨 가는 것으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AC.443과 정확히 호응합니다. AC.443의 사람은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 영에게는 희미하고 불분명한 삶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마지막인 AC.448에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삶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한 상태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443에서 시작된 문제가 AC.448에서 다시 돌아와 하나의 결론을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사람의 사후 상태가 동일하게 밝아진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희미한삶에서밝은삶으로’ 옮겨 간다고 한 뒤, 특별히 ‘주님을신앙하는사람들’(thosewhoareinfaithintheLord)은 ‘더욱더밝아지는삶’(alifethatismoreandmoreclear)으로 들어간다고 구별합니다. 적어도 이 글의 표현만 놓고 보면, 사후에 의식과 지각이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과 주님을 신앙하는 사람의 삶이 계속해서 더욱 밝아진다는 것은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448하나만으로 천국과 지옥을 포함한 모든 사후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상태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는 대목도 눈길을 끕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친구들도 그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런 사실을 전하거나 글로 써 보낸다 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망상이라고 하거나 비웃으며, 믿기 전에 표적이나 기적을 요구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증거를 하나 더 제시하면 누구나 믿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의 존재 자체를 마음속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증언이나 체험을 전해 주어도 그것이 곧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마지막 부분에서 AC.445-446의 논의와 다시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영의 존재를 입으로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누군가가 영과 대화할 수 있다고 하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배경 가운데 하나로 당시 사람들이 영에 관해 만들어 낸 지나치게 추상적인 관념을 지적합니다. 영이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정의와 가정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영에게서 모든 감각을 제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실제 존재가 아니라, 이름만 남은 추상적 개념에 가까워집니다. AC.444의 ‘단지생각’, AC.445의 ‘추상적생각’, AC.446의 연장과 실체를 둘러싼 논쟁이 여기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더학식있는사람이되고자할수록더욱그렇게한다’는 마지막 표현 역시 학문이나 깊은 사고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42에서는 오히려 태고 시대 사람들의 사고가 오늘날보다 훨씬 깊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AC.446에서 문제가 된 것도 지성 자체가 아니라 ‘지성을향한길을막는’ 추상적 논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비판받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정의와 가정을 실제보다 앞세운 나머지 영을 살아 있는 존재로 이해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는 사고입니다. 지성은 실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인간의 개념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길 때에는 오히려 실재를 가리는 장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AC.443-448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드러납니다. 영적 삶은 육체가 사라진다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며(AC.443), 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유기적 실체이고(AC.444), 영혼을 추상적 생각으로만 만들면 결국 사후 존속 자체를 믿기 어려워지며(AC.445),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의 연장과 실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AC.446), 인간에게서 실제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이며(AC.447), 육체의 죽음 뒤에도 바로 그 인간의 삶이 계속됩니다(AC.448). 그러므로 이 여섯 글이 궁극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죽은뒤에무엇이있는가?’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살아있는나는본질적으로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있어서는 영이며, 따라서 육체의 죽음은 인간 자신의 소멸이 아니라 그 생명이 계속되는 상태의 변화입니다. (AC.448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