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C’는 ‘SwedenborgWordCommentary’의 약어로, ‘스베덴보리의렌즈로읽는말씀해설’을 뜻합니다. 여기서 ‘Word’는 단순히 성경이라는 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한 ‘말씀’(the Word)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SWC에서 해설의 대상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SWC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요약하거나 그의 신학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는 작업이 아니라,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말씀의 내적 의미와 상응의 질서를 길잡이로 삼아 다시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 그 안에 흐르는 주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거듭남을 통합적으로 읽으려는 성경 해설 작업입니다.
SWC의 첫 번째 원칙은 ‘말씀의중심은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신적 인성의 영화가 다루어지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그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형성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SWC는 성경을 인간의 도덕적 교훈이나 자기계발의 이야기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족장들의 이야기, 출애굽과 광야 여정, 제사와 정결 규례 등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본문들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주님께서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영화의 역사와 연결되며, 그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악과 거짓에서 건짐을 받아 선과 진리 안에서 새롭게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독립된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이루신 영화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문자적의미에서출발하되문자적의미에만머물지않는다’는 것입니다. SWC는 성경의 역사적·문법적 문맥을 건너뛰어 곧바로 영적 의미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본문의 사건과 규례가 문자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살펴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문자 안에는 그보다 깊은 영적·천적 실재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문자적 의미는 버려야 할 껍질이 아니라 내적 의미를 담고 지탱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SWC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문자를버리고영으로’가 아니라 ‘문자를통하여그안의영으로’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상응은임의적인상징붙이기가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붙이고, 불이나 산이나 나무가 등장할 때마다 그럴듯한 영적 상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상응 해석은 아닙니다. 상응은 자연계와 영계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이며, 스베덴보리의 방대한 저작에는 말씀의 여러 사물과 인물, 장소와 숫자, 행위가 무엇을 상응하고 대표하는지 실제 본문을 따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SWC는 가능한 한 이 원전의 근거를 확인한 뒤 해설합니다. 상응은 해석자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해석자의 자의성을 제한하는 질서입니다.
이와 연결되는 네 번째 원칙은 ‘근거의강도만큼만말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해당 성경 구절이나 요소를 직접 설명한 경우에는 그 근거 위에서 분명하게 해설합니다. 해당 구절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더라도 여러 저작에서 일관되게 밝혀진 상응과 교리로 충분히 뒷받침되는 경우에는 그에 맞는 절제된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원전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세부는 그럴듯하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판단을 보류합니다. 따라서 SWC의 원전 사용 원칙은 ‘원전상확실한것’, ‘일반적인상응에비추어유력한것’, ‘근거가부족하여보류할것’을 가능한 한 구별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아르카나 앞에서는 많이 말하는 것보다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원칙은 ‘개별상응을전체서사안에서읽는다’는 것입니다. 소가 무엇을 뜻하고, 피가 무엇을 뜻하며, 물과 불과 기름이 각각 무엇을 상응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개별 상응은 하나의 더 큰 신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정결하게 되고, 무엇이 제거되며, 어떤 선과 진리가 심기고, 그것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삶으로 내려오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SWC는 ‘이것은무엇을상징하는가?’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주님의영화와인간의거듭남이라는전체과정에서어떤자리를차지하는가?’를 묻습니다. 상응 하나하나는 점이고, SWC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점들이 이어져 이루는 말씀의 서사입니다.
여섯 번째 원칙은 ‘내적의미를오늘의외적사람에게거꾸로적용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정결법, 신체에 관한 규정, 성적 질서, 전쟁과 형벌, 제사장과 희생제사 등의 본문에서는 이 원칙이 중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많은 제도와 규례는 영적·천적 실재를 외적으로 대표하도록 주어진 것이므로, 그 외적 형식을 오늘날 사람에게 그대로 옮겨 그의 영적 상태나 인간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육체적 흠이 대표적 예배에서 특정한 영적 결핍을 나타냈다고 해서 오늘날 같은 신체 상태를 가진 사람에게 그 영적 의미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은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안에 담긴 신적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일곱 번째 원칙은 ‘거듭남은인간의자기완성이아니라주님의역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을 살피고 회개하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고, 진리를 밝히시며, 선을 심고 자라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SWC에서 거듭남을 말할 때 인간의 노력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명령은 ‘네힘으로너자신을완성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역사에 응답하고 협력하도록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역사하시고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하되, 그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여덟 번째 원칙은 ‘내적의미는결국삶으로내려와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에 관한 지식을 풍부하게 갖는 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속사람에서 받아들인 것이 겉 사람의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SWC는 해설의 마지막에 언제나 같은 종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은이말씀을통해내안에서무엇을보게하시는가?무엇을제거하고정결하게하시려는가?어떤선과진리를심고결합시키려하시는가?그리고그것이오늘나의이웃사랑과쓰임안에서어떻게살아나야하는가?’ 내적 의미는 삶에서 멀어지기 위한 깊이가 아니라 더 깊이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깊이입니다.
아홉 번째 원칙은 ‘스베덴보리에서끝나지않고다시말씀으로돌아간다’는 것입니다. SWC에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Coelestia, 1749-1756, AC)를 비롯한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은 매우 중요한 길잡이입니다. 그러나 SWC의 목적은 독자를 스베덴보리의 문장 앞에 멈춰 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것을 통해 이전에는 지나쳤던 성경의 한 단어와 한 장면이 새롭게 보이고, 그 빛을 가지고 다시 말씀을 읽으며, 마침내 말씀 안에서 주님을 더욱 분명하게 만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따라서 SWC의 기본 흐름은 ‘성경본문→SWC통합해설→스베덴보리원전의근거→다시성경본문과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SWC는 기존에 진행해 온 스베덴보리 원전 번역·해설 작업과도 구별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한 항목씩 읽고 번역하고 해설하는 작업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원전 자체가 직접적인 연구 대상입니다. 반면 SWC에서는 성경의 한 장 또는 하나의 본문이 중심에 놓이고,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은 그 본문 안에 흐르는 내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함께 사용됩니다. 전자가 스베덴보리의 원전을 따라 말씀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작업이라면, SWC는 그동안 밝혀진 원전의 빛을 모아 성경 본문 전체를 다시 조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작업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보완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SWC는 하나의 본문이나 한 권의 성경에 한정된 작업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책을 차례로 읽어 가는 연속적인 성경 해설 시리즈를 지향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에는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라는 방대한 연속 해설이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계시록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과 ‘계시록밝히기’(Apocalypse Revealed, 1766, AR)라는 직접적인 해설이 있는 반면, 말씀의 다른 책들에 관한 내적 의미와 상응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SWC는 이러한 차이를 존중하면서, 직접적인 연속 해설이 있는 책에서는 그 원전을 충실한 중심축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책에서는 여러 저작에 흩어진 관련 원전들을 찾아 연결하여 성경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읽어 가고자 합니다. 이는 스베덴보리가 남기지 않은 주석을 대신 완성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가 밝혀 놓은 말씀의 내적 의미와 상응의 빛을 따라 말씀의 여러 책을 다시 읽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SWC의 각 성경책은 가능하면 ‘들어가며’에서 그 책을 읽는 기본 관점과 중심 주제를 살피고, 각 장의 본문을 차례로 해설한 뒤, 마지막 ‘총평’에서 그 책 전체를 관통해 온 내적 흐름을 다시 조망하는 방식으로 구성합니다. 한 장 한 장의 상응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권 전체가 어떤 영적 서사를 이루는지를 함께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여러 성경책으로 이어질수록 서로 떨어져 보이던 율법과 역사, 시와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적 중심, 곧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향하고 있는지도 조금씩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SWC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상응을 기억하는 것도, 수많은 저작 번호를 익히는 것도 아닙니다. 한 가지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이말씀을통해무엇을이루고계시는가?’ 이 질문을 가지고 말씀의 문자에서 출발하여 내적 의미로 들어가고, 주님의 영화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바라보며, 다시 우리의 실제 삶과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것이 SWC가 지향하는 독법입니다. SWC의 목적은 성경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흩어져 보이던 말씀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신적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의 속과 겉의 삶이 함께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SWC소개)
※ 아래는 SWC 시리즈 첫 작업으로 ‘레위기’ 편입니다. 읽어 보시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레위기 안에 주님이 베풀어 두신 너무나 크고 놀라운, 향기롭고 깊은 사랑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창4:16-18)
제목은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가인의 성읍 에녹
이며, 다음은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와 손과 발에 위임식 숫양의 피까지 발랐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 실제 사역을 시작하려 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네속죄제와네번제를드려서너를위하여,백성을위하여속죄하라’고 합니다. 실제 순서도 아론 자신의 제사가 먼저이고 그 후 백성의 제사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인간 자신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레4에서 보았듯 속죄제는 악과 거짓에서의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 거룩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도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거듭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 쓰임을 많이 맡을수록 이 원리는 더 중요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다 보면 그 말씀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말하면서 자기 분노와 교만과 자기애는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쓰임은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나는가르치는사람이다’, ‘나는돕는사람이다’, ‘나는영적인사람이다’라는 자기상이 오히려 자기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9의 첫 실제 제사장 사역은 남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속죄제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하게깨끗해진뒤에야다른사람을도울수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계속 주님의 정결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인정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깊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알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쉽게 정죄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린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9의 순서는 모든 영적 쓰임에 하나의 원리를 줍니다. ‘먼저네자신을주님앞에세우라.’ 남의 악을 보기 전에 자기 악을 보고, 남에게 말씀을 적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적용하며, 다른 사람을 정결하게 하려 하기 전에 자신도 주님의 정결하심 아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쓰임은 자기 의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SW.레9심화2)
레9은 단순히 ‘다음날’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여덟째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물며 위임식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표현은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일곱 날이 끝나고 여덟째 날이 시작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여덟째날’은 ‘그다음상태의첫단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여덟째 날은 단순히 숫자 8의 신비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일곱이완성된뒤에오는새로운시작’입니다. 한 상태가 충만하게 완성되고 그 다음 상태가 열리는 것입니다.
레8과 레9의 관계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레8에서 아론은 준비됩니다. 씻고,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고, 피를 바르고, 손에 제물을 받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뭅니다. 그러나 레9의 여덟째 날이 되자 그 모든 준비가 실제 쓰임으로 전환됩니다. 아론이 직접 제단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떤 상태를 충분히 형성하신 뒤 새로운 상태를 여십니다. 진리를 배우는 시간이 있고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해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악을 깨닫는 시간이 있고 그것을 실제로 끊어 내야 하는 시간이 옵니다. 준비가 영원히 준비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삶에는 ‘일곱째날’도 필요하고 ‘여덟째날’도 필요합니다. 충분히 머물고 배우고 형성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받은 것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쓰임을 행해야 합니다. 계속 배우기만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준비는 목적을 잃습니다.
반대로 여덟째 날을 너무 빨리 만들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레8의 이레를 건너뛰고 곧바로 레9의 사역으로 뛰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면을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상태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충만함 없는 활동은 쉽게 proprium의 열심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9의 ‘여덟째날’은 거듭남에서 매우 희망적인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한 상태를 완성하시면 거기서 끝내지 않으십니다. 완성은 다음 상태의 시작이 됩니다. 정결은 쓰임으로, 배움은 삶으로, 준비는 봉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새로운 상태에서 레9의 약속, ‘오늘여호와께서너희에게나타나실것임이니라’가 시작됩니다. (SW.레9심화1)
레위기 9장은 ‘여덟째날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짧은 표현은 앞의 레8과 레9을 하나로 연결하는 열쇠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레 동안 회막 문을 떠나지 않고 위임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이제 실제 제사장 사역이 시작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장 위임이 이레 동안 계속되었다고 설명한 뒤, ‘여덟째날’은 ‘그다음상태의첫단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의 여덟째 날은 단순히 달력상의 다음 날이 아닙니다. 준비가 완성된 뒤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것은 레8과 레9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레8에서 아론은 씻김을 받고, 옷을 입고, 기름 부음을 받고,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고, 손에 제물을 받아 흔들고, 이레 동안 회막 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직 ‘준비’였습니다. 레9에서 비로소 아론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살피고, 마음을 정돈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준비시키시는 목적은 결국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덟째 날은 준비된 선과 진리가 실제 삶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상태의 첫 장면은 의외입니다. 아론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곧바로 백성을 위한 제사부터 드릴 것 같지만, 먼저 ‘자기를위한속죄제’와 ‘자기를위한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7절에서 모세는 ‘네속죄제와네번제를드려서너를위하여,백성을위하여속죄하고’라고 명령합니다. 8절부터 14절까지 실제로 아론 자신의 속죄제와 번제가 먼저 드려지고, 그 후 15절부터 백성을 위한 제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맡았다고 해서 인간 자신의 정결 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전에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계속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이 점은 모든 영적 쓰임에서 중요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말씀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자기 내면을 돌아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이제제사장이니백성의문제만다루면된다’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은 잘 보면서 자신의 악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면서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면 쓰임은 쉽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참된 쓰임은 자기 정결을 지나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15절부터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가 차례로 드려집니다. 레1-7에서 하나씩 배웠던 제사들이 이제 실제 제사장 사역 안에서 하나의 계열로 등장합니다. 먼저 죄와 관련된 정결이 있고, 이어 전체를 주님께 드리는 번제가 있으며, 선과 진리가 삶의 예물이 되는 소제가 있고, 마지막에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내는 화목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거듭남의네단계’로 고정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 배열에는 분명한 영적 질서가 보입니다.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이 결합보다 먼저이며, 주님께 드려짐과 선한 삶을 거쳐 마침내 화목과 교통으로 나아갑니다.
18절로 21절의 화목제에서는 지금까지 배운 상응들이 다시 모입니다.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은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이 제단에 올라갑니다. AC.10033(출29:13)은 제사의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에서 피와 기름이 함께 다루어지는 것은 진리와 선의 결합이라는 제사 전체의 중심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리고 가슴들과 오른쪽 뒷다리는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립니다. 레7에서 보았듯 가슴은 체어리티의 영적 선과, 오른쪽 뒷다리는 더 내적인 천적 선과 연결됩니다. 레1-7에서 하나씩 배운 제사의 언어가 이제 레9의 실제 예배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아론은 모든 제사를 마친 뒤 ‘백성을향하여손을들어축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아론의 손은 제물을 다루던 손이었습니다. 레8에서는 그 손에 제물을 올려놓아 요제로 흔들게 했고, 그 손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마침내 다른 사람을 향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쓰임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안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단순히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말보다 훨씬 깊습니다. AC.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인 모든 좋은 것을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아론이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는 장면은 제사장 자신의 힘으로 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손을채우셨던’ 주님께서 이제 레9에서는 그 손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복을 흘려보내십니다.
23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함께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을 축복합니다. 그때 마침내 ‘여호와의영광이온백성에게나타납니다.’ 회막 자체가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AC.9784(출27:20)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회막은 ‘주님의임재’를 의미합니다. 회막이 바로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을 만나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회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축복하고 그 직후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쓰임의 능력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분에게서 받아 나올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AC.5922(창45:13)는 ‘여호와의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하며, 천국에서 신적 진리가 빛과 영광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분명하게 ‘여호와의영광’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레9에서 ‘여호와의영광이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눈부신 초자연적 현상을 보았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사와 정결과 쓰임을 통해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절정이 찾아옵니다.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사른지라.’ 여기에서 인간이 피운 제단의 불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이 불은 ‘여호와앞에서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의 상응을 매우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AC.6832(출3:2)는 제단 위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을 신적 사랑과 연결하고, 레6:12-13의 꺼지지 않는 불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레9마지막에 여호와에게서 나온 불이 제물을 사르는 것은 모든 참된 예배의 생명이 결국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않는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레6에서는 ‘불은끊임이없이제단위에피워꺼지지않게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를 표상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는 그 불의 근원이 눈앞에 드러납니다. ‘불이여호와앞에서나옵니다.’ 인간이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이 규례대로 행하고, 피를 뿌리고 기름을 놓지만 마지막으로 제사를 받아들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예배의 형식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그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불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장면은 거듭남에서도 결정적입니다. 인간은 말씀을 읽고, 악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섬깁니다. 이런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실제 영적 생명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력 자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올려놓을 수는 있지만 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지막 반응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들은 불을 보고 ‘소리지르며엎드립니다.’ 모든 준비와 모든 제사가 결국 인간의 자기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 앞의 경배로 끝납니다. 제사장이 훌륭하게 의식을 마쳤으므로 사람들이 아론을 칭찬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과 주님에게서 나온 불을 보고 모두가 엎드립니다. 참된 쓰임은 사람의 시선을 쓰임을 행한 사람에게 모으지 않고 주님께 돌립니다.
레8과 레9을 함께 놓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거듭남의 계열이 보입니다. 레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씻으시고, 진리를 입히시고, 사랑의 기름을 부으시고,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시며, 손에 선과 진리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이레의 충만한 준비가 끝난 뒤 레9의 여덟째 날이 옵니다. 이제 인간은 받은 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먼저 자신을 계속 정결하게 하고, 그 다음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며, 마침내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그때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에게서 불이 나옵니다.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하여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선이 흘러가게 하시고, 마침내 그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이 드러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오늘여호와께서너희에게나타나실것임이니라.’ 레9의 이 약속은 바로 그렇게 성취됩니다. (SW.레9해설)
아론은 이미 레8에서 제사장으로 위임되었습니다. 물로 씻었고 거룩한 옷을 입었으며 관유를 받았고, 귀와 손과 발에 위임식 숫양의 피까지 발랐습니다. 그런데 레9에서 실제 사역을 시작하려 하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네속죄제와네번제를드려서너를위하여,백성을위하여속죄하라’고 합니다. 실제 순서도 아론 자신의 제사가 먼저이고 그 후 백성의 제사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인간 자신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레4에서 보았듯 속죄제는 악과 거짓에서의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위해 거룩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도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직분은 거듭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적 쓰임을 많이 맡을수록 이 원리는 더 중요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다 보면 그 말씀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회개를 말하면서 자기 분노와 교만과 자기애는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쓰임은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의 도구가 됩니다. ‘나는가르치는사람이다’, ‘나는돕는사람이다’, ‘나는영적인사람이다’라는 자기상이 오히려 자기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9의 첫 실제 제사장 사역은 남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속죄제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완벽하게깨끗해진뒤에야다른사람을도울수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도 계속 주님의 정결을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인정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깊게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알수록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쉽게 정죄하기 어렵습니다. 자기 속죄제를 먼저 드린 제사장이 백성의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9의 순서는 모든 영적 쓰임에 하나의 원리를 줍니다. ‘먼저네자신을주님앞에세우라.’ 남의 악을 보기 전에 자기 악을 보고, 남에게 말씀을 적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적용하며, 다른 사람을 정결하게 하려 하기 전에 자신도 주님의 정결하심 아래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쓰임은 자기 의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SW.레9심화2)
3.‘여호와의영광이나타난다는것은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영광이너희에게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가 끝난 뒤 실제로 ‘여호와의영광이온백성에게나타났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의영광’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영광’을 단순한 눈부신 광채로만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5922(창45:13)는 여호와의 영광을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AC.10574(출33:18)는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가장 참된 의미에서는 그 신적 빛 가운데 나타나시는 주님 자신과 관련됩니다. 또한 말씀과 교회와 예배의 속뜻, 곧 그 안에 있는 신적 실재가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9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 앞에 굉장한 초자연적 빛이 나타났다는 데 의미가 머물지 않습니다. 표상적으로는 주님의 신적 진리가 교회와 예배 가운데 드러나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의 임재가 지각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언제 나타나는지가 중요합니다. 레9시작부터 즉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론의 속죄제와 번제가 있고, 백성의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있고, 아론의 축복이 있으며,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 후에야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순서는 주님의 임재를 인간이 의식으로 ‘불러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적 질서에 따라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쓰임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항상 임재하시는 주님이 인간에게 ‘나타날수있는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태양은 계속 빛나지만 창문이 닫혀 있으면 방 안은 어둡습니다. 창문을 연다고 태양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와 정결과 예배가 주님의 임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레9의 영광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결과입니다. 진리를 단지 문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보기 시작합니다. 예배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주님과 만나는 자리가 되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흘러가는 쓰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씀 안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영광이나타난다’는 것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화하면서 언제나 임재하시던 주님의 신적 진리와 사랑이 비로소 지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말씀과 예배와 이웃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SW.레9심화3)
4.‘왜아론은제사를마친뒤손을들어백성을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얼마나많이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받은것이나를통해얼마나선한쓰임으로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심화4)
5.‘왜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물을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축복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이여호와앞에서나와제단위의번제물과기름을’ 사릅니다. 백성은 그것을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립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불’만이 아니라 ‘여호와앞에서나와’입니다. 제단에는 이미 불이 있었고 제사장들도 제물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제사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듯 불이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불을 사랑과 매우 깊게 연결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6832(출3:2)는 불이 좋은 의미에서는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레6:12-13의 ‘제단의불은항상피워꺼지지않게하라’는 말씀을 직접 인용하면서 그 영속적인 제단 불이 신적 선 자체, 곧 신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레9마지막의 불을 인간의 종교적 열심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뜨거워져서 제사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불은 ‘여호와앞에서’ 나옵니다. 예배에 생명을 주는 사랑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레6의 ‘꺼지지않는불’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레6에서는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불은 주님의 영원하고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를 표상합니다. 레9에서는 이제 그 불의 출처가 명시됩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인간에게 내려옵니다.
인간이 하는 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잡고, 피를 뿌리고, 씻고, 제단에 올리고, 규례에 따라 행합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말씀을 배우고,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 자체가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같은 구제를 해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 있고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해도 자기 지식을 보이기 위해 할 수 있고 사람의 영적 선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위가 같아도 그 안에 어떤 ‘불’이 있는지가 다릅니다.
따라서 레9의 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무엇을하고있는가?’만이 아니라 ‘그일을움직이는불은어디에서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불도 사람을 열심히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이 내려왔을 때 백성은 아론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온백성이이를보고소리지르며엎드렸더라.’ 모든 예배와 모든 쓰임의 마지막 방향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신적 사랑이 나타날 때 인간의 proprium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레8에서 인간의 귀와 손과 발이 준비되었습니다. 레9에서 그 준비된 인간이 실제 쓰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성경은 다시 분명히 합니다. 거듭남을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며 쓰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제물을 제단에 올리지만 불은 여호와 앞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이것이 레9마지막 한 절에 담긴 거듭남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SW.레9심화5)
레8의 모든 의식이 끝났는데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곧바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위임식이끝나는날까지이레동안은회막문에나가지말라’고 하시며, 다시 ‘칠주야를회막문에머물라’고 명령하십니다. 왜 제사장 위임에는 이레가 필요했을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원전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출22:30)은 ‘일곱’이 완전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바로 레8:33-34를 직접 인용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받은 사람들이 이레 동안 회막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완전성과 충만함을 표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AC.10102(출29:30)도 같은 원리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레’는 ‘충만하고완전한인정과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레 동안의 위임은 단순히 일주일간의 훈련 기간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선과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하나의 완전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에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영적 변화는 한순간의 결단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를 깨닫고 크게 감동했다고 해서 그 진리가 즉시 우리의 의지와 삶 전체에 자리 잡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반복해서 받아들여지고, 시험을 통과하고,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면서 비로소 삶이 됩니다.
그래서 레8에서는 하루 동안 엄청난 의식이 진행된 뒤에도 ‘아직끝난것이아니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씻었고, 옷을 입었고, 기름을 부었고, 피를 발랐고, 제물을 손에 받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상태로 자리 잡기까지 이레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설교를 듣고 ‘이제부터이렇게살아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실제 성품이 되려면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같은 진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한 번의 깨달음이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삶의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회막문을떠나지말라’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인상적입니다. 위임의 상태가 완성되기 전에 자기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말씀의 질서 안에 머물면서 받은 것을 충분히 자기 삶에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듭남에는 그래서 ‘머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이미 받은 하나의 진리 안에 충분히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용서하라는 진리를 알았다면 그것을 실제 용서가 될 때까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를 알았다면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가 될 때까지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레가 지나면 여덟째 날이 옵니다. AC.9228은 일곱이 완성된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여덟째 날은 그 다음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다음 레9이 ‘여덟째날’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레8의 이레 동안의 위임이 완성된 뒤 레9에서는 실제 제사장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레8의 이레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형성의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어떤 쓰임에 사용하시기 전에 선과 진리가 그 사람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이 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참된 위임은 순간적인 임명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하나의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여덟째날’, 곧 실제 쓰임의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SW.레8심화5)
레8:25-28에서는 위임식의 뜻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숫양의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 무교병과 기름 섞은 떡과 전병을 모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삼습니다. 왜 위임식에서는 제물을 그냥 제단으로 가져가지 않고 굳이 제사장의 ‘손’에 올려놓았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82(출29:24)는 손바닥 위에 놓인 기름과 콩팥과 오른쪽 뒷다리와 떡들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손에 놓는 것은 ‘이모든것은주님의것이며주님에게서온다’는 인정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임’의 개념을 뒤집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직책에 위임된다는 것은 권한을 자기 손에 넘겨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레8의 위임식에서는 손이 채워지는 순간 오히려 그 손에 있는 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손에 많은 것이 놓일수록 ‘이것은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 AC.10083(출29:24)은 그것을 흔드는 요제를 ‘생명을부여하는것’과 연결합니다. 특별히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신적 생명이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지식만으로는 아직 생명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고 그것에 따라 살기 시작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손에 놓인 제물과 흔드는 동작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에게서왔다’고 인정하고, 그 인정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와 능력과 선을 자기 것이라고 붙들면 그것은 proprium안에서 죽기 시작하지만, 그것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때 그 선과 진리는 인간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이것은 모든 쓰임에 적용됩니다. 설교하는 능력도, 가르치는 지혜도, 사람을 돌보는 따뜻함도, 돈을 벌고 사용하는 능력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이웃을 섬길 기회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그것을 실제로 행하지만 근원은 손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손을채운다’는 위임의 히브리적 이미지와 스베덴보리의 해설은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빈손이 채워지지만 그 채움은 소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다시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이제내가권한을가졌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내손에맡기셨다’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참된 요제는 ‘내가이것을이루었습니다’가 아니라 ‘이모든선과진리는주님에게서왔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제사장은 손이 가득 찼지만 자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손이 주님의 쓰임을 가장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 안에서 인간의 손은 비로소 신적 생명의 도구가 됩니다. (SW.레8심화4)
레8:23-24는 제사장 위임식 가운데 가장 낯설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모세는 위임식 숫양의 피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왜 하필 이 세 곳이며, 왜 모두 오른쪽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원전이 놀라울 만큼 구체적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60(출29:20)은 위임식 숫양의 피가 주님의 신적 선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 곳에 발라지는 것은 같은 신적 진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AC.10061(출29:20)은 오른쪽 귓부리를 해설합니다. 귀는 ‘지각’을 의미하며, 특히 오른쪽 귀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른쪽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에 피가 발라지는 것은 먼저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속에서 지각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다음은 오른손 엄지입니다. AC.10062(출29:20)는 엄지손가락이 선을 통한 진리의 능력,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가진 힘과 그로부터 생기는 이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손은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며, 엄지는 손의 힘을 대표하는 끝부분입니다. 귀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이제 이해와 능력, 그리고 행동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오른발 엄지입니다. AC.10063(출29:20)은 이것을 가장 바깥 천국에 해당하는 이해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머리와 그 기관들이 가장 안쪽 천국에, 몸과 손이 중간 천국에, 발이 가장 바깥 천국에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귀·손·발은 단순한 세 신체 부위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을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하면 매우 실제적인 의미가 나타납니다. 진리는 먼저 귀로 ‘들려야’ 합니다. 그러나 들었다고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와 능력으로 내려와 손에서 행해져야 하고, 다시 가장 바깥 일상의 삶으로 내려와 발이 걷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안다’와 ‘말씀대로산다’ 사이에는 귀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감동하는 것은 귀의 단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해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손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순간만이 아니라 돈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운전하고, 일하고, 가족과 살아가는 일상의 방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발의 단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곳 모두 ‘오른쪽’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오른쪽은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으로부터 진리를 듣고 이해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레8의 피는 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손을 지나 발까지 내려갑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는 우리의 가장 안쪽 지각에서 시작하여 이해와 행동을 지나 가장 바깥 일상의 삶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진리가 겉 사람의 삶까지 질서 있게 할 때 거듭남이 실제가 됩니다.
이것이 위임식의 본질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은 진리를 잘 듣는 사람만도 아니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만도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듣고, 그 진리를 선에서 이해하며, 손으로 행하고, 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른쪽 귀와 손과 발에 같은 피가 발라진 것은 한 사람 전체가 신적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SW.레8심화3)
레8:12에서 모세는 관유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합니다. 기름을 손이나 옷에 조금 바른 것이 아니라 ‘머리에붓습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왜 기름 부음이 이토록 중요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출29의 병행 본문을 해설하면서 관유를 ‘신적선으로의취임’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아론은 최고 의미에서 주님을 신적 선에 관하여 표상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주님의 인성 전체에 있는 신적 선을 나타냅니다. 기름이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제사의 여러 규례에서도 반복해서 확인됩니다.
따라서 제사장직의 가장 깊은 중심은 ‘사랑의선’입니다. 제사장은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 진리의 생명은 선에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은 생명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외적으로는 제사장의 옷을 입었어도 그 안에 관유가 없는 셈입니다.
관유가 ‘머리’에 부어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머리는 몸 전체의 첫째와 가장 높은 부분이며,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첫째와 가장 높은 것은 전체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사랑의 선이 일부 행동에만 붙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람을 지배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목회나 교회 봉사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정을 섬기든, 직장에서 일하든, 어려운 사람을 돕든, 말씀을 가르치든, 그 쓰임을 실제로 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똑같은 행동도 자기 명예를 위해 할 수도 있고 이웃의 선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레8에서는 씻음 다음에 옷을 입히고, 그 후 관유를 붓습니다.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진리를 입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랑의 선에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진리가 길을 보여 준다면 사랑은 그 길을 실제로 걷게 하는 생명입니다.
참된 기름 부음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 안으로 들어와 ‘선한것을알고있기때문에’가 아니라 ‘선한것을사랑하기때문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따라서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관유는 제사장이라는 지위에 권위를 더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모든 거룩한 쓰임의 근원이 사랑의 선이라는 선언입니다. 진리가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이 전체 사람을 채울 때 비로소 진리는 살아 있는 쓰임이 됩니다. (SW.레8심화2)
레8의 제사장 위임식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순서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화려한 에봇이나 흉패부터 입히지 않습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그들을씻깁니다.’ 그 다음에야 속옷과 띠와 겉옷과 에봇과 흉패와 관을 입힙니다. 왜 거룩한 옷보다 씻음이 먼저일까요?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02(출29:4)는 이 장면을 매우 직접적으로 해설합니다. ‘물로씻는것’은 신앙의 진리들을 통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인간의 정결과 거듭남은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씻음이 옷보다 먼저라는 것은 중요한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진리를 많이 ‘입는것’과 그 진리에 의해 실제로 정결하게 되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 지식과 교리와 신학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자기 악을 비추고 씻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면, 거룩한 옷은 입었지만 몸은 씻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진리는 먼저 우리를 꾸미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씻기 위해 주어집니다. ‘이말씀으로다른사람을어떻게가르칠까?’보다 먼저 ‘이말씀은내안에서무엇을드러내고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분노와 교만과 탐욕과 자기애를 비추고,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게 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피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첫 쓰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후에 옷이 입혀집니다. AC.10003(출29:5)은 아론의 옷을 주님의 영적 나라의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정결하게 된 사람에게 진리가 입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악을 제거하는 소극적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진리를 받아 새로운 삶의 형태를 갖추는 적극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씻음’과 ‘입음’이 모두 필요합니다. 씻기만 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으면 비어 있게 되고, 씻지 않은 채 옷만 입으면 겉만 종교적인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우리를 씻으시고 다시 진리로 우리를 입히십니다. 같은 진리가 처음에는 악을 드러내는 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옷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8의 첫 위임 행위가 물로 씻는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쓰임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직책도, 지식도, 권위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위임은 먼저 씻김에서 시작됩니다. (SW.레8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