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5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오늘날 세상은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동’(, brass)은 자연적 선과 상응한다는 사실 같은 건데, 이런 식으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금속은 저마다 그 속뜻으로는 어떤 특별한 것들과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금’(, gold)은 천적 선, ‘은’(, silver)은 영적 진리, ‘동’은 자연적 선, ‘철’(, iron)은 자연적 진리와 각각 상응한다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다른 금속들도 그렇고요, ‘나무’(wood)와 ‘돌’(stone)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와 성막, 그리고 성전에 사용된 ‘금’, ‘은’, ‘동’ 및 ‘나무’의 상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자비를 따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이런 상응 사실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 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16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17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60:16, 17) Thou shalt also suck the milk of the gentiles, and shalt suck the breast of kings. For brass I will bring gold, and for iron I will bring silver, and for wood brass, and for stones iron; I will also make thy tribute peace, and thine exactors righteousness, (Isa. 60:16–17)

 

위 구절들은 주님의 오심, 그의 나라와 천적 교회에 대해 다루는데요, ‘금을 가지고 놋을’(For brass gold)은 자연적 선은 천적 선으로, ‘은을 가지고 철을’(for iron silver)은 자연적 진리는 영적 진리로, ‘놋으로 나무를’(for wood brass)은 육적(, corporeal) 선은 자연적 선으로, ‘철로 돌을’(for stones iron)은 감각적(sensuous) 진리는 자연적 진리로 각각 상응합니다. 에스겔에는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 brass 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 iron 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 wood 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 stones 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야완과 두발과 메섹은 네 상인이 되었음이여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 (27:13) Javan, Tubal, and Meshec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soul of man, and vessels of brass they gave thy trading, (Ezek. 27:13)

 

두로(Tyre), 그러니까 이 두로가 영적, 천적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상응한다는 내용인데요, 여기서 ‘놋그릇’(vessels of brass)은 자연적 선과 상응합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 of brass” are natural goods.

 

신명기입니다. In Moses: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8:9) A land whose stones are iron, and out of whose mountains thou mayest hew brass, (Deut. 8:9)

 

이 구절에서도 ‘돌’(stones)은 감각적 진리를, ‘철’(iron)은 자연적, 그러니까 이성적(rational) 진리를, 그리고 ‘동’(brass)은 자연적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6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1:7) Four living creatures, or cherubs, whose feet sparkled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Ezek. 1:7)

 

여기서도 거듭 ‘구리’(brass)는 자연적 선과 상응하며, 사람의 ‘발바닥’(foot)은 자연적인 걸 표현합니다. 다니엘한테도 같은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5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6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10:5, 6) A man clothed in linen, whose loins were girded with gold of Uphaz, his body also was like the beryl, and his arms and his feet like the appearance of burnished brass. (Dan. 10:5–6)

 

‘놋뱀’(brazen serpent)(21:9)이 주님의 감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한다는 것은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the “brazen 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9)

 

해설

 

AC.425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거의 잊혀진,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원리 하나를 다시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과 재료 하나하나가 각각 고유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특히 ‘(brass, 구리)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금속 전반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배열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질서는 임의적이 아니라, 천적–영적–자연적 구조에 정확히 상응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gold)은 천적 선, 곧 사랑의 가장 내적인 선을 뜻하고, ‘(silver)은 영적 진리, 곧 신앙의 진리를 뜻하며, ‘(brass)은 자연적 선, 즉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을 뜻하고, ‘(iron)은 자연적 진리, 곧 이성과 합리성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진리를 뜻합니다.

 

이러한 상응은 단순한 상징 풀이가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래서 성막과 성전, 언약궤에 사용된 재료들, 그러니까 금, 은, 놋, 나무, 돌은 모두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표상합니다. 주님은 아무 재료나 사용하지 않으셨고, 각각의 재료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실재를 담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이 질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라는 말씀은 단순한 물질적 번영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적 차원의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차원인 천적,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지고 변화됨을 뜻합니다. 자연적 선(놋)이 천적 선(금)으로, 자연적 진리(철)가 영적 진리(은)로 변화된다는 것은, 인간의 외적 삶이 주님의 사랑과 신앙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 곧 천적 교회의 회복입니다.

 

에스겔 27장에서 ‘두로(Tyre)가 ‘사람과 놋그릇을 가지고 네 상품을 바꾸어 갔도다’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두로는 말씀에서 영적, 천적 풍요를 지닌 자들, 곧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을 표상합니다. 그들이 거래하는 ‘놋그릇’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자연적 선을 담는 그릇, 즉 삶 속에서 사용될 수 있는 선을 뜻합니다. 여기서도 놋은 언제나 외적 삶의 선, 실천 가능한 선과 연결됩니다.

 

신명기 8장에서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라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을 감각적 진리, ‘’을 자연적, 이성적 진리, ‘’을 자연적 선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감각에서 이성으로, 그리고 삶의 선으로 이어지는 자연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단지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에스겔 1장에서 그룹들의 발이 ‘그들의 발바닥은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라는 묘사도 이 질서를 강화합니다. ‘’은 언제나 인간의 자연적 차원, 곧 삶의 가장 아래 단계, 행동과 실천의 영역을 뜻합니다. 그 발이 놋처럼 빛났다는 것은, 자연적 삶 자체가 선으로 충만해졌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늘의 실재가 가장 낮은 차원까지 내려와 자연적 삶을 거룩하게 만들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다니엘 10장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라는 묘사도 같은 의미입니다. 허리는 금으로 띠를 두르고(천적 선), 몸은 보석처럼 빛나며(영적 상태), 팔과 발은 놋과 같습니다. 이는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이 한 인물 안에서 질서 있게 결합된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선은 결코 하위적이거나 무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위의 차원들을 충실히 담아내는 기반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놋뱀은 이 모든 상응을 집약합니다. 놋뱀은 감각적, 자연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단순한 물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자연적 선, 곧 인간의 가장 낮은 상태까지 내려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의 선을 표상합니다. 여기서도 놋은 언제나 구원과 연결된 자연적 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AC.425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과 재료들은 결코 장식이나 역사적 우연이 아니며, 교회와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층위적 구조를 드러내는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중 ‘’은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과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내려와 구현되는 자리, 곧 자연적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신앙은 언제나 금과 은으로 끝나지 않고, 놋으로 내려와 삶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AC.424, 창4:22, 'artificer'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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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에 나오는 ‘기억-지식’이라는 게 뭔가요?

 

 

1.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scientia / memory-knowledg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억-지식’은 한마디로 말해,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앎의 재료들, 곧 사실, 정보, 교리 문장, 경험, 개념, 언어, 기술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기억-지식에 속합니다.

 

* 성경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 것

* 교리 문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라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

* 철학, 신학, 과학, 역사, 윤리 지식

* 삶의 경험에서 얻은 판단 기준

* 설교를 많이 들어서 쌓인 신앙 용어들

 

중요한 점은, 기억-지식은 아직 ‘’, 곧 삶이 되지 않은 앎이라는 것입니다.

 

 

2. 기억-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 ‘자연적 차원’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기억-지식은 분명히 자연적 차원에 속합니다.

 

* 몸에 속하고

* 뇌와 기억에 저장되고

* 말로 설명할 수 있고

* 잊어버릴 수도 있고

* 옳게도, 그르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424에서 장인(artificer)이 기억-지식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장인은 재료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재료일 뿐입니다.

 

기억-지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아직은 선과 진리가 될 가능성일 뿐입니다.

 

 

3. 기억-지식 ≠ 신앙

 

스베덴보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고, 기억-지식은 기억에 저장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를 아는 것 → 기억-지식

*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함 → 이해

*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 → 의지

* 그 결과 삶이 바뀌는 것 → 신앙의 시작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런 구조를 사용합니다.

 

기억-지식 → 이해 → 신앙 → 삶

 

이 순서가 뒤집히면, 즉 기억-지식이 이해와 삶을 지배하면 → 가인의 길이 됩니다.

 

 

4. 왜 기억-지식이 위험해질 수 있는가

 

기억-지식은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갑니다.

 

① 위로 열리면 (정상 질서)

 

* 기억-지식 → 이해의 도구

* 신앙과 체어리티에 봉사

* 두발가인처럼 ‘스승(instructor)이 됨

 

② 아래로만 닫히면 (타락)

 

* 기억-지식 → 자기 확신의 무기

* 거짓을 꾸미는 재료

* 우상을 만드는 장인의 도구 (AC.424)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주인을 잘못 만나면 우상을 만들고, 주님께 복종하면 성전을 짓는다

 

 

5. 기억 지식은 왜 꼭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지식은 절대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억-지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 교리, 성경 언어는 모두 기억-지식의 형태로 먼저 들어옵니다. 기억-지식은 영적 씨앗이 심길 토양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의 출발점이지만, 목적지는 아니다

 

 

6. 정리

 

기억-지식이란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앎, 주인을 기다리는 재료, 신앙을 섬길 수도 있고, 신앙을 죽일 수도 있는 자연적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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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공’(artificer)은 지혜와 지성, 그리고 아는 게 많은 박식한 사람(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과 상응하며, 여기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과 상응합니다. 계시록에서처럼 말입니다. By an “artificer” in the Word is signified a wise, intelligent, and well-informed [sciens] man, and here by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re signified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natural good and truth. As in John:

 

21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고 (18:21, 22) With violence shall that great city Babylon be thrown down, and shall be found no more at all. And the voice of harpers, and musicians, and of pipers, and trumpeters, shall be heard no more at all in her; and no artificer, of whatsoever craft, shall be found any more in her. (Rev. 18:21–22)

 

여기 ‘거문고 타는 자’(Harpers)는 위에서처럼 진리와, ‘나팔 부는 자’(trumpeters)는 신앙의 선과, 그리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artificer of any craft)는, 그러니까 진리와 선에 관한 기억-지식과 각각 상응하는데요,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Harpers” here as above signify truths; “trumpeters,” the goods of faith; an “artificer of any craft,” one who knows, or the memory-knowledge of truth and good. In Isaiah:

 

19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40:19, 20) The artificer melteth a graven image, and the smelter spreadeth it over with gold, and casteth silver chains; he seeketh unto him a wise artificer, to prepare a graven image that shall not be moved, (Isa. 40:19–20)

 

자신들을 위해 판타지로부터 거짓된 것, 곧 ‘우상’(graven image)을 위조하고, 그걸 가르쳐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지요. 예레미야에 보면, speaking of those who from fantasy forge for themselves what is false—a “graven image”—and teach it so that it appears true. In Jeremiah: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10:1, 8-9) At the same time as they are infatuated they grow foolish, the doctrine of vanities, it is but a stock. Silver beaten out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artificer, and of the hands of the smelter; blue and raiment; they are all the work of the wise, (Jer. 10:1, 8–9)

 

이 말씀이 상응하는 바는, 거짓을 가르치며, 말씀에서 적당한 구절들을 골라 수집하는 자인데요,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어떤 떠오르는 걸 그럴듯하게 위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일컫기를, ‘우상의 가르침’(doctrine of vanities), 그리고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work of the wise)이라 하는 것이지요. 고대에 등장하는 기술공(the artificer)이 바로 이런 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우상, 즉 거짓을 만드는 자들로서, 그 만든 우상의 겉을, 금으로는 선을 짐짓 닮게 하고, 은으로는 그 외관이 진리처럼 보이게 하며, 그리고 청색, 자색 옷으로는, 누가 보아도 그런 자연적인 것들을 확실히 나타내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signifying one who teaches falsities, and collects from the Word things with which to forge his invention, wherefore it is called a “doctrine of vanities,” and the “work of the wise.” Such persons were represented in ancient times by artificers who forge idols, that is, falsities, which they adorn with gold, that is, with a semblance of good; and with silver, or an appearance of truth; and with blue and with raiment, or such natural things as are in apparent agreement.

 

해설

 

AC.424에서 스베덴보리는 ‘장인(匠人, artificer)이라는 표현이 성경에서 단순한 기술자나 수공업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말씀에서 ‘장인’은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으며, 지식을 갖춘 사람, 곧 어떤 영역의 지식(sciens)을 다루는 사람을 표상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라는 말은, 자연적 선(구리)과 자연적 진리(쇠)에 관한 지식을 알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장인은 외적 재료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적 차원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형성하는 지성적 주체를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을 묘사할 때, 음악가들과 함께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고’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앞서 음악가들, 곧 ‘거문고 타는 자, 풍류하는 자,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들’이 사라진다는 말은 진리와 선의 영적 표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하고, 그 뒤에 ‘세공업자(artificer), 곧 장인이 사라진다는 말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장인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다루는 사람을 표상하며, 그 부재는 교회의 지적 토대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알립니다.

 

이사야 40장에서는 장인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장인은 지혜로운 장인으로 묘사되지만, 그 지혜는 환상과 상상(fantasy)에 기초한 지혜입니다. 그는 거짓된 것을 만들고(우상), 그것을 금과 은으로 입혀 선과 진리의 외양을 씌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 생각에서 나온 거짓을 가르치되, 말씀에서 일부 표현과 개념을 끌어와 그럴듯하게 꾸미는 행위로 해석합니다. 즉 장인은 언제나 긍정적 의미만 갖지 않으며,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레미야 10장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됩니다. ‘우상의 가르침(doctrine of vanities)이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work of the wise)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교훈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말씀의 요소들(은, 금, 청색, 옷감 등)을 선별적으로 취해 조합한 지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은은 진리의 외양, 금은 선의 외양, 청색과 의복은 자연적 질서와 합리성의 외관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처럼 보이도록 매우 정교하게 구성된 거짓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은 더 위험합니다. 그것은 무지에서 나온 오류가 아니라, 지식을 잘못 사용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424는 매우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장인’, 곧 지식인은 교회의 회복에도 쓰일 수 있고, 교회의 타락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내적 차원에 봉사하도록 가르치는 교사로 등장하지만, 같은 ‘장인’의 능력이 바벨론이나 우상 제작자에게서는 거짓을 정교화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차이는 능력에 있지 않고, 질서와 목적에 있습니다. 자연적 지식이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 아래에 놓일 때 그것은 교회를 세우지만,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거짓을 미화하는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AC.424에서 장인은 단순한 직업군이 아니라, 자연적 지성의 대표자입니다. 이 지성은 중립적이며, 위로부터 질서를 받으면 선을 만들고, 자기중심에 머물면 우상을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에 우상을 만들던 장인들이 바로 이런 잘못 사용된 지성의 표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의 외양을 갖춘 거짓을 만들었고,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교리로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결국 AC.424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자연적 지식과 기술, 지성은 교회의 적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입니다. 두발가인처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면, 장인은 교회의 귀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장인처럼 자기 사상과 환상을 절대화하면, 그는 거짓의 제작자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통해, 새 교회가 자연적 지성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로 교육하고 인도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AC.425, 창4:22, '구리'(銅, brass)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오늘날 세상은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동’(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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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3, 창4:22, '두발가인이 father가 아닌, instructor인 이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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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모든 장인의 스승, 트레이너)라 합니다.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 야발과 유발 전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즉 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은 이들 야발과 유발의 때부터 나타났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조상’이라 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즉 외적인 것들은 두발가인 전에도 있었는데요, 그래서 두발가인한테는 ‘조상’이라 하지 않고,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즉 이들을 훈련시킨 트레이너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 외적인 것들이 이제는 내적인 것들과 연결된 상태이지만 말입니다. Tubal-Cain is called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and not the “father,” as was the case with Jabal and Jubal; and the reason is that before there were no celestial and spiritual or internal things. And the term “father” is applied to Jabal and Jubal, to denote that such internal things then first began to exist; whereas natural or external things did exist before, but were now applied to internal things, so that Tubal-Cain is not called the “father,” but the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해설

 

AC.42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발가인(Tubal-Cain)이 왜 ‘조상(father, 아버지)이 아니라 ‘교사(instructor)로 불리는지를 통해, 새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의 방향을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 차이가 아니라, 교회 내적 구조가 어떻게 처음 생겨나고, 그다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 주는 핵심 단서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야발과 유발이 ‘조상’으로 불린 이유를 상기시킵니다. 야발(천적 차원)과 유발(영적 차원)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적 차원—곧 사랑의 거룩함과 신앙의 영적 질서—이 처음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시점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둘에게는 ‘조상’이라는 칭호가 적합합니다. ‘조상’은 시간상의 최초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최초, 곧 이전에는 없던 것을 처음 낳은 근원적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발가인이 대표하는 자연적 차원은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닙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도덕, 기술, 질서, 사회적 유익—은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가인의 계보 전체만 보아도, 도시는 세워졌고, 기술은 발달했으며, 사회 질서는 나름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 차원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내적 차원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차원은 ‘새로 태어날’ 필요가 없었고, 대신 새롭게 사용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두발가인은 ‘조상’, 곧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로 불립니다. ‘교사’란, 무(無)에서 생명을 낳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른 목적과 질서로 이끄는 역할을 뜻합니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를 새로 창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 봉사하도록 가르치고 단련합니다. 놋과 철을 다루는 장인의 교사라는 표현은, 자연적 차원이 내적 차원의 도구로 재정렬되었음을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교회의 회복은 결코 외적 삶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연적 삶—기술, 문화, 도덕, 제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용도를 바꾸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목적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되던 자연적 능력들이, 이제는 사랑과 신앙을 표현하고 구현하는 수단으로 재교육됩니다. 두발가인이 ‘교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AC.423은 교회의 참된 질서가 내적 → 외적임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살아나야 하고(야발, 유발), 그 다음에 자연적 차원이 그 내적 질서에 맞추어 훈련되고 지도되어야 합니다(두발가인). 만일 이 순서가 뒤바뀌면, 자연적 차원은 다시 독자적으로 굴러가며, 가인의 길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AC.423은 새 교회가 어떻게 전인적 구조를 갖추는지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먼저 내적 차원은 아버지로서 새로 태어나고, 그다음 자연적 차원은 교사에 의해 그 방향을 바로잡습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란 자연적 삶을 무시하는 영적 도피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자연적 삶 전체를 내적 사랑과 신앙에 복종시키는 질서임을 분명히 합니다. 두발가인이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라는 사실 하나에, 교회 회복의 깊은 섭리적 구조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AC.424, 창4:22, 'artificer'의 속뜻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 말씀에 나오는 ‘기능공, 공장(工匠), 장색(匠色), 장인(匠人), 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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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2, 창4:22, '아다와 씰라, 라헬과 레아, 유대 교회의 속과 겉'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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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회는 속(internal)과 겉(external), 그러니까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함께 있었습니다. 천적, 영적인 것들로 구성된 내적 교회와 자연적인 것들로 구성된 외적 교회 말입니다. 내적 교회는 라헬로, 외적 교회는 레아로 표현되었지요. 그러나 야곱으로, 즉 말씀에서 ‘야곱’(Jacob)의 후손으로 이해되는 그들은 외적인 것만을 원하는, 그러니까 예배에서도 겉만 원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래서 라헬에 앞서 레아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눈이 침침한 레아로는 유대 교회를, 라헬로는 이방인들의 새 교회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야곱’은 선지서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요, 하나는 왜곡된, 비뚤어진 상태 가운데 있는 유대 교회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참된 외적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곱이 내적 교회와 상응할 때는 특별히 ‘이스라엘’(Israel)이라 합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로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How the case was with this new church may be seen from the Jewish church, which was both internal and external; the internal church consisting of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the external church of natural things. The internal church was represented by Rachel, and the external by Leah. But as Jacob, or rather his posterity understood by “Jacob” in the Word, were such as to desire only external things, or worship in externals, therefore Leah was given to Jacob before Rachel; and by blear-eyed Leah was represented the Jewish church, and by Rachel a new church of the gentiles. For this reason “Jacob” is taken in both senses in the prophets, in one denoting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and in the other the true external church of the gentiles. When the internal church is signified, he is called “Israel”; but of these matters,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more will be said hereafter.

 

해설

 

AC.422에서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유대 교회(Jewish church)의 예를 들어, 내적 교회와 외적 교회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그는 유대 교회가 겉으로는 하나의 교회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내적 차원(천적, 영적)과 외적 차원(자연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적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면적 실재로 이루어지고, 외적 교회는 의식, 규례, 행위와 같은 자연적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둘이 결합될 때 교회는 온전해지지만, 겉만 남고 속이 사라질 때, 교회는 형식만 유지하는 상태로 기울게 됩니다.

 

이 내적–외적 구조는 ‘라헬(Rachel)과 ‘레아(Leah)의 표상으로 설명됩니다. 라헬은 내적 교회, 곧 천적, 영적 실재를 대표하고, 레아는 외적 교회, 곧 자연적 예배와 삶의 형식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레아가 먼저 야곱에게 주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섭리적 배열입니다. 곧 사람들은 내적 실재보다 외적 형식과 보이는 예배를 더 원했고, 그 결과 외적 교회가 먼저 서게 된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레아를 ‘시력이 약한(blear-eyed, 29:17) 인물로 묘사한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모 묘사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영적 시야가 흐릿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이렇게 레아로 표상된 유대 교회는 외적 예배와 규례에는 열심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의 내적 의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새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질 교회를 표상하는데, 이는 외적 형식이 아닌 내적 실재를 중심으로 세워질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대조는 ‘야곱(Jacob)이라는 인물의 이중적 의미에서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야곱’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왜곡된 상태의 유대 교회, 곧 외적 예배만을 추구한 교회를 뜻하고, 다른 하나는 참된 외적 교회, 곧 이방인 가운데 세워진 교회를 뜻합니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은, 외적 형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외적 형식이 내적 실재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베덴보리는 내적 교회가 강조될 때 야곱은 ‘이스라엘(Israel)로 불린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와 선이 내적으로 결합된 상태, 곧 내적 교회가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 같은 공동체라도 내적 실재가 있을 때는 ‘이스라엘’로, 외적 형식만 남았을 때는 ‘야곱’으로 불립니다. 이는 성경의 명칭 사용이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질서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국 AC.42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유대 교회의 외적 형식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에 내적 실재를 다시 결합시키는 교회입니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대립하는 두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의 두 차원이며, 문제는 순서와 중심입니다. 외적이 먼저 서더라도, 그것이 내적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교회는 언제나 내적 사랑과 신앙을 중심에 두고, 외적 삶과 예배를 그 열매로 삼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함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AC.423, 창4:22, '두발가인이 father가 아닌, instructor인 이유'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 두발가인을 일컬어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instructor of e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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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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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22)

 

AC.421

 

‘씰라’(Zillah)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와,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와 상응합니다. 여기서 ‘구리’(brass)는 자연적 선을, ‘쇠’(iron)는 자연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나아마, 두발가인의 누이’(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는 유사한 교회, 즉 그 교회 밖에 있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와 상응합니다. By “Zillah” is signified, as previously stated, the mother of the natural things of the new church; by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brass” denoting natural good, and “iron” natural truth. By “Naamah, the sister of Tubal-Cain” is signified a similar church, or the doctrine of natural good and truth outside of that church.

 

해설

 

AC.421에서 스베덴보리는 ‘씰라(Zillah)를 새 교회에서 자연적 차원의 어머니로 규정합니다. 앞서 아다가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낳는 어머니였다면, 씰라는 그 사랑과 신앙이 자연계의 삶과 행위 속으로 내려와 구체화되는 차원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이는 새 교회가 내적 차원(천적, 영적)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상의 판단, 행위, 도덕, 질서로까지 확장됨을 뜻합니다. 교회는 마음과 생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연적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Tubal-Cain)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장인과 기술을 물질문명의 진보로 보지 않고,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의 형성으로 해석합니다. ‘구리(brass, )는 성경 전반에서 자연적 선을, ‘(iron, )는 자연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자연적 선이란 외적 삶에서 실천되는 선한 행위와 유익함이며, 자연적 진리란 그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도덕적, 합리적 진리입니다. 두발가인이 ‘스승(instructor)으로 불린 것은, 이러한 선과 진리가 무질서한 관습이 아니라 가르쳐지고 전수되는 교리의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이 나타납니다. 자연적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 선과 진리의 단순한 복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더 거칠고, 더 외적이며, 감각과 경험에 가까운 형태를 띱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이 자연적 차원조차도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에서 내려온 질서 안에 놓입니다. 두발가인이 놋과 철을 다룬다는 표현은, 인간의 외적 삶이 선과 진리라는 재료로 형성되고 단련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자연적 삶 역시 교회의 일부로 회복됩니다.

 

또한 두발가인의 누이로 소개되는 ‘나아마(Naamah)는, 그 교회 밖에 있는 유사한 교회, 혹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표상합니다. ‘누이(sister)라는 표현은 동일한 본질을 지니되, 직접적인 계보 안에는 속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새 교회 밖에서도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교회가 아닌 곳에도 도덕, 정직, 질서, 유익함에 관한 참된 가르침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들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는 진리와 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유사성’과 ‘동일성’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나아마로 표상된 교리는 새 교회와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천적 사랑과 영적 신앙으로부터 직접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이성과 경험의 차원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이’로 불린 것은, 그러한 교리들 역시 주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와 접촉하고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AC.421은 새 교회의 구조가 천적(아다)–영적(야발, 유발)–자연적(씰라, 두발가인)으로 온전히 갖추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랑과 신앙의 내적 차원에서 시작되어, 자연적 삶의 선과 진리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자연적 차원은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나, 참된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만 온전히 유지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새 교회가 결코 관념적이거나 내면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삶 전체를 형성하는 전인적 질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AC.422, 창4:22, '아다와 씰라, 라헬과 레아, 유대 교회의 속과 겉'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 이 새 교회가 어땠는지는 유대 교회를 보면 알 수 있는데요, 유대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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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나오는 다양한 악기들이 가지는 상응'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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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따라 적절한 데서 보시게 됩니다. 여기선 단지 시편에 언급된 것들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In the Word mention is made of various instruments, each having its own signification, as will be shown,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its proper place; here however we shall adduce only what is said in David: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6) I will sacrifice in the tent of Jehovah sacrifices of shouting, I will sing, yea, I will sing praises unto Jehovah, (Ps. 27:6)

 

여기 ‘장막’(tent)은 천적인 것을,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그리고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거기서 나오는 영적인 걸 표현합니다. 계속해서 where by “tent” is expressed what is celestial, and by “shouting,” “singing,” and “singing praises,” what is spiritual thence derived. Again: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33:1-4) Sing unto Jehovah, O ye righteous, for his praise is comely for the upright; confess ye to Jehovah on the harp, sing unto him with the psaltery, an instrument of ten strings. Sing un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with a loud noise; for the Word of Jehovah is right, and all his work is in the truth, (Ps. 33:1–4)

 

신앙의 진리들을 가리키는데요, 다음은 그 내용입니다. denoting the truths of faith, concerning which these things are said.

 

[2] 영적인 것들, 즉 신앙의 진리들과 선들은 하프와 수금 및 노래와 비슷한 악기들을 가지고 축하한 반면, 신앙의 거룩한 것들, 곧 천적인 것들은 관악기, 그러니까 트럼펫 같은 걸로 축하했는데요, 이것이 성전에서, 그리고 왜 그렇게나 자주, 그렇게나 많은 악기가 사용되었는지 하는 이유, 즉 이런저런 주제를 해당 특정 악기로 축하하기 위해서였으며, 그 결과 ‘아, 이런 주제를 축하하기 위해 이런 악기를 선택한 것이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Spiritual things, or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the harp and psaltery, with singing and analogous instruments, but the holy or celestial things of faith were celebrated with wind instruments, such as trumpets and the like; and this was why so many instruments were used about the temple and so often, in order that this or that subject might be celebrated with certain instruments; and in consequence of this the instruments came to be taken and understood for the subjects that were celebrated with them.

 

[3] 계속해서 Again:

 

2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23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71:22, 23) I will 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even thy truth, O my God; unto thee will I sing praises with the harp, O thou holy one of Israel; my lips shall sing when I sing praises unto thee, and my soul which thou hast redeemed, (Ps. 71:22–23)

 

여기 또한 신앙의 진리들과 상응하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where also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Again: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147:7) Answer to Jehovah in confession, sing praises upon the harp unto our God; (Ps. 147:7)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그 언급에 ‘여호와’(Jehovah)가 나오는 것이며,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sing praises upon the harp)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God)이 나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confession” has respect to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and therefore mention is made of “Jehovah”; and to “sing praises upon the harp”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wherefore “God” is spoken of. Again: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149:3) Let them praise the name of Jehovah in the dance, let them sing praises unto him with the timbrel and harp, (Ps. 149:3)

 

여기 ‘소고’(timbrel, 탬버린)는 선에, ‘수금’(harp)은 진리, 곧 그들이 찬양하는 진리에 각각 상응합니다. where the “timbrel” signifies good, and the “harp” truth, which they praise.

 

[4] 계속해서 Again: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3-5) Praise God 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praise him with the psaltery and harp; praise him with the timbrel and dance; praise him with stringed instruments and the organ; praise him upon the loud cymbals; praise him upon the cymbals of shouting. (Ps. 150:3–5)

 

이 악기들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찬양에 관한 여러 주제였습니다. 굳이 이렇게 죽 나열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각각의 악기들이 무슨 저마다 구별되는 상응 없이도 이렇게 쓸데없이 언급되었다고 믿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속해서 다음은 선과 진리의 지식에 관한 언급입니다. These instruments denote the goods and the truths of faith which were the subjects of praise; for let no one believe that so many different instruments would have been here mentioned unless each had a distinct signification. Again, referring to the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3, 4) O send out thy light and thy truth, let them lead me, let them bring me unto the mountain of thy holiness, and to thy habitations, and I will go in to the altar of God, unto God, the gladness of my exultation; yea, I will confess unto thee upon the harp, O God, my God. (Ps. 43:3, 4)

 

[5] 이사야에서는, 신앙과 그 지식에 속한 것들을 언급하면서 In Isaiah, referring to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23:16) Take a harp, go about the city, play well, sing many songs, that thou mayest be called to remembrance. (Isa. 23:16)

 

같은 내용이 계시록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The same is expressed still more plainly in John: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8) The 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 fell down before the lamb, having every one of them harps, and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which are the prayers of the saints, (Rev. 5:8)

 

여기서 분명한 건, 생물들과 장로들이 가진 건 거문고가 아니라 ‘거문고’(harps)가 상응하고 있는 신앙의 진리들과, 그리고 ‘향이 가득한 금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이 상응하고 있는 신앙의 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는 악기 연주를 일컬어 ‘찬송’(praises)과 ‘감사함’(confessions)이라 하고 있습니다. where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that the animals and elders had not harps, but that by “harps” are signified the truths of faith, and by “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 the goods of faith. In David the performances on the instruments are called “praises” and “confessions.” (Ps. 42:5; 69:3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30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69:30, 31)

 

계시록 또 다른 데서는 And in another place in John: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2, 3) I heard a voice from heaven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I heard the voice of harpers harping with their harps, and they sang a new song. (Rev. 14:2–3)

 

계속해서 또 다른 데서 And in another place: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15:2) I saw them standing by the sea of glass having the harps of God. (Rev. 15:2)

 

다음 사실도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자신들의 차이점을 따라 소리를 구분하는데요, 노래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뿐 아니라 목소리에서 나오는 소리로도 구별합니다. 그들은 조화를 이루는 소리만 받아들이는데요, 그렇게 해서 소리의 일치, 그리고 그 결과 악기의 일치가 있게 됩니다. 선과 진리의 본성(nature)과 본질(essence)을 유지하면서 말이지요. It is worthy of mention that angels and spirits distinguish sounds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 with respect to good and truth, not only those produced in singing and by instruments, but also those of voices; and they admit none but such as are in accord, so that there may be a concord of the sounds, and consequently of the instruments, with the nature and essence of the good and the true.

 

 

해설

 

AC.420에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악기들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각각 서로 다른 영적 실재를 표상하고 있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다윗의 시편(27:6)을 인용하여, ‘여호와의 장막(the tent of Jehovah)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노래를 통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을 제시합니다. ‘장막(tent)은 사랑의 거룩한 것, 곧 천적인 영역을 표상하고, 그 장막 안에서 터져 나오는 ‘즐거운(shouting), ‘노래하며(singing), ‘찬송하리로다(singing praises)는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표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의 진리와 선은 그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는 결과가 됩니다.

 

시편 33편에서 ‘수금(harp), ‘비파(psaltery), ‘새 노래(new song), ‘즐거운 소리(loud noise)가 언급되는 것은, 예배의 풍성함을 단순히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백되고 찬양됨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the Word of Jehovah is right)라는 구절과 함께 음악이 언급되는 점에서, 이 악기들은 신앙의 진리와 그 질서를 표상합니다. 즉, 악기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조화롭게 배열된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합니다. 현악기와 노래는 주로 영적인 것들, 곧 신앙의 진리와 선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었고, 나팔과 같은 관악기는 천적인 것들, 즉 사랑의 거룩함을 기념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성전 예배에는 매우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되었으며, 각각의 악기는 기념되는 주제에 따라 선택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악기 자체가 곧 그것으로 기념되던 영적 실재의 표상으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응의 질서가 예배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71편과 147편에서는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confess to thee with the psaltery),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sing praises upon the harp)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여호와(Jehovah)와 ‘하나님(God)이라는 명칭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여호와’는 사랑의 천적인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백(confession)이 여호와를 향할 때는 천적인 것을, 수금으로 노래하며 하나님께 찬송할 때는 영적인 신앙의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 미묘한 구분은 성경 언어가 얼마나 정밀한 상응의 체계 위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시편 149편과 150편은 이러한 구조를 극적으로 확장합니다. ‘소고(timbrel), ‘(dance), ‘수금(harp), ‘현악(stringed instruments), ‘퉁소(organ), ‘큰 소리 나는 제금(loud cymbals), ‘높은 소리 나는 제금(cymbals of shouting)까지 나열되는 것은, 예배의 흥을 돋우기 위한 장황한 수사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모든 종류가 주님을 찬양하는 상태를 총체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각각의 악기가 서로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성경이 이렇게 많은 악기를 굳이 구분하여 언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모든 세부가 의미 없는 장식이 아님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사야 23장과 시편 43편에서도 수금은 신앙의 진리, 빛과 진리는 영적 인도를 표상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르면 이 상징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four animals and the four and twenty elders)가 각기 ‘수금(harps)을 들고 있으며, ‘향이 가득한 금 대접(golden vials full of incense offerings)을 가진 장면은, 문자 그대로 천상 존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향을 들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수금은 신앙의 진리, 향은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기도를 표상합니다. 이는 상응을 모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증언을 덧붙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은 소리를 단순한 음향으로 듣지 않고, 그 소리 안에 담긴 선과 진리의 성질에 따라 즉각적으로 분별합니다. 노래의 음성, 악기의 울림, 말의 소리까지도 그 배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지며, 선과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소리는 자연스럽게 배제됩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언제나 소리의 조화, 곧 선과 진리의 조화가 있으며, 이 조화가 곧 하늘의 질서입니다.

 

결국 AC.420은 음악과 악기가 단순한 예배 도구가 아니라, 천적인 사랑과 영적인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고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상임을 밝혀 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기 하나하나는, 교회와 인간 내면에서 사랑과 신앙이 울리는 방식을 드러내는 상응의 언어이며, 이를 통해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AC.421, 창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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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창4:21, '영적인 것' - 신앙의 진리와 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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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고 선한 걸 이해하는 건 신앙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지식은 이 둘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가르치는 바대로 되는 거, 그 결과 주님 사랑의 사람이 되어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건 천적입니다. 즉 이해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건 영적이지만, 이해한 걸 실천에 옮겨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천적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이들 두 가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두 악기, 곧 ‘수금과 퉁소’(the harp and organ)로 상응하고 있습니다. 하프는, 다들 아시듯 현악기이며, 그래서 영적 진리를, 그리고 오르간은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 중간, 곧 영적 선을 상응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the holy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goods, so spiritual things are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for it belongs to faith to understand not only what is true, but also what is good. The knowledges of faith involve both. But to be such as faith teaches is celestial. As faith involves both of these, they are signified by two instruments, the harp and the organ. The harp, as everyone knows, is a stringed instrument, and therefore signifies spiritual truth; but the organ, being intermediate between a stringed instrument and a wind instrument, signifies spiritual good.

 

 

해설

 

AC.419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분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이 둘이 어떻게 신앙 안에서 결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정리합니다.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은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파생된 선이고, ‘영적인 것(spiritual things)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앙이 단지 참된 것을 아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이 참인지뿐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까지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 곧 ‘신앙의 앎’ 속에는 진리와 선이 함께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중요한 구분을 덧붙입니다. 신앙이 진리와 선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그 이해한 바를 존재 자체로 살아내는 것, 곧 그 사람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은 천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선이라고 아는 것은 신앙의 일이고, 그 선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의 일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과 사랑,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관계를 오해 없이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것들이 두 악기, 수금과 퉁소(오르간)로 표상된다고 설명합니다. 신앙 안에는 진리와 선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기가 아니라 두 악기가 필요합니다. 수금은 현악기로서, 줄의 진동을 통해 소리를 냅니다. 이는 분명하고 구별되는 음, 곧 진리의 성격과 상응합니다. 진리는 구분하고, 밝히며, 질서를 세웁니다. 그래서 수금은 영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반면 퉁소, 혹은 오르간은 성격상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의 중간적 성질을 지닙니다. 공기의 흐름이 관을 통해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는 일정한 구조와 질서 안에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중간성’을 근거로, 오르간이 영적 선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진리처럼 날카롭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사랑처럼 즉각적인 생명력만으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선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음악의 물리적 특성을 억지로 영적 의미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응의 질서를 따라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는 분별과 명료성을 지니고, 선은 온화함과 유익함을 지닙니다. 현악기의 또렷한 음은 진리의 성격과 상응하고, 공기의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울리는 오르간의 소리는 선의 성격과 상응합니다. 이 둘이 함께 연주될 때, 비로소 신앙의 전체, 곧 진리와 선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표현됩니다.

 

결국 AC.419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단일한 차원이 아니며, 진리와 선의 이중 구조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음악이라는 표상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납니다. 수금만 있다면 신앙은 차갑고 분석적인 지식에 머물고, 오르간만 있다면 신앙은 방향 없는 선의 감정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살아 있는 질서가 됩니다.

 

따라서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으로 불린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진리와 선의 균형 속에 자리 잡았음을 알리는 표상입니다. 이는 천적인 사랑(야발)에서 출발하여, 영적인 신앙(유발)으로 질서 있게 전개되는 새 교회의 구조를 완성하는 중요한 한 조각이며, 스베덴보리가 음악의 상응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AC.420, 창4:21, '말씀에 나오는 다양한 악기들이 가지는 상응'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 말씀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나오는데요, 저마다 나름의 상응을 가지지요. 이 저마다의 상응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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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8, 창4:21, '수금과 퉁소' -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 앞 절에서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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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1)

 

AC.418

 

앞 절에서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이를 ‘수금과 퉁소’(harp and org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프 같은 현악기가 신앙의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한데요, 표상 교회(the representative church)의 예배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악기들과 찬양이 상응하는 바가 이것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 예배에 그렇게나 많은 싱어와 뮤지션이 있었던 건데요, 그 모든 것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천국의 모든 기쁨은 마음의 즐거움을 낳는다(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즉 천국의 기쁨을 즐거운 마음으로 표현하고자 함이며, 그걸 찬양, 즉 성가대와 이를 돕는 현악단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노래(singing), 즉 찬양이라는 게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뭔가 이 찬양을 도울 수 있는 걸 고안하다 보니 현악기(stringed instruments)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애정(The affection of the heart)은 천적이지만, 그로 인한 찬양은 영적입니다. 노래, 즉 찬양과 이와 유사한 것들은 영적인 걸 가리킨다는 사실이 천사 성가대들(the angelic choirs)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는데요, 이 천사 성가대는 두 종류, 곧 천적 성가대와 영적 성가대가 있습니다. 영적 성가대는 천적 성가대와 쉽게 구별되는데, 그들이 찬양할 때 내는 바이브레이션 [sono canoro alato] 때문이지요. 이는 현악기 소리와 비슷한데요, 이런 내용에 대한 더 깊은 언급은 주님의 신성한 자비(the Divine mercy of the Lord)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태고인들(太古, The most ancient people)은 천적인 건 심장 영역(the province of the heart)과, 영적인 건 폐(the lungs) 영역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고, 그 결과 폐에 관한 걸 노랫소리와 그 유사한 것들로 상응하는 것이며, 그래서 목소리나 그런 악기들의 사운드로 그런 상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은 단지 심장과 폐가 일종의 결혼, 그러니까 사랑과 신앙의 결혼 같은 그런 결혼을 표현할 뿐 아니라, 또한 천적 천사들은 심장 영역에, 영적 천사들은 폐 영역에 속한다는 것도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이 이런 거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또한 알 수 있는데요, 이는 주님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이며, 그저 유발이 그런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의미밖에 뭐 더 다른 아무것도 없다면 거기엔 무슨 생명이라는 게 없으며, 이런 건 알아도 아무한테도 아무 소용도 없는 거라는 사실입니다. The former verse treated of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but this verse treats of spiritual things which are of faith, and these are expressed by the “harp and organ.” That by stringed instruments, such as harps and the like, are signified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many considerations. Similar instruments, and also the singing, in the worship of the representative church, represented nothing else, and it was on this account that there were so many singers and musicians, the cause of this representation being that all heavenly joy produces gladness of heart, which was expressed by singing, and in the next place by stringed instruments that emulated and exalted the singing. Every affection of the heart is attended with this: that it produces singing, and consequently what is connected with singing. The affection of the heart is celestial, but the consequent singing is spiritual. That singing and that which resembles it denote what is spiritual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angelic choirs, which are of two kinds, celestial and spiritual. The spiritual choirs are easily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by their vibrant singing tone [sono canoro alato], comparable to the sound of stringed instruments, of which, by the Divine mercy of the Lord, we shall speak hereafter. The most ancient people referred what was celestial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at was spiritual to that of the lungs, and consequently to whatever pertains to the lungs, as do the singing voice and things like it, and therefore the voices or sounds of such instruments. The ground of this was not merely that the heart and lungs represent a kind of marriage, like that of love and faith, but also because the celestial angels belong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the spiritual angels to that of the lungs. That such things are meant in the passage before us, may also be known from the fact that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and that it would be destitute of life if nothing more were implied than that Jubal was the father of such as play upon the harp and the organ; nor is it of any use to anyone to know this.

 

 

해설

 

AC.418에서 스베덴보리는 본문이 다루는 주제가 앞 절과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앞선 절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이 절은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것들이 ‘수금과 퉁소’로 표현됩니다. 이는 성경이 음악적 도구를 언급할 때, 결코 문화사나 예술사의 기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표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현악기, 곧 수금과 같은 악기들이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구약의 대표적 교회, 곧 표상적 교회에서 음악과 노래가 예배의 핵심을 이루었던 이유는, 그것들이 하늘의 기쁨을 자연계에서 상응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곧 마음의 즐거움으로 나타나고, 이 즐거움은 먼저 노래로 표현되며, 이어서 노래를 북돋우고 고양하는 현악기로 확장됩니다. 이 질서 자체가 이미 천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마음의 애정 자체는 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애정이 소리와 음성, 곧 노래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영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즉, 사랑은 내적인 불이며, 노래는 그 불이 밖으로 울려 퍼지는 진동입니다. 그러므로 음악은 사랑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표현, 곧 영적인 상태의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음악과 노래는 언제나 신앙의 진리와 선, 그 감응과 기쁨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덧붙여, 이 사실이 단지 추론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임을 밝힙니다. 그는 천사들의 합창을 관찰했으며, 그 합창이 천적인 합창과 영적인 합창으로 구분됨을 증언합니다. 특히 영적인 합창은 ‘날개 달린 듯한 진동하는 노랫소리’를 내며, 이는 현악기의 울림과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인 합창이 더 깊고 내적인 감동을 주는 반면, 영적인 합창은 분명한 음성, 질서 있는 진동, 전달되는 진리의 성격을 띤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의 영적 차원이 갖는 특성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하던 심장과 폐의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천적인 것을 심장의 영역, 영적인 것을 폐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심장은 사랑과 생명의 중심이며, 폐는 호흡과 음성의 기관입니다. 노래와 말, 소리는 모두 폐의 작용에 속합니다. 따라서 노래와 악기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것, 곧 신앙의 영역을 표상합니다. 이 질서는 단순한 생리학적 비유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인체 안에서 상응적으로 드러난 구조입니다. 사랑이 심장이라면, 신앙은 폐이며, 둘은 분리될 수 없으나 구별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유발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이 만일 문자적 사실에 그친다면, 성경은 생명 없는 기록이 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누가 최초의 음악가였는지를 아는 것은 영혼의 구원이나 신앙의 삶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님의 말씀인 이상, 그 안에는 반드시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생명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생명이, 음악이라는 표상을 통해 신앙의 영적인 기쁨과 진리의 조화로 드러납니다.

 

결국 AC.418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새 교회가 회복될 때, 사랑의 거룩함(천적인 것)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질서도 함께 회복됩니다. 그 영적인 질서는 차갑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노래처럼 울리고,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는 신앙입니다. 수금과 퉁소는 바로 그 상태를 표상하며,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지 않고, 사랑의 기쁨을 진리의 언어로 노래하는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AC.419, 창4:21, '영적인 것' - 신앙의 진리와 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 천적인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 인한 선이듯, 영적인 것은 신앙의 진리와 선입니다. 참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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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7, 창4: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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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4:21)

 

AC.417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his brother’s name was Jubal)은 그 교회의 영적인 것들에 관한 독트린(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에,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은 신앙의 진리와 선(the truths and goods of faith)에 각각 상응합니다. By “his brother’s name was Jubal” is signified the doctrine of the spiritual things of the same church; by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해설

 

AC.417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발의 동생 ‘유발(Jubal)을 통해, 새로 시작되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것들의 교리적 측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서 야발이 장막과 가축으로 표상된 천적인 것(사랑의 거룩함과 그로부터 나온 선)을 대표했다면, 유발은 그와 형제 관계로 소개되며, 같은 교회 안에 속한 영적인 차원, 곧 신앙의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를 대표합니다. ‘형제’라는 표현은 두 요소가 서로 경쟁하거나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전제로 공존하는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유발을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음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적 상태가 진리와 선의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표현되는 방식을 표상합니다. 수금과 퉁소 같은 악기는 소리를 통해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움직이는데, 이는 진리가 단순한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고 선과 결합되어 삶을 울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음악은 영적인 것들이 교리로 정리되고, 동시에 삶의 감각과 정서에까지 스며드는 상태를 상응적으로 보여 줍니다.

 

특히 ‘조상, 곧 아버지’라는 표현은, 유발이 음악의 역사적 창시자라는 뜻이 아니라, 영적 교리가 정식으로 자리 잡아 이후의 모든 신앙적 표현의 근원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와 선이 교리로 체계화되지 않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고 감정적 열심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대로 교리가 사랑과 분리되면, 그것은 가인의 길처럼 생명 없는 지식이 됩니다. 유발은 이 두 극단을 피하여, 천적인 사랑(야발)에서 나온 영적인 교리가 올바른 질서 안에서 형성되었음을 표상합니다.

 

또한 음악의 특징은 질서와 비례, 리듬과 조화에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진리와 선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정보가 아니라, 서로 상응하며 조화를 이루는 체계임을 보여 줍니다. 수금과 퉁소가 각각 다른 음색과 역할을 가지면서도 하나의 음악을 이루듯, 교회의 진리와 선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되 하나의 신앙 고백과 삶의 방향으로 수렴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발은, 새 교회가 단지 사랑의 열정만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바르게 인도할 영적 교리를 함께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AC.417의 핵심은, 새 교회의 회복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균형 있는 재건이라는 점입니다. 야발이 사랑의 거룩함과 선의 삶을 대표한다면, 유발은 그 사랑이 진리의 언어로 노래 되고, 교리로 가르쳐질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대표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형제라는 표현 속에 이미 그 질서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유발을 통해, 참된 교회는 사랑만 있는 교회도 아니고, 교리만 있는 교회도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교리가 진리와 선의 조화로운 ‘음악’처럼 울리는 교회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18, 창4:21, '수금과 퉁소' -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 앞 절에서는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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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과 '아벨'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 본절,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가 사랑의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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