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홀로 거한다(dwell alone)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이들이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부터 침해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유대 교회에서, 그들이 민족들을 몰아낸 뒤 홀로 거하였던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alone)고 말하는데,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 “dwell alone” 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 “alone,” 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라고 하였고, 모세의 예언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라고 하였으며,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히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민족들(nations)은 악(evils)을 뜻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홀로 거하고자 하지 않았으니, 곧 천적 인간으로 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유대 교회와 같이 민족들 가운데에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말해지는데, 왜냐하면 원하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where “nations” 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8의 ‘혼자 사는 것’이라는 표현을 ‘정반대의 의미’로 재정의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을 결핍이나 고립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혼자 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에 있어,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천적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말은 부정이 아니라 찬사였습니다. 유대 교회가 민족들을 몰아내고 홀로 거한 것은, 그 자체로는 그들이 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천적 상태를 가리키는 외적 표상’이었습니다. 말씀에서 교회를 ‘홀로 있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악의 질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발람의 예언에서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는 말은 결정적입니다. 여기서 ‘여러 민족’은 단순한 이방인이 아니라, 악을 의미합니다. 즉, 홀로 거한다는 것은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본래 태고교회가 지녔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방향을 틀어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더 이상 이렇게 홀로 거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 교회가 나중에 그러했듯이, ‘민족들 가운데에 있기를’, 곧 세상 질서와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창2:18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선언은, 인간이 외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의 의지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밝힙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 원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다시 말해, 허락은 원인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서 선택된 방향의 결과’입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은 특히 날카롭습니다. ‘원하는 자는 이미 악 안에 있으며,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다’는 말은, 악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는 형태로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유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기에, 인간이 주님 아닌 다른 인도를 원할 때,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AC.139는 이렇게 말합니다. ‘홀로 있음’은 본래 천국의 상태였으나, 인간이 그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홀로 있음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후의 모든 분리와 타락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8.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주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 질서에 쉬 수긍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가령, 온 천국에 주님 말고 다른 하나님이 있는지를 찾아보게 하신다든지, 비록 지옥에 합당한 자들일지라도 원하면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천국 변방에라도 발을 들여놓게 잠시 허락, 천국을 경험하게 하신다든지 말이지요. 주님은 이런 독립하고자 하는 천적 인간에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 proprium을 허락하시네요...

 

 

네, 바로 그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고도 두렵도록 깊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자’처럼 행동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간과 천사들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을 읽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 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영들에게조차 주님은 억지로 굴복시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확인하고 경험하고 선택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이나 느슨함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아주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과 천사를 단지 ‘올바르게 복종하는 존재’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강제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심지어 그 자유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질 가능성까지도 감수하십니다. 이것이 proprium 허락의 가장 깊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조차 어떤 영들이 ‘정말 주님 외에 다른 중심은 없는가’, ‘정말 자기 자신으로 살 수는 없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할 때, 주님은 단칼에 꺾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는 실제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짜 자유 안에서 확인되고 선택되지 않은 질서는, 그 존재 안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의 핵심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바로 그 허락 안에 주님의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단순히 ‘끌려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독립하려는 움직임조차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자유 안에서, 끝없이 다시 자신 쪽으로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드러납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실수로 허락된 위험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참된 사랑과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천국의 기쁨도 실제로 자기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자기처럼 느끼는 자리까지 허락하시되, 동시에 끊임없이 ‘생명의 근원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부드럽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단순한 흥미로운 영계 묘사가 아니라, 주님의 통치 방식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힘으로 굴복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스스로 사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심지어 천적 인간 안에도 ‘독립하고 싶은 가능성’ 자체는 남겨 두십니다. 단, 천국에서는 그 가능성이 더 이상 자기중심으로 굳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래도 생명은 주님께 있구나’라는 더 깊은 기쁨과 감사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은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은 단순히 질서를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면서도 결국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proprium의 허락은 바로 그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bygrace.kr

 

AC.138, 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사람 자신의 proprium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선택하려는 구조,  proprium이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을 대체, 대신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 뭔가요? 표현이 어려워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기성(proprium)이 단순히 방해물이나 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자기처럼 느껴지는 요소’가 왜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직접 움직이는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선택도, 그리고 사랑도 내가 능동적으로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내가 한다고 느끼는 자리’가 proprium, 곧 자기성입니다. 만약 이것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아도 그것을 자기 삶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도, 기쁨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기성은, 비록 위험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더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할 때, 실제 생명과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것을 전혀 자기 일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사랑도 기쁨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내가 선택했고, 내가 사랑했다’고 느낀다면, 바로 그 자기감 속에서 그는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이 자기감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질 때의 타락한 자기중심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AC.138에서 말하는 ‘돕는 배필’은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곧,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 속에서 체험하고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처럼 느껴지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단순한 외부 보조자가 아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 밖에서 와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타자(他者),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된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자기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인도를 받지만, 그 인도가 자기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가 원한다’, ‘내가 따른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어떤 자기성이 필요합니다. 이 자기성이 바로 ‘돕는 배필’의 깊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너무 추상적으로 보지 마시고, 이렇게 이해하시면 훨씬 또렷합니다.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이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내 선택’, ‘내 사랑’처럼 실제로 느끼며 응답할 수 있게 해 주는 자기감의 구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자기성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AC.138, 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AC.138.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주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 질서에 쉬 수긍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거의 모든 요

bygrace.kr

 

AC.138, 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AC.138.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위 해설, ‘혼자 사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8.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위 해설, ‘혼자 사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내적 방향의 변화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나도 함께 이끌고 싶다는 의식이 깨어난 상태가 바로 혼자 사는 것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 내적 방향의 변화가 뭔가요? 그리고 천적 인간의 삶이 뭐가 부족하다고 이렇게 곁눈질을 하나요? 천사들은 이러지 않지요? 이것이 천국과 지상의 차이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내적 방향의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변화 이전에 먼저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중심 이동을 뜻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삶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에게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판단하고 싶다’,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스스로 알고 결정하고 싶다’는 움직임이 아주 조용히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내적 방향의 변화’입니다. 아직 노골적인 반역이나 악은 아닙니다. 다만 생명의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쪽’에서 ‘나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기울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영적 독립의 욕구입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과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 안에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proprium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합’보다 ‘독립’을 원합니다. 곧, ‘함께 살기’보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 시작되는 긴장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런 곁눈질을 하느냐, 천적 인간의 삶에 뭐가 부족해서 그러느냐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사실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 안에는 결핍이 없습니다. 문제는 결핍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행복하게 유지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있으려면, 아주 미세하게라도 ‘자기 쪽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움직임은 ‘무언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자유로운 존재 안에 필연적으로 열려 있는 가능성입니다.

 

다만 지상과 천국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이 방향 전환이 실제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 쪽으로 점점 더 굳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다시 주님께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은 선택과 재형성의 자리입니다. 반면 천국에서는 이미 방향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에게도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은 여전히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독립 욕구’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단순히 교리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느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가 나와도, 그것은 지상의 인간처럼 ‘타락 가능성’의 흔들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감사가 새롭게 살아나는 리듬에 가깝습니다. 천사들도 때때로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가 더 의식되지만, 그들은 그 순간조차 자연스럽게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반면 지상에서는 그 ‘자기감’이 실제로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과 지상의 가장 큰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리하면, AC.138의 ‘내적 방향의 변화’란, 인간이 더 이상 단순히 ‘받아 사는 존재’로 머물기보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쪽으로 아주 미세하게 기울기 시작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며, 지상에서는 그것이 실제 분리와 타락으로까지 갈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굳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AC.138, 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

bygrace.kr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2:18)

 

AC.138

 

혼자(alone)라는 말은 그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였음을 뜻합니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사람의 proprium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후에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rib built into a woman)로 불리게 됩니다. 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해설

 

이 단락은 창2:18의 유명한 표현들을 ‘전적으로 영적, 구조적 의미’로 고정시켜 줍니다.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즉 주님의 인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내적 방향의 변화’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서 ‘나도 함께 이끌고 싶다’는 의식, 즉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의식이 깨어난 상태가 바로 ‘혼자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명히 ‘사람 자신의 proprium’이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며 선택하려는 구조, 곧 ‘proprium’이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주님을 대체, 대신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그를 위하여’, 즉 ‘그에게 맞는’이라는 표현은 이 proprium이 무질서한 반항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태에 맞게,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그러나 그 적합성은 어디까지나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만’ 유지됩니다. 이 proprium이 중심으로 올라오면, 돕는 자는 곧 대체자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proprium이 이후에 ‘갈빗대로 만드신 여자’로 불린다는 점은,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애정의 차원’에서 형성된 자기성임을 예고합니다. 인간은 먼저 사랑과 애정의 영역에서 proprium을 느끼고, 그다음에야 생각과 판단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자기성을 ‘돕는 배필’로 허락하시되, 생명의 중심이 아니라 ‘곁에 두어진 구조’로 두십니다.

 

AC.13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성향이며, 그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바로 ‘proprium’의 허락이라고 말입니다.

 

 

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AC.138, 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AC.138.심화 1. ‘내적 방향의 변화’ 위 해설, ‘혼자 사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혼자 사는 것’은 정서적 외로움이나 사회적 결핍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bygrace.kr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AC.138, 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AC.138.심화 2.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 역시 위 해설,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돕는 배필’ 역시 외부에서 보충되는 타자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분

bygrace.kr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AC.138, 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AC.138.심화 3.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는 주님’ 주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 질서에 쉬 수긍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거의 모든 요

bygrace.kr

 

 

 

 

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을 때를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제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으로 기울어진 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1, 2, 3장을 읽는 ‘해석의 지평을 단번에 정리해 주는 총괄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개별 사건을 넘어, 말씀 전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이 세 장은 역사 서술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인간의 일생’을 다룬다는 선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가 ‘사람(homo)이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정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인간처럼 존재했고, 그 내적 상태의 변화가 곧 말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탄생, 중간은 성숙, 끝은 쇠퇴와 소멸입니다. 창세기 1, 2, 3장은 이 전 과정을 한 호흡으로 다룹니다.

 

이 장, 곧 창세기 2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절정의 순간’을 담고 있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을 때, 즉 주님과 직접 결합, 퍼셉션(perception)으로 살던 가장 번성한 상태가 묘사되었습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평화의 안식은 모두 이 절정 상태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다릅니다. 이제 본문은 ‘자기의 것,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자들’을 다룹니다. 이는 곧 태고교회가 더 이상 순수한 천적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자기의식과 자기중심이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기울어짐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방향성’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변화를 갑작스러운 붕괴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말합니다. 앞부분은 가장 번성한 상태였고, 지금은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즉, 타락은 한순간의 추락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입니다.

 

AC.137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 2, 3장을 따로따로 읽지 말고, 하나의 생명 이야기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이상화된 과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근원이고, 에덴은 회상이 아니라 목표이며, 타락은 신화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이 문장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창세기 2장을 ‘아름답게 닫아 줍니다’. 천적 인간의 찬란함을 본 뒤에, 그 찬란함이 어떻게 proprium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제 독자는 다음 장에서 그 기울어짐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일생’으로 읽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bygrace.kr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주 예리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서는 이런 ‘부정을 통한 표현’이 꽤 자주 나오는데, 그냥 단순 긍정보다 훨씬 미묘한 상태를 전달하려 할 때 그렇습니다. AC.136의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을 단순히 ‘acceptable’(받아들일 만한)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닌’ 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 상태가 완전히 긍정적이거나 완전히 안전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에는 어떤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proprium, 곧 자기감과 자기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이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요소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다’, ‘완전히 허용된다’라고 강하게 긍정하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뉘앙스는 우리말로 하면 이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질서 안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본래 위험 요소를 포함하지만, 올바르게 놓이면 거부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자체로 절대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고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이 표현은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미묘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proprium을 단순히 ‘’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자유와 사랑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proprium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적극적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질서 안에서 허용되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 영어에서는 단순 긍정보다 ‘부정을 부정하는 방식’이 훨씬 섬세한 중간 지대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not impossible’, ‘not unreasonable’, ‘not unacceptable’ 같은 표현들은, 단순히 가능, 합리, 수용 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보와 긴장을 남긴 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렇게 쓴 이유는, proprium이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대로 믿고 맡겨도 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긍정 대신, 조심스러운 ‘부정을 통한 제한적 긍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곧, proprium은 위험하지만 필수적이며, 본래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bygrace.kr

 

AC.136,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bygracetistory.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AC.136 해설에서 반복되는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은 모두 결국 proprium의 여러 측면을 풀어 설명하는 표현들입니다. 다만 완전히 동일한 단어로 기계적으로 치환하기보다는, 각각이 proprium의 어느 측면을 강조하느냐를 살려 읽으시면 훨씬 정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자기의 것’은 proprium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 곧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귀속의 문제입니다. ‘이 생각은 내 것이다’, ‘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 ‘이 지혜는 내 것이다’라고 느끼는 방향입니다.

 

반면 ‘자기성’은 proprium이 단순한 소유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어떤 ‘자기중심적 성향’ 혹은 ‘자기다움의 방향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더 어울립니다. 곧, 사람이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성질입니다.

 

그리고 ‘자기감’은 가장 섬세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느낌’ 차원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은, 인간은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이 바로 자기감입니다. 이것 자체는 반드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와 사랑의 조건입니다. 문제는 그 자기감을 ‘진짜 독립된 자기’로 굳혀 버릴 때입니다.

 

그래서 셋 다 proprium과 연결되지만, 약간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자기의 것’은 ‘귀속’, ‘자기성’은 ‘방향성과 성질’, ‘자기감’은 ‘체험되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AC.136 해설 전체 흐름에서는 이 셋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곧,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며 살아가도록 허락된 상태’,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께 열려 있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으로 굳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모두 proprium의 설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목사님처럼 AC를 계속 읽어 가실 때는, ‘프로프리움’이라는 원어 개념을 중심축으로 잡아 두시고, 문맥에 따라 그것이 지금은 ‘자기감’을 말하는지, ‘자기 중심성’을 말하는지, ‘내 것이라 여기는 귀속 의식’을 말하는지 분별해 읽으시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정리하면, 네, AC.136의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은 모두 proprium의 변주들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각각은 proprium의 다른 얼굴, 곧 ‘소유됨’, ‘자기 중심성’, ‘자기처럼 느껴지는 감각’을 조금씩 다르게 비추는 표현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C.136, 심화 2, ‘not be unacceptable’

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

bygrace.kr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도록 하십니다 (25).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전체의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봉인’과 같습니다. 앞에서 인간에게 ‘프로프리움(proprium, own)이 허락되고, 그것이 천적, 영적 생명과 결합, 하나처럼 느껴지게 되었다고 말한 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바로 그 프로프리움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주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innocence)는 도덕적 무결성이나 경험의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란, ‘모든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내적 인정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느끼며 살되, 그 프로프리움 안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방향성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프로프리움은 아직 ‘용납될 수 있습니다’. 프로프리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정향(定向)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노센스가 주입된 프로프리움은 주님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지닙니다. 이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느끼며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되, 그 자유가 아직 자기주장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2:25에서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이 드러나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감추어야 할 자기주장이 아직 없고, 비교와 판단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성(自己性), 곧 프로프리움은 있으되, 그것을 방어하거나 과시할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동시에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평형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노센스가 프로프리움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인간은 아직 주님과의 결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노센스가 사라지거나, 프로프리움이 중심으로 올라오는 순간, 같은 프로프리움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바로 이 이노센스가 시험받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AC.13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살아 있는 한에서는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으며, 그 이노센스야말로 천적 인간 상태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bygracetistory.tistory.com

 

2. ‘not be unacceptable

 

 

AC.136, 심화 2, ‘not be unacceptable’

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

bygrace.kr

 

 

 

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방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bygrace.kr

 

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5.심화

 

1.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와 창2:15

 

위 해설 중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상태로 이해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아주 정확한 연결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이면, 창2:15의 상태는 단순히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일 뿐 아니라, ‘그 질서가 아직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완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에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두어짐’을 받았습니다. 곧 그는 근원이 아니고, 받아 누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그 동산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경작하고, 지키며,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즉, 천적 인간은 주님과 매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가 주님과 동일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지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자기 삶처럼 실제로 누립니다. 그래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행위가 가능합니다. 만일 인간이 완전히 수동적 기계라면 경작도, 지킴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반대로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면 에덴은 곧 자기 소유가 되어 버립니다.

 

2:15는 바로 그 중간의, 아니 더 정확히는 ‘올바른 결합 상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활동하고, 선택하고, 돌보지만, 그 모든 것을 ‘자기 근원’, 곧 ‘자기가 근원이 되어 한 것’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에덴 안에서 살지만, 에덴의 주인은 아닙니다. 이것이 AC.122 이후 계속 반복되는 ‘누리되 소유하지는 말라’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AC.135에서 말하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는 창2:15의 구조와 아주 잘 맞아떨어집니다. 주님과 인간은 분리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뒤섞여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끝까지 주님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이후 선악과의 긴장입니다. 곧 ‘누리는 상태’에서 ‘소유하려는 상태’로 기울어질 때입니다. 그래서 창2:15는 단순한 노동 명령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가장 조화롭게 놓여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리하면, 네, 창2:15 AC.135의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적절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주님과 깊이 결합되어 살아가지만, 결코 그분과 동일한 근원이 되지는 않으며, 바로 그 겸허한 질서 안에서 에덴은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