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던 가장 천적인 교회였는데, 왜 그 능력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을까요?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했지만, AC.502는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여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분명했던 퍼셉션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간 그 자체는 교회를 쇠퇴시키는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세대를 거치면서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배경 가운데 하나는 AC.494에서 설명한 ‘유전적악의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단순히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달된 어떤 고정된 죄의 덩어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적인 악(actualevil)을 반복하여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들면 그것이 그의 본성에 더해지고, 그렇게 형성된 성향이 후대에 전달되면서 유전적 악은 세대를 거쳐 더욱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후손이 조상의 죄책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563에서 분명히 하듯 사람은 유전적인 것 자체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적인 악으로 만들 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깊어질수록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맑게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AC.501의 ‘열매와씨앗’의 비유는 이러한 변화를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열매와 씨앗의 가장 안쪽에는 ‘열매의열매’, ‘씨앗의씨앗’이라 할 수 있는 중심이 있고, 거기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그 본질은 점차 적어져 마침내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뇌의 비유도 같습니다. 가장 내적인 섬세한 유기적 형태로부터 점차 더 일반적이고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져 마지막에는 두개골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비유를 든 것은 태고교회 이후의 교회들이 서로 아무 관계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일정한 질서를 따라 이어졌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내적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본질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점차 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AC.502에서 퍼셉션의 쇠퇴를 ‘더욱일반적인것이됨’이라고 표현합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매우 명료하고 세밀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퍼셉션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그 구별이 덜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양이 줄어든 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진리를 즉각적이고 구체적으로 알아보던 내적인 능력이 점차 흐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쇠퇴는 먼저 교리책이 없어졌다거나 예배 제도가 무너졌다는 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적 상태가 변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AC.503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퍼셉션은 단지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아는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선을 실제로 행할 때 생기는 행복과 기쁨이 퍼셉션의 생명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행하는데서오는이러한행복과기쁨이없다면퍼셉션능력에는생명이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쓰임’(use)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의 쇠퇴는 단순히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사건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던 사랑의 생명 자체가 점차 약해진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태고교회 쇠퇴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명료하게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점차 강해지고 실제적인 악이 반복되면서 인간의 내적 질서는 달라졌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퍼셉션도 함께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세대를 거쳐 누적되면서 최초에는 명료했던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고, 마침내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 자체가 사라져 간 것입니다. 따라서 ‘유전적악의증가’, ‘사랑과쓰임의생명약화’, ‘퍼셉션의흐려짐’은 서로 무관한 세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쇠퇴 과정의 서로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퍼셉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 수 있는 길 자체를 닫으신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다른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AC.2831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영적 인간의 양심을 구별하며, AC.7935는 영적 교회의 양심이 사람이 배우고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말씀과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쇠퇴에 맞추어 진리의 기준을 낮추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계속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려져 간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잃어버린 퍼셉션을 인위적으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렬한 직감이나 내면의 음성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분별하며,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503이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원리는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지 많이 아는 데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합하여 쓰임이 될 때 살아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기쁨을 잃어 간다면 지식은 늘어도 영적 시야는 오히려 흐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삶에 옮기고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것을 기뻐할수록,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소유하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양심의 빛 안에서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분별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퍼셉션의 쇠퇴를 기록한 창5의 계보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이유입니다. (AC.500-503심화1)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가진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그러한교회가존재하지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옳다’,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진리를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진리로부터양심이형성되어선으로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아주강해진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참이므로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말씀에서어떻게가르치셨는가’, ‘이웃을사랑하라는진리에비추어이것은옳은가’, ‘내가알고믿는진리에따라어떻게행동해야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해서는안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양심이그렇게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어떤생각이강하게떠오르는것’, ‘내적으로어떤음성을듣는것’, ‘설명하기어렵지만확신이드는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주님으로부터직접무엇이진리인지느끼고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체험을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인간과영적인간의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심화2)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악’(hereditaryevil)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으며,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거기에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의 본성처럼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향이 다시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세대가 계속되면서 유전적 악이 축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조상의악을물려받았다면조상의죄에대한책임도내가져야하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입니다. 유전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악 자체 때문에 책망받지는 않습니다. AC.4563은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유전적 악은 사람이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으며, ‘주님의자비로아무도유전적인것때문에책망받지않고실제적인것때문에책망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악한 성향과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여 실제로 행한 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쉽게 분노하는 성향, 지나친 자기중심성,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같은 기울어짐을 물려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는 아닙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도적으로 즐기고 행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악’(actualevil)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전적 악은 우리에게 주어진 출발 조건에 가깝고, 실제적인 악은 그 조건 안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든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의 유전적 악이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13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적 악이 최초의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명시합니다. 각 사람이 실제 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에 악을 더하고, 그것이 자녀에게 전달되며, 다시 그 자녀가 자신의 실제 악을 더함으로써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인류의 유전적 악은 한 조상의 한 번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법적인 죄책으로 전가되는 구조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의 실제 삶에서 형성된 악의 성향이 계속 축적되어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의죄가내게유전된다’는 말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조상이 범한 구체적인 죄의 행위와 그 죄책이 그대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달되는 것은 그 악에서 형성된 기울어짐입니다. 나는 그것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물리칠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유전적 악의 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도 않고, 반대로 조상의 책임을 후손에게 떠넘기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AC.494가 말하는 ‘유전적악의증가’는 왜 교회의 쇠퇴와 연결될까요? 한 세대가 악을 반복하여 그것을 본성처럼 만들면 다음 세대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강해진 악의 기울어짐을 출발점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것을 다시 실제 악으로 만들고 새로운 악을 더한다면 그 흐름은 더욱 강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세대를 거쳐 일어났고, 그 결과 처음의 온전한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어 마침내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AC.494의 설명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선택한 악이 세대를 지나며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의 마지막은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AC.494는 유전적 악이 ‘주님에의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게서 감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악의 성향이 가문과 세대를 따라 내려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에 맞서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오래된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새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부모의 책임도 새롭게 보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완전한 상태만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여러 세대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모에게 절망이나 과도한 죄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서 발견되는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반복하여 굳히느냐, 아니면 주님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거듭남의 길을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함으로써 나를 통하여 계속되던 악의 흐름이 이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어지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악의 교리는 ‘나는원래이런집안에서태어났으니어쩔수없다’는 운명론도 아니고, ‘조상이죄를지었으니나도그죄에책임이있다’는 집단적 죄책의 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현실을 매우 깊이 인정하면서도 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듭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많은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성향을 자신의 삶으로 확정하지 않고 주님께 돌이킬 때, 세대를 지나며 축적된 악의 힘은 거듭남 가운데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494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삶은 그 세대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복하여 자신의 본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역사가 세대를 넘어간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유전적 악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며, 거듭남은 바로 그 사랑이 한 사람의 자유 안에서 악의 오래된 흐름을 꺾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역사입니다. (AC.492-495심화1)
AC.488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말을 합니다. 천사들은 지상에서와 같은 시간을 알지 못하며,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그변화’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즉시 질문이 생깁니다. ‘시간이없다면천국에서는아무일도일어나지않는가?어떤일이먼저일어나고다른일이나중에일어나는순서도없는가?천사가배우고성장하고상태가변한다면그것자체가결국시간아닌가?그리고영원히산다는것은무엇을의미하는가?’
먼저 ‘천국에는시간이없다’는 말을 ‘천국에는변화나연속성이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과지옥’(Heaven and Hell, 1758, HH) 154-161은 아예 한 장 전체의 제목을 ‘천국에서천사들의상태변화’로 두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총명의 상태가 계속 변화합니다. 어떤 때에는 사랑과 지혜가 더 충만하고 밝은 상태에 있고, 어떤 때에는 상대적으로 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얼어붙어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이상태에서저상태로’ 이어지는 분명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시간과 무엇이 다를까요? HH.162-169는 ‘천국의시간’을 따로 설명하면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지상에서 우리의 시간은 해와 지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해, 달, 주, 날, 시간 등 일정한 단위로 측정됩니다. 그러나 천국의 해는 그런 방식으로 날과 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몇시’, ‘며칠후’, ‘몇년전’이라는 자연적 시간의 관념으로 삶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상의 시간에 해당하는 것은 ‘상태와그상태의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없다’는 것은 ‘전후의연속성이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연속성을지상의시계와달력의단위로경험하지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아주 희미하게나마 경험합니다.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두 시간이 마치 몇 분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고통이나 불안 속에서 기다릴 때에는 몇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객관적인 시간은 같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험을 시간의 근원이 상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로 설명합니다(HH.168). 천국에서는 자연적 시간의 외적 척도가 사라지고 그 근원에 해당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먼저’와 ‘나중’에 해당하는 질서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시계의 숫자가 앞뒤로 배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질서입니다. AC.4901도 영들과 천사들의 생명이 ‘시간안에서진행되는것처럼보이지만’, 그들은 사람처럼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상태들’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시간이없다’는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는지상과같은자연적시간이없으며,그에대응하는상태의연속과변화가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488에서 왜 ‘날’과 ‘해’가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날’, ‘해’, ‘오늘’, ‘내일’, ‘어제’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러한 표현에서 그 시간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지각합니다(HH.165-166). 아침과 봄은 사랑과 지혜가 새롭게 밝아지는 상태를, 저녁과 가을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에 있는 시간 표현이 천국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영적인 실재인 ‘상태’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HH.167은 천사들이 ‘영원’을 사람과 다르게 이해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을 ‘끝없이계속되는시간’으로 상상합니다. 지금부터 1억 년, 1조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숫자를 붙여도 그것은 여전히 시간의 연장일 뿐입니다. 천사들은 영원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상태’라는 관점에서 지각합니다.
AC.1382도 같은 점을 매우 인상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조차 끝없는 시간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천사들에게는 수천 년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긴 시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전혀 단절된 것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그들의 현재 안에는 주님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지각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은 ‘끝없이오래버텨야하는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천사가 ‘영원’을 무한한 상태로 지각한다고 해서 천사가 무한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한과 영원은 본래 주님께 속합니다. 천사들은 유한한 피조물이며,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끝없이 받아들이면서 계속해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원은 천사가 어느 순간 완성되어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과 진리를 유한한 존재로서 계속 받아들이며 더 깊은 사랑과 지혜로 나아가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창5의 ‘날들과해들’로 돌아오면 AC.486-491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창5가 ‘팔백년’, ‘구백삼십년’과 같은 숫자를 기록할 때 속뜻의 중심은 단순히 지상의 달력으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AC.487-488이 강조하는 것은 그 ‘날들과해들’ 안에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독자는 시간을 읽지만, 천국은 그 시간 안에 담긴 상태를 읽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연대 기록을 넘어 교회의 내적 역사로 읽게 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결국 ‘천국에는시간이없다’는 말은 천국이 변화 없는 정지 상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국에는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끊임없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해와 달과 시계와 달력으로 재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몇년을살았는가’를 먼저 묻지만 천국의 관점에서는 ‘어떤상태를지나왔으며지금어떤상태에있는가’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꾸어 줍니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신앙생활을 ‘몇년했는가’가 아닙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상태에서 얼마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상태로 옮겨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날과 해를 지나지만, 주님은 그 날과 해 안에서 우리의 상태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날들과해들’은 단순히 오래된 사람들의 기이하게 긴 수명을 기록한 표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실제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시간의축적’이 아니라 ‘상태의변화’, 곧 거듭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486-491심화1)
창4:25에도 ‘셋’이 나오고 창5:3에도 ‘셋’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당연히 동일한 셋이며, 창5는 창4끝에 등장한 셋의 후손을 계속 기록하는 족보로 보입니다. 그런데 AC.485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기서셋은앞에서묘사된셋(창4:25)과다른교회를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창4와 창5에 각각 등장하는 ‘에녹’과 ‘라멕’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AC.485의 답은 간단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서로다른교리를가진교회들이같은이름으로일컬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이 같다는 사실 자체가 속뜻에서 동일한 교회임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 창4의 라멕과 창5의 라멕이 서로 다른 교회인 것처럼, 창4의 셋과 창5의 셋도 서로 다른 교회입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그의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신앙’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창4의 장 전체 개요에서도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으며 그것을 ‘셋’이라 한다고 요약합니다.
그러나 창5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AC.435는 바로 다음 장인 창5:1-4에서 다시 ‘사람과그의아내’와 ‘셋을낳음’이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태고교회의첫후대’가 의미된다고 명시합니다. 같은 사람과 같은 출생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창1과 창2에서 사람의 창조가 반복되는 것과 비교합니다. 창1에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창2에서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므로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 창4와 창5의 구조가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AC.337은 창4전체가 태고교회의 타락, 곧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내고, 그로부터 여러 이단적 계열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창4후반에는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교회’가 일어나며, 마지막에는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창5의 장 전체 개요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AC.460은 이 장이 ‘태고교회가연속되는세대들을통하여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이어지는과정’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이어 AC.461은 태고교회 자체를 ‘사람’이라 하고, AC.462는 태고교회만큼 천적이지는 않았던 두 번째 교회를 ‘셋’이라 하며,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교회들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와 창5를 속뜻에서 하나의 단순한 직선 계보로 이어 붙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창4는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발생하면서 생긴 가인 계열의 이단과 분파, 그리고 그 흐름 가운데 새 교회가 일어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창5는 다시 태고교회 자체와 그 첫 후대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교회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두 장 모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름들이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창4의교회계열과창5의교회계열이같은홍수이전시대에서로병행하여존재했던것인가?’ 이것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특히 창4가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 분파들을 다루고, 창5가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를 따로 추적한다는 설명을 함께 놓으면, 한 계열이 나타났다고 해서 다른 계열이 곧바로 사라졌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AC.337자체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을 태고교회에서 생겨난 ‘이단과분파들’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가지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합니다. AC.435와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창4의셋과창5의셋은서로다른교회이며,같은이름이서로다른교회를가리킬수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337과 창5의 개요가 보여 주는 것은 두 장이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을 추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창4의 각 교회와 창5의 각 교회를 하나씩 대응시켜 ‘이교회와저교회가정확히같은시기에존재했다’고 연대기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병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홍수이전태고교회시대안에서서로구별되는여러교회적계열과분파가전개되었다’는 의미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4와 창5를 문자적 족보처럼 한 줄로만 읽으면 ‘가인계열이후에셋계열이시작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누가누구다음에태어났는가’보다 ‘태고교회로부터어떤교회적상태와교리가갈라져나오고,어떤것은쇠퇴하며,어떤것은보존되어다음교회로이어졌는가’가 중심입니다. 창4와 창5는 동일한 홍수 이전 세계를 서로 다른 교회적 관점에서 비추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중요한 의미도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과 같은 이단이 생겨났다고 해서 주님께서 교회 전체를 즉시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흐름이 한쪽에서 전개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른 형태의 교회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4의 마지막에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의 후대가 노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주님의 보존하시는 섭리가 더 깊고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셋과창5의셋은같은교회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AC.485가 직접 그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그 답은 더 큰 질문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왜 말씀은 서로 다른 교회에 같은 이름을 사용했으며, 왜 창4와 창5에 셋, 에녹, 라멕이라는 이름들이 반복되는가? 그것은 창세기 초반의 계보가 단순한 인물 명단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에 나타난 여러 교회와 교리와 내적 상태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창4와 창5는 서로 중복되는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와 분화, 보존과 계승이라는 서로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두 개의 창이 됩니다. (AC.481-485심화2)
AC.484는 셋 교회를 가리켜 태고교회와 ‘매우비슷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중요한 차이를 덧붙입니다. ‘사랑이그만큼주된것은아니었지만,여전히신앙은사랑과결합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셋 교회의 위치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단절된 교회도 아니고,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사랑과신앙의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이어받았지만, 그 결합 안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는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C.484는 실제로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를 먼저 보아야 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으며, ‘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에서비롯되는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이는 별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신앙이라는 말 자체를 따로 언급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천적 질서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AC.202에서도 천적 인간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것을 추론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 ‘사랑이주된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을 신앙보다 조금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의 근원이며, 신앙이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질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절대적으로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AC.484는 셋 교회를 ‘여섯째날의영적인간’과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지만, 일곱째 날이 표상하는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아직 구별됩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비슷하면서도같지는않았다’는 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차이는 창4의 가인과 비교할 때 더욱 또렷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의 주도성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보다 앞세우고 마침내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AC.337은 이것을 태고교회 교리의 왜곡으로 설명하고,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로부터도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셋과 가인은 매우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이전만큼주된것은아니지만신앙은여전히사랑과결합되어’ 있습니다. 가인에게서는 ‘신앙이사랑보다더본질적인것으로여겨지고마침내사랑으로부터분리’됩니다. 둘 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셋에게서는 결합이 아직 살아 있고, 가인에게서는 그 결합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것은 훗날 나타나는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의 차이를 생각하게 하는 초기 징후이기도 합니다. AC.393은 인류가 태고교회와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할 것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에 결합된 양심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셋 교회 자체가 이미 후대의 영적 교회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AC.484에서 보이는 ‘사랑의주도성은약해졌지만신앙과사랑의결합은유지되는상태’는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질서로부터 인류가 점차 멀어져 가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따라서 셋 교회의 의미를 단순히 ‘태고교회의두번째버전’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셋은 ‘계승과변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입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이어지지만, 그 상태는 이미 앞선 교회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모든 시대의 사람을 똑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상태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존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AC.484의 마지막 문장은 창5전체를 읽는 하나의 기준이 됩니다. 셋 이후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늙어 죽고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483이 밝힌 것처럼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셋에게서 이미 나타난 ‘같으면서도달라지는’ 교회의 계승은 앞으로 더욱 다양한 상태로 전개됩니다.
결국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같은 점은 ‘신앙이사랑과결합되어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사랑이더이상태고교회에서처럼그만큼주된것은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서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봅니다. 교회의 쇠퇴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변화 가운데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결합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이어 가십니다. (AC.481-485심화1)
잠깐 공지입니다. 오늘로 창4 AC리딩을 마칩니다. 다음 주 창5부터는 각 장 앞뒤의 영계 경험 및 장 또는 단락 개요는 전체 AC원고에는 그대로 유지하되, 주일예배 AC리딩 본문으로는 빼겠습니다. 장 또는 단락이 바뀔 때 바로 1절이나 해당 절로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전체 개요가 필요하시거나 AC연속 리딩 중이신 분들은 교회 블로그(https://bygrace.kr/)를 방문하시면 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오늘부터는 그 주 리딩을 마치기 전, 그 다음 주 리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아래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영상은 아주 사소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편이 처음 가는 길에서 차선을 하나 잘못 탑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아, 진짜. 그것도제대로못해?’ 조금 뒤 주차가 한 번에 되지 않자 ‘됐어. 그냥내가할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도 이 남자는 운전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괜찮아. 다시가면되지’ 하며 웃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실수를 했는데, 10년 사이에 ‘웃을일’이 ‘못난일’이 되었습니다. 영상은 여기서 질문합니다. ‘사람은그대로인데왜평가만달라졌는가?’
영상이 내놓는 답은 ‘고마움이사라진자리에채점표가들어앉았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집까지 데려다주면 고맙고, 밥값을 내면 고맙고, 퇴근길에 케이크 하나를 사와도 ‘내생각이나서샀구나’ 합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운전도, 월급도, 집안일도, 아이 돌보는 것도 모두 ‘당연히해야하는것’이 됩니다. 물론 결혼하면 서로 책임을 지므로 어느 정도 당연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문제는 ‘책임이당연해지는것’과 함께 ‘고마움까지사라지는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먼저 세지 않지만, proprium은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나는이만큼했는데당신은무엇을했어?’, ‘남편이라면이정도는해야하는것아니야?’, ‘다른집남편은저렇게하는데당신은왜못해?’ 이렇게 상대가 ‘사랑하는사람’에서 ‘나의기대를충족시켜야하는사람’으로 바뀌는 순간, 부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장부의 특징은 매우 불공정합니다. 잘한 것은 ‘원래해야할일’이어서 기록하지 않고, 못한 것만 기록합니다.
영상은 이것을 정확히 짚습니다. 남편이 매일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고,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차에 이상이 생기면 정비소를 알아보고, 보일러가 고장 나면 기사를 부르는 일들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활용을 한 번 내놓지 않으면 ‘당신은집에서하는게뭐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상은 이 말이 아픈 이유를 ‘하나를지적당해서가아니라하나로사람전체가정리됐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예리한 지적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식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거듭남 가운데 있는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거듭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 불완전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한 번의 실패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남겨 두신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그 사람을 선 쪽으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결혼 안에서도 사랑은 상대의 결점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보면서도그결점으로그사람전체를규정하지않는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영상에는 더 깊은 통찰이 하나 나옵니다. 결혼하면서 배우자 위에 ‘남편’이라는 자리가 덮인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이사람이나에게무엇을해주었는가’를 보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이면이정도는해야하는것아닌가?’로 기준이 바뀝니다. 더구나 그 ‘이정도’라는 기준을 현실의 한 사람에게서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돈은 가장 많이 버는 남편에게서, 집안일은 가장 잘하는 남편에게서, 육아는 가장 다정한 아빠에게서, 성격은 가장 무던한 남편에게서 하나씩 가져와 머릿속에 ‘이상적인남편’을 조립합니다. 그리고 현실의 한 남자에게 그 모든 기준을 요구합니다. 영상의 표현처럼 ‘사람이내려간게아니라기준이올라간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비교는 현실의 배우자와 현실의 다른 한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의 가장 좋은 부분만 잘라 붙인 ‘존재하지않는사람’과 내 배우자를 비교합니다. 그러므로 내 배우자가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남편에게 적용하면 ‘돈도잘벌고, 집안일도잘하고, 아이에게도자상하고, 부모에게도잘하고, 말도다정하고, 아내마음도알아서헤아리며, 취미도건전하고, 외모관리도하는남편’이 됩니다. 아내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역시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여자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영상 제목의 한계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결혼후남편을무시하기시작하는여자들의특징’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현상은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를 다른 여성들과 비교하며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아내는돈도벌면서집안일도잘한다더라’, ‘누구엄마는아이교육을저렇게한다더라’, ‘연애할때는안그랬는데왜이렇게변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상 자체도 후반부에서 남편이 아내의 외모나 친정을 약점으로 공격하는 것 역시 관계를 무너뜨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여자의문제’로만 읽으면 영상에서 건질 수 있는 훨씬 깊은 진실을 놓치게 됩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말’입니다. 밖에서는 직장 동료나 친구에게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배우자에게는 너무 쉽게 합니다. ‘그것도못해?’, ‘당신이뭘알아?’, ‘당신은센스없잖아’, ‘당신한테시키면두번일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남편은진짜똥손이야’, ‘우리집에서제일큰애가얘야’ 같은 말을 농담으로 합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습니다. 남편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 농담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그 사람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됩니다.
이 대목은 영적으로 매우 무겁습니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에는 생각이 실리고, 생각에는 애정이 실립니다. 계속해서 상대를 낮추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면 이미 내 안에서는 그 사람을 낮추어 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그 말에 맞추어 상대를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원래그런사람이야’라는 말은 결국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틀 속에 상대를 가두는 일이 됩니다.
영상이 보여주는 악순환은 더욱 섬뜩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판단을 계속 고쳐줍니다. 무엇을 사오면 ‘왜이것을샀어?’, 의견을 내면 ‘당신이뭘알아?’, 일을 하면 ‘그렇게하는게아니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표정을 먼저 살핍니다. ‘이걸사도되나?’, ‘이말을하면또틀렸다고하려나?’ 결국 자기 의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은왜자기생각이없어?’ 알아서 하면 지적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알아서하는게없다’고 지적받습니다.
영상은 이를 ‘몇년에걸쳐서로가제일싫어하는모습을서로에게만들어주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남편이 무엇을 해도 고쳐주다 보니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역시이사람은내가시켜야만움직인다’고 확신합니다. 이 부분은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상대의 악을 단지 발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태도로 그 약점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무책임이나 게으름을 모두 아내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무책임한 남편도 있고, 가족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도 있으며, 모든 결정을 배우자에게 떠넘기면서 편하게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내가잔소리를해서남편이이렇게되었다’는 하나의 설명으로 모든 부부를 해석한다면 그것 역시 영상이 경계하는 ‘채점표’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향해야 합니다. ‘상대가왜저렇게되었는가?’보다 먼저 ‘나는이관계안에서무엇을만들어내고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아픈 부분은 배우자가 서로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대목입니다. 배우자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온 얼굴도 보고, 승진에서 밀린 날도 알고, 돈 걱정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도 압니다. 좋은 배우자는 그 약점을 알기 때문에 지켜줍니다. 그러나 관계가 상하면 바로 그 지식이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까회사에서도인정못받지’, ‘당신이그러니까승진을못하는거야.’ 가장 믿었던 사람이 가장 아픈 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거기를 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의 친밀성이 가진 두 얼굴입니다. 친밀함은 상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은 내가 어디가 아픈지 모릅니다. 배우자는 압니다. 그래서 결혼애에서 친밀함은 단순히 서로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알게된것을어떻게사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는가, 싸움에서 이기는 데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하게 ‘착하게살아야한다’는 감정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는 것, 상대의 실수를 사람 전체의 평가로 확대하지 않는 것, 내가 옳더라도 상대의 인격을 짓밟는 방식으로 그 옳음을 행사하지 않는 것 역시 체어리티입니다. 특히 부부 싸움에서 ‘사실인말’이 가장 잔인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라서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어서 더 깊이 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교입니다. 결혼할 때 남편의 월급에 만족했던 아내가 몇 년 뒤 주변 친구들의 남편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대기업으로 옮겼고, 누구는 서울에 집을 샀고, 누구 집 아이는 학원을 여러 개 다닙니다. 그러자 어제까지 성실하게 출근하고 월급을 가져오며 아이를 사랑하던 남편이 갑자기 부족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영상은 ‘바뀐건남편이아니라비교대상이하나생겼다는것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비교는 감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감사는 ‘내게주어진것’을 보지만 비교는 ‘내게없는것’을 봅니다. 감사는 지금 내 곁의 사람을 보지만 비교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끌어와 내 곁의 사람을 재판합니다. 그리고 비교에는 끝이 없습니다. 내 배우자보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언제나 있고, 더 다정한 사람도 있고, 더 집안일을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기준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배우자의 가치는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변화는 결국 남편이 ‘말을하지않게되는것’입니다. 처음에는 설명합니다. 다음에는 다툽니다. 그다음에는 피합니다. 마지막에는 ‘응’, ‘알았어’, ‘그래’ 세 마디만 남습니다. 아내는 ‘당신은왜나랑대화를안해?’라고 하지만 남편은 이미 ‘말해서뭐하나? 어차피틀렸다고할텐데’라는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영상 마지막 질문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남편은왜나랑대화를안해요?’가 아니라 ‘그사람은언제부터말을안하게됐을까요?’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싸움마저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남편은 퇴근하고 지하주차장에서 휴대전화를 보다가 올라가고, 아내는 아이와 친구와 취미에 집중합니다. 같은 집에서 ‘관리비냈어?’, ‘아이학원데려다줘’, ‘택배받아줘’ 같은 기능적인 말만 합니다.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그러나 영상은 ‘조용한집을사이좋은집으로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싸움이없어진게아니라기대가없어진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바라보는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몸이 한집에 산다고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돈을 쓰고 아이를 키운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향해 열리고, 서로의 선을 기뻐하며, 점점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상 속 ‘조용한부부’의 문제는 싸움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서로에게 닫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은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남편이 ‘참는것이가정을지키는것’이라고 생각하여 공개적인 비하나 모욕을 그냥 웃고 넘깁니다. 그러나 영상은 필요하다면 ‘그얘기는그만하자’, ‘그런말듣는것싫어. 앞으로는하지마’라고 차분히 선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악한 습관을 계속하도록 방치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을긋는다’는 것을 보복이나 권력투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를무시했으니나도당신을무시하겠다’가 아니라 ‘우리사이에서이런방식의말은서로에게좋지않으니여기서멈추자’는 것입니다.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경계가 아니라 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경계입니다. 사랑은 무조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해 질서를 세우기도 합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회복의 출발점은 의외로 작습니다. 거창한 ‘우리대화좀하자’가 아니라 상대가 한 일을 하나씩 다시 알아보는 것입니다. ‘오늘그것챙겨줘서편했어’, ‘이거당신이알아본거지?’ 영상은 이를 ‘잔소리를줄이는것’과 구별합니다. 잔소리만 줄이면 집이 조용해질 뿐이지만 ‘잘한것을세기시작하면사람이다시말을하기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표현하면 ‘선의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악과 거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심어 두시고 보존하신 선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가 나빠질수록 상대 안의 선은 보지 않고 악과 결점만 수집합니다. 마치 검사가 유죄 증거만 모으듯 지난 몇 년의 사건들을 모아 ‘봐, 당신은원래이런사람이야’라는 판결문을 작성합니다. 회복은 그 판결문을 찢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된 선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깊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왜배우자를무시할때은밀한만족을느끼는가?’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할 때 proprium은 만족합니다. 내가 더 현명하고, 더 책임감 있고, 더 희생하며, 이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내가붙잡고있기때문’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달콤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깎아내리는 이유 중 하나를 ‘자기가인정받고싶어서’라고 분석합니다. 남편이 얼마나 못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런사람을데리고이집을이만큼꾸려가는나’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렌즈는 남편에게서 아내에게로, 그리고 다시 영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저런여자와살면얼마나힘들까?’에서 멈추면 이 영상은 또 하나의 남녀 갈등 콘텐츠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가장가까운사람에게어떤채점표를들이대고있는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배우자뿐 아니라 자녀, 부모,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랜 관계일수록 그렇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작은 친절에도 감사하지만 가족이 수십 년 동안 해온 수고에는 좀처럼 감사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이 문을 잡아주면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배우자가 매일 차려주는 밥, 벌어오는 생활비, 운전, 설거지, 장보기, 병원 동행, 아이 돌봄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족이니까당연하지’라는 말은 어느 순간 사랑을 가장 빠르게 메마르게 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의 말이 그래서 오래 남습니다. ‘상대아래에있는사람처럼대하지않는것. 밖에서는절대안할말을가족이라는이유로하지않는것. 상대의약한자리를안다는이유로거기를누르지않는것. 남의집배우자를기준으로내옆사람의값을매기지않는것.’ 이것은 단순한 부부관계 기술을 넘어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결혼은 상대가 내 기대를 얼마나 잘 충족시키는지를 평가하는 긴 시험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을 통해 내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내려놓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듭남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결점은 분명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두 길이 갈립니다. ‘당신은왜그것도못해?’라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길과, ‘이사람의부족함앞에서지금내안에서는무엇이올라오고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결혼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날은 크게 싸운 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상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 날, 잘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못하면 짜증만 나는 날, 서로의 마음보다 기능만 주고받는 날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회복의 시작도 거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우자가 해온 아주 작은 선 하나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고마워.’
결국 이 영상의 제목 ‘당신은왜그것도못해?’를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뒤집으면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왜가장사랑한다고말하는사람의선은당연하게여기면서, 그의부족함은그렇게쉽게세고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배우자의 성적표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채점표’를 바라보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먼저 내려놓게 하시는 것은 상대의 결점이 아니라 바로 그 채점표인지도 모릅니다.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다루는주제는인류최초의어떤한사람의창조가아니라태고교회’라고 합니다. 창세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스베덴보리는아담을인류최초의한남성개인으로보지않았다는말인가?’
먼저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아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합니다. AC.478에서 그는 히브리어 ‘아담’(Adam)이 ‘사람’(man)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더욱이 창1:26에서는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 곧이어 ‘그들’이라는 복수로 받고, 창5:2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한 남성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함께 포함하는 말이며,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AC.137에서도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사람’(homo)이라 하는 태고교회를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룬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1764, DP) 241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밝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과그의아내’가 ‘세상에창조된최초의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이라는개인에게태고교회라는추가적인상징적의미도있다’는 정도의 설명보다 훨씬 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그의아내’라는 형상으로 묘사된 대상 자체가 인류 최초의 두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DP.328에서도 같은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스라엘·유대교회 이전의 여러 교회가 역사적인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족들과 사람들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그 첫 번째인 태고교회가 ‘아담과그의아내하와’의 이름 아래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AC.478한 곳에서 우연히 등장하는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역사적개인아담의존재를부정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여기서는 질문 자체를 조금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창세기에나오는아담은하나님께서세상에최초로창조하신한남성개인이며,하와는그와함께최초로창조된한여성개인이라고스베덴보리가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DP.241에 비추어 답은 분명합니다. 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아담과그의아내’는 최초로 창조된 두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인류역사전체를통틀어아담이라는이름을가진어떤개인도실제로존재한적이없었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의 문제를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아담이라는이름을가진사람이역사상단한명도없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창세기의아담과하와라는이름아래무엇을계시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명확합니다. ‘태고교회’입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시대 자체를 신화적이고 비역사적인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114이하에서는 ‘사람또는아담이라했던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과 사후세계에서 대화했다고 기록하며, 그 교회의 후대에 속했던 사람들도 언급합니다. 따라서 ‘아담=태고교회’라는 해석은 ‘실제로존재했던사람들은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와 그 상태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창5의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을 단순히 한 가족의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는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히려는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AC.470은 이 이름들이 실제적인 것들, 곧 여러 교회와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AC.485는 창4의 셋과 창5의 셋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까지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에서 이어져 나온 여러 교회와 그 상태의 계승을 기록한 내적 역사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스베덴보리가 ‘그러므로역사적개인아담은존재하지않았다’라는 현대적인 문장으로 결론짓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적은 역사학적 논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의 개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어떤 신적 진리를 담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담은존재하지않았다’고 말하는 대신, 훨씬 더 자신의 해석 원리에 맞는 방식으로 ‘아담과그의아내는세상에창조된최초의인간들을의미하지않고태고교회의사람들을의미한다’고 말합니다(DP.241).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두 개인에 관한 전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고 태고시대의 실제 사람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교회가 있었으며, 말씀은 그 교회를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아담을 읽을 때 중심 질문은 ‘최초의한남자가누구였는가?’보다 ‘왜주님께서는최초의교회를‘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셨는가?’가 됩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창1의 창조, 창2의 에덴, 창3의 타락, 그리고 창5의 계보가 모두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태고교회의 형성과 천적 상태, 쇠퇴와 후대 교회들의 계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내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475-480심화2)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여자를창조하셨고...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AC.475-48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신앙을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will)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 둘을 끝까지 ‘남자와여자’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둘을 하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 출발점은 AC.477의 매우 중요한 선언에 있습니다. ‘가장높은의미로는오직주님자신만이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된 사람이 되는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천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고, 영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독립적으로 참된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의미하는 신앙은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쪽과 관계되고, 여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쪽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와 의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반대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밝혀 주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역시 온전한 질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나뉘어 있던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AC.479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주님을향한사랑에서비롯된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두 요소를 반반씩 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보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며, 그렇게 알게 된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이 표상하는 상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지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AC.337). 따라서 창5:2의 ‘남자와여자’의 결혼은 창4에서 무너진 바로 그 질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476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남자와여자’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일 때에는 아직 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하나의 삶이 됩니다. 사람이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아는 것과 원하는 것,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그의이름’이 아니라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 한 것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80은 이 상태를 창1의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며, 그때 사랑이 중심이 되는 천적 상태가 시작됩니다. AC.83도 여섯째 날이 완성되는 때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사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가 주님을 중심으로 바로잡혀 더 이상 신앙과 사랑이 서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천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교회와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사람’이 됩니다. 참된 인간성은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다시 신앙과 삶이 흘러나오는 데서 완성됩니다. 창5:2의 ‘그들의이름을사람이라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AC.475-480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