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
‘네아우의피들의소리’(voiceofthybrother’sbloods)는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의미하고,‘피들이부르짖는것’(cryingofbloods)은죄책의고발을의미하며,‘땅’(ground)은분열또는이단을의미합니다. The“voiceofthybrother’sbloods”signifies that violence had been done to charity; the“cryingofbloods”is the accusation of guilt, and“ground”signifies a schism or heresy.
해설
AC.373은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의 속뜻을 아주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속뜻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나아가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한다는 질서 자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네아우의피들의소리가내게부르짖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73부터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 소멸이 가져오는 죄책과 그 죄책이 드러나는 상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먼저 ‘네아우의피들의소리’는 ‘체어리티에폭력이가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계속해서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아벨의 피는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의 흔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마침내 소멸시켰다는 것이며, 이제 흘려진 아벨의 피는 바로 그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나타냅니다. ‘폭력’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인의 교리적 원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침해되고 파괴된 결과를 보여 줍니다.
특히 원문이 ‘blood’가 아니라 ‘bloods’, 곧 복수형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AC.373자체는 아직 왜 복수형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피들의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한다고만 밝힙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복수형의 세부적인 상응을 미리 단정하여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붙들고 있는 복수형을 보존하고, 그 의미가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지켜 온 원칙과도 맞습니다. 현재 번호가 직접 말하는 범위는 분명히 말하되, 뒤의 설명을 앞당겨 과도하게 넣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피들이부르짖는것’은 ‘죄책의고발’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시다가 땅에 흘린 피의 소리를 듣고 범죄를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은 이미 행해진 악 자체가 그 악의 성질과 죄책을 드러내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벨의 피는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행한 악을 부인하고 합리화하며 감추려 할 수 있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그 악이 실제로 무엇을 파괴했는지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들의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입니다.
여기서 ‘고발’이라는 말을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찾아내어 처벌할 근거를 모으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큰 틀에서 주님은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 가운데 실제로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교리 안에 굳히면 그 악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드러나는 것을 말씀은 마치 피가 소리를 내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따라서 ‘죄책의고발’은 변덕스러운 신적 분노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악의 실상이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땅’(ground)은 ‘분열또는이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이어져 온 ‘ground’의 의미를 가인의 상태에 맞추어 읽어야 하는 대목입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교리를 만든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단순히 한 사람의 개인적 감정이나 행동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킨 교리적 토대 안에서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단’이라는 표현 역시 오늘날의 교파적 의미로 성급하게 옮겨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73이 말하는 ‘heresy’는 이 문맥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에서 떨어져 나와 한 부분을 독립시키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교리적 왜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교단이나 사람에게 곧바로 ‘가인의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이 번호의 목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어떤 진리 하나를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의 정확성을 강조하면서 그 신앙의 생명인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73은 이렇게 앞의 흐름을 세 단어로 압축합니다. ‘피들’, ‘부르짖음’, ‘땅’입니다.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땅’은 그러한 폭력이 일어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는 가인의 교리가 ‘신앙이지배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아벨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 결과가 사라지지 않고 ‘피들의소리’가 되어 부르짖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생긴 영적 파괴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내게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그 일이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했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교리와 논리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사랑을 훼손한 결과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참된 신앙은 아벨의 피를 흘리는 신앙이 아니라 아벨을 ‘아우’로 인정하고 그의 ‘지키는자’가 되는 신앙입니다. 곧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그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
‘지키는자’(keeper)가된다는것은섬기는것을의미합니다.유대교회에서‘문지기들’(doorkeepers)과‘문을지키는자들’(porters),곧문지방을지키는자들이그러했습니다.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그러나‘가인’이라하는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으며,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 To be a“keeper”signifies to serve, like“doorkeepers”and“porters”(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Faith is called the“keeper”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Cain”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해설
AC.372는 창4:9에서 가인이 한 말 가운데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의 ‘지키는자’(keeper)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답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72에서는 왜 ‘지키는자’라는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이체어리티의지키는자라고불리는것은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하기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동생을보호할책임이있습니까?’라는 책임 회피를 넘어, 속뜻에서는 ‘왜신앙이체어리티를섬겨야합니까?’라는 영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키는자’가 ‘섬기는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유대교회의 문지기들을 예로 듭니다. 문지기는 문이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이나 성전 자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이 지키는 것을 대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자’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체어리티가 삶에서 올바르게 나타나도록 섬깁니다.
여기서 ‘신앙은체어리티를섬긴다’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지기가 집을 섬긴다고 해서 문지기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선이라고 느끼는 것을 곧바로 참된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도만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를 언제나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서 진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창4:7, 특히 AC.361-365에서 살펴본 ‘주도권’의 문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72마지막에서 ‘이는7절에서설명한바와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논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372를 이해하려면 ‘신앙과체어리티가운데어느것이먼저생기는가?’라는 시간적 순서보다 ‘둘이결합된뒤무엇이무엇을위해존재하는가?’라는 목적과 주도권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종적인 질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며,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깁니다.
이 점은 방금 AC.371에서 살펴본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졌다’는 말과도 잘 연결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서는 먼저 말씀과 계시된 진리를 배우고, 그것으로 양심이 형성되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을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와 모든 선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AC.372의 설명과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AC.371의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읽을 때 영적 인간의 질서가 더 선명해집니다.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선이며, 신앙이 살아 있게 되는 것은 체어리티 안에서입니다.
반대로 ‘가인’이라 하는 교리는 이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교리의원리에따르면신앙이지배해야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사랑과 분리하며,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 결과 아벨, 곧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뒤에는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체어리티를섬기지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이 자신의 올바른 기능을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할 때 체어리티가 소멸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교리를 정확히 고백하는가, 어떤 진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을 사랑과 쓰임으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용하는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키는자’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보호 이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또한 감정적인 호의만을 체어리티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무엇이 이웃의 참된 선인지를 말씀의 진리가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는 목적은 진리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 순수하고 지혜롭게 쓰임을 행하도록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문지기’와 같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리가 정확하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신앙고백이 분명한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고,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질서는 아닙니다. 문지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며, 선과 진리 모두의 근원과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72는 가인의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질문에 속뜻으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그렇다.신앙은체어리티의지키는자가되어야한다.’ 그러나 가인의 교리는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려 했으며, 그 결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번호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다시 압축합니다. 참된 신앙의 위대함은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체어리티를 지키고 섬기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
‘여호와께서말씀하심’(speakingofJehovah)으로태고교회사람들은퍼셉션을의미했습니다.그들은주님께서자신들에게지각하는능력을주셨다는것을알고있었기때문입니다.이퍼셉션은사랑이주된것이었던동안에만계속될수있었습니다.주님을향한사랑이그치고,그결과이웃을향한사랑도그치자퍼셉션은소멸되었습니다.그러나사랑이남아있는만큼퍼셉션도남아있었습니다.이퍼셉션의능력은태고교회에고유한것이었습니다.그러나홍수후사람들에게서처럼신앙이사랑에서분리되고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지게되었을때에는양심이그뒤를이었습니다.양심역시딕테이트를주지만그방식은다르며,이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말씀드리겠습니다.양심이딕테이트를줄때에도말씀에서는이와마찬가지로‘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Jehovahspeaks)고합니다.양심은계시된것들과지식들,그리고말씀으로부터형성되기때문입니다.말씀이말하거나딕테이트를줄때에는주님께서말씀하시는것입니다.그러므로오늘날에도양심이나신앙에관한일을말할때‘주님께서말씀하신다’(theLordsays)고하는것보다더흔한표현은없습니다. By the“speakingofJehovah”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Jehovah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Lord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양심은어떻게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퍼셉션은사랑이주된것이었던동안에만계속될수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향한사랑이그치고,그결과이웃을향한사랑도그치자퍼셉션은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남아있는만큼퍼셉션도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이 ‘사랑이남아있는만큼퍼셉션도남아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 곧 ‘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이퍼셉션의능력은태고교회에고유한것이었습니다.그러나홍수후사람들에게서처럼신앙이사랑에서분리되고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지게되었을때에는양심이그뒤를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역시딕테이트를주지만그방식은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내안에서어떤강한느낌이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계시된것들과지식들,그리고말씀으로부터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말하거나딕테이트를줄때에는주님께서말씀하시는것’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의 ‘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이렇게기록되어있기때문에이것을해야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통하여체어리티가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내게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것들과지식들,그리고말씀으로부터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은 ‘여호와께서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Where is Abel thy brother?And he said,I know not,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AC.370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JehovahsaiduntoCain)는것은체어리티,곧‘아우아벨’(brotherAbel)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을의미합니다.가인의대답인‘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Iknownot,amImybrother’skeeper?)는신앙이체어리티를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으며,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고,그결과신앙이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음을의미합니다.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 “JehovahsaiduntoCain”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brotherAbel.” Cain’s reply, “Iknownot,amImybrother’skeeper?”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의 ‘여호와께서가인에게이르시되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곧아우아벨에관하여그들에게어떤딕테이트를주는,내면에서오는어떤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다’를 ‘consciencedictated’, 곧 ‘양심이말해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certainperceptivityfrom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과 ‘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가인에게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어디있느냐’, 곧 ‘체어리티는어디에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분하여함은어찌됨이며안색이변함은어찌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아닌것으로여겼습니다.’ 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습니다.’ 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을완전히거부했습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왜아벨을지켜야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종속되기를원하지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그를지켜야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왜체어리티를돌보아야하는가?신앙이체어리티와무슨상관이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믿는진리가어떻게이웃의선으로나타나야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어디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네아우아벨이어디있느냐?’ 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신앙안에서체어리티는어디에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2026/09/06)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함께주를경배하세’, 찬230, ‘우리의참되신구주시니’, 찬92, ‘위에계신나의친구’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AC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오늘부터 시작하는 ‘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
그러므로‘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쳐죽였다.그들이함께들에있을때에’(CainroseupagainsthisbrotherAbel,andslewhim,whentheywereinthefieldtogether)라는말씀은,신앙과체어리티가둘다신앙의교리에서나온것이라할지라도사랑에서분리된신앙은체어리티를중요하지않게여기고,그로말미암아결국체어리티를소멸시킬수밖에없었음을뜻합니다.이것은오늘날체어리티의행위가없어도오직신앙만으로구원받는다고주장하는사람들의경우와같습니다.그들은사랑이없으면신앙이구원하지못한다는것을알고입술로고백하면서도,바로‘오직신앙만으로구원받는다’는그전제자체로체어리티를소멸시키고있기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CainroseupagainsthisbrotherAbel,andslewhim,whentheywereinthefieldtogether,”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들’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그의아우아벨을쳐죽였다.그들이함께들에있을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체어리티가둘다신앙의교리에서나온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않게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필요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아벨을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말미암아결국체어리티를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행위가없어도오직신앙만으로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없으면신앙이구원하지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중요합니다’, ‘선한삶도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오직신앙만으로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오직신앙만을주장하지않으니가인과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않게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신앙을가지고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신앙안에서아벨은살아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
‘들’(field)이교리를상징하며,따라서신앙과체어리티의교리에속한모든것을상징한다는것은말씀에서분명합니다.예레미야에서,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여기서‘들’(field)은교리를상징하고,‘재산’(possessions)과‘보물’(treasures)은신앙의영적부요함,곧신앙의교리에속한것들을뜻합니다.같은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이는교회와그신앙을다루는말씀입니다.교리는그안에씨가있기때문에‘들’(field)이라합니다.같은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In the same:
여기서‘들’(field)은교리를,‘나무들’(trees)은지식을,‘농부들’(husbandmen)은예배하는사람들을상징합니다.시편에서,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In David:
여기서밭이즐거워할수도없고숲의나무들이노래할수도없다는것은아주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는사람안에있는것들,곧신앙의지식들을뜻합니다.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In Jeremiah:
여기에서도땅이나들의채소가슬퍼할수있는것이아니며,이표현들이황폐함의상태에있는사람안의어떤것들을가리킨다는것은분명합니다.이와비슷한말씀이이사야에도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주님께서도시대의완성에관하여예언하시면서신앙의교리를‘들’(field)이라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여기서‘들’(field)은참된것이든거짓된것이든신앙의교리를뜻합니다.‘들’(field)이교리를상징하므로,신앙의씨를받는것은사람이든교회든세계든또한‘들’(field)이라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의 ‘그들이들에있을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들’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들’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그안에씨가있기때문에들이라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들=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씨’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들’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나의산’에 관한 말씀에서 ‘들’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들’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갈아엎어질것’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들’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사람이밭에있으매한사람은데려가고한사람은버려둠을당할것’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들’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들’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들’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황무하고’, ‘곡식이진하여’, ‘새포도주가말랐고’, ‘기름이다하였으며’, ‘밭의모든나무가다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들’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시96:12의 ‘밭과그가운데에있는모든것은즐거워할지로다그때숲의모든나무들이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의 ‘들의모든나무가손뼉을칠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의 ‘땅이슬퍼하며온지방의채소가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들’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두사람이밭에있으매한사람은데려가고한사람은버려둠을당할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밭’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것이든거짓된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밭’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마지막에는 ‘들’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들’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올바른교리를알고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알고있는교리는내안에서무엇을자라게하고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두경우뿐아니라이와비슷한다른경우들에서도장자권과그에따른주도권을둘러싼다툼이있습니다.신앙과체어리티는둘다교회의자손이기때문입니다.신앙은이장1절의가인처럼‘사람’(man)이라하고,체어리티는사19:2,렘13:14및다른곳들에서처럼‘형제’(brother)라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앞에서말한것처럼야곱과에서가상징하는것도가인과아벨이상징하는것과비슷했습니다.야곱역시자기형에서를밀어내려했는데,이는호세아에서도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그러나에서,곧에서로표상된체어리티가마침내주도권을가지게될것이라는사실은그들의아버지이삭의예언에서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아우’, 곧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과 ‘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먼저생기고그다음신앙이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시간적으로먼저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궁극적으로다른것에생명을주고그것을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빛’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교회,곧새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내어머니와내동생들은곧하나님의말씀을듣고행하는이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눅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것’을 신앙과, ‘행하는것’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과 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안에서신앙과체어리티는형제로함께살고있는가,아니면신앙이체어리티를밀어내고그위에서려하는가?’ 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죽음후사람이다른삶안에있기까지거의하루도지나지않습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 없고,천사들에게는 날과 해 대신‘상태의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하루’는 무엇일까요?정말 죽은 뒤 대략24시간 정도가 지나서 영계에 들어간다는 뜻일까요,아니면‘하루’자체가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하나는 자연계에 아직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와 독자의 관점이고,다른 하나는 영계 안에서 살아가는 영과 천사의 관점입니다.AC.70의 문장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가 역시 자연계의 독자에게 죽음 이후의 일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그는‘육체가죽은뒤다른삶안에있기까지거의하루도지나지않는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여기서의‘하루’를 처음부터 영계의 상징적인 상태 주기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천국과지옥’162-165에서 영계의 시간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천국에서도 사건들은 서로 이어지고 진행되지만 천사들에게는 자연계 사람과 같은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자연계에는 해와 날이 있지만 천국에는 그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사람의 자연적 시간 관념이 천사에게 전달되면 천사는 그것을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로 지각한다고 합니다.따라서‘영계에는자연계와같은24시간제의하루가있는가?’라는 질문에는‘그런의미의하루는없다’고 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영계에는자연적하루가없다’는 사실과‘AC.70에서스베덴보리가자연적시간언어를사용할수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스베덴보리는 아직 자연계에 살고 있고 자연계의 독자에게 자신이 관찰한 사후 소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자연계의 사건을 기준으로‘거의하루도지나지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이것을 굳이‘하루라는말은사실시간뜻이아니라하나의상태주기라는뜻이다’라고 바꾸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가령 스베덴보리가‘나는어떤사람이죽은뒤열두시간후에그와이야기했다’고 자연계의 관찰자로서 말한다면,그 사람이 영계에서 열두 시간을 시계로 재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자연계에 남아 있는 관찰자가 자연계의 시간으로 경과를 표현한 것입니다.AC.70의‘거의하루’도 우선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다면‘거의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24시간보다 짧다는 교리적 시간표일까요?그렇게까지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AC.70은 사망 시각부터 몇 시간 몇 분 만에 영적인 의식이 완전히 열리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의 강조점은 훨씬 분명합니다.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긴 공백이 없다는 것입니다.그는‘거의하루도지나지않는다’고 말한 뒤 곧바로 그 이유를‘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AC들에서는 그‘소생’이 아무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완료되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육체의 생명이 끝나고 영으로서 의식적으로 깨어나는 데에는 주님의 질서 아래 일정한 과정이 있으며,천사들이 함께하는 단계들이 설명됩니다.그러므로‘삶의연속’은‘아무런과정도없다’는 뜻이 아니라‘존재와생명이끊어지지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즉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신학적으로‘사람은죽으면즉시영계에들어간다’고 말할 때의‘즉시’는 죽음과 사후생명 사이에 수백 년 동안 무의식 상태로 기다리는 별도의 삶의 공백이 없다는 뜻으로는 적절합니다.그러나 그것을‘심장이멈추는바로그0.001초뒤에소생의전과정이끝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AC.70자체도‘거의하루도지나지않는다’고 하여 어떤 질서 있는 전환 과정이 있음을 암시하고,그 과정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거의하루’를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AC.70한 글만으로 개인마다 몇 시간씩 달라진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이후 소생에 관한 여러 기록을 읽으면서 각 상태의 차이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지금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확한‘사후24시간규칙’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육체의 죽음과 의식적인 다른 삶 사이가 매우 짧고 연속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피해야 할 것은 이 표현을 주님의‘사흘만에부활하사’와 곧바로 연결하는 것입니다.성경에서‘셋’이나‘셋째날’이 충만함이나 완성을 뜻하는 경우가 있고,스베덴보리도 그러한 상응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그러나AC.70의‘거의하루’와 주님의 부활의‘사흘’을 동일한 사후 소생 원리로 연결하는 것은 이 본문이 하지 않는 설명입니다.특히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보통 인간의 사후 소생과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므로,관련AC에서 직접 다룰 때 별도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인간의 사후 소생과 주님의 부활을 둘 다‘죽음이후의깨어남’이라는 말만으로 같은 구조에 넣으면,주님의 신적 인성과 영화라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가르침을 흐릴 수 있습니다.따라서AC.70에서는 일반 인간의 소생에 집중하고,주님의 부활 문제는 관련 본문이 나올 때 그 자체의 문맥에서 다루는 것이 가이드1.0에도 맞습니다.
그러면‘영계에는시간이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순서도없고모든것이한순간에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과지옥’은 천국에서도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다만 자연계처럼 태양의 운동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시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영적 세계에서는 상태가 변화하면서 연속과 진행이 있으며,그것이 자연계 사람에게는 시간과 비슷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 기록을 읽다가‘하루’, ‘몇시간’, ‘오랫동안’, ‘곧’, ‘이후’같은 말을 만나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첫째,스베덴보리가 자연계에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연계 독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자연적 시간 표현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둘째,영들과 천사들이 그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연속은 자연계의 시계 시간과 동일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AC.70의‘거의하루도지나지않아’는 가장 먼저‘죽음이후오랜공백없이매우짧은과정안에서다른삶의의식안에있게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그 하루를 반드시24시간이라는 교리적 제한으로 고정할 필요도 없고,반대로‘하루는시간과전혀관계없고순전히하나의상태를상징한다’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영계의하루가몇시간인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바로 다음 문장이 목적을 알려 줍니다. ‘죽음은삶의연속이기때문입니다.’인간은 죽은 뒤 오래도록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죽음과 매우 가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이것이‘거의하루도지나지않아’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입니다.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에덴동산등에관한이모든내용,곧아브람시대까지의기록을모세는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전해받았습니다.’우리는 흔히 창세기를‘모세가기록한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스베덴보리는창세기1장부터아브람이전까지의내용을모세가직접계시받아기록한것이아니라고보는가?’, ‘그렇다면그내용은실제역사가아니라전승된이야기일뿐이라는뜻인가?’
먼저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태고교회의후손들로부터’받았다고 말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이것은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첫째스타일’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그러한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기,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역사적사실들은문자적의미에나타난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일종의역사적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아브람이전은역사가아니고아브람이후부터만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AC.66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실제개인이아니었다’, ‘노아홍수는실제사건이아니었다’같은 결론을AC.66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창1부터모든내용은아브람이후와똑같은의미에서문자그대로의역사라고스베덴보리도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노아,홍수,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태고교회후손들로부터받은표상적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용어상‘전승된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적어도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빛과 궁창과 물,식물과 광명체,물고기와 새와 짐승,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태고교회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스베덴보리가실제로무엇을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그것은 앞으로 관련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1장을 지금까지 왜‘거듭남의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