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천주교회의 자기 이해를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명제는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 이상의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의 필요에 따라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구원의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에는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본질적인 요소로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천주교회와의 완전한 일치는 단순히 어느 교단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우리가 역사적 계보와 제도적 연속성으로 확인하는 바로 그 교회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교황과의 일치, 사도적 계승, 성사의 유효성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전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천주교회는 자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46, 847, 848항은 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잘못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속하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자기 이해를 공식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의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 그리고 교회가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교회의 영적 생명이 특정한 역사적 조직의 독점적 소유가 된다는 결론까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고 당신의 생명을 받는 자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다른 가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교회의 참됨을 판단할 때 역사적 연속성이나 제도적 권위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과 그 결합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열매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제318항에서 328항에 걸쳐 이 문제를 더욱 넓은 시야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HH.328은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 그 교회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는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를 인체의 심장과 폐가 다른 기관들에 생명을 전달하는 관계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고 주님을 알 수 있는 곳에는 특별한 영적 빛과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받는 공동체가 곧 주님의 교회 전체를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외적 명칭보다 내적 생명에 의해 성립하며, 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교회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의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제도적인 교회의 바깥에 있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로부터 영적으로 배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는 천주교의 제도적 교회론과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안에 교회의 온전한 제도적·성사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본질을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찾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55-367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서는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없으며, 주님과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얼마나 완전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실제로 사람들의 의지와 이해에 들어가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주님에 관하여 정확한 진리를 가르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고 이웃을 위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그 공동체의 외적 교회성은 내적 교회성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역사적·제도적 조건 때문에 충분한 기독교 교리를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자신이 이해하는 신적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한다면 주님은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이 그것을 소유하고 자랑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살아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역사 속에 세우시고, 말씀을 보존하시며,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예배와 성찬을 이어 가고,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세대를 넘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 일들은 그 자체로 귀중한 쓰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질서와 제도가 모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형식과 질서를 통해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 질서를 교회의 본질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 지도자이든, 그들의 참된 권위는 직위 그 자체에서 영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진리를 충실하게 가르치고, 그 진리로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데서 그 정당한 쓰임을 발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내적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생명이 아니라 교회의 형식에 그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역사적 계보와 무관하게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보편적 교회 이해입니다. HH.318에서 그는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HH.328은 말씀과 주님을 아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교회가 지상의 한 제도적 공동체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해 온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표현 자체를 다시 검토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천주교회의 신자로 등록되어 있고 모든 성사생활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멸시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신앙을 이용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천주교회와 아무런 제도적 관계가 없지만,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양심을 따라 악을 피하며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느 쪽을 당신의 교회에 더 가깝다고 보시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외적인 행위만 보고 인간의 최종적 내면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과 내적 상태를 온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외적인 소속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경고가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이므로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개신교 신자 역시 ‘우리 교회는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이므로 나는 바른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나는 이제 참된 교리를 알게 되었으므로 다른 교회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잘 안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은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 기쁨이 어느 순간 자신이 옳다는 우월감으로 바뀌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절대화하는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참된 교회를 말하면서도 정작 교회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주님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이며, 그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교회를 보존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귀중한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온전함을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사도적 계승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어떤 인간 조직의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을 인도하는 참된 신앙이 살아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주교의 모든 신자를 판단하거나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주교 안에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안에도 주님의 교회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교회의 보편성은 교파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인간이 세운 제도적 경계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참된 교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 주님의 진리가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