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일이 어긋납니다. 사람도 안 만나지고, 돈도 마련되지 않고, 계획했던 일정도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연달아 생깁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더 해 보자’고 생각하지만 막힘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신앙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행16:6-7). 그 뒤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여기서는 분명 어떤 길이 막힌 것이 방향을 바꾸라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혹시 내가 방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은 건강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막혔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결론으로 뛰어갈 때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도 놀라울 만큼 많은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은 분명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요?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과 방해가 있었고, 대적들은 성벽 공사를 중단시키려 했으며, 내부에서도 어려움이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아야 할 정도였습니다(느4:17). 만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계속 막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성벽 재건은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지만 그의 사역에는 끊임없이 막힘이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물들은 ‘이 일을 하지 말라’는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바로 그 어려움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부르심을 수행했습니다. 행16에서도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어떤 길은 성령께서 막으셨지만, 마게도냐로 간 뒤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힌 것은 ‘마게도냐로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막힘’처럼 보여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든 장애물이 같은 종류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어떤 막힘은 방향을 바꾸라는 섭리적 인도일 수 있고, 어떤 막힘은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견디고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막힘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고,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자연계의 여러 조건 때문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일이 안 풀린다’는 모습이지만 그 내적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매 순간 외적인 사건을 암호처럼 해독하여 ‘하라’, ‘하지 말라’를 알아맞히게 하는 체계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일어난 모든 사건에 즉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자금 조달이 계속 실패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업계획 자체가 현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거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선하고 필요한 일을 시작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예상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계속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이 막으신다’고 해석하여 포기한다면, 오히려 끝까지 해야 할 선한 일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환경의 신호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정보를 살펴보고, 경험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능력과 형편을 점검하고, 예상되는 결과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이 선과 진리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힘든 분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세 번 막혔으니 하나님 뜻이 아니야’, ‘기도했는데 계속 문제가 생기니 그만두라는 뜻이야’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편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부담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에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하게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모든 막힘을 무조건 ‘시험’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충분한 이유를 들어 만류하고, 객관적으로도 문제가 반복해서 드러나며, 자신의 능력과 조건을 보아도 계속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끝까지 밀어붙이면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일 수 있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에는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고, 꼭 하고 싶은 일에는 ‘사탄의 방해가 심한 것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장애물을 자기 욕망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막힘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몇 번 막혔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이 잘 풀리든 막히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분명히 선한 일이라면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왜 이 일을 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정말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이루려는 것인지, 아니면 성공과 인정, 자기만족을 원하는 것인지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막힘은 나에게 무엇을 다시 보게 하는가?’입니다. 당장 ‘하라, 하지 말라’는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 그 장애를 통하여 계획의 허점이 드러났는지, 내 욕심이 드러났는지, 준비 부족이 드러났는지, 아니면 정말로 포기하지 말고 인내해야 할 선이 더욱 분명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힘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분별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외적인 사건을 보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마다 하늘에서 ‘YES’나 ‘NO’가 떨어진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내적으로 분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처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일이 계속 막힐 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멈추어 살펴보는 것은 좋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동기를 살피고, 현실적인 조건을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믿을 만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뒤 ‘계속해야 할 선인가,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가,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막힘 자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등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한 뒤에는 어느 정도 책임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장애가 나타날 때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 뜻인가 아닌가’를 묻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선하고 옳다고 충분히 판단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견딜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살펴본 결과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둘 다 믿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문제에서도 가장 깊은 기준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 모든 상황은 막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배신, 체포, 거짓 증언, 조롱, 채찍질, 십자가가 이어졌습니다. 외적인 상황만 읽었다면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 자체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악과 잘못된 선택, 다른 사람의 자유,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장애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하여 돌아설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면서 선으로 이끄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일이 계속 막히는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단순히 ‘그렇다’거나 ‘아니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분명 멈추어 살펴보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 방향을 바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분별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곧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의 암호로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 앞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분별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 왜 자꾸 막으십니까?’라고 단정하기 전에,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보아야 할 선과 진리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야 한다면 견딜 지혜와 힘을 주시고, 멈추어야 한다면 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시며,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막힘이 곧 하나님의 ‘NO’는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려라’일 수 있고, ‘방법을 바꾸어라’일 수도 있으며, ‘끝까지 가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 의미를 당장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모든 사건의 숨은 뜻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들고 주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SL.25,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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