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 함께 주를 경배하세’,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따라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 따르면서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4에서는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4:6-8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질서가 뒤집힐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있습니다. 따라서 4:7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 이제 단순히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이단이 생길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가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사람의 의지를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있습니다.

 

AC.364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마귀,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그리고 AC.364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강한 자기 의지나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있습니다.

 

AC.365 관계를 불꽃 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겨울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 바로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수도 있습니다.

 

AC.367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신 8:21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신앙에, 행하는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 진리를 듣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 AC.366에서 교리를 상징한다고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 밭에 감추인 보화 말씀에서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수도 있습니다.

 

AC.369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4:8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있습니다. 바로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분리 죽은 행위 죽은 예배 분노 내적인 것들의 변화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깊은 진리를 안다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걸음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 어디까지 나아갈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질서가 회복될 우리의 신앙은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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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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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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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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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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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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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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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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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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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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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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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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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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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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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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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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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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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8

(field)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That afield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재산과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여기서 (field)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possessions) 보물(treasures) 신앙의 영적 부요함,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field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andtreasures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에 관해서는 밭같이 갈아엎어질 (plowed like a field)이라고 선언합니다(26:18; 3:12).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plowed like a field.(Jer. 26:18, Micah 3:12)

 

유다의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같이 경작지가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이는 교회와 신앙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field)이라 합니다. 같은 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field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알리라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에서,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서 (field) 교리를, 나무들(trees) 지식을, 농부들(husbandmen) 예배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fieldsignifies doctrine, “treesknowledges, andhusbandmenworshipers. In David:

 

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서 밭이 즐거워할 수도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도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에서도 땅이나 들의 채소가 슬퍼할 있는 것이 아니며, 표현들이 황폐함의 상태에 있는 사람 안의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에도 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께서도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예언하시면서 신앙의 교리를 (field)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field: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여기서 (field)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합니다. (field) 교리를 상징하므로,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또한 (field)이라 합니다. where by afield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field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 나의 에 관한 말씀에서 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 갈아엎어질 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 황무하고’, ‘곡식이 진하여’, ‘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으며’, ‘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96:12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 마지막에는 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교리는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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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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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7

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과, (field)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필요한 만큼은 예외입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은 신앙의 본성 또는 본질 자체로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형제 관계는 에서와 야곱으로 표상되었으며,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38:28-30),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and that afield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손에 매었더니 29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손에 홍색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38:28-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48:13-14)로도 표상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48:13-14)

 

경우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에서도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1절의 가인처럼 사람(man)이라 하고, 체어리티는 19:2, 13:14 다른 곳들에서처럼 형제(brother) 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man,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brother,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것이며 (19:2)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14)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형제의 언약(the covenant of brethren)이라 합니다(1:9).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9)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곱과 에서가 상징하는 것도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야곱 역시 자기 에서를 밀어내려 했는데, 이는 호세아에서도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에서로 표상된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에서 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멍에를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는 같은 의미로, 이방인의 교회, 교회는 에서로 표상되고 유대교회는 야곱으로 표상됩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교회, 초대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도 주님께서는 형제라 하십니다(8:21).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8:21)

 

듣는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사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시기 때문입니다(7:24, 26).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해설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 아우’,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 먼저 생기고 그다음 신앙이 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다른 것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 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 교회, 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 을 신앙과, ‘행하는 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위에 서려 하는가?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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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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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 없고,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루는 무엇일까요? 정말 죽은 뒤 대략 24시간 정도가 지나서 영계에 들어간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루 자체가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에 아직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와 독자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계 안에서 살아가는 영과 천사의 관점입니다. AC.70의 문장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가 역시 자연계의 독자에게 죽음 이후의 일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그는 육체가 죽은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하루를 처음부터 영계의 상징적인 상태 주기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천국과 지옥 162-165에서 영계의 시간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도 사건들은 서로 이어지고 진행되지만 천사들에게는 자연계 사람과 같은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해와 날이 있지만 천국에는 그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사람의 자연적 시간 관념이 천사에게 전달되면 천사는 그것을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로 지각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24시간제의 하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런 의미의 하루는 없다고 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영계에는 자연적 하루가 없다는 사실과 AC.70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연적 시간 언어를 사용할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자연계에 살고 있고 자연계의 독자에게 자신이 관찰한 사후 소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자연계의 사건을 기준으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하루라는 말은 사실 시간 뜻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주기라는 뜻이다라고 바꾸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가령 스베덴보리가 나는 어떤 사람이 죽은  열두 시간 후에 그와 이야기했다고 자연계의 관찰자로서 말한다면, 그 사람이 영계에서 열두 시간을 시계로 재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계에 남아 있는 관찰자가 자연계의 시간으로 경과를 표현한 것입니다. AC.70 거의 하루도 우선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24시간보다 짧다는 교리적 시간표일까요? 그렇게까지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은 사망 시각부터 몇 시간 몇 분 만에 영적인 의식이 완전히 열리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강조점은 훨씬 분명합니다.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긴 공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뒤 곧바로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AC들에서는 그 소생이 아무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완료되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육체의 생명이 끝나고 영으로서 의식적으로 깨어나는 데에는 주님의 질서 아래 일정한 과정이 있으며, 천사들이 함께하는 단계들이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연속 아무런 과정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와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즉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학적으로 사람은 죽으면 즉시 영계에 들어간다고 말할 때의 즉시는 죽음과 사후생명 사이에 수백 년 동안 무의식 상태로 기다리는 별도의 삶의 공백이 없다는 뜻으로는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심장이 멈추는 바로  0.001 뒤에 소생의  과정이 끝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 자체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어떤 질서 있는 전환 과정이 있음을 암시하고, 그 과정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의 하루를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AC.70 한 글만으로 개인마다 몇 시간씩 달라진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후 소생에 관한 여러 기록을 읽으면서 각 상태의 차이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확한 사후 24시간 규칙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과 의식적인 다른 삶 사이가 매우 짧고 연속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피해야 할 것은 이 표현을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하사와 곧바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나 셋째 이 충만함이나 완성을 뜻하는 경우가 있고, 스베덴보리도 그러한 상응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0 거의 하루와 주님의 부활의 사흘을 동일한 사후 소생 원리로 연결하는 것은 이 본문이 하지 않는 설명입니다. 특히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보통 인간의 사후 소생과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므로, 관련 AC에서 직접 다룰 때 별도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사후 소생과 주님의 부활을 둘 다 죽음 이후의 깨어남이라는 말만으로 같은 구조에 넣으면, 주님의 신적 인성과 영화라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가르침을 흐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0에서는 일반 인간의 소생에 집중하고, 주님의 부활 문제는 관련 본문이 나올 때 그 자체의 문맥에서 다루는 것이 가이드 1.0에도 맞습니다.

 

그러면 영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 순서도 없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천국에서도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자연계처럼 태양의 운동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시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상태가 변화하면서 연속과 진행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 사람에게는 시간과 비슷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 기록을 읽다가 하루’, ‘ 시간’, ‘오랫동안’, ‘’, ‘이후 같은 말을 만나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에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연계 독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자연적 시간 표현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영들과 천사들이 그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연속은 자연계의 시계 시간과 동일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AC.70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는 가장 먼저 죽음 이후 오랜 공백 없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의 의식 안에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하루를 반드시 24시간이라는 교리적 제한으로 고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루는 시간과 전혀 관계없고 순전히 하나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 영계의 하루가  시간인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목적을 알려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은 뒤 오래도록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매우 가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입니다.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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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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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

AC.66 심화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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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 무엇인가?

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간 이들은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만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이라고 했을까요? 이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층의 내적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AC.65가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가 정확히 몇 번째 층이며 그보다 더 안쪽에 어떤 의미들이 몇 단계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 문자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라는 완성된 층위표를 만들고, AC.65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정확히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이 표현은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를 말씀의 문자와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더 깊은 차원이나 질서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 AC.64에서도 천사들은 말씀의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64-65를 함께 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 안의 세부적인 층위와 서로의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점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한 단어가 더 큰 교리를 암시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교리 전체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을 발견하면 , 그렇다면 내적 의미에도  깊은 질서가 있을  있겠구나 하고 기억해 두고,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질서를 직접 설명할 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지각한 것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였을까요? AC.65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 의미는 너무 아름다웠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했으며,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이번 글의 초점은 그 의미가 내적 의미의 몇 번째 층인가를 분류하는 데 있기보다, 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내적 의미는 단어마다 임의의 상징 하나를 붙여 놓은 사전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질서 가운데 지각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것도 좋은 예가 됩니다. , 궁창, 식물, 광명체, 생물, 사람이라는 각각의 표현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연속된 흐름 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바로 밑에 숨어 있는  번째 암호처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는 비밀 암호를 해독하듯 단어 하나를 다른 단어 하나로 바꾸는 작업보다 훨씬 깊습니다. AC.65의 표현대로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를 가지고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을 인간이 노력하면 곧 천사처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5는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독자에게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직접 지각하는 훈련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의 문자를 읽고, AC를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속뜻을 배우며, 그 말씀을 삶에서 받아들입니다. 천사적 지각 자체를 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 때문에 말씀의 문자를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는 바로 무엇의 내적 의미인가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문자와 아무 관계 없이 따로 존재하는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의 문자 안에 이러한 깊이가 있다는 것이 AC.65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말씀의 문자와 구별되는 내적 의미 가운데 문자에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AC.65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들의 수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더 분명해질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AC.65가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려는 것은 그 내적 의미의 위치보다 그 성질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완전한 연속의 질서를 가지며,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어서 그들이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스베덴보리가 왜 바로 앞 AC.64에서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불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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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

AC.65 심화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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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신 그분께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 번째 제사장’, 에덴을 ‘ 번째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아니라 돌아올 길을 다시 짜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것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 유일한 ’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 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 죄가 바로 순간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동물이 대신 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 세상의 ’, 진설병을 ‘나는 생명의 ’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제한될 없는 ’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보이는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위를 덮은 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 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 피를 통해 법적으로 용서받아 하나님께 접근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 기구가 무엇을 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안에서 주님이 거하실 성막은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 죄인이 무서운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그를 천국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SY.16, 말씀나침반,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2026032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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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 가진 아주 작은 것으로도 주변을 천국으로 만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 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 손에 있던 것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 작은데 일을 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 ’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을 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 쓰임도 자체로 주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 헤어진 곳을 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 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 이것을 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 옷을 만들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 이어 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 완성될 때까지 일한다’, ‘ 순서를 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 ’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 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제자는 다비다 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 행동을 완전히 똑같이 하는 특별한 완전한 ’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 바늘 하나 때문에 해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 때문에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르게 되었고, 바로 시기에 고넬료 사건이 이어진다. 하나의 쓰임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음 쓰임과 연결될 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 이야기는 믿을 아니라 참고만 하는 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 커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 7년째인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 앞보다 커야 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을 하면 바늘은 사라진다’,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 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 바늘처럼 일했다는 사실조차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주님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 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 일을 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선을 주신 분도 주님이며, 내가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사용한 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 다비다의 사랑과 바늘을 통해 천국의 어떤 것을 이웃의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 들고 울던 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 사람이 내가 힘들 나를 도와주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 영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상한 것을 이어 주며, 소리 없이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선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은 , 끝까지 쓰임을 행하는 .’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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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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