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는 이 두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오랜 시간 설명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 자체는 진지하며, 본문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충분히 엿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바라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로마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창세기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로마서를 펼치기 전에 먼저 창세기 2장과 3장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원리는 이미 창세기의 내적 의미 안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영적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태초부터 말씀 안에 심어 두신 질서를 교회에 적용하여 설명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로마서에서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법은 선악과를 먹는 사건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부터 악을 사랑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았고, 선과 진리를 거의 본능처럼 분별하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상징되는 감각적 자아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 안에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던 질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proprium’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자아’라고 번역되지만, 단순한 개성이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고 하는 자기 생명’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죄는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은 어떤 법률 조항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질서가 되어 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 역시 로마서에서 처음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주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이 그 원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그 생기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유입(influx)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창조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는 창세기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영적 역사를 다른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선악과를 먹음’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표상과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 읽기가 현대 개신교와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열고,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원형이고, 로마서는 그 원형을 설명하는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가장 깊은 샘은 언제나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으며, 바울은 그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번 설교를 읽기 시작하면, 관심의 중심도 조금 달라집니다. 설교자가 로마서의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바울이 지금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열리는 순간, 로마서는 더 이상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생명의 질서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층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 말씀의 원형이라는 관점을 마음에 두고, 설교 자체를 살펴보겠습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전개합니다. 특히 그는 여기서 말하는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말하며,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검토한 끝에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설교를 읽어 보면 단순히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원어를 살피고, 로마서 7장과 8장의 문맥을 연결하며,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주일설교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는 존중받을 만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본문이 실제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자세는 분명 귀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관련 구절을 모두 연결하고, 하나의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까지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 자체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연구하여 창세기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이해한 다음,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순서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죄의 법’, ‘하나님의 법’을 서로 비교하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이것은 본문을 충실히 읽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 원형은 어디에, 그리고 이미기록되어 있는가?’

 

그 질문의 답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 안에 두 가지 질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영원한 표상입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얻으려는 질서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자기 사랑은 하나의 법처럼 인간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이미 상징으로 보여 준 내용을 교리적인 언어로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바울이 무엇을 새롭게 말하는가?’가 아니라,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사도들의 서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글이지,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모든 단어 안에 연속적인 아르카나(arcana)가 담겨 있는 말씀 자체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서신을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연구는 언제나 말씀의 원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설명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스베덴보리에게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속뜻 안에서 이미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죄의 지배, 인간의 내적 갈등, 성령의 생명, 거듭남, 자유로운 선택과 같은 주제들은 모두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의 창세기 해설에서 이미 긴 흐름으로 다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그 긴 이야기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설교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로마서를 읽고 창세기를 이해하려 한다면, 창세기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길을 따르면 순서는 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주님, 타락과 거듭남의 전체 구조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미 알고 있던 영적 질서를 교회의 삶에 적용하는 살아 있는 해설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는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제 설교자가 로마서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가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설명이 창세기의 원형과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조금씩 갈라지는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빛 속에서 설교를 다시 읽게 하는 새로운 독서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을 매우 존중하면서도, 바울의 서신을 창세기나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약성경의 중심이 바울서신처럼 여겨지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중심은 언제나 ‘말씀(The Word)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의미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흐르는 책들, 곧 모세 오경을 비롯, 여호수아, 사사기, 열왕기, 시편 및 선지서들과 복음서들, 그리고 계시록이 중심이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한 글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이번 설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연구합니다. 그는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하나님의 법’이라는 표현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분명 성실하며,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연구는 어디까지나 ‘적용’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원형은 이미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설교의 핵심인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은 로마서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 원형은 이미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모든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중심의 질서에서 자기 중심의 질서로 옮겨 가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바울은 이 긴 영적 역사를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성령의 법’도 바울이 처음 만든 표현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 노아 시대에 남겨 두시는 리메인스(remains),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과정, 이삭과 야곱의 생애, 출애굽의 여정, 광야의 시험,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말씀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는 과정을 다양한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 긴 흐름을 교회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칭의’, ‘성화’, ‘육신’, ‘성령’과 같은 바울의 용어를 기준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속뜻을 통해 인간의 창조와 타락, 거듭남과 구원의 질서를 이해합니다. 그런 다음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은 새로운 교리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진리를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교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울의 권위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복음을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말하며, 끊임없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서 성취된 진리를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에 설명하는 사명을 감당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서신은 말씀과 경쟁하는 책이 아니라, 말씀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읽고,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그 타락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영화(榮化)의 길을 걸으셨는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을 읽으면, 로마서의 한 절 한 절이 훨씬 깊고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 문장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질서를 요약하는 증언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로마서의 단어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분명 귀한 연구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 진리를 주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어떤 표상으로 이미 보여 주셨는가?’ 바로 이 질문이 열릴 때, 우리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 말씀 자체가 품고 있는 더 깊은 아르카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성경 읽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설교의 핵심 본문인 로마서 8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새로운 영적 원리를 계시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 들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언어로 설명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설명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두 질서가 인간 안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죄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고, 성령께서 그 죄의 권세에서 사람을 해방하신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바울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대립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창세기 3장으로 향합니다.

 

창세기의 속뜻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가장 바깥 자연적 인간, 곧 감각과 자기 판단만을 신뢰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인간 안에서는 하나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전까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하다’는 질서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보기에는 좋다’는 질서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변화가 죄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죄는 어떤 행동을 먼저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죄를 설명할 때 언제나 ‘사랑’을 먼저 말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면 그 뒤에 수많은 죄가 열매처럼 맺히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도 결국 이러한 자기 사랑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굳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설교에서는 이것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 가시는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억누르는 힘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악이 즐거웠다면 이제는 선이 즐거워지고, 이전에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 기뻤다면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입니다.

 

이 점에서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거듭남을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이삭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야곱이 씨름하는 것으로, 요셉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 거듭남을 보여 줍니다. 모두 서로 다른 역사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러한 긴 영적 역사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설교에서는 죄와 성령의 싸움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이 곧바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보존되고 자라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시고, 거듭남의 때가 되면 그것들을 하나씩 깨우십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는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주님의 섭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로마서 8장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은 죄와 성령이 힘겨루기를 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신 거듭남의 역사가 마침내 사람 안에서 본격적으로 열리는 순간입니다.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생명의 질서가 조금씩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해방’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 모습입니다.

 

결국 로마서 8장을 창세기의 속뜻으로 다시 읽으면, 본문은 훨씬 넓은 풍경 속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은 단지 교리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지나, 복음서에서 주님 자신 안에서 완성된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마서는 비로소 창세기와 하나가 되고, 설교 역시 그 원형의 빛 속에서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설교 자체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을 매우 진지하게 연구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본문의 문맥을 세밀하게 따라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 정도로 본문 자체를 붙들고 설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와, 죄와 성화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이번 설교의 분명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설교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구의 깊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연구의 출발점이 말씀의 원형이 아니라 바울의 설명이라는 점입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안에서 답을 찾기 위해 로마서를 계속 파고듭니다. 로마서 7장을 읽고 다시 8장을 읽으며, 바울의 표현 하나하나를 분석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라면 같은 시간을 들여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펼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결국 그 말씀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경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관의 차이입니다. 만일 바울의 서신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성경 전체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먼저 있고, 바울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중심이 아니라 안내자입니다. 안내자는 소중하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의 여러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을 길게 설명하지만, 정작 왜 인간 안에 그런 ‘’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태고교회와 선악과, 자기 사랑과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죄를 교리의 문제로 보기 전에 존재의 문제로 봅니다. 인간이 어떤 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랑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는 성령의 역사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 역시 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주님의 끊임없는 유입(influx)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매 순간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으로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한 체험을 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동안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설명은 로마서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깊이이며, 바로 말씀의 속뜻이 열릴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입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교자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회개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하며, 죄와 타협하는 신앙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탤 것입니다. 죄를 끊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죄 없는 존재로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품은 존재로 만드시려 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목표는 단순히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읽으며 가장 크게 떠오른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자는 마치 큰 나무의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식물학자와 같습니다. 가지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하고, 잎의 구조를 분석하며, 열매가 어떻게 맺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 나무가 어떤 뿌리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봅니다. 뿌리를 알면 가지도 이해되지만, 가지만 오래 연구해서는 뿌리까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번 설교를 읽으며 느낀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변승우 목사의 설교는 로마서를 매우 성실하게 읽은 설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라면 로마서를 읽기 전에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었을 것입니다. 이 두 방법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의 차이는 설교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통해 말씀을 이해하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통해 바울을 이해하려는 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읽을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설교 자체의 장점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말씀의 원형인 창세기와 복음서의 빛 속에 다시 놓아 볼 때, 비로소 바울이 말하려 했던 진정한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로마서는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구원의 질서를 교회의 언어로 아름답게 증언하는 글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를 끝까지 듣고 난 뒤 가장 크게 남는 인상은 설교자의 진지함입니다. 그는 로마서 82절을 가볍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본문보다 이야기나 예화를 앞세우는 설교가 많아지는 시대에는 이러한 진지한 연구 자체가 귀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로마서를 이렇게까지 연구하는가?’입니다. 물론 로마서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은 새로운 하늘의 비밀을 처음 계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현실에 맞게 풀어 설명한 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연구의 중심은 언제나 말씀 자체여야 하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성경 읽기와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로마서를 기준으로 창세기를 읽고, 갈라디아서를 기준으로 율법을 이해하며, 에베소서를 기준으로 복음서를 정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그는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고,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창세기의 한 절을 설명하는 데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면서도, 바울의 한 절을 놓고 같은 방식의 연속적인 속뜻을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원형은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번 설교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승우 목사가 로마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만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교회에 설명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게 됩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선악과 사건으로 연결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창조와 거듭남의 역사로 연결됩니다. 또한 ‘육신’과 ‘성령’의 대립도 단순한 윤리적 갈등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주님 사랑이라는 두 생명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은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와 복음서,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다른 책들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역시 그 생명 밖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생명을 교회의 언어로 증언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깊이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바울을 끝없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의지하고 있는 말씀의 원형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 오히려 다시 확인하게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회개와 성화를 강조했으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결코 멀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주제를 언제나 말씀 전체의 흐름 안에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먼저 본 다음,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경 읽기는 언제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향하고, 교리가 아니라 생명을 향합니다.

 

아마 이것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어떤 설교를 만나든 먼저 ‘이 설교가 어떤 본문을 설명하는가’를 묻기보다, ‘이 설교가 설명하는 영적 원형은 말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번 설교 역시 그런 시선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로마서는 여전히 귀한 책이고, 바울은 여전히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우리를 언제나 그 증언 너머,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끕니다.

 

아마 이것이 이번 설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통찰일 것입니다. 설교를 바울의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눈으로 읽고, 그다음 바울을 읽는 것 바로 그때 로마서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된 거듭남의 역사를 교회의 삶 속에 다시 들려주는 살아 있는 증언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성경적인 성경 읽기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9, JMS 정명석, ‘깔짝거리지 말고 하라, 본격적으로 하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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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을 떼어 놓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실제 어떤 신앙 체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출처만으로 모든 내용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일부 좋은 내용만 보고 전체를 긍정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말씀 자체와 그 열매를 기준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적인 요소는 인정하고, 이어서 어디에서부터 중심이 달라지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설교의 제목인 ‘깔짝거리지 말고 본격적으로 하라’는 표현은 매우 직설적입니다. 설교자는 신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와 마5:48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를 본문으로 삼아, 신앙을 피상적으로 하지 말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출발점 자체는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분적인 관심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함해야 하며, 신앙 역시 말이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하며, 참된 믿음은 선한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하라’는 첫 번째 권면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손과 얼굴만 씻지 말고 온몸을 씻어야 한다’, ‘휴지로 닦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샤워하듯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비유를 반복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비유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씻음’은 단순한 육체의 청결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회개를 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부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진리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가 ‘부분적인 신앙’을 경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주일 예배 한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직장, 인간관계와 양심, 말과 행동까지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도 함께 짚어야 합니다. 설교는 ‘온전하게 하라’는 말씀을 매우 강한 완전주의적 어조로 풀어 갑니다. 마치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오늘 하나의 악을 버리고, 내일 또 다른 거짓을 깨닫고, 그렇게 조금씩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오랜 인내와 반복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은 반드시 단번에 완성된다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하게 계속 나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말씀의 정신에 더 가깝습니다.

 

설교는 이후 월명동 개발 이야기를 길게 소개합니다. 앞산을 얼마나 깎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측량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직접 기준을 정해 주셨다는 이야기, 거대한 바위를 옮기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등이 매우 자세하게 이어집니다. 처음 들으면 이것은 단순한 성공 사례처럼 보입니다. 작은 일도 대충 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교훈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하는 자세는 신앙인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계속될수록 그 중심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월명동이라는 특정 장소와 ‘선생’이라 불리는 특정 인물의 경험이 설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월명동을 직접 측량하셨고, 월명동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전이며, 지구에서 가장 좋은 길지이고, 하나님께서 시대의 사명자를 그곳에 세우셨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창조주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특정 장소의 아름다움이 특정 인물의 절대적 사명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더욱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지형도 아닙니다. 참된 성전은 주님께서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는 인간의 마음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훌륭한 건축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이름 없는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장소는 거룩함의 원인이 아니라, 거룩함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설교에는 개인적인 꿈과 영적 체험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꿈에서 배설물을 닦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이렇게 계시하셨다’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양심을 깨우치시고 깊은 깨달음을 주시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꿈과 느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지 여부는 반드시 말씀과 그 열매를 통해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영향을 누구보다 자세히 설명했지만, 동시에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동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영적 체험은 언제나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지만, 설교가 후반부로 갈수록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선생의 정신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 ‘항상 기준에 줄 맞추라’, ‘맞추지 않으면 서열에서 나와야 한다’는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설교의 중심축이 하나님에게서 특정 인간 지도자에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여기서 이 설교가 JMS라는 배경에서 선포된 설교라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설교 속 ‘선생’은 추상적인 스승이 아니라 정명석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과 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는 말은 일반적인 신앙 권면이 아니라, 실제 조직 안에서 지도자를 중심에 두는 신앙 구조를 반영하는 언어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를 단순한 열심의 권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배경을 알고 읽으면 설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어 보면, 천국의 모든 천사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천사는 자기 이름을 증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줄을 맞추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천사는 그 선과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지도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인도합니다.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만일 설교가 점점 지도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 질서가 뒤바뀌기 시작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설교는 또한 ‘하나님과 그 사명자에게 관심 없는 자는 대가를 받는다’,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제자가 아니라 아저씨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6:5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 지도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지도자도 주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어떤 지도자도 신앙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설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황금 신부천국’, ‘신부답게 영도 육도 깨끗이 하라’,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간 자가 없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경건한 삶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지도자 중심의 신앙과 결합될 때는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이 설교자는 대한민국 법원에서 성범죄에 대해 유죄가 확정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와 ‘깨끗함’을 반복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성경적 권면만으로 읽을 수 없으며, 실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과 설교의 일치 여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말보다 삶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천국을 말하고, 거룩함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더라도 실제 삶이 그것과 반대라면 그 사람의 말은 점차 생명을 잃게 됩니다. 참된 진리는 반드시 삶으로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화려한 언변이나 많은 계시 주장보다, 그의 삶이 주님의 계명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설교 전체를 한마디로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을 대충 하지 말라’, ‘회개를 형식적으로 하지 말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라’,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과 일을 살펴보라’는 권면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요소들은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특정 지도자의 권위를 강화하는 논리 속으로 흡수됩니다. 좋은 성경 구절과 생활의 지혜가 결국 인간 지도자를 절대화하는 구조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깔짝거림’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만 향해야 할 사랑과 신뢰와 순종이 점차 한 인간에게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거듭남은 지도자를 얼마나 열심히 증거했느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자기애와 지배욕, 거짓과 탐욕을 얼마나 주님의 능력으로 버려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으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나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 그리고 이성 안에서 자라갑니다.

 

결국 이 설교가 말하는 ‘본격적으로 하라’는 권면은 방향만 바로 잡는다면 매우 귀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격성’의 대상은 특정 지도자도, 특정 장소도, 특정 조직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말씀의 진리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것이 신6:5가 말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며, 또한 스베덴보리가 평생 일관되게 증언한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SY.40, 변승우 목사,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 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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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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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의 영토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가나안 땅’은 주님의 나라, 곧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며, 한 사람 안에서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거듭난 마음과 삶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 천국으로 이동하는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마음과 생활을 다스리도록 하는 거듭남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천년왕국은 주님이 재림할 때 가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은, 표현과 교리적 배경은 다르지만, 천국을 단지 미래의 장소로만 보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상태로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천국은 시간과 장소 이전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5장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경계는 현대 독자에게는 낯선 지명들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남쪽 경계, 동쪽 경계, 북쪽 경계, 서쪽 경계가 세밀하게 열거되기 때문에, 이 본문을 읽다가 그저 고대의 토지대장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는 불필요한 기록이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땅의 경계가 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질서와 한계를 나타냅니다. 각 지파는 천국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를 표상하며,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그 선과 진리가 활동하는 고유한 영역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능과 은사를 갖는 것이 아니듯, 천국의 모든 공동체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사랑의 선을 중심으로 하고, 어떤 공동체는 신앙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며, 또 어떤 공동체는 순종과 섬김의 선을 중심으로 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과 경계는 분열이나 차별이 아니라, 하나의 천국을 이루는 다양성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중에서도 유다 지파는 특별히 주님에 대한 사랑, 더 깊게는 주님의 신적 사랑과 천적 나라를 표상합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땅이 먼저 상세히 기술되는 것은 참된 교회의 모든 질서가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랑에서 나올 때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논쟁적인 지식이 되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진리는 사람을 살리고 섬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는 이야기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나는 얼마나 넓은 땅과 큰 복을 받을 것인가’보다 ‘내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느 영역까지 다스리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말, 경제생활과 인간관계, 정치적 판단과 종교적 열심 가운데 어느 부분까지 주님의 사랑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이 본문에 대한 더 내적인 적용입니다.

 

설교자는 제비뽑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중요한 일을 제비로 결정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도 제비로 이루어졌고, 요나의 책임을 가려낼 때도 제비를 뽑았으며,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정할 때도 제비를 사용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비는 인간의 계산과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가 ‘제비뽑기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의지’라는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직접 원하시고 일으키신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행동을 미리 조종하는 결정론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을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으로 인도하는 신적 질서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시지만, 동시에 사람이 악을 선택할 자유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것을 허용하시고,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가 나오도록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허용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말하면, 인간이 저지른 악과 거짓, 폭력과 불의를 하나님께 돌리는 위험이 생깁니다. 모든 일이 섭리의 바깥에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설교에서 가룟 유다의 제비와 죽음이 언급되면서, 그의 배반과 자살까지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간 사건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신적 성품을 함께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반과 자살을 명하시거나 예정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다는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따라 주님을 배반했으며, 주님은 그 악한 선택까지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셨다는 것과, 그 악을 미리 원하시고 강제로 행하게 하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 역시 사람들의 악의와 폭력이 주님의 뜻이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악을 받아 이기시고 인류 구원의 길로 바꾸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신적 섭리의 놀라움입니다. 섭리는 악을 악으로 명령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악조차도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굴복시키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설교자가 설명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았다’는 예정론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어느 누구도 지옥을 위해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운명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정은 특정한 사람만 구원하기로 정한 예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로 정하신 신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도 인간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아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선택을 강제로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향을 잘 알아 어떤 선택을 할지 예상한다고 해서, 자녀의 선택을 부모가 대신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주님의 예지는 인간의 예상과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지만, ‘아심’과 ‘행하게 하심’은 여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선택할 모든 가능성과 결과를 영원부터 아시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도록 가장 섬세하게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지워 버리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끝없이 선으로 이끄시는 사랑과 지혜의 통치입니다.

 

설교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인 태도를 대조한 부분은 목회적으로 귀 기울일 만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인도를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 인간적인 낙관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광야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겪는 시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곧바로 가나안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욕망과 습관, 두려움과 자기 신뢰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은 마치 메마른 광야를 걷는 것 같은 시간을 지나갑니다. 그때 불평은 단순히 입으로 투덜거리는 행위보다,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이전의 악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내적 태도를 뜻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감사하면 더 큰 감사할 일이 생긴다’거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면 넓은 빌딩과 땅을 받는다’는 식의 적용은 조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는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한 영적 기술이 아닙니다. 참된 감사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드리는 조건부 반응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영원한 선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태도입니다. 감사의 열매가 반드시 건물과 재산, 건강과 장수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감사는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마음을 지켜 주고,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며,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기업은 넓은 토지나 빌딩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큰 땅을 받은 이유를 ‘광야에서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연결하는 것도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속뜻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고 갈렙은 유다 지파에 속했으며, 두 사람은 각각 기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 전체가 받은 넓은 기업이 갈렙 한 사람의 긍정적인 태도에 대한 개인적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유다 지파의 위치와 기업은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질서 안에서 정해진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도 기업의 크기는 세속적 성공의 양을 나타내기보다, 각 선과 진리가 천국의 질서 안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범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으면 더 큰 부동산을 받는다’는 식으로 연결하기보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더 깊은 선과 진리를 맡기신다’고 이해하는 편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설교에서는 ‘이방 사람과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오늘의 불신자들과 관계 맺는 문제로 적용하면서, 이방 사람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되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권면에는 신앙의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진지한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의 거짓과 탐욕, 음란과 자기애에 쉽게 미혹될 수 있으므로,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 ‘이방 민족’은 단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한 사람 안에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은 이웃집의 불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교만, 탐욕, 증오, 기만, 음란, 복수심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밖에 있다고 해서 모두 멸해야 할 이방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영적으로는 가나안 족속의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교회 밖에서도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멀리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그 사람 안의 악에는 동의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되 우월감이나 적대감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설교의 후반부로 갈수록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보다 정치적 주장과 국가적 위기론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특정 정치인, 정부, 선거관리 기관, 군부, 간첩, 부정선거, 연방제, 국민저항권 등에 대한 강한 주장들이 이어지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특정한 정치적 행동과 집회 참여를 촉구합니다. 이 주장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말들이 예배 가운데 성도들의 내면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말씀의 설교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자신의 악을 보게 하며, 회개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적대와 공포가 말씀의 중심을 차지하면, 성도는 자기 안의 악보다 외부의 적을 더 크게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가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무엇을 생각할 때 기쁨을 느끼는가에 의해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며, 국가의 정의와 자유를 염려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확신이 증오와 모욕, 공포와 분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기독교’를 말하더라도 그 내적 정서는 천국의 사랑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은 같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의 종류에 따라 질서 있게 모이는 곳입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는가보다 그 입장을 어떤 마음으로 품고 표현했는가가 영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설교 중에는 ‘그놈’, ‘멍청하다’, ‘무식이 충만하다’, ‘인생 조진다’, ‘뒤진다’와 같은 거친 표현과, 특정 성도의 외모와 몸매, 나이와 죽음을 소재로 삼는 농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설교자는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고 성도들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회중이 웃고 박수치며 설교자와 친밀하게 교감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배와 설교의 언어는 단순한 대중 연설이나 오락 프로그램의 언어와는 달라야 합니다. 말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나는 형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심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람의 존엄을 낮추거나 성도를 공개적으로 당황하게 하는 언어가 반복되면 그 열심의 그릇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 성도의 몸매를 ‘처녀 같다’고 평가하거나, 남편과 함께 몇 살에 ‘뒤지라’고 농담하는 방식은 친밀함이라는 이름 아래 넘어가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설교자의 권위 앞에서 성도는 불편함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천국적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상대의 수치를 덮으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인격을 세워 줍니다. 설교자의 유머도 성도를 웃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설교자 자신을 낮추거나 말씀의 진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더 온전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설교자가 자신의 부흥회 경력, 교회와 한국 교회를 위해 한 일, 신학교 강의 경험, 정치적 영향력, 외국 대사와의 만남 계획 등을 길게 언급하는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역이 우연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회중에게 확신시키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많은 집회를 인도한 경험은 존중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영적 권위는 과거의 업적이나 많은 군중, 유명 인사와의 관계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는 말씀이 지닌 진리와 설교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람은 주님을 섬기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가’를 자기 정체성의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이때 사역은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조금씩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 중 구치소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스위든보그’(스베덴보리의 영어식 발음)와 ‘썬다 싱’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설교자가 스베덴보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사후세계와 천국에 관한 증언을 남긴 인물로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전한 천국과 지옥의 가르침은 단순히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사후에 가는 곳은 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일치한다고 설명합니다. 입술로 천국을 원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을 통해 천국이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사랑과 말과 행동을 천국의 질서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 말미의 치유기도에는 병든 성도들을 향한 목회적 연민과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며,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사건을 믿고 성도들의 질병과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는 육체의 회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이해성이 열리는 것이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선한 삶을 실천하지 못하던 사람이 새롭게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생명이 소멸된 상태에서 영적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치유기도는 육체의 병이 낫기를 구하는 동시에, 교만과 증오, 탐욕과 거짓, 절망과 불신이라는 내적 질병이 치유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직후 계좌를 안내하며 예물을 요청하는 장면도 헌금의 내적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헌금은 주님께 돈을 드려 복을 얻는 거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자발성과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며, 질병 치유나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와 직접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액수가 크더라도 자기 과시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내적으로는 빈 것이 될 수 있으며, 아주 작은 예물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에서 드린다면 주님 앞에서는 귀한 것이 됩니다.

 

이 설교 전체를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점은 강한 확신과 생동감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박물관 속의 옛이야기로 두지 않고, 오늘의 삶과 국가 현실, 개인의 감사와 믿음에 직접 연결하려고 합니다. 회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찬송과 기도,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면서 예배를 살아 있는 사건으로 만들려는 열정도 분명합니다. ‘가나안 땅을 지금부터 경험해야 한다’, ‘이방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광야에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메시지들은 신앙생활에 유익한 방향성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이 귀한 열정이 더욱 온전한 영적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자유와 함께 설명하고, 허용된 일과 하나님께서 직접 뜻하신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또한 가나안의 적을 외부의 정치 세력이나 불신자에게 먼저 적용하기보다, 설교자와 회중 각자의 마음속 악과 거짓에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정치적 판단은 사실 확인과 절제를 거쳐 표현하고, 예배가 특정 진영의 동원 공간으로 변하지 않도록 말씀의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감사는 물질적 보상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하고, 믿음은 현실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신력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사는 충실함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땅 분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큰 땅을 주실 것인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주님께서 내 안의 어느 영역까지 다스리고 계시는가’입니다. 내 정치적 생각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말투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고, 예배와 찬송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이웃을 판단하는 마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겠다는 열심은 크지만 정작 내 안의 교만과 분노는 가나안 족속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땅 나누기는 내 인생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드리고, 사랑과 진리가 각각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의 경계가 하나하나 정해졌듯, 거듭나는 사람의 삶에도 영적 경계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허용하지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허용하지 않으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경계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되 모든 사건을 성급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단정하지 않고, 국가를 사랑하되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되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해치지 않는 것이 가나안의 참된 경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중심과 경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면 진리는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악에서 건져 내는 빛이 되고, 권위는 사람을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책임이 되며, 감사는 복을 끌어오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기쁨이 됩니다. 또한 섭리는 인간을 미리 조종하는 숙명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을 선택하도록 순간순간 이끄시는 주님의 부드럽고도 끈질긴 사랑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단지 ‘제비뽑기에도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는 한 문장이 아닙니다. 더 온전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세상의 복잡한 사건들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비가 뽑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업을 받은 사람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가정과 교회, 직업과 재물, 건강과 영향력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 기업을 자기애와 지배욕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땅은 가나안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애굽과 바벨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가나안 정복은 밖에 있는 사람을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악을 주님의 능력으로 몰아내는 일입니다. 참된 땅 분배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제 기능을 찾는 일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의 자유를 없애는 통제가 아니라, 그 자유를 보호하면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참된 감사는 고난을 부정하는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붙들고 선을 선택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참된 천년왕국은 특정 정치 세력이 승리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고 다스리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의 마지막 ‘땅 나누기’는 오래전 이스라엘의 영토 분배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 땅을 나누고 계십니다. 사랑이 다스려야 할 곳, 진리가 밝혀야 할 곳, 회개가 시작되어야 할 곳, 섬김이 이루어져야 할 곳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땅을 탐하거나 외부의 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자신의 기업을 정직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경계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자리 잡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며, 이 땅에서부터 경험해야 할 주님의 나라입니다.

 

 

 

SY.37, ‘약속을 지켜야 할 사람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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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심을 ‘신실함’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설교입니다. 설교자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약속했다가 형편이 좋아지자 쉽게 약속을 뒤집은 유다 백성의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반대로 수백 년 동안 조상의 약속을 지켜 온 레갑 자손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이어 하나님의 성품 역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므로, 하나님의 백성 역시 약속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전체적으로 본문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며 실제적인 적용까지 연결하는 설교라는 점에서 듣는 이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보면, 이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신앙은 입술의 고백보다 삶 속에서 드러나는 의지와 행동으로 판별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결국 그의 삶을 결정하고, 삶이 곧 그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외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말씀은 단순히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윤리 교육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언제나 인간의 외적 행동보다 먼저 그 행동을 낳는 내적 상태를 다룹니다. 예레미야 34장에서 유다 백성이 약속을 어긴 이유는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 약속이 참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위기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약속은 했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바뀌자 행동도 즉시 바뀌었습니다. 외적인 순종은 잠시 있었지만 속 사람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보여 주는 더 깊은 진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행동의 변화’보다 ‘사랑의 변화’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기도 하고, 보상을 바라며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점차 그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면, 나중에는 선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됩니다.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은 전자의 상태에 머물렀고, 레갑 자손은 후자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 주는 표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약속을 지켜라’는 명령 이전에 ‘왜 그 약속을 지키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레갑 자손에 대한 해석에서도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레갑 자손을 ‘신실한 사람들’로 소개하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들이 반드시 이상적인 공동체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의 금주, 장막 생활, 토지 미소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신 일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가문의 특별한 규례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은 그들의 생활 방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원칙을 흔들림 없이 지킨 태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장막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마음의 일관성을 보여 주는 표상으로 레갑 자손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방 계통인 레갑 자손을 유다 백성과 비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말씀 전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구조입니다. 혈통이나 종교적 명분보다 실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서는 사람이 어떤 교파에 속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지가 결정적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레갑 자손은 ‘이방인이면서도 신실한 사람들’이라는 역사적 사례인 동시에, 진리를 들은 사람보다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더 주님께 가까울 수 있다는 영적 원리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부에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세우고, 가정을 유지하며,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복음 전도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적용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일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이유는 단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 자체가 서로 신뢰하는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이익 때문에 말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이므로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는 삶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는 훈련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를 지금 이 땅에서 조금씩 배우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설교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신실하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목회적 격려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신실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고, 멀어질수록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관계를 자주 ‘주님은 언제나 같은 태양처럼 비추시지만, 인간이 등을 돌리거나 얼굴을 돌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안정되고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마지막에 소개된 폴리캅의 순교는 매우 인상적인 예화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보다 주님께 대한 충성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순교 역시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보다 주님 사랑을 선택하는 모든 영적 싸움이 넓은 의미의 순교입니다. 사람은 매일 자신의 이익과 진리 사이에서 선택합니다. 그때마다 진리를 선택하는 작은 순종들이 모여 하나의 인격을 만들고, 결국 천국의 사람을 형성하게 됩니다.

 

종합하면, 이번 설교는 ‘약속’이라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책임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전달한 메시지입니다. 특히 신앙을 삶의 실천으로 연결하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약속을 지키는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천국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지켜지는 약속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실함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움직이는 기준이 두려움이나 이익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SY.38,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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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6,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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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특히 ‘무병장수’, ‘경제적 번영’, ‘사업 성공’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태도를 경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에 두는 삶이 참된 믿음이라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성경적이며, 신앙이 단순히 현세적 유익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부분은 자연적인 복보다 영적인 생명을 먼저 구해야 한다는 일관된 가르침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진 장소인 ‘가이사랴 빌립보’를 로마 황제 숭배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부분은 설교적으로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황제를 ‘’으로 떠받드는 도시 한가운데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세상의 권세보다 주님을 참된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설명은 성경 본문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이후부터 예수님의 관심이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다는 흐름을 따라가며,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는 질병이나 가난이 아니라 죄와 영원한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도 핵심을 잘 짚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부터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반복하여 예고하십니다. 설교자는 이 점을 통해 ‘신앙의 중심은 기적이 아니라 구속’이라는 사실을 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여기에는 중요한 공감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오래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이며, 육체의 건강보다 영혼의 상태가 훨씬 중요합니다. 따라서 병이 낫는 것 자체가 구원의 본질은 아니며,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일은 인간의 속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복은 일시적이지만,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의 사람’과 ‘마태복음 16장 이후의 사람’이라는 구분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하나의 영적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전자는 건강과 성공, 형통을 중심으로 예수를 찾는 사람이며, 후자는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설교적 장치로서는 상당히 효과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분을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장 구분이 곧 인간의 영적 단계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진행 과정을 중요하게 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6장 이전’과 ‘이후’라는 구분은 문자적인 장 구분이라기보다,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영적 전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읽는다면 더욱 풍성한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아 만류하는 장면에 대한 해석 역시 흥미롭습니다. 입으로는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막상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신앙고백은 했지만 아직 자기중심성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더라도, 자신의 ‘proprium’, 곧 자기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반복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한 직후에도 여전히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단번에 완전한 상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긴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기 사랑을 벗겨 가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거쳐 가는 하나의 영적 모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의 핵심 구절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에 대한 적용도 매우 진지합니다. 특히 ‘육체의 안일만 추구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소비주의와 번영주의 신앙을 향한 좋은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 가는 변화의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 중요한 보완점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부정하거나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욕구를 무조건 억압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인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 자체가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는 자기 본성’, 곧 ‘proprium’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 생명은 오히려 사람의 참된 자아를 회복시킵니다. 따라서 자기 부인은 인간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짓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후반부에서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자기 변화에 있다’는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앙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라는 지적은 오늘날에도 깊이 새길 만한 내용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상태를 여러 저작에서 매우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다만 ‘무병장수나 경제적 형통을 바라는 사람은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갇힌 사람이며, 그 믿음은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표현은 조금 조심스럽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이 질병과 가난 때문에 교회의 문을 두드립니다. 성경에도 병 낫기를 구한 사람, 먹을 양식을 구한 사람, 도움을 구한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치유하시며 돌보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러한 자연적 소망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으로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건강 때문에, 가정 문제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주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을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주님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방향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발전을 ‘외적인 사람, 즉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자기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세상 중심에서 천국 중심으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이 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의 목표를 현세적 성공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강한 문제의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놓치기 쉬운 본질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는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상징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을 주님의 진리로 끊임없이 벗겨 가시는 거듭남의 실제 과정이라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죽은 뒤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 거듭남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속 사람이 살아나는 영적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16장은 단순히 ‘축복 신앙에서 십자가 신앙으로’ 넘어가는 장이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자연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이끌어 가시는 거대한 전환점으로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SY.37, ‘약속을 지켜야 할 사람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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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5, ‘요즘 교회가 가장 두려워 하는 6가지 질문’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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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분명히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미워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마지막까지 그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난이나 분노의 언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자기 성찰의 언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참된 체어리티는 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상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건강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헌금에 관한 부분도 생각보다 훨씬 균형 잡혀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으로 설명하고,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감사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 역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관리해야 하며, 투명성과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재정 운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접근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헌금은 단순히 재정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랑의 상응적 표현’이라는 점까지 연결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액수보다 사랑의 질이 중요하며, 투명성 역시 외적인 제도가 아니라 먼저 그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한다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죄를 다루는 부분 역시 영상은 결코 목회자를 공격하거나 지도자를 무너뜨리자는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도 사람이며 연약할 수 있다’, ‘문제는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목회자를 사랑하는 길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돕고 필요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려는 균형 감각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상당 부분 만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악을 미워하되 사람의 구원을 포기하지 말라’는 점을 더욱 강조했을 것입니다. 징계도 궁극적으로는 회복을 위한 것이며, 진리와 자비는 언제나 함께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성도’에 대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영상은 질문 자체를 불신앙으로 몰아서는 안 되며, 베레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주님께서 주신 귀한 능력으로 보았으며, 맹목적인 수용보다 말씀 안에서 분별하는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질문의 출발점도 중요하게 봅니다. 진리를 사랑하여 묻는 질문과 자기 우월감이나 반항심에서 나오는 질문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이 적어도 ‘질문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청년 문제를 다루는 부분도 상당히 균형 있습니다. 청년들을 단순히 ‘믿음이 약한 세대’로 몰아가지 않고, 교회가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프로그램보다 진실성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적 형식보다 내적 생명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영상이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별 주장들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의 ‘최종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있습니다. 영상은 교회의 생존 본능, 재정의 불투명성, 지도자의 책임 회피, 질문을 막는 문화 등을 주로 외적 구조와 운영 방식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왜 그런 구조가 생겼는가? 왜 교회가 조직을 지키려 하는가? 왜 재정을 투명하게 다루지 못하는가? 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 그 뿌리를 그는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찾습니다. 외적 제도는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상은 ‘교회가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왜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질 것입니다. 그 답은 ‘주님의 교회를 자신의 교회처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헌금 문제도 ‘왜 투명하지 못한가?’를 넘어 ‘왜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라는 내적 사랑의 문제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결국 외적 개혁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각 사람의 거듭남이며, 교회의 상태는 그 구성원들의 영적 상태가 모여 형성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교회개혁적 관점’에서는 매우 균형 있고 성숙한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며, 질문을 허용하고,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내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외적 문제의 뿌리를 인간 내면의 사랑의 질서와 거듭남의 문제로까지 연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개혁은 조직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영적 개혁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덧붙인다면, 이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도 매우 깊이 조화를 이루는 글이 될 것입니다.

 

 

 

SY.36, ‘기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는 ‘축복 중심 신앙’을 비판하면서, 마태복음 16장을 기점으로 신앙의 방향이 근본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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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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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책입니다. 어떤 이는 세계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예언서로 읽고, 어떤 이는 당시 교회를 향한 상징적 메시지로 이해하며, 또 어떤 이는 인간 영혼의 여정을 담은 영적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이번 강의는 이러한 여러 해석 가운데서도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적 흐름으로 연결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출애굽과 광야, 성막과 절기, 선지자들의 예언을 거쳐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다는 큰 틀을 따라 설명을 이어 갔으며, 각각의 사건을 서로 독립된 이야기로 보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설계도 안에서 이해하려는 점이 강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기보다 처음과 끝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의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성경의 여러 사건을 단순한 과거의 역사로 보지 않고 ‘모형’으로 이해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출애굽은 단순한 민족의 탈출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더 큰 구원의 모형이며,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연단을 받는 과정의 모형이고,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나라의 모형으로 설명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약이 구약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여러 곳에서 구약의 사건들을 ‘장차 올 일의 그림자’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점차 드러나는 책으로 이해하려는 이번 강의의 기본 방향은 충분히 귀 기울여 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함께 읽어 온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왜 그 사건들이 모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의는 모형 자체를 매우 충실하게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은 단지 미래를 예고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과 인간의 영혼,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창조 질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은 과거의 역사인 동시에 오늘도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과정이며,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지나가는 영적 시험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어느 한 시대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말씀하시는 살아 있는 계시가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번 강의는 요한계시록을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구속사의 완성으로 이해합니다. 대환난과 메시아 왕국, 백보좌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 속에서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과정으로 설명되며, 성도는 이러한 큰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시대를 분별하고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이처럼 미래를 향한 소망과 경각심을 함께 일깨우려는 강의의 의도는 분명하며, 신앙을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해하려는 진지한 태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같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도 먼저 인간의 내면을 바라봅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역사 속의 미래 사건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의 상태이며, 짐승은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된 욕망을, 새 예루살렘은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교회와 거듭난 인간의 마음을 함께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는 책인 동시에,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 싸움과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주는 책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의 관점이며, 말씀을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현재형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강의가 성경의 큰 숲을 보여 주는 데 매우 힘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숲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 숲이 오늘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구속사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저는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여러 주제들도 결국 이 하나의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종말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미래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결국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강의는 종말의 여러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반복하여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곧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지식이 삶의 거룩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오늘날 종말론이 자칫 호기심이나 시대 분석에만 머무르기 쉬운 현실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 있는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은 두려움을 조성하기 위한 주제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더욱 깨어 있게 만드는 말씀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의는 계속해서 상기시켜 줍니다.

 

이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모든 교리는 결국 삶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지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생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강의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삶의 변화와 순종을 강조하는 모습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정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와 설명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결론만큼은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다시 한 번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번 강의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기는 자’를 종말의 시대를 끝까지 믿음으로 견디는 성도로 설명합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약속된 영광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도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이기는 자’를 먼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과 연결합니다. 그가 말하는 싸움은 무엇보다 자기 사랑과 주님을 향한 사랑 사이의 싸움이며, 거짓과 진리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특별한 영적 영웅이라기보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한 성향과 거짓된 생각을 주님의 도움으로 하나씩 이겨 가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쟁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모든 신앙인의 마음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 현실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특정 시대를 위한 책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말씀이었고,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말씀이었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현재형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 의미가 마지막 시대에만 국한된다면, 지난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직접적인 생명의 말씀이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 읽기 시작하면, 일곱 교회도, 일곱 인도, 일곱 나팔도, 새 예루살렘도 모두 오늘 우리의 신앙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을 단지 예언서가 아니라 거듭남의 책으로까지 이해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 흥미롭게 느껴졌던 부분은 강의가 성경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여러 시대를 거쳐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다는 설명은 매우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또 하나의 흐름을 더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영혼의 흐름입니다. 창세기는 한 사람의 신앙이 시작되는 때이며, 출애굽은 세상을 떠나는 첫 결단이고, 광야는 시험의 과정이며, 가나안은 거듭난 삶의 평안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 거듭남이 완성되어 새 예루살렘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역사책인 동시에 인간 영혼의 자서전이 됩니다. 그것이 상응의 관점이 성경을 더욱 현재형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종말을 바라보는 방향에 있습니다. 강의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를 변화시키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붙드는 것보다, 미래의 소망이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가장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번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종말론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종말론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강의는 여러 예언과 상징을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말씀을 붙드는 삶,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삶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결국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종말에 대한 지식이 늘어날수록 사랑은 식어 가고, 겸손은 사라지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만 커진다면 그것은 말씀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반복해서 삶의 변화를 강조한 점은 깊이 새겨볼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말씀의 목적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역사와 예언, 모든 교리와 계명이 결국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만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계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더해질 때 말씀은 미래를 알려 주는 예언서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내적 의미를 끊임없이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교리를 세우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사람과 주님이 더욱 깊이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번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가장 큰 차이는 ‘모형’과 ‘상응’이라는 두 관점의 차이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같은 사건들을 오늘도 인간의 영혼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하나는 역사의 흐름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거듭남의 과정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성경을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오늘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여러 상징들이 주로 미래의 사건으로 해석될 경우,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 예루살렘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일 뿐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교회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벨론 역시 역사 속의 한 세력만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거짓 신앙의 상태를 함께 나타냅니다. 이러한 상응의 의미를 함께 살펴볼 때 요한계시록은 특정 시대만을 위한 예언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신앙인에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책이 됩니다. 저는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큰 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향한 진지함입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 전체를 하나로 이해하려 하며,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한 가치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 속뜻도 열리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존중하는 마음은 언제나 신앙의 가장 소중한 출발점입니다.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저는 다시 한번 성경을 읽는 두 가지 시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수록 후자의 시선이 점점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말씀은 단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천국 사람으로 빚어 가시기 위해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도 마지막 시대의 예언서인 동시에,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거듭남의 기록입니다.

 

결국 모든 성경 읽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 말씀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만일 그 말씀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며, 자기 사랑을 조금씩 내려놓게 한다면 우리는 이미 말씀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가장 중요한 점이었으며,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성경 읽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과거의 기록도, 미래의 예언도 넘어, 오늘도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SY.35, ‘요즘 교회가 가장 두려워 하는 6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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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3, ‘신학교 자퇴합니다’, 제가 본 것은 ‘추악한 거래’였습니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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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아인교회와 농아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여기서도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육체의 눈과 귀가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감각하는 주체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귀는 자연계의 소리를 영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며, 혀와 성대는 영의 생각과 애정을 자연계의 음성으로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 기관의 손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적 청각이나 생각하고 교통하는 능력까지 결여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통로가 제한된 것이지, 그 사람의 영이 불완전하거나 인간성이 덜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사람의 본질이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고,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몸, 보지 못하는 몸, 걷지 못하는 몸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영원한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에서 영이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 통로가 제한된 상태이지, 영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22는 농인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청각은 단순히 물리적 소리를 더 크게 듣는 능력이 아닙니다. 영계의 말은 생각과 애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교통입니다. 지상에서는 음성, 문자, 표정, 몸짓과 같은 외적 기호를 거쳐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애정이 그 표현 안에 함께 담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도 육체를 벗은 뒤에는 다른 영들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겪었던 의사소통의 장벽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인의 지상 삶을 단지 ‘사후에 고쳐질 결핍’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보다 그의 마음의 애정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는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조금도 덜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도 언제나 육체적 청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로 설교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수어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되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는 기관의 상태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말한다’는 것도 음성을 낸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어는 얼굴 표정과 공간, 움직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애정과 관계를 풍성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인을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실제 언어 능력과 인간적 교통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 목회 역시 단순히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기는 보조적 사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육화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농인 공동체에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고립, 교육과 정보 접근의 어려움,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인 목회자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누며, 교회가 참된 영적 공동체가 되도록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특히 교회는 농인을 일방적인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농인 공동체는 언어가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교통의 본질이 음성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나눔이라는 사실, 몸 전체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의 언어, 곧 생각과 애정이 표현 전체에 담기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장애를 곧바로 영적 결함의 표지로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몸은 유전, 질병, 사고, 환경 등 수많은 자연적 원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고, 그가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문자로, 누군가는 수어와 표정과 관계를 통하여 받습니다. 통로는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농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는 기적’만을 목표로 삼으면,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공동체, 그리고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치유는 신체 기능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립이 교통으로, 배제가 공동체로, 수치가 존엄으로 바뀌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AC.322의 마지막 문장인 ‘감각하는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도 단순히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은 감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다른 사람의 애정과 필요를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온전한 인간,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완전한 인간 구조를 가진 존재이며, 다만 자연계의 특정 감각 통로에 제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후에는 그 제한이 벗겨지고,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생각과 애정과 교통의 능력이 훨씬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이미 사람이었던 자신이 육체의 제약 없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22는 농인들을 향해 ‘언젠가 귀가 열릴 것이니 지금의 삶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인들에게 ‘육체의 귀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이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참으로 말하는 이는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농인을 섬기시는 그 목사님의 사역은 바로 이 영적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하여 교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귀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2, 창4 앞, ‘AC.321의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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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걸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세요. 안 믿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들립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 활동에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AC.321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글입니다. 앞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사고, 그리고 언어 능력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히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영이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false notion)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형체 없는 의식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사람의 실질적인 내적 인간, 속 사람이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입니다. 따라서 감각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게 있습니다.

 

영들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지상의 한낮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의 빛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빛이며, 그 빛 안에서 천사들은 사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태까지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시각은 단순히 더 밝게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보는 능력입니다.

 

청각 역시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영계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전달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골라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이 생각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들의 언어는 짧은 표현 안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까지 함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이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다(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는 뜻입니다.

 

촉각에 관한 설명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감각이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촉각의 여러 차이와 형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의 본질이 어떤 대상과의 접촉과 반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각은 빛과의 접촉이며, 청각은 소리의 진동과의 접촉이고, 후각은 냄새의 기운과의 접촉입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바깥의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촉각은 모든 감각의 가장 일반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고통을 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욕망이 외적으로 드러나며, 악한 영들은 서로의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상태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 접촉이 그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선한 사랑과 지혜에 접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같은 영적 감각 능력이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에서는 행복이 되고 지옥에서는 고통이 됩니다.

 

이 글은 욕망과 애정도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사람이 전혀 다른 욕망을 새로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한 주된 사랑이 육체의 외적 제약을 벗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은 새로운 성품을 얻는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진짜 성품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사고 능력에 관한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idea) 안에는 지상에서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생각이 단순히 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내적입니다. 자연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의 제약을 받지만, 영계의 생각은 애정과 의미, 관계와 목적을 하나의 관념 안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생각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려면 많은 문장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곧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더 예리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확증하는 데 사용합니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지혜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능력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와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더 완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은 불완전한 인간의 잔재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인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이 글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오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기쁨과 고통으로 느끼는가를 포함한 생명 전체의 수용 능력을 뜻합니다. 천국의 생명은 선과 진리를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생명이며,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거짓에만 반응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참되다고 느끼며, 무엇과 결합하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AC.322는 죽음 뒤의 삶이 지상보다 희미하고 비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육체는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자연계에 나타내는 도구이며, 육체가 벗겨지면 영의 감각과 생각과 애정은 본래의 힘을 더욱 자유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성품에 따라 더욱 온전하고 분명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AC.322.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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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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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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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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