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칠 때, 그 중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앞선 EO.006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이유와 그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이며, 그러한 참여는 인간의 내면과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거나 특별한 종교적 감동을 느끼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과 은혜를 인간에게 전달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는 일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구원론과 영성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해와 의지,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주님의 ‘인플럭스’(influx)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말하는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생명의 유입은 같은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가르침입니까? 이 질문을 살펴보려면 두 전통이 말하는 신적 참여의 의미와 인간의 수용, 그리고 그 참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영적 변화를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에서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는 ‘신화’(theosis)라는 가르침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닮아 가며,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접하면 인간이 결국 하나님이 된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인간이 창조주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로 남아 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실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신화가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행동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변화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도덕적 노력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실제로 역사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신적 참여가 인간의 개별성을 없애거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창조된 목적에 더욱 충실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신화는 인간이 신성을 소유하여 독립적인 신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에 점점 더 깊이 참여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적 에너지와 하나님의 본질을 구별하는 이유가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쟁에 있지 않고, 인간의 구원과 영적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성경적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은 벧후1:4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참여’(koinonos)는 하나님의 생명과 무관한 외적인 보상을 받는다는 뜻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정교회는 이 말씀을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에 실제로 참여하도록 창조되고 구원받았다는 증언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요15:4-5에서 주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갈2:20에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고 고백하며, 엡3:19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히 외부에서 명령을 내리고 복종하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의 신적 참여를 증언한다고 해서 곧바로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 전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질과 에너지라는 신학적 개념은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이라는 진리와, 각 신학 전통이 그 결합을 설명하는 개념적 구조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교회에서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신적 에너지에 참여하게 됩니까? 동방정교회의 영성 전통은 일반적으로 ‘정화’(katharsis), ‘조명’(photismos), ‘신화’(theosis) 또는 하나님과의 결합이라는 흐름으로 영적 성장을 설명합니다. 정화는 인간이 죄와 정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조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이 밝아지고 영적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신화는 이러한 정화와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더욱 충만하게 참여하며 그분과 결합하는 영적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순서대로 한 번씩 통과하고 끝나는 기계적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회개하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며, 더욱 깊은 사랑과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기도와 금식, 성찬과 회개, 자선과 이웃 사랑을 이러한 영적 삶의 중요한 요소로 여깁니다. 특히 ‘시너지’(synergeia), 곧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등한 능력을 가진 두 주체로서 구원을 절반씩 이루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과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그 은혜에 응답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로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 그리고 주님의 인플럭스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비교할 만한 중요한 접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4에서 하나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과 인간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고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자신에게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살아 있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경험을 단순한 착각이라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일이 신적 섭리와 거듭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것으로만 경험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사랑하거나 악을 멀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며,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인플럭스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때때로 특별한 능력을 보내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존재하고 살아가며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지속적인 생명 공급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이 신적 생명의 유입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만 발생하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존재와 활동을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주님과 영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악한 사람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악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언제나 선과 진리이며, 악과 거짓은 인간이 그 생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합니다. 이것은 햇빛이 깨끗한 물과 오염된 물에 동일하게 비추더라도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의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햇빛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상태를 구별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28-33에서 신적 섭리의 목적이 인류로 천국을 이루고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플럭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단순히 살아 있도록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올바르게 받아들여 점점 더 깊은 영적 결합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생명의 공급과 구원에 이르는 영적 결합은 구별되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것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합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스베덴보리는 DLW.242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영적 빛은 인간의 여러 단계에 흘러들어올 수 있지만, 영적 열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정도에 따라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적 빛은 지혜와 진리에, 영적 열은 사랑과 선에 상응합니다. 이 구별은 인간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언제나 동일한 수준에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을 깊이 연구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정당화하며, 이웃을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는 영적 빛을 받아들였지만 의지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성숙이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아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고,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플럭스에 참되게 응답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적인 빛을 경험하거나 높은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하려 애쓰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방정교회의 신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 영적 완성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 단순히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정교회에서는 인간이 성령의 은혜에 협력하면서 정념을 정화하고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하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인간이 주님의 인플럭스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해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스스로 신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자신의 자유로운 응답과 삶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차이도 분명합니다. 정교회의 신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 참여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유입과 수용을 중심으로 이해됩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신적 에너지에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인간의 영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접점을 가지지만, 삼위일체와 신적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결합을 이해하는 신학적 구조에서는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각각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정교회의 신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비교할 때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할수록 인간 자신의 자유와 개별성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면 인간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의지를 잃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가 인간을 창조주와 동일한 본질로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DP.42-44에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자신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더욱 분명하게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역설처럼 느껴집니다. 주님께 더욱 의존할수록 인간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욕망에 얽매여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영적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수록, 그는 외부의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욱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신적 참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특별한 영적 체험을 얻는 일로 생각합니다. 기도 중에 강렬한 평화를 느끼거나, 신비로운 빛을 보거나,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영적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 신적 참여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는 신적 빛에 관한 가르침이 있지만, 그 전통 역시 외적인 신비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의 정화와 겸손, 회개와 사랑이 결여된 상태에서 특별한 체험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미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참된 영적 상태는 특별한 체험이나 높은 지식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천국의 빛에 속한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여전히 이기적인 사랑을 따르고 있다면, 그는 아직 그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특별한 영적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신의 이익보다 정직을 선택하며,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려 한다면, 그의 삶에서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내면 전체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는 그 행동의 내적인 사랑과 동기에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적 참여가 실제 삶의 사랑과 선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서 결합할 때 그것이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단순히 올바른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을 이루고자 하며, 지혜는 그 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밝혀 주고, 쓰임은 그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DLW.241에서는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생각과 선택이 형성되며, 결국 그 사랑은 실제 행동과 삶의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과의 결합은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종교적 순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정직을 지키는 일도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참된 영적 삶이 예배당과 수도원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자비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신적 참여를 말하면서 일상의 선한 쓰임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두 전통이 함께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진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추상적인 신비 속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더욱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영적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며,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이웃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쉽게 분노하고,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모욕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학적 지식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특별한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살피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애쓰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범위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듭날 수 없으며,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선을 행할 능력과 기회를 주셨으며,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인플럭스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문제에서 의미 있는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신적 참여의 참된 의미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특별한 영적 존재가 되었는가보다, 그가 얼마나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소유하거나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은혜를 실제로 전달하시며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모든 영적 생명과 사랑과 지혜는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결합을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개념보다,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와 인간의 수용,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한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그 결합의 신학적 구조와 의미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적 에너지와 인플럭스를 단순히 같은 개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두 전통의 가르침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결합은 단순한 지적 이해나 외적인 종교 행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받은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며, 일상의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감당할 때, 주님과의 결합은 우리의 내면과 삶에서 점점 더 깊어집니다. 결국 참된 신적 참여는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한다는 것의 영적 의미입니다. (EO.007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고 신화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참여는 단순한 신비 체험이나 도덕적 모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하며, 모든 영적 변화가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에 의존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는 서로 다른 신학적 구조에 속하므로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결합한다고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영적 완성에 이를 수 없으며, 참된 신앙이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면서, 주님의 인플럭스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신적 본질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체험을 얻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더욱 자유롭고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EO.006.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SL.EO.006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해설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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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6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는 교리입니다. 처음 이 말을 접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의 본질과 속성과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가리키며, ‘에너지’(energeia)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피조물 안에 실제로 역사하시는 신적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 에너지나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별도의 능력도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중간 실체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에너지 역시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만을 경험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초월성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깊은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가 구별된다면,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어떤 신적 활동과만 결합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가르치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influx)와 어떻게 만나고 달라집니까? 바로 이 문제가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히 14세기 동방정교회의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Gregory Palamas, 1296-1359)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당시 아토스산의 수도사들은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념을 정화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적 빛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영적 전통을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칼라브리아의 바라암(Barlaam of Calabria)은 수도사들이 주장하는 신적 빛의 경험과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본질을 피조물이 알 수 없다면, 인간이 실제로 경험한다고 말하는 신적 빛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팔라마스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어떤 피조물도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는 인간에게 실제로 전달되고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분으로 남아 계시면서도 인간에게 참으로 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134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비롯하여 1347년과 1351년의 공의회들은 팔라마스의 주요 가르침을 지지했으며, 이후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은 동방정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이 구별의 사상적 뿌리가 팔라마스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앞선 교부들에게도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역사하심은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팔라마스는 이러한 전통을 자신의 시대에 제기된 신학적 문제와 영적 체험의 논쟁 속에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여기서 동방정교회가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이유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참여한다고 말한다면,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동일해질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유한하며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된 선물이나 효과에만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것과만 관계를 맺는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동방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은 바로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되지 않으며 그 본질을 소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에너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적 역사하심이므로,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벧후1:4에서 신자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는 대목과 깊이 연결됩니다. 정교회는 이 참여를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의 존재로 변화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피조물로 남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생명과 거룩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은 참여할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구별은 인간의 구원을 단순한 법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으로 이해하려는 정교회 구원론의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지만, 하나님 안에 서로 분리된 두 신적 존재가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질은 참하나님이고 에너지는 그보다 낮은 또 다른 신적 존재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실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에너지 안에 참으로 현존하십니다. 팔라마스의 가르침에서 신적 에너지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적 에너지에 참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부를 떼어 받아 소유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피조물에게 분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서로 다른 신적 에너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신적 에너지는 세 위격이 공유하시는 하나의 신적 본질에 속하는 역사하심입니다. 이처럼 정교회는 구별과 일치를 함께 보존하려 하지만, 그 구별을 철학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을 단순히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관념상의 구별이라고 축소해서도 안 되며, 반대로 하나님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실체가 있다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이 구별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뉘지 않으시면서도 피조물에게 참으로 자신을 전달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문제와 연결되는 여러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장면도 나타납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인식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면서도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또한 마17:1-8의 변화산 사건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정교회의 팔라마스 전통은 이 빛을 단순한 자연적인 광채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영광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하며, 이를 ‘타보르의 빛’(Tabor Light)이라고 부릅니다. 정교회는 이 빛을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의 현현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 자체가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여 이러한 교리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한편 요14:9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4:10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함께 증언합니다. 이 두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할 것인가는 정교회와 스베덴보리가 각각 다른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지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4-16에서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존재의 발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DLW.28-39에서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사랑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여러 속성 가운데 두 가지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이 둘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전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별도의 피조된 능력을 보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물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생명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DLW.83-100에서는 영계의 태양이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나타나는 최초의 발출이며, 그 태양에서 나오는 영적 열과 빛이 각각 사랑과 지혜에 상응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과 인간은 이 영적 열과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랑하고 생각하며 영적 생명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영계의 태양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최초의 발출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구별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피조물 사이에 생명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처음 접하면 동방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이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 및 그 발출에 관한 가르침과 거의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두 전통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자체를 소유하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실제적인 신적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단순히 인간의 관념이나 종교적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신적 발출 및 인플럭스를 같은 교리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에서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역사하심이며, 인간은 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영계의 태양으로 나타나고, 영적 열과 빛을 통해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질서와 그 수용을 설명합니다. 영계의 태양과 영적 열과 빛을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에 그대로 대응시키면 양쪽의 신학적 구조를 혼동하게 됩니다. 특히 영계의 태양은 정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신적 에너지와 동일한 항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실제적인 결합을 설명하려는 목적에서는 만나지만, 그 결합의 존재론적 구조와 신적 발출의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창조와 수용’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DLW.52-55에서 그는 모든 피조물이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것들은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수용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나누어 받아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로 이루어졌다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분명하게 유지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사랑 자체나 지혜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환상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실제로 살아 있고 사랑하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플럭스는 바로 이러한 신적 생명의 끊임없는 유입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결합은 인간이 자기 안에 신성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그분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정교회의 신화와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특히 인간의 수용 능력과 영적 질서, 그리고 의지와 이해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를 실제로 받아들입니까? 스베덴보리는 DLW.242에서 인간의 이해는 높은 수준의 영적 빛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의지가 영적 열에 해당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의지가 실제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가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의지가 영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생명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려면 이해와 의지가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마음의 정화와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가르침과 중요한 비교가 가능합니다. 정교회 역시 하나님과의 결합을 단순한 지식의 획득으로 이해하지 않고, 회개와 기도와 정념의 정화, 사랑과 거룩함의 성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 변화의 핵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신적 결합을 이야기하면서 실제 삶의 변화를 제외한다면, 정교회의 신화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도 그 핵심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실제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깊은 기도 중에 특별한 빛을 경험하거나 강렬한 평화를 느낄 때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를 깨달을 때 신적 조명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신앙생활에서 소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 자체만으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서도 신비로운 현상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태도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신적 빛의 경험을 논의하는 전통 속에서도 겸손과 회개와 분별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영적 빛을 많이 받아 진리를 깊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참된 거듭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신비로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교만을 버리지 않고 이웃을 멸시한다면, 그의 체험만으로 영적 성숙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신비 체험은 없더라도 자신의 욕심과 분노를 살피고,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에게 진실하게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을 판단하는 데에는 외적인 체험보다 삶의 방향과 사랑의 성격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비교에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가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그 생명을 동일하게 받아들여 영적으로 선해진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생명을 공급하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내적 사랑과 상태에 따라 그 생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주님에게서 악이 흘러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신적 생명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잘못된 수용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적 결합은 단순한 존재론적 접촉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의존의 관계를 나타내지만, 주님과 실제로 선과 진리 안에서 결합하는 일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신다는 사실과 인간이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구원에 이르는 친교를 누린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피조물이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보편적인 진리와, 인간이 그 생명을 어떤 사랑과 의지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영적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됩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도 소유하거나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참된 친교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보존하면서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실제적인 결합을 인정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을 설명하는 중심 개념은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보다는 주님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 그 발출과 인플럭스, 그리고 인간의 수용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피조물은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적인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를 동일한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을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거나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신학적 개념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으로 악을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하나님과의 결합은 더 이상 추상적인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영적 현실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결합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EO.006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그분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면서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특히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신학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피조물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 대신 신적 사랑과 지혜, 영계의 태양을 통한 신적 발출, 인플럭스 및 인간의 수용이라는 구조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신적 에너지와 신적 발출의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구별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주님과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거나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거듭남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5.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SL.EO.005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의 신적 근원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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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5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의 신적 근원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이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가르침은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면,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것이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발출’(procession)은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한 존재가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어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시지만 성부보다 나중에 존재하기 시작한 분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한 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시고,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동일한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는 참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은 서로 다른 위격적 관계로 이해됩니다. 동방정교회는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그 신비의 방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교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오랫동안 갈등해 온 중요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만 발출하십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십니까?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논쟁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동방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서방교회의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한 다음,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전혀 다른 신학적 관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령 이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문헌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연결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이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면서, 성부에게서 발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중심에는 요15:26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성령의 영원한 근원에 관한 중요한 계시로 이해합니다. 성부는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이시며, 성자와 성령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의 근원성은 신적 본질이 성부에게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성부가 성령을 지배하거나 성령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급자라는 뜻도 아닙니다. 정교회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나의 신적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는 완전한 신적 위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발출을 설명할 때에는 성부의 근원성뿐 아니라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도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정교회의 성령론을 성부에게 종속된 영적 능력에 관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핵심에 ‘필리오케’(Filioque)라는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원래 381년 신경의 그리스어 본문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고 고백했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6세기 무렵 서방의 일부 지역에서 신경에 첨가되었으며, 로마의 전례에서는 11세기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후 이 문제는 동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갈등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을 단순히 성령의 출발점이 한 곳인가 두 곳인가 하는 문제로만 이해하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동방정교회가 염려하는 것은 성부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성이 훼손되는 일이며, 서방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신적 일치와 성령의 발출에서 그 일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필리오케 논쟁에는 신경의 원래 문구를 누가 어떤 권한으로 변경할 수 있는가 하는 교회론적 문제도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논쟁은 단순히 단어 하나의 첨가를 둘러싼 언어적 다툼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교회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필리오케를 동방정교회가 비판하는 것처럼 반드시 두 개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을 인정하는 교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가톨릭의 정식 설명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하나의 원리로 발출하시며, 성부와 성자가 각각 별도의 성령을 발생시키는 두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동방정교회 역시 성령께서 성자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시며, 성자와 전혀 관계없이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동방교회의 신학 전통에서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고 성자를 통하여 나타나신다는 표현이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기원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파송 및 역사하심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심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곧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이 성자에게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2003년 북미 정교회-가톨릭 신학 협의에서도 양측은 이 문제에서 서로의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왜곡해 온 점을 인정하고, 성령의 신성과 성령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더욱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필리오케 논쟁을 살필 때에도 동방정교회는 성자를 배제하고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를 두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요15:26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6:7에서는 주님께서 떠나가셔야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으며, 요16:13-15에서는 진리의 성령이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20:22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성령과 성부의 관계뿐 아니라 성령과 성자의 깊은 일치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어떤 신학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발출을 성부에게 돌리면서, 성자를 통한 파송과 계시의 역사도 인정합니다.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성령의 영원한 발출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님에게서 나오시는 신적 진리이자 신적 역사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따라서 같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더라도 그 말씀에서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해석이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46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발출하는 신성’(the Divine Proceeding)이며, 이것은 주님 자신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는 마28:1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면서, 주님 안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주님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지만, 그렇다고 그 활동이 그 사람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또 다른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역사하심은 주님과 분리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피조물에게 전달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근거로 성령이 단순한 비인격적 힘이나 자연적인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의미되는 신적 역사하심은 바로 주님 자신의 신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39-141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이 신적 삼위일체가 계시는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 구원자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동시에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특히 성령이 의미하는 신적 진리는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적 진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시며, 악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십니다. 또한 TCR.142-145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 새롭게 하심과 생명을 주심, 거룩하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 악에서 깨끗하게 하심과 죄의 용서,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에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은 한 분 하나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또 다른 구원자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신적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며, 인간은 그 역사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성령론은 단순히 성령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 어떻게 임하시며 거듭남을 이루시는가 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이것은 성령의 발출을 영원한 세 위격의 관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는 TCR.153-155에서 주님께서 성부로부터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의 관계입니다. 성부는 영혼에 비유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과 하나를 이루는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신성과 신적 인성이 하나 되어 나타내시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말씀과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신적 역사하심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피조물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서로 분리된 두 신적 근원이 공동으로 성령을 발생시키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라는 두 영원한 위격 사이에서 성령이 발출하시는 정교회 또는 서방교회의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성령의 발출을 논하기 전에 먼저 성부와 성자가 한 분 주님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교회와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논쟁에 스베덴보리의 견해를 단순히 어느 한쪽의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논쟁의 근본적인 전제인 세 영원한 위격의 존재 자체를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다고 가르칩니까? 그렇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창1:2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사61:1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임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성육신 이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주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뒤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요7:39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으셨다고 말씀하는 대목은 이러한 이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을 성육신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나 신적 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신적 인성을 완성하신 뒤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관계와 충만함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발출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생명이 처음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주님께서 영화된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과 결합하시며 자신의 신적 생명을 전달하시는 역사와 연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성령 이해를 비교할 때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정교회가 성령을 단순히 추상적인 세 번째 신적 인격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교회는 성령께서 실제로 인간 안에 임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결합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논리적 요소가 아니라, 신자의 기도와 예배와 거룩한 삶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신화’(theosis)는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신적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흘려보내시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하여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역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거룩해지거나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실제적인 신적 역사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성령은 영원한 신적 위격이시며, 스베덴보리의 성령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또한 정교회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이 두 개념의 관계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더욱 정밀하게 검토할 문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어떤 사람은 강렬한 감정이나 특별한 은사, 방언과 예언, 신비로운 체험이 나타날 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인간에게 역사하실 때 깊은 감동이나 깨달음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성령의 참된 역사하심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16:13에서 진리의 성령이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은 무엇보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서 확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독립된 신적 인격 하나가 인간에게 들어와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진리로 인간의 이해를 밝히시고, 신적 사랑으로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키시며,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에 살아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진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면, 그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깊은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신적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성령의 발출에 관한 오랜 논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는 성령의 영원한 기원과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두고 오랜 세월 논쟁해 왔습니다. 그 논쟁에는 신학적으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성경의 표현과 교회의 신학적 언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깊어질수록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이 자신의 교리적 체계를 완전한 것으로 여기고, 다른 전통의 신자들을 쉽게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정교회의 성령론에는 성부의 유일한 근원성과 성령의 참된 신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적 통찰이 있습니다. 서방교회의 필리오케에도 성부와 성자의 불가분한 일치를 강조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전통의 출발점 자체를 다시 검토하여 성령을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으로 이해합니다. 이 세 관점을 비교할 때에는 각각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공정하게 살펴야 하며, 교리적 차이를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정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적 분별은 진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지, 자신의 지식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동일한 신적 본질과 영광을 공유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령의 발출을 성부와 성자라는 영원한 두 위격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 자체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씀은 성부라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독립적인 또 하나의 신적 위격을 발생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근원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신적 생명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그 신적 역사하심으로 인간이 진리를 깨닫고 악에서 벗어나 선과 사랑의 삶으로 거듭난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에 관한 참된 신앙은 성령의 영원한 기원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의미되는 주님의 신적 역사하심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서 밝혀 주시는 진리를 따라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은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성령의 발출과 그 신앙적 의미입니다. (EO.005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고백입니다. 서방교회의 필리오케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는 표현으로, 성부와 성자의 신적 일치를 강조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이를 성령의 영원한 기원과 성자를 통한 파송을 혼동할 수 있는 문제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논쟁의 전제인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부를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 성자를 영화된 신적 인성, 성령을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성령의 발출은 독립적인 세 번째 신적 인격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신적 역사하심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만나지만, 성령의 존재 방식과 신적 근원에 대한 이해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성령의 기원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6.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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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4.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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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르침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에게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아들이 태어나며,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자연적인 출생의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아니며,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나셨거나 성부보다 열등한 하나님이시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자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생은 시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영원한 관계를 뜻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성자의 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보존하려는 동방정교회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영원히 태어난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부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별개의 신적 위격이라는 주장은 반드시 같은 뜻입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전통적 삼위일체 신학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동방정교회의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당시 아리우스(Arius)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신 분이 아니며, 성부에 의해 존재하게 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일 수는 있어도, 성부와 동일한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는 이러한 주장을 배격하고,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창조되신 분이 아니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homoousios)입니다. 이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자를 모든 시대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빛에서 나온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표현들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기원하신다는 점과 그분 역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함께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영원한 출생’(eternal generation)은 성자가 만들어지셨다는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이 둘로 나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는 신적 본질에서 완전히 동일하시며, 구별되는 것은 성부께서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 나시는 분이시라는 위격적 관계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의 이 교리를 성자가 성부보다 낮은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교회가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진리를 거꾸로 해석하는 일이 됩니다.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8장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언제나 함께 존재하시므로 성부는 계셨지만 성자는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성부가 처음에는 성부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성자를 낳으심으로써 성부가 되셨다면, 하나님 안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므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는 일도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과 빛의 관계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불이 타오를 때 빛이 함께 나타나듯, 성부와 성자는 시간적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시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신비 전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불과 빛은 피조된 현상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는 방식 자체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인정합니다. 결국 정교회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내적 생명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가능한 한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살펴볼 본문은 요1:1-3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어 요1:14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통해 성자께서 성육신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으며,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고 이해합니다. 히1:3에서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 설명하는 말씀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요5:26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지만, ‘영원한 출생’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공식 자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의 영원성과 그 말씀을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정교회는 두 내용을 하나의 진리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별하려면 성경이 무엇을 직접 말씀하는지, 그리고 각 신학 전통이 그 말씀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는지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19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전제를 정면으로 검토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계신 성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존재하신 하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성자라고 가르칩니다. 즉, ‘영원부터 계신 주님’과 ‘영원부터 별개의 위격으로 존재하는 성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단순히 성부와 성자라는 명칭의 사용 시기를 다르게 정하자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창조 이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DL.19-20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던 성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한 별개의 신적 위격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라 불리는 인성의 근원이 바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눅1:35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므로 태어날 거룩한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성자에 관한 중요한 성경적 증거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92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보내실 때 취하신 인성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의 근원은 피조된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신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실제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생기 있게 하시는 가장 내적인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인성은 여느 인간의 인성과 동일한 출발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성자의 탄생은 신적 존재 하나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영원부터 계신 성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성부와 구별된 영원한 성자 위격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셨던 ‘말씀’(Logos)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두 전통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요1:1의 말씀이 곧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 성자이시며, 이 성자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성육신은 영원한 성자 위격이 인간 본성을 취하신 사건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 TCR.85-88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적 선과 분리되지 않은 신적 진리로서 세상에 내려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진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지혜이며,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또 다른 인격으로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영원부터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신적 진리가 인간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며, 그 과정에서 신적 선이 분리되거나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정교회는 영원한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위격으로 이해하고, 스베덴보리는 영원한 말씀을 한 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 모두 말씀이 영원하며 신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말씀이 영원부터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는가 하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피해야 할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특별한 능력을 받은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주님의 신적 인성을 피조된 인간의 본성이 신성과 외적으로 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이루셨으며, 부활하신 뒤에는 인성에 관해서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동방정교회의 성육신 교리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정교회는 영원한 성자 위격이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함께 가지시며,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영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지만, 그 신성이 인성과 결합하는 구조와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자 이해를 인간 예수를 신으로 높인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며,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를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도 안 됩니다. 양쪽의 차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어떤 방식으로 계시며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성자를 낳으셨다면 그 이전에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신적 친교가 창조 이전부터 완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심 자체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이 나타난 뒤에야 시작된 것이 아니며, 세상의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께 사랑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영원부터 두 신적 인격 사이의 관계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신적 인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계셨으며, 창조는 그 사랑이 피조물에게 전달되고 피조물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신적 목적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세 위격의 상호 관계보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서 이해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의 표현을 달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어떤 구조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는 영원하신 성자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 신자의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보다 열등한 신적 중개자가 아니라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자 신앙을 성부와 성자라는 두 신을 섬기는 신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정교회는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을 고백하며, 모든 신적 예배가 하나의 신적 생명을 향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인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한 분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영원부터 계신 성부와 영원부터 계신 성자를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주체로 상상하면서 그 두 존재를 하나의 하나님으로 결합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 안에 계신 성부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도 주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독립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기도의 중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어떻게 구별하여 부를 것인가보다,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관념을 갖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교리적 지식이 곧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교리적 이해를 다른 교회 신자들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역시 주님의 사랑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1763) SS.92에서 잘못된 교리 자체만으로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며, 악한 삶과 진리를 파괴하도록 확증한 거짓이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종교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모든 교리의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자들의 내적 신앙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실제로 충돌하는 부분을 마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되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교리적 차이를 명확하게 밝히되 상대방 안에 있는 선과 진리까지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낮은 존재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교회의 신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 안에는 주님의 참된 신성과 영원성을 지키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성부와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성자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셨고, 그리하여 인성에 관해서도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참된 신성은 영원한 별개의 위격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과 그분의 영화된 신적 인성의 완전한 일치에서 이해됩니다. 요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과 요14:9의 주님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는 선언은 이러한 관점에서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늘 어딘가에 계신 성부와 그분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성자를 각각 상상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바로 그분이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따라야 할 한 분 주님이심을 깨닫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교리의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는 거듭남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O.004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성자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영원부터 계셨다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성자는 그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된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와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받은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O.005.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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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3.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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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으신 분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신성을 받아 존재하는 종속적인 신적 존재들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성부의 군주성’(monarchy of the Father)은 성부가 다른 두 위격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신성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인격적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며, 성부보다 늦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성부의 군주성을 통해 하나님의 일치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부가 신적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치는 성부라는 한 위격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신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은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의, 특히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니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완전하게 인정하면서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님의 일치를 함께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때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원인’(aitia) 또는 ‘근원’(arche)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이라는 말은 자연계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한 존재가 뒤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인과관계와 다릅니다. 성부는 성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으시며, 성령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원한 발출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일하게 신성이시며, 동일하게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까닭을 한 분 성부에게서 설명하면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신적 생명 안에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부가 세 위격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의 영원한 관계를 성부의 근원성으로 설명하는 정교회 특유의 신학적 구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용어상의 문제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표현은 동방정교회의 핵심 사상을 전달하지만, 자칫 신적 본질 자체가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났거나, 성부가 어떤 신성을 먼저 소유한 다음 그것을 성자와 성령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개의 신적 본질을 각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고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성부의 근원성이란 이 공통된 신적 본질보다 앞서 존재하는 별도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성부와 맺는 영원한 위격적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이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시지만, 그 때문에 성자와 성령보다 더 신적이신 것은 아닙니다.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그 방식에서 구별되지만, 두 위격의 신성에는 어떠한 등급 차이도 없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성부의 군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부께서 홀로 결정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그 결정에 복종하는 세 신적 주체의 협력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가르침을 공정하게 이해하려면 ‘성부가 유일한 근원’이라는 말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성’이라는 말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요15:26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교회는 여기서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 성부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확인합니다. 또한 요5:26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요1:18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10:30에서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하며, 요14:9-11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성부가 근원이시라는 이해를 뒷받침하는 표현과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를 증언하는 표현이 함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이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두 위격적 관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육신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신 인성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본문 자체와 그 본문을 해석하는 신학적 체계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6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에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고 해서 세 신적 인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는 한 분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성육신을 통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특히 TCR.167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신성이 주님의 영혼에 해당하고, 성자의 신적 인성이 그 영혼과 하나를 이루는 몸에 해당하며, 성령은 영혼과 몸이 하나 되어 나타내는 활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구조로 축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본질과 인격 모두에서 한 분이심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신적 근원이시지만, 그 성부는 성자와 구별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닙니다.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이해할 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육신과 영화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29-36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화’(glorification)는 단순히 예수께서 부활 후 영광스러운 지위에 오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유한한 인간적 상태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벗으시고, 자신의 근원적인 신성으로부터 신적 인성을 이루신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래부터 따로 존재하던 두 신적 인격이 영원히 관계를 맺는 구조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인성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혼이 몸 밖에 따로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듯, 성부는 성자 밖에 계신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단순한 명칭의 차이로 없애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구별과 그 결합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결과가 한 분 신적 인격 안의 완전한 일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의 신론에서는 성부의 근원성을 성자와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보다 주님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강조하는 성부의 군주성 안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 안에 둘 이상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입니다. 정교회는 성부를 유일한 근원으로 고백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경쟁이나 권력의 서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 안의 완전한 일치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여러 신적 권력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러한 일치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성부라는 한 위격에 두면서도 성자와 성령을 별개의 영원한 위격으로 인정하는 구조가 신적 인격의 완전한 단일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봅니다. 동방정교회가 ‘한 근원으로부터 세 위격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근원적인 신성과 신적 인성과 신적 역사하심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를 단순히 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교회에서 영원한 세 위격의 실재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은 바로 그러한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거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부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실제 신앙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가는 구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열등하므로 인간이 그분들을 거쳐 더 높은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등하게 예배하며, 성자를 통하고 성령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는 표현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전례적 언어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정교회 신자의 기도를 마치 두 신적 중개자를 통하여 멀리 계신 성부의 허락을 얻으려는 행위처럼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인간 사이에 서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의 신성이 그분 안에 완전하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신적 인격을 거쳐 다른 신적 인격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그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을 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 자신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부를 근원적인 신성이라고 부르고 성자를 신적 인성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신성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인성은 그보다 낮은 어떤 피조물적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더 이상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성과 완전하게 결합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신성에 관해서만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인성에 관해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보이지 않는 절대자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도 성부가 성자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신적 인성의 결합을 영혼과 몸의 일치에 비유하지만, 그 비유는 신적 인성이 신성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피조된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성부는 신성, 성자는 인성’이라는 간단한 공식에 머물지 않고, 성자는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두려운 권위자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긴다면, 그의 신앙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성품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을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에서 직접 도출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사랑과 선과 지혜를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단일성이 우리의 실제 생각과 기도 속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는 어느 교회에 속한 신자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한 분 주님께 우리의 이해와 사랑을 집중하도록 안내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그분 안에 근원적인 신성이 완전하게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안에 서로 대립하는 사랑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치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는 사랑과 진리를 분리한다면, 그 신앙고백은 아직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부의 군주성이라는 어려운 교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인간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회의 교부들이 성부의 근원성과 세 위격의 일치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철학적 개념 속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신적 신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 계시의 중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상대방의 신앙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선을 교리적 차이만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교리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다른 신앙인을 멸시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신학적 분별은 중요하지만, 그 분별의 최종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성과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일치를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 안에 독립적인 여러 근원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는 하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의 신성을 참되게 알고자 한다면, 그 신성이 자신을 완전하게 나타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14:9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 다른 세 신적 인격을 마음속에 조합하여 하나로 생각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나타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부의 군주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 삶에서 그분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EO.003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성부의 군주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면서도 성부에게서 영원한 관계의 근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일치를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함께 강조하면서도, 신적 근원과 삼위일체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성을 성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교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O.004.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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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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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고백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가를 가리키고, ‘위격’(hypostasis)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가리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시지만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이십니다. 그렇다고 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생명과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그 일치에는 어떠한 분열이나 대립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이 한 분의 신적 인격이시라는 뜻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의 차이를 넘어,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공통점과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교부들의 신학적 논의를 통해 정교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를 고백함으로써 성자가 하나님보다 낮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했습니다.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신성과 영광을 명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정교회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교회가 삼위일체를 인간의 추론으로 만들어 낸 철학적 공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성경과 예배, 그리고 살아 있는 신앙 경험에 근거한다고 설명합니다. 교부들이 본질과 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개념 안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치와 성부·성자·성령의 구별을 동시에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입장에서 삼위일체는 세 신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아니며, 반대로 한 하나님이 단순히 세 가지 이름으로 나타나신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세 위격은 실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려면 동방정교회가 ‘위격’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격’이나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는 대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의식과 의지와 행동의 주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말하는 세 신적 위격을 이러한 인간적 개념으로 그대로 이해하면 세 하나님을 상상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경쟁하거나 협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세 신적 개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세 위격은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하시며, 성부께서 행하시는 신적 일에 성자와 성령께서 분리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세 위격의 구별을 단순히 창조와 구속과 성화라는 서로 다른 역할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 되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위격적 구별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낳으심’과 ‘발출’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부가 성자보다 먼저 존재하셨다거나, 성자가 성부보다 열등하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하거나 비교하려면 먼저 이처럼 정교회 자신이 세 위격의 독립성과 하나님의 단일성을 어떻게 구별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선언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구별된 표현이 함께 나타납니다. 신6:4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이심을 선포하며, 사45:5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도 막12:29에서 이 고백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한편 마3: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에는 세례받으시는 예수님과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성령,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28:19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며, 요14:16에서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들이 곧바로 ‘하나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라는 완성된 교리적 공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공식은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고 해석하는 교회의 신학적 언어입니다. 따라서 신학적 분별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이름이 등장하는가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과연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구별을 나타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이해와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84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 위격이 영원부터 구별되어 존재하신다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참된 단일성을 인간의 생각 속에서 훼손한다고 봅니다. TCR.166-169에서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설명하면서,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이 한 사람을 이루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성부는 영혼에 해당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영혼과 몸과 그 활동을 서로 구별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각각 독립적인 세 사람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으로 구별되지만 세 분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55에서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단순한 양태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은 일반적으로 한 하나님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설명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단순한 역할이나 임시적인 가면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실제적인 신적 삼위일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 그 삼위일체가 세 신적 인격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그의 견해가 동방정교회의 세 위격 교리와 양립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구별을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세 신적 위격이 존재했다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TCR.170-171에서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부터 세 위격의 삼위일체가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으심으로써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적 삼위일체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 안에 어떠한 구별이나 신적 역사도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세 영원한 인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용어를 조정하여 쉽게 해소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라 두 신학 체계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출발점 자체에 관한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 말씀하시고, 성자께서 성부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시는 장면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의 설명에서는 성육신하신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며, 지상 생애 동안 유전받은 인간적 상태를 통과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시고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부께 기도하시는 모습은 본래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화의 과정에 있는 인성과 그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 사이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4:10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시며, 요14:9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요10:30에서는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성부와 성자의 일치가 단순히 뜻과 목적의 일치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의 실질적인 신적 일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절들을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과 상호 내재를 증언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면서도, 두 위격의 구별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이 특정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논쟁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말씀을 어떤 신론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가 핵심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신앙과 예배의 실제적인 방향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 신자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간다는 전례적 구조 속에서 기도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함께 예배합니다. 정교회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일치는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친교이며, 교회 역시 이러한 일치를 본받아 사랑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부름받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안에 분열이나 경쟁이 없으며, 참된 신앙은 사랑과 일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기도하고 예배할 때 마음속에 하나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세 신적 주체로 상상한다면, 입으로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실제 생각 속에서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TCR.172-173에서 이러한 문제를 특별히 비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정교회 신자가 실제로 세 하나님을 믿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바로 그러한 삼신론을 명시적으로 배격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정교회 신자 개개인의 내면을 판정하는 말이 아니라, 세 영원한 위격이라는 교리적 구조가 인간의 하나님 관념에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신학적 비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사랑한다는 뜻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부 하나님을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심판자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기며, 성령을 두 분 사이에서 인간에게 능력을 전달하는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상상한다면, 그의 하나님 이해에는 심각한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이 정교회의 공식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나온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신적 사랑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실제 신앙생활에 자리 잡을 가능성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문제를 더욱 근본적으로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적 인간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서로 다른 사랑이나 상충하는 의지를 가진 세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진리와 생명 또한 동일한 신적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어떤 신적 인격의 자비를 얻어 다른 신적 인격의 진노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충만하게 나타난 신적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인간의 거듭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단순히 신학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면, 그 고백은 인간의 이해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그 사랑과 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도 사랑과 진리가 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섬기는 삶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이해와 의지가 점차 하나의 영적 생명으로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인간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하나님의 신적 삼위일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신적 생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치를 참되게 인정하는 신앙은 인간 안에서도 분열된 삶을 극복하고, 아는 진리와 행하는 선이 일치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인 신학 논쟁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어떻게 살아 내는가 하는 실제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하나님의 분리될 수 없는 일치를 보존하려는 오랜 교회의 신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교회 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한 본질이시라는 고백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신적 인격에서도 한 분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세 영원한 위격의 일치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의 신적 일치로 이해합니다. 결국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완전한 일치를 함께 고백하지만, 그 일치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갈라집니다. 이러한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상대 전통의 진지한 신앙고백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이 증언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더욱 깊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그 질문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세 분으로 나누어 생각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목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2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삼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한 일치와 세 위격의 실질적인 구별을 함께 보존하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일치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사랑의 일치를 함께 인정하지만, 세 위격의 영원한 실재 여부와 신적 일치의 구조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세 신적 주체로 나누어 상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신앙과 예배의 중심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교리적 이해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되어 실제 삶의 선으로 나타나는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O.003.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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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001.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SL.EO.001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것의 경계 해설동방정교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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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1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것의 경계

 

해설

동방정교회 신학을 처음 접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고백들이 아무리 참되고 거룩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언어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려 할 때, 그 설명은 언제나 인간의 유한한 이해 안에 머무릅니다.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신앙적 겸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신비신학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이 만나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오래전부터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이라는 전통 속에서 다루어 왔습니다. 부정신학이란 하나님께 무엇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피조물의 어떤 개념으로도 완전히 규정할 수 없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신학적 접근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선함의 한계를 초월하시고,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는 지혜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존재하시지만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에게 선이나 지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선과 지혜의 근원이시므로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만으로는 그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와 함께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생명이시고 진리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은 참되지만, 그러한 긍정적 진술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신 실재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러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에서 하나님의 신성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그분의 본질을 규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전한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실제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피조물의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참된 지식을 얻는 것과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계시를 통해 가능하지만, 후자는 피조물에게 불가능합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피조물에게 완전히 드러내지는 않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만하게 계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결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무지의 장벽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1:18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55:8-9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들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이해만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14:9에서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씀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 함께 있으며,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가르침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함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단순한 모순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유한한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은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7에서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것들이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자연적 관념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것들을 완전히 지각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 역시 인간보다 더 높은 영적 관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자신의 이해 안에 모두 담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천국에 있는 천사라도 피조물이며, 피조물은 결코 무한하신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 자체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모두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에 따라 그분을 참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무한을 유한한 개념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는 DLW.11에서 천국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물질적 신체를 가지셨다거나, 어떤 공간 속에 갇힌 유한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창1:26-27의 말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를 닮으신 것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별개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인간에게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Divine Human)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추상적 신성을 상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의 신비신학은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추상적인 절대자로 남겨 두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하거나 파악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 힘이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을 가리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해 인간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공급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안에 소유하거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신적 결합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를 완전히 같은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개념이 전제하는 신론과 인간론, 그리고 신적 결합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 전통의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어떤 신자가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은 하나님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옳지만, 그 겸손이 하나님을 알아 가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신자가 성경과 교리를 많이 공부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 역시 위험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이 지적 정보의 축적을 넘어 그분과의 살아 있는 결합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진리가 인간의 이해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알아 가고,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해한 진리를 실제 삶 속에서 사랑과 선으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하나님은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교리적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삼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름에 담긴 생명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전문적인 신학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살피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신학적 지식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진리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치며,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그 지식이 어떤 사랑과 결합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여 삶의 선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고백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며, 천사조차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계시의 목적과 어긋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며 자신과 결합하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신비를 성육신과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언어로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간과 신적 사랑 및 지혜의 인플럭스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의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일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물러서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크신 분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주신 계시를 따라 계속 알아 가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완전히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1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참된 겸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피조물이 그분을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으로서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결합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기하는 것도, 그 지식을 완전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라, 주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선한 삶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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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7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 도성제의 바른 삶과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

 

해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막상 욕망을 내려놓거나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 곧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요소로 이루어진 길입니다. 팔정도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가운데 네 번째인 ‘도성제’(道聖諦, magga-sacca)의 핵심입니다. 사성제는 인간의 고통을 밝히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실천의 길인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불교가 말하는 ‘고’(苦, dukkha)는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나 일시적인 슬픔을 넘어, 조건에 의존하는 삶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불만족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열반’(涅槃, nibbāna)은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를 지속시키는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이 소멸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 수칙이 아닙니다. 불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의 길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팔정도를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 곧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벗어나는 길로 설명합니다. 그 여덟 요소는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곧 사성제와 행위의 결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곧 탐욕과 악의와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난 바른 의도를 품는 것, ‘정어’(正語, sammā-vācā), 곧 거짓말과 이간질, 거친 말과 무익한 말을 삼가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a), 곧 살생과 도둑질과 잘못된 성적 행위를 멀리하는 것, ‘정명’(正命, sammā-ājīva), 곧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바른 생계,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곧 해로운 마음의 상태를 막고 버리며 선한 상태를 일으키고 유지하려는 노력, ‘정념’(正念, sammā-sati), 곧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바르게 알아차리며 살피는 것, 그리고 ‘정정’(正定, sammā-samādhi), 곧 마음을 바르게 집중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여덟 요소는 서로 무관한 규칙들이 아니라, 바른 이해와 의도가 언어와 행동과 생계를 이끌고, 바른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지혜를 깊게 하는 하나의 수행 체계를 이룹니다.

 

팔정도의 구조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학’(三學, tisso sikkhā), 곧 계율·선정·지혜의 세 가지 훈련을 살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에,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율에,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선정에 속하는 수행으로 정리합니다. 이는 올바른 생각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살피면서 말과 행동을 바꾸고, 마음을 훈련하여 현실을 더욱 깊이 통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āya) 117번의 ‘대사십경’(Mahācattārīsaka Sutta)은 정견을 다른 수행 요소에 앞서는 중요한 요소로 설명하면서, 정정진과 정념이 바른 견해와 의도를 확립하는 데 함께 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념은 아무런 판단 없이 순간의 느낌을 관찰하는 일로만 축소할 수 없으며, 정정 역시 단순한 휴식이나 심리적 안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이들은 해로운 상태를 버리고 바른 수행을 성숙시키며, 궁극적으로 고통을 소멸시키는 해탈의 길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현대적인 스트레스 관리 방법이나 일반적인 도덕 교육으로만 이해한다면 불교가 본래 제시한 종교적 목적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팔정도에는 말씀의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살펴볼 만한 윤리적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짓말을 일삼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알고 있다는 진리가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합니다. 팔정도는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바른 이해가 바른 말과 행동과 생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종교 의례나 명상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종교적인 삶은 특정한 신앙 지식을 소유하거나 교리를 정확하게 암송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실제 의지와 행동으로 옮기는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팔정도가 언어와 행위와 생계에 이르기까지 바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귀중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유사성이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이 바른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바름의 궁극적인 기준과 근원, 그리고 그 삶이 향하는 목적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선한 행동의 외형과 내적 동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평판을 높이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그 대가로 인정과 존경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지 않고 진실로 상대방의 유익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29번에서 십계명의 금지 명령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어떻게 관계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은 살인과 도둑질, 간음과 거짓 증언 같은 악을 멀리해야 하며, 특히 그것들을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는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나 구제 활동이 아니라, 이웃의 참된 유익을 바라고 그 유익을 실제로 이루려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악을 멀리하는 이유까지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팔정도의 윤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바른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기독교만 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대조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불교가 바른 행위와 수행을 갈애와 무명의 소멸 및 해탈의 길에서 이해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번에서 설명한 원리는 이러한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겉 사람의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그럴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의 악을 제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겉 사람’(external man)은 인간의 자연적 생각과 행동의 차원을, ‘속 사람’(internal man)은 그의 영적 내면을 가리킵니다. 또한 ‘거듭남’(regeneration)이란 단순히 행동 습관을 개선하거나 자기 통제 능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과정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악에 맞서 싸우며 선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참된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정정진과 기독교의 거듭남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를 단순히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불교 역시 바른 가르침과 스승, 수행 공동체와 여러 조건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대승불교의 일부 전통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도움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것이 곧 주님을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새 교회의 교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팔정도의 여덟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구별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정견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도덕 관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성제와 ‘업’(業, kamma), 곧 의도적인 행위와 그 결과, 무상과 무아,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불교 특유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정념과 정정은 단순히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의 근본 원인을 통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각 요소를 기독교의 덕목과 하나씩 대응시키면서 정견은 올바른 성경 지식, 정어는 거짓말하지 않기, 정정은 기도와 같은 식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기능이 비슷해 보여도 그 안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본질과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의 교리’ 65번은 여러 나라와 종교의 사람들에게도 십계명과 유사한 도덕적 규범이 있으며,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그러한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의 종교적 환경과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 안에서 그를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교인이 팔정도를 실천하며 진실로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그 선의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 행위의 외형만으로 그의 내적인 영적 상태나 영원한 운명까지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와 의도, 말과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수행의 길입니다. 그 안에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행동을 실제로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지식이나 의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바른 삶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은 동일한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팔정도를 통하여 갈애와 무명을 소멸하고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지향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분과 결합하는 천국의 삶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한쪽은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한쪽은 믿음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른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의 빛에서 참된 길은 단순히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아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선을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고 그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삶은 외적인 도덕적 성취를 넘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깊어지며, 진리를 아는 삶과 선을 행하는 삶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BU.007 해설)

 

요약

팔정도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루는 핵심 수행의 길로서, 바른 이해와 의도, 언어와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특히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삶 전체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를 단순한 도덕 수칙이나 심리적 안정의 방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며, 불교의 해탈과 말씀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윤리적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의 수행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영적 삶의 목적은 그분과 결합하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6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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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경외와 깊이 연결되는 아랍어 개념이 ‘타크와’(taqwa)입니다. 타크와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되지만, 단순히 형벌을 무서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며, 악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경건함과 도덕적 책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꾸란 3:102는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49:13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특히 꾸란 2:177은 참된 의로움이 단순히 예배의 방향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약속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삶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외를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돌아보며,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며, 잠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시111: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판단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존중하며, 그분께 어긋나는 악을 멀리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요일4: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성격을 구별하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형벌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분을 거스르거나 그분에게서 받은 선을 해칠까 염려하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당할 손해와 고통에 중심을 두지만, 후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그 사랑의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3718항에서 두려움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않은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입니다. 전자는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형벌이나 명예와 재산의 상실, 자신의 이익이 손상되는 일을 염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반면 후자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주님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선과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외라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에 거룩한 경외가 전혀 없다면 마치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그 사랑에 중요한 무엇이 결여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거룩한 조심스러움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기중심적인 불안은 줄어들지만, 그 사랑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의 본질은 형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랑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저작 5459항에서 예배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외적 예배에서는 두려움이 중심이 될 수 있지만, 영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하며, 천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단순히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교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변화함에 따라 두려움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악을 피하던 사람이 점차 악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마침내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거듭남(再生, regeneration)과 깊이 관련됩니다. 그러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악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악을 멈추게 하는 외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 자체가 참된 경외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이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 8925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출20:20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거룩한 두려움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해치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과 같으며, 주님을 거스르거나 계명을 어기는 일을 피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경외는 하나님이 언제 자신을 벌하실지 몰라 불안해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외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지키려는 내적 의지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형벌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외적으로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자체가 이웃을 해치고 주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미워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욱 깊은 영적 토대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룩한 경외는 악을 피하는 행위와 선을 사랑하는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타크와에 담긴 진리와 그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악을 경계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마음은 참된 경외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선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단순한 종교적 복종이 아니라 양심과 선행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정한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경외를 하나님이 내리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명령의 준수에만 머물게 한다면, 그 경외는 아직 사랑의 내적 상태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슬람 신앙 전체의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깊은 영적 전통이 있으며, 기독교에서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의무감에 머무는 신앙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은 특정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보다 그 경외가 실제로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며, 어떤 삶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는 여전히 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주님을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경외의 충만한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는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양심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유로 종교 지도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거나, 자신의 양심과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경외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신적 섭리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는 분별을 금지하거나 인간을 공포로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행하는 일이 과연 선한지, 이웃에게 유익한지, 주님의 계명에 합당한지를 더욱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깊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하거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한다면, 그 경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웃 앞에서도 자신의 교만과 지배욕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경외의 완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무서워하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악을 피하는 이유는 달라져야 합니다. 악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해치기 때문에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분의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합니까?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직하게 살아갑니까, 아니면 정직과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피합니까? 참된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심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경외는 사랑에 이르기 위한 일시적인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룩해지는 신앙의 내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벌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선과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IS.007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경건과 양심,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의무의 준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하려는 마음이며,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사랑 안에서 거룩한 경외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경외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경외를 공포와 외적 복종에만 한정하는 이해가 영적 한계를 지닙니다. 참된 경외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IS.006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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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을 일으키는 바깥의 조건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의 괴로움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원하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조차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살피면서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을 단순히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서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는 고통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 그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인 ‘멸성제’(滅聖諦, nirodha-sacca)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소멸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갈애’(渴愛, taṇhā)란 감각적 즐거움과 존재의 지속, 또는 존재의 소멸을 갈망하는 목마름을 뜻하고, ‘집착’(執著, upādāna)은 그러한 대상을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불교가 말하는 소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활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애와 집착에 사로잡혀 고통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멸성제를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버리고 놓아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소멸한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입니다. 연기란 어떤 현상도 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같은 경전집의 SN 12.2는 ‘무명’(無明, avijjā), 곧 고통과 그 원인 및 소멸의 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져 고통이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그에 의존하던 조건들도 소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는 과정도 멈추게 됩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열반’(涅槃, nibbāna)은 이러한 갈애와 무명,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열반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안정과 같지 않습니다. 또한 열반을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허무한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도 불교의 설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조건 지어진 존재의 반복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으로 이해하며, 그 궁극적인 상태를 일반적인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갈애가 소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살아 있는 동안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 육체적 통증과 질병, 늙음과 죽음이 여전히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험을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결합하여 새로운 괴로움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36.6에 나오는 ‘화살의 비유’는 이 차이를 잘 설명합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할 때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더하여 마치 두 개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지만, 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집착과 정신적 고통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성제를 ‘깨달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군가가 심한 슬픔이나 불안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수행이 부족하다거나 집착이 많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책망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조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의 감정과 욕망에 무조건 끌려다닐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을 바르게 살피고 다스리는 가운데 새로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고, 이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악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77–480번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들을 지배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중심적인 사랑이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그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재물이나 명예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내면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랑하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물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가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명한다면, 말씀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힐 때 참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두 설명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 소멸과 말씀에서 말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곧바로 동일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83번에서 인간이 본래의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악을 선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시작되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싸워 이길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저작 DP.100은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 안에서 악을 제거하시려면 인간이 먼저 겉 사람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해야 한다는 신적 섭리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속 사람’(internal man)은 인간의 영적 내면을, ‘겉 사람’(external man)은 자연적 삶과 외적인 생각 및 행동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거듭남은 모든 욕망과 개성을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질서에 따라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을 설명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의 방향이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두 전통이 모두 인간의 내적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더라도 그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얻는 평안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평안은 같은 것입니까? 두 평안 사이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갈애의 소멸은 집착에 따른 불안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연결되지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평안은 주님과 결합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 안에 있게 되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악을 멀리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불편함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지배하던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역사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일을 하며 정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과 활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적극적 사랑이나 자비도 없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 역시 자비와 이타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다른 중생의 해탈을 돕는 보살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양쪽의 차이는 한쪽에는 자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자비와 선의 궁극적인 근원 및 영원한 삶의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종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가족 간의 갈등이나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망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머문다면, 종교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돌아보게 하며, 원하는 것을 끝없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말씀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최종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며, 고통의 소멸 자체를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외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은 서로 분리된 두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삶에 함께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결국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멸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의 근본적인 조건이 소멸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성찰하고,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붙잡지 않도록 경계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멸성제를 모든 감정과 사랑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깨달은 사람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생명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단순히 어떤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버려야 하지만, 그 자리에 참된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멸성제가 인간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준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며 어떤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자유는 자기의 욕망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BU.006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의 소멸을 통하여 고통의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멸성제에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갈애의 소멸을 모든 의욕과 감정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열반을 단순한 무감각 또는 존재의 소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멸성제가 육체적 질병이나 외적인 불행의 완전한 제거를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해탈과 말씀의 거듭남 사이에 있는 자기중심적 욕망의 극복이라는 공통점을 인정하되,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와 천국의 평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7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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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5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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