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AC.224 심화 1)

 

위 문장에서 창3은 아직 퍼셉션의 시대인데 왜 양심의 흔적 같은 표현이 나오나요?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 때 시작되는 거 아닌가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말씀대로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즉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는 기본적으로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에 속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AC.224를 해설하면서 제가 사용한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교리 체계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추론이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Ancient Church)는 퍼셉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신 양심(conscience)이 주어졌습니다. 양심은 진리의 지식(knowledges of truth)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내적 판단 능력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사람들을 두고 ‘양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말하면, 신학적으로는 시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생깁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크게 약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그들은 여전히 얼마간의 퍼셉션(perception)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고 숨었습니다.’

 

실제로 AC.220 AC.221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제가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현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다 보니 나온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가까운 경험이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AC 해설이나 심화 원고에서는 그것보다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용하신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퍼셉션(perception)의 잔재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지각할 수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이 표현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시대 구분, 즉 태고교회 = 퍼셉션(perception), 고대교회 = 양심(conscience)이라는 구조와 더 잘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짚어 주신 부분은 AC 해설을 장기적으로 정리할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정확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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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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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1. ‘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이 구절을 AC.224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후손들은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을 수 있었지만, 여기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그 자연적 선마저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뻔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자신의 악을 악으로 느끼는 능력 자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영적 상태는 훨씬 더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AC.217에서 스베덴보리는 포도나무를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포도가 없다는 것은 영적 선이 사라졌다는 뜻이고, 무화과가 없다는 것은 자연적 선마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특히 AC.224의 문맥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중요합니다. 창3의 사람들은 아직 무화과 잎이라도 있었습니다. 즉 자연적 선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무화과 자체가 없습니다. 자연적 선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잎사귀가 마른다’고 합니다. 잎은 진리에 대한 외적 지식이나 교리의 형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고, 남아 있던 외적 종교 형식마저 생명력을 잃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224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악한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의 후손들과 대비시키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반면,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더 이상 숨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남아 있던 자연적 선마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악 때문에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주님께서 역사하실 여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는 훨씬 더 깊은 영적 황폐(vastation)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AC.224에서 렘8:12-13을 끌어오는 이유입니다. 창3의 사람들은 넘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고,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그 마지막 남은 자연적 선마저 잃어버린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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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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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4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지각(percep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의 원인이 되며, 또한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conscience)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자비롭게 작용하지만, 사람이 처해 있는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람, 곧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이 후손의 상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의 상태였습니다.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숨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선마저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숨지도 않습니다. 그들에 관하여는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해설

 

AC.224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이 숨은 것은 완전한 악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어느 정도의 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사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숨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자연적 선은 아직 영적 선(spiritual good)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성향, 도덕적 감각, 수치심, 양심에 대한 반응 등을 포함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비록 타락하였지만, 아직 이 자연적 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 곧 자비와 평화와 선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악마적인 공포가 아니라 양심의 불편함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깊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습니다. 즉 양심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진단 기준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말씀을 읽다가 찔림을 받거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희망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잘못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로 그 상태를 묘사합니다.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으며 잎사귀마저 마른 상태입니다. 즉 선의 열매도 없고 진리의 열매도 없으며, 외적 신앙의 흔적조차 말라 버린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주님의 자비와 평화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언제나 동일하게 자비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의 임재를 평안으로 느끼고, 회개하는 사람은 그것을 양심의 책망으로 느끼며, 완전히 악한 사람은 그것을 불편함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결국 AC.22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이 숨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고,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의식할 수 있었으며, 여전히 자신의 벗음(nakedness)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남아 있는 선의 흔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의 아픔은 종종 영적 생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상태인 것입니다.

 

 

심화

 

1. ‘8:12-13

 

 

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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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심의 흔적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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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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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심화

 

1.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이 구절을 AC.223에서 인용한 이유는, 사람이 악 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는 경험이 실제로는 주님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 변화 때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얼굴을 가리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고,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222에서 이미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사랑, 모든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라면, 그 사랑의 얼굴을 실제로 돌리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인간의 체험에 따라 말한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악 가운데 들어가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은 약해지고, 진리는 희미해지고, 기도도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마치 하나님께서 멀어지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멀어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 점에서 사59:2는 창3의 아담과 하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서 숨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고 말합니다. 숨어 있는 쪽은 인간이고, 찾으시는 쪽은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는 주님의 사랑을 멈추게 하는 힘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입니다. 마치 태양이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스스로 문을 닫고 커튼을 치면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움은 태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빛을 막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었다’는 말은 사실상 ‘너희 죄가 너희로 하여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의 얼굴이지만, 죄악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AC.223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결코 자비를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사랑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사랑과 own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59:2를 인용한 이유는, 창3의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주님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멀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심판의 말씀이기 전에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죄는 주님의 사랑을 없애지 못합니다. 다만 그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을 가릴 뿐입니다. 그래서 창3의 아담이 숨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에도,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그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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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3

 

주님의 얼굴(the face of the Lord)이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자비로 바라보시며, 결코 누구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돌리시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얼굴을 돌립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또 여기 창세기에서는 그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말하고 있습니다.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해설

 

AC.223은 앞 절(AC.222)의 내용을 더욱 분명하게 결론짓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외면하시고, 노하셔서 얼굴을 돌리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정반대의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선(good) 자체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태양과 같으시며, 그 사랑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태양이 특정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고 다른 사람에게는 등을 돌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왜 ‘주께서 얼굴을 숨기셨다’거나 ‘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올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인간의 체험에 따른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얼굴을 돌린 쪽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 속으로 들어갈수록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결국 그것을 피하려 하게 됩니다.

 

이사야 592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었다’고 하지, ‘그가 얼굴을 돌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죄가 장벽이 된 것입니다. 마치 두꺼운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3장의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주님이 아담을 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곧이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십니다. 찾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숨는 쪽은 인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기 싫어하고, 기도하기 싫어하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주님이 멀리 계신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멀어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같은 사랑으로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의 상태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23은 매우 위로가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와 평화를 향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주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얼굴을 향해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숨었지만, 주님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의 영적 삶 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59:2

 

 

AC.223, 심화 1, ‘사59:2’

AC.223.심화 1.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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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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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심화

 

4. ‘63:7-9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심판이나 진노가 아니라 사랑(love), 자비(mercy), 긍휼(pity), 구원(salvation)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먼저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아름다운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이사야 63장을 인용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his faces)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마치 주님 앞에 서 있는 어떤 천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 한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자비’, ‘사랑’, ‘긍휼’, ‘구원’이라는 단어들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맥 속에서 ‘자기 앞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이미 ‘얼굴’이라는 표현을 자비와 사랑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는 구절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멀리 떨어져 인간을 심판하는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태를 아시고,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끊임없이 구원하려 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표현은 주님의 사랑의 본성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진노나 보복의 언어가 없습니다. 구원의 동기는 오직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창3의 장면이 더욱 깊이 이해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AC.222에 따르면 그 얼굴은 사랑의 얼굴이며 자비의 얼굴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을 멸하려는 얼굴을 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려는 얼굴을 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악을 의식하게 되면 주님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미루고, 말씀을 멀리하고, 영적인 것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숨는다고 해서 사랑이 진노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 63장은 주님의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얼굴이며, 사랑으로 구속하고 자비로 품어 주는 얼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 자체를 ‘그 얼굴의 사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AC.222에서 사63:7-9를 인용한 이유는, 창3의 ‘여호와의 얼굴’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얼굴은 두려움의 근원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아담이 두려워한 것은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의 빛 아래 드러난 자기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창3을 매우 따뜻하게 비추어 줍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그를 찾으시는 분은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구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담이 피한 얼굴은 심판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사야가 노래한 바로 그 ‘사랑과 자비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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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심화 3, ‘시4:6’

AC.222.심화 3.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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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심화

 

3. ‘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참된 선(good)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 ‘주의 얼굴의 빛(the light of thy faces)은 그 선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편의 앞부분을 보면 사람들이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여 줄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성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이 참된 행복과 평화, 선한 삶의 근원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선을 찾고 있지만, 다윗은 선 자체를 달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얼굴빛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얼굴빛이 비추어질 때, 선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AC.222의 문맥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나 심판을 의미한다면, 다윗이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가장 큰 복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얼굴의 빛(light of thy faces)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흘러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천국의 모든 빛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그 빛 속에는 신적 사랑의 열이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빛은 단순한 호의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을 살리는 영적 생명 자체입니다.

 

이 점에서 시4:6은 창3의 장면과 깊은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고,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주님의 얼굴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차이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얼굴은 평화와 기쁨이지만, 자기 악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태양이 건강한 눈에는 즐거움이지만, 아픈 눈에는 고통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를 잘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 선인가?’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참된 선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을 직접 찾기보다 주님의 얼굴빛을 구해야 합니다. 빛이 오면 선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22에서 시4:6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들이 찾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이 주님의 얼굴빛 안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장의 의미를 더욱 깊게 드러냅니다. 아담과 하와가 피해 숨은 것은 바로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곧 모든 선과 평화의 근원인 주님의 얼굴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얼굴빛을 거두지 않으시고, 숨은 인간을 끝까지 찾아 나서셨습니다. 이것이 AC.222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22, 심화 4, ‘사6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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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자비(mercy), 축복(blessing), 평강(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먼저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증거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67:1입니다.

 

이 시편을 보면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을 비추사’라는 표현이 나란히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이미 ‘주의 얼굴빛’과 ‘은혜’, ‘’을 같은 의미권 안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얼굴은 인간을 정죄하거나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고 복을 주며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얼굴빛을 비추사’라는 표현은 태양의 빛을 연상시킵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이 빛과 열을 보내듯이, 영계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보내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전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열과 진리의 빛으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빛’은 단순한 미소나 호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시67 AC.222의 논증에 매우 중요한 본문이 됩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면, 어찌하여 시편 기자가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는 그것을 가장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얼굴이 곧 은혜와 축복의 근원임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창3의 장면도 다시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피한 것은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가장 따뜻하고, 가장 자비로운 얼굴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랑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빛은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방에 햇빛이 들어오면 먼지와 어지러움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햇빛은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 빛은 숨겨져 있던 것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빛 자체를 피하려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AC.222에서 시67:1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긍정적으로 정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얼굴이며, 은혜의 얼굴이며, 복의 얼굴입니다. 주님의 얼굴빛이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 흘러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3의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바로 그 얼굴빛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은 희망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숨더라도 주님은 여전히 얼굴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67:1 AC.222의 맥락에서 보면 단순한 축복 기도가 아니라, 숨은 인간을 향해 여전히 사랑과 은혜를 비추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AC.222, 심화 3, ‘시4:6’

AC.222.심화 3.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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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심화 1, ‘민6:25-26’

AC.222.심화 1. ‘민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 26) Jehovah make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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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심화

 

1. ‘6:25-26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면,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정반대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와 평강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그는 민수기 6장의 축복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흘러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십니다. 따라서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과 나란히 사용됩니다.

 

또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평강(peace)은 단순한 마음의 안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의 가장 깊은 상태이며,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질서와 조화가 인간 안에 흘러 들어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은 평강의 근원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3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진노의 얼굴을 피해 숨은 것이 아닙니다. 자비와 평강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고, 악을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주님의 빛 앞에 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마치 병든 눈이 햇빛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햇빛 자체는 따뜻하고 생명을 주는 것이지만, 눈에 병이 있으면 그 빛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와 평화이지만,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얼굴(face)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의 복수형인 ‘얼굴들(faces)입니다. 영어 본문도 ‘his face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무수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외형적 얼굴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모든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AC.222에서 민6:25-26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창3에서 아담과 하와가 피한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얼굴은 심판의 얼굴이 아니라 은혜의 얼굴이며, 진노의 얼굴이 아니라 평강의 얼굴입니다.

 

결국 이 축복의 말씀은 창3의 장면을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아담은 그 얼굴을 피해 숨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 얼굴을 비추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도망쳤지만, 주님의 자비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수기의 축복은 단순한 제사장의 축도가 아니라, 창세기 이후 모든 인류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마음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는 말씀 속에는, 숨은 아담을 찾아 나서신 주님의 사랑이 이미 담겨 있는 것입니다.

 

 

 

AC.222, 심화 2, ‘시67:1’

AC.222.심화 2. ‘시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이 구절을 AC.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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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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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2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를 두려워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악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대답, 곧 다다음 절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라는 말로부터도 분명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the face of Jehovah), 또는 주님의 얼굴(the face of the Lord)은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축복 말씀으로부터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또 시편에서,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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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는 이사야서에서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faces)라고도 불립니다.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해설

 

AC.222는 창세기 38절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를 설명하면서, 말씀에서 ‘여호와의 낯(the face of Jehovah)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여 숨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진노나 심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이 두려움과 심판 자체라면, 아무도 그 얼굴이 자신에게 비추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은 그런 얼굴을 피하여 숨었을까요? 이유는 주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는 주님의 사랑조차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눈병이 난 사람이 태양 빛을 괴롭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은 변하지 않았지만, 눈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현상을 영계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선한 영이나 천사가 가까이 오면 악한 영들은 고통을 느끼며 물러납니다. 천사가 그들을 공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과 평화가 그들의 상태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도망갑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실제로 말씀 전체를 보면,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를 향하고 있습니다. 변하는 것은 인간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때는 그 얼굴이 평화와 기쁨으로 느껴지고, 자기 사랑과 악 속에 있을 때는 같은 얼굴이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느껴집니다.

 

또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3장의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faces)를 주님의 자비의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까이 오시는 사랑의 임재를 뜻합니다. 즉 ‘얼굴’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주님의 가장 가까운 현존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결국 AC.222의 핵심은, 아담이 숨은 이유가 주님의 진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와 선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사랑을 더 이상 기쁨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숨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피하고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싫어할 때, 그는 실제로 주님에게서 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6: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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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7:1

 

 

AC.222, 심화 2, ‘시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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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6

 

 

AC.222, 심화 3, ‘시4:6’

AC.222.심화 3.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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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3:7-9

 

 

AC.222, 심화 4, ‘사63:7-9’

AC.222.심화 4. ‘사63:7-9’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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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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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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