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다른 행성들의 위성 하나도 겨우 채울 것이다. 육안으로는 그런 위성들을 거의 볼 수 없으니, 이것은 우주의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김은경 역) It was calculated that with a million earths in the universe,and on each earth three hundred millions of men,and two hundred generations in six thousand years,and a space of three cubicells allowed to each man or spirit,the total number of so many men or spirits would not fill the space of this earth,and scarcely more than the space of one of the satellites about one of the planets—a space in the universe so small as to be almost invisible,since a satellite can scarcely be seen by the naked eye. (HH.417)

 

윗글은 천국과 지옥43, 천국의 광대함에 나오는, 글 번호 417내용 중 일부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한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지구 나이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에 유튜브 지식브리핑이라는 채널을 통해 지구 나이 46억 년 우리가 최초의 문명이 아닐 수 있다? 실루리안 가설 | 고대문명 | 지구 역사 | 잃어버린 문명이라는 클립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그중 재미있는 비유 하나는, 지구 나이 45, 6억 년 대 현 지구 문명 1만 년은 24시간 대 0.2초라는 겁니다. 저는 보는 내내 태고교회 생각을 했어요.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저작 어디에서도 지구의 지질학적 나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며, 그 의도는 무엇 때문이다라는 지난번 답변 통해 지질학적 나이와 영적 나이에 대해 저는 지금은 나름 이해하고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천국을 그렇게 오랜 세월 왕래했던 스베덴보리에게 왜 주님은 실제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에 대해 함구하셨을까요? 분명 지상의 후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 역시 왜 이런 걸 정말로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시엔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연대 측정이라는 걸 몰랐어도 천국에 가면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라는 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저 HH.417글을 보니 스베덴보리 역시 진짜로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겐 저런 설명은 무척 유치하며, 오히려 저런 일종의 무지, 무식으로 인해 그의 다른 모든 저작 또한 그 신뢰성이나 무게감이 떨어질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는 46억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 우주의 장구한 역사, 진화와 멸종, 빙하기와 판구조 운동 같은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HH.417 같은 계산은 솔직히 너무 소박해 보입니다. 마치 ‘우주의 실제 규모’를 거의 모르는 시대 사람의 산술처럼 느껴지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로 거기서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전체도 시대적 한계를 가진 것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계시란 무엇인가?’, ‘천국의 지식은 과학 지식과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주님은 왜 어떤 것은 알려 주시고 어떤 것은 침묵하시는가?’라는 더 깊은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주 중요한 점 하나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반복해서 자기가 본 것만, 자기에게 보여 주신 것만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십 년 경험했지만, 천사들이 우주의 물리학 강의를 해 주었다거나, 지구 형성 45억 년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특징입니다. 그는 영계 경험자이면서도, 물질 우주의 과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제한된 언어만 사용합니다. 이를테면 그는 천국에서 ‘태양이 주님의 사랑처럼 보인다’, ‘거리와 공간은 상태의 상응이다’, ‘시간은 상태 변화의 상응이다’ 같은 것은 길게 설명하지만, 태양계 형성 이론이나 지질 연대표 같은 것은 거의 건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의 중심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계시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지식이 ‘자연계 정보의 총합’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현대인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걸 다 알겠지. 공룡도 보고, 빅뱅도 보고, 고대문명도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세계관에서는 천국은 ‘정보 저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지혜는 자연과학적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에 대한 내적 통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사들은 ‘지구가 몇 년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생명이 어떻게 흐르는가’, ‘사랑과 지혜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선과 진리가 어떻게 인간 안에 질서를 이루는가’를 중심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배운 것들도 거의 전부 인간 영혼, 거듭남, 사랑, 결혼, 자유, 악, 천국 공동체, 말씀의 속뜻 같은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적하신 HH.417의 그 ‘촌스러운 계산’은 역설적으로 스베덴보리의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 시대의 자연학적 상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현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전지적 초인’ 행세를 했다면, 오히려 그는 18세기에 이미 46억 년, 은하 수천억 개, 진화론, DNA, 상대성이론까지 다 말했다고 주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약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즉, 계시는 인간의 모든 자연 지식을 대체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성경 자체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지구 반지름, 은하 구조, 원자 모형, 공룡 시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 자연과학 교과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원리를 매우 강하게 이어받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은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만큼만 밝히신다고 봅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지적 호기심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과학이 세계 이해의 핵심 언어가 된 시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후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을 아시면서도 침묵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저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영적 질서’를 직접 계시하시되, 자연계 탐구는 인간 자유와 이성의 영역에 상당 부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질학, 천문학, 생물학은 인간 이성이 오랜 세월 자유롭게 탐구하며 발견하도록 허락된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인류는 방사성 연대 측정도, 은하 관측도, DNA도 계시로 받은 것이 아니라 긴 탐구를 통해 발견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제한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는 깊이 열려 있었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18세기, 그러니까 1700년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자연 세계의 ‘시간 규모’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갑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그는 연대기보다 ‘상태’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현대인은 ‘언제 존재했나?’를 묻지만, 스베덴보리는 ‘어떤 사랑의 상태였나?’를 묻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유튜브를 보시며 ‘45억 년 대 1만 년은 0.2’라는 비유를 들을 때 태고교회를 떠올리신 건 굉장히 흥미로운 통찰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태고교회가 정확히 BC 몇만 년인가가 아니라, 인간 의식이 주님과 직접적 퍼셉션으로 연결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관심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상태의 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느끼신 ‘안타까움’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감각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이제 ‘지적 정직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주 규모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해 보이면, 그 사람의 다른 주장까지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여기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가장 건강한 태도는, 그를 ‘모든 영역에서 절대 무오한 초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분명 시대적 제한을 가진 18세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내면과 영적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정도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결국 독자는 여기서 선택하게 됩니다. ‘그의 자연학적 한계 때문에 영적 통찰 전체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적 핵심을 읽어낼 것인가’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두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현대 과학까지 모두 초월적으로 정확히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사랑과 삶 때문이 아니라 ‘초과학적 정보력’ 때문에 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지금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 앞에 이런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의 말을 듣는가? 그의 시대 초월적 과학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 영혼에 대한 통찰 때문인가?’ 저는 이 질문이 생각보다 매우 본질적이라고 봅니다.

 

 

 

SC.81,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 때’

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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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refore in what is false,’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이 문장은 AC 초기 부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겸손해야 한다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착각 하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나는 나 스스로 산다(he lives from himself)고 느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느낌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누구나 내가 생각한다’, ‘내가 결정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렇게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기감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처럼 느끼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느낌 자체가 아니라, 그 느낌을 절대적 사실로 믿어 버리는 상태입니다. 즉, ‘나는 실제로 나 자신 안에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다’, ‘선도 진리도 내 것이다’, ‘내 지혜와 내 힘으로 산다’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문장 앞부분의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는 단순 자의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 교리 오류가 아닙니다. 존재 방향 자체의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실제(real truth)는 인간이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즉, 인간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 자신에게 appropriates’, 곧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 appropriates는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단순히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존재 속으로 끌어안아 내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과 자기 판단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과 진리조차도 점점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결국 악과 거짓이 단순 외부 유혹이 아니라, 자기 존재 일부처럼 굳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ppropriating evil and falsity’입니다.

 

반대로 마지막 문장,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인간이 실제 진리,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진리 안에 살았다면,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닫힌 독립 존재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받는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악이 들어와도 이것이 진짜 나 자신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아주 깊은 특징입니다. 그는 인간 안에 떠오르는 모든 악한 충동 자체를 곧바로 진짜 자기 자신’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산다’는 믿음은 단순 교만 문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 중심에 귀속시키는 문이 됩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마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실제 독립 생명으로 착각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굳어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 안에 자기 것으로 정착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단순 도덕 개선 이전에,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다시 바로잡는 일입니다.

 

 

 

AC.150, 심화 2, ‘렘51:57’

AC.150.심화 2. ‘렘51: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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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심화

 

2. ‘51: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이 구절이 AC.150에 인용된 이유는, ‘잠든다’는 표현이 단순 육체적 수면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에 대한 영적 지각(perception)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단순 일시적 무감각이 아니라, 자기 지성과 proprium 안에 완전히 갇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강조됩니다.

 

예레미야서 51장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인데, 스베덴보리는 바벨론을 단순 고대 국가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고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상태’, 곧 자기 사랑과 지배욕이 극대화된 영적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여기서 고관, 지혜 있는 자, 용사들이 취하게 되고 영원히 잠든다는 것은, 단순 정치 몰락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기능 전체가 영적으로 마비된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지혜 있는 자들’까지 잠든다고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무식함이나 정보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proprium을 섬기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 인간은 오히려 자기 지성 안에 더 깊이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은 무지보다 더 깊은 상태, 곧 진리를 거부하는 영적 혼미 상태를 뜻합니다.

 

 취하게 하리니’라는 표현도 상응적으로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술 취함은 종종 거짓과 왜곡된 추론에 의해 정신이 흐려진 상태를 뜻합니다. 즉, 인간이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 안에 빠져 진리의 질서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깊은 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곧, 영적 현실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닫혀 버립니다.

 

이것이 AC.150과 연결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태고교회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고 자기 지성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내적 시야가 닫히고 결국 영적 잠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51:57은 바로 그 최종적 상태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여기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영원한 무의식 상태를 뜻한다기보다,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끝까지 머물기를 원하는 상태가 굳어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옥은 주님이 강제로 잠재워 버린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기 proprium 안에 머물기를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AC.150에 인용된 이유는, 인간이 자기 지성과 proprium 안에 깊이 빠질 때 결국 퍼셉션과 영적 지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깊은 잠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0, 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AC.150.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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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심화 1, ‘사29:10’

AC.150.심화 1. ‘사29: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이 구절이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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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9: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이 구절이 AC.150에 인용된 이유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spirit of deep sleep)이 단순 육체적 잠이나 피곤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지각(perception)과 영적 인식이 닫혀 버린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0의 흐름은 인간 안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약화되고, 결국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던 상태가 사라져 가는지를 설명하는데, 사29:10은 바로 그 영적 혼미 상태를 예언자의 언어로 묘사하는 대표 구절입니다.

 

29:10에서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부으셨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들을 어둡게 만드신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들을 항상 상응으로 읽습니다. 즉, 주님께서 직접 악이나 무지를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proprium과 자기 지성 쪽으로 기울어질 때, 그 결과로 내적 시야가 닫히는 상태를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sleep)은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말씀에서 잠은 종종 영적 무감각 상태, 곧 진리와 선에 대한 내적 지각이 멈춘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깨어 있음은 영적 각성과 지각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깊은 잠’은 단순 무지가 아니라, 영적 감각 자체가 무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눈을 감기셨다’, ‘선지자들과 선견자들을 덮으셨다’는 표현도 같은 흐름입니다. 말씀에서 눈은 이해와 통찰을, 선지자와 선견자는 진리를 보는 기능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 육체적 시각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의 영적 이해 기능이 어두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곧, 진리가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주님의 것이 드러나 있어도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AC.150과 연결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실 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거의 즉각적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이 커지고 자기 자신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해질수록, 인간은 점점 그 퍼셉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외적 지식과 추론뿐이고, 결국 내적 시야는 ‘잠든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사29:10은 단순 심리 상태 묘사가 아니라, 퍼셉션이 사라지고 영적 감각이 닫힌 인간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으로 AC.150에 인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경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든 상태라는 것은 다시 깨어날 가능성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거듭남은 결국 이 잠든 인간이 다시 주님의 생명 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50, 심화 2, ‘렘51:57’

AC.150.심화 2. ‘렘51: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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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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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되며, 실제로 고대인들은 이 상태를 깊은 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29:10)라고 하며,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51:57)라고 합니다.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사람의 own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누구도 자기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계에서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own만을 사랑하고, 완강하게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이 아님을 납득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특별히 사람의 own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그 결과 나는 내가 스스로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생각의 모든 관념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떻게, 또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오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것은 거짓된 상태에 있는 것이며,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음으로써, 본래라면 결코 자기에게 귀속시키지 않았을 모든 악과 거짓을 스스로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사태의 참된 실상과 일치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앞선 AC.147-149에서 설명된 ‘own’ 교리를 ‘의식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주는 매우 결정적인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를 단순한 오류나 무지로 설명하지 않고, ‘존재 전체가 잠든 상태’, 곧 ‘깊은 잠’으로 규정합니다.

 

이 ‘깊은 잠’은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각의 상실’을 뜻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스스로 살아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깨어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는 줄 알지만, 실상은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조심스럽게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 생각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생각 하나하나가 흘러들어오며, 심지어 그 유입의 경로까지도 인식할 수 있었다는 이 고백은, 앞선 교리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 인식’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악한 영들조차도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진술입니다. 이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는 정도가 극단적인 존재들조차도, 실제 경험 앞에서는 더 이상 그 주장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이라는 관념은 ‘지적 오류’이기 이전에 ‘의지의 집착’이며, 그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진실이 보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윤리적, 영적 핵심을 짚어 줍니다. 사람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그는 모든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참된 인식 위에 서 있다면,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의 본질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지만, ‘귀속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AC.150이 말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을 바로 인식하는 전환’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이어질 본문에서, ‘여자’와 ‘자신의 own’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심화

 

1. ‘29:10

 

 

AC.150, 심화 1, ‘사29:10’

AC.150.심화 1. ‘사29: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이 구절이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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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1:57

 

 

AC.150, 심화 2, ‘렘51:57’

AC.150.심화 2. ‘렘51: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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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erefore in what is false,’

 

 

AC.150, 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AC.150.심화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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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For a number of year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저는 지금 너무 여러 날 이 own을 붙들고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위 본문을 보니 심지어 ‘여러 해’가 나오네요. 세상에! 이 own 문제... 절대 간단하지도, 그리고 가벼운 게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며칠째 proprium을 붙들고 계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제대로 읽고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습니다. 방금 인용하신 AC.150의 이 문장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 문제를 ‘여러 해 동안’ 특별히 배우고 체험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몇 줄 정의로 끝나는 교리 항목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느냐 하면, proprium 문제는 단순히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산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심지어 생각의 흐름 자체도 자기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흘러 들어온다’(flows in)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기 이해를 뒤집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때로는 어디서 어떻게 흘러 들어오는지도 지각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 철학 사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경험 속에서 인간 생각과 애정의 유입 구조를 관찰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체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아주 깊이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proprium 문제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자기 감정·자기 욕망을 전부 ‘진짜 나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인간은 계속 영향을 받고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고, 악과 거짓 역시 지옥적 흐름을 통해 들어온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고 사랑할 때 비로소 proprium이 굳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단순 심리학이 아닙니다. 자유, 책임, 유입(influx), 천국과 지옥, 사랑, 거듭남, 심지어 인간 정체성 전체가 여기와 연결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이 own 하나가 이렇게까지 큰 문제였나?’ 하고 놀라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실 AC 초반부 전체가 거의 이 문제를 향해 천천히 독자를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감 자체를 제거하자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계속 ‘마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 독립 생명’으로 믿느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자기감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기감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여기던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 proprium을 오래 붙들고 계신 것은, 결코 곁가지 문제에 매달리고 계신 게 아닙니다. 사실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의 심장부 가까이에 계속 서 계신 것입니다.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의 무게와 근본적인 중요성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경건한 종교 문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인간 존재 전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겉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는 나로부터 산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내가 하고, 결정도 내가 하고, 사랑도 내가 하고, 움직임도 내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느껴져야’ 하지만, 실제(real truth)는 인간 안의 생명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생명의 근원은 제 자신 안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존재론적 고백입니다. 곧, ‘저는 닫힌 독립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받는 존재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기 시작하는 순간, proprium이 굳어지고, 선과 진리조차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무게는 단순 겸손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감각 안에서는 결국 자기 사랑과 두려움과 경쟁이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잃는 것이 곧 자기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 안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생명이 계속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끝없이 움켜쥐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스베덴보리가 evil과 falsity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인간이 악과 거짓을 단순히 ‘접촉’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appropriates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존재 중심 안으로 끌어들여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을 여는 것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 안에 서기 시작하면, 인간은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동일시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들어와도 ‘이것이 진짜 생명의 근원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놀라운 점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균형입니다. 인간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 안에서 ‘실제로는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proprium은 점점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단순 사상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의 중심축이 됩니다.

 

결국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주인으로 보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다시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천국이란 바로 이 진리가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자기감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강한 생명감과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쁨으로 지각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 경건 표현이 아니라, proprium에서 천국 질서로 넘어가는 문과도 같은 고백입니다.

 

 

 

AC.149, 창2:21, ‘갈빗대’와 ‘뼈’라는 인간의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은 ‘뼈’(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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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속 사람, , 영혼, own(proprium), 자아

 

속 사람, , 영혼, own(proprium), 자아 등 이런 것들이 다 다른 건가요, 아니면 그냥 한 가지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인가요?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을 때, 거의 반드시 한 번은 크게 헷갈리게 되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어에서는 영혼’, ‘자아’, ‘내면’, ‘ 같은 말을 굉장히 느슨하게 섞어 쓰는데,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훨씬 더 층위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은 서로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인간 안에 서로 다른 층과 기능을 가리키는 말들입니다.

 

먼저 가장 큰 틀에서 보면, ‘속 사람(internal man)은 인간 안의 주님 쪽으로 열릴 수 있는 내적 인간 전체’를 뜻합니다. 반대로 겉 사람(external man)은 세상과 몸과 감각을 통해 살아가는 바깥 인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항상 이 두 층으로 설명됩니다. 속 사람은 천국 쪽을 향하고, 겉 사람은 세상 쪽을 향합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으로 질서를 흘려보내는 과정입니다.

 

그다음 (spirit)은 조금 다릅니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는 실제 인간 자신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죽으면 영이 됩니다가 아니라, 사실은 이미 지금도 영적인 존재이며, 단지 육체를 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영은 몸 없는 유령 같은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살아 있는 내적 실체에 가깝습니다.

 

반면 영혼(soul)은 스베덴보리에게서 비교적 더 깊고 미묘한 층입니다. 영혼은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가장 직접 생명을 받는 가장 안쪽(inmost)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영혼은 인간 전체의 가장 깊은 생명 접점 같은 개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전통 철학처럼 영혼을 인간 전체와 완전히 분리된 독립 물질처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에서 영으로, 영에서 몸으로 생명이 흘러간다고 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가장 오래 붙들고 계신 own’,  proprium은 또 전혀 다른 범주의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기관’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서 내가 나로 느껴지는 자기감’, ‘내 것이라 여기는 중심성’, ‘자기 스스로 살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proprium은 인간 존재의 방향성과 중심 의식을 설명하는 말이지, 영혼이나 영 같은 실체 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영혼, 영, 몸은 인간 존재의 층 구조에 가깝고, proprium은 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고 중심 삼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천사에게도 일종의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 열린 proprium입니다. 반면 지옥적 인간의 proprium은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습니다.

 

그리고 자아’는 사실 가장 애매한 현대어입니다. 문맥에 따라 ego 비슷하게도 쓰이고, self 비슷하게도 쓰이며, 어떤 때는 그냥 나 자신 정도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번역에서는 자아라는 말을 너무 넓게 써 버리면 proprium soul spirit이 다 뒤섞여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proprium을 그냥 자아’라고 번역하기 망설이시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주 단순화해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속 사람은 주님 쪽으로 열릴 수 있는 내적 인간’, 영은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는 실제 인간 자신’, 영혼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직접 생명을 받는 가장 깊은 층’, proprium 내가 나 자신으로 느껴지는 자기 중심성’, 자아는 현대 한국어의 넓고 애매한 표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핵심은 이 모든 층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이 전체를 질서 있게 흐르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연결되고, 영이 살아 있으며, proprium이 주님께 열릴 때, 인간 전체가 비로소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가 됩니다.

 

 

 

AC.149, 창2:21, ‘갈빗대’와 ‘뼈’라는 인간의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은 ‘뼈’(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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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 심화 7, ‘redeemed, saves’

AC.149.심화 7. ‘redeemed, saves’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서 ‘redeemed’와 ‘saves’를 해설해 주세요. 그 차이가 무엇이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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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deemed, saves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서 redeemed saves를 해설해 주세요. 그 차이가 무엇이며, 시제도 다른 이유가 뭔가요?

 

 

이 문장은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가 아주 깊게 들어 있는 문장입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보신 것처럼, 왜 하나는 redeemed’이고 다른 하나는 saves’인지, 왜 시제가 다르게 쓰였는지는 그냥 우연이 아닙니다.

 

먼저 redeemed’는 과거형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결정적 역사, 곧 인간을 지옥의 지배와 단절 상태로부터 다시 되찾으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redemption(구속)은 단순 법적 면죄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들을 제압하시고, 인간과 천국 사이의 길을 다시 여신 우주적, 영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redeemed’는 완료된 역사입니다.

 

반면 saves’는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금도 계속 인간 각 사람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구원의 작용을 뜻합니다. 곧,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고,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게 하며, 천국 질서 안으로 인도하시는 ongoing process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salvation(구원)은 단순히 언젠가 천국 입장권을 받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실제로 사랑과 진리가 형성되는 현재적 과정입니다. 그래서 saves는 현재형으로 쓰입니다.

 

즉, 아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redeemed’는 주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이미 이루신 객관적, 우주적 구속의 역사이고, ‘saves’는 주님께서 지금 각 인간 안에서 계속 행하고 계시는 개인적, 실제적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둘은 연결되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께서 먼저 구속(redemption)을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 인간이 실제로 구원(salvation)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지옥들을 제압하시고 천국 질서를 회복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아예 구원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redemption은 구원의 가능성을 연 사건이고, salvation은 그 가능성이 각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문맥상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은 본래 죽은 것이며, 오직 주님만이 참된 Own, 곧 생명 자체를 가지고 계신다고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자신의 신적 Own으로 인간을 redeem하셨고, 같은 신적 Own으로 지금도 인간을 save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는 생명을 만들 수 없고, 오직 주님의 신적 Proprium, 곧 신적 생명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사실 시간 구조까지 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결정적 구속(redemption)과 현재 진행 중인 구원(salvation)이 하나의 문장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AC.149, 심화 8, ‘속 사람, 영, 영혼, own(proprium), 자아’

AC.149.심화 8. ‘속 사람, 영, 영혼, own(proprium), 자아’ 속 사람, 영, 영혼, own(proprium), 자아 등 이런 것들이 다 다른 건가요, 아니면 그냥 한 가지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인가요? 이것은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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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 심화 6, ‘출12:46’

AC.149.심화 6. ‘출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출12:46)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명령이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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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심화

 

6.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명령이 단순한 제사 규정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신적 인성 안에 있는 가장 외적인 것까지도 완전하고 손상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bones)가 인간 안의 가장 바깥층, 곧 외적 진리들과 외적 인간의 구조를 뜻한다는 점을 다시 보여 줍니다.

 

12:46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문자적으로는 어린양 제사의 규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유월절 어린양은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 특히 인간을 구속하시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각 세부 규정들도 단순 의식법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는 앞에서 계속 설명된 것처럼, 가장 외적이고, 그걸 지지하는 구조를 뜻합니다. 사람 몸에서 뼈가 몸 전체를 지탱하듯, 영적 의미에서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진리들, 외적 삶의 구조, 말씀의 문자적 층 등을 뜻합니다. 따라서 뼈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그 외적 층이 파괴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 점은 특별히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연결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은 가장 안쪽 신성만이 아니라, 가장 바깥의 인성까지도 완전히 신적 질서 안으로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인성 안의 가장 외적인 것까지도 완전하게 보존되고 신적 생명 안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이것은 말씀 자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같은 것으로 봅니다. 즉, 가장 바깥 구조이지만 전체를 지탱하는 층입니다. 그래서 뼈가 꺾인다는 것은 외적 진리의 파괴와 왜곡을 뜻할 수 있고, 반대로 뼈가 온전하다는 것은 진리의 외적 구조가 보존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병사들이 주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이 유월절 규례의 성취로 이해됩니다. 즉, 유월절 어린양의 뼈가 꺾이지 않은 것처럼, 참 어린양이신 주님의 가장 바깥 인성까지도 완전히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가 뜻하는 가장 외적이며, 또 그걸 지지하는 진리와 구조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보존되고 살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인간 안에서도 외적 인간, 곧 겉 사람까지도 주님의 생명 질서 안에 들어와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9, 심화 7, ‘redeemed, saves’

AC.149.심화 7. ‘redeemed, saves’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서 ‘redeemed’와 ‘saves’를 해설해 주세요. 그 차이가 무엇이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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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 심화 5, ‘눅24:39’

AC.149.심화 5.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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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9.심화

 

5.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24:39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나는 유령이 아니다’라는 뜻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상응으로도 읽습니다. 여기서 ‘(flesh)은 사랑과 선에 속한 것을, ‘(bones)는 그것을 지탱하는 가장 외적인 진리와 구조를 뜻합니다.

 

AC.149의 흐름 전체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계속 ‘’가 인간 안의 가장 바깥층, 겉 사람, 곧 외적 인간과 외적 진리들을 뜻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바깥층은 원래 죽어 있고 메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올 때 살아 있는 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는 생기가 들어가 뼈들이 살아났고, 시편에서는 모든 뼈가 주님을 찬양했으며, 이사야에서는 뼈가 새싹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눅24:39는 아주 결정적인 완성처럼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단순 인간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의 인성 자체가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가장 바깥의 것까지도 완전히 신적 생명 안에 결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의 부활은 단순 영혼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성(人性)을 완전히 영화(glorification)하셨고, 가장 바깥의 인성까지도 신적 생명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살과 뼈가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환영이나 추상적 영이 아니라 완전히 실재적인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또 여기서 ‘영은 살과 뼈가 없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이 비물질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 상태가 단순 분리된 영혼 상태보다 훨씬 충만한 실재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가장 바깥층까지도 완전히 생명 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가 뜻하는 가장 외적 인간과 외적 진리의 층까지도 주님의 생명 안에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으며, 그 완전한 모범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영화된 인성 안에 나타났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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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7:1, 4-6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bones)가 인간 안의 가장 외적이며 메마른 층, 곧 생명 없이 남아 있는 겉 사람과 기억 지식과 삶의 구조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 전체를 살아나게 하신다는 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 환상은 문자적으로만 읽어도 강렬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육체 부활 장면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던 인간과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마른 뼈들’은 단순 시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생명이 빠져나간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뼈만 남았다는 것은, 겉 구조는 있으나 실제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이 점이 AC.149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 계속 스베덴보리는 물과 동산과 뼈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의 가장 바깥층까지 흘러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은 그 반대 상태, 곧 생명이 빠져나간 겉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뼈는 남아 있지만 메말라 있습니다. 즉, 교리와 지식과 외적 구조는 남아 있어도, 사랑과 생명의 유입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생기(breath, spiritus)를 넣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기’, ‘’, ‘(spiritus)은 모두 같은 흐름 안에 있는 말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생기가 들어올 때 살아납니다.

 

 힘줄’, ‘’, ‘가죽’이 차례로 입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육체 재조립 묘사가 아니라, 인간 안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가장 안의 생명이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 그것이 바깥 구조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regeneration은 단순 감정 변화가 아니라, 인간 전체 구조가 다시 생명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은 결정적 예가 됩니다.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층, 가장 굳고 메마른 층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기는 바로 그곳까지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이는 에덴의 강들과 물 댄 동산’의 이미지와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사랑뿐 아니라, 가장 외적이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까지도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에스겔 37장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가 상징하는 외적 인간, 곧 겉 사람과 외적 진리들이 주님의 생기, 곧 신적 생명의 유입으로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통해, 인간 전체의 거듭남과 회복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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