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7.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78:49-50)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 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78:49-50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당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사람들에게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영어 원문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an immission of evil angels’, 곧 ‘악한 천사들을 들여보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실제로 분노하시며, 인간에게 악한 영들을 보내어 벌하시는 것일까요? AC.357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직후, 매우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이며,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도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해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 이해와 말씀의 속뜻,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는 어느 순간 사랑하시다가 어느 순간 격분하여 악을 보내시는 식의 인간적인 감정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서 악을 향하면, 그 결과가 인간에게는 마치 주님께서 진노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외관에 따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이 점에서 시78:49-50과 사45:24을 함께 읽으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시78편만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노하신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45:24에서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바로 이 구절을 보조 구절로 인용하면서 ‘분노’의 실제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분노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반발하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주님께 분노할까요? AC.357의 앞부분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된 사람에게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선처럼 느껴집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 자기 명예가 높아지는 것, 자기가 옳다고 인정받는 것, 자기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질서는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만의 이익보다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지배하기보다 섬기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기보다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주님의 질서는 자기 욕망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AC.357에 따르면 악한 영들 가운데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결국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45:24의 ‘그에게 노하는 ’는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보조 구절이 됩니다.

 

따라서 시78편의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주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악한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경험하는 악의 결과가 말씀의 문자에서는 주님의 진노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말씀에 나타나는 ‘외관’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말씀도 그렇게 말하지만, 속뜻에서는 실제 원인이 인간의 악과 주님에게서의 이탈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특히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다’는 표현은 이 원리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AC.357은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같은 사랑에 따른 결합’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겉모습이나 말보다 사랑의 질이 사람을 서로 결합시킵니다. 같은 것을 사랑하는 영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 가운데 있는 영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 기만과 탐욕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는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는 악하므로 악한 영을 보내겠다’고 결정하여 그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애정이 그와 같은 애정을 가진 영적 사회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AC.357의 표현대로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한 영들에게 내버려 두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악에서 보호하시고, 악을 제한하시며, 가능한 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이 완강하게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삼을 때, 주님께서는 그 선택의 결과 자체가 전혀 나타나지 못하도록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택한 사랑에 따른 결과가 허용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78:50의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지나갈 길을 마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허용하신 ’이 주님께서 ‘행하신 ’처럼 기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판’에 대한 이해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심판을 하나님께서 위에서 사람을 바라보다가 ‘너는 선하므로 천국, 너는 악하므로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여 각각 다른 장소로 보내는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심판은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영적 사회로 스스로 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역시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집어넣는 감옥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보다 자기 사랑과 악을 더 사랑하게 된 영이 자기와 같은 사랑을 가진 곳으로 향한 결과입니다.

 

45:24의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와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는 대조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한쪽에는 여호와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여호와께 ‘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한 분이며 그분의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의 방향입니다. 주님께 향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공의와 힘을 발견하지만, 자기 사랑 때문에 주님의 질서에 반발하는 사람은 동일한 주님 앞에서 분노와 수치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누가 변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주님이 천사를 보내다가 갑자기 악한 천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의 질에 따라 악한 영들과 결합한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결과가 마치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시고 노하시며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원리를 다시 가인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AC.357이 왜 시78:49-50과 사45:24을 인용했는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창4에서 먼저 분노하는 쪽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와 거기에서 나오는 예배를 기뻐하시는데, 바로 그 질서가 가인에게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인이 분노합니다. 이것이 사45:24의 ‘그에게 노하는 ’의 원리와 같습니다.

 

결국 가인의 분노와 ‘여호와의 진노’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영적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거스르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고통과 악을 경험하면서는 그것을 마치 주님께서 자기에게 분노하여 내리신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 분노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는데, 그 결과가 주님의 진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문자적 외관과 속뜻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이나 악의 결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시78편의 죽음과 재앙 역시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을 주님의 분노나 보복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고,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사랑에 따라 영적 결합을 형성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순간에도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그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의 질서 밖에서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57이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그와 같은 영들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만들어 내는 결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도 주님은 가능한 한 악을 제한하시며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려고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시78:49-50을 사45:24과 함께 읽으면 ‘여호와의 진노’라는 표현의 방향이 뒤집혀 보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사랑에 따라 그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서 인간을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인의 분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경고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노하고 계신지를 먼저 묻기보다, ‘혹시 내가 주님의 질서에 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사랑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리와 체어리티에 반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벨을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8:49-50과 사45:24이 함께 보여 주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주님 안에 있는 인간적인 분노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인간이 그 사랑에서 돌아서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할 때, 그 악의 결과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자기와 같은 악한 영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질서조차 자신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심판 가운데서도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며, 분노의 근원 역시 주님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떠난 인간의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이 AC.357이 ‘가인의 분노’에서 시작하여 ‘여호와의 진노’까지 나아가 밝히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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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Cains anger was kindled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and evenfury,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와 다투던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45:24) 말합니다. 이로부터 분노(anger) 악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anger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성경에서 왜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연결합니다. 짧지 않은 한 단락 안에 인간의 악, 지옥의 상태, 말씀의 외관이라는 세 주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아직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킨 최종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체어리티가 떠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것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55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타락은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가 되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며, 이제 체어리티를 향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다음 단계가 아벨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매우 날카롭게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자연적인 분노를 무조건 자기 사랑이라고 단정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영적 의미의 분노, 특히 악에서 나오는 분노의 근원을 밝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그것을 막으면 반발이 일어나고, 그 반발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분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이 왜 분노했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것은 받아 주시지 않았다’는 형제간 질투가 아닙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옳고 자신이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의 존재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분노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사람은 때때로 ‘진리를 지키기 때문에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에 분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리, 자기의 신앙적 위치, 자기의 명예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를 ‘진리를 위한 열심’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AC.357은 그때 그 분노의 더 깊은 곳을 살펴보게 합니다.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배적 사랑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그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에 반발합니다.

 

여기에는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존재에게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에 따라 같은 주님의 질서가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것이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바로 그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께 분노합니다.

 

이 원리가 곧바로 성경의 ‘여호와의 진노’ 문제로 이어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감정이 격해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7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설명할 때 자주 다루는 ‘외관’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자기를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 즉 겉으로는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속뜻에서는 원인이 주님의 분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습니다.

 

78:49-50이 좋은 예입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한 천사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사람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애정에 따른 결합’의 원리와도 맞닿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영적 사회와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면 그에 상응하는 천국적 영향에 자신을 열고, 악과 거짓을 사랑하면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악한 영들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악한 영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형벌을 집행하기 위해 그들을 파견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의 사랑의 방향이 그들과의 결합을 불러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말을 단순한 인과응보 정도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와 같은 성질의 영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 그것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점점 가까워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면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상벌 이전에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셨다’는 시78:50의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을 말씀의 문자에서는, 즉 말씀은 겉으로는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표현한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악으로 향할 때, 그것을 무조건 제거하여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다만 섭리 안에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허용된 것이 겉으로는 때때로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이 점에서 AC.357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에게 사랑과 반대되는 인간적인 분노가 있다고 생각하면, 주님 안에 사랑과 진노라는 서로 상반된 두 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할 때, 그 사랑을 복으로 경험하고, 등을 돌려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동일한 신적 질서를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비유하자면 태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빛을 등지고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이 ‘태양이 내게서 빛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방향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비유이지만, AC.357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분노’의 외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은 다시 가인에게 돌아옵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이 분노합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의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묘사가 아니라 지옥적 사랑의 원리가 처음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의 AC.352-354와 대비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고, 그 사랑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반면 AC.357의 가인에게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갈등은 결국 이 두 사랑의 질서가 충돌하는 문제로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이 두 표현은 사실 하나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빈자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AC.357은 우리에게 분노 자체보다 그 분노의 ‘근원’을 보라고 합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거슬렸기에 분노하는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반발하는가, 주님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뜻과 명예와 판단을 지키기 위해 화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내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분노와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설 때 자기 사랑과 같은 성질의 악을 자기에게 끌어당기며,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78:49-50)

 

 

AC.357,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AC.357.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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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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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6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것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byCain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to his offering he looked not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글이라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부분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 설명했다’고 밝히므로, 여기서는 이미 나온 내용을 길게 반복하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 변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다시 세워 놓았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가인’입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 사랑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까지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실제 삶에서 신앙과 사랑이 조금씩 멀어지는 상태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굳어지면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신앙으로 온전히 존재할 있다’는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됩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349에서 보았듯이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예배는 외적 형식을 아무리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할 것은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체어리티만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53에서는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체어리티와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의 대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앞의 AC.341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AC.356에서 다시 확인하는 이유는 이제 가인의 더 깊은 내적 변화가 설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에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AC.355는 이것을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한 상태라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AC.356은 짧지만 가인의 타락 과정에서 하나의 경계선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의 제물은 무엇인가’, ‘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결국 AC.356의 핵심은 이미 확인한 두 사실을 다시 붙드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그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다음 단계인 ‘분노’와 ‘안색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즉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결국 생각과 교리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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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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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합니다.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offering not being looked to) 것은 앞에서와 같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그의 안색이 변했다(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 것은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분노(anger)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하고, 안색(faces) 내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그것들이 변할 안색이 떨어졌다(fall) 말합니다. ByCain,as has been stated,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such a doctrine as admits of the possibility of this separation; by hisoffering not being looked tois signified as before that his worship was unacceptable. ByCains anger being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Byangeris denoted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by thefaces,the interiors, which are said tofallwhen they are changed.

 

 

해설

 

AC.355부터 창4:5의 속뜻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앞의 AC.346-354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드렸으며, 왜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말씀의 초점은 ‘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먼저 ‘가인’에 대한 정의가 조금 더 정밀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도 상징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사랑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넘어,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고 교리적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음부터 가인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AC.347에서는 처음에는 가인이라 불리는 교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에서 지금처럼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실제적인 분리가 되고, 이제는 그 분리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인정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따라서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AC.349에서 ‘제물’은 예배를 상징한다고 했으므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는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없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가인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분노’를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질투했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왜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나타낼까요? 체어리티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그의 선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사랑보다 높이고, 자신의 교리적 위치를 지키려 할 때, 체어리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특히 자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벨의 예배는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가인이 아벨을 향하여 분노한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이제 그것을 적대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몹시’라는 표현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분리는 이제 단순한 개념상의 구별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체어리티를 불편하게 여기고, 마침내 그것을 향해 분노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사랑과 별개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아닌가?’라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했지만,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자, 이제 사랑과 체어리티 자체가 신앙의 자기주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은 이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영어 원문은 ‘his faces falling’,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들이 떨어졌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얼굴(faces)을 인간의 ‘내적인 것들’로 해석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뻐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슬프거나 분노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처럼 얼굴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 관한 교리적 변화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 잘못된 질서가 인간의 내면 자체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흐름을 AC.338부터 연결해서 보면 가인의 타락 과정이 상당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점차 분리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집니다. 그러자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가 나오고, 이제 그 결과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이후에는 결국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영적 파국이 아닙니다. AC.355는 그 직전의 내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질서가 생각과 교리에서 뒤집히고, 그 뒤 애정이 변하며, 마침내 삶의 행위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교리가 단순히 머릿속의 잘못된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면 인간의 애정과 의지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단지 신학 시험에서 답 하나를 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바른 교리를 믿고 있으므로 어떻게 살아가든 신앙 자체는 온전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처음에는 작은 교리적 분리처럼 보여도 점차 삶과 애정의 질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오히려 방해물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분노를 돌아볼 때 AC.355는 날카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물론 모든 분노가 곧 체어리티의 상실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악과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신앙과 교리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선이 오히려 인정받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라면 그 안에 가인의 상태가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의 분노에서 특히 두려운 것은 그가 여전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예배를 폐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 종교성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외적 종교생활이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가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진리를 말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체어리티가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가인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비극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게 될수록 이웃을 더 사랑하는가, 더 자비로워지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낮아질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선과 결합하고 있다면 사람의 내적인 것들도 점차 주님을 향해 열립니다.

 

결국 AC.355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분노’보다 그 뒤에 있는 ‘내적인 것들의 변화’입니다. 가인의 얼굴이 변하기 전에 그의 내면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이 변한 근본 이유는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며, 그 교리에서 예배하고,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향하여 분노하게 될 때, 인간의 내적인 얼굴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AC.355는 가인의 타락이 본격적으로 외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직전의 결정적인 지점을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중립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체어리티가 떠나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내면이 변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고 계심을 이후의 글에서 살펴볼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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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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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는 아벨(Abel) 그의 제물(offering) 관하여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hat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signifies that the things of charity, and all worship grounded therein, are pleasing to the Lord, has been explained before, as regards bothAbel,and hisoffering.

 

 

해설

 

AC.354는 매우 짧으며, 사실상 앞의 AC.350-353을 마무리하는 결론 역할을 합니다. 새로운 상응을 제시하기보다는 창4:4의 마지막 부분인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말씀의 속뜻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체어리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지 않고 예배의 근거, 곧 예배가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9에서 말한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그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는다’는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외적인 예배의 형식이 아무리 온전해 보여도 그 안에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는 살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 자체의 근원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고,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것을 나타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에게서 어떤 훌륭한 것을 만들어 주님께 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체어리티의 삶과 예배로 다시 주님께 돌려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호와께서 돌아보셨다’는 표현도 주님께서 가인이라는 사람보다 아벨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것은 아벨이 표상하는 체어리티와 그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주님의 서로 다른 반응은 사람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두 종류의 내적 상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점은 곧 이어질 가인의 반응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외적으로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예배는 체어리티에 기초했습니다. 결국 두 제물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을 드렸는가?’보다 ‘어디에서부터 드렸는가?’입니다. 한쪽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고, 다른 한쪽은 체어리티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4:4의 ‘돌아보셨다’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예배하는가, 얼마나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가, 얼마나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의 내적 근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예배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알수록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 예배에는 아벨의 생명이 있습니다.

 

AC.354는 짧지만 AC.350-35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아벨 = 체어리티’, ‘처음 =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 ‘기름 = 주님께 속한 천적인 사랑의 ’,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드리는 ‘제물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결국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에서 예배가 나오는 질서’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 살펴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다시 가장 단순한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행위냐의 대립이 아닙니다. ‘신앙과 예배 안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받고, 예배가 체어리티에 기초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돌아보시는’ 살아 있는 신앙과 예배가 됩니다.

 

 

 

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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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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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강한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의 지구촌교회 창립기념 설교를 계기로, 떼제 공동체와 관상기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 에큐메니즘, 유진 피터슨과 레노바레 운동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비판합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 방법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에게 이것은 결국 ‘다른 복음’의 문제이며, 교회가 성경에서 떠나 종교통합과 신비주의로 이동하는 ‘배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의 ‘다른 복음’, 고린도후서 11장의 ‘다른 예수, 다른 , 다른 복음’, 요한이서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져와 자신의 비판을 뒷받침합니다.

 

이처럼 정동수 목사의 문제의식 자체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 ‘화해’, ‘포용’, ‘넓은 마음’이라는 아름다운 말 아래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종교적 차이를 지워 버리고 ‘무엇을 믿든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식의 무차별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선과 진리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어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제기하는 ‘넓은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의 경계까지 없애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정동수 목사와 스베덴보리의 길은 크게 갈라집니다. 정동수 목사는 ‘진리의 경계’를 거의 교리적 소속과 정통성의 경계로 설정합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가 함께 예배하는 것을 종교통합으로 보고, 그것을 사실상 ‘다른 복음’과 연결합니다. 더 나아가 강의 마지막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진리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경계는 사람이 어느 교단 명부에 속해 있는가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를 읽는 데 가장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방대한 기록에서 사람을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이방인’이라는 지상의 명칭만으로 나누어 구원을 판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각 종교 안에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으며,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거나 자신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교회적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떤 교리를 배웠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는 구별합니다. 그의 저서,‘천국과 지옥’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도 결국 사람이 사후에 자기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지상에서 가입했던 교파의 연장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동수 목사의 ‘가톨릭 신자는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없다’는 식의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 상당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리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교리적으로 많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자기애와 세상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보다, 제한된 진리밖에 모르면서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세워 놓고 이동원 목사의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이 표현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아름다운 진실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만든 교파의 울타리보다 훨씬 큽니다. 주님은 개신교라는 명칭 아래 있는 사람만 돌보시는 분이 아니며,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합니다. 심지어 참된 종교에 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의 교파적 마음보다 넓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한 문장이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넓다는 것과 주님께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리를 동일하게 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넓은 마음’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사이에 실제 교리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교황권, 성인에 대한 기도, 성찬 이해, 칭의, 교회론 등에 실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똑같으니 아무 차이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진리 문제의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떼제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 문제에서도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으니 모든 교리가 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함께 기도했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참여자가 그 가운데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떼제를 ‘가짜들끼리 같이 모이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집단적으로 판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고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영적 상태를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입니다. 정동수 목사는 이동원 목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끌어낸 것을 ‘설교 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보내신 목적이 ‘넓은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먼저 하고 싶은 말을 정해 놓은 다음 성경 본문을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설교 왜곡’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지적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역시 본문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경고를 적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고 해서 어느 본문에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집어넣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문자의 뜻을 정직하게 읽어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문의 직접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 뒤에야 말씀의 속뜻을 살펴야 합니다. 속뜻은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주님께서 넣어 두신 더 깊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나쁜 무화과는 남아 있거나 심판 아래 놓인 이들을 가리킵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눈에는 정반대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포로가 된 사람들이 실패자이고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들을 오히려 ‘좋은 무화과’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보존하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보입니다. 인간이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사건이 반드시 영적 파멸은 아니며, 인간이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상태가 반드시 영적 안전도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화과’라는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말씀에서 무화과는 대체로 자연적 선, 곧 사람의 외적·자연적 삶에서 나타나는 선과 관련됩니다. 포도나무가 보다 영적인 선과 연결되고 올리브가 보다 천적인 선과 연결되는 것과 비교하면, 무화과는 인간의 자연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선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대비는 단순히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도덕적 구분보다 더 깊게, 사람의 자연적 삶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선하게 형성되었는가 아니면 부패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열어 줍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 포로라는 사건도 색다르게 보입니다. 포로 생활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다의 오랜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십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다시 교회를 일으킬 수 있는 남은 것을 지키십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로 그런 보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악의 결과 가운데서 선을 끌어내십니다.

 

이 점에서는 이동원 목사가 고난을 통하여 더 넓은 시야를 배우는다는 방향으로 적용한 것이 본문의 문자에 직접 쓰여 있지는 않더라도, ‘고난을 통한 변화’라는 적용 자체를 곧바로 성경 왜곡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조금 더 살펴볼 여지가 있습니다. 설교에는 본문 해석과 오늘의 적용이라는 두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적용이 본문의 중심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 아니면 본문을 발판으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동원 목사의 실제 설교 전체 문맥을 놓고 따져야 공정합니다. 이번 원고가 제시한 비판자의 설명만으로 그의 설교 전체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정동수 목사 자신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본문에 없는 것을 가져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설교 왜곡’이라고 매우 좋은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후 예레미야에서 ‘하늘의 여왕’을 가져와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 칭호와 직접 연결하고, 따라서 예레미야를 설교한다면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와 종교통합을 버리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당시 말한 ‘하늘의 여왕’과 후대 가톨릭에서 마리아에게 사용된 ‘하늘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두 대상을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본문 밖의 역사적·신학적 연결을 사용한 ‘적용’입니다.

 

이것은 정동수 목사의 결론이 반드시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일관성입니다. 이동원 목사가 본문에서 현대 교회의 화해를 적용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것을 넣은 ’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은 같은 예레미야에서 현대 가톨릭의 마리아론을 끌어오는 것이 자동적으로 허용된다면 해석 기준이 비대칭적이 됩니다. 설교자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해석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매우 유익한 제3의 길을 제공합니다. 역사적 문맥은 역사적 문맥대로 존중하면서, 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는 인간의 자의적인 연상으로 찾지 않고 말씀 전체의 상응을 통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하늘의 여왕’을 단순히 2천여 년 뒤 특정 교단의 명칭으로 바로 점프시키는 것보다, 우상숭배가 인간 내면에서 무엇인지 먼저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 속해야 할 사랑과 경배를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 돌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속뜻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에서 계속 등장하는 ‘배도’ 역시 단순히 교단 이동이나 에큐메니즘 참여보다 훨씬 깊은 문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심각한 배도는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통이어도 체어리티가 죽어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아벨, 곧 체어리티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사람은 동시에 ‘나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언어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짜 목사’, ‘쓰레기’, ‘마귀가 만든 ’, ‘가짜들끼리 모인다’, ‘침례교의 침자도 모르는 사람’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를 위한 열심도 그 안의 정서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보호하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원합니다. 자기애에서 나오는 열심은 진리를 방패 삼아 상대를 공격하고 이기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매우 강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속의 불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사랑해야 하므로 오류를 지적하지 말자’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이웃 사랑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사람을 영적으로 해친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다만 목적이 중요합니다. ‘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여야 합니다. 이것이 논쟁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이제 관상기도 문제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관상기도, 침묵기도, 향심기도, 호흡기도 등을 거의 하나의 범주로 묶고, 불교·힌두교의 명상 및 만트라와 연결합니다.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면 이성적 사고가 정지되고 의식을 잃게 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 외부 영적 존재에게 열리고 결국 ‘마귀가 들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촛불을 바라보거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역시 같은 위험의 통로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매우 세심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영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영향’이라는 개념 자체를 스베덴보리에게 낯선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부분만 보면 강사의 경계심이 스베덴보리와 접점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평상시에도 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정 기도법을 사용해야 비로소 영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이 자유와 이성 안에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을 켰다는 사실, 몇 분 침묵했다는 사실, 짧은 기도문을 반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마귀가 들어오는 통로가 열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경계선은 ‘자유와 이성을 훼손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무비판적 수동성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이성을 내려놓게 하고, 어떤 내적 음성이나 느낌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라고 믿게 만드는 수행이라면 분명 위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파괴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것을 삶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 중요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고 잠시 침묵하면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역시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여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려 하는 것과, 방금 읽은 말씀을 주님 앞에서 조용히 되새기며 자신을 살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외형은 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일 수 있지만 내적 활동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반복기도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헛된 반복’을 경계하신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반복이 곧 ‘헛된 반복’은 아닙니다. 같은 시편을 반복해서 읽는 것,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진심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찬송의 후렴을 반복하는 것을 그 자체만으로 힌두교 만트라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말의 횟수보다 그 말 안에 있는 의도와 의식입니다. 의미를 제거하고 의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기계적 반복과, 마음을 주님께 돌리며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기는 반복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목적’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같은 외적 행위라도 목적이 다르면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가 됩니다. 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 자기 안의 신성을 발견하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반복을 통해 의식을 지우려 하고, 다른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반복하며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습니다. 외적 형식만으로 내적 상태를 판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떼제 찬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의 구조가 단순하고 짧은 문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 구조 자체가 곧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선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 찬양이 사람의 애정을 어디로 이끄는가? 주님을 향한 겸손과 사랑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자기 감정의 황홀경 자체를 사랑하게 하는가? 그리고 정서가 이후의 삶에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가?

 

이 기준은 통성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조용한 기도만 위험하고 큰소리 기도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도취될 수 있고, 조용히 침묵하면서도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기도 형식보다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본질입니다.

 

강의에서 ‘설교 없는 예배’에 대한 비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로마서 10장의 ‘신앙은 들음에서 난다’를 근거로 말씀 선포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성경을 읽고 5~10분 침묵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적 설교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워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 체험만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자체는 인간 설교자의 설명보다 더 근원적인 거룩함을 지닙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봉독한 뒤 잠시 조용히 그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씀 선포를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설교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인도받고 있는가’입니다. 훌륭한 설교도 사람을 자기 숭배로 이끌 수 있고, 짧은 말씀 봉독 하나가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역설적으로 이번 강의 자체에도 적용됩니다. 강사는 성도들에게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무조건 아멘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원칙은 이동원 목사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의를 하는 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이동원 목사가 유명하다고 믿지 말라’가 옳다면 ‘이동원 목사를 비판하는 유명한 목사가 말한다고 그대로 믿지도 말라’ 역시 옳습니다. 모든 주장을 말씀과 사실과 이성 앞에서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이번 강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분별의 원칙입니다. ‘누가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말했는가?’보다 ‘ 말이 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연결하고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강사는 유진 피터슨을 ‘신비주의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메시지’를 ‘쓰레기’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저작과 신학 전체를 특정 연관관계 몇 가지로 한꺼번에 판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저자의 특정 주장에 문제가 있다면 그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면 됩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댈러스 윌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과 관계가 있으므로 사람도 잘못되었다’는 연쇄적인 방식보다 각각의 가르침을 실제 내용에 따라 검토하는 편이 더 공정합니다.

 

특히 ‘누구 이름이 나오면 가지 말라’는 방식의 분별은 성도들에게 단기적으로는 편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분별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름 목록만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분별은 ‘ 사람은 금지된 사람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하는가,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가, 말씀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열매 맺게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강의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가톨릭과 구원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성인 숭배, 인간에게 신적 권위를 돌리는 문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바벨론에 관한 해설을 읽어 보면 그 비판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의 영혼과 천국에 대한 권세를 자기에게 돌리는 사랑을 심각한 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포용적이니까 가톨릭 교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큰 오해입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가톨릭 신자는 모두 지옥 간다’는 결론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교리 체계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과 그 안에 태어나 살아온 개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부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빛과 기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십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뿐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등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적용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의 민족들, 곧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분명히 다룹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종교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선한 삶을 살며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 사후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 마지막의 ‘구원은 기독교 안에만 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중요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도 단호합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을 통해 구원받는다’와 ‘지상에서 특정한 기독교 교리 체계에 소속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그 근원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은 놀랍도록 넓으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주님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이번 논쟁의 표현이 다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정말 넓습니다. 그러나 ‘아무거나 괜찮다’는 의미에서 넓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려 하기 때문에 넓습니다. 불교인도, 무슬림도, 가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사랑하시지만 그들 안에 있는 모든 거짓을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하시되 거짓에서는 건져 내시고, 선을 보존하시며, 더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과 잘못된 종교통합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교리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모두 똑같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희생한 통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함께 대화하면서 무엇이 참인지 찾고, 가능한 선에서는 협력하며,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긴다’는 태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후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강의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장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의 화해와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진리의 문제를 덮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설교자가 본문을 자기 주장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 유명한 목사의 말도 성도가 분별해야 한다는 경고, 감정적·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진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침묵을 곧 관상기도로, 관상기도를 곧 동양 종교의 명상으로, 반복 찬양을 곧 만트라로, 만트라적 반복을 곧 의식 상실로, 의식의 이완을 곧 마귀의 침입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논증에는 단계마다 별도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또한 떼제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짜’로 묶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분별’에서 ‘심판’으로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영적 세계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은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내적 사랑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누가 천국에 속했고 누가 지옥에 속했는지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교리를 살필 수 있고 행동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위험한 가르침을 경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 자체를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기존 기독교의 여러 교리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믿음만의 구원, 속죄, 부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말씀의 속뜻 등 거의 모든 핵심 주제가 새롭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가장 조심해야 할 유혹이 ‘나는 이제 알았고 저들은 모른다’는 우월감입니다. 그것이 들어오는 순간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proprium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여 주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 사람이 틀렸는가?’가 아니라 ‘ 말씀이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는가?’입니다. 예레미야 24장의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도 결국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자연적 삶 안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선은 무엇이며, 이미 부패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붙들고 있는 예루살렘은 정말 주님의 도성인가, 아니면 내가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proprium의 성인가? 때로는 내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벨론 포로’ 같은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오히려 내 안의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좋은 무화과 광주의 소망’이라는 본문은 특정 목사의 에큐메니즘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되기 전에 우리 자신의 거듭남을 비추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판정하는 책이기 전에 나를 심판하고 고치고 거듭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넓은 마음이냐, 진리 수호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은 신적 지혜와 하나이며, 선은 진리와 결혼해야 합니다. 진리를 버린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잃은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리적 차이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영성을 경계하면서도 침묵과 묵상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가톨릭 신자의 영혼을 우리가 대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에큐메니즘의 위험을 살피면서도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배도로 규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분별하라고 가르치면서 그 목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유명한 목사의 말 역시 똑같은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이라는 말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 넓음은 진리를 희석시키는 넓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넓음입니다. 주님은 거짓을 참이라고 부르실 만큼 넓으신 분이 아니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참으로 이끄실 만큼 넓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별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에는 우리가 함부로 그을 있는 경계가 없습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잃으면 한쪽에서는 무차별적인 종교혼합으로 흐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교리적 정죄와 영적 우월감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시간의 강의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에게 남아야 할 질문은 ‘이동원 목사는 배도한 목사인가?’ 하나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경계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오류를 찾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진리의 차이를 흐리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넓지만 흐리지 않고, 분명하지만 정죄하지 않는’ 분별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논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고 싶은 지점입니다.

 

 

 

SY.71, 정동수 목사,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로 성경 공부 바르게 하기, 잘못된 목사, 교리, 설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특강은 인공지능 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동수 목사의 출발점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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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기도에 대한 신뢰로 나아갑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문장은 사실 매우 단순합니다.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전부’인 것처럼 신앙인에게도 하나님이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반복합니다. 이 중심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깊은 지점을 건드립니다. 다만 설교 후반부의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면 반드시 받는다’는 적용으로 갈수록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박요한 목사가 무화과나무 사건을 문자 그대로만 읽지 않고 ‘표면성 이면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한 대목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께서 배가 고프셔서 열매를 찾으셨는데 열매가 없자 화가 나서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무성한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당시 예루살렘 종교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과 종교적 형식은 화려하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라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방식과 상당히 가까이 다가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 속의 나무와 잎과 열매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닙니다. 특히 ‘열매’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선한 삶으로 가져가는 것, 곧 선과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산출과 깊이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의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진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잎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필요하고, 말씀에 관한 지식도 필요하며, 예배의 형식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열매를 위한 ’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종교의 목적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 열심이어도 그것이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으로는 잎만 무성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예배를 화려하게 하지 말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설교와 기도가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이 지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대형 연합집회, 수많은 직함, 화려한 찬양대와 찬양 형식을 비판하는 문제도 조금 조심스럽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명예와 직함과 외형이 앞서는 종교는 분명 위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화려함’ 자체와 ‘’을 동일시하기 어렵습니다. 소박한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내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라고 해서 자동으로 외적 예배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양대를 없애야 한국 교회가 산다’는 식의 결론보다는 ‘찬양대가 있든 없든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는가’를 묻는 편이 더 본질적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어린아이에 관한 해설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어린아이도 장난감과 좋은 것을 좋아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들을 내려놓고 엄마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재산과 직업과 가정과 건강과 성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과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목적이고 어느 것이 수단인가’입니다. 어린아이 비유를 이 관점에서 읽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것은 괜찮지만 ‘엄마보다 장난감이 중요해지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주님에게서 받아 선하게 사용하는 동안에는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대신하여 삶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이 됩니다.

 

이것은 설교 중 출애굽기 33장의 모세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은 주시겠지만 친히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것을 ‘가나안보다 하나님을 원하는 신앙’으로 읽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중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보다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깊이 표현한다면, 천국조차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의 본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그 안에서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없이 천국만 얻겠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를 더하면 이 설교는 더욱 깊어집니다. 어린아이가 천국적인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미숙하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에게 무엇이든 달라고 조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의 핵심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인 proprium과 정반대 방향입니다. ‘내가 안다’, ‘내가 있다’, ‘ 힘으로 산다’는 자기중심적 독립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생명과 선이 공급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은 지성을 포기하는 신앙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자신에게서 선할 없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깊은 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요한 목사가 ‘어린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고 한 것은 매우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반드시 돈과 성공과 건강과 소원의 성취를 공급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생명, 선을 사랑할 능력, 진리를 볼 빛, 악과 싸울 힘, 그리고 거듭남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서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어린아이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부의 기도론은 이 렌즈에서 한 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과 오랜 기도 끝에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경험을 들려주면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는 고백 자체는 소중합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증언 역시 귀합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경제적인 회복과 성공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2122절의 보편적 해석 원리로 확장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믿음으로 오래 기도했는데도 병이 낫지 않은 사람, 사업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은 ‘내가 어린아이처럼 믿지 못했기 때문인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우리의 욕망을 무제한으로 실현해 주시는 데 있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신적 섭리 안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이든 요구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엄마가 문자 그대로 무엇이든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과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박요한 목사가 사용한 ‘엄마만 믿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기도 응답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엄마에게 조르면 내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얻는다’가 아니라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에게 나를 맡길 있다’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으리라’는 말씀도 ‘ 욕망을 강한 확신으로 밀어붙이면 현실이 된다’는 공식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기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것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점차 ‘주님, 이것이 제게 정말 선한 것이라면 허락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뜻을 고쳐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변합니다. 결국 가장 깊은 기도는 주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의 절정은 ‘ 뜻대로 이루어졌다’가 아니라 ‘ 뜻이 주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 ‘성령 충만’을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상태로 설명한 부분 역시 매우 좋습니다. 방언이나 봉사나 종교적 활동 하나를 성령 충만의 결정적 표지로 삼지 않고 ‘하나님 분이면 만족합니다’라는 방향으로 가져간 것은 이번 설교의 중요한 장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친밀감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함’과 ‘이웃에게 선을 행함’은 서로 경쟁하는 두 영성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안과 밖으로 나타나는 두 모습입니다.

 

반면 설교 중 몇몇 단정적인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교 전체를 ‘예수님이 씨를 말려 버린 이단 종교’라고 규정하는 표현이나, 특정 음악가·연예인들의 약물 문제를 감정적 공연 방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설명, 점이나 타로를 본 사람의 영 안으로 곧바로 악령이 들어와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설명하는 방식 등은 설교의 중심 메시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주장들이 아닙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심판을 역사적 유대인 전체에 대한 주님의 저주로 확대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 민족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상했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자신에게도 살아 있는 심판과 경고가 됩니다. ‘ 유대인들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였다’고 끝내면 말씀은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지만, ‘혹시 지금 안에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있지 않은가?’라고 읽으면 말씀이 거듭남의 말씀이 됩니다.

 

설교 첫머리에서 언급한 엘리사와 아이들 사건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적 사건 앞에서 ‘성격이 불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구나’라고 나름의 답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본문일수록 문자적 사건에 나타난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교훈을 끌어내기보다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 자신이 무화과나무에서는 ‘표면성 이면의 영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엘리사 사건에서는 문자적 인물의 성격으로 해석한 것은 방법론적으로 조금 일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사건을 함께 놓으면 ‘문자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일수록 속뜻이 필요한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결국 이번 설교의 가장 귀한 부분은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박요한 목사 자신이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가나안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끝까지 밀고 가면 설교 전체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도 ‘하나님 없는 종교’이고, 성전의 문제도 ‘하나님 없는 종교적 외형’이며, 어린아이의 아름다움도 ‘엄마 없는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이고, 모세의 위대함도 ‘하나님 없는 가나안을 거절한 ’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절정 역시 ‘하나님 없는 응답’을 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란 주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무엇이든 얻어내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모든 생명과 선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 자신을 모든 선물보다 사랑하고, 사랑을 삶의 열매로 맺어 가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무화과나무의 ‘열매’, 어린아이의 ‘엄마’, 모세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믿고 구하는 기도’가 한 줄로 이어집니다. 잎만 무성한 종교에서 열매 맺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랑하는 데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데로,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어른의 proprium에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밝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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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고, 수도학교와 잇사갈 성경대학, 봉쇄학당, 수도 영성가 연구, 방문객 교육과 부흥회 사역 등을 소개한 뒤, 자신이 생각하는 수도원 운동의 방향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은 하나의 수도 일화라기보다 강문호 수도사가 생각하는 ‘개신교 수도원 운동의 자기소개와 비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도 개별 사실 하나하나를 따지는 것보다 이 세 축이 과연 사람을 어디로 이끌려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영상은 은퇴를 앞두고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고 기도했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를 인생의 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은 생애를 어떻게 주님께 드릴 것인가를 묻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의 영적 성장은 특정 나이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평생 계속되며,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노년은 단순히 지난 업적을 정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을 더욱 내려놓고 주님께로 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반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소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아름다운 후반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나 더 던집니다. 많은 일을 이루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아니면 사람이 점점 더 주님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후반전일까요? 물론 둘은 서로 배척되지 않습니다. 수도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고, 수백 권의 자료를 집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외적 성취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가?’보다 ‘ 일을 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주님의 질서 아래 놓였는가?’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원을 알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하고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답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도원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이 깨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대목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개신교 전통 밖으로 나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것이 다른 전통에는 있을 있다’는 열린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신교가 종교개혁 이후 수도원 제도와 상당히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오래된 기독교 전통 안에서 기도와 절제, 침묵, 공동생활, 노동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 자체는 귀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외적 수도생활과 내적 거듭남을 구별합니다. 수도원을 많이 방문했다고 수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며,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쇄된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고 내면의 자기 사랑까지 봉쇄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접촉을 줄이면 이전에는 외부 활동에 가려져 있던 proprium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수도의 시험은 ‘얼마나 세상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떠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영상에 나오는 새벽 4시의 기도실 이야기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연 속 작은 기도실에 들어가 예수의 형상 아래 머리를 대고 ‘오늘 안수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모습에는 주님께 의탁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형상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외적 도움으로 사용된다면 그 자체를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 아니라 그 순간 마음이 향하는 대상입니다. 더 나아가 아침에 주님의 인도를 구했다면 하루 동안 실제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님의 계명 아래 두려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실에서의 ‘주님, 저를 지켜 주세요’가 생활 속에서는 ‘주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게 주세요’가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수도학교 이야기는 강문호 수도사의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개신교 안에 수도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고,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 수도사의 길을 택하고, 다시 일부가 수도원을 세우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도제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기도와 자기 성찰, 절제와 쓰임을 훈련하는 환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제도 자체가 영적 우월감이나 특별한 신분의식으로 변한다면 오히려 거듭남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도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행할 때 거룩함이 형성됩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도 이번 영상의 큰 축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한번 성경만 깊이 파보자’, ‘오직 예수 공부만 보자’며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수백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은 인간이 그 문자만 읽어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천국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발견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안다는 것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알고, 고대 문헌을 많이 읽고, 사람들이 처음 듣는 정보를 많이 찾아낸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깊이는 궁극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정보를 발견했는가?’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 알고,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그토록 방대하게 펼쳐 보인 목적도 지적 경탄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주님과 천국과 인간의 거듭남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악할 만큼 새로운 성경 지식’은 종착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 지식이 사람의 생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직 말씀은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강문호 수도사가 마지막 때를 대비하는 수도원 영성을 ‘청빈, 거룩, 오직 예수’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는 대목입니다. ‘ 대신 청빈, 음란 대신 거룩, 배교 대신 오직 예수’라는 구도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렬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어입니다. 그리고 각각에는 분명 기독교적 가치가 있습니다. 재물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지고, 성적 욕망의 무질서를 다스리며,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으려는 삶은 모두 중요한 영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세 가지를 조금 다르게 깊이 들어갑니다. 먼저 ‘청빈’의 반대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재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을 몹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청빈보다 더 깊은 것은 ‘소유에 대한 내적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 힘과 내 영광의 증거로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맡겨진 것으로 보며 쓰임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란 대신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 절제는 중요하지만, 거룩은 단순한 금욕보다 훨씬 큽니다. 외적 행동을 억제했다고 내적 욕망까지 정돈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혼애의 질서는 오히려 매우 중요하며, 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거룩은 아닙니다. 거룩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자의 독신도 그 자체가 더 높은 거룩함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욕망을 중심에 놓지 않고 사랑을 주님의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교 대신 오직 예수’는 세 표어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를 반복한다고 주님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의 가장 깊은 형태는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내 지식이 아니라 주님, 내 업적이 아니라 주님,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내가 세운 제도와 내가 만든 책과 내가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주님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영상에는 ‘내가 방문했다’, ‘내가 수도원을 세웠다’, ‘내가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학교를 세웠다’는 식의 개인적 경험과 성취가 자연스럽게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를 곧바로 자기 자랑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는 영상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한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을 바라보게 합니다. ‘ 모든 일을 누가 이루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할 고백은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끄셨으며, 나는 쓰임을 위해 사용된 도구일 뿐이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처음의 ‘후반전이 아름답게 달라’는 기도와 마지막의 ‘오직 예수’는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후반전은 앞선 전반전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는 후반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아름다운 후반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이야기는 조금씩 작아지고 주님 이야기가 점점 커지는 후반전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내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면, 영적 노년에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나는 얼마나 그분 앞에서 비워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수도원의 존재 이유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세상에서 도망치는 장소도 아니고, 특별히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장소도 아닐 것입니다. 수도원이 참으로 교회를 섬기려 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조용히 자기 proprium을 직면하고, 주님 앞에서 그것을 내려놓으며, 다시 세상 속 이웃을 더 잘 사랑하고 섬기도록 준비되는 장소여야 합니다. 외적 침묵이 내적 침묵으로, 외적 청빈이 내적 자유로, 외적 독신과 절제가 사랑의 질서로, 성경 연구가 삶의 거듭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제시된 ‘청빈, 거룩, 오직 예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다듬어 다시 말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보다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 ‘욕망을 억누르는 ’보다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는 ’, 그리고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보다 ‘자기 대신 주님이 중심이 되게 하는 ’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진다면 수도원은 교회와 경쟁하는 또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귀한 영적 훈련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말은 처음에 나왔던 ‘후반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인생의 후반전은 단순한 제2의 성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점점 더 ‘’에게서 ‘주님’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가 크게 보이고, 내가 얼마나 알려졌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의 선한 쓰임에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수도의 열매는 수도원 숫자도, 제자의 숫자도, 책의 숫자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사람의 말과 표정과 삶에서 ‘ 사람’보다 ‘주님’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마침내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 낸 가장 아름다운 후반전일 것입니다.

 

 

 

SY.83, 강문호 수도사, ‘아토스 이비론 수도원,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잊지 말라’ (202001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소개하는 곳은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입니다. 아토스에 얽힌 전승과 이비론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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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심화

 

1. ‘ 모세의 노래에는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주의 표현이 이토록 많이 나오는가 - 천적인 것들의 무수한 종류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AC.353에서 스베덴보리는 신32:14을 인용한 뒤 매우 이례적으로 강한 말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그리고 속뜻이 없다면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숫양과 염소의 기름’, ‘바산의 아들들’,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와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풍요로운 땅에서 좋은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인 것들’의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AC.353의 출발점을 다시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며, ‘체어리티는 천적인 ’,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천적인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32:14에 나오는 풍성한 음식들의 목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것을 자연적인 음식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과 선에 속한 여러 천적 상태를 표현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이 AC.353 [3]의 첫 문장입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신32:14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 ‘’, ‘체어리티’라고 하면 각각 하나의 단순한 개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사랑과 선은 그렇게 단조로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사람과 천사의 서로 다른 상태와 쓰임과 수용 정도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것을 하나의 자연물로만 표상하지 않고 젖, 기름, 밀, 포도즙 등 서로 다른 수많은 자연적 형상을 사용합니다.

 

소의 엉긴 (butter of kine)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53에서 이 표현 하나하나의 세부 상응을 아직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글만을 근거로 ‘소의 엉긴 젖은 정확히 이것이다’라고 지나치게 세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글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의 엉긴 ’ 역시 천적인 것의 어떤 종류와 세부 종류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젖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선의 질입니다.

 

양의 ’도 마찬가지입니다. 젖은 생명을 먹이고 자라게 하는 음식입니다. 그러나 AC.353의 직접적인 초점은 각각의 식품에 고정된 사전식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소의 엉긴 ’과 ‘양의 ’이 서로 다른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하나이면서도 그것을 받는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것이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들이 하나의 주님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이어 ‘어린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AC.353 전체에서 이미 설명한 ‘기름’의 상응이 직접 적용됩니다. ‘기름’은 천적인 것 자체, 곧 사랑에 속한 선을 상징합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름 하나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과 숫양과 염소 등 서로 다른 동물들과 관련된 표현들이 연이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천적 선이 하나의 획일적인 선이 아니라 무수한 종류와 세부 종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산에서  숫양’이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문자적으로 바산은 풍요로운 목축지로 유명한 지역이므로 좋은 가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353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지리적 풍요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바산의 아들들’까지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하나로 포함합니다. 즉 말씀의 지명과 동물과 음식은 서로 무관하게 늘어놓은 장식적 표현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영적·천적 실재들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매우 독특한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 원문은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입니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밀의 콩팥의 기름’ 정도가 됩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자연스럽게 ‘지극히 아름다운 ’이라고 번역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문체만 생각하면 상당히 기이한 표현입니다. 밀에 무슨 콩팥이 있으며, 그 콩팥에 무슨 기름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표현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속뜻이 없으면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콩팥’과 ‘기름’이라는 표현은 가장 깊고 귀한 부분을 나타내는 표상적 언어이고, 여기에 ‘’이 결합됩니다. 다만 AC.353 자체에서는 ‘밀의 콩팥의 기름’이 구체적으로 어느 종류의 천적 선인지를 더 세분하여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스베덴보리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특이한 표현까지도 무의미한 시적 과장이 아니라 천적인 선의 특정한 종류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포도의 ’가 등장합니다. 개역개정은 ‘포도즙의 붉은 ’이라고 번역하지만, AC.353의 영어 표현은 ‘the blood of the grape’입니다. 자연적인 포도에 ‘’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특이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적 언어에서는 포도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즙을 ‘’라고 부르는 자연적 형상을 통해 더 깊은 실재를 담을 수 있습니다. AC.353은 이 역시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방법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상응을 단순히 ‘기름 = 사랑’, ‘포도주 = 신앙’ 같은 일대일 대응표로만 이해하면 말씀의 풍요로움을 오히려 축소할 수 있습니다. AC.353은 천적인 것 자체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표상하는 자연계의 사물들도 그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무수히 다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랑,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랑,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행하려는 애정 등은 모두 선과 사랑에 속하면서도 그 질과 쓰임이 서로 다릅니다. 더구나 각각의 사랑 안에도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의 선은 하나의 무색무취한 ‘’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선이 유한한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모든 천사가 선하다고 해서 모든 천사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각 천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각 공동체도 서로 다른 주된 선과 쓰임을 중심으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신32:14의 풍성한 음식들은 이러한 ‘하나 안의 무수한 다양성’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음식으로 표현될까요? 음식은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와 생명이 되고 힘이 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선과 진리는 인간의 내면을 먹이고 살아 있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먹고 마시는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신32:14에서도 이스라엘이 먹고 마시는 모습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여러 종류의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내적 생명을 얻는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신32:14은 바로 앞 AC.353 [2]의 시36:8-9와도 잘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이며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과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과 ‘’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만족하는 말씀의 표현들이 결국 인간의 속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천적인 것들의 근원입니다. AC.353은 첫머리에서 ‘기름’이 천적인 것을 뜻한다고 하면서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앞의 AC.352도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32:14에 펼쳐지는 이 풍성한 천적 선의 세계는 인간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와 세부 종류의 선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사실은 신32:14을 모세의 노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스라엘이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즙을 스스로 만들어 자기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인도하시고 먹이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며 여러 종류의 사랑과 선으로 그의 속 사람을 먹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며 마치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창4:4의 아벨에게 돌아옵니다.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AC.352에서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뜻했고, AC.353에서 ‘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32:14의 긴 인용은 창4:4의 짧은 ‘기름’이라는 한 단어 안에 얼마나 광대한 천적 실재가 담겨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된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기름’을 단순히 ‘좋은 마음’ 정도로 이해해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기름’ 안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헤아릴 수 없는 종류와 상태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서 단 하나의 선만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 관계 전체, 쓰임 전체에 서로 다른 선들을 질서 있게 형성해 가십니다.

 

그래서 AC.353의 신32:14 인용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보면 젖과 기름과 밀과 포도즙으로 이루어진 풍요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천국의 사랑과 선의 무수한 종류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의 다양성이 영적인 생명을 이루는 선의 다양성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응입니다.

 

결국 신32:14의 핵심은 ‘어떤 음식이 정확히 어떤 선을 뜻하는가?’를 하나하나 외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53이 특별히 강조하는 더 큰 원리는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천국과 인간 안에서는 무수한 선과 쓰임으로 펼쳐집니다. 그래서 말씀 역시 그 풍요를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의 숫양’, ‘염소’, ‘밀의 콩팥의 기름’, ‘포도의 ’라는 서로 다른 자연적 형상들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문자적으로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표현을 만나더라도 ‘ 성경에 이런 표현이 필요할까?’ 하며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세부에 아르카나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353의 표현대로 속뜻이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입니다. 그러나 상응을 통하여 열어 보면, 그 낯선 말들 하나하나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요의 중심에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32:14의 풍성한 식탁도, 아벨이 드린 ‘기름’도 결국 이것을 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주시고, 그 선을 무수한 형태의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살아내게 하시며,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여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물 안에 들어 있는 천적인 질서이며, 신32:14의 풍성한 표현들이 열어 보여 주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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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4)

 

AC.353

 

기름(fat) 천적인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희생 제사에서 여러 종류의 기름으로 표상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간을 덮는 기름 또는 간에 붙은 꺼풀,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과 내장 위의 기름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들은 거룩한 것이었으며 제단 위에서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29:13, 22; 3:3-4, 14; 4:8-9, 19, 26, 31, 35; 8:16, 25) Byfatis signified the celestial itself, which is also of the Lord. The celestial is all that which is of love. Faith also is celestial when it is from love.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 good of charity is the celestial. All these were represented by the various kinds of fat in the sacrifices, and distinctively by that which covered the liver, or the caul; by the fat upon the kidneys; by the fat covering the intestines, and upon the intestines; which were holy, and were offered up as burnt offerings upon the altar. (Exod. 29:13, 22; Lev. 3:3, 4, 14; 4:89, 19, 26, 31, 35; 8:16, 25)

 

13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위에 있는 꺼풀과 콩팥과 위의 기름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2 너는 숫양의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그것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위의 꺼풀과 콩팥과 그것들 위의 기름과 오른쪽 넓적다리를 가지라 이는 위임식의 숫양이라 (29:13, 22)

 

3그는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3:3-4, 14)

 

8 속죄 제물이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 콩팥과 위의 기름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9그것의 기름은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6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31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5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같이 내어 제단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4:8-9, 19, 26, 31, 35)

 

16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25그가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꺼풀과 콩팥과 기름과 오른쪽 뒷다리를 떼어내고 (8:16, 25)

 

그러므로 이것들을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 했습니다. (3:14, 16) They were therefore called thebread of the offering by fire for a rest unto Jehovah.” (Lev. 3:14, 16)

 

14그는 그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16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3:14, 16)

 

같은 이유로 유대 백성은 짐승의 어떤 기름도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었으며, 이것을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 하였습니다. (3:17; 7:23, 25) For the same reason the Jewish people were forbidden to eat any of the fat of the beasts by what is calleda perpetual statut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Lev. 3:17; 7:23, 25)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17)

 

23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것이요, 25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제물의 기름을 먹으면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23, 25)

 

이유는 교회가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This was because that church was such that it did not even acknowledge internal, much less celestial things.

 

[2]기름(fat) 천적인 것들과 체어리티의 선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at “fat” signifies celestial things, and the goods of charity, is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Isaiah: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55:2) Wherefore do ye weigh silver for that which is not bread, and your labor for that which satisfieth not? Attend ye diligently unto me, and eat ye that which is good, and let your soul delight itself in fatness. (Isa. 55:2)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eremiah: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복으로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14) I will fill the soul of the priests with fatness, and my people shall be satiated with my good, (Jer. 31:14)

 

여기서기름진 문자 그대로의 기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영적 선을 뜻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다윗의 글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it is very evident that fatness is not mea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So in David:

 

8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36:8-9) They are filled with the fatness of thy house, and thou makest them drink of the river of thy deliciousnesses. For with thee is the fountain of lives; in thy light we see light. (Ps. 36:89)

 

여기서살진 (fatness)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ves)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상징하고, ‘복락의 강물(river of deliciousnesses)(light)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다윗의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fatnessand thefountain of livessignify the celestial, which is of love; and theriver of deliciousnesses,andlight,the spiritual, which is of faith from love. Again in David: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5) My soul shall be satiated with marrow and fatness, and my mouth shall praise thee with lips of songs, (Ps. 63:5)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기름진 (fat) 천적인 것을, ‘찬송하는 입술(lips of songs) 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같은 이유로 땅의 처음 것인 열매들도기름(fat)이라고 합니다. (18:12) where in like mannerfatdenotes the celestial, andlips of songsthe spiritual. That it is what is celestial is very evident, because it will satiate the soul. For the same reason the first fruits, which were the firstborn of the earth, are calledfat.” (Num. 18: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소산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8:12)

 

[3]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 앞에서 읊은 노래에서는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묘사합니다. As celestial things are of innumerable genera, and still more innumerable species, they are described in general in the song which Moses recited before the people: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32:14) Butter of kine, and milk of the flock, with fat of lambs and of rams, the sons of Bashan, and of goats, with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ou shalt drink the blood of the grape, unmixed. (Deut. 32:14)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속뜻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없습니다. 속뜻이 없다면소의 엉긴 (butter of kine), ‘양의 (milk of sheep), ‘어린 양의 기름(fat of lambs), ‘숫양과 염소의 기름(fat of rams and goats), ‘바산의 아들들(sons of Bashan), ‘밀의 콩팥의 기름(fat of the kidneys of wheat), ‘포도의 (blood of the grape) 같은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표현 하나하나는 천적인 것들의 종류와 세부 종류를 상징합니다. It is impossible for anyone to know the signification of these expressions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Without the internal sense, such expressions as the “butter of kine,” the “milk of sheep,” the “fat of lambs,” the “fat of rams and goats,” the “sons of Bashan,” the “fat of the kidneys of wheat,” and the “blood of the grape,” would be words and nothing more, and yet they all and each signify genera and species of celestial things.

 

 

해설

 

AC.353은 앞의 AC.350에서 아벨이 드린 ‘기름진 ’이 ‘천적인 자체이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다’고 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풉니다. 그리고 첫 문장부터 핵심을 매우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름’은 단순히 풍요나 좋은 것을 막연하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에 속한 선, 곧 천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중요합니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을 통해 계속 살펴온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신앙 자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랑에서 비롯되고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면 그 신앙 역시 천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이어 ‘체어리티는 천적인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로써 사랑,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 체어리티, 체어리티의 선이 하나의 생명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고립된 별개의 종교 요소가 아니라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바로 앞 AC.352에서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으므로, AC.353의 ‘기름’ 역시 인간 자신의 선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선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희생 제사에서 기름이 특별히 여호와께 드려졌습니다. 간을 덮는 기름, 콩팥 위의 기름, 내장을 덮는 기름 등은 모두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졌습니다. 문자적,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왜 동물의 특정 부위에 붙은 기름을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표상의 관점에서는 그 세밀한 규례들이 인간 안에 있는 여러 종류와 정도의 사랑과 선을 나타내는 외적 표상이 됩니다.

 

특히 이것들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음식’이라고 불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자연적인 음식이나 기름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제물이 ‘음식’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주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결합에 관한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드려지는 기름의 거룩함은 물질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표상하는 천적 선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름을 먹어서는 안 되었을까요? AC.353은 그 이유를 상당히 강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유대교회는 ‘내적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천적인 것은 더더욱 인정하지 않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내적인 사랑의 선을 표상하는 기름은 그들에게 속한 것으로 취하여 먹게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천적인 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다’는 원리를 표상적으로 보존하는 장치였습니다.

 

[2]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제사법에서 선지서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름진 ’이 문자 그대로의 지방이나 풍부한 음식만을 의미할 수 없는 구절들을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사55:2의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말합니다. 렘31:14 역시 ‘ 백성을 나의 선으로 만족하게 한다’는 것과 제사장들의 심령을 ‘기름’으로 만족하게 한다는 표현을 병행합니다. 따라서 ‘기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으로 영혼이 채워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36:8-9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살진 ’과 ‘생명의 원천’을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 ‘복락의 강물’과 ‘’을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에 속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천적·영적 질서가 매우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먼저 생명과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진리와 신앙의 빛이 나옵니다. ‘주의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지성에서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사랑 안에서 참된 진리를 본다는 질서와도 잘 연결됩니다.

 

63:5에서도 ‘기름진 ’은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육체의 배부름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찬송하는 입술’은 영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내적인 사랑의 선이 먼저 있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고백과 찬송이 뒤따릅니다. 여기에서도 사랑이 신앙보다 내적으로 먼저라는 AC.352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18:12에서 첫 열매가 ‘기름’으로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앞의 AC.352에서 처음 난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처음 난 것과 ‘기름’이 서로 연결됩니다. 처음 난 것이 주님의 것인 것처럼, 그 안의 가장 좋은 것, 곧 사랑과 선의 생명 역시 주님의 것입니다. 결국 ‘처음 ’과 ‘기름진 ’을 함께 드린 아벨의 제물은 ‘거룩한 것과 천적인 것은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하나의 고백을 두 상응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3]에서는 신32:14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더욱 깊어집니다. ‘소의 엉긴 ’, ‘양의 ’, ‘어린 양의 기름’, ‘바산에서 숫양’, ‘염소’, ‘지극히 아름다운 ’, ‘포도즙의 붉은 ’ 같은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풍요로운 음식의 목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각각 천적인 것들의 서로 다른 종류와 세부 종류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천적인 것들은 헤아릴 없이 많은 종류와, 그보다도 헤아릴 없이 많은 세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나 ‘’을 하나의 단순한 개념처럼 생각하지만, 천국의 사랑과 선은 단조로운 하나의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은 무한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천사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말씀도 그것을 단 하나의 상징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러 동물과 음식과 기름과 젖과 곡식과 포도주를 통하여 서로 다른 종류의 선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기름 = 사랑’이라는 등식 하나를 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름인지, 어떤 동물의 기름인지, 어떤 제사에서 사용되는지, 어떤 다른 표현들과 함께 등장하는지에 따라 더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니라 천국의 질서와 인간 내면의 무수한 상태들이 자연적 형상 속에 표현되는 살아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32:14에 대해 ‘속뜻이 없다면 이러한 표현들은 단지 말들에 지나지 않을 ’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왜 말씀의 문자에 이토록 세밀하고 때로는 낯선 표현들이 들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문자 안에는 천국의 실재들이 담겨 있으며,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세부 사항 하나하나도 속뜻에서는 의미를 가집니다.

 

AC.353을 다시 아벨의 제물로 돌아가 읽으면 창4:4의 짧은 표현이 놀랍도록 깊어집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처음 ’은 오직 주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나타내고, ‘기름’은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선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벨 자체는 체어리티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물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에게도 ‘소산’이 있었고 ‘제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산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행위였고, 그 제물은 그러한 신앙에서 나온 예배였습니다. 반면 아벨의 제물에는 ‘처음 ’과 ‘기름’이 있습니다. 곧 모든 거룩함과 사랑의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이 있고,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있습니다. 두 제물의 차이는 물질의 차이가 아니라 내적 생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353의 핵심을 ‘기름은 천적인 것을 뜻한다’는 상응 하나로만 기억해서는 아쉽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 기름이 천적인 것을 뜻하는가?’입니다. 천적인 것은 사랑에 속한 것이고, 모든 참된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 사랑에서 나올 때 살아 있고,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기름’은 인간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사랑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는 기준도 바꾸어 줍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가, 예배를 얼마나 드리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 안에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곧 그 신앙과 예배와 행위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고, 예배가 체어리티에서 나오며, 행위가 주님에게서 받은 선에서 나올 때, 그것은 아벨이 드린 ‘기름진 ’과 같은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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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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