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nature),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본성,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그저 기억 지식에서 비롯될 뿐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서는 뒤이어 나오는 글들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설명이라기보다 ‘구조적 이정표’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세기 2장 9절을 중심으로, 나무, 동산, 에덴, 중앙이라는 핵심 상징들을 압축적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종류의 ‘나무’가 다시 한번 또렷이 구분되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둘째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지 기억 지식에서 출발할 뿐인 신앙입니다. 이는 질서가 거꾸로 될 위험을 내포한 인식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개념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는 그 윤곽만 제시되었을 뿐이며, 각각이 실제 삶과 영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이 문장을 둡니다.
그래서 AC.106은 독자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질 설명의 흐름 속에서’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지식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 갈라지고 또 충돌하는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 글은 또한 스베덴보리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 개념을 먼저 심어 두고, 그것이 이후의 설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차 분명해지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이름을 얻었을 뿐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그 열매를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AC.106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지도’를 펼쳐 보았을 뿐이며, 이제부터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AC.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the 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의지 곧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서술되지만 말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동산 가운데’, 곧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고,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욕망만 있으므로,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곧 모든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분한테서 나오는 자비 말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의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자리’와 정확히 연결시키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 한가운데’를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의지의 중심’으로 읽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조, 즉 동산은 지성,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구조를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는 해석입니다.
먼저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은 이미 AC.102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위치입니다. 그것은 동산의 변두리에 있지 않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사랑의 신앙이 인간 내면에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중심 원리’임을 뜻합니다.
이 중심은 곧 속 사람의 의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지를 ‘마음’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 속한 가장 근본적인 소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의지는 인간의 자율적 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이 자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통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일상 언어에서는 ‘내 의지’, ‘내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속한 것은 참된 의지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사람이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충동입니다.
이 대목은 인간 이해에 있어 매우 정직하고도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을 ‘생산’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유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자유뿐입니다.
이제 다시 ‘동산 한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 자리는 의지의 자리이며,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참된 의지가 없고 다만 욕망만 있다면, 그 나무는 사람의 소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자비는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비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흘러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인간 삶의 중심이 언제나 주님의 자비에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도덕적 시험담에서 완전히 벗겨 냅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입니다. 중심에 주님의 자비가 있을 때, 사랑과 신앙은 살아 있고, 지성은 에덴의 동산이 됩니다. 중심이 인간 자신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질서는 무너집니다.
AC.105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중심은 주어지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 곧 ‘생명나무’라고 말입니다.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단순히 ‘고행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자기를 벌하는 것이 과연 거듭남인가’라는 핵심 문제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 특히 『Arcana Coelestia』와 『True Christian Religion』의 회개론을 종합하면, 그는 외적 고행과 자학을 매우 신중하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몇 덩어리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자기 처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참된 회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인정하며, 그 악을 실제로 끊어내려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불편을 자초하는 행위는 외적 행위일 뿐, 그것이 곧 악을 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때리거나 굶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악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적 고행은 오히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면서도 은근히 ‘나는 이렇게까지 회개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고행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은밀한 영적 교만의 자양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사랑’이 더욱 미묘하게 살아날 수 있음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겉으로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으로는 ‘나는 경건하다’는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함’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끊는 것,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어하는 것, 명예욕과 이익욕을 내려놓는 것—이것이 진짜 고행입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는 남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보는 참된 고난이며, 주님이 보시는 참된 속죄의 길입니다.
넷째, 과거 수도원 전통의 자기 처벌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도, 일상 속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을 이기는 것이 더 깊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거듭남을 ‘특수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전혀 자기를 절제하거나 훈련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이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외적 형식이고, 후자는 내적 변화입니다.
여섯째, 목사님께서 보신 그 수도원장의 메시지—‘우리도 그렇게 살자’—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벌하지 말고, 자기 안의 악을 끊으라. 몸을 때리지 말고, 자아 사랑을 거절하라. 외적 고행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께서 싸워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하라.’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고행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악한 사랑을 거부하는 지속적 선택’입니다. 수도원의 채찍이나 굶주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지, 상처 난 등을 원하시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제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신다면, 외적 고행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시고, 대신 ‘일상 속 영적 전투’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균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아,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퍼셉션이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감각으로서, 어떤 것이 그 상황, 그 순간에서 참인지, 그리고 선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은 천사들에게서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참이고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또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립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해 온 핵심 개념, 곧 ‘퍼셉션’(perception)을 정면으로 정의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는 안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퍼셉션은 감정도 아니고, 직관도 아니며, 추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어떤 것이 그 상황에서 참인지, 어떤 것이 그 순간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분별’하게 합니다. 논증이나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느끼는 것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므로,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이 퍼셉션이 삶의 기본 감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배우지 않았고, 무엇이 선한지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이 다루는 인간은, 계율이나 교리 이전의 인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이 천사들한테서는 더욱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퍼셉션을 통해 참과 선을 알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압니다. 즉,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즉시 구별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매우 낯선 능력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거의 묻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누군가가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성품(quality)을 알아차립니다. 이는 정보 수집이나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퍼셉션의 자연스러운 작용’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알아보는 방식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인간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누어 대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양심은 퍼셉션의 대체물이 아닙니다. 양심은 교리와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내적 규범’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알려 주지만, 즉각적이지 않고, 때로는 갈등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반면 퍼셉션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없고, 영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있습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지만, 퍼셉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는 인간’을 언급합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는 외적 규범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 행동할 수는 있지만,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퍼셉션은 더더욱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현실 진단’입니다. 창세기 2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감각을 전제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AC.104는 이렇게 말합니다. 퍼셉션은 잃어버린 신비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생명의 감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알지 못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 감각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글이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제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여 사용되는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읽어 온 모든 상응 해설에 ‘해석 원칙의 열쇠’를 쥐여 주는 매우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이 고정된 사전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같은 ‘나무’라는 표현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인간 상태가 논의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주제(subject)의 성격에 따라 술어(predicate)의 성격이 달라진다.’
지금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로 사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나무’는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식, 곧 퍼셉션’을 의미하게 됩니다.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나무라는 상징 때문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 같은 ‘나무’라는 말이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면,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은 퍼셉션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 곧 이해와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의 ‘나무’는 지식, 교리, 혹은 기억 지식과 연결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상응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이 원칙은 성경 해석 전반에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특정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항상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적 해석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AC.102에서 설명된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해석도 절대적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적 인간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하는 정의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창세기 2장은 특별합니다. 이 장은 역사나 교리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본래적인 상태에 있을 때의 내적 구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창세기 1장과 2장이 같은 창조 이야기를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주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장은 영적 인간의 형성과 질서를, 2장은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을 다룹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표현이 전혀 다른 깊이와 결을 띱니다.
AC.103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응은 단어에 붙어 있는 꼬리표가 아니라, 말씀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 상태 전체에 의해 살아나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창2:9)
AC.102
‘나무’(a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a 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truth)을, ‘먹기에 좋은 나무’(a tree good for food)는 선에 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good)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그저 기억 지식에서 나올 뿐인 신앙(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을 의미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상징 언어가 어디까지 정밀하게 인간의 내적 구조를 가리키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핵심적인 설명입니다. 흔히 우리는 에덴동산의 나무들을 도덕적 시험 장치로만 이해해 왔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나무들을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인식과 생명 방식’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동산은 지성이었고, 이제 그 동산 안의 나무들은 퍼셉션 자체입니다.
먼저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퍼셉션은 지식이나 추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내적 감각입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두고 위로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퍼셉션은 사랑이라는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해와 삶의 열매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동산의 중심 요소는 길이나 건물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설명은, 진리가 먼저 ‘보이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진리는 이해의 차원에서 빛처럼 인식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진리는 분석 결과가 아니라, 보자마자 ‘아, 이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반면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자기 생명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선은 단순히 옳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이루는 양분’입니다. 그래서 선에 대한 퍼셉션은 이해보다 더 깊은 차원, 곧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속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선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입니다.
이제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신앙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입니다. 복수형 ‘생명들’(lives)은,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을 포함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중심은 이 나무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 자체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식의 출처’가 문제입니다. 이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그저 기억 지식에서 나올 뿐인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는 외적 경험과 정보, 추론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그것은 영적 인간에게는 필요하지만,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대비가 드러납니다. ‘생명나무’는 위에서 아래로, 주님 → 사랑 → 신앙의 질서로 흘러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래에서 위로, 감각 → 기억 지식 → 판단이라는 질서를 따릅니다.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이 생명의 중심 자리를 차지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히 “이 나무는 좋고, 저 나무는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모든 퍼셉션이 사랑에서 나오지만, 만일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는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된다고 말입니다.
AC.102는 이렇게 창세기 2장의 나무들을 인간 내면의 지도처럼 펼쳐 보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퍼셉션이 있고, 그 주변에는 진리와 선의 다양한 퍼셉션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보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보고, 그 사랑이 그의 모든 퍼셉션을 살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101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겔에 이르기를,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겔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주님께서 ‘동쪽’이시기 때문에, 성전을 짓기 이전의 표상적인 유대 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널리 행해졌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이 글은 앞서 AC.98–100에서 확립된 ‘동쪽은 주님’이라는 상응을, ‘명시적 성경 본문과 실제 교회 관습’을 통해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상응을 추상 개념으로 제시하지 않고, 언제나 말씀과 교회의 실제를 통해 뿌리내리게 합니다. 여기서 ‘동쪽’은 더 이상 상징적 방향이 아니라, ‘신적 임재가 나타나는 방향’입니다.
에스겔의 장면은 매우 장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으로부터 오고,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영광으로 땅이 빛납니다. 이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와 선의 충만한 유입’을 묘사한 것입니다. ‘많은 물소리’는 풍성한 진리의 울림을, ‘땅이 빛났다’는 것은 겉 사람까지도 그 영광의 영향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이 장면은 왜 ‘동쪽’이 주님을 의미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동쪽에서 떠오르고, 생명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동쪽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그 사랑이 처음 비추는 방향이 곧 동쪽입니다.
이 상응이 교회의 실제 관습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 유대 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기도의 방향을 주님께 맞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전통이나 형식이 아니라, 표상적 교회의 핵심 태도였습니다.
이 관습은 또한 외적 행위가 내적 인식을 담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몸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이지만, 그 내적 의미는 ‘사랑과 생명의 근원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표상적 교회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내적 실재를 담고 있었기에, 이런 관습은 살아 있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AC.101은 이렇게 말합니다. 동쪽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방향이며, 사람의 지성과 사랑이 열리는 출발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이 동쪽에 심어졌고, 그래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언제나 동쪽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100
‘동산’(a garden)이 지성(intelligence)을 의미하고, ‘에덴’(Eden)이 사랑(love)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드러납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이 구절에서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이고,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앞의 것들은 ‘에덴’과 관련되고, 뒤의 것들은 ‘동산’과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에게서는 같은 사물을 두 표현으로 말하는 경우가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the garden in Eden)이 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에 나오는 10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이 글은 앞서 AC.98–99에서 제시된 정의를, ‘말씀 자체의 내부 구조’를 통해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의 해석을 설명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이사야서의 문체 자체가 이미 ‘에덴 = 사랑’, ‘동산 = 지성’이라는 구조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아르카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의미는 해설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질서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이사야 51장 3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황폐함이 회복되는 과정이 두 겹의 언어로 묘사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사막을 에덴 같게’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라는 표현입니다. 겉으로 보면 반복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을 ‘천적 차원과 영적 차원의 병행 서술’로 읽습니다.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사랑에 직접 속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막은 비어 있는 상태이지만, 동시에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는, 이해를 거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바로 흘러나온 반응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에덴’, 곧 사랑과 연결됩니다.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와 지성의 차원’에 속합니다. 광양 역시 메마른 곳이지만, 질서가 회복될 때 그곳은 ‘동산’이 됩니다. 즐거움과 노래는 감정과 표현의 형태를 띠며, 이는 사랑 자체라기보다는, 사랑에서 흘러나온 인식과 이해의 반향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동산’, 곧 지성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인간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같은 회복의 과정이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의 차원에서는 에덴이 회복되고, 이해의 차원에서는 동산이 회복됩니다. 이 둘은 경쟁하지 않고, 질서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의 문체를 하나의 규칙으로 설명합니다. 같은 사물을 두 표현으로 말하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 기법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구조를 동시에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층위를 동시에 열어 줍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에덴동산’이라는 결합 표현이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에덴만 있으면 사랑은 있으되 이해가 드러나지 않고, 동산만 있으면 지성은 있으되 생명의 근원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사랑과 지성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로 결합된 상태이기에, 반드시 ‘에덴동산’으로 불려야 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독자를 다음 글로 이끕니다. ‘에덴동산’이 더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10절에서 다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설명이 결론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전개를 위한 토대’임을 알려 줍니다. 곧 강들과 흐름, 그리고 지성의 세부 구조로 이어질 준비가 된 것입니다.
AC.100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은 이미 스스로를 해석하고 있으며,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질서는 예언서의 문체 속에 고요히, 그러나 정밀하게 새겨져 있다고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a 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아,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하늘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