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을 위해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could never appear from the letter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and yet there is evidently here enfolded some deeper meaning, for everyone must be aware that Jehovah God did not make a coat of skin for them.

 

 

해설

 

AC.293은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왜 말씀에는 반드시 내적 의미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금까지 설명한 ‘가죽옷’의 의미는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창3:21을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교육과 섭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의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말씀 속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적 의미를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이미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 즉 속뜻은 겉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겉뜻에 감추어진 주님의 뜻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의 논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여기서 전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단사가 되어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뜻을 찾도록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역사 속에 주님과 천국, 교회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글자는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이며, 내적 의미는 그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겉 글자를 붙드는 것과 내적 의미를 찾는 것은 서로 대립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만일 이 다섯 절이 단순히 몇 가지 역사적 사건만 기록한 것이라면, ‘가죽옷’은 최초의 의복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그 전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옷’ 역시 단순한 옷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변화한 것을 보여 주는 영적 표지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도 더욱 잘 어울립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은 거의 언제나 사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옷은 거룩한 직분을 의미하고, 흰옷은 진리와 순결을, 더러운 옷은 죄와 거짓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옷 역시 그들의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저술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창3:21의 ‘가죽옷’도 같은 상응의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허락된 새로운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먼저 겉 글자를 소중히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왜 주님께서 하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겸손히 물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언제나 글자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은 평생 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말씀의 깊이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AC.293은 창3:21 하나만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옷을 만드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성령께서 하필 ‘가죽옷’이라는 표현을 기록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따라갈 때, 우리는 글자 너머에서,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새로운 교회의 길을 열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293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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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쳐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신 것을 만드셨다(making)입히셨다(clothing), 그리고 가죽옷(coat of skin)으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 Lord instructed them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his instructing them is expressed by “making” and “clothing,” and spiritual and natural good, by the “coat of skin.”

 

 

해설

 

AC.292는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 주셨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자비의 행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새로운 상태에 맞게 다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는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절의 중심은 ‘가죽옷’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입히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만드셨다’와 ‘입히셨다’는 두 동사를 모두 ‘가르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시거나 입혀 주시는 행위는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에 알맞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을 보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질서를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천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퍼셉션을 통해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내적 생명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고, 보다 외적인 방법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심’은 이전 천적 상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죽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영적 선’은 신앙을 따라 행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이고 질서 있는 선을 말합니다. 인간은 비록 태고교회가 누리던 천적 선을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완전히 악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삶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왜 하필 ‘가죽옷’일까요?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도 이는 가장 외적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적 생명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 상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가장 바깥 단계에서부터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전 천적 상태에 알맞은 옷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이전보다 낮은 상태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이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한 결론으로 이해한다면, 21절은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20절이 교회의 처음, 곧 ‘생명’으로 시작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처음의 그 천적 영광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본래 상태는 사라졌지만, 교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보존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운 사랑이나 밝은 깨달음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니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형편에 맞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때로는 일상의 의무와 양심, 그리고 신앙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인도하십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가죽옷’일지도 모릅니다.

 

AC.292는 ‘가죽옷’을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옷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맞추어진 주님의 교육이며, 새로운 삶의 질서이자 새로운 교회의 출발입니다. 천적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치시고, 그 선 안에서 다시 당신과 함께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인간의 실패를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라, 실패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증언하는 은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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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1, 창3:20, ‘창3:20-24는 태고교회 전 생애에 대한 요약’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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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는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기 때문에, 교회는 여기서 결혼(a marriage)으로 묘사되며, ‘생명(life)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하와(Eve)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In this verse is described the first time, when the church was in the flower of her youth, representing the heavenly marriage, on which account she is described by a marriage, and is called “Eve,” from a word meaning “life.”

 

 

해설

 

AC.291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가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의아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과 ‘생명’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읽기보다 창세기 첫 세 장 전체의 결론으로 읽으면, 이 표현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창3:20은 새로운 사건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 생애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첫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0-24는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다섯 구절로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절은 교회가 처음 생명을 받던 때를,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섭리를, 22절은 모독을 막기 위한 자비로운 제한을, 23절은 에덴에서의 추방을 통한 교회의 종말을, 그리고 24절은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각각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단순한 다섯 사건이 아니라, 한 교회의 처음과 끝을 요약한 영적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20절을 보자마자 교회의 ‘처음’을 말합니다.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상태를 말합니다. 봄에 꽃이 막 피어날 때가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것처럼, 태고교회 역시 처음에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결합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선과 진리를 분리하지 않았으며, 사랑과 지혜가 하나 된 상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는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바로 천적 결혼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되므로, 성경은 교회를 신부와 아내로 자주 표현하며, 여기에서도 교회를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담의 아내는 ‘하와’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와(Eve)는 ‘생명’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이름이며, 이어지는 말씀에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입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에 바로 이러한 생명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그 생명을 통하여 천국과 직접 연결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라는 이름은 한 여인의 이름을 넘어, 교회가 처음 받았던 주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창3:20은 창3:19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 ‘생명’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한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으로 시작했던 교회가 결국 ‘흙으로 돌아감’으로 끝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시간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미 서술된 태고교회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조망하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291에서 스베덴보리가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을 언급하는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3:20-24 전체를 보면, 태고교회의 역사는 인간의 실패로 끝났지만,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타락 이후에도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생명나무를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하는 동시에,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교회를 떠나지 않으신 주님의 구원 섭리를 함께 증언하는 아름다운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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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창3:20, ‘산’(living)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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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7/19)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9, ‘주 은혜를 받으려’, 85, ‘구주를 생각만 해도입니다.

 

오늘 3 일곱 번째, 본문은 창3:16-19이고, AC 글 번호로는 261번에서 279번입니다. 오늘로 창3 전체 세 마디 중 두 번째 마디(3:14-19)를 마칩니다. 다음 주부터는 마지막 세 번째 마디 시작합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6-19)

 

제목은

 

주님을 떠난 사람,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

 

이며, 다음은 AC.261-279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읽을 본문은 창3:16-19에 대한 AC.261-279의 해설입니다. 이 본문은 겉으로는 여자의 임신과 출산의 고통, 남편의 다스림, 땅의 저주, 노동의 수고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내려진 육체적 형벌 기록으로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남자여자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 안 여러 마음 기능을 표상하며, 이 말씀 전체는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점차 돌아서면서 겪게 된 영적 상태의 변화를 묘사합니다.

 

먼저 여자는 교회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순수한 처음 상태의 교회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에게 속한 것을 사랑함으로써 왜곡되기 시작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선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직접 알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 그리고 자기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외적인 범죄 하나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에서 임신은 마음 안에서 생각과 의도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하고,자식을 낳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생각으로부터 진리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평안하게 지각할 수 있었지만, proprium이 들어온 뒤에는 진리 하나가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삶으로 태어나는 일에도 싸움과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신의 고통은 진리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의 근심을, 출산의 고통은 그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 내는 과정의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이 싸움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할 때, 악한 영들이 그 사람 안의 감각과 욕망을 강하게 자극하고, 동시에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일어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게 만들고, 천사들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를 통하여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영적 유혹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고통을 부과하시는 일이 아니라, 악이 사람을 끌어가려는 가운데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그를 붙드시고 구원하시는 과정입니다. 진리는 이 싸움 없이 사람의 실제 생명이 되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에서 남자 또는 남편rational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에서 남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표상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에는 직접적인 퍼셉션과 참된 총명이 크게 손상되고, rational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rational은 총명 자체가 아니라 총명을 닮은 기능이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애정과 감각을 질서 있게 인도하면 유익하지만, proprium과 감각의 제안에 동의하면,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분리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의 말을 따랐다는 뜻이 아니라, rationalproprium에서 나오는 욕구와 감각의 판단에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유혹은 감각에서 시작되었지만, rational이 그것을 승인할 때, 사람 전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은 겉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돌아서고 분리됨으로써 저주받은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통로이며, 겉 사람은 애정과 기억, 생각과 행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입니다. 선과 진리의 씨는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안에 심어지지만, 그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옵니다. rational은 이 둘을 연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rational이 감각과 proprium의 편에 서면, 겉 사람은 속 사람의 빛을 받지 못하게 되고, 사람은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안에 보존된 선과 진리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산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담 개인이 평생 힘들게 농사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태고교회가 그 교회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비참하고 불안한 영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네 평생에는 한 개인의 수명이 아니라 그 교회가 존속하는 모든 날, 곧 타락이 시작된 때부터 홍수로 그 교회가 끝날 때까지의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를 의미합니다. 열매 맺는 나무와 추수가 선과 진리의 번성을 뜻한다면, 그 반대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악과 거짓이 차지한 상태를 뜻합니다. 황폐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거두어 가신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계속 거부함으로써 그것들이 삶 속에서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입니다. 열매가 맺혀야 할 겉 사람 안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는 것입니다.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 되게 하는 것은 뛰어난 추론 능력이나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욕망과 감각, 자기 보존과 쾌락을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도 여전히 rational을 사용하여 매우 예리하게 추론할 수 있지만,rational은 주님의 빛을 섬기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에서 먹을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사람과 천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주님과 신앙 및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을 듣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기쁨과 평안으로 받아들여야 할 천적 양식을 반감과 수고 가운데 받아들이게 된 상태가 바로 얼굴에 땀을 흘려 먹을 것을 먹는 상태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역시 단순히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은 생명이 없는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정죄와 지옥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서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호흡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거듭나기 이전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 마침내 영적으로 흙과 같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결과가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주님으로부터 돌아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는 하나의 연속된 타락 과정을 보여줍니다. 감각이 천적인 것에서 돌아서고, proprium이 자기 욕구를 사랑하며, rational이 거기에 동의하자,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 결과 진리는 싸움과 고통을 거쳐야만 태어나고, 삶은 수고와 불안으로 가득해지며, 선과 진리의 열매 대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랍니다. 마침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싫어하고, 자연적이며 감각적인 생명만을 따라 살다가 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지 인간의 파멸에 관한 말씀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사람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천사들을 통하여 그를 보호하십니다. 유혹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사람 안에 지켜야 할 영적 생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생명을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왜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결합,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셔야 했는지를 준비하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3의 타락에 대한 이 긴 설명의 중심에는 결국, 스스로 주님에게서 돌아선 사람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속 사람과 겉 사람을 결합시키려 하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61,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AC.261-26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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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2, 창3:16, ‘여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2‘여자’(woman)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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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3, 창3:16,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3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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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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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5, 창3:16, ‘남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5‘남편’으로 옮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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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6, 창3:16, ‘창3:16에 담긴 결혼의 법의 의미’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6모든 법과 계명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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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7,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AC.267-27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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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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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9, 창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9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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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0, 창3:17,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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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1, 창3:17, ‘네 평생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1‘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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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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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3, 창3:18, ‘가시덤불과 엉겅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3‘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rn and the thistle)가 저주와 황폐(vastation)를 의미한다는 것은, 추수(harvest)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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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4, 창3:18,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8)AC.274‘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o eat the herb of the field), 곧 거친 음식(wild food)을 먹는다는 것은, 들짐승처럼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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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5,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AC.275-27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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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6, 창3:19, ‘먹을 것’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6‘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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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7, 창3:19, ‘내적 의미, 곧 말씀의 속뜻’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7이것이 내적 의미, 곧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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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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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9, 창3:19, ‘창3:14-19 절별 요약’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9그러므로 이 모든 구절을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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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오늘의 흐름과 예배 리딩의 밀도를 함께 생각하면, 심화까지 포함하여 꼭 읽었으면 하는 글은 다음 세 부분입니다.

 

첫째는 AC.263과 그 해설입니다. 이 글은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가 왜 영적 싸움을 의미하는지 가장 실제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감각의 차원에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면 악한 영들이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하고, 함께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는 설명은, 오늘 본문의 ‘고통’을 하나님의 형벌이나 단순한 심리적 괴로움으로 오해하지 않게 해줍니다. 또한 진리가 사람 안에 잉태되고, 삶으로 태어나는 과정이 왜 싸움과 근심을 동반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오늘 리딩의 전반부를 이해하는 핵심 글이므로, AC.263 본문과 해설은 반드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AC.263, 창3:16,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3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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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AC.268과 심화 AC.118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교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 고른다면 저는 이것을 택하겠습니다. AC.268은 ‘’이 왜 겉 사람을 의미하는지, 선과 진리의 씨가 왜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안에 심어지는지, 속 사람 안에는 무엇이 보존되어 있는지, 그리고 rational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한꺼번에 설명합니다. 특히 rational이 본래는 속 사람의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이지만, 감각과 proprium에 동의하면 오히려 둘을 분리시키게 된다는 설명은 창3의 타락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여기에 심화 ‘AC.118’을 함께 읽으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rational, 겉 사람으로 이어지는 본래의 인플럭스 질서와 창3에서 그 질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가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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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8, 심화 1, ‘AC.118’

AC.268.심화 1. ‘AC.118’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방금 설명한 ‘rational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가르침이 이미 창2의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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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AC.276과 심화 21:5-6입니다. AC.276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를 단순한 노동의 고통이 아니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싫어하고 멀리하게 된 상태로 해석합니다. ‘먹을 것’, 곧 ‘’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 영적 생명의 양식이라는 설명과,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시라는 말씀은 오늘 본문의 결론을 주님 중심으로 모아 줍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 부르며 싫어한 민21:5-6 심화를 함께 읽으면, 천적인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이 그것을 부담스럽고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 매우 실제적으로 전달됩니다. 오늘날 사람도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즐거워하면서 말씀과 회개, 그리고 천국의 일은 부담스러워할 수 있다는 적용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AC.276, 창3:19, ‘먹을 것’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6‘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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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6, 심화 3, ‘민21:5-6’

AC.276.심화 3. ‘민21:5-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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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 순서는 AC.263, AC.268과 심화 ‘AC.118’, AC.276과 심화 ‘21:5-6’이 가장 좋겠습니다. 첫 글에서는 영적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고, 둘째 글에서는 그 싸움이 일어나는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며, 셋째 글에서는 타락의 가장 깊은 결과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을 싫어하게 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오늘 본문이 단순히 ‘고통, 저주, 노동, 죽음’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어떻게 무너지고,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람을 보호하고 다시 생명의 떡으로 이끄시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연결된 계시로 들릴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생명의 주님, 오늘도 창세기 3장의 깊은 말씀을 통하여 저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도 여전히 주님보다 자신을 의지하려는 proprium이 있고, 감각과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연약함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사들을 통하여 보호하시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유혹을 허락,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rational이 감각과 자기 사랑을 따르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빛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아름답게 이어 주는 통로가 되게 하시며, 저희 마음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열매가 자라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주님 말씀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사모하게 하시고, 말씀을 듣고 배우고 행하는 일이 저희의 가장 큰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받은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저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 되게 하시며, 이번 한 주간도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가운데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따라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과 감사를 주님께 올려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7-19(D1)

 

2659, 6, 창3.6, 2026-07-12(D1)-주일예배(창3,15, AC.250-260), ‘타락보다 먼저 주어진 구원의 약속’.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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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7/12, 창3:15, AC.250-260), ‘타락보다 먼저 주어진 구원의 약속’

※ 오늘(2026/07/1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8, ‘예수 우리 왕이여’, 찬84,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입니다. 오늘은 창3 여섯 번째, 본문은 창3:15이고, AC 글 번호로는 250번에서 260번입니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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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심화

 

40. ‘28:15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영적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결핍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거짓과 악을 선택,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결과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AC.290의 메시지를, 그 반대편에서 매우 강렬하게 증언하는 본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죽음과 계약을 맺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언약’은 결합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사람들이 영적 죽음과 스스로 결합하였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하기보다 악과 거짓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죽음의 본질입니다.

 

또한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는 말은 자기 확신과 거짓된 안전감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교리, 그리고 생활 방식이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AC.290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므로, 그분을 떠난 모든 안전은 결국 허상에 불과합니다.

 

이어지는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라는 말씀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피난처는 본래 사람을 보호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보호막으로 삼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짓은 생명을 전달하지 못하며,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의 인플럭스를 막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입니다.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다’는 표현도 같은 의미를 반복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과 거짓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사고 속에 자신을 숨깁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이러한 은폐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거짓은 사람을 더욱 깊은 영적 죽음 속으로 이끌 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영적 죽음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AC.290에서 인용된 요8:21과 요8:24를 잘 보완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선언하셨고, 이사야는 그 죄 가운데 머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허위를 안전으로 여기며, 결국 사망과 결합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은 영적 죽음의 원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바로 뒤에 인용된 사25:8과도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28:15에서는 사람들이 사망과 스스로 언약을 맺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25:8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사람은 거짓을 선택, 죽음과 결합하지만, 주님께서는 진리와 생명으로 그 죽음을 깨뜨리십니다. 이 대조는 생명의 근원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28:15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영적 죽음의 실체와 그 원인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주님을 떠나 거짓과 악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는 순간 영적 죽음과 결합하게 됩니다. 반대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일 때만 주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떠난 모든 거짓된 의지와 거짓된 신뢰는 결국 영적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AC.290, 창3:20, ‘산’(living)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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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39, ‘사25:8’

AC.290.심화 39.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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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심화

 

39.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오직 여호와이신 주님만이 영적 죽음을 완전히 제거하시고, 참된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예언하는 대표적인 말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죽음을 이기시는 분도 오직 주님뿐이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아름답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육체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사망’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으로는 죽지만, 주님과 결합된 사람은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사망을 멸하신다는 것은 영적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주어가 주 여호와’라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죽음을 이길 수 없으며, 어떤 천사나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을 멸하실 수 있습니다. AC.290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생명은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어지는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는 말씀도 단순히 슬픔을 위로하신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눈물은 영적 의미로는 악과 거짓으로 인해 겪는 고통과 시험, 그리고 주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는 비참함을 나타냅니다. 영적 죽음이 제거될 때, 이러한 슬픔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눈물을 씻으시는 일은 사망을 멸하시는 역사와 하나의 구원 사역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수치’는 죄 자체보다도 죄와 거짓으로 인해 생긴 영적 불명예와 황폐한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되며, 그 결과 영적 수치도 제거됩니다. 따라서 사망의 제거와 수치의 제거는 모두 거듭남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AC.290에서 앞서 인용된 요5:25와 요8:51을 더욱 완성해 줍니다. 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하였고, 8:51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 모든 일을 하나의 예언으로 압축, 여호와께서 친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신약은 이 예언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는 선언 역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소망이나 예언자의 희망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여호와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회복은 인간의 노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이루시고 보증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AC.290이 생명을 주님의 고유한 속성으로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경의 선언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25:8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생명과 죽음에 관한 성경 전체의 결론을 제시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스스로 영적 죽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 자체이신 여호와,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영적 죽음을 영원히 멸하시고, 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며, 그 결과 모든 영적 슬픔과 수치를 제거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예언의 형태로 가장 장엄하게 선포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AC.290, 심화 40, ‘사28:15’

AC.290.심화 40. ‘사28:15’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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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심화

 

38. ‘8:51-52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이며,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직접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AC.290의 핵심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뒷받침합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기서 죽음을 육체의 죽음으로만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모두 육체적으로 죽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결합이 끊어진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도 말씀에서 죽음’은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을 뜻한다고 일관되게 설명합니다.

 

특히 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암송하거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신적 진리이며, 그 안에는 주님의 생명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곧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두 표현도 같은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강조합니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영적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며,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그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는 죽더라도 영적 죽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이미 주님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문자적 이해와 영적 이해의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AC.290 역시 같은 관점에서, 사람의 참된 생명은 육체의 활동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영적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요5:25와 요8:21, 24를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하셨고, 8:21 24에서는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의 기준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4:16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빛을 거부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머물며,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본문은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51-52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직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지킬 때만 영적 죽음을 이기고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영적 죽음을 결코 경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선언으로 가장 분명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AC.290, 심화 39, ‘사25:8’

AC.290.심화 39.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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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37, ‘요8:24’

AC.290.심화 37.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I said then to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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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영적 생명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영적 죽음 가운데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선언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너희가 죽으리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두 번이나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반복하십니다. 이 반복은 참된 죽음이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임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한 번 범한 상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은 곧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구절의 중심은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원문의 내가 그(I am)는 단순히 예수라는 한 인물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주님께서 영원하신 여호와, 곧 생명 자체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여러 저술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여호와의 이름이 주님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또한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언제나 삶과 결합된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됩니다.

 

이 구절은 바로 앞의 요8:2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21절에서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말씀하셨고, 24절에서는 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죽음의 근본 원인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290이 말하는 생명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요5:25와도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주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여기서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 가운데 죽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두 본문은 함께 읽을 때, 생명과 죽음이 모두 주님에 대한 사람의 응답과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또한 AC.290에 앞서 인용된 마4:16과도 연결됩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본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어도 그것을 거부하면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24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참된 생명과 영적 죽음의 갈림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일 때만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을 거부하면 죄 가운데 머물게 되고, 그 결과는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선언으로 가장 명백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AC.290, 심화 36, ‘요8:21’

AC.290.심화 36. ‘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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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의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죄 가운데 죽는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요5:25가 영적 생명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면,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죽으리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죽음의 원인이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죄와 악 속에 머무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죄란 단순히 어떤 행위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떠나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삶의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죽는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내가 가리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영화되신 후에도 계속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전제합니다. 문제는 주님께 생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AC.290이 말하는 것처럼 생명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지만, 사람이 악과 거짓을 붙들면 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 탐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찾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삶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외적으로는 주님을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자신들의 악과 거짓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 가운데 죽는다’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 역시 공간적인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은 장소보다 상태의 차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은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진리의 상태인 반면, 죄 가운데 머무는 사람은 그 상태와 전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결합되지 않는 한, 누구도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마4:16과 요5:25와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고, 5:25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동일한 주님 앞에 있으면서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빛과 음성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갈립니다.

 

또한 이 구절은 호6:2와 시85:6 주께서 우리를 살리신다’는 말씀과도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살리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이 죄를 사랑하여 그 상태 안에 머물기를 선택하면 그 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원인은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스스로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영적 죽음의 본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요8:21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생명과 죽음이 모두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주님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참으로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죄 가운데 머물러 주님의 생명을 거부하면, 비록 육체는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때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엄숙하게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AC.290, 심화 37, ‘요8:24’

AC.290.심화 37.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I said then to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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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35, ‘요5:25’

AC.290.심화 35.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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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곧 주님뿐이심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메시지인 사람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무엇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거짓 가운데 있어 주님의 생명과 분리된 사람들을 가리키십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죽음’은 먼저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고 반복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영적 생명의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라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 안에 있는 신적 생명입니다.

 

이어지는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AC.290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주님의 음성이 있고, 그 음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납니다. 생명의 시작은 언제나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인플럭스(influx)의 원리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앞 절들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5:21에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하시고, 이어서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 하십니다. 따라서 25절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에게 생명을 전달하시는 분이심을 설명하는 문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AC.290의 논지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앞에서 AC.290에 인용된 마4:16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 말씀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음성은 그 진리의 전달을 의미하며, 두 본문 모두 주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일한 역사를 서로 다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호6:2와 시85:6에서 주께서 우리를 살리시며’,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말한 예언과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살리신다 선포되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음성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 선언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한 생명의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5:25 AC.29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본래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과, 오직 주님의 음성과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때만 참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장 권위 있게 선언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AC.290의 중심 메시지를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AC.290, 심화 36, ‘요8:21’

AC.290.심화 36. ‘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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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34, ‘마4:16’

AC.290.심화 34.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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