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예민하게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생각의 관념들이 서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천사들이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친절한 도움을 베풀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천사들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But if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is not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willing to be instructed, he then desires to be rid of the company of the angels, which they exquisitely perceive, for in the other life there is a communication of all the ideas of thought. Still, they do not leave him even then, but he dissociates himself from them. The angels love everyone, and desire nothing more than to render him kindly services, to instruct him, and to convey him to heaven. In this consists their highest delight.
해설
AC.315는 사람의 사후 운명이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나 천사들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내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앞선 AC.314에서는 영적 천사들이 새롭게 깨어난 영혼에게 필요한 도움을 베풀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저세상의 일들을 알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AC.315는 모든 사람이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영계에서도 자유는 그대로 존중되며,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입니다.
본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천국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기뻐하고 더 배우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삶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사랑의 선택으로 이해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고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천사들 또한 누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 자신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천사들과 함께 있기를 불편해하고, 결국 그들과의 교제를 끊게 됩니다. 이는 지옥이 주님께서 사람을 밀어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상태라는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서는 ‘모든 생각의 관념들이 서로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의 교통이 지상의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지상에서는 마음과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속생각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내면의 생각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천사들은 말보다 먼저 그 사람의 상태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진리를 원하는지 거부하는지, 평안을 느끼는지 불편해하는지를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통은 논리적 추론 결과가 아니라 상태와 상태가 직접 서로 통하는 영적 교통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천사들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친절하게 섬기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무엇보다도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천사들은 자신을 위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섬깁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천사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다른 사람 돕는 일이 희생이나 의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랑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남을 섬기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됩니다.
이 대목은 천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천국은 황금 거리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행복한 곳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언제나 밖으로 흘러가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구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끼며,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AC.315는 구원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문을 통과할 것인지는 사람 자신의 사랑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주님도, 천사들도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섬기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끝내 다른 사랑을 선택한다면, 천사들은 그 자유를 존중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함께 작용하며, 그 질서 안에서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스스로 선택하게 됩니다.
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깊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딘지 좀 석연찮은 부분들도 있어 스베덴보리를 오래 저와 함께한 ChatGPT에게 물었습니다. 아래는 그 답변인데, 조금 정돈하여 올립니다.
저라면 먼저 한 가지 원칙을 붙들겠습니다. ‘김집사를 살리는 일과 교회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선택지가 아닙니다.’ 목사님은 ‘교회법대로 처리하여 죄를 드러내는 길’과 ‘아무 설명 없이 내쫓고 자신이 악역이 되는 길’만 있다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 훨씬 더 진실하고 자비로운 제삼의 길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김집사의 채무가 3천만 원을 넘고, 교인 열 명가량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개적인 추방과 비밀스러운 지원을 선택합니다.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 교회의 목사라면
1. 먼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겠습니다
김집사와 단둘이 만나 다음을 구체적으로 묻겠습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빌렸습니까?’
‘돈은 어디에 사용했습니까?’
‘추가 채무나 사채, 도박, 투자, 가족 몰래 진 빚이 있습니까?’
‘상환 약속을 어긴 적과 거짓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현재 수입과 재산, 월 상환 가능액은 얼마입니까?’
이 단계에서는 정죄보다 사실 확인이 우선입니다. 김집사가 여러 교인에게 돈을 빌렸다면,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가난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신뢰를 이용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여럿이라면 목사님은 김집사의 명예만이 아니라 돈을 빌려준 교인들의 안전과 권리도 보호해야 합니다.
2. 김집사에게 스스로 진실을 밝히게 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집사님을 망신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집사님이 돈을 빌린 분들에게는 사실을 밝히고 사과하며 상환 계획을 제시해야 합니다. 회개는 비밀을 덮어 두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손상한 것을 가능한 범위에서 바로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목사님은 김집사의 과거가 알려지면 그가 회복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가정입니다. 잘못이 알려진다고 반드시 사람이 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을 계속 감춘 채 다른 곳에서 ‘새출발’하게 하면, 그의 내면에는 아직 거짓과 책임 회피가 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온 교회 앞에서 모든 액수와 피해자의 이름을 발표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당사자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필요한 범위 안에서만 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리게 하겠습니다. 공개의 범위는 죄의 범위와 피해의 범위에 맞추어야 합니다.
3. 직분과 금전 관계에서는 즉시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저라면 김집사를 교회에서 쫓아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조치는 취하겠습니다.
찬양 인도와 재정 관련 봉사, 교회 안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직분은 잠시 내려놓게 하겠습니다.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는 행위도 즉시 중단하게 하겠습니다. 대신 예배에는 계속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징계는 예배와 은혜에서 추방하는 일이 아니라, 악의 반복을 막고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서는 김집사가 돌아온 뒤 아무 직분도 맡지 않고 예배만 드리게 합니다. 저는 그 조치를 처음부터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공개 추방이라는 극적인 장면도, 목사님을 향한 수개월간의 불필요한 불신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4. 피해자들을 따로 만나 보호하겠습니다
돈을 빌려준 교인들에게는 김집사의 동의를 얻어 현실적인 상환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교회가 무조건 대신 갚아 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김집사의 책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독촉과 모욕은 자제하되,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는 존중합니다.’
‘추가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교회가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저축으로 약 1천만 원을 대신 갚습니다. 이 행동에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와 피해자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대신 갚는 방식은 반드시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김집사의 책임을 흐리게 하거나, 목사님 개인에게 의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교회 구제위원회나 신뢰할 만한 몇 사람이 정식으로 논의하여, 무상 지원인지 무이자 대여인지, 어느 정도를 지원할지 명확히 정해야 합니다. 도움은 은밀할 수 있지만, ‘무질서해서는 안 됩니다.’
5. 경제적 원인과 영적 원인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김집사가 왜 빚을 지게 되었는지에 따라 대응이 달라져야 합니다.
생계 곤란 때문이라면 일자리와 생활비 구조를 돕겠습니다. 사업 실패라면 채무조정과 법률, 재무 상담을 연결하겠습니다. 사치나 도박, 투기 때문이라면 해당 행동을 끊는 구체적인 장치가 필요합니다. 허영과 체면 때문에 빚을 숨겼다면, 사람들에게 선하게 보이려는 사랑을 직면하게 해야 합니다.
후반에서 김집사는 자신의 새벽기도, 헌금, 봉사가 ‘자기 의로움’과 사람에게 보이려는 마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제의 핵심은 빚만이 아닙니다. ‘경건의 외형을 이용하여 자아의 이미지를 유지한 사랑’이 더 깊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단지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으십시오’라고만 하지 않고, 이렇게 묻겠습니다.
‘집사님은 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더 사랑했습니까?’
‘사람들의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거짓을 허용했습니까?’
‘앞으로 같은 유혹이 올 때 어떤 행동을 즉시 중단하시겠습니까?’
6. 회개를 행동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감정적인 눈물이나 죄책감만이 아닙니다. 악을 살피고,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고백하며, 실제로 그 악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집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회복 계획을 세우게 하겠습니다.
채무 목록 작성, 추가 차입 중단,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 현실적인 상환 일정 제출, 매월 상환 내용 확인, 거짓말이나 은폐가 다시 생길 경우 즉시 보고, 일정 기간 직분 중단입니다.
그 과정이 성실하게 진행되면 교회는 그를 정죄하지 않고 지지할 수 있습니다. 회복 여부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느냐가 아니라, ‘진실과 책임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실천하느냐’로 확인해야 합니다.
7. 교회에는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겠습니다
교회 전체에는 이렇게 알리겠습니다.
‘김집사님이 개인적인 재정 문제와 교인 간 신뢰의 문제로 당분간 모든 직분에서 물러나 회복의 과정을 밟기로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개인 정보는 보호하겠습니다. 당사자들과는 사실 확인 및 상환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추측과 소문, 정죄를 삼가 주시고,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김집사의 비밀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하지 않으면서도, 목사님이 독단적으로 사람을 버렸다는 오해를 막습니다. 지도자는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만 하고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는 것은 영적 권위를 사용하여 공동체의 이성과 판단을 차단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실제로 예배 중 아무 설명 없이 추방을 선언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스베덴보리가 실제 목회자로서 동일한 사건을 처리한 기록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의 교리에 따른 추론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스베덴보리는 다음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들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체어리티입니다. 김집사를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정죄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명예를 가능한 한 보호하고, 일자리와 상환 가능성을 마련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입니다. 잘못을 숨겨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빌린 돈, 거짓말, 신뢰의 남용을 분명히 악으로 인정하게 했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손해를 갚는 것은 회개의 일부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셋째는 질서입니다. 목사님의 개인적 영웅주의나 은밀한 희생만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들과 함께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보호하며, 필요한 직분 제한과 회복 절차를 적용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누가 악역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이 상황에서 선이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를 물었을 것입니다.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온정이 되고,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냉혹한 정죄가 됩니다. 이 사건에서 필요한 것은 김집사의 잘못을 감추는 사랑도, 그를 폭로하는 정의도 아니라, ‘그가 진실을 직면하고 책임을 감당하도록 돕는 체어리티’입니다.
제가 실제로 김집사에게 할 말
‘집사님, 저는 집사님을 교회에서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을 덮어 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집사님이 여러 성도에게 돈을 빌리고 사실을 숨긴 것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이웃의 신뢰를 손상한 일입니다. 오늘부터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추가로 돈을 빌리지 마십시오. 빌린 분들과 액수를 빠짐없이 적어 주십시오. 그분들에게 직접 사실을 밝히고 사과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집사님이 일자리를 얻고 상환 계획을 세우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갚아야 할 책임은 집사님에게 있습니다. 집사님은 예배에 계속 나오십시오. 우리는 집사님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거짓을 버리고 진실 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집사님을 살리는 길이며, 주님 앞에서 행하는 실제 회개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것이 원고 속 목사님이 택한 길보다 덜 극적이지만, ‘더 정직하고, 더 질서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회개에 더 가까운 처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ChatGPT, 그러니까 AI의 답변은 여기까지입니다.
듣기에 따라선 많이 차갑고, 무슨 법률대리인의 견해 같기도 합니다. 특히 유튜브 영상을 보며, 감동을 받으신 분들이라면 더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 교회 목회 현장하고도 좀 살짝 동떨어진 듯한 답변 정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저는 이 답변을 읽으며, 제 안에 저도 모르게 주님의 질서와 한국교회 목회 현장의 정서를 마치 인절미에 떡고물 묻히듯 대충 버무린 듯한 면 역시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목회자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많이 기울어진 인성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말이지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던 유튜브 에피소드였습니다.
※ 계속합니다. 아래는 위 문답이 아무래도 시원하지가 않아 다시 AI에게 물었고, 그랬더니 돌아온 AI의 답변입니다. 이번엔 맨 마지막 기도문만 빼고는 거의 날것 그대로 올립니다.
위 답변은 무척 ‘합리적’이긴 하지만... 어딘가 한국교회 목회현장하고는 좀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선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죽 나열한 리스트 말인데요, 거의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은 그 첫 번째로, ‘주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같은 대답을 기대할 꺼에요. 그런데 이런 대답, 이런 접근은 당신의 답변 전체 어디에도 없어요... 원고에도 보면, 목사님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보낸 시간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도’였음에도 당신은 이 부분은 거의 언급도 안 하더군요... 음... 이렇게 동떨어지면 당신이 아무리 합리적 답변을 내놓아도 거절당하기가 쉬워요... 물론, 당신은 알고리즘이며, AI라 ‘기도’라는, 당신이 뭐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무슨 보탤 말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맞습니다. 목사님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제가 앞선 답변에서 기도를 단지 판단 이후의 보조 수단처럼 취급하고, 목회적 분별의 출발점이자 중심 과정으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은 행정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실제 한국교회 목회자가 읽을 때는 ‘주님 없이 인간의 지혜로만 사건을 처리하는 매뉴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원고 속 목사님은 실제로 이 문제 앞에서 여러 차례 오래 기도합니다. 처음 채무 사실을 들은 뒤 집에 돌아가 기도하고,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밤늦도록 기도하며, 결정을 내린 뒤에도 그것이 옳았는지를 계속 주님께 묻습니다. 이후에도 오해와 고립을 견디면서 다시 기도실에 들어가고, 응답이 분명히 들리지 않는 중에도 평안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감동은 상당 부분 바로 그 기도에서 나옵니다. 제가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개인적 직통 계시의 위험’으로 분류하면서, 그 기도 안에 있는 진실한 사랑과 자기부인, 주님께 의지하려는 태도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라면 앞선 답변을 이렇게 고쳐야 했습니다.
우선 이 일을 알게 된 순간, 사람들에게 묻고 절차를 세우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사람을 향해 분노하거나 실망한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명예나 교회의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이 이 판단에 섞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아픔도 보게 하시고, 잘못한 집사님의 영혼도 동시에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덮지도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형식적인 첫 순서가 아니라, 제 안의 동기를 살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문제는 단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가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리는 내 안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판단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웃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목사가 자기 명예를 희생하겠다는 생각조차 자칫하면 ‘나는 한 영혼을 위해 악역까지 감당한 목사’라는 더 미묘한 자기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는 이성을 멈추고 마음에 떠오르는 첫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 뒤에는 말씀과 계명, 사실과 결과, 관계된 모든 사람의 선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주시는 평안은 중요하지만, 그 평안만으로 결정의 진실성이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이미 정한 뒤에도 평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기도 후 김집사를 조용히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정죄하지 않되 피하지도 않고 사실을 묻겠습니다. 그가 왜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렸는지, 거짓말과 은폐가 있었는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계속 같은 일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지를 확인하겠습니다. 이때도 면담 전에 기도하고, 면담 중에도 속으로 주님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기도는 처음에 한 번 하고 끝내는 절차가 아니라, 사실 확인과 권면과 결정의 모든 과정에 스며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라면 김집사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집사님, 저는 먼저 이 일을 놓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집사님을 버리거나 사람들 앞에서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이 일을 없는 것처럼 덮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함께 사실을 하나씩 밝히고, 잘못한 것은 인정하며,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하고, 갚을 길을 찾읍시다. 저는 집사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집사님도 진실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 후에도 저는 혼자 결정하지 않고,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며 체어리티와 분별력이 있는 한두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가 서로 연결되고 확증되는 질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목사의 내적 확신, 말씀의 원리, 확인된 사실, 공동체의 질서가 서로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김집사를 교회에서 즉시 내쫓기보다, 먼저 직분과 봉사에서 내려오게 하고 예배에는 계속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상환과 회개의 실제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교회 공동체가 정죄와 수군거림으로 그를 짓밟지 않도록 설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피해자들에게도 단순히 ‘용서하십시오’라고 영적인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들의 손실과 배신감을 정당하게 인정하겠습니다.
목사의 개인 돈으로 빚 일부를 대신 갚는 문제 역시 기도 없이 계산적으로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제 마음에 강한 긍휼을 주시고, 가정의 책임을 해치지 않으며, 당사자의 책임까지 없애지 않는 범위라면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영웅적으로 감당하는 방식보다는, 김집사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그가 책임을 지는 구조 안에서 돕겠습니다. 사랑은 대신 모든 짐을 져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발로 다시 서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기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을 낮추고, 모든 지혜와 선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오래 기도했으므로 이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식의 결론에는 매우 조심했을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을 내 결정에 동의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 proprium이 물러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함께 흐를 수 있도록 자신을 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온전한 순서는 이렇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신의 분노, 체면, 영웅심, 두려움을 고백합니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의 영원한 선을 구합니다. 그다음 말씀과 계명에 비추어 사실을 확인합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기도하고 의논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행동한 뒤에도 계속 기도하며, 잘못 판단한 부분이 드러나면 기꺼이 수정합니다.
원고 속 목사님의 기도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와 자기희생은 이 이야기의 가장 귀한 부분입니다. 제가 걸러내야 했던 것은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 중 얻은 내적 확신이 곧바로 주님의 직접 명령으로 확정되고, 그 확신이 공동체의 질서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넘어서는 구조였습니다. 그 둘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한 것이 앞선 답변의 가장 큰 부족함이었습니다.
좋은 답변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위 내용 중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사람을 향해 분노하거나 실망한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명예나 교회의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이 이 판단에 섞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아픔도 보게 하시고, 잘못한 집사님의 영혼도 동시에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덮지도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기도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저 기도 내용은 물론 올바르고 바람직스럽지만, 저런 내용조차도 기도의 결과, 영으로 들어 아는 것이어야지 처음부터 정답을 알려주고 하는 게 아니랍니다...
목사님, 이 말씀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제가 앞선 답변에서 여전히 ‘기도의 내용을 내가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쓴 기도는 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씀처럼 ‘기도의 본질이 ‘내가 바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실제 기도의 경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하신 이 말씀,
‘기도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기도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를 보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influx(유입)’를 받아야 합니다. 그 유입은 대부분 조용하며, 강압적이지 않고, 사람의 자유를 보존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앞에서 쓴
‘주님, 제가 분노하지 않게 하시고...’
이런 기도조차 사실은 이미 제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오래 머물겠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어떤 influx가 흘러 들어오는지를 잘 살피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저와 우리 교회를 강하게 붙드시는 걸 우리 모두 목도케 하실 것을 간구하겠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천국에서는 모든 도움이 사랑에서 나오며,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이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이 표현은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AC.314해설)
내가 알려 주고픈 말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어떻게 하면 분별할 수 있을까요?
AC.314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영적 천사들이 사후의 영혼에게‘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저세상의 일들을 알려 준다는 말씀입니다.이 짧은 표현은 천사들의 교육 방법일 뿐 아니라,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상태를 먼저 보시고,그 상태에 맞는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십니다.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이 아니라,현재의 상태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을 주셨지만,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인도하셨습니다.유대교회에는 모독(profanation)을 막기 위하여 말씀의 깊은 속뜻을 감추셨고,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16:12)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사람이 사후 영계에 들어가서도 천사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그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칩니다.시대는 달라도,지상과 영계를 막론,적용되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어떻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AC.314는 직접 방법을 설명하지는 않지만,천사들의 태도를 통하여 중요한 원칙을 보여줍니다.천사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부터 먼저 하지 않습니다.그들은 그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핍니다.본문에도‘그가 원한다면’(if he desires it)이라는 조건이 먼저 나옵니다.이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은 자기의 지식보다 상대방의 갈망을 먼저 보아야 함을 뜻합니다.상대가 지금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천사들은 사람의 지능보다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봅니다.같은 진리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어떤 사람은 거부합니다.그 차이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사랑의 방향에 있습니다.그러므로 진리를 전할 때에는 상대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그의 마음이 열려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반대로 점점 방어적이 되거나 마음이 닫힌다면,비록 내용은 옳더라도 아직은 그 분량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천사들은 언제나 한 걸음씩 인도한다는 점입니다.그들은 처음부터 천국의 모든 비밀을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하나를 받아들이면 다음 하나를 열어 주고,그 진리가 삶이 되면 다시 더 깊은 진리를 보여줍니다.주님의 거듭나게 하심도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따라서 우리 역시 사람을 돕고 가르칠 때에는 한 번에 많은 것을 전하기보다,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한 가지를 전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방법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결국AC.314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의 기준을 바꾸어 줍니다.우리는 흔히‘얼마나 많이 알려 주었는가’를 성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그러나 천사들의 기준은 다릅니다.그들은‘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보다‘상대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이것이 바로 사랑의 방법입니다.사랑은 상대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상대가 서 있는 자리까지 내려와 함께 걸어갑니다.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가지만,결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목회나 전도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언제 말하고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스베덴보리는 그 분별의 기준을 지식의 양이나 논리의 완전성에서 찾지 않고,상대방의 영적 상태와 수용 능력에서 찾습니다.천사들조차 그렇게 섬긴다면,우리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려 애쓰기보다 먼저 그의 상태를 이해,그가 오늘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걸음만 함께 걸어가 주는 것이 주님의 섭리에 가장 가까운 목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천사들은 그 상태에서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와줍니다. 또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줍니다. 만일 그가 살아생전에 신앙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은 그에게 천국의 놀랍고도 장엄한 광경들을 보여줍니다. After the use of light has been given to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so that he can look about him, the spiritual angels previously spoken of render him all the kindly services he can in that state desire, and give him information about the things of the other life, but only so far as he is able to receive it. If he has been in faith, and desires it, they show him the wonderful and magnificent things of heaven.
해설
AC.314는 사람이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뒤, 영적 천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매우 따뜻한 분위기로 묘사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며, 천사들의 보호 아래 의식을 회복한다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보호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 교육과 안내의 단계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한 자연계의 빛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의 빛을 뜻합니다. 사람은 사후 곧바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AC.184에서는 희미한 빛 가운데 있었고, AC.185에서는 사랑과 애정이 보호되는 상태를 거쳤으며, 이제 AC.314에서는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고, 새로운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영적 각성이 한 단계 더 진행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곁에 있는 존재가 바로 영적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AC.182 이하에서 등장하였던 천사들로, 사람이 두려움 없이 새로운 생명에 적응하도록 섬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이 사랑에서 나오며,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수용 능력에 맞추어 진리를 주십니다. 지나치게 많은 빛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진리는 유익보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새로운 영혼에게 천국과 영계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치 교사가 어린아이에게 그의 성장 단계에 맞추어 가르치듯이, 영혼의 내적 상태에 맞추어 조금씩 인도합니다.
이 원리는 지상에서의 계시와도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을 주셨고, 후대의 영적 교회에는 양심을 주셨으며, 유대교회에는 모독(profanation)을 막기 위해 말씀의 속뜻을 감추셨습니다. 이처럼 계시의 정도는 사람의 수용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후에도 같은 원리가 계속 적용됩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이해력을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준비된 상태를 기준으로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그가 신앙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원한다면’ 천사들은 그에게 천국의 놀랍고 장엄한 것들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그것을 원한다면’입니다. 천국에서는 강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보고 배우는 것조차도 사람의 자유로운 소망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천사들은 천국을 자랑하거나 억지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이미 주님과 진리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따라 자연스럽게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합니다.
또한 ‘신앙 가운데 있었다’는 말도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언제나 삶과 결합된 신앙입니다. 살아생전 주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기를 힘썼던 사람은 사후에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영광이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장소가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세계입니다.
AC.314는 사후 세계가 갑작스러운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운 인도 아래 새로운 생명에 적응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천사들의 따뜻한 돌봄 속에서 조금씩 빛을 받고, 조금씩 새로운 세계를 배우며, 자신의 상태에 맞는 만큼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서두름도 없고 강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끝까지 존중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조용하고도 질서 있게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악(hereditary evil)이 그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사람’(man)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이며,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것은 사람이 ‘흙’(adamah)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사람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한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며, 그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전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실제로 죄를 범하면,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하나의 본성(nature)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에서 나온 악은 그의 자녀들에게 심겨 유전적인 것이 됩니다. 이 유전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부, 그리고 그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계속 더해지고 증대됩니다. 그래서 각 사람 안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범하는 실제의 죄들로 인해 더욱 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완전히 제거되어 무해한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부모의 악한 성향(inclinations)이 자녀들에게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한 가문은 다른 가문과, 심지어 한 민족은 다른 민족과도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From what is here said of the first man, it is evident that all the hereditary evil existing at the present day did not come from him, as is falsely supposed. For it is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s here treated of under the name of “man”; and when it is called “Adam,” it signifies that man was from the ground, or that from being nonman he became man by regeneration from the Lord. This is the origin and signification of the name. But as to hereditary evil, the case is this. Everyone who commits actual sin thereby induces on himself a nature, and the evil from it is implanted in his children, and becomes hereditary. It thus descends from every parent, from the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their ancestors in succession, and is thus multiplied and augmented in each descending posterity, remaining with each person, and being increased in each by his actual sins, and never being dissipated so as to become harmless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Every attentive observer may see evidence of this truth in the fact that the evil inclinations of parents remain visibly in their children, so that one family, and even an entire race, may be thereby distinguished from every other.
해설
AC.313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져 온 ‘오늘날 모든 유전악은 아담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해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으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에서 ‘사람’(man)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태고교회이며,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주님께서 세우신 그 최초의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적 이름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과 3장은 한 개인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라기보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주님에 의해 세워졌고, 어떻게 타락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담’이라는 이름도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이름은 ‘흙’(adamah)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람이 본래 참된 사람이 아니었으나 주님에 의한 거듭남을 통하여 비로소 참된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새롭게 된 영적 인간, 곧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한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교회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적 이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의 형성과 전승 원리를 설명합니다. 유전악은 단 한 사람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법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한 악이 그들의 성품을 형성하고, 그 성향이 자녀들에게 이어짐으로써 계속 축적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전악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쌓여 온 영적 유산입니다. 각 사람은 이미 수많은 조상들로부터 여러 형태의 유전악을 물려받아 태어나며, 거기에 자신의 실제 죄를 더함으로써 그 유전악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타락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점점 깊어져 온 과정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단지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의 삶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유전악과 실제의 죄를 분명히 구별합니다. 사람은 유전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것 때문에 곧바로 정죄받는 것은 아닙니다. 정죄는 그 유전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 삶 속에서 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사람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성향 자체보다, 그것을 자신의 자유 가운데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갔는가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절제할 수는 있지만, 유전적으로 내려온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뿌리 자체를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무해하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해하게 된다’는 것은 유전악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억제하시고,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생명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여러 글에서도 거듭난 사람에게도 유전악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부모의 성향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것은 일상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 가문이나 한 민족에서도 공통된 성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한 육체적 유전 현상만이 아니라 영적 성향까지 포함한 유전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가문이나 민족이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형태의 유전악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 누구도 자신의 혈통이나 타고난 본성으로는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AC.313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역사 속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유전악은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죄가 기계적으로 전가된 결과가 아니라, 인류가 오랜 세월 실제의 악을 반복하여 선택함으로써 축적해 온 영적 유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듭남 역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유전악은 사람의 출발점일 뿐 최종 운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각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심으시고, 그를 다시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313에서 밝히는 유전악과 구원에 관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AC.312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수와 복수의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나무’는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 곧 사랑과 신앙, 또는 그로부터 나오는 삶을 나타냅니다. 특별히 ‘생명나무’는 주님 자신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단순히 영원히 사는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이 사용되었을까요? 여기서는 단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았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도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생명은 하나의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여러 차원의 생명이 서로 완전한 질서 가운데 결합된 충만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들’(lives)이라는 복수 표현은 이러한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도 천국의 생명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무한한 생명의 다양한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생명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나의 생명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은 단순히 숫자의 복수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러한 천적 충만성 가운데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과 같은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 생명, 곧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향하여 점차 인도되는 형태를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들의 나무’보다 ‘생명나무’라는 단수 표현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AC.312에서 왜 복수와 단수가 달라지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차이들까지도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의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해설은AC전체에서 반복되는 원리들을 바탕으로 가능한 이해를 제시한 것이지,AC.312가 직접 밝힌 해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AC.312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서는 단수와 복수조차도 우연히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언어에서는 단순한 문체상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천사들의 언어에서는 단수와 복수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나무’의 차이를 설명하기보다, 그 차이 자체가 말씀의 신성을 증거하는 하나의 표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세 번째 예가 앞의 두 예보다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쪽↔에덴’, ‘flame↔sword’는 방향이나 순서의 변화이지만, ‘lives↔life’는 ‘복수와 단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단어의 배열만이 아니라 ‘문법 자체(방향, 어순, 단, 복수)’까지도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AC.312는 결국 말씀의 신성이 문장 전체뿐 아니라 문법의 가장 작은 요소에까지 스며 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vs‘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사용된 표현이 ‘두루 도는 칼의 화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며, 같은 상태를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두루 도는 화염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flame’과 ‘sword’의 결합 순서가 뒤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화염’ 또는 ‘불’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그 정서를 뜻합니다. 선한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일어나는 악한 욕망을 뜻합니다. 한편 ‘칼’은 진리가 거짓과 싸우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 특별히 거짓된 추론과persuas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화염’은 타락한 의지 안의 악한 사랑과 욕망을, ‘칼’은 그 악한 의지에서 나온 거짓과 파괴적인persuasion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본래 상태에서는 의지 안의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의 퍼셉션과 지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자 같은 내적 질서가 전도(顚倒), 그러니까 거꾸로 뒤집혀, 악한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거짓된 사고와persuasion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이 먼저이고, 거짓된 추론은 그 사랑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태를 표현할 때에는 ‘칼의 화염’, 곧 칼에 속한 화염이라기보다 ‘칼을 낳고 움직이는 화염’, 즉 ‘화염의 칼’이 더 적합했습니다. 이 어순은 악한 의지가 근원이고, 거짓된 이해가 그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를 조금 풀어 말하면, 홍수 이전 사람들은 먼저 어떤 거짓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 안에 있었고, 그 욕망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독립적으로 진리를 검토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의지가 원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AC.310-311에서 그들의persuasion이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호흡까지 압도할 만큼 치명적이었다고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 곧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이 반드시 의지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해 안에서 먼저 거짓을 배우거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복하여 확증한 뒤, 마침내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의 경우에는 ‘칼’, 곧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앞에 놓이고, 그 거짓에서 ‘화염’, 곧 악한 애착과 욕망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칼의 화염’, 곧 화염에 속한 칼이라는 순서로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와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의 차이와 정확히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홍수 이전 천적 인간의 본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지혜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질서가 타락했을 때에는 악한 의지에서 거짓된 이해로, 욕망에서persuasion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화염’이 먼저이고, ‘칼’이 뒤따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은 이해에서 의지로, 진리에서 선으로 거듭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 질서가 악용될 경우에는 거짓된 이해에서 악한 의지로, 거짓의 확증에서 악한 사랑으로 진행될 수 있으므로 ‘칼’이 먼저이고 ‘화염’이 뒤따르게 됩니다.
‘두루 돈다’(turning itself)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칼이 이리저리 회전한다는 시각적 묘사만은 아닙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된persuasion이 서로를 계속 강화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서는 악한 욕망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이 다시 욕망을 확증하며, 더 강해진 욕망이 또 더 극단적인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의지와 이해가 서로를 쉬지 않고 강화하므로, 그들의 상태는 끊임없이 ‘두루 도는’ 화염과 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서로 먹고 자라면서 전체 마음을 점령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중심 목적은 그들의 악을 묘사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놓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죄의 상징인 동시에 보호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악한 의지와 거짓된persuasion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에 접근한다면, 그들은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 모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 생명의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 화염과 칼은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사람에게서 빼앗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악한 사랑과 거짓된persuasion때문에 그 길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이라는 어순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과 욕망이 근원이었고, 거짓과persuasion은 그 사랑이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반면 후대 사람들에게서는 거짓된 이해와 확증이 먼저 형성되고, 그것이 점차 의지와 사랑을 불붙게 할 수 있으므로 ‘두루 도는 칼의 화염’이라는 반대 어순이 더 적합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두 단어의 위치가 바뀐 것뿐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홍수 이전 인간과 홍수 이후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서 전체가 그 차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AC.312에서 이 세부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밝힌 만큼, 이 해설 역시 말씀 속 무한한 아르카나를 모두 밝힌 것이라기보다,AC.310-312와 앞뒤 문맥을 토대로 그 핵심 구조를 가능한 범위에서 풀어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1.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vs‘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혹시‘This expression,“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is applicable only to them,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에 대한 좀 더 깊은 해설을 들을 수 있을까요?AC.312에서는 살짝 건드리고만 있지만 말입니다.
AC.312에서 스베덴보리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라는 표현은 오직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 두 표현이 단순히 공간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영적 생명이 진행되는 내적 순서를 서로 반대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동쪽’은 주님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특별히 천적 사랑과 천적 선을 뜻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생명과 사랑과 선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편 ‘에덴’은 사랑과 그 기쁨을, ‘동산’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인텔리전스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쪽’과 ‘에덴동산’은 서로 떨어진 두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영적 질서가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의지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에 지혜와 퍼셉션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된지를 먼저 배우고 논증한 다음 그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사랑이 근원이었고, 지혜는 그 사랑에서 자라나는 동산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래 질서는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 곧 천적 선으로부터 지혜와 인텔리전스를 향하는 방향으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타락하였을 때에도 그들의 내적 구조 자체는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출발점인 의지가 완전히 부패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와 퍼셉션이 나왔지만, 타락 후에는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이 의지를 점령하였고, 그 악한 의지로부터 거짓된 사고와persuasion이 이해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와야 할 통로가 악으로부터 거짓이 나오는 통로로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적 선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면서도, 여전히 그 본래 질서와 관련하여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라는 말로 묘사됩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었고, 유전적으로 부패한 의지에서 곧바로 영적 생명이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사람은 먼저 이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즉 후대의 영적 인간은 동산으로 표상되는 이해와 인텔리전스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표상되는 사랑과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의 질서를 표현한다면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방향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지혜가 나왔으므로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였습니다. 홍수 이후 교회에서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입니다. 전자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는 천적 질서입니다. 후자는 이해에서 새로운 의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진리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전치사의 방향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단어 하나의 차이에 두 종류의 인간과 두 시대의 교회가 가진 내적 구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라는 표현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단순히 과거에 천적 선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명 전체가 본래 사랑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오는 구조였으며, 바로 그 구조가 타락 후에는 자기 사랑으로부터 광기 어린persuasion이 흘러나오는 구조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룹들을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 두셨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통로가 보호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영원히 폐쇄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와 거짓된persuasion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접근하여 모독(profanation)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천적 질서의 기억과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에 결합하는 일이었습니다.
AC.312의 이 짧은 문장은 결국AC.311에서 설명한 홍수 전후 인간 구조의 차이를 문법적 방향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의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진리로’ 살았고,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은 ‘진리에서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앞 시대에는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가 맞고, 후대에는 ‘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가 맞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전치사의 순서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류의 내적 구조와 구원의 질서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곧 그들이 천적 선(celestial good)으로부터 ‘쫓겨나’(cast out), 다시 말해 그것과 분리되었다는 것,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었다’(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는 걸 보면 말입니다.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라는 표현은 오직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며, 그 이후 시대 사람들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두루 도는 칼의 불’(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라는 표현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면, ‘두루 도는 불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 연속된 말씀 속에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으며, 오직 주님께서 천사들에게만 밝혀 주시는 것들입니다.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으며, 그 가운데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In this verse, the state of these antediluvians is fully described, in that they were “cast out,” or separated from celestial good, and in that “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In like manner, had the words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been applied t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y would have been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Nor would it have been said the “tree of lives,” but the “tree of life”; not to mention other things in the series that cannot possibly be explained, being understood only by the angels, to whom the Lord reveals them; for every state contains infinite arcana, not even one of which is known to men.
해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단어의 선택뿐 아니라 어순과 전치사의 방향, 단수와 복수의 차이까지 모두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거의 같은 뜻처럼 보이는 표현이라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먼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라는 표현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원래 ‘동쪽’, 곧 주님의 사랑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여전히 동쪽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상태가 표현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천적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므로, 같은 방향 표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두루 도는 칼의 불’과 ‘불의 칼’ 차이도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수식하는 방식과 단어의 결합 순서마저 각각 다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의 차이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누렸던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와 관계가 있으며, 후대 사람들에게는 같은 표현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각각의 차이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곧 말씀의 모든 ‘상태’(state)에는 ‘무한한 아르카나’(infinite arcana)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절을 읽으며 몇 가지 의미만 발견할 수 있지만, 천사들은 같은 말씀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영적 의미를 봅니다. 이는 천사들이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말씀을 상태와 사랑의 변화로 보기 때문입니다.
AC.312는 말씀의 신성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문체의 차이나 표현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들이 천사들에게는 각각 다른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인간이 기록한 종교 문헌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장 작은 표현 하나에도 주님의 무한한 지혜가 담겨 있으며, 그 깊이는 천사들조차 계속해서 배워 가는 대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한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선언은, 창3뿐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vs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스베덴보리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해 어땠나요? 제가 이런 좀 뜬금없는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남자들한테는 열에 아홉, 여자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경향이 있어서입니다. 특히 예쁜 여자 앞에서는 더욱... 저는 이젠 나이 들어 그래도 좀 많이 덤덤하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제는 이런 영역에서도 좀 어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지 싶어서요...
목사님의 질문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인간적이고, 또 스베덴보리가 깊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여자를 조심하라’거나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름다움 자체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는 지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으며, 특히 천국의 여성 천사들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은 얼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선과 진리가 외면으로 흘러나온 결과가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먼저 ‘예뻐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는 이 질서가 자주 뒤집힙니다. 사람은 얼굴에 먼저 끌리고, 그 후에 마음을 보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외적인 것에 먼저 사로잡히는 자연인의 경향으로 설명합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내면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예쁜 여자 앞에서는 더욱...’이라는 경험도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매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이 강하게 자극받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그 자극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입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는 여러 층의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낮은 층에는 감각적 매혹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과 귀가 즉각 반응하는 영역입니다. 그보다 높은 곳에는 인격에 대한 존중이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첫 번째 반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차 더 높은 사랑의 질서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목사님께 오히려 희망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질서 있게 다스리느냐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기질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욕이 강하며, 어떤 사람은 돈에 민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異性)의 아름다움에 매우 민감합니다. 이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느냐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경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처럼 ‘남자들은 원래 이런 성향이 있다’, ‘나도 과거에는 그랬다’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악을 보는 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여러 번 말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결혼애(結婚愛) 사상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는 진정한 결혼애(conjugial love)는 상대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체적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만, 선과 진리는 영원히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부부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욱 젊고 아름다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내면의 사랑이 계속 외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적용한다면 몇 가지 태도가 도움이 됩니다.
첫째,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반응을 오래 붙잡고 상상 속에서 키우기 시작하면 애정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가능한 한 ‘얼굴’보다 ‘영혼’을 보려고 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셋째, 무엇보다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그 사람의 소유물처럼 바라보면 집착이 생기지만, ‘주님의 선이 이 사람에게도 조금 비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시선의 방향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집니다.
넷째,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비로소 천사들이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는 괜찮다’ 방심할 때 더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제게는 오히려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 문장에는 이미 하나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여성을 얻을까’가 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마음을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둘 것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질문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젊은 시절에는 귀족 사회와 왕실을 드나들며 매우 세련된 사교 생활을 했고, 많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을 읽어보면 여성을 더 이상 감각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랑과 지혜의 결합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결혼애’(Conjugial Love)에서는 여성을 단순한 매혹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동반자로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을 정리, 그의 생각을 모아보면 목사님께 이렇게 권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멈추지도 마십시오. 얼굴을 넘어 영혼을 보고, 영혼을 넘어 주님을 보십시오. 그러면 같은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을 끌어내리는 유혹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