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19:10)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planted near the waters;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Ezek. 19:10).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할 뿐 아니라, 특별히 ‘좋은 상태에 있는 교회’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사50:1, 렘50:12, 겔16:45는 모두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을 받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겔19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 왕국의 몰락과 슬픔을 노래하는 애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배경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 구절에서 ‘어머니’가 고대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 역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는 상응의 한 예가 됩니다.
여기서 교회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로 묘사됩니다. 말씀에서 포도나무는 일반적으로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교회가 본래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또한 ‘물이 많으므로’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므로 물가에 심겨 있고 물이 많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진리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진리 안에 있을 때 선한 삶과 풍성한 영적 열매가 나타남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에서 ‘어머니’를 고대교회로 설명합니다. 반면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혼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겔19:10의 ‘어머니’는 문맥상 고대교회를 의미하지만, ‘어머니’라는 상징 자체는 최초의 교회이며 유일한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에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교회를 예로 들면서도 하나의 공통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곧 말씀에서 ‘어머니’는 시대와 대상이 달라져도 언제나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타락한 교회를, 어떤 경우에는 주님 안에서 열매 맺는 교회를 가리키지만, ‘어머니’라는 상응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9:10을 인용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인 모습으로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인용들이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주님의 진리 가운데 심겨 풍성한 열매를 맺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를 통하여 ‘어머니’라는 표현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교회를 나타내는 영적 상징임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겔16:45)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your mother was a Hittite,and your father an Amorite(Ezek. 16:45),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의 타락을 책망하는 말씀이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도‘어머니’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교회를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한 사50:1이나 렘50:12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그렇다면‘어머니’역시 그 주님과 결합하고 신앙의 진리를 낳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즉,이 구절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서 제시하는 상응 해석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남편을 싫어하였다’는 말씀은 단순히 부부 사이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영적으로는 교회가 주님을 거부하고,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원래 교회는 주님과 결합,생명을 받아야 하지만,타락한 교회는 그 결합을 싫어하고,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자녀를 싫어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말씀에서‘자녀’는 교회로부터 태어나는 신앙의 진리들을 상징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교회가 주님뿐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까지 함께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이것은 교회의 타락이 단순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선과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영적 문제임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라’는 말씀도 실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이‘헷 사람’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은 악을 의미합니다.즉,타락한 교회는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거짓과 악을 자기 근원으로 삼는 교회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상응 관계를 통하여‘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만일‘어머니’를 단순한 육신의 어머니로 이해한다면, ‘남편은 주님’, ‘자녀들은 신앙의 진리’, ‘헷 사람은 거짓’, ‘아모리 사람은 악’이라는 설명은 서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그러나‘어머니’를 교회로 이해하면,구절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영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6:45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어머니’라는 단어 하나를 예로 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그는 이 구절 전체를 통하여‘어머니는 교회’, ‘남편은 주님’, ‘자녀들은 신앙의 진리’라는 상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따라서 이 말씀은‘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풍성하고도 분명하게 증명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렘50:12)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Jer. 50:12).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지만,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벨론 자체가 아니라‘어머니’라는 표현입니다.그는 이 구절을 통하여 말씀에서‘어머니’가 영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말씀에서‘어머니’는 사람을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이,교회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영적 생명으로 자라게 합니다.그러므로‘어머니’라는 표현은 한 개인이 아니라 영적 공동체,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에서‘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는 말씀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여기서‘수치’와‘치욕’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고 본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교회는 여전히 외형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주님과의 결합을 잃으면 영적으로는 수치 가운데 있는 교회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바벨론에 대한 심판 가운데 기록하고 있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도 변하지 않는 상응 원리를 봅니다.곧 말씀에서‘어머니’라는 표현은 역사적 배경이 어디이든 일관되게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따라서 그는 이 구절을‘어머니’가 교회를 뜻한다는 성경적 증거로 인용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교회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주님 안에 있는 교회는 영적 생명을 낳는 어머니가 되지만,선과 진리를 떠난 교회는 수치와 부끄러움 가운데 있는 어머니가 됩니다.따라서‘어머니’라는 상징은 교회의 존재뿐 아니라 그 영적 상태까지 함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50:12를 인용하는 이유는,역사적으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라 할지라도,그 안에 사용된‘어머니’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역사적 배경을 넘어 일관된 상응의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50:1)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Isa. 50:1)?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실제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사야가 말하는‘너희의 어미’는 이스라엘 백성 각자의 어머니가 아니라,그들을 영적으로 낳고 길러야 했던 이스라엘 교회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는 흔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나타납니다.주님은 교회에 사랑과 선,진리와 생명을 주시고,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여 사람들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그러므로 교회를‘아내’라고 할 때에는 주님과 결합,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측면을 강조하고, ‘어머니’라고 할 때에는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달,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사50:1의‘이혼 증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이 끊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그러나 이 구절은 주님께서 까닭 없이 교회를 버리셨다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물으심으로써,주님께서 먼저 교회를 내버리신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이어지는 말씀처럼,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원인은 그들 자신의 죄악과 허물에 있었습니다.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부,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을 끊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어머니의 이혼’은 교회 조직이 외적으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성전과 제사,율법과 종교적 형식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교회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말씀의 진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게 왜곡하면,외형은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주님과 분리됩니다.이것이 영적 의미에서의 이혼입니다.
이 구절은‘어머니’라는 표현이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개인의 육신의 어머니에게 주님이 이혼 증서를 주신다는 것은 문맥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어머니’를 교회로 이해하면,주님과 교회의 언약 관계,그 관계의 파괴,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성경적 증거로 인용합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심판과 함께 주님의 자비도 담겨 있습니다.주님께서는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먼저 관계를 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오히려 교회가 스스로 떠난 뒤에도 계속 돌아오라고 부르시며,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정,다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그러므로‘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는‘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주님의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50:1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사람을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교회를 의미하며,교회가 주님과 분리되는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은 교회가‘어머니’라는 사실뿐 아니라,교회의 생명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에 있으며,그 결합을 잃으면 외적 종교 형식이 남아 있어도 참된 교회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89
‘아내’(wife)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것도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mother)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는 교회를 매우 자주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It has also been shown above that by “wife” is meant the church, and in the universal sense the kingdom of the Lord in the heavens and on earth; and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same is meant by “mother.” In the Word the church is very frequently called “mother,” as in Isaiah: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사50:1) 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 (Isa. 50:1)?
예레미야에는In Jeremiah: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렘50:12) 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 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 (Jer. 50:12).
에스겔에는In Ezekiel: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겔16:45) 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 your mother was a Hittite, and your father an Amorite (Ezek. 16:45),
여기서 ‘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헷 사람’(Hittite)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Amorite)은 악을 의미합니다. where “man” [vir] denotes the Lord and all that is celestial; “sons,” the truths of faith; a “Hittite,” what is false: and an “Amorite,” what is evil.
역시 에스겔에In the same: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19:10) 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 planted near the waters; 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 (Ezek. 19:10).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특히 ‘어머니’(mother)라는 이름은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태고교회는 최초의 교회였으며, 유일한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Here “mother” denotes the ancient church. The term “mother” is more especially applicable to the most ancient church, because it was the first church, and the only one that was celestial, and therefore beloved by the Lord more than any other.
해설
AC.289은 왜 말씀에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아내’가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머니’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여인이나 어머니를 단순한 가족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어머니’는 영적으로 사람을 낳고 기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이, 교회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교회를 자주 ‘어머니’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하여 여러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먼저 사50:1에서는 ‘너희 어미의 이혼 증서’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어미, 곧 어머니’는 이스라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혼은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주님을 떠나 언약을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와 주님 사이의 영적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렘50:12에서도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거짓과 악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영광을 잃었기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처럼 한 나라나 한 민족을 단순한 정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교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겔16:45에서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실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헷 사람’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은 악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거짓과 악을 받아들인 교회가 주님과 신앙의 진리마저 싫어하게 된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겔19:10에서는 ‘네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많은 물은 풍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고대교회가 한때 주님의 진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같은 ‘어머니’라는 표현이라도 문맥에 따라 태고교회, 고대교회, 이스라엘 교회 등 여러 교회를 가리킬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언제나 교회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는 인류 최초의 교회였을 뿐 아니라, 유일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이후의 모든 참된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어떤 교회는 더 사랑하시고 다른 교회는 덜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를 향하여 동일합니다. 다만 태고교회는 그 사랑을 가장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AC.289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왜 교회를 의미하는지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며, 그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를 만날 때에는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88
‘아담’(man, homo)이 태고교회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오직 주님만이 사람(man)이시며, 모든 천적 인간이 사람인 것도 그들이 주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역시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속한 사람은 예외 없이, 그리고 어떤 구별도 없이 모두 ‘사람’이었습니다. 후에는 이 이름이 겉으로 사람처럼 보이는 모든 존재에게까지 확대, 사람을 짐승과 구별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That by “man” is meant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celestial man, was previously shown; and at the same time it was also shown that the Lord alone is man, and that from him every celestial man is man, because in his likeness. Hence every member of the church, without exception or distinction, was called a “man,” and at length this name was applied to anyone who in body appeared as a man, to distinguish him from beasts.
해설
AC.288은 ‘사람’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정리해 주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단순히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사람’이라는 이름은 원래 훨씬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이름은 처음부터 육체를 기준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아담’(man, homo)은 태고교회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개역개정은 창3:20에서 ‘아담’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괄호 안에 homo를 덧붙임으로써 이것이 단순한 개인의 이름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아담’은 한 개인인 동시에, 주님과 가장 가까이 교통하던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을 대표하는 표상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man)이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천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지혜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일 뿐,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스스로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본래 주님께만 완전하게 속합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도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주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모습, 곧 겉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살며,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직접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형상을 가장 충만하게 반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에서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남녀의 차별도, 신분의 차별도, 능력의 차별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신분이나 외적 조건이 아니라, 주님과의 영적 관계를 기준으로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차 타락, 이 이름의 의미도 함께 희미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는 이름에 담긴 영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이 말은 단순히 몸의 모습, 곧 겉모습이 사람처럼 생긴 존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본래 영적 이름이었던 ‘사람’이 점차 자연적 이름, 평범한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언어의 변화가 아니라, 인류의 영적 상태가 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닮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던 ‘사람’이라는 이름이, 시간이 흐르면서 단지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는 말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회가 내적 의미를 잃고 외적인 것만 남게 된 과정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AC.288은 ‘사람’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외모도, 지식도, 사회적 지위도 아닙니다.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만큼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며, 모든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아담’, 곧 ‘사람’이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장 깊은 의미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And the man [homo] called his wife’s name Eve, because she was the mother of all living. (창3:20)
AC.287
여기서 ‘아담’(man, homo)은 태고교회의 사람, 곧 천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내’(wife)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녀를 ‘어머니’(mother)라고 하는 것은 최초의 교회였기 때문이며, ‘산 자’(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y the “man” [homo] is here meant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celestial man, and by the “wife” and the “mother of all living” is meant the church. She is called “mother,” as being the first church; and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해설
AC.287은 창3:20에 나오는 ‘아담’, ‘아내’,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내적 의미로는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단순히 아담과 하와라는 두 개인의 이야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여기서 ‘아담’은 태고교회의 사람을, ‘아내’는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최초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담’(man, homo)은 태고교회의 사람, 곧 천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개역개정은 창3:20에서 ‘아담’이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괄호 안에 덧붙인 homo는 고유명사만을 강조하기보다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개역개정에 따라 ‘아담’이라고 하되, 내적 의미로는 그가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을 대표한다는 점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아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단순한 제도나 조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역사적인 부부인 동시에, 내적 의미로는 천적 인간과 그가 속한 교회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교회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교회는 사람 안에서 실제적인 생명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를 ‘어머니’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초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어머니’는 영적으로 사람을 낳고 기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고 양육하듯이, 교회는 사람에게 말씀과 신앙을 전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돕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태고교회는 이후 모든 참된 교회의 첫 근원이었이며, 그래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가리켜 ‘산 자’라고 하는 이유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연결되어 그분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을 말씀은 ‘산 자’라고 합니다.
특히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이 영적으로 살아 있었던 까닭은 그들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생명의 근원이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참으로 교회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두어야 하며, 사람들을 자기 조직이나 교리 체계에 묶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AC.287은 창3:20의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태고교회와 영적 생명의 근원을 설명합니다. ‘아담’은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을, ‘아내’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최초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산 자’였던 이유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모든 영적 생명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 참된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공동체라는 데 있습니다.
이 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태고 사람들과 그들의 거듭남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들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이 마침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과정을 다루었고, 이어서 천적인 사람이 되어 태고교회를 이루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다음에는 그들이 타락한 일과,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후손과 그 뒤를 이은 후손들이 홍수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어떻게 쇠퇴해 갔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마지막 몇 절에서는 태고교회 사람이 처음 형성된 때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번 요약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앞에서 말한 모든 내용을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This and the preceding chapters, down to the verses now under consideration, tre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d of their regeneration; first, of those who lived like wild animals, but at length became spiritual men; then of those who became celestial men, and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afterwards of those who fell away, and their descendants, in regular order through the first, second, and third posterities and their successors, down to the flood. In the verses following, which conclude the chapter, we have a recapitulation of what occurred from the period when the man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formed, until the flood; thus it is a conclusion to all that goes before.
해설
AC.286은 창3 마지막 부분을 해설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창1부터 창3까지 이어져 온 내용을 한눈에 정리해 주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앞부분을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의 탄생과 성장, 타락과 멸망이라는 거대한 영적 역사를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286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어질 홍수 이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 역할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 사람들이 처음에는 ‘들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 짐승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본능과 감각을 따라 살아가는 자연적인 인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점차 거듭나게 하셨고, 먼저 영적인 사람으로, 이어서 천적인 사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즉 창1의 여섯 날은 한 개인의 거듭남인 동시에, 인류 최초의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다음 단계가 태고교회의 완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에서 묘사되는 에덴동산의 사람을 천적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은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모든 교회의 원형이며, 이후의 모든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이 교회가 점차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선택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뱀은 감각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own으로 진리를 판단하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작은 이탈로 시작하였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퍼셉션을 잃고, 천적 상태를 잃고, 자연적 선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AC.281부터 AC.285까지는 바로 이러한 후손들의 점진적인 쇠퇴 과정을 여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타락을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첫 번째 후손, 두 번째 후손, 세 번째 후손을 거쳐 마지막 후손에 이르기까지, 선과 진리가 점차 약해지고, 자기 사랑과 그릇된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삶에서도 같은 원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타협과 작은 자기 신뢰가 반복되면서 점차 영적 생명을 잃어가게 됩니다.
또한 AC.286은 지금까지의 내용이 단지 태고교회의 역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역사와 한 사람의 거듭남을 언제나 같은 질서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창1에서 창3까지의 모든 과정은 인류 최초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나고, 혹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영적 과정을 함께 보여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시대를 초월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제 이어질 몇 절이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다시 요약하는 결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중요한 영적 진리는 말씀 속에서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반복되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창3의 마지막 부분은 앞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홍수 이전 인류의 최종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AC.286은 창1부터 창3까지를 하나의 큰 영적 이야기로 묶어 주는 전환점입니다. 처음에는 감각과 본능을 따라 살던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거듭나 영적인 사람과 천적인 사람이 되었고, 다시 자기 사랑과 own을 선택함으로 점차 타락, 홍수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긴 역사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한 번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교회가 무너질 때마다 새로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창1부터 창3까지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이며, AC.286은 그 모든 내용을 한눈에 조망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중요한 결론입니다.
AC.285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더럽고 추한 사랑’(filthy loves)과 ‘그릇된 확신’(persuasions)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ersuasions’는 단순한 의견(opinion)이나 믿음(belief)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persuasion은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생각에 깊이 결합, 아무리 진리가 제시되어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어진 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그릇된 확신’, ‘망상적 확신’, 또는 ‘완고한 확신’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를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퍼셉션을 통하여 진리를 알고 있었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 자신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거짓이 반복되고 굳어지면서 마침내 진리를 완전히 밀어내는 강력한 확신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이 바로persuasion입니다.
이러한persuasion은 단순히 잘못된 생각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제를 잘못 이해할 수 있고, 새로운 진리를 배우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persuasion은 이미 사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나 증거만으로는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진리를 사랑해서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논리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persuasion은 지성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가persuasion을 위험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이 이해에만 머물러 있을 때에는 아직 고쳐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사랑과 결합하여persuasion이 되면, 사람은 거짓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게 됩니다. 그 결과 진리를 들을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거짓을 더욱 굳게 방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진리를 밀어내는 상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말기persuasion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집’보다 훨씬 강한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그들의persuasion이 너무 강하여, 다른 영들의 생각과 자유까지 억누를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거짓을 너무나 절대적인 것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진리를 생각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persuasion은 영계에서도 매우 위험한 상태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AC.285에서는 ‘더럽고 추한 사랑’과 ‘그릇된 확신’을 함께 말합니다. 더럽고 추한 사랑은 사람의 의지를 지배하고,persuasion은 사람의 이해를 지배합니다. 의지가 악한 사랑에 사로잡히고, 이해가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히면, 사람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지옥 상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동시에 이것이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신앙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persuasion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천적 진리까지 충분히 알고 그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모독(profanation)에 빠져 훨씬 더 깊은 영적 파멸을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더 큰 악에 빠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persuasion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진리보다 더 신뢰하고, 자신의 욕망을 지키기 위하여 말씀을 왜곡, 아무리 분명한 진리가 제시되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그 거짓은 점차persuasion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 진리를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persuasion이 아니라 참된 신앙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AC.285가 경고하는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자기 사랑이 만들어 낸 거짓을 끝까지 붙드는 영적 완고함이며, 동시에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마음의 상태입니다.
AC.285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자기 자신의 더럽고 추한 사랑’(filthy loves)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럽다’(filthy)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지 않다거나 죄가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주님을 향해야 할 사랑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뒤집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근본적으로 왜곡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삶은 결국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은 생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생각은 사랑을 섬기고,rational은 사랑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주님을 향하면 사람 전체가 천국을 향하게 되고,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면 사람 전체가 지옥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인간 생명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더럽고 추한 사랑’이란 단순히 욕심이 많거나 성격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의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심지어 선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어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지배하려 하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하고 미워하는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결국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filthy’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고상하게 꾸며질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천사들은 사랑 자체를 보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악취를 풍기는 더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더럽고 추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영계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사람을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과 쉽게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먼저 악한 사랑을 품고, 그다음에는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은 다시 악한 사랑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AC.285는 ‘더럽고 추한 사랑’과 ‘그릇된 확신’(persuasions)을 나란히 말합니다. 사랑은 의지를 지배하고, 그릇된 확신은 이해를 지배하여 사람 전체를 거짓된 삶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조차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그러한 사랑 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을 원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더 높은 진리와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러한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까지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모독(profanation)에 빠져 훨씬 더 깊은 영적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그 상태에 두신 것은 버리심이 아니라 보호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사람 안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삶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주님 사랑 아래 있을 때에는 질서 안에 있지만,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그것은 ‘더럽고 추한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사랑을 완전히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 사랑 아래 두어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AC.285의 ‘더럽고 추한 사랑’은 모든 악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돌아서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랑이며, 결국 사람의 생각과 의지, 삶 전체를 지배, 진리마저 왜곡시키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문은,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까지도 모독으로부터 보호, 언젠가 다시 진리와 생명의 길로 돌아올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줍니다. 이것이AC.285가 전하는 가장 깊은 자비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