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AC.67부터 이러한 표현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AC.71에서는 그 내용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는 것까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허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주님께서 직접 이제 이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71 자체가 그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번호에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는 말도 없고, 천사가 지시했다는 말도 없으며, 퍼셉션이나 유입을 통해 알았다는 설명도 없습니다. 따라서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만 가지고 그 전달 방식을 하나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은 오히려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할 때에는 그렇게 말합니다. AC.67에서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고, AC.70에서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그들과 말하고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허락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 알려졌는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AC.71까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이 그의 기록에 더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느꼈다는 정도로 낮추어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그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독자적인 결정이나 성취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주님의 신적 자비 허락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이 모든 일을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답은 두 가지를 함께 붙드는 것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일을 주님의 신적 자비 아래 허락된 일로 이해했습니다. 둘째, 그 허락이 매번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AC.71이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인 말씀인지, 영적 교통 가운데 주어진 인식인지, 다른 어떤 방식인지 이 한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신비화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단순한 문학적 겸손의 표현으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독자에게 그의 자기 이해를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을 말씀의 아르카나와 다른 삶의 실상을 스스로 발견하여 발표하는 독립적인 탐구자로 제시하지 않고, 그것들을 알고 보고 밝히도록 허락받은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그의 기록을 더 읽으면서 이러한 허락의 성격을 밝혀 주는 직접적인 설명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이해를 더 넓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1의 독자는 아직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분명히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함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허락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허락되었는가는 여기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그의 증언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AC.71 심화 1)

 

 

 

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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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창1과 창2에서 천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른 사람이나 태고교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천적 인간이라 했던 사람들은 무엇이며, 왜 여기서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AC.162가 무엇을 설명하려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어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이유를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며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강조점은 누가 천적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보다 천적인 것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2에서 계속 배워 온 질서와도 같습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과 진리도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AC.149에서는 더 나아가 오직 주님만이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 곧 주님의 proprium을 가지고 계시며, 주님의 proprium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생명이 아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천적인 것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생명을 받아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천적 인간이었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천적인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천적 인간이십니다. 반면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만큼 천적 인간이 됩니다. AC.155에서 천사들이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천사가 천사인 까닭도, 천적 인간이 천적 인간인 까닭도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162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한 뒤 곧바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모든 천사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라는 데 우선적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천국의 천적인 성질 자체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도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천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적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혼인의 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지상의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천적 혼인의 가장 깊은 중심에도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AC.162가 천적 혼인을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혼인의 하나 됨도 인간 둘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그 본과 질서를 한 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따라서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문장은 인간이나 천사의 천적 상태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적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천국이 천적 천국이 되는 것은 주님과 별도로 천적인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과 질서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창2가 계속 가르쳐 온 한 가지 질서를 다시 가장 깊은 곳에서 확인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1)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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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 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 AC.161은 그 답을 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 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오직 주님의 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명의 기관이라고 했습니다. 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고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AC.161 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행위 하나를 예로 듭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구별됩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부분은  사람이고  부분은  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삶, 하나의 의지, 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 이것이 AC.161이 말하는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 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까지 했으며,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 나라는 존재가 점점 없어지는 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 주님께서 안에서 움직이시고 인간은 밖에서 수동적으로 따라 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천적·영적 생명과 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 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 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  삶을  삶으로 살아가지만,  생명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 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 (AC.161 심화 1)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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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유튜브 채널 ‘말씀의 서사’의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기에 상당히 중요한 영상입니다. 주제가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자막 전체를 보면 이 영상은 전통적인 니케아-아타나시우스적 삼위일체론을 대중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하려는 영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중간중간 사용하는 비유와 표현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가 가장 강하게 문제 삼았던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신적 위격’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판정하기보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시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는지를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자료입니다.

 

영상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서 출발하며, 이것을 신앙이 얕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그만큼 깊고 신비로운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출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 본래부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모순적인 신비인가, 아니면 교회가 하나님을 영원한 위격으로 설명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독교에는 반드시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 신적 인격의 연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의 삼위일체로 이해합니다. 영상과 스베덴보리 모두 ‘하나님은 분이며 삼위일체가 있다’고 말하지만, ‘ 셋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길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상은 신명기 64절의 ‘하나’인 히브리어 ‘에하드’가 창세기 224절의 ‘ ’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반드시 단순한 숫자적 하나만을 뜻하지 않고 ‘여럿이 연합된 하나’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창세기 11절의 ‘엘로힘’이 형태상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라는 점도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하나의 힌트처럼 제시합니다. 다행히 영상도 이것들만으로 삼위일체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데, 이 신중함은 좋습니다. 그러나 ‘에하드’가 집합적 하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이 복수 인격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뜻은 아니며, ‘엘로힘’의 형태 역시 그것만으로 삼위일체의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먼저 온전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성은 세 존재가 하나의 목적과 사랑으로 연합하여 이루는 하나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창세기 1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설명하면서 ‘혼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 안에는 이미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가 계셨던 ’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조심해서 보아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창조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의 형성을 다루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창1:26의 ‘우리’를 곧바로 영원 전부터 서로 의논하던 세 신적 위격의 대화로 읽는 것은 AC의 해석과 상당히 멀어집니다. 더구나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시는 우리’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부가 성자에게 말하고 성자가 성부에게 응답하며 성령이 그 옆에 계시는 세 신적 주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서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이라고 고백하면서 생각 속에서는 세 분을 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상이 가장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물속에는 성자,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성령, 하늘에서는 성부의 음성이 있으므로 ‘성부, 성자, 성령 분이 같은 순간에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한 분이 세 역할을 하는 ‘1 3’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삼위일체를 단순한 양태론, 곧 한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 역할을 하고 때로는 아들 역할을 하고 때로는 성령 역할을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상이 경계하는 단순한 ‘1 3역론’에 스베덴보리를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 장면이 ‘영원히 서로 구별되는 신적 인격’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실제적인 구별이지만 세 하나님 사이의 구별이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는 아직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를 시간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임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인격이 잠시 장면에 동시에 등장했다’고 읽으면 성육신과 영화라는 거대한 과정이 사라져 버립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은 단순히 이미 완성된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인간의 옷을 입고 잠시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모친 마리아에게서 취한 인성을 통하여 시험을 겪으시고 악과 지옥을 이기시며 그 인성을 점차 신성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는 이 ‘영화’의 과정이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9분대에 등장하는 ‘태양 비유’입니다. 영상은 하나의 태양에서 ‘, ,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은 셋이지만 본질은 완전히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뜻밖에도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설명하기에 훨씬 적합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를 태양의 열과 빛에 상응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태양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 신성의 근원이 나뉘어 여러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출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을 달리했더라면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에 상당히 가까이 갈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유를 제시한 직후 다시 ‘성부가 계획하고, 성자가 실행하고, 성령이 적용한다’는 세 주체의 분업 구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삼위일체적 구원을 설명할 때 매우 익숙하고 교육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칫 ‘성부라는 분이 계획하고, 성자라는 다른 분이 지상으로 내려와 값을 치르고, 성령이라는 다른 분이 그것을 인간에게 전달한다’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상의 ‘예수님은 번의 죽음으로 우리의 값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갚아주셨습니다’라는 문장은 전통적인 대속·형벌대속적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십자가는 구속의 핵심적인 마지막 시험이며 영화의 완성이지만, 성부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형벌의 값을 성자가 대신 지불하여 성부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육신 전에는 진노하시다가 성자의 희생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게 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친히 인간에게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심으로 인간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영상 후반에 제시하는 ‘삼위일체를 일상에서 누리는 다섯 가지 실천법’에서도 이 차이는 매우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영상은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를 주관해 주세요.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성령님, 오늘 저를 인도해 주세요’라고 각각 부르도록 권하고, 찬송도 1절은 성부, 2절은 성자, 3절은 성령께 드리라고 하며, 하루의 감사 역시 세 분에게 역할별로 나누어 드리도록 권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 제기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오랫동안 반복하면 신자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세 개의 신적 중심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도할 때는 세 분을 차례로 찾아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신학에서 중심은 ‘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따로 계시는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의 내적 신성이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서 취하셨다가 영화하신 신적 인간이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성부를 건너뛰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제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분 주님께 나아감으로써 신성 전체에 나아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영상 자체가 14분대에 말한 ‘여러분은 기도할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와 만나고 있는 겁니다’라는 표현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그것을 ‘ 분이 동시에 기도를 듣는다’고 설명하기보다 ‘ 주님 안에 신성의 충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영상의 신학적 결론은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혼자서는 사랑할 없다. 그러므로 창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넘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이 스베덴보리와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사랑을 주고받는 세 인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신성 자체가 사랑 그 자체이며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는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것을 주며, 그 존재와 결합하기를 원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적 사랑은 창조를 향합니다. 인간과 천국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완전한 신적 사랑 자체가 자신의 선과 행복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사랑이 되기 위해 하나님 안에 최소한 복수의 인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단일성은 결핍이나 고독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한한 사랑과 지혜와 생명의 완전한 하나 됨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상을 ‘삼위일체를 잘못 가르치는 영상’이라고 단순하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적 기독교가 지키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진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이라는 것, 성령은 단순한 비인격적 힘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구원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영상은 진지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외적 상황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이 변화되고 평안을 얻는다는 후반부의 메시지도 매우 귀합니다. 이것은 ‘문제 해결’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와 거듭남을 중요하게 보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영상에는 한 가지 일관된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라고 계속 말하면서 실제 설명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을 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세 신적 주체로 그립니다. 그래서 ‘셋이 완벽하게 하나로 움직인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독자의 내적 사고에는 결국 세 분이 남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론은 이 문제에 대해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한 답을 내놓습니다. ‘삼위일체를 버리지 말라. 그러나 삼위를 영원한 인격에게 나누지 말라. 삼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주님 안에는 성부라 불리는 신성 자체, 성자라 불리는 신적 인간, 성령이라 불리는 발출하는 신성이 있습니다. 이 셋은 세 하나님이 서로 완벽하게 협력하여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삼위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핵심 질문도 ‘ 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에서 ‘ 하나님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 제목 ‘그런데 아직도 어려운 삼위일체’에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답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일체가 어려운 까닭은 반드시 하나님 자체가 모순적인 신비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분을 생각하도록 배워 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를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흩어져 있던 삼위를 다시 주님 안에 모읍니다. 그때 성부께 것인가, 성자께 것인가, 성령께 구할 것인가 하는 신자의 오래된 혼란도 새로운 아래 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영상은 ‘삼위일체의 안개를 걷어 주겠다’고 시작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그 안개가 완전히 걷히는 지점은 ‘ 분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더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 셋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인가’를 보는 데 있습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억지로 하나라고 이해해야 하는 난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로 계시고, 인간에게 보이도록 오셨으며, 지금도 자신의 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구원의 한 질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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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 잘되게 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 남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 자음 순서를 바꾼 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과 고통을 뜻하는 오체브 사이에 의도적인 말놀이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 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 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 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HCSB 계열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 고통을 야기하지 않게 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 번역이 저처럼 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 it may not grieve me’, 곧 ‘그것이 나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 I may not cause 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 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 악에서 지켜 주시고’,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 자체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이해도 실제 번역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 고통이 오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 소유를 늘려 주십시오’, ‘나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 사역을 남들보다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 구했느냐, 복을 구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 복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인정받게 주십시오’, ‘ 이름이 높아지게 주십시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있게 하시고, 책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주님께 받은 것을 넓게 쓰게 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 섭리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 기독교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악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나가지 못하게 주십시오. 말과 행동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받지 않게 주십시오. 그리고 악을 단순히 억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주님께 죄임을 보고 돌이키게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도록 성격을 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사, 제가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시고, 안에서 악을 일으키는 것까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와 ‘주의 손이 나와 함께하게 하십시오’와 ‘악에서 지켜 주십시오’와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게 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 주신 선과 진리의 삶의 영역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힘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게 하십시오. 안의 악이 넓어진 지경 안으로 흘러들지 않게 하시며, 제가 받은 능력과 영향력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 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 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 지경을 넓혀 것을 크게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맡기실 있는 쓰임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그런 내가 있도록 인도해 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 사람의 ’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 안의 ’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고통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proprium 자존심과 지배욕과 인정욕과 탐욕과 분노와 냉혹함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 성격이 원래 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 주님께 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와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 저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악의 통로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proprium 지경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갈 쓰임의 지경이 되게 하십시오.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되, 손으로 주변의 장애물만 치워 달라고 하지 않게 하시고, 먼저 안의 악을 보게 하시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인생과 성공을 보장받는 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 받을수록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지경이 넓어질수록 많은 쓰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힘이 커질수록 아무도 해치지 않게 하시고, 무엇보다 모든 과정에서 주님의 손을 떠나지 않게 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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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mark) 어떤 사람에게 표를 하는 (setting a mark) 구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mark,and ofsetting a mark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9:4)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Ezek. 9:4)

 

여기서 이마에 표를 하는 (marking out the foreheads) 실제로 그들의 머리 앞부분에 어떤 표나 선을 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계시록에서도 where bymarking out the foreheads,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9:4)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Rev. 9:4)

 

하는데, 여기서도 표를 가진다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같은 책에는 손과 이마에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받는 것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13:16).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Rev. 13:16)

 

 

 

그가 모든 작은 자나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6)

 

같은 것이 유대교회에서는 첫째이자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에 관하여 신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6:4, 8)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Deut. 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1:13, 18)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Deut. 11:13, 18)

 

이것으로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모든 계명보다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표상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손과 이마에 표를 하는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becomes manifest.

 

[3]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두발과 야완과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나라에 전파하리라 (66:18-19)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Isa. 66:181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6-17)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Ps. 86:1617)

 

구절들로부터 이제 의미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 하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표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됩니다. 말씀의 속뜻에는 문자적 의미에 담긴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AC.396가인의 가 무엇인지를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확증합니다. 앞의 AC.392에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이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먼저 밝혔습니다. AC.393-395에서는 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에서는 라는 말 자체가 말씀에서 실제로 구별을 의미하는지를 에스겔, 계시록, 신명기, 이사야, 시편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가장 먼저 인용되는 겔9:4는 이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실제 머리 앞부분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그리는 것으로 읽지 않고,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으로 풀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표의 외형이 아니라 그 표를 통하여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4장의 가인의 표 역시 같은 원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9:4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도 같은 증거로 제시됩니다. 여기서도 이마에 있는 표는 사람을 영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표시라기보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속해 있는지를 구별하는 표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도 가인이라는 개인에게 붙은 특이한 신체 표식으로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계13:16손과 이마에 가 언급되고, 이어 유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도록 한 규례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표상을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6장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이자 큰 계명으로 구별되어야 했으며, 그것을 손과 이마에 두는 행위가 바로 그 구별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우위에 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의 의미를 확증하면서 다시 사랑에 관한 계명을 모든 계명보다 구별하는 표상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앙이 보존되는 목적은 신앙이 홀로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주된 것으로 인정하는 올바른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마의 세부 상응을 이번 번호에서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증명하려는 것은 표를 한다=구별한다는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손과 이마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별도 심화로 펼치기보다, 사랑에 관한 첫째 계명을 다른 모든 것보다 구별하는 표상이었다는 본문의 논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의 사66:18-19와 시86:16-17도 같은 목적을 가집니다. ‘를 세우거나 은총의 표적을 보이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상태가 다른 것과 구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은 서로 다른 독립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사실, 곧 말씀에서 표를 하는 이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인용군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분리를 승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신앙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AC.393-394에서 설명했듯이 인류는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에는 신앙의 지식을 먼저 듣고 배운 뒤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지식이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AC.395에서 그 보존이 왜 거룩한 문제였는지도 설명되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의 벌이 있다고 한 것은 일곱이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이후의 구원을 위한 쓰임으로 구별하여 보존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AC.396는 바로 그 특별한 구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의 에는 구별보존이라는 두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시고, 그렇게 구별하신 목적은 그것이 보존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표를 단순히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시면서 동시에 보호하셨다는 도덕적 이야기로만 읽으면 이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속뜻에서는 인류의 영적 상태가 낮아진 뒤에도 주님께서 앞으로 구원에 쓰일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번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문자적 독법에 경계를 세웁니다. ‘가인이라 하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표가 주어졌다고 생각해서는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표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예 그런 질문 자체가 속뜻의 초점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해석하고 있는 가인은 한 개인의 전기적 인물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회적·영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창1-11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매우 중요한 독법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인의 표가 피부색이었을까, 흉터였을까, 어떤 초자연적인 표시였을까?라고 추측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에서 찾는 아르카나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떤 표였는가?라는 외적 모양이 아니라 표가 주어졌는가?라는 영적 기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마지막 문장을 근거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와 구별되는 속뜻이 있으며, 지금 자신이 해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속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초점은 역사적·고고학적으로 가인의 몸에 어떤 표가 있었는지를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신앙을 어떻게 보존하셨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392-396을 한꺼번에 보면 이제 가인의 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완성됩니다. AC.392에서 가인을 죽이는 것이 모독이고 표는 신앙의 특별한 구별과 보존이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AC.393에서는 인간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야 하는 새로운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AC.394에서는 바로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신앙이 보존되었다고 밝혔고, AC.395에서는 일곱이 그 보존의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성격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6자체가 말씀에서 구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결국 가인의 표는 가인의 죄를 눈에 보이게 표시한 낙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타락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위한 수단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신앙 자체까지 사라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사람이 신앙의 지식을 듣고 배우며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도록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에서 궁극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가인의 몸에 새겨진 어떤 신비한 표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끊지 않으시는 주님의 보존 섭리입니다. (AC.396)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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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인(Cain)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과, 일곱(seven)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알려져 있듯이 일곱이라는 수는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안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때문에 수는 유대교회의 의식에 매우 자주 나타나며 어디에서나 거룩하게 여겨집니다. 또한 이로 인해 크고 작은 기간들이 일곱으로 구분되어 이레들(weeks)이라고 불렸습니다.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들이 그러합니다(9:24-25). That the words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seven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9:24, 25)

 

라반과 야곱도 년의 기간을 이레(week)라고 불렀습니다(29:27-28).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week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나를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일을 채우매 라반이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27, 28)

 

같은 이유로 일곱이라는 수는 어디에서 나타나든 거룩하거나 침해해서는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서 (sun) 사랑을, (moon)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하며, 신앙은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들이 일곱째, 천적 인간에 이르기 전에 여섯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황폐화의 기간들도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때까지 그렇게 구분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마지막 포로 생활인 바벨론 포로로 표상되었는데, 포로 생활은 일곱 번의 , 칠십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땅이 안식년들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도 여러 나옵니다. 같은 것이 다니엘서의 느부갓네살로 표상됩니다. where thesundenotes love, and themoon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순찰자,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들짐승들과 더불어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마지막 때의 황폐화에 관하여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또한 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동안 짓밟으리라 (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형벌의 엄중함과 가중됨도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배나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배나 징벌하리니 (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 주를 비방한 비방을 그들 품에 배나 갚으소서 (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이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앙은 쓰임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것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해설

AC.395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는 창4:15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두 상응에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 배의 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가인을 해치면 일곱 배나 더 심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앙을 함부로 파괴하는 일이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일곱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가장 먼저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여섯 날의 과정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릅니다. 그 일곱째 날에는 평화와 쉼과 안식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가 거룩한 이유는 단순히 고대 사람들이 숫자 7을 신비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처음부터 그것이 거듭남의 완성과 천적 상태,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안식을 표상하는 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유대교회의 여러 의식과 시간의 구분에도 일곱이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메시아가 오기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단9:24-25이레들을 들고, 29:27-28에서 라반과 야곱이 칠 년을 한 이레라고 부른 것도 예로 듭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숫자 7을 현대적인 숫자 암호처럼 계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거룩한 질서와 완결된 기간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119:164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도 같은 의미에서 인용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문자적으로 하루에 정확히 일곱 차례만 찬양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수는 단순한 산술적 수량을 넘어 영적 상태의 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30:26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를 사랑으로, ‘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달이 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과 같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가인 이야기 전체와 정확히 맞닿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데 있었습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달이 해에서 빛을 받듯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사30:26의 인용은 단순히 일곱이 거룩하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번 문맥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관계까지 다시 보여 줍니다. ‘=사랑’,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상응은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방향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도 신앙이 영원히 사랑에서 분리된 채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랑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일곱의 의미를 거듭남뿐 아니라 황폐화에도 적용합니다. 사람의 거듭남이 여섯 기간을 지나 일곱째의 천적 상태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화 역시 천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기간을 거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같은 일곱이 언제나 즐겁고 긍정적인 사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이 나타내는 것은 그 과정의 거룩한 질서 또는 완결된 상태이며, 문맥에 따라 거듭남의 완성과 황폐화의 완결 모두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포로 생활과 칠십 년의 바벨론 포로가 이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칠십은 일곱 번의 으로서 황폐화의 기간을 표상합니다. 땅이 안식년 동안 쉬어야 한다는 말씀 역시 같은 일곱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안식과 황폐화가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다 어떤 영적 기간이 주님의 질서 아래 그 정해진 상태에 이르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가 지나가는 단4장의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바뀌고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황폐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15장의 일곱 마지막 재앙, 11장의 마흔두 달, 5장의 일곱 인도 같은 계열에 놓입니다. 여기서도 숫자 자체를 산술적으로 해독하는 것보다, 일곱이라는 수가 말씀 안에서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질서 및 어떤 상태의 충만한 기간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계11:2의 마흔두 달을 여섯 번의 일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과도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 계산 자체를 독립적인 예언 연대표로 발전시키는 것은 이번 본문의 목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모든 예를 드는 목적은 오직 일곱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26장의 배의 징벌이나 시79:12 배나 갚으소서처럼 형벌의 강화에도 일곱이 사용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이유 역시 일곱의 거룩함에서 찾습니다. 거룩한 것을 침해하는 일의 엄중함을 나타낼 때도 일곱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는 단순히 형량을 일곱 배로 계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가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시 가인에게 돌아오면 AC.395의 논리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이미 본래의 천국적 질서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AC.393-394에서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그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뒤에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번 번호 마지막의 since ... it was to be of service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신앙은 쓰임이 있어야 했습니다.여기서 신앙의 쓰임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상태를 영구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지식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을 완전히 파괴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까지 파괴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분리된 신앙임에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모독이 됩니다. 이것은 잘못된 교리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오류는 이미 매우 분명하게 비판되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오류를 바로잡는 것과 신앙 자체, 특히 주님께서 이후의 구원을 위해 보존하신 신앙의 지식까지 파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은 가인의 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호하신 것은 가인이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앞으로 쓰임이 있을 것을 보존하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악한 일이지만, 신앙에 속한 지식은 이후의 인간이 말씀을 듣고 배우며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오류의 승인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보존의 표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에 관한 매우 깊은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이 현재 불완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안에 앞으로 선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더 나은 질서로 이끄십니다. 가인의 신앙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으므로 참된 질서를 잃었지만, 신앙의 지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이후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AC.395일곱은 단순한 성경 숫자 공부의 주제가 아닙니다. 일곱이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왜 가인의 신앙이 함부로 파괴되어서는 안 되었는지를 밝혀 줍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위해 구별하여 보존하신 것에는 거룩한 쓰임이 있었고, 그 쓰임을 파괴하는 것은 모독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배의 은 바로 그 거룩하고 침해해서는 안 되는 성격을 표현합니다.

 

결국 AC.395는 창1의 일곱째 날에서 창4의 가인의 표까지 하나의 긴 선을 연결합니다. 1의 일곱째 날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 된 천적 인간의 평화와 안식을 나타냈습니다. 4에서는 그 결합이 깨어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존의 거룩함을 다시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하셨습니다. 결국 처음의 목적도 마지막의 목적도 같습니다. 신앙이 홀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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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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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4

이제 이러한 일이 예견되었고,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섭리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해서는 된다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에게 표가 주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도록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결혼과 고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 말씀에서도 그것들을 언급하셨습니다.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도 있도다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9:12)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Matt. 19:12)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eunuchs)이라고 불립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born from the womb)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며, 사람에 의해 고자가 자들(made of men)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고, 스스로 그렇게 자들(made so by themselves)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로서,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합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eunuchs”; those soborn from the womb,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thosemade of men,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and thosemade so by themselves,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해설

AC.394는 바로 앞 AC.393의 설명을 가인의 표에 직접 적용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없고, 결국 신앙을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고 보존하셨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이 대목은 AC.392에서 이미 제시되었지만, AC.394에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이유는 그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AC.393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인간은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지식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이 체어리티로 인도될 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보존은 단순히 어느 한 교리 체계를 역사적으로 존속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 가능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씀을 듣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며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구원의 통로를 완전히 끊지 않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마19:12고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가인의 표와 고자에 관한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결혼의 속뜻과 연결하고, 더 깊게는 천적 천사·영적 천사·천사적 영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먼저 천국의 결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결혼은 가장 깊게는 주님과 천국의 결합을 가리키고, 인간 안에서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문맥에서는 특히 사랑과 신앙이 올바르게 결합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결혼을 깨뜨린 데 있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 뒤에 천국의 결혼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9:12의 말씀을 상응적으로 읽으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연적·자기적인 결혼 상태를 벗어나 천국의 결혼, 곧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고자는 육체적 조건 자체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째,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은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AC.393에서 설명한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천적 천사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그들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은 처음부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과 사랑의 분리를 경험한 뒤 다시 결합되는 방식보다,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둘째, ‘사람에 의해 고자가 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천적 천사처럼 처음부터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아니라, 밖에서 주어지는 신앙의 지식과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들입니다. AC.393에서 말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와 같습니다. 즉 외적으로 들은 진리와 배운 신앙이 수단이 되어 내적으로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셋째, ‘스스로 그렇게 자들은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이며,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사적 영들이 체어리티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행동의 직접적인 출발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천적 상태는 사랑에서, 영적 상태는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행하지만, 이 보다 외적인 상태에서는 먼저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 행해야 한다는 순종이 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따라서 세 부류는 모두 같은 수준에서 나열된 세 가지 인간 유형이라기보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서로 다른 방식과 정도를 보여 줍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배운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며, 천사적 영은 보다 외적으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서의 목적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보존과 마19:12가 연결되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를 잃었어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도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길이 열렸고, 더 외적인 상태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도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질 때마다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가 단순한 보호 표지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상징인 이유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은 인간의 타락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된 신앙 안에 남아 있는 진리의 지식까지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높은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구원의 모든 길을 닫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입니다. 가인 이야기를 단순히 신앙 대 체어리티의 싸움으로만 보면, 해결책이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목표는 분리된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그 결합의 가능성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AC.394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이 천적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에도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직접적인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는 양심의 길을, 더 외적인 사람에게는 순종의 길을 사용하시면서, 각 상태에서 인간을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이끄십니다.

 

결국 AC.394가인의 는 단순히 타락한 신앙을 살려 두신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의 표입니다. 그리고 마19:12의 세 종류의 고자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서로 다른 상태와 방식으로 천국의 결혼, 곧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장 높은 천적 상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영적 질서와 순종의 질서를 통해 다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아갈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감추어진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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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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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듣는 것이 먼저 오고,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가인의 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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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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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 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AC.392에서 드디어 창4장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 가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것은 가인의 완전한 제거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과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존승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 그 신앙의 상태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소멸시킨 신앙입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AC.392의 보존은 교리가 옳으니 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존하십니까? AC.392는 아직 그 이유 전체를 풀어놓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줍니다.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안에 완전히 소멸시켜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89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2에서는 그 완전한 소멸을 막기 위해 신앙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는 가인의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보존의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 속에서도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완전한 상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미 질서를 많이 무너뜨린 상태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앞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입니다. 즉 가인의 표는 단순히 몸에 어떤 표시를 새겼다는 문자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이 신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함부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별하셨는지는 뒤의 번호들을 더 읽어야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AC.392에서는 구별하여 보존함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아직 일곱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므로 배의 복수는 완전한 형벌이다와 같은 식으로 미리 결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지는 번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재 AC.392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을 죽이는 ’, 곧 이처럼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독은 단순한 오류나 악과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관계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침해하거나 더럽히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이미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안에서도 말씀에서 나온 진리의 지식이나 거룩한 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92만으로 그 구체적인 구조를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리면서 우선 분리된 신앙에도 함부로 폭력을 가해서는 되는 이유가 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만한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한꺼번에 부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닙니다. 오류는 오류로 분별해야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진리나 선의 가능성까지 함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392의 직접적인 역사적 의미라기보다 그 원리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이번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고대의 교회 상태입니다.

 

앞의 AC.389-391을 거쳐 이번 번호에 도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사람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AC.391에서는 악과 거짓 자체가 그 안에 형벌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은 결국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보존이 개입합니다.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표는 형벌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인은 자신의 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겪습니다. 지면에서 쫓겨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무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그 선택의 결과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십니다.

 

여기서 AC.384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을 곧바로 기술적인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원문은 그곳에서 remains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리메인스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지금 확정해 버리기보다는,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으며,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 본문에 더 충실합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이 보존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결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를 이루도록 보존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장의 가인 이야기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이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남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 질서를 뒤집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결국 AC.392에서 가인의 는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악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선과 진리까지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범죄자 보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의 질서가 다시 이어질 길을 남겨 두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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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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