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가 관계를 끊을 성경적 근거를 찾는 쪽이라면,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는 관계를 지키고 싶지만 신앙의 차이와 감정의 상처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저는 오히려 이 두 번째 고민 속에 체어리티(charity)가 시작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할 도리’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를 좋아해야만 도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편해도 필요한 안부를 묻고, 아플 때 살피고,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드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한 범위에서 돕고,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 역시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하는 선행은 위선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선한 감정이 완전히 생긴 다음 선을 행하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 앞에서 옳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 자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속에서는 ‘가기 싫다’, ‘전화하기 싫다’, ‘왜 내가 먼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데도 ‘그래도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판단하여 행한다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합리성’(rationality)과 ‘자유’(freedom)가 작동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이 선한지를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체어리티는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에서 ‘우리 신앙을 인정하라’, ‘우리 예배나 종교행위에 참여하라’,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치게 하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앙을 조롱하거나 모욕한다면 ‘이런 대화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경계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서 요한이서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짓과의 연합을 끊는 것’과 ‘체어리티를 끊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겠습니다.’ 이 두 문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머리로는 ‘도리를 해야 한다’고 아는데 마음에서는 분노와 불쾌감과 억울함이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갈등을 ‘내가 교만해서 그렇다’고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그 잘못을 붙잡고 ‘그러므로 나는 저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악이 어느 순간 내 안의 악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에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여기서 체어리티는 감정보다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기 어렵더라도 필요한 선은 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모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지 ‘가족관계를 유지했는가?’가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도리를 다한다’는 것을 ‘예전처럼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를 줄이면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고,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식사를 함께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도울 수도 있습니다. 전화 한 통, 병문안, 필요한 도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모두 가능합니다. ‘친밀함’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같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잘 안 돼’라는 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의 실패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거듭남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을 부정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상대의 악 때문에 나까지 악의 질서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사울과 스데반을 생각하면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더 생깁니다. 내가 상대방의 교리를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사울 안에서 주님께서는 훗날의 바울을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정통이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고 확신하는 내 안에 사울의 종교적 프로프리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는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이 잘못했으니 변화시켜 주십시오’만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 거짓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해야 할 선은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잘못 때문에 제 안에 미움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으로 자리 잡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것은 하되 할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떠맡지 않게 하시고, 어디까지 사랑하고 어디서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 분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기도가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내 영혼까지 함께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계를 얼마나 많이 유지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관계 안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행동했는가?’입니다. 때로는 찾아뵙는 것이 그 답일 수 있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랑까지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아직 따라오지 않더라도 주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선은 행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어도 내가 해야 할 선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요한이서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짓에는 참여하지 않되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경계는 세우되 미움으로 절연하지 않는 것.’ 아마 바로 그 어려운 중간 지점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실제 삶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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