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내 책임 아니야.’ 주님이 우리처럼 이러시는 걸 상상하니 좀 이상하고 우습기까지 하네요. 우리끼리도 아랫사람 단도리 못한 책임은 상관인 제 책임입니다.’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건가요? 주님의 사랑, 주님의 주권 등으로까지 생각이 전개되네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AC.212만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을 때, 반드시 만나게 되는 문제입니다. 왜 말씀은 사람이 스스로 한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할까? 왜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았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고 표현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주님은 결코 악을 만들거나 거짓을 주입하거나 사람을 억지로 눈멀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직 선과 진리만 흘려보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own과 자기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뒤틀고 거부합니다. 문제는 그 결과까지도 결국 주님의 섭리 아래 허용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똑같이 빛을 비춥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빛을 이용해 길을 찾고, 어떤 사람은 그 빛 아래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범죄는 태양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비치는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말씀은 때때로 이런 허용의 차원까지 포함하여 주님께 돌려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말씀의 문자 sense는 인간의 외관(appearance)에 따라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결국 주님의 통치 아래 일어나므로, 허용된 일까지도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 ‘악한 영을 보내셨다’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에서는 사람이 스스로 그 상태를 선택한 것이며, 주님은 그것을 억지로 막지 않고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아랫사람 단도리 못한 책임은 상관인 제 책임입니다’라는 비유는 생각보다 깊은 통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단순히 ‘네 책임이야. 나는 몰라.’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 전체를 보면 주님은 인간이 선택한 결과로 생긴 고통까지도 자신이 짊어지시는 분처럼 나타나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떠났는데도 주님은 끝까지 찾으시고, 인간이 스스로 눈을 감았는데도 다시 눈을 열어 주시려 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언어인지도 모릅니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우리 아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제가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책임 소재를 따지면 자녀의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상대의 책임까지 자기 쪽으로 끌어안습니다.

 

그래서 말씀 속의 이런 표현들은 법률 문서의 언어라기보다 사랑과 섭리의 언어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실제로 악을 만들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악을 선택하여 생긴 결과조차도 당신의 섭리 안에서 관리하시고, 끝까지 그것을 선으로 돌리려 애쓰십니다. 그러므로 문자상으로는 마치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되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주권’까지 생각이 전개된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 방향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주님이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는 분이라면 성경은 ‘그건 네가 한 일이야. 나는 상관없어.’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타락의 역사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계속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인간이 만든 결과까지도 당신 쪽으로 끌어안으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표현들을 읽을 때마다, 주님의 전능보다도 주님의 책임지는 사랑이 먼저 보입니다. 실제 원인은 인간에게 있지만, 주님은 ‘나는 몰라’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그 인간을 돌보시고, 회복시키시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붙들려 하십니다. 말씀의 이런 독특한 표현 방식 뒤에는 어쩌면 그런 사랑의 성품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AC.212, 심화 7, ‘사6:10’

AC.212.심화 7. ‘사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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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이 구절은 매우 이상하게 들립니다. 마치 주님께서 사람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눈을 감기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고, 이해를 닫아 버리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육체의 시력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눈으로 본다’는 것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말씀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이 단순히 육체의 눈이라면,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은 단지 시력을 잃게 하라는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관련된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서 본 겔12:2와도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했고, 이사야에서는 ‘눈이 감기게 하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육체적 시각이 아니라 영적 이해입니다. 즉, 이해가 열리면 진리를 보고, 이해가 닫히면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는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경우는 그 반대입니다. 이해가 닫혀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창3:7의 ‘눈 밝아짐’과 사6:10의 ‘눈 감김’은 서로 정반대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더 깊이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진리를 보여 주시지만, 사람이 자기 own과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으면, 이해가 어두워져 결국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감기는 원인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6:10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는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눈이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그 반대의 경우로서, 이해가 닫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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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6, ‘겔12:2’

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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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구독자 수가 거의 60만에 육박하는 어느 목사님이 최근 장로교 모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으셨군요. 이 분은 KJV 성경에 오리엔티드되신 분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누가 스베덴보리도 KJV 아닌가요?’ 하네요... 지상의 언어로 된 성경들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어떤 입장이며, 그는 저작 활동 시 어떤 성경을 곁에 두고 썼나요?

 

 

스베덴보리도 KJV 아닌가요?’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맞는 부분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살던 18세기 유럽에서는 영어권의 경우, King James Version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고, 오늘날 영어권 새 교회(New Church)에서도 KJV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 KJV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결코 ‘KJV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는 말씀의 거룩함이 특정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내적 의미’, 곧 영적, 천적 의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히브리어 자체나 그리스어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들을 통해 기록된 말씀 속에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원어를 직접 언급합니다. 특히 히브리어 단어 하나, 동사의 시제 하나, 복수형, 단수형 하나까지도 해석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단순히 번역본으로만 읽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어떤 성경을 옆에 두고 저술했을까요?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라틴어 성경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Biblia Sacra로 알려진 학술용 라틴어 성경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저작이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상당히 읽을 수 있었으며, 특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해설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을 보면 원문을 직접 검토한 흔적이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그는 필요할 때,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라틴어 번역 등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작업 환경을 상상하면, 오늘날 어떤 KJV 유일주의 목사가 KJV 한 권만 펴 놓고 연구하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 히브리어 구약 원문

* 그리스어 신약 원문

* 라틴어 성경

* 여러 주석서와 사전

 

등을 함께 활용한 학자에 가까웠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느 번역본이 유일하게 옳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이 구절 안에 주님과 천국에 관한 어떤 내적 의미가 들어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스베덴보리도 KJV를 사용했으니 KJV 유일주의자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를 상당히 오해한 것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는 KJV를 포함하여 여러 번역본을 존중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떤 특정 번역본 하나를 절대화하는 태도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말씀의 신성은 영어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누군가에게 짧게 답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KJV를 사용하던 시대 사람이기는 했지만, KJV 유일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는 특정 번역본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과 그 안의 내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영어 성경인가가 아니라, 그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진리였습니다.’

 

 

 

SC.100, ‘ChatGPT에게 공정하게 질문하기’

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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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말씀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분명 눈이 있었고, 실제로 사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귀도 있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다’와 듣다’는 육체적 감각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이해와 수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말씀을 읽을 수 있고, 귀로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입으로 신앙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닫혀 있고, 의지가 거부하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백성들은 육체적으로는 정상인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과 귀머거리였습니다.

 

이것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연결됩니다. 3:7에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는 이해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겔12:2의 사람들은 눈은 있으나 이해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즉 한쪽은 내적 인식이 열리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내적 인식이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본문은 그 이유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지능 부족이 아닙니다. 정보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진리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보게 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2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단순히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으로는 보았지만, 이해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겔12:2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이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밝아져’도 육체적 시력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백성들은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3:7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7, ‘사6:10’

AC.212.심화 7. ‘사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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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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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려움 가운데 있는 다윗의 탄원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을 이해(understanding)로 읽게 되면, 이 기도는 매우 깊은 영적 기도가 됩니다. ‘주님, 제 이해를 밝히소서. 제가 진리를 진리로 보게 하소서. 제가 제 own의 생각과 판단에 갇히지 않게 하소서. 제가 영적으로 잠들지 않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최근 AC.194-212를 따라오시며, 계속 말씀하신 내용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감각으로 확인해야 믿으려는 태도’,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태도’, ‘이성질’, ‘own의 교묘한 작용’, ‘악을 선으로 보고 거짓을 진리로 보는 상태 같은 것들을 계속 살펴오셨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보면 시13:3은 단순히 지식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 분별력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더욱이 AC.211 AC.212에 따르면,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작은 빛이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며,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의 흔적도 남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시13:3의 기도는 바로 그 작은 빛을 꺼뜨리지 말아 달라는 기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혈기와 극단성을 말씀하셨던 것도 생각납니다. 사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경계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말을 꺼내기가 두렵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시13:3의 기도가 어느 정도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밝아져 있기 때문에 자기 상태를 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기도는 길게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혹은 AC를 읽기 전에, 혹은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그저 이렇게 기도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주님, 제 눈을 밝히소서. 제가 제 own을 진리로 착각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악을 선으로, 거짓을 진리로 보지 않게 하소서. 제가 사망의 잠을 자지 않게 하소서.’

 

AC.212를 읽은 사람에게는, 이 짧은 시편 한 구절이 어쩌면 매우 훌륭한 일상 기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C.212, 심화 6, ‘겔12:2’

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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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4, ‘시13:3’

AC.212.심화 4. ‘시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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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 기관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와 영적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윗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육체의 눈만을 뜻한다면, 뒤에 이어지는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육체적 수면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과 영적 죽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는 ‘내 이해를 밝히소서’, ‘내가 진리를 보게 하소서’, ‘내 내적 인식을 깨워 주소서’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사망의 잠’은 거짓과 악 안에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영적으로 잠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 제 이해를 밝히셔서 제가 영적 죽음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열리는 것이며,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영적 사물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시편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다윗은 외부 정보를 더 많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빛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조명, 내적 인식, 내적 지시와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안다고 해서 진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질 때 비로소 진리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과 ‘생명’, ‘어둠’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해가 밝아질수록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 있고, 이해가 어두워질수록 영적으로 잠들어 갑니다. 그래서 다윗은 눈의 밝아짐과 사망의 잠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놓고 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시13: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하고, ‘눈 밝아짐’은 진리의 빛을 받아 이해가 계몽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의 작용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적 예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시력을 주소서’가 아니라 ‘이해의 빛을 주소서’라는 기도이며, 바로 그 점 때문에 AC.212의 논증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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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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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 회복이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밝아짐을 뜻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보면, 요나단은 전투 중 지쳐 있었고, 숲에서 발견한 꿀을 조금 맛본 뒤 기력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몸에 힘이 돌아오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요나단은 단순히 눈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눈이 밝아졌다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 그들의 눈이 밝아져’를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인식의 작용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 전체의 사용법과 일치함을 보여 주기 위해 요나단의 말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눈으로 새로운 대상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와 주변 상황을 더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입니다. 말씀에서 꿀은 종종 선한 즐거움이나 선에서 오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활력을 얻고, 판단력이 맑아졌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과 결합된 기쁨이 이해를 밝게 한다는 원리와도 상응합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의 계몽(enlightenment)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 요나단의 사례는 발람의 사례와 나란히 놓입니다. 발람은 계시와 환상을 통해 눈이 열린 사람’으로 불렸고, 요나단은 꿀을 맛본 뒤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공통점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은 자주 이해를 의미하며,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이해가 밝아지고,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3:7 눈이 밝아져’도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설명의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곧 나는 이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며, 이것이 AC.212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AC.212, 심화 4, ‘시13:3’

AC.212.심화 4. ‘시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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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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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마다 차이가 상당히 큰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AC.212를 읽다가 보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눈이 열린 사람(man whose eyes are opened)이라고 인용하는데, 왜 한역(韓譯, 한글 번역)은 개역개정이든 개역한글이든 다 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문제는 히브리어 원문에 있습니다. 민24:3의 해당 표현은 해석상 논란이 오래된 구절입니다. 전통적으로는 ‘눈이 열린 사람’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영어 KJV는 ‘the man whose eyes are open’이라고 번역했고, 스베덴보리도 이 전통적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히브리어 연구에서는 이 단어를 ‘감긴’, ‘닫힌’, ‘덮인’ 쪽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은 ‘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잠을 잤다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환상이나 계시를 받는 특별한 상태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같은 장 4절을 보면 더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엎드려서 눈을 뜬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들 가운데는 ‘falling into a trance, but having his eyes open’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육체적으로는 황홀경이나 깊은 영적 상태에 들어가 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눈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AC.21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관심을 두는 것은 히브리어 문법 논쟁이 아닙니다. 그는 발람이 영적 환상과 계시를 받는 상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단순한 육체의 시각이 아니라 내적 인식과 이해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흥미롭게도, 설령 한역의 ‘눈을 감았던 자’를 따른다 해도 AC.212의 논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결국 환상 가운데서 영적 사실을 보게 된 사람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핵심은 ‘눈이 감겼느냐 열렸느냐’의 문자적 표현보다, 발람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AC.212의 문맥에서는 KJV 계열의 ‘눈이 열린 사람’이 스베덴보리의 논증에 더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만, 한역의 ‘눈을 감았던 자’도 결국은 환상과 계시를 받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멀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상응 해석의 측면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눈이 열린 사람’ 쪽이 AC.212의 ‘ = 이해, 인식’이라는 논지와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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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1, ‘민24:3’

AC.212.심화 1. ‘민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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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24:3)라는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7의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 시력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이해와 영적 인식의 열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발람은 여기서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 영어 표현으로는 ‘man whose eyes are opened’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뜨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발람은 이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눈이 밝아져’라는 말은 영적 차원의 어떤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며, 더 정확히는 주어진 계시와 환상을 이해하고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만일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의 눈을 가리킨다면, 발람의 이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와 인식을 가리킨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발람은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인식하는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을 ‘눈이 열린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AC.212에서 발람의 사례는 ‘ = 이해’라는 상응을 증명하는 하나의 중요한 예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적으로 새로운 시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이해가 작동하여 자신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순진무구한 상태에 있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발람의 경우에도 ‘눈 열림’이 반드시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발람은 계시를 받았지만, 끝내 참된 의미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눈이 열렸다’는 표현 자체의 의미이지, 발람의 영적 수준이 아닙니다. 곧 ‘눈 열림’은 어떤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내적 작용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AC.212에서 민24:3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눈이 열렸다’, ‘눈이 밝아졌다’라는 표현은 반복적으로 ‘이해가 열렸다’, ‘내적 인식이 주어졌다’,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발람의 ‘눈을 감았던 자’는 AC.211의 ‘interior dictate’, 곧 ‘내적 딕테이트’ 또는 ‘내적 자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례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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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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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유사한 표현들로부터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발람은 환상들을 본 결과,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합니다 (24:3).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또한 요나단은 꿀을 맛본 후, 그것이 악한 일임을 내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눈이 밝아졌다(eyes saw)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삼상14:29).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eyes)은 자주 이해(understanding)를 뜻하며,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은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eyes)은 이해를 뜻합니다. 에스겔에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have eyes to see, and see not) (12:2)라고 말합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사야서의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라는 말씀 역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눈멀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에게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and ears to hear (Deut. 29:4),

 

고 말하는데,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를, ‘(eyes)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는 주님께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실 것(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42:7)이라 하며,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29:18)라고 말합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해설

 

이 본문은 AC.211의 ‘interior dictate’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말씀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응의 법칙에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창3:7의 ‘눈이 밝아져’를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에서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 이해(understanding)’라는 상응입니다. 자연계에서 눈이 빛을 받아 사물을 보듯이, 영적 차원에서는 이해가 진리의 빛을 받아 사물을 분별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밝아지고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발람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육체의 눈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꿀을 먹은 뒤 실제로 눈이 번쩍 뜨인 것이 아니라, 정신이 맑아지고 상황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눈이 밝아졌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예들을 통해 창3:7의 ‘눈이 밝아져’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어떤 새로운 초능력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뱀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 같은 지혜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지혜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의 인식입니다.

 

특히 AC.212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 밝아져’와 ‘interior dictate’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 딕테이트란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가 빛을 받아 어떤 사실을 즉시 알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 요나단, 다윗, 모세, 이사야, 에스겔의 본문들을 모두 가져와 ‘’이 이해를 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결국 AC.212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3:7에서 ‘눈이 밝아져’는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아직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전의 순진무구함 가운데 있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눈 밝아짐은 영광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자각의 눈 밝아짐이며, 승리의 눈 밝아짐이 아니라 상실의 눈 밝아짐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말씀 전체에서 ‘’이라는 표현을 읽는 중요한 원리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눈은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눈먼 자의 눈을 밝히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치유를 넘어,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212는 단순한 어휘 해설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읽는 상응적 해석의 한 모범을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24:3

 

 

AC.212, 심화 1, ‘민24:3’

AC.212.심화 1. ‘민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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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 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AC.212.심화 2. 한역, ‘눈을 감았던 자’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영어로는 ‘눈이 열린’을 한역(韓譯)에서는 왜 ‘눈을 감은’으로 번역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민24:3은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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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상14:29

 

 

AC.212, 심화 3, ‘삼상14:29’

AC.212.심화 3. ‘삼상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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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3:3

 

 

AC.212, 심화 4, ‘시13:3’

AC.212.심화 4. ‘시13:3’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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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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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2:2

 

 

AC.212, 심화 6, ‘겔12:2’

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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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10

 

 

AC.212, 심화 7, ‘사6:10’

AC.212.심화 7. ‘사6:10’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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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 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AC.212.심화 8.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AC.212 심화 7) 주님은 왜 저렇게 하시죠? ‘이건 네가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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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마음’, ‘눈’, ‘귀’가 각각 의지(will), 이해(understanding), 순종 또는 수용(obedience and reception)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눈’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의 특징은 세 가지가 나란히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서로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각각 다른 내적 기능을 가리킵니다. ‘마음(heart)’은 사랑하고 원하는 의지를, ‘눈(eyes)’은 진리를 분별하는 이해를, ‘귀(ears)’는 들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백성들이 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광야의 기적들을 보았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했습니다. 육체의 눈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보는 눈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사건들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12의 핵심과 연결됩니다. 창3:7에서 ‘눈이 열렸다’는 것은 시력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신29:4에서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두 본문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원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의지와 이해’의 구조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특별히 ‘마음은 의지, 눈은 이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209에서 본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의지와 이해는 인간의 두 중심 기능이며, 말씀은 이를 ‘마음’과 ‘눈’이라는 상응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여기서 ‘여호와께서 주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도 문자적 표현입니다. 주님이 일부러 눈을 주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은 이런 상태를 종종 ‘주님께서 하지 않으셨다’는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결국 AC.212에서 신29:4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보는 눈’이란 육체의 시력이 아니라 이해를 의미하며, ‘깨닫는 마음’은 의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것도 이해가 열려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신29:4는 이러한 상응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를 AC.212의 중요한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7)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옥’과 ‘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창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지각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즉 이해를 밝히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며, 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를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책’은 말씀을 가리키며,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창3:7 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 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12 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 다윗의 ‘눈을 밝히소서’, 에스겔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의 ‘눈을 감기게 하라’, 모세의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 곧 말씀에서 ‘눈’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의 ‘눈이 열렸다’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하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12. ‘검색’이 없던 시절

 

스마트폰, PC가 없어 ‘검색’이라는 걸 할 수 없었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목사님 같은 의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경 전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해설하다가 갑자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신명기, 복음서를 넘나들며 몇 구절씩 정확하게 끌어오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검색도 없던 시대에 이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선 가장 현실적인 답부터 말하자면, 스베덴보리는 당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평생 독서와 연구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대학 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성경과 고전 문헌 연구에 쏟아부은 사람입니다. 당시 학자들은 지금처럼 검색창에 입력하는 대신, 중요한 구절들을 직접 필사하고, 주제별로 정리하고, 머릿속에 축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 자체가 현대인보다 훨씬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성직자나 학자들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암송했습니다. 실제로 17~18세기 유럽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의 상당 부분을 암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정도의 독서량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정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왜냐하면 AC를 읽다 보면 단순히 많이 외운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상응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여러 권에서 같은 상응을 가진 구절들을 정확하게 모아 오는 모습을 보면, 단순 암기 이상의 체계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평소 만들어 두었던 방대한 노트와 색인(index)을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학자들은 오늘날 데이터베이스 대신 ‘공통주제집(commonplace book)’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눈’, ‘귀’, ‘빛’, ‘물’, ‘산’, ‘양’ 같은 주제를 적어 두고 관련 구절들을 계속 정리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의 입장에 서면 또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천사들과의 교통 가운데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천사들에게서 성경 구절 번호를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먼저 성경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 그 위에서 내적 의미가 열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 AC를 읽어 보면 스베덴보리는 ‘천사가 내게 이 구절을 알려 주었다’기보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숙련된 음악가가 악보를 보며 곡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하듯, 그는 말씀 전체 안에서 상응의 연결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을 27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천사들이 모든 것을 즉석에서 알려 주었다면 그렇게 방대한 본문 인용과 문헌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AC를 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성경 본문을 대조하고, 단어를 분석하고, 상응을 추적합니다. 즉 영계 체험이 그의 학문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학문과 성경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원래부터 비범한 학자적 기억력과 평생의 성경 연구 때문이었고, 둘째, 방대한 노트와 색인 작업 때문이었으며, 셋째, 영계 체험을 통해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성을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해 구절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검색’을 하지만, 그는 ‘기억’하고 ‘연결’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마치 성경 전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색 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내면에 살아 있었던 상태 말입니다.

 

 

 

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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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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