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1-25)

 

 

AC 주석 설교 때는 시간에 관하여, 그러니까 설교가 길다, 너무 길다고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현존 앞에서 시간 보내느라 시간 가는 게 너무 안타깝기를 바라는 마음인데요, 마치 천국을 사모, 주님의 허락을 받아 잠시 천국을 방문하게 된 영들이 천국 그 영광에 넋을 잃다가 다시 돌아갈 때가 되자 너무나 안타까워하더라는 스베덴보리의 경험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혹시 본문 내용의 흐름상 도저히 중간에 끊어 이번 주 1부, 다음 주 2부 식으로 하는 게 적절치 못할 경우, 중간에 쉬는 시간을 두더라도 가급적 한 번에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도입되는, 한결같은교회 주일예배의 이런 변화를 좋게 수용하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에 정원 목사님 생전에 헤븐교회 주일예배가 서너 시간이었던 점을, 그리고 유대인들의 예배 또한 그러함을 기억하여 주세요.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2장 두 번째 단락 중 후반부인 21절로 25절, 글 번호로는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입니다.

 

먼저 두 번째 단락 전체(18-25) 및 절 별 개요입니다. 개요는 몇 번을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종의 큰 그림이요, 지도이기 때문인데, 속뜻 설교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이때 어떤 본성(an own)이 새롭게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이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새로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지난주 이어 계속인데, 기억나시라고 지난주에 했던 147번, 148번 글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C.147-150)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을 소유하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푹 빠져 주님과 천국을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깊이 잠든’ 상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정말 많은 사람의 상태가 영적으로는 이 ‘깊이 잠든’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고유 본성은 ‘뼈’(bones)와 상응, 실제로 나중에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 생생해진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시편입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0)

 

이는 에스겔에서 더욱 분명한데요, 거기 뼈들에 대해 ‘살을 입히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하시는 부분입니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2] 사람의 본성(The own of man)은 천국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뭔가 완전히 뼈처럼 보이는, 못 움직이며 매우 추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그 자체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본성이라도 주님에 의해 생기를 얻으면 그때는 살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그저 죽어있는 어떤 것에 불과합니다. 본인에게는 어떤, 실제로는 모든 것, 전부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모두 주님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며, 만일 이 생명이 사라지면 그는 쓰러져 죽은 상태가 되는데 마치 돌멩이처럼 되고 맙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천국과 지옥’ 9번 글입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이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뿐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어떤 것도 그보다 먼저 있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처음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처음 존재를 모든 생명의 궁극적 존재라 부른다. 같은 원리로 만물은 존속한다. 존속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생겨남이며, 중간 매체들을 통해 처음 존재와 끊임없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 즉시 사라지고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하나이며, 사람의 생명은 거기서 나오는 물줄기라고 천사들은 덧붙인다. 따라서 그 물줄기가 끊임없이 원천으로부터 흐름을 공급받지 않으면 즉시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다. (HH.9, 김은경 역)

 

사람은 생명의 기관(an organ of life)일 뿐입니다. 이런 게 기관이고, 이런 게 생명의 애정(the life’s affection)입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속하셨으며, 이것으로 그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본성은 생명이시며, 주님의 본성으로부터 사람의 본성,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인데, 이 본성이 살아나게 됩니다. 주님의 본성은 또 누가복음의 다음 주님 말씀하고도 상응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이는 또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150

사람이 자신의 본성 가운데 있거나 가정하기를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라고 하는 상태를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고대인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29:10), 그리고 ‘그들이 잠들어’(they sleep a sleep)(51:57)라고 말합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실제로는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것들을 주님은 마치 주님이 하시는 것처럼 기록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최종 책임자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조차도 주님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유의 근원 되시며,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천국과 지옥 등 모든 것이 주님의 컨트롤 하에,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떤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영들의 세계인 중간 영계에서 저는 그동안 매우 분명하게 보아왔는데요, 자신의 본성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그리고 자기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간다고 고집, 완강하게 주장하던 악한 영들은, 그러나 실제로 겪어보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고, 자신들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게 아니었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할 수 없이 억지로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년간 저에게는 사람의 본성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알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며, 또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저 스스로는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모든 생각의 실마리가 외부에서 제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종종 그것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흘러들어오는지를 저는 알 수 있었다는 것 등의 사실들에 대해 수년간 저는 분명히 지각하며(perceive) 지내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거야 하는 사람은 거짓됨 가운데 있으며, 그걸 믿기까지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악과 거짓에게 내맡기는 셈이 되는데요, 이 악과 거짓은 그가 만일 이 경우의 실상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그런 것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계에 대해서, 그리고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입류(入流, influx)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 천사들에게 능력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천사들이 영이고 너무 순수하며, 실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능력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물의 원인을 보다 내적으로 살피는 사람의 경우는 견해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란 그의 사고와 의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두 가지를 떠나서는 몸의 작은 부분도 움직이지 못하므로)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고와 의지가 그의 영적 사람이고, 이 영적 사람이 육체와 그 지체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영이 생각하는 것을 입과 혀가 말하고, 영이 뜻하는 것을 몸이 행하며, 이것이 자유자재로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 사고는 천사와 영들을 통해 주께서 다스리시므로 사람 몸의 모든 것도 그렇게 다스리신다. 몸이 하는 모든 것은 의지와 사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람은 천국에서의 입류가 아니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수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 천사들에게 내 발걸음, 행동, 내 혀와 말을 천사들 마음대로 움직이라는 허락이 내려졌었다. 그들은 내 의지와 생각 안에 흘러드는 입류로 나를 움직였다. 그때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천사들은 나에게 모든 사람이 이렇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하고,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비록 교리를 떠나 스스로 생각할 때는 달리 말하고 달리 믿더라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 천사를 보내어 인도해 주시고, 발걸음을 이끄시고 가르쳐 주시라고 하고, 또 생각할 바와 말할 바를 알려주시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은 천사들이 사람에게 어떤 힘을 갖는가를 알리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HH.228, 김은경 역)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C.151-155)

 

151

‘만드시고’(build)는 쓰러져있던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갈빗대’(rib)는 생명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의 본성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 사람의 본성을,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의 본성인 것, 즉 여자라는 그의 새로운 본성이 그에게 승인,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은 그들의 선조처럼 천적 인간 되는 걸 원치 않고 대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 쪽으로 기울어졌는데 결국은 그런 본성이 그들에게 허락, 곧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된 본성 역시 여전히 허락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여자’(woman), 나중에 ‘아내’(wife)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본성’(本性)으로 번역해 오고 있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152

겉 글자의 뜻대로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과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깊은 아르카나가 여기 들어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봐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사람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속아 넘어간 사람이 다름 아닌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건 자신의 본성, 그러니까 같은 말인데,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 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는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창3:6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저 창3 초반은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손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저 창3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53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이사야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4)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황폐함’(Wastes)은 악을, ‘무너짐’(desolations)은 거짓을 의미하며, ‘쌓는 것’(build)은 전자, ‘다시 일으키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선지서 이곳저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런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31:4)

 

 

154

사람의 본성이 아니면서,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도 아니면서 악하고 거짓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악 그 자체이며, 그 결과 사람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사실임을 저는 영들의 세계에서 계속 보고 있어서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제시되는데, 그때 그것들은 너무나 기형적이어서 어떻게 형용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때 자신의 본성에 속한 것들을 자기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 실제 모습을 보고는 공포에 휩싸일 정도로 충격을 받아 마치 악마로부터 도망치듯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참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한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들은 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주님께 속한 천적 특성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삶을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체어리티를 받거나 체어리티로 소생한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소년, 소녀처럼 보입니다. 또 벌거벗은 유아처럼 이노센스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가슴과 머리 위 왕관을 두른 꽃 화환으로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데요, 다이아몬드 같은 오로라 가운데서 즐겁게 지내며, 가장 내적인 데서 오는 행복에 관한 퍼셉션을 갖고 살아가지요.

 

그러니까 참으로 속 사람의 모습으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 사람은 아직 거시기한데 주님의 보혈로 한순간에 죄 씻음 받고 천국 가는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이 말에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글자로 된 겉뜻만 가지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깊이 감추어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뜻에 있어 주님 자신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며, 이 사실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 그 가장 핵심은 바로 천국의 결혼(the heavenly marriage)입니다. 천국 결혼은 그 본성에 있어 주님에 의해 소생될 때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 일컬음을 받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소생된 인간 본성은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관한 퍼셉션을 가지며, 그 결과 표현 불가한 행복과 함께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요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소생된 본성은 어떻게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천사들한테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곧 자신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걸 지각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천사들한테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비록 그들일지라도 이런 주제를 벗어나 한눈파는 순간 그들 역시 순전히 자신들 힘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에게는 어떤 것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그 변화를 지각하는, 그런 본성에 관한 어펙션(affection)이 일반적으로 있는데요, 그 결과 그들은 누구나 자신들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퍼셉션 가운데 있으며, 그때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의 즐거움이 그들 가운데에는 존재합니다. 아래 예레미야에서 말하는 바 역시 바로 이런 본성을 의미합니다.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31:22)

 

이 구절에서도 ‘여자’(woman)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생된 본성을 의미하며, 이것을 ‘둘러싸리라’(to compass)라고 표현한 것은 이 본성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쉬는 시간)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C.156-159)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본성을, 여기서 ‘뼈’(bone)는 이 본성이 생기가 거의 없음을, ‘살’(flesh)은 생기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는 속 사람을 의미,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결합하기 때문에 여기서 ‘여자’(woman)라고 했던 본성을 거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때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개역 개정에는 이 ‘이제’에 대한 번역이 누락 되어 있습니다. 속뜻 전개상 중요한데 말입니다. 주님 말씀은 함부로 더하거나 빼면 안 되며, 그 기준은 속뜻의 흐름상, 곧 속뜻으로 보았을 때입니다.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the internal)이 있는 겉 사람의 본성을 의미하는 한, 그래서 고대에는 자신들의 본성(their own [proprii]), 뿌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한 가족이든 가계이든 기타 어떤 종류의 관계이든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라반도 야곱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29:14)

 

그리고 아비멜렉 또한 자기 어머니의 혈육들과 외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이스라엘 지파들도 다윗에게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158

사람(man, 아담)은 속 사람, 즉 같은 말이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man [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지요.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정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되 실제로는 너무도 구별되어 속 사람,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은 각각 무엇이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에 의해 어떻게 통치되는지를 천적 인간은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들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자신들의 본성, 곧 자신들의 겉 사람에게 속한 본성을 정말 징그럽게도 원한 결과 너무도 변질, 더 이상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라는 것이나, 겉 사람이라는 것이나 같은 거 아냐?’ 할 지경이 되었는데요, 이런 일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60-162)

 

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인데요, 겉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이 겉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 곧 겉과 속이 거기 같이 있는 겁니다. 전에는 속 사람과 속에서 나온 겉이 영이었지만(were spirit), 지금은 이 둘이 육이 되었기(have become flesh)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적 영적 생명은 하나처럼 보이는 본성(the own)에 인접해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거의 모든 결혼식 주례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얼핏 참 좋아 보이는 그럴듯한 본문이지만 그러나 그 속뜻을 보면 참 슬픈 본문이기도 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결합한 게 아니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 결국 겉이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는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면서도 겉 사람 안, 즉 그들의 본성 가운데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로 그런 그들 안으로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면서 말입니다.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하나로 나타나는지 하는 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인플럭스(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入流)라는 걸 모르면 알 수 없는데, 이걸 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나 생각해 보면, 어떤 행위에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즉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한,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 즉 신앙의 열매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 사랑, 신앙은 속, 그것이 체어리티의 행위로 표현되는 건 겉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요, 천사들은 행위 속 동기를 본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선행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 선행 속 마음의 동기를 본다고 합니다. 우리는 외적 존재여서 어쩔 수 없이 겉으로밖에는 볼 수 없지만,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그 속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음의 주님 말씀도 이 글의 연장선, 곧 인플럭스의 흐름으로 이해가 됩니다.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7:16-20)

 

우리는 끝까지 안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 안에 무슨 선한 작업, 곧 ‘영적 천적인 것들이 스며들듯 심어지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가 하는 일입니다.

 

162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은 그 기원이 천적이거나 천적 인간의 삶, 생활의 질서로 말미암습니다.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만이 오직 참으로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든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을 천적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및 올바름의 법이 천적 기원, 즉 천적 인간의 삶과 생활의 질서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결혼의 법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지상의 모든 결혼이 그 기원을 두거나 따라야 하는 천적 결혼인데, 이는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즉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교회,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런 결혼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결혼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그 부부는 천적 결혼(the celestial marriage)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한 전형(典型)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계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게 새겨져 있었는데요, 그래서 그때는 한 남자는 한 명의 아내만 가졌고, 그렇게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 되기를 중단, 겉 사람이 되면서 그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결혼에 있어 천적 결혼을 표상했기 때문에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천국의 행복이었지만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즉 쇠퇴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가 주는 행복 대신 숫자, 곧 겉 사람의 쾌락인 숫자가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는데요,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이것이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허락하게 하신 이유라 하셨습니다.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C.163-167)

 

163

그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naked and not ashamed)이라는 것은 그들이 순진무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순진무구함(innocence, 이노센스)을 그들의 본성 안으로 오랫동안 스며들게 하셨기(had instilled) 때문인데요, 그들의 본성이 이런 순진무구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걸 방지하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입니다.

 

 

164

인간의 본성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그저 악할 뿐이며, 만일 눈으로 볼 수 있게 드러날 경우 그야말로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면 그때는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요, 앞서 154번 글에서 보신 것과 같습니다.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그 본성, 즉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안 보이게 가릴 뿐 아니라 마치 없어진 것 같게도 하는데요, 마치 유아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아들한테서는 악과 거짓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즐거운 무슨 놀이처럼 보이기까지도 하는데요, 그들이 자기들의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한, 그리고 자기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드러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처럼 왜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소유하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지 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이 이노센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증명되는데요, 온전함(integrity)과 이노센스가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수치를 느꼈으며, 그래서 자신들을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의 세계에 있는 표상으로도 마찬가지인데요, 영들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하고 죄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노센스를 증언하기 위해 스스로 벌거벗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한테서 이런 게 두드러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이노센스한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정도의 이노센스까지는 아닌 사람들은 선지자들이 이따금 보았던 천사들처럼 다이아몬드 실크라 할 수 있는 빛나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6

이런 것이 본 장 말씀에 들어있는 일부인데요,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었는데 사실 오늘날 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여기서 다룬 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조차 어떤 사람들한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있는지를 안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과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실이 겉 글자 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좀 간단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에서는 말씀의 겉 글자들은 정확히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생생하게 표현, 표상됩니다. 영들의 세계는 표상의 세계(a world of representatives)이기 때문인데요, 거기서 생생하게 표상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번에는 이층천 천사적 영들(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에 의해 그 표상들에 들어있는 아주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지각되며, 그리고 그렇게 이층천 천사적 영들에 의해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삼층천 천사들(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에 의해 도저히 표현 불가한 천사적 아이디어로 풍성하게, 그리고 꽉 차게 지각됩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the Lord’s good pleasure)에 따라 무한히 다양하게 지각되기 때문인데 이런 게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각 천국의 역량마다 감당할 수 있는 지혜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상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는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지만, 지상에서 육체로 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지혜는 가장 낮은 등급인 요만큼인 반면, 사후 일, 이, 삼 층 천 천국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확장되고 더욱 크게 초월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는 일, 이, 삼층천 천사들을 모두 천사, 그러니까 자연적 천사, 영적 천사, 천적 천사라 하는 반면, 또 어디서는, 그러니까 이 글에서처럼, 선한 영, 천사적 영, 천사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건 삼층천 천사, 천적 천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사이며, 삼층천이야말로 참된 의미의 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여섯 번째 시간인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의 속뜻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2장은 이렇게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창세기 3장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원고 맨 앞으로)

 

설교

2025-10-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12(D1)-주일예배(13, 창2,21-25,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pdf
0.60MB

 

 

 

 

12.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창2:18-21), 2025/10/5(D1, 성찬)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창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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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mercy)와 은혜(grace) (2025/10/11)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6:8)

 

말씀에 ‘긍휼’로도 나오는 ‘자비(mercy)와 우리 대부분이 흔히 쓰는 ‘은혜(grace)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평소 그냥 무심코 쓰지만 말입니다.

 

말씀에서 ‘자비’는 마음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heart) 사람들에게, ‘은혜’는 생각이 겸손한(in humiliation of thought)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사람들(天的, the celestial)은 주님께 ‘자비’를 구하지만(implore), 영적인 사람들(靈的, the spiritual)은 ‘은혜’를 구합니다(beseech).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곧 아담교회가 저물고, 홍수 후 새롭게 일어나는 고대교회, 곧 노아교회는 영적이었는데, 그래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의지(will)가 주님을 향해 열렸던 태고교회가 그 후손으로 갈수록 변질, 탐욕(cupidity)으로 변하면서 닫히는 바람에, 주님이 의지 대신 새로운 창, 곧 이해(understanding)에 해당하는 지적 파트(intellectual part)라는 우회로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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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남았는데 그걸... (2025/10/10)

 

한 걸음 남았는데 그걸...

 

오래전부터 내게 들리는, 나의 내면의 귀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다음 단계, 곧 몸에서 들려 영계로의 여행, 그러니까 주님의 초청으로 천국 방문을 할 수 있는 상태변화를 코앞에 두고 머뭇거린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보다 앞서 주님이 보내신 천사를 직접 만나는 경험의 시작을 말이지요.

 

저는 압니다. 이 한 걸음이 뭘 의미하는지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세상을 향한 두리번거림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처럼 폰을 잡고 유튜브를 켠다든지, 누우면 무의식적으로 켜는 네이버 웹툰이라든지 말이지요. 특히 이 웹툰은 이 나이에 밝히기 참 부끄러운...

 

어쨌든 바로 이런 빈틈, 살짝 열린 틈 때문에 영계 체험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지각, 즉 퍼셉션하고 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내면이 열린 사람들에게 체험되는, 그러니까 허락하시는 하늘로부터 오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 능력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웹툰부터 끊고 있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들이 몹시 궁금한 몇 개가 있지만... 그때마다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외면, 곧 세상을 향해서는 눈을 감고, 오직 천국을 향해서만 마음의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 순서는 유튜브입니다. 이 역시 서서히 줄이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현 시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의로움과 올바름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만 말입니다.

 

남은 한 걸음을 위해, 그리고 그때 실현될 새로운 차원의 영적 진보를 위해 참고 또 참고 있습니다.

 

카톡 활동을 내려놓은 지 두 달 반... 참을 만한 걸 보면 이 또한 잠잠해질 줄 믿습니다.

 

세상을 향한 창이 열린 만큼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고, 그 반대 역시 그렇답니다. 세상과 천국 둘 다 동시에 열 수는 없다고 하네요. 사람의 영혼은 말입니다.

 

저는 먼저 주님과 천국을 향해 열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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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여자의 대화 (3:1) (2025/10/9)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3:1)

 

여기 ‘뱀’(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 된 것들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어야만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AC.194)

 

2:1-17은 태고교회의 시조, 첫 대, 그 출발에 관한, 창2:18-25은 그 후손들, 특히 두 번째 후손에 관한, 창3:1-13은 세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태고교회는 100%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들이었지만 그 후손들은 조금씩 변질, 즉 주님한테서 고개를 돌려 자기를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지막은 노아의 홍수라는 종말이었습니다.

 

1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그 상태의 변화를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 서술하는 내용입니다.

 

감각 파트란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파트가 있는데 그중 감각과 관련된 파트를 말합니다.

 

풀, 채소, 나무는 못 움직이는 것을, 새, 바다 생물, 들짐승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 안에 있으면 ‘움직인다(animate) 하고, 자기를 향한 사랑과 애정 안에 있으면 ‘못 움직인다(inanimate) 합니다.

 

사람, 곧 태고교회가 결국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으로 끝날 줄을 아셨음에도 주님은 그 최악은 피하게 하시려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자아를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허락하시는데 이것을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1, 22)

 

라고 무척 아름답게 묘사하셨습니다.

 

깊이 잠드는 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느라 주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걸 말합니다.

 

뼈와 같은 전혀 생기 없는 상태의 인간 본성을 주님은 살, 곧 주님의 생기를 입힌 새 자아, 새로운 본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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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쓰임새의 나라 (2025/10/8)

 

명절 연휴 잘들 보내고 계시지요? 저는 요즘 창세기에 집중, 명절도, 연휴도 잘 안 보이네요... ㅎㅎ

 

오늘 아침, 지난 설교 작업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말씀을 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의 의미가 ‘그가 그 모든 걸 누리게는 하셨으나 자신의 걸로 소유하는 건 금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라는 풀이와 함께 아래 이어지는 설명으로 마음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무엇을 자기 걸로 소유하는 덴 별 관심이 없고 대신 그 쓰임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즉 주님께 무엇을 받았을 때, 그들은 ‘이걸 왜 주셨을까? 왜 허락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이 주신 걸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그걸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쓰임새의 삶에만 집중합니다.

 

천국의 부자들은 남들보다 더 화려한 생활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금, 은으로 된 듯 광채 나는 궁전에 산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조금도 거기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그 쓰임새만 생각한다. 그들에게 쓰임새는 빛을 받은 듯 분명하게 보이지만 금, 은은 거기 비하면 그늘에 있는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세상에 살 때 쓰임새를 사랑했고, 금, 은은 단지 수단과 도구로만 사랑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광채를 내는 것은 쓰임새다. 쓰임새에 속한 선은 금처럼, 쓰임새에 속한 진리는 은처럼 광채가 난다. (HH.361)

 

남은 삶, 금, 은은 물론 심지어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조차도 거기 마음 두는 대신 오직 주님이 부여하신 쓰임새에만 전념하고자 합니다.

 

오, 주님, 천사의 마음과 태도를 오늘 아침 제게도 부어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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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2:18-21, AC.138-148)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18-25)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다섯 번째 시간으로 2장 후반부 중 첫 번째인 18절로 21절,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AC.138-148)입니다.

 

먼저 2장 후반부(18-25) 전체 및 절 별 개요입니다.

 

131

태고교회의 후손들, 이들은 자신들의 본성(本性, proprium, own)으로 기울어졌는데, 여기서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이 창2 후반은 태고교회 두 번째 후손에 관한 내용입니다.



132

인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신 자신과 세상, 곧 자기 본성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게 허락된 본성을 여기서 다룹니다. (18)

 

133

그래서 그에게 먼저 선에 관한 애정들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알게 하시는데, 이것들은 그가 앞서 주님께 받은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본성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19, 20)

 

※ ‘’을 생각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긍정적이 되며, ‘진리’, ‘’, ‘올바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반듯한 생각들은 앞서 주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이런 귀한 선물들을 받아놓고도 우리는 그 가치를 모르고 아주 보잘것없는 내 안의 것들, 나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주님으로부터는 독립하려고 애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134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본성 상태로 들어가며, 그리고 어떤 본성(an own)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그걸 여자로 빚어진 갈빗대라 한 것입니다. (21-23)

 

 

135

천적 영적 생명은 인간의 본성과 아주 가까이, 거의 하나로 보일 정도로 붙어있습니다. (24)

 

 

136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노센스가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드는데요, 이 본성이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뭐든지 못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25)

 

 

다음은 단락 전체의 배경 설명입니다.

 

 

137

창세기의 첫 세 장은 대체로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 그러니까 사라질 때까지 ‘사람’(man, homo)으로 불렸습니다. 창2 전반부가 이 태고교회가 가장 융성했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던 때를 다루고 있다면, 이제 여기 후반부는 자신들의 본성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이 개요 및 배경이고, 다음은 후반부 본문 절 별 속뜻입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38

‘혼자’(alone)는 그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음을, 대신 자아와 세상으로 인도받기를 원했음을,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자로 만드신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 하는 것입니다.

 

 

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들처럼 주님의 가이드 아래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홀로 지내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로 인한 들끓음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다른 민족들을 다 몰아낸 후 그 땅에 홀로 거주하는 걸로 표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종종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산다’(alone)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곧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모세의 예언에서도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 분명하게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여기 ‘여러 민족’(nations)은 악을 말합니다. 이 태고교회의 후손은 홀로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천적 인간이 되려 하거나 그들처럼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려 하지 않고 대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중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원했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은 이미 악 가운데 있으며 그가 원하는 삶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 우리는 보통 자녀가 무슨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그걸 막거나 금지, 못 하게 꾸짖고 책망하는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자원함이 없는 순종, 사랑으로 하지 않는 복종과, 강제로, 억지로 돌이키게 함은 주님 편에서는 하나 마나이기 때문이며, 그런 건 아예 주님의 속성에 배치되기 때문이지요. 아래 이사야 말씀이 생각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42:3)

 

이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 가는 등불을 끄는’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마치 저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8-15) //

 

 

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본성(man’s ow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 본성의 본질(nature)로부터,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 교회 사람을 주님이 좋게 보셔서 그에게 어떤 본성이 허락되었는데, 그게 마치 그의 본성처럼 보이는 그런 것이어서 이르시기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 하신 것입니다.

 

 

141

인간 본성(man’s own)의 본질(nature)을 육적(corporeal) 세속적 인간, 그리고 영적 인간, 천적 인간과 함께 설명하려면 그전에 먼저 인간 본성에 관한 수많은 것들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육적 세속적 인간에게는 그의 본성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 말고는 아는 게 없고, 앞서도 말씀드렸듯 만일 이걸 잃으면 자기는 망할 꺼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의 경우 역시 그의 본성의 모습은 비슷한데요, 그가 비록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고, 지혜와 이해, 그리고 그 결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을지라도 그에게 있어 이런 지식은 아직은 마음속 신념이라기보다는 입술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은 만물의 생명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힘 주시는 분임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지각(perceives),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력으로 천사들처럼 그냥 알기 때문이지요. 그는 결코 자신의 본성을 원치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은 그에게 어떤 본성을 주시는데, 그것은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입니다. 천사들이 이런 본성 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가장 내적인 평화와 고요한 내적 기쁨(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본성에는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주님은 그들의 본성을 다스리시거나 그들의 본성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이 본성은 가장 천적인 것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본성은 끔찍, 곧 지옥 그 자체입니다. 이 본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다루겠습니다.

 

※ 천적 인간은 천사들처럼 그저 주님의 인도하심만으로 충분, 굳이 무슨 다른 본성을 또 필요로 하거나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 곧 ‘선함과 참됨에 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하는 본성’을 허락하셨습니다.

 

 

19, 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142

‘짐승, 가축’(beasts)은 천적 애정을, ‘공중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을 의미하는데요, 다시 말씀드리면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을, ‘새’(fowls)는 이해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로 하여금 그것들의 퀄리티를 알게 하심이며, 아담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것을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에게 주신 선에 속한 애정의 퀄리티와, 그리고 진리에 관한 지식의 퀄리티를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유 본성으로 기울어졌는데, 이를 전과 같이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처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이 ‘퀄러티를 안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 본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이름을 주다’, ‘아무개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다’의 의미가 모두 이렇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상대방의 아우라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지각하는 건데요, 이 ‘아담’으로 일컬어지는 천적 인간, 곧 초창기 태고교회 사람들이 바로 이런 능력, 곧 이런 퍼셉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43

고대에는 ‘가축’(beasts)과 ‘짐승’(animals)이 사람한테 있는 애정과 그와 같은 걸 의미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천적 사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계에서는 동물을 가지고 그런 거, 곧 애정 같은 걸 표현하며, 실제로도 동물의 생긴 모양대로 해당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말했고, 그때 그들은 그밖에 무슨 다른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도 짐승들이 언급되는 곳마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무슨 다른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 전체가 이런 걸로 가득하며, 그렇기 때문에 각 짐승이 특별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에 담긴 속뜻이 무엇인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도 보았듯 짐승들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즉 해로운 짐승이 있는가 하면 선한, 즉 무해(無害)한 짐승이 있지요. 선한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 예를 들면 양(sheep), 어린 양(lambs), 비둘기 같은 것들이지요. 여기서 다루는 인간이 천적 인간, 혹은 천적 영적 인간이기 때문에 이들 선한 짐승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짐승’(beasts)이 의미하는 바가 일반적으로 애정이라는 것을 위, 곧 말씀 몇몇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AC.45, 46) 여기서 굳이 다시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144

‘이름으로 부르기’(call by name)는 그 퀄리티를 안다는 의미인데요, 이는 고대인들은 ‘이름’(name)을 가지고 어떤 것의 에센스를 이해했기 때문이며, 무엇을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그 퀄리티에 대해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녀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 어떤 의미를 담아 주었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은 그 안에 무언가 고유한, 그 이름으로부터나 그 이름에 의해서나 자녀의 어떤 기원과 고유 특성을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원과 특성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하고 있는, 지금 이 아르카나 주석 작업 중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는 부분에서 아시게 됩니다. 이름들에는 그렇게 이름하는 것의 근원과 퀄리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를 그밖에 무슨 다른 걸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언어적 관습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걸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은 말씀에 나오는 이름들을 그런 의미들을 부여하며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라실 수도 있겠습니다.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2-35)

 

 

145

말씀에서도 ‘이름’(name)은 어떤 것의 에센스(the essence of a thing)를,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는 그 퀄리티에 관해 아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45:3, 4)

 

이 구절에서 ‘네 이름을 불러’(call by name)와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surname)는 그 퀄리티를 예견한다(to foreknow the quality)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앞뒤 구절에 나오는 것처럼, 또 다른 캐릭터가 될 것을 의미하지요.

 

계속해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그가 그들의 퀄리티를 알고 계셨음을 가리키시면서

 

계속해서 같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입니다.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이들 구절에서 ‘이름’(names)은 결코 말 그대로 이름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퀄리티를 의미하는데요, 심지어 천국에서는 그 누구도 이름이 아닌, 그의 퀄리티로만 알려지지요.

 

 

146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그 상징하고 있는 속뜻을 보실 수 있는데, 18절에 보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하시고는 지금은 ‘짐승’(beasts)과 ‘새’(birds)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전에 다룬 적이 있던 것이지요. 그러고는 즉시 또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흐름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곧 그가 비록 자신의 퀄리티, 곧 선에 관한 애정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 자신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인지를, 또는 어떤 상태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기울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유 본성을 간절히 원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 대한 멸시를 시작하기 때문인데 주님에게 속한 것이 아무리 그에게 분명하게 표현되고 보여도 말입니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147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을 의미하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지만 실제로는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그런 본성입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그 안에 생기가 있는 본성을, ‘깊이 잠들게’(deep sleep)는 그의 현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이 이 상태가 되면 그는 자신의 본성이라 하는 걸 소유하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인 줄 알지요. 이 상태는 잠든 상태와 유사한데, 이 상태에 있는 동안은 사람은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이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정신을 차리며 잠에서 깬 상태가 됩니다.



148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단락 중 전반부인 18절로 21절 전반, 글 번호로는 AC.138-148을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는 후반부인 21절 후반부터 끝 절인 25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 및 전체 개요, 그리고 배경을 한 번 더 읽고 마치면 좋겠지만 성찬도 있고 원고가 길어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설교
2025-10-05(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10-05(D1)-주일예배(2618, 창2,18-21, AC.138-148), ‘돕는 배필, 이름, 갈빗대’.pdf
0.44MB
성찬.pdf
0.14MB

 

 

 

13. AC.147-167,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창2:21-25), 2025/10/12(D1)

‘갈빗대, 한 몸, 벌거벗음’(창2:21-25, AC.147-167)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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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5-17, ‘에덴동산, 선악과’ (AC.122-130) (2025/9/28, 주일)

‘에덴동산, 선악과’ (창2:15-17, AC.122-130)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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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명절 연휴는 창세기, 출애굽기와 함께 (2025/10/1)

 

말씀을 사랑하여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거나(loves the Word and lives in charity), 기록된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simplicity of heart)으로 믿으며, 신앙에 관한 속뜻 진리(the truth of faith which is in the internal sense)에 반(反)하는 원칙들을 세운 적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가 주님의 말씀을 읽는 동안 그에게 와있는 천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천사들의 눈앞에서는 말씀의 모든 것(every particular)이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지각됩니다. 이 생명은 말씀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말씀은 이 생명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내려왔을 때 태어난(from which the Word had birth)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사들 앞에 펼쳐지는 이 말씀 속 생명의 향연은 너무나 아름답고(beauty), 너무나 유쾌한 것(pleasantness)인데, 아울러 그때 그들의 모든 상태에 맞춰 형용할 수 없는 다채로움을 가진 표상들(表象, representatives)과 함께 펼쳐집니다.

 

주님의 기록된 말씀은 비록 글자 상으로는, 즉 지상 인간의 언어로는 대충(crude) 살짝 조잡, 세련되지 못해 보여도 그 안에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 앞에(before good spirits, and before angels) 확 펼쳐지는 영적 천적인 것들(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로 충만한데, 그것은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말씀’은 성경 66권 중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 곧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가 담긴 말씀들을 말하는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으로부터만 말미암습니다. 그 가운데 구약은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29), 신약은 , , , , (5) (AC.10325)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말씀을 사랑하여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거나 기록된 말씀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믿으며, 신앙에 관한 속뜻 진리에 반하는 원칙들을 세우는 일 없이’ 읽는 사람한테는 그가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가 위 목록에 없는 성경들을 읽을 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없기 때문인데 그때는 그에게 와 있는 천사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내적 생명만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는 비록 지상 언어로 된 말씀을 읽지만 우리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를 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말씀을 겉뜻으로 읽을지라도 우리 안의 천사들은 속뜻으로 읽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 힘써 창세기를, 힘써 출애굽기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속 사람 안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예를 들면, 속 사람의 강건함이 겉 사람의 육체, 몸의 강건함으로, 속 사람의 아름다움이 겉 사람의 얼굴빛과 피부로, 속 사람의 지혜와 지성이 겉 사람의 총명과 아이디어로 등등 속 사람의 충만함이 겉 사람의 모든 눈부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말씀은 하나에서 열까지 천국과의 상응으로만 기록되었기 때문이며, 사람의 몸은 천국과 일대일 상응하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말씀 생활을 통해 천국의 모든 부요와 능력이 내 삶,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천국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긴 명절 연휴, 가급적 저마다의 무슨 골방을 찾아 바이블 리딩의 시간 가지시기를 적극 권합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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