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0.심화

 

21.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5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시52:5를 인용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살아 있는 땅’에 속하는 것과 그곳에서 뿌리 뽑히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반대 측면에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표현은 살아 있는 땅’입니다. 앞서 시27:13에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악한 자가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 뽑힌다고 합니다. 두 구절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서 같은 영적 진리를 보여 줍니다.

 

52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심판받는 사람은 악을 자랑하고, 거짓을 사랑하며, 혀로 남을 해치는 자입니다. 그는 세상에서는 강하고 안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하십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이 끝나거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와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살아 있는 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가 유입되어 참된 생명이 존재하는 영역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은 일반적으로 교회 또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는 내적 상태를 뜻하며, ‘살아 있는’이라는 말은 그 생명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땅’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이 속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와 함께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생명이 공급되는 가장 깊은 기반을 뜻합니다. 뿌리가 땅에 박혀 있는 동안 나무는 수분과 양분을 받아 살아 있지만, 뿌리가 뽑히면 더 이상 생명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영적으로도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 안에 뿌리를 내릴 때 생명을 받지만, 악과 거짓을 고집하여 그 연결을 스스로 끊으면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 뽑힌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임의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계속 거부, 스스로 생명 질서에서 벗어납니다. 말씀의 겉뜻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고 뿌리 뽑으시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내적 의미로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선택, 주님의 생명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결과를 말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을 주시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 안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시27:13과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27:13에서는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지만, 52:5에서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 뽑힙니다. 전자는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상태이지만, 후자는 그 생명에서 분리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땅’은 단순히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여 영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시52:5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 참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살아 있는 땅’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이며, 그곳에서 뿌리 뽑힌다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 인해 그 생명의 연결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산 자들의 땅’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다른 구절들을 보완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에게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AC.290의 중심 가르침을 반대 측면에서 확증합니다.

 

 

 

AC.290, 심화 20, ‘시27:13’

AC.290.심화 20. ‘시27: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시27:13)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산 자들의 땅’이 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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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7: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27:13)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산 자들의 땅’이 단순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선하심을 경험하는 영역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소망을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에 주목합니다.

 

만일 산 자들의 땅’을 단순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세계로만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그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 것이다 정도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AC.290의 문맥에서는 훨씬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산 자들의 땅’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는 영역이며,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역입니다.

 

이 구절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주님 자신에게서만 나옵니다. 따라서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 안에서 비로소 주님의 선과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AC.290이 말하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AC.290에서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과도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36:9에서는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음’을 말하였고, 17:13에서는 주님을 생수의 근원’이라 하였으며, 53:8과 겔26:20, 32에서는 산 자들의 땅’과 생명에서 끊어진 상태를 대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시27:13에서는 산 자들의 땅’이 주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는 장소이자 상태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이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역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은 주님의 선하심이 나타나고 경험되는 곳이며, 사람은 자신의 생명으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때 비로소 그 산 자들의 땅’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참된 생명과 모든 선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AC.290의 중심 사상을 아름답게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AC.290, 심화 21, ‘시52:5’

AC.290.심화 21. ‘시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시52:5)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시52:5를 인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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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19, ‘겔32:32’

AC.290.심화 19. ‘겔32:32’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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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32:32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앞에서 인용한 겔32:23-27의 결론에 해당하며,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과 죽음의 상태’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대조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표현은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표현이 단순히 지상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는 영역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은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의 생명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이 구절에서 바로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였으나 결국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라는 심판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칼에 죽임을 당한 자’는 단순히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은 진리를 파괴하거나 거짓을 뜻하는 상징이므로, ‘칼에 죽임을 당한 자’는 거짓으로 인해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한 자 역시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할례를 proprium의 악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자신의 proprium 안에 머물러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바로가 그들 가운데 눕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단절된 동일한 영적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에서 반복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 바로는 한때 생명의 영역 안에서 강대한 권세를 행사하며 사람들을 두렵게 하였지만, 그 결과는 생명의 영역에 남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잃은 자들과 함께하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의 권세와 참된 생명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표현을 또 하나의 성경적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바로와 애굽의 최후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는 위엄과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영적 생명을 잃은 자들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참된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동안에만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 속하며, 그 생명을 거부하면 결국 영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에 대한 이 마지막 선언은 이러한 진리를 매우 엄숙하게 마무리하는 증거로 인용된 것입니다.

 

 

 

AC.290, 심화 20, ‘시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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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18, ‘겔32:23-27’

AC.290.심화 15. ‘겔32:23-27’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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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32:23-27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 본문이 반복해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the land of the living)을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그와 정반대되는 상태인 구덩이’, ‘지하’, ‘죽임을 당한 자들’, ‘할례받지 못한 자들’을 대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290의 핵심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생명의 영역과 생명에서 끊어진 영역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32는 애굽과 여러 강대국의 몰락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모두 구덩이로 내려간 자들 가운데 있게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앗수르, 엘람, 메섹, 두발과 같은 민족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모두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구덩이로 내려간 자’, ‘지하로 내려간 자’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단순한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응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는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다소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미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 있었다면 왜 다시 그것이 강조될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은 단순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려움을 끼쳤다’는 것은, 생명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진리와 선을 파괴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그들의 최후는 모두 구덩이’, ‘지하’,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로 묘사됩니다. 이는 장소의 이동보다 상태의 변화를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한 결과, 생명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영적 황폐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과 구덩이’는 서로 대조되는 두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유입을 받는 상태와 그 유입을 거절하는 상태를 각각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반복되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단순한 유대인의 의식이 아니라, proprium의 악을 제거하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여전히 자신의 proprium 안에 머물러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결국 모두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 가운데 놓이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결과를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AC.290이 인용한 여러 말씀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36:9에서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이라 하였고, 17:13에서는 생수의 근원’이라 하였으며, 38:11과 사53:8에서는 산 자의 땅’을 생명의 영역으로 묘사하였습니다. 26:20에서는 주님께서 살아 있는 자의 땅’에 영광을 두신다고 하였고, 여기 겔32:23-27에서는 그 생명의 영역을 어지럽힌 자들이 결국 모두 구덩이로 내려간다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각각의 인용은 서로 다른 측면에서 동일한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겔32:23-27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자의 땅’이라는 표현을 다시 한번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생명의 영역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죽음의 영역을 강렬하게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은 살아 있는 자의 땅’에 속하지만, 그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는 강대한 자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구덩이’와 지하’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흘러나온다는 AC.290의 중심 교리를 매우 극적인 대조를 통해 확증해 주는 중요한 성경적 증거가 됩니다.

 

 

 

AC.290, 심화 19, ‘겔32:32’

AC.290.심화 19. ‘겔32:32’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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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17, ‘겔26:20 끝부분의 한, 영 차이’

AC.290.심화 17. ‘겔26:20 끝부분의 한, 영 차이’ 겔26:20 끝부분에 대한 한글과 영어가 아래와 같이 다른 이유 한글 :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영어 :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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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6:20 끝부분의 한, 영 차이

 

26:20 끝부분에 대한 한글과 영어가 아래와 같이 다른 이유

 

한글 :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영어 :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얼핏 보면 두 번역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개역개정이 히브리어 원문을 다르게 번역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장의 연결 방식을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마지막은 וְנָתַתִּי צְבִי בְּאֶרֶץ חַיִּים(ve-natatti tsevi be'erets chayyim)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산 자의 땅에 영광(아름다움)을 둘 것이다’입니다. 여기에는 얻지 못하리라’라는 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앞부분의 부정문인 네가 다시는 거주하지 못하게 하리라’의 영향을 마지막 절까지 이어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새로운 문장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와 KJV ‘...thou shalt not be inhabited. And I will set glory in the land of the living.’처럼 새 문장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의미는 두로는 심판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산 자의 땅에 자신의 영광을 세우신다’가 됩니다.

 

반면 개역개정은 앞의 부정을 끝까지 이어 ‘...네가 다시는 거주하지 못하게 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게 하리라’로 번역하였습니다.  너는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도록 문장을 연결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문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문장 구조를 어떻게 끊어 읽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AC.290을 보면 스베덴보리의 이해가 어느 쪽인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 구절을 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표현의 증거로 사용하면서 마지막을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으로 인용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히브리어와 라틴어 전통에서는 이 부분을 앞 문장의 계속이 아니라 독립된 새 문장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번 경우에는 개역개정보다 KJV와 스베덴보리의 번역이 AC.290의 논리에도, 히브리어 원문의 흐름에도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앞부분은 두로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마지막은 그 심판과 대조적으로 주님께서 산 자의 땅’에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세우신다는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대조는 에스겔서의 문맥에도 잘 어울릴 뿐 아니라, AC.290이 강조하는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AC.290, 심화 18, ‘겔32:23-27’

AC.290.심화 15. ‘겔32:23-27’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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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심화 16, ‘겔26:20’

AC.290.심화 16. ‘겔26:20’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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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6:20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26:20)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26:20);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구덩이’와 살아 있는 자의 땅’을 서로 대조하면서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290의 핵심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생명 없는 상태와 생명이 충만한 상태를 극명하게 대비하여 그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26은 두로(Tyre)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두로 자체보다 그 영적 의미를 중요하게 봅니다. 두로는 말씀의 지식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상징하지만, 그것이 주님과 분리되면 생명을 잃고 황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로가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은, 단순한 국가 멸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구덩이’와 땅 깊은 곳’은 말씀에서 흔히 생명이 결핍된 상태, 또는 지옥과 그에 가까운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거부하는 상태이므로 예로부터 황폐한 곳’이라고도 불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생명의 근원을 떠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스스로 가진 존재는 아무도 없으며,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질 때 영적 황폐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구절의 마지막은 영어 표현으로는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즉, ‘나는 산 자의 땅에 영광을 세우리라’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표현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사38:11과 사53:8에서도 산 자의 땅’이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땅에 주님께서 친히 영광’을 두신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에서 영광’은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산 자의 땅’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진리가 충만한 영역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AC.290에서 앞서 인용된 여러 말씀과도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36:9에서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이라 하였고, 17:13에서는 생수의 근원’이라 하였으며, 38:11과 사53:8에서는 산 자의 땅’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에스겔에서는 그 산 자의 땅’에 주님께서 영광을 두시지만, 생명의 근원을 떠난 자들은 구덩이’와 땅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 빛과 황폐, 주님과의 연합과 분리가 뚜렷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천국과 지옥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흘러드는 상태이고, 지옥은 그 생명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산 자의 땅’과 구덩이’는 단순히 서로 다른 장소가 아니라, 생명의 유입을 받아들이는 상태와 거부하는 상태를 각각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겔26:20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산 자의 땅’으로, 그분을 떠난 상태를 구덩이’와 땅 깊은 곳’으로 대조하여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산 자의 땅’이라는 말씀들과 함께,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그 생명에서 분리되는 것이 곧 영적 황폐와 죽음이라는 AC.290의 중심 교리를 또 하나의 강력한 성경적 증거로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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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심화

 

15. ‘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53:8)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Isa. 53:8);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살아 있는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과 직접 연결되어 계신 분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90의 중심 교리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의 고난을 받으셨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표현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사38:11에서는 히스기야가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제 사53:8에서는 메시아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을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의 땅’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의미는 훨씬 더 깊어집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땅’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세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는 영역, 곧 참된 생명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그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그 땅에서 끊어지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의 신성 자체가 생명을 잃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성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음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생명 자체이신 분께서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 이 예언의 핵심입니다.

 

또한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는 말씀도 AC.290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단순히 고통을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인류를 다시 주님과 연결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는 사람을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시키고, 주님의 구속은 그 끊어진 연결을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구속 사역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여러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36:9에서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이라 하였고, 17:13에서는 생수의 근원’이라 하였으며, 38:11에서는 산 자의 땅’의 중심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53:8에서는 바로 그 생명의 주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인용의 흐름은 모두 하나의 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곧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며,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친히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구속은 단순히 형벌을 대신 받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모든 세력을 이기시고,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다시 흘러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따라서 사53:8은 단순히 메시아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을 넘어,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구속 사역을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53:8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는 고난을 받으셨음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산 자의 땅’이라는 말씀들과 하나의 흐름을 이루며, 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고, 그 생명을 잃어버린 인류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구속을 이루셨다는 AC.290의 중심 교리를 더욱 완전하게 확증해 주는 중요한 예언입니다.

 

 

 

AC.290, 심화 16, ‘겔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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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의외의 모습

 

자신의 병을 마주 대하는 히스기야의 의외의 모습...주님 신앙도, 사후 세계관도...

 

 

히스기야는 분명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제거했고, 성전을 정결하게 했으며, 앗수르의 침공 앞에서는 여호와를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의 시선은 거의 전적으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 것’에 머뭅니다.

 

그의 노래를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38:11),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거둠 같이...’(38:12), ‘내 생애의 남은 해를 빼앗기게 되었도다(38:10)와 같은 표현이 계속 이어집니다. 죽음 이후 더 밝고 충만한 생명을 향한 기대보다는, 현재의 생명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훨씬 크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이 장면이 더욱 대조적으로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생명의 상실이 아니라, 육체라는 바깥옷을 벗고, 더욱 선명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전환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도 의식과 기억, 애정과 사고가 그대로 이어지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간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세계관에서는 죽음이 슬픔의 이유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사랑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사실 히스기야만 특별히 신앙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구약 전체를 보면, 사후 세계에 대한 계시는 신약처럼 충분히 펼쳐져 있지 않습니다. ‘스올’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 사람이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지는 비교적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11:25),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시며, 사후 생명을 훨씬 분명하게 계시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이유도 설명됩니다. 그는 계시는 인류의 수용 능력에 따라 점진적으로 열렸다고 봅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 사람들은 영계와 사후 생명에 대한 지식을 오늘날 우리가 천국과 지옥’이나 Arcana Coelestia’를 통해 접하는 만큼 명료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의 탄식도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런 사람이 유다 왕이었다니...’라는 느낌은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히스기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왜 신약에서 부활과 영생을 더욱 분명히 계시하셨는지,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통해 사후 세계를 이처럼 상세하게 밝혀 주셨는지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AC.290의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며 주님은 살아 계시는 분’,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고 증언합니다. 그 결론은 결국 하나입니다. ‘생명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계속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생명의 끝으로 두려워했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더 충만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시각이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AC.290, 심화 13, ‘사38:11’

AC.290.심화 13. ‘사38: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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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38: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38:11)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Isa. 38:11)!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주님을 산 자의 땅(the land of the living)과 직접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290의 중심 교리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그 생명이 있는 영역이 어디이며, 그 생명의 중심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이 말씀은 병에서 회복된 히스기야가 죽음의 문턱에서 느꼈던 심정을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가장 큰 상실을 여호와를 다시 뵙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에 주목합니다.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활동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참된 생명이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산 자의 땅’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은 흔히 교회나 생명이 존재하는 영역을 의미하고, ‘산 자’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산 자의 땅’은 단순히 이 세상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 들어오는 영역, 곧 영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라고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결과 사람들과의 생명 있는 교통도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AC.290의 논리와도 일치합니다. 주님과의 연결이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참된 교통도 결국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여러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36:9에서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이라고 하였고, 17:13에서는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였으며, 여기서는 그분을 산 자의 땅’의 중심으로 묘사합니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곧 생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주님이 계시며, 주님을 떠나서는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Potts의 영어는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이라고 하여 Jah’를 두 번 반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원문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번역입니다. 개역개정은 이를 자연스럽게 여호와를... 여호와를’로 번역하지만, 원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은 그분의 절대성과 생명 자체이심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도 바로 여호와를 생명의 중심으로 증언하는 이 표현을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38:11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떠나면 참된 생명을 잃게 되고, 주님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는 말씀들과 함께,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AC.290의 중심 교리를 또 하나의 측면에서 확증하는 중요한 성경적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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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7:13)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Jer. 17:13).

 

 

스베덴보리가 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자체가 주님을 생수의 근원(the spring of living waters)이라고 직접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AC.290의 중심 교리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그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대표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생수의 근원’입니다. 앞서 시36:9에서는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하였고, 여기서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을 같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말씀에서 ’, 특히 생수’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하여 사람에게 들어오는 영적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생수의 근원’은 단순히 물을 공급하는 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버리는 것이 곧 생수의 근원’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강물이 원천에서 끊어지면 말라 버리듯이, 사람도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끊으면 영적으로 메마르게 됩니다.

 

또한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하늘에 기록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속함을 의미하고, 흙에 기록된다는 것은 일시적이고 사라질 것에 속함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근원을 버린 사람은 참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고, 결국 흙과 같은 자연적이고 덧없는 것에만 머물게 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강조하려고 이 구절 전체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특히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AC.290에서 앞서 인용된 시36:9와 서로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시편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하고, 예레미야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생명’을, 다른 하나는 생수’를 말하지만, 둘 다 오직 주님만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연이어 인용, 성경 전체가 동일한 진리를 다양한 표현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더 나아가 생수’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주님 자신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말씀하시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7:37)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들과 예레미야의 생수의 근원’을 같은 영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곧 주님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17:13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여호와를 직접 생수의 근원’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290의 중심 교리인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또 하나의 강력한 성경적 증거로 확증해 줍니다. 동시에 주님을 떠나는 것이 곧 생명의 근원을 떠나는 것이며,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곧 참된 생명과 진리의 샘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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