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 1

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 연단과 양심의 빛을 중심으로

이번 5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사가 신앙을 단순히 ‘진리를 알고 믿는 일’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의의 중요한 명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선한 지식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연단을 받는다’, 그리고 ‘선한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연단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려고 하는 순간 사람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분노가 올라오고, 참으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참아야 할 상황이 오면 불평과 짜증이 솟아납니다. 강사는 바로 이 지점을 ‘연단’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되는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의지와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삶이 된 진리만이 사람에게 실제로 속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가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진리와 반대되는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싸움,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말씀을 실천하려 하면 불편한 환경이 온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구조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보내신다기보다, 섭리 가운데 허용된 삶의 환경을 통하여 이미 사람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보내신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 후반에서도 강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를 붙여 주신다’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말을 조금 다듬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삶이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사랑들이 드러나는 상황을 허용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외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내 안에 이미 있던 분노와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의 다음 설명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연단받을 환경이 왔을 때 불평과 짜증이 올라오고 그것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면 연단의 기회를 피한 것이라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나는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빛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 영성 훈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연결하여 읽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안의 어떤 악을 실제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다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악이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실패의 순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을 보고 주님 앞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강의가 말하는 ‘양심의 빛’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양심을 사람의 ‘지성, 감정, 의지’를 밝혀 주는 기능으로 설명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5장 14절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인용하여, 말씀을 실천하고 연단받을수록 양심이 밝아져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것을 점차 분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구별하면 이번 강의를 더욱 정교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며 참인지를 내적인 방식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와 선이 내면에 자리 잡아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판별 장치가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양심의 질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어겼을 때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니까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 자체도 말씀의 참된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받을수록 양심의 빛이 더욱 밝아져서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칠수록,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더욱 열어 주시며 그 결과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더욱 섬세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아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어떤 영적 감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특히 강의가 ‘말씀의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선으로 옮겨지고, 선이 행위가 되며, 그것이 반복되어 삶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의의 ‘말씀 → 실천 → 내적 저항의 발견 → 회개 → 변화 → 더욱 밝아진 분별’이라는 흐름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면을 상당히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천국에 들어갈 만큼 100% 완전히 밝아져야 한다’는 강사의 표현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99.9도 안 되고 100% 완전히 양심이 밝아져야’ 가나안, 곧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간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이 지상에서 모든 악의 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그렇게 수학적인 완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주된 사랑으로 삼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생명을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 안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proprium이 남아 있으며, 천사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힘으로 100% 정결해진 사람들의 나라’라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의 악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 그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리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인간의 협력과 책임을 조금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구원의 능력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의 ‘연단’이라는 말도 조금 더 깊어집니다. 연단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진리를 붙들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과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연단의 본질은 ‘고난의 양’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내적 선택’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입니다’라는 말은 이번 5강 1부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악한 영들과 지옥의 인플럭스를 실제적인 것으로 가르치므로 모든 악을 단순히 인간 심리 내부의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옥이 사람을 강제로 악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악의 인플럭스가 사람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 곧 타락한 proprium과 결합할 때 그것이 ‘나의 악’으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싸움의 중심은 언제나 ‘저 사람이 문제다’에서 ‘이 일을 통해 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연단은 원수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드러난 내 안의 미움, 보복심,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 우월감과 싸우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의 역시 뒤이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자꾸 보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말하며, 이것을 ‘우리의 옛사람 애굽의 근성을 죽이는’ 과정, ‘자아를 깨뜨려 가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 역시 표현상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으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와 매우 가까운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5강 1부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진리는 삶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낸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자신이 사랑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내 사랑의 실제 상태가 드러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다가 무시당했을 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손해를 볼 상황이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로 그 순간이 실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안에 아직 이것이 있다’고 보여 주시는 거듭남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말씀의 실천 → 연단 → 양심의 밝아짐 → 선악의 분별’이라는 큰 흐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100% 완전 정결을 달성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인간적 완성론으로 가져가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삶이 되고, 그 삶 속에서 악이 드러나며,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여 그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 가운데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된다’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음을 점점 더 알고, 그러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욱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밝아진다’기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빛을 가리던 것들이 하나씩 물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또한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5 2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 ‘광야의 세 차례 연단과 거듭남의 여정

5강 1부에서 강사는 ‘말씀을 실천해야 연단을 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면서 양심의 빛이 점점 밝아지고 선악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 전체의 거대한 그림 하나에 올려놓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로 읽지 않고 한 사람이 구원받고 성장하여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는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세 차례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데 주목하면서 이것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차례 연단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지고 읽는 독자는 아마 상당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는 기본 방향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해석의 세부 내용은 앞으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광야-가나안’을 단지 수천 년 전 민족사의 지리적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거듭남의 질서로 읽는다는 발상 자체에는 매우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도식에서 애굽은 사람이 아직 육적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출애굽은 거기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건이며, 광야는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훈련되고 연단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 잡은 상태, 곧 ‘익은 열매’와 ‘이기는 자’의 상태로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즉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광야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완성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아주 중요한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실제로 거듭났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한 필수적인 시작이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이 되고 실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할 때에는 자기 안에 있는 반대되는 사랑들이 그대로 숨어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면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도 읽을 때에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깊은 상처를 준 사람 앞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제 손해가 닥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일종의 빛과 같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광야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특히 이 광야의 여정을 ‘세 차례 연단’으로 구조화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사건, 두 번째는 아말렉과의 전투, 세 번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력한 적들과의 전투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 세 단계를 요한일서의 ‘아이들-청년들-아비들’의 성장 단계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이스라엘이 거의 싸우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도망가며, 두 번째에서는 실제로 적과 싸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단계로 성장하고, 세 번째에서는 더욱 강한 적들과 싸우며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단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적 성장을 ‘악이 점점 줄어들어 편안해지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더 깊은 싸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싸울 힘조차 없어서 도망가던 사람이 조금 성장하면 실제로 싸우기 시작하고, 더 성장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적과 맞닥뜨립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역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왜 시험이 더 깊어지는가, 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악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불일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속사람을 열어 가실수록, 겉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싸움이 있으려면 싸울 두 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선과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proprium과 결합된 악과 거짓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초기에 별다른 내적 갈등이 없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보이기 시작하며, 이전에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애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양심의 형성과 함께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세 차례’라는 숫자를 실제 영적 성장의 고정된 단계처럼 사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시험을 거친다고 문자적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말씀의 상응 안에서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세 차례 전투’를 인간 거듭남의 완전한 시험 과정의 표상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영적 생애를 정확히 세 번의 시험으로 나누는 심리적 시간표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애 가운데 몇 번의 매우 큰 시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시험들이 오랜 기간 계속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동일한 악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그 사람의 유전적 성향, 삶의 환경, 받아들인 진리와 선, 자유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의 깊은 영적 의미를 존중하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싸우는가’입니다. 출애굽기의 첫 번째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립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듭남의 가장 근본적인 비밀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싸우지만 실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잘 모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면 되지’, ‘화를 내지 않으면 되지’, ‘욕심을 버리면 되지’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자기 의지력이 얼마나 약한지 발견합니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면 다시 분노하고,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명예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나는 나를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듯, 인간도 자기 힘으로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열린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결단하고 싸우고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광야는 ‘내가 얼마나 강한 영적 사람이 되는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자기 힘으로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선과 진리는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선했다고 해서 오늘도 자동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오늘도 자기 힘으로 그 진리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계속 주님에게서 흘러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연단’은 단순한 정신력 강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광야에서 강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자기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전쟁을 잘하는 백성이 되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이 점점 자기 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받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 곳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지므로 지금부터 정확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가나안 입성은 상당히 완성된 성화 상태를 가리킵니다.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을 이루며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세 연단은 그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나안’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 교회, 천국적인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 사람 안에서 모든 악의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제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배 질서가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예전에는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을 지배했지만, 거듭남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악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는 생명의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화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으므로 이제 익은 열매다’라는 자기 인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자기확신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겸손조차 자기 영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섬세합니다. 그래서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도를 측정하기보다 주님께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도식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아직 자기 힘이 없습니다. 청년의 상태에서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아비의 상태에서는 더 깊은 선과 지혜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세 단계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거듭남에 실제로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여러 상태의 연속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거듭남을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 야곱의 삶, 요셉의 이야기,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이 단지 각각 떨어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출애굽과 광야를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두 방식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핵심진리’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연결하면서도 그 연결을 주로 신앙적 유비와 성경구절 간의 조합을 통해 구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일정한 상응의 질서가 있으며, 인물·장소·숫자·사건 하나하나가 그 질서 안에서 연속적인 속뜻을 이룬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출애굽을 영적 성장으로 해석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토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알고 읽으면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을 더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와 비슷하니 결국 같은 것이다’라고 성급하게 동일시할 필요도 없고, 세부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안의 영적 통찰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이 해석은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의 질서를 통해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번 부분에서 그 공통된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오늘의 신앙 언어로 바꾸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고, 삶 속에서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이 긴 과정이 광야입니다.

 

그렇다고 광야가 구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광야가 있습니다. 만나도 광야에서 주어졌고, 반석의 물도 광야에서 주어졌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광야에서 함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존이 벗겨지고 주님의 인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시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주님에게서 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주님께서 더 깊은 곳을 다루고 계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5강 1부에서 다룬 ‘양심의 빛’과도 연결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어둠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나는 점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 더 잘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그것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심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5강 2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광야는 주님께서 진리를 삶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질서 있게 하시는 과정이고, 가나안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진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을 다스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세 차례 연단’도 훨씬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몇 번째 연단에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세 번째이든, 또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시험 가운데 하나이든, 모든 거듭남의 싸움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분이 열어 주신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뿐입니다.

 

다음 5강 3부에서는 강사가 이 ‘세 차례 연단’을 훨씬 구체적으로 펼쳐 가는 부분을 따라가겠습니다. 특히 ‘바로의 군대-아말렉-가나안 입성 전의 강적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지, 그리고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단계와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부터는 공용복 선생의 실제 연단 사례도 점차 등장하기 때문에, ‘핵심진리’가 말하는 영적 성장론의 독특한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5 3

첫째, 둘째, 셋째 연단 : 싸움의 대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강 2부에서는 강사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한 사람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는 큰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고 연단받는 과정이며, 가나안은 그 과정을 지나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가 되는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강사는 이 광야의 과정을 조금 더 세분하여 ‘세 차례 연단’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설명합니다. 첫째 연단은 애굽에서 나온 직후 바로의 군대에게 추격당하는 사건, 둘째 연단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는 사건, 셋째 연단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적들과 싸우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가 세 번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는 이 세 전투를 통하여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이 죄와 싸우는 방식과 깊이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오랫동안 종으로 살았고, 이제 막 바로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단계에서 백성은 스스로 싸워 승리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그 길을 지나가며, 뒤따라 들어온 애굽의 군대는 물에 잠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갓 출발한 사람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아직 죄와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입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깊은 악과 거짓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성질과 욕망과 습관들이 다시 뒤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옛것이 그대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가? 왜 예전 성질이 그대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구별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겉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던 악과 거짓의 질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일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속사람 쪽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데 겉 사람에는 오래된 습관과 애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이 둘이 실제로 질서를 이루도록 하는 긴 과정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애굽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무찌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 비추어 보면 아주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거듭남의 모든 싸움에서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실제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듭남마저 proprium의 사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연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다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만히 애굽 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가나안으로 옮겨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매우 독특한 균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여기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이제 두 번째 연단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실제로 싸웁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도망하던 백성이 이제는 전투에 참여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한 ‘청년’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무엇이 죄인지조차 잘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말씀을 알고 선악을 분별하며 실제로 죄와 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양심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싸움에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래에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고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의 근원이 인간의 전투 능력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사건에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는 상응을 통해 속뜻을 품고 있으며, 아말렉과의 전쟁 역시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모세의 손을 들면 기도가 강해져 이긴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현재 강의가 말하려는 영적 성장의 문맥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래에서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는 위에서 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와 잘 연결됩니다.

 

여기서 ‘청년’의 영성에는 한 가지 위험도 있습니다.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몇 가지 욕망을 이기고, 기도생활이 안정되고, 말씀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조언도 할 수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이제 꽤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자기애가 종교적인 자기애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개념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proprium은 반드시 돈과 성욕과 명예 같은 노골적인 욕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다’, ‘나는 시험을 많이 이겼다’, ‘나는 성화되었다’는 생각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욕망과 싸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proprium을 발견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성장이란 ‘점점 내가 강해지는 것’과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제로 더 절제할 수 있고, 더 분별할 수 있고, 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를 더욱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 능력이 커졌다고 느껴 주님에게서 독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자유롭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연단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 세 번째 연단은 가장 깊고 강한 싸움입니다. 이제 단순히 애굽에서 도망치거나 광야에서 아말렉 하나와 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강사는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와 연결하고, 결국 죄성의 깊은 뿌리까지 다루어 ‘익은 열매’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있을 때보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더 어려워집니다. 만일 영적 성장을 단순히 ‘점점 문제가 없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층층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악부터 다루어집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노골적인 분노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오면 더 미세한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선을 행하고도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이전보다 자기 안의 악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악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더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지만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까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먼지가 보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5강 1부에서 살펴본 ‘양심의 빛’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양심의 빛이 밝아질수록 선악을 더 세밀하게 분별하게 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이런 의미에서는 매우 깊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선악만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의 선악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낳은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옳은 말을 했지만 왜 그 말을 했는가?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가?’라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목적’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행위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목적, 그 목적에서 나오는 생각과 수단, 그리고 최종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에 따라 영적인 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일 수 있고,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헌금도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명성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연단을 단순히 ‘더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다’고 이해하기보다 ‘더 깊은 사랑의 층이 시험받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의미가 깊어집니다. 겉 행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거듭남의 핵심은 행동 목록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 번째 연단을 지나면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실제적이며 매우 깊은 변화입니다.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이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변화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소멸하여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악의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천사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 안으로 주님에게서 선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가 한순간이라도 끊긴다면 누구도 스스로 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완성은 ‘이제 나는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며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라는 말을 읽을 때도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열매는 분명 익어야 합니다. 진리가 단지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선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자기 자신을 익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인간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강사가 첫째·둘째·셋째 연단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결국 ‘싸움 없이 성숙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마음의 위로나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사랑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고백 이후에도 광야가 있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싸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다

 

 

 

5 4

내 속에 거하는 죄와 전적 부패 : 죄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에 뿌리박힌 실체인가

5강은 이제 연단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안의 죄 문제 그 자체로 깊이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숨어 있던 것’의 정체를 ‘죄성’이라고 부르면서 로마서 7장 20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강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결단했는데도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마음속에서 ‘죄의 법’이 일어나 결국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완전 타락’, ‘전적 부패’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말을 단순히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정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훨씬 구조적으로 이해합니다. ‘원죄가 영 속에 뿌리박혀서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에 죄의 법칙이 능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가 바로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 죄성이 잠잠해 있어서 자신도 그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동하여 마음을 지배하고 마침내 행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든 예를 따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앞으로는 오래 참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진리가 양심에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참습니다. 두 번째도 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쯤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합니다. 강사는 바로 그 순간을 ‘죄성이 발동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죄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자 오히려 자기 안에 말씀을 거역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중요한 영적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기 안의 어둠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살면서 화를 낼 때에는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누구나 그렇지’ 하고 지나갑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금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실제로 살려고 하면 이전에는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있던 어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서도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오면 그 진리와 반대되는 의지의 상태가 점차 드러납니다. ‘나는 이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아는데 왜 내 마음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라는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오히려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던 상태에서 이제 둘이 서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죄성을 ‘내 영 속에 뿌리박힌 것’, 더 나아가 ‘영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음란성, 시기, 혈기, 아집, 교만 같은 죄성이 인간 안에 뿌리박혀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설명하고, 이것을 ‘원죄’, ‘부패성’, ‘유전죄’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의 가장 내적인 영 자체에 악의 실체가 뿌리를 박고 있다는 그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곧 inmost는 악이 뿌리박혀 있는 장소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으로 유입하시는 가장 깊은 입구와 관련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갖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죄악으로 오염된 핵’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와 잘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인간에게 유전적 악이 있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에서 유전적 악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법적 ‘죄책’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 곧 악을 사랑하기 쉬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 죄책이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는 전통적인 원죄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자기 삶으로 만든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접점도 보입니다. 강의 자료에서 ‘원죄’라고 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행위 자체’를 원죄라고 하지 않고, 그 타락을 통하여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 곧 ‘부패성·유전죄’를 원죄라고 구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는 그들의 ‘자범죄’이고, 이후 인간에게 유전되는 죄의 성향을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죄성이 들어왔다’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다르지만, 조상의 범죄 행위 자체와 후손에게 이어지는 악의 성향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아담은 지구상 최초의 한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곧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 아담이 역사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그 순간 어떤 죄성이라는 것이 인류의 영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조 자체가 AC의 창세기 속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자기 이성, 곧 proprium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타락해 갔는가를 말씀의 속뜻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유전적 악은 일종의 ‘영적 유전자 속 죄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 축적되어 내려오는 사랑과 애정의 기울어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경향,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반복될 때 개인의 실제 악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죄로 여기고 거부하면 그 악은 비록 유전적 경향으로 존재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proprium’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하다’, ‘내가 옳다’고 느낍니다. 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 자체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제 자기 소유라고 믿고 주님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 proprium은 악과 거짓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죄론은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악한 물질이 박혀 있다’는 그림보다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려는 proprium의 질서’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잘못 들으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악은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핵심진리’와 만납니다. 강사는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를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죄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구나’라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도 한 가지 균형을 놓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악과 싸울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면 말을 삼켜야 하고, 거짓말할 기회가 생기면 진실을 말해야 하며, 탐욕이 올라오면 실제 행동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내가 내 의지력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의 균형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죄성이 환경을 만나면 발동한다’는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시험론으로 조금 바꾸어 읽으면 상당히 유익해집니다. 평소에는 자기 안의 어떤 악한 애정을 모르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거나, 무시당하거나, 성적 유혹을 받거나, 권력을 가질 기회가 생기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숨어 있던 사랑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환경이 그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통하여 이미 자기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기 상태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자기는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지 않을 때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지면 자신도 몰랐던 것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의 환경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충분히 건질 수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때 올라오는 모든 생각과 충동을 곧바로 ‘나 자체’라고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애정과 생각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유입되고, 악한 애정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유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를 선택합니다.

 

이 사실은 죄와 싸우는 사람에게 의외로 큰 자유를 줍니다. 갑자기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이 이것이구나’ 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스쳤다고 해서 ‘내 본질은 음란한 인간이구나’,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내 참된 자아는 살인적인 인간이구나’라고 곧바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라왔을 때 내가 그것을 기뻐하며 붙잡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정말 중요합니다. 유혹과 죄를 동일시하면 신앙생활은 끝없는 자기혐오로 갈 수 있습니다. 시험 가운데 악한 충동이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 안에 그 악과 싸우는 다른 생명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양편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의 ‘내 속에 거하는 죄’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 죄다’라고 읽는 것과 ‘내가 선을 원하면서도 나를 끌어당기는 악한 성향이 여전히 겉 사람 안에 있다’고 읽는 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전자는 ‘나는 본질적으로 죄 덩어리다’라는 자기규정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내 안에는 내가 싸워야 할 유전적이고 실제적인 악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악과 나를 분리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고 계신다’는 거듭남의 관점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가 AC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를 함께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집니다. 인간 안에 악의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인간 안에 은밀히 보존하십니다. 인간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리메인스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완전히 부패하여 안에는 오직 죄밖에 없는 존재’라고만 묘사하면 AC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전적 부패’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이 말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이라면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모든 층위가 악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의 리메인스조차 없으며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인간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는 강의의 설명입니다. 앞선 강의에서 강사는 정욕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보존하도록 주신 기능이지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이 말은 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참된 창조 목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악이 마귀에게서 어떤 ‘죄성 물질’처럼 인간의 영 속으로 이동해 들어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의 인플럭스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파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사랑하며 반복하여 자기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실제 악이 됩니다.

 

이것은 책임의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죄성이 마귀의 것이니 내가 죄를 지은 것은 결국 마귀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자기에게 유입되는 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면서 그것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책임이 생깁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악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선에 대해서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이 독특한 구조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나는 정말 비참한 신세구나’라는 자기 인식도 어느 지점까지는 의미가 있지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목적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로 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빛은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악을 끝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어둠을 발견한 이유는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보이는 순간에도 동시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죄성’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유전적 악·proprium·인플럭스’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죄는 훨씬 깊다. 환경만 주어지면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 힘을 믿지 말고 철저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악을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자유와 합리성을 지켜 주시면서 악을 당신에게서 분리해 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성을 형성하신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보완이 이번 5강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성의 깊이’를 강조하는 강의는 자칫 듣는 사람을 ‘내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거듭남론은 인간의 타락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깊다고 해도 주님의 역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의 유전적 악이 오래되었다 해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앞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연단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오직 악뿐이라면 싸움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악 사이에는 영적 시험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악이 움직일 때 갈등이 생깁니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보복하고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유리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갈등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5강 1부의 ‘양심’, 2부의 ‘광야’, 3부의 ‘세 차례 연단’, 그리고 이번 4부의 ‘죄성’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진리가 양심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그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통하여 광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깊어질수록 더 깊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점점 ‘내 힘으로는 이것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참된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전적 부패’를 ‘나는 존재 자체가 오직 악이다’라는 선언으로 읽기보다, ‘나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으므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고백으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존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존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제 5강은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깊은 죄성이 있다면 성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성은 실제로 뿌리째 없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자’, ‘익은 열매’인가?’입니다. 5강 5부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따라가면서, 공용복 선생의 ‘죄성 제거와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악의 제거, 혹은 악에서의 분리와 거듭남’ 사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5 5

이기는 자익은 열매’ : 성화의 완성은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인가

5강은 이제 지금까지의 연단론을 하나의 분명한 목표점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세 차례의 광야 연단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런 사람을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생명수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라고 표현하고, 신앙의 목표를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인들의 ‘신인 합일’ 등을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영적 완성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묶습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구원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믿었다’, ‘구원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실제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고, 죄와 싸우며 사랑과 성품이 변화되고, 결국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는 단지 어떤 교리적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영적 싸움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의 경주 이미지를 가져와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의 연단을 지나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면 ‘이기는 자’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강조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고,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며 악과 거짓을 실제로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는 ‘이기는 자’를 상당히 완결된 상태로 말합니다. 세 차례 연단을 모두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익은 열매’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표현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 사람 안에서는 죄성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악의 뿌리가 남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섬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분명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외적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실제로 새로워지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 역시 성화나 거듭남을 약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유전적 악과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안의 악은 주님의 역사로 억제되고 분리되며, 새로운 선의 질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의 ‘존재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그 사람의 자유롭고 기쁜 사랑의 중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천사에게 적용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 proprium만을 본다면 그 안에는 선이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완성은 ‘나는 이제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확신이 아니라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겼는가’입니다. 단순히 욕망 몇 가지를 억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김은 자기 의지력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바뀐 결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오히려 아주 좋은 비유가 됩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나무가 뿌리로부터 생명을 받아 충분한 시간 동안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거듭남도 한순간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이루어집니다. 익은 열매란 단순히 죄를 많이 안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된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익은 열매’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이 단일한 한 시점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른 과정과 시기가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다만 ‘첫 열매’, ‘둘째 열매’, ‘셋째 열매’를 고정된 등급표처럼 이해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무수한 차이와 상태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영적 등급을 측정하고 자랑하기 위한 체계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서로 다른 완전성을 이룹니다.

 

특히 ‘이기는 자’라는 말에는 영적 자부심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기는 자’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proprium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성화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기면, 자연적 명예욕이 종교적 명예욕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 성숙의 중요한 표지를 오히려 자기 상태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데서 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조금 더 빨리 내려놓고,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흔들림이 줄고, 예전에는 자기 이익만 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선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완성되었다’는 자기 판정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가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 가톨릭 영성의 ‘신인 합일’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배치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실재를 찾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변화되고, 더 깊은 내적 연합과 성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교파별 용어를 그대로 절대화하기보다 그 배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구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태도에 상당한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 교파나 교리의 차이만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선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신학 전통 안에서도 실제 선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해 살았던 사람은 천국적 상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표현이지만 어떤 공통된 영적 성장의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강사의 직관은 꽤 넓고 포용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인 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을 존재론적인 합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합(conjunction)은 있지만 동일화(identity)는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결합하지만,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따라서 ‘신인 합일’을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자유롭게 흐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그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결합’으로 이해한다면 상당 부분 대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존재가 신성과 하나의 본질이 된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혼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받는 그릇’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로 끊임없이 유입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참된 인간이 되지만 주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표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안에 이제 신적인 생명이 본질적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나는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읽는 경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 생명의 중심이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면류관’의 의미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면류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적 상급으로만 이해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상을 주신다’는 공로 사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은 선을 행하는 삶 자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선의 쓰임 안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외적 보상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와도 잘 연결됩니다. 열매가 익었다고 해서 나무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아 맺은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만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생명을 막는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며 주님의 인플럭스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강의에는 ‘성화는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는가, 죽은 뒤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도 등장합니다. 일부는 성화를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강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성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삶은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사후에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고 확정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실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도 선한 영들이 가르침을 받고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 사랑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회개의 인생이 사후에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잘못 배운 교리를 벗고 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상에서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한 사람이 단지 죽은 뒤 진리를 배워 천국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의 근본적인 방향은 살아 있는 동안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기는 자’라는 말은 미래의 특별한 몇 사람을 가리키는 영적 계급 명칭으로 보기보다, 지금 삶 가운데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모든 거듭남의 방향으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일찍, 어떤 사람은 더 늦게,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시험을 거치지만,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완전’의 의미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서도 지혜와 사랑은 영원히 증대합니다.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을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적 완전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계속 열려 있는 완전성입니다. 사람의 상태에 맞게 질서가 이루어졌지만 그 질서는 영원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다시 매우 적절해집니다. 익은 열매는 생명이 끝난 열매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열매입니다. 그 안에는 씨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성숙은 종착점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자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공용복 선생의 ‘이기는 자’ 개념에 덧붙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자기 힘으로 죄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영적 강자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기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보다 누가 이기게 하셨는지를 더 깊이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전신갑주’, ‘신인 합일’, ‘이기는 자’라는 서로 다른 표현들을 무리 없이 한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가장 깊은 핵심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실제 삶 안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악을 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진리를 행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체어리티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신앙의 목표는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익음’을 자기 상태에 대한 최종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실제 삶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익은 열매’는 영적 엘리트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향하는 겸손한 목표가 됩니다.

 

이제 5강은 이 추상적인 ‘이기는 자’의 개념을 실제 인물들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소화 데레사처럼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보다 작은 일에서 자기부인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이기는 자’가 거대한 영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잘 감당한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자료에서도 소화 데레사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5강 6부에서는 바로 이 ‘작은 승리’와 ‘일상의 성화’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 6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사람 : 소화 데레사와 생활 속 자기부인

5강은 지금까지 상당히 높은 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세 차례 연단’,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남’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영적 성숙을 아주 특별한 체험이나 극적인 희생, 혹은 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여기서 방향을 아주 현실적인 자리로 돌립니다. ‘큰 원수’보다 ‘작은 원수’, ‘큰 승리’보다 ‘작은 승리’,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을 강조하면서 소화 데레사를 소개합니다. 강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작은 원수들’이 생기며, 그때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같은 말씀을 붙들고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것은 잘 주어지지 않고 작은 것들이 주어진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대목은 5강 전체의 무게중심을 아주 중요한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면서 거대한 영적 전쟁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적 상태는 대단한 집회나 특별한 체험보다 생활 속의 작은 자극 앞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말 한마디, 내 뜻을 거스르는 작은 일, 피곤한데 누군가 부탁하는 상황, 별것 아닌 섭섭함,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반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사람 앞에 내놓을 만한 ‘영적 업적’도 없고, 누구에게 인정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가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강사가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그녀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소화’라는 말이 ‘작은 꽃’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큰 꽃처럼 화려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일들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했다고 소개합니다. 강의가 소화 데레사의 전 생애와 신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는 ‘작은 일의 충실함’이라는 영성의 한 특징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의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반드시 자연적 삶의 최종적인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이 생각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하며, 진리도 단지 기억과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진짜 시험장은 결국 일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작은 일’은 사실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의 아주 작은 행위 안에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최종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마지막 그릇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을 해도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다면 그 행위는 단순히 작은 외적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는 아주 사소한 예까지 듭니다.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에도 자기부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를 문자적으로 ‘몇 시에 일어났느냐’의 영성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훨씬 깊습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선한 쓰임’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에 필요한 충분한 휴식은 선한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맡은 책임을 외면한다면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욕구가 높은 목적을 방해할 때 그것을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돌보고 적절히 쉬며, 건강을 유지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을 줄이고, 음식을 줄이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소화 데레사 같은 성인의 금욕적 실천을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시대와 수도원 전통 안에서 행한 구체적인 수행을 그대로 복제한다고 해서 같은 영적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에서도 ‘어떤 영성가는 두 끼만 먹었다고 하면 나도 두 끼 먹어야지’ 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예가 등장합니다. 이런 열심이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사는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의 목적과 사랑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같은 두 끼 식사라도 한 사람에게는 절제의 훈련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영성을 과시하는 proprium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작은 승리’를 아주 직접적으로 풀어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왔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대하는 것, 집에서 ‘원수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반찬을 더 정성스럽게 해 주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즉시 방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등을 ‘이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표현은 매우 생활적이고 때로는 웃음을 섞지만, 강의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큰 악령을 쫓아내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바로 눈앞에서 자기 사랑의 충동을 꺾고 사랑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한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웃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호감이 있을 때 잘해 주는 것은 자연적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때 ‘내 기분’보다 ‘무엇이 선한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무조건 더 잘해 주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악 자체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폭력이나 착취를 행하고 있다면 그 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에게 더 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일을 참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경계를 세우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강의에서 남편의 폭력 같은 사례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부인과 오래 참음을 강조하다 보면 피해자가 폭력을 계속 견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 proprium의 보복심을 물리치는 것과 악한 행위를 방치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악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용서하면서도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한 순응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반찬을 더 맛있게 해 준다’는 강의의 재미있는 예도 그 행동 자체를 규칙으로 만들기보다 그 안의 영적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저 사람이 싫으니 나도 일부러 못되게 해야지’ 하는 보복의 proprium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 반감이 올라와도 그 반감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선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작은 자기부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강 3부에서 말했던 ‘세 번째 연단’의 깊이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악을 버리는 것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들어가면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납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 내가 옳다는 것을 꼭 확인받으려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법으로는 거의 문제 되지 않지만 영적 삶에서는 사랑의 질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작은 일’을 잘 감당한다는 것은 도덕적 완벽주의에 빠져 모든 표정과 감정을 감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방향이 점점 자연적 삶의 작은 부분까지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큰 원칙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를 꼭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상대를 살리려는가 아니면 이기려는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 정말 필요한가?’라고 잠깐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개념은 아주 풍성한 보완을 줍니다. 영적 삶의 중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발견하고 피한 뒤에는 실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에게 화를 안 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욕하지 않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이기는 것도 ‘나는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맡겨진 일을 유용하게 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영적 삶을 자기수련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옮겨 놓습니다. ‘나는 오늘 몇 번 자기를 부인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부인조차 자기 영적 성취의 목록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자기부인은 그 선을 방해하는 자기 사랑을 비켜 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꽃’이라는 이미지는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은 자기가 얼마나 큰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주님 앞에서 영적 가치는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이름 없는 성도, 큰 기관의 책임자와 가정에서 조용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외적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주님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이것은 천국의 쓰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에 맞는 서로 다른 쓰임을 수행합니다. 어떤 쓰임도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겉으로 작아 보이는 쓰임이라고 해서 천국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그 쓰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은 ‘작은 사람으로 만족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큰 책임을 맡기시면 그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큰 책임을 맡았다고 더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책임이 클수록 자기 명예와 지배욕이 섞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래서 큰 쓰임일수록 더 깊은 자기부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회와 사역에도 매우 직접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수천 명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어떤 순간에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큰 행사에서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실제적인 시험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한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면 아직 사랑이 자연적 삶의 작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작은 승리’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이유입니다.

 

또한 강사는 ‘작은 일 정도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신경 쓰면 할 수 있다’는 취지로 격려합니다. 여기에도 좋은 목회적 감각이 있습니다. 거듭남을 너무 거대한 목표로만 제시하면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칠 수 있습니다. ‘완전 성화해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릴 때, 오늘 내 앞에 있는 작은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말을 참는 것, 한 번 먼저 사과하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남의 공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그 작은 선을 행할 때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를 참았지만 그 힘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친절을 선택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할수록 작은 승리가 proprium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이기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이번에도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또 화를 냈다고 해서 ‘나는 거듭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를 보고 변명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원수’라는 강사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영적 의미에서 그 작은 원수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내 안의 반응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한마디 했는데 내 안에서 하루 종일 분노가 계속된다면, 문제의 중심은 그 한마디만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랑, 무시당하기 싫은 proprium, 내가 옳아야 한다는 고집이 함께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외부의 ‘작은 원수’가 내 안의 더 깊은 원수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상대방에게 억지로 좋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은 즉시 명령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별개로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해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내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점차 질서 있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의지와 행동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애정 자체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앞서갑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성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그것 때문에 행동을 조절합니다. 아직 마음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행하면,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억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작은 고행들의 수집이라기보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아주 작은 곳까지 선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식탁에서의 말 한마디, 싫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태도, 누군가의 결점을 보았을 때의 반응 같은 곳까지 주님의 질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거대한 관념 속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자연적 선택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강의를 보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론이 여기서는 갑자기 매우 낮고 평범한 자리로 내려옵니다. ‘익은 열매’가 되려면 엄청난 환상을 보아야 한다거나 거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중요한 중심을 계속 붙들게 합니다. 작은 자기부인의 목적도 결국 자기부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과 쓰임입니다. 내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그 참음으로 상대에게 선이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보다 그 희생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부인이 사랑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기 영성을 증명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다시 proprium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강 6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반드시 큰 전쟁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순간마다 자기 사랑보다 선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작은 승리의 생명조차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승리가 이웃을 향한 실제 쓰임으로 이어질 때 작은 행위 안에 천국의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 다시 더 깊은 자기부인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특히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과 고집,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다르게 대하려는 마음, 그리고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원고에서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자기’의 문제로 직접 지적합니다. 5강 7부에서는 바로 이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과 proprium의 관계를 중심으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5 7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 : 남을 보는 사람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으로

5강 6부에서는 소화 데레사를 통하여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순교나 특별한 영적 사건이 아니라,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배우자의 기분 나쁜 말을 보복으로 되갚지 않으며,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마다 자기 유익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자아가 잘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강사가 여기서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를 먼저 보는가?’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상대를 먼저 보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대체로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도 있지만, 무엇을 하자고 해도 늘 반대하고 ‘들이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 도움이 필요해졌다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아가 많이 깨어진 목회자’라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도울 수 있지만, 자아가 많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마음과 행동 어딘가에 차별이 드러난다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립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더 잘해 주고 싶고, 나를 들이받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proprium과 상당히 가까운 곳을 건드립니다. 다만 앞서 여러 번 구별했듯 강의가 사용하는 ‘자아’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완전히 동일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선을 덜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의 태도에 따라 내 사랑의 양이 달라지는 상태’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proprium과 매우 밀접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힙니다. 나를 인정해 주면 더 도와주고 싶고, 나에게 상처를 주면 ‘왜 내가 저 사람까지 도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적 공정성으로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상대가 내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보다 ‘지금 무엇이 선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누가 나에게 아무리 악을 행해도 무조건 똑같이 대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내적 목적이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인가’여야 합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분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복과 자기 유익이 판단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어 더 아픈 예를 듭니다. 오랫동안 정성껏 돌보아 주고 신앙생활을 도왔던 성도에게 목회자가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강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더 의지해서 그랬나 보다’라고 자기 쪽을 먼저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의 원인을 모두 자기 잘못으로 돌리라는 뜻으로 읽으면 위험하지만,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 일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의존과 기대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상당히 깊은 자기 성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구별해야겠습니다. 상대방의 배신은 상대방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의까지 ‘내 자아 때문이었다’고 떠안는 것은 건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특히 폭력이나 착취, 학대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기 성찰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자기비난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악은 저 사람의 책임이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과도한 사람 의존, 인정 욕구, 보답에 대한 기대,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악과 나의 proprium을 동시에 구별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 인상적인 문장은 ‘자아가 깨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설교 시간에 조는 성도를 예로 듭니다. 자아가 강한 목회자는 ‘어떻게 설교 시간에 저렇게 자는가’ 하고 성도를 탓할 수 있지만, 자아가 깨어진 목회자는 ‘내 설교가 부족해서 조는가 보다’ 하고 먼저 자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성도 역시 ‘목사님 설교가 형편없다’고 먼저 판단하기보다 ‘내가 기도가 부족한가?’라고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문자적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설교가 매우 부실할 수도 있고, 성도가 전날 밤새 일했기 때문에 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원인을 무조건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진리의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사가 말하는 영적 태도의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기 결백을 확보하고 상대방의 잘못부터 찾습니다. ‘나는 맞고 저 사람이 문제다’라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깨어질수록 그 자동적인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혹시 내가 볼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아주 깊게 만납니다.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진리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은 우리 장로님이 들어야 하는데’, ‘저 목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배우자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먼저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세상의 잘못된 교회를 찾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있는지를 보고, 바리새인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위선을 판단하기 전에 내 안의 자기 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지나치면 모든 상황에서 ‘내 탓인가?’만 반복하며 신경증적인 자기분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악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강의의 앞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이미 나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기는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기보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혈기와 아집과 고집이 강하고 자기반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일수록 연단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번 7부의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본다’는 주제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5강의 성장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proprium은 언제나 외부를 향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했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화를 낸 것은 저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외적 원인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외적 원인을 부정하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다. 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런데 왜 그 일이 내 안에서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이 속사람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상대방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다면 그 사건은 내 안의 다른 것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 ‘내 판단은 인정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사랑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자체를 보는 순간 외부 사건이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때 상대방은 더 이상 나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드러내 준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악을 정당화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모욕한 덕분에 내가 거듭났으니 그 모욕은 선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결과를 선을 위해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강의가 모든 생활 환경이 연단과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장점은 살리되, ‘그러니 악한 일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이 직접 시키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면 섭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실 수 있으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배신한 사건에서 ‘주님께서 저 사람에게 나를 배신하라고 시키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벌어진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사람 의존이나 명예욕, 보복심을 보게 하시고 거기서 나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을 하면 ‘모든 것이 연단이다’라는 강의의 언어도 훨씬 안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아’의 정체를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마음과 행실, 곧 ‘옛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며,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심리 현상이라기보다 말과 태도와 반응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은 반드시 외적 삶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즉시 공격하지 않으며, 상대가 나를 칭찬하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덜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 자체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들으면 인간의 자아 자체를 부수어 없애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께서 없애시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로운 개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 참된 개인이 됩니다.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내가 선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사랑의 종류도 다르고, 지혜의 형태도 다르고, 맡은 쓰임도 다릅니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성이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말을 ‘개성이 없어진다’,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한다’,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강의가 목회자에 대한 순종을 예로 들기 때문에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것이 곧 자아가 깨진 증거도 아니고, 목회자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한다고 자아가 강한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양심과 진리에 따라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동의했느냐 반대했느냐’가 아니라 그 동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진리를 위해 양심적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대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 역시 참된 자기부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유와 이성이 거듭남의 필수 조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유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들어가면 강의가 말하는 ‘순종’도 사람에 대한 맹목적 복종보다는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기 고집을 내려놓는 것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귀한 것은 강사가 이 자아의 문제를 목회자에게 먼저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성도를 나중에 차별하지 않는가, 설교 중 조는 성도를 보면서 즉시 그 사람을 탓하지 않는가, 자신이 돌보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성도 통제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자 자신의 내면에 적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려서 읽을 만합니다.

 

이것은 앞서 공용복 선생의 제자들에게서 느끼셨다는 ‘핵심진리에 자기 개인의 것을 함부로 섞지 않으려 하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받은 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가 실제 자기부인과 연결될 때에는 귀한 덕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승에 대한 충실함 역시 스스로 진리를 살피는 자유와 분별을 막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아가 깨어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을 ‘무슨 일이 생겨도 다 내 잘못이라고 하라’고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기에 앞서,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먼저 살펴라’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남의 티보다 자기 들보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자기 들보를 본 뒤에는 그것을 붙들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내가 역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가 회개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주님, 제 안에 이것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싶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 삶에서 다르게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선을 계속하고, 잘못을 지적받으면 한 번쯤 변명하지 않고 들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작은 행동들 속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실제로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멸시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를 칭찬하느냐 비난하느냐, 나에게 유익하냐 손해냐가 선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에게 실제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 전체의 ‘성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내려옵니다. 성화는 어떤 특별한 체험 뒤에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고 선언하는 상태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유익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는 데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익은 열매’라는 거대한 표현이 결국 ‘내게 잘해 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선을 베풀 수 있는가?’라는 아주 작은 질문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귀한 긴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 7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진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을 보면서도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자기 안의 자기 사랑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실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제 강의는 이 ‘자아가 깨어짐’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상태로 연결하면서, 단순히 상대에게 보복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성화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아가페 사랑’과 실제 인물들의 사례로 옮겨 갑니다. 원고에서도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함을 누리는 것’, 그리고 성화된 성도의 목표가 단순한 건강과 물질의 복이 아니라 그런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데 있다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5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과 ‘아가페’, 그리고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및 천적 사랑과 어떻게 구별하여 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 8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 아가페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성화의 실제 모습

5강은 이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문제로 가져갑니다. 앞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먼저 탓하기보다 자기 안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그런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강의가 성화의 실제 모습을 매우 높은 신비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상태’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앞에서 말한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자아가 깨어짐’이 결국 사랑이라는 한 지점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세 차례 연단’과 ‘이기는 자’를 단순히 강한 영적 전사가 되는 과정으로 읽었다면, 여기서 그 의미가 수정됩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것입니까? 결국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혈기와 아집과 고집, 보복심과 자기 의, 인정받으려는 욕망,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은 자연적 애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성화의 목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상태보다,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 앞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상태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체어리티(charity)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매우 깊은 교리를 알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자기에게 손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 지식과 체험만으로 그의 영적 상태를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시험하는 매우 깊은 말씀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도와주며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데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 심지어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조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근거가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에서 ‘무엇이 주님 앞에서 선한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호감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보기보다, 그 사랑의 실제 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감정적 호감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본질은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깊게는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감정의 따뜻함보다 훨씬 깊고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원수에게 반드시 따뜻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렸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해서 곧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은 기억과 자연적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당 기간 남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이유로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보복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려 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님 앞에서 거절하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자기 악에서 돌이켜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미 사랑의 방향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의 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에서 벗어나 선 가운데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원수의 악을 용납하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거짓말하고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그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잘못을 ‘사랑하니까’ 허용한다면 결국 자녀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시 범죄를 방치하는 것이 범죄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제지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그 사람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분별한 친절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사랑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과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악을 돕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 안의 악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의가 말하는 ‘원수와도 화평한다’는 것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반드시 관계를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졌다면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어떤 관계는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상대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질서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화평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앞부분의 가르침과 ‘원수를 사랑한다’는 이번 부분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상처를 받으면 즉시 자기 정당화를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반드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받았다는 사실 자체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상처는 실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은 그 상처를 붙잡아 자기 의와 보복심을 키우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받았을 때 그 상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로 만드는가, 아니면 주님께 가져가 자기 안에 일어나는 미움과 보복심을 보게 되는 계기로 삼는가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깊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기비난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그 사람을 생각하면 두렵고 괴로운데 ‘나는 사랑이 없어서 이렇다’고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의 회복과 영적 용서는 서로 관련되지만 반드시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거듭남의 과정도 사람의 상태를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시작도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붙잡지 않는 것,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 그 사람에게 실제 선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마음속에서 저주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5강 6부에서 살펴본 ‘작은 일에서 이기는 것’의 연장선입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 사랑’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웅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작은 자기부인이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사랑의 질서가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보복하지 않고, 내일 한 번 험담하지 않고, 다음에는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조금이나마 바랄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필요할 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먼저 행동을 이끌다가 점차 새로운 애정이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것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성에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를 제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 마음에서는 미워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살면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억지로 하던 선을 나중에는 사랑해서 하게 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화를 억누르는 것과 화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입을 다물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용서하려 하지만, 나중에는 상대가 악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성화된 사람’의 모습과 상당히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접점이 있습니다. 성화를 단순히 ‘죄성이 제거된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설명보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사랑이 형성된 상태’라는 실제 삶의 모습으로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까워집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여기에도 끝은 없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제 나는 완전 성화되었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자기 사랑의 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는 ‘나는 사랑이 많은 존재다’라고 자기 사랑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아가페’와 스베덴보리의 천적 사랑을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celestial)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 사랑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사랑이 의지 자체의 중심이 되어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인 상태와 관련됩니다. 영적(spiritual)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에 있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했으니 천적 인간이다’라고 단순히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사랑’을 신앙의 최고 열매로 놓는 방향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삶 속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깊은 주제와도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신앙이 아벨을 죽일 때, 곧 교리가 사랑을 밀어낼 때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높은 윤리적 명령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정통 교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면서 나를 비판한 사람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분리입니다. 바로 그 분리를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다시 결합시키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교리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선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 아래 있었느냐보다 그가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거짓은 진리가 아니므로 사후에는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지식 자체로 천국적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상대의 오류를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그의 멸망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무기로 사용하면 진리 자체는 옳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랑은 지옥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특히 무거운 문제입니다. 설교에서 잘못된 교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 속에 ‘나는 저 사람보다 옳다’는 기쁨이 들어 있다면 proprium이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상처를 주는 칼이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악을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왜 그것을 말하는가’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진리를 말하되 그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선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쓰임과 선입니다.

 

이 관점에서 ‘원수와 화평한다’는 말도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갈등하면서도 내적으로 상대의 선을 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를 막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으면서도 그 사람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반박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논쟁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하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멸시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원수를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면서 자기 안의 미움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폭로하는 데 능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proprium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5강 앞부분에서 강사가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라고 했던 말이 여기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외부의 원수가 사라져도 proprium이 그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다시 원수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과 화해해도 자기 사랑이 그대로라면 내일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렸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다루시는 것은 외부의 모든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대하는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분명히 보면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진리를 붙들면서도 상대를 멸시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사람이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의 훨씬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억지로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해’라고 자기 감정을 조작해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막는 자기 사랑과 보복심을 죄로 여기고 피할 때 조금씩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도 결국 은혜이며 동시에 거듭남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성화’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드러납니다. 성화를 ‘내 안의 죄성이 100% 제거되었다’는 자기 상태에 대한 선언보다, ‘전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던 사람에게 이제 선을 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랑의 변화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실제이고, 삶에서 확인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5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모든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면서도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고, 자기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가능한 자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랑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제 5강은 이러한 성화와 사랑을 실제 인물들의 삶에 더욱 구체적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강의 후반의 중요한 축인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적 체험이 점차 전면에 등장하며, 그의 1929년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의 승리와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핵심진리’의 틀 안에서 해석합니다. 5강 9부에서는 이 부분을 서둘러 스베덴보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먼저 강의가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충분히 따라간 뒤 ‘내주합일’, ‘그리스도의 생명’, ‘성화’를 스베덴보리의 ‘결합(conjunction)’ 및 주님의 인플럭스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5 9

이용도 목사의 생명내주합일’ :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5강은 이제 후반부의 중요한 인물인 이용도 목사에게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강사는 ‘말씀의 실천-연단-양심의 밝아짐-세 차례 연단-자아의 깨어짐-이기는 자-익은 열매-원수 사랑’이라는 긴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용도 목사의 삶과 체험을 이 전체 구조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특히 그의 1929년 무렵의 깊은 영적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을 통과한 사건으로 보고, 그 이후 나타난 그의 삶과 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의의 관심은 단순히 이용도 목사가 얼마나 유명한 부흥사였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깊은 연단을 통과한 뒤 ‘내가 사는 것’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강의가 말하는 ‘생명’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학적 명제를 알고 있다는 지적 신앙도 아닙니다. 강사가 이용도 목사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주’라는 말과 ‘합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성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때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에서 진리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는 분명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두 존재가 하나의 존재로 섞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conjunction)이 있지만 존재의 혼합이나 동일화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며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라 해도 신성 그 자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자기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생명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내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점점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 결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결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할수록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온전해집니다. 이것은 5강 7부에서 살펴본 ‘자아가 깨어진다’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부수어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인격 자체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그것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과 쓰임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과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각각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하나의 생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상당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 교리가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살 수도 있으며, ‘성령’을 말하면서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위는 결국 생명에서 드러납니다. 무엇을 고백하는가뿐 아니라 그 고백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그토록 심각하게 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영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욱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반드시 폭발해야 하고, 탐욕이 생기면 반드시 따라가야 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겉으로 자유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나는 화가 나지만 화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정직을 선택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자유가 생깁니다.

 

그 자유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이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교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빛을 받아 봅니다. 눈 안에 태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사랑하고 생각합니다. 거듭남은 그 유입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그릇이 질서 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이라는 강한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안전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신성과 인간 본질의 합일’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사이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계시고 인간은 인간으로 있으면서,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추상적인 신비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평가할 때도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의 열매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렬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음성을 들었거나 극심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는 영적 진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 인간의 교통 가능성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분별한 영적 체험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합니다.

 

영적 체험의 진위를 살피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그 체험 이후 사람이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해지는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면 섬기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과 선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원수를 더 미워하게 되는가, 아니면 사랑하려 하는가? 체험이 proprium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그 지배를 약하게 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지금까지 5강이 말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세 번째 연단을 통과했다’는 증거가 어떤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라면 5강 앞부분의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는 계속해서 ‘자기를 본다’, ‘자아가 깨어진다’, ‘작은 일에서 이긴다’, ‘원수를 사랑한다’를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용도 목사의 체험 역시 그 체험 자체보다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강의가 보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강조가 의미를 갖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착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면 그 생명이 반드시 사랑과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외적 열매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이 있으면 행위가 나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면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열매가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와 오늘날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십자가는 물론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예수께서 내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의 법정적 공식으로만 축소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거듭남과 삶이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형벌을 대신 받아 아버지의 진노를 만족시키신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까지 싸우시고 이기시며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하신 최후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 때문에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거듭남은 서로 경쟁하는 두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실제 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과 삶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를 읽으면 상당히 풍성해집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예수의 생명이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이 내 원수 관계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자기부인이 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을 믿는다면 옛사람과 다른 어떤 새로운 생명이 실제로 자라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나치게 주관적인 내적 체험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낀다’는 확신 자체가 객관적 기준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진리와 선이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진리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렬한 사랑과 일치감을 느껴도 그것이 말씀의 선과 진리에 반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자기 신격화로 이어진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내주합일’과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제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엄청난 영적 위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이 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과 주님의 진리를 함부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신적 인플럭스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언어를 입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합에는 오히려 겸손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특별하다’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내가 성화되었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인식입니다. 천사가 자기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내주합일’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보완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일’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그의 삶을 움직이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이용도 목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1929년 체험을 정말 ‘세 번째 연단의 완성’이라고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핵심진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을 존중하여 먼저 그대로 이해하되,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근거로 이용도 목사의 사후 영적 상태나 거듭남의 정확한 단계를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의 말과 삶,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랑의 방향을 보여 주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 절제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판정하는 렌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가르침과 삶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밝힌 영적 질서 안에서 더 정확하게 구별해 보는 렌즈에 가깝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살려고 했는지를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어디에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이 보이며 어디에서 신학적인 구별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교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신앙의 궁극적 증거가 사람의 변화된 사랑과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AC의 아주 근본적인 원리와 만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속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살아낸 것입니다. 지식은 기억에서 분리될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의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 이후에도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 지식을 축적했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가장 실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는 특별한 체험의 순간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 진실을 말하면 불리해질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생명’이 움직이는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5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동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황홀경도, 환상도, 특별한 계시도 아닙니다. 체어리티입니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 진실할 수 있는가,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다른 사람을 덜 멸시하는가,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을 더욱 주님께 돌리는가입니다. 바로 그 열매에서 결합의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5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사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전체 강의를 한데 모으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연단-죄성-자아의 깨어짐-성화-이기는 자-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큰 구조가 어디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깊이 만나는지, 그리고 ‘죄성의 완전 제거’, ‘전적 부패’, ‘세 차례 연단의 단계화’, ‘신인합일’ 등 어디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한지를 종합하여 5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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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에서 생명까지’ : 5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종합

5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말씀의 실천’, ‘양심의 빛’, ‘광야의 연단’, ‘세 차례 연단’, ‘죄성’, ‘전적 부패’, ‘자아의 깨어짐’,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원수 사랑’, 그리고 마지막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주합일’까지 긴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서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성장론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죄와 정욕이 드러나고, 그것을 회개하며, 자기중심성이 깨어지고, 마침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을 ‘익은 열매’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모든 성도가 연단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연단을 받아야만 익은 열매가 되고,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한 언어가 반복됩니다.

 

이런 전체 방향을 먼저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5강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신분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구원이 당신의 성품과 사랑과 일상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계속 묻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생명이 없으며, 진리는 선이 되고 행위가 되어야 실제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5강의 첫 출발점인 ‘말씀의 실천’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습니다. 강사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오히려 자기 안의 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인내를 배우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 드러나며, 자기부인을 배우면 자기 뜻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연단’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조금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구별되지 않던 선과 악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악을 비추어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사람에게 새로운 악을 넣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강의에는 반복하여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표현을 ‘삶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숨은 애정과 지배적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조금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를 당하면 분노가 올라오고, 재물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손해가 생기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환경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5강의 ‘연단’과 스베덴보리의 ‘시험’을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붙여 주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강합니다. 더 나아가 천년왕국 말기에 마귀가 풀리는 것까지 ‘연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의 섭리와 악의 허용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주님은 악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지옥의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주님이 저 사람에게 나를 괴롭히라고 시키셨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이미 발생한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자기애와 분노를 드러내고 그것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5강의 두 번째 큰 축은 ‘세 차례 연단’입니다. 출애굽 직후 바로의 추격, 광야에서의 아말렉 전쟁,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적들과의 전쟁을 인간의 영적 성장 세 단계와 연결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가나안 정복까지를 ‘세 번째 연단 과정’, 곧 광야 연단의 마지막 단계로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구조는 ‘신앙생활이 진행될수록 싸움의 대상이 더 깊어진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행동의 죄를 다루지만, 점차 인정욕구, 자기 의, 아집, 자기 영성에 대한 자부심처럼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반드시 ‘시험이 점점 적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내면이 열리면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수준의 진리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왜 이 말을 하는가? 상대를 살리려는가,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가?’라는 목적의 차원까지 들어갑니다. 행동에서 의도로, 의도에서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거듭남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연단’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셋’은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상응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모든 신앙인의 생애에 적용되는 고정된 영적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종류와 깊이와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는 영적 성장의 완전한 과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되, ‘나는 지금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를 판정하는 척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5강의 세 번째 큰 축은 ‘죄성’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선을 원하면서도 범죄하는 이유를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죄성’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전적 부패’와 연결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장 중요한 인간론적 보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유전적 악을 매우 심각하게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inmost 자체를 악의 뿌리가 박힌 곳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유입되는 가장 내적인 입구와 관계됩니다.

 

또한 조상의 죄책 자체가 법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도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유전되는 것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사람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실제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악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악한 충동이 스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인플럭스의 원리가 들어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자기 생각과 자기 애정처럼 느껴집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 책임과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악이 지옥에서 유입된다’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유입된 악을 사랑하여 받아들이면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5강의 ‘전적 부패’를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인간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가까워집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전혀 없고,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사람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어린 시절부터 리메인스를 저장하십니다.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선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그 안에서 은밀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강의 죄론은 ‘인간의 악이 얼마나 깊은가’를 매우 강하게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다’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합니다. 인간의 악만 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인간 자신이 모르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실제 영적 시험이 가능한 것도 인간에게 오직 악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가 그 악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의 네 번째 큰 축인 ‘자아의 깨어짐’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자아가 깨어진 사람의 특징을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보기보다 자기를 먼저 보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 목회자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성도라도 어려움을 당하면 차별하지 않고 돕는 사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자기 안의 사람 의존을 돌아보는 사례 등이 나옵니다. 이 통찰은 proprium의 문제와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모든 문제는 내 탓이다’라는 자기비난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실제로 악을 행했다면 그 악은 상대의 책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동시에 ‘이 사건을 통해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살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상대의 악과 자기 proprium을 함께 구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점점 외부에 놓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 교회가 문제다’, ‘저 목사가 문제다’, ‘저 사람이 자아가 강하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짓 교리를 비판하면서 자기 안의 자기 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음을 지적하면서 자기 안의 냉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자체가 proprium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5강의 다섯 번째 큰 축은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입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이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또 익은 열매는 말씀을 ‘99%’가 아니라 ‘100%’ 실천하는 사람이며, 빛 가운데 철저하게 회개하여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이라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바로 이 ‘100%’의 언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철저성을 강조하는 목회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유전적 악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절대적 무죄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완전함은 ‘나는 이제 자체로 완전하다’는 자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 선이 지배적 사랑이 된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악의 제거’라는 말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악이 인간에게서 독립적인 실체처럼 뽑혀 우주 밖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라기보다, 악이 분리되고 억제되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전에는 악을 기뻐해서 행했지만 이제는 그 악을 죄로 여기고 싫어하며 선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이고 깊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아름답게 읽는 방식은 ‘완전히 무결한 사람’보다 ‘주님의 선이 그의 삶에서 실제 열매를 맺게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공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받아 맺습니다. 인간도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행동과 쓰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진정 익은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보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 중간에 등장하는 아주 소박한 일상 사례들이 오히려 ‘익은 열매’의 의미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강사는 자신도 자주 패배한다고 솔직히 말하며, 가정에서 말 한마디와 혈기 하나를 다루는 것을 실제 ‘이김’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기는 자’가 너무 높은 영적 계급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을 생활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큰 신비 체험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말을 절제하는 것,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 작은 관계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예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크고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에서 사랑을 실천한 것을 성화의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종교적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업, 관계, 일상의 책임 안에서 나타납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마지막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은 머리 안의 선이 아니라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원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5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화’를 죄성 제거라는 추상적인 설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삶의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신앙의 완성은 결국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원수 사랑 역시 무분별한 용납과 같지 않습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폭력과 착취와 거짓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갑니다. 악을 제지하면서도 상대의 파멸을 즐기지 않고, 필요한 책임을 물으면서도 보복심에 지배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5강이 사랑으로 깊어지는 끝자락에 이용도 목사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수도적인 영성’,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 합일되는 성화·성결의 복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담는 복음’으로 설명하며, 기복신앙과 대조합니다. 이 표현은 5강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결국 죄를 많이 분석하고 연단의 단계를 공부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내주합일’을 결합(conjunction)의 언어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합쳐져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에 받아들여져 그 사람의 삶을 점점 질서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생명을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플럭스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거듭남은 이 인플럭스가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간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물리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의 가장 깊은 표지는 황홀한 체험보다 사랑과 진리의 열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용도 목사에 대한 강사의 높은 평가도 절제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는 그의 삶과 체험을 ‘세 번째 연단’, ‘성화’, ‘내주합일’의 틀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핵심진리’ 전통 안에서의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용도 목사의 정확한 영적 단계나 사후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적인 전기와 체험만으로 그의 내적인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기록된 삶과 메시지에서 자기부인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하는 열매가 보이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절제는 공용복 선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에 깊은 진리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공용복 선생의 모든 체계가 스베덴보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몇몇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실제 영적 통찰을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5강은 바로 그 균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 ‘자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넓혀야 한다’, ‘신앙은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다’, ‘정확한 세 차례 연단을 통과한다’, ‘100% 정결한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문자적인 종말론적 시간표 등을 절대적인 영적 구조로 만드는 부분은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종말론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의의 전체 성장론은 교회시대,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같은 문자적인 미래 시간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 자료에서는 일부 성도의 환난 전 휴거, 후 3년 반 등의 구조를 문자적인 종말 사건으로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사람들까지 실제 역사적 인구 집단으로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이런 이미지들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는 상응적 말씀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체계가 분명히 갈라집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지적하는 목적은 ‘누가 더 성경적인가’를 놓고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각의 말이 사람의 영적 삶에 무엇을 하려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종말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그 긴장을 미래의 달력에서 현재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대환란이 올 때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원적으로 ‘오늘 당신 안에서 무엇이 주인인가?’를 묻게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을 읽으면 종말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마지막 심판이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거짓의 외관이 벗겨지고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질서와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영계에 들어가면 자기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5강 전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강의는 그것을 ‘죄성과 정욕을 이기고 있는가’라고 묻고, ‘자아가 깨어졌는가’라고 묻고, ‘익은 열매인가’라고 묻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을 ‘당신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돈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자기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종교조차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면 돈과 지위와 지식과 재능은 모두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무엇이 주인인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자’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이기는 자는 강한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정복한 영적 영웅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점점 생명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여전히 자연적 욕구와 감정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서 질서를 찾습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개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삶의 최종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막되 미워하지 않는 것, 진리를 말하되 멸시하지 않는 것, 거리를 두어야 할 때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체어리티입니다.

 

‘내주합일’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처럼 독립적으로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면서, 그 사랑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표현하는 결합입니다.

 

그리고 ‘익은 열매’ 역시 자기 완성의 자격증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자연적 삶의 실제 열매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말로 자기 익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삶에서 나타납니다. 말투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5강이 이용도 목사의 ‘생명’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긴 죄론과 연단론의 마지막 목적이 ‘죄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진리를 배우는 것도 결국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는 ‘핵심진리’의 5강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 신앙에서 행하는 신앙으로, 행하는 신앙에서 사랑하여 행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말씀 때문에 참습니다.’ 나중에는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그 사람의 선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AC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은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독립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을 섬기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5강이 그토록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결국 이 문제와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5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연단을 많이 받아 자기 힘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죄로 알고 물리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점점 생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여기에 던지는 아주 좋은 질문 하나는 그대로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말씀은 지금 당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AC를 읽는 사람에게도 매우 필요한 질문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인플럭스와 proprium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것들이 실제 우리의 말과 관계와 선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핵심진리’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 연단과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 실제로 생명을 주시고 악을 물리치시는 분이 누구이며, 인간의 자연적 애정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하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들어가면 성화는 자기완성의 긴장에서 벗어나면서도 삶의 변화라는 엄중함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렇게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5강의 장점은 더욱 살아나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보완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욕망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격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신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진리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5강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깊고도 안전하게 읽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5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1부의 ‘말씀의 실천과 양심의 빛’에서 시작하여, 2부의 ‘출애굽-광야-가나안’, 3부의 ‘세 차례 연단’, 4부의 ‘죄성과 전적 부패’, 5부의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 6부의 ‘작은 일의 승리’, 7부의 ‘자아가 깨어짐’, 8부의 ‘원수 사랑과 체어리티’, 9부의 ‘이용도 목사와 생명의 내주합일’을 지나, 마지막 10부에서는 그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 삶이 되는 거듭남’이라는 한 중심으로 모았습니다. 앞선 1강부터 이번 5강까지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진리’의 가장 강한 문제의식도 이제 꽤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알고 믿는가’에서 멈추지 말고 ‘그 진리가 실제 당신의 생명이 되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오래 붙들어 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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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 1

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보기

4강은 앞선 강의들과 연결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 광야의 연단, 영계의 구조와 사후의 상태 등을 비교적 큰 틀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그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실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죄론’을 시작합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도 명확하게 밝힙니다.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나타나는 어두운 마음과 몸의 행실과 생활’을 세밀하게 분별하고,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구별함으로써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 앞에서 물리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죄론을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과목 정도로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과목들을 꿰는 중심축으로 이해합니다. ‘입문’에서 말하는 휴거 성도의 자격도 죄 문제와 관계되고, ‘교회시대 이기는 자’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이며, ‘영계론’에서도 사후 심판과 천국·지옥의 문제가 결국 죄와 연결되고, ‘속죄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루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는 죄 문제를 해결한 성도들의 삶이고, ‘성장론’ 역시 죄와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핵심진리’의 목차와 여러 권의 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는 여러 교리를 병렬적으로 모아 놓은 책이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는가?’라는 하나의 문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출발점에는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 외적인 행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미움,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처음부터 훨씬 깊은 곳을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낳는 ‘죄성’과 ‘정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은 단순한 윤리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내면 해부’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만든 내 안의 무엇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 이전에 의지가 있고, 의지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에서 생각과 의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의 목적이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이익이라면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외관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관을 보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낳은 의지와 목적을 보십니다.

 

이번 강의에는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강사는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지금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여러분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강단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서 ‘자기 자랑’이 나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를 ‘타락한 정욕’에서 찾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은 이미 성적 욕망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내가 한 일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정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히 육체의 몇 가지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AC를 읽어 온 우리에게는 ‘proprium’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욕심이 많다’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그 ‘자기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타락한 의지 전체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음식과 성욕과 재물욕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proprium에 깊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달리 정결하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나는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proprium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강단 위의 자기 자신에게까지 칼날을 돌리는 것은 귀하게 볼 부분입니다. 죄론을 남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금세 위험해집니다. ‘저 사람은 탐욕스럽다’, ‘저 목사는 명예욕이 많다’, ‘저 성도는 육적이다’ 하면서 죄론이 타인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론의 칼날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기본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회개는 타인의 악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살피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의에는 이 문제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재미있는 경험담도 등장합니다. 강사가 평신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주간 살아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하나님께 영광’,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하나님께 영광’ 하며 감사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그릇 밑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평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가 다소 우스워 보이지만 강사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당히 진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 하나가 바뀌자 내면의 상태가 즉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평온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면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생기고,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랑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거듭남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악은 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죄론’이 단순한 죄 목록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강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은 죄, 이것은 죄 아님’이라는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눈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었을 때 왜 기쁜가, 이것을 빼앗겼을 때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론은 추상적인 조직신학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실제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관찰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내 안에 이런 악이 있구나’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 삶에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일조차 proprium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까지 끊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정결하다’, ‘나는 이 정도로 연단받았다’는 또 하나의 자기 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방향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을 보지만 악만 바라보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악에서 얼굴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행합니다. 악을 제거하는 이유도 ‘아무 욕망도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4강 첫머리에 흐르는 ‘정결’이라는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인간성의 삭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을 하나씩 없애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은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사랑하고 더욱 깊게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가 달라집니다. 자기만을 위한 기쁨에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쪽으로, 소유하는 기쁨에서 유용하게 쓰는 기쁨으로, 인정받는 기쁨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쪽으로 사랑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강의 첫 질문인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한다면, 단순히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기보다 ‘우리 사랑의 질서가 정결해져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 아래 다른 모든 사랑들이 어떤 질서로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도 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4강은 이제 본격적인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정욕 자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능인데 타락하면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여러 욕망으로 세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랑의 질서’가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4강 2부에서 별도의 주제로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1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습니다. ‘죄를 알려면 먼저 행동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행동을 낳고 있는 내 안의 사랑과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목적은 자신을 정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주님께서 바로잡으실 수 있도록 자유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상당히 깊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4 2

정욕은 처음부터 악한 것이 아니다 : 창조된 애정과 타락한 욕망, 그리고 사랑의 질서

4강 1부에서 강사는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서 찾지 않고, 그 행동을 낳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내면을 움직이는 ‘정욕’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강의가 사용하는 ‘정욕’이라는 말의 범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욕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강의에서의 정욕은 훨씬 넓습니다. 강사는 그것을 크게 ‘애정’과 ‘욕망’으로 나누고, 애정에는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등이 있으며, 욕망에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삶을 움직이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구를 가리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정욕 자체가 처음부터 죄악된 것은 아니다’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고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연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이 기능들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자기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핵심진리’의 죄론을 모든 자연적 욕구를 악하게 보는 금욕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목에서 강사가 말하는 것은 ‘배고픔이 죄다’, ‘남녀간의 애정이 죄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죄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기능이 타락을 통하여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문제 삼는 것은 욕구의 ‘존재’보다 욕구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능들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적인 애정과 욕구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쉬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을 섬기면 선한 질서 안에 있지만,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 위로 올라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목적-원인-결과’의 질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는가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과 판단이 ‘원인’이 되며, 그것이 실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얻는 것과, 재산 자체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것은 외적으로는 모두 ‘돈을 버는 행위’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갖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 지위를 통하여 더 큰 유용성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섬기기 원한다면 명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성은 핑계가 되고 ‘내가 높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proprium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1부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타락한 정욕’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가 전도된 사랑’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다 정교하게 ‘사랑들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들은 서로 위아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주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는 이웃 사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그 자체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을 무조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병적인 자기부정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의 직업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사랑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다면 오히려 필요합니다. 문제는 ‘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 자기 사랑은 지옥적인 사랑으로 전도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진리’가 정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표현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으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의 기쁨은 자연계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만족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 만족을 느끼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결정적입니다.

 

가령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 자체는 악한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선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으면 불편해진다면 그때 숨어 있던 다른 사랑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동일한 선행이지만 내적으로는 두 사랑이 서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순수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봉사하면서도 감사받고 싶으며,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은 이런 혼합된 동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작은 선한 의도를 붙드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 섞여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조금씩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내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하지 않으니 나는 위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혼합된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일부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는 주님만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랑 안에 아직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구나.’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악을 물리치면서 선한 동기가 점점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강한 자기 성찰은 매우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파헤쳐 ‘이것도 정욕, 저것도 정욕, 이것도 자기 만족’이라고만 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될수록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기라는 것은 없어져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자기 것처럼 행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말하는 ‘천적 proprium’, 곧 주님에게서 받은 새로운 own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은 ‘나’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짓된 ‘나’에서 참된 ‘나’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애정 자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고, 부부간의 애정을 죽이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기쁨을 없애고, 일을 성취하는 만족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애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애정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우상’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올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직관적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그것을 잃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애정이 있지만 그 모든 애정을 조직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목적으로 삼으면 다른 자연적 사랑들이 그 아래에서 질서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으면 종교적 행위조차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한 방법은 ‘무엇을 잃을 때 내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돈을 잃을 때인가, 명예를 잃을 때인가, 사람의 인정을 잃을 때인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인가, 가족에 대한 내 뜻이 좌절될 때인가. 이런 순간에 평소 감추어져 있던 지배적 사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욕의 첫 번째 형태로 ‘혈육간의 애정’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마태복음 10장 37절, 곧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가져와, 가족 사랑조차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혈육간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거듭나면서 그것이 영적 사랑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내 자녀니까’, ‘내 부모니까’, ‘내 가족이니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혈연애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서 ‘이 사람이 주님께 속한 한 영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혈연을 넘어서는 체어리티가 그 자연적 사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영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꾼다면 혈육간의 애정이 높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의 영원한 선을 위해 때로는 바로잡아 주고, 부모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사랑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참된 사랑으로 만들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결국 자녀를 ‘나의 것’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그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애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질’을 변화시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행동 안에도 전혀 다른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뒤에도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번 4강의 ‘정욕’이라는 용어를 독자는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정욕’을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란한 욕망’과 동일시하면 강의 전체가 크게 왜곡됩니다. 이 강의에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라는 넓은 영역을 가리키며, 핵심 문제는 그것이 타락하여 ‘자기 만족’과 결합하고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설명 역시 ‘이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죄인가?’보다 ‘이 욕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작은 차이도 점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심진리’는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끊고’, ‘죽이는’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한 사랑을 물리치는 싸움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질서의 회복’으로 설명하는 데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서로를 보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언어는 악과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긴장을 일깨우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싸움의 목적이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아래 바른 질서로 되돌리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4강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욕이 있다’는 사실보다 ‘정욕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종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자연적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바로 그때 자연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선물로 주어진 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은 사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애정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이 가장 깊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사랑 아래 이웃 사랑과 자연적 애정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사람의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강의는 여기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비롯한 여러 정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통하여 식욕과 인간의 육적 요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강한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절제’와 ‘억압’, ‘시험’과 ‘거듭남’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것을 4강 3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 3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 : 억압이 아니라 주님 아래로 돌아오는 것

4강은 ‘정욕’을 인간에게 처음부터 악하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는 자연스럽게 매우 실천적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정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끊는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그 의미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구와 애정을 없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듭남은 곧 자기 억압이나 금욕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으며, 친구와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을 이 강의 자체의 앞뒤 맥락에서 읽어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뜻보다는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은 생각으로 ‘악이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까 봐, 처벌받을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강의의 강한 언어에는 단순히 악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실제로 싸우라는 중요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악한 애정 자체가 사라진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욕망의 뿌리까지 이미 제거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데도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 안에서는 실제 전투가 일어납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proprium의 애정이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것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내적 충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초기에는 ‘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화가 난다고 즉시 화를 쏟아내지 않고, 욕심이 생긴다고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며, 음란한 욕망이 일어난다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계속 이를 악물고 평생 욕망을 눌러 놓는 상태가 천국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깊은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반복해서 죄로 알고 물리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악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약해지고 반대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이 훨씬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쁜 것’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단순한 행동 교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행동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문제를 주님의 광야 시험과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로 읽습니다. 육체는 떡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떡보다 더 높은 곳, 곧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에는 분명한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주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필요에 지배당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음식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성욕은 결혼과 인류의 지속에 관계된 자연적 기능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도될 수 있습니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쉼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맡겨진 유용성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 역시 생활과 유용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소유 그 자체가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욕구가 어떤 질서 아래 있느냐’입니다.

 

다만 주님의 광야 시험을 ‘식욕을 절제하신 사건’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시험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절제한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계로부터 취하신 유전적 인간성을 통하여 지옥들과 싸우셨고, 계속되는 시험과 승리를 통해 그 인간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 역시 지옥 전체와의 신적 전투라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의 실천적 적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층위를 구별하면 됩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육체의 요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속뜻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전투와 영화라는 훨씬 깊은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전자의 적용을 폐기하기보다 후자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정욕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은 금식할 수도 있고, 술을 끊을 수도 있으며,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금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절제만으로는 사람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고,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나는 명예를 초월한 영적인 사람’이라는 더 은밀한 명예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 자체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 하나를 억제했는데 그 에너지가 더 깊은 propr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싸우는 방식은 매우 독특한 긴장을 갖습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서 알아서 제거하시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결단하고, 피하고, 거절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와 인플럭스가 함께 작용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싸우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끊어라’,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언어에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 말을 ‘내 의지력으로 나를 정결하게 만들라’고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엄청난 자기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자기 의에 빠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악을 물리친다’고 이해하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역사가 동시에 살아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험’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단순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나는 이것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시험이 오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은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목적은 강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새로운 사람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의 거듭남 이야기와도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악한 영들과 선한 천사들의 인플럭스 사이에서 실제적인 영적 싸움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에게는 그것이 ‘내 생각’, ‘내 욕망’,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가운데 자유가 보존됩니다. 인간은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보기보다, 긴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하나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싸우고, 얼마 뒤 그보다 더 깊은 동기를 발견하고 또 싸우며, 어느 정도 정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은밀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평생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친 일이며, 그 깊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에서 ‘완전’이나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공용복 선생의 전통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앞으로 매우 중요한 대화가 필요해집니다. ‘죄성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체계 사이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유전적 악 자체가 마치 어떤 물질처럼 뽑혀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억제되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사랑하도록 변화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proprium만 놓고 보면 아무 선도 없음을 압니다. 바로 그 인정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나는 이제 악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내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압니다. 동시에 그것이 비참함이나 자기혐오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안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표현의 궁극적인 방향도 조금 달리 들립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아무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그 욕망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상태입니다. 배고픔은 있지만 음식이 주인은 아닙니다. 재산은 있지만 재물이 주인은 아닙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지만 가족이 주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삶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를 깊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성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배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요구,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악을 끊는 것 뒤에는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강한 금욕적 언어를 굳이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문자 그대로 자연적 욕망의 제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사랑의 질서 회복’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아 줍니다. 정욕과 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생명 자체와 싸우지는 마십시오. 악을 끊으십시오. 그러나 선한 애정까지 잘라내지는 마십시오. 자기 사랑의 지배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보다 ‘누가 주인인가’입니다.

 

그래서 4강 3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애정과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그 지배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이 싸움은 단순한 억압에서 사랑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원리를 혈육간의 애정과 가족 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복음서의 매우 강한 말씀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대환란’이라는 공용복 선생의 독특한 종말론적 틀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가까이 가다가 다시 분명하게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4강 4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 4

혈육의 사랑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 : 가족애의 제거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 그리고 대환란에 대한 중요한 구별

앞선 4강 2부와 3부에서 강사는 ‘정욕’이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 원리를 가장 민감한 영역 가운데 하나인 ‘혈육간의 애정’에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처럼 인간에게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도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매우 강한 말씀을 가져옵니다. 강의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혈육간의 애정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사랑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 ‘자녀에게 정을 떼라’, ‘가족을 멀리할수록 영적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의 방향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폐기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와 배우자를 냉정하게 대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주님 사랑과 충돌할 때 무엇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양을 줄이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를 묻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혈연에 기초한 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영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연적 혈연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에는 체어리티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은 전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가 악을 행해도 무조건 감싸 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부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선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악을 도와주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결국 그 자녀의 영원한 선을 해친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애정 안에 소유욕과 자기애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자식이니까’라는 이유로 선과 진리의 기준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면 자연적 혈연애 안으로 영적 사랑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내 것’으로 사랑하는 데서 주님께 속한 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궁극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잠시 관계 안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지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고, 상대의 진정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의 혈연관계 자체가 영원한 관계의 최종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상태가 드러나며, 같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합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부모와 자녀, 부부의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의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혈연 자체가 영원한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강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과 진리보다 앞세우는 자기중심적 애착을 끊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자연적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영적인 것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4강 전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중요한 보완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끊는다’, ‘죽인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전투적 표현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를 ‘질서’라는 언어로 보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강의는 가족애의 문제를 종말론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현재의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하면서 혈육간의 애정과 여러 정욕을 다룰 수 있지만, 앞으로 ‘7년 대환란’, 특히 ‘후 3년 반’과 같은 극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강의는 ‘반강제적으로’ 행실을 닦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환란을 실제 미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핵심진리’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 용어 차이가 아니라 말씀을 읽는 기본 방식의 차이와 관계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실제 역사적 미래 사건의 시간표와 연결하는 종말론적 틀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 주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각 시대 비교표’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회시대’, ‘대환란’, ‘천년그리스도왕국’, ‘새 하늘과 새 땅’ 등을 역사적 순서 안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은 자연계 우주의 물리적 파괴와 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결, 심판, 그리고 새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전쟁’도 단순히 미래의 군사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전투를 나타내며, 숫자와 기간 역시 말씀의 상응에 따라 영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7년’이나 ‘3년 반’을 미래 달력의 정확한 기간으로 놓고 종말의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존중하면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종말의 환난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에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상과 육에 붙들리지 말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강력한 목회적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의 영적 핵심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메시지를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7년의 정치·사회적 재난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시험받고, 기존의 종교적 외관이 무너지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영적 상태로 더 깊이 읽습니다.

 

특히 ‘반강제적으로 정결하게 된다’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자유’가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것은 인간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외부의 공포 때문에 악을 하지 않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악한 사랑이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환란 같은 극단적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어떤 사람은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비한 자동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지만, 환난이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거듭남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험과 강제를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만큼 내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보존됩니다. 선과 진리를 붙들 것인지, 악과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원하여 정욕을 끊지 않으면 나중에 환난을 통해 강제로 끊게 된다’는 식의 설명은 목회적으로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지금 자유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과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이 그것을 계속 거절할수록 자기 안의 악은 더욱 굳어질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은 그 사람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고, 거짓된 의존을 흔들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목회적 차이를 낳습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앞으로 대환란이 오니까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에만 놓이면, 신앙의 중심이 자칫 미래의 재난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대환란이 내일 오든 오지 않든, 오늘 내 안에서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종말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말론도 갑자기 우리의 현재 삶 가까이로 옵니다. ‘마지막 때’는 단순히 먼 미래의 세계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오래된 영적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거짓이 무너지고, 내가 감추어 두었던 악이 드러나며,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세우시는 과정에는 작은 의미의 심판과 새 창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개인 심리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적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형성을 다룹니다. 다만 그 동일한 신적 질서가 개인의 거듭남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시 가족애의 문제로 돌아오면 강의가 왜 이 두 주제를 연결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내가 정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를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나는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재산과 명예와 안전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사랑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대환란의 세부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의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냉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가족을 더욱 선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은 중요하지 않다’며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입은 proprium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맡겨진 이웃 가운데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식의 극단적인 영성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충실하게 돌보는 것도 유용성(use)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강한 말씀도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를 감정적 증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충돌하는 경우 어떤 자연적 애정도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우선성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하면 모든 낮은 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 아래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영적 성장에 대한 도표’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핵심진리’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성경의 역사를 인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가족, 재산, 명예,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흔들리는 경험은 일종의 ‘광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평소 의지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광야의 목적 역시 단순한 박탈이 아닙니다. 옛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광야 뒤에는 가나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악을 버린 자리에는 선한 사랑이 들어와야 합니다.

 

결국 4강에서 반복되는 ‘끊는다’는 언어를 우리는 계속 이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자기중심적 소유욕을 끊는 것입니다.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물욕을 끊는다는 것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명예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직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결국 끊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전도된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무엇이든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내 자녀’, ‘내 재산’, ‘내 명예’, ‘내 사역’, 심지어 ‘내 신앙’, ‘내 성화’, ‘내 영성’까지 붙잡습니다. 거듭남은 이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녀도 주님의 것이고, 재산도 주님께서 유용성을 위해 맡기신 것이며, 사역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것을 더 충실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강 4부의 중심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더욱 참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핵심 역시 고난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고 그 자유 가운데 주님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 상당히 가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주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연적 애정은 내려와야 한다’는 데서는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자적 ‘7년 대환란’과 ‘후 3년 반’을 통해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정결해진다는 종말론적 틀에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는 같은 문제를 자유와 사랑, 영적 심판과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지키려 했던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리고 4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혈육간의 애정에서 다른 정욕들, 특히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자기 만족의 문제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시에 ‘악을 끊는 것’과 ‘성화된 사람이 되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도 생깁니다. 이 부분은 4강의 죄론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4강 5부에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4 5

죄성정욕은 어떻게 결합하는가 :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을 지배하는 생명의 문제

4강은 이제 한층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식욕·성욕·물욕·명예욕·수면욕 등으로 넓게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본래부터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위해 주신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어떻게 죄의 통로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이 둘이 결합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의 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정욕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자연적 기능입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식욕이 있고, 인류가 이어지도록 남녀간의 애정과 성적 기능이 있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혈육간의 애정이 있고, 자연계에서 살아가도록 사물과 소유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죄성’은 이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의 죄악된 성질이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께서 주신 정욕과 결합함으로써 그 정욕을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보존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한 기능이었던 정욕이 ‘자기 만족’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좋은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된 인간성’과 ‘타락한 인간성’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원하는 능력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몸과 자연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면 구원은 자연스럽게 ‘몸에서 벗어나는 것’, ‘감정을 없애는 것’, ‘욕구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처음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된 것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연적 차원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자연계의 삶도 버려야 할 저급한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더 높은 영적인 것을 받아 표현하는 최종적인 그릇입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순종하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으로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속사람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다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정욕과 결합한 것이다’라는 설명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조금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떤 악한 ‘물질’이나 ‘성질’이 마귀에게서 인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것처럼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인간 안에 독립적인 실체처럼 주입되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자기가 사랑하여 받아들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 내 안에 죄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만 말하면 자칫 악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한 인플럭스가 지옥에서 온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없애지 않습니다. 악이 밖에서 유입된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 악은 그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마침내 그의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때 그는 ‘악이 들어왔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내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이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고, 거듭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의 결합’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자연적 애정과 욕구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욕 자체가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절제되지 않고 오직 자기 쾌락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이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과 안전과 지배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진리조차 사람의 박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2부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만족을 악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한 뒤 느끼는 기쁨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때의 기쁨도 있으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만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이것은 죄를 분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쁩니다. 그 기쁨이 곧 자기중심적인 정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자 갑자기 화가 나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해 주었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순간 내 선행 안에 섞여 있던 다른 목적 하나가 드러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선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인정과 보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행한 선을 전부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흔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과 악이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나는 순수한 선으로 이것을 했다’거나 ‘전부 악한 동기였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보다, 선한 애정과 자기 사랑이 섞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혼합된 상태에서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합니다. 동시에 설교를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사랑까지 가짜였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느 날 후자의 동기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더 칭찬하거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내 안에 이것도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발견이 회개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작업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니 정욕인가? 이것을 먹고 기쁘니 육적인가? 가족을 사랑하니 혈육의 정에 빠진 것인가? 칭찬을 받고 기쁘니 내 모든 사역이 거짓이었는가?’ 하는 식으로 가면 영적 삶은 자유를 잃고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그렇게 인간을 자기 내면에 갇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악을 발견하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운 뒤,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성과 정욕을 찾아낸다’는 강의의 요청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닥을 끝없이 파헤쳐 숨은 죄를 찾아내라는 뜻이라기보다, 실제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사람을 깎아내리는가,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가, 돈 때문에 진리를 양보하는가, 가족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가,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대상으로 보는가, 분노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악을 주님 앞에서 다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회개를 매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내적 악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모두 자기 힘으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싸우면 그 싸움을 통하여 더 깊은 내면이 열립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양파 껍질을 한꺼번에 벗기는 것처럼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리메인스’와 연결해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AC에서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를 시험과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 안에는 악밖에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AC의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온 것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고 보존하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죄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자기 안의 악을 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배후에는 이미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악을 보여 주시는 것은 정죄하여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영적으로 퇴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진리의 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성’이라는 말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죄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처럼 이해하면 ‘나는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은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온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고 있으며 거듭날 수 있도록 자유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악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죽인다’는 표현도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나에게서 선이 나온다’, ‘내 지혜로 진리를 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여기는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갈수록 인간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참된 개성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애정과 유용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고유한 모습을 더 온전히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이 가진 강한 ‘자기부인’의 언어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는 매우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찾아내어 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합니다. 그 강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삶이 변해야 하고, 숨은 욕망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성화의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러나 누가 그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집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성을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성화는 쉽게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악이 물러난 자리는 반드시 선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탐욕을 끊었는데 체어리티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끊었는데 결혼의 거룩함과 상대방을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예욕을 끊었는데 유용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빈자리만 생긴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소유욕을 끊었는데 가족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사랑 자체가 메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악을 제거하는 과정’인 동시에 ‘선이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거짓이 제거되는 만큼 진리가 자리를 잡고, 악한 애정이 물러나는 만큼 선한 애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욕과 거듭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금욕은 ‘하지 않는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한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4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가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분별하고 철저히 자기 성찰하여 회개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론의 목적은 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실제 삶에서 그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적 사랑’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고, 지식도 그 사랑을 섬기며, 심지어 종교도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면 성경 지식마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적이면 자연적 재산과 능력과 지위까지 이웃의 유용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궁극적인 질문은 ‘내게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내 생명의 중심에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성’과 ‘정욕의 결합’이라는 이번 강의의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proprium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는 것이 타락의 질서이며, 거듭남은 그 자연적 애정들이 다시 속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식욕, 같은 재산, 같은 가족, 같은 직업, 같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인간을 ‘욕망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에게도 애정이 있고 열망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순수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남보다 높아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수행하기를 기뻐하며, 자기 영광보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강 5부의 중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죄성의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욕망들을 하나씩 잘라내어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공용복 선생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다루라’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처럼 눈에 잘 보이는 욕망 몇 가지를 절제했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 신앙이 더 높아야 한다’는 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을 이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핵심진리’의 죄론과 AC의 거듭남 이해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실제로 싸우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그 싸움에서 누구의 힘을 의지하고 있으며, 무엇이 당신의 새로운 사랑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라고 한 질문을 더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죄론은 단순한 금욕도, 단순한 교리도 아닌 실제 거듭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4강은 이러한 죄성과 정욕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가져가면서, 인간이 자신의 행실을 어떻게 살피고 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화’를 죄를 하나씩 제거하여 어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사람의 의지와 삶을 점점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까지 가장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4강 6부에서는 바로 그 ‘성화와 거듭남’의 문제를 중심으로 4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4 6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것 : 큰일보다 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성화는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4강의 마지막 흐름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죄성’과 ‘정욕’을 다시 매우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립니다. 강사는 죄론을 연구하는 목적을 단지 인간의 타락 구조를 설명하는 데 두지 않습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행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철저한 회개생활도, 영적인 성장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론은 결국 ‘빛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생활 속에서 세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4강 전체의 초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죄성’, ‘정욕’, ‘타락’, ‘마귀’ 같은 상당히 무거운 단어들이 등장했지만, 강의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대한 악행 몇 가지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가운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작은 불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죄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활 구석구석의 죽은 행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사가 들었던 ‘밥그릇 밑의 죽은 바퀴벌레’ 이야기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에도 감사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불쾌한 상황 하나가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의 평안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강사는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평소에는 숨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이 환경의 자극을 만나 ‘행실’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내적인 사랑과 애정은 외적 상황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온유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고,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기대가 좌절되고, 몸이 불편해질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proprium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시험이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보고 불쾌해진 것 자체를 곧바로 영적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꼭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불결한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자연적 반응 자체는 창조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 자연적 반응이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나느냐입니다. 불편을 느끼는 것과 그 불편 때문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은 다릅니다. 싫은 맛을 느끼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다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영적인 악을 그대로 동일시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반응을 죄로 의심하는 과도한 자기검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식사에서 음식이 조금 짜더라도 짜증을 내기보다 물을 타서 먹든지 덜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작은 상황에서 ‘입으로 상급을 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상급을 보실 때 ‘큰 사업을 했는가, 큰 교회를 목회했는가, 많은 헌금을 했는가’ 같은 외적 규모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했는가’를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큰일을 했든 작은 일을 했든, 유명한 사람이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든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죄와 정욕을 회개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4강 전체에서 매우 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죄성 제거’,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 ‘이기는 자’, ‘익은 열매’ 같은 매우 높은 단계의 언어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만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성화를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단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의 끝으로 갈수록 성화의 현장이 다시 식탁과 말투와 사람 관계와 작은 불편으로 내려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생활의 종교’를 생각하면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며, 불의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종교적 활동만 해야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연계의 수많은 관계와 책임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삶으로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목회했는가’보다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외적 결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 명예와 자기 지배를 향하고 있다면 영적인 성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정직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했다면 그 삶 안에는 실제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큰 상급’을 쌓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을 외부에서 별도로 지급되는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의 행위 안에는 이미 그 행위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선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상태가 천국적 상급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 큰 상을 받는다’는 계산으로 선을 행하면 아직 자기 유익이 목적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선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웃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행하고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선과 상급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공로점수를 많이 모은 사람이 더 좋은 상품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쓰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내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받지 못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버리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은밀한 선행을 하라는 방향으로 강의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4강의 죄론이 도착하는 곳은 ‘죄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조금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익은 열매’가 되는 비교적 분명한 완성 단계가 강조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성화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며, 그런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이 단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인간이 이곳에서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공용복 선생의 강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완성’을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 안의 모든 유전적 악이 존재론적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는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질서 아래 놓이고 억제되며, 인간은 그 악을 사랑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proprium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점은 ‘성화’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나는 죄성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정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 proprium이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명예욕은 버렸지만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용복 선생의 전승 안에도 이 위험을 완화하는 매우 귀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 ‘훌륭한 성도는 무엇을 많이 가진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라 회개를 잘하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낮추지 말고 그대로 증거하되, 자신의 부족함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높은 ‘완전’의 언어와 함께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나는 이제 회개할 것이 없다’로 가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짐에 따라 자기 안의 더 미세한 동기까지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악만 죄로 보였는데,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의 자기 자랑,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감사받고 싶은 동기,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아집까지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퇴보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햇빛이 희미할 때는 방 안이 깨끗해 보이지만 강한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의 먼지까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자기 proprium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나는 내 안에서 악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더 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께 돌이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꽤 아름답게 만납니다. 완전함을 자기 무결점의 확신으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빛 앞에서 계속 자기 것을 내려놓으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회개’도 죄책감을 오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는 죄와 정욕을 ‘철저히 회개’하라고 반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회개에는 반드시 실제 생활의 변화가 포함됩니다. 악을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음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나서 오래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말을 삼키는 것이 회개의 실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생활 구석구석’과도 정확히 만납니다. 대단한 순교의 순간이 와야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오는 작은 선택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싶을 때 기다려 주는 것, 내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무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변명하지 않는 것, 불편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과 진리가 실제 자연적 삶 속에 내려옵니다.

 

다른 강의에서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들어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했다’고 설명하고, 생활 속의 ‘작은 원수’ 앞에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오래 참는다’는 말씀을 적용해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 것도 바로 이 전통의 일관된 방향을 보여 줍니다. 거대한 ‘익은 열매’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통해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익은 열매’를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높은 영적 상태의 자기 인식으로만 이해하면 평범한 성도는 언제나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관계와 작은 말과 작은 책임 안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열매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엌과 식탁과 사무실과 교회 복도와 전화 한 통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차원에까지 선과 진리가 내려와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실제 행위가 없다면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은 의지를 통하여 행위가 되어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행위가 영적인 것의 최종적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의 실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자연적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고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행실’의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으로 보이는 행실’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행실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설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식사하고, 일하지만 그 안을 움직이는 생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정과 자기 유익이 움직이면 외관은 선해도 내적인 성질은 달라지고, 체어리티와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면 일상적인 작은 행동 안에도 천국적 생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강 전체가 처음과 끝에서 아름다운 원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죄론을 왜 공부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렇다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답은 거대한 사건보다 ‘생활 구석구석’입니다. 결국 죄론은 지옥의 죄 목록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자리들에서 어떤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부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4강의 강점을 상당히 높이 보고 싶습니다. 죄를 추상적인 ‘원죄’나 법적인 유죄 상태로만 놓아두지 않고, 사람의 애정과 욕망과 행실까지 들어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죄 문제는 다 끝났다’는 식으로 삶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성품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긴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에 계속 보태는 것은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 애정과 욕망 자체를 악으로 만들지 말고 그 ‘질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죄와 싸우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셋째, 성화를 ‘죄가 전혀 없는 자기완성’보다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선과 진리가 삶의 기쁨이 되는 거듭남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죄를 안 짓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닙니다. 전자는 두려움이나 억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단지 악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완성 방향은 ‘하지 않음’에서 ‘사랑하여 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의 마지막 찬양의 ‘사랑으로 행하라’는 방향과도 잘 만납니다. 결국 오랜 죄론 강의의 마지막 말이 ‘죄를 무서워하라’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가 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벗는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정욕의 지배를 끊는 목적도 더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자기중심적 만족을 내려놓는 목적도 주님과 이웃의 선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4강 전체를 관통했던 ‘정욕’이라는 말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욕은 이 강의의 용법에서 인간의 애정과 욕망을 넓게 가리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주어졌지만 타락하여 자기중심적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애정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애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 다시 질서 있게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욕도 쓰임을 섬기고, 재물도 쓰임을 섬기며, 명예도 쓰임을 섬기고, 가족 사랑도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섬깁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린다’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훨씬 깊은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칭찬을 전혀 듣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 사랑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거듭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과 쓰임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자연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천국의 질서를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도 무위와 정지가 아니라 쓰임의 삶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그 쓰임의 기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강의 ‘생활 구석구석’이라는 표현은 아주 좋은 끝맺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영계 지식도, 복잡한 종말론도, 성화의 단계도 결국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생명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하루의 작은 관계들 속에서 악을 죄로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쓰임을 행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도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 무엇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익은 열매’와 함께 읽으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을 지나치게 딱딱한 완전주의로만 읽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를 잘한다는 것은 자기 악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실제로 돌아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지막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론의 목적은 인간을 죄에 사로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생명을 막고 있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회개하고,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이렇게 깊어집니다. ‘그 열매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주님께서 그의 의지와 삶 안에 심어 자라게 하시는 선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4강은 6부로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처음에는 ‘죄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정욕’, ‘죄성’, ‘사랑의 질서’, ‘십자가에 못 박음’, ‘가족애와 대환란’, ‘성화와 거듭남’을 지나 마지막에는 ‘생활 구석구석의 사랑의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앞서 한 편으로 너무 압축해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따라오니 이 강의가 단순히 ‘욕망을 죽이라’는 금욕 강의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묻는 꽤 치밀한 죄론이라는 점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이 이 강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정욕의 제거’보다 ‘사랑의 질서 회복’,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 생명’ 쪽으로 한층 더 깊게 열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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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3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3강 1부‘영계의 구조와 실상’ - ‘익은 열매’와 사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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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그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하므로 그의 제물 역시 그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내고, 아벨이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하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말한다는 점입니다. 예배와 예배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사람이 손에 들고 온 물건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 의도, 삶입니다. 제물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있다면 그 외적 행위만으로 주님과 결합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안에서 드리는 외적 예배는 그 안에 내적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은 ‘덜 좋은 것을 바쳤기 때문’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그 예배의 근원 자체가 질서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겨야 하는데 사랑에서 독립하였고, 진리가 선으로 인도되어야 하는데 진리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예배를 임의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은 본질상 주님의 사랑과 결합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도 따뜻함이 없으면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진리가 있어도 선이 없으면 영적 생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AC.326은 오늘의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배의 참됨은 예배당 안에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주일의 예배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악을 멀리하고, 이웃의 선을 구하려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의 기도와 찬송과 예물에는 그 삶에서 형성된 체어리티가 함께 들어갑니다. 결국 주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곧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과 그 삶에서 흘러나오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두 종류의 생명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드리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나며, 이제 이 분리의 결과로 드려지는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다음 단계의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바로 그 반응 속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왜 마침내 체어리티를 해치게 되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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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4:3-5)

 

AC.326

 

각각의 예배가 묘사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가인의 제물(offering of Cain), 체어리티의 예배는 아벨의 제물(offering of Abel)로 묘사됩니다. (3-4)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졌으나,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5) 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관념이나 교리로 머물지 않습니다. 각각 자기에게 맞는 예배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사람이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표현은 ‘worship from charity’, 곧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입니다.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 안에 체어리티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바라는 내적 생명이 외적 예배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25에서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예배 역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예배는 사랑과 별개로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즉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일 수 있고,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교리를 말하고 주님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 안에 체어리티가 없다면, 겉으로는 주님을 향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듯이, 예배도 삶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두 형제가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시고,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 그 자체보다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므로 받아들여졌고,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도 주님께서 임의로 거부하셨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그 자체로 주님의 사랑과 결합할 수 없다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은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교리적으로 옳은 말을 하면서도 가인의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을 드리며, 심지어 열심히 신앙을 변호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삶에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 ‘내 교리가 얼마나 정확한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나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가’, ‘나의 신앙은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나타나는가’와 분리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을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25에서도 매우 중요했던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faith’ 자체가 아니라 ‘faith separated from love’,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선은 그 진리를 삶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룹니다.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본래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AC.326이 ‘아벨의 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 자체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구별됩니다. 참된 예배의 근원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삶에서 형성됩니다. 이웃을 속이고 미워하며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가 예배 시간에 거룩한 형식을 갖춘다고 해서 그 형식 자체가 내적 예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그 삶에서 나온 사랑이 기도와 찬송과 말씀 읽기와 헌물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예배의 내적 질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의 질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을 바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과 진리는 본래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물은 ‘제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proprium의 행위라기보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에는 이러한 인정이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점차 ‘내가 안다’, ‘내가 믿는다’, ‘내가 드린다’는 자기의 공로와 자기 의로 기울 위험이 있습니다.

 

AC.326은 그래서 창4의 비극이 더욱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 첫 번째 분리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납니다.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면 예배도 둘로 갈라집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옵니다. 결국 창4가 묻는 것은 ‘당신은 예배를 드리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AC.326, 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AC.326.심화 1. ‘왜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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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 아벨의 속뜻’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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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먼저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고, 믿음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그 순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먼저 논증하여 믿은 뒤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이 퍼셉션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외부에서 배운 교리를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떼어 놓는 것 자체가 본래의 질서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진리가 있었고, 진리 안에는 그 진리를 낳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신앙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뜻합니다.

 

그런데 후손들에게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기보다, 진리를 사랑과 별개로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신앙에 관한 교리’가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리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퍼셉션이 약해지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고 보존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가’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AC.325는 이 최초의 분리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교하고, 성경 지식이 아무리 풍부하며, 신앙 고백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교리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벨만 남기고, 가인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사랑을 표현하며,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창4의 첫 비극은 살인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아벨이 들에서 죽기 전에 이미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갈라졌습니다. 외적인 살인은 그보다 앞서 일어난 내적인 분리의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창4 전체의 출발점을 매우 깊은 곳에 둡니다. 교회의 파괴는 밖에서 누군가 교회를 공격할 때,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진리가 선으로부터, 교리가 삶으로부터 분리될 때 이미 시작됩니다. 그리고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AC.325, 창4:1-2, ‘창4 본문, 개요, 배경’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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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2) 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영적 분리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단순한 형제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분리되고,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입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through love’를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었다’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며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은 두 개의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진리이므로 믿고, 그러므로 사랑해야 한다’는 순서보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한다’는 천적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성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이해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 내용을 지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AC.325의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는 태고교회의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이 거짓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에서 가지를 떼어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줄기와 뿌리에서 분리되면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신앙은 선과 사랑 안에 있을 때는 살아 있지만, 그것들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라고 매우 정확하게 규정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창4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을 ‘악한 신앙’이라고 처음부터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참된 신앙의 요소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스스로 서려 하기 시작한 상태가 가인입니다. 이후 그것이 점점 자신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 체어리티를 억압하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한 친절이나 구제 활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에게 행하려는 사랑이며,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게 하는 내적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교리와 선행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단순한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본래 두 형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고, 체어리티는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독립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처음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태고교회가 쇠퇴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새로운 거짓 교리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교회 안에 있던 하나의 요소인 신앙이 전체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노골적인 거짓에서 시작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의 일부를 전체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을 절대화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신앙만’이 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진리는 참된 것이지만, 사랑과 삶에서 떨어진 진리가 되면 점차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섬기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은 선과 진리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점차 ‘자기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다’, ‘나는 믿는다’는 의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보다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주님께로 이끄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길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 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처음의 가인은 본래 교회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며, 아벨 역시 같은 교회 안의 체어리티입니다. 비극은 둘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데 있지 않고, 본래 하나여야 할 것이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을 붙들어야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악이 선을 죽였다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교회의 본질로 높이면서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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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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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창4, ‘창4 본문, 개요, 배경’(AC.324-337)

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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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는 삶’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응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영적 장소를 ‘지성소’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설교자는 역대하 5장의 솔로몬 성전과 언약궤, 그룹들, 지성소를 출발점으로 삼아 성막의 뜰과 성소와 지성소를 기도의 깊이에 대응시킵니다. 그리고 회개 역시 뜰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회개가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지성소의 회개’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아니라, 성령의 강한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서 실제로 돌아서 다시는 그 죄에 지배되지 않게 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먼저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성소-지성소’라는 구조를 인간의 영적 깊이와 연결하려는 발상 자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던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 구조와 기구와 재료와 배치 전체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거듭나는 인간의 내면을 표상합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내적인 것, 더욱 높은 천국의 것,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속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성막을 설명하면서 ‘뜰에 머무는 신앙이 있고, 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으며, 지성소까지 들어가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영적 적용을 시도하는 것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성경 이해와 의외로 가까운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 구조를 주로 ‘기도의 깊이’와 연결합니다. 특히 방언으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하면서 점점 깊이 들어가,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경험적 구조를 제시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시간 정도 기도하면 어느 단계까지 가고, 두세 시간 방언기도를 계속하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경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이미 오래 훈련된 사람은 더 자주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여기에서 상당히 신중해집니다. 왜냐하면 성막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시간의 양적 증가’를 표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그리고 더욱 내적인 천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몇 시간을 기도했느냐보다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주님에게로 돌이켜졌느냐와 관계됩니다. 한 시간 기도한 사람이 뜰에 있고, 세 시간 기도한 사람이 지성소에 있다는 식의 공간적, 시간적 대응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시간 기도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세상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주님께 집중하고, 자기 욕망과 잡념을 내려놓으며 기도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내면을 정돈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의 영적 공식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오래 기도하면 더 깊은 영적 공간에 들어간다’는 공식이 형성되면, 영적 상태의 깊이가 기도시간이나 체험의 강도로 측정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사랑의 질입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곳은 가장 강렬한 환상을 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설교의 중심인 ‘회개’로 들어가면, 서사라 목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상당히 좁아집니다. 설교자는 회개를 세 단계처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정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지만,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다시 넘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가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의 빛 가운데 자기 죄의 실상을 너무나 깊이 깨닫고 통회하며, 그 결과 실제로 그 죄에서 벗어나 다시 그 죄에 지배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나 순간적인 죄책감을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살피고, 자기 안에서 특정한 악을 발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 생활에서 그 악과 싸워 그것을 피해야 합니다. 결국 회개의 진실성은 ‘얼마나 슬퍼했는가’보다 ‘그 악을 실제로 죄로 여기고 떠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서사라 목사는 심지어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회개가 안 된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심으로 죄를 자백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믿어야 하며,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균형입니다. 설교 전체에는 통곡과 강렬한 성령 체험이 상당히 강조되어 있지만, 적어도 눈물 자체를 구원의 조건이나 회개의 절대 기준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서사라 목사의 설명에서는 가장 깊은 회개가 이루어질 때, ‘회개의 영’이 강하게 임하고,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며, 통곡이 터지고, 그 결과 그 죄를 다시 짓지 않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아름다운 회심 경험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어떤 악의 추함이 갑자기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고, 그것을 진심으로 혐오하게 되어 삶이 크게 바뀌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 전체를 이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듭남은 대체로 훨씬 길고 깊은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악을 깨닫고 버리기로 결심했는데도 다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싸우고, 또 넘어지고, 다시 주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숨어 있던 더 깊은 동기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차례로 드러납니다. 자신은 이미 어떤 악을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악의 더 깊은 뿌리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회개를 했으면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은 회개의 지향점을 말하는 것으로는 매우 좋지만,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명제로 사용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싸움’입니다.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과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유혹입니다. 그리고 싸움이 반복되면서 이전에 즐거웠던 악이 점차 싫어지고, 처음에는 힘들게 행했던 선이 점차 자연스러워집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 자체를 바꾸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 단번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처럼 설명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며, 그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어 가신다고 보는 것이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여기서 ‘지성소’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에게 지성소는 상당히 체험적인 공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때로는 자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곳처럼 묘사됩니다. 설교 후반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개인적 체험까지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깨달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결론과 조심해야 할 과정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거나 어떤 영적 형상을 경험했다는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훨씬 세밀해집니다.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상응을 따라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빛이나 얼굴이나 인물이나 장소를 보았다고 해서, 그 보이는 형상을 곧바로 하나님의 본체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 경험을 해석하는 문제는 별개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사라 목사의 천국, 지옥 체험을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보았다’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별을 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영계의 현상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영계에서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상응을 따라 나타나는지, 영들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인간이 그 경험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라 목사의 체험을 처음부터 ‘거짓이다’라고 배척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직접 보았다니 그대로 사실이다’라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방언기도를 다루는 부분 역시 같은 원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8장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을 장시간 방언기도와 연결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더라도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방언기도 시간을 늘려 갈 것을 상당히 강하게 권합니다. 여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 설교의 ‘하나님께 묻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높으므로 자기 판단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로마서 8장의 이 구절을 곧바로 장시간 방언기도의 기술적 근거로 연결하는 것은 별도의 해석적 검토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바울서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복음서, 계시록처럼 연속적인 속뜻을 가진 말씀의 범주와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서 영적 세계의 구조를 세밀하게 끌어내기보다, 서사라 목사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 곧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므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원리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사실 ‘지성소 체험’도 ‘방언 세 시간’도 아닙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성소 단계의 회개를 설명하면서 ‘나는 정말 다시는 화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또 화를 내고 말았다’는 식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바로 여기에 거듭남의 실제 현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을 원하지만 옛 욕망이 다시 일어납니다.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힘의 한계를 경험합니다. 서사라 목사는 이것을 ‘자기 절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은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기 힘으로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처음에는 ‘내가 결심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목적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꺾는 것입니다. ‘내가 선해질 수 있다’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선의 능력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 점에서는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자기 절망 성령의 도움 죄를 이기는 능력’이라는 흐름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상당히 의미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리메인스’, ‘유혹’, ‘자유’, ‘이성’,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훨씬 긴 과정을 더합니다. 인간의 변화는 어느 순간 강력한 영이 임하여 이전의 악을 단숨에 없애는 사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선과 진리의 상태들, 이후 받아들인 말씀의 진리들, 삶에서 겪는 수많은 영적 싸움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어떤 황홀한 영적 경험의 ‘최종 방’이라기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깊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설교에서 말하는 ‘-성소-지성소’를 조금 다르게 다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뜰은 아직 외적인 종교생활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하니까 죄라고 하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하지만, 아직 그 진리가 자기 내면의 사랑과 충분히 연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면 진리가 인간의 이해성과 양심에 들어옵니다. ‘이것은 정말 악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진심으로 깨닫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지성소에 해당하는 더욱 내적인 상태에서는 그 진리가 단지 ‘해야 할 의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결합합니다. 이제 악을 피하는 이유가 벌이 두렵거나 명령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악 자체가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치는 것이어서 싫어집니다. 반대로 선은 명령받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좋아집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서사라 목사가 말하고 싶었던 ‘지성소의 회개’도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한 번 크게 울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보다 더 깊은 변화가 됩니다.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악을 싫어하게 되고, 선을 억지로 행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외적 행동 하나가 고쳐지는 것을 넘어 그 행동을 낳던 애정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첫 번째 설교와 두 번째 설교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첫 설교에서는 ‘하나님께 물어라’였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지성소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라’입니다. 두 설교 모두 서사라 목사의 영성에서 매우 강한 한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신앙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하나님과의 교통과 경험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설교가 많은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교리적 대상이 아니라 지금 묻고, 듣고,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놀랍게도 하나님을 추상적 교리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순간에 주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살아 있고, 인간은 그 인플럭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에 매우 깊은 공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만남’을 특별한 체험에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가장 깊은 결합은 무엇을 보고 듣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 받아들여져 그의 삶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사라 목사가 말하는 지성소까지 들어가라는 권면의 방향은 귀하지만, 그 지성소를 장시간 방언기도 끝에 도달하는 특별한 영적 체험의 장소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에까지 들어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상태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면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도 달라집니다. 그것은 가장 많이 울어 본 회개도 아니고, 가장 강렬한 임재를 체험한 회개도 아니며, 가장 오래 방언기도한 사람이 도달하는 회개도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실제 삶에서 그것을 피하며,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싸우고, 그렇게 오랜 거듭남을 통하여 마침내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랑 안에서 주님과 인간이 결합합니다.

 

그 의미에서 서사라 목사의 이 설교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무언가를 잘라내기보다 한 단계 더 깊게 가져갈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회개는 실제로 죄에서 돌아서는 데까지 가야 한다’, ‘자기 힘으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신앙은 외적인 종교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중심 메시지는 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소-지성소’를 기도시간과 체험의 단계로 고정하고, 강렬한 회개 체험이 곧 악의 완전한 제거를 보증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거듭남의 질서가 중요한 보완을 제공합니다.

 

결국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보았는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 ‘얼마나 강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그 선과 진리가 인간의 가장 깊은 사랑 안에 자리 잡고, 거기에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성막 전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어 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말의 가장 깊고도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SY.55, 서사라 목사, ‘하나님께 묻는 자와 묻지 않는 자의 결말’ (2019010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서사라 목사의 ‘하나님께 묻는 삶’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장 12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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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심화

 

1. ‘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4, 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 이건 좀... 차라리 창4 따로, 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갑자기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그대로 시간순으로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태어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 긴 세월 동안 나이만 먹다가 뒤늦게 셋을 낳았다는 것인지, 또 태고교회는 가인 이후, 오랫동안 어두운 상태에 있다가 셋 이후에야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창4와 창5를 그렇게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장은 동일한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을 각각 집중하여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질의 흐름, 곧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보여 줍니다. 반면 창5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을 거쳐 노아에 이르는 태고교회의 주된 계승선을 따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모두 끝난 뒤에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계열은 상당 부분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나란히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나란히’라는 말도 모든 인물의 출생 연대를 정확히 맞추어 역사적 동시성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보다 ‘상태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가인,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단지 개인만이 아니라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고,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서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한쪽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다음, 동시에 다시 다른 계열로 돌아가 이번에는 그쪽 계열의 역사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은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대표되는 한 계열에서 셋으로 대표되는 다른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그 셋 계열을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 노아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줍니다. 즉 창4와 창5는 ‘먼저 가인 계열, 그 모든 역사가 끝난 다음 셋 계열’이라는 관계라기보다,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계열을 각각 추적한 두 개의 서술’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것을 너무 단순하게 ‘가인 계열은 악한 계열이고, 셋 계열은 선한 계열이다’라고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점차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면서 변질되어 간 데 있습니다. 또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완전한 상태로 노아까지 내려간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점차 쇠퇴하여 결국 홍수라는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두 계열 모두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영적 역사 안에 있으며, 다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라는 명칭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교회 한 세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손 교회들을 거쳐 홍수 직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교회 시대를 포괄합니다. 그 안에는 가장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교리적 계열도 있고, 그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새로운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의 어두운 모습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순간 태고교회 전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AC.324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두 흐름입니다. 인간, 즉 아담에게서는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고 교리들이 분리되어 여러 ‘heresies’가 생겨나지만, 주님에게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는 바로 이 두 흐름이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서로 다른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이 관점을 처음부터 가지고 읽으면, 앞으로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가 단순한 고대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분리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생명의 계보를 보존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역사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AC.324, 창4, ‘창4 본문, 개요, 배경’(AC.324-337)

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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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heresies)을 다루며, 그 후에 에노스(Enosh)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는 창4는 가인과 아벨,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마지막에 셋과 에노스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의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으로는 태고교회가 점차 쇠퇴하면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분리되고, 그 결과 여러 교리적, 교회적 계열이 생겨나는 과정,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를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perception)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독립적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하나였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체어리티(charity)와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특정한 교리를 전체인 것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AC.324가 말하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heresies’를 ‘이단들’이라고 번역하더라도,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특정 교단이나 단체에 대한 판정보다,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되고 절대화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합니다. 부분적인 진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라는 전체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를 신앙의 전부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후 가인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하게 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 역시 단순한 형제 살해를 넘어,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마침내 체어리티를 무시하고 소멸시키는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나 AC.324의 두 번째 절반은 전혀 다른 방향을 보여 줍니다. 교리들이 분리되고,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에노스’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교회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으켜진 것입니다. 인간은 교회를 분리하고 변질시키지만,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전의 교회가 더 이상 본래의 상태로 존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마련하십니다.

 

4:26의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 교회와 연결됩니다. 최초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주님을 예배하던 가장 깊은 천적 상태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님과 인간의 연결 자체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예배의 형태도 달라졌고, 주님께서는 그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한 족보상의 출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구원의 길을 계속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신 것은, 인간을 영원히 생명에서 쫓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창4에서는 그 보호의 섭리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되는지가 나타납니다. 인간이 가장 순수했던 천적 상태를 잃고, 교리와 신앙마저 분열시키더라도, 주님께서는 생명나무의 길 자체를 없애지 않으시고, 인간이 다시 그 생명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교회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심화

 

1. ‘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AC.324.심화 1. ‘창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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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창4 본문, 개요, 배경’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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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창4 앞(AC.320-322)의 구체적 사례를 뒤(AC.443-448)에서 제시하겠다고’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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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장 12절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태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하나님께 묻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병들었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낸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묻지 않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태도’라고 전개합니다.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이 ‘묻기’는 단순히 성경을 읽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차원을 넘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말, 그리고 마음속으로 즉시 들어오는 응답까지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사소통으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입니다.

 

먼저 이 설교의 중심 명제 자체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만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이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오류 가운데 하나는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지혜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지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에는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하시야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이 점에서는 적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아하시야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관한 답을 어디에서 구했느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영적으로 넓혀 읽으면 인간이 삶의 근원과 방향을 주님에게서 찾지 않고 자기 지성, 세속적 판단, 욕망, 미신, 또는 다른 어떤 피조된 것에서 찾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는 질문은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 됩니다. ‘나는 실제로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으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통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 애정과 욕망에 따라 사물을 보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그 사람의 사랑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참이라고 보고, 무엇을 중요하다고 판단하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혹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자신을 살피는 태도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묻는 사람’은 단순히 신비한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게 보면 자기 뜻을 절대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도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는 성경에 이미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용서를 명한다면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용서할까요?’라고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디로 이사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처럼 성경에 구체적인 답이 적혀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개인적 계시나 음성이 성경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존중하려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고 기다리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입’, 그리고 훈련이 깊어질 경우 질문하자마자 마음속으로 오는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답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에는 응답을 얻기 위해 금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훈련이 많이 되어’ 물으면 거의 즉시 응답이 온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자주 묻는 훈련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깊어지고 응답을 더 빨리 알 수 있다고 권합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할 것입니다. 영계로부터 인간에게 생각과 애정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애정이 인플럭스를 통해 들어온다고 끊임없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을 ‘생산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흐름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마음 안으로 어떤 생각이 들어온다’는 서사라 목사의 경험 자체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곧바로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떤 생각이 내 안에 분명하게 들어왔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판단은 전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는 오히려 이 둘을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고, 악한 영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으며, 자신의 기억과 애정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경험되는 수많은 사고도 있습니다. 더욱이 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사람의 생각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출처를 모르면 그것을 완전히 ‘내 생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강렬하거나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서사라 목사의 ‘자꾸 묻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 방식을 알게 되고, 훈련되면 거의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표현은 장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하루의 삶을 주님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 뜻을 내려놓으려는 훈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주일예배나 교리적 고백에 가두지 않고 일상 전체로 가져오게 합니다. ‘갈까요, 말까요, 이것을 할까요, 저것을 할까요’ 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면에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질문 → 내면의 응답 → 하나님의 뜻 확인’이라는 거의 자동적인 체계로 굳어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수 있고,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생긴 생각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반복적으로 어떤 응답을 기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응답’이라고 해석할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응답을 얼마나 빨리 듣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진리와 선에 의해 얼마나 새로워지고 있느냐입니다. 천국은 음성을 잘 듣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게 바꾸어 표현한다면, ‘주님의 뜻을 알려 달라고 계속 신비한 신호를 요구한다’기보다 ‘말씀 앞에서 자기 욕망과 판단을 내려놓고, 이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살피며,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행할 힘을 주님께 구한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듭니다. 주님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매 순간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하며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마침내 자기 생명처럼 살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합니다. 설교를 그대로 밀어붙이면 자칫 ‘하나님께 물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묻지 않아서 실패했다’는 구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교자는 ‘우리 인생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취지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히 사는 사람도 외적으로는 실패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항상 외적 성공의 정답을 알려 주는 체계가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실수와 고난까지도 허용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인도하시는 무한히 깊은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묻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보다 ‘묻는 사람은 실패 속에서도 주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다윗 역시 늘 완벽한 선택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죄를 범한 뒤에도 다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모든 선택에서 초자연적 정답을 미리 전달받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달을 때 그것을 자기 합리화로 덮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인정하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설교 후반의 ‘영에 속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먼저 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자동자막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전체 문맥에서는 이 뜻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겉 사람에게 즉각 솟아나는 충동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속 사람의 더 높은 원리 아래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온다고 곧 말하지 않고, 욕망이 생긴다고 곧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 판단이 옳아 보인다고 즉시 결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그 ‘멈춤’의 다음 단계가 반드시 ‘어떤 내적 음성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 양심, 이성적 숙고,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 책임, 현실적 조건을 함께 살피는 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보다 낮은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보존하면서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모든 결정을 직접적인 음성에 의존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라 목사의 설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서사라 목사의 언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대화적’입니다. 사람이 묻고 하나님께서 답하시며, 그 응답을 알아듣는 능력이 훈련을 통해 발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통은 대부분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선을 흘려보내시고, 천국을 통해 진리를 비추시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그의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강렬한 체험보다 오히려 어느새 선을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며, 악을 싫어하게 된 변화가 주님의 임재를 더 깊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사라 목사의 영적 체험 전체를 앞으로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았는가’, ‘무슨 음성을 들었는가’, ‘누구를 만났는가’만으로 참과 거짓을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게 됩니다. ‘그 체험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 외적 현상에 집착하게 하는가, 아니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게 하는가? 개인에게 주어진 말을 절대화하게 하는가, 아니면 말씀의 보편적 진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가?’ 결국 영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그 체험의 화려함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중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므로 내가 알아서 산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이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나는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점입니다. 또한 성경에 이미 명백히 주어진 명령을 개인적 응답으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구분도 중요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주님의 뜻을 구하라는 권면 역시 거듭남의 실제와 접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묻는다’를 ‘내면에서 특정한 문장 형태의 응답을 받아내는 것’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이성을 통해, 이웃을 통해, 현실의 질서를 통해, 때로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섭리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인도는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라는 개별 질문에 대한 즉답보다, 그 사람이 선한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버려야 할 핵심 메시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심은 상당히 소중합니다. ‘주님께 묻고 살아라.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 주님을 네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 다만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면 훨씬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네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의 음성이라고 여기지는 말라. 말씀의 진리와 선, 이웃 사랑, 이성과 자유 안에서 그것을 살펴라.’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묻는 삶’의 가장 성숙한 모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것 할까요, 저것 할까요?’라고 답을 받아 움직이는 삶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거듭남을 거쳐 주님의 뜻이 점차 자기 마음의 사랑이 되고, 그래서 특별한 음성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진실을 선택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는 상태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부모에게 매 순간 ‘이거 해도 돼요?’라고 묻지만, 성장할수록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여 묻지 않아도 그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의 성숙도 어쩌면 그와 같습니다. 주님께 묻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기 생명 안에 새겨져 살아 있는 ‘대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번 서사라 목사의 첫 설교가 앞으로 이어질 천국·지옥 체험 해설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이 설교만 보아도 서사라 목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인간은 그 음성을 실제로 듣고 분별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천국 방문, 주님과의 대화, 천국 인물들과의 만남 등을 살펴볼 때도 결국 핵심 질문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경험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영계로부터 오는 경험은 어떤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할 때 서사라 목사의 증언을 성급히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 잡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능하겠습니다.

 

 

 

SY.56, 서사라 목사, ‘지성소에서 드리는 회개’ (2019090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앞서 살펴본 ‘하나님께 묻는 삶’보다 서사라 목사의 영성을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보여 주는 설교입니다. 첫 설교에서 중심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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