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9.심화

 

1.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Jehovah shall satisfy thy soul in droughts, and make thy bones alert,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Isa. 58:11)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물 댄 동산(a watered garden)이 단순 풍요로운 자연 풍경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받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9의 흐름은 계속해서 에덴동산과 물과 강과 생명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사58:11은 바로 그 구조를 예언서의 언어로 다시 확인해 주는 대표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동산(garden)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진리와 지성이 살아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에덴동산은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이 질서 있게 흘러 들어오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동산이 살아 있으려면 반드시 ‘’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물(water)은 대체로 진리, 특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 댄 동산’이라는 표현은, 인간 안의 진리와 지성과 애정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으로 계속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물이 끊어진 동산은, 겉으로는 구조가 남아 있어도 실제 생명이 마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니라, 외적으로는 메마르고 부족해 보여도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이 공급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뼈(bones)는 가장 바깥의 지지 구조, 곧 인간 안의 외적 진리들과 삶의 틀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 내적 감동만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까지도 주님의 진리 안에서 강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는, 에덴동산의 물과 강들이 상징하는 영적 생명의 질서가 단지 창세기의 시적 묘사가 아니라, 예언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보편적 영적 원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계속 유입되는 진리와 선 안에서 살아나는 존재이며, 그 상태가 바로 ‘물 댄 동산’으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AC 전체의 흐름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proprium 안에 갇힌 인간은 결국 스스로 메마르게 되지만, 주님으로부터 받는 인간은 바깥 환경이 어떠하든 안에서 계속 물이 흐릅니다. 그래서 ‘물 댄 동산’은 단순 풍요의 비유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regenerated state, 곧 거듭난 인간 상태의 상징입니다.

 

 

 

AC.149, 창2:21, ‘갈빗대’와 ‘뼈’라는 인간의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은 ‘뼈’(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own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서에 이르기를, In the Word also, man’s own is signified by “bones,” and indeed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s in Isaiah: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1) Jehovah shall satisfy thy soul in droughts, and make thy bones alert,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Isa. 58:11)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66:14) Then shall ye see,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and your bones shall sprout as the blade. (Isa. 66:14)

 

시편에서도 In David: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35:10) All my bones shall say, Jehovah, who is like unto thee? (Ps. 35:10)

 

이것은 에스겔서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거기서는 뼈들이 살을 입고 영을 받는다고 합니다. This is still more evident from Ezekiel, where he speaks of bones receiving flesh, and having spirit put into them: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2] 사람의 own은 하늘에서 볼 때 전적으로 뼈와 같은 어떤 것으로 보이며, 생명 없고 매우 흉측하여 본질상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에는 살과 같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own은 그 자체로는 순전히 죽은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어떤 것, 곧 모든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생명에서 온 것이며, 만일 이것이 제거된다면 그는 돌처럼 쓰러져 죽게 됩니다. 사람은 생명의 기관에 불과하며, 그 기관의 성질에 따라 생명의 애정이 그러한 것입니다. 참으로 자신의 Own을 가지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Own으로 사람을 구속하셨고,Own으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의 Own은 곧 생명이며,Own에서 사람의 own, 곧 본질상 죽은 것이 살아나게 됩니다. 주님의 Own은 또한 누가복음 다음 주님 말씀으로도 전해집니다. The own of man, when viewed from heaven, appears like a something that is wholly bony, inanimate, and very ugly, consequently as being in itself dead, but when vivified by the Lord it looks like flesh. For man’s own is a mere dead thing, although to him it appears as something, indeed as everything. Whatever lives in him is from the Lord’s life, and if this were withdrawn he would fall down as dead as a stone; for man is only an organ of life, and such as is the organ, such is the life’s affection.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The Lord’s own is life, and from his own, man’s own, which in itself is dead, is made alive. The Lord’s own is also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Luke: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 하신 것도 같은 뜻이었습니다 (12:46). It was also meant by not a bone of the paschal lamb being broken (Exod.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12:46)



해설

 

AC.149는 ‘갈빗대’와 ‘’가 왜 인간의 own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지’를 결정적으로 밝혀 주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 own’이라는 등식 자체가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것이 어떻게 생명을 입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성경 전반에서 ‘’가 긍정적으로 쓰이는 예들을 제시합니다. 이는 own이 무조건 제거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는 표현은, own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때 인간 전체가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은 이 교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뼈는 본래 완전히 죽은 상태입니다. 거기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마지막으로 영이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산 존재’가 됩니다. 이는 인간의 own이 단계적으로 질서를 입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own은 스스로는 결코 살아날 수 없으며, ‘주님의 생명이 주입될 때에만’ 생명이 됩니다.

 

특히 중요한 문장은 ‘사람은 생명의 기관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가장 근본적인 정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own이 생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며, 실제 생명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지점에서 ‘주님의 Own’과 ‘사람의 own’이 대비됩니다. 사람의 own은 본질상 죽은 것이지만, 주님의 Own은 곧 생명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Own으로 사람을 구속하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생명으로 사람의 own을 살아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구조이며, 자유가 가능해지는 이유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께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의 Own이 인간의 own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뼈가 꺾이지 않은 것도, 주님의 신적 생명이 결코 손상되지 않음을 상징합니다.

 

AC.149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의 own은 뼈와 같아 죽어 있으나, 주님의 생명이 그것을 덮을 때 살이 되고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own을 없애는 데 있지 않고, ‘누구의 생명이 그 own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심화

 

1. ‘58:11

 

 

AC.149, 심화 1, ‘사58:11’

AC.149.심화 1. ‘사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

bygrace.kr

 

2. ‘사66: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 (사66:14) Then shall ye see, and your heart shall rejoice, and your bones shall sprout as the blade. (Isa. 66:14)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뼈’(bones)가 단순 육체의 뼈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가장 바깥에 있는 지지 구조, 곧 외적 인간과 그 안의 진리들을 뜻하며, 그것마저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9는 에덴의 강들과 물과 동산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인간 전체에 어떻게 흘러 들어오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사야 66:14는 그 생명이 가장 바깥 층까지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뼈’는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몸에서 뼈는 가장 단단하고 가장 바깥의 구조이며, 몸 전체를 지탱하는 틀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의미에서 뼈는 인간 안의 가장 외적인 것들, 특히 삶의 구조를 이루는 외적 진리들과 기억 지식들, 실천의 틀 등을 뜻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뼈가 살아난다, 강건해진다, 마른 뼈가 회복된다는 표현들은 단순 건강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외적 삶 전체가 다시 생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는 표현은 특히 아름답습니다. 뼈처럼 단단하고 메마른 것조차, 마치 새싹이 돋듯 살아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생명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사랑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외적이고 굳어진 층까지도 새롭게 합니다.

 

또 이 구절은 AC.149의 핵심 주제인 ‘생명의 유입’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 ‘물 댄 동산’이 인간 안의 내적 생명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여기서는 그 생명이 외적 인간의 구조까지 흘러 내려가 실제 삶을 살아 있게 만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유입은 단순 내면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가장 바깥 구조까지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마음이 기뻐한다’와 ‘뼈가 살아난다’가 함께 나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음(heart)은 사랑과 의지의 중심을, 뼈는 외적 구조를 뜻합니다. 곧, 안쪽의 사랑과 기쁨이 살아날 때, 바깥의 삶의 구조도 함께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regeneration, 곧 거듭남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층뿐 아니라 가장 외적인 층, 곧 ‘뼈’로 상징되는 삶의 구조와 외적 진리들까지도 살아 있게 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거듭남은 단순 내적 감정 변화가 아니라, 인간 전체가 생명의 흐름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시35:10’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35:10) All my bones shall say, Jehovah, who is like unto thee? (Ps. 35:10)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뼈’(bones)가 단순 육체 기관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바깥까지 포함한 전체 존재, 특히 외적 인간의 진리들과 삶의 구조를 뜻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전체를 살아 있게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함께 주님을 증거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35:10에서 다윗은 ‘내 모든 뼈가 말하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상한 표현입니다. 뼈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상응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뼈는 인간 안의 가장 외적이며 지지적인 구조, 곧 외적 인간과 외적 진리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모든 뼈가 말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바깥 층까지도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인정하고 증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AC.149의 흐름과 아주 잘 맞습니다. 앞에서 ‘물 댄 동산’, ‘뼈가 새싹처럼 살아난다’는 표현들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층에서부터 가장 바깥 층까지 흘러 들어가는 구조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결과로,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해 응답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특히 ‘모든 뼈’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 일부 감정이나 순간적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인간 전체 구조가 주님을 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regeneration, 곧 거듭남은 단순히 내면 체험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과 진리가 가장 바깥의 삶과 행동과 기억 지식까지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뼈’까지 말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 전체가 주님 안에서 하나로 살아난 상태를 뜻합니다.

 

또 여기 내용 자체도 의미심장합니다. ‘가난한 자를 건지시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proprium 안에 있을 때는 스스로를 살릴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더 강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건지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뼈가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외적 삶조차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층까지 살아 있게 만들며, 그 결과 인간 전체, 심지어 ‘뼈’로 상징되는 외적 인간의 구조까지도 주님을 인정하고 증거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4. ‘겔37:1, 4-6’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1, 4-6) The hand of Jehovah set me in the midst of the valley, and it was full of bones; and he said to me, prophesy upon these bones, and say unto them, O ye dry bones, hear the word of Jehovah; thus saith the Lord Jehovih to these bones, Behold, I bring breath [spiritus] into you, and ye shall live, and I will lay sinews upon you, and will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and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e shall live,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Ezek. 37:1, 4–6)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뼈’(bones)가 인간 안의 가장 외적이며 메마른 층, 곧 생명 없이 남아 있는 외적 인간과 기억 지식과 삶의 구조를 뜻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 전체를 살아나게 하신다는 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 환상은 문자적으로만 읽어도 강렬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육체 부활 장면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던 인간과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마른 뼈들’은 단순 시체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생명이 빠져나간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뼈만 남았다는 것은, 겉 구조는 있으나 실제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이 점이 AC.149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앞에서 계속 스베덴보리는 물과 동산과 뼈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층까지 흘러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37장은 그 반대 상태, 곧 생명이 빠져나간 외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뼈는 남아 있지만 메말라 있습니다. 즉, 교리와 지식과 외적 구조는 남아 있어도, 사랑과 생명의 유입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뼈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생기(breath, spiritus)를 넣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생기, 숨, 영(spiritus)은 모두 같은 흐름 안에 있는 말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생기가 들어올 때 살아납니다.

 

또 ‘힘줄’, ‘살’, ‘가죽’이 차례로 입혀지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육체 재조립 묘사가 아니라, 인간 안의 질서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가장 안의 생명이 먼저 들어오고, 그 다음 그것이 바깥 구조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regeneration은 단순 감정 변화가 아니라, 인간 전체 구조가 다시 생명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은 결정적 예가 됩니다.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층, 가장 굳고 메마른 층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기는 바로 그곳까지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이는 에덴의 강들과 ‘물 댄 동산’의 이미지와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사랑뿐 아니라, 가장 외적이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까지도 새롭게 합니다.

 

따라서 에스겔 37장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뼈’가 상징하는 외적 인간과 외적 진리들이 주님의 생기, 곧 신적 생명의 유입으로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통해, 인간 전체의 거듭남과 회복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ccc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살과 뼈’(flesh and bones)가 단순 육체 물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는 생명으로 채워진 외적 인간 전체를 뜻하며, 심지어 부활 이후의 주님의 영화된 인성조차 완전히 실재적(real)이라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5.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39) A spirit hath not flesh and bones as ye see me have. (Luke 24:39)

 

 

누가복음 24:39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나는 유령이 아니다’라는 뜻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상응적으로도 읽습니다. 여기서 ‘살’(flesh)은 사랑과 선에 속한 것을, ‘뼈’(bones)는 그것을 지탱하는 가장 외적인 진리와 구조를 뜻합니다.

 

AC.149의 흐름 전체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계속 ‘뼈’가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층, 외적 인간과 외적 진리들을 뜻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바깥 층은 원래 죽어 있고 메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올 때 살아 있는 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는 생기가 들어가 뼈들이 살아났고, 시편에서는 모든 뼈가 주님을 찬양했으며, 이사야에서는 뼈가 새싹처럼 살아났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눅24:39는 아주 결정적인 완성처럼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단순 인간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의 인성 자체가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가장 바깥의 것까지도 완전히 신적 생명 안에 결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의 부활은 단순 영혼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성을 완전히 영화(glorification)하셨고, 가장 바깥의 인성까지도 신적 생명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살과 뼈가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인성이 환영이나 추상적 영이 아니라 완전히 실재적인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또 여기서 ‘영은 살과 뼈가 없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이 비물질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 상태가 단순 분리된 영혼 상태보다 훨씬 충만한 실재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가장 바깥 층까지도 완전히 생명 안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뼈’가 뜻하는 가장 외적 인간과 외적 진리의 층까지도 주님의 생명 안에서 완전히 살아날 수 있으며, 그 완전한 모범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영화된 인성 안에 나타났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6. ‘출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출12:46)

 

 

이 구절이 AC.149에 인용된 이유는,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명령이 단순한 제사 규정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신적 인간성 안에 있는 가장 외적인 것까지도 완전하고 손상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뼈’(bones)가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층, 곧 외적 진리들과 외적 인간의 구조를 뜻한다는 점을 다시 보여 줍니다.

 

출애굽기 12:46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문자적으로는 어린양 제사의 규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유월절 어린양은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 특히 인간을 구속하시는 주님의 신적 인간성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각 세부 규정들도 단순 의식법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뼈’는 앞에서 계속 설명된 것처럼, 가장 외적이고 지지적인 구조를 뜻합니다. 사람 몸에서 뼈가 몸 전체를 지탱하듯, 영적 의미에서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 진리들, 외적 삶의 구조, 말씀의 문자적 층 등을 뜻합니다. 따라서 뼈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그 외적 층이 파괴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 점은 특별히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와 연결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은 가장 안쪽 신성만이 아니라, 가장 바깥의 인간성까지도 완전히 신적 질서 안으로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인성 안의 가장 외적인 것까지도 완전하게 보존되고 신적 생명 안에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이것은 말씀 자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뼈’ 같은 것으로 봅니다. 즉, 가장 바깥 구조이지만 전체를 지탱하는 층입니다. 그래서 뼈가 꺾인다는 것은 외적 진리의 파괴와 왜곡을 뜻할 수 있고, 반대로 뼈가 온전하다는 것은 진리의 외적 구조가 보존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병사들이 주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이 유월절 규례의 성취로 이해됩니다. 즉, 유월절 어린양의 뼈가 꺾이지 않은 것처럼, 참 어린양이신 주님의 가장 바깥 인성까지도 완전히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9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뼈’가 뜻하는 가장 외적이며 지지적인 진리와 구조가 주님 안에서 완전히 보존되고 살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인간 안에서도 외적 인간까지 주님의 생명 질서 안에 들어와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7. ‘redeemed, saves’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 by this own he redeemed man, and by this own he saves him.

 

본문에 나오는 위 문장에서 ‘redeemed’와 ‘saves’를 해설해 주세요. 그 차이가 무엇이며, 시제도 다른 이유가 뭔가요?

 

 

이 문장은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가 아주 깊게 들어 있는 문장입니다. 특히 왜 하나는 ‘redeemed’이고 다른 하나는 ‘saves’인지, 왜 시제가 다르게 쓰였는지는 그냥 우연이 아닙니다. 먼저 ‘redeemed’는 과거형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미 이루신 결정적 역사, 곧 인간을 지옥의 지배와 단절 상태로부터 다시 되찾으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redemption(구속)은 단순 법적 면죄 선언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지옥들을 제압하시고 인간과 천국 사이의 길을 다시 여신 우주적·영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며, 그런 의미에서 ‘redeemed’는 완료된 역사입니다.

 

반면 ‘saves’는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금도 계속 인간 각 사람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구원의 작용을 뜻합니다. 곧 인간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고,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게 하며, 천국 질서 안으로 인도하시는 ongoing process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salvation(구원)은 단순히 언젠가 천국 입장권을 받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실제로 사랑과 진리가 형성되는 현재적 과정입니다. 그래서 saves는 현재형으로 쓰입니다. 즉, ‘redeemed’는 주님께서 인류 전체를 위해 이미 이루신 객관적·우주적 구속의 역사이고, ‘saves’는 주님께서 지금 각 인간 안에서 계속 행하고 계시는 실제적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문맥상 ‘The Lord alone has what is his own’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본래 죽은 것이며, 오직 주님만이 참된 Own, 곧 생명 자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자신의 신적 Own으로 인간을 redeem하셨고, 같은 신적 Own으로 지금도 인간을 save하시는 것입니다.

 

 

 

AC.148, 창2:21, 더 깊은 상응으로 본 '갈빗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 사람의 own(proprium), 곧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을 ‘갈빗대’(rib),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AC.148

 

사람의 own(proprium), 곧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갈빗대(rib), 곧 가슴뼈라고 하는 이유는,태고 사람들에게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에는 심장과 폐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뼈는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에 더 낮은 것들을 뜻하였고,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뜻하였습니다. 이러한 뜻, 의미들의 근거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로, 이것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더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The reason why what is man’s own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is called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that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chest signified charity, because it contains both the heart and the lungs; and bones signified the viler things, because they possess a minimum of vitality;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is one of the deepest arcana known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이 단락은 AC.147에서 설명된 ‘갈빗대’의 의미를 ‘한 단계 더 깊은 상응의 층위’로 끌어내립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하필 ‘갈빗대’이며, 왜 그것이 가슴뼈인지를 설명합니다. 이는 상징의 선택이 전혀 임의적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먼저 가슴이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가슴에는 심장과 폐가 함께 있습니다. 심장은 사랑을, 폐는 신앙의 호흡, 곧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가슴은 사랑과 신앙이 함께 작용하는 자리이며, 이것이 바로 체어리티의 자리입니다. 태고 사람들에게 인간의 중심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었고, 생각보다 ‘사랑의 질서’가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슴에서 나온 것이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심장과 폐를 보호하지만, 그 자체는 뼈이며 생명력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own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own은 사랑의 자리 가까이에서 나오지만, ‘사랑 그 자체는 아닙니다’. 중심을 보호하는 구조이지만, 중심의 생명을 직접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뼈는 ‘더 낮은 것들’을 뜻합니다. 이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정도가 가장 낮은 층위’라는 뜻입니다. 반면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을 뜻합니다. 갈빗대 자리에 살이 채워졌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성이 여전히 낮은 성질을 지니고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덮이고 관통되어 살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성은 사랑에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사랑 그 자체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자리 가까이에서 나오되, 생명은 없고, 그러나 주님께서 그 자리에 생명을 덧입히심으로써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이 미묘한 위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의 것, 곧 own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것으로 오해되거나, 반대로 생명의 주인으로 착각되기 쉽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일부러 설명을 멈춥니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라, ‘질서의 배려’입니다. 이 아르카나는 인간의 구조 전체, 특히 사랑과 신앙, 자유와 생명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이후 더 넓은 맥락 속에서 다시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AC.14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own은 사랑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중심 그 자체도 아니며, 생명 없는 뼈와 같은 것이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생명으로 덮여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가장 섬세한 구조라고 말입니다.

 

 

 

AC.149, 창2:21, ‘갈빗대’와 ‘뼈’라는 인간의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은 ‘뼈’(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

bygrace.kr

 

AC.147, 창2:21, '갈빗대, 살, 깊은 잠'(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1)

 

AC.147

 

갈빗대(rib)는 가슴의 뼈로서, 생명력(vitality)이 거의 없는 사람의 own(proprium)을 뜻하며, 동시에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을 뜻합니다. ‘살로 대신 채우시고(flesh in the place of the rib)는 생명력이 있는 own을 뜻합니다. ‘깊은 잠(deep sleep)은 그가 자기의 own을 가진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된 상태를 뜻하는데, 이 상태는 잠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자기로부터, 그러니까 스스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여길 뿐,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어나게 되며, 그렇게 비로소 잠에서 갠 상태가 됩니다.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meant man’s own, 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by “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by a “deep 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which state resembles sleep, 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 thinks, speaks, and acts, from himself. 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and becomes awake.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후반부 가운데서도 ‘가장 정밀한 인간 의식 분석’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갈빗대’, ‘’, ‘깊은 잠’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이 자기의 own, 곧 자신의 proprium을 어떻게 경험하며 살아가는지를 거의 현상학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뼈이며, 뼈는 생명력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사람의 own이 본질적으로는 ‘생명을 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이 자기의 own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자기성(自己性)의 역설입니다. 생명은 없지만, 가장 나 자신처럼 느껴지는 것,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own(라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갈빗대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에 ‘’을 채우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기성이 완전히 비생명적인 것으로 방치되지 않고, ‘생명력을 띠도록 허락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생명력은 자기의 own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흘러 들어와 own과 결합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로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깊은 잠’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무의식이나 혼수 상태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산다고 느끼는 의식 상태’를 뜻합니다. 이 상태에 있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오류가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허락하신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려면, 이렇게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상태에서는 생명의 실제 근원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말합니다. 사람이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됩니다. 이것이 영적 각성입니다.

 

이 각성은 자기의 own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own의 위치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는 나로 느끼며 살지만, 그 생명의 근원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상태,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own, 즉 proprium을 가지되, 그것을 생명의 주인으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AC.147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느끼는 상태는 필연적으로 ‘’과 같지만, 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자기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아는 데 있으며,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비로소 참으로 깨어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AC.148, 창2:21, 더 깊은 상응으로 본 '갈빗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 사람의 own(proprium), 곧 그에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own을 ‘갈빗대’(rib),

bygrace.kr

 

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 the affections of good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네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AC.146의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의 ‘quality’, 곧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결국 두 축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의 애정들(affections of good)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지식들(knowledges of truth)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선행과 지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의도적으로 affections knowledges라는 말을 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무엇을 알고 있느냐만으로 규정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훨씬 더 깊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affections of good’, 곧 ‘선의 애정들’은 인간 안의 사랑의 방향을 뜻합니다. 어떤 선을 기뻐하는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affection은 단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quality를 결정합니다.

 

반면 ‘knowledges of truth’, 곧 ‘진리의 지식들’은 그 사랑이 어떤 진리 안에서 형성되고 인도받는가를 뜻합니다. 여기서 knowledges는 단순 암기 정보가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내용들입니다. 인간은 사랑만으로는 방향을 잃기 쉽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메마르기 쉽기 때문에, 선의 애정과 진리의 인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표현은, 인간의 quality가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무엇을 참이라고 알고 있는가’라는,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affections of good을 두고, 그다음 knowledges of truth를 둡니다. 이것은 인간의 중심이 결국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섬길 때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진리를 알아도, 어떤 사람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합니다. 겉 지식은 비슷해도 quality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quality의 중심에는 affection, 곧 사랑의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46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단순 학문 수준이나 외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제 quality는, 그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고 있으며, 어떤 진리 안에서 그 사랑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AC.146,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위 본문에서 맨 끝 영어,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여기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는 직역하면, ‘그것들이 그들에게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하더라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represented shown이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문맥에서 ‘represented’(표상되다)는 단순히 눈앞에 나타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영적 진리나 주님의 것이 상징과 표상, 상응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말씀, 교회의 예식, 자연 속 질서, 천사적 상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의 진리와 선이 인간 앞에 ‘표상적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면 ‘shown’(보여지다)은 그것이 단지 상징 속에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해 가능하도록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 표상만이 아니라 설명되고 드러나며,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한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아무리 설명해 줘도’ 정도보다 더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상태로 기울기 시작하면, 주님의 진리와 질서가 상징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아무리 분명하게 드러나도 점점 그것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진리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 안의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 쪽으로 굳어질 때, 그 사람은 점점 주님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풀면 대략 이런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진리와 선이 상징과 계시를 통해 아무리 분명히 드러나고 실제로 보여진다 해도, 점점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plainly’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희미하게 암시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proprium이 중심이 되면,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문장은, 타락의 핵심이 단순 무지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함’에 있다는 점을 아주 날카롭게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AC.146, 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가 the affections of good과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

bygrace.kr

 

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AC.146

 

지금까지 말한 바를 통해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는 연결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하시고, 곧이어 각종 들짐승(beasts)공중의 각종 새(birds)가 언급되는데, 이들은 이미 앞에서 다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즉시 다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가 반복되는데, 이는 그가 선에 대한 애정들과 진리에 대한 인식들(knowledges)에 관한 자신의 질(quality) 아는 것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 여전히 자신의 own,proprium으로 기울어졌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해설

 

이 단락은 창2:18-20의 구조 전체를 ‘해석적으로 봉합’해 주는 매우 중요한 정리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본문의 반복과 배열이 우연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구성’임을 밝힙니다.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에 다시 짐승들과 새들이 등장하고, 그럼에도 다시 ‘돕는 배필이 없었다’ 결론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인식들에 대한 ‘(quality)을 알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는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충분함을 뜻합니다. 짐승들과 새들을 알고 이름 붙였다는 것은,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질서를 ‘보지 못해서’ 자신의 own,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같은 결론이 반복됩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 반복은 실패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충분히 보여 주어도, 충분히 설명해 주어도, 이미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한 상태에서는 주님의 것들을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문제는 계시의 부족이 아니라, ‘욕구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진술을 덧붙입니다.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지더라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고의적인 반항이 아니라, 내적 중심이 이동한 결과입니다. 주님의 것이 여전히 보이지만, 더 이상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 단락은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통찰을 줍니다. 신앙의 쇠퇴는 대개 진리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말씀이 더 이상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해는 되어도 중심에 두고 싶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AC.14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주님께서 아무리 분명히 보여 주셔도 그것은 더 이상 결정을 바꾸지 못하며, 그 결과 ‘돕는 배필’은 외부에서 찾을 수 없고, 결국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하나의 구조로 받아들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

bygrace.kr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 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가 the affections of good과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

bygrace.kr

 

 

 

AC.147, 창2:21, '갈빗대, 살, 깊은 잠'(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bygrace.kr

 

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하는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5.심화

 

8.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리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어떤 방향에 놓여 있는가를 뜻합니다.

 

윗글은 위 심화 6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 나오는 예정론이 뭔가요? 칼빈은 왜 이런 얘길 한 건가요? 그리고 이게 왜 여기서 갑자기 언급되나요?

 

 

여기서 말한 예정론’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 버림받을지가 하나님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사상입니다. 특히 존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이것이 강하게 발전했는데, 흔히 이중 예정’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되고(election), 어떤 사람들은 심판으로 남겨진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칼빈 자신은 이것을 단순 냉혹한 운명론처럼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려 했습니다. 당시 중세 후기의 공로주의적 신앙, 곧 인간 행위나 교회 제도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칼빈은 구원의 시작도 끝도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상이 어떤 성경 구절들과 결합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방금 나온 계13:8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 같은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마치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채 태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영원 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결정되었다는 식으로 읽히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런 구절들을 미리 확정된 운명 명단’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생명책은 어떤 천상 행정 문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형성된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주님의 생명 질서와 결합된 상태를 뜻하고,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 그 상태가 자기 사랑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정론적 독해에서는 중심이 하나님이 미리 누구를 선택했는가’에 놓이기 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독해에서는 중심이 인간이 지금 어떤 사랑 안에 살고 있는가’에 놓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궁극적 생명은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오지만, 인간은 자유 안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처음부터 버림받도록 창조된 인간’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사랑과 proprium 안에 머무르기를 고집할 때 스스로 천국 질서와 멀어진다고 봅니다. 즉, 지옥도 억지로 보내진 형벌 장소’라기보다, 자기 사랑의 상태가 끝까지 굳어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정론 이야기가 갑자기 나온 이유는, 13:8 같은 표현이 역사적으로 예정론과 자주 연결되어 읽혀 왔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구나’라고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구절을 그렇게 읽지 않고, 인간 안의 실제 영적 상태와 사랑의 방향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는다는 점을 구분해 드리기 위해 그 이야기를 언급한 것입니다.

 

 

 

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하는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bygrace.kr

 

AC.145, 심화 6,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AC.145.심화 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는, 이게 무슨 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5.심화

 

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소리’는 문자 그대로의 이름 발음, 곧 외적인 호칭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이다’라는 말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단순히 ○○’, ‘○○’ 같은 언어적 이름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삶의 상태와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AC.145 전체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요약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name)은 단순한 발음이나 문자 조합이 아니라, 존재의 essence quality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도, 문자 몇 자가 천국 장부에 적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영적 상태가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인간을 아신다는 것은, 그 사람 주민등록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진리 안에서 살며, 삶 전체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름의 발음 자체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존재의 quality가 전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천국에서는 각 천사가 자기 사랑과 신앙의 상태에 따라 일종의 영적 이름’을 가집니다. 즉, 존재 상태 자체가 그 이름입니다.

 

그래서 소리’는 외적 표지이고, ‘quality’는 실제 존재 상태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이름 발음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사랑과 신앙과 삶의 방향 전체가 천국 질서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이름을 들을 때, 단순 발음만 떠오르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분위기와 기억 전체가 함께 떠오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훨씬 더 깊고 영적인 차원으로 가져갑니다. 천국에서는 이름이 곧 상태(state) quality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라는 문장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단순 호적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실제로 형성된 사랑과 진리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AC.145, 심화 8,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

AC.145.심화 8.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

bygrace.kr

 

AC.145, 심화 6, ‘계13:8’

AC.145.심화 6.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5.심화

 

6.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앞의 계3:4-5와 마찬가지로, ‘이름(name)이 단순한 문자상의 명단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뜻한다는 점을 다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통해, 이름이 곧 천국적 생명과의 결합 여부를 나타낸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호칭이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은 단순 등록 여부 정도의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책’은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의 생명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과 신앙과 삶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는지가 기록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이 그 사람을 모르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가 천국적 생명과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곧, 그 존재의 essence quality가 어린 양,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어린 양(Lamb)은 주님의 신적 인성, 특히 순결한 사랑과 구속의 측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명부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그 존재의 상태가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하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말씀에서 짐승(beast)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자기 사랑과 왜곡된 신앙 체계에 속한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가 주님의 질서보다 자기중심 질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5의 문맥 안에서는, 이 구절이 이름(name)의 영적 의미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는 예가 됩니다.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영적 상태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천국 질서 안에 있다는 뜻이고,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 질서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리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어떤 방향에 놓여 있는가를 뜻합니다. 생명책은 단순 외적 명단이 아니라, 존재의 실제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13:8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인간의 essence quality를 뜻하며, 따라서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주님의 생명 질서 안에 결합되어 있음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 질서와 일치하지 않음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5, 심화 6,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AC.145.심화 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는, 이게 무슨 말

bygrace.kr

 

AC.145, 심화 5, ‘계3:4-5’

AC.145.심화 5.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