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최후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아니다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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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영적 의미(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백마’(白馬, the white horse)에 관한 소저작을 보세요. Concerning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see in the small work on the white horse mentioned in Revelation.
해설
LJ.5는 분량으로 보면 매우 짧지만, 내용상으로는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지탱하는 핵심 전제를 독자에게 명확히 상기시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하늘’, ‘새 땅’, ‘창조’, ‘심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임의적이거나 상징적 상상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하나의 기준점으로 ‘말씀의 영적 의미’를 다시 호출합니다. 즉,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설명은 오직 영적 의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요한계시록에 나온 백마에 관한 소저작’은 스베덴보리의 독립 저작인 ‘The White Horse’(白馬)를 가리킵니다. 이 책에서 ‘백마’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등장하는 상징으로, 말씀의 영적 의미가 다시 열리는 상태, 곧 참된 이해가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말은 이해를, 흰색은 진리를 의미하므로, 흰말, 곧 백마는 ‘정화된 이해’, ‘영적 진리로 밝아진 말씀 이해’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의 시대가 바로 이 백마의 시대라고 봅니다.
이 한 문장은 사실상 독자에게 하나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만일 영적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LJ 전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의미가 실제로 존재하며, 주님에 의해 지금 이 시대에 열리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질서 있게 연결됩니다. 즉 마지막 심판은 우주적 파괴가 아니라 영적 세계의 정리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고, 창조는 인간과 교회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흐름이 형성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고 ‘보라’고만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참고 문헌 안내가 아니라, 독자가 직접 그 전제를 충분히 숙지하지 않으면 이후 논의를 온전히 따라올 수 없다는 암묵적 경고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LJ는 ‘영적 의미 입문서’가 아니라, 이미 그 기초를 이해한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심화 논의입니다.
목회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매우 정직한 태도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주장을 단절된 계시처럼 제시하지 않고, 언제나 말씀 자체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합니다. 마지막 심판, 최후의 심판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말씀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가 정립되어야 합니다. 문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더 깊은 의미로 들어갈 것인가가 여기서 갈립니다.
따라서 LJ.5는 단순한 각주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논의를 지탱하는 ‘열쇠 안내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마가 달리는 곳에서만, 마지막 심판은 공포의 종말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과 교회의 새출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1.최후심판의 날은 세상 파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is not meant by the day of the last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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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영적 의미로 ‘창조하다’(to create)는 또한 형성하다(to form), 세우다(to establish), 거듭나게 하다(to regenerate)를 의미하는데요,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creating a new heaven and a new earth)는 것은 하늘과 땅에 새 교회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음 구절들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To create” in the spiritual sense of the Word also signifies to form, to establish, and to regenerate; so by “creating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signifies to establish a new church in heaven and on earth, as may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시102:18) The people who shall be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e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earth (Ps. 104:30).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1, 7) Thus said Jehovah, thy Creator, O Jacob, thy Former,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and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everyone called by my name, and for my glory I have created,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1, 7, and in other places).
그러므로 인간의 ‘새 창조’(the new creation)란 그의 개혁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람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인데, 곧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ure)이란 개혁된 사람(a reformed man)을 뜻합니다. Hence it is, that “the new creation” of man is his reformation, since he is made anew, that is, from natural he is made spiritual; and hence it is that “a new creature” is a reformed man.60
60. ‘창조하다’(to create)는 새롭게 창조하는 것, 곧 개혁하고 거듭나게 하는 걸 의미합니다. “To create” is to create anew, or to reform and regenerate (n. 16, 88, 10373, 10634).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to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는 것은 새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To create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is to institute a new church (n. 10373).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하늘과 땅의 창조’(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역시 내적 의미, 즉 속뜻으로는 태고교회, 곧 가장 오래된 천적 교회의 설립이라는 말입니다. By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is described the institution of the celestial church, which was the most ancient church (n. 8891, 9942, 10545).
해설
LJ.4는 종말론 이해를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하늘’과 ‘땅’이 교회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창조’라는 단어 자체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우리는 보통 창조를 무(無)에서의 물질적 생성으로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창조는 무엇보다 ‘영적 형성’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단지 만드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끊임없이 새롭게 빚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다고 말할 때, 그 핵심은 존재의 시작보다 ‘상태의 변화’에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선언은 이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곧 새 창조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거듭남’의 언어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심판, 새 하늘, 새 땅이라는 거대한 표현들은 결국 한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갱신은 개인의 갱신 없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먼저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그 새로워진 사람들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시편에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라는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백성이 아니라 ‘새 마음을 받은 백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새 의지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이미 창조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은 채 예배만 반복된다면 그것은 아직 ‘창조 이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라는 표현은 창조가 성령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영이 임할 때 인간의 내면 질서가 재구성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여기서 ‘지’(地), 곧 땅은 다시 교회를 뜻하므로, 교회의 참된 쇄신은 제도 개편이 아니라 영의 흐름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의 모든 깊은 부흥은 외적 전략보다 내적 각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에서 ‘내가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는 삼중 표현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영적 형성이 한 순간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임을 암시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단번에 완성하지 않으시고, 자유 속에서 서서히 빚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폭발적 체험이라기보다 평생에 걸친 창조입니다.
주60이 밝히듯,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조차 내적 의미에서는 ‘태고교회의 설립’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통찰입니다. 즉 성경의 첫 장부터 이미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세우시는지가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진리가 밝혀지는 것이고, 물과 땅이 나뉘는 것은 내적 삶과 외적 삶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이며, 인간 창조는 사랑과 지성을 갖춘 영적 존재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 전체는 반복해서 ‘창조 → 타락 → 재창조’의 리듬을 보여 줍니다.
목회적으로 이 글은 매우 강력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의 미래를 걱정하며 구조나 숫자를 먼저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지금도 사람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다면 교회의 미래는 이미 준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종종 ‘창조의 전 단계’일 뿐입니다.
또 하나 깊이 묵상할 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옛사람을 수리하지 않으시고 새 사람을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 개선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 사랑 중심에서 이웃 사랑 중심으로 이동할 때 우리는 실제로 ‘새 피조물’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법적 선언이라기보다 존재론적 변화입니다. 사람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LJ.4가 전하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창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역시 이 창조 사역의 일부이며, 그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움입니다. 주님은 낡은 교회를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더 깊이, 더 새롭게 교회를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는 언제나 ‘새 사람이 된 이들’ 안에서 먼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