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저희가 곧 첫 손주 볼 날이 다가와 며느리 배가 남산만 하고, 배에 손 대고 안수 기도하는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잠깐, 이 ‘안수’의 의미를 말씀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

 

개역개정 성경으로는, 이 ‘안수’라는 키워드가 처음 나오는 데가 아래와 같습니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출29:10)

 

복음서에는 주님의 이 안수, 곧 손을 통한 접촉으로 병을 낫게 하시고, 고치신 기록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가령,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9: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8:25)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7:33-35)

 

등, 이 외(外)에도 참 많지만 략(略)하고...

 

이 안수와 같은 ‘접촉’의 행위, 표현은 사실은 천국의 어떤 것에 대한 표상(表象)인데요, 그것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 곧 ‘생명이 같으면 함께 결합, 교류, 교통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안수를 해도 왜 누구는 병고침을 비롯, 기도가 응답되는 반면, 누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는 사실, 저의 오랜 의문점이었는데요, 이 천국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이런 비밀을 깨닫게 되었지요 ^^

 

안수 받는 자의 속 사람이 천국과 같은 심성, 천국과 같은 생명, 곧 주님의 선(the Divine good)과 공명(共鳴)할 수 있는 속 사람이어야 천국의 모든 것, 곧 주님의 생명과 능력, 권능이 그의 안에 흘러들어가 그를 고치며,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심성, 우리의 생명, 특히 기도 받는 며느리와 아들의 속 사람이 주님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 이 두 사람,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몸’이라 여겨지므로, 주의 종들의 모든 안수 통해 주님의 생명과 능력, 하늘의 권능이 아이 부모를 통해 아이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본문 시작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24번에서 26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창조 둘째 날입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아래는 위 본문말씀에 대한 아케이나이며, 중간중간 저의 설명을 덧댔음을 밝힙니다.

 

창조 첫째 날, 곧 거듭남 첫 번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으로 표현된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낮’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

 

‘낮’은 주님께 속한 것을,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은 리메인스(remains)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창1:5)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요,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반면, 겉 사람 안에는 오직 사람으로,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반면, 겉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세상으로 말미암은 지식입니다. 특히,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학습을 통해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속 사람을 ‘궁창’(穹蒼, an expanse)으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로,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로 각각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bodily and worldly)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거듭남 그 초기 단계 때,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오늘 중요한 메시지는, 사람의 거듭남 초기 단게 때, 이제 빛을 받은 단계에서 사람은 전에 안 하던 말과 행동, 곧 기특한 언행을 시작하는데, 그런데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 자기를 대견하게, 대단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좀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지요. 교회 안에도, 주위에도 제법 많습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전에는 그런 걸 바로 지적하고, 훈계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을 보니 주님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중 그런 단계가 있음을 감안하시고 잠자코 다음 단계로 그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포함, 교인이나 주위 다른 분들의 그런 미성숙한 모습을 주님이 우리를 품으시는 것처럼 품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아직 미성숙할지라도 그의 안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고, 그의 겉 모습과 함께 동시에 영의 눈도 켜져서 그의 속 사람 또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거듭되는 넘어짐과 악습에 다시 발담그는 그런 연약함에도 불구, 주님이 나를 받으심 기억하시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나는 어쩌면 또 넘어지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나는 조금 더 성장한 상태에서 그러고 있을꺼야. 비록 계속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겠지만, 어제의 저녁과 아침이 아닌, 좀더 나아진, 좀더 위를 향해 나아간 중에 맞이하는 저녁과 아침일꺼야!’라고, 자신을 향해 긍정하는 그런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정도로 둘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을 주님,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환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2-13(D2)-창세기이야기(7), '둘째 날,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분하시는 두 번째 상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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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창조 첫째 날입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2-5)

 

이야기 #3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첫 육일 간 기록은, 사실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대략 여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11/15일자 이야기를 참고하시고요, 혹시 카톡 지난 글 찾는 게 불편하시면, 아래 링크, 제 블로그의 ‘창세기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로 가시면 지난 글들을 편리하게 보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bygrace.kr/

 

자, 그럼, 위 본문을 중심으로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 참고로, 이후 내용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17번에서 23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사람의 거듭남 첫 번째 상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요. 저런 상태에서 이런 상태로 상태 변화가 시작되려면 뭔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이 첫째 날은 주님이 사람에게 거듭남에 필요한 사전 준비, 거듭남이라는 빌딩을 짓기 전, 땅을 다지는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거듭남 이전 상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과 진리의 씨 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혼돈’은 그 땅에 선이 전혀 없음을, ‘공허’는 진리가 전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외적 발현이 선(善, the Divine good)이며, 이 선을 담은 그릇이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은 사랑의 선이요, 주님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인 것입니다.

 

어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면, 그 선과 진리의 결과, 그는 주님을 만나며, 주님 앞으로 인도됩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나라이므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곧 천국과 같은 상태가 되어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자기의 신성과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도록, 곧 주님의 선(good)과 사람의 의지(will)가, 주님의 진리(truth)가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와 각각 서로 상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거듭남이란, 바로 이 상응이 깨어나 활성화, 서로 공명(共鳴)하는 것이며, 그래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켜서는 특별히 ‘혼돈과 공허’(a void and emptiness)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흑암’의 상태, 곧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과,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매우 어리석고 무지한,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깊음 위에 있고’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상태이며, 그 가운데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깊다’, 뭔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 천국에서 보면 마치 까만 덩어리(a black mass)처럼,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destitute of vitality), 아주 극심한 궁핍 덩어리로 보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빛인데, 이 빛이 전혀 없으므로 저렇게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지요. 천국이 광명한 나라인 것은 천국은 주님의 진리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태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다음 단계인 거듭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면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선이라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시작되는데요, 그런데 이때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반발하는(hinder and resist) 일체의 요소들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새사람이 그 안에 잉태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이 표현은 주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품으시니라’(brood)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암닭이 알을 품에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숨기시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보관하여 오신 것들인데요, 말씀 전체를 통하여, 이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지며, 외적인 일들,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겉으로 밝히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이 지식을 가리켜 여기서 ‘수면 위’라 하신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 이야기, ‘리메인스’라는 개념은 앞으로 말씀 전체를 관통합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그의 영유아 시절, 자기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이 리메인스를 공급받게 되며, 즉 주님이 아이의 안으로 이 리메인스를 밀어넣으시며, 이것은 나중에 그의 거듭남과 회심에 아주 결정적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천적인 것, 주님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며, 그렇게 사람의 ‘인권’(人權)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각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것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며, 그것은 곧 이웃 사랑(charity)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권’이라 쓰고, ‘교만’이라 읽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남은 자’ 사상이나 십일조도 다 이 리메인스에서 출발합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이 뭔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됩니다.

 

온통 겉 사람 뿐이기만 한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또 이런 자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인 모든 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 선들은 악이요, 그런 진리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뭔가가 다시 시작될 때, 그때 그는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선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로 더욱더 다가갈 때, 이 빛이 바로 주님이신데요, 이분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사람은 주님의 존재,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위의 말씀과, 또 주님은 선 또는 생명 그 자체시며, 진리 또는 빛 그 자체시라는 사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 ‘저녁’에서 바로 ‘아침’이 될까요? 그것은 천국에는 ‘’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 지옥의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천국에 ‘아침’이니, ‘저녁’이니 하는 무슨 상태들이, 무슨 상태들의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천국에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천국은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인데요, 천국의 상태는 곧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천사 하나하나가 가장 작은 천국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사들의 상태가 새벽, 아침, 낮, 저녁 등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천사들은 늘 밝은 빛 가운데 하하호호 하며, 항상 충만한 기쁨 가운데 있는 줄 아는데요, 아닙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밝았다, 흐렸다, 기뻤다, 우울했다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사들 역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세상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사랑함이라는,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에 함몰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천사들은 이 ‘자기 사랑’을 ‘주님 사랑’으로 억제하는 만큼만, 저지되는 만큼만 천사입니다. 천사들은 생전에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주님을 사랑하여서 천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인데도 말입니다.

 

천국 한 공동체 내 같은 천사들일지라도 이 천사의 상태와 저 천사의 상태가 다르며, 또 여러 공동체들 역시,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상태가 다릅니다. 이 천국과 저 천국의 상태도 다르고요! 이는 마치 이 지구 상의 여러 날씨와 기후, 시간의 상태가 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지구 이편이 밤이면, 저편은 낮이고, 이쪽에 동이 터오면, 저쪽은 해가 저물며, 이쪽은 타들어가는 가뭄이면, 저쪽은 모든 걸 다 휩쓸어 가는 홍수요, 이쪽이 여름이면, 저쪽은 겨울이고... 등등 지상의 이 모든 상태 변화는 곧 천국의 어떠함을 상응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아멘, 할렐루야!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이 없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정도로 첫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2-06(D2)-창세기이야기(6), '첫째 날,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번째 상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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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은 지난 2월 14일, 함께 나눈 내용입니다.

 

... 최근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와, 이에 대한 AC.44번 내용 중에,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심어 무얼 믿고 무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하는 문장에 눈길이 갔더랬습니다. 특별히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연결하는 표현에 말이지요.

 

특별히 세계테마기행 최근 편 가운데 ‘벼랑 끝을 걷다, 협곡 기행’인 시리즈를 보는 중, 오... 정말 지구 상 어마어마한 협곡들을 소개하는데, 비록 영상으로지만,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 프랑스령 레위니옹 살라지 협곡, 실라오스 협곡, 그리고 중국의 시링협곡, 언스대협곡,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라이드리버캐니언 등입니다.

 

이 장엄, 광대, 광활한 장면들을 또 드론으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계속 감탄에 감탄을 계속하다가...

 

오, 할렐루야! 이 모든 광경, 곧 땅의 모습 이 모든 장관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의 마음이겠구나 싶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보실 때, 저렇게 보이시는가 보다 싶은 순간, 엄청난 전율이 일며,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말씀 구절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대하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주님이 내 안에 조성하신 마음의 어떠함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엄청난 무슨 발견을 한 것 같은 아주 흥분된 순간이었습니다...

 

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모판입니다. 모형이요, 모델하우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사람을 위함이며, 오직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무엇이라 해도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일체의 것은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며, 아무리 사람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해도 사람의 구원, 곧, 천국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여전히 천국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말씀(The Word) 전체가 단 한 가지 목적, 곧,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세기도, 그리고 창세기 1장도 결국은 한 사람의 거듭남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천지창조 이야기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첫 단계부터 여섯 번째 단계 가운데 있는 사람, 즉, 아직 거듭남 중에 있는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한테는 주님은 아직 ‘하나님’이셔서 창세기 1장엔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일곱 번째 단계인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 즉,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한테는 주님은 비로소 ‘여호와’이셔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각각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연계 모든 만물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련되며, 구원에 기여할 때에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가 그 사람한테는 ‘태초’(太初, the beginning)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 the heavens and the earth)는 사람 안의 속 사람,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는 앞으로 대하(大河)처럼 계속 됩니다.

 

말씀에 나오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cf. 사43:7)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2021-11-29(D2)-창세기이야기(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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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를 들어, ‘아담’ 하면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하와’ 하면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아벨’도, ‘가인’도... 다 그렇게 그런 이름을 가진 한 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육이 영의 생각, 영의 사정을,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생각과 사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한, 이런 지독한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된 데에는, 초대교회의 연약함을 비롯, 니케아 회의의 심의와 칙령(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325년) 및 이후 전개된 교리의 역사 등 역사적 배경 이야기가 좀 있으며, 나중에 필요하면 다루겠습니다. (TCR.206)

 

한 마디로, 상응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말씀의 영적 의미, 곧 속뜻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요, 초대교회 이후, 위와 같은 이유로 인류에게 이 지식이 닫힌 것입니다. (TCR.206)

 

하지만 비록 말씀의 겉 글자의 뜻 가운데 살았더라도, 즉,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의 삶을 사신 분들에게는 주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구원이 베풀어졌습니다. 즉, 천국의 대기인 신성(神性, the Divine)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천국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문턱이 높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비로 지금 이 상응 지식이 계시되고(啓示, revealed), 즉, 드러나고 있고, 교회에 관한 신적 진리들(the Divine truths of the church)이 빛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이 바로 말씀의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구성하는 진리들입니다. (TCR.207)

 

다시 ‘아담’이라는 이름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점부터 말씀드리면,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의 이름이며, 신앙의 이름, 신학의 이름이요, ‘하와’ 같은 경우는 어떤 내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 하면 ‘므두셀라’입니다. 창세기 5장 27절을 보면,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이 ‘므두셀라’는 ‘므두셀라’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된 어느 한 작은 단위의 교회 시대를 말하며, 또한 여기 이 ‘구백육십구 세’라는 기간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969세라는 정량적인 의미가 아닌, 장구한 세월을 뜻하는 어떤 영적인 의미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시대 교회와 신앙을, 그리고 어떤 영적 의미를 각각 그 이름으로 일컬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람부터가 비로소 실제 역사, 곧 이때부터 나오는 이름들이 비로소 실제 살았던 한 개인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해하시려면 먼저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래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모드는 이랬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이 세상의 것을 언급할 때, 그것이 표상하는(represented)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것(representatives)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historical series)로도 꾸몄습니다. 그렇게 하면, 보다 더 생생하니까요. 이렇게 하는 게 그들에겐 굉장히 차원 높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사용된 스타일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개역개정 번역과 영어가 상당히 달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직역하면, ‘높고 높은 것을 말하며, 입을 벌려 고대의 것이 나오게 하라’가 되겠습니다.

 

이런 대표성을 가리켜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천지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이어지는 이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모세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기록물(historical) 스타일로서, 아브람의 때로부터 시작, 모세의 책들 및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과 열왕들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글자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적(prophetical) 스타일인데, 이는 태고교회에서 아주 높은 공경을 받던 어떤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계속 연결되어 역사적 무슨 형태를 갖추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가장 깊은 아케이나가 들어있는 속뜻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은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케이나는 아름다운 순서로 연결되며, 거기에는 겉 사람과 속 사람에 관한 것, 교회의 수많은 상태들 및 천국 그 자체, 그리고 가장 내적으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다윗의 시편(the psalms of David) 스타일로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 언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에서 주님은 다윗이라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속뜻으로는 왕이십니다. (AC.66)

 

어떠신가요? 좀... 어려우시죠? 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환히 비추심을 구하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서술 스타일의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태고교회 스타일로, 그리고 12장부터는 역사기록 스타일로 그 서술 스타일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를 읽을 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입니다. 대략 45, 6억 년 전후라 합니다. 이 장구한 연대 중 태고교회의 시작, 즉, 아담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아브람의 때까지가 태고교회 스타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즉,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가 됩니다.

 

말씀이 무슨 다큐멘터리나 일지도 아니고... 이 장엄, 장구한 수십억 년 역사를 실제 역사로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겠으며, 과연 그럴 필요가 있기나 할까요? 그런 기록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일에 무슨, 그리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이런 이유로, 고대의 역사를 이런 문체, 이런 이야기 스타일로 기록, 인류의 그간 있었던 총 네 번의 교회 시대, 즉,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혹은 표상교회, 表象) 및 현 기독교회 중 앞 두 교회인 태고교회(혹은 아담교회)와 고대교회(일명 노아교회)를 창세기의 맨 앞부분 열한 개의 장으로 압축, 요약, 이야기체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축, 요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뜻을 넣어두셔서 이 아케이나(arcana, 秘義)를 오직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만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지혜의 5, 4, 3등급 지혜라 하겠습니다. 말씀은 6등급 지혜인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이런 말씀 서술 스타일을 이해하신다면 비로소 창세기 첫 열한 장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또한 창세기 이야기를, 본문을 가지고 제대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이토록(?) 뜸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며, 또 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출발을 창세기에서 해야 하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2(D2)-창세기이야기(4), '말씀(the Word) 서술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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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기 앞서, 거듭 당부드리는 몇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의 영과 육은 정말 다르듯 말씀의 영과 육, 곧 속뜻과 겉 글자의 뜻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말씀(the Word)은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인간을 또한 어떻게든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구원, 곧 거듭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한마디로, 거듭남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래서 말씀은 그 주된 포커스가 오직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정도만 꼭 붙드셔도 앞으로 읽으시게 될 내용들을 향해 잘 준비된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상태를 잘 유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이런 마음 상태라야 한 방울 누수 없이 고스란히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이것이 겉 글자의 의미 그대로이며, 저 역시 사십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창조과학회에 심취, 공대생으로서 뭔가 과학적으로도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것 같아 더 깊이 들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

 

그러면서도 당시 아인슈타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글 등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니, 마이크로, 분자, 원자, 중성자, 소립자, 미립자의 세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유니버스의 세계로 등 양쪽 극단의 지식들을 조금, 아주 조금 접하고 제 안에 부인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런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주 저 수많은 은하 중 비교적 가깝다고 하는, 250만 광년(光年,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해당하는 항성 수가 1조 개...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그저 이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하나를 밤에 반짝반짝 비추기 위한 용도로만 지으셨다고? 너무 비능률, 비효율적인 게 아닐까? 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있었습니다 ^^

 

네, 이 얘긴 이쯤하고... 다시 창세기 1장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은 겉뜻으로는 창조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과 관련된 여섯 단계 또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천국 이야기 #3, ‘천국은 상태(狀態, state)의 나라’에서 말씀드렸듯 창세기를 포함, 말씀도 역시 ‘상태’ 관점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을 무슨 계단처럼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해지는 노을, 아름다운 색조가 그레디언트하게 연이어져 딱딱 구분은 어려워도 대략적으로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간 한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요, 거듭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will)와 새 이해(understanding, 이성, 사고력, 이해하는 능력)를 받아 그것으로 주님의 선을 행할 마음을 먹고, 주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지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기우는 갈망(yearning)이 있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머리굴림(reasoning)이 있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어떤 구분이 생기는 상태로서, 주님의 것은 ‘리메인스’(remains)라 하여, 모든 사람의 영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이슬비처럼 내려 조용히 쌓이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영구 보관하시며,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을 도우십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어떤 큰 시험, 불행, 혹은 슬픔 등을 겪을 때, 비로소 깨어나며,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 리메인스가 깨어나면, 그때까지 그가 정신없이 추구하던 모든 세상에 속한 것들은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 때,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사이, 구분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십일조의 기원이 바로 이 리메인스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신앙의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기부, 자선)도 실천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기특하게도 전에 안 하던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활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걸 자기가 하는 줄로, 자기가 대단해서 하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상태입니다. 드디어 속 사람 안에 신앙의 불, 체어리티의 불이 켜집니다. ‘두 큰 광명체’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자기가 하는 신앙의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활기와 생명력을 갖는 상태입니다.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입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말을 할 때도, 사랑의 선을 행할 때도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상태입니다. ‘생물’, ‘짐승’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었으며, 이런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합니다. 그의 영적 삶은 ‘먹을거리’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의 일로 더욱 더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몸과 감각 등 자연적 삶 역시 그렇게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이때 그의 겉 사람은 이런 그의 변화를 저항하며, 그래서 그의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마지막 상태인 여섯 번째 상태 끝에 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제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 삶으로 유턴할 가망이 없다 판단한, 그의 평생에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긴 악한 영들은 그를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전투란 서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감으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쉴 수 있게 되며, 그래서 드디어 주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 안식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속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사실은 우리 대신 주님이 싸우신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안식일인 것이며, 이 안식의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지상에서는 몇몇 성인(聖人)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이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런 호칭에 대해 기겁을 하고, 정색을 할 겁니다...)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시대, 아담 교회 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였고, 그래서 그때는 천사들도, 그리고 주님도 친히 지상의 사람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그런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안식의 상태이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라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한 인간을 영적 인간이라 하고, 여기서 악한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을 천적 인간이라 합니다.

 

참고로, 그래서 영적 인간의 이야기인 창세기 1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고, 천적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그중에서 일부가 두 번째, 그중에서, 그중에서... 여섯 번째 상태만 해도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오프닝, 개략을 너무 많이, 자세히 다루었나요? 앞으로 장별, 절별 자세히 다루는 방식은 좀... 순서대로 나가되 특별한 주제, 이슈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긴 생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 안의 천사들은 저렇게, 저런 속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 육은 육인 것처럼, 우리는 육의 글자를 읽을 때, 천사들은 영의 글자, 곧 속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십니다. 이 표현이 참 어려우실 듯한데요... 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아름다운 분들마다 어서 이 말씀의 속뜻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서입니다 ^^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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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첫 번째 시간에서 저는 주님의 지혜에는 여섯 단계, 등급(degree)이 있다 말씀드렸고, 그 첫 1, 2등급은 오직 주님께 속한 영역이라 그 어떤 피조물도 이해불가이며, 3등급부터 차례로 삼층천, 이층천, 그리고 일층천 천사에게 허락되었으며, 마지막 6등급이 비로소 인류에게 허락되었다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적 시야, 시력을 가지고 이해할 수도 있겠어요. 우리는 내적 시력이 6등급으로 아주 안 좋아 아주 거칠고 대문짝만하게 써야 겨우 보여 더듬더듬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한정된 지면에 몇 글자 싣지도 못하고, 말씀을 오직 겉 글자로만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위로 갈수록, 혹은 내적일수록 더 시력이 좋아 인류가 읽지 못하는 것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력이 좋을수록 더 많은 것을 읽고 볼 수 있으니까요

 

참고로, 각 천국 천사들의 차이를 좀 말씀드리면, 삼층천 가장 내적 천사들의 지혜는 이층천 천사들의 지혜를 수천 수만배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이층천 천사들은 삼층천 천사들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이런 관계는 나머지도 같습니다

 

그러면 일층천 천사들을 보고 우리는 ‘에계, 겨우...’ 하겠지만... 인류의 현자(賢者)들의 지혜와 일층천 천사들의 지혜가 또 위와 같은 차이입니다. 그만큼 하늘의 지혜는 지상하고는 비교불가입니다

 

밀턴, 괴테 및 스베덴보리 등 기네스 북에, 인류 중 가장 지능이 높았던 사람들로 등재된 이분들 역시 그저 하늘의 빛 한 조각 받아 저렇게들 뛰어나다 하지만 이분들 역시 일층천 천사 앞에 서서 그들의 지혜를 접하게 되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감탄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아무리 뛰어난들 분명한 사실은 저들을 포함, 모든 피조는 유한한 반면, 주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수학을 좀 하신 분들은 이 유한과 무한의 차이를 느끼실 겁니다. 무한 앞에 유한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네,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그걸 듣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히 빛을 구하는 그런 태도가 안전할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사전 준비를 좀 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의 시야가 너무 조야(粗野)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의도치 않게 주님과 주님의 말씀(The Word)을 모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성정 상, 그들이 깨닫고, 알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 모독의 길을 걸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두려움은 그것이 사람의 영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덕지덕지 붙어있기만 한 악은 나중에 주님이 떼어내시면 되지만, 영 자체가 변질되어 더럽혀지면, 그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표현된 태고 교회의 멸망 때, 사실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지옥 저 한쪽 구석에서 지옥의 다른 영들을 해치지 못하게 따로 격리상태에 있습니다. 신성모독의 폐해는 이토록 정말 지독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처음 듣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인데,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6등급 시력인 인류에게 부득불 그들의 언어로 맞추어 주신 것임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각각 자기들의 시력으로 우리 눈엔 안 보이는 더 내적인 뜻으로 읽습니다. 그걸 가리켜 속뜻(internal meaning), 혹은 아케이나(arcana, 秘義)라 합니다

 

셋째, 이런 속뜻을 이제는 인류에게 오픈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늘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어차피 천국 가면 다 알게될 걸 왜 굳이 골치아프게 미리...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어 본의 아니게 아주 엉뚱한 삶을 살다 생을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을 올바로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류 네 번째 교회인 현 기독교회는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어 말씀의 속뜻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말씀의 속뜻을 여시고, 이 일에 필요한 많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인류 다섯 번째요, 마지막 교회인 주님의 새 교회는 태고 교회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받드는 영원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속뜻을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원래 태초의 인류는 속뜻의 사람들이었으나 점차 주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게 되어 그 내면이 닫히고, 내적 시력을 잃게 된 것이므로, 이제라도 주님을 사랑하여 말씀의 영인 속뜻, 곧 말씀을 영으로 읽기를 간절히 사모하시면, 사람마다 조금씩 내적 시력이 회복되어 그 속뜻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빛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함. 이것이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열쇠입니다

 

저는 이 공부를 시작할 무렵, 오른쪽 눈 시력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더래서 더더욱 이 시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험했어요. 이 글을 쓰며 생각하니, 혹시 이 내적 시력의 메시지를 가르치시려는 무슨 주님의 섭리가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

 

이밖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겠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 세 번째 이야기부터 드디어 창세기 1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공부에 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빛, 환히 비추사 닫혔던 우리의 내면이 열리고, 어두웠던 내적 시야, 시력이 차츰 회복되어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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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창세기, 출애굽기에서 출발,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대한 천사적 이해, 천국적 지각 가운데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창세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에 앞서 선행 학습(?)으로 다루어야 할 중요 주제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진리(Truth Divine)의 여러 단계(degree, 등급, 레벨, 차원... 등 번역이 좀...)와 그 가운데서 지상의 언어로 기록된 말씀(the Word in the letter)의 위치

 

말씀의 겉뜻과 속뜻

 

영계의 구조

 

삼위일체

 

등등... 이 외에도 무척 많으나 다른 다양한 주제는 별도 이야기로 다른 요일에 다루기로 하고요, 오늘은 위 첫 번째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출16:10) 말씀에 대한 주석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Truth Divine)는 하나가 아닌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데, 이것은 천사들의 이해(angelic understanding)조차 초월합니다. 세 번째인 신적 진리(truth Divine) 3등급은 가장 내적 천국, 곧 삼층천 진리이며, 그러나 사람은 그 추호(秋毫)도 도저히 이해불가한 진리입니다. 네 번째인 4등급은 중간 천국, 곧 이층천 진리이며, 이 역시 사람에겐 이해불가입니다. 주님의 진리 다섯 번째, 5등급 진리는 가장 바깥 천국, 곧 일층천 진리이며, 이것은 몇몇 빛을 받은 사람들이 살짝 지각할 수는 있는 그런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여전히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불가인데, 혹시라도 어떤 영감으로 떠오르게 되면, ‘아, 그런 거구나!’ 지각하여 믿게 되는 그런 천재성이 나오게 됩니다. 끝으로, 여섯 번째인 6등급 신적 진리는, 이것이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적합한 진리이며, 그래서 말씀의 겉 글자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AC.8443)

 

창세기 이야기 시작에 앞서 이런 아케이나(arcana, 秘義)를 먼저 살피는 이유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주님의 진리의 그 광대함과 깊이, 그리고 인간의 미천함의 현주소... 등을 통해 마음의 준비를 좀 먼저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 같아선 정말 처음부터 우리에게 천사들의 수준으로 진리를 부어주고 싶으셨겠지만 우리의 내면이 닫히고, 우리의 그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너무나도 정말 아니어서 할 수 없이 이 너무나도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 지상의 글자를 빌려 말씀을 기록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인간은 계속 주님과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네, 뭐, 하여튼 앞으로 이렇게 매주 월요 오후는 창세기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아, 그리고 부언하여 말씀드리면, 여기 제가 말씀드리는 거의 모든 문장은 사실은 ‘...라고 합니다. 하더군요. 라고 들었습니다. 읽었습니다...’ 등으로 끝맺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계시를 받거나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이며, 아주 살짝, 아주 조금, 혹시 도움되실까 저 나름의 해석을 붙여 풀이를 보태는 경우들이 있기는 할 겁니다만 저 역시 그저 옮기는 수준입니다. 이 옮기는 것 조차도 아주 떨림의 연속이지만요... ^^

 

주께서 내내 천국의 빛 비춰 주셔서 이 이야기들을 접할 때, 심령이 환하여지며, 닫혔던 내면이 열리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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