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이야기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주제는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인데요, 오늘 이야기를 끝으로, 이런 일대일 카톡 형태의 나눔 대신 제 개인 블로그(https://bygrace.kr/)를 통한 나눔 형태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1. 이렇게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보내는 건 ‘모든 건 자원(自願)함으로!’라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평소 늘 여겼기 때문이며,

 

2. 그래서 일종의 신앙,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요, 자칫 스토킹일 수도 있고,

 

3. 솔직히 말씀드리면, 보내고 나서도 매번 좀 마음고생 하는 것에 이젠 지쳤기 때문입니다.

 

4. 부연하여 하나 더 말씀드리면,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 같은데요, 이 이야기 공유를 정례화하다 보니 정작 제가 소명으로 받은 번역의 일에 전념할 수가 없게 되어 가고... 그래서 고민, 이건 아니다 판단,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동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오신 분들 계시면, 그분들껜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글을 안 쓰겠다는 게 아니고, 단지 지금까지 일일이 보내드렸던 것을 대신, 앞으로는 제 개인 블로그에 올려 놓겠습니다 하는 것이니, 앞으로도 생각나실 땐 언제든 방문하여 보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그동안 정말 원치 않으셨는데 차마 말씀은 못 하시고 꾹꾹 참으셨던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저로선 ‘이 사실은 모두가 알아야 해!’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가 받은 모든 걸 나누고자 하였어도 그것이 상대방에겐 신앙을 빙자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사42:3)시는 주님을, 그리고 탤런트 김혜자 씨의 책 제목,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를 많이 생각한 며칠이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오늘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제 36장을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생전, 예수를 안 믿으면, 죽은 후 바로 지옥 가는데 아... 이걸 어째? 주님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하셨으니 내가 다소 좀 무례하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어떻게든 교회를 다니게, 예수를 믿게 해야겠다. 그것이 참된 도리요, 효도고, 우정이요, 사랑이다!

 

꼭 이대로는 아니어도 거의 많은 전도와 선교의 동기와 시도가 이런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연유하지 싶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27년간 수시로 천국을, 영계를 왕래하면서 그는 거기서 정말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천국에 와 있음을 보았으며, 또 그들과 교류하였다는 사실인데, 그러면, 이는 어찜이며, 이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 행하는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눅13:29-30)

 

하신 것을 보면, 분명 살아생전 기독교 개신교인이 되어 예수영접기도를 해야만 천국 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그 사람의 내면이, 속 사람이 그 기도를 받쳐주는 한, 가장 좋은 경우이겠지만 말입니다.

 

비기독교인으로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그들은 살아생전 선한 삶을 살았으며, 이웃을 사랑했고, 비록 그땐 몰라 주님 아닌 자기들의 무슨 우상을 경배하였지만, 그 경배는 과연 제대로 된 경배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경배보다 훨씬 더 거룩하였고, 그들의 영의 상태가 신앙의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내적 애정으로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사랑에서 우러난 자비가 있었고, 그들의 무지에는 이노센스(innocence, 천진난만, 순진무구)가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모든 것을 즉시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책 36장 본문에서 메인 아이디어를 얻어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고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

 

1. 천국은 신성(神性, the Divine)으로 충만한 나라다.

 

2. 주님의 신성은 사랑의 선(善, the Divine good)과 신앙의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다.

 

3. 진리(교리)는 선을 담는 그릇(recipient)이다.

 

4. 중요한 건, 그릇이 아니라 거기 담기는 내용물이다.

 

5. 단지 기독교의 그릇, 교리가 권장되는 이유는, 기독교에는 주님과 직접 결합할 수 있는 말씀(the Word)이 있기 때문이며, 그 말씀 아래 살아생전, 이미 밝고 환한 빛 가운데 천국 생활에 꼭 필요한 선으로 명료하게 준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이에 비해 타 종교는 흐린 초롱불이며, 초라한 그릇들이어서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가능하다면 이 밝은 빛 아래서, 이 좋은 그릇 안에서 신앙 생활하자 권하는 게 전도요, 선교다.

 

7.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시야는 온 세상이다.

 

※ 참고로, 전 세계 현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략적으로, 기독교 25억, 이슬람교 18억, 힌두교 11억, 불교 5억, 중국 전통 신앙 3억 9천 4백만, 부족 신앙 3억, 아프리카 전통 1억, 시크교 2천 3백만, 스피리티즘 1천 5백만, 유대교 1천 5백만 등, 이 외에도 계속되며,

 

여기서 기독교만 보더라도

 

가톨릭 53%, 개신교 40% (이중 주류 교단 17%, 독립교회, 초교파 19%), 성공회 4%, 정교회 11%, 기타 1.3% 등...

 

이 자료는 위키피디아 현재 자료에서 참조했습니다.

 

8. 비기독교인들, 생전에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사람들, 말씀을 들어본 적도, 접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찌 되는가?

 

그들의 구원이 단순히 예수를 안 믿었다는 걸로,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았다는 걸로 결정된다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믿음이라는 거, 신앙이라는 거는 단지 그릇, 교리의 문제일 뿐인데, 그 그릇의 문제 때문에 천국을 못 간다면, 주님이 그런 신이시라면, 그건 너무 불공정하지 않을까? 만인에게 공정한,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보다 시스템적인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으로 준비되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시스템! 왜? 천국은 ‘’의 나라이므로...

 

9. 생전에 주님을 몰랐지만 자기 종교의 교리라는 그릇 안에서 ‘’한 삶을 살며, ‘’으로 준비된 자들은 천국 오리엔테이션 때,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정성을 다한 안내를 받고는,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아주아주 기뻐하며, 감사하며...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가 거기서 이루어지며 완성된다!

 

10. 주님은 심지어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영원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지옥의 기운이 전체 피조 세계의 균형을 흔들 때, 그냥 쉽게 바로 지옥에 내려가 직접 교통정리를 하실 수 있는 분이 불편(?)을 감수하시고, 인성을 입으시고 지옥을 방문하신 것! 왜? 그래야 지옥이 소멸되지 않으니까...

 

주님은 천국보다 지옥보다 크신 분!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 이 세상이든 주님이 여호와의 신성 그 자체로 만일 이 피조 세계에 훅 들어오시면, 주님의 방문을 받은 그 세계는 그냥 바로 소멸됨!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삼층천 천사들조차 사실은 주님이 얇은 막을 입히셔서 소멸되지 않게 보호하신다는 사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신데, 하물며 전 세계 67%에 육박하는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6, 70%에 육박하는 비개신교인들을 외면하실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은 개신교인들만의 하나님이실까?

 

...

 

네, 이상으로 저 36장의 내용을 제 나름대로 좀 풀어보았습니다. 좀 더 생생하고 실제 영계 체험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저 책 36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3년 전, 처음 저 내용을 접하고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으며, 몇 번이고 읽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편협한 기독교 개신교 침례교인이었는지 말입니다!

 

저는 지금은 장로교 통합 측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태생부터 밝은 빛 아래 말씀으로 양육 받을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셨던 주님께 무한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흔한 말로는 금수저도 이런 금수저가 없지요!

 

저 역시 그러나 그동안 이런 주님의 은혜를, 다른 입장, 다른 그릇이라는 환경 가운데 태어나 그런 신앙, 그런 종교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는 일에 힘썼던 지난날을 고백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신앙적 철부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국이 어떤 곳이며, 주님은 어떤 분이시고, ‘말씀’이란 오직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야만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말씀(the Word)임을 시인, 고백하게 된 지금은 오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charity)의 삶에 힘쓰며,

 

※ ‘말씀’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도들, 특히 현 기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을 비롯, 신약성경 사도들의 서신서들, 그리고 구약성경의 여러 글들, 가령, 룻기,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잠언, 전도서 등... 은 주님의 말씀을 환히 비추어 주는 조명등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이 조명등들이 비추는 주님을 바라보아야지 이 조명등들을 보면서 거기서 교리를 추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처럼, 곧 주님은 현 좌파를 비롯, 우파나 중도 안에서도 여전히 불의한 자들이 있지만 변함없이 햇볕과 비를 공평하게 내리시는 주님처럼 선한 삶, 사랑의 실천, 변함없으시고 한결같으신 주님 앞에 나의 할 도리 다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자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 주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으신 분들을 보면, 그분들은 이단, 삼단 어쩌고 하실 겨를도 없으시며, 아무리 자기가 듣기에 많이 낯설고 좀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천사들처럼 그 속 사람, 곧 상대방의 내면의 선만 보십니다. 그릇이 아닌, 그 안에 담긴 내용에만 주목하시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님과 천사들은 사람의 내면, 속 사람, 영의 참모습만 보십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샬롬! ^^

 

2021-12-17(D6)-천국이야기(8), '교회에 속했던 적이 없는데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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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저희가 곧 첫 손주 볼 날이 다가와 며느리 배가 남산만 하고, 배에 손 대고 안수 기도하는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잠깐, 이 ‘안수’의 의미를 말씀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

 

개역개정 성경으로는, 이 ‘안수’라는 키워드가 처음 나오는 데가 아래와 같습니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출29:10)

 

복음서에는 주님의 이 안수, 곧 손을 통한 접촉으로 병을 낫게 하시고, 고치신 기록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가령,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9: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8:25)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7:33-35)

 

등, 이 외(外)에도 참 많지만 략(略)하고...

 

이 안수와 같은 ‘접촉’의 행위, 표현은 사실은 천국의 어떤 것에 대한 표상(表象)인데요, 그것은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리’, 곧 ‘생명이 같으면 함께 결합, 교류, 교통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안수를 해도 왜 누구는 병고침을 비롯, 기도가 응답되는 반면, 누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이는 사실, 저의 오랜 의문점이었는데요, 이 천국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이런 비밀을 깨닫게 되었지요 ^^

 

안수 받는 자의 속 사람이 천국과 같은 심성, 천국과 같은 생명, 곧 주님의 선(the Divine good)과 공명(共鳴)할 수 있는 속 사람이어야 천국의 모든 것, 곧 주님의 생명과 능력, 권능이 그의 안에 흘러들어가 그를 고치며,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심성, 우리의 생명, 특히 기도 받는 며느리와 아들의 속 사람이 주님과 공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 이 두 사람,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한 몸’이라 여겨지므로, 주의 종들의 모든 안수 통해 주님의 생명과 능력, 하늘의 권능이 아이 부모를 통해 아이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아멘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본문 시작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24번에서 26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창조 둘째 날입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아래는 위 본문말씀에 대한 아케이나이며, 중간중간 저의 설명을 덧댔음을 밝힙니다.

 

창조 첫째 날, 곧 거듭남 첫 번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으로 표현된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가 ‘낮’ 안에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을 낳으시고, 빛을 처음으로 주십니다.

 

‘낮’은 주님께 속한 것을, ‘참과 선에 속한 지식’은 리메인스(remains)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창1:5)

 

이 빛은 곧 주님이시며, 선 자체, 진리 자체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어떤 구별을 두시는데요, 그 결과,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들(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들(memory-knowledges, [scientifica]) 사이에 일종의 구별이 생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반면, 겉 사람 안에는 오직 사람으로,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반면, 겉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세상으로 말미암은 지식입니다. 특히,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학습을 통해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속 사람을 ‘궁창’(穹蒼, an expanse)으로,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은 ‘궁창 위의 물’로,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은 ‘궁창 아래의 물’로 각각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 같은 게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속 사람 같은 내면세계는커녕, 오히려 겉 사람의 본성과 퀄리티 같은 거에 더 익숙해져 있지요. 그는 생각하기를, ‘속 사람, 겉 사람은 서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합니다. 그 자신 이미 감각적이고 세속적인(bodily and worldly) 일에 푹 잠겨 있으므로, 속 사람 같은 내면의 일들 역시 그런 식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 하시고, 이어서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십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십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말이지요.

 

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거듭남 그 초기 단계 때,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 사이를 구별,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전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제 다음으로 관찰하게 되는 사실은, 먼저 속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속 사람에게 속한 일들은 선과 진리이며, 그것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고 있는 가운데 재미있는 사실은, 겉 사람의 경우, 그 본성상, 사람은 지금 자기가 행하는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줄로 여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처음부터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것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이런 착각까지도, 그의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를 주님 쪽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궁창 아래의 물’이 먼저 언급되고, ‘궁창 위의 물’이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입니다. 사람의 미련함, 어리석음, 연약함과 그에 따른 오류 같은 것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어 선과 진리의 일들로 구부려지는 신비, 거듭남의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체적이든 세부적이든, 겉 사람에게서 속 사람까지, ‘땅’에서 ‘하늘’까지 주님의 섭리 아래 한 사람의 거듭남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 중 신비입니다.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쳤고’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예언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통구와 같은 것입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또 주의 오심을 드러내어 말하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오류나 틀린 생각을 바로잡으시지도, 재산이나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방향을 구부러지게 하십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지요. 주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5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내용이 같은 구절들은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녁’, ‘아침’, ‘날’의 의미는 앞서 5절에서 다룬 것과 같습니다.

 

오늘 중요한 메시지는, 사람의 거듭남 초기 단게 때, 이제 빛을 받은 단계에서 사람은 전에 안 하던 말과 행동, 곧 기특한 언행을 시작하는데, 그런데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안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런 자기를 대견하게, 대단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좀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지요. 교회 안에도, 주위에도 제법 많습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전에는 그런 걸 바로 지적하고, 훈계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을 보니 주님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중 그런 단계가 있음을 감안하시고 잠자코 다음 단계로 그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포함, 교인이나 주위 다른 분들의 그런 미성숙한 모습을 주님이 우리를 품으시는 것처럼 품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가 아직 미성숙할지라도 그의 안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속 사람, 곧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기억하고, 그의 겉 모습과 함께 동시에 영의 눈도 켜져서 그의 속 사람 또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거듭되는 넘어짐과 악습에 다시 발담그는 그런 연약함에도 불구, 주님이 나를 받으심 기억하시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나는 어쩌면 또 넘어지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나는 조금 더 성장한 상태에서 그러고 있을꺼야. 비록 계속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겠지만, 어제의 저녁과 아침이 아닌, 좀더 나아진, 좀더 위를 향해 나아간 중에 맞이하는 저녁과 아침일꺼야!’라고, 자신을 향해 긍정하는 그런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정도로 둘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을 주님,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환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2-13(D2)-창세기이야기(7), '둘째 날,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분하시는 두 번째 상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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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 역시 지난 주에 이어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3편, 최종편입니다 ^^

 

지난 2편에 이어 오늘 마무리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 참고로, 월요일 창세기 이야기처럼 이 천국 이야기 역시,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 ‘Arcana Coelestia’(1749-1756) 및 그의 책, ‘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1758)을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네, 바로 시작합니다. 네 번째인,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입니다.

 

다음은 위 책의 53장, ‘사람의 사후 셋째 상태’ 시작글입니다. 김은경 역을 인용합니다. 글 번호로는 512번 글입니다.

 

가독성 및 정독(精讀)과 강조를 위해 문장 단위로 나눠보았습니다.

 

...

 

죽은 후의 사람, 즉 영의 셋째 상태는 교육받는 단계다.

 

이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 천사가 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옥에 갈 사람들에게는 이 단계가 없다.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둘째 상태는 셋째 상태를 겸한 것이며, 그들이 자기 자신의 사랑, 즉 그 사랑이 있는 지옥 사회로 완전히 돌아서면 완료된다.

 

이렇게 완료되면, 그들은 그 사랑으로 의도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옥적이므로, 그들은 오직 악한 것만 의도하고, 그릇된 것만 생각한다.

 

그런 생각과 의도를 그들은 즐긴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전에 자기의 사랑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했던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을 거부한다.

 

선한 영들은 이와 반대로 둘째 상태에서 셋째 상태로 인도된다.

 

이 상태는 교육을 통해 천국에 갈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다.

 

선과 진리를 알아야만, 즉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수 있다.

 

사람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영적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 그에 반대되는 악과 거짓은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엇이 올바름과 정직함인지, 즉 무엇이 사회적, 도덕적 선과 진리인지 배울 수 있다.

 

세상에는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가르치는 사회적 법이 있고, 또 대인관계에서 도덕적 법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정직하고 올바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선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에서 나오지 않고 천국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도출된 교회의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 마음에 속한 내면이 천국에 있지 않으면, 영적 선과 진리는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신성을 인정하고,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올바르고 정직하게 행할 때, 그 마음이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나 세상을 목적으로 해서가 아니라 신성을 위해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사후 생활이 있다는 것,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 말씀은 신성하기 때문에 말씀 안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것 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을 알고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은 영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다면, 영적인 것을 의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의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위와 같은 것을 의도할 때, 천국이, 즉 천국을 거쳐서 주께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주께서는 사람의 의지 속으로 들어오시고, 의지를 통해서 생각 속으로 들어오시며, 그 둘을 통해 삶 속으로 들어오신다.

 

사람의 삶 전체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영적 선과 진리는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며, 사람은 가르침을 통해서만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주님은 사람의 삶 속으로 유입하시는 정도만큼 그를 가르치신다.

 

그 정도만큼 주님은 사람의 의지를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랑으로 불붙이시고, 진리를 앎에 따라 그의 사고를 밝히 깨우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사람의 내면은 열리고, 천국이 그 안에 심어진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성하고 천국적인 것이 사람의 도덕적 삶에 속하는 정직한 행위와, 사회적 삶에 속하는 올바른 행위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때 사람은 그런 행위를 신으로 말미암아, 즉 신성을 목적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도덕적, 사회적 삶에서 그런 목적으로 행하는 정직하고 올바른 행위는 영적 삶의 필수적인 결과이며, 결과의 모든 요소는 그 결과를 낸 원인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인의 성격이 결과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

 

좀 길었지요? 네, 좀 길었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내용, 가령, 주님은 어떤 조건과 상황 가운데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지, 우리의 내면은 어떻게 열리는 건지, 우리의 지상 생활이 어떻게 해서 영적으로 변화되는지 등등... 이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번역도 참 깔끔하게 잘 되었고요 ^^ 주님의 빛을 구하며, 충분히 ‘정독’하시면, 점차 밝아지며, 환하게 이해되실 줄 믿습니다 ^^

 

이 외에도 이 교육장의 전체 구조 및 교육생들의 구성, 그리고 생전에 비기독교인이었던 영들의 경우, 이곳에서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지 등은, 그리고 교육이 다 끝나면, 주님이 직접 한 사람 한 사람, 앞으로 그가 영원히 있게 될 해당 공동체로 인도하시는 등등은, 글이 너무 길어져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중에 사후 다 알게 될 사항들을 굳이 이렇게 미리 다루는 이유는, 이런 내용은 닥쳐서 깨닫기에는, 겪어서 알기에는 너무 늦어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 혈연과 혈육으로 지내게 하신 그 참뜻을 몰라 이 관계가 천년만년 갈 줄 알고, 내 핏줄, 내 혈육, 우리 집과 가문 등에 올인하는 삶을 사는 것은, 내면, 곧 속 사람의 형성에 올인해도 모자랄 시간을 외면, 곧 겉 사람의 삶으로 죄다 낭비를 하는 것과도 같아 사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이란 실상은 그의 애정, 곧 그의 중심 사랑(ruling love, 그 사람의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사랑)이 사람의 모양을 띤 것이며, 이것은 오직 삶을 통해서만 형성됩니다. 삶의 대부분을 겉과 속이 다르게 살아놓고는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그런 건 없습니다. 구원,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공정하지 않은 무슨 허락이나 자비, 은혜를 받아 들어가는 게 아닌, 오직 이런 만인 앞에 공정하고도 공의로운 방법과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네, 다음은 다섯 번째인,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입니다.

 

이 내용 또한 위 책, 40장, ‘천국 안의 결혼’에서 한 가지, 383번 글 인용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나는 또 허락하심에 따라 천국에서의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볼 수 있었다.

 

천국 어디서나 비슷한 사람끼리는 함께 있고, 다른 사람끼리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천국의 각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비슷한 사람들은 스스로 서로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서로에게 이끄신다.

 

마찬가지로, 서로 마음이 하나로 결할될 수 있는 배우자들도 서로 만나게 되고, 만나면 첫눈에 서로를 가장 내적으로 사랑하게 되며, 자기들이 서로의 짝임을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른다.

 

이런 까닭에 천국의 모든 결혼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는다.

 

그들도 혼인잔치를 하며, 거기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데, 잔치의 형식은 공동체마다 다르다.

 

...

 

놀랍지 않습니까? 사후 천국에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난다니요! 그것도 주님의 직접 중재로 말입니다! 2번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결혼’은 천국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스베덴보리 저, ‘Conjugial Love’(1768)라고, 534개의 글로 된 책이 한 권 나올 정도입니다. 이 책 제목의 후반은 ‘After which follow the pleasures of insanity pertaining to promiscuous love’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곧 선이 비슷한, 거의 같은 사람들끼리는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물로 한 공동체 내에서도 모든 구성원의 선이 다 다르며, 그것은 중심에서 동심원 퍼져나가듯 그렇게 다릅니다. 즉 중심에는 그 공동체의 가장 뚜렷한 선을 가진 사람이, 바깥으로 갈수록 좀 덜한 사람이 배열됩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의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만 다릅니다. 마치 아들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얼굴에 아버지의 얼굴이 반영된 것처럼 말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는 비록 처음 보는 초면일지라도 마치 오랜 고향 사람 만나듯 친숙하고 반갑습니다. 그러나 천국일지라도 공동체가 다르면, 즉 선이 다르면 마치 외국인을 만난 듯 그저 대면대면합니다 ^^

 

네, 이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상의 혈육 관계는 휴면상태로 들어가고, 전혀 새로운 존재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의 남편 혹은 아내를 천국에서도 계속 부부로 만나 지내고 싶으면, 그리고 지금의 자녀들과 또 그리 하고 싶으면, 방법은 하나, 서로 선이 같으면 됩니다. 즉 그 중심 사랑이 같으면, 참된 결혼생활을 하면 됩니다. 아내가 원하는 걸 남편도 원하고, 남편이 말하는 걸 아내는 따르고. 하여 둘이 한 몸 되면 됩니다! 아멘, 할렐루야! ^^

 

이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이미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속 사람, 곧 내면을 준비하게 하시려고’입니다!

 

땅 위 혈연관계는 천국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모종밭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인류로 채워지며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땅 위 혈연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결혼을 가장 신성시합니다. 천국 자체가 ‘결혼’입니다. 천국 결혼과 지상 결혼의 차이는 천국 결혼은 그 결과 선과 진리가 생겨나지만, 지상 결혼은 그 결과, 아들, 딸들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주, 우리의 자녀들을 보며, ‘이 아이의 선과 진리는 어떤 면에서 나랑 살짝 다를까?’, 영적 시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땅 위 혈연관계를 통해 부지런히 우리는 자신의 속 사람, 영의 내면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 부모, 손주 등 혈육, 핏줄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이들을 볼 때, 영의 눈이 함께 켜져서 주님의 모습 또한 겹쳐 보여야 하겠습니다. 자녀를 볼 땐, 부부,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뵐 땐, 자신의 뿌리이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역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래야 우리의 지상 혈육, 핏줄 사랑이 주께 복을 받으며, 안전할 것입니다. 이걸 놓치면, 우리는 그저 겉 사람의 일로, 육체의 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2021-12-10(D6)-천국이야기(7),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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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창조 첫째 날입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2-5)

 

이야기 #3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첫 육일 간 기록은, 사실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대략 여섯 단계로 나눠 설명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11/15일자 이야기를 참고하시고요, 혹시 카톡 지난 글 찾는 게 불편하시면, 아래 링크, 제 블로그의 ‘창세기 이야기’라는 카테고리로 가시면 지난 글들을 편리하게 보실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bygrace.kr/

 

자, 그럼, 위 본문을 중심으로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 참고로, 이후 내용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의 창세기 주석, ‘Arcana Coelestia’ 글 번호 17번에서 23번까지를 주로 레퍼런스하였습니다.

 

사람의 거듭남 첫 번째 상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요. 저런 상태에서 이런 상태로 상태 변화가 시작되려면 뭔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요, 그래서 이 첫째 날은 주님이 사람에게 거듭남에 필요한 사전 준비, 거듭남이라는 빌딩을 짓기 전, 땅을 다지는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거듭남 이전 상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과 진리의 씨 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혼돈’은 그 땅에 선이 전혀 없음을, ‘공허’는 진리가 전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의 외적 발현이 선(善, the Divine good)이며, 이 선을 담은 그릇이 진리(眞理, the Divine truth)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선은 사랑의 선이요, 주님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인 것입니다.

 

어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았으면, 그 선과 진리의 결과, 그는 주님을 만나며, 주님 앞으로 인도됩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 곧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나라이므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곧 천국과 같은 상태가 되어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이 자기의 신성과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하도록, 곧 주님의 선(good)과 사람의 의지(will)가, 주님의 진리(truth)가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와 각각 서로 상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거듭남이란, 바로 이 상응이 깨어나 활성화, 서로 공명(共鳴)하는 것이며, 그래서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켜서는 특별히 ‘혼돈과 공허’(a void and emptiness)라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흑암’의 상태, 곧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과,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매우 어리석고 무지한,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깊음 위에 있고’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상태이며, 그 가운데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깊다’, 뭔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 천국에서 보면 마치 까만 덩어리(a black mass)처럼,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destitute of vitality), 아주 극심한 궁핍 덩어리로 보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빛인데, 이 빛이 전혀 없으므로 저렇게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 것이지요. 천국이 광명한 나라인 것은 천국은 주님의 진리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태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다음 단계인 거듭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면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선이라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시작되는데요, 그런데 이때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반발하는(hinder and resist) 일체의 요소들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새사람이 그 안에 잉태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이 표현은 주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품으시니라’(brood)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암닭이 알을 품에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숨기시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보관하여 오신 것들인데요, 말씀 전체를 통하여, 이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지며, 외적인 일들,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겉으로 밝히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이 지식을 가리켜 여기서 ‘수면 위’라 하신 것입니다.

 

이 ‘리메인스’ 이야기, ‘리메인스’라는 개념은 앞으로 말씀 전체를 관통합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그의 영유아 시절, 자기도 모르게 주님으로부터 이 리메인스를 공급받게 되며, 즉 주님이 아이의 안으로 이 리메인스를 밀어넣으시며, 이것은 나중에 그의 거듭남과 회심에 아주 결정적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으로 말미암은 이 천적인 것, 주님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며, 그렇게 사람의 ‘인권’(人權)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인권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각 사람 안에 주님이 보관하신, 주님의 것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며, 그것은 곧 이웃 사랑(charity)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권’이라 쓰고, ‘교만’이라 읽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남은 자’ 사상이나 십일조도 다 이 리메인스에서 출발합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이 뭔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됩니다.

 

온통 겉 사람 뿐이기만 한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또 이런 자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인 모든 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 선들은 악이요, 그런 진리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뭔가가 다시 시작될 때, 그때 그는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선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로 더욱더 다가갈 때, 이 빛이 바로 주님이신데요, 이분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사람은 주님의 존재,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위의 말씀과, 또 주님은 선 또는 생명 그 자체시며, 진리 또는 빛 그 자체시라는 사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빛을 일컬어, ‘좋았더라’, 곧, ‘’(good)이라 합니다. 이 빛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인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그동안 빛인 줄 알았던 모든 걸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동안 악은 선인 것처럼, 거짓은 진리인 것처럼 행세해 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그것들은 그저 어둠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것들이었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며, 또 자기가 의도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주님께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낮은 빛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이면, 그것은 ‘’으로 비교됩니다. 밤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앞서 있었던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그늘진 상태, 거짓의 상태, 아무런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아침’은 모든 후속 상태, 앞으로 진행될 상태를 말합니다. 빛의 상태, 진리의 상태,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입니다.

 

저녁’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반면에, ‘아침’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아무 신앙이 없는 때를 ‘저녁’이라, 신앙의 때를 ‘아침’이라 하였으므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아침’이요, 주님이 떠나가실 때, 그때는 신앙이 없는 때이므로, ‘저녁’이라 하는 것입니다.

 

왜 ‘저녁’에서 바로 ‘아침’이 될까요? 그것은 천국에는 ‘’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 지옥의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천국에 ‘아침’이니, ‘저녁’이니 하는 무슨 상태들이, 무슨 상태들의 변화가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천국에는 상태 변화가 있습니다. 천국은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인데요, 천국의 상태는 곧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천사 하나하나가 가장 작은 천국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사들의 상태가 새벽, 아침, 낮, 저녁 등으로 변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천사들은 늘 밝은 빛 가운데 하하호호 하며, 항상 충만한 기쁨 가운데 있는 줄 아는데요, 아닙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밝았다, 흐렸다, 기뻤다, 우울했다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사들 역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세상 모든 피조물은 자기를 사랑함이라는,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에 함몰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천사들은 이 ‘자기 사랑’을 ‘주님 사랑’으로 억제하는 만큼만, 저지되는 만큼만 천사입니다. 천사들은 생전에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주님을 사랑하여서 천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인데도 말입니다.

 

천국 한 공동체 내 같은 천사들일지라도 이 천사의 상태와 저 천사의 상태가 다르며, 또 여러 공동체들 역시, 이 공동체와 저 공동체의 상태가 다릅니다. 이 천국과 저 천국의 상태도 다르고요! 이는 마치 이 지구 상의 여러 날씨와 기후, 시간의 상태가 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지구 이편이 밤이면, 저편은 낮이고, 이쪽에 동이 터오면, 저쪽은 해가 저물며, 이쪽은 타들어가는 가뭄이면, 저쪽은 모든 걸 다 휩쓸어 가는 홍수요, 이쪽이 여름이면, 저쪽은 겨울이고... 등등 지상의 이 모든 상태 변화는 곧 천국의 어떠함을 상응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아멘, 할렐루야!

 

그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이 없는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정도로 첫째 날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주님의 빛, 천국 빛으로 환히 비추사 내면이 밝아져 밝히 깨닫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2-06(D2)-창세기이야기(6), '첫째 날,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번째 상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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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 주에 이어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2편입니다.

 

지난 1편에 이어 계속 이어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네, 바로 시작합니다. 세 번째인,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 변화’입니다.

 

우리가 ‘영’(靈, spirit)만 해도 잘 잡히지가 않는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외면’, ‘내면’을 논하는 것은 더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사후, 영의 외면의 상태일 때까지는 그래도 아직 그 외모와 아우라가 느껴져 생전 혈연과 지인들이 알아보지만, 그후 외면은 잠들고, 드디어 내면이 드러나게 되면 그때는 완전 다른 그 무엇, 곧 자신의 진짜 모습, 진정한 ‘영’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며, 나중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천국 내 새 공동체에서, 역시 주님이 정해주시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걸 가리켜,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 가서도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며, 또, 굳이 이런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래야 지상 혈육과 혈연의 새로운 영적 의미를 알고, 그 의미에 맞게 주 안에서 올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상 가족 사랑, 핏줄 사랑을 통해 오히려 주님 사랑을 배우고, 연습 및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지상에서, 예를 들면, 부부가 서로를 정말 참으로 ‘둘이 한 몸 되도록 사랑하였고’, 이후 천국에서도 여전히 부부로 지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은 그렇게 지내도록 허락하십니다 ^^ 여기서, ‘둘이 한 몸 되도록 사랑하였다’는 것은,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것을 자기도 원하고, 아내는 남편이 생각하는 것을 자기도 생각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아내의 의지가 남편의 이해 안으로 들어가고, 남편의 이해가 아내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 곧 진정한 ‘하나 됨’, ‘한 몸 됨’을 말합니다.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있어 사람이기 때문인데요, 이 둘이 똑같으면, 주님 보시기엔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사람이 죽어 천국에 가면 거기는 다 천사와 같아서 지상처럼 남자, 여자 이런 성(性)적 구분이 없고, 더 이상 무슨 결혼이다, 부부다 이런 게 없는 걸로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눅20:34-36)

 

때문이지 싶은데요, 이는 우리가 그동안 천국의 결혼을 땅위 결혼의 확장, 연장 개념으로 이해해서 그런 것입니다.

 

실상을 말씀드리면, 천국이라는 상태 자체가 ‘결혼’의 상태이며, 삼위일체, 곧 삼위가 한 분 주님으로 계신 것도 ‘결혼’의 상태요, 우리가 주님과 결합하는 것도 ‘결혼’의 상태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 지상의 결혼은 불완전하지만, 천국에 가면 비로소 완전한 결혼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가진 이 남자, 여자의 성(性)은 영원하여서, 지상에서 보낸 성으로 사후 천국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니 굳이 성전환 수술 같은 걸 할 필요가, 소용이 없습니다. 생전, 몸에 아무리 그런 변화를 주어도 사후, 몸을 벗고 영이 되면, 그 성은 고스란히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슨 젠더니 어쩌니 하는 다양한 시도들도 모두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천국의 천사는 지상의 사람이 사후 천국에 올라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 모든 구성원은 그전에 지상에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 따로, 천사 따로, 기타 무슨 천상 피조물 따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본래 참 사람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 따로, 천사 따로로 알고 있게 된 건, 말씀을 글자의 뜻만으로 이해를 했기 때문이며, 사도들의 편지를 주님의 말씀과 동등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영적이어서 땅위 결혼을 일컫는 용어인 ‘혼례’ 대신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오는 ‘마음의 결합’이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말 대신 ‘두 마음이 하나로 합해짐’이라는 뜻을 가진, ‘서로에게 속함’이라는 어떤 천국 용어로 서로를 부릅니다.

 

항목 ⑤번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천국 공동체는 주님의 선(善, good)의 다양성으로 구분되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원칙, 곧, ‘비슷하면 가까이’에 따라 사후에도 서로 선이 비슷하면 같이 지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한 가족이었는데 천국에서도 같이 지내고 싶으면, 바로 이 선이 정말 비슷하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면’일 때는 알아보는데, ‘내면’일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는 게 뭘까? 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 한 가지 예를 준비했는데요, 바로 나비의 일생입니다. 나비의 일생은 성충-알-유충-번데기의 네 단계를 거칩니다. 이 가운데 번데기를 기준으로 유충 시절과 성충 시절이 극과 극일 정도로 그 외모와 삶이 완전 다른데요, 유충 시절엔 보기에도 참 징그러운 모습으로 잎사귀를 갉아먹으며 살지만 번데기를 거쳐 성충이 되면, 이때는 많은 사람을 매혹케 하는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 꽃으로 만발한 화원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꿀과 수액을 얻어 살아가지요.

 

여기서 굳이 비유하자면, 영의 외면 시절이 유충 모습이요, 영의 내면 시절이 성충, 곧 아름다운 나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천국의 경우이겠고요, 그 내면이 지옥으로 향한 경우는, 정말 참혹한 괴물의 모습이겠지요. 하지만 이 지옥의 경우도, 자기들끼리는 정상적인(?) 사람 모습으로 보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천국 빛으로는 괴물로 보이지만요. 이 역시 주님의 자비요, 배려입니다.

 

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정도로 변신(?)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이 ‘영의 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생전 모든 기억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 상태에선 모두 휴면 상태에 들어가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꺼내어져 활성화됩니다.

 

생전 모든 경험과 기억들은 그래서 이 ‘영의 내면’을 형성하는 일종의 재료들인 셈입니다. ‘영의 내면’은 선과 진리가 어느 정도로 하나가 되었는가, 혹은 악과 거짓이 어느 정도로 하나가 되었는가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혹은 지옥에 가는 것은 바로 이 ‘영의 내면’으로 갑니다. 물론, ‘영의 외면’도 같이 가지만 이것은 이미 휴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영의 내면’으로만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겠지요 ^^

 

참고로, ‘선과 진리의 하나 됨’이란, 주님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마7:24)이라는 말씀과 같이, 주님의 말씀인 진리를 듣고, 들은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알고만 있으면 아직 내 것, 곧, ‘내면’이 아니지만, 알고 있는 그것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면, 바로 그때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어 나의 ‘내면’이 되며, 이때 내 ‘영의 내면’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악과 거짓으로 하나 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내가 무슨 진리를 실천할 때, 그 동기가 ‘주님을 사랑해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말씀에 그렇게 하라 되어 있으니까’ 등의 동기도 좋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건 안 됩니다. 가령,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까..., 내가 이래뵈도 목산데 지금 딴짓을 하거나 모른체 하면 나중에 골치아파지니까..., 그래도 내가, 우리 교회가 사회적 지위와 레벨이 있으니까... 등, 이런 이유로 무슨 선행을 하는 건 그냥 머리(understanding)로만 하는 것일뿐, 그것이 가슴(will)으로까지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후, 영계에서 깨어나는 순간, 주님에 의해 정확히 분류(?)됩니다. 곧 천국 혹은 지옥이 결정되는데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슨 사후, ‘눈 뜨니 천국’ 혹은, ‘눈 뜨니 지옥’, 네, 이런 거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거의 다 어느 정도의 선과 진리, 혹은 악과 거짓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요, 비록 천국 갈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 간 악과 거짓을 지닌 채 임종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죄를 말갛게 씻었으므로 우리는 깨끗해졌다. 그러므로 죽으면 바로 천국 간다.’ 뭐, 이렇게 믿어왔고, 또 고백하며,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천사들은 ‘주님의 보혈’(the Lord’s blood)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e Lord)로 지각합니다.

 

이 진리를 접한 책임(?)과 그 결과는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해의 빛과 열을 받아 생명활동을 하는 숲은 생기로 넘쳐나게 되지만, 반대로 부패를 일으키는 거름더미는 악취로 가득한 것처럼 말입니다. 해는 공평, 공정하게 만물에게 빛과 열을 공급하지만, 그 완전 상반되는 나중 결과는 그 책임이 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받은 당사자인 피조물에게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보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혈’의 능력, 곧 주님의 신성한 진리의 능력을 힘입어 스스로 결단, 악에서 물러나는 일은 안하고, 그저 ‘믿기만’ 하면, 미안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주님의 보혈’로 자기들의 본성(本性, own, 라. 프로프리움 proprium)이 저지되는 만큼만 천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 역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악에서 물러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해야 합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 본성의 힘이 아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요청으로, 악을 직접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악에서 물러나는 건 우리가 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의 의미입니다.

 

천국의 경우를 말씀드리면, 그러나 천국은 일체의 악과 거짓은 허용되지 않는 곳이므로, 천국 가기 전, 먼저 이 악과 거짓을 선(先)처리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에서는 이 악과 거짓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먼저 이 악과 거짓을 떼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 과정이 끝나 온전히 100% 선과 진리로 하나 된 상태가 되면 이제 세 번째 상태인 천국 오리엔테이션 장소로 가는 문이 열리며, 주님이 친히 우리를 그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지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게 다 되어 100% 악과 거짓으로 하나 된 상태가 되면, 이때 비로소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그 문, 그 틈으로 나오는 끔찍한 냄새에 그만 환장을 하며 뛰어듭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지옥을, 사람들은 가기 싫어 하는데 지은 죄과 때문에 억지로 쳐넣어진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두 번째 상태인 ‘영의 내면’이 지옥으로 완성된 사람은 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기운과 냄새, 끔찍한 악취에 그만 환장을 할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에, 머리를 아래로, 두 발을 위로 하고 뛰어들게 되는데, 그게 남이 볼 땐, 누가 발로 차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번째 상태인 ‘영의 내면’ 상태를 마치게 되면, 사람은 악과 거짓으로 100%가 된 상태, 악과 거짓이 결혼한 상태, 온전히 악과 거짓으로 영근 상태이기 때문에, 일말의 무슨 양심의 가책이나 회개, 뉘우침 같은 걸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사실, 지옥의 영들도 자기들이 지금 악을 행하고, 거짓을 말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금할 수가 없는 게, 그들 영의 내면에 있는, 악을 향한 달콤함이 그들을 삼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선이며,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육으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오직 벌로만 통제할 수 있으며, 그래서 지옥은 벌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참고로, 천국 갈 사람들한테는 세 번째 상태인 오리엔테이션 상태가 있지만, 지옥갈 사람들은 이 두 번째 상태로 끝, 바로 지옥 내 해당 공동체로 배정을 받게 됩니다.

 

아, 오늘도...

 

겨우, 하나만 다루었네요. 아이고...

 

나머지는 다음에, 3편으로 만나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의 주제가 너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나머지는 다 합쳐 다음 3편 하나로 끝내겠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2-03(D6)-천국이야기(6),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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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다음은 지난 2월 14일, 함께 나눈 내용입니다.

 

... 최근 창세기 1장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와, 이에 대한 AC.44번 내용 중에,

 

사람은, 땅처럼, 먼저 자기 안에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심어 무얼 믿고 무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고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하는 문장에 눈길이 갔더랬습니다. 특별히 땅을 사람의 마음으로 연결하는 표현에 말이지요.

 

특별히 세계테마기행 최근 편 가운데 ‘벼랑 끝을 걷다, 협곡 기행’인 시리즈를 보는 중, 오... 정말 지구 상 어마어마한 협곡들을 소개하는데, 비록 영상으로지만,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 프랑스령 레위니옹 살라지 협곡, 실라오스 협곡, 그리고 중국의 시링협곡, 언스대협곡,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블라이드리버캐니언 등입니다.

 

이 장엄, 광대, 광활한 장면들을 또 드론으로 말미암아 기가 막힌 영상으로 보여주는데요,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렇게 계속 감탄에 감탄을 계속하다가...

 

오, 할렐루야! 이 모든 광경, 곧 땅의 모습 이 모든 장관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의 마음이겠구나 싶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보실 때, 저렇게 보이시는가 보다 싶은 순간, 엄청난 전율이 일며, 말할 수 없는 큰 감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말씀 구절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대하16:9)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주님이 내 안에 조성하신 마음의 어떠함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그러나 엄청난 무슨 발견을 한 것 같은 아주 흥분된 순간이었습니다...

 

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의 모판입니다. 모형이요, 모델하우스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사람을 위함이며, 오직 사람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럴 듯한 무엇이라 해도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일체의 것은 천국으로 말미암은 게 아니며, 아무리 사람을 그럴 듯하게 여긴다 해도 사람의 구원, 곧, 천국으로 인도함이 아니면 여전히 천국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 말씀(The Word) 전체가 단 한 가지 목적, 곧,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것이며, 그래서 창세기도, 그리고 창세기 1장도 결국은 한 사람의 거듭남의 전 과정을 아름다운 천지창조 이야기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첫 단계부터 여섯 번째 단계 가운데 있는 사람, 즉, 아직 거듭남 중에 있는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한테는 주님은 아직 ‘하나님’이셔서 창세기 1장엔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일곱 번째 단계인 일곱째 날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 즉,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한테는 주님은 비로소 ‘여호와’이셔서 창세기 2장에서는 ‘여호와’로 각각 호칭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연계 모든 만물은 사람의 거듭남에 관련되며, 구원에 기여할 때에만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바로 그때가 그 사람한테는 ‘태초’(太初, the beginning)가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 the heavens and the earth)는 사람 안의 속 사람, 겉 사람을 말합니다. 이 속 사람, 겉 사람 이야기는 앞으로 대하(大河)처럼 계속 됩니다.

 

말씀에 나오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거듭남을 가리킵니다. (cf. 사43:7)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렐루야!

 

2021-11-29(D2)-창세기이야기(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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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 1편입니다. 쓰다보니 분량이 많아져 할 수 없이 1, 2편 둘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번 다룬 것 같아 찾아보니 지난 8월 3일에 간략하게 다루었네요 ^^ 오늘은 원래 생각해 둔 다른 주제가 있었는데, 이번 주, 친인척 부고(訃告) 소식 및 저희 친형님의 25주기 기일도 찾아와 고민하다가 이 주제로 변경했습니다.

 

이 주제를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으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먼저 좀 선행학습을 해야 합니다.

 

- 사후(死後), 영이 된다는 것

- 영의 외면과 내면

- 천국을 이루는 수많은 공동체

- 천국의 결혼

- 부모와 자녀의 영적 의미

- 천국과 지상의 상응

- 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

 

등등...

 

네, 그만큼 쉬운 주제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이 주제에 대한 답이 꼭 무슨 저런 걸 다 알고 열심히 추론해야만 알 수 있는,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가 사후 천국에 가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 이 지상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답조차도 그걸 이해하려면 위와 같은 사전 이해들이 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은 지난 8월 3일, 나눈 글의 시작 부분입니다.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까마득한 조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나? 또 나중에,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까마득한 후손이 찾아와 나한테 인사를 하게 되나?’...

 

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비천적(非天的), 비영적(非靈的)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을 무슨 이 세상의 연장이요, 확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

 

답부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상 혈연관계는 지상에서 끝, 천국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천국에선 전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임종 및 깨어남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자, 그럼 먼저, ① 임종 및 깨어남입니다.

 

임종(臨終)은 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함’입니다. 산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겠지만, 천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참 영의 깨어남’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가족들은 슬피 울고 있지만, 영계에서는 마치 신생아실의 돕는 간호사들처럼 천사들의 극진한 돌봄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신참 영들이 깨어날 때, 마치 지상 신생아 무균실 환경처럼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제일 먼저 가장 높은 천사들인 삼층천 내적 천사들을 보내십니다. 이 천적 천사들이 오면 어떤 향기가 진동하는데요, 이 향기로 인해 일체 악한 영들의 접근이 금지됩니다.

 

세간, 가령, 호스피스 등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통해 임종을 앞둔 분들의 경우, 무슨 저승사자를 보시곤 한다는 말들을 듣는데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분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본 삼층천 천사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이 ‘깨어남’(resuscitation, 소생, 부활)의 과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많지만... 네, 하여튼 영계에서 막 깨어나는 신참 영은 천적, 영적 천사들의 도움과 보살핌으로 이후 영계에서 첫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다음은, ② 영의 외면(exteriors)의 상태변화입니다.

 

’하면 그냥 ‘’이지 무슨 ‘영의 외면, 내면’이 있다 하나 어리둥절하시지요? ^^ ‘영의 외면’이란 다름 아닌, ‘영의 내면’과 육체(肉, body, 살과 뼈로 된) 사이에서 둘을 연결시켜 주는, 영의 바깥, 겉 부분을 말합니다.

 

우리의 이 살과 뼈로 된 몸은 사실은 우리의 영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옷 자체에 무슨 생명이 없듯 사실 우리의 이 몸은 영과 분리된 후엔 그냥 물질일 뿐이어서 바로 썩고 부패하지요. 우리의 모든 기억과 경험, 감각과 감정 중에서, ‘영의 내면’, 즉, 속 사람(internal man)에 속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몸은 아닌, 그런 일체가 바로 이 ‘영의 외면’에 속합니다. ‘영의 내면’에 대해서는 요 바로 다음인 ③번 항목에서 다루겠습니다.

 

영은 사후 몇 차례의 상태변화를 겪으면서 천국, 또는 지옥 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요, 그 첫 번째 상태변화가 바로 이 ‘영의 외면’의 상태변화입니다.

 

영의 외면’이 바로 저런 거여서 사후 신참 영들의 모습은 임종 직전 모습, 즉, 생전 모습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 외면의 상태에서는 생전에 알던 가족과 친지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던 모습이 아직은 남아있어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무척 반가워들 하지요.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한 신참 영들을 이들 고참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고 이런저런 걸 알려줍니다.

 

여기서 잠깐, 사람 안의 ‘천국’이 무엇이며, 또 ‘지옥’이 무엇인지를 잠깐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된 상태가 천국’이며, 이런 사람은 천국의 해당 공동체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서 ‘악과 거짓이 하나 된 상태가 지옥’이며, 이 사람 역시 지옥의 해당 공동체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해당 공동체’라는 것은, 사람은 생전에 이미 그 사람의 ‘중심 사랑’에 의해서, 자기는 모르지만, 그 영은 천국 또는 지옥의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중심 사랑’이란, 그가 무엇을 하든 결국 그의 모든 행위의 근본 동기가 되는 하나의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을 가리켜 ‘중심 사랑’(ruling love)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 사랑’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면 천국으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변화 때, 일어나는 가장 중요 포인트는, 이 영의 ‘중심 사랑’을 통해 형성된 ‘영의 내면’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즉, 선과 진리의 하나 됨, 또는 악과 거짓의 하나 됨이 진행되는 동안, 천국에 갈 사람한테서는 천국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악과 거짓을, 반면, 지옥 갈 사람한테서는 역시 지옥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과 진리를 각각 떼어내는 일이 이때 일어납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이 영의 모습은 점점 달라지며, 이 첫 번째 과정이 마칠 즈음이면, 즉, 그의 ‘영의 내면’이 본모습을 드러내면, 그 모습은 ‘영의 외면’일 때와 너무도 달라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의 외면은 휴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려 다른 사람들의 영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어떤 할머니는 등도 굽고, 흰머리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참 볼품없는 외모이지만, 그 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인 반면, 어떤 젊은 여자는 정말 많은 남자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그 영은 거의 괴물 수준이더라라고 합니다. 이때 이분들이 본 저들의 영은 사실은 저들의 ‘영의 내면’, 곧, 본모습을 본 것입니다.

 

영의 외면, 내면’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내키지는 않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 누굴 만나거나 할 때, 예의 상, 얼굴이나 태도에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표정, 행동을 하거나 정 그럴 수 없다면, 그저 무난하게라도 있다 옵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있고, 도덕과 윤리, 상식과 정서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속이 들키지 않게 가려주는 것, 이것이 바로 ‘영의 외면’이며, 그렇다면, ‘영의 내면’은 아무도 안 볼 때, 누구 신경 쓸 일도 없고, 눈치 볼 것도 없을 때, 그때 나타나는 내 본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즉,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 그것이 ‘영의 내면’입니다.

 

다음 순서들인,

 

③ 영의 내면(interiors)의 상태변화

④ 천국 올라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⑤ 자신의 영원한 공동체에 합류

⑥ 우리가 지상에서 혈연관계로 살아가게 하신 이유

 

는 2편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미니 결론을 미리 좀 말씀드리자면...

 

천국에서는 지상과 같은 ‘생육하고 번성함’이 없고, 대신 ‘주님의 선과 진리의 생겨남’이 있습니다. 지상은 천국의 상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혈연, 혈육도 이런 관점,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의 관점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녀에 대한, 부모에 대한,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탈선하거나 오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주님 사랑’이라는 ‘중심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부모 사랑 또한 부모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며, 남편 또는 아내에 대한 사랑도 남편 또는 아내의 모습으로 내 곁에 계신 ‘주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6(D6)-천국이야기(5), '지상의 혈연관계가 천국까지도 이어지는 걸까?(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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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를 들어, ‘아담’ 하면 ‘아담’이라는 한 개인을, ‘하와’ 하면 ‘하와’라는 한 개인을, 그런 식으로, ‘아벨’도, ‘가인’도... 다 그렇게 그런 이름을 가진 한 개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말씀(the Word)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육이 영의 생각, 영의 사정을,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생각과 사정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뿐 아니라 지난 2천 년 기독교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한, 이런 지독한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된 데에는, 초대교회의 연약함을 비롯, 니케아 회의의 심의와 칙령(the deliberati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Nice, 325년) 및 이후 전개된 교리의 역사 등 역사적 배경 이야기가 좀 있으며, 나중에 필요하면 다루겠습니다. (TCR.206)

 

한 마디로, 상응 지식(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말씀의 영적 의미, 곧 속뜻에 접근할 수가 있는데요, 초대교회 이후, 위와 같은 이유로 인류에게 이 지식이 닫힌 것입니다. (TCR.206)

 

하지만 비록 말씀의 겉 글자의 뜻 가운데 살았더라도, 즉,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과 진리의 삶을 사신 분들에게는 주님의 은혜로 끊임없이 구원이 베풀어졌습니다. 즉, 천국의 대기인 신성(神性, the Divine) 호흡을 할 수 있게 되어 천국 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고, 문턱이 높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비로 지금 이 상응 지식이 계시되고(啓示, revealed), 즉, 드러나고 있고, 교회에 관한 신적 진리들(the Divine truths of the church)이 빛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이 바로 말씀의 영적인 의미, 곧, 속뜻을 구성하는 진리들입니다. (TCR.207)

 

다시 ‘아담’이라는 이름 이야기로 돌아와서, 요점부터 말씀드리면, ‘아담’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교회의 이름이며, 신앙의 이름, 신학의 이름이요, ‘하와’ 같은 경우는 어떤 내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벨’도,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 하면 ‘므두셀라’입니다. 창세기 5장 27절을 보면,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때 이 ‘므두셀라’는 ‘므두셀라’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대표된 어느 한 작은 단위의 교회 시대를 말하며, 또한 여기 이 ‘구백육십구 세’라는 기간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969세라는 정량적인 의미가 아닌, 장구한 세월을 뜻하는 어떤 영적인 의미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부터 11장 ‘에벨’의 때까지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어느 한 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시대 교회와 신앙을, 그리고 어떤 영적 의미를 각각 그 이름으로 일컬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람부터가 비로소 실제 역사, 곧 이때부터 나오는 이름들이 비로소 실제 살았던 한 개인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해하시려면 먼저 말씀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래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모드는 이랬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이 세상의 것을 언급할 때, 그것이 표상하는(represented)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무슨 대표성을 띤 것(representatives)으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historical series)로도 꾸몄습니다. 그렇게 하면, 보다 더 생생하니까요. 이렇게 하는 게 그들에겐 굉장히 차원 높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것이 한나의 다음과 같은 예언에 사용된 스타일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개역개정 번역과 영어가 상당히 달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직역하면, ‘높고 높은 것을 말하며, 입을 벌려 고대의 것이 나오게 하라’가 되겠습니다.

 

이런 대표성을 가리켜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천지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이어지는 이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모세는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기록물(historical) 스타일로서, 아브람의 때로부터 시작, 모세의 책들 및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사무엘과 열왕들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입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글자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가 일반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언적(prophetical) 스타일인데, 이는 태고교회에서 아주 높은 공경을 받던 어떤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계속 연결되어 역사적 무슨 형태를 갖추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가장 깊은 아케이나가 들어있는 속뜻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은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케이나는 아름다운 순서로 연결되며, 거기에는 겉 사람과 속 사람에 관한 것, 교회의 수많은 상태들 및 천국 그 자체, 그리고 가장 내적으로는 주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다윗의 시편(the psalms of David) 스타일로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 언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에서 주님은 다윗이라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속뜻으로는 왕이십니다. (AC.66)

 

어떠신가요? 좀... 어려우시죠? 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환히 비추심을 구하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들 서술 스타일의 관점으로 보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태고교회 스타일로, 그리고 12장부터는 역사기록 스타일로 그 서술 스타일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를 읽을 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입니다. 대략 45, 6억 년 전후라 합니다. 이 장구한 연대 중 태고교회의 시작, 즉, 아담의 등장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아브람의 때까지가 태고교회 스타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즉, 일종의 역사 시리즈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지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가 됩니다.

 

말씀이 무슨 다큐멘터리나 일지도 아니고... 이 장엄, 장구한 수십억 년 역사를 실제 역사로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겠으며, 과연 그럴 필요가 있기나 할까요? 그런 기록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하시는 일에 무슨, 그리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이런 이유로, 고대의 역사를 이런 문체, 이런 이야기 스타일로 기록, 인류의 그간 있었던 총 네 번의 교회 시대, 즉,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혹은 표상교회, 表象) 및 현 기독교회 중 앞 두 교회인 태고교회(혹은 아담교회)와 고대교회(일명 노아교회)를 창세기의 맨 앞부분 열한 개의 장으로 압축, 요약, 이야기체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축, 요약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속뜻을 넣어두셔서 이 아케이나(arcana, 秘義)를 오직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만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지혜의 5, 4, 3등급 지혜라 하겠습니다. 말씀은 6등급 지혜인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이런 말씀 서술 스타일을 이해하신다면 비로소 창세기 첫 열한 장은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또한 창세기 이야기를, 본문을 가지고 제대로 시작하기 앞서 제가 이토록(?) 뜸을 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며, 또 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출발을 창세기에서 해야 하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22(D2)-창세기이야기(4), '말씀(the Word) 서술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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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목은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정했습니다 ^^

 

그 이유는,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이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사후 영계로 들어오기 때문인데요,

 

저 역시, 신대원 시절, 조직신학 시간, 어느 책인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너무 신선하게 와닿아 그다음부터는 각종 기도나 글, 설교 때, 참 많이도 썼던 생각이 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국은 이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한 분 주님’으로 모은 사람만이 들어가는 나라라는 것이며, 여기 ‘모았다’라는 표현은, 겉으로도 그렇게 말하고,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것은 천국이 내면의 나라, 내적(內的, internal) 나라이기 때문인데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내가 속으로 하는 생각을 모두가 들을 수 있기 때문!

 

즉, 천국에서 하는 생각은 ‘소리 나는 생각’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속으로는 ‘세 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한 분 주님’을 말하는 사람은 그 즉시 드러나게 되고, 그 결과, 함께 할 수 없어 천국적인 방법으로 솎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면 저럴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만...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비롯, 좀 깊은 교리적 이야기는 시간이 흐른 뒤 다루게 되면 다루겠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에 빗대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어 '사람'이듯 ‘주님’도 이 세 요소(?)가 있어 '한 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속 사람, 곧 영에 해당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성(the Divine)으로, 주님의 겉 사람, 곧 육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으로, 그리고 활동에 해당하는 ‘성령’(the Holy Spirit, the Divine Proceeding)께서 주님으로부터 발출(發出, proceeding)되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로, 이렇게 세 요소가 한 분 주님으로 계신 것을 삼위일체라 하며,

 

사람’한테서 영 따로, 육 따로, 그리고 활동 따로 떼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듯, 주님도 ‘한 분 주님’을 ‘세 하나님’, 곧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따로따로 떼어 생각하는 순간, 주님은 더 이상 ‘한 분 주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저도 이걸 극복하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만 저만 그런가요? 우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개신교를 포함, 이 신(神)관 극복(?)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빛을 구합니다...

 

아, 그럼, 나는 어떡하지? 난 나이도 많은데다가 이걸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하시는 분들도 분명 계실 텐데요,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라 사신 분들,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진실한 삶을 사신 분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이해가 안 가더라도 사후,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으실 때, 천국 빛으로 환해지고 밝아져 그때 주님에 대한 이런 사실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곧 겉으론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엄청 오래 하셨어도 실제로는 악인의 삶, 곧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절대로 못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과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요, 진리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며,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예수’요, 진리에 대한 호칭이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열고, 확인하셔도 됩니다. 왜 어디는 ‘여호와’라 하시고, 또 어디는 ‘하나님’이라 하시는지, 왜 어디는 ‘예수’라 하시고, 또 어디는 ‘그리스도’라 하시는지 말이죠 ^^

 

주님은 제자들에게 앞뒤 무슨 기다란 형용 없이 단순히 ‘주님’으로 부를 것을 명하셨고, 그래서 주님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늘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이 ‘세 하나님’이 가장 예리하게(?) 표현되는 곳이 바로 예배 마칠 무렵 하는 축도가 아닐까 하는데요, 물론 사도 바울은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서, 주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누고자 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리고 본의 아니게, 자꾸 저도 모르게 나누게 되는 것 같아, 저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축도 때 부르는 호칭을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좀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

 

네, 하여튼 결론은,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주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십니다. 한 분 주님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신성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 인성으로 계시며, 그리고 성령이 신적 진리로 발출하십니다.

 

참고로, 주님에게서 나온 것은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발출된 신적 진리한테서도 주님의 인격이 느껴지며, 주님의 능력과 임재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번째 위를 성령이라 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19(D6)-천국이야기(4),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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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기 앞서, 거듭 당부드리는 몇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의 영과 육은 정말 다르듯 말씀의 영과 육, 곧 속뜻과 겉 글자의 뜻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말씀(the Word)은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인간을 또한 어떻게든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구원, 곧 거듭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한마디로, 거듭남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래서 말씀은 그 주된 포커스가 오직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정도만 꼭 붙드셔도 앞으로 읽으시게 될 내용들을 향해 잘 준비된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상태를 잘 유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이런 마음 상태라야 한 방울 누수 없이 고스란히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이것이 겉 글자의 의미 그대로이며, 저 역시 사십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창조과학회에 심취, 공대생으로서 뭔가 과학적으로도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것 같아 더 깊이 들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

 

그러면서도 당시 아인슈타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글 등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니, 마이크로, 분자, 원자, 중성자, 소립자, 미립자의 세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유니버스의 세계로 등 양쪽 극단의 지식들을 조금, 아주 조금 접하고 제 안에 부인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런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주 저 수많은 은하 중 비교적 가깝다고 하는, 250만 광년(光年,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해당하는 항성 수가 1조 개...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그저 이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하나를 밤에 반짝반짝 비추기 위한 용도로만 지으셨다고? 너무 비능률, 비효율적인 게 아닐까? 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있었습니다 ^^

 

네, 이 얘긴 이쯤하고... 다시 창세기 1장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은 겉뜻으로는 창조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과 관련된 여섯 단계 또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천국 이야기 #3, ‘천국은 상태(狀態, state)의 나라’에서 말씀드렸듯 창세기를 포함, 말씀도 역시 ‘상태’ 관점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을 무슨 계단처럼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해지는 노을, 아름다운 색조가 그레디언트하게 연이어져 딱딱 구분은 어려워도 대략적으로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간 한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요, 거듭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will)와 새 이해(understanding, 이성, 사고력, 이해하는 능력)를 받아 그것으로 주님의 선을 행할 마음을 먹고, 주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지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기우는 갈망(yearning)이 있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머리굴림(reasoning)이 있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어떤 구분이 생기는 상태로서, 주님의 것은 ‘리메인스’(remains)라 하여, 모든 사람의 영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이슬비처럼 내려 조용히 쌓이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영구 보관하시며,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을 도우십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어떤 큰 시험, 불행, 혹은 슬픔 등을 겪을 때, 비로소 깨어나며,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 리메인스가 깨어나면, 그때까지 그가 정신없이 추구하던 모든 세상에 속한 것들은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 때,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사이, 구분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십일조의 기원이 바로 이 리메인스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신앙의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기부, 자선)도 실천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기특하게도 전에 안 하던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활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걸 자기가 하는 줄로, 자기가 대단해서 하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상태입니다. 드디어 속 사람 안에 신앙의 불, 체어리티의 불이 켜집니다. ‘두 큰 광명체’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자기가 하는 신앙의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활기와 생명력을 갖는 상태입니다.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입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말을 할 때도, 사랑의 선을 행할 때도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상태입니다. ‘생물’, ‘짐승’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었으며, 이런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합니다. 그의 영적 삶은 ‘먹을거리’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의 일로 더욱 더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몸과 감각 등 자연적 삶 역시 그렇게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이때 그의 겉 사람은 이런 그의 변화를 저항하며, 그래서 그의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마지막 상태인 여섯 번째 상태 끝에 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제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 삶으로 유턴할 가망이 없다 판단한, 그의 평생에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긴 악한 영들은 그를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전투란 서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감으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쉴 수 있게 되며, 그래서 드디어 주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 안식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속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사실은 우리 대신 주님이 싸우신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안식일인 것이며, 이 안식의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지상에서는 몇몇 성인(聖人)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이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런 호칭에 대해 기겁을 하고, 정색을 할 겁니다...)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시대, 아담 교회 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였고, 그래서 그때는 천사들도, 그리고 주님도 친히 지상의 사람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그런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안식의 상태이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라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한 인간을 영적 인간이라 하고, 여기서 악한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을 천적 인간이라 합니다.

 

참고로, 그래서 영적 인간의 이야기인 창세기 1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고, 천적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그중에서 일부가 두 번째, 그중에서, 그중에서... 여섯 번째 상태만 해도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오프닝, 개략을 너무 많이, 자세히 다루었나요? 앞으로 장별, 절별 자세히 다루는 방식은 좀... 순서대로 나가되 특별한 주제, 이슈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긴 생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 안의 천사들은 저렇게, 저런 속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 육은 육인 것처럼, 우리는 육의 글자를 읽을 때, 천사들은 영의 글자, 곧 속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십니다. 이 표현이 참 어려우실 듯한데요... 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아름다운 분들마다 어서 이 말씀의 속뜻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서입니다 ^^ 아멘아멘, 할렐루야!

2021-11-15(D2)-창세기이야기(3), '창1 천지창조 이야기는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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