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었는데,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C.208)
각 후손이 몇 장 몇 절에서 시작되는지?
현재까지 우리가 확인한AC본문만을 근거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각 후손이 정확히 몇 장 몇 절에서 시작되는가?’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AC.194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창3:1을 해설하면서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이 다루어진다’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세 번째 후손은 적어도 창3:1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AC.208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창3:6을 해설하면서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네 번째 후손은 적어도 창3:6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첫 번째 후손과 두 번째 후손입니다. 앞서 우리가 확인했듯이AC.190의 ‘첫 번째 상태’, ‘두 번째 상태’, ‘세 번째 상태’를 그대로 ‘첫 번째 후손’, ‘두 번째 후손’, ‘세 번째 후손’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state(상태)와posterity(후손)를 서로 다른 범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읽은AC.67-208범위 안에서 본다면, 우리는 ‘세 번째 후손=창3:1’, ‘네 번째 후손=창3:6’은 확인할 수 있지만, ‘첫 번째 후손=창2몇 절’, ‘두 번째 후손=창2몇 절’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정직한 정리는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AC.194에서 이미 세 번째 후손을 언급하므로, 첫 번째와 두 번째 후손은 반드시 그 이전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창2:7인지, 창2:8인지, 창2전체의 어느 구간인지, 혹은AC.67이후의 어느 상태에 해당하는지는AC본문 속에서 직접 확인해야 하며,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질문에 대한 현재의 가장 안전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번째 후손은 창3:1에서 시작하며(AC.194),네 번째 후손은 창3:6에서 시작한다(AC.208).그러나 첫 번째 후손과 두 번째 후손의 시작 지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며,그것을AC.190의 첫째,둘째 상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검토한 결과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앞으로AC.209이하를 계속 읽다 보면, 또는AC.67-193구간을 다시 추적하다 보면, 스베덴보리가first posterity, second posterity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을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첫 번째 후손과 두 번째 후손의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확실히 아는 것’과 ‘추정하는 것’을 구분해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창3:6)
AC.208
이들은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었는데, 자기 사랑(self-love, [amor proprius])에 스스로를 미혹되도록 내어주었으며,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 확증되는 걸 보지 않는 한, 계시된 걸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해설
AC.208은 창세기 3장의 타락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진행된 영적 쇠퇴의 결과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특별히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이 인류 최초의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점차 본래의 순수한 상태를 잃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자기 사랑’(amore proprio)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기 사랑은 단순한 자존감이나 자기 보존 본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보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랑이며, 진리가 참인 이유를 주님께 두지 않고 자기 판단에 두는 상태입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각(perception)을 통해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 주셨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자기 own이 강해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시된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계시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직접 납득할 수 있는가?’, ‘감각과 경험, 지식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3에서 뱀이 제안한 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감각의 것들’(the things of sense)과 ‘기억 지식의 것들’(the things of memory-knowledge)을 함께 언급합니다. 감각의 것들, 곧 감각에 속한 것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외적 경험을 말합니다. 기억 지식(scientificum)은 인간이 축적한 학문, 논리, 정보, 경험 등을 말합니다. 이 둘은 본래 유익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신앙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은 더 이상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확인했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AC.208은 따라서 창3 전체의 핵심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타락의 본질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외적 행위가 아니라, 자기 사랑이 주님에 대한 신뢰를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은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감각과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문제를 ‘지식이 많음’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는 학문과 이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문제는 지식을 사용하는 위치입니다. 진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영적 인간의 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은 창3의 길입니다.
결국 AC.208은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오늘날 인간이 빠지기 쉬운 영적 위험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어야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own은 조용히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편’(man [vir])이 이성(the rational,합리적 능력)을 말한다는 게 본 장6절에 나오는데요,거기 보면,여자는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의 남자(her man)에게 주었고,그는 먹었는데,이는 그도 동의했다는 의미입니다.같은 내용이158번 글에 나오는 남자(the man)에 대한 말로도 분명한데요,거기서 그는 지혜와 지성의 사람(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여기 나오는‘남자’(man)는 그와는 달리 이성을 의미하는데,왜냐하면,지식의 나무,곧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된 결과,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이성이라는 건 지성의 모방,말하자면 겉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AC.265)
AC.207에서 위AC.265를 인용하는 이유
AC.207에서 스베덴보리가AC.26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세기3장6절의 ‘남편도 함께 먹었다’는 표현이 단순히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이성 파트’(rational)가 유혹에 동의한 사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3장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면, 뱀은 감각 파트(sensuous part), 여자는own, 곧 자신의proprium에 속한 애정과 의지를, 남자는 이성 파트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타락은 감각이 제안하고,own이 그것을 좋아하며, 마지막으로 이성이 그것에 동의하는 순서로 진행됩니다.AC.207이 ‘남편이 먹었다는 것은 이성의 동의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AC.265입니다.
특히AC.265에서 중요한 것은 ‘이성은 지성의 모방물이며,마치 그것의 형상 같은 것’(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이라는 설명입니다. 원래 인간의 이성은 지성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사물을 보는 능력이고, 이성은 그 지성을 표현하고 정리하며 적용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이성이 지성을 섬깁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 인해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성만 남게 되었다’(AC.265)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원래 태고교회 사람들은 지각(perception)을 통해 진리를 알았습니다. 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는 그 지각과 지성이 약해지고, 대신 이성이 앞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AC.265는 ‘남자’라는 단어가 창2와 창3에서 미묘하게 다르게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창2에서는 아직 지혜와 지성이 살아 있으므로 ‘남자’가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이미 지혜와 지성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남자’는 더 이상 그런 높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이성적 부분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AC.207은AC.265를 인용하여, 선악과 사건의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각의 유혹이나own의 욕망이 아닙니다. 인간 안의 이성이 그것을 승인하는 순간입니다. 감각은 제안할 수 있고, 욕망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직 완전한 타락은 아닙니다. 그런데 ‘남편도 먹었다’는 것은 이성이 마침내 자기own의 편에 섰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인간 경험에서도 매우 익숙한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욕망이 생깁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등장하여 ‘이 정도는 괜찮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이것이 더 옳다’고 정당화합니다. 이 순간 욕망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하나의 확정된 선택이 됩니다.
그래서AC.207이AC.265를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창3의 타락은 감각이나 애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까지 그것에 동의한 사건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원래 지성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지만, 지성이 무너지면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비극적 전환을 ‘남편도 먹었다’는 짧은 표현 속에서 읽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창3:6)
AC.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을,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own, 곧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해설
AC.207은 창세기 3장 6절에 대한 매우 압축적인 요약입니다. 지금까지 AC.194-206에서 설명된 내적 과정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뱀이 제안하고, 여자가 듣고, 의심이 생기고, 그것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상태가 이제는 실제 동의와 실행으로 발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먹기에 좋은’(good for food)이라는 표현을 ‘욕망’(cupidity)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자기 own이 원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내적 갈망입니다. 선악과가 실제로 맛있어 보였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판단으로 진리를 결정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해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기보다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상태입니다.
다음으로 ‘보기에 아름답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을 의미합니다. 욕망은 항상 상상을 동반합니다. 사람은 먼저 어떤 것을 원하고, 그다음에는 그것이 얼마나 좋을지를 마음속에 그려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눈’은 단순한 육체의 눈이 아니라 자기 own에 의해 왜곡된 이해를 가리킵니다. 그 결과 사람은 실제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합리적이며, 아름답게 그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상’입니다.
또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즐거움’(pleasure)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히 욕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더 현명해지고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창3 전체를 관통하는 유혹의 핵심입니다. ‘주님께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 그러면 네 눈이 열리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즐거움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자기 지혜에 대한 만족과 자기 확신의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 곧 욕망(cupidity), 환상(fantasy), 즐거움(pleasure)이 모두 ‘여자’, 즉 인간의 own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타락이 처음부터 이성의 문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애정의 문제로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생각합니다.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이유를 만듭니다. 그래서 타락의 중심에는 언제나 own의 애정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편도 먹었다’는 것은 이성(rational)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성이 처음부터 주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이 상상을 낳고, 상상이 즐거움을 만들고, 마지막에 이성이 그것을 승인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종종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AC.207은 인간 타락의 심리적 구조를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은 보통 먼저 잘못을 생각하고 나서 욕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애정이 움직이고, 그다음에 이성이 그 애정을 지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가 먹고 남편도 먹었다’는 표현 속에 담긴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AC.207은 단순히 선악과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유혹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욕망이 생기고, 그것이 환상을 만들고, 환상이 즐거움을 낳고, 마지막에 이성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에서 자기 own을 신뢰하는 상태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창3에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실제 구조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이것이 그들이 말하는‘열린 눈’(open eyes)이며,이러한‘신들’(gods)입니다.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뱀들’(serpents)입니다.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AC.206)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시고,지상의 삶은 물론,사후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시네요...
네, 목사님께서 짚으신 부분이야말로AC.206을 읽으며, 가장 깊은 감동을 받게 되는 지점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사실AC.206의 묘사는 상당히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이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하고, 신앙의 신비들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심판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읽어보면, 주님은 그런 사람들조차 단 한 순간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들만의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의인과 악인 위에 함께 비치고, 비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함께 내리는 것처럼, 주님의 생명과 인플럭스는 천국에 갈 사람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사람에게도 계속 흐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지옥에 있는 자들조차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차이는 생명이 어디서 오느냐가 아니라, 그 생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천사는 그것을 사랑과 지혜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지배욕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여전히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주님은 저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볕과 비를 내리십니다. 그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렇고, 죽은 후 중간 영계에 있는 동안에도 그렇고, 심지어 그들이 최종적으로 지옥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끝까지 천국으로 이끌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하여 결국 주님의 질서보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AC.182-189의 사후 첫 상태가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 여러 번 감탄하셨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누구였는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먼저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천적 천사들에게 맡기시고, 사랑과 평안 가운데 보호하시며, 마치 어린아이가 잠에서 깨어나듯 조심스럽게 인도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AC.206의 저런 사람들조차 죽는 순간에는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드러나고, 결국 스스로 자신과 가장 비슷한 공동체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지옥론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주님의 사랑이 천국 문턱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 있지만, 주님은 인간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지만, 주님은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어쩌면AC.206을 읽으며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할 것은 저 사람들의 어둠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결코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인내와 자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인간보다 오래 기다리시며, 인간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지옥으로 뛰어들 때까지 보살피신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를 매우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그 사람이 방향을 돌리기를 바라시며 손을 내밀고 계신다는 점까지 함께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만일‘자신의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자신의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만일‘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AC.206)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 같아요.
네, 저도AC.206을 읽으면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조심해서 말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정 개인들과 나눈 실제 대화를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관찰한 인간 유형을 대표적으로 묘사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이 대목은 단순한 철학적 가정이라기보다 그가 오랫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AC.206의 논리가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그들은 영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씩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의own이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는가?’,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양심이 무엇인지 아는가?’, ‘지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리고 각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마치 실제 사람들과 수없이 대화해 본 사람이 하는 설명처럼 보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이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신의own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공상이다’, ‘양심은 사회 질서를 위한 심리적 장치일 뿐이다’, ‘지각 같은 것은 광신이다’라는 생각은18세기에도 있었겠지만, 어쩌면21세기에는 더 흔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AC.206을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특정 시대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own을 절대화하는 인간 정신의 한 유형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그가 비판하는 대상이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 학문에 뛰어난 사람들’,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당대 유럽 최고의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AC.206을 읽을 때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 이전의 과학자 스베덴보리와, 영계 체험 이후의 계시자 스베덴보리, 두 삶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학문과 철학의 세계도 깊이 알고 있었고, 동시에 영계에서 천사들과 영들과의 교류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순한 교리적 주장이라기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보았고,그들의 생각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았다’는 증언처럼 읽히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AC.206을 읽으며 곧바로 ‘세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학문 자체가 아니라, 학문을 최종 권위로 삼는 태도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평생 쌓은 과학 지식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결국AC.206은 단순한 논쟁문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오랜 세월 관찰한 인간 정신의 한 극단을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말씀처럼, 그 생생함 때문에 독자는 종종 ‘이건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느낌이 충분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3:4, 5)
AC.206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 학문에 뛰어난 자들보다, 자기들의 눈이 열려 있고,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안다 더 굳게 믿는 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더 눈먼 자들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질문해 보기만 하면, 그들이 영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더더욱 그것을 믿지도 않으며,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의 성질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자신들을 같게 여기기 때문이며, 주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연만을 숭배합니다. 그들 가운데 말에 신중하려는 자들은, 그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최고 존재[ens]가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감각과 기억 지식의 것들로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를 확증하는 원리들이며, 만일 감히 할 수만 있다면, 온 우주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이거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만, 만일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고 묻는다면, 그것은 곧 아무런 존재도 가지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own이 모두 제거된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무엇이냐’(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고 묻는다면, 그것을 공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양심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민들을 억제하는 데 쓰이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각(perception)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것을 비웃으며, 광신적인 헛소리라 부를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open eyes)이며, 이러한 ‘신들’(gods)입니다. 그들이 한낮보다 더 분명하다고 여기는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계속 나아가며, 이런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심연일 뿐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세상을 미혹하는 ‘뱀들’(serpents)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아직 이러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은 이 장의 14절부터 19절에서 다루어집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해설
이 단락은 창3의 ‘눈이 열렸다’는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디까지 전개될 수 있는지를, 거의 예언적이라고 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속적 학문이 결합될 때 나타나는 최종 형태를 가차 없이 묘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이 열려 있고, 선악을 분별하며,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가장 강하게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확신이 가장 깊은 ‘눈멀음’(blindness)의 증거입니다.
이들이 보이는 첫 번째 특징은 영적 실재의 전면 부정입니다. 그들은 영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며,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원리적 배제입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은 부정되고, 인간은 멸망하는 짐승과 동등한 존재로 격하됩니다.
이 상태에서 주님은 더 이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자기 자신과 자연을 숭배합니다. 다만 외적으로 조심스러운 이들은 어떤 ‘최고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인격적 주님이 아니라, 본질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원리일 뿐입니다. 이 역시 감각과 지식의 틀 안에서 허용되는 최소한의 형식적 신(神) 개념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의 사고 구조를 매우 정확히 짚습니다. 그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자신의 원리들을 끊임없이 확증하며, 그 확신을 공적인 자리에서도 거리낌없이 드러내려 합니다. 이들에게 진리는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전제 위에서 재확인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신’이나 ‘가장 지혜로운 자’로 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질문으로 드러내 보면, 실상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own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그것을 곧 존재의 소멸로 이해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는 삶은 그들에게 공상으로 취급됩니다.
양심과 지각에 대한 반응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양심은 사회 통제를 위한 허구로, 지각은 광신적 환상으로 조롱됩니다. 이는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영적 기관들마저 부정하는 상태이며, 이 지점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히 감각과 자연의 닫힌 체계 안에 가두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지혜’라고 자처하는 것 자체를 아이러니로 폭로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열린 눈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을 출발점으로 신앙의 신비를 추론할 때 도달하는 곳은, 빛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인식 구조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미혹하는 참된 ‘뱀들’입니다. 여기서 뱀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학문이 결합된 가장 교묘한 형태의 감각적 이성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선을 긋습니다. 창3:4-5에서 다루어지는 태고교회의 이 후손은 아직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의심과 자기 인도의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며, 완전한 전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완전한 전도, 곧 저주와 형벌로 상징되는 상태는 14-19절에서 다루어집니다. AC.206은 따라서 하나의 경고이자 전환점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약속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지금 다루고 있는 본문이 아직 마지막 단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창3을 읽는 독자에게, 지금 자신이 어느 단계에 서 있는지를 조용히 묻게 만드는 매우 날카로운 대목입니다.
이 절들은,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게 될 것이며,그 결과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므로,어쩌면 그것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초기의 의심이 생겼음을 말합니다.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C.205)
이 대목은 타락의 과정에서 매우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 줍니다. 앞 절들에서는 그들이 이미 자기own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길임을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악을 선이라고 믿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금지된 일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초기의 의심’(an incipient doubt)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심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직접 확인해 보면,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이고 심지어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진리를 확인하려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퍼셉션과 계시를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직접 판단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직접 보고’, ‘내가 직접 확인하고’, ‘내가 직접 결론 내리겠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 중심축이 이동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확인해 보아야 참이다’가 중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아직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미 무게중심은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다’라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무엇을 더 배우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상태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보게 되리라는 기대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의존하는 대신 자기 판단력을 신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눈이 열린다’는 약속은 사실상 자기own을 향한 유혹의 언어가 됩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중심에 진리를 더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최종 판단자가 되려는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점차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보다 ‘내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AC.205는 타락이 갑작스러운 반역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작은 의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주님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내가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매우 그럴듯한 생각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뱀이 제안한 길이며, 동시에 인간의own이 처음으로 주님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대목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악은 처음부터 악한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밝아지고, 더 많이 알고, 더 확실히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유혹은 언제나 설득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앞선 절들은,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AC.205)
이 문장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사랑, 곧 자기own의 사랑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고, 주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자기 판단으로 검증해 보고 싶어 했으며, 점차 ‘내가 직접 알아보겠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타락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욕망은 한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지각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경향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한 경향을 갖는 것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그것이 악이라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AC.205가 묘사하는 이들은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을 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허락되지 않은 길이다’라는 내적 지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이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상태와도 비슷합니다. 어떤 말을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지만,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은 흔들리지만, 양심이나 내적 지각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태고교회의 역사적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통찰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대개 처음부터 악을 선이라고 믿으며,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압니다. 다만 점차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욕망의 목소리를 더 크게 듣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처음에 들리던 내적 경고가 점점 희미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다’는 말은, 태고교회 후손들 안에 아직 퍼셉션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미 미끄러지고 있었지만, 아직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주님의 질서를 알아보는 눈이 남아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이후의 의심과 선택, 동의의 과정이 더욱 의미 있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주님의 섭리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잘못을 잘못으로 보게 하시고, 양심의 경고를 들려주시고, 돌아설 기회를 주십니다.AC.205의 이 한 문장 속에는, 인간이 타락해 가는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근한 보호와 인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3:4, 5)
AC.205
각 절은 교회 안의 어떤 특정한 상태, 곧 상태의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앞선 절들은, 비록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 있었으나 그것이 불법임을 여전히 지각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 절들은,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의 눈이 열릴 것이므로, 어쩌면 그것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초기의 의심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마침내 자기 사랑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고, 따라서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의 본성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인도하기를 선호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감각과 기억 지식에 관한 것들에게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해설
이 단락은 창3의 서술이 단절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상태의 연속적 변화’임을 명시적으로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 절을 하나의 심리적, 영적 단계로 읽으며, 그 변화가 얼마나 미세하고 점진적인지를 강조합니다. 타락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합법성과 불법성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앞선 절들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것이 옳지 않다는 지각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선이 아직 작동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됩니다. ‘혹시 불법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반항이 아니라 탐색의 형태를 띠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이 의심의 논리는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만일 스스로 확인해 본다면, 조상들에게서 들은 것들이 정말 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눈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진리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리를 ‘검증하려는’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질서가 전도(顚倒)된다고 봅니다. 계시된 것을 신뢰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인간 자신의 판단으로 시험하려는 순간, 중심은 이미 이동했습니다.
이러한 의심이 단순한 질문에 머물지 않고 결정적인 전환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자기 사랑의 우세’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은 중립적인 애정이 아니라, 인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놓고 주님과 경쟁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의 본성은 주님의 인도 받기를 싫어하고, 자기가 스스로를 인도하려 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같이 되고자 함’의 실제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인도의 특징을 매우 정확히 지적합니다. 스스로를 인도하려는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주님께 묻지 않고, 감각과 기억 지식에게 묻습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논리에게 판단을 위임합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이 신앙 영역에서 행사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AC.205는 타락의 핵심을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인도권의 이동’으로 정의합니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행한 것이 아니라, 불법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약해지고, 마침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과정이 바로 여기서 묘사됩니다. 이 단락은 창3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 신앙 안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직하게 성찰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