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스키즘(schism)이나 이단(heresy)에서 또 다른 이단이 나왔다는 말씀인데요, 이는 앞서 언급되어 온 것들로부터, 그리고 첫 번째 절에 서술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로부터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제 뒤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게 교회에 속한 것이든 이단에 속한 것이든 임신 및 해산과 유사, 그러니까 교회나 이단의 탄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하나의 계보(genealogy)가 형성된 것입니다. 서로 유사하게 연관되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이단이 태동하는 곳에는 한 무리의 이단이 생겨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스베덴보리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라는 표현을, 이미 앞에서 설명한 원리에 따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된 상태가 자기 내부에서 또 다른 분열을 낳는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창세기 41절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말한 구조와 동일한데, 성경에서 이러한 ‘잉태’와 ‘출산’은 언제나 육체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나 이단적 상태가 사상과 교리를 산출하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두 계열, 곧 가인 계열과 셋 계열 둘 다 나란히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계보를 이루는데, 지금 이 본문의 가인 계열의 경우, 가인 이후 동일한 구조가 왜곡된 형태로 작동하여, 하나의 이단적 신앙에서 또 다른 이단적 교리가 연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계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람의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혈통’, 곧 교리와 신앙 형태들이 서로를 낳고 확장해 가는 내적 연관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의 분열된 신앙이 일단 형성되면, 그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논리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파생 형태들을 만들어 내게 되며, 이로부터 다양한 이단과 분파가 끝없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결국 AC.400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그 분리는 단일한 오류로 머무르지 않고, ‘자가 증식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것이 가인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는 근본 이유임을 보여줍니다.

 

 

 

AC.40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 이것이 ‘에녹’(Enoch)이라고 부르던, 모든 교리적,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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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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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99

 

다음 말씀들, 곧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스키즘(schism)이나 이단(heresy)에서 ‘에녹’(Enoch)이라는 또 다른 이단이 나왔음을, ‘성을 쌓고’(the city which he built)는 거기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과, 그리고 그 스키즘이나 이단을 ‘에녹’(Enoch)이라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라고 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스베덴보리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말을,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분파 혹은 이단적 상태가 자기 안에서 또 다른 교리적 형태를 산출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알다’와 ‘낳다’는 육체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 체계가 자기 논리 안에서 새로운 사상과 체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때 낳은 ‘에녹(Enoch)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가인의 신앙에서 파생된 ‘특정한 교리적 형식’을 상징합니다. 이어서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부른 것은, 이 분파에서 나온 모든 교리적, 신학적 구조가 바로 이 에녹이라는 중심 사상에 의해 조직되고 규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성읍은 외적 건물이 아니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교리 체계 전체’를 가리키며, 그 교리의 이름과 성격이 그 분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AC.400,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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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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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설명(AC.387)을 보시기 바랍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가 진리와 선의 바깥을 의미한다는 건,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 이 ‘놋’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a wanderer and a fugitive)가 되는 것이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건 진리와 선을 다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며, 또 래셔널 마인드 근처(near the rational mind), 전에 체어리티가 다스렸던 곳이라는 것은 ‘에덴 동쪽’(the east of Eden)의 의미, 곧 ‘동쪽’(the 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내적 세계인 영계에서는 마인드, 사랑, 체어리티 같은 추상 개념들이 마치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자연계 어떤 걸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듯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무슨 근처, 뭐 했던 곳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에덴, 동쪽, , 성읍, 추방, 거주, 방황 등 이 모든 것은 창세기를 비롯, ‘말씀에서는 영적 지리(spiritual geography)입니다.

 

의지(the will)와 이해(the understanding)로 구성되는 마인드가,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이해는 의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 사이에 아무런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사랑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 의지는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그런 마인드에서는 반대로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하는 것입니다. 방금 보신 것처럼, 인류의 유익을 위해 보전될 수 있도록 신앙을 구별하신 것이지요. ‘가인에게 표를 주신’(had a mark set upon it) 것입니다.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5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해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말은 이미 앞 절에서 설명되었듯이,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영역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 머무는 상태’, 곧 방황과 불안정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 이유는 이 ‘(Nod)이라는 말 자체가 ‘방랑자’와 ‘도망자’를 뜻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표현은 참과 선을 상실한 상태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가인이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는 말은, 이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멀리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이전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곳에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하나였고, 의지가 모든 것이었으며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때는 사랑이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인으로 상징되는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이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다스리지 못하고, 대신 이해가, 다시 말해 ‘사랑 대신 신앙이 마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가인이 에덴에서 멀어지지 않고 ‘에덴의 동쪽’에 머문 것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이를 통해 신앙이 여전히 사랑과 가까운 지성적 영역에 보존되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가 주어진 이유를 다시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이렇게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인류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구별되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98은, 사랑이 떠난 뒤에도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서 주님의 섭리에 따라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의 길이 아직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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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AC.397-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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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의 바깥(outside of truth and good)을,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표현을,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된 상태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떠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자비와 선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라는 말은, 신앙이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영역 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데, 놋 땅은 방황과 불안정, 곧 ‘참과 선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에덴 동쪽, 곧 ‘에덴의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에 거했다는 표현은, 신앙이 완전히 멀리 떠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과거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위치에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장차 다시 사랑과 결합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다는 섭리의 표현입니다.

 

 

 

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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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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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6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의 의미는, 가인 신앙이 보존될 수 있도록, 주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구별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주시는 ‘표’(mark)와, ‘표를 주사’(setting a mark)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요,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 That “Jehovah set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mark,” and of “setting a mark” on anyone, as being a means of distinction. Thus in Ezekiel: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9:4) Jehovah said,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make a mark on (or designate) the foreheads of the men groaning and sighing for all the abominations, (Ezek. 9:4)

 

여기 ‘이마에 표를 그리라’(marking out the foreheads)의 의미는, 그들의 이마에 무슨 표나 선을 그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계시록에서도 말씀하시기를 where by “marking out the foreheads,” is not meant a mark or line upon the front part of their heads, but to distinguish them from others. So in John, it is said that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9:4) The locusts should hurt only those men who had not the mark of God on their foreheads, (Rev. 9:4)

 

여기서도 ‘인침’, 즉 표를 받는 것은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o have the mark means to be distinguished.

 

[2] 계시록 다른 데도 보면,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13:16)라고 되어 있습니다. And in the same book we read of a “mark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Rev.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6)

 

모세의 책, 관련 내용을 보면, 유대 교회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 하였는데, 이 역시 같은 걸 표현하는 것입니다. The same thing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binding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on the hand and on the forehead, concerning which we read in Moses: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6:4, 8) Hear, O Israel, Jehovah our God is one Jehovah; (Deut. 6:4, 8)

 

13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8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11:13, 18) and thou shalt love Jehovah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strength, and thou shalt bind these words for a sign upon thy hand, and they shall be as frontlets between thine eyes. (Deut. 11:13, 18)

 

사랑에 관한 계명을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더 높이 구별해야 함을 이렇게 표현하였고, 이런 이유로, ‘손목과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의 의미가 확연해지는 것입니다. By this was represented that they should distinguish the commandment respecting love above every other, and hence the signification of “marking the hand and the forehead” becomes manifest.

 

[3]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19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66:18, 19) I come to gather all nations and tongues; and they shall come and shall see my glory; and I will set a mark upon them. (Isa. 66:18–19)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86:16, 17) O turn unto me, and have mercy upon me, give thy strength unto thy servant, and save the son of thy handmaid. Set upon me a mark for good, and they that hate me shall see and be ashamed. (Ps. 86:16–17)

 

이들 여러 구절을 통해서 표의 의미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가인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한 사람에게 무슨 눈에 보이는 표를 준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말씀의 속뜻에는 겉 글자의 뜻에 들어있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게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the meaning of a mark is now evident. Let no one therefore imagine that any mark was set upon a particular person called Cain, for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contains things quite different from those contained in the sense of the letter.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말의 핵심이, 어떤 개인에게 신비한 표식을 새겼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다는 주님의 섭리’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경에서 ‘(mark)와 ‘표를 주사’라는 표현은 언제나 물리적 표시가 아니라, ‘구별과 식별의 의미’를 지닙니다.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 가운데서 가증한 일로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명령은, 실제로 이마에 선을 긋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을 다른 자들과 구별하여 보호하겠다는 뜻이었고,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표를 가진 자들이 재앙에서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씀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가 손과 이마에 있다고 할 때도, 이는 특정 문양이 아니라 ‘삶의 행위(손)와 생각과 의지(이마)가 무엇에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구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이미 모세오경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6:4, 8)라는 가장 큰 계명을 손과 이마에 매라는 명령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몸에 붙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의 중심에 사랑의 계명을 두라’는 영적 명령이었습니다. 이처럼 ‘’란 언제나 주님께 속한 것, 혹은 주님의 질서 안에 보존되어야 할 것을 다른 것들과 분명히 나누어 두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가인을 의롭다 하거나 그의 상태를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호되어야 할 역할을 지닌 것임을 선언하는 구별의 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어떤 특정 인물 가인의 몸에 표식이 새겨졌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아르카나는 언제나 인간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다루며, 여기서 ‘가인의 표’는 ‘신앙이 장차 사랑과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남겨진 보존의 장치’를 가리킵니다. 결국 AC.396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어떤 요소를 제거하시기 전에 먼저 그것을 구별하여 보호하시며, 그 구별을 통해 구원의 길을 끝까지 열어두신다는 깊은 신적 질서를 밝히고 있습니다.

 

 

 

AC.397,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AC.397-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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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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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라는 말씀의 의미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sacrilege)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Cain)의 의미가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라는 점, 그리고 ‘칠’(7,seven, 일곱)의 의미는 신성함(what is sacred)이라는 점을 볼 때 분명합니다. 숫자 ‘칠’(seven)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육일간의 창조에 이은 일곱 번째 날, 이날이 곧 천인(天人,the celestial man)이요, 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일(the sabbath)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칠들(sevens)로 구별했는데요,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weeks)라 한 것처럼 말입니다. (9:24-25)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9:24-25)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이라는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29:27, 28)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27, 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칠’이라는 숫자는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inviolable)으로 여겨집니다.그래서 시편을 보면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love)을 가리키는데, 사랑처럼 될 신앙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 천적 인간이 되기 전, 숫자 ‘육’(6,six)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 및 마지막, 즉 바벨론 유수(幽囚,captivity), 곧 십 년씩 일곱 번, 즉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역시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에 관하여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그리고 계속해서 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모세의 책에서처럼 숫자 ‘칠’(7)로 표현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자, 정리하자면,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하십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예배에 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 비록 이 가인이라는 신앙이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류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섭리 안에서 주님도 보호하시는 가인이라는 신앙을,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가 나서서 손대는 건 그 자체로 주님을 대적하는 거, 곧 신성모독이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이 내가 알던 교리와 다를 때, 그저 교리만 다를 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함과 주님을 신앙함이 분명히 보이면, 그러면 직접 나서는 대신 주님께 맡기고, 대신 내가 믿는 교리를 성실히 실천, 주님과 결합하는 일에만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이 단순한 형벌의 과장이나 위협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성모독(sacrilege)’임을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 근거는 두 가지 상징에 있습니다. 첫째, ‘가인’은 이미 밝혀진 대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뜻하며, 둘째, ‘(seven)이라는 수는 성경 전반에서 ‘거룩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칠이라는 수가 거룩하게 여겨진 이유는 창조의 여섯 날과 그 완성인 일곱째 날, 곧 안식과 평화의 상태,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회의 예식과 율법 전반에서 칠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긴 시간의 구분 역시 ‘이레(weeks)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메시아의 때를 가리키는 큰 기간들이 ‘이레’로 구분된 것(9:24, 25)이나, 야곱이 라반을 위해 봉사한 일곱 해가 한 ‘이레’로 불린 것(29:27, 28)이 그 예입니다. 또한 시편에서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19:164)는 표현, 이사야에서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표현(30:26)은 모두 ‘사랑과 신앙이 충만해진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거듭남의 과정이 여섯 단계를 거쳐 일곱째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vastation)의 과정 역시 일곱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천적인 것이 남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여러 포로기, 특히 칠십 년에 걸친 바벨론 포로로 대표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때가 지나가도록 짐승의 마음이 주어진 사건(4:16, 23, 32)이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인(5:1), 일곱 재앙(15:1, 6-8), 여섯 곱하기 일곱의 기간(11:2) 역시 모두 ‘신적 질서의 완결성과 침범 불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형벌의 엄중함이나 완전성을 표현할 때도 ‘칠 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비록 생명력은 없을지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역할을 지니므로’, 그것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거룩한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죄라는 뜻입니다. 즉, 신앙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봉사의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라는 표지로 둘러 보호하시며, 그 침범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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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마태복음 '고자' 이야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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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4

 

이제 이것을 미리 아셨고, 또 인류가 영원한 사망으로 소멸되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에, 여기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아무도 가인을 건드리면 안 된다!’ 이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게 어떤 표를 주셨는데, 이 표의 의미는 주님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신앙을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보존을 위해서지요.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 창세기 5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arcana, 秘義)이며,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결혼과 고자(鼓子, eunuch)에 관하여 하신 말씀 중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9:12)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Matt. 19:12)

 

천국의 결혼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고자’(eunuchs)라 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born from the womb) 고자들은 천적 천사들을 닮았고, ‘사람이 만든’(made of men) 고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비슷하며, ‘스스로 된’(made so by themselves) 고자들은 천사 같은 영들과 비슷한데, 체어리티보다는 순종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 “eunuchs”; those so “born from the womb,” 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those “made of men,” 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and those “made so by themselves,” 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 ‘고자’란 영적 생명을 직접 낳는 능력은 제한되었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신앙의 상태를 가리키는 아르카나적 용어이며,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영적 고자’의 표입니다. 주님은 사랑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신앙이라도 함부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질서 안에 보존하셔서 다시 생명이 돌아올 길을 남겨두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교리가 다르다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며 상대방의 신앙을 쥐잡듯이 몰아붙이며 괴롭히는 것은 정말 삼가셔야 합니다. 이런 행위는 가인조차 보존하시는 주님을 정면으로 모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표에 담긴 의미를 한층 더 깊이 밝히며, 이것이 단지 특정 시대의 신앙 상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 전체가 멸망하지 않도록 마련된 주님의 보편적 섭리’임을 분명히 합니다. 만일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는 과정을 전혀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태고교회와 같은 내적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결국 ‘영원한 죽음’, 곧 주님과의 완전한 단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허용하시되, 그 신앙이 폭력적으로 파괴되거나 경멸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을 해치지 말라’는 선언이며, 동시에 ‘가인에게 표를 두셨다’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조차도 주님께서는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반드시 신앙, 곧 진리를 듣고 아는 단계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면 체어리티로 나아갈 통로 자체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깊은 아르카나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혼인과 고자(eunuchs)에 대해 말씀하신 구절이 바로 이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 말하는 ‘하늘의 혼인’에 속한 자들이 바로 이러한 질서 안에 있는 자들이며,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는 태고교회와 같이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 사랑으로 신앙을 바로 아는 상태, 특별히 신앙을 따로 낳을 필요가 없는 상태, 더 이상 무슨 생식이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 곧 천적 천사와 같은 유형을 뜻합니다. 반면 ‘사람이 만든 고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지만 다시 결합된 상태로, 홍수 이후의 교회나 초대 교회와 같이 ‘영적 천사’의 성격을 지닌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는 체어리티에서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천사적 영들’을 가리키는데, 이들 역시 주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하고 보존되어야 할 유형입니다. 이 모든 구분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다양한 결합 방식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각각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가인의 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섭리의 경계선’입니다. 결국 AC.394는 가인의 표를 통해,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미리 보시고, 신앙이 불완전한 형태로라도 남아 있어 체어리티로 다시 인도될 수 있도록 길을 여신 분임을 밝히며, 이것이 인류 구원의 깊은 신적 질서임을 드러냅니다.

 

 

 

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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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가인 : 체어리티를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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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우리는 지금 이 말씀들의 속뜻 설명을 더 깊이 계속하기에 앞서, 먼저 이 경우가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의 신앙 말고는 그 어떤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신앙이라는 걸 심지어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걸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love from the Lord)으로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천적 천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류는 이런 캐릭터로 계속 있을 수 없어 언젠가는 신앙을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에서 분리, 신앙 자체를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을 예견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섭리하셨는데, 그것은, 그들, 곧 주님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분리되되 신앙을 통해서, 즉 신앙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체어리티(from the Lord charity)를 받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나 들음(hearing)이 먼저 오고, 그러고 나서 지식이나 들음을 통해 이번에는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과 자비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 체어리티라는 건, 신앙과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원리(the principal of faith)를 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시절 그들에게 있었던 퍼셉션(perception) 대신 이제 그 자리를 양심(conscience)이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양심은 체어리티와 결합한 신앙(faith joined to charity)을 통해 얻는 것인데, 이 양심은 참된 걸(what is true) 딕테이트하는 게 아닌,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that it is true) 딕테이트하는 것으로, 이는 말씀에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홍수 후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캐릭터였으며, 주님 초림 후 첫 교회인 초대교회 역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영적 천사들이 천적 천사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과 그 표에 대한 내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밝히기 전에, 먼저 ‘신앙이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는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으며, 오직 사랑에서 나온 신앙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를 배우거나 추론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내적 지각’, 곧 ‘퍼셉션(perception)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따로 말하지 않았고, 신앙은 사랑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동일하며, 이들은 진리를 외적으로 확인할 필요 없이 사랑 안에서 즉시 알아봅니다. 그러나 인류가 점차 겉 사람 중심으로 기울어지며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 미리 보였기 때문에, 주님은 신앙과 사랑이 분리되는 과정을 허용하셨습니다. 다만 그 분리는 파괴가 아니라 ‘섭리적 조정’이었습니다. 신앙이 교리와 지식의 형태로 먼저 주어지고, 그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자비를 주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때 체어리티는 신앙과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신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 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태고교회의 지각은 사라지고, 대신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형성된 양심’이 인간의 내적 안내자가 됩니다. 이 양심은 무엇이 참인지 스스로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고 받아들이고 따르게 합니다. 홍수 이후의 교회들과 주님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는 대부분 이러한 성격을 지녔으며, 바로 이 점에서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과 구별됩니다. AC.393은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왜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핵심 열쇠로서,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이라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 구조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마태복음 '고자' 이야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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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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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 될 것임을,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는 주님은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신앙이 보존될 수 있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 “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이 단순한 형벌의 위협이 아니라, ‘사랑과 분리된 상태에 놓인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성모독(sacrilege)’에 해당함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이미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비록 왜곡되고 약화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주님께서 보존하시려는 질서 안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칠 배’라는 표현을 완전함과 극대화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보며, 이는 신앙에 가해지는 폭력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영적 질서 전체를 거스르는 중대한 훼손’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이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는 가인을 정죄하기 위한 낙인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식별하고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적 표식’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어떤 진리의 요소도 무분별하게 제거하지 않으시며, 특히 거듭남의 가능성과 연결될 수 있는 신앙의 틀은 더욱 그러합니다. 설령 체어리티가 사라져 신앙이 생명력을 잃은 상태라 하더라도, 그 신앙은 장차 다시 선과 결합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지켜 두십니다. 따라서 AC.392는 가인의 표를 ‘타락한 신앙에 대한 관용이나 승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되, ‘미래의 회복과 재결합을 위한 보존’을 목적으로 한 주님의 깊은 섭리입니다. 이 단락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질서를 유지하시며, 악과 거짓 속에서도 가능한 한 생명의 흔적을 남겨 두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AC.393, 창4:15, '가인 : 체어리티를 회복하기 위한 통로로서의 신앙'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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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내세에 있는 악한 영들의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 내세(來世,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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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1

 

내세(來世, the other life)에 있는 악한 영들의 상태를 보면, 분명히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모든 체어리티를 박탈한 사람들은 정처 없이 떠돌며,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가령 어느 무리든지 그들은 이들이 그저 다가오기만 할 뿐인데도 이들의 캐릭터를 즉시 지각합니다. 그런 것이 내세에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이들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대감을 품고 너무하다 할 정도로 잔인하게 대합니다. 악한 영들은 서로를 잔인하게 대하며 학대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을 얻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만족감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런 것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원하든 자기한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그 안에 거짓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으며, 악도 그 안에 악에 대한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 안에 이런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해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이 왜 끊임없이 두려움 속에 사는지를, ‘사후 세계에서의 악한 영들의 실제 상태’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체어리티를 완전히 스스로 제거한 자들은 다른 생애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방황하는데, 이는 외적 처벌 이전에 이미 그들의 내적 상태가 안정과 평화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회(영적 공동체)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그 사회는 즉시 그들의 성품을 알아차리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숨겨질 수 없고 곧바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즉시 쫓겨나며, 때로는 극심한 형벌과 응징을 받게 되는데, 악한 영들은 가능하다면 서로를 죽이고자 할 정도의 적대감을 품습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서로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최대의 즐거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악과 거짓 그 자체의 본성’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이전에는 악과 거짓이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 형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상을 통해 이를 밝힙니다. 즉, 사람이 타인에게 바라거나 행하려는 것이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며, 거짓에는 거짓 자체의 형벌이, 악에는 악 자체의 형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외부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형벌과 그 결과를 끊임없이 예감하며 살아가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려움이 바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는 상태이며, 이는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된 영혼이 피할 수 없이 겪게 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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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 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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