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9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보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노골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데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미묘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올바르게 믿는다면 삶은 그다음 문제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구원은 신앙의 문제이므로 체어리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벨의 생명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벨이 죽은 뒤에도 가인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의 교리는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AC.329가 보여 주는 매우 엄중한 영적 현실입니다. 교회가 체어리티를 잃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종교적 활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도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고, 신앙고백도 남아 있으며,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여전히 활발해 보이는데, 그 안에서 아벨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신앙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 의와 자기 우월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모든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향하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고백하는 신앙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었는데 그 말씀으로 인해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교리를 깊이 알게 되었는데 그 지식 덕분에 더 겸손해졌는가,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그 예배로 인해 악을 더 미워하고,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AC.328에서 말한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가인’이라고 지목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살피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만족이 ‘나는 그것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내는 순간,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아벨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대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면, 가인의 원리가 이미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AC.325에서AC.329까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다음에는 ‘예배의 분리’, 이어서 ‘내적 상태의 악화’, 그리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첫 살인은 단순히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넘어, 교회 안에서 진리가 선과 분리되고, 신앙이 사랑보다 높아질 때, 마침내 교회의 참된 생명인 체어리티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역사입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창4:8-9)
AC.329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사람들한테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이라고 합니다. (8-9절)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마침내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AC.326에서는 이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로 드러났으며,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아직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이지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29에서는 그 질서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신앙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결과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extinguished’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였다’는 창세기의 형제 살인 사건을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불이 꺼지듯 체어리티의 생명이 꺼진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단순히 악한 신앙이 선한 체어리티를 공격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더 이상 살아 있는 원리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앙에 관한 교리는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하나님에 관한 말도 계속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이 사라진 것입니다.
특히 AC.329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과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운 것’을 구별하여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분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하나였는데 그것을 서로 떼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분리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일단 둘을 분리하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생기고, 마침내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본래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할 신앙과 진리가 오히려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바로 이 질서의 전도가 결국 아벨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핵심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앞섰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앞섰다’는 것은 단순히 순서를 먼저 두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교회의 본질이며, 무엇이 주된 것인가 하는 자리의 문제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생명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선이 먼저이고, 진리는 그 선의 형체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에게서는 이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신앙이 스스로 주된 것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체어리티는 처음에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다음에는 불필요한 것이 되며, 마침내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것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이 보여 주는 영적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창4의 살인은 창4:8에서 갑자기 시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AC.325에서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는 순간부터 아벨의 죽음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분리는 예배의 분리로 이어졌고, 예배의 분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악하게 만들었으며, 그 악한 상태에서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4의 몇 절 안에서 읽어 내는 것은 단순한 범죄의 진행이 아니라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중요하다’고 이해하면 AC.329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separated faith’, 곧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28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배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할 때, 교회의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을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그보다 앞세운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회복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가인과 아벨의 본래 질서,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아우 아벨’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문자적으로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지만, 속뜻으로도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AC.328-329의 설명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출생 순서와 영적 우선순위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먼저 등장한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으로 앞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 신앙이 자신을 ‘앞세웠을’ 때 영적 질서가 뒤집히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창4:9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깊어집니다. 주님께서 아벨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너희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있고, 교리도 있고, 예배도 있는데, 그 신앙이 낳아야 할 이웃 사랑은 어디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미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창4:7)
AC.328
그리고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으며,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7절) And that the quality of the faith is known from the charity; and that charity wishes to be with faith, if faith is not made the principal, and is not exalted above charity. (verse 7)
해설
AC.328은 앞의 AC.325-327에서 계속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문제를 한층 더 깊이 다룹니다. AC.325에서는 태고교회가 본래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으나, 이후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나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이라는 두 종류의 예배가 되었고,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점차 악해져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AC.328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덧붙여집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완전히 밀어내고 자신을 그 위에 세우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질’(質, quality)은 그 신앙이 어떤 성질의 신앙인가, 곧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인가, 아니면 외형만 신앙인 죽은 신앙인가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신앙 자체의 주장이나 교리적 정교함이 아니라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신앙을 고백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참된 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죄로 여기고 멀리하게 하는지, 선을 행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듯, 체어리티를 보고 신앙의 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게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신앙은 사람이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실제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체어리티가 되지 않는다면, 아직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는 말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본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신앙은 사람을 선으로, 곧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어지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마치 체어리티를 살아 있는 존재처럼 표현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제거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본래 가인의 적이 아닙니다. 이것이 창4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둘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참된 신앙 역시 체어리티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선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체를 얻습니다. 둘의 결합이 바로 교회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자신을 ‘principal’, 곧 주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신앙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 체어리티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납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어떻게 사느냐는 그 다음이다’, 더 나아가 ‘올바르게 믿기만 하면 체어리티의 삶은 구원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가인의 원리가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28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단순한 대립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몰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자신을 아벨보다 높이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은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창4의 비극은 두 원리가 서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질서가 뒤집혔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창4:7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직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이 다시 선을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한다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았으므로 신앙 자체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신앙이 다시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진리가 선을 향하며, 사람이 알고 믿는 것이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도 본래의 질서 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은 앞의 AC.327에서 보았던 주님의 질문, 곧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가 단순한 책망이 아니었음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상태가 악해지고 있음에도 그에게 회복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며, 아직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면 둘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7은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분리된 것을 다시 결합시키려는 주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 ‘악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이 악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근본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며, 진리는 선의 형체입니다. 둘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신앙의 진리가 체어리티의 선에서 분리되면, 진리는 생명의 근원을 잃고, 결국 사람의proprium이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분리된 신앙’은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나 악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매우 신앙적이고, 교리적으로도 정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예배에도 열심일 수 있습니다. 가인 역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체어리티가 없으면, 신앙은 점차 ‘내가 무엇을 아는가’, ‘내가 얼마나 옳은가’, ‘내 신앙이 얼마나 정통인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는 자기 성찰의 빛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마침내 자신의 신앙이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하게 됩니다.AC.327은 바로 이 내적 변질의 순간을 ‘가인의 분함’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뒤집힌 결과입니다. 사랑이 신앙의 생명이었을 때에는 진리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자 동일한 진리가 오히려proprium을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분리’가 ‘악’으로 발전하는 이유입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사랑의 손에 들어가 악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진행은 매우 정교합니다.AC.325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AC.327에서는 ‘내적 상태의 악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악화된 상태가 계속되면, 다음에는 체어리티 자체를 제거하려는 단계,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창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한 사건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그 살인은 이미 오래전,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AC.327이 짧은 한 문장으로 보여 주는 창4의 매우 깊은 영적 경고입니다.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창4:5-6)
AC.327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진 것은, 가인의 ‘분함이 일어나고 그의 안색이 변한 것’(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으로 묘사됩니다. (5-6절)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 (verses 5–6)
해설
AC.327은 AC.325-326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제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났습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지만,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였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이제 AC.327에서는 그 결과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다’고 합니다. 즉 사랑과 신앙의 분리는 단순히 교리 체계 안에서 일어난 작은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 교리를 붙든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삶까지 악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the state ... became evil’을 ‘상태가 악해졌다’로 옮긴 것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처음부터 완전히 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가인은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자신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자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이것은 창4의 타락이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본래 하나였던 것의 ‘분리’였고, 다음에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이제는 그 결과 사람의 상태 자체가 ‘악’으로 변해 갑니다. 이후에는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가인의 분함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러한 내적 변화의 첫 번째 표현입니다. 개역개정 창4:5은 ‘가인이 몹시 분하여’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분노는 단순히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는 심리적 반응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반발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기는 본래의 질서 안에 있다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질서를 회복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독립하여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되자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 때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하여 분노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신앙도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 다시 ‘신앙만 있으면 된다’, 마침내 ‘체어리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진행되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어야 할 형제가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경쟁자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인의 ‘분함’이 시작됩니다. 본래 하나여야 할 것이 분리된 뒤에는 서로 경쟁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어지는 ‘그의 안색이 변했다’는 표현 역시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성경의 속뜻으로 ‘얼굴’ 또는 ‘안색’은 사람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그의 애정과 생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악한 변화가 이제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처음에는 교리적 주장으로 존재했지만, 이제 그것이 애정과 의지의 상태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proprium의 작용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 사람은 점차 자신의 지식과 교리를 ‘자기의 것’으로 붙들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를 아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의 옳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우월함을 세우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의 신앙이나 예배가 인정받지 못하면,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오히려 상대방을 향하여 분노합니다. 가인의 분함은 바로 이러한 proprium의 상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AC.327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버리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창4:6에서 여호와께서는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미 악해졌지만, 아직 그에게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분노를 아시면서도 그 상태를 스스로 보고 성찰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선을 행할 가능성과 죄를 다스려야 할 책임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가인의 상태가 악해졌다는 것은 곧바로 모든 회복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악이 행동으로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끊임없이 사람을 깨우시고 돌이키려 하십니다.
이 점은 창3에서 살펴본 주님의 섭리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히시고,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시며, 인간의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창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예배가 왜곡되고, 그 결과 사람의 상태가 악해지기 시작했음에도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분하느냐?’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개입입니다.
이 대목은 AC를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물 제사는 좋아하시고, 농산물 제사는 싫어하신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6의 초점은 제물의 물질적 종류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그 제물의 차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하므로 그의 제물 역시 그 신앙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내고, 아벨이 체어리티를 표상하므로 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를 나타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 하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말한다는 점입니다. 예배와 예배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사람이 손에 들고 온 물건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 의도, 삶입니다. 제물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있다면 그 외적 행위만으로 주님과 결합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안에서 드리는 외적 예배는 그 안에 내적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까닭은 ‘덜 좋은 것을 바쳤기 때문’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그 예배의 근원 자체가 질서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겨야 하는데 사랑에서 독립하였고, 진리가 선으로 인도되어야 하는데 진리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예배를 임의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은 본질상 주님의 사랑과 결합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어도 따뜻함이 없으면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진리가 있어도 선이 없으면 영적 생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AC.326은 오늘의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배의 참됨은 예배당 안에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주일의 예배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악을 멀리하고, 이웃의 선을 구하려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의 기도와 찬송과 예물에는 그 삶에서 형성된 체어리티가 함께 들어갑니다. 결국 주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곧 체어리티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과 그 삶에서 흘러나오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창4:3-5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두 종류의 제물이 아니라 두 종류의 예배이며, 더 깊게는 두 종류의 생명입니다. 하나는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드리는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AC.325에서 시작된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나며, 이제 이 분리의 결과로 드려지는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다음 단계의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바로 그 반응 속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왜 마침내 체어리티를 해치게 되는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3-5)
AC.326
각각의 예배가 묘사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는 ‘가인의 제물’(offering of Cain)로, 체어리티의 예배는 ‘아벨의 제물’(offering of Abel)로 묘사됩니다. (3-4절)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졌으나,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5절)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해설
AC.326은 앞의 AC.325에서 제시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이제 ‘예배’의 문제로 발전시킵니다. AC.325에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관념이나 교리로 머물지 않습니다. 각각 자기에게 맞는 예배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창4:3-4에서 가인도 제물을 드리고, 아벨도 제물을 드립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사람이며, 둘 다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AC.326은 그 차이가 제물의 외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표현은 ‘worship from charity’, 곧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입니다.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예배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 바르고, 교리가 정확하며, 기도와 찬송과 헌물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 안에 체어리티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바라는 내적 생명이 외적 예배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25에서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예배 역시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예배는 사랑과 별개로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가인의 제물’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나 예배 자체를 거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립니다. 즉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얼마든지 종교적일 수 있고,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교리를 말하고 주님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 안에 체어리티가 없다면, 겉으로는 주님을 향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생명의 근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듯이, 예배도 삶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두 형제가 가져온 물건을 비교하시고, 하나는 좋아하시고 다른 하나는 싫어하셨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속뜻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제물 그 자체보다 그것을 드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이므로 받아들여졌고,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도 주님께서 임의로 거부하셨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그 자체로 주님의 사랑과 결합할 수 없다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제물’은 매우 엄중한 표상입니다. 사람은 교리적으로 옳은 말을 하면서도 가인의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을 드리며, 심지어 열심히 신앙을 변호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삶에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 ‘내 교리가 얼마나 정확한가’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나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가’, ‘나의 신앙은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나타나는가’와 분리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AC.326을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25에서도 매우 중요했던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faith’ 자체가 아니라 ‘faith separated from love’,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게 하고, 선은 그 진리를 삶으로 살아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룹니다. 아벨의 예배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본래의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AC.326이 ‘아벨의 제물’을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라고 한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 자체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는 구별됩니다. 참된 예배의 근원은 예배 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삶에서 형성됩니다. 이웃을 속이고 미워하며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가 예배 시간에 거룩한 형식을 갖춘다고 해서 그 형식 자체가 내적 예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이웃의 선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그 삶에서 나온 사랑이 기도와 찬송과 말씀 읽기와 헌물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예배의 내적 질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의 질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을 바치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과 진리는 본래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물은 ‘제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proprium의 행위라기보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다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에는 이러한 인정이 있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점차 ‘내가 안다’, ‘내가 믿는다’, ‘내가 드린다’는 자기의 공로와 자기 의로 기울 위험이 있습니다.
AC.326은 그래서 창4의 비극이 더욱 깊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보여 줍니다. AC.325에서 첫 번째 분리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AC.326에서는 그 내적 분리가 예배에까지 나타납니다.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면 예배도 둘로 갈라집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옵니다. 결국 창4가 묻는 것은 ‘당신은 예배를 드리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AC.325에서 특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먼저 말씀을 듣고,그것을 믿고,믿음에 따라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그 순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먼저 논증하여 믿은 뒤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선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이 퍼셉션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외부에서 배운 교리를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떼어 놓는 것 자체가 본래의 질서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진리가 있었고, 진리 안에는 그 진리를 낳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신앙하였다’는 말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뜻합니다.
그런데 후손들에게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기보다, 진리를 사랑과 별개로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신앙에 관한 교리’가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교리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퍼셉션이 약해지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고 보존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는가’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AC.325는 이 최초의 분리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상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강한 말씀입니다. 교리가 아무리 정교하고, 성경 지식이 아무리 풍부하며, 신앙 고백이 아무리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교리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벨만 남기고, 가인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사랑을 표현하며,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창4의 첫 비극은 살인보다 먼저 일어났습니다. 아벨이 들에서 죽기 전에 이미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갈라졌습니다. 외적인 살인은 그보다 앞서 일어난 내적인 분리의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AC.325는 창4전체의 출발점을 매우 깊은 곳에 둡니다. 교회의 파괴는 밖에서 누군가 교회를 공격할 때,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진리가 선으로부터, 교리가 삶으로부터 분리될 때 이미 시작됩니다. 그리고 창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2절)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창4의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영적 분리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단순한 형제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분리되고,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입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through love’를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었다’ 정도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며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은 두 개의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진리이므로 믿고, 그러므로 사랑해야 한다’는 순서보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한다’는 천적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태고교회의 본성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이해가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 내용을 지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래서 AC.325의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는 태고교회의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이 거짓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에서 가지를 떼어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줄기와 뿌리에서 분리되면서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신앙은 선과 사랑 안에 있을 때는 살아 있지만, 그것들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라고 매우 정확하게 규정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계속 기억해야 합니다. 창4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을 ‘악한 신앙’이라고 처음부터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참된 신앙의 요소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스스로 서려 하기 시작한 상태가 가인입니다. 이후 그것이 점점 자신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면서, 체어리티를 억압하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한 친절이나 구제 활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에게 행하려는 사랑이며, 신앙이 실제 생명이 되게 하는 내적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교리와 선행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단순한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본래 두 형제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고, 체어리티는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독립하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처음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태고교회가 쇠퇴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새로운 거짓 교리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교회 안에 있던 하나의 요소인 신앙이 전체 생명인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노골적인 거짓에서 시작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의 일부를 전체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을 절대화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신앙만’이 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진리는 참된 것이지만, 사랑과 삶에서 떨어진 진리가 되면 점차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섬기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의 문제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은 선과 진리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점차 ‘자기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다’, ‘나는 믿는다’는 의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보다 앞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주님께로 이끄는 수단이 아니라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길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 선’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처음의 가인은 본래 교회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며, 아벨 역시 같은 교회 안의 체어리티입니다. 비극은 둘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데 있지 않고, 본래 하나여야 할 것이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을 붙들어야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악이 선을 죽였다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교회의 본질로 높이면서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