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라는 말씀의 의미는, 심지어 그렇게 분리되었을지라도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신성모독(sacrilege)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Cain)의 의미가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라는 점, 그리고 ‘칠’(7,seven, 일곱)의 의미는 신성함(what is sacred)이라는 점을 볼 때 분명합니다. 숫자 ‘칠’(seven)은 잘 알려진 대로 아주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육일간의 창조에 이은 일곱 번째 날, 이날이 곧 천인(天人,the celestial man)이요, 그 안에 평화와 쉼, 그리고 안식일(the sabbath)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숫자는 유대교회의 예전에서 아주 자주 나오며, 이 숫자가 나오는 곳마다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아주 길든지 짧든지 둘 다 칠들(sevens)로 구별했는데요, 아래 다니엘 본문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가리키는 아주 장구한 시간 간격을 가리켜 ‘이레’(weeks)라 한 것처럼 말입니다. (9:24-25) That the words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signify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sacrileg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in,” which is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seven,” which is what is sacred. The number “seven” was esteemed holy, as is well known, by reason of the six days of creation, and of the seventh, which is the celestial man, in whom is peace, rest, and the sabbath. Hence this number occurs so frequently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nd is everywhere held sacred, and hence also both greater and less periods of time were distinguished into sevens, and were called “weeks,” such as the great intervals of time to the coming of the messiah; (Dan. 9:24–25)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9:24-25)

 

라반과 야곱은 칠 년이라는 기간을 ‘칠 일’이라 하였습니다. (29:27, 28) and the time of seven years called a “week” by Laban and Jacob. (Gen. 29:27–28)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27, 28)

 

같은 이유로 어디서든 이 ‘칠’이라는 숫자는 거룩 혹은 신성불가침(inviolable)으로 여겨집니다.그래서 시편을 보면 For the same reason, wherever it occurs, the number seven is accounted holy or inviolable. Thus we read in David: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19:164) Seven times a day do I praise thee. (Ps. 119:164)

 

이사야에서 In Isaiah: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The light of the moon shall be as the light of the sun, and the light of the sun shall be sevenfold, as the light of seven days, (Isa. 30:26)

 

여기 ‘해’(sun)는 사랑을, ‘달’(moon)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신앙(faith from love)을 가리키는데, 사랑처럼 될 신앙입니다. 사람의 거듭남의 기간이 일곱 번째 날, 곧 천인, 천적 인간이 되기 전, 숫자 ‘육’(6,six)으로 구별되듯, 그가 황폐해지는 기간, 곧 천적인 것이 전혀 남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여러 번 포로 생활 및 마지막, 즉 바벨론 유수(幽囚,captivity), 곧 십 년씩 일곱 번, 즉 칠십 년간 지속된 기간은 이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땅은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역시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where the “sun” denotes love, and the “moon” faith from love, which should be as love. As the periods of man’s regeneration are distinguished into six, before the seventh arrives, that is, the celestial man, so also are the periods of his vastation, up to the time when nothing celestial remains. This was represented by the several captivities of the Jews, and by the last or Babylonish captivity, which lasted seven decades, or seventy years. It is also said several times that the earth should rest on its sabbaths. The same is represented by Nebuchadnezzar, in Daniel:

 

16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23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어 없애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풀 가운데에 두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들과 더불어 제 몫을 얻으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였나이다, 32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4:16, 23, 32) His heart shall be changed from man, and a beast’s heart shall be given unto him,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him. (Dan. 4:16, 23, 32)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때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에 관하여 And in John, concerning the vastation of the last times:

 

1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6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7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15:1, 6-8) I saw another sign in heaven, great and marvelous, seven angels, having the seven last plagues; (Rev. 15:1, 6–8)

 

그리고 계속해서 and that: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1:2) The gentiles should tread the holy city under foot forty and two months, or six times seven. (Rev. 11: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1) I saw a book written within and on the back, sealed with seven seals. (Rev. 5:1)

 

같은 이유로 징벌의 가혹함과 더함을 모세의 책에서처럼 숫자 ‘칠’(7)로 표현했습니다. For the same reason the severities and augmentations of punishment were expressed by the number seven; as in Moses:

 

18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21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26:18, 21, 24, 28) If ye will not yet for all this obey me, then I will chastise you sevenfold for your sins. (Lev. 26:18, 21, 24, 28)

 

그리고 시편에서 And in David: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79:12) Render unto our neighbors sevenfold into their bosom. (Ps. 79:12)

 

자, 정리하자면, 신앙을 폭행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sacrilege)이었기 때문에,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하십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예배에 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Now as it was a sacrilege to do violence to faith—since as has been said it was to be of service—it is said that “whosoever should slay Cain, vengeance should be taken on him sevenfold.”  

 

※ 비록 이 가인이라는 신앙이 아벨이라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류는 이 가인이라는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를 회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섭리 안에서 주님도 보호하시는 가인이라는 신앙을,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가 나서서 손대는 건 그 자체로 주님을 대적하는 거, 곧 신성모독이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이 내가 알던 교리와 다를 때, 그저 교리만 다를 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함과 주님을 신앙함이 분명히 보이면, 그러면 직접 나서는 대신 주님께 맡기고, 대신 내가 믿는 교리를 성실히 실천, 주님과 결합하는 일에만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이 단순한 형벌의 과장이나 위협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신성모독(sacrilege)’임을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 근거는 두 가지 상징에 있습니다. 첫째, ‘가인’은 이미 밝혀진 대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을 뜻하며, 둘째, ‘(seven)이라는 수는 성경 전반에서 ‘거룩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칠이라는 수가 거룩하게 여겨진 이유는 창조의 여섯 날과 그 완성인 일곱째 날, 곧 안식과 평화의 상태,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교회의 예식과 율법 전반에서 칠이라는 수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긴 시간의 구분 역시 ‘이레(weeks)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메시아의 때를 가리키는 큰 기간들이 ‘이레’로 구분된 것(9:24, 25)이나, 야곱이 라반을 위해 봉사한 일곱 해가 한 ‘이레’로 불린 것(29:27, 28)이 그 예입니다. 또한 시편에서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19:164)는 표현, 이사야에서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표현(30:26)은 모두 ‘사랑과 신앙이 충만해진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거듭남의 과정이 여섯 단계를 거쳐 일곱째에 이르는 것처럼, 황폐(vastation)의 과정 역시 일곱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천적인 것이 남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여러 포로기, 특히 칠십 년에 걸친 바벨론 포로로 대표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일곱 때가 지나가도록 짐승의 마음이 주어진 사건(4:16, 23, 32)이나,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인(5:1), 일곱 재앙(15:1, 6-8), 여섯 곱하기 일곱의 기간(11:2) 역시 모두 ‘신적 질서의 완결성과 침범 불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형벌의 엄중함이나 완전성을 표현할 때도 ‘칠 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비록 생명력은 없을지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반드시 보존되어야 할 역할을 지니므로’, 그것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거룩한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죄라는 뜻입니다. 즉, 신앙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봉사의 수단으로 남겨져야 하기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라는 표지로 둘러 보호하시며, 그 침범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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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마태복음 '고자' 이야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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