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까 봐 끝없이 두려워합니다. 아래 모세의 글에 기록된 것처럼 말입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26:33, 36-37)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Lev. 26:33, 36–37).

 

이사야에 In Isaiah:

 

16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4:16-20)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Isa. 24:16–20)

 

예레미야에 In Jeremiah: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네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각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49:5)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Jer. 49:5). 

 

이사야에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30:16-17)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Isa. 30:16–17).

 

이 구절들과 말씀 다른 구절들에서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 묘사하기를 ‘도망하다’(fleeing),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하다’(fear of being slain)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는데요, 자신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모두가 자기들의 이웃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모두 서로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 “fleeing,” and as in “fear of being slain.”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해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이 끊임없는 두려움, 곧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공포 속에 산다’는 영적 상태를 설명하며, 이를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여러 구절로 입증합니다. 레위기, 이사야, 예레미야의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황폐함’, ‘쫓김’, ‘소리만 들어도 도망함’, ‘추격자가 없어도 넘어짐’이라는 표현들은 외적 전쟁이나 역사적 재난의 기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이 끊어진 영혼이 겪는 내적 공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체어리티를 잃은 사람은 더 이상 주님의 보호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속 사람 안에 안정과 평안을 지탱해 줄 중심이 사라지고, 그 결과 사소한 자극에도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러한 두려움은 외부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끊임없이 자신을 위협하기 때문에 생기는 내적 공포’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보호막이 될 때 사람은 담대하지만, 그 결합이 끊어지면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 곧 자기 고유 본성(proprium)에 의존하게 되고, 그 고유 본성은 서로를 불신하고 공격하는 성향을 지니므로 결국 모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른 잎사귀 소리에도 도망한다는 표현은, 외적 이유가 없어도 영혼이 스스로 붕괴 직전에 있음을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이웃을 미워하기 때문에 서로를 해치려는 욕망을 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웃 사랑이 사라진 곳에서는 상호 보호가 아니라 상호 파괴가 지배하게 되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따라서 AC.390은, 가인이 두려워했던 죽임을 당함이 외적 폭력 이전에 이미 ‘사랑을 잃은 신앙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영적 공포와 붕괴의 상태’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AC.391,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 내세(來世,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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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무릇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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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9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가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이어지는 내용인데요, 이런 경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서 체어리티를 빼앗을 때, 그는 스스로를 주님으로부터 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체어리티, 즉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이지요. 체어리티가 없는 곳, 거기엔 괴리(乖離, disjunction)가 있으며, 괴리가 있는 곳에서는 사람은 자기 자신, 혹은 본성(own)만 남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이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무슨 마음을 먹든지 그것은 거짓이며, 악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람을 죽게 하거나, 여생(餘生)을 빈털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스베덴보리는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말이, 외부의 어떤 사람이나 존재가 가인을 해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악과 모든 거짓이 그 사람을 파괴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근본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제거할 때, 그 즉시 주님과의 결합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뿐이며, 신앙이나 진리 지식 자체는 그 결합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진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분리(disjunction)가 생기고, 이 분리는 사람이 더 이상 주님에게서 생명과 인도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고유 본성(proprium)에 맡겨지게 되는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고유 본성은 본질적으로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상태에 놓인 사람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점점 거짓으로 물들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악으로 향하게 되며, 이 거짓과 악이 바로 사람을 ‘죽이는 것’, 즉 영적 생명을 소멸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임’은 외적인 멸망이나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속 사람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져 생명의 근원이 사라지는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인이 두려워한 것은 사실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사랑을 잃은 신앙이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상실하여, 내부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악과 거짓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을 통해, 체어리티가 제거된 신앙은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으며,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생각과 자기 욕망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상태에 이른다는 엄중한 영적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AC.390,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 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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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 ‘땅에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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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모르는 걸 의미합니다.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스베덴보리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라는 표현을,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선한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도망자’와 ‘방랑자’는 단순한 이동이나 불안정한 삶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랑(체어리티)이 신앙에서 제거되면, 진리는 더 이상 선에 의해 인도되지 못하고 방향을 잃게 되며, 그 결과 사람은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할 기준을 상실합니다. 이때 남아 있는 진리 지식은 삶을 인도하는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충돌하며 혼란을 낳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가인의 ‘방랑’입니다. 즉, 사랑 없는 신앙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길을 알지 못하게 만들며, 영적으로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떠도는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AC.389,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무릇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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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 ‘주의 낯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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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7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to be hid from thy faces)가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은 ‘주의 낯’(the faces of Jehovah)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주의 낯’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비(mercy)입니다. 이 자비에서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여기 그의 ‘’으로 신앙의 선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That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faces of Jehovah.” The “face of Jehovah,” 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 “faces.”   

 

해설

 

스베덴보리는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주의 낯(faces of Jehovah)이라는 상징의 본래 뜻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성경 전반에서 “여호와의 얼굴”은 감정적 표정이나 물리적 현존을 뜻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비(mercy)’, 곧 하나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의 선한 영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얼굴은 단순히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와 사람에게 도달하는 모든 선의 근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비로부터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 즉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신앙의 선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분을 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진리의 인식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올 때에만 ‘선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낯”은 곧 ‘사랑에 근거한 신앙의 선’,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을 실제로 연결해 주는 생명력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AC.387에서 “그의 얼굴들(faces)”이라는 복수 표현이 사용되는 것도, 이 선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삶 속에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숨겨짐은 언제나 사람 쪽에서 일어납니다. 가인의 경우, 사랑(체어리티)을 죽임으로써 그는 여호와의 자비가 흘러들어오는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들을 느끼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상태는 단순히 “선한 감정이 사라졌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근원과의 단절’을 뜻합니다. 진리는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는 더 이상 선을 낳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사랑 없는 신앙의 가장 치명적인 특징입니다. 진리는 남아 있으되, 그 진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열과 생명은 사라진 상태인 것이지요.

 

결국 AC.387은 가인의 상태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그는 진리로부터도 분리되었고(AC.386), 더 나아가 사랑에서 비롯되는 모든 신앙의 선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이것이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의 영적 의미이며, 하나님이 가인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정확히 묘사하는 아르카나입니다.

 

 

 

AC.388,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 ‘땅에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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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이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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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6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이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은 ‘땅’(ground)이 상징하는 바를 보면 분명한데요, ‘땅’은 그 진짜(genuine) 뜻으로는 교회, 즉 교회에 속한 사람이며, 그래서 앞서 밝힌 대로, 교회가 주장하는 모든 것입니다. 어떤 말의 의미라는 것은 다루는 주제에 따라 필연적으로 달라지는데요, 그래서 심지어 잘못된 신앙, 예를 들면, 스키즘이나 이단 신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땅’이라 합니다. 여기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그러나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That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 “ground.” Here however to be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이라는 말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되는 상태”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그 근거는 성경에서 “(ground)이 단순한 자연적 흙이 아니라, ‘교회 혹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 전반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상징 원리로, 땅은 곧 ‘진리가 심기고 자라는 영적 토양’, 즉 교회의 구조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 구조 안에 속해 있을 때 사람은 진리와 선의 흐름을 받을 수 있지만, 그 구조에서 벗어나면 진리의 빛을 더 이상 공급받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라는 단어가 항상 올바른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상징은 말씀이 다루는 ‘주제(subject)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통한 교회뿐 아니라 ‘분열된 교회, 이단적 가르침, 잘못된 신앙 고백을 가진 집단’도 때로는 “”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외형상으로는 ‘교회’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란 단어는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외적 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의 경우, 즉 가인에 대해 언급될 때는 의미가 훨씬 더 엄중하다고 말합니다.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단순히 정통 교회에서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가 가진 진리의 본질과 완전히 단절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가인은 진리의 틀 안에 있든 없든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그가 더 이상 진리의 생명력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인이 말한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하고, 진리의 빛과 이해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되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인을 심판하여 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체어리티)을 버린 신앙이 스스로 진리의 토대를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될 때에만 생명을 지니는데, 가인은 이미 사랑을 죽였기 때문에 진리가 뿌리내릴 ‘’—즉 선한 내면—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AC.386은 가인의 상태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를 말할 수 있으나, 그 내면에서는 교회의 진리와 완전히 단절된 사람, 즉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영적 생태계의 붕괴를 뜻합니다.

 

 

 

AC.387,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 ‘주의 낯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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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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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4:14)

 

AC.385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hid from thy faces)는 사랑의 신앙의 모든 선(all the good of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됨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는 무엇이 참이요 선인지를 모르는 것을,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 “hid from thy faces”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은 교회의 모든 진리로부터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의 ‘(ground)은 단순한 자연적 토양이 아니라, 교회의 진리가 뿌리를 내리는 영적 기반을 상징합니다. “지면”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속 사람의 영역을 뜻하고,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말은 진리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 즉 교회의 외적 형태는 남아 있어도 그 안에서 길을 잃어 진리의 빛을 더 이상 인지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인은 사랑, 곧 체어리티 없이 신앙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진리의 토대에서도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AC 전반에서 항상 “하나님의 선(특히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즉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숨겨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선에 대한 지각(good perception)의 상실”이라 부르며, 이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는 가장 명백한 징후라고 설명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모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단절”로 풀이합니다. 속 사람(내적 의지)에서 오는 선의 인도함이 없으므로, 사람이 무엇이 올바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지식은 남아 있지만 그 지식이 방향성을 잃어 무작위로 흩어지며, 신앙의 진리들은 더 이상 길을 안내하는 빛이 되지 못한 채 고립된 정보처럼 남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방랑”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파괴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인이 사랑과 선을 잃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진리를 보호할 내적 힘이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만나는 자들”을 외부의 사람이나 존재가 아니라, “가인의 내적 상태에서 생겨난 왜곡된 신앙, 잘못된 개념들, 자기모순, 내적 거짓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사랑이 없는 신앙은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악과 거짓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선이 없는 진리는 생명력을 잃고, 생명력을 잃은 진리는 악과 거짓의 공격 앞에서 방어할 힘이 없습니다.

 

결국 AC.385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없이 분리된 신앙은 교회의 진리와 선에서 분리되고, 그 결과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의 힘에 의해 붕괴되는 운명에 놓인다.’ 이 말은 하나님이 가인을 벌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사랑을 잃음으로써 스스로 그런 상태에 들어간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386,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이 지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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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AC.383-38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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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그런 걸 보면, 가인 안에 아직 뭔가 선한 것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은 사라졌는데, 그건 뒤에 나오는 라멕이 한 말을 보면 분명합니다. 19절하고, 23, 24절입니다.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통해, 가인 안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선의 흔적(리메인스)’이 남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체어리티)을 이미 억압하고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이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인식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안에 ‘미세한 선(어떤 최소한의 선한 감수성)’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남아 있던 선도 결국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후 등장하는 ‘라멕(19, 23–24)에 대한 묘사 때문입니다. 라멕은 가인의 계열이 도달한 ‘최종적 타락 상태’를 대표하는 인물로,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사라지고, 신앙의 진리마저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왜곡으로 변질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AC.384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인(사랑을 잃은 신앙) 안에는 처음에는 아주 약한 선이 남아 있었으나, 그 선이 보존되지 못하고 결국 후손(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사라진 교회의 상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AC.385,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AC.385-391)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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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AC.383-38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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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4:13)

 

AC.38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자기가 악 가운데 있었다는 어떤 고백을, 이 고백은 무슨 내적 고통(internal pain)으로 나온 것입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는 그로 인한 절망(despair)을 의미합니다. Cain said unto 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구절을 매우 깊은 영적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자백(confession)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진리(신앙)가 사랑(체어리티)을 떠나 버린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내적 통증(internal pain)에 의해 일어난 고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인이 아직 회개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죽인 신앙”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처음으로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의식을 “고통을 동반한 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고통은 외적 형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 생명(아벨)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내적 비어 있음’이며, 이것이 가인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입을 열게 만든 것입니다.

 

이어서 가인은 말합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단순히 죄책감의 표현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절망(despair)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상태가 너무 깊이 무너져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절망감’입니다.

 

여기에는 사랑 없이 존재하려는 신앙의 비극적 논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존재의 토대가 무너졌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실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체어리티라는 사랑을 잃어 하나님을 인식할 능력을 스스로 차단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절망은 신앙의 붕괴라기보다, 사실은 ‘회복의 첫 단계’입니다. 왜냐하면 절망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AC.383은 바로 이 점을 드러냅니다. 가인의 고백은 아직 회개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한 첫 미세한 움직임’, 즉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적 통증의 인정’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움직임을 통해 회복의 길을 여시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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