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창4,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창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이건 좀...차라리 창4따로,창5따로,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세요?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갑자기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그대로 시간순으로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태어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 긴 세월 동안 나이만 먹다가 뒤늦게 셋을 낳았다는 것인지, 또 태고교회는 가인 이후, 오랫동안 어두운 상태에 있다가 셋 이후에야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창4와 창5를 그렇게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장은 동일한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을 각각 집중하여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질의 흐름, 곧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보여 줍니다. 반면 창5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을 거쳐 노아에 이르는 태고교회의 주된 계승선을 따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모두 끝난 뒤에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계열은 상당 부분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나란히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나란히’라는 말도 모든 인물의 출생 연대를 정확히 맞추어 역사적 동시성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보다 ‘상태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가인,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단지 개인만이 아니라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고,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서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한쪽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다음, 동시에 다시 다른 계열로 돌아가 이번에는 그쪽 계열의 역사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은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대표되는 한 계열에서 셋으로 대표되는 다른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그 셋 계열을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 노아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줍니다. 즉 창4와 창5는 ‘먼저 가인 계열,그 모든 역사가 끝난 다음 셋 계열’이라는 관계라기보다,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계열을 각각 추적한 두 개의 서술’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것을 너무 단순하게 ‘가인 계열은 악한 계열이고,셋 계열은 선한 계열이다’라고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점차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면서 변질되어 간 데 있습니다. 또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완전한 상태로 노아까지 내려간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점차 쇠퇴하여 결국 홍수라는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두 계열 모두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영적 역사 안에 있으며, 다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라는 명칭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교회 한 세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손 교회들을 거쳐 홍수 직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교회 시대를 포괄합니다. 그 안에는 가장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교리적 계열도 있고, 그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새로운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의 어두운 모습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순간 태고교회 전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AC.324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두 흐름입니다. 인간, 즉 아담에게서는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고 교리들이 분리되어 여러 ‘heresies’가 생겨나지만, 주님에게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는 바로 이 두 흐름이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서로 다른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이 관점을 처음부터 가지고 읽으면, 앞으로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가 단순한 고대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분리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생명의 계보를 보존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역사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heresies)을 다루며, 그 후에 ‘에노스’(Enosh)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는 창4는 가인과 아벨,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마지막에 셋과 에노스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의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으로는 태고교회가 점차 쇠퇴하면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분리되고, 그 결과 여러 교리적, 교회적 계열이 생겨나는 과정,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를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perception)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독립적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하나였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체어리티(charity)와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특정한 교리를 전체인 것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AC.324가 말하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heresies’를 ‘이단들’이라고 번역하더라도,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특정 교단이나 단체에 대한 판정보다,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되고 절대화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합니다. 부분적인 진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라는 전체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를 신앙의 전부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후 가인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하게 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 역시 단순한 형제 살해를 넘어,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마침내 체어리티를 무시하고 소멸시키는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나 AC.324의 두 번째 절반은 전혀 다른 방향을 보여 줍니다. 교리들이 분리되고,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에노스’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교회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으켜진 것입니다. 인간은 교회를 분리하고 변질시키지만,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전의 교회가 더 이상 본래의 상태로 존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마련하십니다.
창4:26의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 교회와 연결됩니다. 최초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주님을 예배하던 가장 깊은 천적 상태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님과 인간의 연결 자체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예배의 형태도 달라졌고, 주님께서는 그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한 족보상의 출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구원의 길을 계속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신 것은, 인간을 영원히 생명에서 쫓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창4에서는 그 보호의 섭리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되는지가 나타납니다. 인간이 가장 순수했던 천적 상태를 잃고, 교리와 신앙마저 분열시키더라도, 주님께서는 생명나무의 길 자체를 없애지 않으시고, 인간이 다시 그 생명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교회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AC.320-322에서 다룬 내용을 다음에 이어질 실제 영계 경험과 연결해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완전한 감각과 사고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지상 생애 동안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삶의 연속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하는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설명을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통하여 확인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입니다.
특히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를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이라고 옮긴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abode’에는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보다 잠시 ‘머물렀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지상의 육체적 삶은 인간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의 첫 단계입니다. 사람은 잠시 자연계에 머물면서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고, 육체를 벗은 뒤에는 그 생명이 영계에서 계속됩니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영계로 삶의 장이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AC.320에서 사람이 사후에도 자신을 여전히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 생명의 연속성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주장을 단순한 추론이나 신학적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322에서 그는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AC.323에서는 지상에 있을 때, 영의 실재와 사후의 감각적 삶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사후에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았으니 벌을 받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관념에 갇혀 있던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 있음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존의 관념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3은 AC.320-322 전체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영을 육체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영을 연기나 기운처럼 막연한 것으로 상상하거나, 사후의 삶을 의식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영계는 정반대입니다. 육체가 더 실제적이고 영이 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영이 본래적인 인간이며, 육체는 그 영이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사용하는 가장 바깥 형체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는 것은 인간적인 감각과 사고를 잃는 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한하던 자연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앞 AC.322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육체의 눈과 귀가 실제로 보고 듣는 주체가 아니라 영이 그것들을 통하여 보고 들었던 것이라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시각이나 청각 자체가 사라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적 기관의 제한이 사라지면서 영적 감각은 더욱 분명하고 완전하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상에서 ‘육체가 감각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자신의 옛 관념을 바로잡는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따라서 AC.323의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짧은 표현에는 상당히 넓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부정했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은 존재하더라도 육체가 없으면 인간다운 감각과 사고를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들이 저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생생한 존재를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 주려 합니다. AC.323은 짧지만, AC.320-322의 ‘사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며, 오히려 더 분명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실제 영계 경험으로 넘겨주는 하나의 문턱과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그러니까 못 듣고,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이‘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아인교회와 농아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여기서도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육체의 눈과 귀가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감각하는 주체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귀는 자연계의 소리를 영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며, 혀와 성대는 영의 생각과 애정을 자연계의 음성으로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 기관의 손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적 청각이나 생각하고 교통하는 능력까지 결여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통로가 제한된 것이지, 그 사람의 영이 불완전하거나 인간성이 덜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사람의 본질이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고,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몸, 보지 못하는 몸, 걷지 못하는 몸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영원한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에서 영이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 통로가 제한된 상태이지, 영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AC.322는 농인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청각은 단순히 물리적 소리를 더 크게 듣는 능력이 아닙니다. 영계의 말은 생각과 애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교통입니다. 지상에서는 음성, 문자, 표정, 몸짓과 같은 외적 기호를 거쳐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애정이 그 표현 안에 함께 담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도 육체를 벗은 뒤에는 다른 영들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겪었던 의사소통의 장벽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인의 지상 삶을 단지 ‘사후에 고쳐질 결핍’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보다 그의 마음의 애정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는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조금도 덜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도 언제나 육체적 청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로 설교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수어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되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는 기관의 상태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말한다’는 것도 음성을 낸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어는 얼굴 표정과 공간, 움직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애정과 관계를 풍성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인을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실제 언어 능력과 인간적 교통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 목회 역시 단순히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기는 보조적 사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육화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농인 공동체에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고립, 교육과 정보 접근의 어려움,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인 목회자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누며, 교회가 참된 영적 공동체가 되도록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특히 교회는 농인을 일방적인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농인 공동체는 언어가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교통의 본질이 음성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나눔이라는 사실, 몸 전체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의 언어, 곧 생각과 애정이 표현 전체에 담기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장애를 곧바로 영적 결함의 표지로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몸은 유전, 질병, 사고, 환경 등 수많은 자연적 원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고, 그가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문자로, 누군가는 수어와 표정과 관계를 통하여 받습니다. 통로는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농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는 기적’만을 목표로 삼으면,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공동체, 그리고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치유는 신체 기능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립이 교통으로, 배제가 공동체로, 수치가 존엄으로 바뀌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AC.322의 마지막 문장인 ‘감각하는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도 단순히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은 감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다른 사람의 애정과 필요를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온전한 인간,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완전한 인간 구조를 가진 존재이며, 다만 자연계의 특정 감각 통로에 제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후에는 그 제한이 벗겨지고,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생각과 애정과 교통의 능력이 훨씬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이미 사람이었던 자신이 육체의 제약 없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AC.322는 농인들을 향해 ‘언젠가 귀가 열릴 것이니 지금의 삶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인들에게 ‘육체의 귀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이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참으로 말하는 이는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농인을 섬기시는 그 목사님의 사역은 바로 이 영적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하여 교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귀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걸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세요. 안 믿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들립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 활동에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는 AC.321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글입니다. 앞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사고, 그리고 언어 능력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히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영이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false notion)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형체 없는 의식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사람의 실질적인 내적 인간, 속 사람이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입니다. 따라서 감각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게 있습니다.
영들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지상의 한낮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의 빛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빛이며, 그 빛 안에서 천사들은 사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태까지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시각은 단순히 더 밝게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보는 능력입니다.
청각 역시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영계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전달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골라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이 생각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들의 언어는 짧은 표현 안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까지 함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이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다’(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는 뜻입니다.
촉각에 관한 설명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감각이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촉각의 여러 차이와 형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의 본질이 어떤 대상과의 접촉과 반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각은 빛과의 접촉이며, 청각은 소리의 진동과의 접촉이고, 후각은 냄새의 기운과의 접촉입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바깥의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촉각은 모든 감각의 가장 일반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고통을 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욕망이 외적으로 드러나며, 악한 영들은 서로의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상태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 접촉이 그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선한 사랑과 지혜에 접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같은 영적 감각 능력이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에서는 행복이 되고 지옥에서는 고통이 됩니다.
이 글은 욕망과 애정도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사람이 전혀 다른 욕망을 새로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한 주된 사랑이 육체의 외적 제약을 벗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은 새로운 성품을 얻는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진짜 성품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사고 능력에 관한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idea) 안에는 지상에서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생각이 단순히 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내적입니다. 자연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의 제약을 받지만, 영계의 생각은 애정과 의미, 관계와 목적을 하나의 관념 안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생각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려면 많은 문장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곧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더 예리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확증하는 데 사용합니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지혜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능력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와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더 완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은 불완전한 인간의 잔재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인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이 글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오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기쁨과 고통으로 느끼는가를 포함한 생명 전체의 수용 능력을 뜻합니다. 천국의 생명은 선과 진리를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생명이며,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거짓에만 반응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참되다고 느끼며, 무엇과 결합하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AC.322는 죽음 뒤의 삶이 지상보다 희미하고 비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육체는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자연계에 나타내는 도구이며, 육체가 벗겨지면 영의 감각과 생각과 애정은 본래의 힘을 더욱 자유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성품에 따라 더욱 온전하고 분명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두 상태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시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해설
AC.321은 AC.320에 이어,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삶의 질이 오히려 지상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모든 능력이 약해지는 상태로 생각합니다. 육체를 떠나면 보고 듣는 능력도 희미해지고, 생각이나 의식도 막연해질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사실을 증언합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을수록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보고, 더욱 분명하게 듣고, 더욱 깊이 생각하며, 더욱 자유롭게 말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감각과 사고의 근원이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영이며, 귀가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듣는 것도 영입니다. 육체의 기관들은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육체를 떠나면 생명의 본체인 영은 자신을 제한하던 물질적 도구를 벗게 되고, 본래의 능력을 훨씬 더 자유롭게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감각 기능이 훨씬 더 뛰어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영들 자신도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연속성’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도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므로, 자신이 갑자기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보고, 듣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에게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계의 삶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여전히 지상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21은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영들은 ‘주님께서 성찰하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찰’(reflection)은 단순히 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전과 현재를 비교하여 주님의 섭리를 깨닫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능력 역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빛 가운데 가능합니다.
이 점은 영계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영계에서는 단순히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뛰어난 감각과 사고가 주님의 빛 안에서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과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반대로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같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지혜와 행복은 끝없이 깊어집니다.
결국 AC.321은 사람이 죽은 뒤에 ‘더 희미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실제적인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육체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표현하는 가장 바깥 도구에 불과하며, 참된 인간은 영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능력을 잃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 보다 자유롭고 충만하게 드러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임종,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평안한,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감옥 형장의 이슬,혹은 자살 등...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의식은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의식의 연속’과 ‘상황에 대한 인식’입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기억과 생각, 감정과 사랑, 성격과 삶의 방향을 그대로 지닌 채 영계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지상에서도 깊이 잠들었다가 막 깨어났을 때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은 계속 이어졌지만,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죽음 직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죽음을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되도록 섭리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특히 교통사고나 전쟁, 살해, 갑작스러운 사고와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충격이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사람은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연속된 의식 속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인도와 새로운 환경을 통해 조금씩 자신이 영계에 들어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점은 지상에서의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고, 어떤 사람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생을 마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나 재난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전쟁이나 범죄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죽음의 방식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갑작스러운 사별은 삶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 놓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은 지상에서 바라본 죽음과 영계에서 경험하는 죽음이 반드시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사고의 순간이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영계에서는 그 한순간의 충격이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천사들을 보내시고, 마치 깊이 잠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옮기듯 그 영혼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사고의 충격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연속성 안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영계의 삶에 적응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AC.320은 ‘사람은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며,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죽음이 파괴적인 단절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나는 끝났다’는 의식보다 ‘나는 계속 살아 있다’는 의식을 먼저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연속된 삶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영계에 들어왔음을 하나씩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AC.320은 단순히 사후 세계의 한 현상을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가장 큰 변화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변화가 영혼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되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손 안에서 이 세상의 삶에서 저세상의 삶으로 조용히 옮겨지며, 그 연속성 속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AC.320에는 흥미롭게도 ‘soul’과 ‘spirit’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the life of souls’라고 말한 뒤, 곧바로 ‘that is,of novitiate spirits’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두 단어가 서로 전혀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 ‘soul’은 사람의 생명이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보다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의 히브리어 ‘네페쉬’와 헬라어 ‘프쉬케’에 가까운 용법으로, 살아 있는 인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 사람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AC.320의 ‘the life of souls’는 문자 그대로는 ‘영혼들의 삶’이지만, 실제 의미는 ‘사후 인간의 삶’ 또는 ‘죽은 사람들의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spirit’은 영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죽은 뒤의 사람을 매우 자주 ‘spirit’이라고 부르며, 특히 영계의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는 존재를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novitiate spirits’는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 곧 신참, 신생 영들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AC.320의 첫 문장은 먼저 가장 넓은 의미의 ‘사후 인간의 삶’을 제시한 뒤, 그것이 곧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어 설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soul’은 주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표현이고, ‘spirit’은 그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를 모두 ‘영혼’으로 번역하면 원문의 의도가 흐려지고, 모두 ‘영’으로 번역해도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표현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한편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실 ‘soul’이나 ‘spirit’보다 ‘man’이라는 표현입니다. 특히 ‘천국과 지옥’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추상적 의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영은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는 ‘영’이라는 말보다 ‘사람’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을 더 잘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AC번역에서는 ‘soul’은 기본적으로 ‘영혼’으로, ‘spirit’은 ‘영’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일관성이 있습니다. 다만 ‘the life of souls’처럼 ‘영혼’이라는 우리말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문맥에서는, 해설을 통해 이것이 곧 ‘사후 인간의 삶’을 뜻한다는 점을 함께 설명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AC.320의 첫 문장은 ‘영혼의 삶,곧 영계에 처음 들어온 새 영들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와 스베덴보리의 의도를 가장 잘 살리는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 삶, 곧 죽은 뒤 처음 영계에 들어가는 신참, 신생 영들(novitiate spirits)의 삶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들어가면 그는 자신이 저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실제적이어서, 누군가 그에게 자신이 영이라고 말해 주면 그는 크게 놀라고 경이로워합니다. 이는 자신이 감각과 욕구, 생각에 있어서 전과 똑같이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상에 살 때에는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이 글은 사람이 죽은 직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단순한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오랜 기간 영계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결과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이후 이어지는 사후 세계에 관한 모든 설명의 출발점이 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은 죽는 순간 자신의 존재가 끊어진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세상’(the other life)에 왔다는 사실조차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전히 이전과 같은 세상에 있으며,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영이 곧 사람 자신이며, 육체는 단지 세상에서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벗는다고 해서 의식 자체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그대로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사람이 ‘감각과 욕구,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영이 막연한 기운이나 그림자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homo)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며, 생각하고, 사랑합니다. 다만 이제는 물질적 몸을 통하여가 아니라 영적 몸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사람의 인격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면의 사람이 자신의 본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놀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영을 비물질적인 어떤 에너지나 희미한 의식 정도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실제 영계에 들어가면 자신이 여전히 완전한 사람이며, 이전과 거의 같은 의식과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믿기 어려워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죽는 순간 모든 환경이 갑자기 바뀌고, 자신의 존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그는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간 것처럼 점진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게 됩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영계에 있으며, 육체를 떠났음을 차츰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전이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영혼을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이 글은 사람의 사후 상태가 죽음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삶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도 암시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다른 존재로 바꾸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하던 것을 그대로 사랑하고, 생각하던 방식 그대로 생각하며, 살아온 삶의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영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참된 사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결국 AC.320은 ‘죽음은 삶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사후관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이 여전히 같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참된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한 첫걸음이며, 주님께서는 그 첫걸음을 혼란이 아니라 평안 가운데 내딛도록 섭리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