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0(D1)-주일예배(2503,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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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o9EVXAqlLQ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원본

2020-09-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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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주년 예배를 사모와 단둘이 드리는데도 평안하고 감사한 이유’ (2023/9/5)

 

지난 주일(9/3) 오후, 둘째와 저 아랫동네 어느 까페에서 대화하던 중 창립 10주년에 대한 둘째의 반응이 계속 마음에 남아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둘째는 자기는 결코 이런 모양의 창립 10주년을 원하지 않았다며, 몹시 실망한 듯 고개를 돌리더군요. 자기는 그래도 번듯한, 최소한 무슨 상가 건물에 사람들도 좀 북적이고, 화환이며, 무슨 그럴듯한 감사예배 식순도 있고... 하여튼 자기는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강하게 부정을 하더군요...

 

다음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면서, 즉 주님이 그를 통해 허락하신 글들 중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아래 내용들을 통해, ‘아, 그래서 이상하게 나는 이런 예배, 이런 교회가 더 좋았던 거구나...’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위 주석은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는데요, 그 중 414번 글의 3번, 4번 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창세기 4장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중 ‘장막에 거주하며’에 대한 주석입니다.

 

414. [3] 말씀(the Word)에서 이 ‘장막’(tent)이라는 용어를 채택, 사랑에 속한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儀式, rites)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신성모독스런 예배들을 통해 장막을 신성모독하기(to profane) 시작했을 때, 세워진 게 순서대로 성막(the tabernacle)이고, 나중에는 성전(the temple)입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막과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 같은 걸 상징한다는 것은, 시편을 보면 분명한데요,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과 관련하여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 천적 인간, 천적 천사, 삼층천 천사)을 그렇게 부르며,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그 뒤에 일어난 교회들(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혼자, 즉 자신들의 가정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장막에서 지극히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신성모독을 당한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고자 초막절(草幕, the feast of tabernacles)이 제정된 것이며, 이때 그들은 땅의 소산물을 거두고, 그 기간,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자기들도 장막에서 지낸 것입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AC.414:3, 4)

 

이상, 윗글을 통해 저는 왜 그동안 규모 큰 교회들과 그 예배들을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왜 집에서 하는 교회와 이런 가정 예배에 오히려 끌렸는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는 다음에 소개할 정말 놀라운 내용으로 이어지며,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1.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22.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23.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24.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말씀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에서 ‘예수’(Jesus)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Christ)라고 칭했다.

 

25.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Divine truths)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thought)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34)

 

이상, 저는 그 성향이 천적 나라, 천적 천사가 더 끌리고 좋습니다. 물론 제 착각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굳이 가슴 신앙, 머리 신앙으로 이해하자면, 저는 가슴 신앙에 더 기울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이유로, 저는 조용히 아내와 함께 집에서 주님을 거룩하게 예배하는 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천적 나라로, 어떤 사람은 영적 나라로 올라가듯, 그렇게 누구는 이렇게, 또 누구는 저렇게 타고나는 것이며,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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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03(D1)-주일예배(2502, 눅12,41-4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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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Lo_BzTYy-g

 

 

원년(2013년) 창립예배 때 특송 : https://youtu.be/pYYoLdKLOK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1-48)

 

 

사람이 복수와 증오, 간통, 간음, 사기, 속임수, 신성모독, 거짓말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한다면 그는 보다 중한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2장 47절에서 주님은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에 따라 행하지 않는 종은 많은 매를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Divine Providence 231:2) Thus if one acknowledges that revenge and hatred, adultery and fornication, fraud and deceit, blasphemy and lying are sins against God and yet commits them, he is therefore in the more grievous of this kind of profanation. For the Lord says: The servant who knows his lord’s will and does not do it, shall be beaten with many strokes (Luke 12:47).

 

 

※ 오늘은 우리 한결같은 교회가 지난 2013년 9월 1일 주일에 시작된 지 만 10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개인적으로는 지난 10년 치 일지를 대략 뒤적이며, 어떤 일이 있었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오셨는지를 살폈는데요,

 

아주 짧게 요약하면... 처음 얼마 동안은 좀 여러 다양한 세미나, 집회 및 프로그램들 같은 외적인 걸 기웃거리다가 서서히 내적인, 즉 영적인 것들, 곧 헤븐 교회 정원 목사를 비롯, 서사라 목사의 천국 체험 쪽으로 방향이 잡히더니 충주봉쇄수도원(강문호 원장) 수도학교를 통해 수도사와 수도원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수도사, 성인들을 접하면서, 동시에 시흥영성수련원(박희진 원장)의 핵심진리(공용복 선생) 및 책으로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 등을 통해 수도원 목회 쪽으로, 그리고 이윽고 지금의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일반목회를 내려놓고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여러 저작들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지난 십 년의 여정, 살짝 방황처럼 보이기도 했던 시간이 그러나 사실은 차근차근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구나 싶고, 한 마디로, 기존 개신교, 기독교에서 벗어나 주님의 새로운 교회로 저를 초대하시는 과정들, 마치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그 긴 유충과 번데기, 그리고 그 껍질을 찢고 나오는 몸부림의 과정들이 있었구나 싶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저런 순서로 흐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external) 신앙에서 속(internal) 신앙으로 들어간 것이죠.

 

제가 스베덴보리 쪽으로 방향을 확정한 때가 2018년 12월인데요, 그래서 저는 오늘은 명목상의 십 주년이고, 제대로 된 십 주년은 2028년 12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그러나 이 환골탈태의 과정, 곧 천국을 향한, 주님을 향한 내면의 창문이 열리기까지 저와 가족, 그리고 교회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거절과 세상 관계의 단절, 그리고 외면을 맛보았으며, 특히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교리적 혼란과 흩어짐 등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며, 그래서 더욱 주님이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저희 사모와 자녀들에게 하늘의 상인 내면을 확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그럼 이 정도로 나누고요, 오늘 말씀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주석인 ‘Arcana Coelestia’ 5846번 글에서 5866번 글까지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보통 두 명의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그와 함께 있는 천사나 영들이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불어넣는 생각과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천사와 영들의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사와 영들을 보내 인간을 이끄시는 것은 자유의지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를 지켜주시기 위한 것인데요,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의 힘이 인간에게 동등하게 미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으로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이 흘러들어오고, 지옥의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이 흘러들어와야 천국과 지옥이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때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고 자유롭게 천국 또는 지옥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멀리하고 자아의 욕구를 따르는 사람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그가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는 그러한 상태를 잠이 든 사이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도둑은 지옥의 영들을 뜻하고, 벽을 뚫는 것은 지옥의 영들이 진리의 울타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셨지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도둑이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하시자 본문 4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는 어쩌면 스스로, 즉 혼자서 주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항상 깨어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주님과 세상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할 때가 많았고, 아주 작은 일을 하고도 보상받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봤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설마 제게 하신 말씀은 아니시지요’라는 뜻으로 주님께 물었고,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베드로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주님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청지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잣집에 고용되어 주인 대신 재산이나 종들을 관리하고 또한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로 보면 주님의 나라 청지기는 바로 우리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재산인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들을 삶에 적용하여 자신이 거듭나는 것은 물론 이웃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될 수 있을까요? 42절부터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께서는 청지기의 가장 큰 일은 집안의 가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집안의 가족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다양한 진리들을 뜻하고, 양식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청지기의 책무는 선을 가지고 진리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선을 가지고 진리를 먹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말고 삶에 적용해 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와 선의 결합이 일어나고 그 진리는 살아있는 진리가 됩니다. 본문에는 또 양식을 나누어 주되 때를 따라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는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자선을 베풀면 안 됩니다. 때에 따라 우리가 베푸는 선이 상대에게 독이 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침묵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진리에 선을 먹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선을 먹일 때 주님께서는 복이 있다 하시고,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진리를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쁜 청지기도 있는데요, 그들의 운명에 대해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많은 신앙인이 자기가 오래도록 살 거라 생각하고 청지기의 책무를 소홀히 합니다. 내일 하면 되지 하며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남녀 종을 때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자 종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들을, 여자 종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자 하는 애정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를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생각에 맞으면 진리로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진리를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인체가 그렇듯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진리에 대한 이런 잘못된 행동들이 진리에 폭행을 가하는 것이며, 남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질,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한다 하면서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하는 것이고, 여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리와 선이 변질이 될 때, 신앙인들의 생명이 변합니다. 생명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의지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상태에서 악하고 거짓된 상태로 의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신앙인의 생명이 악하게 변하는 것을 청지기가 먹고 마시고 취하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주인이 들이닥쳐 그를 엄히 때리고 벌을 내린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후에 영계에서 받을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가 매를 맞는 것은 진리를 모독한 사람이 사후에 영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의 지식을 모두 빼앗기는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악과 거짓만 가지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크게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알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나중에 크게 벌을 받습니다. 진리를 아는 자의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나는 과연 어떤 청지기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됩니다. 게으른 청지기는 아닌지, 또는 악한 청지기는 아닌지 하는 두려움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주님께로 불려가는 날이 아직 한참 남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베드로처럼 주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자부심만 있을 뿐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외면한 적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새로운 교회에서는 청지기의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 진리를 알고도 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Divine Providence’ 231번 글은 신성모독의 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진리를 받아들이고도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한 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세상 유혹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세상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성모독은 진심으로 겸손하지 않은 자에게 해당되는 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정당화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말과 행동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하면서 내심으로는 전혀 진리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하시고 심판 날에 캄캄한 바깥에 쫓겨나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의 신성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고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도 그들은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주님의 인성에 해당된다면 문자적 의미 안의 영적 의미는 주님의 신성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처음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다가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가장 큰 모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부인하는 이유는 대개 주님보다는 세상의 영화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 15절 이하에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미지근한 신앙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평생을 병과 싸웠던 병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병자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직접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병을 고친 다음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앞에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평생을 짊어지고 온 각자의 고질병을 고쳐주시며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원본

2020-08-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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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7(D1)-주일예배(2501, 눅12,35-40),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pdf
0.33MB

https://youtu.be/b6qJdAJUEes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영적 생명이 없는 자연적 생명은 자체로 잠든 것이지만,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깨어있는 것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사람이 각자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따른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 Natural life, considered in itself, or without spiritual life, is nothing else but sleep; but natural life, in which there is spiritual life, is watchfulness; and this cannot be acquired otherwise than by truths, which are in their own light and in their own day, when man is in the life according to them. (AR.158)

 

 

마태복음 26장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앞두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결국 완벽하게 이기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있자 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폭행과 모욕이 두려워서였을까요? 물론 그러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육신을 입으신 인간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고민이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시험은 주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시험에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시험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이 올 때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수단으로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워보려고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시험이 오더라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때 주님이 그 싸움에 관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시험 가운데서 넘어질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당부하신 주님께서 본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는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사람들은 부부의 사랑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의 영적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또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악을 밀어내고 선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집은 세상 혼인집이 아니라 영적인 혼인집인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님이 천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선의 유입(influx)을 뜻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정작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흘러들어오고 지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3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187:3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지혜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에 관한 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깨어있는 것이고 후자는 잠자는 것이다.

 

주님은 깨어있는 사람에게 오시며, 그때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여주십니다. 말씀에서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말씀에서 숫자 3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경에나 삼경에 오시는 것은, 주님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시면서 깨어있을 때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 이경, 삼경하는 ‘경’(更)은 일몰부터 일출을 저녁 7시부터 두 시간씩 다섯으로 나눠 부르는 것으로, 각각 초경, 이경, 삼경...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경은 저녁 7시부터 밤 9시, 이경은 밤 9시부터 밤 11시, 삼경은 밤 11부터 새벽 1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졸기도 하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지요. 신앙인들이 잠잘 때 주님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세 번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깨어있는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한 것, 진실한 것들이 파괴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도둑이 들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우리는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본문 39절과 4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옥의 도둑들이 언제 닥칠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말씀에는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진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문을 열어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순진과 겸손의 정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 접점이 생기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렇고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한 편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기보다 세상 소식과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순진과 겸손을 비롯, 모든 종류의 선의와 근면, 순결한 부부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미움과 나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이 지옥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반성을 하는데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상사에만 관심을 두고 자아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처음 사랑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정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도둑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의 그런 문제들에 대해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 겉 사람이 이런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 하셨습니다. 눈은 영적인 지성, 또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는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깨어있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는 만큼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적 지성이 밝아지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아멘

 

 

 

원본

2020-07-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13(D1)-주일예배(2499, 눅12,13-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pdf
0.40MB

https://youtu.be/E02g6WgaH1k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3-21)

 

 

쓰임(uses)이란 자신과 자신의 소유(one’s own)를 위한 음식과 의복, 주거 같은 생활의 필요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나라, 공동체, 동료 시민들의 선 또한 뜻합니다. 사업도 사업 자체가 궁극적 목적일 뿐, 돈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 그리고 사기(fraud)와 악행(bad practices)을 죄로 알고 피하며 싫어할 때는 선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이 궁극의 목적이요, 사업은 그저 중간, 부차적일 때는 다릅니다. 이럴 경우, 그런 사업은 탐욕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DP.220:11) By uses not only the necessities of life are meant, such as food, raiment, and habitation for oneself and one’s own, but also the good of one’s country, community, and fellow citizens. Business is such a good when it is the end-love and money is a mediate, subservient love, as it is only when the businessman shuns and is averse to fraud and bad practices as sin. It is otherwise when money is the end-love and business the mediate, subservient love. For this is avarice, which is a root of evils (on this see Luke 12:15 and the parable on it, verses 16–21). (DP.220:11)

 

 

다음은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0-28)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어렵고도 험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요한 형제는 ‘할 수 있나이다’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은 왕이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주님에게 부탁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분하게 여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들이 천국의 영화를 모두 독점하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께 아들들을 부탁한 것이나, 다른 제자들이 그것을 분하게 여긴 것이나 모두 그들 마음속에 탐심(貪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탐심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려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난 제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 가운데 불기 시작한 이 탐심을 잠재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탐심 또는 탐욕과 관련된 말씀인데요, 본문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말씀에서 형제는 이웃을 뜻합니다. 그리고 유산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인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 하나가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믿음을 시샘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깊다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자기도 모르게 시샘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앞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형제를 시샘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는 것은, ‘주님, 저 사람에게는 사랑도 주시고, 진리도 많이 주시면서 왜 저에게는 주시지 않습니까?’ 하는 일종의 시샘이며 불평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4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영적 의미로 재판장은 저주하거나, 또는 구원하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보내거나 천국에 보내는 자’가 재판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누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자가 나누는 자입니다. 사람을 편애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주님은 재판장도 아니시고, 나누는 자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어느 누구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되물으셨습니다. 누군가를 시샘하는 것은 결국 주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나 자연적인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의 능력이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분인 까닭은,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사후에 각자의 쓰임새에 따라 천국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역량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더 가까이, 더 많이 누리는 것이고, 주님을 덜 사랑한 사람은 그 역시 그가 주님을 사랑한 그만큼만 주님과의 거리며 누림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더 큰 일을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가진 잔의 크기 만큼만 허락하시되 넘치도록 허락하십니다. 누구나 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신 분입니다. 탐심은 내가 남보다 더 큰 일을 하고, 더 존경받아야만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거리의 청소부보다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단지 그들이 하는 역할만, 그리고 역량, 즉 주님을 사랑하는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 학력이나 배경, 지위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가 자기 역량 가지고 감당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각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최선의 것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형의 유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선하고 진실함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소유가 넉넉하다, 많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보통은 세상의 유한한 삶을 좀 더 편하게 사는 데나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이웃을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며, 많이 사랑할수록 그는 그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탐심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아니고 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을 향해서는 장님이 되게 하고, 대신 이 세상에만 집중, 집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16절로 19절입니다.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말씀에서 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겉으로만 부자이지 속으로는, 내적으로는 부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말씀에 관한 지식일 뿐 진정한 진리, 즉 말씀을 실천할 때 만나게 되는, 그 안에 선이신 주님이 계시는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진리가 없는 이유는 속 사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빛이 흘러 들어와 말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진리를 볼 수가 있는데, 속사람이 닫혀 있으니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자는 말씀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원히 먹고 마시며 살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인간한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는 천국에서 영원히는 고사, 살 수조차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 하시고,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의 욕심으로 이룬 것은 그것이 지식이든, 물질이든, 명예든, 사람을 영원히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마다 삶의 목표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이고,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사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복되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포기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나 나중에 천국에 가서나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 하고, 큰일 하기를 원합니다. 오죽하면 주님의 제자들도 서로를 비교하며 시샘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인척 가운데 한 분은 어릴 적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 큰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한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곳에서도 성공, 큰 부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바에는 제일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1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주님의 나라에도 1등이 있고 2등이 있을까요? 영적인 일이든 세상 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슨 일에나 최고가 되려고 하는 것은 자칫 탐심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일 자체를 위해 해야지 최고가 되려는 마음, 일을 이용해 마음속 숨은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 정치인이 되려고 해야지, 자신의 부와 명예 따위를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면 안 되듯 말이지요. 탐심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탐심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말처럼 탐심을 그대로 두면 거듭남을 방해하는 거대한 악이 됩니다.

 

성(聖) 문서에 보면, 탐심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재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도 않으며 교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나 의복, 음식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돈을 소유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합니다. 탐심 안에는 그렇게 교활함과 천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탐심을 그대로 두면 속 사람이 닫히고 나중에는 선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 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탐심을 그대로 두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끝절입니다.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것입니다.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정성껏 하고 그 일로 인해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큰일로 여기십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섬기는 자의 본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7-28)

 

아멘

 

원본

2020-06-28(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1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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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06(D1)-주일예배(2498,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pdf
0.37MB

https://youtu.be/s-FaLBfUOmw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8-12)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은 대략 1980년대에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당시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시민단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적인 시민운동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민운동과 생계 활동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결국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는 우리나라 시민운동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다 돈과 관련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운동의 태생적 역할은 정부나 지자체에 대한 비판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을 겨누는 진리 안에 반드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무자비한 칼과 같아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영적 시민운동가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요, 오늘날에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 하셨는데, 여기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만 가지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요, 그것이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94번 글 3번 항은,

 

사람은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 마음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은 속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고,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다. 속 사람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이고, 속 사람과 무관하게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AE.794:3)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지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진실하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아닌, 겉 사람으로부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대한 시인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시인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실합니다. 그러나 부인하신다면 그 일은 언제나 거짓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을 ‘인자’(人子, Son of Man, 사람의 아들)라고 부를 때, 인자는 주님의 본질인 선과 진리 중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은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천국의 천사들이나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의미를 얼마든지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성령’은 천국 천사들의 진리인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inner meaning)를 뜻합니다. 성령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 또는 받으라 하신 것은 ‘감추어졌던 내적 진리를 이제 드러내 보여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임의로 왜곡함으로써 내적 진리까지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모든 구절 안에는 선과 진리 간 결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 또는 진리를 임의로 없애거나 분리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이라는 말씀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778번 글 4번 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선과 진정한 진리는 말씀의 영적 의미 안에 들어있다. 그것들이 말씀의 자연적 의미 안에 있을 때는 모두 옷을 입고 있고, 몇 군데만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우리는 외견상의 선이요 진리라고 부른다. (AE.778.4)

 

이 말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의 일부만 볼 수 있고, 전체는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가 대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속에 진정한 선과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어느 곳일까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라든가,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것이 믿음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서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할 때,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잘못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문자적인 진리와 내적 진리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문자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적 진리 또는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내적 진리를 이단의 진리라고 비난합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로 굳게 믿는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정을 아시고,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회당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 당시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이나 권세 있는 자에게 끌려가는 것은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으로 무장한 거짓 교리의 신봉자들과 교리적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때 그 순간 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끔 내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자적인 진리를 앞세워 공격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의 현란한 지식과 화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현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만족한다. 부를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다른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으며, 비천한 상황이 와도 낙담하거나 기죽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다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땅한 말이 떠오르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면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주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날 먹을 것만, 즉 일용할 양식만 거두고, 내일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속뜻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입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속 사람의 소리,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겨누는 진리의 칼로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합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말씀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그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넘어서 내적 진리까지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진리를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 2706번 글을 보면, ‘천사들은 내적 진리에 반하는 욕망의 습관을 끊지 못하는 것도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적 진리에 대해 비교적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깊이, 그리고 많이 아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고, 모든 일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주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우쭐대거나 나쁜 일이 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담담하게 견딘다면 결국 평화와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주님을 시인하고 성령을 거역하지 않으며,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20-05-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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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前生), 환생(幻生) 및 윤회(輪廻)에 관하여’(2023/8/5)

 

지난날 이 주제, 이슈에 관하여 관심(?)을 갖던 중, 스베덴보리를 접하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듯하여 있던 차, 마침 새 교회 홈페이지 게시판(http://www.newchurch.or.kr/board_vOYt45)에 과거 누가 이런 질문을 올린 게 보여 어제오늘 생각을 좀 정리해봤습니다.

 

자유 게시판 - 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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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ewchurch.or.kr

 

제가 이 이슈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관점과 정면 대치함에도 불구, 최면에 빠진 내담자가 실제로 이런 말들을 자기 입으로 술술 말하기 때문이지요.

 

다음은 그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이며,

 

 

부산에 사는 이**이라합니다.

요즘 힘든 일도 많고 마음도 심란하고 부산에 새 교회도 없고 ^^

 

제가 스베덴보리 신학자님 책을 몇 권 읽고 e-Library에 매일 성문서 읽기도 다 읽어가는데...

천국, 지옥은 나오는데 환생, 전생은 언급이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의 믿음이 약해서인지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근데 전생, 환생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다음은 여기 달린 답변입니다.

 

 

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은 전생과 환생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꿈, 데자뷰, 과거에 대한 어떤 막연한 느낌 때문에 마치 전생 또는 환생이 있다고 종종 느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느낌은 우리가 중간영계의 영인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특성, 그리고 특히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어떤 특정한 영향에 따라서 예외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각자에게 한 번씩 주어지는 고유한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땅에서의 일생은 저세상을 위한 준비기간이자 시험대이며, 영적으로 봤을 때 나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해 나가는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매 순간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답변 중, ‘우리가 중간영계의 영인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특성, 그리고 특히 그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어떤 특정한 영향에 따라서 예외적으로 뚜렷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는, 바로 이 부분인데요, 앞서 제가 무슨 실마리를 찾은듯하다 한 게 바로 이 부분이어서 이걸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3장, ‘천국과 인류는 결합되어 있다(The Conjunction of Heaven with the Human Race)에 나오는 글들입니다.

 

292.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따로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럴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들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295.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그 애정, 즉 사랑에 있어서 그 사람과 동질인 영들이다. 선한 영들은 주께서 사람에게 보내시지만, 악한 영들은 그 사람 자신이 불러들인다. 그러나 사람의 애정이 변함에 따라 다른 영들이 함께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람의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각기 그 함께 있는 영들이 바뀐다. 유아기에는 순진성 안에 있는, 따라서 순진성의 천국인 가장 내적 천국, 즉 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소년기에는 알고 싶어 하는 애정 안에 있는, 따라서 가장 외적인 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청년기와 장년기에는 진리와 선에의 애정, 즉 지성 안에 있는 영들이 함께 한다. 이들은 중간 천국, 즉 이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다. 그러나 노년에는 지혜와 순진성 안에 있는 영들, 따라서 가장 내적 천국인 삼층천과 교통하는 영들이 함께 있다. 주께서는 고쳐지고 거듭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연합을 유지하신다. 고쳐지고 거듭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을 가능한 한 악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이들에게도 선한 영들이 함께 있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와 동질인, 지옥과 교통하는 악한 영들과 직접 결합한다. 만일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거나 물질, 복수, 간음 등이면, 각각 똑같은 것을 사랑하는 영들이 와서 그들의 악한 애정 속에 머문다. 그 사람들은 선한 영들에 의해 악으로부터 저지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한 영들의 선동을 받고, 악한 영들은 그 사람들에게 악한 애정이 우세한 한 그들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악한 사람은 지옥에, 선한 사람은 천국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298.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천국에 결합된 영들이나 지옥에 결합된 영들 모두 결코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사람에게 유입시키지 않는다. 만일 영들이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에게 유입해 오면 사람은 영들의 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을 통해 사람에게 흘러드는 것이 있는데, 천국으로부터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지옥으로부터는 악과 거짓을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유입된다...

 

그리고 28장, ‘천사와 사람과의 대화(The Speech of Angels with Man)에도 관련 글이 있어 인용합니다.

 

256. 천사나 영은 그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의 기억만을 사용해야 한다. 천사와 영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있다. 만일 어떤 영이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의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전에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어떤 것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허락하심에 따라 나는 이것을 경험해 보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고대인들 중에는 자기들은 수천 년을 지나 자기들의 전생과 전생에 행한 모든 것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돌아왔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때때로 전에 듣도 보도 않은 것이 기억처럼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영들이 영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소 내용이 좀 길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째, 각 사람에게는 중간영계에서 두 종류의 영들이 와 있다. 이는 스스로 떨어져나간 인류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계속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자비이다.

 

둘째, 이 영들은 선한 영들의 경우, 각 사람의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악한 영들은 그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 각각 그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사람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악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이 와 있지 않으면 그는 존재할 수 없다.

 

셋째,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 안에 와 있는 줄 모른다.

 

넷째, 이 영들은 에이전시(agency, 代行) 영들이다. 즉 선한 영들은 천국 어느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고, 악한 영들은 지옥 어는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렇게 해서 사람은 천국과, 그리고 지옥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의 애정 상태에 따라 와서 머무는 영들이 달라진다.

 

등...

 

 

이상을 종합했을 때, 저는 다음과 같이 나름의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최면에 빠진 상태에서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사실은 그에게 와있는 영들 자신의 기억과 생각이다. 이런 유입을 주님이 금하셨음에도 가끔 일어나는 것은 악한 영들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불법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다. 여러 겹의 전생, 환생 등은 이런 것이 복잡하게 전개되는 그런 어떤 것이다. 사람의 지상 생활은 ‘일생’(一生)이다. 윤회 같은 것은 없다.

 

둘째, 전생, 환생, 윤회 같은 것을 알아보려 하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것이다. 이는 주님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인데, 따라서 누구에게 최면을 걸거나 스스로 그런 데를 찾아가는 것은 절대 삼가야 한다.

 

셋째, 절대 영들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영들은 사람의 육안을 통해 자연계를 볼 수 있으므로 우리가 보는 모든 컨텐츠들에 조심, 유의해야 한다. 음란, 폭력, 잔인, 공포 등의 컨텐츠들을 접하면, 그로 인해 우리 안의 영들이 깨어나 우리를 망가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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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30(D1)-주일예배(2497, 눅12,1-7),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pdf
0.45MB

https://youtu.be/DFnU2GV7-DY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1-7)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떤 일에 대해 이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둘이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직 주님만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후에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일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AE.794:3) In this world no one can determine whether works are from the Lord or from man, since in external form the two kinds appear alike, bu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Lord alone, and after man’s life in the world their origin is disclosed (Matt. 10:26, 27; Mark 4:22; Luke 8:17; 12:2, 3, 8, 9). (AE.794:3)

 

우리 사회 전반에 종북(從北) 또는 종중(從中) 좌파의 사람들이 주도하는 거짓 선동의 거대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후쿠시마 오염수 선동, 양평 IC 선동이 있습니다. 이번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사례는 다행히 교사들 스스로 전교조의 개입을 원천 차단, 저들이 무슨 선동질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들의 모든 움직임을 선동 또는 괴담이라 하는 이유는 저들의 주장이 거의 다 사실과 진실이 심각하게 결여된, 거짓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4.15 부정선거로 다수당이 된 게 99% 분명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 문재인 전 정권 사람들, 그리고 민노총을 비롯, 방송, 언론 노조와 정부 각 부처 산하 곳곳에 심어놓은 저들 좌파의 사람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모두 다 거짓과 위선, 곧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른 모습들을 봅니다. 물론 우파 보수라 하여 이 거짓과 위선의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 3항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떤 일에 대해 이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둘이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직 주님만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후에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일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AE.794:3)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 있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 있는데, 겉으로 보면 비슷,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일을 함에 있어 선 또는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겉으로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의 일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속에 사사로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언제나 거짓된 위선의 일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은 건전한 사람들의 이성을 파괴하고 분별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미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위선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1절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무리 수만 명이 모였는데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무리가 모였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선은 없고 진리만 많이 있다는 뜻인데요, 교회 안에 선은 없고 진리만 있을 때는, 그런 교회에서는 교인들끼리 서로 다투고, 서로에 대한 중상과 비방으로 심하면 교회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예견,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사람들은 자칫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위선자들은 자신도 해치지만 주변 사람들까지 해치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특별히 경계하셨습니다. 2절, 3절입니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남을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놓고 비방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누가 들을까 아주 은밀하게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셨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 462번 글로, 여기에 바로 이 구절들에 대한 의미가 나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 전체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경우를 통해 보아왔다. 기록할 만한 많은 것 중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억에서 생의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모든 행위가 차례로 꺼내져 재현되었는데 주로 간음과 음탕한 행위들이었다.

 

악한 기술로 남을 속이고 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사기행각과 도둑질도 연달아 모두 드러났는데 그중 많은 것은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당시 그들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모든 생각, 의도, 즐거움과 두려움까지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판과 관련, 뇌물을 받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으로 조사받았고, 처음 직책을 맡은 때부터 그만둔 날까지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자세한 뇌물의 액수와 가치, 받은 일시, 당시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의도까지 수백 가지가 떠올라 눈앞에 상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그런 행위를 기록해 둔 수첩까지 한 장 한 장 펼쳐져 읽힌다.

 

처녀들을 유혹해 수치스럽게 했거나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범행이 자세하게 떠오르고 재현된다. 처녀들과 여자들의 얼굴, 장소, 그때 했던 말들과 의도가 실제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볼 때처럼 즉각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 상영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남을 중상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방과 중상이 그때 사용한 단어들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들었다. 세상에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어 왔음에도,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상영되었다.

 

사기로 친척의 유산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같은 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오간 서류와 편지가 읽혀지는 것이 내 귀에 들렸는데, 그것은 한 글자도 빠짐이 없다고 했다.

 

바로 그 사람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이웃을 몰래 독살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밝혀진 과정은 이렇다. 그가 발밑에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구덩이에서 한 사람이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이 나와서 그를 향해 외쳤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러자 그 살인자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 모습, 잔을 건네주는 모습, 게다가 그 행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생각과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자 그는 지옥을 판결받았다.

 

한마디로 모든 악한 영에게는 그의 모든 악과 범행과 약탈과 사기와 속임수가 밝히 드러나고, 그의 기억에서 떠올려져 죄과가 충분히 입증된다. 또 모든 상황이 전부 공개되므로 이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천사가 조사할 때, 그가 한 달 동안 생각한 것이 하루하루 일어난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되살려지는 것도 보았다.

 

이상의 사례들로, 사람은 자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과 사후에 만인 앞에 드러나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주님 말씀도 그것을 의미한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HH.462)

 

계속해서 4절, 5절입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말씀처럼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사람들, 즉 영적인(spiritual) 사람들이 주님의 친구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육신을 죽이는 재물이나 지위,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natural) 사람의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에 대해 계시록 해설 696번 글 23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은 악한 삶과 교리의 거짓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을까, 또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의 두려움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행여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6, 7절입니다.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말씀에서 ‘참새 다섯 마리’는 신앙인의 지혜를 형성하는 작은 진리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돈을 받고 참새를 파는 것은 눈앞의 이득을 위해 진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참새 하나도 잃어버리는바 되지 않게 하겠다고 하시고요,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머리털’은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계에서의 신앙인의 삶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여러 행동과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머리털입니다. 따라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뿐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의도까지 모두 아신다는 뜻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참 많지요. 그리고 바로 수치심과 후회와 같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의도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면 주님께서는 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조금 했더라도 진리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영적인 두려움뿐 아니라 세상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진통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와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 간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큰 싸움을 시험이라고 부르고요, 작은 싸움을 발효(醱酵)라고 부릅니다. 발효란 술이 익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 발효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발효 과정을 거쳐 술의 맑은 원액과 찌꺼기가 분리되는 것처럼 영적인 발효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이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뒤섞여 있는 한 사회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우리 사회가 거듭나려면 영적인 시험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선자와 진실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가려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생활로 인해 주님이 주신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3-14)

 

아멘

 

 

원본

2020-05-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5(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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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3(D1)-주일예배(2496, 눅11,43-54),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pdf
0.44MB

https://youtu.be/a1jkIAFXH7U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43-54)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속으로는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대해 속으로는 정신 나간 생각들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번듯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겉만 하얗고 속은 무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AE.659:10) Those who think evil about God and the neighbor but speak well, and those who think insanely about truths of faith and goods of love but speak sanely, such inwardly are sepulchers whited without, (AE.659:10)

 

※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1장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계11:9)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2020년 4월 19일 주일설교인 이 설교 원본에는 앞서 15일에 있었던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내용이 좀 길게 나와서 이를 생략, 본문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지금이야 이 선거가 99% 부정선거였음을 우파 보수 및 건전한 중도에서는 알게 되었고, 이걸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그 때를 기다리며,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때만 해도 저쪽 사람들이 설마 그런 엄청난 장난을 칠 줄은 일반 국민들은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정황이 느껴지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그때 그 결과가 너무나 이상했거든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두 얼굴 등 당시 분위기로 보아 총선 때 저들의 폭망이 너무나 예견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새인들을 매섭게 꾸짖으십니다.

 

※ 복음서에는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 등의 명칭들이 나오는데요, 이들은 모두 종교적으로는 다 바리새인이며, 다만 그 사회적 역할에서 좀 다를 뿐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던 사람들에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며 용서하셨던 주님, 그러나 그런 주님이 유독 이 바리새인들에게만은 매우 엄격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모두 위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위선을 미워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교활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데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오히려 이웃에게 경각심이라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독이 든 이빨을 감춘 독사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슬며시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의 분별력을 어지럽히고 때로는 양심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사들의 눈에는 이들 위선자들은 마치 독이 있는 뱀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이며, 주님의 빛 가운데 있어서 그 내면, 곧 그 속 정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영계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상에서 이런 위선자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내면에 영적인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빛과 육의 눈으로는 그들의 영적 정체를 볼 수 없으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많은 경우, 이들 위선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속임과 사기를 당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주님 눈에 비친 이런 위선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여기서 ‘회당’과 ‘시장’은 모두 교회를 뜻합니다. 특별히 시장도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시장에서 물품들이 유통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이 유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높은 자리’는 뭘까요? 높은 자리는 주님, 또는 주님이 계신 천국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위선자들은 교회의 직분을 이용해 스스로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이웃을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악하기만 한 자들은 보통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만 그러나 위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넘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결국 천국의 신성한 것에다 세상의 것을 섞어버리는데요, 그것은 주님 앞에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서로 섞는 것을 말씀에서는 영적 간음에 비유합니다.

 

※ 이런 ‘영적 섞음’이 특히 그 속 사람에게 아주 치명적인 이유는 다른 건 주님이 어떻게 해보실 수 있지만, 이 각 사람의 영의 변질은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마5:37)만 하는 삶을 살든지, 비록 좀 삐뚤어지고, 못되게 굴더라도 최소한 잔머리 굴려 겉 다르고 속 다른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平土葬)한 무덤은 봉분이 없이 평평하게 만든 무덤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무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월절 한 달 전인 아달월 15일부터 성전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준비에 들어간다. 성전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오는 모든 길들을 보수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도로 보수’와는 다른 개념이다. 성서 시대의 가난한 자들은 땅을 대충 파서 시체를 묻었는데,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는 흙을 조금만 파도 석회암 바위가 나오기 때문에 깊이 앞 수가 없었다. 이들의 무덤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 ‘평토장한 무덤’(unmarked grave)이었고, 깊이 파서 묻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뼈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몸이 무심코 무덤이나 시체에 닿았다가는 레위기적으로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그런 상태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 파견단은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에서 이러한 평토장한 무덤을 찾아 회칠로 표시하는 일을 했다. 순례자들은 이 표시를 보고, 길을 우회해서 갔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시체 접촉으로 인한 부정을 피할 수 있었다.

 

말씀에서 무덤은 본래 거듭남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 천사들은 사람이 지상에서 죽어 장사 되면 반드시 영계에서 깨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계속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에 나오는 ‘무덤’이나 ‘장사하다, 땅에 묻다’ 등의 표현들이 나오면 그걸 거듭남, 새롭게 일어남, 생명 등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것은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에는 지옥이 들어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마23:27)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불쾌함을 토로합니다.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것은 위선자가 진리의 소리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주님과 이웃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양심을 통해 그를 타이르십니다. 어떻게 타이르실까요? 교회의 직분은 이웃을 섬기는 자리이지 섬김받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때 위선자들은 그것이 진리의 소리인 줄 알면서도 몹시 불편해합니다. 이 율법교사가 지금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것은 그가 주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 수 있는데요, 영적 의미로 ‘선생’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위선자들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죽일 듯이 미워했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46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짐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짐입니다. 만약 교회의 성직자들이 교인들을 주님께로 온전히 이끈다면 성도들의 짐은 아주 가볍고 쉬운 짐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짐을 대신 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진리를 왜곡해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 함께 가 아니라 교인들 혼자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워놓고 정작 자신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 안주합니다. 그것이 지기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 성직자들의 모습입니다.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그것에 대해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창세 이후로’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최초로 교회를 세워주신 이후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서 비롯한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흘린 피’는 뭘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또 아벨(창4:10-11)과 사가랴(대하24:20-22)가 피 흘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랑, 또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체어리티, 또는 사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해진 이러한 폭력들은 유대교회에서는 모세의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믿음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더럽힌 죄를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이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지식의 열쇠는 말씀의 능력이며, 그러므로 천국을 여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는 위선자들이 말씀을 왜곡해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인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걱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특히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나무라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 하시고, 독사의 자식이라 비난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선지자를 죽인 자, 말씀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막는 자라 하십니다. 참으로 신랄하고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 안의 위선자들을 특히 꺼리신 이유는, 그들이 교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체어리티의 신앙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위선은 매우 무서운 죄입니다.

 

주님을 죽이고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봐도 위선자들이 얼마나 진리를 혐오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놓은 세상 것들, 이를테면 명성이나 평판과 재물 같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 하고, 때로는 주님을 책잡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책을 잡아 진리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진리를 향하는 길은 참으로 좁고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 안에서 자신의 위선과 악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매일같이 선의와 진실을 키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되기를 힘쓰기, 선과 진리 실천함에 있어 잔머리 굴리는 대신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그것이 곧 주님 말씀이니까 실천, 실행에 옮기기,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의 삶에 힘쓰기 등 솔직담백, 순진무구, 좀 부족하고 모자라서 실수는 하되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2:9)

 

아멘

 

원본

2020-04-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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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0(D5)-매일예배(2495, 눅11,37-42),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pdf
0.37MB

https://youtu.be/s95W5lrf6xM

 

 

잔과 대접의 겉’, ‘안에 있는 것’,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의 속뜻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11:37-42)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3) And as man has an internal spiritual and an external natural, and the internal is conjoined with heaven and the external with the world, it follows that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5)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의 겉보다는 속을 깨끗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분문 3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어느 바리새인이 주님께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자 주님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말씀에서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내적으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이나 규례들은 철저히 지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 곧 그 정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바리새인’ 하면 겉으로만 거룩해 보일 뿐 내적으로는 악하고,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중에는 주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말씀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마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걸 의미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바리새인이 주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는 것은 위선자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려고만 할 뿐 그대로 사는 데는 그다지 뜻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데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위선자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진리를 배우기 원하면 밀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바리새인이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유대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38절에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말합니다. 이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30:17-21)

 

주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에 수족을 씻도록 명령하신 까닭은, 손과 발을 씻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악을 씻어내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식전에 손 씻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어 마치 율법처럼 지켰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위생 때문에라도 손을 씻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손을 씻는 것은 주님에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때 먼저 자신의 악 씻어내기를, 즉 ‘아, 내 안에 악이 있으니 이대로는 주님을 뵈옵지 못하겠다...’ 하며, 먼저 회개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손 씻는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외관이나 세련된 예배 의식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항상 긍지로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주님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음식을 담는 잔과 대접에 비유하시면서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하십니다.

 

여기서 ‘’과 ‘대접’이 무엇일까요? 잔과 대접은 사람의 겉 사람을 뜻합니다. 겉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신 것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럴 경우, 겉으로는 선하고 진실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목적이나 의도는 항상 이기적이며 악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모두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어느 공직자의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언변 뒤에 숨겨진 불순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은 불결한 위선자들입니다.

 

※ 2019년, 20년 상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을 구제할 때 겉 사람으로만 하면 안 되고, 속 사람과 함께, 즉 속 사람으로부터 받은 걸 가지고 겉 사람을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라야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

 

여기서 내적,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속 사람을, 외적, 자연적이라는 것은 겉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매일같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정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 당시 유대의 성직자들은 박하와 운향과 같은 값비싼 향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십일조가 속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도 속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분들 중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여 간혹 외적인 걸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 각자의 능력에 맞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웃을 구제하는 것 등이 모두 외적인 예배입니다. 내적 예배는 외적인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진리와 선 그 자체를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예배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61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과 결합하고 상응을 통해 가장 마지막 최종적인 것과 결합합니다. 그때 첫 번째 진리는 마지막 진리 안에서 힘을 얻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진리가 마지막 진리 안에 있고, 마지막 진리를 통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AC.8610) For interior things are conjoined with exterior and finally with the last or ultimat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n the truth which is first has strength in that which is last, because it is in this and acts by means of it. (AC.8610)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12)

 

※ 여기서 ‘모세’는 주님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내적인 것, 곧 내적 진리 또는 첫 번째 진리는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진리(the truth Divine)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외적인 진리, 또는 마지막 진리는 글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진정한 진리이며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완전하고 힘이 있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말씀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곧 모든 재앙과 액화가 따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이기적 욕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옥을 향한 문, 곧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만 말하고 행동하는 위선자들은 환난 중에 화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마시고,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시험으로 고통받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5:16)

 

아멘

 

원본

2020-03-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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