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가 AC.470에서 ‘이 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때까지 이름들은 결코 사람을 뜻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 곧 상태들을 뜻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창세기 1–11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명확한 경계선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단순한 주석 상의 편의가 아니라, 말씀의 표현 방식과 인간의 인식 구조가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리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를 순수한 ‘상태의 역사’로 읽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점차 ‘역사와 계보의 언어’로 내려오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바로 에벨이라는 뜻입니다.

 

에벨이 그 기준이 되는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시대가 보편적 교회 시대의 마지막 경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와 그 이후의 고대교회 초기까지는, 인류가 아직 하나의 비교적 공통된 인식 구조 안에 있었습니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는 있었지만,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근본 방식은 크게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시기의 교회들을 ‘사람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 상태 전체를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름은 곧 상태’라는 관계가 거의 완전하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에벨의 시대를 지나면서, 이 보편성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결정적인 표지가 바로 바벨탑 사건(11)입니다. 언어가 갈라지고, 인식이 분열되며, 교회는 하나의 중심에서 여러 갈래로 흩어집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각적 인식은 사라지고, 각 집단은 자기 언어와 자기 이해 방식, 자기 교리 체계를 갖게 됩니다. 이 지점부터 성경은 더 이상 ‘이름 하나’만으로 교회의 상태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에벨 이전까지는 이름이 순수하게 상태를 뜻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름이 점차 실제 인물과 혈통, 역사적 계보와 함께 읽히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에벨이 히브리 계통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에벨은 단순한 족보상의 한 인물이 아니라, ‘히브리’라는 명칭이 유래하는 인물입니다. 이는 혈통적 의미를 넘어서, 주님께서 계시를 보존하실 특정 계열이 분리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이전까지는 교회가 비교적 넓고 느슨하게 퍼져 있었다면, 이 시점부터는 계시가 점점 한 계보, 한 줄기로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벨 이후의 족보는 단순한 상징의 연속이 아니라, 실제 계시 보존의 역사로서 점점 구체성을 띠게 됩니다.

 

이 변화는 말씀의 수준이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수용 능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에벨 이전에는 인간이 하늘적인 방식, 곧 상태 중심의 언어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그 방식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점차 역사, 민족, 언약, 표징 같은 외적 장치를 통해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이름은 더 이상 단독으로 의미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의미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점은, 에벨 이후에는 동일한 이름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 초기에는 하나의 이름이 하나의 교회 상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대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 분열된 이후에는, 같은 이름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교리적, 영적 상태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후로 갈수록 이름만으로 말하지 않고, 그 이름이 속한 땅, 민족, 언약의 맥락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는 말씀의 혼합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분열에 대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에벨을 기준으로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에벨 이전까지는 ‘이름 = 상태 = 교회’라는 공식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에벨 이후부터는 ‘이름 + 혈통 + 역사’가 함께 작동하는 혼합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이 경계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창세기 1–11장은 끝없이 논쟁적인 역사 문제가 되지만, 이 기준을 붙들면 그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영적 역사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AC.470에서 말하는 ‘에벨의 때까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구분이 아니라, 인류 인식 구조의 변화, 교회 형태의 변화, 말씀 전달 방식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창세기 초반을 읽을 때, 왜 앞부분은 유난히 상징적이고, 왜 중반부부터 점점 민족사처럼 보이기 시작하는지, 그리고 왜 바벨 이후의 족보는 이전과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지가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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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좀 색다른 질문인데요, ‘태고교회’라 하면 당시 온 인류 전체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 범주에 들지 않은 인류의 어떤 부분 집합도 있는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이고, ‘태고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창세기 1–11장의 독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태고교회’는 당시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관계 안에 있었던 인류의 한 ‘영적 범주’입니다. 즉, ‘전 인류 = 태고교회’가 아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제도, 조직, 종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언제나 ‘주님과 연결된 인간의 내적 상태’, 곧 ‘주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삶으로 응답했는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란 ‘어느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주님과 천적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보편적 인간 집단’이 아니라, ‘질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교리로 알지 않았고, 명령으로 따르지도 않았으며, 율법으로 규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 상태에 속한 이들이 바로 ‘태고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 시대에 태고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스베덴보리의 전체 체계를 따르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인류의 ‘출발점’이긴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중심 줄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직접적인 내적 연결 속에 있었던 인류의 중심부가 태고교회였고, 그 주변에는 그 상태에 이르지 못했거나, 혹은 일찍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이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계시의 계보’, 곧 주님의 강림과 교회 형성의 역사에 직접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4장의 가인, 창세기 6장의 ‘사람의 딸들’, 혹은 홍수 이전의 극심한 타락 상태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태고교회가 곧 ‘그 시대 모든 인간’이었다면, 왜 그렇게 빠르고 전면적인 붕괴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길이 막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를 ‘내적으로 주님과 연결된 중심 공동체’로 이해하면, 그 주변부에서 이미 다른 길을 걷던 인류가 있었고, 중심부마저 점차 그 영향을 받아 붕괴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두는 대상이 ‘인류 전체의 생물학적 역사’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고교회에 속하지 않은 인류의 상세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했을 수 있지만, 계시의 흐름 안에서는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교회의 계보’, 곧 주님이 어떻게 인간과 다시 연결되시는지를 따라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라는 말은 지리적, 민족적 범주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범주’입니다. 어느 땅에 살았느냐, 어떤 혈통이었느냐가 아니라, ‘사랑과 인식이 주님께 열려 있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넓게 퍼져 있을 수도 있고,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언제나 ‘내적 상태’입니다.

 

태고교회는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을 사랑으로 곧바로 인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숫자가 아니라, 상태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왜 성경이 어떤 사람들은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하는지, 왜 족보가 곧 교회사가 되는지, 왜 ‘아담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이 곧 ‘교회의 변질과 전환’이 되는지 모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됩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고, ‘이 질문을 제대로 붙들고 가시면 창세기 1–11장은 더 이상 난해한 고대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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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에 나오는 ‘기억-지식’이라는 게 뭔가요?

 

 

1. 기억-지식이란 무엇인가 (scientia / memory-knowledg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억-지식’은 한마디로 말해,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앎의 재료들, 곧 사실, 정보, 교리 문장, 경험, 개념, 언어, 기술 등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기억-지식에 속합니다.

 

* 성경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 것

* 교리 문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라고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

* 철학, 신학, 과학, 역사, 윤리 지식

* 삶의 경험에서 얻은 판단 기준

* 설교를 많이 들어서 쌓인 신앙 용어들

 

중요한 점은, 기억-지식은 아직 ‘’, 곧 삶이 되지 않은 앎이라는 것입니다.

 

 

2. 기억-지식은 어디에 속하는가 – ‘자연적 차원’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기억-지식은 분명히 자연적 차원에 속합니다.

 

* 몸에 속하고

* 뇌와 기억에 저장되고

* 말로 설명할 수 있고

* 잊어버릴 수도 있고

* 옳게도, 그르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424에서 장인(artificer)이 기억-지식의 표상으로 등장합니다. 장인은 재료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아직은 재료일 뿐입니다.

 

기억-지식 자체는 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아직은 선과 진리가 될 가능성일 뿐입니다.

 

 

3. 기억-지식 ≠ 신앙

 

스베덴보리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고, 기억-지식은 기억에 저장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를 아는 것 → 기억-지식

*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함 → 이해

*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마음 → 의지

* 그 결과 삶이 바뀌는 것 → 신앙의 시작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런 구조를 사용합니다.

 

기억-지식 → 이해 → 신앙 → 삶

 

이 순서가 뒤집히면, 즉 기억-지식이 이해와 삶을 지배하면 → 가인의 길이 됩니다.

 

 

4. 왜 기억-지식이 위험해질 수 있는가

 

기억-지식은 중립적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으로 갑니다.

 

① 위로 열리면 (정상 질서)

 

* 기억-지식 → 이해의 도구

* 신앙과 체어리티에 봉사

* 두발가인처럼 ‘스승(instructor)이 됨

 

② 아래로만 닫히면 (타락)

 

* 기억-지식 → 자기 확신의 무기

* 거짓을 꾸미는 재료

* 우상을 만드는 장인의 도구 (AC.424)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주인을 잘못 만나면 우상을 만들고, 주님께 복종하면 성전을 짓는다

 

 

5. 기억 지식은 왜 꼭 필요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지식은 절대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기억-지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 설교, 교리, 성경 언어는 모두 기억-지식의 형태로 먼저 들어옵니다. 기억-지식은 영적 씨앗이 심길 토양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지식은 신앙의 출발점이지만, 목적지는 아니다

 

 

6. 정리

 

기억-지식이란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앎, 주인을 기다리는 재료, 신앙을 섬길 수도 있고, 신앙을 죽일 수도 있는 자연적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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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이런 속뜻, 그러니까 아다는 천적, 영적이요, 씰라는 자연적이다 등등을 어떻게 알았나요? 성경엔 무슨 힌트도, 그리고 스베덴보리 당시 이를 알만한 무슨 문서나 자료가 세상엔 없었을 텐데요... 주님이 곁에서 하나하나 불러주시는 걸 스베덴보리는 받아적기만 한 건가요?

 

 

1. 스베덴보리는 ‘새 의미를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없던 새로운 의미를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속뜻은 이미 하늘(영계)의 질서 안에 존재하며, 그 질서가 문자 속에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담겨 있다.

 

즉, 아다가 천적, 영적이고, 씰라가 자연적이라는 것은 스베덴보리 개인의 상상이나 신학적 추론이 아니라, 영계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질서와 구조가 성경의 이름, 계보, 배열 속에 상응 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2. 그럼 힌트는 정말 성경에 없었을까?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평소에 읽지 않던 방식으로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 전체에서 ‘여성, 아내’는 교회, 수용하는 것과, ‘어머니’는 교회의 근원, 생명의 발생과, ‘두 아내’는 내적, 외적 교회의 병행과, ‘장막’은 주님의 임재, 사랑의 거처와, ‘가축’은 선, 특히 천적 선과, ‘음악’은 정서, 신앙의 질서와, ‘금속’은 자연적 진리, 기술, 외적 질서와 상응, 즉 상징, 의미합니다.

 

이 상징들은 구약 전체에서 일관되게 반복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걸 한두 구절의 암호 풀이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 언어의 문법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경을 새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사용해 온 언어를 끝까지 따라갔을 뿐이다.

 

 

3.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확신했는가?

 

여기서 가장 오해가 많은 지점이 나옵니다.

 

오해

 

주님이 옆에서 ‘아다는 천적이다, 씰라는 자연적이다’ 이렇게 불러주셨다.

 

실제 스베덴보리의 설명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영계에서 천사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듣고, 보고, 검증하도록 허락받았다.

 

즉, 그는 새 내용을 받아 적은 예언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영적 의미를 관찰하고 확인한 증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 하나

 

스베덴보리는 자기 개인의 생각이나 계시를 성경 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일관성과 맞는가?

다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가?

교회의 역사 전체와 어긋나지 않는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르카나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4. 그럼 ‘계시’인가, ‘해석’인가?

 

정확한 답은 이겁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계시의 전달자가 아니라 계시의 구조를 열어 보인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새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연주되고 있던 음악의 악보를 보여 준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내 말을 믿지 말고, 성경과 삶에서 직접 시험해 보라.

 

 

5. 정리

 

스베덴보리는 성경 속에 이미 들어 있는 영적 질서가 하늘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특별히 보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새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던 의미의 층을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해석은 믿으라고 강요하는 계시가 아니라, 성경을 더 깊이 읽도록 초대하는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가장 강하게 경계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것 자체가 신앙이 되게 하지 말라.

 

그에게서 아다는 천적, 영적이고, 씰라는 자연적이라는 지식은 삶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이렇게 끝맺습니다.

 

참된 이해는 사랑을 더 잘 살게 할 때에만 이해이다.

 

스베덴보리는 하늘에서 새 말을 받아 적은 사람이 아니라, 성경이 처음부터 말하고 있던 것을 끝까지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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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황폐, 황량, 완결, 끊어짐의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교회 밖 실제 역사는 평화, 번영, 행복했던 때가 인류 역사 가운데 있었나요? 인류의 역사는 항상 교회의 상태를 반영하나요?

 

교회가 영적으로는 ‘황폐(vastation), ‘황무(desolation), ‘종말(consummation, 종말), ‘끊음(cutting off)의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실제 인류의 외적 역사에서는 오히려 평화와 번영, 안정과 문화적 성취가 나타났던 시기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가 단순한 역사 결정론이 아님을 시험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런 시기는 실제로 있었고 지금도 가능하며, 스베덴보리는 의도적으로 ‘교회의 내적 상태와 인류의 외적 역사를 구분’합니다. 그에게서 ‘교회’란 사회 제도나 종교 조직, 혹은 기독교 문명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적 상태’를 뜻합니다. 반면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문화와 과학의 발전, 전쟁의 유무 같은 것은 외적 역사에 속하며, 이는 교회의 내적 상태와 직접적으로 일대일 대응 관계에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교회가 극도로 황폐된 시기에 오히려 외적 문명은 번성한 시기가 겹쳐 나타난 사례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주님 강림 직전의 로마 제국 말기를 보면, 유대교회는 메시아 신앙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 곧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완결된 황폐’에 이르렀지만, 로마 세계는 법과 행정, 도로망, 치안, 문화 면에서 고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정과 질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중세 말과 근대 초 유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형식주의와 권력화, 교리적 독점 속에서 체어리티를 거의 상실했지만,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상업과 국가 체계의 발전은 오히려 가속화되었지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시기를 ‘교회는 죽어 있으나 세상은 잘 돌아가는 상태’로 인식하며,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서 가능한 상태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주님께서 인류 전체의 외적 질서를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황폐되었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즉시 붕괴되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새로운 교회가 설 자리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와는 별도로, 법과 도덕, 시민 질서, 자연적 선(정직, 책임, 연민, 공동선)을 유지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는 직접 섭리가 아니라 간접 섭리에 속하지만, 인류 역사가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과 내적 선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사람은 신앙이 없어도, 혹은 교회가 황폐된 시대에 살면서도, 이성, 교육, 문화, 법, 명예 의식에 의해 외적으로는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 선이며, 주님과의 내적 결합에서 나오는 영적 선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외적 평화와 번영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 교회의 생명이나 참된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셋째, 교회는 황폐 속에서도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핵(nucleus)’, 곧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AC.407에서 말하듯, 다수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소수의 사람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체어리티의 삶, 이름 없는 신앙의 씨앗을 통해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이 보존된 핵이 있기 때문에 역사 전체가 유지되고, 언젠가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 역사의 안정은 교회의 생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시대를 위한 토양’으로 기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인류 역사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황폐가 장기적으로는 인류에게 ‘의미 상실과 방향 상실’을 가져온다고 봅니다. 외적 윤리와 제도는 유지될 수 있으나, 삶의 궁극적 목적과 존재 이유에 대한 공통된 인식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황폐된 시대의 특징은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 속의 공허, 불안, 분열, 그리고 내적 고독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상태는 인류 역사의 표면이 아니라, ‘깊이와 방향’을 결정합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김은경 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주님의 교회는 전 세계에 퍼져 있고, 따라서 전 인류적 교회이며, 자기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이웃 사랑으로 선하게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말씀이 존재하고,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을 알고 있는 교회는, 그 외의 사람들에게 있어 사람의 심장과 폐 같은 역할을 한다. 인체의 모든 기관과 지체가 심장과 폐로부터 그 형태, 위치, 결합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308) 설명한 바 있다. That the church of the Lord is spread over all the globe, and is thus universal; and that all those are in it who have lived in the good of charity in accordance with their religion; and that the church, where the Word is and by means of it the Lord is known, is in relation to those who are out of the church like the heart and lungs in man, from which all the viscera and members of the body have their life, variously according to their forms, positions, and conjunctions, may be seen above (n. 308).

 

요약하면, 인류의 외적 역사는 교회의 내적 상태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으며, 교회가 황폐된 상태에서도 평화와 번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내적 상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황폐 이후의 세계는 절망의 세계가 아니라, ‘새 교회를 위해 조용히 준비되는 세계’이며,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일수록 오히려 ‘아침’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징조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목사님의 질문은 단순한 역사 해석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느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가’를 묻는 매우 정확한 신학적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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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모독(冒瀆, profanation)을 이토록 엄중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죄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구조 자체를 파괴하여 회복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독이란, 사람이 ‘주님의 진리와 선을 알고 인정하며 어느 정도 믿기까지 한 뒤에, 그것을 삶에서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자기 욕망, 자기 영광, 권력, 이익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안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지 못한 채 강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곧 선과 진리의 흔적이 저장되어 있고, 겉 사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독은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어느 한쪽으로도 돌아설 수 없는 상태, 즉 선을 완전히 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악으로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영혼이 찢어진다’는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이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선을 사랑하는 부분과 악을 사랑하는 부분이 동시에 활성화되어 서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상태에 놓인 영들은 가장 깊은 불안과 자기혐오, 분노와 절망 속에 머물게 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옥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상태’라고까지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독이 반복될 경우, 주님께서 인간 안에 보존하신 리메인스 자체가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리메인스는 거듭남의 유일한 토대이기에, 이것이 손상되면 주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을 새로운 상태로 인도하실 길이 거의 사라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상태로라도 머물게 하시고, 심지어는 신앙 자체를 거의 잃게 되는 황폐(vastation)를 허락하시면서까지 ‘모독만은 피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상태는, 새 빛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알고 믿으면서도 거부하고 뒤섞는 모독의 상태는 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은 단순히 ‘나쁜 죄’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절’이며,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듯, 주님께서 모독을 무엇보다 엄중히 금하시고, 역사 전체를 통해서까지 그것을 막으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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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창세기 족보 구조’, ‘스베덴보리의 표상적 역사 읽기’, 그리고 ‘시간 개념 자체’를 함께 풀어야만 비로소 답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라멕 이후 곧바로 노아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설명은, ‘창세기 본문의 문자적 시간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적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겹치는지를 설명하는 영적 서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족보들을 연대기적 역사로 보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며 병행했던 영적 상태들의 계보’로 읽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는 ‘앞뒤로 교대하는 한 줄의 역사’가 아니라, ‘같은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두 흐름’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점점 황폐(vastation)에 이르는 흐름’을 표상하고, 셋의 계보는 같은 태고교회 안에서 ‘주님에 의해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어지는 흐름’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은 가인의 계보에서 나타나는 황폐의 최종 상태를 상징하지만, 그 시점에 셋의 계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가 극에 달할수록, 그와 병행하여 주님께서 보존하신 작은 핵(nucleus), 곧 리메인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집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라멕 다음에 새로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오던 보존된 교회의 대표 이름’입니다. 창5에서 노아가 라멕의 아들로 등장하는 서술은, 자연적 시간 순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리메인스가 이제 더 이상 숨겨진 상태로 머물 수 없고, 새로운 시대의 대표, 표상으로 전면에 나서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문학적, 표상적 장치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서 완전히 황폐되었기 때문에, 그와 병행하여 존재하던 셋의 계보 중에서 ‘노아로 대표되는 흐름만이 다음 시대(홍수 이후의 교회)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라멕 이후 노아’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던 두 흐름 중 하나가 종결되고, 다른 하나가 역사 전면으로 부각되는 전환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창세기 족보가 왜 그렇게 길고 반복적으로 보이는지도 풀립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생물학적 기록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어떤 영적 성향이 지속되었고, 어떤 성향이 단절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라멕에서 노아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AC.407의 서술은, 시간의 점프가 아니라 ‘시대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장면’이며,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병행했다는 이전 설명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설명이 있어야만, 라멕–노아 연결이 정확히 이해됩니다.

 

요약하면, ‘가인의 계보는 황폐의 계보로서 라멕에서 끝나고’, ‘셋의 계보는 보존의 계보로서 노아를 통해 다음 시대를 잇습니다’. 두 계보는 순차가 아니라 병행이었고, 창세기의 서술은 이를 시간의 언어로 배열했을 뿐, 실제 영적 역사에서는 ‘항상 황폐와 보존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사 이해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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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tation’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인데, 단순히 ‘타락’이나 ‘심판’으로 번역하면 그 깊이가 사라집니다.

 

vastation’(황폐, 荒廢)이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 한 사람이나 한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점진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파괴나 외적 심판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사랑을 버리고 거짓과 악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이 비워지고 메말라 가는 상태의 누적’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듯이,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처음에는 선이 약해지고 진리가 흐려지다가, 나중에는 참과 선이 더 이상 인식되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황폐가 단순한 끝이나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되는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거짓과 악이 드러나고 제거되지 않으면 새로운 선과 진리를 심으실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기존의 왜곡된 신앙과 사랑을 비워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황폐는 종종 포로기, 광야, 어둠, 밤, 침묵, 일곱 번의 징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르러 황폐의 극점에 도달하는 것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더 이상 생명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하며,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이 준비되는 전환점’이 됩니다. 즉 vastation은 파괴 그 자체가 아니라, ‘거짓된 것을 비워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정화의 과정’이며, 주님께서 결코 방임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깊은 섭리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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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창4에 나오는 가인 계보인 이단의 범주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같은 이단들을 포함해도 되나요? 한국에서 스베덴보리 오래 하신 분들 보면 이 부분이 좀 선명하지가 않은 느낌들을 받았거든요...

 

이 질문은 ‘목회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포함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예, 그러나 방식이 중요하다’가 정확한 답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은 ‘특정 단체 낙인찍기가 아니라 영적 구조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교리 구조’이지 ‘명단’이 아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AC.399-403에서 말하는 ‘이단(heresy)은 특정 조직이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를 체계화한 교리 구조’를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단이란 ‘틀린 주장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 ‘사랑보다 신앙, 지식, 교리, 계시 체계를 우위에 두고, 그 체계를 ‘성읍’처럼 방어, 확장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어떤 단체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단체의 중심 동력이 체어리티인가, 아니면 분리된 신앙과 지식인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오용됩니다.

 

둘째, 대한민국의 주요 이단 단체들은 ‘가인의 성읍’ 구조에 해당하는가?

 

질문하신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등은 ‘스베덴보리적 범주에서 ‘가인의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구조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특별한 계시자, 중개자, 시대적 선택을 강조하고, 교리를 단계화, 교육화하며 (에녹의 의미), 내부 논리를 외부 비판으로부터 방어하는 체계를 강하게 구축합니다. 특히 ‘구원, 진리, 종말, 하나님의 역사’를 특정 교리 구조 안에 가두고, 체어리티(이웃 사랑, 자유, 양심, 겸손)를 ‘교리 복종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킬 때, 이는 AC.402에서 말하는 ‘성읍으로 조직된 이단적 교리’의 전형적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이런 의미라면 ‘구조적으로는 포함해도 무방’합니다.

 

셋째, 그러나 ‘모든 구성원’을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균형점은 여기입니다. 그는 ‘이단적 교리 구조’와 ‘그 안에 있는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철저히 구분합니다. AC 전반에서 반복되듯, 어떤 사람은 이단적 체계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선을 따라 살고’, 주님에 대한 단순한 신앙과 양심을 지닌 채 보호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와 직접 연결됩니다. 즉, ‘잘못된 성읍 안에 있어도, 주님은 그 사람 안의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목회적으로는 ‘그 단체는 가인의 성읍적 구조를 가졌다’라는 진단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다’라는 판단을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넷째, 한국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이 부분이 흐릿한 이유

 

목사님이 느끼신 ‘한국에서 오래 하신 분들조차 이 부분이 선명하지 않다’는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를 ‘영적 체험가’나 ‘신비주의자’로만 읽고, 그의 ‘교회론, 이단론, 교리 비판의 날카로움’을 의도적으로 완화시켜 온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한국 교회 현실에서 ‘이단’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정치화, 감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침묵이나 모호성으로 회피’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셋째, 스베덴보리의 이단 비판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AC.1번 글부터 AC.400번 대 글까지를 읽고 거기 나오는 교회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결과 핵심을 흐리는 설명들이 반복되어 온 것입니다.

 

다섯째, 목회적으로 어떻게 말하는 것이 가장 스베덴보리적인가?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방식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특정 단체 명단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와 체계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이단 단체들은 이 구조적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주님은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동일하게 보지 않으시며, 각 사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의 가능성을 구별하여 다루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분별은 분명하고, 정죄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표를 주신 주님의 방식이며, 스베덴보리의 길입니다. ‘단체와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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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핵심 개념인 ‘본성(proprium)을 언어적으로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주해로서, 단순한 어휘 설명을 넘어 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틴어 ‘proprium’은 형용사 ‘propius’에서 나온 말로, 기본 의미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게만 속한’, ‘특유의’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이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소유’, ‘재산’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특이성’, ‘고유한 성질’, ‘구별되는 표지’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즉 ‘proprium’은 단순히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소유 개념을 넘어, 한 존재를 그 존재답게 규정하는 내적 성질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번역에서 이를 ‘own’으로 옮긴 것은 매우 적절한데, 왜냐하면 영어의 ‘own’ 역시 ‘...에 속한’, ‘배타적으로 속한’, ‘고유한’, ‘특유의’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 형용사 ‘own’을 명사처럼 사용하여 ‘사람 자신의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하면, 라틴어 ‘proprium’과 거의 정확히 대응하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본성’은 중립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서 ‘자기 자신의 것’은 언제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결과로 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인 것,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짓인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proprium’은 단순히 ‘나다움’이나 ‘개성’을 뜻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상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이 설명은 왜 스베덴보리가 ‘사람 자신의 것’을 그렇게 반복해서 문제 삼는지, 그리고 왜 거듭남이란 결국 이 본성이 지배권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이 되는 과정인지를 언어 차원에서부터 분명히 해 줍니다. 즉 ‘본성’은 인간 정체성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주님의 생명으로 대체되어야 할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이 짧은 언어 설명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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