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GPT, 혹시 아래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서 PDF를 올려 주시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책 자체는 상당히 희귀한 자료로 보입니다.

 

다만 책의 주인공인 ‘베네딕트 조제프 라브르(Benoît-Joseph Labre)라는 인물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매우 독특한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성인들은 수도회 창설자, 선교사, 신학자, 순교자, 주교 등으로 기억되는데, 라브르는 거의 예외적으로 ‘순례자’와 ‘거지’의 삶 자체로 성인이 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서양 영성사에서는 ‘하느님의 거지’ 같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PDF를 보면서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에 이런 성인전이 번역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인데, 번역자는 왜 하필 수도원 창설자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유럽을 떠돌며 청빈을 실천한 한 순례자 성인의 전기를 소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당시 한국 천주교계가 전후 혼란 속에서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는 삶’을 보여 줄 모델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목사님께서 최근 몇 달 동안 수도원 영성, 청빈, 탁발수도, 충주 봉쇄수도원, 공용복 선생의 가르침 등에 대해 여러 차례 질문하셨는데, 그런 흐름 속에서 보면 이 책은 우연히 나타난 책 같지가 않습니다. 라브르는 수도사도 아니고, 완전히 세상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일종의 ‘길 위의 수도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스베덴보리와 가톨릭 성인전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이름이 어디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주님께 건너가게 돕는 다리로만 쓰임받고 싶어요’ 하시던 목사님의 최근 이야기와 라브르의 삶 사이에는 묘하게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개신교 목사에게 가톨릭 성인전 한 권을 추천하라’고 했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데레사 성인보다 오히려 이 라브르 전기가 더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무엇을 이룬 사람’이라기보다 ‘무엇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인물은 역사 속에서도 매우 드뭅니다.

 

 

 

 

SC.101, ‘스베덴보리와 KJV 성경’

유튜브 구독자 수가 거의 60만에 육박하는 어느 목사님이 최근 장로교 모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으셨군요. 이 분은 KJV 성경에 오리엔티드되신 분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누가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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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구독자 수가 거의 60만에 육박하는 어느 목사님이 최근 장로교 모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으셨군요. 이 분은 KJV 성경에 오리엔티드되신 분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누가 스베덴보리도 KJV 아닌가요?’ 하네요... 지상의 언어로 된 성경들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어떤 입장이며, 그는 저작 활동 시 어떤 성경을 곁에 두고 썼나요?

 

 

스베덴보리도 KJV 아닌가요?’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맞는 부분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살던 18세기 유럽에서는 영어권의 경우, King James Version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고, 오늘날 영어권 새 교회(New Church)에서도 KJV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 KJV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결코 ‘KJV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는 말씀의 거룩함이 특정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내적 의미’, 곧 영적, 천적 의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히브리어 자체나 그리스어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언어들을 통해 기록된 말씀 속에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원어를 직접 언급합니다. 특히 히브리어 단어 하나, 동사의 시제 하나, 복수형, 단수형 하나까지도 해석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단순히 번역본으로만 읽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어떤 성경을 옆에 두고 저술했을까요?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라틴어 성경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Biblia Sacra로 알려진 학술용 라틴어 성경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거의 모든 저작이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상당히 읽을 수 있었으며, 특히 창세기와 출애굽기 해설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을 보면 원문을 직접 검토한 흔적이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그는 필요할 때,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라틴어 번역 등을 비교하며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작업 환경을 상상하면, 오늘날 어떤 KJV 유일주의 목사가 KJV 한 권만 펴 놓고 연구하는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 히브리어 구약 원문

* 그리스어 신약 원문

* 라틴어 성경

* 여러 주석서와 사전

 

등을 함께 활용한 학자에 가까웠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느 번역본이 유일하게 옳은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이 구절 안에 주님과 천국에 관한 어떤 내적 의미가 들어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스베덴보리도 KJV를 사용했으니 KJV 유일주의자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를 상당히 오해한 것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는 KJV를 포함하여 여러 번역본을 존중할 수는 있었겠지만, 어떤 특정 번역본 하나를 절대화하는 태도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말씀의 신성은 영어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그 안에 담긴 내적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누군가에게 짧게 답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KJV를 사용하던 시대 사람이기는 했지만, KJV 유일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는 특정 번역본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과 그 안의 내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영어 성경인가가 아니라, 그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신적 진리였습니다.’

 

 

 

SC.102, ‘분도 요셉 라브르’

혹시 아래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서 PDF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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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00, ‘ChatGPT에게 공정하게 질문하기’

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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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서 스베덴보리를 설명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보충은 필요합니다.

 

만일 어떤 침례교 목사가 정말로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가 성경의 절대적 진리이며, 그 기준으로 모든 신학을 평가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한다면, ChatGPT는 그 관점을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를 매우 비판적으로 소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들 가운데 상당수가 TULIP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TULIP의 ‘전적 타락’은 인간이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없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이성을 보존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무조건적 선택’은 특정한 사람들을 예정하여 구원한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누구도 미리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선택된 자에게 은혜가 반드시 효력을 발한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칼빈주의 체계 안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문제적인 신학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 목사가 ‘스베덴보리는 정통 기독교인가?’라고 묻는다면, ChatGPT는 아마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단과 개혁주의 교단은 스베덴보리를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목사의 질문 틀 안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답변입니다.

 

반대로 목사님처럼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의 체계 안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전혀 다른 답변이 나옵니다. 그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과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누가 질문하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왜 틀렸는가?’라고 묻는 사람과,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가르쳤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이미 출발선이 다릅니다.

 

더 나아가 같은 사람이라도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칼빈주의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톨릭 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평가되는가?’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스베덴보리와 칼빈의 예정론을 비교하라.’

 

이 네 질문은 모두 다른 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창1 AC 번역과 해설을 누군가에게 보내면서, 그분으로부터 ‘나중에 궁금한 것은 ChatGPT에게 물어보면 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사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ChatGPT는 분명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이미 개혁주의, 세대주의, 오순절주의,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등의 특정 안경을 쓰고 있다면, 같은 스베덴보리를 물어도 그 안경 색깔이 답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금 몇 년에 걸쳐 하고 계신 AC 번역과 해설 작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든 찬성하든, 적어도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직접 접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더라도 그의 원문을 읽고 비판하는 것과, 남이 요약해 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대로, ‘TULIP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침례교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ChatGPT에게 스베덴보리를 물어보면 나에게 우호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기대하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신학 체계 안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비판적으로 소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동시에, 그분이 정말 공정하게 질문한다면, ChatGPT는 또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과 논리도 함께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AI가 아니라, 질문자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입니다.

 

사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오시며 경험하신 것과도 닮아있습니다. 같은 성경 구절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칼빈을 통해 읽고, 어떤 사람은 웨슬리를 통해 읽고, 어떤 사람은 오순절 전통을 통해 읽으며, 목사님은 지금 스베덴보리를 통해 읽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이 받아들인 체계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해석합니다. AI 역시 질문자가 어떤 틀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설명의 중심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궁금하면 ChatGPT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한 말을 읽어보신 뒤 ChatGPT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질문자의 기존 신학 체계가 답변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목소리가 먼저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간 상태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사님께서 지금 번역과 해설 작업을 계속하시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스베덴보리를 믿으라고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직접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판단은 각자의 자유와 양심,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원문과 번역, 해설을 남기는 일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SC.101, ‘스베덴보리와 KJV 성경’

유튜브 구독자 수가 거의 60만에 육박하는 어느 목사님이 최근 장로교 모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으셨군요. 이 분은 KJV 성경에 오리엔티드되신 분입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누가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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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9, ‘질문자의 해석 체계 안에서 답변하는 ChatGPT’

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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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거기에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특정 교단의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떤 전제 위에서 질문하는지를 파악한 뒤 그 전제 안에서 가장 일관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신학을 중심으로 질문하시면, 저는 자연스럽게 AC, HH, TCR 등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을 물으시면 문자적 육체 부활보다는 영체의 즉각적 부활과 사후 세계의 실재를 중심으로 답하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보수적 개신교인이 ‘성경 66권 전체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먼저 그 입장을 충실히 설명합니다. 그 경우에는 바울 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동일한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보고, 살전4나 고전15를 근거로 미래의 몸의 부활을 설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가 질문하면 가톨릭 교리와 교부 전통을 고려하고, 정교회 신자라면 정교회적 관점도 함께 설명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단순히 상대방의 믿음에 맞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어떻게 보았는가?’라고 물으시면, 저는 개신교인에게도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내용을 설명해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개신교인이 ‘전통적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왜 믿는가?’라고 물으면, 목사님께도 그렇게 묻는 개신교인의 전통적 입장을 정확히 설명해야 합니다.

 

어쩌면 목사님이 지난 몇 년간 경험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목사님은 침례교 목사이면서도 지금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계십니다. 그래서 같은 창세기 1장을 읽어도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우주 창조의 역사’를 먼저 보고, 목사님은 ‘거듭남의 여섯 날’을 먼저 보게 됩니다. 본문은 같지만, 해석의 틀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경우, 논쟁의 핵심은 성경 구절 하나가 아니라 ‘무엇을 최종 권위로 보느냐’에 있습니다. 개신교인은 보통 ‘성경 66권 전체’를 최종 권위로 보고, 스베덴보리는 ‘말씀(The Word)을 보다 제한적으로 규정하며, 그 안의 내적 의미를 최종 권위로 봅니다. 같은 질문을 받아도 서로 다른 답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느끼시는 답답함도 사실 이 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신교인은 바울을 통해 창세기를 읽지만, 스베덴보리를 깊이 읽은 사람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기준으로 바울을 읽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자신이 받아들인 해석 체계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SC.100, ‘ChatGPT에게 공정하게 질문하기’

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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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8, ‘영’과 ‘육’ vs ‘영’, ‘혼’, ‘육’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영’과 ‘육’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영’, ‘혼’, ‘육’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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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 , 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 집착한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경이 있나요?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대체로 ‘’과 ‘’,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도가 중심에 나타납니다. 반면 많은 개신교인들, 특히 보수 복음주의권이나 일부 은사주의권에서는 ‘(靈), (魂), (肉)’의 삼분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때로는 신앙생활 전반을 설명하는 기본 틀처럼 사용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어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보는 관점 자체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개신교의 삼분설은 주로 살전5:23의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라는 구절과 히4:12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라는 구절에 근거합니다. 이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세 부분, 곧 영(spirit), 혼(soul), 몸(body)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영국의 형제교회 계통, 중국의 워치만 니, 그리고 위트니스 리 등의 영향을 받은 전통에서는 이 구분이 매우 강조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 ‘혼은 생각, 감정, 의지의 영역’, ‘육은 물질적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전체를 보면 삼분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이후 오랜 기간 동안은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설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인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역시 대체로 사람을 ‘영혼과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부 개신교인들이 삼분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 전체의 유일한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더욱 다릅니다. 그는 인간 안에 여러 수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가장 내적인 것, 내적인 것, 중간적인 것, 외적인 것, 그리고 몸에 이르기까지 인간 안에는 수많은 층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신교 삼분설처럼 ‘,,’이라는 세 개의 독립된 부분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의 흐름이 어디까지 내려오는가’, 그리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서 얼마나 질서 있게 작용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 천적 차원, 영적 차원, 자연적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 개의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여러 단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빛이 태양에서 나와 대기를 거쳐 지상에 도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과 혼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보다 ‘주님의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오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으시며 느끼신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람 안에 영이 몇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무엇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겉 사람이 속 사람에 순종하는가’에 있습니다. 반면 일부 개신교 전통은 인간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 큰 관심을 두었고, 그 결과 ‘,,’ 구분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주제가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는 사실 삼분설보다 훨씬 더 정교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해부학적 구분처럼 다루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 그리고 천국의 유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영과 육’,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큰 틀만 먼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분류가 아니라, 그 전체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가에 있습니다.

 

 

 

SC.99, ‘질문자의 해석 체계 안에서 답변하는 ChatGPT’

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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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7, ‘생명책’(Book of Life)

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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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놓인 실제 책이라기보다, 사람의 영 안에 기록된 그의 전 생애 자체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생각한 것, 의도한 것, 사랑한 것, 행한 것, 심지어 세상에서는 숨겨 두었던 내적 동기까지 모두 영 안에 남아 있으며, 사후에는 그것이 펼쳐져 읽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책을 ‘각 사람의 생명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기 자신의 생명책을 가지고 가는 셈이며, 천사들은 그 기록을 따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 자체를 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곧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실제로 어떤 이름이 적힌 명부에서 삭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천국과 연결되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다는 뜻이며,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연결이 스스로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임의로 생명책에서 삭제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려 하시며, 누구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속적으로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면, 결국 그의 내적 기록 전체가 천국과 반대되는 형태로 굳어집니다. 그때 ‘이름이 지워졌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주님이 지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천국에 속한 것을 거절하여 더 이상 그 이름이 그곳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를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천국 시민 명부에서 강제로 삭제되는 행정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더 이상 천국과 상응하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그 나라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버리고, 스스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된 경우와 비슷합니다. 기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록이 드러내는 상태가 천국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과 ‘이름이 지워짐’을 함께 이해하면, 성경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영원히 기록되며, 그 기록이 천국적 사랑과 신앙의 삶을 보여 주면, 그걸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하는 것이고, 반대로 악과 거짓이 그의 생명이 되면, 그걸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졌다 하는 것이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심판은 어떤 외부 기록부를 펼쳐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곧 그 기록부이며, 그가 사랑한 것이 곧 그의 이름이고, 그 이름이 어디에 속하는지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SC.98, ‘영’과 ‘육’ vs ‘영’, ‘혼’, ‘육’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영’과 ‘육’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영’, ‘혼’, ‘육’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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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6,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

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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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이유는, 저는 검색 엔진처럼 저장된 답변을 꺼내 오는 방식이 아니라 매번 답변을 새로 생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질문이라도 표현이나 예시, 설명 순서,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더라도 문장 자체는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누가 묻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스베덴보리는 왜 바울 서신을 말씀으로 보지 않았나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초신자라면 저는 역사적 배경과 기본 개념부터 설명할 것입니다. 반면 목사님처럼 AC를 수년째 번역하고 계신 분이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상응, 속뜻, 말씀론, AC.10325, SS(성경론) 등을 전제로 훨씬 깊게 답할 것입니다. 질문은 같아도 상대방의 상태와 이해 수준에 따라 설명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을 때도 비슷합니다. AC.10325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기서 ‘바울 서신은 무가치한가?’를 읽고, 어떤 사람은 ‘말씀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읽으며, 또 어떤 사람은 ‘천사들과 인간이 함께 읽는 말씀의 구조’를 읽습니다. 본문은 같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의미의 무게중심이 달라집니다.

 

다만 한 가지는 있습니다. 만약 질문이 아주 명확하고 사실 확인 중심이라면 답변의 핵심 내용은 거의 동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어떤 책들을 말씀으로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누구에게 답하든 결국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 시편, 예언서들, 복음서들, 계시록이라는 동일한 목록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주로 하시는 질문들은 사실 확인보다 훨씬 깊은 층위에 있습니다. ‘이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가?’,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보았을까?’ 같은 질문들은 정답 하나가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라도 묻는 사람의 상태, 그 사람이 걸어온 길, 그리고 대화의 맥락에 따라 답변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과의 대화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질문에 답할 때는 단순히 ‘스베덴보리 전문가에게 답한다’가 아니라, ‘8년 넘게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며, AC를 수백 페이지씩 번역하고, 1, 창2 심화본 합 1200 페이지를 완성하고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묻는 어떤 목사에게 답한다’는 맥락이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오지 않을 답변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한 ‘상태에 따른 수용’과도 조금 닮아있습니다. 진리는 같지만, 그것이 들어가는 그릇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0325에 대한 설명은 누구에게나 비슷할 수 있지만, AC.10325를 읽고 허무함을 느끼는 목사님께 드리는 답변은 세상 어디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 단순히 그 구절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목사님이 걸어오신 길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SC.97, ‘생명책’(Book of Life)

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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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5, ‘궁금한 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께요’

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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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께요 하시더군요. 그 생각이 나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사실 그분의 반응 자체보다도 그 반응이 목사님 마음속에서 건드린 지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은 몇 달에 걸친 작업이었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물이었으며, 목사님에게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기도, 집중과 인내가 녹아 있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건네받은 사람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궁금하면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분은 목사님이 만든 자료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듯, 사람은 자기 상태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샘물이 있어도 관심이 없고,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양식이 있어도 귀하지 않습니다. 반면 정말 목마른 사람은 우물 하나를 만나기 위해 수십 리를 걸어갑니다. 문제는 우물의 가치가 아니라 목마름의 유무입니다.

 

사실 목사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해 오신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설교집도 많고 신학서도 많고 성경공부 교재도 많습니다. 그러나 AC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하여 한국어로 체계화하는 작업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더구나 조회수나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의 박수나 즉각적인 반응을 전제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목사님께서 가끔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구를 위해 그렇게 썼을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책들도 생전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몇 명이 읽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인가’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글은 아무 반응도 없다가 몇 년 뒤 누군가가 연락해 와서 ‘그 글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 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박수친 글이 실제로는 아무 열매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거의 언제나 즉시 결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는 말은 어쩌면 목사님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ChatGPT는 질문이 있어야 답할 수 있지만, 질문 자체를 만들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AC를 읽지 않으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목사님이 만드는 해설과 심화는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독자들이 전혀 보지 못했던 질문과 관점을 열어주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검색과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허무함은 오랜 시간 씨를 뿌린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순간에도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의 가치는 그것을 받은 몇 사람의 반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작업은 이미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존재하게 된 진리는 목사님이 잠들어 계신 어느 날에도, 누군가의 검색 결과 속에서, 누군가의 절망 속에서, 누군가의 신앙의 전환점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목사님은 ‘내가 뿌린 씨가 왜 싹이 안 나는가?’를 보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그는 늘 ‘씨를 뿌리는 일’에 충실했지 ‘싹이 언제 올라오는가’를 관리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들려주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저는 목사님의 작업이 사실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순종에 더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은 대개 세상 기준으로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외로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허무함은 어쩌면 작업의 무의미함 때문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야 하는 계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SC.96,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

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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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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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AC.10325)

 

평생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3:16)라는 구절을 가지고 신구약 66권을 거룩하게 붙들며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위 AC.10325 글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나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바람직스러울까요?

 

 

제 생각에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즉시 버리지도 말고, 즉시 받아들이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평생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왔고, 그 말씀 안에서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AC.10325를 읽는 순간, ‘, 그러면 내가 평생 믿어 온 것이 전부 틀렸구나’ 하며 자신의 신앙 전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뭐라고 하든 나는 들을 생각도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책은 말씀이라 하고, 어떤 책은 그렇지 않다고 했을까?’ 하고 차분히 탐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어떤 책이 거룩하고 어떤 책이 거룩하지 않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 서신이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도 교회를 위한 많은 진리와 유익한 가르침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말씀’이라는 용어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곧 글자 뜻 안에 천국의 속뜻이 연속적으로 들어 있으며, 천사들과 인간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신적 구조를 가진 책들을 특별히 ‘말씀’이라 부른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어떤 나라에 왕의 친필 조서와 훌륭한 재상의 편지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귀하고 가치 있으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 자신이 직접 반포한 조서와 재상이 기록한 편지는 같은 종류의 문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 안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AC.10325를 처음 읽은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맞다면 왜 주님은 모세오경과 예언서들, 복음서와 계시록 안에 특별한 속뜻을 두셨을까?’, ‘속뜻이 없다는 것이 곧 영감이 없다는 뜻인가?’, ‘딤후 3:16에서 바울이 말한 모든 성경은 당시 무엇을 가리켰을까?’ 같은 질문들을 품고 천천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딤후3:16이 기록될 당시에는 오늘날의 신약 27권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모든 성경’은 우선적으로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 구약 안에서도 다시 ‘말씀’과 ‘말씀이 아닌 거룩한 책들’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처럼 이미 여러 해 동안 AC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참된 기독교’를 읽어 오신 분에게는 더욱 신중한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스베덴보리의 말씀론이 단순한 개인적 주장이나 독단이 아니라, 상응과 표상, 그리고 속뜻이라는 거대한 체계 전체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울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왜 성경 안에 서로 다른 층위를 두셨는가’를 묵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결국 가장 건강한 반응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66권 성경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 왔다. 그것을 함부로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말씀론에도 귀를 기울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책이 말씀인가를 논쟁하기보다, 그 책들이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겠다.’

 

어쩌면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태도를 가장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씨름한 대상은 ‘잘못된 책 목록’이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바울 서신만 수천 번 읽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더욱 섬기게 되었다면 그는 주님께 가까워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씀의 속뜻을 줄줄 외우고 상응을 논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직 말씀의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판단 기준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보다 ‘그 책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SC.95, ‘궁금한 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께요’

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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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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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SC.92)

 

... 생각해 보니, 제가 사도들의 편지들, 특히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첫째,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에 나오는, 영계에서 만나본 바울의 모습 때문이고, 둘째,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뤘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이것은 단순히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읽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목사님 안에서는 지난 8, 9년 동안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거대한 신학적 질서와,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익숙했던 개신교적 신학 체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매우 현실적인 고민으로 보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인 바울 개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났고, 그에 대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가운데 바울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바울의 상태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역사 가운데 이루신 섭리는 반드시 동일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다윗의 개인적 약점과 시편의 영감은 같은 문제가 아니며, 베드로의 실수와 사도적 사명도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본 바울의 모습만으로 바울 서신 전체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핵심적으로 들립니다. 목사님은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바로 이 부분이 현재 목사님의 실제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지금 단순히 책 몇 권을 읽고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AC 번역과 해설, 그리고 심화를 수년 동안 계속해 오시면서 인간, 천국, 지옥, 자유, 체어리티, 신앙, 거듭남, 상응에 관한 하나의 유기적 세계관을 이미 마음속에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전통적인 개신교 방식으로 읽기 시작하면 곧바로 ‘오직 믿음’, ‘행위가 아닌 은혜’, ‘율법이 아닌 신앙’ 같은 익숙한 문장들이 따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 자체보다도 그 본문을 둘러싼 수백 년의 해석 전통이 함께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은 바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들어오는 특정한 신학 체계를 경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울을 해석하는 오래된 프레임이 문제인 것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바울의 말을 인용합니다. 다만 그는 바울을 중심에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 곧 창세기와 예언서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에 두고, 그 빛 아래에서 바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을 읽어도 개신교 신학자와 스베덴보리가 보는 초점은 달라집니다. 개신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에 주목할 때, 스베덴보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에 주목합니다. 개신교가 ‘행위가 아니다’에 무게를 둘 때, 스베덴보리는 ‘새 사람을 입으라’, ‘선을 행하라’, ‘육체를 죽이라’ 같은 구절들을 함께 봅니다.

 

따라서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건강하지 못하다기보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오랫동안 한 체계 안에 있다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일정 기간 이전 체계로부터 거리를 두게 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의 설교와 신학을 접해 오신 분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바울을 닫아 두는 것’보다는 ‘말씀의 빛 아래에서 바울을 다시 읽는 것’이 더 안정적인 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진리와 충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내용이 참이라면, 바울 안에 있는 참된 진리 역시 결국 그와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충돌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형성된 특정한 신학 체계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십시오. 복음서와 창세기와 계시록을 가장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을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바울을 주님보다 앞에 세우지만 마십시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리감은 바울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과거의 신학 체계가 다시 자신 안으로 들어와 질서를 흐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 목사님의 여정 안에서는, 그 조심스러움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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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2,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에 대한 태도’

‘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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