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천상의 결혼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daughter)처녀(virgin),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 제도로 읽지 않고, ‘인간의 내적 구조의 언어’로 읽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외적 성별로 보기 이전에,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의 관계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상실되면서, 이 깊은 인식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고교회에서 결혼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결혼을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천국 결혼은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이 결합을 직접 체험했고, 그래서 결혼은 그 자체로 기쁨이자 영적 인식의 창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사물을 보되,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표지와 통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곧 겉의 것들은 생각을 내적인 것들, 곧 속에 속한 것들로, 그다음에는 천적인 것들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로 이끄는 계단이었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결혼 역시 외적 관계를 넘어, 천상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명확히 정의합니다. 이해력은 남자이고, 의지는 여자입니다. 이는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상응’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며 비추는 역할을 하고, 의지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 생명으로 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둘이 따로 움직일 때는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를 비로소 ‘결혼’이라 합니다.

 

이 결혼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해력에서 본 진리가 의지에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 안에 내적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이며, 앞선 단락들에서 말해 온 형상과 모양의 완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인류 번성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또한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중요한 언어 습관의 뿌리를 설명합니다. 교회를 ‘’, ‘처녀’, ‘아내’로 부르는 표현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니라, 교회를 ‘선에 대한 애정의 주체’로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집단이기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내’이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혼의 언어로 묘사됩니다.

 

 

 

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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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이 구절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학에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가장 정밀하게 압축해 놓은 핵심 문장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형상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두 개의 형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이해 중심의 상태에서 의지 중심의 상태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문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이라 하며’입니다. 여기서 ‘자기 형상’이라는 표현은, 아직 형상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더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상태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단계입니다. 분명 주님을 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은 ‘내가 이해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따라가는’ 구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영적 인간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진리를 통해 주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삶을 조정해 갑니다. 이때 사랑은 아직 앞서지 않고, 신앙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점점 형성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른다’고 말합니다. 즉, ‘신앙 사랑’의 순서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면,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형상의 중심이 더 이상 ‘사람 쪽’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옮겨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히 배워서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직접 작용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그 사랑이 사람 안에서 중심이 될 때, 그 사람은 단순히 주님을 닮아 가는 수준을 넘어,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흐르는 형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것이 옳은가’를 먼저 따지지 않습니다. 이미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본문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말합니다. 즉, ‘사랑 신앙’의 순서입니다. 이해는 더 이상 주도권을 쥐고 판단하는 역할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을 밝히고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시면, 이 구절의 구조가 분명해집니다. ‘형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다만 그 하나의 형상이 처음에는 ‘이해 중심(신앙 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형상’이라 불리고, 점차 ‘의지 중심(사랑 중심)’으로 완성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두 번의 언급은 두 개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중심이 이동하며 완성되는 두 단계’를 보여 줍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배우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노력하며 따라갑니다. 이때는 여전히 ‘내가 이해해서 따라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이 좋아서’, ‘이것이 참으로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이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 되어 삶이 흘러갑니다. 바로 그 전환이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용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깊은 흐름을 한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이 앞서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형상이 완성되는 길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53형상의 두 번 언급은 두 개의 형상이 아니라,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며, 하나의 형상이 완성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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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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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은 낯설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무엇을 중심으로 사는가’의 차이이며, ‘천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늘에 속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지)이 직접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매우 깊은 개념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진리(이해)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선(사랑, 의지) 자체로 주님과 직접 결합된 사람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부터 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해가 먼저 열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이게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를 먼저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은 진리를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의무처럼, 혹은 옳기 때문에 따르다가, 점점 그것이 삶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은 ‘진리    ’의 흐름을 갖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여전히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게 맞나?’, ‘이렇게 해야 하나?’를 끊임없이 따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갈등도 많고, 선택의 싸움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점점 질서가 세워지고, 결국 선한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을 보겠습니다. 천적 인간은 이와 정반대의 구조를 가집니다. 이 사람은 ‘사랑이 먼저’입니다. 즉,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게 맞나?’ 고민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옳은 것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    진리’의 흐름입니다.

 

여기서 ‘천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천적’은 단순히 ‘하늘 같은’이 아니라, ‘천국의 가장 깊은 층위에 속한 상태’,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직접적으로 의지에 심겨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선을 ‘배워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합니다. 진리는 그 사랑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해야 한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고, 갈등도 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이게 좋다, 이것이 사랑스럽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같은 행동을 해도, 그 안에는 억지가 아니라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퍼셉션(perception)이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무엇이 선한지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느끼고 아는 상태’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양심(conscience)을 통해 살아갑니다. 즉, 배운 진리와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왜 ‘천적’이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지는지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영적 인간’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합니다. 그러나 ‘천적’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 곧 ‘이미 사랑이 중심이 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AC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가 바로 이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로 배우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간은 이 상태를 잃고, ‘영적 인간’의 길, 곧 진리를 통해 다시 올라가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선 자체로 주님과 직접 연결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표현은 천국의 가장 깊은 차원에 속한 사랑의 상태’,  의지 자체가 주님과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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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시8:6-8’

AC.52.심화 1. ‘시8:6-8’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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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심화

 

1. 8:6-8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이 구절은 AC.52의 문맥에서 ‘주님의 형상(image)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가’, 곧 ‘주님으로부터 난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와 통치’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8:6-8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지배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서며, 그 결과 모든 내적, 외적 요소들이 그 질서 아래에 조화롭게 복종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입니다. AC.52에서는 ‘주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진리를 통해 주님을 반영하는 상태, 곧 이해가 밝아지고 질서가 서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때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따라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 안에서는 ‘무엇이 위에 있고, 무엇이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가 바로 서게 됩니다.

 

이제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입니다. ‘’은 성경에서 가장 바깥, 가장 낮은 것을 의미하며, ‘발 아래 둔다’는 것은 ‘외적이고 낮은 것들이 내적이고 높은 것 아래에 놓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AC.52의 흐름에서 보면, 이것은 바로 ‘형상이 회복된 사람 안에서 이해(진리)가 중심이 되어, 그 아래에 의지와 삶, 그리고 감각적 요소들이 질서 있게 정돈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구체적 대상들을 보시면 의미가 더 또렷해집니다. ‘소와 양’은 비교적 순한 애정, 곧 선한 자연적 감정들을 의미하고, ‘들짐승’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과 본능을 의미합니다. ‘공중의 새’는 생각과 이해의 활동, 곧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의미하고, ‘바다의 물고기’는 가장 외적인 감각과 기억, 그리고 낮은 수준의 인식들을 의미합니다. 즉, 이것들은 모두 ‘사람 안에 있는 다양한 층위의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 요소들이 서로 뒤엉켜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 아래에서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AC.52에서는 그 중심이 바로 ‘주님의 형상’, 곧 진리를 통해 형성된 내적 인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보셔야 합니다. 이 상태는 ‘내가 나를 잘 통제한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내 안에 세워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상태’입니다. 즉, 통제의 주체가 ‘’가 아니라 ‘내 안에 세워진 주님의 질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어떤 욕망이 올라오면 그것이 바로 생각을 지배하고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감정이 위에 있고, 이성이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주님의 형상이 회복되면, 먼저 ‘이것이 옳은가’가 중심이 되고, 감정과 욕망은 그 아래에서 조절됩니다. 더 나아가면, 그런 욕망 자체도 점점 순화되어 전체가 하나의 조화 속에 들어갑니다.

 

바로 이 상태가 ‘만물이 발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즉, 높은 것이 낮은 것을 다스리고,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이끄는 질서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AC.52에서 말하는 ‘주님의 형상’이 실제로 사람 안에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인간의 권세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형상을 통해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의 완성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온전히 자리 잡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8:6-8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 안에서 진리가 중심이 되어, 모든 내적, 외적 요소들이 질서 있게 복종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52, 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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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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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fowl), 그리고 그 뒤에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가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력과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fowl)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이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이 글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다스림의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두 사람 모두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다스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는가’가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바로 형상과 모양,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가르는 핵심 기준입니다.

 

영적 인간은 아직 겉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해력과 신앙을 통해 삶을 정돈해 갑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다음에 사랑과 행위가 뒤따릅니다. 이 구조에서는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짐승’, 곧 의지와 애정의 영역이 나옵니다. 이 다스림은 위로 올라가려는 다스림이며, 질서를 세워 가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방향은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겉 사람에서 출발한다는 말은, 여전히 외적 사고와 분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태도 거듭남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를 낮추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스림의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제는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스림이 흘러갑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을 묘사할 때는 ‘짐승’, 곧 애정과 사랑의 영역이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그다음에 ‘’, 그리고 마지막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이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끌고, 이해력과 지식은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의 다스림이 ‘강압이나 통제가 아니라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듯, 만물이 ‘발 아래’ 놓인다는 표현은 억압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것들까지도 사랑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즉 감각, 습관, 기억, 일상의 행동까지도 사랑에서 흘러나온 방향에 맞게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통해 인간 삶의 근본 구조를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은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묻고, 천적 인간은 ‘무엇이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를 살아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분별과 훈련이 중요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일치와 평안이 특징이 됩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스림의 완성은, 이해력이 의지를 다스리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이해력을 밝히고 인도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닮음’, 곧 ‘모양’의 상태이며, 주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심화

 

1.8:6-8

 

 

AC.52, 심화 1, ‘시8:6-8’

AC.52.심화 1. ‘시8:6-8’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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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적 인간’,천적 인간

 

 

AC.52, 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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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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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image), ‘모양’(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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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심화

 

3. 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이 구절은 AC.51의 흐름에서 사람이 어떻게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아주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이미 자녀가 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라 살 때,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길과 힘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먼저 이 부분을 가장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권세’라는 말 때문에 어렵게 느껴지는데, 이것을 자격’이나 직위’로 생각하시면 헷갈립니다. 여기서 권세’는 가능하게 하는 힘’, ‘그렇게 될 수 있는 길이 열림’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이제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으로 실제로 변화할 수 있는 길과 능력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이냐가 중요해집니다. 여기서 자녀’는 단순한 관계 용어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는가’,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세상적으로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그 부모의 성향과 성질을 어느 정도 닮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명’,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생명’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 왜 이것이 권세’라고 표현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원래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기준으로 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진리를 영접하고’, 그것을 믿는다’, 즉 받아들이고 따라 살기 시작하면, 사람 안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변화가 가능하도록 주어지는 것이 권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이 이걸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이것은 아주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혈통’은 타고난 성향, ‘육정’은 욕망, ‘사람의 뜻’은 자기 생각과 판단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과정을 열어 놓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 바꾸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이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말씀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좋은 상태’로 바뀝니다. 그때는 더 이상 내가 애써서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삶’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상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너는 이미 자녀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라 살면, 실제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주어진 길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한 줄로 다시 정리하면,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사람이 자기로부터 사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으로부터 사는 새로운 생명으로 실제로 변화될 수 있도록 주어진 영적 가능성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AC.51, 심화 2, ‘요15:14-15’

AC.51.심화 2. ‘요15:14-15’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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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심화

 

2. 15:14-15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이 구절은 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단순히 아는 상태에서, 그것을 행함으로써 주님과 결합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5:14-15 너희는 나의 친구라는 것은 단순한 관계의 변화가 아니라, 진리를 행함으로써 더 이상 외적으로 복종하는 상태(종)가 아니라, 내적으로 이해하고 함께하는 상태(친구)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행하면’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따르는 것’이 기준입니다. AC의 흐름에서 보면, 이것은 ‘이해에 있는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내려오는 순간’을 말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는 아직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다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입니다. ‘’은 단순히 신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따릅니다. 즉, 두려움이나 의무 때문에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초기 상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옳기 때문에’, 혹은 ‘그래야 하니까’ 따릅니다. 아직 그것을 사랑하거나 기뻐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반면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에서 ‘친구’는 ‘내적인 결합 상태’를 의미합니다. 친구는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뜻을 함께 아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알게 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이해하게 하였다’, ‘내적 의미를 공유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즉, 더 이상 바깥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같은 뜻으로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제 AC.51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빛을 믿으라’, ‘빛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그다음 단계가 설명됩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자기 것이 되는 상태’, 곧 주님과 내적으로 연결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이 아니라 ‘친구’가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말씀을 들으면 ‘그래야지’ 하고 억지로라도 따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씀이 점점 이해되고, 결국에는 ‘, 이게 참 좋다’는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행하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그 변화가 ‘종에서 친구로’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관계의 친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순종에서 내적 일치로’, ‘의무에서 사랑으로’, ‘명령에서 이해로’ 넘어가는 거듭남의 중요한 전환점을 설명합니다.

 

15:14-15 너희는 나의 친구라라는 것은 진리를 행함으로써 외적 복종의 상태를 넘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내적 결합의 상태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AC.51, 심화 3, ‘1:12-13’

AC.51.심화 3. ‘요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주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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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심화 1, ‘요12:35-36’

AC.51.심화 1. ‘요12:35-36’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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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심화

 

1. 12:35-36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이 구절은 AC.51의 문맥에서 ‘사람이 진리를 통해 어떻게 인도받고, 또 그것을 거부할 때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2:35-36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직 의식 속에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어둠(거짓과 무지)에 사로잡혀 더 이상 길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는 영적 상태의 법칙을 말합니다.’

 

먼저 ‘빛이 너희 중에 있다’입니다. 여기서 ‘’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해의 빛을 의미합니다. 이 빛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허락하시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언제나 진리를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더 밝게 보이고, 어떤 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다음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입니다.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간다’, ‘선택하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즉,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실제 삶 속에서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어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붙잡힌다’는 표현이 중요한데, 이것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 곧 거짓이 굳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방향 상실’을 말합니다. 진리를 잃은 상태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이해가 어두워진 상태’, 곧 영적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이제 핵심입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곧 신앙과 삶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단지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따를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그 진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빛의 아들이 된다’입니다. ‘아들’은 성경에서 ‘어떤 것에서 나온 것’, ‘그것을 닮은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로부터 태어난 사람’, 곧 이해와 삶이 진리에 의해 형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의 원리가 된 상태입니다.

 

이제 AC.51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를 통해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받아들이면, 그 진리는 점점 사람 안에서 빛이 되어 길을 밝히고, 결국 그 사람을 ‘빛의 아들’, 곧 진리 안에 사는 상태로 이끕니다. 그러나 거부하면, 그 자리는 곧 어둠이 차지하게 되고, 사람은 점점 방향을 잃게 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어떤 순간에 ‘이게 옳다’는 깨달음이 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지 않고 미루거나 무시하면, 그 깨달음은 점점 흐려지고, 나중에는 아예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따라 행동하면, 다음에는 더 분명한 빛이 주어집니다. 이 반복 속에서 사람은 점점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거나, 반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영적 삶의 아주 실제적인 법칙을 말합니다. ‘빛은 주어질 때 붙잡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어둠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12:35-36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는 것은 주어진 진리를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어둠에 사로잡혀 방향을 잃게 된다는 영적 법칙을 의미합니다.’

 

 

 

AC.51, 심화 2, ‘요15:14-15’

AC.51.심화 2. ‘요15:14-15’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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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image), ‘모양’(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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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1

 

형상(image)에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likeness) 그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 곧 닮음(similitude)입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image)인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또한 친구(friend)라고도 하십니다.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모양(likeness),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4, 헬라어는 ἐξ 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 AC.374 [3]번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 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매우 정밀하게 분해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상’과 ‘모양’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의도적으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 모양은 ‘완성된 일치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형상’대로 창조되지만, 곧바로 ‘모양’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이 구분은 인간의 거듭남 구조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가는 상태에 있고,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되어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크지만,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형상’만 말하고, ‘모양’은 다음 단계로 남겨 둡니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온전히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각각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이 호칭들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사람이 여전히 빛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은 여전히 위에서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 ‘걸으라’라는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이는 아직 ‘의식적 선택과 분별이 필요한 상태’임을 뜻합니다.

 

또한 영적 인간을 ‘친구’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란, 명령을 이해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이지, 아들은 아닙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자녀, 곧 아들은 명령을 외부에서 받아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혈통이나 인간적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은 형상으로서 주님을 닮아 가는 중이며,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은 닮음으로서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인간 유형이 아니라, 거듭남의 서로 다른 깊이를 나타냅니다.  

 

 

심화

 

1.12:35-36

 

 

AC.51, 심화 1, ‘요12:35-36’

AC.51.심화 1. ‘요12:35-36’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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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14-15

 

 

AC.51, 심화 2, ‘요15:14-15’

AC.51.심화 2. ‘요15:14-15’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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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13

 

 

AC.51, 심화 3, ‘1:12-13’

AC.51.심화 3. ‘요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주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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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 2.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천적’이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영적’이라는 표현은 익숙한데, ‘천적’이라는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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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우리'의 의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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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심화

 

5.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이 구절은 겉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를 홀로 지으셨다는 선언처럼 보이지만, AC.50의 문맥에서는 주님만이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을 밝히는 핵심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4:24 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쳤다는 것은 우주의 창조만이 아니라,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주님 한 분이 질서 있게 새롭게 형성하시는 영적 창조, 곧 거듭남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먼저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입니다. 여기서 구속자(redeemer)는 단순히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 ‘사람을 거짓과 악의 상태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상태로 옮기시는 분’을 뜻합니다. 그리고 모태에서 너를 지었다’는 표현은 자연적 출생이 아니라, ‘영적 형성의 시작 상태’, 곧 사람이 진리와 선 안에서 다시 형성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이 구절은 이미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인간’, 곧 거듭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입니다. 여기서 만물’은 단순한 자연계의 모든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할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그 질서 전체’를 포함합니다. 사람 안에 하늘’이 세워지고 ’이 정돈되는 이 모든 과정이 바로 만물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결되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창조’임을 보여 줍니다.

 

이제 핵심 표현입니다.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여기서 하늘’은 속 사람, 내적 영역’, 곧 사랑과 신앙이 자리 잡는 부분을 의미하고, ‘’은 겉 사람, 외적 삶과 행위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편다’는 것은 사람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참된 이해의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고, ‘땅을 펼친다’는 것은 그 질서가 실제 삶과 행위 속에서 구현되도록 외적 삶을 정돈하시는 것입니다. 즉, 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로 연결되는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특히 홀로’, ‘나와 함께 한 자 없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을 끊어냅니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선한 의지와 참된 이해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도권은 전적으로 주님께 있으며, 사람은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제 AC.50의 흐름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이런 내적 질서가 자연스럽게, 거의 퍼셉션’으로 주어졌지만, 이후 인간은 그 상태를 잃고, 외적인 것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다시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을 세워 가셔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단독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고자 애씁니다. 겉으로 보면 그 사람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넘어서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싫던 것이 좋아지고, 반대로 이전에 좋던 것이 더 이상 안 좋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만든 변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하늘을 펴고 땅을 정돈하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때 이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창조는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44:24 홀로 하늘을 펴고 땅을 펼쳤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질서 있게 새롭게 형성하시는 전적인 신적 사역, 곧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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