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AC.155)
이 구절이AC.155에 인용된 이유는, ‘여자’(woman)로 상징되는proprium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감싸고 결합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5의 흐름은, 인간의proprium자체는 본래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질서 안으로 돌이키실 수 있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렘31:22의 ‘새 일’은 바로 이 역설적 회복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난해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여러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상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이전 창세기 해석들에서처럼 인간의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의지와 애정의 구조를 뜻하고, ‘남자’(man)는 보다 내적이고 주님께 속한 진리와 지성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둘러싼다’(compass)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 지배나 공격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싸고 결합하고 보호하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이전에는proprium이 진리를 자기 자신 아래 두고 왜곡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반대로proprium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AC초반부 전체 흐름 속에서 매우 희망적인 전환처럼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계속proprium의 위험성과 타락 가능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졌고, 여자라는proprium은 뱀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즉, 주님은 인간을proprium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자기감과 자유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던proprium이, 이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감싸며 움직이는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적proprium’ 혹은 ‘주님께 열린proprium’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 일’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순 외적 개혁이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proprium이, 이제는 사랑과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55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인간의proprium이 단순히 제거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원래는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구조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말 속에는, 문자로부터는 누구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더 깊은 것들이 가장 안쪽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 내용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으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본문에서도, 그 가장 안쪽에서는 ‘천적 혼인’(heavenly marriage)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천적 혼인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는데, 곧 그것은 own 안에 존재하며, 이 own이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의 own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이 own, 곧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는 것의 성질은 간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으나, 그 일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들이 자기로부터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이러한 성질의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 퍼셉션 안에 머무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이와 같은 own도 예레미야서에서 뜻해지는데,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말씀 역시 천적 혼인을 뜻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대해 ‘두르다’(to compass)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이 own이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창세기 2장 전체, 더 나아가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인간의 상태만을 말하지 않고, 그 모든 구조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천적 혼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2의 이 본문도 인간의 기원이나 결혼제도의 설명이 아니라, 주님과 인간, 더 정확히는 주님과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인간의 own’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여기서 천적 혼인은 인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own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이 결정적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었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죽어 있으나,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살아난 own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인간의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과의 결합의 자리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살아난 own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지성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는 앞서 AC.92, AC.154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 같은 계열의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천사들조차도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일상적 상태에서는 마치 자기로부터 사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과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즉각적인 변화를 지각합니다. 이 민감한 퍼셉션이 그들을 다시 질서로 이끌며, 그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이 유지됩니다.
이 설명은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상태란, 끊임없이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를 의식적으로 되뇌는 상태가 아니라, ‘벗어날 때 곧바로 알 수 있는 상태’, 곧 중심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살아난 own의 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렘31:22의 말씀, ‘여자가 남자를 두르리라’는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표현으로, 살아난 own이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 보호하고 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은 더 이상 분열과 반항의 근원이 아니라, ‘결합과 보호의 자리’가 됩니다.
사람의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AC.154)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own으로 주셨나요?그리고 위‘결과적으로’라는 말은 왜 나왔나요?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곧‘여자’라는 새로운own에서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요?왜 누구는‘흉측’하고,누구는‘소년,소녀’,그리고‘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나요?
AC.154는AC초반부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문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사람의own은 악 그 자체이다’,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 개성이나 자기감 전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먼저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첫 질문,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own으로 주셨는가?”에 대해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실 주님께서 ‘악 자체’를 인간에게 창조해 넣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자유로운 자기감(as if from himself)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사랑도 자유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기감을 점점 자기 독립 생명으로 굳히기 시작하면서,proprium은 주님께 열린 구조에서 자기 자신에게 닫힌 구조로 변질됩니다. 바로 그 닫힌 상태가 ‘악한proprium’입니다.
즉, 원래 허락된 것은 살아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었는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중심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proprium을 설명할 때 자꾸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열려 있는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힌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천사에게도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proprium입니다. 반면 지옥적 인간의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짚으신 ‘결과적으로’(consequently)라는 단어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냥 “사람은 악이다”라고 툭 던지지 않습니다. 그는 논리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둔다면, 결과적으로(consequently)인간은 악과 거짓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본래 독립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중심 삼는 순간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결과 악과 거짓 안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결과적으로’는 단순 접속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왜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은 아주 깊은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여자’라는vivified proprium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어떤 영들은 흉측하고, 어떤 영들은 소년, 소녀처럼 보이며, 어떤 천사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인간은 모두 같은 ‘가능성 구조’ 안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방향으로proprium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영계에서 외모는 단순 외형이 아니라 내면 사랑의 형태입니다. 자기 사랑과 지배욕 안에 굳어진 영은 점점 왜곡되고 흉측해집니다. 반면 주님께 열린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순수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미성숙이 아니라,innocence,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최종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는 허락되지만, 그 자유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인간 존재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으로 굳어지고, 어떤 사람은 점점 주님께 열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결국 영적 형상 전체를 만들어 냅니다.
즉, 같은 출발 구조는 주어졌지만, 같은 방향성과 같은 사랑은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기 영원을 형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4
악과 거짓은 언제나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며, 또한 사람의 own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사람의 own에 속한 것들이 눈앞에 제시될 때, 그것들이 말로 묘사하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흉측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다만 own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어, own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사람의 own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특히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보이며,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꽃으로 엮은 화환이 가슴을 두르고 머리에는 관이 씌워진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고 있습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own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진술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인간론의 바닥을 끝까지 내려갔다가, 곧바로 구원의 가능성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한 치의 완화도 없이 선언합니다. 악과 거짓은 오직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동 일부가 악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own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적으로 들리는 문장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을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이 전제는 영들의 세계에서의 시각적 경험으로 뒷받침됩니다. own이 그대로 드러날 때, 그것은 가장 흉측한 형태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본 당사자조차도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흉측함이 ‘벌’이나 ‘정죄’의 결과가 아니라, ‘own의 본질적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의 생명이 덮이지 않은 own은 그 자체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단락의 후반부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동일한 ‘own’이라 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그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흉측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변화는 own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체어리티와 순진함의 상태가 묘사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합니다. 체어리티로 살아난 이들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무력함이나 결핍의 상징이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상태’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이유는, own을 자기의 것으로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가장 깊은 곳에서의 퍼셉션’이라는 표현은, 이 상태가 감정적 만족이나 외적 평안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서 오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앞서 AC.92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도 정확히 상응합니다.
AC.154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지만, 주님의 생명이 그것을 덮을 때, 동일한 own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은 own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own을 주님께 내어드려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통찰은 이어지는 AC.155에서, 여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언어로 넘어가며, 또 다른 긴장을 불러오게 됩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31:4)Yet still will I build thee,and thou shall be built,O virgin of Israel. (Jer. 31:4)
이 구절이AC.153에 인용된 이유는,주님께서 타락과 황폐 이후에도 인간 안의 교회적 상태를 다시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3의 중심 흐름은,proprium때문에 무너진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렘31:4는 바로 그 회복의 약속을 가장 따뜻하고 인격적인 언어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렘31:4에서‘처녀 이스라엘’은 단순 민족 국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에게서 이스라엘은 교회,곧 진리와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그리고‘처녀’(virgin)는 아직 순수성과 수용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즉,완전히 닫혀 버린 상태가 아니라,다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교회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다’입니다.이것은 단순 외적 회복이나 민족 재건을 넘어서,인간 안의 영적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은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것과 같습니다.proprium중심으로 흩어진 인간 안의 생각과 사랑과 삶의 구조가,다시 주님 중심 질서 안으로 재배열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의 사61:4와 흐름이 이어집니다.거기서는 황폐한 도시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다고 했다면,여기서는 그 회복이 더 인격적 관계 언어로 표현됩니다.즉,주님께서 단순 시스템을 복구하시는 것이 아니라,타락한 인간과 다시 관계를 맺으시고,그 존재를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또‘소고를 들고 춤추며 나오리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말씀에서 춤과 기쁨은 단순 감정 폭발이 아니라,사랑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루며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즉,회복은 단순 죄 사함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인간 안에 다시 살아 있는 기쁨과 질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타락과proprium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 안의 교회 상태와 영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지만,주님은‘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즉,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의 자기 재건이 아니라,주님의 재건 역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깊은 위로도 들어 있습니다.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이 무너질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분이 아닙니다.오히려 인간이 무너질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과 자유를 허락하셨고,동시에 그 무너짐 이후에도 다시 세우시는 길까지 준비하신 분입니다.그래서AC.153의 이 흐름은 단순 심판 이후가 아니라, ‘재건하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61:4)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이AC.153에 인용된 이유는, 인간 안에서 무너지고 황폐해진 영적 상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3의 흐름은, 타락과proprium때문에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무너졌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과 재건의 길을 여신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사61:4는 바로 그 ‘재건’의 이미지를 매우 강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사야서61장에서 ‘황폐한 곳’, ‘무너진 곳’, ‘대대로 무너져 있던 성읍’은 단순 전쟁 폐허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황폐(desolation)는 진리와 선이 사라진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곧,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진리가 메말라 있으며, 사랑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바로proprium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성읍’(cities)은 말씀에서 자주 교리적 구조와 진리 체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읍이 황폐해졌다는 것은, 인간 안의 진리 질서 자체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감정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생각과 삶의 구조 전체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세우신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regeneration)을 단순 도덕 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도시를 다시 건축하는 것 같은 일입니다. 인간 안에 다시 질서가 세워지고, 사랑과 진리가 다시 연결되고, 삶 전체가 새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황폐함을 다시 세운다’,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킨다’는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또 ‘대대로 황폐하였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일시적 실수가 아니라, 인간성과 교회 전체 안에 오랫동안 누적된 타락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인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실 이후 점점 더 외적 인간 중심으로 기울어졌고, 결국 영적 황폐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상태 속에서도 다시 회복의 길을 여십니다.
그래서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proprium과 타락으로 무너진 인간 안의 영적 질서와 진리 구조가 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에덴의 상실이 마지막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한 회복과 재건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 개인 심리 회복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재건은 인간 안의 ‘도시’, 곧 생각과 사랑과 삶의 질서 전체가 다시 주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61장은 단순 위로의 시가 아니라, 황폐해진 인간성과 교회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구속과 거듭남의 약속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3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지만, 앞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created), ‘형성’(formed), 혹은 ‘만들어졌다’(made)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들다’(build)라는 말은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로 말씀에서 사용되며, ‘만들다, 짓다’(build)는 악에 대해, ‘다시 세우다’(raise up)는 거짓에 대해, ‘새롭게 하다’(renew)는 둘 다에 대해 사용됩니다. 이사야서에 이르기를,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61:4)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들과 다른 곳들에서 ‘황폐’(Wastes)는 악을 뜻하고, ‘황무’(desolations)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래서 ‘쌓다’(build)는 앞의 것에, ‘다시 일으키다’(set up again)는 뒤의 것에 적용되며, 이러한 구분은 선지자들에 의해 다른 곳들에서도 주의 깊게 지켜집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르기를,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여자’를 가리켜 왜 ‘창조’나 ‘형성’, 혹은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고, 오직 ‘지어졌다’(built into)라고만 표현되는지를 정밀하게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이는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 변화에 대한 ‘영적 진단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창조와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이 주어지고, 질서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이미 질서 안에 있었던 것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뒤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새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짓다’(bui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선지서에서의 용례를 끌어옵니다. ‘황폐’는 악을 뜻하고, ‘황무’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리고 악에 대해서는 ‘짓다’가, 거짓에 대해서는 ‘다시 세우다’가 사용됩니다. 이는 악이 의지의 차원에서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이며, 거짓은 이해의 차원에서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의지와 이해의 구분’, 그리고 악과 거짓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여자가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own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공허함이 아니라, 한때 생명과 질서 안에 있었으나 자기 인도를 원함으로 인해 붕괴된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위에 다시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도 아니고, ‘형성’도 아니며, ‘만듦’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 ‘이스라엘의 처녀’를 다시 짓겠다고 한 말씀은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황폐를 겪은 뒤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짓다’라는 말은 언제나 ‘회복과 허락’, 그러나 동시에 ‘이전 상태와는 다른 긴장’을 동반합니다.
이 단락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own을 허락하시되, 그것을 신적 질서 안에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더 이상 순전한 천적 질서가 아니라, 이후에 시험과 위험을 내포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이후 서사의 모든 긴장의 출발점이 됩니다.
‘여자’(woman)가 사람의own을 뜻한다는 사실은,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own,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뱀은3장에서 등장하지만,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를 통해 열립니다.즉,악은 언제나‘own안으로 초대될 때’비로소 힘을 갖습니다.외부의 거짓이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내부에서 공명하는own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AC.152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인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는 것은 바깥의 악 자체가 아니라,그 악이 인간 안의proprium과 결합할 때라는 점입니다.그래서 그는‘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own’이라고 말합니다.여기서own,곧proprium은 단순 자의식이 아니라, ‘내가 나로부터 산다’, ‘내가 중심이다’, ‘내 판단과 내 욕망이 기준이다’라고 느끼는 자기 중심 구조를 뜻합니다.그리고 바로 그 구조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질 때,인간은 진리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스베덴보리가 악을 단순 외부 침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만약 악이 단지 외부 공격이라면,인간은 거의 피해자에 불과할 것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이 힘을 얻는 이유를 인간 안의proprium에서 찾습니다.즉,바깥에서 들어온 거짓이 인간 안의 어떤 욕망과 자기 사랑과 만나‘그래,바로 이거야’하고 공명할 때,비로소 그것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3장에서 뱀은 먼저 등장하지만,실제 대화와 수용의 중심은 여자입니다.이것이 뜻하는 것은 굉장히 깊습니다.뱀은 감각적 추론과 외적 설득을 상징합니다.즉,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너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않느냐?’같은 외적 유혹입니다.그런데 그 유혹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무너지지 않습니다.문제는 그것이 인간 안의proprium과 연결될 때입니다.
그래서‘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였다’라는 말은,악이 인간 안의 자기중심 구조를 통해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다시 말해,거짓은 단순히 밖에서 강제로 주입되지 않습니다.인간 안에서 그것을 원하고 좋아하고,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무엇이 있을 때,비로소 그것이 힘을 가집니다.이것이‘악은 언제나own안으로 초대될 때 힘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인간 경험이기도 합니다.같은 유혹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별 반응이 없고,어떤 사람은 강하게 끌립니다.왜 그렇습니까?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인간 안의proprium이 그것과 공명하기 때문입니다.즉,바깥 거짓이 안의 자기 사랑과 만날 때,비로소 속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AC.152는 타락을 단순‘외부 사탄의 공격 사건’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타락은 인간 안의proprium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내적 사건입니다.뱀은 제안할 수 있지만,인간 안의own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타락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여자’라는proprium의 비극성과 존엄성이 동시에 드러납니다.그것은 원래 주님께서 자유로운 사랑과 응답을 위해vivify하신 자기감이었습니다.그러나 같은 구조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면,가장 깊은 속임의 통로가 됩니다.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proprium은 단순 악이 아니라,인간 자유 전체가 걸려 있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필수적인 구조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vivified된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own으로 놔두시지 굳이‘여자’로 만드셨어야 했나요?처음own으로 속는 거와 이‘여자’라는 나중own으로 속는 거가 뭐가 다른가요?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창세기2장과3장이 그렇게 깊고도 두려운 본문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결국 속을 거였다면 왜 굳이vivify된proprium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사실상 바로 그 지점을 오래 붙들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주님께서 허락하신vivified proprium은 단순히 ‘속기 쉬운 개선판 자아’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인간이 단지 최초의 오리지널proprium, 곧 죽어 있는 자기성 상태에만 머물렀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사랑하고 응답하는 존재는 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사랑은 강제로 주입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반드시 ‘내가 스스로 원한다’는 자기감(as if from himself)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여기서vivified proprium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마치 자기 스스로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 있는 상호 관계 속 존재가 아니라, 거의 자동 기계 같은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의 죽은proprium과vivified proprium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죽은proprium은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에는 진짜 천국적 사랑도, 자유로운 응답도 없습니다. 반면vivified proprium은 주님의 생명이 통과하면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자유와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 상태입니다. 즉, 인간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자유 때문에 타락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모르셔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히 아시면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유 없는 선은 살아 있는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2장의 ‘여자’는 단순 타락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과 실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연결 구조입니다. 하지만 같은 구조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 삼기 시작할 때는 타락의 통로도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두려운 성격입니다.
그러므로 ‘처음own으로 속는 것’과 ‘vivified된,여자라는own으로 속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처음 죽은proprium은 원래부터 닫혀 있고 생명 없는 자기성입니다. 그러나vivified proprium은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허락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후자의 타락은 단순 기계적 오류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안에서 일어난 배반에 가깝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구속과 거듭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넘어질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넘어질 가능성까지 감수하시면서, 인간이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단순히 ‘실수할 수 없는 자동 순종 상태’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형성된 존재들의 공동체가 됩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own,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or what is the same,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위 본문은 그러니까‘여자’라는own이 속였다는 말인 것 같은데,그러면 좀 이상한 게,이‘여자’라는own은 주님으로 말미암은own아닌가요?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vivified된own이 속인다?너무 이상한데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이상함이 바로AC.152부근의 가장 어려운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분명, 주님께서 인간에게proprium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그것을vivify, 곧 살아 있게 하셨다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own’이라고 하니, 마치 주님께서 살려 주신proprium자체가 곧 속임의 원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으로부터vivified된proprium’ 자체와,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중심으로 붙잡아 버린 상태를 구분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열려 있는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혀 버린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 ‘여자’로 상징된proprium은 아직 질서 안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as if his own’, 곧 ‘마치 자기 것 같은’ 자기감이었습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이 없으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생명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기감을 ‘받는 그릇’으로 머무르지 않고,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proprium은 방향이 바뀝니다.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흐르게 하던 구조였는데, 점점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구조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그 굳어진 방향이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입니다.
그래서AC.152의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own’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감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존재임을 잊고,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기 시작한proprium’이 인간을 속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의proprium은 ‘창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안을 통과하여 인간이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해 주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느 순간 그 창문을 거울처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즉, 더 이상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proprium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후 계속 ‘천사에게도proprium은 있지만,그것은 주님께 열린proprium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자기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반면 지옥적proprium은 같은 자기감을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킨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라는own이 속였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기감 자체가 본래 악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기감이 점점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실제로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생명처럼 붙잡기 시작했을 때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스베덴보리는proprium문제를 그렇게 무겁게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자기감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자기감 때문에 가장 깊이 미혹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