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6.심화

 

3. ‘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4:6-14)

 

 

스베덴보리가 AC.296에서 민4:6-14를 인용한 이유는, ‘해달의 가죽’이 성막 가장 바깥 덮개로 반복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이 자연적 선을 표상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본문에서 법궤와 진설병의 상, 등잔대, 금제단, 성소의 기구들, 번제단 기구들을 모두 운반할 때 해달의 가죽으로 덮습니다. 곧 해달의 가죽은 단순한 방수용 재료가 아니라, 거룩한 것들을 외부의 충격과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바깥 덮개였습니다.

 

4에 나오는 성막 기구들은 각각 주님과 천국, 교회와 사람 안의 거룩한 것들을 표상합니다. 법궤는 가장 내적인 천적 선과 진리를, 진설병의 상은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천적 양식을, 등잔대는 영적 진리와 그 진리에서 오는 밝음을, 금제단은 기도와 예배의 향기로운 것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가장 거룩한 것들이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덮개로 싸여야 했으며, 가장 바깥에는 공통적으로 ‘해달의 가죽 덮개’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인 거룩한 것들이 직접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청색이나 홍색, 자색 보자기로 싸고, 그 위를 다시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청색은 천적인 진리를, 홍색은 영적 선을, 자색은 천적 선을 나타내는 색채이며, 해달의 가죽은 그 모든 것을 둘러싸는 가장 외적인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덮개의 순서는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특히 해달의 가죽이 거의 모든 성막 기구에 반복하여 사용된 것은 자연적 선의 보호 기능이 보편적임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무리 내적으로 사랑과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외적 삶의 질서와 선한 행위로 보호되지 않으면 쉽게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은 내적 거룩함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을 보존하고 운반하며 세상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필수적인 외피입니다.

 

이 점은 AC.296의 중심 주제인 ‘가죽옷’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은 그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 머물 수 없게 된 뒤에도,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통하여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외적인 옷을 의미합니다. 민4의 해달 가죽 덮개 역시 같은 방식으로, 내적인 거룩한 것들이 외적인 자연적 선으로 보호되는 모습을 표상합니다.

 

또한 성막 기구들이 이동할 때 해달의 가죽으로 덮였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성막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광야를 이동할 때, 곧 변화와 시험, 그리고 불안정의 상태를 통과할 때, 이 덮개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여러 상태의 변화를 지날 때, 내적 사랑과 신앙이 외적 삶의 선과 질서에 의해 보호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자연적 선은 특히 시련과 변화의 과정에서 내적인 것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민4:6-14를 통하여 ‘가죽’이 말씀에서 단순한 동물성 재료가 아니라, 사람의 가장 바깥 자연적 차원에 속한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법궤에서부터 제단 기구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거룩한 것이 해달의 가죽으로 덮였다는 것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자연적 선을 통하여 안전하게 보존된다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296에서 이 긴 본문을 인용한 이유는, ‘해달의 가죽’이 자연적 선을 의미하며, 그 자연적 선이 내적인 거룩한 것들을 감싸고 보호하는 가장 바깥 덮개라는 사실을 말씀의 반복된 규례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3의 ‘가죽옷’, 창27의 ‘염소 새끼의 가죽’, 출26의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함께 하나의 상응 체계를 이룹니다. 곧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신앙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생활까지도 선으로 질서 있게 하셔서 사람 전체를 보호하십니다.

 

 

 

AC.296, 창3:21, ‘가죽‘의 상응 원리, 성경 전체를 관통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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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 심화 2, ‘출26:14; 36:19’

AC.296.심화 2.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36:19) 스베덴보리가 AC.296에서 출26:14와 출36:19를 인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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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26:14; 36:19)

 

 

스베덴보리가 AC.296에서 출26:14와 출36:19를 인용한 이유는 성막의 덮개를 이루는 여러 가죽이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라, 모두 영적 의미를 지닌 표상물이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성막 전체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난 사람을 나타내는 거대한 상응 구조라고 보았으며, 그 가운데 가장 바깥을 덮고 있는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badgers) 가죽 역시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은 영적 선을 의미합니다. 숫양은 말씀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에서 나오는 선을 상징하며, 여기에 ‘붉은 물 들인’이라는 표현이 더해짐으로써 그 선이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성막 안에 있는 거룩한 것들이 영적 선으로 먼저 보호되고 감싸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위를 다시 덮고 있는 ‘해달’ 가죽은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자연적 선은 영적 선보다 더 바깥 차원에 속하며,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선한 행위와 질서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막에서 가장 바깥 덮개가 해달 가죽으로 되어 있었던 것은, 가장 외적 삶까지도 선으로 보호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영적인 것은 언제나 자연적인 것을 통하여 세상 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막의 덮개가 두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선에도 질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안쪽의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은 보다 내적인 영적 선을, 그 바깥 ‘해달’ 가죽은 보다 외적인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막은 가장 안쪽의 지성소에서부터 가장 바깥 덮개에 이르기까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영적 질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창3의 ‘가죽옷’과 창27의 ‘염소 새끼의 가죽’이 동일한 상응 체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진 ‘가죽옷’, 야곱이 입은 ‘염소 새끼의 가죽’, 그리고 성막의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 가죽은 모두 사람의 가장 바깥을 덮는 외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상응적으로는 겉 사람을 보호하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성막은 주님의 신성한 인성, 곧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표상하는 동시에, 거듭난 사람을 표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바깥 덮개가 선을 의미하는 가죽으로 덮여 있다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말과 행동, 생활과 습관까지도 선으로 보호되고 질서 가운데 있어야 내적 신앙과 사랑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적 거룩함은 외적 삶이 함께 질서를 이룰 때 비로소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모두 상응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성막 덮개 재료 기록을 단순한 성막 운반법 기록으로만 보면, 왜 굳이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 가죽을 구별하여 기록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응 관점에서는 각각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재료와 구조가 필연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AC.296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성막의 가장 바깥 덮개조차도 주님께서 사람을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보호하시는 섭리를 나타내는 거룩한 표상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AC.296, 심화 3, ‘민4:6-14’

AC.296.심화 3. ‘민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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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 심화 1, ‘창27:15, 16, 27’

AC.296.심화 1. ‘창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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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심화

 

1. ‘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7:15, 16, 27)

 

 

AC.296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7:15, 16, 27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가죽’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염소 새끼의 가죽’과 ‘에서의 좋은 의복’이 함께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표상하며, 그 결과 이삭이 ‘밭의 향취’를 맡아 축복하는 장면이 하나의 일관된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야곱은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는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서의 좋은 의복을 입고, 손과 목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둘렀습니다. 겉으로는 형을 가장하기 위한 변장이지만, 속뜻으로는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는 선을, 야곱은 진리를 대표합니다. 진리가 참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을 입어야 합니다. 따라서 ‘에서의 의복’은 선이 외적 삶 속에 나타난 모습을, ‘염소 새끼의 가죽’은 그 선이 가장 바깥 자연적 차원까지 미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AC.296의 주제는 ‘가죽’입니다. 가죽은 살아 있는 동물의 가장 바깥 부분이며, 상응적으로는 사람의 가장 바깥 삶과 겉 사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염소 새끼의 가죽’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겉 사람을 덮고 보호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창3에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과 정확히 같은 계열의 상징입니다. 두 경우 모두 가죽은 타락하거나 아직 연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외적 선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라는 이삭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향취’는 선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의미하고, ‘’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삭이 맡은 것은 단순히 에서의 체취가 아니라, 교회의 선이 밖으로 드러나는 영적 향기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의복’, ‘가죽’, ‘향취’, ‘’은 각각 따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선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AC.296 후반부에서 성막의 ‘숫양의 가죽’과 ‘해달(badgers) 가죽을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성막의 가장 바깥을 가죽이 덮고 있었던 것처럼, 야곱도 가장 바깥에 가죽을 입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가장 거룩한 것을 외부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27의 가죽과 출26, 민4의 가죽은 동일한 상응의 원리를 보여 주는 서로 다른 사례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이 인용을 통해 말씀의 역사적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상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려 합니다. 만일 ‘염소 새끼의 가죽’이 단순히 털 많은 손을 흉내 내기 위한 도구였다면, 성막의 가죽과 연결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가죽’이 두 본문에서 모두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민수기를 하나의 상응 체계 안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96에서 창27:15, 16, 2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죽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창세기의 또 다른 역사적 사례를 통해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이 입은 ‘염소 새끼의 가죽’은 거듭난 사람의 겉 사람을 감싸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에서의 의복’은 그러한 선이 삶 속에 드러난 모습을, 그리고 ‘밭의 향취’는 그 선이 교회 안에서 발산하는 생명의 향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창3의 ‘가죽옷’과 성막의 ‘가죽 덮개’를 연결하는 중요한 증거로 AC.296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AC.296, 심화 2, ‘출26:14; 36:19’

AC.296.심화 2.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36:19) 스베덴보리가 AC.296에서 출26:14와 출36:19를 인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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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 창3:21, ‘가죽‘의 상응 원리, 성경 전체를 관통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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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이 사실은 야곱에 관한 말씀과 성막에 관한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야곱에 대하여는 그가 에서의 옷을 입고(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맨살이 드러난 손과 목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을 두른 것으로, 그리고 이삭이 그 냄새를 맡고 말하기를,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27:15, 16, 2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That the skins of kids, sheep, goats, badgers, and ram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is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ere Jacob is treated of, and also where the ark is treated of. Of Jacob it is said that he was “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and on his hands and on his neck, where he was naked, “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 and when Isaac smelled them, he said, “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 (Gen. 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또 성막에 대하여는 장막 덮개를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만들라 하였고 (26:14, 36:19),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een in that place. Of the ark it is said that the covering of the tent was “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Exod. 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26:14; 36:19)

 

이스라엘 자손이 길을 떠날 때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법궤를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었으며, 상과 그 모든 기구,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 금 제단과 섬기는 데 쓰이는 모든 기구와 번제단도 모두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습니다 (4:6-14). and that when they set forward Aaron and his sons covered the ark with a covering “of badgers skins,” and likewise the table and its vessels, the candlestick and its vessels, the altar of gold, and the vessels of ministry and of the altar (Num. 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4:6-14)

 

이 가죽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 역시 그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법궤와 성막, 곧 회막 안에 있는 모든 것, 더 나아가 거룩한 의복을 입은 아론에게 속한 모든 것이 천적이며 영적인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저마다의 표상이 없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will in that place also be seen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 for whatever was in the ark, the tabernacle, or the tent, yea, whatever was upon Aaron when clothed with the garments of holines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spiritual, so that there was not the least thing that had not its own representation.

 

 

해설

 

AC.296은 앞글에서 말한 ‘가죽옷’의 의미를 더욱 확장,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타락한 사람에게 입혀 주신 ‘가죽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이 의미가 창세기 한 곳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상응 원리임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가죽이라는 상징은 우연히 사용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반에 걸쳐 일관된 영적 의미를 지닌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형 에서의 옷을 입고, 손과 목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둘렀습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이것은 단순한 변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행위에도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가죽은 사람의 가장 바깥을 감싸는 것이므로, 사람 안에 있는 선이 외적 삶 속에서 드러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염소 새끼의 가죽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겉 사람 안에 자리 잡아 사람의 삶을 감싸고 보호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 예는 성막입니다. 성막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난 사람을 대표하는 가장 거룩한 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의 가장 바깥 덮개가 숫양의 가죽과 해달(badgers)의 가죽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가장 거룩한 것조차 세상 가운데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호하는 가장 바깥층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단순히 둘러싸는 외피가 아니라, 그것을 세상 속에서 보존하고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민수기에서 법궤와 상, 등잔대, 제단 등 모든 거룩한 기구를 이동할 때마다 해달 가죽으로 덮었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하는 동안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거룩한 것의 보호였습니다. 상응으로 보면 사람 안에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 역시 일상의 삶 속에서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 보호막이 바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만 있으면서 생활 속에서 선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쉽게 손상되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죽은 단순한 덮개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존하는 삶의 실제 모습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숫양과 해달 같은 동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가죽입니다. 살아 있는 동물은 애정과 선의 다양한 상태를 상징하지만, 그 가죽은 그러한 선이 가장 바깥의 생활 속에 정착, 사람의 삶을 감싸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신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타락 이후 사람은 더 이상 천적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라는 새로운 보호막을 마련,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

 

글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는 법궤와 성막, 회막, 그리고 아론의 거룩한 의복에 이르기까지 ‘가장 작은 것 하나도 고유한 표상이 없는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이 일부 상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성막의 재료와 색깔, 기구와 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천국의 실재를 나타내도록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면 이러한 표상과 상응의 질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AC.296은 성경의 여러 본문을 하나의 상응으로 연결하면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사람의 가장 바깥 삶을 형성하고 보호하는 주님의 선물임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교회를 보존하신 것처럼, 성막과 법궤도 가죽으로 보호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말씀을 배우고 선을 실천하는 일상의 삶을 통하여 우리 안의 영적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십니다. 이처럼 가죽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생명을 세상 가운데 안전하게 보존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신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의 보호막을 의미합니다.

 

 

심화

 

1. ‘27:15, 16, 27

 

 

AC.296, 심화 1, ‘창27:15, 16, 27’

AC.296.심화 1. ‘창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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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6:14; 36:19

 

 

AC.296, 심화 2, ‘출26:14; 36:19’

AC.296.심화 2.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36:19) 스베덴보리가 AC.296에서 출26:14와 출36:19를 인용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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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6-14

 

 

AC.296, 심화 3, ‘민4:6-14’

AC.296.심화 3. ‘민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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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5, 창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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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위 해설 내용 중 나오는 위 표현은 거의 오늘날 우리 모습과 같아 보이는데요, 그렇다면 태고교회 범주에 속하는 저들과 고대교회, 유대교회 및 기독교회를 거치며, 거의 그 끝자락에 있는 것 같은 오늘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언뜻 보면 AC.295의 설명은 오늘날 신앙인들의 상태와 거의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연결해서 보면,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남아 있는 선의 출처’입니다.

 

태고교회의 첫째, 둘째, 셋째 후손들은 비록 퍼셉션은 잃었지만, 여전히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생명의 줄기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천적 생명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도 태고교회의 천적 선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아직 살아 있었고, 외적인 층만 점차 두꺼워진 것입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유구한 세월을 지나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그리고 기독교회를 거치면서 인류 전체의 상태는 계속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를 스스로 직관하는 능력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리, 양심을 통하여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후손들과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리메인스의 성격’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것은 태고교회의 실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각 사람의 일생 동안 조금씩 심어 주시는 선과 진리입니다. 어린 시절 순수한 애정, 부모를 신뢰하던 마음, 진실을 사랑했던 경험, 이웃을 불쌍히 여겼던 마음 등을 주님께서 보존하셨다가 거듭남의 기초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리메인스는 태고교회의 유산이라기보다, 각 사람 안에서 새롭게 마련되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는 ‘교통의 방식’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천사들과 거의 끊임없이 교통하였습니다.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그 교통은 아직 상당 부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은 일반적으로 천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 교통을 의식 밖에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양심을 통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가운데 인도받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사람이 반드시 더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는 각 시대에 맞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필요했고, 고대교회에는 표상과 상응이 필요했으며, 유대교회에는 의식과 희생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기독교회에는 말씀과 신앙이 주어졌고, 새교회에는 말씀의 속뜻이 열렸습니다. 시대마다 주어지는 은혜의 형태는 달라도,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래서 AC.295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조금 다른 빛이 보입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천적 선을 잃은 뒤, 사실은 희미해진 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처음부터 퍼셉션을 모르고 태어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과 리메인스, 그리고 양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형성해 가십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들이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내려온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방향이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 점이 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태고교회 후손들은 높은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도 아직 산의 공기를 품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오늘 우리는 골짜기에서 출발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조금씩 산을 오르는 사람들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중요하지만, 하나는 잃은 것을 보호받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없는 것을 새롭게 형성 받는 과정입니다. AC.295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오늘 우리 역시 주님께서 각자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어느 시대의 사람도 그의 상태에 맞는 선을 마련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며, 그 선을 통하여 언제나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AC.295, 창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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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5

 

그들을 가리켜 가죽옷을 입었다(clothed with a coat of skin)고 한 까닭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순진무구함(innocence)으로 인해 벌거벗었다(naked)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잃었을 때,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라 합니다.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 서로 이어져 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태고교회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에 따라, 여기서는 그들이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다시 말해 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옷을 입었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는 것은 이 31절로 13절까지 그들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 분명하며, 또한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한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후손들, 그리고 특히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는데, 그들은 이러한 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해설

 

AC.295는 ‘가죽옷’이라는 표현이 왜 사용되었는지를 먼저 태고교회의 ‘벌거벗음’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악을 감추거나 선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의지에는 위장과 꾸밈이 없었으므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순진무구함(innocence)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태고교회 사람들이 순진무구함을 잃게 되자 ‘벌거벗음’의 뜻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살았으므로 자기 상태를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proprium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악과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 이후의 ‘벌거벗음’은 순진무구함이 아니라 선이 결여된 상태, 곧 악 가운데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야기가 역사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벌거벗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외적 서술, 그러니까 무슨 스토리 텔링 같은 이런 서술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방식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사물로 표현하던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벌거벗음’, ‘가죽’, ‘’, ‘입히심’은 모두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벌거벗지 않도록 옷을 입혔다’는 것은 그들을 악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옷은 사람의 내면을 덮고 보호하는 외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천적 선과 퍼셉션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가 완전히 선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더 외적인 선을 주셨습니다. 그 선은 이전의 순진무구함과 같은 내적 선, 곧 천적 선은 아니었지만, 악을 억제하고 사람을 보존할 수 있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죽’은 인간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죽, 그러니까 피부가 몸의 외부를 덮듯이, 가죽옷은 속 사람의 천적 생명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남겨진 겉 사람의 선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형적 착함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도덕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남아 있는 상태에 맞추어 주신 선이며, 이를 통하여 인간이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지지 않도록 붙드시고 보호하신 것입니다.

 

AC.295는 이들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영적 선은 신앙의 진리에서 비롯,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그러한 영적 선이 겉 사람의 생활과 행동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선을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질서 있고 유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선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서로 분리된 두 선이라기보다, 속에서 받은 선과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 자체보다 그 교회의 후손들을 다룬다고 밝힙니다.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선과 진리를 아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지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부여받아 교회의 상태를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이처럼 교회의 생명이 내적인 것에서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간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295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 속에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순진무구함과 천적 선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벌거벗은 채, 곧 악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영적 선과 자연적 선으로 그를 덮고 보호하셨으며, 그 선을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후손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 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AC.295.심화 1. ‘저들과 우리의 차이’ ‘첫 번째 후손들 가운데는 아직 태고교회의 선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들에게서는 그 선이 더욱 외적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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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6, 창3:21, ‘가죽‘의 상응 원리, 성경 전체를 관통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6 새끼 염소와 양, 염소, 그리고 해달(badgers)과 숫양의 가죽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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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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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죽(skin)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염소 새끼나 양, 숫양의 가죽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말씀에서 선에 대한 애정(affections)과 체어리티(charity), 그리고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의미하며, 희생 제사에 사용된 양들도 역시 같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체어리티의 선, 곧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지닌 사람들을 (sheep)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양들의 목자(shepherd of the sheep)라 일컬음을 받으시며,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sheep)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Neither would it be evident to anyone that a “coat of skin” signifies spiritual and natural good, except by a revelation of the internal sense, and a subsequent comparison of passages in the Word where similar expressions occur. The general term “skin” is here used, but that of a kid, sheep, or ram, is understood, which animals in the Word signify affections of good, charity, and that which is of charity, as was likewise signified by the sheep used in the sacrifices. Those are called “sheep”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 of charity, that is, with spiritual and natural good, and hence the Lord is called the “shepherd of the sheep,” and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re called his “sheep,” as everybody knows.

 

 

해설

 

AC.29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 글의 논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킵니다. 앞에서는 ‘가죽옷’에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구절만 떼어 놓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응의 법칙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먼저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의 여러 구절을 서로 비교하지 않고서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그 말씀의 속뜻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계시에 따라 말씀 전체를 서로 비교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속뜻은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기초로 하여 말씀 전체의 일관성을 통해 검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창세기만 설명하지 않고, 시편과 선지서, 복음서 등 말씀 전체를 끊임없이 인용합니다.

 

이어서 그는 여기서 사용된 ‘가죽’이 아무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실제 의미로는 염소 새끼와 양, 그리고 숫양의 가죽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성경에서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아무 동물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정하신 동물들, 곧 모두 특정한 선과 진리를 상징하는 동물들입니다. 따라서 그 가죽 역시 같은 상응을 지닙니다. 창세기 본문은 단순히 ‘가죽’이라고만 기록하지만, 속뜻으로는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깨끗한 짐승의 가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양(sheep)과 숫양(ram)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동물들은 모두 선에 대한 애정과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특히 양은 체어리티 자체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체어리티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양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며, 숫양은 그러한 선이 보다 힘 있게 작용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가죽은 그러한 선이 가장 바깥 삶 속에 나타난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앞 절의 ‘가죽옷’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이며, 양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체어리티의 선이 인간의 겉 생활,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처럼 천적 퍼셉션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단순한 보호의 상징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주님께서 스스로를 ‘선한 목자(10:11)라 하신 사실을 제시합니다. 만일 양이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이라 하시고,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 말씀은 깊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양이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목자는 그들을 사랑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선한 목자’와 창3의 ‘가죽옷’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상응 원리 위에 서 있는 말씀입니다.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요약,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글의 의미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상태를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의 삶을 다시 가르치시고, 그 삶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창3:21은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AC.294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상응 체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죽옷’, 희생 제사의 ‘’, 복음서의 ‘’과 ‘선한 목자’는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문맥에서 기록되었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양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입히시며, 끝까지 목자처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타락 이후 인간이 입게 된 가장 외적인 옷이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은혜의 옷이기도 합니다.

 

 

 

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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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들을 위해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could never appear from the letter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and yet there is evidently here enfolded some deeper meaning, for everyone must be aware that Jehovah God did not make a coat of skin for them.

 

 

해설

 

AC.293은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왜 말씀에는 반드시 내적 의미가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금까지 설명한 ‘가죽옷’의 의미는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창3:21을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 그리고 타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교육과 섭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의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말씀 속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내적 의미를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이미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 즉 속뜻은 겉뜻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겉뜻에 감추어진 주님의 뜻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의 논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으로 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창세기가 여기서 전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재단사가 되어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독자로 하여금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뜻을 찾도록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원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는 말씀의 역사적 사건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역사 속에 주님과 천국, 교회와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글자는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이며, 내적 의미는 그 안에 담긴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겉 글자를 붙드는 것과 내적 의미를 찾는 것은 서로 대립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만일 이 다섯 절이 단순히 몇 가지 역사적 사건만 기록한 것이라면, ‘가죽옷’은 최초의 의복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그 전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가죽옷’ 역시 단순한 옷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변화한 것을 보여 주는 영적 표지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도 더욱 잘 어울립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은 거의 언제나 사람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옷은 거룩한 직분을 의미하고, 흰옷은 진리와 순결을, 더러운 옷은 죄와 거짓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옷 역시 그들의 사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저술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창3:21의 ‘가죽옷’도 같은 상응의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인간에게 허락된 새로운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먼저 겉 글자를 소중히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왜 주님께서 하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겸손히 물어야 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언제나 글자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남은 평생 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말씀의 깊이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AC.293은 창3:21 하나만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가죽옷을 만드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성령께서 하필 ‘가죽옷’이라는 표현을 기록하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따라갈 때, 우리는 글자 너머에서,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새로운 교회의 길을 열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293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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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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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쳐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신 것을 만드셨다(making)입히셨다(clothing), 그리고 가죽옷(coat of skin)으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 Lord instructed them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his instructing them is expressed by “making” and “clothing,” and spiritual and natural good, by the “coat of skin.”

 

 

해설

 

AC.292는 창3:21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말씀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 주셨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단순한 자비의 행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새로운 상태에 맞게 다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는 장면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 절의 중심은 ‘가죽옷’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입히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만드셨다’와 ‘입히셨다’는 두 동사를 모두 ‘가르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말씀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만들어 주시거나 입혀 주시는 행위는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에 알맞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단순히 인간을 보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질서를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천적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퍼셉션을 통해 직접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내적 생명만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고, 보다 외적인 방법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심’은 이전 천적 상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을 위한 새로운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죽옷’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영적 선’은 신앙을 따라 행하는 선이며, ‘자연적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이고 질서 있는 선을 말합니다. 인간은 비록 태고교회가 누리던 천적 선을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완전히 악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영적 선과 자연적 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삶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왜 하필 ‘가죽옷’일까요?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도 이는 가장 외적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적 생명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그 상태를 거의 잃었기 때문에 가장 바깥 단계에서부터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전 천적 상태에 알맞은 옷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맞는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이전보다 낮은 상태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주님의 자비로운 배려이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한 결론으로 이해한다면, 21절은 그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20절이 교회의 처음, 곧 ‘생명’으로 시작된 모습을 보여 준다면,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는 처음의 그 천적 영광을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본래 상태는 사라졌지만, 교회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보존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처음 믿었을 때의 뜨거운 사랑이나 밝은 깨달음을 잃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니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형편에 맞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십니다. 때로는 일상의 의무와 양심, 그리고 신앙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조금씩 인도하십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가죽옷’일지도 모릅니다.

 

AC.292는 ‘가죽옷’을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옷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맞추어진 주님의 교육이며, 새로운 삶의 질서이자 새로운 교회의 출발입니다. 천적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가르치시고, 그 선 안에서 다시 당신과 함께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인간의 실패를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라, 실패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증언하는 은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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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1, 창3:20, ‘창3:20-24는 태고교회 전 생애에 대한 요약’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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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3:20)

 

AC.291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 곧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에 있었던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는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기 때문에, 교회는 여기서 결혼(a marriage)으로 묘사되며, ‘생명(life)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 ‘하와(Eve)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In this verse is described the first time, when the church was in the flower of her youth, representing the heavenly marriage, on which account she is described by a marriage, and is called “Eve,” from a word meaning “life.”

 

 

해설

 

AC.291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에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가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의아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심판이 선포되었는데,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과 ‘생명’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읽기보다 창세기 첫 세 장 전체의 결론으로 읽으면, 이 표현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창3:20은 새로운 사건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 생애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첫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0-24는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다섯 구절로 압축하여 보여 주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절은 교회가 처음 생명을 받던 때를, 21절은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섭리를, 22절은 모독을 막기 위한 자비로운 제한을, 23절은 에덴에서의 추방을 통한 교회의 종말을, 그리고 24절은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각각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단순한 다섯 사건이 아니라, 한 교회의 처음과 끝을 요약한 영적 결론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20절을 보자마자 교회의 ‘처음’을 말합니다. ‘젊음의 꽃을 피우던 때’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상태를 말합니다. 봄에 꽃이 막 피어날 때가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인 것처럼, 태고교회 역시 처음에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결합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선과 진리를 분리하지 않았으며, 사랑과 지혜가 하나 된 상태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을 나타내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적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는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바로 천적 결혼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결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되므로, 성경은 교회를 신부와 아내로 자주 표현하며, 여기에서도 교회를 결혼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담의 아내는 ‘하와’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와(Eve)는 ‘생명’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이름이며, 이어지는 말씀에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설명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입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에 바로 이러한 생명 안에서 존재하였으며, 그 생명을 통하여 천국과 직접 연결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하와’라는 이름은 한 여인의 이름을 넘어, 교회가 처음 받았던 주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창3:20은 창3:19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 ‘생명’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한 교회의 처음과 마지막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생명’으로 시작했던 교회가 결국 ‘흙으로 돌아감’으로 끝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시간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미 서술된 태고교회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조망하는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291에서 스베덴보리가 갑자기 ‘교회의 젊은 시절’을 언급하는 이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3:20-24 전체를 보면, 태고교회의 역사는 인간의 실패로 끝났지만, 주님의 섭리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생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타락 이후에도 가죽옷으로 입히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생명나무를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절은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요약하는 동시에, 그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순간도 교회를 떠나지 않으신 주님의 구원 섭리를 함께 증언하는 아름다운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92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 선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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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0, 창3:20, ‘산’(living)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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