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은 단순한 ‘교회 비판’이 아니라 ‘교회의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여러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능한 한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분명히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문제를 제기하는 태도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미워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마지막까지 그 기조를 유지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난이나 분노의 언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자기 성찰의 언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참된 체어리티는 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상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건강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헌금에 관한 부분도 생각보다 훨씬 균형 잡혀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고백’으로 설명하고, 억지로나 체면 때문에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감사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 역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관리해야 하며, 투명성과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재정 운영이 뒤따라야 한다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접근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헌금은 단순히 재정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사랑의 상응적 표현’이라는 점까지 연결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액수보다 사랑의 질이 중요하며, 투명성 역시 외적인 제도가 아니라 먼저 그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한다고 설명했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죄를 다루는 부분 역시 영상은 결코 목회자를 공격하거나 지도자를 무너뜨리자는 입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목회자도 사람이며 연약할 수 있다’, ‘문제는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죄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목회자를 사랑하는 길도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돕고 필요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려는 균형 감각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상당 부분 만나는 지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악을 미워하되 사람의 구원을 포기하지 말라’는 점을 더욱 강조했을 것입니다. 징계도 궁극적으로는 회복을 위한 것이며, 진리와 자비는 언제나 함께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성도’에 대한 부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영상은 질문 자체를 불신앙으로 몰아서는 안 되며, 베레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주님께서 주신 귀한 능력으로 보았으며, 맹목적인 수용보다 말씀 안에서 분별하는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질문의 출발점도 중요하게 봅니다. 진리를 사랑하여 묻는 질문과 자기 우월감이나 반항심에서 나오는 질문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이 적어도 ‘질문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청년 문제를 다루는 부분도 상당히 균형 있습니다. 청년들을 단순히 ‘믿음이 약한 세대’로 몰아가지 않고, 교회가 먼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프로그램보다 진실성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적 형식보다 내적 생명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영상이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별 주장들이 아니라, 이 모든 현상의 ‘최종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있습니다. 영상은 교회의 생존 본능, 재정의 불투명성, 지도자의 책임 회피, 질문을 막는 문화 등을 주로 외적 구조와 운영 방식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왜 그런 구조가 생겼는가? 왜 교회가 조직을 지키려 하는가? 왜 재정을 투명하게 다루지 못하는가? 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 그 뿌리를 그는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찾습니다. 외적 제도는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상은 ‘교회가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 ‘왜 생존을 더 걱정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질 것입니다. 그 답은 ‘주님의 교회를 자신의 교회처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헌금 문제도 ‘왜 투명하지 못한가?’를 넘어 ‘왜 주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라는 내적 사랑의 문제까지 들어갈 것입니다. 결국 외적 개혁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각 사람의 거듭남이며, 교회의 상태는 그 구성원들의 영적 상태가 모여 형성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핵심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교회개혁적 관점’에서는 매우 균형 있고 성숙한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헌금의 정신을 먼저 세우고, 목회자와 목회자의 죄를 구분하며, 질문을 허용하고,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는 내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외적 문제의 뿌리를 인간 내면의 사랑의 질서와 거듭남의 문제로까지 연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개혁은 조직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영적 개혁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덧붙인다면, 이 영상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도 매우 깊이 조화를 이루는 글이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책입니다. 어떤 이는 세계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예언서로 읽고, 어떤 이는 당시 교회를 향한 상징적 메시지로 이해하며, 또 어떤 이는 인간 영혼의 여정을 담은 영적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이번 강의는 이러한 여러 해석 가운데서도 성경 전체를 하나의 구속사적 흐름으로 연결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출애굽과 광야, 성막과 절기, 선지자들의 예언을 거쳐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다는 큰 틀을 따라 설명을 이어 갔으며, 각각의 사건을 서로 독립된 이야기로 보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설계도 안에서 이해하려는 점이 강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기보다 처음과 끝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의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성경의 여러 사건을 단순한 과거의 역사로 보지 않고 ‘모형’으로 이해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출애굽은 단순한 민족의 탈출이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더 큰 구원의 모형이며,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연단을 받는 과정의 모형이고,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나라의 모형으로 설명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약이 구약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여러 곳에서 구약의 사건들을 ‘장차 올 일의 그림자’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점차 드러나는 책으로 이해하려는 이번 강의의 기본 방향은 충분히 귀 기울여 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함께 읽어 온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왜 그 사건들이 모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강의는 모형 자체를 매우 충실하게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은 단지 미래를 예고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과 인간의 영혼,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창조 질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은 과거의 역사인 동시에 오늘도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과정이며,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지나가는 영적 시험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어느 한 시대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말씀하시는 살아 있는 계시가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번 강의는 요한계시록을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구속사의 완성으로 이해합니다. 대환난과 메시아 왕국, 백보좌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 속에서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과정으로 설명되며, 성도는 이러한 큰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시대를 분별하고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이처럼 미래를 향한 소망과 경각심을 함께 일깨우려는 강의의 의도는 분명하며, 신앙을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해하려는 진지한 태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같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도 먼저 인간의 내면을 바라봅니다. 그는 최후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역사 속의 미래 사건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자기 사랑의 상태이며, 짐승은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된 욕망을, 새 예루살렘은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교회와 거듭난 인간의 마음을 함께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는 책인 동시에,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 싸움과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주는 책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의 관점이며, 말씀을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현재형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강의가 성경의 큰 숲을 보여 주는 데 매우 힘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숲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 숲이 오늘 내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구속사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저는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읽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여러 주제들도 결국 이 하나의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종말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미래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결국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강의는 종말의 여러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반복하여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곧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종말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지식이 삶의 거룩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오늘날 종말론이 자칫 호기심이나 시대 분석에만 머무르기 쉬운 현실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 있는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종말은 두려움을 조성하기 위한 주제가 아니라, 오늘의 삶을 더욱 깨어 있게 만드는 말씀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의는 계속해서 상기시켜 줍니다.
이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보여 줍니다.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모든 교리는 결국 삶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참된 신앙은 지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아는 것보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며, 진리는 반드시 선과 결합되어야 비로소 생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강의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삶의 변화와 순종을 강조하는 모습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정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 근거와 설명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결론만큼은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다시 한 번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번 강의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기는 자’를 종말의 시대를 끝까지 믿음으로 견디는 성도로 설명합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약속된 영광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문맥에서도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이기는 자’를 먼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과 연결합니다. 그가 말하는 싸움은 무엇보다 자기 사랑과 주님을 향한 사랑 사이의 싸움이며, 거짓과 진리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특별한 영적 영웅이라기보다, 날마다 자기 안의 악한 성향과 거짓된 생각을 주님의 도움으로 하나씩 이겨 가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쟁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모든 신앙인의 마음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 현실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한계시록은 더 이상 특정 시대를 위한 책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말씀이었고,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말씀이었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현재형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 의미가 마지막 시대에만 국한된다면, 지난 이천 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직접적인 생명의 말씀이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 읽기 시작하면, 일곱 교회도, 일곱 인도, 일곱 나팔도, 새 예루살렘도 모두 오늘 우리의 신앙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을 단지 예언서가 아니라 거듭남의 책으로까지 이해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 흥미롭게 느껴졌던 부분은 강의가 성경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여러 시대를 거쳐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다는 설명은 매우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또 하나의 흐름을 더합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영혼의 흐름입니다. 창세기는 한 사람의 신앙이 시작되는 때이며, 출애굽은 세상을 떠나는 첫 결단이고, 광야는 시험의 과정이며, 가나안은 거듭난 삶의 평안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 거듭남이 완성되어 새 예루살렘에 이르는 마지막 여정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은 역사책인 동시에 인간 영혼의 자서전이 됩니다. 그것이 상응의 관점이 성경을 더욱 현재형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종말을 바라보는 방향에 있습니다. 강의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를 변화시키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붙드는 것보다, 미래의 소망이 오늘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종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도 가장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번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종말론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종말론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강의는 여러 예언과 상징을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말씀을 붙드는 삶,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삶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결국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종말에 대한 지식이 늘어날수록 사랑은 식어 가고, 겸손은 사라지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만 커진다면 그것은 말씀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반복해서 삶의 변화를 강조한 점은 깊이 새겨볼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말씀의 목적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역사와 예언, 모든 교리와 계명이 결국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만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계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더해질 때 말씀은 미래를 알려 주는 예언서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내적 의미를 끊임없이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교리를 세우려 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사람과 주님이 더욱 깊이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번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가장 큰 차이는 ‘모형’과 ‘상응’이라는 두 관점의 차이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의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같은 사건들을 오늘도 인간의 영혼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하나는 역사의 흐름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거듭남의 과정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두 관점 모두 성경을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오늘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여러 상징들이 주로 미래의 사건으로 해석될 경우,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 예루살렘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일 뿐 아니라,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교회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벨론 역시 역사 속의 한 세력만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거짓 신앙의 상태를 함께 나타냅니다. 이러한 상응의 의미를 함께 살펴볼 때 요한계시록은 특정 시대만을 위한 예언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신앙인에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책이 됩니다. 저는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큰 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번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향한 진지함입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 전체를 하나로 이해하려 하며,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한 가치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 속뜻도 열리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존중하는 마음은 언제나 신앙의 가장 소중한 출발점입니다.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저는 다시 한번 성경을 읽는 두 가지 시선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오늘 내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수록 후자의 시선이 점점 더 깊어짐을 느낍니다. 말씀은 단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천국 사람으로 빚어 가시기 위해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도 마지막 시대의 예언서인 동시에,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거듭남의 기록입니다.
결국 모든 성경 읽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 말씀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만일 그 말씀이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며, 자기 사랑을 조금씩 내려놓게 한다면 우리는 이미 말씀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번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가장 중요한 점이었으며,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성경 읽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은 과거의 기록도, 미래의 예언도 넘어, 오늘도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그러니까 못 듣고,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이‘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아인교회와 농아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여기서도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육체의 눈과 귀가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감각하는 주체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귀는 자연계의 소리를 영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며, 혀와 성대는 영의 생각과 애정을 자연계의 음성으로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 기관의 손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적 청각이나 생각하고 교통하는 능력까지 결여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통로가 제한된 것이지, 그 사람의 영이 불완전하거나 인간성이 덜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사람의 본질이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고,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몸, 보지 못하는 몸, 걷지 못하는 몸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영원한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에서 영이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 통로가 제한된 상태이지, 영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AC.322는 농인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청각은 단순히 물리적 소리를 더 크게 듣는 능력이 아닙니다. 영계의 말은 생각과 애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교통입니다. 지상에서는 음성, 문자, 표정, 몸짓과 같은 외적 기호를 거쳐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애정이 그 표현 안에 함께 담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도 육체를 벗은 뒤에는 다른 영들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겪었던 의사소통의 장벽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인의 지상 삶을 단지 ‘사후에 고쳐질 결핍’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보다 그의 마음의 애정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는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조금도 덜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도 언제나 육체적 청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로 설교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수어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되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는 기관의 상태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말한다’는 것도 음성을 낸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어는 얼굴 표정과 공간, 움직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애정과 관계를 풍성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인을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실제 언어 능력과 인간적 교통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 목회 역시 단순히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기는 보조적 사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육화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농인 공동체에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고립, 교육과 정보 접근의 어려움,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인 목회자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누며, 교회가 참된 영적 공동체가 되도록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특히 교회는 농인을 일방적인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농인 공동체는 언어가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교통의 본질이 음성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나눔이라는 사실, 몸 전체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의 언어, 곧 생각과 애정이 표현 전체에 담기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장애를 곧바로 영적 결함의 표지로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몸은 유전, 질병, 사고, 환경 등 수많은 자연적 원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고, 그가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문자로, 누군가는 수어와 표정과 관계를 통하여 받습니다. 통로는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농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는 기적’만을 목표로 삼으면,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공동체, 그리고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치유는 신체 기능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립이 교통으로, 배제가 공동체로, 수치가 존엄으로 바뀌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AC.322의 마지막 문장인 ‘감각하는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도 단순히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은 감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다른 사람의 애정과 필요를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온전한 인간,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거듭날 수 있는 완전한 인간 구조를 가진 존재이며, 다만 자연계의 특정 감각 통로에 제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후에는 그 제한이 벗겨지고,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생각과 애정과 교통의 능력이 훨씬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이미 사람이었던 자신이 육체의 제약 없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AC.322는 농인들을 향해 ‘언젠가 귀가 열릴 것이니 지금의 삶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인들에게 ‘육체의 귀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이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참으로 말하는 이는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농인을 섬기시는 그 목사님의 사역은 바로 이 영적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하여 교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귀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걸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세요. 안 믿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들립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 활동에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는 AC.321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글입니다. 앞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사고, 그리고 언어 능력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히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영이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false notion)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형체 없는 의식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사람의 실질적인 내적 인간, 속 사람이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입니다. 따라서 감각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게 있습니다.
영들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지상의 한낮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의 빛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빛이며, 그 빛 안에서 천사들은 사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태까지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시각은 단순히 더 밝게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보는 능력입니다.
청각 역시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영계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전달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골라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이 생각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들의 언어는 짧은 표현 안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까지 함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이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다’(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는 뜻입니다.
촉각에 관한 설명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감각이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촉각의 여러 차이와 형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의 본질이 어떤 대상과의 접촉과 반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각은 빛과의 접촉이며, 청각은 소리의 진동과의 접촉이고, 후각은 냄새의 기운과의 접촉입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바깥의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촉각은 모든 감각의 가장 일반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고통을 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욕망이 외적으로 드러나며, 악한 영들은 서로의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상태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 접촉이 그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선한 사랑과 지혜에 접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같은 영적 감각 능력이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에서는 행복이 되고 지옥에서는 고통이 됩니다.
이 글은 욕망과 애정도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사람이 전혀 다른 욕망을 새로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한 주된 사랑이 육체의 외적 제약을 벗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은 새로운 성품을 얻는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진짜 성품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사고 능력에 관한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idea) 안에는 지상에서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생각이 단순히 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내적입니다. 자연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의 제약을 받지만, 영계의 생각은 애정과 의미, 관계와 목적을 하나의 관념 안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생각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려면 많은 문장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곧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더 예리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확증하는 데 사용합니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지혜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능력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와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더 완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은 불완전한 인간의 잔재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인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이 글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오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기쁨과 고통으로 느끼는가를 포함한 생명 전체의 수용 능력을 뜻합니다. 천국의 생명은 선과 진리를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생명이며,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거짓에만 반응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참되다고 느끼며, 무엇과 결합하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AC.322는 죽음 뒤의 삶이 지상보다 희미하고 비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육체는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자연계에 나타내는 도구이며, 육체가 벗겨지면 영의 감각과 생각과 애정은 본래의 힘을 더욱 자유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성품에 따라 더욱 온전하고 분명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일을 알았던 이유를 성경 중심의 삶에서 찾고, 이를 자신의 성경 연구와 ‘잇사갈 성경대학’ 설립의 근거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평생 연구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열정은 귀합니다. 특히 신학을 오래 공부했음에도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 자체를 공부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교리 체계와 신학 지식이 말씀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중요한 자각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교회의 전통이나 인간의 철학이 말씀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며, 모든 교리는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외침에는 분명 존중할 만한 중심이 있습니다.
다만 먼저 몇 가지 성경 본문의 사실관계는 바로잡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 유다 지파를 장자 지파라고 설명하지만, 육신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유다는 장자 지파라기보다 통치권과 지도력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유다에게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창49:10)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또한 모세가 잇사갈 지파에게 ‘성전을 떠나지 말고 제사를 기뻐하며 살면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얻을 것’이라고 단독으로 축복한 것은 아닙니다. 신33:18-19은 스불론과 잇사갈을 함께 향한 축복입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특징을 말할 때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기보다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했다’는 본문 표현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대상12:32의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 이백 명’은 잇사갈 지파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세계사의 태초부터 종말까지를 파악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지파의 용사들과 지도자들을 열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당시 잇사갈 자손들은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가야 할 때를 분별했으며,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세’는 단순한 시대 예측이나 종말 연대표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대의 모든 사건과 미래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확대하기보다, ‘말씀의 진리 안에 있을 때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온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잇사갈은 단순히 성경을 많이 공부하는 학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두 지파는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요소를 나타내며, 각 지파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잇사갈은 이름의 뜻과 야곱의 축복을 통해 ‘보상’, ‘품삯’, ‘일의 결과’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창49:14-15에서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 묘사되며,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나귀’는 자연적 이성을, ‘짐을 멘다’는 것은 봉사와 쓰임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지혜는 지식을 많이 축적한 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제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유용하게 섬기는 데서 생기는 지혜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논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사람들이 ‘시세를 알았다’는 것을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씀을 연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동으로 영적 분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의 빛은 지식의 양보다 사랑의 방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배우면 그 진리는 내적으로 열리지만, 자기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배우면 같은 성경 지식도 닫힌 지식이 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수백 개의 과목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시세 분별로 이어지려면 먼저 ‘내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진리가 누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신학을 십 년 공부했지만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을 공부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걸음이 더 필요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자료를 더 많이 모으고, 고대 문헌과 유대교 해석과 주석을 더 깊이 조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료는 문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말씀의 신성은 그 자료들의 오래됨이나 희귀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문자 안에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공부’에서 ‘성경 공부’로 옮겨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다시 ‘성경 공부’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상에서는 ‘성경은 태초부터 요한계시록의 종말까지를 기록한 책이므로 성경을 공부하면 시세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 성경을 세계사의 연대표나 미래 예측의 암호책으로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태초’는 사람 안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첫 상태이며, ‘종말’은 옛 교회가 끝나고 새로운 영적 질서가 세워지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참된 목적은 세상에서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데 있지 않고, 내 안의 혼돈이 어떻게 질서가 되고, 자연적 사람이 어떻게 영적 사람이 되며, 자기 사랑의 옛 세계가 어떻게 끝나고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대상12:32의 ‘시세를 안다’는 말씀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때’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때는 진리를 배워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시험을 견뎌야 할 때이며, 어떤 때는 악을 끊어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배운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할 때입니다. 잇사갈 자손이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형세를 잘 읽었다는 의미를 넘어,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표상합니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미래를 신비하게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여 ‘지금 무엇이 옳은가’를 밝히는 사람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830개의 과목을 만들었으며 그중 72과목을 뽑아 성경대학 과정을 운영한다고 말합니다. 이 열정과 노동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과목의 수보다 그 과목들이 사람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묻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놀라고, 뜨거워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은 좋은 출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탄과 열정은 아직 거듭남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때문에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던 태도가 부드러워졌는가, 정직과 책임과 체어리티의 삶이 자라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이는 감탄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증명됩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이 쓸 수 없는 신비한 책임을 깨닫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지성과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으로 ‘오직 하나님’을 외치면서도 자기 해석과 자기 업적, 자기 이름을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학문적 업적이 크지 않아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고 조용히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역시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대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저술과 자료를 입수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기보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보조 자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성경만’이라는 말은 자료의 범위를 뜻하기보다 최종 권위의 중심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외부 자료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말씀 위에 두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오직 성경’은 타당한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유대 문헌이나 초대교회 문서가 성경의 깊이를 자동으로 보증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전통 의존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매우 거룩하게 보았지만, 문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성전의 문과 같고, 그 안에는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버리고 숨은 의미만 찾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속뜻은 문자 위에 기초하며, 문자 안에서 보존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오직 성경’은 문자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상상으로 비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질서와 상응, 주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거듭남을 중심으로 문자의 깊이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 성경의 모든 책이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내적 의미가 연속적으로 담긴 책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록된 사도적 문서들을 구분합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모세오경과 여러 예언서는 내적 의미가 글자마다 연속적으로 담긴 말씀에 속하지만, 바울서신은 교회에 유익한 교리적 문서이면서도 같은 방식의 연속적 속뜻을 지닌 말씀으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이라는 말도 단순히 육십육 권을 동일한 방식으로 읽는다는 뜻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신적 질서와 중심을 분별하며 읽는다는 뜻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성경대학’이라는 이름에도 귀한 가능성과 함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잇사갈의 영성은 시대를 분석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고, 진리를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이름을 붙인 성경대학이라면 학생들에게 단지 놀라운 성경 지식이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자료를 제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배운 진리를 어떻게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선한 쓰임으로 바꿀 것인지, 어떻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분별하고 끊을 것인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시세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성경만 공부하고 싶은 분’을 초대하는 장면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 공부는 사람을 폐쇄된 지식 공동체 안으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체어리티와 겸손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다른 교파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게 되고, 자신들이 특별한 비밀을 아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부는 잇사갈의 지혜가 아니라 영적 교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선을 존중하며, 자신의 책임을 더 성실히 감당하게 된다면 그 공부는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의 가장 귀한 부분은 ‘성경에 관한 공부에서 성경 자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하는 데서 말씀의 속뜻을 보고, 말씀의 속뜻을 보는 데서 자기 삶을 비추며, 자기 삶을 비추는 데서 실제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 참된 잇사갈 사람이며, 시대의 사건을 많이 해석하는 사람보다 현재의 상태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분별하여 행하는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잇사갈의 능력은 성경 지식의 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 시대의 상태를 분별하고, 그때그때 마땅히 행할 선을 실천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 많이 읽겠다는 표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오직 주님께 배우고, 배운 진리를 자기 삶의 선한 쓰임으로 바꾸겠다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방언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방언할 때에는 세 가지 생각, 곧 ‘사탄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세워진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께 더 빨리 전달되고 응답받는다’, ‘우둔함이 제거되고, 지혜와 명철과 총명이 들어와 영·혼·육이 세워진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강사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로 규정하고,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선물을 내던지는 행위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까지 말합니다. 또한 방언의 소리가 단순하거나 반복적이더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말고, 계속 사용하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화되고, 삶의 돌파와 응답을 경험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강의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귀히 여기고, 기도를 지속하며, 영적 나태함에서 벗어나라는 긍정적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면, 이 강의는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하나의 발성 현상과 결합시키고, 그 현상에 일정한 영적 효능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방언을 무조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선물이라고 전제한 뒤, 그것을 의심하는 마음을 악한 귀신이 넣어 주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인간의 이성과 분별력은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 안에서 이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인지 살피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맹목적 확신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내적 동의입니다. 물론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의심과 혼란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이나 검토를 악한 영의 역사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현상이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기 암시인지, 집단 분위기의 영향인지, 습관적으로 만들어진 소리인지 살피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분별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의심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심을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정직한 질문은 주님께서 주신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악한 삶을 고집하기 위해 일으키는 의심은 다른 문제입니다.
강사는 ‘내 방언이 정말 방언인가’라고 묻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멈추고, 무조건 계속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현상의 진위보다 그 현상이 어떤 내적 열매를 맺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방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겸손해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유창하고 강렬한 방언을 하더라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그대로 품고 있으며, 타인을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자랑한다면 그 방언은 그의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방언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정직과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실제적인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신비함이나 기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이 선과 진리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교리로도 지나친 주장입니다.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으며, 은사의 종류와 기능도 서로 다릅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지, 개인의 영적 등급을 증명하는 표지가 아닙니다. 누군가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방언을 중단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더는 그에게 선물을 주지 않으신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발성 현상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분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의심하면 죄’라고 압박하면, 사람은 자유롭게 진리를 살피기보다 종교적 권위에 복종하여 자신의 판단을 억누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강요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사람의 내면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방언을 ‘하늘나라 언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언어는 단순히 지상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반복 음절을 뜻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말은 그들의 사랑과 사고에서 직접 흘러나오며, 그 말 안에는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풍부하고 완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천국의 말은 생각과 애정의 상응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천사들은 서로의 말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발성하는 소리를 곧바로 천국의 언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언어가 지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다는 것과, 뜻을 알 수 없는 모든 종교적 발성이 천국의 언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또한 강사는 고전14:2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를 근거로 ‘방언은 통역하거나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고전14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하며, 교회 안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방언은 본질적으로 절대 통역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해당 장 전체의 문맥과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현은 통역의 은사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보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듣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염려한 것도 바로 교회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인해 세움을 얻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방언 그 자체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 고전14의 중심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순절의 여러 언어 역시 단순히 뜻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발성이 아닙니다. 오순절 사건에서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다는 것은 복음이 여러 민족과 다양한 내적 상태에 전해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언어’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 곧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 언어의 기적은 사람이 무의미한 소리를 반복하는 데 있기보다, 서로 다른 상태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각자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입술을 여시는 목적은 진리가 전달되고, 선이 행해지며, 이웃이 세움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강의에서 제시하는 첫 번째 생각은 방언할 때마다 강철 같은 영적 방패가 세워져 사탄의 공격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영적 작용은 성경 본문이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직접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공격을 막는 실제 방패는 진리에 대한 신앙과 선한 삶입니다. 엡6에서 말하는 ‘믿음의 방패’도 특정한 발성법이라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진리 안에 서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한 영들의 공격은 사람이 품고 있는 악한 욕망과 거짓 관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그 공격에 맞서는 길은 반복적인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짓을 진리로 밝히고,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하면서도 미움과 복수심, 탐욕과 음욕, 거짓과 교만을 붙들고 있다면 소리가 그를 자동으로 보호하는 방패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유혹 가운데서 악을 거절한다면, 바로 그 진리가 실제적인 방패가 됩니다.
강사는 방언할 때 ‘지금 방패가 쳐지고 있다’고 계속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은 실제 영적 보호와 심리적 자기 암시를 혼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반복하면 사람은 실제로 안정감이나 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곧 영계에서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환상이나 내적 느낌을 무조건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영적 세계의 사실은 개인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따라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강철 방패로 둘러싸이고 있다’는 심상을 반복하는 것보다, ‘주님, 제 안의 거짓을 보게 하시고 악을 거절할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실제 삶에서 진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실질적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방언하면서 마음의 소원을 생각하면 성령께서 그 기도를 더 효과적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빨리 전달하시며, 그 결과 응답이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역시 기도를 마치 영적 전송 속도의 문제처럼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한국어로 기도하든, 침묵 가운데 마음으로 기도하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든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의도와 필요를 이미 아십니다. 기도는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부터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주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응답을 재촉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고 정돈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참된 기도는 사람의 소원이 무조건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님께 강하게 밀어 올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원함을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아래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소원 중에는 선한 것도 있지만,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실제로 자신과 이웃의 영원한 선을 위한 것인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면 소원이 빨리 응답된다’는 기대는 기도를 욕망 성취의 도구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이 소원을 반드시 빨리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요구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녀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 자체는 귀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방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녀의 자유가 무시된 채 회심이 자동으로 앞당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기도는 자녀를 강제로 변화시키는 영적 압력이 아니라, 부모 자신이 더 지혜롭고 인내하며, 사랑으로 자녀를 대할 수 있도록 주님께 자신을 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녀를 정죄하고 통제하며, 자신의 종교적 기대를 강요한다면, 그 기도는 입술의 열심과 달리 자녀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은 방언할 때 사람의 우둔함과 연약함이 제거되고, 지혜와 명철과 총명이 부어지며, 영과 혼과 육이 점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전14:4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덕을 세운다’는 말을 지능이 높아지고, 총명이 자동으로 주입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세움’은 신앙의 강화와 영적 유익을 뜻할 수 있지만, 반복 발성을 통해 지혜가 자동으로 증가한다는 공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혜는 진리를 많이 알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할수록 그 진리는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고, 그때 주님께서 더 깊은 이해를 열어 주십니다.
‘영·혼·육’이 방언으로 세워진다는 설명도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서로 독립된 세 부분이 기계적으로 결합한 존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혼’은 가장 깊은 생명의 시작과 관련되고, ‘영’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살아가는 인간 전체이며, 육체는 지상에서 영이 활동하기 위한 외적 기관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방언을 통해 영과 혼과 육에 능력이 주입되는 과정이 아니라, 속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는 과정입니다. 지성과 의지, 생각과 행동, 속과 겉이 점차 하나의 질서로 정돈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강의는 방언을 많이 하면 ‘없어질 부분들이 제거되고’ 사람이 변화되어 성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 따르면 악은 어떤 기도 행위의 반복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은 사람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저항할 때 물러납니다. 예를 들어, 분노가 많은 사람이 아무리 오래 방언하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분노의 악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이 방언하면서도 부정한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탐욕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적 욕망에 끌리는 사람이 방언의 기름부음을 느끼면서도 음란한 시선과 행동을 끊지 않는다면, 그것이 성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에는 반드시 자기 성찰, 회개, 악과의 싸움, 새로운 삶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 반복되는 ‘돌파’라는 표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을 특정 방식으로 하면 응답과 성장과 변화의 돌파가 빠르게 일어난다는 가르침은 신앙을 일종의 영적 기술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매우 깊고 세밀하게 역사하며,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문제는 즉시 해결되지 않으며, 오랜 기다림과 실패와 낮아짐을 통해 사람의 자기 사랑이 드러나고, 정화되기도 합니다. 느린 과정이 반드시 믿음 부족의 결과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능력과 즉각적인 체험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진리를 붙들도록 기다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방언의 소리와 ‘기름부음’을 서로 연결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강의에서는 방언을 자신 있게 크게 하고, 특정한 생각을 품으면, 방언 자체에 기름부음이 넘치고, 힘 있게 뻗어 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적 능력은 소리의 강도나 유창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국의 능력은 선과 결합한 진리에서 나옵니다. 악한 사람도 종교적으로 매우 열정적일 수 있고, 강렬한 음성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계의 악한 영들 역시 외적으로는 열심과 확신을 보이며,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감정과 반복되는 음절, 몸의 열감, 황홀감, 소리의 유창함을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현상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의 위험은 방언을 의심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영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놓는다는 점입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무시하는 사람, 악한 영의 의심에 사로잡힌 사람, 영적 발전이 멈춘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기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누군가는 가르침으로, 누군가는 섬김으로, 누군가는 위로와 자비로, 누군가는 조용한 충성과 정직으로 주님의 나라를 섬깁니다. 눈에 띄는 초자연적 은사가 반드시 더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방언 경험을 무조건 거짓이나 자기기만으로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 기도가 깊은 집중과 헌신을 돕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정을 주님께 드리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면 그것을 자랑하거나 구원의 표지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말씀과 이성의 분별 아래 두어야 합니다. 방언 후에 자신이 더 사랑하고 용서하며 정직하게 살게 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라도 말씀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삶에서 벗어난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방언이 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이끈다면 그 열매 자체는 귀히 여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성령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본질적인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신비한 음절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지만, 이웃을 살리는 친절한 말, 잘못을 인정하는 정직한 말,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는 위로의 말,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전하는 말은 천국의 애정이 지상 언어 안에 담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언어란 단지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애정이 진리의 형식을 입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할 때 가져야 할 가장 안전한 생각은 ‘방패가 생긴다’, ‘응답이 빨라진다’, ‘지혜가 자동으로 쏟아진다’는 확신이라기보다 다음과 같은 태도입니다. ‘주님, 이 기도가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저를 더 겸손하게 하시고, 제 악을 보게 하시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체험 자체를 사랑하거나 영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십시오.’ 이러한 기도는 방언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사람의 의지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귀히 여기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한다는 점에서는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의심을 악한 귀신에게서 온 것으로 단정하며, 방언에 ‘보호’, ‘응답 가속’, ‘지혜 주입’, ‘성화’, ‘돌파’라는 효능을 직접 연결하는 것은 성도들을 체험 중심의 신앙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성령의 역사는 특정 음성 현상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한 진리이며,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움직여 선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가장 확실한 표지는 방언의 유창함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최종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그 방언이 사람을 실제로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방언을 한 뒤에도 더 쉽게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며, 방언하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고, 회개 없이 동일한 악을 반복한다면 그 방언은 거듭남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후에 자신의 잘못을 더 잘 보고,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섬긴다면 그 변화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말보다, 알아들은 진리 하나를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돌파는 입술의 음절이 달라지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에 갇혀 있던 마음이 열려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첫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모호한 표현들을 정리하고, 삼신론과 양태론, 아리우스주의와 예수 유일주의를 구분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노력 자체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은 신앙의 기초이며, 잘못된 하나님 이해는 결국 잘못된 신앙생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바로 이 점에서는 강사와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단순한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러 차례 강조합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전통적인 조직신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강의는 처음부터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구분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이며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한 하나님 안에 세 위격(Persons)이 영원부터 존재한다’는 전통적 표현 자체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세 하나님을 연상시키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는 저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에서 니케아 이후의 삼위일체 교리가 아무리 ‘한 하나님’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결국 세 분을 각각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머리로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기도할 때는 성부 따로, 성자 따로, 성령 따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 의식 속에서는 세 신(神)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입술은 하나를 말하지만 생각은 셋을 만든다’는 역설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삼위일체는 부정되어야 할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할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 삼위는 세 위격이 아닙니다. 그는 저서, ‘주님’(The Lord)과 ‘참된 기독교’에서 삼위는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세 가지 신성한 본질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신성 자체’(Divine Itself)로서의 성부, ‘신적 인성’(Divine Human)으로서의 성자, 그리고 ‘신적 흘러나옴, 활동’(Divine Proceeding)으로서의 성령입니다. 이 셋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신성의 세 가지 본질적 구별입니다. 그는 인간을 비유로 들어 영혼과 몸, 그리고 활동이 서로 구별되지만 한 사람을 이루듯이, 주님 안에서도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 그리고 신적 작용, 활동이 하나를 이룬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비유조차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세 사람을 연상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성경적이라고 그는 판단합니다.
강의에서는 성경 번역의 문제를 상당한 비중으로 다룹니다. 특히 영어의 ‘one’을 ‘한 분’으로 번역하느냐 ‘한’으로 번역하느냐에 따라 교리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언어의 미묘한 차이가 신학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번역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문자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문자 안에는 언제나 더 깊은 영적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에서 성경의 문자, 즉 겉 글자만 가지고 교리를 세우면, 서로 다른 구절을 근거로 얼마든지 상반된 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 전체를 비추는 하나의 중심 원리가 필요한데, 그 중심은 언제나 ‘주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어느 구절이든 결국 주님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특정 번역어 하나만으로 삼위일체를 결정하려는 접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전체가 누구를 계시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강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을 모두 비판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낮추는 아리우스주의를 분명히 거부합니다. 주님은 단순한 최고의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양태론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삼위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가면만 바꾸어 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단순한 역할 놀이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성의 구별입니다. 따라서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양태론 모두를 넘어서려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이 독특한 이유입니다. 그는 전통적 삼위일체와 양태론 사이의 절충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제시합니다.
특히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세 위격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말씀하시며, 서로 교제하신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순종하시는 장면을 결코 두 신적 인격 사이의 대화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榮化)가 완성되기 이전, 곧 아직 완전히 신성과 하나 되지 않은 인간성을 입고 계시던 주님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비밀’과 ‘주님’에서 그는 주님의 생애 전체를 인간성을 점차 신성으로 완전히 하나 되게 하시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의 기도와 순종은 영원히 독립된 두 인격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인간성을 영화시키시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내적 싸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는 그 영화가 완성되어,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강의는 니케아 공의회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니케아와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교회가 점차 사도적 단순성을 잃었다고 봅니다. 그는 초대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철학적 개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님 이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변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평범한 신자들은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신비’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끝없는 논쟁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새로운 계시를 통해 가장 먼저 바로잡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하나님 이해였습니다.
강의 후반부에서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명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 마28:19, 요14, 고후13:14 등은 전통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본문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구절들을 모두 인정합니다. 다만 그는 이 본문들이 세 인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성의 삼중성을 보여 준다고 읽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세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단수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와 본질과 권능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세 이름을 나열하신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령에 대한 이해도 전통 신학과 다릅니다. 그는 성령을 제3의 독립된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부활하시고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발출되는,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능력이며, 천사들과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임재입니다. 마치 태양과 빛과 열이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과 성령 역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만도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 자신의 신적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제3의 인격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께서 직접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삼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이 질문으로 모입니다. 그는 저서, ‘주님’을 통해 구약의 여호와께서 신약에서 인간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증언합니다. ‘참된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결국 한 분 주님께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에서는 천국의 모든 천사들이 오직 한 분 주님만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비밀’ 전권을 통해 성경 전체가 바로 그 한 분 주님만을 증언한다고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삼위일체는 결코 세 인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지혜와 작용이 완전히 하나 되신 한 분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교리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성경적으로 설명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선에서 보면, 여전히 니케아 이후의 전통적 틀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새로운 계시가 요청된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한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 신’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새로운 계시를 통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의 참뜻을 다시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최종 목적은 세 위격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저서, ‘주님’, ‘참된 기독교’, ‘천국의 비밀’을 통해 일관되게 증언한 핵심이며, 동시에 오늘날 삼위일체를 다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강의는 처음부터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어떤 ‘안경’을 쓰고 있으며, 그 안경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강연자는 자신이 성경 자체를 다시 읽은 결과,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아니라 후대의 신학이 만들어 낸 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흥미롭게도 ‘교리라는 안경이 성경 이해를 좌우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스베덴보리 역시 매우 강하게 제기했던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과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곳곳에서, 사람들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형성된 교리와 자기 이해를 통해 말씀을 읽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언제나 사람의 애정과 사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말씀의 속뜻을 새롭게 열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안경’이라는 비유 자체는 상당히 의미 있는 문제 제기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기존 교리를 부정하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일관성 속에서 모든 교리를 다시 재정립하려 했다는 점이 이 강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입니다.
강연자는 이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지만 한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단정합니다. 즉 두 하나님이며 두 인격인데, 다만 목적과 뜻이 같기 때문에 ‘하나’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강연자와 일정 부분 겹치면서도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전통적인 ‘세 인격이면서 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실제로는 세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심어 준다고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상이 교회의 가장 큰 혼란 중 하나가 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인 아버지와, 나타난 신적 인성, 그리고 발출, 즉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시는 신성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 그리고 활동이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 안에서도 신성과 인성, 그리고 활동, 즉 흘러나오시는 신성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반대한 것은 ‘삼위’ 자체가 아니라 ‘세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삼위의 이해’였습니다. 그는 삼위를 ‘한 인격 안의 삼위’로 재해석합니다. 이 점에서 강연은 전통 교리를 비판하는 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일부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그 대안으로 두 하나님을 세우는 순간 스베덴보리의 중심 교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강연은 예수님의 순종을 중요한 논거로 사용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들어, 뜻이 둘이므로 두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성, 그러니까 인성을 입으셨으며, 그 인성 안에는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시험과 유혹을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겟세마네에서 나타난 두 뜻은 두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영화되지 않은 인성과 그 안에 내재한 신성 사이에서 일어난 마지막 시험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외부의 다른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성을 끝까지 신성에 복종시키심으로써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즉 ‘Divine Human’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화’(Glorification)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두 신격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구속 과정의 일부입니다.
강연은 또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하셨으며, 태초에 아버지 안에서 혼으로 계시다가 몸을 입고 나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독창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원부터 존재하신 것은 ‘신적 진리’ 곧 말씀(Logos)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분리된 또 하나의 존재가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가 인성을 입고 세상 가운데 오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태초 이전에 ‘아들’이라는 독립된 존재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존재하신 것은 신성 자체이며, ‘아들’이라는 표현은 시간 속에서 성육신하신 이후의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니케아 이후 형성된 ‘영원한 아들의 출생’ 개념을 비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영원한 출생이라는 개념이 성경보다 철학적 추론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원부터 두 번째 하나님이 존재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성령에 대한 강연자의 설명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는 성령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며, 아버지께서 직접 오실 수 없는 곳에서 대신 역사하시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성령을 제3의 독립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을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주님의 역사하심이며,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신적 영향력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도 거부합니다. 그러나 강연이 성령을 오직 아버지의 영으로만 설명하는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령은 영화되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부활 이후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영화된 인성으로부터 신적 진리가 직접 흘러나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버지와 분리된 존재도 아니지만, 단순히 아버지만의 영도 아닙니다. 영화되신 주님의 신적 활동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 강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하나다’라는 표현을 ‘한 존재’가 아니라 ‘뜻과 목적의 일치’로 해석하는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 논리는 일정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될 때, ‘하나’라고 표현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일치가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완전한 연합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과 지혜가 부분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는 신성과 인성이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하나됨과 주님의 하나되심은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동일한 수준의 하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구별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강의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여러 난제를 정면으로 다루려는 진지한 시도를 보여 줍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둘러싼 전통적 설명이 일반 신자들에게 논리적으로 매우 어렵게 들린다는 문제의식도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강의는 전통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는 상당한 통찰을 보이지만, 그 대안을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세 하나님을 거부하려다 두 하나님을 세우는 결과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참된 해결은 하나님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과 보이는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본 자는 나를 보았다’는 말씀을 가장 결정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대표하는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이 강의는 기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중요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으나, 그 문제의 최종 해답은 ‘두 하나님’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계시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아들과 뒤늦게 깨닫는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세대 갈등이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진리의 질서’가 ‘사랑의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란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바라보는 중심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질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원고의 강인호 장로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지옥은 악한 의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고 믿는 것 안에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랑이 섞여 있을 때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악인과 선인의 대결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신앙’과 ‘자신이 만든 신앙’을 구별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원고는 매우 의도적으로 ‘3040 세대가 조용히 사라진다’는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초점이 젊은 세대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로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가’를 묻지만, 이 이야기는 ‘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서만 세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의 눈이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를 보아도 청년은 다른 교회를 보고, 장로는 또 다른 교회를 봅니다. 문제는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강인호 장로는 처음부터 거의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새벽기도 20년 개근,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보일러를 켜고, 헌금을 관리하고, 회의록을 검토하고,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봉사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본받을 만한 신앙인입니다. 실제로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인 선행 자체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선행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인지, 아니면 자신의 proprium이 만들어 낸 질서인지는 오직 시험이 올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없을 때는 둘 다 거의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시험이란 악인을 벌주는 시간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장로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원고는 이것을 단순한 습관처럼 묘사하지만, 상응적으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 ‘자리’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편안한 자리에 머무르려 합니다. 장로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올려놓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곳은 내 자리입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자기애는 대개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자기 중심성은 충분히 작동합니다. 오히려 예의 바른 자기애가 더 깊고 교묘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전통’입니다. 장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즉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전통인가?’ 전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전통을 보존한다면 이미 전통은 껍데기가 됩니다. 천국에서는 질서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질서는 사랑을 위한 질서입니다. 사랑을 억누르는 질서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장로가 지키고 있던 것은 질서였지만, 주님이 세우시는 질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서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사의 청년부 개편안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시험으로 등장합니다. 영상 설교, 소그룹, 청년들의 참여, 질문 가능한 구조 등은 원고 안에서는 단순한 프로그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프로그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들을 수 있는가’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회에서는 가장 먼저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놀라운 것은 반대 이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자기애는 언제나 자신을 정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아들 도훈은 끝까지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틀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는 사랑 없이 전달되면 닫히지만, 사랑 안에서 전달되면 스스로 사람의 양심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도훈은 아버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가 시작됩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장로는 끝까지 방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방어막을 통과합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손자의 질문입니다. ‘아빠는 왜 교회 안 가요?’ 어린아이의 질문은 신학도 아니고 논쟁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오는 순수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아이의 질문은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진실만 요구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처음으로 자신 안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험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질문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아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예배당에서 다시 읽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원고는 매우 아름다운 상징을 사용합니다. 인쇄된 종이를 성경책 안에 끼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말씀 앞에 놓이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장로는 말씀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고통을 가지고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거듭남은 시작됩니다.
‘카페입니까?’라고 말했던 자신의 음성이 되돌아오는 장면은 심판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심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장로는 처음으로 자기 말을 자기 귀로 듣습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드리는 기도는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주님, 제가 지킨 게 뭡니까? 교회입니까, 제 자리입니까?’ 이 질문은 사실 모든 종교인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만든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거듭남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선이라고 믿는 동안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주님이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이어 등장하는 시편 127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다’는 이미지를 반복합니다. 장로는 교회를 세운다고 믿었습니다. 전통도 세우고, 질서도 세우고, 권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세운 것은 구조였고, 주님이 세우시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입니다.
이후의 변화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장로는 갑자기 개혁가가 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도 계속하고, 가장 먼저 교회 문도 엽니다. 달라진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말했고, 이제는 가장 마지막에 말합니다. 이전에는 빨간 펜으로 수정했고, 이제는 검은 볼펜으로 청년들의 말을 적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교회에 맞추려 했고, 이제는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외형은 거의 같지만 내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장로가 결국 아들이 등록한 교회를 묻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포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교회를 자기 소유로 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조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면 됐다’라는 장로의 마지막 마음은 비로소 보편교회의 관점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보다 주님의 교회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를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곧 ‘청년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원고가 말하려는 핵심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그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질서 자체가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을 살리는 질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년들의 요구 역시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리를 전달하는 사랑과 경청의 방식은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원고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전통을 버리라’도 아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도 아닙니다.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들으셨고,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제목은 ‘교회를 떠난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난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가 떠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주님의 집을 세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손자의 질문을 통해,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온 친구를 통해, 아들의 담담한 메시지를 통해 이미 집을 세우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거대한 기적보다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엮어 한 사람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언제나 밖에서 보면 아주 조용하지만, 하늘에서는 한 영혼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가장 큰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