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7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 도성제의 바른 삶과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

 

해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 괴로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아도, 막상 욕망을 내려놓거나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 곧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요소로 이루어진 길입니다. 팔정도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가운데 네 번째인 ‘도성제’(道聖諦, magga-sacca)의 핵심입니다. 사성제는 인간의 고통을 밝히는 고성제,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실천의 길인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불교가 말하는 ‘고’(苦, dukkha)는 단순한 육체적 통증이나 일시적인 슬픔을 넘어, 조건에 의존하는 삶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불만족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열반’(涅槃, nibbāna)은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를 지속시키는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이 소멸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하거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 수칙이 아닙니다. 불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로 이해하는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의 길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팔정도를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 곧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의 몸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벗어나는 길로 설명합니다. 그 여덟 요소는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곧 사성제와 행위의 결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곧 탐욕과 악의와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난 바른 의도를 품는 것, ‘정어’(正語, sammā-vācā), 곧 거짓말과 이간질, 거친 말과 무익한 말을 삼가는 것, ‘정업’(正業, sammā-kammanta), 곧 살생과 도둑질과 잘못된 성적 행위를 멀리하는 것, ‘정명’(正命, sammā-ājīva), 곧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지 않는 바른 생계,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곧 해로운 마음의 상태를 막고 버리며 선한 상태를 일으키고 유지하려는 노력, ‘정념’(正念, sammā-sati), 곧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바르게 알아차리며 살피는 것, 그리고 ‘정정’(正定, sammā-samādhi), 곧 마음을 바르게 집중하여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여덟 요소는 서로 무관한 규칙들이 아니라, 바른 이해와 의도가 언어와 행동과 생계를 이끌고, 바른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 지혜를 깊게 하는 하나의 수행 체계를 이룹니다.

 

팔정도의 구조를 더욱 정확히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학’(三學, tisso sikkhā), 곧 계율·선정·지혜의 세 가지 훈련을 살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견과 정사유는 지혜에,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계율에,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선정에 속하는 수행으로 정리합니다. 이는 올바른 생각만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살피면서 말과 행동을 바꾸고, 마음을 훈련하여 현실을 더욱 깊이 통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āya) 117번의 ‘대사십경’(Mahācattārīsaka Sutta)은 정견을 다른 수행 요소에 앞서는 중요한 요소로 설명하면서, 정정진과 정념이 바른 견해와 의도를 확립하는 데 함께 작용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념은 아무런 판단 없이 순간의 느낌을 관찰하는 일로만 축소할 수 없으며, 정정 역시 단순한 휴식이나 심리적 안정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에서 이들은 해로운 상태를 버리고 바른 수행을 성숙시키며, 궁극적으로 고통을 소멸시키는 해탈의 길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현대적인 스트레스 관리 방법이나 일반적인 도덕 교육으로만 이해한다면 불교가 본래 제시한 종교적 목적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팔정도에는 말씀의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살펴볼 만한 윤리적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짓말을 일삼고 다른 사람을 해치며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알고 있다는 진리가 실제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합니다. 팔정도는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바른 이해가 바른 말과 행동과 생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정어와 정업과 정명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종교 의례나 명상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 전체에 미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종교적인 삶은 특정한 신앙 지식을 소유하거나 교리를 정확하게 암송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을 실제 의지와 행동으로 옮기는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팔정도가 언어와 행위와 생계에 이르기까지 바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은 귀중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유사성이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이 바른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바름의 궁극적인 기준과 근원, 그리고 그 삶이 향하는 목적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선한 행동의 외형과 내적 동기를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정직하게 말하면서도 자기의 평판을 높이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그 대가로 인정과 존경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지 않고 진실로 상대방의 유익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29번에서 십계명의 금지 명령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어떻게 관계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은 살인과 도둑질, 간음과 거짓 증언 같은 악을 멀리해야 하며, 특히 그것들을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는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charity)는 단순한 자선이나 구제 활동이 아니라, 이웃의 참된 유익을 바라고 그 유익을 실제로 이루려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악을 멀리하는 이유까지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팔정도의 윤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바른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외적인 행동만 바르게 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기독교만 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대조해서는 안 됩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불교가 바른 행위와 수행을 갈애와 무명의 소멸 및 해탈의 길에서 이해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거듭남의 질서에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00번에서 설명한 원리는 이러한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겉 사람의 악을 죄로 여겨 마치 자기 힘으로 멀리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그럴 때 주님께서 속 사람의 악을 제거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겉 사람’(external man)은 인간의 자연적 생각과 행동의 차원을, ‘속 사람’(internal man)은 그의 영적 내면을 가리킵니다. 또한 ‘거듭남’(regeneration)이란 단순히 행동 습관을 개선하거나 자기 통제 능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과정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살피고 악에 맞서 싸우며 선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참된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정정진과 기독교의 거듭남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를 단순히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불교 역시 바른 가르침과 스승, 수행 공동체와 여러 조건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대승불교의 일부 전통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도움을 강조합니다. 다만 그것이 곧 주님을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는 새 교회의 교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팔정도의 여덟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구별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정견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도덕 관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성제와 ‘업’(業, kamma), 곧 의도적인 행위와 그 결과, 무상과 무아,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불교 특유의 세계 이해와 연결됩니다. 마찬가지로 정념과 정정은 단순히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의 근본 원인을 통찰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각 요소를 기독교의 덕목과 하나씩 대응시키면서 정견은 올바른 성경 지식, 정어는 거짓말하지 않기, 정정은 기도와 같은 식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기능이 비슷해 보여도 그 안에서 이해하는 인간의 본질과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의 교리’ 65번은 여러 나라와 종교의 사람들에게도 십계명과 유사한 도덕적 규범이 있으며, 자신이 믿는 종교에 따라 그러한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의 종교적 환경과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 안에서 그를 인도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교인이 팔정도를 실천하며 진실로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그 선의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그 행위의 외형만으로 그의 내적인 영적 상태나 영원한 운명까지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와 의도, 말과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수행의 길입니다. 그 안에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분리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행동을 실제로 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지식이나 의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바른 삶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팔정도와 말씀에서 가르치는 거듭남은 동일한 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팔정도를 통하여 갈애와 무명을 소멸하고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지향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분과 결합하는 천국의 삶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는 한쪽은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한쪽은 믿음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른 삶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의 빛에서 참된 길은 단순히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아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힘으로 선을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고 그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바른 삶은 외적인 도덕적 성취를 넘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깊어지며, 진리를 아는 삶과 선을 행하는 삶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BU.007 해설)

 

요약

팔정도는 불교의 도성제를 이루는 핵심 수행의 길로서, 바른 이해와 의도, 언어와 행동, 생계와 노력, 알아차림과 집중을 통하여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합니다. 특히 지식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고 삶 전체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정도를 단순한 도덕 수칙이나 심리적 안정의 방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며, 불교의 해탈과 말씀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의 윤리적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의 수행 자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영적 삶의 목적은 그분과 결합하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6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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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

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을 이루는 중요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경외와 깊이 연결되는 아랍어 개념이 ‘타크와’(taqwa)입니다. 타크와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되지만, 단순히 형벌을 무서워하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명령을 존중하며, 악을 경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경건함과 도덕적 책임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꾸란 3:102는 하나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49:13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가장 경건한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특히 꾸란 2:177은 참된 의로움이 단순히 예배의 방향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약속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삶과 관련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외를 단순히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돌아보며, 선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하며, 잠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시111: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판단과 의지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존중하며, 그분께 어긋나는 악을 멀리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요일4:18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의 성격을 구별하면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형벌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분을 거스르거나 그분에게서 받은 선을 해칠까 염려하는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당할 손해와 고통에 중심을 두지만, 후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그 사랑의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3718항에서 두려움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거룩하지 않은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입니다. 전자는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형벌이나 명예와 재산의 상실, 자신의 이익이 손상되는 일을 염려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반면 후자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으로서 주님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거나, 선과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사랑에서 비롯되는 경외라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사랑에 거룩한 경외가 전혀 없다면 마치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그 사랑에 중요한 무엇이 결여된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거룩한 조심스러움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기중심적인 불안은 줄어들지만, 그 사랑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의 본질은 형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사랑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저작 5459항에서 예배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성격도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외적 예배에서는 두려움이 중심이 될 수 있지만, 영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두려움이 함께하며, 천적 예배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단순히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교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변화함에 따라 두려움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려워 악을 피하던 사람이 점차 악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마침내 선을 사랑하는 가운데 악을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거듭남(再生, regeneration)과 깊이 관련됩니다. 그러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직 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악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악을 멈추게 하는 외적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 자체가 참된 경외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이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이해하며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천국의 비밀’ 8925항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출20:20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거룩한 두려움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해치는 일을 염려하는 마음과 같으며, 주님을 거스르거나 계명을 어기는 일을 피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경외는 하나님이 언제 자신을 벌하실지 몰라 불안해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외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지키려는 내적 의지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형벌을 피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동은 외적으로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자체가 이웃을 해치고 주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악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미워한다면, 그의 정직은 더욱 깊은 영적 토대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룩한 경외는 악을 피하는 행위와 선을 사랑하는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타크와에 담긴 진리와 그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악을 경계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마음은 참된 경외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선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단순한 종교적 복종이 아니라 양심과 선행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정한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경외를 하나님이 내리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명령의 준수에만 머물게 한다면, 그 경외는 아직 사랑의 내적 상태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슬람 신앙 전체의 오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발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깊은 영적 전통이 있으며, 기독교에서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의무감에 머무는 신앙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은 특정 종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보다 그 경외가 실제로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며, 어떤 삶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는 여전히 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주님을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된 경외의 충만한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이 문제는 종교적 권위와 인간의 양심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이유로 종교 지도자의 말을 무조건 따르거나, 자신의 양심과 합리적인 판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경외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신적 섭리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는 분별을 금지하거나 인간을 공포로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행하는 일이 과연 선한지, 이웃에게 유익한지, 주님의 계명에 합당한지를 더욱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깊다고 하면서 이웃을 멸시하거나 자신과 신앙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한다면, 그 경외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경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드는 동시에 이웃 앞에서도 자신의 교만과 지배욕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해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경외의 완성은 하나님을 얼마나 무서워하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악을 피하는 이유는 달라져야 합니다. 악이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해치기 때문에 그것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고 그분의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합니까?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정직하게 살아갑니까, 아니면 정직과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을 피합니까? 참된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운 존재로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심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경외는 사랑에 이르기 위한 일시적인 단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거룩해지는 신앙의 내적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벌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모든 선과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IS.007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타크와를 경건과 양심, 도덕적 책임을 포함하는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접점을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경외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외적 의무의 준수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해치는 악을 피하려는 마음이며,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두려움은 사랑 안에서 거룩한 경외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경외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경외를 공포와 외적 복종에만 한정하는 이해가 영적 한계를 지닙니다. 참된 경외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IS.006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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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6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멸성제의 해탈과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자유

 

해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고통을 일으키는 바깥의 조건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의 괴로움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재물을 원하고, 원하는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조차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살피면서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을 단순히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서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는 고통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 그 원인을 설명하는 집성제, 고통의 소멸 가능성을 가르치는 멸성제,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도성제로 이루어집니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인 ‘멸성제’(滅聖諦, nirodha-sacca)는 고통의 근본 원인이 소멸하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갈애’(渴愛, taṇhā)란 감각적 즐거움과 존재의 지속, 또는 존재의 소멸을 갈망하는 목마름을 뜻하고, ‘집착’(執著, upādāna)은 그러한 대상을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불교가 말하는 소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활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애와 집착에 사로잡혀 고통을 반복하는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멸성제를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버리고 놓아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일으키는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소멸한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입니다. 연기란 어떤 현상도 독립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같은 경전집의 SN 12.2는 ‘무명’(無明, avijjā), 곧 고통과 그 원인 및 소멸의 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져 고통이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그에 의존하던 조건들도 소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는 과정도 멈추게 됩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열반’(涅槃, nibbāna)은 이러한 갈애와 무명,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열반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안정과 같지 않습니다. 또한 열반을 인간이 완전히 없어지는 허무한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도 불교의 설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열반을 조건 지어진 존재의 반복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해방으로 이해하며, 그 궁극적인 상태를 일반적인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갈애가 소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육체적인 고통도 전혀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살아 있는 동안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 육체적 통증과 질병, 늙음과 죽음이 여전히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험을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과 결합하여 새로운 괴로움으로 증폭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36.6에 나오는 ‘화살의 비유’는 이 차이를 잘 설명합니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할 때 정신적인 괴로움까지 더하여 마치 두 개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지만, 바르게 수행한 사람은 육체적인 고통을 겪더라도 거기에 새로운 집착과 정신적 고통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성제를 ‘깨달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사라진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군가가 심한 슬픔이나 불안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수행이 부족하다거나 집착이 많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고통받는 사람을 책망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을 지속시키는 내적인 조건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의 감정과 욕망에 무조건 끌려다닐 필요가 없으며, 그것들을 바르게 살피고 다스리는 가운데 새로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귀중한 통찰이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자유를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고, 이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자유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악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477–480번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들을 지배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중심적인 사랑이 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의 성격이 그의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재물이나 명예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내면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랑하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앞세우면 다른 사람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물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가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명한다면, 말씀은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힐 때 참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두 설명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 소멸과 말씀에서 말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곧바로 동일한 과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83번에서 인간이 본래의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악을 선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멀리하기 시작할 때 개혁이 시작되며, 주님의 도움으로 악과 싸워 이길 때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 같은 저작 DP.100은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 안에서 악을 제거하시려면 인간이 먼저 겉 사람 안에서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해야 한다는 신적 섭리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속 사람’(internal man)은 인간의 영적 내면을, ‘겉 사람’(external man)은 자연적 삶과 외적인 생각 및 행동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거듭남은 모든 욕망과 개성을 없애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선과 진리의 질서에 따라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을 설명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의 방향이 변화하는 거듭남을 설명합니다. 두 전통이 모두 인간의 내적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더라도 그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얻는 평안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평안은 같은 것입니까? 두 평안 사이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불교에서 갈애의 소멸은 집착에 따른 불안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과 연결되지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평안은 주님과 결합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 안에 있게 되고, 그만큼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악을 멀리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음의 불편함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지배하던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역사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는 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삶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일을 하며 정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랑과 활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선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적극적 사랑이나 자비도 없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 역시 자비와 이타적인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다른 중생의 해탈을 돕는 보살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양쪽의 차이는 한쪽에는 자비가 있고 다른 쪽에는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자비와 선의 궁극적인 근원 및 영원한 삶의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종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가족 간의 갈등이나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소망 자체를 무조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데 머문다면, 종교는 오히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의 멸성제는 이러한 욕망의 구조를 돌아보게 하며, 원하는 것을 끝없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말씀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최종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며, 고통의 소멸 자체를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영원한 행복은 외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은 서로 분리된 두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삶에 함께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결국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멸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끊임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는 궁극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의 근본적인 조건이 소멸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성찰하고,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붙잡지 않도록 경계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멸성제를 모든 감정과 사랑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깨달은 사람에게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불교의 열반과 말씀에서 말하는 천국의 생명을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단순히 어떤 욕망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버려야 하지만, 그 자리에 참된 선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멸성제가 인간을 속박하는 갈애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준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며 어떤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자유는 자기의 욕망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데서 시작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BU.006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의 소멸을 통하여 고통의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멸성제에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갈애의 소멸을 모든 의욕과 감정의 제거로 이해하거나, 열반을 단순한 무감각 또는 존재의 소멸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멸성제가 육체적 질병이나 외적인 불행의 완전한 제거를 약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자유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랑과 의지가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해탈과 말씀의 거듭남 사이에 있는 자기중심적 욕망의 극복이라는 공통점을 인정하되, 변화의 궁극적인 근원과 목적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자유와 천국의 평안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7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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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5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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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6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 신적 자비와 정의의 관계

 

해설

이슬람은 알라를 지극히 자비로우시면서도 완전하게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꾸란의 여러 장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al-Rahman)과 ‘한없이 자애로우신 분’(al-Rahim)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이러한 표현은 이슬람 신앙에서 자비(慈悲, mercy)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보여 줍니다. 꾸란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고, 4:40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지극히 작은 불의조차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6:90은 하나님이 정의와 선행, 친족에 대한 베풂을 명령하시고 악과 불의를 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하나님 이해를 엄격한 율법과 심판에만 기초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함께 인정하고, 인간도 그 자비와 정의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불의나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다른 두 속성으로서 때로는 충돌하거나 서로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히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꾸란 6:12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스스로의 원칙으로 삼으셨다고 가르치며, 39:53은 자신의 영혼을 해친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를 절망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꾸란은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특히 7:156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분이 원하시는 자에게 형벌을 내리신다고 말씀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이러한 자비와 정의를 모두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으로 이해하며, 그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부정하고 형벌만 강조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의 형벌을 단지 인간의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두 요소는 실제로 이슬람의 계시와 신학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검토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비 자체이시라면, 그분이 악인에게 형벌을 내리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 형벌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직접 나오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3–4항에서 신적 사랑(神的愛, Divine Love)과 신적 지혜(神的智慧, Divine Wisdom)가 주님에게서 하나로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651항에서는 주님이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어떤 사람에게도 악을 행하실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두 성향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바라며, 주님의 지혜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神的秩序, Divine Order)에 따라 실현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진리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냉혹한 심판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적 정의(Divine Justice)는 하나님의 자비를 제한하거나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비를 베풀려면 정의를 양보해야 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면 자비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지혜를 통하여 선한 목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악인을 심판하시며, 재앙을 내리시는 것으로 표현된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335항에서 주님이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시며 지옥으로 심판하여 보내지 않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자비 자체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할 때 스스로 천국과 주님에게서 멀어지므로, 악한 사람의 상태가 정죄와 형벌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3:17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여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데 있다고 말씀하며, 이어지는 19절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심판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여 진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함으로써 그것을 고통스럽게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속뜻(internal sense)을 통하여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모든 행위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악은 실제로 악이며, 인간은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한 악에 따른 결과를 경험합니다. 영계에서도 악령들이 다른 존재를 해치려 할 때 그들의 행동에는 제약이 가해지며,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형벌과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벌은 주님이 분노를 해소하거나 보복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더 큰 해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영적 질서를 보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악을 허용하신다고 해서 그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허용(許容, permission)과 의지(意志, will)는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무제한으로 퍼지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신적 섭리의 중요한 역사입니다. 따라서 참된 정의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악인을 향한 증오와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가능한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이 질서 있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가르침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차이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며, 악을 피하고 정의와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의 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이슬람 신학이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적인 분노와 보복으로 설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슬람에도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는 가르침과 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다만 꾸란에는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시는 주체로 표현된 구절들이 분명히 존재하며,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표현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간의 악한 상태라는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형벌의 강도나 범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하는 신관(神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시므로 죄인에게 반드시 형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성부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진노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진노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서로 충돌하는 속성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인간을 사랑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 역시 바로 그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속(救贖, redemption)은 본래 자비롭지 않으셨던 하나님을 자비롭게 변화시킨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적 정의가 신적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을 미워하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주님과 결합하여 천국의 생명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라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불의를 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도 정의와 선행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는 서로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두 속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주님의 정의는 그 사랑이 신적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할 때 정의라는 이름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또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묵인하거나,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습니까? 참된 자비는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참된 정의는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신가, 정의로운 분이신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자비와 정의가 하나인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6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인간에게 정의와 자비를 함께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이나 형벌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와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경험하는 정죄와 형벌은 악을 사랑하고 선을 거부하는 영적 상태 및 질서의 보존과 관련됩니다. 신적 자비와 정의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완전히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자비와 정의에 관한 고백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그 관계와 신적 형벌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IS.00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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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005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SL.IS.005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 복종과 자유로운 사랑 해설이슬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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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5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 집성제의 통찰과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의 문제

 

해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괴로워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렵게 얻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며,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재물뿐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명예, 지위와 신념까지도 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깊이 관찰하면서 고통의 원인을 외부 환경에서만 찾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그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두 번째인 ‘집성제’(集聖諦, samudaya-sacca)는 고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핵심에는 ‘갈애’(渴愛, taṇhā), 곧 만족을 얻으려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어떤 대상이나 견해를 자기 것으로 굳게 붙잡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교가 단순히 인간에게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모든 고통이 발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에 영원한 만족을 기대하고, 그것을 놓지 못하며, 자신의 존재와 행복을 거기에 의존시키는 과정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집성제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고통을 지속시키는지 밝히려는 가르침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통의 발생 원인으로 다시 태어남을 지속시키는 갈애를 제시하며, 이를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애’(欲愛, kāma-taṇhā)이고, 둘째는 존재하거나 계속 살아 있으려는 ‘유애’(有愛, bhava-taṇhā)이며, 셋째는 존재하지 않거나 소멸하기를 바라는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입니다. 이 구별은 갈애가 단순히 재물이나 쾌락을 탐하는 욕망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즐거움을 붙잡으려 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영속시키려 하거나, 반대로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사라지기만을 바라면서 또 다른 집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애를 삶의 모든 의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에는 수행과 선행을 향한 건전한 의욕을 뜻하는 ‘찬다’(chanda)라는 개념도 있으며, 깨달음을 위한 바른 노력은 오히려 중요한 수행의 요소입니다. 따라서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닙니다.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에서 벗어나 지혜와 자비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애와 집착의 관계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곧 현상들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불교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상윳따 니까야’ 12.2는 감각적 접촉에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다시 존재의 형성과 태어남이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갈애는 대상을 향한 목마름이고, 집착은 그 대상을 더욱 강하게 붙잡아 자기 것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불교는 집착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특정한 계율과 의례가 그 자체로 해탈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집착, 그리고 고정된 자아에 대한 견해를 붙잡는 집착으로 구별합니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종교적 신념에 대한 집착입니다. 재물이나 쾌락에 대한 욕망은 쉽게 알아차리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과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실은 깨닫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교가 모든 견해나 종교적 실천 자체를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수행을 해탈의 길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우월감이나 새로운 집착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갈애가 고통의 발생 원인이라는 설명은 모든 질병과 재난, 타인에게서 당하는 피해가 그 사람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성제는 고통과 윤회를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조건을 설명하는 것이지, 개별적인 불행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말씀에서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6:19)고 말씀하셨고, 이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10284번에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가 그가 추구하는 목적을 결정하며,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사랑과 주님 및 이웃을 향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삶이 형성됩니다. 불교가 고통을 지속시키는 갈애와 집착을 경계한다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사랑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지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두 설명 모두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인간을 속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사랑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며, 갈애의 소멸을 곧바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형성이라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키며, 특히 자신의 지혜와 능력, 선과 생명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려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 마음속으로는 남보다 거룩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5660에서 거듭나는 사람이 처음에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지만, 마침내 자유롭게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주어지는 새로운 의지를 통하여 인간의 삶의 목적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이웃과 공동체, 주님의 나라와 주님 자신을 향하도록 변화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자기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삶의 목적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목적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불교의 집착 극복과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을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변화는 단순히 집착을 억누르는 심리적 훈련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적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거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일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얻으려 하거나, 자기의 행복과 우월함을 위한 최종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21–22번에서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악을 멀리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그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수행과 새 교회의 거듭남을 구별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불교는 갈애와 무명의 소멸을 통한 ‘해탈’(解脫, vimutti)을 지향하는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행복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거절하지 못하고,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자유라기보다 욕망에 지배받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불교는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고통의 속박이 약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참된 자유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5660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그 안에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소유하고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누리는가보다, 어떤 사랑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최종 목적이 되면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며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삶의 목적이 되면 재물과 능력, 지식과 사회적 지위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욕망의 대상을 단순히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지배적인 사랑과 목적이 새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갈애 분석은 인간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유익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그 자리에 어떤 사랑이 들어서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결국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집성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변하는 것을 영원한 행복의 근거로 삼고,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며,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붙잡으려 할 때 고통이 깊어진다는 설명에는 분명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재물과 쾌락뿐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신앙적 확신까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종교인에게도 중요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갈애와 집착을 모든 욕망이나 사랑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때문에 발생한 결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원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욕망을 무조건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악을 멀리하고 사랑의 질서가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위한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아래 놓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교의 집성제가 인간이 무엇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를 묻는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지를 묻습니다. 참된 자유는 단순히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선을 기쁘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BU.005 해설)

 

요약

갈애와 집착이 고통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불교의 집성제는 인간의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감각적 쾌락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집착과 자신의 견해에 대한 집착까지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모든 의욕이나 사랑을 제거하려 한다고 이해하거나, 모든 고난을 개인의 집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영적 문제는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에 있으며, 거듭남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갈애와 집착에 대한 불교의 통찰을 인정하되, 참된 자유와 행복의 근원은 인간의 자기 통제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롭게 되는 삶에 있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6 ‘갈애와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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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4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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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5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 - 복종과 자유로운 사랑

 

해설

이슬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슬람’(Islam)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복종한다는 의미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무슬림’(Muslim)은 그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꾸란 2:112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면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있다고 가르치며, 4:125 역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선을 행하며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삶을 높이 평가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단순히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생각 없이 굴복하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궁극적인 주인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모든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려는 신앙의 방향 자체는 옳습니다. 다만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복종이 인간의 자유와 사랑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복종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외적 행위뿐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경건도 포함됩니다. 예배와 금식, 구제와 순례 같은 종교적 실천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며, 이러한 행위의 가치는 그것을 수행하는 의도와도 관련됩니다. 특히 꾸란 2:256에는 종교에 강제가 없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구체적인 적용 범위에 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 사이에 해석의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종교적 복종을 외부의 물리적 강제와 단순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또한 이슬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 자발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영적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오직 두려움과 강압으로만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종교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과 그 의무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인간은 어떤 명령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도 있고, 벌이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행위처럼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의도는 서로 다릅니다. 바로 이 차이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검토 대상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71항에서 인간이 자유에 따라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적 섭리(神的攝理, Divine Providence)의 법칙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유(自由, freedom)는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뜻합니다. 주님은 인간을 외부에서 강제로 조종하여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같은 저작 129항에서는 종교에 관한 믿음과 사랑이 외적 강제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강요에 의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내면의 신앙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거듭남(再生, regeneration)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진리를 선택하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주님은 그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순종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43항에서 자유에는 지옥적 자유(infernal freedom)와 천국적 자유(heavenly freedom)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악의 지배를 받는 속박입니다. 반면 선을 사랑하여 선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은 참된 자유입니다. 이 가르침은 요8:34에서 주님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노와 탐욕, 지배욕과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행동한다면, 겉으로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악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위해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갑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순종과 영적 자유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할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이러한 구별은 순종의 동기(動機, motive)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벌이 두렵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에서 돌아서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Th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JHD, 1758) 141–143항에서 자유는 사랑과 의지에서 비롯되며,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참된 자유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143항에서는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은 인간의 생명 안에 남지만,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그렇게 남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이 계명을 지키는 행위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계명에 담긴 선을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점차 정직 자체를 사랑하고, 처음에는 명령 때문에 이웃을 돕던 사람이 마침내 이웃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의 순종은 외적 의무에서 내적 사랑으로 깊어진 것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바로 이러한 변화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슬람의 복종 개념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평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참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망을 절대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며, 정직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복종의 가치를 외적 명령의 이행만으로 판단하거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신앙의 완성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문제가 이슬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목회자의 명령이나 교회의 관습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질문과 분별을 불순종으로 여기며, 두려움을 이용해 신앙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외적 강제는 참된 거듭남의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의 내적 생명으로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종을 평가할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 복종이 단순한 외적 의무에 머무는가, 아니면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 남아 있는 더 근본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인간은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14:15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잘 보여 줍니다. 참된 사랑은 계명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으며, 계명에 대한 참된 순종 역시 사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악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사랑의 자유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순종의 완성은 단순히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굴복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 선을 자신의 삶에서 기꺼이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알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다’라는 고백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순종이 어떤 내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묻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명령을 지키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외적으로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영적으로 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의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복종시키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선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 선을 실천할 때,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더욱 깊은 결합(結合, conjunction)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철저히 복종하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며, 그 순종을 통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은 자유로운 사랑을 파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IS.005 해설)

 

요약

이슬람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특히 복종을 진실한 의도와 선행에 연결하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은 외적 의무의 이행이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복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실천할 때 거듭납니다. 또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그 순종의 대상인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복종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며, 복종을 강제나 외적 형식으로 환원하는 이해가 문제입니다. 참된 순종은 주님을 향한 자유로운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IS.006 ‘알라는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완전하게 정의로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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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4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 - 고성제의 통찰과 거듭남을 향한 주님의 섭리

 

해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고통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병들고, 젊은 사람도 늙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고, 어렵게 얻은 것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인간의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특히 ‘사성제’(四聖諦, cattāri ariyasaccāni), 곧 고통의 현실과 원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 번째인 ‘고성제’(苦聖諦, dukkha ariyasacca)는 인간의 삶이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음을 밝힙니다. 여기서 ‘고’(苦, dukkha)는 단순히 육체적인 통증이나 정신적인 슬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경험조차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조건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불교가 인생을 고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기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의지하고 붙잡으려는 세상의 행복이 왜 끝내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고성제를 설명하면서 태어남과 늙음, 병듦과 죽음,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을 ‘오취온’(五取蘊, pañcupādānakkhandhā), 곧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무더기가 고통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여기서 다섯 무더기란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色)과 느낌인 수(受), 지각인 상(想), 의지적 형성 작용인 행(行), 의식인 식(識)을 가리킵니다. 불교는 이러한 요소들이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변하며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영원한 자기 자신이나 변하지 않는 행복의 근거로 붙잡을 때 고통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상윳따 니까야’ 38.14는 고통을 직접적인 괴로움, 변화에서 오는 괴로움, 조건 지어진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괴로움이라는 세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병이나 상실처럼 직접 경험하는 고통이고, 둘째는 행복했던 상태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데서 오는 불만족이며, 셋째는 당장 괴롭지 않더라도 조건에 의존하는 존재 자체가 궁극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불교의 고성제는 삶의 불행한 사건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통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와 경험의 구조를 살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흔히 현재의 어려움만 해결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건강을 회복하면, 자녀가 잘되면, 원하는 것을 이루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기고, 한때 커다란 기쁨을 주었던 일이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일상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가 강조하는 ‘무상’(無常, anicca), 곧 조건에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인간 경험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세상의 기쁨이 반드시 악하거나 무가치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만족을 얻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도 귀 기울일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 건강과 인간관계만으로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을 완전히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교의 고성제와 기독교의 인간관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조건 지어진 존재의 특성과 그것에 대한 집착을 분석하지만,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창조된 존재로서 자신의 생명과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서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제기합니다. 세상의 행복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모든 참된 생명과 행복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한 주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도 세상에서 환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가 고통을 발생시키는 조건과 집착의 구조를 밝히는 데서 출발한다면, 말씀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762번에서 영적 시험과 자연적 고난을 구별합니다. 영적 시험은 단순히 몸이 아프거나 불행한 사건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선과 진리를 둘러싸고 악과 거짓이 대립하는 내적인 싸움입니다. 반면 질병이나 불행, 자연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슬픔과 불안은 그 자체로 영적 시험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고난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약화시키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보내신 훈련이라고 설명하거나, 고통의 크기를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와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거듭나고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1692에서 영적 시험이 어떻게 인간의 거듭남에 쓰임이 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시험을 통하여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약해지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양심이 더욱 굳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험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선과 진리의 편에 서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거듭남이 가능해집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이란 인간이 단순히 고난을 견디거나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의지가 변화하여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통의 의미를 판단할 때에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다만 이 설명을 모든 고난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의 질병이나 무고한 사람의 피해, 전쟁과 재난으로 인한 고통을 그 사람의 영적 결함이나 성장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과 고통을 선 자체로 여기시는 데 있지 않고, 악이 허용되는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의 고통 이해와 새 교회의 교리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두 전통 모두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적 만족만으로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또한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인간이 더욱 깊은 불안과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교할 만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통은 ‘갈애’(渴愛, taṇhā)와 ‘무명’(無明, avijjā), 집착과 조건 지어진 존재의 특성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며, 그 궁극적인 해결은 갈애의 소멸과 ‘해탈’(解脫, vimutti), 곧 고통과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밝힌 새 교회의 교리에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불교의 해탈을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기독교의 천국을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이 모두 충족되는 장소로 이해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단순히 고통을 없애려 하는가, 행복을 얻으려 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고통의 속박으로 이해하며, 무엇을 자유와 행복의 완성으로 보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새 교회의 교리에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고통이 없는 상태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87–394번에서 천국의 삶이 이웃을 위한 쓰임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영원한 안락함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각자의 쓰임을 통하여 실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쓰임’(use)이란 단순한 노동이나 활동량을 뜻하지 않고, 사랑이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목적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만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에서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나누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 역시 결국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불교의 고성제가 변하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불안정성을 드러낸다면, 말씀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여 사랑과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요청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기쁨이나 가족에 대한 사랑, 건강과 물질적 안정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한 질서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유익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사랑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행복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현실을 깊이 통찰한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고성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조건에 의존하는 존재와 경험이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집착과 자기중심성을 돌아보고, 물질과 쾌락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와 말씀에서 밝히는 인간의 거듭남은 같은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는 고통의 발생과 소멸을 연기와 갈애의 관계에서 설명하지만,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랑과 의지가 새롭게 되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또한 모든 고통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니며, 어떤 고난도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이루는 천국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부정하지도, 고통 자체를 신성하게 만들지도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과 이웃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불교의 고성제가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놓일 수 있는지를 일깨운다면, 말씀은 그 행복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이미 그 생명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BU.004 해설)

 

요약

인생에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불만족이 있다는 불교의 고성제는 인간의 유한성과 변화, 집착의 문제를 깊이 통찰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세상의 행복을 영원한 것으로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고성제를 모든 삶이 불행하다는 비관주의로 이해하거나, 불교의 해탈을 단순한 무감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로 신성하거나 구원을 보장하지 않으며, 영적 시험과 자연적 고난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악과 고통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을 거듭남과 천국의 행복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참된 행복의 근원은 고통의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실현하는 삶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BU.005 ‘고통의 원인은 갈애와 집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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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3.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도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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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4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으시다’ - 신적 초월성과 성육신의 가능성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존재도 그분과 같을 수 없으며, 하나님 역시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꾸란 42:11은 ‘그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하며, 112:4 역시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견줄 만한 존재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신적 초월성(神的超越性, Divine Transcendence)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을 지탱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인간처럼 생겨나거나 성장하거나 쇠약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거나, 어떤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부여하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 유일성을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비유일성 없는 독특함을 강조할 때 ‘탄지흐’(tanzih), 곧 하나님을 피조물의 속성으로부터 구별하고 그분의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존재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적 한계나 물질적 조건으로 그분의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하나님 이해를 단순히 인간과 멀리 떨어져 계신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앙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꾸란 6:103은 인간의 시각이 하나님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아신다고 가르치며, 57:4는 하나님이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함께 계신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50:16은 하나님이 인간의 목숨줄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함께 그분의 가까우심, 곧 신적 내재성(神的內在性, Divine Immanence)에 대한 이해도 이슬람 안에 존재함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 구절들이 하나님이 인간 안에 어떤 방식으로 현존하시는지를 설명하는 방법은 이슬람의 신학 전통에 따라 다릅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과 멀리 떨어져 계시므로 인간을 직접 사랑하거나 돌보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는 식의 설명은 부정확합니다. 오히려 이슬람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면서도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을 인도하시며 자비를 베푸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가까우심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초월성이 하나님 자신의 성육신까지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7항에서 신성(神性, the Divine)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공간에 편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물을 공간과 크기와 거리로 이해하는 데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자연적 조건에 종속되지 않으십니다. 또한 28항에서는 신적 본질 자체가 사랑과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인간보다 더 크고 강력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어떤 존재에게서도 생명을 받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습니다. 어떤 천사도, 아무리 거듭난 인간도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되지 못하며, 피조물이 신성 자체로 변화되는 일도 없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슬람의 신적 초월성에 대한 강조와 중요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피조물과 구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무한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를 함께 설명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같은 저작 11항에서 놀라운 명제를 제시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접하면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뜻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유한한 육체를 지니신 피조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신적 인간의 형상, 곧 무한한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형상을 지니고 계시며, 인간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창1:26–27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도 하나님을 인간적 형상으로 인식한다고 설명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자연계의 물질적인 몸이나 유한한 신체적 조건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적 사랑과 지혜의 완전한 형상이며, 인간은 그것을 유한하게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사람이시라는 가르침은 신적 초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이심을 더욱 깊이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해는 성육신의 문제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슬람의 지배적인 신학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특별한 사도이자 메시아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셨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29–35항에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성을 입으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81–82항에서는 구속주이신 주님이 바로 인성을 입으신 여호와이심을 밝힙니다. 여기서 성육신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유한한 피조물로 변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성 자체로서는 변함없이 무한하시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연적 인성을 입으시고 그 인성 안에서 시험과 승리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인성을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신의 초월성을 상실한 사건이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가르침과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피조된 인간이었는데 특별한 능력을 얻어 신적 존재로 높아진 분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혼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으며, 마리아에게서 받으신 인성은 영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성과 완전히 결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 구별은 성육신으로 폐지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신적 인성을 이루셨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도 자신의 인성을 신성 자체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만이 자신의 신적 능력으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요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선언과 골2:9의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는 말씀은 이러한 이해의 중요한 성경적 근거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성육신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신다는 사실은 참되지만,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성을 입으시고 영화롭게 하실 수 없다고 제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으시다’는 고백에 담긴 진리와 오류는 어디에서 구별됩니까?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으시며, 인간이 만들어 낸 형상이나 관념 속에 가둘 수 없는 분이라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피조된 인간을 신격화하거나,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속성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도 옳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근거로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으실 수 없다고 단정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초월성에 대한 이해가 오히려 하나님의 신적 능력과 사랑의 자기 계시를 제한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성육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만으로 당연히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성육신을 참된 진리로 인정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추론이 아니라, 주님이 실제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신적 초월성에 대한 가르침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문제는 그 참된 가르침을 성육신의 부정으로까지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 자신의 하나님 이해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을 너무 멀리 계신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거룩하심과 무한하심을 인간의 감정이나 욕망의 수준으로 낮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 두 가지 오류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은 피조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이 사랑하고 알며 예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친근하게 느끼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음을 일깨우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잊지 않도록 일깨우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 무한하신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은 인간과 같으신가?’가 아니라,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으신 무한한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는 그분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4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으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을 자연적·물질적 조건으로 제한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신적 초월성은 성육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신적 인간의 형상이시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으시고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신적 초월성 자체는 진리이지만, 그것을 근거로 주님의 성육신과 신적 인성을 거부하는 것은 교리적 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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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3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도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 - 연기의 질서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

 

해설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에서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주와 자연,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면서 이러한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불교에는 부처와 보살, 천상 존재들에 관한 다양한 가르침이 있지만, 세계 전체를 창조하고 모든 존재의 생명을 공급하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그 교리의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세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는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존재도 다른 조건과 완전히 독립하여 성립하지 않으며, 인간의 고통과 삶의 변화 역시 원인과 조건의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단순히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 그리고 인간이 그 근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법은 흔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말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나 현상도 다른 조건과 관계없이 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12.20은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연기의 법칙은 성립하며, 부처는 그것을 깨닫고 설명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불교의 ‘십이연기’(十二緣起,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는 ‘무명’(無明, avidyā)에서 시작하여 행·식·명색 등의 조건적 관계를 거쳐 생·노사에 이르는 고통의 발생 구조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현상을 단순한 기계적 인과관계로 환원하거나, 우주가 최초로 만들어진 순간을 설명하려는 이론과는 구별해야 합니다. 십이연기의 중요한 목적은 인간이 어떻게 ‘윤회’(輪廻, saṃsāra)와 고통에 묶이고, 그 조건을 어떻게 소멸하여 ‘해탈’(解脫, vimokṣa)에 이를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연기를 통하여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는 것은 창조주 없이 우주의 최초 원인을 완전하게 규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와 경험, 고통과 변화가 어떤 조건적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명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디가 니까야’(長部, Dīgha Nikāya) 1번에 해당하는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은 자신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범천(梵天, Brahmā)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먼저 출현한 범천은 뒤이어 나타난 존재들을 보고 자신이 그들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며, 나중에 나타난 존재들 역시 그를 창조주로 오해합니다. 이는 초기불교가 창조주에 대한 특정한 주장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다루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다만 이 경전의 범천과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을 역사적·교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中部, Majjhima Nikāya) 63번의 ‘소말룽키야경’(Cūḷamāluṅkya Sutta)에서 부처는 세계가 영원한지, 유한한지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수행이 시급하다는 점을 독화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불교의 중요한 특징이 드러납니다. 세계의 최초 원인을 밝히는 문제보다, 지금 인간이 겪는 고통과 그 소멸의 길을 아는 것이 더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불교 전통이 우주론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초기불교가 무엇을 종교적 실천의 중심에 두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설명에는 인정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조건과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들이마시는 공기,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도움, 배우고 익힌 지식까지도 독립적인 자기 소유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어떤 선택은 새로운 고통의 원인이 되고 다른 선택은 그 고통을 줄이는 조건이 됩니다. 연기법이 강조하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인간의 오만과 자기중심성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존재들이 서로 의존한다는 사실과, 그 모든 존재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연기는 조건적 관계를 설명하지만, 그 관계 전체의 궁극적인 근원을 반드시 창조주에게서 찾지는 않습니다. 반면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는 창조된 세계의 상호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세계가 존재하고 유지되는 근원을 주님에게서 찾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와 기독교의 창조를 단순히 서로 반대되는 인과관계 이론으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두 설명은 질문의 초점부터 다르며, 바로 그 차이에서 근본적인 신학적 논점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52–59번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모든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DLW.55는 우주가 절대적인 무에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비판하면서,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창조된 우주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DLW.56은 창조된 것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동일한 실체의 연속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존재 사이의 결합과 수용에 기초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세계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니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같은 저작 DLW.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과 천사는 창조된 유한한 생명의 수용자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조란 단순히 아득한 과거에 우주가 처음 만들어진 사건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조된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연기법이 존재들의 조건적 관계를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가 밝힌 창조의 질서는 그러한 모든 유한한 존재가 궁극적으로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인플럭스’(influx), 곧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끊임없이 흘러들어 온다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의 근원까지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그의 생각과 사랑, 행동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3번에서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신적 지혜를 통하여 신적 사랑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DP.324는 창조의 목적이 인간이 신적인 것을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고 영원히 살아가는 데 있음을 밝힙니다. 이는 인간을 창조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도구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합리성을 주시고, 인간이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살아가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새 교회의 교리에서 창조와 섭리, 거듭남은 서로 분리된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하시며, 인간이 그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천국의 삶을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불교에서도 인간의 행위와 수행이 새로운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 과정의 궁극적인 근원을 인격적 창조주와의 결합에서 찾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인간의 고통과 악을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는 고통의 발생을 ‘갈애’(渴愛, taṇhā), 무명, 집착과 여러 조건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며, 그 조건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강조합니다.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울 때 악이 생겨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자아적 성향을 가리키며, 특히 그것을 선과 진리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210번은 인간이 자신에게서 생명이 나오는 것처럼 여기며 자기의 것에 이끌리는 상태와 관련된 중요한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의 무명과 새 교회의 프로프리움은 모두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착각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고통을 지속시키는 무명과 집착을 소멸하는 데 초점을 두고,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과 선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인정하고 그분의 질서에 따라 거듭나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그렇다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인은 반드시 이기적이며, 창조주를 고백하는 기독교인은 반드시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선을 행하는가는 종교적 명칭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불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도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대체로 타당합니다. 불교는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연기와 업, 윤회와 수행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와 고통, 변화의 질서를 설명합니다. 이 가운데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인간의 행동에도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는 통찰은 존중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설명이 곧 우주와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까지 완전히 해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창조된 존재는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되며, 인간은 지금도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세계 안에 원인과 조건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존재와 질서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연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겸손과 책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은 다른 존재에게 의존할 뿐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모든 선과 진리를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자신의 생명과 사랑과 지혜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더욱 깊어집니다. (BU.003 해설)

 

요약

불교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연기와 업 등의 원리를 통하여 세계와 인간을 설명한다는 명제는 대체로 타당합니다. 존재들이 서로 의존하며 행위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통찰에도 인정할 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불교의 연기를 우주의 최초 원인에 관한 완결된 설명으로 이해하거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교가 모든 원인과 질서를 부정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세계와 인간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는 지금도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존재들의 조건적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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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3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 -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과 참된 신적 삼위일체

 

해설

이슬람이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거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유일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핵심 교리인 ‘타우히드’(tawhid)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의 신성은 어떤 존재와도 나누어질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꾸란 4:171은 경전의 백성에게 종교적으로 지나치지 말고, 하나님에 관하여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5:73은 하나님을 셋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주장을 비판합니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신적 인격으로 인정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아무리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설명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신성을 셋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 제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한 분이셔야 하며, 인간이 입술로는 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세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참된 신적 일체성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비판이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먼저 기독교의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조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세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 위격(位格, persons)이 하나의 신적 본질(神的本質, Divine Essence)을 공유하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세 하나님을 믿는다는 식의 설명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가 인간의 실제 이해 속에서 어떤 신관(神觀)을 만들어 내는가를 문제 삼습니다. 성부는 한 인격이고 성자는 다른 인격이며 성령은 또 다른 인격인데, 각 인격이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설명한다면, 인간은 이 세 존재를 하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가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을 공식적으로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라, 세 신적 인격을 구별하는 교리적 표현이 실제 신앙에서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비판입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비판과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비롯되지만, 하나님의 유일성이 단순한 언어적 고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는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DL, 1763) 55–60항에서 하나님의 삼위는 세 인격의 삼위가 아니라 한 인격 안의 삼위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57항에서는 성부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 성자는 신적 인성(神的人性, the Divine Human), 성령은 발출하는 신성(the Proceeding Divine)이라고 밝힙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인간의 영혼과 몸, 그리고 그 둘로부터 나오는 활동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도 신성 자체와 신적 인성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가 있지만, 이것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구별되는 본질적 요소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66–169항에서도 신적 삼위가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적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구조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 안에 구별되는 요소들이 있으면서도 그 존재가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적 삼위일체(Divine Trinity)는 세 신적 존재의 연합이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일체성입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입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서는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의 본질을 함께 강조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성부를 주님의 영혼에 해당하는 신성 자체로, 성자를 그분의 인성으로, 성령을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로 이해합니다. 요14:10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4:9에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영혼과 몸처럼 하나이심을 보여 주는 근거로 이해합니다. 성령 역시 주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제삼의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와 인간을 깨우치고 거듭나게 하시는 신적 역사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독립된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삼위일체의 핵심이며, 이슬람이 비판하는 세 신적 존재에 대한 관념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 170–171항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가 창조 이전부터 세 신적 인격으로 존재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그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부터 계셨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되는 신적 삼위는 하나님이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성육신 이전에는 불완전하셨다가 이후에 완전해지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며, 그 인성을 영화(榮化, glorification)하심으로써 인간이 알고 사랑하며 예배할 수 있는 신적 인성 안에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하나님 안에 영원부터 독립된 세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이해해야 할 신적 삼위입니다. 이슬람은 성육신 자체를 거부하므로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 성육신이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삼위를 함께 이해하게 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을 검토할 때 또 하나 주의할 점은 꾸란 5:116의 해석입니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어머니 마리아를 하나님 외에 두 신으로 섬기라고 했느냐고 물으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를 근거로 꾸란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하나님과 예수와 마리아의 결합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 자체에는 삼위일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으며, 이슬람 해석 전통에서도 이를 반드시 삼위일체의 세 구성원에 관한 설명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피조물의 신격화를 비판하는 구절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을 단순히 마리아를 삼위일체의 한 인격으로 오해한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꾸란이 비판하는 하나님 외의 존재를 신격화하는 행위와 정통 기독교가 실제로 고백하는 삼위일체는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적용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상대 종교가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그 안의 진리와 오류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에 담긴 진리와 오류는 어디에서 갈라집니까?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신성이 서로 독립된 세 하나님에게 나뉘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참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실제로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면서 단지 말로만 하나라고 고백하는 신앙은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 172–173항에서 영원부터 존재하는 세 신적 인격을 각각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고백하더라도 실제 사고 속에는 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남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여기서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 자체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까지 거부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참된 신적 삼위에 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합니다. 문제는 삼위일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누어 이해하던 삼위를 한 분 주님 안에서 바로 이해하도록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비판은 분리된 세 신에 대한 관념을 경계한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참된 신적 삼위일체까지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교리적 한계를 지닙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의 실제 신앙에도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과 구별되는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구하면서도 성령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로 이해하기보다 독립된 존재처럼 떠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삼위일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만 말하면서, 정작 자신이 누구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는지 분명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신을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세상에 오셨으며, 말씀을 통해 그분의 본성을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참된 삼위일체 신앙은 어려운 교리적 공식을 암송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일체성을 인정하고, 그분을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계명을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결국 이슬람의 삼위일체 비판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기독교는 정말 세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논쟁을 넘어, ‘나는 과연 한 분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실제로 누구를 주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예배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적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을 하나로 묶는 교리가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과 신적 역사가 완전하게 하나임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IS.003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고, 서로 독립된 세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신관을 거부하는 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세 신적 인격을 각각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삼위일체 이해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이 신적 삼위 자체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교리적 한계입니다. 참된 삼위일체는 세 하나님이나 세 독립된 신적 인격의 결합이 아니라, 성부는 신성 자체, 성자는 신적 인성, 성령은 발출하는 신적 역사로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신적 삼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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