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nd not ashamed)는 그들이 순진함(innocent)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own안에 순진함을 주입하셔서, 그것이 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는 걸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해설

 

AC.163은 창2의 마지막 절을 여는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나 수치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순진함의 표지’로 제시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순진함이 인간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own 안에 주입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충분히 밝혀졌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하며, 그대로 두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서 그들의 own이 아직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위에 ‘순진함이라는 보호막’이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진함은 own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완충 역할’을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아직 ownown으로 주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own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았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AC.163은 앞선 AC.150의 ‘깊은 잠’과도 미묘하게 연결됩니다. 아직 완전히 깨어 있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또한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안전지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함이 주입되어 있는 동안에는, own이 살아나 있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파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순진함이 상실되는 순간, 벌거벗음은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라 ‘수치’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그 전환이 다음 장에서 일어납니다.

 

AC.163은 그래서 짧지만 매우 밀도가 높은 단락입니다. own + 순진함 = 아직 허용된 상태, own - 순진함 = 곧 드러날 위기

 

이제 이어질 AC.164-167에서는, 이 순진함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유지되지 못했는지가 조금 더 정밀하게 설명되며, 창2가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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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AC.162 해설)

 

 

이 문장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일부다처 허용’을 단순 고대 문화 수준으로만 보거나, 혹은 하나님 뜻 자체가 시대마다 달라진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훨씬 더 깊은 인간 상태의 문제로 봅니다.

 

AC.162 흐름에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조 본래 질서는 ‘하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곧 진리와 선, understanding affection의 완전한 결합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막10에서 ‘처음부터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창조 질서로 올라가십니다. 즉 본래 천국적 질서는 하나의 결합, 하나의 사랑, 하나의 상응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점점 proprium 중심으로 기울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인간 안의 사랑 자체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선과 하나의 진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게 됩니다. affection 자체가 흩어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강해집니다. 이 상태에서 원래 질서를 그대로 강제하면, 오히려 더 심한 왜곡과 위선과 폭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세 율법 안의 여러 허용 조항들을 ‘최선(best)이 아니라 ‘차악(lesser evil)의 허용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천국 질서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낮아진 인간 상태 안에서 완전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라는 것입니다.

 

복수의 아내 허용도 그런 맥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일부다처를 이상으로 세우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상태가 너무 외적이고 완악해져 있었기 때문에, 본래 질서를 즉시 강제할 경우, 더 큰 혼란과 파괴가 생길 수 있었던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 상태를 고려하여, 보다 낮은 단계의 질서를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막10에서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하신 것도 정확히 같은 원리입니다. 율법 일부는 천국의 최고 질서를 직접 반영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상태 안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자비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인용문에서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라는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단순 이상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인간 상태를 실제 그대로 보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질서를 억지로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가장 낮아진 상태 속에서도 완전 붕괴를 막으며, 다시 본래 질서 쪽으로 조금씩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 전체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말씀 안에는 ‘본래 창조 질서’와 ‘타락 이후 허용 질서’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점점 인간을 허용 질서에서 본래 질서로 다시 이끌어 가십니다. 막10에서 주님이 모세보다 창조 처음을 다시 끌어오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AC.162, 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AC.162.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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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C.160 한 몸(one flesh)과 막10:5-9 한 몸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AC.160)

 

앞에서는 한 몸(one flesh)에 대한 설명이 윗글과 같았는데 여기서는,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 육체적 연합이나 사회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였어야 할 인간 존재 구조가 다시 결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남자는 understanding truth 쪽을, 여자는 affection good 쪽을 상징하며, 둘이 하나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 질서가 형성됩니다. (AC.162 심화 2)

 

와 같네요. 둘 다 맞다면, 창세기 AC.160이 본래의 뜻이고, AC.162 10:5-9은 주님이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해석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흐름에서는 AC.160 AC.162가 서로 다른 해석이라기보다, 같은 구조를 서로 다른 층위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막10에서 창2를 ‘새롭게 reinterpretation’하셨다기보다, 오히려 창2 본래 안에 이미 들어 있던 더 깊은 창조 질서를 다시 드러내셨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긴장은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AC.160에서는 ‘한 몸(one flesh)이 굉장히 위험하고 미묘한 의미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 spirit 상태였던 인간이 flesh 상태로 들어오면서, 천적, 영적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one flesh는 인간 안에 proprium이 결합된 상태, 곧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며 사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타락 가능성과 긴장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반면 AC.162에서는 막10을 통해 ‘둘이 한 몸이 된다’가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훨씬 긍정적, 완성적 의미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 같은 one flesh인데 왜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지?’라는 느낌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 스베덴보리에게 이 둘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핵심은 ‘무엇이 무엇과 결합하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AC.160 one flesh는, 천적, 영적 생명이 인간의 own과 결합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생명이 이제 인간의 자기감, 자기 의식, 자기 proprium 안으로 들어와 함께 작동하게 된 상태입니다. 이것 자체는 아직 완성도 아니고, 타락도 아닙니다. 일종의 새로운 인간 구조의 시작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유와 자발성이 생기지만, 동시에 자기 사랑 방향으로 기울 위험도 함께 열립니다.

 

반면 막10 AC.162 one flesh는, 그 구조가 원래 의도된 질서 안에서 완전히 결합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understanding affection, truth good,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 안에서 조화롭게 하나 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타락 이전 창조 질서의 본래 목적이며, 동시에 거듭남 완성 상태입니다.

 

즉 아주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AC.160 = ‘하나 됨의 구조가 형성됨’, AC.162 = ‘그 하나 됨이 본래 질서 안에서 완성됨

 

다시 말해 AC.160은 인간 존재 안에 proprium과 생명이 결합되는 존재론적 구조를 설명하고, AC.162는 그 구조가 주님 안에서 어떻게 참되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막10에서 하신 일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해석’하신 것이라기보다, 사람들이 문자적 결혼 규정만 보고 있던 창2 본래 의미를 다시 창조 질서 차원으로 끌어올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꾸 ‘처음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창조 때로부터’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원래 의도된 인간 구조를 다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전체 해석 방식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같은 표현이 문맥에 따라 다른 층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flesh’도 어떤 곳에서는 자기 사랑과 proprium을 뜻하고, 어떤 곳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성 자체를 뜻하며, 주님에 대해서는 신적 인성의 실제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자체보다, 그 단어 안에서 무엇이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60 AC.162는 서로 다른 해석이 아니라, 같은 ‘one flesh’ 구조를 각각 ‘형성 과정’과 ‘완성 질서’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AC.162, 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AC.162.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AC.162 해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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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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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C.162)

 

 

AC.162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천국론 전체를 압축한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처음 읽으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온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이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천국을 단순 장소나 집합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조직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인간 형상’으로 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천적 인간(celestial man)은 단순히 아주 착한 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한 질서 안에서 하나 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런 완전한 질서는 인간 스스로에게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지혜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truly celestial한 존재는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런데 천국의 모든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천사들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독립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각자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를 하나의 인간처럼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명이 천국 전체 안에 질서 있게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famous한 ‘Grand Man’, 곧 ‘큰 사람(Maximus Homo) 사상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심장 역할과 연결되고, 어떤 공동체는 폐, 눈, 귀, 팔, 손 같은 기능과 연결됩니다. 각각의 천사 공동체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하나의 생명 안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마치 몸의 여러 기관이 서로 다른 기능을 하지만, 한 인간을 이루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왜 천국이 ‘하나의 천적 인간’인가? AC.162는 그 이유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게 말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은 자기 독립 생명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조직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반영입니다. 천국의 인간성은 본래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기독론도 드러납니다. 그는 주님을 단순 천국 바깥에 계신 신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 안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사랑, 지혜, 질서, 생명은 전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individual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도 결국 작은 천국 형성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고,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되며, 인간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인간은 ‘작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인간을 ‘least heaven’이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천국 전체는 ‘greatest man’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인간 자율성에 대한 아주 깊은 교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성(humanity)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아름답고 살아 있는 이유도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AC.162의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이다’라는 말은, 천국이 단순 집합체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라는 말은, 천국의 모든 생명과 인성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선언입니다.

 

 

 

AC.162, 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AC.162.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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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심화 1, ‘막10:5-9’

AC.162.심화 1. ‘막10:5-9’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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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5-9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AC.162)

 

 

이 구절이 AC.162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직접 창2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한 몸’의 의미를 단순 세상 결혼 규정이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의 문제로 다시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막10:5-9에서 주님은 이혼 문제에 답하시면서 단순 율법 조항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창조 때로부터’라는 표현으로 인간 존재의 본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AC.162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먼저 주님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은 단순 성격 문제나 고집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무너지고, proprium 중심 상태가 강화된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깨졌기 때문에, 외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율법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어서 ‘처음 창조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창조 질서로 다시 올라가십니다. AC.162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2의 남자와 여자는 단순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인간 안의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wisdom love의 결합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 육체적 연합이나 사회 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하나였어야 할 인간 존재 구조가 다시 결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남자는 understanding truth 쪽을, 여자는 affection good 쪽을 상징하며, 둘이 하나 될 때 비로소 완전한 인간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시는 말씀도 굉장히 깊습니다. 이것은 단순 이혼 금지 규정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인간 안에 결합시키시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인간의 proprium이 분리시키지 말라는 뜻까지 담고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지옥은 ‘분리’의 방향입니다. 사랑과 진리가 분리되고, 앎과 삶이 분리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됩니다. 반면 천국은 결합의 질서입니다. 사랑이 진리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진리가 사랑을 밝혀 주며,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와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한 몸’은 단순 부부 연합이 아니라 천국 자체의 구조입니다.

 

또 주님께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셨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창2의 속뜻이 단순 후대 상징 해석이 아니라, 실제 창조 질서의 근본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단순 결혼 윤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를 다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2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남자와 여자’, ‘한 몸’이라는 창2의 상징이 단순 자연적 결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본래적 결합 질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질서를 단순 사회 규범이 아니라, 창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국적 질서로 다시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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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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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right)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것, 곧 전부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거기서부터 천적이라 불립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듯이, 혼인의 법은 특히 그러합니다. 혼인은 천적 혼인, 곧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하며, 이 혼인은 한 주님과 한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법은 한 남편과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이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한 남자가 한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자,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하였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하늘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자,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지각하지 못하고, 다수에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 안에서 그것을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부르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모세를 통해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의 마지막을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이라는 주제로 종합하며, 동시에 창3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영적 지형을 완전히 정리해 줍니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혼인을 도덕규범이나 사회 제도로 다루지 않고, ‘천국 질서가 땅에 내려온 가장 구체적인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그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celestial beginnings)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법이 인간의 합의나 경험의 축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 더 정확히는 ‘주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천국이 ‘천적 인간’이라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한 분이 천적 인간이시며, 천국은 그분의 생명이 충만히 흐르는 한 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보편적 질서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혼인입니다. 혼인은 ‘천적 혼인’으로부터 파생되어야 하며, 이 천적 혼인은 ‘한 주님과 한 천국’, 곧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지상의 혼인이 한 남편과 한 아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단순한 윤리 명령이 아니라 ‘천국 형상에 대한 표상’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이 법을 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진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일부일처는 제도가 아니라 자연이었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나의 집을 이루는 것은 억제가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부의 사랑은 ‘천국과 같은 행복’이었는데, 이는 그 사랑이 천적 혼인을 직접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사람들은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 혼인의 중심도 이동합니다.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지각하지 못하고, ‘다수에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만족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완악함’입니다. 여기서 완악함은 잔인함이 아니라, ‘퍼셉션의 상실’을 뜻합니다.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본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하시며, 창조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말씀은, 창2의 질서가 여전히 기준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를 닫습니다. 천적 혼인 →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 → 쇠퇴 → 완악함 → 허락 → 그러나 기준은 여전히 ‘처음’.

 

이제 창3에서는, 이 기준에서 벗어난 인식과 선택이 어떻게 실제 사건으로 드러나는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모든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고 정리한 매우 좋은 지점입니다.

 

 

심화

 

1. ‘10:5-9

 

 

AC.162, 심화 1, ‘막10:5-9’

AC.162.심화 1. ‘막10:5-9’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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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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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C.160한 몸(one flesh)과 막10:5-9한 몸

 

 

AC.162, 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AC.162.심화 3. AC.160의 ‘한 몸’(one flesh)과 막10:5-9의 ‘한 몸’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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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AC.162, 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AC.162.심화 4.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 이 상태에서 모세를 통해 복수의 아내가 허락된 것은, 이상을 낮춘 타협이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자비의 조치’였습니다. (AC.162 해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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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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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flux로 보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열매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라 불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행위’ 이해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이면, 그것 자체로 선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겉 행동 자체보다,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가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그는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의 일이나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행위를 단순 외적 결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흐르는 affection과 목적과 influx가 다르면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모두 같은 자선 행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명예와 자기 만족을 위해 하고, 다른 사람은 진심으로 이웃의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비슷해도,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드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영적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AC.161은 앞 문장의 influx 설명과 바로 연결됩니다. 겉 사람의 행위는 단순 겉 사람만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속 사람으로부터의 유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 다시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행위는 살아 있는 선이 됩니다.

 

여기서 ‘in these the Lord’라는 표현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와 신앙 자체도 인간 독립 소유물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안의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 안에는 이미 주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참된 선행의 실제 생명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행하는 그릇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자주 ‘열매(fruit)라는 표현을 씁니다. 열매는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져 나온 독립 물체가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와 생명 흐름 전체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선행도 단순 의지력 결과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으로 들어온 사랑과 신앙이 겉 사람 안에서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겉 행동만 있고, 그 안에 체어리티와 신앙과 주님이 없다면, 그것은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영적으로는 살아 있는 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dead works’와 ‘living works’의 차이입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행위이고, 죽은 행위는 겉 사람 수준에서 자기 자신만으로 행해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님께서 계속 붙들고 계신 proprium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인간은 쉽게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가 하는 진짜 질문은 ‘그 안에 무엇이 흐르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의인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온 체어리티와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1은 단순 도덕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행위 전체를 ‘influx 구조’ 안에서 다시 보는 설명입니다. 참된 체어리티의 행위란,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 속에 계신 주님이 겉 사람의 행동 안으로 흘러나온 결과라는 것입니다.

 

 

 

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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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3, ‘influx’

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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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AC.161)

 

 

AC.161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를 여는 열쇠 같은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나’로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실제 인간 안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둘이 다른데 왜 우리는 거의 항상 하나처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이 바로 ‘influx’, 곧 유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속 사람과 겉 사람은 단순 병렬 구조가 아닙니다. 속 사람이 먼저이고,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자기 혼자 움직이는 독립 시스템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influx, 곧 유입을 받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유입이 너무 지속적이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둘을 거의 하나처럼 느낍니다.

 

비유하자면 전등과 전기 같은 관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보통 ‘전등이 빛난다’고 느끼지만, 실제 빛은 전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류 유입 때문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전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럽고 끊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등과 전류를 분리해서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관계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에 열려 있는 더 깊은 인간입니다. 사랑, 양심, 더 높은 진리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감각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연적 인간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속 사람을 통하여 계속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인간은 이 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의지를 전부 자기 독립 생명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appearance, 곧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생명과 thought affection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도록 허락받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AC.161의 ‘how they appear as a one’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실제로는 구별되지만, 유입 때문에 하나처럼 보입니다. 마치 영혼과 몸이 서로 다른데도 하나의 인간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팔을 움직일 때, ‘영혼이 몸에 influx를 보내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그냥 ‘내가 움직인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타락과 거듭남도 결국 이 influx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만으로 산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는 influx의 근원을 잊어버립니다. 즉 겉 사람이 자기 독립 생명처럼 굳어집니다. 반대로 거듭남은 점점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influx를 받아 산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지각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지, 무엇이 단순 겉 사람 움직임인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반면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 influx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 사람 자체를 자기 존재 전체로 느끼며 삽니다.

 

결국 AC.161은 단순 심리학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유입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닫힌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과 사랑과 생각이 흘러들어오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도, 바로 그 끊임없는 influx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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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 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AC.161 심화 1)

 

공명이라는 표현 앞에 소름이 돋습니다...

 

 

아마 목사님께서 소름 돋으신 이유는, 그 표현이 단순 창3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 전체를 너무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악은 대부분 ‘외부 침입’이라기보다 ‘내부 공명’으로 설명됩니다. 지옥은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 안에 방향성으로 존재하는 것에 말을 겁니다.

 

그래서 뱀의 말은 단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이 힘을 가진 이유는, 인간 안에 이미 아주 미세하게라도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 ‘나도 스스로 알고 판단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 안에 그런 경향이 전혀 없었다면, 그 말은 그냥 지나가는 소음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이 점이 정말 무섭습니다. 악은 대개 ‘완전히 낯선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안 어딘가 이미 원하고 있던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유혹은 단순 외적 공격이 아니라, 내 own 안의 어떤 것과 외부 거짓이 서로 진동수를 맞추는 현상처럼 보입니다. 목사님께서 ‘공명’이라는 표현에 반응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 현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repeatedly 말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지옥은 인간을 강제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인간 안에 어떤 동의, 어떤 기울어짐, 어떤 delight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혹의 진짜 전장은 외부가 아니라 인간 own 안입니다. 외부 거짓은 단지 그 안에 이미 존재하는 자기 사랑과 독립 욕구를 깨워 흔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태고교회 타락이 그렇게 비극적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원래 주님의 생명을 너무도 직접적으로 알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존재들 안에서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미세한 방향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전에는 단순히 거짓으로 보이던 것이 이제는 ‘매력적인 가능성’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공명입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도 거의 같은 구조 안에서 삽니다. 어떤 말이나 사상이 내 안에서 강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대개 이미 그 방향의 affection이 내 안 어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단순 지식 교정이 아니라 affection의 재형성입니다. 내 안의 공명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경우는, 자기 사랑과 지옥적 사고가 들려와도 그것과 공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의 불협화음처럼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 affection 구조 자체가 이미 주님 중심으로 재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 어떤 영에게는 달콤하게 들리고, 어떤 천사에게는 고통스럽게 들립니다. 결국 인간은 ‘무엇과 공명하는 존재인가’에 따라 자기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AC.161, 심화 3, ‘influx’

AC.161.심화 3. ‘influx’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하는지, 혹은 어떻게 하나로 보이게 되는지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흘러드는 influx, 곧 유입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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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AC.161.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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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심화

 

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이것이 주님에 의해 허락되었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AC.161)

 

위 본문에서 그들은 겉 사람 안, 곧 자기의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말인데요, 이것이 악한 거 아닌가요?

 

 

바로 그 지점이 AC.161의 핵심 긴장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니, 겉 사람 안에서, 자기 own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면 그게 이미 악 아닌가?’라는 감각은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스베덴보리도 결국은 그 방향이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evil)을 단순 충동 발생 자체로 보지 않고, 그것이 굳어져 의지의 중심이 되는 상태로 본다는 점입니다.

 

AC.161에서 말하는 이 후손들은 아직 ‘악한 자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중심 자체가 완전히 자기 사랑으로 굳어진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을 사랑했고, 여전히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전 태고교회처럼 ‘주님 안에서만 살고 싶다’는 상태보다, ‘나 자신 안에서도 살고 싶다’, ‘ own 안에서도 느끼고 움직이고 싶다’는 방향성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문제는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 자체라기보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살고자 하는 경향의 강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즉시 끊어버리지 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면 자유와 자발성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태고교회 초기 인간은 자기감을 거의 ‘투명한 그릇’처럼 가졌습니다. 자기 자신을 느끼더라도 즉시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AC.161의 후손들은 점점 그 자기감을 더 독립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가 너무 자명했는데, 이제는 ‘나도 나 자신처럼 살고 싶다’는 방향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직 완성된 악이라기보다, 악의 방향성(direction)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마치 병이 아직 몸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심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상태와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들을 여전히 ‘good’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선을 미워하지 않았고, 진리를 조롱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사랑 속에 굳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점점 ‘주님 안의 삶’에서 ‘자기 own 안의 삶’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 거짓이 그 안에서 공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AC.161은 굉장히 미묘한 상태를 다룹니다.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방향이 틀어지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마치 아주 미세하게 나침반 방향이 틀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거리 차이가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은 대개 이렇게 시작됩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적 악이라기보다, ‘주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무게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는 것입니다.

 

 

 

AC.161, 심화 2, ‘공명’

AC.161.심화 2. ‘공명’ 그리고 바로 이것이 창3 타락의 문을 엽니다. 뱀의 유혹은 갑자기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덮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이미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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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푸는 열쇠, influx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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