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nature), ‘생명나무(tree of lives), 그러니까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본성,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그저 기억 지식에서 비롯될 뿐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서는 뒤이어 나오는 글들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설명이라기보다 ‘구조적 이정표’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세기 2 9절을 중심으로, 나무, 동산, 에덴, 중앙이라는 핵심 상징들을 압축적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종류의 ‘나무’가 다시 한번 또렷이 구분되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둘째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지 기억 지식에서 출발할 뿐인 신앙입니다. 이는 질서가 거꾸로 될 위험을 내포한 인식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개념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는 그 윤곽만 제시되었을 뿐이며, 각각이 실제 삶과 영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이 문장을 둡니다.

 

그래서 AC.106은 독자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질 설명의 흐름 속에서’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지식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 갈라지고 또 충돌하는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 글은 또한 스베덴보리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 개념을 먼저 심어 두고, 그것이 이후의 설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차 분명해지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이름을 얻었을 뿐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그 열매를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AC.106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지도’를 펼쳐 보았을 뿐이며, 이제부터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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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감을 품을 것 같아요. 소위 말세의 징조 같은 온갖 뉴스가 난무하는 이 시대를 주님이 오셔서 제발 좀 정리, 정돈해 주셨으면들 하거든요.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거룩한 내용을 어떻게 풀어 설명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새 교회는 보이지 않는 상태다’라는 식으로 바로 들어가면, 대부분의 분들은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정리해 주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대 자체를 부정하려 들기보다, 먼저 그 기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공감해 주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은 ‘밖에서 질서를 세워 줄 힘’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서와 의에 대한 갈망’이라는 점에서 건강한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설명은 교정이 아니라 ‘확장’의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질문을 살짝 바꾸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정리하신다면, 그 정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사람’이라고 답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어도 다시 혼란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어가면, 외적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납득하게 됩니다.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단순히 바깥을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방식’이라는 방향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에는 성경 자체를 통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를 떠올리게 하면 좋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와 세상의 혼란을 끝내 줄 ‘외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사람의 마음과 삶을 다루셨습니다. 이 사실을 떠올리게 하면, ‘, 주님의 방식은 원래 이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문이 열립니다. 곧, 주님의 오심은 세상을 뒤집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 나라를 세우는 사건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두 층위’를 구분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안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에서는 전쟁과 갈등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안의 역사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두 층위를 동시에 다루시지만, 중심은 언제나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 설명을 통해, ‘세상이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새 교회가 오느냐’라는 질문이, 사실은 두 층위를 섞어서 생긴 질문임을 스스로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 온 다음에야 비로소 ‘새 교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새 교회’는 눈에 보이는 조직이 먼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새로운 질서’가 먼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살아나며, 그 신앙으로 이해가 열리는 삶의 방식이 실제로 시작될 때, 그것이 바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점을 차분히 연결해 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1퍼센트만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로 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 설명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로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서면,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세상은 이미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질서는 항상 안에서 밖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정리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바꾸시지만, 그 방식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먼저 한 사람 안에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왜 세상은 그대로인데 새 교회를 말하는가’ 하는 반감이 줄어들고, 오히려 ‘그럼, 나부터 시작해야지’라는 방향으로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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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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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새 교회’,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람들로 지상의 99%는 어수선함에도 불구, 겨우 1%의 사람들을 가지고 어느 한쪽 구석에서 새 교회는 시작되는 건가요? 노아의 홍수도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거죠? 태고교회도 당시 교회 안 사람들만 대상으로 한 것이고 말입니다. 석기시대 등을 생각하면, 이렇게 모든 걸 나눠서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핵심부터 바로 말씀드리면,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떤 시점에 전 세계가 한꺼번에 바뀌면서 도래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기대는 성경의 외적 역사 이해에서는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새 교회는 언제나 ‘상태의 시작’으로 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의 질서가 회복된 상태’가 시작될 때, 이미 새 교회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겉으로 보면 세상은 여전히 자기중심의 욕망과 혼란 속에 있습니다. 국가 간 대립, 이념 갈등, 개인의 욕망 중심적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는 다른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란 제도나 숫자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는 99퍼센트가 어떻게 사느냐와 직접적으로 경쟁하거나 대치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층위에서, 조용히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고, 흩어져 있으며, 서로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공통된 하나가 있습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서 이해가 열리는 질서’가 실제로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교회의 시작입니다.

 

말씀하신 ‘노아의 홍수’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 물리적 재난이라기보다, ‘교회 상태의 붕괴’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홍수 이전의 교회, 곧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중심으로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였고, 그 상태가 무너지면서 감각과 기억 지식 중심으로 내려앉는 과정이 홍수로 묘사됩니다. 이 변화는 인류 전체가 동일하게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로 불릴 수 있는 상태를 가진 사람들’ 안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라는 것은 인류 전체와 동일한 범위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이 점에서 석기시대든, 고대든, 현대든, 언제나 인류 전체와 교회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통찰은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같은 입장입니다. 인류 전체는 다양한 상태에 있고, 그중 일부만이 교회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소수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소수가 ‘질서의 중심’을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에서는 양보다 질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들어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살아 있으며, 그 신앙에서 이해가 열리는 그 구조가 살아 있는 한, 교회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새 교회는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간적 의미의 구석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되지 않는 영역에서,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중심적인 영역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영적 질서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개인들일 수 있지만, 그 상태가 점점 연결되면서 교회는 형성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늘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선지자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도, 그리고 이후 모든 영적 갱신의 시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이 질문의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언제 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되느냐’의 문제이며, 그 ‘어디’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한 사람 안의 질서’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으로 돌아서고, 사랑이 중심이 되어 그로부터 신앙이 살아나고, 그 신앙으로 이해가 열릴 때, 그 사람 안에서 이미 새 예루살렘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비록 적어 보여도,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AC.105, 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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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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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시기, 시절마다 거의 동일한 역사요, 패턴이었는데요, 한편으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도 하는, 이런 삶을 이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질문을 조금 냉정하게 바로잡고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 전체, 곧 선지자들,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더 나아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증언까지, 이 모두가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기 중심에 머무는 한, 시대가 바뀌어도 패턴은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아르카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향은 ‘세상을 바로잡는 삶’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질서는 외부 구조가 아니라, 내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욕망과 거짓이 뒤섞여 돌아가더라도, 한 사람 안에서만큼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동방의 에덴동산’이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삶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분별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뉴스, 전쟁, 이념 대립을 볼 때, 그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만 보지 않고, ‘의지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를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나 절망에 휩쓸리기보다, 인간 상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둘째, ‘자기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외부의 혼란이 클수록, 사람은 쉽게 자기 정당화나 공격성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의 길은 반대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섬기도록, 곧 사랑이 이해를 이끌도록, 매 순간 방향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행동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상황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적 상태는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평화에서 나온 작은 행위들의 연속으로 드러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조리함에 대한 감각 자체가 이미 깨어 있음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아무 감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것이 부조리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그 안에는 더 높은 질서에 대한 빛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빛을 외부를 향한 판단으로만 쓰지 않고,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 감각은 절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 사람 안에서 ‘안식의 질서’를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질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살았던 방식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며,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붙들었던 삶의 태도입니다.

 

 

 

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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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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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이 내용으로 오늘날 전 세계 혼란, -중 대립, -우 및 미-이란 전쟁, 그리고 여러 나라 구석구석 좌-우 대립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충분히 설명은 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복잡한 국제 정세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AC.105의 ‘의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의지(사랑)’와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cupidity)’의 구분은 이런 혼란을 바라보는 ‘근본 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은 ‘의지’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로부터 나오는 욕망의 의지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마치 ‘자기 생각’이나 ‘정당한 신념’처럼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집단 차원에서는 ‘우리 편이 옳다’는 확신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만들어집니다.

 

이 구조를 국가와 국제 관계로 확장하면, 매우 유사한 패턴이 보입니다. 국가도 일종의 ‘집단적 인간’처럼 움직입니다.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 번영,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데,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온 질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나온 자기 중심성’일 때입니다. 그때 국가는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관계는 ‘상호 이해’가 아니라 ‘힘의 균형’으로 운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중국 갈등 같은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경제, 기술, 안보 문제이지만, 그 깊은 층에서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합니다. 이 의지는 반드시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기 보존과 우월성에 대한 욕망이 중심이 될 때,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견제하고 압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때 서로는 자신을 ‘정당한 쪽’으로 느끼기 때문에 갈등은 더 복잡해집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란-미국 긴장 역시 비슷한 틀로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역사적, 안보적, 정치적 이유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된 의지’가 작동합니다. 두려움은 자기 보호를 강화시키고, 욕망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상대는 점점 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국가 내부의 좌-우 대립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각 집단이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의지(욕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AC.105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지는 ‘사랑에서 나와 타자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은 ‘자기 중심에서 나와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쪽 의지가 중심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질서와 평화, 혹은 혼란과 갈등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단순히 ‘누가 옳으냐’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지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집단의 상태는 결국 개인들의 상태가 모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의 갈등은, 인간 내면의 질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결국 이 설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란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욕망이 중심에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고,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AC.105, 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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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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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의지 곧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서술되지만 말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고,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욕망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곧 모든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분한테서 나오는 자비 말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의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자리’와 정확히 연결시키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 한가운데’를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의지의 중심’으로 읽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조, 즉 동산은 지성,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구조를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는 해석입니다.

 

먼저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은 이미 AC.102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위치입니다. 그것은 동산의 변두리에 있지 않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사랑의 신앙이 인간 내면에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중심 원리’임을 뜻합니다.

 

이 중심은 곧 속 사람의 의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지를 ‘마음’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 속한 가장 근본적인 소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의지는 인간의 자율적 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이 자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통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일상 언어에서는 ‘내 의지’, ‘내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속한 것은 참된 의지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사람이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충동입니다.

 

이 대목은 인간 이해에 있어 매우 정직하고도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을 ‘생산’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유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자유뿐입니다.

 

이제 다시 ‘동산 한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 자리는 의지의 자리이며,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참된 의지가 없고 다만 욕망만 있다면, 그 나무는 사람의 소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자비는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비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흘러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인간 삶의 중심이 언제나 주님의 자비에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도덕적 시험담에서 완전히 벗겨 냅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입니다. 중심에 주님의 자비가 있을 때, 사랑과 신앙은 살아 있고, 지성은 에덴의 동산이 됩니다. 중심이 인간 자신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질서는 무너집니다.

 

AC.105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중심은 주어지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 곧 ‘생명나무’라고 말입니다.  

 

 

심화

 

1.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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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 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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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새 교회’,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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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AC.105, 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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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세 나무의 구분 :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감각적 신앙의 길목'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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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과 양심 : 잃어버린 생명의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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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퍼셉션이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감각으로서, 어떤 것이 그 상황, 그 순간에서 참인지, 그리고 선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은 천사들에게서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참이고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또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립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해 온 핵심 개념, 곧 ‘퍼셉션(perception)을 정면으로 정의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는 안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퍼셉션은 감정도 아니고, 직관도 아니며, 추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어떤 것이 그 상황에서 참인지, 어떤 것이 그 순간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분별’하게 합니다. 논증이나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느끼는 것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므로,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이 퍼셉션이 삶의 기본 감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배우지 않았고, 무엇이 선한지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이 다루는 인간은, 계율이나 교리 이전의 인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이 천사들한테서는 더욱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퍼셉션을 통해 참과 선을 알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압니다. 즉,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즉시 구별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매우 낯선 능력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거의 묻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누군가가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성품(quality)을 알아차립니다. 이는 정보 수집이나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퍼셉션의 자연스러운 작용’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알아보는 방식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인간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누어 대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양심은 퍼셉션의 대체물이 아닙니다. 양심은 교리와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내적 규범’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알려 주지만, 즉각적이지 않고, 때로는 갈등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반면 퍼셉션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없고, 영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있습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지만, 퍼셉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는 인간’을 언급합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는 외적 규범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 행동할 수는 있지만,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퍼셉션은 더더욱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현실 진단’입니다. 창세기 2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감각을 전제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AC.104는 이렇게 말합니다. 퍼셉션은 잃어버린 신비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생명의 감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알지 못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 감각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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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주제가 의미를 결정한다 : 상응 해석의 원리’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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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심화

 

1. 상징 상응

 

상징 상응을 같은 뜻으로 사용해도 되나요? 위 해설 끝단에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라는 표현에 제가 상응들이라는 표현을 첨가, 창세기의 상징들, 상응들은이라고 했는데, 이래도 되나 해서 묻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두 단어를 완전히 같은 뜻으로 써 버리는 것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상징들, 상응들은’처럼 병렬로 함께 쓰는 것은 가능하지만, 엄밀히는 같은 개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겹치지만 다른 층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상징’은 비교적 넓은 말입니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킨다’, ‘표현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문학에서도, 설교에서도, 일상에서도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반면 ‘상응’은 상응 개념으로,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훨씬 더 엄밀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실제적 대응 관계’, 곧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생명의 질서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의미를 빗대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차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징’은 의미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상응’은 그 의미가 성립되는 실제 관계입니다. 상징은 언어의 층위이고, 상응은 존재의 질서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목사님께서 쓰신 ‘창세기의 상징들, 상응들은’이라는 표현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강조 효과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실제 상응 질서가 있다’는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담기 때문입니다. 다만 반복 사용 시에는 약간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문맥에 따라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더 깔끔할 때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완전히 같은 뜻으로 섞어 쓰는 것은 피하시되, 지금처럼 두 개를 나란히 두어 ‘표현(상징)과 실재(상응)를 함께 짚는 방식’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식 글쓰기에서는 아주 적절한 사용입니다.

 

 

 

AC.103, 창2:9, ‘주제가 의미를 결정한다 : 상응 해석의 원리’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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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글이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제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여 사용되는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읽어 온 모든 상응 해설에 ‘해석 원칙의 열쇠’를 쥐여 주는 매우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이 고정된 사전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같은 ‘나무’라는 표현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인간 상태가 논의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주제(subject)의 성격에 따라 술어(predicate)의 성격이 달라진다.’

 

지금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로 사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나무’는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식, 곧 퍼셉션’을 의미하게 됩니다.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나무라는 상징 때문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 같은 ‘나무’라는 말이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면,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은 퍼셉션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 곧 이해와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의 ‘나무’는 지식, 교리, 혹은 기억 지식과 연결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상응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이 원칙은 성경 해석 전반에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특정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항상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식 해석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AC.102에서 설명된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해석도 절대적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적 인간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하는 정의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창세기 2장은 특별합니다. 이 장은 역사나 교리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본래적인 상태에 있을 때의 내적 구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창세기 1장과 2장이 같은 창조 이야기를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주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장은 영적 인간의 형성과 질서를, 2장은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을 다룹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표현이 전혀 다른 깊이와 결을 띱니다.

 

AC.103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응은 단어에 붙어 있는 꼬리표가 아니라, 말씀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 상태 전체에 의해 살아나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 상응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심화

 

1.상징상응

 

 

AC.103, 심화 1, ‘상징’과 ‘상응’

AC.103.심화 1. ‘상징’과 ‘상응’ ‘상징’과 ‘상응’을 같은 뜻으로 사용해도 되나요? 위 해설 끝단에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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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과 양심 : 잃어버린 생명의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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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두 나무, 두 인식 : 사랑에서 보는가, 지식에서 판단하는가'(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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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심화

 

2. 모든 생명의 차원들

 

 AC.102 해설에 복수형 생명들(lives),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을 포함합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여기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이라는 게 뭔가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들(lives)의 복수형은,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층위’로 나뉘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은 하나이며, 그 근원은 주님이시지만, 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는 단일한 형태로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존재 전체, 그러니까 의지, 이해, 감정, 사고, 행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져’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흘러나와 인간 안의 여러 영역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작용하는 생명의 양상들을 가리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는 ‘의지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사랑 그 자체가 자리 잡는 중심이며,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원하느냐를 결정하는 생명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가장 핵심이 되는 생명으로, 선을 사랑하고 그 안에 머물고자 하는 내적 움직임입니다. 둘째는 ‘이해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으로, 사랑에서 흘러나온 빛이 사고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의 이해는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보는 것 같은 앎’, 곧 퍼셉션에 가까운 인식입니다.

 

셋째는 ‘감정과 정서의 생명’입니다. 사랑이 의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쁨, 평안, 확신, 따뜻함 같은 정서로 퍼져 나가는 차원입니다. AC.92에서 말한 ‘평화의 기쁨’이 바로 이 영역에 해당합니다. 넷째는 ‘이성과 사고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이미 형성된 이해를 가지고 분별하고 적용하는 기능인데,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마저도 사랑을 섬기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다섯째는 ‘행위의 생명’입니다. 말과 행동, 습관과 삶의 방식 속에 나타나는 생명으로, 내적인 사랑과 이해가 외적으로 열매 맺는 차원입니다.

 

이 모든 차원은 서로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의지에 들어오고, 그 사랑이 이해를 밝히며, 감정을 따뜻하게 하고, 사고를 질서 있게 하며, 결국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생명들’이라고 복수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생명이 여러 층위로 전개된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여러 색으로 펼쳐지는 것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결국 이 표현은, 천적 인간의 생명이 단순히 ‘살아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사랑의 생명으로 가득 차서 각 영역마다 살아 움직이는 상태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가 단수로 끝나지 않고 ‘생명들’로 표현될 때, 그것은 사랑이 중심이 되어 인간 전체를 살리는 ‘다층적이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AC.102, 창2:9, '두 나무, 두 인식 : 사랑에서 보는가, 지식에서 판단하는가'(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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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심화 1, ‘도덕적 시험 장치’

AC.102.심화 1. ‘도덕적 시험 장치’ 위 AC.102 해설 초입에 ‘흔히 우리는 에덴동산의 나무들을 도덕적 시험 장치로만 이해해 왔지만,’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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