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8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 불교의 중도와 선과 진리의 신적 질서

 

해설

사람은 흔히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을 철저히 억제해야 거룩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는 삶도,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와 기쁨을 모두 부정하는 삶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중도는 흔히 양쪽의 극단을 피하고 적당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태도로 이해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단순한 절충이나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고’(苦, dukkha), 곧 고통과 근본적인 불만족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른 수행과 지혜의 길입니다. 역사적 석가모니의 수행을 전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그가 왕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 뒤 출가하여 극심한 고행을 했으나, 어느 쪽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제시된 중도는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욕망에 끌려가거나 육체를 학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길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이러한 중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경전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길과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행의 길을 모두 피해야 할 극단으로 제시하고, 부처가 깨달은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라고 밝힙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인 정견, 바른 의도인 정사유, 바른 말인 정어, 바른 행동인 정업, 바른 생계인 정명, 바른 노력인 정정진,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 바른 집중인 정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말, 행동과 생활, 마음의 훈련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의 목적은 그저 지나친 행동을 삼가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애’(渴愛, taṇhā), 곧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열반’(涅槃, nibbāna)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열반은 갈애와 무명이 소멸하여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도는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절제하라는 생활의 지혜를 넘어,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행의 질서입니다. 때로는 매우 엄격한 계율과 지속적인 수행이 요구되기도 하므로, 중도를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길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 12.15에 수록된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 Sutta)은 세계를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견해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라는 두 극단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부처는 이 양극단을 떠나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연기는 존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Madhyamaka) 사상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 사상가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24장 18게송에서 연기와 ‘공’(空, śūnyatā), 곧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현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존재를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로 붙잡는 견해를 비판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초기불교의 수행적 중도와 대승불교의 철학적 중도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어느 한쪽의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를 이해할 때에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수행적 중도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서는 철학적 중도를 함께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기독교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하지도 않고,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필요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1번에서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이 없다면 생각과 행동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삶은 욕망과 사랑을 모두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직업에 충실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중도는 지나친 욕망과 고행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와 새 교회의 신적 질서를 단순히 같은 원리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는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과 지혜의 길인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삶의 질서가 바로잡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밝힌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적당히 절충하거나 모든 갈등을 피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악이라면 분명하게 악을 멀리해야 하고, 어떤 일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 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같은 저작 Life.21–22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의 기준은 언제나 두 극단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적당한 중간을 선택할 수 없고, 선과 악을 조금씩 섞는다고 해서 참된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중도 역시 진리와 오류를 절반씩 섞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 모두 무분별한 절충을 경계할 수 있지만, 불교는 바른 견해와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나는 길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중관사상은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의 통찰을 강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창조된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한한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4번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아니며, 자신이 가진 사랑과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독립적인 생명 소유라는 착각을 경계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설명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공은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현상들의 자성 없음을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전제하고 모든 피조물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독립적인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자아적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절대화하면서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에서 참된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도를 둘러싼 두 전통의 비교는 단순한 생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반대로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분별 없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필요한 것은 양쪽의 행동을 산술적으로 절반씩 섞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참으로 유익하며, 어떤 행동이 선과 진리의 질서에 부합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중도는 극단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 없는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며, 진리 역시 사랑 없는 정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 47번에서 사랑의 본질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결합하는 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는 사랑은 자기만족에 머물 위험이 있고, 상대방의 삶을 세워 주려는 목적 없이 행사하는 진리의 판단 역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단호하게 악을 거절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중간 선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작용하는 삶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중도를 기독교의 사랑과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두 가르침이 동일한 교리를 전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그 의미를 단순한 절충이나 적당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과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을 넘어 팔정도에 따라 ‘해탈’(解脫, vimutti)을 추구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의 의미를 밝히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결론은 옳지 않습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절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중도가 인간을 속박하는 극단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단을 피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희석해서도 안 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를 이룰 때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존중하면서도, 말씀의 빛에서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참된 영적 질서입니다. (BU.008 해설)

 

요약

불교의 중도는 극단을 피하여 적당한 중간을 선택하라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넘어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바른 삶과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를 모든 진리와 오류의 절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참된 영적 삶은 선과 악을 적당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에 담긴 집착 극복과 바른 삶의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삶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임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BU.007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SL.BU.007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 도성제의 바른 삶과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 해설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屬性, attributes)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알아스마 알후스나’(al-asma al-husna), 곧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꾸란 7:180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그 이름들로 그분을 부르라고 가르치며, 17:110은 ‘알라’라고 부르든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든 그분에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59:22–24에는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평화의 근원이신 분, 창조하시는 분, 형상을 주시는 분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여러 완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거룩함 등 그분의 신적 본성을 통하여 알려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같은가, 그리고 여러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99가지 아름다운 이름이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Sahih al-Bukhari) 2736에는 하나님께 99개의 이름이 있으며 이를 알고 헤아리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다는 전승이 나옵니다. 다만 꾸란이 99개의 이름을 하나의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름들의 구체적인 목록과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전승과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들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랍어 명칭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행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적 전통에서는 그 이름들의 뜻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허용된 범위에서 자비와 정의와 관대함을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면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하거나,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이슬람의 신앙은 단순한 명칭의 수집이나 암송을 넘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이름에 관한 가르침과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009항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신적 성질,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존재를 단순한 이름이나 외적 명칭보다 그 존재의 내적 성질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저작 2724항에서는 고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히 특정한 명칭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것과 연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내적 생명이 약해지고 외적 형식만 남자, 사람들은 이름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만을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볼 때에도 중요한 것은 이름의 수나 발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들이 어떤 신적 성질을 나타내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本質, essence)의 관계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28항에서 신적 본질 자체는 사랑과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6–38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이시며, 사랑에서 선이 나오고 지혜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과 선하심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때때로 경쟁하는 속성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적 사랑과 지혜라는 하나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신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고,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랑이 신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여러 독립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과도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신적 본질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는 신학적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한 차이는 특히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들에서 드러납니다. 꾸란에는 자비와 용서의 이름뿐 아니라 절대적 권능과 주권, 심판과 위엄을 나타내는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이름들을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자비와 정의가 신적 본성에 함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적 권능은 신적 사랑과 지혜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보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것처럼 나타나는 표현도 주님의 실제 본성과 인간이 악을 사랑하여 경험하는 결과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석할 때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지배욕, 보복심을 무한하게 확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구별이 이슬람의 권능과 심판에 관한 모든 해석을 인간적인 보복의 관념으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그 이름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마6:9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 2724항에서 이 말씀의 이름이 단순한 발음이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요17:26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순히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계시의 충만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진리를 전달하신 예언자에 머무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결정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과 참된 신앙의 삶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자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 이름의 내적 성질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며, 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선을 실천하려는 상태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종교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우월성으로 삼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신적 명칭만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름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사랑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더라도 한 분이시며, 그 이름들은 인간이 그분의 자비와 거룩함과 지혜를 이해하고 경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름에서 본질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외적 예배에서 내적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며, 그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성질을 얼마나 사랑하고 받아들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모든 신적 사랑과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8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분의 속성을 나타내며, 인간은 그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질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암송하거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참된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또한 신적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본질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며, 그분의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신앙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의 신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IS.00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SL.IS.007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기초다’ - 두려움과 사랑의 영적 질서 해설이슬람에서 하나님을 경외(敬畏, reverence)하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천주교가 죄와 회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죄를 그 중대성에 따라 ‘대죄’(大罪, mortal sin)와 ‘소죄’(小罪, venial sin)로 구별하며,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영원히 상실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단순히 현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죄가 대죄인지는 누가 결정하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를 자신의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일까요? 또한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사랑이 즉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주님께서 죄인을 던져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 따라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대죄와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이해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달라질까요? 이번 명제는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참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4–1855항은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면서, 대죄는 하나님의 법을 중대하게 어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소죄는 체어리티를 상하게 하고 약화시키지만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리서 1857항은 대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첫째, 그 행위가 중대한 사안이어야 합니다. 둘째, 당사자가 그 행위가 중대한 죄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 행위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동일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식과 자유, 의도에 따라 개인적인 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리서 1860항은 무의식적인 무지나 외부의 강압, 심리적·병리적 장애 등이 행위의 자발성과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의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회개 없이 지속되면 인간을 지옥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은 대죄가 체어리티와 성화 은총을 상실하게 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033항은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1035항은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면서 그 가장 큰 고통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1037항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지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상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지옥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노하시어 임의로 지옥행을 선고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끝까지 지속되는 회개 거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지옥을 인간의 악한 삶과 무관한 임의적인 처벌로 이해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유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선택하는가가 영원한 운명과 깊이 관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중대한 악이라는 사실과 그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대죄의 책임이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도 행위 자체의 중대성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대죄의 상태에 있으며,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 갈등과 압력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인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과 특정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결정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지옥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이 자신의 악에 따라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5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분노하여 지옥으로 내쫓으신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며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자신에게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HH.547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이 곧 그 사람 안의 지옥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한 악을 사후에도 사랑하며, 그 악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와 일치하는 영적 공동체를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지옥은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악한 사랑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옥의 존재나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옥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근원을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악한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죄와 회개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다는 천주교의 핵심적인 경고와 연결되면서도, 지옥이 형성되는 영적 원리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개념은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77–480에서 인간의 사후 상태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480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유지하며, 그 사랑이 영계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생전에 한 번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탐욕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으며 정직한 삶으로 돌아섰다면, 그의 상태를 그 한 번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즐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된 상태가 단순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사랑과 의지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가 중대한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 따른 실제적인 삶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의 구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모든 악이 영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속이고 착취하는 악,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악은 매우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악을 진리와 양심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선택할수록 그 악은 자신의 의지와 더욱 깊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중대성과 의도적인 선택을 구별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죄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라는 법적·성사적 분류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특정한 죄목이 어떤 등급에 속하는가보다, 그 악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을 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면서 끝까지 그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그 악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굳혀 갑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참된 경고는 특정한 죄의 등급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회개를 단순히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perfect contrition)가 대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여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사망 직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524항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회개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악 안에 머물며, 악 안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주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에게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번 명제를 단순히 천주교만의 잘못된 지옥 교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깊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악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십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죄를 후회하는 감정과 실제로 그 악을 미워하고 버리려는 사랑의 변화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죄를 고백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실제로 달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사망 직전에 충분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참된 회개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천주교의 완전한 통회에 관한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모두 내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변화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상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는 HH.491–520에서 인간이 죽은 후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를 거쳐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영들의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났던 모습과 내적인 사랑이 점차 구별됩니다. 특히 HH.499–511에서 그는 사람이 사후에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지상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사랑과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후에 누구나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상태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며, HH.480에서는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는 생전에 형성된 사랑과 무관하게 구원의 기회를 새롭게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원한 운명은 단순히 사망 순간의 외적인 종교적 상태나 마지막 고백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미 지옥행이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고집하더라도 결국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고 안심시키는 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선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옥의 가능성은 실제적이며,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할 이유도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옥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조종하기보다, 악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가르치고 주님의 자비 안에서 실제적인 회개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지옥과 회개를 가르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명제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 악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대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는가, 사망 전에 고해성사나 통회를 마쳤는가 하는 외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대죄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인식과 의도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삶의 성격에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지옥의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는 천국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지옥을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신의 죄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거나 마지막 순간의 회개만을 기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젠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할 종교적 절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할 거듭남의 삶입니다. 결국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지옥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버리기를 거부한 악한 사랑입니다. (SL.RC.008 해설)

 

요약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는 그 핵심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악 안에 머무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TCR.520–524와 HH.545–550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성립하려면 중대한 사안과 충분한 인식, 의도적인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이해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개인의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은 대죄와 소죄라는 분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하고 사후에도 유지하는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HH.480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하며, HH.547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악에 상응하는 지옥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은 실제적인 회개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가르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죄목의 분류나 사망 직전의 외적인 고백만으로 개인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옥을 주님께서 분노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하시는 형벌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그러한 단순화를 경계하므로, 이러한 오류를 천주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중요한 차이는 죄와 회개의 필요성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고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상태는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듭남에 따라 전개되며, 어떤 사람의 최종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이를 단순한 죄목의 분류와 마지막 종교적 절차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해로 축소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지옥의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지금부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관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손과 얼굴, 눈과 음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무리 성경적이고 신앙적으로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인간의 생각 속에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의 범주를 초월하시며, 인간의 언어와 관념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 인간이 이해한 그 내용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실재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적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인간적인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과 언어로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인성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만남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지를 인간이 완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표현들이 지닌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말은 인간이 경험하는 선한 사람의 성품을 무한히 확대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피조물이 경험하는 선함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므로 인간의 지성과 동일한 범주에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개념을 초월하신다고 말하는 부정신학을 함께 인정합니다. 긍정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사랑과 선과 지혜와 거룩함을 고백하고, 부정신학은 그 고백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으로 절대화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부정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하나님 자신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지식과 이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신앙적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1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피조물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전적인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몸이 없으시며, 공간의 경계 안에 갇히거나 물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를 때 그 빛을 자연계의 물리적 광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빛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는 참된 계시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더 깊은 실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우상과 구별하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간의 눈에 보이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을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동방정교회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성화상’(icon)입니다. 정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여러 성인의 모습을 나타낸 성화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앞에서 공경을 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을 그림 속에 가두거나 묘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에 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만 남아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므로, 그분의 성육신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며, 성화상의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물론 성화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교회가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함께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55:8-9에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창1:26-27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며, 창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가 증언됩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눈, 얼굴과 팔에 관한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계의 물질적 신체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표현들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특히 요1:18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개념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영원히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은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과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7-10에서 하나님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은 물질적 신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계의 한 장소에 거주하시거나 어떤 물질적인 형상 속에 갇혀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 역시 동방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연적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하나님을 형상 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천국적인 하나님 관념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DLW.11에서 그는 천국의 모든 천사가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유한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고 말할 때에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 유한한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을 인간이라고 부를 때에는 이러한 자연적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 적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DLW.285-289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자연적인 공간과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는 아무런 주체도 없는 추상적인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본질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근원이시고, 피조된 인간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천사들이 모두 완전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신적 질서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의 인간 형상이나 천사들의 인간 형상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우주적 신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천사에게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천국 전체가 인간의 형상과 상응하는 질서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 형상은 자연적인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질서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왜 중요합니까? 그는 DLW.13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종교적 생각의 중심에 있으며, 참된 하나님 관념이 없으면 천국과의 교통도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기도와 예배에서 실제로 어떤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런 형상도 없는 무한한 공간이나 막연한 우주적 힘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각은 분명한 인격적 대상을 향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랑을 누구에게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분명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787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 안에 영혼이 몸 안에 있듯 계시며, 인간이 이처럼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과 상호적인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하나님은 단순히 자연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인성 안에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추상적인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는 신앙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을 아무런 인격도 없는 추상적인 신적 원리로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위격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고,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영원히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교회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 위격의 실재를 함께 고백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인격적 단일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묘사하는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어떤 분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신론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correspondence)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얼굴과 눈과 발, 그리고 빛과 불과 구름에 관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셨거나 자연계의 현상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성경의 자연적 표현들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손은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임재를, 빛은 신적 진리를, 불은 문맥에 따라 신적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문맥과 속뜻에 따라 구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들이 모두 부정확한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적인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위해 주어진 외적인 옷과 같으며, 그 안에는 천국의 영적 의미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제한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상 속에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참된 성경 해석은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형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성화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같은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화상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와 교회의 전례적 전통 속에서 이해됩니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그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가리키는 원형을 향하는 행위로 설명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자연계의 대상과 현상들이 영계의 실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눈에 보이는 형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형상의 권위와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정교회가 성화상을 교회의 예배와 공경 안에서 사용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종교적 그림이나 조각이 예배의 대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영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형상에 종교적 공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비교할 때에는 공통점만을 강조하여 두 개념을 동일시하지 말고, 각각의 신학적 목적과 역할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EO.057-059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교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경과 교리를 충분히 공부했으므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신학적 설명과 다른 생각을 모두 잘못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태도는 모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계시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자신의 지성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 신앙적 겸손을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 겸손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관념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교육과 종교적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 관념을 검토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최종적인 상태까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개념을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의 고백은 아직 삶의 겸손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인간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실제적인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설명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선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교만과 분노와 이기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관념은 아직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정직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하나님 관념은 인간을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겸손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그분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참된 형상도 없으시며 인간이 그분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자체도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되게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신 참된 인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참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분명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연계의 유한한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이 만든 관념 속에 가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우리의 의지와 이해 안에 흘러들어와 실제 삶의 선으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을 바라보는 일이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한 방향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그분을 인간의 생각 안에 가두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사랑을 그분께로 이끄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적 인격의 문제입니다. (EO.008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언어와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부정신학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참된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한하신 분임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형상 없는 추상적인 실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참된 인간이시고,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된 신적 인성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과 신적 인격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연적인 육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신적 사랑과 지혜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겸손과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사랑하는 신앙을 함께 보존하며, 그분께 받은 진리를 실제 삶의 선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7.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동방정교회가 ‘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PR.008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공의는 형벌의 집행인가, 무너진 신적 질서의 회복인가?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죄인을 용서하기 원하시지만, 동시에 완전한 공의를 지니신 분이므로 죄에 대한 형벌을 그냥 면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고, 그 형벌이 치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많은 개신교 신자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죄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악이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형벌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형벌이 치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그를 회복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에 상응하는 고통이 반드시 발생해야 만족되는 것입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속 이해를 제시합니다. 그는 죄의 실제적인 결과와 신적 질서의 엄중함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반드시 형벌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8장 5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과 자기희생을 통해 성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다고 가르칩니다. 제11장 3항 역시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죄의 빚을 완전히 갚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일반적으로 ‘형벌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이라고 불리는 구속론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다만 형벌대속론이 개신교 전체의 유일한 속죄 이해는 아닙니다. 개신교 안에도 그리스도의 승리, 화해, 죄의 용서와 인간의 변화 등을 강조하는 여러 구속 이해가 존재합니다. 또한 정통적인 형벌대속론이 성부는 사랑이 없고 성자만 인간을 사랑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성부께서 사랑으로 성자를 보내셨으며, 성자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이 그 신학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단순히 분노한 아버지가 무고한 아들에게 형벌을 떠넘긴 이야기로만 소개한다면 실제 가르침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하나라고 인정하더라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형벌에 대한 만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 자체가 과연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죄와 형벌의 관계를 강조하는 말씀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롬6:23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선언하며, 갈6:7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히9:22는 율법에 따른 정결 예식의 문맥에서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죄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이 자신의 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죄에 결과가 따른다는 가르침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처벌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히9:22의 피 흘림에 관한 말씀을 모든 죄 사함에 형벌의 집행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확대하려면, 구약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해석하는 신학적 전제가 필요합니다. 반면 겔18:21-23에서는 악인이 자신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면 살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51:17 역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형벌을 집행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 생명을 얻는 데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살필 때 우리는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용서, 제사의 의미와 인간의 회개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115-117항은 구속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구속은 지옥들을 정복하고, 천국에 질서를 회복하며, 그 결과 새로운 영적 교회를 위한 길을 준비하신 주님의 신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구속을 이해하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지옥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영계의 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간이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시기 위해 직접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성을 통해 지옥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시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셨으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속의 본질은 인간에게 내려져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의 세력을 이기시고, 무너진 영적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형벌의 이전보다 훨씬 넓은 영적 현실이며, 주님께서 직접 이루신 신적 승리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난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베덴보리는 TCR.126-131에서 십자가의 수난이 주님께서 겪으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시험을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시는 과정이 완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구속과 십자가의 수난을 서로 무관한 사건으로 분리하지 않지만,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신 행위 자체를 구속의 본질과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서 끊임없이 지옥의 세력과 싸우셨으며,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싸움의 마지막이자 가장 극심한 시험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성에 속한 것을 완전히 벗으시고, 자신의 신성으로부터 나온 인성을 영화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는 성부께서 요구하신 형벌을 성자가 대신 받아 내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악의 모든 세력과 맞서 승리하시고,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영화를 이루셨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132-133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구속 자체와 동일시하는 당시 교회의 가르침을 근본적인 오류로 비판합니다. 이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형벌의 대가 지불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주님의 승리와 영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사53:5의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입니다. 전통적인 형벌대속론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표현을 반드시 성부께서 인간에게 내리실 형벌을 성자에게 이전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지옥의 세력과 직접 대면하셨으며, 그 세력의 공격과 시험을 실제로 감당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의 예언자들이 백성의 죄악을 상징적으로 담당했던 것처럼, 주님의 수난은 당시 사람들이 말씀과 신적 진리를 어떻게 거부하고 모독했는지를 드러내는 표상적 의미도 지닙니다(TCR.126-130). 따라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은 죄의 결과와 악의 세력을 실제로 상대하시고 이기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해석이 사53장의 문자적 표현에서 아무런 신학적 전제 없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구속론은 같은 성경 본문을 서로 다른 신학적 구조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 차이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인간의 실제적인 악과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형벌이 반드시 집행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이것은 악의 결과가 사라진다거나 악인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696항은 악이 스스로 형벌을 가져오며, 악 안에 그 악에 대한 형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형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덧붙이시는 고통이 아닙니다. 악을 사랑하고 행하는 존재가 그 악으로 인해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와 그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통해 이미 천국의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그가 그러한 악을 계속 사랑한다면, 그 악은 그의 내면을 속박하고 다른 악한 존재들과 결합시키며 고통과 파괴를 가져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서로에게 고통을 가하고 형벌을 경험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 악이 무제한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고통을 가능한 한 완화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신적 공의는 악에 상응하는 고통의 양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보복적 원리가 아닙니다. 악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제한하고 선을 보호하며, 가능한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으로 회복시키시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 사함의 의미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요구한다면, 용서는 그 형벌을 죄인 자신이 치르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 치른 뒤에야 가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 사함을 인간이 거듭나는 만큼 악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죄가 제거된다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그 악이 더 이상 그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선 안에 보존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 사함은 단순히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먼저 누군가를 처벌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시고 악에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정당화한다면,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그의 내면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면제해 주시도록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변함없이 열려 있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실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회개와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할 때 또 하나 조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형벌이 공의를 충족한다는 생각은 자칫 고통 자체를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반드시 그만큼 고통을 당해야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도 책임을 묻는 일과 고통을 목적으로 삼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정당한 법적 책임을 묻고, 피해자를 보호하며, 재발을 방지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가해자가 고통을 당하는 것 자체가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도 악은 제한되어야 하며 선한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보복의 만족이 아니라 질서의 보존과 가능한 선의 실현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인간 사회의 법률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공의를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그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와 신적 섭리의 모든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형벌의 정당성을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분별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가능한 도움을 베푸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져야 만족되는 원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죄의 대가가 지불되기 전에는 용서하실 수 없는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는 서로 다른 요구를 지닌 두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지혜 자체이시고, 그분의 공의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으로 인도하시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며, 악이 다른 사람을 파괴하도록 무제한 허용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악인에게 고통을 가하여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를 악에서 돌이켜 구원하고 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사랑한 악에 따라 지옥의 상태로 향하지만, 주님께서는 가능한 한 그를 그 악에서 돌이키고자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중단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신적 성향이 아니라, 사랑이 지혜와 결합하여 선을 보호하고 악을 제한하며 질서를 회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합니까? 전통적인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죄의 형벌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써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죄의 심각성과 십자가의 중요성, 그리고 구원이 인간 자신의 공로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기 위해 누군가가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과하시는 고통이 아니라 악 자체가 가져오는 영적 결과입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는 성부께서 요구하신 형벌을 대신 치르신 사건이 아니라, 지옥의 세력에 대한 마지막 승리와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아야만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인성을 취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내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치렀는가?’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악에서 건져 내셨으며, 나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열린 길에서 실제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적 공의의 목적은 형벌의 완성이 아니라, 악의 지배가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질서가 회복되어 인간이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공의와 형벌,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참된 의미입니다. (PR.008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의 형벌대속론은 하나님의 공의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고 인간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는 죄가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반드시 형벌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참된 기독교’ TCR.115-117에 따르면 구속은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고 천국의 질서를 회복하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주님의 신적 역사입니다. 또한 TCR.126-133은 십자가의 수난을 구속의 본질과 동일시하지 않고, 주님의 마지막 시험과 인성의 영화가 완성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비밀’ AC.696은 악 안에 그 악의 형벌이 있다고 가르치며, 주님께서는 형벌을 가하여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제한하고 고통을 가능한 한 완화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죄 사함은 형벌의 대가가 지불되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보존하시는 거듭남의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TCR.611-614). 결국 신적 공의는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는 보복적 원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악을 제한하고 선을 보호하며 무너진 영적 질서를 회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도 형벌의 대리 집행보다 주님의 승리와 영화, 그리고 인간이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여신 구속의 역사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PR.007.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죄에 진노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SL.PR.007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죄에 진노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의 진노는 실제 감정인가, 인간의 악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7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 - 신적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해설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칠 때, 그 중심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앞선 EO.006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이유와 그 신학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경험이며, 그러한 참여는 인간의 내면과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거나 특별한 종교적 감동을 느끼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과 은혜를 인간에게 전달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는 일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구원론과 영성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이해와 의지,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주님의 ‘인플럭스’(influx)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말하는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생명의 유입은 같은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가르침입니까? 이 질문을 살펴보려면 두 전통이 말하는 신적 참여의 의미와 인간의 수용, 그리고 그 참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영적 변화를 차례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에서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는 ‘신화’(theosis)라는 가르침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화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닮아 가며,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접하면 인간이 결국 하나님이 된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인간이 창조주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로 남아 있으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실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신화가 단순히 하나님을 닮은 행동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이 사랑과 자비와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변화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도덕적 노력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실제로 역사하시고, 인간이 그 은혜에 참여하기 때문에 영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신적 참여가 인간의 개별성을 없애거나 의지를 무력화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창조된 목적에 더욱 충실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신화는 인간이 신성을 소유하여 독립적인 신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에 점점 더 깊이 참여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신적 에너지와 하나님의 본질을 구별하는 이유가 단순한 형이상학적 논쟁에 있지 않고, 인간의 구원과 영적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성경적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은 벧후1:4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참여’(koinonos)는 하나님의 생명과 무관한 외적인 보상을 받는다는 뜻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정교회는 이 말씀을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에 실제로 참여하도록 창조되고 구원받았다는 증언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요15:4-5에서 주님께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갈2:20에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사신다고 고백하며, 엡3:19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히 외부에서 명령을 내리고 복종하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의 신적 참여를 증언한다고 해서 곧바로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 전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질과 에너지라는 신학적 개념은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주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이라는 진리와, 각 신학 전통이 그 결합을 설명하는 개념적 구조를 구별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교회에서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신적 에너지에 참여하게 됩니까? 동방정교회의 영성 전통은 일반적으로 ‘정화’(katharsis), ‘조명’(photismos), ‘신화’(theosis) 또는 하나님과의 결합이라는 흐름으로 영적 성장을 설명합니다. 정화는 인간이 죄와 정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조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이 밝아지고 영적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신화는 이러한 정화와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더욱 충만하게 참여하며 그분과 결합하는 영적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반드시 순서대로 한 번씩 통과하고 끝나는 기계적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회개하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며, 더욱 깊은 사랑과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기도와 금식, 성찬과 회개, 자선과 이웃 사랑을 이러한 영적 삶의 중요한 요소로 여깁니다. 특히 ‘시너지’(synergeia), 곧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라는 개념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동등한 능력을 가진 두 주체로서 구원을 절반씩 이루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과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그 은혜에 응답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로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 그리고 주님의 인플럭스를 받아들이는 과정과 비교할 만한 중요한 접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4에서 하나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과 인간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고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자신에게 생명의 근원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살아 있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경험을 단순한 착각이라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일이 신적 섭리와 거듭남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움직이는 것으로만 경험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사랑하거나 악을 멀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며,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인플럭스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때때로 특별한 능력을 보내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존재하고 살아가며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든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지속적인 생명 공급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이 신적 생명의 유입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만 발생하는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존재와 활동을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주님과 영적으로 결합해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하든 악하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악한 사람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역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악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언제나 선과 진리이며, 악과 거짓은 인간이 그 생명을 잘못된 방향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발생합니다. 이것은 햇빛이 깨끗한 물과 오염된 물에 동일하게 비추더라도 그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의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햇빛과 인간의 영적 상태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상태를 구별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DP.28-33에서 신적 섭리의 목적이 인류로 천국을 이루고 인간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플럭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단순히 살아 있도록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올바르게 받아들여 점점 더 깊은 영적 결합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생명의 공급과 구원에 이르는 영적 결합은 구별되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것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합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스베덴보리는 DLW.242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영적 빛은 인간의 여러 단계에 흘러들어올 수 있지만, 영적 열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정도에 따라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적 빛은 지혜와 진리에, 영적 열은 사랑과 선에 상응합니다. 이 구별은 인간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언제나 동일한 수준에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과 신학을 깊이 연구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정당화하며, 이웃을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의지가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는 영적 빛을 받아들였지만 의지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성숙이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아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고,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플럭스에 참되게 응답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적인 빛을 경험하거나 높은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있는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하려 애쓰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방정교회의 신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 매우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능력만으로 영적 완성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이 단순히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정교회에서는 인간이 성령의 은혜에 협력하면서 정념을 정화하고 하나님을 닮아 가야 하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인간이 주님의 인플럭스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과 진리를 결합해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은 스스로 신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자신의 자유로운 응답과 삶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차이도 분명합니다. 정교회의 신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그 참여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유입과 수용을 중심으로 이해됩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신적 에너지에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에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그분과 결합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인간의 영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접점을 가지지만, 삼위일체와 신적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결합을 이해하는 신학적 구조에서는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각각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정교회의 신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비교할 때 한 가지 더 깊은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할수록 인간 자신의 자유와 개별성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의 결합이 깊어지면 인간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의지를 잃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가 인간을 창조주와 동일한 본질로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DP.42-44에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자신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더욱 분명하게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역설처럼 느껴집니다. 주님께 더욱 의존할수록 인간이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자유는 자기 욕망에 얽매여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영적 능력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수록, 그는 외부의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욱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신적 참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특별한 영적 체험을 얻는 일로 생각합니다. 기도 중에 강렬한 평화를 느끼거나, 신비로운 빛을 보거나,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영적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 신적 참여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는 신적 빛에 관한 가르침이 있지만, 그 전통 역시 외적인 신비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마음의 정화와 겸손, 회개와 사랑이 결여된 상태에서 특별한 체험만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미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참된 영적 상태는 특별한 체험이나 높은 지식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천국의 빛에 속한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여전히 이기적인 사랑을 따르고 있다면, 그는 아직 그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특별한 영적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자신의 이익보다 정직을 선택하며,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려 한다면, 그의 삶에서는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내면 전체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상태는 그 행동의 내적인 사랑과 동기에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적 참여가 실제 삶의 사랑과 선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인간 안에서 결합할 때 그것이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지혜는 단순히 올바른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을 이루고자 하며, 지혜는 그 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밝혀 주고, 쓰임은 그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DLW.241에서는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의 생각과 선택이 형성되며, 결국 그 사랑은 실제 행동과 삶의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과의 결합은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종교적 순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정직을 지키는 일도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참된 영적 삶이 예배당과 수도원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자비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신적 참여를 말하면서 일상의 선한 쓰임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두 전통이 함께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워진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추상적인 신비 속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더욱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영적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며,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이웃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쉽게 분노하고,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모욕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변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학적 지식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사랑을 변화시키도록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특별한 신학적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살피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애쓰며, 잘못했을 때 사과하고,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범위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듭날 수 없으며,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선을 행할 능력과 기회를 주셨으며,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인플럭스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인 삶의 문제에서 의미 있는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신적 참여의 참된 의미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특별한 영적 존재가 되었는가보다, 그가 얼마나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습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소유하거나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남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 은혜를 실제로 전달하시며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신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모든 영적 생명과 사랑과 지혜는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결합을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개념보다,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와 인간의 수용, 그리고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한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그 결합의 신학적 구조와 의미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적 에너지와 인플럭스를 단순히 같은 개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두 전통의 가르침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결합은 단순한 지적 이해나 외적인 종교 행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며, 인간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받은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며, 일상의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감당할 때, 주님과의 결합은 우리의 내면과 삶에서 점점 더 깊어집니다. 결국 참된 신적 참여는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와 주님의 인플럭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한다는 것의 영적 의미입니다. (EO.007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고 신화에 이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참여는 단순한 신비 체험이나 도덕적 모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하며, 모든 영적 변화가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에 의존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는 서로 다른 신학적 구조에 속하므로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결합한다고 설명하고,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난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영적 완성에 이를 수 없으며, 참된 신앙이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을 구별하면서, 주님의 인플럭스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신적 본질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체험을 얻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더욱 자유롭고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EO.008.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

bygrace.kr

 

EO.006.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SL.EO.006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해설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6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는 교리입니다. 처음 이 말을 접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의 본질과 속성과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본질’(ousia)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 안에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가리키며, ‘에너지’(energeia)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피조물 안에 실제로 역사하시는 신적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현대인이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 에너지나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별도의 능력도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중간 실체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에너지 역시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에너지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효과만을 경험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초월성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깊은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가 구별된다면,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어떤 신적 활동과만 결합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가르치는 신적 사랑과 지혜의 ‘인플럭스’(influx)와 어떻게 만나고 달라집니까? 바로 이 문제가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히 14세기 동방정교회의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Gregory Palamas, 1296-1359)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당시 아토스산의 수도사들은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념을 정화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적 빛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영적 전통을 ‘헤시카즘’(hesychasm)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칼라브리아의 바라암(Barlaam of Calabria)은 수도사들이 주장하는 신적 빛의 경험과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비판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본질을 피조물이 알 수 없다면, 인간이 실제로 경험한다고 말하는 신적 빛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팔라마스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어떤 피조물도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는 인간에게 실제로 전달되고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서 초월적인 분으로 남아 계시면서도 인간에게 참으로 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134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비롯하여 1347년과 1351년의 공의회들은 팔라마스의 주요 가르침을 지지했으며, 이후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은 동방정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이 구별의 사상적 뿌리가 팔라마스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앞선 교부들에게도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역사하심은 알 수 있다는 가르침이 나타납니다. 팔라마스는 이러한 전통을 자신의 시대에 제기된 신학적 문제와 영적 체험의 논쟁 속에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여기서 동방정교회가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이유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참여한다고 말한다면,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동일해질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인간은 유한하며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된 선물이나 효과에만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 자신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어떤 것과만 관계를 맺는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동방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은 바로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되지 않으며 그 본질을 소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에너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적 역사하심이므로,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벧후1:4에서 신자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는 대목과 깊이 연결됩니다. 정교회는 이 참여를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의 존재로 변화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피조물로 남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생명과 거룩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은 참여할 수 없지만 그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다는 구별은 인간의 구원을 단순한 법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결합으로 이해하려는 정교회 구원론의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지만, 하나님 안에 서로 분리된 두 신적 존재가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질은 참하나님이고 에너지는 그보다 낮은 또 다른 신적 존재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실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에너지 안에 참으로 현존하십니다. 팔라마스의 가르침에서 신적 에너지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역사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적 에너지에 참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부를 떼어 받아 소유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본질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피조물에게 분배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서로 다른 신적 에너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신적 에너지는 세 위격이 공유하시는 하나의 신적 본질에 속하는 역사하심입니다. 이처럼 정교회는 구별과 일치를 함께 보존하려 하지만, 그 구별을 철학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신학적 논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을 단순히 인간이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낸 관념상의 구별이라고 축소해서도 안 되며, 반대로 하나님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실체가 있다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이 구별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뉘지 않으시면서도 피조물에게 참으로 자신을 전달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문제와 연결되는 여러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장면도 나타납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인식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면서도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또한 마17:1-8의 변화산 사건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정교회의 팔라마스 전통은 이 빛을 단순한 자연적인 광채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영광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하며, 이를 ‘타보르의 빛’(Tabor Light)이라고 부릅니다. 정교회는 이 빛을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의 현현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 자체가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경의 여러 증언을 종합하여 이러한 교리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한편 요14:9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요14:10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십니다. 요17:3에서는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함께 증언합니다. 이 두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할 것인가는 정교회와 스베덴보리가 각각 다른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지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14-16에서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며, 그것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존재의 발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DLW.28-39에서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가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사랑과 지혜는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여러 속성 가운데 두 가지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이 둘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생명과 선과 진리를 전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별도의 피조된 능력을 보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물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생명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DLW.83-100에서는 영계의 태양이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나타나는 최초의 발출이며, 그 태양에서 나오는 영적 열과 빛이 각각 사랑과 지혜에 상응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과 인간은 이 영적 열과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랑하고 생각하며 영적 생명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영계의 태양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최초의 발출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구별을 통해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피조물 사이에 생명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처음 접하면 동방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이 스베덴보리의 신적 사랑과 지혜 및 그 발출에 관한 가르침과 거의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두 전통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 자체를 소유하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실제적인 신적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 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단순히 인간의 관념이나 종교적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신적 발출 및 인플럭스를 같은 교리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에서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역사하심이며, 인간은 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실제로 결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영계의 태양으로 나타나고, 영적 열과 빛을 통해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질서와 그 수용을 설명합니다. 영계의 태양과 영적 열과 빛을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에 그대로 대응시키면 양쪽의 신학적 구조를 혼동하게 됩니다. 특히 영계의 태양은 정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신적 에너지와 동일한 항목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실제적인 결합을 설명하려는 목적에서는 만나지만, 그 결합의 존재론적 구조와 신적 발출의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창조와 수용’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DLW.52-55에서 그는 모든 피조물이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것들은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수용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나누어 받아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로 이루어졌다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분명하게 유지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사랑 자체나 지혜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환상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실제로 살아 있고 사랑하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플럭스는 바로 이러한 신적 생명의 끊임없는 유입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결합은 인간이 자기 안에 신성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 그분과 더욱 깊이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정교회의 신화와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이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특히 인간의 수용 능력과 영적 질서, 그리고 의지와 이해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오는 신적 사랑과 지혜를 실제로 받아들입니까? 스베덴보리는 DLW.242에서 인간의 이해는 높은 수준의 영적 빛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의지가 영적 열에 해당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의지가 실제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가 영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의지가 영적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생명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려면 이해와 의지가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마음의 정화와 신적 에너지에의 참여라는 가르침과 중요한 비교가 가능합니다. 정교회 역시 하나님과의 결합을 단순한 지식의 획득으로 이해하지 않고, 회개와 기도와 정념의 정화, 사랑과 거룩함의 성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 변화의 핵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선과 진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신적 결합을 이야기하면서 실제 삶의 변화를 제외한다면, 정교회의 신화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도 그 핵심을 잃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실제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깊은 기도 중에 특별한 빛을 경험하거나 강렬한 평화를 느낄 때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를 깨달을 때 신적 조명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신앙생활에서 소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 자체만으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동방정교회의 헤시카즘 전통에서도 신비로운 현상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태도는 경계의 대상입니다. 신적 빛의 경험을 논의하는 전통 속에서도 겸손과 회개와 분별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영적 빛을 많이 받아 진리를 깊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의지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지 않으면 참된 거듭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신비로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교만을 버리지 않고 이웃을 멸시한다면, 그의 체험만으로 영적 성숙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특별한 신비 체험은 없더라도 자신의 욕심과 분노를 살피고,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에게 진실하게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을 판단하는 데에는 외적인 체험보다 삶의 방향과 사랑의 성격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비교에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가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공급한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그 생명을 동일하게 받아들여 영적으로 선해진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에게도 생명을 공급하시지만, 사람은 자신의 내적 사랑과 상태에 따라 그 생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주님에게서 악이 흘러나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은 신적 생명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잘못된 수용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적 결합은 단순한 존재론적 접촉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모든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은 보편적인 의존의 관계를 나타내지만, 주님과 실제로 선과 진리 안에서 결합하는 일은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과 거듭남을 요구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신다는 사실과 인간이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구원에 이르는 친교를 누린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피조물이 이미 구원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적 은혜를 받아들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보편적인 진리와, 인간이 그 생명을 어떤 사랑과 의지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영적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됩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도 소유하거나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는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참된 친교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보존하면서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실제적인 결합을 인정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을 설명하는 중심 개념은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보다는 주님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 그 발출과 인플럭스, 그리고 인간의 수용과 거듭남에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피조물은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적인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정교회의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를 동일한 교리로 보아서는 안 되지만, 두 전통은 인간이 하나님을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거나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신학적 개념을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빛으로 진리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으로 악을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하나님과의 결합은 더 이상 추상적인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영적 현실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결합한다는 것의 참된 의미입니다. (EO.006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은 어떤 피조물도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지만 그분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면서 인간이 하나님 자신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특히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의 신학에서 체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피조물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으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교회의 본질과 에너지 구별 대신 신적 사랑과 지혜, 영계의 태양을 통한 신적 발출, 인플럭스 및 인간의 수용이라는 구조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과 인간의 실제적인 결합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신적 에너지와 신적 발출의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구별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주님과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거나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는 거듭남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5.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SL.EO.005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의 신적 근원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5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의 신적 근원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이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가르침은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면,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신다는 것이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발출’(procession)은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거나, 한 존재가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어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시지만 성부보다 나중에 존재하기 시작한 분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한 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시고,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시며, 동일한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는 참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은 서로 다른 위격적 관계로 이해됩니다. 동방정교회는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그 신비의 방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교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오랫동안 갈등해 온 중요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만 발출하십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십니까?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논쟁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동방정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서방교회의 입장을 정확하게 구별한 다음,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전혀 다른 신학적 관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령 이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주는 문헌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연결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이 신경은 성령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면서, 성부에게서 발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고백의 중심에는 요15:26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성령의 영원한 근원에 관한 중요한 계시로 이해합니다. 성부는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이시며, 성자와 성령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의 근원성은 신적 본질이 성부에게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성부가 성령을 지배하거나 성령에게 명령을 내리는 상급자라는 뜻도 아닙니다. 정교회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나의 신적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는 완전한 신적 위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발출을 설명할 때에는 성부의 근원성뿐 아니라 성령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도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정교회의 성령론을 성부에게 종속된 영적 능력에 관한 가르침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핵심에 ‘필리오케’(Filioque)라는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원래 381년 신경의 그리스어 본문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고 고백했지만, 서방교회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6세기 무렵 서방의 일부 지역에서 신경에 첨가되었으며, 로마의 전례에서는 11세기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후 이 문제는 동서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갈등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을 단순히 성령의 출발점이 한 곳인가 두 곳인가 하는 문제로만 이해하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됩니다. 동방정교회가 염려하는 것은 성부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성이 훼손되는 일이며, 서방교회가 강조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신적 일치와 성령의 발출에서 그 일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필리오케 논쟁에는 신경의 원래 문구를 누가 어떤 권한으로 변경할 수 있는가 하는 교회론적 문제도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논쟁은 단순히 단어 하나의 첨가를 둘러싼 언어적 다툼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교회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필리오케를 동방정교회가 비판하는 것처럼 반드시 두 개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을 인정하는 교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가톨릭의 정식 설명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하나의 원리로 발출하시며, 성부와 성자가 각각 별도의 성령을 발생시키는 두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동방정교회 역시 성령께서 성자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시며, 성자와 전혀 관계없이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동방교회의 신학 전통에서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시고 성자를 통하여 나타나신다는 표현이 중요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기원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파송 및 역사하심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심을 받으신다는 사실이 곧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이 성자에게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동방정교회는 바로 이 구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2003년 북미 정교회-가톨릭 신학 협의에서도 양측은 이 문제에서 서로의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왜곡해 온 점을 인정하고, 성령의 신성과 성령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더욱 정밀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필리오케 논쟁을 살필 때에도 동방정교회는 성자를 배제하고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를 두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구별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요15:26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시지만,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16:7에서는 주님께서 떠나가셔야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으며, 요16:13-15에서는 진리의 성령이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요20:22에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성령과 성부의 관계뿐 아니라 성령과 성자의 깊은 일치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어떤 신학적 구조에서 이해하는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동방정교회는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발출을 성부에게 돌리면서, 성자를 통한 파송과 계시의 역사도 인정합니다.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일치를 성령의 영원한 발출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주님에게서 나오시는 신적 진리이자 신적 역사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따라서 같은 요한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더라도 그 말씀에서 성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해석이 서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46에서 성령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발출하는 신성’(the Divine Proceeding)이며, 이것은 주님 자신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는 마28:1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말씀을 설명하면서, 주님 안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주님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지만, 그렇다고 그 활동이 그 사람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또 다른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역사하심은 주님과 분리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피조물에게 전달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근거로 성령이 단순한 비인격적 힘이나 자연적인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의미되는 신적 역사하심은 바로 주님 자신의 신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39-141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령이 신적 삼위일체가 계시는 한 분 하나님, 곧 주 하나님 구원자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동시에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특히 성령이 의미하는 신적 진리는 말씀과 깊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적 진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인간의 이해를 밝히시며, 악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시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십니다. 또한 TCR.142-145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인간의 개혁과 거듭남, 새롭게 하심과 생명을 주심, 거룩하게 하심과 의롭다 하심, 악에서 깨끗하게 하심과 죄의 용서,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에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은 한 분 하나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또 다른 구원자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신적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에게 역사하시며, 인간은 그 역사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성령론은 단순히 성령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하는 문제에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 어떻게 임하시며 거듭남을 이루시는가 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나아갑니다. 이것은 성령의 발출을 영원한 세 위격의 관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는 TCR.153-155에서 주님께서 성부로부터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며, 그 반대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는 두 신적 인격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의 관계입니다. 성부는 영혼에 비유되는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과 하나를 이루는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신성과 신적 인성이 하나 되어 나타내시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말씀과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신적 역사하심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피조물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서로 분리된 두 신적 근원이 공동으로 성령을 발생시키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라는 두 영원한 위격 사이에서 성령이 발출하시는 정교회 또는 서방교회의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는 성령의 발출을 논하기 전에 먼저 성부와 성자가 한 분 주님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교회와 서방교회의 필리오케 논쟁에 스베덴보리의 견해를 단순히 어느 한쪽의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논쟁의 근본적인 전제인 세 영원한 위격의 존재 자체를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성육신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다고 가르칩니까? 그렇게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역사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창1:2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사61:1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임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성육신 이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주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뒤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요7:39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으셨다고 말씀하는 대목은 이러한 이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을 성육신 이전에는 하나님의 영이나 신적 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신적 인성을 완성하신 뒤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관계와 충만함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발출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생명이 처음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주님께서 영화된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과 결합하시며 자신의 신적 생명을 전달하시는 역사와 연결됩니다.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성령 이해를 비교할 때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정교회가 성령을 단순히 추상적인 세 번째 신적 인격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교회는 성령께서 실제로 인간 안에 임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결합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논리적 요소가 아니라, 신자의 기도와 예배와 거룩한 삶에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동방정교회가 강조하는 ‘신화’(theosis)는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결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신적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흘려보내시는 ‘인플럭스’(influx)를 통하여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역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이 자기 능력만으로 거룩해지거나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실제적인 신적 역사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성령은 영원한 신적 위격이시며, 스베덴보리의 성령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별됩니다. 또한 정교회의 창조되지 않은 신적 에너지와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를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이 두 개념의 관계는 이후 EO.006과 EO.007에서 더욱 정밀하게 검토할 문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어떤 사람은 강렬한 감정이나 특별한 은사, 방언과 예언, 신비로운 체험이 나타날 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인간에게 역사하실 때 깊은 감동이나 깨달음이 동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성령의 참된 역사하심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요16:13에서 진리의 성령이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은 무엇보다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서 확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독립된 신적 인격 하나가 인간에게 들어와 특별한 능력을 부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진리로 인간의 이해를 밝히시고, 신적 사랑으로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키시며,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에 살아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진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면, 그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깊은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서는 주님의 신적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성령의 발출에 관한 오랜 논쟁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는 성령의 영원한 기원과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두고 오랜 세월 논쟁해 왔습니다. 그 논쟁에는 신학적으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성경의 표현과 교회의 신학적 언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깊어질수록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이 자신의 교리적 체계를 완전한 것으로 여기고, 다른 전통의 신자들을 쉽게 정죄하는 태도입니다. 정교회의 성령론에는 성부의 유일한 근원성과 성령의 참된 신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적 통찰이 있습니다. 서방교회의 필리오케에도 성부와 성자의 불가분한 일치를 강조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전통의 출발점 자체를 다시 검토하여 성령을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으로 이해합니다. 이 세 관점을 비교할 때에는 각각의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를 공정하게 살펴야 하며, 교리적 차이를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판정으로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적 분별은 진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지, 자신의 지식을 근거로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동일한 신적 본질과 영광을 공유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령의 발출을 성부와 성자라는 영원한 두 위격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 자체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말씀은 성부라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독립적인 또 하나의 신적 위격을 발생시키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근원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신적 생명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고, 그 신적 역사하심으로 인간이 진리를 깨닫고 악에서 벗어나 선과 사랑의 삶으로 거듭난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에 관한 참된 신앙은 성령의 영원한 기원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의미되는 주님의 신적 역사하심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서 밝혀 주시는 진리를 따라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은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주님의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성령의 발출과 그 신앙적 의미입니다. (EO.005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성을 함께 보존하려는 고백입니다. 서방교회의 필리오케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다는 표현으로, 성부와 성자의 신적 일치를 강조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이를 성령의 영원한 기원과 성자를 통한 파송을 혼동할 수 있는 문제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논쟁의 전제인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성부를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 성자를 영화된 신적 인성, 성령을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역사하심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성령의 발출은 독립적인 세 번째 신적 인격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방식과 연결됩니다. 두 전통은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신적 역사하심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만나지만, 성령의 존재 방식과 신적 근원에 대한 이해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성령의 기원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사랑을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6.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SL.EO.006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는 구별된다’ - 인간은 하나님 자신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해설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이해하는

bygrace.kr

 

EO.004.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가르침이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에게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아들이 태어나며,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자연적인 출생의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어느 시점에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아니며,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나셨거나 성부보다 열등한 하나님이시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자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출생은 시간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영원한 관계를 뜻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성자의 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보존하려는 동방정교회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영원히 태어난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부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별개의 신적 위격이라는 주장은 반드시 같은 뜻입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전통적 삼위일체 신학과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동방정교회의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당시 아리우스(Arius)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신 분이 아니며, 성부에 의해 존재하게 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서 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일 수는 있어도, 성부와 동일한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는 이러한 주장을 배격하고,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창조되신 분이 아니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중요한 용어가 ‘동일 본질’(homoousios)입니다. 이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자를 모든 시대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빛에서 나온 빛, 참하나님에게서 나신 참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표현들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기원하신다는 점과 그분 역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함께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영원한 출생’(eternal generation)은 성자가 만들어지셨다는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이 둘로 나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는 신적 본질에서 완전히 동일하시며, 구별되는 것은 성부께서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 나시는 분이시라는 위격적 관계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의 이 교리를 성자가 성부보다 낮은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교회가 아리우스주의에 맞서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 진리를 거꾸로 해석하는 일이 됩니다.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8장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언제나 함께 존재하시므로 성부는 계셨지만 성자는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성부가 처음에는 성부가 아니셨다가 나중에 성자를 낳으심으로써 성부가 되셨다면, 하나님 안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므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시는 일도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과 빛의 관계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불이 타오를 때 빛이 함께 나타나듯, 성부와 성자는 시간적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시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신비 전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불과 빛은 피조된 현상이지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창조되지 않은 신적 실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는 방식 자체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인정합니다. 결국 정교회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내적 생명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 안에서 가능한 한 충실하게 표현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자의 영원한 출생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가장 먼저 살펴볼 본문은 요1:1-3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만물이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이어 요1:14에서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말씀을 통해 성자께서 성육신 이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셨으며,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다고 이해합니다. 히1:3에서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으로 설명하는 말씀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요5:26에서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는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지만, ‘영원한 출생’이라는 후대의 신학적 공식 자체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의 영원성과 그 말씀을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이해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정교회는 두 내용을 하나의 진리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별하려면 성경이 무엇을 직접 말씀하는지, 그리고 각 신학 전통이 그 말씀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는지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19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전제를 정면으로 검토합니다. 그는 영원부터 계신 성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주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원부터 존재하신 하나님 자신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하나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성자라고 가르칩니다. 즉, ‘영원부터 계신 주님’과 ‘영원부터 별개의 위격으로 존재하는 성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단순히 성부와 성자라는 명칭의 사용 시기를 다르게 정하자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창조 이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구조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DL.19-20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신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영원부터 따로 존재하던 성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한 별개의 신적 위격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라 불리는 인성의 근원이 바로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립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눅1:35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므로 태어날 거룩한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성자에 관한 중요한 성경적 증거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92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보내실 때 취하신 인성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잉태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인성의 근원은 피조된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신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가 일반적인 인간의 출생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실제 인성을 취하셨지만, 그 인성을 생기 있게 하시는 가장 내적인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인성은 여느 인간의 인성과 동일한 출발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마침내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 성자의 탄생은 신적 존재 하나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성육신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영원부터 계신 성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성부와 구별된 영원한 성자 위격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셨던 ‘말씀’(Logos)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두 전통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동방정교회는 요1:1의 말씀이 곧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 성자이시며, 이 성자가 마리아에게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성육신은 영원한 성자 위격이 인간 본성을 취하신 사건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참된 기독교’ TCR.85-88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적 선과 분리되지 않은 신적 진리로서 세상에 내려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적 진리는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신적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지혜이며,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또 다른 인격으로 존재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적 선과 신적 진리가 영원부터 하나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바로 이 신적 진리가 인간 세계에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며, 그 과정에서 신적 선이 분리되거나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정교회는 영원한 말씀을 성자의 영원한 위격으로 이해하고, 스베덴보리는 영원한 말씀을 한 분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신적 진리로 이해합니다. 두 전통 모두 말씀이 영원하며 신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말씀이 영원부터 별개의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는가 하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반드시 피해야 할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에게 특별한 능력을 받은 인간으로 이해했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 오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주님의 신적 인성을 피조된 인간의 본성이 신성과 외적으로 결합한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이루셨으며, 부활하신 뒤에는 인성에 관해서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설명은 동방정교회의 성육신 교리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정교회는 영원한 성자 위격이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함께 가지시며,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 결합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취하신 인성이 영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지만, 그 신성이 인성과 결합하는 구조와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자 이해를 인간 예수를 신으로 높인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는 안 되며, 스베덴보리의 성자 이해를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가르침으로 묘사해서도 안 됩니다. 양쪽의 차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어떤 방식으로 계시며 자신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강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 성자를 낳으셨다면 그 이전에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신적 친교가 창조 이전부터 완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심 자체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이 나타난 뒤에야 시작된 것이 아니며, 세상의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께 사랑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영원부터 두 신적 인격 사이의 관계를 전제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신적 인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는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계셨으며, 창조는 그 사랑이 피조물에게 전달되고 피조물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는 신적 목적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세 위격의 상호 관계보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서 이해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의 표현을 달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어떤 구조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는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도 영향을 줍니다. 동방정교회는 영원하신 성자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결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정교회 신자의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보다 열등한 신적 중개자가 아니라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자 신앙을 성부와 성자라는 두 신을 섬기는 신앙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정교회는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위격을 고백하며, 모든 신적 예배가 하나의 신적 생명을 향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앙인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한 분의 신적 인격을 향한 분명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만일 영원부터 계신 성부와 영원부터 계신 성자를 서로 구별되는 두 신적 주체로 상상하면서 그 두 존재를 하나의 하나님으로 결합하려 한다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 안에 계신 성부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부는 주님 밖에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도 주님과 별도로 활동하는 독립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기도의 중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어떻게 구별하여 부를 것인가보다,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관념을 갖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교리적 지식이 곧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교리적 이해를 다른 교회 신자들을 판단하고 멸시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 역시 주님의 사랑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1763) SS.92에서 잘못된 교리 자체만으로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며, 악한 삶과 진리를 파괴하도록 확증한 거짓이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종교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모든 교리의 진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더 밝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을 고백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신자들의 내적 신앙 전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실제로 충돌하는 부분을 마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모호하게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되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교리적 차이를 명확하게 밝히되 상대방 안에 있는 선과 진리까지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는 참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다고 고백합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낮은 존재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교회의 신앙적 노력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 안에는 주님의 참된 신성과 영원성을 지키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성부와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성자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을 영화롭게 하여 신성과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셨고, 그리하여 인성에 관해서도 참으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성자의 참된 신성은 영원한 별개의 위격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과 그분의 영화된 신적 인성의 완전한 일치에서 이해됩니다. 요1: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과 요14:9의 주님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는 선언은 이러한 관점에서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늘 어딘가에 계신 성부와 그분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신 성자를 각각 상상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바로 그분이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따라야 할 한 분 주님이심을 깨닫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교리의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해 선을 행하는 거듭남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O.004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자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참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은 성자를 피조물이나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영원성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영원부터 계셨다는 사실과 성자가 영원부터 구별된 신적 위격으로 존재하셨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그의 가르침에서 영원부터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며, 성자는 그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을 가리킵니다. 또한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한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된 또 하나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신적 선과 영원히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성자의 영원한 위격적 존재와 성육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신성과 신적 인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받은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O.005.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SL.EO.005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령은 성부에게서 발출하신다’ - 필리오케 논쟁과 성령의 신적 근원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의 군

bygrace.kr

 

EO.003.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L.EO.003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 - 성부의 군주성과 신적 일치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특별히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으신 분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신성을 받아 존재하는 종속적인 신적 존재들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정교회가 말하는 ‘성부의 군주성’(monarchy of the Father)은 성부가 다른 두 위격보다 더 강하거나 더 높은 신성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가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인격적 근원이시라는 뜻입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며, 성부보다 늦게 존재하기 시작하신 분들도 아닙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성부의 군주성을 통해 하나님의 일치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성부가 신적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일치는 성부라는 한 위격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신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은 초기 교부들의 삼위일체 논의, 특히 4세기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니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완전하게 인정하면서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님의 일치를 함께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때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원인’(aitia) 또는 ‘근원’(arche)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이라는 말은 자연계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한 존재가 뒤의 존재를 발생시키는 인과관계와 다릅니다. 성부는 성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으시며, 성령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영원한 발출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서 비롯되지만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동일하게 신성이시며, 동일하게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까닭을 한 분 성부에게서 설명하면서,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신적 생명 안에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부가 세 위격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의 영원한 관계를 성부의 근원성으로 설명하는 정교회 특유의 신학적 구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용어상의 문제를 정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시다’라는 표현은 동방정교회의 핵심 사상을 전달하지만, 자칫 신적 본질 자체가 성부보다 나중에 생겨났거나, 성부가 어떤 신성을 먼저 소유한 다음 그것을 성자와 성령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개의 신적 본질을 각각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고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완전하게 공유하십니다. 성부의 근원성이란 이 공통된 신적 본질보다 앞서 존재하는 별도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각각 성부와 맺는 영원한 위격적 관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이시고 성령의 발출 근원이시지만, 그 때문에 성자와 성령보다 더 신적이신 것은 아닙니다.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그 방식에서 구별되지만, 두 위격의 신성에는 어떠한 등급 차이도 없습니다. 또한 정교회는 성부의 군주성을 강조하면서도 세 위격이 하나의 신적 의지와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공유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부께서 홀로 결정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그 결정에 복종하는 세 신적 주체의 협력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가르침을 공정하게 이해하려면 ‘성부가 유일한 근원’이라는 말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성’이라는 말을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로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 가운데 하나는 요15:26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교회는 여기서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 성부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확인합니다. 또한 요5:26에서는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요1:18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다고 증언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들을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요10:30에서 예수께서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하며, 요14:9-11에서는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가르치신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성부가 근원이시라는 이해를 뒷받침하는 표현과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를 증언하는 표현이 함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씀들이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두 위격적 관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육신하신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신 인성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성경의 본문 자체와 그 본문을 해석하는 신학적 체계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성경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163-169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그것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의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인 요소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를 인간의 영혼과 몸과 활동에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고 해서 세 신적 인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부는 한 분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성육신을 통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고,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특히 TCR.167에서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신성이 주님의 영혼에 해당하고, 성자의 신적 인성이 그 영혼과 하나를 이루는 몸에 해당하며, 성령은 영혼과 몸이 하나 되어 나타내는 활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구조로 축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본질과 인격 모두에서 한 분이심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부는 신적 근원이시지만, 그 성부는 성자와 구별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별도의 신적 인격이 아닙니다.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며, 성자는 그 신성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이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과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이해할 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성육신과 영화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의 교리’(Doctrine of the Lord, 1763) DL.29-36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지상 생애 동안 자신의 인성을 점차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영화’(glorification)는 단순히 예수께서 부활 후 영광스러운 지위에 오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유한한 인간적 상태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벗으시고, 자신의 근원적인 신성으로부터 신적 인성을 이루신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래부터 따로 존재하던 두 신적 인격이 영원히 관계를 맺는 구조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근원적인 신성과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인성의 관계로 이해됩니다. 요14:10에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혼이 몸 밖에 따로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듯, 성부는 성자 밖에 계신 또 다른 신적 인격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신성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단순한 명칭의 차이로 없애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구별과 그 결합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결과가 한 분 신적 인격 안의 완전한 일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의 신론에서는 성부의 근원성을 성자와의 영원한 위격적 관계보다 주님 자신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정교회가 강조하는 성부의 군주성 안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 안에 둘 이상의 독립적인 신적 근원이 존재할 수 없다는 통찰입니다. 정교회는 성부를 유일한 근원으로 고백함으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거부합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경쟁이나 권력의 서열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 안의 완전한 일치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여러 신적 권력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러한 일치의 중요성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근원을 성부라는 한 위격에 두면서도 성자와 성령을 별개의 영원한 위격으로 인정하는 구조가 신적 인격의 완전한 단일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봅니다. 동방정교회가 ‘한 근원으로부터 세 위격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근원적인 신성과 신적 인성과 신적 역사하심이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두 견해를 단순히 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교회에서 영원한 세 위격의 실재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내용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적 단일성은 바로 그러한 세 위격의 영원한 구별을 거부하는 핵심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부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실제 신앙의 문제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방정교회의 예배는 성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아가는 구조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열등하므로 인간이 그분들을 거쳐 더 높은 하나님께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등하게 예배하며, 성자를 통하고 성령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는 표현을 세 위격의 구별과 하나의 신적 역사하심을 드러내는 전례적 언어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정교회 신자의 기도를 마치 두 신적 중개자를 통하여 멀리 계신 성부의 허락을 얻으려는 행위처럼 설명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인간 사이에 서 계신 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의 신성이 그분 안에 완전하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14:6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신적 인격을 거쳐 다른 신적 인격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하여 그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에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을 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시는 주님 자신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성부를 근원적인 신성이라고 부르고 성자를 신적 인성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신성만이 참된 하나님이고 인성은 그보다 낮은 어떤 피조물적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더 이상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성과 완전하게 결합하여 신적 인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신성에 관해서만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인성에 관해서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진 보이지 않는 절대자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성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성부는 근원적인 신성이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도 성부가 성자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성과 신적 인성의 결합을 영혼과 몸의 일치에 비유하지만, 그 비유는 신적 인성이 신성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유한하고 피조된 것이지만,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삼위일체 이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성부는 신성, 성자는 인성’이라는 간단한 공식에 머물지 않고, 성자는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두려운 권위자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비로운 중보자로 여긴다면, 그의 신앙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성품에 대한 관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을 동방정교회의 성부의 군주성에서 직접 도출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 역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신적 사랑과 선과 지혜를 공유하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단일성이 우리의 실제 생각과 기도 속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는 어느 교회에 속한 신자든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이 점에서 한 분 주님께 우리의 이해와 사랑을 집중하도록 안내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시고 지혜이시며, 그분 안에 근원적인 신성이 완전하게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안에 서로 대립하는 사랑과 의지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의 신비에 관한 올바른 개념을 소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이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치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는 사랑과 진리를 분리한다면, 그 신앙고백은 아직 자신의 내면에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성부의 군주성이라는 어려운 교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인간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회의 교부들이 성부의 근원성과 세 위격의 일치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철학적 개념 속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신적 신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 계시의 중심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를 분별할 때 우리는 교리적 정확성만으로 상대방의 신앙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정교회의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선을 교리적 차이만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신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교리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다른 신앙인을 멸시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리는 인간을 주님께 인도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신학적 분별은 중요하지만, 그 분별의 최종 목적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부는 신성의 유일한 근원이십니까?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성과 세 위격의 완전한 신적 일치를 설명합니다. 이 가르침에는 하나님 안에 독립적인 여러 근원이 존재할 수 없으며, 신적 생명과 사랑과 의지는 하나라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의 신성을 참되게 알고자 한다면, 그 신성이 자신을 완전하게 나타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신 요14:9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서로 다른 세 신적 인격을 마음속에 조합하여 하나로 생각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나타내신 한 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부의 군주성을 설명하는 신학적 공식을 완성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을 깨닫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실제 삶에서 그분과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EO.003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성부를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의 유일한 위격적 근원으로 고백하며, 이를 ‘성부의 군주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부가 성자와 성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 위격이 동일한 신적 본질과 의지와 역사하심을 공유하면서도 성부에게서 영원한 관계의 근원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신적 일치를 보존하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부의 근원성을 세 영원한 신적 위격 가운데 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근원적인 신성으로 이해합니다.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와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함께 강조하면서도, 신적 근원과 삼위일체의 구조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부의 신성을 성자와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나타나신 한 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께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교리적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O.004.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SL.EO.004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 - 영원한 출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해설동방정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성부

bygrace.kr

 

EO.002.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SL.EO.002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삼위일체의 일치와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설기독교 신앙에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