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입니다. ‘열매(fruit)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씨(seed producing fruit)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음식을 나무의 열매로 부른다는 사실은, 다음 장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만 인용합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성소(sanctuary)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에게 음식이 될 지혜이고, ‘(leaf)은 쓰임을 위한 지성입니다. 이 쓰임을 (medicine)이라 합니다. 반면 영적인 음식을 (herb)이라 한다는 점은 시편에서도 분명합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 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해설

 

이 글은 앞선 AC.56에서 말한 ‘영적 인간의 음식’을 한층 더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핵심은 ‘같은 생명이라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주어지는 양식의 형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풀, 나무, 씨, 열매라는 식물의 세부 이미지를 통해 영적, 천적 차이를 구분합니다.

 

먼저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정의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쓰임’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머무르지 않고, 삶에 적용되고 이웃과 교회를 향해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이라고 합니다. 풀은 먹을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지만, 아직 열매를 맺는 나무만큼 깊은 근원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반면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이라고 합니다. 선은 더 이상 쓰임을 향한 방향성에 머무르지 않고, ‘삶 그 자체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선은 나무이고, 그 결과는 열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구분합니다. 열매 자체는 천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영적 인간에게는 아직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선의 가능성을 지닌 상태이지, 선 그 자체에 완전히 거한 상태는 아닙니다.

 

이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바로 에스겔 47 12절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으로 인해 온 땅이 회복되고 생명이 충만해지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 성소는 언제나 주님 자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입니다. 이 물로 인해 자라는 나무들은 인간 안에서 자라는 생명의 원리들입니다.

 

이 본문에서 열매와 잎이 구분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열매는 ‘지혜’로 해설되고, 잎은 ‘지성’으로 해설됩니다. 지혜는 삶 그 자체와 결합한 진리이며, 그래서 ‘음식’이 됩니다. 반면 지성은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삶을 직접 살게 하지는 않지만, 삶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잎을 ‘’이라고 합니다. 즉 지성은 생명을 낳기보다는, 생명이 병들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천적 인간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음식은 ‘열매’입니다. 그는 진리를 이해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지혜로 삽니다. 그래서 그의 양식은 나무에서 맺힌 열매이며, 그 열매는 달마다 새로워집니다. 이는 천적 상태의 생명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로 불린다는 점은 시편 23편에서 확인됩니다. ‘푸른 풀밭’은 단순한 위로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적 인간이 진리의 양식을 공급받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풀밭은 방목지이며, 여기서 양은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는 영적 인간이 여전히 인도를 필요로 하며, 진리를 통해 방향을 잡아 가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라도, 영적 인간에게는 ,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로 주어집니다. 풀은 쓰임을 향한 진리이고, 열매는 삶이 된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은 여전히 성장 중이고, 천적 인간은 사랑 안에 거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음식을 주십니다.

 

 

 

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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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심화

 

1.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AC.56 본문에 반복되는,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라는 표현에서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의 삶과 일치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좀 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결론부터 아주 선명하게 말씀드리면, AC.56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종류의 선과 진리를 접할 때 마음이 자연스럽게 기쁘고 편안해진다’는 뜻이고, ‘그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 선택하고 살아가는 방향과 정확히 같은 성질이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의 상태와 맞아떨어질 때 생기는 반응’입니다.

 

먼저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는 표현부터 풀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다른 수준의 좋아함’입니다. ‘천적’은 사랑 자체, 곧 선을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나서 아무도 몰라도 마음 깊이 따뜻하고 평안한 기쁨이 남는 것, 이것이 천적인 기쁨입니다. ‘영적’은 진리를 이해하고 깨닫는 기쁨입니다. 말씀을 읽다가 ,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마음이 환해지는 기쁨, 혹은 옳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되어 마음이 정리되는 기쁨입니다. ‘자연적’은 그보다 바깥에서 오는 기쁨으로, 좋은 결과를 얻거나, 일이 잘 풀리거나, 관계가 편안해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기쁨을 느끼느냐는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정확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남을 이기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남을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AC.56 기뻐한다’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라는 표현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과 맞는 것을 들으면 편안하고 기쁘지만, 맞지 않는 것을 들으면 불편하고 거부감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정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열리고 힘을 얻습니다. 반대로, 속이는 데 익숙한 사람은 같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이유를 붙여 피하려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일치’와 불일치’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사랑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것을 들을 때 깊이 공감하고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살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들을 때 마음이 밝아지고 즐거워진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는 것은, 아직 바깥 결과 중심의 삶에 있기 때문에, 외적인 성공이나 편안함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걸 더 와닿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 내가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이게 논리적으로 맞다’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오늘 위로가 된다’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설교는 같지만, 기쁨의 지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삶의 중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56은 사실 아주 중요한 진단 기준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에서 기뻐하는가’를 보면, ‘내가 지금 어떤 삶의 상태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진행되면, 기쁨의 내용도 바뀝니다. 처음에는 결과에서 기뻐하던 사람이, 점점 진리에서 기뻐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랑 자체에서 기뻐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수준에 따라 기쁨의 내용이 다르다는 뜻이고, ‘그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 기쁨이 그 사람의 실제 삶의 방향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선과 진리를 만날 때 기뻐하며, 그 기쁨이 곧 그의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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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1:29)

 

AC.56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적 음식(celestial food)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이것들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므로 이르기를 영적 음식(spiritual food)이라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에 속하므로 이르기를 음식(food),먹을거리라 하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음식을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로 묘사되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tree yielding seed)라 합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이 글은 인간을 ‘천적 인간영적 인간자연적 인간’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의 인간이 무엇을 ‘먹을거리’, 곧 ‘음식’으로 삼아 살아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음식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기쁘게 하는 것’, 곧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핵심 개념입니다.

 

먼저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합니다. 천적인 것들이란 사랑 그 자체,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매개되지 않고, 삶과 즉각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천적 음식’이라 합니다. 음식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져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삶과 완전히 합치되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인간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 곧 진리와 신앙의 내용으로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 진리들은 아직 사랑 그 자체는 아니며, 사랑과 결합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가리켜 ‘영적 음식’이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영적 음식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음식이라 불린다는 점입니다. 즉 단순히 많이 아는 지식이나 교리라면 음식이 될 수 없고, ‘삶과 연결될 때만 음식’이 됩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즐거움이나 세상적 관심만을 뜻하지는 않지만, 주로 기억 지식, 곧 외부 세계에서 축적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억-지식들 역시 ‘음식’이라 부르는데, 이는 자연적 인간에게 그것들이 실제로 삶의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음식은 가장 바깥층의 음식이며, 그 자체로는 영적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영적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식은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창세기의 표상 언어를 통해 설명됩니다.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는 모두 ‘생명이 있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풀은 자라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아직 천적 사랑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씨를 맺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씨는 앞으로 더 자랄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즉 영적 인간의 음식은 단순히 현재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장차 더 깊은 생명으로 나아갈 잠재력’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음식들은 ‘씨 가진 나무(tree yielding seed)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불립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일부러 말을 멈추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된다고 밝힘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의 삶과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계속 따라오게 만듭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가 인간 내면의 질서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구성입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먹고 살지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을 먹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먹으며, 자연적 인간은 기억-지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 먹는 음식이 점점 바뀌는 과정입니다.’  

 

 

심화

 

1.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AC.56, 심화 1,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AC.55.심화 1.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AC.56 본문에 반복되는, ‘천적(영적,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라는 표현에서 ‘천적(영적,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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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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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생육, 번성', '결혼한 땅’, '땅에 충만', '풀, 나무, 공중의 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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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심화

 

 AC.55 본문 중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를 보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식물, 특히 을 하찮게 여겼거든요. 그런데 그 조차 사실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 그것이 크게 자란 것이라 하니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지점이 바로 AC.55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입니다. ‘’은 하찮은 단계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실제로 결합하여 이미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 다시 말해 단순한 앎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결코 낮게 보지 않고, 오히려 이미 생명이 작동하고 있는 단계’로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씨(진리)만 있을 때는 아직 가능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진리를 많이 알아도,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면,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는 생장이 시작됩니다. 그 첫 모습이 바로 ’입니다. 그러니까 ’은 작은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점에서 ’은 오히려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갖는 오해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크고 단단한 나무’를 높게 보고, ‘’을 낮게 봅니다. 그런데 AC의 시선은 다릅니다. ‘’은 이미 결합이 일어난 상태’이고, ‘나무’는 그 결합이 완전히 안정되고 확장된 상태’일 뿐입니다. 즉, 둘의 차이는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 성장의 정도’입니다. 그래서 ’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 ‘이미 본질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나무는 그 본질이 더 넓고 깊게 펼쳐진 모습입니다.

 

이걸 신앙적으로 풀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단계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 아는 바를 사랑으로 살아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살아내는 사람’이 더 앞선 상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충격이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찮게 여기던 ’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된 결과’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하찮게 여기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매우 깊은 상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이미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걸 더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은 낮고, 부드럽고, 쉽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성질이 사랑과 결합된 신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억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라고, 강하게 버티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자기주장보다 생명을 드러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은 단지 작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의 성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성장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생명인가’를 다시 보게 합니다. 크고 단단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작더라도 실제로 살아 있는 것’, 곧 신앙과 사랑이 결합된 상태가 훨씬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55에서 은 하찮은 단계가 아니라,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이미 실제 생명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내는 매우 본질적인 단계입니다.’

 

 

 

AC.55, 심화 3, ‘마13:31-32’

AC.55.심화 3. ‘마13:31-32’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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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심화

 

3. 13:31-32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이 비유는 AC.55의 문맥에서 ‘거듭남의 시작은 매우 작고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자라게 하실 때 결국 사람 전체를 변화시키는 큰 상태로 확장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겨자씨 한 알은 사람 안에 처음 심어지는 아주 작은 진리와 선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것이 자라 나무가 된다는 것은 그 작은 시작이 점점 자라 사람의 전 존재를 덮는 질서로 확장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먼저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 같다’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바깥 어딘가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세워지는 주님의 나라’, 곧 거듭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겨자씨 한 알’은 그 시작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지를 보여 줍니다. 실제로 거듭남은 처음부터 크고 확실한 변화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깨달음, 아주 미약한 선한 의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변화로 시작됩니다.

 

이제 ‘사람이 자기 밭에 심는다’입니다. ‘’은 사람의 마음과 삶, 곧 진리가 뿌려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심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자기 안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거듭남의 시작은 어떤 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진리가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다음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 주어지는 진리는 크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연약해서 쉽게 무시되거나 잊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것이 시작입니다.

 

이제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이것은 거듭남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던 것이 점점 자라, 이제는 사람 안에서 가장 큰 것이 됩니다. 즉, 처음에는 진리가 주변적인 것이었지만, 점점 중심으로 올라와 사람의 생각과 삶 전체를 이끄는 상태가 됩니다. ‘’은 일시적이고 낮은 것을 의미하고,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를 가진 안정된 구조, 곧 확립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는 생각과 이해, 곧 다양한 진리의 인식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이제 사람 안에 진리가 자리 잡아, 그 위에 더 많은 생각과 이해들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즉, 처음에는 하나의 작은 진리였지만, 이제는 그 위에 수많은 진리들이 연결되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 AC.55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욱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자식들을 잃지 않는다’, ‘결혼된 땅이 된다’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이 비유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즉, 처음에는 작고 쉽게 사라지던 선과 진리가, 이제는 자라서 안정된 구조를 이루고, 더 이상 사라지지 않으며, 그 위에 더 많은 것이 쌓이는 상태가 됩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주 작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붙잡고 조금씩 실천하다 보면, 점점 그 생각이 커지고,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그 하나의 진리가 중심이 되어, 다른 생각과 판단들도 그 기준 위에서 정리됩니다. 바로 그 상태가 ‘겨자씨가 나무가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으신 작은 시작이 어떻게 전체를 변화시키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그 시작을 심고 지키는 역할을 할 뿐이고, 실제로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3:3132의 겨자씨 비유는 거듭남이 아주 작은 진리의 시작에서 출발하여, 결국 사람 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로 성장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AC.55, 심화 4, ‘풀’(herb)

AC.55.심화 위 AC.55 본문 중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를 보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식물,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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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심화 2, ‘사62:4’

AC.55.심화 2. ‘사62: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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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심화

 

2. 62: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구절은 AC.55의 문맥에서 ‘거듭남이 완성되어 갈 때 사람 안에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 곧 버려진 상태에서 기쁨과 결합의 상태로 전환되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62:4 헵시바 쁄라는 사람이 더 이상 황폐한 상태에 있지 않고, 주님과 결합되어 그분의 기쁨이 머무는 상태, 곧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된 거듭남의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입니다. ‘버림받은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외로운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결합되지 못한 채 흩어져 있는 상태’, 곧 내적인 공허와 분열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AC.55의 흐름에서 보면, 거듭나기 전이나 초기 상태에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무엇인가 있어도 금방 사라지고, 중심이 잡히지 않는 상태가 반복됩니다. 이것이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에서 ‘’은 사람 자체, 특히 그 사람의 삶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황무지’는 선과 진리가 자라지 못하는 상태, 곧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열매가 맺히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메마른 상태가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입니다. ‘너를 헵시바라 하며.’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감정 표현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그 사람 안에 실제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기쁨이 흘러나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입니다. ‘쁄라’는 ‘결혼한 상태’, 곧 ‘결합된 상태’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결혼’은 언제나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사람 안에서 진리(이해)와 선(의지)이 더 이상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결합되어 함께 작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제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가 이 의미를 확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두 요소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이해가 따로 있고 의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이제 AC.55와 연결하면 전체가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처음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며’, ‘자식들을 잃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상태로 이어집니다. 즉, 선과 진리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단계에서 벗어나, 그것들이 서로 결합되어 지속되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도 금방 식어 버리고, 결심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다시 황무지로 돌아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변화가 일어나면, 같은 진리가 점점 삶과 연결되고, 선한 마음도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면, ‘이게 옳다’는 것과 ‘이게 좋다’는 것이 하나가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삶이 유지됩니다. 바로 그 상태가 ‘쁄라’, 곧 결합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회복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져 더 이상 끊어지지 않는 상태’, 곧 거듭남의 깊은 완성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더 이상 메마른 땅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머무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62:4 헵시바 쁄라는 거듭남이 완성되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그 상태가 지속되어 주님의 기쁨이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55, 심화 3, ‘마13:31-32’

AC.55.심화 3. ‘마13:31-32’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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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심화 1, ‘겔36:11-12’

AC.55.심화 1. ‘겔36:11-12’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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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심화

 

1. 36:11-12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이 구절은 AC.55의 문맥에서 ‘거듭남이 진행될 때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회복과 풍성함, 그리고 질서의 재건’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36:11-12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번성의 약속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속한 여러 기능들이 다시 살아나 풍성해지고, 처음보다 더 나은 질서로 회복되는 거듭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내적인 것, 곧 이해와 진리에 속한 것을 의미하고, ‘짐승’은 외적인 것, 곧 의지와 애정, 특히 자연적인 수준의 선과 감정들을 의미합니다. 이 둘이 함께 ‘많아지고 번성한다’는 것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함께 자라나고, 그것이 점점 풍성해진다는 뜻입니다. 즉, 단순히 지식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감정만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 이해와 의지가 함께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다음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입니다. ‘전 지위’는 단순히 과거의 상태가 아니라, ‘본래 있어야 했던 질서’, 곧 주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인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처음보다 낫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니라, ‘더 깊고 확고한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유혹과 싸움을 거쳐 얻어진 질서는 처음보다 더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 중요한 표현입니다. ‘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여기서 ‘사람이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인 인간, 곧 참된 이해가 중심이 되어 전체를 이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안에서 ‘진리와 이해’가 위에 서고, 그 아래에 다른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이 상태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영적 교회’, 곧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 백성 이스라엘’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 안에 사는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이 너희 위에 다닌다’는 것은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삶의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입니다. ‘기업’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식들’은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선과 진리, 곧 새로운 생명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식들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한때는 생겼다가 사라지던 선과 진리들이 이제는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 곧 안정된 거듭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AC.55의 흐름과 연결하면 전체가 또렷해집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 사람 안에서 먼저 진리와 선이 조금씩 생겨납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것들이 쉽게 사라지고 흔들립니다. 그러다가 점점 질서가 세워지면서, 진리와 선이 함께 자라고, 그 상태가 안정되며, 결국에는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번성’, ‘회복’, ‘기업’의 의미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깨달음이 생겨도 금방 흐려지고, 어떤 결심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진리라도 점점 깊어지고, 선한 마음도 더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이전에는 쉽게 무너지던 것이 이제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 상태가 ‘처음보다 낫게 되는 상태’이며, ‘자식들을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회복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세우시는 점진적이면서도 확고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즉, 흩어져 있던 것이 모이고, 약하던 것이 강해지며, 잠깐이던 것이 지속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36:11-12는 거듭남을 통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 질서가 처음보다 더 견고하게 회복되어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됨을 의미합니다.’

 

 

 

AC.55, 심화 2, ‘사62:4’

AC.55.심화 2. ‘사62: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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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생육, 번성', '결혼한 땅’, '땅에 충만', '풀, 나무, 공중의 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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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앞에서는multiplications번성으로 번역,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에서 말한 ‘결혼’ 개념을 한 단계 더 확장합니다. 결혼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었고, 이제 이 결합에서 ‘무엇이 나오는가’가 주제가 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이 결합에서 나오는 결과를 매우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것은 ‘생육(fruitfulness), 곧 열매 맺음이라 했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즉 열매 맺음은 질의 문제이고, 번성함은 양의 문제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인간 내적 과정에 대한 정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은 사랑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선은 ‘열매’로 표현됩니다. 반면 진리는 이해에 속하고, 이해는 분별하고 확장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번성’으로 표현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작용 방식은 다릅니다.

 

에스겔의 본문에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나오고, ‘번성(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이미 거듭난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고 있는 상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진리가 먼저 늘어납니다. 사람은 먼저 알아야 하고, 분별해야 하며, 진리의 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선이 그 진리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언어에서는 진리가 먼저, 선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사람을 ‘결혼한 땅’이라 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하며, 특히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로 정렬된 상태를 뜻합니다. 땅이 결혼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처가 됩니다.

 

이 결합에서 나오는 산출물의 명명법도 매우 일관됩니다.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들’, 선에서 나온 것은 ‘’이라 합니다. 이는 성별 개념이 아니라, ‘출처의 차이’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해에서 나온 것은 아들이고, 의지에서 나온 것은 딸입니다. 말씀에서 교회가 딸이나 처녀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 이전에 선의 애정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이 전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의 선은 가장 작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은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작은 선은 자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풀로, 나무로 자라고, 마침내 그 안에 수많은 진리, 이해의 내용들이 깃들게 됩니다. 기억 지식은 이때 비로소 살아 있는 가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영적 인간의 상태를 ‘전투’로 규정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지배욕이나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의 언어’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들과의 긴장과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싸움 속에서 진리와 선은 점점 더 결합하고,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심화

 

1.36:11-12

 

 

AC.55, 심화 1, ‘겔36:11-12’

AC.55.심화 1. ‘겔36:11-12’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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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2:4

 

 

AC.55, 심화 2, ‘사62:4’

AC.55.심화 2. ‘사62: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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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31-32

 

 

AC.55, 심화 3, ‘마13:31-32’

AC.55.심화 3. ‘마13:31-32’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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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erb)

 

 

AC.55, 심화 4, ‘풀’(herb)

AC.55.심화 위 AC.55 본문 중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풀’(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tree)가 됩니다.’를 보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식물,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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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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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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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천상의 결혼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daughter)처녀(virgin),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 제도로 읽지 않고, ‘인간의 내적 구조의 언어’로 읽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외적 성별로 보기 이전에,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의 관계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상실되면서, 이 깊은 인식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고교회에서 결혼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결혼을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천국 결혼은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이 결합을 직접 체험했고, 그래서 결혼은 그 자체로 기쁨이자 영적 인식의 창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사물을 보되,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표지와 통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곧 겉의 것들은 생각을 내적인 것들, 곧 속에 속한 것들로, 그다음에는 천적인 것들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로 이끄는 계단이었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결혼 역시 외적 관계를 넘어, 천상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명확히 정의합니다. 이해력은 남자이고, 의지는 여자입니다. 이는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상응’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며 비추는 역할을 하고, 의지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 생명으로 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둘이 따로 움직일 때는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를 비로소 ‘결혼’이라 합니다.

 

이 결혼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해력에서 본 진리가 의지에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 안에 내적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이며, 앞선 단락들에서 말해 온 형상과 모양의 완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인류 번성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또한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중요한 언어 습관의 뿌리를 설명합니다. 교회를 ‘’, ‘처녀’, ‘아내’로 부르는 표현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니라, 교회를 ‘선에 대한 애정의 주체’로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집단이기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내’이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혼의 언어로 묘사됩니다.

 

 

 

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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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이 구절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학에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그리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가장 정밀하게 압축해 놓은 핵심 문장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형상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두 개의 형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이해 중심의 상태에서 의지 중심의 상태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문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이라 하며’입니다. 여기서 ‘자기 형상’이라는 표현은, 아직 형상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쪽에 더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상태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단계입니다. 분명 주님을 향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심은 ‘내가 이해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따라가는’ 구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영적 인간의 출발점입니다. 그는 진리를 통해 주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삶을 조정해 갑니다. 이때 사랑은 아직 앞서지 않고, 신앙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점점 형성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른다’고 말합니다. 즉, ‘신앙 사랑’의 순서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면,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형상의 중심이 더 이상 ‘사람 쪽’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 옮겨집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히 배워서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직접 작용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그 사랑이 사람 안에서 중심이 될 때, 그 사람은 단순히 주님을 닮아 가는 수준을 넘어,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흐르는 형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것이 옳은가’를 먼저 따지지 않습니다. 이미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본문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말합니다. 즉, ‘사랑 신앙’의 순서입니다. 이해는 더 이상 주도권을 쥐고 판단하는 역할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을 밝히고 표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시면, 이 구절의 구조가 분명해집니다. ‘형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다만 그 하나의 형상이 처음에는 ‘이해 중심(신앙 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형상’이라 불리고, 점차 ‘의지 중심(사랑 중심)’으로 완성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두 번의 언급은 두 개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이 ‘중심이 이동하며 완성되는 두 단계’를 보여 줍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말씀을 배우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노력하며 따라갑니다. 이때는 여전히 ‘내가 이해해서 따라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이 좋아서’, ‘이것이 참으로 선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이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 되어 삶이 흘러갑니다. 바로 그 전환이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용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깊은 흐름을 한 문장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이 앞서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형상이 완성되는 길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53형상의 두 번 언급은 두 개의 형상이 아니라,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며, 하나의 형상이 완성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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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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