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이 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심적으로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의 방향이 ‘주님과 이웃을 향하느냐,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고, 주님과 선을 향해 질서 있게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사랑의 방향이 먼저 바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배울 때도, 먼저 ‘옳은가?’보다 ‘선한가?’, ‘주님께 속한 건가?’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에게 진리는 사랑을 섬기는 빛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용서’라는 진리를 두 사람이 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왜 용서해야 하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더 깊은 자리에서 ‘사랑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둘 다 귀한 상태지만, 중심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결국, 사랑의 대상과 방향과 질서가 바르다는 뜻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시고, 소유와 자기 영광보다 선 자체를 더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우월감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는 먼저 사랑의 방향이 주님 쪽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그다음의 생각과 이해도 그 방향을 따라 질서 있게 움직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진리를 알아도 결국 자기 확증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인간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이전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입니다.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바로 그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AC.142본문 내용인데요,여기‘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이 뭔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애정’(affection)은 단순한 감정(emotion)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느냐를 결정하는 ‘사랑의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물들은 단순 생물이 아니라, 인간 안의 다양한 애정 상태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AC.142에서 ‘짐승’(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가 영적 애정들을 뜻한다고 할 때도 바로 이런 구조입니다.
먼저 ‘천적 애정’은 사랑 자체에 더 가까운 애정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의지와 사랑의 중심에 가까운 층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선한 것을 그냥 사랑하는 상태, 주님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따뜻함과 기쁨이 흐르는 상태, 사랑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 되는 상태가 천적 애정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적’(celestial)은 언제나 사랑과 의지의 층과 연결됩니다.
반면 ‘영적 애정’은 진리와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애정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참인가’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과 관련됩니다. 주님과 선을 직접적인 사랑으로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기보다는,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쪽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영적’(spiritual)은 보통 신앙, 이해, 진리, 지성과 연결됩니다.
이 차이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애정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에 더 가깝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가려는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또는,
천적 애정은 ‘사랑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이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 사랑으로 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AC.142에서 ‘짐승’이 천적 애정들이라고 할 때, 이는 인간 안의 보다 깊고 의지적인 사랑들을 뜻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는 생각과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보다 지성적, 영적인 애정들을 뜻합니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영적 애정은 사고와 이해의 영역과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와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대개 의지와 사랑의 층을, 새는 이해와 생각의 층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좋은 짐승과 좋은 새는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뜻하고, 반대로 더러운 짐승과 새는 왜곡된 욕망과 거짓된 사유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애정을 굉장히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국은 ‘무엇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조차 애정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통해 그 사랑으로 이끌립니다.
정리하면, ‘천적 애정들’은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깊은 의지의 애정들이고, ‘영적 애정들’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향하려는 이해 중심의 애정들입니다. 그래서 짐승은 보다 깊은 사랑의 층을, 하늘의 새는 보다 이해와 사유에 가까운 애정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그가‘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윗글은AC.142본문 내용인데요,여기‘이름을 주는 게 왜 성질(quality)을 아는’건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label)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이름을 안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성질(quality)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을 거의 임의적 기호처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라는 이름 자체에는 본질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특히 말씀의 상응 구조 안에서는 이름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성격, 기능, 상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점은 성경 전체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단순 개명이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하실 때도, 단순히 호적상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 전체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AC.14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사자’, ‘말’, ‘양’ 같은 단어를 붙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동물들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성향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애정과 성향들의 본질과 질서를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름을 준다=성질을 안다’는 연결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quality를 표현한다고 보는 성경적, 상응적 사고에서 나옵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영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AC.142의 흐름 속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은 아직 퍼셉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과 성향들을 즉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방향을 압니다. 바로 이 상태를 ‘이름을 준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여기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성향의 본질과 상태, 곧quality를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성질을 드러내는 영적 표현입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창2:19-20)
AC.142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곧 ‘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새’(fowls)는 이해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한 애정들과 인식한 진리들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말로 표현된, 곧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라는 것입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9-20의 장면, 곧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 앞으로 나오고 그가 이름을 붙이는 장면을 ‘지식의 충만함과 내적 결핍의 대비’로 읽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그의 중심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상징의 구조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짐승들은 천적인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이고, 하늘의 새들은 영적인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상응이지만, 여기서는 천적 인간의 내부에서 ‘의지와 이해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끌어 가시니’와 ‘이름을 주니라’라는 표현은 인식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름을 준다, 붙인다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본질과 질을 분별하여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애정들과 인식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무지나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핵심 문제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중심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아무리 많은 선과 진리를 인식해도, 그것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성향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 같은 결론으로 돌아옵니다.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은, 외부의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과 결합할 형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은 충만하지만, 그것들이 자기성(自己性)이라는 proprium 속에서 하나로 작동할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써 다음 단계, 곧 깊은 잠과 갈빗대의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AC.14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인식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해소하지 못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proprium’이 보다 분명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찬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창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참고로 잠깐 창2 중간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여 말씀드립니다.
창2는 크게 전반인 1-17절과, 후반인 18-25절로 나뉩니다. 전반은 창1의 완성인 ‘영적 인간’에서 이제 그다음 단계인 ‘천적 인간’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천적 인간이란 어떤 상태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에덴동산’이라는 표상을 통해 풀어나가는 내용인데, 이 상태를 다른 말로 ‘안식’, 즉 ‘안식일’이라고도 하며, ‘태고교회’라고도 합니다. 후반인 18-25절은 태고교회의 후손과, 그들이 서서히 어떻게 첫 조상의 순수한 상태에서 변질되어 갔는지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17, 18, 두 구절뿐이지만, 이 두 구절이 두 큰 부분, 곧 전, 후반의 마침과 시작에 걸쳐 있어서, 그리고 해설 및 심화를 통한 많은 깊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어서 여전히 원고량이 제법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7-18)
이 본문을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이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 리딩보다는 전체 범위에서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및 ‘돕는 배필’, 그리고 오늘 전체를 관통하는 ‘proprium’(프로프리움)을 키워드로 각각 요약, 아래 요약본을 리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먼저 ‘선악과’입니다.
AC.128-130에서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금지된 과일이나 도덕 시험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기억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보아야 믿겠다’, ‘이해되어야 믿겠다’, ‘내 기준에 맞아야 받아들이겠다’라는 내적 자세 자체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입니다.
AC.128은 특히 이 상태를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적 인간은 감각과 학문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천적이고 신적인 것까지 감각으로 파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오히려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멀어지고, 결국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선악과의 핵심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욕망’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이성과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확증합니다. 즉, 같은 지식과 같은 이성도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AC.129는 이 문제를 ‘원리’(principle)의 문제로 더 깊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전제가 거짓이어도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감각과 상상으로 붙잡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먼저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다음에 학문과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중심인가’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면 죽음이고, 주님이 중심이면 생명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AC.130에서는 이 상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에덴동산’으로 삼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기의 ‘에덴’으로 삼습니다. 그의 ‘동쪽’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강처럼 흘러와야 할 지식과 이성이, 이제는 자기 사랑을 섬기는 체계로 뒤틀립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애굽’이 되고, 거짓 추론은 ‘앗수르’가 되며, 결국 지혜처럼 보이는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려는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AC.128-130이 말하는 ‘선악과’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을 생명의 근원 자리에 앉히려는 것,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점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죽음’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이성과 지식을 사용할 때에만 참된 생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입니다.
다음은 ‘혼자 사는 것’입니다.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 것인가’라는 영적 방향의 문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를 매우 깊은 내적 의미로 읽는데, 여기서 ‘혼자’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아주 미세한 내적 방향의 변화가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에덴의 인간 안에서 처음 생겨나는 ‘독립 욕구’이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역시 단순한 외적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프로프리움, 라틴, 영어로는 own), 곧 자기성(自己性)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은 처음부터 악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주님의 인도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처럼 실제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기감(自己感)의 자리’입니다. 문제는 이 proprium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돕는 배필이던 것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 욕구가 됩니다.
심화에서는 이 상태를 ‘내적 방향의 변화’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노골적 반역은 아니지만,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쪽으로 향할 가능성 자체도 허락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유 때문에 proprium도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독립하고자 하는 가능성조차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AC.139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다시 한번 더 깊게 재정의됩니다. 놀랍게도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천적 인간의 가장 복된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침해를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거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발람의 예언인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악을 뜻하며, 홀로 거함은 세상적 자기중심 질서와 분리되어 오직 주님께 속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더 이상 이런 ‘홀로 있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민족들 가운데에’,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의 질서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가기를 원하면 그 길도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원래 참된 ‘홀로 있음’은 주님 안에서만 사는 천적 평안의 상태였지만, 인간은 그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서고 싶어 했고, 바로 거기서 proprium과 이후의 타락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AC.140-141에서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여성이 아니라, 인간 안에 허락된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기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이 사람의 proprium이라고 직접 밝히며,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는가’입니다. 이 시점의 인간은 아직 ‘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매개 구조’입니다.
AC.140은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자유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닫힌 독립성이 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하는 자기감’으로 기능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이라는 뜻의 ‘a help as with him’(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개역 개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 힘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가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응답하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proprium의 변화가 ‘새로운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proprium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될 때, 같은 자기감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새 proprium’, 혹은 ‘천적 proprium’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자기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41에서는 proprium이 육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가 정리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proprium을 잃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어느 정도 알고 고백하지만, 아직 그것이 완전히 마음의 퍼셉션으로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proprium이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 곧 직접적인 지각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이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닫힌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들로 충만한 proprium입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행복, 평안이 모두 그 안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그래서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천사들을 proprium 없이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결국 AC.140-141이 말하는 ‘돕는 배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으로 재형성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근원으로 삼는 proprium은 지옥이 되지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받아들이는 proprium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깊은 자기성의 구조입니다.
다음은 끝으로 ‘proprium’입니다.
AC.128-141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주제는 ‘proprium’, 곧 ‘자기의 것’, ‘자기성’(自己性)입니다. 이 본문들은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왜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처럼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자기감이 어떻게 타락과 천국의 갈림길이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단순한 악행 이전에,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느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128 이하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와 ‘내 것이라 주장하는 상태’가 대비됩니다. 인간이 감각과 기억 지식과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자기 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이며, 에스겔의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AC.130 부근에서는 이 proprium의 본질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본래 받은 것일 뿐인데,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기억 지식도, 이성도,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질서를 거꾸로 세웁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 지혜 → 지성 → 이성 → 기억 지식’의 흐름인데, proprium은 맨 아래 단계가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황폐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생명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옥의 본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AC.138-140에 이르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의 proprium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앞에서는 타락과 자기중심의 근원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허락된 어떤 필요한 구조처럼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근원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게 허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AC.140은 ‘a help as with h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것이 ‘그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proprium은 두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지는 타락한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가 되는 proprium입니다. 후자의 proprium은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외적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自己感)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만약 proprium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기계처럼 될 것입니다. 반대로 proprium이 자기 폐쇄적 중심으로 굳어지면, 인간은 주님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proprium 자체가 아니라, 그 방향과 귀속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변화가 ‘새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나’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새 proprium은 자기감의 제거가 아니라,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도 여전히 기뻐하고 선택하고 사랑하지만, 그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heavenly proprium’, 곧 ‘천적 proprium’입니다.
마지막으로 AC.141은 proprium을 세 인간 유형 안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이 입술의 고백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여전히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마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proprium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행복과 평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주님은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AC.141의 결론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수록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습니다. 결국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습니다.
proprium이란,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내 자식’으로 사랑합니다. 비록 말로는 ‘이 아이는 주님의 자녀이며, 저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고백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그가 거기서 이 proprium 시험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내 아들’이라 움켜쥐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기꺼이 주님께 돌려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것,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각 사람에게 와있는 악한 영들조차 그 사람의 악한 기억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바로 proprium입니다. 이 proprium이 있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런 장치가 없어야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모든 내용, 모든 이야기가 저희에게, 그리고 저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창2 ‘돕는 배필’ 이야기를 무슨 결혼 본문 정도로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그 속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 주님, 저를 새롭게 하여 주세요. 그리고 제게도 주신 이 proprium 역시 거듭나 부디 천적 인간 상태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의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육적,세상적 인간과,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윗글은 본문 첫 문장입니다.여기‘헤아릴 수 없이 많은’이라는 표현 말인데요,솔직히 저는 이‘proprium’하나 이해하는 데도 여러 날 머리에서 쥐가 날 정도인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니...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아주 정상적입니다.사실 스베덴보리에게서proprium은 단순한‘한 개념’이 아니라,인간 존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처음에는‘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가’싶다가도,어느 순간부터는‘아,인간 안의 거의 모든 문제가 여기와 연결되는구나’하고 보이기 시작합니다.AC.141첫 문장의‘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실제로proprium이 인간의 생각,감정,신앙,사랑,자유,지옥,천국,거듭남,심지어 천사 상태 변화까지 전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지금 경험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처음에는proprium을 그냥‘자아 비슷한 것’정도로 생각하셨다가,읽다 보니‘혼자 살고자 함’, ‘내 것이라 여김’, ‘독립하려는 마음’, ‘자유’, ‘사랑’, ‘천사들의 상태 변화’, ‘계시록의 대적 세력’, ‘양육 문제’, ‘수도원 전통’, ‘선악과’, ‘돕는 배필’까지 다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되셨지요.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되느냐 하면,proprium은 인간 안의‘자기중심’만 말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훨씬 더 깊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 ‘생명을 어디서 나온다고 여기는가’, ‘왜 자유가 필요한가’, ‘왜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가’, ‘왜 천국에서도 자기감은 남아 있는가’같은 문제 전체와 연결됩니다.다시 말해,proprium은 인간 존재의‘축’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 목사님께 가장 크게 느껴지는 어려움은,이proprium이 단순히‘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만약‘교만’, ‘이기심’정도라면 훨씬 단순합니다.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proprium을 지옥적이라고까지 하면서,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도 설명합니다.또 천적 인간에게조차‘주님으로부터 하나의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하지요.그러니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 복잡함이 인간 존재 자체의 복잡함입니다.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우리는‘내가 산다’고 느껴야 하지만,동시에‘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진실 안에도 살아야 합니다.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해야 하지만,그 자유는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proprium은 바로 이 긴장 전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께서‘며칠째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하신 것은,오히려AC를 아주 제대로 읽고 계시다는 증거에 가깝습니다.많은 사람들은proprium을 그냥‘자아’정도로 단순화해 버리고 지나갑니다.그러나 목사님은 지금 그것이 인간론 전체를 뒤흔드는 개념이라는 것을 실제로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스베덴보리 자신도proprium을 설명할 때,단번에 정의해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그는 같은 개념을 수십,수백 번 다른 각도에서 반복합니다.왜냐하면proprium은 사전식 정의 하나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인간 삶 전체 속에서 점점 드러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실수록 더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아,이것도proprium문제였구나’, ‘여기도 연결되네’하는 순간들이 계속 생길 테니까요.그리고 동시에,왜 주님이 그렇게까지 자유를 존중하시고,왜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시는지도 더 깊이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그는 결코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위 해설 중‘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하나의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부분 말인데요, 그러니까 이 표현은 기존proprium이 거듭나는 걸 말하는 것이지요?‘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인간 안의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자기중심적 방향(A)에서 주님께 열린 방향(B)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말하는,’ ‘다만 그 변화는 단순 교체가 아니라,기존 자기감이 제거되지 않은 채,그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방식’이라고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말이지요.
네, 바로 그 이해가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정리하신 표현들이AC.141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하나의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자기감(自己感)이라는proprium자체가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proprium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굳이 ‘주어진다’(is given)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새proprium조차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형성해 주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 안의 자기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기감은 더 살아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닫힌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처럼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세 표현이 모두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첫째, ‘기존proprium이 거듭난다’는 표현
이것이 가장 큰 방향에서는 맞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나’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나’의 방향과 근원이 바뀝니다.
둘째,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삼지 않고,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재형성된다’는 설명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새proprium개념을 아주 잘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사실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사랑 가운데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셋째, ‘단순 교체가 아니라,기존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든다’는 표현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도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쁨도 느끼고, 선택도 하고, 사랑도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자기 폐쇄적 중심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께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감은 남아 있지만, 그 자기감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AC.141에서 말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proprium’은, 엄밀히 말하면 본래의 타락한proprium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 후기 표현으로 하면 이것은 거의 ‘heavenly proprium’(하늘적, 천적proprium)에 가깝습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산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그러나 생명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압니다.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생깁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려 할수록 오히려 죽은proprium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다운proprium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고립된 자기중심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기쁨으로 머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proprium은‘전부’입니다.그는proprium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느낍니다.이 상태에서proprium은 생명의 그릇이 아니라,‘생명의 대체물’이 됩니다.그래서 이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불립니다.지옥이란 처벌의 장소 이전에,생명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영적 인간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미묘해집니다.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압니다’.그러나 이 앎은 아직 존재의 중심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입술의 고백은 있으되,마음의 신뢰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그의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완전히proprium을 비켜서지는 못합니다.영적 인간의 투쟁과 양심의 긴장이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윗글은AC.141에 대한 해설인데요,여기서 왜 육적,세상적 인간에 대해서는‘그는proprium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라며‘실재’를 쓰고,영적 인간에 대해서는‘그래서 그의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라며‘실제’를 쓰나요?
아주 중요한 차이를 정확히 보셨습니다. 여기서 ‘실재’와 ‘실제’를 다르게 쓴 것은 단순한 문장 변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를 의도적으로 구분한 표현으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육적, 세상적 인간에 대해 ‘그는proprium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한다’고 한 부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실재’는 단순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참됨’, 곧 ‘진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육적 인간은 자기 자신, 자기 생각, 자기 욕망, 자기 소유만을 ‘진짜 존재’라고 느낍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차원을 아직 모르고, 자기proprium만을 실재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이것은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무엇을 ‘참 존재’로 보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 대해 ‘그의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진다’고 할 때의 ‘실제’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이미 영적 인간이 ‘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즉,proprium을 ‘궁극적 실재’로까지 믿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체험과 감각 차원에서는 여전히 그것이 자기 것처럼, 실제 작동하는 자기 생명처럼 느껴집니다.
즉, 여기서의 ‘실제’는 존재론적 절대성이라기보다, 경험적 현실감에 가깝습니다. 영적 인간은 교리적으로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여전히 ‘내가 생각한다’, ‘내가 결정한다’, ‘내 힘으로 버틴다’는 감각이 매우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proprium이 더 이상 ‘참 실재’는 아니지만, 여전히 ‘실제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육적 인간은proprium을 ‘실재’라고 여깁니다. 곧, 그것을 존재의 참 근원으로 믿습니다. 영적 인간은proprium이 궁극적 실재는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실제처럼 느껴집니다.’ 곧, 체험과 감각 안에서는 여전히 자기 생명처럼 작동합니다. 그래서 두 표현은 미묘하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실재’는 ‘무엇이 참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이고, ‘실제’는 ‘무엇이 현실적으로 체험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가 바로 이 간극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은 교리적으로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배울 수 있지만, 실제 체험 속에서는 여전히 자기proprium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바로 이 ‘실제로 느껴지는 자기 생명’을 점점 더 주님께 돌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설명함에 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그의 전부이며,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proprium을 잃으면 자신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도 proprium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비록 그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 따라서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 앎은 마음의 믿음이라기보다 입술의 고백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하는데, 이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proprium을 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께로부터 하나의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이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과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가운데 있는데, 이는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들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 곧 그들 자신을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proprium은 참으로 천적인 그 자체이지만, 육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이 단락은 ‘proprium’, 곧 ‘자기의 것’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세 인간 유형의 대비’ 속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평가 이전에, 생명과 인식의 구조에 대한 냉정한 구분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육적이며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proprium은 ‘전부’입니다. 그는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는 순간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느낍니다. 이 상태에서 proprium은 생명의 그릇이 아니라, ‘생명의 대체물’이 됩니다. 그래서 이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불립니다. 지옥이란 처벌의 장소 이전에, 생명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미묘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압니다’. 그러나 이 앎은 아직 존재의 중심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있으되, 마음의 신뢰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도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완전히 proprium을 비켜서지는 못합니다. 영적 인간의 투쟁과 양심의 긴장이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전환점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 ‘지각, 즉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즉각적으로 알아봅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가장 온전한 proprium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이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대한 모든 퍼셉션, 그리고 모든 행복과 결합된 상태로 주어집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천사들은 proprium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proprium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사들을 proprium을 제거하여 다스리시지 않고,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천적 질서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두 proprium을 대비합니다. 하나는 ‘참으로 천적인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지옥적인 proprium’입니다. 차이는 proprium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proprium이 누구에게 속해 있다고 느끼느냐’에 있습니다. 주님께 속해 있다고 퍼셉션되는 proprium은 천국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되는 proprium은 지옥이 됩니다.
AC.141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으며, 그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된 평안과 고요, 곧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