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동산’(garden)으로 삼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의 ‘에덴’(Eden)이며, 그의 ‘동쪽’(east)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의 모든 기억 지식으로서, 이는 정죄 받습니다. 그의 ‘둘째 강’(second river), 곧 ‘앗수르가 있는 곳’(Assyria)은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며, 그의 ‘셋째 강’(third river), 곧 ‘구스가 있는 곳’(Ethiopia)은 거기서 나온 악과 거짓의 원리들로서, 이것들이 그의 신앙의 지식입니다.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애굽’(Egypt), 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에스겔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러한 사람들은 같은 예언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불립니다. 거기서도 바로, 곧 애굽이 다음과 같은 말로 다루어집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에서 나온 지식, 곧 기억 지식과 인식을 뜻하는데, 이들이 추론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해설

 

AC.130은 지금까지 창세기 2장에서 차근차근 쌓아 온 ‘천적 질서의 완전한 반전, 전도, 뒤집힘’을 한 번에 보여주는, 매우 강력하고도 무서운 단락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에덴동산’과 네 강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의 질서인지를 설명했다면, 이 단락은 그 질서가 ‘인간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어떻게 뒤집히는지’를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상징들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동산, 에덴, 동쪽, 네 강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의 동산은 감각과 기억 지식입니다. 즉, 보이는 것, 축적된 정보, 경험과 논리입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이 ‘동산’, 곧 삶과 지혜의 중심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에덴, 곧 사랑의 중심은 주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그의 동쪽은 서쪽’이라는 말입니다. 말씀 전체에서 동쪽은 주님을 뜻하는데, 이 사람에게 동쪽은 자기 자신입니다. 곧, 그는 빛이 떠오르는 방향을 완전히 거꾸로 돌려놓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영적 방향 상실의 본질입니다.

 

네 강의 왜곡은 더 심각합니다. 유브라데 강, 곧 기억 지식은 ‘정죄 받는 것’이 됩니다.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못하고, 자기 소유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강 ‘앗수르’는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거짓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 됩니다. 셋째 강 ‘구스’는 악과 거짓의 원리들이 되며, 심지어 그것이 그의 ‘신앙의 지식’이라고 불립니다. 넷째 강은 더 이상 지혜가 아니라, 말씀에서 ‘마술’이라 부르는 상태입니다. 이는 지식을 가지고 영적 세계를 조종하려는 태도, 곧 신앙의 완전한 왜곡입니다.

 

이 지점에서 ‘애굽’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변합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을 뜻하지만, 그것이 마술적인 것이 될 때, 즉,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할 때,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바로는 ‘내 강은 내 것이며, 내가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의 주권을 주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리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바로 심판의 이유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이라는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에덴의 나무는 원래 말씀에서 나온 지식, 곧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기 추론과 자기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될 때, 그 나무들은 더 이상 천국에 있지 않고 지옥에 있게 됩니다. 이는 지식 자체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사용 목적과 출발점이 뒤틀린 결과’입니다.

 

AC.130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지식, 같은 상징도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생명의 강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마술과 파괴의 체계가 되며, 에덴의 동산은 지옥의 숲으로 뒤바뀐다고 말합니다. 이 단락은 창세기 3장의 비극을 예고함과 동시에, 모든 시대 모든 개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이기도 합니다.

 

 

심화

 

1. ‘겔29:3, 9’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 (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 구절이 AC.130에 인용된 이유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에스겔서 29장의 ‘애굽 왕 바로’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기억 지식과 감각적 이성에 의존하는 인간’, 곧 외적 인간, 겉 사람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강’은 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지식의 흐름, 곧 기억 지식과 그로부터 나온 사고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AC.122–130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 곧 ‘소유 의식의 왜곡’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인간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외적 인간은 그것을 ‘내가 만든 것’, ‘내 능력의 결과’라고 여깁니다. 지식도, 판단도, 심지어 신앙까지도 자기 소유로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교만을 꾸짖는 말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뒤집힌 상태’를 드러냅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 지혜 → 지성 → 이성 → 기억 지식으로 내려오는 흐름인데, 여기서는 그 맨 아래 단계에 있는 기억 지식이 스스로 근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가 ‘강의 한가운데 누워 있는 큰 악어’로 묘사되는 이유입니다. 그는 흐름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 흐름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어지는 ‘애굽 땅이 황무지가 된다’는 선언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이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을 때, 겉으로는 풍부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빠져나가 ‘내적으로는 황폐해집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의 유입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심판의 목적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입니다. 곧, 근원을 다시 바로잡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130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소유하지 말라’, ‘받은 것일 뿐이다’라는 원리가, 여기서는 반대로 뒤집힌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집힘이 어떤 영적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의 말씀은 AC.130에서 다음을 확증합니다. 인간이 자기 지식과 능력,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바로의 상태에 서게 되며,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내적 황폐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다시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2. ‘겔31:16, 18’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 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이 구절이 AC.13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에스겔서 29장에서 보았던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이 ‘어디까지 나아가며, 결국 어떤 종말에 이르는가’를 한 단계 더 깊이, 그리고 더 완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곧 AC.130의 주제인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의 결과’를, 이번에는 ‘에덴의 나무들’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바로’는 여전히 기억 지식과 그로부터 나온 이성, 곧 외적 인간의 정점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이번 구절에서는 그가 단순히 교만한 상태에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핵심입니다. ‘에덴의 나무들’은 원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식과 그로부터 나온 모든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그 나무들과 ‘같은 자리’에 놓이면서도 결국 ‘지하로 내려간다’는 것은, ‘외적 인간이 내적 생명의 언어와 형식을 흉내 내거나 소유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 실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역설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에덴의 나무들처럼 보이는 상태’, 곧 지혜롭고, 풍성하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그 모든 것은 결국 동일한 방향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 어떤 것과 같은고’라는 질문은, 사실상 ‘겉모습의 유사성과 내적 본질의 차이를 대비시키는 선언’입니다.

 

또한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 누우리라’는 표현은, 진리(칼)에 의해 드러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진리 앞에서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실제로는 생명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받지 못한 자’라는 표현은, 내적 정결, 곧 사랑에 의해 정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아무리 지식과 이성이 발달했어도, ‘사랑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는 결국 외적인 것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이 AC.130에서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내 것이라 하지 말라’는 권면을 넘어서, 그 태도가 지속될 때, ‘영적 구조 전체가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생명과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로가 ‘그 모든 군대와 함께’ 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의지하던 모든 사고 체계와 지식 체계 전체가 함께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의 구절은 AC.130에서 다음을 확증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겉으로는 에덴의 나무들처럼 보일지라도, 그 근원이 자기 자신일 때에는 결국 동일한 결말, 곧 내적 생명으로부터의 추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가 도달하는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3. ‘마술’

 

위 본문에 나오는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애굽’(Egypt), 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라는 이 부분 좀 설명해 주세요.

 

 

이 대목은 꽤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핵심은 ‘지식이나 이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가 바뀔 때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넷째 강’, 곧 가장 바깥 단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지혜’를 두고 그것을 ‘마술’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질서를 먼저 다시 보셔야 이해가 또렷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까지 내려와 생명을 줍니다. 이 흐름이 유지될 때에는, 바깥에 있는 기억 지식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며, 이성은 밝고 건강하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곧 사람이 ‘기억 지식과 이성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지혜로워지려 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지혜처럼 보이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성질도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술이나 초자연적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자기중심에서 나온 지식과 추론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진리를 만들어내려는 태도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알 수 있다’, ‘나는 내 지식으로 판단하고 결론낼 수 있다’는 상태가 극단으로 가면, 그것이 곧 ‘마술적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안에서 근원을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마술적인 것이 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잃고, 오히려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겉으로는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애굽과 바로가 종종 ‘마술사’, ‘술객’과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이 상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고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래서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안에서 완결된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129에서 말한 ‘거짓된 원리를 전제로 삼으면 모든 지식이 그것을 지지하게 된다’는 구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넷째 강에서 비롯된 지혜’라고 부르는 이유 말인데요, 그것은 겉모습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매우 ‘지혜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풍부한 지식, 날카로운 분석, 설득력 있는 말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 아래에서 조합된 지혜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지혜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정리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를 떠나, 기억 지식과 이성으로부터 스스로 지혜를 만들어내려 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빛나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뒤틀린 상태이며, 사람을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출발점과 방향’입니다.

 

 

 

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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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초청하게 될 텐데, 그때 이런 표현들, 그러니까 저희 교회는 가급적 선한 삶을 살고프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같은 문구를 사용하면 많이 이상할까요? 이런저런 교리적 배경으로 싸우고 다투느라 교회가 어수선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습니다만...

 

 

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기보다, 그대로 사용하시면 오히려 ‘문을 먼저 좁혀 버리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22-124가 말하는 ‘경작하며 지키게’의 핵심은, 이미 선한 사람만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온 사람 안에 있는 것을 경작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지켜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특히 거기서 말하는 ‘영적 인간’은 처음부터 선과 진리의 조화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서히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작점은 오히려 불완전하고 혼재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만’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가장 필요한 사람들, 곧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갈망은 있는 사람들조차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거나 스스로를 배제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거듭남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바로 그 의미에서 ‘경작’은 씨앗을 심고 돌보는 일이요, ‘지킴’은 잘못된 원리나 왜곡된 애착이 그 과정을 망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초대 문구는 ‘결과 상태’를 전제하기보다 ‘과정에의 참여’를 여는 쪽이 더 본질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그 사랑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이 걷는 길, 곧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그래서 표현을 조금만 바꾸면 훨씬 자연스럽고, 동시에 AC의 정신에도 더 부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이라는 단정적 표현 대신 ‘삶을 더 선하게 살아가고 싶으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 대신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길을 함께 찾고 싶으신 분들’처럼 ‘이미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방향은 분명해집니다. 교회 안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초대 문구에서 걸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들어온 이후의 가르침과 공동체의 분위기, 곧 말씀과 삶의 일관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염려, 곧 ‘교리로 싸우는 어수선함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타당합니다. 다만 그것은 ‘누가 들어오느냐’보다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AC.122-124의 빛에서 보면, 참된 ‘지킴’은 외부인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질서’를 세워 외부에서 들어오는 혼란이 스스로 힘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문턱을 높여 조용해지는 곳’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의 질서가 분명하여 자연히 고요해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계획하시는 초대는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방향만 조금 다듬으시면 매우 건강한 형태가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교회는 이미 완성된 사람을 찾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 아래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곳입니다.’ 이 한 줄 안에 ‘경작’과 ‘지킴’, 그리고 ‘영적 인간의 길’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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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위 본문에,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근거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거나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전제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는데, 이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상상으로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데를 읽으면서 많이 답답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곧 창1:2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 같은데, 이런 사람에게 과연 빛이 비친다고 무슨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요? 시작될 수 있으니까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답답함이 드는 지점이 아주 정확합니다. 그 문장은 ‘이 사람은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상태의 구조가 무엇으로는 열리지 않는가’를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곧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전제를 고수하는 한, 그 틀 안에서는 영적, 천적인 것이 스스로 들어올 통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빛이 전혀 비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빛은 다른 길로, 다른 층위로 먼저 들어옵니다.

 

1:2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단순한 무지라기보다, ‘내면의 질서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때 빛은 먼저 ‘이해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들어오기보다, ‘삶과 양심의 자리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들어옵니다. 사람은 여전히 ‘보아야 믿겠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미세한 찔림, 어떤 선택 뒤에 남는 평안과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초기의 ‘’입니다.

 

중요한 점은, 빛이 처음부터 ‘보이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살게 하면서 나중에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질서에서는 이해가 먼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아주 조금 바뀌면서 그에 따라 이해가 서서히 열립니다’. ‘증명되면 하겠다’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선을 한 번 행해 보니, 그다음이 조금 보인다’는 식입니다. 이때 이성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대성을 내려놓고 섬기는 자리로 옮겨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 안에는 이미 ‘리메인스(remains, 남겨진 것들)가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각, 진실에 대한 정직함, 선을 향한 미약한 기울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 리메인스가 빛을 받아 ‘밖의 강한 논리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반응’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여전히 회의하고 따지면서도, 속에서는 ‘그래도 이 길이 옳다’는 아주 조용한 동의가 자라납니다. 이것이 변화의 실제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논증으로 설득’이라기보다, ‘작은 순종과 작은 선의 실천’입니다. 아주 사소해 보여도 좋습니다. 진실을 한 번 더 말해 보기, 이익이 적어도 공정하게 선택해 보기, 타인을 한 번 더 배려해 보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선택을 할 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에서 한발 물러서고, 그 틈으로 빛이 더 깊이 들어옵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이해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미 경험하신 것처럼, 이 길은 ‘먼저 보고 믿는’ 길이 아니라, ‘조금 살다가 보게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연결되며, 이성이 더 넓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이때 사람은 깨닫습니다. ‘내가 닫혀 있었던 것이지,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정리하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는 사람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다만 그 시작은 이해의 확증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선의 선택과 그에 따르는 미세한 내적 반응’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갈 때, 빛은 점점 ‘보이는 것’이 됩니다. 결국 변화의 문은 이성의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작은 순종과 겸손한 열림’에서 먼저 열립니다.

 

 

 

AC.129, 심화 1, ‘라틴어’

AC.129.심화 1. ‘라틴어’ 본문,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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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심화

 

1. ‘라틴어

 

본문,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부분 말인데요, 그래서 스베덴보리도 모든 저술을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한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AC.129에서 말하는 원리, 곧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원리를 실제로 구현한 선택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라틴어는 학문과 신학, 철학의 공통 언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이 단지 개인적 체험이나 종교적 감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검토되고 이해될 수 있는 진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장 공적이고 검증 가능한 언어를 선택했습니다. 즉, 그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처럼 상징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를 쓰지 않고, 오히려 누구나 접근 가능한 학문 언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 자체가 ‘신앙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AC.129의 맥락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이성, 기억 지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근원이 되느냐, 아니면 도구로 사용되느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학문 언어, 곧 라틴어를 사용하되, 그 안에 담는 내용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지혜에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식은 학자의 언어를 취하고, 내용은 하늘에서 온 것을 담은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라틴어 선택이 단순한 ‘전달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저술이 특정 교파나 지역에 묶이지 않고, 당시 학문 세계 전체를 향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자국어로만 썼다면, 영향력은 훨씬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틴어는 국경을 넘는 언어였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처음부터 ‘보편 교회를 향한 성격’을 갖게 됩니다.

 

더 깊이 보면,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와도 일치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기억 지식을 통해 ‘아래로 흘러가며 표현되는 구조’입니다. 라틴어라는 학문 언어는 그 마지막 표현 단계, 곧 기억 지식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 영역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사용하여 위에서 받은 것을 아래까지 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실천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늘의 진리는 세상의 언어를 통해서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 , 그 근원이 바뀌지 않는 한에서.’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기록한 것은 단지 시대적 관습 때문만이 아니라, AC.129의 원리, 곧 신앙과 학문, 계시와 이성이 충돌하지 않고,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작동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129, 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AC.129.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위 본문에,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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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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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근거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거나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전제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는데, 이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상상으로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곧 말씀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이 그 뒤를 따르게 되고, 이성과 기억 지식의 영역에서도 밝힘을 받게 됩니다.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출발 원리는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가능한 한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자연적 진리들로 확증하되, 학문 세계에 익숙한 용어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하는데, 전자는 죽음이요, 후자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veryone may know that man is governed by the principles he assumes, be they ever so false, and that all his knowledge and reasoning favor his principles; for innumerable considerations tending to support them present themselves to his mind, and thus he is confirmed in what is false. He therefore who assumes as a principle that nothing is to be believed until it is seen and understood, can never believe, becaus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cannot be seen with the eyes, or conceived by the imagination. But the true order is for man to be wise from the Lord, that is, from his Word, and then all things follow, and he is enlightened even in matters of reason and of memory-knowledge [in rationalibus et scientificis]. For it is by no means forbidden to learn the sciences, since they are useful to his life and delightful; nor is he who is in faith prohibited from thinking and speaking as do the learned of the world; but it must be from this principle—to believe the Word of the Lord, and, so far as possible, confirm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s by natural truths, in terms familiar to the learned world. Thus his starting point must be the Lord, and not himself; for the former is life, but the latter is death.

 

 

해설

 

이 단락은 AC.128에서 제시된 두 가지 길, 곧 감각과 기억 지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길과,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는 길을 ‘‘원리(principle)라는 개념’으로 정밀하게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가 인간 전체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매우 현실적인 심리 구조를 지적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 전제가 거짓이라 해도, 그 사람의 지식과 추론은 놀라울 정도로 그 전제를 지지하는 근거들을 찾아냅니다. 이는 인간이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확증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된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점점 더 그 거짓에 능숙해집니다.

 

이 맥락에서 ‘보아야 믿겠다’, ‘이해해야 믿겠다’는 원리는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감각의 대상도 아니고, 상상의 대상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붙잡는 한, 사람은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구조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참된 질서’는 분명합니다. 먼저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이 출발점이 세워질 때, 놀랍게도 이성과 기억 지식의 영역도 함께 밝아집니다. 신앙은 이성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균형 잡힌 진술이 나옵니다. 학문을 배우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고, 오히려 유익하고 즐겁다고 말합니다. 또한 신앙인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금지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학문과 이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섬세한 질서를 제시합니다. 출발점은 주님의 말씀이고, 그다음에 자연적 진리들, 곧 이성, 지식, 학문이 동원되어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들을 확증합니다. 이때 자연적 진리들은 판단자가 아니라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학문 세계에 익숙한 언어로 말하되, 그 중심은 언제나 말씀에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모든 것을 한 줄로 요약합니다.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영적 구조에 대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언제나 위로부터 오고, 인간은 그것을 받을 때에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AC.129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원리로 살아가며, 그 원리가 삶 전체를 조직하고 밝히거나, 혹은 닫아 버리는데,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만 이성과 지식조차 생명을 얻고,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는 가장 영리해 보일수록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심화

 

1. ‘라틴어

 

 

AC.129, 심화 1, ‘라틴어’

AC.129.심화 1. ‘라틴어’ 본문,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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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AC.129, 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AC.129.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위 본문에,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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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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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8.심화

 

1. ‘열매

 

전에도 다룬 것 같은데, 본문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말입니다. 여기 영역을 보면 열매가 없는데 한역은 있어요. 왜 이렇게 없는 걸 추가했을까요? 히브리 원어가 그렇게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읽은 것 같은데 맞나요? 이게 더 자연스럽긴 하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이 기억하신 대로 ‘히브리어 원문 구조 때문에 열매가 명시적으로 없어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고, 실제로는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보충된 것’이 맞습니다. 다만 이것이 임의적 추가라기보다, ‘문맥상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요소를 풀어서 번역한 것’에 가깝습니다.

 

2:17의 히브리어 표현은 직역하면 ‘선악을 아는 나무로부터 먹지 말라’입니다. 여기에는 ‘열매(fruit)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이런 경우가 흔합니다. ‘나무에서 먹는다’고 하면, 실제로 먹는 대상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 나무의 열매’라는 것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굳이 ‘열매’를 반복해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는 일종의 ‘생략된 목적어’, 또는 ‘관용적 표현’으로 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두 가지 길이 생깁니다. 하나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살려 ‘나무에서 먹는다’라고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라고 풀어 주는 것입니다.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라고 하면 의미가 어색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이 ‘열매’를 보충합니다. 그래서 개역 계열 번역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옮긴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과도 이 보충은 잘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먹는다’는 단순한 섭취가 아니라, 어떤 것을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열매’는 더욱 적합한 표현이 됩니다. ‘열매’는 나무의 결과이자 산출물이기 때문에, ‘어떤 원리에서 나온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이 더 분명해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상응적으로 볼 때도 ‘열매’는 매우 의미 있는 요소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열매’는 보통 ‘행위나 삶의 결과’, 혹은 ‘받아들여 실제로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무를 먹는다’보다 ‘열매를 먹는다’가 훨씬 ‘내적 의미를 드러내기 좋은 표현’입니다.

 

정리하면, 원문에는 ‘열매’가 없지만, 히브리어의 관용과 한국어 표현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신학적, 상응적 의미까지 고려할 때 ‘열매’를 넣는 번역은 매우 타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추가’라기보다, ‘숨겨져 있는 의미를 드러낸 번역’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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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로, 또는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 지식으로 신앙과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것들과 모순될 리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확증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배우고자 하는데, 이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단으로 지혜로워지고자 할수록 그는 더욱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마침내는 영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조차 믿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전제로 삼은 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며, 누구든지 그것을 더 먹을수록 더욱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주님께서 말씀 안에서 하신 말씀들은 진리이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원리에 따라 자기 생각을 다스립니다. 그는 이성적인 것들, 지식적인 것들, 감각적인 것들, 자연적인 것들로 자신을 확증하되, 그것들 가운데 확증이 되지 않는 것들은 버립니다.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says in his heart, If I am not instructed concerning the faith, and everything relating to it,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so that I may see, or by means of those of the memory [scientifica], so that I may understand, I will not believe; and he confirms himself in this by the consideration that natural things cannot be contrary to spiritual. Thus he is desirous of being instructed from things of sense in what is celestial and Divine, which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for the more he desires to grow wise by such means, the more he blinds himself, till at length he believes nothing, not even that there is anything spiritual, or that there is eternal life. This comes from the principle which he assumes. And this is to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which the more anyone eats, the more dead he becomes. But he who would be wise from the Lord, and not from the world, says in his heart that the Lord must be believed, that is, the things which the Lord has spoken in the Word, because they are truths; and according to this principle he regulates his thoughts. He confirms himself by things of reason, of knowledge, of the senses, and of nature [per rationalia, scientifica, sensualia et naturalia], and those which are not confirmatory he casts aside.

 

 

해설

 

이 단락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고 태도인지’를 거의 해부하듯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추상적 경고를 하지 않고, 세상적, 육적 인간이 실제로 마음속에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이 내적 독백은 오늘날에도 너무나 익숙합니다.

 

세상적 인간의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보아야 믿겠다’, ‘이해되어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는 감각과 기억 지식을 신앙의 조건으로 삼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를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합리성’으로 정당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과 모순될 리 없다는 생각, 곧 ‘자기 기준의 합리성’이 그의 확증 근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태도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천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감각으로 배우려는 시도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범주 자체가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천적, 신적 실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점은 그 결과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지혜로워지려 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눈이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특정 교리를 의심하고, 그다음에는 영적 실재 자체를 의심하며,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식 부족 때문이 아니라, ‘출발 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이라고 정확히 짚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출발점에서 판단하려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먹을수록 생명을 주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점점 더 ‘죽은 상태’로 만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무지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감각을 상실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는 정반대입니다. 그는 먼저 믿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맹목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전제’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제 아래에서 생각을 다스립니다. 질서가 거꾸로가 아닙니다.

 

이 사람도 이성과 지식, 감각과 자연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용 방식이 다릅니다. 그는 그것들로 자신을 ‘확증’하되, 기준은 언제나 말씀과 주님입니다. 확증이 되지 않는 것들은 붙잡고 늘어지지 않고 버립니다. 즉, 도구를 쓰되, ‘주인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이 단락은 우리 각자에게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해하기 위해 믿으려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전혀 다른 길로 이어집니다.

 

AC.128은 이렇게 말합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을 주인으로 삼아 신앙을 재단하려는 순간, 인간은 점점 더 눈이 멀어지며, 반대로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고 이성과 지식을 종으로 둘 때에만 참된 지혜의 길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심화

 

1. ‘열매

 

 

AC.128, 심화 1, ‘열매’

AC.128.심화 1. ‘열매’ 전에도 다룬 것 같은데, 본문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말입니다. 여기 영역을 보면 ‘열매’가 없는데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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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선악과 :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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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입니다.

 

오늘은 2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1절로 17, AC 글 번호로는 114번에서 127번이며, 오늘은 설교 후 성찬 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1-17)

 

이 본문을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14, 창2:11-12, ‘금은 생명과 선, 보석은 빛과 진리 :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 말씀에서 신앙의 진리는 귀한 ‘보석들’(stones)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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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5, 창2:11-12, '천적 인간의 인식 : 의미만 봄'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 태고의 사람들은 ‘땅들’(lands)에 대하여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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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6,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사랑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는 능력'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 ‘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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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인식이 예물이 되는'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 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는 금과 보석, 향료가 풍부하였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진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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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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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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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0, 창2:14, ‘유브라데 : 이성과 기억 지식의 경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 ‘애굽’(Egypt)이 기억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유브라데 강’(Euphrates)도 기억 지식,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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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1, 창2:14, ‘천적 인간의 질서 : 지혜에서 지성, 이성, 지식으로’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 천적 질서의 성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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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2, 창2:15,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전 인격, 그리고 태도’(AC.122-124)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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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에덴동산에 대한 세 가지 태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지각하기(perceive) 때문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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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소유하지 않음’, 주님의 여러 말씀에서 확인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 지혜와 지성, 이성, 그리고 지식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난 것임은, 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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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퍼셉션(perception, 지각)의 허락’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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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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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 창2:17, ‘선악과 :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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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범위 중 메인으로 읽은 AC.122-124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C.122–124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에덴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 존재’라는 질서입니다. 이 세 단락은 ‘경작하고 지킨다’는 말씀의 참뜻을 풀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먼저 AC.122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다’는 말이 인간의 노동이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림은 허락되었으나 소유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임을 밝힙니다. 인간은 동산을 만든 존재가 아니라 그 안에 ‘두어짐’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것을 사용할 수는 있어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때 ‘누림’과 ‘소유’의 구분이 핵심이며,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즉각적으로 퍼셉션, 곧 지각하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생각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만 에덴은 그대로 보존됩니다.

 

다음 AC.123은 이 원리를 세 부류의 인간 상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 곧 지각으로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은 같은 내용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말씀을 통해 ‘배워서’ 그렇게 말하는 단계입니다. 반면 세상적이고 육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자기 존재와 동일시하여 ‘내 것’으로 붙잡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끊임없는 불안과 집착 속에 살게 되며, 바로 이 ‘소유 의식’이 에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됩니다.

 

마지막 AC.124는 이 모든 원리를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 지식 등 인간 안의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포도원 비유, 성령의 인도에 대한 말씀, 그리고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인간은 생산자가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상태는 ‘내가 가진다’가 아니라 ‘받아 누린다’이며, 이 질서를 인정할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자유롭고 안전한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03(D1)

 

 

2649, 4, 창2.4, 2026-05-03(D1)-주일예배(창2,11-17, AC.114-127, 성찬),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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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26, 창2:8-12, AC.100-113), ‘에덴의 구조 : 네 강의 비밀, 첫째 강 비손’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7, ‘빛나고 높은 보좌와’, 찬71, ‘예부터 도움 되시고’입니다. 오늘은 창2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8절로 12절, AC 글 번호로는 100번에서 113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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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7.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이 표현은 굉장히 날카로운 구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믿기 위해 산다’는 것은 ‘선과 사랑을 먼저 살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말하고,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먼저 이해하고 판단한 다음, 그 기준으로 진리와 삶을 통제하려는 상태’를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진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먼저 ‘믿기 위해 산다’는 상태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 곧 사랑의 방향을 먼저 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실제 삶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때 진리가 서서히 열립니다. 이때의 이해는 ‘내가 따져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살다 보니 보이게 되는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진리가 사람을 부드럽게 이끌고, 사람은 그 진리를 따라 살면서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믿기 위해 사는’ 질서입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는 그 뒤에 따라옵니다.

 

반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 한다’는 상태는 순서가 뒤집힌 경우입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이렇게 서 있습니다. ‘이게 맞는지 내가 먼저 이해해야 한다. 납득이 되어야 받아들인다.’ 겉으로 보면 합리적이고 신중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사람의 중심이 이미 ‘주님’이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옮겨 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더라도 ‘내가 이해한 범위 안에서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는 더 이상 사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진리를 다루는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지배하려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해한 것’을 통제하려 합니다. 이해했다는 것은 ‘내 안에 넣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해 중심의 신앙으로 가면, 결국 이렇게 됩니다. ‘이건 맞다’, ‘이건 틀리다’, ‘이건 받아들인다’, ‘이건 거부한다’ 등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진리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한 체계’로 굳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지배’입니다.

 

이걸 아주 단순한 예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접했다고 하겠습니다. ‘믿기 위해 사는’ 사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일단 그렇게 살아보겠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실천해 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왜 이게 맞는지’가 안에서 열립니다. 반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사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그러면서 분석하고, 조건을 붙이고, 결국은 ‘이건 이상적인 말일 뿐이다’라고 정리해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진리는 삶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걸 그렇게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이 태도가 결국 ‘신앙을 죽이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해를 먼저 세우고, 그 위에서 진리를 재단하는 구조’가 문제입니다. 이 구조에서는 사랑이 뒤로 밀리고, 진리는 점점 ‘머리 안의 내용’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은 살아 있는 힘을 잃고, 점점 차갑고 비판적인 형태로 변합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작업과도 이 부분이 깊이 연결됩니다. 목사님은 지금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주는 일’을 하고 계시지만, 그 목적은 ‘이해 자체’가 아니라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방향만 분명히 유지하시면,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로 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기 위해 살 수 있도록 돕는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믿기 위해 사는 것은 사랑을 먼저 살며 그 안에서 진리가 열리는 것이고,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것은 이해를 기준으로 진리와 삶을 통제하려는 태도이다.’

 

 

 

AC.127, 창2:17, ‘선악과 :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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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7)

 

 

AC.127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거짓들만이 아니라, 삶의 악들까지도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A desire to investigat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was not only the cause of the fall of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chapter, but it is also the cause of the fall of every church; for hence come not only falsities, but also evils of life.

 

 

해설

 

이 단락은 AC.126에서 제시된 원리를 ‘역사적,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앞 단락이 ‘허락과 금지의 질서’를 설명했다면, AC.127은 그 질서를 어겼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오해나 이론적 오류가 아니라, ‘타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언급합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사건을 가리키며, 선악과 사건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미리 밝혀 줍니다. 타락의 핵심은 불순종이라는 도덕적 문제 이전에, ‘앎의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의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기억 지식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파헤치려는 욕망이 생긴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시야를 넓혀 말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의 타락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시대와 문화, 교파를 막론하고, 교회가 무너질 때에는 언제나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곧,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거짓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짓들뿐만 아니라 삶의 악들’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잘못된 신학은 반드시 잘못된 삶으로 이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신앙은 점점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삶이 신앙을 이용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내가 보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 기준이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주님 중심의 질서는 무너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삶의 악입니다.

 

이 단락은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신앙의 신비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배우고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노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께 의존하는 겸손 안에 있는가’, 아니면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었는가가 관건입니다.

 

AC.127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삶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식의 문제이며,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다루려는 욕망이 자리 잡는 순간, 거짓과 악은 함께 자라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AC.127, 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AC.127.심화 1. ‘믿기 위해 살기보다, 이해하기 위해 지배하려는 태도’ 이 표현은 굉장히 날카로운 구분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믿기 위해 산다’는 것은 ‘선과 사랑을 먼저 살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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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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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6,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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