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그때그때 야단치고,강압적으로 하면 사람은 고분고분,빙 돌아갈 길을 질러갈 수 있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 방법이 더 빠르고 확실해 보입니다. 실제로 강하게 몰아붙이면, 사람은 일단 멈추고, 겉 행동은 곧바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사람의 중심이 바뀐 결과가 아니라,압력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압력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거나, 안쪽에서는 오히려 반발이 쌓입니다. 그래서 길을 ‘질러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면의 질서가 세워지지 않은 채 외형만 정돈된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하는 행동’ 그 자체보다 ‘자유 속에서 선택된 사랑과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사랑은 강요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 수 없듯이, 선도 강압으로는 뿌리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이 자유가 유지되어야, 사람이 ‘정말로 자기 것처럼’ 선택하고,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강압은 인간의 프로프리움을 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형태로 강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에서는 ‘억지로 한다’, ‘나는 원래 다르게 생각한다’는 감각이 남습니다. 이것은 진짜 변화가 아니라, ‘눌려 있는 자기중심’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방식은 느리고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사람 안에서 스스로 ‘아,이게 맞다’고 동의하는 지점이 생기도록 기다립니다. 이 동의가 생길 때, 비로소 변화는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지름길처럼 보이는 강압은 사실은 우회로이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 속의 인도는 실제로는 ‘가장 곧은 길,곧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곧 마음 전체를 함께 바꾸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주님이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진짜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사랑하게 될 때에만, 그 삶은 그의 것이 되며, 그 상태만이 천국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 본문에‘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자기 자신과 세상,곧 자기의‘프로프리움’(proprium, own)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존재’라는 부분 말인데요,주님의 인도에 무슨2프로 부족함이 있나요?뭐가 부족해서 이런 것이죠?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인도에는 결핍이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인도의 내용이 아니라, ‘인도를 받는‘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문장은 ‘주님의 인도에 무엇이 빠져 있어서 사람이 보충하려 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왜 그런 성향이 생기느냐 하면,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한다’, 결정할 때 ‘내가 결정한다’고 느낍니다. 이 감각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기감’(自己感)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내가 중심이 되고 싶다’는 욕구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충분히 인도하고 계셔도, 사람은 그 안에 머무르기보다 ‘자기 쪽에서 한 번 더 쥐고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결핍을 보충하려는 행동이라기보다,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하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주님의 인도는 위에서 아래로, 사랑에서 지혜로, 질서 있게 흐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프로프리움은 ‘그 흐름에 맡겨지기’보다, ‘내가 알고,내가 판단하고,내가 결정했다’는 느낌을 원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이끄셨다’고 보기보다,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됐다’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고, 은밀하고 부드럽게,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그 인도를 ‘뚜렷한 외적 확증’으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 빈틈에서 사람은 ‘그래도 내가 판단해야 확실하지’라는 쪽으로 기웁니다. 즉, 인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도가 너무 강압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자기 쪽으로 돌아설 여지가 생깁니다.
그래서AC.132의 말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사람은 주님의 인도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동시에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때문에, 거기에 더해 ‘자기중심에서 한 번 더 움직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프리움으로의 기울어짐입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인도는 언제나 완전하지만, 인간은 그 인도를 ‘그대로 받는 자리’에 머물기보다, ‘자기중심을 끼워 넣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무엇을 더 보태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충분한 인도 앞에서‘내가 중심이 되려는 부분’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부족했던 것은 인도가 아니라, ‘그 인도를 온전히 맡기지 못했던 나의 상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창2:18)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 곧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own)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존재이므로, 여기서는 사람에게 허락된 그 프로프리움이 다루어집니다(18절).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후반부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어 하나’를 정확히 집어냅니다. 바로 ‘자기의 것’(own), 곧 ‘proprium’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문제를 무지나 연약함에서 찾지 않고, 훨씬 더 근원적인 성향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이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프리움’이 갑자기 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허락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율성과 독립성을 어느 정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로봇처럼 전적으로 외부에서만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느끼고 선택하는 주체로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자기성(自己性) 자체가 아니라, ‘그 자기성이 중심이 되려는 경향’입니다.
이 단락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이동을 포착합니다. 이전까지의 천적 인간은 주님의 인도 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나도 함께 인도하고 싶다’, ‘나도 판단하고 싶다’, ‘나도 선택의 주체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AC.131에서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짐’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그래서 창2:18에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외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일치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만으로는 더 이상 인간의 의식 구조가 유지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자기의 것’, 곧 ‘프로프리움’이 하나의 구조로 등장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현실을 매우 정직하게 묘사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과 세상도 함께 끌어안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후의 모든 분리, 대응, 결합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AC.13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타락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도 하며, 창세기 2장 후반부는 바로 이 긴장 위에서 전개된다고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유 본성’이라는 번역은 가능은 하지만, 핵심을 정확히 전달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번역’입니다. 상황에 따라 보조적으로 쓸 수는 있어도, proprium의 중심 뜻을 대표하는 번역으로 쓰기에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그것을 ‘타고난 성품’,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성질’ 쪽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그런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성격’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것, 곧 ‘내가 근원이라고 느끼는 상태’, ‘모든 것을 나에게 귀속시키는 중심 감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본성’이라고 하면, 이 핵심이 거의 사라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proprium은 단지 ‘성질’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향성’입니다. 그것은 ‘나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끼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AC 전체에서 proprium은 거의 언제나 ‘왜곡의 근원’, 혹은 ‘주님으로부터의 흐름을 가로막는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그런데 ‘고유 본성’이라고 하면 이런 긴장과 위험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왜 그런 번역이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자기만의 것 같은 느낌’, ‘자기에게 속한 특유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유’라는 말이 그 일부를 잡아주기는 합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자기 고유의 것’ 정도로 풀어 설명할 때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 번역으로는, ‘자기 것’,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 혹은 ‘자기중심’(proprium) 쪽이 훨씬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들은 proprium의 핵심인 ‘귀속(내 것이라 여김)’과 ‘근원 의식’을 직접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charity)처럼 그냥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병기하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처음에 한번 그 의미를 잡아주신 후 말이지요.
정리하면, ‘고유 본성’은 일부 뉘앙스를 담을 수는 있지만, proprium의 핵심인 ‘자기에게 돌리는 상태’를 흐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주 번역으로 쓰기보다는 설명용으로 제한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맥락에서는 결국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의 것으로 여기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한테도 이런 기울어짐이 나타네요...천국에서는 안 일어나지요?이런 일은 지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죠?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천국에서는 그런‘프로프리움으로의 기울어짐’,곧‘내 것’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그 상태는 본질적으로 지상에서의 과정에 속합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 구조를 보시면 더 명확해집니다.
지상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 속에 두어집니다. 이것이 프로프리움의 토양입니다. 사람은 생각도, 판단도, 선택도 모두 ‘내가 한다’고 느낍니다. 이 감각이 있어야 자유가 있고, 그 자유 안에서 ‘내 것인가,주님의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라 해도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아주 미세한 형태로나마 ‘자기 쪽으로 기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에덴 이야기가 바로 그 가능성의 시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상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이 선택의 싸움이 끝난 상태입니다. 그곳의 사람들 역시 여전히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감각’, 곧proprium의 느낌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와 기쁨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주님에게 돌립니다’. 다시 말해, ‘내 것처럼 느껴지지만,내 것이 아님을 동시에 아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움직임’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사랑의 질서가 완전히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이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끊임없이 느껴지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만일 아주 미세하게라도 ‘내가 했다’는 방향으로 기울려는 순간이 생기면, 그것은 곧바로 불편함으로 느껴지고, 자연스럽게 거부됩니다. 이것이 지상에서의 ‘싸움’과 천국에서의 ‘자연스러운 질서’의 차이입니다.
이 점에서 천국은 ‘시험이 없는 곳’이라기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험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입니다. 지상에서는 프로프리움과 주님 사이에서 선택하고 정렬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천국에서는 그 정렬이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뒤집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프로프리움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가능성, 곧 ‘내 것이라 하고 싶어지는 상태’는 본질적으로 지상에서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질서가 확정되면, 천국에서는 동일한 ‘자기감(自己感),곧 프로프리움’은 유지되되, 그것이 더 이상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상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로 영원히 지속됩니다.
결국 지상은 ‘내 것인가,주님의 것인가’를 배우는 자리이고, 천국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기쁨으로 사는 자리’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라틴어‘프로프리움’(proprium)은 원전 용어로,이곳과 다른 곳들에서는 영어‘오운’(ow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형용사‘프로피우스’(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아무개가 소유한’(one’s own),‘적절한’(proper),‘아무개 본인한테만 속한’(belonging to one’s self alone),‘특별한’(special),‘특정한’(particular),‘특유한’(peculiar)입니다.이 형용사의 중성 표현,그게 바로 이 프로프리움인데,이게 명사로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소유’(possession),‘재산’(property)이며,또‘어떤 특이점’(a peculiarity),‘특징’(characteristic mark),‘구별점’(distinguishing sign),‘특징’(characteristic)입니다.영어 형용사‘오운’(own)은 웹스터에 보면 그 의미가‘...에 속한’(belonging to),‘...에 배타적 혹은 특별하게 속한’(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특정한’(peculiar)인데,그래서 우리가 채택한 이‘오운’이라는 말은 프로피우스에 정말 딱 맞는 말이며,만약 라틴어 프로프리움을 대신하기 위해 이 오운을 명사로 사용한다 해도 정말 아주 근접한 번역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편집자 주]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이렇게 ‘프로프리움’이 길게 설명되어 있지만, 한 문장으로 잡으면, 이렇게 이해하시는 게 가장 정확합니다. ‘내 것이라고 느끼는 것,그리고 그‘내 것’이라는 감각에서 살아가는 상태’라고 말입니다.
조금 더 풀어보면, 프로프리움은 단순히 재산이나 소유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차원에서,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지’, ‘내 공로’, ‘내 신앙’까지 포함해서 ‘‘이건 나한테서 나온 것이다’라고 느끼는 모든 것의 중심 감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proprium은 ‘소유’라기보다,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의식 전체’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아니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것만이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유입된 것을 그대로 ‘받아 쓰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합니다’. 바로 그 착각 상태가proprium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훨씬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생각을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합니다. 겉으로 보면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속으로 ‘이건 내가 한 거야’, ‘내가 옳았어’, ‘내 능력이지’라고 느끼는 순간, 그 전체는proprium안으로 들어옵니다. 반대로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이건 주님이 주신 것이고,나는 그걸 사용했을 뿐이다’라고 느낀다면, 그것은proprium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proprium은 ‘나쁜 것’이라기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근원으로 삼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의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모입니다. 생각도, 판단도, 신앙도 결국 자기 확증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AC.129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원리를 자기 것으로 삼으면, 모든 지식이 그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이것이proprium의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더 나아가 말하는 점은,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프로프리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말로 자기중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자는 ‘새로 주어지는 프로프리움’(regenerate proprium)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후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타락한 자기중심입니다. 겉으로는 둘 다 ‘내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구분이 잘 안되지만, 근원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proprium을 완전히 없애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proprium안에 사느냐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중심의proprium안에 살면 모든 것이 왜곡되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것처럼 쓰되 그 근원을 인정하는 상태로 들어가면, 그때는 ‘살아 있는proprium’, 곧 자유롭게 주님의 것을 누리는 상태가 됩니다.
정리하면, ‘프로프리움’은 단순한 소유가 아니라, ‘‘내가 근원이다’라고 느끼는 내적 중심 감각 전체’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 중심을 ‘나’에서 ‘주님’으로 옮기는 데 있습니다.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18-25)
AC.131
여기서는 자기 자신(주3)에게로 기울어진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3 is here treated of.
주3.라틴어‘프로프리움’(proprium)은 원전 용어로,이곳과 다른 곳들에서는 영어‘오운’(ow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형용사‘프로피우스’(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아무개가 소유한’(one’s own), ‘적절한’(proper), ‘아무개 본인한테만 속한’(belonging to one’s self alone), ‘특별한’(special), ‘특정한’(particular), ‘특유한’(peculiar)입니다.이 형용사의 중성 표현,그게 바로 이 프로프리움인데,이게 명사로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소유’(possession), ‘재산’(property)이며,또‘어떤 특이점’(a peculiarity), ‘특징’(characteristic mark), ‘구별점’(distinguishing sign), ‘특징’(characteristic)입니다.영어 형용사‘오운’(own)은 웹스터에 보면 그 의미가‘...에 속한’(belonging to), ‘...에 배타적 혹은 특별하게 속한’(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특정한’(peculiar)인데,그래서 우리가 채택한 이‘오운’이라는 말은 프로피우스에 정말 딱 맞는 말이며,만약 라틴어 프로프리움을 대신하기 위해 이 오운을 명사로 사용한다 해도 정말 아주 근접한 번역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한 문장은 ‘창세기 2장 후반부(18–25절)’ 전체의 방향을 결정짓는 표제와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본문이 ‘천적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상적이고 질서 정연하게 그려 왔다면, AC.131은 시선을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변화의 지점’으로 옮깁니다.
핵심은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졌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곧 태고교회가 한순간에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중심이 아주 미세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perception)하던 상태에서, 점차 ‘자기 자신의 것’(proprium, own)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흔히 말하는 ‘결혼의 제정’이나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부분은, ‘천적 인간 안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분화와 외화의 징후’를 다룹니다. 곧, 완전히 하나였던 내적 상태가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유지되지 않는 시점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아직 창세기 3장의 ‘타락’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AC.131이 말하는 것은 죄의 폭발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방향의 변화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알기 때문에, 이 한 문장으로 분명히 못 박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졌다’는 것은, 이후에 전개될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18-25는 더 이상 순수한 천적 상태의 묘사가 아니라, 천적 인간이 ‘더 이상 그대로 머물 수 없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새로운 구조, 즉 분리, 대응, 결합의 외적 형식을 다루게 됩니다.
AC.131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이제 본문은 ‘주님만을 바라보던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 인간’을 다루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위 본문에 나오는‘그의‘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말씀에서는 이것을‘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그러므로‘애굽’(Egypt),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라는 이 부분 좀 설명해 주세요.
이 대목은 꽤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핵심은 ‘지식이나 이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가 바뀔 때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넷째 강’, 곧 가장 바깥 단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지혜’를 두고 그것을 ‘마술’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질서를 먼저 다시 보셔야 이해가 또렷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까지 내려와 생명을 줍니다. 이 흐름이 유지될 때에는, 바깥에 있는 기억 지식조차도 살아 있는 것이며, 이성은 밝고 건강하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 질서가 뒤집히면, 곧 사람이 ‘기억 지식과 이성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지혜로워지려 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지혜처럼 보이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성질도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주술이나 초자연적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자기중심에서 나온 지식과 추론으로 현실을 지배하고,진리를 만들어내려는 태도 전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스스로 알 수 있다’, ‘나는 내 지식으로 판단하고 결론낼 수 있다’는 상태가 극단으로 가면, 그것이 곧 ‘마술적 상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고, ‘자기 안에서 근원을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이 마술적인 것이 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잃고, 오히려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지배하는 힘’이 됩니다. 겉으로는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애굽과 바로가 종종 ‘마술사’, ‘술객’과 연결되는 이유입니다.
이 상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고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래서 오히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안에서 완결된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AC.129에서 말한 ‘거짓된 원리를 전제로 삼으면 모든 지식이 그것을 지지하게 된다’는 구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넷째 강에서 비롯된 지혜’라고 부르는 이유 말인데요, 그것은 겉모습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매우 ‘지혜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풍부한 지식, 날카로운 분석, 설득력 있는 말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아래에서 조합된 지혜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지혜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정리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를 떠나, 기억 지식과 이성으로부터 스스로 지혜를 만들어내려 할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스베덴보리는 ‘마술’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빛나지만, 실제로는 근원이 뒤틀린 상태이며, 사람을 진리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출발점과 방향’입니다.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겔31:16, 18)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이 구절이AC.13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에스겔서29장에서 보았던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이 ‘어디까지 나아가며,결국 어떤 종말에 이르는가’를 한 단계 더 깊이, 그리고 더 완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곧AC.130의 주제인 ‘자기 것으로 삼는 상태의 결과’를, 이번에는 ‘에덴의 나무들’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여기서 ‘바로’는 여전히 기억 지식과 그로부터 나온 이성, 곧 외적 인간의 정점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이번 구절에서는 그가 단순히 교만한 상태에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핵심입니다. ‘에덴의 나무들’은 원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식과 그로부터 나온 모든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그 나무들과 ‘같은 자리’에 놓이면서도 결국 ‘지하로 내려간다’는 것은, ‘외적 인간이 내적 생명의 언어와 형식을 흉내 내거나 소유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그 실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역설을 보여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에덴의 나무들처럼 보이는 상태’, 곧 지혜롭고, 풍성하고, 영광스러워 보이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그 모든 것은 결국 동일한 방향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 어떤 것과 같은고’라는 질문은, 사실상 ‘겉모습의 유사성과 내적 본질의 차이를 대비시키는 선언’입니다.
또한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 누우리라’는 표현은, 진리(칼)에 의해 드러나고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진리 앞에서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실제로는 생명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받지 못한 자’라는 표현은, 내적 정결, 곧 사랑에 의해 정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아무리 지식과 이성이 발달했어도, ‘사랑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는 결국 외적인 것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이AC.130에서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내 것이라 하지 말라’는 권면을 넘어서, 그 태도가 지속될 때, ‘영적 구조 전체가 어떻게 붕괴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했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생명과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로가 ‘그 모든 군대와 함께’ 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의지하던 모든 사고 체계와 지식 체계 전체가 함께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의 구절은AC.130에서 다음을 확증합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겉으로는 에덴의 나무들처럼 보일지라도, 그 근원이 자기 자신일 때에는 결국 동일한 결말, 곧 내적 생명으로부터의 추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가 도달하는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겔29:3, 9)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Behold,I am against thee,Pharaoh king of Egypt,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who hath said,My river is mine own,and I have made it for myself.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and a waste,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because he hath said,The river is mine,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 구절이AC.130에 인용된 이유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에스겔서29장의 ‘애굽 왕 바로’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기억 지식과 감각적 이성에 의존하는 인간’, 곧 외적 인간, 겉 사람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강’은 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지식의 흐름, 곧 기억 지식과 그로부터 나온 사고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이 핵심입니다.
이것은AC.122–130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 곧 ‘소유 의식의 왜곡’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인간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외적 인간은 그것을 ‘내가 만든 것’, ‘내 능력의 결과’라고 여깁니다. 지식도, 판단도, 심지어 신앙까지도 자기 소유로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교만을 꾸짖는 말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뒤집힌 상태’를 드러냅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 지혜 → 지성 → 이성 → 기억 지식으로 내려오는 흐름인데, 여기서는 그 맨 아래 단계에 있는 기억 지식이 스스로 근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가 ‘강의 한가운데 누워 있는 큰 악어’로 묘사되는 이유입니다. 그는 흐름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 흐름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어지는 ‘애굽 땅이 황무지가 된다’는 선언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이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을 때, 겉으로는 풍부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빠져나가 ‘내적으로는 황폐해집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의 유입이 끊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심판의 목적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입니다. 곧, 근원을 다시 바로잡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AC.130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소유하지 말라’, ‘받은 것일 뿐이다’라는 원리가, 여기서는 반대로 뒤집힌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집힘이 어떤 영적 결과를 낳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의 말씀은AC.130에서 다음을 확증합니다. 인간이 자기 지식과 능력,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는 바로의 상태에 서게 되며,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내적 황폐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다시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동산’(garden)으로 삼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의 ‘에덴’(Eden)이며, 그의 ‘동쪽’(east)은 동쪽이 아니라 서쪽, 곧 자기 자신입니다. 그의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그의 모든 기억 지식으로서, 이는 정죄 받습니다. 그의 ‘둘째 강’(second river), 곧 ‘앗수르가 있는 곳’(Assyria)은 거짓들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며, 그의 ‘셋째 강’(third river), 곧 ‘구스가 있는 곳’(Ethiopia)은 거기서 나온 악과 거짓의 원리들로서, 이것들이 그의 신앙의 지식입니다. 그의 ‘넷째 강’(fourth river)은 거기서 비롯된 지혜인데, 말씀에서는 이것을 ‘마술’(magic)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애굽’(Egypt), 그러니까 이는 기억 지식을 뜻하는데, 지식이 마술적인 것이 된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이며, 이 점은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 에스겔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He who desires to be wise from the world has for his “garden”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re his “Eden”; his “east” is the west, or himself; his “river Euphrates” is all his memory-knowledge, which is condemned; his “second river,” where is “Assyria” is infatuated reasoning productive of falsities; his “third river,” where is “Ethiopia” is the principles of evil and falsity thence derived, which are the knowledges of his faith; his “fourth river” is the wisdom thence derived, which in the Word is called “magic.” And therefore “Egypt”—which signifies memory-knowledge—after the knowledge became magical, signifies such a man, because, as may be seen from the Word, he desires to be wise from self. Of such it is written in Ezekiel:
3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9애굽 땅이 사막과 황무지가 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네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 하도다(겔29:3, 9) Thus hath said the Lord Jehovih,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who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it for myself. And the land of Egypt shall be for a solitude, and a waste, and they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because he hath said, The river is mine, and I have made it. (Ezek. 29:3, 9)
이러한 사람들은 같은 예언서에서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 in hell)이라고도 불립니다. 거기서도 바로, 곧 애굽이 다음과 같은 말로 다루어집니다. Such men are also called “trees of Eden in hell,” in the same prophet, where also Pharaoh, or the Egyptian, is treated of in these words:
16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18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겔31:16, 18)When I shall have made him descend into hell with them that descend into the pit; to whom art thou thus made like in glory and in greatness among the trees of Eden? yet shalt thou be made to descend with the trees of Eden into the lower earth,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be slain by the sword. This is Pharaoh and all his crew, (Ezek. 31:16, 18)
여기서 ‘에덴의 나무들’(trees of Eden)은 말씀에서 나온 지식, 곧 기억 지식과 인식을 뜻하는데, 이들이 추론들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where the “trees of Eden” denote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from the Word, which they thus profane by reasonings.
해설
AC.130은 지금까지 창세기 2장에서 차근차근 쌓아 온 ‘천적 질서의 완전한 반전, 전도, 뒤집힘’을 한 번에 보여주는, 매우 강력하고도 무서운 단락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에덴동산’과 네 강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생명의 질서인지를 설명했다면, 이 단락은 그 질서가 ‘인간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어떻게 뒤집히는지’를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상징들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동산, 에덴, 동쪽, 네 강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출발점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 하나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의 동산은 감각과 기억 지식입니다. 즉, 보이는 것, 축적된 정보, 경험과 논리입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이 ‘동산’, 곧 삶과 지혜의 중심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에덴, 곧 사랑의 중심은 주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그의 동쪽은 서쪽’이라는 말입니다. 말씀 전체에서 동쪽은 주님을 뜻하는데, 이 사람에게 동쪽은 자기 자신입니다. 곧, 그는 빛이 떠오르는 방향을 완전히 거꾸로 돌려놓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영적 방향 상실의 본질입니다.
네 강의 왜곡은 더 심각합니다. 유브라데 강, 곧 기억 지식은 ‘정죄 받는 것’이 됩니다.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 못하고, 자기 소유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강 ‘앗수르’는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거짓을 낳는 어리석은 추론이 됩니다. 셋째 강 ‘구스’는 악과 거짓의 원리들이 되며, 심지어 그것이 그의 ‘신앙의 지식’이라고 불립니다. 넷째 강은 더 이상 지혜가 아니라, 말씀에서 ‘마술’이라 부르는 상태입니다. 이는 지식을 가지고 영적 세계를 조종하려는 태도, 곧 신앙의 완전한 왜곡입니다.
이 지점에서 ‘애굽’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변합니다. 애굽은 원래 기억 지식을 뜻하지만, 그것이 마술적인 것이 될 때, 즉, 자기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할 때,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바로는 ‘내 강은 내 것이며, 내가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의 주권을 주님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리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바로 심판의 이유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지옥에 있는 에덴의 나무들’이라는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에덴의 나무는 원래 말씀에서 나온 지식, 곧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기 추론과 자기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될 때, 그 나무들은 더 이상 천국에 있지 않고 지옥에 있게 됩니다. 이는 지식 자체가 악해진 것이 아니라, ‘사용 목적과 출발점이 뒤틀린 결과’입니다.
AC.130은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말씀, 같은 지식, 같은 상징도 주님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생명의 강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마술과 파괴의 체계가 되며, 에덴의 동산은 지옥의 숲으로 뒤바뀐다고 말합니다. 이 단락은 창세기 3장의 비극을 예고함과 동시에, 모든 시대 모든 개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