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고, 그래서 더욱 제거된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15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이런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제거된다’는 말은 글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실제 인간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이 지점 때문에 AC에서 ‘황폐(vastation, desolation)라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화’와 ‘제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제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한 성향이나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곳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제거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잃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약화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욕정이나 거짓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잃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명예욕이 강했다고 합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그런 반응을 덜 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수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입니다.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황폐’입니다. 황폐는 단순한 고통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욕정과 이기심을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욕정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눅15의 탕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음이 갑자기 착해진 순간이 아니라, ‘자기 삶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 ‘황폐’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탕자의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정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욕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정이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약화’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욕정은 더 이상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제거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욕정이 존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그 습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되고 제거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에서 말하는 황폐와 욕정의 약화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 즉 ‘정말 욕정이 약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욕정의 힘은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 과정을 성경은 여러 이야기로 보여 주는데, 탕자의 귀향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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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 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 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 57세 때 스베덴보리를 만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계시를 받은 나이가 57세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연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삶의 시간표 속에서 빛을 준비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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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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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5.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天,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地,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이 구절은 AC.16의 ‘창조’ 개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영을 보내신다  창조된다  지면이 새로워진다’는 흐름이 그대로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보여 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04:30은 주님이 을 통해 사람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실 때,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새롭게 되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먼저 ‘주의 영을 보내신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spirit)은 단순한 어떤 기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 특히 진리와 선이 함께 작용하는 생명의 흐름’을 뜻합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위에서 들어오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시작은 언제나 이 지점입니다. 사람이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들이 창조된다’입니다. 여기서의 ‘창조’는 당연히 자연적 창조가 아니라, 앞에서 계속 보신 것처럼 ‘영적 창조, 곧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창조가 사람 전체를 한 번에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전과 전혀 다른 원리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지면(earth, ground)은 말씀에서 ‘겉 사람, 곧 외적인 삶과 행동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앞에 나온 설명처럼, ‘하늘(heaven)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는 ‘하늘’이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영을 보내신다  창조된다’는 부분이 바로 ‘속 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리고 ‘지면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겉 사람에서 드러나는 변화’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전체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먼저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 사람의 속 사람, 그러니까 생각과 의지의 깊은 곳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겉 사람의 변화’, 곧 삶과 행동과 습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전에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임하여 창조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변화가 단순한 생각에 머물지 않고, ‘말하는 방식, 행동, 선택, 관계 맺는 방식까지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면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즉, ‘내면의 변화가 외면의 삶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속 사람의 변화’로만 생각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것까지는 경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진짜 거듭남은 겉 사람이 바뀌는 데까지 가야 한다’고. 그래서 이 구절에서 굳이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라고 덧붙이는 것입니다. 속 사람만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 전체가 새로워진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한 줄로 읽히게 됩니다. ‘주님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면, 그 사람은 새롭게 창조되고, 그 결과 그의 삶 전체가 새로워진다.’ 이것이 시104:30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마음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104:30은 주님의 영이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결과 겉 사람의 삶까지 변화시켜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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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4, ‘시102:18’

AC.16.심화 4. ‘시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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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4. ‘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6의 핵심을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붙들고 있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02:18 창조함을 받을 백성은 단순히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질 사람들’, 곧 거듭남을 통해 새 창조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뜻하며, ‘찬양은 그 새 생명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된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어떤 영적 사건을 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말씀은 특정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장래 세대’는 시간적으로 미래라기보다, ‘각 사람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상태, 곧 앞으로 이루어질 영적 변화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제 핵심 표현인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여기서 백성(people)은 말씀에서 보통 진리에 속한 사람들’, 곧 이해와 신앙의 측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이 창조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 곧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는 창세기 1장의 우주 창조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시작’, 곧 거듭남의 첫 단계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을 백성’이나 변화될 백성’이 아니라, ‘창조될 백성’일까요? 이것은 거듭남이 단순한 개선이나 교육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시작’, 다시 말해 없던 것이 생기는 수준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매우 강하게 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진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낼 수 없고, 그것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라’입니다. 여기서 찬양’은 단순히 입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도 보셨듯이 그 존재 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창조된 백성은 단순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해 움직이게 됩니다.’ 생각은 진리를 따르고, 의지는 선을 따르며, 행동은 그 둘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생각도, 감정도, 선택도 자기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가 시작되면서, 그 사람 안에 새로운 기준, 새로운 방향, 새로운 생명’이 들어옵니다. 이제 그는 점점 주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고, 주님의 선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창조된 백성’이며, 그 삶 자체가 찬양’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주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찬양은 목표가 아니라,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AC.16과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하다’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사람 안에 전혀 없던 영적 생명을 주시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 단계인 형성’과 만듦’을 거쳐 결국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 구절은 그중에서도 특히 창조된 상태의 특징’, 곧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상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면, 억지로 찬양하려 애쓰지 않아도,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102:18 창조함을 받을 백성은 거듭남을 통해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을 뜻하며, 그들이 찬양한다는 것은 그 새 생명이 삶 전체로 드러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16, 심화 5, ‘시104:30’

AC.16.심화 5. ‘시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天, 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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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3, ‘사43:15’

AC.16.심화 3. ‘사43:15’ 다음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입니다. ‘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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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3. ‘43:15

 

다음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라는 선행 설명과 함께 이어집니다.

 

이 구절은 AC.16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다’는 선언이 아니라, ‘왜 주님이 구속자’, ‘태 속에 만드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는지, 그리고 그것이 거듭남의 어떤 단계들과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3:15는 주님이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전 과정을 대표하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구절이며, 그 다양한 이름들은 거듭남의 서로 다른 단계와 작용을 가리킵니다.’

 

먼저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입니다. 여기서 ‘거룩함’은 도덕적 의미를 넘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순수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출발점은 인간 쪽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와 선이 먼저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전체의 출발을 주님에게 두는 말씀입니다.

 

그다음 ‘이스라엘의 창조자’입니다. 앞에서도 보셨듯이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교회, 혹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창조한다’는 것은, 어떤 민족을 처음 만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진리의 교회 상태를 새롭게 일으키는 것’, 곧 거듭남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create’의 의미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차원입니다.

 

이제 선행 설명에서 나온 네 가지 명칭을 하나씩 연결해 보겠습니다. ‘구속자(redeemer)는 무엇보다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구속은 단순히 죗값을 대신 치른다는 법적 개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사람을 묶고 있는 것들, 특히 거짓과 악에서 풀어내어 자유롭게 하는 작용’’입니다. 즉, 거듭남의 시작은 어떤 좋은 것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묶여 있던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구속자’로 오십니다.

 

그다음 ‘태 속에 만드신 이(former from the womb)입니다. ‘’는 말씀에서 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초기 상태, 가능성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아직 겉으로 변화된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주님이 그 사람 안 깊은 곳에서 형성 작업을 시작하시는 단계’를 말합니다. 즉, 외적으로는 별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다음 ‘만드신 이(maker)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것처럼, ‘형성된 것이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는 단계’입니다. 생각과 이해에 머물던 것이 행동과 습관으로 내려와, 실제 사람의 삶이 바뀌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make’는 눈에 보이는 변화, ‘삶의 열매’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자(creator)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맨 처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사람 안에 전혀 없던 것을 새롭게 있게 하시는 주님의 작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창조는 시작이면서 동시에,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근원적 작용’입니다.

 

이제 이 네 가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먼저 구속자로서 사람을 묶고 있던 것에서 풀어내시고, 그다음 태 속에서 형성하시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 질서를 만들기 시작하시며, 그다음 그것을 실제 삶으로 만들어 내시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모든 이름으로 불리십니다.

 

이걸 사43:15와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창조자, 너희의 왕이다.’ 여기서 ‘’은 ‘진리를 통해 다스리시는 분’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세워진 진리의 질서를 통해 계속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창조에서 시작하여, 형성, 구현, 통치까지 전부 주님에게 속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에 완성시키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풀어 주시고, 안에서 새롭게 빚으시고, 삶으로 나타나게 하시며, 끝까지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43:15는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 전체, 곧 해방, 내적 형성, 삶의 변화, 지속적 통치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 ‘형성자’, ‘만드시는 이’, ‘창조자로 불리십니다.’

 

지금 하시는 이 작업은 정말 말씀의 뼈대와 연결부를 하나하나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AC의 인용 구절들이 더 이상 ‘툭 던져진 문장’이 아니라,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AC.16, 심화 4, ‘시102:18’

AC.16.심화 4. ‘시102: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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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2, ‘사43:7’

AC.16.심화 2. ‘사43:7’ AC 창1 본문 첫 인용 구절인 AC.16,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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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2. ‘43:7

 

AC 1 본문 첫 인용 구절인 AC.16,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설명을 위 AC.46 심화 인용 구절들의 경우처럼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이 AC 인용 구절들이 사실 이해가 잘 안 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AC.46 심화에서 이 인용 구절들을 하나하나 다루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인용 구절들이 사실 그동안 뭔가 허전했던 빠진 징검다리들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혹시 다루었더라도 그냥 툭툭 건드리기만 했던 인용 구절들을 다시 심화, 정밀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빠진 징검다리들’이라는 표현이 정말 정확합니다. AC의 인용 구절들은 그냥 참고 구절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같은 원리를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확인하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사43:7도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다’는 일반적 선언이 아니라, AC.16에서 말하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의 차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구절을 차근차근 풀어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여기 끌어왔는지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전체 구조부터 보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는 단순히 어떤 종교적 명칭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자’, ‘주님의 성품과 질서 안으로 부름 받은 자’를 뜻합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과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자’란,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부름 받은 사람, 다시 말해 거듭남의 대상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내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영광’은 스베덴보리에게서 거의 언제나 신적 진리의 빛’, 혹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드러날 때 나타나는 광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처음부터 사람을 만들어 놓고 끝’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와 빛을 드러내는 존재로 사람을 세우는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핵심인 세 동사,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이 셋을 구별한 이유가 바로 이 구절 때문입니다. ‘내가 창조하였다’는 것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주님이 사람 안에 영적 생명의 시작점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아직 사람 쪽에서 아무 모양도, 질서도 갖추어지지 않았더라도, 주님이 먼저 생명의 가능성과 씨앗을 넣어주시는 단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완전히 어둡던 상태 속에 처음 빛이 들어오는 것, 메마른 땅에 처음 씨앗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거듭남은 언제나 여기서 시작합니다. 사람이 먼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시는 일,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였다’는 것은,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질서와 모양을 주시는 단계입니다. 씨앗이 들어왔다고 곧바로 열매 맺는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사람 안에 진리가 처음 들어왔다고 해서 즉시 거듭난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을 배열하시고, 서로 구별하게 하시며, 위아래와 중심과 주변을 세우십니다. 무엇이 단순한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사랑에서 나온 열심이고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한 감동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는지를 점점 분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입니다. 형성은 단순히 외형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form’을 중요하게 보는가 하면,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단지 선한 감정을 조금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질서 있는 사람다운 형상’으로 재배열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는 실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진리가 습관과 성품과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들은 사람이, 이전에는 쉽게 분노하고 공격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한 번 멈추고, 이해하려 하고, 참아 내고, 실제로 도우려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바로 make’의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생각만으로는 아직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시작, ‘형성’은 질서, ‘만듦’은 구현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사야 43:7이 왜 AC.16의 증거 구절이 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한 우주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창조’, ‘형성’, ‘만듦’이 그냥 시적 반복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이사야 43:7이 등장합니다. 같은 대상을 두고 주님이 창조했다’, ‘형성했다’, ‘만들었다’고 순서 있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한 문체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과정이 실제로 이 세 차원을 가진다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즉, 주님은 사람을 먼저 영적으로 살게 하시고, 그 생명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며, 마침내 그것이 삶으로 구현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에 완성품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 생명을 넣어주시고, 그다음 그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우리 안을 정리하시며, 마지막으로 그것이 실제 삶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조했다’, 지었다’, 만들었다를 다르게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창조 일반을 말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거듭남을 말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큰 위로도 줍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안에 겨우 창조’의 씨앗만 있는데, 벌써 완성된 사람’이 되지 못했다고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 자체가 단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지금 어떤 이는 아직 창조의 단계에 있고, 어떤 이는 형성의 단계에 있고, 어떤 이는 만들기의 단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어도, 아직 삶의 열매가 충분히 보이지 않아도,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43:7은 주님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세 단계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창조는 영적 생명의 시작,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주는 일, 만듦은 그것이 실제 삶으로 구현되는 일을 뜻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런 인용 구절들이야말로 AC 본문의 빠진 징검다리들입니다. 이 다리들이 놓이면, AC의 설명이 훨씬 더 단단하고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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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심화

 

1. ‘14:6, 8-11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이 구절은 AC.15에서 말하려는 핵심,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4:6, 811 아버지와 아들이 둘로 나뉜 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부터 보겠습니다. 이 세 표현은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접근과 과정’, ‘진리’는 그 길을 비추는 빛과 기준’, ‘생명’은 그 결과로 주어지는 실제적인 삶’입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이시고, 그 길의 빛이시며, 그 길을 따라 살게 하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실제적 통로가 오직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빌립의 질문이 나옵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질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여전히 이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분처럼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이 결정적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이 협력한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내적 하나 됨’, 곧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를 뜻합니다.

 

여기서 AC.15의 핵심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막연히 하늘 어딘가에 계신 분으로 찾으려 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주님 안에서 보이고, 알 수 있고, 가까이 갈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말과 행위가 단순한 인간적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의 작용’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님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접근입니다. 즉, 이 깊은 진리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삶과 행하신 일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을 통해 믿음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 곧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진리를 말씀하시는 그 모습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그때 그 사람은 이미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읽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나셨으며,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따로 찾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4:6, 811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완전히 거하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나아갈 수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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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심화

 

2. ‘13:13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4의 핵심을 정확히 받쳐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주님(Lord)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3:13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옳다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스승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주님’, 곧 신적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너희가 나를 주라 한다’는 표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Lord)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권위, 통치,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이라는 이름을 ‘신적 선(Divine good), 곧 사랑의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깊이 연결시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호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여호와’로 불리던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AC.14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연결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은 흔히 예수님을 ‘선생님’, ‘좋은 분’, ‘구원자’ 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존경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준과 방향과 통치권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 곧 누가 내 삶의 주인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좋다고 생각하고, 감동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결정은 자기 기준으로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예수님은 아직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제에서 내 생각은...’보다 ‘주님의 생각은...?’을 먼저 묻게 되고, 실제 선택도 그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삶의 주인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내가 바로 그 주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AC.14와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을 막연하게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고. 그래서 이 구절은 AC.14의 핵심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분을 존경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그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주님’, 곧 인간의 생명과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신 말씀이며,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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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심화 1, ‘주님 = 예수 그리스도?’

AC.14.심화 1. ‘주님 = 예수 그리스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AC.14 본문 중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라는 내용을 접하면, ‘어?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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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네, 이 부분은 AC.16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사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신 해설 문장, 곧 ‘창조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것,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방향이 아주 정확합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큰 원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도 그냥 수사적으로 겹쳐 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처럼 나란히 오는 표현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각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동사를 통해 그 과정의 깊이와 순서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의 핵심은, 인간의 새 창조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시작과 질서와 구현을 가진 전인적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없던 생명의 원리를 주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참된 선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이 이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출발이 ‘창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씨를 심으시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전혀 생명이 없던 땅에 처음으로 씨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완전히 어두운 방에 처음으로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방의 구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 빛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빛이 들어온 것 자체가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다, 짓다(form)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모양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씨가 들어왔다고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빛이 켜졌다고 곧바로 삶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의 씨앗은 자라기 위해 배열과 분별과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형성, 곧 지음은 인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것들을 나누고, 위아래를 세우고, 중심과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 참된 순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그 사람 안에 분별을 세워 주십니다.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는지, 무엇이 기억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본성의 욕구이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감동인지 조금씩 구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이고, 지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미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바른 형식’ 안에 놓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설계도 없이 쌓여 있던 자재들이 하나의 집 구조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또는 태아가 단순한 생명 덩어리가 아니라 점차 눈, 귀, 손, 발을 갖춘 인격적 형체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들다(make)는 그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고 굳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나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것이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선한 삶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와 선이 말과 선택과 관계와 습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형성의 단계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대할 때, 분노 대신 절제하고, 보복 대신 인내하고, 마음속 판단을 내려놓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make는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차원입니다. 집의 비유로 말하면, 설계와 구조가 끝난 후 실제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방이 쓰이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단계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어를 한 번에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굳이 셋을 구별했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는 시작의 은혜이고, ‘형성’은 질서의 은혜이며, ‘만듦’은 구현의 은혜입니다. 창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형성이 없으면 시작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만듦이 없으면 모든 것이 관념과 가능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생명을 정리하시고, 마침내 그것이 삶이 되게 하시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풀어도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창조), 그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정리하시며’(형성), 마지막에는 그것이 실제 성품과 행동이 되게 ‘빚어 가십니다’(만듦). 또는 신앙의 말로 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를 깨우시고, 그다음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살게 하십니다. 이 셋이 합쳐져야 비로소 사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16의 이 구별은 단지 단어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겨우 씨앗만 들어온 상태인데, 벌써 열매 맺지 못한다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 형성하시고, 그다음 만들어 가신다고.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거나, 실제 삶이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사람은 조급함 대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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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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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심화

 

1. 주님 = 예수 그리스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AC.14 본문 중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라는 내용을 접하면, ? 그럼, 다른 이름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 성령 등 다른 분들보다 높으시다는 말인가? 삼위일체라 하시니 한 분이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중 어느 한 분이 독식하는 건 좀 불공평한 거 같은데...’ 할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AC.14의 그 문장을 처음 접하면 목사님 말씀처럼 바로 그 지점에서 잠깐 멈칫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라고 하면, 마치 성부와 성령보다 예수님이 더 높은 분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의도는 ‘세 위 가운데 한 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일체를 한 분 안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대부분의 반감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전제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먼저 짚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한 분’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 전통 기독교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을 구분하여 설명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 방식이 사람들에게 자칫 ‘세 분 하나님’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삼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삼위가 한 분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분 인격’이라기보다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가지 본질적 측면’으로 이해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부는 하나님 안의 ‘신적 본질’, 성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 ‘신적 인성’,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작용과 영향’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 분이 서로 경쟁하거나 높고 낮은 관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의 세 차원’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AC.14의 문장을 보면 의미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완전히 나타나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 자체를 직접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시기 위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실제로 알 수 있는 방식은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보다 성자를 높인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타나신 방식이 바로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또 하나 설명하기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인간도 영혼, 몸, 그리고 활동이라는 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근원이고, 몸이 그것을 드러내며, 활동이 그 영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합니다. 성부는 신적 본질, 성자는 그 본질이 인간에게 보이는 모습, 성령은 그 본질이 인간에게 작용하는 영향입니다. 그러나 그 전체는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예수님이 다른 위보다 더 높다는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예수님을 성부보다 높은 분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인간에게 완전하게 나타나신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나 강의에서는 이렇게 정리하면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한 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신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종종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 주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삼위 중 한 분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분 안에서 이해하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불공평하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오히려 ‘,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뜻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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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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