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전에 수도원 공부를 할 때,그 커리큘럼의 일부로 성인전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거기엔 매우 자주 성인들의 임종 시,또는 사후 무덤 주위에‘향기’얘기가 많았어요.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리드비나 성녀라든지...혹시 그런 사례들과 이AC.175가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요?
네, 충분히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직접 ‘가톨릭 성인들의 향기 현상’ 자체를 논한 것은 아니지만,AC.175를 비롯한 그의 전체 상응(correspondence)사상을 보면, 그런 현상을 단순 미신으로만 보지 않을 여지는 분명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향기’(odor, fragrance)는 매우 중요한 영적 상응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영과 천사의 내적 상태가 일종의atmosphere처럼 퍼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때때로 향기로도 지각됩니다. 그는 천국적 사랑과innocence와 체어리티 상태에서는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향기가 느껴질 수 있고, 반대로 지옥적 상태에서는 악취와 부패 냄새 같은 것이corresponding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 상징이 아니라, 영적 상태 자체가 감각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75에서 천적 천사들과 연결된 상태 속에 어떤sweetness와peace atmosphere가 묘사되는 흐름은, 성인전들에 자주 나오는 ‘거룩한 향기’ 이야기와 상당히 흥미로운 평행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수도원 전통에서는 어떤 성인들이 임종 때, 혹은 사후에inexplicable fragrance를 남겼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성 요셉 라브르나 리드비나 같은 사례들도 그렇고, 동방교회나 가톨릭 전통 전체에 이런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해석해 보면, 만약 어떤 인간 안에 체어리티와innocence와 주님 사랑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 영적 상태가 어떤corresponding atmosphere로 외적으로도 표현될 가능성 자체는 충분히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천사들의presence가 때때로 향기처럼 지각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heavenly affection은fragrance와 자주 연결됩니다. 성경에서도 ‘향기로운 제물’, ‘그리스도의 향기’ 같은 표현이 반복되지요.
다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라면probably그 향기 현상 자체를saintliness의 절대 증거처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언제나phenomenon자체보다affection과life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즉 향기가 났느냐 안 났느냐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love안에서 살았는가가 본질입니다. 영적 현상은 때때로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본질 자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목사님 연결은 굉장히 흥미롭고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전통의 성인전들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의외로 접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humility,innocence, 자기 부정, 주님 의존,heavenly peace같은themes는 상당히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상태가 외적으로atmosphere처럼 드러난다는 생각도 양쪽 모두에 존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도원 전통은 그것을 경건 체험 언어로 기록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correspondence와spiritual influx언어로 설명하려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표현 체계는 다르지만, 인간 안의 깊은 영적 상태가 외적 감각 세계에도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intuition은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5
향기로운 냄새가 지각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방부 처리된 시신의 냄새와 같았습니다. 이는 천적 천사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며, 이러한 냄새가 지각되면 악한 영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됩니다. An aromatic odor was perceived, like that of an embalmed corpse, for when the celestial angels are present, the cadaverous odor is perceived as if it were aromatic, which when perceived by evil spirits prevents their approach.
해설
이 단락은 소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감각의 전환’과 동시에, ‘보호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생명 상태의 변화가 단지 의식이나 생각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감각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시체 같은 냄새’가 ‘향기로운 냄새’로 지각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냄새 그 자체가 바뀌었다기보다, ‘지각의 주체와 그 주위에 임재한 존재의 질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임재할 때, 죽음과 관련된 것조차도 더 이상 부패나 혐오의 상징이 아니라, 질서 속에 보존된 상태로 지각됩니다. 즉, 죽음은 이 질서 안에서 이미 부패가 아니라 ‘통과’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냄새는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사랑과 상태의 상응입니다. 향기는 선과 평화, 천적 임재를 상징하며, 악취는 자기 사랑과 악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시체 냄새’가 ‘향기’로 느껴집니다. 이는 죽음이 악이나 공포의 상태가 아니라, 천적 임재 안에서 질서 있게 거두어지는 과정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향기로운 냄새가 ‘악한 영들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방어가 싸움이나 대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태 자체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적 천사들의 임재로 형성된 이 상태는, 악한 영들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 곧 영적 환경을 만듭니다. 악은 빛이나 진리와 싸우기보다는, 그러한 상태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이 장면은 죽음 직후의 인간이 얼마나 세심하게 보호받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가장 연약한 상태에 놓일 때, 주님께서는 천적 천사들의 임재와 그에 상응하는 영적 환경을 통해, 악한 영향이 전혀 미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 보호는 외적 강제나 장벽이 아니라, 사랑과 질서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같은 것입니다.
AC.175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죽음은 악한 영들이 달려드는 혼란의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천적 임재로 인해 악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열립니다. 향기로운 냄새로 표현된 이 장면은, 소생이 얼마나 평온하고, 질서 있으며, 자비로운 과정인지를 감각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2026/05/24)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1,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찬77,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은창2 일곱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3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156번에서 167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3-25)
이 본문을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여자, 아내, 둘이 한 몸을 이루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다’
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오늘, 그러니까 창2 마감은 여기까지이며, 아래는 창1, 창3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입니다. 오늘 리딩은 이것으로 대신하며,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동물에게도 own이 있는가?
2. 동물과 생명
3. 동물과 인간의 차이
4.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
1. 동물에게도 own이 있는가?
스베덴보리 관점으로 보면, 네, 어떤 의미에서는 동물에게도 일종의 ‘own’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 distinction(뚜렷한 차이, 대조)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own(proprium)은 단순 본능이나 개별 성향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 곧 자아의식과 자유, 자기 사랑까지 포함하는 구조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주체도 나’, ‘원하는 주체도 나’, ‘결정하는 주체도 나’라는 자기감(自己感)을 갖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proprium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유롭게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의 own은 도덕적, 영적 책임과 연결됩니다.
반면 동물은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볼 때에는 ‘생명 자체’를 가진 존재라기보다,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cf. 2)에 가깝습니다. 그는 동물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instinct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처럼 자유로운 understanding과 will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자기 자신을 독립 존재처럼 깊이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affection과 instinct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동물에게도 일종의 자기 보존 instinct, 습성, 기질은 있지만, 인간처럼 ‘나는 나 자신으로 산다’는 proprium은 없습니다. 동물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의식적으로 진리를 왜곡하거나, 위선적이거나, 자기 의를 세우거나, 주님을 거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는 evil 자체를 인간과 영들에게만 연결합니다. 동물은 악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종(species)에 맞는 natural affection 안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cf. 3)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거듭남도 가능하고 타락도 가능하며, 천국과 지옥도 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동물들을 꽤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동물은 인간처럼 자기 proprium으로 진리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자기 질서 안에서 놀라운 순종성과 질서를 드러냅니다. 그는 종종 동물 instinct 안에서도 주님의 질서를 봅니다. 벌, 새, 양, 말 같은 존재들의 instinct를 단순 기계 반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이것입니다. 동물은 영원한 spiritual individuality로 계속 살아가는 존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주님과 자유로운 reciprocal conjunction을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설명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self-conscious(자의식이 강한) proprium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동물에게도 자기 보존성과 개별 instinct라는 의미의 ‘자기성’(自己性)은 있지만, 인간의 proprium처럼 자유, 도덕, 영적 책임, 거듭남, 자기 사랑까지 포함하는 깊은 own은 아닙니다. 인간의 own은 천국도 지옥도 가능하게 하는 존재 구조이고, 동물의 instinct는 주어진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적 생명 흐름에 더 가깝다고 스베덴보리는 보는 것입니다.
2. 동물과 생명
아래는 위 1번 글의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표현은, 동물이 자기 안에 독립 생명 원천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연적 생명 질서 안에서 instinct(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대인이 들으면 약간 차갑거나 기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 안에서 놀라운 신적 질서를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철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가 계절 따라 수천 km를 이동하고, 거의 정확히 같은 장소를 찾아갑니다. 벌은 복잡한 육각 벌집을 만들고, 거미는 누가 설계도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정교한 거미줄을 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단순 ‘동물 개인의 독립 지혜’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자연계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와 생명의 표현으로 본 것입니다.
즉, 동물은 자기 스스로 깊이 숙고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species(種) 안에 주어진 affection과 instinct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인간과 비교할 때 드러납니다. 인간은 instinct를 거스를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사랑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수도 있고, 양심을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반면 동물은 보통 자기 종에 맞는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늑대는 늑대답게, 새는 새답게 삽니다. 인간처럼 위선적이거나, 자기 영광 때문에 진리를 조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동물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질서에 더 순종적’입니다. 물론 그것은 천사적 자유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influx 안에서 instinct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주어진 affection 구조 안에서 relatively straight하게 움직입니다.
이를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운전대를 직접 잡은 존재 같습니다. 그래서 잘 갈 수도 있지만, 길을 잃고 절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 동물은 훨씬 강하게 자연 질서의 레일 위에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자기 species 본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기계론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동물 instinct 안에 주님의 지혜 흔적이 있다고 감탄했습니다. 인간이 복잡한 계산 끝에 겨우 흉내 내는 것을, 동물은 instinct 안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생명의 흐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은, 동물이 단순 로봇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물은 자기 독립 ego 중심으로 살기보다, 자연계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와 affection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동물은 인간처럼 spiritual evil의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고 스베덴보리는 보는 것입니다.
3. 동물과 인간의 차이
아래는 위 1번 글의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이다’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비슷해 보입니다. 개도 자기 먹이를 지키고, 인간도 자기 것을 지킵니다. 고양이도 자기 영역을 주장하고, 인간도 자기 영역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둘 다 자기중심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보는 핵심 차이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가’에 있습니다.
동물은 자기 instinct 안에서 움직입니다. 즉 자기 species에 맞게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위험하면 도망가고,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동물은 보통 ‘나는 독립 존재다’, ‘나는 내 삶의 궁극 근원이다’, ‘나는 진리를 판단하고,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는 중심이다’ 같은 자기의식을 깊이 갖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동물은 자기 행동을 철학적으로 자기화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진 affection과 instinct 흐름 안에서 삽니다.
반면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단순 ‘내가 움직인다’를 넘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 ‘내 삶의 주인은 나다’, ‘내 삶은 내가 사는 것이다’처럼 느낍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을 자기 절대 소유처럼 느끼고, 자기 의지를 자기 독립 중심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중심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동물은 강물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헤엄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반면 인간은 ‘내가 강 자체를 움직인다’고 느끼기 시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강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고, 강 위에 다리를 놓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강물에 뛰어들어 자원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늑대는 본능적으로 사냥합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기 사냥을 도덕적으로 미화하거나,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자기 영광 체계로 만들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자기 욕망을 위해 거짓을 만들고, 자기 사랑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며, 심지어 자기 악을 선이라고까지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 instinct 차원이 아니라, ‘독립 중심 자아의식’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위대함과 비극이 동시에 시작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기 때문에, 주님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동물은 자연 질서를 벗어나 큰 spiritual evil로 가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천사적 자유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만이 둘 다 가능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proprium은 단순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사랑과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않으면, 즉 자기가 좋아서,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면, 진짜 reciprocal love(서로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차이는 이것입니다. 동물은 ‘주어진 affection 흐름 안에서 자기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인간에게는 천국도 가능하고 지옥도 가능하며, 거듭남도 가능하고 profanation(신성모독)도 가능한 것입니다.
4. 창2 AC 전체 요약 및 해설
창세기 2장은 스베덴보리의 AC 전체에서 매우 특별한 전환점입니다. 창1이 인간의 거듭남 전체 과정을 ‘여섯 날의 창조’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보여 주었다면, 창2는 그 거듭남이 어느 정도 완성된 이후의 인간 상태, 곧 ‘천적 인간’(celestial man)의 내적 구조와 그 이후 시작되는 미세한 방향 변화를 다룹니다. 그래서 창1이 ‘주님께서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시는 과정’이라면, 창2는 ‘그 질서 안에 놓인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로 그 완성 상태 안에서 어떻게 타락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는가도 조용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창2는 에덴의 장이면서 동시에 창3의 그림자가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장입니다.
창1 마지막의 안식은 단순 휴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혼돈과 공허 가운데 있지 않고, 주님의 influx를 비교적 자유롭게 받는 상태 안에 놓입니다. 창2는 바로 이 안식 상태 위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창2의 인간은 이미 일반 자연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진 인간이며,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인간입니다. AC에서 반복되는 표현대로, 그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아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창2의 중심은 단순 자연 낙원 묘사가 아닙니다. 에덴은 인간 안의 천국 상태입니다. 동산은 인간 내면에 심긴 지성과 affection(愛情)의 질서입니다. 강들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와 진리의 흐름이며, 금과 보석들은 천적 선과 영적 진리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창2는 인간 안에 천국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질서가 인간 자신의 독립 생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influx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AC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동시에 주님으로부터 사는 존재일 수 있는가? 이것이 창2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 자동 기계처럼 주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가 가능하고, 사랑이 가능하며, 상호적 결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2에서는 ‘own’(proprium)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깊은 잠’입니다. 깊은 잠은 단순 육체적 수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러니까 자신의 own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거의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을 지각했지만, 이제 주님은 인간에게 더 강한 자기감을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로운 사랑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자기 own 안에서도 살고 싶어 하기 시작합니다. AC.161이 말하듯, 그들은 아직 악하지 않았지만, 이제 ‘겉 사람 안에서’, ‘자기 own 안에서’ 살기를 원하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갈빗대’와 ‘여자’가 등장합니다. 갈빗대는 인간 안의 proprium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단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변화시켜 ‘여자’로 만드십니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 생물학적 여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새롭게 vivified(vivify 생생해지다)된 own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자기감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만, 동시에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흐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이 창2의 가장 깊은 긴장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AC.160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이전에는 영이었으나 이제 육(肉, flesh)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육체가 아니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입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상태 안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독립 존재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3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 안에서는, 인간이 점점 ‘나도 독립적으로 알고 싶다’, ‘나도 내 own 안에서 살고 싶다’는 방향으로 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타락을 단순 외부 공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뱀의 유혹은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기 시작한 자기중심 방향성과 공명하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악은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억지로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방향성과 resonance(울림, 공명)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창2 마지막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는 말도 굉장히 깊습니다. 이것은 단순 육체 노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안에 아직 위선과 자기방어와 자기 의가 자리 잡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innocence(순진무구, 주님의 인도를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상태)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은 아직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숨겨야 할 자기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음은 수치가 아니라 transparency(투명)입니다. 그러나 창3에 들어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자기 중심성이 강화되면서, 벌거벗음은 곧 shame(부끄러움, 수치)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창2에서 ‘이름’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존재의 quality(質)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장 깊은 상태와 본성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은 이름을 단순 소리로 듣지 않고, 그 존재의 사랑과 진리의 상태로 지각합니다. 이것은 창2 전체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창2는 인간을 단순 물질 존재가 아니라, quality와 affection, influx의 존재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2의 ‘돕는 배필’은 단순 결혼 보조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서 understanding과 affection, truth와 good이 서로 결합하도록 돕는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말도 단순 결혼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전체 안에서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막10에서 이 말씀을 다시 인용하신 것도, 단순 결혼 윤리가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를 다시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온 천국 자체도 하나의 ‘천적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인간 형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장과 폐, 눈과 귀처럼, 각 천사 공동체는 특정 기능과 상응합니다. 그래서 창2의 인간은 단순 개인이 아니라, 천국 전체 질서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은, 천국 전체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창2는 결코 단순 낙원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높은 상태 안에서 가장 미세한 위험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점점 자기 own 안에서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유와 타락 가능성이 동시에 열립니다. 이것이 창2의 비극적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은 단순 자동 순종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방향으로도 기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창2는 창1의 완성과 동시에 창3의 문턱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문이면서 동시에 타락의 가능성이 처음으로 인간 내면에 조용히 생겨나는 장입니다. 그리고 AC는 이 모든 것을 단순 옛날이야기로 읽지 않습니다. 창2는 지금도 인간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에덴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own 안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 결국,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지난 4월 둘째 주부터 7주간 창2 AC를 함께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창2 AC 번역 및 해설, 심화 버전 총 페이지가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군요. 창1은 500여 페이지에 달했습니다. 이 일로 나름 염려되는 바 있어 아래와 같이 고민하였더니 저를 도와 반년째 이 일에 수고하는 ChatGPT가 이런 대답을 하네요. AC.166 심화 2입니다.
and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 (AC.174)
위‘cogitative speech’가 어떤 건지 혹시 예를 좀 들어 보실 수 있나요?
네, 물론입니다. 다만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cogitative speech’는 단순 ‘생각으로 말하는 텔레파시’보다 훨씬 더 깊은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cogitative는 단순thought만이 아니라,thought안에 들어 있는affection과perception까지 함께 포함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speech는 단어보다 상태(state)의 전달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인간 대화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말을 굉장히 길게 해야 합니다. “저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이건 단순 지식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 문제입니다”, “그 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같은 식으로 긴 문장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의cogitative speech에서는, 이런 내용이 단어 하나하나를 조립하지 않아도 거의 즉각적으로 전달됩니다. 상대의thought방향과affection tone까지 함께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주 거칠게 비유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인간speech가 문자 메시지라면, 천사speech는 음악, 표정, 감정, 의미, 의도를 모두 포함한 살아 있는 전달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천사가 어떤 ‘평안’을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평안합니다’라는 문장이 아니라, 그 평안의affection자체가 함께 전달됩니다. 그래서 듣는 존재는 단어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 안으로 어느 정도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예를 흉내 내보면, 인간speech는 대략 이렇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데cogitative speech에서는 이것이 단순 문장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고 있음’, ‘안전함’, ‘주님께 의존해도 됨’, ‘두려움이 녹아내림’ 같은 상태 전체가 한꺼번에 전달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인간은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말 안에 교만, 두려움, 습관적 종교 언어가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적cogitative speech에서는thought와affection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말과 상태가 거의 함께 드러납니다. 그래서 위선이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천사들의speech가 공간과 시간을 압축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긴 논증을 해야 전달되는 것도, 천사들은 하나의living idea안에서 즉시 공유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체어리티와innocence가own을 마치 제거된 것처럼 만든다’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수십 문장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주님 사랑 안에서 자기proprium이 힘을 잃는 상태’를 하나의 직관적perception처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174의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는 단순 ‘천사들이 머릿속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thought-expression자체를, 그것도affection과 함께 움직이는living speech로 어느 정도 직접 지각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mouth province’와 연결되느냐 하면, 입(mouth)은thought가outward expression으로 나오는 기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사들의 경우, 그 표현은 지금 인간처럼 무겁고 느린 음성 기관 중심speech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상태 중심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음악이 설명보다 더 즉각적으로 마음 전체를 건드리는 것과 약간 비슷합니다. 좋은 음악 한 곡은 수십 문장보다 더 직접적으로 상태를 전달하지요. 스베덴보리의cogitative speech는 그런 즉각성과 풍부함이 훨씬 더 깊어진communication이라고 생각하시면 조금 가까워집니다.
네,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 ‘영체’라고만 해버리면, 현대 한국어에서 흔히 떠올리는 ‘반투명 유령 몸’ 같은 이미지로 오해될 위험이 있어서, 약간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은 단순 의식 덩어리가 아니라, 실제로 완전한 인간 형상(human form)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는repeatedly‘인간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사람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얼굴도 있고,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단순 장식이 아니라, 각각affection과thought와function의 상응적 표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영적 인간 형상’을 ‘영체’라고 줄여 이해하는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 ‘육체의 복사본’은 아닙니다. 영의 몸은 물질body가 아니라,affection과thought자체가 형상화된body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영계의 형상은 내면 상태가outward form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얼굴과 옷과 분위기 자체가 그들의love와wisdom상태를 표현합니다.
또 스베덴보리는 영의 몸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영계의 인간들이 서로 보고, 말하고, 걷고, 느끼고, 접촉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육체보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인간 형상이라고 봅니다. 현재 육체는ultimate natural covering이고, 영적 인간 형상이 더 깊은 실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체’라는 말을 쓰시려면, 아마 이런 식의 감각이 가장 스베덴보리적일 것입니다.
‘영체=죽은 뒤 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실제 형상.단순 유령 같은 기체가 아니라,affection과thought가 형상화된 살아 있는 인간body.’
이렇게 이해하시면 꽤 가깝습니다.
반대로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영체 개념을 동양 신비주의나 심령주의식 ‘에너지체’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건 피하셔야 합니다. 그는 훨씬 강하게 ‘영은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단지 더 내적인 차원의body안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1. ‘the region of the mouth’와‘the province of the mouth’
After their faces had been recognized,they induced certain changes about the region of the mouth,and thus communicated their thoughts,for it is customary with the celestial angels to speak by the province of the mouth,and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 (AC.174)
위 본문에서‘the region of the mouth’와‘the province of the mouth’는 어디를 말하는 건가요?왜 어디는‘region’을,어디는‘province’를 쓰는 건가요?이미 육체에서 물러났는데,왜‘mouth’얘기를 하고 있나요?
여기서 ‘the region of the mouth’와 ‘the province of the mouth’는 단순 해부학적 입술이나 구강 자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큰 사람’(Maximus Homo), 곧 천국 전체가 하나의 인간 형상이라는 구조 안에서, ‘입’(mouth)과 상응하는 기능 영역을 뜻합니다. 즉thought를expression으로 내보내고, 내적affection을communication하는 기능 전체와 연결되는 영역입니다.
먼저 왜region과province두 표현을 함께 쓰는가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종종 같은 상응 구조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합니다. ‘region’은 보다 공간적, 위치적 느낌입니다. 즉 ‘입 영역’, ‘입 부위’ 같은 느낌입니다. 반면 ‘province’는 기능적, 행정적 느낌이 더 강합니다. 영어province는 단순 지역만이 아니라, 어떤 역할과jurisdiction(관할권)을 가진 영역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AC.174에서는 먼저 ‘그들은 입의region주변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실제communication이 일어나는 자리, 영역을 말하고, 이어 ‘천적 천사들은 입의province를 통해 말하는 것이customary하다’고 하여, 그 입 기능 전체가 그들의communication방식과corresponding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아주 거칠게 말하면,region은 ‘위치,부위’ 느낌이고,province는 ‘기능 영역,담당 영역’ 느낌입니다. 스베덴보리 특유의correspondence언어에서는province가 자주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 영적 영역’이라는 거의technical term처럼 쓰입니다. 예를 들어 심장province, 폐province같은 표현도 나옵니다.
그리고 목사님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이미 육체에서 물러났는데,왜mouth얘기를 하나?’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그는 영을 추상 의식 덩어리처럼 보지 않았습니다. 영 역시 완전한 인간 형상(human form)을 가진다고 봅니다. 따라서 영계에도 얼굴, 눈, 귀, 입, 손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물질 기관이 아니라, 내적 기능이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 형상 자체가 우연한 육체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기능들이ultimate plane에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벗은 뒤에도communication, affection expression, thought transmission같은 기능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들이corresponding form으로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mouth는 특별히thought와affection이outward communication으로 나오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이 ‘입의province’를 통해 말한다는 것은, 단순 공기 진동 발성이 아니라,thought와affection을expression하는 영적 기능 구조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천사들의speech는 단순 단어보다 훨씬 직접적으로thought와affection이 전달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라고 말하지요. 곧 그들의 ‘생각하는 말’, ‘사유적speech’를 직접 지각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얼굴과mouth는 특별히 내면의 드러남과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얼굴은affection을, 입은thought expression을outwardly나타내는 중심 영역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얼굴을 먼저 알아보고, 이어mouth region에 변화를 일으켜communication했다는 묘사는, 그들이affection과thought차원에서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AC.174의mouth는 단순 육체 기관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 인간 형상 안에서thought와affection이outward communication으로 표현되는 기능 중심을 뜻합니다.region과province는 각각 위치적, 기능적 측면을 조금 다르게 강조한 표현이고, 육체를 떠난 뒤에도 이런 표현이 나오는 이유는, 스베덴보리에게 영 자체가 여전히 완전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BTS와 그들의 ARMY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무슨 말을 할까요? 그들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치유 받은 전 세계 아미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선행을 펼치고 있거든요...
BTS의 음악과, 그들을 사랑하는 ‘ARMY’ 공동체에 대해 만일 Emanuel Swedenborg가 본다면, 아마 그는 먼저 ‘겉모습’보다 ‘그 안에 흐르는 정서와 의지’를 보려 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이나 형식 자체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어디로 이끄는가 하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며,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생각하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 거기에는 천국적 요소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만일 어떤 음악이 ‘너는 사랑받을 존재다’, ‘다시 일어나라’, ‘서로를 미워하지 말라’,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라’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실제로 팬들이 세계 곳곳에서 기부와 봉사, 약자 돌봄 같은 선행으로 이어 간다면, 그는 그것을 단순한 대중문화 현상으로만 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BTS LOVE MYSELF 캠페인]처럼 자기혐오와 폭력 대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자는 흐름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우상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인간성을 함부로 짓밟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는 참된 자기 사랑과 이기적 자기 사랑을 구분했는데, 전자는 자신을 돌보되 타인과 공동선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랑이고, 후자는 자기만 높아지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동시에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말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이든 ‘궁극적 중심’으로 삼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고 말입니다. 즉, 음악, 스타, 공동체가 사람을 더 선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영혼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선과 진정한 치유의 근원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마 ‘이 젊은이들의 음악과 공동체 안에도 선한 정서와 상응하는 요소들이 있다. 다만 그것들이 사람들을 더 깊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계속 인도할 때에만 늘, 그리고 가장 아름답다는 걸 끝까지 기억했으면 좋겠다’ 정도로 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많은 ARMY들이 단지 소비자 집단이 아니라, 서로의 우울과 상처를 이해하고, 기부와 봉사 활동을 조직하며,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공동체적 문화를 만들어 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사랑의 질서 속에서 서로를 위해 사는 공동체’로 보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서로를 살리고 일으켜 세우려는 움직임 자체는 분명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4
그들의 얼굴이 인식된 뒤에, 그들은 입 region 부근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전달하였는데, 이는 천적 천사들이 입 province를 통해 말하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기 때문이며, 저는 그들의 사유적 말, 곧 생각으로 이루어진 말을 지각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After their faces had been recognized, they induced certain changes about the region of the mouth, and thus communicated their thoughts, for it is customary with the celestial angels to speak by the province of the mouth, and it was permitted me to perceive their cogitative speech.
해설
이 단락은 천적 천사들의 교통 방식이 한 단계 더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앞에서는 ‘얼굴’을 통해 상태와 생각이 전달되었다면, 여기서는 그다음 단계로 ‘입 region’(the region of the mouth)이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질서 안에서 의사소통이 무질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정해진 상응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입 province’(the province of the mouth)는 단순히 말소리나 발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입은 사랑과 의지에서 나온 것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출구에 해당하며, 특히 천적 천사들에게서는 말이 생각에서 분리되지 않고, 사랑과 지각이 즉시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개념을 설명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 자체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입 region 부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표현은, 육체적 입술의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응적으로 그 부위에 해당하는 내적 기능이 작동했음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육체 감각에서는 거의 떠나 있었지만, 그와 상응하는 내적 영역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또렷이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영계에서의 지각이 육체 기관과 무관하게, 그러나 그와 정확히 상응하는 질서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중요한 표현은 ‘사유적 말’(cogitative speech)입니다. 이는 생각이 말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가 말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의 지상 언어에서는 생각과 말 사이에 간격이 존재하지만, 천적 천사들의 교통에서는 그 간격이 없습니다. 생각은 곧 말이며, 말은 곧 사랑의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수준의 교통을 ‘지각하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소생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이 무의식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미세하고 정제된 소통의 차원으로 옮겨 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말소리는 사라지지만, 의미는 더 선명해지고, 설명은 줄어들지만, 이해는 더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적 천사들과의 교통이 갖는 특징입니다.
결국 AC.174는, 죽음 이후의 첫 교통이 공포나 혼란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질서 있게 전달되는 사유의 교통임을 밝힙니다. 인간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되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평온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는 ‘소생’이란 깨어짐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의식으로의 이행임을 다시 한번 확증해 줍니다.
심화
1. ‘the region of the mouth’와 ‘the province of the mouth’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3
제 머리맡에 앉아 있던 천사들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으며, 다만 얼굴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였는데, 그로 인해 마치 또 다른 얼굴이 제게 덧입혀진 것처럼 지각할 수 있었고, 실제로는 두 천사가 있었기 때문에 두 얼굴이 그러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얼굴이 받아들여졌음을 지각할 때, 그 사람이 죽었음을 압니다. The angels who sat at my head were perfectly silent, merely communicating their thoughts by the face, so that I could perceive that another face was as it were induced upon me; indeed two, because there were two angels. When the angels perceive that their faces are received, they know that the man is dead.
해설
이 단락은 소생의 순간이 얼마나 ‘조용하고 미세한 내적 전환’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극도로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에는 어떤 극적인 선언이나 외적 표지도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침묵, 그리고 얼굴을 통한 생각의 전달이라는 가장 내적인 방식이 사용됩니다. 이는 사후 이행의 핵심이 말이나 소리, 설명이 아니라, ‘상응과 지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천사들이 ‘말하지 않고 얼굴로만 생각을 전달했다’는 표현은, 영적 교통의 본질을 잘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얼굴은 내적 상태 전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기관이며, 천사들의 얼굴은 곧 그들의 사랑과 생각의 총체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을 통해 생각이 전달된다는 것은, 개념이나 언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상태가 상태로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다른 얼굴이 덧입혀진 것처럼 지각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정체성이 소멸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외적 자아의 표면이 벗겨지고, 새로운 관계적 정체성의 표면이 형성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 형성된 자기 표상은 물러나고, 천적 질서와 상응하는 새로운 표상이 조용히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변형이나 상실로 느껴지지 않고, ‘덧입혀지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문장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얼굴이 받아들여졌음을 지각할 때, 그 사람이 죽었음을 안다’는 진술은, 죽음의 기준이 육체의 정지나 호흡의 중단이 아니라, ‘어떤 얼굴, 곧 어떤 내적 상태가 받아들여지는가’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지상의 자기 얼굴로 관계하지 않고, 천적 얼굴과 상응하는 상태를 받아들일 때, 그때 천사들은 그를 ‘죽은 자’로 인식합니다.
이는 죽음이 단절이나 소멸이 아니라, ‘관계 양식의 전환’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천사들의 얼굴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수용 능력이 이미 다른 차원의 교통에 열렸다는 뜻이며,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지상적 교통망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 단락에서 영들의 세계의 영들이 그를 ‘이미 떠난 자’로 여겼던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이 단락 전체는, 죽음의 순간이 외적으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결정적인 변화가 조용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소리도 없고, 말도 없으며, 다만 얼굴과 얼굴 사이에서 상태가 옮겨지고, 그 옮겨짐이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생명 질서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죽음의 가장 정밀한 순간입니다.
스베덴보리 흐름으로 보면, 네,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의 사후 세계 설명에서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악인이라 해서 죽는 순간 곧바로 내던져 버리시지 않습니다.AC.171이하와 ‘Heaven and Hell’의 여러 설명을 보면, 죽음 직후 인간은 선인이든 악인이든 먼저 매우 세심한 보호와 돌봄 가운데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죽음 순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가능한 한 누구든 천국으로 이끌기를 원하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죽음 직후에는 특별히 천적 천사들이 함께하며, 인간이 두려움과 혼란 속에 빠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악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다만 중요한 차이는 그다음부터 점점 드러납니다. 선한 사람은 그 천사적influx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친근함을 느끼며 점점 더 열립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그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천사들의love와innocence atmosphere자체가, 자기 사랑과 증오와 지배욕 안에 있는 영에게는 점점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이런 표현을 씁니다. 천국의 공기 자체가 악한 영에게는 숨 막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들을 밀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affection구조가 그 사랑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밝은 빛이 건강한 눈에는 아름답지만, 병든 눈에는 고통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죽음 직후의 초기 돌봄은 거의universal합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처음부터 냉혹하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인조차 가능한 한 평화롭게 새로운 상태로 옮겨지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은 점점 자기 진짜love와delight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과 가장 잘 맞는 영적 공동체를 스스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 점이 스베덴보리 지옥론의 핵심입니다. 그는 지옥을 ‘하나님이 화나서 집어넣는 감옥’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끝까지 붙든love의 방향이 결국 그 사람의 세계가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결국 천국을 싫어하게 되고, 자기들과 비슷한affection이 있는 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므로AC.171의 극진한 배려와 보호는 악인에게도 처음에는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다릅니다. 선한 사람은 그것 안에서 살아나고, 악한 사람은 점점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 합니다. 그러나 그 시작 자체에는 여전히 주님의 자비와 보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