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1:29)

 

AC.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입니다. ‘열매(fruit)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씨(seed producing fruit)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음식을 나무의 열매로 부른다는 사실은, 다음 장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만 인용합니다. The “herb bearing seed” 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 “tree in which is fruit” is the good of faith; “fruit” 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 “seed producing fruit” 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the sanctuary)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에게 음식이 될 지혜이고, ‘(the leaf)은 쓰임을 위한 지성입니다. 이 쓰임을 ‘(medicine)이라 합니다. 반면 영적인 음식을 ‘(herb)이라 한다는 점은 시편에서도 분명합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 “sanctuary.” “Fruit” 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 “leaf” 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 “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 “herb,” 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 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해설

 

이 글은 앞선 AC.56에서 말한 ‘영적 인간의 음식’을 한층 더 정밀하게 풀어 줍니다. 핵심은 ‘같은 생명이라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주어지는 양식의 형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풀, 나무, 씨, 열매라는 식물의 세부 이미지를 통해 영적, 천적 차이를 구분합니다.

 

먼저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정의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쓰임’입니다. 진리가 진리로 머무르지 않고, 삶에 적용되고 이웃과 교회를 향해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이라고 합니다. 풀은 먹을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지만, 아직 열매를 맺는 나무만큼 깊은 근원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반면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이라고 합니다. 선은 더 이상 쓰임을 향한 방향성에 머무르지 않고, ‘삶 그 자체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선은 나무이고, 그 결과는 열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구분합니다. 열매 자체는 천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영적 인간에게는 아직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선의 가능성을 지닌 상태이지, 선 그 자체에 완전히 거한 상태는 아닙니다.

 

이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바로 에스겔 4712절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으로 인해 온 땅이 회복되고 생명이 충만해지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AC의 관점에서 성소는 언제나 주님 자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입니다. 이 물로 인해 자라는 나무들은 인간 안에서 자라는 생명의 원리들입니다.

 

이 본문에서 열매와 잎이 구분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열매는 ‘지혜’로 해설되고, 잎은 ‘지성’으로 해설됩니다. 지혜는 삶 그 자체와 결합한 진리이며, 그래서 ‘음식’이 됩니다. 반면 지성은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삶을 직접 살게 하지는 않지만, 삶을 보호하고 회복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잎을 ‘’이라고 합니다. 즉 지성은 생명을 낳기보다는, 생명이 병들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천적 인간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음식은 ‘열매’입니다. 그는 진리를 이해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지혜로 삽니다. 그래서 그의 양식은 나무에서 맺힌 열매이며, 그 열매는 달마다 새로워집니다. 이는 천적 상태의 생명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로 불린다는 점은 시편 23편에서 확인됩니다. ‘푸른 풀밭’은 단순한 위로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적 인간이 진리의 양식을 공급받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풀밭은 방목지이며, 여기서 양은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는 영적 인간이 여전히 인도를 필요로 하며, 진리를 통해 방향을 잡아 가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라도, 영적 인간에게는 ,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로 주어집니다. 풀은 쓰임을 향한 진리이고, 열매는 삶이 된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은 여전히 성장 중이고, 천적 인간은 사랑 안에 거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는 음식을 주십니다.

 

 

 

AC.56,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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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1:29)

 

AC.56

 

천적 인간은 오직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천적 음식(celestial food)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이것들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므로 이르기를 ‘영적 음식(spiritual food)이라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는데, 이것들은 그의 삶에 속하므로 이르기를 ‘음식(food), 곧 ‘먹을거리’라 하며, 주로 기억-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음식을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로 묘사되며,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 합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 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 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 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 bearing seed,” and by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 yielding seed.” 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이 글은 인간을 ‘천적 인간영적 인간자연적 인간’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의 인간이 무엇을 ‘먹을거리’, 곧 ‘음식’으로 삼아 살아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음식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기쁘게 하는 것’, 곧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핵심 개념입니다.

 

먼저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합니다. 천적인 것들이란 사랑 그 자체,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더 이상 진리를 통해 매개되지 않고, 삶과 즉각적으로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천적 음식’이라 합니다. 음식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져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삶과 완전히 합치되어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인간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것들, 곧 진리와 신앙의 내용으로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 진리들은 아직 사랑 그 자체는 아니며, 사랑과 결합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가리켜 ‘영적 음식’이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영적 음식 역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음식이라 불린다는 점입니다. 즉 단순히 많이 아는 지식이나 교리라면 음식이 될 수 없고, ‘삶과 연결될 때만 음식’이 됩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즐거움이나 세상적 관심만을 뜻하지는 않지만, 주로 기억-지식, 곧 외부 세계에서 축적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기억-지식들 역시 ‘음식’이라 부르는데, 이는 자연적 인간에게 그것들이 실제로 삶의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음식은 가장 바깥층의 음식이며, 그 자체로는 영적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영적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식은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창세기의 표상 언어를 통해 설명됩니다.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와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모두 ‘생명이 있지만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풀은 자라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아직 천적 사랑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씨를 맺는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씨는 앞으로 더 자랄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즉 영적 인간의 음식은 단순히 현재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장차 더 깊은 생명으로 나아갈 잠재력’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음식들은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불립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일부러 말을 멈추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자연적 음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된다고 밝힘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의 삶과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계속 따라오게 만듭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질서가 인간 내면의 질서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구성입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먹고 살지만,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이 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을 먹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먹으며, 자연적 인간은 기억-지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이란,먹는 음식이 점점 바뀌는 과정입니다.

 

 

 

AC.57, 창1:29, ‘받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양식’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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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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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현, 그러니까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같은 수동 표현이 거의 다인데요, 이걸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처럼 능동 표현으로 바꾸면 무슨 큰 오류일까요? 여기 AC에서는 왜 거의 다 수동 표현을 쓰나요?

 

 

먼저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었을 때’를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로 바꾸는 것이 ‘즉각적인 이단이나 결정적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표현 하나로 인해, 스베덴보리가 AC(Arcana Coelestia) 전체에서 지키고자 한 ‘인간 이해의 중심축’이 미세하나마 분명하게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문법이 아니라 ‘주체가 어디로 이동하느냐’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서 결합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결합했다’는 표현은, 어떤 주체가 의도적으로 두 요소를 묶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생각과 행동을 결합했다’,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다’ 같은 말은 모두 ‘인간의 능동적 작업’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AC에서 말하는 신앙과 사랑, 이해력과 의지의 결합은 그런 종류의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시도해서 성취하는 통합’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내적 질서의 재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합을 언제나 ‘사건’이 아니라 ‘상태’로 말합니다. 결합은 어떤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오랜 준비, 유입, 허용, 정렬의 결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에서 ‘결합되었다’는 표현은, 인간이 무엇을 했다는 느낌을 최대한 제거하고, 변화된 상태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 영어와 라틴어에서 수동 표현은 주체를 감추기 위한 문법이 아니라, 주체를 보존하기 위한 문법입니다.

 

AC의 원문인 라틴어를 보면, 스베덴보리는 굳이 능동으로 쓸 수 있는 자리에서도 반복해서 수동이나 비인칭 구조를 선택합니다. 이는 문체상의 습관이 아니라, 명백한 신학적 선택입니다. 그는 인간이 ‘무엇을 한다’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proprium’(자기 본성)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과 질서의 실제 작용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 신학적 긴장을 문장 구조 속에 그대로 심어 놓은 것이 바로 AC의 수동 표현들입니다.

 

셋째, ‘is conjoined’, ‘is vivified’, ‘is regenerated 같은 영어 표현은 단순한 문법 선택이 아니라, ‘비인칭 신적 작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수동 표현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적습니다. 영어 독자는 ‘is conjoined’를 보며 ‘누가 했지?’를 묻기보다, ‘, 이런 상태가 되었구나’라고 읽습니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결합되었다’라는 표현은 다소 딱딱한 대신, ‘결합했다’라는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번역자는 늘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AC의 영어 수동은, 단순히 ‘자연스러운 표현’을 택한 결과가 아니라, ‘독자의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 훈련시키는 장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조차, ‘내가 했다’는 생각보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넷째, 그렇다면 능동 표현은 언제 문제가 되고, 언제 허용될까요? 핵심 기준은 이것입니다. 그 문장이 행위의 근원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위의 현상을 말하고 있는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생명의 부여, 거듭남, 조명, 인도와 같은 표현은 모두 ‘행위의 근원’을 다룹니다. 이 경우 능동으로 바꾸면, 인간이 그 근원의 주체인 것처럼 읽힐 위험이 큽니다. 반면 ‘그는 말한다’, ‘그는 행한다’, ‘그는 분별한다’처럼 이미 생겨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할 때는 능동 표현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에서 말한다’는 표현은 비교적 안전하지만, ‘신앙과 사랑이 결합했다’는 표현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전자는 ‘표현의 방향’이고, 후자는 ‘존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렇다고 해서 번역에서 항상 수동만 고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번역 본문과 해설, 설교는 동일한 언어 공간이 아닙니다.’

 

번역 본문은 독자가 아직 구조를 모를 가능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동을 유지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반면 해설이나 설교에서는 이미 주체가 누구인지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능동 표현을 사용해도 오해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수동만 쓰면 한국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독자가 내용을 따라오기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균형이 가장 좋습니다. 본문 번역에서는 ‘결합되었을 때’를 유지하고, 해설에서는 ‘결합했을 때’라고 말하되, 한 번쯤은 ‘이 결합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라고 짚어 주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에서 수동 표현은 문법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 훈련입니다.’ 독자가 문장을 읽는 동안에도, ‘내가 주체다가 아니라 나는 수용자다라는 감각 안에 머물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결합되었다’를 ‘결합했다’로 바꾸는 것이 당장 큰 오류는 아니지만, 그 방향이 반복되면 AC 전체의 호흡, 즉 ‘주님 중심–인간 수용자 중심이라는 축’이 서서히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1에 나오는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창1:26에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창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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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8)

 

AC.55

 

태고의 사람들은 이해력과 의지, 곧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 했기 때문에, 그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의 모든 것은 ‘생육(fruitfulness)이라 했고, 진리의 모든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표현들이 사용되는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 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36:11, 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서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합니다. 이 본문에서 진리에 속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언급되고, 선에 속한 ‘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 multiplications을 번성으로 번역, 서로 다른 영어를 같은 한글 단어로 번역한 바람에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이 그다음에 언급되는 이유는,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 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력이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 married land,” as in Isaiah: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 결합에서 나오는 진리의 열매들을 ‘아들(sons)이라 하고, 선의 열매들을 ‘(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는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 ‘가득 차게 된다(replenished)는 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그에게 역사하실 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 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A 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의 선을 뜻하는데, 그것이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다(the least of all seeds)고들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가 하는 선을 자기한테서 난 거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한테서 나는 건 실상 악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남의 상태 중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선이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작은 선, 보잘것없어 보이는 선일지라도 말입니다. A “grain of mustard 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 least of all 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 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것은 크게 자라 ‘(an herb)이 되고,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a tree)가 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the birds of the heavens), 곧 진리들,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데(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이 가지들은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일 때, 그리고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에는 전투 상태에 있기 때문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 of the 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 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에서 말한 ‘결혼’ 개념을 한 단계 더 확장합니다. 결혼은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었고, 이제 이 결합에서 ‘무엇이 산출, 곧 나오는가’가 주제가 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이 결합에서 나오는 결과를 매우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선에서 나오는 것은 ‘생육(fruitfulness), 곧 열매 맺음이라 했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은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했습니다. 즉 열매 맺음은 질의 문제이고, 번성함은 양의 문제입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인간 내적 과정에 대한 정밀한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은 사랑에 속하고, 사랑은 생명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선은 ‘열매’로 표현됩니다. 반면 진리는 이해력에 속하고, 이해력은 분별하고 확장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번성’으로 표현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지만, 작용 방식은 다릅니다.

 

에스겔의 본문에서 ‘수가 많음(multiplication)이 먼저 나오고, ‘번성(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글이 이미 거듭난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고 있는 상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진리가 먼저 늘어납니다. 사람은 먼저 알아야 하고, 분별해야 하며, 진리의 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다음에야 선이 그 진리 안에 들어와 생명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언어에서는 진리가 먼저, 선이 나중에 나옵니다.

 

이해력과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결합했을 때, 그 사람을 ‘결혼한 땅’이라 합니다. 여기서 땅은 언제나 인간을 뜻하며, 특히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하나로 정렬된 상태를 뜻합니다. 땅이 결혼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갈라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때 인간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처가 됩니다.

 

이 결합에서 나오는 산출물의 명명법도 매우 일관됩니다. 진리에서 나온 것은 ‘아들’, 선에서 나온 것은 ‘’이라 합니다. 이는 성별 개념이 아니라, ‘출처의 차이’를 말하는 언어입니다. 이해력에서 나온 것은 아들이고, 의지에서 나온 것은 딸입니다. 말씀에서 교회가 딸이나 처녀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 이전에 선의 애정으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이 전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의 선은 가장 작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은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작은 선은 자랍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풀로, 나무로 자라고, 마침내 그 안에 수많은 진리, 이해력의 내용들이 깃들게 됩니다. 기억-지식은 이때 비로소 살아 있는 가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영적 인간의 상태를 ‘전투’로 규정합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지배욕이나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의 언어’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들과의 긴장과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 싸움 속에서 진리와 선은 점점 더 결합하고, 인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용 구절 해설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36:11, 12)

 

위 구절은 문자 그대로는 ‘폐허가 된 땅이 다시 사람과 가축으로 가득 차고, 옛날처럼 회복된다’는 회복 예언처럼 보이지만, AC.55의 맥락에서는 ‘거듭남’의 내부 과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보여 주는 대표 구절로 읽힙니다.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겠다’에서 ‘사람’은 영적 인간,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을 받아 ‘이해력’ 중심으로 깨어나는 상태를 뜻하고, ‘짐승’은 의지의 영역, 즉 애정과 사랑의 영역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본문은 ‘수가 많고(multiply)번성하게 하겠다(be fruitful)를 함께 말하지만, AC.55는 이 순서를 의도적으로 잡아 ‘진리의 증가가 먼저, 선의 결실은 그다음’이라고 읽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될 때, 사람은 먼저 진리(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길인지)를 배우고, 분별하며, 기억 안에 쌓습니다. 그다음에야 그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좋아지고’, ‘원하고’, ‘행하고 싶은 것’이 되면서 선으로 열매 맺습니다. 그래서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는 ‘지식의 증가’가 먼저 나타나고, ‘성품의 변화’는 그다음에 나타납니다. 또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의 상태, 즉 내적 결혼(이해력과 의지의 하나 됨)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던 상태를 가리키고, ‘처음(beginnings)은 홍수 이후 고대교회, 곧 외적인 것이 더 강해져 진리를 통해 길을 찾아야 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예언은 단지 역사적 회복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 진리와 선을 다시 심으셔서, 옛 질서처럼 살게 하신다’는 거듭남의 약속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62:4)

 

위 구절은 AC.55에서 ‘결혼한 땅’이라는 강렬한 표현을 제공하는 구절인데, 이 말은 낭만적 비유가 아니라 ‘분열된 내면의 통합’에 대한 선언입니다.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내적 의미에서 ‘겉 사람(삶, 습관, 감정의 반응, 선택의 자리)’이 더 이상 메마른 수동적 터전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자라는 토양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뀝니다. ‘헵시바(my delight is in her)는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방향성이 그 안에 생겼다’는 뜻이고, ‘쁄라(married)는 이해력과 의지가 더 이상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삶으로 묶였다는 뜻입니다. 이사야가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듭남이 단지 머리로 아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자리(땅)’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담아내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한 땅’은 ‘교리적으로는 옳은데 삶이 안 따라오는’ 분열 상태의 반대편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보는데 의지가 반대로 끌어당기는 상태에서는 ‘황무지’입니다. 반대로 이해력이 보는 진리를 의지가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에서는 그 땅이 ‘결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성도들에게도 아주 직접적으로 적용됩니다. ‘내 생각은 신앙을 말하는데 내 습관과 욕구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상태’가 황무지라면, ‘말과 선택이 같은 방향으로 묶이는 상태’가 결혼한 땅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1, 32)

 

위 구절의 겨자씨 비유는 AC.55가 말하는 ‘증가와 결실’의 과정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살아 있는 선의 시작’을 뜻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왜 가장 작은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는 한, 그 선은 가장 작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선 안에는 여전히 자기 공로, 자기 의(내가 했다), 자기 중심의 기쁨이 섞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선이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작 단계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고, 주님은 그 단계의 ‘작은 선’도 씨앗으로 삼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란 후에는’이라는 과정 언어가 붙습니다. 진리가 늘고(번성),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열매 맺음) 둘이 결합하면 작은 씨가 풀(herb)이 되고, 마침내 나무(tree)가 됩니다. 나무가 되었다는 말은 ‘결합이 안정된 상태’, 즉 사랑이 주도권을 잡아 진리들이 그 사랑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라는 말은, ‘이해력에 속한 것들(진리들, 통찰들)이 풍성해지고, 그것들이 기억-지식(가지) 안에 정착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즉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지식이 단지 머릿속 정보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구조물처럼 자리를 잡습니다. 예전에는 같은 성경 지식이라도 ‘논쟁거리’이거나 ‘기억된 문장’에 머물렀다면, 결합 이후에는 그 지식이 ‘살아 있는 가지’가 되어 새들이 깃들 듯 자연스럽게 쓰임을 얻습니다.

 

 

이 세 구절을 한 흐름으로 묶으면, AC.55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 선명해집니다. 에스겔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에게서 왜 번성이 먼저이고 열매 맺음이 그다음인지 보여 주고, 이사야는 그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를 ‘결혼한 땅’이라 부르며, 마태는 그 결합이 어떻게 ‘작은 시작에서 큰 생명 체계로 성장하는지’를 씨앗의 성장으로 보여 줍니다. 그래서 ‘번성’과 ‘열매 맺음’은 단지 좋은 결과를 말하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는 실제 과정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 안에서는 늘 전투가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난 것처럼 느끼는 선’을 주님께로 돌려 드리고, 진리를 사랑으로 내려보내어, 이해력과 의지가 한 방향으로 묶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의 결과가 바로 ‘황무지에서 결혼한 땅으로’의 변화이고, ‘작은 겨자씨에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의 성장입니다.

 

 

 

AC.56,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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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의 속뜻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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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천상의 결혼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력을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the 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the 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 제도로 읽지 않고, ‘인간의 내적 구조의 언어’로 읽도록 이끕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외적 성별로 보기 이전에,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의 관계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상실되면서, 이 깊은 인식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태고교회에서 결혼이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결혼을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천국 결혼은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의 결합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이 결합을 직접 체험했고, 그래서 결혼은 그 자체로 기쁨이자 영적 인식의 창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에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사물을 보되,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표지와 통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곧 겉의 것들은 생각을 내적인 것들, 곧 속에 속한 것들로, 그다음에는 천적인 것들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로 이끄는 계단이었습니다. 이 구조 안에서 결혼 역시 외적 관계를 넘어, 천상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명확히 정의합니다. 이해력은 남자이고, 의지는 여자입니다. 이는 우열이나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 상응’입니다. 이해력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며 비추는 역할을 하고, 의지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 생명으로 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둘이 따로 움직일 때는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를 비로소 ‘결혼’이라 합니다.

 

이 결혼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이해력에서 본 진리가 의지에서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 안에 내적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 구조이며, 앞선 단락들에서 말해 온 형상과 모양의 완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인류 번성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또한 성경 전체에 퍼져 있는 중요한 언어 습관의 뿌리를 설명합니다. 교회를 ‘’, ‘처녀’, ‘아내’로 부르는 표현은 단순한 시적 장치가 아니라, 교회를 ‘선에 대한 애정의 주체’로 보았기 때문에 생겨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집단이기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내’이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혼의 언어로 묘사됩니다.



 

핵심 개념 정리

 

이 글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속뜻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이해력, 여자는 의지이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인간 안에 결혼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결혼은 인간적 발명이 아니라, ‘천국 결혼의 반영’이며, 그 궁극적 근원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결혼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유는, 그들이 그 결혼을 통해 단지 서로를 사랑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세기 1장의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시대에 묶인 문장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 구조의 계시로 다가옵니다.

 

 

 

AC.55,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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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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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력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 “image” 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 “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 “image of God.”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학의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해 놓은 단락입니다. 여기 ‘형상’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단순한 문체상의 반복이 아니라, ‘인간 안에 두 중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두 중심이 바로 이해력과 의지이며, 각각 신앙과 사랑의 자리입니다.

 

먼저 이해력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이라 하는 건, 영적 인간이 아직 ‘주님을 바라보고 닮아 가는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신앙은 진리를 통해 주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며, 삶을 그에 맞추려는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여전히 ‘형상’ 안에 있지만, 그 형상은 아직 완성된 닮음, 모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표현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기 형상’에 머뭅니다.

 

반면 의지에 속한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립니다. 이는 사랑이 주님의 본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는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인간 안에서 주도권을 가질 때, 인간은 단순히 주님을 닮아 가는 존재를 넘어,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작동하는 형식’이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 글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다시 한번 ‘순서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그다음에 옵니다. 그는 먼저 옳고 그름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사랑을 형성해 갑니다. 그래서 사랑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거듭남의 필수 단계이며,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강하게 작동하는 구간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순서가 바뀝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는 더 이상 ‘이것이 옳은가’를 계산하지 않고, ‘사랑에서 나온 것이 곧 옳은 것’이 됩니다. 이때 이해력은 의지를 통제하지 않고, 의지를 밝히는 빛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앞서고’, 신앙은 그 사랑을 설명하고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이 글이 말하는 ‘형상’의 이중 언급은, 인간 안에 두 개의 형상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형상이 ‘성장하고 깊어지는 두 단계’를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신앙의 형상으로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의 형상으로 완성됩니다. 이 전환점이 바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본문 심화 해설

 

이 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스베덴보리가 결코 신앙을 경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해력에 속한 신앙도 분명히 ‘형상’입니다. 즉 그것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인간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그 형상은 아직 ‘매개적 형상’입니다. 진리를 통해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매개가 아닙니다. 사랑은 직접적인 결합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주도권을 잡을 때, 형상은 더 이상 ‘자기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라 불립니다. 이는 인간이 신격화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서 왜곡 없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이 구조를 놓치면, ‘왜 형상을 두 번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해력–의지, 신앙–사랑, 영적 인간–천적 인간이라는 축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짧은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인간 구조도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AC.52, 창1:26, ‘사람이 영적이면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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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이 언급되고, 그다음에 ‘(fowl), 그리고 그 뒤에 ‘바다의 물고기(the fish of the sea)가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력과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와 ‘(fowl)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이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 “beasts” are first mentioned, and then “fowl,” and afterwards the “fish of the sea,” 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 “fishes” and “fowl” 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 “beasts.”

 

 

해설

 

이 글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다스림의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두 사람 모두 다스림을 받으며, 또한 다스림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향하는가’가 전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바로 형상과 모양, 영적 상태와 천적 상태를 가르는 핵심 기준입니다.

 

영적 인간은 아직 겉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이해력과 신앙을 통해 삶을 정돈해 갑니다. 그래서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다음에 사랑과 행위가 뒤따릅니다. 이 구조에서는 이해력에 속한 것들이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짐승’, 곧 의지와 애정의 영역이 나옵니다. 이 다스림은 위로 올라가려는 다스림이며, 질서를 세워 가는 다스림입니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방향은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겉 사람에서 출발한다는 말은, 여전히 외적 사고와 분별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태도 거듭남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를 낮추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스림의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제는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다스림이 흘러갑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을 묘사할 때는 ‘짐승’, 곧 애정과 사랑의 영역이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그다음에 ‘’, 그리고 마지막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이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끌고, 이해력과 지식은 그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의 다스림이 ‘강압이나 통제가 아니라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듯, 만물이 ‘발 아래’ 놓인다는 표현은 억압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것들까지도 사랑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즉 감각, 습관, 기억, 일상의 행동까지도 사랑에서 흘러나온 방향에 맞게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통해 인간 삶의 근본 구조를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은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묻고, 천적 인간은 ‘무엇이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가’를 살아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분별과 훈련이 중요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일치와 평안이 특징이 됩니다.

 

결국 이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스림의 완성은, 이해력이 의지를 다스리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이해력을 밝히고 인도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닮음’, 곧 ‘모양’의 상태이며, 주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서 가장 깊이 실현된 모습입니다.



 

인용구절 해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이 시편은 문자적으로 보면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노래하는 찬가입니다. 그러나 AC.52에서는 이 구절이 단순히 ‘인간 일반’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그분의 닮음, 모양인 천적 인간’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다스림은 오직 사랑에서 나오며, 그 사랑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말은, 주님께서 신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움직이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발 아래 두셨다’는 표현은, 가장 낮은 차원의 것들조차 그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억압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조화’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나열 순서입니다. 시편에서는 먼저 양 떼와 가축, 곧 애정과 사랑에 해당하는 것들이 나오고, 그다음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이는 천적인 상태의 질서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사랑이 먼저 서고, 이해력과 지식은 그 사랑을 섬깁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의 다스림이며, 주님의 다스림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이 AC.52에서 인용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의 ‘다스림’이 단순한 인간 우월 선언이 아니라, ‘거듭남의 단계에 따른 내적 질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위로 향한 다스림이 필요하고, 천적 단계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다스림이 완성됩니다.

 

 

 

AC.51, 창1:26, 영적 인간은 ‘형상’(an image), 천적 인간은 ‘모양’(a 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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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1

 

형상(the image)에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a likeness) 그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an 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a likeness), 곧 닮음(similitude)입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an image)인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a 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또한 ‘친구(a friend)라고도 하십니다.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모양(a likeness),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a 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4, 헬라어는 ἐξ 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 AC.374 [3]번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 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매우 정밀하게 분해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상’과 ‘모양’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의도적으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 모양은 ‘완성된 일치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형상’대로 창조되지만, 곧바로 ‘모양’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이 구분은 인간의 거듭남 구조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주님을 닮아 가는 상태에 있고,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되어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은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크지만, 단절이 아니라 연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형상’만 말하고, ‘모양’은 다음 단계로 남겨 둡니다. 이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생명이 온전히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 글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각각 다른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이 호칭들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나타냅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 사람이 여전히 빛에 의해 인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은 여전히 위에서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라’, ‘걸으라’라는 표현이 함께 나옵니다. 이는 아직 ‘의식적 선택과 분별이 필요한 상태’임을 뜻합니다.

 

또한 영적 인간을 ‘친구’라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란, 명령을 이해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즉,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친구이지, 아들은 아닙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립니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자녀, 곧 아들은 명령을 외부에서 받아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혈통이나 인간적 의지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은 형상으로서 주님을 닮아 가는 중이며, 천적인 사람, 곧 천적 인간은 닮음으로서 주님과 일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다른 인간 유형이 아니라, 거듭남의 서로 다른 깊이를 나타냅니다.



 

인용구절 해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이 구절에서 ‘’은 진리이며, 더 정확히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조명’입니다. ‘어둠에 다닌다’는 것은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빛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빛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믿으라’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이는 영적인 상태가 ‘지속적인 선택과 응답을 요구하는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 사람이 빛으로부터 태어났고, 빛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빛은 ‘근원’이 아니라 ‘비춤’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여기서 ‘친구’라는 말은 단순한 친밀감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의식적 동의와 이해가 가능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은 더 이상 종처럼 명령만 내리지 않으시고, 뜻을 설명하시며, 그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세우십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뜻을 듣고,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뜻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2, 13)

 

이 구절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모든 자연적 근원들이 부정됩니다.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은 모두 배제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더 이상 자기중심의 생명에서 살지 않음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가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와 그 사람의 본성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빛을 믿으라’는 권면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빛 안에 있으며, 빛과 함께 움직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닮음이라고도 하는 ‘모양’, 곧 주님의 형상과의 일치입니다.

 

 

정리하면, ‘형상은 길 위에 있는 상태이고, 모양은 그 길이 삶이 된 상태’입니다. AC.51은 이 차이를 성경 전체와 연결하여 가장 정교하게 설명하는 단락 중 하나입니다.

 

 

 

AC.52, 창1:26, ‘사람이 영적이면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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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우리의 형상'(the image of the Lord)의 속뜻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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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0

 

태고교회는 ‘주의 형상(the image of the Lord)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계를 통한 소통과, 천국을 통한 소통, 그리고 그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는 구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후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사람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천사들은 함께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이 가장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만 않도록 막아 주며, 그의 본성적 욕구를 통해서는 선으로, 감각의 오류를 통해서는 진리 쪽으로 향하게 할 뿐입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이 그 지배를 겨우 막고 있는 상태이므로, 천국과의 소통은 매우 미약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며,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고,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천사들이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고, 곧이어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지만, 다스림과 창조의 주체는 오직 주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도 이 점을 이사야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 자신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으며, 오직 주님한테서 나오는 그분의 힘으로만 자기들은 일한다고 고백합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이 글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인간의 외형이나 도덕성 차원이 아니라, ‘영적 통치 구조’의 관점에서 풀어 줍니다. 태고교회가 ‘주의 형상’을 매우 깊이 이해했다는 말은, 그들이 인간의 생명이 어디서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퍼셉션을 통해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주님–천국–천사–영계–인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연결이 끊기면 인간은 단순히 약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가 유지되지를 않습니다.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진술 중 하나는, 사람이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비주의적 주장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일상적인 구조’입니다. 인간은 감각적으로는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연결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 조건’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치는 ‘악한 영들의 우세’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 글은 인간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존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강하게 작용할 때에도 천사들은 함께 있으며,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때 천사들이 사용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적 욕구와 감각의 오류를 통해서라도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힙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의 현재 상태를 무시하지 않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거듭남 이후에는 통치의 중심이 바뀝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작용하며,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적극적으로 불어넣습니다. 특히 악과 거짓에 대해 ‘두려움과 혐오’가 생긴다는 설명은 중요합니다. 이는 외적 규율이나 공포심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더 이상 악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거부감이 생기는 상태가 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천사들을 통치의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철저히 ‘사역자’이며, 통치의 실제 주체는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복수형과 단수형이 함께 사용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형상대로’라는 표현은 천사들의 사역을 포함한 통치 구조를 드러내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단수 표현은 ‘권능과 주권의 단일성’을 분명히 합니다.

 

이 글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그 통치는 천사들과 영들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생각과 의지, 감정과 선택까지 질서 있게 이끕니다. 태고교회가 이해했던 ‘주의 형상’은 바로 이 살아 있는 연결 구조였습니다.



 

인용구절 해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여호와가 유일한 창조주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AC.50의 맥락에서 이 말씀은 단순한 창조 신앙 고백이 아니라, ‘영적 통치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다’는 말은, 천사들이 실제로 많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작용의 근원이 주님 한 분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인간이 천사들의 사역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을 천사들의 능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사들 자신도 이 사실을 가장 분명히 알고 있으며, 스스로에게는 아무 힘도 없고 오직 주님한테서만 능력이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천사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완전히 의존하는 질서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AC.51, 창1:26, 영적 인간은 ‘형상’(an image), 천적 인간은 ‘모양’(a 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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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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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가 인용한 구절들(4:23, 25 / 45:11-12 / 1:26 / 7:13-14 / 24:30)을 ‘사람’과 ‘인자’의 의미, 그리고 문자 의미와 속뜻의 관계라는 큰 축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간론, 기독론, 말씀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매우 높은 밀도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사실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주님에게서 유입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 불렀습니다. 즉 ‘사람’이란 내 안에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는 상태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점이 서면, 예언서와 복음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결정적인 지점마다 등장하는지 비로소 맥이 잡힙니다.

 

4:23, 25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나라의 황폐, 질서 붕괴, 심판의 참상을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AC.49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단순한 인구의 멸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사람됨’이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사람됨은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유입되어 마음(의지와 이해력)의 질서로 자리 잡은 상태인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의 빛이 꺼지면, 즉 이러한 사람됨이 사라지면 겉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속뜻으로는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들은 이성적, 지적인 것, 곧 이해력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며, 새가 날아갔다는 말은 이해력이 진리의 빛에서 이탈하여 더 이상 위를 향해 날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공허와 흑암’ 상태, 혹은 교회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본문이 됩니다.

 

45:11-12에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문자 의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AC의 큰 흐름에서는 ‘창조하다, 만들다, 빚다’ 같은 표현이 예언서에서 자주 ‘거듭남’과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곧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은 생물학적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참된 사람됨’의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단수로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원형은 하나’라는 진술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람됨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만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래서 최고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속뜻으로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주님의 형상을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그 창조가 곧 새 창조, 즉 거듭남으로 번역됩니다.

 

1:26의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는, 왜 주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증거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환상 언어이며, 인간이 신적 현실을 직접 담아낼 수 없기에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9의 논지는 거꾸로 갑니다. 주님이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과 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상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형상과 연결된 결과이며, 그 형상이 ‘보좌’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사람 같은 형상’이 가장 높은 자리인 보좌 위에 놓이는 것은, ‘사람됨’이 곧 신적 통치의 본질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자기 호칭과 직결됩니다. AC.49는 여기서 ‘인자’가 사실상 ‘사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전면에 세웁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그 통치가 영원하다고 말할 때, 속뜻은 ‘한 인간 지도자가 영원한 제국을 세운다’가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으로서,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후에 마24:30과 연결되며, ‘구름’이 말씀의 문자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사람’, 곧 인자로 인식되십니다. 그래서 인자 환상은 종말론적 장면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한 근본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24:30의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구절도, AC.49에서는 단순한 미래 사건의 예언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구름’은 문자, ‘능력과 큰 영광’은 속뜻이라는 해석이 들어오면, 이 말씀은 곧 ‘문자 의미가 매개가 되어 속뜻이 열릴 때, 주님이 인자로 오신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단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속뜻이 열리기 전에는 사람들은 문자 속에 가려진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이 ‘사람’이심도 흐릿하게만 압니다. 그러나 속뜻이 열리면, 그 속뜻이 가리키는 바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기서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즉 속뜻의 능력은 정보량이나 지적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연결되는 데서 나옵니다.

 

이 모든 인용 구절이 합쳐져 AC.49가 세우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안에서 퍼셉션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지 인구의 부재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부재이며, ‘사람을 창조한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거듭남에 의한 새 창조입니다. 또 주님이 ‘사람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신적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자’의 구름-영광 언어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이 어떻게 연결되어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는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를 읽는 열쇠이자, 예수님이 왜 자신을 ‘인자’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말씀의 속뜻이 ‘능력과 영광’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핵심 답변을 한 덩어리 안에 담고 있는 글입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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