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Word)에 대해 알고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신학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사님의 태도에는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실제 태도를 기준으로 하나씩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이런 ‘배제 중심 태도’는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참 말씀(The Word in the proper sense)이 무엇인지, 어디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중심으로 영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첫째, 참된 말씀, 곧 창, 출, 시편 일부, 복음서, 계시록에 집중하며, 그 내적 의미를 계시, 둘째, 성경 전체, 곧 바울 서신을 포함해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는 모든 성경’을 존중하며,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 그는 AC.10325, TCR.226 등에서 ‘바울 서신은 말씀의 ‘inner sense(속뜻, arcana)를 가진 책은 아니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주님의 섭리로 주어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faith alone), 즉 ‘의롭다 함을 믿는 것만으로’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바울 서신 전체를 폐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믿음-사랑의 결합’을 바울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잘못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바울 자체 문제라기보다 ‘후대 교회의 해석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의 ‘목회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합니다. DP.234 등에서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 바울 서신을 통해 기본 윤리, 공동체 질서, 교리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 또한 주님의 섭리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신학을 따른다고 해서 바울을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참된 말씀’의 용도는 ‘영적 의미를 위해서’이다

 

지금 느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내적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텍스트가 모두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의 빛만 붙잡고 목회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AC.1408, AC.9025 등에서 밝히기를, ‘사람들은 외적 진리인 성경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진리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는 ‘성경 전체의 문자적 세계 안에 심어져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자적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의미의 기반을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사적으로 대화한 목회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는 문자적 말씀을 통해 접근하라’ 내적 의미를 설교자가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설교자 자신은 항상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그러면 설교의 어조, 초점, 균형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 서신도 영적 원리로 재해석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진리의 빛을 받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는 ‘배제가 아니라 재해석을 원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현재 모습은?

 

먼저, 좋은 면(강점)입니다. 내적 의미를 붙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있으시고, ‘참된 말씀’ 중심의 신학적 정렬이 매우 정확하시며, 설교의 중심을 주님(여호와 예수)으로 세우는 방향성이 강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귀하고 건강한 모습이요, 과정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면도 존재하는데요,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반인 문자적 성경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내적 의미를 나누기 전에 필요한 외적 질서가 무너질 위험’도 있으며, ‘바울 서신 등 교회 전통의 큰 기둥을 한 번에 없애는 효과’, ‘교회 분열과 오해, 배척을 불러오기 쉬움’ 등의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832에서 이런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의 상태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진리도 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듣는 자들의 역량에 맞춰 대부분 쉬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됨

 

1단계, 개인적으로는 참 말씀에 집중하라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이 단계에 매우 잘 맞습니다.

 

2단계, 설교에서는 ‘문자적 말씀’과 ‘내적 원리’를 혼합하라

 

문자적 말씀이 ‘뿌리와 줄기’라면, 내적 의미는 ‘열매와 향기’입니다. 뿌리와 줄기만 있어도 안 되고, 뿌리와 줄기 없이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3단계, 바울 서신도, 복음서나 시편 등 ‘말씀’의 빛을 비추어 ‘정화된 의미’만 사용하라

 

사용하되, 내적 의미의 원리로 걸러서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조언

 

지금처럼 ‘참 말씀 중심’으로 가시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비롯, ‘말씀’ 아닌 다른 성경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을 인도하는 데 이 성경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문자적 성경 전체가 사실 주님의 섭리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그 문자적 글도 결국은 ‘내적 의미의 문을 열어주는 외피’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 ‘건강한 길’은 문자적 말씀을 존중하면서 내적 의미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가장 안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가장 깊고 온전하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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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few)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scarcely).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거듭남(재창조, regeneration)의 현실을 가감 없이 알려 주는 글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일곱 단계(7)의 영적 순서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모든 단계를 ‘전부 거치는 사람은 극히 희귀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은 초기 단계에서 멈추거나, 중간 정도에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 자유, 습관, 삶의 조건들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첫 번째 상태란, AC.7에서 설명된 것처럼, 영적 무지, 공허, 깊은 어둠, 주님의 자비가 처음 작용하는 단계 등, ‘영적 시작점’에만 머물고, 그다음 단계로는 나아가질 못하고 있는 상황을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인의 현실을 정확히 말해 줍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두 번째 상태(AC.8)는, 주님의 것(리메인스)과 자기의 것(proprium)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구별이 삶 전체로 확장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예전 자연적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이 사람들은 다음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상태는, 회개, 겸손 및 선한 행동을 시작하고, 경건해지지만, 그러나 아직 선의 근원을 자신으로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두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에서 불붙기 시작하는 상태, 사랑과 신앙이라는 불이 속 사람 안에서 켜지는 상태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진리의 번성, 신앙으로 말하고, 선과 진리를 확증하며, 물고기와 새가 내적 생명을 갖는 상태입니다. 이 단계까지 오는 성도는 ‘상당히 깊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은 여기서 멈춥니다.

 

그리고 아주 적은(few)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여섯 번째 상태는, 창1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참된 선행(생기 있는 선), 신앙과 사랑의 결합, 영적 인간(image), 영적 음식으로 사는 삶, 자연적 욕망과 영적 사랑의 실제적 전투, 선의 지배가 시작되는 상태,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단순한 경건의 수준을 넘어 ‘내면에서 실제로 주님의 지배가 시작되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에 이르는 이들은 ‘아주 적다(few)고 합니다.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scarcely)

 

일곱 번째 상태는, ‘안식(peace), ‘내적 평화(shalom), ‘주님과의 합일’, ‘거듭남의 완성’, ‘천적 인간(celestial man)을 의미합니다. 이 단계는 ‘자기의 고유 본성(proprium)의 완전한 복종, 주님 사랑이 절대 지배권을 가진 상태이며, 주님의 뜻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scarcely)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성화 완성’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요약

 

지상에서 거듭남의 일곱 단계를 모두 통과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 대부분은 첫 단계에서 멈추고, 일부는 둘째 단계까지, 더 소수는 셋째, 넷째, 다섯째 단계까지 이르며, 여섯째 단계에 도달하는 이는 매우 적고, 일곱째 단계인 완성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신학적 정리

 

거듭남은 단계적이며,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적 시작점’에서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깊은 회개(3단계)와 영적 조명(4단계)을 경험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입니다. 진리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5단계는 큰 은혜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하는 6단계는 희귀하고, ‘생기 있는 선’(living good)이 실제로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7단계의 ‘평화’는 거듭남의 목적과 목표이지만, 지상에서 도달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각 사람이 ‘가능한 만큼’ 최대한 그 단계를 밟도록 인도하십니다.

 

 

 

AC.12, 창1, '여섯 번째 상태' (AC.6-15)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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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 지식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가리켜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그래서 바로 이 지점이 두 생명 간 싸움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 싸움은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4-31)

 

 

해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다섯 번째 상태(AC.11)가 ‘신앙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상태’였다면, 여섯 번째 상태(AC.12)는 ‘신앙(진리)으로, 그리고 더 깊게 그로 말미암아 사랑(선)으로 말과 행동이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신앙 → 체어리티 → 선한 행동’, 즉, 진리가 마음을 밝히고, 사랑이 의지를 움직이며, 그 결과 실천이 이루어지는 ‘완성된 구조, 순서’가 형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상태

 

이전 단계의 선행이 모두 ‘훈련 중’이었다면, 이 단계는 ‘영적 선행의 성숙한 완성기’입니다. 참된 말을 하고, 선을 행하며, 행동과 내면, 곧 겉과 속이 일치하고, 자기, 자아의 의도 대신 주님의 사랑이 의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단계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여기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말씀에 ‘가축’으로 번역된 ‘짐승’은 사람 안의 선한 애정들, 특히 ‘체어리티에 속한 감정들’, 그러니까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선한 기쁨들’을 말합니다. 역시 말씀에 ‘생물’로 번역된 ‘산 영’은 선한 애정과 진리의 결합, 즉,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한 움직임이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 곧 ‘가축’은 애정(affection)을, ‘산 영’, 곧 ‘생물’은 애정이 진리에 의해 질서화된 영적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여기까지 온 그를 가리켜 ‘영적 인간(spiritual man)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분류에 따르면, ‘천적(celestial) 인간은 사랑 중심, ‘영적(spiritual) 인간은 진리 중심, 그리고 ‘자연적(natural) 인간은 세상 중심인데요, 여섯 번째 상태는 이 분류에서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올라가는 문턱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형상(image)이라고 하는 걸까요?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영적 인간은 주님의 ‘진리’를, 천적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닮아서이지요. 그래서 영적 인간을 ‘주님의 형상(image)’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 지식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그래서 이런 것들을 가리켜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여기의 핵심은 영적 인간의 ‘양식’, 곧 그의 ‘먹을거리’는 신앙의 지식(진리)과 체어리티의 행위(선행)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영혼을 먹이고 기쁘게 하는 ‘참된 영적 음식’입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쁘게 유지되는데

 

이 말은, 그럼에도, 즉 이 단계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자연적 욕망과 외적 기쁨, 그리고 세상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둘, 곧 영적 기쁨과 자연적 기쁨, 혹은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은 서로 공존하며, 또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이 두 생명 간 싸움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 싸움이 바로 ‘영적 싸움(temptation, spiritual combat)입니다. ‘영적 전투’, 또는 ‘영적 전쟁’이라고도 하지요. 스베덴보리는 다음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참된 영적 싸움은 여섯 번째 상태에서만 일어난다. 그 이전의 유혹은 ‘진짜 유혹’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짜 싸움은 ‘사랑과 신앙이 이미 깨어난 다음’에 자연적 욕망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은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이 싸움의 목표는, ‘자연적 욕망을 정복하고, 속 사람 안에 있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여섯 번째 단계의 핵심’입니다.

 

그가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천적 인간(celestial man)은 창1아담’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닮았다면, 천적 인간은 ‘주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남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요약

 

여섯 번째 상태는 참된 거듭남이 도달해야 할 고지입니다. 신앙과 사랑에서 참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오며, 사람 안의 선한 애정(짐승)과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그 안에 형성됩니다. 그는 주님의 ‘형상’인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음식인 진리와 체어리티를 양식 삼아 자연적 욕망을 상대로 영적 사랑으로 싸웁니다. 이때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서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신학적 정리

 

참된 거듭남의 과정은 이 여섯 번째 단계에서 비로소 완성의 문턱에 선다. ‘형상’은 영적 인간, ‘모양’은 천적 인간에 해당한다. 진정한 영적 싸움은 사랑이 깨어난 상태에서만 일어난다.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이다. 짐승(선한 애정)과 산 영(영적 생명)의 개념은 영적 심리학의 핵심이다. 육체적 기쁨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도권을 잡기까지 질서화된다.

 

 

 

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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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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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해설

 

다섯 번째 상태는 창1다섯째 날’, 즉 ‘물고기와 새들이 등장하는 날’의 영적 의미입니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1:20-23)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전 단계(AC.10)에서는 사랑이 감동되고, 신앙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며, 두 광명체(해와 달)가 속 사람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여기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여기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말하고,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며, 진리에 의해 생각하고, 진리 자체가 사고의 원천이 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이전 단계에서는 경건한 말과 선행이 주로 시련이라든지 감정적 경건함, 혹은 억지춘향식 신앙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 자체가 내부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

 

여기서 말하는 ‘확증(confirm)은 다음을 뜻합니다. 곧 진리를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마음에 새겨 삶의 원칙으로 삼아 선과 진리를 스스로 지지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인격 안에 뿌리내리는 것 말이지요. 그러니까 ‘신앙의 확신이 내부에서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내적 인간, 곧 속 사람의 확증’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 선행과 말, 행동은 이전보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첫째, 이제 선행은 ‘자기’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에서 나온 것이며, 둘째, 그래서 그 선행은 ‘살아 있는 선(living good)이 됩니다. 셋째, ‘생기 있는 것(animated)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실제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단계의 선행은 단순한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이 깃든’ 선행입니다.

 

말씀에서는 이것들을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이라고 부릅니다

 

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에 나오는 수중 생물, 곧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다음을 상징합니다. 바다의 물고기는 감각적이고 지식적인 진리들, 외적 진리, 지식 기반의 이해 및 자연적 판단력, 그리고 말씀에 대한 외적 지식 등을 말이지요. 그런가 하면, 하늘의 새는 이해력에서 솟아오르는 생각들, 내적 사유, 영적 이해 및 고양된 사상,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 등, 그러니까, 바다의 물고기는 이해의 ‘낮은 단계’의 진리를, 하늘의 새는 이해의 ‘높은 단계’의 진리를 각각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이 ‘두 영역의 진리들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상태’가 되는 단계입니다.

 

요약

 

다섯 번째 상태는, 진리(신앙)로부터 말하고 생각하며, 그로 인해 선과 진리를 확신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때 사람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은 생명을 갖게 되며, 말씀에서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로 상징됩니다.

 

신학적 정리

 

속 사람의 신앙이 실제로 사고와 말에 작용하기 시작할 때가 바로 다섯 번째 단계입니다. 지식의 진리(물고기)와 직관적, 영적 진리(새)가 모두 살아나 움직입니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사람의 선행은 ‘생기 있는 선’(living good) 이 됩니다. 앞선 단계에서는 주로 감정적 경건이나 시련 속에서 행동했지만, 이제는 진리가 사람을 움직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내적 확증’(confirmation) 의 단계이며, 이것이 없으면 여섯 번째 상태(선의 성숙)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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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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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게 되며, 말씀에서는 이 둘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해설

 

이 글 AC.10은 거듭남의 ‘네 번째 단계’, 즉 창1 ‘넷째 날’인 해, 달, 별을 설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이전 단계(AC.9)에서 나타난 선행은 대체로 ‘나로부터’ 나온 줄 알고 한 ‘생기 없는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 대한 사랑(선)이 마음에서 실제로 불붙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체어리티가 진심으로 움직이며, 선한 행동을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게 됩니다. 즉, ‘사랑이 생겨난 것’입니다.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

 

여기서 신앙이란 ‘교리적 동의’가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진리 속에서 주님을 보는 마음, 진리가 나를 안내하는 빛이 되는 체험, 그리고 진리가 영혼의 눈을 밝히는 실제의 광명을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신앙의 내적 조명’을 체험합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스베덴보리는 매우 신중하게 말합니다. 이전 단계(회개의 단계)에서 나타난 경건한 말, 선한 행동도 분명 귀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진정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지

 

즉, 어려움, 슬픔, 절박함, 마음의 공허, 외적 곤궁 때문에 경건해지고 착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발적 선’이 아니라 ‘내적 압박 속에서의 선’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겉 사람의 선’이라 부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어떤 선을 그 근원을 ‘주님’으로 알고 행한 것이면 그 선은 ‘살아 있는 선’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알고 행한 것이면 그 선은 ‘생기 없는 선’이라고 말입니다. 전 단계에서의 선은 후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의 속 사람 안에서 타오르게 되며

 

이것은 거듭남 전 과정의 중대 전환점(turning point)입니다. 이전까지는 리메인스(유아기 기억), 회개, 시련, 약한 선행 같은 준비 단계였다면, 이제는 ‘속 사람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부터 선과 진리는 ‘나한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됩니다.

 

말씀에서는 이 둘을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부릅니다

 

1:14-19의 ‘해와 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해(sun)는 사랑(선, 체어리티), 달(moon)은 신앙(진리), 그리고 별들은 진리의 세부 항목들입니다. 빛을 내는 근원은 ‘사랑’(해)입니다. ‘신앙’(달)은 사랑의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해가 먼저, 즉 사랑이 우선하는 것이죠. 달은 해의 빛을 받아야만 빛나듯 신앙도 사랑으로라야 참 신앙인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사랑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내적 광명’을 경험합니다.

 

요약

 

네 번째 상태는 속 사람 안에서 사랑(체어리티)과 신앙(진리)이 실제로 타오르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전까지의 선행과 경건에는 생기가 없었으나,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빛으로 인해 참된 내적 선과 신앙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두 광명체’, 곧 해(사랑)와 달(신앙)입니다.

 

신학적 정리

 

참된 선은 사랑에서 나오며, 사랑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신앙은 사랑의 빛을 받아 비취는 것이며, 사랑 없이 신앙은 없다. 초기의 회개와 선행은 귀하지만, 종종 고난의 압력에서 나온 것이다. 속 사람에서 사랑과 신앙이 타오를 때, 비로소 ‘해와 달’이 생긴다. 이 단계는 거듭남의 ‘본격적 시작’이며, 이후 단계인 다섯째, 여섯째 날의 기초가 된다.

 

 

 

AC.11, 창1, '다섯 번째 상태' (AC.6-15)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부터 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때 그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갖게 되는데, 말씀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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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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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서 나온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선들은 아직은 생기가 없는(inanimate) 선들입니다. 이러한 선들을 말씀에서는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

 

앞의 AC.7이 첫 번째 상태, 즉 무지, 흑암 속에 주님의 자비가 처음 운행하신 상태이고, AC.8은 두 번째 상태, 즉 주님의 것인 리메인스와 자기 고유의 것이 구별되는 상태였다면, 여기 AC.9는 세 번째 상태, 곧 ‘회개(repentance)가 생겨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회개란 단순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죄를 ‘죄’로 인식하고, 선을 갈망하며, 말과 행동에서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시도’를 말합니다. 즉, 인간이 ‘속 사람의 빛’으로 자신의 상태를 보게 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속 사람이 깨어나면 다음과 같은 움직임들이 나타나는데요, 예를 들면, 기도를 하고 싶다, 성경을 경건하게 대한다, 선을 향한 마음이 진지하다, 혹은 말을 부드럽게 하고, 태도가 겸손하다, 하나님을 더욱 갈망한다 등과 같은 것들이지요. 이것은 매우 귀한 단계입니다만,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초기 단계’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완성된 선이 아닙니다.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즉, 구제, 친절, 봉사, 남을 돕는 일, 예배에 충실함 및 기타 나름대로의 선행 등의 ‘선한 일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속 사람이 깨어났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선들은 아직은 생기가 없는(inanimate) 선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해서 선을 행한 것이다’, ‘내가 노력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경건한 것이다’ 등, ‘선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생기 없는 선’, ‘outer charity’, ‘natural good’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선도 귀하지만,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선은 아닙니다’. 어떤 선이 살아 있는 선이 되려면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아는 상태여야 합니다. 자기가 그 선의 근원인 줄 아는 상태에 있는 한, 그 선은 생기 없는 선이 됩니다.

 

이러한 선들을 말씀에서는 ‘풀’(tender grass)

 

1:11-12에 나오는 세 가지 식물은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 나오는 세 단계의 선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연한 ‘풀’(tender grass)입니다. 이 풀의 특징들로는, 갓 돋아난 선, 아직 뿌리가 약함, 매우 취약함, 쉽게 꺾임, 생명력은 있지만 깊지 않음 등이 있습니다. 이는 회개의 초기 상태에서 나오는 선에 해당합니다.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1, 12)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곧 진리와 분별이 조금씩 생기는 단계인데요, 이 단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 속에 ‘’(진리)가 생김, 선과 진리가 결합할 준비, 선한 행동이 ‘진리의 방향성’을 가지기 시작함, 이론적, 교리적 신앙이 조금씩 깨어남 등. 즉, 아직은 약하지만, ‘점차 자라나는 선’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곧 완성된 선의 단계인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뿌리가 깊음, 주님으로부터 오며, 사랑(선)과 지혜(진리)가 결합함,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정함 같은 것이지요. 회개의 초기 단계의 목표는 결국 이 ‘열매 맺는 나무’에 이르는 것입니다.

 

요약

 

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단계입니다. 속 사람이 깨어나 경건한 말과 태도가 드러나고, 선한 행위들이 나타나지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선들은 아직 ‘생기 없는 선’입니다. 이 선은 말씀에서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라는 성장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신학적 정리

 

거듭남은 회개 없이는 없다. 회개 초기의 선은 매우 귀하지만 아직 연약하다. 겉으로 보기엔 선해도 그러나 ‘근원을 자신에게 두면’ 죽은 선이다. 하지만, 이 단계는 필수적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첫 싹이다. 창1:11-12에 나오는 세 종류 식물은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 나오는 세 단계의 선을 보여준다. 이 단계는 사람의 삶에서 종종 ‘회심의 순간’으로 나타난다.

 

 

 

AC.10, 창1, '네 번째 상태' (AC.6-15)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하였지만, 그것은 그가 겪는 시험과 곤궁 때문에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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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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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아기부터 배워 저장되어 온 신앙의 지식들입니다. 이 지식들은 저장되어 있으나, 사람이 이 두 번째 상태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상태가 거의 항상 시험이나 불행, 혹은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고요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분리됩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 리메인스는 지금까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주님에 의해 저장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두 번째 상태는, ...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

 

첫 번째 상태(AC.7) 깊은 어둠 속에서 주님의 자비가 처음 운행하시는 단계’였죠. 두 번째 상태는 그다음으로, ‘무엇이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 나의 것(자기 고유, proprium)인지 마음 안에서 처음으로 분별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 분별은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전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착각하면 거듭남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리메인스(remains)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리메인스란, ‘어린 시절부터 주님이 사람 안에 조용히 쌓아두신 선한 것들과 참된 것들, 그리고 체어리티의 씨앗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어릴 때 경험한 선함, 부모의 사랑, 기도, 가르침, 선한 감정 같은 것들을 통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속 사람 안에 저장’,  소중하게 보관’되다가 어느 날, 어떤 상황, 즉 시험이나 불행, 슬픔 등을 만나면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유아기부터 배워 저장되어 온 신앙의 지식들

 

리메인스의 한 종류는 유아기, 어린 시절 신앙 교육으로 들어온 지식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거짓말은 나쁘다, 기도하는 법, 성경 이야기들 등이지요. 이것들은 평소에는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겉 사람 안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이 이 두 번째 상태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리메인스는 필요할 때’, 그러니까 사람이 준비되었을 때 주님이 꺼내 쓰십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존적 갈등, 슬픔, 시험의 순간에 리메인스가 갑자기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에는 이 상태가 거의 항상 시험이나 불행, 혹은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영적 법칙이 하나 나오는데요, 그것은 겉 사람이 조용해지지 않으면, 속 사람 안에 쌓여 있는 리메인스는 절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때때로 고통, 슬픔, 시험을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이유입니다. 영어로는 permissive providence’라고 하지요. 이것들은 겉 사람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자기 사랑, 곧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나 자기 욕망 같은 것을 잠잠하게’, 그러니까 마치 죽은 것처럼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그제야 속 사람에 저장된 이 리메인스가 떠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인데요, 소위 모태신앙이라 하는 저였지만, 3 때 어머니 교통사고로 별세하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고 나서야 그동안 천방지축,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별 다를 바 없었던 인생의 세속적 추구로부터 한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겨우 시작이었고, 비록 대기업도 다니고, 대형 교회의 중요 스태프로 섬겼어도 여전히 큰 교만과 자만의 세속적 괴물이었던 저는 이후 권고사직이라는 내침을, 그것도 신학을 하기 전 한 번, 신학을 하고 난 다음 또 한 번 등 두 번이나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겉으로는 신앙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본모습은 여전히 주님의 것을 가로채려는 자였던 것이었죠. 저는 저를 부단히도 스스로 높이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나이는 먹어가면서, 그러나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말할 수 없는 비참 가운데 있다가, 드디어 진심으로 저 둘째의 고백,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15:17-19)

 

하는 고백이 터져 나왔는데, 그러면서 뭔가 제 삶에 영적 전환이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제게 이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가 이제 보니 바로 저 리메인스, 곧 주님이 저의 어린 시절, 제 안에 차곡차곡 쟁여놓으셨던 리메인스였던 것입니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분리

 

이 분리는 매우 중요한 중생의 전제입니다. 여기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은 감각, 욕망, 세상 사랑, 자기중심적 사고와 태도 같은 것들이고, ‘속 사람에 속한 것들은 주님이 천천히 쌓아두신 리메인스, 선, 진리 같은 것들입니다. 평소에는 이 둘이 섞여 있어서 사람은 무엇이 자기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것인지 잘 모릅니다만, 그러나 시련을 통해 겉 사람은 조용해지고, 약해지며 낮아지는 반면, 속 사람은 빛나고 깨어나는 분리가 일어납니다.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있는데

 

주님은 우리 속 사람 안에 평생 선한 감정, 천국적 인상, 신앙의 지식, 체어리티의 작은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저장’해 두십니다. 이것들이 바로 거듭남 전체의 씨앗’입니다.

 

이렇게 이 거듭남 두 번째 상태의 목적은 리메인스를 꺼내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요약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과 ‘자기에게 속한 것’이 처음으로 구별되는 단계다. 이 구별은 보통 시련이나 슬픔을 통해 일어난다. 이때 겉 사람은 잠잠해지고, 속 사람 안에 주님이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신학적 정리

 

리메인스(remains)는 중생의 씨앗이며, 주님이 직접 쌓으신다. 고난과 시련은 겉 사람을 조용하게 하기 위한 주님의 허용적 섭리이다. 진짜 영적 성장은 침체, 슬픔, 갈등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님의 것과 자기 고유의 것이 처음 분리되는 순간이 바로 ‘둘째 날’이다. 속 사람의 처음 깨어남이 바로 창1 ‘궁창’이다.

 

 

 

AC.9, 창1, '세 번째 상태' (AC.6-15)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진지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행위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선들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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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첫 번째 상태' (AC.6-15)

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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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 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상태 안에 일어나는 첫 움직임, 곧 주님의 자비(긍휼) 가 바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에 앞서 존재하는 상태

 

1의 첫째 날은 ‘거듭남의 시작 전’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를 사람의 ‘영적 초기 상태’로 봅니다. 즉, ‘선도 없고, 진리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AC는 ‘거듭남 이전 상태(pre-regenerat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유아기)부터의 상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전제를 하나 말합니다. ‘유아기는 아직 스스로 악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죄가 없다. 그러나 진리의 빛은 거의 없다.’ 그래서 유아기는 ‘순진성(innocence)의 씨앗은 있으나 의식적 진리의 빛은 없는 상태’입니다. 이 두 요소가 ‘혼돈하고 공허한’ 부분입니다.

 

거듭남 직전에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모두 포함

 

다음은 성인이 되어 거듭남 직전에 도달하면 보통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내면적으로 공허함, 삶의 목적에 대한 혼란, 선과 진리에 대한 무지, 하나님을 아직 깊이 알지 못함, 죄에 대한 자각이 막 시작됨 등이지요. 그러니까 이때가 ‘흑암(darkness), ‘혼돈(confusion), ‘공허(emptiness)의 시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 인간, 즉 속 사람은 아직 죽어 있고, 외적 인간, 곧 겉 사람만 살아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 상태는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

 

1:2의 이 세 표현은 영적 의미에서 다음을 가리키는데요, 각각 ‘혼돈(void)은 선이 없음을, ‘공허(emptiness)는 진리가 없음을,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도 없고, 진리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상태, 바로 이 상태가 인간의 ‘원초적 자연적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 안에 일어나는 첫 움직임, 곧 주님의 자비

 

거듭남은 ‘사람이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명백히 선언합니다. ‘중생의 첫 시작은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이며, 인간은 이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의 운행’을 가리켜 주님의 ‘선재(先在)적 은혜(prevenient mercy)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수면(waters)은 ‘지식(knowledges)의 씨앗입니다. 비록 이렇게 진리가 없는 상태라 해도 인간은 최소한 선악에 대한 희미한 감각이라든지, 양심의 미약한 요소, 선을 향한 작은 갈망 같은 기초적 ‘지식의 물’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바로 이 ‘물들 위’, 곧 ‘수면 위’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즉, 삶을 향해 ‘깨어나게’ 하며, 선을 향한 작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진리를 향한 그리움을 싹트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미약한 물음을 넣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첫 신호’입니다.

 

요약하면

 

첫 번째 상태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가 거의 없고, 깊은 무지 속에 있지만, 주님의 자비가 조용히 작용하기 시작하는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심’이다.

 

목회적 관점으로는

 

주님의 자비가 항상 먼저다. 거듭남의 시작은 ‘깊은 어둠’에서 이루어진다. 무지해 보이는 상태도 사실은 주님이 준비 중이신 상태다. 창1:2의 ‘혼돈’과 ‘공허’, ‘흑암’은 죄의 상태가 아니라 ‘준비되는 상태’다. 유아기의 상태도 미약하지만 ‘선의 기초’가 심긴다.

 

 

 

AC.8, 창1, '두 번째 상태' (AC.6-15)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 사이에 구별이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 불리는데, 여기서 리메인스란 특히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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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본문,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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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설명은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즉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한, 그의 대표 저작인 ‘Arcana Coelestia’(약어 AC)에 대한 소개입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Arcana Coelestia’라는 책은 어떤 책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적, 영적 의미를, 천국 관점에서 풀어낸 거대한 영적 주석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경 주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 영혼의 구조’, ‘주님과 인간의 관계’, ‘거듭남의 과정’, ‘천국과 지옥의 실상’, ‘삶과 사후의 법칙’ 등을 다루는, 기독교 전통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저작입니다.

 

왜 이런 책을 썼는가?

 

스베덴보리는 ‘성경에는 외적 의미, 곧 겉 글자의 뜻, 겉뜻만이 아니라, 그 안에 영적 의미, 곧 속뜻(arcana)이 계시되어 있다. 사람이 육과 영으로 되어있듯 말씀도 겉뜻과 속뜻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허락으로 오랜 세월 영계를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로 하여금 이러한 성경의 속뜻, 곧 arcana를 설명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합니다.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신학책이 아니라, ‘천사들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영계에서 성경의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의 내면은 어떻게 되어있는가?’, ‘영적 성장, 곧 거듭남은 실제로 어떤 단계를 거치는가?’ 등, 이런 질문들에 대한 ‘체계적인 해설서’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다섯 가지

 

첫째, 성경의 영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해설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모든 낱말, 사건, 인물들을 ‘상응(correspondence) 개념으로 풀어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아담’은 태고교회, ‘가인’은 신앙과 사랑의 분리, ‘홍수’는 인간 내부의 영적 붕괴, 그리고 ‘출애굽’은 거듭남의 전체 여정이라는 의미와 각각 상응한다는 것이지요.

 

둘째, 주님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를 통합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주님의 영광, 주님의 인성의 영화, 그리고 인간 구원의 내적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셋째, 인간 영혼의 작동 원리를 밝힘

 

거듭남은 감정이 아니라 ‘내적 질서의 회복’이며, 그 과정에서 신앙, 사랑, 양심, 자유의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매우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넷째, 천국과 지옥을 실제 세계로 다룸

 

어디까지나 추측, 즉 ‘이럴 것이다’가 아니라, ‘보았다’, ‘들었다’, ‘그들과 대화했다’ 등의 형식으로 영계의 구조, 영혼의 상태, 사후의 삶을 설명합니다.

 

다섯째, 신앙생활과 일상에 직결되는 원리를 제시

 

Arcana Coelestia는 단순 주석이 아니라 ‘삶의 법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선과 진리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자아(ego)의 본질은 무엇인가?’, ‘선을 행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악과 거짓의 구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주님은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시는가?’ 등, 이 책을 읽으면 신앙적인 질문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대한 관점’이 달라집니다.

 

누가 읽으면 좋은가?

 

기독교인 가운데 성경의 깊은 면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든지, 비기독교인 중에서는 철학이나 영성, 인간 의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든지, 혹은 학자나 사상가 중에서는 신학, 심리학, 영성학의 교차점에 관심 있는 사람 등,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 변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좋습니다.

 

이 책, ‘Arcana Coelestia’는 특정 종파의 권유, 호교론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근본 원리를 다루는 보편적 영성서’입니다.

 

요약

 

Arcana Coelestia는 성경의 영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해설하며, 인간 영혼의 구조와 천국과 지옥, 주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거듭남의 실제 과정을 설명하는 기독교 영성의 대작이다.

 

비유하자면

 

성경이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라면, Arcana Coelestia는 그 뒤에 있는 ‘설계도와 작동 원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마치 건물의 외관만 보고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그 건물의 내부 구조와 전기, 배관, 철골 설계를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에서 더 나아가, ‘왜 그렇게 말하는가?’, ‘그게 인간 안에서 실제로 어떤 영적 과정으로 일어나는가?’를 알려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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