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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어서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생각처럼 천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인식은 어느 정도 맞지만,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극단적으로 희귀한 존재로만 볼 필요는 없다’가 더 정확한 균형입니다. 왜냐하면 천적’이라는 것을 흔히 말하는 성격 좋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천적 인간 = 타고나기를 사랑스러운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온순함, 다정함, 눈물 많음, 배려심 같은 것은 자연적 애정일 수도 있고, 영적 과정 중의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은 그런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의지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과 직접 결합된 상태’,  선 자체를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질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깊이’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부드럽지 않은 사람도 천적일 수 있고, 반대로 매우 따뜻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도 아직 자연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하셔야 천적 인간은 극소수일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 정리됩니다.

 

그 다음으로, 왜 천적 인간이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느냐를 보면, 이유는 단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진리를 통해 자라기 때문입니다. 즉, ‘이게 옳다’를 배우고, 그걸 따라 살면서 점점 변화됩니다. 이것이 영적 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대부분은 이 길을 걷습니다. 설교도, 교훈도, 교육도 대부분 이 구조를 전제로 합니다.

 

반면 천적 상태는 사랑이 먼저’인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이 따뜻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따지기 전에 이미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는 인간이 타락 이후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드물게 느껴지는 것이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도 태고교회를 바로 이 천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이 적다’는 것을 특별한 몇 사람만의 영역’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AC의 흐름과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결국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사랑’이 어떤 구조 위에서 형성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도 결국 사랑에 이르지만, 그것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풀어보면 훨씬 편안해집니다. 어떤 성도는 계속 이게 맞나요?’를 묻고, 고민하고, 분별하며 자랍니다. 또 어떤 성도는 복잡한 설명 없이도 자연스럽게 선한 방향을 택합니다. 둘은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둘 다 주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누가 더 높다’가 아니라 각 사람이 어떤 길 위에 있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는 것이 맞지만, 그것은 소수 엘리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보통 진리를 통해 거듭나는 구조 때문이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길 위에서 결국 사랑 중심의 상태로 인도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천적 인간은 드물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방식의 차이이며, 모든 사람은 자기 방식 안에서 사랑 중심의 완성으로 인도됩니다.’

 

 

 

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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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 최종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가 말이죠.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느끼신 대로 그 두 문장은 그대로 두면 충돌처럼 들리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이것은 내용의 모순이라기보다 ‘두 층위(가능성 vs 최종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섞어 말하면서 생긴 혼선’입니다. 이걸 분리해서 보면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변화될 수 있는 자유는 열려 있지만, 그 변화는 아무 형태로나 무한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조 안에서 완성된다’입니다.

 

먼저 ‘최종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리키는 층위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처음 상태에 묶여 있지 않고, 선택과 거듭남을 통해 실제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즉, 처음에 자연적이었던 사람이 영적이 될 수 있고, 영적 인간도 더 깊이 사랑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맞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출발 상태에 묶어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장,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는 전혀 다른 층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거듭났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사랑에 이르는 구조’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깊이 사랑에 이르더라도, 그 사랑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사랑’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이 먼저’인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정확히 나누면 이렇게 됩니다. ‘변화의 가능성’ 차원에서는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성된 구조’ 차원에서는 차이가 유지됩니다. 즉, 영적 인간이 사랑에 이르더라도 그는 ‘영적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천적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걸 비유로 풀어보면 더 또렷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평안’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오랜 고민과 분별, 선택의 과정을 거쳐 평안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 평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 다 평안하지만, 그 평안의 ‘형성 방식’은 다릅니다. 이 차이가 바로 영적과 천적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영적 사람이 천적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바꾸는 것이 정확합니다. ‘영적 사람도 사랑 중심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천적 인간의 사랑과 동일한 구조인가?’—아니오, 형성 방식이 다릅니다.

 

이렇게 보시면 두 문장이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열려 있음(자유와 변화 가능성)’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형성된 질서(구조의 고유성)’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가장 정확한 정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 중심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사랑은 각자가 거듭난 방식에 따라 영적 구조 안에서 혹은 천적 구조 안에서 완성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완성의 방식은 각자의 구조에 따라 다르게 유지됩니다.’

 

 

 

AC.62, 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AC.62.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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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그럼, 처음부터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타고나는 거군요.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적’이 될 수는 없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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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그럼, 처음부터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타고나는 거군요.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적이 될 수는 없는 거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타고나는 경향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최종 상태를 절대적으로 고정하지는 않는다’가 가장 정확한 표현입니다. 즉, 사람은 ‘영적인 쪽이 더 맞는 성향’, 혹은 ‘천적인 쪽이 더 맞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사람이 결국 어디에 서게 되는지는 전적으로 ‘거듭남의 과정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은 절대 천적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AC 전체 흐름과는 맞지 않습니다.

 

먼저 ‘타고남’에 대해서는 이렇게 보셔야 합니다. 사람마다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데 더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과 관계, 선함에 더 민감합니다. 전자는 영적 경향, 후자는 천적 경향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출발점과 길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는 목사님 말씀처럼 ‘어느 정도 방향성은 타고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론까지 고정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서 핵심은 언제나 ‘자유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성향 위에서 선택을 통해 변화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진리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점점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는 ‘시작은 영적으로 했지만, 천적 상태에 가까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바뀐다’기보다는, ‘자기의 길 위에서 최고로 완성된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즉, 영적 인간은 영적 방식으로 완성되고, 천적 인간은 천적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둘은 서로 열등, 우등 관계가 아니라, ‘다른 질서의 완전’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둘로 나뉘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깊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통 ‘진리를 통해 사랑으로 가는 길(영적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의 끝에서도 사랑은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사랑’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바로 시작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둘 다 사랑에 이르지만, 그 사랑의 형성과 구조가 다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을 정확히 다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영적으로 시작한 사람이 천적처럼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그에 맞는 자리, 곧 영적 천국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한이 아니라 ‘자기 구조에 맞는 완전함’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풀어보면 더 편안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통해 차근차근 자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과 헌신이 먼저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이 더 높으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길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께로 나아가느냐’입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같은 틀로 만들지 않으시고, 각 사람에게 맞는 완성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영적 또는 천적 경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최종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 위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는 완성으로 나아가며, 그에 따라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으로 구별됩니다.’

 

 

 

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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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AC.62.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위 해설 결론 부분,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를 설명해 주세요. 만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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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위 해설 결론 부분,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를 설명해 주세요. 만일, 모든 거듭남의 종착지가 일곱째 날이라면, 그러면 왜 영적 천국이 있는 건가요? 전부 천적 천국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섯째 날이 형상의 완성이고 일곱째 날이 안식’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최고 상태(천적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 안에서 질서가 완성되고, 그 위에 주님의 평안이 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종착지는 모두 ‘안식’이 맞지만, 그 안식의 ‘형태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며, 그 차이가 바로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의 구분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라는 표현부터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여기서 ‘완성’은 ‘최고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바로 섰다’, ‘구조가 안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중심 아래에서 정렬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이전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것을 ‘형상이 완성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다음 ‘일곱째 날은 안식’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싸움이 중심이 아닌 상태’, ‘주님이 주도하시고 사람은 그 안에서 평안히 있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끊임없는 선택과 내적 갈등이 중심이지만, 점점 상태가 정돈되면 ‘억지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선 안에 머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이제 목사님 질문의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모든 거듭남의 종착지가 일곱째 날이라면, 왜 영적 천국이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매우 정확한 질문입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안식은 동일하지만, 그 안식에 이르는 방식과 그 안식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해’ 거듭납니다. 먼저 이해가 열리고, 그 이해를 따라 살면서 점점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그의 안식은 ‘진리가 밝혀져 있고, 그 진리 안에서 안정된 상태’입니다. 그는 여전히 ‘옳고 그름’을 인식하고, 그 인식 속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영적 천국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사랑 자체’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굳이 따져서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이미 그의 본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안식은 ‘사랑 자체 안에서의 평안’, 곧 더 깊고 직접적인 결합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천국입니다.

 

그래서 두 천국은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안식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둘 다 일곱째 날의 상태이지만, 하나는 ‘진리를 통해 들어간 안식’, 다른 하나는 ‘사랑 자체 안에 있는 안식’입니다.

 

이걸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평안을 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게 좋다, 이것이 사랑이다’라는 상태 자체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안합니다. 둘 다 평안하지만, 하나는 ‘이해를 통한 평안’, 다른 하나는 ‘사랑 자체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모두 천적 천국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창조되지 않았고, 같은 방식으로 거듭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은 이 둘을 모두 온전한 길로 인정하시고, 각각에 맞는 천국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영적 천국도 결코 ‘덜한 천국’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완전한 천국’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 문장으로 돌아가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은 ‘각자의 방식대로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고, ‘일곱째 날은 안식’은 ‘그 완성 위에 주님의 평안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영적 인간에게도, 천적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 성질과 깊이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모든 거듭남은 안식(일곱째 날)으로 끝나지만, 그 안식은 진리를 통해 형성된 영적 안식과 사랑 자체에 근거한 천적 안식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이 함께 존재합니다.’

 

 

 

AC.62, 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그럼, 처음부터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타고나는 거군요.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적’이 될 수는 없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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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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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 처음에는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생기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요약해 주는 핵심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시간의 길이나 역사적 연대를 뜻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합니다. 여섯 날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상태들, 곧 영적 형성의 단계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조 이야기를 인간 내면의 재창조 이야기로 읽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여섯 단계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속에서도 이 여섯 단계가 반복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삶,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세부적으로 반복되는 과정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은 ‘처음에는 전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적 인간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인간’이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인간의 본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 근원은 자기 본성과 자기 사랑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첫 단계에서 인간은 ‘겨우 인간의 어떤 모습’이 됩니다. 이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빛이 비치기 시작, 선과 진리가 자기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이때 인간은 아직 흔들리고 불안정하지만, 더 이상 완전히 닫힌 존재는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표현은 거듭남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거듭남은 급격한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형성입니다. 이해가 먼저 열리고, 그다음 의지가 움직이며, 이 둘이 여러 번의 갈등과 반복을 거쳐 서서히 결합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패와 후퇴도 포함되며, 그 모든 것이 여섯 날이라는 구조 안에 포함됩니다.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주님을 닮았다는 외형적 의미가 아니라, 이해와 의지가 질서 있게 결합,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삶 전체를 다스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리를 행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날의 핵심이며,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섯째 날이 끝이라고 해서 과정이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이 글은 거듭남의 목적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 여정이 얼마나 섬세하고 단계적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날마다 다시 창조되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심화

 

1.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AC.62, 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AC.62.심화 1.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 위 해설 결론 부분, ‘여섯째 날은 형상의 완성이며,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로 이어집니다.’를 설명해 주세요. 만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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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 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AC.62.심화 2. ‘처음부터 타고나는가?’ 그럼, 처음부터 ‘영적 천국’에 갈 사람과 ‘천적 천국’에 갈 사람은 타고나는 거군요. ‘영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적’이 될 수는 없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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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 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심화 3. ‘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음... 위 설명은 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아요.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구조와 본질은 여전히 영적 방식 위에 있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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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변화의 가능성, 완성의 방식

 

 

AC.62, 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AC.62.심화 4.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네요?’ 그러면... 천적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겠어요. 천성적으로 ‘사랑스런’ 사람, 처음부터 사랑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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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천적 인간’, 일곱째 날에 대한 위와 같은 생각은 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라는 글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13의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는 말씀은 ‘천적 인간은 극히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 해당된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의 거듭남이 그만큼 깊고 어려운 과정이며, 실제로 완전한 안식의 상태까지 이르는 경우가 드물다’는 현실적 진술입니다. 즉, ‘배제의 선언’이 아니라 ‘과정의 난이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이 문장의 무게를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없다’라고 하지 않고 ‘거의 없다(scarcely)라고 합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문을 닫는 표현이 아니라, ‘열려 있지만, 매우 깊고 어려운 상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그 상태로 이끄시지만, 인간 쪽에서 거기까지 온전히 응답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AC 전체 흐름으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까지는 ‘싸움과 선택의 과정’입니다. 여기까지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상태는 ‘싸움이 끝나고, 사랑이 완전히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려면, 단순히 몇 가지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희귀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하나 더 있습니다. AC.13에서 말하는 ‘일곱째 상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즉, 거의 흔들림이 없는, 깊이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이라도 평안을 경험하면 일곱째인가?’처럼 낮춰 보면 혼선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완전히 정착된 안식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드물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제 목사님 질문과 연결하면 핵심이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 극히 적은 것 아닌가?’—부분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처음부터 정해진 소수’로 이해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AC의 흐름에서는 언제나 ‘열려 있음’이 유지됩니다. 누구든지 그 길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그 깊이까지 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꼭 보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적다(few), 거의 없다(scarcely)’는 표현은 종종 ‘영적 질서의 기준’에서 말한 것이지, 우리가 통계적으로 셀 수 있는 숫자 개념과는 조금 다릅니다. 즉, ‘인간의 상태가 그만큼 깊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 풀어보면 오히려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대부분은 여기까지밖에 못 갑니다’라는 낙심의 메시지가 아니라, ‘이 길은 깊고 긴 길이지만, 주님이 끝까지 이끄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일곱째 상태를 완전히 이룬 사람’을 찾기보다, ‘지금 이 사람이 그 방향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이렇게 정리하시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힙니다. ‘일곱째 상태, 곧 천적 상태는 실제로 깊고 어려운 단계이기 때문에 드물게 보이지만, 그것은 닫힌 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도받고 있는 방향이며, 각 사람은 그 길 위에서 자기 정도만큼 그 안식에 참여하게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AC.13거의 없다는 표현은 천적 상태가 배제된 소수의 영역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깊고 완전한 거듭남의 상태가 실제로는 드물게 성취된다는 현실적 진술입니다.’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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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으로 저는 단순히 이해’(理解)를 선호합니다. 이해력’, 사고력 등 여러 번역이 있고, 그 이유와 배경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말입니다.  이해라는 번역이 많이 낯설어 꼭 다른 번역이 필요하다면, 저는 이해하는 능력으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의지 또한 의도하는 능력으로 같이 바꾸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understanding’을 이해’로 두시려는 방향은 충분히 타당하고, 오히려 AC 전체를 일관되게 읽어 나가는 데에도 좋은 선택입니다. 다만 핵심은 이해’를 단순한 결과(알아진 상태)가 아니라 작동하는 기능(능력)’으로 읽히도록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로 두되,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시는 방식은 매우 균형 잡힌 접근입니다.

 

먼저 왜 이해’가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짚어보면 분명해집니다. 한국어에서 이해’는 보통 이미 알아버린 상태’, 즉 결과로 느껴집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nderstanding’은 단순히 알고 있음’이 아니라, ‘판단하고,분별하고,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형성하는 살아 있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이 이해력’, ‘지성’, ‘사고력 같은 표현을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번역들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해력’은 능력은 살리지만 딱딱하고, ‘지성’은 철학적으로 들리고, ‘사고력’은 범위가 너무 넓어집니다. 반면 이해’는 가장 자연스럽고, 성경 읽는 흐름에도 잘 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처럼 이해’를 기본으로 두고, 독자가 오해할 수 있는 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방식이 실제 목회와 설교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이제 의지’와의 짝을 보시면 더 또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항상 understanding - will’입니다. 이것을 이해 - 의지’로 두면 간결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기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이해하는 능력 -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도 아주 정확한 접근입니다. 특히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 설명이 훨씬 와닿습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하실 점이 있습니다. 매번 이해하는 능력’, ‘의도하는 능력’으로 풀면 문장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식은 이렇게 보입니다. 기본 텍스트에서는 이해 - 의지’를 유지하고, 처음 설명할 때 한 번만 여기서 이해는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라고 풀어 주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이해’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자와 청중 모두에게 가장 부담이 적습니다.

 

이걸 실제 설교 흐름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해는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단순한 의욕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고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한 번만 정확히 잡아 주면, 이후에는 이해’와 의지’만 써도 청중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해’라는 번역은 충분히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살아 있는 기능’이라는 점을 초기에만 분명히 밝혀 주면 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이해하는 능력’으로 풀어 주는 것은 매우 좋은 보완 방식입니다. ‘의지 - 의도하는 능력’과의 짝도 구조적으로 잘 맞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understanding 이해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며, 다만 그것이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보완 설명으로 살려 주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방법입니다.’

 

 

 

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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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은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에 속하고, 후자는 그의 의지(will)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거듭남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결정적인 구분’을 아주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구분은 단순한 단계 차이나 신앙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두 근본 능력, 곧 이해와 의지의 차이에 근거합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이후 AC 전반의 논의가 흐릿해집니다.

 

먼저, ‘영적인 것’이란 신앙에 관한 지식들, 곧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분별하며 이해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교리, 말씀에 대한 인식, 선과 악, 참과 거짓을 가르는 사고의 능력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해에 속합니다. 이해는 빛의 영역에 가깝고, 사물을 드러내고 구별하며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아는 것’, ‘깨닫는 것’, ‘분별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면 ‘천적인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나 호의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무엇을 기꺼이 행하려 하는가와 관련된 영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에 속하며, 의지는 열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의지는 움직이게 하고, 선택하게 하며, 실제 행동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것은 ‘사랑하는 것’, ‘원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구분에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적인 것을 낮게 보거나, 천적인 것을 단순히 ‘더 좋은 영적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기능적으로 구별’합니다. 영적인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천적인 것은 그 진리에 생명을 부여하는 원천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하고, 의지는 그 방향으로 실제로 걷게 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은 먼저 영적인 상태를 거치게 됩니다. 즉, 진리를 배우고, 신앙의 지식들을 이해 안에 쌓아 가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단계에만 머물면 사람은 여전히 영적 인간에 머물며, 천적 인간이 되지는 못합니다. 천적 상태란, 그 이해한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삶의 동력이 되는 상태입니다.

 

AC.61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이해에만 머물러 있고 의지로 내려오지 않으면, 그것은 여전히 영적 차원에 머무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의지에 자리 잡으면, 그 사랑은 이해를 통해 진리를 찾고 받아들이며, 진리는 다시 사랑을 섬기는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때 비로소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하나로 결합합니다.

 

그래서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인간 내적 구조의 지도’를 제공합니다. 무엇이 이해에 속하는지, 무엇이 의지에 속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천적인 방향’으로 실제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됩니다.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분은 바로 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구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심화

 

1.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 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AC.61.심화 1.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으로 저는 단순히 ‘이해’(理解)를 선호합니다. ‘이해력’, ‘사고력’ 등 여러 번역이 있고, 그 이유와 배경이 충분히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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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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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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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0.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 본문 중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0에서 말하는 ‘신앙에 속한 것들’은 ‘무엇이 옳고 참된지에 대한 이해와 인식’, 곧 진리에 속한 내용들이고, ‘사랑에 속한 것들’은 ‘그것을 실제로 좋아하고 행하려는 의지와 삶’, 곧 선에 속한 내용들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는 ‘아는 것’, 후자는 ‘사는 것’입니다.

 

먼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감정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가’를 아는 모든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교만하지 말라’, ‘용서하라’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 말씀을 읽고 깨닫는 내용, 설교를 듣고 ‘이게 옳다’고 이해하는 것, 상황을 분별하며 ‘이 길이 맞다’ 판단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전부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핵심은 ‘이해와 인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로 머리와 생각의 영역, 곧 ‘이해(understanding)에 속합니다.

 

이제 ‘사랑에 속한 것들’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진리들이 실제로 ‘마음에 들어오고, 좋아지고,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정직하라’라는 거 아는 걸 넘어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좋다’ 느끼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 ‘용서하라’를 넘어서, 실제로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핵심은 ‘의지와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지(will)와 삶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 둘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삶이 아닙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그 방향을 실제로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지도라면, 사랑은 발걸음입니다. 신앙이 빛이라면, 사랑은 따뜻함입니다. 둘이 함께 있어야 완전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그 사람을 배려하려고 마음을 쓰고, 시간을 내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사랑에 속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며, 마음속에서도 교만을 경계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AC.60에서 이 둘을 함께 말하는 이유는, 거듭남이 이 두 영역에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감정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르게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둘의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보통 ‘신앙  사랑’입니다. 먼저 알고, 그다음에 그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  신앙’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AC 전체에서 이 둘의 관계는 계속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에 대한 모든 이해와 인식이고, ‘사랑에 속한 것들’은 그것을 실제로 좋아하고 행하며 삶으로 드러내는 모든 의지와 행동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신앙은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것이고, 사랑은 그 옳은 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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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소명 이후에도 사람들을 완전히 끊고 산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는 분명한 ‘내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세상적인 사교나 필요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쓰임’과 ‘영적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제한된 교류였지만, 그 속의 밀도는 매우 깊고 의도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명 이후 그의 삶의 중심은 글을 쓰는 일이었고, 그것도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받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시간은 사실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명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적 일의 흐름을 끊는가, 아니면 돕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업자, 지식인, 성직자들과 교류도 했지만, 그 모든 만남은 길게 이어지는 사교적 관계라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그러나 깊게’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즉,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선택된 접촉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사람은 단순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는 곧 자신이 어떤 영적 영향(influx)을 받는지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위적인 만남이나, 감정적 친분 중심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영들과의 교류까지 경험했던 그였기에, 외적 사람 뒤에 있는 내적 상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사람을 만나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이 만남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가’로 좁혀졌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위생’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을 나누는 것’ 자체에도 분명한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아무에게나 쉽게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매우 평범한 주제—정치, 과학, 일상—로 대화를 나누었고, 깊은 영적 내용은 책을 통해서만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배려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 속에서도 ‘내적 진리를 직접 주입하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외적 교제보다 내적 교제’를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짜 교류는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수많은 천사들과 더 깊이 교제하고 있었고, 지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삶의 밀도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항상 내적 중심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만남이 사명을 방해하는가, 돕는가’, 둘째,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 영적 영향을 주는가’, 셋째, ‘이 대화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입니다. 이 세 기준 아래에서 그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깊고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조용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극도로 밀도 높은 삶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바로 그 직감, 곧 ‘시간 시간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만남을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본래 밀도를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SC.50,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경우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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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 전체 거듭남 과정의 ‘정점’을 짧지만 매우 밀도 있게 설명합니다. 앞선 모든 단계들이 ‘좋았더라’라고 평가되었지만, 마지막에만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심히’라는 표현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신앙은 존재했고, 선한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아직 완전히 하나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주로 이해에 속해 있었고, 사랑은 의지에 속해 있으되 아직 신앙을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진리는 ‘살아 있는 것’이 되기 직전의 상태, 혹은 부분적으로만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들이 ‘좋았더라’라고는 불리지만, ‘심히 좋았더라’라고까지는 불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AC.60에서 말하는 결정적 변화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이 더 이상 단순한 이해나 인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제 ‘무엇이 참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참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결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단순한 협력이나 병렬이 아니라, ‘혼인 관계’로 이해합니다. 혼인에서는 둘이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각자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이처럼 영적인 것들(신앙, 진리, 이해)과 천적인 것들(사랑, 선, 의지)이 결합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온전한 생명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위계적 서열이 아니라, 기능적 차이를 가집니다. 영적인 것은 빛에 가깝고, 천적인 것은 열에 가깝습니다. 빛만 있으면 사물을 볼 수는 있지만 살릴 수는 없고, 열만 있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나 빛과 열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발생합니다. ‘심히 좋았더라’라는 평가는 바로 이 ‘생명 발생의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인간 안에서 더 이상 근본적인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는 의지와 다투지 않고, 신앙은 사랑을 변명하지 않으며, 선행은 억지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행함은 자연스럽고, 진리는 살아 있으며, 삶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완성, 곧 창조의 여섯째 날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 평가는 도덕적 칭찬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이제 인간 안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이 자리 잡았다는 선언입니다. 이 때문에 앞선 모든 ‘좋았더라’를 포괄하면서도 초과하는 표현, 곧 ‘심히 좋았더라’가 사용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의 이행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위 AC.60 본문 중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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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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