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Therefore,behold,the days come,says Jehovah,that they shall no more say,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Jer. 23:7);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천사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이 구절의‘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이 바로 영어 본문의‘Jehovah lives’,곧‘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에 해당합니다.
렘23:7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렘16:14와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두 본문 모두 과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맹세하였으나,장차 주님께서 더 크고 새로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예언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단지 과거의 출애굽을 회상하는 말씀이 아니라,살아 계신 주님께서 시대마다 자기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 내시고,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표현은 단순히 여호와께서 존재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생명 자체(Life Itself)이십니다.사람과 천사는 생명을 받아 살아가지만,주님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그러므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는 고백은 모든 생명과 구원,그리고 회복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만 짧게 인용하였지만,그 의미는 이어지는 렘23: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그들이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시고,다시 그들의 땅에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역사적으로는 흩어진 백성의 귀환을 가리키지만,내적 의미로는 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졌던 사람을 다시 모아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살아 계신다’는 것은 정지된 속성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하고 회복시키시는 신적 활동과 연결됩니다.살아 계신 주님은 사람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깨우시며,악의 종살이에서 건져 내시고,선과 진리 안에서 다시 살게 하십니다.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라는 사실은 이처럼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출애굽과 포로에서의 귀환은 모두 거듭남의 과정을 나타냅니다. ‘애굽 땅’은 사람이 자연적 지식과 외적인 것에 매여 있는 상태와 관련되고,흩어졌던 여러 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 분산되었던 생각과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아래 다시 모이는 것을 나타냅니다.이 모든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살아 계신 여호와’이시므로,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납니다.
이 구절은 렘5:2와도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렘5:2에서는 사람들이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맹세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짓되게 살았습니다.그러나 렘23:7-8에서는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실제로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일이 나타납니다.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지‘주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구원을 받아 그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렘23:7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동시에 이 구절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실 뿐 아니라,악과 거짓 가운데 흩어진 사람을 다시 모으고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이심을 보여 줍니다.그러므로 태고교회가‘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살아 계신 여호와,곧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Therefore,behold,the days come,says Jehovah,that it shall no more be said,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but,Jehovah lives,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Jer. 16:14-15).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AC.290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구절은 그 진리를 더욱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며,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장차 그보다 더 큰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백성은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역사적으로는 포로에서의 귀환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악과 거짓의 모든 속박에서 건져 내시는 더 큰 구원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역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도, 포로 된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때도 동일한 ‘살아 계신 여호와’이십니다. 다시 말해, 시대와 사건은 달라져도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이AC.290의 중심 사상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단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키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북방 땅과 여러 나라에서의 귀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이것은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가 주님에 의해 다시 신앙과 생명의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특히 ‘북방’은 말씀에서 진리의 빛이 희미해진 상태나 영적 어둠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북방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다시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영적으로는 본래 주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와 생명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이 구절은 ‘살아 계신 여호와’라는 이름과 함께, 그 살아 계신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따라서 생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끊임없이 악에서 선으로, 거짓에서 진리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16:14-15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이 주님을 ‘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사람을 모든 영적 속박에서 구원하여 참된 생명의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AC.290에서 말하는 ‘산’(living)은 단순히 존재를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고, 당신께로 이끄시는 구원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And it shall be,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to promise by My name,Living Jehovah,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Jer. 12:16).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 오직 주님만이‘살아 계신 여호와’로 불리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90의 중심 주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이며,이 구절은 그 사실을 잘 뒷받침하는 성경적 증거입니다.
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예언입니다.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여‘내 백성의 도’를 배우고,더 이상 바알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면,그들도 주님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따라서 이 말씀은 이방 민족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 주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입니다.이는 단순한 맹세의 관용구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그러므로 이 표현은 생명이 바알이나 다른 어떤 존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반대로‘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는 거짓 신을 숭배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모든 상태를 의미합니다.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힘,거짓된 교리,또는 어떤 피조물을 생명의 근원처럼 의지할 때,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바알을 따르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또한‘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주님께서는 단순히 입으로‘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먼저 주님의 도를 배우고,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며,그 결과로‘살아 있는 여호와’를 고백하는 삶을 원하십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살아 있는 신앙이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임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AC.290에 인용합니다.그는 예레미야의 예언 자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말씀이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합니다.그리고 그 이름은 곧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모든 참된 생명이 오직 그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렘12:16은AC.29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도 되고,죽은 사람도 됩니다.주님을 생명 자체이신‘살아 계신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분의 길을 배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생명 안에 거하게 됩니다.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하여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And though they say,Jehovah lives;still they promise falsely(Jer. 5:2).
스베덴보리가AC.290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오직 주님만이 참으로‘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는 앞에서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설명한 뒤,말씀이 실제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존재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그것은 주님께서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모든 천사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따라서 말씀이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모든 생명이 오직 그 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문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백성은 입으로는‘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하지만,실제로는‘거짓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다시 말해,그들은‘살아 계신 여호와’를 입술로는 인정하면서도 삶으로는 그분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신앙의 고백은 있었지만,그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AC.290의 내용과 연결됩니다.스베덴보리는 생명은 단순히‘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 안에 있을 때,비로소 사람 안에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그러므로 입으로 아무리‘여호와께서 살아 계신다’말해도,주님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또한 살아 있는 신앙과 죽은 신앙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살아 있는 신앙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신앙입니다.반대로 죽은 신앙은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입니다.예레미야는 바로 이러한 상태를‘거짓 맹세’라는 말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예레미야 시대의 죄악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그는 말씀에서 주님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동시에,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그 생명은 참된 신앙 안에서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렘5:2는AC.290의 핵심 주제를 잘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실제로 연결될 때,비로소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그래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살아 계신 여호와’라고 하며,그분 안에 있는 사람만을 참된 의미에서‘산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90
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mother of all living)라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미 앞에서 설명한 내용으로 분명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이며, 모든 존재의 생명은 그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옵니다. 또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있을 수 있으며,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신앙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신앙 안에 계시지 않으면 그 신앙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분’(living)이라고 하며, ‘살아 계신 여호와’(living Jehovah)라고 합니다(렘5:2; 12:16; 16:14-15; 23:7; 겔5:11). That she was called the “mother of all living” in consequence of possessing faith in the Lord, who is life itself, is also evident from what has been already shown. There cannot be more than one life, from which is the life of all, and there can be no life, which is life, except through faith in the Lord, who is the life, nor can there be faith in which is life, except from him, consequently unless he is in it. On this account, in the Word, the Lord alone is called “living,” and is named the “living Jehovah” (Jer. 5:2; 12:16; 16:14, 15; 23:7; Ezek. 5:11);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 And though they say, Jehovah lives; still they promise falsely (Jer. 5:2).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렘12:16) And it shall be, if learning they shall learn the ways of My people, to promise by My name, Living Jehovah, as they taught My people to promise by Baal, then shall they be built in the midst of My people (Jer. 12:16).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16:14, 15)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it shall no more be said,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but,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from the land of the north, 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He had compelled them; and I will return them onto their ground that I gave unto their fathers (Jer. 16:14-15).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렘23:7) Therefore, behold, the days come, says Jehovah, that they shall no more say, Jehovah lives, who brought up the sons of Israel out of the land of Egypt (Jer. 23:7);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겔5:11)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Ezek. 5:11).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he that liveth to eternity)라고 하며 (단4:34; 계4:10; 5:14; 10:6), “he that liveth to eternity” (Dan. 4:34; Rev. 4:10; 5:14; 10:6);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4:34)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Dan.4:34);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4:10)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saying (Rev. 4:10),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계5:14) And the four animals said, Amen. 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Rev. 5:14).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10:6) and swore by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who created heaven,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earth,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sea, and the things in it, that time shall be no longer (Rev. 10:6).
‘생명의 원천’(fountain of life)이라고 하고 (시36:9), the “fountain of life” (Ps.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36:9) For with Thee is the spring of lives; In Thy light shall we see light (Ps. 36:9).
‘생수의 근원’(fountain of living waters)이라고 합니다 (렘17:13).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Jer.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렘17:13)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Jer. 17:13).
주님으로 말미암아, 곧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천국은 ‘산 자의 땅’(land of the living)이라고 합니다 (사38:11; 53:8; 겔26:20; 32:23-27, 32; 시27:13; 52:5; 142:5). Heaven (which lives by or from him) is called the “land of the living.” (Isa. 38:11; 53:8; Ezek. 26:20; 32:23–27, 32; Ps. 27:13; 52:5; 142:5)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사38:11)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Isa. 38:11)!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53:8)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Isa. 53:8);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겔26:20)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26:20);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겔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시27:13)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시5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142:5)
또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산 자’(living)라고 합니다. 시편에 And those are called “living” who are in faith in the Lord; as in David: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생명책’(in the book of lives)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69:28; 계13:8; 17:8; 20:15). And those who possess faith are said to be “in the book of lives”(Ps. 69:28), and “in the book of life.”(Rev. 13:8; 17:8; 20:15)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69:28) Let them be wiped out of the Book of Lives, And not be written with the just (Ps. 69:2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And all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Rev. 13: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계17:8) The beast that thou sawest was and is not, and is about to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to go away into destruction; and they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marvel,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o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looking at the beast that was and is not, and yet is (Rev. 17: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계20:15) And if anyon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Rev. 20:15).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아난다’(made alive)고 합니다 (호6:2; 시85:6). Wherefore also those who receive faith in him are said to be “made alive.” (Hos. 6:2; Ps. 85:6)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After two days He will make us live;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Hos. 6:2).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시85:6) Wilt Thou not return, wilt Thou not make us live, That Thy people may be glad in Thee? (Ps. 85:6)
반대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말씀은 ‘죽은 자’(dead)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말입니다. On the other hand it follows that those who are not in faith are called “dead”; as in Isaiah: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The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rise again,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Isa. 26:14),
여기서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하며, ‘일어난다’(rise again)는 것은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은 그들을 ‘죽임을 당한 자들’(pierced)이라고도 합니다 (겔32:23-26, 28-31). meaning those who are puffed up with the love of self; to “rise again” signifies to enter into life. They are also said to be “pierced.” (Ezek. 32:23–26, 28–31)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겔32:23-26)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6).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28-31)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28–31).
주님께서도 그들을 ‘죽은 자들’(dead)이라고 하셨습니다 (마4:16; 요5:25; 8:21, 24, 51-52). They are also called “dead” by the Lord. (Matt. 4:16; John 5:25; 8:21, 24, 51, 52)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Matt. 4:1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또한 말씀은 지옥을 ‘사망’(death)이라고 합니다 (사25:8; 28:15). Hell also is called “death.” (Isa. 25:8; 28:15)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해설
AC.290은 왜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산 자’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호흡하고 움직이며 생각한다고 해서 곧 말씀의 의미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주님과 연결된 사람만이 영적으로 살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여럿일 수 없다 말합니다. 사람과 천사가 저마다 자기 생명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존재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사람은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며,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고 믿는 것은 겉으로 느껴지는 현상일 뿐, 생명의 실제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생명이라 할 만한 생명’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사실로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 생명이 있으려면 그 신앙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주님께서 그 안에 계셔야 합니다. 주님과 분리된 신앙은 지식이나 확신일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말씀은 오직 주님만을 ‘살아 계신 여호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주님께서 생명을 다른 곳에서 받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그 자체이심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나오고, 그 사랑으로부터 지혜와 진리가 나오며, 그 모든 것이 천사와 사람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천국을 ‘산 자의 땅’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천국이 살아 있는 것은 천사들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고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산 자의 땅’에 속해 있는 셈입니다.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어떤 장부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살아난다’는 말씀 역시 육체가 다시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닫혀 있던 영적 생명이 열리고, 주님과의 연결이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씀에서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특히 사26:14의 ‘죽은 자들’은 자기 사랑으로 부풀어 오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람의 중심을 차지하면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자리가 닫히기 때문에, 그 상태를 말씀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서 지옥을 ‘사망’이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지옥의 영들도 존재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들의 삶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을 거꾸로 받아 자기 사랑과 악으로 바꾼 상태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흐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죽음과 같은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지옥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의지와 사랑이 돌아선 상태입니다.
AC.290의 중심은 ‘살아 있다’는 말의 영적 의미에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국과 교회와 사람은 모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생명의 근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그 생명으로 인도한 최초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교회의 사명도 사람을 자기 조직이나 지식에 묶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럽혔은즉 나도 너를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미약하게 하리니 (겔5:11) Therefore, as I live, says the Lord Jehovih, shall it not be, because thou hast defiled My sanctuary with all thy detestable things, and with all thine abominations, that even I shall diminish thee; and My eye shall not spare, and even I will not have pity (Ezek. 5:11).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5장 11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내가 사는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As I live)’라고 말씀하시는 예를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이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 후, 이러한 진리를 증명하는 여러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인간은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를 두고 맹세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으시므로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맹세가 아니라 ‘나의 삶(as I live)’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심을 암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천사와 인간은 생명을 받는 존재이지만,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본문의 나머지 내용은 이스라엘 교회의 타락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증한 것들’과 ‘혐오스러운 일들’로 주님의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상응적으로 성소는 주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영역, 곧 교회 안의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소를 더럽혔다는 것은 단순히 예배 장소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왜곡하고 더럽혔음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주님은 ‘내 눈이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주님께서 실제로 자비를 거두신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져 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인간의 상태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생명이신 주님과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내가 사는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시지만, 교회는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거부하고 성소를 더럽힘으로써 스스로 황폐와 심판을 불러옵니다. 따라서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 있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영적 상태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에스겔 5장 11절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만이 스스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AC.290에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살아 계신 분이며, 참된 생명은 그분에 대한 신앙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6. ‘단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단4:34) And at the end of the days I, Nebuchadnezzar, lifted up my eyes to the heavens, and my knowledge returned to me, and I blessed the Most High and I praised and honored Him who lives to eternity, whose dominion is an eternal dominion, and His kingdom is with generation and generation (Dan.4:34);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다니엘 4장 34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단순히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he who lives to eternity)’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며, 따라서 말씀에서 주님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으로 불린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그러한 진리를 더욱 강하게 증언하는 대표적인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과 그 후의 회복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와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다가 이성을 잃고 들짐승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한이 차매’ 하늘을 우러러보았고, 그때 비로소 총명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정신적 회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주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영적 전환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자신만 바라볼 때는 영적으로 어두워지지만, 주님을 바라볼 때 참된 지성과 지혜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회복된 직후 ‘지극히 높으신 이’를 찬양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경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바로 ‘영생하시는 이(Him who lives to eternity)’입니다. 인간과 천사는 모두 생명을 받는 존재이며, 그들의 생명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에게서도 생명을 받지 않으시며, 스스로 생명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분을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어지는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주님의 왕국과 통치는 영원한 생명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겪지만,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영생하시는 이’라는 표현과 ‘영원한 권세’라는 표현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주제인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다’는 가르침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을 의지할 때는 짐승과 같은 상태로 내려갔지만, 하늘을 우러러보고 주님을 인정했을 때 총명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는 참된 생명과 지혜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다니엘 4장 34절을 통해 주님께서 단순히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분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모든 천사와 인간은 그분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인 교회도 결국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 이 구절은 AC.290의 주제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7. ‘계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4:10) the twenty and four elders fell down before Him who sat on the throne,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and cast their crowns before the throne, saying (Rev. 4:10),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 4장 10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국의 모든 영광과 권세가 결국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오직 주님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이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 뒤, 말씀에서 주님이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불리는 여러 구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장로들은 천국의 지혜와 선 안에 있는 사람들, 또는 교회의 모든 진리와 선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모두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립니다. 이것은 천국의 모든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특히 여기서 주님은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의미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살아 있는 것도, 천국이 존재하는 것도, 모든 선과 진리가 활동하는 것도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예배는 결국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드려집니다.
또한 장로들이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장면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관(crown)은 지혜, 승리, 영광, 또는 진리로부터 오는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그 관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이는 천국의 천사들이 자신들의 선과 진리, 지혜와 행복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명과 모든 영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사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나 천사가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의 가장 높은 예배는 주님을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로 인정하고 경배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찬양의 표현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 한 분뿐이라는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 10절은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영광이 그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불리는 교회조차도 결국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며, 참된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8. ‘계5: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계5:14) And the four animals said, Amen. And the twenty four elders fell down and worshiped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Rev. 5:14).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 5장 14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국 전체의 예배가 결국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께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만이 생명 자체(Life Itself)이시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 뒤, 말씀에서 주님이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불리는 여러 구절을 연이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 흐름의 마지막 부분에 속합니다.
본문은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라고 시작합니다. 계시록에서 네 생물은 천국 전체의 생명, 사랑, 지혜, 그리고 말씀의 내적 진리를 대표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찬양과 경배가 참되고 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입니다. ‘아멘’은 단순히 ‘그렇습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서 진리가 확증되고 받아들여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어 ‘이십사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고 말합니다. 앞의 계시록 4장 10절과 마찬가지로, 이십사 장로들은 천국과 교회의 모든 선과 진리를 대표합니다. 그들이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천국의 모든 지혜와 선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에게서 선하거나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경배의 대상입니다. 장로들은 단순히 능력이 크신 분이나 영광스러운 분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을 경배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살아 있는 것도,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것도, 모든 선과 진리가 존재하는 것도 오직 주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4장 10절과 5장 14절은 서로 매우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모두 인용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는 천국의 장로들이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을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네 생물과 장로들이 함께 그분을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천국 전체가 한마음으로 주님만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주제를 아름답게 마무리해 줍니다. 주님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이며, 천국과 교회, 천사와 인간의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완전한 예배는 자신의 어떤 공로나 능력도 주장하지 않고, 오직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모든 영광과 경배를 돌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 불리는 교회조차도 결국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전달하는 통로일 뿐이며, 참된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9. ‘계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10:6) and swore by 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 who created heaven,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earth, and the things in it, and the sea, and the things in it, that time shall be no longer (Rev. 10:6).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 10장 6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단순히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일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만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이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 뒤, 말씀에서 주님이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으로 불리는 여러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생명’과 ‘창조’를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본문은 천사가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를 두고 맹세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단순히 오래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Him who lives for ages of ages)’으로 불립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 오직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천사도 인간도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살아 계신 분이 바로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것들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과 창조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단지 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흔히 ‘보존은 계속되는 창조’라고 설명합니다. 즉 창조된 모든 것은 매 순간 주님의 생명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사상을 매우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주님만이 살아 계신 분이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께서 죽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자존적(自存的)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그분의 생명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조주라는 칭호와 살아 계신 분이라는 칭호가 한 구절 안에서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마지막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time shall be no longer)’라는 말씀도 영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계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역사와 교회의 모든 상태는 결국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그분께서 정하신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맹세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확증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더욱 깊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오며, 천국과 교회, 천사와 인간이 살아 있는 것도 오직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주제인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다’라는 진리를 매우 분명하게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10. ‘시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36:9) For with Thee is the spring of lives; In Thy light shall we see light (Ps. 36:9).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36편 9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단순히 살아 계신 분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 자체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그는 말씀에서 주님이 ‘살아 계신 여호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불리는 여러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을 직접 ‘생명의 원천(the spring of lives)’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매우 근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나 천사는 스스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을 받는 존재일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을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시며, 모든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생명이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원천 자체가 주님 안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문은 ‘생명(life)’이 아니라 ‘생명들(lives)’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이해합니다. 사랑의 생명, 신앙의 생명, 지혜의 생명, 선의 생명, 진리의 생명 등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은 결국 하나이며, 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씀도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말씀에서 ‘빛(light)’은 진리를 의미하며, 특히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지성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육안이 태양빛이 있어야 사물을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정신도 주님의 진리의 빛 안에 있을 때만 참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생명과 빛을 함께 연결합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를 보는 빛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다시 말하면 선과 사랑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고, 지혜와 진리의 빛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천국 전체는 바로 이 생명과 빛의 유입으로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것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표현의 궁극적인 근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태고교회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 자체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원천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36편 9절은 AC.290 전체의 핵심을 가장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라는 말은 모든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선언하며,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는 말은 모든 참된 지혜와 진리 역시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와 인간, 교회와 천국의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유래한다는 진리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렘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렘17:13) O Jehovah, the hope of Israel, all who forsake Thee shall be ashamed, and they who turn aside away from Me shall be written in the earth, for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 spring of living waters (Jer. 17:13).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예레미야 17장 13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단순히 ‘생명의 원천’이실 뿐 아니라 ‘생수의 근원(the spring of living waters)’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시편 36편 9절의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를 인용하여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였고, 이제는 같은 진리를 ‘생수’라는 상징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참된 교회를 의미하며, ‘소망’은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버린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수치’가 됩니다. 이는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잃어버린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라는 표현은 AC.278에서 설명된 ‘흙(dust)’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흙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정죄된 상태, 영적인 죽음, 그리고 지옥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흙에 기록된다’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명의 영역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기서 ‘생수(living waters)’는 말씀의 진리,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물이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듯이, 영적 진리는 영혼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그 물이 단순한 물이 아니라 ‘생수’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물은 진리를, 생수는 생명을 가진 진리, 곧 주님에게서 나오는 살아 있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참된 지혜와 모든 영적 생명이 그분에게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시편 36편 9절의 ‘생명의 원천’이라는 표현과 사실상 같은 진리를 다른 상징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AC.290의 전체 주제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주님만이 살아 계신 분이시며, 천사와 인간은 모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떠나면, 자연스럽게 생명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생수의 근원을 버린 자’와 ‘흙에 기록된 자’를 서로 연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것은 곧 영적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 17장 13절을 통해, 주님이 ‘생명의 원천’일 뿐 아니라 ‘생수의 근원’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과 모든 진리는 그분에게서 나오며, 그분을 떠나는 것은 곧 생명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사상인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참된 생명은 그분에게서만 나온다’는 진리를 매우 강력하게 증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2. ‘사38: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사38:11) I said, I shall not see Jah, Jah in the land of the living! I shall not look on man any more with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Isa. 38:11)!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38장 11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산 자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 단순한 지상의 어떤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들과 천국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르는 여러 구절들을 제시하면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죽음을 앞두고 탄식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에 대한 슬픔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 속에서 더 깊은 영적 의미를 봅니다. 여기서 ‘산 자의 땅’은 단순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여호와를 본다’는 표현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을 본다는 것은 그분을 인식하고, 그분의 임재와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본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하며 그분과 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한 본문은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인간 사회와의 이별을 뜻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사람(man)’이라는 표현 자체가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 곧 교회 안의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단순한 인간 집단 이상의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AC.290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산 자의 땅’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설명한 뒤,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사야 38장 11절은 생명이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 안에 있는 상태가 곧 ‘산 자의 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 구절은 또한 생명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를 생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생명은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주님에게서 떠나 있으면 영적으로는 죽은 자이며, 반대로 육체를 떠났더라도 주님 안에 있으면 참으로 살아 있는 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산 자의 땅’은 단순한 지상이 아니라 천국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38장 11절을 통해, 천국이 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그분의 생명을 받아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가르침인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 안에 있는 자들만이 참으로 산 자들이다’라는 진리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3. ‘사53: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53:8) From restraint and from judgment He was taken; and who shall contemplate His generation? For He was severed from the land of the living; on account of the transgression of My people a plague was upon Him (Isa. 53: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53장 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지상의 생존 영역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영적 생명의 영역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르는 여러 구절을 제시하면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메시아에 대한 가장 유명한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다’고 말하는데, 문자적으로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단순한 육체적 죽음 이상의 의미로 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산 자들의 땅’은 단순한 지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가운데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주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AC.290의 문맥에서 ‘산 자들의 땅’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국과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친히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지신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는 실제로 주님에게서 생명이 끊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들이 경험하는 가장 깊은 버려짐과 고난의 상태까지 내려오셨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이어서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의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타락과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를 지옥과의 싸움과 인류 구원을 위한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고난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상태를 짊어지신 주님의 구속 사역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산 자들의 땅’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사실상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주님이 그 땅에서 끊어지셨다고 말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분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죽음의 상태까지 내려오셨다는 놀라운 신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이사야서가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천국과 교회가 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곳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8절은 단순히 주님의 수난을 예언하는 구절일 뿐 아니라,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며, 천국과 교회는 그 생명 안에 있기 때문에 ‘산 자들의 땅’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4. ‘겔26:20’
내가 너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내려가서 옛적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하고 너를 그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땅 깊은 곳 예로부터 황폐한 곳에 살게 하리라 네가 다시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지 못하리니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겔26:20) and I shall bring thee down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to the people of an age, and shall cause thee to dwell in the lower earth, as in waste places of an age, with those who go down into the pit, so that thou not be dwelt in; and 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26:20);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26장 20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 천국과 교회, 곧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을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설명한 뒤, 그러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역이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두로(Tyre)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두로는 상응적으로는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특히 교회의 지식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오용하고 타락시킨 상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들과 함께 내려간다’, ‘땅 깊은 곳에 거하게 된다’, ‘옛적부터 황폐한 곳에 있게 된다’는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영적 생명이 결핍된 상태, 곧 지옥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구덩이(pit)’는 말씀에서 거짓과 영적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덩이에 내려간다’는 것은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에서 멀어져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땅 깊은 곳’과 ‘황폐한 곳’도 생명이 없는 상태, 주님의 빛과 진리가 미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부정적 상태와 대조되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산 자들의 땅’입니다. 본문 마지막에서 주님은 ‘내가 산 자들의 땅에 영광을 두리라(I shall put elegance in the land of the living)’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영광(glory)’은 말씀에서 주님의 신적 진리와 그 빛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광은 황폐한 곳이나 구덩이에 있는 자들에게 놓이는 것이 아니라, ‘산 자들의 땅’에 놓입니다.
이것은 곧 주님의 진리와 생명이 천국과 참된 교회 안에서 빛난다는 뜻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는 단순히 장소의 차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차이입니다. 구덩이와 황폐한 곳은 주님의 생명을 거부한 상태를 의미하고, 산 자들의 땅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주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영역이 바로 ‘산 자들의 땅’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도 그곳에 머물며, 천국과 교회도 그 생명 안에서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산 자들의 땅’이 단순한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진리가 충만한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5. ‘겔32:23-27’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27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 (겔32:23-27)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shall not lie with the mighty who are fallen of the uncircumcised, who are gone down to hell with their weapons of war; and they have put their swords under their heads, but their iniquities shall be on their bones, as they were the dismay of the might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7).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32장 23-27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 단순히 지상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산 자들의 땅에서 두려움을 끼쳤다’는 말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통해 ‘산 자들의 땅’이 특별한 영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본문은 애굽과 여러 이방 민족들의 영적 몰락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엘람, 메섹, 두발 등은 문자적으로는 고대 민족들이지만, 상응적으로는 진리와 선에서 벗어난 여러 종류의 거짓과 악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칼에 죽임을 당한 자’, ‘할례받지 못한 자’, ‘구덩이에 내려간 자’로 묘사되는데, 이는 모두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본문은 그들이 과거에 ‘산 자들의 땅에서 두려움을 끼쳤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강대국들이 세상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역사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두려움을 끼쳤다’는 것은 거짓과 악이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압박하고 파괴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산 자들의 땅’은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영역, 곧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산 자들의 땅’과 ‘구덩이’를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구덩이, 낮은 땅, 죽임당한 자들, 할례받지 못한 자들, 수치와 굴욕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산 자들의 땅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생명과 영적 죽음의 대조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는 ‘산 자들의 땅’으로 표현되고, 그 생명을 거부하여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상태는 ‘구덩이’와 ‘지하 세계’로 표현됩니다.
특히 27절의 ‘그들의 죄악이 그들의 뼈 위에 있다’는 표현도 주목할 만합니다. 뼈는 사람의 가장 바깥쪽, 가장 낮은 부분을 의미하는데, 죄악이 뼈 위에 있다는 것은 악이 삶의 가장 깊은 습성과 본성에까지 스며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명의 영역인 ‘산 자들의 땅’에 속하지 못하고 죽음의 영역에 머물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역사적 민족들의 멸망을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 표현이 여러 예언서에서 일관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통해, 말씀 자체가 천국과 교회를 ‘산 자들의 땅’으로 부르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국과 교회는 ‘산 자들의 땅’이라 불립니다. 반대로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아무리 세상에서 강하고 두려운 존재였을지라도 결국 ‘구덩이’에 속한 자들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에스겔 32장 23-27절은 생명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왜 천국과 교회가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리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AC.290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6. ‘겔32:32’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그 모든 무리와 더불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곧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이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32) For I have put My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he shall be laid dow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with them that are slain with the sword, even Pharaoh and all his multitude,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32).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32장 32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서 같은 장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표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천국과 교회가 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하면서, 이 표현이 말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Pharaoh)에 대한 심판의 결론 부분입니다. 상응적으로 바로는 단순한 애굽 왕이 아니라, 신적인 것들을 자기 지성과 기억지식으로만 이해하려는 자연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지성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처음에는 강하고 지혜로워 보이지만, 결국 영적 생명과 분리되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바로로 하여금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산 자들의 땅’은 앞선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천국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바로와 애굽은 그 영역 안에서 진리를 혼란시키고 사람들을 미혹하며 두려움을 끼치는 세력으로 묘사됩니다. 즉 거짓된 지성과 자기 확신이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렇게 강력해 보이던 바로도 결국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 가운데’,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 가운데’ 눕게 됩니다. 말씀에서 ‘할례받지 못한 자’는 선과 진리로 정결하게 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는 거짓으로 인해 영적으로 멸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패배와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특별히 ‘산 자들의 땅’과 ‘죽임당한 자들의 무덤’을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주님과 결합된 상태는 ‘산 자들의 땅’으로 표현됩니다. 반면 자기 자신과 세상의 지혜만을 의지하는 상태는 결국 ‘칼에 죽임당한 자들’의 상태로 끝납니다. 이것은 AC.290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과 죽음의 대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내가 두려움을 두었다(I have put My dismay)’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주님께서 두려움을 주신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주님께서 악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혼란과 황폐가 이러한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말씀은 종종 결과를 원인처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에스겔 32장 32절을 통해 다시 한번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천국과 교회의 상태를 의미하며, 그곳에 속한 사람들은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바로로 대표되는 자기 지성의 사람들은 한때 그 땅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결국 생명의 영역이 아니라 죽음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는 상태만이 참된 삶이다’라는 AC.290의 중심 사상을 뒷받침하는 마지막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7. ‘시27: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시27:13)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27편 13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 단순한 지상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선이 나타나는 천국과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여러 구절들을 통해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하였으며, 이 구절은 그 의미를 더욱 아름답고 직접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목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보다(see)’는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호와의 선하심’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선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의 생명 안에서 그분의 선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만일 이것이 단순히 지상의 생존 상태를 의미한다면, 악인과 선인 모두가 같은 땅에 살고 있으므로 특별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말씀은 ‘산 자들의 땅’을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영역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천국과 참된 교회, 그리고 주님과 결합된 영적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90에서 인용된 다른 구절들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시편 36편 9절에서는 주님을 ‘생명의 원천’이라고 불렀고, 예레미야 17장 13절에서는 ‘생수의 근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영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즉 주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천국과 교회는 그 생명이 흘러 들어가는 땅인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 속에는 강한 확신도 담겨 있습니다. 그는 ‘확실히 믿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의 선하심이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그 선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영적 확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희망의 표현이 아니라 신앙의 선언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입니다.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그것이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천국과 교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곳은 단순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7편 13절은 AC.290의 핵심 주제를 매우 아름답게 요약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는 천국과 교회는 ‘산 자들의 땅’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땅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선하심을 보고, 이해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며, 참된 삶은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라는 AC.290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8. ‘시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시52: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52편 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의미하며, 그곳에서 뽑혀 나간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여러 구절들을 통해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는데, 이 구절은 그 표현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악인의 최후를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시며’, ‘네 장막에서 뽑아내시며’, ‘산 자들의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말씀의 상응에서 사랑과 예배, 또는 교회의 거처를 의미하며, ‘뿌리’는 생명의 근원과 연결된 가장 깊은 기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생명 자체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산 자들의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신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만일 ‘산 자들의 땅’이 단순히 이 세상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단지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즉 산 자들의 땅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천국과 교회의 상태이며, 그곳에서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시편 27편 13절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산 자들의 땅은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그 땅에서 뿌리가 뽑혀 나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생명에서 끊어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생명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결합되어 있는 사람은 ‘산 자’이며, 그가 속한 상태는 ‘산 자들의 땅’입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사람은 비록 존재를 계속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이며, 생명의 땅에서 뿌리 뽑힌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영적 상태이며, 그곳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그 땅에서 뿌리가 뽑힌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과 분리되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시편 52편 5절은 AC.290에서 ‘산 자들의 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9. ‘시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142: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142편 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 단순히 사람이 살아가는 지상의 세계가 아니라,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영적 영역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르는 여러 성경 구절을 제시하면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피난처’는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보호와 안전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분깃(portion)’은 상속받은 기업이나 소유를 뜻하는데, 영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소유하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특히 다윗은 ‘주는 나의 분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고백입니다. 그는 어떤 땅이나 재산이나 권세를 자신의 기업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 자신을 자신의 분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천국의 본질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의 행복은 어떤 환경이나 외적인 보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 자체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곧 사람의 기업이며 분깃이 됩니다.
이 고백이 ‘산 자들의 땅에서’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된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산 자들의 땅은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주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산 자들의 땅은 주님을 자신의 분깃으로 아는 사람들이 속한 영역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시편 27편 13절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본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를 자신의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는 주님의 선을 경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자신을 가장 귀한 기업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둘 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산 자들의 땅’이 단순히 생존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생명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곳에서는 주님의 선하심이 드러나고, 주님 자신이 사람의 분깃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산 자들의 땅은 궁극적으로 천국을 의미하며, 그 천국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편 142편 5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해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산 자들의 땅에서 사람의 피난처가 되시고 분깃이 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산 자들’이라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20. ‘시66: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66:9) 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 (Ps. 66:9).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66편 9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산 자들 가운데 두시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생명은 그분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 후,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왜 ‘산 자들(living)’이라고 불리는지를 여러 말씀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은 문자 그대로 ‘우리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시는 분(Who putteth our soul among the living)’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산 자들의 무리 가운데 두신다는 점입니다. 즉 생명은 인간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산 자들’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숨 쉬고 움직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말씀에서 ‘산 자들’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 곧 신앙과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기서 ‘영혼(soul)’은 사람의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신다는 것은, 그 사람을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영역 안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자기 자신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사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앞에서 주님은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생명이 실제로 사람 안에 어떻게 전달되는지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심으로써, 그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시편 66편 9절은 ‘산 자’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를 생명의 영역 안에 두시기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AC.290에서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산 자들이다’라는 가르침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1. ‘시69:28’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69:28) Let them be wiped out of the Book of Lives, And not be written with the just (Ps. 69:2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69편 2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책(Book of Lives)’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한 뒤, 그러한 사람들이 말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책에서 삭제해 달라는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자적인 명부나 기록부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책(book)’은 기억과 기록, 그리고 사람의 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은 주님 앞에 있는 어떤 물질적 책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본문은 ‘생명책’과 ‘의인들과 함께 기록됨’을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이 단순한 등록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뜻임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의인은 자기 의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란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생명책에서 지워진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삭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 주님을 거부하고 선과 진리를 버림으로써 생명의 상태에서 떠나게 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결과를 ‘생명책에서 지워진다’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나온 ‘산 자들’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의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신다’(시 66:9)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됩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돌아서면 그는 더 이상 생명의 상태 안에 있지 않게 되며, 그래서 ‘생명책에서 지워진 자’로 묘사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원문 표현인 ‘생명책(Book of Lives)’에 주목합니다. 이는 단순히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영적 생명, 곧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생명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은 그러한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69편 28절은 AC.290에서 매우 중요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이 구절은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로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생명책은 단순한 상징적 기록부가 아니라, 주님과 결합된 영적 생명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 점에서 이 구절은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AC.290의 중심 가르침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22.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And all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worship him,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Rev. 13: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책(book of life)’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시편 69편 28절의 ‘생명들의 책(Book of Lives)’을 인용한 뒤, 이어서 계시록의 ‘생명책(book of life)’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별합니다. 여기서 차이를 결정하는 기준은 권력이나 지식이나 외적 소속이 아니라,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책은 단순한 명부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곧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에서 ‘어린 양(Lamb)’은 주님의 신적 인성, 특히 구속과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은 일반적인 생명의 책이 아니라, 어린 양이신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생명책도 본질적으로는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미리 기록하고 어떤 사람은 미리 제외하셨다는 예정론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의 해석에서 ‘이름(name)’은 사람의 본성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며,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그 생명을 거부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에서 짐승은 주님에게서 나온 진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나온 거짓된 원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짐승을 경배하는 것은 거짓을 진리보다 더 사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거짓에 굴복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결국 짐승을 따르게 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시편 69편 28절과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생명들의 책’에서 지워지는 것이 언급되었고, 여기서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언급됩니다. 두 경우 모두 핵심은 동일합니다. 생명책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그 책에 기록된 자들은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통해, 말씀에서 ‘생명책’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기록부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가르침, 곧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산 자들이다’라는 진리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3. ‘계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계17:8) The beast that thou sawest was and is not, and is about to come up out of the abyss, and to go away into destruction; and they who dwell on the earth shall marvel, whose names were not written on the book of life 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 looking at the beast that was and is not, and yet is (Rev. 17: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 17장 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생명책(book of life)’에 기록된 자들과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시편과 계시록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며, 주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구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본문은 ‘짐승’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말하면서, 그들을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 자체보다도, 왜 어떤 사람들은 짐승에게 미혹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여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생명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나온 원리를 더 사랑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창세 이후로(from the founding of the world)’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세상이 창조된 순간부터 작성된 명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세상(world)’은 흔히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교회가 존재하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별되어 왔음을 뜻합니다.
본문의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올라온다’는 표현은 거짓이 여러 형태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거짓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가도 다시 등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거짓에 놀라고 매료되지만,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본질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요한계시록 13장 8절과 거의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로 묘사되었고, 여기서는 짐승을 보고 놀라는 자들이 역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생명책이 단순한 상징적 기록부가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지 여부를 나타내는 표현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AC.290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사람들, 곧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거짓과 악에 쉽게 미혹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만이 참된 생명을 가진다’는 AC.290의 중심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4.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계20:15) And if anyone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 he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Rev. 20:1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계시록 20장 1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생명책(book of life)’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의미하며, 그 생명 밖에 있는 상태가 곧 지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여러 구절을 통해 주님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으며, 이 구절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은 매우 간결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최후 심판 때 어떤 책을 펼쳐 이름을 대조한 뒤 형벌을 내리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의 재판 기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생명책’은 사람의 전 생애와 내적 상태, 특히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인 정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대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잊으셨거나 제외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지속적으로 거절하여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 머문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불 못(lake of fire)’ 역시 문자적인 불바다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불은 본래 사랑을 의미합니다. 천국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천적 불로 나타나지만, 지옥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옥의 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불 못은 주님에게서 분리된 사랑, 곧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지옥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어떤 임의적인 형벌 선고를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상태와 불 못은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사실상 같은 상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거부한 사람은 결국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머물게 되며,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전체 논리를 완성해 줍니다. 주님은 ‘생명의 원천’이시고, ‘생수의 근원’이시며,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는 사람들은 ‘산 자들’, ‘산 자들의 땅에 있는 자들’,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불립니다. 반대로 그 생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결국 생명책 밖에 있게 되며, 자기 사랑의 불 가운데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20장 15절을 통해, 생명책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상징적 장부가 아니라 사람의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 안에 있다는 뜻이고,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생명에서 스스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가르침인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참된 생명은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다’는 진리를 강력하게 확증하는 마지막 증거들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5. ‘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After two days He will make us live; i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and we shall live before Him (Hos. 6:2).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호세아 6장 2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living)’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생명의 원천’, ‘산 자들의 땅’, ‘생명책’ 등의 표현을 통해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한 뒤, 이제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절로 이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부활과 거듭남의 의미를 봅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생명을 갖고 있지 않으며, 주님께서 그를 살리실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따라서 ‘살리신다’는 말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부여하신다는 뜻입니다.
특히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는 표현은 말씀 전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부활과 완성의 상징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 날’을 단순한 시간 계산으로 보기보다, 시련과 준비의 과정을 거친 뒤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영적 상태로 일으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핵심은 마지막 말씀인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에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 안에 있으며,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생명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주제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앞서 인용된 시편 66편 9절에서는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신다’고 하였고, 여기서는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린 것은 그 교회가 생명의 근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전달하는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일으킴을 받는 것도, 주님의 앞에서 사는 것도 모두 주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호세아 6장 2절을 통해, 말씀에서 ‘산다(live)’는 표현이 단순한 자연적 생명을 뜻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에서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가르침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6. ‘시85:6’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시85:6) Wilt Thou not return, wilt Thou not make us live, That Thy people may be glad in Thee? (Ps. 85:6)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편 85편 6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말씀에서 ‘살게 하신다(make us live)’는 표현은 영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을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설명하였고, 이제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리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육체의 소생을 의미하기보다, 신앙과 사랑이 쇠퇴한 상태에서 다시 영적 생명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다시(return)’라는 표현은 이전에 주님과의 연결이 있었으나 그것이 약화되거나 잃어버려진 상태를 전제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생명을 처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회복(restoration)’과 ‘거듭남(regeneration)’의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이어지는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이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쁨(gladness)을 단순한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참된 기쁨은 사랑과 신앙이 결합될 때 생기는 천적이고 영적인 행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호세아 6장 2절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호세아에서는 ‘그가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고 하였고, 여기서는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이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 모두 생명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또한 AC.290의 전체 문맥에서 보면, 스베덴보리는 ‘산 자들’, ‘산 자들의 땅’, ‘생명책’ 등의 표현을 하나의 공통된 진리 아래 묶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생명이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게 하신다’는 말도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실 때 사람은 산 자가 되며, 그 생명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85편 6절은 AC.290에서 매우 중요한 증거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이 인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비로소 참된 기쁨과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사람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만 참으로 살아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7. ‘사26: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사26:14) The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rise again,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Isa. 26:14),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6장 14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산 자(living)’와 ‘죽은 자(dead)’가 단순히 육체적 생사(生死)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 불린다는 여러 구절을 제시하였고, 이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하여 같은 진리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겠고’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부활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계속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는 자연적 죽음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르바임(Rephaim)은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르바임은 문자적으로는 거인족을 가리키지만, 상응적으로는 자기 확신과 교만 속에 빠져 진리를 왜곡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주님께서 임의로 사람을 멸하신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 스스로가 주님의 생명을 거부할 때 그 결과로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되며, 말씀은 이러한 결과를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기억을 없이하였다’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 기억은 단순한 기억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과 흔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영적 생명과 연결된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과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호세아 6장 2절이나 시편 85편 6절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그가 우리를 살리시며’,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말하였지만, 여기서는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한쪽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그 생명을 완전히 거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26장 14절을 통해, 말씀에서 ‘죽은 자’라는 표현 역시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산 자들’이라 불립니다. 반대로 그 생명을 거부한 사람들은 비록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도 말씀에서는 ‘죽은 자들’이라고 불립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에서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8. ‘겔32:23-26’
23그 무덤이 구덩이 깊은 곳에 만들어졌고 그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진 자 곧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하던 자로다 24거기에 엘람이 있고 그 모든 무리가 그 무덤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져 지하에 내려간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25그와 그 모든 무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침상을 놓았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뉘었도다 26거기에 메섹과 두발과 그 모든 무리가 있고 그 여러 무덤은 사방에 있음이여 그들은 다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로다 그들이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두렵게 하였으나 (겔32:23-26) whose graves are put in the flanks of the pit, and her assembly is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put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lam is there, and all her crowd around her grave, all of them slain, fallen by the sword, who have gone down uncircumcised to the lower earth, who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and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y have put a bed for her in the midst of the slain with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slain by the sword, for their dismay was put in the land of the living, but they have borne their humiliation with them that go down to the pit. He is put in the midst of the slain. Meshech is there, Tubal, and all her crowd; her graves are all around him, all of them uncircumcised, pierced by the sword, 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 (Ezek. 32:23-26).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32장 23-26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의미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교회와 천국의 영역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을 ‘생명의 원천’, ‘생수의 근원’,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설명한 뒤,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여러 성경 구절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산 자들의 땅에서 두려움을 끼쳤다(for they put their dismay in the land of the living)’는 말이 나옵니다. 만일 ‘산 자들의 땅’이 단순히 지상의 인간 사회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반복은 특별한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산 자들’이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거짓과 악이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압박하고 혼란시키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엘람, 메섹, 두발 등은 단순한 역사적 민족들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이들은 각각 진리가 왜곡된 상태, 외적인 지식에만 머무르는 상태, 또는 신앙 없는 지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로 묘사되는 것은 거짓으로 인해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칼은 진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은 이들이 ‘구덩이’, ‘지하’, ‘무덤’, ‘죽임당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모두 영적 죽음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가 특별히 ‘산 자들의 땅’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생명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엘람이나 메섹에 대한 해석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관심은 반복해서 나타나는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교회와 천국을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부정적인 대조를 통해 보여줍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산 자들’이며 그들이 속한 곳은 ‘산 자들의 땅’입니다. 반면 거짓과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강하고 두려운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칼에 죽임당한 자들’, ‘구덩이에 내려간 자들’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32장 23-26절은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참된 생명이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교회와 천국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산 자들의 땅’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AC.290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9. ‘겔32:28-31’
28오직 너는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함께 패망할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29거기에 에돔 곧 그 왕들과 그 모든 고관이 있음이여 그들이 강성하였었으나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있겠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구덩이에 내려간 자와 함께 누우리로다 30거기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내려간 북쪽 모든 방백과 모든 시돈 사람이 있음이여 그들이 본래는 강성하였으므로 두렵게 하였으나 이제는 부끄러움을 품고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와 함께 누웠고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수치를 당하였도다 31바로가 그들을 보고 그 모든 무리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것임이여 칼에 죽임을 당한 바로와 그 온 군대가 그러하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32:28-31) And thou shalt be broken in the midst of the uncircumcised, and shalt lie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re is Edom, her kings, and all her chiefs, which with their might are put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they shall lie with the uncircumcised, and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There be the princes of the north, all of them, and all the Zidonians, who have gone down with the slain; by their dismay they are ashamed of their might; and they lie uncircumcised with those slain by the sword, and bear their humiliation with those who go down to the pit. Pharaoh shall see them, and shall comfort himself over all his crowd; Pharaoh and all his host are slain by the sword, says the Lord Jehovih (Ezek. 32:28–31).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에스겔 32장 28-31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선 23-27절과 마찬가지로 ‘산 자들의 땅(the land of the living)’과 대조되는 영적 죽음의 상태를 보여 줌으로써,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이 부분에서는 ‘산 자들의 땅’이라는 표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바로 앞 구절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그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에돔, 북쪽의 방백들, 시돈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에돔은 자기 사랑에 의해 왜곡된 선을, 북쪽은 진리의 빛이 결핍된 상태를, 시돈은 신앙의 지식을 가졌으나 그것을 삶에 적용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모두 한때는 강하고 영향력이 있었으나 결국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 ‘할례받지 못한 자들’, ‘구덩이에 내려간 자들’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특히 반복되는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할례는 말씀에서 외적인 의식 자체보다 내적 정결, 곧 악한 사랑이 제거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할례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지 못한 상태, 곧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죽음과 황폐의 영역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표현도 반복됩니다. 말씀에서 칼은 반대 의미로 거짓을 의미하므로,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여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에서는 바로가 이들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함께 멸망한 자들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는 뜻처럼 보이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같은 종류의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서로를 통해 자기 상태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천국적 위로가 아니라,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자들끼리의 왜곡된 연대감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결국 동일합니다. 그는 ‘산 자들’, ‘산 자들의 땅’, ‘생명책’ 등의 표현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들은 산 자들이고, 그들이 속한 곳은 산 자들의 땅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머무는 자들은 아무리 세상에서 강해 보일지라도 결국 ‘구덩이에 내려간 자들’,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에스겔 32장 28-31절은 앞선 구절들과 함께,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참된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오며, 주님과 결합된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산 자들’이라 불릴 수 있다는 AC.290의 중심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0.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4:16) the people who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o sat in the country and shadow of death, light has risen (Matt. 4:16).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마태복음 4장 16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진리에서 분리된 영적 상태를 의미하며, 반대로 ‘빛(light)’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한 뒤, 이제 그 죽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흑암에 앉은 백성’과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갈릴리 지방에 복음이 전파된 사건을 설명하는 예언의 성취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영적 의미를 봅니다. 여기서 ‘흑암’은 진리에 대한 무지와 거짓을 의미하며, ‘사망의 땅’은 주님의 생명이 결핍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히 가난하거나 고난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사망의 땅과 그늘’이라는 표현은 AC.290의 주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앞에서 천국은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 상태가 ‘사망의 땅’으로 묘사됩니다. 산 자들의 땅이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곳이라면, 사망의 땅은 그 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은 서로 반대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은 어둠이나 죽음이 아니라 ‘큰 빛’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영적 죽음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과 진리를 가져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빛은 언제나 신적 진리를 뜻하며, 그 진리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복음 전파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강림 자체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망의 땅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빛을 본다는 것은, 거짓과 무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산 자들’이라는 표현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죽은 자들’과 ‘사망의 땅’이라는 표현도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의 의미는 죽음의 상태와 대조될 때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4장 16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복음서의 언어로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람은 본래 흑암과 사망의 땅에 앉아 있었지만, 주님께서 오심으로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곧 주님의 신적 진리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 사람은 죽은 자의 상태에서 벗어나 산 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오는 진리와 신앙 안에 있는 자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AC.290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증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1.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 Amen, amen, I say to you, that an hour comes, and now is, when the dead sha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ey who hear shall live (John 5:2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5장 2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죽은 자(dead)’와 ‘산 자(living)’라는 표현이 육체적 죽음과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여러 구절을 제시하였는데, 이 말씀은 그 의미를 주님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증언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곧 이 때라(now is)’라는 표현입니다. 만일 이 말씀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부활만을 의미한다면, ‘곧 이 때라’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당시에도 이미 그 시간이 와 있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의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생명과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말씀의 의미에서는 죽은 자들입니다. 앞서 이사야 26장 14절의 ‘죽은 자들은 살지 못하겠고’가 영적 죽음을 의미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죽음은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음성(voice)’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 곧 말씀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they who hear shall live)’는 AC.290 전체의 핵심을 그대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은 인간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죽은 자는 산 자가 됩니다. 그래서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호세아 6장 2절의 ‘그가 우리를 살리시며’, 시편 85편 6절의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시편 66편 9절의 ‘우리 영혼을 산 자들 가운데 두신다’는 말씀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모두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90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서 인용된 많은 구절들은 시편, 예언서, 계시록의 말씀들이었지만, 여기서는 주님께서 친히 ‘죽은 자들이 살아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조건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5장 25절을 통해, ‘산 자들’이란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죽은 자들’은 육체의 죽은 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 곧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들은 살아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가르침인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2. ‘요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8:21) Then Jesus said again to them, I go, and you shall seek Me, and shall die in your sin. Whither I go, you cannot come (John 8:21).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8장 21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죄 가운데 죽는다(die in your sin)’는 표현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거부함으로써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산 자들’, ‘산 자들의 땅’, ‘생명책’ 등의 표현을 통해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라고 설명하였고, 이제는 그 반대 상태가 무엇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특별히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곧 주님과 결합되지 못한 채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주님이 가시는 곳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상태,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께 나아오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막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상태가 주님의 생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5장 25절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머무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생명’과 ‘죽음’이 본질적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므로, 그분과 결합된 사람은 살아 있는 자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AC.290의 핵심 주제를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지은 상태에서 육체의 생을 마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천국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사랑 안에 있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8장 21절을 통해, 말씀에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AC.290에서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3. ‘요8: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I said then to you that you sha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you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8장 24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참된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반대로 주님을 믿지 않는 상태는 ‘죄 가운데 죽는 것’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구절은 그 이유를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뒤, 그 이유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믿지 아니하면’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누구신지를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생명과 진리가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내가 그인 줄(I am)’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메시아다’라는 뜻을 넘어서는 표현입니다. 말씀 전체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라는 표현은 여호와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주님은 자신이 생명 자체이신 분임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므로,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히 ‘믿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원인은 주님께서 형벌을 내리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스스로 돌아서는 데 있습니다. 마치 태양빛을 등지면 어둠 속에 있게 되는 것처럼, 주님을 거부하면 영적 죽음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5장 25절과 요한복음 8장 21절을 더욱 선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5장에서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고, 8장 21절에서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왜 죽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은 주님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산 자들’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왜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불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8장 24절은 AC.290의 핵심 사상을 매우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사람은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34. ‘요8:51-52’
51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8:51, 52) Amen, amen, I say to you,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behold death for eternity. Then the Jews said to Him, Now we know that Thou hast a demon. Abraham is dead, and the prophets, and Thou sayest, If anyone keep My word, he shall not taste death into the ages (John 8:51, 52).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한복음 8장 51-52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죽음(death)’이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 불린다고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 사실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즉시 반박합니다.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들은 죽음을 육체의 죽음으로만 이해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으므로, 주님의 말씀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만일 육체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아브라함도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모두 죽었으므로 주님의 말씀이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영적 죽음, 곧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 말을 지킨다’는 것도 단순히 말씀을 암기하거나 외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는 그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의 생명 안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특히 ‘죽음을 본다(behold death)’와 ‘죽음을 맛본다(taste death)’는 표현은 영적 체험을 가리킵니다. 말씀에서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맛본다는 것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 죽음을 자신의 상태로 경험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5장 25절의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강조되었고, 여기서는 살아난 사람이 더 이상 죽음을 보지 않는 것이 강조됩니다. 두 구절 모두 영적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8장 24절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과도 정확히 대응됩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는 영적 죽음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생명의 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는 말씀에서 ‘죽음’이라는 말이 대개 영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죽더라도 영적으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자들이다’라는 AC.290의 핵심 가르침을 가장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5.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He shall swallow up death perpetually; and the Lord Jehovih shall wipe away the tear from all the faces; and the reproach of His people shall He remove from all the earth; for Jehovah has spoken (Isa. 25:8).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5장 8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오심으로 그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해 왔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죽음이 결국 주님에 의해 폐하여진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만일 여기서 사망이 육체적 죽음을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의 사망을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영적 죽음이란 주님에게서 분리된 상태, 곧 선과 진리의 생명을 잃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사망을 삼켜 버리신다(swallow up death)’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던 지옥의 권세와 영적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는 단순한 도덕적 모범의 삶이 아니라 지옥 전체와의 끊임없는 전투였으며, 그 승리를 통해 인류에게 다시 천국으로 나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망이 멸해진다는 것은 육체가 죽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말씀에서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영적 고통과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는 불안과 두려움과 공허함이 생기지만, 주님의 생명이 다시 유입될 때 그러한 영적 슬픔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눈물을 씻기신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수치는 단순한 체면 손상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상실된 상태에서 오는 영적 부끄러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수치가 제거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생명과 진리의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8장 51절의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개인의 차원에서 죽음이 정복되는 것이 말해졌다면, 여기서는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사망 자체가 폐하여지는 것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둘 다 동일한 진리, 곧 주님께서 영적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5장 8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심으로써 그 영적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 결과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영적 죽음을 영원히 멸하셨다’는 AC.290의 핵심 사상을 웅장하게 선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6. ‘사28:15’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사28:15) for you have said, We have cut a covenant with death, and with hell have we made a vision; when the whip of inundation passes through, it shall not come to us; for we will set a lie as our protection, and in falsity will we hide ourselves (Isa. 28:15).
AC.29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8장 15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death)’과 ‘스올(hell, 지옥)’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나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 가운데 있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산 자들’이라고 불리고, 주님의 생명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러한 영적 죽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은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표현입니다. 누가 실제로 죽음과 계약을 맺고 지옥과 조약을 체결하겠습니까?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사망’은 영적 죽음, 곧 진리와 선을 거부한 상태를 의미하며, ‘스올’은 그러한 상태가 궁극적으로 연결되는 지옥적 삶을 의미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가입니다. 그들은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안전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들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것을 안전과 보호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영적 죽음의 본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영적 죽음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거짓을 진리처럼 믿고 그 안에서 안전을 찾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 8장 24절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을 거부하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 죽음의 상태가 ‘거짓을 피난처로 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죽음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거짓과 악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왜 어떤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라고 불리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대신 거짓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이미 ‘사망과 언약한 자들’로 불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사야 28장 15절을 AC.290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사망과 언약하고 스올과 맹약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AC.290의 중심 사상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강하게 증언합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산 자들입니다. 반대로 거짓과 허위를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은 비록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말씀의 의미에서는 이미 사망과 연합한 자들입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 28장 15절은 ‘생명’과 ‘죽음’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 구절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19:10)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planted near the waters;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Ezek. 19:10).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할 뿐 아니라, 특별히 ‘좋은 상태에 있는 교회’도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사50:1, 렘50:12, 겔16:45는 모두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풍성한 생명을 받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겔19의 역사적 배경은 유다 왕국의 몰락과 슬픔을 노래하는 애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배경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 구절에서 ‘어머니’가 고대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 역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는 상응의 한 예가 됩니다.
여기서 교회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로 묘사됩니다. 말씀에서 포도나무는 일반적으로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교회가 본래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또한 ‘물이 많으므로’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므로 물가에 심겨 있고 물이 많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한 진리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가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진리 안에 있을 때 선한 삶과 풍성한 영적 열매가 나타남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에서 ‘어머니’를 고대교회로 설명합니다. 반면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혼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겔19:10의 ‘어머니’는 문맥상 고대교회를 의미하지만, ‘어머니’라는 상징 자체는 최초의 교회이며 유일한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에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교회를 예로 들면서도 하나의 공통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곧 말씀에서 ‘어머니’는 시대와 대상이 달라져도 언제나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타락한 교회를, 어떤 경우에는 주님 안에서 열매 맺는 교회를 가리키지만, ‘어머니’라는 상응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9:10을 인용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긍정적인 모습으로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인용들이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 구절은 주님의 진리 가운데 심겨 풍성한 열매를 맺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를 통하여 ‘어머니’라는 표현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교회를 나타내는 영적 상징임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겔16:45)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your mother was a Hittite,and your father an Amorite(Ezek. 16:45),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의 타락을 책망하는 말씀이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도‘어머니’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교회를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한 사50:1이나 렘50:12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그렇다면‘어머니’역시 그 주님과 결합하고 신앙의 진리를 낳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즉,이 구절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서 제시하는 상응 해석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남편을 싫어하였다’는 말씀은 단순히 부부 사이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영적으로는 교회가 주님을 거부하고,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선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원래 교회는 주님과 결합,생명을 받아야 하지만,타락한 교회는 그 결합을 싫어하고,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자녀를 싫어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말씀에서‘자녀’는 교회로부터 태어나는 신앙의 진리들을 상징합니다.따라서 이 구절은 교회가 주님뿐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까지 함께 거절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이것은 교회의 타락이 단순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선과 진리 자체를 거부하는 영적 문제임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라’는 말씀도 실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이‘헷 사람’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은 악을 의미합니다.즉,타락한 교회는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거짓과 악을 자기 근원으로 삼는 교회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상응 관계를 통하여‘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만일‘어머니’를 단순한 육신의 어머니로 이해한다면, ‘남편은 주님’, ‘자녀들은 신앙의 진리’, ‘헷 사람은 거짓’, ‘아모리 사람은 악’이라는 설명은 서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그러나‘어머니’를 교회로 이해하면,구절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영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6:45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어머니’라는 단어 하나를 예로 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그는 이 구절 전체를 통하여‘어머니는 교회’, ‘남편은 주님’, ‘자녀들은 신앙의 진리’라는 상응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따라서 이 말씀은‘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가장 풍성하고도 분명하게 증명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렘50:12)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Jer. 50:12).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의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지만,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바벨론 자체가 아니라‘어머니’라는 표현입니다.그는 이 구절을 통하여 말씀에서‘어머니’가 영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말씀에서‘어머니’는 사람을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이,교회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영적 생명으로 자라게 합니다.그러므로‘어머니’라는 표현은 한 개인이 아니라 영적 공동체,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 구절에서‘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는 말씀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여기서‘수치’와‘치욕’은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고 본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교회는 여전히 외형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주님과의 결합을 잃으면 영적으로는 수치 가운데 있는 교회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바벨론에 대한 심판 가운데 기록하고 있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도 변하지 않는 상응 원리를 봅니다.곧 말씀에서‘어머니’라는 표현은 역사적 배경이 어디이든 일관되게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따라서 그는 이 구절을‘어머니’가 교회를 뜻한다는 성경적 증거로 인용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교회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주님 안에 있는 교회는 영적 생명을 낳는 어머니가 되지만,선과 진리를 떠난 교회는 수치와 부끄러움 가운데 있는 어머니가 됩니다.따라서‘어머니’라는 상징은 교회의 존재뿐 아니라 그 영적 상태까지 함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렘50:12를 인용하는 이유는,역사적으로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라 할지라도,그 안에 사용된‘어머니’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역사적 배경을 넘어 일관된 상응의 질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사50:1)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Isa. 50:1)?
스베덴보리가AC.289에서 위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실제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이사야가 말하는‘너희의 어미’는 이스라엘 백성 각자의 어머니가 아니라,그들을 영적으로 낳고 길러야 했던 이스라엘 교회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는 흔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나타납니다.주님은 교회에 사랑과 선,진리와 생명을 주시고,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여 사람들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그러므로 교회를‘아내’라고 할 때에는 주님과 결합,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측면을 강조하고, ‘어머니’라고 할 때에는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달,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사50:1의‘이혼 증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이 끊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그러나 이 구절은 주님께서 까닭 없이 교회를 버리셨다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물으심으로써,주님께서 먼저 교회를 내버리신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이어지는 말씀처럼,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원인은 그들 자신의 죄악과 허물에 있었습니다.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부,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을 끊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어머니의 이혼’은 교회 조직이 외적으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성전과 제사,율법과 종교적 형식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교회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말씀의 진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게 왜곡하면,외형은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주님과 분리됩니다.이것이 영적 의미에서의 이혼입니다.
이 구절은‘어머니’라는 표현이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개인의 육신의 어머니에게 주님이 이혼 증서를 주신다는 것은 문맥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어머니’를 교회로 이해하면,주님과 교회의 언약 관계,그 관계의 파괴,그리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어머니’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성경적 증거로 인용합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심판과 함께 주님의 자비도 담겨 있습니다.주님께서는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먼저 관계를 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오히려 교회가 스스로 떠난 뒤에도 계속 돌아오라고 부르시며,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정,다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그러므로‘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는‘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는 주님의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50:1을 인용하는 이유는,말씀에서‘어머니’가 사람을 영적으로 낳고 기르는 교회를 의미하며,교회가 주님과 분리되는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선과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이 구절은 교회가‘어머니’라는 사실뿐 아니라,교회의 생명은 오직 주님과의 결합에 있으며,그 결합을 잃으면 외적 종교 형식이 남아 있어도 참된 교회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창3:20)
AC.289
‘아내’(wife)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의미한다는 것도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mother)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에서는 교회를 매우 자주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It has also been shown above that by “wife” is meant the church, and in the universal sense the kingdom of the Lord in the heavens and on earth; and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same is meant by “mother.” In the Word the church is very frequently called “mother,” as in Isaiah: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사50:1) Where is the bill of your mother’s divorcement (Isa. 50:1)?
예레미야에는In Jeremiah:
그러므로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 보라 그가 나라들 가운데의 마지막과 광야와 마른 땅과 거친 계곡이 될 것이며 (렘50:12) Your mother is greatly ashamed; she that bare you was suffused with shame (Jer. 50:12).
에스겔에는In Ezekiel: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겔16:45) Thou art thy mother’s daughter that loathed her man and her sons; your mother was a Hittite, and your father an Amorite (Ezek. 16:45),
여기서 ‘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자녀’(sons)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헷 사람’(Hittite)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Amorite)은 악을 의미합니다. where “man” [vir] denotes the Lord and all that is celestial; “sons,” the truths of faith; a “Hittite,” what is false: and an “Amorite,” what is evil.
역시 에스겔에In the same: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19:10) Thy mother is like a vine in thy likeness, planted near the waters; she was fruitful and full of leaves because of many waters (Ezek. 19:10).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특히 ‘어머니’(mother)라는 이름은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립니다. 태고교회는 최초의 교회였으며, 유일한 천적 교회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Here “mother” denotes the ancient church. The term “mother” is more especially applicable to the most ancient church, because it was the first church, and the only one that was celestial, and therefore beloved by the Lord more than any other.
해설
AC.289은 왜 말씀에서 교회를 ‘어머니’라고 하는지를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아내’가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는데,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머니’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여인이나 어머니를 단순한 가족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어머니’는 영적으로 사람을 낳고 기르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이, 교회는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합니다. 따라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단순히 출생의 근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에게 전달되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교회를 자주 ‘어머니’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하여 여러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먼저 사50:1에서는 ‘너희 어미의 이혼 증서’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어미, 곧 어머니’는 이스라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혼은 주님께서 교회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스스로 주님을 떠나 언약을 깨뜨린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와 주님 사이의 영적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렘50:12에서도 ‘너희의 어머니가 큰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를 낳은 자가 치욕을 당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어머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거짓과 악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영광을 잃었기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처럼 한 나라나 한 민족을 단순한 정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교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겔16:45에서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실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헷 사람’은 거짓을, ‘아모리 사람’은 악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편’(man, vir)은 주님과 천적인 모든 것을, ‘자녀’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거짓과 악을 받아들인 교회가 주님과 신앙의 진리마저 싫어하게 된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겔19:10에서는 ‘네 어머니는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 같아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고대교회를 의미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교회를, 많은 물은 풍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고대교회가 한때 주님의 진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같은 ‘어머니’라는 표현이라도 문맥에 따라 태고교회, 고대교회, 이스라엘 교회 등 여러 교회를 가리킬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언제나 교회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라는 이름은 무엇보다 태고교회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는 인류 최초의 교회였을 뿐 아니라, 유일한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퍼셉션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직접 받아들이며 살았고, 이후의 모든 참된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어떤 교회는 더 사랑하시고 다른 교회는 덜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모든 사람과 모든 교회를 향하여 동일합니다. 다만 태고교회는 그 사랑을 가장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AC.289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왜 교회를 의미하는지를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영적 생명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며, 그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를 만날 때에는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