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창2:23)
AC.157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그 안에 속 사람이 들어 있는, 겉 사람의 own을 뜻하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의 사람들, 곧 같은 집이나 같은 가족에 속한 사람들이나, 어떤 정도로든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야곱에게 말하기를,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아비멜렉도 자기 어머니의 형제들과 외조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또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해설
AC.157은 앞 절의 선언, 곧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시적 표현이나 개인적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고대 세계 전체에 통용되던 ‘영적, 사회적 인식의 언어’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성경 안의 실제 역사적 용례들을 통해,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핵심은 이 표현이 ‘자기의 사람들’(their own, [proprii])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친근감이나 애정 표현이 아니라, ‘같은 생명권, 같은 소속, 같은 정체성 안에 있다는 인식’을 뜻합니다. 즉 ‘너는 나와 하나의 own에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은 혈연적 사실을 넘어, 야곱을 자기 집안의 일부로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의 말 역시 정치적 설득의 언어이지만, 그 근거는 혈연적 자기 동일성에 있습니다. 다윗에게 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말도 마찬가지로, 왕과 백성이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몸과 같은 관계’임을 선언하는 말입니다.
이 모든 용례에서 공통적인 것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분리될 수 없는 결속’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외적 연합이 아니라, own으로 묶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매우 강력합니다. 한편으로는 보호와 충성의 언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점이 창2의 문맥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앞 절에서 ‘여자’가 ‘아내’로 불리고, 이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언어가 등장함으로써, 인간의 own은 더 이상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집, 나의 몸, 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절(AC.158-159)로 이어지는 논리적, 영적 다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결혼제도의 기원이 아니라, ‘자기의 own과의 결합이 최종적으로 정당화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AC.157은 그 결합이 왜 그렇게 강력하고 되돌리기 어려운지를, 고대 언어의 실제 사용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심화
1. ‘창29: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관계를 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생명에 속한 결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AC.157의 흐름에서 스베덴보리는 ‘뼈’와 ‘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뼈’는 보다 외적이고 지탱하는 진리 구조를, ‘살’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는 말은 단순 친척 확인이 아니라, ‘너와 나는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창29:14에서 라반은 야곱을 단순 외부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와 같은 혈육, 곧 자기 생명권 안에 속한 자로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식 속뜻에서는 이것이 단순 가족 관계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사이, 곧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AC.149 이후 스베덴보리는 계속 ‘뼈’와 ‘살’을 영적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는 죽은 상태의 인간이 주님의 breath로 살아나는 모습이 나오고, 주님의 부활 장면에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심으로써,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전체 구조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57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는, 참된 결합은 단순 외적 접촉이 아니라 같은 선과 진리,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속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뼈’만 있으면 차갑고 딱딱한 구조에 불과하지만, ‘살’이 함께할 때 거기에 살아 있는 affection과 생명이 들어옵니다. 즉, 진리와 선의 결합이 완전한 인간을 이룹니다.
또 이 표현은 앞선 창2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도 핵심은 단순 육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서로 같은 생명과 본질 안에서 결합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라반의 말 역시, 말씀 전체의 상응 체계 안에서는 ‘같은 생명 안에 속함’, ‘같은 affection과 진리 안에서 연결됨’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창2:23)
AC.156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own을 뜻합니다. 여기서 ‘뼈’(bone)는 아직 그다지 살아나지 않은 own을 뜻하고, ‘살’(flesh)은 살아난 own을 뜻합니다. 또한 ‘남자’(Man)는 속 사람을 뜻하며,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여자’(woman)라 했던 own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Now)라는 말은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에 이렇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선언이 단순한 감탄이나 결혼 서약의 시초가 아니라, ‘인간 내적 구조의 변화가 언어로 표출된 장면’임을 밝히는 단락입니다. 이 말은 인식의 언어가 아니라, 상태의 언어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철저히 ‘own’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뼈’는 여전히 생명이 적은 own이며, ‘살’은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입니다. 즉 이 문장은 own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own이 ‘살아난 정도의 차이’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상태에서 이미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미묘한 징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명칭의 변화입니다. 이전까지 ‘여자’라 하던 것을 이제는 ‘아내’라고 합니다. 이 변화는 역할이나 위계의 변화가 아니라, ‘결합 방식의 변화’를 뜻합니다. ‘남자’, 즉 ‘사람’은 여전히 속 사람을 뜻하고, ‘아내’는 겉 사람의 own입니다. 이제 이 둘은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상호 결합된 상태로 인식됩니다. own이 더 이상 외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보이지 않고,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결과’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전 상태에서는 own이 ‘여자’로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own이 속 사람과 하나의 몸처럼 인식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에 나타날 더 큰 위험의 전조입니다. own이 살아나되,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AC.156은 따라서 중립적인 진술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매우 긴장된 지점에 서 있습니다.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이 ‘아내’로 불리며 결합되었으나, 이 결합은 아직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결합’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단락들에서는 이 결합이 어떻게 사랑의 언어로 정당화되고, 동시에 질서의 한계를 넘게 되는지가 이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이 절은 창2의 정서적 정점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환의 경고등’과도 같은 자리입니다. 이 긴장을 품은 채로 AC.157-159로 넘어가게 되면, ‘버리고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왜 그토록 결정적인 문장이 되는지가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오늘(2026/05/1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0,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75, ‘주여 우리 무리를’입니다.
오늘은창2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9절로 22절, AC 글 번호로는 142번에서 15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19-22)
이 본문을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
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본문 및 해설,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시작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 전체 범위에서 ‘이름’, ‘돕는 배필’, ‘깊은 잠’, ‘갈빗대’, 그리고 ‘여자’를 키워드로 각각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름’입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나 식별표가 아니라, 존재의 essence와 quality, 곧 그 존재의 본질과 상태 전체를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교회 사람들에게 이름을 짓는 일은 단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 안에 있는 origin과 nature를 분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었다(창2:20)는 것도 단순 작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안의 여러 애정과 상태들의 성질을 분별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표현은 단순 호명이 아니라, 그 존재를 깊이 알고 인정하며, 섭리 안에 두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고레스나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들의 상태와 역할 전체를 아시고 주님의 목적 안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내 것이라’(사43:1)는 선언은 단순 소유의 말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아시고 받아들이신다는 영적 의미를 담습니다.
또한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 개명(改名)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처럼, 이름의 변화는 영적 상태와 사명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AC.154-155는 인간의 proprium(라틴, 영어로는 own)조차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원래 자기중심적이던 proprium이 이제 주님의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는 상태가 바로 ‘새 이름’과 상응하는 새로운 존재 상태입니다. 결국 말씀에서 이름은 존재의 본질이며, 새 이름은 새 생명과 새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래는 proprium에 대한 설명입니다.
proprium이란, 영어로는 own이라 하며, 우리말로 옮기기 참 쉽지 않은, 굳이 옮기자면, ‘자기(自己)의 것’, ‘자기성(性)’, ‘자기감(感)’ 등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마음먹고, 이해하고, 선택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모든 걸 마치 자기가 하는 줄로 알게 주님이 허락하신 근본적인 어떤 것입니다. 로봇과 인간을 나누는, 자아, 본성보다 상위 혹은 더 안쪽 개념이며, 이게 있어야 사람은 자유가 시작되고, 그래야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됩니다. 말씀 전체가 어찌 보면 전부 이 proprium(own)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인 ‘갈빗대’, ‘여자’ 이야기도 사실은 이 proprium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돕는 배필’입니다.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동반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안에 반드시 형성되어야 하는 어떤 내적 결합 구조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인간 안의 여러 애정과 생각, 곧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에서도 ‘돕는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진리와 인식, 즉 지식을 가져도, 자기 존재 안에 어떤 살아 있는 결합이 형성되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AC.146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에게 진리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님의 질서를 충분히 ‘보도록 허락받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인식의 부족이 아니라 ‘욕구의 방향’이었습니다. 인간은 점점 자신의 own, 곧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중심에 두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이 없었다’는 반복은 단순 실패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방향 전환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외부에서 발견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proprium의 구조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 것처럼 느끼되 그 방향이 주님을 향해 열린 새로운 proprium을 형성하십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proprium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선과 진리를 담고 섬기는 그릇으로 재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궁극적으로, 인간 안에서 사랑과 진리가 서로 결합하도록 돕는 구조를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남녀 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 전체 안에서 의지와 이해, 사랑과 지성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게 하는 영적 결합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돕는 배필’, ‘이름 짓기’, ‘proprium’, 그리고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주제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 곧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고,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깊은 잠’입니다.
‘깊은 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 즉 자신의 proprium 안으로 들어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느끼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깊은 잠’을 내리셨다(창2:21)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이 마치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점차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기 것, 곧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게 되자,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을 ‘깊은 잠’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면 그에 대한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 ‘깊은 잠’은 단순히 타락 이전의 평안한 잠이 아니라, 인간 안에 proprium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인간은 이 상태에서 자신을 독립된 존재처럼 느끼게 되며, 이후부터는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지’라는 감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완전한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에서 한 단계 가려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하고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이 상태를 통해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자유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상호 결합, 그러니까 주님과 인간의 결합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은 잠’은 단순한 추락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허용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주님께 돌이켜 자발적으로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깊은 잠’은 매우 중요한 영적 상징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직접 지각하던 천적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영적 상태로 넘어가는 장면이며, 동시에 proprium의 시작과 자유의 시작, 그리고 이후 거듭남의 긴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깊은 잠’ 속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같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다시 ‘나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참고로 태고교회의 첫 세대는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여서 이런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깊은 잠’ 이야기, 곧 창2 후반은 그들의 후손들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갈빗대’입니다.
‘갈빗대’는 단순히 인간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안의 proprium 가운데 비교적 부드럽고 선한 부분, 곧 주님께서 새롭게 형성하실 수 있는 인간 자신의 것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감각과 의지가 주어지되, 그것이 완전히 악한 자기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듬어지고 질서 지어진 형태로 형성되는 과정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자신에게서 나오는 proprium이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느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느끼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자, 주님은 인간 안에 새로운 proprium을 형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원래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죽은 것이며 자기 사랑으로 기울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상대적으로 순하고 유순한 부분을 취해 새로운 인간성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취하셨다’는 표현의 속뜻입니다.
갈빗대가 특별히 사용된 이유도 의미심장합니다. 갈빗대는 심장과 폐를 감싸 보호하는 부분입니다. 심장은 사랑을, 폐는 신앙 혹은 이해를 상징하므로, 갈빗대는 사랑과 신앙을 둘러싸며 지탱하는, 보다 외적인 인간의 것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바깥쪽에 있는, 보다 외적이고 형성 가능한 부분을 사용하여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또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 안에 ‘의지’와 ‘애정’의 차원이 분리되어 드러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단순한 여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곧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결합하려는 성향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갈빗대는 인간 안에서 주님께 순응하고 결합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proprium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갈빗대’는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져 ‘마치 자기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살아 있는 proprium’이라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갈빗대는 단순한 신체 기관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롭게 세우시는 거듭난 인간성의 재료를 의미합니다.
다음은 끝으로 ‘여자’입니다. 겸사 오늘 범위를 전반적으로 리뷰하겠습니다.
AC.142-155에서 ‘여자’는 단순히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 존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간 전체를 통해, ‘여자’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의 새로운 상태, 특히 affection과 의지의 차원, 그리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살아 있는 자기성(自己性)의 구조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단순 결혼 이야기나 인간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사랑과 진리, 의지와 이해, 자기감(自己感)과 주님의 생명이 어떻게 결합되고, 또 어떻게 타락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서술입니다.
먼저 AC.142에서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 작명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quality, 곧 질(質)과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의 여러 애정과 생각, 의지와 이해의 움직임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짐승’은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는 영적 애정들과 생각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모든 상태를 분별했음에도 불구하고 ‘돕는 배필’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아직 어떤 살아 있는 결합 구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 ‘여자’의 필요성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단순 외로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이해(understanding)는 있으되 affection(愛情)이 아직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인간은 진리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랑과 결합될 때라야 비로소 생명을 가집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진리를 살아 있게 만드는 affection의 구조이며, 이 affection을 바로 ‘여자’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43에서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인간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인간은 아직 완전히 자기중심적 상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천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점차 영적 상태로 이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여전히 주님의 생명을 받고 있으나,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한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 속에서 ‘여자’라는 새로운 proprium이 형성됩니다.
AC.144-145에서는 이름의 의미가 계속 설명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essence, origin, nature를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인간 존재 전체의 상태와 방향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자’의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단순 개체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구조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에서 교회가 종종 여성과 신부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 사랑 안에서 열매 맺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AC.146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own, 즉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할 때, 주님의 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자’라는 proprium은 처음에는 주님께 열려 있는 살아 있는 자기감이었지만,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설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affection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 affection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 때 타락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창세기 3장에서 뱀과 연결됩니다. 뱀은 외부 유혹과 감각적 추론을 상징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통로는 ‘여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의 거짓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힘을 가지는 것은, 인간 안의 proprium이 그것과 공명할 때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타락의 희생자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과 자기감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AC.147-149는 동시에 희망도 보여 줍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은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새롭게 vivify, 곧 살아 있게 하십니다. 이때의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 움직이는 구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사적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proprium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모든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압니다.
AC.149에서 ‘뼈’가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뼈는 인간 안의 가장 바깥 구조를 뜻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들어오면 살아날 수 있는 구조를 뜻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이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죽은 뼈와 같지만, 주님의 breath, spiritus가 들어오면 살아납니다. 이것은 ‘여자’라는 proprium 역시 주님의 생명 안에서만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50은 이 문제를 더욱 깊게 다룹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각과 affection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도 오랜 세월 영계를 왕래하며 여러 해 동안 이것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서 ‘여자’의 핵심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여자는 바로 이 ‘as if from himself’ 상태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자기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151-152에서는 ‘여자’가 더욱 명확히 proprium과 연결됩니다.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것은, 인간 안의 affection과 자기감이 자기 사랑 방향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중요한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을 때입니다. 그래서 같은 ‘여자’가 어떤 경우에는 타락의 통로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천국적 affection의 그릇이 됩니다.
AC.153에서는 황폐한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안의 affection과 proprium도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affection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제거 대상이 아니라, 재창조와 거듭남의 중심 구조입니다.
AC.154는 가장 충격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며, 결과적으로 인간은 악과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자체를 무가치하게 보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생명이 그 proprium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 천사들이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AC.155에서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는 보다 내적인 진리와 지혜를, ‘여자’는 affection과 proprium을 뜻합니다. 그리고 ‘둘러싼다’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감싸고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입니다.
따라서 AC.142-155 전체에서 ‘여자’는 단순 여성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의 affection, 의지, 사랑, 그리고 proprium 전체를 상징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살아 있는 자기감으로 허락되었고, 이후 타락의 가능성을 품게 되었지만, 결국 주님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사랑의 차원이며, 인간이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존재 구조입니다.
결국 ‘여자’는 인간 영혼 안의 가장 깊은 질문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 것인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자신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와 선을 감싸는 affection이 될 것인가? AC.142-155는 바로 이 질문을, ‘여자’라는 상징 안에 담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놀라운 말씀들을 우리가 몇 번씩 되새김할 때, 우리를 환히 비추사 우리로 밝히 이해되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AC.155)
이 구절이AC.155에 인용된 이유는, ‘여자’(woman)로 상징되는proprium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감싸고 결합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5의 흐름은, 인간의proprium자체는 본래 악으로 기울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질서 안으로 돌이키실 수 있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렘31:22의 ‘새 일’은 바로 이 역설적 회복을 상징하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매우 난해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여러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상응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이전 창세기 해석들에서처럼 인간의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의지와 애정의 구조를 뜻하고, ‘남자’(man)는 보다 내적이고 주님께 속한 진리와 지성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둘러싼다’(compass)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 지배나 공격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싸고 결합하고 보호하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즉, 이전에는proprium이 진리를 자기 자신 아래 두고 왜곡하려 했지만, 여기서는 반대로proprium자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되어, 진리와 선을 둘러싸고 섬기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일’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AC초반부 전체 흐름 속에서 매우 희망적인 전환처럼 등장합니다. 앞에서는 계속proprium의 위험성과 타락 가능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졌고, 여자라는proprium은 뱀의 유혹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로 그proprium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즉, 주님은 인간을proprium없는 존재로 되돌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자기감과 자유 구조 자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던proprium이, 이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감싸며 움직이는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적proprium’ 혹은 ‘주님께 열린proprium’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 일’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순 외적 개혁이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원래 타락의 통로였던proprium이, 이제는 사랑과 진리를 담는 그릇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55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인간의proprium이 단순히 제거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재형성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원래는 타락의 통로였던 ‘여자’가 이제는 진리와 선을 감싸고 섬기는 구조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5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a rib was built into a woman)라는 말 속에는, 문자로부터는 누구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더 깊은 것들이 가장 안쪽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 내용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으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본문에서도, 그 가장 안쪽에서는 ‘천적 혼인’(heavenly marriage)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천적 혼인은 이러한 성질을 지니는데, 곧 그것은 own 안에 존재하며, 이 own이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난 사람의 own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이 own, 곧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 불리는 것의 성질은 간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지각하고 있으나, 그 일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들이 자기로부터 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이러한 성질의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곧바로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 퍼셉션 안에 머무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이와 같은 own도 예레미야서에서 뜻해지는데,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말씀 역시 천적 혼인을 뜻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대해 ‘두르다’(to compass)라는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이 own이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창세기 2장 전체, 더 나아가 ‘말씀 자체의 가장 깊은 핵심을 직접적으로 열어 보이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인간의 상태만을 말하지 않고, 그 모든 구조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천적 혼인’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안쪽이 언제나 ‘주님 자신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창2의 이 본문도 인간의 기원이나 결혼제도의 설명이 아니라, 주님과 인간, 더 정확히는 주님과 ‘주님에 의해 살아난 인간의 own’ 사이의 관계를 다룹니다.
여기서 천적 혼인은 인간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own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이 결정적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었듯이, 인간의 own은 본질상 죽어 있으나,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살아난 own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인간의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과의 결합의 자리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살아난 own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게 되며, 그 결과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지혜와 지성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는 앞서 AC.92, AC.154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 같은 계열의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천사들조차도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일상적 상태에서는 마치 자기로부터 사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보편적 애정’이 있어서, 사랑과 진리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즉각적인 변화를 지각합니다. 이 민감한 퍼셉션이 그들을 다시 질서로 이끌며, 그 안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이 유지됩니다.
이 설명은 인간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상태란, 끊임없이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를 의식적으로 되뇌는 상태가 아니라, ‘벗어날 때 곧바로 알 수 있는 상태’, 곧 중심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살아난 own의 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렘31:22의 말씀, ‘여자가 남자를 두르리라’는 구절이 인용됩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표현으로, 살아난 own이 사랑의 중심을 둘러싸 보호하고 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갈빗대가 살이 되어 심장을 두르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은 더 이상 분열과 반항의 근원이 아니라, ‘결합과 보호의 자리’가 됩니다.
사람의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AC.154)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own으로 주셨나요?그리고 위‘결과적으로’라는 말은 왜 나왔나요?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곧‘여자’라는 새로운own에서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요?왜 누구는‘흉측’하고,누구는‘소년,소녀’,그리고‘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나요?
AC.154는AC초반부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문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사람의own은 악 그 자체이다’,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 개성이나 자기감 전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먼저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첫 질문,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own으로 주셨는가?”에 대해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실 주님께서 ‘악 자체’를 인간에게 창조해 넣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자유로운 자기감(as if from himself)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사랑도 자유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기감을 점점 자기 독립 생명으로 굳히기 시작하면서,proprium은 주님께 열린 구조에서 자기 자신에게 닫힌 구조로 변질됩니다. 바로 그 닫힌 상태가 ‘악한proprium’입니다.
즉, 원래 허락된 것은 살아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었는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중심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proprium을 설명할 때 자꾸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열려 있는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힌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천사에게도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proprium입니다. 반면 지옥적 인간의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짚으신 ‘결과적으로’(consequently)라는 단어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냥 “사람은 악이다”라고 툭 던지지 않습니다. 그는 논리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둔다면, 결과적으로(consequently)인간은 악과 거짓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본래 독립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중심 삼는 순간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결과 악과 거짓 안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결과적으로’는 단순 접속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왜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은 아주 깊은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여자’라는vivified proprium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어떤 영들은 흉측하고, 어떤 영들은 소년, 소녀처럼 보이며, 어떤 천사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인간은 모두 같은 ‘가능성 구조’ 안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방향으로proprium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영계에서 외모는 단순 외형이 아니라 내면 사랑의 형태입니다. 자기 사랑과 지배욕 안에 굳어진 영은 점점 왜곡되고 흉측해집니다. 반면 주님께 열린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순수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미성숙이 아니라,innocence,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최종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는 허락되지만, 그 자유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인간 존재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으로 굳어지고, 어떤 사람은 점점 주님께 열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결국 영적 형상 전체를 만들어 냅니다.
즉, 같은 출발 구조는 주어졌지만, 같은 방향성과 같은 사랑은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기 영원을 형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4
악과 거짓은 언제나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며, 또한 사람의 own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사람의 own에 속한 것들이 눈앞에 제시될 때, 그것들이 말로 묘사하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흉측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다만 own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어, own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사람의 own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특히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보이며,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꽃으로 엮은 화환이 가슴을 두르고 머리에는 관이 씌워진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고 있습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own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진술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인간론의 바닥을 끝까지 내려갔다가, 곧바로 구원의 가능성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한 치의 완화도 없이 선언합니다. 악과 거짓은 오직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동 일부가 악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own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적으로 들리는 문장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을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이 전제는 영들의 세계에서의 시각적 경험으로 뒷받침됩니다. own이 그대로 드러날 때, 그것은 가장 흉측한 형태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본 당사자조차도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흉측함이 ‘벌’이나 ‘정죄’의 결과가 아니라, ‘own의 본질적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의 생명이 덮이지 않은 own은 그 자체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단락의 후반부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동일한 ‘own’이라 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그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흉측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변화는 own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체어리티와 순진함의 상태가 묘사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합니다. 체어리티로 살아난 이들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무력함이나 결핍의 상징이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상태’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이유는, own을 자기의 것으로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가장 깊은 곳에서의 퍼셉션’이라는 표현은, 이 상태가 감정적 만족이나 외적 평안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서 오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앞서 AC.92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도 정확히 상응합니다.
AC.154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지만, 주님의 생명이 그것을 덮을 때, 동일한 own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은 own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own을 주님께 내어드려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통찰은 이어지는 AC.155에서, 여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언어로 넘어가며, 또 다른 긴장을 불러오게 됩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렘31:4)Yet still will I build thee,and thou shall be built,O virgin of Israel. (Jer. 31:4)
이 구절이AC.153에 인용된 이유는,주님께서 타락과 황폐 이후에도 인간 안의 교회적 상태를 다시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3의 중심 흐름은,proprium때문에 무너진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렘31:4는 바로 그 회복의 약속을 가장 따뜻하고 인격적인 언어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렘31:4에서‘처녀 이스라엘’은 단순 민족 국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에게서 이스라엘은 교회,곧 진리와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그리고‘처녀’(virgin)는 아직 순수성과 수용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즉,완전히 닫혀 버린 상태가 아니라,다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교회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다’입니다.이것은 단순 외적 회복이나 민족 재건을 넘어서,인간 안의 영적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은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것과 같습니다.proprium중심으로 흩어진 인간 안의 생각과 사랑과 삶의 구조가,다시 주님 중심 질서 안으로 재배열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의 사61:4와 흐름이 이어집니다.거기서는 황폐한 도시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다고 했다면,여기서는 그 회복이 더 인격적 관계 언어로 표현됩니다.즉,주님께서 단순 시스템을 복구하시는 것이 아니라,타락한 인간과 다시 관계를 맺으시고,그 존재를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또‘소고를 들고 춤추며 나오리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말씀에서 춤과 기쁨은 단순 감정 폭발이 아니라,사랑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루며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즉,회복은 단순 죄 사함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인간 안에 다시 살아 있는 기쁨과 질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타락과proprium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 안의 교회 상태와 영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지만,주님은‘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즉,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의 자기 재건이 아니라,주님의 재건 역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깊은 위로도 들어 있습니다.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이 무너질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분이 아닙니다.오히려 인간이 무너질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과 자유를 허락하셨고,동시에 그 무너짐 이후에도 다시 세우시는 길까지 준비하신 분입니다.그래서AC.153의 이 흐름은 단순 심판 이후가 아니라, ‘재건하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61:4)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이 구절이AC.153에 인용된 이유는, 인간 안에서 무너지고 황폐해진 영적 상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153의 흐름은, 타락과proprium때문에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무너졌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과 재건의 길을 여신다는 데로 이어집니다. 사61:4는 바로 그 ‘재건’의 이미지를 매우 강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이사야서61장에서 ‘황폐한 곳’, ‘무너진 곳’, ‘대대로 무너져 있던 성읍’은 단순 전쟁 폐허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황폐(desolation)는 진리와 선이 사라진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곧,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진리가 메말라 있으며, 사랑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바로proprium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성읍’(cities)은 말씀에서 자주 교리적 구조와 진리 체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읍이 황폐해졌다는 것은, 인간 안의 진리 질서 자체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감정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생각과 삶의 구조 전체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다시 세우신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regeneration)을 단순 도덕 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도시를 다시 건축하는 것 같은 일입니다. 인간 안에 다시 질서가 세워지고, 사랑과 진리가 다시 연결되고, 삶 전체가 새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황폐함을 다시 세운다’,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킨다’는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또 ‘대대로 황폐하였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일시적 실수가 아니라, 인간성과 교회 전체 안에 오랫동안 누적된 타락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인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 상실 이후 점점 더 외적 인간 중심으로 기울어졌고, 결국 영적 황폐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상태 속에서도 다시 회복의 길을 여십니다.
그래서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proprium과 타락으로 무너진 인간 안의 영적 질서와 진리 구조가 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에덴의 상실이 마지막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한 회복과 재건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 개인 심리 회복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참된 재건은 인간 안의 ‘도시’, 곧 생각과 사랑과 삶의 질서 전체가 다시 주님 중심으로 세워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61장은 단순 위로의 시가 아니라, 황폐해진 인간성과 교회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구속과 거듭남의 약속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창2:22)
AC.153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지만, 앞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created), ‘형성’(formed), 혹은 ‘만들어졌다’(made)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만들다’(build)라는 말은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로 말씀에서 사용되며, ‘만들다, 짓다’(build)는 악에 대해, ‘다시 세우다’(raise up)는 거짓에 대해, ‘새롭게 하다’(renew)는 둘 다에 대해 사용됩니다. 이사야서에 이르기를,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사61:4)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들과 다른 곳들에서 ‘황폐’(Wastes)는 악을 뜻하고, ‘황무’(desolations)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래서 ‘쌓다’(build)는 앞의 것에, ‘다시 일으키다’(set up again)는 뒤의 것에 적용되며, 이러한 구분은 선지자들에 의해 다른 곳들에서도 주의 깊게 지켜집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르기를,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여자’를 가리켜 왜 ‘창조’나 ‘형성’, 혹은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고, 오직 ‘지어졌다’(built into)라고만 표현되는지를 정밀하게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이는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 변화에 대한 ‘영적 진단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창조와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이 주어지고, 질서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이미 질서 안에 있었던 것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뒤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새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짓다’(bui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선지서에서의 용례를 끌어옵니다. ‘황폐’는 악을 뜻하고, ‘황무’는 거짓을 뜻합니다. 그리고 악에 대해서는 ‘짓다’가, 거짓에 대해서는 ‘다시 세우다’가 사용됩니다. 이는 악이 의지의 차원에서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이며, 거짓은 이해의 차원에서 붕괴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의지와 이해의 구분’, 그리고 악과 거짓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여자가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own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의 공허함이 아니라, 한때 생명과 질서 안에 있었으나 자기 인도를 원함으로 인해 붕괴된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 own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위에 다시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도 아니고, ‘형성’도 아니며, ‘만듦’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 ‘이스라엘의 처녀’를 다시 짓겠다고 한 말씀은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황폐를 겪은 뒤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짓다’라는 말은 언제나 ‘회복과 허락’, 그러나 동시에 ‘이전 상태와는 다른 긴장’을 동반합니다.
이 단락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균형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own을 허락하시되, 그것을 신적 질서 안에 다시 세우십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더 이상 순전한 천적 질서가 아니라, 이후에 시험과 위험을 내포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이후 서사의 모든 긴장의 출발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