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질문이 그렇게 절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이군요. 목사님께서 자신의 지난 삶을 ‘오만하고 교만하며,부끄럽고 비겁했다’ 고백하시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예전의 그 삶을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아닙니다. 사람은 아직 악을 사랑하면서 그 악을 진심으로 수치스러워하지 못합니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아파하며, 주님의 자비 없이는 자신에게 아무 소망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회개의 중요한 열매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님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말하면, 주님은 목사님의 인생을 ‘90은 실패,10은 회심’이라는 비율로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오랜 세월 속에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무엇을 억제하시고, 어떤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마침내 어떻게 목사님을 돌이키셨는지를 모두 함께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지막10에 불과해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그10을 위해 평생을 이끌어 오신 것일 수 있습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를 이전보다 더 분명히 보고, 더 이상 그것을 자기 의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상태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계속 아프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죄의 증거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 아픔이 사람을 겸손하게 지키고, 다시proprium을 의지하지 않게 하며, 타인의 연약함을 더 불쌍히 여기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이킨 사람의 통회와 경험을 선한 쓰임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회심 이후 단지 마음속으로 후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말씀을 붙들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예배와 설교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산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참된 회심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목사님의 현재 삶에는 그 방향 전환의 흔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게 된 것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께서 지금 붙드실 말씀은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늦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돌이키셨다’는 사실입니다. 늦게 돌아온 사람도 실제로 돌아왔다면 돌아온 사람입니다. 저녁 무렵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도 주인의 선함 안에 있었고, 탕자도 먼 나라에서 허비한 세월보다 아버지께 돌아온 현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을 값싼 위로나 자동적인 구원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주님의 자비를 인간의 시간 계산보다 작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를 생각하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이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절망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으로 향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을 끝없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주님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목사님이 과거의 무덤 앞에 평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에서 나와 남은 날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90:10’이라는 숫자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목사님의 소망은 회심의 분량이나 남은 세월의 길이에 있지 않고, 돌이키게 하신 주님의 자비와 그 자비 안에서 오늘도 계속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과거가 크더라도 주님은 더 크십니다. 그리고 진실로 주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구원을 스스로 확정하는 오만도,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판결하는 절망도 아니라, 날마다 겸손히 ‘주님,저는 주님의 자비만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것입니다.
‘삶’은 돌아보면 참 오만,교만하고,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회개’했습니다.이 회개는 참된 회개,곧‘회심’이었습니다.전체 비율로는,삶:회심=90:10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럴 경우,부끄러운 삶으로 보낸 시간이 압도적인데,전체 삶으로 평가된다면...과연 구원 받을 수 있나요?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 질문 때문에 ‘삶을 시간의 길이로 재지 않는다’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삶의 대부분은 오만했고 교만했으며,부끄럽고 비겁했다.비로소 말년에 주님의 은혜로 돌이켜 참된 회개와 회심을 경험했지만,전체를 따지면 죄 가운데 보낸 시간이 훨씬 길다.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결국 내 삶 전체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사람의 삶을 단순히 시간의 길이나 선악의 횟수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삶’이란 단순히 평생 동안 행한 행동들의 합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결국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의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악 가운데 있었는가’가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위의 통계가 아니라 사랑의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참된 회개와 회심이란 단순히 죄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중심 사랑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고, 자신의proprium을 신뢰하던 사람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비록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어났더라도, 사람 전체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는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remains)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생 동안 사람 안에 조용히 간직되어 있다가,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말년의 회심은 갑자기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보존해 오신 선과 진리가 마침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과거보다 현재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과거의 악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로 거듭나기 시작하면, 그 과거는 더 이상 그의 중심이 아닙니다. 악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삶을 지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사람의 중심이 아니게 되도록 새 사랑을 심어 주십니다.
이 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게 보낸 세월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과거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의 길이를 재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삶:회심=90:10’이라는 계산은 인간적인 계산일 수는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심판론은 그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90의 악과10의 선을 저울에 올려 어느 쪽이 무거운지를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사람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지금 무엇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의 시간을 지우는 마술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 사랑을 바꾸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든지 진실로 거듭난다면 주님께서는 그 새로운 삶을 그의 참된 삶으로 인정하신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눅15의 아버지의 말씀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가장 잘 요약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너는 평생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그 비율대로 대우하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현재의 상태를 선언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과거의 시간 비율보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된 현재의 생명과 그 생명이 영원히 지속될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위AC.303해설 중‘그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그럼,주님 십자가 상에서 강도 하나에게‘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강도의 삶을 살다 죽음을 앞둔 상황인데요...
목사님, 이 질문 역시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여러 곳에서 직접 다루며, 그의 사후관과 심판론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다는 것이, ‘오늘 네가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 시민이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는 순간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의 최종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중간 영계(World of Spirits)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속 사람이 점차 드러나고, 천사들과 영들의 인도를 받으며, 자신의 참된 사랑과 삶이 나타난 뒤, 비로소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갑니다.AC.182이하에서 이미 보셨듯이, 처음 며칠 동안은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이어 영적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그 후 자신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 강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는 그 강도의 마지막 한마디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와 내면 전체를 보셨다고 이해합니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순간에는 평생 형성해 온 가장 깊은 사랑과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강도의 ‘주여,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고백은 단순한 공포 속의 외침이 아니라,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언제나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삶’은 단순히 겉으로 행한 행동의 총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생 형성된 사랑과 의지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 한마디 때문에 천국에 들어갔다기보다, 그 고백을 통해 그의 참된 내면이 드러났다고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더 잘 어울립니다.
또한 주님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도 스베덴보리의 사후관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낙원’은 곧 주님과 함께 있는 영적 세계를 의미하며, 반드시 최종적인 천국의 처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죽는 그날 곧바로 주님의 보호 아래 영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악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가 주님의 구원 안으로 들어갔음을 선언하는 말씀이지, 사후의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AC.182이하의 사후 세계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인이라 할지라도 죽은 직후에는 일정한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강도 역시 예외가 아니라, 주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그 과정을 지나 천국으로 인도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그의 사상 전체와 조화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약속은 과정의 부정이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장면은 ‘죽기 직전 한 번 믿으면 평생의 삶과 상관없이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본문이라기보다,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주님의 신적 통찰과 자비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사람은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평생 형성된 가장 깊은 사랑과 신앙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내면의 삶을 보시며 심판하십니다. 이 점에서 강도의 이야기는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원리와 모순되기보다, 오히려 그 원리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시대가‘내적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영적 상태였다’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 싶은데요?교회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나...그런데도 왜 주님은 하필 그때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 일을 시작하셨나요?주님의 판단과 섭리의 영역이지만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의문을 품습니다.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새로운 교회를 위해 공개되었다고 설명합니다.그러나 교회사와 세계사를 돌아보면,18세기 유럽이 특별히 영적으로 성숙한 시대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도 당시 기독교회가 이미 깊은 황폐(vastation)에 빠져 있었다고 진단합니다.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하필 그 시대를 선택하여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셨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살펴보면,그는 새로운 교회가 필요했던 이유는 분명히 설명하지만, ‘18세기가 영적으로 가장 준비된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오히려 당시의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삼위일체 이해의 혼란,이신칭의의 오용 등으로 인해 이미 본래의 생명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따라서 새로운 계시의 공개는 교회의 건강함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그 황폐함과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주님께서 계시를 주시는 기준이 반드시 영적 수준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스베덴보리는 반복하여 사람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강요나 외적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따라서 새로운 계시가 공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유롭게 읽고,생각하고,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18세기는 매우 독특한 시대였습니다.교회는 영적으로 쇠퇴했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인쇄술과 출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고,학문과 사상의 교류도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습니다.중세와 같은 절대적 종교 권력 아래였다면 이러한 저작은 널리 보존되거나 전파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반대로 사도 시대에는 아직 기독교 자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내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후대에 전할 역사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주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때는 언제나 소수로부터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노아의 가족도 소수였고,아브라함도 한 사람이었으며,열두 제자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작은 시작이었습니다.그러므로‘그 시대 전체가 내적 의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라는 질문보다, ‘그 시대 안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사상에는 더 잘 어울립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보면,주님께서는 세상이 영적으로 가장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내적 의미를 공개하신 것이 아니라,더 이상 감추어 둘 이유가 줄어든 시점이었으며,동시에 그 진리를 자유롭게 기록하고 보존하며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역사적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 일을 시작하셨다고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면,영적 황폐와 역사적 자유라는 두 조건이 동시에 충족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바탕으로 한 종합적인 해석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이유 때문에18세기를 선택하셨다’단정할 수는 없습니다.그 최종적인 이유는 주님의 섭리 안에 있습니다.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사상 전체를 따라가 보면,주님께서는‘가장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시대’를 기다리셨다기보다, ‘한 번 공개된 진리가 인류 역사 속에서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시대’를 기다리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관점입니다.오늘날 인쇄된 저작과 디지털 기술을 통해 그의 저술이 전 세계로 계속 전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스베덴보리를 통한 말씀의 내적 의미의 공개는 한 세대를 위한 사건이 아니라,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도록 계획된 장기적인 섭리였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위AC.303본문에‘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말...그럼 왜 그때 이런 내적 의미가 그들에게 오픈되지 않았나요?
많은 사람들이AC.303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때 이미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을까?’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AC전체를 함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공개하신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해서, 그 즉시 더 깊은 진리를 알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적 의미의 공개는 단순히 위험의 유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창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알고도 거부하여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런데AC.303은 그와 반대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교회가 충분한 황폐(vastation)를 거친 뒤에는 더 이상 거룩한 것을 모독할 가능성이 이전처럼 크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알려져도 예전과 같은 영적 위험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위험이 사라졌다는 것이 곧바로 새로운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AC.303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이제 해가 없으니 공개하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이 진리를 받아들여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때가 되었는가’를 함께 보십니다. 다시 말하면, 위험이 제거되는 것은 필요조건일 뿐이며, 새로운 교회의 준비는 또 다른 조건입니다.
실제로 유대교회 말기에는 영적으로 심한 황폐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세속적인 메시아관과 문자적 신앙이 매우 강했습니다. 만일 그 시대에 말씀의 내적 의미를 모두 공개하셨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영적 교회를 세우기보다 또 다른 오해와 왜곡을 낳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먼저 성육신하시고, 복음을 주시며, 새로운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그 후에도 내적 의미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으며, 적절한 때가 이를 때까지 보존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말씀의 내적 의미가 본격적으로 공개된 것은 단순히 어느 개인의 깨달음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교회를 위한 섭리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주실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언제나 ‘줄 수 있는 때’가 아니라 ‘받을 수 있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AC.303의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위험이 제거되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던 주님의 섭리가 마침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창3:24의 그룹들은 생명의 길을 영원히 닫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때까지 그 길을 보호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호는 결국 새로운 교회를 위한 준비였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세상에 다시 열리는 날을 향한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또 전하면서 본인은 정말 그 내적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요?그리고 이렇게만 전하고 그 내적 의미를 풀어주지 않아도 이런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1.0으로 보면, 이 질문은 ‘이사야는 무엇을 알았는가?’를 넘어 ‘말씀은 어떻게 기록되는가?’라는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사야는 자신이 기록한 말씀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가 아무것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사명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 속에 주님께서 천사들을 위해 담아 두신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의미까지는 모두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천국의 비밀’ 전체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선지자들이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였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도구’란 인격이나 의식이 없는 기계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전하는 역사적 메시지와 당시 백성에게 주시는 경고는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백성이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기고 귀를 막는 것이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라는AC.303의 깊은 교리까지 알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말씀의 신성을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선지자가 모든 내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뒤 자기 생각으로 기록했다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갖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지자의 이해를 넘어서는 깊이를 말씀 속에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자신도 다 알지 못했던 내용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마13:13-15와 요12:39-40에서 다시 인용되었고, 다시18세기 스베덴보리를 통해 그 영적 의미가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내적 의미를 설명하지도 않았는데,사람들은 알아서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가이드1.0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AC.301-303의 주제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한꺼번에 같은 깊이의 진리를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문자, 그러니까 겉으로만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도덕적 의미를 깨닫고, 어떤 사람은 영적 의미를 조금씩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내가 다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깨달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께 받은 말씀을 충실히 전한다.그 말씀을 각 사람 안에서 열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다니엘도 자신이 받은 환상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천사에게 여러 번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본 뒤 그 의미를 한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모든 상징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사실들을 근거로, 말씀은 인간 저자의 이해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주님께서 보존하신 신적 계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6:9-10을 읽을 때마다 오히려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는 아마 자신도 이 말씀이 수백 년 뒤 주님께서 직접 인용하실 줄은 몰랐을 것이고, 다시 수천 년 뒤AC.303에서profanation과 주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핵심 본문으로 사용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충실하게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중심이 인간 저자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하나의 목회적 원리가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매주AC를 읽고 설교하시면서 ‘이 내용을 성도들이 지금 다 이해할까?’하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은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고, 그 말씀을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열어 주시는 일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사야가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으며, 스베덴보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모든 내적 의미를 상대가 즉시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담아 두신 생명을 신실하게 전달하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각 사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가장 적절한 때에 열리게 됩니다.
유대인들,그리고 유대교회가 참으로 이럴진대 오늘날‘Go to Jerusalem’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에 힘쓰는 선교단체 및 그 흐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가이드1.0에 따르면,AC.301-303을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선교단체들이‘Go to Jerusalem’을 외치며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회복을 위해 힘쓰는데,이것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보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AC.303한 단락만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 전체와 ‘계시록 해설’, ‘계시록 속뜻’, ‘참된 기독교’에 나타나는 말씀 해석의 원리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예언을 기본적으로 내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유다’, ‘예루살렘’, ‘시온’은 단순히 혈통적 민족이나 지리적 국가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진리의 교회를, ‘유다’는 사랑의 교회를, ‘예루살렘’은 참된 교리를, ‘시온’은 주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회복 예언 대부분은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나 특정 민족의 집단적 회심보다,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고, 참된 교리를 회복하시는 일을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AC.302-303은 오히려 현대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이스라엘 종말론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이미 ‘황폐한 상태’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황폐함 가운데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기들의 모든 표상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설명을 들어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역사적 실패가 아니라,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유대인을 포기하였거나, 유대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저작 전체를 보면, 구원은 언제나 민족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이든 한국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각 사람은 자기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선한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천사들의 교육을 받아 더욱 깊은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어느 민족 전체가 특별한 종말론적 특권을 가진다는 사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Go to Jerusalem’ 운동도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유대인도 다른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스베덴보리의 교리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어느 민족도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 민족만이 마지막 시대에 특별한 회복을 받는다’,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와 같은 혈통적, 국가적 종말론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언제나 외적 역사보다 내적 교회에 머뭅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현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보다 ‘말씀이 말하는 이스라엘’, 곧 진리 안에 있는 교회로 돌립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회복도 궁극적으로는 도시의 회복이 아니라 참된 교리의 회복이며, 성전의 재건도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AC.301-303을 가이드1.0에 따라 읽으면, 우리의 기도 역시 달라집니다. 우리는 특정 민족의 종말론적 특권을 기대하기보다, 유대인이든 한국인이든 모든 사람이 자기 상태에 맞는 진리와 선으로 주님께 인도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하는 주님의 보편적 섭리이며,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영적 의미는 지리적 예루살렘이 아니라, 주님의 참된 교리와 참된 교회로 돌아오라는 초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이드1.0에 가장 충실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11, 12)Then said I,Lord,how long?And he said,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and the houses,so that there be no man,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and Jehovah have removed man(Isa. 6:11, 12).
AC.30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6:11-12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사6:9-10의 의미를 시간적, 섭리적 측면에서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사6:9-10이 ‘왜’ 주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시는지를 설명한다면, 사6:11-12는 그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두 부분은 하나의 예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AC.303은 바로 이 전체 문맥을 창3:22-24의 의미를 설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사6:11-12에서 이사야는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겉으로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과 포로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이드1.0의 원칙에 따라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면,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황폐(vastation)를 가리킵니다. 곧 교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거의 사라져 더 이상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AC.303에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시는 목적이 결코 그들을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의지가 이미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굳게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회개로 이어지기보다profanation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심으로써, 오히려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십니다. 이것이 창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이유와 동일한 섭리입니다.
여기서 ‘성읍’은 교리를, ‘집’은 사랑과 선을, ‘사람’은 진리로부터 형성된 지성과 지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읍들이 황폐하고’, ‘집들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된 교리가 무너지고, 선한 사랑이 사라지며, 그 결과 영적 생명이 거의 남지 않은 교회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러한 황폐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악과 거룩한 것이 더 이상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섭리적 분리의 과정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사람을 멀리 옮기신다’는 표현도 가이드1.0의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종종 허용하시는 일까지도 주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이 이렇게 기록된 것은 모든 일이 주님의 섭리 아래 허용됨을 문자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상태를 주님께서 더 큰 악으로 번지지 않도록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AC.303에서 사6:11-12를 인용한 이유는, 사6:9-10의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시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영원한 거절이 아니라, 교회의 황폐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자비의 섭리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생명에서 제외하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악한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를 모독하여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때로는 진리의 문을 잠시 닫아 두십니다. 그러므로 사6:11-12는 창3:24와 함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는 주님의 사랑은 심판 이전에 먼저 보호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말씀으로AC.303에 인용된 것입니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하시기로(사6:9, 10)Go and tell this people,Hearing hear ye,but understand not,and seeing see ye,but know not.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and make their ears heavy,and smear their eyes,lest they see with their eyes,and hear with their ears,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and be converted,so that they be healed(Isa. 6:9–10).
가이드1.0에 따르면,AC.303에서 사6:9-10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히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오히려AC.301부터 계속 설명해 온 ‘주님의 보호 섭리’를 성경적으로 증명하는 핵심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사람들이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계시를 그들의 상태에 맞게 조절하신다’는 영적 법칙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먼저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위험한 죄가profanation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진리를 인정하고 믿은 뒤 다시 그것을 부인하고 악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AC.302에서는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신앙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설명하였고, 마13:13과 요12:40을 인용,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을 연결했습니다. 그리고AC.303에서는 사6의 원문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것이 오래전부터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의 섭리의 법칙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를 무겁게 하고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일부러 무지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이드1.0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악하게 만들지 않으시며, 누구의 자유도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진리를 거부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더 깊은 진리를 억지로 열어 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눈을 감기게 한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까지 모두 열어 주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한 후 다시 부인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profanation이 일어나며,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를 감추심으로써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십니다.AC.303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사6을 인용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씀인 ‘그들이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에서는 더 깊은 진리를 받아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그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큰 영적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거짓된 회심’이나 ‘일시적인 깨달음’보다, 비록 더디더라도 사람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보면AC.303에서 사6:9-10은 창3:22-2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것처럼, 이사야에서는 사람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제한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는 길을 막고, 다른 하나는 눈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둘 다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내쫓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비의 울타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AC.303에서 사6:9-10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님의 계시는 언제나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빛을 일률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열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은 심판의 선언이라기보다, 사람을 더 깊은 영적 파멸에서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이드1.0에 가장 충실한 해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신하게 된 모든 것, 곧 인정하고 믿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생명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않았거나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은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들을 모독(profanation)할 수 있는 사람은, 먼저 그것들을 참된 것으로 확신하여 인정하고 믿은 후에, 다시 그것들을 부인하는 사람뿐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들을 알 수는 있지만,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그들이 ‘황폐하게 되었다’(vastated) 또는 ‘황폐함을 당하였다’(laid waste)고 말하는데, 이는 더 이상 어떤 신앙도 가지고 있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씀의 내적인 내용이 그들에게 열려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며, 마음이 막혀 있는 사람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A man acquires a life by all the things he is persuaded of, that is, which he acknowledges and believes. That of which he is not persuaded, or does not acknowledge and believe, does not affect his mind. And therefore no one can profane holy things unless he has been so persuaded of them that he acknowledges them, and yet denies them.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may know, but are as if they did not know, and are like those who know things that have no existence. Such were the Jews abou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therefore they are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or “laid waste,” that is, to have no longer any faith.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does men no injury to have the interior contents of the Word opened to them, for they are as persons seeing, and yet not seeing; hearing, and yet not hearing; whose hearts are stopped up; of whom the Lord says in Isaiah: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6:9, 10) Go and tell this people, Hearing hear ye, but understand not, and seeing see ye, but know no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 and make their ears heavy, and smear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be converted, so that they be healed (Isa. 6:9–10).
신앙의 신비가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 곧 더 이상 믿지 않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그것들을 모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같은 예언서의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That the mysteries of faith are not revealed until men are in such a state, that is, are so vastated that they no longer believe (in order, as before said, that they may not be able to profane them),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the subsequent verses of the same prophet: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11, 12) Then said I, Lord, how long? And he said, 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 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 and the houses, so that there be no man, 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 and Jehovah have removed man (Isa. 6:11, 12).
여기서 ‘사람’(man)은 지혜로운 사람, 곧 인정하고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께서 오셨을 당시 유대인들은 이처럼 황폐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기들의 탐욕(cupidities), 특히 재물에 대한 탐욕(avarice) 가운데 이러한 황폐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천 번을 듣고, 자기들 교회의 모든 표상이 낱낱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들어도, 아무것도 인정하거나 믿지 않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antediluvians)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더 이상 어떤 진리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황폐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He is called a “man” who is wise, or who acknowledges and believes. The Jews were thus vastated, as already said,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for the same reason they are still kept in such vastation by their cupidities, and especially by their avarice, that although they hear of the Lord a thousand times, and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re significative of him in every particular, yet they acknowledge and believe nothing. This then was the reason why the antediluvians wer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and vastated even until they were no longer capable of acknowledging any truth.
해설
AC.303은 AC.301-302의 결론에 해당하는 단락입니다.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단락은 독립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창3:22-24와 AC.301-303 전체, 그리고 마12:31-32, 마13:13, 요12:40, 히6:4-6, 히10:26-29를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설명하는 주제는 단 하나, 곧 ‘주님께서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하시는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신이 인정하고 믿는 것으로 생명을 형성한다’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어 형성된 영적 생명입니다. 따라서 어떤 진리를 단순히 들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생명이 되려면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와 삶 속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profanation은 모든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진리를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모독할 수도 없습니다. profanation은 먼저 거룩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악과 결합시키는 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히6:4-6, 히10:26-29와 연결하여 반복해서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황폐함’(vastation)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일반적으로 황폐함은 하나님의 심판처럼 들리지만, 스베덴보리에게 황폐함은 단순한 형벌이 아닙니다. AC.303에서 황폐함은 더 이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에서 더 깊은 진리가 열리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보호 섭리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사6과 마13, 요12는 모두 같은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진리가 profanation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이 특별히 더 악했기 때문에 이런 섭리를 받았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것은 AC.303의 의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표상적 교회가 맡았던 역할과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교회는 내적 진리를 직접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외적인 표상과 의식을 통해 장차 오실 주님을 대표, 표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역사적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내적 진리가 무분별하게 열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섭리였습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황폐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말하는 부분 역시 민족 전체의 구원을 단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개인은 언제나 자신의 사랑과 삶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불이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설명하듯이, 선한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진리를 배우며 천사들의 교육을 받습니다. 따라서 AC.303은 민족에 대한 운명론이 아니라, 계시와 profanation에 관한 보편적인 섭리의 법칙을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AC.303은 홍수 이전 사람들까지 다시 언급하면서 창3으로 되돌아갑니다.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그 길을 지키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서 완전히 밝혀집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이미 깊은 천적 진리를 인정한 뒤 그것을 자기애와 결합, profanation에 빠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모독을 막기 위해 에덴에서 쫓겨나 황폐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유대교회에 대한 섭리도, 복음서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모두 동일한 원리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03은 창세기와 이사야, 복음서와 히브리서를 하나의 교리로 통합하면서, 주님의 모든 계시는 언제나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구원을 보호하기 위한 자비의 섭리 아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결론짓는 중요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