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자가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이 넘침같이손으로그 면류관을땅에 던지리니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사28:2, 3)He shall cast down to the earth with the hand;they shall be trampled on by feet—a crown of pride(Isa. 28:2–3).
스베덴보리가AC.258에서 사28:2-3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영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교만을 가장 낮은 자리로 끌어내려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함을 다시 한번 성경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사26이 ‘높은 성읍’이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사28은 그 높아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교만의 면류관’이라는 상징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본문에서 ‘땅에 던지신다’는 표현은 단순한 추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교회나 자연적 차원을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높은 영적 위치에서 가장 낮은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3에서 뱀이 ‘배로 다니며 흙을 먹는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자기 사랑은 하늘의 질서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가장 낮은 영역으로 제한됩니다.
이어지는 ‘발에 밟힐 것이라’는 말씀은AC.258의 핵심 주제를 직접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밟는다’(trample)는 것을 악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세를 꺾어 더 이상 사람과 천국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악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주님의 통치 아래 놓여 활동 범위가 제한됩니다. 따라서 ‘발에 밟힌다’는 것은 신적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교만의 면류관’(a crown of pride)이라는 표현입니다. 면류관은 본래 왕권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참된 영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스스로에게 씌운 거짓된 영광을 의미합니다. 자기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고,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최고의 기준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뱀이 사람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속삭였던 유혹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의 면류관’은 단순한 자만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통치권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영적 교만을 뜻합니다. 이는 앞의AC.257에서 인용된 루시퍼의 ‘내가 하늘에 오르겠다’, ‘내 보좌를 높이겠다’,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겠다’는 선언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루시퍼의 교만이 여기서는 ‘면류관’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뱀, 루시퍼, 붉은 용, 교만의 면류관은 모두 같은 자기 사랑을 서로 다른 표상으로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그 면류관이 결국 발에 밟힌다고 말합니다. 이는 참된 왕권은 자기 높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일수록 영적으로는 낮아지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수록 오히려 높아집니다. 이러한 역전의 질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이며, 창3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도 바로 이 질서를 처음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성경 여러 곳을 연결하여 하나의 일관된 영적 원리를 설명합니다. 창세기에서는 뱀의 머리가 상하고, 이사야에서는 교만의 면류관이 발에 밟히며, 시편에서는 원수들의 머리가 상하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붉은 용이 하늘에서 내쫓깁니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자기 사랑의 지배가 끝나고 주님의 질서가 세워지는 동일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AC.258에서 사28:2-3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단순한 형벌의 선언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교만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그 거짓된 권세를 꺾으시는 주님의 구속 사역을 예언한 말씀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교만의 면류관’이 발에 밟힌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인간의 모든 교만은 결국 무너지고, 오직 주님의 사랑과 진리만이 영원한 통치권을 가지신다는 영적 진리를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주 여호와는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사26:4-6)Jehovah hath cast down them that dwell on high;the exalted city he will humble it;he will humble it even to the earth;he will prostrate it even to the dust;the foot shall tread it down(Isa. 26:4–6).
스베덴보리가AC.258에서 사26:4-6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영적으로는 악과 자기 사랑을 가장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함을 성경의 다른 본문을 통해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상하게 한다’(bruise)와 ‘밟는다’(trample)는 표현이 단순히 파괴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악의 교만과 지배력을 꺾어 질서 아래 두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사26은 바로 이러한 영적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는 단순히 높은 산이나 성곽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는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들, 곧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를 신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악은 언제나 자신을 높이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앞의AC.257에서 인용한 루시퍼의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리라’는 선언도 바로 이러한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사26의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는 창세기의 ‘뱀의 머리’와 동일한 영적 실체를 다른 표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솟은 성’(the exalted city)역시 실제 도시를 가리키기보다, 자기 사랑과 거짓이 스스로 구축한 견고한 사고 체계와 삶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성읍’은 흔히 교리나 사상 체계를 상징합니다. 선한 의미에서는 진리의 교회를 뜻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 교리와 자기중심적 사고 체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성읍을 낮추신다는 것은 악한 사고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그 성읍을 ‘땅에 엎으시되’, 다시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단순히 패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본래 있어야 할 가장 낮은 자리로 되돌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3에서 뱀이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라는 저주와 정확히 같은 영적 질서가 여기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은 더 이상 높은 곳에서 다스리지 못하고, 가장 바깥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영역에만 머물게 됩니다.
이어지는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라는 말씀은AC.258의 핵심을 직접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밟는다’의 의미를 악을 철저히 억눌러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발은 성경에서 가장 바깥 차원의 능력과 실제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발 아래 놓인다는 것은 악이 질서의 가장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창3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심판 방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이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결과에 따라 가장 낮은 상태로 내려가도록 하십니다. 영계에서는 사랑의 성질이 곧 사람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이려는 사랑은 자연스럽게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은 가장 높은 천국으로 향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말씀은 형벌의 선언이라기보다 영적 질서의 법칙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은 주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지옥과 직접 싸우심으로, 자기 사랑이 천국과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 세력을 억누르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뱀은 흙을 먹게 되었고, 이사야의 높은 성읍은 티끌에까지 낮아졌으며, 결국 요한계시록의 큰 붉은 용도 하늘에서 땅으로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하나의 동일한 영적 사건을 서로 다른 표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AC.258에서 사26:4-6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악의 존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교만과 지배권을 꺾어 영원한 신적 질서 아래 두시는 주님의 승리를 의미함을 성경 자체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높은 곳에 사는 자들’, ‘높이 솟은 성읍’, ‘티끌’, ‘발로 밟는다’와 같은 모든 표현은 자기 사랑이 낮아지고 주님의 통치가 확립되는 동일한 영적 진리를 서로 다른 상징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AC.258
‘상하게 할 것이요’(trampling on) 또는 ‘상하게 할 것이니라’(bruising)의 의미가 그것을 낮추어 억누름으로써 ‘배로 다니며 흙을 먹게’(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본 글과 앞 글의 내용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이사야서에도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That by “trampling on” or “bruising” is meant depression, so as to compel it to “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is now evident from this and the preceding verses. So likewise in Isaiah: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사26:4-6) Jehovah hath cast down them that dwell on high; the exalted city he will humble it; he will humble it even to the earth; he will prostrate it even to the dust; the foot shall tread it down (Isa. 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이 넘침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사28:2, 3) He shall cast down to the earth with the hand; they shall be trampled on by feet—a crown of pride (Isa. 28: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5의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 가운데 ‘상하게 할 것이니라’(bruise)와 역시 ‘상하게 할 것이요’로 옮긴 ‘밟다’(trample)라는 표현의 영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이 악을 완전히 소멸시키거나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장 낮은 자리로 억누르고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앞 글의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는 악과 지옥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질서 아래 두신다는 점입니다. 악한 영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천국을 침범하거나 선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주님의 통치 아래 일정한 한계와 질서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것은 지옥의 세력을 무력화하고, 그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배는 가장 낮은 상태를, 흙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에만 머무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즉, 자기 사랑과 거짓은 더 이상 하늘의 진리를 바라보거나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가장 바깥의 자연적 차원에 묶여 있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악을 ‘밟으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저주는 단순한 형벌의 선언이 아니라 영적 질서가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사26을 인용합니다.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 ‘솟은 성’은 문자적으로는 교만한 나라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자기 사랑으로 높아진 마음을 의미합니다. 악은 언제나 자신을 높이고, 스스로 견고한 성을 쌓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땅에’까지, 더 나아가 ‘진토에’까지 낮추십니다. 이는 악이 스스로 차지하려 했던 높은 자리를 완전히 잃고, 가장 낮은 상태에 놓이게 됨을 나타냅니다.
특히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라는 표현은 창3의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성경에서 발은 가장 바깥 차원의 능력과 실행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발로 밟는다는 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질서가 가장 실제적인 차원에서 악을 제압하고 통치함을 의미합니다. 악은 더 이상 머리를 들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지 못하고, 오히려 발 아래 놓이는 대상이 됩니다.
이어지는 사28의 ‘교만한 면류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면류관은 본래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사랑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거짓된 영광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일수록 자신이 강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 모든 교만이 결국 발에 밟히는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무너뜨리시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악의 중심에 있는 교만과 자기 지배욕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높음’과 ‘낮음’의 상응을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사랑은 언제나 올라가려 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낮추십니다. 반대로 겸손과 체어리티는 스스로를 낮추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높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낮추심’, ‘엎으심’, ‘밟으심’, ‘진토에 이르게 하심’은 모두 악한 사랑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가는 과정을 표현하는 서로 다른 상징들입니다.
AC.258은 창3:15의 ‘상하게 한다’는 표현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주님의 승리는 악을 존재에서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사람과 천국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영원한 질서 아래 두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자기 사랑과 거짓이 완전히 무질서한 권세를 잃고, 주님의 통치 아래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는 영원한 영적 질서를 선언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시110:1-2, 6-7)The saying of Jehovah to my Lord,Sit thou at my right hand,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Jehovah shall send the rod of thy strength out of Zion,he shall judge the nations,he hath filled with dead bodies,he hath bruised the head over much land;he shall drink of the brook in the way,therefore shall he lift up the head(Ps. 110:1–2, 6–7).
스베덴보리가AC.257에서 시110:1-2, 6-7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결국 주님의 메시아적 승리를 예언하는 말씀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사14의 ‘루시퍼’와 계12의 ‘큰 붉은 용’을 통해 악이 얼마나 스스로를 높이려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시110을 통해서는 그러한 악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키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증언합니다. 다시 말해, 앞의 두 인용이 악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라면, 이 인용은 그 악을 이기시는 주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110은 신약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메시아 시편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구절은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주님께 하신 말씀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말씀을 주님의 신적 인성과 영화(Glorification)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은 창3:15의 승리가 추상적인 선의 승리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실제로 지옥과 싸워 이기심으로 이루신 승리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특히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는 말씀은 창세기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예언과 직접 연결됩니다.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과 발 아래 두는 것은 모두 악의 지배권을 완전히 무너뜨린다는 같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발’은 가장 바깥 차원의 능력과 실행을 의미하므로, 원수들이 발판이 된다는 것은 지옥의 세력이 더 이상 주님이나 천국을 지배할 수 없고, 오히려 신적 질서 아래 복종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또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라는 말씀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시온’은 천적 교회와 주님의 신적 사랑을 상징하며, ‘홀’은 왕권과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권능의 홀은 세속적인 무력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창3의 약속 역시 무력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진리가 지옥의 거짓과 악을 압도하는 승리라는 점에서 이 시편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어지는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라는 구절은AC.257의 핵심과 직접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머리’는 단순히 어떤 개인의 머리가 아니라, 악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 곧 자기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뱀의 머리’를 자기 사랑의 지배욕으로 설명한 것처럼, 시편에서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 ‘머리’를 치시고 깨뜨리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창세기와 시편은 서로 다른 표현으로 동일한 영적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물’은 진리를, ‘시냇물’은 삶 가운데 실제로 적용되는 진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모든 시험과 유혹을 겪으시며, 신적 진리에 따라 끝까지 싸우셨고, 그 결과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머리를 드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인다는 뜻이 아니라, 승리를 완성하신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심을 의미합니다. 이는 루시퍼가 자기 힘으로 머리를 높이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루시퍼는 스스로 높아지려다 낮아졌고, 주님은 끝까지 자신을 낮추심으로 가장 높이 들리셨습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시110을 인용한 것은 창3:15을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예언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사14은 자기 사랑의 교만을, 계12은 그 악의 조직적인 세력을, 그리고 시110은 그 모든 악을 정복하시는 메시아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세 본문은 서로 독립된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주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증언하는 것입니다.
AC.257에서 이 시편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단순한 인간도, 천사도 아니라, 성육신하여 지옥의 모든 세력과 직접 싸우시고 끝내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3:15은 인간이 악을 이겨 내라는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악의 근원을 정복하셨으며, 그 승리의 능력으로 오늘도 사람 안에 있는 ‘뱀의 머리’, 곧 자기 사랑의 지배를 꺾어 가신다는 구속의 복음을 선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그가 땅으로 내쫓기니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12:3, 9)A great red dragon,having seven heads,and ten horns,and many diadems upon his heads;but he was cast into the earth(Rev. 12:3, 9).
스베덴보리가AC.257에서 계12:3, 9의 ‘큰 붉은 용’을 인용한 이유는, 창3의 ‘뱀’이 단순히 에덴동산에 등장했던 한 존재가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계속 활동하는 동일한 영적 악의 원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뱀’, 이사야의 ‘루시퍼’,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큰 붉은 용’은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표상으로 나타나지만,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자기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거짓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은 특히 이 악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강력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한 뱀이 아니라 ‘큰 붉은 용’으로 묘사된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극도로 성장, 거대한 영적 세력을 이루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붉은색’은 사랑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천국적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그로 인한 파괴적인 욕망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붉은 용은 사랑 자체가 타락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상징합니다.
‘일곱 머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머리는 지배하는 원리와 지성을 의미하며, 일곱은 성경에서 충만함이나 완전함을 뜻하는 수입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는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과 악이 모든 방면에서 사람의 사고를 지배하려 함을 나타냅니다. 창세기에서 말한 ‘뱀의 머리’가 이제는 일곱 머리로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은, 악이 개인의 유혹을 넘어 교회와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열 뿔’ 역시 권세를 의미합니다. ‘뿔’은 성경에서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용의 열 뿔은 악과 거짓이 단순히 생각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을 행사하려 함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AC.257에서 자기 사랑은 세상을 지배하려 하고, 하늘을 지배하려 하며, 마침내 주님까지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한 내용이 바로 이 상징 속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머리 위에 있는 ‘많은 면류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면류관은 본래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거짓 권위를 뜻합니다. 즉, 악은 언제나 자신을 선으로 꾸미고,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하며, 사람들 앞에서 정당성과 권위를 주장합니다. 악이 가장 위험한 때는 노골적으로 악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진리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지옥은 선과 진리를 흉내 내며 사람을 속인다고 설명하는데, 이 면류관은 바로 그러한 위장된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핵심은 용의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가 땅으로 내쫓겼다.’ 아무리 거대한 용이라 해도 천국에는 머물 수 없습니다. 자기 사랑은 하늘의 질서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배로 다니며 흙을 먹게 된다’고 하신 말씀과 요한계시록에서 용이 ‘땅으로 내쫓긴다’는 말씀은 같은 영적 진리를 서로 다른 표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존재 자체에서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천국과 사람의 내면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낮은 자리로 제한하십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가 계12을 인용한 것은 창세기의 ‘뱀의 머리’를 신약의 계시와 연결하여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영적 전쟁은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며, 그 싸움의 본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한편에는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기 사랑과 거짓이 있습니다. 용은 시대마다 이름과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인용은 창3:15의 약속이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자기 사랑과 거짓의 세력을 끝내 패배시키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큰 붉은 용’은 단순한 종말의 괴물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머리를 들려는 자기 사랑의 상징이며, 주님께서 반드시 굴복시키시는 ‘뱀의 머리’의 또 다른 표상인 것입니다.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14:12-15)O Lucifer,thou hast said in thy heart,I will ascend the heavens,I will exal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and I will sit upon the mount of the congregation,in the sides of the north,I will ascend above the heights of the cloud,I will be made equal to the most high;yet thou shalt be brought down to hell,to the sides of the pit(Isa. 14:12–15).
스베덴보리가AC.257에서 사14:12-15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뱀의 머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세기의 상징을 단지 창세기 안에서만 설명하지 않고, 같은 영적 실재를 말하는 다른 말씀들과 연결, 하나의 일관된 교리를 제시합니다. 즉, ‘뱀의 머리’와 ‘루시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영적 원리, 곧 자기 사랑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본성을 서로 다른 표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올라가겠다’(I will ascend), ‘내가 높이겠다’(I will exalt), ‘내가 앉겠다’(I will sit), ‘내가 가장 높으신 이와 같아지겠다’(I will be made equal to the Most High)라는 반복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자기 사랑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기 사랑은 만족을 모르는 사랑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인정받고, 더 지배하려 하며, 결국에는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위에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세상을 다스리려 하고,하늘을 다스리려 하며,마침내 주님까지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한 내용이 바로 이사야의 이 말씀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별들 위에 내 보좌를 높이겠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 ‘별’은 진리들, 또는 진리 가운데 있는 천사들과 교회의 지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자기 사랑은 진리를 섬기려 하지 않고, 진리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기보다, 자기 욕망에 맞게 말씀을 해석, 이용하며, 진리 자체를 자기 권력의 도구로 만들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또한 ‘북쪽 집회의 산에 앉겠다’는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묘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산’은 사랑의 상태를 의미하며, 특별히 ‘여호와의 산’ 또는 ‘집회의 산’은 주님께 속한 천국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루시퍼가 그 산에 앉겠다고 말하는 것은 천국의 왕이 되겠다는 선언이며, 이는 곧 하나님께 속한 사랑의 자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뱀이 인간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유혹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가장 높으신 이와 같아지겠다’는 말은 자기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를 드러냅니다. 악은 처음부터 악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보호와 자기만족이라는 합리적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어되지 않으면 결국에는 모든 선과 진리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하나님조차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을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이 본문은 그 근원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반대로 이사야는 그 결말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나 너는 지옥,곧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복이라기보다 영계의 질서를 말합니다. 스스로를 가장 높이려는 사랑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자신을 낮추어 주님을 높이는 사랑은 가장 높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영원한 법칙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루시퍼의 추락은 자기 사랑이 필연적으로 맞이하는 영적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사14을 인용한 목적은 ‘루시퍼’라는 존재 자체를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의 내면입니다. 우리 안에도 작은 루시퍼가 있으며, 우리 안에도 ‘내가 높아지겠다’,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뱀의 머리’와 이사야의 ‘루시퍼’는 모두 바로 그 내면의 자기 사랑을 가리킵니다.
AC.257에서 사14을 인용한 이유는 단순한 성경 인용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창세기의 ‘뱀’, 이사야의 ‘루시퍼’, 요한계시록의 ‘큰 붉은 용’은 모두 동일한 영적 실체를 여러 시대와 여러 표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실체는 곧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자기 사랑입니다. 그리고 창3:15에서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약속은, 바로 이 모든 자기 사랑의 지배를 근본에서 꺾으시고, 겸손과 사랑의 천국 질서를 회복하시는 구속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임을 스베덴보리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AC.257
‘뱀의 머리’(head of the serpent)가 일반적으로는 악의 지배(the dominion of evil)를, 특히 자기 사랑의 지배를 뜻한다는 것은 그 본성(nature)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자기 사랑은 그 성질이 너무도 무서워 단지 지배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만족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려 하며,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마침내 주님 자신까지도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설령 거기까지 이른다 해도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자기 사랑의 아주 작은 불꽃 속에도 숨어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방종하도록 내버려지고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바로 터져 나와 그와 같은 극단적인 높이까지 치달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serpent), 곧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악이 얼마나 지배하려 하는지, 그리고 자기의 지배를 거부하는 모든 이를 얼마나 미워하는지가 분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높이는 ‘뱀의 머리’이며, 주님께서 그것을 땅에까지 짓밟으셔서(tramples down), 앞 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배로 다니며 흙을 먹게’(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 하시는 대상입니다. 이와 같은 ‘뱀’(serpent), 또는 ‘용’(dragon)은 이사야에서 ‘루시퍼’(Lucifer)라고 불리며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at by the “head of the serpent” is meant the dominion of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of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its nature, which is so direful as not only to seek dominion, but even dominion over all things upon earth; nor does it rest satisfied with this, but aspires even to rule over everything in heaven, and then, not content with this, over the Lord himself, and even then it is not satisfied. This is latent in every spark of the love of self. If it were indulged, and freed from restraint, we should perceive that it would at once burst forth and would grow even to that aspiring height. Hence it is evident how the “serpent,” or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desires to exercise dominion, and how much it hates all those who refuse its sway. This is that “head of the serpent” which exalts itself, and which the Lord “tramples down,” even to the earth, that it may “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 as stated in the verse immediately preceding. Thus also is described the “serpent” or “dragon” called “Lucifer” in Isaiah: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14:12-15) O Lucifer, thou hast said in thy heart, I will ascend the heavens, I will exal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 and I will sit upon the mount of the congregation, in the sides of the north, I will ascend above the heights of the cloud, I will be made equal to the most high; yet thou shalt be brought down to hell, to the sides of the pit (Isa. 14:12–15).
또한 ‘뱀’(serpent) 또는 ‘용’(dragon)이 자기 머리를 얼마나 높이 드는지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e “serpent” or “dragon” is also described in the Revelation in regard to the way in which he exalts his head: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12:3, 9) A great red dragon, having seven heads, and ten horns, and many diadems upon his heads; but he was cast into the earth (Rev. 12:3, 9).
시편에서도In David: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시110:1-2, 6-7) The saying of Jehovah 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Jehovah shall send the rod of thy strength out of Zion, he shall judge the nations, he hath filled with dead bodies, he hath bruised the head over much land; he shall drink of the brook in the way, therefore shall he lift up the head (Ps. 110:1–2, 6–7).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5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 가운데 ‘뱀의 머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어떤 악한 존재의 머리로 보지 않고, 모든 악의 중심 원리, 특히 ‘자기 사랑(love of self)의 지배욕’으로 해석합니다. 악에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기 사랑을 이처럼 강하게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아래 두려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다음에는 공동체와 세상을 지배하려 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질서 자체를 자기 뜻에 굴복시키려 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속삭인 뱀의 유혹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결국 자기 사랑은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성향이 특별히 악한 몇몇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아주 작은 불꽃 속에도’(latent in every spark) 숨어 있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이 지배욕을 주님께서 끊임없이 억제하시고 다스리시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주님의 보호가 거두어지면 자기 사랑은 언제든 다시 머리를 들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통찰입니다.
‘뱀의 머리’가 ‘배로 다니며 흙을 먹게 된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이는 악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가장 낮은 자리로 눌려졌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존재 자체에서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내면을 통치하지 못하도록 질서 아래 두십니다. 이것이 ‘머리를 짓밟는다’는 표현의 영적 의미입니다.
사14의 ‘루시퍼’ 역시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루시퍼를 어떤 독립된 마귀의 이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자기 사랑의 본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봅니다. ‘내가 하늘에 오르겠다’, ‘내 보좌를 높이겠다’,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겠다’는 선언은 모두 자기 사랑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 끝은 반드시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가장 높아지려는 것이 가장 낮아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영계의 질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 역시 같은 자기 사랑을 다른 상징으로 묘사합니다.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악이 여러 방면에서 지성을 장악하려 함을, 뿔은 권세를, 머리 위의 면류관은 자기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거짓된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용은 하늘에 머물 수 없어 땅으로 내쫓깁니다. 다시 말해, 자기 사랑은 아무리 화려한 논리와 권세를 갖추어도 천국의 질서와는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시110을 인용하여, 이 모든 싸움의 승리가 오직 주님께 속함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원수들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며, 악의 근원을 깨뜨리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사랑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 되심으로 이루어진 구속과 영화의 능력이 사람 안에서도 역사, 우리 속의 ‘뱀의 머리’를 날마다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3:15은 단지 최초의 복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 안에서 자기 사랑의 지배를 무너뜨리시고, 사랑과 겸손의 나라를 세우시는 영원한 약속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목적은 자신의 신적 능력(Divine power)으로 자신의 인성(human essence)안에서 신적 천적own(Divine celestial own)과 인간적own(human own)을 하나로 결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그렇게 하여 그분 안에서 이 둘이 하나(a one)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만일 이러한 결합(union)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온 세상(the whole world)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AC.256)
AC.256에서 말하는 결합(union)은 주님의 인성(human essence)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인간적own(human own)을 입으셨고,그것을 유혹과 승리를 통하여 완전히 신적으로 만드셨습니다.그 결과 그분 안에서 신적 천적own(Divine celestial own)과 인간적own이 하나(a one)가 되었습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곧 인성이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결합이 단지 주님 개인 안에서만 일어난 변화였다면,왜‘온 세상이 멸망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요?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이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모든 천국과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유일한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모든 선과 진리,모든 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사람에게 흘러 들어옵니다.그러므로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는 일은 전 우주의 생명 질서와 직접 관련됩니다.
인류가 타락함에 따라 지옥의 세력은 점점 커졌고,천국과 인간 사이의 질서는 심각하게 무너졌습니다.악한 영들은 사람의 겉 사람과 감각,own을 통하여 더욱 강하게 역사하였고,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만일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었다면,천국에서 인류에게로 내려오는 생명의 유입은 더 이상 안전하게 전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그분은 인성 안에서 모든 지옥의 공격을 직접 받으셨고,그것을 하나씩 정복하셨습니다.이 승리를 통하여 지옥을 질서 안에 두시고,천국을 정돈하시며,인간이 다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그러므로 주님의 내적 결합은 동시에 우주적 질서의 회복이었습니다.
특히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야 했던 이유는,인간이 신성 자체에 직접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무한한 신성은 유한한 인간에게 직접 나타날 수 없습니다.그러나 신적으로 된 인성,곧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통하여 주님은 천사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실 수 있으며,생명과 구원을 전달하실 수 있습니다.따라서 주님의 인성 안에서 이루어진 결합은 신성과 인류 사이에 영원한 중재의 길을 세운 사건이었습니다.
이 점에서‘온 세상’은 단순히 당시 지상의 사람들만을 뜻하지 않습니다.그것은 지상 인류,영계,천국과 지옥을 포함한 전체 영적 세계,곧 피조 세계 전체의 질서를 가리킵니다.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지 않으시고,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지 않으셨다면,지옥의 세력은 계속 커져 천국의 질서를 침범,사람의 자유와rational을 파괴,결국 아무도 거듭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결합은 인간 거듭남의 원형이 됩니다.주님 안에서는 신적 천적own과 인간적own이 완전히 하나 되었지만,사람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거듭남이 이루어집니다.사람은 스스로 인간적own을 신적으로 만들 수 없지만,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own이 새롭게 질서 지어질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님의 영화는 인간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결국AC.256에서 주님 안의 결합과 온 세상의 구원이 연결되는 이유는,주님의 인성,곧 신적 인성이 모든 천국과 인류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그 결합은 주님 개인의 완성에 그친 것이 아니라,지옥을 제압,천국을 회복하며,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유입될 수 있게 한 우주적 구속 사건이었습니다.만일 이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인류는 주님과 연결될 길을 잃고,자유와 거듭남의 가능성도 사라져,영적으로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AC.256
‘신앙’(faith) 뿐만 아니라 주님(the Lord) 자신도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으로 불리십니다. 이는 오직 주님만이 신앙을 주시며, 따라서 주님 자신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태어나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도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지옥적이며 마귀적인 own에 빠져 버린 그러한 교회(the church) 안으로 오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자신의 신적 능력(Divine power)으로 자신의 인성(human essence) 안에서 신적 천적 own(Divine celestial own)과 인간적 own(human own)을 하나로 결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 안에서 이 둘이 하나(a one)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결합(union)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온 세상(the whole world)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이시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것’(it)이 아니라 ‘그’(he)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Not only is faith but also the Lord himself is called the “seed of the woman,” both because he alone gives faith, and thus is faith, and because he was pleased to be born, and that into such a church as had altogether fallen into an infernal and diabolical own through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in order that by his Divine power he might unite the Divine celestial own with the human own in his human essence, so that in him they might be a one; and unless this union had been effected, the whole world must have utterly perished. Because the Lord is thus the seed of the woman, it is not said “it,” but “he.”
해설
AC.256은 창3:15의 ‘여자의 후손’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많은 기독교 전통에서 이 구절은 이미 오래전부터 메시아 예언, 곧 장차 오실 주님에 대한 최초의 복음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이유를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이 단순히 주님께 대한 믿음이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the Lord Himself)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앙(faith)은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과 함께 신앙을 사람 안에 흘려보내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어떤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아직 건강하고 순수한 교회 안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으로 거의 완전히 무너져 버린 교회 안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이미 창3에서 보았듯이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의 own은 점점 지옥적이며 마귀적인 own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own을 본질적으로 지옥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주님 없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만일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천국과 연결될 수 없었고, 결국 인류 전체는 영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성육신이 필요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인간의 인성(human essence)을 입으심으로써 인간이 있는 바로 그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성 안에서 인간적 own과 신적 own 사이의 싸움을 직접 싸우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단순히 인간을 밖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본성을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AC.256의 가장 어려운 표현인 ‘신적 천적 own(Divine celestial own)과 인간적 own(human own)의 결합’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완전히 하나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own과 주님의 생명이 서로 대립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인성이 완전히 신성화(glorification) 되어 신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만일 이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온 세상은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다시 천국으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와야 했고, 신성이 인성을 입어야 했으며, 주님께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새로운 연결점이 되어 주셔야 했습니다. 성육신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존재 자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우주적 필연성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여기서 ‘씨’, 곧 ‘후손’에 대해 ‘it’이라 하지 않고, ‘he’라고 말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어떤 추상적 교리나 개념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한 인격, 곧 주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주님이며,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신 주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창3:15은 단순한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첫 번째 복음입니다. 인간이 가장 깊이 타락한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이미 ‘내가 너희에게 갈 것이다. 내가 너희의 자리까지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다시 나의 자리로 이끌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자의 후손’의 가장 깊은 의미입니다.
3주께서 이르시되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시89:3-4, 29, 36)I have made a covenant with mine elect,I have sworn unto David my servant,even to eternity will I establish thy seed,and his seed will I make to endure forever,and his throne as the days of the heavens;his seed shall endure to eternity,and his throne as the sun before me(Ps. 89:3–4, 29, 36),
AC.25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씨’(seed)또는 ‘자손’이 단순한 육체적 후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faith)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5의 ‘여자의 후손’을 설명하면서, 말씀 여러 곳에서 ‘씨’가 영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다윗’(David)을 역사적 인물 다윗으로 보지 않고 주님(the Lord)을 의미하는 표상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라는 말씀은 다윗 왕가의 육체적 혈통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다윗의 지상 왕조는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반드시 더 깊은 영적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속된다’, ‘그의 왕위가 하늘의 날과 같다’, ‘그의 왕위가 해 같이 항상 있다’는 표현 역시 단순한 인간 왕국에 적용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왕국에만 적용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왕위’(throne)를 주님의 왕국(the Lord's kingdom)으로, ‘해’(sun)를 사랑(love)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씨’(seed)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왕국은 사랑과 신앙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해가 사랑이라면, 그 해로부터 나오는 빛은 신앙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후손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신앙이 영원히 보존된다는 뜻입니다.
특히AC.255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뱀의 후손’을 불신으로 설명하였고, 이제 ‘여자의 후손’을 신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89의 ‘다윗의 자손’ 역시 육체적 후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계열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국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성경이 ‘씨’(seed)를 영적 의미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왕위는 주님의 왕국을, 해는 사랑을, 씨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의 씨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씀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참된 신앙이 영원히 존속하며, 그것이 주님의 왕국 안에서 계속 살아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창3:15의 ‘여자의 후손’이 단순한 인간 후손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는AC.255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