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들의 풀이 싹이 나며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욜2:22)Be not afraid,ye beasts of my fields,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Joel 2:22).
이 구절을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8장이 선의 상실과 황폐를 말한다면, 요엘2장은 그 반대로 선의 회복과 생명의 회복을 말하는 본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가뭄과 황폐가 끝나고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가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농업 회복의 예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 선과 진리가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묘사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영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자연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상생활 속의 정직, 양심, 이웃 사랑, 책임감 같은 선한 삶이 다시 열매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AC.216과 연결해 보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창3에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무화과 잎, 곧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그리고AC.217에서는 무화과나무 자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요엘서의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말씀은 단순히 나무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남아 있던 선한 요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본 렘8:12-13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적 선도 자연적 선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요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황폐(vastation)이후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람 안에 선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맨 앞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들짐승은 종종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정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라.주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황폐한 시기를 지나더라도, 결국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다시 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217에서 이 구절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보여 주는 마지막 예로 인용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둘이 함께 힘을 낸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신앙과 삶, 사랑과 행동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의 상실을 노래했다면, 요엘은 선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교회와 인간 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희망의 약속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9:10)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Hos. 9:10).
이 구절을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포도’(grapes)는 영적 선의 열매를, ‘무화과’(figs)는 자연적 선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예레미야8장에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는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함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9장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며 기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설명하기 위해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과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것’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광야는 원래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포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뜻밖의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포도는 영적 선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들 안에서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발견하시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first ripe fig)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 무화과도 귀하지만, 첫 열매는 가장 먼저 익은 열매로서 특별히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자연적 선이 아니라, 갓 나타나기 시작한 순수하고 신선한 자연적 선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처음 나타나는 선한 의지와 순수한 삶의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AC.217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포도와 무화과가 단순한 과일이라면, 왜 주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셨겠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 내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포도는 영적 선을, 무화과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발견하신 선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곧바로 슬픈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즉 처음에는 포도와 무화과처럼 아름다운 선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우상숭배와 자기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3의 흐름과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순진무구함이 있었으나 점차own으로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AC.217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포도와 무화과의 상징을 설명하기 위한 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대비시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아름답게 존재했지만, 결국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호9:10을 인용한 이유는, 포도가 영적 선의 열매를, 무화과가 자연적 선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특히 ‘광야의 포도’와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는 주님께서 인간과 교회 안에서 발견하시는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선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레미야8장의 황폐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주님께서 원래 교회 안에서 보고자 하셨던 선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렘8:12, 13)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Nay,they were not at all ashamed,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saith Jehovah;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nor figs on the fig tree,and the leaf hath fallen(Jer. 8:12–13),
이 구절을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이 둘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선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해서 읽습니다. 앞에서는 ‘그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AC.213과AC.216에서 이미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사람들이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내적 저항이나 수치를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은 그 원인을 설명합니다. 포도는 영적 선의 열매이고, 무화과는 자연적 선의 열매인데, 둘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는 영적 선도 사라졌고, 정직과 양심, 도덕성과 같은 자연적 선도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보다 더 심각하게 포도나무를 먼저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선이 먼저 죽으면 결국 자연적 선도 오래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종교적 사랑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인간적 양심마저 무너집니다. 그 결과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잎사귀가 마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잎은 흔히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외적 교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결국 잎까지 마른다는 것은 선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남아 있던 외적 종교 형식마저 생명력을 잃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AC.217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농작물의 흉작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면적 황폐(vastation)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악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오늘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 악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는다’고 덧붙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끄러움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경고등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매우 심각한 영적 진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AC.217에서 렘8:12-13을 인용한 이유는, 부끄러움을 잃은 상태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는 상태가 사실상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선이 사라지면 포도가 없어지고, 자연적 선이 사라지면 무화과가 없어지며, 그 결과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 속에서 본 교회의 황폐한 모습인 것입니다.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came to it,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and he said unto it,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Matt. 21:19),
이 구절을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히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선의 실제 삶은 사라지고, 외적 형식만 남은 교회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 속 나무들은 단순한 식물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선의 열매, 곧 정직함, 공정함, 자비, 이웃 사랑, 양심적인 행동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 잎은 흔히 지식, 교리, 외적 신앙고백, 종교적 형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아는 것은 많고, 종교적 외형도 갖추고 있지만 실제 삶 속 선은 없다는 뜻입니다.
AC.217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한 그루 나무에 대한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당시 교회 전체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상적 사건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알고 있었고, 율법을 말할 수 있었으며, 종교의식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이미 영적으로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AC.216과 연결해서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 타락한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것은 순진무구함은 잃었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마21에 이르면 이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즉 인간과 교회의 쇠퇴가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단순한 신앙 지식이 아니라 선의 열매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교리를 말할 수 있고, 성경을 인용할 수 있으며, 신학적 논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잎만 있는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217에서 이 구절은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중요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조차 상실한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고 풍성해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보실 때는 정작 찾으시는 열매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더 깊이 보면, 이 구절은 단순한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잎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열매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내 안에는 과연 열매가 있는가,아니면 잎만 있는가?’를 묻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런 내적 의미를 보기 때문에 이 구절을AC.217에서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설명하는 대표적 예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7
말씀에서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잃어버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이 나오는 곳마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거나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포도원’(vineyard)과 ‘무화과나무’(fig tree)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길가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마21:19).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as in Matthew: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것은 땅 위에서 어떠한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도 비슷합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 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것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모두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타락하여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악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호세아에서는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요엘에서는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여기서 ‘포도나무’(vine)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해설
이 본문은 AC.216의 ‘무화과 나뭇잎’ 해설을 더 넓게 확장하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를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영적 선’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계에서 자연적 선과 영적 선은 구별됩니다. 자연적 선은 부모를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정직하게 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입니다. 반면, 영적 선은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근원과 동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무화과나무보다 더 안쪽 차원의 선을 상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21:19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도 새롭게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행동을 이상하게 느낍니다. 열매철도 아닌데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실제 나무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상 행위로 이해합니다. 잎은 있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외적 종교성은 있지만, 선의 열매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면, 그 사건은 세상에 자연적 선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장도 같은 원리입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은 단순한 농작물 흉작 예언이 아닙니다.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는 구절입니다. AC.213과 AC.216에서 본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직 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호9:10과 욜2:22는 회복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것,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내는 것은 모두 선의 회복을 뜻합니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따라오신 AC.213-217의 흐름을 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연결이 보입니다. 창2의 순진무구함이 사라진 뒤, 사람들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그것은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AC.217에서는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창3:7의 무화과 잎은 단순한 임시 옷이 아니라, 순진무구함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마지막 보호막과 같은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은 단순한 식물 상징 해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의 여러 층위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두 나무가 모두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의 삶은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둘 다 말라 버릴 때, 교회와 인간은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응을 통해,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언급들이 사실은 인간의 내적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6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나뭇잎을 엮어’(sew leaves together)는 스스로를 변명하는 걸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치마로 삼았더라’(make themselves girdles)는 수치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고, 이렇게 교회의 이 후손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누리던 순진무구함 대신 오직 자연적 선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연적 선으로 자기들의 악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표현을 해설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단순히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 타락 이후의 영적 상태를 읽어 냅니다.
우선 ‘잎들을 엮어 꿰맨다’(to sew leaves together)는 것을 ‘변명한다’(excuse themselves)라고 해석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통찰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보통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합니다. 하나는 주님 앞에 그대로 인정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길입니다. 아담이 ‘하와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하와가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엮는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fig tree)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이란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도덕성, 예의, 가족애, 사회적 책임감,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순진무구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전의 순진무구함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오는 선 가운데 살았지만, 이 후손들은 이미 그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악해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어느 정도는 질서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화과 잎은 매우 흥미로운 상징이 됩니다. 무화과 잎은 벌거벗음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가릴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선도 인간의 악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단지 외적으로 억제하고 덮어줄 뿐입니다. 사람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의 자기 사랑과 교만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연적 선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수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AC.213에서도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양심과 내적 빛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화과 잎은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완전한 타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는 마지막 보호막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216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순진무구함을 잃었고, 그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주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지 못하고, 자기 상태를 가리며 변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연적 선 덕분에 자신들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화과 잎은 인간의 불완전한 변명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락을 막고 있는 마지막 남은 선의 흔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51:17)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scientia],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Jer. 51:17).
이 구절을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own이 기억 지식(scientia)과 이성을 잘못 사용하여 결국 거짓과 악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우상숭배를 비난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영적 우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마지막에 ‘새긴 우상(graven image)은 인간own의 거짓을,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인간own의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이AC.215의 문맥에서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from themselves)생각하는 것’의 결과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own과 감각, 기억 지식만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결국 그는 자기만의 진리 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니라 ‘새긴 우상’, 곧 거짓의 형상입니다.
또한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는 말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매우 정교한 교리와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아름답고 설득력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없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형상에 불과합니다. 마치 정교하게 조각된 우상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마다 지식으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된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물론 여기서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과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own의 손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지식을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완고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AC.206과AC.215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뱀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것들이 주님의 진리에 봉사할 때는 유익하지만, 그것들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며’, ‘살아 있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단순한 고대 우상숭배 비판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자기own으로부터 만들어 내는 거짓과 악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사람은 돌과 나무를 숭배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판단, 자기 철학, 자기 확신,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다면 여전히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AC.215에서 렘51:17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own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재료로 삼아 거짓과 악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내며, 그 우상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우상숭배의 가장 깊은 의미는 손으로 만든 형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대신 자기own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0, 11)Thy wisdom and thy knowledge,it hath turned thee away,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I,and none else besides me;and evil shall come upon thee,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of which thou art not aware(Isa. 47:10–11).
이 구절을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own이 어떻게 사람을 자기 확신과 자기 숭배의 상태로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사5:21이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를 말한다면, 이사야47장은 그 상태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자기 생각을 신뢰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repeatedly경고하는own의 최종 형태입니다. 즉 모든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결국 주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상태입니다.
특히AC.215의 문맥에서는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scientia)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own의 손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러면 지식은 진리를 향한 사다리가 아니라,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동시에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지가 사람을 속인다고 생각하지만, 말씀은 오히려 잘못 사용된 지혜와 지식이 사람을 속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AC.206의 뱀과도 연결됩니다. 뱀은 무지를 상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영리함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주님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입니다.
또한 ‘나를 보는 자가 없다’는 말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을 속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주님도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모든 내면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의 사랑과 의도 자체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라는 말씀은 영적 법칙을 말합니다.own안에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어두워지지만,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밝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AC.215에서 말한 ‘그들 자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파멸은 갑자기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자기 안에서 자라 온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own의 본질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own은 사람에게 ‘너는 지혜롭다’, ‘너는 스스로 설 수 있다’, ‘너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점점 더 깊은 거짓과 어둠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천사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클수록 더욱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AC.215의 흐름 속에서 이사야47장은 단순한 심판 예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영의 운명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다’는 말은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곧 지혜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그 지혜를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말은 인간own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자리이며, 동시에 천국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인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21)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Isa. 5:21).
이 구절을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own이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를 가장 간결하고도 강력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앞서AC.215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영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마다 그것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사실조차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습니다. 바로 그 상태를 이사야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롭다’는 말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눈에’(in their own eyes)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지혜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천사들이 가장 지혜로운 이유도 자기 지혜를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own은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자기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고, 자기 판단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기며, 점차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말씀은 단순히 교만한 사람을 꾸짖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삶의 가장 근본적인 위험을 지적합니다. 사람이 자기 눈에 지혜롭게 보이기 시작하면, 더 이상 주님의 빛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AC.206에서 말한 ‘눈이 밝아졌다고 생각하는 뱀들’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특히AC.215의 문맥에서는 ‘신앙에 대해 추론하는 것’이 문제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영적 천사들이 이해와 이성으로 신앙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AC.203). 문제는 자기own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을 재판하려는 태도입니다. 즉 ‘내가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내 판단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때 사람은 바로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순진무구(innocence)의 정반대를 보여 줍니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나는 모른다.주님께서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own은 ‘내가 안다.내 판단이 맞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순진무구를 사랑하고, 지옥은 자기 지혜를 사랑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실제 영계에서 이런 상태를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지옥의 영들이 자신을 매우 지혜롭고 뛰어난 존재로 여기지만, 천사들의 빛 가운데 들어가면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끝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따라서AC.215에서 사5:21을 인용한 이유는,own의 본질을 한 구절로 요약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own은 사람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가장 지혜롭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때문에 주님의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화 있을진저’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자기own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AC.215의 전체 논지는 이 한마디로 압축됩니다. ‘가장 위험한 무지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무지이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의 말씀 속에서 바로 그 영적 원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AC.215
사람의 own이 악과 거짓밖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이 언제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지를 통해 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 자신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너무도 진실하다고 확신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영적 생명이나 천적 생명, 곧 신앙의 일들에 대하여 추론하기 시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의심하고 있으며, 심지어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대해 추론한다는 것은 곧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자기 자신, 곧 own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순전한 거짓들 속으로 빠져들며, 결국 짙은 어둠의 심연,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심연에 빠지면 아주 작은 반론 하나가 천 개의 진리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는데, 이는 마치 눈동자에 먼지 한 톨만 들어가도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사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21)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Isa.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사47:10, 11)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Isa. 47:10–11).
예레미야에서는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렘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여기서 ‘새긴 우상’(graven image)은 인간 own의 거짓을, ‘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인간 own의 악을 의미합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해설
이 본문은 AC.210부터 계속 이어져 온 ‘own’에 대한 설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는 own이 악과 거짓의 근원이라고 교리적으로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표현은 ‘영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반복적으로 관찰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영들이 거짓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206의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own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own의 가장 무서운 특징이 악 자체보다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악’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에 대해 추론한다는 것은 곧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종류의 사고와 연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AC.203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적 천사들은 이해와 이성으로 신앙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 자체를 재판하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AC.194-206에서 계속 비판된 ‘뱀의 길’입니다.
특히 ‘눈동자에 먼지 한 톨만 들어가도 온 우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유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짓이 반드시 거대한 논리 체계일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단 하나의 잘못된 원리, 단 하나의 자기 사랑, 단 하나의 잘못된 전제가 전체 시야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작은 반론 하나가 천 개의 진리를 무력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문제는 지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눈에’ 지혜로운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아니라 자기 own을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사47의 말씀처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own의 최종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의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에 대한 해석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새긴 우상은 own에서 나온 거짓이고, 부어 만든 우상은 own에서 나온 악입니다. 우상이란 결국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낸 신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의 가장 깊은 의미는 돌이나 금속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own을 진리와 선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5 전체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 own을 따라가면 갈수록 자신은 더욱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평생에 걸쳐 강조한 순진무구(innocence)란 바로 그 반대 상태입니다. 곧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AC.215는 결국 own과 순진무구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