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V.001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잠언 100선 |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1:7)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자신의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삶
사람은 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복잡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며,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부하고, 경험을 쌓고, 책을 읽고,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지혜의 출발점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잠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참된 영적 지혜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일까요?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가 어디에서 비롯되며, 그 지혜가 어떻게 사랑과 결합되고,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먼저 잠1:7이 놓인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1:1-6은 이 책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행하는 법과 의와 공평과 정직을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을 밝힌 직후 7절에서는 그 모든 배움의 기초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경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아’(יִרְאָה)는 두려움뿐 아니라 경건한 존경과 경외심을 포함하며, ‘근본’에 해당하는 ‘레쉬트’(רֵאשִׁית)는 시작과 으뜸가는 것을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지식’에 해당하는 ‘다아트’(דַּעַת)는 단순한 정보의 축적을 넘어 삶에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실제적인 앎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모든 학문적 지식을 저절로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주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을 인정할 때 다른 모든 지식도 올바른 목적을 향해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자신이 아는 것을 어떤 사랑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 죄를 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옥에 갈까 두렵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삼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악을 억제하는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참된 경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에게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잘못을 피하는 아이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잘못을 피하는 아이를 생각해 보면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아이의 외적 행동은 같을 수 있지만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 동기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2826에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설명합니다. 특히 AC.2826:13에서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예배, 신앙의 선에서 비롯된 예배, 사랑의 선에서 비롯된 예배를 구별합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지만, 거룩한 경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경외는 주님과 이웃을 거스르거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 반하는 것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AC.3718에서는 사랑과 거룩한 경외의 관계를 음식과 소금에 비유합니다. 거룩한 경외가 없는 사랑은 소금이 빠진 음식처럼 싱거우며, 거룩한 경외가 있는 사랑은 적절하게 간을 한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 사람은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더욱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구원이 위태로워질까 두려워 악을 피하는 상태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 자체를 싫어하고 멀리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면 잠언이 왜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지혜는 인간 자신의 이해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65-275에서 그는 천사들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다고 설명하면서, 그 근원을 천국의 빛과 열에서 찾습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이며, 천국의 열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선입니다. 천사들은 이 빛과 열을 받아들이는 만큼 지혜로워집니다. 특히 HH.268에서는 천국의 사랑이 자신의 선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혜가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으로 다른 존재에게 유익을 주려는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사들의 지혜조차 그들 자신의 소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지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주체로 살아가지만, 그 모든 능력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성을 무시하거나 판단 능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해를 성실하게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이 아님을 인정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설명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프로프리움은 인간에게 고유한 자기 자신이라는 뜻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에는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능력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여기며 그것을 자기 소유와 공로로 삼으려는 성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성향은 노골적인 교만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에게도 미묘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경험과 공부를 통해 탁월한 판단력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여러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조언을 불필요하게 여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을 통해 얻은 판단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연구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확인하려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을 향한 겸손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해와 지혜를 감사히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잠1:7 후반부가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잠언이 말하는 미련함은 단순히 지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배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윌림’(אֱוִילִים)은 지혜와 교정을 거부하는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보다 방어하거나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지식이 주어져도 그 지식이 내적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이 이미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뿐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도 살핍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 안에 진실이 있는지 검토하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그것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비판과 훈계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당한 요구와 잘못된 가르침은 분별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는 맹목적 복종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하는 완고함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선과 진리의 궁극적 근원이심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모두 그 기준 아래에서 살피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일까요? 여기서는 세상에서 발휘되는 지혜와 영적 지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어려운 이웃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과 능력, 선한 행동을 무가치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과 지옥’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을 따라 선하게 살아왔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물론 그의 신학에서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을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지혜와 선한 삶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지혜와 선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밝히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지혜를 더 의지하고 이웃을 위한 선을 외면한다면, 그는 아직 이 말씀의 영적 의미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은 입술의 신앙고백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그 고백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행동으로 나타나는가를 통해 확인됩니다.
거듭남의 관점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자신의 내적 상태를 살피는 데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분노하거나 상처받았을 때에는 자신의 판단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집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자신이 오랫동안 희생하고 책임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불평을 부당하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가 정말로 선과 진리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인지 살펴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마음 안에 이웃을 위한 사랑이 있는지, 아니면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있는지도 돌아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모두 용납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말씀의 빛 아래에 놓고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올바른지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100-128에서 인간이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깨달은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절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와 책임을 다하는 거듭남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지혜와 사랑의 관계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자체로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그것을 배우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실제 삶에서 선한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생명과 결합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사랑과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많지 않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서 선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외적 행동만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최종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안에 어떤 사랑과 의도가 들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참된 지혜는 옳은 답을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가 자신의 의지를 변화시키도록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보다 그 진리가 얼마나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이 말씀은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더욱 실제적인 질문이 됩니다. 배우자와 의견이 충돌할 때 우리는 자신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서로를 이해하고 더 선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을 때에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상대방에게 되갚아 주려 합니까, 아니면 무엇이 정직하고 지혜로운 선택인지 분별하려 합니까? 교회에서 자신과 신앙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오류를 드러내어 자신의 신앙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합니까,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상대방의 양심과 형편을 존중하려 합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양보하는 사람도 아니고, 갈등을 무조건 피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일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분노와 욕망이 판단을 지배하지 않도록 살피며,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묻습니다. 또한 잘못을 발견했을 때, 자신을 정죄하거나 절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잘못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실제로 멀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불필요한 비난을 삼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과하는 작은 행동들이 모두 이러한 삶의 일부입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한 지혜를 얻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이러한 일상의 선택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의지 안에 점차 자리 잡는 과정입니다.
결국 잠1:7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든 참된 지혜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으며, 인간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영적 지혜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경외는 두려움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랑과 결합된 거룩한 경외로 변화합니다. 또한 미련함은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고 지혜와 훈계를 거부하는 완고함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해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의해 끊임없이 교정되고 깊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를 알게 된 것을 자랑하기보다 그 진리가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살피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적 상태를 돌아보고, 자신의 유익을 넘어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는 길을 찾습니다. 참된 지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옳은 판단을 내리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