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2.심화

 

2.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러니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사는 것이네요?

 

 

네, 정확히 그 방향입니다. 다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이라는 말을 단순히 ‘세상 속에서도 성공한 신앙인’이라는 이미지로만 이해하면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더 깊은 의미는 ‘외적 환경과 상관없이 내적 중심을 지킨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각각 이집트와 바벨론이라는 전혀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았지만, 그들의 삶의 근원은 그 체제에 있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체제의 언어와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혜를 ‘내가 해석하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해석하시나이다’라고 돌렸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같은 지혜를 사용하지만, 그 출처를 자기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는 삶’입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학문과 행정 체계 안에서 최고 수준의 지성으로 활동했지만, 그 중심은 바벨론에 있지 않았습니다. 왕의 꿈을 해석할 때도, 그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상황이 아무리 자신에게 불리, 자신을 에워싸더라도, 내적 방향, 곧 기도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완전히 그 시대와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근원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입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함께 움직이지만, 속 사람은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할이나 위치가 아니라 ‘출처’입니다. 같은 판단을 하고,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이 자기 영광이나 두려움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주님께 맡기고 이웃을 위한 선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이 됩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특별한 환경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이 ‘출처의 질서’를 지켰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서 나오지 않는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이 요셉과 다니엘의 삶이고, 동시에 우리가 지금 이 혼란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깊은 길입니다.

 

 

 

AC.112, 창2:11-12, '지혜, 지성, 선, 진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기준은 오직 주님'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더욱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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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심화 1, ‘세상에서는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AC.111.심화 1. ‘세상에서는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위 본문의 끝을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들도 비록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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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심화

 

1. ‘세상에서는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위 본문의 끝을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들도 비록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가짜입니다.’라고 하는데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런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에서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곧 겉보기에는 지혜, 신앙, 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요지는 그것들을 ‘당장 제거하라’가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살되, 그것에 속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즉, 문제의 핵심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내적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에서 나오도록’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도 그 출발점이 자기 사랑과 인정 욕구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선의와 주님께 대한 순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세상 속에서는 동일한 언어와 구조를 사용하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이것을 왜 하는가’가 중심을 결정합니다. 이 중심이 흐려지지 않도록 조용히 점검하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구별은 하되,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짜와 진짜를 분별하는 눈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적 질서가 쉽게 흐려집니다. 그러나 그 분별이 곧 사람에 대한 판단과 배척으로 이어지면, 그 순간 이미 중심이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질서와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품되, 그 안의 흐름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겉으로는 함께, 속으로는 방향을 지키는 삶’이 됩니다. 직장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동일한 시스템과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인가’를 조용히 살피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이 반복될수록, 사람은 점점 더 ‘흐름의 출처’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가는 길입니다.

 

또한 너무 급하게 완전한 상태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대부분의 신앙이 ‘진리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짜와 섞여 있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의 일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방향이 바뀌고 있는가입니다. 점점 더 사랑에서 나오려 하고, 점점 더 주님께 돌리려 한다면, 이미 질서는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삶은 겉으로는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평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출처가 바뀐 삶’입니다. 같은 일을 하되, 다른 근원에서 하는 삶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변화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세상 한가운데서 ‘다른 질서로 사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태도는 가짜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흐름’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사람은 점점 더 분별하게 되고, 동시에 점점 더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AC.112, 심화 2,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AC.112.심화 2.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러니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사는 것이네요? 네, 정확히 그 방향입니다. 다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이라는 말을 단순히 ‘세상 속에서도 성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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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창2:11-12, '지혜, 지성, 선, 진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기준은 오직 주님'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더욱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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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2

 

더욱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라는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그러므로 역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이라는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선은 없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선도 없으며,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진리는 없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들도 비록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가짜입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 thus also from the Lord; 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 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 and thus from the Lord, 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 but they are spurious.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이어진 모든 설명을 ‘원천의 문제’로 단정 짓는 매우 강한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네 가지를 나열하지만, 그 요지는 단순합니다. ‘출처가 주님인가 아닌가’입니다. 무엇이 얼마나 고상해 보이는지,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사랑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지혜와 지성의 구분이 다시 한번 분명해집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기능이지만, 근원은 같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지혜와 지성 또한 주님에게서 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율적 생산 영역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받아들이는 그릇이지, 원천이 아닙니다.

 

이어 선과 진리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는 앞서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을 의미한다는 설명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선과 진리는 인간의 도덕적 성취나 지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한발 더 나아가, 매우 불편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도, 세상에서는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가짜’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은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행위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원의 왜곡’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가짜라는 말의 핵심은, 그것들이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혜처럼 보일 수 있고, 진리처럼 말할 수 있으며, 선처럼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유입이 없다면, 그것들은 지속되지 않고,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으로 되돌아갑니다.

 

이 글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원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성이 나오며, 그 모든 것이 다시 사랑의 선으로 돌아갑니다. 이 순환이 살아 있을 때, 그것은 참된 것입니다.

 

AC.112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나오느냐이며,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이름만 같을 뿐, 생명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세상에서는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AC.112, 심화 1, ‘세상에서는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AC.111.심화 1. ‘세상에서는 가짜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위 본문의 끝을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들도 비록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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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AC.112, 심화 2,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AC.112.심화 2.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그러니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사는 것이네요? 네, 정확히 그 방향입니다. 다만 ‘요셉처럼, 다니엘처럼’이라는 말을 단순히 ‘세상 속에서도 성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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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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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심화

 

2. ‘온 하늘은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위 본문에 언급하기를, ‘외적인 인간들은 거의 기억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지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많은 이들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러나 이 각각의 것들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매우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수없이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데요, 이 나중 언급이 얼른 와닿지가 않아요. 정말 이런 게 가능할까요? 지상에서는 실현되기 어렵겠지요?

 

 

말씀하신 정말 이런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에서는 사람의 상태가 섞여 있고, 겉 사람 중심의 질서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질서가 세워진다는 개념이 거의 체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지상에서 관찰되는 사회 질서’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질서’입니다. 이 둘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지상에서는 외적 조건과 이해관계가 질서를 만들지만, 하늘에서는 오직 사랑의 질’이 질서를 만듭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늘에서의 질서는 누가 더 많이 알고, 더 잘하고, 더 높은 위치에 있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각 존재가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자리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단순히 종류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방향, 깊이, 순수성, 목적이 모두 다릅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사랑도 하나같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수없이 많은 차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머리로 분류할 수 있는 몇 가지 범주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결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차이가 어떻게 질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늘의 질서는 외부에서 억지로 배열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각 존재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가장 잘 맞는 자리’로 자연스럽게 이끌립니다. 비슷한 사랑을 가진 이들은 서로를 편안하게 느끼고, 다른 사랑을 가진 이들과는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와 맞는 공동체 안에 있게 되고, 그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를 이룹니다. 이것은 억지로 맞춘 질서가 아니라, 생명이 스스로 자리 잡은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지상과 하늘의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는 서로 다른 상태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섞여 살며, 외적 규칙과 제도로 겨우 질서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늘 충돌과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내적 상태 자체가 곧 자리’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끼리 억지로 함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곳에서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존재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서는 지상에서는 완전히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직 겉 사람 중심의 상태에 있고, 사랑도 순수하게 분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무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갈리고, 어떤 환경에서는 마음이 열리고, 어떤 곳에서는 닫히는 경험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질서의 아주 희미한 그림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하늘의 질서는 복잡한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난 생명의 배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중심이기 때문에, 무질서가 아니라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지상에서는 이것이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어둡게 나타나지만, 인간은 원래 그 질서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설명은 낯설지만, 동시에 깊은 곳에서는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AC.111, 창2:11-12,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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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심화 1,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

AC.111.심화 1.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 위 본문에 나오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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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심화

 

1.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

 

위 본문에 나오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표현, 그리고 해설에 나오는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표현 등, 이 표현들을 설명해 주세요.

 

 

이 표현은 단순히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지식 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 자체가 태고교회 때와 달라졌다는 진단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오늘날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와 지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를 별도의 추론 없이 바로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그 상태에 있지 않고, 사랑과 지성이 분리된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같은 말을 들어도 그 의미를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다’는 말은,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속 사람, 곧 사랑과 의지의 중심에서 살았고, 겉 사람은 그 흐름을 따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사랑의 표현이었고, 지혜는 사랑이 스스로를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은 겉 사람, 곧 감각과 기억 지식, 이성과 판단의 영역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생각의 동의가 되고, 지혜는 정보의 정리가 되며, 지성은 분석 능력이 됩니다. 이처럼 출발점이 바뀌었기 때문에, 같은 신앙’, 같은 지혜’라는 말을 써도 실제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더 이상 직접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신앙은 대부분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 믿으려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이미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는 상태’입니다. 전자는 항상 의심과 선택의 긴장을 동반하지만, 후자는 갈등 없이 흐르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에게 이 개념을 설명하면,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경험의 토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혜와 지성’을 모른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혜를 경험이나 노하우, 지성을 사고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의 빛이고, 지성은 그 빛이 질서를 이루어 펼쳐진 상태입니다. 즉, 그것들은 기능이 아니라 생명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랑 중심의 상태에서 벗어나 버렸기 때문에, 이 지혜와 지성도 더 이상 체험적으로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비판이라기보다 진단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배우고, 판단하지만,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직접 아는 감각’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2장을 설명하면서도 계속해서 이것은 지금 상태에서는 이해되기 어렵다’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듣는 쪽의 내적 구조가 이미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은 희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잃어버린 질서 위에 다시 세워질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을 통해, 사랑에서 나온 신앙 대신 진리에서 시작하는 신앙을 통해 준비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성숙해지면, 다시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과 지혜가 흘러나오는 상태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른다’는 말은 끝이 아니라, ‘다른 길을 통해 다시 들어가야 하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AC.111, 심화 2, ‘온 하늘은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AC.111.심화 2. ‘온 하늘은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위 본문에 언급하기를, ‘외적인 인간들은 거의 기억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지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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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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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대로 설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인간들은 거의 기억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지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많은 이들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의 것들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매우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수없이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이 글은 앞선 AC.110의 설명을 잠시 멈추어 세우며,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를 정직하게 밝히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설명의 난해함이 아니라, 듣는 귀의 상실입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faith from love)이라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을 교리의 동의, 혹은 생각의 확신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오늘날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 그는 오늘날의 인간을 ‘외적 인간(external men)으로 규정합니다. 외적 인간은 기억 지식, 곧 정보와 경험의 축적만을 알고, 그것을 지성, 지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지성은 사고 능력이 되고, 지혜는 노하우가 되며, 신앙은 의견이나 신념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지성, 지혜, 신앙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나 애착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원리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을 단일한 ‘생각하는 주체’로만 이해하는 현대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섞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 구별되며, 매우 명확하게 구별된다’고 말입니다. 이 구별이 사라질 때, 인간 내면은 흐려지고, 영적 질서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무게를 하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하게 배열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은 획일적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질적 차이에 따라 질서 지어진 생명의 우주’입니다. 그 차이는 몇 가지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고 표현됩니다.

 

이 말은 곧,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그 자체로 고유하며, 대체 불가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질서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AC.1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을 감각하고 분별하는 내적 구조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그 잃어버린 구별 위에 완전한 질서로 서 있습니다.  

 

 

심화

 

1.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

 

 

AC.111, 심화 1,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

AC.111.심화 1.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 위 본문에 나오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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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 하늘은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AC.111, 심화 2, ‘온 하늘은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AC.111.심화 2. ‘온 하늘은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위 본문에 언급하기를, ‘외적인 인간들은 거의 기억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지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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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창2:11-12, '지혜, 지성, 선, 진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기준은 오직 주님'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더욱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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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0, 창2:11-12, '천적 인간의 첫 지성, 비손 : 사랑에서 나온 신앙'(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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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0.심화

 

1. ‘사랑에서 나온 신앙

 

위 본문에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럼,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신앙은 안 그런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신앙은 대부분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기보다 ‘진리나 지식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는 신앙’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AC.110에서 말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일반적인 신앙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신앙의 완성된 상태’, 곧 천적 인간의 신앙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신앙은 먼저 듣고, 배우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익히고,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려는 과정이 먼저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는 이것이 옳다고 믿는다’라는 의식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아직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이해와 선택을 통해 붙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에는 종종 긴장과 싸움이 따릅니다. 알지만 따르기 어렵고, 믿지만 흔들리는 일이 생깁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의 신앙’입니다.

 

반면 AC.110에서 말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출발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는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흘러나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지를 먼저 따져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참으로 보이고 받아들여지는 상태입니다. 이때 신앙은 더 이상 ‘결정’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표현’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굳이 논증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에서는 ‘나는 믿는다’는 감각이 중심에 있지만, 사랑에서 나온 신앙에서는 ‘주님이 이끄신다’는 감각이 중심이 됩니다. 전자는 여전히 자기 의식이 앞서 있고, 후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에는 신앙이 힘들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두 신앙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먼저 일반적인 신앙, 곧 진리에서 시작하는 신앙을 통해 준비됩니다. 말씀을 배우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양심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사랑도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목적은 아닙니다. 이 신앙이 점차 사랑과 결합되고, 마침내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상태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AC.110에서 말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직 ‘완성된 형태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출발점일 수도 있고,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신앙이 출발점이고, 천적 인간에게는 신앙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신앙은 ‘진리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가야 하는 신앙’이고, AC.110에서 말하는 신앙은 ‘이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근원의 차이’, 곧 어디에서 시작되느냐의 차이입니다.

 

 

 

AC.110, 창2:11-12, '천적 인간의 첫 지성, 비손 : 사랑에서 나온 신앙'(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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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2:11, 12)

 

AC.110

 

첫째(first) , 비손(Pishon)은 신앙의 지성을 의미하는데, 이 신앙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은 마음을 의미하고, (gold)은 선을 의미하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gold)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가 언급되는 것은, 하나는 사랑의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The “first” river, or “Pishon,” signifies the intelligence of the faith that is from love; “the land of Havilah” signifies the mind; “gold” signifies goo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truth. “Gold” is mentioned twice because it signifies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from love; an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are mentioned because the one signifies the truth of love, and the other the truth of faith from love. Such is the celestial man.

 

해설

 

이 글은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지혜의 강이 ‘구체적 지성의 첫 형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네 강 가운데 ‘첫째 강’이 먼저 설명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사랑에서 시작되는 신앙의 지성’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지성은 교리에서 출발한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신앙입니다.

 

‘비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지성입니다. 이는 신앙이 이해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은 무엇을 믿을지 고민한 결과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미 살아 있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은 차갑거나 분석적이지 않고, ‘따뜻한 빛을 띤 이해’입니다.

 

하윌라 땅’이 마음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 지성이 머무는 자리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머릿속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마음 전체, 곧 사랑과 의지가 자리한 내적 영역 안에 놓여 있습니다. 지성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장에서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과 ‘보석들’이 등장합니다. 금은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금이 두 번 언급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반복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조차도 선의 성격을 띱니다. 신앙이 의무나 판단이 아니라, 선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진리 또한 중립적 사실이나 교리 명제가 아닙니다. 하나는 사랑의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입니다. 즉, 진리마저도 사랑을 근원으로 하여 두 겹의 깊이를 가집니다. 진리는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신앙의 진리는 사랑을 따라 말하는 진리입니다.

 

이 구조를 종합하면, 비손 강의 영역에서는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는 빛’입니다. 지성은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사랑을 더 잘 살도록 봉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지성 구조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이다.’ 이는 정의라기보다, ‘삶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살며, 그의 지성은 언제나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비손 강은 그 첫 흐름이며, 이후의 강들은 이 흐름이 어떻게 더 세분화되는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AC.1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첫 지성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며, 그 지성의 땅에는 선이 금처럼 풍부하고, 진리는 보석처럼 빛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사랑에서 나온 신앙

 

 

AC.110, 심화 1, ‘사랑에서 나온 신앙’

AC.110.심화 1. ‘사랑에서 나온 신앙’ 위 본문에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럼,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신앙은 안 그런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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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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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 지혜와 지성 나타나는 것이 겉보기엔 사람인 것 같아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실은 오직 주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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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의 결혼 생활은 실제로 어떤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목격한 천국 부부의 삶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왕래하면서 가장 경외심을 느꼈던 장면 중 하나는 천국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에도 결혼이 있다’ 정도의 진술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의 일상 전체, 곧 그 얼굴의 빛, 말투, 행동, 기쁨의 흐름, 심지어 생각의 결합까지 모두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본 천국의 결혼 생활은 지상에서 우리가 아는 결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천국 부부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를 보고 가장 먼저 충격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닮아 있었습니다. 서로의 말투, 기쁨의 색깔, 빛깔까지 닮아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 부부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영혼이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이다.’(‘결혼애’ 178, 181) 지상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도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같은 선(善), 같은 진리, 같은 사랑을 공유하므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본 천국 부부 중 일부는 서로 손을 잡고 걸을 때, 마치 한 존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천국 부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빛이 흐른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를 볼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서 어떤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열정적인 환희가 아니라 잔잔한 기쁨이 차오른 채 넘치지 않는 ‘평화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사랑과 지혜가 서로 흐르고 오르는 것을 보았다.’ 즉, 부부끼리 서로를 바라볼 때, 지혜가 흐르고 사랑이 흘러서 두 영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천국 부부는 말보다 감정의 투명한 교류로 소통한다

 

천국에서는 사람의 내적 감정이 표정, 눈빛, 기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감추기, 오해, 삐침, 질투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 사이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말이 거의 필요 없었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은 서로의 애정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입니다. 천국의 말은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상대의 마음을 감싸는 음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 부부의 일상은 함께 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가 어떤 의미에서 ‘동역자’라고 말했습니다. 부부는 각자 역할이 있지만, 그 역할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선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며, 자신이 맡은 영적 공동체를 돕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공동체에 진리를 가르치고, 아내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완성시키는 데 기여하며, 이 두 흐름이 하나의 선으로 결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남편은 지혜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고, 천국의 아내는 사랑을 통해 지혜, 곧 남편을 사랑한다.’(‘결혼애’ 21) 지상에서처럼 가사 분담, 성 역할 갈등 같은 개념은 없습니다. 모든 활동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부부에게는 권태’, 식상함’, 갈등이 없다

 

왜 없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주님에게서 직접 흐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의 사랑을 ‘늘 새로워지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의 결혼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러므로 하루하루 더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지상의 결혼처럼 싫증이 나거나, 익숙해져 무감각해지거나, 서로를 상처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이미 악과 이기심에서 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부부는 ’() 또한 영적 기쁨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아주 깊게 기록했습니다. 천국의 혼인 사랑에는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친밀함은 지상의 성적 욕구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정서의 가장 순전한 결합, 영혼이 영혼을 포옹하는 기쁨, 두 생명의 교류가 빛처럼 흐르는 경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천국의 부부는 서로를 포옹할 때, 사랑과 지혜가 흐르는 것을 느낀다.’ 육체적 욕구가 아니라 영적 친밀성이며, 그 기쁨은 지상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결합니다.

 

 

천국 부부의 사랑은 영원히 유지되는 기쁨이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부부는 함께 있을 때, 주님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경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결합은 중간 영계에서 검증되고, 천국의 빛 속에서 굳어지며,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혼인천국’(婚姻天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결혼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두 영혼이 하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결합, 말보다 감정이 더 투명하게 흐르는 소통, 갈등, 질투, 오해가 없는 평화, 주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새로워지는 기쁨, 하나의 선을 이루는 동역자 관계, 영혼의 친밀함이 최고조로 발현되는 관계,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라고 말입니다. 지상의 어떤 결혼도 천국의 이 결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SC.75,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에서의 결혼은?’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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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독자라면, 반드시 한 번쯤 품게 되는 핵심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혼인했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 결혼의 본질’을 깊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후에 실제로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는 생전에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 전체와 영적 원리를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반드시 자기 본질에 맞는 짝을 만나게 된다.’ 이것만큼은 거의 확정적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의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의 결합’이며, 스베덴보리처럼 영적 본질이 정련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본질에 맞는 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매우 차분하게,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원리와 그의 삶과 저술 전체를 조합해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어떤 결혼을 하게 되는가’를 전기적, 서술적 흐름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혼의 본질은 결혼에 적합한 구조였다

 

스베덴보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회피한 사람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50대 후반, 영계를 왕래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이 ‘개인적 가정생활’보다 인류 전체에 대한 사명으로 옮겨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결혼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 즉, 영혼의 가장 깊은 층은 짝을 향해 열려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지상에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영계에서의 결혼과는 무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천국 결혼이 영혼의 본질 일치에 의해 결정됨을 직접 확인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던 천국 부부들은 지상에서 어떤 관계였느냐보다 ‘영혼이 어떤 성질이었느냐’가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 부부는 서로의 내적 선과 진리의 일치로 결합한다.’(‘결혼애’ 41, 50, 56 ) 스베덴보리는 인류 중에서 내적 선과 진리의 결합이 가장 깊고 특수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결론은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반드시 그 내적 본질에 맞는 짝이 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생전에 결혼에 적합한 상태에 있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천국 결혼의 준비 조건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선함과 하나가 된 상태

2. 영혼의 이기심이 정화된 상태

3.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둔 상태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생전 25년 이상 철저히 갖추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특히 영계 왕래 후에는 감정, 사랑, 욕망, 동기까지 투명하게 드러나는 상태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천국에서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저술 전체가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주님이 예비한 짝을 만날 가능성이 사실상 100%이다

 

천국에서의 결혼 원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영혼의 본질이 맞으면,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여러 부부의 모습은 다 다음과 같은 흐름을 보여줍니다. 서로의 영혼의 냄새(seemly aura)를 바로 알아보고, ‘이 사람이구나!’ 하는 강렬한 인식이 생기며, 천국의 빛 속에서 그 결합이 영원히 굳어진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결혼이다.’ 스베덴보리처럼 영혼이 완전히 정련된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조화로운 짝을 만나게 됩니다. 그 짝은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시대, 민족,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는 나는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겸손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나는 천국에서 결혼할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자신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지, 자신의 개인적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단서를 남겼습니다. ‘천국적 결혼은 주님이 직접 이루시는 가장 큰 선이다.’, ‘이 결혼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진리를 사랑한 이에게는 그에 맞는 짝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진리를 목숨처럼 사랑하며, 진리의 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결혼하지 않을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결론,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반드시 자기 본질에 완벽히 맞는 짝을 만나 결혼했을 것이다

 

이것은 교리적 상상이나 추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남긴 영계 관찰 전체를 종합한 영적 필연성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1. 천국적 결혼은 영혼의 본질이 결정한다.

2. 스베덴보리는 영혼의 본질이 선과 진리의 완성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3.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영적으로 상응하는 짝이 있다.

4. 천국에서는 그 짝을 찾지 못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니, 영계의 질서상 ‘반드시’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 결혼은 지상의 어떤 결혼보다 훨씬 깊고 밝고 자유로운 결합일 것입니다.

 

 

 

SC.74,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한 경우’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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