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태고교회라고 무조건 석기시대 비슷한 문명일 거라는 생각 대신 어쩌면 오늘날에 버금가는 찬란한 문명을 누렸을지도 모른다.지구 나이45,6억 년이라면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태고교회 역시...’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이런 생각은 좀 무리겠지요?
반드시 무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다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에 근거하여 말한다면,그 가설을 지지할 만한 직접적인 근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 대해 매우 많이 말하면서도,그들의 기술 문명이나 물질 문명의 수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는 태고교회의 위대함을 설명할 때,언제나 그들의‘지각’(perception), ‘주님과의 교통’, ‘천사들과의 교류’, ‘사랑과 신앙의 일치’같은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만일 그들에게 오늘날에 버금가는 과학기술 문명이 있었다면,스베덴보리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태고교회가 반드시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원시 부족 수준이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사실AC를 읽어보면,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매우 높은 지혜를 가진 존재들로 묘사합니다.그들은 자연 속의 모든 사물에서 영적인 의미를 보았고,상응을 통해 생각했으며,후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따라서‘영적 문명’이라는 의미에서는 현대 인류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생각이 나오는 이유도 이해가 됩니다.지구의 연대를 수십억 년으로 보는 현대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면,인류 문명이 겨우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에 불과하다는 것은 매우 짧아 보입니다.그래서‘그 긴 세월 동안 여러 차례 고도의 문명이 있었다가 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합니다.실제로 그런 가설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초점이 조금 다릅니다.그는‘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보다‘사람이 주님께 얼마나 가까웠는가?’를 묻습니다.그래서 설령 태고교회가 오늘날 수준의 기술 문명을 가졌다고 해도,그것은 그들의 본질적 특징이 아닙니다.반대로 아무런 첨단 기술이 없었다고 해도,그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면 스베덴보리에게는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정반대의 가능성입니다.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인간처럼 자연 세계를 정복하고 조작하려는 욕구가 상대적으로 약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바깥 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기보다,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를 지각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현대문명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면,태고교회는 내면의 지혜와 영적 지각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생각을 조금 수정해 본다면, ‘태고교회가 오늘날에 버금가는 기술 문명을 가졌을 수도 있다’보다는‘태고교회는 현대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영적 문명을 가졌을 수도 있다’가 스베덴보리의 묘사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인 상상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입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 자신도 태고교회 이전의 인류 역사나 지구의 물질적 연대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적은 거의 없기 때문에, ‘태고교회 시대의 물질 문명 수준’에 대해서는 사실상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 같습니다.
결국AC를 따라가다 보면,태고교회의 위대함은 그들이 무엇을 만들었느냐보다 무엇을 지각했느냐에 있었습니다.현대인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우주망원경을 만들 수 있지만,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했습니다.스베덴보리라면 아마 후자를 더 놀라운 문명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AC.196)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45,6억 년을 기준으로 하면,인간의 문명시대를 훨씬 넓게 잡아1만 년으로 해도 고작0.2초라고 하더군요.그래서 사람들은‘혹시 과거 지구 자체가 문명사적으로 몇 차례 리셋된 게 아니냐,지금도 가끔 도저히 설명 불가한 것들이 땅속 고대 지층에서 발견되는 것들(오파츠,Out-Of-Place Artifacts)을 보면 말이다.’라고 합니다.이런 오늘날 분위기에서 저 인용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 대목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AC.196의‘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은 오늘날 말하는 고고학,지질학,물리학,유전학 같은 현대 과학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스베덴보리 당시의 인간들이 고대인들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연 지식과 학문 체계를 갖게 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따라서AC.196의 초점은‘지식의 양’이 아니라‘지식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잃어버린 고대 문명’, ‘문명 리셋’, ‘설명하기 어려운 유물’같은 논의는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하지만,AC.196의 핵심과는 조금 다른 방향입니다.설령 과거에 지금보다 더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문명의 발전 정도가 아닙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전혀 몰랐지만,천적인 지각을 가졌습니다.반대로 현대인은 엄청난 과학 지식을 가졌지만,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따라서AC.196의 기준은 기술 수준이 아니라 영적 상태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습니다. ‘그 고대 문명이 실제로 있었는가?’보다‘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 끌리는가?’입니다.많은 경우,사람들은 현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사례를 발견하면,그것을 곧바로 영적인 것의 증거로 삼으려 합니다.그런데 이것도 사실은AC.194-196이 말하는 동일한 구조일 수 있습니다.즉, ‘눈에 보이는 증거가 나와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방향만 바뀌었을 뿐,여전히 감각적 증거를 최종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어떤 사람은‘영혼은 없다.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또 어떤 사람은‘고대 유물 가운데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영혼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두 사람은 결론은 다르지만,공통적으로‘보이는 증거가 최종 판단 기준’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AC.196은 바로 그 태도 자체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AC.196을 읽으실 때는‘고대인들이 몰랐던scientia가 무엇이었는가?’보다‘지식이 신앙의 종이 되는가,아니면 주인이 되는가?’에 초점을 두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스베덴보리는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습니다.문제는 과학이나 지식이‘주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도구’에서‘주님을 재판하는 도구’로 바뀔 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2026년은 오히려AC.196을 더 절실하게 읽어야 하는 시대일 수 있습니다.우리는 스베덴보리 시대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AI,양자물리학,유전체학,우주망원경,빅데이터 등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scientia를 갖고 있습니다.그러나AC.196의 질문은 여전히 같습니다. ‘그 지식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는가,아니면 더 자기 확신에 차게 만들고 있는가?’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심은‘고대에 더 발전한 문명이 있었는가?’가 아니라‘인간이 지식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워지는가,아니면 자기 자신의own을 더 신뢰하게 되는가?’에 있습니다.AC.196을 읽을 때 그 기준을 붙들고 있으면,잃어버린 문명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본문의 핵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지식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지식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스베덴보리가 말하는‘뱀의 독’은18세기보다2026년에 훨씬 더 정교한 형태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는데,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AC.196)
본문의‘오늘날’(the present day)과 이 글을 쓰고 있는2026년은 제법 간격이 큰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오히려AC를 읽을 때는 그런 시간적 간격을 의식적으로 넘어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보면AC.196의 ‘오늘날’은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던18세기 중엽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는1740-1750년대 유럽의 지적 분위기, 특히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전, 그리고 신앙을 이성으로 재판하려는 경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은 분명 스베덴보리의 동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종종 특정 시대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AC.196도 그런 경우입니다. 그가 말하려는 핵심은 ‘18세기 사람들이 나쁘다’가 아닙니다. 핵심은 ‘계시보다 감각을 더 신뢰하는 상태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AC.196을 읽으면 오히려2026년이 스베덴보리 시대보다 더 잘 들어맞는 부분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는 것은 믿지 않으며’, ‘기억 지식과 철학으로 자기 불신앙을 더욱 강화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과학, 데이터, 통계, 실험, 측정, 알고리즘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측정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과학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과학자였습니다. 문제는AC.196이 말하듯, 과학과 지식이 진리를 섬기는 종이 아니라 진리를 심판하는 주인이 될 때입니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현대가 스베덴보리 시대보다 더AC.196에 가까운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번역이나 해설에서 ‘오늘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신다면, 문자적으로는 ‘스베덴보리 당시’를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계시보다 감각과 기억 지식을 우위에 두는 모든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의 ‘말세’와도 비슷합니다. 문자적으로는 특정 시기를 가리킬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하나의 교회 상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AC.196의 ‘오늘날’도 단순한 연대기적 표현이라기보다 하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2026년에AC.196을 읽으며 ‘이 말이 지금도 해당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는 ‘해당될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더 선명하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AC.196을 읽으며 놀라운 점은, 약270년 전에 쓰인 글인데도 현대인이 영혼, 천국, 양심, 영적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너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AC.196의 ‘오늘날’은 역사적으로는18세기를 가리키지만, 영적으로는 지금도 계속 반복되는 인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창3:1)
AC.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보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 더 큰 신뢰를 두는 자들을 ‘뱀’(serpents)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는데, 이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지식들[scientifica]로 그러한 불신을 스스로 확증함으로써, 자기 안에 훨씬 더 큰 정도의 시력 상실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것, 기억 지식의 것, 그리고 철학으로부터 하늘의 일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눈멀게 하여, 이후에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일 뿐 아니라 훨씬 더 해로운 ‘날아다니는 뱀’(flying serpents)이기도 함을 알 수 있도록, 우리는 그들이 영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감각적인 사람, 곧 오직 감각의 증거만을 믿는 자는, 영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다’(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라고 합니다. 기억 지식의 사람[scientificus], 곧 기억 지식들로부터 결론을 내리는 자는 말하기를, ‘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기체나 열기 같은 것이거나, 혹은 자기 학문 속의 어떤 다른 실체일 뿐이며, 곧 허공으로 사라질 것 아닌가? 동물들도 몸과 감각과 이성, 그리고 그 유사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죽는다고 하면서, 어찌 사람의 영만은 산다고 말하는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철학자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리하다고 자처하지만, 사실상 그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영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영에 대해 논쟁하며, 물질적이거나 유기적이거나 연장된 것에서 무엇이든 취하는 표현은 하나도 영에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을 자기 관념에서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마침내 그것을 상실해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소 건전한 이들은 영을 ‘사고’(thought)라고 말하지만, 사고에 대해 추론하면서 거기서 모든 실체성을 분리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에는 육체가 죽을 때 사고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감각의 것, 기억 지식의 것, 철학으로부터 추론하는 모든 자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 결과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언급되는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영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자기들은 영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말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죽은 후에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자기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살아 있게 합니다.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Not so the simple in heart: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해설
이 단락은 ‘뱀’이라는 상징을 시대적 변화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확장합니다. 고대에는 계시보다 감각을 더 신뢰하는 상태만으로도 ‘뱀’이라 불렸는데,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상태를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으로 진단합니다. 이제 인간은 단순히 감각에 의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동원하여 자신의 불신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고 확증합니다. 그 결과 생기는 시력 상실은 고대보다 훨씬 깊고 완고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감각적 불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발생합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없었던 ‘scientifica’, 곧 체계화된 자연 지식과 학문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하지만, 계시를 배제하는 도구가 될 때 오히려 인간을 더 깊은 영적 어둠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날아다니는 뱀’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단순히 땅에 붙어있는 감각적 사고보다 훨씬 빠르고 널리 해를 끼치는 사고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예로 ‘영에 대한 믿음’을 선택합니다. 감각적인 사람은 영을 보거나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며, 존재의 조건은 물리적 접촉 가능성으로 축소됩니다. 이는 영적 실재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거하는 태도입니다.
기억 지식의 사람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을 자기 학문 체계 안의 개념으로 환원합니다. 영은 기체, 열기, 혹은 어떤 일시적 현상으로 설명되며,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도 지워지며, 영의 영속성은 부정됩니다. 이는 감각적 불신이 지식의 언어를 빌려 체계화된 모습입니다.
철학자들의 경우는 더욱 미묘합니다. 이들은 영을 지나치게 순수한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물질성, 조직성, 실체성을 모두 제거합니다. 그 결과 영은 사고라는 이름으로 남지만, 그 사고조차 실체가 없으므로 육체와 함께 소멸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영은 논리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는 지성의 승리가 아니라, 지성이 자기 대상을 스스로 말살한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감각, 지식, 철학이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있으나, 동일한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해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됩니다.
이에 대비되어 제시되는 것이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입니다. 이들은 철학적 정의나 과학적 증명을 제시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영이 존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단순함은 무지가 아니라, 질서의 보존입니다. 이들은 이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이성을 살아 있게 합니다.
AC.196은 결국, 타락의 마지막 단계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무지나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계시를 무력화시키는 상태입니다. 동시에 이 단락은 참된 이성이 어디에서 살아나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성은 감각과 철학으로 강화될 때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살아 움직입니다.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욥20:16, 17)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he shall not see the brooks,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Job 20:16–17).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욥20:16-17을 인용하는 이유는,감각적 추론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앞에서 인용한 시편과 아모스,예레미야의 구절들이 주로‘뱀의 독’자체와 그 위험성을 설명했다면,욥기의 이 구절은 그 독의 결과로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은,사람이 스스로 독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암시합니다.뱀이 억지로 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그것을 마시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추론을 사람이 스스로 사랑하고 선택하는 상태를 뜻합니다.그는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하고,분별력이라고 생각하며,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실제로는 영적 생명을 약화시키는 독을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꿀과 젖의 강’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다시 말해,천국의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풍성함을 뜻합니다.
왜 하필‘꿀’과‘젖’일까요?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꿀은 자연적 차원에서 느껴지는 선의 달콤함을,젖은 보다 내적인 진리와 선의 양육을 의미합니다.그래서‘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 전체에서 천국적 상태와 교회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본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에서 오는 기쁨을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주목할 점은‘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꿀과 젖도 여전히 있습니다.천국의 실재도 존재합니다.주님의 사랑도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그러나 뱀의 독에 중독된 사람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립니다.
이 점이AC.195전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감각적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이 본다고 생각합니다.그는 증거를 요구하고,분석하고,검증하고,논증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그는 자연은 보지만 천국은 보지 못합니다.물질은 보지만 영은 보지 못합니다.현상은 보지만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그래서AC.196으로 이어지면 결국 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상태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욥기20장의 이 말씀은‘이성질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틀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더 높은 차원의 실재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뱀의 독은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그에게‘나는 잘 보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그러나 그 결과 그는 정작‘꿀과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독사의 독’은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잘못된 추론을 뜻하고, ‘꿀과 젖이 흐르는 강’은 영적,천적 진리의 풍성함을 뜻합니다.그리고 그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사람이 뱀의 독을 사랑할수록,그는 천국의 강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통해 강조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렘46:22-24)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for they shall go in strength,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saith Jehovah,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and are innumerable.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Jer. 46:22–24).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렘46:22-24를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애굽’과 ‘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그는 이 본문을 통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scientifica)에 근거하여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단순히 고대 국가가 아닙니다. 상응적으로는 기억 지식, 학문, 경험적 지식의 영역을 뜻합니다. 원래 이것들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실제로 태고교회 이후의 고대교회에서는 많은 지식과 학문이 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과 진리를 섬기는 종의 자리를 떠나, 주님과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설 때입니다. 그때 애굽은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왜 하필 뱀의 소리일까요? 창3의 뱀이 감각적 인간을 상징하듯이, 여기서도 애굽은 기억 지식과 감각적 증거를 근거로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뱀의 소리’란 단순한 말소리가 아니라, 감각과 지식을 근거로 추론하는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도끼를 가지고 와서 수풀을 찍는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도끼는 분석하고 쪼개고 해체하는 지성의 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기억 지식과 감각적 추론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영적인 신비일 때입니다. 사랑, 신앙, 천국,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은 본래 해부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인데, 감각적 인간은 그것마저 분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마치 숲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숲은 종종 진리와 지식의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조사하고 이해,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탐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은 조사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진리에 대한 암시로 읽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라는 말씀은AC.195의 결론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북쪽’은 흔히 진리의 빛이 없는 상태, 곧 어둠이나 무지를 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각과 기억 지식에 가장 의존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더 깊은 어둠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결국 북쪽 백성의 손에 넘겨집니다. 즉, 자신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영적 맹목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AC.195에서 예레미야46장은 단순히 애굽에 대한 예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해 창3의 뱀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 작동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은 본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앙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면, ‘애굽의 소리’는 ‘뱀의 소리’가 됩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보자면, 이 본문은 ‘지식질’ 또는 ‘학문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성이 문제가 아니라, 이성이 주님을 재판하려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AC.195에서 스베덴보리는 ‘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인간의 추론이 결국 영적 어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9마치 사람이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5:19, 20)As if a man came into a house,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and a serpent bit him.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even thick darkness,and no brightness in it(Amos 5:19–20)?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암5:19-20을 인용하는 이유는,감각적 추론에 의지하는 사람이 스스로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실제로는 더 깊은 영적 어둠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스베덴보리는 특별히‘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는AC.195에서‘손을 벽에 대는 것’을‘자기 자신의 힘’(self-derived power)과‘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로 해석합니다.집 안에 들어왔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벽을 짚었으니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뱀에게 물립니다.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경험,지식을 의지할 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지만,바로 그 지점에서 뱀,곧 감각적 추론의 독이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창3의 뱀도 사람을 노골적인 악으로 유혹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스스로 판단하라’, ‘직접 확인하라’, ‘네 눈으로 보라’고 말했습니다.인간은 그것을 자유와 지혜의 확대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는 영적 시력을 잃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아모스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사람은 벽을 짚고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사실은 가장 위험한 곳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뱀에게 물린다’는 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닙니다.자기 확신이 낳는 영적 결과를 의미합니다.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감각,기억 지식에 의존할수록 점점 더 확신에 차게 됩니다.그러나 그 확신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결국 그 확신 자체가 독이 됩니다.AC.195가 계속 말하는‘뱀의 독’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어지는‘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냐’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보통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빛과 구원의 날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어둠의 날이 됩니다.왜냐하면 주님의 빛은 그 사람의 거짓된 확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빛이 왔는데도 어둠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빛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받아들이는 상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아모스의 말씀은AC.194와AC.195전체를 요약하는 본문처럼 보입니다.사람은 감각을 신뢰하고,자신의 판단을 신뢰하고,자신의 지식을 신뢰합니다.마치 집 안에 들어와 벽을 짚은 것처럼 안심합니다.그러나 그가 의지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뱀이 숨어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물립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해 본다면,이 본문은‘이성질의 가장 위험한 특징은 그것이 자신을 지혜롭게 보이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도둑은 자기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그러나 감각적 추론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실적이며,가장 분별력 있다고 생각합니다.바로 그 점이 뱀의 독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그래서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아모스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순히‘뱀’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그는 이 말씀을 통해‘자기 힘과 감각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영적 독에 물리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빛 없는 어둠’,곧 진리의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영적 맹목 상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거짓을 말하는도다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58:3-5)They go astray from the womb,speaking a lie.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sociantis sodalitia] (Ps. 58:3–5).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시58:3-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뱀’이 단순히 잘못된 생각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듣지 않으려는 상태 자체를 의미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시편140편이 ‘뱀의 독’이라는 표현을 통해 감각적 추론의 해악을 보여 주었다면, 시편58편은 그 추론이 사람을 어떤 상태로 만드는지를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입니다. 그는AC.195에서 바로 이어 ‘이성적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지혜로운 자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 추론’을 ‘뱀의 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문제는 단순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미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창3의 뱀도 단순히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 질문 뒤에는 이미 결론이 들어 있었습니다.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즉 그는 진리를 배우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질문합니다.AC.195의 시편58편 인용도 바로 이 점을 설명합니다. 독사는 술사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귀머거리 독사’는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배우지 못합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들을 수 없고, 설령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이미 감각과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AC.195의 핵심은 ‘독’보다도 어쩌면 ‘귀를 막는다’는 표현에 있습니다. 독은 결과이고, 귀를 막는 것이 원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진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감각적 인간’도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손에 잡히는 것만 인정하며, 자기 경험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배제합니다. 그러니 천국, 영혼,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은 애초에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58편의 ‘귀머거리 독사’는AC.194에서 말한 ‘보고 느끼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의 다음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확인해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상태가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독사의 귀가 막힌 상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AC.189에서도 천국으로 인도되기 위해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인식의 첫걸음은 ‘내가 모를 수도 있다’는 인정입니다. 반대로 귀머거리 독사는 ‘나는 이미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AC.195가 시편58편을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뱀의 독은 단순히 잘못된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진리의 음성에 귀 막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창3의 뱀이 상징하는 감각적 추론의 가장 위험한 결과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다시 빌려 보자면, 진정한 위험은 ‘이성질’ 자체보다 ‘이성질을 하고 있다는 말을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상태’일 것입니다.AC.195의 귀머거리 독사는 바로 그 상태를 보여 줍니다. 자기 판단이 최종 권위가 되어 버린 사람, 그래서 더 이상 지혜로운 자의 음성도, 주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게 된 사람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은 창3의 뱀이 단순한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닫힘과 영적 청각의 상실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140:3)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Ps. 140:3).
AC.19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뱀’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에 근거한 추론’ 또는 ‘신앙의 진리를 공격하는 추론’을 상징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말을 험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추론을 날카롭게 벼려 진리를 공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혀’에 주목합니다. 혀는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상응적으로는 사고와 추론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뜻합니다. 뱀의 혀가 날카롭다는 것은 감각과 외적 경험에 근거한 논리가 매우 설득력 있고 교묘하게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거짓은 대개 처음부터 거짓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창3의 뱀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정녕 그러하냐?’고 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는 이미 신앙을 감각의 법정에 세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독사의 독이 그 입술 아래 있다’는 표현은 더욱 중요합니다. 독은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입술 아래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몸 안으로 들어가면 생명을 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 추론의 위험성에 비유합니다. 감각적 추론은 처음에는 지혜처럼 보이고 상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를 그것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결국 영적 생명을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독’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단순히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판단하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독은 남을 죽이는 것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마비시킵니다.
이 때문에AC.195에서 시편140편은 단순한 도덕적 경고가 아니라 영적 경고로 사용됩니다. ‘뱀의 혀’는 감각적 추론을, ‘독사의 독’은 그 추론이 영혼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뜻합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과 ‘신앙의 진리를 감각으로 재판하는 것’을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편 구절은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이성질’의 위험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성이 진리를 섬길 때는 유익한 도구가 되지만, 진리를 심판하는 자리에 올라앉을 때는 ‘독사의 독’처럼 영적 생명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AC.195는 이 시편 구절을 통해 창3의 뱀이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작동하는 잘못된 추론의 원리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뱀’(serpents)이라 했습니다.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C.195)
감각적인 것,곧 보이는 것,물질적인 것,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뱀’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AC.195해설)
여기서 주님 주신‘이성’(理性)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이성질’이라 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도둑질,이간질처럼‘이성’에‘...질’을 조합,제가 만들어 봤습니다만...
저는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이성질’이라는 표현이 꽤 직관적이고 전달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말하려는 의도, 곧 ‘이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이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꼬집고 싶다는 취지는 충분히 전달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이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AC.195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이성의 오용’입니다.
그래서 만일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성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면, 듣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아,목사님은 이성을 나쁘게 보시는구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AC.203에서 영적 천사들이 이해와 이성을 사용하여 신앙의 진리들을 확인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이성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신앙을 재판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이 만약 이 표현을 사용하신다면,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성질은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이성을 주님 위에 앉혀 놓고 주님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해 두면 오해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이성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분명히 보고, 더 질서 있게 정리하는 것이 이성의 역할입니다. 반면AC.195가 말하는 뱀의 길은 이성이 종의 자리를 떠나 왕좌에 앉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이 만들어 내신 ‘이성질’은 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성 사용’이 아니라 ‘이성을 휘두르는 짓’이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운전’과 ‘난폭운전’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가장 가까운 의미로 정의한다면, ‘이성질’이란 ‘이성을 진리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진리를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사용하는 행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앞으로 설교에서 사용하신다면, 저는 이런 식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이성질을 합니다.이성은 주님을 이해하라고 주신 것인데,우리는 그 이성으로 주님을 심사하려 합니다.이것이 창3의 뱀이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듣는 분들도 금방 의미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도둑질’, ‘이간질’, ‘생떼질’처럼 ‘...질’에는 원래 주어진 것을 비뚤게 사용하는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성질’은AC.195가 경고하는 ‘이성의 오용’을 표현하는 목사님식 신조어로는 꽤 적절한 것 같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의도와 충돌하지 않도록,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의 월권 행위’를 가리킨다는 설명을 한 번 덧붙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