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3에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서로 다른 선지서에서 ‘새벽’, ‘비’, ‘들의성장’, ‘여호와께서심으신가지’와 같은 표현들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이러한 말씀들을 한데 모아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 실마리는 앞의 AC.90-92에 있습니다. AC.90에서는 ‘비’와 ‘안개’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평온’이라고 했고, AC.91에서는 그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셔진 겉 사람에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됩니다. AC.9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평온을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3의 ‘비’는 단순히 자연계의 비를 아름다운 비유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앞에서 설명한 평화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미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 ‘복된소낙비’가 내리자 ‘들의나무가열매를맺으며땅이그소산을낸다’고 하는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비가 내리고, 땅이 적셔지고, 그 결과 생명이 자라납니다.
‘들의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AC.90에서는 들의 관목과 초목을 일반적으로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이라 했고, AC.91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에서 교회가 ‘들의풀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수가 많아지거나 외적으로 번성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AC.93의 문맥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의해 사람이 자라고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새벽’은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AC.86에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 하고, 천적 인간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왜 천적 인간이 아침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C.93의 호세아 인용에서는 사람이 셋째 날에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살게 되는 것과 함께, 주님의 나타나심이 ‘새벽빛’과 같다고 합니다. 이어서 그분은 ‘비와같이’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새벽’과 ‘비’와 ‘들의성장’은 서로 떨어진 세 개의 상응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과정처럼 이어집니다. 새벽은 새로운 상태가 밝아오는 것을 보여 주고, 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보여 주며, 들의 성장은 그 생명으로 인해 겉 사람에서 실제로 새로운 것이 산출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새로운 날이 밝고, 비가 내리며, 들에서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새벽=이것,비=저것,들=저것’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일으키시며, 그분의 생명이 사람에게 임하고, 그 생명으로 사람이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계의 새벽과 비와 성장의 질서가 천적 인간의 형성과 놀랍도록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에 인용된 ‘여호와께서심으신가지’와 ‘여호와하나님의손으로하신일’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 밝혀 줍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안에 새벽을 만들고 비를 내리며 자신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AC.87에서는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다고 했고, AC.88에서는 새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AC.93의 새벽과 비와 성장도 바로 그 주님의 역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벽’, ‘비’, ‘들의성장’은 각각 따로 외워야 할 상응어라기보다 천적 인간에게 일어나는 하나의 살아 있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의 상태가 밝아오고,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미치며, 그 생명으로부터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자라 열매 맺습니다. 이것이 AC.93이 여러 선지서의 말씀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 주는 천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AC.93심화2)
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날’에 이루어지며, ‘셋째날’은 말씀에서 ‘일곱째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숫자로 보면 3과 7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것을 뜻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같은것을뜻한다’는 말을 숫자 3과 7의 모든 상응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숫자가 이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에서 ‘일곱째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며,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안식입니다. AC.84-88에서 이 일곱째 날은 싸움의 종결, 주님의 안식, 그리고 주님 홀로 이루신 거듭남의 완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AC.93에서 인용한 호세아에서는 ‘셋째날’에 이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틀후에우리를살리시며셋째날에우리를일으키시리니우리가그의앞에서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이어서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고, 그분은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3의 문맥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만나는 지점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싸움이 끝나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시작되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삽니다. 둘 다 이전 상태가 끝나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숫자를 단순한 산술적 수량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날’과 ‘일곱째날’이라는 표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상태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3=7’이라는 새로운 상응 공식을 만들어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AC.93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셋째날’이 ‘일곱째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세아의 인용은 단순히 ‘셋째날’이라는 숫자의 증거 구절이 아닙니다. ‘살리심’, ‘일으키심’, ‘주님앞에서삶’, ‘새벽’, ‘비’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AC.84이후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AC.90-92에서 설명한 비와 평화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3에서 ‘셋째날’과 ‘일곱째날’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은 두 숫자의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둘 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이끄시는 완성과 일으키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세밀한 차이는 이후 스베덴보리가 각 숫자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만, AC.93을 읽는 독자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AC.93심화1)
AC.92의 마지막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의진리들과사랑의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즐거움에서생명을얻는다’고 합니다. 진리와 선이 이미 진리와 선이라면, 다시 ‘생명을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어떻게 구별했는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AC.81에서는 영적 인간이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에서’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나오는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AC.83에서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진리들이생명을얻는다’는 것을 진리가 이전에는 거짓이었다가 이제 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이미 진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안에서 어떤 근원으로부터 살아 움직이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단순히 알고 인정하는 내용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사랑의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87-88에서 싸움을 수행하고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은 주님 홀로라고 했습니다. AC.91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고,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과 진리가 생명을 얻는 근원 역시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평화에서’가 아니라 ‘평화의즐거움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순종이 억지 복종이 아니라는 점과도 연결됩니다. AC.85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그의 사랑과 바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평화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평화의즐거움’은 단순한 기분 좋은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싸움이 그치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에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그 질서 안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AC.92는 ‘진리를알고있는것’과 ‘진리가사람안에서살아있는것’ 사이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진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여기서 말하는 천적 생명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루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평화의 생명이 사람의 겉 사람에까지 미칠 때 진리와 선은 그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평화의즐거움에서생명을얻는다’는 표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AC.92심화2)
AC.92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의 평화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화를 갈등이나 불안이 없는 상태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평화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AC.92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적 상태가 아닙니다. 그 직전까지 사람 안에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AC.91에 따르면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그 결과 싸움이 그치며 평온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평화는 단순히 싸움 하나가 없어졌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의 질서가 달라진 결과로 찾아오는 상태입니다.
AC.92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움이 그쳤기 때문에 생명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전에는 싸움과 저항 때문에 충분히 나타나지 못하던 것이 이제 겉 사람에게까지 미치기 시작합니다. AC.91에서는 이것을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는 수증기에 비유했습니다. 평화는 텅 빈 고요가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에게 생명이 미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4부터 계속 나온 ‘안식’도 주님께서 피곤하여 일을 중단하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일이 완성되어 싸움이 그쳤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완성된 질서 안에서 이제 평화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자연의 모습으로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폭풍이 그쳤다고 해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한 비와 이슬이 땅을 적실 때 식물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AC.90-91에서 ‘비’와 ‘안개’가 평화의 평온을 뜻하고, 그것에 의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된다고 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평화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곧생명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92의 표현은 더 정확합니다. 그것은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가 어디에서 오며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사람 자신이 만들어 내는 편안함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나와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거기에서 선과 진리가 살아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AC.92에서 말하는 평화는 싸움의 부재보다 훨씬 적극적인 상태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말미암은 불안이 그친 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자유롭게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 생명으로 인해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살아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안식입니다. (AC.92심화1)
AC.91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구체적으로 ‘천적영적기원에서나오는이성에속한것들과기억지식에속한것들’이라고 합니다.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는데 왜 단순히 ‘천적기원’이라고 하지 않고 ‘천적영적기원’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확실한 것은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해서 이성과 기억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안개로 적셔지는 지면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한다고 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1은 그것들을 다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라고 하면서 그 기원을 ‘천적영적’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영적인간에게는신앙과이성이있지만천적인간에게는사랑만있고이성과지식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3에서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신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 안에 놓입니다.
이 점에서 ‘천적영적기원’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문맥에서 ‘천적’인 것은 사랑이 주된 상태와 연결되고, ‘영적’인 것은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천적 질서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91한 번호만으로 ‘천적영적’이라는 표현 전체에 고정된 정의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elestialspiritualorigin’이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표현 자체를 별도로 풀어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천적영적’이라는 말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의 공식처럼 같은 뜻을 대입하기보다, 지금의 문맥에서 무엇을 설명하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현재 문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기원’입니다. AC.91은 평온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적시고, 바로 그 평온에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된다고 합니다. 즉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은 겉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겉 사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와 생명이 겉 사람에 미치고, 그로부터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새로운 상태로 산출됩니다.
그러므로 ‘천적영적기원에서나오는이성과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활동하지만 이제 그 기원이 달라져 있습니다.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신앙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에까지 미칩니다.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지식은 그렇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에 의해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AC.91심화2)
AC.91은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이것을 속 사람은 좋은 것이고 겉 사람은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0-91에서 천적 인간에게도 겉 사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들의관목’과 ‘들의초목’, 곧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됩니다. 문제는 겉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이 질서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AC.91의 표현 그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섬기려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AC.81은 영적 인간이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AC.84-87에서는 여섯 날의 싸움 뒤에 일곱째 날의 안식이 온다고 했습니다. AC.91은 이제 그 싸움이 인간 안에서는 어떤 관계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아직 저항과 싸움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가 달라집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것이 어떤 모습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고 이슬로 촉촉하게 하며, 그 결과 겉 사람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이 산출됩니다. 즉 겉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그것을 바깥의 삶 가운데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은 겉 사람을 억압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섬김’ 역시 인간의 몸과 감각, 이성, 기억지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이성과 기억지식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기능하게 됩니다. 겉 사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에서는 천적 인간이 겉으로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굴복당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 안의 바람 자체가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가 더 이상 속 사람과 싸우지 않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결국 AC.91의 ‘순종하고섬긴다’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안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아직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에 따라 활동합니다. 그때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안식은 겉 사람이 사라져 얻는 안식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놓임으로써 얻는 안식입니다. (AC.91심화1)
AC.90은 곧이어 ‘안개’라 하는 ‘비’가 싸움이 그칠 때의 ‘평화의평온’이라고 합니다. 자연계의 비와 안개가 왜 사람의 내적인 평화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AC.90만 읽으면 스베덴보리는 우선 그 의미를 선언할 뿐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AC.91에서 그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 평온은 ‘속사람으로부터겉사람을적시고이슬로촉촉하게하는수증기와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의 핵심은 단순히 물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혹은 안으로부터 내려와 메마른 것을 적시고 그곳에서 무엇인가 자라게 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 싸움이 그칩니다. 그때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에게 미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비와 안개가 지면을 적시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평화의평온’은 단순히 싸움이 사라져 조용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AC.92에서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여, 그 평온은 단지 싸움의 그침이 아니라 ‘내적인평화에서나오는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평화의 즐거움에서 생명을 얻어 태어납니다. 비와 안개는 바로 이처럼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생명이 미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비’와 ‘안개’를 단순히 ‘평화’라는 단어와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상응의 모습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메마른 지면이 스스로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비와 안개에 의해 적셔지고, 그렇게 적셔진 지면에서 식물이 자랍니다. 이와 같이 천적 인간의 겉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을 받아 그 안에서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 점에서 AC.90의 비와 안개는 AC.87-92의 흐름을 하나로 이어 줍니다.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시고, 싸움이 그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바로 서고, 그때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을 적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부터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비와 안개는 단순한 고요함의 표상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화의 생명이 사람 안에 흘러들어 새로운 것을 자라게 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AC.90심화2)
AC.90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겉 사람을 두고도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한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겉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 명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이 차이는 AC.89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질서와 연결해서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 곧 ‘땅’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에서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겉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AC.90에서 그 달라진 상태의 겉 사람을 ‘지면’과 ‘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땅’, ‘지면’, ‘들’이라는 세 단어에 언제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의미표를 만들라는 뜻은 아닙니다. AC.90이 직접 알려 주는 것은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은 ‘땅’이라 하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밝힌 범위 안에서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지면’과 ‘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줄까요?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 이제 그 ‘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산출됩니다. AC.90은 이것들을 일반적으로 ‘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이라고 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받아 산출하는 영역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다음 AC.91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적 인간일 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겉 사람을 적시자 거기에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산출됩니다. 따라서 ‘지면’과 ‘들’은 천적 인간 안에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생명 있는 것을 산출하는 겉 사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지면’과 ‘들’로 명칭이 달라지는 것을 단순한 어휘 변화로 볼 수 없습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고, 그 결과 겉 사람도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며, 그곳에서 흘러오는 생명과 평온을 받아 열매 맺는 ‘지면’과 ‘들’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땅은언제나영적인간의겉사람이고,지면과들은언제나천적인간의겉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과 주제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90이 지금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라는 이 문맥에서 겉 사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말씀의 표현도 ‘땅’에서 ‘지면’과 ‘들’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AC.90심화1)
※오늘(2026/09/27)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크신사랑’, 찬95, ‘나의기쁨나의소망되시며’입니다.
오늘은창4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19-24)
제목은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이며, 다음은‘3분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앞의 영상을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질문은 ‘우리는정말한팀인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옮겨 부모의 자리에서 바라보겠습니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집니다. ‘결혼한내자녀와그배우자가한팀이되도록나는얼마나잘물러나주고있는가?’입니다. 영상에는 시어머니의 말, 장모의 개입, 명절 방문 순서, 음식 준비, 용돈, 육아, 제사와 친척 관계 등 수많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를 켜고 부모의 자리에서 보면 이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영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자녀를사랑하는것’과 ‘자녀를내삶의연장으로붙들고있는것’은 같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결혼에 관하여 매우 놀라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이러므로남자가부모를떠나그의아내와합하여둘이한몸을이룰지로다’(창2:24). 여기에는 ‘떠남’이 먼저 있고 ‘합함’이 있으며 그 결과 ‘한몸’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와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는 순간 관계의 질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부모와 자녀가 하나의 가정이었다면 이제 그 자녀는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2:24의 ‘떠남’은 자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야 한다면 부모 역시 자녀가 떠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면 후자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결혼의 본질을 두 마음의 결합에서 찾습니다. 두 사람이 단순히 한집에서 사는 것을 넘어 점차 하나의 삶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가되고자하는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가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랑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결합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 딸과 사위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우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린 시절에는 보호하고 가르치고 개입하는 사랑이었다면, 결혼 이후에는 상당 부분 ‘물러남으로써보호하는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까닭은 부모에게는 자녀의 결혼보다 부모-자녀 관계가 훨씬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며느리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아들이었고, 딸은 사위를 만나기 수십 년 전부터 내 딸이었습니다. 부모에게는 수많은 기억과 희생과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혼 후에도 ‘내아들’, ‘내딸’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작동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자녀에게는 이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의남편’, ‘누군가의아내’입니다. 부모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악의가 전혀 없어도 자녀의 결혼생활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수 있습니다.
명절은 이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이번에는언제오니?’, ‘몇시에올거니?’, ‘자고갈거지?’, ‘큰아버지가오시는데얼굴은보고가야지’, ‘명절인데이정도는해야하지않니?’ 각각의 말만 떼어 놓으면 크게 잘못된 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자녀를 보고 싶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요구가 양가에서 동시에 들어오면 자녀 부부는 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조금만더있다가라’는 한마디이지만, 자녀의 배우자에게는 ‘우리친정보다시댁이항상우선이다’ 또는 그 반대의 메시지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영상이 보여 주는 갈등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런 작은 요구들이 반복되면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부모가 특별히 살펴야 할 것은 ‘나는요구하지않았다’는 자기평가입니다. 직접 ‘우리집부터와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서운한 표정, 반복되는 질문, 다른 집 자녀와의 비교, ‘옛날에는다그랬다’는 말, 늦게 왔을 때의 냉랭함으로 충분히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잘 알기 때문에 부모가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거듭남은 말만 조심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원하는대로해주어야사랑받는다고느끼는마음’ 자체를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이기심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선한 외형을 입을 때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가족인데이정도는해야지’, ‘부모에게효도하는것이당연하지’, ‘우리가너를어떻게키웠는데’, ‘명절에가족이모이는게뭐가나쁘니?’ 모두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자녀의 자유와 새 가정을 존중하는 사랑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내가부모이니이정도는받을권리가있다’는 자기성이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내적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은 ‘아들이효도하고싶은데며느리가일을하고, 딸이효도하고싶은데사위가비용을부담한다’는 지적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며느리가 차린 명절상을 받으면서 ‘우리아들이참효자다’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 그 효도의 상당 부분을 누가 감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딸이 부모에게 좋은 선물을 해왔을 때도 그 비용과 준비가 사위에게 어떤 부담이 되었는지 부모는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의 효도를 기쁘게 받는 것과 자녀 배우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먼저 ‘너희가무리하면서까지하지않아도된다’고 말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가족 사랑일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사위를 ‘우리집사람이되었으니우리집방식에따라야하는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집안으로 편입되어 그 집안의 관습에 복종하는 사건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집은원래이렇다’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새로운 가족에게 과거의 질서를 그대로 강요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사람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전통이 사랑을 돕는다면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전통 때문에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고통받는다면 부모 역시 그 전통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 역시 반대 극단입니다. 자녀가 결혼했다고 부모의 지혜와 경험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조언할 수 있고 걱정할 수 있으며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언’과 ‘지배’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조언은 상대에게 자유를 남겨 둡니다. 지배는 내가 원하는 결론을 상대가 선택해야 마음이 놓입니다. ‘내생각은이렇지만결정은너희둘이잘의논해서해라’라고 말하고 실제로 다른 결정을 했을 때도 그것을 존중할 수 있다면 조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너희가알아서해라’라고 말해 놓고 다른 선택을 하면 서운함과 냉대로 대한다면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부모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부 사이의 갈등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자녀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부모에게 털어놓을 때 부모의 본능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부부싸움은 화해하면 끝날 수 있어도 부모의 마음에 새겨진 며느리나 사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다음 날 배우자와 화해했는데 부모는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자녀가 배우자를 흉볼 때 무조건 함께 분노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많이힘들었겠구나. 그래도그문제는너희둘이잘이야기해보아라’ 하고 자녀를 다시 배우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그 결혼을 보호하는 부모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내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처럼,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리에서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녀의 모든 선택을 대신하고, 자녀의 배우자와 경쟁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배우자를 우선할 때 배신당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랑 안에는 소유하려는 자기성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동안에는 붙잡아 주는 것이 사랑이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놓아주는 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결혼한 자녀가 ‘이번명절에는처가부터가겠습니다’, ‘이번에는여행을가려고합니다’, ‘제사는이렇게간소화했으면합니다’, ‘이번에는오래있지못합니다’라고 말할 때 부모의 마음에 서운함이 생기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서운함을 자녀에게 죄책감으로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살필 것인가입니다. ‘왜나는아이들이오지않으면이렇게섭섭한가? 내가원하는가족의모습을아이들에게강요하고있지는않은가? 아이들이나를사랑한다는증거를특정한방식으로확인받으려하고있지는않은가?’ 이런 질문이 부모 자신의 거듭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자녀의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분명 부족한 점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내며느리’, ‘내사위’이기 이전에 자녀가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며느리나 사위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면 결국 자녀에게 두 충성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가 배우자를 보호하면 ‘결혼하더니변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2:24의 질서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오히려 당연합니다.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혼적 결합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우리때문에너희둘이싸우지는마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일은우리가감당할테니너희가정을먼저잘세워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더욱 깊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신의 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녀의 사랑을 붙잡아야만 안심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배우자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부모, 이것은 결코 작은 영적 성숙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 공경의 의미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효도를 요구하는 것과 자녀가 자유롭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강요된 효도는 외적 행동을 얻을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얻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녀 부부의 자유와 경계를 존중하면 오히려 자녀가 기쁜 마음으로 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사랑은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자유를 줄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강제로 사랑을 받아내지 않으시는 이유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명절 역시 이런 의미에서는 부모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아이들이몇시에왔는가’, ‘얼마짜리선물을가져왔는가’, ‘며느리가음식을얼마나했는가’, ‘사위가얼마나오래앉아있었는가’를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는이들의결혼을평안하게해주는부모인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을 때 ‘너도앉아서쉬어라’라고 말하고, 사위가 불편하게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자녀 부부가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그래, 얼른가봐라’ 하고 보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매우 실제적인 체어리티입니다. 거창한 신앙 고백보다 이런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랑의 질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입장에서 이 영상의 핵심 질문은 ‘왜요즘자녀들은명절을힘들어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자녀가결혼한뒤에도여전히부모-자녀관계가그들의삶에서가장우선이어야한다고생각하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그리고 ‘내가섭섭하지않기위해자녀의배우자가희생하도록요구하고있지는않은가?’입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이런 불편한 자기 발견을 통과합니다.
창2:24의 ‘부모를떠나그의아내와합하여’라는 말씀은 그래서 자녀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자녀에게는 ‘떠날용기’를 요구하고 부모에게는 ‘보낼사랑’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떠나는 것이 거듭남이라면 부모가 보내는 것 역시 거듭남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손을 잡아 주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결혼한 자녀에게는 그 손을 조금씩 놓아주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붙잡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아이는내소유가아니라주님께속한한사람이며, 이제배우자와함께새로운삶을이루어가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모의 가장 큰 성공은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를 가장 먼저 찾게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사랑하고, 딸과 사위가 서로를 보호하며, 그들의 아이들이 평안한 가정 안에서 자라는 것을 기뻐하면서 자신은 한 걸음 뒤에서 그 결혼을 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집에먼저와라’보다 ‘너희둘이의논해서편한대로해라’, ‘며느리가이것도안하느냐’보다 ‘너희둘이행복하게살아라’, ‘결혼하더니자식이변했다’보다 ‘이제정말자기가정을이루어가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세대 갈등 해결법이 아닙니다. 사랑의 질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부모의 사랑도 주님의 손 안에서 계속 변화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품는 사랑이었다가, 가르치는 사랑이 되고, 기다리는 사랑이 되며, 마침내 놓아주고 축복하는 사랑으로 성숙해 갑니다. 어쩌면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한 장면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자녀를얼마나붙잡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안에서얼마나자유롭게놓아줄수있는가.’ 자녀의 결혼을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 그것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깊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