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영접기도’만큼 익숙하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기도는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설명한 뒤 상대방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겠느냐고 묻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정해진 기도문을 한 문장씩 따라 하도록 인도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가 끝나면 전도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축하하며, 때로는 그날의 날짜를 기록해 두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 자체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본래 주님께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기도가 어느새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정한 기도문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까요?

 

먼저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는 영접기도, 곧 ‘죄인의 기도’(Sinner's Prayer)는 초대교회부터 동일한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기도가 아닙니다. 회개와 신앙고백의 전통은 초기 기독교부터 존재했지만,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하고 일정한 기도문을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은 근대 부흥운동과 복음전도 문화 속에서 발전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부흥집회와 20세기 대중전도 활동을 거치면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모든 개신교 교단이 영접기도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개신교 신학자와 목회자도 기도문을 따라 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라기보다, 특정한 전도 방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신자들의 의식 속에 사실상 구원의 필수 절차처럼 자리 잡은 현상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37, 38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자,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0, 31절에서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합니다. 로마서 10장 9, 10절 역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어디에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문장으로 영접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 주님을 향한 고백과 삶의 변화를 가르치지만, 구원을 특정한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따라 말하는 행위에 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조건을 인간이 덧붙이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볼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등장하는 십자가 위의 강도입니다. 그는 전도자의 안내를 받아 영접기도를 드리지 않았고, 교회의 정식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본문은 구원을 받기 위해 정해진 기도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 죽기 직전 몇 마디 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와 관계없이 구원이 자동으로 확정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강도의 내면을 아셨지만,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강도의 짧은 고백 안에 어떤 참된 회개와 신뢰가 있었는지 그 깊이를 완전히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구원 공식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절차에 갇히지 않으시며, 그 사람의 실제 내면을 아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더 깊은 차원에서 조명합니다. 그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라고 설명하며(TCR.337),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에는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시작이며,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는 것은 그 시작을 밝히는 과정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배운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과정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는 마음을 표현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 말한 사실 자체가 참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입술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실제 의지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직 기독교 언어와 기도 형식을 배우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외적 신앙 형식 자체보다 그 형식을 통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스베덴보리의 회개론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그는 TCR.510–511에서 회개를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는 첫 번째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16–519에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종교적 감정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도는 결코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일은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정해진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입술의 고백과 생명의 회개를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영접기도를 한 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이 전통적인 배타적 구원 이해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318–328에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사람도 자신의 종교에 따라 선하게 살고,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신성, 그러니까 신적인 것을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한 진리를 가르친다거나, 주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는다면 그 역시 주님에 의해 구원받습니다. 다만 지상에서 특정 종교에 속했는지, 특정 기도문을 사용했는지가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자동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섭리는 인간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 종교적 환경이라는 외적 조건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역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접기도가 무의식 속에서 교리화될 때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교회가 정해 놓은 절차를 통과해야만 작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아직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믿거나,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한다면, 이미 구원을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지혜보다 인간의 종교적 형식에 더 강하게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마련한 형식에 의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하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자유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와, 진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아십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판단할 때 단지 영접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시는 인간 내면의 깊이를 외적인 한 가지 사실로 축소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영접기도를 없애야 한다거나 전도 현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용서와 인도를 구하도록 돕는 것은 얼마든지 유익합니다. 처음 신앙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면, 목회자가 함께 기도문을 만들어 주거나 한 문장씩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기도가 끝난 뒤 ‘이제 영접기도를 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이제 주님께 마음을 열었으니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주님과 더욱 깊이 결합해 갑시다’라고 권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기도라는 사건을 구원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게 만들 위험이 있지만, 후자는 기도를 거듭남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전도와 목회의 목적은 사람에게 어떤 종교적 절차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바로잡아야 할 것은 기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일은 분명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행위가 하나의 필수적인 종교 형식으로 절대화될 때, 우리는 그 형식이 본래 가리키던 실체를 놓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입술에서 특정한 기도문이 한 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삶이 실제로 그분을 향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부르시며, 각 사람이 자신의 형편과 이해의 수준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남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영접기도를 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지금도 주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내 입술의 기도가 내 의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가? 내가 고백한 주님께서 실제로 내 삶의 주님이 되어 가고 계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기도문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접기도는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고백하는 유익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성경적 절차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그 구원은 믿음과 회개, 체어리티와 거듭남을 통해 인간의 실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문을 사용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SL.PR.001,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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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천주교회의 자기 이해를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명제는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주장입니다. 천주교는 자신을 수많은 기독교 교파 가운데 하나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교회가 역사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그 교회의 온전한 실재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교단적 자부심 이상의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교회는 인간들이 신앙의 필요에 따라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구원의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에는 사도적 계승과 성사, 교도권과 교회적 일치가 본질적인 요소로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천주교회와의 완전한 일치는 단순히 어느 교단에 가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온전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주님께서 보시는 참된 교회도 우리가 역사적 계보와 제도적 연속성으로 확인하는 바로 그 교회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는 기준은 교황과의 일치, 사도적 계승, 성사의 유효성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공동체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에 있는 것일까요?

 

먼저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8항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교회 안에 온전히 존속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 밖에는 아무런 진리나 은총도 없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전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천주교회는 자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않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제846, 847, 848항은 교회의 구원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자기 잘못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만이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를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모두 지옥에 간다’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히 존속하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자기 이해를 공식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온전한 교회’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 전혀 다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베드로의 특별한 사도적 직무와 그 후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 그리고 교회가 주님께 속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교회의 영적 생명이 특정한 역사적 조직의 독점적 소유가 된다는 결론까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당신 안에 거하고 당신의 생명을 받는 자가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생명은 어느 가지가 먼저 생겼는지, 어느 가지가 다른 가지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가지가 동일한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알아보게 하는 표지가 그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교회의 참됨을 판단할 때 역사적 연속성이나 제도적 권위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과 그 결합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열매를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제318항에서 328항에 걸쳐 이 문제를 더욱 넓은 시야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HH.328은 주님의 교회가 온 지구에 퍼져 있으며, 각자의 종교 안에서 체어리티(charity)의 선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 그 교회에 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동시에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 수 있는 교회에는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를 인체의 심장과 폐가 다른 기관들에 생명을 전달하는 관계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게 참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있고 주님을 알 수 있는 곳에는 특별한 영적 빛과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받는 공동체가 곧 주님의 교회 전체를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사실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외적 명칭보다 내적 생명에 의해 성립하며, 그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결합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교회라고 해서 반드시 그 안의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교회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제도적인 교회의 바깥에 있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로부터 영적으로 배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는 천주교의 제도적 교회론과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안에 교회의 온전한 제도적·성사적 실재가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본질을 주님에게서 비롯되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찾습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355-367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되어서는 참된 생명을 가질 수 없으며, 주님과 체어리티와 신앙이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얼마나 완전한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실제로 사람들의 의지와 이해에 들어가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주님에 관하여 정확한 진리를 가르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고 이웃을 위한 사랑이 사라진다면, 그 공동체의 외적 교회성은 내적 교회성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역사적·제도적 조건 때문에 충분한 기독교 교리를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자신이 이해하는 신적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한다면 주님은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이 그것을 소유하고 자랑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에 따라 살아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적 계승과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역사 속에 세우시고, 말씀을 보존하시며, 신앙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도록 섭리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하며, 예배와 성찬을 이어 가고,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세대를 넘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 일들은 그 자체로 귀중한 쓰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질서와 제도가 모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구체적인 형식과 질서를 통해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외적 질서를 교회의 본질 자체와 동일시할 때 발생합니다. 교회 제도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을 돕는 수단이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든, 목사와 장로와 교회 지도자이든, 그들의 참된 권위는 직위 그 자체에서 영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진리를 충실하게 가르치고, 그 진리로 사람들을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데서 그 정당한 쓰임을 발견합니다. 외적인 계승이 아무리 분명하더라도 내적 사랑이 사라진다면 계승된 것은 교회의 생명이 아니라 교회의 형식에 그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사랑과 신앙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역사적 계보와 무관하게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보편적 교회 이해입니다. HH.318에서 그는 주님의 자비가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HH.328은 말씀과 주님을 아는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의 교회가 지상의 한 제도적 공동체로 제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해 온 ‘교회 안’과 ‘교회 밖’이라는 표현 자체를 다시 검토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천주교회의 신자로 등록되어 있고 모든 성사생활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멸시하며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신앙을 이용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천주교회와 아무런 제도적 관계가 없지만, 자신이 아는 진리에 충실하고 양심을 따라 악을 피하며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느 쪽을 당신의 교회에 더 가깝다고 보시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외적인 행위만 보고 인간의 최종적 내면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과 내적 상태를 온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 외적인 소속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적용되는 경고가 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이므로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개신교 신자 역시 ‘우리 교회는 성경 중심의 정통교회이므로 나는 바른 신앙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나는 이제 참된 교리를 알게 되었으므로 다른 교회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잘 안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은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입니다. 진리를 알게 된 기쁨이 어느 순간 자신이 옳다는 우월감으로 바뀌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절대화하는 마음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참된 교회를 말하면서도 정작 교회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피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주님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적 공동체이며, 그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라는 명제에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진리는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역사 속에서 교회를 보존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말씀과 예배와 신앙 공동체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귀중한 수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온전함을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사도적 계승의 독점적 소유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어떤 인간 조직의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을 인도하는 참된 신앙이 살아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천주교의 모든 신자를 판단하거나 그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주교 안에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 안에도 주님의 교회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교회의 보편성은 교파의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인간이 세운 제도적 경계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결국 참된 교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느 교회가 자신을 참된 교회라고 선언하는가?’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 주님의 진리가 사랑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참된 교회는 특정한 교회 조직이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과 삶 안에서 결합하여 실제로 살아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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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1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 - 영접과 거듭남 사이에서 사라진 것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확신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전도집회에서 결신을 요청할 때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확인할 때도 이 표현은 반복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 년 전 어느 부흥회에서 영접기도를 드렸던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날 이후 별다른 내적 변화가 없었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려는 소중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접이라는 한 번의 행위가 그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영원한 구원을 확정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듭남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주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영접’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단지 예수님에 관한 특정한 교리들을 사실로 인정하거나, 정해진 기도문을 따라 말하거나, 어느 순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영접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23절에서는 자신을 사랑하여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오셔서 거처를 함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마음속에 모셔 들였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실제로 그분과 결합해 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는 개신교의 구원 이해에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원하는 신앙이 주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고 밝히면서, 참된 신앙의 핵심을 올바르게 믿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TCR.337–342). 또한 신앙은 주님께 나아가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형성된다고 가르칩니다(TCR.343–34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에 의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인간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에 협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더라도, 사람이 자신의 악을 사랑하고 진리를 거부한다면 주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온전히 활동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구원은 단순히 인간의 법적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는 사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 의해 새로워지고, 사랑의 방향이 바뀌며, 악을 즐거워하던 사람이 점차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인정하는 단계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진리로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악을 멀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애정과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 단지 과거에 있었던 영접의 순간에만 의존한다면, 정작 구원의 실질적인 내용인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1758)에서 교리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교회가 사람 안에 성립하지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하는 내용과도 연결됩니다(NJHD.243).

 

그렇다면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자랑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임을 밝힙니다. 은혜와 선행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생명의 근원이고, 믿음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선행은 그 생명이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참된 믿음과 체어리티는 주님 안에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믿음도 참된 생명을 갖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TCR.355–361). 따라서 선하게 사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여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도 오류이지만, 선하게 사는 문제를 구원과 분리하여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오류입니다.

 

여기에는 더욱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최종 판결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일에 무감각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확신이 오히려 감사와 순종의 삶을 북돋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영접의 사실만을 절대화하면,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 자신의 욕망과 분노와 교만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악을 변명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으려는 성향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할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본래 주님께 자신을 맡기기 위한 믿음이 어느 순간 자기 상태를 보증하는 수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님을 향하는 대신, 자신이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구원의 지위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특정한 신앙고백이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인간이 최종적으로 판정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만이 사람의 내면과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저 사람은 영접기도를 했으니 구원받았다’거나 ‘저 사람은 제대로 된 영접기도를 하지 않았으니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정이 아닙니다. 참된 질문은 그 사람이 주님께로 향하고 있는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진리로 악을 멀리하며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마저 사람의 외적 행위 몇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성경은 구원을 단지 한순간의 종교적 선언으로 축소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았다’는 말에서 우리가 보존해야 할 진리는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라는 사실이며, 바로잡아야 할 오류는 그분을 한 번 영접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을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와 악의 지배에서 건져 내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 그분의 진리가 내 생각을 바꾸고, 그분의 사랑이 내 의지를 바꾸며, 그분의 생명이 내 삶에서 이웃을 향한 선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과거의 영접기도 한 번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함께 거하시며 마침내 우리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영접은 참된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영접의 선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은 믿음과 체어리티가 결합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받아들입니다.

 

 

 

SL.PR.002,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SL.PR.002 | 개신교인의 무의식 속 교리화된 오류 100선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영접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하나의 기도문에 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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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에게 대적하다가 잘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모세를 대적한 고라 일당이 심판을 받고(민16),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뒤 나병에 걸리며(민12), 엘리사를 조롱한 아이들이 큰 화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왕하2:23-24). 이런 본문들을 읽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신다’는 생각이 생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거짓으로 사람을 모함하며, 진리를 미워하여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 자체에 일종의 영적 면책특권을 부여할 때 생깁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니 그의 말과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인간에게 주님의 권위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게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판단과 행동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삼상24:6), 그렇다고 사울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실제로 다윗을 죽이려 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여 자신의 손으로 왕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울의 악한 행동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존중과 복종은 같은 말이 아니며, 직분을 존중하는 것과 그 직분자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도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 분명한 사례는 바울과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세우신 사람이었지만,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났을 때, 바울은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고 말합니다(갈2:11). 만일 ‘하나님의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바울은 사도 베드로를 책망해서는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 사건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사람도 잘못할 수 있고, 그 잘못은 진리에 따라 바로잡혀야 함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왕에게 순종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의 죄를 직면하게 했고(삼하12:7), 엘리야는 아합의 악을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라가 모세를 대적한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라 사건의 핵심을 단순히 ‘하나님의 지도자를 비판했다’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모세의 개인적인 실수를 지적하거나 책임 있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맞서 자기들의 권력과 지위를 요구하며 반역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오늘날 ‘목회자를 비판하면 고라처럼 심판받는다’는 식으로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모세의 지위와 현대 교회의 목회자 직분을 아무 설명 없이 동일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민12의 미리암과 아론 사건 역시 단순히 모세와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하며(민12:2) 모세에게 주어진 고유한 사명을 시기하고 자기들의 위치를 높이려 했습니다. 본문은 이어서 모세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합니다(민12:3). 이것은 자기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나를 건드리면 하나님께 벌받는다’고 위협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것’과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과 ‘주님을 대적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선한 사역자를 거짓으로 모함하고 악의적으로 방해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질문하거나, 재정 비리를 지적하거나, 권력 남용과 부당한 행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일’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나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 ‘나를 떠난 사람들은 결국 잘되지 않았다’, ‘주의 종에게 손대면 자녀에게까지 화가 간다’는 식의 말을 지도자 자신이 사용한다면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자기 권위를 지켜 주는 보복자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보다 목회자를 두려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참된 권위는 ‘선’(good)과 ‘진리’(truth)를 섬기기 위한 권위입니다. 직분 그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함, 안수, 교회의 규모, 오랜 사역 경력, 많은 추종자가 그 사람의 모든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직분은 선과 진리를 섬기도록 맡겨진 ‘쓰임’(use)이며, 그 권위 역시 그 쓰임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성도에게 중요한 질문도 ‘저 사람은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합당한가?’입니다. 사람을 중심에 놓으면 신앙은 인물 숭배로 흐르기 쉽지만, 선과 진리를 중심에 놓으면 지도자와 성도 모두 주님 아래 서게 됩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은 특별히 위험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역을 맡기셨다’는 고백이 어느 순간 ‘그러므로 나를 반대하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다’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판단과 주님의 뜻 사이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종교적 프로프리움은 자신의 욕망과 권위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인데 뭐’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과 선한 사역 자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선한 사역을 무너뜨리려 하거나, 진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악입니다. 비판하는 사람 역시 ‘나는 정말 진리를 위해 이 말을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싫어서 공격하고 싶은 것인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도자도 비판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쪽 모두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참된가를 기준으로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누군가가 주님의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대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악에는 결과가 있습니다. 거짓을 사랑하면 거짓이 그 사람의 내면을 형성하고, 미움과 지배욕을 반복해서 선택하면 그것이 점점 그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이 훨씬 더 깊은 의미의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밖에서 보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한 악이 결국 그 자신의 생명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했으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망하게 하셨다’, ‘목회자를 비판했더니 병에 걸렸다’, ‘주의 종을 떠났더니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사건을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인과관계를 알 수 없습니다. 자연계의 불행을 하나님의 보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적 섭리의 원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44).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종을 비판한 사람에게 병과 실패를 보내어 보복하시는 분으로 주님을 이해한다면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사랑과 충돌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사울의 이야기는 이 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사울은 실제로 주님의 사람을 대적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분명 악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즉시 보복하여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메섹 길에서 그를 만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고(행9:4), 그를 돌이켜 훗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목적이 보복이 아니라 구원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내 사람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과 성도들을 향한 박해가 주님을 향한 박해가 된 것은 그들이 특별한 신분의 ‘주의 종’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 때문에 박해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은 사람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하는 우리 역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보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가 선과 진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람을 우상화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는다’는 말은 그대로 공식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미워하여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악이며 그 악은 인간의 내면에 결과를 남깁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 지도자에게 반대하거나 그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연적인 불행을 보내신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선과 진리를 악의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일이지만, 어떤 “하나님의 사람”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보복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려 벌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거부하거나, 반대로 사람을 주님과 동일시하여 그의 잘못까지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회자와 영적 지도자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는 ‘나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 역시 언제나 주님의 선과 진리 아래 있음을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성도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 역시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되 주님께 속한 선과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하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틀릴 수 있습니다. 직분자도 틀릴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선과 진리는 사람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사람의 편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목회자도 성도도 함께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SL.29,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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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도한 뒤 ‘이제 주님께 맡기자’고 마음먹으면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이 있고(시37:5),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벧전5:7). 그러므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맡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을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내가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알아서 사람도 보내 주시고 돈도 마련해 주시며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야 할 결정과 책임을 미루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느1:4). 그러나 기도한 뒤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성벽을 세우시겠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무엇을 요청할지 준비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는 밤에 직접 성벽의 상태를 살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여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적들이 공격하려 하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느4:9). 이 한 구절에 맡김의 균형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동시에 ‘파수꾼을 두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행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27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모두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배에서 몰래 도망하려 하자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행27:31).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해야 할 적절한 행동은 서로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기도한 뒤 공부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건강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필요한 치료와 생활 습관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맡김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이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출과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뢰라기보다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수는 있지만 자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고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과까지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일할 수는 있지만 시장과 다른 사람의 선택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용서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참된 ‘맡김’이 시작됩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하나님 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들은 거듭남(regeneration)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대신해 버리신다면 인간은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원리를 강조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악을 거절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실제로 내가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생명 자체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한다’와 ‘주님께서 하신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차원을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도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다 해야 한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모든 결과의 주인으로 만드는 프로프리움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다른 모습의 프로프리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을 피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뢰는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면서도 결과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뒤 당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맡김은 행동의 중단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살아 내는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게 행동하면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돌봅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최선의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녀의 마음과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강제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계속 행하되, 그 사람의 자유와 최종적인 내면까지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과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이시겠지’라고 하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약2:15-16).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니라 선한 행동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다시 자기 의존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때 맡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한 뒤에도 결과가 내 뜻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행동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뒤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다시 기도합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바르게 보게 합니다. 행동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게서 받은 빛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과해야 한다면 사과하고,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하고, 치료받아야 한다면 치료받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요청하며,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이미 지나간 과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최종적인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경계가 보일 때 맡김은 훨씬 구체적인 신앙이 됩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것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맡기지 못했나?’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대신 보장해 주신다는 계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결과와 주님의 섭리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입니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어떤 문제는 오래 남아 있으면서 우리를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회복되고, 어떤 관계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이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라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과 불안을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러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 순간 맡김은 영적 방임으로 바뀝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책임까지 주님께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선을 성실히 행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맡김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서도, 선을 행할 힘과 결과의 궁극적인 주권은 모두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겼다’는 말 뒤에는 두 문장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지배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 문장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첫 번째가 빠지면 영적 방임이 되고, 두 번째가 빠지면 자기 의존이 됩니다.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과 힘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평안히 주님의 손에 놓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제 몫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몫까지 제가 붙들고 있지도 않겠습니다.’

 

 

 

SL.30, ‘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주의 종을 대적하면 벌받아’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면 결국 벌받아.’ 교회 안에서 종종 듣는 말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 영적 지도자에게 심각한 비판을 제기하면 ‘주의 종을 함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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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8,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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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가르치며,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돌보심 밖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귀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와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셨다’를 같은 뜻으로 만들어 버릴 때 생깁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인과 전쟁, 학대와 배신, 거짓과 착취까지도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악을 금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악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은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며(요삼1:11), 야고보는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약1:13).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일을 주님께서 동시에 하기를 원하셨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악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정 범위에서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악을 아예 막아 버리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에 관계됩니다. 사람이 선을 선택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악을 선택하려 할 때마다 초자연적으로 손을 붙잡아 막으신다면, 겉으로는 악이 없는 세상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을 강제로 행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며, 사랑 역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계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허용이 방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용하신다’는 말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 밖에 존재하는 별도의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한 더 큰 악으로 번지는 것을 제한하시고, 그 결과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악은 인간과 지옥에서 나오지만, 악을 제한하고 그 가운데서 선한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결국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 버리면 형들의 악한 선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형들이 의도한 것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선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인간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구별됩니다.

 

십자가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언을 이용했으며, 군병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배신과 증오와 잔인함 자체를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악은 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그 악조차 주님의 구원 역사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과 지옥의 가장 깊은 악을 맞아 그것을 이기시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신적 섭리의 놀라운 깊이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어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일어나도 그것이 당신의 궁극적인 선을 좌절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별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데려가셨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범죄 피해자에게 ‘이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면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악한 선택으로 고통받은 사람에게 그 악까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자신을 해친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두려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건의 이유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빨리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재해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과 홍수, 암과 감염병,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칙이 있고, 그 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도 일어납니다. 또한 인간의 탐욕과 무책임, 폭력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지 하나로 환원하면 자연적인 원인과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반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신가? 막으실 수 있는데도 허용하셨다면 결국 뜻하신 것과 같은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그러나 ‘막을 능력이 있음’과 ‘그 일을 원함’은 같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의 모든 잘못된 선택을 물리적으로 막을 능력이 없어서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부모와 주님의 섭리를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허용 = 찬성’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고통 없는 자연적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여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당장 개입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묻지만,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는 한순간보다 인간의 영원한 삶 전체를 보고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고통 앞에서 ‘다 하나님의 허용이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허용의 교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체념을 강요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교리입니다. 학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벗어나야 하고,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막아야 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병이 생겼다면 치료해야 하고, 재난이 일어났다면 사람을 구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악과 고통 앞에서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신적 섭리를 믿는 태도와 다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을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 사람 곁에 서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악을 막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돌보았습니다(눅10:33-35).

 

또한 이 구별은 인간의 책임을 보존합니다. 만일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저지른 잘못도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근거가 약해집니다.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주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악의 책임을 주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거부할 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자신의 악을 하나님의 섭리 뒤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고백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의 어떤 악도 주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인간을 선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뜻하셨을까?’라고 묻는 것보다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셨는지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이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선을 이루기 원하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악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한쪽 극단에는 ‘세상일은 모두 우연이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고 원하신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훨씬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지만 인간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에는 귀한 신앙고백과 위험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다’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직접 뜻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제한하고 인간을 가능한 선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비극을 만날 때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설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왜 이런 일이 허용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악이 주님의 선보다 강하지는 않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가장 깊은 악을 행했지만, 그 악이 주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도 주님의 선한 목적을 최종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SL.29,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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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돌아봐야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는 말입니다. 취업이 되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병이 생기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사고를 당하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혹시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순종과 복, 불순종과 화를 연결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에는 분명 성경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너무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 ‘좋은 일 = 하나님의 복, 나쁜 일 = 내가 잘못한 결과’라고 모든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성경은 실제로 죄와 그 결과를 연결합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면 그 악 자체가 삶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하면 신뢰를 잃고, 탐욕에 사로잡히면 관계가 깨지며, 무절제하게 살면 삶의 여러 영역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혹시 내가 고쳐야 할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은 없는가?’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오히려 거듭남에 필요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그러므로 네가 뭔가 잘못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다루는 성경이 욥기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바로 이 공식을 가지고 욥을 바라보았습니다. 욥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니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무너졌으니 욥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 큰 잘못을 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합니다(욥4:7). 얼핏 들으면 상당히 경건하고 논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서두에서 독자는 이미 욥의 고난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끝없이 욥의 숨은 죄를 찾아내려 했던 이유는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나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고방식을 직접 바로잡으셨습니다. 요9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고난에 상응하는 죄인을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십니다(요9:3). 주님은 고난을 보고 곧바로 죄의 크기를 역산하는 인간의 습관을 깨뜨리십니다.

 

눅13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례가 나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아마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고 하십니다(눅13:4-5). 비극을 당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컸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고, 질병, 재난, 실패를 보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5:45). 자연계에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립니다. 선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으며, 선한 사람도 병들 수 있고 악한 사람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형편만 보고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읽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73의 시인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흔들렸습니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탄식합니다(시73:4-5). 만일 ‘잘되는 사람 =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시인이 본 악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국 외적인 형통과 인간의 궁극적인 영적 상태가 같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물론 자연적인 복도 있습니다. 건강과 일용할 양식, 좋은 관계와 안전, 필요한 물질은 모두 감사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굳이 ‘이것은 복이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감사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하며,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면 됩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좋은 일을 ‘복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 복의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마5:3-10).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박해받는 상태를 ‘복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외적인 환경이 얼마나 편안한가보다 인간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과 영원한 관점에서 실제로 선한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이 생기는 것이 자연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그 돈 때문에 탐욕과 교만이 더욱 강해진다면 그 사람의 영적 삶에는 오히려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경제적인 어려움 자체는 분명 고통스럽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가난이나 실패를 보내셨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질병과 사고, 실패와 재난을 ‘하나님께서 뜻하셨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악과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이며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자연계에는 자연적인 질서와 인과관계가 있으며,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과 악으로 인해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생겼으니 내가 뭔가 잘못했나?’라는 질문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필요합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삶의 습관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판단과 욕심, 준비 부족을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관계가 깨졌다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사건을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거듭남을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이 공식을 적용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거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생긴 부모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거나, 사업이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이 왜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원인을 함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며, 그 사람이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반대로 좋은 일을 경험한 사람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까 사업이 잘된다’, ‘내가 믿음이 좋으니까 자녀가 잘된다’, ‘기도를 많이 해서 건강하다’는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프로프리움’(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거기에서 ‘그러므로 잘 안 되는 사람은 나보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공을 영적 우월함의 증거로 삼는 순간, 감사가 교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자연적인 좋은 것에 대한 가장 건강한 반응은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선한 쓰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면 그것을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 건강하다면 그 건강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인지, 지위와 능력을 얻었다면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이 영적인 복과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진정한 복은 단순히 좋은 사건이 많이 생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복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천국을 향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형편이 좋을 때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형편이 어려울 때도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관점에서 훨씬 깊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면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거나 더 사랑받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구나’, ‘내 믿음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자동으로 결론 내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의 죄와 믿음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일은 감사할 선물이 될 수 있고 나쁜 일은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사건의 좋고 나쁨 자체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복은 내 삶에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천국의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나쁜 일이 생겼어? 뭔가 잘못한 거지’라는 말은 절반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대로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좋은 것은 주님께 감사하고, 어려움 앞에서는 자신을 겸손히 살피되, 형통한 사람을 의인으로 높이지도 말고 고난받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너무 빨리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의 사정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것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좋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SL.28,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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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6,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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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계속 막히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이상하다. 기도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왜 이렇게 계속 막히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일이 어긋납니다. 사람도 안 만나지고, 돈도 마련되지 않고, 계획했던 일정도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연달아 생깁니다. 처음에는 ‘조금만 더 해 보자’고 생각하지만 막힘이 반복되면 마음속에 신앙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행16:6-7). 그 뒤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향합니다. 여기서는 분명 어떤 길이 막힌 것이 방향을 바꾸라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혹시 내가 방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은 건강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막혔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결론으로 뛰어갈 때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길에도 놀라울 만큼 많은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은 분명 선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요?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과 방해가 있었고, 대적들은 성벽 공사를 중단시키려 했으며, 내부에서도 어려움이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아야 할 정도였습니다(느4:17). 만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계속 막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성벽 재건은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더욱 극적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지만 그의 사역에는 끊임없이 막힘이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물들은 ‘이 일을 하지 말라’는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바로 그 어려움들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부르심을 수행했습니다. 행16에서도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어떤 길은 성령께서 막으셨지만, 마게도냐로 간 뒤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힌 것은 ‘마게도냐로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막힘’처럼 보여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든 장애물이 같은 종류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어떤 막힘은 방향을 바꾸라는 섭리적 인도일 수 있고, 어떤 막힘은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견디고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막힘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고,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나 자연계의 여러 조건 때문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두 ‘일이 안 풀린다’는 모습이지만 그 내적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매 순간 외적인 사건을 암호처럼 해독하여 ‘하라’, ‘하지 말라’를 알아맞히게 하는 체계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일어난 모든 사건에 즉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자금 조달이 계속 실패한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업계획 자체가 현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거나 시기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선하고 필요한 일을 시작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예상하지 못한 문제 때문에 계속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이 막으신다’고 해석하여 포기한다면, 오히려 끝까지 해야 할 선한 일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환경의 신호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합니다. 정보를 살펴보고, 경험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능력과 형편을 점검하고, 예상되는 결과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이 선과 진리에 합당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힘든 분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세 번 막혔으니 하나님 뜻이 아니야’, ‘기도했는데 계속 문제가 생기니 그만두라는 뜻이야’라고 결론 내리면 오히려 편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책임져야 할 부담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에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하게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모든 막힘을 무조건 ‘시험’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충분한 이유를 들어 만류하고, 객관적으로도 문제가 반복해서 드러나며, 자신의 능력과 조건을 보아도 계속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끝까지 밀어붙이면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신앙적 분별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일 수 있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을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에는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 같다’고 말하고, 꼭 하고 싶은 일에는 ‘사탄의 방해가 심한 것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장애물을 자기 욕망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막힘 앞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몇 번 막혔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일이 잘 풀리든 막히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대로 분명히 선한 일이라면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즉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왜 이 일을 하려 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정말 이웃에게 필요한 선을 이루려는 것인지, 아니면 성공과 인정, 자기만족을 원하는 것인지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막힘은 나에게 무엇을 다시 보게 하는가?’입니다. 당장 ‘하라, 하지 말라’는 답을 얻으려 하기보다, 그 장애를 통하여 계획의 허점이 드러났는지, 내 욕심이 드러났는지, 준비 부족이 드러났는지, 아니면 정말로 포기하지 말고 인내해야 할 선이 더욱 분명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힘은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분별을 깊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것은 거듭남(regeneration)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외적인 사건을 보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결정마다 하늘에서 ‘YES’나 ‘NO’가 떨어진다면 우리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내적으로 분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처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렇다면 일이 계속 막힐 때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멈추어 살펴보는 것은 좋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자신의 동기를 살피고, 현실적인 조건을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믿을 만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뒤 ‘계속해야 할 선인가,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가,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말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막힘 자체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등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한 뒤에는 어느 정도 책임 있게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장애가 나타날 때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 뜻인가 아닌가’를 묻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선하고 옳다고 충분히 판단했다면 어려움이 있어도 견딜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살펴본 결과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둘 다 믿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문제에서도 가장 깊은 기준을 보여 줍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 모든 상황은 막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배신, 체포, 거짓 증언, 조롱, 채찍질, 십자가가 이어졌습니다. 외적인 상황만 읽었다면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길에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 자체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신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악과 잘못된 선택, 다른 사람의 자유,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수많은 고통과 장애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허용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하여 돌아설 수 있도록 섭리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면서 선으로 이끄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결국 ‘일이 계속 막히는데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단순히 ‘그렇다’거나 ‘아니다’라고 답할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분명 멈추어 살펴보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 방향을 바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금지 명령은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반복되는 막힘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분별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곧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장애물을 하나님의 암호로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 앞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분별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계속 막힐 때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 왜 자꾸 막으십니까?’라고 단정하기 전에,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보아야 할 선과 진리는 무엇입니까? 계속해야 한다면 견딜 지혜와 힘을 주시고, 멈추어야 한다면 제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시며,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막힘이 곧 하나님의 ‘NO’는 아닙니다. 때로는 ‘기다려라’일 수 있고, ‘방법을 바꾸어라’일 수도 있으며, ‘끝까지 가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 의미를 당장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모든 사건의 숨은 뜻을 알아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들고 주님을 신뢰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SL.27,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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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5,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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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했는데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계속 문제가 생기고 계획이 어그러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면서 ‘여호와께서 나의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라고 고백했고(창24:27), 요셉에 대해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기록합니다(창39:2). 그러므로 어떤 일이 순조롭게 열릴 때 그것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감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 일이 잘 풀림’, 그리고 그 반대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님 = 일이 막힘’이라는 공식을 놓는 것입니다. 이 공식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일이 얼마나 잘 풀리는지만 보아도 하나님의 뜻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깊이 읽어 보면 이 공식은 곧 무너집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성경은 분명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하셨던 요셉의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이 잘 풀리는 삶’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노예로 팔렸고,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스럽게 일했지만, 거짓 고발을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심지어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렸습니다. 만일 요셉이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려야 한다’는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면, 여러 차례 ‘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나 보다’라고 결론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막혀 있는 시간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창39:21).

 

바울의 삶은 더욱 분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언제나 순조롭게 열렸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가 파선하고, 사람들에게 쫓겨났습니다. 행16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고, 옥문이 열렸으며, 간수와 그의 집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행16:22-34).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막힘’이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던 바로 그 길에서 감옥에 갔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일이 아주 잘 풀린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습니다. 삯을 내니 배에도 탈 수 있었습니다(욘1:3). 상황만 놓고 보면 놀라울 만큼 길이 잘 열렸습니다. ‘기도했더니 마침 배가 있더라. 역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배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달아나는 배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지 않으며, ‘문이 닫혔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열린 문으로 잘못 들어갈 수도 있고, 닫힌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닫힌 문 자체가 주님의 인도하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단지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의 순조로움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별하려 하면 우리는 매우 쉽게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실제로 주님께서 길을 막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16에서 바울 일행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16:6-7). 이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하여 방향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일이 막히는 것을 전혀 무시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환경의 열림과 닫힘은 우리가 분별할 때 참고해야 할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어가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원하는 일을 모두 성공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고 거듭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 일이 성공할 것인가’, ‘이 관계가 이루어질 것인가’, ‘사업이 잘될 것인가’,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를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자연적 성공과 영적 선이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크게 성공했는데 그 성공 때문에 돈과 명예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사업이 실패했는데 그 실패를 통하여 자신의 교만을 보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 결혼이 자동으로 주님의 뜻이라는 뜻도 아니며,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서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연계에서의 ‘잘됨’과 영적 의미에서의 ‘선’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계약이 성사되었다’, ‘내가 원하던 사람이 나타났다’, ‘돈이 마련되었다’, ‘문이 열렸다.’ 물론 실제로 주님의 섭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다고 단정하면,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막으신다’고 너무 쉽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주님의 제지인지,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인지, 자연계의 조건 때문인지, 나 자신의 준비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선한 일을 이루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인지는 즉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장애물에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를 붙이는 것도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체포, 심문, 조롱, 채찍질,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만 보면 모든 일이 ‘잘못 풀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배신했고,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부했고, 빌라도는 십자가형을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일이 잘 풀릴 것이다’라는 기준만 적용한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사건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바로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형통 = 하나님의 뜻’이라는 공식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일이 잘 풀리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선하고 참된가’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충돌한다면 아무리 문이 활짝 열려도 주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상황보다 먼저 선과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왜 이것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말하지만,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 이미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주님께 확인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외부에서 표적을 찾는 일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살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실제 상황도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없애고, 매 순간 초자연적인 신호로 지시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정보를 살피고, 조언을 듣고, 결과를 예상하고, 책임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씀의 선과 진리에 비추어 보고, 그 뒤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풀렸으니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일이 막힐 때도 멈추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혔으니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다’고 즉시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형통과 장애 모두 분별의 자료는 될 수 있지만 최종 기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선을 선택했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관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옳은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더 힘든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일이 안 풀리니 내가 잘못 가고 있나’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을 너무 빨리 포기하게 됩니다.

 

반대로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때야말로 더 깊이 자신을 살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성공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이 일이 나를 주님과 이웃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더 집착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형통 자체가 영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살피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풀리는 삶이 아니라, 일이 풀리든 막히든 점점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릴 거야’라는 말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필요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귀한 신뢰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도 일이 막힐 수 있고, 주님의 뜻을 거슬러 가면서도 일이 놀라울 만큼 잘 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은 ‘이 일이 잘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되며, 나는 그것을 선택함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일이 가장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사랑은 가장 깊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형통’을 주님의 뜻과 동일시해서도, ‘막힘’을 주님의 부재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때로 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를 이끄시고, 때로 닫힌 문 앞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시며, 때로는 아주 어렵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길이 얼마나 편한가가 아니라, 그 길에서 내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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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결혼을 포기하면 더 거룩해지는가?’ -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바라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1. 독신이라는 선택에 담긴 사랑과 헌신

 

‘신앙의 쉼터’ 영상은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이 왜 결혼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독신 생활을 단순한 금욕이나 교회법의 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억제가 아니라 사로잡힘’이라는 표현은 이 영상의 중심 메시지를 잘 드러냅니다. 결혼이나 가정이 나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기꺼이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수도 생활을 단순히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는 삶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신앙적 동기를 바라보게 합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사제의 독신을 변경할 수 없는 신앙 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랜 전통을 통해 발전한 교회 규율로 이해합니다. 서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의 독신을 원칙적으로 요구하지만, 동방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미 결혼한 남성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구 사제의 독신 약속과 수도자의 정결·청빈·순명 서원은 제도적으로도 구별됩니다. 영상은 이러한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소개하면서, 사제의 독신은 목자로서의 봉사와, 수도자의 정결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 생활과 특별히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의 삶이 불완전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병든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준 사제와 수도자들의 삶에는 분명히 귀한 사랑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도 어떤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결혼했는지 독신으로 살았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했고 어떤 선을 실제로 행했는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생활의 신학적 의미를 검토하는 것과 그 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의 진실한 헌신을 존중하는 것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2.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준다는 주장

 

영상에서 가장 깊이 검토해야 할 부분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이 ‘하늘나라를 미리 살아 보여 주는 표징’이라는 설명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마태복음 22장 30절의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삼습니다. 지상의 혼인은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영원한 삶에서는 그 형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혼인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은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삶을 지금부터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일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을 읽으면 전혀 다른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HH.366에서 천국에도 혼인이 있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천사들은 모두 인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며,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질서는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혼인은 지상의 혼인과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는 더욱 깊고 완전한 사랑의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HH.367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혼인을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가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인간의 마음이 형성되듯, 참된 혼인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로 남아 있으면서 내적으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남녀가 함께 생활하거나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는 관계를 넘어섭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 인간관계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참된 결혼애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결혼을 넘어선 독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불완전하게 경험했던 참된 결혼애가 그 내적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는 세계입니다. 이는 가톨릭의 독신 이해와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영원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입니다. 가톨릭은 독신을 장차 완성될 하늘나라의 표징으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가 결합하는 참된 혼인 자체에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발견합니다.

 

3. 스베덴보리가 영구 독신 서원을 경계한 이유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는 저작은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입니다. 특히 CL.155와 CL.156은 사제와 수도자의 독신을 살펴볼 때 피할 수 없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5에서 영구적인 독신을 서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참된 정결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참된 정결은 단순히 성적 행위를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결혼애가 올바른 질서에 따라 보존되고 정화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인간은 외적 행동을 억제할 수 있지만, 외적인 억제가 곧 내적 사랑의 변화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평생 정결하게 생활한다고 해도, 그 내면이 욕망과 자기중심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독신 자체가 그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며, 상대방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게 된다면 그 사람은 혼인 생활을 통하여 내적으로 정화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CL.156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인의 상태가 독신의 상태보다 우선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혼인이 창조 때부터 세워진 질서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비롯되고,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거나, 독신자는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혼인의 거룩함을 독신보다 낮은 것으로 여기는 종교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으려는 가르침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CL.155에서 수도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는 지상에서 했던 서원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결혼애를 원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혼인 생활로 인도되고, 독신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상태에 맞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외적인 종교 제도가 영원한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 그에 상응하는 삶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수도 생활의 헌신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구적 독신 서원을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의 보증처럼 이해하는 것은 분명하게 경계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인간이 지상에서 어떤 종교적 약속을 했는지보다, 그 약속을 지키는 동안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4. ‘나를 비워야 하나님이 들어오신다’는 말의 속뜻

 

영상의 후반부에는 매우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내가 나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외로움의 십자가를 견디며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과 깊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세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이 비워야 할 것은 결혼이나 재산, 가족관계와 같은 외적 삶의 형태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이 참으로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모든 판단과 사랑의 중심에 놓으려는 ‘프로프리움’(proprium)입니다. 인간은 혼자 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외적 관계의 수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그 관계들 안에서 자신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독신 생활과 결혼 생활은 서로 다른 환경이지만, 동일한 영적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신자는 자신의 시간과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에 바칠 수도 있고, 자신의 안락함과 독립성을 지키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 역시 배우자와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도 있고, 그들을 주님께서 맡기신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중심이 될 것인가, 아니면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이웃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운다’는 말은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인간적인 사랑을 포기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가정을 이루고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야말로 자기중심적 사랑을 내려놓는 가장 구체적이고 끈질긴 훈련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자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일은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과 실제 결혼애

 

영상은 수도자가 자신의 온 삶을 그리스도께 봉헌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가톨릭 수도 전통에서 이러한 표현은 깊은 신앙적 의미를 지니며, 실제 혼인을 뜻하기보다 주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과 충실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이해를 적용할 때는 이러한 상징을 특정한 생활 형태에만 독점적으로 연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되는 것은 교회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별이나 혼인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입니다. 교회가 신부라는 것은 교회가 주님을 다른 그 어떤 걸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만이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교회가 이 상응의 의미에 참여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결혼애는 오히려 이 영적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참된 결합은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상응하고,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에서 그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관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결혼애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 사이에서 가장 내밀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와 참된 결혼애입니다. 결혼했다고 해서 누구나 자동으로 거룩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서 참된 결혼애를 이해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선과 진리가 결합할 수 있는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내적 질서가 지상의 결혼 생활에서도, 독신으로 수행하는 이웃 사랑의 삶에서도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의 기준이 됩니다.

 

6. ‘혼자 사는 사제가 부부를 상담할 수 있는가?’

 

영상은 처음에 제기한 현실적인 질문, 곧 결혼하지 않은 사제가 어떻게 부부 문제를 상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도 답합니다. 사제는 많은 가정의 기쁨과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때로는 당사자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결혼 경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통찰이나 상담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 방향의 과장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부부를 상담했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내적 경험을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함께 살아 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알기 어려운 관계의 깊이와 책임, 친밀함과 갈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적 상담에서는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실제적 지식, 심리적 통찰, 경청하는 태도, 그리고 필요할 때 전문적 도움을 연결하는 겸손이 함께 요구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상담자가 결혼했는지 독신인지가 아니라, 그가 부부에게 어떤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을 사랑이라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서로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면서 선과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 가는 길을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부를 단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로 보는가, 아니면 서로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되고 거듭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로 보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된 목회적 지혜는 어떤 삶을 경험했다는 사실 하나에서 자동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며, 그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질서를 이루어야 하는지 이해하고 실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에서 자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한 목회자도 배워야 하고 독신 사제도 배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상담받는 사람들의 내면을 자신이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7. 하늘나라의 예고편은 독신인가, 사랑인가?

 

영상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독신을 ‘지상에 먼저 도착한 하늘나라의 예고편’이라고 표현합니다.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적용하면 그 비유의 중심을 조금 다르게 놓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은 독신이라는 생활 형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 안에 실제로 나타나는 천국의 사랑입니다.

 

천국은 외적인 신분이나 종교적 직책에 따라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에서는 모든 천사가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 기쁨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을 위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러한 천국의 원리는 지상의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병원이나 학교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자녀를 돌보는 평범한 가정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독신 수도자가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돌보며 기쁨을 누리는 모습은 분명 하늘나라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든 배우자를 오랜 세월 돌보는 남편이나 아내의 모습 역시 같은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평생 품고 살아가는 부모의 헌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이웃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의 삶도 그러합니다. 이 모든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얼마나 많은가가 아니라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며,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선을 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결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이 단순히 여러 사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천국의 가장 깊은 질서와 연결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기혼자가 독신자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된 결혼애를 잃어버린 혼인은 외적인 관계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결합에 대한 장애물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창조와 천국의 질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8.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어떤 삶인가?

 

이 영상을 통하여 우리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헌신을 새롭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과 그 독신 생활에 부여된 모든 신학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적 금욕이나 자기희생의 외적인 크기보다, 그 안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종교적 헌신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헌신을 더욱 깊은 기준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 내면에서 자기 의로움이나 영적 우월감을 키우고 있다면 그 외적 희생은 참된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날마다 자신의 이기심을 돌아보고 배우자와 자녀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일상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향해 자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했는지만이 아니라, 그 포기를 통하여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영상의 마지막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진짜로 찾는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당신의 사랑은 결국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이 질문은 독신자와 기혼자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질문을 한 걸음 더 깊이 이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인간적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인간적 관계 자체를 정화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다’는 고백에는 진실한 헌신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배우자를 더욱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고백에도 똑같이,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참된 결혼애의 질서 안에서 더욱 깊이 드러나는 영적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 사랑을 모두 버린 채 홀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선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독신인가 결혼인가 하는 외적인 구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떤 사랑을 이루고 계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독신의 헌신도, 결혼의 헌신도 그 자체가 구원의 공로나 거룩함의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거듭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천국은 바로 그러한 사랑이 가장 온전한 형태로 실현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누가 더 많은 것을 포기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삶에서 주님의 사랑이 더욱 진실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독신자의 조용한 헌신 속에서 나타나든, 부부가 평생 서로를 사랑하는 삶 속에서 나타나든,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 영상에서 인용한 가톨릭의 독신 교회법과 그리스도론적·교회론적·종말론적 근거는 바오로 6세의 1967년 회칙 ‘사제 독신 생활’과 교회법 제277조에서 확인됩니다. 다만 ‘1139년에 독신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서방 교회의 독신 규율은 그 이전부터 발전해 왔으며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그 제도화에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제가 이번 영상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독신으로 살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삶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과 정면으로 만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독신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해하기보다 ‘천국에서 인간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문제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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