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렌즈’ 종교별 100선 시리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개신교(PR), 동방정교회(EO), 로마가톨릭(RC), 이슬람(IS), 불교(BU)의 교리와 신앙을 각각 100개의 주제로 살펴봅니다. 이 작업의 목적은 어느 종교가 더 우월하고 어느 종교가 더 잘못되었는지를 판정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 종교와 신앙 전통 안에 어떤 진리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진리가 역사와 교리와 인간의 종교적 사고를 거치면서 어디에서 확장되거나 변형되고 때로는 오류와 뒤섞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에서 말하는 ‘진리와 오류’는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구분이 아니라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보기 위한 분별의 언어입니다.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기본 원칙은 이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가 믿고 말하는 것을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하되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하되 그것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고,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은 주님께 남겨 둔다.’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겉으로 어떤 종교에 속해 있는가만으로 한 사람의 내면과 영원한 운명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살피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전통에서 가르쳐 온 교리와 실제 신앙 속에 형성된 생각들입니다.

 

PR | 개신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PR(Protestantism) 시리즈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와 실제 신앙생활 속에서 형성된 믿음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과 삼위일체, 성경과 계시, 인간과 죄, 예정과 자유의지, 십자가와 속죄, 칭의와 구원, 거듭남과 성화, 믿음과 선행, 성령과 은사, 기도와 섭리, 교회와 목회자, 예배와 성례, 천사와 사탄, 영적 전쟁, 죽음과 부활, 천국과 지옥, 재림과 종말, 다른 종교와 구원, 결혼과 가정과 일상의 신앙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신앙의 전체 지형을 다룹니다. 개신교는 하나의 단일한 신학체계가 아니므로 개혁주의·루터교·침례교·웨슬리안·오순절 등 특정 전통의 가르침을 개신교 전체의 교리로 단정하지 않고, 공통교리와 교파적 강조점, 그리고 실제 교회생활에서 형성된 통속적 신앙을 구별하여 살펴봅니다.

 

 

PR.001,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SL.PR.001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 한 하나님 안의 신적 삼위인가, 영원한 세 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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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 | 동방정교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EO(Eastern Orthodox) 시리즈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강하게 보존해 온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영성을 살펴봅니다. 삼위일체, 성육신, 교회와 성례, 성찬, 성모 마리아, 성인과 성화상, 수도생활과 기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신적 전례와 더불어 특히 정교회 영성의 중심에 있는 ‘신화’(theosis), 곧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가르침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하나님의 본질’(essence)과 ‘신적 에너지’(energies)의 구별, 정화·조명·신화라는 영적 여정 등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과 인간의 결합, 인플럭스(influx), 거듭남(regeneration)과 흥미로운 접점을 갖지만 동일한 체계는 아닙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그 유사성을 성급하게 동일시하지 않고, 공통되는 진리와 구조적인 차이를 함께 살펴봅니다.

 

 

EO.001.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SL.EO.001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 -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알 수 없다는 것의 경계 해설동방정교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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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 | 로마가톨릭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RC(Roman Catholic) 시리즈는 로마가톨릭의 공식 교리와 오랜 신앙전통, 그리고 실제 신자들의 신심생활을 함께 살펴봅니다. 교황과 교도권, 성전과 성경, 미사와 성체성사, 세례와 고해성사, 마리아와 성인들의 전구,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공로와 은총, 성물·성지·순례·유해·성모 발현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서는 특히 가톨릭교회의 공식 가르침과 대중적 신심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나 성인을 ‘숭배한다’는 식으로 상대 전통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주장을 먼저 만들어 놓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 전통이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그 안에 보존된 진리를 인정한 다음, 그것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어디에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봅니다.

 

 

RC.001.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SL.RC.001 | 천주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천주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다’ - 주님의 교회는 역사적 계승에 있는가,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 있는가? 해설천주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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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IS(Islam) 시리즈는 이슬람의 하나님 이해와 예언자 전통, 꾸란, 무함마드, 기도·금식·자선·순례, 심판과 천국과 지옥, 예정과 인간의 책임, 공동체와 윤리 등 이슬람 신앙의 핵심을 살펴봅니다. 이슬람에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앙, 기도와 자선, 절제와 순종, 공동체적 책임 등 주목할 만한 종교적 진지함이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에서는 기독교 및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매우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시리즈는 그 차이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무슬림 개인을 그 교리와 동일시하여 판단하지 않으며, 이슬람 안에 존재하는 선과 진리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사람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봅니다.

 

 

IS.001.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SL.IS.001 | 이슬람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는 오직 한 분이며, 그분 외에는 신이 없다’ - 유일신 신앙과 신적 일체성 해설이슬람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고백은 ‘알라는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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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BU(Buddhism) 시리즈는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 연기, 업, 윤회, 무상, 무아, 열반, 자비, 수행과 명상 등을 중심으로 불교가 인간의 욕망과 고통, 집착과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를 살펴봅니다. 특히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통찰,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수행, 자비와 절제의 삶에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 인간의 개별적 영원성,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선과 진리의 인플럭스, 천국에서의 인격적 삶 등의 문제에서는 근본적인 차이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비슷한 수행 언어를 곧바로 같은 영적 실재에 대한 설명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살펴봅니다.

 

 

BU.001. ‘부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다’

SL.BU.001 | 불교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부처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다’ - 깨달은 인간과 생명 자체이신 주님의 차이 해설불교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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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섯 시리즈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종교의 역사는 단순히 ‘진리를 가진 종교’와 ‘오류를 가진 종교’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시대와 문화, 전통과 욕망, 두려움과 이해의 한계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교리 안에도 진리와 오류가 뒤섞일 수 있고, 신학적으로 잘못된 체계 안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는 진리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매우 정확한 교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고 행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궁극적으로 묻는 질문도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종교에 속해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당신이 알고 있는 진리가 당신의 의지와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적 생명의 중심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신교인이든, 정교회인이든, 가톨릭 신자이든, 무슬림이든, 불교인이든 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외적인 종교 명칭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각 사람이 받은 진리와 기회, 그의 자유와 양심, 그리고 실제 삶의 내면을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100선 시리즈는 다른 종교를 공격하기 위한 ‘오류 사전’도 아니고, 모든 종교가 결국 같다고 말하기 위한 ‘종교통합 프로젝트’도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분명히 하고 오류는 오류대로 분별하되, 그 모든 작업을 사람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사랑 안에서 하려는 시도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와 교리들을 통과하면서 결국 바라보려는 중심은 하나입니다.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건져 내어 선과 진리를 사랑하게 하시고, 마침내 자신과 결합하여 천국의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 종교별 100선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를 판정하는 작업이 아니라, ‘각 종교와 신앙 속에 어떤 진리가 보존되어 있고, 그것이 어디에서 인간적인 것과 뒤섞였으며, 주님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사람을 어떻게 선과 진리와 천국의 생명으로 이끄시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입니다.

 

※ ‘힌두교’(Hinduism, HI)와 ‘유대교’(Judaism, JU)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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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9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 - 발견된 법의 질서와 진리 자체이신 주님

 

해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사람을 존경하면서도, 때로는 그 진리가 발견자의 소유이거나 그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법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 법칙은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성립합니다. 불교는 부처와 진리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와 비슷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란 부처가 깨닫고 가르친 진리와 수행의 길을 뜻하며, ‘법’(法, dhamma 또는 dharma)은 문맥에 따라 가르침, 진리, 현상, 존재의 질서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불교에서 역사적 석가모니는 우주와 인간을 지배하는 법칙을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 낸 창조주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하여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진리를 통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존재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라는 명제는 초기불교의 중요한 자기 이해를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다만 여기서 ‘진리’라는 표현을 곧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적 진리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진리가 인간의 생각과 관계없이 성립한다는 주장과, 그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12.20에 수록된 ‘인연경’(Paccaya Sutta)은 이 명제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이 경전은 부처들이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법의 안정성과 규칙성, 특정한 조건에 따른 발생의 질서는 그대로 성립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곧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원리입니다. 특히 ‘무명’(無明, avijjā), 곧 존재의 실상과 고통의 발생 및 소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지고, ‘갈애’(渴愛, taṇhā)와 ‘집착’(執著, upādāna)을 거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의 고통이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부처는 이러한 질서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분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진리의 객관성은 어떤 위대한 스승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임의로 새로운 법칙을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질서를 깨달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을 모든 자연과학적 법칙이나 우주의 최초 원인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에서 연기는 무엇보다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발생 및 소멸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설명에는 인정할 만한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진리는 인간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권위에 따라 마음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며, 어떤 스승을 존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주장이 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쉽게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그 안에 있는 진리까지 거부하기 쉽습니다. 종교 안에서도 유명한 지도자의 말이나 오래된 전통을 그 자체로 진리의 기준으로 삼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라면 누가 말했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그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고,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불교의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 183게송은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실천하며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부처들의 가르침이라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는 불교가 단순히 추상적인 세계의 법칙을 아는 데 머무르지 않고, 깨달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선과 마음의 정화는 업과 윤회, 해탈이라는 교리적 맥락 안에 있으므로, 이를 기독교의 죄와 거듭남에 관한 설명과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진리의 근원을 어떻게 밝히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고 선언하고, 이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진리는 인간이 발견하고 설명하는 객관적인 법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서 인간에게 오셨다는 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SS, 1763) 1번에서 성경, 곧 말씀이 신적 진리 자체임을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룩한 까닭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나 오랜 전통이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저작 SS.98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궁극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신적 진리, 곧 말씀이 되셨음을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가 자신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진리를 발견하고 가르쳤다는 불교의 설명과 달리, 말씀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시며 인간에게 진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단순히 가장 위대한 진리의 발견자나 깨달은 스승으로 이해하는 것은 새 교회의 교리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발견하여 비로소 진리와 하나가 된 존재가 아니라, 본래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이신 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불교가 법을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불교가 인간의 지혜를 절대화하거나 진리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는 부처조차 법의 질서를 임의로 바꾸는 창조주가 아니라 그것을 깨달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법신’(法身, dharmakāya)과 ‘진여’(眞如, tathatā) 등의 개념을 통하여 궁극적인 진리와 부처의 관계를 더욱 깊이 탐구합니다. 법신은 대승불교의 전통에 따라 부처의 진리적 차원이나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며, 진여는 현상의 참된 그러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이나 성육신하신 말씀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4번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와 인간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리 깊은 진리를 통찰하더라도 진리 자체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신 개념을 단순히 인간이 자신을 신격화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인간이 진리를 존중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와 존재의 근원을 인격적이며 신적인 창조주에게서 찾는가, 아니면 연기와 공, 진여 등의 불교적 개념을 통하여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차이는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의 이해에 맞지 않는 의견을 무조건 배척하며, 진리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 특히 자신의 지혜와 선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관련됩니다. 인간이 어떤 진리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자기 공로와 우월함의 근거로 삼는다면, 진리를 이해한 사실이 곧 영적 성숙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8번에서 천사들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자신에게 있는 지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람 사이의 차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기보다, 그 진리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유사성을 근거로 불교의 깨달음과 새 교회의 거듭남을 동일한 과정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리가 인간의 생각과 독립적으로 성립한다는 사실은 그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참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법을 듣는 것과 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읽고 교리를 정확하게 아는 기독교인이라도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은 영적 생명과 결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은 교리적인 지식의 축적이나 종교적 정체성의 확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바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 역시 무명과 집착을 극복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불교인은 실천을 중시하지만 기독교인은 믿음만을 중시한다는 식의 대조는 옳지 않습니다. 두 전통 모두 앎과 삶의 결합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진리의 근원과 영적 변화의 목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라는 명제는 초기불교의 법 이해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설명입니다. 부처는 연기의 질서를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가르친 존재로 이해되며, 진리는 특정한 인간의 취향이나 권위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진리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귀중한 윤리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이 있다는 사실과, 그 법칙이 곧 말씀에서 말하는 신적 진리 자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주님은 진리를 발견한 인간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 자체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법과 말씀의 신적 진리를 동일시할 수 없으며, 불교의 깨달음을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과 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동시에 불교인이 진실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할 때 그 안에 나타나는 진리와 선을 종교적 차이만으로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사랑으로 실천하는가를 살피는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이 참된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며, 참된 지혜는 그 진리의 근원을 인정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영적 생명과 결합합니다. (BU.009 해설)

 

요약

불법은 부처가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깨닫고 가르친 진리라는 설명은 초기불교의 연기법 이해에 부합합니다. 진리가 인간의 개인적 권위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으며, 진리를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에도 인정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을 말씀의 신적 진리와 동일시하거나, 부처의 깨달음을 주님의 신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주님은 진리를 발견한 존재가 아니라 진리와 생명 자체이시며, 인간과 천사는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진리 발견이라는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그 진리를 받아들인 인간은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8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SL.BU.008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 불교의 중도와 선과 진리의 신적 질서 해설사람은 흔히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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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9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 초월성과 계시, 이해와 신앙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理解, understanding)를 초월하시는 분이지만,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뜻을 계시(啓示, revelation)하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므로,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에서 ‘와흐이’(wahy)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예언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계시를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꾸란 42:51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시거나, 가림막 뒤에서 말씀하시거나, 사자를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6:44는 예언자에게 계시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숙고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계시 이해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려 주신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한 분이시지만,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슬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꾸란 47:24는 사람들이 꾸란을 깊이 숙고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며, 3:7은 경전 안에 의미가 분명한 구절들과 해석이 쉽지 않은 구절들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해석이 어려운 내용의 궁극적인 의미를 하나님만 아시는지,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도 일정하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문장 구조와 해석 전통에 따른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꾸란이 모든 계시를 인간의 이해 밖에 있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슬람 신학에는 이성(理性, reason)과 계시의 관계를 깊이 연구한 전통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무타질라파(Mu'tazila)는 신적 정의와 인간의 책임을 이해하는 데 이성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으며, 아슈아리파(Ash'ariyya)는 계시의 권위를 중시하면서도 신학적 논증을 활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을 ‘이해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종교’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권위를 가지며, 계시와 이성적 판단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는 이슬람 내부에서도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47–348항에서 참된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고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신앙(信仰, faith)은 인간의 이해를 정지시키고 어떤 명제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의 이해 안으로 들어와야 하며,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실천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해는 단순히 정보를 기억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의 중요한 기능이며, 의지(意志, will)와 결합할 때 영적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말을 외적으로 반복할 수 있지만, 그러한 반복만으로 그 말이 자신의 내적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여전히 지식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해와 사랑, 진리와 선, 앎과 삶이 서로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한한 신적 본질을 인간의 유한한 사고 속에 완전히 담아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신적 무한성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71–172항은 주님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인간을 자신의 이해와 판단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존재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제시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신적 계시는 인간의 이성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가 참된 빛을 받아 올바르게 기능하도록 하는 근거입니다. 신앙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자만도 아니며,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각 자체를 포기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겸손하게 배우고, 자신이 이해한 만큼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계시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슬람에서 꾸란은 하나님이 무함마드에게 전달하신 최종적인 계시이며, 무함마드는 그 계시를 받은 예언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말씀(Word)이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록을 넘어, 그 안에 신적 진리가 담겨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 172항은 주님이 말씀 자체이시므로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요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하며, 14절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의 충만함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계시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보다, 어떤 계시를 신적 말씀으로 인정하며 그 계시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다만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꾸란과 성경이 동일한 방식으로 기록되었거나 동일한 영적 구조를 지닌다고 전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속뜻에 관한 가르침을 꾸란 전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계시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지적 능력만으로 모든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SS, 1763) 26항에서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간 자신의 지성만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와 관련되므로,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진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을 임의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이해를 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자신의 지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해 자체가 아니라, 모든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자기중심적인 지성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신학적 지식을 소유하더라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만으로 말씀을 해석한다면, 그 지식은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신중하게 검토하며, 진리를 알게 된 만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이해와 신앙을 함께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영적 이해에는 합리적인 분별뿐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실제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는 고백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므로 인간이 그분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려 주시며, 인간은 그 계시를 진지하게 배우고 숙고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유로 계시된 내용에 관한 합리적 질문을 금지하거나, 종교적 권위자의 해석을 인간이 분별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이러한 위험은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질문을 막거나, 목회자의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자유를 약화시키는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의 계시관과 스베덴보리의 계시관 사이에 남아 있는 근본적인 차이는 성육신하신 주님과 성경의 신적 성격에 대한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서 진리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참된 신앙의 길로 제시합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무지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교리를 만났을 때 말씀을 더욱 살피고 진리를 구하기보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질문을 중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자신이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영적 지식을 얻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이해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성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진리 앞에서는 성실하게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계시의 목적은 인간을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앞에 무조건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알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 문항이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인가, 없는 분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도록 허락하신 진리를 얼마나 성실하게 배우고 있으며, 그 진리를 얼마나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9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꾸란 역시 인간에게 계시를 숙고하도록 요구하므로, 이슬람의 계시 신앙을 맹목적 복종이나 이성의 부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무한한 신적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주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이해하고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계시의 중심은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말씀의 진리는 그분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초월성과 계시에 관한 고백 자체는 참되지만,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와 주님의 신성에 관한 이해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도, 자신의 지성을 절대화하는 것도 아니라,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선행으로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IS.008.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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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9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 진리의 근거는 교회의 권위에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있는가?

 

해설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이것은 천주교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의 순종에 관한 명제입니다. 천주교는 신앙을 개인이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해석하여 선택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복음을 맡기셨으며, 사도들에게서 이어지는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가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는 개인의 생각과 판단만으로 신앙을 결정하지 않고, 오랜 세월 교회가 보존해 온 진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교리가 참된 진리인 이유는 교회가 그것을 정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일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일까요? 반대로 신자가 스스로 진리의 참됨을 살피고 질문하는 일은 교회에 대한 불순종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번 명제는 교회의 교리와 권위를 모두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권위를 얻으며, 그 가르침이 어떻게 인간 자신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4–85항은 신앙의 유산이 성경과 성전에 담겨 교회 전체에 맡겨졌으며, 이를 권위 있게 해석하는 직무가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에 맡겨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도권은 로마 교황과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수행하는 공식적인 가르침의 직무를 뜻합니다. 천주교는 교도권이 단순히 신학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계시를 해석하고 신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전할 권한을 지닌다고 믿습니다. 특히 교리서 88항은 교도권이 계시에 포함된 진리나 그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진리를 결정적으로 제시할 때 ‘교의’(敎義, dogma)를 정의한다고 설명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교의를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인간의 생각으로 새로운 신적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도권이 계시의 유산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한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정한 진리’라는 표현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관점에서는 교회가 임의로 만들어 낸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권위 있게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6항은 교도권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섬기는 직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91–94항은 신자들이 계시의 진리를 이해하고 보존하며 그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일에 참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일반 신자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필요가 없고 교회가 말하는 내용을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리서 1783–1785항은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도권의 해석 권한은 개인 신자의 판단과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서 87항은 신자들이 목자들의 가르침을 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하며, 890–892항은 교도권의 가르침이 지닌 권위와 그에 대한 신자의 동의를 구별하여 제시합니다. 여기서 모든 교회의 발언이 동일한 수준의 무류성을 지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결정적으로 선포된 교의와 그 밖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구별하며, 그에 따라 신자에게 요구되는 동의의 성격도 달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권위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그 구조가 진리의 참됨을 확인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 공동체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배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딤전3:15는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릅니다. 엡4:11-13은 주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르치는 직무를 주신 목적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불필요하거나 각 사람이 자신의 생각만으로 신앙을 형성하면 된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참된 신앙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행17:11은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경멸하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이 성경에 부합하는지를 살폈습니다. 또한 요8:31-32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중심은 어떤 인간 조직의 권위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담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일과 그 가르침을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는 일은 반드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교회의 가르침은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SS, 1763) 76항에서 교회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그 교회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 성경을 낭독한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서 어떤 교리를 이끌어 내며, 그 진리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말씀은 교회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자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끊임없이 비추어 보아야 할 신적 진리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가 오랜 전통을 지녔거나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르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리가 참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며, 그 말씀의 진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가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그 교리의 권위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나 제도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 점에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51–352항은 특별히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성과 지혜란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악인지를 내적으로 보고 이해하며 분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HH.352에서는 다른 사람이 참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참이라고 믿고, 그 뒤에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찾아 확신하는 상태를 ‘거짓된 지성과 지혜’(spurious intelligence and wisdom)의 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주장을 이미 참이라고 확정한 뒤에는 그 주장이 실제로 거짓이더라도 여러 가지 논거를 찾아 참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배우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부모와 교사, 목회자와 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내용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가 구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 진리를 스스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신앙과, 그 진리가 참된 이유를 오직 가르친 사람의 권위에서만 찾는 신앙입니다. 특히 HH.352:2는 어린 시절 스승에게 배운 내용을 참되다고 믿었더라도 성장한 뒤 진리를 사랑하여 탐구하고, 그 진리의 참됨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앞서 비판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배우는 것과 스스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배척해야 할 행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배우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7055:2에서도 같은 문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의 교리를 따르면서도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교회가 가르쳤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전했다는 이유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경우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신적 진리와 관련된 가르침이 전달될 수 있지만, 그것이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내적인 인식과 충분히 결합한 상태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특히 삶을 위하여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이 실제로 참된지 살피려 하며, 그 교리가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분별하려 합니다. 이 본문은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암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자기 자신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지 않았다면 아직 신앙의 내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면서도 그것이 왜 참된지 이해하고자 말씀을 살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은 참된 신앙의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자가 교회보다 더 높은 개인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교리는 그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진리의 근원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곧 개인의 생각을 모든 진리보다 높이는 태도를 정당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이해와 감각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것을 참이라고 확신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깊은 진리 안에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독립적인 판단 자체가 참된 신앙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00:4에서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그의 이해를 밝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깨달음은 인간 자신의 총명함이나 자율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분별은 교회가 말했으므로 무조건 참이라고 확신하는 태도뿐 아니라, 교회가 말했으므로 무조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쳤는가보다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 역시 참된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리를 믿는 것과 교리대로 살아가는 것의 관계입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정한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신앙의 목적이 완성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032–2038항은 교회의 가르침이 도덕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2044항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한 행위가 복음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언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신앙의 순종을 단순히 교리적 동의와 제도적 복종으로만 이해한다고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교리를 실천하는 일의 영적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규정을 지키는 이유가 교회의 처벌이나 주변의 평가가 두렵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외적인 순종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규정 안에 담긴 진리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 선을 실천한다면 더욱 내적인 신앙의 행위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understanding)와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려는 ‘의지’(will)를 함께 강조합니다. AC.9050은 믿음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은 교리를 알고 동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리를 지키는 행위가 귀중한 이유는 그 자체가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삶에서 실현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와 신자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교리를 정리하며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처음부터 성경의 깊은 의미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체계적인 가르침과 공동체의 도움은 신앙의 성장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이 이러한 쓰임을 감당하려면 신자가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질문을 제기하는 일을 언제나 불순종으로 여기거나, 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신앙의 부족으로 판단한다면 신자는 자신의 이해와 양심을 사용하기보다 외적인 권위에 의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자가 겸손하게 말씀을 배우고 진리의 참됨을 살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격려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은 더욱 깊은 영적 쓰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을 가톨릭 신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모든 천주교 신자가 교회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교회 안에서 진리를 진지하게 배우고 연구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개신교 신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유명한 목회자의 해석을 무조건 참이라고 믿는다면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가 던지는 질문은 천주교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와 신자가 자신의 신앙이 진리 자체에 근거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권위에 근거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참된 신앙이 되는지 분명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진리를 가르치고, 신자가 그 진리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며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실천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일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했기 때문에 참되며,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곧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교회의 권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교회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만, 진리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신앙의 목적은 어떤 교리 체계를 정확하게 보존하거나 제도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은 존중하되 그 가르침을 말씀보다 높여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이해와 양심을 사용하되 그것을 주님의 진리보다 높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판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는 데 있지 않고, 둘 모두가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 앞에서 겸손하게 서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인간 조직이 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밝혀 주신 참된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실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를 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RC.009 해설)

 

요약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라는 명제에는 신자가 개인적인 생각만을 절대화하지 않고 교회가 보존하고 가르치는 진리를 배우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도권이 성경과 성전에 담긴 계시를 권위 있게 해석한다고 가르치지만, 교도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다거나 임의로 새로운 신적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신자의 양심과 이해, 진리에 대한 탐구와 사랑의 실천을 인정하므로, 천주교가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신앙의 전부로 가르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로마 교황과 주교들의 교도권에 특별한 해석 권한을 부여하고, 확정적으로 제시된 교의에 신자가 신앙의 동의로 응답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권위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진리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는 SS.76에서 교회가 말씀으로부터 존재하며 말씀에 대한 이해에 따라 교회의 영적 성격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HH.351–352에서는 다른 사람의 권위 때문에 어떤 가르침을 참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진리 자체를 사랑하여 그 참됨을 이해하는 신앙을 구별합니다. AC.7055:2 역시 교회의 교리가 참된 이유를 단지 권위 있는 사람들이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와,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삶을 위하여 사랑하는 상태를 구별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거나 신자가 올바른 교리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교리가 참되다는 궁극적인 근거를 교회의 제도적 권위에서 찾고, 신자 자신의 이해와 진리의 분별보다 그 권위에 대한 동의를 앞세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 비판은 천주교뿐 아니라 모든 교회와 신자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의 이름과 저작의 권위만을 내세우고 실제 말씀의 진리를 살피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한에서 참된 영적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의 권위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다’라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교회가 정했기 때문에 참된 진리이며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기준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교리의 출처를 주님의 말씀에서 찾고, 그 진리를 이해와 의지 안에 받아들여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RC.008.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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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O.009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다’ - 신적 사랑과 심판의 관계

 

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가장 자주 듣는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며 최후에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신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가르침을 함께 생각하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라면 어떻게 인간에게 진노하시며, 영원한 형벌을 선언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왜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머무르게 됩니까? 흔히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마치 서로 다른 두 성품을 가지신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정교회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관점에서 깊이 다루어 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에게는 기쁨으로, 악인에게는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설명은 일반적인 형벌 중심의 하나님 이해와 상당히 다르게 들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결코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선택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사랑과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어디에서 만나며, 무엇이 다릅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에 관한 이해에도 깊이 연결됩니다.

 

동방정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신앙의 중심에 둡니다. 요일4:8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요일4:16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랑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여러 상황에서 선택하시는 행동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본성에 속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선하게 행동할 때만 나타나는 보상도 아니며,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라졌다가 회개하면 다시 생겨나는 감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이시며, 인간을 생명과 구원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정교회(OCA)의 교리 해설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과 세상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허락하시거나 악을 아무런 결과 없이 방치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인간이 악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끄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 자비와 정의를 서로 경쟁하는 별개의 성품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안에는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무관하게 작용하는 별도의 신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앞에서 자신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동방정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시리아의 이사악(Isaac of Nineveh)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없는 기쁨과 평화가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악한 사랑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동일한 신적 임재가 고통스럽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사악은 이러한 고통을 사랑의 채찍이라는 강렬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를 보내신다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지만 그 사랑을 대하는 인간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국 정교회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 해설도 이러한 관점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이지만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근거로 동방정교회가 모든 심판과 형벌의 언어를 부정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정교회의 예배와 성경 해석에는 여전히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 정죄와 형벌에 관한 표현들이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의 감정만으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깊은 신학적 흐름이 정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의 차이로만 이해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을 유지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25:31-46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인자 앞에 모이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사람들이 구별되는 심판의 장면을 말씀하십니다. 이때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리적 명제를 정확하게 고백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았는지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정교회는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신앙에 관한 정답을 맞혔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사랑으로 살아왔으며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이 자신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얻는 수단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교회는 선행과 거룩한 삶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협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심판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 그리고 삶의 실제적인 변화라는 문제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말씀합니다. 겔18:23에서 주 여호와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겔33:11에서도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반면 롬2:5-6에서는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이 진노의 날에 임할 심판을 쌓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12:29에서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해석의 문제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과 악인에게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한 사랑을 중단하시고 분노라는 반대 감정으로 돌아서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가 악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심판으로 경험된다는 뜻입니까? 동방정교회의 여러 교부와 영성 전통은 이 문제를 후자의 관점에서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관하여 강조점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모두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정교회 전체의 입장을 단정하거나, 반대로 정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처럼 분노하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이해한다고 규정하는 일은 모두 피해야 합니다. 각 전통이 성경의 심판 언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정확하게 살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더욱 분명한 신학적 구별을 제시합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256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복수하시며 사람을 벌하시고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표현들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표현들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내적 성품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고 선 자체이시므로, 인간의 악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이 때때로 하나님께 악한 감정과 형벌의 원인을 돌리는 이유를 ‘진리의 외관’(appearances of truth)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과 실제 영적인 원인이 항상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실제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악한 상태에 빠져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며, 악을 원하는 인간이 그 신적 생명을 잘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통과 심판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경험에 따라 나타나는 외적인 진술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내적 본성이 실제로 분노와 복수로 변화한다는 교리를 세우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단순한 관용이나 무조건적인 허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과 동일하게 취급하시거나 인간의 악행에 아무런 결과도 따르지 않도록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악에 사로잡혀 자신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악은 인간을 참된 자유와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며, 악한 사랑에 머무르는 사람은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형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HH.545-550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 자신이 지옥으로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고 그들의 악을 멀리하시려 하지만, 악한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천국의 선과 진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며 자신과 비슷한 사랑을 가진 영들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옥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분노를 쏟아 붓기 위해 마련하신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악한 사랑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영적 삶의 상태와 공동체입니다. 그렇다고 지옥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형벌이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에도 실제적인 고통과 악의 억제를 위한 형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형벌의 근원을 주님의 분노나 복수심에 두지 않고, 악 자체의 성질과 악한 영들 사이의 충돌 및 영적 질서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동방정교회의 심판 이해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정교회의 이사악은 하나님의 사랑이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미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지배적 사랑에 따라 그 신적 생명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가르칩니다. 두 전통 모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보내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악의적인 분노를 보내신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전통의 심판과 지옥에 관한 가르침 전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미래의 궁극적인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계에서 깨어나고, 자신의 내적 사랑이 점차 드러나면서 천국 또는 지옥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지상의 모든 무덤이 열리고 물질적인 육체가 동시에 부활하는 사건이 아니라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수용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후 상태와 심판의 시기 및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EO.081-090에서 별도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도 언제나 사랑으로 역사하신다면, 왜 악한 사람은 그 사랑을 기쁨으로 경험하지 못합니까?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인간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선택하고 사랑한 것들을 통하여 점차 내적인 성격을 형성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기쁨을 느끼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일,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삶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애정으로 이루어지므로, 자신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그러한 삶이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반대되는 영적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지옥의 고통은 이처럼 인간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았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지금 분노하거나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영원한 운명을 곧바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거듭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악에서 돌이킬 기회를 계속 제공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배적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다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과 삶의 방향을 살피도록 하는 영적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죽은 뒤에 받는 최종적인 판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계속합니다. 요3:19-21에서 주님께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갑작스럽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으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빛이 나타났을 때 인간이 그 빛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어둠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인간의 거짓을 드러내며, 주님의 선은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돌아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 때 회개하고 변화되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그 사람을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힘이 아니라 그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빛입니다. 그러나 그 빛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영적 의미를 생각할 때에는 주님께서 언제 인간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시는가 하는 문제보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변하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사랑과 상태가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나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고난과 불행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거나, 가정과 직장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셨거나 벌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고난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에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눅13:1-5에서 주님께서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듣는 사람들 자신이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요9:1-3에서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잡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자연계의 고난과 영적인 심판을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신적 섭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고통을 원하시거나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시며,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을 섭리로 다스리시면서 가능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어떤 죄 때문에 벌을 받았는지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고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이 고통받는 이웃을 정죄하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의 중심에 있는 신적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신다는 가르침이 인간의 책임이나 정의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면, 그 행동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며 피해자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도 필요합니다. 사랑은 악을 모른 체하는 태도가 아니며, 용서는 악한 행동을 선한 행동으로 바꾸어 부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악의 확산을 막으며,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옥에서 악한 영들의 행동이 아무런 제약 없이 허용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는 악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제한되고 질서에 따라 억제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함께 이해한다는 것은 악한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그 책임을 다루는 목적과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복수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의 고통을 즐기는 것과, 악을 막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려는 사람이라면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을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정의를 실천하되,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확정하는 일은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이 죄를 지을 때마다 화를 내시고, 자신이 충분히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형벌을 내리실 수 있는 두려운 심판자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무조건 자신을 이해하시고 자신의 모든 선택을 용납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념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지만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 안에 머무르는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인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분노로 돌아서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벗어나도록 끊임없이 생명과 진리를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도 단순히 형벌이 무서워 벌을 피하려는 태도에서 더 깊은 의미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경외는 주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을 경계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때 회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품으신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고 있는 악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됩니다. 기도 역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억지로 돌려놓으려는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따를 힘과 지혜를 구하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이해하는 방식이 실제 신앙생활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나님 안에 사랑과 분노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성품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고백하면서, 특히 여러 교부의 가르침을 통하여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내적 상태에 따라 기쁨이나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실제로 인간적인 분노나 복수심을 품으실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신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심판은 주님의 사랑이 변화하여 악한 사람을 향한 적대적인 의지로 바뀌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사랑과 삶으로 형성한 영적 상태가 주님의 진리 앞에서 드러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시라는 사실은 그분이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심판을 참되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분의 변하지 않는 신적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넘어, 악이 우리 자신과 이웃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악에서 돌이키는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단정하지 않고, 악을 분별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며, 자신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언제나 인간을 선과 생명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 앞에서 자신의 악을 버리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신적 사랑과 심판의 참된 관계입니다. (EO.009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거룩한 심판자이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의 사랑과 분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려는 중요한 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시리아의 이사악을 비롯한 교부들의 가르침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인에게는 기쁨으로, 거부하는 악인에게는 고통으로 경험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인간적인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실 수 없으며, 성경에서 하나님께 진노와 형벌을 돌리는 표현들은 인간의 경험에 따른 진리의 외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시며, 인간이 자신의 지배적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천국 또는 지옥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인간이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만나지만, 최후의 심판과 사후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분노로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인간의 참된 사랑과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고난이나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단정하지 말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신뢰하면서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O.008.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SL.EO.008 |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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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PR.009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참된 목적

 

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신앙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 명예나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모든 활동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높은 목적 아래 놓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삶의 절대적인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찬양과 예배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더 크게 만드시는 분이십니까? 만일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행복과 자유, 사랑과 기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을 다시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영광을 인간의 찬양과 인정으로 더욱 높아지는 신적 명예처럼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본성과 창조의 목적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가장 깊은 목적은 무엇일까요?

 

먼저 전통적인 개신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기쁨이 처음부터 함께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답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도구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이해합니다. 고전10:31에서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며, 롬11:36에서는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인간의 삶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갇혀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창조 목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앙 자체를 곧바로 오류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 가르침을 실제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광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광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으면 중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인간 사회의 명예와 영광을 떠올립니다. 왕은 백성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권력자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게 하며,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통해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경험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면, 하나님께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자신의 위대함을 인정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많을수록, 예배가 더욱 화려할수록, 더 큰 교회와 더 많은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도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한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 인간의 인정이나 찬양이 부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도 완전하셨으며,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신적 사랑과 지혜의 충만함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명예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배와 찬양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찬양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찬양과 감사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이해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채워 드리는 존재가 되지만, 뒤의 이해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DLW.47에서 사랑의 본질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그와 결합하며, 그 존재의 행복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사랑뿐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적 사랑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한다면, 자칫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신적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만함을 더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사랑하시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며, 그 존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TCR.43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의 본질이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 되기를 원하며, 자신의 것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목적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발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한 신적 사랑을 다른 존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창조 목적은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DP.27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섭리가 지향하는 목적이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이며, 인간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은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물리적 공간이나,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존재들이 모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끝없이 선언하는 장소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인간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서로 결합하여 이루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처음부터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사후에 천국에 들어간 존재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국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마련하시며, 그가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영원한 천국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 드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임으로써 주님과 상호적인 사랑의 결합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위한 복종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생명 안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AC.5922에서 ‘영광’이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신적 진리, 곧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천국의 영광은 그 신적 진리를 받아들인 천사들의 지혜와 이해, 그리고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관계됩니다. 여기서 영광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칭찬함으로써 외부에서 더해지는 명예가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천국과 인간에게 나타나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들이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살아가는 영적 현실입니다. 요1:14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광을 주님 안에 나타난 신적 진리와 연결합니다. 또한 마5:16에서 주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찬양하는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자신의 이익보다 선한 것을 선택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배와 찬양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고백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배를 통해 삶의 중심이 주님께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찬양의 횟수나 열정, 외적인 규모가 곧바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 영광의 크기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HH.222-227에서 천국의 예배와 설교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예배가 진리의 가르침과 사랑의 삶에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천국의 참된 예배는 예배 장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천사들이 살아가는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 전체와 관계됩니다. 이는 지상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찬양과 경건한 기도로 예배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가족을 무시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한다면, 그의 외적인 예배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의 삶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실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배의 참된 목적은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여 그 진리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쓰임’(use)의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신적 사랑과 지혜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쓰임을 통해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241은 사랑과 지혜와 쓰임의 관계를 목적과 원인과 결과에 비유합니다. 사랑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며, 지혜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길을 밝히고, 쓰임은 사랑과 지혜가 실제로 열매 맺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활동을 종교적인 형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고, 직장인이 정직하게 일하며, 교사가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의료인이 환자를 성실하게 보살피며, 이웃이 서로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서도 주님의 선과 진리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일이 곧 참된 영적 쓰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직업과 활동을 통해서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이웃의 유익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위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인간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기쁨으로 행할 때, 그 삶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드러내는 쓰임이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정직하고 선한 삶의 자리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지나치게 외적인 성과와 연결하면 신앙생활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크게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가 좋은 성적을 얻고, 교회가 성장하며,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 그것을 주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감사하는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성공 자체를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하면 실패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오랫동안 돌봄의 부담을 감당하는 사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세상에서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외적인 규모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가능한 선한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일을 통해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가족과 이웃을 돌보며 깊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이러한 삶의 가치는 세상의 명예와 인정을 기준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라는 부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와 양심을 억압하는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나 공동체가 자신들의 사업이나 계획을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결하면,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취급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나 특정한 사역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시할수록,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과 부당한 요구가 정당화될 위험도 커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신적 섭리’ DP.71-99에서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잃고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참된 영적 결합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로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고,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며, 자신의 권위와 목적을 절대화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에 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명예와 권력, 공동체의 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비롯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살피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이웃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대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두 표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참되게 이해할수록 인간이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여 선한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신적 진리는 그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자기 욕망이 충족될 때 느끼는 일시적인 만족과 구별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기쁨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의 행복을 기뻐하며, 천국의 삶은 그러한 사랑이 공동체 전체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주님과 결합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참된 행복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까?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신교의 신앙고백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원한 기쁨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부터 완전한 사랑과 지혜이시며, 인간의 찬양과 인정에 의해 더 완전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어 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높여 드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할 때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결국 참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였는가?’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사랑의 목적에 얼마나 응답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사랑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주님 안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은 서로 다른 두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가며 그 삶 자체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창조 목적,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삶의 의미입니다. (PR.009 해설)

 

요약

전통적인 개신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DLW.47과 ‘참된 기독교’ TCR.43에 따르면 신적 사랑의 본질은 자신 밖의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그들과 결합하며, 자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신적 섭리’ DP.27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천국과 주님과의 영원한 삶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천국의 비밀’ AC.5922에서 영광은 가장 높은 의미로 주님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를 가리키며, 천국에서는 그 진리를 받아들인 존재들의 지혜와 체어리티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히 찬양과 예배의 양을 늘리거나 외적인 성과를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타나고, 그 사랑이 이웃의 행복을 위한 쓰임으로 열매 맺을 때 인간은 자신의 참된 창조 목적을 이루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PR.008.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SL.PR.008 | 개신교(Protestant)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한 형벌이 반드시 치러질 것을 요구한다’ - 하나님의 공의는 형벌의 집행인가, 무너진 신적 질서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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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BU.008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 불교의 중도와 선과 진리의 신적 질서

 

해설

사람은 흔히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 합니다. 한쪽에서는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쪽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을 철저히 억제해야 거룩하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는 삶도, 인간의 자연적인 필요와 기쁨을 모두 부정하는 삶도 온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불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는 길을 제시합니다. 중도는 흔히 양쪽의 극단을 피하고 적당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태도로 이해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단순한 절충이나 타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고’(苦, dukkha), 곧 고통과 근본적인 불만족에서 벗어나게 하는 바른 수행과 지혜의 길입니다. 역사적 석가모니의 수행을 전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그가 왕자로서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 뒤 출가하여 극심한 고행을 했으나, 어느 쪽에서도 궁극적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제시된 중도는 감각적인 쾌락에 빠지는 삶과 자신을 지나치게 괴롭히는 고행이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참된 행복을 얻으려면 욕망에 끌려가거나 육체를 학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르게 이해하고 다스리는 길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56.11에 수록된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pavattana Sutta)은 이러한 중도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경전은 감각적인 즐거움에 탐닉하는 길과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행의 길을 모두 피해야 할 극단으로 제시하고, 부처가 깨달은 중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라고 밝힙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인 정견, 바른 의도인 정사유, 바른 말인 정어, 바른 행동인 정업, 바른 생계인 정명, 바른 노력인 정정진,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 바른 집중인 정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생각과 말, 행동과 생활, 마음의 훈련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중도의 목적은 그저 지나친 행동을 삼가고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애’(渴愛, taṇhā), 곧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목마름과 ‘집착’(執著, upādāna), 곧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열반’(涅槃, nibbāna)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열반은 갈애와 무명이 소멸하여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중도는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절제하라는 생활의 지혜를 넘어,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행의 질서입니다. 때로는 매우 엄격한 계율과 지속적인 수행이 요구되기도 하므로, 중도를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길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 12.15에 수록된 ‘가전연경’(迦旃延經, Kaccānagotta Sutta)은 세계를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견해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라는 두 극단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부처는 이 양극단을 떠나 모든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연기는 존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겨난다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대승불교의 ‘중관’(中觀, Madhyamaka) 사상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 사상가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ūlamadhyamakakārikā) 24장 18게송에서 연기와 ‘공’(空, śūnyatā), 곧 모든 현상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도와 연결합니다. 이는 현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존재를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로 붙잡는 견해를 비판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초기불교의 수행적 중도와 대승불교의 철학적 중도가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이 어느 한쪽의 견해에 집착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를 이해할 때에는 쾌락과 고행 사이의 수행적 중도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서는 철학적 중도를 함께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교의 통찰은 기독교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삶 자체를 악하다고 규정하지도 않고,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정당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필요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먼저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1번에서 사랑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이 없다면 생각과 행동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삶은 욕망과 사랑을 모두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직업에 충실하고, 정당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보다 앞세우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중도는 지나친 욕망과 고행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와 새 교회의 신적 질서를 단순히 같은 원리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의 중도는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수행과 지혜의 길인 반면, 새 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며 그분의 사랑과 지혜 안에서 삶의 질서가 바로잡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밝힌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원리는 이 문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엇이 옳은지를 생각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쪽의 의견을 적당히 절충하거나 모든 갈등을 피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악이라면 분명하게 악을 멀리해야 하고, 어떤 일이 이웃에게 유익하다면 그 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같은 저작 Life.21–22는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할 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악을 죄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과 신적 질서에 반대되기 때문에 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의 기준은 언제나 두 극단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적당한 중간을 선택할 수 없고, 선과 악을 조금씩 섞는다고 해서 참된 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의 중도 역시 진리와 오류를 절반씩 섞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전통 모두 무분별한 절충을 경계할 수 있지만, 불교는 바른 견해와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새 교회의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함으로써 거듭나는 길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욱 깊이 살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교의 중관사상은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고 고정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의 통찰을 강조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창조된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한한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신적 사랑과 지혜’ 4번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아니며, 자신이 가진 사랑과 지혜의 궁극적인 근원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독립적인 생명 소유라는 착각을 경계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설명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공은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현상들의 자성 없음을 설명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작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전제하고 모든 피조물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독립적인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으로 여기는 자아적 성향과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절대화하면서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빛에서 참된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도를 둘러싼 두 전통의 비교는 단순한 생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생명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요구를 들어주거나, 반대로 자녀를 바르게 키운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유로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분별 없이 용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필요한 것은 양쪽의 행동을 산술적으로 절반씩 섞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그 사람에게 참으로 유익하며, 어떤 행동이 선과 진리의 질서에 부합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불교의 중도는 극단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절대화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 없는 무조건적인 허용이 아니며, 진리 역시 사랑 없는 정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 47번에서 사랑의 본질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결합하는 데 있음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는 사랑은 자기만족에 머물 위험이 있고, 상대방의 삶을 세워 주려는 목적 없이 행사하는 진리의 판단 역시 자기 우월감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단호하게 악을 거절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중간 선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작용하는 삶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중도를 기독교의 사랑과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두 가르침이 동일한 교리를 전한다는 결론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는 명제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그 의미를 단순한 절충이나 적당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삶과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을 넘어 팔정도에 따라 ‘해탈’(解脫, vimutti)을 추구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은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의 의미를 밝히는 길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곧 진리라는 결론은 옳지 않습니다. 말씀과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차이는 인간의 편의에 따라 절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중도가 인간을 속박하는 극단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어떤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극단을 피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희석해서도 안 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려서도 안 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하나를 이룰 때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중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존중하면서도, 말씀의 빛에서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참된 영적 질서입니다. (BU.008 해설)

 

요약

불교의 중도는 극단을 피하여 적당한 중간을 선택하라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초기불교에서는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넘어 팔정도를 실천하는 길이며, 대승불교의 중관사상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넘어 연기와 공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욕망과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바른 삶과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를 모든 진리와 오류의 절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참된 영적 삶은 선과 악을 적당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중도에 담긴 집착 극복과 바른 삶의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삶이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임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BU.009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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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007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팔정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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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8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 - 신적 이름과 신적 본질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께 아름다운 이름들이 있으며, 그 이름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屬性, attributes)을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알아스마 알후스나’(al-asma al-husna), 곧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라고 부릅니다. 꾸란 7:180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들이 하나님께 속하므로 그 이름들로 그분을 부르라고 가르치며, 17:110은 ‘알라’라고 부르든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든 그분에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꾸란 59:22–24에는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분, 평화의 근원이신 분, 창조하시는 분, 형상을 주시는 분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서로 다른 신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그분의 여러 완전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해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와 지혜와 거룩함 등 그분의 신적 본성을 통하여 알려지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같은가, 그리고 여러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99가지 아름다운 이름이 특별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Sahih al-Bukhari) 2736에는 하나님께 99개의 이름이 있으며 이를 알고 헤아리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간다는 전승이 나옵니다. 다만 꾸란이 99개의 이름을 하나의 목록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름들의 구체적인 목록과 범위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전승과 학파에 따른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 이름들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아랍어 명칭을 소리 내어 반복하는 행위만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영적 전통에서는 그 이름들의 뜻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허용된 범위에서 자비와 정의와 관대함을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부르면서 이웃에게 잔인하게 행동하거나, 정의로우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불의를 행한다면, 그 이름을 안다는 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는 모순이 생깁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이슬람의 신앙은 단순한 명칭의 수집이나 암송을 넘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이름에 관한 가르침과 중요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009항에서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name)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신적 성질,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포함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존재를 단순한 이름이나 외적 명칭보다 그 존재의 내적 성질에 따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저작 2724항에서는 고대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단순히 특정한 명칭을 발음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분을 예배하는 모든 것과 연결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의 내적 생명이 약해지고 외적 형식만 남자, 사람들은 이름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특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만을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볼 때에도 중요한 것은 이름의 수나 발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들이 어떤 신적 성질을 나타내며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本質, essence)의 관계라는 문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28항에서 신적 본질 자체는 사랑과 지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6–38항에서는 하나님이 사랑 자체와 지혜 자체이시며, 사랑에서 선이 나오고 지혜에서 진리가 나온다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과 선하심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때때로 경쟁하는 속성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신적 사랑과 지혜라는 하나의 본질에 속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와 관계를 이해하는 여러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신적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질을 생각하게 되고,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랑이 신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 역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여러 독립된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과도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신적 본질과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는 신학적 차이가 남습니다.

 

그러한 차이는 특히 하나님의 권능과 심판을 나타내는 이름들에서 드러납니다. 꾸란에는 자비와 용서의 이름뿐 아니라 절대적 권능과 주권, 심판과 위엄을 나타내는 이름들도 등장합니다. 이슬람은 이러한 이름들을 모두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자비와 정의가 신적 본성에 함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신적 권능은 신적 사랑과 지혜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보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것처럼 나타나는 표현도 주님의 실제 본성과 인간이 악을 사랑하여 경험하는 결과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해석할 때에도 인간적인 분노와 지배욕, 보복심을 무한하게 확대하여 하나님의 속성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러한 구별이 이슬람의 권능과 심판에 관한 모든 해석을 인간적인 보복의 관념으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 안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피조물의 감정이나 행동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신학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그 이름을 통하여 어떤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마6:9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 2724항에서 이 말씀의 이름이 단순한 발음이나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요17:26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셨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순히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호칭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계시의 충만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진리를 전달하신 예언자에 머무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알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적 사랑과 지혜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결정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입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과 참된 신앙의 삶은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하게 살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전자는 이름을 알면서도 그 이름의 내적 성질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며, 후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선을 실천하려는 상태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하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나 종교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제 삶에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영적 우월성으로 삼거나, 자신이 사용하는 신적 명칭만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름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자랑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사랑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알라의 아름다운 이름들은 그분의 속성을 나타낸다’는 이슬람의 고백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시더라도 한 분이시며, 그 이름들은 인간이 그분의 자비와 거룩함과 지혜를 이해하고 경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름에서 본질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외적 예배에서 내적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며, 그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관점은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다고 고백하면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신적 성질을 얼마나 사랑하고 받아들이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모든 신적 사랑과 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항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IS.008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분의 속성을 나타내며, 인간은 그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경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분의 성질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신앙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름을 암송하거나 속성에 관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참된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또한 신적 속성들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본질이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본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계시되며, 그분의 이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아름다운 이름에 관한 신앙 자체가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름들의 신적 본질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육신하신 주님에 대한 인식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IS.009.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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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8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 지옥을 결정하는 것은 죄의 종류인가, 끝까지 붙든 삶의 사랑인가?

 

해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천주교가 죄와 회개,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하여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인간의 죄를 그 중대성에 따라 ‘대죄’(大罪, mortal sin)와 ‘소죄’(小罪, venial sin)로 구별하며,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영원히 상실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의 도덕적 선택이 단순히 현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죄가 대죄인지는 누가 결정하며, 그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죄를 자신의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동일한 것일까요? 또한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사랑이 즉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주님께서 죄인을 던져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악한 사랑에 따라 스스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의 대죄와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이러한 이해와 어디에서 일치하고, 어디에서 달라질까요? 이번 명제는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며 참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854–1855항은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면서, 대죄는 하나님의 법을 중대하게 어겨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체어리티를 파괴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는 죄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소죄는 체어리티를 상하게 하고 약화시키지만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어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교리서 1857항은 대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첫째, 그 행위가 중대한 사안이어야 합니다. 둘째, 당사자가 그 행위가 중대한 죄임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그 행위에 의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동일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의 인식과 자유, 의도에 따라 개인적인 책임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리서 1860항은 무의식적인 무지나 외부의 강압, 심리적·병리적 장애 등이 행위의 자발성과 책임을 감소시키거나 제거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없으며, 그의 이해와 의지, 자유로운 선택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회개 없이 지속되면 인간을 지옥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은 대죄가 체어리티와 성화 은총을 상실하게 하며,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033항은 대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영원히 분리되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1035항은 지옥의 영원성을 가르치면서 그 가장 큰 고통을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1037항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지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상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지옥 교리를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분노하시어 임의로 지옥행을 선고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끝까지 지속되는 회개 거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전통 모두 지옥을 인간의 악한 삶과 무관한 임의적인 처벌로 이해하지 않으며, 인간이 자유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고 선택하는가가 영원한 운명과 깊이 관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죄를 지은 사람의 상태를 판단할 때에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어떤 행위가 객관적으로 중대한 악이라는 사실과 그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대죄의 책임이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을 구별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861항도 행위 자체의 중대성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대죄의 상태에 있으며, 지금 죽는다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천주교의 공식 교리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별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어떤 내적 갈등과 압력 가운데 있었는지,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했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인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과 특정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판단하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까지 결정하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지옥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545–550항에서 주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지 않으시며, 악한 영이 자신의 악에 따라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5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굴을 돌리시고 분노하여 지옥으로 내쫓으신다는 생각을 비판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며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자신에게서 내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HH.547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악이 곧 그 사람 안의 지옥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한 악을 사후에도 사랑하며, 그 악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와 일치하는 영적 공동체를 찾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지옥은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여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악한 사랑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옥의 존재나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지옥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근원을 주님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악한 사랑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죄와 회개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관계된다는 천주교의 핵심적인 경고와 연결되면서도, 지옥이 형성되는 영적 원리를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개념은 ‘지배적인 사랑’(ruling love)입니다. 스베덴보리는 HH.477–480에서 인간의 사후 상태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HH.480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유지하며, 그 사랑이 영계에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생전에 한 번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탐욕으로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후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으며 정직한 삶으로 돌아섰다면, 그의 상태를 그 한 번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즐기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된 상태가 단순한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그 행동을 낳는 사랑과 의지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가 중대한가를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형성된 사랑과 그 사랑에 따른 실제적인 삶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의 구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모든 악이 영적으로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거나 속이고 착취하는 악,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악은 매우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또한 사람이 어떤 악을 진리와 양심을 거슬러 의도적으로 선택할수록 그 악은 자신의 의지와 더욱 깊이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의 중대성과 의도적인 선택을 구별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죄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천주교의 대죄와 소죄라는 법적·성사적 분류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결정적인 것은 특정한 죄목이 어떤 등급에 속하는가보다, 그 악이 인간의 사랑과 의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그 악을 피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면, 그는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고 즐기면서 끝까지 그것을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그 악을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으로 굳혀 갑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참된 경고는 특정한 죄의 등급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이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제 회개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회개를 단순히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perfect contrition)가 대죄의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여기에는 가능한 한 빨리 고해성사를 받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사망 직전에 고해성사를 받지 못하면 언제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520–524항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회개를 통하여 제거하지 않는 한 그 악 안에 머물며, 악 안에 계속 머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에서는 실제적인 회개가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주님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고 악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에게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이번 명제를 단순히 천주교만의 잘못된 지옥 교리라고 규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망 직전의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깊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랜 세월 악을 사랑하며 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아십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죄를 후회하는 감정과 실제로 그 악을 미워하고 버리려는 사랑의 변화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에 죄를 고백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이 실제로 달라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사망 직전에 충분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변화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해서 아무런 참된 회개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회개의 진정성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입니다. 천주교의 완전한 통회에 관한 가르침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모두 내적인 변화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변화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상태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 이후의 상태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는 HH.491–520에서 인간이 죽은 후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를 거쳐 자신의 내적인 상태가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즉시 최종적인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영들의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났던 모습과 내적인 사랑이 점차 구별됩니다. 특히 HH.499–511에서 그는 사람이 사후에 자신의 속 사람의 상태로 들어가면서 지상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사랑과 의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후에 누구나 자유롭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여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인간의 내적인 사랑이 드러나고 그에 따른 상태가 전개된다고 설명하며, HH.480에서는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는 생전에 형성된 사랑과 무관하게 구원의 기회를 새롭게 얻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상에서 실제로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영원한 운명은 단순히 사망 순간의 외적인 종교적 상태나 마지막 고백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애를 통하여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사람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이미 지옥행이 확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인간이 어떤 악을 사랑하고 고집하더라도 결국 모두 천국에 들어간다고 안심시키는 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여 그가 사랑하지도 않는 선을 억지로 사랑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따라서 지옥의 가능성은 실제적이며, 인간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할 이유도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최종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지,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옥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을 조종하기보다, 악이 인간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가르치고 주님의 자비 안에서 실제적인 회개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처벌을 피하기 위한 외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지옥과 회개를 가르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명제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그 악은 그의 삶을 지배하며, 사후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영적 상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단순히 대죄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는가, 사망 전에 고해성사나 통회를 마쳤는가 하는 외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대죄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인식과 의도적인 동의가 필요하며, 개인의 최종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삶의 성격에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으로 던지지 않으시며, 인간이 악을 사랑하는 만큼 스스로 지옥의 상태에 가까워집니다. 반대로 인간이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그는 천국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지옥을 피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자신의 죄가 어떤 등급에 해당하는지를 계산하거나 마지막 순간의 회개만을 기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사랑과 의지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언젠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할 종교적 절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야 할 거듭남의 삶입니다. 결국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을 지옥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끝까지 붙들고 버리기를 거부한 악한 사랑입니다. (SL.RC.008 해설)

 

요약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죽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명제는 그 핵심에서 반드시 오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악을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악 안에 머무른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TCR.520–524와 HH.545–550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천주교는 대죄가 성립하려면 중대한 사안과 충분한 인식, 의도적인 동의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죄의 상태에서 회개하지 않고 죽는 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로 이해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시며, 개인의 최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맡겨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은 정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태를 설명하는 핵심은 대죄와 소죄라는 분류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형성하고 사후에도 유지하는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HH.480은 인간의 지배적인 사랑이 사후에도 지속된다고 설명하며, HH.547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이 스스로 그 악에 상응하는 지옥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TCR.528–531은 실제적인 회개가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류로 검토해야 할 핵심은 회개하지 않은 악이 인간을 지옥으로 이끈다는 가르침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특정한 죄목의 분류나 사망 직전의 외적인 고백만으로 개인의 영원한 상태를 확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옥을 주님께서 분노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부과하시는 형벌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그러한 단순화를 경계하므로, 이러한 오류를 천주교 전체의 가르침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중요한 차이는 죄와 회개의 필요성보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가 무엇에 의하여 형성되고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사후의 상태는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인 사랑과 실제적인 거듭남에 따라 전개되며, 어떤 사람의 최종 상태를 인간이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악을 사랑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이를 단순한 죄목의 분류와 마지막 종교적 절차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해로 축소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지옥의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며 지금부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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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 부정신학과 신적 인격의 문제

 

해설

동방정교회의 신학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관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가르침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시며 지혜이시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의 손과 얼굴, 눈과 음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동방정교회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무리 성경적이고 신앙적으로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인간의 생각 속에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의 범주를 초월하시며, 인간의 언어와 관념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뜻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안다고 말할 때, 인간이 이해한 그 내용과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실재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적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인간적인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과 언어로 나타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에서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과 스베덴보리의 신적 인성에 관한 가르침이 중요한 만남과 차이를 드러냅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이신지를 인간이 완전히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표현들이 지닌 유한성과 한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말은 인간이 경험하는 선한 사람의 성품을 무한히 확대하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피조물이 경험하는 선함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므로 인간의 지성과 동일한 범주에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는 ‘긍정신학’(cataphatic theology)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개념을 초월하신다고 말하는 부정신학을 함께 인정합니다. 긍정신학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사랑과 선과 지혜와 거룩함을 고백하고, 부정신학은 그 고백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으로 절대화하지 않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부정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추상적 존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든 하나님에 관한 개념을 하나님 자신과 혼동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지식과 이해를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신앙적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8세기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입니다. 그는 ‘정통신앙 해설’(An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제1권 1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며,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피조물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전적인 무지 속에 남겨 두신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고, 창조되지 않으셨으며,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지식이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파악한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몸이 없으시며, 공간의 경계 안에 갇히거나 물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를 때 그 빛을 자연계의 물리적 광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된 빛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는 참된 계시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더 깊은 실재를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자연적 감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우상과 구별하려는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간의 눈에 보이셨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을 하나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연결하여 동방정교회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성화상’(icon)입니다. 정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 여러 성인의 모습을 나타낸 성화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형상을 초월하신다는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앞에서 공경을 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적 본질을 그림 속에 가두거나 묘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실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화상 공경에 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만 남아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 인간으로 나타나셨으므로, 그분의 성육신을 시각적인 형상으로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를 구별하며, 성화상의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보존하려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물론 성화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지만, 정교회가 인간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함께 증언합니다. 출33:20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55:8-9에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창1:26-27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며, 창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모습 가운데 여호와의 임재가 증언됩니다. 또한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눈, 얼굴과 팔에 관한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계의 물질적 신체에 관한 설명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제한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러한 표현들이 단순히 인간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이 인간에게 말씀을 주신 목적을 이해하기 어렵게 됩니다. 특히 요1:18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하며, 요14:9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개념을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영원히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과 결합할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신학은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과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DLW.7-10에서 하나님은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은 물질적 신체가 우주 전체에 퍼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계의 한 장소에 거주하시거나 어떤 물질적인 형상 속에 갇혀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 역시 동방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연적 관념을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는 일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하나님을 형상 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천국적인 하나님 관념의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DLW.11에서 그는 천국의 모든 천사가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인간처럼 유한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시고, 모든 인간적 생명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 자체가 하나님의 신적 사랑과 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인간이시다’(God is very Man)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고 말할 때에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는 유한한 존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을 인간이라고 부를 때에는 이러한 자연적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 적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DLW.285-289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자연적인 공간과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는 아무런 주체도 없는 추상적인 성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의 본질적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것의 근원이시고, 피조된 인간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을 이루고, 천사들이 모두 완전한 인간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러한 신적 질서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국의 인간 형상이나 천사들의 인간 형상은 하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우주적 신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의 모든 천사에게 사랑과 지혜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천국 전체가 인간의 형상과 상응하는 질서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 형상은 자연적인 육체의 형태가 아니라 신적 사랑과 지혜의 질서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열쇠가 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왜 중요합니까? 그는 DLW.13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모든 종교적 생각의 중심에 있으며, 참된 하나님 관념이 없으면 천국과의 교통도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기도와 예배에서 실제로 어떤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런 형상도 없는 무한한 공간이나 막연한 우주적 힘으로만 생각한다면, 인간의 생각은 분명한 인격적 대상을 향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 사랑을 누구에게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차 추상적인 관념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도와 사랑을 분명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TCR.787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 안에 영혼이 몸 안에 있듯 계시며, 인간이 이처럼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하여 그분과 상호적인 결합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하나님은 단순히 자연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신적 인성 안에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예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추상적인 신학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실제로 결합하는 신앙의 중요한 토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면서 동방정교회가 하나님을 아무런 인격도 없는 추상적인 신적 원리로 이해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동방정교회 역시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 위격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시고,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부정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참된 친교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가르침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와 동방정교회 사이에는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영원히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본질에서뿐 아니라 인격에서도 한 분이시며, 성부는 주님 안의 근원적인 신성이시고, 성자는 그 신성이 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신적 인성이시며, 성령은 그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역사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교회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세 위격의 실재를 함께 고백한다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인격적 단일성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하나님을 묘사하는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어떤 분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신론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correspondence)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과 얼굴과 눈과 발, 그리고 빛과 불과 구름에 관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모두 자연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셨거나 자연계의 현상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오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따르면 성경의 자연적 표현들 안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손은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임재를, 빛은 신적 진리를, 불은 문맥에 따라 신적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문맥과 속뜻에 따라 구별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형상이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들이 모두 부정확한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적인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이해를 위해 주어진 외적인 옷과 같으며, 그 안에는 천국의 영적 의미와 주님의 신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자연적인 형상으로 제한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상 속에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참된 성경 해석은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 형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동방정교회의 성화상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같은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교회의 성화상은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와 교회의 전례적 전통 속에서 이해됩니다.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그 물질 자체를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이 가리키는 원형을 향하는 행위로 설명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자연계의 대상과 현상들이 영계의 실재와 맺는 관계, 그리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두 전통 모두 눈에 보이는 형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형상의 권위와 기능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정교회가 성화상을 교회의 예배와 공경 안에서 사용하는 반면,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를 밝히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한 상응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종교적 그림이나 조각이 예배의 대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영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과 그 형상에 종교적 공경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교회의 성화상 전통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비교할 때에는 공통점만을 강조하여 두 개념을 동일시하지 말고, 각각의 신학적 목적과 역할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EO.057-059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신학적 차이가 실제 신앙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교만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경과 교리를 충분히 공부했으므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신학적 설명과 다른 생각을 모두 잘못된 것으로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태도는 모두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이 자신을 알 수 없도록 감추어 두신 분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계시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하심 전체를 자신의 지성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방정교회의 부정신학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에게 신앙적 겸손을 가르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 겸손이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관념에 머물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관념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교육과 종교적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 관념을 검토하고 그 안에 담긴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사랑과 신앙의 최종적인 상태까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개념을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자랑한다면 그의 고백은 아직 삶의 겸손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인간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자신이 아는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성숙은 진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이해하는가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의 사랑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실제적인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설명을 소유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선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교만과 분노와 이기심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관념은 아직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정직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하나님 관념은 인간을 자신의 지식에 대한 확신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겸손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처음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이 가르침에는 인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관념과 상상력으로 그분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참된 형상도 없으시며 인간이 그분을 분명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는 주장으로 확대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실제로 동방정교회 자체도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참되게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더욱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신 참된 인간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적 인성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개념을 초월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참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분명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연계의 유한한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이 만든 관념 속에 가두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신적 사랑과 지혜가 우리의 의지와 이해 안에 흘러들어와 실제 삶의 선으로 열매 맺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과 그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성을 바라보는 일이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한 방향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은 그분을 인간의 생각 안에 가두는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사랑을 그분께로 이끄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적 인격의 문제입니다. (EO.008 해설)

 

요약

동방정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개념과 형상을 초월하시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언어와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부정신학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한한 관념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참된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이나 인격적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무한하신 분임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형상 없는 추상적인 실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랑 자체이시며 지혜 자체이신 참된 인간이시고, 모든 인간적인 것의 신적 원형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된 신적 인성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념과 신적 인격의 일치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 하나님을 인간 형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연적인 육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신적 사랑과 지혜를 한 분 하나님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겸손과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사랑하는 신앙을 함께 보존하며, 그분께 받은 진리를 실제 삶의 선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는 데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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