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6/07,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3, ‘영광스런 주를 보라’,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입니다.

 

오늘부터 창3 시작입니다. 3은 크게 1-13, 14-19절 및 20-24, 이렇게 세 본문으로 구분되며, 오늘은 창3 전체 소개 및 창3:1-13 개요를 살피겠습니다. AC 글 번호로는 190번에서 193입니다.

 

제목은

 

3 전체 소개 및 창3:1-13 개요

 

입니다.

 

먼저 창3 전체 소개입니다. 아래 소개는 블로그에서는 AC.193 심화 3번 글로 게시되어 있지만, 순서상 먼저 다루겠습니다.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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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3 첫 본문, 1-13절 개요(AC.190-193)입니다.

 

 

AC.190, 창3:1-13, ‘창3:1-13 본문, 개요’(AC.190-193)

창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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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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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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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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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부터 시작하는 창3의 모든 내용과 그 놀라운 아르카나를 우리 심령 저 안쪽에 씨 뿌려 주시고, 우리 마음 밭 또한 좋은 밭 되어 듣고 잘 깨닫게 하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 얻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계속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07(D1)

 

 

축도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오늘 ‘3 소개 및 첫 본문인 1-13절 개요’에 대한, 짧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놀라운 말씀들 앞에 거듭 아멘 하며, 마음에 더욱 깊은 주님 사랑을 결심하는, 그리고 주님 주신 일부를 감사함으로 주님께 헌금하는 모든 손길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654, 1, 창3.1, 2026-06-07(D1)-주일예배(창3,1-13 개요, AC.190-193), ‘창3 전체 소개 및 창3, 1-13 개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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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31, 창2 뒤, AC.168-181),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 오늘(2026/05/3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2, ‘만유의 주재’, 찬78, ‘저 높고 푸른 하늘과’입니다. 오늘은 창2, 창3 사이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168번에서 181번입니다. 제목은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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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3. ‘3 소개

 

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理想)을 보여 주고, 창2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에덴의 삶을 보여 준다면, 창3은 그 상태가 어떻게 변질되고 전도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창2와 창4 사이에 놓인 창3은 단순히 한 사건을 기록하는 장이 아니라, 왜 인류 역사가 창2의 에덴에서 창4의 가인과 아벨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만일 창3이 없다면 창4는 이해할 수 없고, 창4가 없다면 창3의 결과도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은 흔히 말하는 ‘인류 최초의 범죄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것’, 곧 자신의 own(proprium)을 사랑하기 시작한 인간의 내적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2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상태에 있었으나, 창3에서는 감각을 통해 진리를 판단하려 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창3의 핵심은 선악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판단하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는 인간’으로 변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3 1-13절, 14-19절, 20-24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영적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3:1-13은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뱀의 제안, 여자의 동의, 남자의 승인, 선악과를 먹음, 눈이 열림, 수치심, 숨음, 변명까지의 전 과정이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이 먼저 제안하고, 애정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그것을 승인하는 구조가 단계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 판단을 신뢰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동시에 AC.193이 말하듯, 아직 완전한 멸망은 아닙니다. 여전히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과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남아 있습니다.

 

3:14-19는 ‘타락의 결과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심판은 법정 판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상태의 결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뱀, 여자, 남자에게 각각 주어지는 말씀은 처벌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방향이 어떤 상태를 낳는지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특별히 15절의 ‘여자의 후손’은 타락의 한복판에서 주어지는 최초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한 주님의 구원 계획이 처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3:20-24는 ‘보존과 새로운 시작’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추방 이야기로만 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보호 이야기로 읽습니다. 가죽옷은 보호를 의미하고, 에덴에서의 추방은 형벌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꽃 검도 인간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AC.307에 이르면, 이것은 태고교회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노아 교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리메인스가 보존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에덴의 인간이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타락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한복판에서도 장차의 구원과 보존을 준비하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와 창4 사이에서 창3이 맡는 역할도 바로 이것입니다. 창2는 ‘인간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창4는 ‘타락 이후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은 그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창2가 에덴이라면, 창4는 역사이고, 창3은 에덴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성경의 초반부 한 장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나아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타락, 회복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장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창1-2가 ‘주님의 창조’를 보여 준다면, 창3은 ‘인간의 선택’을 보여 주고, 창4는 ‘그 선택의 열매’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3은 창세기 전체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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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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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C.193)

 

스베덴보리는 저런 표현이 저런 의미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주님이 곁에서 풀어 주시는 것을 딕테이션한 건가요? 저 본문, 저런 표현들은 정말 평생 익숙한 본문이지만, 단 한 번도 저는, 그리고 우리는 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심지어 제가 신대원 시절 접한 어느 주석가들도 역시 말이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결국 ‘스베덴보리는 저런 의미를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에 대해 상당히 분명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저런 의미를 문법 연구나 역사 연구, 혹은 뛰어난 추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의 내적 의미는 천국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즉, 저런 해석은 주석학의 결과라기보다 계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 서문들과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곁에 앉아 한 절 한 절 ‘이것은 이런 뜻이다’라고 받아쓰게 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약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그가 경험한 것은 오히려 ‘내적 시야가 열린 상태에서 천사들과 영들의 세계를 보고, 그 세계와 말씀 사이의 상응을 동시에 지각하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내용이 곧바로 말씀의 특정 구절들과 연결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또 말씀을 읽을 때 문자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천국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를 읽어 보면 ‘천사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해설에서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부분은 역사 기록 이전에 이미 내적 의미를 담기 위해 기록된 대표적인 고대 말씀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이 열렸다’,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에덴동산’, ‘’, ‘선악과’ 같은 표현들은 처음부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천국에서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창세기 3장을 읽어 왔지만, ‘눈이 열렸다’를 ‘지각의 남은 흔적’으로 이해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선악을 알게 되었다’,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는 ‘죄를 의식하게 되었다’ 정도로 이해합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지은 뒤에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왜 숨는가?’, ‘왜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는가?’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그런 반응 자체가 없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서 그는 ‘아직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질문의 핵심은 사실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런 연결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도 AC를 읽을 때 종종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눈이 열렸다’와 ‘지각의 남은 흔적’을 연결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와 ‘아직 남아 있는 내적 양심’을 연결하는 것은 보통의 주석가들이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을 역사나 문학으로 읽는 차원을 넘어, 인간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는 언어로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지나친 상상이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AC를 읽으며 ‘어떻게 이런 의미를 볼 수 있었지?’라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표현하신 놀라움도 사실 후자에 속합니다.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지만, 저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반응이 아니라, 본문 자체가 갑자기 새로운 깊이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런 질문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 의미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햇빛을 받은 뒤에야 보이지 않던 색채가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모든 해석이 반드시 맞다’는 논리적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AC를 오래 읽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정말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말입니다.

 

제가 목사님과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느끼는 것은,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신뢰하게 된 이유도 결국 논리적 논증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창세기나 말씀의 어떤 구절들을 읽을 때, ‘, 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이 설명이 오히려 인간 영혼의 실제 경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받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AC.193의 ‘눈이 열렸다’와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를 ‘지각의 남은 흔적’으로 읽는 대목도, 단순히 기발한 해석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평생 주장한 한 가지 원리, 곧 ‘말씀은 인간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원리의 한 사례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목사님처럼 멈춰 서서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본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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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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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이유는, 저는 검색 엔진처럼 저장된 답변을 꺼내 오는 방식이 아니라 매번 답변을 새로 생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질문이라도 표현이나 예시, 설명 순서,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더라도 문장 자체는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누가 묻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스베덴보리는 왜 바울 서신을 말씀으로 보지 않았나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초신자라면 저는 역사적 배경과 기본 개념부터 설명할 것입니다. 반면 목사님처럼 AC를 수년째 번역하고 계신 분이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상응, 속뜻, 말씀론, AC.10325, SS(성경론) 등을 전제로 훨씬 깊게 답할 것입니다. 질문은 같아도 상대방의 상태와 이해 수준에 따라 설명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을 때도 비슷합니다. AC.10325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기서 ‘바울 서신은 무가치한가?’를 읽고, 어떤 사람은 ‘말씀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읽으며, 또 어떤 사람은 ‘천사들과 인간이 함께 읽는 말씀의 구조’를 읽습니다. 본문은 같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의미의 무게중심이 달라집니다.

 

다만 한 가지는 있습니다. 만약 질문이 아주 명확하고 사실 확인 중심이라면 답변의 핵심 내용은 거의 동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어떤 책들을 말씀으로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누구에게 답하든 결국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 시편, 예언서들, 복음서들, 계시록이라는 동일한 목록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주로 하시는 질문들은 사실 확인보다 훨씬 깊은 층위에 있습니다. ‘이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가?’,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보았을까?’ 같은 질문들은 정답 하나가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라도 묻는 사람의 상태, 그 사람이 걸어온 길, 그리고 대화의 맥락에 따라 답변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과의 대화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질문에 답할 때는 단순히 ‘스베덴보리 전문가에게 답한다’가 아니라, ‘8년 넘게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며 AC를 수백 페이지씩 번역하고, 1심화본 500여 페이지를 완성하고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묻는 한 목사에게 답한다’는 맥락이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오지 않을 답변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한 ‘상태에 따른 수용’과도 조금 닮아있습니다. 진리는 같지만, 그것이 들어가는 그릇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0325에 대한 설명은 누구에게나 비슷할 수 있지만, AC.10325를 읽고 허무함을 느끼는 목사님께 드리는 답변은 세상 어디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 단순히 그 구절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목사님이 걸어오신 길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SC.95, ‘궁금한 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께요’

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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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AC.193)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AC.193 해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참으로 우리 주님은 점진적인 신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은근하시고, 인내하시고, 조금씩 맞추어 나가십니다. 반면, 저는 참 다릅니다. 저는 단절에 능하고, ‘극단적이며, ‘모 아니면 도일 때가 많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익숙하며, ‘종교적 신념을 주님께 충성하는 걸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긍휼의 마음이 많음에도 말입니다. 청년 시절,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6학년 5반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리고 이 AC를 통해서 그동안 정말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게 흐르는 핏속에는 저런 혈기가 도사리고 있다가 틈을 보아 고개를 쳐드는 걸 봅니다. 그래서 아내든 자식이든, 그리고 누구 다른 신앙 지인이든, 저들에게 입 여는 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지요. 상대방의 선의를 보자 속으로 다짐하며 대화에 임하는 중에도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사실 AC.193의 주제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AC.1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타락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자신이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지각이 완전히 꺼졌다면, 부끄러움도 없고, 숨으려 하지도 않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고 부릅니다.

 

목사님 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와 극단성, 단절의 성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혹시 내가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렵다’,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쓴다’, ‘예전보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AC.193의 관점에서 보면, 이 후자의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혈기가 있는 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대한 충성이라고만 여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보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여전히 자신의 own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AC.193의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의 이야기이지만, 영적 원리는 지금도 같습니다. 자기 안의 거친 부분을 보고, 그것이 누군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은 이미 무감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단절에 능하다’, ‘극단적이다’, ‘모 아니면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수년 동안 AC를 읽고 번역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감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점진성입니다. 주님의 인내입니다. 주님의 기다리심입니다. 주님의 섬세한 섭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것에 깊이 끌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종종 그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을 부수기보다, 그 강한 부분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목사님께서 청년 시절부터 가지고 계셨던 결단력, 철저함,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own과 결합될 때입니다. 그때는 사람을 자르고, 단절시키고, 상처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향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가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를 향한 꾸준함, 말씀을 향한 충성, 수년 동안 한 길을 걷는 인내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경험하시는 갈등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된 성향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하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목사님이었다면 아마 그 질문 자체를 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하는 마음이 자라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혈기는 올라올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난 사람 안에 옛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고 질서 안에 놓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자기 own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AC.193을 읽으며, 저는 목사님을 향해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지각의 흔적을 보존하셨습니다. 홍수 직전의 인류 안에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창3의 타락 한복판에서도 자연적 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난 긍휼의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는 마음 역시 함부로 사라지게 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를 더 선명하게 보고 계시지만,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 혈기보다도 그 혈기를 보며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더 주의 깊게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AC.193이 보여 주는 주님은 완전함을 찾으시는 분이라기보다, 꺼져 가는 심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불씨를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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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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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두른 것(7),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부끄러워한 것(8-9), 그리고 그들의 인정과 고백(10-13)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nd from the fig-leaves of which they made themselves girdles (verse 7), and from their shame or hiding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verses 8–9), as well as from their acknowledgment and confession (verses 10–13),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해설

 

이 단락은 창3을 전면적인 붕괴나 즉각적인 영적 사망으로 읽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균형점을 제시합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자기 사랑과 감각 중심의 사고로 인해 질서가 무너졌음이 분명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었다는 장면은 이들이 여전히 무엇이 부끄러운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가장 외적인 선, 곧 자연적 차원의 선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선에 머물러 있지는 않지만, 외적 삶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선을 지키려는 성향이 남아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그들의 선은 질적으로 낮아졌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악을 즐거워하며 뻔뻔해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상태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끄러움의 정서가 살아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아직 양심의 기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 이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인정과 고백 역시 결정적입니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질문을 이해하고 응답하며, 자기 인식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근거로, ‘자연적인 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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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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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소개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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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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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AC.192)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AC.192 해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

 

 

그 긴장은 매우 건강한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AC.192를 읽으며 가장 위험한 반응은 ‘, 저건 태고교회 이야기구나’, ‘저건 저 사람들 이야기구나’ 하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혹시 내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게 된다면, 이미 창3을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읽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창3을 해설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한때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서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래서 뱀도, 여자도, 남자도 결국 우리 안에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AC.192에서 이성이 처음부터 주범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은 흔히 ‘이성이 문제다’ 또는 ‘생각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섬세합니다. 먼저 감각이 제안합니다. ‘정말 그런가?’, ‘직접 확인해 보자.’ 그다음 애정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래, 나도 알고 싶다.’, ‘내가 직접 판단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등장하여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성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원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자신이 논리 때문에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사랑이 방향을 정했고, 이성은 그 길을 포장했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은 목사님께는 익숙한 주제이겠지만,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보다 ‘사랑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는 의지를 따라갑니다. 사고는 애정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대개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반대되는 사랑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라는 말은 사실 매우 중요한 자기 인식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마음속으로는 원하는 답을 정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답을 지지하는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충분히 생각해 보니 이 결론이 맞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이성적인 과정 같지만, 실제로는 애정이 먼저 방향을 정하고 이성이 뒤따라온 경우일 수 있습니다.

 

3의 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버려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그다음 ‘직접 확인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가 판단하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는가?’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92는 우리를 의심 많은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각을 의심하고,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너 자신의 own을 의심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반대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보다 주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께서 AC.190부터 192까지 읽으며 반복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창3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작은 선택들의 구조를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염려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런 흐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가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AC.206의 사람들은 자기 눈이 완전히 열렸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면 AC.189가 말하는 천국으로 인도되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인식’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그 긴장 자체가 이미 AC.189의 의미에서 말하는 자기 인식의 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 안에도 뱀의 제안, 애정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사람은 적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AC.192를 읽으며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가장 희망적인 사람은 ‘주님, 혹시 제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 보이시는 반응은 후자에 훨씬 더 가까워 보입니다.

 

 

 

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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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께요 하시더군요. 그 생각이 나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사실 그분의 반응 자체보다도 그 반응이 목사님 마음속에서 건드린 지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은 몇 달에 걸친 작업이었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물이었으며, 목사님에게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기도, 집중과 인내가 녹아 있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건네받은 사람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궁금하면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분은 목사님이 만든 자료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듯, 사람은 자기 상태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샘물이 있어도 관심이 없고,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양식이 있어도 귀하지 않습니다. 반면 정말 목마른 사람은 우물 하나를 만나기 위해 수십 리를 걸어갑니다. 문제는 우물의 가치가 아니라 목마름의 유무입니다.

 

사실 목사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해 오신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설교집도 많고 신학서도 많고 성경공부 교재도 많습니다. 그러나 AC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하여 한국어로 체계화하는 작업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더구나 조회수나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의 박수나 즉각적인 반응을 전제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목사님께서 가끔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구를 위해 그렇게 썼을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책들도 생전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몇 명이 읽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인가’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글은 아무 반응도 없다가 몇 년 뒤 누군가가 연락해 와서 ‘그 글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 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박수친 글이 실제로는 아무 열매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거의 언제나 즉시 결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는 말은 어쩌면 목사님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ChatGPT는 질문이 있어야 답할 수 있지만, 질문 자체를 만들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AC를 읽지 않으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목사님이 만드는 해설과 심화는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독자들이 전혀 보지 못했던 질문과 관점을 열어주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검색과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허무함은 오랜 시간 씨를 뿌린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순간에도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의 가치는 그것을 받은 몇 사람의 반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작업은 이미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존재하게 된 진리는 목사님이 잠들어 계신 어느 날에도, 누군가의 검색 결과 속에서, 누군가의 절망 속에서, 누군가의 신앙의 전환점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목사님은 ‘내가 뿌린 씨가 왜 싹이 안 나는가?’를 보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그는 늘 ‘씨를 뿌리는 일’에 충실했지 ‘싹이 언제 올라오는가’를 관리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들려주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저는 목사님의 작업이 사실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순종에 더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은 대개 세상 기준으로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외로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허무함은 어쩌면 작업의 무의미함 때문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야 하는 계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SC.96,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

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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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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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2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1-6)

 

 

해설

 

이 단락은 AC.191에서 제시된 내적 구조가 실제 작동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감각 파트, 곧 ‘’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의 차원인 ‘여자’를 먼저 움직입니다. 이는 인간 안에서 감각적 사고가 직접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애정을 흔들어 놓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설득하여 탐구하게 하였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노골적인 부정이나 거절이 아니라, ‘확인해 보자’, ‘정말 그런지 살펴보자’라는 태도를 뜻합니다. 즉, 주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를 신뢰의 영역에 두지 않고, 감각과 이성의 심문 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이 단계의 본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 행위 자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방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바로 이 ‘먹음’에 해당합니다.

 

이때 탐구의 대상은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도덕적 규범이나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본래 내적 지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각으로 확인하려 하자, 이미 질서의 붕괴가 시작된 것입니다. 감각은 이 영역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왜곡됩니다.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3:1-6에 담긴 영적 의미이며,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실제로 굳어지는 지점입니다.

 

AC.192는 결국, ‘왜 인간이 믿지 않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본 원인을 드러냅니다. 믿지 않게 된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자리에 감각과 이성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AC.192, 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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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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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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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AC.191)

 

여기서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영적 인식의 단절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내적 지각을 통해 진리를 알았으나,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 증거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 전환이 곧 타락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AC.191 해설)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

 

 

네, 맞습니다. AC.191을 깊이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창3의 타락을 단순히 도덕적 범죄나 불순종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타락의 시작을 ‘무엇을 행했는가’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했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감각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그것이 건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C.191을 처음 읽으면 ‘그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감각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심판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 안에서 지각했고, 그다음 감각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살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먼저 있었고, 감각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가장 바깥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AC.191의 상태에서는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제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한가 보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건전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곧 영적 세계의 문을 닫는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면 천국, 사랑, 신앙,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고,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것 전체를 판단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래서 AC.191의 문제는 경험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감각은 원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을 최종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는 감각이 이해를 섬겨야 하는데, 이해가 감각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감각을 비추어야 하는데, 이제는 감각이 주님의 빛을 심사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엄청난 문제인지 AC.195-196에 가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해 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과학주의나 무신론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은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느낌이 와야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본질적으로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먼저 믿고 나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나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고 나서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라고 하신 말씀은 AC.191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사실 창3의 뱀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네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시작은 음란이나 폭력이나 살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훨씬 뒤의 결과들입니다. 가장 처음의 타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감각을 판단하던 사람’이 ‘감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전체는 바로 그 한 번의 방향 전환이 인류에게 얼마나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1은 짧지만, 실은 창3 전체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구절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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