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칭의’는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서이미나를의롭다고인정하셨으니내내면이실제로얼마나변화했는가는구원과별개의문제다’라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단지 그 사람에 대한 법적인 판단을 바꾸신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까지 새롭게 하신다는 뜻일까요? 만일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악을 사랑하고 이웃을 해치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과연 그 사람 안에 구원의 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목적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개신교의 공식적인 칭의 교리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은 일반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며, 성화는 그 사람이 실제 삶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1항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의를 주입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같은 장 2항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가르치며, 제13장은 성화를 통해 인간이 실제로 새로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공식 교리가 내면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칭의만으로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고 실제적인 변화는 부차적인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검토해야 할 것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구별을 근거로 구원과 거듭남을 사실상 분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는 함께 강조됩니다. 바울은 롬3:24에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롬6:1-2에서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러도 되느냐고 물은 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어 롬6: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후5:17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에게 은혜는 죄를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가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께서도 요3:3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문제와,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새로워지는가 하는 문제를 서로 무관하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는 이 문제를 개혁과 거듭남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TCR.571은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변화되는 과정을 두 단계로 구별합니다. 첫 번째인 개혁은 주로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이며, 두 번째인 거듭남은 그 진리가 의지와 사랑에 받아들여지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의 사랑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알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거짓말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이렇게 이해 속에 머물던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TCR.571에서 지상에서 개혁의 첫 번째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사후에 두 번째 상태로 인도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을 지상에서 반드시 완성해야 하는 도덕적 과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이 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죄 사함 이해는 종교개혁 신학의 법정적 칭의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TCR.611–614는 사람이 거듭나는 만큼 죄가 제거되며, 이러한 제거가 죄 사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거’는 인간이 저지른 악이 존재 자체를 잃고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TCR.614는 악이 뿌리째 뽑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악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도록 보존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단순히 과거의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 법적인 선언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실제로 건져 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역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인간의 내면까지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을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적 성취에 따라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576–578은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되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주님과 인간이 구원의 공로를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면서 그 능력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지도록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 악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자유롭게 협력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인간의 생명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목회 현장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신자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칭의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가정에서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도 ‘나는이미의롭다하심을받았으니내구원에는문제가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신앙 이해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인간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신앙고백과 실제 삶 사이에 심각한 분리가 있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악과 연약함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아직 충분히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거듭남은 완성된 도덕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 정도를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악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선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면서도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칭의를받았으면내내면이실제로얼마나변화했는가는구원과별개의문제다’라는 말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이루려는 목적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겔36:26-27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여 살 같은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화되지 않은 인간에게 새로운 신분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는이미의롭다하심을받았으니괜찮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오늘도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구원의 확신은 내면의 변화를 외면하는 데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데서 깊어집니다. (PR.007해설)
‘고해성사를통해사제에게죄를고백하면죄를용서받는다.’ 이것은 천주교의 ‘고해성사’(告解聖事, SacramentofPenanceandReconciliation)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및 교회와 화해하기 위하여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고백을 듣고 필요한 권고와 보속을 제시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경을 선언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성사적 과정을 통하여 신자가 실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경을 듣는 일과 주님께서 실제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사죄의 선언이 이루어진 순간 인간의 내적 악도 제거되는 것일까요? 사제에게 고백하는 행위는 참된 회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죄 사함의 통로이기도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죄의 용서를 주님에 의한 실제적 거듭남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직무를 존중하면서도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죄를 고백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회개, 사죄 선언과 실제적 죄의 용서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1422–1424항은 고해성사를 회개와 참회, 고백과 용서, 화해의 성사로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교회의 친교를 손상시켰을 때 이 성사를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441항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명시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직무를 맡기셨으며, 그 직무가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1461항은 사제가 성품성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죄의 권한을 행사한다고 가르치며, 1466항은 고해 사제가 하나님의 용서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그 용서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사제가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없애는 제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의 공식적인 이해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사제는 그 용서를 성사적으로 전달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사제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소유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만 속한 죄 사함의 권능이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행사된다는 천주교의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입술로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아무런 회개 없이 자동으로 용서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8항은 참회자의 통회와 고백, 보속,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한 사죄를 고해성사의 중요한 요소로 설명합니다. 특히 1451항은 ‘통회’(痛悔, contrition)를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1452항은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완전한 통회가 대죄의 용서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성사적 고백을 하겠다는 결심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456항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기억해 낸 중대한 죄들을 사제에게 고백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고해성사에는 죄의 인정과 진정한 뉘우침,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이 함께 포함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실제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절차를 죄의 용서를 얻는 통상적인 성사적 통로로 규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를 하나의 성사 안에서 연결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각각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여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가 사제의 사죄권을 설명할 때 중요하게 제시하는 성경은 요20:22-23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16:18-19에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 마18:18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도 교회의 화해와 사죄 직무에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죄의 용서와 교회의 책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후대에 발전한 개별 고백 및 성사적 사죄 제도가 모든 세부 내용에서 동일한 것인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447항 역시 교회 역사에서 참회의 구체적인 방식이 달라졌으며, 오늘날과 같은 사제와 신자 사이의 개별적인 고백 방식이 오랜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고해성사의 모든 절차가 요20에 직접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사도적 직무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이러한 제도가 발전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말씀을 인간에게 독립적인 죄 사함의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천국 열쇠와 매고 푸는 권세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믿음과 진리입니다.
이 문제에서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는 스베덴보리의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9410항입니다. 그는 마16:18-19와 마18:18의 말씀을 해설하면서,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을 표상하며 천국 열쇠는 진리에서 비롯되는 권능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을 열고 닫는 권능은 어떤 인간이 자신의 지위에 따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진리에 속하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AC.9410:2–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기 권한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에 들이거나 천국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어 4절에서는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 하나를 풀어 줄 수 없으며, 죄가 풀리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이루시는 거듭남을 통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제의 사죄권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다만 이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특히 인간이 자신에게 주님 고유의 구원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천주교가 사제에게 하나님과 독립된 권능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논점은 천주교가 인정하는 사제의 종속적인 성사적 권한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유일한 죄 사함의 권능 사이에 어떤 신학적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의 실제적인 제거는 사제의 직무나 선언 자체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539항이 매우 중요한 답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의 짐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교회의 성직자에게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고백하고 사죄를 받아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내는 것이 해롭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자신을 성찰하고 날마다 저지르는 악을 돌아보는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연적고백’(naturalconfession)이라고 부르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영적고백’(spiritualconfession)과 구별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든 행위를 무가치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죄를 받는 행위가 양심의 안정을 돕는 유익한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TCR.567:7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실천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자기 성찰조차 회피하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을 스베덴보리가 가톨릭의 성사적 사죄권 전체를 승인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제 앞에서 이루어지는 고백의 자연적·목회적 유익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인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TCR.528–531과 538–539항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회개의 가르침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회개가 자신의 죄를 막연하게 인정하거나 입술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먼저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주님께 악을 이길 힘을 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탐욕과 거짓말, 분노와 교만을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악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된 회개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TCR.538항은 죄의 고백을 구주이신 주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539항은 자기 성찰 후에 주님께 악을 물리칠 능력과 선을 행할 마음을 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미 인간의 죄를 알고 계시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여 알려 드릴 필요가 없으며, 주님은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간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악에서 돌아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제거됩니다. 따라서 참된 고백은 단순히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그 악을 인정하고 실제로 돌이키는 영적 과정입니다. 사제 앞에서의 고백이 이러한 성찰을 도울 수는 있지만, 그 고백 자체가 내적인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는 AC.9444–9449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저지른 죄가 그 사람의 생명에 뿌리내려 있으므로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지 않는 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AC.9445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하거나 진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AC.9448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물게 하시고 악과 거짓에서 멀어지게 하시는 것이 죄의 용서라고 정의합니다. 또한 AC.9449는 죄가 용서된 상태의 표지로 하나님을 하나님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이웃 때문에 섬기며, 악을 피하고 미워하는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단순히 어떤 선언에 따라 인간의 법적 상태가 바뀌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는 역사와 관계됩니다. 물론 천주교도 사죄 이후의 회개와 성화를 중요하게 가르치므로, 이 차이를 천주교는 삶의 변화를 불필요하게 여기고 스베덴보리만 삶의 변화를 강조한다는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회개의 필요성 자체보다, 사제의 성사적 사죄 선언에 어떠한 영적 효력을 부여하며 그것을 주님의 실제적인 죄 사함과 어떻게 연결하는가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죄의 고백이 실제 목회 현장에서 어떤 쓰임을 지녀야 하는가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혼자 인정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에게 죄를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가운데 양심의 깨달음과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피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하거나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받는 일과,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목회자나 사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죄를 성찰하도록 도우며 회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로 인간의 내적인 악을 없애거나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죄경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의 모든 악한 성향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가 여전히 자신의 약함과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회개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점진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악을 반복해서 돌아보고 다시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 지도자의 참된 역할은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능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실제적인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성사의 참된 가치를 판단하려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15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어떤 인간적인 중재자가 아들의 죄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고백하기 전부터 그의 모든 내적인 상태를 알고 계시며, 그가 악에서 벗어나 선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언제나 원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죄의 고백은 주님의 마음을 설득하여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 악에서 돌이키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사제나 목회자,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회개의 과정에서 귀중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스베덴보리 역시 사제 앞에서의 고백과 사죄가 양심의 부담을 덜어 주는 자연적인 쓰임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죄의 제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모든 경우에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기 성찰과 죄의 인정, 뉘우침과 화해라는 중요한 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익과 사제의 성사적 사죄권에 관한 신학적 주장 사이의 차이입니다. 참된 죄의 용서는 오직 주님의 자비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그분의 도움으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갈 때 실제적인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결국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고백과 회개의 궁극적인 목적은 용서를 선언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이 실제로 새롭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RC.007해설)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뜻밖의 반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선행을강조하면행위구원이되는것아닙니까?’, ‘우리는행위가아니라믿음으로구원받는다고배웠습니다’, ‘착하게사는것으로천국에갈수있다면예수님께서왜십자가에달리셨겠습니까?’라는 질문들입니다. 이러한 반응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심이 지나쳐 선행 자체를 강조하는 것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역설에 직면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셨는데, 정작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선한 삶을 강조하는 일을 신학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강조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일까요?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선행은 인간의 공로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요?
먼저 ‘행위구원’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 준수, 종교적 공로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비판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위구원을 경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이 구원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주장과 선행이 구원에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6장은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할 능력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 자체가 선행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리적 구별이 신앙생활에서 단순화되면서 선행을 강조하는 설교까지 행위구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식 교리가 실제로 가르치는 내용과 그것이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5:16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7:21에서는 자신을 향해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14:15에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마25:31-46에서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병들고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강조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삶을 단순히 신앙의 장식이나 선택적인 열매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야고보 역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약2:17). 그러므로 선행을 강조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행위구원이라고 비판한다면,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말씀까지 같은 비판을 받아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문제는 선행의 중요성을 인정하느냐가 아니라, 그 선행의 근원을 어디에 두고 어떤 목적으로 행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422–424항은 체어리티의 본질을 사람이 자신의 직무와 사업과 일에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것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선행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를 크게 넓혀 줍니다. 많은 사람은 선행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헌금을 드리며,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특별한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일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그러한 특별한 활동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노동자가 자신의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며, 공직자가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선을 우선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과 지혜로 돌보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체어리티는 나타납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정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언제나 영적인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TCR.424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면, 겉으로는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내적으로는 참된 체어리티가 없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뿐 아니라 그 행동을 이끄는 내적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행과 자기 공로를 추구하는 행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TCR.439–442에서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사람이 자신의 선행을 공로로 여기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그 대가로 천국의 높은 자리를 기대한다면, 그의 행위에는 자기 사랑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서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 자체를 기뻐한다면, 그 행위는 전혀 다른 내적 성격을 지닙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TCR.435–438에서 체어리티의 첫 번째 일이 악을 멀리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이웃을 위해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불의를 그대로 사랑하면서 외적으로 자선을 베푼다고 해서 그 자선이 자동으로 영적인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한 삶 위에 선행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멀리함으로써 주님의 선이 실제로 흐를 수 있는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결국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스베덴보리의 ‘신적섭리’(DivineProvidence, DP, 1764) 100–128항은 이 문제를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마치스스로’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합리성을 통해 역사하시므로, 인간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나는은혜로구원받았으니주님께서언젠가고쳐주실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거짓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여 악을 멀리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거짓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자기 공로로 구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자신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가 선행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행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헌금 액수, 전도 실적, 봉사 시간, 교회 행사 참여 횟수 등을 중심으로 신앙의 열심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활동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시간과 재물을 드리는 일도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영적 성숙이나 구원의 공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면 선행의 본래 의미가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자신의 직업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가정에서 가족을 성실하게 돌보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특별한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볍게 여겨진다면, 그 역시 체어리티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특정한 종교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 전체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정의롭고 성실하게 수행할 때 나타납니다. 그 쓰임이 주님을 향한 신앙과 결합될 때 일상의 도덕적 삶은 영적인 생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선행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행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근원과 목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입니다. ‘선을많이행해야천국에갈자격을얻는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인간의 공로를 강조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우리를거듭나게하시므로우리는악을멀리하고선을행하는삶으로나아가야한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요15:5에서 자신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같은 장에서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참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주님과 결합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TCR.373–377에서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한 행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행위는 믿음에 덧붙이는 외적인 장식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실제 삶에서 하나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이때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인간 안에서 실제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선행을강조하면행위구원이다’라는 말에서 보존해야 할 진리는 인간이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지키겠다는 이유로 선행 자체를 의심하거나,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자신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실제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천국의 생명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선행을강조하면행위구원이되는가?’가 아니라, ‘내가행하는선의근원은누구이며,나는누구를위해그선을행하고있는가?’입니다. 참된 선행은 은혜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구체적인 자리입니다. (PR.006해설)
‘세례는원죄를씻어주고사람을새롭게태어나게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세례성사’(洗禮聖事, SacramentofBaptism)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성사이며,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통로라고 가르칩니다. 아직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아기에게도 세례를 베푸는 것은 이러한 이해와 관계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상태에 있으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죄에서 벗어나거나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사랑과 의지가 실제로 변화되는 것일까요?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아기도 세례를 받으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면서도,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악이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성사적 의미와 실제 거듭남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번 명제는 세례의 필요성을 단순히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본질과 주님의 은총, 그리고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1213항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기초이자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1262–1263항은 세례의 중요한 효과가 죄의 정화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출생이며, 세례를 통하여 원죄와 이전의 개인적인 죄가 용서된다고 설명합니다. 1265항은 세례받은 사람이 은총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거나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은총을 베푸시는 성사이며, 그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한 성향이 사라지고 이후에는 죄를 지을 위험도 없어진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서 1264항은 세례 이후에도 죄로 기우는 성향인 ‘사욕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ce)이 남는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272항은 세례의 지워지지 않는 영적인 표지가 남더라도 죄로 인하여 그 구원적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입장을 ‘세례만받으면이후의삶과관계없이자동으로구원받는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의 회개와 영적 성장, 사랑의 실천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를 통하여 죄의 용서와 은총에 의한 새로운 출생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원죄’(原罪, originalsin)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는 원죄를 각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실제로 저지른 개인적인 죄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4–405항은 원죄를 원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이 결핍된 상태로 설명하며, 그것은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 안에서 전해진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주교는 이러한 상태가 인류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520항에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었다는 전통적인 설명을 비판합니다. 그는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이 아니라 ‘태고교회’(theMostAncientChurch)를 나타내는 표상적 인물로 해석하며, 에덴동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말씀도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설명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성향을 지니는 이유를 아담 한 개인의 범죄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선천적인 악의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악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과, 그 성향을 아담 한 사람에게서 유전된 원죄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521에서 인간이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악을 ‘유전악’(遺傳惡, hereditaryevil)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유전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실제로 저지른 죄가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입니다. 인간은 부모와 조상에게서 여러 가지 악한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그 모든 악을 자신이 실제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유전악 자체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한 악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의 성향은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제어되고 변화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된 죄책을 어떤 의식으로 제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의 성향이 어떻게 주님의 능력으로 다스려지고 그 사람이 실제적인 선의 삶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천주교 역시 원죄를 물로 씻어 내는 물질적인 오염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원죄의 상태가 제거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물에 어떤 물리적 능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의 기원과 세례의 성사적 효력, 실제적인 거듭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신학적 차이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천주교의 원죄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거나,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타락한 성향 자체를 부정했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가 세례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TCR.667–691에서 세례를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다루며 그 영적 의미와 쓰임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세례를 무의미한 종교 의식으로 여기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세례를 성찬과 함께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합니다. 다만 TCR.670–673에서 세례의 물로 씻는 행위가 나타내는 것은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영적씻음’(spiritualwashing)이라고 설명합니다.자연적인 물은 인간의 몸을 씻을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자리 잡은 악을 직접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몸을 아무리 씻어도 그 사람 안에 있는 도둑질과 강도질의 성향까지 씻겨 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TCR.673에서는 내면이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씻음만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세례를 베푸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외적인 의식이 인간의 내적 변화와 관계없이 죄를 제거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물에 어떤 독립적인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례가 단순히 인간의 결심을 보여 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가 영계의 질서와 연결되는 실제적인 쓰임을 지닌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77–687에서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첫째, 세례는 사람을 기독교회에 입문시키며 동시에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게 합니다(TCR.677–680). 둘째, 세례는 사람이 구속주이자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인정하며 그분을 따르도록 하는 쓰임을 지닙니다(TCR.681–683). 셋째이자 궁극적인 쓰임은 그 사람이 주님에 의하여 거듭나는 것입니다(TCR.684–687).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교회에 입문하는 것은 주님을 알고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주님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거듭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단순히 교회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의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 자연계와 영계가 연결되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쓰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내적인 악이 제거되어 거듭남이 완성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TCR.684–685에서는 세례의 궁극적인 목적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통하여 실제로 거듭나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세례의 세 가지 쓰임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연결되며, 앞선 두 가지 쓰임은 궁극적인 거듭남 안에서 그 의미를 완성합니다. 따라서 세례의 가치는 외적인 의식이 지닌 영적 질서와 그 의식이 가리키는 실제적인 거듭남을 함께 이해할 때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이해는 유아세례에서 더욱 중요해집니다.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0항에서 유아도 원죄의 상태로 태어나므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TCR.677에서 유아가 아직 자신의 이해와 의지로 믿음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유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내적인 이해와 의지가 이미 새로워졌으며 거듭남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유아세례를 무의미하게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세례를 통하여 유아가 기독교회에 입문하고 영계의 기독교인들과 연결되며, 주님께서 천사들을 그 아이에게 배정하여 주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보호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세례를 단순한 인간의 종교적 선언보다 깊은 영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영계의 연결이 장래의 구원과 거듭남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사용하게 될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거듭남을 위한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시작을 곧 완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천주교의 성사적 새 출생과 스베덴보리의 실제적인 거듭남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경 역시 세례의 외적인 씻음과 실제적인 영적 출생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요3:3-8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천주교는 이 말씀을 세례성사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말씀에서 ‘물’은 진리를 나타내며,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의 역사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씀은 외적인 물의 의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진리와 사랑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 과정을 드러냅니다. 행2:38에서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며, 벧전3:21은 세례를 단순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와 연결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세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세례가 외적인 씻음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도 성경 본문과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요3장의 물과 성령을 영적인 진리와 주님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에 근거한 해석이며, 그 자체가 천주교의 세례 해석을 역사적으로 반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의 외적인 표지가 실제로 악과 거짓에서 정화되는 내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611–614에서 죄의 용서와 제거가 거듭남의 과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용서는 인간이 행한 모든 악이 단순히 사라져 과거의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악에서 멀어지게 하시고 선 안에 머물게 하시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피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만큼 그 악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자유 가운데 진리를 받아들이고 마치 자기 자신이 행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며 선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거듭남은 인간의 사랑과 의지, 이해와 삶이 실제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천주교 역시 세례 이후에 회개와 성화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세례 때 원죄와 이전의 죄가 실제로 용서되고 은총에 의한 새 출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죄의 제거와 영적 출생의 실제적인 성취를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지속적인 과정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전통의 차이는 세례 이후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세례 자체에 어떤 영적인 효력을 부여하고 그 효력과 실제 거듭남을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세례 이후의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악을 돌아보거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세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교만과 탐욕, 이기심과 분노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같지만,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러한 차이는 중요합니다. 참된 거듭남은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현재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선과 진리의 삶을 이루고 계시는가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내면을 다른 사람이 임의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가장 깊은 사랑과 영적인 상태는 주님께서 아십니다. 다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이미 모든 영적 과정을 완성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어떤 삶으로 부르셨는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주님을 알고 인정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부르는 거룩한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참된 열매를 맺으려면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례의 참된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세례를 주님께서 제정하신 중요한 성례로 인정하며, 그 안에 교회로의 입문과 영계의 질서, 주님을 인정하고 거듭남으로 나아가는 실제적인 영적 쓰임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세례를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형식이나 불필요한 의식으로 여기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 세례를 받는 순간 인간의 모든 악이 제거되고 거듭남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외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으로 선과 진리를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23:25-26에서 주님께서는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시면서 먼저 안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됩니다. 겉 사람의 씻음은 속 사람의 정화를 가리켜야 하며, 그 외적인 표지는 실제로 거듭나는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자신의 과거 세례를 구원의 완성으로 여기기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악과 거짓에서 정화하시고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참된 가치는 물로 씻는 외적인 행위와 그 행위가 나타내는 영적인 정화를 구별하면서, 그 둘을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함께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길을 가리키는 거룩한 입문이며, 그 길에서 실제로 인간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RC.006해설)
개신교 신앙에서 ‘오직믿음으로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구원은믿음으로받는것이므로삶과행위는구원과관계없다’는 생각으로 발전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웃을 미워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며, 악을 죄로 여기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는 참된 믿음일까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단순히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란무엇이며,주님께서인간을구원하신다는것은실제로무엇을의미하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먼저 이 명제를 개신교 전체의 공식 교리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종교개혁 전통의 ‘오직믿음’(solafide)은 일반적으로 선행이 칭의의 근거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선행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1장 2항은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안에서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하며 사랑으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제16장에서는 선행을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삶과행위는구원과관계없다’는 말은 엄밀한 개혁주의 교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일상적인 신앙 언어 속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종교개혁 신학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도 남아 있습니다. 종교개혁 전통이 칭의를 설명할 때 믿음과 행위의 역할을 엄격하게 구별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참된 믿음 자체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특정 교단을 잘못 이해하여 비판하는 데 있지 않고, 구원의 본질에서 믿음과 삶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 문제의 출발점은 로마서 3장 28절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역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준수하거나 자신의 종교적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율법의 지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문맥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율법의행위로구원받지않는다’는 가르침을 곧바로 ‘어떤선한행위도구원과관계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하면, 바울의 의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로마서 2장 6절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도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언어적 고백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새로운 생명과 관계되며, 그 생명은 실제 삶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4절로 26절입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나 자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하는 사람의 예를 통해, 실제 사랑이 없는 믿음의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이어 17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의 점수를 쌓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 안에 실제로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의 고통을 보면서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즐거워하면서도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야고보는 그 믿음의 생명 자체를 질문합니다. 문제는 선행이라는 외적인 증거가 충분한가를 넘어, 선을 사랑하는 내적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새예루살렘과그천적교리’(NewJerusalemandItsHeavenlyDoctrine)108항은 이 문제를 매우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믿음의 본질도 알 수 없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체어리티와 믿음이 선과 진리처럼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09항에서는 체어리티와 믿음의 관계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에 비유합니다.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두 능력이 함께 인간의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체어리티와 믿음도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이 먼저 생기고 그 결과로 선행이 뒤따라온다는 시간적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믿음이 된다는 존재론적 설명입니다. 이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진리는 아직 그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에 받아들여져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은 다소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으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336항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믿음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는 오래된 논쟁을 다루면서, 시간상으로는 믿음이 먼저이지만 목적상으로는 체어리티가 먼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먼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한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면 믿음이 선행보다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현하여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합니다. 시간상으로는 기초를 놓고 벽을 세우며 지붕을 만드는 일이 먼저이지만, 집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진리를 배우는 것은 체어리티의 생명에 이르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행보다 앞세울 수는 있어도, 선행과 무관한 독립적인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목적이 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차적인 일이 되는 순간, 신앙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행위’의 의미입니다. 행위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와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같은 돈을 기부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이웃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덜어 주고 싶어서 기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부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랑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471–476항에서 인간의 삶이 그의 사랑에 따라 형성되며, 행위에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생각이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신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의 숫자를 세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어떠한 삶을 형성했는지를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과 관련된 것은 행위의 외적인 양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악을 멀리하려는 내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인 상태는 실제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행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행위는 사랑을 실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은 결국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 질문은 개신교 신자들이 스베덴보리의 구원론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제기할 수 있는 반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선을 만들어 내거나 자신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고 자신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삼는다면, 오히려 그 안에는 자기 사랑과 ‘프로프리움’(proprium)이 개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행동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적섭리’(DivineProvidence)100–128항은 사람이 자신의 악을 마치 스스로 제거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하지만, 그 악을 실제로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자신을 변화시키실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노력으로 거듭남을 완성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협력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주님의 신성한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은혜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가 인간의 생명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인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잘 알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가족을 함부로 대하고, 직장에서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과 교만을 조금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예수님을믿으므로구원받았다.선행은구원의조건이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그의 신앙 이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인지, 아니면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종교적 안심을 얻는 일인지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자신을 향해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6절에서는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병든 사람과 갇힌 사람을 돌보는 일을 통해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인간의 종교적 고백만이 아니라 그 고백이 이웃을 향한 실제 사랑으로 나타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믿음과 삶의 결합을 강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평가하면서 ‘나는오늘충분히선하게살았는가?이정도의선행으로구원받을수있는가?’라는 불안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거듭남은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계산하여 합격점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시고, 그 사람이 점차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발견하는 것은 절망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주님께 더욱 나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아직 이기심과 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았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확신도 자신의 공로나 과거의 신앙고백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의 설교와 양육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삶의 변화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면, 성도들은 교리를 정확히 알고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가 선행과 봉사만을 강조하면서 주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자신의 헌신과 공로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누구이신지, 무엇이 선하고 참된 것인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사랑이 되어 실제 삶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새예루살렘과그천적교리’ 243항에서 교리는 교회를 이루는 데 필요하지만, 교리만으로 인간 안에 교회가 성립하지는 않으며 그 교리에 따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주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삶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주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절에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고, 같은 장 21절에서는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하여 올바른 생각을 갖거나 감정적으로 깊은 애정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악으로 인정하며,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따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삶과 행위는 관계없다는 생각은 결국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마침내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질문은 ‘나는믿음으로구원받는가,행위로구원받는가?’라는 양자택일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나의믿음은실제로주님을향하고있는가?내가알고있는진리가내사랑을변화시키고있는가?그사랑이이웃을위한선한쓰임으로나타나고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종교적 자격이 아니라, 믿음과 체어리티가 하나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천국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PR.005해설)
‘마리아의발현과메시지는신자들의회개와신심에도움을줄수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모발현’(聖母發現, Marianapparition)과 ‘사적계시’(私的啓示, privaterevelat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에는 마리아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회개, 평화와 보속을 권고했다는 오랜 전승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르드와 포르투갈의 파티마는 널리 알려진 사례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리예 역시 많은 신자가 순례하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증언하며, 그 메시지를 접한 신자들 가운데 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기도생활에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례들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메시지를 통하여 회개했다는 사실이 그 메시지를 전한 존재가 실제로 마리아였다는 증거가 될까요? 특별한 모습이나 음성을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현상이 객관적인 영계의 사건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를 보고 천사와 영들을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그의 영적 경험과 천주교의 성모 발현을 어떤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까요? 이번 명제는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체험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신학적 정확성,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나는 회개와 사랑의 열매를 구별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67항은 교회 역사에서 여러 사적 계시가 보고되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공적 계시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새로운 구원의 진리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계시를 완성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사적 계시는 특정한 시대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의 모든 발현과 메시지를 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교회가 어떤 발현과 관련된 신심을 인정하더라도 모든 신자가 그 발현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구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계시 안에 있으며, 특별한 체험이나 새로운 메시지가 그 계시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별도의 질문이 남습니다. 어떤 메시지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를 실제로 마리아가 전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사적 계시의 권위를 성경보다 낮게 인정하더라도, 그 발현의 초자연적 출처가 실제로 확인되었는지는 다시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2024년 5월 17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초자연적현상으로추정되는사건의판별을위한규범’(NormsforProceedingintheDiscernmentofAllegedSupernaturalPhenomena)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 규범은 발현이나 환시, 특별한 메시지를 검토할 때 그 내용이 신앙과 도덕에 부합하는지, 체험자의 진실성과 태도는 어떠한지, 그리고 회개와 기도, 이웃 사랑과 같은 실제적인 열매가 나타나는지를 살피도록 합니다. 특히 ‘장애없음’(Nihilobstat)이라는 긍정적인 결론은 관련 신심과 순례를 허용하거나 장려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그 발현이 실제로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천주교가 스스로 긍정적인 영적 열매와 초자연적 출처의 진실성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원칙은 2024년 9월 19일 발표된 메주고리예 관련 문서 ‘평화의모후’(TheQueenofPeace)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신앙교리부는 메주고리예를 통한 회개와 화해, 기도와 신앙의 회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발현 자체의 초자연적 진실성을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메시지라고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 일부에는 신학적으로 부정확하거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특정한 순례지에서 참된 회개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보고된 모든 발현과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적 유익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초자연적 출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역시 특별한 영적 현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도록 가르칩니다. 요일4:1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고 권합니다. 살전5:20–21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마24:24에서 주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떤 현상이 놀랍고 특별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출처를 신적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영적 현상을 분별한다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람을 곧바로 거짓말쟁이나 악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체험자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진실하게 증언할 수 있지만, 그 체험의 원인과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각, 기대와 신앙적 배경은 체험을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험자의 진실성과 체험의 객관적인 사실 여부, 메시지의 신학적 타당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특별한 체험 안에 참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그 전체를 참되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분별은 놀라운 현상 자체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의 진리와 일치하며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지 살피는 데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영적 발현의 가능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영계의 천사와 영들은 서로 보고 듣고 말하며 실제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계의 인간이 영적인 존재를 지각하거나 영계와 관계된 특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랫동안 영계의 여러 존재와 만나고 대화한 경험을 기록했으며,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827항에서는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를 보았다고도 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모든 영적 발현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직접적인 기록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적인 진실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리아를 보았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보고된 모든 성모 발현의 진실성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빛나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거나 자신을 마리아라고 소개하는 존재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경험만으로 실제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났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존재의 모습과 정체, 그 존재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출처는 각각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HH.249는 중요한 직접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시 인간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도록 허락되는 일이 드물며, 그러한 교통에는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영들이 자신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특히 악한 영들이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내적인 체험에 사로잡히는 상태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환시나 특별한 체험이 반드시 악령에게서 비롯된다고 판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모습을 보거나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참된 천국의 계시라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계와의 교통은 인간의 호기심이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을 신앙의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현상을 어떤 근거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태도 자체가 올바른 영적 질서에 속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특별한 체험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그 체험을 무조건 추구하거나 신적 진리의 확실한 근거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일기’(SpiritualDiary, SD) 1647항은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그는 자신이 표상과 환시, 영들과 천사들의 대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를 경험했지만, 실제로 자신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분은 영이나 천사 자체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들이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 할 때 거짓된 내용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진술은 스베덴보리가 영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영계의 존재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바로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TCR.779에서 그는 새 교회의 교리를 어떤 천사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말씀을 읽는 가운데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을 근거로 성모 발현의 메시지 역시 특별한 신적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나타났으며 얼마나 놀라운 체험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경험을 통하여 주장되는 진리가 실제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기록에서도 영적 경험과 그 안에서 받아들이는 신적 진리는 구별되며, 모든 참된 진리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이 원칙은 발현 메시지의 내용을 검토할 때도 중요합니다. 성모 발현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들에는 기도와 회개, 죄에서 돌아서는 삶, 사랑과 평화,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권고는 그 자체로 성경의 가르침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 안에 참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 메시지가 실제로 마리아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참된 내용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어떤 체험에 대한 해석이 부정확하더라도 그 안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회개와 사랑을 권고하는 메시지 안에 특정한 발현 장소나 발현자에게 지나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거나,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흐리게 하는 내용이 함께 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지를 통째로 받아들이거나 통째로 부정하기보다 개별적인 내용을 분별해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은 특별한 감동이나 종교적 열정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거듭남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발현 메시지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특별한 평안을 느낀 것이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영적 변화는 그 이후의 삶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체험의 감동보다 그 체험 이후에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거듭남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 문제는 발현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그 메시지를 따르는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반드시 거짓말을 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려 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매우 경건하고 겸손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체험을 신적인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진실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의미나 원인을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발현과 관련된 신심 가운데 실제적인 회개와 사랑의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그러한 열매가 발현의 모든 세부 내용과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의 진실성과 메시지의 정확성, 그리고 영적 열매의 가치를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의도를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전하는 내용 가운데 말씀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인정하고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요구하는 태도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조롱하거나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진리와 선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는 주님께 맡기되,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신학적 주장은 말씀에 따라 검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말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어떤 신자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일보다 새로운 발현과 메시지에 더 큰 열정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또한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주어진 경고나 약속을 신앙의 중심에 놓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중요한 영적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위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더라도 그것이 말씀을 대신하거나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영적 체험이라면 인간의 시선을 체험 자체나 특정한 전달자에게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하며, 새로운 신비에 대한 호기심보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한 것처럼, 신앙의 올바른 방향은 특별한 전달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발현과 메시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운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에 부합하며 인간을 회개와 사랑, 거듭남의 삶으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한 열매가 나타났더라도 발현의 초자연적 진실성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특별한 체험을 성급하게 부정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말씀보다 높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새로운 메시지를 찾아다니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SL.RC.040해설)
‘마리아에게특별한공경을드리는것은하느님께드리는흠숭과다르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 신심을 설명할 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인들에게 표하는 공경을 구별하며, 마리아에게는 다른 성인들보다 특별한 공경을 드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거나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마리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숭배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흠숭과 공경의 차이는 사용하는 명칭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누구를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가에 있는 것일까요? 특별 공경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예배가 외적인 의식보다 그 안에 담긴 내적인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 공경의 의미와 한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종교적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간에 대한 존경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그 구별이 실제 신앙의 삶에서도 유지되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서는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欽崇, latria), 천사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恭敬, dulia), 그리고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공경’(特別恭敬, hyperdulia)을 구별합니다. 흠숭은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모든 생명과 구원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공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신 은총과 그들이 보여 준 거룩한 삶을 존중하는 것이며, 특별 공경은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독특한 역할과 복됨을 특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흠숭과 공경이 단순히 경배의 강도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이 아무리 특별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흠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창조주나 신적 존재로 인정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주교의 특별 공경은 일반적인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존경보다 넓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며, 성모 축일과 묵주기도, 전구 요청 등의 신심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공경과 흠숭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과 그 원칙 아래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66항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 항목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서 특별한 공경을 받지만, 그 공경은 성육신하신 말씀과 성부와 성령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오히려 그 흠숭을 증진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67항은 마리아에 관한 가르침과 신심에서 지나친 과장과 편협한 축소를 모두 피하고, 참된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헛된 믿음을 경계하도록 권고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971항 역시 마리아에 대한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1997년 10월 22일의 교리교육에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다른 성인들에게 드리는 공경보다 특별하지만, 하나님께만 드리는 흠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가르침에는 인정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속하는 영광과 권능이 있으며, 아무리 복된 인간이라도 창조주와 동일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가 이러한 구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실제 신심 행위가 언제나 그 원칙에 일치한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의 내용과 개인의 신앙적 이해, 그리고 구체적인 종교 행위는 각각 살펴야 합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와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존경을 구별합니다. 출20:3–5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며, 마4:10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참된 예배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 대한 존경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과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히13:7의 권고는 인간에게 표할 수 있는 올바른 존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으며, 눅1:48에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자신을 복되다고 일컬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복되다고 인정하고 그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 자체를 우상숭배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과 그에게 기도하며 특별한 영적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을 존경하도록 가르친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에게 종교적 청원을 드려도 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공경과 흠숭을 구별하는 문제는 외적인 명칭을 넘어 실제로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영적 권능을 기대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모상과 성화 앞에서 이루어지는 신심 행위를 살펴볼 때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천주교는 성모상 자체를 신으로 섬긴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모상과 성화는 마리아의 믿음과 주님의 성육신을 기억하도록 돕는 종교적 표상이며, 형상에 표하는 존경은 궁극적으로 그 형상이 나타내는 인물을 향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신자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가 실제로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무릎을 꿇거나 절하는 행위는 문맥에 따라 예배뿐 아니라 존경과 간청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상이 기억과 묵상의 도구라는 설명과 그 형상에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특정한 성모상이나 성지에 독립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형상 앞에서 기도하면 마리아가 자신의 필요를 특별하게 해결해 준다고 기대한다면 그 믿음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상이나 몸의 자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에게 능력을 기대하고 그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겉으로 비슷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믿음과 의도는 다를 수 있으며,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신심 행위의 의미를 검토하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까지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살펴보도록 이끕니다. 그는 참된 예배가 단순한 기도문이나 찬송, 몸의 자세와 종교적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구별은 ‘속사람’(internalman)과 ‘겉사람’(externalman)의 관계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 행위의 영적 가치를 판단하려면 그 행위가 겉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 HH.2–12에서 천국의 하나님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며,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성인의 믿음과 사랑을 존중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주님께만 속한 신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그들을 구원의 근원처럼 의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참된 공경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참된 예배는 그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께 자신을 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존경과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원칙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신심에 대하여 강한 비판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TCR.94에서 마리아를 다른 모든 성인보다 높이고 여신이나 성인들의 여왕처럼 받드는 신심을 비판합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 마리아의 아들로 이해하는 경향이 주님의 참된 신성에 관한 이해를 흐리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평가와 천주교의 공식 교리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실제로 여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TCR.94를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마리아를 여신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처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비판은 마리아의 자연적인 모성을 지나치게 높이는 과정에서 주님의 유일한 신성이 흐려지고, 인간이 주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과 의존을 피조물에게 옮길 위험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에게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실제적인 중심이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마리아라는 특별한 피조물에게 옮겨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특별 공경이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신심의 모든 내용과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앞서 살펴본 마리아의 전구 및 묵주기도와도 연결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특별 공경이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다르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에게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행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공경과 흠숭이 교리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4–825에서 지상의 사람들이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그 성인들이 알고 듣는다는 생각을 직접 비판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드리는 청원을 흠숭이 아니라 특별 공경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타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는 모든 전구와 은총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에 종속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어머니’(MaterPopuliFidelis)역시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구원자처럼 이해하거나, 주님의 자비가 부족하므로 마리아가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공식적인 구별은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설명을 넘어,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종교적 청원을 드리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존중하는 일반적인 태도와 마리아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구별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특별히 존중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할까요? 성경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중요한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물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권합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존중하는 가장 분명한 길은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기억하고 본받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존중이 그에게 독립적인 영적 권능을 기대하거나 직접적인 종교적 청원을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확대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운 믿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 인간을 영적인 의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호칭이나 독립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여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복됨 역시 이러한 영적 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경과 흠숭의 구별을 실제 신앙의 내면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만 흠숭을 드린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자신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며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신앙에는 공식적인 교리와 실제적인 의존 사이의 긴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근거로 모든 천주교 신자가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긴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리아를 기억함으로써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신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구별하되 다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강조하는 참된 예배의 중심은 주님 한 분을 향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흠숭과 인간에게 표하는 공경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구별은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 기도의 대상과 영적 의존의 방향에서도 유지되어야 합니다. 결국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길은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선과 진리의 근원이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예배와 구원의 소망을 주님 한 분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SL.RC.039해설)
‘묵주기도를바치며마리아의전구를청하는것은올바른신심이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실천해 온 ‘묵주기도’(默珠祈禱, Rosary)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묵주기도는 일정한 수의 구슬을 이용하여 정해진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는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마음에 새기며 마리아의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청하는 중요한 신심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을 향한 기도일까요, 마리아를 향한 기도일까요?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는 행위와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는 동일한 영적 의미를 지닐까요? 정해진 기도문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이 주님께 깊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반복에 포함된 모든 기도 내용도 올바르다고 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참된 예배와 기도가 주님 한 분을 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묵상과 마리아를 향한 직접적인 청원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번 문제는 단순히 천주교의 기도 관습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가 무엇이며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그리고 외적인 신앙 행위가 어떻게 참된 내적 예배로 이어지는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묵주기도의 구성과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일반적으로 십자가의 성호와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등을 바치며 정해진 신비를 묵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단에서는 주님의 기도 한 번과 성모송 열 번, 영광송 등을 바치며, 통상 다섯 단을 하나의 묵주기도 단위로 삼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는 주님의 성육신과 탄생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공생활과 복음 선포를 묵상하는 빛의 신비,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부활과 영광을 묵상하는 영광의 신비로 이루어집니다. 전통적으로는 환희·고통·영광의 세 신비가 사용되었으며, 200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빛의 신비를 추가로 제안하여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네 묶음의 구성이 갖추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묵주기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의 이름만 부르는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묵주의 구슬은 기도의 순서를 기억하고 집중을 돕는 도구이며, 각 단에서 묵상하는 중심 사건은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영적 의미를 평가하려면 성경에 근거한 묵상과 실제로 반복하는 기도문의 대상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천주교 역시 묵주기도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설명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 교황 교서 ‘동정마리아의묵주기도’(RosariumVirginisMariae)1항에서 묵주기도가 마리아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도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12항에서는 묵주기도가 ‘관상’(觀想, contemplation)을 잃으면 그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기계적인 반복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26항은 반복되는 기도문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며, 28항은 묵주기도가 하나의 묵상 방법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나아가 묵주의 구슬을 부적이나 마술적인 물건처럼 취급하는 태도도 경계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기도문을 많이 반복하거나 묵주를 오래 사용하면 자동으로 특별한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기도가 주님의 생애를 깊이 이해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내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도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을 집중하고 말씀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훈련이 필요하며,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는 행위는 신앙생활에 유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 전체를 처음부터 무의미한 반복이나 우상숭배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성경적 묵상의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판단입니다.
그러나 묵주기도의 중심을 이루는 ‘성모송’(聖母誦, HailMary)을 살펴보면 별도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성모송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앞부분은 눅1:28의 천사의 인사와 눅1:42의 엘리사벳의 축복에 근거합니다. 마리아가 은총을 받은 여인이며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낳은 예수님이 복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경에 직접 근거하며, 마리아에게 주어진 특별한 소명을 인정하고 그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성모송의 뒷부분은 마리아에게 지금과 죽을 때에 죄인인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의 인사를 그대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교회의 신심 안에서 발전한 직접적인 전구 요청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2676–2677항 역시 이 두 부분을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양하고, 뒷부분에서는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송 전체가 성경 구절을 그대로 낭독하는 기도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성경에 근거한 축복과 후대 교회가 발전시킨 전구 요청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묵주기도의 성경적 묵상과 마리아를 향한 청원의 타당성을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반복하여 묵상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시1:2는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고 가르치며, 마26:44에는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기도하신 사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6:7에서 주님께서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모든 반복 기도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같은 말을 다시 하는 형식 자체보다,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외적인 기도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속사람’(internalman)과 ‘겉사람’(externalman)에 관한 가르침도 이러한 구별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입술의 말과 몸의 동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행위 안에 담긴 사랑과 신앙에 있습니다. 인간은 겉으로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할 수 있으며, 반대로 짧고 단순한 기도 안에서도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믿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기도문이나 묵주의 사용은 그것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의 악을 돌아보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인도할 때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반복에 특별한 효력이 있다고 믿거나 기도의 횟수 자체를 신앙의 목표로 삼는다면 예배의 질서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반복하는가보다 무엇을 생각하며 누구를 향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삶의 어떤 변화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적 묵상과 마리아의 전구가 만납니다. 천주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마리아의 전구를 청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정마리아의묵주기도’ 16항과 33항에서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가 묵주기도의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그 안에 마리아를 향한 직접적인 청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두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일과 천국의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일은 서로 다른 영적 행위입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가르침,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향하게 합니다. 반면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행위는 그가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청원을 실제로 알고 들을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전제는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이나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서 자동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의 묵상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마리아를 직접적인 기도 요청의 대상으로 삼는 부분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매우 직접적인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824–825항에서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에서 자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비판합니다. TCR.824에서는 지상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던 사람들이 영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들이 지상의 사람들에게서 기도와 공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TCR.825에서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이 설명은 천국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선한 쓰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천사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인간을 보호하고 돕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도움과 그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행위는 다른 문제입니다. 영계와 자연계 사이의 참된 교통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이 원하는 특정한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불러 자신의 간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TCR.824–825는 묵주기도에 포함된 마리아를 향한 청원을 검토하는 데 중요한 직접 근거가 됩니다. 다만 이 항목들은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지, 묵주기도 전체의 구성과 목적을 직접 분석한 해설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의 성경 묵상에 대한 평가와 그 안에 포함된 전구 요청에 대한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다른 성인들과 달리 지상의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천주교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영적 어머니이므로 그의 전구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저작에서 마리아에게 그러한 예외적인 기도 청취 능력이 주어졌다고 가르치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났으며,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청원을 듣고 은총을 전달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기록이 마리아의 모든 천상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가 어떠한 사랑이나 선한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천주교 역시 마리아를 주님과 동등한 신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전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되며, 2025년 바티칸 신앙교리부의 ‘신자들의어머니’(MaterPopuliFidelis)도 이러한 구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실제적인 차이는 마리아가 독립적인 신적 권능을 지녔는가의 문제에만 있지 않습니다. 천국의 특정한 인간에게 직접 청원하는 행위 자체가 참된 영적 교통의 질서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TCR.824–825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관행은 그러한 질서와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구별은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신자는 묵주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어떤 사람은 반복되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라앉히며 주님께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화해의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무조건 거짓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지닌 불완전한 이해 가운데서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참된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실제적인 위로와 평안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그 기도에 포함된 모든 교리적 전제가 참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반대로 교리적 오류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 기도 가운데 이루어진 모든 진실한 회개와 사랑의 경험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내면과 기도의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과 사랑을 완전하게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그가 믿고 실천하는 내용이 말씀의 진리와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일과 묵주기도의 신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일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묵주기도의 긍정적인 요소를 보존하면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온전한 기도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핵심은 외적인 형식보다 기도의 대상과 내용에 있습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탄생을 묵상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고난을 기억하며, 부활과 인성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를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귀중한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말씀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묵상을 위하여 반드시 마리아에게 전구를 요청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요14:13–14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 끝에 정해진 말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그분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인정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특별한 형식을 이용하여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열어 드리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더욱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마지막으로 묵주기도의 가치를 판단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심은 주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영적 관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알고 계시며, 인간이 자신의 고통과 필요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미 그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의 특별한 자비나 영향력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묵주기도에 담긴 주님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에 대한 묵상은 존중할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는 부분까지 동일한 수준의 신적 진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외적인 반복과 묵주의 사용 역시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고 인간의 마음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에 따라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의 진실한 마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만, 기도의 내용과 대상은 말씀의 진리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요2:5에서 하인들에게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권한 것처럼, 참된 신앙의 방향은 언제나 마리아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반복되는 기도를 넘어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여기에 참된 기도의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 올바른 신심의 중심은 묵주의 구슬이나 기도의 횟수, 특정한 성인의 전구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한 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선을 행하는 삶에 있습니다. (SL.RC.038해설)
‘마리아는신자들을위하여그리스도께전구한다.’ 이것은 천주교의 마리아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전구’(轉求, intercession)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전구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를 말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천국에서 신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에도 나타납니다. 신자들은 마리아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지금과 죽을 때에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가 천국에서도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다는 신앙적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접하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과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를 듣는다는 사실은 같은 것일까요? 천국의 천사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직접 기도를 드려도 된다는 근거가 될까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라면,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마리아의 도움을 먼저 요청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문제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청하는 관행의 적절성을 넘어, 기도의 대상과 영적 교통의 질서, 주님의 유일한 중재, 그리고 천국의 모든 생명과 권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묻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62항은 마리아가 천상의 영광에 들어간 후에도 모성적 역할을 계속하며, 여러 형태의 전구를 통하여 신자들이 구원의 은총을 받도록 돕는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969항 역시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며, 마리아를 ‘변호자’(Advocate), ‘도움이신분’(Helper), ‘중재자’(Mediatrix)등의 칭호로 부르는 전통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970항은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하지 않으며, 그 모든 구원적 영향력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구원자로 가르치거나, 그에게 독립적인 신적 능력이 있다고 선언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에 참여하는 종속적인 협력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구별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마리아의 전구가 주님의 권능에 종속되어 있다는 설명과, 마리아가 실제로 지상의 신자들이 드리는 청원을 알고 그들을 위하여 전구한다는 사실이 신적으로 확증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검토해야 할 핵심은 후자의 주장입니다.
천주교가 전구를 설명할 때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은 ‘성도의통공’(聖徒의通功, communionofsaints)입니다. 이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신자들과 죽은 후 정화를 받는 이들, 그리고 천국의 성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영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가르침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954–959항은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영적인 결합을 끊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956항은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의 신자들을 위하여 전구하며, 이러한 형제적 사랑이 지상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전구는 성인들의 일반적인 전구와 연결되지만, 그가 주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영적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 때문에 더욱 뛰어난 모성적 역할로 이해됩니다. 성경 역시 살아 있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약5:16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하며, 바울도 여러 서신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전구라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과, 천국에 있는 특정한 성인에게 직접 기도를 청하는 일이 동일한 영적 질서에 속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천주교는 성도의 통공을 근거로 두 행위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이 문제를 다르게 가르칩니다.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어머니’(MaterPopuliFidelis)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명확하게 정리했습니다. 이 문서의 24–29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그분의 중재는 다른 피조물의 도움으로 보충해야 하는 불완전한 중재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37–42항은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를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참여하는 특별한 협력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38항은 마리아의 기도가 다른 성인들의 전구와 구별되는 특별한 가치와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하고, 41항은 마리아가 천국에서도 신자들의 기도에 모성적으로 동참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 문서가 마리아의 역할을 단순한 상징이나 신앙의 모범으로 축소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실제적인 천상 전구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은총을 독립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주님의 자비를 대신 관리하는 존재는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이러한 설명에는 주님의 유일한 구원을 보존하려는 중요한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전구가 그리스도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지상의 수많은 신자가 드리는 청원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질문까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자연계와 영계 사이의 영적 교통이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전구를 설명할 때 자주 제시하는 성경은 요2:1–11의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 사정을 알리고, 하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천주교는 여기서 마리아가 사람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살피고 그것을 주님께 아뢰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인정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과 후대의 신학적 적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요2장의 마리아는 지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인간이었으며, 혼인 잔치의 구체적인 상황을 직접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사정을 예수님께 알렸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사후에도 지상의 모든 신자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주님께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실제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며, 하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중심은 마리아의 독립적인 중재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마리아의 전구를 보여 주는 신앙적 표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전구의 구체적인 작용을 입증하는 직접적인 근거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천사들이 인간을 돕는 말씀과 계8:3–4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환상도 천상 전구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연결 역시 그 의미를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돕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인간이 특정한 천사나 성인에게 직접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계8장의 환상도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상징적 장면이지,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요청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한편 딤전2:5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이시며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는 신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구원하시는 유일한 중재자가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자들의 상호 기도, 천사들의 도움, 천국의 성인들에게 드리는 전구 요청,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적 중재는 각각 구별해야 합니다. 이들을 모두 하나의 의미로 취급하면 성경이 직접 가르치는 내용과 후대의 신학적 해석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HeavenandHell, HH, 1758)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완전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영계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서로를 위한 선한 쓰임 가운데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인간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잃거나 다른 존재를 위한 선한 마음을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의 삶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국의 사랑이 곧 지상의 인간이 원하는 특정한 영적 존재를 자유롭게 불러 자신의 청원을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 연결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특정한 성인이나 천사를 기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참된 영적 교통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 자신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천사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직접 기도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전구뿐 아니라 모든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를 검토할 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824–825항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TCR.824에서 스베덴보리는 영계에 들어온 가톨릭 신자들, 특히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지상에서 공경하던 성인들을 찾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성인들은 천국이나 영계의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지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기도하고 공경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자신이 성인으로 공경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러한 공경을 원하는 영들은 오히려 영적 혼란에 빠진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TCR.825에서는 성인들에게 드리는 청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더욱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는 지상의 신자들이 성인들에게 전하는 기도가 그들에게 도달하여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 두 항목은 스베덴보리의 성인 전구에 관한 입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직접 근거입니다. 여기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성인들의 지위가 주님보다 낮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지상의 신자가 천국의 성인들에게 직접 청원하고, 그들이 그 청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 자체가 영계의 실제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내용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과 그에 근거한 가르침으로 제시한 것이므로, 성경 본문과 동일한 종류의 역사적 증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 안에서는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명백한 자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천국의 성인들이 지상의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드리는 청원을 듣지 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천사들이 인간을 돕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천사들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며, 악령들의 영향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보호의 역사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천사들의 도움은 실제적이지만 그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어떤 천사가 함께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천사의 보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도움은 인간의 의식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도움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도움을 받기 위하여 특정한 영적 존재를 직접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천사들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께서 자신의 섭리에 따라 천사들을 통하여 인간을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과 선한 쓰임을 인정하는 일은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를 정당화하는 일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마리아의 전구와 일반 성인들의 전구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모든 성인의 전구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리아의 전구는 그 가운데 특별한 모성적 성격과 뛰어난 지위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인들에게 직접 드리는 청원이 실제 영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예외적인 기도 청취 능력이 주어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났다고 기록하면서, 마리아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과 나란히 신적 권능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기록이 마리아의 모든 천상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에게 어떠한 사랑이나 선한 쓰임도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마리아가 지상의 모든 신자가 드리는 기도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TCR.824–825의 직접적인 성인 기도 비판과 TCR.827의 마리아에 관한 기록을 함께 고려하면, 마리아에게 전구를 청하는 관행을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리아가 복된 여인이라는 사실과 그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별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이 주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지옥’ 7–12항에서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를 말씀드리기 전에는 알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며, 다른 피조물이 인간의 사정을 설명해야만 비로소 그를 이해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무한한 사랑과 지혜 자체이시며,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필요를 모든 피조물보다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기도하는 일은 그분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드리거나, 원래 베풀지 않으려 하셨던 은총을 설득하여 받아 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열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이해와 의지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아의 전구가 없으면 주님의 자비에 가까이 나아가기 어렵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천주교의 공식 교리 역시 마리아의 전구가 없으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직접 전구를 청하는 관행을 특별한 신앙적 도움으로 제시한다면, 그러한 방식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는 기도의 질서에 실제로 부합하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은 인간에게 이미 가까이 계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별도의 천상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인간의 실제적인 신앙 감정과도 관련됩니다. 어떤 신자는 하나님을 엄격한 심판자로 생각하면서 그분께 직접 기도하기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마리아에게는 자신의 연약함과 아픔을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 자체를 경솔하게 비판하거나 그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신앙적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의 대상을 더욱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보다 더 자비롭고 인간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모든 참된 모성애와 위로와 자비의 근원은 오직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천주교의 2025년 ‘신자들의어머니’ 문서 역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마리아의 전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특정한 신앙 감정을 비난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신앙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모든 사랑과 자비의 근원으로 인정하는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우리를 주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분임을 깨닫도록 이끕니다.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모습도 이러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요2:5에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권합니다. 눅1:38에서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특별한 신적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가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한 복된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역할이 그를 영원한 기도 요청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귀중한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에게 기도를 드리고 영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모든 천사와 구원받은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는 피조물이며, 그들이 지닌 모든 선한 쓰임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참된 존중은 그들에게 주님의 권능을 나누어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교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기도는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의 짐을 지는 체어리티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인간이 천국의 특정한 성인들에게 직접 청원하고, 그들이 그 청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관행을 영계의 실제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능력으로 인간을 돕지만, 인간은 그들에게 직접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도움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땅히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주님 자신입니다. 이는 천사들의 도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도움의 시작과 끝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된 복된 여인이었지만, 그에게 어떠한 사랑과 선한 쓰임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주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마리아에게 머무르거나 그를 거쳐야만 주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각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마음을 열 때 사랑과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참된 기도의 목적은 어떤 천상 존재의 특별한 영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주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결합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의지가 새로워지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과 모든 자비와 구원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SL.RC.037해설)
‘마리아는교회의어머니이며모든신자의영적어머니다.’ 이것은 천주교가 마리아에게 부여하는 ‘교회의어머니’(MotheroftheChurch)와 ‘영적모성’(靈的母性, spiritualmotherhood)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천주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육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와 교회 전체에 대하여 특별한 어머니의 역할을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마리아는 신자들을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우며,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특별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모든 신자의 어머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질까요? 성경은 마리아가 교회 전체의 영적 어머니라고 직접 가르칠까요? 사람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여기에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별도의 관계가 필요한 것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치는데, 교회의 영적 모성과 마리아 개인에게 부여된 모성적 지위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단순히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존칭의 적절성을 넘어, 인간이 누구에게서 영적 생명을 받고 어떤 과정을 통하여 거듭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명제를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 및 거듭남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 의미와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인류의빛’(LumenGentium)53항은 마리아가 사랑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도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61항은 마리아가 순종과 믿음, 소망과 사랑으로 구세주의 구원 사업에 특별하게 협력했으므로 ‘은총의질서안에서우리의어머니’라고 가르칩니다. 62항은 그러한 모성적 역할이 마리아의 지상 생애에만 국한되지 않고 천상에서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oftheCatholicChurch)963–970항 역시 이 가르침을 계승합니다. 특히 968항은 마리아가 인간의 초자연적인 생명을 회복시키는 구속의 역사에 특별하게 협력했다고 설명하며, 969항은 그가 천상에서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돌봄과 전구를 계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은 단순히 마리아를 존경할 만한 신앙의 선배로 기억한다는 뜻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신자들의 영적 삶을 돕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러한 역할을 그리스도에게서 독립된 권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교회헌장 60항은 그리스도의 중재가 유일하며, 마리아의 모든 구원적 영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에 의존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가 마리아를 영적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선언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공식 교리의 실제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 칭호의 역사적 발전도 중요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1월 2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3회기 폐막 연설에서 마리아를 ‘교회의어머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교회란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목자들과 모든 신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후 이 칭호는 가톨릭의 전례와 신심 안에서 더욱 널리 사용되었으며, 2018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결정에 따라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어머니복되신동정마리아기념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라는 생각이 1964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사상은 오랜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했으며,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모범으로 이해하는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역시 교회의 설립자와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생명은 그분의 구속과 성령의 역사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교회의 창설자나 최고 통치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칭호가 단순한 명예적 표현을 넘어 모든 신자와의 실제적인 영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면, 그러한 관계가 성경과 주님의 영적 질서에서 어떤 근거를 갖는지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2025년 11월 4일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신자들의어머니’(MaterPopuliFidelis)는 특히 주목할 만한 문서입니다. 이 문서의 34–37항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모든 지체와 관계되는 모성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단순히 과거의 모범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에도 신자들을 위한 모성적 협력과 ‘전구’(轉求, intercession)를 감당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약화시키거나,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독립적인 구원적 역할을 부여하는 표현을 경계합니다. 특히 45–47항은 마리아가 하나님과 별도로 은총을 보관하거나 모든 은총이 반드시 그의 손을 통하여 전달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리아의 역할은 신자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이며, 실제로 영적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정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천주교의 공식 교리 자체가 마리아를 주님의 은총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을 인정하더라도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 신적으로 확정된 진리인지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주교의 영적 모성론과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을 비교해야 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성경은 요19:26–27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마리아에게는 ‘여자여보소서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보라네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역사적 문맥에서 주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시고, 그 제자에게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돌보도록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돌보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여기에서 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가 모든 신자를 대표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그 제자의 어머니로 맡기신 것은 교회 전체에 마리아를 영적 어머니로 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교회의 삶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19:26–27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마리아를 반드시 영적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직접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특별한 권위를 받았다고 확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직접 기록한 사건과 그 사건에 부여한 후대의 신학적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주님론은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기독교’(TrueChristianReligion, TCR, 1771) 102항에서 주님께서 마리아에게서 취하신 인성을 영화하셨으므로, 영화 이후의 주님을 여전히 마리아에게서 비롯된 자연적인 인성에 의하여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요19:26–27을 인용하며, 주님께서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 ‘여자여’라고 부르신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해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호칭 자체가 자연적인 모자 관계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며, 이 장면은 오히려 주님께서 마리아를 돌보시는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영원한 신적 정체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자연적인 인성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주님의 지상 생애에서 실제로 어머니였다는 사실은 인정하되, 그 자연적인 모성을 근거로 영화된 주님과 교회 전체에 대한 영원한 모성적 권위를 도출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신 사건과 마리아에게 모든 신자의 거듭남을 돌보는 보편적 직분이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영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289–290항에서 창3:20의 하와가 ‘모든산자의어머니’라고 불린 이유를 해설합니다. 그는 여기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내며,‘산자’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는 믿음과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AC.289는 아내와 어머니가 교회,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AC.290은 참된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어떤 한 여성이 모든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직접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교회의 영적 역할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691과 2717항에서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머니를 교회와 연결하여 해석하며, 특히 진리에 대한 애정과 관계된 영적 교회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머니가 지니는 속뜻은 단순한 자연적 출생을 넘어,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검토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는 사실과 마리아라는 역사적 인물에게 모든 신자의 보편적인 영적 모성의 권위가 주어졌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적 의미는 성경의 다른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갈4:26에서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자유자이며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특정한 인간 여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자유와 생명을 지닌 영적 공동체를 나타냅니다. 또한 계12:1의 해를 입은 여자에 관하여 스베덴보리는 ‘계시록해설’(ApocalypseRevealed, AR, 1766) 533항에서 그 여인이 새 하늘에 있는 주님의 새 교회와 땅 위에 세워질 새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어머니와 여자가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응의 원리를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이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여성 개인에게 교회의 모든 영적 권위가 실제로 부여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모습은 교회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신앙적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교회를 나타내는 모범이라는 주장과 그가 모든 신자의 영원한 어머니라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원리는 역사적인 인물을 신격화하거나 그에게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적 출생의 근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요3:3–8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요1:12–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거듭남’(regeneration)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만큼 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의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생명의 근원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곳이며, 실제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는 자연적인 출생에서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다른 모든 인간의 영적 출생이 마리아에게서 비롯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은 영적 모성의 중심을 특정한 역사적 인물보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교회의 쓰임에 둡니다. 그리고 그 교회조차 모든 생명을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천주교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가 함께 나타납니다. 천주교 역시 영적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 마리아 자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총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돕는 모성적 협력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리아 개인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지속적인 모성적 역할이 실제로 주어졌다고 고백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직접적인 가르침에서 영적 어머니라는 표현은 우선 교회와 관계되며,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께서 말씀과 선과 진리를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교회의 모범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의 자연적인 모성을 모든 신자를 향한 보편적이고 영원한 영적 직분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별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 특히 천주교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을 천상에서 계속되는 전구와 돌봄의 역할로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와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서로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감당한다는 사실과, 특정한 한 인간에게 모든 신자를 향한 특별한 모성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은 마리아의 전구와 중재에 관한 후속 해설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TCR.827에서 자신이 영계에서 마리아와 만난 경험을 기록합니다. 그는 마리아가 자신은 주님의 어머니였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인간적인 것을 벗으시고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으로 보고한 내용이므로, 자료의 성격을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마리아 이해를 직접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주님을 예배하는 영계의 인간으로 나타나며, 모든 신자의 영적 생명을 낳거나 보존하는 독립적인 권위자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록에 특별한 모성적 직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마리아가 천국에서 어떠한 사랑이나 쓰임도 감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론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선한 쓰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특별한 쓰임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그가 영원히 모든 인간의 영적 어머니로서 특별한 천상 권위를 행사한다는 주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직접 뒷받침하지만, 후자는 그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위로와 보호, 따뜻함과 돌봄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 역시 사49:15에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설령 어머니가 자식을 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도록 돕는 비유이지만, 주님의 사랑이 부족하여 다른 존재가 그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참된 모성애의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특별히 자비로운 영적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주님께서는 멀고 엄격하시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받아 주는 분이라고 여긴다면, 그 신앙적 이해는 다시 살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무한한 사랑과 자비 자체이시며, 인간이 그분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다른 피조물의 모성적 보호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주교의 공식 가르침과 개인적인 통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2025년 신앙교리부 문서는 마리아를 주님의 엄격한 심판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별도의 피난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표상을 주님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별도의 영적 권위나 관계로 확정하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을 존중하는 일은 이러한 신학적 구별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눅1:38에서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고 부르며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눅1:46–47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 자신의 구주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2:5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리아가 교회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 주는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믿음과 순종의 본보기로 기억하는 데에는 귀중한 신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순종이 모든 신자에게 마리아와의 직접적이고 영원한 모자 관계를 형성한다는 사실까지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특별한 칭호나 지위를 받았는가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적인 삶에서 실천하는가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된 여인인 것도 그가 주님의 성육신을 위하여 선택되었고, 그 말씀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그의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방향, 곧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영적 모성이 무엇이며 인간이 누구에게서 새롭게 태어나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어머니가 교회를 나타낸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과 진리를 전하며,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교회조차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인 것은 오직 주님께서 그 안에 계시고, 그분의 선과 진리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복된 어머니였으며, 그의 믿음과 순종은 교회가 본받아야 할 귀중한 모범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영적으로 낳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마리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과 영적인 모자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교회의어머니이며모든신자의영적어머니다’라는 명제를 검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마리아의 모성적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라는 영적 표상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과 교회의 참된 쓰임을 이해하고,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그 생명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영적인 어머니의 쓰임을 감당하지만, 그 모든 생명과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주님 자신이십니다. (SL.RC.036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