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 the affections of good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네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AC.146의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의 ‘quality’, 곧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결국 두 축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선의 애정들(affections of good)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지식들(knowledges of truth)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선행과 지식’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의도적으로 affections knowledges라는 말을 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무엇을 알고 있느냐만으로 규정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훨씬 더 깊이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affections of good’, 곧 ‘선의 애정들’은 인간 안의 사랑의 방향을 뜻합니다. 어떤 선을 기뻐하는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어디에 마음이 끌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affection은 단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quality를 결정합니다.

 

반면 ‘knowledges of truth’, 곧 ‘진리의 지식들’은 그 사랑이 어떤 진리 안에서 형성되고 인도받는가를 뜻합니다. 여기서 knowledges는 단순 암기 정보가 아니라, 진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내용들입니다. 인간은 사랑만으로는 방향을 잃기 쉽고, 진리만으로는 생명이 메마르기 쉽기 때문에, 선의 애정과 진리의 인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표현은, 인간의 quality가 결국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무엇을 참이라고 알고 있는가’라는, 이 두 가지의 결합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순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affections of good을 두고, 그다음 knowledges of truth를 둡니다. 이것은 인간의 중심이 결국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섬길 때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진리를 알아도, 어떤 사람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섬기기 위해 사용합니다. 겉 지식은 비슷해도 quality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quality의 중심에는 affection, 곧 사랑의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46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이 단순 학문 수준이나 외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제 quality는, 그 사람이 어떤 선을 사랑하고 있으며, 어떤 진리 안에서 그 사랑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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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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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위 본문에서 맨 끝 영어,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여기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는 직역하면, ‘그것들이 그들에게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하더라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represented shown이 단순 반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 문맥에서 ‘represented’(표상되다)는 단순히 눈앞에 나타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영적 진리나 주님의 것이 상징과 표상, 상응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말씀, 교회의 예식, 자연 속 질서, 천사적 상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의 진리와 선이 인간 앞에 ‘표상적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면 ‘shown’(보여지다)은 그것이 단지 상징 속에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이해 가능하도록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 표상만이 아니라 설명되고 드러나며, 어느 정도 인식 가능한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단순히 ‘아무리 설명해 줘도’ 정도보다 더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상태로 기울기 시작하면, 주님의 진리와 질서가 상징적으로나 직접적으로나 아무리 분명하게 드러나도 점점 그것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진리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 안의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 쪽으로 굳어질 때, 그 사람은 점점 주님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풀면 대략 이런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진리와 선이 상징과 계시를 통해 아무리 분명히 드러나고 실제로 보여진다 해도, 점점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plainly’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희미하게 암시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proprium이 중심이 되면,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6의 이 문장은, 타락의 핵심이 단순 무지가 아니라 ‘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함’에 있다는 점을 아주 날카롭게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AC.146, 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가 the affections of good과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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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창2:19-20, '창2:18-20의 전체 구조'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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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AC.146

 

지금까지 말한 바를 통해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는 연결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하시고, 곧이어 각종 들짐승(beasts)공중의 각종 새(birds)가 언급되는데, 이들은 이미 앞에서 다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즉시 다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가 반복되는데, 이는 그가 선에 대한 애정들과 진리에 대한 인식들(knowledges)에 관한 자신의 질(quality) 아는 것이 허락되었음에도 불구, 여전히 자신의 own,proprium으로 기울어졌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and presently “beasts” and “birds” 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해설

 

이 단락은 창2:18-20의 구조 전체를 ‘해석적으로 봉합’해 주는 매우 중요한 정리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본문의 반복과 배열이 우연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구성’임을 밝힙니다.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고 말한 직후에 다시 짐승들과 새들이 등장하고, 그럼에도 다시 ‘돕는 배필이 없었다’ 결론짓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인식들에 대한 ‘(quality)을 알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는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충분함을 뜻합니다. 짐승들과 새들을 알고 이름 붙였다는 것은,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님의 질서를 ‘보지 못해서’ 자신의 own,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같은 결론이 반복됩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이 반복은 실패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충분히 보여 주어도, 충분히 설명해 주어도, 이미 자신의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한 상태에서는 주님의 것들을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문제는 계시의 부족이 아니라, ‘욕구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날카로운 진술을 덧붙입니다.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지더라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고의적인 반항이 아니라, 내적 중심이 이동한 결과입니다. 주님의 것이 여전히 보이지만, 더 이상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 단락은 오늘을 사는 독자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통찰을 줍니다. 신앙의 쇠퇴는 대개 진리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말씀이 더 이상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해는 되어도 중심에 두고 싶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AC.14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주님께서 아무리 분명히 보여 주셔도 그것은 더 이상 결정을 바꾸지 못하며, 그 결과 ‘돕는 배필’은 외부에서 찾을 수 없고, 결국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하나의 구조로 받아들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 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AC.146.심화 1. ‘represented and shown’ 왜냐하면 자신의 proprium을 원하는 성향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 및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업신여김을 시작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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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 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AC.146.심화 2. ‘quality를 결정하는 두 축’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말인데요, his quality가 the affections of good과 knowledges of truth, 이 두 가지로 결정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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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하는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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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리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어떤 방향에 놓여 있는가를 뜻합니다.

 

윗글은 위 심화 6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 나오는 예정론이 뭔가요? 칼빈은 왜 이런 얘길 한 건가요? 그리고 이게 왜 여기서 갑자기 언급되나요?

 

 

여기서 말한 예정론’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 버림받을지가 하나님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사상입니다. 특히 존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이것이 강하게 발전했는데, 흔히 이중 예정’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되고(election), 어떤 사람들은 심판으로 남겨진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칼빈 자신은 이것을 단순 냉혹한 운명론처럼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려 했습니다. 당시 중세 후기의 공로주의적 신앙, 곧 인간 행위나 교회 제도를 통해 구원을 확보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칼빈은 구원의 시작도 끝도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상이 어떤 성경 구절들과 결합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방금 나온 계13:8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 같은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마치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채 태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영원 전에 어떤 사람은 구원,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결정되었다는 식으로 읽히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런 구절들을 미리 확정된 운명 명단’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생명책은 어떤 천상 행정 문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형성된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주님의 생명 질서와 결합된 상태를 뜻하고,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 그 상태가 자기 사랑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정론적 독해에서는 중심이 하나님이 미리 누구를 선택했는가’에 놓이기 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독해에서는 중심이 인간이 지금 어떤 사랑 안에 살고 있는가’에 놓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궁극적 생명은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오지만, 인간은 자유 안에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는 처음부터 버림받도록 창조된 인간’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사랑과 proprium 안에 머무르기를 고집할 때 스스로 천국 질서와 멀어진다고 봅니다. 즉, 지옥도 억지로 보내진 형벌 장소’라기보다, 자기 사랑의 상태가 끝까지 굳어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정론 이야기가 갑자기 나온 이유는, 13:8 같은 표현이 역사적으로 예정론과 자주 연결되어 읽혀 왔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구나’라고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구절을 그렇게 읽지 않고, 인간 안의 실제 영적 상태와 사랑의 방향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는다는 점을 구분해 드리기 위해 그 이야기를 언급한 것입니다.

 

 

 

AC.145, 창2:19-20, 이사야와 계시록을 통해 확인하는 '이름'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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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심화 6,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AC.145.심화 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는, 이게 무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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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소리’는 문자 그대로의 이름 발음, 곧 외적인 호칭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이다’라는 말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단순히 ○○’, ‘○○’ 같은 언어적 이름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삶의 상태와 사랑의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AC.145 전체의 핵심을 아주 압축적으로 요약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name)은 단순한 발음이나 문자 조합이 아니라, 존재의 essence quality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도, 문자 몇 자가 천국 장부에 적힌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영적 상태가 주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인간을 아신다는 것은, 그 사람 주민등록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진리 안에서 살며, 삶 전체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름의 발음 자체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상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수천 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각 존재의 quality가 전부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천국에서는 각 천사가 자기 사랑과 신앙의 상태에 따라 일종의 영적 이름’을 가집니다. 즉, 존재 상태 자체가 그 이름입니다.

 

그래서 소리’는 외적 표지이고, ‘quality’는 실제 존재 상태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어떤 이름 발음이 적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사랑과 신앙과 삶의 방향 전체가 천국 질서 안에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이름을 들을 때, 단순 발음만 떠오르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분위기와 기억 전체가 함께 떠오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훨씬 더 깊고 영적인 차원으로 가져갑니다. 천국에서는 이름이 곧 상태(state) quality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라는 문장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단순 호적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실제로 형성된 사랑과 진리의 상태라는 뜻입니다.

 

 

 

AC.145, 심화 8,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

AC.145.심화 8.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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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심화 6, ‘계13:8’

AC.145.심화 6.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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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Rev. 13:8).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앞의 계3:4-5와 마찬가지로, ‘이름(name)이 단순한 문자상의 명단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뜻한다는 점을 다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표현을 통해, 이름이 곧 천국적 생명과의 결합 여부를 나타낸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호칭이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말은 단순 등록 여부 정도의 뜻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책’은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의 생명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 안에 어떤 사랑과 신앙과 삶의 질서가 형성되어 있는지가 기록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이 그 사람을 모르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가 천국적 생명과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곧, 그 존재의 essence quality가 어린 양,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어린 양(Lamb)은 주님의 신적 인성, 특히 순결한 사랑과 구속의 측면을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명부에 오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그 존재의 상태가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하는 것도 같은 구조입니다. 말씀에서 짐승(beast)은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자기 사랑과 왜곡된 신앙 체계에 속한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가 주님의 질서보다 자기중심 질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5의 문맥 안에서는, 이 구절이 이름(name)의 영적 의미를 매우 강하게 드러내는 예가 됩니다.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영적 상태 전체를 뜻하기 때문에,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천국 질서 안에 있다는 뜻이고,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 질서와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예정론처럼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자들이 미리 버림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어떤 방향에 놓여 있는가를 뜻합니다. 생명책은 단순 외적 명단이 아니라, 존재의 실제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13:8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인간의 essence quality를 뜻하며, 따라서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주님의 생명 질서 안에 결합되어 있음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상태가 그 질서와 일치하지 않음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5, 심화 6,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AC.145.심화 7.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 ‘삶의 질(quality)’입니다. 위 문장은 위 해설에 나오는 문장인데, 여기 ‘기록된 것은 소리가 아니라’는, 이게 무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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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심화 5, ‘계3:4-5’

AC.145.심화 5.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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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4, 5) Thou hast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he that overcometh, the same shall be clothed in white raiment, and I will not blot out his name out of the book of life, but I will confess his name before my Father, and before his angels (Rev. 3:4–5).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름(name)이 단순한 개인 식별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본질 전체를 뜻한다는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그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 ‘그 이름을 시인한다’는 표현들이 모두 나오는데, 이것들은 전부 이름이 곧 존재의 영적 quality essence를 뜻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먼저 계3:4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은 진리와 신앙의 외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삶과 신앙의 상태가 거짓과 악으로 심하게 왜곡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리켜 몇 명의 이름들(a few names)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이미 이름’이 단순 호칭이 아니라, 어떤 영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표현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은 더욱 중요합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문자 기록이라면, 이것은 단순 명단 관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서 생명책’은 주님 앞에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와 생명의 기록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거기에 기록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본질이 천국 질서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등록 말소가 아니라, 그 상태가 더 이상 천국 질서와 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시인하신다는 것은, 그 존재의 상태를 인정하시고, 그것이 주님의 질서와 일치함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AC.145의 흐름 안에서 이 구절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은 essence quality를 담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3:4-5는 이름이 단순 명칭이 아니라는 점을 거의 노골적으로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지워지고, 시인되는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 영적 상태를 대표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위로가 되는 의미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름을 아신다는 것은, 단순히 누구인지 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과 진리의 상태까지도 다 아시고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데 교회 전체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 안에도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정리하면, 3:4-5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뜻하며,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주님께 시인된다는 것은, 그 존재 전체가 천국 질서 안에서 인정되고 기억된다는 뜻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5, 심화 6, ‘계13:8’

AC.145.심화 6.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lamb’s book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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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심화 4, ‘사40:26’

AC.145.심화 4. ‘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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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6)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th created these things, that bringeth out their army by number. He will call them all by name, (Isa. 40:26)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표현이 단순히 우주의 존재들을 목록처럼 알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상태와 질서와 본질을 완전히 알고 다스리신다는 뜻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40:26은 문자적으로는 하늘의 별들과 만상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상응적으로 읽습니다. 말씀에서 ‘하늘의 군대(army of heaven), 별들, 빛들은 단순 천체가 아니라 진리들과 지식들, 그리고 천사적 질서들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모든 상태와 질서를 완전히 알고 계시며, 하나하나를 제 자리에 두신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수효대로’와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입니다. 이것은 단순 계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수(number)는 질서와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만상을 수효대로 이끌어 내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한 질서와 조화 안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그 질서 안의 각각의 본성과 quality를 완전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5의 흐름 속에서는 이 구절이 아주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essence quality를 담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각 존재를 그 본질과 상태 안에서 완전히 아신다는 뜻이 됩니다.

 

또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섭리 개념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시야 밖에 있는 존재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단지 전체만 아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작은 개별까지도 그 이름, 곧 본질과 상태를 아십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주님은 보편(universal)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개별적인 것(particulars and singulars)까지 아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AC.145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말이 단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그 본질과 질서 안에서 완전히 알고 섭리하는 것을 뜻한다는 증거로 인용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40:26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essence quality와 상태를 완전히 알고 계시며, 그 모든 것을 질서 가운데 보존하고 다스리신다는 뜻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5, 심화 5, ‘계3:4-5’

AC.145.심화 5. ‘계3:4-5’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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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심화 3, ‘사43:1’

AC.145.심화 3.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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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심화

 

3.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43:1) Fear not, O Israel, for I have redeemed thee, I have called thee by thy name; thou art mine, (Isa. 43:1)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이름으로 부른다(call by name)라는 표현이 단순히 어떤 사람을 식별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를 깊이 알고, 인정하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의미를 가장 따뜻하고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43:1에서 주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핵심은 마지막 말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앞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표현이 바로 이 선언과 연결됩니다. 곧,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 호명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를 자기와 관계된 존재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45의 흐름 안에서는, ‘이름’이 곧 존재의 essence quality를 담는다는 점이 다시 확인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아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상태와 본성, 가능성과 역할 전체를 아시며, 그들을 섭리 안에 두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또 여기 구속하였다’와 이름으로 불렀다’가 함께 나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구속은 단순 법적 선언이 아니라, 다시 자기에게로 돌려놓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단순 식별이 아니라, ‘나는 너를 안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너는 나와 관계된 존재다’라는 의미를 담습니다.

 

이 점에서 AC.145는 이름(name)에 대한 아주 깊은 성경적 이해를 보여 줍니다. 이름은 단순한 외적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영적 실체를 담습니다. 따라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의 내적 상태를 알고 인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너는 내 것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적으로 보면 아주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소유욕 같은 뜻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할 때는 proprium 안에 갇히지만, 주님께 속할 때는 비로소 참 생명 안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 것이라’는 말은 억압적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과 보호, 그리고 사랑의 관계 선언입니다.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깊이 알고, 그를 사랑과 섭리 안에서 자기와 관계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5, 심화 4, ‘사40:26’

AC.145.심화 4. ‘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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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심화

 

2. ‘62: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62:2) Thou shalt be called by a new name, which the mouth of Jehovah shall declare, (Isa. 62:2)

 

 

이 구절이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새 이름(new name)을 받는다는 것이 단순한 개명(改名)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와 본질이 새롭게 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4-145의 전체 흐름은 계속해서 ‘이름’이 단순 호칭이 아니라 essence quality를 담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62:2는 그 점을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표 구절입니다.

 

여기서 이사야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회복, 곧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명칭을 붙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의 영적 상태 자체가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름이 단순 표지라면, 새 이름을 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이름이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담기 때문에, ‘새 이름’은 곧 ‘새 상태’, ‘새 본성’, ‘새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은 단순 호칭 변경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상태와 사명이 변화되었음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새 이름’도 새 존재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AC.145에서 사62:2가 인용되는 이유는, 고대인들과 말씀의 언어에서 이름(name)이 곧 존재의 essence quality를 담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새 이름’이란, 그 존재 안에 새로운 영적 상태와 생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여기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름이 인간의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곧, 새로운 상태와 본질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AC의 흐름 안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안다’, ‘이름을 준다’는 표현들이 모두 단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와 본질을 인식하고 규정하는 영적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이름’은 단순히 새 호칭이 아니라, 새 quality와 새 essence의 표지입니다.

 

정리하면, 사62:2 AC.145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이름(name)은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뜻하며, 따라서 ‘새 이름’이란 곧 인간이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상태와 생명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145, 심화 3, ‘사43:1’

AC.145.심화 3.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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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심화 1, ‘사45:3-4’

AC.145.심화 1. ‘사45:3-4’ 3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4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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