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께요 하시더군요. 그 생각이 나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사실 그분의 반응 자체보다도 그 반응이 목사님 마음속에서 건드린 지점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은 몇 달에 걸친 작업이었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물이었으며, 목사님에게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기도, 집중과 인내가 녹아 있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건네받은 사람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궁금하면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 한구석에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어쩌면 그분은 목사님이 만든 자료의 가치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듯, 사람은 자기 상태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목마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샘물이 있어도 관심이 없고, 배고프지 않은 사람에게는 양식이 있어도 귀하지 않습니다. 반면 정말 목마른 사람은 우물 하나를 만나기 위해 수십 리를 걸어갑니다. 문제는 우물의 가치가 아니라 목마름의 유무입니다.

 

사실 목사님께서 지난 몇 년 동안 해 오신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종류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설교집도 많고 신학서도 많고 성경공부 교재도 많습니다. 그러나 AC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하여 한국어로 체계화하는 작업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더구나 조회수나 반응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의 박수나 즉각적인 반응을 전제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목사님께서 가끔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구를 위해 그렇게 썼을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그의 책들도 생전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몇 명이 읽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일인가’였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이미 여러 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글은 아무 반응도 없다가 몇 년 뒤 누군가가 연락해 와서 ‘그 글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 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이 박수친 글이 실제로는 아무 열매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영적인 일은 거의 언제나 즉시 결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게요’라는 말은 어쩌면 목사님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ChatGPT는 질문이 있어야 답할 수 있지만, 질문 자체를 만들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AC를 읽지 않으면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목사님이 만드는 해설과 심화는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독자들이 전혀 보지 못했던 질문과 관점을 열어주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검색과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허무함은 오랜 시간 씨를 뿌린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순간에도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창1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의 가치는 그것을 받은 몇 사람의 반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작업은 이미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존재하게 된 진리는 목사님이 잠들어 계신 어느 날에도, 누군가의 검색 결과 속에서, 누군가의 절망 속에서, 누군가의 신앙의 전환점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목사님은 ‘내가 뿌린 씨가 왜 싹이 안 나는가?’를 보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그는 늘 ‘씨를 뿌리는 일’에 충실했지 ‘싹이 언제 올라오는가’를 관리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들려주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저는 목사님의 작업이 사실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순종에 더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들은 대개 세상 기준으로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외로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의 허무함은 어쩌면 작업의 무의미함 때문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야 하는 계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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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2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1-6)

 

 

해설

 

이 단락은 AC.191에서 제시된 내적 구조가 실제 작동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감각 파트, 곧 ‘’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의 차원인 ‘여자’를 먼저 움직입니다. 이는 인간 안에서 감각적 사고가 직접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애정을 흔들어 놓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설득하여 탐구하게 하였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노골적인 부정이나 거절이 아니라, ‘확인해 보자’, ‘정말 그런지 살펴보자’라는 태도를 뜻합니다. 즉, 주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를 신뢰의 영역에 두지 않고, 감각과 이성의 심문 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이 단계의 본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 행위 자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방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바로 이 ‘먹음’에 해당합니다.

 

이때 탐구의 대상은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도덕적 규범이나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본래 내적 지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각으로 확인하려 하자, 이미 질서의 붕괴가 시작된 것입니다. 감각은 이 영역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왜곡됩니다.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3:1-6에 담긴 영적 의미이며,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실제로 굳어지는 지점입니다.

 

AC.192는 결국, ‘왜 인간이 믿지 않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본 원인을 드러냅니다. 믿지 않게 된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자리에 감각과 이성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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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AC.191)

 

여기서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영적 인식의 단절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내적 지각을 통해 진리를 알았으나,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 증거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 전환이 곧 타락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AC.191 해설)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

 

 

네, 맞습니다. AC.191을 깊이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창3의 타락을 단순히 도덕적 범죄나 불순종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타락의 시작을 ‘무엇을 행했는가’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했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감각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그것이 건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C.191을 처음 읽으면 ‘그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감각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심판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 안에서 지각했고, 그다음 감각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살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먼저 있었고, 감각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가장 바깥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AC.191의 상태에서는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제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한가 보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건전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곧 영적 세계의 문을 닫는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면 천국, 사랑, 신앙,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고,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것 전체를 판단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래서 AC.191의 문제는 경험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감각은 원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을 최종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는 감각이 이해를 섬겨야 하는데, 이해가 감각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감각을 비추어야 하는데, 이제는 감각이 주님의 빛을 심사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엄청난 문제인지 AC.195-196에 가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해 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과학주의나 무신론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은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느낌이 와야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본질적으로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먼저 믿고 나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나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고 나서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라고 하신 말씀은 AC.191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사실 창3의 뱀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네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시작은 음란이나 폭력이나 살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훨씬 뒤의 결과들입니다. 가장 처음의 타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감각을 판단하던 사람’이 ‘감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전체는 바로 그 한 번의 방향 전환이 인류에게 얼마나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1은 짧지만, 실은 창3 전체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구절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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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은 여자(woman), 이성적인 부분은 남자(man)로 표현됩니다.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is represented by the “serpent”; the love of self, or their own love, by the “woman”; and the rational by the “man.”

 

 

해설

 

이 단락은 창3의 상징 구조를 가장 직접적으로 풀어 주는 핵심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타락의 출발점을 ‘자기 사랑’에서 찾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인식 방식의 변화를 정확히 짚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출발한 인간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인식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만을 믿게 됩니다.

 

여기서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영적 인식의 단절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내적 지각을 통해 진리를 알았으나,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 증거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 전환이 곧 타락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입니다. 뱀은 악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 사고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감각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하지만, 상위 질서를 잃고 주도권을 쥘 때 거짓의 통로가 됩니다. 따라서 뱀은 가장 낮은 층위의 사고가 가장 높은 판단 기준이 되어 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여자’로 표현되는 것은 자기 사랑, 곧 own의 사랑입니다. 이는 인간의 애정, 곧 사랑의 차원을 가리키며, 여기서 사랑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감각이 주도권을 잡게 된 배경에는 언제나 사랑의 방향 전환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중심을 여자라는 상징에 배치합니다.

 

남자’는 이성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이성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직접 빛을 받는 이성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감각에 영향을 받는 이성입니다. 즉, 이성 자체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떤 사랑과 어떤 기준 아래 놓이게 되었는가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 단락은 창3의 인물들이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뱀, 여자, 남자는 각각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 안에서 질서가 뒤바뀐 상태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이 앞서고, 자기 사랑이 그 감각을 사랑하며, 이성은 그 둘을 합리화하는 구조가 바로 여기서 제시됩니다.

 

AC.191은 따라서 창3을 도덕적 유혹 이야기로 축소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 인식의 질서가 어떻게 전도(顚倒)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영적 진단이며, 동시에 오늘날 인간 상태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AC.191, 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AC.191.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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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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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 창3:1-13, ‘창3:1-13 본문, 개요’(AC.190-193)

창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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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Samuel, the two books of Kings, the Psalms of David, the Prophets Isaiah, Jeremiah, Lamentations, Ezekiel, Daniel, Hosea, Joel, Amos, Obadiah, Jonah,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and in the New Testament the four Gospels, Matthew, Mark, Luke, and John; and Revelation. (AC.10325)

 

평생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3:16)라는 구절을 가지고 신구약 66권을 거룩하게 붙들며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위 AC.10325 글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나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가장 바람직스러울까요?

 

 

제 생각에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즉시 버리지도 말고, 즉시 받아들이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평생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왔고, 그 말씀 안에서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AC.10325를 읽는 순간, ‘, 그러면 내가 평생 믿어 온 것이 전부 틀렸구나’ 하며 자신의 신앙 전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뭐라고 하든 나는 들을 생각도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는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책은 말씀이라 하고, 어떤 책은 그렇지 않다고 했을까?’ 하고 차분히 탐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어떤 책이 거룩하고 어떤 책이 거룩하지 않다는 구분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 서신이나 다른 사도들의 서신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도 교회를 위한 많은 진리와 유익한 가르침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말씀’이라는 용어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곧 글자 뜻 안에 천국의 속뜻이 연속적으로 들어 있으며, 천사들과 인간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신적 구조를 가진 책들을 특별히 ‘말씀’이라 부른 것입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어떤 나라에 왕의 친필 조서와 훌륭한 재상의 편지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귀하고 가치 있으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왕 자신이 직접 반포한 조서와 재상이 기록한 편지는 같은 종류의 문서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 안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AC.10325를 처음 읽은 사람에게 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맞다면 왜 주님은 모세오경과 예언서들, 복음서와 계시록 안에 특별한 속뜻을 두셨을까?’, ‘속뜻이 없다는 것이 곧 영감이 없다는 뜻인가?’, ‘딤후 3:16에서 바울이 말한 모든 성경은 당시 무엇을 가리켰을까?’ 같은 질문들을 품고 천천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딤후3:16이 기록될 당시에는 오늘날의 신약 27권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모든 성경’은 우선적으로 구약 성경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그 구약 안에서도 다시 ‘말씀’과 ‘말씀이 아닌 거룩한 책들’을 구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처럼 이미 여러 해 동안 AC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참된 기독교’를 읽어 오신 분에게는 더욱 신중한 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스베덴보리의 말씀론이 단순한 개인적 주장이나 독단이 아니라, 상응과 표상, 그리고 속뜻이라는 거대한 체계 전체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보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울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왜 성경 안에 서로 다른 층위를 두셨는가’를 묵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결국 가장 건강한 반응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66권 성경을 통해 주님의 인도를 받아 왔다. 그것을 함부로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말씀론에도 귀를 기울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책이 말씀인가를 논쟁하기보다, 그 책들이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먼저 살피겠다.’

 

어쩌면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태도를 가장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씨름한 대상은 ‘잘못된 책 목록’이 아니라 ‘사랑 없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바울 서신만 수천 번 읽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더욱 섬기게 되었다면 그는 주님께 가까워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씀의 속뜻을 줄줄 외우고 상응을 논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직 말씀의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국 최종적인 판단 기준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보다 ‘그 책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SC.95, ‘궁금한 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께요’

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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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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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SC.92)

 

... 생각해 보니, 제가 사도들의 편지들, 특히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첫째, 스베덴보리의 참된 기독교에 나오는, 영계에서 만나본 바울의 모습 때문이고, 둘째,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뤘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이것은 단순히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읽지 않는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목사님 안에서는 지난 8, 9년 동안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거대한 신학적 질서와,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익숙했던 개신교적 신학 체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매우 현실적인 고민으로 보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인 바울 개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났고, 그에 대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가운데 바울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바울의 상태와,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역사 가운데 이루신 섭리는 반드시 동일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다윗의 개인적 약점과 시편의 영감은 같은 문제가 아니며, 베드로의 실수와 사도적 사명도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본 바울의 모습만으로 바울 서신 전체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가 훨씬 더 핵심적으로 들립니다. 목사님은 ‘그의 서신들이 나름 또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발 담그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뒤죽박죽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바로 이 부분이 현재 목사님의 실제 심정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지금 단순히 책 몇 권을 읽고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AC 번역과 해설, 그리고 심화를 수년 동안 계속해 오시면서 인간, 천국, 지옥, 자유, 체어리티, 신앙, 거듭남, 상응에 관한 하나의 유기적 세계관을 이미 마음속에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전통적인 개신교 방식으로 읽기 시작하면 곧바로 ‘오직 믿음’, ‘행위가 아닌 은혜’, ‘율법이 아닌 신앙’ 같은 익숙한 문장들이 따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 자체보다도 그 본문을 둘러싼 수백 년의 해석 전통이 함께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목사님은 바울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들어오는 특정한 신학 체계를 경계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울을 해석하는 오래된 프레임이 문제인 것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바울의 말을 인용합니다. 다만 그는 바울을 중심에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 곧 창세기와 예언서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에 두고, 그 빛 아래에서 바울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을 읽어도 개신교 신학자와 스베덴보리가 보는 초점은 달라집니다. 개신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에 주목할 때, 스베덴보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앙’에 주목합니다. 개신교가 ‘행위가 아니다’에 무게를 둘 때, 스베덴보리는 ‘새 사람을 입으라’, ‘선을 행하라’, ‘육체를 죽이라’ 같은 구절들을 함께 봅니다.

 

따라서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건강하지 못하다기보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오랫동안 한 체계 안에 있다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일정 기간 이전 체계로부터 거리를 두게 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의 설교와 신학을 접해 오신 분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바울을 닫아 두는 것’보다는 ‘말씀의 빛 아래에서 바울을 다시 읽는 것’이 더 안정적인 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진리와 충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히신 내용이 참이라면, 바울 안에 있는 참된 진리 역시 결국 그와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충돌하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형성된 특정한 신학 체계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십시오. 복음서와 창세기와 계시록을 가장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나 바울을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바울을 주님보다 앞에 세우지만 마십시오.’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리감은 바울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 과거의 신학 체계가 다시 자신 안으로 들어와 질서를 흐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현재 목사님의 여정 안에서는, 그 조심스러움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존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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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2,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에 대한 태도’

‘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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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목사님, 제 생각에는 이것은 ‘건강하다’ 혹은 ‘건강하지 않다’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하게 되는 단계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The Word)에 대한 가르침을 처음 깊이 접하면 충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선지서, 복음서, 계시록 안에는 천국과 주님에 관한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데, 다른 성경책들에는 그런 의미의 아르카나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굳이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생깁니다. 사실 목사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의 스베덴보리 독자들 가운데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이 ‘말씀’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쓸모없다’거나 ‘권위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존중했고, 바울의 글 안에도 교회를 위한 유익한 가르침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천국과 지상을 연결하는 내적 구조를 가진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성전과 같고, 바울 서신은 그 성전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훌륭한 신학서와 같습니다. 둘은 중요성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학서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목사님의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 약간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과거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 많은 설교가 바울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보다 로마서를 더 읽고, 복음서보다 갈라디아서를 더 읽고, 주님의 말씀보다 교리 체계를 더 읽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그 반작용으로 ‘이제는 복음서와 창세기만 보겠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은 언제나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든 진리를 결국 주님께로부터 보았고, 모든 성경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단지 중심과 주변을 구분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을 중심에 두어라. 그러나 다른 성경도 경시하지 말라.’

 

복음서를 태양으로 삼아라. 그러나 다른 책들을 어둠으로 취급하지 말라.’

 

내적 의미가 없는 책이라 하여 주님께서 그것을 헛되이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특히 주일설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시면서 이미 체험하셨듯이, 창세기 한 절 속에는 바울 서신 한 장보다 훨씬 깊은 영적 세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중심 설교로 이동하신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어쩌면 스베덴보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바울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별로 읽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굳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편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경계한 것 중 하나가 ‘부분 진리를 전체 진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인지입니다.

 

사실 후자의 비중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바울 중심 설교를 들었고 하셨습니다. 반면 AC와 ‘말씀’의 속뜻은 이제야 발견한 거대한 대륙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태 자체는 건강하지 않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입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말씀을 중심에 두되, 나머지 성경도 주님의 섭리 아래 있는 귀한 증언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가장 스베덴보리다운 균형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베덴보리가 목사님의 강단에 직접 올라온다면 아마 바울을 거의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바울을 폄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창세기와 복음서와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바울을 인용하여 ‘보십시오. 바울도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목사님이 ‘말씀’을 중심에 두게 된 것은 건강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중심에 둔다’와 ‘나머지를 멀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권했을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권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아래는 신구약 66권 중 스베덴보리가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는 성경 목록입니다.

 

 

SC.94, ‘AC.10325를 읽는 가장 바람직스러운 태도’

The books of the Word are all those which have an internal sense; and those which have not an internal sense are not the Word. The books of the Word in the Old Testament are the five books of Moses, the book of Joshua, the book of Judges, the two book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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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3, ‘바울 서신을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이유’

‘제가 오히려 궁금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금 바울 서신을 멀리하게 된 이유가 ‘말씀이 아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영혼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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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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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심화

 

2. ‘태고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상태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다루어지는데, The third stat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treated of, (AC.190)

 

 

죄송하지만, 여기서 앞에서 다룬 태고교회의 첫 번째, 두 번째 상태에 대한 설명 좀 다시 부탁드립니다.

 

 

AC.19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첫 번째 상태와 두 번째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은 사실상 태고교회의 형성과 변화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장이며, 창세기 3장은 그 마지막 단계와 전환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190 세 번째 상태’는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창2 전체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첫 번째 상태는 창2:7의 상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 해당합니다. 이 상태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는 생명이 없고,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자신의 proprium, 곧 자신의 own이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의 인간은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로 압니다.

 

두 번째 상태는 에덴동산의 상태입니다. 2:8 이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제 인간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합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진리를 배우고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즉시 압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그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았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황금기입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강들, 아름다운 나무들은 모두 이 풍성한 천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2 후반부에 이르면 한 가지 경고가 주어집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먹지 말라’, ‘만지지도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아직 타락이 시작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위험이 이미 시야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창3:1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세 번째 상태입니다. AC.190은 이것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own을 몹시 원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의 own은 재산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온 생각, 판단, 의지, 지혜를 뜻합니다.

 

첫 번째 상태에서는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였습니다. 두 번째 상태에서는 나는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산다’였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상태에서는 그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 ‘내가 스스로 판단해 보겠다’가 시작됩니다. 아직 선악과를 먹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타락은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중심이 아주 미세하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AC.191부터 뱀이 등장합니다. 뱀은 감각적인 부분을 뜻합니다. 이제 인간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신앙을 검토하려고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AC.204 이하에서 보듯, ‘하나님과 같이 되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세 상태를 가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상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에덴의 상태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신앙을 자기 판단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AC.190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번째 상태를 아직 악한 상태’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그들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숨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사랑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창3은 죄를 지은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3은 먼저 사랑의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AC.190에서 말하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의 핵심입니다.

 

 

 

AC.190, 창3:1-13, ‘창3:1-13 본문, 개요’(AC.190-193)

창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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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0, 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AC.190.심화 1.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의 own’으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표현을 ‘자신의 own’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AC.190)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AC를 처음 읽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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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특히 칼빈주의나 복음주의 배경에서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 안에 악한 영이 함께 있다’는 말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먼저 설명하기보다, 성경 자체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악한 영이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늘 선과 악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신자라 해도 영적 긴장과 시험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는 성경도 인정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면 대화가 ‘악한 영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신자가 어떻게 시험을 받는가’라는 성경적 주제로 옮겨집니다.

 

그다음에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항상 천국의 영향과 지옥의 영향 사이에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사 둘과 악한 영 둘은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사람은 영적으로 중립 지대에 서 있으며,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양쪽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악한 영이 어떻게 함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신자는 왜 여전히 유혹을 받습니까? 왜 죄와 싸웁니까? 왜 바울은 육체와 성령의 싸움을 말합니까?’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싸움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의 영향이 만나는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목사님은 틀렸습니다’라는 식으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교수급 신학자는 반론을 준비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들을 읽으며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 대화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사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강력한 논거는 따로 있습니다.

 

만약 거듭난 사람 안에 더 이상 악의 영향이 전혀 없다면, 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 합니까? 왜 성화가 평생 계속됩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하려고 천사들과 영들의 지속적인 동행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과 악령이 한 집에 함께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의 과정을 설명하는 영적 구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 칼빈주의 교수님이라면 ‘악한 영 둘, 천사 둘’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평생 영적 전쟁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신다’는 지점까지는 의외로 상당 부분 공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표현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그 표현이 설명하려는 ‘자유와 시험의 원리’를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SC.92, ‘그 안에 아르카나가 없는 성경들에 대한 태도’

‘말씀’(The Word)에 대해 알고 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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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0,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니다?’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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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해도 될까요?

 

 

목사님, 그 표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목사님이 말씀하시려는 뜻이 ‘스베덴보리는 현재의 개신교나 가톨릭, 정교회가 이해하는 전통적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릅니다’라는 의미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이해, 이신칭의, 대속 개념, 예정론, 성경 해석 방식, 사후 세계 이해 등에서 전통 기독교와 매우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스베덴보리는 기존 기독교의 한 분파라기보다, 기독교를 근본부터 다시 해석한 체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단정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은 평생 자신을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야말로 주님께서 세우신 참된 기독교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일에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대표 저작 제목 자체가 ‘True Christian Religion’, 곧 ‘참된 기독교’입니다. 그는 새 종교를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없고, 오히려 기독교 안에 잃어버린 진리를 회복한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교수님 같은 칼빈주의자 앞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목사님, 스베덴보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개신교 신학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기독교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자신은 오히려 참된 기독교를 회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불필요한 오해를 줄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칼빈주의 교수님은 이미 스베덴보리를 ‘기독교 밖’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입에서 먼저 ‘사실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말해 버리면, 그 순간 대화는 끝나 버릴 수 있습니다. 상대는 ‘그렇다면 더 들을 이유가 없군요’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식 접근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저는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서 주님, 거듭남, 천국, 사랑,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해석이 우리가 배워 온 신학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최소한 ‘얼마나 다른데?’ 하고 들어 볼 여지는 남깁니다.

 

실제로 목사님이 오랫동안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셨듯이, 스베덴보리의 핵심은 ‘기독교를 버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더 깊이 이해하자’입니다. 다만 그 결과가 기존 교회 신학과 너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아니다’보다는 ‘전통적 기독교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기독교 해석이다’ 정도가 훨씬 정확하고 생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SC.91,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모든 사람에게는 천사 둘, 악한 영 둘이 와 있다’는 말에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시는데 어떻게 악한 영이 같이 있을 수 있나?’ 하시는 경우 그 질문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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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9, ‘캘빈주의자 침례교 목사님 앞에서’

침례교 목사님이시면서도 자신을 캘빈주의자라며, 그의 5대 교리(TULIP)를 굳게 믿는다 자랑스러워 하기까지 하시는, 신학교에서 교수도 하시는 분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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