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8

 

말씀은 말씀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다

The Word cannot be understood except by means of doctrine from the Word.

 

 

교회의 교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3464, 5402, 6832, 10763, 10765). 교리 없이 말씀은 이해되지 않는다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참된 교리는 말씀을 읽는 자들에게 등불과 같다 (10401). 참되고 순수한 교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사람들(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로부터 나와야 한다 (2510, 2516, 2519, 2524, 10105). 말씀은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에 의해 이해된다 (10324). 열린 자들은 스스로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다 (9382, 10659). 교회의 교리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과, 말씀의 겉뜻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보라 (9025). 교리 없이 말씀의 겉뜻 안에만 있는 자들은 신적 진리에 관한 어떤 이해에도 이르지 못한다 (9409, 9410, 10582). 그들은 많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10431). The doctrine of the church must be from the Word (n. 3464, 5402, 6832, 10763, 10765). The Word without doctrine is not understood (n. 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True doctrine is a lamp to those who read the Word (n. 10401). Genuine doctrine must be from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from the Lord (n. 2510, 2516, 2519, 2524, 10105). The Word is understood by means of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n. 10324). They who are in enlightenment form for themselves doctrine from the Word (n. 9382, 10659).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those who teach and learn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alone (n. 9025). They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 without doctrine, do not come into any understanding concerning Divine truths (n. 9409, 9410, 10582). They may fall into many errors (n. 10431).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이해로 볼 수 있게 되면, 단지 자기 교회의 교리 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참된지 아닌지를 말씀으로부터 살핀다 (5402, 5432, 6047).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자기 출생지로부터 진리를 갖게 될 것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든 헬라인으로 태어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6047). 그러나 말씀의 겉뜻으로부터 신앙에 관한 것이 된 그런 것들은 충분히 살핀 뒤에야 비로소 버려야 하며, 성급히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9039). They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when they become adults, and can see from their own understanding, do not simply abide in the doctrinals of their churches, but examine from the Word whether they be true or not (n. 5402, 5432, 6047). Otherwise everyone would have truth from another, and from his native soil, whether he were born a Jew or a Greek (n. 6047). Nevertheless such things as are become matters of faith from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are not to be extinguished till after a full view (n. 9039).

 

교회의 참된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다 (2417, 4766, 10763, 10765). 신앙의 교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가 교회를 이룬다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교리들은 사람이 그것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들이 단지 기억과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1515, 2049, 2116).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신앙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도덕 철학이라 불리는 학문으로 밀려나 거절되고 있다 (2417).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삶, 곧 체어리티로 인정받는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 것이다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체어리티의 교리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교리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지 보라 (4844). 체어리티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천적인 것들에 대하여 무지 가운데 있다 (2435). 오직 신앙의 교리만을 붙들고 체어리티의 교리는 붙들지 않는 자들은 오류에 빠지는데, 다음에 그 오류들이 또한 묘사되어 있다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The true doctrine of the church is the doctrine of charity and faith (n. 2417, 4766, 10763, 10765). The doctrine of faith does not constitute the church, but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n. 809, 1798, 1799, 1834, 4468, 4677, 4766, 5826, 6637). Doctrinals are of no account, unless one lives according to them; and everyone may see they are for the sake of life, and not merely for the memory and thought thence derived (n. 1515, 2049, 2116). In the churches at this day the doctrine of faith is taught, and not the doctrine of charity, the latter being rejected to a science, which is called moral philosophy (n. 2417). The church would be one, if they should be acknowledged as men of the church from the life, thus from charity (n. 1285, 1316, 2982, 3267, 3445, 3451, 3452). How much superior the doctrine of charity is to that of faith separate from charity (n. 4844). They who know nothing concerning charity, are in ignorance with respect to heavenly things (n. 2435). They who only hold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that of charity, fall into errors; which errors are also described (n. 2383, 2417, 3146, 3325, 3412, 3413, 3416, 3773, 4672, 4730, 4783, 4925, 5351, 7623–7677, 7752–7762, 7790, 8094, 8313, 8530, 8765, 9186, 9224, 10555).

 

오직 신앙의 교리 안에만 있고,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 안에는 아닌 자들을 가리켜 옛날에는 ‘무할례자’(the uncircumcised), 혹은 ‘블레셋 사람’(Philistines)이라고 불렀다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고대인들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교리를 붙들었고, 신앙의 교리를 그것에 종속시켰다 (2417, 3419, 4844, 4955). They who are only in the doctrine of faith, and not in the life of faith, which is charity, were formerly called the uncircumcised, or Philistines (n. 3412, 3413, 3463, 8093, 8313, 9340). The ancients held the doctrine of love to the Lord and of charity towards the neighbor, and made the doctrine of faith subservient thereto (n. 2417, 3419, 4844, 4955).

 

열린 자가 형성한 교리는 그 후에 이성과 학문적인 것들에 의해 확증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 충만히 이해되고 굳게 세워진다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이 주제에 관하여는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51번을 보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은 교회 안의 교리적인 것들은 무슨 이성적 통찰 없이 그저 단순히 믿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3394). Doctrine formed by one enlightened may afterwards be confirmed by things rational and scientific; and that thus it is more fully understood, and is corroborated (n. 2553, 2719, 2720, 3052, 3310, 6047). See more on this subject in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51). They who are in faith separate from charity would have the doctrinal of the church simply believed, without any rational intuition (n. 3394).

 

지혜로운 사람의 표지는 교리를 확증하는 데 있지 않고, 그전에 먼저 그것이 참인지를 보는 데 있다. 이것이 열린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경우다 (1017, 4741, 7012, 7680, 7950). 확증의 빛은 자연적 빛이다. 영적 빛이 아니며, 심지어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다 (8780). 모든 것, 심지어 거짓까지도 진리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주 단단히 확증될 수 있다 (2482, 2490, 5033, 6865, 8521). It is not the mark of a wise man to confirm a dogma, but to see whether it be true before it is confirmed; and that this is the case with those who are in enlightenment (n. 1017, 4741, 7012, 7680, 7950). The light of confirmation is a natural light, and not spiritual, and may exist even with the evil (n. 8780). All things, even falsities, may be so far confirmed, as to appear like truths (n. 2482, 2490, 5033, 6865, 8521).

 

 

해설

 

말씀은 거룩하지만, 그 거룩함이 사람에게 자동으로 이해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말씀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길어 올린 질서 있는 진리의 체계가 있어야 비로소 말씀의 세부들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고, 말씀은 광대한 땅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이 광야에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듯, 교리 없이 말씀을 읽으면 각 구절이 흩어져 보이거나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의 사유에서 임의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열림은 주님께서 이해의 내면, 곧 속을 여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단순한 학문적 산물이 아니라, 삶과 사랑의 질서 속에서 주님께 인도받으며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교리만이 등불처럼 말씀을 밝혀 줍니다. 반대로 글자만 붙들고, 즉 말씀을 겉뜻으로만, 그리고 교리 없이 읽으면 사람은 자기 애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심지어 거짓도 진리처럼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교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으로 그것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반항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태어난 문화와 전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자기 교회 진리’를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신중함을 요구합니다. 겉뜻으로 보고 신앙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들은 충분히 살피기 전에는 성급히 버려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검토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입니다.

 

이 WH.8의 중심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의 참 교리는 체어리티와 신앙의 교리이지만,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것은 신앙의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삶’, 곧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이 머리에만 머물면 교회는 분열되지만, 체어리티가 삶이 되면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고대 교회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에 두고 신앙을 그에 종속시켰다는 말은, 교리의 중심이 사랑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블레셋과 같고, 지식은 있어도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열림(enlightenment) 가운데 형성된 교리는 이후 이성과 학문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질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열림이 있고, 그다음 이성적 확증이 있지만, 반대로 먼저 확증하고 나중에 진리를 찾으려 하면, 그것은 자연적 빛 안에서의 논증, 논쟁에 머무를 뿐입니다. 확증의 빛은 악한 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모든 거짓도 체계적으로 세워지면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확증할 것인가를 먼저 묻지 않고, 그것이 참인가를 먼저 봅니다. 이것이 열린 자의 표지입니다.

 

결국 WH.8은 말씀과 교리, 사랑과 신앙, 열림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근원이고, 교리는 그로부터 나오며, 체어리티는 교리를 살아 있게 하고, 열림은 그 모든 것을 올바른 질서 안에 두는 하늘의 빛입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만 말씀은 이해되고, 교회는 실제가 됩니다.

 

 

 

WH.7, '말씀은 열린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WH.7 말씀은 열린(enlightened)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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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거듭남의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몰래 간직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 양심의 흔적, 말씀을 들으며 잠시 감동받았던 기억,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겉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빛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 사람이 아직 자기 본성과 세상 사랑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고, 세상적 성공과 자아 만족을 선이라고 여기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활동할 공간이 없습니다. 햇빛은 이미 떠 있지만, 짙은 안개가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겉의 일들이 황폐해진다’는 말은, 인생이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겉 사람의 자만과 자기 신뢰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실패, 상실, 유혹, 고난, 양심의 가책 같은 경험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의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겉 사람의 주장들이 잠잠해집니다. AC에서는 이것을 ‘황폐’ 또는 ‘정적 상태’라고 부릅니다. 겉의 소리가 낮아질 때, 속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겉 사람의 허위와 교만이 약해질 때,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비로소 작용합니다. 그때 사람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선은 선이지’, ‘그래도 진리는 중요하지’,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등, 이런 깨달음이 바로 리메인스가 빛 가운데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법칙과 같습니다. 낮이 오기 전에는 밤이 있습니다. 씨앗이 싹트기 전에는 껍질이 갈라집니다. 겉 사람의 확신이 무너지지 않으면, 속 사람의 생명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 우리 인생을 ‘조용히 비우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리메인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 사람이 아무리 거칠어도, 주님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겉의 강한 집착이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AC.19에 나오는 저 표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혹 지금 어떤 황폐를 겪고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이 조용해질 때, 속 사람 안의 리메인스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실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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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와 찬63,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입니다.

 

오늘부터 해설 버전 누락분 창세기 1장부터 3장입니다. 창3 마치면 창6으로 원래대로 이번엔 쭈욱 나갑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창1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16번에서 1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1, 2)

 

 

이 본문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AC)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오늘은 창1:1-2에 해당하는 AC.16-19를 그 번역과 해설로 접하면서, 거의 설교와도 같은 해설의 어떠함을 다시 한번 맛보고, 거기서 우리 모두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러 곳에서 이것은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는 또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남을 의미하지만,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 속에 만드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시는데, 역시 이사야를 보면,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 heaven)은 거듭나기 전 속 사람(the internal man), (, earth)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1절의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는 표현을 시간적 최초의 순간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출발점’으로 해석합니다. ‘태초’는 태고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하는 첫 시기를 포함합니다. 즉, 창세기의 ‘태초’는 역사 속 한 시점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현실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그 사람만의 ‘태초’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 시기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 혹은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한다는 설명은, 이 상태가 단순히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질서’에 속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태고의 상태는 연대기적으로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곧 영원의 질서가 인간 안에 처음 세워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태초’, 곧 ‘시작’을 사람의 거듭남의 첫 시기와 직접 연결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단순히 이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변화나 성장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반드시 ‘새 창조’라는 표현이 필요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거듭남이 전면적인 전환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지서에 나오는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 같은 표현들이 거의 언제나 거듭남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표현들은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데,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그리고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킵니다. 이 차이는 이후에 더 자세히 다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원칙 하나가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창조의 언어는 곧 거듭남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를 창조하시고, 지으시며,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 곧 주님의 신성과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영적 재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속자이시며, 태에서부터 지으시는 분이시고, 만드시는 분이시며, 창조자이십니다. 이 모든 호칭은 주님의 다양한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 인간의 거듭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말해 주는 표현들입니다.

 

시편의 인용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새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됨을 뜻합니다. 또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인간의 외적 삶, 곧 ‘지면’까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내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표면까지 갱신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리를 예고합니다. ‘(, heaven), 곧 ‘하늘’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 earth), 곧 ‘’은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가 곧 인간 내면의 구조를 가리킨다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하늘과 땅은 우주의 두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두 차원입니다. 이 해석이 이후 글들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창세기 전체가 인간 거듭남의 지도임이 점점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AC.16은 창세기의 ‘시작’을 역사와 인간을 동시에 꿰뚫는 개념으로 제시합니다. 태고의 시대, 거듭남의 첫 시기, 새로운 창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적 질서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표현들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시작의 주체이시며, 인간의 영적 삶은 언제나 그분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리고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과정 시작 전 인간의 상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는 이 상태의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겉 사람을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거듭남 과정 시작 전의 겉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활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경작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지요.

 

혼돈(void)과 ‘공허(empty)의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혼돈’은 선의 부재(不在)를, ‘공허’는 진리의 부재를 뜻한다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근원에 참된 선과 진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도 많은 일을 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자연적 근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일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선이 아니며, 외적으로는 진리처럼 보일 수 있어도 실제로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흑암(thick darkness)입니다. 이 어둠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나 교육의 결핍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어리석음(stupidity)과 ‘무지(ignorance)라고 부르는데, 특히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것들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어둠은 영적 무감각의 상태이며, 영적, 천적 삶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서 세상일에는 매우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눈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상태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기중심과 세상 중심을 향해 있을 때, 그것은 영적 선을 향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지혜는 결국 어둠의 일부가 됩니다.

 

이어지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매우 결정적입니다. 앞서 AC.16에서 예고된 것처럼, ‘하늘’은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 이전의 인간에게도 속 사람은 존재하지만, 그 안에 빛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 사람은 잠재적으로는 있으나, 아직 주님의 빛으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영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전제하면서도, 그 가능성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필요성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단지 조금 더 나아지거나, 조금 더 선해지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의 땅에는 새로운 씨가 뿌려져야 하고, 흑암 속에는 빛이 비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빛의 창조가 그토록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묘사가 특정 집단이나 시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이전의 모든 인간, 즉 아직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배경이나 도덕적 성취와 무관하게, 주님의 생명이 실제로 유입되기 전의 인간은 영적으로는 공허하고 비어 있습니다. 이 인식은 인간의 교만을 꺾는 동시에, 주님의 자비를 향한 문을 엽니다.

 

결국 AC.17은 인간을 절망 속에 몰아넣기 위한 설명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입니다.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치유가 시작되듯,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공허하고 어둡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빛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글에서 설명될 주님의 자비로운 역사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AC.18

 

깊음(the 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 그로 말미암는 거짓을 뜻하며, 사람은 전적으로 이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그것들 속에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그는 빛이 없으므로, 깊음(deep), 곧 어둡고 혼란한 어떤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 여러 곳에서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사람의 거듭남 이전에 그것들은 마르거나(dried up) 황폐해집니다(wasted). 다음 이사야 말씀처럼 말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러한 사람은 또한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를 포함하는데, 이는 거듭남에 앞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참된 것을 알 수 있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기 전에,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2절에 나오는 ‘깊음(the faces of the deep)을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상태로 해석합니다. ‘깊음’은 단순히 깊은 바다나 혼돈의 어떤 상태를 뜻하는 대신, 거듭나지 않은 인간이 전적으로 잠겨 있는 욕정과 거짓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욕정(cupidities)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삶의 근원적 지향을 뜻합니다. 이 욕정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들이 발생하며, 사람은 그것들로 구성된 존재가 됩니다.

 

이 상태의 핵심 특징은 ‘빛이 없음’입니다. 빛이 없다는 것은 진리가 없다는 뜻이고, 진리가 없다는 것은 방향과 분별이 없다는 뜻이며, 그래서 이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참된 질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깊음’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깊은 바닷속에서는 위와 아래, 앞과 뒤의 감각이 사라지듯, 이 상태의 인간은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말씀에서 ‘깊음’이나 ‘바다의 깊은 곳’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깊음이 거듭남 이전에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히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거하고 비우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깊은 물이 그대로 있는 한, 그 위에 새로운 질서는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력한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주님은 큰 깊음의 물들을 마르게 하시고, 바다의 깊은 곳들을 속량 받은 자들이 건너갈 길로 만드십니다. 이는 욕정과 거짓으로 가득 찬 상태 자체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를 구원의 통로로 바꾸시는 주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깊음을 단순히 덮어만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과 가능한 길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적인 전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한 이 상태의 인간은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인간의 외적 활동성, 즉 겉모습,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실재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매우 활발하고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영적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국의 빛 아래에서 아무런 생명도 없는 덩어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낮추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합니다. 황폐는 파괴가 아니라 준비입니다.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황폐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기 위해 기존의 방해 요소들이 제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기 전에, 또 선한 것에 의해 실제로 감동되기 전에, 그 유입을 가로막는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는 어떤 진리도 깊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옛 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의 근원이 더 이상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죽음이 있어야만, 새 생명이 잉태될 공간이 생깁니다. AC.18은 이처럼 거듭남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관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 과정 전체가 주님의 구원 사역 안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19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2절의 가장 따뜻하면서도 깊은 표현, 곧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을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능력이나 심판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무엇보다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로 해석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두려움이나 강제에서가 아니라, 보호하고 살리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암탉이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하는데요, 알은 아직 생명이 드러나지 않았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생명의 가능성이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 이전의 인간 안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이미 심어 두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주님의 자비는 그 가능성 위에 머무르시며, 서두르지 않으시고, 억지로 깨뜨리지도 않으시며, 적절한 때까지 조용히 품으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대상은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보았듯이, 물은 진리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물은 아직 빛 가운데 드러난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신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 곧 리메인스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기억하거나 소유한다고 느끼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삶의 여러 순간 속에서 조용히 저장해 두신 내적 보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가 외적인 것들, 곧 사람의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활발하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외적인 것들이 약화되고, 침묵하게 되는 시간을 허용하시며, 그 이후에야 리메인스를 실제로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AC.18의 ‘황폐’와 AC.19의 ‘운행’은 정확히 맞물립니다. 황폐는 비워내는 과정이고, 운행은 보호하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주님은 한편으로는 옛사람의 욕정과 거짓을 약화시키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리메인스를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품고 계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시점이야말로 거듭남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내적 역사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수면’, 곧 ‘물의 얼굴’이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얼굴은 드러난 표면이면서 동시에 방향을 나타냅니다. 즉, 리메인스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주님을 향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바로 그 방향성 위에서 운행하십니다. 이때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어요. 오히려 더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인간의 의식적 결단이나 열심보다 훨씬 이전에, 훨씬 깊은 차원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은 이미 사람을 품고 계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기 전에, 주님은 이미 진리의 씨앗을 보존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주님의 하강으로 시작됩니다.

 

결국 AC.19는 거듭남의 가장 은밀한 근원을 드러냅니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주님의 자비이며, 그 자비는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운행하십니다. 이 인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지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진전도 없어 보일 때조차, 주님의 영은 여전히 수면 위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네, 이상입니다. 어떻습니까?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AC 원문 번역과 특히 그 해설을 그대로 읽었는데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해설 없이 읽을 때는 정말 어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설로 풀어 주니까 글 하나하나가 다 무슨 설교 같지 않으신지요? 이 AC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좀 더 와닿게 풀어 번역할 수 있을까 거의 6, 7년을 솔직히 몸부림을 쳐온 저로서는 뒤늦게 이 ChatGPT라는 AI의 도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이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 그래도 이 AI의 초벌 결과물을 문장 하나하나, 사용된 단어, 표현 하나하나의 적절함과 적당함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을 그동안 주님은 제 안에 조성하셔서, 이 AI로 하여금 본연의 비서 역할에만, 도우미 역할에만 머무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의외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주님께 감사하고, 그래서 이 ChatGPT라는 AI를 믿고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유능한 비서가 생기는 바람에 그동안 엄두도 못 냈던 나머지, 그러나 무척 중요한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들 역시 부지런히 번역 및 해설 작업을 병행, 제 블로그(https://bygrace.kr)에 수시로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지난주 새롭게 시작한 저작들은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1758, LJ), ‘백마(白馬, White Horse, 1758, WH) 등인데, 이 비교적 짧은 글들은 AC가 배경으로 깔고 들어가는 다른 중요한 개념들을 매우 깊고 넓게 다져 주는 글들입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의 내면은 탄탄한, 그리고 빛나는 계시의 지식으로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도 너무 많은 분량만 아니면 가급적 AC를 원본 및 해설 그대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말이 해설이지 형식만 조금 고치면 그대로 설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해설 없이 원본만 읽던 시절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런 우리의 우직한 모습을 기뻐하신 주님의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AC.10578, 10645, 10829)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15(D1)

 

2638, 1. 창1.1, 2026-02-15(D1)-주일예배(창1,1-2, AC.16-1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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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7

 

말씀은 열린(enlightened)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물론, 심지어 영적인 것들조차 이해할(comprehend) 수 없습니다 (n. 2196, 2203, 2209, 2654). 그러므로 열린 자들만이 말씀을 이해합니다 (n. 10323). 주님은 열린 자들로 하여금 진리들을 이해하게(understand)하시고,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분별하게(discern) 하십니다 (n. 9382, 10659).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관되지 않게 보이고, 어떤 곳에서는 스스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n. 9025). 그러므로 열리지 않은 자들에 의해, 그들이 어떤 의견이나 이단을 확증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세속적, 육체적 사랑을 변호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n. 4738, 10339, 10401). The human rational faculty cannot comprehend Divine, nor even spiritual things, unless it be enlightened by the Lord (n. 2196, 2203, 2209, 2654). Thus they only who are enlightened comprehend the Word (n. 10323). The Lord enables those who are enlightened to understand truths, and to discern those things which appear to contradict each other (n. 9382, 10659). The Word in its literal sense appears inconsistent, and in some places seems to contradict itself (n. 9025). And therefore by those who are not enlightened, it may be so explained and applied, as to confirm any opinion or heresy, and to defend any worldly and corporeal love (n. 4738, 10339, 10401).

 

진리와 선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만, 명예나 이익, 영광을 사랑하여, 곧 자기 사랑으로 말씀을 읽는 자들은 열리지 않습니다 (n. 9382, 10548–10550). 선한 삶 가운데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진리에 대한 애정 안에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8694). 자기의 내면이 열려 있는 자들, 곧 그 속 사람이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질 수 있는 자들이 열립니다 (n. 10401, 10402, 10691, 10694).열림(Enlightenment)이란 실제로 마음의 내적 부분이 열리는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입니다 (n. 10330). 말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더라도, (the internal), 곧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것이 흘러 들어옵니다 (n. 6789).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 곧 자기 자신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자들만이 열려 말씀 안에서 진리들을 봅니다 (n. 10638). 진리를 진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신적 진리들에 따라 살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입니다 (n. 10578, 10645, 10829). 말씀은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삶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납니다 (n. 1776). 자기 자신의 지성에서 나온 것들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한테 고유한 것, 즉 인간의 본성(proprium)으로부터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n. 8941, 8944). 거짓 교리를 많이 확증해 온 자들은 열릴 수 없습니다 (n. 10640). They are enlightened from the Word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truth and good, but not they who read it from the love of fame, of gain, or of honor, thus from the love of self (n. 9382, 10548, 10549, 10550) They are enlightened who are in the good of life, and thereby in the affection of truth (n. 8694). They are enlightened whose internal is open, thus who as to their internal man are capable of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401, 10402, 10691, 10694). Enlightenment is an actual opening of the interiors of the mind, and also an elevation into the light of heaven (n. 10330). There is an influx of holiness from the internal, that i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with those who regard the Word as holy, though they themselves are ignorant of it (n. 6789). They are enlightened, and see truths in the Word, who are led by the Lord, but not they who are led by themselves (n. 10638). They are led by the Lord, who love truth because it is truth, who also are they that love to live according to Divine truths (n. 10578, 10645, 10829). The Word is vivified with man according to the life of his love and faith (n. 1776). The things derived from one’s own intelligence have no life in themselves, because from man’s proprium there is nothing good (n. 8941, 8944). They cannot be enlightened who have much confirmed themselves in false doctrine (n. 10640).

 

열리는 것은 이해입니다 (n. 6608, 9300).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n. 6242, 6608, 10659). 교회의 모든 교리에 관하여, 이해의 관념들(ideas)과 그로부터 나오는 사유(the thought)의 관념들이 있으며, 그에 따라 교리가 지각됩니다(perceived) (n. 3310, 3825).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의 관념들은 자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연적 관념들 안에 영적 관념들이 감추어져 있으며, 인간은 죽은 후 그 영적 관념들 안으로 들어갑니다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어떤 주제에 관하여 이해와 그로부터의 사유의 관념이 없이는 어떠한 지각도 있을 수 없습니다 (n. 3825). It is the understanding which is enlightened (n. 6608, 9300). The understanding is the recipient of truth (n. 6242, 6608, 10659). In regard to every doctrine of the church, there are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according to which the doctrine is perceived (n. 3310, 3825). The ideas of man during his life in the world are natural, because man then thinks in the natural; but still spiritual ideas are concealed therein with those who are in the affection of truth for the sake of truth, and man comes into these ideas after death (n. 3310, 5510, 6201, 10236, 10240, 10550). Without idea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thought thence, on any subject, there can be no perception (n. 3825).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관념들은 내세에서 드러나며, 그 어떠함(quality)이 천사들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관념들이 사랑의 애정에서 나오는 정도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n. 1869, 3320, 5510, 6201, 8885). 그러므로 이성적 인간이 아니고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없이, 그 주제에 대한 이성적 통찰도 없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지각과 애정의 생명이 전혀 없는 말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n. 2533).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열리는 걸 허용합니다 (n. 3619, 9824, 9905, 10548). Ideas concerning the things of faith are laid open in the other life, and their quality is seen by the angels, and man is then conjoined with others according to those ideas, so far as they proceed from the affection which is of love (n. 1869, 3320, 5510, 6201, 8885). Therefore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a rational man; for to believe anything without an idea thereof, and without a rational view of the subject, is only to retain in the memory words destitute of all the life of perception and affection, which is not believing (n. 2533). It is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which admits of enlightenment (n. 3619, 9824, 9905, 10548).

 

 

해설

 

이 글은 ‘백마’의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백마는 이해였고, 이제 그 이해가 어떻게 열리는지가 설명됩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으로 신적 진리를 꿰뚫을 수 없습니다.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능력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유입입니다. 말씀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도, 열릴 때 비로소 질서 안에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난해함은 결함이 아니라, 열릴 것을 요구하는 구조입니다.

 

열림의 조건은 지적 재능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가에 따라 빛의 유입이 달라집니다. 자기 사랑에서 읽는 자는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선한 삶 가운데 있는 자, 곧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내면이 열려 하늘의 빛으로 들어 올려집니다. 열린다는 것은 마음의 내면이 실제로 열리는 사건이며, 이는 단지 감정적 고양이 아니라 존재 구조의 상승입니다.

 

이해는 진리의 그릇입니다. 교리는 관념 속에서 형성됩니다. 관념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맹목적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를 이해하려는 이성적 노력은 믿음의 적이 아니라, 믿음의 필수 요소입니다. 다만 그 이해가 자기 지성에서 나오느냐, 주님의 빛에서 나오느냐가 문제입니다. 인간한테 있는 고유한 것(proprium), 즉 인간의 본성에는 생명이 없고, 주님의 빛이 들어올 때만 이해가 살아 있습니다.

 

내세에서 관념이 드러난다는 언급은, 신앙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고 구조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던 신앙의 관념들에 따라 다른 이들과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은 영원한 결합을 결정합니다. ‘백마’가 이해라면, 그 말이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가 곧 인간의 영원한 방향입니다.

 

마지막으로, 열림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열립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은 문자 속에 서 있고, 열리는 것은 그 문자를 통해 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과 진리의 애정으로 읽는 자에게,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십니다. 이해가 열리고, 모순은 질서가 되며, 말씀이 살아납니다.

 

 

 

WH.8, '말씀은 말씀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다'

WH.8 말씀은 말씀에서 나온 교리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다The Word cannot be understood except by means of doctrine from the Word. 교회의 교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3464, 5402, 6832, 10763, 10765).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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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rom Arcana Coelestia 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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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게 뭔가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가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나의 입장을 강화해 주기 때문에, 나를 높여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나를 기쁘게 하든 아프게 하든, 나를 드러내 주든 낮추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빛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진리를 ‘수단’으로 쓰지 않고, 진리를 ‘목적’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씀이 나의 습관이나 생각을 바로잡을 때,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그래도 이것이 참이라면 나는 배우겠다’라고 반응하는 것이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라고 접근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성경을 읽어도, 속으로는 자기를 확증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도 진리를 존중합니다. 그는 진리를 통해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곧 삶으로 이어집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옳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옳은 대로 살고자’ 합니다. 여기서 이해와 삶이 연결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겸손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는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우기를 기뻐합니다. 그는 진리를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진리 앞에서 배우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자가 곧 주님에 의해 인도되는 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방향이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라 진리, 곧 주님 쪽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매우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왜 이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가?’ 내가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인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정말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고 싶어서인가? 진리를 진리로 사랑하는 마음은 조용하고 단순하지만, 그 안에 하늘의 빛이 스며듭니다. 그런 마음에서 말씀을 읽을 때, 비로소 내면의 열림(enlightenment)이 시작됩니다.

 

 

 

SC.15, ‘노아의 홍수’의 속뜻

‘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해 주세요. 노아의 홍수는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는 말에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저도 그랬고, 거의 모든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 마음이 철컹 닫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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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AC에서 인용

From Arcana Coelestia

 

WH.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관하여, 그리고 인간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적 진리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n. 8944, 10318–10320).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곧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학식 있는 사람들까지도,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 그것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n. 10319). 인간이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n. 1775), 하늘로부터의 어떤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였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시대마다 계시가 있었습니다 (n. 2895). From the light of nature nothing is known concerning the Lord, concerning heaven and hell, concerning the life of man after death, nor concerning the Divine truths by which man acquires spiritual and eternal life (n. 8944, 10318, 10319, 10320). This may appear manifest from the consideration, that many, and among them men of learning, do not believe those things, although they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are thereby instructed concerning them (n. 10319). Therefore it was necessary that there should be some revelation from heaven because man was born for heaven (n. 1775). Therefore in every age of the world there has been a revelation (n. 2895).

 

이 지상에서 차례로 주어진 여러 종류의 계시에 대하여는 n.10355,10632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홍수 이전, 이른바 황금시대라 불리던 태고인들에게는 직접적인 계시(an immediate revelation)가 있었고, 그로부터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n. 2896). 홍수 이후에 존재하였던 고대 교회들에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인 말씀(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이 있었습니다 (n. 2686, 2897). 그 교회들에 관하여는 새 예루살렘과 그 천적 교리’(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적 부분은 여호와의 전쟁들(the Wars of Jehovah)이라 하였고, 예언적 부분은 선포들(Enunciations)이라 하였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영감(inspiration)에 있어서 우리 말씀과 같았으나, 그 교회들에 맞게 조정되어 있었습니다 (n. 2897). 그 말씀은 모세에 의하여 언급되었으나 (n. 2686, 2897), 지금은 잃어버려졌습니다 (n. 2897). 또한 발람의 예언들(the prophecies of Balaam)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예언적 계시(Prophetical revelations)가 주어졌습니다 (n. 2898). Of the various kinds of revelation which have successively been made on this earth (n. 10355, 10632). To the most ancient men, who lived before the flood, whose time was called the golden age, there was an immediate revelation, and thence Divine truth was inscribed on their hearts (n. 2896). The ancient churches, which existed after the flood, had a historical and prophetical Word (n. 2686, 2897): concerning which churches see New Jerusalem and Its Heavenly Doctrine (n. 247). Its historical parts were called the Wars of Jehovah, and its prophetical parts, Enunciations (n. 2897). That Word as to inspiration was like our Word, but accommodated to those churches (n. 2897). It is mentioned by Moses (n. 2686, 2897). But that Word is lost (n. 2897). Prophetical revelations were also made to others, as appears from the prophecies of Balaam (n. 2898).

 

말씀은 그 모든 부분과 각각의 세부(particular part)에 이르기까지 신적(Divine)입니다 (n. 639, 680, 10321, 10637). 말씀은 점 하나와 획 하나(every point and iota)에 이르기까지 신적이며 거룩하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n. 1349). 오늘날 말씀이 획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되었다고 설명되는 방식에 관하여는 n.1886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e Word is Divine in all and every particular part (n. 639, 680, 10321, 10637). The Word is Divine and holy as to every point and iota, from experience (n. 1349). How it is explained at this day that the Word is inspired as to every iota (n. 1886).

 

교회는 특별히 말씀이 있는 곳,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신적 진리들이 계시되는 곳에 존재합니다 (n. 3857, 10761). 그러나 말씀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이 알려지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곧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속하는 자들은 말씀에서 나온 진리들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거듭난 자들, 곧 그 안의 진리들에 따라 사는 자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The church is especially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and Divine truths are revealed (n. 3857, 10761). But it does not follow from thence, that they are of the church, who are born where the Word is, and where the Lord is thereby known; but they who, by means of truths from the Word, are regenerated by the Lord, who are they who live according to the truths therein, consequently who lead a life of love and faith (n. 6637, 10143, 10153, 10578, 10645, 10829).

 

 

해설

 

이 글은 ‘백마’라는 상징 논의를 넘어, 왜 말씀이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근본 문제로 나아갑니다. 자연의 빛, 곧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주님, 천국, 사후 생명,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이는 이성의 부정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 규정입니다. 인간은 천국을 위하여 태어났으나, 천국에 관한 지식은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여기서 계시의 역사적 연속성이 제시됩니다. 태고교회에는 직접 계시가 있었고, 진리가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외적 말씀이 필요해졌고,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는 역사적, 예언적 형태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은 사라졌다는 언급은, 계시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대마다 주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계시의 점진성과 섭리적 질서를 강조합니다.

 

말씀이 ‘점 하나와 획 하나까지’ 신적이라는 선언은 내적 의미 교리의 토대입니다. 만일 말씀의 일부만 신적이라면, 내적 의미도 부분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부가 신적이라면, 모든 세부가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문자 자체를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무한한 깊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내적 의미는 문자와 분리된 다른 책이 아니라, 문자 속에 내재한 차원입니다.

 

교회의 정의도 재정의됩니다. 교회는 지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조직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이 알려지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백마’는 단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 조건입니다. 이해가 열릴 때 교회가 살아 있습니다.

 

이 글은 계시, 말씀, 교회, 거듭남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합니다. 계시는 인간이 천국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주어졌고, 말씀은 그 계시의 기록이며, 교회는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거듭남은 그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탁월성은 단지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WH.7, '말씀은 열린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7 말씀은 열린 사람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The Word is not understood except by those who are enlightened. 인간의 이성적 능력(rational faculty)은 주님에 의해 열리지(enlightened) 않으면 신성(Divine)은 물론, 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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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5, ‘백마’(the White Hors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the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5 ‘백마’(the White Horse)가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한 이해를 뜻하기 때문에, 말씀과 그 내적 의미에 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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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5

 

백마(the White Horse)가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한 이해를 뜻하기 때문에, 말씀과 그 내적 의미에 관하여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the Arcana Coelestia)에서 밝혀진 몇 가지 사항들을 여기에 덧붙입니다. 왜냐하면 그 저작에서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모든 내용이 말씀의 영적 곧 내적 의미에 따라 해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Since “the Whit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of the Word as to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tho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Word and that sense, which are shown in the Arcana Coelestia, are here subjoined: for in that work the whole contents of Genesis and Exodus are explained according to the spiritual or internal sense of the Word.

 

 

해설

 

이 글은 ‘백마’ 전체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는 ‘말 = 이해’라는 상응을 성경과 영계의 표상으로 증명해 왔다면, 이제는 그 이해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주겠다는 선언입니다. 곧 ‘백마’는 단순한 상징 해설이 아니라, 이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실천적으로 구현된 해석 방법의 이름입니다. 이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꿰뚫어 보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내적 의미로 해설한 작업을 참고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백마’의 교리가 단지 상징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방대한 본문 주해 작업 속에서 검증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전체가 영적 의미에 따라 설명될 수 있었다면, 말씀 전체도 동일한 법칙 아래 이해될 수 있다는 전제가 서 있습니다.

 

목회적으로 보아도 이 문장은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몇 구절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흐르는 질서라는 점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백마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 말이 실제로 달린 길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백마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말씀을 새롭게 읽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WH.5는 일종의 연결 고리입니다. 상징의 증명에서 실제 해석으로, 선언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백마’가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라면, 이제 독자는 그 이해가 어떻게 본문 전체를 열어 가는지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마지막 때에 열릴 새 이해가 추상적 계시가 아니라, 구체적 본문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 주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결정적인 문장입니다.

 

 

 

WH.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From Arcana Coelestia 6 말씀의 필요성과 탁월성 The necessity and excellence of the Word. 자연의 빛으로는 주님에 관하여,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인간이 죽은 후의 생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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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4, '말, 병거 등 상응 지식은 인류 공통 유산'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4 ‘병거’(chariots)와 ‘말’(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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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4

 

병거(chariots)(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은 표상 교회들(representative churches)이었고, 그들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상응과 표상의 학문(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이 모든 학문 중 으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를 뜻한다는 의미는 그 교회들로부터 주변의 지혜로운 이들, 심지어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혜와 총명의 신(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을 태양에 두고 그것을 묘사할 때, 불의 병거와 네 마리의 불말을 그것에 돌렸습니다. 또한 바다의 신(the God of the sea)을 묘사할 때에는, 바다가 이해에서 나온 학문들(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을 뜻하기 때문에, 그에게도 말들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이해로부터 학문이 나오는 기원을 묘사할 때에는, 날개 달린 말을 그려, 그 말이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고, 그 샘가에 학문들(the sciences)이라 불리는 아홉 처녀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That such is the signification of “chariots” and “horses” was well known in the ancient churches; for those churches were representative churches, and with those who were in them, the science of correspondences and representations was the chief of all sciences. The signification of the horse, as being understanding, was derived by the wise round about, even to Greece, from those churches. Hence it was,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sun, in which they placed their God of wisdom and intelligence, that they attributed to it a chariot and four horses of fire.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God of the sea, since by the sea were signified sciences derived from the understanding, that they also attributed horses to him. And when they would describe the origin of the sciences from the understanding, they represented it by a winged horse, which with its hoof broke open a fountain, at which sat nine virgins called the sciences.

 

이는 고대 교회들로부터 (the horse)은 이해를 뜻하고, ‘날개(wings)는 영적 진리를 뜻하며, ‘발굽(the hoof)은 이해에서 나온 학문적인 것을 뜻하고, ‘(a fountain)은 학문들이 흘러나오는 교리(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를 뜻한다는 지식을 전해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트로이 목마(the Trojan horse)로 불리는 것도 다른 의미가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해로 고안해 낸 인위적인 계책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대인들에게서 전해진 방식에 따라 이해를 묘사할 때에는 날아다니는 말이나 페가수스로 형상화하는 것이 보통이며, 교리는 샘으로, 학문은 처녀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 신비적 의미에서 이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이러한 상징들이 이방인들에게 고대 표상 교회들로부터 전해졌다는 사실은 더욱 알지 못합니다. For from the ancient churches they received the knowledge that “the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wings,” spiritual truth; “the hoof,” what is scientific from the understanding; and “a fountain,” doctrine from which sciences are derived. Nor is anything else signified by “the Trojan horse,” than an artificial contrivance devised by their understanding for the purpose of destroying the walls. Even at this day, when the understanding is described after the manner received from those ancients, it is usual to figure it by a flying horse or Pegasus; so, likewise, doctrine is described by a fountain, and the sciences by virgins; but scarcely anyone knows that “the horse,” in the mystic sen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still less that those significatives were derived by the Gentiles from the ancient representative churches.

 

 

해설

 

이 글은 상응의 학문이 단지 성경 해석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반에 영향을 미친 원형적 지식이었다는 점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고대 교회는 자연과 영계 사이의 상응을 알고 있었고, 그 지식이 모든 학문의 기초였습니다. ‘말 = 이해’라는 상응은 그들 사이에서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징은 후대의 상상이 아니라, 잊혀진 지혜의 흔적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태양신의 불병거와 네 말은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근원이 하늘의 빛에서 나온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태양은 사랑, 불은 그 열기, 말은 이해를 뜻합니다. 바다의 신에게 말이 귀속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바다는 지식의 집합을 상징하며, 지식은 이해를 통해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신화는 왜곡되었으나, 그 근저에는 상응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날개 달린 말, 곧 페가수스가 발굽으로 샘을 터뜨리는 장면은 매우 깊은 상응을 담고 있습니다. 날개는 영적 진리, 말은 이해, 발굽은 이해의 제일 바깥 작용, 샘은 교리입니다. 곧 영적 진리로 상승한 이해가 교리의 원천을 열고, 그로부터 학문이 흘러나온다는 구조입니다. 아홉 처녀는 학문과 예술의 분화된 형태를 뜻합니다. 이는 고대 상응 지식이 신화적 상징으로 변형된 사례입니다.

 

트로이 목마 또한 이해로 고안된 계책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말이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니라, 전략적 지성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상응의 기억이 문화 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이해를 날아오르는 말로, 교리를 샘으로, 학문을 처녀로 형상화하는 관습이 남아 있지만, 그 영적 기원은 거의 잊혔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상응의 지식이 인류의 공통 유산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방 문화의 상징도 근원적으로는 고대 표상 교회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상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교리는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고대 지혜의 회복입니다. 이해는 언제나 말로, 교리는 병거로, 사랑은 불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영계의 구조이며, 성경과 인류 문화 속에 동시에 흔적을 남긴 상응의 법칙입니다.

 

 

 

WH.3, 영계에서는 '이해'(the understanding)가 '말'(a horse)로 나타남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3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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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3

 

(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spiritual world)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말들이 자주 보이며,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또한 병거들도 보입니다. 거기서는 누구나 그것들이 지적이고 교리적인(intellectual and doctrinal) 것들을 뜻한다는 걸 압니다. 저는 어떤 이들이 자기 이해로부터 생각할(thinking from their understanding) , 그들이 마치 말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자주 관찰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색(思索, meditation)이 다른 이들 앞에서 그렇게 표상되었으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That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is from no other source than from the representatives in the spiritual world. In that world horses are frequently seen, and persons sitting upon horses, and also chariots; and there everyone knows that they signify intellectual and doctrinal things. I have often observed, when any were thinking from their understanding, that at such times they appeared as if riding on horses; their meditation was thus represented before others, they themselves not knowing it.

 

또한 그곳에는 교리의 진리(the truths of doctrine)에 관하여 이해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곳에 가까이 가면, 온 평원이 병거와 말들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새로 온 영들은, 그것이 그들의 지적 사유(intellectual thought)에서 비롯된 나타남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 장소는 지성과 지혜의 모임(the assembly of the intelligent and the wise)이라 불립니다. There is also a place there, where many assemble who think and speak from the understanding concerning the truths of doctrine; and when others approach, they see the whole plain full of chariots and horses; and novitiate spirits, who wonder whence this is, are instructed that it is an appearance resulting from their intellectual thought. That place is called the assembly of the intelligent and the wise.

 

저는 또한 어떤 이들이 천국으로 들려 올라갈 때 밝은 말들과 불병거들(bright horses and chariots of fire)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때 천국 교리의 진리들(the truths of heavenly doctrine)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지혜로워지고, 그렇게 천국으로 올려졌다는 표징(a sign)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사용된 불수레와 불말(왕하2:11, the chariot of fire and the horses of fire by which Elijah was taken up into heaven)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이 눈이 열려 보았던 불말과 불병거(왕하6:17, the horses and chariots of fire)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I have likewise seen bright horses and chariots of fire, when some were taken up into heaven, which was a sign that they were then instructed in the truths of heavenly doctrine, and became intelligent, and thus were taken up; on seeing which, it occurred to my mind, what is signified by “the chariot of fire and the horses of fire by which Elijah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what is signified by “the horses and chariots of fire” that were seen by the young man of Elisha, when his eyes were opened.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왕하2:11)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해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성경 구절을 통해 ‘말 = 이해’라는 상징을 증명했다면, 여기서는 그 근원을 영계의 실재에서 찾습니다. 곧 성경의 상징은 임의적 비유가 아니라, 영계에서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표상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입니다. 영계에서는 사유와 애정이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이해로 생각하는 이는 말 위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은 이해의 상징이 아니라, 이해의 자연스러운 형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 표상이 본인은 모르는 사이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계가 인간의 내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세계임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유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하지만, 영계에서는 그것이 외형으로 나타납니다. 이해 중심의 사유는 말, 교리적 체계는 병거로 나타납니다. 병거는 구조화된 교리, 말은 그 교리를 움직이게 하는 이해입니다.

 

지성과 지혜의 모임’이라는 장소는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의 공동체는 평원에 가득한 말과 병거로 나타납니다. 새로 온 영들이 그것을 보고 놀란다는 것은, 아직 영적 상응의 법칙을 모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장면은 성경 해석의 근거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영적 경험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밝은 말들과 불병거는 천국 교리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은 사랑, ‘’은 이해, ‘병거’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불말과 불병거는 사랑으로 생동하는 이해와 교리를 뜻합니다. 이것이 엘리야 승천 사건의 영적 의미와 연결됩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표상하였고, 불말과 불병거는 말씀의 이해와 교리 안에서 하늘로 올려짐을 뜻합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눈이 열려 보았다는 표현은, 영적 시야의 개방을 뜻합니다.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불말과 불병거가 보입니다. 이는 이해가 열릴 때, 교리의 내적 생명이 보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백마’의 교리를 단지 성경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영계의 구조 자체에서 근거 짓는 매우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말은 이해이며, 이해는 하늘의 빛을 운반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열리는 것은 곧 인간 이해의 승격, 업그레이드를 뜻합니다.

 

 

 

WH.4, '말, 병거 등 상응 지식은 인류 공통 유산'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4 ‘병거’(chariots)와 ‘말’(horses)이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고대 교회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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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2, ‘말’(a horse)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말 탄 자’(rider)는 지혜로운 사람(one who is intelligent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2 말씀의 예언서들에는 ‘말’이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지금까지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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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WH.2

 

말씀의 예언서들에는 이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지금까지 (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고,탄 자(rider)가 지혜로운 사람(one who is intelligent)을 뜻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영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을 뜻하며, 따라서 말씀 안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이 이상하고 놀랍게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임은 말씀 안의 많은 구절들로부터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중 몇 가지만 여기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에서 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I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mention is very often made of the horse, but heretofore no one has known that “a hors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his “rider” one who is intelligent; and this possibly, because it seems strange and wonderful, that by “a horse” such a thing should be meant in the spiritual sense, and thence in the Word. But nevertheless that it is so, may evidently appear from many passages therein; some of which only I will here adduce. In the prophecy of Israel, it is said of Dan:

 

17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49:17, 18) Dan is a serpent upon the way, an arrow-snake upon the highway, that biteth the horse’s heels, so that his rider shall fall backward (Gen. 49:17, 18).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에 관한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a serpent)이 무엇을 뜻하고, ‘(a horse)과 그 탄 자(rider)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안에 어떤 영적 의미가 들어 있음을 압니다. 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이 예언을 해설한 곳(n. 6398–6401)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No one can understand what this prophecy concerning one of the tribes of Israel signifies unless he knows what is signified by “a serpent,” and what by “a horse” and his “rider”; everyone, however, knows that there is something spiritual involved therein; what therefore each expression signifies,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n. 6398–6401), where this prophecy is explained. In Habakkuk: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15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3:8, 15) O God, thou didst ride upon thy horses. Thy chariots are salvation. thou didst tread in the sea with thy horses (Hab. 3:8, 15).

 

여기서 말들(horses)이 영적인 것을 뜻함은 분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의미라면, ‘하나님이 그의 말들을 타신다(God rides upon his horses)거나 그의 말들로 바다를 밟으신다(and that he treads upon the sea with his horses)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스가랴서에서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That “horses” here signify what is spiritual, is evident, for they are said concerning God; in any other sense, what could be meant by saying that “God rides upon his horses, and that he treads upon the sea with his horses?” In like manner in Zechariah: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14:20) In that day, there shall be upon the bells of the horses, holiness unto Jehovah (Zech. 14:20).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 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 모든 민족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12:4) In that day, saith Jehovah, I will smite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 and his rider with madness; and I will open mine eyes upon the house of Judah, and will smite every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 (Zech. 12:4).

 

여기서는 교회의 황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는 더 이상 어떠한 진리의 이해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말과 그 탄 자(the horse and his rider)로 묘사됩니다. 만일 다른 의미라면, ‘모든 말을 놀라게 한다(smiting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거나 백성의 말을 눈멀게 한다(smiting the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는 말이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욥기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It treats there of the vastation of the church, which takes place when there no longer remains the understanding of any truth; and which is described thus by “the horse and his rider”; what else could be the meaning of “smiting every horse with astonishment,” and of “smiting the horse of the people with blindness”? What has this to do with the church? In Job:

 

17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18그러나 그것이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를 우습게 여기느니라 19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39:17-19) God hath caused her to forget wisdom, neither hath he imparted to her intelligence: what time she lifteth up herself on high, she scorneth the horse and his rider (39:17–19 seq.).

 

여기서 (the horse)이 이해를 뜻함은 분명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말하기를, That “the horse” here signifies the understanding, is manifestly evident. In like manner in David, where it is said: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45:4) He rideth upon the word of truth (Ps. 45:4).

 

또한 다른 많은 구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왜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이라 불렸는지, 또 왜 엘리사의 사환이 산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한 것을 보았는지(the boy of Elisha saw the mountain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병거(chariots)가 무엇을 뜻하고, ‘엘리야와 엘리사(Elijah and Elisha)가 무엇을 표상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And in many other passages. Moreover, who can know the reason why Elijah and Elisha were called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and why “the boy of Elisha saw the mountain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except it be known what is signified by “chariots,” and what was represented by “Elijah and Elisha”? For Elisha said to Elijah:

 

11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12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왕하2:11, 12)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2 Kings 2:11, 12).

 

요아스 왕도 엘리사에게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And Joash the king said to Elisha: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왕하13:14) 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2 Kings 13:14).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And, speaking of the boy of Elisha, it is said: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6:17) Jehovah opened the eyes of the boy of Elisha, and he saw and behold the mountain was full of horses and chariots of fire round about Elisha (2 Kings 6:17).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이라 불린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말씀에 관하여 표상하였기(they both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때문이며, ‘병거(a chariot)는 말씀에서 나온 교리(doctrine from the Word), ‘마병’(horsemen)은 지성(intelligence)을 뜻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말씀에 관한 주님을 표상하였다는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n. 5247, 7643, 8029, 9327) 볼 수 있으며, ‘병거가 말씀에서 나온 교리를 뜻한다는 것도 그곳에서(n. 5321, 8215) 볼 수 있습니다. The reason why Elijah and Elisha were called “the chariot of Israel and the horsemen thereof” is that they both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and “a chariot” signifies doctrine from the Word, and “horsemen” intelligence. That “Elijah” and “Elisha” represented the Lord as to the Word may be seen in Arcana Coelestia (n. 5247, 7643, 8029, 9327). And that “chariots” signify doctrine drawn from the Word (n. 5321, 8215).

 

 

해설

 

이 글은 ‘’이 이해를 뜻한다는 핵심 명제를 본격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증명하기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상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서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의 용례를 통해 일관된 영적 법칙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합니다. ‘’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 곧 진리를 파악하는 이해력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그 탄 자’는 그 이해를 실제로 사용하는 지성적 주체를 뜻합니다.

 

창세기 49장에서 단에 대한 예언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적 추론을, ‘말굽을 문다’는 것이 이해의 제일 바깥 부분을 공격하는 것을, ‘탄 자를 뒤로 떨어뜨린다’는 것이 지성을 전복시키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면 그 영적 구조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난해함이 상징 체계의 부재가 아니라, 상징 체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박국과 스가랴의 구절들은 더욱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말을 타신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해를 뜻한다고 보면, 주님께서 진리의 이해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스가랴에서 ‘말을 치신다’거나 ‘눈멀게 하신다’는 것은 교회의 황폐, 곧 진리 이해의 상실을 묘사하는 상징입니다. 교회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외적 제도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욥기에서 ‘말과 그 탄 자를 비웃는다’는 표현은 이해와 지성을 경시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영적 교만이나 감각적 자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해는 하늘로부터 오는 빛인데, 그것을 조롱하는 것은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하늘의 빛을 운반하는 기능을 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 불린 것은 매우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병거는 교리, 말은 이해, 마병은 지성입니다. 두 선지자는 말씀을 대표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을 병거와 마병이라 부른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본 불말과 불병거는 하늘의 보호를 상징할 뿐 아니라, 하늘의 교리와 이해가 주님의 종을 둘러싸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모든 인용은 하나의 결론으로 모입니다. ‘’은 이해이며, 그 이해는 교회의 생명과 직결됩니다. 이해가 밝으면 교회가 살아 있고, 이해가 황폐하면 교회도 황폐합니다. 그러므로 ‘백마’의 계시는 단지 상징 해설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림으로써 이해가 새롭게 회복되는 사건을 뜻합니다. 이는 교회의 회복과 직결되는 주제입니다.

 

 

 

WH.3, 영계에서는 '이해'(the understanding)가 '말'(a horse)로 나타남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3 ‘말’(a horse)이 이해(the understanding)를 뜻하는 까닭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영계의 표상들(the representatives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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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1,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 (WH.1-5)

백마(白馬) The White Horse Mentioned in Revelation 19(1758, 1769) 말씀과 그 영적, 즉 내적 의미The Word and its spiritual or internal sense (sections 1–5) 1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은 그 영적, 곧 내적 의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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