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며,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이 거기서 함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을, 결혼제도의 기원이나 윤리 규범이 아니라 ‘영적 구조의 변화’로 읽게 만드는 핵심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을 한 문장 한 문장 해체하여,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부모’는 속 사람의 기원,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떠난다’는 것은, 속 사람이 더 이상 주도권을 유지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단절이 아니라, 중심 이동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는,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거처를 두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다스리는 위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별이 약화되어 ‘겉 사람 안에 내재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때 겉 사람의 own과의 결합이 훨씬 밀접해집니다.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은 이 둘이 함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조화로운 협력이라기보다는, ‘분리가 어려운 결합 상태’를 의미합니다. 앞 단락 AC.159에서 말했듯이, 이미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흐려진 상태에서의 결합이기 때문에, 이 ‘하나 됨’은 이전의 천적 결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 단락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이었으나, 이제는 ‘’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기의 own과 밀접히 결합된 상태’를 뜻합니다. 영이란 주님께 열려 있는 상태를, 육이란 자기의 own과 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자기의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아직 즉각적인 타락은 아니지만, ‘타락이 가능해진 구조’입니다. 생명이 자기의 own과 너무 가까워졌고, 그 결과 구별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AC.160은 창2의 마지막 문장들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전환점’이 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다음 AC.161-162에서는 이 상태가 어떻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로 묘사되며, 동시에 어떤 보호막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는지가 이어서 드러나게 됩니다.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AC.160)

 

 

AC.160은 창2 마지막과 창3 시작 사이에서 인간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특히 여기서 ‘영’(spirit)에서 ‘육’(flesh)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 육체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육’(flesh)은 자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 곧 자기 자신 중심으로 기울 수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생명을 받던 인간이 이제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proprium과 결합된 상태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먼저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다’는 부분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반영하는 상태였습니다. 겉 사람조차 속 사람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주님의 질서 아래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affection, 그리고 행동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spirit 상태였습니다. 여기 spirit은 단순 영혼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흐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육’(flesh)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물질 몸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proprium이 결합되어, 자기 자신 중심의 감각과 자기 생명 의식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단순히 주님의 흐름 통로로만 느끼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사는 존재’처럼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육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추락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어서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adjoined’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천적,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도, 사랑도, 상호적 결합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함께 흐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that they might be as one’, 곧 둘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여전히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역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육’이 반드시 완전 악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후 말씀에서 flesh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사랑에 기울어진 인간성을 뜻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 문맥에서는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AC.160의 flesh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인간 상태’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문장은 결국, 인간 존재 구조 안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났음을 설명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의 전적으로 spirit 상태였지만, 이제는 proprium과 결합된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적, 영적 생명을 그 안에 계속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독립된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수동적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AC.160은 바로 그 놀라운 긴장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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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한 것인지를 지각하고, 또한 겉 사람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속 사람을 통하여 다스려지는지를 지각합니다.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AC.159)

 

 

AC.159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천적 인간 이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나 ‘신앙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실제로 지각(perceive)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속 사람(internal man)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인간 안의 더 깊은 차원입니다. 사랑, 퍼셉션, 천국적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external man)은 감각, 일상 사고, 행동, 세상과 접촉하는 자연적 인간의 차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 이 둘이 거의 뒤섞여 있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과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과 자기 판단을 거의 곧 자기 자신 전체로 느낍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은 다릅니다. 그는 자기 안에 두 층위가 있다는 것을 단순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분명히 지각합니다. 즉, ‘이것은 겉 사람의 움직임이구나’, ‘이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를 내적으로 압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겉 사람이 자기 독립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까지 지각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바로 ‘through the internal’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을 직접 억지로 조종하시는 방식으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먼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와 사랑을 심으시고, 그것이 점차 겉 사람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마치 영혼이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듯이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흐름을 어느 정도 실제로 느낍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충동이나 생각이 올라오면 거의 즉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화가 올라오면 ‘내가 화났다’, 욕망이 올라오면 ‘내가 원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안의 겉 사람 움직임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더 깊은 평안과 질서를 압니다. 그래서 겉 사람의 움직임이 속 사람 질서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퍼셉션’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단순 추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이 주님께 속하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지를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압니다. 그래서 그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거슬러 독립하려 할 때도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와도 연결됩니다. 거듭남 이전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어 있고 충돌합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려 하지만, 겉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안에서 결합합니다. 겉 사람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래서 AC.159는 단순 심리 설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국적 인간 상태의 묘사입니다.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너무도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서로 적대하지 않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의 질서 아래 살아 움직이는 상태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바로 참된 인간 질서이며, 천국의 인간 구조입니다.

 

 

 

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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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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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현 기독교 및 개신교 전역 어디에서든 결혼식 메인 본문 문장 중 하나가 바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창2:24, 곧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거의 모든 기독교 결혼식에서 가장 대표적인 축복 본문처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행복하게 살라’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적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층위를 봅니다.

 

그에게서 이 말씀은 단순 결혼 윤리나 가정 축복 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 구조 자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인간 안에서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지성과 사랑이 하나 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몸’은 단순 육체적 결합이나 정서적 친밀감을 넘어서, 존재 전체의 결합을 뜻합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결혼식에서 이 구절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결혼은 단순 사회 제도가 아니라, 바로 이 영적 결합의 지상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깊이를 거의 모른 채 문자적 의미에만 머문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남자는 주로 understanding truth 쪽을, 여자는 will affection, 곧 love good 쪽을 상징합니다. 물론 실제 인간 안에는 남녀 모두 두 요소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적으로는 이런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이 두 차원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둘이 친하게 살아라’ 수준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서 진리를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분열 상태가 끝나고,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며, 이해하는 것을 살아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전체가 사실상 이 결합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선과 진리의 결혼, love wisdom의 결합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결혼식에서 사용되기에 오히려 너무 깊은 말씀입니다. 단순 부부 축복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완성과 천국 질서 자체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결혼이 참되려면, 단순 감정 결합이 아니라, 서로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자라야 한다는 뜻까지 포함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몸’이 거의 낭만적, 윤리적 표현처럼 들렸는데, AC를 통해 보니 이것이 인간 영혼 전체의 구조와 연결된 엄청난 선언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이런 경험이 자주 옵니다. 익숙한 성경 문장이 suddenly 전혀 다른 깊이로 열리는 순간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이 구절을 결혼식에서 사용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깊은 진리를 무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대부분은 그것이 단순 ‘부부 화합’ 정도를 넘어서,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영원한 결합, 곧 천국 자체를 상징한다는 사실까지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59, 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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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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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9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지각(perceive)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한 것인지를 지각하고, 또한 겉 사람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속 사람을 통하여 다스려지는지를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자기의 own을 원하게 된 결과, 그 상태가 변화되어,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질 때에는 이러한 지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창2:23-24의 결합 언어가 ‘어떤 인식의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전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단락입니다. 이 단락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문제는 결합 그 자체가 아니라, ‘구별을 잃은 상태에서의 결합’이었습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 구별은 이론적 분별이 아니라, ‘직접적인 퍼셉션’입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겉 사람의 영역인지를 자연스럽게 압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질서 또한 지각합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주도권을 갖지 않으며, 속 사람을 통로로 삼아 주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겉 사람에 속한 자기의 own을 원했습니다. 이 ‘원함’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인식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향성’입니다. 그 결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된다는 지각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두 층’으로 인식되지 않고, 하나의 연속체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질 때에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 즉,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라고 느끼는 것은 중립적인 착각이 아니라, ‘자기의 own으로 기운 상태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 3장에서 인간이 왜 그렇게 확신에 차서 잘못을 선택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인식적 토대입니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의 결합은 ‘구별을 전제로 한 결합’이었지만, 그 후손들에게서의 결합은 ‘구별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결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차이가 곧 ‘질서 안의 결합’과 ‘질서를 상실한 결합’을 가릅니다.

 

AC.159는 이렇게 창2를 마무리합니다. 창2는 타락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타락이 가능해진 인식 구조’를 이미 완성해 둔다고 말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라고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자기의 것과 주님의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장, 창3이 시작됩니다.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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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AC.159, 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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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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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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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심화

 

3. ‘wise’, ‘intelligent

 

스베덴보리 용어에서 wise’와 intelligent’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intelligent’는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사람을, ‘wise’는 그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내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intelligent understanding 쪽에, wise will love까지 결합된 더 깊은 상태에 연결됩니다.

 

먼저 intelligent’입니다. 이것은 보통 총명한’, ‘지성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telligent한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질서를 보고, 개념들을 연결하고, 무엇이 참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spiritual man) intelligence와 많이 연결됩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함으로 선으로 나아갑니다. 다시 말해,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 살아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wise’는 단순히 진리를 아는 수준을 넘습니다. wise한 사람은 진리를 실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지 무엇이 옳은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존재 자체로 살아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wisdom love inseparable합니다. 사랑 없는 wisdom은 참된 wisdom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천적 인간(celestial man)과 천적 천사들은 특히 wise하다고 불립니다. 그들은 논리적 추론 이전에 선과 진리를 사랑 안에서 직관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주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체어리티와 겸손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하고, 교리적으로도 정확하다면 그는 intelligent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때는 wise에 가까워집니다.  intelligent 진리를 아는 능력’이고, wise 진리가 생명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intelligence wisdom을 나란히 놓으면서도, wisdom을 더 높은 상태로 다룹니다. intelligence는 아직 understanding 중심이지만, wisdom understanding will이 하나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intelligent한 사람은 진리를 봅니다’. 그러나 wise한 사람은 진리 안에서 삽니다’.

 

번역으로 정리하면, 보통 이렇게 가실 수 있습니다. intelligent = 총명한, 지성 있는. wise = 지혜로운.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wise는 단순 IQ 높고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가장 wise한 존재들은 가장 많이 아는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사랑하는 존재들입니다.

 

 

 

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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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심화 2, ‘렘5:1’

AC.158.심화 2.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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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심화

 

2.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AC.158)

 

 

이 구절이 AC.158에 인용된 이유도, 말씀에서 man’이 단순 인간 일반이 아니라, 진리와 선 안에서 사는 영적 인간, 특별히 이해와 분별 안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영어의 man’은 단순 homo가 아니라 vir 계열 의미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렘5:1 한 사람을 찾으면’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착한 시민 한 명을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참된 영적 인간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보면 조건이 두 가지입니다. ‘정의를 행하며’와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각각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정의(judgment)는 단순 법률 판결이 아니라, 진리에서 나오는 바른 분별과 질서를 뜻하고,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찾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여기의 한 사람’은 선과 진리가 결합된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이 말씀에서 vir’로 표현됩니다.

 

AC.158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말씀에서 남자 혹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자주 진리와 이해의 차원을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앞의 사41:28에서는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참된 영적 분별의 부재를 뜻했다면, 여기 렘5:1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이라는 말이, 아직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표현이 됩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다니라’는 표현도 상징적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루살렘은 교회를 뜻하고, 거리(streets)는 교리적 진리들이 지나가는 길, 곧 교회의 진리 체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거리 속에서조차 참된 사람’, 곧 진리 안에 사는 영적 인간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교회 전체가 외적 형식만 남고, 실제 생명은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여기서 주님이 한 사람만 있어도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시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선과 진리 안에 있는 한 사람은, 그 안에 교회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영적 인간 한 명만 있어도 그 안에 주님의 교회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5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사람(man, vir)이 단순 인간 일반이 아니라, 진리와 선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렘5:1은, 교회가 아무리 외적으로 존재해도 그런 사람’이 사라지면 영적 생명을 잃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표적 구절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AC.158, 심화 3, ‘wise’, ‘intelligent’

AC.158.심화 3. ‘wise’, ‘intelligent’ 스베덴보리 용어에서 ‘wise’와 ‘intelligent’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intelligent’는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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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심화 1, ‘사41:28’

AC.158.심화 1. ‘사41: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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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심화

 

1. ‘41: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AC.158)

 

 

이 구절이 AC.158에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man’이라는 말이 단순 인간 일반을 뜻하지 않고, 특별히 진리와 지혜 안에 있는 인간, 곧 참된 이해와 분별을 가진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41:28의 영어는 일반적 인간을 뜻하는 homo가 아니라 ‘vir’가 사용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사41:28에서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단순 인구 부재가 아니라, 참된 진리 안에서 판단하고 조언할 수 있는 영적 인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라틴어 ‘vir’는 보통 이해, 진리, 지혜와 연결됩니다. 반면 homo는 보다 일반적인 인간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vir가 없다’는 표현은, 교회 안에 더 이상 참된 분별과 영적 이해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이어지는 ‘조언자도 없다’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counsel은 단순 의견 제시가 아니라, 진리로부터 오는 분별과 지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AC.158의 흐름은, 인간 안에서 참된 진리와 선의 결합이 무너질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앞에서 ‘여자’가 affection proprium의 차원을 상징했다면, 여기 vir라고 하는 ‘man’은 보다 이해와 진리의 차원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분별할 ‘vir’가 사라지면, affection 역시 방향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가 함께 결합될 때, 비로소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구절은 우상숭배 문맥 안에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이사야 41장은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을 의지하는 상태를 비판하는 장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proprium 중심 상태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 지혜만 의지하게 되면, 결국 참된 ‘vir’, 곧 주님의 진리 안에서 보는 이해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단순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영적 분별 자체의 상실을 뜻합니다.

 

따라서 AC.15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말씀에서 ‘man [vir]’이 단순 남성이나 인간 일반이 아니라, 진리와 지혜 안의 영적 인간을 뜻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vir가 없다’는 것은 곧 교회 안에 참된 이해와 조언,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AC.158, 심화 2, ‘렘5:1’

AC.158.심화 2.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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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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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8

 

사람(man)은 속 사람을 뜻하며, 같은 말로 하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을 뜻한다는 것이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이는 지혜롭고 총명한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도 이르기를,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5:1)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Jer. 5:1)

 

여기서 공의를 행하는 자(One who executes judgment)는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one who seeks the truth)는 총명한 사람을 뜻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해설

 

AC.158은 앞 절들에서 사용된 ‘사람’이라는 단어가 ‘성별이나 일반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명확히 ‘속 사람’, 곧 ‘지혜와 총명을 지닌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확정해 주는 단락입니다. 이는 창2:23-24를 해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구절을 통해, 말씀에서 ‘사람(vir)이 없다고 할 때, 그것이 인구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사라진 상태’를 뜻합니다. 모사가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판단과 분별의 중심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표현은 더욱 분명합니다.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혜로 판단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정보나 지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살아 움직이는 상태’, 곧 총명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창세기 2장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앞 절에서 ‘여자’가 ‘아내’가 되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이 나온 뒤, 곧이어 ‘사람이 부모를 떠나’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한 남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자기의 own과 결합하는 주체’, 곧 지혜와 총명을 가진 내적 중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AC.158은 창2의 흐름을 이렇게 정리해 줍니다. own이 살아나 ‘아내’가 되었고, 이제 그것과 결합하는 주체는 ‘사람’, 곧 속 사람입니다. 이는 본능적 결합이나 감정적 결합이 아니라, ‘의식과 인식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결합’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결합은 더욱 강력해지며, 동시에 이후에 나타날 위험도 함께 커집니다.

 

이 단락은 짧지만, 창2:24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의 문법’을 제공하는 핵심 고리입니다. 다음 AC.159에서는 이 결합이 ‘부모를 떠난다’는 말로 어떻게 확장되며, 질서 전체의 이동을 뜻하게 되는지가 이어서 밝혀지게 됩니다.

 

 

심화

 

1. ‘41:28

 

 

AC.158, 심화 1, ‘사41:28’

AC.158.심화 1. ‘사41: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Isa. 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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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1

 

 

AC.158, 심화 2, ‘렘5:1’

AC.158.심화 2. ‘렘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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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se’, ‘intelligent

 

 

AC.158, 심화 3, ‘wise’, ‘intelligent’

AC.158.심화 3. ‘wise’, ‘intelligent’ 스베덴보리 용어에서 ‘wise’와 ‘intelligent’는 서로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intelligent’는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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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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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own 관련 여러 구절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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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 역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 확인이 아니라, 같은 생명과 같은 질서 안에 속한 결합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삼하5:1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한 골육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같은 민족이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는 당신과 같은 생명 안에 속하며, 당신의 통치 질서와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AC.157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는 ‘’와 ‘’을 영적 상응으로 읽습니다. ‘’는 인간 안의 외적 진리 구조, 곧 지탱하고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하고, ‘’은 그 안에 흐르는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살아 있는 인간 전체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우리는 왕의 뼈와 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 정치적 충성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다윗은 자주 주님, 특히 왕 되신 주님과 그분의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영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의 통치 아래 하나 되기를 인정하는 장면처럼 읽힙니다. 즉, 같은 선과 진리 안에 속한 결합의 고백입니다.

 

또 여기에는 ‘통치’의 성격도 드러납니다. 세상 통치는 강압과 외적 권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천국적 통치는 같은 생명 안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윗을 단순 힘 있는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말씀에서 이런 ‘골육’의 표현은 언제나 단순 친족 이상의 깊은 결합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2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와도 흐름이 이어집니다. 거기서 그것은 남자와 여자,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을 뜻했다면, 여기서는 왕과 백성, 곧 주님과 교회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말씀 전체에서 같은 생명, 같은 선과 진리, 같은 영적 질서 안의 결합을 뜻하는 상징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7, 창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 own 관련 여러 구절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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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심화 3, ‘삿9:2’

AC.157.심화 3. ‘삿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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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심화

 

3. ‘9: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AC.157)

 

 

이 구절이 AC.157에 인용된 이유도,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 혈연관계를 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생명 질서 안에 속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9:2에서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의 골육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그들 사이의 친밀성과 동일성을 강조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혈연 호소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영적 상응의 관점에서 읽습니다.

 

AC.157의 문맥에서 ’는 보다 외적이고 지탱하는 진리 구조를, ‘’은 살아 있는 선과 affection을 뜻합니다. 그래서 뼈와 살’은 단순 육체 조합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결합된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너는 내 뼈요 살이다’라는 말은, ‘너와 나는 같은 생명 안에 속한다’, ‘같은 사랑과 같은 질서 안에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9장의 경우는 조금 더 의미심장합니다. 아비멜렉은 이 표현을 이용해 사람들의 affection과 결속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합니다. 다시 말해, ‘같은 골육’이라는 표현은 원래는 생명의 친밀한 결합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자연적, 정치적 목적에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외적 결합이 내적 결합을 흉내 내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말씀에서 뼈와 살’이라는 표현 자체는 본래 선과 진리, 사랑과 이해의 결합을 뜻하는 깊은 상징인데, 인간은 그것을 자연적 유대나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 혈연 언급이 아니라, 인간이 같은 생명’의 언어를 어떻게 자기편 만들기의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창2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과 연결됩니다. 2에서는 그것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적 결합을 뜻했다면, 여기서는 그 표현이 겉 사람 수준으로 내려와 정치적 설득과 자연적 연대의 언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에도 여전히 그 표현 속의 본래 영적 의미를 읽어 냅니다. 곧, 인간은 본능적으로 같은 생명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며, 진짜 천국적 결합은 혈연이 아니라 같은 선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AC.157, 심화 4, ‘삼하5:1’

AC.157.심화 4. ‘삼하5:1’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AC.157) 이 구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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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7, 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AC.157.심화 2.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결합’ 야곱은 이후 교회의 외적 차원과 연결되는 인물인데, ‘뼈와 살’이라는 표현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도 결합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AC.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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