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
‘가인이여호와께아뢰되’(CainsaiduntoJehovah)는어떤내적고통으로말미암아자기가악가운데있음을어느정도고백한것을의미합니다.‘내죄악이너무커서사함을받을수없나이다’(mineiniquityisgreaterthancanbetakenaway)는그로인한절망을의미합니다. “CainsaiduntoJehovah” signifies a certain confession that he was in evil, induced by some internal pain; “mineiniquityisgreaterthancanbetakenaway” signifies despair on that account.
해설
AC.383은 창4:13의 ‘가인이여호와께아뢰되내죄벌이지기가너무무거우니이다’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가인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도 ‘내가알지못하나이다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인이여호와께아뢰되’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어떤내적고통으로말미암아자기가악가운데있음을어느정도고백한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완전한 회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전의 완강한 부인과는 다른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acertainconfe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의악을고백했다’고 단정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someinternalpain’, 곧 ‘어떤내적고통’에 의해 일어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참된 회개나 거듭남의 시작이라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느꼈고, 그 고통 가운데 적어도 자기가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내가알지못하나이다’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이지만, 아직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향하는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악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그 고통이 언제나 악 자체를 미워하는 회개의 고통인 것은 아닙니다. 악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고, 자기에게 닥친 손실이나 형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으며, 자기 상태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회개에서는 ‘이악때문에내가고통스럽다’는 데서 더 나아가 ‘이것이주님을거스르는악이므로더이상원하지않는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AC.383은 아직 가인에게 그 전체 과정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정도의고백’이라는 제한된 표현이 적절합니다.
이어지는 ‘내죄악이너무커서사함을받을수없나이다’는 ‘그로인한절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가인의 시선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것은더이상제거될수도,용서될수도없다’는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악을 악으로 보는 것과 ‘나는이악에서결코벗어날수없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오히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악을 보지 않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기 악을 보고 주님의 자비보다 그것을 더 크게 여기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 점에서 AC.383은 앞의 AC.379-382와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서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고,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결실하지 못하며,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상태에 놓인 가인이 이제 자기 악의 결과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잃었기 때문에 그 인식은 곧바로 주님의 자비를 향한 신뢰로 나아가기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깨달았지만 그 악보다 크신 주님의 자비를 아직 바라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합니다. AC.383의 ‘절망’을 모든 영적 절망에 대한 일반론으로 곧바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시험 가운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도 다룹니다. 그러한 상태는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가인의 문맥에서 말하는 절망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은 결과로 나타나는 절망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류의 영적 고통이나 시험과 섞어 해석하기보다 우선 이 문맥 자체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가인이 다시 ‘여호와께’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전개를 보기 위해 중요하게 남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악 가운데 있으며 절망한다고 해서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이야기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께 자기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을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시는 주님의 보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AC.383의 절망만을 보고 가인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이후의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으로 말미암아 선에서 돌아서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돌아섰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여전히 그 사람의 보존과 궁극적인 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가인의 절망은 ‘내죄악은너무커서제거될수없다’고 느끼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절망이 주님의 섭리와 자비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준비를 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거듭남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악을 발견하는 목적은 ‘나는이렇게악하니끝났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악을 주님의 구원 능력보다 더 크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 악을 정확히 보면서 동시에 모든 선과 구원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83은 가인의 내면에서 일어난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줍니다.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책임을 부인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어떤 내적 고통 때문에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은 아직 주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죄악이너무커서사함을받을수없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집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절망이 마지막이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악보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며, 이후 가인에게 주어지는 보존의 표는 바로 이 절망 뒤에서도 주님의 섭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년 1월 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하나되는삶’, ‘외적질서와내적질서’, 그리고 ‘거룩한공동체란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대표적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모든죄가들어오는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음란해지고, 배부르면교만해지고, 배부르면자기자랑을하게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합일의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안의선은내것이아니라주님의것’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어떤높은영적단계에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응답이다. 기도는안되는것을되게하고, 불가능을가능하게하고, 닫힌문을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바라는불가능한일을하나님이이루어주시는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모든것의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한인간이시키는대로하는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더먹고싶다’, ‘내뜻대로하고싶다’, ‘나는예외이고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온수도사가없다. 한국과아토스의고리를만들어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이런수도영성이생겼으면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이런교회수도사들이많이배출되어하나님과함께사는사람들이많이나타났으면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많이배출되는것’과 ‘거듭난사람이많아지는것’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가까이하는사람들이많으면사막이도시가된다’, ‘아름다운사람들이살기때문에그곳이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수도자가되는법’보다 ‘거룩한공동체가어떻게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훈련끝에드디어하나님과합일의단계에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하면도달하는영적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여기까지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나를여기까지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무엇보다우선하고싶었던갈망’, ‘욕망에끌려다니지않으려했던절제’, ‘기도를삶의중심에두려했던태도’, ‘피조물에게까지미친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같은곳’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2)
AC.382
‘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fugitiveandawandererintheearth)가된다는것이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알지못하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말씀에서‘유리하는것’(wandering)과‘피하여달아나는것’(fleeingaway)의의미로부터분명합니다.예레미야애가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That to be a“fugitiveandawandererintheearth”signifie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wandering”and“fleeingaway”in the Word. As in Jeremiah:
여기서‘선지자들’(prophets)은가르치는자들을,‘제사장들’(priests)은그에따라사는자들을의미합니다.‘거리에서맹인같이방황하는것’(wanderblindinthestreets)은무엇이진리고선인지알지못하는것입니다. where“prophets”are those who teach,and“priests,”those who live accordingly;to“wanderblindinthestreets”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여기서‘비가내린밭의부분’(partofthefieldonwhichitrained)은체어리티에서나오는신앙의교리를의미하고,‘비가내리지않은밭의부분’(partorpieceofthefieldonwhichitdidnotrain)은체어리티없는신앙의교리를의미합니다.‘물을마시려고유리하는것’(wandertodrinkthewaters)역시진리를찾는것을의미합니다. where by the“partofthefieldonwhichitrained”is signified the doctrine of faith from charity;and by the“part”or“piece”“ofthefieldonwhichitdidnotrain,”the doctrine of faith without charity. To“wandertodrinkthewaters”likewise denotes to seek after truth.
여기서‘에브라임’(Ephraim)은진리에대한이해,곧신앙을의미하는데,이는그가요셉의장자였기때문입니다.‘말라버린뿌리’(rootwhichwasdriedup)는열매를맺을수없는체어리티를의미하고,‘여러나라가운데에서떠도는자들’(wanderersamongthenations)은무엇이진리고선인지알지못하는자들을의미합니다. “Ephraim”here denotes the understanding of truth,or faith,because he was the firstborn of Joseph;the“rootwhichwasdriedup”denotes charity that cannot bear fruit;“wanderersamongthenations”are those who do not know what is true and good.
‘아라비아’(Arabia)와‘동방의아들들’(sonsoftheeast)은천적인부요함,곧사랑에속한것들을소유함을의미합니다.이것들이황폐해질때그들은‘피하고’(flee)‘유리한다’(wander)고,곧선한것을전혀행하지않을때‘피하며유리하는자들’(fugitivesandwanderers)이된다고말합니다.‘하솔주민들’(inhabitantsofHazor),곧영적인부요함인신앙에속한것들을소유한자들에대해서는그들이‘깊은곳으로내려간다’(letthemselvesdownintothedeep)고하는데,이는그들이멸망한다는뜻입니다. “Arabia”and the“sonsoftheeast,”signify the possession of celestial riches,or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which,when vastated,are said to“flee,”and“wander,”that is,to be“fugitivesandwanderers,”when they do nought of what is good. Of the“inhabitantsofHazor,”or those who possess spiritual riches,which are those of faith,it is said that they“letthemselvesdownintothedeep,”that is,they perish.
이는‘환상의골짜기’(valleyofvision),곧체어리티없는신앙이가능하다는환상을두고한말입니다.이로부터뒤의한절에서그가체어리티에서분리된신앙을고백하는자를‘피하며유리하는자’(fugitiveandawanderer),곧선과진리에관하여아무것도알지못하는자라고말한이유가분명해집니다. speaking of the“valleyofvision,”or the fantasy that faith is possible without charity. Hence appears the reason why it is said,in a subsequent verse(Isa.22:14),that he who professes faith that is apart from charity is a“fugitiveandawanderer,”that is,knows nothing of good and truth.
AC.382는 AC.380에서 ‘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가된다’는 것이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알지못하는것’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리한다’는 것을 단순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를 차례로 인용하면서 말씀에서 ‘유리함’과 ‘피하여달아남’이 영적으로 방향을 잃은 상태, 특히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용은 가인의 문제, 곧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와 연결됩니다.
첫 번째 인용인 애4:13-14에서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거리에서맹인같이방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을 가르치는 자들로, ‘제사장들’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과 삶을 대표하는 두 부류가 모두 맹인처럼 거리를 방황한다는 것은 단순히 길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인데, 영적으로 방향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그 거리에서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진리와 선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이 가인이 ‘유리하는자’가 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두 번째 암4:7-8은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한 밭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밭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비가 내린 밭을 ‘체어리티에서나오는신앙의교리’로, 비가 내리지 않은 밭을 ‘체어리티없는신앙의교리’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신앙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후자는 비를 받지 못한 밭처럼 말라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마시려고 이 성읍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합니다. 물은 여기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와 연결됩니다. 즉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계속 진리를 찾아 헤매며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AC.379-381의 흐름을 그대로 이어 줍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 했고, AC.380에서는 그런 신앙이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AC.381에서는 그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암4장의 ‘물을마시려고유리하지만만족하지못하는’ 사람들은 그 상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신앙은 지식을 계속 더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이 생명으로 이어지지 않으므로 참된 영적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호9:16-17에서는 ‘에브라임’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브라임을 ‘진리에대한이해,곧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뿌리가말라열매를맺지못한다’는 것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의 ‘땅이그효력을내지않는다’는 설명과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라는 생명이 사라지면 신앙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여러나라가운데에서떠도는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남아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렘49장의 ‘아라비아’와 ‘동방의아들들’은 조금 더 깊은 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천적인부요함’, 곧 사랑에 속한 것들을 소유한 상태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황폐해지면 ‘피하고유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선한것을전혀행하지않는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선과진리를알지못한다’는 상태가 단순한 지적 혼란이 아니라 삶의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결국 무엇이 선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하솔주민들’이 가진 영적인 부요함, 곧 신앙에 속한 것들 역시 결국 ‘깊은곳으로내려간다’, 즉 멸망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영적 지식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22장의 ‘환상의골짜기’는 이 모든 설명을 가인의 핵심 문제에 직접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체어리티없는신앙이가능하다는환상’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fantasy’라는 말이 매우 강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고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교리가 걸어온 길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시작하여 둘을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 위에 놓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피하며유리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드러납니다. 가인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신앙의 방향을 잃었습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하면 진리만 더욱 순수하게 남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분별할 능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선이며, 신앙에 생명을 주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을 잃은 진리는 지식으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진리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물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걷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있으면교리적진리를몰라도된다’는 반대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AC.382의 결론은 진리를 버리고 선만 붙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분별하려면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진리는 체어리티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가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체어리티가 그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한 데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의 여러 성경 인용을 하나씩 별개의 교리로 떼어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다섯 인용을 가져온 목적은 하나입니다. 말씀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피하여달아나는’ 이미지들이 영적인 방향 상실과 연결되며, 그 방향 상실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에서는 맹인처럼 방황하고, 아모스에서는 물을 찾아 유리하며, 호세아에서는 열매 없는 에브라임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돌고, 예레미야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부요함을 잃은 자들이 피하고 유리하며, 이사야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환상’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상태를 비춥니다.
따라서 창4:12의 ‘너는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가되리라’는 것은 단순히 가인에게 내려진 외적인 유랑 형벌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 결국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교리가 맞이한 가장 깊은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만을 높이려 했는데 결국 신앙 자체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버릴 때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으며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올바른 방향을 얻게 됩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2)
AC.381
‘땅을가는것’(tilltheground)이이분열또는이단을배양하는것을의미한다는것은방금설명한‘땅’(ground)의의미에서분명합니다.그리고‘땅이그효력을내지아니하는것’(notyieldingitsstrength)이그결실없음을의미한다는것은땅에관하여앞에서말한것과그말자체에서도분명하며,또한체어리티없는신앙을고백하는자들은아무런신앙도고백하지않는것이라는,앞에서말한사실에서도분명합니다. That to“tilltheground”mean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 appears from the signification of“ground,”of which we have just now spoken;and that its“notyieldingitsstrength”denotes its barrenness,is evident both from what was said concerning ground,and from the words themselves,as well as from this consideration,that those who profess faith without charity,profess no faith,as was said above.
해설
AC.381은 바로 앞 AC.380의 설명 가운데 처음 두 부분을 확증합니다. ‘땅을가는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며, 그 땅이 ‘그효력을내지아니한다’는 것은 그 분열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새로운 상응을 길게 전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앞에서 이미 밝혀진 ‘땅’의 의미와 창4:12의 표현 자체, 그리고 AC.379에서 제시한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는 원리를 함께 가져와 AC.380의 해석이 왜 성립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땅을가는것’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땅’의 의미에서 나옵니다. AC.377에서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라고 했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 성질이 형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문맥에서 그 땅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적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땅을 계속 간다는 것은 그 분열을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된 원리를 한 번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가르치면서 더욱 견고한 체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배양’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경작하더라도 그 땅은 ‘그효력’을 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실없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땅이그효력을내지않는다’는 표현 자체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땅의 힘은 씨를 받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는 데 나타나는데, 이제 그 힘이 가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속뜻에서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켜도 거기에서는 참된 영적 생명의 열매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결실없음’의 이유를 다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없는신앙을고백하는자들은아무런신앙도고백하지않는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AC.379의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라단지지식이다’라는 설명을 압축하여 되풀이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이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그 땅의 생산력을 빼앗아 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신앙의 생명 자체를 이루는 체어리티를 신앙에서 떼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제거한 뒤에는 아무리 그 신앙을 경작해도 살아 있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없는신앙을고백한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나는신앙이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문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profess’에는 어떤 교리를 자기의 신앙 원리로 인정하고 주장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체어리티를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에서 떼어 내면서도 그것을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것을 부정합니다. 체어리티가 빠진 신앙은 신앙의 한 종류가 아니라, 앞에서 말했듯이 신앙에 관한 지식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행위가있어야신앙의부족분을채워완전해진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에 외적으로 덧붙이는 공로적 행위가 아닙니다. AC.379에서 체어리티를 ‘사랑과자비’라고 했고, 그것이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생각 안에 있을 때 그 생각 안에 ‘신앙의본질인체어리티’가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의 열매는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에 외적인 선행 몇 가지를 더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가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어 실제 삶으로 나타날 때 생깁니다.
이렇게 보면 ‘땅을열심히가는데도열매가없다’는 이미지는 상당히 강력합니다. 사람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기 신앙의 논리를 세우고, 성경 구절을 모으고,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매우 열심히 땅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작업의 중심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제거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경작 자체가 생명의 열매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된 분리를 더 깊이 ‘배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이 경작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땅을 경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열매 맺으려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올바른 교리를 찾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말씀의 진리와 참된 교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의 목적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지식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가르치고 선으로 인도하며, 마침내 선과 결합되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진리를 연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게 되고, 자기의 지적 우월성을 확인하며, 선한 쓰임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가 갈고 있는 ‘땅’이 어떤 땅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C.381은 그래서 AC.379-380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지며,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단지 지식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AC.380에서는 그런 분열을 계속 배양해도 그 땅은 결실하지 못하고, 결국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 유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1은 그 결실 없음의 이유를 다시 한 번 명시합니다.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외적인 형벌이 아니라 신앙에서 그 생명을 제거한 데 있습니다.
결국 AC.381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땅은 아무리 갈아도 참된 영적 결실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에 있으며,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와 삶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가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제거한 데 있었고, 그 결과 남은 것은 더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하는 땅이었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창4:12)
AC.380
‘땅을가는것’(tilltheground)은이분열또는이단을배양하는것을의미합니다.‘땅이다시는네게그효력을내지아니할것이요’(itshallnotyielduntotheeitsstrength)는그것이결실이없음을의미합니다.‘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afugitiveandawandererintheearth)가된다는것은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알지못하는것을의미합니다. To“tilltheground”signifies to cultivate this schism or heresy;“itshallnotyielduntotheeitsstrength”signifies that it is barren. To be a“fugitiveandawandererintheearth”is not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해설
AC.380은 창4:12의 ‘네가밭을갈아도땅이다시는그효력을네게주지아니할것이요너는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가되리라’의 속뜻을 세 부분으로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377-379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고, 그 분열로 말미암아 사람이 선에서 돌아서며, 체어리티가 소멸될 때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80에서는 그러한 분열을 계속 붙들고 발전시킬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결실이 없으며,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먼저 ‘땅을간다’는 것은 ‘이분열또는이단을배양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간다는 것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얻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문맥 안에서 결정됩니다. 여기서 ‘땅’은 이미 AC.377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 분열된 교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확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못된 원리도 사람이 계속 생각하고 논증하고 뒷받침하면 점점 더 정교한 하나의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계가 정교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가인의 진행 과정과도 잘 맞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분리가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가 되었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AC.378에서는 그 분열이 ‘입을벌려’, 곧 하나의 이단적 교리로 가르쳐졌다고 했습니다. 이제 ‘땅을간다’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조잡한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출발점을 붙들고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증하면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 있어 보이는 교리 체계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살아 있는 결합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땅은 참된 영적 열매를 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곧이어 ‘땅이다시는네게그효력을내지아니할것이요’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간단히 ‘그것이결실이없음을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strength’는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 곧 열매를 내는 힘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교리를 아무리 발전시키고 확증해도 거기에서는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AC.379에서 그 이유가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며,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체어리티, 곧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신앙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경작해도 그 지식 자체에서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생명이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실이없다’는 것을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 성과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379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 없는 사람도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경건한 열심처럼 보이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는 설교도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종교 활동을 하며, 상당한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외적 성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 영적 결실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스스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서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알지못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AC.380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더 순수하게 보존하려고 체어리티와 구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배척하면 역설적으로 신앙 자체도 선과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게 됩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과 결합할 때 살아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을 잃어버린 신앙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에 관하여 방향을 잃고 ‘피하며유리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 점은 앞의 AC.379와 매우 깊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의 무리들조차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안다’는 것은 단순히 진리에 관한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참된교리다’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진리를 생명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사람 안에서 방향을 잃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 나면 결국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알지못한다’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부족이라기보다 영적 분별의 상실에 가깝습니다.
‘피하는자’와 ‘유리하는자’라는 두 표현 역시 지금 번호에서는 하나하나 별도의 상응으로 세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전체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80은 둘을 합쳐 ‘nottoknowwhatisgoodandtrue’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피하는자는이것,유리하는자는저것’이라고 미리 나누어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두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구별한다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현재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방향을 잃고 안정된 영적 토대를 갖지 못하는 상태 전체를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앙의 정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들을 자기 사랑이나 정죄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진리를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땅을 열심히 갈고 있지만 그 땅이 ‘그효력’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방향을 얻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듭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보호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이 둘이 주님 안에서 결합될 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함께 받아들일 때 생기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유리함’과 반대되는 상태는 단순히 교리적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삶의 방향이 분명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80은 가인의 분열이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세 단계로 보여 줍니다. 먼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을 계속 ‘경작’합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여 ‘피하며유리하는자’가 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버리고 신앙만을 지키려 했던 교리가 결국 신앙 자체의 방향까지 잃어버리는 역설입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 있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
이러한것들이의미된다는것은앞에서설명한것으로부터분명하며,‘저주를받는것’(cursed)이선에서돌아서는것이라는사실은이미앞에서밝혔습니다(AC.245).불의와가증한것들,곧미움이사람을돌아서게하여오직아래쪽만바라보게하기때문입니다.즉육체적이고세속적인것들만바라보게하며,그리하여지옥에속한것들을바라보게합니다.이것은체어리티가추방되고소멸될때일어납니다.그때에는주님과사람을연결하는결속이끊어지기때문입니다.우리를주님과결합시키는것은오직체어리티,곧사랑과자비이며,체어리티없는신앙은결코우리를주님과결합시키지못합니다.그러한신앙은신앙이아니라단지지식에불과하며,지옥의무리들조차도그러한지식을가질수있습니다.그들은그것을가지고선한사람들을교활하게속이며자신을빛의천사들인것처럼가장할수있습니다.또한가장악한설교자들이때때로경건과같은열심을가지고그렇게하곤하지만,그들의입술에서나오는것보다그들의마음에서더먼것은아무것도없습니다.기억속에만있는신앙이나거기에서나온생각만으로어떤유익이있을수있다고믿을만큼판단력이약한사람이있을수있겠습니까?누구나자신의경험으로,다른사람의말이나동의가아무리그럴듯하더라도그것이의지나의도에서나오지않는다면아무도그것을가치있게여기지않는다는것을알고있습니다.그것들을기쁘게하고한사람을다른사람과결합시키는것은바로의지입니다.의지가실제사람이며,사람이의지하지않는생각이나말은실제사람이아닙니다.사람은의지로부터자신의성질과성향을얻습니다.의지가그에게영향을미치기때문입니다.그러나어떤사람이선한것을생각한다면,그생각안에는신앙의본질인체어리티가있습니다.선을행하려는의지가그생각안에있기때문입니다.그러나그가선한것을생각한다고말하면서도악하게산다면,그는악한것외에는아무것도의지할수없으며,그러므로거기에는신앙이없습니다.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is evident from what has gone before; and that to be “cursed” is to be averse to good, has been already shown (n. 245).For iniquities and abominations, or hatreds, are what avert man, so that he looks downward only, that is,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thus to those which are of hell.This takes place when charity is banished and extinguished, for then the bond which connects the Lord with man is severed, since only charity, or love and mercy, are what conjoin us with him, and never faith without charity, for this is no faith, being mere knowledge, such as the infernal crew themselves may possess, and by which they can craftily deceive the good, and feign themselves angels of light; and as the most wicked preachers are sometimes wont to do, with a zeal like that of piety, although nothing is further from their hearts than that which proceeds from their lips.Can anyone be of judgment so weak as to believe that faith alone in the memory, or the thought thence derived, can be of any avail, when everybody knows from his own experience that no one esteems the words or assenting of another, no matter of what nature, when they do not come from the will or intention?It is this that makes them pleasing, and that conjoins one man with another.The will is the real man, and not the thought or speech which he does not will.A man acquires his nature and disposition from the will, because this affects him.But if anyone thinks what is good, the essence of faith, which is charity, is in the thought, because the will to do what is good is in it.But if he says that he thinks what is good, and yet lives wickedly, he cannot possibly will anything but what is evil, and there is therefore no faith.
해설
AC.379는 앞의 AC.378에서 ‘네가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가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이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245에서 ‘저주를받는다’는 것이 선에서 돌아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저주’를 주님께서 가인에게 악을 내려 보내시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 것은 ‘불의와가증한것들,곧미움’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선에서 돌아서고, 마침내 아래쪽, 곧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 바라보게 되며 지옥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등지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저주의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곧바로 밝힙니다. ‘체어리티가추방되고소멸될때’입니다. 이 한 문장이 가인 이야기 전체를 다시 묶어 줍니다.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교리 하나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이 끊어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우리를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체어리티,곧사랑과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표현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어야 하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더 이상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없는신앙은신앙이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mereknowledge’, 곧 단지 지식일 뿐입니다. 사람이 주님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알고,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신학적 논리를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심지어 지옥의 무리들조차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사랑하고 의지하여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기억과 이해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사람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선한사람들을교활하게속이고자신을빛의천사들인것처럼가장할수있다’는 대목도 바로 이 차이를 강조합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 자체는 악한 의지에 의해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돕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지배하거나 속이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같은 진리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들리는 말만 보면 둘을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악한설교자들’도 때때로 경건해 보이는 열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특정 설교자들을 의심하고 판단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외적인 종교 언어와 내적인 의지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379의 논증은 ‘기억속에만있는신앙’으로 옮겨갑니다. 사람이 교리를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원에 어떤 효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느냐고 스베덴보리는 반문합니다.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예로 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그의 진정한 의지나 의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말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 말은 두 사람을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이 서툴더라도 실제로 상대의 선을 원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일상적인 원리를 사람과 주님의 관계에도 적용합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에서 가장 강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나옵니다. ‘의지가실제사람입니다.’ 이것은 생각과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의지와 이해는 인간 마음의 두 중요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지가 그의 생명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의지하지 않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앙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말과 생각은 아직 그 사람의 실제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의지로부터자신의성질과성향을얻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대목을 ‘사람에게순간적으로어떤악한의지가느껴지면그것이곧그사람의영원한본질이다’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중인 인간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애정과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악한 충동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려 한다면, 그 싸움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의지가실제사람’이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모든 충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자기 것으로 삼는 지배적인 의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남의 싸움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사람이선한것을생각한다면,그생각안에는신앙의본질인체어리티가있다’고 합니다. 얼핏 읽으면 앞에서 ‘생각만으로는아무소용이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선한 생각 안에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유를 덧붙입니다. ‘선을행하려는의지가그생각안에있기때문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선한생각’은 머릿속에서 선에 관한 명제를 떠올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실제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의지와 분리된 지식이 아니라 의지에서 생명을 받은 생각이며, 따라서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우리가 주목했던 ‘willingwhatisgood’, 곧 ‘선을의도하는것’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의 생명은 단순히 무엇이 참인지 아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을 만들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유롭게 의도하며 행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신앙의 생각 안에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는선한것을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악하다면 문제가 전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은 실제로 악한 것 외에는 의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신앙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여기서도 한두 번의 실패나 거듭남 가운데 넘어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선을 진심으로 의도하면서도 연약함 때문에 실패할 수 있고, 다시 회개하여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번 문맥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입과 생각으로는 선과 진리를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악을 사랑하고 악한 삶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 입술의 신앙은 그의 생명이 아니며,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 ‘신앙이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79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보다선행이중요하다’는 도덕적 교훈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해 행하는 외적인 선행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의지 안에 받아들여지고, 진리와 결합하여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그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믿을것인가,행할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진리가의지와삶안에서사랑과결합되어살아있는신앙이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결국 AC.379에서 가인의 ‘저주’가 왜 그렇게 심각한지가 드러납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단지 기독교적 덕목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주님을 결합시키는 결속을 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남을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정교한 신학과 경건한 말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을 의도하는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의지가실제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입술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고백되는가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의도하며 살아가게 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네가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Cursedartthoufromtheground)는그분열로말미암아그가돌아서게되었음을의미합니다.‘그입을벌려’(whichhathopeneditsmouth)는그이단이그들에게가르쳤음을의미합니다.‘네아우의피들을네손에서받아들였은즉’(receivethybrother’sbloodsfromthyhand)은그것이체어리티에폭력을가하여체어리티를소멸시켰음을의미합니다. “Cursedartthoufromtheground”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whichhathopeneditsmouth”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to“receivethybrother’sbloodsfromthyhand”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and extinguished it.
해설
AC.378은 창4:11의 ‘땅이그입을벌려네손에서부터네아우의피를받았은즉네가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7에서 ‘땅’은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고,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며 악과 거짓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78의 ‘땅에서저주를받는다’는 말씀도 외적인 토지가 가인을 저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킨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림으로써 생긴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네가땅에서저주를받으리니’를 ‘그분열로말미암아그가돌아서게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서 돌아섰느냐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여 그에게서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킨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저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스스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저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저주의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인간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명과 선이 흘러오는 질서에 등을 돌립니다. 햇빛은 계속 비치지만 사람이 스스로 등을 돌리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이 태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태양을 등진 상태에서 생긴 것처럼, 여기서 ‘저주’도 주님의 사랑이 반대로 변한 결과라기보다 가인의 분열이 가져온 영적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땅이그입을벌렸다’는 것은 ‘그이단이그들에게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피를 받아들였다는 문자적 장면을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가르침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바로 앞에서 땅은 사람 안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입’이 있습니다. 입은 말하고 가르치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분열이 단순히 내면에 잠재된 생각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로 표현되고 가르쳐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상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마음의 흔들림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원리가 교리로 형성되고 전달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은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교리는이와같이되었습니다’와 직접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을 거부했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결국 완전히 배척했습니다. 이제 그 상태가 ‘땅이입을벌린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즉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악과 거짓이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교리로 조직되고 가르쳐질 때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AC.377에서 사람이 그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형성된다고 한 설명과도 바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네아우의피들을네손에서받아들였은즉’은 그 이단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시 ‘피들’이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AC.374에서 이미 그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은 단지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있어야 할 여러 선한 것들이 폭력을 당하고 소멸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특히 ‘네손에서’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AC.378자체에서는 ‘손’의 상응을 별도로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앞질러 자세히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전체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인의 분열과 이단이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결과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idviolencetocharity,andextinguishedit’이라고 아주 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체어리티를 덜 중요하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78의 세 표현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땅에서저주를받는다’는 것은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입니다. 그다음 ‘땅이입을벌린다’는 것은 그 분열이 이단적 교리가 되어 가르쳐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이 ‘아우의피들을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리가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그것을 소멸시킨 결과입니다. 분열이 내면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삶과 교회의 사랑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단’ 역시 오늘날 특정 교파를 정죄하는 말로 성급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이단이 무엇인지는 이미 문맥 안에서 분명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하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AC.378은 다른 사람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판정하기 위한 도구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게 합니다. 내가 붙드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결국 AC.378의 ‘저주’는 주님께서 가인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분열은 입을 벌려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으며, 마침내 아벨의 피들을 받아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가인을 부르시지만, 가인의 교리는 점점 더 주님의 질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신앙을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자기가 서 있는 땅 자체를 분열의 땅으로 만들지만,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나는 주님의 밭이 됩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
여기서‘땅’(ground)이분열또는이단을의미한다는것은‘밭’(field)이교리를의미한다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그러므로밭을그안에가지고있는‘땅’은분열을의미합니다.사람자신이‘땅’이며또한‘밭’입니다.이러한것들이사람안에심어지기때문입니다.사람은자기안에심어진것에따라그런사람이되기때문입니다.선들과진리들로부터는선하고참된사람이되고,악들과거짓들로부터는악하고거짓된사람이됩니다.어떤특정한교리나이단안에있는사람은그것으로부터이름을얻게됩니다.그러므로지금다루고있는구절에서도‘땅’이라는말은사람안에있는분열또는이단을나타내기위해사용됩니다. That the“ground”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field”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ground,”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Man himself is the“ground,”and also the“field,”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ground”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은 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땅(ground)은분열또는이단을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창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또는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밭’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들’ 또는 ‘밭’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땅’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또는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자신이땅이며또한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자기안에심어진것에따라그런사람이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진리들로부터는선하고참된사람이되고,악들과거짓들로부터는악하고거짓된사람이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을 ‘나쁜생각이한번들어오면악한사람이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특정한교리나이단안에있는사람은그것으로부터이름을얻게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교리만머리로정확히알면선한사람이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땅’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자신이땅이며또한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내안에는무엇이심어지고있는가?내가반복하여받아들이고확증하는생각은무엇인가?내가붙드는신앙의진리는실제로체어리티와결합되고있는가?아니면어떤진리를자기사랑을정당화하는수단으로사용하고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땅’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원래어떤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지금무엇을받아들이고있으며,주님께서내안에심으시는것을어떻게받아들이고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
이로부터‘피들이부르짖는것’(cryingofbloods)은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는것이따라나옵니다.폭력을가하는자들은죄책이있는것으로여겨지기때문입니다.시편에서는다음과같습니다.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cryingofbloods”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As in David:
AC.376은 앞의 AC.373-375에서 전개된 설명을 아주 짧게 결론짓습니다. AC.373에서는 ‘피들의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374에서는 왜 ‘피들’이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피는 특히 미움을 의미하며,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고 할 수만 있다면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AC.375에서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황에 사용되지만 창4:10에서는 특별히 고발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76은 이 둘을 결합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자에게는 죄책이 있으므로, 그 폭력을 뜻하는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바로 그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죄책의고발’이라는 표현은 마치 아벨의 피가 주님 앞에서 가인을 고소하여 주님께서 비로소 범인을 알아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모르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은 악 자체가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피들이부르짖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변명하거나 부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 폭력 자체가 그 사람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음’과 ‘고발’은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라기보다, 행해진 악의 본질과 책임이 영적 질서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짧은 번호에서 시34:21을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의인을미워하는자는죄책이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바로 앞 AC.374에서 설명한 ‘미움’과 이번 AC.376의 ‘죄책’을 직접 연결합니다. AC.374에서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며 마음으로 형제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시편은 의인을 ‘미워하는자’가 죄책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미움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지나가는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굳어져 이웃의 선을 해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실제 영적 책임과 연결되는 악입니다. 이 구절은 ‘미움→체어리티에대한폭력→죄책’이라는 AC.374-376의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겔22:4은 그 연결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네가흘린피로말미암아죄책이있게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는 ‘피’와 ‘죄책’이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4:10의 ‘피들이부르짖는다’를 ‘죄책의고발’로 읽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살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설명에 따르면 미움과 무자비함과 거기서 솟아나는 여러 불의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피’가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는 것이고, 그 피가 행위자에게 돌아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도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폭력을가하는자들은죄책이있는것으로여겨진다’고 한다고 해서 외적으로 어떤 해로운 결과가 발생하기만 하면 언제나 동일한 정도의 영적 죄책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죄책에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 알고도 선택한 악의 성질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맥에서 가인의 폭력은 우발적인 실수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앞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완전히 거부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죄책은 그러한 내적 거부와 폭력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피들의부르짖음’은 가인의 앞선 말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아벨의 관계를 부인하고 ‘내가내아우를지키는자니이까?’라고 책임을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AC.372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의 ‘지키는자’, 곧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6에서는 그 거부와 폭력이 ‘죄책의고발’로 돌아옵니다. 책임을 부인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교리적으로 선언하더라도, 그 결과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면 그 결과 자체가 그 잘못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AC.376은 ‘죄책’을 주님께서 밖에서 인간에게 덧씌우시는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한 악과 연결하여 읽게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임의로 죄책을 만들어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 자체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앞의 AC.357에서 여호와의 진노가 실제로 주님 안에 있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상태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도 방향이 통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그 악에 따른 상태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AC.376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4:10의 ‘피들의부르짖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완성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고, 그 폭력에는 죄책이 있으며, 그러므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알지못한다’고 말하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미움과 악을 합리화하고 책임을 부인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회개는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거나 변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의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부르짖는것’이 ‘죄책의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소리’와 ‘부르짖음의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소리’라고 말합니다. 즉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습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소리와부르짖는소리가그가운데에서다시는들리지아니할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의 ‘네아우의핏소리가땅에서부터내게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알지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 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고발’, ‘부르짖음=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여러경우에사용되지만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여기서는죄책의고발을의미합니다.’ 창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이 ‘피들의부르짖음= 죄책의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가 ‘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