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해설

 

이 문장은 짧지만,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깊은 정점 중 하나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이 ‘죽음에서 소생됨’, ‘영적 상태로 들어감’, 그리고 ‘천적 상태로 나아감’이라는 상승의 운동이었다면, AC.74는 그 운동이 도달하는 ‘멈춤의 지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멈춤은 정지나 공백이 아니라, 완성과 평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멈춤은 ‘일곱째 날’이며, ‘주님이 쉬시는 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곧바로 ‘일곱째 날’과 동일시합니다. 이는 시간의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까지는 언제나 움직임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싸움과 수고가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악을 대적하고, 질서를 세워 가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쉬신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일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이해와 판단, 선택이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단계에서는 주님의 선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이해는 그 선을 섬기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를 ‘주님의 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창세기 1장은 여섯 날의 창조로 끝나지만, 그 끝은 완결이 아니라 ‘문턱’입니다. 창세기 21절로 3절에서 비로소 ‘안식’이 언급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동일합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서 곧바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상태는 여전히 진리 중심의 삶이며, 싸움과 선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은 더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그 특징을 길게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일곱째 날’이라는 말 속에 이미 모든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은 빛과 어둠을 나누는 날이 아니고, 물과 물을 가르는 날도 아니며, 생명을 만들어 내는 날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천적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이미 주어진 진리 안에서, 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갑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순히 ‘행복한 곳’이나 ‘보상의 장소’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그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 있어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진리를 따르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이렇게 보면, AC.74는 독자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여섯째 날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일곱째 날을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신앙은 여전히 필요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2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인간을 결국 ‘안식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식은 삶을 포기하는 자리가 아니라, 삶이 가장 온전히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AC.74는 다음에 이어질 모든 설명의 기준점이 됩니다. 이후에 나오는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지키고 경작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일곱째 날의 사람’, 곧 천적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주님은 그 안에서 어떻게 거하시는가, 그리고 그 상태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이제 펼쳐질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흐름에서 AC.74는 매우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수고의 신앙에서 안식의 신앙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spiritual(영적)에서 celestial(천적)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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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논의를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AC.72까지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예고하는 문턱이었다면, AC.73은 이제 그 영원한 삶 안에서도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깊어지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을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도 분명한 단계와 질서, 그리고 성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된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죽어있음’은 무엇보다도 ‘영적 무감각과 분리의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 땅에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적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후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거듭남의 보편적 구조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이 된 뒤에, 그다음 단계로 ‘천적 인간’이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많은 신학적 전통에서는 영적 상태 자체를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상태는 ‘중간 단계’입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신앙의 질서 안에 들어선 상태는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입니다.

 

천적인 상태란, 진리를 ‘아는 상태’를 넘어, 선을 ‘사는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이 주로 이해와 분별의 차원에 서 있다면,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상태에서는 진리가 앞서고 선이 그 뒤를 따르지만, 천적인 상태에서는 선이 중심이 되고 진리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담깁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이동하는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사후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질서와 순서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영적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천적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 먼저 길이 열리고, 그다음에야 사랑이 그 길을 따라 깊어집니다. 이는 창1에서 빛이 먼저 창조되고, 그다음에 생명이 질서 잡히는 구조와 정확히 상응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1을 다루면서, 그 동일한 구조가 사후 삶과 거듭남의 내적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AC.73이 단지 일반론을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 해설하고 있는 본문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입니다. 창2:1에서 말하는 ‘다 이루어졌다’는 상태는, 단순히 영적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인 천적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졌음을 포함합니다. 즉, 창2는 영적 인간을 넘어,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하는 장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과 창2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1장은 주로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다루고, 2장은 그 영적 상태 위에서 ‘천적 삶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다룹니다. AC.73은 바로 이 전환점을 독자에게 명확히 짚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부터 읽게 될 내용은 더 이상 단순한 분별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사후 삶에 대한 오해를 조용히 바로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곧바로 완성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후 삶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이 땅에서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집니다. 사후 세계는 보상과 처벌의 무대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결국 AC.73은 아주 짧은 문장 안에서, 창조–거듭남–사후 삶이라는 세 층위를 하나로 겹쳐 놓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이 질서는, 태고교회의 구조이자, 개인의 거듭남의 구조이며, 사후 삶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질서를 지금부터 창2를 통해 차분히, 그러나 매우 구체적으로 풀어 가려 합니다.

 

 

 

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 안식'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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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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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이정표’와 같습니다.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내용들을 본문 한가운데에 넣지 않고 장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는 그 설명을 실제로 실행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글의 구조가 이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장의 끝에서’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삶에 대한 설명을 말씀 해설의 중심부에 끼워 넣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에 둡니다. 이는 사후 삶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끝은 결론이자 독자가 지금까지 읽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삶의 실제로 연결시키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뒤에야, 그 말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말해도 좋다는 허락’이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전히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설명하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AC.67에서부터 반복되어 온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후 삶에 대한 이 설명은 흥미로운 부록도, 개인적 체험담도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지금 이 위치에 놓이도록 허락된 증언’이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다시 한번 정의합니다. 그는 ‘죽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하지 않고,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수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른 삶 안으로 옮겨지는 상태입니다.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단순히 ‘다음 세계’나 ‘저 세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차원임을 뜻합니다.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삶의 참된 자리로 들어간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글은 또한 독자의 기대를 조용히 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나 공포스러운 심판 이야기를 예고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즉, 과정과 질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에 이어질 설명들이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질서 있는 묘사’가 될 것임을 미리 알려줍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다시 보면, 이 글의 위치가 얼마나 정확한지 분명해집니다. AC.67에서는 ‘왜 내가 말할 수 있는가’를 밝혔고, AC.68에서는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은 본래 그렇게 창조되었다’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라는 핵심을 제시했으며, AC.71에서는 ‘이 모든 것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72에서,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말합니다. ‘이제 실제로 그것을 말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72는 내용보다도 ‘전환의 의미’가 더 큰 단락입니다. 이 글을 기점으로, 아르카나는 추상적 전제와 선언의 영역을 지나,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사후 삶의 묘사’로 들어갑니다. 독자는 더 이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그러한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짧은 글은 마치 문턱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준비였고, 여기서부터는 실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문턱 앞에서 독자에게 묻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알립니다. ‘이제 말할 것이다.’ 그 말이 어떤 삶의 이해를 요구하게 될지는, 다음 단락들에서 점점 분명해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spiritual(영적)에서 celestial(천적)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73 사람은 죽어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에는 그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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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이런 증언을 말씀 본문 앞뒤에 넣는 이유'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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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리고 그밖에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로서,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증언과 내용 전개를 잠시 멈추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는 방식 자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메타적 설명입니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으로 말하는가’를 밝힙니다. 이 한 문장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가르쳐 주는 안내문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글들에서 사후 삶, 영적 교통, 소생의 상태 같은 내용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런 내용들을 성경 본문 해설 한가운데에 그대로 끼워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던 독자의 인식 흐름이 끊기게 되고, 성경 본문과 증언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 본문을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다시 말해 그 어떤 독자에게도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거나 본문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그 고유한 흐름과 질서를 따라 해설되어야 하며, 개인적 증언이나 추가 설명은 그 질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식이 바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는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구조입니다.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그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이, 즉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그 내적 의미만이 놓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르카나는 하나의 혼합된 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가 질서 있게 공존하는 책’이 됩니다.

 

또한 그는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분리된 부록처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본문 해설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등장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기능적으로 배치됩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지 않고, ‘말씀의 질서가 허락하는 만큼만’ 드러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이 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배열의 권한조차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뿐 아니라, 어디에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까지도 허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스스로를 계시의 주체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봉사하는 증언자’로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이해하면, 아르카나를 읽다가 느끼게 되는 독특한 리듬, 그러니까 본문 해설과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교차하면서도 결코 뒤섞이지 않는 리듬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글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차원을 동시에 붙잡으려다 모두 놓쳐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C.71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책을 서두르지 말라’, ‘각 층위를 그 자리에 두고 읽으라’, ‘말씀과 증언을 섞지 말고, 연결하되 혼동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단지 아르카나를 위한 독서 지침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 전체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앞선 AC.70에서 ‘죽음은 삶의 계속, 연속’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제시되었다면, AC.71은 그 주제를 어떻게 질서 있게 풀어 갈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용의 진실성만큼이나, 그것을 담는 형식과 위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AC.72, 창2 앞,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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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사람이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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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 거부’,장기 기증’,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어떤 조언을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묶어 주셨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장기 기증’, ‘무빈소 장례’는 모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을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이런 제도를 언급했는가?’라는 1차 질문을 넘어서, ‘그가 영계, 죽음, 몸, 장례를 바라보는 일관된 원리’에 따라 각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하여

 

생명은 기계적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전이’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이 몸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 생명은 심장, 호흡, 기계적 기능에 있지 않다

* 생명은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 있다

* 육체는 영이 머무는 동안만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의식도 없고, 내적 삶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오직 기계적 연장만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을 ‘신앙적 의무’로 무한히 연장해야 할 이유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의 연장을 ‘자연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데, 육체만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은 신적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즉, ‘연명 치료 거부는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자연스럽게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장기 기증에 대하여

 

몸은 영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맡겨진 도구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사후의 사람은 이 땅의 육체와는 아무런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영적 몸’’이며, 지상의 심장, 간, 각막, 피부와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749-1756)에서 말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개념을 빌리면,

 

* 육체는 ‘상응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영의 상태이며, 사랑의 질(, quality)이다

 

따라서 ‘사후에 육체 일부가 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는 몸은 그 사람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자연계에 남긴 흔적이다

 

장기 기증은

 

*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 부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 오히려 ‘이웃 사랑의 자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죽은 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스베덴보리는 장례 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 그는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난다

* 그리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된다

 

즉, ‘빈소에 누워 있는 육체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 ‘남은 자들의 정서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 과도한 형식

* 체면을 위한 장례

* 슬픔을 연출하는 절차

 

이런 것들은 필수가 아닙니다.

 

무빈소 장례’는 충분히 스베덴보리적 정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추모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각자가 마음에서 주님 앞에 고인을 맡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영적인 의미는 충만합니다.

 

 

4.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연명 치료 거부 → ‘영의 자유를 존중하라

* 장기 기증 → ‘육체를 사랑의 마지막 도구로 내어주라

* 무빈소 장례 → ‘죽은 이를 땅에 붙잡아 두지 말라

 

이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선택이 죽음을 부정하려는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의 연속을 신뢰하는 태도인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진짜 신앙은 죽음 이후를 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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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자기들이 그랬듯, 또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연속(a continuation of life)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서론의 방향을 분명히 바꿉니다. AC.67-69가 ‘이런 증언이 가능한 이유’와 ‘인간 본성의 구조’를 설명했다면, AC.70은 그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밝힙니다. 그 첫 주제가 바로 ‘사람이 소생될 때’, 다시 말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단절이나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음을 ‘들어감’으로, 곧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표현은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깨어남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죽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던 상태가 ‘다른 방식으로 의식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씁니다.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증언이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그래서 더 충격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사후에 다시 말하고, 함께 있었으며, 그 시간이 하루나 한 주가 아니라 ‘여러 달’, 심지어 ‘거의 일 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였습니다. 이는 사후 세계가 막연한 안개 속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 기억,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 삶’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감상이나 신비적 분위기를 전혀 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합니다. 그 담담함 자체가 이 경험을 ‘비범한 사건’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로 제시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듯, 그는 ‘나는 그들과 말했고, 함께 지냈다’고 말합니다. 이 어조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진술의 무게를 크게 만듭니다.

 

사후에 만난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책망이나 비난도 없습니다. 다만 순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후의 삶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기에, 그것을 부정하던 과거의 자신과 타인의 상태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신을 지적하지만, 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지의 문제’, 더 정확히는 ‘겉 사람에 너무 깊이 잠긴 상태의 결과’로 암시합니다. 육체의 감각과 세상의 질서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으면, 생명이 그 너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육체를 벗어나면, 그 불신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긴 공백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과 사후 삶 사이에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사후관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다른 국면입니다. 끊어지는 것은 육체와의 관계이지, 의식과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다른 삶의 양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낯선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형성되어 온 삶의 성향과 애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AC.70은 그래서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죽음을 끝으로 이해한다면,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집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지속, 연속’으로 이해한다면, 이 땅의 삶은 준비이자 전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아르카나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를 이 글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삶은 다음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AC.67-69가 ‘말씀이 왜 다른 삶, 즉 사후 시작되는 삶을 향하는가’를 설명했다면, AC.70은 이제 그 다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실제 경험에 근거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르카나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으로 전개됩니다.

 

 

 

AC.69, 창2 앞,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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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자, 그 길이 닫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그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단번에 정리해 버립니다. 그는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능력의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 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립니다. 즉, 이것은 어떤 특별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예외적 능력이 아니라,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게 가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문장만으로도, 영적 교통을 둘러싼 많은 종교적 상상과 오해는 자리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몸을 입은 영’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를 가진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 ‘영적 존재가 육체를 입은 상태’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은 본질적으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생명이 다른 옷을 입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영적 존재 사이의 단절은 본질이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인류사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태고교회는 영계와 자연계를 오가는 특별한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간다’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지 않았고, 자연과 영적 실재가 동시에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영적 교통은 신비 체험이 아니라 ‘삶의 일상적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전환합니다. 문제가 언제, 왜 발생했는지를 분명히 짚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깊이 잠그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것들 속에 잠겨 버린 상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압도하고, 외적 관심사가 내적 생명을 가려 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길이 닫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습니다. 즉, 인간의 본성에서 영적 교통의 가능성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길이 파괴되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지만, 닫혔다면 다시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놀랍도록 희망적입니다. ‘사람이 그 안에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기술, 수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잠김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즉,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영들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어떤 공동의 삶 안에 있게 된다’는 마지막 문장은, 사후 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고 있던 삶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죽음 이후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의 삶의 차원이 분명해질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스베덴보리는 평소 영계를 그렇게 오랜 시간 방문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이런 방대한 저술 작업을 병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한번 명확해집니다. AC.69는 그 답을 ‘특별한 이중생활’이 아니라,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상태의 부분적 회복’에서 찾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삶을 중단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잠김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에서 글을 쓰며 살면서도, 동시에 영적 공동체 안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계를 방문할 동안 육신은 마치 무슨 마취 상태에 있듯 꼼짝 못 한 채 누워있었다가 몸 안에 돌아오면 그때 깨어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AC.69는 우리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인간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인간을 철저히 육체적, 세속적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말은 처음부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몸을 입은 영’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은 기이한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인간 이해의 회복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AC.67이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을 향한다’는 선언이었다면, AC.68은 ‘나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증언이었고, AC.69는 ‘그 경험은 인간 본성 자체에 근거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세 단락이 함께 놓일 때,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신비가가 아니라, ‘창조 질서를 다시 설명하는 증언자’로 서게 됩니다.

 

 

 

AC.70, 창2 앞, '사람이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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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앞, '예상되는 여러 반대에도 불구, 스베덴보리가 이걸 전하는 이유'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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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제가 사람들의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전한다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밖의 여러 반대들을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이 글은 AC.67에서 밝힌 전제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이는, 매우 정직하고도 대담한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의심을 품을지, 어떤 방식으로 반대할지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8은 방어문이 아니라, ‘미리 써 내려간 응답’에 가깝습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반대 의견들을 매우 정확하게 분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이 안 믿을 것이다’라고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 안에 있는 한 불가능하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인 조작’ 혹은 ‘신뢰, 관심을 얻기 위한 서사’라고 말할 것임을 구체적으로 짚습니다. 이는 그가 순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작업이 ‘의심과 반대를 동반할 것’임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점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학적 가능성이나 신학적 전통을 끌어오지 않습니다. 대신 단 세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정합니다. ‘나는 보았다. 나는 들었다. 나는 느꼈다.’ 이 세 동사는 매우 의도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나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전인적 경험의 증언’입니다.

 

보았다’는 것은 형상과 구조,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를 막연한 분위기나 감정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 관계, 거리, 방향, 질서가 있는 세계로 보았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라, 대화했고, 질문했고,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느꼈다’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청각적 환상이 아니라, ‘실재로서의 경험’이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영적 세계를 ‘정보’가 아니라 ‘접촉된 현실’로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만약 이것이 상상이라면, 느낄 수는 있어도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의도적 조작이라면, 수십 년에 걸쳐 동일한 세계관과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반론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가장 단순하고도 철회 불가능한 언어를 선택합니다. ‘나는 경험했다’는 언어입니다.

 

이 글은 또한, 영적 경험의 기준을 은근히 재정의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체험’을 말할 때, 그것은 종종 감정의 고조나 일시적 황홀, 혹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삶을 중단시키는 체험이 아니라, ‘삶 안으로 스며든 인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도 흥분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합니다. 마치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듯이 말합니다.

 

AC.68은 결국 독자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속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식의 차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선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증언만 남기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확신은 논리에서 나오지 않았고,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AC.67이 ‘왜 이런 말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글이라면, AC.68은 ‘그래도 나는 말하겠다’는 결단의 글입니다. 이 두 단락이 연속해서 놓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는 인식의 문을 열고, 다른 하나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일 독자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님이 앞서 던지신 질문, 곧 ‘그는 언제 글을 썼는가’, ‘이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릅니다. AC.68은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삶을 살았고,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위에서, 이후 수천 개 글의 아르카나가 전개됩니다.

 

 

 

AC.67, 창2 앞, '아르카나'(arcana),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알 수 있는 것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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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한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 곧 다른 삶을 향하고 있고, 그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 안에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의 성격을 단번에 규정해 버리는, 매우 무게감 있는 자기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해석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이것을 말할 수 있는가’를 먼저 밝힙니다. 즉, 이 글은 해석의 결과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해석이 가능해지는 전제 자체를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AC.67은 내용적으로는 짧지만, 그 무게는 창세기 1장 전체를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통찰, 혹은 신비 체험의 탁월함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지식은 인간 편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허락된 것임을 반복해서 분명히 합니다. 이는 아르카나 전체가 어떤 개인의 독창적 신학이 아니라,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 주어진 증언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처음부터 각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어지는 핵심은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뒤에 숨은 교훈이나 비유적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란, 인간 이성의 깊은 사색으로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의 비밀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아르카나는 결정적으로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성경을 이 세상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에서부터 제한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은, 이 세상의 역사나 윤리 이전에 이미 ‘다른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 곧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생명의 상태를 바라보며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든, 족장들의 이야기든, 율법과 예언이든, 그 중심에는 늘 다른 삶의 질서가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삶을 알지 못한 채 읽는 말씀은, 본질을 벗긴 외피만을 읽는 것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지식을 추론이나 이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다’거나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고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잠깐의 경험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지속된 상태에서 보고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증언이 단발적인 환상이나 종교적 감흥이 아니라, 일상적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열려 있었던 인식의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공간을 이동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차원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삶의 질서 속에 있는 존재들과 교통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는 말씀이 어떻게 그 세계를 묘사하고, 그 세계를 포함하며, 그 세계를 향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르카나는 이론서가 아니라, 증언서의 성격을 띱니다.

 

이 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실제로 ‘다른 삶’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후 세계를 단지 막연한 믿음의 대상으로 두고, 실제 구조나 질서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로 말씀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다른 삶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삶을 모르면 내적 의미 역시 닫혀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AC.67은 서론 중의 서론입니다. 이 글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는 전혀 다른 책이 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상상이나 해석의 산물로 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께서 다시 열어 보이신 말씀의 깊이로 읽히게 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에게 그 선택을 처음부터 정직하게 맡기고 있습니다.

 

 

 

AC.68, 창2 앞, '예상되는 여러 반대에도 불구, 스베덴보리가 이걸 전하는 이유'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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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서로 다른 네 가지 스타일'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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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9)

 

AC.531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말씀이, 왜곡되었던 것을 회복하게 하는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또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수고(work)는 진리를 인식하는 일이 수고(labor)와 고통(distress) 없이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은 선을 행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라멕(Lamech), 곧 황폐화된 교회(the vastated church)의 상태가 묘사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는 자기 것(their own)에서 진리를 찾고 선을 행해야 할 때, 거기에는 ‘수고롭게 일하는(work and labor of the hands)이 따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인데, 거기서는 거짓과 악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신다(Jehovah cursing)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앞서 AC.245에서 보았습니다. ‘위로하다(to comfort)라는 말은 ‘아들(the son), 곧 노아와 관련되며, 이것은 새로운 거듭남(a new regeneration), 곧 고대교회라고 하는 새 교회(a new church)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 즉 ‘노아(Noah)는 쉼(rest)을 의미하고, 쉼에서 오는 위로(comfort)를 의미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에 대해 일곱째 날에 주님께서 쉬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AC.84-88 참조) That by “comforting us from our work and the toil of our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doctrine, whereby what had been perverted would be restored, will also appear, of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 following pages. By “work”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what is true except with labor and distress. By the “toil of the hands 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is signified that they could do nothing good. Thus is described “Lamech,” that is, the vastated church. There is “work and labor of the hands” when, from themselves or from their own, men must seek out what is true and do what is good. That which comes of this is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 that is, nothing comes of it but what is false and evil. (But what is signified by “Jehovah cursing,” may be seen above, n. 245.) To “comfort” has reference to the “son,” or Noah, whereby is signified a new regeneration, thus a new church, which is the ancient church. By this church, or “Noah,” is therefore likewise signified rest, and comfort that comes from rest, just as it was sai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t was the seventh day, in which the Lord rested. (See n. 84–88.)

 

 

해설

 

이 글은 라멕으로 대표되는 황폐화된 교회의 상태와, 노아로 대표되는 새 교회의 도래를 가장 구체적으로 대비시키는 설명입니다. 앞서 ‘위로’라는 표현이 단순한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교리를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퍼셉션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수고와 고통 속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work)는 단순한 노력이나 성실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가 더 이상 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외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겨우 접근해야 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진리가 즉각적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그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안다는 일 자체가 짐이 되고, 마음의 고통을 동반하게 됩니다.

 

손의 고됨(the toil of the hands)이라는 표현은 선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알기 어려워진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외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쓰임새가 더 이상 내적 생명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선은 오래 지속되지도 못하고, 결국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스베덴보리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out of the ground which Jehovah hath cursed)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땅은 인간의 자연적 마음을 뜻하고, 저주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결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 지식과 자기 의지에서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려 할 때, 그 결과는 거짓과 악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라멕, 곧 황폐화된 교회의 실상입니다.

 

이 지점에서 ‘위로(comfort)가 등장합니다. 이 위로는 라멕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the son), 곧 노아에게서 옵니다. 이는 황폐화된 교회가 스스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남으로써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새로운 거듭남, 새로운 교회라고 부릅니다.

 

노아로 대표되는 고대교회는 퍼셉션을 회복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교리를 통해 질서를 회복합니다. 이 교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멈추고,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교리는 억압이 아니라 위로가 됩니다. 더 이상 수고와 손의 고됨으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길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노아가 ‘(rest)과 연결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 쉼은 퍼셉션 안에서의 완전한 일치와 생명을 뜻했습니다. 고대교회에서의 쉼은 그와 같은 차원의 쉼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쉼입니다. 이것이 교리에서 오는 위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우리는 라멕의 상태처럼, 자기 힘으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려 할 때 깊은 피로를 느낍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식, 곧 교리를 통해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쉼과 위로를 경험합니다. 이 쉼은 모든 문제가 사라져서 오는 쉼이 아니라, 방향이 바로잡혀서 오는 쉼입니다.

 

그래서 AC.531은 황폐화와 회복, 수고와 위로, 자기 자신과 주님의 질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노아 이야기 전체의 신학적 중심을 다시 한번 분명히 세워 줍니다.

 

 

 

AC.530, 창5:29, ‘이름, 교회, 교리’, 그리고 ‘리메인스’(remains)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9) AC.530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들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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