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29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분명합니다. 곧 인간의 이성 파트가 자신의 own, 즉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속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 뱀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사실 그런 뱀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serpent)으로 의미되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자체에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감각들(the senses)에 의해 속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음에도 불구, 자기 사랑(self-love) 때문에 주님(the Lord)과 그분에 대한 신앙(faith)에 관하여 들은 것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믿으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the rational of man suffered itself to be deceived by its own, because this was dear to him (that is, by the love of self), so that he believed nothing but what he could see and feel. Everyone can see that Jehovah God did not speak to a serpent, and indeed that there was no serpent, neither did he address the sensuous part that is signified by the “serpent”; but that these words involve a different meaning, namely, that they perceived themselves to be deluded by the senses, and yet, in consequence of self-love, were desirous of ascertaining the truth of what they had heard concerning the Lord, and concerning faith in him, before they believed it.

 

 

해설

 

AC.229는 창세기 3장의 뱀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뱀이 말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뱀과 대화하셨다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본래 의미를 놓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뱀(the serpent)은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뱀의 유혹이란 결국 인간 안 감각적 사고가 이성을 설득,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뜻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하나 설명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거부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지적 부족함이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종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직접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빛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는 사실상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

 

내 경험과 내 판단으로 확인되면 받아들이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타락의 핵심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성이 주님의 빛 아래에서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참된 이성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타락한 이성은 진리가 옳은지 틀린지를 자기 기준으로 재판하려 합니다.

 

그래서 AC.229는 매우 현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종종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믿겠다’, ‘내가 납득되면 받아들이겠다’, ‘내 경험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건강한 질문과 탐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경고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숨어 있는 이성은 결코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미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감각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재판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우리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해될 때만 믿으려 하는가?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는 자리에서 ‘내가 납득해야 참이다’라는 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뱀이 인간의 이성을 설득한 방식이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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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를 처음 읽는 분들뿐 아니라 오래 읽은 분들도 한동안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보통 진리’와 신앙’을 거의 같은 뜻처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둘 사이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진리(truth)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참된 내용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님만이 생명이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악은 피해야 한다’, ‘사랑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신앙(faith)은 그런 진리를 사람이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상태를 말합니다. 즉 진리가 객관적인 내용이라면, 신앙은 그 진리를 믿고 붙드는 인간 쪽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란, 단순히 참된 명제가 아니라,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신앙의 내용이 된 진리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자체로는 진리(truth)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이것이 주님의 뜻이며 참된 길이다’라고 믿는다면, 그 진리는 그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가 됩니다.

 

즉, 진리(truth)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의 진리이고,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는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자신의 신앙 안에 들어온 진리인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것을 믿는 단계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하고, 돕고, 섬기고, 희생한다면 그것은 이미 삶 속에 구현된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 둘을 짝으로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입니다. 이는 마치 씨앗과 열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라고 아는 것은 씨앗이고,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사랑(love)으로부터 진리(truth)를 알았습니다. 즉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곧바로 지각(perception)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은 순서가 반대였습니다.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믿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쓰며, 마침내 체어리티(charity)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강조하고, 고대교회 이후를 설명할 때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강조합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천적 인간(celestial man)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것이 선한 것임을 안다 하는 사람이고, 영적 인간(spiritual man)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옳다고 믿는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AC.228에서 천사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천사들은 어떤 생각이 사람 안으로 들어올 때, 이것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허무는 것인가, 혹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파괴하는 것인가를 즉시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용서는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다’라는 냉혹한 마음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사람 자신보다 훨씬 먼저, 그리고 훨씬 더 섬세하게 지각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AC를 읽으실 때는,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를 간단히 사람이 믿고 붙들고 있는 주님의 진리’, 혹은 신앙의 내용이 되는 진리 정도로 이해하시면 대부분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읽히실 것입니다.


 

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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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8

 

천사들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지를 얼마나 섬세하게 알아차리는지는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들어오는지, 또 언제 들어오는지를 사람 자신보다도 천 배나 더 완전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 가운데 가장 미세한 것까지도 천사들은 그 사람 자신이 자기 안에서 가장 그레이트하게 아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지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확실한 진실입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해설

 

AC.228은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보여 주는 매우 놀라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단순히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동만 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생각과 애정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즉시 알아차립니다.

 

특히 천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어떤 생각이나 욕망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와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에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반대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어떤 거짓이나 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지각합니다.

 

반면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 왜 떠올랐는지, 어떤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과 충동은 의식의 문턱을 스쳐 지나가며, 대부분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 가장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분명히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안의 가장 그레이트한 생각을 아는 것보다 천사들이 사람 안의 가장 작은 생각을 더 분명하게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의 지각이 사람의 자기 인식보다 훨씬 깊고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AC.227의 내용과도 이어집니다. 사람은 영적 세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들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역사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의 내면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지각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합니다.

 

물론 이것은 천사들이 사람을 감시하거나 정죄하기 위해 살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들의 관심은 오직 주님의 선과 진리를 보존하고, 사람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미세한 증상까지 알아차려 병이 깊어지기 전에 치료하려는 것처럼, 천사들은 사람 안에 들어오는 악과 거짓을 민감하게 지각하여 주님의 섭리 아래 그것을 막고 선을 북돋우려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현대인에게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기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진실’이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이 수년간 영계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에 근거한 증언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AC.228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우리 안의 가장 작은 선까지도 보호하시고, 가장 미세한 악의 침입까지도 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거창한 결단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각 하나, 애정 하나까지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AC.228, 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AC.224.심화 1.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이 표현은 스베덴보리를 처음 읽는 분들뿐 아니라 오래 읽은 분들도 한동안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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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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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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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7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그리고 양심(conscience)의 기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에 대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얼마간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주님에 의해 영들(spirits)과 천사들(angels)을 통하여 다스려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악한 영들(evil spirits)이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을 물리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 하나의 싸움(combat)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그리고 양심(conscience)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또한 시험(temptations)을 통해서도 같은 싸움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만일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을 만큼 육체적인 것(corporeal things)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자신과 함께 영들과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에만 몰두한 사람들은 이러한 싸움을 수백 번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단지 상상이나 정신 이상의 결과라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싸움을 수천 번, 수만 번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그것도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그러하였습니다. 또한 그 싸움을 일으킨 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들이며, 어디에 있었는지, 언제 왔고 언제 떠났는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해설

 

AC.227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영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퍼셉션(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에 대해 설명해 왔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혼자 생각하거나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영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 한 분이시며, 천사들과 영들은 그 섭리의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이 선을 향하려고 할 때에는 천사들이 함께하고, 악으로 기울려고 할 때에는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combat)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싸움, 이 전투는 대부분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이 모두 이 영적 전투가 인간 의식 속에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으로,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내적 딕테이트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으로 경험되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근원은 같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선으로 이끄시는 역사입니다.

 

또한 시험(temptations)의 본질도 여기서 설명됩니다. 시험은 단순히 어려운 환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영향과 천사들의 보호가 사람 안에서 충돌하는 영적 전투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겪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심한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평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영들과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육체적인 것(corporeal things)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내적 전투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단지 심리 현상이나 신경 작용으로만 설명하려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모든 심리 현상을 곧바로 영들의 직접적인 작용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핵심은 인간의 내면에는 자연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차원이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 차원을 통하여 끊임없이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특별한 사명을 언급합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이러한 영적 전투를 직접 경험하였으며, 그 원인이 되는 영들과 천사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후 저작들에서 영계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AC.227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갈등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느끼는 내적 격려,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갈등, 시험 가운데 경험하는 치열한 내적 전투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악한 영들의 영향으로부터 지키시는 영적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도 끊임없이 이어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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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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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3:9-10)

 

AC.226

 

부르시며(crying),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the voice in the garden),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그리고 숨었나이다(hiding themselves)의 의미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이미 모든 걸 미리 알고 계심에도 불구, 사람에게 먼저 네가 어디 있느냐?’ 또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시는 일이 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시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acknowledge and confess) 하기 위함입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해설

 

AC.226은 창세기 39절의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의미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던져 왔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정말 아담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셨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왜 숨었는지도,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물으셨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도록 이끄십니다.

 

영적 변화는 강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너는 지금 이런 상태다’라고 선언하시는 것만으로는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직접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고백할 때 비로소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러한 질문이 자주 등장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와 같은 질문들은 모두 주님께서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자기 내면을 직면, 직시하도록 하시는 질문들입니다.

 

이 점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지리적 위치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묻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랑 가운데 있느냐?’, ‘너는 지금 나와 얼마나 가까우냐, 혹은 얼마나 멀어졌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질문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책망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주님께 다시 나아오도록 초대하시는 사랑의 질문입니다.

 

결국 AC.226은 주님의 질문에는 언제나 자비가 담겨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는 강요되지 않으며, 언제나 자유로운 인정과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심판의 선언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다시 찾으시는 목자의 첫 번째 부르심인 것입니다.

 

 

 

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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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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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5

 

동산 나무 사이(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그 안에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이 있는데, 그것이 나무(tree)라고 불린다는 사실 역시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celestial man)이 거하던 동산(garden)으로부터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동산(garden)이라고 불리는데, 다만 그것을 경작하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good)은 그 가장 안쪽(inmost)이 천적(celestial)이지 않으면 참된 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celestial)으로부터, 또는 그것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각(perception)이 옵니다. 이 가장 깊은 것, 곧 안쪽(inmost)이 여기서는 사이(midst)라고 불립니다.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해설

 

AC.225는 창세기 38절의 ‘동산 나무 사이’라는 표현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특별히 ‘사이(midst, 가운데)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말씀에서 ‘가운데’는 단순한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가장 깊은 것(inmost), 가장 본질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앞 절들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후손들이 타락했지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과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남겨 두고 있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산 나무 사이’는 바로 그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지각의 중심부를 가리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celestial)이지 않으면 참된 선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외적으로는 선해 보여도 그 가장 깊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완전한 의미의 선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절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가 칭찬받기 위함인지, 이익을 얻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인지에 따라 그 선의 질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가장 깊은 동기, 가장 안쪽의 사랑을 ‘가운데(midst)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동산(garden)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동산의 중심에는 언제나 천적(celestial),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퍼셉션(perception)의 근원도 설명합니다. 지각은 단순한 지식이나 추론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을 통하여 생겨나는 직접적인 영적 인식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AC.225에서 말하는 ‘동산 나무 사이’는 타락 이후에도 아직 남아 있던 자연적 선의 중심, 그리고 그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천적 요소와 지각의 흔적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지만, 아직 그 중심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자신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도 있었으며, 숨을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모든 영적 생명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선의 진정한 가치는 외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 깊은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선은 살아 있는 선이 되며, 그로부터 참된 지각(perception)도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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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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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AC.224 심화 1)

 

위 문장에서 창3은 아직 퍼셉션의 시대인데 왜 양심의 흔적 같은 표현이 나오나요?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 때 시작되는 거 아닌가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말씀대로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즉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는 기본적으로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에 속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AC.224를 해설하면서 제가 사용한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교리 체계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추론이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Ancient Church)는 퍼셉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신 양심(conscience)이 주어졌습니다. 양심은 진리의 지식(knowledges of truth)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내적 판단 능력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사람들을 두고 ‘양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말하면, 신학적으로는 시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생깁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크게 약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그들은 여전히 얼마간의 퍼셉션(perception)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고 숨었습니다.’

 

실제로 AC.220 AC.221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제가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현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다 보니 나온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가까운 경험이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AC 해설이나 심화 원고에서는 그것보다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용하신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퍼셉션(perception)의 잔재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지각할 수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이 표현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시대 구분, 즉 태고교회 = 퍼셉션(perception), 고대교회 = 양심(conscience)이라는 구조와 더 잘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짚어 주신 부분은 AC 해설을 장기적으로 정리할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정확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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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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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1. ‘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이 구절을 AC.224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후손들은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을 수 있었지만, 여기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그 자연적 선마저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뻔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자신의 악을 악으로 느끼는 능력 자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영적 상태는 훨씬 더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AC.217에서 스베덴보리는 포도나무를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포도가 없다는 것은 영적 선이 사라졌다는 뜻이고, 무화과가 없다는 것은 자연적 선마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특히 AC.224의 문맥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중요합니다. 창3의 사람들은 아직 무화과 잎이라도 있었습니다. 즉 자연적 선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무화과 자체가 없습니다. 자연적 선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잎사귀가 마른다’고 합니다. 잎은 진리에 대한 외적 지식이나 교리의 형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고, 남아 있던 외적 종교 형식마저 생명력을 잃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224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악한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의 후손들과 대비시키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반면,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더 이상 숨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남아 있던 자연적 선마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악 때문에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주님께서 역사하실 여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는 훨씬 더 깊은 영적 황폐(vastation)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AC.224에서 렘8:12-13을 끌어오는 이유입니다. 창3의 사람들은 넘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고,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그 마지막 남은 자연적 선마저 잃어버린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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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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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4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지각(percep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의 원인이 되며, 또한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conscience)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자비롭게 작용하지만, 사람이 처해 있는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람, 곧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이 후손의 상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의 상태였습니다.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숨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선마저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숨지도 않습니다. 그들에 관하여는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해설

 

AC.224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이 숨은 것은 완전한 악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어느 정도의 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사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숨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자연적 선은 아직 영적 선(spiritual good)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성향, 도덕적 감각, 수치심, 양심에 대한 반응 등을 포함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비록 타락하였지만, 아직 이 자연적 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 곧 자비와 평화와 선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악마적인 공포가 아니라 양심의 불편함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깊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습니다. 즉 양심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진단 기준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말씀을 읽다가 찔림을 받거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희망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잘못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로 그 상태를 묘사합니다.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으며 잎사귀마저 마른 상태입니다. 즉 선의 열매도 없고 진리의 열매도 없으며, 외적 신앙의 흔적조차 말라 버린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주님의 자비와 평화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언제나 동일하게 자비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의 임재를 평안으로 느끼고, 회개하는 사람은 그것을 양심의 책망으로 느끼며, 완전히 악한 사람은 그것을 불편함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결국 AC.22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이 숨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고,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의식할 수 있었으며, 여전히 자신의 벗음(nakedness)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남아 있는 선의 흔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의 아픔은 종종 영적 생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상태인 것입니다.

 

 

심화

 

1. ‘8:12-13

 

 

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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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심의 흔적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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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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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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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심화

 

1.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이 구절을 AC.223에서 인용한 이유는, 사람이 악 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는 경험이 실제로는 주님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 변화 때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얼굴을 가리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고,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222에서 이미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사랑, 모든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라면, 그 사랑의 얼굴을 실제로 돌리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인간의 체험에 따라 말한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악 가운데 들어가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은 약해지고, 진리는 희미해지고, 기도도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마치 하나님께서 멀어지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멀어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 점에서 사59:2는 창3의 아담과 하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서 숨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고 말합니다. 숨어 있는 쪽은 인간이고, 찾으시는 쪽은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는 주님의 사랑을 멈추게 하는 힘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입니다. 마치 태양이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스스로 문을 닫고 커튼을 치면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움은 태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빛을 막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었다’는 말은 사실상 ‘너희 죄가 너희로 하여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의 얼굴이지만, 죄악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AC.223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결코 자비를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사랑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사랑과 own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59:2를 인용한 이유는, 창3의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주님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멀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심판의 말씀이기 전에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죄는 주님의 사랑을 없애지 못합니다. 다만 그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을 가릴 뿐입니다. 그래서 창3의 아담이 숨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에도,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그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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