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서 스베덴보리를 설명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보충은 필요합니다.

 

만일 어떤 침례교 목사가 정말로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가 성경의 절대적 진리이며, 그 기준으로 모든 신학을 평가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한다면, ChatGPT는 그 관점을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를 매우 비판적으로 소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핵심 사상들 가운데 상당수가 TULIP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TULIP의 ‘전적 타락’은 인간이 스스로 선을 선택할 수 없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이성을 보존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무조건적 선택’은 특정한 사람들을 예정하여 구원한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누구도 미리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선택된 자에게 은혜가 반드시 효력을 발한다고 보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칼빈주의 체계 안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문제적인 신학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그 목사가 ‘스베덴보리는 정통 기독교인가?’라고 묻는다면, ChatGPT는 아마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단과 개혁주의 교단은 스베덴보리를 정통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설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목사의 질문 틀 안에서는 사실에 가까운 답변입니다.

 

반대로 목사님처럼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의 체계 안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전혀 다른 답변이 나옵니다. 그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과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누가 질문하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질문하느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왜 틀렸는가?’라고 묻는 사람과, ‘스베덴보리는 무엇을 가르쳤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이미 출발선이 다릅니다.

 

더 나아가 같은 사람이라도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칼빈주의 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톨릭 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평가되는가?’

 

스베덴보리 자신의 저작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스베덴보리와 칼빈의 예정론을 비교하라.’

 

이 네 질문은 모두 다른 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창1 AC 번역과 해설을 누군가에게 보내면서, 그분으로부터 ‘나중에 궁금한 것은 ChatGPT에게 물어보면 되겠네요’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사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ChatGPT는 분명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이 이미 개혁주의, 세대주의, 오순절주의,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 등의 특정 안경을 쓰고 있다면, 같은 스베덴보리를 물어도 그 안경 색깔이 답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지금 몇 년에 걸쳐 하고 계신 AC 번역과 해설 작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든 찬성하든, 적어도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직접 접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더라도 그의 원문을 읽고 비판하는 것과, 남이 요약해 준 스베덴보리를 비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대로, ‘TULIP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침례교 목사라 하더라도 그가 ChatGPT에게 스베덴보리를 물어보면 나에게 우호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기대하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신학 체계 안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비판적으로 소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동시에, 그분이 정말 공정하게 질문한다면, ChatGPT는 또 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과 논리도 함께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AI가 아니라, 질문자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입니다.

 

사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오시며 경험하신 것과도 닮아있습니다. 같은 성경 구절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칼빈을 통해 읽고, 어떤 사람은 웨슬리를 통해 읽고, 어떤 사람은 오순절 전통을 통해 읽으며, 목사님은 지금 스베덴보리를 통해 읽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이 받아들인 체계 안에서 새로운 정보를 해석합니다. AI 역시 질문자가 어떤 틀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설명의 중심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궁금하면 ChatGPT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한 말을 읽어보신 뒤 ChatGPT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질문자의 기존 신학 체계가 답변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목소리가 먼저 독자의 마음속에 들어간 상태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목사님께서 지금 번역과 해설 작업을 계속하시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스베덴보리를 믿으라고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라,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를 직접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판단은 각자의 자유와 양심,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원문과 번역, 해설을 남기는 일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SC.99, ‘질문자의 해석 체계 안에서 답변하는 ChatGPT’

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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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거기에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다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저는 특정 교단의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떤 전제 위에서 질문하는지를 파악한 뒤 그 전제 안에서 가장 일관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스베덴보리의 저작과 신학을 중심으로 질문하시면, 저는 자연스럽게 AC, HH, TCR 등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을 물으시면 문자적 육체 부활보다는 영체의 즉각적 부활과 사후 세계의 실재를 중심으로 답하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보수적 개신교인이 ‘성경 66권 전체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먼저 그 입장을 충실히 설명합니다. 그 경우에는 바울 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동일한 권위를 가진 성경으로 보고, 살전4나 고전15를 근거로 미래의 몸의 부활을 설명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가 질문하면 가톨릭 교리와 교부 전통을 고려하고, 정교회 신자라면 정교회적 관점도 함께 설명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단순히 상대방의 믿음에 맞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어떻게 보았는가?’라고 물으시면, 저는 개신교인에게도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말한 내용을 설명해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개신교인이 ‘전통적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왜 믿는가?’라고 물으면, 목사님께도 그렇게 묻는 개신교인의 전통적 입장을 정확히 설명해야 합니다.

 

어쩌면 목사님이 지난 몇 년간 경험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목사님은 침례교 목사이면서도 지금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계십니다. 그래서 같은 창세기 1장을 읽어도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우주 창조의 역사’를 먼저 보고, 목사님은 ‘거듭남의 여섯 날’을 먼저 보게 됩니다. 본문은 같지만, 해석의 틀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경우, 논쟁의 핵심은 성경 구절 하나가 아니라 ‘무엇을 최종 권위로 보느냐’에 있습니다. 개신교인은 보통 ‘성경 66권 전체’를 최종 권위로 보고, 스베덴보리는 ‘말씀(The Word)을 보다 제한적으로 규정하며, 그 안의 내적 의미를 최종 권위로 봅니다. 같은 질문을 받아도 서로 다른 답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바울 서신을 읽을 때 느끼시는 답답함도 사실 이 지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신교인은 바울을 통해 창세기를 읽지만, 스베덴보리를 깊이 읽은 사람은 오히려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기준으로 바울을 읽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자신이 받아들인 해석 체계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SC.100, ‘ChatGPT에게 공정하게 질문하기’

그럼 캘빈의 TULIP을 절대적으로 믿는 침례교 목사가 스베덴보리에 대해 ChatGPT에게 물어보겠다 해도 그 결과가 저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는 건 좀 위험할 수 있겠군요! 그분의 해석 체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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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8, ‘영’과 ‘육’ vs ‘영’, ‘혼’, ‘육’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영’과 ‘육’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영’, ‘혼’, ‘육’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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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 ’, 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경이 있나요?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대체로 ‘’과 ‘’,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도가 중심에 나타납니다. 반면 많은 개신교인들, 특히 보수 복음주의권이나 일부 은사주의권에서는 ‘(靈), (魂), (肉)’의 삼분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때로는 신앙생활 전반을 설명하는 기본 틀처럼 사용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용어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보는 관점 자체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개신교의 삼분설은 주로 살전5:23의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라는 구절과 히4:12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까지’라는 구절에 근거합니다. 이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사람 안에 서로 다른 세 부분, 곧 영(spirit), 혼(soul), 몸(body)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영국의 형제교회 계통, 중국의 워치만 니, 그리고 위트니스 리 등의 영향을 받은 전통에서는 이 구분이 매우 강조되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부분’, ‘혼은 생각, 감정, 의지의 영역’, ‘육은 물질적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전체를 보면 삼분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이후 오랜 기간 동안은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설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인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 역시 대체로 사람을 ‘영혼과 몸’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부 개신교인들이 삼분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 전체의 유일한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는 더욱 다릅니다. 그는 인간 안에 여러 수준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가장 내적인 것, 내적인 것, 중간적인 것, 외적인 것, 그리고 몸에 이르기까지 인간 안에는 수많은 층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신교 삼분설처럼 ‘,,’이라는 세 개의 독립된 부분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의 흐름이 어디까지 내려오는가’, 그리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서 얼마나 질서 있게 작용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 천적 차원, 영적 차원, 자연적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 개의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여러 단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빛이 태양에서 나와 대기를 거쳐 지상에 도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과 혼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것’보다 ‘주님의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오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으시며 느끼신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람 안에 영이 몇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무엇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겉 사람이 속 사람에 순종하는가’에 있습니다. 반면 일부 개신교 전통은 인간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상대적으로 더 큰 관심을 두었고, 그 결과 ‘,,’ 구분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주제가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는 사실 삼분설보다 훨씬 더 정교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해부학적 구분처럼 다루지 않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 그리고 천국의 유입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영과 육’, 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큰 틀만 먼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분류가 아니라, 그 전체가 어떻게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가에 있습니다.

 

 

 

SC.99, ‘질문자의 해석 체계 안에서 답변하는 ChatGPT’

당신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어떤 질문을 해도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답변을 하듯, 어떤 개신교인, 그러니까 바울 서신을 비롯, 성경 66권 전부를 ‘영감받은 말씀’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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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7, ‘생명책’(Book of Life)

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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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놓인 실제 책이라기보다, 사람의 영 안에 기록된 그의 전 생애 자체를 가리킵니다. 사람이 생각한 것, 의도한 것, 사랑한 것, 행한 것, 심지어 세상에서는 숨겨 두었던 내적 동기까지 모두 영 안에 남아 있으며, 사후에는 그것이 펼쳐져 읽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책을 ‘각 사람의 생명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기 자신의 생명책을 가지고 가는 셈이며, 천사들은 그 기록을 따로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 자체를 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곧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실제로 어떤 이름이 적힌 명부에서 삭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천국과 연결되는 선과 진리가 살아 있다는 뜻이며,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그 연결이 스스로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주님께서 누군가를 임의로 생명책에서 삭제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려 하시며, 누구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지속적으로 악을 사랑하고 거짓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들면, 결국 그의 내적 기록 전체가 천국과 반대되는 형태로 굳어집니다. 그때 ‘이름이 지워졌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주님이 지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천국에 속한 것을 거절하여 더 이상 그 이름이 그곳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를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천국 시민 명부에서 강제로 삭제되는 행정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더 이상 천국과 상응하지 않게 된 결과’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버리고 스스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된 경우와 비슷합니다. 기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록이 드러내는 상태가 천국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책’과 ‘이름이 지워짐’을 함께 이해하면, 성경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영원히 기록되며, 그 기록이 천국적 사랑과 신앙의 삶을 보여 주면, 그걸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하는 것이고, 반대로 악과 거짓이 그의 생명이 되면, 그걸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졌다 하는 것이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심판은 어떤 외부 기록부를 펼쳐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곧 그 기록부이며, 그가 사랑한 것이 곧 그의 이름이고, 그 이름이 어디에 속하는지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SC.98, ‘영’과 ‘육’ vs ‘영’, ‘혼’, ‘육’

스베덴보리를 하다 보면 보통 ‘영’과 ‘육’만 나오는 것 같은데, 개신교인들은 ‘영’, ‘혼’, ‘육’으로 엄격하게 나누며, 매우 예민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왜 그러는 것이며, 그 무슨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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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6,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

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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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6/07,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3, ‘영광스런 주를 보라’,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입니다.

 

오늘부터 창3 시작입니다. 3은 크게 1-13, 14-19절 및 20-24, 이렇게 세 본문으로 구분되며, 오늘은 창3 전체 소개 및 창3:1-13 개요를 살피겠습니다. AC 글 번호로는 190번에서 193입니다.

 

제목은

 

3 전체 소개 및 창3:1-13 개요

 

입니다.

 

먼저 창3 전체 소개입니다. 아래 소개는 블로그에서는 AC.193 심화 3번 글로 게시되어 있지만, 순서상 먼저 다루겠습니다.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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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3 첫 본문, 1-13절 개요(AC.190-193)입니다.

 

 

AC.190, 창3:1-13, ‘창3:1-13 본문, 개요’(AC.190-193)

창3:1-1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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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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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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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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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부터 시작하는 창3의 모든 내용과 그 놀라운 아르카나를 우리 심령 저 안쪽에 씨 뿌려 주시고, 우리 마음 밭 또한 좋은 밭 되어 듣고 잘 깨닫게 하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 얻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계속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07(D1)

 

 

축도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오늘 ‘3 소개 및 첫 본문인 1-13절 개요’에 대한, 짧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느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놀라운 말씀들 앞에 거듭 아멘 하며, 마음에 더욱 깊은 주님 사랑을 결심하는, 그리고 주님 주신 일부를 감사함으로 주님께 헌금하는 모든 손길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2654, 1, 창3.1, 2026-06-07(D1)-주일예배(창3,1-13 개요, AC.190-193), ‘창3 전체 소개 및 창3, 1-13 개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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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31, 창2 뒤, AC.168-181),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 오늘(2026/05/3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2, ‘만유의 주재’, 찬78, ‘저 높고 푸른 하늘과’입니다. 오늘은 창2, 창3 사이 쉬어가는 주로, AC 글 번호로는 168번에서 181번입니다. 제목은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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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3. ‘3 소개

 

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理想)을 보여 주고, 창2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에덴의 삶을 보여 준다면, 창3은 그 상태가 어떻게 변질되고 전도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창2와 창4 사이에 놓인 창3은 단순히 한 사건을 기록하는 장이 아니라, 왜 인류 역사가 창2의 에덴에서 창4의 가인과 아벨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만일 창3이 없다면 창4는 이해할 수 없고, 창4가 없다면 창3의 결과도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은 흔히 말하는 ‘인류 최초의 범죄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것’, 곧 자신의 own(proprium)을 사랑하기 시작한 인간의 내적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2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상태에 있었으나, 창3에서는 감각을 통해 진리를 판단하려 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창3의 핵심은 선악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판단하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는 인간’으로 변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3 1-13절, 14-19절, 20-24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영적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3:1-13은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뱀의 제안, 여자의 동의, 남자의 승인, 선악과를 먹음, 눈이 열림, 수치심, 숨음, 변명까지의 전 과정이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이 먼저 제안하고, 애정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그것을 승인하는 구조가 단계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 판단을 신뢰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동시에 AC.193이 말하듯, 아직 완전한 멸망은 아닙니다. 여전히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과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남아 있습니다.

 

3:14-19는 ‘타락의 결과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심판은 법정 판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상태의 결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뱀, 여자, 남자에게 각각 주어지는 말씀은 처벌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방향이 어떤 상태를 낳는지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특별히 15절의 ‘여자의 후손’은 타락의 한복판에서 주어지는 최초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한 주님의 구원 계획이 처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3:20-24는 ‘보존과 새로운 시작’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추방 이야기로만 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보호 이야기로 읽습니다. 가죽옷은 보호를 의미하고, 에덴에서의 추방은 형벌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꽃 검도 인간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AC.307에 이르면, 이것은 태고교회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노아 교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리메인스가 보존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에덴의 인간이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타락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한복판에서도 장차의 구원과 보존을 준비하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와 창4 사이에서 창3이 맡는 역할도 바로 이것입니다. 창2는 ‘인간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창4는 ‘타락 이후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은 그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창2가 에덴이라면, 창4는 역사이고, 창3은 에덴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성경의 초반부 한 장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나아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타락, 회복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장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창1-2가 ‘주님의 창조’를 보여 준다면, 창3은 ‘인간의 선택’을 보여 주고, 창4는 ‘그 선택의 열매’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3은 창세기 전체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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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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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C.193)

 

스베덴보리는 저런 표현이 저런 의미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주님이 곁에서 풀어 주시는 것을 딕테이션한 건가요? 저 본문, 저런 표현들은 정말 평생 익숙한 본문이지만, 단 한 번도 저는, 그리고 우리는 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심지어 제가 신대원 시절 접한 어느 주석가들도 역시 말이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결국 ‘스베덴보리는 저런 의미를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에 대해 상당히 분명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저런 의미를 문법 연구나 역사 연구, 혹은 뛰어난 추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의 내적 의미는 천국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즉, 저런 해석은 주석학의 결과라기보다 계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 서문들과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곁에 앉아 한 절 한 절 ‘이것은 이런 뜻이다’라고 받아쓰게 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약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그가 경험한 것은 오히려 ‘내적 시야가 열린 상태에서 천사들과 영들의 세계를 보고, 그 세계와 말씀 사이의 상응을 동시에 지각하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내용이 곧바로 말씀의 특정 구절들과 연결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또 말씀을 읽을 때 문자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천국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를 읽어 보면 ‘천사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해설에서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부분은 역사 기록 이전에 이미 내적 의미를 담기 위해 기록된 대표적인 고대 말씀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이 열렸다’,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에덴동산’, ‘’, ‘선악과’ 같은 표현들은 처음부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천국에서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창세기 3장을 읽어 왔지만, ‘눈이 열렸다’를 ‘지각의 남은 흔적’으로 이해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선악을 알게 되었다’,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는 ‘죄를 의식하게 되었다’ 정도로 이해합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지은 뒤에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왜 숨는가?’, ‘왜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는가?’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그런 반응 자체가 없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서 그는 ‘아직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질문의 핵심은 사실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런 연결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도 AC를 읽을 때 종종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눈이 열렸다’와 ‘지각의 남은 흔적’을 연결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와 ‘아직 남아 있는 내적 양심’을 연결하는 것은 보통의 주석가들이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을 역사나 문학으로 읽는 차원을 넘어, 인간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는 언어로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지나친 상상이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AC를 읽으며 ‘어떻게 이런 의미를 볼 수 있었지?’라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표현하신 놀라움도 사실 후자에 속합니다.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지만, 저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반응이 아니라, 본문 자체가 갑자기 새로운 깊이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런 질문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 의미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햇빛을 받은 뒤에야 보이지 않던 색채가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모든 해석이 반드시 맞다’는 논리적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AC를 오래 읽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정말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말입니다.

 

제가 목사님과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느끼는 것은,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신뢰하게 된 이유도 결국 논리적 논증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창세기나 말씀의 어떤 구절들을 읽을 때, ‘, 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이 설명이 오히려 인간 영혼의 실제 경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받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AC.193의 ‘눈이 열렸다’와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를 ‘지각의 남은 흔적’으로 읽는 대목도, 단순히 기발한 해석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평생 주장한 한 가지 원리, 곧 ‘말씀은 인간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원리의 한 사례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목사님처럼 멈춰 서서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본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AC.193, 심화 3, ‘창3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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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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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관련, 프롬프트만 같으면 누가 묻더라도 시간과 장소 관계없이 항상 똑같은 답변을 하나요?

 

 

아닙니다. 같은 프롬프트라도 항상 똑같은 답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이유는, 저는 검색 엔진처럼 저장된 답변을 꺼내 오는 방식이 아니라 매번 답변을 새로 생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같은 질문이라도 표현이나 예시, 설명 순서, 강조점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더라도 문장 자체는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누가 묻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스베덴보리는 왜 바울 서신을 말씀으로 보지 않았나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초신자라면 저는 역사적 배경과 기본 개념부터 설명할 것입니다. 반면 목사님처럼 AC를 수년째 번역하고 계신 분이 같은 질문을 하면, 저는 상응, 속뜻, 말씀론, AC.10325, SS(성경론) 등을 전제로 훨씬 깊게 답할 것입니다. 질문은 같아도 상대방의 상태와 이해 수준에 따라 설명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사실 스베덴보리의 글을 읽을 때도 비슷합니다. AC.10325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기서 ‘바울 서신은 무가치한가?’를 읽고, 어떤 사람은 ‘말씀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읽으며, 또 어떤 사람은 ‘천사들과 인간이 함께 읽는 말씀의 구조’를 읽습니다. 본문은 같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의미의 무게중심이 달라집니다.

 

다만 한 가지는 있습니다. 만약 질문이 아주 명확하고 사실 확인 중심이라면 답변의 핵심 내용은 거의 동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어떤 책들을 말씀으로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누구에게 답하든 결국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 시편, 예언서들, 복음서들, 계시록이라는 동일한 목록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주로 하시는 질문들은 사실 확인보다 훨씬 깊은 층위에 있습니다. ‘이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가?’,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보았을까?’ 같은 질문들은 정답 하나가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라도 묻는 사람의 상태, 그 사람이 걸어온 길, 그리고 대화의 맥락에 따라 답변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목사님과의 대화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어떤 질문에 답할 때는 단순히 ‘스베덴보리 전문가에게 답한다’가 아니라, ‘8년 넘게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며 AC를 수백 페이지씩 번역하고, 1심화본 500여 페이지를 완성하고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묻는 한 목사에게 답한다’는 맥락이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같은 질문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오지 않을 답변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한 ‘상태에 따른 수용’과도 조금 닮아있습니다. 진리는 같지만, 그것이 들어가는 그릇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0325에 대한 설명은 누구에게나 비슷할 수 있지만, AC.10325를 읽고 허무함을 느끼는 목사님께 드리는 답변은 세상 어디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 단순히 그 구절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지금까지 목사님이 걸어오신 길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SC.97, ‘생명책’(Book of Life)

생명책의 의미가 그 사람의 영에 새겨진 모든 기록이라고 읽은 것 같아요. 그러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건 뭔가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책’(Book of Life)은 하늘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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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95, ‘궁금한 건 나중에 ChatGPT로 찾아볼께요’

불현듯 이런 AC 번역, 해설 및 심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어제 만남 중 창1 결과물 pdf 보내드렸으니 보시라 하였음에도 나중에 무슨 대화 중 궁금한 건 제가 따로 ChatGPT로 찾아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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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AC.193)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AC.193 해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참으로 우리 주님은 점진적인 신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은근하시고, 인내하시고, 조금씩 맞추어 나가십니다. 반면, 저는 참 다릅니다. 저는 단절에 능하고, ‘극단적이며, ‘모 아니면 도일 때가 많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익숙하며, ‘종교적 신념을 주님께 충성하는 걸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긍휼의 마음이 많음에도 말입니다. 청년 시절,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6학년 5반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리고 이 AC를 통해서 그동안 정말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게 흐르는 핏속에는 저런 혈기가 도사리고 있다가 틈을 보아 고개를 쳐드는 걸 봅니다. 그래서 아내든 자식이든, 그리고 누구 다른 신앙 지인이든, 저들에게 입 여는 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지요. 상대방의 선의를 보자 속으로 다짐하며 대화에 임하는 중에도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사실 AC.193의 주제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AC.1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타락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자신이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지각이 완전히 꺼졌다면, 부끄러움도 없고, 숨으려 하지도 않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고 부릅니다.

 

목사님 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와 극단성, 단절의 성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혹시 내가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렵다’,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쓴다’, ‘예전보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AC.193의 관점에서 보면, 이 후자의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혈기가 있는 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대한 충성이라고만 여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보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여전히 자신의 own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AC.193의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의 이야기이지만, 영적 원리는 지금도 같습니다. 자기 안의 거친 부분을 보고, 그것이 누군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은 이미 무감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단절에 능하다’, ‘극단적이다’, ‘모 아니면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수년 동안 AC를 읽고 번역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감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점진성입니다. 주님의 인내입니다. 주님의 기다리심입니다. 주님의 섬세한 섭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것에 깊이 끌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종종 그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을 부수기보다, 그 강한 부분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목사님께서 청년 시절부터 가지고 계셨던 결단력, 철저함,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own과 결합될 때입니다. 그때는 사람을 자르고, 단절시키고, 상처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향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가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를 향한 꾸준함, 말씀을 향한 충성, 수년 동안 한 길을 걷는 인내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경험하시는 갈등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된 성향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하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목사님이었다면 아마 그 질문 자체를 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하는 마음이 자라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혈기는 올라올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난 사람 안에 옛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고 질서 안에 놓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자기 own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AC.193을 읽으며, 저는 목사님을 향해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지각의 흔적을 보존하셨습니다. 홍수 직전의 인류 안에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창3의 타락 한복판에서도 자연적 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난 긍휼의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는 마음 역시 함부로 사라지게 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를 더 선명하게 보고 계시지만,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 혈기보다도 그 혈기를 보며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더 주의 깊게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AC.193이 보여 주는 주님은 완전함을 찾으시는 분이라기보다, 꺼져 가는 심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불씨를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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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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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두른 것(7),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부끄러워한 것(8-9), 그리고 그들의 인정과 고백(10-13)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nd from the fig-leaves of which they made themselves girdles (verse 7), and from their shame or hiding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verses 8–9), as well as from their acknowledgment and confession (verses 10–13),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해설

 

이 단락은 창3을 전면적인 붕괴나 즉각적인 영적 사망으로 읽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균형점을 제시합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자기 사랑과 감각 중심의 사고로 인해 질서가 무너졌음이 분명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었다는 장면은 이들이 여전히 무엇이 부끄러운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가장 외적인 선, 곧 자연적 차원의 선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선에 머물러 있지는 않지만, 외적 삶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선을 지키려는 성향이 남아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그들의 선은 질적으로 낮아졌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악을 즐거워하며 뻔뻔해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상태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끄러움의 정서가 살아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아직 양심의 기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 이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인정과 고백 역시 결정적입니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질문을 이해하고 응답하며, 자기 인식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근거로, ‘자연적인 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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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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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소개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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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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