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제목만 보면 조금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모은 돈 없는 30대 여자들의 충격적인 특징들’이라는 표현은 자칫 특정 성별과 세대를 하나의 유형으로 묶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 속 ‘윤서 씨’를 남자로 바꾸어도 이야기의 본질은 거의 달라지지 않습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할부와 리볼빙이 이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소비 수준에 맞추며, 여행과 공연에는 ‘경험이니까’라는 이유를 붙이고, 목돈이 생기면 ‘이 정도 보상은 괜찮다’며 써버리는 모습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자기관리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제목은 사실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입니다.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 남는 것이 없을까?’

 

영상의 첫 장면은 상징적입니다. 월급 290만 원이 들어오지만 몇 시간 뒤 카드값 190만 원이 빠져나갑니다. 결혼자금 통장에는 남자친구가 100만 원을 넣지만 윤서 씨가 넣은 돈은 없습니다. 문제는 윤서 씨가 명품에 중독되었거나 거대한 빚을 숨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시 1만 4천 원, 라떼 5천5백 원, 점심 1만 3천 원, 동료들에게 산 커피, 배달음식, 니트 한 벌처럼 각각의 소비에는 모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돈을 많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은 하루의 지출이 15만 원이 됩니다. 여기에 노트북, 에어컨, 항공권, 코트, 필라테스 할부가 겹치면서 ‘이번 달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이미 42만 원이 나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흥미롭게 작동합니다. 악은 언제나 거대한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많은 것은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작은 허용들의 축적입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악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여행이나 좋은 식사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 삶의 전체 질서를 보지 않은 채 순간순간의 욕구마다 ‘이것쯤은 괜찮다’고 허락하는 습관입니다. 하나하나는 합리적으로 보여도 그것들이 모여 내 삶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영상 속 윤서 씨에게는 그래서 ‘큰 사치’가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비에 ‘이유’가 있습니다. 택시는 지각하지 않기 위해, 커피는 직장생활을 위해, 비싼 집들이 선물은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해, 브라이덜 샤워는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콘서트와 여행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에, 비싼 월세는 안전하고 출퇴근하기 편하기 때문에, 필라테스는 건강을 위해, 성과급 소비는 ‘1년 동안 고생한 나에게 주는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욕구에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prium을 생각하게 됩니다. proprium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드러내기보다 종종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사치가 아니라 경험이야’,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어’,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는 나에게 해줘야지’, ‘다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잖아.’ 각각의 문장은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왜 그 사실을 지금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진실은 때때로 욕구를 섬기는 변호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상에서 두 번째 특징으로 지적하는 ‘내 월급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보고 소비 수준을 정한다’는 문제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윤서 씨는 같은 직장 동기의 집들이에 23만 원짜리 선물을 가져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3만~5만 원 정도의 선물을 가져왔는데도 ‘싸 보이는 것을 들고 가기 싫어서’였습니다.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빠지면 눈에 띌까 봐 돈을 냅니다. 결국 소비의 기준이 ‘나에게 정말 필요한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돈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것의 가치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싼 식사, 더 멋진 여행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자체의 유용보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돈은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자아를 표현하고 방어하는 수단이 됩니다.

 

반대로 같은 직장에 같은 시기에 들어가 비슷한 월급을 받은 동기는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차도 사지 않았습니다. 윤서 씨는 그런 동기를 ‘좀 재미없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 뒤 그 동기에게는 전세보증금이 생겼습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날 그 방에서 가장 비싼 선물을 들고 온 사람이 모아둔 돈은 가장 적은 사람이었다.’ 지금 보이는 풍요와 실제로 축적된 삶의 기반이 서로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좋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을 더 큰 선을 위해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행이 나빠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을 마련한다는 더 큰 목적 때문에 이번 여행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커피가 나빠서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세운 목적을 위해 오늘의 욕구를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제에는 반드시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의 나뿐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이 영상에서 ‘경험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대목은 특히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윤서 씨는 오사카 콘서트에 120만 원을 쓰면서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고 평생 기억에 남을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상에 따르면 그는 직장생활 8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했고 여행비로만 2천만 원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휴대전화에는 8년치 여행 사진이 쌓였지만 통장에는 200만 원 정도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행하지 말라’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삶은 금욕 자체를 선으로 삼지 않습니다. 문제는 질서입니다. 유용을 위한 휴식, 가족과의 여행, 아름다운 것을 경험하는 기쁨은 충분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은 남으니까 괜찮다’는 말 역시 무제한적인 소비를 정당화하는 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도 소비입니다. 기억은 남지만 지불한 돈 역시 사라집니다. 따라서 ‘좋은 경험인가?’와 함께 ‘지금 내 형편에 맞는 경험인가?’도 물어야 합니다.

 

더 심각한 장면은 어머니가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넣어준 청약통장을 깨는 부분입니다. 어머니는 ‘이건 절대 깨지 마. 나중에 너 집 구할 때 쓰는 거야’라며 딸의 미래를 위해 돈을 모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윤서 씨는 설 연휴 여행 잔금을 내기 위해 그 통장을 해지합니다. 그러면서 ‘어차피 결혼하면 남자친구 쪽에서 집은 해결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 문제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습관이 아닙니다. 자기 미래를 준비해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의 축적 위에 올려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남자친구의 말이 영상 전체를 관통합니다. ‘나는 네가 돈을 못 모으는 것보다 달라질 생각이 없다는 게 무서워.’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 돈을 9년 동안 모았어. 차도 안 바꾸고 여행도 1년에 한 번만 가면서. 그게 너랑 같이 쓰기 싫다는 게 아니야. 같이 모을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이것은 결혼에 관한 상당히 중요한 통찰입니다.

 

결혼은 ‘내 것과 네 것을 합치는 것’이기 전에 ‘내 삶의 방향과 네 삶의 방향을 합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 8천만 원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200만 원밖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결혼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는 질병, 가족부양, 학업, 실직, 사업 실패 등 수많은 사정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모았다고 반드시 성실한 것도 아니며 모은 돈이 적다고 반드시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돈을 대하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오늘의 만족을 줄여 미래를 준비하고, 다른 사람은 미래의 자원을 끌어와 오늘을 즐깁니다. 한 사람은 ‘먼저 모으고 남은 돈을 쓰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 쓰고 남으면 모으자’고 생각합니다. 이런 두 사람이 결혼하면 단순히 통장만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의 표현대로 ‘두 사람이 돈을 쓰는 방식도 한 통장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서로의 연봉만 확인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의 방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참된 결혼의 핵심에는 두 마음의 결합이 있습니다. 결혼은 몸과 재산과 주거의 결합만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지의 결합을 향해 갑니다. 그렇다면 돈은 결혼의 본질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매우 현실적인 창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꺼이 돈을 쓰는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참는지, 무엇을 위해 저축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상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는 어쩌면 8천만 원과 200만 원이 아닙니다. 남자친구는 9년 동안 매주 일요일 밤 10분씩 자신이 쓴 돈을 기록했습니다. 반면 윤서 씨는 자신의 월 지출이 월세를 제외하고 약 150만 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최근 3개월 평균 카드 사용액은 238만 원이었습니다. 배달은 한 달 23번, 택시는 19번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특별한 투자 천재여서 돈을 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의미심장합니다. 거듭남 역시 먼저 ‘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고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기록을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화를 잘 안 내’, ‘나는 남을 판단하지 않아’, ‘나는 돈에 욕심이 없어’, ‘나는 가족을 위해 살고 있어’라는 자기평가와 실제 하루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가계부와 영적 자기성찰 사이에는 뜻밖의 닮은 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기록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돈도 작은 지출들이 모여 큰 흐름이 되고, 영적 삶도 작은 허용들이 쌓여 습관이 됩니다. 5천 원짜리 커피 한 잔이 가계를 무너뜨리지 않듯 한 번의 짜증이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선택은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영상 속 윤서 씨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상은 일곱 번째 특징을 ‘돈이 없는 이유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결혼하면 합치면 된다’, ‘집은 남자친구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 ‘혼수는 엄마가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삶에서 생긴 문제를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외부의 자원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것은 돈을 넘어서는 인간의 오래된 성향입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나는 괜찮아질 거야’,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해질 거야’, ‘돈이 많아지면 절약할 거야’, ‘시간이 생기면 말씀을 읽을 거야’, ‘상대가 먼저 달라지면 나도 달라질 거야.’ 그러나 거듭남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환경에 들어간 뒤의 나를 먼저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작은 것들을 통해 나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영상의 핵심은 ‘30대 여자는 얼마를 모아야 하는가?’가 아닙니다. 더구나 ‘모은 돈이 적은 사람은 결혼상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왔으며, 그 방향에 문제가 있음을 보았을 때 바꿀 의지가 있는가?’입니다. 남자친구 역시 액수가 아니라 바로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달라질 생각이 없어 보여서’였습니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미 완성된 사람이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진리의 빛 가운데 보았을 때 계속 변명하며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 하며 돌이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상태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장면이 의미심장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데 쓰라고 8년 동안 청약통장을 부어주었지만 딸은 그 돈을 여행과 카드값에 사용했습니다.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상은 이를 ‘엄마는 딸이 결혼하면 그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고, 딸은 결혼하면 남자친구의 통장이 집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둘 중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참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사라진 것은 통장만이 아닙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 무엇인가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8년 동안 매달 5만 원씩 미래를 선택했지만 딸은 그 미래를 현재의 여행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차이는 액수의 차이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거듭남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의 proprium은 언제나 ‘지금’을 원합니다. 지금 인정받고 싶고, 지금 화를 내고 싶고, 지금 즐기고 싶고, 지금 내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더 먼 것을 보게 하십니다. 지금 한 번 참는 것, 지금 한 번 정직해지는 것, 지금 한 번 욕구를 내려놓는 것이 즉시 큰 기쁨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영원한 성품을 형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축’은 그 자체가 영적인 선은 아니지만 ‘절제’와 ‘질서’와 ‘미래를 위한 현재의 포기’를 연습하는 매우 현실적인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탐욕 때문에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이웃을 외면하면서 자기 재산만 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모았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으고,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쓰는가’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보고 통장 잔액보다 먼저 물어볼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는 너무 쉽게 “이 정도는 괜찮아”라고 말하는가?’,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는가?’, ‘내가 오늘 누리는 것 때문에 미래의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변명하는 사람인가, 방향을 바꾸는 사람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마지막에 비추어야 할 곳은 윤서 씨의 통장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왜 이것밖에 없지?’라는 질문을 돈에만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 안에 체어리티는 얼마나 쌓였는가, 수없이 말씀을 읽었는데 내 성품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많은 은혜와 진리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실제 삶에서 어떤 선으로 축적되었는가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돈은 쓰면 사라지지만 선은 행할수록 사람 안에 남습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이 쌓여 통장의 잔액이 되듯, 매일의 작은 의지와 행동이 쌓여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이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서른세 살에 얼마를 모았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쌓으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지금의 방향으로 계속 간다면 내 안에는 과연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상’과 ‘모양’을 비슷한 의미의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AC.472-473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표현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며, ‘형상은 모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AC.472의 ‘창조하다’(create)와 ‘만들다’(make)의 구별과 연결됩니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은 거듭나서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진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창조-영적 인간-형상’과 ‘만듦-천적 인간-모양’이라는 거듭남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거듭남의 시작과 진행 가운데 주님의 질서가 사람 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그 질서가 사랑과 삶에 더욱 온전히 자리 잡은 상태입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인정하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잡아 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아직 싸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고, 진리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며 순종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의 것이 그의 생각과 삶 안에서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질서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단지 진리가 명령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행합니다. 그래서 AC.473은 천적 인간이 주님의 ‘모양’인 이유를 ‘전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를 외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와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기쁘게 받아들이므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점점 그의 자유와 기쁨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양’이 ‘실제적인 닮음’(real replica)이라는 표현도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동일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피조물이고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것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 살아갈수록,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더욱 실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은 영적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인 ‘모양’이 됩니다.

 

그러므로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외형이 점점 하나님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중심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믿고 순종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사람의 사랑과 의지에까지 심으십니다. 마침내 사람은 ‘진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는 상태’에서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행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신앙이 사랑으로 들어가고,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외적인 순종이 내적인 기쁨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상태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었던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5:1에서 태고교회를 다시 소개하면서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이 교회의 고유한 천적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차이는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먼저 당신의 ‘형상’을 이루시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 진리를 사랑과 결합시키고 우리의 의지와 삶 속에까지 심으셔서, 우리가 점점 당신의 ‘모양’을 닮아 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단지 올바른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어 주님의 선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469-474 심화 2)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bygrace.kr

 

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69-474 심화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 세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족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하나의 ‘집안’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집안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집안이 서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 집에 함께 살지는 않으면서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고, 다시 여러 일가가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집안-일가-민족’으로 점차 확대되는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구조를 설명하는 이유는 단순히 태고 시대의 사회생활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AC.471은 그들이 이렇게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가 ‘교회가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힙니다. 각 집안과 일가가 자기 부모에게 의존함으로써 부모로부터 이어진 사랑과 참된 예배 안에 머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혈연을 따라 집안과 일가가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하는 교회적 질서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각 집안의 ‘고유한 성향’(geniu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녀뿐 아니라 먼 후손들에게까지 부모로부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이어졌으며, 그 특징이 얼굴과 여러 고유한 특성에서도 드러날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집안과 일가가 서로 무분별하게 뒤섞이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혈통의 보존을 넘어,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던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성격을 보존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구별’과 ‘분열’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집안과 일가는 서로 달랐지만, 그 다름 자체가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서가 천국의 모습을 살아 있게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다른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태고교회의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 역시 서로 고유한 성격을 가지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게 표상’하였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를 하나의 획일적인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태고교회라는 큰 틀 안에는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이 있었고, 각각의 공동체에는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성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공동체에서 교리나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모든 공동체가 동시에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집단이 기존의 사랑과 신앙의 질서에서 벗어나더라도 다른 집안과 일가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교회적 성격을 계속 보존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가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이름 아래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변화와 분파들의 전개가 묘사되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과정이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어떤 교회 계열이 태고교회의 원래 질서에서 분리되거나 변질되었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다른 모든 집안과 일가와 민족까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0-471이 보여 주는 공동체 구조는 같은 넓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교회 상태와 계열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AC.470-471만으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계열이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진행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것은 태고 시대의 교회가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으며, 그 구별이 교회를 보존하고 천국의 여러 공동체를 표상하는 질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창4와 창5의 구체적인 관계는 관련 AC의 설명을 더 종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한 계열이 등장하면 이전의 모든 공동체가 사라지고 다음 하나의 교회로 통째로 교체된다’는 단선적인 그림만으로 태고교회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결국 태고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집안과 일가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각 공동체가 주님께 받은 고유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모두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천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르면서도 주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이루듯, 태고교회의 집안과 일가와 민족도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공동체 질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 안의 하나 됨’이라는 천국의 질서를 지상에서 살아 있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AC.469-474 심화 1)

 

 

 

AC.469-474 심화 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AC.469-474 심화2,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은 어떻게 다른가?’ 창1:26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고, 창5:1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

bygrace.kr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시청자의 감정을 한쪽으로 강하게 끌고 갑니다. 결혼 전에는 ‘요즘 누가 외벌이를 해? 나도 300 버는데 그걸 왜 놔?’라고 말했던 아내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월급 380만 원으로 세 식구의 생활비와 대출을 감당하면서 점심값까지 아끼는데, 아내는 어린이집 등원 후 친구들과 카페와 브런치 식당을 다니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제주 여행까지 갑니다. 영상 첫 장면부터 남편의 통장에는 11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나 요즘 숨 돌릴 틈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시청자가 남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영상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즘 여자들은 편하게 살려고 전업주부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자체도 육아 때문에 실제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삶의 형태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에 영상이 정확하게 짚듯이 ‘문제는 전업주부라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한 사람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동의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상의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맞벌이냐 외벌이냐’가 아니라 ‘진실이 있었느냐’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혼자 벌어 대출을 갚고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계속 일하는 거 맞지?’라고 명시적으로 확인합니다. 아내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그 대답을 기초로 결혼 후의 경제생활을 계산했고, 실제 신혼 1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적금을 붓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연애 중 흘려들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결혼생활의 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후반부에서 아내는 마침내 ‘나 다시 회사 다니고 싶지 않아. 애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아팠던 것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결혼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참된 자유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선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춘 채 그의 선택을 받아냈다면 외형적으로는 상대가 자유롭게 결정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유의 토대는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예의’ 정도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자녀를 꼭 원한다’, ‘나는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 ‘나는 빚이 이만큼 있다’ 같은 문제들은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혀야 합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을 얻기 위해 상대가 싫어할 만한 사실을 감추는 순간, 사랑은 이미 상대를 위한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랑’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아주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proprium은 언제나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처음에는 ‘돌까지’라는 이유가 있었고, 돌이 지나자 ‘두 돌까지’, 다시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아프면 누가 데리러 가느냐’, ‘경력 단절 여성을 누가 뽑아주느냐’라는 새로운 이유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내면의 실제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나는 다시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이유를 나중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육아, 건강, 가족, 희생처럼 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 편하고 싶다’고 말하면 양심에 걸리지만 ‘아이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면 스스로도 선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명분보다 그 아래 있는 사랑, 곧 ‘무엇을 위해 이것을 원하는가’를 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명분보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상 속 아내의 지난 3년을 ‘놀았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출산과 초기 육아가 실제로 매우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은 영상 자체도 인정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 1년 동안 남편 역시 아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의 문제를 ‘밖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안의 노동 역시 실제 노동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시장가격보다 그 노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 사이의 ‘공동의 짐’이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도 처음부터 반드시 월 300만 원짜리 정규직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월 100만 원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영상의 표현대로 ‘우리 집 돈 문제를 둘이 같이 들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모든 일을 정확히 50 대 50으로 나누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한 사람이 돈을 더 벌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육아를 더 맡을 수 있으며, 질병이나 실직이 생기면 한쪽이 거의 전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똑같으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함께 지고 있느냐’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결혼의 핵심 역시 두 사람이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생활에서 돈은 ‘당신 돈’과 ‘내가 쓸 돈’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육아 역시 ‘당신이 맡아야 할 일’이 될 수 없으며, 집안일 역시 한 사람의 고정된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형편과 능력과 시기에 따라 역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속 가장 심각한 장면은 어쩌면 카페도 필라테스도 제주 여행도 아닙니다. 아내가 ‘당신 월급으로 못 사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 안에서는 남편의 노동이 이미 ‘우리 가정을 위해 한 사람이 감당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냥 매달 들어오는 380만 원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편이 점심값 6천 원을 아끼고, 야근하고, 막차를 타기 위해 뛰고, 회사에서 자리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인 월급만 남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 영상과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그 영상의 핵심은 ‘상대가 한 일을 알아봐 주는가’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도 남편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이 배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는 외벌이 남편들이 ‘수고했다’보다 ‘당신이 뭘 아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결국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업주부의 가사와 육아를 남편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말한다면 정확히 같은 오류입니다. 배우자의 수고를 보지 않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도 당연하지 않고 아내의 밥과 빨래와 육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당신도 원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지고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바뀌기 쉽습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또 하나 나타나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 친구 남편들은 그런 거 안 따져’, ‘지은이 남편은 애 어린이집 보내면 필라테스라도 다니라고 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에 따르면 그 비교 대상의 경제적 조건은 이 가정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비교의 문제는 다른 가정의 ‘결과’만 가져오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집의 여행, 자동차, 주택, 육아 방식, 소비 수준만 바라보면 내 배우자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 안에서 체어리티를 매우 빠르게 말라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힘들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남편도 생계 때문에 두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쳤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가 더 힘든가’를 판정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나도 힘들어’라고 상대의 고통을 덮기 전에 ‘당신도 힘들었구나’를 말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영상의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그래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가계부 전체를 식탁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석 달 안에 하루 네 시간이든 재택이든 일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가족카드 한도를 줄이자’, ‘일을 시작하면 등원과 주말 오전은 내가 맡고 아이가 아프면 연차를 번갈아 쓰자’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를 굴복시켰다’고 읽을 장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영상의 서사 안에서는 그동안 감정과 변명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현실의 숫자와 구체적인 역할’ 앞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도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결혼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명령과 압박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입니다. 가계의 실제 형편을 함께 보고, 서로의 수고를 정확하게 말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진실하게 밝힌 뒤 두 사람이 자유롭게 공동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버니 내 말을 들어라’도 잘못이고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당신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져라’도 잘못입니다. 둘 다 자신의 기여를 상대를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어쩌면 돈도, 직장도, 카페도 아닙니다.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은 상대의 자유로운 ‘예’를 받아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예’를 얻기 위해 중요한 진실을 감춘다면 상대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보여준 사람에게 ‘예’라고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맞벌이할 거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어느 정도 일을 줄일 것인가?’,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가사와 육아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부모의 도움은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소비 수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같은 질문입니다. 영상은 날짜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모든 미래를 계약서처럼 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국 이 영상의 제목도 조금 달라집니다. ‘왜 이 여자는 전업주부를 원하게 되었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배우자에게 내 진짜 욕구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선한 명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은 영상 속 아내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거듭남은 자기 욕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진실의 빛 가운데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는 직장에 돌아가기 싫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하기 두렵다’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두려움과 욕구를 진리 가운데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을 함께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월 380만 원도, 61만 원의 카페와 브런치 비용도, 1억 800만 원의 사라진 소득도 아닐 것입니다. 숫자는 문제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당신이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나는 나 자신을 진실하게 보여주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실한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당신 책임’, ‘내 책임’을 넘어 ‘우리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결혼은 비로소 한 몸의 질서를 향해 갑니다. 한 사람이 돈을 벌든 둘이 벌든, 한 사람이 아이를 더 돌보든 둘이 정확히 나누든 그것은 가정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안에 진실과 자유와 상호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혼의 핵심은 ‘누가 더 많이 했는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자기성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원하고 함께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4 심화

‘에녹이 보존한 교리는 후대의 고대 말씀과 모세의 창세기 기록에 어떻게 이어졌는가?’

 

 

AC.464는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했으며, 그 교리가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정돈하여 보존한 교리가 훗날 고대교회에 전해지고, 더 나아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사용한 고대의 자료가 된 것일까요? 큰 흐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에녹의 교리 = 고대 말씀 = 모세오경’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에녹의 역할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후대처럼 체계적인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를 판단하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태가 변하면서 이러한 퍼셉션이 계속 유지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을 모아 교리의 형태로 정돈했습니다. 살아 있는 내적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이 후대에도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창5:24의 속뜻과 연결됩니다. 에녹의 교리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즉시 필요한 것이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쓰이지 않으면서도 훗날 필요할 때를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질 것을 주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까지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시고 다른 형태로 보존하신 것입니다. AC.464의 에녹은 이런 의미에서 ‘퍼셉션에서 교리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녹이 정돈한 교리를 곧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말씀’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고대교회에 하나의 ‘고대 말씀’(Ancient Word)이 있었으며, 그것이 후대에는 소실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민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와 수10:13 및 삼하1:18에 언급되는 ‘야살의 책’ 등을 그 고대 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상응과 표상의 지식이 고대교회에서 말씀과 교리의 형태로 발전하고 보존되었던 더 넓은 전승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에녹의 교리화는 이 긴 전승의 매우 초기적이고 중요한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이 모세 시대에 처음 아무 자료도 없이 생겨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서 내려오던 고대의 기록과 전승이 있었으며, 모세가 그러한 자료를 사용했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태고교회와 고대교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매우 오래된 교회적 전승이 상응적 서술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의 말씀과 상응 지식 자체는 후대에 상당 부분 소실되었지만, 그 내용과 표현의 일부는 섭리 가운데 후대의 말씀 안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와 에녹의 교리 보존 사이에는 ‘고대의 계시와 퍼셉션이 후대를 위해 보존되고 전승되었다’는 큰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을 ‘에녹이 책을 한 권 써 두었고 그것이 그대로 전해져 모세오경이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64는 그런 직접적인 문헌 계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세오경 전체가 에녹의 교리에서 유래했다고 할 근거도 없습니다. 보다 정확한 그림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 → 에녹이라 하는 교회의 교리화와 보존 → 고대교회에서의 전승과 발전 → 고대의 말씀과 여러 기록 및 전승 → 모세가 사용한 고대 자료’라는 긴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여러 시대와 여러 형태의 전승이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녹의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은 한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던 특별한 영적 상태가 사라질 때 그들과 함께 모든 진리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그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 가운데 후대에 필요한 것은 교리와 전승의 형태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존된 진리는 다른 형태로 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AC.464가 ‘후대의 쓰임’이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러한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에서 모세까지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에녹이 정돈한 교리가 그대로 모세오경이 된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을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보존한 에녹의 사역이 고대교회의 오랜 전승을 거쳐 훗날 말씀의 기록으로 이어지는 큰 섭리적 흐름의 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할 때마다 진리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받을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고 전달하십니다. 에녹의 ‘들려감’은 바로 그 보존의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64 심화)

 

 

 

AC.464, 창5, ‘에녹은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으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교회이다’

개요 AC.464‘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로부터 교리를 형성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당시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후대의 쓰임을 위해 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460-468 심화

‘창5의 이름들은 왜 사람이 아니라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하는가?’

 

창5를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족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하는 식으로 이름과 나이, 출생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을 때 이 이름들을 사람의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AC.46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이 장의 이름들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들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교리들 또는 교회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창5의 문자적 형태를 부정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말씀의 속뜻으로는 이 족보가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본문이 족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속뜻으로 그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AC.460-468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의 이름들을 통하여 태고교회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했는지를 읽습니다. 따라서 AC.461의 ‘사람’은 천적이었던 태고교회 그 자체를, AC.462의 ‘셋’은 그보다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를, AC.463의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세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회를, AC.465의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를, AC.466의 ‘노아’는 열 번째 교회이자 새로운 고대교회를 나타냅니다. 창5의 족보 전체가 속뜻으로는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와 창5를 읽을 때 생기는 중요한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등장한 뒤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창5의 속뜻에서는 셋이 태고교회에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라고 합니다. 만일 창4와 창5를 하나의 평면적인 연대기적 족보로만 읽으면서 동시에 각 이름을 교회의 순번으로 대응시키려 한다면 이 둘은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읽는 속뜻의 층위에서는 창4와 창5가 각각 교회의 서로 다른 영적 역사를 펼쳐 보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어떤 이름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나온다는 문자적 서술 순서를 그대로 창5의 ‘첫 번째 교회, 두 번째 교회...’라는 영적 계승 순서에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AC.468은 이 문제에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앞 장, 곧 창4에서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이미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창5의 이름들 역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들’, 여기서는 교리 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 이름으로 표현되는 영적 성질과 상태를 담을 수 있다는 상응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에녹’, ‘라멕’, ‘노아’라는 이름을 만날 때 속뜻이 묻는 첫 질문은 ‘이 사람에게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이 이름을 통하여 말씀은 어떤 교회 상태를 나타내는가?’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 아담, 셋, 에녹, 노아라는 역사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AC.460-468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속뜻으로는 이 이름들이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성 자체에 관한 질문과 속뜻으로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구별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우리가 AC를 따라갈 때 우선 붙들어야 하는 것은 후자입니다. 문자적 본문은 족보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속뜻은 교회와 교리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창5의 놀라울 정도로 반복적인 형식도 새롭게 보입니다. 이름이 나오고, 나이가 나오고, 낳았다고 하고, 다시 살았다고 하고, 마침내 죽었다고 하는 동일한 구조가 계속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족보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서 시작된 어떤 영적 상태가 다음 교회로 전달되고 변화하며 마침내 쇠퇴해 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각 이름과 수, 그리고 ‘낳음’과 ‘죽음’의 표현은 이후 본문 해설에서 각각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라는 관점에서 풀리게 됩니다.

 

결국 창5의 이름들을 교회와 교리로 읽는 것은 문자적 본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안에 담긴 더 깊은 말씀의 흐름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표면에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낳는 족보가 있고, 그 안에는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의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긴 흐름의 끝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노아’라는 리메인스가 남습니다. 이것이 창5의 족보를 단순한 고대인의 명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어 가시고 쇠퇴 가운데서도 어떻게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게 하는 열쇠입니다. (AC.460-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상당히 자극적인 대비로 시작합니다. 같은 남자가 한국에서는 늘 부족한 남자 친구가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작은 행동에도 고마움을 받는 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자 친구에게 한국인 여자 친구는 ‘괜찮아? 근데 오늘 내 친구 생일 모임은 어떡하지?’라고 묻고, 일본인 여자 친구는 죽과 음료를 들고 찾아옵니다. 영상은 이 두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아 ‘눈치 주던 한국 여자’와 ‘감동 주던 일본 여자’를 대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먼저 한 가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본질적으로 이렇다’는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영상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여성과 한 남자의 사례이며, 국적이나 민족 전체의 영적 성향을 이것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 사례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을 받는 방식과 사랑을 주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속 첫 번째 관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랑에 끊임없이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100일에는 꽃다발이 아니라 목걸이를 알아서 준비해야 했고, 친구 모임에 가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상대의 말이 아니라 표정과 분위기로 알아내야 했으며, 조용하면 ‘어렵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말하면 ‘오버한다’고 합니다. 남자가 행동을 고쳐도 그 변화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새로운 부족함이 다시 발견됩니다. 영상은 이를 매우 정확하게 ‘연애를 하는 건지 매일 시험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반면 두 번째 관계에서는 요구가 비교적 명확하고, 상대가 베푼 작은 행동을 알아보고 ‘고맙다’고 표현하며, 잘못했을 때도 무엇이 서운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주었으면 하는지를 직접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을 원하고 그에게 선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천국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끊임없이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계산하지만, 천국적 사랑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선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행동은 어느 순간부터 모두 사랑을 측정하는 시험지가 됩니다.

 

영상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 바로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사랑’입니다. 은정 씨 역시 성우 씨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영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바라는 것이 많았고, 그 바람을 직접 말하기보다 상대가 알아서 맞혀주기를 원했습니다. 맞히면 당연한 것이 되고 틀리면 서운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연애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proprium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것쯤은 알아야지’, ‘나를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다른 남자 친구들은 한다는데 왜 당신은 못 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있지만 그 사랑 안에 자기중심성이 섞여 있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척도로 계속 환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상에서 반복되는 ‘비교’는 영적으로도 주목할 만합니다. ‘친구 남자 친구는 이것을 해줬다’, ‘다른 남자들은 다 한다’, ‘언니 남자 친구는 이것도 보냈다’는 말입니다. 비교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과 경쟁하여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은 ‘당신이어서’ 기뻐하는 것인데, 비교는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비교가 지속되면 선물도 선물이 아니게 되고, 배려도 배려가 아니게 되며, 사랑에서 자발적으로 하던 행동조차 점차 의무가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김치 먹고 싶다고 하셔서요’, ‘오늘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요’, ‘예약까지 알아봐줘서 고마워요’ 같은 아주 작은 반응입니다. 상대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하고, 우산을 씌워주느라 젖은 어깨를 알아보고, 맛없는 식당에서도 결과보다 예약하고 준비한 마음을 봅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성우 씨가 일본인 여자 친구와의 차이를 ‘그 사람은 내가 한 걸 알아봐줘’라고 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봐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선을 가장 쉽게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출퇴근길 배려가 몇 년 뒤에는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감사했던 식사 준비와 설거지와 육아와 경제적 책임이 시간이 흐르면 ‘원래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영상도 정확히 이것을 지적합니다. 월급이 들어오는 것,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 명절에 운전하는 것 등이 어느 순간 모두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감사는 단순한 인간관계 기술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받은 선을 ‘내가 당연히 받을 몫’으로 보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입니다. 배우자가 밥을 해주는 것도, 돈을 벌어오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는 것도, 아플 때 돌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서 자동으로 발생하는 기능이 아닙니다. 한 인격이 나를 위해 시간과 힘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상대는 ‘내 필요를 충족시키는 사람’에서 ‘나에게 선을 베풀고 있는 한 사람’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마워’라는 짧은 말은 관계 안에서 proprium의 지배를 약하게 만드는 매우 작은 체어리티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는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처음 만든 김치찌개가 맛이 없었는데 유이 씨는 한 그릇을 다 먹고 ‘한국 사람이 해준 김치찌개 처음 먹어 봐요. 다음에 또 해 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연습하고 나중에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까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자를 움직이는 여자 화법’ 정도로 읽으면 너무 얕습니다. 사랑이 상대 안의 선을 발견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선이 더욱 자라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비난 속에서도 변할 수 있지만, 자신 안의 작은 선을 누군가 알아봐줄 때 훨씬 자유롭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유이 씨처럼 무조건 칭찬하고 참고 맞춰주는 것이 이상적인 사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상에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반례가 있습니다. 성우 씨가 약속을 잊고 술자리에 가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을 때 유이 씨는 ‘괜찮아요’라고 덮어버리지 않습니다. ‘어제는 조금 서운했어요. 다음에 늦으면 먼저 연락해 줘요’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 일본 전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다만 ‘틀린 것을 알려주되 창피하지 않게’ 알려줍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진리를 사랑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핵심은 ‘남자는 칭찬해야 말을 듣는다’도 아니고 ‘일본 여자는 한국 여자보다 남자를 잘 다룬다’도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선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부족한 것만 찾고 있는가?’입니다. 상대에게 열 가지 선이 있고 한 가지 부족함이 있을 때 proprium은 이상하게도 그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면 잠시 감사하는 대신 열한 번째 부족함을 찾아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보다 계속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남녀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도 아내의 수많은 수고를 ‘원래 아내가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고, 아내도 남편의 수고를 ‘원래 남편이 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의 효도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고, 자녀도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목회자도 교인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으며 교인도 목회자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당연함’은 감사가 사라지는 자리이며, 감사가 사라지면 관계는 조금씩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변하기 쉽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성우 씨 자신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는 ‘안 하면 서운하다고 할까 봐’ 행동했지만 도쿄에서는 ‘하고 싶어서’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데려다주고 싶고, 맛있다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요리하고 싶어졌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합니다. 데려다주고, 선물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기념일을 챙깁니다. 그러나 내적 동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의무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기쁨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결혼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결혼적 결합은 상대를 이용하여 나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선을 기뻐하면서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관계입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쪽이 다른 쪽의 기대를 완벽하게 읽고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내면을 알려고 하고, 필요한 것은 정직하게 말하며, 받은 선에는 감사하고, 잘못은 사랑 안에서 바로잡으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자기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상 제목의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라는 구도는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는 결국 사라져야 합니다. 국적을 떼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랑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사랑’과 ‘상대에게서 오는 작은 선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랑은 한국인 안에도, 일본인 안에도, 남자 안에도, 여자 안에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 사람 안에서도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배우자가 해준 작은 일을 보고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에는 상대의 실수를 부드럽게 알려주다가도 어떤 때에는 ‘그것도 몰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어떤 여자를 만나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을 때 훨씬 깊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비추는 마지막 지점은 주님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선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에게서 작은 선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습관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넘어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배우자가 오늘도 수고했다는 것, 나를 기다려 주었다는 것, 아픈 나를 돌보았다는 것, 서툰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 내 말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들어오는 선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남자는 거창한 대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라는 결론도 조금 넓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베푼 작은 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닿았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고마워’, ‘오늘 수고했어’, ‘당신이 해줘서 좋았어’, ‘그때 내가 힘든 걸 알아줘서 고마웠어.’ 이런 말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의 존재와 선을 ‘내가 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면 오래된 관계가 메말라가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움이 많아졌을 때보다 ‘고마운 것이 없어졌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마운 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져 당연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은 거창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곁의 사람이 해준 아주 작은 일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이것밖에 못 하지?’에서 ‘이것도 해주었구나’로 시선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결국 이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둘 문장은 ‘한국 여자와 일본 여자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것일 것입니다. ‘은정 씨는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고 유이 씨는 사랑을 알아봐줬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문장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놓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을 확인받으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 곁에 이미 와 있는 사랑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사랑을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발견하는 법을 배워 가는 두 사람만 남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SY.104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 다 아니고, 훨씬 더 내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 아우라가 강해서 악령이 접근하지 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입류(influx)를 통한 영적 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통해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 실제 무기고가 있고 천사들이 칼을 차고 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 생각과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 안의 악·거짓·두려움·절망을 자극 → 인간 ← 선·진리·소망을 일깨움 ← 천사 ← 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 대 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 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 파괴하여 악을 제거하려는 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 더 이상 다른 존재를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분리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 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 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하여 흘러드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스피어’입니다.

 

 

 

SY.104, 씨네마톡, ‘시티즌 비질란테’(Citizen Vigilante, 2026) - 정의가 복수가 되는 순간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을 보는 동안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단순히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편한 것은 우리가 주인공의 행동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먼저 무고한 사람이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법과 제도가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며, 가해자들이 그 틈을 빠져나가는 상황을 보여 줍니다. 그러고는 비질란테를 등장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를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무력한 사람들을 돕는 진짜 기사’라고 환호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은 관객에게 위험한 질문 하나를 건넵니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대신해야 하지 않는가?’

 

이 질문이 강력한 까닭은 그 출발점에 분명한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입니다. 강간과 살인, 폭력과 약탈을 ‘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무조건적인 관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체어리티는 악이 계속해서 이웃을 해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을 포함합니다. 사회의 법과 재판과 형벌도 이런 관점에서는 단순한 세속 제도가 아니라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한 질서의 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하는 렌즈가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보고, 그것을 제어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 중간의 피해자 장면은 특히 곤혹스럽습니다. 비질란테는 피해자에게 재판이 몇 년이나 걸릴 수 있고, 그동안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계속 증언해야 하며,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정의입니까?’ 이어서 ‘정의를 원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그렇다면 저 사람이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하는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악에 대한 분노’와 ‘악인에 대한 증오’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지점까지 서로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 악 때문에 사람이 파괴되고 이웃이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을 증오하면서 그의 고통과 파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중심은 더 이상 ‘이웃을 악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사람에게 고통을 돌려주는 것’으로 이동합니다. 정의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복수의 쾌감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영화가 섬뜩한 것은 바로 이 변화가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합니다. 다음에는 범죄자를 응징합니다. 그러다가 경찰에게까지 ‘나를 방해하면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정의를 집행한다고 시작한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이 정의인지 결정하고, 누가 악인인지 판결하고, 형량까지 정하며, 마침내 자신을 막는 공권력까지 제거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장면은 판사를 찾아가는 대목입니다. 비질란테는 미성년자를 집단 성폭행한 가해자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은 책임을 판사에게 묻습니다. 영화 속 판사는 이들의 범죄를 사회 통합의 실패와 연결하고 가해자들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러자 비질란테는 그 판사를 피해자를 해친 사람들과 사실상 같은 편에 놓습니다. 관객의 분노를 극대화하도록 만들어진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것과 ‘그러므로 내가 그 판사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의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개인에게 최종 심판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질서의 실패가 ‘나 자신이 질서가 되어도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순간, 비질란테는 자기가 싸우던 악의 논리를 닮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집단 성폭행 가해자들을 찾아가는 장면은 이 문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영화는 가해자들이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정황을 일부러 제시합니다. 한 사람은 피해자가 옷을 그렇게 입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비질란테는 그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합니다. 결국 감옥을 피했던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죽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고 ‘저런 자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와, 그들이 고통받고 죽는 모습을 즐기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관객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정의가 회복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저 인간들이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두 마음은 겉으로 매우 비슷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근원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심판은 인간의 복수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주님은 악인을 미워해서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사랑과 선이며, 심판조차도 질서를 회복하고 선한 자들을 악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 역시 ‘당한 만큼 갚아 주시는’ 신적 보복이라기보다 악이 다른 존재를 무제한으로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질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서도 형벌의 정당성은 ‘저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내 분이 풀리는가’가 아니라 ‘악을 어떻게 억제하고 무고한 이웃을 어떻게 보호하며 무너진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엄한 형벌이라도 그 내면의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함’이나 ‘봐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어쩌면 비질란테만이 아닙니다. ‘그를 환호하는 사람들’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영화를 보면서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되는 ‘우리 자신’입니다. 작품 속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저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환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proprium은 기묘합니다. 처음에는 ‘무고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걸음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고통을 주어도 된다’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가 고통받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가 됩니다. 이때 선과 진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 내면에는 이미 복수와 증오가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언제나 처음부터 ‘나는 악이다’라고 말하며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는 정의다’라는 얼굴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고 ‘그러니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 내려서도 안 됩니다. 그것 역시 너무 단순합니다. 무고한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고, 사람이 살해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는데도 아무런 분노가 없다면 그것을 반드시 영적 성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이웃을 파괴하는 악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거부가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악이 멈추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악한 사람이 파멸하기를 원하는가.’ 전자는 질서를 향하고 후자는 복수를 향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의 마음에서는 이 둘이 너무나 쉽게 섞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정의라고 즉시 성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시티즌 비질란테’가 ‘스베덴보리의 렌즈’ 앞에서 던지는 질문은 ‘저 비질란테가 옳은가, 법원이 옳은가?’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훨씬 더 불편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악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악인을 미워하는가?’, ‘나는 피해자가 보호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가해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은가?’, ‘나는 정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나의 분노가 허락받기를 원하는가?’

 

이 구별 앞에서는 저 역시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끔찍한 악행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법이 그것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렌즈를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악을 선이라 하지 않되 악인을 향한 증오에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복수를 정의로 착각하지도 않으며, 필요한 형벌과 질서는 단호하게 세우되 인간의 최종적인 내면과 영원한 운명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 남겨 두는 것, 그것이 이 잔혹하고 불편한 영화를 통과하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분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화가 보여 주는 가장 깊은 역설은 이것입니다. ‘악과 싸우는 동안, 그 악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싸움일지도 모릅니다.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SY.104 심화 1, 씨네마톡,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SY.104 심화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