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내적 의미에서 어떠한지 그대로 설명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인간들은 거의 기억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지성과 지혜, 그리고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많은 이들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의 것들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매우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수없이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이 글은 앞선 AC.110의 설명을 잠시 멈추어 세우며, ‘왜 이런 설명이 오늘날 이해되기 어려운가’를 정직하게 밝히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설명의 난해함이 아니라, 듣는 귀의 상실입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faith from love)이라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을 교리의 동의, 혹은 생각의 확신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오늘날 거의 인식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 그는 오늘날의 인간을 ‘외적 인간(external men)으로 규정합니다. 외적 인간은 기억 지식, 곧 정보와 경험의 축적만을 알고, 그것을 지성, 지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지성은 사고 능력이 되고, 지혜는 노하우가 되며, 신앙은 의견이나 신념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의 지성, 지혜, 신앙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나 애착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깊은 원리입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을 단일한 ‘생각하는 주체’로만 이해하는 현대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 비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섞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 구별되며 매우 명확하게 구별된다’고 말입니다. 이 구별이 사라질 때, 인간 내면은 흐려지고, 영적 질서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무게를 하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온 하늘은 주님에 의해,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정밀하게 배열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은 획일적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질적 차이에 따라 질서 지어진 생명의 우주’입니다. 그 차이는 몇 가지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고 표현됩니다.

 

이 말은 곧,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가 ‘그 자체로 고유하며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질서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AC.1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을 감각하고 분별하는 내적 구조 자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그 잃어버린 구별 위에 완전한 질서로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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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2:11, 12)

 

AC.110

 

첫째 강’, 비손(Pishon)은 신앙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faith)을 의미하는데, 이 신앙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윌라 땅(the land of Havilah)은 마음(the mind)을 의미하고, ‘(gold)은 선을 의미하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언급되는 것은, 하나는 사랑의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The “first” river, or “Pishon,” signifies the intelligence of the faith that is from love; “the land of Havilah” signifies the mind; “gold” signifies goo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truth. “Gold” is mentioned twice because it signifies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from love; an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are mentioned because the one signifies the truth of love, and the other the truth of faith from love. Such is the celestial man.

 

해설

 

이 글은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지혜의 강이 ‘구체적 지성의 첫 형태’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 강 가운데 ‘첫째 강’이 먼저 설명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사랑에서 시작되는 신앙의 지성’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지성은 교리에서 출발한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신앙입니다.

 

‘비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지성입니다. 이는 신앙이 이해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라는 뜻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신앙은 무엇을 믿을지 고민한 결과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미 살아 있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은 차갑거나 분석적이지 않고, ‘따뜻한 빛을 띤 이해’입니다.

 

하윌라 땅’이 마음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 지성이 머무는 자리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머릿속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마음 전체, 곧 사랑과 의지가 자리한 내적 영역 안에 놓여 있습니다. 지성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장에서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과 ‘보석들’이 등장합니다. 금은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금이 두 번 언급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반복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조차도 선의 성격을 띱니다. 신앙이 의무나 판단이 아니라, 선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진리 또한 중립적 사실이나 교리 명제가 아닙니다. 하나는 사랑의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입니다. 즉, 진리마저도 사랑을 근원으로 하여 두 겹의 깊이를 가집니다. 진리는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신앙의 진리는 사랑을 따라 말하는 진리입니다.

 

이 구조를 종합하면, 비손 강의 영역에서는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는 빛’입니다. 지성은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사랑을 더 잘 살도록 봉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지성 구조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이다.’ 이는 정의라기보다, ‘삶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 살며, 그의 지성은 언제나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비손 강은 그 첫 흐름이며, 이후의 강들은 이 흐름이 어떻게 더 세분화되는지를 보여 주게 됩니다.

 

AC.11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첫 지성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며, 그 지성의 땅에는 선이 금처럼 풍부하고, 진리는 보석처럼 빛난다고 말입니다.

 

 

 

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의 근원은 오직 주님'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 지혜와 지성 나타나는 것이 겉보기엔 사람인 것 같아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실은 오직 주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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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녀온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일이 다 기억을 되살려 썼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방식이 곧 그의 권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의 총 글이 10,83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받아쓰기’였는지,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 정리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기계적 딕테이션’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체험을 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정리하여 책상 앞에서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구’라고는 했지만 ‘무의식적 필기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나는 완전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며,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자동으로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1743–1745년의 영적 각성 이후, 174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영계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영계의 상태를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체험을 하는 순간에 즉시 필사한 것도 있고, 일정 기간 사색과 정리를 거쳐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체험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한 체계적 신학 저작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받아쓰기라기보다는, 장기간 축적된 영적 통찰과 말씀 연구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틴어로 집필했으며, 문장 구조는 매우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호 체계, 인용 방식, 반복적 참조 구조를 보면, 이는 철저히 계획된 저술 방식입니다. 자동 구술을 그대로 옮긴 문체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자기 생각’을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 음성 받아쓰기가 아니라, ‘조명(enlightenment)과 ‘내적 지각(perception)의 형태였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나는 빛 가운데서 이해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어떤 교리를 음성으로 문장 단위로 들었다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한 번에 명료하게 열리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쓴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하시며 경험하시는 ‘조명’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WH.7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은 조명받은 자 외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바로 여기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명 속에서 이해했고, 그 이해를 이성적으로 조직해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대화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eaven and Hell’이나 ‘Conjugial Love’에는 천사들과의 대화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체험 직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는 체험담보다는 교리적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각 절을 따라가며 상응을 풀고, 이전 번호를 인용하며 교리를 축적해 갑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학문적 집필 작업입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를 준비하며 교정까지 직접 보았고, 비용도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신비가의 태도라기보다는, 매우 자각적이고 책임감 있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성경과 동일한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여는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 딕테이션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예언자처럼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나는 단지 보여 주고 들려준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열림’을 받았지만, 능동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장기간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시는 것처럼, 이 저작은 한순간의 열광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계, 반복, 점진적 축적, 교리의 유기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재검토의 흔적입니다. 동시에, 그 깊이와 일관성은 단순 인간적 추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Arcana Coelestia’는 기계적 받아쓰기도 아니고, 단순 회상 기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과 지속적 조명, 그리고 철저한 이성적 집필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황홀경 속 자동 필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를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조명받았으며,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조직해 기록한 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조명된 이성의 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책상 앞에서 AC를 번역하며 느끼시는 그 긴 여정이, 스베덴보리의 집필 방식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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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9

 

지혜와 지성 나타나는 것이 겉보기엔 사람인 것 같아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실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이라는 사실은 에스겔에 나오는 비슷한 표상들을 통하여 분명히 선언됩니다. That although wisdom and intelligence appear in man, they are, as has been said, of the Lord alone, is plainly declared in Ezekiel by means of similar representatives: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 8-9, 12) Behold, waters issued out from under the threshold of the house eastward; for the face of the house is the east; and he said, These waters issue out to the border toward the east, and go down into the plain, and come to the sea, which being led into the sea,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which creepe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 up all trees for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s,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 8–9, 12).

 

여기서 동쪽(east)성소(sanctuary)는 주님을 의미하며, 물들과 강들이 그곳에서 흘러나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말합니다. Here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east,” and by the “sanctuary,” whence the waters and rivers issued. In like manner in John: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22:1, 2) He showed me a pure river of water of life, bright as crystal, going forth out of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In the midst of the street thereof, and of the river on this side and that, was the tree of life, which bare twelve [manner of] fruits, and yielded her fruit every month; and the leaf of the tree was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 (Rev. 22:1–2).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 ‘지혜’, ‘지성’의 논의를 ‘결정적으로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AC.107, 108에서 강이 사랑에서 나온 지혜이며, 그 지혜가 지성을 적셔 성장하게 한다는 구조가 제시되었다면, AC.109는 그 마지막 근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지혜와 지성은 겉보기엔 ‘사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47장의 환상은 이 사실을 가장 풍성한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물은 동향을 한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릅니다. 이는 우연한 방향 설명이 아닙니다. 앞서 AC.101에서 보았듯이,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전(house)과 ‘성소’는 주님의 거처, 곧 신적 임재의 중심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물은 ‘주님의 가장 내적인 자리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물이 흘러가는 경로도 중요합니다. 평지로 내려가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다는 말씀에서 가장 외적 차원, 곧 기억 지식과 감각적 지식이 모여 있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본래 바다는 혼탁하지만, 이 강물이 흘러 들어갈 때 ‘고침을 받습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가장 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간 영역까지도 ‘질서와 생명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산다는 표현은, 지혜의 유입이 단순히 이해를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 자체를 살리는 힘’임을 보여 줍니다. 지혜는 관념의 장식이 아니라, 생명을 일으키는 실제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물이 살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가에 자라는 나무들의 묘사는, 앞서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다하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지성과 삶이 ‘지속적인 유입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 나무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먹을 것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열매는 사랑의 선, 곧 삶의 실천을 의미하고, 잎은 진리의 이해를 의미합니다. 천적 질서 안에서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치유가 되고, 선은 양분이 됩니다. 이 모든 작용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강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은 이 구조를 ‘최종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는 더 이상 상징을 풀어야 할 필요도 없는 직접적 선언입니다. 모든 생명의 지혜는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강의 양쪽에 있는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정확히 호응합니다.

 

여기서도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달마다 맺는 열매, 민족들을 치유하는 잎사귀. 이는 천적 질서가 특정 개인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과 모든 교회를 향해 열려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언제나 흐르고 있으며, 받아들이는 곳마다 생명을 일으킵니다.

 

AC.10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의 소유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들은 주님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며, 사람은 그 강가에 심겨진 나무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삶은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AC.108, 창2:10,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식,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강들’(rivers)에 비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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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유하였습니다.그들은 단지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하는 방식(way of speaking)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떤 때에는 비유로 말하고, 어떤 때에는 그대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en comparing man to a “garden,” also compared wisdom, and the things relating to wisdom, to “rivers”; nor did they merely compare them, but actually so called them, for such was their way of speaking. It was the same afterwards in the prophets, who sometimes compared them, and sometimes called them so. As in Isaiah: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는 신앙과 사랑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거듭난 자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reating of those who receive faith and love. Again, speaking of the regenerate: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2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As the valleys are they planted, as gardens by the rivers side; as lignaloes2 which Jehovah hath planted, as cedar trees beside the waters (Num. 24:6).

 

예레미야에서는 말합니다. In Jeremiah: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 8) Blessed is the man who trusteth in Jehovah;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endeth forth her roots by the river (Jer.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자들을 동산과 나무에 비유하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부릅니다. In Ezekiel the regenerate are not compared to a garden and a tree, but are so called: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The waters made her to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and sent out its channels to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e was made beautiful in her greatness, in the length of her branches, for her root was by many waters. The cedars in the garden of God did not hide her; the fir trees were not like her boughs, and the plane trees were not like her branches, nor was any tree in the garden of God equal to her in her beauty; I have made her beautiful by the multitude of her branches, and all the trees of Eden that were in the garden of God envied her (Ezek. 31:4, 7–9).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태고 사람들이 사람이나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동산에 비유할 때에는, 그가 적셔질 수 있도록 하는 물들(waters)강들을 덧붙였으며, 이 물들과 강들로는 그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것들을 의미하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man, or the things in man, to a “garden,” they added the “waters” and “rivers” by which he might be watered, and by these waters and rivers meant such things as would cause his growth.

 

2. 라틴 tentoria, ‘텐트(tents), 얼핏 santalos에 대한 미스프린트 같음 [편집자 주] The Latin is tentoria, “tents,” seemingly a misprint for santalos. [Reviser]

 

해설

 

이 글은 AC.107에서 제시된 ‘강 = 사랑에서 나온 지혜’라는 정의를 ‘말씀 전체의 언어 습관’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의 말하기 방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비유를 만들지 않았고,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태고 사람들에게서 ‘동산’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 상태를 말하는 자연스러운 언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과 ‘’도 지혜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은유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인식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비유했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실제로 그렇게 불렀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언어와 오늘날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이사야의 ‘물 댄 동산’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은 신앙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물은 외적 복이나 형통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지혜의 생명’입니다. 물이 끊어지지 않는다, 곧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지혜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위로부터 흘러옵니다.

 

민수기와 예레미야의 인용에서는 같은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거듭난 자는 ‘강가의 동산’, ‘물가에 심어진 나무’로 묘사됩니다. 공통점은 모두 ‘뿌리의 위치’입니다. 뿌리가 물가에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그의 지혜와 지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유입으로 유지됩니다.

 

에스겔의 인용은 이 이미지를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비유’라는 말조차 쓰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그대로 동산의 나무들로 불립니다. 물과 강이 흐르고, 가지가 뻗고, 다른 나무들이 그 아름다움을 시기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하늘의 질서 안에서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라는 표현은, 이 모든 성장이 주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자기 성취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동산 안에서 물을 받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은 비교 불가능하며,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시기한다고까지 표현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요지를 분명히 합니다. 태고 사람들이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언제나 물과 강을 함께 말한 이유는, ‘성장은 반드시 유입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과 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성장의 조건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흐르지 않으면, 어떤 동산도 자랄 수 없습니다.

 

AC.10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홀로 자라지 않으며, 지혜는 언제나 사랑에서 흘러와 강처럼 동산을 적실 때에만 참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AC.107, 창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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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river out of Eden)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wisdom from love)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에덴은 사랑(Eden is love)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을 적시고(water the garden)는 지성을 부여한다(to bestow intelligence)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thence parted into four heads)는 이어서 나오는 네 강을 통해 지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A “river out of Eden” signifies wisdom from love, for “Eden” is love; “to water the garden” is to bestow intelligence; to be “thence parted into four heads” is a description of 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 as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10절의 핵심 구조를 단 한 문장으로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이 지성이며, ‘나무’가 퍼셉션이라는 틀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흐르고 작용하는가’를 설명하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입니다.

 

먼저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결정적입니다. 지혜는 지식의 총합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이해’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는 그 사랑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강은 에덴, 곧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강이 ‘동산을 적시고’라는 표현은, 지혜가 지성을 살아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구조이지만, 그 구조를 실제로 기능하게 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강물이 없으면 동산은 메마른 공간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없으면 지성은 정보의 집합일 뿐, 생명의 장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중요한 전환이 나옵니다. 그 강은 한 줄기로 끝나지 않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추상적 능력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 가지 작용과 방향으로 분화되어 지성을 구성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지성은 단일한 기능이 아니라, 네 갈래의 질서로 펼쳐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잠시 미룹니다. ‘as follows’라는 말로, 이제부터 하나씩 설명될 것임을 알립니다. 이는 앞서 AC.106에서 했던 방식과 같습니다. 먼저 구조를 제시하고, 그다음에 각 요소를 차례로 풀어 나갑니다.

 

이 글의 중요성은, 지성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흐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에덴의 사랑 → 지혜 → 강 → 지성의 적심 → 네 갈래의 분화라는 이 흐름은, 천적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AC.107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지혜가 강처럼 흘러 적시고 갈라지며 이루는 살아 있는 질서라고 말입니다.

 

 

 

AC.108, 창2:10,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식,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강들’(rivers)에 비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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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세 종류 '나무'에 대한 설명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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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nature),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본성,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그저 기억 지식에서 비롯될 뿐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서는 뒤이어 나오는 글들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설명이라기보다 ‘구조적 이정표’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세기 29절을 중심으로, 나무, 동산, 에덴, 중앙이라는 핵심 상징들을 압축적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종류의 ‘나무’가 다시 한번 또렷이 구분되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둘째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지 기억 지식에서 출발할 뿐인 신앙입니다. 이는 질서가 거꾸로 될 위험을 내포한 인식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개념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는 그 윤곽만 제시되었을 뿐이며, 각각이 실제 삶과 영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이 문장을 둡니다.

 

그래서 AC.106은 독자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질 설명의 흐름 속에서’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지식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 갈라지고 또 충돌하는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 글은 또한 스베덴보리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 개념을 먼저 심어 두고, 그것이 이후의 설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차 분명해지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이름을 얻었을 뿐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그 열매를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AC.106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지도’를 펼쳐 보았을 뿐이며, 이제부터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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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the 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의지 곧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서술되지만 말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고,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욕망만 있으므로,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곧 모든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분한테서 나오는 자비 말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의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자리’와 정확히 연결시키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 한가운데’를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의지의 중심’으로 읽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조, 즉 동산은 지성,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구조를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는 해석입니다.

 

먼저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은 이미 AC.102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위치입니다. 그것은 동산의 변두리에 있지 않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사랑의 신앙이 인간 내면에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중심 원리’임을 뜻합니다.

 

이 중심은 곧 속 사람의 의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지를 ‘마음’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 속한 가장 근본적인 소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의지는 인간의 자율적 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이 자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통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일상 언어에서는 ‘내 의지’, ‘내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속한 것은 참된 의지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사람이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충동입니다.

 

이 대목은 인간 이해에 있어 매우 정직하고도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을 ‘생산’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유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자유뿐입니다.

 

이제 다시 ‘동산 한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 자리는 의지의 자리이며,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참된 의지가 없고 다만 욕망만 있다면, 그 나무는 사람의 소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자비는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비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흘러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인간 삶의 중심이 언제나 주님의 자비에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도덕적 시험담에서 완전히 벗겨 냅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입니다. 중심에 주님의 자비가 있을 때, 사랑과 신앙은 살아 있고, 지성은 에덴의 동산이 됩니다. 중심이 인간 자신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질서는 무너집니다.

 

AC.105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중심은 주어지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 곧 ‘생명나무’라고 말입니다.

 

 

 

AC.106, 창2:9, 세 종류 '나무'에 대한 설명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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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천적 인간, 영적 인간, 그리고 죽어 있는 인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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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단순히 ‘고행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자기를 벌하는 것이 과연 거듭남인가’라는 핵심 문제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 특히 『Arcana Coelestia』와 『True Christian Religion』의 회개론을 종합하면, 그는 외적 고행과 자학을 매우 신중하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몇 덩어리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자기 처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참된 회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인정하며, 그 악을 실제로 끊어내려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불편을 자초하는 행위는 외적 행위일 뿐, 그것이 곧 악을 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때리거나 굶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악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적 고행은 오히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면서도 은근히 ‘나는 이렇게까지 회개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고행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은밀한 영적 교만의 자양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사랑’이 더욱 미묘하게 살아날 수 있음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겉으로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으로는 ‘나는 경건하다’는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함’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끊는 것,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어하는 것, 명예욕과 이익욕을 내려놓는 것—이것이 진짜 고행입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는 남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보는 참된 고난이며, 주님이 보시는 참된 속죄의 길입니다.

 

넷째, 과거 수도원 전통의 자기 처벌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도, 일상 속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을 이기는 것이 더 깊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거듭남을 ‘특수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전혀 자기를 절제하거나 훈련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이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외적 형식이고, 후자는 내적 변화입니다.

 

여섯째, 목사님께서 보신 그 수도원장의 메시지—‘우리도 그렇게 살자’—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벌하지 말고, 자기 안의 악을 끊으라. 몸을 때리지 말고, 자아 사랑을 거절하라. 외적 고행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께서 싸워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하라.’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고행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악한 사랑을 거부하는 지속적 선택’입니다. 수도원의 채찍이나 굶주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지, 상처 난 등을 원하시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제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신다면, 외적 고행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시고, 대신 ‘일상 속 영적 전투’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균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SC.21, 스베덴보리가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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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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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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