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5.심화

 

2. 그 땅의 들짐승

 

 AC.45 해설 하단에 이 글은 그 땅의 들짐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거듭남은 욕정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참 감동적입니다. 혹시 그러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실제 일상 속에서는 매 순간 바로 이 욕정과 쾌락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실제 삶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욕정과 쾌락을 질서 안으로 두는 방법은 그것을 직접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싸워서 뿌리 뽑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아래에 두어 방향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리를 하나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욕정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같은 욕망이라도, 주님 아래 있으면 선을 섬기는 도구가 되고, 자기 사랑 아래 있으면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핵심은 제거가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누구인가’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첫 단계는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욕정이나 쾌락이 올라올 때, 그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지금 이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걸까?’ 하고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질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욕정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방향을 바꾸는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 하면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럼 이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데 쓰자’라고 바꾸면, 같은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끊으려 하면 반발이 생기지만, 그것을 더 건강하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옮기면, 점점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것은 ‘억제’가 아니라 ‘재배치’입니다.

 

세 번째는 ‘작은 절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작은 선택에서 질서를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번 참는 것, 더 가지려는 마음에서 한 번 멈추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지 않는 것 등, 이런 작은 절제들이 쌓이면서, 욕정은 점점 ‘주인이 아니라 종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네 번째는 가장 중요한데,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빠지면, 앞의 모든 과정이 결국 자기 노력으로 끝나버립니다. 욕정과 싸우다 보면 금방 느끼게 됩니다. ‘이건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저를 끌고 가는 힘입니다. 주님이 다스려 주세요.’ 하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짜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 곧 영적 전투는 직접 싸우는 것, 곧 내가 이 ‘욕정과 쾌락’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방향을 바꾸고  작은 절제로 길을 내고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일상에서 가능한 실제적인 길입니다.

 

이 과정은 빠르게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거듭남의 평생 과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어떤 욕정이 계속 올라온다고 해서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가’입니다. 예전에는 그대로 끌려갔다면, 이제는 한 번 멈추고,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주님께 돌리는, 즉 이럴 수만 있다면, 이것은 이미 이 질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기보다, 그것이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욕정과 쾌락을 다스리는 길은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사랑 아래 두어 방향과 자리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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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 1. ‘태고 시대’ AC.45 본문에 ‘태고 시대’가 나오는데요, 기독교 배경이 없는 분들은 대뜸 ‘석기 시대’를 떠올리실 겁니다. 동굴에서 살며, 돌연장을 사용, 사냥을 하며 살았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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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심화

 

1. 태고 시대

 

AC.45 본문에 태고 시대가 나오는데요, 기독교 배경이 없는 분들은 대뜸 석기 시대를 떠올리실 겁니다. 동굴에서 살며, 돌연장을 사용, 사냥을 하며 살았던 시대를 말이지요. 원시 미개 종족, 인류를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런 높은 수준의 설명이 과연 와닿을까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지점은 정말 많은 초심자, 곧 입문하시는 분들이 처음에 강하게 걸려 넘어지는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태고 시대’라고 하면 자동으로 ‘석기 시대’, ‘동굴’, ‘원시인’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반드시 ‘개념을 완전히 다시 잡아 주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 시대는 역사학에서 말하는 석기 시대가 아니라, ‘인류의 영적 상태가 가장 높았던 시대’,  태고교회가 존재하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기술 수준이나 문명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수준’을 기준으로 구분한 시대입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볼 때, ‘기술이 발전했느냐,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느냐’로 시대를 나눕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씁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과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가?’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원시 시대’라고 부르는 때가 사실은 오히려 ‘가장 깊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대’가 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금처럼 배우고 따지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로 아는 상태,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 그러니까 학습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바로 느끼고 아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시대를 가장 높은 상태로 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려면 공부하고, 설교 듣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태고 시대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양심보다 더 깊은 어떤 것으로 이건 옳다, 이건 아니다를 바로 알았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내면 상태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원시인이 아니었나요?’라는 질문이 반드시 나올 텐데,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외적인 생활 방식이 어떠했는지는 본질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매우 지혜롭고, 깊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개’와는 정반대입니다.

 

태고 시대는 문명이 가장 낮은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결이 가장 깊었던 시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많이 배우지만, 하나님을 바로 아는 힘은 약합니다. 그런데 태고 시대 사람들은 많이 배우지 않아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상태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한 용어 설명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꿔 주는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이 일어나면, 이후 ‘태고교회’, ‘고대교회’, ‘히브리교회’ 같은 개념들도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AC.45, 심화 2, ‘그 땅의 들짐승’

AC.45.심화 2. ‘그 땅의 들짐승’ 위 AC.45 해설 하단에 ‘이 글은 ‘그 땅의 들짐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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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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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심화

 

3. ‘7:24, 26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 구절이 AC.44에 인용된 이유는, 사람이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은 반드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땅에 비유하면서, 땅에 씨가 뿌려져야 열매가 맺히듯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 지식이 심겨야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들은 것을 의지가 행해야 비로소 생명이 생깁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의 역할은 말씀을 듣는 것이고, 의지의 역할은 말씀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마태복음 7장의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비유가 정확히 이 점을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차이는 말씀을 들었느냐 듣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차이는 그 말씀을 행했느냐 행하지 않았느냐에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를 듣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한 사람입니다. 반석은 말씀의 진리, 더 깊게는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진리를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기초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하나가 된 상태인 것입니다.

 

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은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을 행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교리를 알고 있으며, 진리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와 삶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C.44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마음이 둘로 나뉘고, 이해와 의지가 결합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AC.44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물고기와 새는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이어 나오는 생물과 가축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은 물고기와 새의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생물과 가축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곧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이해에서 의지로, 신앙의 지식에서 사랑의 삶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7 24절과 26절이 AC.44에 인용된 이유는, 신앙의 지식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지식이 의지와 삶 속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영적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가르는 기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들은 진리를 얼마나 살았느냐가 참된 거듭남의 기준이라는 것을 이 구절은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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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심화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AC.44.심화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위 심화 1최하단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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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심화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위 심화 1최하단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에 나오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은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부분을 한 번 제대로 붙들면 AC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론을 먼저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선과 진리가 두 축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 그것을 받아 사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담아 놓은 말씀이 동일한 구조,  사랑(선)과 그 사랑을 드러내는 빛(진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교리 항목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주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 안에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있으며, 이 둘은 분리된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면서도 구별되는 두 측면’입니다. 신적 선은 사랑 자체, 곧 ‘살리고자 하는 의지’이고, 신적 진리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빛, 곧 ‘무엇이 옳은지 알게 하는 형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내용이고, 진리는 그 사랑의 표현과 질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무엇이 나오든, 그것은 항상 ‘사랑으로 살게 하고, 진리로 비추는 두 작용을 함께’ 가지고 나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천국’을 보면, 이 구조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천국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이루어진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크게 ‘천적 천국(사랑 중심)’과 ‘영적 천국(진리 중심)’으로 나누지만, 실제로는 둘 다 항상 함께 있습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많이 아는 존재’도 아니고, ‘많이 느끼는 존재’도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진리로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사랑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 나오는 생명감’입니다. 이 점에서 천국 자체가 이미 ‘두 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이제 ‘인간’을 보면, 동일한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두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will), 곧 사랑하고 원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 곧 알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의지는 ‘’의 자리이고, 이해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 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려면, 그가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의지)’와 ‘무엇을 옳다고 보느냐(이해)’를 보면 됩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사람이 무너지고, 결합되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이미 ‘선과 진리의 결합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보면, 이것이 왜 계속 ‘선과 진리’로 읽혀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말씀은 단순한 역사나 교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고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반드시 이 두 요소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건, 인물, 자연물로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어떤 것은 선을, 어떤 것은 진리를, 혹은 그 결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이라도 한쪽은 사랑의 측면에서, 한쪽은 진리의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고, 두 해석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같은 구조로 풀어가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왜 이것이 두 축인가?’ 그것은 이것이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최소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그것은 방향 없는 열정이 됩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차갑고 움직이지 않는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이 결합되면,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존재, 곧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계속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행함과 들음’ 등, 전부 같은 구조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생명의 이중 구조’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진리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천국은 그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된 곳이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사는 존재이며, 말씀은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결국 사랑과 진리 이야기입니다.’

 

‘‘선과 진리는 하나의 무슨 교리 주제가 아니라, 주님, 천국, 인간,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의 기본 구조이기 때문에,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두 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AC.44, 심화 1,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얘기만’

AC.44.심화 1.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얘기만’ 이 질문은 너무 초보스러워서 오히려 창피하기까지 한데요... 이 AC.44에도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들음과 행함’의 구도가 여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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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심화

 

1.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얘기만

 

이 질문은 너무 초보스러워서 오히려 창피하기까지 한데요...  AC.44에도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들음과 행함의 구도가 여전하네요... 전에 어느 나이 드신 여 목사님에게 이 AC 1권 리딩을 권했더니, 좀 보시다가 하시는 말씀, 무슨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 , , 진리, 진리, 진리 얘기만 하느냐시며 더는 안 읽으시더군요... 개신교 목사님조차 이러시니 일반 교인들은... 도대체 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관점으로만 말하는 건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전혀 초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 전체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질문’입니다. 그 여 목사님의 반응도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많은 분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끝까지 선과 진리 얘기만 하느냐?’라는, 이 질문에 답이 되면,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썼는지도 동시에 풀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요소인 선과 진리, 그러니까 의지와 이해를 계속 다른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두 개의 축을 계속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 이 두 가지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의지, 선)’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해하는가(이해, 진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이 두 가지에서 나옵니다. 행동도, 선택도, 신앙도, 심지어 기쁨과 고통도 다 이 두 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설명할 때, 이 둘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좋은 마음은 있어도, 무엇이 옳은지 모르면 방향 없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선만 있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행함과 들음’을 반복합니다. 다 다른 말 같지만, 사실은 ‘같은 구조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반복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는 이 둘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분리된 상태’를 깨뜨리고, ‘‘이 둘은 반드시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복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계속 다른 본문, 다른 상황, 다른 상징 속에서 같은 원리를 확인시키는 작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 물, 땅, 식물, 광명체 등,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전부 이 구조로 풀립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주어지고(빛), 그다음 구별이 생기고(궁창), 그다음 삶으로 나오고(식물), 그다음 그것이 빛으로 작동합니다(광명체). 전부 선과 진리의 관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보통 ‘믿음’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행함’은 그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라는 이중 구조가 계속 반복되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구조적으로 하나로 묶어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것이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주제의 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곧 선과 진리를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AC.44, 심화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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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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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심화

 

2. (blessing)

 

AC.43 본문 중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에 나오는 (blessing)에 대해 조금만 더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AC.43에서 말하는 ‘(blessing)을 제대로 이해하면, 말씀 전체에서 ‘’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은 단순히 무엇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나도록 하시는 주님의 작용’, 곧 선과 진리가 계속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 건강, 형통, 보호, 성공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을 본질적인 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 안의 생명과 직접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복은 훨씬 깊어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자라고, 연결되고, 확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3에서는 복을 설명하면서 바로 ‘열매 맺음’과 ‘번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이 복의 본체입니다.

 

이걸 조금 더 와닿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작은 진리를 하나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씨앗’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복이 그 안에 작용하면, 이 하나의 생각이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점점 ‘행동으로 이어지고, 습관이 되고, 더 깊은 이해로 확장되며, 다른 선과 진리들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선한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계속 이어지고 확장되는 것이 ‘번성’입니다.

 

그래서 복은 ‘하나 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는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 증가는 외적인 양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있고, 어떤 사람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 차이가 바로 ‘복이 작용하는가’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복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복은 무엇을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는 좋은 것이 계속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자라나게 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작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도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생명의 확장에 대한 선언’입니다.

 

 

 

AC.43, 창1:22-23, ‘살아 있는 생명의 증식 : 사랑의 열매와 신앙의 번성’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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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심화 1, ‘놀라울’(amazing)

AC.43.심화 1. ‘놀라울’(amazing) AC.43 본문 중,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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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심화

 

1. 놀라울(amazing)

 

AC.43 본문 중,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라고 하는데, 혹시 그런 실제 사례를 좀 들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amaz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43에서의 ‘놀라울(amazing)은 ‘지상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던 선과 진리의 증가가, 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질적인 드러남도 포함되지만, 이 문맥에서는 특히 ‘양적 번성과 증식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느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시간, 공간, 감각, 육체 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해도, 진리를 배워도, 그것이 자라는 속도나 범위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마치 작은 화분에 심긴 나무처럼, 자라긴 하지만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자랍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계로 들어가면, 이 제한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쉬우십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작은 선을 꾸준히 행하며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큰 변화도 없고, 열매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계에 들어가면, 그 씨앗이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의 선과 진리가 계속 연결되고, 결합되고, 확장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많아진다’가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번성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이 증가는 단순한 ‘개수 증가’가 아니라, ‘연결의 증가’입니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와 연결되고, 하나의 선한 의도가 더 많은 선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전체가 살아 있는 구조처럼 확장됩니다. 그래서 그 증가는 선형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퍼져 나갑니다.’ 이 점에서 ‘amazing’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없다면, 영계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비슷해 보이던 두 사람이, 영계에서는 한 사람은 계속 풍성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 차이 역시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AC.43의 이 문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선과 진리의 성장이 제한되어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그것이 방해 없이 결합되고 확장되어, 놀라울 정도로 풍성하게 증가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작은 선과 배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자라날 씨앗입니다.’

 

 

 

AC.43, 심화 2, ‘복’(blessing)

AC.43.심화 2. ‘복’(blessing) AC.43 본문 중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에 나오는 ‘복’(blessing)에 대해 조금만 더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AC.43에서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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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살아 있는 생명의 증식 : 사랑의 열매와 신앙의 번성’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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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6. ‘51: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이사야 27장의 리워야단이나 에스겔의 큰 악어와 마찬가지로, ‘고래(whale) 또는 큰 물고기’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큰 물고기들’이 원래는 지식과 이해의 큰 체계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분리되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게 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느부갓네살 왕’과 바벨론’은 말씀에서 단순한 역사적 국가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은 거룩한 것들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상태, 곧 자기 사랑이 종교와 신앙까지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은 그러한 자기 사랑의 지배력을 대표합니다.

 

본문은 그가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라고 말합니다. 영어 원문에는 고래처럼 나를 삼켰다(swallowed me as a whale)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고래는 방대한 지식과 추론 능력을 가진 자연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섬기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목적을 위해 흡수하고 이용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고래는 먹고 삼키고 배를 채우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특히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음식은 선과 진리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적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여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 영광과 자기 권세를 위해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음식’을 먹지만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자기 사랑의 연료로 사용합니다.

 

AC.42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큰 물고기’의 가장 위험한 형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에스겔의 바로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는 자연적 인간을 나타내고, 이사야의 리워야단은 진리를 왜곡하는 교만한 추론을 나타낸다면, 예레미야의 고래는 거룩한 진리들까지도 자기 사랑을 위해 삼켜 버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단순한 무지나 오류가 아니라, 진리를 소유하고도 그것을 왜곡하여 자기 자신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이 자신을 빈 그릇이 되게 하였다’고 탄식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에 삼켜질 때, 사람은 겉으로는 많은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비어 있게 됩니다. 그릇은 가득 찬 것 같지만, 생명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51 34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 또는 고래’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 방대한 지식과 진리들을 자기 사랑과 권세욕을 위해 삼켜 버리는 상태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의 큰 물고기들’이 단순한 자연 생물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거대한 구조를 의미하며, 그것이 주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섬길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인 것입니다.

 

 

 

AC.42, 창1:21, ‘지식을 살리는가 삼키는가 : 큰 바다짐승들로 드러나는 일반 원리의 방향’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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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5, ‘사27:1’

AC.42.심화 5. ‘사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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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5. ‘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창세기 1 21절의 큰 물고기들’이 말씀에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별히 여기서는 거짓과 자기 지혜에 의해 왜곡된 지식과 추론을 상징하는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큰 물고기들’이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큰 지식들, 기억-지식들, 그리고 이해의 활동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될 때는 괴물 같은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27장에 나오는 리워야단’은 단순한 바다 괴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는 인간의 왜곡된 추론을 상징합니다. 특히 날랜 뱀’, ‘꼬불꼬불한 뱀’이라는 표현은 진리를 곧게 보지 못하고 자기 논리와 교만한 추론으로 비틀어 버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원래 지식은 진리를 섬겨야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오히려 지식을 이용해 진리를 공격하고 왜곡하려 합니다. 리워야단은 바로 그런 상태의 표상입니다.

 

이어지는 바다에 있는 용 또는 바다에 있는 큰 물고기들’을 죽이신다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바다는 기억-지식과 자연적 인간의 이해가 있는 영역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닷속 괴물들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방대한 지식과 추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주님과 진리에 대항하는 데 사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바로와 큰 악어가 상징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상태입니다.

 

AC.42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에 창조된 물고기들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력과 지식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의 진리 아래 있을 때는 에스겔 47장의 풍성한 물고기들처럼 생명을 주는 것이 되지만, 자기 사랑과 교만 아래 있을 때는 리워야단과 바다의 괴물처럼 진리를 대적하는 힘이 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크고 강한 칼’로 리워야단을 벌하신다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에서 칼은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거짓된 추론과 왜곡된 지식을 심판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승리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27 1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들’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될 경우, 인간의 교만한 지식과 왜곡된 추론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리워야단과 바다의 괴물들은 진리를 섬기는 이해가 아니라 진리를 거스르는 이해를 뜻하며, 주님께서는 결국 그러한 거짓된 지혜를 자신의 진리로 심판하시고 제거하신다는 사실을 이 구절은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42, 심화 6, ‘렘51:34’

AC.42.심화 6. ‘렘51: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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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4, ‘겔32:2’

AC.42.심화 4.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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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심화

 

4. ‘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에스겔 29장과 마찬가지로 큰 물고기 또는 큰 악어’가 지식과 이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혜에 교만해진 자연적 인간의 왜곡된 이해를 의미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4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 21절의 큰 물고기들’이 일반적으로는 지식들과 그로부터 형성된 이해의 큰 구조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뒤, 그 상응이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여러 예언서를 통해 증명합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애굽의 바로입니다. 말씀에서 애굽은 기억-지식과 학문적 지식을 의미하고, 바로는 그러한 지식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하는 자연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바로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 또는 큰 물고기’로 묘사되는 것은, 그가 방대한 지식과 이해를 소유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것을 주님을 향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본문은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은 진리와 지식을 의미합니다. 원래 물은 맑고 생명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발로 물을 휘저어 흐리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자연적 인간이 자기 추론과 자기 지혜로 진리를 왜곡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교만을 따라 진리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점이 AC.42의 주제와 직접 연결됩니다. 큰 물고기는 이해력의 큰 능력과 방대한 지식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것이 주님의 빛 아래 있지 않을 때는 오히려 진리를 흐리는 힘이 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이해력은 진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그 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는 이해력이 진리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목적에 종속시키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에스겔 47장의 물고기들이 생명의 물로 인해 번성하는 모습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스겔 47장의 물고기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안에서 살아나는 이해를 뜻하지만, 에스겔 32장의 큰 악어는 자기 지혜로 진리를 흐리는 이해를 뜻합니다. 하나는 생명을 주는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오염시키는 이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42에 인용된 이유는, ‘큰 물고기 또는 큰 악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자기 지혜와 자기 확신에 빠진 자연적 인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가 물을 휘저어 더럽히는 모습은,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겸손히 받지 않고, 자기 추론으로 왜곡할 때 일어나는 영적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큰 물고기들’의 부정적 상응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42, 심화 5, ‘사27:1’

AC.42.심화 5. ‘사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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