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18.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바로 위 심화 4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좀 더 자세히 풀어 주세요.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는, 이성이 본질적으로 ‘두 방향으로 모두 열려 있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성이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을 따라 작동할 때는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지만, 그 유입을 끊고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할 때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동일한 기능에 대해 동시에 칭찬과 경고가 함께 주어집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부터 보겠습니다. 앗수르가 올바르게 사용될 때, 그것은 ‘명석한 이성’, 곧 진리를 분명하게 보고 질서를 세우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으로 유입되고, 그것이 이성적 마음을 거쳐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펼쳐질 때, 이성은 그 흐름을 ‘정리하고, 구분하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이성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빛을 받아 반사하고 확장하는 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의 앗수르는 교회를 보호하고, 진리를 왜곡 없이 전달하며, 사람의 삶을 질서 있게 만드는 유익한 기능으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가 시작됩니다. 이성은 본래 ‘받는 자리’인데, 인간은 쉽게 그 이성을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는 근원’으로 착각합니다. 즉, 이성이 유입의 통로라는 사실을 잊고,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기 시작하는 순간’, 앗수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뀝니다. 이때 이성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재단하려 합니다. 그 결과, 참된 것조차 자기 방식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고, 거짓된 것이라도 논리적으로 맞아 보이면 받아들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예언서에서 앗수르를 교만과 왜곡의 상징으로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이 두 상태의 차이는 ‘능력의 크기’가 아니라 ‘유입의 방향’에 있습니다. 이성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을 따라 작동할 때는 밝아지고, 자기중심으로 닫힐 때는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성을 없애거나 억누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이 어디에 붙어 있는가, 무엇을 근원으로 삼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앗수르’에 대한 긍정과 경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성이 인간 안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빛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창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빛이라고 착각하기 가장 쉬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폐기할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할 ‘통로’이며, 바로 그 점에서 늘 찬사와 경고가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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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AC.118.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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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위에서 오는 것을 받아 겉 사람의 생각과 지식을 조직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기능상 겉 사람에 속한 것으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이성이 낮거나 세속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와 아래(감각, 기억 지식)를 연결하는 중간이면서도 아래쪽에 기울어 있는 층위’’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구조를 보시면,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곧 생명에 속한 것을 직접 받는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퍼셉션이 중심이고, 판단 이전의 아는 상태’가 있습니다. 반면 겉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 말과 행위의 자리입니다. 이 둘 사이에 놓인 것이 이성적 마음입니다. 이성은 위로부터 온 것을 받아 아래의 지식과 생각을 정리하고, 연결하고, 판단으로 풀어내는 기능’을 합니다. 바로 이 아래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에, 분류상 겉 사람 쪽에 둡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성적 마음이 실제로 기억 지식(scientifica)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이성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작동하지 않고, 경험과 언어, 개념이라는 외적 자료를 가지고 추론합니다. 그래서 그 작용의 장(場)은 자연스럽게 겉 사람의 영역에 놓입니다.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은 속 사람을 통해 내려오지만, 이성이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겉 사람의 재료와 형식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AC.118에서 말하는 흐름,  주님  속 사람  이성적 마음(겉 사람)’이라는 질서가 성립합니다. 이 질서가 유지되면 이성은 명석해지고,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 흐름이 끊어지면, 같은 이성적 마음이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여기며 독립하려 하고’, 그때 왜곡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성적 마음’이 겉 사람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그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작용의 방향과 자리의 문제’입니다. 이성은 위에서 시작되지 않고, 위에서 받은 것을 아래에서 펼쳐내는 기능이기 때문에, 구조상 겉 사람의 편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언제나 근원’이 아니라 통로’이며, 그 근원을 향해 열려 있을 때에만 참된 명석함을 갖습니다.

 

 

 

AC.118, 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AC.118.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바로 위 심화 4에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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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심화 3, ‘Euphrates, Phrath’

AC.118.심화 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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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입니다.

 

Phrath’는 히브리어 원어 프라트(פְּרָת)를 그대로 음역한 이름이고, ‘Euphrates’는 이 히브리어 이름이 그리스어 유프라테스(Εὐφράτης)를 거쳐 라틴어와 영어로 전해진 형태입니다. 즉, 성경 원문에서는 Phrath’이고, 서양 번역 전통에서는 Euphrates’로 굳어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Phrath’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원어에 더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상응과 내적 의미를 다루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말씀의 가장 초기 형태, 곧 히브리어 표현을 존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권 독자에게 익숙한 Euphrates 대신 Phrath’를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런 이름 선택이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강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각각 특정한 영적 기능을 뜻하는 상응이기 때문에, 원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 의미를 더 직접적으로 전달한다고 본 것입니다.

 

정리하면, ‘Phrath’는 히브리어 원어 이름이고, ‘Euphrates’는 그 번역, 전승 과정에서 생긴 그리스, 라틴식 이름이며,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다루는 맥락에서 원어에 가까운 Phrath’를 선택한 것입니다.

 

 

 

AC.118, 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AC.118.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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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심화 2, ‘기혼과 힛데겔’

AC.118.심화 2. ‘기혼과 힛데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가 뭔가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는 단순히 ‘두 번째 강과 세 번째 강’의 순서 차이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단계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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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혼과 힛데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가 뭔가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는 단순히 두 번째 강과 세 번째 강’의 순서 차이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단계와 성격의 차이’입니다. 둘 다 이해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깊이와 방향, 그리고 기능이 다릅니다.

 

먼저 기혼은 AC.116-117에서 보았듯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것들을 이해 안에서 알아보고 분별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이해의 기초이며, 아직은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참이다 하고 알아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기혼은 이해의 수용적 단계’, 또는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힛데겔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힛데겔은 단순히 알아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인식들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연결하고, 판단하는, 이른바 이성적 작용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reason’과 rational’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즉, 기혼이 알아보는 이해’라면, 힛데겔은 생각하고 전개하는 이해’입니다.

 

이 차이를 흐름으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면서, 먼저 기혼 단계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힛데겔 단계에서는, 그 인식들을 가지고 추론하고, 체계화하고, 판단하는 이성의 활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혼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천적 질서 안에 있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받아들이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힛데겔 단계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생각을 만들어내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성이 자기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쉽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지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혼은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알아보는 이해의 단계이고, 힛데겔은 그 인식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전개하는 이성의 단계입니다. 하나는 인식’, 다른 하나는 추론’이며, 하나는 수용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작용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인간 이해 구조를 정확히 보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AC.118, 심화 3, ‘Euphrates, Phrath’

AC.118.심화 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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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심화 1, ‘reason과 rational’

AC.118.심화 1. ‘reason과 rational’ reason과 rational의 차이가 뭔가요? AC.118에서 ‘reason’과 ‘rational’은 비슷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분명히 구별되는 두 층위를 가리킵니다. 이 차이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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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심화

 

1. ‘reason rational

 

reason rational의 차이가 뭔가요?

 

 

AC.118에서 ‘reason’과 ‘rational’은 비슷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분명히 구별되는 두 층위를 가리킵니다. 이 차이를 잡아야 이후 ‘이성’과 ‘합리성’의 구조가 정확히 보입니다.

 

먼저 ‘rational’은 ‘이성이라는 기능 자체’, 곧 사람 안에 있는 하나의 ‘기관’ 또는 ‘능력’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설명할 때, 늘 의지와 이해를 말하고, 그 이해가 더 형성되고 조직된 상태를 ‘rational’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rational’은 고정된 능력, 구조, 자리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이 있는 자리’, 또는 ‘이성적 차원’입니다.

 

반면 ‘reason’은 그 ‘rational’이 실제로 움직이는 작용, 곧 ‘추론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생각하고 비교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 즉 ‘이성의 사용’입니다. 그래서 ‘reason’은 동적이고, ‘rational’은 정적입니다. 하나는 기능이고, 하나는 그 기능의 작용입니다.

 

이 차이를 AC의 흐름 안에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rational’은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자리인데, 이 자리가 올바른 질서 안에 있으면 ‘reason’도 바르게 작동합니다. 그러나 질서가 뒤집히면, 같은 ‘rational’이라는 능력을 가지고도 ‘reason’은 잘못된 결론을 만들어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유입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구분합니다. 사람은 ‘rational’을 가지고 있지만, 그 ‘reasoning’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즉, 이성이라는 기관은 주어져 있지만, 그 기관이 무엇을 근거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rational’은 이성이라는 자리, 구조, 능력이고, ‘reason’은 그 이성이 실제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작용입니다. 그리고 AC.118에서 이 구분을 두는 이유는, 인간이 단순히 ‘이성적 존재’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고, 그 이성이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을 따라 작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AC.118, 심화 2, ‘기혼과 힛데겔’

AC.118.심화 2. ‘기혼과 힛데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가 뭔가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는 단순히 ‘두 번째 강과 세 번째 강’의 순서 차이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단계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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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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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2:14)

 

AC.118

 

힛데겔 강(river Hiddekel)은 이성(reason), 곧 이성의 명석함(clearsightedness of reason)입니다. ‘앗수르(Asshur)는 이성적 마음(rational mind)이며,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은 이성의 명석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흘러들어옴을 의미합니다. ‘브랏(Phrath), 곧 유브라데 강은 기억 지식이며, 이는 마지막 단계(the ultimate)이자 경계(boundary)입니다. The “river Hiddekel” is 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Asshur” is the rational mind; the “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 signifies that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come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Phrath,” or Euphrates, is memory-knowledge, which is the ultimate or boundary.

 

 

해설

 

이 글은 에덴에서 흘러나온 지혜의 강이 ‘이성(reason)과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이라는 두 하위 층위로 더 세분화되는 지점을 다룹니다. 앞선 둘째 강 ‘기혼’이 이해의 인식들을 의미했다면, 셋째 강 ‘힛데겔’은 그 인식들이 ‘이성의 명석함’으로 조직되고 투명해지는 단계입니다.

 

힛데겔’이 이성의 명석함을 의미한다는 말은, 이성이 단순한 계산이나 논증 능력이 아니라, ‘진리의 흐름을 또렷이 보는 능력’임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명석함은 스스로 밝아지는 자율적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비췸을 받을 때 생기는 선명함입니다.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앗수르는 종종 이성의 힘과 연결되며, 올바르게 쓰일 때에는 교회의 보호와 질서를 돕지만, 스스로를 절대화할 때에는 교만과 왜곡으로 기울어집니다. 따라서 이성의 명석함이 ‘동쪽’, 곧 주님을 향해 흐른다는 표현은, ‘이성은 근원을 잊지 않을 때에만 참되다’는 조건을 분명히 합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구조는 유입의 질서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주님 → 속 사람 → 이성적 마음(겉 사람)이라는 흐름입니다. 이성은 출발점이 아니라 ‘경유지’입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 이성은 교만해지지 않고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 지식이며 ‘경계’라는 설명은, 에덴의 강들이 도달하는 ‘최외곽(the ultimate or boundary), 즉 가장 바깥을 짚어 줍니다. 기억 지식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며 경계입니다.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면 감각과 세속의 영역이 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위로부터의 유입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그릇’으로 기능할 때에만 온전합니다.

 

AC.1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스스로 빛나지 않으며, 기억 지식은 결코 근원이 아니고, 모든 명석함은 주님에게서 시작되어 질서 있게 아래로 흐를 때에만 참된 빛을 가진다고 말입니다.  

 

 

심화

 

1. ‘reasonrational

 

 

AC.118, 심화 1, ‘reason과 rational’

AC.118.심화 1. ‘reason과 rational’ reason과 rational의 차이가 뭔가요? AC.118에서 ‘reason’과 ‘rational’은 비슷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분명히 구별되는 두 층위를 가리킵니다. 이 차이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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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혼과 힛데겔

 

 

AC.118, 심화 2, ‘기혼과 힛데겔’

AC.118.심화 2. ‘기혼과 힛데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가 뭔가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는 단순히 ‘두 번째 강과 세 번째 강’의 순서 차이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단계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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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uphrates, Phrath

 

 

AC.118, 심화 3, ‘Euphrates, Phrath’

AC.118.심화 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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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AC.118, 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AC.118.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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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AC.118, 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AC.118.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바로 위 심화 4에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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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인식이 예물이 되는'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 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는 금과 보석, 향료가 풍부하였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진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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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심화

 

5. ‘왕상10:1-2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왕상10:1, 2)

 

 

이 구절이 AC.117에서 참조되는 이유는, ‘스바의 여왕’과 그녀가 가져온 ‘금과 보석과 향품’이라는 장면을 통해 ‘인식의 영역, 곧 이해가 참된 지혜를 향해 나아와 시험받고, 결국 그것을 인정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스바의 여왕’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상응적으로는 ‘선과 진리에 대한 풍부한 인식, 곧 이해 안에 있는 인식의 상태’를 대표합니다. 스바는 앞선 여러 본문에서처럼 사랑의 선과 그로부터 나온 것들과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솔로몬을 시험하러 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식이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때 ‘솔로몬’은 분명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만남은 단순한 왕과 여왕의 만남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인식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와 마주하는 장면’입니다. ‘어려운 문제로 시험한다’는 표현은, 이해가 자기 안의 모든 의문과 생각을 가지고 진리를 시험해 보는 과정을 뜻합니다.

 

그녀가 가져온 ‘향품과 많은 금과 보석’도 중요합니다. 금은 사랑의 선, 보석은 신앙의 진리, 향품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기쁨과 경배를 의미합니다. 즉, 그녀는 단순히 물질을 들고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인식의 내용들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말한다’는 것은, 이해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어 진리 앞에 놓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장면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인식은 스스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 앞에서 시험되고, 그 지혜를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이는 AC.117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기혼이 의미하는 ‘인식’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에 종속될 때에만 참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참조되는 이유는, 인식의 영역이 단순히 왜곡되거나 거래되는 모습만이 아니라, 이렇게 ‘주님을 향해 나아와 시험받고, 결국 그 지혜를 인정하며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긍정적 과정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이해와 인식은 주님께 맞서 독립하려 할 때는 혼란이 되지만, 주님께 나아가 그분의 지혜를 인정할 때는 참된 신앙의 통로가 된다는 점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AC.117, 창2:13, '천적 인간의 이해, 기혼 : 인식이 예물이 되는'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 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는 금과 보석, 향료가 풍부하였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진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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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심화 4, ‘시72:7, 10’

AC.117.심화 4. ‘시72:7, 10’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시72: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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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심화

 

4. ‘72:7, 10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72:7, 10)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shall be no moon; the kings of Tarshish and of the isles shall bring presents; the kings of Sheba and Seba shall offer a gift (Ps. 72:7, 10).

 

 

이 구절이 AC.117에 인용된 이유는, ‘스바와 시바’, 그리고 ‘왕들이 예물을 드린다’는 표현을 통해 ‘인식과 진리의 영역이 주님께로 돌아와 바르게 질서 지어질 때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이 시편은 주님의 나라, 곧 참된 왕의 통치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의인이 흥왕하고 평강이 풍성하다’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번영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평강’은 외적 평화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가 조화를 이루는 내적 평화입니다.

 

이어 ‘다시스와 섬의 왕들’, ‘스바와 시바 왕들’이 등장합니다. 상응에서 ‘왕들’은 진리, 특히 이해 안에 있는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바와 시바’는 앞선 여러 구절들에서 보았듯이, ‘사랑의 선과 그것에 속한 것들, 그리고 그로부터 나온 인식과 풍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여러 차원의 진리와 인식들이 주님께로 나아와 예물을 드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헌납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진리와 인식, 이해의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상태’, 곧 그것들이 더 이상 자기 소유나 자랑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다른 본문들과 대비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두로의 상업 장면에서는 보석과 금이 ‘거래’되었습니다. 즉, 인식과 진리가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같은 영역의 것들이 ‘예물’로 드려집니다. 다시 말해, ‘인식과 진리가 주님께 종속되고, 올바른 질서로 회복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117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기혼이 의미하는 ‘인식의 영역’은 타락하면 거래의 도구가 되지만, 회복되면 이렇게 ‘주님께 드려지는 예물, 곧 참된 신앙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같은 ‘금과 보석’, 같은 ‘인식과 진리’라도, 그것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인용입니다.

 

 

 

AC.117, 심화 5, ‘왕상10:1-2’

AC.117.심화 5. ‘왕상10:1-2’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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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심화 3, ‘겔27:22’

AC.117.심화 3. ‘겔27:22’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22) The merchants of Sheba and Raamah, these were th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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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심화

 

3. ‘27:22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27:22) The merchants of Sheba and Raama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chief of all spices, and in every precious stone, and in gold (Ezek. 27:22),

 

 

이 구절이 AC.117에 인용된 이유는, ‘스바와 라아마’, 그리고 ‘보석과 금’이라는 표현을 통해 ‘인식(기혼의 영역)이 어떻게 참되게도, 왜곡되게도 사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이 본문은 두로에 대한 말씀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로는 상응에서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지식과 인식, 곧 진리들을 다루는 영역’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이 ‘상인들’에 의해 거래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상인은 사고파는 자이므로, 이는 진리와 인식이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익과 목적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스바와 라아마’가 등장합니다. 스바는 앞선 AC.113에서도 보았듯이, 본래는 ‘사랑의 선과 그로부터 나온 좋은 것들’과 연결되는 긍정적 상응을 갖습니다. 라아마 역시 그 계열에 속한 것으로, 선과 진리의 영역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오는 물품이 ‘향 재료, 보석, ’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사랑에서 나온 것들의 기쁨,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상업’, 곧 거래의 맥락 안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즉, 본래 주님으로부터 유입되어 생명을 살리는 데 쓰여야 할 선과 진리, 인식들이, ‘외적 목적과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상태’로 전락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왜곡된 인식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점이 AC.117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기혼은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 곧 이해의 영역을 의미하지만, 그 인식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사용될 때는 살아 있는 것이 되지만, 외적 목적과 자기 중심성에 종속될 때는 이렇게 ‘거래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보석과 금’ 같은 거룩한 상응들조차, 그 출처와 사용이 바뀌면 ‘참된 생명의 요소가 아니라, 외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인식과 진리는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나오고,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인용입니다.

 

 

 

AC.117, 심화 4, ‘시72:7, 10’

AC.117.심화 4. ‘시72:7, 10’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시72: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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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심화 2, ‘단11:43’

AC.117.심화 2. ‘단11:43’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단11:43) He shall have power over the treasures of gold and of silver, and over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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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1:43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11:43) He shall have power over the treasures of gold and of silver, and over all the desirable things of Egypt; and the Lybians and the Ethiopians shall be under his steps, (Dan. 11:43)

 

 

이 구절이 AC.117에 인용된 이유는, ‘애굽’과 ‘구스’가 각각 ‘외적 지식과 내적 인식의 영역’을 뜻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왜곡되고 종속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이 말씀에서 ‘애굽의 금과 은, 모든 보물’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말씀의 상응에 따라 ‘외적 지식과 그 안에 담긴 선과 진리의 요소들’, 곧 기억 지식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애굽은 늘 외적 인간, 특히 감각과 경험에서 모은 지식을 상징하는데, 그 지식 안에도 본래는 선과 진리의 흔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권세 아래 놓인다’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 지식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다른 힘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어 ‘리비아와 구스’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법에서 구스는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마음의 기능, 특히 이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영역’, 곧 AC.116에서 말한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cognitio)’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구스가 ‘그의 시종이 된다’, 곧 ‘발 아래 놓인다’고 표현됩니다. 이는 이해의 기능, 인식의 능력이 본래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중심에 종속되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이 구조를 함께 보면 분명해집니다. 외적 지식(애굽)과 내적 인식(구스)이 모두 하나의 잘못된 중심 아래 놓이게 되는 상태, 곧 ‘질서가 뒤집힌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본래의 질서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이해와 인식으로 흐르며,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로, 외적 지식과 인식이 주님이 아닌 다른 중심에 의해 지배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117에 인용된 이유는, 기혼이 의미하는 ‘인식의 영역’이 항상 선하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중심 아래 놓일 때는 왜곡되고 종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이해와 인식 자체는 중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유입을 받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인용입니다.

 

 

 

AC.117, 심화 3, ‘겔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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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심화 1, ‘습3:5, 9-10’

AC.117.심화 1. ‘습3:5, 9-10’ 5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9그때에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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