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라멕’(Lamech)이,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너무나 일반적이고 흐릿하여 거의 없는 상태의 교회를 의미하며, 그 결과 황폐화된 교회를 뜻한다는 것은 앞 장인 창4에서 말한 내용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앞 장에 나오는 ‘라멕’(Lamech) 역시 이곳의 의미와 거의 같은데, 곧 황폐화를 뜻합니다 (창4:18, 19, 23, 24 참조). 또한 그를 낳은 자의 이름도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 ‘므드사엘’(Methusael)이라 불리는데, 이름들이 의미하는 바도 서로 거의 같습니다. ‘므드사엘’과 ‘므두셀라’(Methuselah)는 곧 죽어 가는 것을 의미하고, ‘라멕’은 파괴된 것을 의미합니다. That by “Lamech” is signified a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as to be next to none, consequently a church vastated, appears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nd from what follows in the next verse. “Lamech” in the preceding chapter has nearly the same signification as in this, namely, vastation (concerning which see Gen. 4:18, 19, 23, 24); and he who begat him is also called by nearly the same name, “Methusael,” so that the things signified by the names are nearly the same. By “Methusael” and “Methuselah” is signified something that is about to die; and by “Lamech” what is destroyed.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18-19, 23-24)
해설
이 글은 라멕으로 대표되는 교회 상태가 왜 태고교회의 ‘끝’으로 규정되는지를 결정적으로 설명해 주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한 장 안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창세기 4장과 5장을 가로질러 동일한 이름들이 반복 사용되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이름이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같은 종류의 영적 상태가 다시 등장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앞 장의 라멕과 여기의 라멕은 서로 다른 개인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거의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곧 ‘황폐화’입니다. 여기서 황폐화란, 선과 진리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던 퍼셉션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와 선은 기억 속에는 남아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삶을 이끄는 내적 빛이 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황폐화가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음을 이름 자체를 통해 보여 줍니다. ‘므드사엘’과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모두 ‘곧 죽게 될 것’, ‘소멸을 앞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이미 생명의 끝자락에 와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라멕의 교회는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가던 상태가 마침내 파괴에 이른 결과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는 ‘곧 죽을 상태’를, ‘라멕’은 ‘이미 파괴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통해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종말이 단절이 아니라, 단계적인 쇠퇴의 완결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묵직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가 황폐해진다는 것은 외형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배도 있고, 말씀이 있고, 제도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분별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내적 능력이 사라질 때, 그 교회는 이미 황폐화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라멕의 교회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황폐화는 심판 이전에 이미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결코 갑작스러운 멸망이나 임의적 심판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은 상태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태고교회의 마지막이 단순한 실패나 타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영적 역사에서 하나의 시대가 그 역할을 마치고 물러나는 장면임을 보게 됩니다. 퍼셉션의 시대는 여기서 끝났고, 이후의 인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AC.527은 라멕을 정죄하는 글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결을 정확히 짚어 주는 평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해를 가지고 다음 절로 넘어가면, 노아의 등장이 훨씬 더 필연적이고도 의미 있게 다가오게 됩니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And Lamech lived a hundred eighty and ten years, and begat a son.(창5:28)
AC.526
여기서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에서는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너무나 일반적이고 흐릿하여(general and obscure) 거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이 교회는 황폐화되었습니다(vastated). 그리고 ‘아들’(the son)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By “Lamech” is here signified a ninth church, wherein the perception of truth and good was so general and obscure that it was next to none, so that the church was vastated. By the “son”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해설
이 문장은 태고교회의 마지막 국면을 매우 단호하게 규정하는 대목입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이 ‘약해졌다’, ‘일반화되었다’, ‘흐릿해졌다’는 표현들이 점진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그 한계가 분명히 선언됩니다. 라멕으로 대표되는 이 아홉 번째 교회에 이르러서는, 퍼셉션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이 거의 없다’는 말은, 사람이 선과 진리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억 속의 지식이나 전통적인 신앙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분별로 작동하지 못하고, 상황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있기는 하나,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는 이 교회를 ‘황폐화되었다’(vastated)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황폐화는 도덕적 타락이나 외적 붕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핵심 생명인 퍼셉션이 사라짐으로써, 더 이상 교회로서 기능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말은 남아 있지만 생명은 빠져나간 상태, 형식은 있지만 내적 빛은 없는 상태입니다. 비유하자면, 생명 연장 장치의 도움으로 아직 의학적 사망 판정만 안 내려졌을 뿐, 더 이상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바로 ‘아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상태를 설명한 직후, ‘아들’이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마지막이 단순한 끝이 아니라, 다음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된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교회가 완전히 황폐해질 때, 그 상태 안에서는 더 이상 회복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라멕의 교회는 회복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아들’, 곧 새로운 교회가 태어납니다.
이 ‘아들’은 이전 교회의 연장이 아닙니다. 같은 퍼셉션을 되살린 것도 아니고, 태고교회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도 아닙니다. 전혀 다른 인식 방식, 전혀 다른 신앙 구조를 가진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노아’ 교회의 문맥입니다.
그래서 AC.526은 단순한 평가 문장이 아니라, 시대 전환을 알리는 문장입니다. 태고교회는 라멕에서 끝나고, 노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됩니다. 하나는 퍼셉션의 교회였고, 다른 하나는 교리와 신앙의 교회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 있으며, 그 단절은 주님의 섭리 안에서 준비된 전환입니다.
이렇게 보면, 라멕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역할을 마친 교회의 상징입니다. 퍼셉션의 시대는 여기까지였고, 인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연결되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이 바로 AC.526입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시면, 곧 이어지는 노아 이야기가 단순한 심판 서사가 아니라, 인류 영적 역사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새로운 시작으로 읽히게 됩니다.
오늘은 창세기 5장 네 번째 시간, 25절로 27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23번에서 52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5:25-27)
이 본문을
퍼셉션 이야기 (심화)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입니다.
25절(AC.523-524),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하는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완전성(perfection)은 감소하였고, 그와 함께 지혜와 지성도 감소하였습니다. 26-27절(AC.525),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이상과 같은 속뜻에서 핵심은, 퍼셉션이 더욱 일반적이 되고, 흐려졌다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교회가 연명 치료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이라는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교회가, 이 생명을 받는 창 관리에 소홀, 부주의 및 대신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세상을 향한 창을 열고 세상을 두리번거린 결과,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각종 장기가 거의 작동을 안 하게 되어 결국 생명 연장 장치에 의존, 심장도 폐도, 그리고 혈액을 비롯, 각종 장기를 기계 장비에 의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참 안타까운 상태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 중요 장기들은 주님의 퍼셉션이라는 생명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는데 교회가 이 퍼셉션이라는 생명 공급받는 걸 소홀히 여겨 장기들의 건강을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므두셀라의 경우로 볼 수 있고, 라멕에 이르러는 이제 이 장치의 스위치를 언제 끄느냐, 인공호흡기를 언제 떼느냐의 시기만 남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인 퍼셉션에 관해서 말이죠.
결국 오늘 본문 역시 다시 원점인 ‘퍼셉션’(perception) 문제의 계속이며, 그래서 지난주 설교 중 이 퍼셉션을 다룬 부분을 다시 복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이 퍼셉션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 내용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 번 반복이 그래서 꼭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아, 엄마가 지금 힘들어하시는구나...’ 하며 엄마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the most minute)라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되는 식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그래서 천국을 상태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력 차이요, 해상도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높으면 사물이, 화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낮으면 흐릿하게 무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퍼셉션은 그 모든 정황 및 그 마음속 동기까지 보지만 일반화된 규범인 교리는 그런 걸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획일화, 통제, 차별 금지를 기치로 내걸지만, 자유민주주의는 다양화, 자유, 차이 인정을 붙잡는 것인가 봅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영재를 일반 학교에 보낼 경우, 많은 경우 아이를 망치는 것과도 같은데요,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내면이 열려 매 순간 하늘의 빛으로 즉시 알면 되는 것을 굳이 자기들이 정한 어떤 룰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승자 최강록이 재료마다 그릇을 달리하여 다르게 조림한 것을, 예를 들면, ‘중불로 적당하게’ 이런 식으로 획일화, 규범화, 교리화를 하면, 이후 그 레시피를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과연 그 맛이 재현될까요?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오직 잘 정돈된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요, 담아두는 그릇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떻게 이제 좀 퍼셉션이 뭔지 잡히십니까? 다음은 성경에서 이 퍼셉션이 실제로 나타났던 사례들 중 두 가지를 찾아보고, 그 이해를 더욱 깊게 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로 그가 보디발의 감옥에 있다가 바로 앞에 불려 나간 장면입니다. 창세기 41장입니다.
1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8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9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10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14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17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에 나일 강 가에 서서 18보니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19그 뒤에 또 약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 20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일곱 살진 소를 먹었으며 21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 내가 곧 깨었다가 22다시 꿈에 보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23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더니 24그 가는 이삭이 좋은 일곱 이삭을 삼키더라 내가 그 꿈을 점술가에게 말하였으나 그것을 내게 풀이해 주는 자가 없느니라 25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33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37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창41:1-45)
사전에 누구에게 들은 바도 없이 현장, 즉 바로 앞에서 처음 듣고 바로 해석하는 요셉입니다. 사전 학습 없이 바로 아는 것, 곧 주님이 알려주시는 퍼셉션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셉은 어떻게 그런 청년의 때에 이런 놀라운 퍼셉션 능력, 곧 주님을 향한, 천국을 향한 창을 활짝 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 역시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가 꾼 꿈을 풀어 주는 장면입니다. 이 사례는 더욱 놀라운 것이, 왕이 꿈을 알려주지도 않고 다니엘에게 네가 내가 꾼 꿈을 말하고, 그리고 그걸 해석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1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2왕이 그의 꿈을 자기에게 알려 주도록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라 말하매 그들이 들어가서 왕의 앞에 선지라 3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하니 4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말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께서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는지라 5왕이 갈대아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6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하니 7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니 8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지연하려 함이로다 9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하더라 10갈대아인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어떤 크고 권력 있는 왕이라도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인들에게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11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12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령하니라 13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14그 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16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7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18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19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22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24이에 다니엘은 왕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라 명령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라 하니 25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 앞에 들어가서 아뢰되 내가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었나이다 그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26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꾼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하니 27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29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30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31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36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아뢰리이다 37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41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쇠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그 발가락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43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46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48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49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단2)
어떻습니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 역시 정말 놀라운 퍼셉션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다니엘의 경우, 왕이 그 꿈을 알려주질 않아 부득이하게 그 꿈의 주인이신 주님께 나아가 직접 여쭐 수밖에 없었고, 느부갓네살의 고백, 곧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하는 고백대로 다니엘은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춰 주님 앞에 나아감을 봅니다.
이 두 사례는 퍼셉션의 아주 특별한 사례들, 곧 하나는 당시 애굽과 그 인근, 곧 그 시대 온 세계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경륜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전체 역사, 곧 전체 교회사에 관한 대계(大計)를 보여 주시는 특별한 사례들입니다만, 그렇다고 퍼셉션은 늘 이런 크고 엄중한 사안에만 작동하나 보다 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요셉이나 다니엘이나 평소 얼마나 주님을 향해 매 순간 깨어있었으면, 그러니까 항상 그 퍼셉션의 창이 열려 있었으면 이런 위급하고, 또 중차대한 경우에도 어김없이 작동, 참 감사한 대처를 할 수 있었을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그리고 세월을 아껴 우리 역시 이 시대 오늘이라도 우리 자신의 이 잠들어 있는 퍼셉션 능력을 흔들어 깨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상 중 아주 작은 일에 대해서조차 주님의 뜻과 계획, 주님의 생각을 몰라 우왕좌왕,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갑갑하고 앞이 안 보이는 이유는 창문이 닫혀있어서입니다. 창문이 열려야 창문 너머 미래를, 앞날을 볼 수 있는데, 닫혀있으니 안 보이고, 안 보이니 계속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이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이 세겜의 악한 일을 끊고 떠날 때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35:1-5)
오늘 우리 역시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사로잡는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 역할을 하는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는다’는 것은 ‘영원히 중심에 오르지 못하도록 가장 낮은 자리에 놓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어떤 악습일 수도 있고,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더 말이지요.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오랜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고 같은 말인데, 우리의 퍼셉션 역시 그 창을 여는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오랜 세월 나를 사로잡았던 것들로부터 헤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같은 경우는 그래서 주님의 허락으로 무슨 결정적 체험들이 필요했는데, 하나는 고3 때 어머니 교통사고로 별세하신 일, 이 일로 저는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점프할 수 있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난 2013년 개척의 해 겨울에 있었던 영적 체험, 곧 제게 와있던 악한 영을 비록 흐릿하게나마 영안이 열려 잠깐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영계의 일이 저한테는 더 이상 이성적 논쟁과 사유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 짧고 그간 창5에서 되풀이되던 형태의 문장이라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본문이지만, 오히려 그 덕에 퍼셉션에 대한 더욱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창5를 두 주 더 다루어 마친 후, 창세기 진도 나가는 걸 잠시 멈추고, 현 번역에 해설 다는 진도에 맞추겠습니다.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And Methuselah lived after he begat Lamech seven hundred eighty and two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ethuselah were nine hundred and sixty and nine years, and he died. (창5:26, 27)
AC.525
이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These word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이 본문은 창세기 5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서술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형식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장수 기록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AC.525에서 이 모든 표현이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합니다. 즉, 여기에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이미 확립된 내적 의미가 다시 적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에서 ‘살다’, ‘세’, ‘자녀’, ‘죽었다’라는 표현은 모두 시간이나 생물학적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 즉 ‘해’와 ‘날’은 여전히 교회의 상태와 그 지속을 뜻하고, ‘자녀’, 곧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가 지니고 있던 진리들과 선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죽었더라’라는 표현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에 고유하던 퍼셉션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므두셀라의 경우, 앞서 설명된 대로 그는 태고교회 말기에 속한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이 시점에서 퍼셉션은 이미 매우 일반적이고 흐릿해졌으며, 더 이상 미세한 분별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그의 교회적 성격을 새롭게 설명하지 않고, 앞서 반복된 형식 그대로만 기록됩니다. 설명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상태가 이미 단순해졌기 때문에 같은 틀로 충분해진 것입니다.
‘라멕을 낳았다’는 말은 또 하나의 교회 상태가 그로부터 이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는 혈통의 계승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연속은 더 높은 단계로의 진보가 아니라, 점진적인 약화와 이동의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전체에는 발전의 긴장감보다는,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듯한 정리의 느낌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AC.525에서 ‘These words have a like signification’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독자에게, 이 본문을 특별하게 해석하려 애쓰지 말고, 이미 앞에서 배운 해석의 틀을 그대로 적용하라고 안내하는 것입니다. 날은 상태이고, 해는 그 상태의 성격이며,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와 선이고, 죽음은 퍼셉션 상태의 종결이라는 원칙이 여기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메시지의 강조입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패턴 속에서 조금씩 약해지고, 점점 외적인 방식으로 이동해 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말기는 극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조용한 반복 속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이 AC.525는 새로운 교훈을 덧붙이기보다는, 지금까지 읽어 온 내용을 스스로 적용해 보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더 이상 해설에만 의존하지 않고, 창세기 족보의 반복 속에서도 교회의 상태 변화를 읽어낼 수 있게 됩니다.
이 교회의 어떠함(quality)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퍼셉션의 능력이 일반적이고 흐릿하였다는 점은 ‘노아’라 하는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완전성(perfection)은 감소하였고, 그와 함께 지혜와 지성도 감소하였습니다. Nothing is mentioned concerning the quality of this church; but that its perceptive faculty was general and obscure, is evident from the description of the church called “Noah”; so that perfection decreased, and with perfection wisdom and intelligence.
해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태고교회 전체의 흐름을 정리하는 ‘결정적인 평가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일부러 이 교회의 ‘구체적 성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상태가 다음 교회인 ‘노아’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교회는 독자적인 특징을 논할 만큼의 고유한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이에요.
앞선 교회들에서는 각 이름마다 퍼셉션의 미묘한 차이가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더 천적이었고, 어떤 교회는 퍼셉션이 보다 일반화되었으며, 어떤 교회는 교리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구분조차 생략됩니다. 이는 퍼셉션이 이미 충분히 약화되어, 더 이상 미세한 차이를 논할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퍼셉션을 ‘일반적이고 흐릿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말은, 분별이 넓은 범주로만 작동하고, 더 이상 구체적인 상황과 상태를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흐릿하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분명히 보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지만, 빛이 직접적으로 비추는 상태도 아닙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하나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아는 상태’가 아니라, ‘대략적인 방향만 짐작하는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문장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는 ‘노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성격을 직접 설명하는 대신, ‘노아 교회’를 통해 거꾸로 그 상태를 이해하라고 안내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들이 이미 다음 시대의 교회 방식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이 시점에서 태고교회는 더 이상 완전히 태고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새로운 교회로 넘어간 것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완전성의 감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성은 도덕적 완전함이나 윤리적 흠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퍼셉션의 선명함, 즉 선과 진리를 직접 인식하는 능력의 완전성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약해질수록, 교회는 점점 더 외적인 방식에 의존하게 되고, 그만큼 내적인 생명은 줄어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완전성의 감소와 함께 ‘지혜와 지성의 감소’를 나란히 언급합니다. 지혜는 선에 대한 인식이고, 지성은 진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작동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이 흐릿해질수록, 지혜는 감각적인 선이나 전통적인 선으로 바뀌고, 지성은 추론과 기억에 의존하는 이해로 바뀝니다. 이는 능력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인식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기는 변화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태고교회의 끝이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인식 방식이 바뀌는 전환’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퍼셉션이 줄어들수록, 인간은 더 많은 설명과 규범과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패라기보다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새로운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무겁습니다. 태고교회는 여기서 사실상 막을 내리고, 이후 인류는 더 이상 ‘즉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니라 ‘배워서 아는 교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노아’는 그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이름이며, 이 교회는 그 문 앞에 서 있는 마지막 태고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보면, AC.524는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창세기 5장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리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And Methuselah lived a hundred eighty and seven years, and begat Lamech.(창5:25)
AC.523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라멕’(Lamech)은 아홉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Methuselah” is signified an eighth church, and by “Lamech” a ninth.
해설
이 짧은 문장은 단순한 계보 설명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인명으로 보이는 이름들을 개인이 아니라 ‘교회 상태’로 읽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합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각각 독립된 인물의 생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이르러 점점 달라져 가는 영적 상태의 연속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앞서 ‘사람’(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이미 퍼셉션은 점차 희미해지고, 직접적인 인식보다는 더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로 이동해 왔습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바로 그 흐름이 더욱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전히 태고교회 계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생명력과 즉각성은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므두셀라’가 여덟 번째 교회로 언급된다는 것은, 교회의 연속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고, 주님과의 연결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점점 더 길어지고, 느슨해지며, 직접적인 퍼셉션보다는 전해진 것, 보존된 것, 기억된 것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는 ‘살아 있는 분별’이 아니라 ‘아직은 붙들고 있는 신앙의 잔향’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좀 미안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비유하자면, ‘생명 연장 장치로 의학적 수명만 유지하는 상태’에 가깝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로 소개됩니다. 숫자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점이 태고교회의 말기라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라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이후 곧바로 ‘노아’가 이어진다는 점을 떠올리면, 여기서 말하는 상태는 이미 큰 전환을 앞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교회는 더 이상 내부의 빛으로 움직이지 못한 채 외적 질서와 보존된 가르침에 의존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이제 곧 그 장치를 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과정을 ‘타락’이나 ‘실패’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 전체의 상태 변화이며,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용된 흐름입니다. 퍼셉션이 사라지는 대신, 이후 인류는 교리, 규범, 제도, 법, 문자에 의존해 살아가게 됩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바로 그 문턱에 서 있는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히 ‘여덟 번째, 아홉 번째’라는 정보를 주고 있는 게 다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끝을 향해 가고 있으며, 곧 전혀 다른 방식의 교회 시대가 열릴 것임을 조용히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지루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류 영적 상태의 미세한 이동을 기록한 장이라는 사실이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리가 아니라 ‘존재’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죄인가요?’, ‘성전환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겉으로 보면 윤리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성도들이 묻고 있는 것은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입니다. 이 질문의 핵심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물음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상태로도 주님께 갈 수 있는 사람인가?’
즉, 문제는 행동의 옳고 그름 이전에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해 단순히 ‘된다 / 안 된다’, ‘죄다 / 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답하면, 성도는 잠시 침묵할 수는 있어도 결코 마음이 열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침묵은 단절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이 이 질문에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간을 ‘행위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속에 있는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2.스베덴보리는 성적 정체성을 말하지 않고, ‘사랑의 근원’을 말합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동성애자, 이성애자, 트랜스젠더’ 같은 범주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범주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반복해서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사랑은 두 근원 중 하나에서 나옵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사랑’입니다. 그는 후자를 ‘자기 사랑’이라 부르며, 이것이 인간 내면의 거의 모든 왜곡의 뿌리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성 간의 사랑이든 이성 간의 사랑이든, 결혼 안의 사랑이든 결혼 밖의 사랑이든, 질문은 동일합니다.
‘이 사랑이 나를 주님과 이웃 쪽으로 열어 주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더 깊이 묶어 두는가?’
이 기준은 매우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준 앞에서는 ‘정상’이라 불리는 사람도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기준은 매우 공정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태생적 상태만으로 배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3.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는 제도가 아니라 ‘천국의 구조’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결혼애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인간 이해와 천국 이해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입니다. 그는 결혼을 사회 제도나 윤리 규범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결혼을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영적 실재로 봅니다.
이때 ‘남자와 여자’는 단순한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남자는 ‘진리의 형상’으로, 여자는 ‘선의 형상’으로 설명됩니다. 이 둘의 결합은 곧 천국 그 자체의 형식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무수한 결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묘사합니다.
이 구조 안에서 볼 때, 동성 간의 성적 결합은 단순히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영적 형식이 외형적으로 표현되지 못한 상태’로 이해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곧바로 ‘정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외형보다 내적 상태를 먼저 봅니다.
4.성전환과 성형에 대한 스베덴보리적 이해의 핵심 원칙
스베덴보리는 성형이나 성전환 수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작 전반을 관통하는 한 문장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을 제공합니다.
‘영이 육체를 만드는 것이지 육체가 영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그 파장은 큽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볼 때, 내적 영적 불일치나 고통은 외형을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외형의 변화는 내적 상태의 표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치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함께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왜곡된 성향, 상처, 불균형을 지닌 존재임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런 상태 자체가 죄의 증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삶 전체를 ‘점진적 회복의 과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당신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해결책이 외형의 변화에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5.성도들에게 답할 때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
첫째, 정체성 논쟁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규정하려는 순간, 대화는 닫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묻습니다.
둘째, 사랑의 방향을 질문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당신을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까, 아니면 더 고립되게 합니까?’
이 질문은 공격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셋째, 고통에는 충분히 공감하되, 질서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질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민과 상대주의는 다릅니다.
넷째, 변화는 언제나 ‘거듭남’의 문제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듭남’은 성적 취향의 즉각적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서서히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6.스베덴보리가 오늘 이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천국은 특정 성적 상태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에 두는 사람들이, 각자의 왜곡을 주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공동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을 것입니다.
‘주님께 가는 길은 닫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나 질서를 통과한다.’
이 말은 동시에 위로이자 요청입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지만, 누구도 자기 방식으로 천국을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7.목회자의 자리에서 드리는 마지막 한 마디
이 주제에서 목사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깔끔한 도덕 판결문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방향을 줍니다.
‘사랑이 어디서 왔는지 보라.’
‘그 사랑이 너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라.’
이 정도만 흔들리지 않고 말해 줄 수 있다면, 성도는 적어도 혼자 싸우고 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목회의 첫걸음일 것입니다.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을 갖게 했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이 너무 엉뚱하지요? 번역자들이 이런 배경지식 없이 번역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표상들은 시편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78:2-4)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이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 그대로 나타나 있지만, 그 안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들이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겼던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속적이고 역사적인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비밀들이 담겨 있는데, 그것들은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이어지며,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다양한 상태들, 하늘 자체,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다윗이라는 왕의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이 글은 말씀 전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매우 구조적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을 하나의 동일한 스타일로 보지 않고,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 전환을 요구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본문을 읽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타일로 소개되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오늘날 우리가 ‘신화적’이라고 부르기 쉬운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신화가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언어입니다. 이 스타일의 핵심은, 외적 사물과 사건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영적, 천적 실재를 직접 떠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상징이 아니라, 곧바로 영적 세계와 연결된 창문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었음을 뜻합니다. 창조 이야기, 에덴동산, 초기 족장들의 이야기가 단절된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가 변화해 가는 하나의 생명 서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나의 예언과 다윗의 시편이 인용되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높은 말’,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은 난해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뜻합니다. 이 ‘감추어졌던 것’은 악이나 무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이해를 넘어서는 신적 깊이를 가리킵니다. 즉,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신 상태와 같습니다.
둘째 스타일인 역사적 스타일은, 오늘날 독자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역사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역사성과 상징성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역사로서 참이면서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성경 해석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셋째 스타일인 예언적 스타일은,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분명히 짚습니다. 이 스타일은 ‘연결된 역사 형식’이 아니라, 단절되고 압축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 안에서는 이 파편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됩니다. 예언서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읽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예언적 스타일의 특징은 범위의 확장성입니다.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 교회의 상태, 하늘의 질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주님 자신까지를 동시에 다룹니다. 그래서 이 스타일은 문자적 차원에 머물러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내적 의미로 들어가야 합니다.
넷째 스타일인 시편은 이 모든 스타일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예언처럼 높고, 그러나 일상 언어처럼 인간적입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말하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상태와 주님의 왕적 통치를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개인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신앙 고백이 됩니다.
이 글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말씀은 단일한 방식으로 읽히도록 쓰이지 않았습니다. 스타일을 구별하지 않으면, 의미도 왜곡됩니다. 그러나 스타일을 구별하고, 각 스타일이 가리키는 차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점점 하나의 살아 있는 구조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구조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과 인간의 거듭남이 놓여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로서 뜻해지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의미가 너무도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도 완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서, 그들은 그것을 ‘영광’(glory)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이 글은 AC.64의 내용을 경험적 차원에서 직접 증언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앞선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은 문자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원리적으로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그 사실이 실제 영계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교리가 아니라 체험의 보고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하늘의 첫 입구 뜰’(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최고천도, 내천도 아닌, 비교적 낮은 단계의 하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는 이들조차 말씀의 문자나 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적 인식이 얼마나 철저히 ‘의미 중심’인지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단어가 의미로 가는 관문이지만, 천사에게는 의미만 있고 단어는 없습니다.
이들이 이해한다고 말한 것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입니다. 이는 최심층의 천적 의미라기보다, 문자 바로 안쪽에 있는 영적 의미를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인간의 지성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질서 정연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적 의미는 파편적인 상징들의 집합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살아 있는 흐름으로 이어진 구조라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그들이 그 내적 의미를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단순한 찬란함이나 위엄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드러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진리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질서 속에서 완전하게 작동할 때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들이 내적 의미를 영광이라고 부른 것은, 그 의미 안에서 주님의 신적 질서가 직접 체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은 인간 독자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집착하는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는 천사적 차원에서는 거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대신 그 말씀이 어떤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지, 신앙과 사랑의 어떤 질서를 드러내는지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 매달릴수록 오히려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고, 의미를 향해 마음을 열수록 문자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경험이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즉, 말씀은 인간이 읽는 순간에도 동시에 천사적 차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말씀은 단일한 텍스트이지만, 그 독자는 인간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으며, 각자의 차원에 맞는 방식으로 동일한 말씀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다층적 생명’입니다.
결국 이 글은 우리에게 하나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말씀을 문자로만 붙잡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서 질서와 흐름, 상태와 생명을 느끼려는 태도로 접근할 때, 비록 우리가 천사처럼 직접 내적 의미를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 방향을 향해 마음이 정렬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말씀은 점차 정보의 책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남으로 이끄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속뜻)이며, 그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비밀(arcana)은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풀어내려면 수많은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극히 일부만 제시되었는데, 그것도 이 말씀이 거듭남을 다루고 있으며, 그 거듭남이 외적 인간(the external man, 겉 사람)에서 내적 인간(the internal man,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합니다. 그들은 문자 속에 있는 것들,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역사서와 예언서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 성읍, 강, 사람의 이름들은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담을 보며 그들은 태고교회를 인식하지만,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의 주님에 대한 신앙을 인식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 가운데 남아 있던 교회, 곧 아브람 시대까지 이어진 교회를 인식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그 개인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그가 대표한 구원하는 신앙을 인식합니다. 이와 같이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만을 인식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이 글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 출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중요한 점은, 내적 의미가 문자 의미에 덧붙여진 해석이 아니라, 문자 속에 생명처럼 깃들어 있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문자는 겉모습이고, 내적 의미는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실체입니다.
이 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내적 의미가 문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적 시선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자 의미는 역사와 사건, 인물과 지명을 보여 주지만, 내적 의미는 상태와 질서, 신앙과 사랑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같은 본문을 읽고도, 인간은 역사로 읽고 천사는 생명으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신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겸손한 수사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구조 자체가 무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님 자신에게서 나왔고, 주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의미 역시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단지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 역시, 그 무한한 의미 중 일부일 뿐입니다.
이 글의 중심 전환점은 ‘천사들은 말씀을 이렇게 인식한다’라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 독자에게 천사의 인식 방식을 직접 소개합니다. 천사들은 문자적 단어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 차원이 이미 문자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에게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각각 특정한 영적 상태와 교회의 국면을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예를 들어, 천사들이 ‘아담’을 인식할 때, 그들은 한 사람이나 한 시대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주님에 대한 신앙, 곧 사랑과 직접 결합된 신앙의 상태를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노아’는 홍수 생존자의 이름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교회의 질서와 그 지속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역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의 대표로 인식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인물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 인물은 천사적 차원에서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상태’이며 ‘어떤 신앙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곧장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의 방향성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내적 의미가 말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외적 인간에서 내적 인간으로 나아갑니다. 문자 역시 외적 차원이고, 내적 의미는 내적 차원입니다. 인간이 문자를 통해 내적 의미로 나아갈 때, 그 사람의 거듭남 역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영적 성장 구조는 서로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독자에게 하나의 초대를 던집니다. 말씀을 더 이상 단지 ‘읽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적 질서를 인식하라는 초대입니다. 문자에 집착하면 역사에 머물지만, 내적 의미로 들어가면 주님의 역사, 곧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와 거듭남의 생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말씀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