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가 인용한 구절들(4:23, 25 / 45:11-12 / 1:26 / 7:13-14 / 24:30)을 ‘사람’과 ‘인자’의 의미, 그리고 문자 의미와 속뜻의 관계라는 큰 축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간론, 기독론, 말씀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매우 높은 밀도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사실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주님에게서 유입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 불렀습니다. 즉 ‘사람’이란 내 안에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는 상태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점이 서면, 예언서와 복음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결정적인 지점마다 등장하는지 비로소 맥이 잡힙니다.

 

4:23, 25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나라의 황폐, 질서 붕괴, 심판의 참상을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AC.49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단순한 인구의 멸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사람됨’이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사람됨은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유입되어 마음(의지와 이해력)의 질서로 자리 잡은 상태인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의 빛이 꺼지면, 즉 이러한 사람됨이 사라지면 겉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속뜻으로는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들은 이성적, 지적인 것, 곧 이해력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며, 새가 날아갔다는 말은 이해력이 진리의 빛에서 이탈하여 더 이상 위를 향해 날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공허와 흑암’ 상태, 혹은 교회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본문이 됩니다.

 

45:11-12에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문자 의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AC의 큰 흐름에서는 ‘창조하다, 만들다, 빚다’ 같은 표현이 예언서에서 자주 ‘거듭남’과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곧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은 생물학적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참된 사람됨’의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단수로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원형은 하나’라는 진술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람됨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만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래서 최고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속뜻으로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주님의 형상을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그 창조가 곧 새 창조, 즉 거듭남으로 번역됩니다.

 

1:26의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는, 왜 주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증거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환상 언어이며, 인간이 신적 현실을 직접 담아낼 수 없기에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9의 논지는 거꾸로 갑니다. 주님이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과 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상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형상과 연결된 결과이며, 그 형상이 ‘보좌’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사람 같은 형상’이 가장 높은 자리인 보좌 위에 놓이는 것은, ‘사람됨’이 곧 신적 통치의 본질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자기 호칭과 직결됩니다. AC.49는 여기서 ‘인자’가 사실상 ‘사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전면에 세웁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그 통치가 영원하다고 말할 때, 속뜻은 ‘한 인간 지도자가 영원한 제국을 세운다’가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으로서,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후에 마24:30과 연결되며, ‘구름’이 말씀의 문자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사람’, 곧 인자로 인식되십니다. 그래서 인자 환상은 종말론적 장면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한 근본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24:30의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구절도, AC.49에서는 단순한 미래 사건의 예언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구름’은 문자, ‘능력과 큰 영광’은 속뜻이라는 해석이 들어오면, 이 말씀은 곧 ‘문자 의미가 매개가 되어 속뜻이 열릴 때, 주님이 인자로 오신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단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속뜻이 열리기 전에는 사람들은 문자 속에 가려진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이 ‘사람’이심도 흐릿하게만 압니다. 그러나 속뜻이 열리면, 그 속뜻이 가리키는 바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기서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즉 속뜻의 능력은 정보량이나 지적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연결되는 데서 나옵니다.

 

이 모든 인용 구절이 합쳐져 AC.49가 세우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안에서 퍼셉션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지 인구의 부재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부재이며, ‘사람을 창조한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거듭남에 의한 새 창조입니다. 또 주님이 ‘사람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신적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자’의 구름-영광 언어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이 어떻게 연결되어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는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를 읽는 열쇠이자, 예수님이 왜 자신을 ‘인자’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말씀의 속뜻이 ‘능력과 영광’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핵심 답변을 한 덩어리 안에 담고 있는 글입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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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1:26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는 표현은 현대 한국어 감각으로 읽으면 다소 낯설고, 때로는 가치 판단이 섞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 2장과 그에 대한 AC의 해설에서 이 표현은 결코 경멸적이거나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움직임의 방식’,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가 작동하는 높이와 방향’을 나타내는 매우 정밀한 표현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단순히 ‘살아 있다/죽어 있다’로 나누지 않고,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지를 통해 그 상태를 드러냅니다. ‘긴다’는 말은 바로 그 가장 낮은 움직임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기다’로 번역되는 동사들은 공통적으로 땅이나 물에 밀착된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위로 솟구치거나 공중을 가르는 움직임과 대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체를 말할 때, 날아다니는 것, 헤엄치는 것, 기어다니는 것을 구분합니다. 이 구분은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상응의 언어’입니다. 날아다니는 것은 위를 향한 인식과 사고, 곧 이성적, 이해력의 차원을 가리키고, 물속을 헤엄치는 것은 기억과 지식의 차원을 가리키며, 기어다니는 것은 감각과 즉각적 반응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즉 ‘긴다’는 표현은 인간 안에서 ‘가장 아래층에서 작동하는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기는 것’을 악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에서 ‘기는 것’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 아직 위로 들어 올려지지 않은 상태를 뜻할 뿐, 본질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감각, 습관, 즉각적 욕구, 정서적 반응이라는 층위를 반드시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땅에 붙어 기듯 작동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먼저 생각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긴다’는 표현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보면, 이 구조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빛이 먼저 생기고, 하늘과 물의 구분이 이루어지며, 그다음에 물고기와 새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땅의 짐승과 기는 것들이 나옵니다. 이는 시간 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위의 차원, 곧 진리의 빛과 이해력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아래 차원의 생명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만약 이 질서가 거꾸로 되면, 즉 감각과 욕구가 먼저 지배하면, 인간은 ‘기어다니는 삶’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땅에 기는 모든 것’은 인간 안에서 ‘생각 이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몸의 기억, 자동화된 습관, 감각적 쾌, 불쾌, 즉각적인 분노나 두려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반응해 버리는 정서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스스로 위를 보지 못합니다.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며, 주님은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질서 안으로 넣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점에서 AC의 인간 이해는 매우 통합적입니다. 거듭남은 영혼만 바뀌고 몸은 그대로 두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고상한 생각만 바뀌고 일상의 반응과 습관은 방치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와 작동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기는 것’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대상이 가장 낮은 층위까지 내려왔다는 표시이며, 인간 전체가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설교나 번역에서 이 표현을 다룰 때 특히 조심해야 할 점이 여기 있습니다. ‘기는 것’을 하찮거나 천한 것으로 설명해 버리면, 성경의 의도를 정반대로 전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낮은 차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이 주님의 생명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기는 것을 멸하지 않으시고, 굽히고, 다스리고, 살리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억압이 아니라 질서 부여입니다.

 

결국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 전체를 다루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신앙, 이해, 사랑은 머리에서만 끝나지 않고,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말투, 몸짓, 반사적인 감정, 반복되는 습관, 일상의 선택 속까지 주님의 질서가 스며들 때, 그때 비로소 ‘기는 것’도 살아 있는 혼, 즉 ‘생물’의 일부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긴다’는 말은 부끄러운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마지막 깊이를 드러내는 매우 정직한 성경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01-20(D3)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의 금식 기도와 방언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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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력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the 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the 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력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the living soul), ‘가축(the 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의미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요약이자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각 단계를 분리해서 설명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인지 명확히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의 원리로 말합니다. 이 신앙은 이해력에 속하며, 사람은 그 신앙을 통해 진리와 선을 확인하고 확증합니다. 이때 그의 사고와 말은 더 이상 무생물, 곧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 곧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물고기’와 ‘’가 등장합니다. 이는 기억-지식과 이성적, 지적 사고가 이제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그 중심이 이해력에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이해력의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온 의지의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을 통해 삶으로 내려옵니다. 이때 등장하는 상징이 ‘생물’과 ‘짐승’(‘가축’)입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생각에서 애정과 행위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표현입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사람은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이해력의 차원, 곧 신앙의 확증과 말의 차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 곧 의지 차원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이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닮음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닮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진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도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앙만으로 말할 때는 아직 다섯 번째 상태이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여 삶으로 드러날 때 여섯 번째 상태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입니다.

 

 

 

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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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무엇인가를 내놓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렇게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이 글은 창세기 본문의 ‘말씀 순서 변화 자체가 지닌 의미’를 통해, 거듭남의 방향과 구조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단어 하나, 배열 하나도 우연이 아니라고 보며, 특히 순서의 변화는 항상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같은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나열 순서가 바뀌는 이유가 바로 그 열쇠입니다.

 

앞 절에서는 땅이 ‘생물 → 가축 → 들짐승’ 순으로 낸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무언가를 내놓는 것처럼 느끼는 단계, 곧 겉 사람의 차원에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때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지만, 사람의 퍼셉션은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들짐승 → 가축’ 순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 변화는, 거듭남의 주체가 점차 사람 자신에서 주님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 처음에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점점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으며,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방향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같은 원리를 강조합니다. 주님은 먼저 겉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그 겉 사람의 활동과 선택을 통해 속 사람을 열어 가십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도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고, 점차 더 깊은 차원으로 이동합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과정에서 사람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제거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 착각을 즉시 부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시어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착각조차도 주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의 순서 변화는 단순한 문체상의 변형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방향 전환의 흔적입니다. 거듭남은 늘 바깥에서 안으로, 자기 자신에서 주님으로 이동하는 여정이며, 창세기의 언어는 그 여정을 가장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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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은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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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affections)을 뜻한다는 사실, 곧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36:9, 11)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이는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들짐승(Wild animals)도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the 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the 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또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만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이 글은 왜 말씀에서 ‘짐승’(개역개정에서는 자주 ‘가축’으로 번역)과 ‘들짐승’이 그렇게 자주, 그리고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애정 구조를 드러내는 필수적인 언어라고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 가장 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애정이기 때문에, 애정은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이 글은 먼저 짐승이 선과 악 어느 쪽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악한 사람에게서의 짐승은 악한 애정이며, 선한 사람에게서의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다. 그래서 짐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짐승이 어떤 성질을 지니느냐가 핵심입니다. 거듭남을 다루는 본문들에서는 언제나 짐승이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데, 이는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정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언서들에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생각과 애정이 함께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씨는 이해와 인식을, 짐승의 씨는 의지와 애정을 가리킵니다. 거듭남은 어느 한쪽만의 변화가 아니라, 두 영역이 동시에 새롭게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이 글은 또한 ‘짐승’과 ‘들짐승’을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층위의 애정을 뜻하며,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들짐승과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시편에서 고래(‘’으로 번역됨)와 과실나무(‘과수’로 번역됨)와 짐승과 새들이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불리는 장면은, 이 상징들이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찬양은 의식적 행위이므로,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원리에게만 요청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 안의 모든 생명 원리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글은 또한 천사들이 ‘짐승들’(‘생물’로 번역됨)로 불린다는 사실을 통해, 짐승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깊은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인간적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충만함이 주님께 가장 가까운 상태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짐승’으로 불린다는 것은, 애정이야말로 생명의 핵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이 ‘모든 피조물’(‘만민’으로 번역됨)에게 전파된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말씀 전체가 인간의 애정과 생명을 새롭게 빚어 가는 과정임을, ‘짐승’이라는 상징을 통해 아주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AC.45, 창1:24-25, ‘구약에 나오는 동물들’, 사람의 이해, 의지, 애정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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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5

 

태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이렇게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 그리고 구약 말씀 전체에서 보면 늘 서로 다른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는데요,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해롭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고,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지요. 이때 사람 안의 악들은 곰이나 늑대, 개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그리고 반대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나 양, 어린양 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여기 이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들(The 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며, 따라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는 이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서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더 낮은 것들은 ‘그 땅의 들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욕정(cupidities)과 쾌락(pleasures)을 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이 글은 왜 말씀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반복해서 ‘짐승’의 이미지로 표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태고 시대 사람들의 인식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내적 상태를 추상 개념으로 나누기보다, 살아 움직이는 형상으로 보았고, 그래서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의 성질로 표현했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짐승’이라는 말이 본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짐승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그 기준은 해를 끼치느냐, 온순하냐에 있습니다. 곰, 늑대, 개처럼 해로운 짐승들은 사람 안의 악한 충동과 파괴적인 성향을 뜻하고, 암송아지, 양, 어린양처럼 온순한 짐승들은 선하고 부드러운 애정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짐승들은 후자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악한 짐승들이 주된 상징이 되지 않고,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의지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그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이 더 이상 해롭지 않고,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특히 이 글은 ‘짐승’이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애정은 의지의 핵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실제 동력입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들은 생각이나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애정이 본질적으로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그 땅의 들짐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거듭남은 욕정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에서 동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이 살아 움직이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 애정과 욕정은 모두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교회는 이것을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상징은 원시적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영적 언어입니다.

 

 

 

AC.46, 창1:24-25, ‘짐승'(beasts)은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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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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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깊이를 가늠할 때, 자연스럽게 몇 가지 외적 표지를 떠올립니다. 금식을 하는가,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기도할 때 눈물과 통곡이 있는가, 방언이나 특별한 영적 체험이 있는가 같은 것들입니다. 실제로 교회사 속에서도 이런 요소들은 경건과 헌신의 징표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그런데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이런 기대가 자주 어긋납니다. 그는 금식 기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기도의 방법론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방언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 ‘진리’, ‘’, ‘의지’, ‘지각’ 같은 단어들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나 시대적 한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을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어떤 존재 상태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이 출발점의 차이가, 금식, 기도, 방언에 대한 그의 침묵을 만들어 냅니다.

 

 

2. 금식 기도 : 행위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

 

성경에서 금식은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모세, 엘리야, 다니엘, 그리고 주님 자신도 금식하셨습니다. 이런 본문들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금식을 ‘영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특별한 행위’로 이해해 왔습니다. 일정 기간 음식을 끊고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더 잘 열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 금식은 결코 ‘음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음식은 단지 외적 상응일 뿐이며, 금식의 실제 내용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절제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입이 음식을 끊었는가가 아니라, ‘의지가 무엇을 끊었는가’가 핵심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며칠씩 금식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자기 의를 붙들고 있고, 타인을 정죄하며, 자신이 더 거룩해졌다고 느낀다면, 그 금식은 영적으로는 오히려 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금식은 자아를 낮추는 대신, 자아를 더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금식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금식을 ‘신앙의 중심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금식은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악으로 보고 그것을 거절하는 지속적인 내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초점의 이동’입니다.

 

 

3. 기도 일반 :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과 주님 사이의 연결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기도의 ‘기술’이나 ‘강도’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에 따르면, 기도의 본질은 언제나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리대로 살고, 선을 의지에서 선택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이미 하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짧은 기도, 혹은 말없는 탄식조차도 천국에서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언어로 받아들여집니다.

 

반대로, 삶은 변하지 않은 채 기도만 늘어난다면, 그 기도는 소리로는 크지만 영적으로는 공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그는 통성 기도냐 묵상 기도냐, 중보 기도냐 개인 기도냐 같은 구분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구분은 외적 형식의 차이일 뿐, 기도의 실체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드는가?’, ‘이 기도가 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 기도는 형식이 무엇이든 참됩니다.

 

 

4. 방언 : 영적 언어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

 

방언 문제는 특히 민감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보여 주는 강력한 표지로 여겨져 왔고, 어떤 공동체에서는 방언 경험이 사실상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잣대처럼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의 언어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사들의 언어를 듣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 구조를 설명했습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천사의 언어는 결코 무질서하지 않으며, 의미 없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즉각적으로 의미로 전달되는, 매우 정합적이고 질서 있는 언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말하는 본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음성 발화가 ‘고등한 영적 상태’의 증거라는 주장은, 스베덴보리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는 그런 현상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구원의 기준이나 교회의 중심 표지로 삼는 것’에는 분명한 거리를 둡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결과입니다. 방언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이후에 그 사람이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더 진리 안에서 살게 되었는가, 더 이웃을 품게 되었는가가 기준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현상은 영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하위 영역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5. 왜 이런 주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조용했는가

 

여기서 핵심 질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이나 강조를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그의 사명이 ‘신앙 실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명은, 인간이 영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사랑과 진리가 어떻게 사람 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왜곡되며, 어떻게 다시 회복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분별의 기준’을 남겼습니다.

 

금식, 기도, 방언, 찬양은 모두 시대와 문화에 따라 형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의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변하지 않는 구조를 남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적 열심을 조직하거나 장려하지 않고, 그것들이 참된지 거짓된지를 가려낼 수 있는 ‘내적 잣대’를 제공했습니다.

 

 

6.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깊은 도전

 

이 모든 논의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금식과 기도가 많아질수록, 방언과 감정적 고양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더 신앙적인 사람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더 미묘한 자기만족에 빠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무조건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는 끊임없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 모든 것이 너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이 너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그는 일부러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 오늘의 교회와 신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깊은 숙제를 남겼습니다.

 

 

7. 맺음말 : 외적 열심을 넘어 내적 실재로

 

결국 스베덴보리가 금식 기도와 각종 기도, 방언에 대해 강조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어떤 사랑 안에 살고 있는가, 어떤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의 저작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그는 우리가 붙들고 싶은 외적 확신의 표지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하고, 대신 삶 전체를 신앙의 자리로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침묵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창1에 나오는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창1:26에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창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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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 개신교 예배 음악, 찬양에 대하여

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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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이 먼저 그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과 ‘땅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로,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과 ‘가축(the beast)과 ‘기는 것(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이 글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지식과 행위,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 왜 필수적인가’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땅에 비유하면서, 어떤 선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땅이 씨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사람도 신앙의 지식이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준비이며, 삶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이 글의 핵심은 이해와 의지의 역할 분담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기능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의지의 기능입니다. 이 둘은 역할이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에 그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면 마음이 나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비유는, 이 글의 요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반석은 진리 위에 세워진 삶을 뜻하고, 모래는 지식만 있고 삶이 따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나오지 않고, 행하지 않음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1장의 상징들을 인간 내면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이해에 속한 것들은 물과 새로 표현됩니다. 물은 지식의 저장과 흐름을, 새는 생각과 이성을 뜻합니다. 이는 모두 ‘아는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의지에 속한 것들은 땅에서 나오는 생물과 가축, 그리고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선택하고 행하며 살아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해의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며, 깊은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의 영역, 곧 삶의 선택과 행위로 내려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아직 생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신앙의 지식은 씨앗이고, 의지 안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으로 드러나며, 이해와 의지가 하나가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온전한 마음과 하나의 삶을 갖게 됩니다.

 

 

 

AC.45, 창1:24-25, ‘구약에 나오는 동물들’, 사람의 이해, 의지, 애정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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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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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를 비롯, 전체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베덴보리 저작을 보면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은 것 같아요. 왜 그런 건가요?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왜 스베덴보리에게서 찬양과 음악은 조용한가

 

개신교를 포함한 현대 기독교의 예배를 떠올리면, 음악과 찬양은 거의 예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설교보다 찬양 시간이 더 길고, 예배의 성패가 ‘찬양의 은혜로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합니다. 신앙 간증 역시 ‘찬양 중에 울었다’, ‘찬양하다가 은혜를 받았다’는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풍경에 익숙한 눈으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펼치면, 자연히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렇게 찬양 이야기가 적은가’, ‘왜 교회 음악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정확히 겨누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음악을 몰랐거나, 예술을 무시했거나, 혹은 감성이 메마른 신학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가 애초에 외적 예배 요소를 중심에 두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스베덴보리는 ‘찬양 없는 메마른 신학자’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나면, 오히려 오늘날 교회의 예배 구조가 얼마나 ‘외적 형식’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를 거꾸로 성찰하게 됩니다.

 

 

2.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축: ‘예배란 무엇인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에게서 ‘예배’는 특정 시간, 특정 공간, 특정 형식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의 저작 전반에서 예배는 ‘삶 전체의 방향’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의지와 이해가 주님을 향해 정렬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는 행위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있을 때, 말과 행동과 의식이 뒤따르는 것이지, 반대로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자동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음악과 찬양은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 예배의 ‘표현 양식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는 외적 예배 행위를 평가할 때 항상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이 그 사람 안의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단지 습관, 문화, 감정의 산물인가’. 이 질문 앞에서 음악은 특권을 갖지 않습니다. 찬송이든 기도든 설교든, 모두 동일한 기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예배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거나, 어떤 형식이 더 좋다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 곧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비하면, 음악의 비중은 자연히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3. 찬양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급진적 전환

 

현대 교회 문화에서 찬양은 종종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찬양을 하면 마음이 열리고, 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 초반에 찬양으로 분위기를 만들고, 사람들의 감정을 끌어올린 뒤, 그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구조는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시각에서 보면, 이 구조는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말합니다. ‘내적 상태가 먼저 있고, 외적 표현은 그 다음에 온다’. 참된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될 때, 그 상태가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과 심지어 노래로까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노래가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노래를 낳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찬양은 결코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찬양은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측정 도구’이지 ‘발전 장치’가 아닙니다. 찬양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은, 그 찬양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 상태가 실제로 존재할 때에만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자연적 감정의 울림일 뿐입니다.

 

 

4. 천국의 음악과 지상의 교회 음악의 본질적 차이

 

혹시 스베덴보리가 음악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는 천국에서의 소리와 노래, 말의 리듬과 조화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묘사를 남겼습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천국의 음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연주되는 음악’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곧 소리로 드러납니다. 천사들이 말할 때, 그 말에는 이미 음악성이 깃들어 있으며, 그 울림은 그들의 내적 상태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거기에는 연습도 없고, 연출도 없고, 감정을 유도하려는 의도도 없습니다. 상태가 곧 소리이고, 소리가 곧 상태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지상의 교회 음악은 필연적으로 ‘기술과 연출과 반복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지 않습니다. 그는 천국의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지상의 찬양을 끌어오지 않고, 오히려 지상의 찬양이 얼마나 쉽게 천국의 것을 ‘흉내만 낼 수 있는지’를 경계합니다.

 

 

5. 감정의 문제: ‘울림변화는 다르다

 

스베덴보리가 교회 음악을 다룰 때 조심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자연적 감정’과 ‘영적 상태’를 매우 쉽게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합니다. 조율된 화음, 반복되는 후렴, 점점 고조되는 리듬은 누구에게나 눈물과 전율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반드시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감정의 고양이 곧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삶을 바꾸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 감동은 영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묻습니다. ‘그 찬양 이후에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었는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선택하는 힘이 생겼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찬양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의 신학에서는 중심에 설 수 없습니다.

 

 

6. 말씀의 이해가 찬양보다 앞서는 이유

 

스베덴보리 저작이 음악보다 압도적으로 ‘말씀의 구조와 의미’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유일한 길은,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따라 삶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찬양은 이 과정을 보조할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부르는 찬양은, 진리 없는 열심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의미가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일 때, 굳이 많은 찬양이 없어도 그 삶 자체가 예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예배는 ‘주일의 음악적 행사’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음악을 분석하기보다는, 말씀의 속뜻, 상응, 내적 논리, 인간 정신의 구조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 ‘차갑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유이지만, 동시에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7. 맺음말: 침묵은 부정이 아니라 방향 설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교회 음악과 찬양의 언급이 적은 것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신앙의 중심을 ‘느낌’이 아니라 ‘상태’, ‘형식’이 아니라 ‘’, ‘행위’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에 두었습니다. 음악은 그 전체 구조 속에서 자연히 자리를 찾을 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깊이 읽을수록,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찬양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내가 말하는 은혜는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예배의 중심이 정말 주님과 말씀인가, 아니면 나의 감정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음악에 대해 말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2026-01-18(D1)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의 금식 기도와 방언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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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버전 장례 설교

아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실제 상태’를 조용히 밝혀 주는 설교입니다.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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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창세기 5장 세 번째 시간, 21절로 24절이며, AC 글 번호로는 516번에서 522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5:21-24)

 

 

이 본문을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대한 속뜻 요약입니다.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는 신앙에 관한 교리를, ‘자녀들을 낳았으며(begat sons and daughters)는 진리와 선에 관한 교리적인 것들을,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는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는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은 속뜻 요약에서 핵심은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였던 태고교회에서 왜 갑자기 교리 얘기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며, 이걸 이해하려면 그렇다면, ‘퍼셉션이란 무엇인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다음은 며칠 전 제가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합니다.

 

 

아래는 AC.521(23-24)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문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적 이해나 논리적 판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것은 정보를 모아 분석한 결과도 아니고, 규칙을 적용해 도출한 결론도 아닙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직접 감지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이미 방향이 주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며, 설명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로 작동합니다. 마치 아이가 어느 순간 엄마의 얼굴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아, 엄마가 지금 힘들어하시는구나...’ 엄마의 상태를 즉각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미세하다(the most minute)라는 표현은 퍼셉션이 불분명하거나 흐릿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퍼셉션은 너무 정밀해서 일반적인 언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상황을 볼 때, 그 상황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분리하지 않고 한꺼번에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 듣는 사람의 준비 정도, 관계의 맥락, 시기의 적절성,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올 결과까지가 동시에 감지되는 식입니다.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인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퍼셉션은 매우 정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퍼셉션은 항상 개별적으로 작동합니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퍼셉션은 그것을 상황마다 다르게 인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이 선이 됩니다. 이 차이는 원칙을 어긴 결과가 아니라, 상태, 곧 상황이,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분별의 차이입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기준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퍼셉션은 교리와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교리는 전달되기 위해 반드시 일반화를 필요로 합니다. ‘항상’, ‘대체로’, ‘원칙적으로’와 같은 표현이 없으면 교리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를 하나의 틀로 묶어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이러한 일반화 자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언제나 이번 경우를 보고, 지금 상태를 봅니다. 비유하자면, 시력 차이요, 해상도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높으면 사물이, 화면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보이지만, 낮으면 흐릿하게 무난하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경계를 긋고, 흐름을 멈추고, 판단을 고정합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흐르며,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살아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분별을 문장이나 규칙으로 붙잡아 두려는 순간, 우리는 그 생명 대신 틀만 붙잡게 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퍼셉션은 그 모든 정황 및 그 마음속 동기까지 보지만 일반화된 규범인 교리는 그런 걸 다 놓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든 사고의 비유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규칙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고의 자유로움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사고능력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외적인 규칙에 매이면서 내적 판단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영재를 일반 학교에 보낼 경우, 많은 경우 아이를 망치는 것과도 같은데요, 퍼셉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적인 빛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으로 다시 배우게 하면, 그 인식은 점차 경직됩니다. 내면이 열려 매 순간 하늘의 빛으로 즉시 알면 되는 것을 굳이 자기들이 정한 어떤 룰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흐릿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구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며 살아 있어서 일반 개념으로 묶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숙련된 장인이 재료를 다루며 느끼는 감각과 비슷합니다. 그 감각은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매우 정확하게 작동합니다. 흑백요리사 시즌2에서 종이 한 장 차이보다 더 미세한 차이로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승자 최강록이 재료마다 그릇을 달리하여 다르게 조림한 것을, 예를 들면, ‘중불로 적당하게’ 이런 식으로 획일화, 규칙화, 교리화를 하면, 이후 그 레시피를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서 과연 그 맛이 재현될까요? 천국의 천사들이 바로 이런 퍼셉션으로 생활하며, 그래서 그들은 일상 대인관계나 지상의 누구를 도울 때 실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퍼셉션으로 섬기기 때문에 온전하며, 완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퍼셉션 능력은 장차 사라질 것이었고,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오직 잘 정돈된 교리를 통해 배우며 점진적으로 선과 진리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이 전환을 대비하여, 에녹이라는 교회에게 퍼셉션 내용을 교리로 정리하는 일이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자체를 살아내는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리는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지만, 퍼셉션이 다시 회복될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표현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현실을 깊이 비춥니다. 우리는 대부분 교리를 통해 신앙을 배웁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류의 상태에 맞는 방식입니다. 다만 교리가 곧 생명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교리는 빛을 가리키는 창이요, 담아두는 그릇이지, 빛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퍼셉션이 ‘미세하고 개별적’이라는 말은 선과 진리를 규칙이나 원칙이 아니라 각 상태와 순간 속에서 직접 분별하는 살아 있는 인식을 뜻합니다. 이 인식은 너무 살아 있어서 언어로 고정될 수 없고, 교리로 완전히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사라졌고, 대신 교리가 보존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이해할 때, 에녹의 교회와 그 보존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그러니까 첫 천적 인간이었던 ‘사람’, 곧 아담 교회 때는 이런 퍼셉션이 온전했던, 그래서 천국 천사들과 거의 차이가 없어 그 시절엔 천사들도 지상에 내려와 같이 대화도 하고 어울릴 수 있었지만, 차츰 외적 감각, 그러니까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에 익숙해져 간 그 후손들, 곧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속 아닌 겉, 즉 내면보다 외면을 추구, 오직 내면으로만 들을 수 있는 퍼셉션이 잘 안 들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삶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잘 모르게 되자 부득이하게 그 하나하나를 교리 형태로 정돈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그때 이 일에 쓰임 받은 사람들, 곧 교회가 바로 에녹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이 에녹이라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곧 그들의 퍼셉션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다음은 그 기록입니다.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상태와 성격 또한 저는 알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어떤 분명함도 없는, 다소 일반적이고 어두운 퍼셉션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교리적인 것들 쪽으로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되는 그런 퍼셉션이었습니다. (AC.522)

 

즉 이미 그들 자신, 퍼셉션이 거의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 그런 안타까운 상태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 그들은 여러 전해 내려오는 선과 진리들을 수집, 잘 정돈하여 나름 교리화, ‘퍼셉션이 사라진 이후를 대비한 형식화된 분별의 틀’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직접 알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인간이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은 ‘교리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록 영적 시력은 거의 잃어가고 있으나 힘을 다하여 수고, 후손들이 여전히 주님 안에서, 그러니까 주님의 선과 진리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하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던 에녹 이야기와 오늘 설교는 아주 다릅니다. 보통은, 에녹이 얼마나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였으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겠는가? 우리도 그런 에녹의 삶을 본받아야 하겠다는 식이지요. 이 역시 좋습니다. 겉뜻에 충실한 해석이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할렐루야입니까? 우리는 절대 겉뜻으로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을 무조건 폄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너무 엉뚱하게 해석, 잘못된 길로만 빠지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한 가지, 그렇다면 이 퍼셉션은 에녹 이후로, 태고교회 이후로 이제 완전히 인류한테서 떠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창문, 곧 천국을 향해 열린 창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이후 인류가 이 퍼셉션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창문이 닫혀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지금도 이 창문을 여는 사람한테는 감사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이 퍼셉션은 변함없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현 시대 가장 최근의 성자라 할 수 있는 정교회 뽀르피리우스를 비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많은 성인들, 그러니까 이현필, 이세종을 비롯,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체스코 등이 그렇습니다. 이분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이분들은 하늘을 향해 자기 내면의 창문을 여신 분들이지만 우리는 세상에 몰두하느라 창문을 열어도 세상 창문만 열고 산다는 점입니다. 우리 역시 이제라도 세상 창문은 닫고 천국 창문을 열면 이 퍼셉션은 다시 재개된다고 합니다.

 

다만 이 퍼셉션은 생명과도 같아 서서히 움직입니다. 즉 서서히 증가하고 서서히 사라지고 하는 것이죠. 퍼셉션을 다시 깨어나게 하고 싶으면 일상 매 순간 양심의 소리, 옳고 그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때마다 하나씩 인내심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을 의지하고 황소 걸음처럼 뚜벅뚜벅 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주께 하듯 하라신 말씀 기억하고, 사람 가려 가며, 환경 탓하는 대신 범사에 감사하며, 그저 매 순간 주님 앞에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이 퍼셉션 근육이 생기며, 기운이 돌아옵니다. 영혼의 근육이 생겨 기운을 차리게 되지요. 그러면서 점점 주님 음성이 들리며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어두운 시대에 이런 식으로 다시 천국을 향한 자신의 창문을 열어 미약하나마 퍼셉션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1-18(D1)

 

2634, 27. 창5.3, 2026-01-18(D1)-주일예배(창5,21-24, AC.516-522),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pdf
0.38MB

 

 

 

 

 

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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