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하나님께’, 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3-5)

 

제목은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46-358 요약입니다.

 

AC.346-358 앞의 AC.338-345에서 밝혀진 가인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이제 실제 행위와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4:3-5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으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참된 성질이 외적인 형식이나 제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어떤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차이가 마침내 가인의 분함 안색이 변함으로 이어지면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46-347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 원문으로는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에서 시작된 가인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어 이제 결과가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함 있었고, 신앙도 후대처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고, 분리가 굳어져 하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교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목적에서 멀어질 있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타락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있다고 여기게 되고, 마침내 신앙으로부터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냅니다. 흐름은 내적 분리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AC.346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며, 심지어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문제는 종교적 행위가 없다는 있지 않고,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가 안에 없다는 있습니다.

 

AC.348 이것을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땅의 소산 여기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부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얼마든지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있습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종교적인 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고 사람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영적인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12장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말씀이 가인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가까이하고 외적으로는 열매까지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위의 뿌리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있습니다.

 

여기서 뿌리와 열매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는 사람의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만으로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할 없습니다. 같은 봉사와 헌신이라도 자기 의와 명예, 인정과 보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37:31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인용하면서 위로 열매를 맺는다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사람 안에 주님께서 심으신 선이 사람의 실제 삶과 쓰임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AC.349 여기에서 걸음 나아가 외적인 예배와 내적인 예배의 관계를 밝힙니다. 외적인 것은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나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을 외적인 예배도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물이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면서도 받아들여질 없었던 이유입니다. 문제는 제물을 드렸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제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에 있습니다.

 

AC.350-354에서는 이제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과 대조됩니다. 아벨 체어리티를, 떼의 처음 , 양의 새끼 거룩한 것을, 기름진 천적인 자체를 나타내며,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동물 제물을 곡식 제물보다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핵심입니다.

 

특히 양의 새끼 기름 아벨의 예배가 자기에게서 나온 선을 주님께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모든 거룩함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임을 보여 줍니다. 처음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선의 시작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며, 기름 천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선의 가장 내적인 생명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누구인가?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벨의 제물 안에는 바로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신앙 체어리티 이해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제물의 대비는 신앙의 예배와 사랑의 예배라는 단순한 대립보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신앙의 예배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 대비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AC.355부터 말씀의 초점은 제물 자체에서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옮겨갑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4:5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로까지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작은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있다 생각 자체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인에게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AC.356 지금까지의 논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분함 안색의 변화 이해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단순히 머릿속의 교리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을 변화시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진리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AC.357 가인이 몹시 분하여 바로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날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개인이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앙이 본래 체어리티를 섬겨야 자기 위치를 잊고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 , 체어리티는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후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씨앗이 이미 드러납니다.

 

AC.358 안색이 변하니,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떨어졌다 표현은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내적인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마음의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신다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얼굴 주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인간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이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 향할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합니다.

 

따라서 AC.346-358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외적인 것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예배가 있었으며 제물이 있었습니다. 아벨에게도 행위와 예배와 제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여호와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자체로 살아 있지 않으며, 사람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비로소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땅의 소산 아벨의 양의 새끼와 기름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과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드리는가?, 나는 봉사하는가?, 나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며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의와 인정 욕구, 교리적 우월성,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외적인 종교생활은 풍성해도 안의 생명은 약해질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행위라도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체어리티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 중요한 것은 가인의 타락 과정이 다시 한번 점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분리가 AC.346-358 이르면 하나의 분명한 연쇄를 이루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따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별이 분리가 됩니다. 분리된 신앙에서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생깁니다.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깁니다.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갑자기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이미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6-358 중심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지 않습니다. 깊은 질문은 무엇이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입니다. 답은 체어리티이며, 궁극적으로는 체어리티를 통하여 인간에게 유입되는 주님의 생명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서 생명을 받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종교 행위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흘러나와 실제 삶과 예배를 하나로 만들 이루어집니다.

 

결국 AC.346-358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고 아벨도 제물을 드렸지만, 예배의 내적 근원은 달랐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있지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없다면 결국 죽은 열매가 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예배는 모든 거룩함과 선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다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아벨의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앞의 AC.338-345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 단계 깊게 보여 줍니다. 구간이 가인과 아벨은 무엇인가? 밝혔다면, AC.346-358 둘의 차이가 실제 삶과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행위도 살아 있고 예배도 살아 있으며 인간의 얼굴, 내적인 것들에도 주님의 자비가 비칩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와 행위와 예배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생명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행위와 예배가 되게 하시는 과정이며, 그때 우리의 전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하나의 예배가 되어 갑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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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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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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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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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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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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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 첫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 떼의 처음 난 것’)는 오직 주님께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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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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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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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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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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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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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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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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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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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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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30(D1)

 

2666, 3, 창4.3, 2026-08-30(D1)-주일예배(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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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23, 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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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먼저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본질로, 조직과 제도와 건물과 직분 같은 것은 비본질로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와 깊이 연결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건물, 직제, 교단, 예배 형식 등은 교회를 위한 외적 그릇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교회의 생명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 포도주와 가죽 부대’ 비유를 박요한 목사가 교회의 제도와 형식의 갱신 문제에 적용한 것도 나름의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절대화될 때, 오히려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것은 반드시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내적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지만, 그릇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죽 부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 가죽 부대가 포도주를 담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직분을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비판한 대목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이 본래는 섬김을 위한 기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명예와 권세와 특권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직분과 지위는 ‘용도(use)’를 위해 존재합니다.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 얼마나 선한 용도를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분이 ‘나는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장의 수단이 된다면, 외적으로는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proprium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필요합니다. 직분이나 제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계급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도가 없어도 사람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도가 없을수록 특정 개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없는 교회’라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분이 있든 없든 권한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용도를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구조의 유무보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박요한 목사가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도 핵심을 잘 짚은 부분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도, 장로도, 특정 헌금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관과도 잘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 속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맡겨진 용도를 수행할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회를 ‘ 교회’, ‘ 성도’, ‘ 조직’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주님의 것이 인간의 proprium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박요한 목사는 전통 교회의 문제를 주로 장로 중심 구조나 당회 구조에서 찾습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의 문제는 장로교의 당회라는 특정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회중제가 강한 교회에서는 다수의 여론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가 없는 교회’라고 선언한 공동체에서도 비공식적인 영향력과 인간관계가 정치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임직헌금에 대한 비판도 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상당한 금액의 임직예물을 요구하거나 자발적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경쟁을 유도하는 관행을 문제 삼습니다. 이 지적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돈과 영적 지위를 연결하면, 외적 재산이 내적 가치와 섞이기 쉽습니다. 헌금 자체는 선한 용도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이만큼 냈으므로 이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면 그 헌금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취지는 헌금 액수와 영적 권위를 연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적게 드린다고 자동으로 겸손한 것도 아니고, 많이 드린다고 자동으로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선한 용도를 위해 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 문제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여 드렸는가’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와 교회 활동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교회 활동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정작 예배 시간에 졸게 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예배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활동이 내적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 전체의 논리와 일관됩니다. 교회 봉사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면, 외적 종교 활동이 오히려 내적 신앙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의 중요한 가족 행사보다 제자훈련 참석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한 대목은 체어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할 만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하는 것으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이웃에 대한 성실함, 직장에서의 정직함 역시 모두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배는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무시하거나 일상의 의무를 경시하게 만든다면 외적인 종교성과 실제 체어리티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도 번씩 빠지는 것이 좋다’, ‘오기 싫으면 유튜브로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예배를 절대화하지 말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예배를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를 담고 유지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생명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반드시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식의 압박도 잘못이지만, ‘마음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유튜브가 교회다’라는 선언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현장 참석자와 동일하게 성도로 인정하며, 유튜브를 오프라인 교회로 끌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형태 변화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반드시 특정 장소에 모여야 하는가?’ ‘ 공간에 있지 않아도 교회적 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본질은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들이 진리와 선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의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내가 교회다’라는 강조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사람 자신에게 적용한 것도 방향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다’라는 말 역시 조금 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교회 전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실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더 넓은 의미의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안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 되어 있는가, 주님이 중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중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오무’를 강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뒤이어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없앴는가보다 무엇이 살아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계급이 없고, 정치가 없고, 임직헌금이 없고, 건물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생명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직분과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어도,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설교의 ‘오무’는 목적이라기보다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의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워낸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그것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바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적 설교의 중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문장’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들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완성의 사건이며, 동시에 사람이 주님을 따를 때 겪는 시험과 자기 부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 참으로 깊어지려면 ‘십자가를 믿는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후반의 ‘목사가 노동하는 교회’라는 강조도 스베덴보리의 ‘용도’ 개념과 접점이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육체노동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하며,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어려움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노동 그 자체를 영적 수행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선한 용도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영적 성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설교에서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난을 ‘메기’에 비유하면서 영혼을 깨우는 축복의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이 영적 각성을 위해 보내신 도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주님은 악이나 고통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발생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고, 그것을 사람이 거듭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통을 보내셨다’보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 초반에서 스트레스와 근심이 당뇨, 비만, 암 등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설교의 영적 주제와는 별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육체 질병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갖기 때문에 영적 상태나 심리적 스트레스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에 매달리다가 삶의 중요한 것을 잃을 있다’는 설교적 비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에서도 설교의 중심 진리와 주변의 과도한 표현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대목은 ‘묵은 것을 얼마나 벗어내느냐’라는 표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오히려 익숙한 형식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낡은 proprium의 습관과 사랑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 가죽 부대’는 새 예배 형식이나 새 교회 모델보다 먼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조금 더 깊게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장로 제도, 당회, 임직헌금, 건물 중심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없앤 새로운 교회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 또 하나의 묵은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본질적이다’, ‘우리는 제도를 벗어났다’는 자의식이 굳어지는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던 개혁 자체가 새로운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언제나 ‘저쪽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한 교회도 내일이면 낡을 수 있고,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집착하면 새로운 제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외적 형식을 한 번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수정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자면, 새 포도주는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과 진리이고, 새 가죽 부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워진 사람의 마음과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교회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가, 내 전통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위와 익숙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요한 목사 자신에게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장로들이 문제다’, ‘전통 교회가 문제다’, ‘건물 교회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제도주의와 자기 의가 내 안에는 없는가?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자기 의는 없는가? ‘나는 본질을 안다’는 교만은 없는가? 개혁의 영은 남의 낡음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안의 낡음을 벗겨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의 중심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가죽 부대는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교회 모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계속 자기 proprium 벗어내고 새롭게 되는 사람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외적 형식을 제거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내가 교회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에서 읽으면 더 깊어집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선언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가, 내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는가, 그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가,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용도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아닐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작은 공간에서도 참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무엇을 없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조직과 제도와 건물은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새 가죽 부대도 내일은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자신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무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표어도 결국 ‘오무’(五無)보다 ‘일유(一有)가 더 중요해집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없앴는가보다,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주님이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가장 깊은 자리이고, 이번 설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SY.89, 박요한 목사, ‘극우 정치병자 소굴이 된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상’ (2026071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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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의 목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종교란 인간에게 어떤 별도의 초월적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 삶의 자세를 변화시키는 메시지라고 규정합니다.

 

이 대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 묘합니다. 상당히 가까이 다가왔다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죽어서 천국 가는 ’만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고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스베덴보리에게도 상당 부분 통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들어가는 보상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지배적 사랑을 형성하고, 그 사랑에 따라 사후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으니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따라 산다면, 그 고백 자체가 천국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특히 도올이 말하는 ‘사랑을 베풀고 이웃을 보살피며 아름다운 윤리가 실현되는 공동체’라는 표현은 외형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종교를 단순한 신조의 동의로 보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 안에서 나타나야 하며, 선을 행하는 삶과 분리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도올이 한국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굳이 방어적으로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이 실제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가 계속 들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도올이 ‘기독교라고 말한들, 불교라고 말한들, 유교라고 말한들 똑같다’고 넘어가는 순간 스베덴보리와는 갈라집니다.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종교의 진리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해야 합니다. 선만 있고 진리가 필요 없다거나, 어떤 진리를 믿든 착하게 살기만 하면 모두 같다는 식으로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단순히 훌륭한 윤리적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도올에게 예수의 말씀은 인간을 ‘깨닫게 하고 변화시키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단순히 깨달음을 제공하는 가르침을 넘어 ‘생명을 주는 신적 진리’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잠시 뒤 도올이 사용하는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나라는 존재가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교의 ‘대각’이나 ‘해탈’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변화’라는 현상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변화의 근원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할 것입니다. 인간이 말씀을 깨달아 스스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을 질서 안으로 가져오시는 과정, 곧 ‘거듭남’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의 서문과 첫 번째 말씀 사이에 있는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표현을 세밀하게 분석합니다. 여기서 ‘’가 예수일 수도 있고 기록자인 도마일 수도 있다고 본 뒤, 결국 자신은 도마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문장, 곧 ‘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도마가 독자에게 제시한 일종의 해석 원리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올이 강조하는 ‘해석을 발견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도올은 단순히 교수에게 배우거나 책에서 뜻을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ChatGPT에게 물어서 얻는 해석 같은 것도 아니라며, ‘너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의 의미가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 발견이 자기 존재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그 말씀이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의 것이 됩니다. 머릿속에 알고 있는 진리와 사랑하여 행하는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말씀의 해석을 발견한다’는 것이 단순히 독자의 실존적 깨달음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자체 안에 이미 신적 질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 천적 의미가 있으며, 그것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참된 해석은 ‘ 삶에서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발견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발견은 말씀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진리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자체에도 중요한 경계가 됩니다. 우리 역시 어떤 문장을 읽고 스베덴보리를 가져다가 자유롭게 의미를 붙이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고,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과 속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 다음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이 어느 순간 본문을 듣는 일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올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매우 독특하게 해석합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식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도마복음에는 애초에 ‘영혼’이라는 카테고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맛본다’는 행위 자체에 주목합니다. 맛보는 것은 죽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행위이므로,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사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올은 오염된 음식을 먹는 비유를 듭니다. 먹는 행위 자체는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인데,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먹으면서 오히려 죽음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한국 기독교에 적용합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잘못된 성경 해석과 죄책감, 협박과 겁박의 종교를 계속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올은 ‘죽음을 맛본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는 도올 특유의 상당히 자유로운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다’라는 고대 표현 자체를 이렇게까지 현대 한국 기독교의 정신적 경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본문 자체에서 곧바로 나오는 결론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에 특정 정치적 집단까지 연결하여 ‘성경을 공부할수록 뇌가 경색되고 특정 정치세력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순간에는 신학적 해석과 도올 자신의 정치·사회적 평가가 뒤섞입니다. 이 부분은 구별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사람의 영적 죽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반대편 정치 성향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할 원칙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먹는다’는 발상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이며,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과 거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육체적으로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죽음에 속한 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의 죽음을 맞더라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도올과 스베덴보리는 아주 가까이 왔다가 다시 갈라집니다. 도올은 ‘아무도 죽음을 체험할 없다. 인간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적 경험의 차원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경계 너머를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으로서 삶이 계속되는 전환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다른 영들과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도올이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제거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를 오직 현세적 삶의 질로 가져온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현세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라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를 훨씬 급진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라는 영적 죽음에 빠지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도올이 ‘영생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밀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생’이라는 말을 훨씬 더 깊게 되찾습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 끝없이 오래 사는 ’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이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상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올이 처음 비판한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 신앙’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미래의 보상 상품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먼저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실제 삶에서 체어리티로 나타날 때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가 형성됩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턱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죽어서 천국 가려고 하지 말고 지금 땅에서 사랑하며 살아라’고 말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상당 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중요한 말을 덧붙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살아 형성된 사랑이 죽음 이후에도 당신의 삶이 된다.’ 현세와 내세는 서로 경쟁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그래서 도올이 너무 좋은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것을 결국 인간의 ‘깨달음’으로 수렴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해석을 발견하라 삶에서 깨달아라 인격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이루어라 죽음을 맛보지 말라.’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에는 한 분이 빠져 있습니다.

 

주님’입니다.

 

거듭남은 자기계발의 최고 단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서 스스로 고양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선도 진리도 생명도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유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도올의 ‘해석을 발견하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조금 바꾸어 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거기서 끝나지 말라. 진리가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진리를 발견한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말라. 진리를 통하여 나를 변화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도마복음과 정경 복음서 사이의 차이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도올은 도마복음이 서술을 제거하고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만 남겼기 때문에 더 순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행하심’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십자가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그 모든 과정 역시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의 어록에서 귀한 것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사가 없기 때문에 순결하다’는 결론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사가 불순물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서사’ 안에 주님의 구속과 영화라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도올에게서 상당히 좋은 질문 하나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생명을 먹고 있는가, 죽음을 먹고 있는가?’ 이것은 충분히 간직할 만한 질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알고, 심지어 스베덴보리를 많이 읽는 것 자체가 우리를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지성을 자랑하게 된다면, 진리의 지식조차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도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내가 발견한 탁월한 해석’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말씀의 속뜻도 결국 우리를 지적으로 놀라게 하기 위해 열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께 연결하고 우리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말씀의 해석을 삶에서 발견함으로써 죽음을 맛보지 않는 인간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인간을 말합니다.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죽은 교리를 경계하고, 삶 없는 신앙을 경계하며, 말씀을 실제 삶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중심은 다릅니다. 한쪽에는 ‘깨닫고 변화하는 인간’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도올을 보는 일은 바로 그 차이를 발견하면서도, 도올에게서 발견되는 진리의 조각을 버리지 않는 일이겠습니다. 그의 모든 말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그의 몇몇 과장 때문에 모든 말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을 삶에서 발견하라’, ‘신앙이 사랑과 이웃 돌봄으로 나타나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이 굳어질 수도 있다’는 그의 경고는 충분히 들을 만합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일관됩니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아마 그 한마디가 이번 도올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의 가장 깊은 접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갈림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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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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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사무엘하 121절로 6절, 곧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상당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의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인물 숭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전개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붙드는 두 가치를 ‘개혁’과 ‘애민’이라고 말하며,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는 ’,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인물을 우상화하여 그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비전으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이승만도, 명성황후도, 오늘의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이 다윗에게 한 한마디입니다. ‘당신이 사람이라.’ 이 말이야말로 이 긴 설교 전체를 영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즉시 분노합니다. ‘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악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다루는 인간의 proprium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기 악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의 악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봅니다. 그래서 남의 탐욕은 탐욕으로 보면서 자기 탐욕에는 이유가 있고, 남의 권력욕은 악으로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의 권력욕에는 명분을 붙이며, 남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거짓에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좌우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가진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설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정치적 진영을 넘어서는 영적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인간을 우상화하지 마세요’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인간을 우상화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성공, 내가 원하는 힘을 어떤 지도자가 대신 구현한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통해 확장된 자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우상화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결국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 사람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인물을 우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내일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왼쪽에 새로운 우상을 세울 수도 있고, 왼쪽의 우상을 비판하면서 오른쪽의 인물을 절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누구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우상 교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의 죄를 끔찍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며, 마침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잘 짚었듯이 성경은 다윗의 ‘앞모습’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이것 자체가 인간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악을 자기 악으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라는 일반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입니다’라고 자기 삶에서 특정한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물리치려 하는 데서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단의 ‘당신이 사람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고발이 아닙니다. 다윗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는 진리의 빛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승만, 명성황후, 한국 교회의 극우적 정치교육, 특정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의 문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비판합니다. 박요한 목사가 제시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평가는 별도로 검증하고 논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 가운데 누가 악한가?’가 아니라 ‘ 말씀을 듣고 있는 안에는 이것이 없는가?’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이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는 데서 끝났다면 아무런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을 정확하게 평가하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설교가 정말 깊은 영적 설교가 되려면, ‘ 정치인들이 사람이다’, ‘ 극우 기독교인들이 사람이다’, ‘ 지도자들이 사람이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리고 나도 사람일 있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단의 비유가 오히려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들어오면 설교의 정치적 소재 전체가 갑자기 거듭남의 문제로 바뀝니다.

 

박요한 목사가 강조하는 ‘애민’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상처 입은 자의 손을 만져 주고 안아 있는 따뜻한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설교 후반의 말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선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리가 참이라면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민’과 ‘체어리티’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연민이나 따뜻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악을 제지하는 것이 체어리티이며, 때로는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분노를 쏟아내는가’가 아니라 ‘이웃의 참된 선을 위하여 행동하는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박요한 목사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거부하면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고 말한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와 진리를 함께 붙들려는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준을 박요한 목사 자신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 안에는 정치적 반대편이나 역사적 인물을 향한 매우 거친 표현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번 설교가 스스로 제시한 ‘기독교인은 써야 언어와 쓰지 않아야 언어가 있다’는 기준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조롱을 비판하면서 상대편을 조롱한다면, 주장하는 진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냐가 아니라, 그 언어를 움직이는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특히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쉬운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였던 것이 어느 순간 ‘악인이라고 판단한 상대를 미워하는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정의로운 분노처럼 보이지만 영적 기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행위의 외형만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애민’은 매우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참된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민’을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내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사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의 인간됨을 부정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체어리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후반에 소개되는 어린 학생의 질문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치인도 사랑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그 정치인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박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여부와 구체적 맥락은 별도로 확인해야 하지만, 박요한 목사가 이 사례를 통해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상대를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신앙은 체어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은 거부해야 하지만 사람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악과 거짓이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인간 집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거부하면서도 사람에게 선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할수록 더욱 어려우면서도 더욱 필요한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제목 ‘한국 교회는 어떻게 극우 양성소가 되었나?’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극우 양성소’는 문맥상 낡고 부패한 종교체제, 권력과 결탁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옛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하고,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제도와 간판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가장 깊은 자리는 교단 총회도, 정치적 입장도, 예배 형식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속 사람입니다. 내가 진리를 이용하여 남을 심판하는가, 아니면 그 진리가 먼저 나를 심판하게 하는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내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참된 개혁에 더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설교의 ‘개혁’과 ‘애민’이라는 두 기둥도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혁과 애민’이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가치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의 결합으로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고 개혁하게 하며, 선은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개혁은 정죄가 되기 쉽고,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 둘이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국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궁 안에 홀로 서 있는 나단과 다윗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한 사람은 그 진리 앞에 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을 제거할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제거한다고 자기 안의 악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나단’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양심을 통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 때로는 실패와 수치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때 proprium은 즉시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 사람도 그러지 않았는가’, ‘저쪽은 심하지 않은가’, ‘내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모든 비교를 멈추고 주님 앞에서 ‘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의 우상을 깨뜨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앞에서 안의 proprium 내가 만든 우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물리치며, 자리에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나게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품었다는 교육의 비전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에게 ‘누가 좋은 정치인이고 누가 나쁜 정치인인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절대화하지 않는 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볼 수 있는 법,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는 법, 약한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돌이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라면 그것은 특정 정치 진영의 다음 세대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양심을 길러 주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결론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에 악한 사람이 많아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편의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할 때,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할 때,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남을 향해 들었던 손가락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시작됩니다. ‘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심판의 말씀이 오히려 거듭남의 문이 됩니다.

 

 

 

SY.91, 박요한 목사, ‘내가 장로와 당회를 없애버린 이유’ (2026072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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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85, 박요한 목사, ‘내 어머니 같은 나의 하나님 -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어린아이 같은 신앙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는 마태복음 21장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사건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 종교성과 어린아이 같은 신앙, 하나님과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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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이 처음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입니다. ‘예수는 정말 살았는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람인가?’입니다. 도올은 요세푸스의 역사 기록에는 세례 요한이 비교적 분명하게 등장하는 반면 예수에 대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자료가 빈약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예수와 역사학이 복원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드라마적 구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에 관한 동시대의 외부 기록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풍부하지 않다’는 것과 ‘예수에 관한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도올 자신도 결국 예수를 완전한 허구의 인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원한 X’라고 부르면서도, 예수의 죽음 이후 그를 향한 강렬한 기억과 운동을 낳은 어떤 역사적 진원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도올의 실제 관심은 ‘예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후대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상에서 역사적 인간 예수를 얼마나 분리하여 찾아낼 있느냐’에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와 도올의 방향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도올은 후대의 ‘그리스도’를 걷어내면서 그 아래 묻혀 있는 ‘인간 예수’를 찾으려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질문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라는 인간 안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셨는가?’입니다. 도올에게는 ‘인간 예수 후대에 신화화된 그리스도’라는 방향이 강하다면, 스베덴보리에게는 ‘여호와 인성을 취하심 시험과 승리 인성의 영화 신적 인성’이라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는 단순한 ‘위대한 종교인의 전기’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에게 훌륭한 가르침 몇 가지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영계에 극도로 팽창한 지옥의 세력을 제압하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회복하시며, 동시에 취하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성육신 이해에서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기적, 시험, 십자가, 부활 등을 걷어내고 ‘예수의 순수한 말씀’만 남기면 더 본래적인 예수에게 가까워진다는 도올의 생각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주님의 생애에서 가장 깊은 차원을 제거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도올의 문제 제기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기존 기독교가 들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실제로 알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에 관한 교리만 알고 있는가?’입니다. 도올이 바울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바울에게는 ‘예수라는 인간’이 거의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바울에게 중심은 갈릴리를 걷고, 사람을 만나고,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비유를 말씀하시고, 죄인들과 식사하신 예수보다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라는 신학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도 그냥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를 아무리 정확하게 고백해도 그분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셨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셨으며, 무엇을 선이라고 하셨는지를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이 ‘교리화된 그리스도’ 뒤에 가려진 예수의 실제 말씀과 삶을 다시 보자고 요구하는 것은 기존 기독교에 유익한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올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바울이 ‘예수 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운동’을 했고, 그 운동을 통해 교회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초기 교회는 승천한 예수가 곧 다시 돌아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기다리는 ‘종말론적 회중’이었으며, 심지어 이를 현대의 극단적 휴거 집단과 비교합니다. 예수가 오지 않자 재림을 계속 연기하다가 결국 ‘여기서 궁리를 하자’는 방향으로 신학이 변했다고 풍자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짚어야 할 과장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 강렬한 종말론적 기대가 있었다는 사실과 초기 교회 전체를 현대의 시한부 종말론 집단과 사실상 동일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처음에는 어느 해에 재림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했다가 오니 계속 연기했다’는 식의 서술은 이 강의에서 도올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설명과 강연자의 풍자적 재구성을 구별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도올과 스베덴보리가 뜻밖에 가까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림을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구름을 타고 지구로 다시 내려오시는 사건으로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도올과 전혀 다릅니다. 도올은 문자적 재림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 자체를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가 품고 있는 속뜻을 밝힘으로써 ‘구름을 타고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새롭게 풉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그 가운데 나타나는 ‘영광’은 말씀의 내적, 신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은 실패하여 연기된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의미를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도올은 ‘ 왔다’고 말하고,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오심의 방식을 잘못 알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강의의 중반 이후부터 도올의 주장은 더욱 대담해집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교회가 ‘바울의 철학만으로는 되겠다.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른바 ‘마가 교단’에서 일종의 드라마 팀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의 예수 전승을 수집하여 최초의 복음서 드라마인 마가복음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마가가 성공하자 마태가 나오고, 이어 누가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요한이 종합했다는 식입니다. 심지어 복음서가 처음에는 중동의 구전문화나 판소리처럼 ‘챈팅(chanting), 곧 일정한 가락을 붙여 낭송하는 공연적 형태였을 것이라는 설명까지 합니다.

 

이 부분은 특별히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복음서가 구전 전승과 공동체적 전승 과정을 거쳤다는 문제,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가운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견해 등과 ‘마가 교단이 드라마 작가 그룹을 팔레스타인에 파견했다’는 이야기는 동일한 수준의 역사적 명제가 아닙니다. 후자는 이 강의만 놓고 보면 도올의 상당히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과 재구성이 들어간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설명’과 ‘입증된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귀담아들을 통찰은 있습니다. 복음서가 현대적인 의미의 녹취록이나 CCTV 기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자료를 선택하고 배열하며, 각각의 공동체와 신학적 목적 속에서 예수의 생애를 증언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러므로 드라마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다’와 ‘역사적 사실을 창작했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올은 이 둘 사이를 때때로 너무 빨리 건너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강의의 중심인 ‘도마복음’이 등장합니다. 도올에게 도마복음은 거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말씀 114개가 어록 형태로 수록되어 있고, 정경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탄생과 활동을 연결하는 서사, 십자가, 무덤, 부활, 승천 등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도올은 바로 이 ‘비어 있음’을 대단히 중요하게 봅니다. 후대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들어가기 이전의 ‘순결한 예수’가 여기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늦다는 견해를 강하게 거부하고, 오히려 이것이 예수 전승의 원초적 형태를 보존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논리적으로도 한번 점검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가 ‘없다’는 것과 그 문서가 ‘십자가와 부활 전승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문서의 장르가 ‘어록집’이라면 애초에 서사적 사건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그 장르의 특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 서사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의 창작이다’라는 결론은 그 사이에 상당한 논증을 더 필요로 합니다. 강의에서는 이 간격이 너무 쉽게 넘어가집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복음서의 ‘말씀’과 ‘사건’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 진짜이고 사건은 후대에 덧붙은 신화라는 식으로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애는 하나입니다. 주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 병자를 고치신 것,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 십자가를 지신 것,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는 역사적 층위가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내적 과정, 곧 지옥들과의 싸움과 인성의 영화라는 더 깊은 신적 실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올이 복음서에서 ‘신화’를 제거하여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가 ‘신화’라고 부르는 대목 안에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발견합니다.

 

특히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전통 기독교의 형벌대속론과 스베덴보리의 십자가 이해는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부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성자에게 대신 가하여 진노를 만족시켰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옥들과 싸우신 마지막 시험이며, 그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써 취하신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과정의 절정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이 기존 기독교의 ‘우리 죄를 대신하여 벌받은 예수’라는 도식을 문제 삼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비판 가운데 들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후대 교회가 만들어 신화적 예수상이다’로 넘어가면 스베덴보리와는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도마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아름답고 깊은 예수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문헌이 정경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의 모든 내용을 거짓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 말이 사람을 주님께, 선과 진리에, 체어리티의 삶에 이르게 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그러므로 도마복음이 사복음서보다 순결한 복음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예수의 육성 어록을 많이 보존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 안에 천적, 영적 의미가 질서 있게 들어 있고, 그 상응을 통하여 천국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적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실제로 하셨을 가능성이 높은 말들을 가장 오래된 형태로 모았다’는 역사비평적 가치와 ‘이것이 신적 말씀인가?’라는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도올의 접근에는 흥미로운 역설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신화에서 해방’하여 원래 예수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게 ‘신화적 요소’를 하나씩 제거하고 나면 마지막에는 오히려 주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지가 사라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는 훌륭한 말씀을 남기고 진실하게 살다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위대한 스승으로 남습니다. 실제로 강의 후반에서 도올이 그리는 예수상은 상당히 그 방향으로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묻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친히 오셔야 했는가?

 

좋은 윤리적 가르침만 필요했다면 선지자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새로운 철학만 필요했다면 또 하나의 현자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와 영계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게 선과 진리를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옥의 세력이 팽창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직접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을 제거하면 성육신의 우주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강의 마지막에 도올은 도마복음을 통한 기독교의 재건을 한국인의 주체성 문제와 연결합니다. 서양에서 수입된 기독교를 마치 강대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처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국인의 상식과 미학적·신앙적 감각으로 기독교를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는 21세기를 견딜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대목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반은 상당히 공감되고 반은 경계하게 됩니다. 신앙을 특정 문화의 옷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옳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적 체계 전체를 곧 주님의 진리 자체로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부터 당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이신칭의, 형벌대속적 구원 이해 등을 매우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전통이 그렇게 가르쳤으니 그대로 믿어라’는 태도를 스베덴보리 역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를 벗어난 자리에 ‘한국인의 감각’을 최종 기준으로 세운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서양도 기준이 아니고 한국도 기준이 아닙니다. 보수도 기준이 아니고 진보도 기준이 아닙니다. 도마복음도 기준이 아니고 스베덴보리라는 인간 개인도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주님이며,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이번 강의를 통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깊이 배울 수 있는 지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올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전제를 낯설게 만들어 다시 질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 자신과 예수에 관한 신학을 구별해 적이 있는가?’, ‘재림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복음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 정경 밖의 초기 기독교 문헌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가?’ 이런 질문들은 충분히 유익합니다.

 

그러나 도올에게서 멈추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가 ‘신화’라고 제거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역사적 인간 예수’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 인간 안에 계셨던 ‘여호와’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도올은 교회가 만든 그리스도에게서 역사적 예수를 구해내려 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서 인성을 입고 오신 여호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전자는 우리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그분의 선과 진리로 거듭나는 사람’으로 데려갑니다. 예수의 말씀을 존경하는 것과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번 도올 김용옥을 ‘틀린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질문 때문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묻지 않던 것들을 다시 묻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충분히 따라간 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대어 보면, 기존 기독교와 도올 가운데 어느 한쪽을 단순히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풍경이 열립니다. 전통 기독교가 십자가를 이해한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지고, 도올이 십자가를 후대의 신화화 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에도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문자적 재림론에도 물음을 던지고, 재림 자체를 초기 교회의 실패한 기대처럼 취급하는 데에도 물음을 던집니다.

 

아마 이것이 앞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누구의 편에 서서 상대방의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는 곳에서는 진리를 기뻐하고, 거짓이 섞인 곳에서는 그것을 분별하되, 그 사람 전체를 그 오류 하나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올의 날카로운 질문도 받고, 그의 지나친 역사적 재구성도 경계하고, 기존 기독교의 소중한 고백도 보존하면서 그 안에 굳어진 인간적 전통 역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스베덴보리를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작업조차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열어 보여 준 말씀과 영계의 질서를 도움 삼아, ‘ 모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오래 붙들수록, 사람을 너무 빨리 ‘우리 ’과 ‘저쪽 ’, ‘옳은 사람’과 ‘틀린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SY.90, 도올 김용옥, ‘종교라는 게 도대체 뭐냐?’ (20251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도올은 강의 시작부터 종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호하게 규정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죽은 뒤 천당에 가려는 신앙을 ‘도피세적’이라고 비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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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일화, 아토스 체험, 수도 영성의 가치 등을 소개했다면, 이번 영상은 그 관심이 어떻게 한국 개신교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교육 과정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에는 수도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 그 출발점에 있었던 ‘거룩한 삶을 배우고 전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의 직접적인 계기로 제시하는 것은 세겜의 야곱의 우물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만난 한 수도사입니다. 영상의 자동자막은 지명과 상황을 상당히 흐트러뜨리고 있어 세부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사라진 지역에서 홀로 수도원을 지키던 노수도사가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취지로 말하고, 이어 강문호 수도사에게 ‘수도사를 양성해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말을 자신의 표현대로 ‘5 볼트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여기에서 수도학교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대목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반드시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떠나지 않는 ’ 자체가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교회의 생명은 외적 규모나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 그리고 그 선을 밝혀 주는 진리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 교회의 본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그 지역에 그 수도사 한 사람만이 주님을 대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앙적 고백으로 읽으면 상당히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특정 수도원이나 수도사에게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지역에서 마지막 기독교인이 떠났다고 해서 그곳에서 주님까지 떠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교회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양심과 선을 향한 애정이 남아 있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삶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 수도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기보다, ‘ 수도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데서 찾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문호 수도사가 곧바로 ‘수도사 파송’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선교사 파송에는 교통비와 생활비, 활동비 등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미 형성된 수도원에 수도사를 보내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발상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선교의 효율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파송하는가?’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도사라는 외적 신분을 얻는 것과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어쩌면 ‘수도학교를 만들자’가 아니라 그보다 앞에 있는 ‘거룩한 영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거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도 아니고, 금욕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룩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께로 향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조금씩 물러가며,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실제 이웃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그것을 돕는 하나의 외적 형식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룩은 아닙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처음 열두 명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훈련하여 보내셨다는 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열두 명이 모이고, 계속 지원자가 생겨 스물넷, 마침내 서른여섯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은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표지는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적게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외적 성공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과 그 목적에서 나오는 ‘수단’, 그리고 마침내 맺히는 ‘쓰임(use)’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사람이 모였는가?’보다 ‘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수도사가 배출되었는가?’보다 ‘그들의 proprium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 기까지 이어졌는가?’보다 ‘ 과정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학교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신학교도, 교회도, 선교단체도, 수도원도,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모임도 똑같습니다. 지식과 제도가 커졌는데 자기 사랑도 함께 커진다면 외적 성장은 내적 성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사도 없고, 교수도 없고, 교재도 없고, 공부할 교실도 없었다’며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고 회고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합니다. 아무 기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고 교재와 커리큘럼을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구합니다. 고대·중세·현대 수도원, 수도원의 역사와 영성, 아토스와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공부하도록 구성한 것도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기독교 수도 전통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중심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도원의 역사와 위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수록 자칫 ‘비범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금식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절제했는지가 수도 영성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복음의 중심이 조금씩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속해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곳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주님’입니다. 수도사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도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 말미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마르는 빨래가 어디 있느냐’는 취지로 초기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대목은 오히려 수도학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영적 훈련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 무엇을 붙드는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시행착오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숙의 증거도 아닙니다. 자신의 오류를 보고 인정하며 돌이키는 과정까지도 주님은 거듭남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루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고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이후 수도학교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미리 가져와 판단하지 않고, ‘출발 당시의 영상’ 자체로 읽는 것이 가장 공정하겠습니다. 이 영상 속 강문호 수도사에게서는 분명한 열망이 보입니다. 자신이 해외 수도원들을 다니며 받은 충격과 감동을 한국 개신교 안에 소개하고 싶었고, 그것을 일회성 세미나로 끝내지 않고 사람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출발점에 조용히 하나의 문장을 덧붙인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속을 새롭게 하시도록 하라.’ 수도복도, 수도학교도, 커리큘럼도, 금욕도, 공동생활도 모두 외적 그릇입니다. 좋은 그릇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이며, 그것이 일상의 체어리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가장 정교한 수도 제도도 외적 형식에 머물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수도원 밖에서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시작된 ‘수도학교’의 꿈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길은 수도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자기 공로를 낮추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살피며, 주님께 모든 선의 근원을 돌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학교의 진정한 열매는 졸업생 명단이나 수도원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룩한 영을 전하는 학교’라는 강문호 수도사의 처음 소망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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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를 설명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AC를 읽으며 배운 교회의 영적 역사를 생각하면 이 표현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서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홍수 이전인 가인에게 어떻게 양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먼저 가장 분명한 원칙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내적 구조는 같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오늘날 사람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을 사랑하면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이 천적 구조를 잃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0에서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아니라 영적 씨가 있으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선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심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과 이후의 인간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 퍼셉션, 고대교회 = 양심’이라는 기본 구별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앞서 AC.224를 해설하면서도 이 문제를 한 번 만났습니다. 3의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두고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표현하면 시대가 뒤섞인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양심의 흔적’보다는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AC.359에서는 왜 스베덴보리 자신이 conscience’라고 했을까요? 여기서 첫 번째로 주의할 것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4에서 다루는 것은 이미 타락이 시작된 이후의 태고교회 후손들과 거기서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입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하나로 존재하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점차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고, 마침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되어 가는 과정을 표상합니다. 즉 가인은 퍼셉션이 가장 충만했던 태고교회의 전성기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적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 안에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359 conscience’는 노아 이후 영적 인간의 양심이 이미 가인에게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10에서 스베덴보리가 매우 분명하게 설정한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무너집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실수로 conscience라고 썼으니 사실 perception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AC.359의 문장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입니다. 따라서 두 진술을 모두 보존하면서 그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실마리가 앞의 AC.224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곳에서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  여호와의 얼굴들’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딕테이트(dictate) 원인이 되며,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합니다. 즉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지만 그 내적 딕테이트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퍼셉션을 가진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의 방식으로,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AC.359에 비추어 보면, 여기서 핵심은 conscience’라는 단어 하나를 시대 구분의 기술적 용어로만 읽기보다 Jehovah said’, 곧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아직 가인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여기서 특별히 perception dictated’가 아니라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AC.359 자체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전체 문맥에서 한 가지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가 교리로 굳어지고 있으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하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합니다. 따라서 AC.359의 가인은 태고교회의 온전한 퍼셉션을 가진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가인은 오히려 매우 흥미로운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가인에게 퍼셉션이 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고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 후 인간에게 마련된 새로운 영적 구조와 양심의 형성을 명백히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AC.310에 따르면 홍수 후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나 선한 의지가 본래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할 능력은 남아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진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양심을 심어 주십니다. 이것이 고대교회와 오늘날 영적 인간에게 속하는 본격적인 양심의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conscience’와 홍수 후 영적 인간의 conscience’를 완전히 동일한 구조라고 단정하는 것보다는, AC.359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멀어져 가는 가인에게도 아직  잘못을 내적으로 알리는 딕테이트가 있었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습니다. 그의 내적인 것들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AC.359가 강조하는 결정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에서 죽은 행위와 예배가 생기고,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의 내적 딕테이트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 말씀을 따라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는 길로 돌아서지 않았고,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라는 더 깊은 원리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강제로 선하게 만든다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이 사라지고, 따라서 진정한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행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러한 장면입니다. 강제가 아니라 딕테이트이고, 심판에 앞선 경고이며, 자유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하도록 하시는 자비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시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우리는 가인 시대의 홍수 이전 인간이 아닙니다. AC.310이 설명하듯 우리는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 구조에 속하며, 주님께서는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이것이 정말 진리를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proprium 상처받았기 때문인가?’, ‘내가 옳음을 주장하는 동안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내적으로 살피게 될 때, 그 양심의 딕테이트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359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반복해서 거스르면 처음에는 잘못인  알면서 하는 ’이었던 것이 점차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 ’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에도 분노 그 자체가 마지막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분노에서 돌이키지 않자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는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단순히 죄를 지은 뒤 우리를 괴롭히는 기능이 아니라, 악이 아직 행위와 습관과 지배적 사랑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결국 AC.359의 이 작은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전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그 퍼셉션은 교회가 타락하면서 점차 쇠퇴했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구조가 달라졌으며, 주님께서는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AC.359 conscience dictated’를 이 두 시대의 구별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별을 하고 나면 AC.359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내적 딕테이트를 정확히 어느 시대의 기술적 범주에 넣을 것인가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도 주님의 자비는 먼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악을 향하여 가는 바로 그 길목에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든,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이든, 그 모든 선한 내적 딕테이트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중요한 순간은 바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가인처럼 자기 분노를 붙드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보고 체어리티로 돌아서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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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앞에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으며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짧은 글이지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57-358에서 가인의 ‘분하여 ’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안색이 변함’, 원어로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상태가 최종적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의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가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까지 배운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인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후손을 다루는 계열에 속하는데,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이 아니라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를 외부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양심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퍼셉션 대신 진리의 지식을 기초로 양심이 형성됩니다. AC.310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59의 ‘conscience’를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에 속한 영적 인간의 양심과 똑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conscience’라는 말을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쳐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conscience dictated’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인이라는 상태가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와도 다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를 표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과 하나였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점차 분리되어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시대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온전히 보존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점차 쇠퇴하고 무너져 가는 과정에 속합니다. 앞서 창3을 살펴볼 때에도 타락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퍼셉션이 크게 약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점에서 AC.359의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 주어질 새로운 질서의 양심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체어리티에서 벗어나고 있는 그에게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내적으로 알리고 제지하는 어떤 딕테이트(dictate)가 있었다는 뜻으로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앞의 AC.224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와 평화와 모든 선이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의 원인이 되고,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가 인간의 서로 다른 영적 상태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짐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4:6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상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고 돌이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분노하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시지도 않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악이 실제 행위로 굳어지기 전에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359의 중심은 ‘가인에게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체어리티에서 떠나고 있는 가인에게도 주님의 내적 경고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 경고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틈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여기서 시대적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아니므로 그들의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형성하시는 양심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분노와 질투와 자기 의가 일어날 때, ‘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이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proprium인가?’, ‘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게 하는 양심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이것은 AC.359의 가인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양심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말씀의 원리를 오늘날 우리의 영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AC.359는 매우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났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해서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먼저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그것을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마련하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이제 그 경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의 갈림길에 들어섭니다.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 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

AC.359.심화 1.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부터인데, 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하는가? AC.359를 읽다가 상당히 중요한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6의 ‘여호와께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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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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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6:26;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6:26의 제사장 축복과 시4:6의 기도에는 공통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안에 한 걸음 더 깊은 속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얼굴을 드심’이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할까요? 그 열쇠는 먼저 말씀에서 ‘얼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마음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달라지고, 기뻐하면 밝아지며, 슬퍼하면 어두워지고, 분노하면 또 다른 모습이 됩니다. 특히 태고시대의 사람들은 내면과 얼굴이 완전히 일치하여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얼굴’은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존재의 내적인 상태를 표상하기에 매우 적합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내적인 것, 곧 신적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간단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가장 내적인 것은 인간처럼 여러 감정이 서로 교대하는 상태가 아니라 변함없는 신적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을 향하여 흘러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민6:26의 의미가 깊어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AC.358은 ‘주님께서  얼굴을 사람에게 드시는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35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하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자비가 나오고, 그 자비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 인간 안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것입니다.

 

4:6은 여기에 ‘’이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을 더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님의 얼굴은 단지 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춥니다.’ 이것은 AC.358 첫머리의 설명과 놀랍도록 잘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도 내적 애정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면,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은 주님의 내적인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저를 좋게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가  사랑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게 하소서’라는 깊은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칠 때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그의 선을 원하며,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평강’까지 연결하면 민6:26의 구조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얼굴을 드심과 평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어 인간의 내적 질서를 바로잡을 때 평강이 뒤따릅니다. 이 평강은 단순히 외부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얼굴을 든다’는 표현을 자연적인 의미와 혼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다’, ‘얼굴을 들다’라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58의 속뜻은 오히려 자기 높임과 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때입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의 내면을 밝히고 그 사랑이 외적인 삶에 나타날 때 비로소 얼굴이 들립니다.

 

이제 이와 반대 방향의 표현인 렘3:12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는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입니다. 직역하면 ‘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바로 AC.358에서 설명하는 ‘얼굴이 들림’과 ‘얼굴이 떨어짐’의 대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유입니다.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과 ‘긍휼’, 곧 자비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얼굴을 드시는 것은 자비에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얼굴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일까요? AC.358의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실제로 변하는 쪽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57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됩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중단되어 얼굴이 실제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함으로써 주님의 변함없는 자비를 다르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가 바로 그 예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AC.357에서 설명했듯이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기주장을 강화하고,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에 분노하면서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 내적 변화가 ‘얼굴이 떨어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렇게 민6:26과 창4의 가인을 나란히 놓으면 매우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며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거부하고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인간 자신의 얼굴이 떨어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시4:6의 기도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미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얼굴, 곧 우리의 내적인 것이 주님을 향하도록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그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유입’과 ‘수용’의 질서도 들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과 선은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시는 것은 신적 사랑과 자비의 유입을 나타내고,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체어리티 가운데 들어가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하면 주님의 빛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삶은 결국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AC.351에서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자비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주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향합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흘러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시작된 자비가 인간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얼굴’의 상응은 매우 아름다운 순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시면 그 자비에서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의 내적인 것이 변화하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그의 얼굴과 삶을 통하여 빛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적 상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속에 있는 사랑이 겉으로 그대로 빛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떠나면 얼굴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질서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경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에 반발하면서 내면이 변했고, 그 변화가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얼굴의 들림과 떨어짐은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거부하는가를 보여 주는 상응입니다.

 

따라서 민6:26의 축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단순히 일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비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임하고, 그 자비가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며, 그 체어리티로 인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평강을 누리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4:6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역시 같은 깊이를 가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그분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를 향하여 계시는 주님의 얼굴, 곧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내적인 것이 돌이켜져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렘3:12은 바로 그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확인해 줍니다.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긍휼이 있는 자임이라.’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긍휼이 있는 ’, 곧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는 있어도 주님 안의 자비가 그 반대의 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세 구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질서가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그분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얼굴을 인간에게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그 얼굴이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선이 인간의 내면에 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이 ‘떨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는 주님의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시고,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며,  체어리티가 우리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모든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다시 빛나게 하소서.’ 이것이 AC.358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말씀 속에서 열어 보여 주는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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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 얼굴이 떨어짐(falling) 상징적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태고시대의 사람들은 얼굴이 내면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장과 기만은 당시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이 얼굴 상징되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lifted up) 하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fall)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s upon man) 표현됩니다. (6:26; 4:6) That by the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and of its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얼굴이 떨어진다(face falling)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예레미야에서 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face falling,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face of Jehovah)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상징하고,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makes the face to fall),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Theface of Jehovahis mercy, and when helifts up his face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makes the face to fall,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의 ‘안색이 변하니’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 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히브리적 표현과 영어 번역은 훨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his faces fell’, 곧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하며, 얼굴이 ‘들리는 ’과 ‘떨어지는 ’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아름답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단순한 육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밖으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평안과 불안이 얼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말씀의 상응에서 얼굴은 인간의 내면을 나타내기에 매우 적합한 자연적 형상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시대 사람들에게 있었던 매우 특별한 상태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얼굴이 내면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태고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아직 오늘날 인간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속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얼굴을 통하여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얼굴로는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을 ‘괴물 같은 ’으로 여겼습니다.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속으로 불쾌해도 웃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친절한 얼굴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상대방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어느 정도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358이 말하는 것은 그런 예의나 자기 절제가 아니라 ‘가장과 기만(simulation and deceit)입니다. 실제 내면과 정반대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이것이 혐오스러웠다는 것은 그들의 천적 성품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내적 사랑에서 외적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속에는 하나를 품고 겉으로는 정반대를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삶의 질서를 찢어 놓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얼굴’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내적인 것을 상징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 들린다’와 ‘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 얼굴은 ‘들렸다’고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 상태가 악한 방향으로 변하면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의 내적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그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57과 연결하면 그 과정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결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합니다. 즉 ‘분노’와 ‘얼굴의 떨어짐’은 서로 별개의 현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내면 전체의 상태가 변하고, 그 변화가 ‘얼굴이 떨어짐’이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여기서 민6:26의 제사장 축복이 매우 중요한 반대 그림을 제공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을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과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심’은 정확히 반대 방향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실 때입니다. 자연적 의미에서 얼굴을 든다는 말은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지만, 속뜻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인간의 내면을 밝게 할 때 그의 얼굴이 들립니다.

 

4:6의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얼굴이 ‘들리는 ’과 ‘빛나는 ’이 연결됩니다. AC.358 첫머리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고 했던 것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의 내적인 것에서도 체어리티가 빛나게 됩니다.

 

3:12은 반대 표현을 통하여 같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면,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곧이어 나옵니다. ‘나는 긍휼이 있는 자임이라.’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얼굴’과 ‘자비’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내적인 것을 상징하는데,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인간의 입장에서 그 자비와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도 바로 앞 AC.357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로우셨다가 다음 순간 얼굴을 떨어뜨리고, 인간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AC.357에서 분노는 실제로 인간에게 속한 것이라고 했듯이, AC.358에서도 마지막에 ‘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은 주님께서 가인에게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진노’와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방향을 바꾼 쪽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가인의 이야기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신앙과 사랑이 실제로 분리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가 생겼습니다. 이어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겼고, 그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노로 인해 ‘얼굴이 떨어집니다.’ 곧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것은 악이 인간 안에서 진행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교리적 오류처럼 시작된 것이 애정에 영향을 미치고, 애정의 변화가 결국 인간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꿉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교리는 단순한 지적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고, 어떤 거짓을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가와 연결되며, 그 사랑은 사람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사람 전체를 형성합니다.

 

AC.358에서 태고인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길게 설명하는 것도 이 때문에 중요합니다. 창4의 이야기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일어난 영적 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속과 겉이 하나였던 천적 인간의 상태가 점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가장과 기만의 가능성이 생기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서로 달라질 수 있는 인간 상태로 내려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이러한 깊은 변화까지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속에 있는 것을 무조건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기만은 다릅니다. 화가 난다고 그대로 화를 쏟아내는 것이 속과 겉의 일치는 아닙니다. 거듭남의 목표는 내면의 악을 외면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일치는 ‘악한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AC.358의 얼굴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실 때, 내적인 것이 변화하고, 그 선이 외적 삶을 통해 빛납니다. 말과 행동, 표정과 관계, 일상의 쓰임 속에서 내적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얼굴이 들리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면과 외면 모두가 어두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곧이어 주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표정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내적인 것들이 이렇게 변했느냐?’라는 영적 질문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 내면이 빛나는 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얼굴이 곧 내면을 나타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함’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357이 ‘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나는 순간을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얼굴’, 곧 내면 전체가 변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실 때, 곧 우리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때,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서 빛납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얼굴이 들림’과 ‘얼굴이 떨어짐’이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표현 속에 감추어 놓으신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 인용 심화 판단

 

AC.358은 별도 심화 가치가 충분합니다. 특히 민6:26과 시4:6을 묶어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라는 주제로 다루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렘3:12을 반대 방향의 보조 구절로 함께 사용하면 ‘얼굴을 드심’과 ‘얼굴을 떨어뜨림’의 상응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또 하나는 본문 앞부분의 ‘태고인들은 얼굴과 내면이 완전히 일치했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별도의 성경 인용 심화라기보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속·겉 사람의 관계를 연결하는 주제 심화로 발전시킬 만합니다. 다만 현재 창4의 흐름에서는 첫 번째 심화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 블로그 제목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AC.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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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천국의 비밀, AC358, 창세기 4장, 가인의 안색, 얼굴의 속뜻, 태고교회, 체어리티, 속 사람과 겉 사람, 성경의 속뜻

 

 

심화

 

1.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6:26; 4:6)

 

 

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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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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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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