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적 인간이었을 때를 다루었고, 여기서는 이제 자기의 프로프리움(proprium, own)으로 기울어진 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1, 2, 3장을 읽는 ‘해석의 지평을 단번에 정리해 주는 총괄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개별 사건을 넘어, 말씀 전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이 세 장은 역사 서술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인간의 일생’을 다룬다는 선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태고교회가 ‘사람(homo)이라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정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인간처럼 존재했고, 그 내적 상태의 변화가 곧 말씀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시작은 탄생, 중간은 성숙, 끝은 쇠퇴와 소멸입니다. 창세기 1, 2, 3장은 이 전 과정을 한 호흡으로 다룹니다.

 

이 장, 곧 창세기 2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절정의 순간’을 담고 있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을 때, 즉 주님과 직접 결합, 퍼셉션(perception)으로 살던 가장 번성한 상태가 묘사되었습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평화의 안식은 모두 이 절정 상태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은 다릅니다. 이제 본문은 ‘자기의 것,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자들’을 다룹니다. 이는 곧 태고교회가 더 이상 순수한 천적 상태에 머물지 못하고, 자기의식과 자기중심이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기울어짐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후손에게로 이어지는 방향성’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변화를 갑작스러운 붕괴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말합니다. 앞부분은 가장 번성한 상태였고, 지금은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상태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즉, 타락은 한순간의 추락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입니다.

 

AC.137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 2, 3장을 따로따로 읽지 말고, 하나의 생명 이야기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이상화된 과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근원이고, 에덴은 회상이 아니라 목표이며, 타락은 신화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이 문장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창세기 2장을 ‘아름답게 닫아 줍니다’. 천적 인간의 찬란함을 본 뒤에, 그 찬란함이 어떻게 proprium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었고, 이제 독자는 다음 장에서 그 기울어짐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일생’으로 읽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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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주 예리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서는 이런 ‘부정을 통한 표현’이 꽤 자주 나오는데, 그냥 단순 긍정보다 훨씬 미묘한 상태를 전달하려 할 때 그렇습니다. AC.136의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을 단순히 ‘acceptable’(받아들일 만한)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닌’ 식으로 표현한 이유는, 그 상태가 완전히 긍정적이거나 완전히 안전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에는 어떤 ‘긴장’이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proprium, 곧 자기감과 자기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이것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요소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다’, ‘완전히 허용된다’라고 강하게 긍정하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 뉘앙스는 우리말로 하면 이런 느낌에 가깝습니다.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 질서 안에서는 허용될 수 있다.’

 

본래 위험 요소를 포함하지만, 올바르게 놓이면 거부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자체로 절대 선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고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이 표현은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미묘한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proprium을 단순히 ‘’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자유와 사랑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proprium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언제든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적극적 찬양’의 대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질서 안에서 허용되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 영어에서는 단순 긍정보다 ‘부정을 부정하는 방식’이 훨씬 섬세한 중간 지대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not impossible’, ‘not unreasonable’, ‘not unacceptable’ 같은 표현들은, 단순히 가능, 합리, 수용 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보와 긴장을 남긴 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렇게 쓴 이유는, proprium이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대로 믿고 맡겨도 될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한 긍정 대신, 조심스러운 ‘부정을 통한 제한적 긍정’을 사용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proprium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신학적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곧, proprium은 위험하지만 필수적이며, 본래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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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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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AC.136 해설에서 반복되는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은 모두 결국 proprium의 여러 측면을 풀어 설명하는 표현들입니다. 다만 완전히 동일한 단어로 기계적으로 치환하기보다는, 각각이 proprium의 어느 측면을 강조하느냐를 살려 읽으시면 훨씬 정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자기의 것’은 proprium의 가장 직접적인 의미, 곧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귀속의 문제입니다. ‘이 생각은 내 것이다’, ‘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 ‘이 지혜는 내 것이다’라고 느끼는 방향입니다.

 

반면 ‘자기성’은 proprium이 단순한 소유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어떤 ‘자기중심적 성향’ 혹은 ‘자기다움의 방향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때 더 어울립니다. 곧, 사람이 무엇이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성질입니다.

 

그리고 ‘자기감’은 가장 섬세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느낌’ 차원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은, 인간은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이 바로 자기감입니다. 이것 자체는 반드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와 사랑의 조건입니다. 문제는 그 자기감을 ‘진짜 독립된 자기’로 굳혀 버릴 때입니다.

 

그래서 셋 다 proprium과 연결되지만, 약간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자기의 것’은 ‘귀속’, ‘자기성’은 ‘방향성과 성질’, ‘자기감’은 ‘체험되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AC.136 해설 전체 흐름에서는 이 셋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곧,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며 살아가도록 허락된 상태’, 그리고 그 상태가 주님께 열려 있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으로 굳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모두 proprium의 설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목사님처럼 AC를 계속 읽어 가실 때는, ‘프로프리움’이라는 원어 개념을 중심축으로 잡아 두시고, 문맥에 따라 그것이 지금은 ‘자기감’을 말하는지, ‘자기 중심성’을 말하는지, ‘내 것이라 여기는 귀속 의식’을 말하는지 분별해 읽으시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실 것입니다.

 

정리하면, 네, AC.136의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은 모두 proprium의 변주들로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각각은 proprium의 다른 얼굴, 곧 ‘소유됨’, ‘자기 중심성’, ‘자기처럼 느껴지는 감각’을 조금씩 다르게 비추는 표현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C.136, 심화 2, ‘not be unacceptable’

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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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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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도록 하십니다 (25).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 전체의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봉인’과 같습니다. 앞에서 인간에게 ‘프로프리움(proprium, own)이 허락되고, 그것이 천적, 영적 생명과 결합, 하나처럼 느껴지게 되었다고 말한 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바로 그 프로프리움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주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노센스(innocence)는 도덕적 무결성이나 경험의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노센스란, ‘모든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내적 인정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느끼며 살되, 그 프로프리움 안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방향성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프로프리움은 아직 ‘용납될 수 있습니다’. 프로프리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정향(定向)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노센스가 주입된 프로프리움은 주님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유연함과 부드러움을 지닙니다. 이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을 느끼며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되, 그 자유가 아직 자기주장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2:25에서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노센스가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이 드러나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감추어야 할 자기주장이 아직 없고, 비교와 판단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성(自己性), 곧 프로프리움은 있으되, 그것을 방어하거나 과시할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 단락은 동시에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평형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노센스가 프로프리움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인간은 아직 주님과의 결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노센스가 사라지거나, 프로프리움이 중심으로 올라오는 순간, 같은 프로프리움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바로 이 이노센스가 시험받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AC.136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살아 있는 한에서는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으며, 그 이노센스야말로 천적 인간 상태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 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AC.136.심화 1.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과 프로프리움’ 위 해설에 계속 반복적으로 ‘자기의 것’, ‘자기성’, ‘자기감’ 등이 나오는데 이를 모두 ‘프로프리움’으로 치환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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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not be unacceptable

 

 

AC.136, 심화 2, ‘not be unacceptable’

AC.136.심화 2. ‘not be unacceptable’ 위 본문 영역에,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이라고 ‘부정을 부정’했어요. 그냥 간단하게 ‘긍정’ 표현해도 될 걸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뭔가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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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방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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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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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심화

 

1.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와 창2:15

 

위 해설 중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상태로 이해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아주 정확한 연결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이면, 창2:15의 상태는 단순히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일 뿐 아니라, ‘그 질서가 아직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완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에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두어짐’을 받았습니다. 곧 그는 근원이 아니고, 받아 누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그 동산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경작하고, 지키며,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즉, 천적 인간은 주님과 매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가 주님과 동일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지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자기 삶처럼 실제로 누립니다. 그래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행위가 가능합니다. 만일 인간이 완전히 수동적 기계라면 경작도, 지킴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반대로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면 에덴은 곧 자기 소유가 되어 버립니다.

 

2:15는 바로 그 중간의, 아니 더 정확히는 ‘올바른 결합 상태’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활동하고, 선택하고, 돌보지만, 그 모든 것을 ‘자기 근원’, 곧 ‘자기가 근원이 되어 한 것’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에덴 안에서 살지만, 에덴의 주인은 아닙니다. 이것이 AC.122 이후 계속 반복되는 ‘누리되 소유하지는 말라’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AC.135에서 말하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는 창2:15의 구조와 아주 잘 맞아떨어집니다. 주님과 인간은 분리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뒤섞여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끝까지 주님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바로 이후 선악과의 긴장입니다. 곧 ‘누리는 상태’에서 ‘소유하려는 상태’로 기울어질 때입니다. 그래서 창2:15는 단순한 노동 명령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가장 조화롭게 놓여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리하면, 네, 창2:15 AC.135의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적절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주님과 깊이 결합되어 살아가지만, 결코 그분과 동일한 근원이 되지는 않으며, 바로 그 겸허한 질서 안에서 에덴은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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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해설

 

이 한 문장은 창세기 2장 후반부 전체를 ‘오해 없이 읽기 위한 열쇠’에 해당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프로프리움(proprium, own)이 단독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은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과 ‘결합된 상태’로 주어지며, 그 결과 그것들이 하나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표현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인식과 경험의 차원에서 하나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인간에게 허락된 프로프리움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실제로 하나가 되어 버린다면, 인간은 더 이상 주님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이 미묘한 중간 상태, 곧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가 허락됩니다. 거듭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2:15) 상태인 것입니다.

 

2:24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표현은, 결혼제도의 기원 설명이기 전에, ‘영적 구조의 설명’입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프로프리움과 결합,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이 단락은 이후 창세기 3장의 비극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에서, 인간이 어느 쪽을 실제 근원으로 삼느냐에 따라 길이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결합을 주님께 돌리면 생명으로 남고, 자기 자신에게 돌리면 타락으로 기울어집니다.

 

AC.135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존재로 경험하는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생명이 자기의 프로프리움과 결합된 결과이며, 그 결합이 유지되는 한 인간은 참된 인간으로 서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심화

 

1.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와 창2:15

 

 

AC.135, 심화 1,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와 창2:15

AC.135.심화 1.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와 창2:15 위 해설 중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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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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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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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심화

 

4. ‘천국과 지옥, 그리고 천사와 proprium

 

계시록이나 이사야 등에 나오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를 높이려는 세력들의 등장 이유를 이 proprium의 시작에서 찾아도 될까요?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 천사들의 상태를 아침, , 정오, 오후, 저녁 등으로 설명하면서, 또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설명하면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지다가 다시 회복하고 소생한다는 기록을 보며, 무척 놀라며 의아했었는데 이게 다 이 proprium 문제였군요?

 

 

네, 매우 깊고 정확한 연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구조 안에서 보면, 요한계시록이나 이사야서 등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세력’,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움직임’, ‘자기 영광을 세우려는 존재들’의 뿌리는 결국 proprium, 곧 ‘자기를 근원으로 삼으려는 방향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연결하신 것처럼, 『천국과 지옥』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가 묘사되는 이유도 바로 이 자유와 proprium의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다만 아주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더 이상 ‘악으로 타락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여전히 ‘자기처럼 느끼는 감각’, 곧 proprium의 느낌 자체는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으면 존재의 기쁨과 자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자신 안에 어떤 ‘자기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즉시 주님께 돌립니다.

 

그런데 왜 아침과 저녁, 봄과 겨울 같은 상태 변화가 있느냐 하면, 천사들도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생명의 흐름을 끊임없이 새롭게 경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항상 같은 강도로 같은 밝음 속에만 있다면, 그들은 ‘받고 있다’는 감각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빛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자기 쪽이 조금 더 느껴지는 상태가 허용됩니다.

 

이때 천사들이 경험하는 ‘저녁’이나 ‘겨울’은, 지상의 인간처럼 악으로 떨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자기 자신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더 의식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를 지나면서, 그들은 다시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 깊이 기쁨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상태 변화는 타락의 위험이라기보다, ‘사랑과 감사가 새로워지는 호흡 같은 것’입니다.

 

반면 지옥적 상태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proprium이 더 이상 주님께 돌려지지 않고, 완전히 자기중심으로 굳어집니다. 그래서 계시록이나 이사야에 나오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세력’은 단순한 정치적 세력이나 외적 악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는 영적 방향’을 가리킵니다. 루시퍼의 추락, 바벨, 바로, 두로 왕 같은 상징들이 모두 결국 같은 뿌리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 이게 다 proprium 문제였군요’라고 느끼신 것은 정말 중요한 통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천사론, 타락론과 거듭남, 심지어 천국과 지옥의 구조까지도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을 누구에게 돌리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정리하면, 계시록과 이사야의 대적 세력들은 proprium이 극단적으로 굳어진 상태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서 천사들의 상태 변화가 묘사되는 것도, 천사들 역시 자유 안에서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기쁨을 새롭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옥은 그 흐름을 자기 것으로 붙잡은 상태이고, 천국은 그 흐름을 다시 주님께 돌리는 상태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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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심화 3, '영적 인간과 proprium'

AC.134.심화 3. ‘영적 인간과 proprium’ 그럼 proprium은 영적 인간 단계에서는 아직 없는 건가요? 아직 영적 인간인 사람들한테는 이 proprium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자아, 자기, 고유 본성 같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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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적 인간과 proprium

 

그럼 proprium은 영적 인간 단계에서는 아직 없는 건가요? 아직 영적 인간인 사람들한테는 이 proprium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자아, 자기, 고유 본성 같은 이런 것만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proprium은 영적 인간 단계에 가서 처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천적 인간 단계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서 proprium은 ‘타락 이후 인간 전체에 깊이 깔려 있는 기본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세상적 인간에게도 있고, 영적 인간에게도 있으며, 심지어 천적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조차 계속 조심스럽게 다루어집니다. 다만 단계마다 ‘proprium이 어떻게 작동하느냐’가 달라집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세상적, 육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은 거의 노골적입니다. ‘내 생각’, ‘내 욕망’, ‘내 판단’, ‘내 소유’가 중심이며, 그것을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 자신이 거의 곧 proprium 안에 잠겨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런 상태를 두고 ‘죽은 상태’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자기 안에 두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 단계에 들어오면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는 말씀을 배우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려 하며,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proprium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그것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영적 인간은 자기중심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갈등, 자기 의지와 주님의 뜻 사이의 긴장이 나타납니다.

 

즉, 영적 인간은 proprium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proprium을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중심 속에 완전히 잠겨 있었다면, 이제는 그 자기 중심이 얼마나 끈질기게 올라오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 싸움, 순종, 기도 같은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 단계에서는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이미 큰 방향이 주님께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노골적인 자기중심은 많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아주 미세하고 깊은 형태의 proprium 문제가 드러납니다. 곧 ‘이 선한 상태 자체를 자기 것으로 느끼고 싶어지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영적 인간에게는 proprium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있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세상적 인간은 proprium 안에 묻혀 있고, 영적 인간은 proprium과 싸우기 시작하며, 천적 인간은 proprium의 가장 미세한 그림자까지도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배워 갑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도 proprium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는 더 이상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이 주님의 생명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깨달음이 거듭남의 실제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자아’, ‘자기’, ‘고유 본성’ 같은 말과 proprium의 관계를 굳이 구분하자면, 자아나 자기는 존재 구조 자체를 말할 수 있지만, proprium은 그 자아가 ‘자기중심으로 굳어져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는 방향성’을 특별히 가리킨다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AC.134, 심화 4, '천국과 지옥, 그리고 천사와 proprium'

AC.134.심화 4. ‘천국과 지옥, 그리고 천사와 proprium’ 계시록이나 이사야 등에 나오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를 높이려는’ 세력들의 등장 이유를 이 proprium의 시작에서 찾아도 될까요?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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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심화 2, '천적 인간 단계에서 proprium 문제가 시작되는 이유'

AC.134.심화 2. ‘천적 인간 단계에서 proprium 문제가 시작되는 이유’ 천적 인간까지 되고 난 다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뭔가요? 이런 건 이미 영적 인간 단계에서 해결된 거 아닌가요? 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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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인간 단계에서 proprium 문제가 시작되는 이유

 

천적 인간까지 되고 난 다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뭔가요? 이런 건 이미 영적 인간 단계에서 해결된 거 아닌가요? 예를 들면, animate, inanimate 같은...

 

 

바로 그 지점이 창세기 2장과 AC 초반부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통 우리는 ‘천적 인간’이면 이미 완성된 상태, 다시는 흔들릴 가능성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거기서부터 아주 미세하고 깊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의 시험은 더 이상 ‘선과 악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선을 누구의 것으로 돌릴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 단계에서는 큰 틀에서 이미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통해 선과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 하며,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싸움도 어느 정도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단계에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거의 ‘animate/inanimate’, 곧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는 수준의 변화가 이미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영적 인간은 적어도 ‘무엇이 살아 있는 길인가’를 압니다. 그래서 큰 방향은 이미 주님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 단계는 그보다 훨씬 더 미세합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선이냐 악이냐’ 자체가 중심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이 생명 자체를 누구에게 귀속시키느냐’가 문제로 떠오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인간이 ‘나는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단계라면, 천적 인간은 그 안에서조차 아주 은밀하게 올라오는 ‘그래도 이것은 내가 한 것 아닌가’라는 미세한 자기 귀속의 움직임이 문제 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에덴 이야기가 바로 천적 인간의 배경 안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밝고 아름다운 상태 안에서, ‘‘자기 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어떻게 자기중심으로 기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가능성이 곧바로 ‘타락했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한, 그 자유 속에는 언제나 자기 쪽으로 기울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봅니다. 천적 인간은 그 가능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질서 안에 있지만,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기계처럼 고정된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 가장 깊어질수록, 자유도 가장 깊은 자리에서 유지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천적 인간의 문제는 영적 인간보다 더 미세하고 더 깊습니다. 영적 인간의 싸움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거짓과 진리, 선과 악의 충돌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시험은 겉으로는 거의 선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을 사랑한다’는 상태 안에서도, 아주 미세하게 ‘그래도 이 사랑은 내 것 같다’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proprium의 가장 깊은 층입니다.

 

그래서 AC의 흐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 단계에서는 ‘죽은 상태에서 살아 있는 상태로의 전환’이 중심이고, 천적 인간 단계에서는 ‘살아 있는 그 생명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는 순수성’이 중심입니다. 전자는 생명의 여부가 문제이고, 후자는 생명의 귀속이 문제입니다.

 

결국 천적 인간에게조차 이런 문제가 언급되는 이유는, 주님이 인간을 단순히 ‘올바르게 작동하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마지막 긴장은 ‘내가 주님을 따르는가?’가 아니라, ‘주님의 것을 끝까지 주님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AC.134, 심화 3, '영적 인간과 proprium'

AC.134.심화 3. ‘영적 인간과 proprium’ 그럼 proprium은 영적 인간 단계에서는 아직 없는 건가요? 아직 영적 인간인 사람들한테는 이 proprium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자아, 자기, 고유 본성 같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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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심화 1,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AC.134.심화 1.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본문 영역,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에 두 own이 나옵니다. 하나는 ‘his own’, 다른 하나는 ‘an own’. 이 둘은 서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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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본문 영역(英譯),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에 두 own이 나옵니다. 하나는 his own’, 다른 하나는 an own’. 이 둘은 서로 다른 거죠? 그리고 이 own이 바로 proprium이죠?

 

 

네, 정확히 보셨습니다. AC.134의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에서 나오는 두 own은 같은 단어를 쓰고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미묘하게 층위가 다릅니다. 그리고 둘 다 결국 라틴어 원문에서는 proprium 계열을 번역한 것입니다. 다만 첫 번째는 ‘상태’, 두 번째는 ‘실체적 자기감(自己感)’ 쪽에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먼저 ‘a state of his own’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그 자신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도인데, 여기서 own은 형용사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남의 것이 아닌 자기 쪽의 상태’, ‘자기에게 속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더 이상 단순히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만 받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 즉 생각도 자기가 하는 것이고, 선택도 자기가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느끼는 상태, ‘이런 걸 하는 주체가 나다.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유와 시험, 책임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반면 뒤의 ‘an own is given him’은 훨씬 더 특별한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own이 명사처럼 쓰입니다. 영어 문법으로 보면 약간 인위적인 표현인데, 바로 라틴어 proprium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직역하면 ‘하나의 own이 그에게 주어진다’인데, 자연스럽게 풀면 ‘자기 것처럼 느껴지는 중심 감각’, 혹은 ‘자기 자신으로 느끼는 어떤 것, 그러니까 자기성(自己性)’ 혹은 자기감(自己感)’ 같은 것이 그에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둘의 차이는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좋습니다. ‘a state of his own’은 ‘그가 들어가는 상태’, 곧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조건, 상황, 상태를 말하고, ‘an own’은 그 상태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자기 귀속의 감각 자체’, 곧 proprium을 말합니다. 하나는 환경 혹은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 안에서 느껴지는 ‘자기성(自己性)’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an own is given him’이라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간이 가진 proprium조차도 사실은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완전히 자기 본래의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자유와 사랑이 가능하도록 주님이 허락하신 ‘자기감(自己感)’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 것,  자기에게 고유해 보이는, 그래서 그 소유권과 주도권이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어진 것,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핵심 구조를 아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기처럼 느끼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 자기 것처럼 느껴지는 proprium을 부여받지만, 그 목적은 ‘진짜 독립’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정리하면, 네, 두 own은 둘 다 proprium과 연결되지만, 첫 번째는 ‘자기 상태’, 두 번째는 ‘자기감 자체’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표현인 ‘an own’은 바로 라틴어 proprium을 영어에서 최대한 살려 낸 번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AC.134, 심화 2, '천적 인간 단계에서 proprium 문제가 시작되는 이유'

AC.134.심화 2. ‘천적 인간 단계에서 proprium 문제가 시작되는 이유’ 천적 인간까지 되고 난 다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뭔가요? 이런 건 이미 영적 인간 단계에서 해결된 거 아닌가요? 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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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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