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을 다 합쳐 ‘천국’(heaven)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천국을 만드는 것은, 주님한테서 나와 천사들한테로 흘러드는, 그리고 그들에 의해 수용되는 신성(Divine)입니다.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성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이므로, 천사들은 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만 천사이며, 천국입니다. The angels taken collectively are called heaven, for they constitute heaven; and yet that which makes heave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i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and flows into the angels and is received by them. And a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is the good of love and the truth of faith, the angels are angels and are heaven in the measure in which they receive good and truth from the Lord.
해설
이 글은 이 책, ‘천국과 지옥’ 전체를 여는 매우 중요한 기초 원리를 제시합니다. 곧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이며, 그 상태의 본질은 주님한테서 나오는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을 다 합쳐 천국이라고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천국이 어떤 건축물이나 공간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적 존재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모여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천국을 만드는 것은 천사들 자신이 아니라, 주님한테서 나와 그들 안으로 흘러들어 수용되는 주님의 신성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나아감’(go forth)과 ‘흘러듦’(flow into), 곧 ‘발출’과 ‘유입’입니다. 주님은 태양처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발출하십니다. 이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는 모든 천사에게 흘러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사가 되는 이유는 단지 그 빛과 열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빛이 비추어도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두 요소를 함께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대원리입니다. 선과 진리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선은 사랑의 내용이고, 진리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선은 의지에 속하고,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천국은 단지 무엇을 ‘아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천국이 됩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만큼만 천사이며, 천국이다’라는 말은, 천사도 본질상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입니다. 받아들이는 정도, 곧 수용의 정도가 곧 그 존재의 질을 결정합니다.
이 원리는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간 역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 그것을 막으면, 흘러들어와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반대로 겸손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같은 말씀을 읽어도 그 안에서 빛을 받습니다.
결국 이 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가?’ 천국은 먼 곳에 있는 공간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정도만큼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천국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는 대신, 그분께 돌려드리며, 기꺼이 수용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HH.7이 제시하는 천국의 본질입니다. 천국은 천사들의 모임이지만, 그 본질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그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수용의 정도가 곧 천국의 깊이와 높이를 결정합니다.
HH.7에서 스베덴보리가 굳이 ‘constitute’와 ‘make’라는 두 동사를 나누어 쓴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외형적 구성’과 ‘본질적 원인’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HH.7 전체의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먼저 ‘constitute’라는 말은 ‘구성하다, 이루다, 형성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집합체를 이루는 구성 요소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 도시를 구성한다’고 할 때, 시민들은 도시의 구성원입니다. 같은 의미로, 천사들은 모여서 천국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the angels taken collectively are called heaven, for they constitute heaven’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집합적, 구성적 차원’입니다. 천국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천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스베덴보리는 전환합니다. ‘and yet...’라고 하면서 ‘make’라는 동사를 씁니다. ‘that which makes heaven... is the Divine that goes forth from the Lord.’ 여기서 ‘make’는 단순히 구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하게 하다, 성립하게 하다, 본질을 이루다’에 가깝습니다. 즉, 무엇이 그것을 실제로 그 존재가 되게 하는가 하는 ‘본질적 원인’의 문제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constitute’ → 천사들이 천국의 구성 요소라는 점을 말함 (외형적, 집합적 차원)
‘make’ → 무엇이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지를 말함 (본질적, 원인적 차원)
스베덴보리는 이 두 층위를 의도적으로 구분합니다. 겉으로 보면 천사들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천사들 자체가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 안에 받아들여진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천국을 천국 되게 합니다.
만일 여기서 두 동사를 구별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오해가 생깁니다. ‘천국은 천사들이 있으니까 천국이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천사들이 구성하기는 하지만, 천국을 성립시키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
이 차이는 그의 전체 신학에서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를 ‘구성’하지만, 사랑과 진리가 그들 안에 살아 있지 않으면 교회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이 보면, 여기에는 존재론적 구별이 있습니다.
constitute → 형상(form)의 차원
make → 본질(esse, being)의 차원
천사들은 형상을 이루는 주체들이고, 주님의 신성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형상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고, 본질이 빠지면 형상은 껍데기만 남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두 동사를 나눈 것은 단순한 문체상의 다양성이 아니라, 매우 정밀한 신학적, 형이상학적 구분입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천사들은 천국을 구성하지만, 주님의 신성만이 천국을 천국 되게 만든다.’
이 차이를 보시면 HH.7 전체가 훨씬 또렷해질 것입니다.
2.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스베덴보리가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예외 없이’라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이 표현은 논리적 강조가 아니라 존재론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저 자연적 언어 감각으로 보면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뜻이고, 일상적으로는 ‘빠짐없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이것이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우주와 천국, 인간, 교회, 말씀까지 모두를 ‘보편과 개별의 상응적 구조’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의 사상에서 ‘보편’(general)은 단순히 큰 덩어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개별적인 것들을 함께 묶어 하나로 작용하게 하는 ‘포괄적 질서’입니다. 반면 ‘개별’(particular)은 그 보편 안에 들어 있는 각각의 실제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때로 ‘most particular’이라는 표현까지 써서, 가장 미세한 단위까지 포함시킵니다.
예를 들어, 천국을 생각해 보면, 전체 천국이라는 보편이 있고, 각 천국(삼층천)이라는 중간 보편이 있으며, 각 천사 사회, 각 천사 개인, 심지어 그 개인의 사랑과 사고의 가장 작은 움직임까지 모두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보편’이 따로 있고 ‘개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은 개별들 안에서만 존재하며, 개별들은 보편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HH.7에서 ‘천국을 만드는 것은 일반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신성이다’(the Divine makes heave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고 할 때, 이것은 ‘예외 없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뜻입니다.
‘천국 전체를 이루는 것도 주님의 신성이며, 각 천사 한 사람 한 사람을 천국 되게 하는 것도 주님의 신성이다.’
만약 그가 단순히 ‘without exception’이라고 썼다면, 그것은 논리적 배제의 의미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in general and in particular’은 구조적, 유기적 포함을 말합니다. 천국이라는 전체가 주님의 신성으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 전체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도 동일한 원리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상응’ 사상과 연결됩니다. 상응에서는 보편과 개별이 서로 반영합니다. 큰 것은 작은 것 안에, 작은 것은 큰 것 안에 질서 있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천국은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전체 천국은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the Grand Man)이고, 각 천사는 그 안의 지체입니다. 이런 사고 안에서는 ‘보편’과 ‘개별’을 항상 함께 말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말하면 구조가 무너집니다.
결국 이 표현은 단순히 ‘예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신적 원리가 전체 구조와 각 요소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선언입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보편은 개별 안에 있고, 개별은 보편 안에 있으며, 주님의 신성은 그 둘 모두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습관적으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in general and in particular’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이해 방식 자체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 때, 성부(聖父, the Father)를 믿는다 고백하였던 어떤 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일반인 같은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분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주님의 천국 외에 다른 천국이 있는지, 원하는 곳마다 돌아다니며 찾아보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찾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다른 천국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천국의 행복을 영광과 지배(dominion)에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었고, 천국은 그런 걸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세상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높아질 수 있는 그런 천국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There were certain spirits who while living in the world had professed to believe in the Father; but of the Lord they had the same idea as of any other man, and therefore did not believe him to be the God of heaven. For this reason they were permitted to wander about and inquire wherever they wished whether there were any other heaven than the heaven of the Lord. They searched for several days, but nowhere found any. These were such as place the happiness of heaven in glory and dominion; and as they were unable to get what they desired, and were told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such things, they became indignant, and wished for a heaven where they could lord it over others and be eminent in glory like that in the world.
해설
HH.6은 매우 생생한 장면을 통해 한 가지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 등장하는 영들은 지상에서 ‘성부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은 다른 사람들, 곧 일반인과 같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즉, 그들의 하나님 관념은 추상적 아버지 하나님에 머물렀고, 주님을 통해 드러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천국의 중심이 주님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즉시 정죄되거나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 확인해 보도록 허락됩니다. ‘주님의 천국 말고 다른 천국이 있는지’ 자유롭게 찾아보도록 허락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영계에서는 강압적 판결보다 ‘스스로 상태를 드러내는 과정’이 먼저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 찾아보지만, 다른 천국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이며, 그 중심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있지 않고,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영광과 지배’의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누렸거나 누리고 싶었던 권세와 명예가 천국에서도 계속되기를 기대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의 중심은 여전히 자기 자신과 우월감에 있었던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질서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행복은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섬기는 데 있습니다. 높아지는 데 있지 않고, 다른 이를 유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하나님과의 결합이 아니라, 자기 영광의 연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특정 집단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천국에 대한 오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종종 천국을 고통이 없고, 인정받고, 높임 받는 상태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본질을 사랑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거기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배하려는 사랑은 그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결국 HH.6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해의 왜곡은 천국 이해의 왜곡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왜곡은 사랑의 왜곡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을 단지 사람으로만 보고, 아버지를 추상적으로만 믿으며, 천국을 자기 영광의 장소로만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천국의 실제 행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천국을 무엇으로 기대하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질서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 자아가 높아지는 자리를 원하는가? 천국은 찾는 자에게 열리지만, 그 마음의 사랑이 천국의 질서와 같을 때에만 그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교회에 속한 자들은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are of the church cannot doubt that the Lord is the God of heaven, for he himself taught,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1:27);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16:15);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That all things of the Father are his (Matt. 11:27; John 16:15; 17:2).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And that he hath all power in heaven and on earth (Matt. 28:18).
‘하늘과 땅에서’라고 하신 것은, 하늘을 다스리는 분은 땅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주15)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선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 곧 모든 지성과 지혜, 그 결과로서의 모든 행복,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He says “in heaven and on earth,” because he that rules heaven rules the earth also, for the one depends upon the other.15 “Ruling heaven and earth” means to receive from the Lord every good pertaining to love and every truth pertaining to faith, thus 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in consequence all happiness, in a word, eternal life. This also the Lord taught when he said: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the Son shall not see life (John 3:36).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 26)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that believeth on Me, though he die yet shall he live; and whosoever liveth and believeth on Me shall never die (John 11:25,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John 14:6).
주15. 천국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The entire heaven is the Lord’s (n. 2751, 7086).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다. He has all power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s (n. 1607, 10089, 10827). 주님이 천국을 다스리시므로 주님은 또한 천국에 의존하는 모든 것, 곧 지상의 모든 것도 다스리신다. As the Lord rules heaven He rules also all things that depend thereon, thus all things in the world (n. 2026, 2027, 4523, 4524). 주님 홀로 지옥들로부터 떨어트리시고, 악에서 떠나 선 가운데 있게 하시며, 그렇게 해서 구원하시는 권세가 있으시다. The Lord alone has power to remove the hells, to withhold from evil and hold in good, and thus to save (n. 10019).
해설
HH.5는 앞선 글들의 논지를 성경 말씀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HH.2와 HH.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교회에 속한 자들’이라면 이것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의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에 속한 자들’이란 단순히 교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알고 읽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이라면, 신성은 분리된 두 중심으로 나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는 ‘하늘을 다스리는 분은 땅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분리된 체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영적 원인이고, 땅은 그 결과인 외적 표현입니다. 영적 세계가 자연 세계에 유입하고, 자연 세계는 영적 세계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주권자가 곧 땅의 주권자입니다. 주님이 하늘의 주이시라면, 동시에 우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실질적으로 풀이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치 권한을 행사하는 왕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하늘을 다스린다는 것은, 사랑에 속한 모든 선과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사들이 지혜롭고 행복한 이유는 그들 안으로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 지성과 지혜,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행복과 영원한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유래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표현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존재를 인정하는 지적 동의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믿음은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 흐르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곧 생명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가진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주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이를 수 없다는 뜻이며, 진리라는 것은 모든 참된 인식이 그분 안에 있다는 뜻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존재의 근원이 그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 선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HH.5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단지 중개자가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며,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시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심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그분과의 결합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천국 이해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인간 생명의 근원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글은 설교적으로도 매우 힘이 있습니다. ‘다스림’을 권위가 아니라 ‘생명의 유입’으로 설명하면, 성도들이 주님 통치의 의미를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
1.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HH.5에서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는 것이 곧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모든 지성과 지혜, 행복, 영원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오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마치 없던 능력이 갑자기 주입되는 것처럼, 혹은 아이큐가 올라가듯 지적 능력이 증가하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받음’은 그런 외적, 기계적 주입이 아닙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전제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자체 소유자’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즉, 생명은 본질적으로 주님께 속해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주 이런 비유를 씁니다. 태양이 빛과 열을 발할 때, 식물은 그 빛과 열을 받아 자랍니다. 식물은 빛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식물이 기계처럼 자동으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용 능력과 상태에 따라 성장의 질이 달라집니다.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 수용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 곧 선과 지혜를 끊임없이 발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 ‘다스림’은 강압적 통치가 아니라, 이 선과 진리의 지속적 유입입니다. 천사들이 지혜롭고 행복한 이유는, 그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받는다’는 것은 갑자기 지능 지수가 상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이큐는 자연적 사고 능력의 측면에 속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영적 차원의 능력입니다. 진리를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선과 결합된 진리를 보는 능력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이해하는 상태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서 지혜가 증가한다는 것은 정보를 많이 암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진리를 더 밝게 이해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이 주님을 향할 때, 그에 상응하여 이해도 밝아집니다. 그래서 ‘받는다’는 것은 능력의 외적 증가라기보다, 존재의 투명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유입니다. 인간은 수동적 파이프가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은 끊임없이 흘러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 자유가 지상 생애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사랑이 이미 주님과 일치해 있기 때문에, 그 유입을 막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큰 기쁨과 더 밝은 이해를 ‘받게’ 됩니다.
정리하면, ‘받는다’는 것은 없던 두뇌 기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이 수용하도록 창조된 생명과 지혜가 방해 없이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창문이 깨끗해질수록 햇빛이 더 잘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림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HH.5의 ‘받는다’는 말은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끊임없이 받아 존재한다. 그리고 그 수용이 깊어질수록 지혜와 행복도 깊어진다.
※아래는 위 심화 해설 중 ‘인간은 생명의 수용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한 번 더 해설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리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수용체입니다. 이 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님으로부터 받는다’는 말도 오해하게 되고, 천국의 지혜와 행복이 무엇인지도 왜곡되기 쉽습니다.
먼저 근원에 대한 문제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적 근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생명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전구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류를 받아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전류가 끊기면 전구는 어두워집니다. 전구가 빛의 근원이 아니듯, 인간도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적 통로가 아닙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진리가 끊임없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수용체이되, 능동적 수용체입니다.
이제 ‘받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능력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없던 두뇌 기능이 새로 생기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본래 수용하도록 창조된 구조가 점점 더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정화될수록, 이해는 더 밝아집니다. 자기 중심성이 줄어들수록, 진리를 왜곡 없이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지성과 지혜가 ‘증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이큐와 같은 자연적 지능은 두뇌 기능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성(intelligence)과 지혜(wisdom)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것은 선과 결합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 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그에 따라 사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외적 정보 축적이 아니라, 존재의 투명성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태양은 항상 빛과 열을 발합니다. 그러나 창문이 더럽거나 닫혀 있으면 빛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창문을 닦고 열면 방은 밝아집니다. 방이 스스로 빛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빛을 더 잘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항상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 자기 사랑, 왜곡된 관념이 그것을 가립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창문이 맑아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서 ‘받는다’는 것은 창문이 거의 완전히 투명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점점 더 깊은 사랑과 더 밝은 이해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으로부터 무한히 더 깊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수용도 끝이 없습니다.
결국 이 원리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님은 근원이시고, 인간은 수용체입니다. 생명, 사랑, 진리, 지혜, 행복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수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인간다워집니다.
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그들은 모두 주님이 자기들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가운데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분이 만유의 주이시며, 곧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나며, 지식을 통해 점점 완전해져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르게 되는 일은, 뒤의 장들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Infants, who form a third part of heaven, are all initiated into the acknowledgment and belief that the Lord is their Father, and afterwards that he is the Lord of all, thus the God of heaven and earth. That children grow up in heaven and are perfected by means of knowledges, even to angelic intelligence and wisdom, will be see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Heaven and Hell’ 전체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유아들이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룬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상징적 과장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실제 상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모두 천국으로 가며, 그 수가 매우 많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안팎의 구분이 없습니다. 유아는 아직 스스로 악을 선택하거나 진리를 거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all initiated into the acknowledgment’라는 표현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완성된 천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되어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단번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먼저 주님을 ‘아버지’로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 교육이 아니라, 관계의 형성입니다. 어린 존재가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관념은 ‘아버지’입니다. 사랑하고 보호하며 돌보는 분으로서의 주님을 먼저 경험합니다.
그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이후에 주님이 ‘만유의 주’(the Lord of all)이시며 ‘하늘과 땅의 하나님’(the God of heaven and earth)이심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격적 친밀성에서 시작하여 점차 우주적 통치의 주님으로 이해가 확장됩니다. 사랑의 관계가 먼저이고, 교리적 인식은 그다음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질서와 일치합니다. 항상 사랑이 먼저이고, 진리의 이해는 그다음입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선언은,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난다’(grow up)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지된 상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정체의 세계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통해 점점 완전해지며, 마침내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s)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또한 인간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지상에서 그 가능성이 충분히 펼쳐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아의 죽음은 영적 성장의 단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순수한 환경에서 계속되는 시작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HH.2와 HH.3에서 ‘주님을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천국과의 연결 문제로 제시되었는데, HH.4에서는 유아들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인식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 줍니다. 복잡한 교리 논쟁 없이, 관계적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결국 이 글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는 어린 생명들을 완전히 품고 계시다는 것. 둘째, 천국은 완성된 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는 학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거기서 배우고, 자라고, 지혜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큰 위로를 줍니다.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에게, 혹은 어린 생명의 의미를 묻는 이들에게, HH.4는 깊은 소망의 문을 열어 줍니다.
심화
1. ‘유아들은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루는데’
HH.4에서 스베덴보리가 ‘유아들이 천국의 삼 분의 일을 이룬다’고 말하는 부분은 많은 독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진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런 비율이 가능한지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전제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계에서 본 실제 상태에 대한 관찰로 제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서 유아기 혹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스스로 악을 확정적으로 선택하거나 진리를 고의적으로 거부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 분의 일’이라는 규모가 가능한가? 여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으로 인류의 사망률을 생각해 보면, 특히 고대와 중세, 근대 초기까지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의료가 발달하기 전에는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살던 18세기에도 유아 사망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구 통계적으로 보아도, 인류 전체 역사 속에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구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둘째,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단일 시대의 공동체로 보지 않습니다. 천국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모여든 모든 세대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영적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현재 지구 인구 비율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장구한 역사 전체를 배경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여기에는 신학적 의미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는 선과 진리에 대한 가능성을 지닌 상태로 태어난다고 봅니다. 유아는 아직 자신의 자유를 통해 악을 확정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성 중인 존재’로서 천국에서 계속 자라날 수 있습니다. HH.4 다음 부분들에서 그는 아이들이 천국에서 교육받고, 지식들을 통해 점점 완전해지며, 마침내 천사적 지성과 지혜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국은 완성된 자들만 모여 있는 정지된 세계가 아니라, 성장의 세계입니다.
여기서 ‘삼 분의 일’이라는 표현을 상징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과 스베덴보리 저작 전반에서 ‘삼’은 완전함이나 충만함과 관련된 수입니다. 반드시 정확한 수학적 33.3%를 의미한다기보다, ‘결코 소수가 아니다’,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강조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대체로 자신이 본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강하므로, 완전히 상징으로만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균형 잡힌 이해는 ‘매우 많은 수’라는 실제적 진술로 보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주는 목회적 의미는 매우 큽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어린 생명이 짧은 삶을 마치고 떠났습니다. HH.4는 그 생명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멈춘 존재가 아니라 계속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결국 ‘천국의 삼 분의 일’이라는 말은 단순한 통계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의 광대함을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상실처럼 보이는 수많은 생명들이, 영적 질서 안에서는 잃어버려지지 않았다는 선언입니다.
2.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라나며’
많은 신앙인들이 막연히 ‘죽으면 상태가 고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면, 영원히 어린 모습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가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HH.4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아이들은 천국에서 자라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영적 존재 이해를 뒤집는 선언입니다.
먼저 기본 원리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 존재합니다. 육체는 일시적 외적 형식이고, 영은 참된 인간입니다. 지상에서의 성장은 육체적 성장과 함께 이루어지지만, 본질은 영적 성장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를 배우고, 의지와 이해가 형성되는 과정이 진짜 성장입니다. 그렇다면 육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성장이 멈출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외적 제약이 사라진 상태에서 더 순수한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란다는 말은, 그들이 단번에 완성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시작하여, 천국의 질서 안에서 교육받고, 사랑을 배우고, 진리를 배우며, 점점 성숙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장들에서 천국에는 아이들을 돌보는 천사들이 있고, 그들이 매우 부드럽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아이들을 인도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교육은 강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흔히 ‘지상 생애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상 생애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유와 선택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생애가 ‘완성의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아직 자유로운 악의 선택을 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성장이 계속되는 장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영적 방향을 확정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천국에서 펼쳐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놀라는 이유는, ‘죽음 이후는 정지된 상태’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살아 있는 세계, 역동적인 세계로 묘사합니다. 거기에는 배움이 있고, 깊어짐이 있고, 점점 더 큰 사랑과 더 밝은 이해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완성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더 충만해지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분과의 결합도 무한히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천국에서 자란다는 것은, 인간의 참된 나이는 육체적 나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천사는 결국 ‘젊음의 상태’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젊음은 사랑과 생명의 충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자라서 천사적 성숙에 이르며, 동시에 그 존재는 영원한 생명의 젊음 안에 머뭅니다.
결국 이 선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장은 지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차원에서 계속된다. 지상은 시작이고, 천국은 그 성숙이 더 순수하게 진행되는 장이다.
그러므로 어린 생명의 죽음은 성장이 중단된 사건이 아니라, 다른 환경에서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며, 그 신념을 스스로 굳힌 자들은 천국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만이 예배받으시는 천국으로부터 어떠한 유입(influx)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점차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마침내는 벙어리와 같이 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하며, 관절에 힘이 없는 사람처럼 팔을 축 늘어뜨리고 흔들며 비틀거리게 됩니다. 또한 소키니안들(the Socinians)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의 인성만을 인정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천국 밖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렇게 하여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이들과 완전히 분리됩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신적 존재(an invisible Divine)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주님에 대한 모든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아무 하나님도 믿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신성은 그들에게 있어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어떤 속성에 불과하며,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주14). 이러한 자들은 이른바 자연 숭배자들 가운데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이라 불리는 자들은 이와 다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Those within the church who have denied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the Father only, and have confirmed themselves in that belief, are not in heaven; and as they are unable to receive any influx from heaven, where the Lord alone is worshiped, they gradually lose the ability to think what is true about any subject whatever; and finally they become as if dumb, or they talk stupidly, and ramble about with their arms dangling and swinging as if weak in the joints. Again, those who, like the Socinians, have denied the Divinity of the Lord and have acknowledged his humanity only, are likewise outside of heaven; they are brought forward a little toward the right and are let down into the deep, and are thus wholly separated from the rest that come from the Christian world. Finally, those who profess to believe in an invisible Divine, which they call 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 from which all things originated, and who reject all belief in the Lord, find out that they believe in no God; since this invisible Divine is to them a property of nature in her first principles, which cannot be an object of faith and love, because it is not an object of thought.14 Such have their lot among those called nature worshipers. It is otherwise with those born outside the church, who are called the heathen; these will be treated of hereafter.
주14. 어떤 생각으로도 지각될 수 없는 신성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A Divine that cannot be perceived by any idea cannot be received by faith (n. 4733, 5110, 5663, 6982, 6996, 7004, 7211, 9356, 9359, 9972, 10067, 10267).
해설
HH.3은 HH.2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앞 절에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리에 비추어, 주님을 부인하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특정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결이 어떻게 끊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연결이 차단되면 그 세계와의 유입도 차단됩니다.
첫 번째 유형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고 아버지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하나님을 주님과 분리된 존재로 생각하며, 주님을 단지 중개자나 도덕 교사 정도로 여깁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런 관념은 천국의 실제 질서와 맞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신성이 주님 안에 있다고 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천국의 영향, 곧 영적 유입을 받을 통로가 열리지 않습니다. 유입이 끊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는 ‘참된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점차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 지식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분별하는 내적 힘이 약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그는 벙어리처럼 되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몸이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 장면이라기보다, 내적 생명력이 빠져나간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빛이 차단되면, 생각과 의지가 힘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소키니안들처럼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집단 그 자체보다, ‘주님의 신성을 거부하는 관념’입니다. 주님을 단지 위대한 인간, 도덕 교사, 혹은 예언자로만 인정하고, 그 안에 신성이 거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념은 천국의 하나님 이해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세계에서 온 다른 영들과 분리된다고 묘사됩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 역시 영적 분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빛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은 더 철학적인 형태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우주의 영혼’ 혹은 ‘절대적 원리’를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의 최초 원리와 같은 추상적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신앙은 생각의 대상, 곧 인격적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이지 ‘어떤 원리’가 아닙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 개념은 결국 자연 숭배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자연의 속성으로 환원하면, 신앙은 사라지고 철학적 추상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밖에서 태어난 이방인들은 이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생이나 문화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도 주님을 의식적으로 부인한 경우와, 복음을 알 기회가 없었던 경우는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후에 이방인들이 어떻게 천국에 받아들여지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빛을 알고도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빛을 알지 못한 상태’를 구분하는 설명입니다.
결국 HH.3의 중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한 질서이며, 주님을 부인하는 관념은 그 질서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추상화하거나, 주님을 단지 인간으로 축소하거나, 신성을 분리된 존재로 상상하는 관념은 영적 유입을 차단합니다. 그리고 유입이 끊기면 진리를 생각하는 힘도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순한 교리 선택이 아니라, 영적 생명과 직접 연결된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심화
1. ‘그들은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지며’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공간 이동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에서는 ‘공간은 곧 상태(state)’인 점을 감안하면, 이 표현은 지리적 이동이라기보다 ‘영적 상태의 변화와 분리’를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먼저 큰 원리를 하나 정리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는 우리가 아는 물리적 공간 개념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가까움’과 ‘멀어짐’은 사랑과 진리의 유사성 혹은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빛 쪽으로 간다는 것은 더 큰 진리 인식 상태로 나아감을 뜻하고,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진리의 빛이 약한 상태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왔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말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오른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에서 오른쪽은 보통 ‘진리의 빛’ 혹은 ‘지적 측면’을 상징합니다. 천국에서도 오른편은 진리에 더 밝은 영역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른쪽으로 조금 끌려 나온다’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 어느 정도 진리의 빛에 비추어져 시험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이 가진 ‘주님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천국의 빛 앞에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둘째, ‘조금’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완전히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 빛에 노출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가 맞지 않으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셋째,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진다’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아래’ 혹은 ‘깊음’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이며, 때로는 거짓과 자기 확신 속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과 조화되지 않는 상태는 자연히 더 낮은, 즉 더 어두운 영역과 결합합니다. 이것은 형벌을 받는 장면이라기보다, ‘유사한 것끼리 모이는’ 영계의 질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임의적 처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밀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사랑과 신념이 그들을 그에 상응하는 영역으로 이끕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위, 아래’는 도덕적 서열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에 따른 상태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진리의 빛에 잠시 비추어지지만,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빛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과 상응하는 더 낮은 영적 상태로 분리된다.
이 장면은 교리적 정죄의 그림이 아니라, 영계의 ‘상응과 유입의 법칙’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2. ‘생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HH.3 전체의 철학적 핵심에 해당합니다. 단순히 ‘추상적 신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본질 구조’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먼저 하나의 기본 원리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신앙은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향해 마음이 결합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향해 의지가 나아가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둘 다 반드시 ‘대상’(object)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고, 인식 없는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문제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영혼’(the soul of the universe [ens universi])이라는 개념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 철학적 원리입니다. 일종의 ‘자연의 최초 원리’ 혹은 ‘우주적 에너지’ 같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머릿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설명을 위한 ‘어떤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시작됩니다.
생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구체적 인격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함’이라는 추상 개념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선함이 구현된 인격이나 행위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원리’나 ‘우주의 영혼’은 사고의 구조 속에서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향한 관계적 애정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사랑은 결합을 지향합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응답을 받고, 상호작용을 이루려는 성질입니다. 그런데 비인격적 원리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를 가지지 않고, 사랑을 돌려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은 영적 결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하나님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인격적이십니다. 사랑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며,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생각될 수 있고, 사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분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단지 ‘자연의 속성’이나 ‘비인격적 절대자’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신앙은 곧 철학적 관념으로 바뀌고 맙니다. 철학은 사유를 자극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결합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 ‘아무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의 질서를 신격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연은 생각될 수는 있지만, 사랑의 응답을 주는 인격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신은 신앙과 사랑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생각 속에서 인격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사랑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현대인들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에너지’, ‘우주적 힘’, ‘자연의 법칙’을 말하면서도 인격적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HH.3은 이미 18세기에 그 문제의 영적 구조를 정확히 짚고 있는 셈입니다.
3.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
HH.3에서 스베덴보리가 굳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와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구원론과 책임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단순히 제도적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알 수 있는 계시의 빛이 주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과 말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이라는 말은 지리적 소속보다도 ‘계시의 빛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구분이 필요한가? 이유는 ‘책임의 정도’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받은 빛에 따라 판단됩니다. 더 큰 빛을 받았는데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 그 거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 분리’가 됩니다. HH.3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문제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고, 이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확정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방향 선택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태어난 자들’, 곧 이방인들은 주님에 대한 명확한 계시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들은 빛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이방인들 가운데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았던 이들은 사후에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알 기회가 주어지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분은 배타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의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기준으로 기계적으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빛을 알고 거부한 상태와, 아직 빛을 듣지 못한 상태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외적 소속이 아니라 ‘내적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교회의 내적 본질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 태어났어도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에 가까운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면서, 먼저 ‘빛 아래 있으면서도 그 빛을 거부한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안’은 계시의 빛을 받은 상태를 의미하고, ‘교회 밖’은 그 빛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빛을 받은 후의 거부는 책임이 따르지만, 빛을 받지 못한 무지는 동일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HH.3에서 그 구분을 두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온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천국의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 거기에서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이,First of all it must be known who the God of heaven is, since upon that all the other things depend. Throughout all heaven no other than the Lord alone is acknowledged as the God of heaven. There it is said, as he himself taught,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하신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0:30, 38);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9-11);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하였노라 (요16:13-15) That he is one with the Father; that the Father is in him, and he in the Father; that he who sees him sees the Father; and that everything that is holy goes forth from him (John 10:30, 38; 14:9–11; 16:13–15).
저는 이 문제에 관하여 천사들과 자주 대화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에서는 신성(the Divine)을 셋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성은 하나임을 알고 지각하며, 그 하나가 주님 안에 계심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온 교회 사람들 가운데 신적 존재(Divine beings)를 셋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가진 자들은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한 신적 존재에서 다른 신적 존재로 옮겨 다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주13) 허용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생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말은 생각이 직접 나오는 거, 즉 말하는 생각(the thought speaking)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신성을 셋으로 나누고,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며,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주님 안에 집중시키지 않은 자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생각이 서로 쉐어링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한다면, 그는 즉시 드러나 거절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진리와 선을 분리하지 않았던 자들, 곧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았던 자들은, 저 세상에서 가르침을 받은 후, 주님이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천국의 관념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삶과 분리한 자들, 곧 참된 신앙의 계명에 따라 살지 않았던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I have often talked with angels on this subject, and they have invariably declared that in heaven they are unable to divide the Divine into three, because they know and perceive that the Divine is One and this One is in the Lord. They also said that those of the church who come from this world having an idea of three Divine beings cannot be admitted into heaven, since their thought wanders from one Divine being to another; and it is not allowable there to think three and say one,13 because in heaven everyone speaks from his thought, since speech there is the immediate product of the thought, or the thought speaking. Consequently, those in this world who have divided the Divine into three, and have adopted a different idea of each, and have not made that idea one and centered it in the Lord, cannot be received into heaven, because in heaven there is a sharing of all thoughts, and therefore if anyone came thinking three and saying one, he would be at once found out and rejected. But let it be known that all those who have not separated what is true from what is good, or faith from love, accept in the other life, when they have been taught, the heavenly idea of the Lord, that he is the God of the univers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ife, that is, who have not lived according to the precepts of true faith.
주13. 그리스도인들은 저세상에서 유일신 사상(唯一神, the idea of the one God)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일단 그들을 조사해 보면, 그들은 삼신 사상(三神, the idea of three Gods)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Christians were examined in the other life in regard to their idea of the one God and it was found that they held the idea of three Gods (n. 2329, 5256, 10736, 10738, 10821).주님의 신적 삼위일체(A Divine trinity in the Lord)가 천국에서는 인정되고 있다.A Divine trinity in the Lord is acknowledged in heaven (n. 14, 15, 1729, 2005, 5256, 9303).
해설
HH.2에서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아는 일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먼저 장소로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빛의 세계, 죽음 이후의 평안한 처소처럼 상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어떤 공간 이전에 ‘누구와 함께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천국 이해 전체를 결정합니다. 하나님 이해가 흔들리면 천국 이해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의 구조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문제를 제시합니다.
그는 단언합니다. 천국에서는 오직 주님 한 분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파적 주장이나 단순한 신학적 선택이 아니라, 천국의 실제 상태에 대한 증언입니다. 천사들은 신성을 셋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성을 하나로 ‘알고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이 논리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세 중심이 아니라 한 중심이며, 그 중심이 곧 영화로우신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천국에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아버지라는 또 다른 분리된 신적 인격을 따로 상상하지 않습니다. 신성 전체가 주님 안에 있다고 지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지상의 일반적 관념과 차이가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사고 속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각각 다른 존재처럼 떠올립니다. 겉으로는 하나를 말하지만, 내적 상상에서는 셋으로 분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이런 분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생각과 말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생각을 숨길 수 있고, 말은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말이 곧 생각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생각이 곧바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하는 상태는 즉시 모순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교리 시험에서 탈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내적 일치의 세계이며, 하나님 이해에서도 동일한 일치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전통적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배제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와 선을 분리하지 않은 자들’, 곧 ‘신앙과 사랑을 분리하지 않은 자들’은 사후에 가르침을 받아 천국의 관념을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음으로 선을 사랑했고, 삶 속에서 계명을 따르려 했던 사람은 더 깊은 진리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적 구조가 이미 하나됨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앙을 말로만 고백하고 삶에서는 따르지 않았던 사람, 곧 신앙을 삶과 분리한 사람은 천국의 관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 문제는 지적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분리된 상태이며, 분리는 곧 천국과 어긋나는 구조입니다.
결국 HH.2의 중심 메시지는 삼위일체 논쟁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됨’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한 분이 주님 안에 계시고, 천국은 그 한 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인간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생각과 말, 고백과 삶이 하나가 될 때, 그 질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지 신학적 선택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분열된 사고와 분열된 삶 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님 안에서 점점 하나로 통합될 것인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본 사람으로서, 천국의 질서는 철저히 ‘하나’의 질서라고 증언하며, 그 하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결합된 인격, 곧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심화
1. ‘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다른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신학적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묻는 선언입니다. 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 이해가 곧 현실 이해, 인간 이해, 행복 이해,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비유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나라의 법과 질서는 그 나라의 최고 권위자가 어떤 존재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정의로운 왕인가, 폭군인가, 무관심한 통치자인가에 따라 나라의 분위기와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념은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추상적 절대자인지, 세 인격으로 분리된 권위 구조인지, 아니면 사랑과 지혜가 하나로 결합된 인격적 중심인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지 못하면, 천국을 잘못 상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지배적 권력자로 생각하면 천국도 권력의 질서로 상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비인격적 원리로 생각하면 천국도 감정 없는 철학적 상태로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과 진리의 완전한 인격이라면, 천국은 그 사랑과 진리 안에서의 공동체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궁극적 기준으로 삼느냐가 삶의 방향을 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인정과 명예를 삼습니다.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선택과 판단이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이 그 궁극적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 인간의 행복 이해와 윤리, 삶의 목표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 중심을 하나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아일 수도 있고, 사회적 성공일 수도 있고, 어떤 이념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중심이 주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 된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심이 분열되어 있다면, 삶도 분열됩니다.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어 사고하면, 인간의 내면도 쉽게 분리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한 중심으로 이해하면, 인간의 내적 통합도 가능해집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천국’이라는 말을 빼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을 무엇으로 두고 있는지가 당신의 삶 전체를 결정합니다. 그 기준이 흔들리면 모든 판단이 흔들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이 그 기준이며, 그 하나님이 주님이라는 점을 바로 세우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다’는 말은 교리적 위계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 문제입니다. 하나님 이해는 단순한 종교 정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근원적 질문이라는 뜻입니다.
※ 아래는 ‘아직 신앙생활을 안 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 해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설명하려면, 먼저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인생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중심을 하나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성공을 중심에 두고,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인정과 명예를 중심에 둡니다. 겉으로는 여러 가치를 말하지만, 실제 선택의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곧 그 사람의 하나님입니다. 꼭 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가장 궁극적인 판단 기준이 그 사람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내 삶의 궁극적 중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중심이 권력이라면, 삶은 경쟁과 비교로 흐릅니다. 만약 중심이 인정이라면, 타인의 시선이 나의 기쁨과 절망을 좌우합니다. 만약 중심이 물질이라면, 소유의 증감이 곧 존재 가치의 증감이 됩니다. 중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각이 조직되고, 감정이 반응하고,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단지 교리 선택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떨어진 추상적 존재로 이해하면, 신앙은 철학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이해하면, 종교는 불안과 복종의 체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세 권위의 분리 구조처럼 상상하면, 인간의 내면도 쉽게 분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하나 된 인격적 중심이라면, 인간도 그 안에서 통합을 배웁니다. 사랑과 진리가 갈라지지 않고, 믿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으며, 생각과 말이 점점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해는 인간 이해와 직결됩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당신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흔들리는 것을 중심에 두면 삶도 함께 흔들립니다. 변하는 것을 중심에 두면 결국 허무에 이릅니다. 스베덴보리는 변하지 않는 중심, 사랑과 진리가 하나로 결합된 중심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바로 주님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중심을 따라 살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중심이 바뀌면 가치 판단이 바뀌고, 가치 판단이 바뀌면 삶의 방향이 바뀌며, 삶의 방향이 바뀌면 존재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서두에서 이 문제를 먼저 세우는 이유는, 중심이 바로 서지 않으면 그 위에 쌓는 모든 설명이 결국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당신 인생의 최종 기준이 누구인가, 무엇인가가 당신의 생각과 선택과 행복을 모두 결정한다.’
그리고 그 기준이 주님일 때, 인간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으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경쟁이 아니라 유익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2.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생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말은 생각이 직접 나오는 거, 즉 말하는 생각(the thought speaking)이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Heaven and Hell’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계의 기본 법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겉으로는 단순한 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국 존재 방식의 핵심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먼저 가장 기본 원리부터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는 ‘내면이 곧 외면으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지상에서는 생각과 말이 분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예의, 계산, 두려움, 체면 등 여러 이유로 생각을 감추고 말로는 다른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말이 반드시 생각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말이 곧 생각의 직접적 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은 생각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할 때, 이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천사들은 먼저 문장을 조립해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그대로 소리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the thought speaking’, 곧 ‘말하는 생각’이라고 표현합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생각입니다. 둘 사이에 간격이 없습니다.
왜 이런 구조가 가능한가?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내적 인간, 즉 속 사람과 외적 인간, 즉 겉 사람이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는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 사이에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존재 전체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진리와 선이 분리되지 않고, 의지와 이해가 조화를 이루며, 사랑과 사고가 일치합니다. 이런 통합 상태에서는 생각이 왜곡 없이 바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HH.2에서 왜 중요한가 하면, ‘셋을 생각하면서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논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상에서는 삼위를 각각 다른 신적 존재처럼 상상하면서도,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만약 내면에서 세 존재를 따로 떠올리고 있다면 그것이 즉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셋을 생각하고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세계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도 있습니다. 천국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내적 진실성과 존재의 일치가 완성된 세계’입니다. 생각과 말이 하나라는 것은 도덕적 정직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가 통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말하는 것을 그대로 사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생각과 말이 분리되는 것은 아직 내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삶을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 하나로 결합되어 가는 과정’으로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이 분리를 점점 줄여 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서는 그 과정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말은 생각이 직접 나오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단순한 언어학적 묘사가 아니라, 천국의 존재론을 설명하는 선언입니다. 천국은 생각과 말이 하나인 세계이며, 그래서 하나님 이해 역시 분열될 수 없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주께서 제자들 앞에서‘세상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시대의 종말,완성,마지막 때),곧 교회의 마지막 시기에 대하여(주1)말씀하시면서,사랑과 신앙에 관한 그 연속적 상태들을 예언하신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주2)The Lord, speaking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of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ich is 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1 says, near the end of what he foretells about its successive states in respect to love and faith:2
주1. [별도 언급이 없는 한, 이번 판의 모든 참조는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에 관한 것이며, 스베덴보리가 작성한 것이다. References in this edition, unless otherwise noted, are to Emanuel Swedenborg’s Arcana Coelestia and were made by Swedenborg.]시대의 종말(완성)은 교회의 마지막 때이다.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s the final period of the church (n. 4535, 10622).
주2. 주께서 마지막 때와 주님의 오심(His coming),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어떻게 황폐해져 갈 것과 최후의 심판(the final judgment) 등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마24, 25)이 창세기 26장에서 40장까지 각 서문에 설명되어 있다.The Lord’s predictions in Matthew (24 and 25), respect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and His coming, and the consequent successive vastation of the church and the final judgment, are explained in the prefaces to chapters 26–40 of Genesis (n. 3353–3356, 3486–3489, 3650–3655, 3751–3757, 3897–3901, 4056–4060, 4229–4231, 4332–4335, 4422–4424, 4635–4638, 4661–4664, 4807–4810, 4954–4959, 5063–5071).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29-31)Immediately after the tribulation of those days the sun shall be darkened,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And then shall appear the sign of the Son of man in heaven;and then shall all the tribes of the earth mourn;and they shall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And he shall send forth his angels with a trumpet and a great sound;and they shall gather together his elect from the four winds,from the end to end of the heavens. (Matt. 24:29–31)
이 말씀을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최후의 심판’(the final judgment)이라 불리는 그 마지막 시기에 이 모든 일이 문자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곧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주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주께서 천사들과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가운데 친히 나타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또한 다른 곳에 예언된 바와 같이,눈에 보이는 온 우주가 멸망하고,그 후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이라고 여깁니다.오늘날 교회 안의 대부분 사람들의 견해가 이와 같습니다.그러나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부분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를 알지 못합니다.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영적이며 천적(天的, heavenly)인 것들을 다루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속뜻)가 있습니다.문자적 의미인 겉뜻이 다루는 자연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이것은 단지 문장 전체의 의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말씀의 낱말 하나하나에도(주3)해당합니다. 말씀은 전적으로 상응(correspondences)(주4)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그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그 의미가 무엇인지는‘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Arcana Coelestia,영어Secrets of Heaven,天界秘義, 1749-1756,창,출 속뜻 주석,총10,837개 글)에서 말하고 보여 준 모든 것들로부터 알 수 있으며,또한‘백마’(白馬, White Horse, 1758),곧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흰말에 대한 소책자와 거기 나오는 그 모든 인용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Those who understand these words according to the sense of the letter have no other belief than that during that latest period, which is called the final judgment, all these things are to come to pass just as they are described in the literal sense, that is, that the sun and moon will be darkened and the stars will fall from the sky, that the sign of the Lord will appear in the sky, and he himself will be seen in the clouds, attended by angels with trumpets; and furthermore, as is foretold elsewhere, that the whole visible universe will be destroyed, and afterwards a new heaven with a new earth will come into being. Such is the opinion of most men in the church at the present day.But those who so believe are ignorant of the arcana that lie hidden in every particular of the Word. For in every particular of the Word there is an internal sense which treats of things spiritual and heavenly, not of things natural and worldly, such as are treated of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this is true not only of the meaning of groups of words, it is true of each particular word.3 For 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4 to the end that there may be an internal sense in every least particular of it.What that sense is can be seen from all that has been said and shown about it in Arcana Coelestia [published 1749–1756]; also from quotations gathered from that work in the explanation of the White Horse [of the Apocalypse, published 1758] spoken of in Revelation.
주3. 말씀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속뜻, 혹은 영적인 뜻이 있다.Both in the wholes and particulars of the Word there is an internal or spiritual sense (n. 1143, 1984, 2135, 2333, 2395, 2495, 4442, 9048, 9063, 9086).
주4. 말씀은 오직 상응으로만(solely by correspondences)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말씀은 그 안에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어떤 영적인 의미들을 갖게 된다.The Word is written solely by correspondences, and for this reason each thing and all things in it have a spiritual meaning (n. 1404, 1408, 1409, 1540, 1619, 1659, 1709, 1783, 2900, 9086).
위에 인용된 구절에서 주께서‘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하신 말씀은 이러한 내적 의미에 따라 이해되어야 합니다.그곳에서‘해’는 사랑에 관한 주님을(주5)뜻하고,‘달’은 신앙에 관한 주님을(주6),‘별들’은 선과 진리,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주7),‘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는 신적 진리의 나타남을,‘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는 진리와 선,곧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들을(주8),‘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은 말씀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과 계시를(주9)뜻합니다.여기서‘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주10),‘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주11)뜻합니다.‘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를(주12)뜻합니다.그러므로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교회의 마지막 때,곧 사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그 결과 신앙도 없는 때에,주께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여시고,천국의 아르카나를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다음 페이지들에서 밝히려는 아르카나는 천국과 지옥,그리고 사후 인간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은 천국과 지옥,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이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제시되고,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교회 안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들조차 마음속으로‘그 세상에 가 보았다가 우리에게 말해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하며,믿기를 거부합니다.특히 세상적 지혜를 많이 가진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부정의 영(spirit of denial)이 지배적입니다.이러한 부정의 영이 마음이 단순한 자들과 신앙이 단순한 자들까지 감염,타락시키는 걸 막게 하시려고,주님은 저를 불러 저로 하여금 천사들과 함께 거하며,사람과 사람이 말하듯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셨고,또한 천국과 지옥에 있는 것들을 직접 보는 것을 허락하셨는데,이런 경험이 지난 십삼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이제 주님은 저로 하여금 제가 보고 들은 바를 따라 이것들을 기술하도록 허락하셨는데,이는 무지가 밝혀지고,불신이 흩어지기를 바라셔서입니다.오늘날 허락된 이러한 즉각적 계시는,이것이 곧‘주님의 오심’(the coming of the Lord)으로 의미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It is according to that sense that what the Lord says in the passage quoted above respecting his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is to be understood. The “sun” there that is to be darkened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love;5 the “moon” the Lord in respect to faith;6 “stars”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7 “the sign of the Son of man in heaven” the manifestation of Divine truth; “the tribes of the earth” that shall mourn, all things relating to truth and good or to faith and love;8 “the coming of the Lord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lory” his presence in the Word, and revelation,9 “clouds” signifying the sense of the letter of the Word,10 and “glory”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11 “the angels with a trumpet and great voice” signify heaven as a source of Divine truth.12 All this makes clear that these words of the Lord mean that at the end of the church, when there is no longer any love, and consequently no faith, the Lord will open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and reveal arcana of heaven. The arcana revealed in the following pages relate to heaven and hell, and also to the life of man after death. The man of the church at this date knows scarcely anything about heaven and hell or about his life after death, although all these matters are set forth and described in the Word; and yet many of those born within the church refuse to believe in them, saying in their hearts, “Who has come from that world and told us?” Lest, therefore, such a spirit of denial, which especially prevails with those who have much worldly wisdom, should also infect and corrupt the simple in heart and the simple in faith, it has been granted me to associate with angels and to talk with them as man with man, also to see what is in the heavens and what is in the hells, and this for thirteen years; so now from what I have seen and heard it has been granted me to describe these, in the hope that ignorance may thus be enlightened and unbelief dissipated. Such immediate revelation is granted at this day because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coming of the Lord.
주5. 말씀에서 ‘해’는 사랑 관점에서 본 주님을 상징하며, 그 결과,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을 상징한다.In the Word the “sun”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love, and in consequence love to the Lord (n. 1529, 1837, 2441, 2495, 4060, 4696, 7083, 10809).
주6. 말씀에서 ‘달’은 신앙 관점에서 본 주님을 상징하며, 그 결과,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을 상징한다.In the Word the “moon” signifies the Lord in respect to faith, and in consequence faith in the Lord (n. 1529, 1530, 2495, 4060, 4696, 7083).
주7. 말씀에서 ‘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상징한다.In the Word “stars” signify knowledges of good and truth (n. 2495, 2849, 4697).
주8. ‘모든 족속들’은 세상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 관련 모든 것을 상징한다.“Tribes” signify all truths and goods in the complex, thus all things of faith and love (n. 3858, 3926, 4060, 6335).
주9. 주의 오심은 말씀 속 현존과 계시(His presence in the Word, and revelation)를 상징한다.The coming of the Lord signifies His presence in the Word, and revelation (n. 3900, 4060).
주10. 말씀에서 ‘구름’은 겉 글자에 들어있는 말씀이나 겉뜻(the sense of its letter)을 상징한다.In the Word “clouds” signify the Word in the letter or the sense of its letter (n. 4060, 4391, 5922, 6343, 6752, 8106, 8781, 9430, 10551, 10574).
주11. 말씀에서 ‘영광’은 천국 및 말씀의 속뜻으로서의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상징한다.In the Word “glory” signifies Divine truth as it is in heaven and as it is in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n. 4809, 5922, 8267, 8427, 9429, 10574).
주12. ‘큰 나팔’은 천국 및 천국으로부터 계시된 신적 진리를 상징한다. A “trumpet” or “horn” signifies Divine truth in heaven, and revealed from heaven (n. 8158, 8823, 8915); ‘소리’ 역시 같은 걸 상징한다. and “voice” has a like signification (n. 6771, 9926).
해설
이HH.1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이라는 책을 왜, 어떤 문제의식으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쓰는지를 ‘서문 한 장’ 안에 다 압축해 둔 글입니다. 처음 접하는 분들이 가장 먼저 걸려 넘어지는 지점은 보통 이것입니다. ‘마24에 나온 말씀이면,세상 끝날 때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는 말 아닌가요?그러면 실제로 그런 우주적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읽는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 ‘그렇게 읽는 것은 말씀의‘속뜻’(내적 의미)을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말합니다. 즉, 이 글의 출발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론’을 논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문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핵심 원리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말씀(성경)은 낱말 하나하나까지도 내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 둘째, ‘그 내적 의미는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말이 낯선 분들은 이렇게 이해하면 가장 안전합니다. ‘성경의 자연적 표현(해, 달, 별, 구름, 나팔 같은 단어들)은 단지 자연 현상을 말하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그 자연 현상이 표상하는 영적 현실을 함께 담고 있다.그래서 성경은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세상 이야기’처럼 보이는 겉옷 아래에‘영적 상태’를 말한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우주 과학책’이나 ‘미래 예언의 천문학 보고서’처럼 읽지 않고,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계시’로 읽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24장의 장엄한 종말 언어를 ‘물리적 파괴’로만 읽으면, 성경이 실제로 말하려는 핵심에서 벗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끝’이 무엇인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기’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나 교단이 아니라, ‘사람 안에,공동체 안에 살아 있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끝’은 ‘지구의 끝’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않게 되는 끝’입니다. 즉, 사랑이 식고, 그러니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꺼지고, 그 결과로 신앙도 껍데기만 남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언제나 붙여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살아납니다. 사랑이 죽으면 신앙은 지식이나 주장으로만 남고, 결국 분열과 논쟁과 자기 확증의 도구가 되기 쉽습니다.HH.1은 바로 그 상태를 ‘해가 어두워짐,달이 빛을 내지 않음,별이 떨어짐’으로 풀어 읽습니다.
여기서 상징 해석이 시작됩니다. ‘해’는 사랑에 관한 주님을 뜻합니다. ‘달’은 신앙에 관한 주님을 뜻합니다. ‘별’은 선과 진리의 지식들,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합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해가 밝다’는 것은 사랑이 살아 있고 따뜻하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살아 있으면 사람의 내면이 따뜻해지고, 그 따뜻함 속에서 진리가 ‘빛’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사랑이 식어 차가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사람은 진리를 진리 자체로 사랑하기보다, 자기 입장을 지키는 도구로 쓰기 쉽고, 신앙도 살아 있는 신뢰라기보다 ‘말과 주장’으로 남기 쉽습니다. 그러면 ‘달’, 즉 신앙의 빛도 희미해집니다. ‘별’, 즉 지식들은 더 심각합니다. 별은 ‘하늘의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데, 영적으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삶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사랑과 신앙이 약해지면 그 지식이 ‘머리 속 정보’로만 남거나, 왜곡되거나, 아예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입니다. 그러니 이 문장은 ‘천문학적 재난’이 아니라 ‘영적 내전’에 가깝습니다.
그다음 ‘인자의 표적,징조가 하늘에 보인다’는 구절을 스베덴보리는 ‘신적 진리의 나타남’이라고 풉니다. ‘인자’는 성경에서 ‘진리’의 측면, 곧 ‘말씀의 진리’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인자의 표적’은 ‘진리가 다시 나타나고 드러나는 징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공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시야’, ‘영적 시각’을 뜻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즉 ‘하늘에 보인다’는 것은 ‘영적 차원에서 드러난다’, ‘내적 의미에서 드러난다’와 맞물립니다.
또 ‘땅의 모든 지파가 애통한다’는 말은 흔히 ‘세상 사람들이 슬퍼한다’로만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지파’를 ‘신앙과 사랑의 모든 요소들’의 총합으로 봅니다. ‘지파’는 ‘교회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입니다. 사랑에 속한 것, 신앙에 속한 것, 선에 속한 것, 진리에 속한 것들이 다 ‘지파’로 표상됩니다. 그러니 ‘모든 지파가 애통한다’는 것은 ‘교회 안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슬퍼할 상태가 된다’, 또는 ‘진리와 선이 상실되어 그 결핍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시 말해 감정적 장면이 아니라, 상태의 진단입니다.
가장 핵심은 ‘구름을 타고 오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주님의 오심’을 ‘말씀 안에서의 주님의 현존과 계시’로 정의합니다. 초심자들이 제일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인데, 차근히 풀면 이렇습니다.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구름은 빛을 가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을 담아 전달하기도 합니다. 문자적 의미는 때로는 거칠고, 역사 이야기 같고, 서로 모순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문자 속에 ‘영광’이 있습니다. ‘영광’은 내적 의미입니다. 즉, ‘구름+영광’은 ‘문자 속에 감춰진 내적 빛’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은 ‘주님이 성경의 문자 속에 임재하시며,그 문자를 통하여 내적 의미를 계시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재림’의 핵심 정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이 열리는 사건’이 재림입니다.
‘나팔과 큰 소리로 천사들을 보낸다’도 같은 흐름입니다. 나팔은 ‘하늘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진리의 선포’를 뜻합니다. ‘하늘이 증언하는 진리’, ‘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오는 분명한 알림’입니다. 그러니 천사들은 ‘하늘의 매개’, ‘하늘의 증언자’ 역할을 합니다. 결국 이 전체 장면은 ‘교회의 마지막 때에,주님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하늘의 진리를 다시 들리게 하신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런 계시가 필요하다고 하나요?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천국과 지옥’, ‘사후의 삶’에 대해 사실상 무지해졌다고 진단합니다. 더 놀라운 건, 성경 안에 그것들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도, 교회 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신의 대표 문장을 하나 제시합니다. ‘누가 저 세상에서 와서 말해 주었느냐?’ 이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겠다’는 냉소이기도 하고, ‘현세만이 현실’이라는 실용주의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세상적 지혜(worldly wisdom)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가 강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상적 지혜’는 학문 자체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보이는 것만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고’로 굳어졌을 때의 위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이 ‘단순한 마음’, ‘단순한 신앙’을 오염시켜 버릴 수 있다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밝힙니다. ‘저는 천사들과 교제했고,천국과 지옥을 보았고,이것이 십삼 년 동안 계속되었고,그래서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합니다.’ 사람들은 여기서 ‘이게 자기주장 아닌가?’라고 반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반응을 예상하듯, 이 체험을 ‘자기 명성’의 재료로 내놓는 대신, ‘무지를 밝히고 불신을 흩기 위한 허락’이라고 규정합니다. 즉, 개인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적 상태, 즉 사후를 부정하는 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결정적입니다. ‘이러한 즉각적 계시가 오늘날 허락되었는데,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오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곧 ‘이 시대에 허락된 즉각적 계시,곧 내적 의미의 개방’입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을 위해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의 종말 예언은 우주 파괴의 예고장이 아니라,교회의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영적 상태를 말하며,주님의 재림은 물리적 강림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열려 하늘의 진리가 다시 계시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저서, ‘천국과 지옥’을 바로 그 ‘계시의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이 책이 단순한 교리서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 결과로 ‘천국,지옥,사후 삶’을 밝혀 주려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성경은 겉으로는 역사와 비유와 예언의 옷을 입고 있지만,그 옷 아래에 인간의 내면과 천국의 질서를 말하는 살아 있는 뜻이 숨겨져 있다.구름은 옷감이고,영광은 그 옷 속에서 비치는 빛이다.재림은 하늘 어딘가에서 새로운 장면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이미 주어진 말씀의‘안쪽’이 열려 빛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저 하늘의 먹구름도 비록 이쪽은 흐리지만, 저쪽은 햇빛으로 빛납니다. 이편은 보이는 쪽으로 말씀의 겉뜻이라면, 저편은 비록 우리 눈엔 안 보이지만, 주님의 신적 진리로 빛나는 속뜻입니다.
심화
1. ‘그러나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부분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를 알지 못합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영적이며 천적(天的, heavenly)인 것들을 다루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 사용에서 ‘아르카나’(arcana)와 ‘내적 의미’(internal sense)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정확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내적 의미’는 구조이고, ‘아르카나’는 그 구조 안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은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겉은 문자적 의미, 즉 겉뜻이고, 속은 내적 의미, 즉 속뜻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자연적 표현, 역사적 이야기, 비유, 예언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다루는 더 깊은 층위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는 말씀 안에 항상 존재하는 구조적 차원, 즉 ‘속뜻의 차원’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르카나’는 무엇인가요? ‘arcana’는 라틴어로 ‘감추어진 것들’, ‘비밀들’, ‘숨겨진 진리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쓴 ‘Arcana Coelestia’라는 책 제목 자체가 ‘천적(하늘에 속한) 비밀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밀’은 신비주의적 암호가 아니라, 문자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들을 뜻합니다.
이제 둘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말씀에는 ‘내적 의미’라는 층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의미’ 안에 담겨 있는 구체적인 영적, 천적 진리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는 차원이고, ‘아르카나’는 그 차원 안의 내용입니다. 집에 비유하면, ‘내적 의미’는 집 안쪽 공간이고, ‘아르카나’는 그 안에 놓여 있는 보물들입니다.
HH.1에서 스베덴보리가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각 부분 속에 감추어진 아르카나를 모른다’고 할 때, 그는 이런 뜻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문자적 의미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적 상태, 천국의 질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 교회의 쇠퇴 과정 같은 깊은 진리들, 곧 ‘아르카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드러나는 통로는 어디인가 하면, 바로 ‘내적 의미’입니다. 내적 의미가 열릴 때 아르카나가 보입니다.
또 한 가지 구분이 도움이 됩니다. ‘내적 의미’는 말씀 전체에 항상 존재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본질적 성격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는 특정한 진리 내용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더 유동적으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해는 사랑에 관한 주님을 뜻한다’는 해석, ‘구름은 문자적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 ‘주님의 오심은 말씀 안에서의 현존과 계시를 뜻한다’는 해석, 이런 것들이 각각 하나의 ‘아르카나’입니다. 이 모든 아르카나가 모여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구성합니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은 상응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문자와 영적 실재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습니다. 이 상응 체계 전체가 ‘내적 의미’라는 구조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상응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천적 진리의 구체적 내용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아르카나는 내적 의미의 산물이며, 내적 의미는 아르카나가 자리하는 틀입니다.
목사님 번역 사역과 연결해서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창세기 한 절 한 절을 번역하시면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삭은 무엇을 뜻하는가, 애굽은 무엇을 뜻하는가’라고 풀어 가실 때, 그 작업 전체가 ‘내적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영적 진리들, 곧 사랑과 신앙의 질서, 거듭남의 단계, 교회의 상태 변화 같은 구체적 통찰들이 바로 ‘아르카나’입니다.
따라서 두 용어는 겹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내적 의미’는 말씀 안에 항상 있는 구조적 차원이고, ‘아르카나’는 그 차원 안에 담긴 감추어진 영적 진리들입니다. 이렇게 구분해 두시면, HH.1에서 스베덴보리가 왜 ‘아르카나’와 ‘내적 의미’를 나란히 말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2. ‘말씀은 전적으로 상응(correspondences)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씀은 전적으로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문장은 스베덴보리를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자명하게 들리지만, 반감을 가진 사람에게는 곧바로 ‘자의적 해석 체계 아닌가?’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설득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가 맞다’고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어떤 책인가를 차분히 짚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성경은 처음부터 ‘상징적 언어’를 사용해 왔다는 점은 스베덴보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23)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양을 치는 직업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보호와 인도라는 관계를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15)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물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런 표현들을 ‘비유’나 ‘영적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즉, 성경 안에 자연적 표현을 통해 영적 관계를 말하는 방식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상응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입니다.
둘째, 성경의 예언서나 묵시문학을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 24장의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천문학적 사건으로만 읽는 해석은 역사적으로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많은 주류 신학자들조차 이것을 ‘상징적 종말 언어’로 봅니다. 이사야, 에스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 뿔, 용, 큰 음녀 같은 표현들도 문자 그대로의 동물학적 묘사로 읽지 않습니다. 이미 기독교 전통 안에는 ‘자연적 이미지가 영적 현실을 가리킨다’는 인식이 널리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원리를 체계화한 것일 뿐, 전혀 새로운 발명을 한 것이 아닙니다.
셋째, 성경의 일관성을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은 오히려 합리적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저자들이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문화 속에서 기록한 문서들의 집합입니다. 그런데도 ‘구원’, ‘언약’, ‘왕’, ‘양’, ‘빛’, ‘물’, ‘광야’, ‘성전’ 같은 이미지들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반복은 단순한 우연이나 문학적 취향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조직적입니다. 마치 하나의 공통된 상징 체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성경이 단순한 역사 기록이나 도덕 교훈집이라면, 이런 상징적 일관성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물과 영적 실재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그 반복은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넷째, ‘가장 작은 부분까지 내적 의미를 지닌다’는 표현도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문학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시나 고전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단어 선택 하나, 색채 하나, 숫자 하나가 작품 전체의 구조와 연결된다고 보는 해석 전통이 있습니다. 하물며 성경이 ‘계시’라는 이름을 가진 책이라면, 단어 하나도 우연히 들어갔다고 보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경전적 존중의 한 형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존중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모든 단어가 상응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성경의 표현이 단순한 표면 정보 전달을 넘어선다’는 점은 쉽게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다섯째, 경험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읽을 때와, 상징적, 영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전혀 다른 깊이의 이해가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 이야기를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이동사로만 읽을 때와, 그것을 ‘인간의 영적 해방 과정’으로 읽을 때, 독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달라집니다. 상응이라는 틀은 이런 ‘영적 독서’가 자의적 공상이 아니라 일정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 가지는 남습니다. 성경이 단순한 자연적 사실 전달서라면, 마태복음 24장이나 요한계시록은 거의 이해 불가능한 텍스트가 됩니다. 그러나 자연적 이미지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가정하면, 그 난해함이 상당 부분 풀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상응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명제는 최소한 ‘성경을 더 일관되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하나의 설명 가설’로는 충분히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성경이 상징과 비유, 예언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그 표현들이 단순한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공헌은 그 직관을 ‘상응’이라는 개념으로 조직화하고, 그 결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영적 의미가 스며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 데 있습니다. 이 명제는 그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야만 가능한 억지가 아니라, 성경 자체의 문학적, 신학적 성격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충분히 논의 가능한 주장입니다.
3.‘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 안에 제시되고, 묘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지옥, 사후 삶이 말씀 안에 다 제시되어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 개신교인의 질문은 정당합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렇게 말한다’고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 본문 자체를 차분히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먼저, ‘천국과 사후 의식의 지속성’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최소한 ‘죽은 뒤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또 변화산 사건(마17)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은, 이미 죽은 인물들이 여전히 인격적 존재로 나타난다는 서술입니다. 바울도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후5: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빌1:23)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즉각적이고 인격적인 상태’를 전제합니다. 단순히 ‘무의식적 잠’이라면 이런 표현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지옥과 심판 이후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19–31)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죽은 후 부자는 고통 가운데 있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습니다. 양쪽 모두 의식과 기억, 그리고 대화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라 해도, 예수님은 완전히 허구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구조를 빌려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적어도 ‘죽은 후의 의식적 상태’라는 전제를 공유하지 않았다면 이 비유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 20–22장은 ‘생명책’, ‘불못’,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합니다. 요5:29에서도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들은 사후 상태, 심판,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분명히 전제합니다.
개신교인들이 “그건 상징적 표현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많은 부분이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상징이 있다고 해서 실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표현은 상징이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징은 ‘방식’이지 ‘허구’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가 상징적일 수는 있지만, 그 배후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신약 전체가 ‘이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긴장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 4장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난해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본문들은 단순히 ‘죽은 후 무의식 상태’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풍부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라고까지 말했을까요? 이것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실질적 성격, 곧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사후의 삶이 어떤 질서로 진행되는지 등에 대해 매우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비판에 가깝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죽으면 천당 간다’는 말은 하지만, 천국이 어떤 상태인지,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왜 어떤 이는 지옥에 이르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막연함’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개신교인에게 답할 때는 이렇게 정리하시면 안전합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의 삶에 대한 기본 전제는 성경 전체에 분명히 있다. 다만 그 구체적 성격과 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 전통이 존재한다. 스베덴보리는 그 구체적 구조를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의 권위를 먼저 세우면서도 스베덴보리를 ‘성경을 대신하는 인물’로 오해받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죽음 이후의 의식적 존재’, ‘천국과 지옥의 구분’, ‘최종적 심판과 상태의 지속’을 말합니다. 다만 그 구체적 모습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해석을 상응과 내적 의미의 틀 안에서 풀어냈고, 그 결과가 그의 저서, ‘Heaven and Hell’입니다. 상대가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성경이 사후 세계를 실재로 전제한다는 점 자체는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예언서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에스겔에서 말하기를,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겔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여기서 이성(rational)은 ‘레바논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불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함,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은 기억 지식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훨씬 더 명료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과 다른 많은 곳에서 ‘애굽’은 기억 지식들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이성(reason)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이 글은 AC.118에서 제시된 ‘힛데겔 강 = 이성의 명석함’, ‘앗수르 = 이성적 마음’이라는 정의를, 예언서 전체를 가로지르는 상응의 증언으로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말씀이 스스로 이 해석을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에서 앗수르가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백향목은 곧고 높으며,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나무입니다. 이는 이성이 가진 구조적 힘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이성은 인간 정신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능력이며, 사유의 높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자라는 조건은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라지 않았고, ‘물들’과 ‘깊은 물’, 그리고 ‘강들’로 인해 자랐습니다. 다시 말해, 이성은 유입에 의해 살아납니다.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함,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이 기억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성이 작동하는 실제 내부 구조를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들은 이성의 토양이자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방향을 갖지 못합니다. 이성은 이 기억 지식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고 연결하지만, 그 이성 자체도 위로부터의 흐름 없이는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질서를 더 넓은 구조 속에 배치합니다.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이 서로 왕래하며 하나의 복을 이룬다는 그림은, 인간 정신의 삼중 구조를 매우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입니다. 이 셋이 서로 단절되지 않고 연결될 때, 곧 기억 지식이 이성으로 정리되고, 이성이 지성으로 밝혀질 때, 그 전체가 ‘복’이 됩니다.
특히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라는 표현은, 기억 지식이 이성을 섬겨야 한다는 질서를 말합니다. 정보와 경험은 이성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이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또한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하는 대목은, 이성 자체도 인간의 자랑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나의 기업’으로 불리는 것은, 지성이 주님의 목적과 직접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단순한 이해 능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살아내는 능력이며, 이는 인간 안에서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영역입니다.
AC.119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높고 강력하지만, 근원은 아니다. 기억 지식과 지성을 잇는 중간에 서서 섬길 때에만 참되며, 이 삼중 질서가 하나로 움직일 때, 인간 전체가 복이 된다고 말입니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창2:14)
AC.118
‘힛데겔 강’(river Hiddekel)은 이성(reason), 곧 이성의 명석함(clearsightedness of reason)입니다. ‘앗수르’(Asshur)는 이성적 마음(rational mind)이며,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은 이성의 명석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흘러들어옴을 의미합니다. ‘브랏’(Phrath), 곧 유브라데 강은 기억 지식이며, 이는 마지막 단계(the ultimate)이자 경계입니다. The “river Hiddekel” is 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Asshur” is the rational mind; the “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 signifies that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come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Phrath,” or Euphrates, is memory-knowledge, which is the ultimate or boundary.
해설
이 글은 에덴에서 흘러나온 지혜의 강이 ‘이성’(reason)과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이라는 두 하위 층위로 더 세분화되는 지점을 다룹니다. 앞선 둘째 강 ‘기혼’이 이해의 인식들을 의미했다면, 셋째 강 ‘힛데겔’은 그 인식들이 ‘이성의 명석함’으로 조직되고 투명해지는 단계입니다.
‘힛데겔’이 이성의 명석함을 의미한다는 말은, 이성이 단순한 계산이나 논증 능력이 아니라, ‘진리의 흐름을 또렷이 보는 능력’임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명석함은 스스로 밝아지는 자율적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비췸을 받을 때 생기는 선명함입니다.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앗수르는 종종 이성의 힘과 연결되며, 올바르게 쓰일 때에는 교회의 보호와 질서를 돕지만, 스스로를 절대화할 때에는 교만과 왜곡으로 기울어집니다. 따라서 이성의 명석함이 ‘동쪽’, 곧 주님을 향해 흐른다는 표현은, ‘이성은 근원을 잊지 않을 때에만 참되다’는 조건을 분명히 합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라는 구조는 유입의 질서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주님 → 속 사람 → 이성적 마음(겉 사람)이라는 흐름입니다. 이성은 출발점이 아니라 ‘경유지’입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 이성은 교만해지지 않고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 지식이며 ‘경계’라는 설명은, 에덴의 강들이 도달하는 ‘최외곽’(the ultimate or boundary), 즉 가장 바깥을 짚어 줍니다. 기억 지식은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며 경계입니다. 더 이상 아래로 내려가면 감각과 세속의 영역이 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위로부터의 유입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그릇’으로 기능할 때에만 온전합니다.
AC.1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스스로 빛나지 않으며, 기억 지식은 결코 근원이 아니고, 모든 명석함은 주님에게서 시작되어 질서 있게 아래로 흐를 때에만 참된 빛을 가진다고 말입니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은, 사실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결코 막연히 ‘영감을 받았다’거나 ‘신비 체험을 했다’고만 말하지 않고,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자신이 어떤 상태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권위 아래서 계시를 받았는지를 진술합니다. 아래에 가장 핵심이 되는 저작들과 그 원문 취지를 정리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은 ‘Heaven and Hell’(천국과 지옥, 1758) 서문과 본문 중 여러 곳입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영이 열려’(opened) 천사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단지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in full wakefulness) 보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특히 그는 약 1745년 이후 ‘내적 시야가 열려’ 영계에 출입할 수 있었고, 수십 년 동안 거의 매일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그 대화 내용과 영계의 질서를 기록했다고 증언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가 이것을 일시적 황홀경이나 무의식 상태가 아니라, 일상적 의식 가운데서 경험했다고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나는 영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몸 안에 있었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며, 이중적 의식 상태를 설명합니다.
다음으로 매우 중요한 증언은 ‘Arcana Coelestia’(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749-1756) 서문과 각 권의 앞부분, 그리고 여러 단락에 흩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를 주님으로부터 계시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를 ‘구술’(dictation) 방식으로 받았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으로부터 조명(enlightenment)을 받아 말씀의 영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 조명은 그의 지성을 통하여 작용하는 빛과 같은 것이며, 그 빛 가운데서 문자 속에 감추어진 영적 의미가 드러났다고 설명합니다. 즉, 기계적 받아쓰기가 아니라, 지성이 열려 진리를 ‘보게 되는’ 방식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저작은 ‘Apocalypse Revealed’(계시록 풀이, 1766)과 ‘Apocalypse Explained’(계시록 해설, 1759)입니다. 여기서도 그는 자신이 단지 상징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의 실제 교류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는 요한계시록의 장면들이 영계에서 실제 상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는 자신이 ‘영적 세계에 들어가 그 상태들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하며, 이 체험을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반복했다고 진술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자기 묘사는 비교적 짧은 저작인 ‘True Christian Religion’(참된 기독교, 1771) 서문과 몇몇 후반부 단락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그는 ‘주님께서 친히 나를 부르셨다’고 말하며, 자신이 ‘새 교회를 위한 교리를 계시하도록 위임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27년 동안 천사들과 계속 교통해 왔다고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또한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의 어조는 매우 단호하며, 자신의 사명을 공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초기의 개인적 체험은 ‘Spiritual Experiences’(영계 일기, 1747-1765)에서 보다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그가 어떤 날 어떤 영을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으며, 어떤 내적 상태를 통과했는지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책은 출판을 염두에 둔 체계적 저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적 기록 노트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체험이 점차 안정되고, 점점 더 질서 정연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계시의 방식’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와 교류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말씀의 내적 의미는 ‘조명’(enlightenment) 가운데서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위임된 사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예언자적 황홀경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상태에서 천상적 사실을 보고 기록한 증인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내가 받은 계시는 기계적 받아쓰기라기보다 조명된 지성 안에서 진리를 본 것’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