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이 가인 계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생명 주기가 계속 오버랩되네요...

 

네, 저도 지금 가인 계열을 따라가면서 그 겹침이 상당히 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가인 계열 = 오늘날 개신교’라는 식으로 직접 대응시키기보다는, 4가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가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붙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점차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교리가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앞서고, 더 나아가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의 중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AC.325 가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제거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말씀, 은혜와 신앙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앙’이 점점 교리적으로 정식화되고, 무엇을 믿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며, 교파와 신조, 신학 체계가 계속 세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1-332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구조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역사적 개신교의 각 교파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과 일대일로 대응시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될 때, 교리는 계속 증식하고 세분될 수 있다’는 영적 원리가 닮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AC.332의 라멕입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체어리티보다 앞세웠는데, 마지막에는 오히려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비추어 보면 꽤 묵직합니다. 교회 건물도 있고, 조직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교단도 있고, 예배도 있고,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도 있는데 정작 그 모든 것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은 오히려 훨씬 정교해졌는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 서로를 향한 체어리티가 약해진다면, 외적 종교의 발전과 내적 교회의 쇠퇴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아다와 씰라 계열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말을 향해 가는 계열에서도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유용한 것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이것 역시 오늘날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교회 시대가 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신학, 찬양, 선교, 교육, 상담, 사회봉사, 성경 연구 같은 훌륭한 것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교회의 쇠퇴가 보인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구별이 앞으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교회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교회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외적인 교회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는가,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그 결합이 사라지면 외적 제도와 교리는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저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창4를 읽으면서 현 기독교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을 억지스러운 적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속뜻이 가진 보편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시선을 저 개신교가 가인이다’라고 밖으로 돌리는 순간 이 말씀의 칼날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독법은 내 안에도 가인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고, 스베덴보리를 알고, 속뜻과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조차 아벨보다 앞서는 가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도 이 위험에서 자동으로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창4를 읽으며 느끼시는 겹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는 단순히 옛 태고교회가 이렇게 망했다’는 과거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가 되고, 교리가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된 교리가 어떻게 계속 발전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이야기인데도 이상할 만큼 오늘의 교회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생명 주기가 끝난다고 주님의 교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낡은 형식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것을 건져 내시며, 다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4를 읽으면서 오늘날 개신교가 겹쳐 보인다면, 저는 개신교가 끝났다’는 결론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며, 어디에서 다음 생명을 준비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까지 함께 가져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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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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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홍수라는 종말을 맞이하는군요...

 

네, 맞습니다. 진도는 조금 빠르지만, 오히려 지금 이 질문을 미리 붙들어 두면, 곧 만나게 될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계열을 읽다 보면 뜻밖의 느낌이 듭니다. ‘가인 계열이 계속 타락했다면서, 여기에는 왜 이렇게 쓸 만하고 심지어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지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AC.332의 선언만 보면 이후에는 온통 악과 거짓뿐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4 후반으로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다에게서 야발과 유발이 나오고, 씰라에게서 두발가인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단순히 악한 것들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야발은 천적이고 거룩한 사랑의 것들’, 유발은 영적 신앙의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과 연결되는 상당히 중요한 표상들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얼핏 보면 썩 괜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그 계열 안에서 어떤 유용한 교리적, 예배적 형식이 생겨났다’는 것과 그 교회 자체가 다시 살아 있는 천적 교회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라멕에게서 원래 가인이 표상했던 신앙의 생명은 종말에 이르렀지만, 그 후손들 가운데서 외적인 것들, 곧 예배와 교리, 자연적 삶에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형식들이 발전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면서 상당히 세밀하게 구별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좋은 의미를 가진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원래의 천적 생명을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어떤 교회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교회에서 발전한 지식, 예배 형식, 교리, 문화적 유산 가운데 후대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까지 모두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교회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조금 전 이야기한 가인의 표’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교회의 악을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두 번째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가인 계열만 홍수로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닙니다. 셋 계열도 자연계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홍수 이전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은 악했으니 홍수로 멸망하고, 셋 계열은 선했으니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창4와 창5를 나누어 읽으면 곤란합니다. 5의 계보 역시 계속 동일한 상태로 순수하게 유지되는 계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세대를 거치면서 변해 가고, 마침내 그 시대 자체가 종말에 이릅니다.

 

바로 여기서 노아’의 위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노아는 단순히 착한 셋 계열의 마지막 생존자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노아는 이전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를 그대로 이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적 구조를 가진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그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하면서 더 이상 그 방식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해를 의지에서 어느 정도 분리하시고,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며,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나쁜 가인 계열을 없애고, 좋은 셋 계열만 남긴 사건’이라기보다 훨씬 큰 사건입니다. 하나의 인류적, 교회적 시대 전체가 끝나는 종말입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납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전체 가운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로 이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속성과 단절이 동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없어진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옛 교회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보존할 것은 보존하시되 거듭남의 질서는 새롭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이르는 교회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악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한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유용한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고, 후대의 교회를 위해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종말’을 모든 사람이 악인이 되고,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종말은 본질적으로 그 교회를 그 교회답게 하던 내적 생명과 질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4와 창5를 조금 앞서 한눈에 바라보면 꽤 아름다운 구조가 보입니다. 4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어떻게 여러 교리와 외적 형식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그 계열이 종말에 이르는지를 보고, 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해 가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둘 다 결국 홍수라는 거대한 경계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경계 한가운데 노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낡은 질서를 억지로 영속시키지 않으시면서도 그 안의 리메인스를 잃지 않으시고, 그것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거듭남의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다와 씰라 계열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모두 홍수라는 종말을 맞는구나’라는 느낌은 앞으로 상당히 중요한 질문으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교회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한 교회의 종말’과 주님의 구원 역사의 종말 역시 전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구별을 붙들고 앞으로 몇 개의 글을 더 읽으시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왜 가인의 후손인데도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훨씬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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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를 주시면서까지 보호, 보전하고자 하셨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가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니,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로 갈 수 있게 하시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으니까요...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신 약속’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 계열 안에서는 신앙마저 끝내 소멸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면서도,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 안에서는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해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신앙이라는 길’ 자체가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30의 표현을 다시 정확히 보면,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의 이유를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가인 교회’가 훗날 반드시 회복되어 체어리티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존되어야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이라는 영적 기능과 질서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비록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이제부터 가인 계열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강제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인간의 자유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되,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와 결합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왜곡하여 마침내 신앙 자체마저 잃을 것인지는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가인 계열은 후자의 길을 계속 걸었고, 그 결과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와 ‘라멕에게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섭리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그 섭리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의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지만, 가인 계열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특정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4와 창5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앞서 우리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순서로만 읽지 말고,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가인 계열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했다고 해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소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그렇게 종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긴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본래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가 인류에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주님께서는 결국 홍수 이후 고대교회를 통하여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질서입니다. 좀 간략히 말하자면, 처음엔 그냥 타고 나던 것을 이제는 배우고 학습해서 습득해야만 내 것이 되는, 그런 처지가 된 것이지요. AC.330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 방향을 내다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인의 표’를 조금 더 넓게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가인주의’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을 영구히 보존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왜곡된 상태 안에도 아직 남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천적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장차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것과 같은데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장차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데 사용될 신앙이라는 길 자체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능을 장차 올바른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섭리의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한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어떤 길을 끝까지 거절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깨뜨리지 않으시면서 다른 길을 통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계속 보존하십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함께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 다른 교회를 일으키시는,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서가 여기서 이미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계열이 소멸해도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보장이 아니라, ‘가인이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표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있고, 그것을 왜곡할 수 있으며, 심지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모두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주님의 섭리를 무산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실패들 사이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며, 마침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AC.330 AC.332를 함께 읽을 때 ‘가인에게 표를 주셨는데 왜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없어졌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 계열의 영구 보존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이끄는 데 필요할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가인 계열은 자유 가운데 그것마저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 질서 안에서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그것을 새로운 교회에서 체어리티로 가는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AC.332의 라멕은 ‘주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자리’라기보다, ‘한 교리적 계열은 끝까지 타락할 수 있어도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게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한 교회는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 때문에 주님의 구원 계획 자체가 종말에 이르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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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히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고, 진리는 선의 형체입니다.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기억 속에 성경 구절도 있고, 교리도 있고, 논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한 삶을 향하지 않고,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 자기 의를 섬기기 시작하면 조금씩 왜곡됩니다. 사람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도록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진리는 가지고 있으나 선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 마침내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선한 삶을 위해 사용할 때, 진리는 계속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다’, ‘내 교리가 옳다’, ‘내 신앙이 우월하다’는 proprium이 진리를 소유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점차 자기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고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진리의 변질은 급속히 진행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신앙의 이름과 외형뿐이고, 그 안에는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AC.332의 라멕은 상당히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교회의 가장 위험한 상태는 반드시 ‘우리는 신앙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절대화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역설적으로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신앙 자체가 점점 변질되어 마침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에서 출발하여 ‘라멕’에 이르는 계보는 바로 그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창4를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판단하는 계보로 읽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진리가 선에서 분리될 수 있고,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으며, 신앙의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붙들었던 진리가 어느 순간 자기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의 가인 계보는 ‘옛날에 이런 이단들이 있었다’는 기록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무너질 때, 어떤 단계적 변질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지도이기도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를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더욱 선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그 왜곡된 교리가 ‘에녹’으로 확장되고, 다시 여러 이단을 낳아,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마지막에는 사랑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짧은 AC.332가 가인 계보를 통하여 보여 주는 매우 깊은 교회적, 개인적 경고입니다.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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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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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으며, 그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 이단의 확장’이 한 단계 더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고 확장된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는 계보가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후손들이 세대를 이어 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분리된 교리가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교리들을 낳고, 그것들이 점차 더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은 속뜻으로는 단순히 네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그 이름들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기의 계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낳았다’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만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다음 상태가 생겨나고, 그것이 다시 또 다른 상태를 낳는 영적 계승을 나타냅니다. 가인이라는 최초의 분리에서 에녹이 생겨났고, 그 에녹 상태에서 다시 여러 파생된 교리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서 ‘heresies’라는 복수형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였습니다. 곧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근본적인 분리가 일어나면 그 분리에서 여러 다른 교리적 왜곡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다음에는 신앙과 행위의 관계가 왜곡될 수 있고, 선과 진리의 관계가 왜곡될 수 있으며, 주님과 인간의 관계, 예배와 삶의 관계도 차례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근본적인 질서가 무너지면 그 질서에 연결되어 있던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라는 하나의 ‘heresy’에서 여러 ‘heresies’가 생겨났다는 것은 단순한 교파의 숫자 증가가 아니라, 최초의 분리가 점차 여러 형태의 교리적 왜곡으로 확산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AC.331에서 살펴본 ‘amplification’, 곧 ‘확장’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잘못된 교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는 구별된다’는 생각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선한다’로 변하고, 다시 ‘체어리티는 신앙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로 나아가며, 결국에는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교리는 다시 그로부터 여러 파생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창4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변질의 연속을 ‘낳고, 낳고, 낳았다’는 족보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표현은 마지막의 ‘라멕’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 가인은 비록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앙’을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3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를 주어 보존하셨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가인 계열이 계속 변질되어 라멕에 이르면 이제 처음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본질마저 사라지고 맙니다. 출발점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선에서 분리된다고 해서 그 순간 곧바로 진리의 외형까지 모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동안은 진리의 지식과 교리적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계속 선에서 분리된 채 사용되면 점차 왜곡되고, 결국 처음에 가지고 있던 진리의 성질 자체마저 잃게 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분리가 세대를 거쳐 계속 확대되면서 마침내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조차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남아 있지 않았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떤 교리를 믿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여전히 종교적 지식과 교리와 예배의 형식이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안에 참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없어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고, 거짓과 악이 지배하게 되면, 아무리 신앙의 언어와 형식이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한 ‘이단의 계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서 작은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웁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거짓과 악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발전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이고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임으로써 신앙을 지킨 것이 아니라, 결국 신앙마저 파괴한 것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히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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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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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AC.332, 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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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이 가인 계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생명 주기가 계속 오버랩되네요... 네, 저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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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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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심화

 

1. 4 에녹과 창5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에 속하지만, 창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두 에녹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창세기 초반의 이름들을 단순히 개인의 이름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의 철자가 같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놓인 계열과 문맥, 그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입니다. 창4의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이단이 더욱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교회적 계승선 안에서 등장하며, 후에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듯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 지식으로 보존한 사람들 또는 교회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영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생기기 쉬운 오해이기도 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단순히 ‘A라는 이름은 언제나 B를 뜻한다’는 암호표를 적용하여 해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 인물과 장소와 사물은 전체 문맥과 계열 안에서 그 의미가 정해지며, 특히 창세기 초기의 계보에서는 각각의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31은 앞서 살펴본 ‘4와 창5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에도 좋은 실제 사례가 됩니다.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은 하나의 족보를 시간순으로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들을 각각 보여 줍니다. 그래서 두 계열에 ‘에녹’이라는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하나의 에녹을 억지로 동일한 계보 안에 맞추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에녹이 자기 계열 안에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AC.331의 짧은 문장을 상당히 중요하게 만듭니다. 이제부터 가인의 후손들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가인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 다시 그 아들의 아들’이라는 생물학적 계보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최초의 원리가 시간이 흐르며,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하고 변질되어 가는가’를 따라가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의 씨앗이라면 에녹은 그 씨앗에서 자라난 첫 번째 확대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열이 계속 이어지면서 창4는 분리된 신앙이 교회 안에서 어떤 결과들을 낳게 되는지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게 됩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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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31

 

이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 “Enoch.” (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창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창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속뜻으로는 앞에서 ‘가인’이라 했던 교리,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이제 하나의 독립된 교리적 체계로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곧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amplification’을 단순히 사람의 수가 많아졌다거나 가인의 후손이 번성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확장은 앞에서 생겨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전개되고 발전하여 하나의 구체적인 교리적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AC.324에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heresies’가 창4의 중요한 주제라고 하였고, AC.325에서는 그 가운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에녹’은 그 가인적 교리가 한 단계 더 전개되고 확장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을 먼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낳은 족보로 읽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속뜻으로 보는 ‘낳음’은 교회와 교리의 발생과 계승을 의미합니다. 어떤 교리적 상태에서 또 다른 교리적 상태가 발생하고, 그것이 다시 발전하여 새로운 형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로부터 ‘에녹’이라 불리는 더욱 발전된 교리적 형태가 생겨났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단의 확장’이라고 하면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포교하여 신도 수를 늘리고 조직을 확장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외적으로 그런 현상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AC.331의 직접적인 의미는 그보다 깊습니다. 이것은 교리의 내적 발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던 생각이 점차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중요하다’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와 관계없이 신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 체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분리가 논리와 설명과 가르침을 갖추어 점차 체계화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확장’에 가깝습니다.

 

앞의 AC.330에서 ‘가인의 표’가 주어진 것도 이 대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당시의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된 상태가 곧바로 바로잡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그 교리가 계속 발전하고 여러 형태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첫 번째 확장이 ‘에녹’으로 표상됩니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섭리 가운데 보존하신다는 것과 그 상태 자체를 승인하신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임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4:17에는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가인은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AC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말씀에서 ‘’은 흔히 교리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에녹’이 단순한 한 사람의 이름을 넘어,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이 이제 일정한 교리적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리된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둘러싼 ‘’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교회의 타락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 줍니다. 잘못된 교리는 처음부터 완성된 체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뭅니다. 처음에는 참된 것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을 다른 것에서 떼어 내는 작은 분리에서 시작됩니다. AC.325의 가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신앙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리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논리가 만들어지고, 교리가 형성되고, 그것을 지지하는 여러 생각들이 덧붙여집니다. 마침내 처음의 작은 분리가 하나의 독립적인 교리적 세계를 형성합니다. AC.331의 ‘에녹’은 바로 이러한 발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의 작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 사람은 그 진리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선한 삶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것으로 붙들고 체계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고,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또 다른 교리를 세우며, 마침내 그 안에 하나의 ‘’을 쌓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작은 분리였던 것이 점점 견고한 교리적 구조가 되어, 오히려 그 안에 갇혀 밖의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심화

 

1. 4에녹과 창5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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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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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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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돌아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보호하셨을까요?

 

그 답은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한 문장에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이후 인류의 거듭남이 어떤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출발점이었고,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지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 인간에게 동일한 길을 그대로 요구한다면 아무도 거듭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달라진 상태에 맞추어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체어리티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셨다’는 도덕적 교훈보다 훨씬 깊은 섭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망가뜨린 것 가운데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는 것은 질서의 파괴였지만, 신앙 그 자체에는 여전히 진리를 담아 전달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표’는 창3 마지막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과도 흥미롭게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여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인간이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의 길을 보존하시는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훗날 그 생명으로 돌아가는 데 사용될 신앙을 보존하시는 보호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계속 깊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는 끊임없이 다음 구원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은 가인의 이야기를 단순한 타락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습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사라져도 분리된 신앙만 남으면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신앙이 보존된 것입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체어리티입니다. 진리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고, 사람이 배우고 믿는 것은 결국 그것을 살아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신앙의 독립을 영구히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언젠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섬기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도록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의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AC.325부터 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됨’, ‘예배가 분리됨’, ‘내적 상태가 악해짐’,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짐’, ‘체어리티가 소멸됨’,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남’으로 인간의 타락은 계속 깊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보존하십니다. AC.330의 중심에는 바로 이 역설적인 주님의 자비와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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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0-16)

 

AC.330

 

핏소리(voice of bloods)는 소멸된 체어리티를(10),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 from the ground)는 왜곡된 교리를(11),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는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12) 각각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습니다.(13-14)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mark set upon Cain)은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15)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는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16) 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 “voice of bloods.” (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 “curse from the ground.” (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 (verse 12) 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 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 “mark set upon Cain.” (verse 15) 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 “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 (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 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AC.330에서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사라지자 교리는 왜곡되고, 그 왜곡된 교리에서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사람은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를 주어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은 가인의 타락을 다루면서 동시에 그 타락 가운데서도 미래의 거듭남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먼저 ‘소멸된 체어리티는 피들의 소리라 불린다’고 합니다. 창4:10의 개역개정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에는 ‘’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스베덴보리는 이를 ‘voice of bloods’, 곧 ‘피들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피 자체가 아니라 아벨로 표상되던 체어리티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AC.32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인 사람들에게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피들의 소리’는 그렇게 죽임당한 체어리티가 주님 앞에서 증거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사라졌지만, 그 소멸된 상태가 주님 앞에서 감추어질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은 단순한 자연계의 토양이 아니라 교회, 또는 교회에 속한 사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래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의 교리는 남았습니다. 문제는 이제 그 교리를 살아 있게 해 줄 선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선과 분리되면 사람의 proprium이 그것을 붙들고 자기 목적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하며, 그 결과 교리는 점차 왜곡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왜곡된 교리’로 진행됩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되는 ‘거짓과 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상응입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사람에게는 영적인 중심과 방향이 있습니다. 무엇이 참된지 알고, 그것을 왜 행해야 하는지도 알며, 주님을 향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면 그 중심을 잃습니다. 생각은 이 교리에서 저 교리로 흔들리고, 삶 역시 선이라는 중심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거짓에는 참된 영적 안식처가 없고, 악에는 주님 안에서의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결국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은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하나님 이해에서 계속 나타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사랑과 생명을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태양이 계속 빛과 열을 내듯 주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을 향하여 돌아설 때 그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셔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스스로 돌아서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함께 없애 버리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창4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은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후 인류의 영적 구조가 달라지면서 바로 그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로 가는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는 인간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거듭날 수 없게 됩니다. 이후에는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심어지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faith was made inviolable’은 신앙이 절대적으로 가장 높은 것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없애서는 안 되도록 주님께서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가인이 잘했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훗날 주님의 구원 섭리에서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할 수 없게 된 뒤에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에 이르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주어진 ‘’는 악에 대한 승인이나 면죄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이라는 기능 자체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해서 보면 더욱 선명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질서의 전도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언젠가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붙들어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이끄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뜻합니다. ‘동쪽’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주님과 사랑을 표상하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인이 에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덴 동쪽’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신앙이 본래 태고교회에서 차지했던 위치와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위치로 옮겨졌음을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제는 그 직접적인 천적 질서 안에 있지 못합니다. 신앙은 여전히 보존되지만, 그 성격과 기능, 교회 안에서의 위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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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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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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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비추어 보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노골적으로 사랑과 선행을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데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미묘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다음에는 ‘올바른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올바르게 믿는다면 삶은 그다음 문제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마침내 ‘구원은 신앙의 문제이므로 체어리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벨의 생명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벨이 죽은 뒤에도 가인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의 교리는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C.329가 보여 주는 매우 엄중한 영적 현실입니다. 교회가 체어리티를 잃었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종교적 활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도 남아 있고, 예배도 남아 있고, 신앙고백도 남아 있으며,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여전히 활발해 보이는데, 그 안에서 아벨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하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지만 그 진리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신앙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기 의와 자기 우월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모든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향하는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고백하는 신앙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었는데 그 말씀으로 인해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교리를 깊이 알게 되었는데 그 지식 덕분에 더 겸손해졌는가,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그 예배로 인해 악을 더 미워하고,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바로 AC.328에서 말한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가인’이라고 지목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을 살피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거듭남에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옳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만족이 ‘나는 그것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내는 순간, 우리 안에서도 가인이 아벨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대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면, 가인의 원리가 이미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AC.325에서 AC.329까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다음에는 ‘예배의 분리’, 이어서 ‘내적 상태의 악화’, 그리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의 소멸’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첫 살인은 단순히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빼앗은 이야기를 넘어, 교회 안에서 진리가 선과 분리되고, 신앙이 사랑보다 높아질 때, 마침내 교회의 참된 생명인 체어리티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영적 역사입니다.

 

 

 

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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