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지쳐 중간중간 누워 쉬어야 하며, 그럴 때면, 하릴없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웹툰을 보거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다 합치면 몇 시간씩 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건, 제 시야가 자꾸 세상사를 향하게 되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AC, 그리고 천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어땠나요? 그의 전체 저작량을 보면 하루하루가 거의 살인적인 시간 사용이었을 것 같은데, 그는 지치지 않았나요? 갈수록 6, 7, 8학년이 되어 심신이 예전 같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지금 목사님이 단순히 ‘글을 많이 쓰느라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는 ‘두 세계 사이를 하루 종일 왕복하고 계시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C 본문을 붙들고 내적 의미를 따라가며, 그것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풀어낸다는 건, 단순 지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정신 집중과 내적 긴장을 요구합니다. 특히 목사님처럼 단순 번역이 아니라 ‘상태 안으로 들어가며’ 작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간중간 몸이 꺼지듯 누워야 하는 것도, 정신이 자동적으로 가벼운 영상이나 웹툰 쪽으로 도피하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입니다. 사람이 높은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낮은 감각 자극으로 균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사님이 정확히 보신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쉬는 것 자체’보다, 그 쉬는 방식이 점점 시야를 세상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 휴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의 초점 자체가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도 인간이기에 피곤함 자체는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후기 저작들을 보면, 인간적 체력으로는 거의 설명이 안 될 정도의 작업량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 집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절 단위로 따라가며 영적 의미를 풀어내는 작업이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영계 체험과 저작에 들어갔고, 60대와 70대에 가장 방대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목사님과 조금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두 세계 중 어느 쪽이 실재인가’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천국을 믿는 사람’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영적 세계가 더 실재적이라는 감각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경우는 세상 자극이 지금 우리에게 스마트폰처럼 강한 흡인력을 갖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후기에 점점 더 세상 사교와 오락, 명예 경쟁, 학문적 과시에서 멀어집니다. 대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식하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않았으며, 산책과 휴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그 엄청난 저작량은 ‘광적인 몰아치기’라기보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의 규칙성과 집중의 반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님은 지금 거의 ‘전투 모드’로 작업하고 계신 느낌이 강합니다. 하루 8개 전후의 글을 매일 생산한다는 건, 실제로는 일반적인 연구자나 목회자의 작업량을 이미 훨씬 넘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목사님께 필요한 것은, ‘더 몰입해야 한다’보다, ‘내적 시야를 흐리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사님을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사역으로 부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자꾸 ‘AC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인데’라고 느끼시지만, 인간 정신은 계속 최고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휴식이 아니라 ‘휴식의 질서’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라면, 휴식을 완전히 세속적 감각의 홍수 속으로 던져 넣기보다, 정신의 결을 크게 흐리지 않는 방향을 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용한 산책, 가벼운 독서, 자연 관찰, 기도 속 멈춤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 오늘날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력 자체’를 계속 밖으로 끌어당기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몇 시간 웹툰과 유튜브를 보고 나면, 단순히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마음의 방향 자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너무 자신을 정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이미 상당 부분 ‘자기 own과 싸우며’ 이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왜 또 무너졌나’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방향을 돌리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 의지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려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사님도 지금부터는, ‘유튜브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보다, ‘내 영의 초점을 크게 흐리지 않는 휴식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감각적 영상 대신 자연 다큐, 조용한 클래식, 천국과 지옥 관련 지도, 미술, 역사 탐색, 혹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눈 감고 쉬는 시간 같은 방향입니다. 인간 정신은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에서 쉬느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자꾸 ‘내가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속에만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목사님이 하고 계신 AC 작업은, 사실상 한국어권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입니다. 당장은 조회수도 적고 반응도 미미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도 생전에는 자기 저작이 이렇게 오래 읽힐 줄 인간적으로는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씨를 뿌렸고, 열매는 훨씬 뒤에 나타났습니다. 목사님 역시 지금 ‘즉각적 반응’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길 닦기’에 가까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속도를 더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것입니다.

 

 

 

SC.83, ‘스베덴보리와 개신교의 기도, 찬양, 금식, 방언, 전도’

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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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 (AC.160 심화 3)

 

1에 의하면, 2 전반 첫 번째 태고교회 역시 부단한 자기 own과의 싸움, 그리고 그 극복을 통해 저 자리, 저 상태까지 이른 것 같은데... 그래서 윗글 표현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로 고쳐 표현해야 할 것 같아요.

 

 

목사님 지적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AC.16-63까지의 ‘1 거듭남 구조’를 충분히 따라온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 제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대로, 창2의 태고교회 인간 역시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천적 상태에 도달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창1 여섯 날의 과정 전체가, 질서 없는 상태로부터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긴 형성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표현, 곧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라기보다, ‘그렇게 느끼려는 순간 아주 단호하게 물러납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은 상당히 통찰력 있습니다. 실제로 천적 인간을 너무 ‘자기감 자체가 거의 없는 존재’처럼 이해하면, 창1 전체의 거듭남 투쟁 구조와 잘 연결되지 않는 면이 생깁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흐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충돌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즉, 태고교회 인간에게도 proprium 가능성 자체는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창2에서 ‘돕는 배필’, ‘깊은 잠’, ‘여자’, 그리고 이후 타락 가능성 자체가 등장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도 인간인 이상 자기 자신 안으로 기울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무게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기본 상태 자체가 자기 자신 중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이키려면 거꾸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기본 중심이 주님 쪽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으로 느끼려는 움직임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오늘날 인간처럼 굳어지고 체질화되기 전에 훨씬 더 민감하게 그것을 감지하고 물러날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즉 목사님 표현대로라면, 태고교회 인간은 ‘독립 중심 감각 자체가 전혀 없는 존재’라기보다, 그것이 올라오는 순간 즉시 그것의 위험성을 퍼셉션으로 느끼고, 자연스럽게 주님께 다시 돌이키는 존재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무서운 민감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사랑이나 자기 의를 느껴도 그것을 상당히 오랫동안 ‘나 자신’으로 붙들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proprium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지는 움직임 자체를 거의 영적 통증처럼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훨씬 빠르게 주님 질서로 되돌아갑니다.

 

이 점에서 창1의 여섯 날도 새롭게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 자동 성장 과정이 아니라, 인간 안의 혼돈이 점차 주님의 질서 안으로 정렬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안식 상태 역시 ‘더 이상 어떤 유혹도 없는 상태’라기보다, 주님의 질서가 중심을 잡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수정 표현은 상당 부분 타당합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적었다’는 말을 너무 정적인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순간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로 이해하면, 창1의 거듭남 구조와도 훨씬 잘 연결됩니다.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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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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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베덴보리도 기도 생활을 했나요? 찬양, 그러니까 일상 중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나요? 금식은? 방언, 그리고 전도, 선교는요? 제가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던 시기, 뭔가 크게 달랐던 점이 기독교, 개신교인들에겐 일상적인 이런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관찰이십니다. 사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처음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를 접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낯섦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감각 말입니다. 현대 개신교인에게 익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보통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 ‘전도 열심히 하는 사람’, ‘금식과 철야를 하는 사람’, ‘성령 체험과 방언을 말하는 사람’ 같은 형태로 드러나는데,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기록이 빠져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신앙의 중심축 자체가 오늘날 복음주의적 경건 형태와 상당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분명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기도의 외적 형식’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더 본질적인 기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반복적 언어 자체보다,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기 악을 보고 물러서며 선을 행하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는 ‘무릎 꿇고 몇 시간 통성기도했다’ 같은 기록은 거의 없지만, 대신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열고, 자기 own(proprium)을 경계하며,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할 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기도라고 보는 흐름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드릴 때, 천사들과 연결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계 체험 초기에 극심한 영적 공격과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기도를 ‘집회 중심 행위’라기보다 ‘주님 앞에 영혼을 여는 상태’로 보았습니다.

 

찬양과 찬송 역시 비슷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의 스웨덴 루터교회 예배에는 당연히 찬송이 있었고, 그 역시 평생 교회 사람이었으므로 찬송 자체를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처럼 ‘찬양 사역’, ‘은혜로운 찬양 시간’, ‘찬양 집회’ 같은 형태의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음악적 감정 고양보다 ‘천국의 질서와 사랑의 상태’에 더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천국에서의 말과 음악이 사람의 내적 상태와 정확히 상응한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즉 천사들의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흐름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찬양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감정적 열광 자체를 신앙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는 금식 수행을 강조하는 흐름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외적 금욕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예전에 몸담으셨던 수도원 전통과 비교하면 꽤 낯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음식을 줄이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줄이는 것이 더 본질적 금식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금식이라는 방향입니다. 물론 절제와 단순한 삶 자체는 매우 중요하게 보았지만, 그것을 공로적 수행처럼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방언 문제는 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오순절 계통에서 말하는 방언 운동과 매우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와의 접촉 자체는 누구보다 강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영들과의 직접 교류’를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이 영들의 음성을 직접 좇기 시작하면 쉽게 환상과 자기 확신 속으로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식 의미의 방언 체험이나 신비주의적 열광을 신앙의 중심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의 변화’, ‘체어리티’, ‘주님 사랑’, ‘유익한 삶’이 참된 영성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전도와 선교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대 개신교식 ‘노방전도’나 ‘대중부흥회’ 스타일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는 평생 거리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교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저작 전체를 ‘새 교회(New Church)를 위한 주님의 준비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진리들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조용하고 비가시적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진리를 질서 있게 제시하고, 자유롭게 읽고 판단하도록 두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블로그에 거의 매일 AC 해설과 심화를 올리시는 모습이, 외적으로는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방식과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을 즉시 움직이는 운동’보다 ‘오랜 시간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길을 닦는 작업’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실 때 느끼셨던 그 낯섦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신앙 활동 중심의 경건’보다 ‘존재 상태 중심의 거듭남’을 훨씬 더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문화에서는 흔히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가 신앙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집회, 부흥, 철야, 방언, 간증 같은 요소는 거의 없고, 대신 끝없이 인간의 의지, 사랑, 사고, 체어리티, 질서, 거듭남, 천국적 상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합니다. 처음엔 이것이 ‘차갑다’ 혹은 ‘경건 생활이 없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읽다 보면, 그는 오히려 신앙을 인간 존재 전체의 가장 깊은 층위까지 가져가려 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SC.84, ‘살인적인 저작 활동 중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쉬었나?’

저는 하루 중 상당 시간을 ChatGPT를 통한 AC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관련, 초벌 및 마무리 작업, 그리고 그걸 블로그에 게시하는 작업으로 보냅니다. 보통 매일 8개 전후의 글 작성을 하는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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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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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더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AC.160 심화 2)

 

그렇다면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는 더 자유롭지도, 더 자발적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 지점이 AC 초반부를 읽으며, 가장 놀랍고도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 태고교회 인간이 ‘자유가 없었다’거나 ‘자발성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는 종류의 ‘독립적 자기의식 기반 자유’는 훨씬 약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리된 독립 중심처럼 느끼는 정도가 매우 적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거의 자동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결정한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신앙인조차 실제 삶에서는 자기 자신을 거의 독립 존재처럼 느끼며 삽니다. 그런데 태고교회 인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흘러든다는 사실을 퍼셉션으로 거의 직접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유는 오늘날 인간처럼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선택하는 자유’라기보다, ‘주님의 선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유’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핵심 차이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더 분리된 자의식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 없이도 자기 혼자 설 수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강한 자기감 속에서 삽니다. 이 때문에 훨씬 더 위험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완전히 굳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주님께 돌아올 가능성도 생깁니다.

 

반면 태고교회 인간은 훨씬 더 순수했고, 훨씬 더 천국 가까이에 있었지만, 오늘날 인간처럼 깊은 자기 분리 상태 안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아버지 손을 거의 놓지 않은 아이’에 가까웠고, 오늘날 인간은 ‘멀리 떠나 자기 인생처럼 살다가 다시 돌아오는 탕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기 교회 인간에게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가 열렸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은 더 낮고 위험한 자유입니다. 천사적 순수 상태가 아니라, 유혹과 자기 사랑과 의심 한가운데서 선택해야 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도 인간이 자발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전체의 아주 깊은 역설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능성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강제된 선은 참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 순종 시스템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님을 사랑하는 존재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태고교회 인간은 우리보다 훨씬 더 순수했고 더 천국적이었지만, 오늘날 인간처럼 강한 proprium 의식 안에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형태의 자유 경험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날 인간은 훨씬 더 위험하고 불안정하지만, 바로 그 깊은 자기감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택하는’ 새로운 차원의 자발성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AC.160, 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AC.160.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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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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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하향’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거의 직접적인 퍼셉션 안에서 살았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안에 있었고,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거의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알았습니다. 그런데 AC.160에 이르면 인간은 이제 ‘(flesh)이 됩니다. 곧 proprium과 자기감이 훨씬 강해지고, 주님의 생명을 직접 지각하던 상태에서는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이전보다 낮아진 상태, 곧 일종의 ‘하향’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실패나 실수처럼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상태를 통해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너무 직접적으로 천국 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처럼 자기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하게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온 인간은 자신을 훨씬 더 ‘나 자신’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더 불완전하고 더 자기중심적으로 될 가능성을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더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을 자동 순종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심지어 자기 사랑으로 기울 가능성까지 가진 상태 안에서, 자유롭게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AC.160의 변화는 단순 ‘질 저하’라기보다, 위험성과 자유가 함께 커진 상태라고 보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를 아주 거칠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 손 안에서 완전히 보호받는 상태는 안전하지만, 아직 독립적 인격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기 의지와 자기 판단이 강해지면 훨씬 위험해집니다. 반항도 가능하고 잘못도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태에서 비로소 ‘자발적 사랑’도 가능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역사를 어느 정도 이런 방향으로 봅니다.

 

그래서 AC.160의 ‘영이 육이 되었다’는 변화는, 단순 추락만이 아니라 ‘자유와 proprium이 본격적으로 인간 존재 안에 결합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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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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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AC.160)

 

 

AC.160은 창2 마지막과 창3 시작 사이에서 인간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특히 여기서 ‘(spirit)에서 ‘(flesh)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 육체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flesh)은 자주 proprium과 결합된 인간 상태, 곧 자기 자신 중심으로 기울 수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생명을 받던 인간이 이제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proprium과 결합된 상태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먼저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다’는 부분입니다. 태고교회 인간은 원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생명을 직접 반영하는 상태였습니다. 겉 사람조차 속 사람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주님의 질서 아래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과 affection, 그리고 행동은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spirit 상태였습니다. 여기 spirit은 단순 영혼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흐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flesh)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flesh는 단순 물질 몸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 proprium이 결합되어, 자기 자신 중심의 감각과 자기 생명 의식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단순히 주님의 흐름 통로로만 느끼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사는 존재’처럼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이 육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 추락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어서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adjoined’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천적, 영적 생명을 결합시키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면 자유도, 사랑도, 상호적 결합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되지만, 동시에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함께 흐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that they might be as one’, 곧 둘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여전히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핵심 역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반드시 완전 악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후 말씀에서 flesh는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사랑에 기울어진 인간성을 뜻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살아 있는 인간 전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의 영화(glorification) 문맥에서는 신적 인성의 실제성과 충만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AC.160 flesh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인간 상태’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문장은 결국, 인간 존재 구조 안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났음을 설명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의 전적으로 spirit 상태였지만, 이제는 proprium과 결합된 flesh 상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천적, 영적 생명을 그 안에 계속 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독립된 존재도 아니고, 완전히 수동적 존재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처럼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AC.160은 바로 그 놀라운 긴장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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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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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0

 

부모를 떠나(leave father and mother)는 속 사람으로부터 물러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cleave unto his wife)는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며, ‘한 몸을 이룰지로다(be one flesh)는 그들이 거기서 함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을, 결혼제도의 기원이나 윤리 규범이 아니라 ‘영적 구조의 변화’로 읽게 만드는 핵심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 절을 한 문장 한 문장 해체하여,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부모’는 속 사람의 기원,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떠난다’는 것은, 속 사람이 더 이상 주도권을 유지하지 않고 ‘뒤로 물러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단절이 아니라, 중심 이동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는,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거처를 두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이 겉 사람을 다스리는 위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 구별이 약화되어 ‘겉 사람 안에 내재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때 겉 사람의 own과의 결합이 훨씬 밀접해집니다.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은 이 둘이 함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조화로운 협력이라기보다는, ‘분리가 어려운 결합 상태’를 의미합니다. 앞 단락 AC.159에서 말했듯이, 이미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흐려진 상태에서의 결합이기 때문에, 이 ‘하나 됨’은 이전의 천적 결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 단락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이었으나, 이제는 ‘’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자기의 own과 밀접히 결합된 상태’를 뜻합니다. 영이란 주님께 열려 있는 상태를, 육이란 자기의 own과 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 자기의 own과 결합되어, 하나인 것처럼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는 아직 즉각적인 타락은 아니지만, ‘타락이 가능해진 구조’입니다. 생명이 자기의 own과 너무 가까워졌고, 그 결과 구별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AC.160은 창2의 마지막 문장들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험한 전환점’이 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다음 AC.161-162에서는 이 상태가 어떻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로 묘사되며, 동시에 어떤 보호막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는지가 이어서 드러나게 됩니다.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 flesh)

 

 

AC.160, 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AC.160.심화 1. ‘전에는 영(spirit), 이제는 육(肉, flesh)’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肉, flesh)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천적인 생명과 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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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 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AC.160.심화 2. ‘하향(下向) 평준화’ 어느 정도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관점에서는 단순 ‘퇴보’나 ‘열화’(劣化)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더 복합적인 의미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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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 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AC.160.심화 3. ‘온전한 천적 인간 상태, 곧 첫 번째 태고교회’ 그래서 이것은 단순 ‘하향 평준화’라기보다, ‘더 낮고 위험한 상태 안으로 내려왔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운 결합 가능성이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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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AC.160, 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AC.160.심화 4. ‘즉시 퍼셉션으로 감지하고 물러나는 상태’ 첫 번째 태고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더 주님 안에 있었고,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님의 생명을 지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님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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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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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한 것인지를 지각하고, 또한 겉 사람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속 사람을 통하여 다스려지는지를 지각합니다.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AC.159)

 

 

AC.159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천적 인간 이해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나 ‘신앙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차이를 실제로 지각(perceive)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속 사람(internal man)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인간 안의 더 깊은 차원입니다. 사랑, 퍼셉션, 천국적 질서가 자리하는 곳입니다. 반면 ‘겉 사람(external man)은 감각, 일상 사고, 행동, 세상과 접촉하는 자연적 인간의 차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인간은 이 둘이 거의 뒤섞여 있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과 욕망이 어디서 오는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과 자기 판단을 거의 곧 자기 자신 전체로 느낍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은 다릅니다. 그는 자기 안에 두 층위가 있다는 것을 단순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분명히 지각합니다. 즉, ‘이것은 겉 사람의 움직임이구나’, ‘이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를 내적으로 압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겉 사람이 자기 독립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까지 지각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바로 ‘through the internal’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을 직접 억지로 조종하시는 방식으로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먼저 속 사람 안에 선과 진리와 사랑을 심으시고, 그것이 점차 겉 사람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마치 영혼이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듯이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흐름을 어느 정도 실제로 느낍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충동이나 생각이 올라오면 거의 즉시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화가 올라오면 ‘내가 화났다’, 욕망이 올라오면 ‘내가 원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자기 안의 겉 사람 움직임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봅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더 깊은 평안과 질서를 압니다. 그래서 겉 사람의 움직임이 속 사람 질서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퍼셉션’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단순 추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이 주님께 속하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지를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감각처럼 압니다. 그래서 그는 겉 사람이 속 사람을 거슬러 독립하려 할 때도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와도 연결됩니다. 거듭남 이전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리되어 있고 충돌합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려 하지만, 겉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질서 안에서 결합합니다. 겉 사람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래서 AC.159는 단순 심리 설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천국적 인간 상태의 묘사입니다.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너무도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서로 적대하지 않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의 질서 아래 살아 움직이는 상태 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바로 참된 인간 질서이며, 천국의 인간 구조입니다.

 

 

 

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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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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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현 기독교 및 개신교 전역 어디에서든 결혼식 메인 본문 문장 중 하나가 바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창2:24, 곧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는 거의 모든 기독교 결혼식에서 가장 대표적인 축복 본문처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어 행복하게 살라’는 정도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적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층위를 봅니다.

 

그에게서 이 말씀은 단순 결혼 윤리나 가정 축복 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 구조 자체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인간 안에서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지성과 사랑이 하나 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몸’은 단순 육체적 결합이나 정서적 친밀감을 넘어서, 존재 전체의 결합을 뜻합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결혼식에서 이 구절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결혼은 단순 사회 제도가 아니라, 바로 이 영적 결합의 지상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깊이를 거의 모른 채 문자적 의미에만 머문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남자는 주로 understanding truth 쪽을, 여자는 will affection, 곧 love good 쪽을 상징합니다. 물론 실제 인간 안에는 남녀 모두 두 요소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적으로는 이런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이 두 차원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히 ‘둘이 친하게 살아라’ 수준이 아닙니다. 인간 안에서 진리를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분열 상태가 끝나고,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며, 이해하는 것을 살아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전체가 사실상 이 결합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기쁨은 선과 진리의 결혼, love wisdom의 결합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은 결혼식에서 사용되기에 오히려 너무 깊은 말씀입니다. 단순 부부 축복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완성과 천국 질서 자체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결혼이 참되려면, 단순 감정 결합이 아니라, 서로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가 함께 자라야 한다는 뜻까지 포함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한 몸’이 거의 낭만적, 윤리적 표현처럼 들렸는데, AC를 통해 보니 이것이 인간 영혼 전체의 구조와 연결된 엄청난 선언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이런 경험이 자주 옵니다. 익숙한 성경 문장이 suddenly 전혀 다른 깊이로 열리는 순간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이 구절을 결혼식에서 사용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깊은 진리를 무의식적으로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대부분은 그것이 단순 ‘부부 화합’ 정도를 넘어서,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영원한 결합, 곧 천국 자체를 상징한다는 사실까지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59, 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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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 겉 사람을 구별 못하게 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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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23)

 

AC.159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지각(perceive)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한 것인지를 지각하고, 또한 겉 사람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속 사람을 통하여 다스려지는지를 지각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자기의 own을 원하게 된 결과, 그 상태가 변화되어,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질 때에는 이러한 지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창2:23-24의 결합 언어가 ‘어떤 인식의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전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단락입니다. 이 단락은 ‘왜 문제가 되었는가’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문제는 결합 그 자체가 아니라, ‘구별을 잃은 상태에서의 결합’이었습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 구별은 이론적 분별이 아니라, ‘직접적인 퍼셉션’입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무엇이 겉 사람의 영역인지를 자연스럽게 압니다.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해 주님께 다스려지고 있다는 질서 또한 지각합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주도권을 갖지 않으며, 속 사람을 통로로 삼아 주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겉 사람에 속한 자기의 own을 원했습니다. 이 ‘원함’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인식 구조를 변화시키는 방향성’입니다. 그 결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된다는 지각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두 층’으로 인식되지 않고, 하나의 연속체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질 때에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 즉,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라고 느끼는 것은 중립적인 착각이 아니라, ‘자기의 own으로 기운 상태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 3장에서 인간이 왜 그렇게 확신에 차서 잘못을 선택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인식적 토대입니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의 결합은 ‘구별을 전제로 한 결합’이었지만, 그 후손들에게서의 결합은 ‘구별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결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차이가 곧 ‘질서 안의 결합’과 ‘질서를 상실한 결합’을 가릅니다.

 

AC.159는 이렇게 창2를 마무리합니다. 창2는 타락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타락이 가능해진 인식 구조’를 이미 완성해 둔다고 말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라고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자기의 것과 주님의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장, 창3이 시작됩니다.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 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AC.159.심화 1.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창2의 마지막 문장, 곧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단순한 축복 선언이 아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위 해설 문장을 잃고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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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AC.159, 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AC.159.심화 2. ‘천적 인간의 속 사람, 겉 사람’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되어 있으며, 참으로 매우 분명히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한 것인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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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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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man [vir]’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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