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8.심화

 

1. 58:10-11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 구절이 왜 AC.108에 인용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지금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는 ’과 ’이 단순한 자연 이미지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의 유입’이라는 사실이 말씀 전체의 공통 언어임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8장의 이 구절은, 그 상응이 실제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예로 선택된 것입니다.

 

이사야의 문맥을 보면, 출발점은 매우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장면입니다. ‘주린 자에게 심정이 동하고 괴로워하는 자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용어로 말하면 사랑이 실제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즉, 사랑이 개념이 아니라 삶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사랑이 먼저 움직이고, 그다음에 변화가 따라옵니다. 이 구조가 바로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는 구조와 같습니다.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 지혜와 빛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오른다’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지혜의 출현’을 뜻합니다. 사랑이 실제로 작용할 때, 그 사람 안에 이해가 열리고,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는 외부에서 정보를 더 얻어서 생기는 변화가 아니라, ‘내적 상태가 바뀌면서 따라오는 인식의 변화’입니다. AC.107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지혜가 흘러나온다는 원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이 지혜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행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계속해서 유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마른 곳에서도 만족하게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외적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내적 생명은 마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 의미입니다.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부로 흘러드는 생명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이 등장합니다.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물 댄 동산’은 AC.108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입니다. 동산은 지성이고, 물은 지혜이며, 그 지혜는 사랑에서 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축복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지성을 적시는 상태’를 그대로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2장의 에덴 구조가 이사야 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지혜가 일회적 깨달음이 아니라, ‘지속적인 유입’임을 보여줍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은 한 번 깨닫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성은 마르지 않습니다. 이 점이 바로 ’과 ’이라는 이미지가 함께 사용되는 이유입니다.

 

결국 이 구절이 AC.108에 인용된 이유는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동산과 강의 구조’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흐르는 동일한 생명의 질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질서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실제로 작용할 때 곧바로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이 말씀은 단순히 선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수준을 넘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으로 움직일 때,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들어와 그 사람의 지성을 적시고, 그 삶 전체를 살아 있는 동산으로 만든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AC.108이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입니다.

 

 

 

AC.108, 창2:10, ‘동산과 강 : 사랑에서 흐르는 지혜가 이루는 인간의 성장 질서’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떤 때에는 비유로 말하고, 어떤 때에는 그대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en comparing man to a “garden,” also compared wisdom, and the things relating to wisdom, to “rivers”; nor did they merely compare them, but actually so called them, for such was their way of speaking. It was the same afterwards in the prophets, who sometimes compared them, and sometimes called them so. As in Isaiah: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는 신앙과 사랑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거듭난 자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reating of those who receive faith and love. Again, speaking of the regenerate: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2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As the valleys are they planted, as gardens by the rivers side; as lignaloes2 which Jehovah hath planted, as cedar trees beside the waters (Num. 24:6).

 

예레미야에서는 말합니다. In Jeremiah: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 8) Blessed is the man who trusteth in Jehovah;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endeth forth her roots by the river (Jer.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자들을 동산과 나무에 비유하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부릅니다. In Ezekiel the regenerate are not compared to a garden and a tree, but are so called: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The waters made her to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and sent out its channels to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e was made beautiful in her greatness, in the length of her branches, for her root was by many waters. The cedars in the garden of God did not hide her; the fir trees were not like her boughs, and the plane trees were not like her branches, nor was any tree in the garden of God equal to her in her beauty; I have made her beautiful by the multitude of her branches, and all the trees of Eden that were in the garden of God envied her (Ezek. 31:4, 7–9).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태고 사람들이 사람이나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에는, 그가 적셔질 수 있도록 하는 물들(waters) 강들(rivers)을 덧붙였으며, 이 물들과 강들로는 그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것들을 의미하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man, or the things in man, to a “garden,” they added the “waters” and “rivers” by which he might be watered, and by these waters and rivers meant such things as would cause his growth.

 

2. 라틴 tentoria, ‘텐트(tents), 얼핏 santalos에 대한 미스프린트 같음 [편집자 주] The Latin is tentoria, “tents,” seemingly a misprint for santalos. [Reviser]

 

해설

 

이 글은 AC.107에서 제시된 ‘강 = 사랑에서 나온 지혜’라는 정의를 ‘말씀 전체의 언어 습관’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의 말하기 방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비유를 만들지 않았고,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태고 사람들에게서 ‘동산’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 상태를 말하는 자연스러운 언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과 ‘’도 지혜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은유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인식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비유했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실제로 그렇게 불렀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언어와 오늘날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이사야의 ‘물 댄 동산’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은 신앙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물은 외적 복이나 형통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지혜의 생명’입니다. 물이 끊어지지 않는다, 곧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지혜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위로부터 흘러옵니다.

 

민수기와 예레미야의 인용에서는 같은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거듭난 자는 ‘강가의 동산’, ‘물가에 심어진 나무’로 묘사됩니다. 공통점은 모두 ‘뿌리의 위치’입니다. 뿌리가 물가에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그의 지혜와 지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유입으로 유지됩니다.

 

에스겔의 인용은 이 이미지를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비유’라는 말조차 쓰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그대로 동산의 나무들로 불립니다. 물과 강이 흐르고, 가지가 뻗고, 다른 나무들이 그 아름다움을 시기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하늘의 질서 안에서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라는 표현은, 이 모든 성장이 주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자기 성취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동산 안에서 물을 받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은 비교 불가능하며,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시기한다고까지 표현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요지를 분명히 합니다. 태고 사람들이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언제나 물과 강을 함께 말한 이유는, ‘성장은 반드시 유입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과 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성장의 조건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흐르지 않으면, 어떤 동산도 자랄 수 없습니다.

 

AC.10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홀로 자라지 않으며, 지혜는 언제나 사랑에서 흘러와 강처럼 동산을 적실 때에만 참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심화

 

1.58:10-11

 

 

AC.108, 심화 1, ‘사58:10-11’

AC.108.심화 1. ‘사58:10-11’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

bygrace.kr

 

 

 

 

AC.107, 창2:10, '에덴의 강 : 사랑에서 지혜로, 지혜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생명의 질서'(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river out of Eden)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에덴(Eden)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을 적시고(to water the garden)는 지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thence parted into four heads)는 이어서 나오는 네 강을 통해 지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A “river out of Eden” signifies wisdom from love, for “Eden” is love; “to water the garden” is to bestow intelligence; to be “thence parted into four heads” is a description of 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 as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 10절의 핵심 구조를 단 한 문장으로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이 지성이며, ‘나무’가 퍼셉션이라는 틀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흐르고 작용하는가’를 설명하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입니다.

 

먼저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결정적입니다. 지혜는 지식의 총합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이해’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는 그 사랑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강은 에덴, 곧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강이 ‘동산을 적시고’라는 표현은, 지혜가 지성을 살아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구조이지만, 그 구조를 실제로 기능하게 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강물이 없으면 동산은 메마른 공간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없으면 지성은 정보의 집합일 뿐, 생명의 장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중요한 전환이 나옵니다. 그 강은 한 줄기로 끝나지 않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추상적 능력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 가지 작용과 방향으로 분화되어 지성을 구성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지성은 단일한 기능이 아니라, 네 갈래의 질서로 펼쳐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잠시 미룹니다. ‘as follows’라는 말로, 이제부터 하나씩 설명될 것임을 알립니다. 이는 앞서 AC.106에서 했던 방식과 같습니다. 먼저 구조를 제시하고, 그다음에 각 요소를 차례로 풀어 나갑니다.

 

이 글의 중요성은, 지성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흐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에덴의 사랑 → 지혜 → 강 → 지성의 적심 → 네 갈래의 분화라는 이 흐름은, 천적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AC.107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지혜가 강처럼 흘러 적시고 갈라지며 이루는 살아 있는 질서라고 말입니다.

 

 

 

AC.108, 창2:10, ‘동산과 강 : 사랑에서 흐르는 지혜가 이루는 인간의 성장 질서’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

bygrace.kr

 

AC.106, 창2:9, '세 나무의 구분 :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감각적 신앙의 길목'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질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다만 그 만남은 비극도 아니고, 충격도 아니고,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재회가 이루어진 뒤, 각자의 길을 가는 형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분명히 보았고, 그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관찰했습니다.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 먼저 간 사람은 이미 자기 본질에 맞는 짝을 찾았다

 

천국에서의 혼인은 지상의 법률적 혼인이 아니라 영적 본질(affectional essence)이 맞는 두 존재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함께 살았던 부부라도 영적 본질이 전혀 맞지 않았다면, 천국에서 부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중간 영계에서 정화된 뒤, 자신과 영적으로 가장 잘 맞는 ‘진짜 짝’을 만나 천국적 결혼을 이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예비하신 진짜 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후, 지상 배우자가 죽어 중간 영계에 도착한다

 

이때 중간 영계에 들어온 지상 배우자는 먼저 천국에 올라간 배우자가 ‘다른 천국적 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죽음의 평안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상태, 천사의 안내, 중간 영계의 분위기 등 이런 것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먼저 천국 간 배우자가 중간 영계 배우자를 보러 오는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굳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영적 친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영적 친화성이 없는 존재는 서로에게 끌림이 생기지 않는다.’ 즉, 주님이 그 마음 안에서 집착을 제거하셨기 때문에 억지로 가서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일시적 만남은 허용된다

 

중간 영계에 새로 도착한 지상 배우자가 강하게 보기 원하거나 서로에게 아직 ‘남은 질문’이 있다면, 천사들이 그 만남을 잠시 허용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아주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 만남은 대부분 다음과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강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로 ‘, 당신이 오셨군요.’ 정도의 자연스러운 인식이 있습니다. 대립도, 갈등도, 원망도 없습니다. 은근한 감사, 또는 담담한 정서가 흐릅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그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평화에 가깝다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영계에서의 이별은 지상의 감정적 상실이 아니다. 상태가 맞지 않는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즉, 천국에 있던 배우자도 슬퍼하지 않고, 중간 영계에 도착한 배우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간 영계에서는 이미 지상적 집착(attachment)이나 소유 의식이 천사들에 의해 부드럽게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은 억지도, 슬픔도, 미련도, 적대도 없이 단지 ‘아주 조용한 고별’ 같은 이런 정서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평화로운 결별 장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간 영계에 도착한 그 배우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자신에게 가장 맞는 영적 상태를 향해 중간 영계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정화가 충분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짜 짝, 즉 자신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이성(異性)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결합은 지상 결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밝고 평화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혼의 진짜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재회와 결별은 비극이 아니라 질서이다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적 질서이며, 불일치한 둘이 억지로 함께 있는 일이 없다.’ 그리고 또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과정이고, 천국에서의 결혼은 본질이다.’ 즉, 지상에서는 의무, 상황, 문화, 정, 책임이 부부를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혼의 본질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만나더라도 평범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맞습니다

 

네, 목사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이미 천국에서 다른 짝을 만난 쪽은 한때의 지상 배우자를 따뜻한 기억으로만 바라보며,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한 배우자와는 조용히 재회하고, 조용히 인사하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의 감정적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별에는 고통이 아니고,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가 있다.’

 

 

 

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nature), ‘생명나무(tree of lives), 그러니까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본성,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그저 기억 지식에서 비롯될 뿐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서는 뒤이어 나오는 글들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설명이라기보다 ‘구조적 이정표’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세기 2 9절을 중심으로, 나무, 동산, 에덴, 중앙이라는 핵심 상징들을 압축적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종류의 ‘나무’가 다시 한번 또렷이 구분되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둘째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지 기억 지식에서 출발할 뿐인 신앙입니다. 이는 질서가 거꾸로 될 위험을 내포한 인식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개념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는 그 윤곽만 제시되었을 뿐이며, 각각이 실제 삶과 영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이 문장을 둡니다.

 

그래서 AC.106은 독자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질 설명의 흐름 속에서’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지식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 갈라지고 또 충돌하는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 글은 또한 스베덴보리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 개념을 먼저 심어 두고, 그것이 이후의 설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차 분명해지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이름을 얻었을 뿐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그 열매를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AC.106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지도’를 펼쳐 보았을 뿐이며, 이제부터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AC.107, 창2:10, '에덴의 강 : 사랑에서 지혜로, 지혜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생명의 질서'(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

bygrace.kr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감을 품을 것 같아요. 소위 말세의 징조 같은 온갖 뉴스가 난무하는 이 시대를 주님이 오셔서 제발 좀 정리, 정돈해 주셨으면들 하거든요.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위와 같은 거룩한 내용을 어떻게 풀어 설명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새 교회는 보이지 않는 상태다’라는 식으로 바로 들어가면, 대부분의 분들은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정리해 주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대 자체를 부정하려 들기보다, 먼저 그 기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공감해 주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사람들은 ‘밖에서 질서를 세워 줄 힘’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서와 의에 대한 갈망’이라는 점에서 건강한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설명은 교정이 아니라 ‘확장’의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질문을 살짝 바꾸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정리하신다면, 그 정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사람’이라고 답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가 바뀌어도 다시 혼란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어가면, 외적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납득하게 됩니다.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단순히 바깥을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방식’이라는 방향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후에는 성경 자체를 통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를 떠올리게 하면 좋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와 세상의 혼란을 끝내 줄 ‘외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사람의 마음과 삶을 다루셨습니다. 이 사실을 떠올리게 하면, ‘, 주님의 방식은 원래 이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문이 열립니다. 곧, 주님의 오심은 세상을 뒤집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 안에 나라를 세우는 사건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두 층위’를 구분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안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에서는 전쟁과 갈등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안의 역사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두 층위를 동시에 다루시지만, 중심은 언제나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 설명을 통해, ‘세상이 여전히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새 교회가 오느냐’라는 질문이, 사실은 두 층위를 섞어서 생긴 질문임을 스스로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 온 다음에야 비로소 ‘새 교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새 교회’는 눈에 보이는 조직이 먼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 ‘새로운 질서’가 먼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살아나며, 그 신앙으로 이해가 열리는 삶의 방식이 실제로 시작될 때, 그것이 바로 새 교회의 시작이라는 점을 차분히 연결해 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1퍼센트만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길’로 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 설명이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로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서면, 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세상은 이미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질서는 항상 안에서 밖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정리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바꾸시지만, 그 방식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먼저 한 사람 안에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왜 세상은 그대로인데 새 교회를 말하는가’ 하는 반감이 줄어들고, 오히려 ‘그럼, 나부터 시작해야지’라는 방향으로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bygrace.kr

 

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05.심화

 

3. 새 교회’,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람들로 지상의 99%는 어수선함에도 불구, 겨우 1%의 사람들을 가지고 어느 한쪽 구석에서 새 교회는 시작되는 건가요? 노아의 홍수도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거죠? 태고교회도 당시 교회 안 사람들만 대상으로 한 것이고 말입니다. 석기시대 등을 생각하면, 이렇게 모든 걸 나눠서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

 

 

핵심부터 바로 말씀드리면,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떤 시점에 전 세계가 한꺼번에 바뀌면서 도래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기대는 성경의 외적 역사 이해에서는 가능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새 교회는 언제나 ‘상태의 시작’으로 옵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의 질서가 회복된 상태’가 시작될 때, 이미 새 교회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것처럼, 겉으로 보면 세상은 여전히 자기중심의 욕망과 혼란 속에 있습니다. 국가 간 대립, 이념 갈등, 개인의 욕망 중심적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본질’과는 다른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교회란 제도나 숫자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내적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교회는 99퍼센트가 어떻게 사느냐와 직접적으로 경쟁하거나 대치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층위에서, 조용히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고, 흩어져 있으며, 서로를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공통된 하나가 있습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에서 이해가 열리는 질서’가 실제로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교회의 시작입니다.

 

말씀하신 ‘노아의 홍수’ 역시 같은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 물리적 재난이라기보다, ‘교회 상태의 붕괴’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홍수 이전의 교회, 곧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중심으로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였고, 그 상태가 무너지면서 감각과 기억 지식 중심으로 내려앉는 과정이 홍수로 묘사됩니다. 이 변화는 인류 전체가 동일하게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교회로 불릴 수 있는 상태를 가진 사람들’ 안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라는 것은 인류 전체와 동일한 범위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된 상태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이 점에서 석기시대든, 고대든, 현대든, 언제나 인류 전체와 교회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통찰은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같은 입장입니다. 인류 전체는 다양한 상태에 있고, 그중 일부만이 교회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소수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소수가 ‘질서의 중심’을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에서는 양보다 질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들어오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살아 있으며, 그 신앙에서 이해가 열리는 그 구조가 살아 있는 한, 교회는 존재합니다.

 

따라서 새 교회는 ‘어느 한 구석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간적 의미의 구석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되지 않는 영역에서,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중심적인 영역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영적 질서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개인들일 수 있지만, 그 상태가 점점 연결되면서 교회는 형성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늘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선지자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도, 그리고 이후 모든 영적 갱신의 시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이 질문의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새 교회는 ‘언제 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 시작되느냐’의 문제이며, 그 ‘어디’는 바깥세상이 아니라 ‘한 사람 안의 질서’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으로 돌아서고, 사랑이 중심이 되어 그로부터 신앙이 살아나고, 그 신앙으로 이해가 열릴 때, 그 사람 안에서 이미 새 예루살렘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비록 적어 보여도,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AC.105, 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

bygrace.kr

 

AC.105, 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시기, 시절마다 거의 동일한 역사요, 패턴이었는데요, 한편으론 부조리한 세상이라고도 하는, 이런 삶을 이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질문을 조금 냉정하게 바로잡고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 전체, 곧 선지자들, 성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더 나아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증언까지, 이 모두가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구조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기 중심에 머무는 한, 시대가 바뀌어도 패턴은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아르카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방향은 ‘세상을 바로잡는 삶’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질서는 외부 구조가 아니라, 내 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욕망과 거짓이 뒤섞여 돌아가더라도, 한 사람 안에서만큼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는 질서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동방의 에덴동산’이며,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삶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분별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뉴스, 전쟁, 이념 대립을 볼 때, 그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만 보지 않고, ‘의지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를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나 절망에 휩쓸리기보다, 인간 상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둘째, ‘자기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외부의 혼란이 클수록, 사람은 쉽게 자기 정당화나 공격성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의 길은 반대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을 섬기도록, 곧 사랑이 이해를 이끌도록, 매 순간 방향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셋째, ‘체어리티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행동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상황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적 상태는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평화에서 나온 작은 행위들의 연속으로 드러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부조리함에 대한 감각 자체가 이미 깨어 있음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아무 감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것이 부조리하다고 느낀다면, 이미 그 안에는 더 높은 질서에 대한 빛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빛을 외부를 향한 판단으로만 쓰지 않고,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로 돌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 감각은 절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실제적인 답은 이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한 사람 안에서 ‘안식의 질서’를 이루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질서 안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살았던 방식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길이며,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붙들었던 삶의 태도입니다.

 

 

 

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

bygrace.kr

 

AC.105,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내용 말인데요, 이 내용으로 오늘날 전 세계 혼란, -중 대립, -우 및 미-이란 전쟁, 그리고 여러 나라 구석구석 좌-우 대립 등을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충분히 설명은 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짚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모든 복잡한 국제 정세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AC.105의 ‘의지’,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의지(사랑)’와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cupidity)’의 구분은 이런 혼란을 바라보는 ‘근본 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은 ‘의지’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는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로부터 나오는 욕망의 의지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인간은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마치 ‘자기 생각’이나 ‘정당한 신념’처럼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차원에서는 ‘내가 옳다’는 확신이, 집단 차원에서는 ‘우리 편이 옳다’는 확신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이미 갈등의 씨앗이 만들어집니다.

 

이 구조를 국가와 국제 관계로 확장하면, 매우 유사한 패턴이 보입니다. 국가도 일종의 ‘집단적 인간’처럼 움직입니다. 각 국가는 자국의 안전, 번영,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데,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온 질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나온 자기 중심성’일 때입니다. 그때 국가는 상대를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위협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관계는 ‘상호 이해’가 아니라 ‘힘의 균형’으로 운영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중국 갈등 같은 경우를 보면, 겉으로는 경제, 기술, 안보 문제이지만, 그 깊은 층에서는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합니다. 이 의지는 반드시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기 보존과 우월성에 대한 욕망이 중심이 될 때, 상대를 인정하기보다 견제하고 압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때 서로는 자신을 ‘정당한 쪽’으로 느끼기 때문에 갈등은 더 복잡해집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란-미국 긴장 역시 비슷한 틀로 볼 수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역사적, 안보적, 정치적 이유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판단의 밑바닥에는 ‘두려움과 욕망이 결합된 의지’가 작동합니다. 두려움은 자기 보호를 강화시키고, 욕망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 상대는 점점 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국가 내부의 좌-우 대립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각 집단이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상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양쪽 모두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의지(욕망)’의 특징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 모든 것을 AC.105의 언어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의지는 ‘사랑에서 나와 타자를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반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욕망은 ‘자기 중심에서 나와 상대를 도구화하거나 배제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어느 쪽 의지가 중심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질서와 평화, 혹은 혼란과 갈등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은 단순히 ‘누가 옳으냐’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의지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집단의 상태는 결국 개인들의 상태가 모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의 갈등은, 인간 내면의 질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대해서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결국 이 설명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란은 단지 정치적,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욕망이 중심에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고, 사랑이 중심에 있을 때만 질서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AC.105, 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bygrace.kr

 

AC.105, 창2:9, ‘생명나무 : 인간 의지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의지 곧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서술되지만 말입니다.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이게 사람의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가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고,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욕망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곧 모든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 결과 모든 생명이 나오는 그분한테서 나오는 자비 말입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의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를,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자리’와 정확히 연결시키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산 한가운데’를 공간적 중심이 아니라, ‘의지의 중심’으로 읽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구조, 즉 동산은 지성,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구조를 한 단계 더 깊이 밀어 넣는 해석입니다.

 

먼저 ‘생명나무’가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은 이미 AC.102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위치입니다. 그것은 동산의 변두리에 있지 않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는 사랑과 사랑의 신앙이 인간 내면에서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중심 원리’임을 뜻합니다.

 

이 중심은 곧 속 사람의 의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의지를 ‘마음’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 속한 가장 근본적인 소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에 서게 됩니다. 의지는 인간의 자율적 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하시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이 자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를 통해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단서를 덧붙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비록 일상 언어에서는 ‘내 의지’, ‘내 마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속한 것은 참된 의지가 아니라 ‘욕망’입니다. 사람이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충동입니다.

 

이 대목은 인간 이해에 있어 매우 정직하고도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도덕적 결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선을 ‘생산’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유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자유뿐입니다.

 

이제 다시 ‘동산 한가운데’로 돌아옵니다. 그 자리는 의지의 자리이며,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참된 의지가 없고 다만 욕망만 있다면, 그 나무는 사람의 소유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를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자비는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비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생명의 중심을 차지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은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흘러옵니다. 생명나무가 동산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인간 삶의 중심이 언제나 주님의 자비에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도덕적 시험담에서 완전히 벗겨 냅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입니다. 중심에 주님의 자비가 있을 때, 사랑과 신앙은 살아 있고, 지성은 에덴의 동산이 됩니다. 중심이 인간 자신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질서는 무너집니다.

 

AC.105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생명의 중심은 주어지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 곧 ‘생명나무’라고 말입니다.  

 

 

심화

 

1.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 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AC.105.심화 1. ‘욕망(cupidity), 이걸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데’ 위 본문에 ‘의지는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건데,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가장 근본적인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bygrace.kr

 

2.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 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AC.105.심화 2. ‘아르카나를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약 각 선지자들도, 그리고 이천년 전 주님도,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인, 심지어 스베덴보리 역시 그들이 지상에 머물던

bygrace.kr

 

3.새 교회’,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 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AC.105.심화 3.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의 시작 그럼 ‘새 교회’, 곧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오나요? 그때에도 여전히 세상은 ‘자기가 중심’인 사람들로 혼란스러울 텐데... 그런 사

bygrace.kr

 

4.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AC.105, 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AC.105.심화 4.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한 답변’ 위 설명을 10년 차 된 저는 이제는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당황, 혼란스러워하며, 반

bygrace.kr

 

 

 

AC.106, 창2:9, '세 나무의 구분 :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감각적 신앙의 길목'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bygrace.kr

 

AC.104, 창2:9, '퍼셉션과 양심 : 잃어버린 생명의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