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24)

 

AC.433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뜻임은 이미 15절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흔일곱 배의 보복(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훨씬 신성모독을 뜻하며, 결과가 정죄라는 사실은 일흔일곱 (seventy and sevenfold) 의미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일곱(seven)이라는 수가 거룩한 것은 일곱째 (seventh day) 천적 인간,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하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일곱(seven)이라는 수는 어디에 나오든 거룩한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합니다. 다만 거룩함과 신성함은 그곳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적용되며, 대상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흔(seventy)이라는 수의 의미도 나옵니다.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하는데, 말씀에서 시대는 년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거나 신성한 것을 표현하고자 때에는 일흔일곱 (seventy-sevenfold)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형제를 일곱 번까지만 용서할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그러합니다(18:22). 이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용서가 끝이 없도록,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That Cains beingavenged sevenfoldsignifies that it was sacrilege to do violence to that separated faith which is meant byCain,” has been already shown at verse 15. And that by a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is signified a far greater sacrileg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damna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seventy and sevenfold.” That the numbersevenis holy originates in the fact that theseventh daysignifies the celestial man, the celestial church, the celestial kingdom, and, in the highest sense, the Lord himself. Hence the numberseven,” wherever it occurs in the Word, signifies what is holy, or most sacred; and this holiness and sanctity is predicated of, or according to, the things that are being treated of. From this comes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seventy,” which comprises seven ages; for an age, in the Word, is ten years. When anything most holy or sacred was to be expressed, it was saidseventy-sevenfold,” as when the Lord said that a man should forgive his brother not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Matt. 18:22), by which is meant that they should forgive as many times as he sins, so that the forgiving should be without end, or should be eternal, which is holy.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18:22)

 

그리고 여기서 라멕이 일흔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이라는 말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입니다. And here, that Lamech shouldbe avenged seventy and sevenfoldmeans damnation, because of the violation of that which is most sacred.

 

해설

AC.433은 앞의 AC.432에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 정죄를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앞 번호에서는 라멕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후자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왜 그러한 상태를 하필 일흔일곱 라는 수로 표현하는지, 말씀에서 일곱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창4:15로 돌아갑니다.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이라는 말은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조차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남아 있는 거룩한 것을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근거를 일곱째 에서 찾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엿새와 창세기 2장의 일곱째 날을 설명하면서, 그는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의 거룩함은 숫자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해석 원칙도 덧붙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뜻하지만, 그 거룩함은 다루는 대상에 따라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구절의 의미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관해 일곱이라고 말하는지, 그 구절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원칙을 놓치면 말씀의 숫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일정한 뜻으로만 대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일흔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한 시대를 십 년으로 나타내므로, 일흔은 일곱 시대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한 것을 표현할 때 일흔일곱 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일흔이나 일흔일곱을 실제 연수나 형벌의 횟수로 계산하는 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수들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8:22를 인용합니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용서의 횟수에 상한선을 정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곧 영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수가 용서와 연결되는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의 보복과 연결됩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다루는 대상에 따라라는 원칙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의미는 끝없는 용서이고, 창세기에서 밝히는 의미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입니다. 따라서 두 구절의 숫자 표현을 단순히 같은 결과를 나타내는 공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거룩함의 의미가 각 구절에서 다루는 대상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는 뜻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앞의 AC.432와 연결하면, 라멕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이번 번호는 바로 그 상태가 왜 일흔일곱 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일흔일곱 배를 실제 형벌의 배율로 계산하거나,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밝히는 속뜻과 다릅니다. (AC.433 해설)

 

심화

1.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인용되었는가?’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 배의 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4:24의 표현은 일흔일곱 이고, 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 번씩 일곱 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 무한한 자비, 다른 하나는 무한한 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 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 심화 1)

 

 

 

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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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심화

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멕에게 훨씬 더 큰 보복이 가해진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주님께서 라멕에게 일흔일곱 배로 복수하신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AC.432는 이 표현을 정죄라고 풀이합니다. 이 짧은 설명을 이해하려면 문자적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번 번호는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실제 형벌의 횟수나 배율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으며, 그로 인해 정죄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죄가 곧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의 핵심은 정확한 수량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성모독과 그에 따른 정죄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단어만을 근거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원한을 품고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속뜻은 정죄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주님의 분노나 정죄의 작용에 관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복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한 더 넓은 설명은 관련 번호들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보복을 정죄라고 풀이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붙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를 비교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의 AC.396에서는 가인의 표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라멕이 그 신앙을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킨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두 표현을 함께 읽으면 가인에게서 다룬 신앙의 문제와 라멕에게서 드러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단순히 숫자만으로 계산하여 영적 상태의 정확한 크기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독자가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정죄라는 표현을 곧바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신앙에 관한 의문이 생기거나 체어리티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자신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받는 상태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와 신성모독의 상태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중요성을 일깨우지만, 각 개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판단하도록 주어진 설명은 아닙니다.

 

결국 일흔일곱 배의 보복AC.432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 표현을 실제 보복의 횟수로 계산하거나 주님의 인간적인 분노로 곧바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의 말이 가리키는 영적 상태를 밝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AC.432 심화 2)

 

 

 

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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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 심화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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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신성모독인가?’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성모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이번 번호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체어리티입니다. 앞의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라멕이 이 둘을 죽였다는 말은 그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은 단순히 입으로 거룩한 것을 비난하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거룩한 것들이 소멸되는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말과 신앙이 약해졌다는 말을 구별해야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거나, 의심과 혼란을 겪거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곧 이번 번호의 신성모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한 표현이 신앙의 소멸을 뜻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자신의 일시적인 연약함을 곧바로 신성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훨씬 신성모독일까요? AC.432는 그 이유를 길게 논증하지 않지만,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중요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무관하게 놓여 있는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소멸된 데 이어,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의 소멸이 그 신앙과 연결된 사랑의 소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체어리티가 참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에는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그것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밝혀 온 체어리티의 의미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신성모독이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쉽게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거나 사랑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라멕처럼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432는 말씀의 속뜻에서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를 설명하는 번호입니다. 특정한 사람의 내면과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이 한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결국 AC.432에서 신성모독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와 관련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을 신성모독이라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일을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신앙을 단지 보존해야 할 지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신앙과 연결된 체어리티까지 함께 살펴보게 합니다. (AC.432 심화 1)

 

 

 

AC.432 심화 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AC.432 심화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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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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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4)

 

AC.432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는데, 이는 훨씬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이것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입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y had extinguished the faith meant byCain,to do violence to which was sacrilege, and at the same time had extinguished the charity which should be born through faith, a far greater sacrilege, and that for this there was condemnation, that is, aseventy and sevenfold avengement.

 

해설

AC.432는 창4: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27-431에서 스베덴보리는 라멕이 죽였다고 말한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상처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는 이 설명들을 하나로 모아, 라멕의 말에 담긴 신성모독과 정죄의 의미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인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파괴되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이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낸 의견이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상태는 신앙의 소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고 말합니다. 앞의 AC.429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한 이유가 여기서 다시 중요해집니다. 라멕이 사람어린아이를 함께 죽였다는 것은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훨씬 신성모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의할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단순히 지식과 행동의 두 항목으로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AC.432에서 문제 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한 내용을 조금 잘못 이해했거나 이웃을 충분히 돕지 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 안의 거룩한 것인 신앙이 소멸되고,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된 상태를 말합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이상 성한 곳이 없다고 설명한 황폐가 이번 번호에서는 신성모독과 정죄라는 표현으로 이어집니다.

 

훨씬 신성모독이라는 말도 이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소멸시키는 일 자체가 신성모독이지만, 체어리티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과 무관한 별개의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신앙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의 한 문장만으로 모든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에 대한 일반적인 서열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소멸로 인해 정죄가 있었으며, 그것이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흔일곱 배를 가인의 일곱 배보다 정확히 열한 배 무거운 형벌로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AC.432가 직접 밝히는 것은 이 표현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데 따른 정죄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보복이라는 말만으로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복수하신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번호는 그 표현의 속뜻을 정죄라고 밝히지만, 정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모든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AC.432는 라멕의 고백에 담긴 황폐의 의미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은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소멸시켰고,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각각 신성모독과 훨씬 더 큰 신성모독이라고 설명하며, 그 결과인 정죄를 일흔일곱 배의 보복이라고 풀이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말은 단순히 더 큰 보복을 요구하는 선언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된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AC.432 해설)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신성모독인가?’

 

AC.432 심화 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 심화1.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은 왜 신성모독인가?’ AC.432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은 ‘신성모독’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성모독을 하나님을 욕하거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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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AC.432 심화 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AC.432 심화2.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의 분노를 뜻하는가?’ 창4:24에서 라멕은 가인을 위한 벌이 일곱 배라면 자신을 위한 벌은 일흔일곱 배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보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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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 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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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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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표현은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온몸이 상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어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가 등장하고, 그것들을 짜내거나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431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여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 신체적 상처의 묘사가 라멕의 영적 상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라멕의 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멕은 사람을 죽였고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AC.429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431에서는 사람에게 연결된 상처가 신앙의 황폐를, 어린아이에게 연결된 타박상이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라멕의 말에서 상처는 단순히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이 입은 육체적 부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한 상태를 더 넓은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상처가 한 곳에만 있다면 몸의 다른 부분은 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읽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바닥과 머리의 개별 상응을 새로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묘사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얼마나 심각한 상태로 나타내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상처’, ‘타박상’, ‘종기를 구별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상처를 신앙에, 타박상을 체어리티에, 종기를 그 둘 모두에 연결합니다. 우리 눈에는 모두 몸이 상한 모습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들이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을 알면 이사야의 말씀이 단순히 고통스러운 장면을 반복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함께 나타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한 곳이 없다는 말을 읽는 우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우선 이것을 자신이 겪는 모든 신앙의 흔들림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경험이 곧 라멕의 황폐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31은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와 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의 표현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연약함을 이 본문만으로 최종 판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상처를 싸매거나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AC.431이 그 상태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에서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특정한 상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은 이번 번호의 직접적인 설명과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황폐의 심각성을 충분히 받아들이되,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덧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말씀은 AC.431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보여 주는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라멕의 상처타박상은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나타내며, 이사야의 종기는 그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따로 떼어 놓은 채 교회의 온전함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AC.431 심화 1)

 

 

 

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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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4:23)

 

AC.431

상처(wound) 타박상(bruise) 이상 성한 곳이 없음을 뜻하고, 상처(wound) 신앙이 황폐해졌음을, 타박상(bruise) 체어리티가 황폐해졌음을 뜻한다는 사실은 상처 사람(man) 관해, 타박상 어린아이(little one) 관해 쓰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신앙의 황폐와 체어리티의 황폐는 이사야에서도 같은 표현들로 묘사됩니다. That by awoundand abruiseis signified that there was soundness no longer, by awoundthat faith was desolated, and by abruisethat charity was devastated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woundis predicated of aman,andbruiseof alittle one.The desolation of faith and the vastation of charity are described in the same terms in Isaiah: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1:6) From the sole of the foot even unto the head there is no soundness in it; but wound and bruise and a fresh sore they have not been pressed out, neither bound up, neither mollified with oil. (Isa. 1:6)

 

말씀에서 상처(wound) 황폐해진 신앙에 관해, 타박상(bruise) 황폐해진 체어리티에 관해, 종기(sore) 모두에 관해 쓰였습니다. In this passagewoundis predicated of faith desolated, “bruiseof charity devastated, andsoreof both.

 

해설

AC.431은 라멕이 내가 사람을 죽여 내게 상처를 입혔고, 어린아이를 죽여 내게 해를 입혔다고 한 말의 마지막 부분을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는 근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두 표현에 각각 연결된 상처타박상의 의미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표현이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며,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만 떼어 놓고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상처사람에 관해 쓰였고, ‘타박상어린아이에 관해 쓰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앞에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으므로, 그들에게 연결된 상처와 타박상도 각각 신앙과 체어리티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을 이해할 때 개별 표현뿐 아니라 표현들 사이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1: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고 상처와 타박상과 새로 생긴 종기뿐인 모습을 묘사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온몸이 상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묘사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인용은 라멕의 말에 나오는 상처와 타박상이 단순한 육체적 부상을 넘어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세 표현은 서로 구별됩니다. ‘상처는 황폐해진 신앙을, ‘타박상은 황폐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종기는 신앙과 체어리티 둘 모두에 관해 쓰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상처의 표현들을 하나의 뜻으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다른 표현이 사용된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의 구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세 상처가 실제로 어떤 순서로 발생하는지, 각각 어떤 구체적인 악이나 거짓에 대응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이사야의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상처가 한 부분에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성한 곳이 없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용하면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고백을 단순히 신앙의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체어리티가 잠시 약해진 상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27에서도 그는 상처와 타박상이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상처들을 짜내지도, 싸매지도,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지도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상처가 돌봄을 받지 못한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풀이하는 것은 상처와 타박상과 종기의 의미입니다. 짜내는 일이나 싸매는 일, 기름을 바르는 일의 개별 속뜻까지 이 번호에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표현들을 곧바로 특정한 회복 과정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우선 이사야가 묘사하는 상처의 심각성을 함께 읽는 것이 원문에 충실합니다.

 

이번 번호를 읽을 때 황폐와 일상적인 영적 연약함을 구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거나 이웃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31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 곧 신앙과 체어리티에 더 이상 성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말씀을 자신의 모든 부족함에 즉시 적용하여 회복할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특히 AC.431은 황폐의 의미를 밝히는 번호이지, 어떤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결국 AC.431은 라멕의 말에 등장하는 상처타박상이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과 어린아이의 의미를 바탕으로 두 상처를 구별하고, 1:6에서 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사실을 통해 그 해석을 확인합니다. 이사야의 성한 곳이 없다는 말씀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영적 온전함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AC.431 해설)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1 심화 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0 심화1.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1:6은 읽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씀입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는 표현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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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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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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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3. 주님은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다고 말하며, 그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살펴본 어린아이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우리가 아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작고 연약하며 아직 자라는 중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아이로 불리시는 이유를 미숙함이나 부족함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어린아이의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그 표현이 나타내는 순진무구와 사랑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 점은 같은 구절에 나오는 주님의 이름들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이로 불리시는 분이 동시에 기묘자와 모사, 하나님과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능력이나 지혜를 낮추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여러 말씀으로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에 주님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주님께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진무구와 사랑을 설명하는 표현이 주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이번 번호의 마지막 논거가 됩니다.

 

이것은 눅18:15, 17을 읽을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AC.430의 흐름에서 이 말씀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어린아이의 속뜻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이며, 주님은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저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번 번호가 밝히는 순진무구와 사랑의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하여 생각하는 일입니다. 다만 AC.430은 주님의 탄생과 신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주님이 아이라고 불리시는 이유를 순진무구 자체와 사랑 자체라는 두 표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AC.430의 마지막 인용은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내며, 주님께서는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아이라고 불리십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아기에 관한 말씀은 어린아이의 속뜻이 단순한 연령이나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AC.430 심화 3)

 

 

 

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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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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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라는 말로 구별한다고 설명합니다.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세 표현 모두 나이가 어린 존재를 가리키므로,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들이 사랑의 서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먼저 젖먹이의 사랑은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의지하며 사랑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관계를 통해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젖먹이가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자신의 사랑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어머니나 유모와 맺는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부드러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유아의 사랑은 부모를 향한 사랑에 비유됩니다. 젖먹이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관계 안에서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별도의 단계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단계에서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말합니다. 세 표현을 나란히 놓으면,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추상적인 감정 하나로만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관계를 통해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가 가르치는 사람을 향해 품는 체어리티라는 표현을 단순히 선생님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30은 교사에 대한 복종을 체어리티의 정의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의 관계를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를 통해 어린아이가 나타내는 체어리티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단계를 실제 나이에 따라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영적 성장표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AC.430의 직접적인 설명은 말씀에서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영적 상태를 실제 나이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한 단계에 있는 사람이 다른 단계에 있는 사람보다 반드시 더 거룩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이번 번호의 설명을 넘어섭니다.

 

이 구별은 렘44:7을 이해할 때 도움이 됩니다. 그 말씀에서는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유아와 젖먹이까지 끊어 버려 남은 것이 없게 하려느냐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리와 선에 관한 표현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에 관한 표현까지 함께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그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는 말씀에서 단순히 같은 연령대를 반복하여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AC.430에서 이들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나타내며, 어린아이는 특별히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구별을 알면 말씀에 등장하는 작은 표현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0 심화 2)

 

 

 

AC.430 심화 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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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AC.430 심화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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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히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은 상태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자가 이번 번호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두 가지가 왜 함께 언급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경험이 적고 남을 쉽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그에게 참된 체어리티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내면까지 저절로 순진무구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도록 돕습니다.

 

AC.430은 이 두 가지의 관계를 참된순진무구와 참된체어리티라는 표현으로 밝힙니다. 순진무구가 참된 사랑과 분리될 수 없고, 체어리티도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진무구를 단순한 무지나 무력함으로,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둘의 구체적인 내적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느 한쪽만을 떼어 내어 참된 영적 상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 관계를 생각하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가까이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지식과 판단력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를 통해 밝히는 것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에 관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면서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제 라멕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AC.429에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었습니다. AC.430은 그 어린아이가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라멕의 황폐를 이해할 때 체어리티의 소멸만 따로 떼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와 참된 순진무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나타내는 상태가 왜 심각한지 이해하는 데 이번 번호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으며 자신에게 순진무구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곧바로 자신이 라멕처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30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앞의 번호들은 라멕이 나타내는 황폐의 상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일과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30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참된 순진무구와 참된 체어리티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아이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랑과 연결된 순진무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관계를 이해할 때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나타내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AC.430 심화 1)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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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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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4:23)

 

AC.430

말씀에서 어린 (a little one), 어린아이(little child) 순진무구를 뜻하며, 체어리티도 뜻합니다.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없고,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없기 때문입니다. 순진무구에는 단계가 있으며, 말씀에서는 이를 젖먹이들(sucklings), 유아들(infants), 어린아이들(little children)이라는 말로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 없이는 참된 순진무구도 없으므로, 젖먹이들(sucklings), 유아들(infants), 어린아이들(little children) 사랑의 단계도 뜻합니다. 젖먹이가 어머니나 유모를 향해 품는 사랑과 같은 부드러운 사랑, 유아가 부모를 향해 품는 사랑과 같은 사랑, 그리고 어린아이가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해 품는 사랑과 같은 체어리티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little one,orlittle child,in the Word, signifies innocence, and also charity, for true innocence cannot exist without charity, nor true charity without innocence. There are three degrees of innocence, distinguished in the Word by the termssucklings,” “infants,andlittle children”; and as there is no true innocence without true love and charity, therefore also bysucklings,” “infants,andlittle childrenare signified the three degrees of love: namely, tender love, like that of a suckling toward its mother or nurse; love like that of an infant toward its parents; and charity, similar to that of a little child toward its instructor. Thus it is said in Isaiah: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11:6) The wolf shall dwell with the lamb, and the leopard shall lie down with the kid; and the calf, and the young lion, and the fat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shall lead them. (Isa. 11:6)

 

여기서 어린양(lamb), 어린 염소(kid), 송아지(calf) 순진무구와 사랑의 단계를 뜻하고, 이리(wolf), 표범(leopard), 어린 사자(young lion) 반대되는 것들을 뜻하며, 어린아이(little child)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ere alamb,akid,and acalfsignify the three degrees of innocence and love; awolf,aleopard,and ayoung lion,their opposites; and alittle child,charity. In Jeremiah: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어찌하여 악을 행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며 유다 가운데에서 너희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먹는 자를 멸절하여 남은 자가 없게 하려느냐 (44:7) Ye commit this great evil against your souls, to cut off from you man and wife, infant and suckling, out of the midst of Judah, to leave you no remains. (Jer. 44:7)

 

남자와 여자(man and wife)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진리와 선을 나타내며, 유아와 젖먹이(infant and suckling) 사랑의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유아(infant) 어린아이(little child)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Man and wifedenot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of the will, or of truth and of good; andinfant and suckling,the first degrees of love. That aninfantand alittle childdenote innocence and charity is very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in Luke: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8:15, 17) They brought unto him little children that he should touch them. And Jesus said, Suffer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shall in no wise enter therein. (Luke 18:15, 17)

 

주님 자신도 어린 (little one), 아이(child)라고 불리십니다(9:6). 주님은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구절에서 주님은 기묘자(wonderful), 모사(counselor), 하나님(God), 용사(hero), 영존하시는 아버지(father of eternity), 평강의 (prince of peace)이라고도 불리십니다. The Lord himself is called alittle one,” orchild(Isa. 9:6), because he is innocence itself and love itself, and in the same passage he is spoken of aswonderful, counselor, God, hero, father of eternity, prince of peace.”

 

이는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것임이라 (9:6)

 

해설

AC.430은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왜 체어리티의 소멸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429에서는 사람이 신앙을,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뿐 아니라 순진무구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참된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없고, 참된 체어리티도 순진무구 없이 존재할 없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중심은 어린 나이 자체가 아니라, 순진무구와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순진무구는 단순히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잘못을 저지를 능력이 없는 상태와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순진무구의 완전한 정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순진무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모든 어린아이가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완전하게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어린아이는 우리가 살펴야 할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말씀의 젖먹이’, ‘유아’, ‘어린아이를 구별합니다. 젖먹이는 어머니나 유모를 향한 부드러운 사랑과 연결되고, 유아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연결되며, 어린아이는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구별은 사랑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사람이 실제 나이에 따라 이 세 단계를 반드시 차례로 통과한다는 발달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사용된 세 표현의 영적 의미를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사11:6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에는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 염소, 어린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등장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양과 어린 염소와 송아지가 순진무구와 사랑의 세 단계를, 이리와 표범과 어린 사자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인도한다는 말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뜻한다고 밝힙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각 동물에 대해 별도의 상세한 상응표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44:7에서는 남자와 여자에 이어 유아와 젖먹이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이해력과 의지에 속한 것들, 곧 진리와 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유아와 젖먹이는 사랑의 첫 단계들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문맥은 유다 백성의 악행과 그로 인한 멸절의 경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 안에서 진리와 선뿐 아니라 사랑의 첫 단계들까지 언급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특히 원문 끝의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하려느냐는 표현은 이러한 상실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다만 AC.430은 여기서 리메인스의 교리를 별도로 풀이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관련 번호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18:15, 17에서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어린아이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나타낸다는 사실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독자가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단지 어린아이를 가까이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통해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순진무구와 체어리티가 천국의 삶과 무관한 부수적 성품이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하여 주님 자신이 아이라고 불리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어린양과 어린아이, 젖먹이와 유아를 통해 순진무구와 사랑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의미를 주님 자신에게 연결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나 지혜가 미숙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말씀에서 그분은 기묘자, 모사, 하나님, 용사,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도 불리십니다.

 

이렇게 보면 AC.430어린아이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의 관계를 차례로 밝혀 갑니다. 먼저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고, 젖먹이와 유아와 어린아이를 통해 사랑의 세 단계를 구별합니다. 이어 이사야와 예레미야,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한 다음, 주님께서 순진무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시라는 사실로 마무리합니다. 따라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히 어떤 선한 행동이 줄어들었다는 뜻을 넘어, 교회 안에서 순진무구와 분리될 수 없는 체어리티가 소멸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AC.430 해설)

 

심화

1. 순진무구는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없는가?’

 

AC.430 심화 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AC.430 심화1. ‘순진무구는 왜 체어리티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우리는 ‘순진무구’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어린아이의 해맑은 표정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AC.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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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 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 심화2. ‘젖먹이·유아·어린아이, 사랑의 세 단계는 무엇을 구별하는가?’ AC.430에서 스베덴보리는 순진무구에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씀에서는 그 단계들을 ‘젖먹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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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님은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 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 심화3. 주님은 왜 ‘아이’라고 불리시는가? AC.430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사9:6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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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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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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