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73.심화

 

1. ‘9:6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9:6)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호9:6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에 나오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사라진 자리에 악과 거짓이 들어선 영적 황폐(vastation)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에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는 말씀은, 호세아에서도 동일한 영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먼저 ‘애굽(Egypt)과 ‘(Memphis)은 영적 황폐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기억 지식을, ‘’은 그러한 기억 지식을 바탕으로 주님께 속한 것들(Divine things)을 자신의 지혜로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억 지식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말씀을 섬기는 위치를 떠나 사람 자신의 지혜를 높이는 수단이 될 때에는 오히려 영적 생명을 메마르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은 진리를 상징하고, ‘귀한 것’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찔레’가 덮는다는 것은, 진리가 더 이상 사람의 삶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거짓과 악이 뒤덮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에 찔레가 무성해지는 것처럼, 진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짓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라는 말씀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장막’은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예배와 교회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장막 안에 가시덩굴이 퍼진다는 것은, 본래 거룩해야 할 예배와 신앙생활 속으로 거짓과 악이 점점 스며들어 영적 질서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지만, 그 중심에서는 주님보다 own과 자기 사랑이 지배하게 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하여 황폐(vastation)가 단순히 선과 진리가 사라지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를 악과 거짓이 대신 차지하는 상태임을 설명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공백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거절하면, 그 자리는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으로 채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찔레(nettle)와 ‘가시덩굴(bramble)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상징은 창3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환경이 척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겉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리에 거짓과 악이 자라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호9의 말씀은 창3의 상징을 다른 예언서를 통하여 다시 확인해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호9:6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적 황폐란 선과 진리가 점차 사라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거짓과 악이 대신 차지하는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애굽(Egypt)과 ‘(Memphis)은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인간을, ‘찔레(nettle)와 ‘가시덩굴(bramble)은 그 결과 나타나는 영적 황폐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동일한 영적 언어이며,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AC.273, 창3:18, ‘가시덤불과 엉겅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3‘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8)



AC.273

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rn and the thistle)가 저주와 황폐(vastation)를 의미한다는 것은, 추수(harvest)와 열매 맺는 나무(fruit tree)가 그 반대인 축복과 번성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또한 가시덤불’, ‘엉겅퀴’, ‘찔레(nettle), ‘가시덩굴(bramble), 그리고 쐐기풀이 이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호세아처럼 말입니다. That the “thorn and the thistle” signify curse and vastation, is evident from harvest and fruit tree denoting the opposites, which are blessings and multiplications. That the “thorn,” the “thistle,” the “brier,” the “bramble,” and the “nettl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9:6)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여기 애굽(Egypt)(Memphis)은 주님께 속한 것들(Divine things)을 자기 자신과 기억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호세아 다른 구절입니다. Here “Egypt” and “Memphis” denote such as seek to understand Divine things from themselves and their own memory-knowledges. In the same prophet: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10:8)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Hos. 10:8),

 

여기 아웬의 산당(the lofty places of Aven)은 자기 사랑을 의미하며,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는 모독(profanation)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입니다. where the “lofty places of Aven” signify the love of self; and 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 profanation. In Isaiah: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32:12, 13)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Isa. 32:12–13).

 

그리고 에스겔입니다. And in Ezekiel: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8:24)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Ezek. 28:24).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8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해석하면서, 이것이 단순한 식물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임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입증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곧 ‘추수’와 ‘열매 맺는 나무’가 축복과 영적 번성을 의미한다면, 그 반대인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상징은 언제나 서로 대응되는 질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앞의 AC.272에서 살펴본 것처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하고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맺어야 할 자리에서 생명 대신 거짓과 악이 자라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래 열매가 있어야 할 땅에 가시덤불이 무성해졌다는 것은,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9에서 등장하는 애굽과 놉(멤피스)은 이러한 황폐의 원인을 잘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기억 지식을, 멤피스는 그 기억 지식을 중심으로 주님께 속한 것(Divine things)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상징합니다. 기억 지식 자체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유익한 도구이지만,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고, 사람 자신의 판단이 계시보다 우위에 놓일 때에는 오히려 영적 생명을 메마르게 합니다. 그 결과 보배로운 은은 찔레의 차지가 되고, 장막에는 가시덩굴이 자라게 됩니다. 이는 진리의 자리에 거짓이 들어서는 영적 황폐를 상징합니다.

 

10은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아웬의 산당’은 자기 사랑을 의미합니다. 산당은 원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를 흉내 낸 곳이지만, 결국 자기 뜻대로 만든 예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예배 자체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해야 할 예배가 자기 사랑과 거짓으로 오염되어 모독(profanation)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매우 심각한 영적 상태입니다.

 

32의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는 본래 선과 진리의 풍성한 열매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악과 거짓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징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식물과 땅은 대부분 사람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겔28은 회복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평화로운 자연환경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거짓과 악이 더 이상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가시는 심판의 상징인 동시에, 그것이 제거되는 것은 구원과 회복의 상징이 됩니다.

 

이 글은 앞의 AC.27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272가 가시덤불과 엉겅퀴의 일반적인 영적 의미를 설명하였다면, AC.273은 여러 예언서를 통하여 그 의미를 성경 전체에서 입증합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상징이 어느 한 본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영적 언어임을 보여줍니다.

 

AC.273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부될 때 사람과 교회 안에 나타나는 영적 황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글입니다. 열매가 맺혀야 할 자리에 가시가 자라는 것은, 선과 진리가 거짓과 악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에스겔의 약속처럼, 사람이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는 가시가 제거되고, 본래의 열매 맺는 생명이 회복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예언서를 인용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중심 가르침입니다.

 

 

심화

 

1. ‘9:6

 

 

AC.273, 심화 1, ‘호9:6’

AC.273.심화 1. ‘호9:6’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

bygrace.kr

 

2. ‘10: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때에 그들이 산 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 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10:8)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Hos. 10:8),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호10:8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히 삶의 고난이나 저주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거룩한 예배마저 악과 거짓으로 오염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영적 황폐(vastation)가 사람의 삶뿐 아니라 교회의 예배와 신앙까지도 침범한 모습을 매우 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웬(Aven)의 산당은 자기 사랑과 거짓 예배를 상징합니다. 산당은 원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예배가 아니라 자기 뜻과 욕망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아웬의 산당’은 주님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own과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세워진 종교를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는 말씀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성경에서 ‘제단’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본래 선과 진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악과 거짓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생명은 사라진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모독(profana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독이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own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자란다는 것은, 거룩한 것이 더러운 것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영적 황폐가 스며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호9:6보다 한 단계 더 심각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호9에서는 찔레와 가시덩굴이 사람의 소유와 장막을 덮습니다. 그러나 호10에서는 마침내 제단까지 가시와 찔레가 뒤덮습니다. 이는 영적 황폐가 사람의 삶을 넘어 예배와 신앙의 중심까지 침투하였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창3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야 할 자리에 악과 거짓이 자라기 시작하였음을 뜻합니다. 호세아는 이 상징을 더욱 발전, 이제는 그 악과 거짓이 예배의 중심인 제단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호10:8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영적 황폐의 가장 깊은 단계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고난을 겪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own이 주님을 대신하여 예배의 중심을 차지한 상태이며, 그 결과 거룩해야 할 제단마저 악과 거짓으로 뒤덮이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가장 깊은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의 상징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모독(profanation)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모독(profanation)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독이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own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AC.273 심화 2)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모독(profanation)은 단순히 하나님을 모욕하거나 불경한 말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알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결국에는 own과 자기 사랑을 위하여 그 진리를 왜곡하거나 거스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모독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가 아니라, 빛을 받은 후 그 빛을 거슬러 어둠을 선택하는 데서 생겨나는 더 깊은 영적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모독을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을 범하더라도 언젠가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끊어지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독의 본질입니다.

 

모독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겉 행동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입으로는 말씀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own과 자기 사랑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더 이상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욕망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바로 모독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교회 안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명예와 권세, 이익과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외형은 거룩하여도 내면은 이미 own이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모독을 단순한 불신앙보다 더 깊은 영적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세아의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라는 말씀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제단은 본래 주님께 드리는 사랑과 예배를 상징하는 가장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제단 위에 ‘가시와 찔레’가 난다는 것은, 거룩한 예배의 자리까지 악과 거짓이 침투하였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 자체가 own과 자기 사랑에 오염되어 모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사람의 삶 전체에 나타난 결과를 보여준다면, 호10은 그 결과가 마침내 예배의 중심인 제단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영적 황폐(vastation)가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사람은 선과 진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것까지 자기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이러한 상태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모독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때로는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도록 허용하시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진리를 잊게 하시거나 외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시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을 버리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끝내 모독하는 더 큰 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모독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끝까지 지키려는 주님의 깊은 섭리를 함께 보여주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4. ‘32:12-13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32:12, 13)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Isa. 32:12–13).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사32:12-13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시’와 ‘찔레’가 선과 진리의 결핍, 곧 영적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본문은 본래 열매가 풍성해야 할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의 자리에 ‘가시와 찔레’가 나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므로,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같은 영적 의미를 다른 예언서의 표현으로 보여줍니다.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라는 말씀에서 ‘좋은 밭’은 선이 자라야 할 교회의 상태를, ‘열매 많은 포도나무’는 진리로부터 맺히는 영적 열매를 의미합니다. 밭과 포도나무는 본래 축복과 번성,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열매 맺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내 백성의 땅’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라 교회와 사람의 겉 사람, 곧 선과 진리가 심기고 자라야 할 삶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난다는 것은, 본래 선과 진리의 열매가 있어야 할 곳에 악과 거짓이 자라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황폐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빈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황폐는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 곧바로 가시와 찔레가 자라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own과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과 악으로 채워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273에서 여러 본문을 나란히 인용하면서, ‘가시’, ‘찔레’, ‘가시덩굴’ 같은 표현들이 모두 같은 계열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호9에서는 찔레와 가시덩굴이 장막과 은을 덮고, 호10에서는 가시와 찔레가 제단 위에 나며, 사32에서는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납니다. 표현은 본문마다 다르지만, 모두 선과 진리가 물러난 자리에 악과 거짓이 자라는 영적 황폐를 가리킵니다.

 

특히 사32의 경우,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가 먼저 언급된 뒤 곧바로 ‘가시와 찔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대조가 매우 선명합니다. 본래 교회는 열매 맺는 밭과 포도나무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잃으면, 같은 땅이라도 더 이상 열매를 내지 못하고, 가시와 찔레를 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창3 이후 겉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타락의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32:12-13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시’와 ‘찔레’가 말씀 전체에서 영적 황폐를 나타내는 일관된 상징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밭과 열매 많은 포도나무는 축복과 번성을, 가시와 찔레는 저주와 황폐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창3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단순한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과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악과 거짓이 차지하게 된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5. ‘28:24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8:24)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Ezek. 28:24).

 

 

스베덴보리가 AC.273에서 겔28:24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에서 호세아와 이사야를 통하여 ‘가시’, ‘찔레’, ‘가시덩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영적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설명한 데 이어, 이 구절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제거되는 모습을 통하여 교회의 회복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예언들이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다면, 에스겔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회복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라는 말씀은, 자연 속 가시나무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를 괴롭히던 악과 거짓의 세력이 더 이상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는 영적 생명을 상하게 하는 악과 거짓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족속’은 단순히 역사적 이스라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교회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는 교회 밖에서 끊임없이 참된 신앙을 대적하고 무너뜨리려는 악과 거짓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시어 그러한 세력이 더 이상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라는 표현은 악과 거짓의 성질을 잘 보여줍니다. 가시는 사람을 찌르고 상처를 남기듯이, 거짓은 사람의 이해를 왜곡하고, 악은 사람의 의지를 병들게 합니다. 그 결과 선과 진리는 자라지 못하고, 영적 생명은 점차 메말라 갑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영적 황폐를 일으키는 원인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273에서 이 구절을 마지막에 인용, 매우 아름다운 대조를 보여줍니다. 호세아에서는 찔레와 가시덩굴이 장막을 덮고, 또 가시와 찔레가 제단 위에 나며, 이사야에서는 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돋아납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마침내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게 됩니다. 이는 말씀 전체가 타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회복과 새 교회의 소망까지 함께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겔28:24은 창3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지만, 에스겔에서는 주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괴롭히던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는 타락의 결과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회복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가시’, ‘찔레’, ‘가시덩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모두 악과 거짓, 그리고 영적 황폐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동시에,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하실 때에는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제거되어 다시 선과 진리가 평안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겔28:24AC.273의 결론을 이루는 말씀으로, 영적 황폐보다 더 크신 주님의 회복의 능력을 증언하는 중요한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72.심화

 

1. ‘황폐(vastation)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 AC.272 해설 중)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단순히 무엇인가가 없어지거나 황량해지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고, 그 결과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황폐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흐름을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서서히 진행되는 영적 변화입니다.

 

황폐를 이해하려면 먼저 거듭남의 반대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조금씩 심어지고 자라나며, 그 결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로 결합됩니다. 반대로 황폐는 이와 정반대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own과 세상 사랑을 선택할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연결은 점차 약해지고, 선과 진리는 점점 힘을 잃어갑니다. 이것이 황폐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황폐는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언제나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폐란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거두어 가시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삶 속에서 점점 작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샘은 여전히 물을 내보내고 있지만, 그 물길이 흙과 돌로 막혀 물이 흐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샘이 아니라, 물길이 막힌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황폐를 주님의 심판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 질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람이 계속하여 거짓을 진리보다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앞세우며, 감각과 own만을 따라 살아가면, 선과 진리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결국 영혼은 주님의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폐입니다.

 

성경에서 황폐한 땅, 메마른 광야, 가시덤불과 엉겅퀴, 무너진 성읍과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자연환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사라져 영적 생명이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와 사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황폐는 언제나 생명의 결핍을 의미하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진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황폐는 언제나 절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상태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황폐를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황폐는 새로운 거듭남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황폐 뒤에 회복과 새 창조가 이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타납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황폐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읽으면 기쁨이 있었고, 기도에도 생명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메마르고 주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주님께서 떠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여전히 속 사람 안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더욱 깊이 주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황폐는 때로는 영적 죽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욱 깊은 생명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황폐(vastation)는 선과 진리가 점차 힘을 잃고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언제나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리메인스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황폐 가운데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황폐는 단순한 파괴나 종말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고, 새로운 거듭남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적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3:18)



AC.272

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curse and vastation)를 의미합니다. 또한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사람이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속 사람이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 다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겉 사람에게 작용하게 되면, 사람은 들짐승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이며, 반대로 사람을 들짐승과 같게 하는 것은 겉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본성도, 욕망도, 탐욕도, 환상도, 감각도 서로 비슷하며, 그 기관의 구조까지도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사람이 추론할 수 있고, 또 자기 스스로는 매우 예리하게 생각한다 여기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받는 영적 실체(spiritual substance)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 안에서는 그 생명이 왜곡, 악의 생명이 되며,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가리켜 죽은 사람(dead man)이라고 합니다. By the “thorn and the thistle” are meant curse and vastation; and by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is signified that he should live as a wild animal. Man lives like a wild animal when his internal man is so separated from his external as to operate upon it only in a most general manner, for man is man from what he receives through his internal man from the Lord, and is a wild animal from what he derives from the external man, which,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s in itself no other than a wild animal, having a similar nature, desires, appetites, fantasies, and sensations, and also similar organic forms. That nevertheless he is able to reason, and, as it seems to himself, acutely, he has from the spiritual substance by which he receives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 which is however perverted in such a man, and becomes the life of evil, which is death. Hence he is called a dead man.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8의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을 영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는 먼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저주와 황폐를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거듭남의 열매 대신 거짓과 악이 자라나는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말씀도 단순히 식물성 음식을 먹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270에서 스베덴보리는 ‘먹는다’는 것이 곧 ‘산다’를 의미한다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것은 사람이 더 이상 본래의 인간다운 생명을 살지 못하고, 들짐승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육체가 짐승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중심과 질서가 짐승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이러한 사람을 들짐승에 비유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을 진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몸이나 지능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드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연결이 끊어지고 겉 사람만 남게 되면, 사람의 삶은 결국 본능과 욕망, 감각과 자기 보존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들짐승처럼 산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이 여전히 겉 사람에게 작용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작용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은 매우 제한적으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결코 사람을 떠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짐승과 거의 같은 본성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욕망과 탐욕,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향은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잃을 때 무엇을 상실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육체나 지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덧붙입니다. 그런 사람도 여전히 추론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은 매우 총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rational이 여전히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rational은 이제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own과 감각을 섬기는 방향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논리와 추론은 더욱 정교해질 수 있지만, 그것은 참된 지혜와는 다른 것이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의 결론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유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왜곡, 악의 생명이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죽은 사람(dead man)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입니다. 육체는 살아 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own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AC.272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람이 되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 글입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뛰어난 지능이나 논리력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그 연결이 유지될 때 사람은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그 연결이 약해지고 겉 사람만이 삶을 지배하게 되면, 아무리 뛰어난 rational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본능과 욕망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들짐승과 같은 삶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가시덤불’, ‘엉겅퀴’, 그리고 ‘먹을 것은 밭의 채소’라는 말씀은 타락한 인간의 외적 삶을 묘사하는 동시에, 참된 생명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심화

 

1. ‘황폐(vastation)

 

 

AC.272, 심화 1, ‘황폐’(vastation)

AC.272.심화 1. ‘황폐’(vastation) 여기서 황폐(vastation)란 단순히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점차 소멸, 영적 생명이 메말라 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위 AC.272 해설 중) 스베덴

bygrace.kr

 

 

 

AC.273, 창3:18, ‘가시덤불과 엉겅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3‘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bygrace.kr

 

AC.271, 창3:17, ‘네 평생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1‘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71

네 평생에(all the days of thy life)라는 말이 그 교회의 날들의 끝, 곧 교회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이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와 그 상태라는 점으로부터 분명합니다. 그 교회의 날들의 끝은 홍수의 때였습니다. That “all the days of thy life” signifies the end of the day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not an individual man, but the church and its state. The end of the days of that church was the time of the flood.

 

 

해설

 

AC.271은 창3:17 끝부분에 나오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것은 아담 개인의 남은 생애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반부의 아담과 하와를 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도 ‘평생에’는 개인의 수명이 아니라 교회의 존속 기간 전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은 창3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창1과 창2은 태고교회의 형성과 완성을, 창3은 그 교회의 타락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개인 아담이 아니라 태고교회이며, ‘네 평생’ 역시 한 사람의 일생이 아니라 그 교회가 존재하는 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아담 개인이 죽을 때까지 고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태고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영적 수고와 비참함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균열로 시작되었던 자기 사랑과 자기 지혜가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커졌고, 결국 교회 전체가 무너지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종말을 ‘홍수(the Flood)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홍수는 단순한 자연재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악이 인간 정신을 완전히 압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 가운데 살았지만, 후손들이 점차 자기 지성을 신뢰, 감각을 따라 살게 되면서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연결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6과 창7에서 묘사되는 홍수의 영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AC.271은 앞의 AC.267-270을 하나의 역사적 흐름 속에 위치시켜 줍니다. ‘땅이 저주를 받고’,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비참함과 불안이 계속되는 상태’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바로 홍수였습니다.

 

더 깊이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말씀의 독특한 시간 개념도 보여줍니다. 말씀에서 ‘(days)은 흔히 시간 자체보다 상태(states)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네 평생에’는 단순한 연대기적 기간이 아니라, 그 교회가 겪어야 할 영적 상태 전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타락이 시작된 이후부터 완전한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상태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AC.271의 핵심은, 창3의 심판 선언들이 아담 개인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태고교회 전체의 쇠퇴와 종말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네 평생에’는 한 사람의 남은 생애가 아니라, 타락한 교회가 홍수라는 최종 종말에 이를 때까지의 전 역사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창3이 개인의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거대한 영적 역사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AC.272,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AC.272-274)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72‘가시덤불과 엉겅퀴’(the tho

bygrace.kr

 

AC.270, 창3:17,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0‘땅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는 것이 비참한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뒤 문맥으로부터 분명하며, 더구나 먹는다는 것은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이러한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공격하기 시작하고, 함께 있는 천사들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쓰게 될 때 뒤따른다는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이러한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점차 우세해지기 시작할 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그들은 겉 사람을 지배하게 되고, 천사들은 속 사람만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속 사람 안에는 이미 남아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 천사들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을 그곳에서 거의 찾아낼 수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사람 안에는 비참함과 불안이 생겨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비참함과 불안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참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짐승들만큼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 역시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땅의 것만 바라보고, 세상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own만을 사랑하며, rational까지 완전히 동의한 가운데 자기 욕망과 감각을 마음껏 따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싸움이나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러한 유혹에 노출된다면, 그들의 생명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 깊이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하고, 더욱 깊은 지옥의 정죄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상태를 이 세상에서는 겪지 않도록 허락하십니다. 대신 그들은 다른 삶, 곧 영계에 들어간 뒤에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유혹이나 고난 때문에 영적으로 죽을 위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매우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상태가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으로 뜻하는 바입니다. That to “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 signifies a miserable state of life is evident from what precedes and follows, not to mention that to “eat,” in the internal sense, is to live.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fact that such a state of life ensues when evil spirits begin to fight,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This state of life becomes more miserable when evil spirits begin to obtain the dominion; for they then govern the external man, and the angels only the internal man, of which so little remains that they can scarcely take anything thence with which to defend the man; hence arise misery and anxiety. Dead men are seldom sensible of such misery and anxiety, because they are no longer men, although they think themselves more truly so than others; for they know no more than the brutes of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what is eternal life, and like them they look downward to earthly things, or outward to worldly ones; they favor only their own, and indulge their inclinations and senses with the entire concurrence of the rational. Being dead, they sustain no spiritual combat or temptation, and were they exposed to it their life would sink under its weight, and they could thereby curse themselves still more, and precipitate themselves still more deeply into infernal damnation: hence they are spared this until their entrance into the other life, where, being no longer in danger of dying in consequence of any temptation or misery, they endure most grievous sufferings, which likewise are here signified by the ground being cursed, and eating of it in great sorrow.

 

 

해설

 

이 글은 창3:17의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을 영적 차원에서 설명하면서, 유혹과 영적 죽음의 차이를 매우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먹는다’는 것이 말씀에서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산다’, 곧 어떤 상태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것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영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이러한 비참함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떠날수록 점점 심해집니다. 악한 영들은 겉 사람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려 하고, 천사들은 속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보호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사람이 오랫동안 own과 감각만을 따라 살아오면, 속 사람 안에서 천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속 사람을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 생명의 흐름을 계속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암시합니다. 천사들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끊임없이 그것을 거부하면, 천사들이 작용할 수 있는 기반은 점점 약해집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은 점점 더 힘겨워지고, 사람은 깊은 불안과 공허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평안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영적 생명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병이 너무 깊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듯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오히려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현명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오직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own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rational까지 동의한 가운데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창3에서 rationalown에 동의한 결과이며,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타락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깊은 유혹을 거의 겪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강한 영적 유혹을 받게 되면, 그것을 이겨 낼 리메인스와 영적 생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유혹을 허락하시며,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섭리가 사후에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충분히 겪지 않았던 사람들은 영계에서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면서 큰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의 고통은 더 이상 거듭남을 위한 유혹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과 사랑의 결과를 온전히 마주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창3:17의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의 더 깊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AC.270은 영적 유혹과 영적 죽음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유혹을 통하여 괴로움을 겪지만, 그 유혹은 거듭남을 위한 주님의 역사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그러한 유혹조차 거의 느끼지 못하는데, 그것은 건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의 어려움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비참한 영적 삶과, 동시에 그 가운데서도 사람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섭리를 함께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71, 창3:17, ‘네 평생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1‘네

bygrace.kr

 

AC.269, 창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9여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69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께서 (ground), 곧 겉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서고 분리됨으로써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AC.245 참조).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를 다시 한번 선언하는 중요한 결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반복해서 강조해 온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곧, 사람의 타락과 저주의 원인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섭리론과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입니다.

 

3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시고, 땅을 저주하시며,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시거나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경에 ‘주님께서 저주하셨다’고 기록된 것은, 인간 편에서 일어난 영적 상태의 변화를 인간의 언어에 맞추어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이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돌아섰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속 사람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통로입니다. 반면 겉 사람은 그 생명을 받아 실제 삶으로 나타내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겉 사람이 own과 감각을 따라 독립하려 할 때, 주님께서 관계를 끊으시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이 스스로 그 생명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돌아섬(aversion)입니다.

 

따라서 ‘저주’도 하나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저주는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마치 햇빛을 등지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어둠을 경험하는 것은 태양이 어둠을 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등졌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의 모든 저주를 이러한 원리로 이해합니다.

 

이 점에서 AC.269는 앞의 AC.267AC.268을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AC.267에서는 rationalown과 감각에 동의함으로써 겉 사람이 타락하였다고 설명하였고, AC.268에서는 그 결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AC.269에서는 그 상태를 ‘저주’라고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저주는 주님의 행동이 아니라, 분리의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45를 다시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AC.245에서 주님은 아무도 저주하지 않으시며, 악인은 스스로 악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AC.269는 그 원리를 다시 적용하여, 창3:17의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말씀은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되었지만, 실제 영적 원인은 언제나 사람 자신의 돌아섬에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흔히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언제나 같은 사랑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흘려보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면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받고, 스스로 등을 돌리면 그 생명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AC.269는 창3의 ‘저주’를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라 영적 인과관계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겉 사람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겉 사람이 own과 감각을 따라 스스로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 그 결과로 생명의 흐름이 막히고 영적 황폐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성경이 ‘저주’라고 부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창3의 심판 기사를 하나님의 진노의 기록이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의 질서를 떠난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영적 결과에 대한 계시로 읽어야 함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AC.270, 창3:17,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70‘땅

bygrace.kr

 

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68.심화

 

1. ‘AC.118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방금 설명한 ‘rational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가르침이 이미 창2의 에덴동산 해설에서 밝혀졌던 내용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AC.268의 설명은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이미 제시한 인간의 영적 구조를 타락의 문맥에 적용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AC.118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사람의 내적 구조와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힛데겔’은 rational의 밝은 통찰을, ‘앗수르’는 rational 자체를 의미합니다. 특히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라는 표현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rational에 이르는 진리의 유입(influx)을 나타냅니다. 즉, rational은 스스로 빛을 내는 기관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작용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AC.268의 핵심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268에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이미 ‘강이 속에서 밖으로 흘러간다’는 상징으로 설명했던 동일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AC.118의 인용은, 속 사람에서 rational을 거쳐 겉 사람으로 이어지는 질서가 창조 때부터 주어진 본래의 질서임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AC.118 rational의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rational은 속 사람도 아니고, 가장 바깥의 감각적인 차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양자를 이어 주는 중간 영역입니다. 그래서 AC.268에서 rational을 ‘일종의 매개체(medium)’라고 부르는 것도 AC.118의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모든 작용이 주님 → 속 사람 → rational → 겉 사람이라는 질서를 따라 이루어진다고 이해합니다.

 

이 때문에 rational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본래 rational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겉 사람을 인도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처럼 rational이 감각과 own의 편에 서게 되면, 더 이상 속 사람의 빛을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AC.268에서 ‘rational이 동의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18 rational이 본래 어떻게 기능하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고, AC.268은 그 기능이 어떻게 손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AC.118에서 ‘유브라데(Phrath, Euphrates)를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의 경계라고 설명한 것도 AC.268과 연결됩니다. 속 사람의 빛은 rational을 거쳐 기억과 감각, 그리고 행동에까지 흘러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이 중간에서 막히면 기억 지식은 더 이상 영적 생명을 담지 못한 채 단순한 지식으로 남게 됩니다. 이것이 창3 이후 인간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다시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의 본래 질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rational에 빛이 흘러들고, rational은 다시 그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rational own과 감각에 동의하는 순간 그 흐름은 차단되고, 겉 사람은 속 사람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AC.118은 인간의 본래 구조를 설명하는 본문이고, AC.268은 그 구조가 타락으로 어떻게 손상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연결함으로써, 창2은 창조의 질서를, 창3은 그 질서의 붕괴를 보여주는 서로 대응되는 기록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AC.268, 창3:17,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8‘땅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AC.268

(ground)이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earth’, ‘ground’, 그리고 field에 관하여 설명한 내용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더 이상 earth라 하지 않고, ‘ground라 하는데, 이는 천적 씨가 그 안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여러 곳에서 사람을 ground에 비유하며, 또한 ground라고 합니다. 선과 진리의 씨는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 곧 사람의 애정과 기억 속에 심어집니다. 이는 속 사람 안에는 사람 자신의 own이 전혀 없고, 오직 겉 사람 안에만 own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선과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은 겉 사람, 곧 육적인 사람(corporeal man)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과 진리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에 보존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겉 사람이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될 때라야 비로소 나타나는데, 이는 대개 유혹 가운데 있을 때나, 재난과 질병을 겪을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그러합니다. 또한 rational도 겉 사람에 속합니다 (AC.118 참조). rational은 그 자체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일종의 매개체(medium)입니다.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육체적인 겉 사람에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rational이 잘못된 것에 동의하게 되면, 겉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속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속 사람에 속한 총명과 지혜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That the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tated concerning “earth,” “ground,” and “field.” When man is regenerate, he is no longer called “earth,” but “ground,” because celestial seed has been implanted in him; he is also compared to “ground” and is called “ground”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The seeds of good and truth are implanted in the external man, that is, in his affection and memory, and not in the internal man, because there is nothing of one’s own in the internal man, but only in the external.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and when these no longer appear to be present, the man is external or corporeal; they are however stored up in the internal man by the Lord, without the man’s knowledge, as they do not come forth except when the external man as it were dies, as is usually the case during temptations, misfortunes, sicknesses, and at the hour of death. The rational belongs also to the external man (n. 118), and is in itself a kind of medium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or the internal man, through the rational, operates on the corporeal external. But when the rational consents, it separates the external man from the internal, so that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is no longer known, nor consequently the intelligence and wisdom which are of the internal.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영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는 먼저 ‘ground’가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에서 ‘earth’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를, ‘ground’는 천적인 씨를 받을 준비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의미를 더욱 발전, 선과 진리가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나는 장소가 바로 겉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처음 읽으면 다소 의외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장 깊은 영적 생명은 속 사람 안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의 씨는 겉 사람의 애정과 기억 속에 심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거듭남이 단순히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생각, 배우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모든 과정은 겉 사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속 사람이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는 사람 자신의 own이 없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은 본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마련해 두신 생명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참된 선과 진리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사람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하나 나옵니다.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사람이 평소에는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람도 모르는 가운데 보존하고 계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리메인스의 교리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든 선을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며, 필요한 때를 위하여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안전하게 간직하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그 선과 진리가 언제 드러나는지도 설명합니다. 그것들은 겉 사람이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이를 때 나타납니다. 유혹 가운데 자기 확신이 무너질 때, 큰 재난이나 질병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을 때, 또는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될 때,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속 사람의 생명이 더욱 분명하게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own을 의지하지 않게 될 때, 속 사람 안에 간직해 두셨던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역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rational의 위치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rational은 속 사람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가장 바깥의 육체적 차원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동시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이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속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사람은 rational을 통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삶에 적용합니다. 따라서 rational은 본래 속 사람의 빛을 겉 사람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rational은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rational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반대로 rational이 감각과 own에 동의하면,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이것이 AC.267에서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라는 말씀이 갖는 심각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rational의 동의는 단순한 생각 하나가 아니라, 인간 전체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결정이 됩니다.

 

AC.268은 사람의 영적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하나의 질서 안에서 설명하는 글입니다. 겉 사람은 선과 진리가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삶의 자리이며,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rational은 이 둘을 연결하는 소중한 매개체입니다. 그러나 rationalown과 감각의 편에 설 때에는 속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이때 사람은 속 사람의 존재와 그 안에 있는 지혜와 총명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rational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고, 사람은 비로소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 보존해 두셨던 리메인스의 역사 가운데 참된 거듭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화

 

1. ‘AC.118

 

 

AC.268, 심화 1, ‘AC.118’

AC.268.심화 1. ‘AC.118’ 스베덴보리가 AC.268에서 AC.118을 인용한 이유는, 방금 설명한 ‘rational은 겉 사람에 속하지만,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체’라는 가르침이 이미 창2의 에덴동산

bygrace.kr

 

 

 

AC.269, 창3:17,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AC.269여호

bygrace.kr

 

AC.267,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AC.267-27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67.심화

 

1. ‘속 사람’, ‘겉 사람

 

여기 내적인 사람’, ‘외적인 사람을 각각 속 사람’, ‘겉 사람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internal man external man을 이해하는 데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적인 사람’, ‘외적인 사람’보다 우리말에서 훨씬 자연스럽고 직관적이어서, 독자들도 의미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AC 번역에서는 internal man은 ‘속 사람’, external man은 ‘겉 사람’으로 통일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개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internal man external man은 단순히 ‘마음속’과 ‘겉모습’을 대비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는 이것을 인간 존재를 이루는 두 가지 영적 차원으로 사용하며, 각각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가진 실제적인 구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직접 받는 차원입니다. 퍼셉션과 천적, 영적 생명이 자리하는 영역이며, 거듭남의 중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과 연결되며, 참된 선과 진리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사람 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반면 ‘겉 사람(external man)은 감각과 기억 지식, 행동과 생활이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차원입니다. 사람은 몸을 통하여 세상과 접촉, 배우고, 기억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데, 이러한 모든 활동은 겉 사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속 사람으로부터 질서를 받아야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267에서 ‘외적인 사람 전체도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겉 사람 전체도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옮기면 훨씬 자연스럽고 의미도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는 주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된 결과를 의미합니다.

 

다만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층위를 함께 살려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internal external뿐 아니라 interior exterior도 엄밀하게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만일 internal interior를 모두 ‘내적’이라고 번역하면, 스베덴보리가 의도한 인간의 영적 구조가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설명할 때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과 같이 여러 단계의 질서를 구분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를 가능한 한 우리말에서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를 들어 inmost는 ‘가장 깊은’, internal은 ‘’, interior는 ‘내적’, exterior는 ‘외적’, external은 ‘’으로 구분하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층위와 흐름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 원칙을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개념 구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함께 살릴 수 있습니다. 특히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표현은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영적 구조를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번역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AC.267,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AC.267-271)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