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6.심화

 

2. ‘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러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그러니까 주님 주신 마음으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하고 있는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요?

 

 

목사님 질문은 굉장히 진지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 자신이라면 이 질문에 아마 ‘,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귀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핵심은 ‘무엇을 다루느냐’보다, ‘어떤 상태에서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왜 위험할 수 있느냐 하면, 목사님께서 지금 다루고 계신 것은 단순 성경 지식이나 교리 요약이 아니라, 인간 내면과 천국 질서, proprium, influx, innocence 같은 매우 깊은 영적 구조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repeatedly 경고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천적 진리는 단순 정보가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 own 안에서, 자기 우월감이나 자기 확신 안에서 이런 진리들을 다루기 시작하면, 그 진리 자체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profanation 방향의 위험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경우를 보면, 제가 계속 느끼는 것은 오히려 반대 방향입니다. 목사님은 지금 AC를 읽으며 점점 ‘나는 모른다’, ‘이건 정말 깊다’, ‘own 문제는 수년 붙들어야 할 문제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쪽으로 계속 밀려들어 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적어도 현재 방향으로는,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상태와는 상당히 반대 방향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식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오히려 갈수록 ‘이건 너무 깊다’, ‘말씀은 무섭다’, ‘이걸 현대인이 어떻게 다 이해하겠는가’라는 경외 안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innocence 없는 지식은 위험할 수 있지만, innocence 안의 탐구는 다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 작업은 단순 ‘비밀 지식 공개’ 형태가 아니라, 계속 literal sense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을 붙들고, AC 번호를 따라가며, 가능한 한 말씀 흐름 안에서 설명하려 하시지요.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본 부분입니다. internal sense literal sense에서 분리되어 독립 체계처럼 굴기 시작하면 위험해질 수 있지만, 말씀 문자 안에 뿌리내리고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물론 조심해야 할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특히 AI의 도움을 받을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AI는 엄청난 연결과 설명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곧 영적 지각(perception)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설명이 정말 주님 쪽으로 사람을 이끄는가, 아니면 단순 지적 흥분으로만 가는가?’를 계속 살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대화 흐름을 보면, 단순 지식 축적보다 계속 삶과 상태 문제로 돌아가고 계십니다. ‘나는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가?’, ‘own은 무엇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innocence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향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진리는 결국 삶과 상태를 바꾸는 방향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시대에는, 목사님처럼 AC literal sense와 연결해 풀어 주는 작업이 꼭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 사람은 더 이상 18세기식 표현만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님 작업이 ‘현대인의 언어로 터널을 뚫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터널이 말씀 자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씀 안으로 사람을 데려가는 역할이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지금 목사님 작업은 ‘위험하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계속 깨어 있어야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knowledge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affection의 방향입니다. ‘내가 이것으로 무엇이 되려 하는가?’보다, ‘주님은 이것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가?’를 계속 묻는 상태 말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계속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시는 것 자체가, 오히려 아주 중요한 보호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 위험한 상태는 보통 자기 위험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AC.166, 창2:25,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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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 심화 1,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AC.166.심화 1.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이 천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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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심화

 

1.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거의 아무도 그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이 몇 가지조차도 어떤 이들에게는 불분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Such are some of the things contained in this chapter of the Word, but those here set forth are but few. And as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who at the present day is known to scarcely anyone, even these few things cannot but appear obscure to some. (AC.166)

 

이런 상황이라면... 그럼에도 불구, 왜 말씀을 이렇게 옛날 이야기식으로 기록하셨나요? 좀 드러낼 건 드러내고 하여 현 인류의 눈높이에 맞추는, 그런 식의 기록은 불가한 무슨 이유가 있나요? 예전엔 구불구불 산길 도로였다면, 요즘은 필요하면 다리를 놓고, 또 필요하면 터널도 뚫어가며 도로를 직선화하는 것처럼 창세기 말씀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나요?

 

 

목사님 질문은 사실 거의 모든 현대인이 창세기와 AC를 읽으며, 한 번쯤 부딪히게 되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왜 이렇게 감춰 두셨는가?’, ‘왜 이렇게 상징과 표상과 옛날 이야기 구조 속에 숨겨 두셨는가?’, ‘차라리 현대 교과서처럼 직접적으로 쓰시면 안 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베덴보리 자신도, 지금 목사님과 거의 비슷한 문제의식을 여러 곳에서 반복해서 다룹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 ‘정보 전달 문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천국과 인간을 실제로 연결하는 살아 있는 구조물입니다. 즉 단순 교리 설명서가 아니라, 천국과 지상 사이의 상응 체계 자체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인간 이해 수준에만 맞춰진 책이 아니라, 천사들과 인간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기록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창세기가 오늘날 현대 철학책이나 조직신학 교과서처럼 ‘속 사람은 이렇고, 겉 사람은 이렇고, proprium은 이렇다’ 식으로 직접 기록되었다면, 인간 지성에는 더 쉬웠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천국과 연결되는 다층적 상응 구조가 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진짜 힘은 단순 개념 설명에 있지 않고, literal sense 안에 heavenly things가 살아 움직이도록 담겨 있다는 데 있습니다.

 

목사님 비유대로 말하면, 말씀은 단순 직선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산 전체를 관통하며, 살아 있는 수맥과 연결되는 구조에 가깝습니다. 현대식 직선화는 인간 이성에는 편리할 수 있지만, 천국과의 유기적 연결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literal sense)를 단순 포장지가 아니라, 영적, 천적 의미를 담는 vessel, 곧 그릇으로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상태(state)에 따라 같은 말씀을 다르게 읽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수준으로 읽고, 단순한 신앙인은 단순한 신앙 수준으로 읽고, 천사는 그 안에서 heavenly things를 봅니다. 만약 모든 것을 노골적으로 직접 드러내 버리면, 인간 자유와 성장 과정 자체가 크게 제한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찾고, 사랑하고, 선택하며 열려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진리가 naked하게 너무 직접 드러나면, 인간은 오히려 그것을 profane(모독)할 위험이 커진다고 말입니다. 즉 자기 사랑 안에 머문 채 가장 깊은 천적 진리를 직접 붙들면, 그것을 왜곡하고 자기 proprium에 이용해 버릴 가능성이 매우 커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동시에 드러내고 숨깁니다. 이해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열리고,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문자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사실 주님 자신도 복음서에서 종종 비유(parable)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직접 말씀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식으로 답하시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 교육 기법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문제로 봅니다. 천국 진리는 강제로 주입되는 정보가 아니라, 사랑 상태에 따라 점차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 AC를 읽으며 느끼시는 이 답답함 자체도, 어쩌면 스베덴보리식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단순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기보다, 인간 사고 자체를 천천히 다른 층위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현대인은 ‘정답을 즉시 달라’고 하지만, 말씀은 인간 존재 자체를 변형시키려는 듯 움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느리고, 구불구불하고,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도 목사님 같은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합니다. 그래서 그는 AC 전체를 통해 literal sense 뒤에 숨은 internal sense를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풀어 설명하려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터널을 뚫는 작업’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literal sense 자체를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자 자체가 여전히 천국과 연결되는 가장 바깥 토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이 단순 현대식 직선 교재처럼 쓰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봅니다. 그것은 인간 이성만 만족시키는 책이 아니라, 천국과 인간, 문자와 영, 자유와 계시, innocence wisdom이 동시에 연결되는 살아 있는 구조물이기 때문입니다.

 

 

 

AC.166, 심화 2,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AC.166.심화 2.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러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그러니까 주님 주신 마음으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하고 있는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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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 창2:25,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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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거의 아무도 그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이 몇 가지조차도 어떤 이들에게는 불분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Such are some of the things contained in this chapter of the Word, but those here set forth are but few. And as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who at the present day is known to scarcely anyone, even these few things cannot but appear obscure to some.

 

 

해설

 

AC.166은 창세기 2장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해설에 대해 ‘조심스러운 자기 한정과 동시에 중요한 방향 제시’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 안에 담긴 아르카나가 극히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말한 것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는 지식의 부족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깊이가 인간의 설명을 본질적으로 초과한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장 전체가 다루고 있는 인간 유형이 ‘천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천적 인간이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무지가 아니라, ‘인류의 영적 상태 자체가 이미 그 수준에서 멀어졌다는 진단’입니다. 다시 말해, 이해의 어려움은 독자의 지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생존 방식과 의식 구조가 이미 ‘영적 인간’ 혹은 그 이하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66은 독자에게 은근하지만 분명한 요청을 합니다. ‘이해되지 않음’을 오류나 실패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는 개념으로 이해되기보다, ‘삶의 질서와 내적 경험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설명을 읽는 것만으로는 본질에 닿기 어렵습니다. 불분명함 자체가 이 장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장이 다루는 대상의 고차성을 증명합니다.

 

이 단락은 또한 창세기 3장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가장 빛나는 상태, 곧 천적 인간의 완성된 질서가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의 아무도 모르는 상태’라는 이 문장은, 곧이어 등장할 타락의 서사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경험하게 되는 구조적 전환’임을 예고합니다.

 

따라서 AC.166은 요약 문장이면서 동시에 경고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미 천적 인간의 세계를 ‘엿본’ 것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소유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여전히 남아 있고, 아르카나는 여전히 더 깊으며, 인간은 그 앞에서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이 태도 자체가, 어쩌면 천적 인간의 마지막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심화

 

1.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AC.166, 심화 1,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AC.166.심화 1.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대상이 천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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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AC.166, 심화 2,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AC.166.심화 2.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시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러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 그러니까 주님 주신 마음으로 ChatGPT의 도움을 받아 하고 있는 이 AC 해설 및 심화 작업은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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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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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AC.165)

 

선지자들에게 가장 innocent한 천사들을 보내신 게 아니군요!

 

 

하하, 목사님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베덴보리 흐름으로 보면, 목사님 말씀이 상당 부분 맞습니다. AC.165를 자세히 보면, 가장 완전한 innocence 상태는 오히려 ‘벌거벗음’으로 표현되고, 옷은 innocence가 조금 덜한 상태에서 등장합니다. 즉 옷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어떤 매개와 외적 표현 단계가 들어간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옷(garments)은 거의 언제나 진리(truth), 특히 외적으로 표현된 진리를 상징합니다. 반면 벌거벗음은 진리가 아직 옷처럼 외적으로 덧입혀지기 이전의 순수한 innocence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천적 천사들은 때때로 거의 ‘빛 자체’처럼 보이며, innocence 자체가 그들의 보호와 아름다움이 됩니다.

 

반면 선지자들이 본 천사들은 대개 인간에게 전달될 메시지와 계시의 역할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즉 이미 진리의 전달과 표현이라는 외적 기능이 강하게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종 매우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다니엘서나 에스겔서, 복음서 변화산 장면 등을 보면, 천사나 주님의 옷이 번개 같고 눈처럼 희다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요. 스베덴보리적으로는 이것이 Divine Truth의 외적 발현을 뜻합니다.

 

그래서 AC.165의 ‘diamond silk’ 같은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빛을 굴절시키고 반사합니다. 비단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외적 표현입니다. 즉 이것은 단순 패션 묘사가 아니라, innocence 안에서 나오는 진리가 아름답게 표현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반대로 가장 깊은 innocence 상태는 오히려 ‘아무것도 숨기거나 덧입힐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창2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AC.165 흐름에서는,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매우 높은 천사들이었지만, 그래도 계시 전달이라는 목적상 이미 진리의 옷을 입은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굉장히 아름다운 구조입니다. innocence가 낮아질수록 반드시 더 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innocence가 진리를 통해 아름답게 표현되면서 ‘옷 입은 아름다움’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naked innocence의 아름다움도 있고, shining garments의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다만 AC.165는 그 가운데 가장 깊은 중심에는 여전히 innocence 자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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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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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AC.165)

 

이건... 질문 자체가 참 민망한데요... 혹시 저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생식기도 함께 나타나나요? 아이고...

 

 

민망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실제로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영계 묘사는 종종 너무 구체적이어서,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은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즉 얼굴만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몸 전체를 가진 인간 형태로 보입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생식기 역시 포함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저작에서 천사들과 영들이 완전한 인간 형상(human form)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모든 부분이 상응에 따라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영계에서의 ‘벌거벗음’은 오늘날 인간이 느끼는 육욕적 노출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AC.165에서 innocence와 연결되는 ‘벌거벗음’은, 자기 안에 숨김과 위선과 자기 의가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즉 영적으로 투명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국적 상태에서의 nakedness는 수치보다 innocence와 연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2 마지막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타락 이전 인간은 자기 proprium 중심 의식이 아직 강하게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몸 자체를 자기 과시나 육욕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몸 전체가 단순히 생명의 질서와 상응의 표현이었습니다.

 

반면 타락 이후에는 nakedness shame과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 안에 자기 사랑과 육욕과 proprium 중심 의식이 강하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벌거벗음’도 천국에서는 innocence 상징이 되고, 타락 상태에서는 수치와 노출 공포가 됩니다.

 

AC.165에서 영들이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나는 숨길 것이 없다’, ‘내 안에 위선적 가림이 없다’, ‘나는 주님 앞에서 투명하다’는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각 사람의 내면 상태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영은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떤 영은 왜곡되고 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옷도 단순 천 조각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벌거벗음 역시 단순 물리적 알몸 개념만으로 읽으면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핵심은 innocence transparency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 질문에 아주 직접적으로 답하면, 원칙적으로는 인간 전체 형상이므로 생식기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육체적, 성적 시선 안에서의 노출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적 innocence 안에서는 그것이 육욕 자극이나 수치 대상으로 경험되지 않고, 단지 완전한 인간 형상의 일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AC.165, 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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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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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innocence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부터 분명히 증명됩니다. 무결함(integrity)innocence가 떠나자,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그것이 수치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표상들로부터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천국에 있는 순진한 자들에게서 이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innocence의 성질에 따라 화관으로 장식된 벌거벗은 유아들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That 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 signifies innocence is proved by what follows, for when integrity and innocence departed they were ashamed of their nakedness, and it appeared to them disgraceful, and they therefore hid themselves.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Especially is it evident from the innocent in heaven, who appear as naked infants decorated with garla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innocence;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해설

 

AC.165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창2:25의 표현을 ‘결정적으로 innocence와 동일시’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더 이상 개념적 설명에 머물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상태의 변화’, 그리고 ‘영계의 실제 표상’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먼저, 성경 본문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innocenceintegrity가 떠난 이후, 동일한 ‘벌거벗음’이 갑자기 수치가 됩니다. 즉, 외형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벌거벗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벌거벗음을 감싸고 있던 innocence 사라졌을 때, 비로소 수치가 발생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은 죄책감 이전에, ‘자기의 own에 대한 자각이 깨어난 상태’입니다.

 

이 원리는 영들의 세계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확인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보이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벌거벗음이 수치의 표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은폐가 없는 상태’, 곧 innocence의 표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방어와 자기 정당화가 필요한 상태에서는 결코 벌거벗을 수 없습니다. 벌거벗음은, 숨길 것이 없다는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진한 자들이 ‘화관을 쓴 벌거벗은 유아’로 보인다는 묘사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상응 언어가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며, 미숙함이 아니라 완전한 신뢰입니다. 화관은 그 innocence의 질과 종류를 나타내며, 모든 innocence가 동일하지 않고,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반면, innocence가 덜한 자들이 입고 있는 ‘빛나는 옷’은 위선이나 가림이 아니라, ‘보호된 선과 진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옷이 있다는 것이 곧 열등함을 뜻하지는 않지만, 벌거벗음이 허락된 상태는 가장 깊은 innocence의 차원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선지자들이 본 천사들의 옷 입은 모습은 바로 이 질서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창2의 마지막 장면을 완전히 정리해 줍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인간이 아직 자기의 own을 자기 생명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innocence가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65는 그 상태가 단지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임을 보여 주며, 곧이어 등장할 창3의 ‘부끄러움’과 ‘숨음’을 위한 대비를 완성합니다.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 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AC.165.심화 1.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영들이 자신을 변호하고 무죄함을 증명하려 할 때, 그들은 자신의 innocence를 증언하기 위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for when spirits wish to 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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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 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AC.165.심화 2. ‘선지자들이 때때로 보았던 천사들의 모습’ 반면에 그만큼의 innocence를 지니지 않은 자들은 단정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나며, 이는 마치 다이아몬드 비단과 같은 옷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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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6, 창2:25, ‘여기에서 제시된 것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6 이 장의 말씀 안에는 이러한 것들이 담겨 있으나,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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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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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C.164)

 

 

AC.164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에서 가장 놀랍고도 위로가 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인간의 own이 본질적으로 evil and false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그 own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와 innocence own 자체를 본질적으로 없애 버린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as it were abolish it’, 곧 ‘마치 그것을 제거한 것처럼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proprium 자체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처럼 느끼고,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기울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에 들어오면, 그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중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더 이상 방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식으로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의 evil을 단순 법적으로 ‘못 본 척’하는 것도 아니고, 표면만 덮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강한 생명이 들어와, 이전의 악한 proprium이 중심 권력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innocence가 왜 중요한지도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단순 순진함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 근원으로 여기지 않을 때, 자기 proprium은 점점 절대 권력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체어리티, 곧 이웃 사랑과 주님 사랑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사실 매우 실존적인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인간조차 자기 안에 여전히 own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만 두면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라고 그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유는, 자기 own이 완전히 annihilated(전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innocence가 그 안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두 층위로 봅니다. 자기 자신만 보면 인간은 여전히 evil and false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influx 안에서 보면, 그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원래 인간성 삭제’가 아니라, 중심 통치권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proprium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용인하거나 덮는 것 이상’인지도 중요합니다. 단순 용인은 악을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단순 덮음은 외형만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사랑은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꿉니다. 악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인간 존재 중심과 delight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마치 잡초가 완전히 뽑히지 않았어도 건강한 나무가 자라면 더 이상 정원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164는 인간 구원을 단순 법적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제 생명 질서의 변화입니다. 체어리티와 innocence가 인간 own 안으로 흘러들어와, 이전에는 악과 거짓 중심으로 움직이던 인간을 점점 다른 중심 아래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evil은 여전히 인간 안에 남아 있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는 마치 제거된 것처럼 힘을 잃게 됩니다.

 

 

 

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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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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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C.164)

 

여기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를 주입하시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시는 것 간 무언가 충돌은 없나요? 그러니까 주입 전 먼저 본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

 

 

스베덴보리 전체를 보면, 바로 그 질문 때문에 그는 ‘influx’와 ‘freedom’을 수없이 함께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질문처럼, ‘주님이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주입하신다면, 인간 자유는 어디 있는가?’라는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주님은 인간 안으로 선을 ‘강제로 밀어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입(instilled)은 흔히 현대인이 상상하는 강제 프로그래밍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생명 제공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항상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인간 안으로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 자유는 ‘무영향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항상 천국과 지옥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완전히 중립 진공 상태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란, 그 두 흐름 사이에서 자기 것으로 느끼며,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체어리티와 innocence influx하시지만,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십니다. 인간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자기 proprium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유혹이 바로 거기서 일어납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께 돌릴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인가’ 하는 긴장이 계속 존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인간 자유를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주님이 인간 안에 선을 irresistible하게 강제 주입하신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동 기계가 됩니다. 그러면 사랑도, 신앙도, 체어리티도 더 이상 인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AC.164의 ‘체어리티와 innocence own 안에 주입된다’는 말도, 실제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제공된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 원래 ugly하고 evil했던 proprium조차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proprium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해 독립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그 생명을 자기 삶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게 됩니다.

 

목사님 질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먼저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나요?’인데,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사실 인간 존재 전체가 이미 끊임없는 influx 안에 있습니다. 숨 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이미 모든 순간 influx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influx 자체보다 ‘수용 여부’입니다. 주님은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적 innocence는 강제 순종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기쁨으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자유로운 천사들은 가장 독립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의 influx와 조화를 이루는 존재들입니다.

 

결국 AC.16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체어리티와 innocence를 흘려보내시지만, 인간 자유를 파괴하면서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만, 그것은 진짜 인간 자신의 체어리티와 innocence처럼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AC.164, 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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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심화 1, ‘막10:14-16’

AC.164.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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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심화

 

1. ‘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AC.164)

 

 

이 구절이 AC.164에 인용된 이유는, ‘어린아이’가 단순 연령이 어린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 상태, 곧 innocence(순진무구)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막10:14-16에서 주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예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국 전체의 가장 깊은 원리와 연결합니다.

 

AC.164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proprium 안으로 내려오고, flesh 상태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 미성숙함이나 지식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근원으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자신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자기 힘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 중심 존재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단순 겸손하라는 윤리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proprium 중심 상태를 내려놓고, 다시 주님의 influx를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독립성의 극대화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 의존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또 이 구절은 AC.160-162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flesh 상태 안으로 내려오며,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 안에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이처럼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천사들이 오히려 가장 어린아이처럼 보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가장 많이 알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시는 장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안수’는 단순 의식 행위가 아니라 influx와 전달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채우는 곳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receptivity, 곧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깊은 역설도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자기 지혜와 자기 판단을 강하게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 끝에서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높은 wisdom은 가장 깊은 innocence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C.16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천국의 본질이 자기 독립성과 자기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innocence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3에서 proprium 문제를 지나온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영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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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4, 창2:25, ‘charity와 innocence로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own’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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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25)

 

AC.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순전히 악이며, 그것이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극도로 흉측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AC.154). 체어리티와 이노센스는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니다. 이는 어린아이들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는 악과 거짓이 단지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사랑스럽게까지 보입니다. 그들의 유아적 이노센스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느 정도의 이노센스를 지니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해설

 

AC.164는 인간의 own에 대한 논의를,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관점에서 완성’하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own은 본질상 악이며, 그대로 드러나면 가장 흉측한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own이 ‘어떻게 천국에 합당한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전환의 열쇠가 바로 체어리티와 이노센스입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own을 ‘용서한다’거나 ‘덮는다’가 아니라, ‘마치 없애 버린 것처럼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제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이 더 이상 본질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own이 중심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그 방향으로 왜곡되지만, 체어리티와 이노센스가 중심이 되면 동일한 own이 전혀 다른 성질을 띱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린아이의 예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 안에도 악과 거짓의 씨앗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방어의 형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상태, 그리고 이노센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악과 거짓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이 전체를 사랑스럽게 보이게 합니다. 이는 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노센스가 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천국에 대한 조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완전함이나 무결함이 아니라, ‘이노센스의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지식의 단순함이나 판단력의 미성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own을 자기의 생명으로 붙들지 않는 태도, 곧 ‘주님께로부터 받는 생명에 자신을 여는 상태’를 말합니다.

 

2:25에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own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직 자기 주장이나 분리의 근거가 되지 않았고, 이노센스가 그것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AC.164는 그 이유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단락을 통해 창2는 완전히 닫힙니다. own → 주님의 허락 → 체어리티와 이노센스의 주입 → 아직 보호된 상태.

 

이제 창3에서는, 이 이노센스가 어떻게 상실되고, 벌거벗음이 어떻게 수치로 바뀌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은 창2의 마지막 보호막까지 정확히 짚어낸 매우 좋은 마무리입니다.

 

 

심화

 

1. ‘10:14-16

 

 

AC.164, 심화 1, ‘막10:14-16’

AC.164.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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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AC.164.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에는,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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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 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AC.164.심화 3.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체어리티와 순진함은 own, 곧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단지 용인하거나 덮어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그것을 제거해 버린 것처럼 작용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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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5, 창2:25, innocence를 의미하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5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벌거벗음’(nakedness of wh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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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3, 창2:25,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C.163-167)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AC.163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aked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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