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AC.59본문 중‘이 사실의 확실성은,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저 세상의 영들,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그들이 독을 내뿜고,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부분도 정말 놀랍습니다.저는 일상 중 약간의 어떤 영적이다 싶은 순간,혹은 상황도 매우 놀라며 크게 두려워하는 편인데,위 증언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저의 천배 만배의 상황을,그것도 오랜 기간 경험했다는 것이어서 말입니다.스베덴보리는 정말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큰 영적 거인이지 싶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구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핵심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실제로 작용하는가’입니다. 그 경험은 스베덴보리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 있어도,주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중심은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주님의 보호 질서’입니다.
먼저 목사님께서 느끼신 놀라움과 두려움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느낌이 와도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 감각 세계에 익숙하고, 그 너머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세계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강도의 경험을 했습니다. 이 점만 보면 분명 ‘특별한 사람’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특별해서 견딘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키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허락되었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입니다. 즉, 아무리 수천의 영들이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무제한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허락과 통제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걸 우리의 상태로 연결하면 오히려 더 중요한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극단적인 경험을 하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도 감정의 흔들림, 생각의 혼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같은 것들을 겪습니다. 이것도 넓게 보면 ‘영적 영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말해 주는 것은, ‘그 어떤 영향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렇게 받아들이시면 좋습니다.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인데,스베덴보리는 강해서 견딘다’가 아니라, ‘스베덴보리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간이지만,주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 해를 입지 않았다.그렇다면 나 역시 그 보호 안에 있다’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본질적인 적용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의 이 경험은 ‘보여 주기 위한 예외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영적 세계의 구조를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방식으로 보호받으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신앙의 길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한 채 믿고,느끼지 못한 채 선택하는 것’이 더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조금만 영적인 느낌이 와도 놀라고 두려워하는 상태’는 오히려 매우 정상적인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걸 목회적으로도 연결해 보면, 성도들에게도 같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영계는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은 항상 ‘영적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그리고 삶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결국 강조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드러난 ‘질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무리 강한 영적 영향 속에서도,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해를 입지 않으며,그 모든 것은 주님의 허락과 한계 안에서만 일어난다’입니다.
목사님께 드리고 싶은 한마디로 마무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의 강함이 아니라,그를 지키신 주님의 절대적인 보호입니다.’
위 심화2본문 중‘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라고 하는데...만일,안 찾아올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령,목회자에게 실망했다든지,목회자를 비롯,다른 제삼자가 자기 사정 아는 걸 프라이버시 침해로 여긴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 대한 목회의 핵심은 ‘끌어내려 하기보다,안전한 거리에서 관계의 문을 열어 두고,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통로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AC.59의 원리에 그대로 연결하면, 주님도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시고, 그 상태를 허용하시되 길을 열어 두시며, 때를 기다리십니다. 목회도 같은 결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접근 방식의 전환’입니다.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상담 자리로 끌어내려 하면, 그 사람에게는 ‘압박’이나 ‘감시’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실망했거나, 자신의 사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라면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 시도’보다 ‘관계 회복의 최소 단위’입니다. 아주 짧은 안부, 부담 없는 인사, 설교 후 가벼운 대화, 혹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일상적 접촉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 사람은 나를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나를 존중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상황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 꺼내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상대가 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혹시 말을 꺼냈을 때도,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여지를 항상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쌓이면, 그 사람 안에 ‘여기는 안전하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직접 상담이 아니라 간접 통로를 여는 것’입니다. 설교, 글, 소그룹, 혹은 다른 신뢰하는 성도를 통한 연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1:1로는 마음을 열지 않지만, 말씀이나 다른 관계를 통해 서서히 열립니다. 주님도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비유와 사건과 다른 사람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게 유연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태도가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합니다.AC.59의 원리대로라면, 사람은 자기 상태 안에서 충분히 겪고, 느끼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없이 바뀐 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아도,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으면 조급해지고, 결국 관계를 더 닫히게 만듭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교회에 나오지만, 거리를 둡니다. 이때 ‘요즘 왜 그러세요?’라고 바로 묻기보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세요?’, ‘요즘 바쁘시죠?’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짧게라도 반응하면, 거기서 멈추고, 더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서 반복적으로 ‘안전한 접촉’을 쌓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때가 ‘문이 열린 순간’입니다.
물론 끝까지 안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자유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목회자는 끝까지 ‘길이 열려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언제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게 들어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찾아오지 않는 성도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관계를 안전하게 유지하며,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간접적인 통로를 열어 두고,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목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찾아오지 않는 성도는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안전한 거리에서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와 같은 방법을 혹시 목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AC.59에서 본 주님의 방식은 목회에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요약됩니다. ‘사람을 한 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지금의 상태를 인정한 채,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자라도록 돕고,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즉, ‘제거’가 아니라 ‘전환’, ‘압박’이 아니라 ‘성장’, ‘통제’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을 당장 없애지 않으십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성도의 문제를 보면서 ‘이건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건 틀렸습니다’라고 바로 제거하려 들면, 겉으로는 잠깐 눌릴 수 있어도, 결국 더 깊은 반발이나 위선, 혹은 무력감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상태가 지금 이 사람의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진리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방식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강요’하면 그 사람의 기존 구조와 부딪혀 버립니다. 대신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이 스스로 ‘아,이런 길도 있구나’를 보게 해야 합니다. 설교든 상담이든, 결론을 밀어붙이기보다 ‘보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도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구조 자체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답답하고, 때로는 실망도 됩니다. 그러나AC의 관점에서는 ‘지금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여도,그 안에서 구조가 바뀌고 있는 중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지켜 주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악한 영들의 자극까지도 허용하시며 사람에게 선택의 공간을 주십니다.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 주거나 강하게 통제하면, 겉으로는 정돈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길이 옳습니다’라고 말하되, 동시에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합니다’라는 자리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인 목회 장면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성도가 반복적인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때 ‘왜 또 그러십니까’가 아니라, ‘그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인정한 위에서, ‘이럴 때 이런 선택도 가능하다’는 진리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중심이 이동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방식에 가까운 목회’입니다.
또 하나 덧붙이면, 목회자는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각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목회자가 할 일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지켜 주고, 때로는 방향을 비추고, 때로는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첫째, 성도의 현재 상태를 서둘러 제거하려 하지 말고 인정한다. 둘째, 진리를 강요하지 않고 비추어 준다. 셋째,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견딘다. 넷째, 선택의 자리를 남겨 둔다. 다섯째, 주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고 그 통로가 된다.
한 줄로 정리하면, ‘주님의 거듭남 방식에 따른 목회는 사람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그 사람이 스스로 진리를 선택하며 서서히 변화될 수 있도록 동행하고 지켜 주는 것입니다.’
위AC.59본문 중‘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라는 내용이 놀랍습니다.놀라우면서도 선뜻 이해가 잘 안되는데,설명 부탁드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문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옛 상태(욕정과 거기서 나온 거짓)는 단순히 나쁜 것이 아니라,그 사람이 지금까지‘살아온 방식 자체’,곧 생명의 그릇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그것을 한 번에 없애면 사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둔 채 서서히 바꾸시며, 그 과정에서 악한 영들의 작용까지도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먼저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진다’는 말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리고 살아오면서 ‘좋아하는 것,싫어하는 것,끌리는 것,집착하는 것’이 쌓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비교하는 마음, 편하고 싶은 마음, 내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마음 등입니다. 이것들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택과 판단을 실제로 끌고 가는 힘입니다. 그래서 ‘지배권을 가진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이렇게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자기 욕구에 맞게 생각을 만들고 정당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정도는 괜찮지’, ‘상황이 이러니까 어쩔 수 없어’, ‘나는 틀리지 않았어’ 같은 생각들이죠. 이것이 ‘욕정에서 나온 거짓’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판단조차 상당 부분은 이미 욕구에 맞춰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의 구조’가 여기에 얽혀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왜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다’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의 욕정과 그에 따른 생각들을 한 번에 다 없애 버리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 사람은 지금까지 그것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일종의 공허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기존의 생명 구조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꾸십니다’. 즉, 기존의 욕정과 생각을 그대로 두신 채, 그 위에 새로운 진리와 선을 조금씩 심으시고, 그것이 점점 자라 기존의 것을 대신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가장 놀라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충격적이지만, 구조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의 욕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정들을 계속 자극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허락되느냐 하면, 사람이 자기 상태를 실제로 느끼고,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 안에 강한 욕구가 올라옵니다. 화, 욕심, 비교, 인정욕 같은 것들입니다. 이때 그것을 그냥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안에 있구나’를 분명히 느끼게 하시고,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다른 길도 함께 보이게 하십니다. 이 두 흐름 사이에서 사람이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만약 욕정이 아예 올라오지 않는다면, 사람은 선택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냥 자동으로 ‘좋은 상태’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의 자극은 단순히 방해가 아니라, ‘자유와 선택의 장’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주님은 그 자극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도록 항상 제한하십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은 원래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곧바로 제거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상태 위에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유지한 채, 악한 영들의 자극 속에서 진리와 선을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새로운 생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옛 상태를 한 번에 없애지 않으시고,그 상태를 유지한 채 선택과 싸움을 통해 서서히 새로운 생명으로 바꾸시며,그 과정에서 악한 영들의 작용까지도 제한적으로 사용하십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모든 푸른 풀’(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이 언급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전투에 놓이게 되며, 이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militant)라 불립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는데, 이는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욕정들과 거짓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전체가 파괴되고 말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지금까지 획득해 온 유일한 생명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며, 이들은 그의 욕정들을 자극합니다. 그 결과 욕정들은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되며, 이렇게 사람이 개혁됩니다. 이 전투의 시기 동안, 사랑과 신앙,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를 극도로 미워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비유되는 음식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시는데, 이는 평온과 평화의 상태와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이 음식은 주님께서 간헐적으로 주십니다.The reason why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only are here described as food for the natural man is this. In the course of regeneration, when man is being made spiritual, he is continually engaged in combat, on which account the church of the Lord is called “militant”; for before regeneration cupidities have the dominion, because the whole man is composed of mere cupidities and the falsities thence derived. During regeneration these cupidities and falsities cannot be instantaneously abolished, for this would be to destroy the whole man, such being the only life which he has acquired; and therefore evil spirits are suffered to continue with him for a long time, that they may excite his cupidities, and that these may thus be loosened, in innumerable ways, even to such a degree that they can be inclined by the Lord to good, and the man be thus reformed. In the time of combat, the evil spirits, who bear the utmost hatred against all that is good and true, that is, against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which things alone are good and true, because they have eternal life in them—leave the man nothing else for food but what is compared to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nevertheless the Lord gives him also a food which is compared to the herb bearing seed, and to the tree in which is fruit, which are states of tranquillity and peace, with their joys and delights; and this food the Lord gives the man at intervals.
[2]주님께서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즉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는 영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치명적인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의 확실성은, 제가 지금까지 수년 동안, 비록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저 세상의 영들, 그중에서도 가장 악한 영들과 함께 지내 온 경험을 통해 확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를 괴롭히도록 허락받았으나, 주님의 보호 아래서 제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오랜 경험을 통해 저는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견뎌야 하는 전투에 대해 충분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누구도 의심 없는 신앙으로 믿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뒤이은 글들에서 계속 설명될 것입니다.Unless the Lord defended man every moment, yea, even the smallest part of every moment, he would instantly perish, in consequence of the indescribably intense and mortal hatred which prevails in the world of spirits against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e certainty of this fact I can affirm, having been now for some years (notwithstanding my remaining in the body) associated with spirits in the other life, even with the worst of them, and I have sometimes been surrounded by thousands, to whom it was permitted to spit forth their venom, and infest me by all possible methods, yet without their being able to hurt a single hair of my head, so secure was I under the Lord’s protection. From so many years’ experience I have been thoroughly instructed concerning the world of spirits and its nature, as well as concerning the combat which those being regenerated must needs endure, in order to attain the happiness of eternal life. But as no one can be so well instructed in such subjects by a general description as to believe them with an undoubting faith, the particulars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relate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창세기1장에서 자연적 인간에게 주어진 음식이 왜 ‘채소와 푸른 풀’로 제한되는지를, ‘거듭남의 전투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점진적 성장이나 도덕적 개선으로 보지 않고, 실제적인 영적 전투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부르며, 개인의 거듭남 역시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거듭나기 전 인간의 상태는 매우 분명하게 규정됩니다. 인간은 욕정과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이 그의 삶을 지배합니다. 이 욕정들은 단순히 제거할 수 있는 껍질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느끼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즉시 제거하면 인간 전체가 무너집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 이해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을 급격히 바꾸지 않으시고, ‘그가 견딜 수 있는 속도로만 변화시키십니다.’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오랜 기간 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이는 놀랍게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주님의 섭리의 일부입니다. 악한 영들은 욕정을 자극하지만, 바로 그 자극을 통해 욕정은 점점 느슨해지고, 고정된 지배력을 잃습니다. 이렇게 욕정이 풀릴 때에야 비로소 그것들은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즉 전투는 파괴가 아니라 ‘재배열을 위한 과정’입니다.
이 전투의 한가운데서,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채소와 푸른 풀’에 해당하는 것만을 허락합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양식만이 유지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영적 기쁨, 깊은 평화, 확신에 찬 신앙은 이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삶은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버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적 음식만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중심은 절망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와 간헐적 위로’에 있습니다. 주님은 전투 중인 사람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는 음식도 주십니다. 이것은 평온과 평화의 상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음식이 ‘항상’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투의 현실을 유지하면서도, 사람이 완전히 꺾이지 않도록 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체험을 길게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보호가 없으면 인간은 단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영의 세계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극심한 증오가 존재하며, 이것은 인간의 상상 범위를 훨씬 넘어섭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는 일반적인 방어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지속적인 보존’입니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삼되,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이런 일을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후의 글들에서 점진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AC전체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만큼만’ 주어집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의 길은 평온한 상승 곡선이 아니라,전투와 보호가 교차하는 길입니다.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제한되는 이유는 인간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그가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정렬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순간까지도 주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위AC.58해설에 나오는 ‘자연적 애정’과 ‘자연적 사고’는 특별한 신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늘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그 ‘출처와 중심’이 아직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세상과 자기 자신’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내가 보통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 중,아직 신앙과 사랑으로 깊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먼저 ‘자연적 애정’부터 보겠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욕구,감정,끌림’입니다. 예를 들어, 편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손해 보기 싫은 마음, 가족을 아끼는 마음, 내 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서운하거나 기쁜 감정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자연적 애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다/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출발하느냐’입니다. 자연적 애정은 기본적으로 ‘나 중심’, ‘내 삶 중심’, ‘세상 속에서의 나’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처럼 보여도 아직은 주님과의 결합 안에 들어온 상태는 아닙니다.
이제 ‘자연적 사고’를 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생각들입니다. 예를 들어, ‘이게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풀릴까’,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같은 판단들입니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경험, 기억, 상식, 논리도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이것도 역시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세상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형성된 생각’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래서AC.58에서 말하는 구조를 연결하면 이렇게 됩니다. ‘들짐승’은 이런 자연적 애정들, 즉 감정과 욕구 쪽을 가리키고, ‘공중의 새’는 자연적 사고들, 즉 생각과 지식 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져서 ‘자연적 인간’이 됩니다. 다시 말해, ‘느끼고 생각하는’, 즉 ‘애정과 사고’, 이 두 층위가 아직 주님과 깊이 결합되지 않은 상태가 자연적 인간입니다.
이걸 더 와닿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내가 화가 납니다. 이건 자연적 애정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 왜 저러지?’, ‘내가 이렇게 대응해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자연적 사고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움직이며 내가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게 바로 ‘들짐승과 새가 함께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상태 자체는 출발점이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될 때입니다. 자연적 애정만 따라가면 욕심, 경쟁, 비교, 집착으로 흐르기 쉽고, 자연적 사고만 따르면 자기중심적 계산과 판단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 ‘채소’와 ‘풀’, 즉 진리를 주셔서 이 상태를 조금씩 바꾸어 가십니다.
그래서 변화는 이렇게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자연적 애정대로 살던 사람이, ‘이건 옳지 않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적 사고도 점점 ‘내 기준’이 아니라 ‘진리 기준’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 감정과 생각이라도, 그 방향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핵심을 한 번 더 또렷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적 애정’은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과 욕구이고, ‘자연적 사고’는 내가 일상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판단입니다. 다만 그것들이 아직 주님과의 결합 안에 들어오기 전, 즉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일 때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자연적 애정과 자연적 사고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그대로의 것이지만,아직 주님이 아니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이 구절은AC.58의 문맥에서 ‘주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수준의 것들에 맞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그것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익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104:14의‘가축을 위한 풀’과‘사람을 위한 채소’는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애정과 이성적 이해에 각각 맞게 주어지는 선과 진리의 양식을 의미하며,그 목적은 결국 삶의 실제 양식인‘떡’,곧‘선한 삶’을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가축을 위한 풀’입니다. 성경에서 ‘가축’은 길들여진 애정, 곧 비교적 온순하고 질서 안에 들어온 자연적 욕망이나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풀’은 앞에서 보신 것처럼 ‘처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선과 진리’, 곧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가축을 위한 풀’은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애정들이 유지되고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아직 깊은 이해나 높은 사랑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사람이 최소한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기초 양식입니다.
이제 ‘사람을 위한 채소’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이해와 이성을 사용하는 존재’, 곧 더 높은 수준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채소’는 ‘씨 맺는 것’, 곧 계속해서 다음 것을 낳는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위한 채소’는 단순한 기초를 넘어서, 사람이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 확장하고 깊게 만들어 가는 양식을 뜻합니다. 즉, 생각하고 분별하며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풀’은 유지와 기초에 가깝고, ‘채소’는 성장과 확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 안의 상태에 따라 각각에 맞는 양식을 주십니다. 아직 자연적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는 ‘풀’이 필요하고, 더 이해가 열려 있는 사람에게는 ‘채소’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열이 아니라 ‘단계와 용도의 차이’입니다.
이제 마지막이 핵심입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여기서 ‘먹을 것’, 곧 ‘떡’은 언제나 ‘선한 삶’, ‘실제로 살아내는 선’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의 삶 전체, 특히 외적 삶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께서 다양한 형태의 진리와 선을 공급하시는 이유는,결국 그것이 사람의 실제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제AC.58의 흐름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앞에서 ‘채소’와 ‘나무’, ‘열매’가 나왔듯이, 여기서는 그 공급의 구조가 설명됩니다. 즉, 주님은 사람 안의 각 수준에 맞게 ‘풀’과 ‘채소’를 주시고, 그것이 점점 자라 결국 ‘먹을 것’, 곧 선한 삶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 깊은 신앙 이해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바르게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풀’이 주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에게는 ‘채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실제로 어떻게 사느냐’로 이어져야 합니다. 즉, 말과 생각을 넘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의 공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선과 진리를 주시고,그것을 통해 결국 선한 삶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시104:14는 주님께서 사람 안의 각 수준에 맞게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그것을 통해 결국 실제 삶에서 떡,곧 선한 열매가 맺히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창1:30)
AC.58
같은 사람의 자연적 음식이 여기서 설명됩니다. 그의 자연적인 것은 ‘땅의 모든 짐승’(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모든 새’(fowl of the heavens)로 표상되며, 이들에게는 먹을 것으로 ‘모든 푸른 풀’이 주어집니다. 그의 자연적 음식과 영적 음식 둘 다 시편에 이렇게 묘사됩니다.The natural meat of the same man is here described. His natural is signified by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by the “fowl of the heavens,” to which there are given for food 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 Both his natural and his spiritual food are thus described in David: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시104:14)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Ps. 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은, 같은 시편의 11절과 12절에 언급된 ‘들짐승’과 ‘공중의 새’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where the term “beast” is used to express both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which are mentioned in verses 11 and 12 of the same psalm.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시104:11, 12)
해설
이 글은 AC.56, 57에서 다룬 ‘영적 인간의 음식’에 이어, ‘같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자연적 인간의 음식’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여러 인간이 따로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인간 안에 서로 다른 단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로 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자연적 음식은 ‘다른 사람의 음식’이 아니라, ‘같은 사람 안에서 가장 바깥 단계를 유지하는 양식’입니다.
자연적인 것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로 표상됩니다. 이는 앞서 반복해서 설명된 상응 구조를 그대로 따릅니다. 들짐승은 감각과 욕구에 가까운 자연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는 자연적 사고와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이 두 영역이 자연적 인간을 구성하며, 이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채소’와 ‘푸른 풀’입니다. 즉 자연적 인간은 생명을 직접 낳는 열매나 씨를 먹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라난 외적 지식과 경험의 결과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연적 음식이 결코 ‘악한 음식’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채소와 풀은 주님이 직접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음식의 출처가 아니라, ‘그 음식이 어느 단계의 생명을 유지하느냐’입니다. 자연적 음식은 자연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적합하고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영적 생명이나 천적 생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구절이 시편 104편 14절입니다. 이 시편은 창조 질서 전체를 찬양하는 시로, 인간과 동물, 땅과 하늘이 각자에게 맞는 양식을 받는 질서를 노래합니다. 여기서 ‘가축을 위한 풀을 자라게 하시며’라는 말은, 자연적 애정들이 유지될 수 있도록 주님이 외적 세계를 공급하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라는 말은, 자연적 인간이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쓰임을 향한 질서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사람을 위한’(for the service of man)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은 목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 천적 생명을 섬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자연적 사고, 기억 지식, 경험, 기술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더 안쪽의 생명을 돕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채소는 ‘사람의 쓰임을 위하여’ 자랍니다.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라는 표현은, 인간이 외적 세계에서 얻는 모든 자연적 자원이 결국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자연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산다고 느끼는 착각을 교정하는 표현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가장 쉽게 ‘내가 내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산다’고 느끼는 단계이기 때문에, 시편은 그 지점에서조차 주님의 섭리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굳이 짚어 줍니다. 이는 성경의 언어가 얼마나 ‘포괄적 상응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짐승과 새가 다르지만, 상응적으로는 모두 자연적 생명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같은 사람 안에서 영적 음식과 자연적 음식은 동시에 존재하며, 둘 다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각각은 ‘자기 단계의 생명만을 유지’합니다. 거듭남이란 자연적 음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음식이 더 높은 음식들을 섬기도록 ‘질서가 바로잡히는 과정’입니다.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고,‘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입니다.’라는 이 도입 문장이 이해가 안 됩니다.차근차근 설명 좀 해주세요.
이 문장은 처음 보면 낯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채소’와 ‘나무’를 그냥 식물로 읽는데,AC에서는 이것들을 ‘사람 안에 자라는 영적인 것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씨 맺는 채소’는 아직 자라 가는 단계의 진리, 곧 사람 안에서 계속 퍼지고 다음 것을 낳는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더 깊어져 삶이 되고, 실제 선한 행위와 성품으로 나타난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앞의 것은 주로 ‘진리’ 쪽에, 뒤의 것은 ‘선’ 쪽에 더 가깝습니다.
먼저 ‘씨 맺는 채소’부터 보겠습니다. 씨는 ‘무엇인가를 다시 낳는 것’입니다. 성경의 상응에서 씨는 매우 자주 ‘진리’, 또는 더 정확히는 ‘사람 안에 심겨져 다음 단계를 낳는 진리’를 뜻합니다. 왜 진리가 씨이냐 하면, 진리는 사람 안에 들어오면 거기서 생각을 낳고, 분별을 낳고, 선택을 낳고, 더 나아가 삶의 변화를 낳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직해야 한다’라는 진리를 배웁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냥 한 문장, 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붙들고 살기 시작하면, 거기서 ‘그럼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작은 거짓도 피해야 하나?’, ‘정직은 말뿐 아니라 태도에도 해당하나?’ 같은 더 많은 생각과 적용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진리가 또 다른 진리들을 낳습니다. 이 점에서 진리는 ‘씨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맺는 채소’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계속 자라고 퍼지고 다음 것을 낳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채소’일까요? 채소나 풀은 보통 땅에서 비교적 빨리 돋고, 넓게 퍼지고, 먼저 눈에 띄는 생장입니다.AC의 흐름에서 이것은 ‘진리가 먼저 밖으로 드러나는 상태’와 잘 맞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대개 처음에는 ‘진리를 아는 것’, ‘옳고 그름을 배우는 것’,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 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처음부터 큰 나무처럼 확고한 선을 가진 상태로 시작하지 않고, 먼저 채소나 풀처럼 ‘진리의 싹’이 많이 돋는 상태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씨 맺는 채소’는 ‘아직 성장 중이지만 이미 생명력이 있고,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낳는 진리’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제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는 말을 풀어보겠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진리는 진리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는 반드시 어디론가 갑니다. 그것은 사람을 더 바르게 살게 하고, 더 선하게 행하게 하고, 더 유익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쓰임’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를 안다고 해 보십시오. 그 진리가 참된 진리라면, 그것은 결국 말, 행동, 배려, 인내, 용서, 봉사 같은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아직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씨 맺는 채소’는 ‘계속 무언가를 낳는 진리’, 곧 ‘쓰임으로 나아가려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본래 열매를 향해 자라는 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입니다’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채소보다 더 안정되고, 더 깊이 뿌리내리고, 더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열매는 성경에서 거의 언제나 ‘삶에서 실제로 나타난 선’, 곧 행위와 성품의 결과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는 단순히 진리를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그 진리가 사람 안에 깊이 뿌리내려 실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다시 아까의 예를 들면, ‘정직해야 한다’라는 진리를 아는 것은 아직 씨나 채소 단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실제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 말과 판단과 행동에서 정직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그때는 ‘열매 맺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선’이라는 표현도 차근차근 보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진리를 아는 것이고, 선은 그 진리가 삶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은 ‘신앙에서 나온 선’, 다시 말해 ‘배우고 믿은 진리가 삶 속에서 실제 선으로 나타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냥 타고난 착함과는 다릅니다. 타고난 온순함이나 성격 좋은 것과도 다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에 따라 살면서 형성된 선, 곧 ‘진리에서 태어난 선’이 바로 신앙의 선입니다. 그래서 ‘열매 맺는 나무’는 ‘진리가 선이 된 상태’, ‘아는 것이 사는 것이 된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둘의 관계를 아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씨 맺는 채소’는 ‘알고 배우며 자라 가는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삶이 되어 실제 선을 낳는 상태’입니다. 전자는 과정 쪽, 후자는 결과 쪽입니다. 전자는 아직 퍼지고 낳는 힘이 강조되고, 후자는 이미 맺고 먹이는 힘이 강조됩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이어집니다. 채소가 나무보다 하찮다는 뜻도 아니고, 나무만 중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먼저 자라고, 그다음 그 진리가 선으로 굳어져 열매를 맺는다는 영적 성장의 순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걸 실제 신앙생활에 붙이면 더 와닿습니다. 처음 말씀을 배울 때는 머릿속에 진리가 많이 들어옵니다. ‘기도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교만하면 안 된다’, ‘남을 섬겨야 한다’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중 어떤 것들은 실제 삶이 됩니다. 정말로 기도하는 사람, 정말로 용서하는 사람, 정말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입 문장은 ‘진리는 자라서 선이 되어야 한다. 아는 것은 결국 살아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한 문장으로 다시 줄이면 이렇습니다. ‘씨 맺는 채소’는 사람 안에서 계속 퍼지고, 다음 것을 낳으며, 쓰임을 향해 자라는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깊이 뿌리내려 실제 선한 삶과 행위로 나타난 상태입니다.
1여호와는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 2)My shepherd,I shall not want;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Ps. 23:1–2).
이 구절은AC.57의 문맥에서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흐름 안에 있을 때,사람 안에 어떤 평안과 충만이 형성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23:1-2의‘푸른 풀밭’과‘쉴 만한 물가’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사랑과 말씀의 공급 속에서,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안정되고 만족을 얻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먼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다. ‘목자’는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인도하고 먹이며 돌보는 분’, 곧 주님께서 직접 사람의 삶을 이끄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니라, ‘내면에서 더 이상 결핍을 느끼지 않는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충분히 공급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제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입니다. 여기서 ‘풀밭’은 앞서 보신 것처럼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상태’, 곧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생명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누이신다’는 것은 단순히 쉰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안정을 얻는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가 형성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불안하게 떠돌지 않고, 그 상태 안에서 평안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풀밭’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누이신다’, 곧 주님께서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 평안은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 속에서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이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입니다. ‘물’은 언제나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쉴 만한 물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진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진리가 더 이상 혼란이나 긴장을 주지 않고,오히려 안정을 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진리가 사람을 괴롭히거나 갈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밝히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두 표현은 함께 읽혀야 합니다. ‘풀밭’은 선과 진리가 결합된 상태에서 오는 ‘의지의 평안’, ‘물가’는 진리가 바로 이해되어 오는 ‘이해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즉, 의지와 이해가 모두 안정된 상태입니다.
이제AC.57과 연결하면 의미가 더 또렷해집니다. 앞에서 ‘강의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끊이지 않는 상태’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느껴지는 상태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음’, ‘풀밭에 누움’, ‘쉴 만한 물가’입니다. 즉, 생명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평안’으로 체험되는 단계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이전에는 무엇을 선택할 때마다 갈등하고, 옳은 것을 알아도 마음이 불편하고, 계속 흔들립니다. 그런데 점점 변화가 일어나면, 같은 진리를 따라 살아도 더 이상 억지나 긴장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함과 안정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생각도 맑아지고, 마음도 가라앉습니다. 바로 그 상태가 ‘풀밭에 누워 있는 상태’, ‘쉴 만한 물가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 자리 잡았을 때 나타나는 실제적인 내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즉, 더 이상 쫓기듯 사는 것이 아니라, ‘인도받는 삶’, ‘안식이 있는 삶’으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시23:1-2의‘푸른 풀밭’과‘쉴 만한 물가’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의지와 이해가 함께 안정되어,사람이 내적으로 부족함 없이 평안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