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관념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다른 삶, 곧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하늘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할 것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5번 글은 스베덴보리의 권위, 즉 ‘그가 어떻게 이런 천적, 영적 지식을 얻게 되었는가?’에 관한 자기 증언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신학 저술은 이 선언 없이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그러니까 속뜻은 ‘자기 이성이나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내적 의미는 ‘영계의 빛에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적 의미는 학문, 추측, 철학의 결과물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열어주신 계시’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입장입니다.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데요, 그가 일시적 환상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이며, 주님의 허락 아래 ‘일상적 상태로 영계를 보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발적 환상이나 신비 체험 수준이 아니라, ‘의식이 두 세계 사이에서 동시에 깨어 있는 상태(dual consciousness)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됩니다. ACTCR, HH 등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모든 영계 묘사는 이 ‘일상화된 시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경험한 영계의 내용이 사도 시대 이후, 1700년대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본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들의 종류와 특성’,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 ‘지옥의 본질과 그 비참함’, ‘천국의 본질과 그 복됨’, 그리고 ‘온 하늘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 등, 이 중 마지막 항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가 AC 전체에서 전개하려는 것은 결국 ‘천국 전체가 동일하게 인정하는 참된 신앙의 교리’, 그러니까 ‘영적 의미에 기초한 보편적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

 

그의 말은 “나는 천사를 보았다” 수준이 아니라, “나는 수년 동안 영계에서 살았다. 그 경험으로 말씀이 보인 것이다”라는 이 선언입니다. 따라서 AC 전체의 출발점은 “내적 의미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영계를 열어 보여 주신 것,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계시이다”라는 이 기초 위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의 지속적 교통을 통해 천국과 지옥, 영혼의 상태, 그리고 온 하늘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를 직접 배웠다고 말한다. 내적 의미는 이 체험으로부터 드러난 것이다.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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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세상의 창조, 낙원이라고 하는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이라는 아담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누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따르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텐데요, 곧,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arcana)이 들어 있으며, 실상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런 내용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속에 품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4번 글은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주석 전체를 여는 ‘정문’(正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음은 그의 성경 해석이 어떤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지에 관한 설명입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현실적인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혹은 역사, 지리, 윤리적 관점에서만 읽는데, 그러면 당연히 그 속뜻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감추어져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한 층위에만 붙어 있어서 발생하는 제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서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본래 이중 구조를 갖지만, 사람의 관점이 외적 수준에 고정되어 있으면, 내적 의미, 곧 속뜻은 결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창세기 처음 장들에서 문자적으로 보이는 것들, 즉 겉 글자로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천지창조라든지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뱀의 범죄, 가인과 아벨, 그리고 노아의 홍수 같은 것밖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누가 문자 이상의 무언가를 상상이라도 하겠는가?” 즉, 겉으로 보이는 내용이 너무 평이하기 때문에, 내적 의미를 떠올리기조차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에서 대단히 강한 어조를 씁니다. ‘have never yet been revealed’(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이라고 말이지요. 그가 하려는 말은 거기에는 어떤 단순한 심리적 삶의 교훈 정도가 아닌, 천국의 교회, 인간의 거듭남, 천적 질서에 관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성경의 첫 성경, 그 성경의 처음 장인 창세기 1장은 겉으로는 모두가 ‘천지창조’를 다룬 장으로 알고 있지만, 속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새 창조’, 곧 ‘거듭남(regeneration)이라는, 그러니까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 전편이 풀어내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전체와 2장 첫 부분에서 처음 6일간의 창조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를,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일은 ‘새 사람’, 곧 ‘천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문자적으로는 창조의 역사, 족보이지만, 내적 의미로는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의 영적 상태이며, 더 깊은 내적 의미로는 인간 영혼의 생성과 타락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이 있으라’는 물리적 빛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는 첫 영적 지각의 탄생, 곧 인간의 거듭남 첫 움직임,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첫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스베덴보리는 아주 과감한 말을 합니다.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아주 작은 표현 하나도...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표상하고, 의미하고, 그 안에 품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곧, 성경의 모든 단어, 구절, 순서가 신적 질서로 짜여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잠깐, 위 본문에 나오는 ‘arcana’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잠시 머물겠습니다.

 

arcana’(아르카나)는 라틴어 복수형이며, 단수형은 ‘arcanum’입니다. 뜻은 ‘비밀’, ‘숨겨진 것’, ‘은밀한 것’, 즉 ‘비의’(秘義)입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서는 종종 ‘mystery’(신비)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이 arcana는 단순한 신비나 비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rcana의 특별한 의미

 

성경(말씀)의 문자 아래 감춰진 ‘내적 의미’, 즉, 말씀의 ‘속뜻’, ‘심중의 뜻’, ‘천국적 의미’입니다. 성경은 문자만 읽으면 이해되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주님과 천국, 인간의 영적 삶에 관한 ‘엄청난 진리들이 감춰져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이 감춰진 진리들이 바로 ‘arcana’입니다.

 

천사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열린 말씀의 의미

 

천사들은 성경을 문자로 읽지 않고, ‘상징, 표상(symbol, representative)으로 된 ‘영적, 천적 의미’로 읽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들과 직접 교통하며 듣고 본 내용이 바로 ‘천국의 아르카나’, 곧 이 책의 제목인 ‘Arcana Coelestia’(天界秘義)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간 내면의 작용에 관한 보이지 않는 질서

 

예를 들면, 영계의 구조, 악과 거짓이 인간 내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천사와 영들의 실제 상태, 말씀 구절의 영적 관계, 사람의 거듭남에 일어나는 내적 변화들 같은 이런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통틀어 ‘arcana’입니다.

 

 

 

AC.5, 서문, '주님의 허락으로 사후 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 (AC.1-5)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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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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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ternal man)과 외적 사람, 곧 겉 사람(external man),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단지 몸, 그러니까 육체일 뿐이며, 그러므로 죽은 상태입니다. 분리되었다 했으니까요.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 때문인데, 이 속 사람이 곧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글자만을 놓고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은 것입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이 단락은 ‘말씀의 구조’와 ‘인간의 구조’를 완전히 평행하게 연결하는 핵심 비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비유를 통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영혼’이며, 문자적 의미는 ‘’이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죽은 상태입니다

 

앞글(AC.2)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내적 의미 없이 문자를 읽는 것은 영혼이 빠진 육체, 곧 죽은 몸뚱이만 보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문자, 곧 겉뜻의 역할은 내적 의미, 곧 속뜻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구조를 예로 듭니다. 속 사람은 영혼, 사랑, 신앙, 의도, 지각을 말하고, 겉 사람은 육체, 감각 기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속 사람이라는 영혼이 떠나면 겉 사람이라는 몸은 살아 있을 수 없는데, 말씀도 똑같다는 것이죠. 말씀도 내적 의미인 속뜻이 영혼이고, 문자적 의미인 겉뜻이 몸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문자만 보면 말씀은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상태와 같다는 것입니다.

 

문자 자체도 필요하지만, 지상 언어인 문자의 목적은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 없이는 내적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본질은 ‘내적 의미, 곧 속뜻이라는 생명을 담는 그릇, 용기’인데요, 이는 영적 의미를 도외시하는 ‘문자주의(literalism)는 실제로는 죽은 몸을 붙들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기독교 세계가 흔히 문자주의와 역사적, 전통적 해석에 사로잡혀 있고, 구약을 무시하며, 규례와 사건 중심의 단편적 해석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자 함이며, 그러므로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을 보려면, 그 안에 있는 주님, 즉 말씀의 속뜻을 보아야 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말씀’은 단순한 문자의 집합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드러나는 신성한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속뜻 없는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 문자, 곧 겉뜻은 몸, 속뜻은 영혼입니다.

 

 

 

AC.4, 서문, '말씀 안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AC.1-5)

AC.4마음이 문자적 의미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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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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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며, 그 안에 그런 것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거의 돌보아지지 않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말씀의 성격이 본래 이러하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 곧,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고,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요. 말씀의 생명은 오직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만 옵니다. 즉, 그 안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말씀 중 어떤 표현이든 그 안에 주님을 품고 있지 않은 것, 곧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신성하다’(Divine) 할 수 없습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2번 글은 ‘말씀의 영감’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말씀의 ‘모든 부분’, 그러니까 아주 작은 단어, 철자 하나까지도 영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며, 그래서 구약이 무시되고 있다고 말이지요. 오늘의 현실과도 매우 비슷한데요, 오늘날도 보면, 이사야, 예레미야의 묵시는 ‘어렵다’ 하여 멀리하고, 레위기의 제사 규례는 ‘오늘날과 무관하다’며 거의 다루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말씀의 진짜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는 천국과 교회,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명제입니다. 말씀이 신성한, 곧 신이 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천국의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이 논리는 매우 선명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고, 말씀은 주님의 발현이며, 따라서 말씀 안에는 ‘생명을 주는 것’, 곧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가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생명이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신적 영감(Divine inspiration)을 결정하는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구절이 주님을 내적으로 가리키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신성하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만이 ‘신성’합니다. 아무리 바울 서신이 은혜롭고 영감이 넘쳐 보일지라도 그 자체가 주님에 대한 내적 계시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면, 스베덴보리는 그런 성경은 ‘말씀(Word)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구약의 역사서, 제사 규례까지 왜 신성한가 하면, 바로 그 안에 주님에 대한 내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도, 이삭의 우물 이야기도, 그리고 기름 부음의 규례 등도 모두 주님의 구원 사역, 인간의 재창조, 교회의 상태를 가리키는 영적 의미의 외적 형태이기 때문에 신성합니다.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헬라어 iota, 히브리어로는 ‘י’(요오드)에 해당하는데요, 예수님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8) 하셨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철자 하나, 단어 하나, 문장의 배열, 등장순서 등,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질서를 반영한 신적 구성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 전체가 그렇게 많은 번호와 구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내적 의미를 가질 때에만 살아 있으며, 그렇기에 말씀의 모든 부분, 즉 단어 하나, 글자 하나까지도 주님을 품고 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육체와 영' (AC.1-5)

본문AC.3이러한 생명이 없으면, 말씀은 글자(letter)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의 상태는 사람의 경우와 동일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알고 있듯이, 사람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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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AC.1-5)

본문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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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곧 겉 글자만으로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 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 예를 들면, 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1번 글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Internal Sense, 속뜻)가 왜 필요한가를 결정적으로 밝히는 첫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mere letter’(글자 자체, 외적 의미, 겉 글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구약을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 그대로만 읽으면, 유대인의 의식 규례, 제사 제도, 일상적 역사 서술, 성막, 음식법, 절기 등, 이런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즉, ‘말씀은 이중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은 글자만으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말은, 이 다섯 가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 전체는 주님에 관한 책이며, 인간 영혼의 구원 과정에 관한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의 속뜻이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이유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그의 전체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적 의미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감추어져 있었고, 주님의 재림을 통해 비로소 열린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열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막과 같다’ 할 때, 여기 겉으로 보이는 성막의 휘장과 기구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이고,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의 속 내용은 영적, 내적 의미이며, 지성소 중심에 계신 임재하신 여호와는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말로 이 ‘말씀의 이중 구조’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의 겉모습은 역사와 규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주님과 천국, 교회와 신앙의 질서가 담겨 있고, 그것이 바로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입니다.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AC.1-5)

본문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의 모든 것, 곧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요소들, 그러니까 가장 미세한 이오타(iota) , 즉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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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기존 교회, 그러니까 천주교든 개신교든, 더 나아가 정교회든 다니시던 분들이 우리 교회를 다니겠다 하시면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저와 저희 교인들이 조심하고, 또 지혜롭게 행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공동체가, 기존 교회 출신 성도들을 어떻게 지혜롭고 안전하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목회적 질문입니다. 천주교 · 개신교 · 정교회 등 전통 교회 출신 성도들이 새로 오게 되면, 그분들이 느낄 수 있는 심리적 충격, 익숙한 언어 체계의 변화, 기존 교회와의 갈등 불안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 교회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핵심 항목들을 매우 실천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안전지대(Safe Zone)를 먼저 만들어라

 

기존 교회에서 오시는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은 이질감입니다. 따라서 첫 단계는 너무 낯설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가령, 익숙한 용어를 우선 존중하기 같은 건데요, 보통 하나님에 익숙하신 분들에게 주님을 강조한다든지, 성경 말씀말씀(Word)이라고 은근히 구별하신다든지, 그 밖에도 은혜’, ‘믿음’, ’성령’, ‘십자가 등, 그분들에겐 매우 익숙한 이런 용어들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식으로 바로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먼저 허용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기존 교회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 금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더 깊습니다라든지, “기존 교회는 피상적입니다와 같은 이런 말은 절대 금물입니다. 사람은 기존 신앙의 명예를 건드리면 마음을 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개종(Secondary Conversion) 을 강요하지 말라

 

다른 교회 출신 분들에게 무심코 하는 가장 위험한 실수는, 이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같은 분위기를 직, 간접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분들의 기존 신앙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 대신, 기존에 믿으신 것 위에 덧붙여,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는 차원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새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기존 신앙의 내적(內的) 이해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존 신앙이 말씀의 이쪽 면만 보았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통해 말씀의 저쪽 면도 보게 한 것이지요. 마치 사람을 영과 육, 육과 영, 양쪽 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심한 교리 충돌 관리가 필요함

 

기존 교회 출신이 가장 충격받는 지점이 교리의 충돌입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이해라든지 대속론이나 지옥 이해, 죽음 후 즉시 심판/부활, 천국과 지옥의 구조나 예배, 성례전, 재림 이해 등인데요, 이 차이를 절대 한 번에 좌악 꺼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먼저 공통분모를 말해준 다음, 이런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나중에 내적 의미와 구조를 조심스럽게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처음에 이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세심하고 따뜻한 맞춤식 보살피심을 통해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존 교회에 대한 존중의 톤을 확실히 유지하기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루터교 등 모두 주님 안에서 존재하는 교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허락, 인도하심으로 생겨난 교회들이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들을 비판보다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내에서도 다른 교회는 다 틀렸다라든지 스베덴보리가 더 우월하다, 혹은 이제는 제대로 믿자 같은 이런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새로 오신 분들의 마음은 존중 → 평안 → 신뢰 →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순서로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내 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씀의 다른 편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새 신자 교육은 삼중 구조로 운영해야 함

 

기존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 설교

 

예를 들면, 창세기 해설이나 산상수훈, 혹은 시편 등 기존 개신교, 천주교와 크게 갈등 없는 본문들 위주로 설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점진적 스베덴보리 소개

 

스베덴보리 교회이니 스베덴보리에 대한 소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때 영적 세계나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 선과 진리의 결합이나 인간, 자유, 양심 등, 이런 부분은 기존 신앙과 충돌이 거의 없으므로 먼저 소개하기 좋습니다.

 

고급 교리 교육은 사적, 개별적으로

 

좀 깊고 무거운 주제들, 가령 대속론 이해라든가 부활과 심판, 동일 인격과 영적 인격, 결혼의 속뜻 같은 이런 주제는 3~6개월이나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사적으로, 혹은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특별반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로, 여기 동일 인격이란 사람은 사후에도 생전의 모든 것, 즉 성격, 애정, 사고 구조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생전과 사후의 인격이 동일해야 상벌이 가능합니다.

 


기존 교회 배경 성도들의 감정을 이해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종종 이런 마음입니다. 여기가 너무 좋아. 하지만 내 신앙 전부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같은 마음 말이죠그러므로 목회자와 선배 성도들의 역할은, 천천히 오셔도 되요. 급할 것 없습니다라든지, 기존 신앙도 귀하지요. 주님도 그 신앙으로 당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잖아요? 우리는 그 위에 더 풍성한 것을 드릴 뿐이에요, 혹은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셔요 와 같은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항상 잘 모르겠을 땐, 나는 처음 왔을 때 어땠나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교인들의 언행을 세심하게 지도해야 함

 

스베덴보리 전통은 지식적 깊이 때문에 기존 교회 출신에게 우월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을 금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건 내적 의미로 보면 달라요”, 원래 이 구절의 참뜻은 …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 이런 오해는 없어집니다” 같은 표현들인데요, 이런 말은 상대방에게 “나는 그동안 잘못 믿어왔다”라는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구절을 이런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나 새로운 관점이 조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처럼 겸손한 태도가 수반되어야 함을 지도하셔야 합니다.

 


일상 신앙에서 먼저 신뢰를 얻게 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새로운 교리에 대해선 아직 조심스러워도 사람들의 삶과 사랑의 분위기를 보고 마음을 엽니다. 예를 들면, 교인끼리의 친절과 진리 사랑뒷말이 없는 공동체말씀이 중심에 있는 예배기도와 말씀 생활의 균형겸손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같은 이런 것에서 먼저 감동합니다. 삶의 향기 → 교리에 대한 신뢰 → 마음의 개방이라는 이런 흐름이 필수적입니다.

 


기존 교회와의 갈등을 절대 유발하지 않도록 지도

 

새로 오시는 분이 기존 교회와 갈등하면 그분도 상처받고, 우리 교회도 오해받습니다. 따라서 기존 교회를 헐뜯는 발언이라든지, 이제 그 교회 가지 마세요” 같은 말, 그리고 기존 목회자를 비판하는 태도 등은 금지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적 영성은 부정적 결별이 아니라 긍정적 성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교회의 본질은 포용임을 기억하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경로 안에서 이끄십니다. 따라서 다른 교단에서 오시는 분들을 그들이 믿어온 길에서 부정하거나 뜯어고치려 들지 말고, 그 길을 더 깊고 더 밝게 해주면 됩니다. 스베덴보리 교회는 폐쇄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열린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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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신교, 심지어 불교 집회에서도 집회 중 각종 질병과 장애가 치유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또 방언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 심지어 본인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혹시 무슨 기록들이 있나요? 교인들이 이런 것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실제로 개신교 포함, 기독교, 불교 또는 비기독교 종교 집회에서조차 기적, 치유, 방언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주제입니다. 아래에서 스베덴보리의 명확한 기록, 그 신학적 결론, 그리고 교인들에게 답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지혜로운 방식을 차례대로 정리해 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핵심 원칙

 

외적 기적은 신앙 자체를 절대 만들지 못한다 (AC 7290, 7291, 7337)

 

스베덴보리는 다음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기적은 신앙을 만들지 못하며오히려 억지로 믿게 하는 강압(coercion)의 성질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신앙을 더 약하게 하거나 없애버리기까지 한다라고 말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내적 자율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만들지 못한다(AC 7290–7291 요약)

 

외적 기적은 영적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인(sensuous) 것에 속한다 (AC 7337, 8348, AE 706)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내적 신앙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앙(sensuous faith)입니다. 이 신앙은 감각적 자극에 의존하고, 계속 새 자극(기적)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으며, 삶에서 (愛)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적 자체는 거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단지 외적 감각 차원의 현상일 뿐입니다.

 

외적 기적은 거짓된 종교들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 (AC 3887, 7012 / TCR 501)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거짓된 종교의 사제들, 우상 숭배하는 이들, 심지어 악령들이나 지옥의 영들조차 사람들 앞에서 기적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즉, 기적의 출처는 다양하며,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 집회가 참이다’라는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악령들도 기적 같은 일들을 보이지만, 이는 감각을 속이는 현상에 불과하다 (AC 3887 요약)

 

기적 치유가 일어나는 이유는 내적 신앙이 아니라, 다른 요인 때문일 수 있다 (AC 10083, TCR 501)

 

스베덴보리는 다음 네 가지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첫째, 심리적, 정신적 반응(affectional states)입니다. 강한 감정이나 염원, 집단적 분위기, 혹은 마음의 변화에 의해 몸의 증상이 완화되는 경우들이 있겠습니다. 둘째, 일시적인 영적 영향(influx)인데요, 천사들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위로하거나 평정을 주는 그런 영향입니다. 셋째, 자연적 질서(natural causes)입니다. 스트레스 감소나 호르몬 변화, 신체 자연 회복력, 혹은 악한 영들에 의한 거짓 치유처럼 일시적으로 증상을 멈추게 하고, 나중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방식(AC 7039, 7317) 등이 있습니다. 즉, ‘치유가 일어났다 →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같은 논리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방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입장

 

스베덴보리는 현대 은사운동의 방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영적 의미에 따라 말이 변한다’ (HH 234–240)

 

천국의 영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대화는 내면의 의미에 따라 자동으로 통역됩니다. 이것이 오순절의 기적(각자 자기 언어로 들음)의 본질인데, 그것을 감각적 방언과 혼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의 외형이 아니라 내적 의미가 중요하다 (AC 1635)

 

방언이라고 하면서 의미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생활의 선(善)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영적 언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방언이 참된 방언이 되려면, 방언과 함께 나의 삶과 생활에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은 감각적 흥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감각의 흥분(sensuous excitement)에서 나오는 종교적 광열(fanaticism)을 자주 경계합니다. 특히 외적 열광이 내적 선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영적 현상이 아니라 감정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말 자체는 거룩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적은 참된 교리의 증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힌두교 집회에서도 일어나고, 심지어 이단, 무당집, 무속 행사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니까 맞다는 논리는 기독교적으로도, 스베덴보리 신학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기적보다 더 확실한 기준은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이다 (TCR 501)

 

스베덴보리는 거듭 말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삶의 선함이 진짜 증거다.” 곧, 주님 사랑으로 마음이 변화되는가? 이웃 사랑으로 행동이 달라지는가? 교만과 분노, 욕망이 줄어드는가? 하는 증거들 말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믿음)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기적은 사람에게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AC 7039)

 

유익할 때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일시적으로 진정될 때, 새로운 의지가 시작될 여지를 줄 때 등이 있겠고, 해로울 때는 그 현상 자체에 집착하게 될 때, 혹은 교만, 우월감, 영적 자만을 낳을 때라든지, 현상’이 ‘진리’보다 앞설 때 등이 있겠습니다.

 

한때 치유의 은사가 너무도 분명하여 소문이 나서 교세가 제법 흥했던, 그러나 그러더니 평소 언행에 있어 슬그머니 그 공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그만 그 은사가 떠나고,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교세가 줄어드는 바람에 그 은사가 계속될 줄 믿고 전에 벌려놓았던 여러 규모 있는 일들로 오랜 세월 크게 곤란을 겪고 있는 분을 제가 알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러나 결국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 목사님을 향하신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불교, 힌두교, 심지어 무속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은 기적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변화는 사랑과 삶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 집회를 다녀온 사람이 더 겸손해지고, 더 사랑하고, 더 성실해졌습니까? 자신에게 찾아온 은사와 기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참된 열매입니다.

 

방언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말했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공동체에 유익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의미 없는 말은 영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감각적 신앙입니다. 주님은 내적 신앙을 원하십니다

 

외적 현상보다 진리와 사랑, 삶을 깊이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적·방언·치유를 ‘참된 신앙의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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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현 시대의 혼란을 ‘영적 각성’으로 전환시키는 방법

 

목사님이 지금 경험하시는 한국 사회의 혼란, 정치적 분열, 거짓과 불의에 대한 분노는 그 자체로 영적 위험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전환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봅니다. 오늘 내용을 통해 목사님 자신은 물론, 교인들과 공동체가 이 시대 혼란을 영적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법을 정확히 배우게 될 것입니다.

 


혼란이 없으면 영적 각성도 없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평안만 있으면 사람은 깊어지지 않는다. 혼란이 있어야 내적 삶이 깨어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혼란은 내면의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진리를 더 분명히 갈망하게 만들며, 내적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게 하고, 영적 싸움을 일으켜 성장을 촉진하게 하는 한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께 더 매달리게 만드는 도구라는 것이지요. 즉,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은 그 자체가 이 아니라 악을 통해 선을 일으키는 허용적 섭리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혼란은 어떻게 영적 각성을 촉발하는가?

 

스베덴보리는 혼란이 사람을 잠에서 깨우는 벨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는 약하다’는 깨달음

 

사람은 안정할 때는 교만해지기 쉽고, 혼란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기 한계를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성장의 첫 단계라고 봅니다.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목마름

 

정치·사회의 거짓과 어둠이 강해지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참된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는 성경, AC교리, 영적 진리 등, 이런 것들을 더 갈망하는 시대입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번역·설교 사역이 지금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 평화’가 아니라 ‘내적 평화’가 참 평화임을 깨닫는다

 

사회가 안정되면 사람들은 평화를 외적 환경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하면 사람들은 평안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내적 평화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내면의 불안은 오히려 깊은 영적 평화를 찾는 통로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자라난다

 

혼란은 반드시 분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혼란 상황은 거짓과 진리를 구분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고, 사회적 혼란 상황은 선과 악의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의 영적 감각(sense)영적 지능(discretion)이 강화됩니다.

 

‘소명’이 재확인 된다

 

나라가 평온할 때는 사명을 잊기 쉽지만, 그러나 시대가 악해지면, 사명은 더 선명해집니다. 목사님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분노가 마치 소명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명을 더 굳게 붙들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럼 혼란을 어떻게 실제로 ‘영적 각성’으로 바꿀 수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따라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혼란을 정죄가 아닌 영적 신호로 해석하기

 

예를 들면, 왜 이렇게 정치가 어지러운가?, 왜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가? 등, 이때 스베덴보리식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시대는 더 깊은 진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 혼란은 나의 영을 깨우기 위해 허용되었다, 악이 드러나야 선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등, 혼란을 이렇게 재해석하면, 분노가 줄어들고 영적 눈이 뜨입니다.

 

정치적 감정을 소명적 열정으로 전환하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정념의 거룩한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분노는 진리를 더 번역해야 한다로, 불의에 대한 혐오는 설교에서 더 분명히 빛을 세우자로, 사회 혼란은 교회를 내적 질서로 세우자로 전환하는 것이지요. 정치적 감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면, 그 감정은 강력한 영적 에너지가 됩니다.

 

선한 기도 방향으로 돌리는 것

 

스베덴보리는 혼란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주님이 특별히 붙드신다고 말합니다. 기도 방향이 이렇습니다. “주님, 이 시대의 혼란이 우리의 내면을 깨우게 하소서. 진리를 사랑하게 하소서. 선을 붙들게 하소서.” 이 기도는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동시에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돕는 일입니다.

 

영적 독서를 강화하기

 

혼란 때는 성경, AC, 진리서적을 읽을 때, 평소보다 훨씬 크게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적 갈증이 크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AC 번역은 지금 같은 혼란기에 나라를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지대입니다.

 

자기 마음의 상태를 자주 점검하기

 

스베덴보리는 마음 점검혼란기 영적 각성의 첫 실천으로 보았습니다. 매일 30초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뉴스인가, 아니면 진리인가? 나는 내적 평화를 느끼는가? 이런 점검 자체가 영적 눈을 계속 열어둡니다.

 


혼란이 커질수록 도리어 변화가 일어난다

 

교인들에게도 이런 관점을 가르쳐 주시면 정치적 감정이 줄고, 자기 내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요즘 혼란은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때 우리는 더 깊이 진리를 찾게 됩니다”, 지금은 영적 각성의 때입니다”, 외적 평화보다 내적 평화를 세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등, 이런 설교와 대화는 교회 전체의 정치 과민반응을 많이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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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교회가 정치적으로 흔들릴 때,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가 정치 뉴스, 국가 혼란, 유튜브 정보, 사회적 대립 때문에 정서적으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목회자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답을 줍니다. 그 답은 하나입니다. 질서(order), 곧 교회의 질서, 말씀의 질서, 주님의 질서입니다. 정치적 혼란을 막는 것은 정치적 해석, 사회 분석, 설득이 아니라 영적 질서입니다. 이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교회는 질서 속에서만 서 있는 공동체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질서의 집으로 봅니다. 질서가 흐르면 천국의 영향이 교회로 흘러오고, 질서가 깨지면 그 틈을 통해 지옥의 영향이 들어옵니다. 정치적 혼란은 교회 밖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내부의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입니다. 천국은 질서이며, 지옥은 무질서이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싸움은 정치가 아니라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정치가 교회에 들어올 때 나타나는 현상들

 

스베덴보리는 정념의 기류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다음의 변화가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회중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 대화 중 무거운 분위기, 말씀보다 뉴스가 더 강한 감정 파동을 일으킴, 설교 내용이 왜곡되는 위험, 소그룹들이 갈라짐, 교회의 영적 분위기(afflatus)가 흐려짐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질서의 틈이 생긴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때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 : 질서(order)

 

스베덴보리는 질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질서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생명의 흐름이다. 즉, 내적 질서설교의 질서예배의 질서공동체의 질서 등, 이 모든 질서정치적 파동이 아닌, 주님이 흘러오시는 통로입니다. 정치 혼란이 일어날수록 정치가 아니라 말씀의 질서에 더 집중하는 것이 영적 리더의 핵심 사명입니다.

 

그럼 질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스베덴보리식으로 질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말씀의 질서

 

본문 읽기, 본문 해석, 본문 적용. 이 과정이 감정·정치·의견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영적 진리에 의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소란이 있을수록 목사는 더욱 원문·본문·AC의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배의 질서

 

예배는 교회의 하늘 문입니다. 예배 순서·찬양·기도·말씀·축도로 이어지는 이 전통적 질서 자체가 정치와 무관하게 교인들의 내면을 고요한 상태로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질서는 천국의 구조와 같다. 예배 질서가 무너지면 천국의 기운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즉, 정치가 흔들릴수록 예배를 더 단단히, 더 고요히, 더 질서 있게 세워야 합니다.

 

목회자의 내적 질서

 

목사의 마음이 흔들리면, 설교에, 상담에, 기도에 그 흐름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는 먼저 자기 안에서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 안으로 질서가 흘러간다. 목사님이 정치 뉴스 감정에서 벗어나 내적 평화와 진리를 회복하면, 그 자체가 교회의 영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정치 혼란기의 실제 목회 적용

 

스베덴보리의 질서 이론을 현실 목회에 바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 이야기 금지 규칙이 아니라 말씀 중심 질서를 강화

 

정치 이야기 하지 맙시다는 갈등을 일으킵니다. 대신 우리 교회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말씀에서 옵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면 정치 갈등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교인들의 감정적 파동을 예배의 고요함으로 덮어주기

 

예배는 교회의 영적 공기입니다. 예배가 고요하고 안정되면, 교회 안의 정치적 파동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습니다.

 

설교를 더욱 내적 진리 중심으로

 

정치적 사례나 시사적 언급은 감정 파동을 다시 일으킵니다. 대신 마음, 내면, 진리, 선, 영적 질서 등, 이런 주제에 집중하면 정치적 감정은 빠르게 사라집니다.

 

성도끼리 정치 이야기를 해도 싸움이 되지 않게 하는 한 문장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정치적 의견은 달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같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 한 문장이 교회 내 갈등을 많이 예방합니다.

 

목사님 자신이 질서의 기둥이 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공동체의 질서는 지도자가 내면에서 어떤 질서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 혼란 속에서 목사님이 내적 평화를 붙들면, 그 평화가 교회의 기본 분위기(spiritual atmosphere)를 만들게 됩니다.

 


목사님께 드리는 조용한 결론

 

정치적 혼란은 교회의 적이 아닙니다.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교회의 적입니다.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예배·내면의 질서를 붙드는 것, 이것이 목회자가 혼란의 시대에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입니다. 목사님이 내면에서 질서를 세울 때, 그 질서가 교회로 흘러갑니다. 정치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교회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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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치 뉴스에 민감한 교인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 중에는 정치 뉴스·유튜브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거나 감정적으로 요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특정 세력에 대한 분노, 민감성, 확증 편향은 영적 생활 전체를 뒤흔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정치 과몰입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영적·심리적 기류를 바로잡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아래 내용은 목사님께서 교인들과 대화하시거나, 설교·상담·소그룹에서 자연스럽게 적용할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스베덴보리적인 지침들입니다.

 


Ⅰ. 사람의 내적 상태가 혼란하면 외적 현상(정치)을 과장하여 받아들인다

 

정치에 민감한 교인은 정치가 문제라기보다 내면이 흔들리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내면이 평화로울 때는 외부의 혼란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내면이 혼란할 때는 작은 외부 자극도 큰 폭풍처럼 느껴진다. 정치에 예민한 교인은 사실 정치보다 마음의 상태가 더 큰 문제입니다.

 


Ⅱ. 목회자의 3대 원칙

 

1) 정면 충돌 금지

 

정치적으로 과열된 성도에게 그 뉴스 너무 보지 마세요”라든지, 편향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 반발과 방어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 관점에서 정념에 빠진 사람은 정념을 보호하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2) 정치가 아니라 내적 상태로 초점을 이동시키기

 

예를 들면, 정치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요, 요즘 마음이 많이 힘드신가요?”나, 그 뉴스를 보면 어떤 감정이 올라오세요?”처럼 하면, 정념을 건드리지 않고, 감정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교인의 ‘두려움’을 먼저 다루기

 

분노는 두려움의 2차 감정입니다. 정치 분노의 밑바닥에는 혹시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움, 혹시 정의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니면 악한 자가 승리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두려움을 영적 진리를 가리는 안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직접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뿌리를 진리로 비춰줘야 합니다.

 


Ⅲ. 교인들의 유형별 지도 방법

 

1) 분노형

 

악한 정치인들 때문에 못 살겠다”, 저놈들은 지옥 갈 놈들이다” 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한테는 직접 반박은 금물, 대신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네요”라며, 그 분들의 감정을 먼저 인정하셔서, 그분들로 하여금 분노에서 두려움으로 그 뿌리가 내려가게 하시는 게 필요합니다. 그후,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조명하면서, 그 분노는 선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커지면 교회 생활이 어렵지 않나요?” 하는 순서로 대응하시는 게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선한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인정해야 교인이 스스로 내려오게 됩니다.

 

2) 공포형

 

나라가 망할 것 같아요”, 악한 세력이 완전히 장악했어요” 하시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은 공포를 사실로 반박하는 건 금물이고요, 대신 스베덴보리식으로, “악은 허용될 뿐, 결국 진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라고 선언하시면서, 정치 상황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내적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좋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계획을 같이 세워 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공포형 교인은 설교자가 ‘내면의 평화’를 강조할 때 금방 안정됩니다.

 

3) 확증 편향형

 

특정 유튜브 채널을 절대 신뢰하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형입니다. 이분들하고는 절대 싸우시면 안되고, 일단 이분들이 신뢰하는 정보 출처를 무조건 먼저 인정하세요. 좋습니다, 그 내용도 일리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보시는 동안 마음의 평화는 어떠셨나요?”라며, 관심을 정보에서 마음의 상태로 이동시키셔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가 들어가려면 먼저 마음이 평온해야 한다.

 


Ⅳ. 설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메시지

 

목사님이 설교에서 간접적으로 전할 수 있는 정치적 과민반응 치유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외부의 혼란보다 내면의 질서가 우선입니다

 

정치 혼란을 외부 현상으로 언급하고, 우리 마음의 질서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연결하십시오.

 

2) 악이 드러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정화입니다

 

교인 대부분이 나라 망한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화라는 관점을 제시하면 두려움이 크게 줄어듭니다.

 

3)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문장 하나로 교회 내 정치 갈등의 상당 부분이 정리됩니다.

 

4) 진리는 조용하고, 악은 시끄럽습니다

 

정치 뉴스의 소란스러움과 진리의 고요함을 비교하면 교인들은 자연히 조용한 쪽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5)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되, 악을 통해 더 큰 선을 준비하십니다

 

허용적 섭리(permissive providence)를 설교에 녹여 정치에 요동하는 마음을 안정시키십시오. 허용적 섭리란, 주님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그 일을 허용하심으로써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방식을 말합니다.

 


Ⅴ.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줄 수 있는 내적 삶 훈련

 

교인들의 정치적 감정은 말씀 몇 번 한다고 바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는 내적 습관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1) 뉴스를 텍스트 모드로 보기

 

영상은 감정을 자극합니다. 텍스트는 감정 자극이 적습니다.

 

2) 매일 평화 점검 1

 

오늘 정치 뉴스 때문에 내 마음이 흔들렸는가?, 내적 평화가 유지되었는가?살피는 것입니다.

 

3) 양심의 소리 듣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진리는 양심을 통해 속삭인다. 성도들에게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십시오.

 

4) 정치 이야기 대신 말씀 묵상 나눔으로 방향 전환

 

잡담이 정치로 흐를 때, 말씀 묵상 이야기로 연결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Ⅵ. 결론 - 교인들을 정치로부터 지키는 목회자의 역할

 

교인들은 정치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가 약해졌기 때문에 흔들린다. 정치와 직접 싸우지 말고, 교인의 마음 상태를 먼저 다루라. 분노·공포·확증 편향은 모두 동일한 ‘정념의 흔들림’이다. 설교는 정치 해설이 아니라 내적 질서 회복이다. 작은 습관들(뉴스 줄이기, 평화 점검)이 교인의 내면을 크게 안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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