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4

말씀에서 잉태(conception)아들들을 낳는 것(birth of sons)은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잉태는 마음의 생각과 의도(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호세아서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in the Word, are taken in a spiritual sense—“conception” for the 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and “sons” for truths—is evident from Hosea: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9:11, 12) As for Ephraim, their glory shall fly away like a bird, from the birth, and from the womb, and from the conception; though they shall have brought up their sons, yet will I bereave them, that they be not man; yea, woe also to them when I depart from them (Hos. 9:11–12),

 

여기서 에브라임은 지성적인 사람, 곧 진리를 이해하는 이해력을 의미하며, ‘아들들은 진리들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어리석게 된 지성적인 사람, 곧 에브라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where “Ephraim” signifies the intelligent,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and “sons,” truths themselves. It is likewise said elsewhere concerning Ephraim, or one who is intelligent, who has become foolish: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3:13)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n unwise son, for 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 (Hos. 13:13).

 

또한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in Isaiah: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23:4, 5)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Isa. 23:4–5),

 

여기 시돈은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들을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 말미암아 파괴하여 영적으로 메마르게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where “Zidon” means those who have been in the knowledges of faith, but have destroyed them by memory-knowledges, and so have become barren.

 

[2] 다시 같은 예언서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아들들은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Again in the same prophet, treating of regeneration, and where likewise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by “sons”: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66:7-9)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Isa. 66:7–9).

 

천적 결혼(the heavenly marriage)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과 진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그것들을 아들들이라고 부르십니다. Goods and truths, being conceived and born of the heavenly marriage, are therefore called “sons” by the Lord in Matthew: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Matt. 13:37–38).

 

또한 주님께서는 구원하는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라고도 부르십니다 (8:39). 이는 앞에서 (AC.255) 말한 것처럼, ‘(seed)는 신앙을 의미하므로,에서 나온 아들들은 신앙의 선과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nd 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 he calls “sons of Abraham” (John 8:39); for “seed” (as stated n. 255) denotes faith, wherefore “sons,” which are of the “seed,” are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8:39)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친히 자체이시므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곧 교회의 신앙 자체를 의미합니다. Hence also the Lord, as being himself the “seed,”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faith of the churc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설명한 ‘잉태’와 ‘아들들’의 의미가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영적 언어임을 여러 본문을 통해 입증합니다. AC.261에서는 ‘잉태는 모든 생각이며, 아들들은 진리들이다’라고 정의하였고, AC.263에서는 그 잉태와 출산이 영적 전쟁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AC.264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그 정의가 성경 전체의 상응 구조와 일치함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잉태’를 ‘마음의 생각과 의도(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생각’은 단순한 지적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숙고하며, 그것이 삶의 방향으로 형성되어 가는 내적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따라서 잉태는 영적 생명이 아직 밖으로 나타나기 전, 사람의 내면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형성의 과정입니다.

 

반면 ‘아들들’은 그 생각이 열매를 맺어 나타난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아들’은 거의 일관되게 진리를 상징하며, ‘’은 선에 대한 애정이나 교회의 애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속에 확립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육체적인 출산을 비유로 하여, 영적 생명이 생각에서 삶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에브라임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브라임’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곧 이해력(intellectual understanding)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이해력이 타락하면, 아무리 ‘잉태’와 ‘출산’이 언급되어도 실제 진리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출산에서도, 태에서도, 잉태에서도 영광이 떠난다’는 말씀은 이해력이 진리를 잃어버린 상태를 뜻하며, ‘아들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진리 자체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의 ‘시돈’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시돈은 원래 신앙의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기억 지식으로만 다루다가 영적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해산하지도 않았고, 낳지도 않았다’는 것은 진리가 전혀 태어나지 못하는 영적 불임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갖는 것과 진리를 실제로 낳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가르칩니다.

 

반대로 사66은 거듭남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진리가 태어나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집니다. ‘산고가 오기 전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 참된 영적 출산은 언제나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약을 인용하여 구약의 상징이 주님 안에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천국의 아들들’,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혈통을 의미하지 않고, 신앙에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진리의 근원이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가 신앙을 의미하므로, 그 씨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신앙의 선과 진리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영적 출생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신 이유까지 연결합니다. 여기서 그는 ‘인자’를 단순히 인간이 되신 분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 자체이시며, 교회의 모든 신앙의 근원이시므로, ‘인자’는 교회의 신앙을 대표하는 이름이 됩니다. 이는 곧 모든 참된 진리는 주님에게서 잉태되고, 주님에게서 태어나며, 주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AC.264는 ‘잉태’와 ‘출산’, ‘아들들’이라는 상징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언어임을 입증하는 글입니다. 잉태는 진리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각과 의도로 형성되는 과정이며, 출산은 그 진리가 삶 속에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이고, 아들들은 그렇게 태어난 진리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영적 출생은 천적 결합, 결혼에서 비롯되며, 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3:16은 육체적인 임신과 출산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진리를 형성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영적 생명의 신비를 계시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심화

 

1. ‘호9:11-12’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호9:11, 12) As for Ephraim, their glory shall fly away like a bird, from the birth, and from the womb, and from the conception; though they shall have brought up their sons, yet will I bereave them, that they be not man; yea, woe also to them when I depart from them (Hos. 9:11–12),

 

 

AC.264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임신’(conception), ‘아이 배는 것’(womb), ‘해산’(birth), 그리고 ‘자식’(sons)이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영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6의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성경 전체에서 ‘자식’은 진리들을, ‘임신’은 생각과 의도의 형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이 호세아의 말씀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 곧 이해력(intellectual faculty)이나 진리에 대한 지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라는 것은 그 이해력의 영광, 곧 진리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자녀의 감소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더 이상 진리들이 형성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각이 잉태되지 못하고, 진리가 태어나지 못하며,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라는 말씀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자식’이 단순한 육신의 자녀를 의미한다면, 이어지는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that they be not man)라는 표현은 매우 어색해집니다. 그러나 ‘자식’을 진리들로 이해하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곧 교회 안에 진리들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그 진리들은 생명을 잃고 결국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또한 마지막의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라는 말씀은 모든 진리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지식이나 기억력만으로는 진리가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있을 때만 진리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되며,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생각은 있으나 참된 임신은 없고, 교리는 있으나 참된 해산이 없으며, 지식은 있으나 살아 있는 진리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임신’, ‘아이 배는 것’, ‘해산’, ‘자식’이라는 표현들이 모두 영적 과정, 곧 생각의 형성과 진리의 태어남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창3:16의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며, 진리가 사람 안에서 형성되고 자라나는 과정을 출산의 언어로 표현하는 말씀의 일관된 방식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호13: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호13:13)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n unwise son, for 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 (Hos. 13:13).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호13:13을 인용한 이유는, 창3:16절에서 말하는 ‘임신’, ‘산고’(産苦), ‘자식’이 모두 영적 의미를 가진 상징임을 성경 자체를 통해 다시 한번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호세아 9장에서는 ‘임신’과 ‘자식’이 생각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였다면, 여기서는 ‘산고’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 진리가 사람 안에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라는 말씀은 육체적 출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산고를 영적 유혹과 내적 싸움으로 이해합니다. 앞의 AC.261과 AC.263에서도 ‘고통’은 영적 전쟁(combat)과 그로 인한 근심(anxiety)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호세아의 이 말씀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태어나기 직전에 반드시 겪게 되는 영적 갈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어지는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자식’은 진리를 의미하지만, ‘지혜 없는 자식’은 진리를 받을 기회를 가지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음에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에브라임, 곧 이해하는 능력이 타락한 상태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특히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라는 표현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해산의 때가 되었는데도 태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가 생각 속에서는 어느 정도 형성되었지만, 실제 삶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옳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으로는 출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점은 AC.261에서 설명한 ‘임신’과 ‘해산’의 구별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임신은 생각 속에서 진리가 형성되는 과정이고, 해산은 그 진리가 삶 속에 실제로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바로 그 마지막 단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진리가 마음속에서만 머물고 삶으로 태어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지혜 없는 자식’의 상태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단순히 지식이 부족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들었고 이해할 기회도 있었지만, 자기 의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가 함께 작용해야 거듭남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이해만 있고 삶이 없으면, 임신은 있었지만 해산은 없는 상태가 됩니다. 호세아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영적 불완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인용은 또한 거듭남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참된 거듭남은 단순히 진리를 배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생각 속에서 잉태된 진리가 의지를 거쳐 삶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산고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 생명이 되기까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영적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창3:16의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으로 설명하고, 호세아 13장은 그 과정이 실패한 사례를 보여주는 본문으로 인용합니다.

 

결국 AC.264에서 호13:13을 인용한 이유는, 창3:16의 ‘임신’, ‘산고’, ‘출산’, ‘자식’이 모두 영적 생명의 형성과 완성을 나타내는 상징임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진리가 생각 속에만 머물고 삶으로는 나타나지 못하는 상태를 ‘지혜 없는 자식’이라는 표현으로 묘사함으로써, 참된 거듭남은 진리를 아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영적 싸움을 거쳐 실제 삶 속에 태어나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사23:4-5’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사23:4, 5)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Isa. 23:4–5),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사23:4-5을 인용한 이유는, 창3:16의 ‘해산’과 ‘자식을 낳는 것’이 육체적 출산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선을 낳는 영적 과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또 하나의 성경 본문으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는 호세아서를 통해 ‘임신’과 ‘자식’의 영적 의미를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출산하지 못함’과 ‘자녀를 기르지 못함’을 통해 진리를 더 이상 낳지 못하는 교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시돈’(Zidon)을 신앙의 지식(knowledges of faith)을 가진 사람들로 해석합니다. 시돈은 고대에 무역으로 유명한 도시였는데, 상응적으로는 여러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기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시돈은 말씀과 교회의 진리를 배우고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아직 그것이 생명으로 결합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지식은 있지만 아직 그 지식이 사랑과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의 시돈이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때문에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 지식은 단순한 학문이나 일반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기억 지식이 신앙을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신앙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감각과 세속적 학문만으로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신앙의 지식은 점차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시돈은 ‘나는 해산하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으로부터 어떠한 영적 진리도 산출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61에서 스베덴보리는 ‘임신’을 생각의 형성으로, ‘출산’을 진리가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돈은 그 과정 자체가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이어지는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청년들’은 강건한 진리들을, ‘처녀들’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애정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교회 안에서 진리도 자라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자라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영적 출생도 없고, 영적 성장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돈과 함께 언급되는 ‘애굽’(Egypt)과 ‘두로’(Tyre)도 이러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애굽은 기억 지식 전반을, 두로는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기억 지식은 신앙을 돕기 위해 존재하고, 신앙의 지식은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억 지식이 신앙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두로와 시돈이 상징하는 영적 지식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러한 교회의 황폐를 애통하며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AC.259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현대인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그는 오늘날 뱀이 사람을 공격하는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로 ‘감각’,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을 언급하였습니다. 물론 기억 지식과 철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의 계시보다 위에 놓일 때, 사람은 말씀을 믿기 전에 먼저 자기 이성과 학문으로 재단하게 됩니다. 그 결과 지식은 많아도 진리는 태어나지 못하는 영적 불임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AC.264에서 사23:4-5을 인용한 이유는, 창3:16의 ‘임신’과 ‘해산’이 영적으로는 진리를 낳는 것을 의미하며, 반대로 ‘출산하지 못함’은 신앙의 지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삶의 진리로 열매 맺지 못하는 교회의 황폐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시돈을 통해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기억 지식이 신앙을 지배함으로써 진리도, 진리를 사랑하는 애정도 더 이상 태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경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참된 영적 출산은 오직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사66:7-9’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사66:7-9)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Isa. 66:7–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사66:7-9을 인용한 이유는, ‘해산’, ‘낳음’, ‘남아’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육체적 출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진리가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 과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의 호세아와 이사야 23장 인용들이 진리가 태어나지 못하거나 잃어버려지는 상태를 보여 주었다면, 이사야 66장은 반대로 주님께서 새 교회와 새 생명을 급속히 일으키시는 긍정적 출산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라는 말씀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보통은 산고가 있고, 그다음 출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통이 오기 전에 먼저 낳았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 출산은 인간의 힘과 계산으로만 진행되는 자연적 과정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이루어질 때에는 사람의 예상과 순서를 넘어갑니다. 진리의 태어남은 본질적으로 주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아를 낳았다’는 표현에서 ‘남아, 곧 사내아이’는 신앙의 진리, 또는 강건하게 세워지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아들’은 진리를 상징하므로, 여기의 사내아이는 거듭남이나 새 교회 안에서 태어나는 참된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66장은 단지 한 아이의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교회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라는 말씀은 새 교회의 형성과 거듭남의 놀라움을 말합니다. ‘나라’로 옮긴 ‘땅’(earth)은 교회가 세워지는 터, 또는 교회 자체를 의미할 수 있고, ‘나라’는 진리와 선으로 이루어진 영적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단순히 개인의 생각 하나를 고치시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질서 전체를 태어나게 하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AC.261에서 말한 ‘임신’과 ‘출산’의 구별도 더 분명하게 해줍니다. 임신은 진리가 생각과 의도 안에서 형성되는 단계이고, 출산은 그 진리가 실제 생명과 삶으로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이사야 66장은 그 출산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때, 인간이 생각하는 고통과 지연의 질서를 넘어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를 거듭남을 다루는 본문으로 인용합니다.

 

또한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주님의 섭리에 대한 강한 위로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참된 진리를 잉태하게 하셨다면, 그 목적은 그것이 실제로 태어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시작만 하시고 끝내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진리가 아직 완전히 삶으로 나타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23장의 시돈은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도 그것을 기억 지식으로 파괴하여 끝내 해산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이사야 66장은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실 때 임신과 출산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두 본문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의 지식과 자기 지혜가 앞설 때는 영적 불임이 오지만, 주님의 신적 작용이 중심이 될 때는 새 진리와 새 교회가 태어납니다.

 

결국 AC.264에서 사66:7-9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을 낳는다’는 표현이 말씀에서 신앙의 진리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그 태어남은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과 새 교회의 탄생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창3:16의 ‘고통 가운데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을 단지 형벌의 언어로 읽지 않게 해줍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사람 안에 진리를 잉태하게 하시고, 때가 되면 그것을 삶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구원의 질서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5. ‘마13:37-38’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7, 38)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Matt. 13:37–38).

 

 

AC.264에서 스베덴보리가 마13:37-3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아들들’(sons)이 단순히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게는 선과 진리, 특히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6의 ‘고통 중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성경 전체에서 ‘아들’이라는 표현이 영적으로는 진리의 태어남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내적인 의미를 봅니다. 씨(seed)는 이미 AC.255에서 설명했듯이 신앙 또는 신앙의 씨앗인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 씨로부터 나오는 ‘아들들’은 그 신앙에서 생겨난 선과 진리들, 또는 그 진리들을 받아들여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씨’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져 자라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겨져 성장하며, 그 결과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삶이 태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아들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아들들’은 천국으로부터 나온 진리들, 또는 그 진리들에 의해 형성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 하시는 점도 AC.264의 중요한 논점입니다. 주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자’는 주님의 신적 진리(Divine Truth)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씨로부터 ‘천국의 아들들’, 곧 진리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반대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진리가 아들을 낳듯이 거짓도 아들을 낳습니다. 선한 씨는 천국의 진리들을 산출하지만, 악한 씨는 거짓과 악을 산출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아들’은 단순히 출생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과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일관되게 진리들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16의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도 결국은 진리들을 낳는 것을 의미하며, 마태복음의 ‘천국의 아들들’ 역시 같은 상응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에서 참된 ‘아들’은 육체적 자녀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심으신 신앙의 씨로부터 태어나는 선과 진리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AC.264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하면, 주님 자신이 참된 ‘씨’이시며, 참된 신앙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천국의 아들들은 바로 그 분으로부터 나온 진리들이며,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신앙과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아들 = 진리’라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신약성경에서 직접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증거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6. ‘요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8:39)

 

 

스베덴보리가 AC.264에서 요8:39을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아들’이 단순한 혈통상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태어난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잉태’, ‘출산’, ‘아들’이라는 표현이 모두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해 왔으며, 이제 그 해석이 구약뿐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구원의 근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혈통만으로는 참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아브라함의 신앙과 삶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말씀에서 ‘아들’은 단순히 육신으로 태어난 자녀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 성품과 삶, 곧 그의 사랑과 신앙에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란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순종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상응에 따른 ‘아들’의 영적 의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AC.261에서 설명한 ‘아들은 진리들’이라는 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사람 안에 태어날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믿음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현된 진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진리가 자신의 삶 속에 실제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영적 출생’의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부모에게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 새로운 출생은 혈통이나 민족, 혹은 전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혈통보다 삶을 기준으로 참된 자녀를 구별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씨’(seed)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씨가 뿌려져 자라 열매를 맺듯이, 주님께서 심으시는 신앙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을 생겨나게 합니다. 따라서 씨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신앙으로부터 나온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혈연적 계보가 아니라 영적 계보이며, 말씀 전체가 가르치는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십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자는 단순히 인간이 되신 분이라는 의미를 넘어, 말씀 자체이시며, 교회의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신앙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씨처럼 심어지고, 사람 안에서 자라나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결국 AC.264에서 요8:39을 인용한 이유는, ‘아들’이 혈통이 아니라 영적 출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순종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창3:16의 ‘아들들을 낳는다’라는 말씀 역시 육체적인 자녀의 출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신앙의 진리와 선을 태어나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AC.263, 창3:16,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3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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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3

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면,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면, 악한 영들은 강력하게 공격을 시작하고, 이때 함께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 싸움이 임신 및 해산 관련, 내가 네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는 말씀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는 생각들과 진리의 생겨남에 관한 것을 의미합니다. When therefore the sensuous part averts itself or curses itself, the consequence is that evil spirits begin to fight powerfully,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and therefore this combat is described by the words,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that is, as to the thoughts and productions of truth.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앞 절에서 설명한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는 말씀이 왜 영적 전쟁을 의미하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이 타락한 이후 영적 세계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 악한 영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반대로 천사들은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더욱 힘쓰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양측의 작용이 사람 안에서 경험되는 영적 유혹과 내적 갈등입니다.

 

여기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는 사람의 가장 바깥 의식, 곧 오감을 통하여 세상과 접촉하는 자연적 차원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AC.259에서 뱀이 공격하는 대상이 바로 이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감각 자체는 주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각이 주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독립하여 스스로 진리와 선을 판단하려 할 때입니다. 이것이 ‘감각 파트가 스스로 돌아선다(averts itself)는 말의 의미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저주를 받는다(curses itself)는 표현을 매우 신중하게 사용합니다. 원문은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감각 파트가 스스로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저주받은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즉, 저주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연결을 끊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3에서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해석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그 결과 영계에서는 즉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을 더욱 자극하며, 힘껏 공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사람을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천사들은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는 리메인스를 통하여 선한 생각과 선한 애정을 일깨우며, 사람이 완전히 악에 넘어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보호합니다. 따라서 영적 유혹은 악한 영과 천사가 서로 대등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람을 지키시는 가운데 악을 허용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를 영적 전쟁으로 해석합니다. 이 고통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악한 영들의 영향과 천사들의 보호가 사람 안에서 동시에 작용할 때 경험하는 내적 긴장과 불안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주님 편에 서려 할수록 자기 사랑은 더욱 저항하고, 그 저항 속에서 유혹과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에서의 ‘고통’입니다.

 

이어지는 ‘잉태와 아들들을 낳는 것’도 앞 절 설명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잉태’는 새로운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이며, ‘아들들을 낳는 것’은 그 생각이 실제 진리의 삶으로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타락 이후에는 결코 평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새로운 진리가 생각 속에 자리 잡으려 할 때마다 악은 그것을 방해하려 하고, 진리가 삶으로 나타나려 할 때마다 자기 사랑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반드시 영적 싸움을 통과하여야만 사람의 것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AC.261AC.263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AC.261이 ‘고통’, ‘잉태’, ‘아들’의 영적 의미를 정의하였다면, AC.263은 왜 그런 고통이 생기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원인은 주님께서 고통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 안에서 악한 영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천사들도 더욱 애써 사람을 보호하게 되므로, 사람은 두 세계의 영향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AC.263은 창3:16의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는 말씀이 영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유혹의 과정을 묘사한 것임을 밝히는 글입니다. 사람이 감각적 차원에서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악한 영들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고, 천사들은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통하여 더욱 힘써 보호합니다. 그 결과 사람 안에서는 새로운 진리가 생각 속에 잉태되고, 삶 속에 태어나는 과정 전체가 영적 싸움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 고통은 형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허락하시는 영적 전투의 모습이며, 그 싸움의 끝에는 언제나 주님의 보호와 승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AC.264, 창3:16, ‘임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4말씀에서 ‘잉태’(co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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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2, 창3:16, ‘여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2‘여자’(woman)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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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6)



AC.262

여자(woman)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전에 여자로 뜻하였던 그 proprium(own)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지금 다루고 있는 대상이, 이미 타락하여 왜곡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woman” has been previously shown, but here the church perverted by 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signified by the “woman,” because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 is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자’라는 동일한 상징이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상태의 교회를 나타낼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는 앞에서 이미 ‘여자’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상징은 언제나 고정된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여기의 ‘여자’는 교회 일반이 아니라, 자기 고유 proprium이 들어와 본래의 순수함을 잃기 시작한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표현은 ‘왜곡된 교회(the church perverte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악한 교회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곡되었다(perverted)는 것은 본래의 질서가 점차 비틀어지고 방향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을 중심으로 살던 교회가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같은 진리를 가지고도 그것을 바라보는 중심이 달라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원인이 바로 ‘proprium(own)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오는 것처럼 느끼지만,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proprium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점차 자신이 선하고, 자신이 지혜롭고,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자기중심성이 모든 영적 왜곡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 글은 창3의 시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지금 다루고 있는 대상은 이미 타락하여 왜곡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3은 태고교회가 완전히 끝난 이후의 고대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의 계보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미 그들의 내적 상태는 본래의 순수함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AC.261에서 보았던 내적 질서의 변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후손(posterity)이라는 표현도 단순한 혈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후손을 흔히 같은 교회의 영적 계승자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후손이란 태고교회의 전통과 계시를 이어받았지만, 그 정신과 생명을 점차 잃어버린 사람들을 뜻합니다. 외형상으로는 같은 교회에 속해 있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다른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타락을 매우 점진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퍼셉션이 약해지고, 이어 자기 proprium이 커지며, 그 결과 진리의 이해가 왜곡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랑과 지혜의 질서 자체가 무너져 홍수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창3은 완전한 타락의 결과를 기록한 장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시작되고 점차 심화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장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말씀도 있고, 예배도 있으며, 신앙고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주님에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가는 순간, 교회는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이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가 항상 자기 proprium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AC.262는 창3에 나오는 ‘여자’가 더 이상 창2의 순수한 태고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글입니다. 여기의 ‘여자’는 자기 proprium을 사랑함으로써 본래의 질서를 잃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아니라, 여전히 태고교회의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적 쇠퇴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후 창4와 창5, 그리고 홍수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질 교회의 점진적인 타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AC.263, 창3:16,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3그러므로 감각 파트(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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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1,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AC.261-26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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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3:16)



AC.261

이제 여자(woman)는 그 교회가 사랑하였던 고유한 것(proprium)의 측면에서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는 영적 싸움과, 그로 인해 생기는 근심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임신(conception)은 모든 생각을 의미하며,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는 그렇게 하여 생겨나는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편(man)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것(the rational)을 의미하며, 여자는 그것에 순종하게 되고, 그것이 여자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By the “woman” is now signified the church as to proprium, which it loved; by “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 is signified combat, and the anxiety it occasions; by “conception,” every thought; by the “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 the truths which she would thus produce; by “man,” here as before, the rational which it will obey, and which will rul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16의 말씀을 영적 의미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뱀과 여자의 후손에 관한 말씀을 다루었다면, 이제는 타락이 시작된 이후 태고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먼저 ‘여자’를 단순히 최초의 여성인 하와 개인으로 보지 않고, 교회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proprium을 사랑하게 된 교회’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본래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로 살았던 교회가, 이제는 점차 자신의 own을 신뢰하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을 통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을 직접 알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 이후 사람은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 자기 지혜를 점차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였지만, 그 내면에는 이미 타락의 과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점차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는 말씀도 문자적인 육체의 고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전투(combat)와, 그로 인해 생기는 근심과 불안(anxiety)으로 설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따르려는 성향과 주님을 따르려는 성향이 서로 충돌하면서 사람 안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내적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 고통은 주님의 형벌이 아니라, 거듭남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영적 유혹과 내적 긴장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잉태, 임신(conception)은 스베덴보리가 분명하게 ‘모든 생각(every thought)이라고 설명합니다. 잉태는 아직 출산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처음 마음속에 받아들여지고, 생각과 이해의 형태로 형성되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잉태되듯이, 영적 생명도 먼저 생각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생각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을 ‘임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다음의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는 표현은 잉태된 생각이 실제 진리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아들’은 진리를 상징하므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생각 속에만 있던 진리가 실제 삶과 행동 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잉태와 출산은 같은 과정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두 단계입니다. 먼저 진리가 생각 속에 잉태되고, 그다음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실천되고 확립될 때 비로소 ‘아들이 태어난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과정이 영적 싸움과 근심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도 문자적인 남녀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남편(man)은 앞에서와 같이 이성적인 것(the rational)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시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직 홍수 이전이며, 교회는 여전히 태고교회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퍼셉션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proprium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퍼셉션이 점차 약해지고, 그에 따라 이성의 기능이 이전보다 점점 더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내적 질서가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한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창3은 태고교회가 이미 끝난 뒤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가 점차 쇠퇴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의 사람들도 여전히 퍼셉션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처럼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변화는 창세기 4장과 5장을 거치며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홍수 이후 노아로 대표되는 고대교회에서는 퍼셉션 대신 양심(conscience)이 영적 삶의 중심이 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AC.261은 그 역사적 전환이 시작되는 첫 단계를 설명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61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타락이 시작된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own을 사랑하기 시작한 교회는 이제 영적 전투, 싸움을 경험하게 되고, 그 싸움 속에서 새로운 진리가 먼저 생각 속에 ‘잉태’되며, 이어서 삶 속에서 ‘출산’됩니다. 동시에 사랑 안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던 퍼셉션은 점차 약해지고, 이성의 역할이 점차 커지는 방향으로 교회의 내적 질서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아직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며, 훗날 홍수 이후 양심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교회가 세워질 역사적 전환을 준비하는 단계로 이해하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전체 문맥에 가장 충실한 해석입니다.

 

 

 

AC.262, 창3:16, ‘여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6)AC.262‘여자’(woman)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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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0, 창3:15, ‘당시의 교회에게 이미 주어진 계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60지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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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7/12)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8, ‘예수 우리 왕이여’, 84,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입니다.

 

오늘 3 여섯 번째, 본문은 창3:15이고, AC 글 번호로는 250번에서 260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제목은

 

타락보다 먼저 주어진 구원의 약속

 

이며, 다음은 AC.250-260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읽을 AC.250-260은 창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해설하는 부분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장차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알리는 최초의 복음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말씀을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예언으로 이해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후손’,머리’,발꿈치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를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 자세히 밝힙니다.

 

먼저 은 일반적으로 모든 악을, 특별히는 자기 사랑을 의미합니다. 뱀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밀착하여 땅을 기어다니는 것처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는 악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빛보다 자기 감각과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게 만듭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님과 말씀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거짓을 낳고, 거짓은 다시 악을 정당화하며, 마침내 자기 사랑과 증오가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성경에 여러 종류의 뱀과 독사가 등장하는 것은 자기 사랑에서 나온 악과 거짓에도 수없이 다양한 종류와 정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주님 및 이웃에 대한 증오가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자기 사랑이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돌보거나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다른 사람과 세상, 더 나아가 천국과 주님까지도 자기 뜻 아래 두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제어되지 않으면 지배욕으로 발전하며, 자기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창3의 뱀은 단순히 한 동물이나 한 악령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밀어내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모든 악의 원리를 나타냅니다.

 

반면 여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여자, 아내, 신부, 처녀, 딸로 불리는 이유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수용체이기 때문입니다.12해를 옷 입은 여자’,54남편을 가진 아내’,21어린 양의 신부아내가 모두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창3:15의 여자도 하와라는 한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주님을 받아들이며 그분과 결합하는 교회를 뜻합니다.

 

교회가 주님과 결합하는 데에는 own이 필요합니다. own이 전혀 없다면 자유로운 인격도, 사랑의 응답도, 결합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own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own은 자기 사랑과 악의 근원이지만,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순진과 평화와 선을 불어넣어 새롭게 하신 own은 천적이며 천사적인 own이 됩니다. 거듭남은 사람의 개성과 인격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지옥적인 own이 물러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own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생각하고 사랑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안의 선과 진리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뱀의 후손여자의 후손 역시 육체적인 혈통을 뜻하지 않습니다.후손’,는 어떤 근원에서 태어나고 산출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은 자기 사랑과 악에서 나오는 불신과 거짓 전체를 뜻하고, 여자의 후손은 교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태어나는 신앙을 뜻합니다. 성경이 행악의 종자’,거짓의 후손’,경건한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도 씨와 후손이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각각 악과 거짓 또는 선과 신앙에서 태어나는 영적 산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은 신앙만을 의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며, 주님 자신이 모든 신앙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3:15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는 추상적인 교리나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세력을 직접 정복하실 주님 자신입니다. 이 점에서 창3:15은 인류가 타락한 바로 그 자리에서 주어진 최초의 구원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거의 완전히 지옥적 상태에 빠진 교회 안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적 유전으로부터 받은 인성을 입으시고, 그 인성 안에서 지옥의 모든 공격과 유혹을 친히 받으셨으며, 신적 능력으로 하나씩 이기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주님 안의 인간적 own은 신적 천적 own과 완전히 결합되었고, 그분의 인성은 신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영화라고 부릅니다.

 

주님 안에서 일어난 이 결합이 온 세상과 관계되는 까닭은, 주님께서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천국과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유일한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옥의 세력은 인간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사람의 자유와 rational을 파괴할 만큼 강해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지옥을 정복하지 않으셨다면 천국과 인류 사이의 연결이 무너지고, 사람은 더 이상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 거듭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그분 개인에게만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지옥을 제압하고 천국을 정돈하며 인류에게 다시 생명이 유입될 수 있도록 한 우주적인 구속 사건이었습니다.

 

뱀의 머리는 악의 지배, 특별히 자기 사랑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머리는 몸 전체를 지배하는 부분이므로, 뱀의 머리는 자기 사랑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삶 전체를 통치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14의 계명성은 내가 하늘에 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고 말하고,12의 큰 붉은 용은 여러 머리와 뿔과 왕관을 가지고 자신을 높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자기 사랑이 세상뿐 아니라 천국과 주님까지도 지배하려는 본성을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 지배권을 근본적으로 꺾으신다는 뜻입니다.

 

상하게 한다 또는 밟는다는 것은 악을 존재 자체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천국과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낮추고 억누르며 신적 질서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26에서는 높이 솟은 성이 땅과 진토에까지 낮아지고 발에 밟히며,28에서는 교만의 면류관이 땅에 던져져 발에 밟힙니다. 이처럼 악은 자신을 높이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보내십니다. 이것이 뱀이 배로 다니며 흙을 먹게 되는 상태이며, 뱀의 머리가 상하게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뱀도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발꿈치는 사람 안의 가장 낮은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차원, 곧 감각과 기억 지식, 외적 사고와 실제 생활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뱀은 사람 안의 가장 깊은 천적, 영적 생명을 직접 해칠 수는 없지만, 감각과 외적 삶을 통하여 사람을 흔들고 넘어뜨리려 합니다.49에서 뱀이 말굽을 물어 탄 자를 뒤로 떨어뜨리는 것,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것 등은 모두 이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가장 깊은 선과 진리는 주님께서 친히 보호하십니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 선과 진리를 스베덴보리는 리메인스라고 부릅니다. 악은 사람의 발꿈치, 곧 외적이고 감각적인 삶을 상하게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에는 직접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리메인스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쓰러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시고, 유혹 가운데 보호하시며, 마침내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읽을 AC.250-260의 전체 흐름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감각과 자기 사랑을 따라 주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결과 뱀의 후손인 불신과 거짓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타락의 순간에 이미 여자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인성을 입고 지옥과 싸워 이기시며, 자신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결합하심으로 악의 지배를 깨뜨리고 온 인류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뱀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창3:15에 담긴 최초의 복음이며, 오늘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50,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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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1, 창3:15, ‘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1‘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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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2, 창3:15, ‘여자’(own)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2‘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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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3, 창3:15, ‘여자’(church)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3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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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4, 창3:15, ‘뱀의 후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4‘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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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5, 창3:15, ‘여자의 후손’(신앙)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5‘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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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6, 창3:15, ‘여자의 후손’(주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6‘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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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7, 창3:15, ‘뱀의 머리’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7‘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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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8, 창3:15, ‘상하게 할 것이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8‘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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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 창3:15, ‘발꿈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9‘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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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0, 창3:15, ‘당시의 교회에게 이미 주어진 계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60지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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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링크들 중 특별히 선별한 글들입니다.

 

 

AC.250,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AC.250-260)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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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1, 심화 6, ‘천 년 동안 결박하여’

AC.251.심화 6. ‘천 년 동안 결박하여’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20:2) 아래는 스베덴보리의 ‘Apocalypse Revealed’ 관련 글인 AR.842에 대한 번역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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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6, 심화 1,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

AC.256.심화 1. ‘주님의 신적 인성(Divine Human)’ 그 목적은 자신의 신적 능력(Divine power)으로 자신의 인성(human essence) 안에서 신적 천적 own(Divine celestial own)과 인간적 own(human own)을 하나로 결합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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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은 마치기 전, 아래와 같은 아주 근본적인 질문 하나만 생각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님은 왜 악을 그냥 밟기만 하시고, 아예 없애 버리시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품게 되는 자연스러운 의문입니다.3에서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AC.257-258에서는 이것을 밟는다’,낮춘다’,배로 다니며 흙을 먹게 한다는 의미로 해설합니다. 그런데 왜 악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 단지 억누르기만 하시는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또한 악을 위해 따로 창조된 존재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선을 향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악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오용에서 비롯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끝까지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사후에 악한 영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러한 악한 영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실까요?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생명 자체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한 번 창조하신 존재를 무(無)로 돌려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악한 영이 되었을지라도,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않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이 끝까지 생명을 보존하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악을 신적 질서 안에 두십니다. 악은 더 이상 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제한되고, 지옥은 더 이상 천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다스려집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발로 밟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악은 존재하지만, 주님의 허락 없이는 질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 이런 방식이 필요한가 하면,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선택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악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리신다면,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일도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가 있을 때만 사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악과 선이 함께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선이 결국 승리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사람은 유혹을 통하여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며, 그 과정에서 거듭나게 됩니다. 만일 악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혹도 없고, 자유로운 선택도 없으며, 따라서 참된 사랑과 신앙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을 존재에서 없애신 것이 아니라, 모든 지옥의 세력을 하나하나 이기시고 신적 질서 아래 두셨습니다. 그 결과 지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천국과 인류를 지배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창3의 약속은 단순히 악을 제거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코 마지막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다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악은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수는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머리를 상하게 하십니다. 악은 사람을 시험할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는 없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끝내 악보다 더 크신 주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주님,

 

오늘도 저희를 말씀 앞으로 불러 주시고, 창3에 담긴 최초의 복음과 주님의 구원 약속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연약, 때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고, 유혹 가운데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지옥의 세력을 이기셨음을 믿습니다. 저희가 언제나 자신 대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능력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 안에 주님께서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지켜 주시고,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저희의 겉 사람은 흔들릴지라도 속 사람은 더욱 굳세게 하시고, 날마다 저의 own은 낮아지고, 대신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저희 삶을 다스리게 하옵소서. 또한 오늘 들은 말씀이 지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사랑과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오늘 함께 예배드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가정 위에 주님의 평안과 보호하심을 더하시며, 주님의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저희 모두가 세상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시고,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축도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그 거룩한 역사하심이, 오늘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는 최초의 복음과, 이미 태초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시어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섭리를 아르카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며, 거듭 진심으로 아멘 하는 모든 성도들과,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모든 손길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7-12(D1)

 

2659, 6, 창3.6, 2026-07-12(D1)-주일예배(창3,15, AC.250-260), ‘타락보다 먼저 주어진 구원의 약속’.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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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7/05, 창3:14, AC.234-249), ‘하늘을 잃은 인간과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

※ 오늘(2026/07/05, 성찬)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7,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성찬), 찬83, ‘나의 맘에 근심 구름’입니다. 오늘은 창3 다섯 번째, 본문은 창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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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AC.260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부터, 당시의 교회에는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계시가 이미 주어졌음이 분명합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it was revealed to the church of that time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해설

 

이 짧은 글은 매우 간결하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3:15을 해설하면서 ‘여자의 후손’, ‘뱀의 머리’, ‘발꿈치’ 등의 영적 의미를 차례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설명을 한 문장으로 결론짓습니다. 곧, 창3:15은 단순한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장차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이미 계시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당시의 교회(the church of that time)는 태고교회를 가리킵니다. 태고교회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지각(perception)으로 이해했던 교회였기 때문에, 창3:15을 단순히 뱀과 사람 사이 원한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 속에서 장차 오실 구세주와, 그분께서 지옥의 권세를 정복하실 일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인간들이 받은 계시는 처음부터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모세 시대나 예언자 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초기부터 이미 시작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타락한 직후 곧바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이미 회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3:15은 흔히 성경 최초의 복음이라고 불리는데, 스베덴보리 역시 같은 의미를 더욱 깊은 영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의 성육신이 하나님의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뒤늦게 마련된 구원 방법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주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계시되었고, 교회는 그 약속을 바라보며 유지되었습니다. 태고교회, 고대교회, 그리고 이후의 모든 참된 교회는 형태는 달라도 모두 장차 오실 주님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계시되었다(it was revealed)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철학이나 추론으로 메시아를 알아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다는 뜻입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인간의 사색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서 시작됩니다. 태고교회가 장차 오실 주님을 알았던 것도 인간의 지혜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앞에서 설명한 리메인스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실 뿐 아니라, 교회 안에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보존하셨습니다. 사람 안에는 거듭남의 씨앗을, 교회 안에는 구원의 약속을 남겨 두심으로써, 어떤 시대에도 구원의 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섭리이며, AC.260은 그 사실을 매우 압축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과 신약을 서로 다른 시대의 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분, 곧 주님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창세기의 첫 복음에서 시작된 약속은 복음서에서 성취되고, 그 효력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3:15은 과거의 예언에 머무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 안에서 악의 ‘머리’를 꺾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역사에 대한 선언입니다.

 

AC.260은 지금까지의 해설 전체를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는 결론입니다. 태고교회는 이미 장차 오실 주님을 알고 있었으며, 그분께서 지옥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계시로 받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첫 복음은 단지 미래의 사건을 예고한 말씀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며, 모든 참된 교회를 하나로 묶는 중심 진리인 것입니다.

 

 

 

AC.261,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AC.261-26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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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 창3:15, ‘발꿈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9‘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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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심화

 

3.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25:26) That his hand laid hold of Esaus heel, whence he was called Jacob (Gen. 25:26),

 

 

스베덴보리가 AC.259에서 창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라는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발꿈치’가 가장 낮은 자연적 차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를 통해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5의 ‘발꿈치’를 단순한 신체 부위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되는 영적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야곱의 이름이 발꿈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본문에서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한 장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하나의 예언적 표상으로 봅니다. 그에게 ‘야곱’은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외적 교회, 특별히 후에 세워질 유대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붙잡는 행위는 외적 교회가 가장 바깥 차원의 신앙과 예배를 붙드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야곱이라는 이름이 발꿈치에서 유래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야곱으로 상징되는 유대교회가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유대교회는 말씀의 가장 바깥 차원인 의식과 예식, 율법의 문자에는 열심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천적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외적인 것은 보존했지만,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내적 생명을 손상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참된 교회는 내적 진리와 외적 삶이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교회는 점차 외적 의식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게 되었고, 형식은 남았지만 그 형식이 가리키는 주님과 사랑, 그리고 신앙의 본질은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이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발꿈치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바깥 차원이 내적 생명과 분리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된 창49의 ‘말의 발꿈치’와 시편의 ‘발꿈치의 죄악’과도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창49에서는 뱀이 발꿈치를 물고, 시편에서는 죄악이 발꿈치를 둘러싸며, 창25에서는 야곱이 발꿈치를 붙잡습니다. 모두 발꿈치가 사람의 가장 바깥 자연적 삶을 상징한다는 동일한 영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반복을 통해 자신의 상응 해석이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인용은 뱀이 왜 발꿈치만 상하게 할 수 있는지도 이해하게 합니다. 발꿈치는 가장 바깥 차원이므로 악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는 그보다 더 깊은 영적 차원과 천적 차원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신앙과 생활이 손상을 입을 수는 있어도, 사람이 완전히 주님을 거부하지 않는 한 가장 깊은 생명의 씨앗까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 뒤에서 곧바로 리메인스를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구조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야곱’은 항상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외적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외적 삶이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외적 신앙이 내적 신앙과 분리될 때입니다. 그러면 발꿈치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 입기 쉬운 부분이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외적 신앙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반드시 내적 사랑과 진리에 연결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AC.259에서 창25:26을 인용한 이유는, ‘발꿈치’가 사람의 가장 낮은 자연적, 외적 차원을 의미하는 성경적 상징임을 확인하고, ‘야곱’으로 대표되는 외적 교회가 그 차원에 머물러 내적 의미를 잃을 때, 어떻게 영적 손상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창3:15의 ‘발꿈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며, 동시에 외적 신앙은 언제나 내적 사랑과 결합되어야만 참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교회론을 잘 드러내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259, 창3:15, ‘발꿈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9‘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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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 심화 2, ‘시49:5’

AC.259.심화 2. ‘시49: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49:5)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Ps. 49:5). 스베덴보리가 AC.259에서 시49:5의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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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심화

 

2. ‘49: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49:5)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Ps. 49:5).

 

 

스베덴보리가 AC.259에서 시49:5의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The iniquity of my heels)라는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성경에서 ‘발꿈치’가 가장 낮은 자연적, 육체적 차원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5의 ‘발꿈치’를 임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경 구절들을 통해 같은 상징이 반복되고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해석이 성경 전체의 상응 체계와 일치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발꿈치의 죄악’은 문자 그대로 발이나 발꿈치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은 사람의 의지와 사고에 속하는 것이므로, 신체의 한 부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발꿈치’는 사람의 가장 바깥 삶, 곧 감각과 일상생활, 외적 행동과 자연적 성향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창세기에서 뱀이 상하게 하는 ‘발꿈치’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나를 에워싸는(compassed me about)이라는 표현은 악이 가장 먼저 외적인 삶을 에워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깊은 영적 타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각적 즐거움, 작은 타협, 자기합리화, 왜곡된 사고와 같은 가장 바깥 영역에서 영향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점차 사람을 둘러싸고, 결국 내면으로 스며들어 삶 전체를 흔들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발꿈치를 영적 전쟁의 최전선으로 이해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창49:17의 ‘말의 발꿈치를 문다’는 구절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두 본문 모두 발꿈치가 공격 대상이 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악이 사람 안의 가장 깊은 천적 생명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바깥의 자연적 차원을 통하여 접근한다는 영적 질서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서로 다른 책에서 같은 상징을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일관된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악의 한계도 동시에 밝힙니다. 발꿈치는 가장 낮은 부분이므로 뱀은 거기까지는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안쪽의 영적 차원, 더욱이 천적 차원에는 직접 접근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 가장 깊은 영역은 어떤 지옥의 세력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따라서 발꿈치의 죄악이 아무리 사람을 둘러싼다 해도, 주님께서 지키시는 가장 깊은 생명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시편의 이 표현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도 보여줍니다. 사람은 흔히 큰 죄나 명백한 악만 경계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가장 낮은 자연적 삶에서 시작되는 작은 왜곡들이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감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습관, 세상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미세한 교만과 변명 등이 바로 ‘발꿈치의 죄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쌓이면 사람의 영적 균형은 점차 흔들리게 됩니다.

 

나아가 이 구절은 창3:15의 약속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뱀은 발꿈치를 상하게 할 수는 있지만, 머리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 악은 사람의 외적 삶에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악의 근원 자체를 꺾으십니다. 이것이 두 표현의 결정적인 차이이며, 스베덴보리가 머리와 발꿈치를 대비하여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AC.259에서 시49:5을 인용한 이유는, ‘발꿈치’가 사람의 가장 낮은 자연적, 감각적 차원을 의미하는 성경적 상징임을 입증하고, 악은 바로 그 영역을 통하여 사람을 에워싸고 흔들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악의 활동 범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리메인스와 가장 깊은 영적 생명은 결코 뱀의 권세 아래 놓이지 않는다는 희망의 진리도 함께 증언하고 있습니다.

 

 

 

AC.259, 심화 3, ‘창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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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 심화 1, ‘창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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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심화

 

1. ‘49: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49:17) Dan shall be a serpent upon the way, an adder upon the path, biting the horses heels, and his rider falls backward (Gen. 49:17).

 

 

스베덴보리가 AC.259에서 창49: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뱀이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경 자체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뱀이 공격하는 대상이 사람의 가장 바깥 차원, 곧 ‘발꿈치’임을 다시 확인해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뱀이 공격할 수 있는 범위와 그 공격 방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라는 표현은 단 지파 자체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예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는 ‘’은 감각적 차원에 머무는 사고와 그것을 이용하는 악을 의미합니다. 길섶과 샛길, 곧 길과 길가는 사람이 진리를 따라 걸어가는 삶의 과정을 뜻하는데, 그 길 위에 뱀이 숨어 있다는 것은 악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보다, 사람의 일상적인 생각과 판단 속에 은밀히 침투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말굽, 곧 말의 발꿈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이해력, 특히 진리를 이해하는 지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뱀이 말 자체를 무는 것이 아니라 ‘발꿈치’를 문다는 것은, 진리의 가장 바깥 차원, 곧 감각과 기억 지식, 외적 사고와 실제 생활의 영역을 먼저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악은 처음부터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생명을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접근하기 쉬운 외적 차원부터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말을 타는 사람은 이해력을 사용하는 사람, 곧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의 발꿈치가 물리면 말이 균형을 잃고, 결국 탄 사람도 넘어집니다. 이것은 악이 직접 영적 진리를 무너뜨리지 못하더라도, 외적 삶과 감각적 판단을 왜곡함으로써 결국 사람 전체를 넘어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작은 타협이 큰 영적 넘어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발꿈치’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역할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발꿈치를 사람 안의 가장 낮은 자연적, 육체적 차원이라고 설명한 뒤, 같은 상징이 창49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발꿈치’라는 상징이 우연한 표현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되는 영적 언어임을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뱀의 한계도 함께 나타납니다. 뱀은 말의 머리나 가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발꿈치만 공격합니다. 이는 지옥이 사람 안의 가장 깊은 천적 생명이나 영적 생명을 직접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그 가장 깊은 영역은 지옥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뱀은 가장 바깥의 감각적 차원만 공격할 수 있을 뿐입니다. AC.259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리메인스를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영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감각주의와 자기 사랑이, 유대교회에서는 외적 전통과 의식주의가, 오늘날에는 감각주의와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이 발꿈치를 무는 뱀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주님의 계시보다 앞서게 되면 사람은 외적 사고에 사로잡혀 점차 영적 중심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탄 자가 뒤로 떨어지는 영적 과정입니다.

 

AC.259에서 창49:17을 인용한 이유는, 창3:15의 ‘발꿈치’가 가장 낮은 자연적, 감각적 차원을 의미하며, 뱀은 바로 그 영역을 공격하여 사람을 넘어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뱀의 능력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뱀은 발꿈치를 물 수는 있어도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가장 깊은 생명, 곧 리메인스에는 결코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영적 전쟁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큰 소망이며,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AC.259, 심화 2, ‘시49:5’

AC.259.심화 2. ‘시49: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49:5)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Ps. 49:5). 스베덴보리가 AC.259에서 시49:5의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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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9, 창3:15, ‘발꿈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9‘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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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5)



AC.259

발꿈치(heel)가 가장 낮은 자연적 또는 육체적 차원을 의미한다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인간 안에 있는 여러 요소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머리와 얼굴에 대응시켰고, 거기에서 나오는 체어리티와 자비를 가슴에 대응시켰으며, 자연적인 것들을 발에, 그보다 더 낮은 자연적인 것들을 발바닥에, 그리고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들을 발꿈치에 대응시켰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 대응시킨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을 그러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성의 가장 낮은 것들, 곧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도 야곱이 단에 대하여 예언한 다음 말씀으로 뜻해집니다. That by the “heel” is meant the lowest natural or corporeal cannot be known unless the way in which the most ancient people considered the various things in man is known. They referred hi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to the head and face; what comes forth from these as charity and mercy, to the chest; natural things, to the feet; lower natural things, to the soles of the feet; and the lowest natural and corporeal things, to the heel; nor did they merely refer to them, but also so called them. The lowest things of reason, that is, memory-knowledges, were also meant by what Jacob prophesied concerning Dan: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49:17) Dan shall be a serpent upon the way, an adder upon the path, biting the horses heels, and his rider falls backward (Gen. 49:17).

 

또 시편에서도 Also in David: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49:5)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Ps. 49:5).

 

같은 의미로 야곱이 태어날 때 기록된 다음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In like manner by what is related of Jacob, when he came forth from the womb,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25:26) That his hand laid hold of Esaus heel, whence he was called Jacob (Gen. 25:26),

 

야곱(Jacob)이라는 이름은 발꿈치(heel)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는 야곱으로 상징되는 유대교회가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뱀은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들만 해칠 수 있으며, 독사의 종류가 아닌 이상 사람 안의 더 안쪽 자연적인 것들은 해칠 수 없고, 더욱이 영적인 것들은 해칠 수 없으며, 가장 더욱이 천적인 것들은 해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천적인 것들은 주님께서 사람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보존하시고 저장해 두십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저장해 두시는 것들을 말씀에서는 리메인스(remains)라고 부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뱀이 감각적 원리와 자기 사랑을 통하여 이러한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들을 어떻게 파괴하였는지, 유대인들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전통 및 사소한 규례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통하여 어떻게 그것들을 파괴하였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감각과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을 통하여, 동시에 같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통하여 어떻게 그것들을 파괴하였고 또 계속 파괴하고 있는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for the name “Jacob” comes from the “heel,” because the Jewish church, signified by “Jacob,” injured the heel. A serpent can injure only the lowest natural things, but unless it is a species of viper, not the interior natural things in man, still less his spiritual things, and least of all his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preserves and stores up in man without his knowledge. What are thus stored up by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The mode in which the serpent destroyed those lowest natural things in the people before the flood, by 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 and among the Jews, by 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how at this day he has destroyed and continues to destroy them by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at the same time by the same loves, sha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old hereafter.

 

 

해설

 

이 글은 창3:15의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핵심적인 글입니다. 앞의 AC.257-258에서는 뱀의 ‘머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면, 이제는 사람의 ‘발꿈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의 상응적 사고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몸을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표상으로 보았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머리와 얼굴은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가슴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체어리티와 자비를, 발은 자연적인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발바닥은 더 낮은 자연적 차원을, 발꿈치는 가장 바깥에 있는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발꿈치는 사람의 영적 생명 가운데 가장 외곽에 위치한 영역, 곧 감각과 육체를 통하여 세상과 직접 접촉하는 부분을 상징합니다. 창3에서 뱀이 사람의 발꿈치를 문다는 것은 바로 이 가장 바깥 차원을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창49:17의 단에 관한 예언을 인용합니다. ‘말굽, 곧 말의 발꿈치를 문다’는 것은 진리를 상징하는 말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가장 낮은 자연적 기반을 흔들어 결국 탄 사람이 뒤로 넘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악은 처음부터 사람의 가장 깊은 천적 생명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과 외적 사고, 왜곡된 기억 지식 등을 통하여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이것이 뱀의 전형적인 공격 방식입니다.

 

또한 시편의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The iniquity of my heels)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이 악에 물들면, 그것은 점차 더 안쪽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은 거창한 신학 이전에, 일상적인 감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서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발꿈치가 가장 낮은 부분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전쟁이 가장 먼저 벌어지는 자리라고 가르칩니다.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장면도 같은 원리로 해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야곱’을 외적 교회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이해하며, 특별히 유대교회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발꿈치에서 유래한 것은, 유대교회가 말씀의 가장 바깥 차원인 의식과 예식에는 열심이었지만, 그 안의 영적 의미는 손상시켰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는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라, 외적 신앙과 자연적 삶 전체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뱀이 공격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뱀은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은 해칠 수 있지만, 더 깊은 영적 차원이나 천적 차원은 직접 해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사람 안의 가장 깊은 천적인 것은 주님께서 친히 보호하시며 저장해 두시는데, 이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입니다. 리메인스는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이며,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보존되는 가장 거룩한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지옥도 이 영역에는 직접 손을 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악이 시대마다 같은 본질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합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감각주의와 자기 사랑으로, 유대교회는 전통과 외적 규례 및 자기 사랑으로, 그리고 현대인은 감각주의와 기억 지식, 철학,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가장 낮은 자연적 삶을 파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철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인간의 기억 지식과 철학이 주님의 계시보다 우위에 서서 스스로 진리의 최종 심판자가 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가장 먼저 손상되는 것이 바로 ‘발꿈치’, 곧 자연적 삶의 건전한 질서입니다.

 

AC.259는 창3:15의 ‘발꿈치’를 통해 영적 전쟁의 실제 현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뱀은 사람 안의 가장 깊은 천적 생명에는 직접 접근하지 못하지만, 감각과 외적 사고, 기억 지식과 자기 사랑을 통하여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을 흔들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리메인스를 보존하고 계시며, 바로 그 거룩한 씨앗을 통해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발꿈치’와 ‘리메인스’를 함께 설명하는 스베덴보리의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심화

 

1. ‘49:17

 

 

AC.259, 심화 1, ‘창49:17’

AC.259.심화 1. ‘창49: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창49:17) Dan shall be a serpent upon the way, an adder upon the path, biting the horse’s heels, and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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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9:5

 

 

AC.259, 심화 2, ‘시49:5’

AC.259.심화 2. ‘시49:5’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시49:5)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Ps. 49:5). 스베덴보리가 AC.259에서 시49:5의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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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5:26

 

 

AC.259, 심화 3, ‘창25:26’

AC.259.심화 3. ‘창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창25:26) That his hand laid hold of Es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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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0, 창3:15, ‘당시의 교회에게 이미 주어진 계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60지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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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8, 창3:15, ‘상하게 할 것이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AC.258‘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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