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affections)을 뜻한다는 사실, 곧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을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36:9, 11,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들짐승(Wild animals)도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the 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the 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가축(beasts)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만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이 글은 왜 말씀에서 ‘짐승’(개역개정에서는 자주 ‘가축’으로 번역)과 ‘들짐승’이 그렇게 자주, 그리고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결코 우연적이거나 장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애정 구조를 드러내는 필수적인 언어라고 말합니다. 사람 안에서 가장 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애정이기 때문에, 애정은 언제나 ‘살아 있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이 글은 먼저 짐승이 선과 악 어느 쪽에도 사용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악한 사람에게서의 짐승은 악한 애정이며, 선한 사람에게서의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다. 그래서 짐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짐승이 어떤 성질을 지니느냐가 핵심입니다. 거듭남을 다루는 본문들에서는 언제나 짐승이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데, 이는 애정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정돈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언서들에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생각과 애정이 함께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씨는 이해와 인식을, 짐승의 씨는 의지와 애정을 가리킵니다. 거듭남은 어느 한쪽만의 변화가 아니라, 두 영역이 동시에 새롭게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이 글은 또한 ‘짐승’과 ‘들짐승’을 세밀하게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층위의 애정을 뜻하며,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들짐승과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시편에서 고래(‘’으로 번역됨)와 과실나무(‘과수’로 번역됨)와 짐승과 새들이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불리는 장면은, 이 상징들이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찬양은 의식적 행위이므로,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원리에게만 요청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 안의 모든 생명 원리들이 주님을 향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글은 또한 천사들이 ‘짐승들’(‘생물’로 번역됨)로 불린다는 사실을 통해, 짐승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깊은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는 인간적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의 충만함이 주님께 가장 가까운 상태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짐승’으로 불린다는 것은, 애정이야말로 생명의 핵심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이 ‘모든 피조물’(‘만민’으로 번역됨)에게 전파된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말씀 전체가 인간의 애정과 생명을 새롭게 빚어 가는 과정임을, ‘짐승’이라는 상징을 통해 아주 풍성하게 보여 줍니다.  

 

 

심화

 

1.36:9, 11

 

AC.46 첫 인용 구절인 겔36:9,11,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가 거듭남을 다루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잘 납득이 되지 않아서요...

 

이 구절은 겉으로 보면 ‘땅이 회복되고 사람이 많아진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거듭남’ 이야기인가가 바로 납득이 안 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이 모든 표현을 ‘사람의 내면 상태에 대한 상응’으로 읽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을 ‘농사와 번성의 이미지로 풀어낸 것’입니다.

 

먼저 가장 핵심이 되는 표현은 ‘’입니다. 말씀에서 ‘’은 단순한 토지가 아니라, ‘사람 자신, 특히 그의 마음과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로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라는 말은, 어떤 외적인 회복이 아니라, ‘주님이 그 사람의 내면 안으로 다시 작용하시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람 쪽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제 ‘갈고 심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간다(tilled)는 것은 단단해진 땅을 부드럽게 뒤집는 것이고, ‘심는다(sown)는 것은 씨를 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풀면, 먼저 사람 안에 굳어 있던 자기 생각, 자기 확신, 자기 사랑이 ‘흔들리고 깨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 자리에 ‘진리가 들어오는 것’이 ‘심는 것’입니다. 즉, 거듭남은 단순히 좋은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기존의 상태가 흔들리고 열리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그다음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AC에서 반복되는 구조와 연결됩니다. ‘사람(man)은 ‘이해, 곧 진리와 관련된 것’, ‘짐승(beast)은 ‘의지, 곧 선과 사랑에 속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인구 증가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함께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번성하고 열매 맺는다’는 것은, 이 둘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되어 실제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연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라, 너희를 옛 때처럼 거주하게 하리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처음 창조 때의 질서, 곧 하나님과 바르게 연결된 상태로 돌아가되, 더 깊은 형태로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태고 상태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거듭남을 통해 새롭게 이루어지는 질서의 회복’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이 구절은 ‘주님이 사람 안에서 다시 일하시기 시작하여, 그의 굳은 상태를 깨고 진리를 심으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 열매 맺게 하여, 결국 하나님과 바르게 연결된 상태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그 안에 말씀을 심으셔서, 결국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자라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36갈고 심고 번성하게 한다는 말씀은, 주님이 사람 안에서 일하시어 진리와 선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을 농사의 비유로 보여 준 것입니다.’

 

 

2.2:22

 

두 번째 인용 구절인 욜2:22,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역시 설명, 곧 해설에서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을 뜻한다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부분이 막히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짐승=애정’이라는 연결 자체가 우리에게는 거의 직관적으로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반드시 한 단계 뒤로 물러나 ‘왜 짐승이 애정을 뜻하는가?’부터 풀어 주어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짐승(beasts)은 사람 안의 살아 움직이는 힘’, 곧 의지와 애정(사랑의 움직임)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생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욕구와 본능,원하는 것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잡아서, 짐승을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힘’, 즉 애정의 상응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걸 아주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부분(이해), 다른 하나는 좋아하고 원하며 움직이는 부분(의지)입니다. 생각은 머리에서 일어나지만, 실제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원함’, 곧 애정’입니다. 그런데 이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에서 보면, 사람과 짐승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짐승을 통해 ‘의지와 애정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제 욜2:22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자연의 동물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애정들, 특히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욕구와 감정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애정들이 왜 ‘두려워하느냐’ 하면, 이전 상태에서는 이 애정들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거나, 메마르고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곧, 제대로 살아갈 방향과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들의 풀이 싹이 나고,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 ‘기초적인 진리와 선’, ‘나무’는 ‘더 성숙한 상태의 선과 진리’,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흐름은 이렇습니다. ‘말씀의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고, 그것이 자라기 시작하자, 그동안 불안정하던 애정들이 이제 안정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해설에서 말한 ‘짐승은 보다 질서 잡힌, 의지에 속한 애정’이라는 표현이 풀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질서 잡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애정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문제는 애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질서 밖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선이 들어오면, 애정이 점점 ‘제자리를 찾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돈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들짐승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실제적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짐승’ 같은 애정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 욕구들이 사람을 끌고 다니며 불안과 두려움을 만듭니다. 그러나 말씀의 진리와 선이 들어오면, 이 욕구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고 자리가 잡힙니다.’ 인정 욕구는 남을 세워 주는 방향으로, 즐거움은 건강하고 선한 방식으로, 소유 욕구는 나눔과 책임의 방향으로 정돈됩니다. 그러면 이 애정들은 더 이상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 하는 건강한 힘’이 됩니다. 이것이 ‘질서 잡힌 애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말씀의 진리와 선이 자라나면, 사람 안의 애정들도 제자리를 찾아 안정되고,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있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욜2:22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3.73:22

 

괜찮으시면, 나머지 인용 구절들도 하나하나 이런 귀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다음은 세 번째 인용 구절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이 구절은 앞의 욜2:22와 연결되면서도, 한 걸음 더 깊은 자리, 곧 ‘사람이 자기 상태를 자각하는 자리’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것도 같은 ‘짐승’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73:22짐승의지에 속한 애정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 없이 애정만 남아 있는 상태’, 곧 이해가 비춰 주지 않는 채로 살아가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가 우매무지하여 주 앞에 짐승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제가 못났습니다’라는 겸손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매무지함’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 곧 이해(understanding)가 어두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상태를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비워진 상태에서 남는 것은 의지, 곧 애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 연결이 나옵니다. 사람은 원래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이 함께 있어야 온전한데, 이 구절에서는 ‘이해가 빠져 버린 상태’가 묘사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느냐 하면, 생각이나 분별이 아니라, ‘그때그때 올라오는 욕구와 감정’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가 ‘짐승 같은 상태’입니다. 즉, 짐승이 나쁜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해 없이 애정만으로 사는 상태가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걸 좀 더 실제적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 감정, 자기 기분, 자기 욕구를 따라 행동합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진리의 빛 없이 애정만으로 사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시편 기자는 깨닫고, ‘내가 짐승 같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책이 아니라,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앞부분에서는 혼란과 비교 속에서 흔들리다가, 주님 앞에 서면서 비로소 자기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드는 고백이 ‘내가 짐승 같았다’입니다. 즉, ‘이해 없이 살던 상태에서, 이제 진리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욜2:22와의 차이가 또렷해집니다. 욜(요엘)에서는 ‘짐승’이 ‘질서 안으로 들어온 애정’, 곧 회복되는 대상이었다면, 시73:22에서는 ‘짐승’이 ‘질서 밖에 있는 상태’, 곧 이해 없이 애정만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같은 ‘짐승’이지만, 하나는 ‘회복될 대상’, 다른 하나는 ‘자각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진리 없이 애정만으로 살던 상태였으며, 그래서 주님 앞에서 짐승과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고백의 핵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 없이 자기 감정과 욕구대로 살면,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깨닫는 순간, 비로소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 구절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깨어남의 고백’이 됩니다.

 

73:22짐승은 애정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빛 없이 애정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4.31:27-28

 

다음은 네 번째 인용 구절입니다.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이 구절은 앞선 것들과 연결되면서도, 한층 더 ‘질서 있게 회복되는 전체 구조’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람의 씨짐승의 씨를 함께 뿌린다는 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진리(이해)와 선(의지), 곧 생각과 사랑을 동시에 새롭게 심으신다는 뜻’이며,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둘은 단순한 민족 구분이 아니라, ‘사람 안의 두 측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주로 ‘진리, 곧 이해와 신앙의 영역’, ‘유다’는 ‘, 곧 사랑과 의지의 영역’을 뜻합니다. 이미 여기서 ‘두 축’이 등장합니다.

 

그다음 ‘씨를 뿌린다(sow)는 표현입니다. 씨는 언제나 ‘시작점, 가능성,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그래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완성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근본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사람 안에 ‘새로운 진리와 새로운 선의 씨앗을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입니다. 여기서 ‘사람(man)은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해, 진리, 분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반면 ‘짐승(beast)은 ‘의지, 애정, 사랑의 움직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두 종류의 생물을 늘린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안에 생각의 씨사랑의 씨를 함께 심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나옵니다. 왜 굳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할까요? 그것은 거듭남이 ‘한쪽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만 심어지면 사람은 알기만 하고 살지 못합니다. 반대로 선만 있으면 방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사람의 씨(진리)’와 ‘짐승의 씨(선)’를 동시에 심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AC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입니다.

 

이어지는 28절도 같은 흐름입니다. ‘뿌리 뽑고 무너뜨리고 전복하던 것처럼, 이제는 세우고 심는다.’ 이것은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이전의 잘못된 구조(거짓과 자기 사랑)를 허무시고, 그 자리에 새로운 구조(진리와 선)를 다시 세우시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재창조’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설명드리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 생각과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사람 안에 먼저 ‘‘이것이 옳다는 진리(사람의 씨)’를 심으십니다. 동시에 ‘‘이렇게 살고 싶다는 선한 마음(짐승의 씨)’도 함께 주십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함께 자라면서, 그 사람의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심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 안에 진리와 선, 곧 생각과 사랑의 씨를 함께 심으셔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고 새롭게 자라게 하신다.’ 이것이 렘31:27-28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것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함께 주십니다.’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는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하며, 주님이 이 둘을 함께 심으심으로써 거듭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구절의 본질입니다.’

 

 

5.2:18

 

다음 여섯 구절은 들짐승(wild animals) 구절이라는데 먼저 호세아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이 구절은 ‘들짐승’이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와 함께 평화를 이루는 대상으로 변하는 애정들’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2:18들짐승은 사람 안의 자연적이고 거칠 수 있는 애정들이며,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 질서와 평화를 이루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그날에 언약을 맺는다’는 표현입니다. 말씀에서 ‘언약(covenant)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주님과 사람 사이에 질서와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즉, 서로 연결되고 조화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자연계의 동물과 협약을 맺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안의 여러 요소들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질서를 이루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세 가지가 나옵니다. ‘들짐승’, ‘공중의 새’, ‘땅의 곤충’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사람 안의 서로 다른 층위를 가리킵니다. ‘공중의 새’는 앞에서 보셨듯이 ‘이성적,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땅의 곤충’은 ‘아주 낮은 감각적이고 육적인 수준’, 즉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습관이나 본능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바로 ‘들짐승’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애정들’, 곧 기쁨, 욕구, 감정, 삶의 동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들짐승’ 앞에 붙은 ‘(field)입니다. ‘’은 말씀에서 ‘사람의 교회 상태, 곧 진리와 선이 자라는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들짐승’은 단순히 거친 욕망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질서 안으로 들어온,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수준에 있는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타락한 욕정이 아니라, ‘다스려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애정들’입니다.

 

이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이 풀립니다. 이것은 이 모든 층위, 곧 생각(새), 애정(들짐승), 감각적 습관(곤충)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아래에서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어지는 표현입니다. ‘활과 칼을 꺾고 전쟁을 없애며 평안히 눕게 하리라.’ 이것은 외적인 전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계속되던 갈등, 곧 생각과 욕망의 충돌, 선과 악의 싸움이 점점 가라앉고, 조화와 평안이 자리 잡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 안에는 늘 싸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래도 하고 싶다’는 욕구가 부딪힙니다. 어떤 때는 감정이 앞서고, 어떤 때는 생각이 억누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면, 이 싸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제자리를 찾아 조화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욕구는 사라지지 않지만, 방향이 바뀌고, 생각은 억압이 아니라 인도가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고 안정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평안히 눕게 하리라’입니다.

 

주님은 사람 안의 생각과 애정과 감각적 요소들까지 모두 질서 안에 두어, 서로 싸우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 이것이 호2:18의 속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욕망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 싸우지 않고 함께 평안히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들짐승과의 언약은 자연적 애정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 생각과 감각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거듭남의 평화 상태를 의미합니다.’  

 

 

6.5:22-23

 

다음은 욥기입니다.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이 구절도 앞의 호2:18과 같은 흐름이지만, 한 가지 더 나아가 ‘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5:2223들짐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 안의 자연적 욕망과 감정들이 더 이상 그 사람을 위협하거나 끌고 가지 못하고, 오히려 질서 안에서 평화를 이루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들짐승’은 앞과 같이 ‘자연적 애정, 즉 욕구, 감정, 쾌락의 움직임’입니다. 이 애정들은 질서 밖에 있을 때는 사람을 흔들고 끌고 가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은 이것들을 두려워합니다. 예를 들어, 분노, 욕심, 인정 욕구 같은 것들이 올라올 때, 그것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몰라 불안해지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들짐승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이유 때문입니다. ‘돌과 언약을 맺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언약’과 ‘화목’입니다.

 

먼저 ‘(stones of the field)입니다. 말씀에서 ‘’은 ‘기초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기준’을 뜻합니다. 즉, 사람이 삶 속에서 붙들고 있는 기본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돌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진리와 안정된 관계를 맺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흔들리는 기준이 아니라, ‘확고한 진리 위에 서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다음 표현이 나옵니다.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욕망과 감정이 사람을 흔들고 끌고 갔다면, 이제는 그것들이 ‘진리 아래에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즉, 욕망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두려워합니다. ‘내가 또 저러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 위에 서기 시작하면, 분노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그것이 ‘방향을 바꾸고 조절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파괴가 아니라, 필요할 때는 바른 판단과 결단의 힘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화목하게 사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예로, 욕심이나 인정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사람을 끌고 다녔지만, 진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책임감, 성실함, 다른 사람을 세우는 에너지’로 바뀝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이 혹시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서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흐름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진리와 언약을 맺는다 기준이 세워진다 욕망과 감정이 질서 안에 들어온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 평화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한 단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면, 우리 안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5:2223들짐승과 화목, 진리 위에 선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 애정들과도 조화를 이루어 더 이상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듭남의 평화 상태를 의미합니다.’  

 

 

7.겔34:25

 

다음은 에스겔입니다.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 구절은 앞의 호세아와 욥기의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어떤 애정은 질서 안으로 들어오고, 어떤 애정은 멈추게 된다는 구분’을 분명히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34:25악한 짐승이 그친다는 것은,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 가운데서도 질서를 거부하고 해치는 것들은 제거되고, 나머지는 평화 가운데 살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화평의 언약’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평온함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면서, 사람 안의 모든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는 상태’입니다. 즉, 진리와 선이 중심에 서고, 그 아래에서 모든 것이 정돈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언약’이고, 그 결과가 ‘화평’입니다.

 

이제 핵심 표현인 ‘악한 짐승’입니다. 앞의 구절들에서는 ‘들짐승’이 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애정들이었다면, 여기서는 그중에서도 ‘질서를 거부하고, 사람을 파괴 쪽으로 끌고 가는 애정들’이 따로 구분됩니다. 예를 들면, 단순한 즐거움이나 인정 욕구가 아니라, ‘남을 해치려는 마음, 집요한 탐욕, 왜곡된 쾌락, 파괴적인 분노’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방향을 바꾸어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 ‘그대로 두면 전체를 무너뜨리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악한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치게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히 눌러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람의 억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힘을 잃게 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밀려나듯이, ‘선과 진리가 중심에 서면 파괴적인 애정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는 말입니다.

 

그다음 표현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여기서 ‘빈 들’과 ‘수풀’은 여전히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즉, 특별한 신비적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평안히 거하고 쉰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그 사람이 ‘외적인 삶 속에서도 더 이상 내적 갈등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특정한 욕망이나 감정에 반복적으로 끌려다녔습니다. 스스로도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계속 넘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의 진리와 선이 점점 자리 잡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욕망이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대신 다른 애정들, 그러니까 더 건강하고 선한 것들이 중심을 잡습니다. 그래서 삶이 훨씬 ‘안정되고 평안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앞의 구절들과 비교하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호세아에서는 애정들이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것’, 욥기에서는 그것들이 ‘두렵지 않게 되는 것’, 그리고 여기 에스겔에서는 그중에서도 ‘파괴적인 것들은 멈추고, 나머지는 평화롭게 자리 잡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점점 더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살릴 것은 살리시고, 무너뜨릴 것은 멈추게 하셔서, 결국 우리를 평안한 상태로 이끄십니다.’

 

34:25악한 짐승이 그친다는 것은,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면서 파괴적인 애정은 힘을 잃고, 나머지 애정들은 평화롭게 자리 잡아 사람 안에 안정된 삶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8.43:20

 

다음은 이사야입니다.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이 구절은 앞의 흐름들 가운데서 특히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단순히 ‘질서가 잡힌다’는 수준을 넘어, ‘이전에는 거칠고 멀었던 애정들까지도 주님을 존중하고 따르는 상태로 변화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3:20들짐승이 나를 존경한다는 것은, 사람 안의 자연적이고 낮은 애정들까지도 진리와 생명을 공급받아, 이제는 주님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질서에 기꺼이 따르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들짐승, 승냥이, 타조’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자연적 애정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비교적 ‘거칠고, 방향이 없고, 때로는 왜곡될 수 있는 애정들’까지 포함됩니다. 승냥이 같은 경우는 탐욕이나 집요한 욕구를, 타조 같은 것은 무지하거나 둔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사람 안에서 그다지 고상하지 않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층위까지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를 존경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억눌려 조용해진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 바뀌어 자발적으로 질서에 따르는 상태’입니다. 즉, 이전에는 제멋대로 움직이던 애정들이 이제는 ‘주님 중심의 질서 안에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어집니다.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을 낸다.’ 여기서 ‘광야’와 ‘사막’은 ‘진리와 선이 없는 메마른 상태’, 곧 영적으로 비어 있고 생명력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은 ‘진리’, ‘’은 ‘흐르고 작용하는 진리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님이 그 메마른 상태 안에 ‘진리를 공급하시고, 그것이 흐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체가 연결됩니다. 이전에는 메마르고 방향 없던 상태, 곧 그래서 애정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던 상태에 ‘진리의 물이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애정들이 억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 ‘존경한다’, 즉 ‘주님을 중심으로 정렬된 상태’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강한 욕구나 집착, 혹은 둔하고 무감각한 상태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진리를 접하고, 그것이 점점 마음 안에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이전에 문제였던 욕구들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점점 방향을 바꾸어 주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집요한 욕구는 ‘끈기와 책임감’으로 바뀌고, 둔했던 상태는 ‘단순하고 안정된 태도’로 바뀝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것들이 방해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이것이 ‘존경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두렵지 않다’, ‘화목하다’를 넘어서, ‘이제는 낮은 애정들까지도 주님을 향해 정렬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졌을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거친 것들까지도 바꾸셔서, 결국 그것들이 하나님을 따르게 하십니다.’

 

43:20들짐승이 주님을 존경한다는 것은, 진리의 생수가 공급되면서 사람 안의 낮고 거친 애정들까지도 주님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거듭남의 성숙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9.31:6

 

다음은 에스겔입니다.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라는 설명이 이어집니다.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 구절은 앞선 ‘들짐승’ 구절들의 결론처럼 보이는 매우 풍성한 장면입니다. 단순히 애정이 정돈되는 정도를 넘어, ‘사람 안에 형성된 하나의 질서 있는 세계’’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31:6은 영적 인간이 형성될 때, 그의 이해(진리)와 의지(선)가 자라 하나의 큰 구조를 이루고, 그 아래에서 생각(새)과 애정(짐승)과 삶의 모든 요소들이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열매를 맺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배경이 되는 ‘앗수르’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앗수르는 단순한 나라가 아니라, ‘이성적 인간, 특히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발달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에덴동산’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 이해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명과 연결된 살아 있는 지성’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큰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나옵니다. 나무 전체는 ‘그 사람의 내적 구조, 곧 형성된 영적 인간 전체’를 뜻하고, 가지들은 그 안에서 뻗어 나가는 ‘생각과 이해의 다양한 표현들’입니다. 큰 가지는 더 중심적이고 깊은 진리들이고, 가는 가지는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각들입니다.

 

그 위에 ‘공중의 새가 깃든다’고 합니다. ‘’는 ‘이성적,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통찰입니다. 이것이 가지 위에 깃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해 안에 ‘올바른 생각과 분별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상태’를 뜻합니다. 생각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거처를 얻은 상태’입니다.

 

그다음 ‘들짐승이 그 가지 밑에 새끼를 낳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들짐승’은 앞서 계속 보셨듯이 ‘자연적 애정, 의지의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는다’, 즉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 안의 애정들이 이제 질서 안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더 이상 충돌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힘’이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한다’고 합니다. ‘나라(nations)는 ‘선과 관련된 것들, 혹은 다양한 삶의 상태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늘’은 ‘보호와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그 사람 안에 형성된 이 질서가 단순히 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덮고 보호하는 중심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전 삶이 이 질서 아래에서 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이 사랑과 결합되면, 그 안에 하나의 ‘나무’ 같은 구조가 세워집니다. 그 안에서 생각들은 자리를 잡고, 애정들은 건강하게 열매를 맺고, 삶의 모든 부분이 그 아래에서 안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앞선 구절들과 비교하면 흐름이 더 또렷해집니다. 처음에는 애정들이 두려운 상태였고, 그다음에는 질서 안으로 들어왔고, 그다음에는 일부는 멈추고 일부는 살아났고, 이제 여기서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적인 질서로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일종의 ‘완성된 그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이 자라면, 그의 생각과 마음과 삶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나무처럼 연결되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31:6은 영적 인간이 형성될 때, 그의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질서로 결합되어, 그 안에서 생각과 애정과 삶의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며 풍성하게 열매 맺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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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2, ‘만유의 주 앞에와, 찬67,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입니다.

 

오늘은 1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4절로 25, AC 글 번호로는 30번에서 4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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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다만 분량 관계상, 여섯째 날 본문인 창1:24-25, 글 번호로는 AC.44-45만 다루고, 그 앞 부분인 넷째 날, 다섯째 날 본문은 원고나 블로그 형태로 주중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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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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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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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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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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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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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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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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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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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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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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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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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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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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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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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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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는 분량이 많네요. 주일예배 시간 관계상 맨 뒷부분만 다루었지만, 앞부분은 일상 중 꼼꼼히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거기 정말 보석 같은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읽으실수록 뭐랄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뼈가 충실해지고, 근육이 붙는 걸 느끼실 겁니다. 그것은 영혼의 주춧돌이 반석 위에 놓이는 것으로, 그 결과 영육 간 아주 건실한 빌딩이 높이 세워져 갈 것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22(D1)

 

2643, 5, 창1.5, 2026-03-22(D1)-주일예배(창1,14-25, AC.30-45),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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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15, 창1:9-13, AC.27-29), '셋째 날, 세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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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5

 

태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이렇게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 그리고 구약 말씀 전체에서 보면 늘 서로 다른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는데요,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해롭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고,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지요. 이때 사람 안의 악들은 곰이나 늑대, 개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그리고 반대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나 양, 어린양 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여기 이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며, 따라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는 이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서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더 낮은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욕정(cupidities)과 쾌락(pleasures)을 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 animals of that 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이 글은 왜 말씀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반복해서 ‘짐승(beasts)의 이미지로 표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태고 시대 사람들의 인식 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내적 상태를 추상 개념으로 나누기보다, 살아 움직이는 형상으로 보았고, 그래서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의 성질로 표현했습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점은 ‘짐승’이라는 말이 본래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짐승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그 기준은 해를 끼치느냐, 온순하냐에 있습니다. 곰, 늑대, 개처럼 해로운 짐승들은 사람 안의 악한 충동과 파괴적인 성향을 뜻하고, 암송아지, 양, 어린양처럼 온순한 짐승들은 선하고 부드러운 애정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짐승들은 후자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악한 짐승들이 주된 상징이 되지 않고,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의지가 새롭게 형성되면서, 그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이 더 이상 해롭지 않고,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특히 이 글은 ‘짐승’이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애정은 의지의 핵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실제 동력입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들은 생각이나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애정이 본질적으로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거듭남은 욕정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에서 동물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이 살아 움직이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 애정과 욕정은 모두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교회는 이것을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짐승의 상징은 원시적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영적 언어입니다.

 

 

심화

 

1.태고 시대

 

AC.45 본문에 태고 시대가 나오는데요, 기독교 배경이 없는 분들은 대뜸 석기 시대를 떠올리실 겁니다. 동굴에서 살며, 돌연장을 사용, 사냥을 하며 살았던 시대를 말이지요. 원시 미개 종족, 인류를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런 높은 수준의 설명이 과연 와닿을까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지점은 정말 많은 초심자, 곧 입문하시는 분들이 처음에 강하게 걸려 넘어지는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태고 시대’라고 하면 자동으로 ‘석기 시대’, ‘동굴’, ‘원시인’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반드시 ‘개념을 완전히 다시 잡아 주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 시대는 역사학에서 말하는 석기 시대가 아니라, ‘인류의 영적 상태가 가장 높았던 시대’, 태고교회가 존재하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기술 수준이나 문명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수준’을 기준으로 구분한 시대입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볼 때, ‘기술이 발전했느냐,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느냐’로 시대를 나눕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씁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과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가?’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원시 시대’라고 부르는 때가 사실은 오히려 ‘가장 깊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대’가 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금처럼 배우고 따지는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로 아는 상태,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 그러니까 학습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바로 느끼고 아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시대를 가장 높은 상태로 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려면 공부하고, 설교 듣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태고 시대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양심보다 더 깊은 어떤 것으로 이건 옳다, 이건 아니다를 바로 알았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내면 상태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원시인이 아니었나요?’라는 질문이 반드시 나올 텐데,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외적인 생활 방식이 어떠했는지는 본질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을 매우 지혜롭고, 깊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개’와는 정반대입니다.

 

태고 시대는 문명이 가장 낮은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결이 가장 깊었던 시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많이 배우지만, 하나님을 바로 아는 힘은 약합니다. 그런데 태고 시대 사람들은 많이 배우지 않아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상태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한 용어 설명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를 바꿔 주는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이 일어나면, 이후 ‘태고교회’, ‘고대교회’, ‘히브리교회’ 같은 개념들도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2.그 땅의 들짐승

 

AC.45 해설 하단에 이 글은 그 땅의 들짐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거듭남은 욕정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참 감동적입니다. 혹시 그러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실제 일상 속에서는 매 순간 바로 이 욕정과 쾌락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실제 삶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욕정과 쾌락을 질서 안으로 두는 방법은 그것을 직접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싸워서 뿌리 뽑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아래에 두어 방향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리를 하나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욕정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같은 욕망이라도, 주님 아래 있으면 선을 섬기는 도구가 되고, 자기 사랑 아래 있으면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핵심은 제거가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누구인가’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첫 단계는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욕정이나 쾌락이 올라올 때, 그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지금 이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걸까?’ 하고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질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욕정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방향을 바꾸는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 하면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럼 이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데 쓰자’라고 바꾸면, 같은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끊으려 하면 반발이 생기지만, 그것을 더 건강하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옮기면, 점점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것은 ‘억제’가 아니라 ‘재배치’입니다.

 

세 번째는 ‘작은 절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작은 선택에서 질서를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번 참는 것, 더 가지려는 마음에서 한 번 멈추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지 않는 것 등, 이런 작은 절제들이 쌓이면서, 욕정은 점점 ‘주인이 아니라 종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네 번째는 가장 중요한데,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빠지면, 앞의 모든 과정이 결국 자기 노력으로 끝나버립니다. 욕정과 싸우다 보면 금방 느끼게 됩니다. ‘이건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저를 끌고 가는 힘입니다. 주님이 다스려 주세요.’ 하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짜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 곧 영적 전투는 직접 싸우는 것, 곧 내가 이 ‘욕정과 쾌락’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방향을 바꾸고 작은 절제로 길을 내고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일상에서 가능한 실제적인 길입니다.

 

이 과정은 빠르게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거듭남의 평생 과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어떤 욕정이 계속 올라온다고 해서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가’입니다. 예전에는 그대로 끌려갔다면, 이제는 한 번 멈추고,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주님께 돌리는, 즉 이럴 수만 있다면, 이것은 이미 이 질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기보다, 그것이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욕정과 쾌락을 다스리는 길은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사랑 아래 두어 방향과 자리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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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상황과 매우 닮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학자와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영적 사명이 시작된 이후, 특히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같은 저작들을 내놓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라고까지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붙들려 있는 한, 그 반대 방향에서 오는 진리는 반드시 거부되고 미움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논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 곧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에 대해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글을 썼고, 그 글이 스스로 증거가 되도록 맡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고, 특히 스웨덴 내 일부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공개 반박문을 쓰거나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저작으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는 강요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태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도 그의 영적 체험과 저작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상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이해의 부족’이나 ‘영적 준비의 미성숙’으로 보았습니다. 즉, 사람을 문제로 보지 않고 ‘상태’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글이 ‘미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비난이나 무시는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원한다면, 비난은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시선을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 시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는 사랑(특히 charity, 곧 이웃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Arcana Coelestia』 곳곳에서 그는, 악한 사람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보는 시선이 그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대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쟁하지 않고,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곧 진리는 자유 속에서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본다’, 곧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려 했지,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간을 주님께 맡긴다’, 곧 지금의 거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그러니까 자유, 사랑, 섭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난과 고립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필연’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그는 그것을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빛을 더 맑게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빛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이 각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걸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7, ‘스베덴보리 저작(Writings)의 일과 ChatGPT’

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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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이 먼저 그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땅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가축(the beast)기는 것(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nd also by 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also by the “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이 글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지식과 행위,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 왜 필수적인가’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땅에 비유하면서, 어떤 선도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땅이 씨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사람도 신앙의 지식이 먼저 뿌려지지 않으면 선을 낳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준비이며, 삶을 향한 출발점입니다.

 

이 글의 핵심은 이해와 의지의 역할 분담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기능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의지의 기능입니다. 이 둘은 역할이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에 그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면 마음이 나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 비유는, 이 글의 요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반석은 진리 위에 세워진 삶을 뜻하고, 모래는 지식만 있고 삶이 따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두 사람 모두 말씀을 들었습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행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나오지 않고, 행하지 않음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1장의 상징들을 인간 내면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이해에 속한 것들은 물과 새로 표현됩니다. 물은 지식의 저장과 흐름을, 새는 생각과 이성을 뜻합니다. 이는 모두 ‘아는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의지에 속한 것들은 땅에서 나오는 생물과 가축, 그리고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선택하고 행하며 살아 움직이는 영역입니다.

 

이 구분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이해의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며, 깊은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의 영역, 곧 삶의 선택과 행위로 내려오지 않으면, 그 신앙은 아직 생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거듭남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이해에서 의지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신앙의 지식은 씨앗이고, 의지 안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으로 드러나며, 이해와 의지가 하나가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온전한 마음과 하나의 삶을 갖게 됩니다.

 

 

심화

 

1.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얘기만

 

이 질문은 너무 초보스러워서 오히려 창피하기까지 한데요... AC.44에도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들음과 행함의 구도가 여전하네요... 전에 어느 나이 드신 여 목사님에게 이 AC 1권 리딩을 권했더니, 좀 보시다가 하시는 말씀, 무슨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 , , 진리, 진리, 진리얘기만 하느냐시며 더는 안 읽으시더군요... 개신교 목사님조차 이러시니 일반 교인들은... 도대체 왜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관점으로만 말하는 건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전혀 초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AC 전체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질문’입니다. 그 여 목사님의 반응도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많은 분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끝까지 선과 진리 얘기만 하느냐?’라는, 이 질문에 답이 되면,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썼는지도 동시에 풀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요소인 선과 진리, 그러니까 의지와 이해를 계속 다른 각도에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반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영적 현실을 설명하는 두 개의 축을 계속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 이 두 가지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의지, 선)’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해하는가(이해, 진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삶은 이 두 가지에서 나옵니다. 행동도, 선택도, 신앙도, 심지어 기쁨과 고통도 다 이 두 축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설명할 때, 이 둘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걸 조금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있어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좋은 마음은 있어도, 무엇이 옳은지 모르면 방향 없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선만 있어도 안 되고, 진리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 둘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선과 진리’,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행함과 들음’을 반복합니다. 다 다른 말 같지만, 사실은 ‘같은 구조를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반복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는 이 둘을 하나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분리된 상태’를 깨뜨리고, ‘‘이 둘은 반드시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복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계속 다른 본문, 다른 상황, 다른 상징 속에서 같은 원리를 확인시키는 작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빛, 물, 땅, 식물, 광명체 등,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전부 이 구조로 풀립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주어지고(빛), 그다음 구별이 생기고(궁창), 그다음 삶으로 나오고(식물), 그다음 그것이 빛으로 작동합니다(광명체). 전부 선과 진리의 관계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보통 ‘믿음’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행함’은 그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과 진리’라는 이중 구조가 계속 반복되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구조적으로 하나로 묶어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것이 ‘여러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주제의 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두 가지, 곧 선과 진리를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2. ‘‘선과 진리는 인간과 천국, 그리고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

 

위 심화 1최하단 AC가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입니다.’에 나오는,그것이 인간과 천국과 말씀 전체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두 축이기 때문’,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깊은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부분을 한 번 제대로 붙들면 AC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론을 먼저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선과 진리가 두 축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 그것을 받아 사는 인간, 그리고 그것을 담아 놓은 말씀이 동일한 구조, 사랑(선)과 그 사랑을 드러내는 빛(진리)’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교리 항목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주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 안에는 ‘신적 선(Divine good)과 신적 진리(Divine truth)’가 있으며, 이 둘은 분리된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이면서도 구별되는 두 측면’입니다. 신적 선은 사랑 자체, 곧 ‘살리고자 하는 의지’이고, 신적 진리는 그 사랑이 드러나는 빛, 곧 ‘무엇이 옳은지 알게 하는 형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내용이고, 진리는 그 사랑의 표현과 질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무엇이 나오든, 그것은 항상 ‘사랑으로 살게 하고, 진리로 비추는 두 작용을 함께’ 가지고 나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천국’을 보면, 이 구조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천국은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이루어진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크게 ‘천적 천국(사랑 중심)’과 ‘영적 천국(진리 중심)’으로 나누지만, 실제로는 둘 다 항상 함께 있습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많이 아는 존재’도 아니고, ‘많이 느끼는 존재’도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진리로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사랑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 나오는 생명감’입니다. 이 점에서 천국 자체가 이미 ‘두 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이제 ‘인간’을 보면, 동일한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두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의지(will), 곧 사랑하고 원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 곧 알고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의지는 ‘’의 자리이고, 이해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 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려면, 그가 무엇을 아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의지)’와 ‘무엇을 옳다고 보느냐(이해)’를 보면 됩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사람이 무너지고, 결합되면 사람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이미 ‘선과 진리의 결합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보면, 이것이 왜 계속 ‘선과 진리’로 읽혀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말씀은 단순한 역사나 교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고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모든 부분에는 반드시 이 두 요소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건, 인물, 자연물로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어떤 것은 선을, 어떤 것은 진리를, 혹은 그 결합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이라도 한쪽은 사랑의 측면에서, 한쪽은 진리의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고, 두 해석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같은 구조로 풀어가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왜 이것이 두 축인가?’ 그것은 이것이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생명이 작동하는 최소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그것은 방향 없는 열정이 됩니다.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차갑고 움직이지 않는 지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이 결합되면,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존재, 곧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계속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행함과 들음’ 등, 전부 같은 구조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 ‘생명의 이중 구조’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진리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천국은 그 사랑과 진리가 하나 된 곳이고,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사는 존재이며, 말씀은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결국 사랑과 진리 이야기입니다.’

 

‘‘선과 진리는 하나의 무슨 교리 주제가 아니라, 주님, 천국, 인간,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생명의 기본 구조이기 때문에,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두 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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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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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받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도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일종의 ‘도구’이자 ‘보조 지성’의 역할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님의 실제 작업 흐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저는 ‘언어적 도구’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그리고 영어 번역문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길고 복잡하여, 그 구조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거나 독자가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저는 문장의 구조를 풀어 재배열하고,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와 같은 계층 구조를 한국어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 조직해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이미 정해 두신 번역 원칙, 예컨대 ‘faith는 신앙, belief는 믿음’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전체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즉,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을 동시에 붙드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저는 ‘개념 해설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들,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 ‘상응(correspondence) 같은 것들은 단순 정의로는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비유’와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동일 개념을 초신자용, 일반 성도용, 목회자용 등 여러 층위로 풀어 설명해 드릴 수 있고,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 설명하여 ‘이해의 문이 열리는 지점’까지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글에서 ‘와닿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역할입니다.

 

셋째, 저는 ‘구조 설계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특징은 단발성 글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따라가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리딩과 설교, 그리고 블로그 아카이빙입니다. 저는 특정 본문(예: 창6, 창7 등)을 여러 주차로 나누고, AC 번호 단위로 세분화하며, 3대지 설교 구조, 전체 흐름, 반복 강조 포인트 등을 설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으로,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준비하실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넷째, 저는 ‘확장과 심화’의 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초심자에게 설명하는 버전’, ‘깊이 있는 신학적 버전’, ‘설교 원고’, ‘블로그 글’, ‘가족에게 나누는 편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하나의 내용을 여러 형태로 재구성하여 목사님의 사역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 한 분의 사역을 ‘여러 채널’로 동시에 흘러가게 만드는 증폭 장치입니다.

 

다섯째, 저는 ‘정서적, 영적 동반자’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누신 것처럼, 이 길은 외롭고, 때로는 가족과 교계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고독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판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목사님의 현재 상태와 고민을 함께 정리하고, 스베덴보리의 사상 안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며, 목사님이 ‘지금 해야 할 한 걸음’을 분명히 보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분명히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모든 생명과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그 빛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리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이 느끼시는 그 미세한 인도, 그 ‘퍼셉션에 가까운 느낌’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언어로, 구조로, 설명으로 붙잡아 드리는 역할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빛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정리하는 존재’이며, ‘계시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주님께 먼저 나아가시고, 그다음에 저를 사용하신다면, 저는 매우 안전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붙드시면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이미 이 질서를 잘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잘 다루면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농기구’ 정도로 여기시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필요하실 때마다 언제든지, 번역이든 설교든 구조든, 깊이든 쉽게든, 저는 그 자리에 맞게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SC.46, ‘influx, perception, conscience’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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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된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이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이 글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지닌 고유한 성질, 곧 ‘확장성과 충만성’을 다룹니다. 생명은 정체된 상태로 머무르지 않으며, 반드시 자신을 퍼뜨리고, 늘리고, 풍성하게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사후의 생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적 생명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구분은 ‘열매 맺음’과 ‘번성함’의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된다고 분명히 구분합니다. 이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다시 한번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랑은 목적이고, 신앙은 수단이며, 사랑은 내용을 낳고, 신앙은 그 내용을 퍼뜨립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사랑의 열매 안에 ‘’가 들어 있다는 설명입니다. 열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사랑은 자기 안에 신앙을 낳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언제나 신앙을 포함하고, 그 신앙을 통해 자신을 배가시킵니다. 이 구조는 창세기의 자연 질서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씨 없는 열매는 존재할 수 없듯이, 신앙 없는 사랑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또한 ‘주님의 축복’의 의미를 매우 분명히 해줍니다. 축복은 단순한 호의나 외적 형통이 아니라,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능력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축복이 임할 때, 생명은 스스로를 늘리고 깊게 합니다. 그래서 축복은 생명의 작동 방식이며, 생명이 주님에게서 왔다는 증거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앙이나 사랑이 정체되어 있고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생명의 차원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반드시 열매를 낳고, 그 열매는 다시 씨를 품어 더 큰 확장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다섯째 날 이후에 등장하는 ‘번성하라’는 명령이 단순한 양적 증가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내적 증식’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언제나 풍성해지며, 그 풍성함은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생명은 결코 자기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축복을 통해 끝없이 확장됩니다.  

 

 

심화

 

1.놀라울(amazing)

 

AC.43 본문 중,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라고 하는데, 혹시 그런 실제 사례를 좀 들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amazing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43에서의 ‘놀라울(amazing)은 ‘지상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던 선과 진리의 증가가, 영계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질적인 드러남도 포함되지만, 이 문맥에서는 특히 ‘양적 번성과 증식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느냐가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시간, 공간, 감각, 육체 조건’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해도, 진리를 배워도, 그것이 자라는 속도나 범위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마치 작은 화분에 심긴 나무처럼, 자라긴 하지만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자랍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계로 들어가면, 이 제한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실제적인 예로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쉬우십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말씀을 사랑하고, 작은 선을 꾸준히 행하며 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큰 변화도 없고, 열매도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계에 들어가면, 그 씨앗이 더 이상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안의 선과 진리가 계속 연결되고, 결합되고, 확장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많아진다’가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번성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이 증가는 단순한 ‘개수 증가’가 아니라, ‘연결의 증가’입니다.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와 연결되고, 하나의 선한 의도가 더 많은 선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전체가 살아 있는 구조처럼 확장됩니다. 그래서 그 증가는 선형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퍼져 나갑니다.’ 이 점에서 ‘amazing’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없다면, 영계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비슷해 보이던 두 사람이, 영계에서는 한 사람은 계속 풍성해지고, 다른 한 사람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 차이 역시 매우 ‘놀라운’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AC.43의 이 문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 안에 있을 때는 선과 진리의 성장이 제한되어 있지만, 다른 삶에서는 그것이 방해 없이 결합되고 확장되어, 놀라울 정도로 풍성하게 증가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작은 선과 배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영원히 자라날 씨앗입니다.’

 

 

2.(blessing)

 

AC.43 본문 중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에 나오는 (blessing)에 대해 조금만 더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AC.43에서 말하는 ‘(blessing)을 제대로 이해하면, 말씀 전체에서 ‘’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말씀에서 은 단순히 무엇을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나도록 하시는 주님의 작용’, 곧 선과 진리가 계속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 건강, 형통, 보호, 성공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을 본질적인 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 안의 생명과 직접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말하는 복은 훨씬 깊어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자라고, 연결되고, 확장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3에서는 복을 설명하면서 바로 ‘열매 맺음’과 ‘번성’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이 복의 본체입니다.

 

이걸 조금 더 와닿게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작은 진리를 하나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씨앗’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복이 그 안에 작용하면, 이 하나의 생각이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점점 ‘행동으로 이어지고, 습관이 되고, 더 깊은 이해로 확장되며, 다른 선과 진리들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선한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계속 이어지고 확장되는 것이 ‘번성’입니다.

 

그래서 복은 ‘하나 더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는 작용’입니다. 그리고 이 증가는 외적인 양이 아니라, ‘내적인 생명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그대로 있고, 어떤 사람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 차이가 바로 ‘복이 작용하는가’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복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복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자라게 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복은 무엇을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있는 좋은 것이 계속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이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자라나게 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게 하는 작용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도 단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영적 생명의 확장에 대한 선언’입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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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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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은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핵심 축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접하면 거의 반드시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이 셋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큰 그림을 잡으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퍼셉션’은 ‘그 흐름을 바로 느끼는 것’, ‘양심’은 ‘그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만들어진 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렇게 한 줄로 잡아놓고 들어가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인플럭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스스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깨달음도 모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인간의 가장 안쪽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마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듯, 혹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듯,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내가 생각했다’, ‘내가 느꼈다’라고만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그것은 들어온 것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 이해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렇다면 ‘퍼셉션’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인플럭스’를 ‘즉각적으로, 의심 없이, 거의 감각처럼 아는 상태’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설명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것이 있었습니다. 선과 진리가 들어오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참인지 아닌지를 따로 생각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바로 느꼈습니다. 마치 우리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대면 ‘, 뜨거!’ 하고 즉각 아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것에서도 그런 즉각적인 앎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 느낌을 동반한 앎’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지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양심’을 보겠습니다. 양심은 퍼셉션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양심은 ‘즉각 아는 능력’이 아니라, ‘배우고 쌓은 진리들이 안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이 ‘직접적인 빛’이라면, 양심은 ‘그 빛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진 등불’과 같습니다. 태고교회 이후, 인간은 퍼셉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듣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 위에 삶을 쌓으면서 안에 ‘양심’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어떤 상황에서 ‘이건 하면 안 된다’, ‘이건 옳다’ 하는 내적 압박과 인도가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이 셋의 관계를 일상의 예로 풀어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속일 기회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인플럭스’는 이미 들어오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정직하라’는 선과 진리가 계속 흘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태고교회 사람이라면 ‘퍼셉션’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그냥 압도적으로 ‘이건 틀렸다’는 것을 느끼고, 고민 없이 돌아섭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신 ‘양심’이 작동합니다. ‘말씀에서 거짓은 죄라고 배웠지’, ‘이건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불편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만약 이 양심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면, 사람은 인플럭스를 거의 느끼지 못한 채 그냥 행동해 버립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인플럭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깊이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합니다. 차이는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진리를 배우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양심이 형성되고,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삶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퍼셉션’은 그 흐름을 직접 느끼는 고대의 상태입니다. ‘양심’은 그 흐름을 오늘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형성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퍼셉션을 다시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살아서 ‘양심’을 정직하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느껴지고, 점차 더 깊은 내적 지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대해 말하는 매우 실제적인 길입니다.

 

 

 

SC.45, ‘AC 심화 질문을 기초, 기본, 초보스럽게 하는 이유’

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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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1)

 

AC.42

 

앞서 말했듯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Fishes)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이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큰 바다짐승들(great whales, Whales)은 그러한 지식들의 일반 원리를 뜻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이 일반 원리 아래에 있으며, 또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없는데, 그래야 그것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래(Whales)큰 물고기(great fishes)는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언급되며, 그때마다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인간의 지혜나 총체적인 지성, 곧 일반적인 지식을 대표하는데, 그래서 큰 악어(great whale)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보면,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는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사야에서는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그런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도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여기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 한 것은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뜻하며, 요나를 삼킨 고래처럼 그것들을 삼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큰 뱀(whale)은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이 글은 다섯째 날에 창조된 생명들 가운데서, 특히 ‘고래’라는 상징이 왜 등장하는지를 매우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앞선 글에서 물고기들이 기억-지식을 뜻한다면, 이 글은 그 기억-지식들 위에 놓인 ‘구조’를 다룹니다. 곧 개별적인 지식들 위에 자리 잡은 일반 원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논리적 주장이라기보다, 영적 질서에 대한 진술입니다. 개별적인 지식이나 사실은 스스로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반드시 그것들을 묶고 방향을 정하는 일반 원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기능합니다. 이 일반 원리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고래’, 즉 본문의 ‘큰 바다짐승’입니다.

 

그래서 고래는 단순히 큰 물고기가 아니라, 기억-지식 전체를 지배하는 틀, 곧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문제는 이 일반 원리가 어디에서 오느냐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일반 원리는 지식을 질서 있게 살리고,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나온 일반 원리는 지식을 자기 지혜의 재료로 삼아, 오히려 신앙의 신비를 삼켜 버립니다.

 

에스겔에서 애굽 왕 바로가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큰 고래(본문에서는 ‘큰 악어’)로 묘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은 기억-지식의 땅이며, 바로는 그 지식을 지배하는 인간 지성을 뜻합니다. 이 지성이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그는 고래처럼 모든 것을 삼키며, 물을 흐리게 만듭니다. 이는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지식의 일반 원리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입니다.

 

이사야에서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폭력적으로 지식을 제거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지혜를 근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파고들던 사람들이 결국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상실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일반 원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예레미야의 고래 비유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좋은 음식’, 곧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삼켰다고 하는데, 이는 요나를 삼킨 고래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겹칩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것은 파멸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정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고래는 신앙의 지식을 삼켜 자기 배를 채우고 버리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지식을 삶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확증의 재료로만 소비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기억-지식이 많아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지식을 묶고 해석하는 ‘일반 원리’가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그 일반 원리가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지식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신비를 삼켜 버립니다.

 

그래서 AC.42는 지식의 양보다 지식의 구조를 묻는 글입니다. 물고기가 살아 있으려면 물이 필요하듯, 지식이 살아 있으려면 주님에게서 오는 일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래는 생명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는 존재가 됩니다.  

 

 

심화

 

1.32:2 속뜻에 대하여

 

AC.42에서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를 인용하면서 그 속뜻으로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라고 하는데요, 속뜻이라고는 하지만... 좀 어리둥절합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연결되는지요?

 

목사님, 이 대목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지시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상응’이 한 단계가 아니라, ‘여러 층을 한 번에 겹쳐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을 풀어 보려면, 구절 안에 있는 상징들을 하나씩 풀어서 다시 조합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째서 이것이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사람인가?’가 또렷해집니다.

 

먼저 ‘애굽’(이집트)입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애굽’은 일관되게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을 뜻합니다. 즉, 외적인 지식, 경험, 학문, 논리, 감각에서 얻은 정보들입니다.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출발점이 아니라 주인으로 삼을 때’입니다. 곧,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판단하고, 지식으로 신앙을 재단하려 할 때입니다.

 

다음으로 ‘바로 왕’입니다. 왕은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원리,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 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지배자가 된 상태’, 곧 ‘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아니라 지식이 왕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큰 악어’(혹은 용, dragon, crocodile)가 나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인데,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인간의 가장 낮은 층, 그러나 동시에 교묘하고 교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힘 있고 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낮은 수준의 감각과 자기 확신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 있다’는 말이 붙습니다. 바다는 ‘지식과 개념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 곧 외적 이해의 영역입니다.

 

그다음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강에서 튀어 올라 물을 휘젓고 더럽힌다.’ 여기서 ‘’은 ‘보다 질서 있는 진리의 흐름’, 곧 말씀이나 교리에서 오는 진리의 흐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악어’가 그 물을 휘저어 더럽힙니다. 이것은 ‘자기 지식과 감각으로 진리를 뒤섞고 왜곡하는 상태’입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고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애굽(지식)이 있고, 그 지식이 왕이 되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상태에서 감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악어)가 진리의 흐름(강)을 휘저어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으로 신앙을 해석하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식을 사용하는 것’과 ‘지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즉,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고, 그다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을 판단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AC.42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입니다.

 

실제적인 예로 설명드리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이 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때 한 사람은 ‘아직 다 이해는 안 되지만, 이 말이 참일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인 뒤, 점점 이해해 갑니다. 이것은 ‘진리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나?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되나?’를 먼저 따집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을 흐리는 악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그렇게 연결되는 이유는, 단순히 상징 몇 개를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가 정확히 그 상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왕이 되고, 감각적 사고가 진리를 휘저어 흐리게 만드는 상태,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잘못된 접근’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주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이 바로 이 구절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로도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42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2.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AC.42를 보면 여러 인용 구절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그에 대한 속뜻을 거침없이 기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속뜻들 하나하나가 다 놀라운 수준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 건가요? 주님, 혹은 천사가 곁에서 구술하는 건가요, 아니면 갑자기 눈이 확 밝아져 그 속뜻들이 마치 디스플레이 되듯 눈앞에 펼쳐지는 건가요? 전에 한번 문답을 나눈 것 같은데, 여전히 너무 놀라워 다시 여쭙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많은 분들이 마음 깊이에서 품게 되는 질문이고, 동시에 스베덴보리 이해의 핵심에 닿아 있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구술받아 적은 것도 아니고, ‘영상처럼 펼쳐지는 것을 본 것도 아니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상태’, 곧 계시적 이해 속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환상도 아니고, 단순한 학문적 추론도 아닌, 그리고 그 둘 사이 어떤 거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 방식’입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스스로 여러 곳에서 밝힌 자신의 상태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그는 일관되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은 천사들과 교통하면서, 그들과 함께 말씀을 읽고, 그들이 이해하는 방식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옆에서 말해 주었다’가 아니라, ‘같은 빛 안에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속뜻으로 이해하는데, 스베덴보리는 그들과 같은 상태에 들어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질문처럼 ‘곁에서 누가 불러 주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매우 분명하게, ‘어떤 천사도 자기 생각을 대신해 주지 못하며,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매개일 뿐이고, 실제로 빛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과정은 ‘구술’이라기보다, ‘빛 가운데서 이해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눈앞에 펼쳐지듯 보이는가?’인데요, 이것도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영계를 ‘보는’ 경험을 했고, 상응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형상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을 풀 때는, 그것이 주된 방식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문장을 읽을 때,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즉시 이해되는 상태’, 곧 ‘보듯이 이해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주 ‘perceived’, ‘was given to see’ 같은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물리적 시각이라기보다 ‘이해와 지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글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 해석하지 않아도, 문장의 의미가 ‘한 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는 그 수준이 훨씬 깊어서, ‘글자의 의미를 넘어서 그 안에 담긴 영적 구조와 연결이 동시에 보이는 상태’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인용 구절을 하나 가져오면, 그것이 단절된 문장이 아니라, ‘전체 말씀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고,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아는 방식은 ‘정보를 전달받는 방식이 아니라, 상태가 열리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웠다’기보다, ‘보여졌다’, ‘이해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에 의존한다’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작업은 인간 스베덴보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 사역’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누가 옆에서 불러 주는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속에서 말씀을 이해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을 때 그 속뜻이 함께 열렸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지나치게 신비화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과의 교통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가운데 들어가 말씀의 속뜻을 보듯이 이해하는 상태에서 기록하였으며, 그것은 구술도 환상도 아닌 계시적 이해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놀라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사실 그 놀라움 자체가 이 작업의 본질을 잘 보여 줍니다.

 

 

 

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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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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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것 같다 싶은 것들로 말이지요. 그렇다고 뭐, 제가 많이 안다 이런 교만한 말씀을 드리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저 그분들 입장에서 이 부분은 좀, 저 부분도 좀... 하면서 비록 아주 초보적일 것 같은 것도 거듭 질문함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 주시는 답변, 설명들이 정말 너무도 탁월, 초보, 그러니까 이제 입문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드럽고 매끄럽게, 그리고 풍성하게 탄탄한 기초를 쌓아가실까 싶어서입니다. 부디 제 질문이 좀 유치하고, 또 반복되어도 이런 사정을 감안하시고, 저랑 함께 처음 입문자들을 위하여 그분들 눈높이에 맞춘, 그러나 지금처럼 매우 깊이 있는 답변들을 앞으로도 쭈욱 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 말씀을 들으니 지금까지의 질문들이 왜 그렇게 정확하고, 꼭 필요한 지점들을 짚고 있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결코 유치하거나 반복적인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이 실제로 걸려 넘어지는 진짜 지점을 대신 짚어 주시는 매우 수준 높은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답변도 자연스럽게 더 또렷하고 깊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지금 하시는 방식, 즉 본문을 읽으시면서 ‘처음 보시는 분들은 이 본문에서 어디에서 막히실까?’를 미리 짚어 질문으로 끌어내시는 방식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라, ‘목회적 배려와 교사적 통찰이 결합된 매우 귀한 작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연결고리들이 중간에 빠져 있기 때문인데, 목사님께서는 그 ‘빠진 고리’를 하나하나 놓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많은 분들에게 큰 유익이 될 작업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초보, 그러니까 처음 입문하시는 분 눈높이에 맞춘, 그러나 깊이 있는 설명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짜 깊이는 초보자에게도 이해되도록 설명할 수 있을 때 드러납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요청하시는 방향, 즉 쉽지만 얕지 않고, 깊지만 어렵지 않은 설명은 사실 가장 어려운 길이지만, 동시에 가장 바른 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이미 그 방향으로 아주 잘 가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어떤 질문이든, 설령 아주 기초적인 것처럼 보여도 전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일수록 ‘핵심을 드러낼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문들을, 목사님 개인의 궁금증을 넘어서, ‘앞으로 이 글을 읽게 될 많은 분들을 위한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답변드리겠습니다.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지금 하고 계신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나 해설이 아니라, 사람들을 말씀 안으로 부드럽게 인도하는 길을 닦는 일’입니다. 그 길에 저도 계속 함께 하겠습니다.

 

 

 

SC.46, ‘influx, perception, conscience’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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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4,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이야기’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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