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이 두려워한 내적 딕테이트(an internal dictate)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음성’(voice)이 갖는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음성’(voice of Jehovah)은 말씀 자체(the Word itself),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 양심(conscience) 또는 내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a taking notice inwardly),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책망(reproof)을 의미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천둥(thunders)도 ‘여호와의 음성들’(voices of Jehovah)이라고 불립니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를,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계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Rev. 10:3),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때 외적 음성과 내적 음성이 함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Rev. 10:7).

 

또 시편은 말하기를,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 33)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Ps. 68:32–33).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적 하늘들의 하늘’(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은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지혜를 의미하고, ‘음성’(voice)은 계시(revelation)와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를 의미합니다. 또,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29:3-5, 7-9)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Ps. 29:3–5, 7–9).

 

또 이사야서에는,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사30:30, 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라고 하였습니다.

 

 

해설

 

AC.219의 핵심은 창세기 3장 8절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이 실제 귀로 들리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여기서의 ‘음성’(voice)은 양심의 소리, 내적 깨달음,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책망과 경고를 의미합니다.

 

타락 이전의 태고교회 사람들은 퍼셉션(perception), 곧 직접적인 영적 지각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느끼고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 시작되자 그들은 더 이상 그 퍼셉션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다’는 것은, 주님의 내적 말씀과 양심의 경고가 여전히 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같은 음성이 평안과 기쁨이었지만, 죄를 지은 후에는 책망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발출, 주님의 계시, 양심의 역사, 내적 깨달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음성이 백향목을 꺾고 광야를 흔들며 숲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의 진리가 인간 안의 교만과 거짓을 드러내고 흔들어 놓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양심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양심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울리는 내적 음성입니다. 선한 상태에 있을 때는 그 음성이 위로와 인도처럼 느껴지지만, 악한 상태에 있을 때는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느껴집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8절에서 아담과 하와가 숨은 이유는 주님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변한 것은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같은 태양이 건강한 눈에는 빛이 되지만 병든 눈에는 고통이 되는 것처럼, 같은 주님의 음성이 순수한 상태에서는 기쁨이지만 타락한 상태에서는 두려움으로 경험된 것입니다.

 

결국 AC.219는 타락의 가장 깊은 결과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단순히 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랑하던 주님의 음성을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난 후 가장 먼저 주님에게서 숨으려 하고, 양심의 소리를 피하려 하며, 내적 책망을 외면하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영적 의미라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심화

 

1. ‘계10:3’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계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Rev. 10:3),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음성’(voice)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 진리의 선포, 그리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을 설명하면서,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여러 구절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계10:3입니다.

 

여기서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은 단순한 발성 행위가 아닙니다. 천사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와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라는 표현은 신적 진리가 강력하게 선포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자는 말씀에서 종종 진리의 능력과 권세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일곱 우레가 자기 음성을 발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레(thunder)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가 외적으로는 강력한 소리처럼, 내적으로는 계시와 깨달음처럼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9에서는 이 구절을 가리켜 ‘외적 음성과 내적 음성이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사의 외침은 외적 계시를, 우레의 음성은 그 계시가 사람의 내면에 울리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외부에서 진리가 선포될 뿐 아니라, 그것이 내면에서도 반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창3:8과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들은 ‘여호와의 음성’도 단순한 외부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내적 딕테이트였습니다. 계10:3의 우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그 소리가 전달하는 영적 의미와 내적 각성입니다.

 

또한 숫자 ‘일곱’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일곱’은 충만함,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우레’는 진리의 충만한 선포, 또는 하늘로부터 오는 완전한 증언을 상징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이어서 그 우레들이 말한 내용을 기록하려 하자 기록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계10:4). 스베덴보리는 이런 부분들을 통해, 어떤 영적 진리들은 단순히 문자로 기록되거나 자연적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보았습니다. 천사들의 언어와 내적 의미의 세계에는 문자적 언어를 초월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음성’이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전달이며, 외적으로는 계시로, 내적으로는 양심과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아담이 들은 ‘여호와의 음성’과 요한계시록의 ‘일곱 우레의 음성’은 형태는 다르지만, 같은 영적 원리를 가리킵니다. 곧 주님께서 인간에게 진리를 알리시고, 그 진리가 인간의 내면을 흔들고 깨우는 작용인 것입니다.

 

 

2. ‘계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Rev. 10:7).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음성’(voice)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와 진리의 선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을 설명하면서, ‘음성’이 말씀 전체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여러 구절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계10:7을 인용하며, ‘일곱째 천사의 음성’ 역시 단순한 발성 행위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곱째 천사의 음성’과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음성이 단순한 소리라면, 왜 그 음성과 함께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겠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근거로, 음성이란 계시의 전달, 진리의 선포, 주님의 뜻이 드러나는 작용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또한 ‘일곱째’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 완성이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째 천사의 음성’은 하늘의 진리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마지막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은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알려 주셨던 구원의 계획과 교회의 참된 상태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AC.219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의 내적 의미와 연결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들은 ‘여호와의 음성’은 자기들의 상태를 깨닫게 하는 내적 지시, 딕테이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계10:7의 ‘일곱째 천사의 음성’도 진리를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히는 계시의 음성입니다. 규모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습니다. 음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드러내며 깨닫게 하는 작용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비밀’은 결코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숨겨져 있는 비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절한 때가 되면 계시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음성’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신적 작용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이 구절은 ‘음성’이 곧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한다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창세기에서는 그 음성이 양심과 퍼셉션의 형태로 들렸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사의 선포와 비밀의 성취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둘 다 본질적으로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진리를 알리시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며, 사람을 깨우시는 동일한 신적 작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의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계시와 진리의 전달이며, 사람의 내면에서는 양심과 내적 딕테이트로, 교회 전체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선포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3:8의 ‘여호와의 음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들은 것도 결국 그들의 상태를 비추어 주는 주님의 계시의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3. ‘시68:32-33’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 33)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Ps. 68:32–33).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음성’(voice)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계시(revelation)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 가운데 ‘옛적 하늘들의 하늘’(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아주 높은 하늘이라는 뜻으로 보지 않고,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의 지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후대 사람들과 달리 지각(perception)을 통해 주님의 뜻을 직접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에 알려졌던 주님의 신적 통치와 인도를 가리키며, 이어지는 ‘그가 그의 음성을 내신다’는 말은 단순한 소리의 발성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와 내적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특히 AC.218-219의 흐름 속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내적 딕테이트였습니다. 따라서 AC.219는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음성’이 원래부터 계시와 양심, 내적 깨달음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웅장한 소리’(a voice of strength)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큰 소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힘’(strength)은 진리가 가진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깨우고, 거짓을 무너뜨리고, 선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음성은 언제나 ‘힘 있는 음성’입니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은 태고교회와의 연결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AC.218에서는 타락한 후손들에게도 아직 퍼셉션의 잔재가 남아 있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219에서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언급함으로써, 그 퍼셉션이 원래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태고교회가 누렸던 주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AC.219에서 시68:32-33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이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별히 ‘옛적 하늘들의 하늘’이라는 표현을 통해 태고교회 사람들이 가졌던 지각(perception)과 주님의 계시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190 이후 계속 따라오신 흐름 속에서 보면, 이 구절은 매우 아름답게 읽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바깥에서 들은 것이 아니라 안에서 알았습니다. 그것이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락 후에도 그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창3:8에서 아담과 하와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음성’은, 사실 태고교회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주님의 내적 부르심의 마지막 메아리였던 것입니다.

 

 

4. ‘시29:3-5, 7-9’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29:3-5, 7-9)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Ps. 29:3–5, 7–9).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voice of Jehovah)가 단순한 음향이나 천둥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신적 진리와 계시, 그리고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시편은 폭풍우가 지나가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천둥이 울리고, 백향목이 꺾이고, 광야가 흔들리고, 불꽃이 갈라지는 장엄한 자연 현상이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 현상에 대한 시적 묘사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에 인간의 영혼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신적 진리의 작용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다’는 말에서 ‘물’은 말씀의 진리와 신앙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이 물 위에 있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간의 이해와 신앙 위에 역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위엄차도다’라는 것은 진리 자체가 가진 능력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 힘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음성은 언제나 힘 있고 영광스럽습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신다’는 표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백향목은 말씀에서 흔히 인간의 높은 지성과 자랑스러운 이성적 능력을 상징합니다. 특히 레바논의 백향목은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와 학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이 그것을 꺾는다는 것은, 주님의 진리가 인간 own의 교만한 지혜와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신다’는 말에서 화염은 사랑과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진리가 인간 안의 사랑과 욕망을 분별하고 드러내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무엇이 천국적 사랑이고, 무엇이 자기 사랑인지를 밝혀 줍니다.

 

또한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시킨다’라는 것은 영적으로 황폐한 상태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진리와 선이 부족한 상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은 죽어 있는 양심을 흔들고, 잠든 영혼을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AC.219의 문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벗기신다’는 구절입니다. 오늘날 번역으로는 다소 낯설게 들리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출산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암사슴은 선한 애정과 순수한 정서를 상징하며, 새끼를 낳게 한다는 것은 선한 것들이 실제 삶 속에 태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숲을 벗긴다는 것은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시29 전체는 폭풍의 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음성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 위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교만한 백향목을 꺾고, 광야를 흔들고,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며, 숨겨진 것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창3:8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 음성은 아담과 하와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지각, 곧 퍼셉션의 흔적을 깨우는 내적 딕테이트였으며, 시29의 여호와의 음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면을 비추고, 흔들고, 드러내고, 때로는 책망하는 신적 진리의 작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여호와의 음성’은 귀로 듣는 소리라기보다, 영혼이 듣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AC.219는 바로 그 사실을 시29를 통해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사30:30-31’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사30:30, 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이 구절을 AC.219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목소리’(voice of Jehovah)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하며, 그 진리가 인간 own에서 나온 거짓된 추론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19의 전체 목적은 창3:8의 ‘동산에서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음성을 단순한 청각적 소리로 보지 않고, 양심과 퍼셉션 속에 울리는 주님의 내적 부르심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음성’이 언제나 계시와 진리의 작용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0장의 경우, 특히 ‘앗수르’(Asshur)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앗수르는 흔히 이성적 능력, 추론 능력, 지성(intellectual reasoning)을 의미합니다. 원래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own 안에 머물면서 이성을 주님 위에 두게 되면, 앗수르는 진리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재판하는 주인이 됩니다.

 

바로 AC.194-206에서 본 뱀의 길이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다’가 아니라, ‘내 감각과 내 이성이 납득해야 믿겠다’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라는 말은, 신적 진리가 인간 own의 교만한 추론을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진리 앞에서는 인간의 가장 정교한 논리도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AC.215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 사람은 결국 거짓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지만, 여호와의 음성은 그 거짓을 드러내고 깨뜨립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화염’, ‘폭풍’, ‘폭우’, ‘우박’ 역시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표현들은 진리가 인간 안의 거짓과 악을 심판하고 정화하는 다양한 작용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음성은 부드러운 위로의 음성일 뿐 아니라, 때로는 인간의 자기 확신과 교만을 무너뜨리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창3의 아담과 하와가 들은 음성과도 연결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자기들의 상태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숨겨진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기 own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빛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9에서 사30:30-31을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음성’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신적 진리이며, 특히 인간 own의 추론과 자기 지혜를 꺾고 진리 앞에 복종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와 이 구절은 서로 짝을 이루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전자는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 주고, 후자는 그런 인간적 지혜를 무너뜨리는 여호와의 음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의 이야기 전체는 바로 그 두 길, 곧 자신의 음성을 따르는 길과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길 사이의 갈림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8,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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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하는데, 이 내적 딕테이트는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지각(perception)의 남은 흔적이었습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잔여 지각을 보유하고 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두려워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숨었던 동산 나무 사이에(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은 사이에(midst)라고 불립니다. ‘나무(tree)는 앞에서와 같이 지각(perception)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치 하나만 남아 있는 것처럼 단수로 나무라고 말한 것입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해설

 

이 본문은 창3:8의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는 말씀을 내적 의미로 해설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지각의 마지막 흔적이 강조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스베덴보리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211AC.212에서 설명된 ‘interior dictate’와 같은 개념입니다. 즉 밖에서 들려오는 물리적 음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이것은 옳지 않다’, ‘이 길은 아니다’라고 알려주는 영적 자각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지각(perception)을 통해 직접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거의 사라지고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저녁 무렵의 시원한 바람을 뜻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상태로 읽습니다. 하루의 한낮이 밝은 지각의 상태라면, 서늘한 저녁은 지각이 점차 사라져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태고교회가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지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는 것은 단순히 두려워서 숨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은 내적 딕테이트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딕테이트가 자기들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213에서 말한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한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사람이 악을 의식하게 되면 주님을 미워하지는 않을지라도, 주님의 빛을 피하고 싶어집니다. 빛이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해설이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적 선 안으로 물러난 상태로 봅니다. 이미 이노센스와 깊은 퍼셉션은 잃어버렸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216에서 무화과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악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자연적 선 속으로 숨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무’를 단수로 표현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원래 동산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고, 그것들은 다양한 퍼셉션과 선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퍼셉션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나무’가 단수로 언급되는 것을, 마치 수많은 퍼셉션 가운데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AC.194-218 전체의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뱀의 유혹 이후 사람들은 감각과 자기 지혜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노센스를 잃었으며,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고, 무화과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내적 딕테이트가 남아 있고, 아직 부끄러움을 느끼며, 아직 자연적 선 속으로 숨을 수 있습니다. AC.218은 바로 그 마지막 남은 영적 생명의 흔적을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은 매우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후에도 주님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더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의식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숨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숨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가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AC.218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딕테이트의 잔재’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완전한 퍼셉션은 사라졌지만, 아직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은 상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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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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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6/2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5, ‘큰 영화로신 주’, 81, ‘주는 귀한 보배입니다.

 

오늘3 세 번째, 본문은 창3:6-7이고, AC 글 번호로는 207번에서 217입니다.  

 

먼저 본문,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3:6-7)

 

제목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

 

이며, 다음은 AC.207-217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입니다.

 

 

창세기 36절과 7절은 타락의 실제 과정과 그 결과를 보여 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6절은 의지와 이해가 뱀의 설득을 받아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7절은 그 결과로 순진무구함(innocence)이 사라지고 자기 의(selfhood)가 드러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두 절은 단순히 최초 인간 부부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아를 사랑하는 상태로 기울어 가는 영적 과정을 상징합니다.

 

창세기 3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로 시작됩니다. 이는 감각과 외적 사고가 뱀의 설득에 의해 영향을 받아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먹음직도 하고는 선에 대한 욕망처럼 보이는 것을,보암직도 하고는 진리처럼 보이는 것을,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이어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는 구절은 의지(여자)뿐 아니라 이해(남자)까지도 같은 설득에 동의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 전체가 자아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세기 37절은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를 보여 줍니다.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말씀은 참된 영적 시력이 열렸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연적 자각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벌거벗음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선과 진리를 상실한 상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결핍과 수치를 가리기 위해 외적인 진리와 도덕성으로 스스로를 꾸미려 했음을 뜻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외적 인간을 상징하므로, 이는 내적 생명을 잃은 사람이 외적 종교성이나 도덕성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요약하면, 6절은 하나님보다 자기 판단을 신뢰하게 된 과정, 7절은 그 결과 순진무구함이 사라지고, 자기 의와 외적 종교성으로 자신을 가리게 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절을 통해 모든 영적 타락의 본질은 금지된 열매 자체가 아니라 주님 대신 자신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며, 그 결과 사람은 참된 생명을 잃고, 외적인 것들로 자신의 영적 빈곤을 가리려 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태고교회의 이야기인 동시에, 오늘날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될 수 있는 영적 과정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전체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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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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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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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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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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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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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창3:7,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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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4, 창3:7, ‘벌거벗음’(naked)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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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5, 창3:7, ‘own’을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증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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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6, 창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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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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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링크들 중 오늘 예배 때 꼭 리딩했으면 하는 글들입니다.

 

 

AC.207,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AC.207-210)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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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0, 창3:6,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의 정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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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AC.211-21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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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AC.212.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저도 이런 기도를 늘 드려야겠어요... 이 구절은 AC.212를 읽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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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AC.213.심화 1. ‘순진무구’(innocence) ‘순진무구’(innocence)는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순진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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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3, 심화 5, ‘계3:18’

AC.213.심화 5.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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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6, 창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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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1, ‘마21:19’

AC.217.심화 1. ‘마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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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오늘 창3:6, 7 본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에 대한, 그러나 그 드러내시는, 너무나 놀라운 속뜻 앞에 우리 내면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확 밝아지며, 감사, 감동하게 됩니다. 오, 주님, 저희로 이 생명의 말씀 안에서 영원히, 그리고 새로운 한 주도 살아가게 하여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21(D1)

 

2656, 3, 창3.3, 2026-06-21(D1)-주일예배(창3,6-7, AC.207-217),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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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6/14, 창3:1-5, AC.194-206),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 변화, 그 중심의 이동’

※ 오늘(2026/06/1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4, ‘참 놀랍도다 주 크신 이름’, 찬80, ‘천지에 있는 이름 중’입니다. 오늘은 창3 두 번째, 본문은 창3:1-5이고, AC 글 번호로는 194번에서 206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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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심화

 

4. ‘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8장이 선의 상실과 황폐를 말한다면, 요엘 2장은 그 반대로 선의 회복과 생명의 회복을 말하는 본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가뭄과 황폐가 끝나고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가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농업 회복의 예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 선과 진리가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묘사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영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자연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상생활 속의 정직, 양심, 이웃 사랑, 책임감 같은 선한 삶이 다시 열매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AC.216과 연결해 보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창3에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무화과 잎, 곧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그리고 AC.217에서는 무화과나무 자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요엘서의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말씀은 단순히 나무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남아 있던 선한 요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본 렘8:12-13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적 선도 자연적 선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요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황폐(vastation) 이후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람 안에 선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맨 앞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들짐승은 종종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정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황폐한 시기를 지나더라도, 결국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다시 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보여 주는 마지막 예로 인용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둘이 함께 힘을 낸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신앙과 삶, 사랑과 행동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의 상실을 노래했다면, 요엘은 선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교회와 인간 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희망의 약속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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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3, ‘호9:10’

AC.217.심화 3.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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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심화

 

3.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포도(grapes)는 영적 선의 열매를, ‘무화과(figs)는 자연적 선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예레미야 8장에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는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함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9장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며 기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설명하기 위해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과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것’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광야는 원래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포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뜻밖의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포도는 영적 선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들 안에서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발견하시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first ripe fig)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 무화과도 귀하지만, 첫 열매는 가장 먼저 익은 열매로서 특별히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자연적 선이 아니라, 갓 나타나기 시작한 순수하고 신선한 자연적 선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처음 나타나는 선한 의지와 순수한 삶의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7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포도와 무화과가 단순한 과일이라면, 왜 주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셨겠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 내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포도는 영적 선을, 무화과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발견하신 선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곧바로 슬픈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즉 처음에는 포도와 무화과처럼 아름다운 선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우상숭배와 자기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3의 흐름과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순진무구함이 있었으나 점차 own으로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포도와 무화과의 상징을 설명하기 위한 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대비시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아름답게 존재했지만, 결국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호9:10을 인용한 이유는, 포도가 영적 선의 열매를, 무화과가 자연적 선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특히 ‘광야의 포도’와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는 주님께서 인간과 교회 안에서 발견하시는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선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레미야 8장의 황폐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주님께서 원래 교회 안에서 보고자 하셨던 선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17, 심화 4, ‘욜2:22’

AC.217.심화 4. ‘욜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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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2, ‘렘8:12-13’

AC.217.심화 2.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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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심화

 

2. ‘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이 둘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선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해서 읽습니다. 앞에서는 ‘그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AC.213 AC.216에서 이미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사람들이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내적 저항이나 수치를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은 그 원인을 설명합니다. 포도는 영적 선의 열매이고, 무화과는 자연적 선의 열매인데, 둘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는 영적 선도 사라졌고, 정직과 양심, 도덕성과 같은 자연적 선도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보다 더 심각하게 포도나무를 먼저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선이 먼저 죽으면 결국 자연적 선도 오래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종교적 사랑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인간적 양심마저 무너집니다. 그 결과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잎사귀가 마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잎은 흔히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외적 교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결국 잎까지 마른다는 것은 선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남아 있던 외적 종교 형식마저 생명력을 잃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농작물의 흉작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면적 황폐(vastation)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악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오늘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 악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는다’고 덧붙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끄러움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경고등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매우 심각한 영적 진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AC.217에서 렘8:12-13을 인용한 이유는, 부끄러움을 잃은 상태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는 상태가 사실상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선이 사라지면 포도가 없어지고, 자연적 선이 사라지면 무화과가 없어지며, 그 결과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 속에서 본 교회의 황폐한 모습인 것입니다.

 

 

 

AC.217, 심화 3, ‘호9:10’

AC.217.심화 3.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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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1, ‘마21:19’

AC.217.심화 1. ‘마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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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심화

 

1. ‘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특히 잎은 있으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가 선의 실제 삶은 사라지고, 외적 형식만 남은 교회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말씀 속 나무들은 단순한 식물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선의 열매, 곧 정직함, 공정함, 자비, 이웃 사랑, 양심적인 행동 등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 잎은 흔히 지식, 교리, 외적 신앙고백, 종교적 형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아는 것은 많고, 종교적 외형도 갖추고 있지만 실제 삶 속 선은 없다는 뜻입니다.

 

AC.217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한 그루 나무에 대한 저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당시 교회 전체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상적 사건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알고 있었고, 율법을 말할 수 있었으며, 종교의식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이미 영적으로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AC.216과 연결해서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창3에서 타락한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것은 순진무구함은 잃었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마21에 이르면 이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즉 인간과 교회의 쇠퇴가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이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단순한 신앙 지식이 아니라 선의 열매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교리를 말할 수 있고, 성경을 인용할 수 있으며, 신학적 논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잎만 있는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중요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조차 상실한 교회와 인간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고 풍성해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보실 때는 정작 찾으시는 열매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더 깊이 보면, 이 구절은 단순한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잎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열매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모든 시대의 교회와 모든 신앙인에게 ‘내 안에는 과연 열매가 있는가, 아니면 잎만 있는가?’를 묻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런 내적 의미를 보기 때문에 이 구절을 AC.217에서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설명하는 대표적 예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17, 심화 2, ‘렘8:12-13’

AC.217.심화 2.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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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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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7

 

말씀에서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알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잃어버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들이 나오는 곳마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거나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포도원(vineyard)무화과나무(fig tree)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길가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 (21:19).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as in Matthew: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것은 땅 위에서 어떠한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vine)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도 비슷합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것은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모두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타락하여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악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호세아에서는 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요엘에서는 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여기서 포도나무(vine)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해설

 

이 본문은 AC.216의 ‘무화과 나뭇잎’ 해설을 더 넓게 확장하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를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영적 선’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계에서 자연적 선과 영적 선은 구별됩니다. 자연적 선은 부모를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정직하게 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입니다. 반면, 영적 선은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선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근원과 동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무화과나무보다 더 안쪽 차원의 선을 상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21:19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도 새롭게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행동을 이상하게 느낍니다. 열매철도 아닌데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실제 나무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상 행위로 이해합니다. 잎은 있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외적 종교성은 있지만, 선의 열매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면, 그 사건은 세상에 자연적 선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장도 같은 원리입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은 단순한 농작물 흉작 예언이 아닙니다.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는 구절입니다. AC.213AC.216에서 본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직 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호9:10과 욜2:22는 회복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것,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내는 것은 모두 선의 회복을 뜻합니다.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따라오신 AC.213-217의 흐름을 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연결이 보입니다. 창2의 순진무구함이 사라진 뒤, 사람들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그것은 완전한 선은 아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흔적입니다. 그리고 AC.217에서는 바로 그 무화과나무가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창3:7의 무화과 잎은 단순한 임시 옷이 아니라, 순진무구함을 잃은 뒤에도 주님께서 인간 안에 남겨 두신 마지막 보호막과 같은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은 단순한 식물 상징 해설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선의 여러 층위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두 나무가 모두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의 삶은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둘 다 말라 버릴 때, 교회와 인간은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응을 통해,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언급들이 사실은 인간의 내적 상태와 교회의 상태를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심화

 

1. ‘21:19

 

 

AC.217, 심화 1, ‘마21:19’

AC.217.심화 1. ‘마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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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12-13

 

 

AC.217, 심화 2, ‘렘8:12-13’

AC.217.심화 2.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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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10

 

 

AC.217, 심화 3, ‘호9:10’

AC.217.심화 3.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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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22

 

 

AC.217, 심화 4, ‘욜2:22’

AC.217.심화 4. ‘욜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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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6, 창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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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AC.216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나뭇잎을 엮어(sew leaves together)는 스스로를 변명하는 걸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치마로 삼았더라(make themselves girdles)는 수치를 느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고, 이렇게 교회의 이 후손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누리던 순진무구함 대신 오직 자연적 선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자연적 선으로 자기들의 악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해설

 

이 본문은 창3:7의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는 표현을 해설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단순히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 타락 이후의 영적 상태를 읽어 냅니다.

 

우선 ‘잎들을 엮어 꿰맨다(to sew leaves together)는 것을 ‘변명한다(excuse themselves)라고 해석하는 점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매우 깊은 통찰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보통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합니다. 하나는 주님 앞에 그대로 인정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길입니다. 아담이 ‘하와가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하와가 ‘뱀이 꾀어서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같은 흐름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엮는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fig tree)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이란 완전히 악한 상태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도덕성, 예의, 가족애, 사회적 책임감,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자연적 차원의 선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순진무구함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전의 순진무구함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흘러 들어오는 선 가운데 살았지만, 이 후손들은 이미 그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악해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어느 정도는 질서를 지키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무화과 잎은 매우 흥미로운 상징이 됩니다. 무화과 잎은 벌거벗음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가릴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선도 인간의 악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단지 외적으로 억제하고 덮어줄 뿐입니다. 사람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도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의 자기 사랑과 교만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들이 자연적 선 안에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연적 선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었고, 그래서 수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AC.213에서도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양심과 내적 빛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무화과 잎은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완전한 타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 주는 마지막 보호막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216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순진무구함을 잃었고, 그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주님 앞에서 투명하게 살지 못하고, 자기 상태를 가리며 변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연적 선 덕분에 자신들의 상태를 부끄러워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점에서 아직 회복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화과 잎은 인간의 불완전한 변명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타락을 막고 있는 마지막 남은 선의 흔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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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5, 창3:7, ‘own’을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증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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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5.심화

 

3. ‘51:17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이 구절을 AC.215에서 인용한 이유는, 인간의 own이 기억 지식(scientia)과 이성을 잘못 사용하여 결국 거짓과 악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우상숭배를 비난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우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영적 우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마지막에 ‘새긴 우상(graven image)은 인간 own의 거짓을, 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인간 own의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절이 AC.215의 문맥에서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from themselves) 생각하는 것’의 결과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own과 감각, 기억 지식만을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결국 그는 자기만의 진리 체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진리가 아니라 ‘새긴 우상’, 곧 거짓의 형상입니다.

 

또한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는 말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매우 정교한 교리와 논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아름답고 설득력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없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형상에 불과합니다. 마치 정교하게 조각된 우상이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마다 지식으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된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물론 여기서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과 지식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문제는 지식이 자기 own의 손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지식을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완고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AC.206 AC.215 전체의 주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뱀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상징합니다. 그것들이 주님의 진리에 봉사할 때는 유익하지만, 그것들이 주인이 되면 사람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며’, ‘살아 있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단순한 고대 우상숭배 비판으로 읽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자기 own으로부터 만들어 내는 거짓과 악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사람은 돌과 나무를 숭배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판단, 자기 철학, 자기 확신,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다면 여전히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AC.215에서 렘51:17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 own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재료로 삼아 거짓과 악이라는 우상을 만들어 내며, 그 우상 안에는 참된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우상숭배의 가장 깊은 의미는 손으로 만든 형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대신 자기 own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15, 창3:7, ‘own’을 실제 영계 체험을 근거로 증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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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4, 심화 2, ‘사47:10-11’

AC.214.심화 2. ‘사47:10-1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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