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사전적 의미는 형용사로서는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입니다. 이 proprium은 중성인데 명사로 사용되면, ‘possession,’ ‘property’를 의미하며, 또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은 웹스터에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를 의미하는 걸로 봐서,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own’이라는 말은 proprius와 매우 정확히 일치하며, 라틴 proprium에 맞는 어떤 명사를 만들면, 아주 가까운 번역 효과를 얻지 싶습니다.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 “own.” 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 “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 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 “possession,” “property”; also “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 The English adjective “own” is defined by Webster to mean “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 “own” 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이 주석은 스베덴보리 저술의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인 ‘proprium’(프로프리움)—한국어로 흔히 “자기 고유한 것”, 혹은 “본성”(本性)—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라틴어 ‘proprius’는 형용사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유의”, “다른 것과 구별되는”이라는 뜻을 가지며, 그 중성형 명사 ‘proprium’은 “자기 소유물”, “고유성”, “특징”, “독자적 성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proprium은 어떤 존재에게서 고유하게,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own”은 편집자가 지적했듯이 “자기 자신의”, “특유의”, “배타적으로 속한”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proprius의 뜻과 거의 완전하게 일치합니다. 문제는 거듭남을 다루는 스베덴보리 신학 안에서는 proprium이 단순한 개인의 개성이나 특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일관되게 “사람 자신의 것(own,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악이며, 거짓으로 기울어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라기보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존재론적 진술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느끼는 모든 생각, 판단, 욕망은 영적 실재에서 보면 빛이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proprium은 항상 어둠, , 흑암, 죽음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반대로, 사람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인간의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의 proprium(신적 본성)’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proprium은 철저히 부정적 개념”임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proprium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것을 ‘굴복시키고, 재배열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재구성’할 때에만 인간은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언어학적 주석은 proprium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자기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론 전체의 기초 용어임을 보여 주며, 번역 시에도 자기 고유한 것, 자기 본성,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표현으로 신중하게 옮겨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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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빛을(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모든 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어둠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day)과 비교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반면,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자아,고유 속성)은 뭐든지 다 (night)과 비교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인데, 이런 비교는 말씀에서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창1: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영적 의미를 풀어 주며, 거듭남 과정에서 ‘빛과 어둠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좋다’고 불린 것은 그 빛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시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참되며 생명을 주는 것이기에, 영적인 빛은 곧 주님의 선의 작용입니다. 반대로 “어둠”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스스로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와 감정 상태를 뜻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본래 어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종종 빛처럼 보입니다. 즉,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착시가 거듭남 이전의 자연적 인간을 지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사람의 고유 본성(man’s proprium)의 본질이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지혜를 마치 빛인 것처럼 의지하지만, 실제로는 영적 실재와 전혀 맞닿아 있지 않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비추시는 진정한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자기 지혜와 자기 사랑의 판단들이 모두 어둠으로 드러납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모든 것을 “(day)에 비유하고,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night)에 비유합니다. 낮은 주님의 빛 안에서 분별과 생명이 있는 상태이고, 밤은 주님의 빛이 없고 자기 고유의 상태만이 작용하는 어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낮과 밤의 비유는 시편과 예언서, 복음서 등 성경 전반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며, “빛과 어둠”, “낮과 밤”의 구분은 곧 ‘주님에게 속한 것과 인간에게 속한 것의 영적 구분’을 뜻합니다. AC.21은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 행위인 빛의 분리가 곧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영적 분별—주님의 것과 자기 고유의 것의 분리—임을 강조하며, 거듭남의 근본 원리가 바로 이 구별에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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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의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 그러니까 겉이기만 한 겉의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 게 선이며, 그런 사랑들한테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이상한, 뒤집힌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자기의 선은 사실은 선이 아니며, 또한 그가 빛 가운데 더욱 들어갈수록, 이 빛은 주님이신데요,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이런 사실들을 그는 처음으로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존재하신다(the Lord exists)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히며, 그것이 단순히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최초의 참된 인식이 열리는 순간’임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사람이 처음으로 “선과 진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보다 더 높은 것(higher)”임을 깨닫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거듭나기 전의 사람은 선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 진리를 자기 욕망과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 정도로 이해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을 모두 선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모두 진리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가 움직여 속 사람이 조금이라도 열리기 시작하면,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안의 선이라 여겼던 것이 사실은 악이며,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자기중심적 거짓’임을 감지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는 최초의 영적 각성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새로 잉태되는 단계conceived anew”라 부르며, 바로 이때 사람이 비로소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과 진리 자체이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 인식은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영적 빛이 내면에 처음 스며들어오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요한복음 824절,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거듭남의 첫 단계는 반드시 ‘주님이 계심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장의 위대한 선언—“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를 제시하여, 선과 진리의 모든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사람의 어떤 선도, 어떤 진리도 스스로 낳을 수 없고, 모두 주님으로부터 흐르는 생명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처럼, 이 단계는 여전히 무지와 혼돈 속에 있으면서도, 주님의 빛이 처음으로 비추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정리하면, AC.20이 말하는 첫 상태는 종교적 자각의 시작을 넘어, ‘자기중심적 선과 진리의 붕괴’, ‘주님이 선과 진리의 유일한 근원임을 인식하는 첫 빛’, ‘영적 인간으로 잉태되는 시작점’이라는 매우 깊고 결정적인 영적 전환의 순간입니다.

 

 

 

AC.21, 창1:4, 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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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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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키는데요,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남은 자(a remnant)라고 합니다. 이는 참과 선에 관한 지식으로 되어 있습니다.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 즉 낮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 하고 있습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거듭남의 시작에서 주님의 자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한다고 설명하며,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품으시다(brood)라는 표현을 암탉이 알을 품어 생명이 깨어나도록 하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즉, 거듭남 이전의 인간은 아직 영적 생명을 갖고 있지 않지만, 주님의 자비는 마치 어미 새가 알을 보호하는 것처럼, 사람 안에 숨겨진 잠재적 생명을 깨우기 위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럼 이 자비가 무엇을 “운행”하는가?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라고 말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아기부터 성장 과정 중에 경험한 선한 감정들, 신앙적 인지들, 선과 진리에 대한 작고 순수한 인상들, 하나님에 대한 어린 마음의 감각 같은 것들로, 주님이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시는 신적 씨앗입니다. 이 리메인스는 평소에는 의식되지 않지만, 외적 삶이 황폐해지고(vastation), 자기 고유의 욕망과 거짓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하며, 거듭남의 기반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리메인스를 창1:2의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waters)은 진리의 지식들을, 그 위의 “얼굴들(faces)은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인상들, 즉 주님이 보존해 두신 신적 흔적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리메인스가 없다면 어떤 사람도 거듭날 수 없으며, 주님의 자비가 운행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AC.19는 따라서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의 결심이나 도덕적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 안에 미리 심어 두신 선과 진리의 씨앗을 깨우는 자비의 역사’에서 비롯됨을 강조합니다.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거듭남이 시작된 사람의 첫 번째 상태는 그가 선과 참이 뭔가 더 높은 거라는 걸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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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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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의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무슨 깊음(deep)과도 같은,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이지요. 이사야입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As in Isaiah: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거듭남의 선행 상태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 위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표현에 사용된 영어 vastation은 사어(死語)에 가까운 말인지 사전에도 잘 안 나옵니다. NCE(New Century Edition)역에서는 이를 overall spiritual devast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해설

 

AC.18은 거듭남 이전의 인간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며, 창1:2의 표현 “깊음(the deep)이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인간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과 거짓의 혼합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깊음 위(faces of the deep)라는 표현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 속에 자리 잡은 각종 욕망(cupidities)과 그 욕망에서 비롯된 거짓들(falsities)을 말합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선하고 참된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과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상태가 바로 “깊음”입니다. 이 상태는 주님의 빛이 없는 완전한 어둠이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 없고, 영적 방향감각 없이 혼란 속에 잠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인간을 “깊음”, “바다 깊은 곳”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이러한 깊음이 “말리신(dried up) 혹은 “황폐해진(wasted)으로 묘사됩니다. 이사야 519-11절에서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여호와라고 한 것은, 주님이 인간 안의 욕망과 거짓을 물리치시고, 그 속에서 구속된 자들이 지나갈 길을 여신다는 뜻이며, 곧 주님이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먼저 인간 내부의 혼돈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로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외적 생명은 활발해 보일지라도 영적 생명이 전혀 없을 때 천사들에게는 빛과 생기가 전무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예언서에서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교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황폐는 주님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과 선한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전의 거짓과 욕망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 안의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그래야만 ‘새 사람’이 잉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도덕적 자멸이 아니라, 주님이 거듭남을 시작하기 위해 허용하시는 내적 정리 작업이며, 진리와 선이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AC.18은 “깊음”이라는 성경적 상징을 통해, 거듭남의 초기에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내적 분해와 정화의 과정을 설명하며, 인간의 변화는 언제나 주님의 빛이 깊음 위로 움직이기 전에, 먼저 그 깊음이 드러나고 비워지는 과정을 거침을 가르쳐 줍니다.

 

 

 

AC.19, 창1:2, '수면 위, 리메인스'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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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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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혼돈하고 공허한 땅(earth void and empty), 또 거기에 선과 진리가 전혀 파종되지 않은 지면(ground)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표현이 인간 개인에게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밝히며, 거듭남 이전의 영적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사실적으로 그려 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거듭남 이전의 사람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earth void and empty)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선과 참된 진리가 아직 그의 내면에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혼돈(void)는 선의 부재를, “공허(empty)은 진리의 부재를 의미하며, 이 둘의 부재가 결합되면 창세기가 묘사한 “흑암”, 즉 영적 어둠과 무지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우둔함(stupidity)과 “신앙의 모든 것에 대한 무지(ignorance)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지적 무지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참된 인식과 천국의 질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선과 진리에 대해 아무런 기준도 없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지혜롭고 능력 있어 보일지라도 영적 실재를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데는 능숙하고 교활하지만, 선을 행하는 데에는 지식도 의지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렘4:22, 23을 인용하여, 주님이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은 인간의 외적 삶(겉 사람)을, “하늘”은 내적 삶(속 사람)을 의미하는데, 거듭남 이전에는 겉 사람 안에는 선이 없고, 속 사람 안에는 진리의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는 표현은 사람이 영적으로 무엇이 참된 것인지조차 모른다는 뜻이며, 이때 그는 비록 종교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참된 의미로 이해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 내적 지각(perception)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정죄의 상태가 아니라 ‘거듭남이 시작되기 이전 누구나 통과하는 자연적 상태’라고 강조합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빛과 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혼돈과 공허 속에 있으며, 주님은 이 상태를 정죄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1:2) 것처럼, 이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 위에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따라서 AC.17은 영적 삶의 출발점이 결코 밝고 지혜로운 상태가 아니라, ‘무지와 혼돈, 선과 진리의 결핍’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며, 거듭남의 첫걸음은 주님이 임하시기 전 우리의 실제 상태를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AC.18, 창1:2, '깊음 위'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 위’(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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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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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 하기도 합니다. ‘태초’(beginning)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 “the beginning.” 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 “days of old” [antiquitatis] and also the “days of eternity.” The “beginning” 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 “new creation” of man. 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to “make,” 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maker) 및 ‘창조자’(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 “redeemer,” the “former from the womb,” the “maker,” and also the “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천’(, heaven)은 속 사람을, ‘지’(,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들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earth” 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은 창1:1의 “태초에”라는 한 단어가 담고 있는 영적 깊이를 풀어 주면서, “창조”라는 표현을 문자적 우주 기원에만 묶어 두지 않고 ‘태고교회와 개인의 거듭남’이라는 두 차원에서 동시에 읽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초(beginning)가 역사적으로는 ‘가장 옛 시대, 곧 태고교회의 시대’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예언서들에서 자주 나오는 “옛날”, “영원”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시기를 가리키는데,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살던 인류 최초 교회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태초”라는 말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남을 받기 시작하는 첫 시기’도 함께 포함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new creation)라고 부릅니다. 이때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make)라는 표현들은 예언서에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데, 문자적으로는 세상과 민족의 형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고, 속 사람을 재형성하시며,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시는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뜻합니다. 이 단락에서 인용하는 사43:7,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는 말씀은, 주님이 당신의 영광, 곧 사랑과 진리가 드러나도록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창조, 조성, 제작”이라는 세 표현으로 다르게 말해 준 예입니다. 또 같은 예언서에서 주님이 “구속자, 태에서부터 조성하신 이, 만드신 이, 창조자” 등으로 불리는 것 역시, 주님이 사람을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속에서부터 다시 빚으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라고 할 때, 단순히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임하실 때 사람과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그 결과로 ‘땅의 얼굴’, 곧 인간의 겉 삶과 외적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하늘”과 “”도 문자 그대로만 보면 우주의 위, 아래를 가리키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남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의 두 차원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곧 “하늘”은 사람 안의 ‘속 사람’(내적 인간)을, “”은 ‘겉 사람’(외적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둘이 혼돈과 공허, 흑암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창조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이것이 곧 인간 개인에게서는 거듭남의 시작이며, 인류 전체에게서는 태고교회와 그 이후 교회들을 세워 가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AC.16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짧은 말씀 속에, (1) 태고교회라는 가장 옛 시대의 시작과, (2) 오늘 여기서 각 사람이 주님 안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듭남의 첫 단계,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열려 있음을 보여 주며, 성경의 “창조, 조성, 만듦”이라는 모든 언어가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내적 사역’, 곧 거듭남을 가리키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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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는' (AC.6-15)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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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천국의 실제 신앙 고백을 직접적으로 밝히는 대목으로, 천사들이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주님(Lord)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명백히 천국의 증언을 기록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 즉 ‘아버지이신 여호와가 인성을 입고 나타나신 분’으로 알고 믿습니다. 천사들은 결코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인격으로 분리하여 예배하지 않으며, 삼위의 구분을 오직 ‘하나의 인격 안에서의 세 가지 신적 본질(신성 자체, 신적 진리, 신적 작용)’로 이해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요한복음 14장은 이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인성 속에 아버지의 신성이 완전히 하나 되어 나타났다는 사실, 즉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고 접근 가능해졌다는 ‘기독론적 절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두 분이 분리된 존재나 두 인격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그러나 동시에 영적으로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신성과 사랑의 전체 충만이 거하며, 그분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각기 따로 호명하거나 분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며 예배합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삼위 전체의 신성이, 사랑과 지혜와 능력, 즉 여호와의 모든 신적 본질이 일체로 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단순한 교리적 해석이 아니라 ‘천국의 실제 체험적 인식’이라고 강조하며, 천국 전체가 ‘주님’을 아버지로 알고, 또 그렇게 예배한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증언합니다. 따라서 AC.15는 스베덴보리 신학의 기초인 ‘주님 이해’(高基督論)를 선언하는 핵심 문장으로, 말씀 속에서의 ‘아버지’라는 표현도 속뜻에서는 언제나 주님의 신성 자체를 의미하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아버지를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분을 볼 수 있게 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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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이라는 호칭' (AC.6-15)

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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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정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the Lord)으로만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해설

 

AC.14 글은 Arcana Coelestia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Lord) 개념을 규정하는 자리이며, 스베덴보리 신학의 그리스도론을 가장 명확하게 요약한 선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모든 주석에서 ‘(Lord)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직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미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즉, ‘Lord’라는 호칭은 삼위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부분 명칭이 아니라, ‘성육하신 하나님의 전체성(Deus Homo)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독으로 “(Lord)라고 부르며, 이는 곧 천국 전체가 사용하는 호칭과 일치합니다. 그는 “온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아는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영들은 예수님이 곧 여호와이시며,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 아니라 한 분의 신성 안에서 구별되는 두 면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관적 지각(perception)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의 신성이 사랑(선)과 지혜(진리)로 무한히 흘러나오며 모든 천적, 영적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그분만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는 분으로 인식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 아니라, 천국의 존재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실재(reality)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라고 부르라고 명령하신 요한복음 1313절을 인용하며,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직접적 선언으로 봅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존칭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아버지와 하나이신 신성 자체임을 밝히시는 자기 계시’입니다. 부활 이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라 부르게 된 것도, 그분의 ‘신적 인성(Divine Human)을 직접 목도한 이후에 생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초기 교회가 “예수는 주시다(Kyrios Iesous)라는 고백을 신앙의 중심에 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Lord’라는 말을 통해 ‘삼위일체의 분리적 이해(성부-성자-성령을 세 인격으로 보는 관점)’를 넘어, 아버지의 신성과 아들의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통일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 전반에서 “여호와”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에도 그 속뜻에서는 항상 “주님—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글은 창세기 해설을 넘어,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신학적 틀을 제시하는 선언으로서, 이후 모든 구절에서 “”라는 말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이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성육하신 여호와,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신적 주권과 자비, 사랑의 임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근본 원칙을 제공합니다.

 

 

 

AC.15, 창1,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는' (AC.6-15)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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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오늘날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 (AC.6-15)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와 다섯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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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Word)에 대해 알고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신학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사님의 태도에는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실제 태도를 기준으로 하나씩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이런 ‘배제 중심 태도’는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참 말씀(The Word in the proper sense)이 무엇인지, 어디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중심으로 영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첫째, 참된 말씀, 곧 창, 출, 시편 일부, 복음서, 계시록에 집중하며, 그 내적 의미를 계시, 둘째, 성경 전체, 곧 바울 서신을 포함해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는 모든 성경’을 존중하며,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 그는 AC.10325, TCR.226 등에서 ‘바울 서신은 말씀의 ‘inner sense(속뜻, arcana)를 가진 책은 아니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주님의 섭리로 주어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faith alone), 즉 ‘의롭다 함을 믿는 것만으로’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바울 서신 전체를 폐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믿음-사랑의 결합’을 바울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잘못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바울 자체 문제라기보다 ‘후대 교회의 해석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의 ‘목회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합니다. DP.234 등에서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 바울 서신을 통해 기본 윤리, 공동체 질서, 교리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 또한 주님의 섭리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신학을 따른다고 해서 바울을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참된 말씀’의 용도는 ‘영적 의미를 위해서’이다

 

지금 느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내적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텍스트가 모두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의 빛만 붙잡고 목회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AC.1408, AC.9025 등에서 밝히기를, ‘사람들은 외적 진리인 성경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진리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는 ‘성경 전체의 문자적 세계 안에 심어져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자적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의미의 기반을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사적으로 대화한 목회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는 문자적 말씀을 통해 접근하라’ 내적 의미를 설교자가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설교자 자신은 항상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그러면 설교의 어조, 초점, 균형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 서신도 영적 원리로 재해석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진리의 빛을 받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는 ‘배제가 아니라 재해석을 원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현재 모습은?

 

먼저, 좋은 면(강점)입니다. 내적 의미를 붙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있으시고, ‘참된 말씀’ 중심의 신학적 정렬이 매우 정확하시며, 설교의 중심을 주님(여호와 예수)으로 세우는 방향성이 강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귀하고 건강한 모습이요, 과정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면도 존재하는데요,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반인 문자적 성경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내적 의미를 나누기 전에 필요한 외적 질서가 무너질 위험’도 있으며, ‘바울 서신 등 교회 전통의 큰 기둥을 한 번에 없애는 효과’, ‘교회 분열과 오해, 배척을 불러오기 쉬움’ 등의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832에서 이런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의 상태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진리도 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듣는 자들의 역량에 맞춰 대부분 쉬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됨

 

1단계, 개인적으로는 참 말씀에 집중하라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이 단계에 매우 잘 맞습니다.

 

2단계, 설교에서는 ‘문자적 말씀’과 ‘내적 원리’를 혼합하라

 

문자적 말씀이 ‘뿌리와 줄기’라면, 내적 의미는 ‘열매와 향기’입니다. 뿌리와 줄기만 있어도 안 되고, 뿌리와 줄기 없이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3단계, 바울 서신도, 복음서나 시편 등 ‘말씀’의 빛을 비추어 ‘정화된 의미’만 사용하라

 

사용하되, 내적 의미의 원리로 걸러서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조언

 

지금처럼 ‘참 말씀 중심’으로 가시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비롯, ‘말씀’ 아닌 다른 성경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을 인도하는 데 이 성경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문자적 성경 전체가 사실 주님의 섭리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그 문자적 글도 결국은 ‘내적 의미의 문을 열어주는 외피’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 ‘건강한 길’은 문자적 말씀을 존중하면서 내적 의미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가장 안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가장 깊고 온전하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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