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7

뱀이 배로 기어간다(serpent going on his belly)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더 이상 하늘의 것들을 바라볼 수 없고, 오직 몸과 땅에 속한 것들만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belly)로는 땅에 가장 가까운 것들을, ‘가슴(chest)으로는 땅보다 높은 것들을, 그리고 머리(head)로는 가장 높은 것들을 의미하였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여기서 감각 파트는 인간 본성 가운데 가장 낮은 부분인데, 그것이 배로 기어간다(went upon its belly) 한 것은 땅에 속한 것들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교회에서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리거나 머리에 티끌을 뿌리는 행위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That the “serpent going on his belly” denotes that their sensuous part could no longer look upward to the things of heaven, but only downward to those of the body and the ear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ancient times by the “belly” such things are signified as are nearest to the earth; by the “chest” such as are above the earth; and by the “head,” what is highest. It is here said that the sensuous part, which in itself is the lowest part of man’s nature, “went upon its belly,” because it turned to what is earthly. The depression of the belly even to the earth, and the sprinkling of dust on the head, had a similar signification in the Jewish church. Thus we read in David: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44:24-26) Wherefore hidest thou thy faces, and forgettest our misery and our oppression? For our soul is bowed down to the dust, and our belly cleaveth to the earth. Arise, a help for us, and redeem us for thy mercys sake (Ps. 44:24–26),

 

여기서도 사람이 여호와의 얼굴에서 돌아설 때, ‘배가 티끌과 땅에 붙는다(cleaves by his belly to the dust and to the earth)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간 일도 가장 낮은 곳들, 곧 아래의 땅(lower earth)을 의미하며, 그래서 그는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라고 말합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when man averts himself from the face of Jehovah, he “cleaves by his belly to the dust and to the earth.” In Jonah likewise, by the “belly” of the great fish, into which he was cast, are signified the lower parts of the earth, as is evident from his prophecy: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2) Out of the belly of hell cried I, and thou heardest my voice (Jonah 2:2),

 

여기서 스올(hell)은 아래의 땅을 의미합니다. where “hell” denotes the lower earth.

 

 

해설

 

이 글은 창3:14의 ‘배로 기어갈지니라’는 말씀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뱀이 원래부터 배로 기어 다니므로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 안의 감각 파트가 영적인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묘사하는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고대교회 사람들은 인간의 몸 자체를 하나의 상응 구조로 보았습니다. 머리는 가장 높은 것들, 곧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을 의미하였고, 가슴은 사랑과 신앙 같은 중간 영역을 의미하였으며, 배는 가장 아래 단계, 곧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배로 기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자세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완전히 아래로 향했다는 뜻입니다.

 

원래 인간은 위를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눈은 하늘을 볼 수 있고, 생각은 진리를 향할 수 있으며, 사랑은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이 주인이 되면 시선이 바뀝니다. 이제 관심은 영적인 것보다 세속적인 것에, 영원한 것보다 눈앞의 것에, 주님보다 자기 자신에게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배로 기어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낮아지고 세상적인 것에 얽매인 상태를 묘사합니다. 특히 ‘배가 땅에 붙었다’는 표현은 감각적 인간이 하늘을 향한 시선을 잃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물고기의 배를 단순한 생물학적 공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영적 상태, 곧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영역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물고기의 배’와 ‘스올의 뱃속’을 연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영적으로 깊은 침체와 어둠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AC.247의 핵심은 ‘’가 가장 낮은 차원의 삶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이 배로 기어간다’는 것은 감각적 인간이 더 이상 위를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아래의 것들만 바라보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형벌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 일어나는 영적 방향 상실의 묘사입니다. 원래 하늘을 향하던 존재가 이제는 땅만 바라보게 되었고, 영원을 생각하던 존재가 순간적인 것만 생각하게 되었으며, 주님을 향하던 사랑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이 ‘배로 기어가는 뱀’의 가장 깊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44:24-26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44:24-26) Wherefore hidest thou thy faces, and forgettest our misery and our oppression? For our soul is bowed down to the dust, and our belly cleaveth to the earth. Arise, a help for us, and redeem us for thy mercys sake (Ps. 44:24–26),

 

 

이 시편 구절은 AC.247에서 ‘(belly)가 가장 낮은 차원의 것, 곧 몸과 땅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는 증거로 인용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시편 기자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육체적 고통의 표현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서 ‘영혼(soul)이 진토에 엎드려 있고, ‘(belly)가 땅에 붙어 있다는 표현 속에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특히 ‘배가 땅에 붙었다(our belly cleaveth to the earth)는 표현은 창3:14의 ‘배로 기어갈지니라’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배는 인간 안의 가장 낮은 수준, 곧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차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배가 땅에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 관심, 그리고 사랑이 하늘의 것들보다 세상과 몸의 것들에 매여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AC.247에서 그는 ‘사람이 여호와의 얼굴에서 돌아설 때, 배가 티끌과 땅에 붙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인간의 시선은 위를 향하지 못하고 아래를 향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보다 일시적인 것을, 천국보다 세상을,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상태에서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움 요청이 아니라, 땅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다시 위를 향하게 해 달라는 영적 기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AC.247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가 가장 낮은 감각적 수준을 의미하며, ‘배가 땅에 붙는다’는 것은 감각적 인간이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들에 매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곧 창세기에서 뱀이 ‘배로 기어가게 된 것’의 의미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성경적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2) Out of the belly of hell cried I, and thou heardest my voice (Jonah 2:2),

 

 

이 구절은 AC.247에서 ‘(belly)가 가장 낮은 것들, 곧 땅과 육체에 속한 차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내적 의미에 주목합니다. 그는 ‘스올의 뱃속(out of the belly of hell)이라는 표현을 단순한 물고기의 위장 속으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가장 낮고 어두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여기서 ‘’는 앞에서 본 창3:14의 ‘배로 기어갈지니라’와 같은 상응을 가집니다. 고대교회의 상응 언어에서 머리는 가장 높은 것들, 가슴은 중간의 영적, 자연적인 것들, 배는 가장 낮은 감각적, 육체적인 것들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스올의 뱃속’은 단순히 어떤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영적으로 가장 아래 단계까지 내려간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배로 기어가는 것은 하늘을 등지고 아래만 바라보는 타락의 상태를 의미하지만, 요나는 가장 낮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아래에 있지만 아래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곳에서 위를 향해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은 단순히 고난 중의 기도가 아니라 인간이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상태에 있을지라도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으며, 주님은 그 음성을 들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지만, 주님과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AC.247에서 이 구절은 ‘’가 가장 낮은 차원을 의미한다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동시에 그 낮은 상태가 반드시 절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줍니다. 사람이 비록 ‘스올의 뱃속’과 같은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주님을 향해 부르짖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위를 향한 길이 열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47에서 욘2:2를 인용한 이유는, ‘’가 영적으로 가장 낮은 차원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도 주님의 자비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영적 원리를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요나는 땅 아래와 같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의 기도는 하늘에 닿았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C.246, 창3:14, ‘들의 모든 짐승’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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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6.심화

 

1. ‘68:9-10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68:9, 10) Thou, O God, dost send the rain of thy kindnesses; thou confirmest thy laboring inheritance; thy wild animal shall dwell therein (Ps. 68:9–10),

 

 

68:9-10 AC.246에서 ‘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이 애정(affection)을 의미한다는 증거로 인용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메마른 기업을 회복시키시고, 그 가운데 주의 회중이 거하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영어 원문에는 ‘thy wild animal shall dwell therein’이라는 표현이 있어, 스베덴보리는 이 ‘들의 짐승’을 단순한 동물로 보지 않습니다.

 

그의 상응 해석에 따르면 ‘(rain)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진리와 축복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기업(inheritance)은 교회 또는 주님께 속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가운데 거하는 들짐승(wild animal)’은 그 교회 안에 살아 있는 선한 애정, 곧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정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내적 의미는, 주님께서 진리의 비를 내려 황폐해진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그 안에 선한 애정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AC.246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성경의 ‘들의 짐승’이 언제나 실제 동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들의 짐승이 하나님의 기업 가운데 거한다’고 말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동물보다 교회 안에 거하는 선한 애정으로 이해할 때 훨씬 자연스럽고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field)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단순한 자연의 들판이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들의 짐승’은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애정들, 특히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정서들을 뜻하게 됩니다.

 

결국 AC.246에서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들의 짐승’이 상응으로는 인간 안의 애정, 특히 선한 애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의 들짐승이 그 가운데 거하나이다’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회복하신 교회 안에 선의 애정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음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AC.246, 창3:14, ‘들의 모든 짐승’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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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6

짐승(beast)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이 애정(affections)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AC.45, 46)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여기에 다윗의 다음 말씀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That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y affections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aid concerning them (n. 45–46), to which it is permitted to add the following passage from David: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68:9, 10) Thou, O God, dost send the rain of thy kindnesses; thou confirmest thy laboring inheritance; thy wild animal shall dwell therein (Ps. 68:9–10),

 

여기서도 들의 짐승(wild animal)은 선의 애정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기업 가운데 거한다(dwell in the inheritance of God) 하기 때문입니다. where also “wild animal” denotes the affection of good, because it is said that it shall “dwell in the inheritance of God.”

 

또한 여기와 창2:19-20에서는 짐승들의 짐승이 언급되는 반면, The reason why here, and also in chapter 2:19–20,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re mentioned,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1:24-25에서는 짐승땅의 짐승이 언급되는 이유는, while in chapter 1:24–25,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re named,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여기서는 교회(church) 또는 거듭난 사람(regenerated man)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반면, 첫째 장에서는 아직 교회가 되지 않은 상태, 곧 장차 거듭나게 될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field)이라는 말은 교회 또는 거듭난 사람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is that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the church or regenerated man, whereas the first chapter related to what was as yet not a church, or to man about to become regenerate; for the word “field” is applied to the church, or to the regenerate.

 

 

해설

 

이 본문은 먼저 ‘짐승’과 ‘들의 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현대인은 동물을 보면 동물 자체를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성경 속 동물들은 대부분 인간 안의 애정과 욕구, 성향을 상징합니다. 선한 동물은 선한 애정을, 사나운 동물은 왜곡된 애정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시편 68편의 ‘주의 들짐승이 그 가운데 거하나이다’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 가운데 동물이 산다는 말이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들의 짐승’을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주시는 선의 애정, 곧 체어리티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업 가운데 들짐승이 거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선한 애정이 살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흥미로운 차이를 지적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땅의 짐승(wild animal of the earth)이라고 했는데, 창세기 2장과 여기서는 ‘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차이를 우연한 표현상의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아직 완성된 교회가 아니라, 장차 거듭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다룹니다. 그래서 ‘(earth)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반면 창세기 2장 이후는 이미 교회가 형성된 상태, 또는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다루므로 ‘(field)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field)은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은 씨가 뿌려지고 열매가 맺히는 장소이므로,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 종종 교회 자체나, 교회의 진리와 선이 자라는 인간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들의 짐승’은 단순한 자연 동물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애정들을 의미하게 됩니다. 선한 애정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왜곡된 애정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교회와 관련된 내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246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경의 ‘짐승’과 ‘들의 짐승’은 인간 안의 애정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땅의 짐승’과 ‘들의 짐승’의 차이는 ‘’과 ‘’의 차이와 같으며, ‘’은 특별히 교회와 거듭난 사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단어 하나까지도 우연히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같은 ‘짐승’이라도 ‘땅의 짐승’인지 ‘들의 짐승’인지에 따라 그 내적 의미가 달라지며, 이를 통해 말씀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심화

 

1. ‘68:9-10

 

 

AC.246, 심화 1, ‘시68:9-10’

AC.246.심화 1. ‘시68:9-10’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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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7, 창3:14, ‘배로 다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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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5, 창3:14, ‘네가 더욱 저주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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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5

그가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모든 짐승보다,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았다(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라고 하신 말씀이,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천적인 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몸에 속한 것들을 향한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게 되었다는 뜻임은 말씀의 내적 의미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은 결코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노하지 않으시며, 누구도 시험으로 이끌지 않으시고, 누구도 벌하지 않으시며, 더욱이 누구도 저주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지옥의 무리(infernal crew)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며, 자비와 평화, 선의 근원으로부터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여기와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노하시고, 벌하시고, 시험하시며, 심지어 죽이시고 저주하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먼저 주님께서 우주 안의 모든 것, 심지어 악 자체와 형벌, 그리고 시험까지도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가장 일반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곧 형벌의 악과 시험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어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울 때에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먼저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이러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That “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may be clearly shown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Jehovah God or the Lord never curses anyone. He is never angry with anyone, never leads anyone into temptation, never punishes anyone, and still less does he curse anyone. All this is done by the infernal crew, for such things can never proceed from the fountain of mercy, peace, and goodness. The reason of its being said, both here and in other parts of the Word, that Jehovah God not only turns away his face, is angry, punishes, and tempts, but also kills and even curses, is that men may believe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and every thing in the universe, even evil itself, punishments, and temptations; and when they have received this most general idea, may afterwards learn how he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y turning the evil of punishment and of temptation into good. In teaching and learning the Word, the most general truths must come first; and therefore the literal sense is full of such things.

 

 

해설

 

이 글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앞서 AC.212 심화 부분에서 ‘말씀은 종종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주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표현한다’는 설명을 보시고,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 질문하셨던 내용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주님은 결코 노하지 않으시고, 벌하지 않으시며, 시험에 빠뜨리지 않으시고, 저주하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비와 평화, 그리고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에서 악이 나올 수 없고, 사랑 자체에서 증오가 나올 수 없으며, 자비 자체에서 저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분명히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여호와께서 치셨다’, ‘여호와께서 벌하셨다’, ‘여호와께서 저주하셨다’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표현된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즉 실제로는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통과 어둠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주님께서 행하신 일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태양을 등지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은 태양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가 그런 건 생각 안 하고, ‘태양 때문에 내가 이 깊은 동굴로 들어왔다’며, 태양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태양만 없었으면 안 들어왔을 꺼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고통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그것을 ‘주님, 왜 이렇게 저를 괴롭히십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처음부터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교육의 원리에서 찾습니다. 어린아이는 먼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개념부터 배웁니다. 먼저 ‘모든 것은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다음에 ‘주님은 악을 직접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 선을 위해 사용하신다’라는 더 깊은 진리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the most general truths)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나중에는 그 다스림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245는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악의 창조자가 아니시지만, 악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시험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 인간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벌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자초한 결과 속에서도 가능한 한 많은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AC.245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주님께서 저주하셨다’고 말할 때, 내적 의미로는 ‘인간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주님께서 진노하셨다’고 말할 때, 내적 의미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결과를 경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먼저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가르친 뒤, 점차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AC.245는 창3의 뱀에 대한 저주를 설명하는 본문인 동시에,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주님의 진노’, ‘형벌’, ‘저주’ 같은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46, 창3:14, ‘들의 모든 짐승’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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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4,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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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4

앞에서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의 의미가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타락의 원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므로, 이 말씀에 관하여는 더 이상 말할 게 없습니다. Having before shown that by “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eir perceiving the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no more need be said in regard to these words.

 

 

해설

 

이 글은 새로운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AC.242에 대한 짧은 정리와 연결 역할을 하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문자 그대로의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가 타락의 원인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된 상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고 다음 설명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안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완전히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자신들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감각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전의 상태에서 멀어졌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감각과 판단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와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전혀 몰라서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며, 내면에서는 경고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 때문에 그 경고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244는 비록 매우 짧은 글이지만, 타락의 본질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문제는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도 자기 사랑 때문에 감각과 own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글은 스베덴보리의 해설 방식도 보여줍니다. 그는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이미 확립된 의미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상응과 영적 상태를 계속 전개해 나갑니다. 그래서 AC.244는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뱀의 저주’, ‘여자의 상태’, ‘이성의 타락’, 그리고 ‘주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설명을 연결하는 짧은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45, 창3:14, ‘네가 더욱 저주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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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3, 창3:14,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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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3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들(the most ancient celestial men)에게 있어서 몸의 감각적 것들(the sensuous things of the body)은 그들의 내적 사람(internal man), 그러니까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는 성격의 것이었으며, 그들은 그 이상으로 그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후에는,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앞세우게 되었고, 그 결과 그것들은 분리되어 육체적인 것(corporeal)이 되더니, 그렇게 하여 정죄(condemned)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elestial men the sensuous things of the body were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compliant and subservient to their internal man, and beyond this they did not care for them. But after they had begun to love themselves, they set the things of sense before the internal man, and therefore those things were separated, became corporeal, and so were condemned.

 

 

해설

 

이 글은 AC.242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배로 기어간다’, ‘흙을 먹는다’라는 상징을 통해 감각 파트가 하늘을 향하던 상태에서 땅만 바라보는 상태로 변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변화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들도 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감각에 지배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각은 내적 사람, 곧 속 사람을 섬기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감각 자체가 아니라, 감각을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의미와 신적 질서였습니다. 그래서 AC.241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세상을 보면서 천국을 생각하였고, 자연을 보면서 신적인 걸 생각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감각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겼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원래의 질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속 사람, 그 아래에 이성, 그 아래에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감각은 마지막 단계에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마치 창문이 스스로 목적은 아니지만 빛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 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후’입니다. 자기 사랑이 생기자, 인간은 더 이상 감각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감각을 기준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속 사람이 감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속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 ‘느껴지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감각적인 것들을 속 사람보다 앞세웠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 안에 타락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감각의 존재가 아니라, 감각의 위치입니다. 종이 주인이 되고, 도구가 목적이 되며,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 결과 감각은 ‘분리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감각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속 사람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원래 감각은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제는 그것이 끊어져 독립된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감각은 점점 더 ‘육체적인 것(corporeal)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육체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몸에 속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것과 분리되어 오직 몸과 세상만을 실재로 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감각은 더 이상 천국을 향한 창문이 아니라, 인간을 세상 속에 가두는 벽이 되어 버립니다.

 

마지막의 ‘정죄(condemned) 역시 주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각이 본래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오직 세상과 몸에만 매이게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의 원천과 분리된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전 AC들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스베덴보리에게 정죄와 저주는 주님의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스스로 초래, 자초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AC.243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감각을 사용했지만, 감각에 지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생기자, 감각을 속 사람보다 앞세우게 되었고, 그 결과 감각은 영적인 것과 분리되어 순전히 육체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바로 인간 타락의 핵심이며, 동시에 ‘뱀이 배로 기어가고 흙을 먹게 되었다’는 말씀의 실제 의미인 것입니다.

 

 

 

AC.244,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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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2,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AC.242-249)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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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3:14)



AC.242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는 건,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sensuous part)가 타락의 원인임을 깨달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뱀이 모든 짐승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저주를 받았다(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는 건, 그들의 감각 파트가 천적인 것들로부터 등을 돌려 몸에 속한 것들을 향했으며, 그 결과 스스로를 저주하게 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기서 짐승(beast)들의 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와 같이 애정(affections)을 의미합니다. ‘배로 기어간다(serpent going upon its belly)는 건, 그들의 감각 파트가 더 이상 하늘의 것들을 바라볼 수 없고, 오직 몸과 땅의 것들만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평생 흙을 먹는다(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는 건, 그들의 감각 파트가 몸과 땅에 속한 것들 외에는 아무 걸로도 살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곧 지옥 상태(infernal state)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By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at they perceived their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and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signify affections, as before. The “serpent going upon its belly”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could no longer look upward to the things of heaven, but only downward, to those of the body and the earth. Its “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became such that it could not live from anything but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e earth, that is to say, it became infernal.

 

 

해설

 

이 글은 창3:14에 담긴 상징들을 하나씩 해설하면서, 감각적 인간이 어떻게 영적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는 건, 실제 뱀과의 대화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어느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들이 감각과 자기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한 결과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감각 파트는 원래 인간 안에서 가장 바깥 단계에 있으며, 위로는 이성(rational)을 섬기고, 더 위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감각이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지배하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뱀이 ‘스스로를 저주하였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게 아니라, 하늘의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배로 기어간다’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원래 인간의 내적 시선은 위를 향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천국과 주님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이 주인이 되자 시선이 완전히 아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관심의 중심은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세상, 이익과 소유, 감각적 만족이 됩니다. 이것이 ‘배로 기어간다’는 상징의 내적 의미입니다.

 

특히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매우 강렬합니다. 성경에서 흙은 종종 가장 낮은 차원의 것, 곧 순전히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걸 의미합니다. 따라서 흙을 먹는다는 건, 더 이상 하늘의 선과 진리로 양육되지 못하고, 오직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양식으로 삼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영적인 것에는 흥미를 잃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만을 실재로 여기게 되면, 바로 이런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AC.242는 단순히 뱀의 형벌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방향 전환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원래는 위를 바라보던 존재가 아래만 바라보게 되었고, 하늘의 양식을 먹던 존재가 흙을 먹게 되었으며, 주님의 빛 아래 살던 존재가 몸과 세상의 것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감각적 인간의 타락이며, 동시에 지옥 상태의 본질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43, 창3:14,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지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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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1, 창3:14-19, ‘배경’

배경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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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시각은 단지 도구적인 역할을 할 뿐이었고, 그들의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상태였는지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때, 실제로는 단어들을 듣고 있지만 마치 듣지 않는 것처럼 그 의미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단어의 의미조차 넘어서 그 안에 담긴 더 보편적인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 있는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땅 위 사물들을 볼 때, 그것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붙잡혔고, 그 사물들 자체를 생각하였으며, 그것들로부터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을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감각적인 것(the sensuous)이 주된 것이 되었고, 조상들에게서처럼 단지 도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과 땅에 속한 것이 주된 것이 되면, 사람은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하늘의 일들을 추론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를 눈멀게 합니다. 이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뜻은 듣지 않고 단어들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그 의미의 전체적인 취지는 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단 한 단어, 심지어 문법적인 특징 하나만 가지고도 그 사람이 말한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being celestial men, were so constituted that every object they beheld in the world or upon the face of the earth, they indeed saw, but they thought about the heavenly and Divine things the objects signified or represented. Their sight was merely an instrumental agency, and so consequently was their speech. Anyone may know how this was from his own experience, for if he attends closely to the meaning of a speaker’s words, he does indeed hear the words, but is as if he did not hear them, taking in only the sense; and one who thinks more deeply does not attend even to the sense of the words, but to a more universal sense. But the posterities that are here treated of were not like their fathers, for when they beheld the objects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as they loved them, their minds cleaved to them, and they thought about them, and from them about things heavenly and Divine. Thus with them what is sensuous began to be the principal, and not as with their fathers the instrumental. And when that which is of the world and of the earth becomes the principal, then men reason from this about the things of heaven, and so blind themselves. How this is may also be known by anyone from his own experience; for he who attends to the words of a speaker, and not to the sense of the words, takes in but little of the sense, and still less of the universal import of the sense, and sometimes judges of all that a man says from a single word, or even from a grammatical peculiarity.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와 그 후손들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타락의 본질을 단순히 악한 행동이 아니라 ‘보는 방식의 변화’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눈으로 나무를 보았지만, 나무 자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무를 통해 생명과 성장, 그리고 주님의 질서를 보았습니다. 태양을 보면서는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였고, 빛을 보면서는 신적 진리를 생각하였습니다. 꽃을 보면서는 천국의 아름다움을, 결실을 보면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자연계는 목적이 아니라 창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창문을 본 것이 아니라 창문 너머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각은 주된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물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곧 생각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을 통해 천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자연계가 더 이상 상응(correspondence)의 세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최종 실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것을 감각적인 게(the sensuous) 주인이 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원래는 영적인 것이 위에 있고, 감각적인 것은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그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매우 흥미로운 예를 듭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보통 단어 자체보다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의미는 보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에만 집착한다면, 그는 말의 진정한 뜻을 놓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단어 하나나 문법 하나를 붙잡고 전체 내용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적인 삶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의미를 보았고, 후손들은 단어를 보았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상응되는 실체를 보았고, 후손들은 외형을 보았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국을 보았고, 후손들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C.241은 단순히 고대인의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타락은 먼저 사랑의 방향이 바뀌는 데서 시작, 그다음에는 보는 방식이 바뀌며, 결국에는 도구가 주인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세상을 보면서 하늘을 보았지만, 그 후손들은 하늘을 생각한다 하면서도 결국 세상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감각은 도구가 아니라 주인이 되었고, 인간은 하늘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AC.242, 창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AC.242-249)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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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0, 창3:14-19, ‘19절 개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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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3:19)



AC.240

 

다음으로는 그들이 신앙(faith)과 사랑(love)에 속한 모든 것에 혐오(aversion)를 갖게 된 상태가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man)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도 묘사됩니다. (19) Next, their aversion to everything of faith and love; and that thus from being man they became not men. (verse 19)

 

 

해설

 

이 글은 AC.239의 연장선에 있으며,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엄중한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결과로 나타난 영적 상태가 설명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에 혐오를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의심했고, 다음에는 자기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제는 신앙과 사랑 자체를 싫어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세계의 중요한 법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거부하는 상태에 오래 머물면, 나중에는 진리 자체를 불편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체어리티(charity)와 이웃 사랑은 부담스럽고 거슬리는 것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한 무관심이었던 것이 점차 반감으로, 그리고 마침내 혐오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앙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외형이나 지능, 언어 능력이 인간성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천국 관점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것과 결합된 신앙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성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보면, 그는 인간(homo)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끊고, 사랑과 신앙을 거부하며,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추구하게 되면, 외적으로는 인간일지라도 내적으로는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이 점은 AC.239에서 언급된 ‘짐승 같은 본성’과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의 진리와 사랑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높은 차원을 잃어버리고 본능과 욕망만을 따라 살게 되면, 영적으로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40은 단순한 도덕적 비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사랑에 대한 혐오가 생기면, 바로 그 인간성의 핵심이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AC.240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단순히 몇 가지 진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과 사랑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영적 의미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을 가리켜 ‘인간이었으나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타락의 최종 단계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의 변질임을 보여주는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AC.241, 창3:14-19, ‘배경’

배경AC.241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천적 인간(celestial men)이었기 때문에, 세상이나 땅 위의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단지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이 의미하거나 표상하는 천적이고 신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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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9, 창3:14-19, ‘18절 개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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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3:18)



AC.239

 

저주(curse)와 황폐(vastation)가 묘사되며, 또한 그들의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도 묘사됩니다. (18) The curse and vastation are described, and also their ferine nature. (verse 18)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3:18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해설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곧 저주(curse), 황폐(vastation), 그리고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먼저 ‘저주’는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미워하시거나 벌을 내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AC.223 등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주님은 결코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자비와 평화 가운데 계십니다. 따라서 저주란 인간이 스스로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났을 때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연결이 약해질수록 인간 안의 선과 진리가 점점 말라 가는 상태가 바로 저주입니다.

 

다음으로 ‘황폐(vastation)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황폐란 단순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가 점차 제거되어 텅 비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완전히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밝은 지각(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연결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과 감각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그 선과 진리가 하나씩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AC.239는 바로 그 과정을 ‘황폐’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짐승 같은 본성(ferine nature)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ferine’은 야생 짐승 같은, 본능에 지배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래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의해 인도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어버리면 점차 더 낮은 수준의 욕망과 충동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과 짐승의 가장 큰 차이를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능력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AC.238에서 보았듯이 이성이 추론(ratiocination)으로 타락하고, AC.239에서 선과 진리가 황폐되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더 본능과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짐승 같은 본성’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실제 동물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여전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기 사랑에 완전히 지배된 사람들을 영적으로는 맹수나 독사와 비슷한 상태로 설명하곤 합니다.

 

따라서 AC.239는 창3의 타락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간 요약과 같습니다.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로 저주가 생기고, 그 저주로 인해 선과 진리가 황폐되며, 그 결과 인간은 점점 더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어 갑니다.

 

이처럼 AC.239는 단순히 형벌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저주는 그 결과이고, 황폐는 그 과정이며, 짐승 같은 본성은 그 최종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AC.240, 창3:14-19, ‘19절 개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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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8, 창3:14-19, ‘17절 개요’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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