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엉뚱한 질문인데요, 제가 알기로 중간 영계에서 보내는 기간은 길어야 30년을 넘지 않는다고 했어요. 만일 이 기간 중에 이미 천국 특정 공동체로 배정된 사람은 마침 지상의 혈육이 사후 중간영계로 들어오면 어떻게 만나는 건가요? 잠깐 소속 천국 공동체에서 외출을 하는 건가요?

 

 

아주 정확한 지점을 짚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엉뚱하다’고 하셨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을 깊이 읽는 분들만 할 수 있는 정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방식이 지상적 상상과는 다르다.’입니다.

 

 

먼저 핵심을 정리하면, 가는 곳’, 그러니까 최종 거처와 만나는 자유는 서로 다른 원리다

 

스베덴보리는 다음 두 가지를 구분합니다. 영혼의 최종 거처(천국, 지옥)는 영적 본질에 따라 결정되고, 사랑으로 연결된 존재들과의 만남은 영계 전체에 걸쳐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즉, ‘어디에 사는가?’와 ‘누구를 만나는가?’는 완전히 다른 법칙에 의해 결정됩니다. 천국의 특정 공동체에 이미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 공동체에만 갇혀 사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간영계 30은 시간 개념이 아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길어야 30’이라는 표현은 사실 육체적 시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변화의 정도를 우리에게 알아듣게 설명한 것일 뿐입니다. 영계에서는 모두 상태(state)로 설명됩니다.

 

 

이미 천국 특정 공동체에 있는 사람이 중간 영계에 막 들어온 지상 가족을 만나려면, 천국에서 잠시 나와야 하나?’

 

결론은 ‘, 그럴 수 있다’입니다. 그러나 그 ‘외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사람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국의 영들은, 사랑에 의해 그들이 원하거나 주님이 보시기에 필요하다 여겨지는 곳에 순간적으로 있을 수 있다.’(AC 다수, HH.192-200 부근) 즉, 걸어서 가거나 이동 수단을 타거나 문서를 발급받아 ‘외출 허가’를 받는 이런 식이 전혀 아니라, 사랑이 그 위치로 데려다 놓습니다.

 

 

실제 장면, 천국의 부모가 중간 영계로 막 들어온 자녀를 맞는 순간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이미 천국에 소속된 존재였고, 자녀는 지상에서 막 죽어 중간 영계에 도착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버지는 마치 그를 오랜 세월 기다린 듯 자녀 앞에 나타났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서 왔는지 본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사랑에 의해 그곳에 있었다.’(AC, HH 곳곳에 반복되는 원리)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 속해 있던 아버지는 ‘잠깐 천국을 떠나서’가 아니라, 사랑의 인력(引力) 에 의해 자녀가 있는 상태로 즉시 ‘있게 된 것’입니다. 영계에서는 ‘장소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이동’이 곧 이동입니다.

 

 

천국의 영들은 자연적 거리 개념이 없다

 

천국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천국 공동체에 ‘전적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가정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있습니다.(천국 공동체) 그러나 사랑이 느껴지는 곳에는 순간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영계의 공간은 ‘가까움’이 아니라 ‘사랑의 친화성’으로 결정된다라고 요약했습니다.

 

 

그럼 천국 사람은 중간 영계로 내려올 수 있는가?

 

답은 ‘, 가능하다’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상대방의 영적 상태가 낮아짐으로 인해 그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함께 있을 수 있다.’(AC.1880 근방 내용 요지) 그러나 중요한 본질은 이것입니다. 천국인이 중간 영계의 가족을 만날 때, 그는 ‘천국 상태를 버리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의 상태를 느끼고, 그 상태에 맞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상태(state)의 조정이지, 본질적인 소속 변동이 아닙니다.

 

 

천국의 영이 외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가 상태의 다리를 놓는다

 

지상적 사고는 ‘천국에서 잠시 외출해서 중간 영계로 내려와서 만나는가?’이지만, 영계적 실상은 ‘사랑의 연결이 곧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입니다. 이 만남은 다음 두 원리에 의해 설명됩니다. 첫째, 사랑이 이동을 가능하게 한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affectional presence(애정적 임재)라고 부릅니다. 둘째, 서로의 상태가 맞춰지면 즉시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천국에 속한 영이 중간 영계로 들어온 가족을 능히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 중요한 한 가지 제한, 천국인은 지옥 상태에 있는 가족에게는 접근하지 못한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이 결합을 만들지만, 본질(善, 眞)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가족, 악에 빠진 가족, 천국인이 접근할 수 없는 낮은 상태와 같은 경우에는 만남 자체가 자연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거절’이 아니라 영적 법칙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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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의 가족 관계, 스베덴보리가 직접 보고 배운 실제 모습들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왕래할 때, 그가 처음부터 확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지상처럼 가족이 그대로 이어질까?’, ‘상대가 나를 알아볼까?’, ‘이별했던 가족과의 관계는 회복될까?’ 등, 그는 지상에서도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고, 자신도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 부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어머니, 형제들, 누이와의 이별, 사별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영계를 본 뒤 가장 먼저 기록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가족 관계는 사후에 실제로 어떻게 되는가’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본 장면, 지상에서 사랑했던 가족은 서로 알아본다

 

영계에 도착하는 영혼은 ‘나는 죽었다’는 사실보다 먼저, 사람들을 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어머니와 먼저 이별했던 한 남성을 관찰합니다. 그는 영계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훗날 자신을 어릴 적 돌보던 어머니가 영계에 들어오는 장면을 맞이합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인식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상의 얼굴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혈연이 단순히 지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었던 관계는 영계에서 더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가족 관계의 재회는 혈연때문이 아니라 영적 친화성, 친밀성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혈연(生物學)은 자연계에서 맺어지는 관계이고, 영적 친화성(靈的 親和性), 친밀성은 영계에서 결합을 결정하는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재회 장면들을 분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육체적 가족 관계는 영계에서는 더 이상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상에서 가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서 자동적으로 함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 오갔던 가족끼리는 반드시 다시 만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은 영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남깁니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영계에서 더욱 강하게 연결된다.’

 

 

천국에서 가족이 만날 때 보이는 모습, 부드럽지만 격정적인 기쁨

 

스베덴보리는 가족 재회를 ‘천국적 기쁨’ 중 가장 강렬한 기쁨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부부, 자녀, 형제자매가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는 지상에서의 모든 오해와 후회가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의 빛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진짜 마음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래서 지상에서 말하지 못했던 사랑,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 풀지 못한 오해들이 서로를 보는 순간 해소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신학적 진술’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본 장면이었습니다.

 

 

함께 살지 못하는 가족, 사랑이 없었던 관계는 자연히 흩어진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도 여러 번 관찰했습니다. 지상에서는 억지로 한 집에 살았던 가족, 혹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이별한 가족의 경우, 영계에서 서로를 보아도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계에서는 억지로 함께 있을 수 없다. 본질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은 자연히 멀어진다.’ 그는 이것을 보고 ‘두렵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우 깊은 위로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결합되지 않은 관계를 억지로 붙잡아두는 것이 지상에서는 고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는 그 억지가 사라지고,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는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 영원히 함께 있는 관계가 아님을 정확히 설명하다

 

스베덴보리는 부모와 자녀가 영계에서도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합니다. 부모-자녀 관계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영계에서는 서로에게 맞는 공동체로 흩어진다. 부모는 성인 자녀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이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영계의 원리가 영적 친화성, 친밀성에 따른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영적 본질과 자녀의 영적 본질이 다르면 각자가 적합한 천국 공동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점입니다.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은 영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함께 살지 않을 뿐, 서로의 안녕을 기뻐하며 자주 만날 수 있다.’ 즉, 영원한 동거는 없지만, 영적 교류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형제자매 관계, 사랑이 있는 형제는 천국에서도 자주 교류한다

 

지상에서 서로를 아끼며 신앙적,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형제자매는 천국에서도 자주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함께 신앙을 지켰던 형제, 서로를 도왔던 남매, 어린 시절부터 깊은 사랑을 나눈 형제와 같은, 이런 관계는 지상보다 더 깊은 기쁨으로 서로를 만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고, ‘천국에서는 혈연보다 내적 사랑이 결합을 이룬다.’라고 정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으로 깨달은 결론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가족 관계를 보고 내린 결론은 매우 단순하지만 깊습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은 반드시 다시 만난다. 그러나 그 재회는 지상의 관계를 복사한 것이 아니라, 정화된 상태에서의 더 깊은 재회다. 천국에서는 억지 동거가 아니라 영적 친화성이 기준이 된다. 부모-자녀는 영원한 동거는 아니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천국에서 가족 관계는 더 자유롭고, 더 밝고, 더 진실해진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직접 보고 남긴 가장 중요한 가족 관련 결론입니다.

 

 

 

SC.67,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과 중간 영계에 이제 막 들어온 지상 가족과의 만남’

좀 엉뚱한 질문인데요, 제가 알기로 중간 영계에서 보내는 기간은 길어야 30년을 넘지 않는다고 했어요. 만일 이 기간 중에 이미 천국 특정 공동체로 배정된 사람은 마침 지상의 혈육이 사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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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5, ‘엘리사와 암곰 둘에게 찢긴 사십이 명의 아이들’(왕하2:23-24)

왕하2:23-24,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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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2:23-24)라는 내용을 가리켜 유튜브에서 성경 역사상 가장 난해한 구절이라 하며 대문짝만하게 다루는 걸 보았습니다. 겉뜻으로만 보면 정말 그러지 싶은데요, 이 말씀의 속뜻을 알고 싶습니다.

 

 

이 본문은 겉뜻 그대로만 보면 매우 거칠고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처럼 보입니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이런 장면들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영적 상태와 교회의 질서’를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여기서 핵심은 ‘아이들을 벌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조롱하고 거부하는 상태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상징적 계시입니다. 이 전제를 놓치면 이 장면은 잔혹하게만 보이지만, 상응의 빛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영적 법칙을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먼저 ‘엘리사’는 단순한 한 인물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교리’를 상징합니다. 엘리야가 떠나고 엘리사가 뒤를 잇는 구조 자체가 ‘옛 상태에서 새 상태로의 계승’, 곧 진리의 전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벧엘’은 문자 그대로는 장소이지만, 영적으로는 ‘교회’ 혹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벧엘은 종종 ‘타락한 예배’, 즉 외형만 남고, 내적 진리가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참된 진리가 타락한 교회 상태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다음 ‘작은 아이들’이 나와 조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단순한 어린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아이’는 상태를 나타내며, 특히 ‘미성숙한 이해, 혹은 왜곡된 단순한 생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읍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상태에서 나온 사고’임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진리를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그것을 비웃고 거부하는 교회의 생각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외친 ‘대머리여 올라가라’라는 말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성경에서 ‘머리털’은 ‘진리의 가장 외적 표현, 곧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대머리’라는 것은 ‘진리가 겉모습까지도 제거된 상태’, 곧 ‘말씀의 외적 진리마저 부정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조롱은 단순한 놀림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올라가라’는 말은 ‘여기서 사라져라, 우리에게 필요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결국 ‘진리를 완전히 배척하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이제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는 부분을 보면, 이것 역시 사람이 분노하여 저주했다기보다 ‘영적 법칙이 작동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주님의 본성과 질서, 곧 진리와 선의 전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질서에 의해 결과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이 누군가를 임의로 벌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끝까지 조롱하고 거부하는 상태가 스스로 파괴를 불러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암곰 둘이 나와 사십이 명을 찢었다’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은 말씀의 ‘외적 의미’, 특히 그것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암곰’이라는 표현은 그 왜곡된 상태가 ‘강하게 감정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은 종종 ‘선과 진리의 결합’ 혹은 그 반대로 ‘왜곡된 결합’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거짓과 악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십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시험과 심판의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는 수로,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상태가 끝까지 차올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 전체는 ‘진리를 조롱하고 거부하는 교회의 상태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님이 아이들을 잔인하게 벌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경멸하고 배척하는 상태가 어떤 영적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고 있는 상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비웃고 밀어내며 자기 확신 속에 머물게 될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닫히고, 결국 자기 안의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본문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향한 겸손과 경외를 잃지 말라’는 깊은 영적 권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SC.66, ‘사후, 천국에서 가족은 서로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

천국에서의 가족 관계, 스베덴보리가 직접 보고 배운 실제 모습들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왕래할 때, 그가 처음부터 확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지상처럼 가족이 그대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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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4,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부부, ‘두 사람 같으나 하나인 삶’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왕래하며 가장 놀라워했던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배우자였던 사람들, 혹은 영적으로 결합된 부부들이 천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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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26, ‘구세주를 아는 이들’, 70, ‘피난처 있으니입니다.

 

오늘은 2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85번에서 99번입니다. 그 주간 진도에 맞추는 본문이다 보니 절과 절 사이가 중첩될 수 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2-8)

 

이 본문을

 

안식 안에서 열리는 에덴,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85, 창2:2-3, 창2 '안식'의 확장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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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 창2:2-3, ‘안식’의 구조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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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창2:2-3, 영계의 질서로 본 '안식'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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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안식’, 정체성의 변화, '하나님의 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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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천적 인간의 형성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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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초목과 채소’, 천적 인간의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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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비, 안개’, 천적 상태의 평온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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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안식', 평화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 전체를 적시는 상태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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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천적 인간의 상태’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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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겉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과정(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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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겉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사랑의 생명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 그의 신앙,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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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오해 바로잡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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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호흡 자체가 영적 상태와 직결되어 있었던 태고교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이 ‘숨 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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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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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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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범위 중 메인으로 읽은 AC.99번 글은 얼핏 그동안 우리가 읽어 온,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냥 스윽 읽고 지나칠 만한 본문 중에서 심화로 살핀 네 가지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시선을 이런, 어쩌면 ‘평범한 표현들’에 잠시 머무르게 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이성은 주님의 빛을 받을 때, 본연의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됨을 확인합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록해 나가신 이 AC 본문들 역시 그 깊이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깊고 어려워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자 마음먹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열려 천국 빛 아래 있게 되며, 그 순간 천국 천사들처럼 모든 게 이해되어짐을 컨펌(confirm)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선을 의도함’, ‘사랑하기로 마음먹음’입니다. 이 안전한 삶의 태도 안에서 우리는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4-19(D1)

 

2647, 2, 창2.2, 2026-04-19(D1)-주일예배(창2,2-8, AC.85-99), ‘안식 안에서 열리는 에덴,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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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12, 창2:1-3, AC.67-84),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 창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절,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창2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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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심화

 

4.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AC.99 본문에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여기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게 뭔가요? 선행 내용에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라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열려 있다는 건 어떤 건지, 그리고 그것이 왜 주님으로부터인지요?

 

 

AC.99에서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허락을 받는다’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람 안의 모든 기능, 즉 생각, 관념, 말, 행동 등이 닫힌 자기중심의 회로’가 아니라 위로 연결된 상태’에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인플럭스(influx)가 통하는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막힘없이 들어와 그 사람의 내부 질서를 형성하고, 그 질서가 그대로 바깥 표현으로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열림(opened)은 문 하나가 열린다는 이미지보다, 전체 구조가 위를 향해 정렬되고 소통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먼저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이 열려 있다’는 것을 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생각의 형식’은 우리 것이지만 생명’은 위에서 온다고 봅니다. 사람이 자신과 세상 중심으로 살 때는 그 생각이 주로 감각, 기억 지식, 자기 이익의 논리에서 구성됩니다. 이때는 생각이 닫혀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 같은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위에서 비추는 빛을 받습니다. 그러면 생각의 배열이 달라지고, 관념들이 서로 충돌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무엇이 더 본질적인지 자연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생각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주제를 말해도, 한쪽은 방어와 정당화의 논리로 흘러가고, 다른 쪽은 진리와 선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차이가 생깁니다.

 

다음으로 말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자기표현을 넘어, 안에 형성된 질서가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이 생각의 외적 형태라고 보는데, 생각이 주님으로부터 비치고 정렬되면 말도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말이 줄고, 과장이나 왜곡이 줄며, 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말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억지로 조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그렇게 열려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동이 열려 있다’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행동은 의지의 외적 표현인데, 의지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영향 아래 있을 때, 그 사람의 선택과 행위는 점점 일관된 방향을 갖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주 평범한 일, 그러니까 말 한마디, 선택 하나일지라도 그 안에는 이미 위에서 내려온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중심의 계산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더 깊은 기준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행동이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주님으로부터’라고 말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생명을 받는 그릇’이지, 스스로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이 진리와 선을 실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평소에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특별한 환상을 보거나 비범한 체험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근원’을 바르게 두고, 실제로 그 근원으로부터 오는 흐름이 막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열림’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AC.99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처럼, 사람이 지성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두기 시작할 때, 그리고 진리를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할 때, 그때 비로소 이 통로가 열립니다. 반대로 내가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자리에 계속 서 있으면, 겉으로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이 흐름은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점점 살아나고, 어떤 사람은 점점 더 자기 확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리하면, ‘그의 모든 생각과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위를 향해 정렬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생각–말–행동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인간 활동이지만, 그 근원과 흐름이 달라진 상태이며,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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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위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가장 내적인 의미’가 ‘보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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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가장 내적인 의미 보편적 의미가 되는 건가요? 이어지는 내용인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처럼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보편적 질서라는 말인가요?

 

 

핵심을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다만 한 걸음 더 분명히 하자면, 스베덴보리가 가장 내적인 의미(inmost sense)를 동시에 보편적 의미(universal sense)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의미가 단순히 더 깊다’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을 안에서부터 지배하고 포함하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내적인 것은 가장 좁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통일하는 가장 넓은 근원입니다. 이 점이 직관과는 반대로 느껴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다가옵니다.

 

사람의 구조를 예로 들면 이해가 훨씬 쉬워집니다. 몸 전체를 움직이는 것은 손발 같은 바깥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장과 폐입니다. 이 심장과 폐는 위치로 보면 가장 안쪽’이지만, 기능으로 보면 온몸을 살리는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손 하나, 발 하나는 부분적이지만, 심장은 모든 세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인 것이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구조를 의미의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특정 사건, 특정 인물, 특정 상황을 다루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더 넓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반면 가장 내적인 의미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 곧 사랑과 진리의 질서 자체를 다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 모든 시대, 모든 상태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편적 의미’가 됩니다. 결국 내적일수록 좁다’가 아니라 내적일수록 근원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함한다’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문장,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와의 연결을 보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이해하신 대로,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질서라는 이해는 매우 정확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이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한 질서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천국은 어떤 공간이기 이전에 질서’이며, 그 질서는 사랑이 주가 되고, 진리가 그 사랑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이 질서가 그대로 사람 안에 형성되면 그 사람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가장 내적인 의미에서 말씀은 언제나 이 하나를 말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이루시는가’, 그리고 그 나라가 어떻게 사람 안에 형성되는가’입니다. 이보다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는 없습니다. 역사 이야기든, 족보든, 율법이든, 전쟁 이야기든, 가장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이 한 가지 질서로 수렴됩니다. 그러니 그 의미가 보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는 단순히 깊은 해석이 아니라, 모든 의미를 낳는 근원적 중심이기 때문에 보편적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언제나 동일하게, 주님의 나라와 그 나라가 사람 안에 세워지는 질서, 곧 천적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적 인간의 올바른 질서가 곧 천국의 보편적 질서’라는 이해는 정확할 뿐 아니라, 바로 그 표현이 AC.99의 핵심을 잘 붙잡고 있다고 보셔도 됩니다.

 

 

 

AC.99, 심화 4,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AC.99.심화 4.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위 AC.99 본문에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여기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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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위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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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원치 않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이것하고 지성은 주님이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것하고 서로 무슨 상관이 있나요?

 

 

AC.99에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성격 충돌이나 기분의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두 생명의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로 말하면,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는 자리이고, 겉 사람은 세상과 감각, 기억 지식 속에서 형성된 자리입니다. 원래 질서대로라면, 속 사람이 위에서 이끌고 겉 사람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듭남 이전의 상태에서는 이 질서가 뒤집혀서, 겉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속 사람의 요구를 거부하거나 왜곡합니다. 그래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운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실제로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속 사람은 어떤 진리를 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방향을 느끼지만, 겉 사람은 그건 현실적으로 손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왜 나만?’ 같은 식으로 반응합니다. 혹은 말씀을 들을 때, 속에서는 이건 참이다’라는 조용한 확증이 일어나는데, 겉에서는 즉시 분석과 의심, 반론을 만들어 냅니다. 이때 겉 사람의 무기는 바로 이성’과 기억 지식’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 경험, 세상적 기준을 총동원해서 속 사람에서 오는 것을 무력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싸움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  지성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이성과 기억 지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과의 관계를 보면, 이 둘은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 표현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울 수 있는 이유 자체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지성의 근원을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그는 이미 겉 사람의 편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위에서 들어오는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아래에서 축적된 것, 곧 자기 경험과 지식과 논리를 최종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속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들어와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검열하고 심판하는 구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이것을 주신다’는 태도가 아니라 이게 내 기준에 맞나?’를 먼저 따집니다. 이때 이미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기준이고, 이성과 기억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고 섬기는 도구여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성과 기억 지식이 왕이 되어 버리고, 위에서 오는 것은 그 앞에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것이 됩니다. 이 상태 자체가 바로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성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순간, 겉 사람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 결과 속 사람과의 싸움이 시작된다’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내가 아는 것, 내가 이해하는 것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할 때, 싸움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겉 사람은 여전히 반응하고 저항하지만, 더 이상 절대 기준이 아니게 되고, 점점 속 사람의 빛 아래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성을 쓰느냐’가 아니라 이성을 어디에 두느냐’입니다. 이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자리로 있을 때는 그것이 참된 지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성이 스스로를 근원으로 삼고, 위에서 오는 것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것은 곧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같은 이성’이라도 한쪽에서는 빛을 받는 창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빛을 막는 벽이 됩니다.

 

결국 AC.99의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안과 밖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운다’는 것은 현상이고,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 원인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은 이 질서를 다시 바로잡아, 속 사람이 이끌고 겉 사람이 따르는 상태로 회복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AC.99, 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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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위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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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왕래하며 가장 놀라워했던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배우자였던 사람들, 혹은 영적으로 결합된 부부들이 천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습을 보고, ‘결혼’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기록합니다.

 

 

1. 천국의 부부는 서로를 닮아 간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부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이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얼굴 생김새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 기운, 눈빛, 마음의 색깔이 서로 비슷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지만, 마음의 결합 속에서는 하나가 된다.’(‘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 후반부 요지) 이 ‘닮아감’은 억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서로의 선(善)과 진리(眞理)가 하나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상에서 말하자면, 너무 오래 함께 살아서 마음의 온도가 같은 사람들, 혹은 서로를 미리 알기라도 하듯 마음이 통하는 부부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2. 천국의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에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부부가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같은 진리, 같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보통 ‘배우자를 사랑한다’, ‘배우자에게 끌린다’가 출발점이지만, 천국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을 중심으로 동일한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 사랑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구조입니다. 즉, 영적 관점에서는 내가 주님을 향한 방향을 갖고 있고, 상대도 같은 방향을 갖고 있을 때, 그 둘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결혼을 ‘주님 안에서의 둘의 결합’이라고 부릅니다.

 

 

3. 천국의 부부 일치는 겉으로 보이는 조화가 아니라 속에서 일어난 결합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부부들이 겉으로 보기엔 조화롭고 평온하지만, 그 조화는 단순히 정서적 친밀감이나 성격 궁합 때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선과 진리를 통해 결합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기보다 갈등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지상의 결혼은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

 

지상에서는 서로 다른 배경, 성격, 상처로 인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 자연입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이미 성화된 두 마음의 결합

 

천국에서는 서로의 악과 상처, 오해의 뿌리가 제거된 뒤에 서로를 만나기 때문에 지상에서 흔한 갈등의 씨앗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부부는 억지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같아져서 하나가 됩니다.

 

 

4. 천국의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은 고요하지만 깊은 환희가 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부부들을 보며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은 말수가 적지만, 너무나 깊은 기쁨이 내면에서 흐른다.’ 그들의 기쁨은 흥분이나 큰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따뜻한 빛 속에 오래 있었던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된 기쁨입니다. 그는 이 기쁨을 ‘내면의 고요 속에서 우러나는 환희’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이 천국 부부의 특징입니다. 서로 말이 많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기 때문에 침묵조차 평안의 교류가 됩니다.

 

 

5. 스베덴보리를 감동시킨 장면, 손을 잡고 걷는 천국의 부부

 

스베덴보리는 어느 천국 사회에서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손을 가볍게 잡고,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천국의 정원을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영혼의 결합이란 무엇인가를 아주 깊이 깨닫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 생애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깊은 인상을 남긴 순간들 중 하나였습니다.

 

 

6. 지상의 결혼에 대한 실제적 메시지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부부를 본 뒤, 지상에서 결혼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남깁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천국 결혼의 준비 과정이다

 

지상에서는 갈등, 상처, 오해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겪으며 서로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된다면 그 결혼은 이미 천국적 결혼의 씨앗이 됩니다.

 

부부의 가장 큰 일치는 마음의 방향성이 같아지는 것

 

성격도, 취향도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향한 방향만 같으면 천국에서 ‘진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부부의 사랑은 죽음을 넘어간다

 

천국에서 부부가 다시 만나는 이유는 ‘법적 부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영적으로 결합된 부부는 죽음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SC.65, ‘엘리사와 암곰 둘에게 찢긴 사십이 명의 아이들’(왕하2:23-24)

왕하2:23-24,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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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3, ‘AI의 발전과 상관없이 나는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유튜브를 통해 AI의 엄청난 발전을 보면서 불현듯 든 생각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ChatGPT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대략 10년쯤 걸리겠지 하며 하고 있는, 이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의 일이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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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냥 깨달아지고 납득되는 걸 이렇게 표현한 건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99에서 말하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것은 단순히 , 이해가 된다’, ‘납득이 된다’는 인지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측면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생명 쪽에서부터 이해가 열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안에서부터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바깥에서 정보를 받아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을 떠올립니다. 책을 읽고, 설명을 듣고, 비교하고 판단해서 이게 맞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지요. 이건 기억 지식  이성  이해’로 올라가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AC.99에서 말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먼저 어떤 생명의 흐름’, 곧 선과 진리의 감각이 들어오고, 그것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해, 이성, 기억 지식의 영역을 안에서부터 밝히고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전혀 못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이게 이거였구나 하고 열리는 일이 생깁니다.

 

여기서 신앙을 통하여’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살려고 할 때’, 곧 체어리티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그때 그 사람 안에 주님과 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그 통로를 따라 인플럭스(influx), 즉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옵니다. 이 흐름이 바로 이해를 밝히는 실제 원인입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는 머리로 백 번 설명을 들어도 닫혀 있다가, 삶이 조금 바뀌는 순간 갑자기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이걸 그냥 깨달아지는 것 아닌가요?’라고 느끼신 것은 아주 정확한 감각입니다. 맞습니다,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나타납니다. 그런데 차이는 그 깨달음의 출처’에 있습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은 비교, 추론, 논증에서 나옵니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빛’이 이해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안다’고 하지요. 이때의 앎은 판단의 결과라기보다 퍼셉션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와닿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말씀이나 아르카나 구절을 읽을 때, 평소에는 그냥 문장으로만 보이던 것이 어느 날은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고,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동시에 이건 이렇게 살아야겠구나’까지 함께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이해와 의지가 동시에 움직입니다. 단순히 맞는 말이네’가 아니라 이게 진짜다’라는 느낌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주님이 흘러들어오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인지 작용의 설명’이 아니라 영적 작용의 설명’입니다. 이해가 열리는 것은 결과이고, 그 원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입니다. 그리고 그 인플럭스는 아무 때나 임의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앙 안에서, 곧 진리를 살려는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 그 통로가 열립니다. 이 점이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AC.99의 이 표현은 이해가 잘 된다’는 말보다 훨씬 깊은 뜻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와, 사람의 생각 구조 전체를 안에서부터 밝히고 정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이해를 만들어 내는 사건’입니다.

 

 

 

AC.99, 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위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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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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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천국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천국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심화

 

1.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 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위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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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 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AC.99.심화 2.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 위 AC.99 본문에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속 사람이 원하는 걸 겉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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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 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위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가장 내적인 의미’가 ‘보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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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AC.99, 심화 4,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AC.99.심화 4.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위 AC.99 본문에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여기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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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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