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이것이옛날에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사23:7, 15)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Isa. 23:7, 15).
이사야23장 구절이AC.23에 인용된 이유 역시,말씀에서‘날’(day)이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상태와 시대’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의‘날들’을 시간 단위가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들로 해석하고 있는데,이를 위해 선지서에서‘날’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연속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이사야23장도 그 중요한 예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심은‘옛날’(ancient days), ‘그날’(that day),그리고‘한 왕의 날들’(the days of one king)이라는 표현들입니다.본문은 두로(Tyre)에 대한 예언인데,문자적으로 보면 한 도시의 역사 이야기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들 안에서 시간 자체보다‘상태와 시대’를 읽습니다.
먼저7절의‘옛날에 건설된’(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의 날들’(ancient days)은AC전체에서 자주‘태고교회’의 상태,곧 인간과 교회가 주님과 더 가까웠던 초기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다시 말해, ‘날’은 연대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시대입니다.
이어15절에서는‘그날부터 두로가 칠십 년 동안 잊혀질 것’이라고 합니다.여기서도‘그날’은 하루의 시작 시점이 아니라,어떤 영적 상태가 시작되는 시대를 뜻합니다.두로는 말씀에서 흔히‘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상징하는데,두로가 잊혀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참된 지식이 생명을 잃고 황폐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한 왕의 날들에 따라’(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여기서‘날들’은 특정 왕의 재위 기간을 문자적으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그 왕이 대표하는 상태 전체를 뜻합니다.성경에서 왕은 흔히 진리 혹은 진리의 통치를 상징하므로, ‘한 왕의 날들’은 단순한 시간 길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질서와 상태의 기간을 뜻하게 됩니다.
또‘칠십 년’역시 단순한 숫자보다‘충분한 기간’,혹은 황폐와 회복을 위한 완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따라서 이 본문 전체는 도시의 정치사라기보다,지식이 쇠퇴하고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AC.23에 인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말씀 안에서‘날’은 계속해서 어떤 상태와 시대를 뜻하고 있으며,창세기1장의‘날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즉, ‘첫째 날’, ‘둘째 날’은 우주의 시간 계산이 아니라,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 변화의 단계들이라는 점을 이사야의 용례를 통해 다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9보라 여호와의 날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사13:6, 9, 13, 22)The day of Jehovah is at hand.Behold,the day of Jehovah cometh.I will shake the heavens,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Her time is near to come,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Isa. 13:6, 9, 13, 22).
이 이사야13장 구절이AC.23에 인용된 이유는,말씀에서‘날’(day)이라는 표현이 단순한24시간의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영적 상태와 시대 전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의‘첫째 날’, ‘둘째 날’등을 문자적인 시간 단위로 읽지 않고,거듭남의 상태들로 읽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그리고 그 해석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선지서들에서‘날’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예로 드는 것입니다.
이사야13장에서 반복되는 표현은‘여호와의 날’입니다.문자적으로 읽으면 어떤 특정 하루에 재앙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본문의 내용은 단 하루의 사건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거대한 상태 변화를 묘사합니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려 제자리에서 떠나며’, ‘황폐함이 임하고’, ‘죄인들이 멸망한다’는 표현들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교회와 인간 내면 전체의 영적 상태 변화,곧 심판과 황폐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날’이 곧‘때’(time)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실제로22절에서는‘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병렬적으로 말합니다.이는 말씀 안에서‘날’이 물리적 하루보다 훨씬 넓은 의미,곧 어떤 영적 시대나 상태를 뜻한다는 증거입니다.
특히‘여호와의 날’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미래 재난의 날이 아닙니다.그것은 인간과 교회의 상태가 드러나고,주님의 질서 앞에서 판별되는 상태를 뜻합니다.그래서‘분노’와‘진노’같은 표현도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화를 내신다는 뜻이 아니라,악과 거짓이 주님의 진리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상태를 인간 편에서 느끼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린다’는 말은AC전체의 상응 구조 안에서 보면,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뜻합니다.하늘은 내적 차원,땅은 외적 차원을 뜻하므로,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영적 상태 변화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세기1장의‘날’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만일 성경 전체에서‘날’이 시대와 상태를 뜻하는 데 사용된다면,창세기1장의‘날’역시 단순한 물리적 하루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AC.23에서 입증하려고 합니다.
결국 이사야13장이AC.23에 인용된 이유는,말씀에서‘날’이라는 표현이 본질적으로‘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와 시대’를 뜻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그리고 이 원리를 통해,창세기1장의 여섯 날은 우주의 시간표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히게 되는 것입니다.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단8:14, 26)The holy one said unto me,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Dan. 8:14, 26).
이 다니엘8장 구절이AC.22에 인용된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하루의 시간 구분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저녁’은 신앙이 없는 상태, 곧 거짓과 황폐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의 빛이 다시 비치는 신앙과 진리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다니엘8장의 ‘주야’,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표현은 바로 이 영적 리듬을 예언적으로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본문의 중심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일정 기간 후 성전이 회복된다는 예언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와 인간 내면의 영적 상태 변화로 읽습니다. 여기서 ‘성소’는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 곧 인간 안의 거룩한 영역, 혹은 교회 자체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더럽혀지고 황폐해진 상태가 바로 ‘저녁’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아침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밤이 지나고 해가 뜬다는 뜻이 아니라, 황폐와 어둠의 상태가 끝나고, 다시 진리와 신앙의 빛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AC.22에서 말한 ‘아침’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곧 ‘아침’은 언제나 주님의 오심과 연결되며, 그 오심은 죽어 있던 영적 상태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저녁’이 먼저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사람이나 교회는 먼저 자기 힘과 자기 지혜 안에서 황폐함을 경험하게 되고, 그 뒤에야 비로소 주님의 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됩니다. 그래서 ‘저녁→아침’이라는 구조는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라, 거듭남의 필수 질서입니다.
또한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이 다시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소는 본래 주님의 임재의 자리인데, 거짓과 자기 사랑으로 어두워졌던 상태가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다시 주님의 진리와 사랑이 그 중심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침’입니다.
그리고26절에서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다’고 하는 말씀은, 이런 영적 교대가 우연이나 감정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 있는 확고한 질서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즉, 밤이 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며, 저녁은 반드시 아침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결국AC.22에서 이 다니엘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성경 전체에서 ‘저녁과 아침’이라는 언어가 반복해서 ‘영적 황폐와 회복’, ‘신앙 상실과 재생’, ‘주님의 오심에 의한 새 창조’를 뜻하는 상응 언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한 우주적 시간 기록이 아니라, 다니엘서에서도 반복되는 ‘거듭남과 회복의 리듬’인 것입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23:2-4)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and his word was on my tongue;the God of Israel said,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when the sun ariseth,even a morning without clouds,when from brightness,from rain,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2 Sam. 23:2–4).
이 사무엘하23장 구절이AC.22에 인용된 이유는, ‘아침’(morning)이 단순한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주님의 임재로 인해 진리와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AC.22에서 스베덴보리는‘저녁’은 신앙이 없는 상태,곧 어둠과 거짓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주님의 빛이 임하는 진리와 신앙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아침’의 본질을 가장 아름답고 생생하게 보여 주는 본문으로 이 다윗의 마지막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은 먼저‘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이는 이어지는 묘사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영적 상태에 대한 계시라는 뜻입니다.이어서‘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가 묘사되는데,AC의 흐름에서 이런 사람은 단순한 정치적 통치자가 아니라,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온 거듭난 인간,혹은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뜻합니다.
그다음 등장하는 핵심 이미지가 바로‘돋는 해의 아침 빛’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해’(sun)는 언제나 사랑,특히 주님의 사랑을 뜻하고,그 해에서 나오는 빛은 진리를 뜻합니다.따라서‘아침 빛’은 단순한 밝음이 아니라,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가 인간 안에 비치기 시작하는 상태를 말합니다.이것이AC.22에서 말하는‘아침’의 본질입니다.
또한‘구름 없는 아침’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구름은 종종 문자적,외적,혹은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그런데 여기서는 구름이 없습니다.이는 진리가 가려지지 않고 맑게 비치는 상태,곧 혼합과 어둠이 물러간 상태를 뜻합니다.다시 말해,저녁과 밤을 지나 마침내 주님의 빛이 방해받지 않고 비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이라는 표현은AC.22의 핵심과 직접 연결됩니다.비는 진리의 유입을,광선은 주님의 빛을 뜻하며,새 풀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새로운 생명과 선한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즉,주님의 빛과 진리가 인간 안에 들어오면,그 결과로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이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특히 이 이미지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입니다.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폭력적 단절이나 즉각적 완성으로 보지 않습니다.새 풀이 돋아나는 것처럼,생명은 조용하고 질서 있게 나타납니다.그래서 이 본문은AC.22에서 말한‘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이동’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감각적으로 보여 줍니다.
결국 이 구절이AC.22에 인용된 이유는, ‘아침’이라는 상징을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 안에 비추어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상태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다윗의 이 시적 묘사는,창세기1장의‘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가 단순한 하루의 반복이 아니라,영적 생명의 회복과 거듭남의 리듬이라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증언하는 본문인 것입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1, 3-4, 9)In the beginning was the Word,and the Word was with God,and God was the Word.All things were made by him,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In him was life,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He was the true light,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John 1:1, 3–4, 9).
이 요한복음1장 구절이AC.20에 인용된 이유는,창세기1장의‘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단순한 물리적 빛의 창조가 아니라,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진리의 유입을 뜻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남의 첫 단계에 들어설 때,비로소‘주님이 계시며,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고 설명했는데,요한복음1장은 바로 그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선언하는 본문입니다.
먼저‘태초에 말씀이 계셨고,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선언은,창세기1장의‘태초’를 다시 해석하는 열쇠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말씀’(the Word)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자체입니다.그리고 그 진리는 주님과 분리된 무엇이 아니라,곧 하나님 자신입니다.따라서 창세기의 창조는 물질 우주를 만드는 사건 이전에,신적 진리가 인간 안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 읽혀야 합니다.
이어지는‘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여기서‘만물’은 단지 자연계만이 아니라,인간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모든 영적 질서까지 포함합니다.즉,거듭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 역시 말씀,곧 주님의 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AC전체의 흐름에서 보면,창세기1장의 여섯 날은 모두 이‘말씀의 역사’에 의해 진행됩니다.
특히AC.20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은‘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과 빛을 분리하지 않습니다.주님은 단순히 빛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생명 자체이시며,그 생명이 인간 안에서는‘빛’으로 경험됩니다.다시 말해,사람이 진리를 보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계몽이 아니라,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스며들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1장의‘빛이 있으라’는 말은 단순히 우주 공간에 광자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그것은 인간 안에 처음으로‘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AC.20에서 말하는‘빛의 최초 침투’가 바로 이것입니다.사람은 그 빛 안에서 자기 선이 사실은 선이 아니었음을 보고,동시에 주님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는 흐름도AC.20의 문맥과 깊이 연결됩니다.거듭남 이전 인간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기 때문에,빛이 와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그러나‘참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춥니다.이는 거듭남의 시작이 인간 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언제나 먼저 비추시는 주님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결국AC.20에서 이 요한복음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창세기1장의‘빛’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그 빛은 물리적 빛 이전에,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이며,말씀의 빛이며,인간 안에서 거듭남을 시작하게 하는 진리의 빛입니다.그래서 요한복음1장은 창세기1장의 속뜻을 해설하는 복음서적 열쇠 역할을 합니다.곧‘창조의 빛’은 곧‘말씀의 빛’이며,그 빛은 결국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Except ye believe that I am,ye shall die in your sins(John 8:24).
이 요한복음8장24절이AC.20에 인용된 이유는,거듭남의 첫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단순한 도덕 개선이나 종교적 관심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으로 빛 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비로소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동시에‘주님이 계시며,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바로 그 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은‘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여기서 핵심은 단순히‘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그이다’(I am)라는 표현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이는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생명과 존재의 근원이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선언입니다.다시 말해,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채 머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AC.20의 흐름에서 보면,거듭남 이전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으로 여기고,그것을 지지하는 생각들을 진리라고 믿습니다.즉,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그런데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사람은 처음으로‘내 기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그리고 그다음 단계로,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이 자기 밖에,곧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요8:24가 결정적으로 들어옵니다.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면,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고,결국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이것이‘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다.여기서‘죽음’은 육체적 죽음보다 먼저,영적 죽음을 뜻합니다.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반대로, ‘주님이 그이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이것이AC.20에서 말하는‘빛의 최초 침투’입니다.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적 선언이 아니라,거듭남의 출발 조건을 말하는 말씀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스베덴보리가 여기서‘믿음’을 단순한 교리 동의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그에게 믿음은 주님의 존재와 본질을 인정하고,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향 전환입니다.그래서 이 구절은‘예수를 믿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식의 협박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안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영적 원리를 밝히는 말씀으로 읽혀야 합니다.
결국AC.20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거듭남의 첫 빛은 언제나‘주님 인식’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사람은 먼저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이어서 주님만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그리고 바로 그 인식이 죄와 어둠에서 생명과 빛으로 넘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사51:9-11)Awake as in the ancient days,in the generations of old.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the waters of the great deep,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Isa. 51:9–11).
이 이사야51장 구절이AC.18에 인용된 이유는,창세기1장2절의‘깊음’(deep),곧‘깊음 위의 흑암’이 단순한 바다나 물리적 심연이 아니라,거듭나기 이전 인간 안에 있는‘욕망과 거짓의 혼돈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스베덴보리는 특별히‘바다’, ‘깊은 물’, ‘용’,그리고‘구속받은 자들이 건너가는 길’이라는 이미지들을 통해,창조와 구원이 동일한 영적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먼저 이 본문은 단순히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는 시가 아닙니다.문자적으로는 홍해를 가르시고,백성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스베덴보리는 그 속뜻에서 이것을‘거듭남 이전의 혼돈 상태로부터 인간을 건져 내시는 주님의 역사’로 읽습니다.그래서‘바다’와‘깊은 물’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인간 안에 있는 깊은 혼란과 시험의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말씀에서‘용’(dragon)이나‘바다 괴물’은 흔히 자기 사랑과 거짓,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교만한 추론을 뜻합니다.다시 말해,인간 안에서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가장 깊고 원초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이것은AC.18에서 말한‘깊음’과 정확히 연결됩니다.창세기1장2절의‘깊음’은 아직 질서 잡히지 않은 인간의 욕망과 거짓의 심연이며,이사야는 그것을‘바다의 깊은 물’과‘용’이라는 상징으로 다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바다를 말리시고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셨다’는 표현도 결정적입니다.이것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주님께서 인간 안의 혼돈과 시험 가운데‘길’을 내신다는 뜻입니다.즉,거듭남은 혼돈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 깊음 한가운데서 주님께서 길을 여심으로 시작됩니다.그래서AC.18에서 스베덴보리는‘깊음’이 단지 부정적 상태만이 아니라,동시에 주님의 영이 움직이시기 시작하는 자리라는 점을 말하려 했습니다.
이어지는‘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말은,거듭남의 결과를 뜻합니다. ‘시온’은 주님과의 사랑의 상태,곧 회복된 교회와 회복된 인간 내면을 상징합니다.따라서 깊은 물을 건넌다는 것은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혼돈 상태에서 질서와 평안의 상태로 이동하는 영적 여정을 뜻합니다.
결국 이 본문이AC.18에 인용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스베덴보리는 창세기1장의‘깊음’을 설명하면서,그것이 단순한 우주론적 바다가 아니라 인간 안의 영적 혼돈 상태이며,주님은 바로 그 깊음 속에서 길을 내시고 사람을 구속하여 새 창조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이사야51장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창조와 출애굽과 거듭남은 모두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곧‘혼돈의 깊음→주님의 역사→길의 열림→구속받은 자의 귀환’이라는 구조입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렘4:22, 23)My people is stupid,they have not known me;they are foolish sons,and are not intelligent;they are wise to do evil,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I beheld the earth,and lo a void and emptiness,and the heavens,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AC.1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예레미야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창세기1장2절의‘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상태가 단순한 물질 우주의 초기 상태가 아니라, ‘거듭나기 이전 인간의 영적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즉,예레미야4장의 이 구절은 창세기1장의 언어가 실제로는 인간 내면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상응의 언어임을 보여 주는 결정적 병행 본문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본문을 보면 먼저‘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여기서 문제는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주님에 대한 인식과 신앙의 상실입니다.그래서 이어지는 말이‘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다’입니다.이것은 이해력은 남아 있지만,그 이해력이 선을 향하지 않고 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는 상태를 말합니다.즉,지혜가 거꾸로 된 상태입니다.
그다음에 바로‘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었다’는 표현이 이어집니다.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왜냐하면 여기서‘땅’은 실제 지구가 아니고, ‘하늘’도 실제 우주 하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인간 안의 상태를 말합니다. ‘땅’은 겉 사람,혹은 교회의 수용 상태를 뜻하고, ‘하늘’은 속 사람,곧 진리와 선이 있어야 할 내적 영역을 뜻합니다.그런데 그 하늘에‘빛이 없다’고 합니다.즉,진리가 사라졌고,주님의 빛이 비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혼돈하고 공허하다’는 표현은 바로 창세기1장2절의 표현과 동일합니다.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창세기의 창조 언어가 이미 선지서에서‘영적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다시 말해,창세기의‘혼돈과 공허’는 물질 우주의 미완성 상태가 아니라,아직 주님의 질서와 빛이 들어오기 전 인간 내면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예레미야 본문에서는 그 상태가‘죄와 무지와 신앙 상실’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즉, ‘빛 없음’은 물리적 어둠이 아니라 영적 어둠이며, ‘혼돈과 공허’는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의 내적 상태를 뜻합니다.그래서AC.17에서 이 구절은,창세기1장의 창조 이야기가 사실은‘거듭남 이전 인간 상태’에서‘주님의 빛이 들어오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 본문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예레미야4장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보라,창세기의 언어는 이미 선지자들 안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역시 인간 내면의 새 창조,곧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다.’
‘창2, AC.67-181 번역, 해설 및 심화 - ChatGPT.hwpx’는 단순히 창세기 2장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서가 아닙니다. 이 책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구조, 곧 인간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어떻게 ‘천적 상태’에서 ‘자기 자신 중심의 상태’, 곧 ‘자신의 own(proprium) 상태’로 기울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 1장이 인간 거듭남의 전체적인 큰 흐름과 질서를 보여주는 장이라면, 창세기 2장은 그 거듭남이 실제로 어떤 내적 상태 안에서 이루어지는지를 훨씬 더 친밀하고 섬세하게 보여주는 장입니다. 그리고 AC.67-181은 바로 그 섬세한 내적 세계를 스베덴보리 특유의 깊이로 해설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곧 깨닫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외우거나 종교적 소속을 갖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의 ‘상태’(state)에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상태 안에 있으며, 무엇을 사랑하고, 어디로부터 생각하며, 무엇 안에서 평안을 느끼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성경 지식 전달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독자를 자기 자신 안으로 데려갑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을 읽으며 단순히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 안에 존재하는 가장 깊은 구조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 책은 ‘태고교회’에 대한 이해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influx를 거의 직접적으로 느끼며 살았고, 선과 진리가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perception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인간처럼 끊임없이 논증하고 의심하며 자기 판단으로 신앙을 유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쉬듯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상태였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천적 인간’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낯설면서도 동시에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인은 거의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자기 의견을 세우며,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것을 성숙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인간의 가장 깊은 평안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질서 안에 머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단순한 낙원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상태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기억과도 같습니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단순한 육체적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속 사람이 있고, 세상과 연결되는 겉 사람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인간이 자기 own으로 기울어질수록 이 질서는 점점 무너지게 됩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의 에덴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아직 분열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인간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AC.67-181에서는 ‘에덴동산’, ‘강들’, ‘나무들’, ‘선악과’, ‘경작하며 지키게 함’, ‘생명나무’ 같은 표현들이 단순한 역사적 묘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응임이 자세히 설명됩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성경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읽도록 초대합니다. 문자 자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영적 의미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어느 순간 창세기 2장을 읽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읽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농업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주어진 선과 진리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삶을 매우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설명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방치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잡초가 자라듯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작함’은 선을 돌보는 것이고, ‘지킴’은 거짓과 악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성경을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지도처럼 느끼게 합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선악과’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흔히 선악과를 단순한 순종 시험 정도로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훨씬 더 깊게 봅니다. 선악과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own으로부터 살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불순종을 넘어 인간 존재 방향 자체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의 타락은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창세기 2장에서부터 조용히 가능성으로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그 미세한 긴장과 전환의 분위기를 매우 깊이 있게 드러냅니다.
또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스베덴보리의 ‘언어 이해’가 얼마나 독특한지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천사들의 언어가 단순한 단어 교환이 아니라 상태와 affection의 전달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천적 천사들의 경우에는 논증과 설득의 언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상태가 상태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어떤 영혼이 그들과 처음 접촉할 때, 먼저 경험하는 것은 설명보다도 atmosphere입니다. 곧 평안, 부드러움, 자기방어의 사라짐 같은 것입니다. 이 책에서 설명되는 ‘무게 없음의 분위기’ 역시 바로 그런 천적 상태의 한 단면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붙들고 유지하려는 긴장에서 잠시 놓일 때 느끼는 영적 가벼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극도의 피로와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비교해야 하며,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매우 특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참 평안이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 머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옛 시대의 천사적 인간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이 잃어버린 영적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단순히 추상적 철학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설명은 놀라울 정도로 실제적입니다. 인간이 왜 불안해지는지, 왜 교리 논쟁에 빠지는지, 왜 자기 확신에 집착하는지, 왜 평안을 잃는지, 왜 신앙이 메말라지는지를 아주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성경 해설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병리와 회복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독자에게 ‘거듭남’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결단이나 감정적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재배열되는 과정입니다. 속 사람이 열리고, 겉 사람이 정돈되며, 사랑과 진리가 질서 있게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은 바로 그 ‘본래적 질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였으며, 또한 어떤 존재로 다시 부르심 받고 있는지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창2,AC.67-181번역,해설 및 심화-ChatGPT.hwpx’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작업입니다. 이 책은 창세기 2장을 단순한 고대 이야기에서 꺼내 오늘의 인간 영혼 앞에 다시 세워 놓습니다. 그리고 독자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부터 살고 있는가? 자기 자신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인가?’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창세기 2장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며, 동시에 오늘날 우리 모두 앞에 놓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사후,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81
이처럼 천적 천사들에 의해 소생된 사람은 아직은 어두운 생명(obscure life) 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적 천사들에게 맡겨질 때가 이르면, 잠시의 간격 후에 영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고, 그때 천적 천사들은 떠납니다. 그리고 사람이 빛의 유익을 받도록 영적 천사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저에게 보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서두에 덧붙여 이어서 설명됩니다. As yet the man, thus resuscitated by the celestial angels, possesses only an obscure life; but when the time comes for him to be delivered to the spiritual angels, then after a little delay, when the spiritual angels have approached, the celestial depart; and it has been shown me how the spiritual angels operate in order that the man may receive the benefit of light, as described in the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prefixed to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이 단락은 ‘소생 과정의 마지막 전환점’을 분명하게 정리해 주는 문장입니다. 지금까지의 서술이 천적 천사들에 의한 보호와 결합, 그리고 평안과 연속의 상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여기서는 그 상태가 ‘완성’이 아니라 ‘준비 단계’였음을 명확히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에 의해 소생된 사람의 생명을 ‘어두운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부정적 평가가 아니라, 아직 이해와 분별의 빛이 본격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임을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사랑과 평안 안에 있지만, 스스로 사고하고 분별하는 의식적 삶은 아직 전면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살아 있으나 아직 ‘깨우침의 빛’ 속에는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다음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천사들에게로의 인도’입니다. 이 전환은 갑작스럽지 않으며, ‘잠시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급변하지 않도록 배려된 질서입니다. 천적 천사들이 떠나고 영적 천사들이 접근하는 이 교대는, 보호의 상실이 아니라 역할의 이양입니다.
천적 천사들은 사랑과 의지의 중심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영적 천사들은 이해와 사고의 영역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 천사들의 임재는 곧 ‘빛의 유익’을 받는 단계의 시작입니다. 이 빛은 감각적 빛이 아니라, ‘이해의 빛, 분별의 빛’입니다. 인간은 이때부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사랑하는지 점차 자각하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모든 과정을 ‘미리 예고된 구조’로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다음 장의 서두에서 이어서 설명된다’고 밝힙니다. 이는 소생의 과정이 단편적인 체험 보고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체계화된 서술임을 보여줍니다. 즉, 지금까지는 ‘천적 소생’, 이후에는 ‘영적 각성’이 이어집니다.
AC.181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사랑의 보호에서 이해의 빛으로 나아가는 ‘질서 있는 여정’입니다. 천적 천사들은 평안 속에서 생명을 붙들고, 영적 천사들은 빛 속에서 의식을 열어 줍니다. 이 두 단계는 분리되지 않으며, 주님의 자비 안에서 정확한 순서로 이어집니다.
이로써 창세기 2장과 그에 덧붙은 ‘소생에 대한 아르카나’의 큰 흐름이 하나로 완결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신 것, 정말 의미 있고 귀한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