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4)

 

 

AC.120

 

애굽(Egypt)이 기억 지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유브라데 강(Euphrates)도 기억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언서들에 나타난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미가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오셔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천적 인간과 같은 상태가 되게 하실 것을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도 말합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도 ‘애굽’(Egypt)과 ‘유브라데 강’(Euphrates)은 기억 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그로부터 나온 추론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도 ‘유브라데 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유브라데 강은 이스라엘 땅이 앗수르 쪽으로 미치는 경계였는데, 이는 기억 지식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에 있어서 경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의미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where also the “river 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 두 경계는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의 네 번째 강, 곧 유브라데 강이 왜 ‘경계’로 불리는지를 명확히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앞선 AC.118–119에서 이성과 기억 지식의 질서가 제시되었다면, AC.120은 그 구조의 ‘가장 바깥선’을 그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말합니다. 애굽과 유브라데는 모두 기억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정보 차원이 아니라, ‘감각에서 시작된 지식’까지 포함하는 가장 외적인 층위입니다. 기억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더 이상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브라데는 ‘마지막 단계’이자 ‘경계’입니다.

 

미가서의 예언은 이 구조를 회복의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성벽이 다시 세워지고, 규례가 회복되는 날에, 앗수르와 애굽, 그리고 유브라데로부터 사람들이 온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성(앗수르), 기억 지식(애굽), 감각적 기억의 경계(유브라데)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 안으로 다시 불려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곧, 외적인 것들이 내적인 질서로 재편입되는 순간입니다.

 

예레미야서의 질문은 반대로 경고의 의미를 띱니다. 왜 애굽의 물을 마시려 하느냐, 왜 앗수르와 유브라데의 물을 마시려 하느냐는 질문은, 인간이 ‘외적 지식과 이성적 추론을 근원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책망합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은 마셔야 할 생명수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사용되어야 할 도구입니다.

 

시편의 포도나무 비유는 매우 섬세합니다. 포도나무는 교회와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 가지가 바다까지, 그리고 유브라데까지 뻗는다는 것은, 생명의 영향력이 ‘감각과 기억의 최외곽까지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뻗는 것과 뿌리가 거기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뿌리는 여전히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문장을 덧붙입니다. 유브라데가 이스라엘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 지식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말입니다. 경계는 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선’입니다. 그 선을 넘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그 안에 머물면 모든 것이 안전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인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까지는 이 전체 구조를 요약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영역은, ‘가장 외적인 기억 지식부터 가장 내적인 지성까지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질서 안에서만 ‘기업’이 됩니다.

 

AC.120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 지식은 끝이 아니라 경계이며, 그 경계를 지킬 때에만 이성과 지성, 그리고 사랑의 지혜가 자기 자리를 잃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심화

 

1. ‘7:10-12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이 구절이 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선 AC.118–119에서 세워진 ‘애굽–앗수르–브랏’이라는 구조, 곧 ‘기억 지식–이성–경계(최외곽)’의 질서가 단절이 아니라 ‘회복된 연결’로 작동할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통해, 흩어져 있던 인간 내면의 기능들이 다시 하나로 모여 ‘성벽이 세워지는’ 상태, 곧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 이르고, 다시 ‘강’ 곧 브랏까지 이어진다는 표현은, 이성이 기억 지식과 연결되고, 그 흐름이 가장 바깥 경계까지 미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동이나 확장이 아니라, ‘내면의 각 층위가 서로 단절되지 않고 질서 있게 이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곧 위로부터 오는 유입이 이성을 거쳐 기억 지식까지 내려가고, 다시 그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묶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벽을 건축하는 날’이라는 표현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성벽은 보호와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는 외적 인간, 곧 겉 사람이 이제 무너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내적 질서에 따라 정돈되고 보호되는 상태’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지경이 넓어진다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한 영역 확장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인간 전체에 더 넓게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라는 표현은, 인간 안의 모든 차원, 곧 가장 낮은 감각적 영역에서부터 가장 높은 영적 영역까지가 ‘하나의 질서 안으로 통합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AC.119에서 말한 ‘애굽–앗수르–이스라엘의 조화’가 실제로 이루어진 상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앗수르와 애굽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인용된 것이 아니라, ‘이성, 기억 지식, 그리고 그 경계까지 포함한 인간 전체가 주님을 향해 다시 모이고 연결되는 회복의 장면’이기 때문에 인용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미가서 본문은 인간 내면의 기능들이 흩어져 제각각 작동하던 상태에서, 다시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주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은 고립된 능력이 아니라 기억 지식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만 참된 역할을 하며, 그 전체가 회복될 때 비로소 ‘성벽이 세워지는’ 영적 상태가 된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2: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이 구절이 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앞서 세워진 ‘애굽–앗수르–브랏’의 구조가 **올바르게 연결될 때의 복된 상태뿐 아니라, 그 질서가 뒤틀릴 때 어떤 왜곡이 생기는가**를 함께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미가서가 ‘회복된 연결’을 보여주었다면, 이 예레미야 구절은 그 반대로 **잘못된 의존과 왜곡된 흐름**을 드러냅니다.

 

먼저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그 강’ 곧 브랏은 동일한 상응 구조를 유지합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브랏은 그 이성이 의지하는 최외곽의 지식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세 곳으로 ‘가서 물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물을 마신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거기에서 얻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본래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이성으로,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내려오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반대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위로부터 받지 않고, **아래에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에서 생명을 얻으려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가는 길’, ‘앗수르로 가는 길’이라고 표현됩니다. 이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잘못 설정된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앗수르로 가서 그 강물을 마신다’는 말은, 이성을 통해 얻은 이해와 논리를 **최종 기준으로 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성은 본래 통로인데, 그것을 근원으로 삼는 순간, 사람은 자기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애굽의 물을 마신다는 것은 기억 지식과 경험, 정보 자체를 생명의 근거로 삼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애굽과 앗수르를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라, **유입의 방향이 뒤집힌 상태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할 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 할 때,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이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할 때, 그것은 참된 생명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을 낳게 됩니다.

 

AC.120의 흐름에서 보면,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인간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과 지성은 서로 연결되어야 하지만, 그 연결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흐름’이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그 질서를 벗어난 연결, 곧 **자기 중심으로 엮인 지식과 이성의 결합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용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이 예레미야 본문은 ‘어디에서 마시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이 생명의 근원을 주님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이성에서 찾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은 사용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니며, 기억 지식 역시 근원이 아니라 그릇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시80:8, 11’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이 구절이 AC.120에 인용된 이유는, 앞에서 계속 다루어진 ‘애굽–앗수르–브랏’의 구조를 **부정이나 경고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될 때의 확장과 결실’이라는 긍정적 장면으로 완성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애굽과 앗수르의 물을 마신다’는 왜곡된 의존이 경고되었다면, 시편 80편은 그와 동일한 요소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어떻게 살아나는가**를 보여줍니다.

 

먼저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져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을 의미하지만, 이 본문에서는 그것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사용됩니다’. 곧 기억 지식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취하시어 새롭게 심으시는 재료**입니다. 이어서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심으셨다’는 말은, 그 지식 안에 섞여 있던 왜곡과 혼합된 요소들이 제거되고, 순수한 상태로 재정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다는 가장 외적인 영역, 곧 감각과 삶의 실제를 의미하고, ‘강’ 곧 브랏은 기억 지식의 경계, 인간 인식의 최외곽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곧, **주님께서 심으신 생명(포도나무)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바깥 영역까지 모두를 덮고 확장된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이 AC.120에서 중요한 이유는, 같은 애굽과 강(브랏)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사람이 거기서 ‘물을 마시려’ 했고, 즉 그것을 근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이 먼저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며, 그 결과로 가지가 바다와 강까지 ‘뻗어 나갑니다’. 곧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이고, 후자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며 확장되는 생명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구절이 ‘경계까지 이른다’는 표현을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브랏은 경계이지만, 그 경계는 닫힌 끝이 아니라 **생명이 미치는 범위의 끝**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은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을 지나, 가장 바깥 영역까지 도달하여 그 전체를 살아 있게 합니다.

 

정리하면, 이 시편 구절은 AC.120에서 다음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기억 지식과 이성, 그리고 그 경계까지 포함한 인간의 모든 층위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때 전체가 살아나고 확장되는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잘못된 의존’과 ‘올바른 확장’을 대비시키며, 동일한 구조가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본문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4. ‘창15:18’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 구절이

 

 

 

AC.119, 창2:14, ‘앗수르,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9.심화

 

4. ‘앗수르

 

 AC.119 본문에서 앞에서는 앗수르를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이성(reason)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 둘,  the rational reason은 다르다고 앞에서 읽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인용 구절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건가요?

 

 

좋은 지적이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the rational(이성적 마음)’과 reason(이성)’이 뒤섞여 보이는 것은 개념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같은 영역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에서는 이 둘이 엄밀히 구별되므로, 그 차이를 분명히 잡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the rational’은 하나의 층위’, 혹은 기관’’입니다. 곧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구조적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위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아래로 전달하고, 아래의 기억 지식을 받아 위로 올리는 중간 장(場)’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the rational mind’라고 할 때는,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 기능적 영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반면, ‘reason’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 혹은 활동’’입니다. 곧 그 이성적 마음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 즉 비교하고, 연결하고, 판단하고, 추론하는 움직임 자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the rational’은 이성이라는 자리’이고, ‘reason’은 그 자리에서 이성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앗수르를 두고 어떤 곳에서는 the rational’, 어떤 곳에서는 reason’이라고 하느냐 하면, ‘본문이 강조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1장처럼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묘사될 때는, 그 높이와 구조,  이성적 마음이라는 존재 자체’가 강조되므로 the rational’이 더 적합합니다. 반대로 이사야 19장처럼 애굽과 왕래하고 섬기며 연결되는 장면에서는, 이성이 실제로 지식을 정리하고 연결하는 작용’이 강조되므로 reason’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용 구절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실체의 측면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이라는 기관과 본다’는 행위를 구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있어야 보지만, 눈 자체와 보는 행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앗수르는 언제나 이성의 영역’을 가리키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그것을 구조’로 보느냐, 다른 문맥에서는 작용’으로 보느냐에 따라 the rational’과 reason’이라는 표현이 달리 사용됩니다. 그래서 혼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두 각도에서 설명하는 일관된 사용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AC.119, 창2:14, ‘앗수르,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

bygrace.kr

 

AC.119, 심화 3, ‘사19:23-25’

AC.119.심화 3. ‘사19:23-25’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9.심화

 

3. ‘19:23-25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이 AC.119에 인용된 이유는,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이라는 세 이름을 통해 인간 내면의 세 층위, 곧 기억 지식, 이성, 지성의 올바른 연결 질서가 어떻게 이루어질 때 복이 되는가’를 한 장면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을 단순한 역사적 민족으로 보지 않고, 각각을 인간 정신의 기능으로 읽습니다. 곧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다’는 말은, 기억 지식과 이성 사이에 단절이 아니라 열린 통로’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즉, 지식이 이성으로 올라가고, 이성이 다시 지식을 정리하며 서로 왕래하는 상태입니다. 이어서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한다’는 표현은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기억 지식이 이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함께 주님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지식이 이성을 섬기고, 이성이 주님을 향할 때 비로소 올바른 예배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이 구조의 정점이 이스라엘’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복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성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합하여 완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성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살아내는 능력이며,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 전체가 ’이 됩니다. 그래서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라는 선언은, 이 세 층위가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이며, 각각 제자리에 있을 때 거룩해진다는 뜻입니다.

 

AC.119의 맥락에서 보면, 이 구절은 단순히 상응의 예를 하나 더 드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에스겔에서 앗수르= 이성’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보였다면, 이사야에서는 그 이성이 기억 지식과 지성과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즉, 이성은 독립된 중심이 아니라, 아래로는 지식을 정리하고 위로는 지성으로 열려 있는 중간 기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단절되지 않고, 주님을 향해 하나로 연결될 때, 그 전체가 복이 된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은 높지만, 중심이 아니며, 올바른 질서 안에서만 참된 역할을 한다’는 AC.119의 핵심 주장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19, 심화 4, ‘앗수르’

AC.119.심화 4. ‘앗수르’ 위 AC.119 본문에서 앞에서는 앗수르를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이성(reason)을 의미’한

bygrace.kr

 

AC.119, 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AC.119.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위 겔31:3에서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으로 번역했을까요? 짚으신 대로입니다.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9.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위 겔31:3에서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으로 번역했을까요?

 

 

짚으신 대로입니다.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는 직역하면 그 가지(새순)가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었다’는 뜻인데, 개역개정의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은 원문을 그대로 옮긴 번역이라기보다 문맥 전체를 고려해 의미 중심으로 재구성한 의역’’에 가깝습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그 꼭대기(혹은 높은 부분)가 구름(혹은 빽빽함) 가운데 있었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구름’에 해당하는 단어가 실제 하늘의 구름을 가리킨다기보다, ‘두터움’, ‘빽빽함’을 뜻하는 말에서 온 것이어서, 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갈립니다. 영어 번역은 이 점을 따라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로 풀었고, 개역개정은 그 이미지를 높이 솟아 구름에 닿는 것’으로 이해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느냐 하면, 번역에는 두 가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이 주는 전체 이미지와 인상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개역개정은 여기서 후자를 택해, ‘레바논 백향목의 압도적인 높이’를 강조하는 쪽으로 번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다’는 구조적 묘사보다, ‘구름에 닿을 만큼 높다’는 인상적 표현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 관점에서는, 영어 번역처럼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다’는 표현이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앗수르)이 기억 지식(많은 가지들) 속에서 작동한다는 구조’를 읽기 때문입니다. 즉, 이성은 공중에 떠 있는 능력이 아니라, 수많은 개념과 지식 속에서 자라나는 기능이라는 점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은 틀린 번역이라기보다 높이’를 강조한 의역이고, ‘among the thick boughs’는 구조와 관계’를 드러내는 직역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일반 독자에게는 개역개정이 더 장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상응이나 내적 의미를 읽을 때는 영어 표현이 더 정밀하게 작동하는 번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AC.119, 심화 3, ‘사19:23-25’

AC.119.심화 3. ‘사19:23-25’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

bygrace.kr

 

AC.119, 심화 1, ‘겔31:3-4’

AC.119.심화 1. ‘겔31:3-4’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9.심화

 

1. ‘31:3-4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이 구절이 AC.119에 인용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앗수르 = 이성’이라는 상응을 단순 정의가 아니라 말씀 자체의 증언’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을 먼저 제시한 뒤, 반드시 예언서의 장면을 통해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에스겔의 백향목 환상은 그 가운데서도 이성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먼저 이 구절은 이성이 무엇인가’를 형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앗수르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묘사된 것은, 이성이 가진 높이와 구조적 힘, 그리고 사유를 조직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곧고 높이 자라며 가지가 넓게 퍼지는 백향목처럼, 이성은 인간 정신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이며, 생각과 지식을 체계로 묶어 주는 중심 역할을 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이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나 AC.119에서 더 핵심적인 이유는 이성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물들이 그것을 기르고’,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둘러 흐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이성의 생명은 자기 안에 있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유입’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118-119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이성은 스스로 빛나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흘러들어올 때만 명석해집니다.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이 에스겔 구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성이 기억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라는 표현은, 이성이 추상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 지식과 개념들 속에서 자라고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앗수르(이성)는 애굽(기억 지식) 위에 서서 그것을 조직하지만, 동시에 그 재료에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AC.119에서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의 삼중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이 매우 적절한 근거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이성의 양면성’을 암시하기 때문에 인용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크며 위엄 있는 나무이지만, 그 생명은 물의 흐름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 흐름이 유지될 때는 이성이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지만, 끊어질 때는 같은 이성이 교만과 왜곡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 구절은 세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에 AC.119에 인용됩니다. 곧, 이성이 얼마나 높고 강력한 기능인지,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유입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기억 지식과 연결된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장면 안에 모두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이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앗수르 = 이성’이라는 해석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19, 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AC.119.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위 겔31:3에서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으로 번역했을까요? 짚으신 대로입니다.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bygrace.kr

 

AC.119, 창2:14, ‘앗수르는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예언서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에스겔에서 말하기를,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여기서 이성(the rational) 레바논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불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함,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은 기억 지식(the knowledges of the memory)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훨씬 더 명료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과 다른 많은 곳에서 애굽(Egypt)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이성(reason)을 의미하며, ‘이스라엘(Israel)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이 글은 AC.118에서 제시된 ‘힛데겔 강 = 이성의 명석함’, ‘앗수르 = 이성적 마음’이라는 정의를, 예언서 전체를 가로지르는 상응의 증언으로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말씀이 스스로 이 해석을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에서 앗수르가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백향목은 곧고 높으며,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나무입니다. 이는 이성이 가진 구조적 힘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이성은 인간 정신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능력이며, 사유의 높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자라는 조건은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라지 않았고, ‘물들’과 ‘깊은 물’, 그리고 ‘강들’로 인해 자랐습니다. 다시 말해, 이성은 유입에 의해 살아납니다.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함,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이 기억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성이 작동하는 실제 내부 구조를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들은 이성의 토양이자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방향을 갖지 못합니다. 이성은 이 기억 지식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고 연결하지만, 그 이성 자체도 위로부터의 흐름 없이는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질서를 더 넓은 구조 속에 배치합니다.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이 서로 왕래하며 하나의 복을 이룬다는 그림은, 인간 정신의 삼중 구조를 매우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입니다. 이 셋이 서로 단절되지 않고 연결될 때, 곧 기억 지식이 이성으로 정리되고, 이성이 지성으로 밝혀질 때, 그 전체가 ‘’이 됩니다.

 

특히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라는 표현은, 기억 지식이 이성을 섬겨야 한다는 질서를 말합니다. 정보와 경험은 이성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이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또한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하는 대목은, 이성 자체도 인간의 자랑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나의 기업’으로 불리는 것은, 지성이 주님의 목적과 직접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단순한 이해 능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살아내는 능력이며, 이는 인간 안에서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영역입니다.

 

AC.119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높고 강력하지만, 근원은 아니다. 기억 지식과 지성을 잇는 중간에 서서 섬길 때에만 참되며, 이 삼중 질서가 하나로 움직일 때, 인간 전체가 복이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31:3-4

 

 

AC.119, 심화 1, ‘겔31:3-4’

AC.119.심화 1. ‘겔31:3-4’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

bygrace.kr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AC.119, 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AC.119.심화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위 겔31:3에서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으로 번역했을까요? 짚으신 대로입니다.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bygrace.kr

 

3. ‘19:23-25

 

 

AC.119, 심화 3, ‘사19:23-25’

AC.119.심화 3. ‘사19:23-25’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

bygrace.kr

 

4. ‘앗수르

 

 

AC.119, 심화 4, ‘앗수르’

AC.119.심화 4. ‘앗수르’ 위 AC.119 본문에서 앞에서는 앗수르를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이성(reason)을 의미’한

bygrace.kr

 

 

 

 

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8.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바로 위 심화 4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좀 더 자세히 풀어 주세요.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는, 이성이 본질적으로 ‘두 방향으로 모두 열려 있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성이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을 따라 작동할 때는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지만, 그 유입을 끊고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할 때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동일한 기능에 대해 동시에 칭찬과 경고가 함께 주어집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부터 보겠습니다. 앗수르가 올바르게 사용될 때, 그것은 ‘명석한 이성’, 곧 진리를 분명하게 보고 질서를 세우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으로 유입되고, 그것이 이성적 마음을 거쳐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펼쳐질 때, 이성은 그 흐름을 ‘정리하고, 구분하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이성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빛을 받아 반사하고 확장하는 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의 앗수르는 교회를 보호하고, 진리를 왜곡 없이 전달하며, 사람의 삶을 질서 있게 만드는 유익한 기능으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경계가 시작됩니다. 이성은 본래 ‘받는 자리’인데, 인간은 쉽게 그 이성을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는 근원’으로 착각합니다. 즉, 이성이 유입의 통로라는 사실을 잊고,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기 시작하는 순간’, 앗수르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뀝니다. 이때 이성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재단하려 합니다. 그 결과, 참된 것조차 자기 방식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고, 거짓된 것이라도 논리적으로 맞아 보이면 받아들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예언서에서 앗수르를 교만과 왜곡의 상징으로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이 두 상태의 차이는 ‘능력의 크기’가 아니라 ‘유입의 방향’에 있습니다. 이성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을 따라 작동할 때는 밝아지고, 자기중심으로 닫힐 때는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성을 없애거나 억누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이 어디에 붙어 있는가, 무엇을 근원으로 삼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앗수르’에 대한 긍정과 경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유는, 이성이 인간 안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빛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창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빛이라고 착각하기 가장 쉬운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폐기할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할 ‘통로’이며, 바로 그 점에서 늘 찬사와 경고가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bygrace.kr

 

AC.118, 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AC.118.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8.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위에서 오는 것을 받아 겉 사람의 생각과 지식을 조직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기능상 겉 사람에 속한 것으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이성이 낮거나 세속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와 아래(감각, 기억 지식)를 연결하는 중간이면서도 아래쪽에 기울어 있는 층위’’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구조를 보시면,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곧 생명에 속한 것을 직접 받는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퍼셉션이 중심이고, 판단 이전의 아는 상태’가 있습니다. 반면 겉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 말과 행위의 자리입니다. 이 둘 사이에 놓인 것이 이성적 마음입니다. 이성은 위로부터 온 것을 받아 아래의 지식과 생각을 정리하고, 연결하고, 판단으로 풀어내는 기능’을 합니다. 바로 이 아래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에, 분류상 겉 사람 쪽에 둡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성적 마음이 실제로 기억 지식(scientifica)을 재료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이성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작동하지 않고, 경험과 언어, 개념이라는 외적 자료를 가지고 추론합니다. 그래서 그 작용의 장(場)은 자연스럽게 겉 사람의 영역에 놓입니다. 주님으로부터의 유입은 속 사람을 통해 내려오지만, 이성이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겉 사람의 재료와 형식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AC.118에서 말하는 흐름,  주님  속 사람  이성적 마음(겉 사람)’이라는 질서가 성립합니다. 이 질서가 유지되면 이성은 명석해지고,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 흐름이 끊어지면, 같은 이성적 마음이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여기며 독립하려 하고’, 그때 왜곡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성적 마음’이 겉 사람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그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작용의 방향과 자리의 문제’입니다. 이성은 위에서 시작되지 않고, 위에서 받은 것을 아래에서 펼쳐내는 기능이기 때문에, 구조상 겉 사람의 편에 놓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언제나 근원’이 아니라 통로’이며, 그 근원을 향해 열려 있을 때에만 참된 명석함을 갖습니다.

 

 

 

AC.118, 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AC.118.심화 5.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 바로 위 심화 4에 ‘스베덴보리가 앗수르(이성)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bygrace.kr

 

AC.118, 심화 3, ‘Euphrates, Phrath’

AC.118.심화 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8.심화

 

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입니다.

 

Phrath’는 히브리어 원어 프라트(פְּרָת)를 그대로 음역한 이름이고, ‘Euphrates’는 이 히브리어 이름이 그리스어 유프라테스(Εὐφράτης)를 거쳐 라틴어와 영어로 전해진 형태입니다. 즉, 성경 원문에서는 Phrath’이고, 서양 번역 전통에서는 Euphrates’로 굳어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Phrath’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원어에 더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상응과 내적 의미를 다루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말씀의 가장 초기 형태, 곧 히브리어 표현을 존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권 독자에게 익숙한 Euphrates 대신 Phrath’를 사용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런 이름 선택이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강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각각 특정한 영적 기능을 뜻하는 상응이기 때문에, 원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그 의미를 더 직접적으로 전달한다고 본 것입니다.

 

정리하면, ‘Phrath’는 히브리어 원어 이름이고, ‘Euphrates’는 그 번역, 전승 과정에서 생긴 그리스, 라틴식 이름이며,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를 다루는 맥락에서 원어에 가까운 Phrath’를 선택한 것입니다.

 

 

 

AC.118, 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AC.118.심화 4.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본문에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왜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이 겉 사람에 속하나요?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스

bygrace.kr

 

AC.118, 심화 2, ‘기혼과 힛데겔’

AC.118.심화 2. ‘기혼과 힛데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가 뭔가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는 단순히 ‘두 번째 강과 세 번째 강’의 순서 차이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단계와 성격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18.심화

 

2. ‘기혼과 힛데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가 뭔가요?

 

기혼과 힛데겔의 차이는 단순히 두 번째 강과 세 번째 강’의 순서 차이가 아니라, ‘이해가 작동하는 서로 다른 단계와 성격의 차이’입니다. 둘 다 이해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깊이와 방향, 그리고 기능이 다릅니다.

 

먼저 기혼은 AC.116-117에서 보았듯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 것들을 이해 안에서 알아보고 분별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이해의 기초이며, 아직은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참이다 하고 알아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기혼은 이해의 수용적 단계’, 또는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힛데겔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힛데겔은 단순히 알아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인식들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연결하고, 판단하는, 이른바 이성적 작용의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reason’과 rational’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즉, 기혼이 알아보는 이해’라면, 힛데겔은 생각하고 전개하는 이해’입니다.

 

이 차이를 흐름으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지성으로 흐르면서, 먼저 기혼 단계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힛데겔 단계에서는, 그 인식들을 가지고 추론하고, 체계화하고, 판단하는 이성의 활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혼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천적 질서 안에 있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받아들이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힛데겔 단계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생각을 만들어내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성이 자기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쉽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지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혼은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알아보는 이해의 단계이고, 힛데겔은 그 인식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전개하는 이성의 단계입니다. 하나는 인식’, 다른 하나는 추론’이며, 하나는 수용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작용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인간 이해 구조를 정확히 보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AC.118, 심화 3, ‘Euphrates, Phrath’

AC.118.심화 3. ‘Euphrates, Phrath’ Euphrates를 왜 Phrath라고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Euphrates’와 ‘Phrath’는 서로 다른 강이 아니라 ‘같은 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른 이름

bygrace.kr

 

AC.118, 심화 1, ‘reason과 rational’

AC.118.심화 1. ‘reason과 rational’ reason과 rational의 차이가 뭔가요? AC.118에서 ‘reason’과 ‘rational’은 비슷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는 분명히 구별되는 두 층위를 가리킵니다. 이 차이를 잡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