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시22:29)All those who go down to the dust shall bow before Jehovah,and those whose soul he hath not made alive(Ps. 22:29).
AC.278에서 스베덴보리가 시22:29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흙’(dust)이 단순한 땅의 흙이나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생명을 잃은 상태, 곧 정죄를 받아 지옥 상태가 된 걸 의미함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9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를 설명하면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시편은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를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와 나란히 언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만일 ‘흙’이 단순히 육체의 무덤을 의미한다면 모든 사람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므로 특별한 구별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특별히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흙은 단순한 물질적 상태가 아니라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은 ‘다 그(Jehovah)앞에 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통치와 심판 아래 모든 사람이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자도 있고, 스스로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있습니다. 후자에 대해 ‘진토 속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에 머물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흙’은 생명이 없는 것, 가장 낮은 것, 그리고 뱀이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창3에서 뱀이 ‘흙을 먹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흙은 자기 사랑과 감각적인 것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인간은 영적으로 ‘흙’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흙으로 돌아간다’는 창세기의 말씀을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곧 사람이 주님의 생명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만을 따라 살게 되면, 그는 영적으로 생명을 잃고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이 시편 구절은AC.278의 논지를 직접 뒷받침합니다. 즉 ‘흙’은 단순한 자연적 물질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생명을 잃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여, 창3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가 육체의 종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 곧 정죄를 받아 지옥 상태가 된 걸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AC.278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by returning to the ground whence he was taken)의 의미가 교회가 거듭나기 이전 상태와 같은 겉 사람(the external man)으로 되돌아감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땅’(ground)이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또한 ‘흙’(dust)의 의미가 정죄를 받음과 지옥이라는 사실도, 저주를 받은 결과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한 뱀에 대하여 이미 설명한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거기서 보여준 ‘흙’의 의미에 덧붙여, 시편의 다음 말씀들도 있습니다. That by “returning to the ground whence he was taken” is signified that the church would return to the external man such as it was before regeneration,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as previously stated. And that “dust” signifies what is condemned and infernal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serpent, which in consequence of being cursed is said to “eat dust.” In addition to what was there shown as to the signification of “dust,” we may add the following passages from David: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시22:29) All those who go down to the dust shall bow before Jehovah, and those whose soul he hath not made alive (Ps. 22: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 Thou hidest thy faces, they are troubled; thou takest away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Ps. 104:29),
이 말씀들은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설 때, 숨이 끊어지고 죽게 되며, 그리하여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곧 정죄를 받아 지옥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which means that when men turn away from the face of the Lord, they expire or die, and thus “return to the dust,” that is, are condemned and become infernal.
해설
AC.278은 창3:19의 마지막 말씀인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마무리하는 대목입니다. 일반적인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구절을 육체적 죽음의 기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자연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를 우선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가 흙으로 분해되는 현상이 아니라, 교회와 인간이 거듭남 이전의 외적 상태로 퇴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는 ‘흙’(dust)이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앞서 AC.255 이하에서 뱀이 ‘흙을 먹을지니라’ 한 것처럼, 흙은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흙 자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흙’은 주님의 생명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 곧 정죄(condemnation)와 지옥 상태(infernal state)를 상징합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시편 두 구절을 인용합니다. 시22에서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와 나란히 언급됩니다. 이는 흙이 단순한 무덤의 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라는 걸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시104에서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라는 말씀도 단순한 육체적 죽음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호흡은 생명의 유입을 의미하며, 주님의 생명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인간은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상태를 주님의 적극적인 형벌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본문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설 때’라고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생명의 근원과 연결이 끊어지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생명의 유입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 얼굴은 내면의 현현을 뜻하기 때문에,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고,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선다는 것은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단순한 죽음의 선언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결과를 묘사하는 영적 표현입니다.
AC.278은 창3의 심판 선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인간의 비극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 분리의 최종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와 지옥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흙’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주님 없이 자기 자신만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 상태의 상징인 것입니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Thou hidest thy faces,they are troubled;thou takest away their breath,they expire,and return to their dust(Ps. 104:29),
AC.278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04:29을 인용하는 이유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return to their dust)는 말이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영적 생명을 잃고 정죄 받은 상태에 이르게 되는 의미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9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를 해석하면서, 같은 상징이 사용된 시편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실제로 얼굴을 돌리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생명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께서 낯을 숨기신다’는 것은 사람 편에서 주님의 사랑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사람이 주님에게서 돌아설 때, 마치 주님께서 멀어지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어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호흡’은 단순한 공기의 숨결이 아니라 생명의 유입(influx)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은 주님께서 끊임없이 생명을 흘려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생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을 의지하게 되면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의 ‘죽음’을 육체의 죽음보다 영적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먼지’(dust)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서 창세기에서 뱀이 흙을 먹게 된 것처럼, 흙은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 곧 주님과 분리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가 흙으로 분해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갇혀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는 바로 본문 자체가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호흡을 거두신즉’, ‘죽어 먼지로 돌아간다’는 세 단계를 연결하여 말합니다. 즉 주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생명의 유입이 거절되며, 그 결과 영적 죽음과 ‘흙의 상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278에서 설명하는 ‘흙으로 돌아감’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시편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창세기의 ‘흙’이 물질적인 흙이 아니라 영적 상징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주님의 얼굴에서 돌아설 때, 그는 생명의 근원과 분리되고, 결국 ‘먼지로 돌아감’, 곧 영적 생명을 잃고 정죄 받은 상태, 지옥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정죄’(condemnation)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condemnation)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화를 내시거나 벌을 선고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정죄를 하나님의 심판이나 형벌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전혀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에게 정죄란 사람이 자신의 사랑과 삶을 통하여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결과이며, 그 선택에 따라 자신의 상태가 확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비 자체이시므로,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뿐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따라서 정죄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한 결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정죄를 하나의 ‘판결’이라기보다 ‘상태의 귀결’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사랑하고 선택하며 살아온 모습 그대로 영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는 겉으로 감추어졌던 사랑과 의도가 모두 드러나고, 각 사람은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은 천국을, 악을 사랑한 사람은 지옥을 자신의 집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정죄의 실상입니다.
정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자유와도 깊이 관련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강제로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으십니다. 만일 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억지로 천국에 데려간다면, 그는 천국의 사랑과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사랑이 지배하는 지옥을 더 편안하게 여기며,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정죄란 주님께서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스스로 머물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죄는 한순간의 실수나 죄 하나 때문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듭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비록 많은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정죄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악을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선이라고 정당화하고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 스스로 정죄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나오는 ‘심판’도 주님께서 사람을 임의로 구분하시는 행위라기보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주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비치지만, 선한 사람은 그 빛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악한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빛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빛 앞에서 사람의 본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도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는 두려움의 교리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의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사람 자신의 자유에 맡기십니다. 결국 정죄란 주님께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한 결과 자신이 사랑하는 삶과 공동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이란 주님께서 특별히 몇 사람만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이 그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단순히 사람이 죽은 뒤 가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과 삶이 지옥의 사랑과 하나가 된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은 먼저 사람 안에서 시작되며, 사후의 지옥은 그 내적인 상태가 완전히 드러난 결과입니다. 따라서 ‘지옥(적) 상태’란 어떤 공간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신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천국(적) 상태가 형성되고,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유익과 지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점차 지옥(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장소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지옥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사랑이란 자신을 돌보는 건강한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과 세상, 심지어 주님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처음에는 작아 보여도 점차 지배욕으로 발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미워하고, 진리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 선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점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기쁨이었던 말씀이 부담이 되고, 회개를 촉구하는 진리가 간섭처럼 느껴지며, 사랑과 섬김보다 인정과 성공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지옥 상태가 깊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옥은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날마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조금씩 형성됩니다.
또한 지옥 상태는 거짓과 악이 서로를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악한 사랑이 생기면, 사람은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은 다시 악한 사랑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이처럼 악과 거짓은 서로를 지탱하며, 사람의 마음을 점점 더 닫아 버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단순히 악의 세계가 아니라, 악과 거짓이 완전히 결합된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 상태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회개의 기회가 있으며,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셔서 사람을 돌이키려 하십니다. 유혹과 시련도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지옥 상태에서 벗어나 천국 상태로 옮겨 가도록 돕는 섭리의 도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인정,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지옥 상태는 점차 무너지고 새로운 천국 상태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갑자기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과 삶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사람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과 같은 분위기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반대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으로부터 형성된 천국 상태가 완전히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죽음 이후의 형벌을 강조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상태입니다. 사람은 매일의 작은 선택을 통하여 천국 상태를 키워 갈 수도 있고, 지옥 상태를 굳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단순히 미래의 지옥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지옥 상태를 발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로 그것을 날마다 새롭게 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AC.277
이것이 내적 의미, 곧 말씀의 속뜻입니다. 문자에만 머무는 사람은, 사람이 수고와 얼굴의 땀으로 땅에서 빵을 얻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man)은 어떤 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의미하며, ‘땅’(ground)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빵’(bread)도 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동산’(garden)도 동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미 충분히 보여준 바와 같습니다. This is the internal sense. He who keeps close to the letter, understands no other than that man must procure bread for himself out of the ground by labor, or by the sweat of his face. “Man” however does not here mean any one man, but the most ancient church; nor does “ground” mean ground, nor “bread” bread, nor “garden” garden, but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s has been sufficiently shown.
해설
AC.277은 지금까지 창3에 대해 스베덴보리가 전개해 온 해석 전체를 짧게 요약하는 결론과 같은 글입니다. 그는 ‘이것이 내적 의미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문자적 의미와 내적 의미의 차이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창3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는 말씀도 단순히 노동의 고통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의 가장 바깥 껍질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자연적인 표현 속에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내적 의미를 통해 교회와 인간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창세기 초반부의 인물들을 역사 속의 개인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람’(아담)은 단순한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창3은 한 개인의 범죄 기록이라기보다 태고교회의 타락과 쇠퇴를 묘사하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찬가지로 ‘땅’도 단순한 흙이나 토양이 아니라 인간의 외적 인간, 그러니까 겉 사람, 또는 진리와 선이 심어지는 삶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빵’, 그러니까 ‘먹을 것’은 육체의 음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생명이며, ‘동산’은 나무와 꽃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 지혜와 퍼셉션이 가득한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스베덴보리는 창3의 거의 모든 요소를 상응(correspondence)에 따라 해석합니다. 뱀은 감각적 인간, 즉 인간의 감각 파트를, 여자는 교회의 애정과 의지를, 남자는 이성을, 나무는 지각과 인식을, 빵은 천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문자에만 머무르면 농업과 노동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인간 정신의 구조와 교회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매우 깊은 계시가 됩니다.
AC.277은 바로 이러한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 원리를 독자에게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즉 말씀은 문자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 속에 감추어진 천적, 영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땅’, ‘빵’, ‘동산’과 같은 단어들을 자연적 의미로만 이해하면 말씀의 가장 깊은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이 글은 창3 전체에 대한 하나의 해석 원칙을 제시합니다. 말씀은 역사와 자연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는 교회와 인간 영혼, 그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미 충분히 보여준 바와 같다’고 말하며, 독자가 이제 문자 너머의 내적 의미를 보는 시각을 갖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5, 6)
AC.276에서 스베덴보리가 민21:5-6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싫어하게 될 때 어떤 영적 상태에 빠지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먹을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르며 싫어한 사건은 바로 그러한 천적 양식에 대한 혐오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만나는 단순한 광야의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만나는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천적 선과 영적 진리를 표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6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만나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만나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하늘에서 주어지는 양식보다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만족을 더 원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음식 불평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 사건은 인간이 영적 생명을 거부하고 자연적, 세속적 삶만을 원하게 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신앙의 진리와 장차 오실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했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천국의 것보다 세상의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만나를 혐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이 불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뱀은 감각적 인간(sensuous man)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불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거짓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뱀이 백성을 무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벌을 내리셨다는 뜻이라기보다, 천적인 것을 거부한 결과 감각적 욕망과 자기 사랑이 더욱 강하게 사람을 지배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AC.276의 문맥에서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이 사용됩니다. 본래 천적인 것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타락한 사람은 그것을 부담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양식조차 싫어하게 됩니다. 만나는 변한 것이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인 것에 대한 혐오와 거부가 얼마나 심각한 영적 상태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거부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창3에서 말하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상태, 곧 천적 생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하게 된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Matt. 4:4),
AC.276에서 스베덴보리가 마4:4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의 참된 생명이 물질적 음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천적 생명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먹을 것’(bread)이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 해석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떡’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자연적 양식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영적 양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인간에게 육체적 생명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이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자나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명과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살아가는 것도 바로 이 생명 때문이며, 인간 역시 내적 인간, 즉 속 사람을 통해 이 생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AC.276의 중심 논점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3:19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에서 먹을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러한 천적인 것들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영적 양식보다 자연적 양식만을 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오직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으로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야 시험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육체의 필요보다 먼저 영적 생명에 중심을 두셨고, 인간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떡’의 참된 의미를 설명합니다. 참된 떡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며, 참된 삶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AC.276에서 인용된 이유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인간과 천사의 참된 양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창3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은 단순한 노동의 어려움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양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게 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he that eateth of this bread shall live to eternity(John 6:58).
AC.276에서 스베덴보리가 요6:5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먹을 것’(bread)이 단순한 육체적 음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곧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9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먼저 ‘먹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이 구절을 가장 직접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십니다.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여기서의 떡이 물질적인 음식이라면 이 말씀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떡은 영적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선, 그리고 진리의 생명으로 이해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주님은 단순히 떡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떡 자체이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지혜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살아가는 양식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사람의 영혼 역시 같은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무엇을 섭취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성만찬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성만찬의 떡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Divine Good)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떡을 떼어 나누는 행위는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먹을 것은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창3:19을 보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이 더 분명해집니다. 먹을 것은 본래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천적인 것이지만, 타락한 사람은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천국의 것들을 자연스럽게 사랑하던 상태를 잃어버리고, 마치 힘겨운 노동 끝에 억지로 먹을 것을 먹는 것처럼 그것들을 어렵고 부담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6:58을 인용한 이유는, ‘떡’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신적 선과 천적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가 확립되어야만 창3의 ‘먹을 것을 먹는다’는 말씀이 단순한 육체적 생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주님 자신이 인간과 천사의 참된 양식이심을 보여주며,AC.276전체 해석의 기초가 되는 핵심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AC.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의 의미가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먹을 것’(bread)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먹을 것’은 모든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천사들의 양식입니다. 만일 그것이 박탈된다면 천사들은 사람이 빵(bread, 먹을 것, 떡, 양식)이나 음식을 빼앗기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땅의 빵과 상응하며, 그래서 말씀의 많은 곳에서 빵으로 표상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먹을 것’, 곧 ‘떡’이신 이유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That 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ignifies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read.” By “bread” is meant everything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is the food of the angels, on the deprivation of which they would cease to live as certainly as men deprived of bread or food. That which is celestial and spiritual in heaven also corresponds to bread on earth, by which moreover they are represented, as is shown by many passages in the Word. That the Lord is “bread,” because from him proceeds whatever is celestial and spiritual, he himself teaches in John: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8) 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 he that eateth of this bread shall live to eternity (John 6:58).
그러므로 성만찬에서도 빵과 포도주가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이 천적인 것은 만나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천사들의 양식이라는 사실은 주님의 다음 말씀으로도 분명합니다. Wherefore also bread and wine are the symbols employed in the holy supper. This celestial is also represented by the manna. That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constitutes the food of angels is manifest from the Lord’s words: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Matt. 4:4),
곧 사람은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그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that is, from the life of the Lord, from which comes everything celestial and spiritual.
[2]홍수 직전에 존재했던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 곧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분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가 언급되면 그들은 등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혐오와 반감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표상하는 만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렀고, 그 때문에 불뱀들이 그들 가운데 보내졌습니다(민21:5-6). The la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flood, and is here treated of, had become so thoroughly lost and immersed in sensuous and bodily things, that they were no longer willing to hear what was the truth of faith, what the Lord was, or that he would come and save them; and when such subjects were mentioned they turned away. This aversion is described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o also the Jews, in consequence of their being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did not acknowledge the existence of heavenly things, and desired only a worldly messiah, could not help feeling an aversion for the manna, because it was a representation of the Lord, calling it “vile bread,” on which account fiery serpents were sent among them (Num.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5, 6)
또한 사람들이 환난과 비참함 가운데 있어 눈물로 천적인 것들을 받게 될 때, 그것들은 그들에 의해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혐오감을 가지고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얼굴에 흘린 땀의 빵’(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Moreover the heavenly things imparted to them in states of adversity and misery, when they were in tears, were called by them the “bread of adversity,” the “bread of misery,” and the “bread of tears.” In the passage before us, that which was received with aversion is called 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
※ 아래는 저런 여러 종류의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의 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사30:20)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the bread of misery)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왕상22:27)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신16:3)
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80:4, 5)
해설
AC.276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3:19)의 의미를 매우 깊이 설명하는 단락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노동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훨씬 깊은 영적 의미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먹을 것’은 육신의 음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곧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6:58)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떡은 단순히 주님을 상징하는 표지가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 모든 영적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또한 성만찬의 떡과 광야의 만나도 모두 같은 천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떡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문제는 떡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있습니다. 태고교회 초기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것을 기쁨과 평안 가운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말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감각과 육체적인 것에 사로잡혀 신앙의 진리와 장차 오실 주님에 관한 말씀을 듣는 것조차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만나를 싫어했던 사건을 예로 듭니다. 만나는 주님을 표상하는 하늘의 양식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음식’(민21:5)이라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그 음식이 상징하는 하늘의 생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의 상태와 본질적으로 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언제나 생명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럽고 싫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난의 떡’, ‘비참의 빵’, ‘눈물의 양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천적인 것 자체가 고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평안 가운데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난과 눈물, 비참함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30:20의 ‘환난의 떡’, 시80:5의 ‘눈물의 양식’은 모두 그러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정한 표현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나타나는 이러한 상징을 종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순조롭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길 때에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상실, 질병과 유혹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될 때, 이전에는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말씀이 위로와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달라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AC.276의 핵심은 ‘땀’보다 ‘먹을 것’에 있습니다. 먹을 것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이며, 주님께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사람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생명의 떡은 기쁨이 아니라 부담으로, 평안이 아니라 수고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환난과 눈물마저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사람이 다시 생명의 떡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AC.276이 전하는 가장 큰 소망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창3:19)
AC.275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을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는 거듭나기 이전에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는 그가 정죄된 상태, 곧 지옥적 상태에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is signified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to “return to the ground from whence he was taken,” is to relapse into the external man, such as he was before regeneration; and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signifies that he is condemned and infernal.
해설
AC.275는 창3:19에 대한 내적 의미를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하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인간의 노동, 죽음, 그리고 육체의 흙으로의 귀환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적으로 영적 상태의 변화로 해석합니다.
먼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을 뜻한다고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먹을 것’을 천적 선,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으로 이해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그러한 천적 생명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선과 진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그것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수고와 저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저항하고 멀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소외를 뜻합니다.
다음으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라는 말씀은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퇴보로 이해합니다. 원래 인간은 거듭남을 통해 겉 사람이 속 사람의 지배 아래 놓이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타락이 진행되면 반대로 겉 사람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고, 사람은 거듭나기 이전의 자연적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라는 것은 영적 상승의 반대 방향, 곧 겉 사람 중심의 삶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육체적 죽음에 대한 선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볼 때, 인간은 결코 소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흙’(dust)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가장 낮은 자연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흙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바람에 날리는 것이고, 발 아래 밟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함으로써 영적으로 가장 낮고 생명 없는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정죄’(condemnation)와 ‘지옥적 상태’(infernal state)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도 주님께서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269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이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 결과로 그러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과 천국을 주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면 결국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 남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지옥의 본질입니다.
AC.275는 창3의 심판 선언이 단순한 육체적 노동과 육체적 죽음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겪게 된 영적 쇠퇴의 마지막 단계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천적인 것을 싫어하게 되고, 거듭남 이전의 겉 사람 상태로 되돌아가며, 마침내 생명의 근원과 분리된 ‘흙’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비극이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주님과의 분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사37:26, 27)Hast thou not heard how I have done it long ago,and from the days of old have I formed it;now have I brought it to pass,and it shall be to lay waste bulwarks,fenced cities,in heaps;and their inhabitants,short of hand,were dismayed and put to shame;they were made the grass of the field,and the green[olus]of the herb,the grass of the housetops,and a field parched before[coram]the standing corn(Isa. 37:26–27).
스베덴보리가AC.274에서 사37:26-27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영적으로 자연적 생명만을 따라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는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라는 여러 식물 비유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은 사람과 교회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식물 종류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점차 쇠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들의 풀’과 ‘푸른 나물’은 쉽게 자라고 쉽게 시드는 식물입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깊은 생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의존하는 자연적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맺는 열매는 자라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지붕의 풀’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지붕 위에는 흙이 거의 없기 때문에, 풀이 잠시 돋아날 수는 있어도 오래 자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내적 연결 없이 외적 지식과 형식만으로 유지되는 신앙도 잠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유혹과 시련을 만나면 쉽게 메말라 버립니다. 이는 겉 사람은 활동하고 있지만, 속 사람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또한 ‘자라지 못한 곡초’는 영적 성장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곡식은 본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자라야 하지만, 아직 익기도 전에 말라 버리면 아무런 결실도 남기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 안에 심겨진 선과 진리도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면 거듭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황폐(vastation)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본문의 ‘태초부터’와 ‘상고부터’라는 표현에도 주목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히 먼 옛날을 뜻하는 시간 표현으로 보지 않고, 홍수 이전 태고교회 말기를 가리키는 상응적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곧 이사야는 당시의 역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래된 교회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적으로 메말라 갔는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37:26-27은 창3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사람이 타락한 결과 ‘밭의 채소를 먹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사37에서는 그 결과가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라는 다양한 상징으로 더욱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잃을수록 점점 깊은 영적 황폐 속으로 들어가며, 결국 열매 없는 생명만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37:26-27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자연적인 음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적 생명을 잃은 사람의 상태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자라지 못한 곡초’는 모두 생명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하며, 이를 통하여 스베덴보리는 타락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더욱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단4:25)They shall drive thee from man,and thy dwelling shall be with the beast of the field;they shall make thee to eat grass as oxen,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thee(Dan 4:25).
스베덴보리가AC.274에서 단4:2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음식에 관한 말이 아니라, 사람이 영적으로 들짐승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게’ 된 사건은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라는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짐승처럼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상응으로 이해합니다. 곧 주님을 떠난 사람은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지만, 영적으로는 들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에게서 쫓겨나서’는 참된 인간성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단순히 이성과 언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과의 연결을 잃으면 육체는 여전히 사람이지만, 영적으로는 더 이상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들짐승과 함께 살며’는 삶의 중심이 영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냅니다. 들짐승은 본능과 감각을 따라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own과 자기 사랑에 지배되는 사람도 감각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창3에서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으로 표현된 상태입니다.
‘소처럼 풀을 먹으며’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풀은 쉽게 자라고 쉽게 마르는 식물로서, 깊은 생명력을 가진 열매와는 대조됩니다. 따라서 ‘풀을 먹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선과 진리가 아니라, 자연적 욕망과 감각 수준에서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징을 통하여 사람이 영적 생명을 잃으면 들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라는 표현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일곱 때’는 단순히 일곱 해를 뜻하기보다, 이러한 낮아진 상태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그 교만이 완전히 꺾일 때까지의 전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 후에야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시 회복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단4:25를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는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분명한 예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사랑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참된 인간의 상태를 잃고,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거부하면 영적으로는 들짐승처럼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창3의 상징이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