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해 어땠나요? 제가 이런 좀 이상한(?)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좀 솔직하게 표현하면, 저를 비롯, 저희 집안 남자들은 열에 아홉, 여자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경향이 있어서입니다. 특히 예쁜 여자 앞에서는 거의 이성이 마비가 될 정도인데요... 저는 이젠 나이 들어 그래도 좀 많이 덤덤하지만, 그래도 아이고...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제는 이런 영역에서도 좀 변화가 필요하지 싶어 여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질문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인간적이고, 또 스베덴보리가 깊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여자를 조심하라’거나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름다움 자체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는 지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으며, 특히 천국의 여성 천사들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은 얼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선과 진리가 외면으로 흘러나온 결과가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먼저 ‘예뻐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는 이 질서가 자주 뒤집힙니다. 사람은 얼굴에 먼저 끌리고, 그 후에 마음을 보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외적인 것에 먼저 사로잡히는 자연인의 경향으로 설명합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내면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예쁜 여자 앞에서는 거의 이성이 마비될 정도’라는 경험도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매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이 강하게 자극받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그 자극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입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는 여러 층의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낮은 층에는 감각적 매혹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과 귀가 즉각 반응하는 영역입니다. 그보다 높은 곳에는 인격에 대한 존중이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첫 번째 반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차 더 높은 사랑의 질서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목사님께 오히려 희망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질서 있게 다스리느냐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기질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욕이 강하며, 어떤 사람은 돈에 민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異性)의 아름다움에 매우 민감합니다. 이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느냐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경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처럼 ‘우리 집안 남자들은 원래 이런 성향이 있다’, ‘나도 과거에는 그랬다’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악을 보는 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여러 번 말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결혼애(結婚愛) 사상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는 진정한 결혼애(conjugial love)는 상대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체적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만, 선과 진리는 영원히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부부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욱 젊고 아름다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내면의 사랑이 계속 외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적용한다면 몇 가지 태도가 도움이 됩니다.

 

첫째,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반응을 오래 붙잡고 상상 속에서 키우기 시작하면 애정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가능한 한 얼굴보다 영혼을 보려고 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셋째, 무엇보다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그 사람의 소유물처럼 바라보면 집착이 생기지만, ‘주님의 선이 이 사람에게도 조금 비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시선의 방향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집니다.

 

넷째,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비로소 천사들이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는 괜찮다’ 방심할 때 더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제게는 오히려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 문장에는 이미 하나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여성을 얻을까’가 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마음을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둘 것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질문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젊은 시절에는 귀족 사회와 왕실을 드나들며 매우 세련된 사교 생활을 했고, 많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을 읽어보면 여성을 더 이상 감각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랑과 지혜의 결합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결혼애(Conjugial Love)에서는 여성을 단순한 매혹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동반자로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라면 목사님께 이렇게 권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멈추지도 마십시오. 얼굴을 넘어 영혼을 보고, 영혼을 넘어 주님을 보십시오. 그러면 같은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을 끌어내리는 유혹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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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의 퀄리티를 미리 아시고, 그들에겐 아르카나를 열지 않으셨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미래를 모두 예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다면 왜 처음부터 홍수 이후와 같은 인간 구조를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반대로 유대교회 사람들의 성향을 아셨다면 왜 그들에게는 말씀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을까요? 겉으로 보면 하나는 자유를 그대로 허락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므로 서로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우를 서로 다른 차원의 섭리로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경우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하나였으며, 선을 사랑하면 곧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질서가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까지 예지하셨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처음부터 더 낮은 상태로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와 최고의 사랑의 가능성을 미리 제한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대교회의 경우는 ‘이미 타락 이후의 인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을 완전히 아셨습니다. 이런 그들의 실제 영적 상태와 성향에도 불구, 만일 그들에게 말씀의 가장 깊은 속뜻까지 충분히 열어 주신다면,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알고도 거부하거나 자기 목적에 이용, 돌이킬 수 없는 모독(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유를 빼앗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컷터칼을 손에 들려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제한하신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계시의 정도’였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었고,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자유가 더 깊은 진리를 모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자비 가운데 계시의 문을 조절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킨 것도 바로 이러한 섭리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막으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리를 알고도 거부, 회복이 더욱 어려워지는 일을 막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신다’는 말과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르카나를 열어 주지 않으셨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원리이고, 두 번째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섭리의 원리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존중하시는 사랑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능성이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자비입니다. 실제로도 비록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살아생전에 선을 사랑하며 살았다면, 비록 지상에서는 말씀의 깊은 아르카나를 알지 못했더라도, 사후 영들의 세계에서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점차 그것들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상에서 아르카나를 감추신 목적이 영원한 배제가 아니라 모독으로부터의 보호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후에는 지상의 민족적 소속이나 교회의 역사적 역할보다 각 사람이 생전에 어떠한 사랑 가운데 살았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며,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필요한 만큼의 빛을 다시 열어 주십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예지는 운명을 미리 정해 놓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미래를 아시지만, 그 예지를 이유로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보존하시면서도, 각 사람과 각 시대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진리와 빛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것이 자비이고, 때로는 더 적은 계시를 허락하시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 두 경우 모두 목적은 하나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모독을 피하고, 결국에는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AC.311의 마지막 문장인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을 마련하셨다’는 말씀도 같은 원리를 드러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질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대신 새로운 영적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이후의 교회들에서도 사람들의 실제 상태에 맞추어 계시의 정도를 조절하셨습니다. 결국 창조에서나 섭리에서나 변하지 않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끝나지 않도록 가장 자비로운 길을 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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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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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처음부터 홍수 이후의 구조로 창조하실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태고교회를 만드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을 종합해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완전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던 것은 ‘시험용 설계’가 아니라, 인간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혜가 하나였고,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인간의 가장 높은 가능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도 자기 사랑을 선택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예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인간을 더 낮은 구조로 만드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지혜에 맞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넘어질 것도 알고, 실수할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이를 평생 유모차에만 태워 키우지는 않습니다. 걸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능력을 주고, 혹시 넘어질 경우를 대비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홍수 이후의 인간 구조는 그런 의미에서 ‘차선책’입니다. 결함이 있는 설계가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적 구조’입니다.

 

이 점에서 AC.311의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스베덴보리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셨다(created)’ 하지 않고, ‘다른 상태들을 마련하셨다(induced other states)고 말합니다.

 

induced’라는 동사는 이미 존재하는 인간 안에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시고 도입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본질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새로운 회복의 질서’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오히려 주님의 섭리가 더욱 놀랍게 느껴집니다. 주님은 타락을 예지하셨지만, 그 때문에 처음부터 인간을 낮은 수준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인간이 실제로 그 자유를 잘못 사용했을 때, ‘그 자유 자체는 보존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은 잃지 않도록’ 새로운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전체와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면서도,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섭리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홍수 이후의 ‘other states’는 바로 그 신적 섭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11, 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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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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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AC.311 해설)

 

그러니까 한 통으로 만들었다가 둘 다 버릴 바에는 차라리 따로따로 만들어 하나가 망가지면 그 부분만 새것으로 교체하자는 식으로 이해하면 되나요?

 

 

네, 비유로는 상당히 적절합니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덧붙이면 스베덴보리의 의도에 더 가까워집니다.

 

태고교회의 인간은 비유하자면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엔진으로 통합된 구조’였습니다. 이 구조는 정상일 때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로 배우거나 추론할 필요 없이, 선을 사랑하면 곧바로 진리를 지각(perception)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있었습니다. 중심축인 의지가 부패하면 이해도 함께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자기 사랑이 의지를 장악하면 이해도 그것을 진리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AC.310 AC.311에서 말하는 홍수 전 사람들의 ‘persuasion’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의심하거나 수정할 여지가 거의 남지 않습니다.

 

홍수 이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조를 바꾸셨습니다. 목사님 표현처럼 ‘따로따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고장 난 부품을 교체하기 쉽도록 만든 기계적 설계 변경이라기보다, ‘의지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이해를 통해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는 이해가 먼저 진리를 듣고, 배우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진리 안에서 조금씩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아직 의지가 완전히 선해지지 않았더라도, 이해가 진리를 붙들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의 비유를 이렇게 조금 수정하면 더욱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통으로 만든 구조는 완전할 때는 가장 아름답지만, 한 부분이 썩으면 전체를 살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에는 의지와 이해를 구별, 설령 의지가 병들었더라도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 진리 안에서 새로운 양심을 형성, 결국 의지까지 새롭게 하시는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홍수 이후의 인간은 ‘성능이 낮아진 인간’이 아니라, ‘회복 가능성이 훨씬 커진 인간’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의지가 변화되어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삶으로 옮길 때,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 voluntarium)를 조금씩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홍수 이후의 구조는 단순한 ‘응급조치’가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마련된 새로운 섭리의 질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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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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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에 있을 수 없는, 그러니까 다른 영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이며, 그래서 다른 지옥들과도 분리된 어떤 지옥에 있는데, 마치 어떤 산 아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확신(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마치 하나의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환상과 확신은 다른 영들에게 매우 깊은 혼미(stupor)를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지금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능력을 빼앗아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 때에도 그들의 확신의 힘(persuasive power)은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에서도 다른 영들과 함께 있게 되면, 그들에게도 이와 같은 일종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 미리 예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멸절(extinct)되었으며, 주님께서는 신적 자비로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다른 영적 상태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tate of those who perished by the flood is such that they cannot be in the world of spirits, or with other spirits, but are in a hell separated from the hells of others, and as it were under a certain mountain. This appears as an intervening mountain in consequence of their 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Their fantasies and persuasions are such as to produce so profound a stupor in other spirits that they do not know whether they are alive or dead, for they deprive them of all understanding of truth, so that they perceive nothing. Such also was their persuasive power during their abode in the world; and because it was foreseen that in the other life they would be incapable of associating with other spirits without inducing on them a kind of death, they all became extinct, and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on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해설

 

AC.311은 앞글(AC.310)에서 설명한 내용을 사후 세계의 실제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글입니다. AC.310이 홍수 이전 사람들의 인간 구조가 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였다면, AC.311은 그러한 구조가 사후 세계에서는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심판 자체보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다른 영들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들이 ‘영들의 세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들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세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뒤 먼저 이곳에서 자신의 참된 내면이 드러나고, 그후 천국이든 지옥이든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홍수 이전 사람들은 이 중간 상태에 머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영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지옥들과도 분리된 특별한 장소에 격리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아니라, 다른 영들을 보호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산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영계에서 산과 언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이 산은 자연적인 암석이 아니라, 그들의 무시무시한 환상과 왜곡된 확신이 만들어 낸 영적 장벽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영적 공동체와 자연스럽게 분리되어 있으며, 그 영향력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환상(fantasies)과 ‘확신(persuasions)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환상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거짓을 실제처럼 경험하는 왜곡된 내적 의식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확신은 그러한 거짓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처럼 붙드는 상태입니다. 이 둘이 결합되면 사람은 더 이상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거짓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다른 영들에게 ‘혼미(stupor)를 일으킨다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혼미는 단순한 두려움이나 당혹감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확신이 다른 영들의 이해를 압도, 그들로 하여금 마치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분간 못하는 상태를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영향력이 그들이 세상 살 때에도 이미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후에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영계에서 아무런 외적 제약 없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사랑과 신념이 훨씬 직접적으로 발산된다고 반복해서 설명하는데, 홍수 이전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왜곡된 확신이 다른 영들의 의식까지 마비시킬 만큼 강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영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영들의 자유와 영적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언제나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한 공동체의 악이 다른 공동체까지 파괴하지 못하도록 질서를 세우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AC.311에서 그들이 특별히 분리된 지옥에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을 덧붙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다른 상태들(other states), 그러니까 이전과는 여러 가지가 바뀌는 상태변화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글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의 구조입니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보다 낮은 단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한 주님의 신적 자비의 결과였습니다.

 

AC.311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지옥을 묘사하려는 글이 아니라, 왜 주님께서 인류의 영적 구조를 바꾸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태고교회의 비극은 단순히 몇몇 사람의 타락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왜곡된 내적 상태가 다른 영들의 자유와 이해까지 파괴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홍수 이후 인류에게 양심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적 질서가 주어진 것은 심판의 결과이기 이전에, 모든 사람을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자비와 섭리의 표현이었습니다.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 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AC.311.심화 1. ‘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의지와 이해가 하나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 안에서 주님께서 양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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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 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AC.311.심화 2. ‘주님은 미리 아셨을 텐데...’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더욱 깊어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예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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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AC.311, 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AC.311.심화 3. ‘예지와 섭리, 그리고 계시의 제한’ 바로 위 심화 2 답변 중 ‘주님은 미래를 예지하시지만, 그 예지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미리 제한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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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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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가 너무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은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본성(genius)에 관한 것인데, 그들의 본성은 홍수 이후를 살았던 사람들의 것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간략히 말하면, 태고 교회를 이루었던 그들의 첫 조상들은 천적 인간들이었으며, 따라서 천적 씨(seeds)가 그들 안에 심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 안에도 천적 기원에서 나온 씨가 남아 있었습니다. 천적 기원의 씨란,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려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걸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의지와 이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 또는 선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태고 사람들은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한 것들을 직접 지각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계통의 후손들에게는 동일한 천적 기원의 씨가 반드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이 진리와 선에서 떨어지는(falling away)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철저히 왜곡, 사후에도 거의 회복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씨는 없고, 영적 씨만 가진 사람들은 이와 다릅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오늘날 사람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없으며, 따라서 선을 향한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할 수 있는 능력, 곧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에 관한 지식과 그로부터 생기는 선을 기초로 양심을 사람 안에 서서히 심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어느 정도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만 그 길은 천적 인간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입니다.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없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어떤 삶이 흘러나오는지, 그리고 그 결과 사후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해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언급한 뒤,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후대 사람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홍수 심판의 이유를 도덕적 차원보다 인간의 영적 구조라는 차원에서 밝히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는 단순한 재능이나 성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놓으신 영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 그 씨는 천적 기원이었으므로, 사랑이 인간 존재 전체를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진리는 그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추론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된 ‘퍼셉션’의 본질입니다.

 

이 때문에 태고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지와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일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험합니다. 이해로는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가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선을 원하면서도 아직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분열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이해를 이끌었고, 이해는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의지와 이해는 서로 다른 기능이면서도 하나의 생명처럼 작용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죄가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위험했던 것은 일시적인 유혹이나 순간적인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이 반복적으로 받아들여져 마침내 의지 자체의 생명이 되어 버릴 때, 인간 존재 전체가 함께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지만,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었으므로, 그 중심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면 이해와 삶 전체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가 변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경우 ‘사후에도 거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 자체가 완전히 부패,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일 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홍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영적 씨’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대신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과정 속에서 양심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는 사랑에서 진리로 나아갔다면, 홍수 이후의 교회는 진리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주님의 섭리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영적 인간의 길’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양심을 주님께서 서서히 심어 주신다’는 부분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도덕성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진리 안에 선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던 직접적인 지각보다 낮은 단계의 생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구원의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홍수 이후의 인간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의 길을 선물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사람들조차도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현대 신학은 인간을 죄인과 의인, 또는 신자와 불신자의 관점에서는 자주 설명하지만, 인간의 내적 구조가 천적인지 영적인지, 의지와 이해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사후의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러한 구분은 인간론과 구원론 전체를 이해하는 기초입니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이후 사람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어떤 길을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인도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조금씩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거듭남은 순간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주님의 섭리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긴 여정인 것입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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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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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심화

 

3.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스베덴보리가 AC.309에서 나3:3을 인용하는 이유 역시 앞에서 인용한 에스겔과 같은 맥락입니다. 곧 ‘’이 말씀의 속뜻으로는 진리를 대적하고 파괴하는 ‘거짓’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훔의 예언은 니느웨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거짓과 악이 극에 달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구절은 ‘기병’, ‘’, ‘’, 그리고 ‘죽임당한 자의 떼’를 차례로 묘사합니다. 겉으로는 전쟁의 참상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군사적 표현들을 모두 영적 싸움의 상징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은 진리를 베어 쓰러뜨리는 거짓을, ‘’은 그 거짓을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확증하는 거짓된 논증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칼과 창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거짓이 단순히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리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구절 첫머리에 나오는 ‘기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능력 또는 지성의 능력을 의미하며, ‘기병’은 그 이해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 능력을 움직이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니느웨의 심판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의 ‘기병’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거짓을 위하여 지성을 사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지성이 진리의 인도를 받을 때는 천국을 섬기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복종할 때는 거짓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이어지는 ‘죽임당한 자의 떼’ 역시 문자적인 전사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 특별히 진리와 선이 거짓과 악에 의해 소멸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죽임당한 자의 떼’는 거짓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황폐하게 된 사람들과 교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AC.309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짓 때문에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상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구절은 앞에서 인용한 겔21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스겔에서는 ‘’이 번개처럼 번뜩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성문마다 두려움을 두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면, 나훔에서는 ‘’과 ‘’이 수많은 죽임을 가져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두 예언 모두 공통적으로 거짓이 교회를 황폐하게 하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러 예언들을 나란히 인용, ‘’이 거짓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어느 한 구절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상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AC.309에서 나3:3을 인용하는 이유는, ‘’과 ‘’으로 대표되는 거짓과 거짓된 논증이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죽이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전쟁의 무기들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이 이해하는 능력을 왜곡하고 진리를 공격, 마침내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언으로 인용된 것입니다.

 

 

 

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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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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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심화

 

2. ‘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AC.309에서 스베덴보리가 겔21의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의 영적 의미를 더욱 강하게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은 문자적인 전쟁 무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으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 특히 자기 사랑과 거짓된 설득에서 나오는 거짓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예언 전체는 거짓이 인간의 내면과 교회를 어떻게 철저히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매우 생생한 상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라는 표현들은 모두 거짓의 파괴력이 극도로 증대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이 진리와 싸우는 거짓, 또는 거짓으로 인해 진리가 파괴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칼이 반복하여 언급되고,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는 것은 거짓이 점점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어 사람의 선과 진리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 또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번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표현 모두 거짓의 파괴력이 사람의 가장 깊은 삶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침실’이나 ‘내실’ 자체의 상응을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거짓이 인간을 부분적으로만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장악, 황폐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표현은 바로 AC.309의 논지를 직접 뒷받침합니다. ‘낙담’은 선에 대한 의지와 진리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많이 엎드러지게’라는 것은 거짓으로 인해 악과 오류가 계속 증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성문’은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 곧 교리와 이성의 출입구를 의미하는데, 모든 성문에 칼이 놓였다는 것은 진리가 들어올 통로 자체가 거짓에 의해 점령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단순히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이 인간의 전 존재를 황폐하게 만드는 영적 상태를 단계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AC.309 전체의 결론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은 ‘그들이 낙담하여’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거짓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것을 확증하는 것들만 보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바로 이러한 영적 황폐함을 예언자의 언어로 묘사한 대표적인 본문인 것입니다. 칼이 번개처럼 번뜩이고, 살육이 커지고, 마음이 녹으며, 넘어짐이 많아지고, 성문마다 칼의 공포가 놓이는 일련의 모습은 모두 거짓이 인간의 영적 생명을 철저히 파괴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에스겔의 ‘’에 관한 예언이 그가 설명하고 있는 ‘거짓으로 인한 황폐함’의 가장 강력한 성경적 증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칼의 물리적 움직임이나 전쟁 장면 자체가 아니라, 거짓이 사람의 마음과 이성, 그리고 진리가 드나드는 모든 통로를 점령, 영적 생명을 무너뜨리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AC.309에서 겔21을 길게 인용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AC.309, 심화 3, ‘나3:3’

AC.309.심화 3.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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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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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에 해당하는 ‘침실’이나 ‘은밀한 방’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개역개정이 어떤 말을 빠뜨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번역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절 번호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09의 영어본은 이 대목을 겔21:14-15로 표시하지만, 유대교식 히브리어 성경의 장절 체계에서는 겔21:19-20에 해당합니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앞 장 끝부분의 다섯 절을 겔21에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절 번호가 다섯 절씩 차이 납니다. 개역개정의 겔21:14에 나오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라는 부분이 바로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와 대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도 해당 표현 자체는 존재하며, 개역개정은 그것을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한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히브리어는 ‘הַחֹדֶרֶת לָהֶם’, 곧 ‘하호데레트 라헴’입니다. ‘하호데레트’는 동사 ‘חדר’에서 나온 여성 단수 분사형인데, 이 동사는 ‘안으로 들어가다’, ‘꿰뚫고 들어가다’라는 방향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문맥에 따라 ‘둘러싸다’, ‘사방에서 죄어 오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일부 영어 역본은 칼이 그들의 내실 또는 은밀한 방 안으로 들어간다고 번역한 반면, 여러 현대 역본은 칼이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들이닥친다고 번역합니다. 실제로 KJV는 ‘privy chambers’로, Young의 직역본은 ‘inner chamber’로 옮기지만, 다른 현대 역본들은 ‘surrounds them’ 또는 ‘closing in on every side’로 처리합니다.

 

따라서 Potts 영어본의 ‘bed chambers’는 히브리어 본문에 ‘’을 뜻하는 별도의 명사가 명백하게 적혀 있기 때문에 생긴 번역이라기보다, ‘하호데레트’라는 동사의 의미를 안쪽으로 침입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한 전통적인 번역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는 같은 동사를 칼이 그들을 사방에서 둘러싸며 몰아붙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는 원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원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난해한 히브리어 표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 AC 연구상 더욱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작성한 영어가 아니라 Potts 영어 번역에 들어 있는 문구입니다.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영어 문구만 보고 스베덴보리의 라틴 원문에도 반드시 ‘침실’이나 ‘내실’에 해당하는 명사가 있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Potts가 라틴 문장을 그대로 직역했을 수도 있지만, 성경 인용 부분을 당시 영어 독자들에게 익숙한 전통적 성경 문구에 맞추어 표현했을 가능성도 따로 검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정확한 비교 순서는 ‘AC 라틴 원문’, ‘Potts 영어 번역’, ‘히브리어 성경 본문’, ‘개역개정’이어야 합니다. AC.309의 라틴 원문이 존재하는 것은 확인되지만, 현재 확보한 온라인 자료에서는 해당 라틴 인용문의 세부 문구까지 안정적으로 열람되지 않아, 라틴 원문에 ‘침실’이라는 명사가 실제로 들어 있다고 여기서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AC.309의 한국어 번역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칼이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는 공간적 세부를 특별히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309에서 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칼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여 선과 진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들만 보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표현을 존중하여 ‘크게 살육하는 칼이 사람들을 에워싼다’고 옮겨도 AC.309의 논지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뒤의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라는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Potts 영어본을 직접 번역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크게 살육하는 칼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한다’로 옮기는 절충안도 가능합니다. 이 번역은 영어의 ‘bed chambers’를 문자적으로 ‘침실’이라고 옮겨 독자에게 불필요한 공간 이미지를 주는 대신, 그 전통적 번역이 담고 있는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뜻을 살립니다. 그러나 AC.309 해설에서 그들의 ‘침실’이나 ‘내실’을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이라고 곧바로 상응 풀이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그 문구를 따로 해석하지 않았고, 바로 뒤에서 설명하는 것은 ‘’과 ‘넘어짐’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제가 ‘은밀한 방’을 사람의 내면이라고 단정적으로 확장한 것은 본문이 직접 말한 범위를 넘어간 해설이었습니다.

 

심화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는 개역개정에서 ‘사람들을 둘러싸고’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개역개정이 어떤 구절을 생략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하호데레트 라헴’을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일부 역본은 이를 ‘그들의 내실까지 들어간다’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현대의 여러 역본은 ‘그들을 에워싸거나 사방에서 몰아붙인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AC 원전은 라틴어이므로 Potts의 영어 표현을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문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AC.309에서 이 인용의 핵심은 칼이 어느 물리적 장소로 들어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거짓과 persuasion이 사람을 철저히 황폐하게 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어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사람들을 둘러싸고’라는 표현을 따르거나, Potts의 뉘앙스를 보존, ‘그들의 깊은 곳까지 침입하는 칼’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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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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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는 자기 사랑(self love)과 거기서 비롯되는 광적 탐욕과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결국 육적, 세상적인 것들로 끌려 내려갑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매우 많은 구절로 입증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모두 인용한다면 여러 쪽에 이를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스겔의 말씀만 인용하겠습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 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21:9-10, 14-15)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Ezek. 21:9–10, 14–15).

 

여기서 (sword)은 사람이 황폐해져 더 이상 선과 진리를 전혀 보지 못하고, 오직 거짓과 그 반대되는 것만 보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많이 엎드러지게(multiplying offenses)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훔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Nahum 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3:3)

 

 

해설

 

AC.309AC.308에서 설명한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의 의미를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하는 글입니다. 앞에서는 두루 도는 불 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고 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런 보호가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이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침범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 자체보다도, 자기 사랑이 만들어 내는 영적 상태를 더욱 강조합니다. 그는 그것을 ‘광적 탐욕과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소유하려는 내적 충동이며, 확신은 그러한 욕망에서 생겨난 거짓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논리적 검토나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며, 결국 사람을 자기 생각 속에 가두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의 신비를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를 높이고,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겉으로는 가장 높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육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결국 위를 향해 올라가려 하지만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겔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칼은 단순한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칼은 진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진리가 완전히 왜곡되었을 때에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힘도 의미합니다. 본문의 칼은 후자의 의미입니다. 사람 안에 남아 있어야 할 선과 진리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거짓이 차지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칼이 번개처럼 번쩍인다는 표현은 거짓이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합니다. 방은 사람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거짓이 단순히 겉 생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선과 진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 사랑이 원하는 것만 진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이 황폐해졌다는 뜻입니다.

 

많이 엎드러지게’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넘어짐은 단순한 실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영적 전도(顚倒)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진리를 접할수록 오히려 그것을 왜곡, 자신의 거짓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를 잘못된 상태에서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3을 인용한 이유도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번쩍이는 칼과 빛나는 창, 그리고 수많은 죽임당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이는 거짓 교리와 왜곡된 추론이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이 본문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이는 신비를 탐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이끌린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를 다루는 태도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창3의 ‘두루 도는 불 칼’은 단순한 형벌의 상징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제한 없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한다면, 가장 거룩한 진리마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의 모독, profanation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두루 도는 불 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것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멀리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자비의 섭리였습니다.

 

AC.309의 핵심은 두루 도는 불 칼이 자기 사랑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 불 칼은 자기 사랑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광적 탐욕과 확신이 거룩한 진리 속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주님의 신적 보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칼과 나훔의 칼은 모두 자기 사랑이 진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창세기의 두루 도는 불 칼은 그러한 황폐가 생명나무에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 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AC.309.심화 1.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Potts역에는 있는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표현이 개역개정에는 안 보이는 이유 개역개정에는 Potts 영어본의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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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9-10, 14-15

 

 

AC.309, 심화 2, ‘겔21:9-10, 14-15’

AC.309.심화 2. ‘겔21:9-10, 14-15’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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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3

 

 

AC.309, 심화 3, ‘나3:3’

AC.309.심화 3.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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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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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8, 창3:24, ‘그룹들’(cherubim)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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