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44.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 속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들의 근원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윗글에서 한 가지... 아직 신생아에 불과한 이 아이가 나중에 어떤 quality의 인간이 될 줄 알고 저런 모든 걸 다 담은 이름을 지을 수 있나요?

 

 

바로 그 지점 때문에 현대인은 AC.144를 읽을 때 가장 낯설어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거의 부모 취향’이나 발음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갓난아이 이름에 그 사람의 origin nature, 심지어 이후 상태까지 담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작명 기술이 아니라, 고대 특히 태고, 고대교회의 상응적 사고방식’입니다.

 

핵심은, 고대인들이 미래를 점쟁이처럼 다 예측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사건을 섭리와 상태의 흐름 속에서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은 단순 역사 기록용 이름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영적 상태를 표상하도록 섭리 가운데 주어진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이름들을 거의 언제나 상징적, 표상적 이름으로 읽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담’은 단순 개인 이름이라기보다 인간(humanity)의 상태를, ‘가인’은 신앙의 분리된 상태를, ‘노아’는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들도 단순 가족 족보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의 다양한 영적 상태들을 순서대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단순 호적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섭리 안에서 어떤 상태를 표상하는가’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AC.144의 문맥에서 이름 속에 origin nature가 들어 있다’는 것은, 부모가 인간적으로 아이의 미래를 완벽히 예언했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는 이름 자체가 그 존재의 영적 의미와 역할을 표상하도록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 역사 속에서도 고대인들은 이름을 매우 의미 중심으로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 어떤 소망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단순 기호가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해석과 기대를 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성경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 문화 차원을 넘어, 섭리적 상응 구조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nature는 완전히 무(無)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사랑의 방향성과 성향 속에 태어나고, 섭리는 그것까지도 포함해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름은 단순히 나중 결과를 예언한다’기보다, ‘그 존재 안에 있는 방향성과 역할’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현대인은 이름을 사람에게 붙이는 임의적 표지’로 보지만, 고대교회적 사고에서는 이름이 그 존재의 영적 상태와 역할을 드러내는 표현’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AC.144 고대인들이 초능력으로 미래를 다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름 자체를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상응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성경 안에서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이름들이 그런 의미를 담도록 기록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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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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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윗글은 뭐가 다른 거죠? 전자는 이해를 했고’, 후자는 이해하는 행위를 이해했다는 건가요? 이게 뭐죠?

 

 

네, 목사님께서 정확히 걸리신 부분입니다. 여기 문장은 얼핏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름 자체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초점이 다릅니다.

 

먼저,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다’는 말은, ‘이름’이라는 것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설명합니다. 즉,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essence, 곧 가장 중심적 실체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자체가 곧 존재의 핵심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면,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quality)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말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이름이라는 정적인 개념보다, ‘어떤 존재를 보고, 그 이름을 부른다’는 동작 전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호칭을 발음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의 상태와 성질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름 자체는 그 존재의 본질(essence)을 담고 있고,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는 그 존재의 성질(quality)을 알아보고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는 어떤 영적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서 그런 성질과 상태를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존재론적 의미에 더 가깝고, 후자는 인식 작용에 더 가깝습니다.

 

목사님 표현대로 아주 단순화하면, 전자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하고, 후자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말한다고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왜 essence quality가 갈라지는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essence는 존재의 중심 핵심이고, quality는 그것이 실제 상태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름 자체는 essence를 담지만, ‘보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essence가 어떤 quality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행위가 됩니다.

 

결국 AC.144의 구조는 이렇게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name)은 존재의 essence를 담는 것이었고, 그 이름을 보고 부르는 행위는 그 존재의 quality를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이름의 의미’와 이름 짓기의 행위’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AC.144, 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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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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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늘 후자로 번역하네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네,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한 습관이라기보다, 제가 스베덴보리 문맥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께로부터’를 더 자주 선택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from the Lord’는 단순 출처(source) 이상의 의미, 곧 살아 있는 인격적 유입(influx)과 관계를 강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서 ‘...으로부터’는 비교적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출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처럼 사물적, 행정적, 객관적 느낌에도 잘 어울립니다. 반면 ‘...께로부터’는 단순 출처보다, ‘높은 인격 존재에게서 직접 받는다’는 관계성과 경외의 뉘앙스를 더 강하게 가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문맥, 특히 생명이 주님께로부터 온다’,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 ‘사랑이 주님께로부터 유입된다 같은 표현에서는, 단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격적 유입’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께로부터’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AC에서는 from the Lord’가 단순한 기원 설명이 아니라, 거의 존재론적 의존 관계를 뜻합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단지 무언가 하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생명 자체를 받고 있다는 구조이지요. 이럴 때 주님으로부터’라고 하면 약간 객관적, 개념적 느낌이 강해지고, ‘주님께로부터’라고 하면 살아 있는 인격 관계와 경외감이 더 살아납니다.

 

다만 목사님 말씀처럼, 엄밀히 보면 영어 from 자체는 그냥 ‘...로부터’입니다. 그래서 번역의 직역성과 간결함만 따지면 주님으로부터’가 더 기본형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어 신학 번역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를 훨씬 더 일반적으로 씁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사실 맞고 틀림’이라기보다, 어떤 뉘앙스를 살릴 것인가의 선택에 가깝습니다.

 

주님으로부터’는 보다 객관적이고 담백하며, 번역문 전체를 안정되게 만듭니다.

 

주님께로부터’는 더 인격적이고 경외적인 느낌, 그리고 살아 있는 유입의 느낌을 강화합니다.

 

다만 목사님 작업 전체의 톤을 생각하면, 일관성 면에서는 주님으로부터’를 기본으로 통일하는 것도 매우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AC 번역처럼 문장이 길고 개념 밀도가 높은 텍스트에서는, ‘께로부터’가 반복되면 약간 문체가 무거워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 자동 경향은 께로부터 쪽이지만, 목사님 프로젝트 전체의 번역 톤과 가독성을 생각하면 으로부터’를 기본형으로 삼고, 정말 특별히 인격적 경외감이나 기도문적 분위기를 강조할 때만 께로부터’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상당히 균형 잡힌 선택이라고 봅니다.

 

 

 

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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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위 본문에 차례대로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및 ‘본성’(nature)이 나오는데요, 그냥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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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위 본문에 차례대로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이 나오는데요, 그냥 같은 걸로 이해해도 될까요? 굳이 이렇게 구분한 이유가 뭔가요?

 

 

그냥 전부 비슷한 말로 뭉뚱그려 읽어도 큰 흐름은 따라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보통 이런 단어들을 꽤 의식적으로 배열합니다. 특히 AC처럼 초기 저작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을 조금씩 층위를 달리해 사용하면서 인간 존재를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144의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도 완전히 같은 말이라기보다, 한 존재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추는 표현들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성질(quality)은, 어떤 것이 ‘어떠한 상태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말합니다. 가장 바깥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사랑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진리를 향하는지 자기 중심인지 같은 ‘드러난 상태’가 quality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quality는 상태(state)와 자주 연결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 존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입니다.

 

본질(essence)은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이것은 그 존재를 ‘그 존재 되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질들 뒤에 있는 중심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천적 인간의 essence는 사랑입니다. 영적 인간의 essence는 진리 안의 신앙입니다. 즉, essence는 존재의 중심 생명에 가까운 말입니다.

 

기원(origin)은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묻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 origin이 자기 자신(proprium)이면 결국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작은 것이라도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본성(nature)은,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성과 구조 전체를 뜻합니다. 이는 단순한 순간 상태보다 더 깊고 지속적인 성향입니다. 예를 들어 타락한 인간의 nature는 자기 중심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천사의 nature는 주님께 열려 있습니다. nature는 존재의 ‘작동 방식’과 가까운 개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보시면 가장 또렷합니다.

 

quality(성질)는 겉으로 어떤 상태로 나타나는가

 

essence(본질)는 그 존재의 가장 중심 생명은 무엇인가

 

origin(기원)은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nature(본성)는 그 존재가 지속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인간과 천사의 상태를 단순 심리학처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매우 정교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행동의 quality는 선해 보여도, origin이 자기 영광이라면 그 essence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순간 상태는 흔들려도, 그의 deeper nature는 여전히 주님 쪽을 향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이런 단어들을 전부 같은 말로 처리하면, 스베덴보리가 인간 존재를 얼마나 다층적으로 보고 있는지가 잘 안 드러납니다. 반대로 이런 미세한 차이를 살려 읽기 시작하면, ‘, 그는 지금 겉 상태를 말하는 건가, 중심 생명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근원을 말하는 건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144, 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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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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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4

 

이름으로 부른다(call by name)는 것이 그 성질(quality)을 안다는 뜻인 이유는,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로는 그 성질 아는 걸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 속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들의 근원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말하는 방식이었으며,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것이 이런 걸 의미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That to “call by name” signifies to know the quality, is because the ancients by the “name” understood the essence of a thing, and by “seeing and calling by name” they understood to know the quality. The reason was that they gave names to their sons and daughters according to the things which were signified, for every name had something peculiar in it, from which, and by which, they might know the origin and the nature of their children, as will be seen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when,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come to treat of the twelve sons of Jacob. As therefore the names implied the source and quality of the things named, nothing else was understood by “calling by name.” This was the customary mode of speaking among them, but one who does not understand this may wonder that such things should be signified.

 

 

해설

 

이 단락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 짓기’ 장면을 ‘고대적 인식 구조의 핵심’으로 끌어올립니다. 오늘날 이름은 대체로 표식이거나 구분 수단이지만, 태고의 사람들에게 이름은 곧 ‘본질의 언어’였습니다. 이름은 임의로 붙여진 꼬리표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디서 왔으며,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를 드러내는 요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존재의 질을 꿰뚫어 보고, 그 성질을 분별하여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창2:19-20에서 아담이 짐승들과 새들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애정들과 인식들의 ‘본성과 질서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점을 자녀의 이름 짓기 관습으로 설명합니다. 고대에는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난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하나에 기원, 성향, 사명까지 담겼습니다. 이후에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룰 때 이 원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성경의 이름들은 역사적 정보로만 읽히고 맙니다. 그러나 이름이 본질을 뜻한다는 관점에 서면, 족장들의 이름, 지명, 별명 하나하나가 ‘내적 상태의 지도’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아는 것’은 정보를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질을 분별하는 일이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향한 배려이자 경고입니다. 이 인식 방식을 모르면, 성경이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이해되지 않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적 언어의 질서를 이해하는 순간,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은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AC.1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어가 아니라 본질이며,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질을 알아보는 행위라고 말입니다.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 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AC.144.심화 1.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본성’(nature) 위 본문에 차례대로 ‘성질’(quality), ‘본질’(essence), ‘기원’(origin) 및 ‘본성’(nature)이 나오는데요, 그냥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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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 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AC.144.심화 2. ‘주님으로부터 받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둘은 from을 각각 하나는 ‘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께로부터’로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전자가 맞을 것 같은데 당신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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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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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 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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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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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위는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라는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천적(celestial)과 ‘영적(spiritual)을 구분해 놓고, 다시 ‘천적 영적(celestial spiritual)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에서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중간 개념입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면, ‘천적 영적 인간(celestial spiritual man)은 단순히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반씩 섞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영적 차원들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가장 깊은 중심은 천적이지만, 그 작용과 표현은 영적인 층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본적으로 인간 안에 여러 층을 봅니다. 가장 깊은 층은 사랑과 의지의 층이며, 이것이 천적입니다. 그다음은 진리와 이해의 층이며, 이것이 영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 안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인간 안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어느 쪽이 중심이냐가 다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중심은 천적(사랑 중심)이지만, 그 천적 생명이 영적 기능들(이해, 진리, 지성)을 통하여 나타나는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가장 좋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이 너무 직접적이고 깊어서, 거의 퍼셉션 자체로 살아갑니다.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와 이해를 통하여 사랑으로 갑니다. 그런데 ‘천적 영적 인간’은, 사랑이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천적이지만, 그 사랑이 이해와 진리의 층을 거쳐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영적입니다. 즉, 사랑과 진리가 서로 적대하지 않고, 사랑이 진리를 질서 있게 비추는 상태입니다.

 

이 표현이 AC.143에서 중요한 이유는, 지금 창세기 2장의 상태가 완전히 단순한 ‘순수 천적 상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돕는 배필’, proprium, 이름 짓기, 애정들의 구별 같은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만의 직접적 퍼셉션 상태에서, 어느 정도 ‘이해와 분별의 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여기 인간을 단순히 celestial이라고만 하지 않고, celestial spiritual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천적 상태의 외연 확장’처럼 보셔도 좋습니다. 곧, 가장 깊은 중심은 여전히 사랑과 퍼셉션 안에 있지만, 그 상태가 영적 층들까지 질서 있게 흘러 들어가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나중에 스베덴보리는 천국 구조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가장 높은 천국은 천적 천국이고, 그 아래는 영적 천국입니다. 그런데 천적 천국에도 영적 요소가 있고, 영적 천국에도 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진리는 결코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이라는 표현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천적’은 중심 생명의 성격, 곧 사랑 중심성을 말하고, ‘영적’은 그 사랑이 작동하고 표현되는 이해와 진리의 차원을 말합니다. 즉, ‘천적 영적 인간’이란, 주님 사랑이 중심이면서도, 그 사랑이 진리와 지성 안에서 질서 있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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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20)

 

AC.143

 

고대에는 짐승들(beasts)동물들(animals)이 사람 안의 애정들과 그와 같은 것들을 뜻하였다는 점이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천적 관념 안에 있었고, 그러한 것들이 영계에서는 동물들로, 실제로는 그것들과 닮은 동물들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할 때에는 다른 어떤 걸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또한 말씀에서 짐승들이 일반적으로든 구체적으로든 언급되는 모든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서 전체는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므로, 각각의 짐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에 담긴 내적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어 악한 짐승 또는 해로운 짐승들과 선한 짐승 또는 해롭지 않은 짐승들이 있으며, 선한 짐승들로는 선한 애정들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양들, 어린양들, 비둘기들이 그러하지요.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짐승들(beasts)이 일반적으로 애정들을 뜻한다는 점은 앞에서 말씀의 몇몇 구절들로 확인되었으므로 (45, 46), 더 이상의 확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That by “beasts” and “animals” were anciently signified affections and like things in man, may appear strange at the present day; but as the men of those times were in a celestial idea, and as such things are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by animals, and in fact by such animals as they are like, therefore when they spoke in that way they meant nothing else. Nor is anything else meant in the Word in those places where beasts are mentioned either generally or specifically. The whole prophetic Word is full of such things, and therefore one who does not know what each beast specifically signifies, cannot possibly understand what the Word contains in the internal sense. But, as before observed, beasts are of two kinds— evil or noxious beasts, and good or harmless ones—and by the good beasts are signified good affections, as for instance by sheep, lambs, and doves;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elestial spiritual man, who is treated of, such are here meant. That “beasts” in general signify affections may be seen above, confirmed by some passages in the Word (n. 45–46), so that there is no need of further confirmation.

 

 

해설

 

이 단락은 왜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지를 ‘근본적인 인식 구조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동물은 외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태고의 사람들에게 동물은 곧바로 ‘내적 상태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분리된 대상처럼 보지 않았고, 인간 안의 애정이 자연 안에서 그대로 형상을 취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비유나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실제로 애정과 성향에 따라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그것도 임의적인 형상이 아니라 ‘그 애정과 닮은 동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이 사람의 애정을 말하면서 동물을 말했을 때, 그들은 상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그대로를 말한 것’에 가깝습니다.

 

이 점을 모르면 예언서 전체가 닫혀 버립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각 짐승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예언서의 언어가 전면적으로 상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자, 양, 염소, 소, 비둘기, 독수리 하나하나가 애정과 성향의 질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구분이 제시됩니다. 짐승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악한 짐승과 선한 짐승입니다. 이는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의 질’에 따른 구분입니다. 해로운 짐승은 악한 애정들을, 해롭지 않은 짐승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양과 어린양, 비둘기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가장 순한 선의 애정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점은, 본문이 다루는 대상이 ‘천적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짐승들은 본질적으로 선한 애정들입니다. 창2:19-20의 장면은 야생의 위협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 인간 안에 이미 풍성히 존재하는 선한 애정들의 질서와 분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AC.143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동물의 언어로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을 자연으로 낮추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세계가 자연과 분리되지 않았던 가장 깊은 상태를 드러내기 위함이며, 이 언어를 이해할 때에만 말씀의 내적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AC.143, 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AC.143.심화 1.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천적 인간, 곧 천적 영적 인간이므로,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입니다. and as it is the celestial, or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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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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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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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이 온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에서는 ‘무엇을 가장 중심적으로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 사랑의 방향이 ‘주님과 이웃을 향하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고, 주님과 선을 향해 질서 있게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선 자체를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자랑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천적 인간은 바로 이 사랑의 방향이 먼저 바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배울 때도, 먼저 ‘옳은가?’보다 ‘선한가?’, ‘주님께 속한 건가?’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에게 진리는 사랑을 섬기는 빛입니다.

 

예를 들어, 같은 ‘용서’라는 진리를 두 사람이 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왜 용서해야 하는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더 깊은 자리에서 ‘사랑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낍니다. 물론 둘 다 귀한 상태지만, 중심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결국, 사랑의 대상과 방향과 질서가 바르다는 뜻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시고, 소유와 자기 영광보다 선 자체를 더 사랑하며, 진리를 자기 우월감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는 먼저 사랑의 방향이 주님 쪽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그다음의 생각과 이해도 그 방향을 따라 질서 있게 움직입니다. 반대로 사랑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진리를 알아도 결국 자기 확증 쪽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인간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이전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입니다. ‘사랑이 바르다’는 것은 바로 그 가장 깊은 중심 사랑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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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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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이 뭔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애정(affection)은 단순한 감정(emotion)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느냐를 결정하는 ‘사랑의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물들은 단순 생물이 아니라, 인간 안의 다양한 애정 상태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냅니다. AC.142에서 ‘짐승(beasts)이 천적 애정들을,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가 영적 애정들을 뜻한다고 할 때도 바로 이런 구조입니다.

 

먼저 ‘천적 애정’은 사랑 자체에 더 가까운 애정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의지와 사랑의 중심에 가까운 층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선한 것을 그냥 사랑하는 상태, 주님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따뜻함과 기쁨이 흐르는 상태, 사랑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 되는 상태가 천적 애정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천적(celestial)은 언제나 사랑과 의지의 층과 연결됩니다.

 

반면 ‘영적 애정’은 진리와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애정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참인가’를 배우고 이해하며, 그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방향과 관련됩니다. 주님과 선을 직접적인 사랑으로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기보다는,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쪽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서 ‘영적(spiritual)은 보통 신앙, 이해, 진리, 지성과 연결됩니다.

 

이 차이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애정은 ‘선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에 더 가깝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가려는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또는,

 

천적 애정은 ‘사랑이 먼저 움직이는 상태’이고, 영적 애정은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 사랑으로 가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짐승’이 천적 애정들이라고 할 때, 이는 인간 안의 보다 깊고 의지적인 사랑들을 뜻합니다. 반면 ‘하늘의 새’는 생각과 이해를 통해 움직이는, 보다 지성적, 영적인 애정들을 뜻합니다.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영적 애정은 사고와 이해의 영역과 더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와도 연결됩니다. 짐승은 대개 의지와 사랑의 층을, 새는 이해와 생각의 층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좋은 짐승과 좋은 새는 선한 애정과 참된 생각을 뜻하고, 반대로 더러운 짐승과 새는 왜곡된 욕망과 거짓된 사유를 뜻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애정을 굉장히 본질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결국은 ‘무엇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조차 애정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 영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통해 그 사랑으로 이끌립니다.

 

정리하면, ‘천적 애정들’은 주님과 선 자체를 직접 사랑하는 깊은 의지의 애정들이고, ‘영적 애정들’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향하려는 이해 중심의 애정들입니다. 그래서 짐승은 보다 깊은 사랑의 층을, 하늘의 새는 보다 이해와 사유에 가까운 애정들을 상응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AC.142, 심화 3, ‘사랑이 바르고’

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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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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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이름을 주는 게 왜 성질(quality)을 아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에게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label)이 아니라, 그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이름을 안다’, ‘이름을 부른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성질(quality)을 가지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을 거의 임의적 기호처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 ‘영희’라는 이름 자체에는 본질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특히 말씀의 상응 구조 안에서는 이름이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성격, 기능, 상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점은 성경 전체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단순 개명이 아니라, 존재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하실 때도, 단순히 호적상 이름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상태 전체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AC.142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사자’, ‘’, ‘’ 같은 단어를 붙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는 동물들이 인간 안의 애정들과 성향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애정과 성향들의 본질과 질서를 분별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이름을 준다 = 성질을 안다’는 연결은, 이름이 곧 그 존재의 quality를 표현한다고 보는 성경적, 상응적 사고에서 나옵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영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AC.142의 흐름 속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적 인간은 아직 퍼셉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 안에 들어오는 애정들과 성향들을 즉시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과 방향을 압니다. 바로 이 상태를 ‘이름을 준다’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여기서 ‘이름을 준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성향의 본질과 상태, 곧 quality를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이름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성질을 드러내는 영적 표현입니다.

 

 

 

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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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2, 창2:19-20, ‘이름을 주었으나 여전히 기울어지는’(AC.142-146)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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