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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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8

(field)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That afield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재산과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여기서 (field)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possessions) 보물(treasures) 신앙의 영적 부요함,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field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andtreasures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에 관해서는 밭같이 갈아엎어질 (plowed like a field)이라고 선언합니다(26:18; 3:12).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plowed like a field.(Jer. 26:18, Micah 3:12)

 

유다의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같이 경작지가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물 가에 심더니 (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이는 교회와 신앙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field)이라 합니다. 같은 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field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알리라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에서,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으니 (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서 (field) 교리를, 나무들(trees) 지식을, 농부들(husbandmen) 예배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fieldsignifies doctrine, “treesknowledges, andhusbandmenworshipers. In David:

 

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서 밭이 즐거워할 수도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도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에서도 땅이나 들의 채소가 슬퍼할 있는 것이 아니며, 표현들이 황폐함의 상태에 있는 사람 안의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에도 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 (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께서도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예언하시면서 신앙의 교리를 (field)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field: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24:40; 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여기서 (field)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합니다. (field) 교리를 상징하므로,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또한 (field)이라 합니다. where by afield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field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 나의 에 관한 말씀에서 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 갈아엎어질 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 황무하고’, ‘곡식이 진하여’, ‘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으며’, ‘밭의 모든 나무가 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96:12밭과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땅이 슬퍼하며 지방의 채소가 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사람은 데려가고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 마지막에는 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교리는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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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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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8)

 

AC.367

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과, (field)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필요한 만큼은 예외입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은 신앙의 본성 또는 본질 자체로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형제 관계는 에서와 야곱으로 표상되었으며,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38:28-30),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and that afield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brother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손에 매었더니 29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손에 홍색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38:28-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48:13-14)로도 표상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48:13-14)

 

경우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에서도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1절의 가인처럼 사람(man)이라 하고, 체어리티는 19:2, 13:14 다른 곳들에서처럼 형제(brother) 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man,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brother,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것이며 (19:2)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14)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형제의 언약(the covenant of brethren)이라 합니다(1:9).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9)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곱과 에서가 상징하는 것도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야곱 역시 자기 에서를 밀어내려 했는데, 이는 호세아에서도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에서로 표상된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에서 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멍에를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는 같은 의미로, 이방인의 교회, 교회는 에서로 표상되고 유대교회는 야곱으로 표상됩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교회, 초대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도 주님께서는 형제라 하십니다(8:21).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8:21)

 

듣는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사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시기 때문입니다(7:24, 26).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해설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 아우’,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 먼저 생기고 그다음 신앙이 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다른 것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 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 교회, 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 을 신앙과, ‘행하는 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위에 서려 하는가?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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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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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 없고,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루는 무엇일까요? 정말 죽은 뒤 대략 24시간 정도가 지나서 영계에 들어간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루 자체가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에 아직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와 독자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계 안에서 살아가는 영과 천사의 관점입니다. AC.70의 문장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가 역시 자연계의 독자에게 죽음 이후의 일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그는 육체가 죽은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하루를 처음부터 영계의 상징적인 상태 주기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천국과 지옥 162-165에서 영계의 시간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도 사건들은 서로 이어지고 진행되지만 천사들에게는 자연계 사람과 같은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해와 날이 있지만 천국에는 그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사람의 자연적 시간 관념이 천사에게 전달되면 천사는 그것을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로 지각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24시간제의 하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런 의미의 하루는 없다고 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영계에는 자연적 하루가 없다는 사실과 AC.70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연적 시간 언어를 사용할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자연계에 살고 있고 자연계의 독자에게 자신이 관찰한 사후 소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자연계의 사건을 기준으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하루라는 말은 사실 시간 뜻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주기라는 뜻이다라고 바꾸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가령 스베덴보리가 나는 어떤 사람이 죽은  열두 시간 후에 그와 이야기했다고 자연계의 관찰자로서 말한다면, 그 사람이 영계에서 열두 시간을 시계로 재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계에 남아 있는 관찰자가 자연계의 시간으로 경과를 표현한 것입니다. AC.70 거의 하루도 우선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24시간보다 짧다는 교리적 시간표일까요? 그렇게까지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은 사망 시각부터 몇 시간 몇 분 만에 영적인 의식이 완전히 열리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강조점은 훨씬 분명합니다.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긴 공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뒤 곧바로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AC들에서는 그 소생이 아무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완료되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육체의 생명이 끝나고 영으로서 의식적으로 깨어나는 데에는 주님의 질서 아래 일정한 과정이 있으며, 천사들이 함께하는 단계들이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연속 아무런 과정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와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즉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학적으로 사람은 죽으면 즉시 영계에 들어간다고 말할 때의 즉시는 죽음과 사후생명 사이에 수백 년 동안 무의식 상태로 기다리는 별도의 삶의 공백이 없다는 뜻으로는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심장이 멈추는 바로  0.001 뒤에 소생의  과정이 끝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 자체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어떤 질서 있는 전환 과정이 있음을 암시하고, 그 과정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의 하루를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AC.70 한 글만으로 개인마다 몇 시간씩 달라진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후 소생에 관한 여러 기록을 읽으면서 각 상태의 차이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확한 사후 24시간 규칙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과 의식적인 다른 삶 사이가 매우 짧고 연속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피해야 할 것은 이 표현을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하사와 곧바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나 셋째 이 충만함이나 완성을 뜻하는 경우가 있고, 스베덴보리도 그러한 상응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0 거의 하루와 주님의 부활의 사흘을 동일한 사후 소생 원리로 연결하는 것은 이 본문이 하지 않는 설명입니다. 특히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보통 인간의 사후 소생과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므로, 관련 AC에서 직접 다룰 때 별도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사후 소생과 주님의 부활을 둘 다 죽음 이후의 깨어남이라는 말만으로 같은 구조에 넣으면, 주님의 신적 인성과 영화라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가르침을 흐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0에서는 일반 인간의 소생에 집중하고, 주님의 부활 문제는 관련 본문이 나올 때 그 자체의 문맥에서 다루는 것이 가이드 1.0에도 맞습니다.

 

그러면 영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 순서도 없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천국에서도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자연계처럼 태양의 운동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시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상태가 변화하면서 연속과 진행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 사람에게는 시간과 비슷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 기록을 읽다가 하루’, ‘ 시간’, ‘오랫동안’, ‘’, ‘이후 같은 말을 만나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에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연계 독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자연적 시간 표현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영들과 천사들이 그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연속은 자연계의 시계 시간과 동일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AC.70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는 가장 먼저 죽음 이후 오랜 공백 없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의 의식 안에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하루를 반드시 24시간이라는 교리적 제한으로 고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루는 시간과 전혀 관계없고 순전히 하나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 영계의 하루가  시간인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목적을 알려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은 뒤 오래도록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매우 가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입니다.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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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한 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을 읽으면 곧 여러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가?’, ‘그렇다면  내용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뜻인가?

 

먼저 AC.66의 문장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의 설명에서는 이 부분의 자료가 모세에게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첫째 스타일 설명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의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고, 그러한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 뒤에 한나와 시편을 인용한 다음,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전승은 단순히 후대 사람들이 꾸며 낸 민담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표상적 표현 방식과 연결된 오래된 자료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과의 구별입니다.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명시합니다. 반면 아브람 이전의 첫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부분을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이전은 역사가 아니고 아브람 이후부터만 역사이다라고 한 줄로 정리해도 될까요? AC.66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단정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첫째 스타일과 둘째 스타일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창세기 앞부분의 각각의 인물과 사건이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이며 어느 의미에서 표상적 구성인지를 세세하게 판정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실제 개인이 아니었다’, ‘노아 홍수는 실제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결론을 AC.66 한 문장에서 바로 끌어내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문장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1부터 모든 내용은 아브람 이후와 똑같은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의 역사라고 스베덴보리도 가르친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AC.66은 분명히 서로 다른 두 스타일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익숙한 선입견에 맞추어 그 구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아담, 노아, 홍수, 족보 등을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곧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대 성서학도 모세오경의 자료와 전승을 연구하지만, 그 학문적 이론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은 표상적 역사는 출발점과 목적이 다릅니다. 용어상 전승된 자료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6은 현대적인 문헌비평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과 그 속뜻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전 자료를 받았다는 것이 말씀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성경의 모든 문장이 기록자의 머릿속에 아무 선행 자료 없이 직접 받아쓰기처럼 들어왔다는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AC.66에서 중요한 것은 모세 이전부터 태고교회의 표상들이 전해졌고, 그것이 말씀의 창세기 앞부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자료의 인간적 전달 경로를 밝혀 말씀을 낮추는 데 있지 않고, 그 오래된 표상적 기록 속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가 들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왜 그렇게 읽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빛과 궁창과 물, 식물과 광명체, 물고기와 새와 짐승, 사람의 창조를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로 읽은 것은 후대의 문자 기록에 임의로 상징을 붙인 것이라고 그 자신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AC.66에 따르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적인 것을 말하면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던 태고교회의 표현 방식이 창세기 앞부분의 배경에 있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모세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서 받았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즉 매우 오래된 표상적 자료가 후손들을 통해 보존되어 모세에게 전해졌다는 그림입니다. 그 구체적인 전승 과정이 몇 세대를 거쳤고 어떤 형태의 문헌이었는지 AC.66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빈칸을 우리가 상상으로 채울 필요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이 성경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는 과정에서는 바로 이런 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미리 가지고 있던 성경관에 맞지 않는다고 문장을 약화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한 문장을 가지고 AC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결론까지 확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을 포함하여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는 그 부분을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과 연결하며,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과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창세기 앞부분의 개별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문장은 말씀의 권위를 낮추기보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지금까지 왜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담은 표상적 연속으로 읽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형성과 스타일에 대해 실제로 한 말을 정직하게 읽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닙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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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2.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 무엇인가?

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간 이들은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만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이라고 했을까요? 이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층의 내적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 AC.65가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가 정확히 몇 번째 층이며 그보다 더 안쪽에 어떤 의미들이 몇 단계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 문자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라는 완성된 층위표를 만들고, AC.65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정확히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이 표현은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를 말씀의 문자와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내적 의미라고 하지 않고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더 깊은 차원이나 질서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 AC.64에서도 천사들은 말씀의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64-65를 함께 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 안의 세부적인 층위와 서로의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점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한 단어가 더 큰 교리를 암시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교리 전체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이라는 말을 발견하면 , 그렇다면 내적 의미에도  깊은 질서가 있을  있겠구나 하고 기억해 두고,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질서를 직접 설명할 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지각한 것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였을까요? AC.65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 의미는 너무 아름다웠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했으며,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이번 글의 초점은 그 의미가 내적 의미의 몇 번째 층인가를 분류하는 데 있기보다, 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연속의 질서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내적 의미는 단어마다 임의의 상징 하나를 붙여 놓은 사전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지는 질서 가운데 지각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것도 좋은 예가 됩니다. , 궁창, 식물, 광명체, 생물, 사람이라는 각각의 표현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연속된 흐름 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단순히 문자 바로 밑에 숨어 있는  번째 암호처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는 비밀 암호를 해독하듯 단어 하나를 다른 단어 하나로 바꾸는 작업보다 훨씬 깊습니다. AC.65의 표현대로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를 가지고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을 인간이 노력하면 곧 천사처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5는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독자에게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를 직접 지각하는 훈련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의 문자를 읽고, AC를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속뜻을 배우며, 그 말씀을 삶에서 받아들입니다. 천사적 지각 자체를 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 때문에 말씀의 문자를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는 바로 무엇의 내적 의미인가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문자와 아무 관계 없이 따로 존재하는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의 문자 안에 이러한 깊이가 있다는 것이 AC.65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라는 표현은 말씀의 문자와 구별되는 내적 의미 가운데 문자에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AC.65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들의 수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더 분명해질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AC.65가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려는 것은 그 내적 의미의 위치보다 그 성질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완전한 연속의 질서를 가지며,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어서 그들이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스베덴보리가 왜 바로 앞 AC.64에서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불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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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심화 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

AC.65 심화1. 천사들이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원어 연구’는 필요 없는가?AC.65를 읽으면 성경을 깊이 공부해 온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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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신 그분께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 번째 제사장’, 에덴을 ‘ 번째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아니라 돌아올 길을 다시 짜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것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 유일한 ’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 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 죄가 바로 순간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동물이 대신 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 세상의 ’, 진설병을 ‘나는 생명의 ’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제한될 없는 ’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보이는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위를 덮은 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 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 피를 통해 법적으로 용서받아 하나님께 접근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 기구가 무엇을 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안에서 주님이 거하실 성막은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 죄인이 무서운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그를 천국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SY.16, 말씀나침반,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2026032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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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사도행전 9장의 다비다 이야기를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풀어냅니다. 다비다가 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주었다는 성경의 짧은 기록에서 출발하여, 바늘의 작음, 꿰매는 기능, 소리 없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 이어 줌, 완성품을 만들어 냄, 흔적을 남김, 한 땀 한 땀 일함, 직접 손에 쥐고 일함, 일을 마치고 사라짐이라는 열 가지 영성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자기가 가진 아주 작은 것으로도 주변을 천국으로 만들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은 최근 영상들 가운데서도 특히 ‘쓰임(use)이라는 중심 주제와 상당히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선 다비다의 이야기를 ‘큰일을 사람’의 이야기보다 ‘자기 손에 있던 것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은 점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는 왕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며, 거대한 조직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이 기억하는 것은 그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을 때 과부들이 그에게서 받은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과 매우 가까운 장면입니다. 천국적인 삶은 반드시 거대한 일을 해야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능력과 형편을 가지고 실제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나타납니다. 바늘 하나와 손재주가 누군가에게는 추위를 막아 주고, 존엄을 지켜 주며,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랑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바늘은 작은데 일을 한다’는 비유는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외적 크기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쓰임이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수천 명을 움직이는 일을 ‘큰일’이라고 부르고 한 사람의 옷을 꿰매 주는 일을 ‘작은 ’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천국의 질서는 그렇게 단순히 규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체어리티에서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주님 앞에서는 훨씬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자’는 메시지는 단지 ‘작게 시작하면 나중에 큰일을 있다’는 성공론으로 끝나기보다, ‘작은 쓰임도 자체로 주님의 나라에 속한다’는 데까지 가면 더 깊어집니다.

 

바늘은 헤어진 곳을 꿰맨다’는 비유는 더 직접적으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상한 것을 꿰매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고, 배고픈 것을 채워 준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아름답습니다. 체어리티는 추상적인 호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유익을 행하는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삶이 찢어진 곳을 발견했을 때 정죄하기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그것을 이어 주는 것, 관계가 끊어진 곳에서는 화해를 돕고, 가난한 곳에서는 필요한 것을 채우며, 외로운 사람에게는 곁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늘의 영성’을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영적 삶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바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두 대목은 이번 영상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칙입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내가 이것을 했다’는 공로의식이 강해질수록 선 안에 proprium이 섞이기 쉽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은 그 선이 흘러가는 그릇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기보다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늘은 옷을 만들고 나면 보이지 않는다’는 이미지는 이번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완전히 숨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쓰임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앞에 서야 하며, 지도자는 책임 있게 자신의 이름으로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주님께 공을 돌릴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봉사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자기를 높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감추어짐은 외적 익명성보다 내적 비공로성에 있습니다.

 

바늘은 이어 준다’는 부분도 좋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다비다와 과부들, 다비다와 예수, 과부들과 천국을 바늘이 이어 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옷은 단지 직물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남겼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과부들이 그 옷을 들고 울었다는 것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 속에 실제 쓰임으로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실제로 결속시키는 것도 교리적 구호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삶에서 만날 때입니다. 진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선은 그것을 행하게 하며, 체어리티는 사람과 사람을 살아 있는 관계로 연결합니다.

 

바늘은 완성될 때까지 일한다’, ‘ 순서를 지킨다’는 대목은 거듭남과 연결해서 읽을 만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감동이나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피하고, 그 자리에 선한 습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 ’은 상당히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매뉴얼대로, 규정대로’라는 표현은 영적 삶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의 외적 과정이 동일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따라 놀랍도록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는 실이 남는다’는 표현도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교회가 남고, 사람 역시 어디를 지나갔든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좋은 가르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무엇을 남겼는가’보다 ‘어떤 상태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내 이름과 기념물이 남는 것보다, 한 사람이 더 평안해지고, 한 관계가 회복되고, 한 사람이 주님께 더 가까워졌다면 그것이 훨씬 귀한 흔적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바느질 공동체의 규모가 아니라 과부들이 몸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랑이었습니다.

 

손은 일하고 마음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아홉 번째 원칙 역시 이번 영상에서 매우 좋은 문장입니다. 이것은 수도원적 영성과 일상적 쓰임을 연결할 수 있는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 일을 버리고 종교적 명상에만 몰두하는 삶보다, 자신의 직업과 가정과 사회적 의무 안에서 정직하게 쓰임을 행하는 삶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므로 바느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청소하고, 가르치고, 운전하고, 돌보고, 행정을 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비다는 수도원 밖에서 수도 영성의 핵심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상에는 성경 본문과 설교적 확대를 구별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여제자는 다비다 명이다’라는 말은 사도행전 936절에서 실제로 다비다에게 여성형 ‘제자’에 해당하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비다가 ‘예수님과 행동을 완전히 똑같이 하는 특별한 완전한 ’이라는 하나의 신분명처럼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많이 나아간 해석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다비다가 제자였고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설교적 적용으로 구별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다비다의 회복과 고넬료 사건을 연결하여 ‘다비다의 바늘 하나 때문에 해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표현도 설교적 연결로서는 흥미롭지만, 사도행전 자체가 그렇게 인과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 사건 이후 욥바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고넬료의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간 것은 본문 흐름상 맞습니다. 그러나 ‘다비다 때문에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오히려 ‘다비다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가 욥바에 머무르게 되었고, 바로 시기에 고넬료 사건이 이어진다. 하나의 쓰임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다음 쓰임과 연결될 있다’ 정도로 말하면 훨씬 깊고 안전합니다.

 

죽은 다비다를 두고 사람들이 ‘베드로가 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해석하는 부분 역시 본문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하지만, 그들이 이미 확실하게 부활을 기대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기도를 통해 다비다가 살아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의 내면을 ‘반드시 살아날 것을 믿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설교의 감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 자체와 우리의 아름다운 추론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영상 후반에 강문호 수도사가 다비다에 관한 후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지금부터 이야기는 믿을 아니라 참고만 하는 전승, 전설’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좋습니다. 다비다가 부활 후 더욱 열심히 구제했고 ‘욥바의 어머니’라 불렸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다비다의 집에 모여 ‘바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성경과 같은 권위로 말하지 않고 전승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런 구별은 중요합니다. 전승은 영적 묵상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시된 사실과 동일한 층위에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볼 부분은 후반전 이야기입니다. 다비다의 전승을 소개한 뒤 강문호 수도사는 모세, 예수, 아브라함을 들어 ‘후반전이 커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은퇴 후 29년 동안 해외에서 더 크게 일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은퇴한 7년째인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의 현재 활동을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노년과 은퇴를 소극적 퇴장으로 여기지 않고 남은 삶에서도 쓰임을 찾자는 뜻에서는 매우 귀합니다. 사람은 몇 살이 되었든 주님께서 허락하신 상태 안에서 계속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반전은 앞보다 커야 한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바꾸어 듣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후반전이 더 ‘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쓰고, 더 많은 나라를 다니고, 더 많은 일을 해야 영적으로 더 큰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반전은 오히려 외적으로 작아지면서 내적으로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앞에서 설교하던 사람이 노년에는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마지막 쓰임일 수도 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상에서 자신의 성급함과 자기의지를 내려놓는 것이 평생의 가장 깊은 거듭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상 안에는 묘한 대비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바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을 하면 바늘은 사라진다’, ‘예수님은 드러나고 나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반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의 큰 사역과 자신의 은퇴 후 활동을 예로 듭니다. 이것을 곧바로 모순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예화로 사용하는 것은 설교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조용히 비추어 볼 만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늘의 영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어쩌면 ‘내가 바늘처럼 일했다는 사실조차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살피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roprium은 노골적인 자랑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는 주님만 드러내고 싶습니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라는 종교적으로 선한 문장 안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문호 수도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참된 ‘바늘의 영성’은 내가 얼마나 많은 천국을 만들었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친 뒤 ‘ 일을 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선을 주신 분도 주님이며, 내가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사용한 것뿐입니다’라고 더 깊이 인정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는 제목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한 번 더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천국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안에 형성됩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바늘은 그 천국적 선이 자연계에서 하나의 구체적 쓰임으로 나타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다비다가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기보다 ‘주님께서 다비다의 사랑과 바늘을 통해 천국의 어떤 것을 이웃의 가운데 나타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번 영상에서 결국 ‘바늘’보다 ‘옷을 들고 울던 과부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록한 이력서가 남은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쓰임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누군가가 ‘ 사람은 굉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 사람이 내가 힘들 나를 도와주었다’, ‘ 사람 때문에 내가 다시 일어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훨씬 천국적인 흔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영상의 ‘바늘의 영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 받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 상한 것을 이어 주며, 소리 없이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선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지 않은 , 끝까지 쓰임을 행하는 .’ 그렇게 살다가 일이 끝났을 때 바늘은 조용히 놓이고 옷만 남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옷조차 우리의 공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손을 빌려 누군가에게 입혀 주신 사랑의 흔적일 것입니다.

 

 

 

SY.94, 강문호 수도사, ‘미르사바 수도원’ (2020011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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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상의 결혼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간 남자와 여자가 이루는 결혼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54가 직접 말하는 것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이 글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들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결혼을 통해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다고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54 안에서만 보아도 결혼이라는 말은 자연적인 남녀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두 기능이 하나로 작동하는 관계까지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천상의 결혼 = 이해와 의지의 결합이라고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AC 전체에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개념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의지의 결합, 진리와 선의 결합, 신앙과 사랑의 결합 등이 서로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참된 결합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을 하나의 평면적인 등식으로 외우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참된 결합이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는 질서라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 표현 역시 AC.54 자체의 문장을 넘어선 전체 AC의 관점에서 정리한 설명이라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4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는 이해와 의지의 결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고 하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는 이해이고 의지는 의지인 채로, 둘이 하나로 작동합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상응의 중요한 성질을 보여 줍니다. 참된 결합은 차이를 없애는 동일화가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해와 의지가 결합한다고 해서 이해가 의지가 되거나 의지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기능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 작동합니다.

 

앞의 AC.53과 연결하면 신앙과 사랑의 관계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53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따라서 이해와 의지의 결혼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사랑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이후 AC.475-476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남자와 여자가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뜻한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여기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교리를 많이 알면서 사랑도 조금 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사랑이 참으로 결합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선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와 관계됩니다. 이해가 한 방향을 보고 의지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둘이 하나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아는 대로 완벽하게 살아야만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완전주의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은 진행되는 과정이며, AC.54는 그 과정의 세부 단계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영적 질서가 이해와 의지의 분리에 있지 않고 그 결합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을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의지는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기능과 깊이 관계되므로 이해와 의지의 결합은 진리와 선의 결합과 분리되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은 천국과 거듭남을 이해하는 매우 근본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자 = 진리’, ‘여자 = 이라는 하나의 기계적인 공식으로 모든 성경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은 문맥을 따라 보아야 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서 남자 = 진리’, ‘여자 = 이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관련된 더 넓은 대응은 이후의 AC 설명과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 결혼은 이 내적인 결혼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AC.54의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즉 자연적인 결혼 자체를 행복의 최종 근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결합의 행복 안에서 더 높은 결합의 질서를 보았고, 그 근원을 천적인 것과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결혼을 단순한 그림자나 중요하지 않은 외피로 취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이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AC.54가 직접 말합니다.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참으로 표상할 때 외적인 것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을 담고 드러내는 귀한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에게 결혼은 단순히 사회제도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는 매우 깊은 표상이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 자체도 ’, ‘처녀’, ‘아내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AC.54는 그 이유를 교회의 선에 대한 애정에서 찾습니다. 이후 말씀에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가 혼인과 부부의 언어로 나타날 때에도 이 천상의 결혼이라는 큰 주제가 배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천국에서의 실제 남녀 결혼과 천상의 결혼은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렇다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저술에서 천국의 결혼과 결혼애를 별도로 매우 깊게 다룹니다. 다만 AC.54 천상의 결혼을 처음부터 사후세계의 부부생활만을 뜻하는 용어로 제한하면 이번 글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이 더 내적인 천상의 결합에서 온다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결합의 궁극적인 근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천상의 결혼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완전한 조화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앞의 AC.39 이후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천상의 결혼을 가장 안전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하나의 단단한 등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질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서로 구별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결합하여 작동하는 것입니다. AC.54에서는 그 가운데 특별히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실제 결혼의 행복은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었고, 그 결합은 다시 천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AC.54에서 남자와 여자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굳이 태고교회의 결혼의 행복과 천상의 결혼을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 :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결혼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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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1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장자권’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성경강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약 35분 동안 찬양과 기도, 집회를 향한 기대와 사모함이 길게 이어지고, 그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받아 가자’, ‘이영환 목사를 통해 주시려는 것을 취하고 가자’는 태도입니다. 특히 인도자는 이영환 목사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주듯 무엇인가를 전하려 한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장자권’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성경 주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영적 유산을 전달받고, 그것을 다시 가지고 가는 ’이라는 강한 전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상 후반에는 ‘장자선교회’ 정기후원과 ‘장자권 교재’가 소개되고, 이 교재를 그동안의 핵심 내용을 모은 일종의 ‘장자권의 완결판 교재’라고 설명합니다. 즉 ‘장자권’은 이 집회에서 우연히 선택한 한 번의 설교 제목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운동으로 발전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처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장자’, ‘처음 ’, ‘장자권’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아벨의 ‘양의 새끼’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 르우벤의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처음 ’과 ‘장자권’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자권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장자권 운동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장자’는 단순히 집안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남들보다 먼저, 많이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장자’는 무엇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과 교회 안에서 무엇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마침내 그것을 삶으로 살아 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신앙이나 진리가 ‘장자’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진다고 해서 진리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과 결합할 때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도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입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먼저 나타난 ’과 ‘실제로 첫째인 ’이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글자를 배우고 나중에 그 글자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해서 글자가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의학지식 자체가 환자를 살리려는 사랑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은 단순한 특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지배해야 하는가’라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가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고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형제 살인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이 사랑보다 자신을 높일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한다’는 무서운 속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장자권 회복’을 말하려면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내가 영적 장자가 되어 특별한 권세를 얻는다’, ‘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다’, ‘ 자녀에게 축복이 계승된다’, ‘내가 남보다 앞선 영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성경의 장자권을 자연적인 특권 체계로 되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하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 신앙이 체어리티를 낳고 있는가’, ‘주님께서 삶의 첫째 자리를 실제로 차지하고 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장자권은 대단히 깊은 거듭남의 주제가 됩니다.

 

특히 AC에서 ‘처음 ’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새끼’가 거룩했던 까닭도 인간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참된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을 여호와께 돌리는 표상은 ‘내가 장자이므로 이것은 권리다’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 안에 있는 선도, 진리도, 사랑도, 신앙도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용자가 작업해 둔 AC 자료에서도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권’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간의 특권의식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면 진리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먼저 살아야 하고, 은혜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을 자신의 영적 계급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직분을 먼저 받았다면 권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쓰임의 책임이 커집니다. 이 의미에서 ‘장자권’은 ‘특권’보다 ‘쓰임’에 가깝습니다.

 

영상 초반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역시 바로 이 기준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분밖에는 사랑할 이가 없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 원한다’는 고백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 집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받아 가겠다’는 사모함 역시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한 애정이 필요하며, 냉랭한 지성만으로는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사람의 의지와 애정이 실제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회의 뜨거움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매우 세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초반 인도자가 반복해서 ‘이영환 목사를 통해 주시려는 ’, ‘목사가 찢어 주듯 주려는 ’을 ‘취하여 가자’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선의로 이해하면 ‘ 목회자가 평생 깨닫고 살아온 신앙의 유산을 배우자’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의 선배에게서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반드시 하나의 안전장치를 둡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진리라 해도 진리가 참된 것은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로일 수 있지만 근원은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의 체험이나 교리 체계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것이 말씀보다 높은 해석의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의 첫 35분을 단순히 ‘찬양이 길다’ 정도로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도입부가 이후 장자권 강의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을 미리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단순히 ‘장자권이라는 성경 개념을 공부하겠다’는 상태가 아니라 ‘ 집회에는 특별히 받아야 무엇인가가 있고, 이영환 목사를 통해 그것이 전달된다’는 기대 속에서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선한 진리가 전달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좋은 토양이 되지만, 특정한 인간의 해석이 지나치게 절대화될 경우에는 검증보다 수용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영환 목사나 장자선교회를 처음부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은 결국 누구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장자권을 가진 인간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선과 사랑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신앙의 지식과 영적 권위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 체계로 나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영상 초반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이영환 목사가 장자권을 실제로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충분히 들은 뒤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출발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장자권’은 ‘내가 남보다 먼저 받을 권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 안에서 주님의 선과 사랑이 첫째가 되고, 진리와 신앙은 그것을 섬기는 질서로 돌아가는 ’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 누구도 스스로 장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장자권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과 진리와 능력까지 주님께 돌려드리는 ’입니다.

 

이 기준을 세워 놓고 다음 2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장자권’을 어떤 성경적 구조로 설명하는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히 ‘장자에게 주어진 ’, ‘장자의 명분’, ‘아브라함·이삭·야곱과 에서’,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와 가정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적용된다고 보는지를 따라가면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인 진리와 실제로 첫째인 ’,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와 하나씩 대조해 보겠습니다.

 

2

1부에서는 이 집회의 전체 분위기와 ‘장자권’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렌즈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번 2부부터는 그 렌즈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 집회에서 장자권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맏아들이 가졌던 권리’라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선교회라는 조직과 교육용 교재가 따로 있을 만큼 하나의 영적 체계로 발전해 있습니다. 영상 끝에서도 현재 사용하는 교재를 이전 교재들의 핵심적인 장자권 내용을 모은 사실상의 ‘완결판 교재’처럼 설명하고, 목회자 전문교재가 아니라 평신도 교육용으로 보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도 단순한 설교 한 편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 성경 개념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하나의 해석 체계’입니다.

 

이 점에서 먼저 인정할 것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라’는 권면 자체에는 상당히 좋은 영적 직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분명히 가볍지 않습니다. 눈앞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더 높은 것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눈앞의 욕망 때문에 영적인 것을 팔아 버리지 말라’는 교훈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다른 관련 강의 자료에서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식욕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이 주신 영적 우선순위, 영적 질서를 파괴한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이 적용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낮은 자연적 욕망이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던 질서가 뒤집혀,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통치 아래 놓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팥죽 그릇 때문에 장자권을 팔지 말라’를 ‘순간적인 자연적 욕망 때문에 영적인 선과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을 단순히 ‘에서는 귀한 영적 복을 가볍게 여겼고 야곱은 그것을 귀하게 여겼다’ 정도로 읽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나쁜 사람, 야곱은 좋은 사람’, ‘에서는 장자권을 잃은 사람, 야곱은 장자권을 쟁취하여 받은 사람’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말씀의 내적 구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와 야곱은 두 개인의 성격을 넘어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크게 말하면 에서는 자연적 차원의 ‘’을, 야곱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아직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다’라는 진리를 배우고, 처음에는 그것을 의무와 순종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에서는 진리가 앞에 나섭니다. 이 단계에서는 야곱이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질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왕이 되기 위해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 섬기기 위해’ 먼저 들어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처음에는 ‘진리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행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해야 한다’였다면, 나중에는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가 됩니다. 바로 이때 외적으로 먼저였던 진리가 본래 자리로 물러나고, 실제로 첫째인 선이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둘러싼 말씀의 역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누가 장자인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출생순위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지므로 진리가 장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에서는 선이 먼저입니다. 신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명에서는 체어리티가 먼저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먼저 배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를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이 쉽게 ‘영적 특권론’으로 변합니다. ‘나는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가정에는 장자권의 복이 있다’, ‘내가 장자권을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장자권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귀한 영적 환경과 리메인스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가 가진 영적 신분이나 권리가 혈통을 따라 자녀에게 이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도, 거듭남도, 천국도 혈통으로 상속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녀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장자권’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영적 신분증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처음 ’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자권이라고 하면 ‘장자가 무엇을 받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처음 것은 누구의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양의 새끼’가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용자가 번역·해설해 둔 AC 자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장자권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장자이므로 받는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속뜻은 ‘처음 것이므로 주님께 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나에게 어떤 복이 오는가’를 묻지만, 영적인 인간은 ‘내가 받은 것이 누구에게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자연적인 장자권은 소유의 언어로 읽기 쉽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귀속과 질서와 쓰임’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권과 함께 ‘’을 말할 때도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복에는 자연적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자녀, 토지, 풍요, 건강, 평안 같은 것이 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의 좋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영적 실체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때입니다. ‘장자권을 회복하면 사업이 잘된다’, ‘가문이 일어난다’, ‘자녀가 성공한다’, ‘물질적인 형통이 따라온다’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씀의 영적인 복이 자연적인 성공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복은 훨씬 안쪽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진리를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사람의 삶을 이끌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쓰임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감당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이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형편이 그의 장자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한층 깊어집니다. 에서의 문제를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했다’는 데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팥죽은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자연적 만족입니다. 장자권은 그보다 더 깊고 먼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팥죽 그릇에 장자권을 판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눈앞의 자연적 만족 때문에 영적인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는 것,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영적 권위를 얻으려다 겸손을 잃는 것, 심지어 ‘장자권을 얻겠다’는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까지 모두 이 원리 아래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역설적입니다. ‘장자권을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을 듣다가 오히려 ‘내가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우월성에 사로잡힌다면, 장자권을 지키려다가 장자권의 속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에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쓰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권세’보다 ‘책임’, ‘소유’보다 ‘귀속’, ‘특권’보다 ‘쓰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장자권’보다 ‘주님의 장자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체어리티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다시 연결됩니다. ‘양의 새끼’를 드린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351 자료에서도 ‘양의 새끼’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상징하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과 거기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 장자권 전체를 뒤집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신앙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결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실제 유입의 질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입니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오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순서’이고 후자는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 질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이 영원히 장자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기에 아주 좋은 주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지 말아야 ’으로 읽기 쉽지만, 속뜻에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 안에서 무엇이 진짜 장자인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장자인가?’라는 질문마저 내려놓게 합니다. 모든 선과 모든 참된 신앙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이 아닙니다. ‘ 안의 질서가 회복되는 ’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지식이 삶이 되며, 자기 사랑이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마침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장자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의 ‘장자권’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가지고 보면 다음 단계에서 더 민감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조상의 신앙과 , 부모와 자녀, 가문과 장자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공된 자막에는 후반부에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와 탈상, 장자에게 제사 음식을 먹이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 장자들이 빨리 죽는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단순한 ‘장자권의 영적 의미’ 문제를 넘어 ‘조상의 죄와 영적 영향, 가문의 저주, 제사와 장자, 세대 영적 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훨씬 중요한 분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영들의 유입, 인간의 자유, 책임, 섭리를 함께 놓고 보아야 정확히 풀립니다.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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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끝에서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가문·조상·제사·유전적 영적 영향’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자막의 해당 부분을 더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영환 목사는 흔히 일부 영적 전쟁이나 가계치유 계열에서 주장하는 ‘가계의 저주’를 오히려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는 부모나 조상의 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 저주로 계속 이어진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갈라디아서 313절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17절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부모가 살아온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조상의 때문에 지금도 저주받는다’는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리 신령하고 아무리 대단해도 가계를 저주하면 저주 부분에서는 잘못된 ’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하며, 정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이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조상이 지은 특정 죄의 형벌이 후손에게 영적 저주로 전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그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자연적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 때문에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 악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 이런 죄가 있었으니 나는 영적으로 묶여 있다’, ‘조상이 우상숭배를 했으므로 후손이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개인의 현재 상태를 조상의 행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삶의 공간에서 문화와 정서는 영향을 있다’고 구별한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폭력적인 반응방식을 배우기 쉽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하면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습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정직과 섬김과 기도가 일상화된 가정에서 성장하면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저주가 혈통을 타고 흐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유전적·심리적·문화적 조건이고, 후자는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영적으로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영환 목사가 이 둘을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더하면 이 문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수많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그 성향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수많은 상태를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리메인스’입니다. 사람에게 유전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밀하게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여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싸우기 시작할 때, 주님은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조상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선과 진리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문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만일 영적 저주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영적 장자권이나 축복 역시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 저주’를 부정하면서 ‘가문의 영적 특권’은 자동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악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정죄되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선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부모가 악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녀가 그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상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 영향의 방식이 ‘영적 신분의 자동 이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게 살면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말씀과 기도와 체어리티의 삶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가 형성되는 자연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악한 삶은 자녀에게 매우 어려운 자연적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 자녀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개별적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가정에서는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책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도 장자에게 특별한 법적·종교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영적 세계에 옮겨 ‘영적인 장자도 부모의 영적 권세와 축복을 상속받는다’고 하면 자연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혼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장자 제도는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 형식이 무엇을 표상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는 또 하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영환 목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농촌에서 성장하며 실제로 보았던 옛 상례와 제례의 모습을 상당히 생생하게 회상합니다. 특히 탈상 때까지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차려 놓고, 그 음식을 장자가 먹던 풍습을 언급하면서 ‘그래서 우리나라는 장자들이 빨리 죽어 버려요’, ‘조선시대부터 장자들이 빨리 죽어 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 문화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앞의 ‘가계의 저주’를 부정한 대목과 달리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조상을 신적 존재처럼 섬기거나 죽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의 장자들이 빨리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에 관한 신학적 판단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제공된 자막 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장자들이 실제로 다른 형제보다 일찍 죽었다’는 통계나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설교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해석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경험도 존재할 없고 사람들의 논리도 존재할 없다’, 결국 진리가 선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로 가계저주론을 비판했던 논리와도 긴장이 생깁니다.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반복되니 가계의 저주다’라는 경험적 추론을 경계했다면, ‘내가 농촌에서 이런 제사 풍습을 보았고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경험 역시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앞에서 세운 좋은 원칙을 자기 자신의 제사문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자연계 어딘가에 머물면서 제삿밥을 받아먹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물질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사람은 영적 몸을 가진 채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은 조상이 제삿날 집으로 돌아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들어가 그것을 먹은 장자에게 죽음의 영향이 전달된다는 식의 사고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은 영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사 행위의 ‘영적 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 행위를 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그 조상에게 자신의 운명과 복을 맡기며 종교적인 숭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와 조상을 존경하고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을 주님에게 속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에게 복과 화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제삿밥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예배와 신뢰가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한국 기독교가 제사 문제를 다룰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사를 반대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존경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족 간 갈등만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 문화일 ’이라며 그 행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면 외적인 형식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애정과 목적’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야 할 예배가 죽은 인간에게 향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그들의 선한 삶을 되새기는 것까지 같은 범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있는가?’라는 더 미묘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유입을 매우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는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 할아버지의 영이 나를 따라다닌다’, ‘우리 가문의 조상 영들이 후손에게 붙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에게 결합되는 영들은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 정체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도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입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한국적인 ‘조상신’ 개념이나 기독교 일부에서 말하는 ‘가계의 ’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 저주’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는다’는 사고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방향은 옳습니다. 강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옛것은 지나갔다’고 강조하는 것도, 신약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는 분명한 복음적 힘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단지 신분의 즉각적인 변경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이라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주님께 돌아섰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성향과 습관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책의 전가나 가계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물려받고 스스로 강화해 온 악한 성향과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가계의 저주는 끝났다’에서 멈추면 사람은 자기 안의 실제 악을 너무 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상의 때문에 정죄받는 사람이 아니지만, 안에는 유전적으로 기울어진 수많은 악의 성향이 있으며 그것이 실제 악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님 앞에서 날마다 살펴야 한다’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 생깁니다. ‘우리 집안이 원래 화를 내니까 어쩔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상의 분노의 영을 끊으면 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분노를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집안은 대째 목회자 집안이다’, ‘우리 부모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우리 가문에는 장자의 복이 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자권 가르침에서 특히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저주는 상속되지 않지만 복은 자동으로 상속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환경과 영적 기회는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는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유산은 ‘내가 받은 장자권을 네게 넘긴다’는 선언보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부모 자신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것, 말씀을 삶보다 앞세우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돈과 명예보다 선한 양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녀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자녀의 마음에는 수많은 선한 상태가 심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나중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자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가문의 회복’이라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문의 회복은 어떤 영적 의식을 통해 조상의 저주를 끊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부터 악의 반복을 멈추는 ’입니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었고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면 ‘폭력의 영을 끊는다’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분노와 폭력을 죄로 여기고 실제 삶에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돈 때문에 싸웠다면 ‘가난의 저주’를 끊는 것보다 탐욕과 소유욕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억압해 왔다면 내가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장자권’이라는 말을 아주 아름답게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내가 우리 가문의 장자가 되어 복을 독점하겠다’가 아니라 ‘내게서부터 악의 대물림을 멈추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장자권’을 직접 이런 문장으로 정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거듭남 교리를 오늘의 가정 문제에 적용한 표현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정직해지고, 내가 먼저 악을 끊고,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며, 내 자녀에게 이전 세대와 다른 선한 환경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영적 장자’라는 표현은 특권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책임을 뜻하게 됩니다.

 

더 깊게는 그 책임마저 ‘ 힘으로 우리 가문을 바꾸겠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장자니까 내가 우리 집안을 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부터 고쳐 주셔서, 나를 통하여 다음 세대에 조금 선한 길이 열리게 하신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장자권은 인간의 영적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이영환 목사의 이 부분에는 ‘함께 보존해야 ’과 ‘분별해서 내려놓아야 ’이 동시에 있습니다. ‘조상의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계속 저주 아래 있다’는 가계저주론을 거부하는 것은 보존할 만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구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앞서 자신이 가계저주론을 비판할 때 사용한 엄격한 기준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을 심판할 필요도 없고, 한 대목의 오류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진리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좋은 가르침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상의 죄책은 나의 죄책이 아니다. 그러나 유전된 악의 성향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저주풀이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평생의 거듭남을 통해 질서가 바로잡힌다. 부모의 선도 자동으로 나의 선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직접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저는 이 정도가 이 부분을 통과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정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4부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장자에게 주어진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을 가정과 자녀와 물질과 사역의 형통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자연적 표현들 안에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읽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이 지점이 이 장자권 가르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분별할 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4

앞의 3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 저주’를 오히려 분명하게 부정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개념과 구별하면서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장자권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문제, 곧 ‘’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다른 강의 자료에서 초보적 신앙의 성도가 좋아하는 것을 ‘주일성수, 교회 봉사, 물질 축복, 행복한 가정’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이후 죄성과 정욕을 다루는 연단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함께 참고할 만합니다. 즉 그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히 ‘장자권 = 물질축복’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생각하면 먼저 ‘ ’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명기의 율법에서도 장자는 아버지 소유 가운데 다른 자녀보다 두 몫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둘러싼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하여 요셉이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에서 ‘장자권’과 ‘ 많은 ’이 연결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질서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옮겨 ‘영적 장자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물질과 성공과 권세를 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상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는 대신 표상의 외형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구약의 토지, 재산, 자녀, 장수, 승리, 풍요는 실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적인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신적 말씀인 이유는 그 자연적인 사건들 안에 영원하고 천국적인 실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은 단지 부동산을, ‘곡식과 포도주’는 단지 식량과 경제적 풍요를, ‘자손’은 단지 생물학적 후손의 증가를 의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교회의 번성, 거듭남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갑절의 ’을 받는다는 것도 반드시 ‘연봉이 배가 된다’, ‘사업 규모가 배가 된다’, ‘자녀가 남보다 크게 성공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커지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 많이 섬길 있게 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사람이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많이 흘려보낼 있는 사람이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권한이 커지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천국에서는 쓰임이 커집니다. 지혜가 많으면 사람들을 지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나눌 책임이 생깁니다. 재물이 많으면 그것 자체가 높은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떤 애정과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장자의 ’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 배의 특권’보다 ‘ 배의 쓰임’이라고 읽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이것은 ‘ ’의 모든 속뜻을 단순히 ‘쓰임’ 하나로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각 문맥마다 상응은 더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장자는 받아 누리는 사람’보다 ‘먼저 받아 많이 섬기는 사람’이라는 방향이 천국의 질서와 훨씬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복을 구하면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며, 자녀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느냐,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께서 사업을 잘되게 주실 것이다’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통하여 정직하게 일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얻은 재물을 선한 쓰임에 사용하고 싶다’는 말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과 사업을 연결하지만 안쪽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주님이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두 번째에서는 자연적인 사업이 주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전자는 종교가 자연적 욕망을 섬기는 방향으로 뒤집힐 위험이 있고,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목적을 섬기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권의 ’을 분별하는 핵심입니다. 장자권을 배운 뒤 사람이 ‘이제 우리 가정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형통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주로 갖게 된다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뒤 ‘나는 우리 가정에서 먼저 회개해야겠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겠다’, ‘내가 가진 것을 가족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겠다’, ‘자녀를 성공의 연장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독립된 영혼으로 대해야겠다’, ‘ 많이 받기를 구하기보다 충실하게 쓰임을 감당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장자권 가르침은 상당히 다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 ’은 매우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녀에게 가장 큰 복은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입니다. 정직을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 뜻밖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장자권의 복을 받았는가, 잃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결과 중심이 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고, 일이 안 되면 ‘내가 장자권을 놓쳤나’,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신앙이 부족한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당하는 의인과 가난한 성도, 병든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성공은 그 사람에게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성공은 오히려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패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큰 성공이 사람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키워 영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만 보고 그 섭리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 형통’이라는 공식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공식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고난=복 없음’이라는 반대 공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형통한 생애를 사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행복을 자연적인 부와 명예의 확대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사랑과 쓰임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자신을 통해 흘러간다는 기쁨이 천국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에는 흥미롭게도 ‘번영신학’과 단순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보입니다. 관련 강의에서 그는 초보적인 성도가 ‘물질 축복 받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발견하고 다루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부자 청년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소유를 팔라’고 하신 것을 단지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사람 안의 ‘정욕, 죄성과 정욕이라는 소유’까지 내려놓는 문제로 확대합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 본문의 정밀한 속뜻 해석과는 별도로, 자연적인 소유보다 내면의 악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을 평가하면서 ‘결국 많이 벌고 자녀 잘되자는 이야기’라고 단순화하면 그의 가르침에 있는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 훈련과 죄의 처리, 헌신과 사명도 강조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여러 요소들이 ‘장자권’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느냐입니다. 자연적 축복과 영적 성숙이 함께 언급될 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이 구별 하나가 전체 가르침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며, 교회라는 외적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안에 영적인 것이 담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그 안의 내용입니다. 그릇을 깨뜨릴 필요는 없지만, 빈 그릇을 내용 자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복된 가정’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도 그것만으로는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약한 가족을 버리지 않으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갈등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을 자기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의 질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된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높은 소득은 감사할 조건일 수 있지만 영적인 복의 척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자기 능력을 남을 누르는 데 쓰지 않고 쓰임에 사용하며,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부모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 장자’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 몫을 맡은 사람’입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지고, 먼저 깨달은 만큼 먼저 실천하며, 먼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할 권위가 아니라 섬길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째’의 역설이 장자권을 비추는 매우 좋은 빛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자주 다투었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장자권에 적용하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장자이므로 첫째다’에서 ‘첫째이므로 가장 먼저 섬긴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 받는다’에서 ‘ 받았으므로 많이 내어놓는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 자녀가 받는다’에서 ‘내가 먼저 거듭나 자녀에게 선한 삶을 보여 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문제까지 다시 풀어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단순히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실제로도 첫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에서는 진리가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장자권의 회복은 ‘신앙의 우월권을 회복하는 ’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자기 자리를 찾아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AC.351의 ‘양의 새끼’가 다시 결정적인 빛을 줍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해당 자료에는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중심의 장자권 이해를 근본에서 뒤집습니다. ‘내가 장자다’가 최종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장자이시다’가 최종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근원도 주님이고, 내가 가진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며,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먼저 무엇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하고 돌려드릴 이유가 됩니다. 장자의 첫 열매가 여호와께 속했던 것처럼, 내 삶의 첫째도 주님께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장자권은 ‘성공의 신학’에서 ‘헌신의 신학’으로, ‘소유의 신학’에서 ‘쓰임의 신학’으로, ‘가문의 특권’에서 ‘거듭남의 책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영환 목사의 가르침 안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장자권을 훨씬 안전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살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하자는 열망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책임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장자인 ’가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장자이신 주님’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장자의 ’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 것이 안에서 무엇이 되었는가?’입니다. 재물이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 지식이 지혜가 되었는가, 신앙이 체어리티가 되었는가, 권위가 섬김이 되었는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선을 구하는 사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진리가 나 자신을 먼저 고치는 진리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장자권의 가장 큰 복은 어쩌면 ‘갑절의 재산’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 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쓰임을 향해 배열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가까워집니다. 자연적인 형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질서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고 ‘무엇은 보존할 것인가, 무엇은 재해석할 것인가, 무엇은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정리하겠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라는 별도의 교리 체계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장자권이 독립된 영적 특권의 교리라기보다 ‘선과 진리의 질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 거듭남과 쓰임’이라는 훨씬 큰 질서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부에서 이 영상 전체를 종합하겠습니다.

 

5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겠습니다. 앞의 네 편에서 우리는 이 가르침 안에 분명히 보존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상당히 깊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장자권은 옳다’ 또는 ‘장자권은 잘못되었다’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게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성경의 장자권이라는 표상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자기 안의 악을 살피게 하며,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보존해야 할 선한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이 ‘특별한 사람’, ‘특별한 가문’, ‘특별한 ’, ‘특별한 영적 권세’를 소유하는 의식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자권의 속뜻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장자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후원과 교재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장자권에 관한 여러 내용을 하나의 교재로 정리하여 평신도들도 배우게 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영환 목사에게 장자권이 단순히 설교를 위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세대가 받은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소비하고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보존할 것은 ‘가계의 저주’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영환 목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상의 죄책이 영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장자와 가문을 강조하는 가르침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문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가문의 저주’와 ‘가문의 ’이라는 양극단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한 ‘물질축복론’으로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관련 강의에서는 물질 축복과 행복한 가정을 신앙생활의 최종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을 발견하고 다루는 더 깊은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장자권과 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번영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실제로 그가 말하고 있는 더 넓은 신앙의 구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가장 먼저 조정해야 할 것은 ‘장자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위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장자권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된 중심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그 표상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우선순위’, ‘사랑과 신앙의 질서’, 그리고 더 깊게는 주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을 하나의 거대한 교리 체계로 확대하여 성경 전체와 신앙생활 전체를 그 틀로 설명하려 하면, 본래 더 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표상이 오히려 전체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 주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약’을 붙들고 성경 전체를 언약 하나로만 읽을 수도 있고, ‘성전’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성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영적 전쟁’을 중심에 놓고 모든 문제를 귀신과 전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분명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는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중심은 장자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시다’는 설명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 자료에는 ‘처음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으로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으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장자권 가르침의 맨 중심에 놓으면 많은 것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내가 장자가 되는 ’보다 ‘주님이 안에서 첫째가 되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 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보다 ‘내가 받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 권세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보다 ‘내가 받은 것을 어떤 쓰임에 돌릴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권의 초점이 인간에게서 주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최근 AC에서 계속 만나 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가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외적인 시간의 순서에서는 가인이 장자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표상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순서와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한 뒤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처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난 신앙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도 첫째라고 주장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비극을 표상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운동을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장자권을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결과 사람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섬기지 못하며, 오히려 ‘나는 특별한 영적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사람이 ‘내가 먼저 회개하겠다’, ‘내가 먼저 용서하겠다’, ‘내가 먼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겠다’, ‘내가 먼저 가족을 섬기겠다’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문’과 ‘다음 세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에는 좋은 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개인화되면서 신앙도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환경을 바꾸며, 내가 받은 선한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반드시 ‘자유’를 놓습니다. 나의 거듭남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받은 천국의 상태를 유산처럼 자녀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선한 삶을 보여 주고, 주님께서 그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데 자연적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녀 역시 자기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유산은 ‘영적 신분의 상속’이 아니라 ‘거듭남에 유리한 선한 환경과 본보기의 전달’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달라집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장자권을 이어받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살려고 애썼다. 너도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네게 맡겨진 쓰임을 찾아 살아라’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진짜였다면 자녀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부모의 영적 지위가 아니라 부모가 사랑했던 ‘선과 진리’입니다.

 

’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을 말할 때 자연적인 복이 자꾸 중심으로 올라오면 경계해야 합니다. 건강, 물질, 성공, 자녀의 형통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부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자연계에서 가능한 한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만 가지고 주님의 복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 신앙은 매우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자권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장자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믿음이 부족했다’, ‘무엇인가 영적 원리를 어겼다’는 설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런 공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의 ‘ ’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 배의 소유’보다 ‘ 쓰임’으로 읽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받은 사람은 먼저 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많이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넓은 쓰임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지배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보다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말씀과 사람을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에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자’라는 말이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장자가 되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면 ‘내가 장자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첫째 자리 역시 바로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문제 역시 마지막으로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영환 목사가 제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배경에는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신앙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먹은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경험적 주장은 별도로 검증되어야 하며, 신학적 확신과 역사적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구별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지 않고 그 행위 안의 애정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 전쟁’ 역시 장자권과 결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한 영들의 실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실패와 질병과 가정 문제를 어떤 특정한 영이나 조상에게 연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악을 행한 책임’을 악한 영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천사가 있다고 해서 ‘내가 선하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악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proprium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장자권의 회복도 어떤 특별한 영적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라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진리를 하나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피하고,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질서를 조금씩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장자권 회복’이라는 말을 굳이 스베덴보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저는 ‘질서의 회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장자권 회복=질서의 회복’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전체 교리를 바탕으로 오늘의 장자권 담론을 재해석한 표현입니다. 내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아래 놓이고, 거짓이 진리에 의해 밝혀지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자기애가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통치 아래 배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자권’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무엇을 받을까?’가 먼저 떠오르느냐, ‘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할까?’가 먼저 떠오르느냐입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장자권의 욕망으로 내려가기 쉽고, 후자는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방향이라고 봅니다. ‘ 세대에서 끝내지 말자. 다음 세대를 생각하자. 받은 것을 전하자. 먼저 사람이 책임을 감당하자.’ 이런 정신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문의 특별한 영적 권리’에서 떼어 내고 ‘선과 진리를 다음 세대에 삶으로 전달하는 책임’으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그러면 장자선교회의 ‘장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장자들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들었으니 먼저 살자’입니다. ‘우리가 장자의 복을 받자’가 아니라 ‘먼저 받은 만큼 먼저 섬기자’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자’가 아니라 ‘우리 자녀가 주님을 자유롭게 선택할 있도록 우리가 먼저 선과 진리를 살아 보여 주자’입니다. 이렇게 바뀐다면 장자라는 이름은 우월성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분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영환 목사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목회 가운데 어떤 사랑으로 장자권을 가르쳤는지, 주님 앞에서 그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우리가 최종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말씀 앞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자연적 의미에 머문 부분은 영적으로 더 깊게 읽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 오류를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편의 해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참된 장자권은 내가 남보다 먼저 받을 권리가 아니라,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시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신앙이 체어리티의 생명이 되어, 먼저 받은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는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이것입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 두 문장을 붙들면 장자권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반대로 장자권이라는 성경의 귀중한 표상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자권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 권리’에서 ‘주님의 질서’로, ‘나의 ’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 가문의 특별함’에서 ‘모든 사람을 향한 주님의 섭리’로, ‘신앙의 우월성’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아벨의 ‘양의 새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 사랑에서 살아나는 신앙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의 완성은 결국 ‘내가 장자권을 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처음 것도 마지막 것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이라는 긴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아주 뜻밖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장자가 되어라’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에는 ‘참된 장자는 오직 주님이시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장자의 특권이 아니라 ‘먼저 받은 만큼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기며, 먼저 살아내는 쓰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이 영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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