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4:23-30)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는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더 잘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당시 교회가 그들에게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오늘날 기독교회라고 불리는 교회 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기독교회의 교리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소수의 사람들만 마음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나마 사랑에서 비롯한 애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숫자가 더 작다. 그러나 교회 밖의 개종한 이교도들은 다르다. 이들은 주님을 그들의 한 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공경한다. (AC.9198:2,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라틴) 9198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 및 Potts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at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country’ signifies that the Lord, and the Divine truth which is from him, are less received and loved in heart within the church, than outside of it. He spoke to the Jews, with whom the church then was; and it is known that the Lord was less received by them than by the nations outside the church. The case is similar at this day in the church which from him is called the Christian church. In this the Lord is indeed received in doctrine; but only by a few with acknowledgment of heart; and by still fewer from the affection of love. It is otherwise with the converted gentiles outside the church. These worship and adore him as their one only God, (AC.9198:2,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2장 22절,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에 관한 주석 중 ‘과부나’(Any widow)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동안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왔는데, 오늘 맑은 하늘을 보니 여러 가지로 기분이 상쾌합니다. 양동룡 부목사님께서 휴가를 가셨는데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7년 7월 30일,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설교를 원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사람들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을 질책하시고, 그러는 주님에게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주님과 회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겉뜻으로는 어리둥절한 이 상황, 그 이유를, 하지만 속뜻을 통해서는 알 수 있는데요, 23절입니다.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자기들에게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할 거라 말씀하십니다. 가버나움에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가버나움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신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요, 가령,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도 고치시며, 천정을 뜯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도 고치시는 등 많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이란 그곳에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말합니다. 기적이란 노력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행운이 찾아오거나, 또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가는 심령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였고, 그러한 역사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렛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기적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들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 저는 특히 이 신유(神癒), 즉 병 고침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 개척 전 부사역자로 있던 중형교회에서의 경험 때문인 것 같은데요, 저는 그때 한 80여 세대를 담당하는 마을사역자였습니다. 거의 웬만한 큰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겪어야만 했었는데요, 그중 열에 일곱은 이 질병과 장애, 장례에 관련된 일이었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특히 복음서 내용 중 주님의 치유의 현장이 늘 부러웠고, 주목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비밀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아마 ‘나는 내가 안수하는 자마다 낫는다’라는, 치유의 은사로 좀 유명해지고 싶은 공명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지만... 그러나 정확하게는, 마을 목원들의 그 아픔과 안타까운 사정들을 좀 해결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수도원 공부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스베덴보리를 알게 되어 지금은 이 일, 이 길을 소명으로 받아 벌써 햇수로 8년째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렴풋이 그 어떤 영적 원리 내지는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데요, 그것은 바로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라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12장에 나오는 내용 덕분입니다. 즉 천국 전체는 한 사람 모습이며, 천국은 사람의 모든 신체, 곧 머리, 몸, 팔과 다리 등에 상응하는 수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그런 천국과 상응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에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들의 인플럭스(influx, 입류)를 통해 그 능력을 공급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좀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이시겠지만... 하여튼 저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쑤욱 들어왔으며, 그러니까 그냥 믿어졌으며, 드러내어 밝히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저는 이렇게 제 몸에 대해 적용, 나름 상당한, 거의 확실하다는 걸 알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물론, 저도 때로는 약도 쓰고, 병원도 다닙니다만, 네, 하여튼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記述)이 믿어지려면 사람의 내면이 열려야 합니다. 내면이 닫히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혀 천국의 모든 걸 받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내면은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단계마다 천국에서 흘러들어오는 것들이 차원이 다릅니다. 아마 천국이 삼층천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고침 받은 복음서 여러 케이스는 그 내면이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실히 열렸던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내면이 어디까지 열렸는가를 보시고, 엔터키만 치셨던 거 같아요.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어 내면이 열리고, 그래서 동일한 은혜를 입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기 때문에, 속뜻으로는 이방인의 지역을 뜻하고, 또한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건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으며,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을 주님의 고향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세우신 교회를 뜻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고향은 천국, 또는 교회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속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다음에는 겉 사람을 변화시키시지요.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키십니까?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십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진리의 씨 뿌리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 바로 전 본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즉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나사렛 사람들이 그 말씀을 경청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귀의 작용이며, 그러므로 겉 사람 안에 있는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애정 안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겉 사람 안에 교회를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그곳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회가 24절에서 말하는 주님의 고향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가 가버나움의 기적을 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내면에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에 대한 애정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 역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새 교회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가 세워지면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진리의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처음 가졌던 진리에 관한 애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진리를 악용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악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지난번 교리 강좌에서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믿는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믿는가? 라는 문제를 서로 얘기했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누구나 구원을 받기 위해 나옵니다. 즉 천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걸 최종 목적으로 삼는 걸 원하시지 않습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나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 때 천국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신앙, 그런 신앙을 새 교회에서는 자연적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가버나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들은 그냥 앉아서 또 무슨 신기한 기적이나 구경하고 있겠다 하는 사람들은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웃을 위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원하고, 또 질병의 치유를 바라며 사업의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한 것들이 다 가버나움의 기적 구경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하신 말씀은 자연적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산으로 끌고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 하는데, 바로 그런 것이 자연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에서 선지자는 성경, 즉 말씀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가장 큰 선지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말씀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의 고향이란 어디입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선지자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자연적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가 자연적 교회였구요, 오늘날에는 기독교회가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 있는 자연적 신앙이 자연적 교회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들어가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에 대해 주님은 25절로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여기서 엘리야 선지자 역시 말씀으로서 주님을 표상합니다. 엘리야 시대라고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많은 교회가 각각의 영적 상태에 따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다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말씀을 왜곡했고, 어떤 교회는 말씀 안의 진리를 말살했습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교회가 선지자를 핍박, 심지어 죽이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 시대는 영적으로 어떤 상태의 교회일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때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으며,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닫힌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속 사람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속 사람이 닫혔기 때문에 겉 사람 안으로 진리와 선이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 것들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속 사람이 닫히고 선과 진리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으로 흉년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 내면의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선과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말씀에서는 삼 년 육 개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3년 6개월은 교회가 타락해 문을 닫기 직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상태를 다른 곳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해와 두 해를 합하면 삼 년이고, 거기에 반년을 더하면 3년 6개월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천이백육십 일’(계12:6)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를 한 달을 삼십 일로 계산하면 42 개월, 즉 3년 반으로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즉 교회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해 문을 닫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나타내지만, 영적인 교회는 아니고 자연적 교회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안에 영적인 것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곳에 과부가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말씀에서 과부는 선이 없는 진리를 나타내거나, 또는 진리가 없는 선을 나타냅니다. 과부는 이렇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본문에 이스라엘의 과부는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는 것은, 진리를 지식으로만 접근할 뿐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내면으로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봐도 진리인지를 모릅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어떻게 진리가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과부에게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은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주실까요? 사렙다의 과부와 같은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사렙다의 과부는 앞에서 말한 이스라엘의 과부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과부가 선이 없는 진리라면, 사렙다의 과부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를 갈구합니다. 주님은 그런 그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흉년 내내 부양하게 하셨습니다. 부양한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그의 영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과부의 집에 기름과 곡식이 끊어지지 않는 것, 곧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왕상17:16)로 표현했습니다.

 

여기 나아만 이야기는 아래 열왕기하 5장 말씀으로 대신합니다.

 

1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1-14) //

 

주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주님께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28, 29절에는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주님께 화를 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 감추고 싶었던 내면의 악이 드러날 때,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어떤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속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합니다. 그런 것이 주님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연적 신앙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 진리가 방해가 될 때는 화를 내며 진리를 밀어냅니다. 여기 ‘그들이 일어나’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본래 진리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 것으로 봐서 그들이 지금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동네는 교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네에서 주님을 쫓아내는 것은 교리 속에 들어있는 내적 진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내적 진리란 말씀의 지식 속에 들어있는 선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어버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산은 사랑 또는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동네가 건설된 산’이란 교리의 바탕에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처음 받아들일 때 마음 가운데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교리의 바탕에 있는 사랑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진리에 대한 사랑은 없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동네가 건설된 산 아래로 주님을 밀어내는 것은 교리로부터 교리의 생명인 사랑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진리를 가지고는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고 동네가 건설된 산에서 밀쳐 떨어뜨릴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는 것은 주님은 어느 곳에나 임재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나 쫓아내는 사람에게나 주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가 주님의 손을 잡기를 기다리시면서 항상 임재해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처음 새 진리 안으로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시 타성에 젖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듭남의 길에서 한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정체가 아니라 후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오리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계속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요, 십계명의 법으로 자기를 비춰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거짓과 악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매일 조금씩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나사렛 사람들의 신앙을 기적을 바라는 신앙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렙다의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의 신앙을 가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본받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아만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나병을 고치기 위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었습니다.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따라 자기와 외동아들이 먹을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선량한 이방인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전체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버리는 그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신앙은 자연적 신앙에서 영적 신앙으로, 영적 신앙에서 천적 신앙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15:26)

 

아멘

 

원본

2017-07-3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3. 2023-03-23(D5)-매일예배(2440, 눅4,23-30), '나사렛 사람들이 주님에게 크게 화를 낸 이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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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지옥.1.12.87-102.'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sc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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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4:14-22)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신적 진리 자체이셨고,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 선 자체이셨다. 그리고 신적 선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혼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호와로부터 잉태하셨으며, 말씀에서 ‘여호와’는 모든 생명의 본질인 신적 사랑에서 비롯한 신적 선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본질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셨다. 왜냐하면 신적 선이 주님 안에 있었고, 그 선에서 발현되는 신적 진리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의 인성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AC.9954:11, 이순철 역)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9954번 글 11번 항에 대한 Clowes 영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For when the Lord was in the world, he was, in respect to the human, the Divine truth itself; and in respect to the very being of his life, he was the Divine good itself, which with man is called the soul from the father; for he was conceived from Jehovah, and in the Word ‘Jehovah’ denotes the Divine good of the Divine love, which is the being of the life of all. From this it is that the Lord alone was ‘the Anointed of Jehovah’ in very essence and in very performance, because the Divine good was in him; and the Divine truth proceeding from this good was in his human while he was in the world (see the places cited in n. 9194, 9315). (AC.9954:11, Clowes 역)

 

이는 출애굽기 28장 41절,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에 관한 주석 중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40일간 광야 시험에서 승리하시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 구절을 읽으시고, 사람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사실 이 말씀 뒷부분에는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모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차이가 있는지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주 두 주에 걸쳐 한 구절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4절입니다.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주님은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시험에서 이기고 돌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 시험이 겉으로는 세상 계실 때 주님이 당하신 시험이지만, 속뜻으로는 거듭나는 사람의 내면에서 그 사람과 함께 싸우시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위 광야 시험의 속뜻을 생각할 때,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거듭나는 사람이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그들의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속뜻으로 ‘갈릴리’는 이방인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거듭나는 사람 안의 겉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잠깐, 겉 사람, 속 사람 등의 용어 정리를 좀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이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아직은 육(肉)을 입고 살아 있는 상태이기에 ^^,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간단하게는 inmost(가장 안쪽), internal(속), external(겉), body(몸)라는 이 네 가지를 이해하시면 되며, 좀 더 명확성을 위해 영어를 그대로 쓰겠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개까지가 영, 나머지인 body는 육, 우선은 이렇게 이해하고 계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이들 네 가지는 사람 생전엔 모호하지만, 일단 사후, 영이 되면 그때는 아주 명료해지는 그런 거라고 합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나고요, 그때 제일 먼저 body가 분리됩니다. 즉 body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를 그대로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준비상태로, 그동안 bodyinternal 사이에서 수고한 external이 정리, 휴면 상태에 들어갈 준비를, 그리고 internal이 전면에 드러날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계의 영원한 삶은 이 internal로 살아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상태 때는 아직은 생전 식구들이나 친구, 지인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알아보고 아주 반가워들 하지요. 사후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이제 external은 휴면 상태로 들어가고, internal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살아생전 한 식구였던 사람들끼리도 서로 못 알아봅니다. 본인은 물론, 식구들 역시 서로의 영, 그러니까 internal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요, 생전 식구들이 본 서로의 모습은 external이지 internal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말이, 지상 혈연은 지상으로 끝, 영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말씀을 그동안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inmost는 주님의 영역입니다. 네, 우선은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처음 거듭날 때는 먼저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re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속 사람 안에 교회가 세워졌지만, 겉 사람의 상태는 아직 교회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이를테면 속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지만, 겉 사람은 주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주님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겉 사람은 마치 이방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겉 사람이 시험에서 한 번 이깁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선 끝에 가까스로 주님 손잡고 시험에서 이긴 것이지요. 그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교회의 작은 초석을 하나 세우십니다. 그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어야 궁극적으로 겉 사람 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돌아오시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회당’은 속뜻으로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교회의 회당은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었고요, 또 교리의 해석이 다를 때, 그것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은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 안에 오셔서 새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또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는데, 뭇사람은 겉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선한 애정들과 생각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칭송했다’는 것은 애정들과 생각들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를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이 흘러들어올 때, ‘이것이 참 진리로구나!’ 하고 공감하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이대로 살아야 하겠구나’ 하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뭇사람들이 칭송하는 모습입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셨다’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역시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겉 사람 안의 어느 부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다’는 말은 주님은 겉 사람 안에서 성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구유에 갓 태어나신 주님이 계시고요, 어떤 분에게는 성전에서 랍비들과 진리를 토론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청년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각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그렇게 성장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성장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악을 끊고 선을 행할 때마다, 그것에 비례해 주님도 조금씩 자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나사렛을 주님이 자라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완전히 거듭나서 더 이상 시험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의 시험이 끝나고 다음번 시험이 올 때까지의 잠시 동안의 평화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리에게 말씀을 읽어주시고, 말씀을 통해서 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교리는 어떤 것입니까? 삶의 다양한 상황에 맞게 진리를 올바르게 적용하는 지혜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원론이라면, 원론에서 파생되는 수없이 많은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들이 주님께서 오늘 회당에서 가르쳐 주시는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을 펴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17절로 19절입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은,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잉태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직분을 받을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신 이유에 대해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십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는 누구며, 눈먼 자는 누구일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과 진리에 대해 무지하여 악과 거짓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다르게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상태가 조금씩 다르고, 그러므로 구원의 처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진리와 선의 지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고자 했던 나사로와 같은 사람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에 비해 ‘눈먼 자’는 진리와 선을 모르기는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이지만, 주님을 믿지도 않고 진리를 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르쳐 주면 순순히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포로 된 자’는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중에는 진리를 전혀 몰라 그렇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알면서 악에 빠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포로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눌린 자’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이 거짓인 줄 모르고, 진리가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눌린 자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리로 알고 신봉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배척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눌린 자입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르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깨닫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참 빛이시기 때문이지요. 참 빛이 있어야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주님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0절입니다.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0절에서 주님은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셨습니다. 여기서 ‘맡은 자’는 영어 성경의 표현으로는 minister, 즉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반드시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는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우리 속으로 오시는 것을 원하며,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 적극적으로 시중을 듭니다. 주님은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말씀을 읽어주시거나 교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섬기는 자들이 성경을 주님께 갖다 드려야 읽어주시고요, 그리고 그때 그 말씀에 있는 내적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님의 모든 선한 역사는, 주님과 우리 안에 있는 섬기는 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섬기는 자가 성경을 가져다 드리자 주님께서 성경을 읽으셨고, 성경을 다 읽고 덮으셨을 때, 다시 섬기는 자에게 맡기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앉다, 서다, 걷다라는 말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앉는 것’은 가장 내적인 상태, 그러니까 의지의 상태를 나타내고요, ‘서는 것’은 의지로부터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을, 그리고 ‘걷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의 의지 가운데 계실 때, 겉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21절입니다.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앉으셨다’는 말과 ‘너희 귀에 응하였다’는 말은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귀에 응하였다’는 것은 영어 성경 표현으로는 ‘귀에서 이루어졌다’입니다. ‘’는 아시는 바와 같이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제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시험에서 이기고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실 때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시험을 이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이 증언했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를 인정하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는데, 이때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요셉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아닙니다. 그러면 야곱의 아들 요셉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같은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고, 이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세상 관점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그가 야곱의 아들인지, 마리아의 남편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천사들은 그냥 요셉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갖는 내적 의미에만 집중합니다.

 

※ 아래는 이런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HH.526:4, 김은경 역) //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요셉과 야곱의 아들 요셉은 천사들이 볼 땐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세상 시각에서 볼 때는, ‘목수 요셉의 아들에게 어떻게 이런 지혜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만, 그러나 내적 의미로 보면 신성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진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신성한 인간이신 주님을 나타내고, 아들은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분으로부터 모든 진리와 선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속 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이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은 우리가 시험에서 이길 때마다 주님께서 겉 사람 안으로 오셔서 그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겉 사람의 의지 안에 말씀의 진리를 심는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을 읽어주시면서 ‘이 글이 너희 귀에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의지 가운데 심어졌다는 뜻입니다. 시험을 이긴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모든 진리가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최초의 신성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와, 마지막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올 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세상 자연적인 것 안에 담길 때 가장 힘이 있습니다. 그 자연적인 것이 바로 주님의 인성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두 번째 말씀은, 주님의 인성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능력이 모든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 된 자와 억눌린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눈먼 자, 포로 된 자, 억눌린 자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어느 만큼은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며, 그리고 포로 된 자이며 억눌린 자입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고, 치유하시는 이 또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그런 능력이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5-36)

 

아멘

 

원본

2017-07-0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22(D4)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2. 2023-03-22(D4)-매일예배(2439, 눅4,14-22),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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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34-40)

 

 

시므온은 순종을 뜻하고 또한 신앙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이 계명에 순종하고 신앙에 따라 행할 때 그의 안에서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사람들은 말씀과 교회의 교리와 설교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신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그러한 지식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단지 기억에서 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의지에 속한 것은 없고, 그러므로 사람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곧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앙을 행동으로 옮길 때, 즉 순종할 때 신앙은 의지 속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사람 안에서 신앙이 된다. (계시록 해설 443:3, 이순철 역)

 

※ 위 계시록해설 443:3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으며, 이는 계시록 7장 7절 말씀에 대한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Simeon” signifies obedience he also signifies faith, for faith becomes faith in man when he obeys and does the commandments; before this is done the knowledge of such things as man has drawn from the Word, from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from preaching, appears as faith, but this is not faith until man does these things; until then it is merely a matter of thought from the memory, in which there is nothing of the will, consequently nothing of the man, for the will is the man himself; it is therefore when a man does this, that is, obeys, that it enters the will, thus the man himself and becomes faith. (AE.443:3)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7:7)

 

 

※ 본 설교부터는 서울 새 교회로 부임(2016년 12월) 후 하신 설교입니다.

 

그동안 출애굽기와 누가복음에 대한 말씀을 한주씩 걸러 전해드렸는데요,

 

※ 이상은 이순철 목사님의 청주 새 교회 시절입니다.

 

며칠 성탄절과 새해 예배가 있어서 시기에 맞는 말씀을 전하다 보니 누가복음 설교를 잠시 쉬었습니다. 오늘은 다시 누가복음 2장 34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유대교회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주님을 찬송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타락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를 그렇게 이해하는 까닭은 말씀에서 그들을 갈릴리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사렛은 갈릴리에 속한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속뜻으로 이방인을 나타냅니다. 이방인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며, 또는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진실한 신앙인들에게 참된 진리와 선을 보내주십니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은 신실한 신앙인들의 내면의 교회를 이루는 진리와 선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내면에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들 속으로 오십니다. 그것이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아기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 부부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진리가 아니세요.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선을 동반한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마리아 부부가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전처럼 진리만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함께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신앙에 따르는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신앙과 삶의 진실한 행위로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통해 참된 진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신앙인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가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이나 선지자는 그렇게 참된 진리를 만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 부부와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바로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34절에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시므온이란 이름은 히브리말로는 귀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므온은 ‘듣는 자’, 즉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진리를 그냥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요, 신앙에 따라 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 진리를 만날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안의 선한 애정이 진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말이지요.

 

한글 성경에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이 아이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세워졌다’라고 말합니다. 많이 다르죠.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로 표상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마치 애굽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거듭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되찾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이는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고 하구요,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라고 말했습니다.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라는 말은 지옥의 공격을 홀로 막아내셨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이 35절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한다고 했는데, 칼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마음의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의지에서 나오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는 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 우리의 의지 속을 비추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지만 의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의지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곧 생명이고, 생명이 맑아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의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 의지나 애정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개혁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음 36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난 사람은 시므온 말고 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바로 ‘안나’라는 이름의 여인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안나 역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안나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 ‘아셀’ 지파의 딸이라는 것과, 선지자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아셀 지파는 애정을 뜻하고, 선지자는 교회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선지자는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안나가 진리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안나는 교회의 교리를 배우기를 힘쓰고, 교리가 이끄는 데로 선하게 살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나가 남편과 결혼해 일곱 해를 살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편은 누구를 말할까요? 말씀에서 남편과 아내는 각각 진리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안나가 남편과 결혼한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과 진리가 서로 만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이 결합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해 하나가 되었으니, 그것은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숫자 7은 거룩한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나가 남편과 함께 산 기간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와 두 번째 상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진리에 복종, 선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진리에 복종하려면 진리에 반하는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끊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하고, 자기의 이익과 이웃의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기 위해서 치열하게 갈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리의 상태에서 선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가 시작됩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가 되면, 진리 행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 일단 선의 상태로 들어가면, 내면에서 선한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억지로 진리를 행하지 않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한 애정에 따라 행하고요, 그래서 그것이 기쁩니다. 37절은 안나의 두 번째 거듭남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방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처음 그 상태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혹시 지난주 출애굽기 19장 설교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도착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은 영적 교회의 사람들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 즉 선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광야는 진리가 아직 심어지지 않은 선을 뜻합니다. 본문에 안나가 과부로 사는 것이 그런 상태입니다. 선한 의지는 있는데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제까지 안나가 실천했던 진리는?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똑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고, 일반적인 진리만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앙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신앙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악을 먼저 끊고, 그다음에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 같은 진리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선을 행하기보다는 주로 자신의 행위 가운데 숨어있는 악과 거짓을 버리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을 행하되 소극적으로 행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때 주님으로부터 받는 진리는 대부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 필요한 일반적인 진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로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선한 의지는 있는데 선을 행하는 방법에 대한 진리가 없음을 느낍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안나가 과부로 지내는 상태입니다. 과부는,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거나, 아니면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 안나의 경우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안나를 과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안나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이 표현은 안나가 과부가 된지 팔십사 년이 지났다는 말이 아니라 안나의 현재 나이가 팔십사 세라는 말이겠지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숫자 4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84는 4의 배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숫자 4의 의미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숫자 4는 하나의 상태가 완전히 끝나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선만 있고 진리는 없는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주님으로부터 진리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안나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말씀에는 안나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금식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금식은 애통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안나는 무엇을 애통해했을까요? 자기 안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음을 슬퍼했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주님께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으로부터 선을 동반한 진리가 그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안나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입니다. 38절에서는

 

38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통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소망하는 이웃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는 예수님, 즉 진리에 대해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안나와 같이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로 들어간 사람이라야 진리를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우님들 가운데도 거듭남의 두 번째 단계에 도달한 분이 계실 수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 누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는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라고 말하는데 진리 아닌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 안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진리 안에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주님을 만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웃들에게 주님에 대해, 즉 진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9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에 대한 정결 예식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 안의 신실한 신앙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낡고 병든 교회를 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때, 한동안은 이전 교회의 예배를 그대로 존속시키십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 부부와 같은 신실한 사람들을 모아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교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본 동네 나사렛’은 새로운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보내주시는 새로운 교회의 교리가 곧 ‘본 동네 나사렛’입니다. 왜냐하면 ‘동네’는 속뜻으로 교회의 교리를 나타내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는 곳이며, 그래서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신실한 신앙인들의 내면의 교회로 오신 주님은 처음에는 아주 연약한 주님이세요. 주님이 연약한 것이 아니고요, 주님을 받아들이는 우리 신앙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점 깊어지면 그에 따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도 점점 자랍니다. 진리에 능력이 생기고, 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40절에서는,

 

40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인간의 때가 묻지 않는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돌려드려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와 요셉 부부가 정결 예식의 기간이 찬 다음 아기를 바친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선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진리와 선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 후 7년 만에 과부가 된 선지자 안나는 그것을 위해 84세가 되도록 금식과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주님은 좀 더 빨리 나를 선하게 만들어주시지 않으시는가? 선에 대한 나의 열정을 모르시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아마 아직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안나처럼 자신에게 진리와 선이 없는 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선을 동반한 진리로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금식과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이 준비 중이신 모든 새 교회가 바로 설 것이고, 부흥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식구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40:6-8)

 

아멘

 

 

원본

2017-0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3. 2023-03-13(D2)-매일예배(2430, 눅2,34-40), '시므온의 축복과 선지자 안나 이야기'.pdf
0.4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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