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1(D1)-주일예배(2506, 눅13,6-9),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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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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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1V5lp3sR7E4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6-9)

 

 

나무에 속한 모든 것은 진리를 뜻하지만, 열매는 다양한 선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의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라고 말한다. (참된 기독교 106)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재앙이나 환난은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면 그 여파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지만, 반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고, 질병과 환난과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 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21:18-20)

 

말씀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요, 첫째, 주님께서 과연 그 정도로 허기를 느끼시거나 예민하셨을까 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주님이 허기를 채우려 하셨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 왜 하필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신 데 왜 무화과나무를 그토록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모든 기적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 곧 속뜻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시장하시다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리적인 욕구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주님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문제로는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않으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이 느끼시는 배고픔이며 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바로 다가가 열매가 열렸는지를 살펴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열매는 신앙인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기까지 했을까요?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자연적인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세 가지 단계의 천국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선에도 세 가지 단계의 선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인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진리를 믿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인 선(spiritual good)은 진리와 선을 사랑하되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적 선(celestial good)입니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위해 또는 선 그 자체를 위해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렇게 자연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천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나 사람을 보실 때 그에게 어떤 선이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살펴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안타깝게도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선도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의 재물과 지위만을 탐했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인 의미에만 매달릴 뿐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해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4-15)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의 경우는 말씀의 내적인 것을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고난 특성상 그들은 진리를 알면 오히려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교회 사람들의 영적 성향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겉으로만 신성할 뿐 내적으로는 전혀 신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스스로 영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보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합니다. 포도원이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선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포도원의 주인이신 주님이 당신의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적 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겠습니까? 누구나 처음에는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도 공정하게 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인이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배우기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나 포도원지기는 모두 주님을 나타내는데,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말씀 또는 진리로서의 주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하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주님이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주인은 또 삼 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삼 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우리를 위해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때리고, 침을 뱉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기다린 삼 년이요,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주님의 그런 마음을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두루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리로 가르치고 설득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설득하실까요? 먼저 나무 주변을 두루 파십니다. 두루 판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쓸 만한 진리와 선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주입하시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대화하듯 천천히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거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거름은 인분과 같이 더러운 것인데 그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628번 글의 2항을 보면 천국의 천사들은 지옥에서 오는 악한 기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 냄새는 인분이나 시체가 썩는 냄새같이 아주 역겹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한 냄새를 지옥의 영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거짓이나 악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악과 거짓들의 역한 냄새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거름을 주신다는 것은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이전의 악과 거짓의 음습한 기운과 역겨운 냄새를 느끼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몸에 밴 악습과 거짓된 신념들을 혐오하게 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찍어내신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참된기독교’ 106번 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출애굽기 21장에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종은 여섯 해까지만 주인을 섬기고 일곱 해가 되면 자유인이 되어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신앙인들은 진리를 위한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여섯 해는 거듭남을 위한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동적인 신앙과 능동적인 신앙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동적인 신앙은 진리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그에 비해 능동적인 신앙은 진리를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신앙이며, 그러므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자발적으로 진리에 따라 사는 그런 신앙입니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과 뜻을 맞추고, 그들의 행동을 참아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 진리의 명령이니까 용서하고 참는다면 그것은 수동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능동적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고 매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8:34-36)

 

아멘

 

 

원본

2020-10-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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