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4:19)

 

AC.408

 

하나의 교회가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지면, 전과 다르게 새로움이 시작, 즉 새 빛이 발(發)하는데요, 말씀에서는 이걸 ‘아침’(morning)이라고 합니다. 이 새 빛, 곧 ‘아침’이 왜 교회가 황폐해질 때까지는 발하지 않는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들은 모독의 일들과 뒤엉킨 상태로 지내왔는데요, 계속 이런 상태에 있는 한, 무슨 빛이나 체어리티의 일이 시작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잡초들’(tares)이 모든 ‘좋은 씨’(good seed)를 파괴하기 때문이지요. When a church has been so vastated that there is no longer any faith, then and not before, it begins anew, that is, new light shines forth,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morning.” The reason why the new light or “morning” does not shine forth until the church is vastated, is that the things of faith and of charity have been commingled with things profane; and so long as they remain in this state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of light or charity to be insinuated, since the “tares” destroy all the “good seed.”

 

※ 주님의 비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13:24-30)

 

그러나 신앙이라는 게 전혀 없으면, 신앙은 더 이상 모독(冒瀆, profaned)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선포된 걸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며, 시인도 안 하고 믿지도 않는, 대신 알기만 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모독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가 바로 오늘날 유대인들의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시인하는 주님이 바로 그동안 자기들이 그토록 고대하며 기다려 왔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이 사실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들은 모하메드인들(무슬림)과 이방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가 아무것도 시인하지도, 믿지도 않을 때까지는 주님이 세상에 오실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But when there is no faith, faith can no longer be profaned, because men no longer believe what is declared unto them; and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but only know, cannot profane, as was observed above. This is the case with the Jews at the present day, who in consequence of living among Christians must be aware that the Lord is acknowledged by Christians to be the messiah whom they themselves have expected, and still continue to expect, but yet they cannot profane this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it. And it is the same with the Mohammedans and gentiles who have heard about the Lor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did not come into the world until the Jewish church acknowledged and believed nothing.

 

 

해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완전히 황폐(vastation)’되어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지며, 이때 비추기 시작하는 새 빛을 성경이 ‘아침(morning)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 이유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것이 ‘속된 것과 섞여 있는 상태’, 곧 거룩한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이용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참된 빛이나 사랑도 사람 안에 스며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합 상태에서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비유에서 말하는 ‘가라지’가 좋은 씨를 질식시키듯, 참된 신앙과 체어리티가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는 더 이상 신앙을 ‘모독(profanation)할 위험이 없게 되는데, 이는 사람들이 무엇이 참이라고 선언되는지를 알기만 할 뿐, 그것을 인정하고 믿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안다(knowing)는 것과 ‘믿는다(believing)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며, 믿지 않는 사람은 모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원리를 그는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이방인들의 사례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으나, 그것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 지식이 거룩한 것을 훼손하는 모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유대교회가 이미 메시아에 대한 참된 신앙을 완전히 상실한 시점, 곧 더 이상 거룩한 것을 모독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일 그 이전에 오셨다면, 그들은 알면서도 왜곡하고 이용함으로써 가장 깊은 모독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408이 말하는 황폐는 단순한 타락이나 심판이 아니라, ‘새 교회와 새 빛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정화 과정’입니다. 신앙이 어설프게 남아 있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섞여 있을 때보다, 차라리 신앙이 전무한 상태가 되어 새롭게 주어지는 진리와 체어리티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의 빛은 다시 ‘아침’으로 떠오릅니다. 이로써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역사와 개인의 영적 여정 모두에서, ‘완전한 황폐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조건’임을 분명히 하며, 라멕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환의 신학적 근거를 이 단락에서 결정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AC.407,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 일반적으로 어떤 교회의 상태는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회는 참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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