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
황폐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알면서도 알기를 원치 않거나, 보면서도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옛 유대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는, 무지의 결과, 뭘 알지도 못하고,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처럼 말입니다. 알면서도 알기를 원치 않는, 즉 보면서도 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황폐함의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때 하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나는데요, 이들이 아니고, 이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는 사람들한테서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홍수 전 태고교회에서 일어났고, 또 홍수 후 고대교회와, 그리고 유대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새 빛이 그때 가서야 빛을 발하고, 그전에는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진리임을 시인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Vastation is of two kinds; first, of those who know and do not wish to know, or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like the Jews of old, and the Christians of the present day; and secondly, of those who, in consequence of their ignorance, neither know nor see anything, like both the ancient and modern gentiles. When the last time of vastation comes upon those who know and do not desire to know, that is, who see and do not desire to see, then a church arises anew, not among them, but with those whom they call gentiles. This occurred with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was before the flood, with the ancient church that was after that event, and also with the Jewish church. The reason why new light shines forth then and not before is, as has been said, that then they can no longer profane the things revealed, because they do not acknowledge and believe that they are true.
해설
스베덴보리는 ‘황폐’(vastation)가 하나의 동일한 상태가 아니라, 그 원인과 성격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황폐’, 곧 진리를 보고도 보려 하지 않으며, 들었으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이는 고대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유형으로, 진리가 이미 계시되어 있고, 접근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때문에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경우 황폐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지적 거부’에서 비롯되며, 그 결과 진리와 체어리티는 점점 왜곡되고, 마침내 신앙 자체가 공허해집니다. 둘째는 ‘무지로 인한 황폐’, 즉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고대와 현대의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난 유형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거부할 조건 자체가 없기에, 악의적 불신이 아니라 ‘열린 무지’의 상태에 머뭅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교회가 일어나는 결정적 순간이 언제인가를 이 구분을 통해 밝히는데, ‘알면서 거부하는 자들’의 황폐가 극에 달할 때, 곧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아 진리를 모독할 위험이 사라질 때에야 비로소 ‘아침’이라는 새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새 교회는 그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며 멸시하던 자들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홍수 이전), 고대교회(홍수 이후), 그리고 유대교회 모두에서 동일하게 반복된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혔듯, ‘모독’의 위험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면서도 거부하는 상태에서는, 새로 주어지는 빛과 체어리티가 즉시 속된 것과 뒤섞여 파괴됩니다. 반면, 진리를 알지 못해 거부하지도 못하는 자들은, 새롭게 계시되는 신앙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가 황폐된 자리의 ‘잔존하는 지식’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열려 있는 무지의 자리로 교회를 옮기십니다. AC.410은 이처럼 교회의 이동이 심판이나 변덕이 아니라, ‘모독을 피하고 구원을 지속하기 위한 필연적 섭리’임을 분명히 하며, 왜 새 아침이 ‘너무 이르게’ 오지 않고, 오직 황폐가 충분히 이루어진 뒤에야 밝아오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합니다.
AC.411, 창4:19, ‘황폐’(vastation), ‘황무’(荒蕪, desolation), ‘종말’(終末, consummation)이 반드시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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