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0(D1)-주일예배(2500, 눅12,22-3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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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ExJ3jyOPZc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눅12:22-34)

 

 

주님의 섭리(Providence) 가운데 있는 만큼 그는 평안하며, 또한 신앙의 선에서 오는 평안 가운데 있는 만큼 그는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the Divine Providence)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the Divine Providence of the Lord)는 일반적으로나 특별히, 아니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있으며, 그러면서도 영원한 것에 관한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AC.8478:4) Be it known also that insofar as anyone is in the stream of Providence, so far he is in a state of peace; also that insofar as anyone is in a state of peace from the good of faith, so far he is in the Divine Providence. These alone know and believe that the Divine Providence of the Lord is in everything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is in the most minute things of all, and that the Divine Providence regards what is eternal.

 

 

출애굽기 16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신 만나에 관한 장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아멘, 여기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오늘 본문에 비추어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바로 이것인데요, 주님은 왜 만나를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걸까요? 만나를 미리 거둬 쌓아두는 것은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주님의 섭리에 대한,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려주신 주님의 가르침 중 하나인데요, 바로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세 번째 주제인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는 범사에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신다(In All That It Does the Lord’s Divine Providence Looks to What Is Infinite and Eternal)입니다. 즉 우리의 일상 범사 모든 일이 사실은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비록 우리는 모르고 무심코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의 무한하고 영원한 결과를 주님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의 법칙을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시고 말입니다. 이 사실, 이 명제를 깊이 붙들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 하나까지도 함부로 아무렇게나 선택하거나 하지 않고, 대신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참된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러한 주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으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만나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거둬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선이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을 때,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과 진리들이 자아에서 나오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에 의해 더럽혀지는데요, 그것이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용할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하시고요, 기도할 때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주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내용입니다. 22절입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목숨과 몸은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염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염려한다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낸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주어진 몫에 만족하지 않고, 늘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진리를 깨우치면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보다는 자신의 머리에 쌓아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진리는 머리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 활용, 영적 생명인 의지와 사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가 실천된 게 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생명이 될 때, 기억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을 통해 진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삶으로 옮기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고 조바심을 내거나, 많은 지식을 쌓아두려 하는 것은 좋지 않은데요, 주님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말씀에서 까마귀는 보통 거짓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거짓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만이 존재하며, 능력이 있는 마음입니다. 즉 전자는 허상이지만, 후자는 실체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며, 진리 앞에서 발붙일 수 없습니다. 모든 거짓은 어둠과 같아서 진실이 없는 곳에 잠시 나타났다가 진실의 빛이 비치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럼에도 거짓이 스스로 존재하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기르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거짓은 주님이 허락하실 때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왜 거짓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실까요?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서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험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때 시험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거짓을 허용하시는 것은 너희 인간을 위해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까마귀를 기르시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까마귀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이번에는 백합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절과 28절의 말씀입니다.

 

27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말씀에서 백합화는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실합니다. 솔로몬의 옷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다 하나 내적 진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적 진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실하며 깊이가 있습니다. 말씀에는 왜 그렇게 고귀한 진리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 비유했을까요? 여기서 백합화는 앞에서 말한 만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신앙의 진리이며 선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일용할 만큼만 만나를 거두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지금 이 백합화에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백합화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라 한 것은 일용할 만큼만 거둔 진리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내일까지 쌓아두기만 하는 진리는 들풀과 같이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해지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백합화에 대해 오늘은 존재하지만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진다 하신 것입니다. 아궁이에 던져진다는 것은 내일까지 쌓아두는 진리는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하므로 지옥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쌓아두기만 하려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로 31절입니다.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영적인 것이든 세상 것이든 각자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염려를 한다면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그런 고통은 잠시뿐이고, 주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앞이 안 보이고 마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았을 때도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순위의 문제, 주객이 전도되는 문제인데요,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의식주를 위한 것이나 그 밖에 재물이나 적당한 지위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적은 어디까지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며, 그러한 물질들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는 영적인 것과 더불어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것에 늘 감사하면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 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만나를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내일 일을 걱정하였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서둘러 여러 날 먹을 만나를 한꺼번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부패해 버렸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늘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 다다음 주인 9월 3일, 9월 첫 주는 저희 한결같은교회 창립 10주년 되는 날입니다. 참고로 오늘 예배는 이 거실에서 2,500번째 드리는 예배입니다. 10년 전인 2013년 9월 1일 주일, 집 이 거실에서 저와 아내, 그리고 큰애 우석이,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작은애 준석이는 군입대를 하여 함께할 수 없었지요. 이 자리에선 잠시 경제적인 부분, 생활 면에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회의 동기가 그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몇 해 동안은 생활이 문제이기도 하여 전도를 비롯,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자립, 곧 십일조 하는 가정이 열 가정만 있어도... 하는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이런저런 무슨 전도세미나다 부흥세미나다 하는 데를 많이 쫓아다녔고, 또 목회와 더불어 잠시 부업도 하는 등 좀 기웃거리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 모든 시도 가운데 주님은 그런 곁눈질을 기뻐하지 아니하셨고, 오히려 점점 더 영의 일과 영성, 그리고 천국 사모함의 마음을 주셔서 갈수록 영적 체험과 수도원, 그리고 현재는 스베덴보리에 전념케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전념한다는 것은 주님이 그를 통해 알리신 일련의 계시를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모든 지난 10년 세월 동안 그러나 주님은 참 많은, 소위 까마귀들을 통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 저희로 굶지 않게, 오히려 배부르게 하셨고, 있어도 없어도, 부하고 빈해도 그저 덤덤, 천사들처럼 모든 걸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 아침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거두러 나갔던 것처럼 지난 세월 한결같이 저희의 만나를 위해 수고한 저희 사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음식이나 의복을 걱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몫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것이고, 천국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이 세상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땅끝에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당신의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해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하며,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진하게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12:33)

 

아멘

 

 

 

원본

2020-07-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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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말씀의 속뜻, 즉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its veriest life)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에 담긴, 주님이 숨겨놓으신 의미)는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그 속에 담긴 것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는데요,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이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인데요,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어떤 단어 하면 탁 떠오르는 의미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그 단어들과 이름들의 의미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낙원의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 개인이 아닌, 그가 표상한 어떤 구원 신앙(a saving faith)을 지각하는 등 말이지요.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들과 이름들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AC.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그 안에 있는 무슨 단어나 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그 가장 가까운 속뜻이 뭔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가슴 벅차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AC.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한, 세속적인 것들을 언급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는 그런 것이었지요. 그들은 이만하면 그 영적, 천적인 의미를 충분히 띠겠다 싶은 것들(representatives)을 가지고 언급했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스토리 텔링 같은 일종의 그럴듯한 역사 시리즈로도 만들었는데요, 이런 식의 표현 방식으로 그들은 정말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언이 바로 이런 스타일입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위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사실 많이 빗나간 번역입니다. 병행 본문(영어)을 보니 너무나 다르지요? 태고교회, 고대교회 같은 이런 배경, 즉 아르카나를 전혀 모르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을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Dark sayings of old)이라고 했습니다.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이들 자세한 내용들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얻었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두 번째 스타일은 역사적 기술이며, 아브람의 때부터 이어진 모세의 책들에서,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 시대, 사무엘, 열왕기의 책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글자의 뜻 그대로입니다. 즉 실제 역사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든, 특별하게든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음이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순서대로 보시게 됩니다. 세 번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인데, 이것은 태고교회 시절 아주 높은 존경을 받았던 스타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러나 계속 연결되어 태고 스타일 같은 역사적 형태로 남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이제는 속뜻, 곧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있어 아름답게 연결된 순서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다양한 상태들, 천국 그 자체,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가장 내적 의미와도 관련되는, 이런 속뜻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과 상용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주님은 이 스타일에서 속뜻으로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인격을 통해 다루어지십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진행됩니다. 즉 본문 주석 앞뒤로 어떤 아르카나가 곁들여져 말씀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깊게, 아주 넓고 깊게 열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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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AC.60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AC.61

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All things relati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re called spiritual, and all that are of 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 are called celestial; the former belong to man’s understanding, and the latter to his will.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AC.62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AC.63

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 다음은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책, ‘천국과 지옥’ 577번 글(김은경 역)입니다.

 

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In the same degree in which angels have wisdom and intelligence infernal spirits have malice and cunning; for the case is the same, since the spirit of man when released from the body is in his good or in his evil—if an angelic spirit in his good, and if an infernal spirit in his evil. Every spirit is his own good or his own evil because he is his own love, as has been often said and shown above. Therefore as an angelic spirit thinks, wills, speaks, and acts, from his good, an infernal spirit does this from his evil; and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evil itself, is to think, will, speak, and act from all things included in the evil.

 

[2] 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So long as man lived in the body it was different, since the evil of the spirit was then under the restraints that every man feels from the law, from hope of gain, from honor, from reputation, and from the fear of losing these; and therefore the evil of his spirit could not then burst forth and show what it was in itself. Moreover, the evil of the spirit of man then lay wrapped up and veiled in outward probity, honesty, justice, and affection for truth and good, which such a man professes and counterfeits for the sake of the world; and under these semblances the evil has lain so concealed and obscured that he himself scarcely knew that his spirit contained so much malice and craftiness, that is, that in himself he was such a devil as he becomes after death, when his spirit comes into itself and into its own nature.

 

[3] 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 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292, 293) 그러나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Such malice then manifests itself as exceeds all belief. There are thousands of evils that then burst forth from evil itself, among which are such as cannot be described in the words of any language. What they are has been granted me to know and also to perceive by much experience, since it has been granted me by the Lord to be in the spiritual world in respect to my spirit and at the same time in the natural world in respect to my body. This I can testify, that their malice is so great that it is hardly possible to describe even a thousandth part of it; and so great that if man were not protected by the Lord he could never be rescued from hell; for with every man there are spirits from hell as well as angels from heaven (see above, n. 292, 293); and yet the Lord cannot protect man unless he acknowledges the Divine and lives a life of faith and charity; for otherwise man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turns himself to infernal spirits, and thus his spirit becomes imbued with a malice like theirs.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 Nevertheless, man is continually withdrawn by the Lord from the evils that he attaches and as it were attracts to himself by his affiliation with infernal spirits. If he is not withdrawn by the internal bonds of conscience, which he fails to receive if he denies a Divine, he is nevertheless withdrawn by external bonds, which are, as said above, fears in respect to the law and its penalties, and fears of the loss of gain and the deprivation of honor and reputation. In fact, such a man may be withdrawn from evils by means of the delights of his love and through fear of the loss or deprivation of those delights; but he cannot be led thereby into spiritual goods. For as soon as such a man is led into these he begins to give his thought to pretenses and devices by simulating or counterfeiting what is good, honest, and just, for the purpose of persuading and thus deceiving. Such cunning adjoins itself to the evil of his spirit and gives form to it, causing his evil to be of the same nature as itself.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릇, 천적인 사람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목표는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인 사람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인 사람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 프란체스코 앞에 ‘(聖)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단순히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聖), 즉 ‘거룩하신 분(The Holy)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며, 그래서 이 칭호는 오직 주님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칭호입니다.

 

※ 은성출판사(http://eunsungpub.co.kr/)의 엄두섭 저, ‘성 프란치스코’를 꼭 읽어 보시기 바라며, 읽으신 분들도 거듭거듭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책을 읽는 우리를 깊은 신앙, 무거운 영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 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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