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3
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르지만, 이렇게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scarcely)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짧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이 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차례차례 통과하여 마침내 같은 지점에 도달하는 고정된 프로그램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판정하는 서열표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다섯 번째 상태이고 저 사람은 두 번째 상태다’라고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AC.13의 목적이 아닙니다. 앞선 AC.7-12에서 살펴본 상태들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가 아닙니다. 특히 외적으로 경건하게 말하거나 선을 행하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AC.9에서도 이미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3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그러나 AC.13 자체는 이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흐름과 AC.12 마지막에서 사랑이 지배권을 얻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한 내용,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일곱째 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짧은 문장만을 근거로 일곱 번째 상태를 여러 영적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가 깊어질수록 실제로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왜 뒤의 상태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를 AC.13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내하지 못해서인지, 시험이 어려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를 이 번호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3은 이유를 분석하기보다 단지 실제 상태의 차이를 짧게 알려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at this day)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두 번째, 어떤 사람들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상태에 있으며,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적은 이들’, ‘거의 아무도 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비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대부분이 첫 번째 상태에 있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AC.13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말하는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7-12를 읽는 방식에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창조의 날들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속도와 같은 깊이로 통과하는 일률적인 단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시는 질서는 분명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질서 있게 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야 합니다. AC.13은 거듭남의 높은 상태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도록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거듭남이 얼마나 깊고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인지를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짧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 해설)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 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AC.13.심화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bygrace.kr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bygrace.kr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bygrace.kr
'즐겨찾기 > AC 창1'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0) | 2026.03.10 |
|---|---|
|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1) | 2026.03.10 |
| AC.26, 창1:8, 저녁과 아침의 의미 : 앞서 밝혀진 상태의 원리를 다시 붙들다 (0) | 2026.03.08 |
| 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오류와 욕정까지 선과 진리로 굽히시는 주님 (0) | 2026.03.08 |
| AC.24, 창1:6-7, 궁창의 분리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나뉘어 하늘이 세워지는 때 (AC.24-25) (0) | 2026.03.0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