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

여러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제가 있도록,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제가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동안이 아니라 여러 동안, 거의 동안이나 세상에서와 똑같이 그들과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자신들이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었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죽은 뒤에는 살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의 본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 증언을 상상이라고 하거나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이기 때문에 본래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모든 서론을 지나 첫 번째 실제 주제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이 소생될 ’,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단어는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소생이라고 하면 죽을 뻔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없어진 사람이 새로 창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육체의 삶이 끝나면서 사람이 영으로서의 의식적인 삶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소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72 이하에서 나올 소생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자연적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서 깨어나는 과정을 가리킨다고 기억해 두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육체의 부활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오랜 기간 의식 없이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육체를 받아 살아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AC.70에서부터 죽음과 영원한 삶을 하나의 연속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삶에서 영으로서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AC.70에서는 아직 그 소생이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바로 다음 글들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경험한 방식으로 하나씩 설명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부분도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도 아니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세상에서와 똑같이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사후생명을 철학적으로 추론하거나 성경 구절만을 들어 논증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직접적인 경험을 증언으로 내놓습니다.

 

세상에서와 똑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후세계의 모든 환경과 조건이 자연계와 똑같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가 그들과 말하고 교제한 방식입니다. 즉 죽은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잔상이나 이름만 남은 존재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다시 말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AC천국과 지옥에서는 사후에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관계한다는 사실이 훨씬 자세히 설명됩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죽은 뒤에도 계속 살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것을 몹시 이상하게여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하거나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죽은 뒤 자신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을 경험하자 과거의 불신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곧바로 악이나 도덕적 잘못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은 왜 그들이 그렇게 믿지 않았는지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69에서 인간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영적 세계와의 의식적인 교통의 길이 닫혔다고 했으므로 일정한 배경 연결은 가능하지만, AC.70 자체가 사후생명을 믿지 않는 이유는 모두 사람에게 잠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최종 해설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AC.70의 가장 강렬한 문장은 마지막 두 문장입니다. ‘실제로 육체의 죽음 사람이 다른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생명과 무생명 사이에 긴 공백이 생기는 사건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적 생명이 끝난 뒤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죽음을 삶의 연속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말을 해석할 때에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후대에 천국에는 자연계와 같은 해와 날과 시간이 없으며, 그곳에서는 시간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C.70거의 하루를 곧 영계에서 하나의 상태 주기를 뜻하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바꾸어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자연계에 있는 독자에게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안에서의 의식적인 삶 사이가 얼마나 짧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자연적 시간 언어로 하루도 거의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영계의 시간과 상태의 관계는 별도의 문제이며, 이 표현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국과 지옥162-165에서는 천사들에게 자연계의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의 하루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정확히 24시간 이내라는 시간표로 바꾸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의 관심은 임종 후 몇 시간 몇 분 만에 어떤 단계가 완료되는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후 AC.72 이하를 보면 소생의 과정에는 질서와 연속이 있으며 여러 천사들이 관여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 시간이냐보다 육체의 죽음과 영원한 삶 사이에 인간 존재의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말은 단순히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다는 명제보다 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죽은 뒤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알고 지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새로운 존재나 과거 사람의 복제품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과 다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즉 죽음 전의 와 죽음 후의 사이에는 인격적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사후 기억과 애정, 성품과 지배적인 사랑에 관한 설명으로 점점 더 구체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이 죽기 전과 그대로다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삶의 연속은 사후에도 아무 변화 없이 자연계 삶이 그대로 반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와 자연적 환경은 벗게 되고,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됩니다. 다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 자체가 끊어졌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인격적 생명의 연속성이 AC.70이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영원한 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들어간다고만 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수적인 후속 삶으로 보지 않게 합니다. 자연계의 삶은 제한된 기간 동안 지속되지만 인간의 영적 생명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삶과 영원한 삶은 서로 상관없는 두 인생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이어지는 두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연계의 삶을 단순한 대기실이나 가치 없는 짧은 준비기간으로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후의 삶이 현재 삶과 연속되기 때문에 지금의 삶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인간의 내적 생명 형성과 관계됩니다. 다만 AC.70은 아직 이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현재 글에서는 우선 사람은 죽어도 계속 산다는 사실과 죽음이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0은 이처럼 앞으로 이어질 긴 사후세계 기록의 첫 글로서 매우 절제된 출발을 합니다. 아직 천국과 지옥의 구조도, 영들의 세계도, 사후의 세 상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근본적인 사실 하나를 세웁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자신이 세상에서 알던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여러 달 동안 말하고 교제한 경험으로 확인했다고 증언합니다.

 

AC.67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67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는 인간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속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70은 마침내 죽음의 문턱을 넘은 인간이 실제로 계속 살아 있다는 증언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0을 읽으면서 당장 사후세계의 모든 교리를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연옥, 최후의 심판, 영들의 세계, 천국과 지옥으로의 최종 귀속 같은 주제들은 뒤에서 각각 더 적절한 자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먼저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사람은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이 짧고 강한 문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

bygrace.kr

 

 

 

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bygrace.kr

 

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고,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며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 말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천사들을 보고 말할  있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중요한 것부터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AC.69는 여기서 사후에 육체를 벗으면 누구나 영들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을 1차적으로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며 바로 다음 AC.70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AC.69의 직접적인 주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에 지나치게 잠기면서 그 길이 닫혔고, 그러한 것들이 물러나면 다시 열린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를 곧바로 죽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도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라고 하여 사람이 잠겨 있던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연계의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의 직접적인 문맥 역시 그러한 개방과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이제 반대편으로 가서 그러면 우리도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과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을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목표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과 지옥 HH.249에서는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이 드물게 허락되는 일이며 위험할 수 있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들이 자신들이 특정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인간의 생각과 애정에 위험하게 개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69는 영계 개방을 위한 수행법이나 영적 기술을 가르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면 길이 다시 열린다고 했을까요? 이것은 영적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입니다. 자연계에서 사는 동안에는 자연적 감각과 육체의 기능을 통하여 세상을 지각하지만, 그 내적인 생명은 영에 속합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감각이 영적 지각을 가리고 있는 상태가 특별히 제거되거나 완화될 경우 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AC.69의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바로 그런 특별한 경우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인 욕망을 충분히 정복하거나 어떤 높은 영적 수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그 길이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67부터 그의 표현은 일관되게 허락되었다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것을 세상에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경험은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도달한 영적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개방으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후대 설명을 보면 사람은 이러한 의식적인 개방이 없어도 이미 자신의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다른 영들과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영적 세계와 교통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람도 영들도 그 관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AC.5862에서는 영들이 보통 자신들이 특정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의 내적인 것들을 여셔서 영들이 그가 아직 육체 안에 사는 인간임을 알도록 특별히 허락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영적 세계를 의식적으로 보고 영들과 대화하는 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하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그 관계가 감각적으로 열려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 영적으로 닫힌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육체적인 것들이라는 말을 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건강을 돌보고, 음식을 먹고, 가족을 사랑하며,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자연계에서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연적 삶은 우리가 쓰임을 수행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AC.69의 문제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겨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하면 영을   있을까?보다  마음은 무엇에 너무 깊이 잠겨 있는가?를 묻는 쪽이 훨씬 안전하고 본질적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소유, 감각적 즐거움과 자기중심적인 관심이 마음 전체를 차지하여 말씀과 주님과 이웃과 영원한 생명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바로 AC.69이 말하는 위험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자연계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자리에 두고, 주님과 영적인 것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고 해서 영적 시각이나 청각이 열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영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에 따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고, 이웃을 향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며,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길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적 현상을 직접 경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동으로 더 선하거나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도 있습니다. 어떤 영이 자신에게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이 곧 주님의 말씀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도 이런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직접 보고 듣는  자체를 신앙의 높은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적 세계와의 참된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가장 안전한 중심은 주님과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들과 직접 대화하려고 할 필요 없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받아들이며,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우리의 내적인 생명은 이미 영적 세계와 관계하고 있으며, 우리는 의식적인 영계 체험이 없어도 주님의 섭리와 천국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는 조금 방향을 바꾸어 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계가 열리도록 육체적인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체험을 얻기 위해 감각을 억제하거나 현실생활을 떠나려 하지도 마십시오. 대신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영적 개방을 허락하셔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그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시는 선과 진리에 따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영을 보지 못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천사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 못해도 말씀의 진리를 들을 수 있으며, 영계를 눈으로 보지 못해도 천국의 질서에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AC.6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입은 영이며, 지금의 삶은 영원한 삶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감각 너머를 억지로 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을 선택하고 어떤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이 다시 열린다는 말씀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 영들과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히 열린 그 길은 그의 고유한 사명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훨씬 평범해 보이지만 더 본질적입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께 의지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쓰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길을 통해 우리의 속 사람은 주님께 열리고, 천국의 질서는 우리 삶 안에 조금씩 이루어집니다.

 

 

 

AC.69, 창2 앞, ‘사람은 본래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길은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고,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며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9는 바로 앞 AC.68에서 제기된 첫 번째 반론에 답하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 천사들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9에서는 그 가능성을 단순히 자신의 특별한 경험으로 변호하지 않고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라는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강한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었던 것을 인간에게 원래 없던 초능력을 특별히 부여받은 것처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의 내적인 생명이 육체 자체에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영이 있으며, 바로 그 영으로 생각하고 의도하며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를 통해 자연계에 살면서도 자신의 영으로는 영적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다라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과 천사와 영이 아무 차이도 없는 동일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인간은 자연계의 육체를 입고 그 육체의 감각과 기능을 통해 자연계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영들과 천사들은 자연계의 물질적 육체를 입고 있지 않습니다. AC.69의 요점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곳적은 지금까지 창1에서 계속 만나 온 태고교회의 시대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과 천국의 질서에 훨씬 더 내적으로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늘날 인간에게 닫혀 있는 영적 세계와의 교통이 가능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69 자체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말했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이후 관련 AC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본래 열려 있던 길은 왜 닫혔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단하게 답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육체와 세상 자체를 악하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자연계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며, 자연계에서 살아가며 쓰임을 행하는 것 역시 인간 삶의 질서에 속합니다. 본문의 문제는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이 그것들 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는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corporeal and worldly things를 곧바로 ’, ‘직업’, ‘재산’, ‘사회생활같은 외적 대상 자체와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삶을 살면서도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쓰임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반대로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마음 전체가 잠길 수도 있습니다. AC.69에서 닫힘을 일으키는 것은 후자의 상태입니다. 인간의 관심과 사랑이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몰입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면서, 이전에 가능했던 의식적인 영적 교통의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길이 닫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서 영 자체가 없어졌다거나 영적 세계와의 모든 관계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의 후대 설명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영으로 언제나 영적 세계와 관계하며, 사람에게는 영들과 천사들이 함께 있습니다. 다만 보통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영들과 함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9길이 닫혔다는 것은 인간과 영계 사이의 모든 관계가 끊겼다는 뜻이 아니라, 영들과 천사들을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그들과 말하는 통로가 닫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그러면 나도 육체적인 것을 멀리하고 영적인 수행을 하면 영들과 말할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그는 훗날 천국과 지옥249에서 오늘날 영들과 말하는 것은 드물게 허락되며 위험하다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특히 영들이 자신들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69는 영들과 말하는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문맥에서는 우선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일어난 특별한 개방을 설명하는 배경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연계의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도 자연적 감각에 의한 제약이 일정한 방식으로 물러나 영적 감각이 열렸고, 그 결과 그는 영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말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재현해야 할 상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개방은 주님의 허락과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후 저작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기서 기존에 우리가 AC.69의 이 표현을 1차적으로 사람이 죽은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는 상태라고 이해했다면 그것은 바로잡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후에는 물론 자연적 육체를 벗고 영적 세계에서 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AC.69 자체의 직접적인 문맥은 사후 소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문장부터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영들 및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하고, 마지막까지 그 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것을 설명합니다. 사후에 육체를 벗는 문제는 바로 다음 AC.70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AC.69AC.70의 주제를 서로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공동의 가운데 있게 된다는 마지막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 한두 번 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보다 더 깊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계속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증언하며, 훗날에는 인간이 자신의 영으로 이미 영적 세계의 공동체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더욱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861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자신의 내적인 것들, 곧 영으로는 다른 영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을 통하여 영적 세계와 교통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일반인은 이러한 관계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점은 사람은 몸을 입은 이라는 첫 설명을 다시 이해하게 해 줍니다. 인간은 지금 자연계에만 속했다가 죽는 순간 갑자기 영적 존재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람에게는 영이 있고, 바로 그 영이 인간의 내적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없던 영을 새로 만드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가 벗겨지면서 그동안 육체 안에서 살아가던 영이 영적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이 흐름은 곧 이어질 AC.70 이하의 소생에 관한 설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목회적 경계가 생깁니다. AC.69를 읽고 영적 세계를 직접 보고 싶어 하거나 영들과 대화하는 체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그것을 보통 인간에게 권장하는 영적 목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는 오늘날 그러한 대화가 위험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상적인 길은 영적 감각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 거듭남을 허락드리는 것입니다. 영적 삶의 깊이는 영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잠기지 않는 역시 영계를 보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신앙생활에 적용되는 더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목적 자체로 삼지 않고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세상의 성공과 소유가 마음의 지배적인 사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말씀과 주님과 영원한 생명에 마음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곧바로 영들과 의식적으로 말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지만, 인간의 외적 삶이 내적 삶을 질식시키지 않도록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점에서는 AC.69의 경고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허락된 상태도 이런 일반적인 거듭남의 결과를 단순히 극대화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육체와 세상을 충분히 초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계가 열렸다고 설명하면 그의 경험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AC.67부터 반복되는 표현은 오히려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도록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듣고 본 것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그의 특별한 개방은 인간이 일정 수준의 영성을 달성하면 자연스럽게 얻는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특별한 목적 아래 허락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 문맥에 더 맞습니다.

 

또 현재 우리가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자연계의 저술 활동과 영계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AC.69는 그 가능성의 기본 토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며,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육체를 유지한 채 영적 감각이 열려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을 죽을 듯한 황홀경이나 장시간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영계를 다녀온 뒤 깨어나 기억을 기록한 것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훗날 AC.5862에서도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내적인 것들을 열어 다음 삶의 것들을 보게 하셨으며, 영들이 자신이 아직 육체 안에 있는 인간임을 알았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그는 언제나 자연계와 영계를 정확히 동시에 보고 들으며 글을 썼다는 식으로 세부적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의 여러 영적 상태와 경험의 방식은 이후 기록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연계에서 육체로 살아 있는 동안 영적 세계가 열려 있었으며, 그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과 장기간 교통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AC.67부터 AC.69까지를 함께 놓으면 흐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67은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다른 삶의 본성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선언했습니다. AC.68은 그런 증언을 사람들이 불가능하거나 상상이라고 할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69는 그 경험의 가능성이 인간이 몸을 입은 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세 글이 차례로 말하는가’, ‘ 반대에도 말하는가’,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여 주는 셈입니다.

 

그러나 AC.69의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잃어버린 영적 감각을 회복하여 영들과 대화하라고 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글은 인간을 자연적 육체만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더 근본적인 인간 이해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자연계에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내면에는 영이 있으며, 그 영으로 영적 세계와 관계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AC.69는 다음 AC.70으로 넘어가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사람이 몸을 입은 이라면 죽음은 인간 자체의 소멸일 수 없습니다. 자연적 육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람의 영은 살아 있습니다. 이제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순간, 곧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넘어갈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바에 따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69인간은 누구인가를 밝힌다면, AC.70부터는 인간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게 됩니다.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AC.69 심화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면 길이 다시 열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AC.69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기만 하면 그

bygrace.kr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bygrace.kr

 

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 및 천사들과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