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5, 6)

 

AC.92

 

싸움이 그치거나, 혹은 욕망들과 거짓들로 인해 일어났던 불안이 사라질 때에, 겉 사람이 누리는 평화의 평온함(the tranquility of peace)이 어떠한 것인지는, 오직 평화의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모든 기쁨에 대한 관념을 능가할 만큼 즐거운 것이어서, 단지 싸움이 그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미치는 상태입니다. 이때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나는데, 그것들은 평화의 기쁨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The nature of the tranquility of peace of the external man, on the cessation of combat, or of the unrest caused by cupidities and falsities, can be known only to those who are acquainted with a state of peace. This state is so delightful that it surpasses every idea of delight: it is not only a cessation of combat, but is life proceeding from interior peace, and affecting the external man in such a manner as cannot be described; the truths of faith, and the goods of love, which derive their life from the delight of peace, are then born.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되어 온 ‘안식’과 ‘평온함’을, 가장 내밀한 체험의 언어로 풀어 주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평온함이 무엇인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정의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오직 알게 되는 상태’, 곧 직접 겪은 사람만이 아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이 평온함은 단순히 싸움이 없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싸움이 없다는 것은 소극적 설명일 뿐입니다. 이 상태의 본질은, ‘내적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는 데 있습니다. 즉, 이것은 공백이나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모든 기쁨의 관념을 능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장이나 수사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 흥분이나 만족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욕망과 거짓으로 인한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로 오는 기쁨은, 무엇을 얻어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방해가 사라져서 드러나는’ 기쁨입니다.

 

이 평온함의 핵심은, 내적 평화가 겉 사람에게 ‘미친다(affecting)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내적 평화는 속 사람 안에 머무는 추상적 상태가 아니라, 겉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 전반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합니다. 강요나 명령, 규범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겉 사람이 더 이상 긴장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이 옳은지를 따로 증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평화를 그대로 받아, 그 안에서 움직입니다. 이 때문에 이 상태는 설명될 수 없고, 오직 체험될 수만 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상태에서 ‘신앙의 진리들’과 ‘사랑의 선들’이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앞서 영적 단계에서 다루어졌던 진리와 선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전에는 진리와 선이 노력과 선택의 산물이었다면, 이제는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여기서 ‘태어난다(are born)라는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이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입되거나 학습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은 신앙의 논리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평화 자체의 기쁨’입니다. 평화가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이 진리와 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 글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삶은, 더 잘 싸우는 삶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특징은 고요함이지만, 결코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충만한 생명 활동입니다.

 

AC.92는 안식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정의합니다. 안식은 멈춤이 아니라, 평화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 전체를 적시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 속에서, 진리와 선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기쁨에서 태어난 열매’가 됩니다.

 

 

 

AC.91, 창2:5-6, ‘안개’, 천적 상태의 평온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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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2:5, 6)

 

AC.9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내포하는지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되어 가는 동안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면,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매우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려 하지 않으므로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가 되면,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므로 싸움이 그치고, 평온함이 따르게 됩니다. (87번을 보십시오) 이 평온함이 안개로 의미됩니다. 이는 그것이 마치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이 물을 받아 적셔지는 수증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이 상태가, ‘들의 초목밭의 채소라 불리는 것들을 산출합니다.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온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입니다. But what these things involve cannot possibly be perceived unless it is known what man’s state is while from being spiritual he is becoming celestial, for they are deeply hidden. While he is spiritual, the external man is not yet willing to yield obedience to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re is a combat;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n the external man begins to obey and serve the internal, and therefore the combat ceases, and tranquility ensues (see n. 87). This tranquility is signified by “rain” and “mist,” for it is like a vapor with which the external man is watered and bedewed from the internal; and it is this tranquility, the offspring of peace, which produces what are called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which, specifically, are things of the rational mind and of the memory [rationalia et scientifica] from a celestial spiritual origin.

 

 

해설

 

이 단락은 AC.90에서 언급된 ‘안개 같은 평온함’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내면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옮겨 가는 중간 국면’을 알지 못하면 이해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개념 설명이 아니라 ‘경험적 전이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존재합니다. 겉 사람은 진리를 알고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기쁘게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여전히 자기 방식, 자기 판단, 자기 습관을 고집하려 하고, 속 사람의 질서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싸움이 생깁니다. 이 싸움은 선과 악 사이의 추상적 대결이 아니라,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매우 실제적인 긴장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서면, 이 관계가 바뀝니다. 겉 사람이 더 이상 억지로 굴복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 속 사람을 섬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순종이 강요가 아니라 기쁨이 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싸움은 끝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맞서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의 질서를 자기 생명의 질서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상태가 바로 ‘평온함’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평온함을 단순한 정서적 안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가 바로잡힌 결과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위계와 질서가 회복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따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평온함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질서의 결과’입니다.

 

이 평온함이 ‘’와 ‘안개’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비는 폭우나 강수량 많은 비가 아닙니다. 곧 ‘안개’라고 불릴 만큼 부드럽고 은은한 것입니다. 이는 겉 사람이 외적 교훈이나 명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생명의 영향으로 적셔진다는 뜻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이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매우 섬세합니다. 안개는 소리를 내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며, 모든 것을 고르게 적십니다. 천적 상태에서의 평온함도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떤 결단의 순간이나 극적 체험으로 드러나지 않고, 어느새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부터 싸움이 끝났는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이미 평온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평온함, 곧 평화에서 태어난 상태가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를 산출합니다. 이는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제 겉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속 사람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이성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이성과 기억 지식이 ‘천적 영적 기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이성, 같은 지식이라도, 그 근원이 다릅니다. 영적 단계에서는 이성과 지식이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천적 단계에서는 사랑을 섬기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이성은 더 이상 판단의 주인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자가 됩니다.

 

그래서 AC.91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평온 속에 있으며, 그 평온함이 이성과 기억 지식을 적셔 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외적 산출물은, 억지로 만들어진 선이 아니라, ‘평화에서 태어난 열매’입니다.

 

이 글은 천적 상태의 깊이를 가장 조용한 언어로 보여 줍니다.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것은 공백이 아니라, 평화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안개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겉 사람 전체를 적셔 갑니다.

 

 

 

AC.92, 창2:5-6, 평화의 기쁨에서 태어나는 ‘들의 초목, 밭의 채소’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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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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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해 주세요. 노아의 홍수는 실제 역사적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는 말에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저도 그랬고, 거의 모든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 마음이 철컹 닫힐 것 같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노아의 홍수의 속뜻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노아의 홍수는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경의 목적이 자연사나 지질학적 사건을 기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영적 역사, 곧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계시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전제를 놓치지 않으면, 홍수 이야기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는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이기 이전에, 인류의 내적 생명이 전면적으로 붕괴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선과 진리의 ‘남은 것들’, 곧 ‘리메인스(remains)가 인간 안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욕구와 확신(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 의해 질식된 상태가 바로 홍수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물은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스스로를 압도하고 잠식한 결과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홍수는 하나님의 분노나 충동적인 심판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인간의 내면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상태는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으며, 그 붕괴는 홍수라는 언어 외에는 달리 표현될 수 없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인간이 ‘스스로 질식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성도들이 묻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홍수가 있었던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정직하고 안전한 대답은, 성경은 홍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말하려는 책이 아니라, 왜 그런 언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는지를 말하려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성경은 사건의 형태보다 그 사건이 상징하는 영적 실재를 계시합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추상 개념으로 사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상태를 자연 이미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내적 붕괴는 땅이 무너지는 것으로, 선과 진리의 질식은 물에 잠기는 것으로, 전면적 혼돈은 홍수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홍수 같은 상태’는 자연적으로도 ‘홍수’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가장 태고한 사람들의 표현 방식’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성경은 틀린 책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읽어 왔던 책이 됩니다. 성경은 한 번도 스스로를 과학 교과서나 역사 연대기로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자연의 언어로 영적 진실을 말하는 책이며, 그 언어를 문자 그대로만 붙잡을 때 오히려 성경의 진리가 가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노아는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노아는 도덕적으로 특별히 착한 개인이어서 살아남은 인물이 아닙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유지 가능한 새로운 인간 형식, 새로운 교회 상태를 대표합니다. 직접적인 퍼셉션(perception)에 의존하지 않고, 외적 진리와 양심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며, 리메인스를 보존할 수 있는 인간 형식이 바로 노아로 상징됩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는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사람의 형식이 바뀐 사건입니다. 이전의 인간 형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 길을 여셨습니다. 홍수는 끝이 아니라 전환이며, 멸절이 아니라 보존을 위한 단절입니다.

 

목회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해 주어도 충분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이 화가 나서 사람들을 쓸어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여신 이야기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꼭 붙들어야 할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선택한 유일한 보존의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관점으로 읽을 때, 홍수는 더 이상 두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살리고 있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SC.14,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를 ‘홍수’(flood)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가 자연적 재난이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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