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말렉’의 속뜻 (2)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7:9) And Moses said unto Joshua, Choose us out men, and go out, fight against Amalek; tomorrow I stand upon the top of the hill, and the rod of God in my hand. (Exdo. 17:9)

 

 

아말렉(Amalek)의 속뜻 두 번째 시간입니다.

 

우선은 주석 형태를 그대로 유지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저 자신도 무척 낯설어 이것을 어떻게 주일 설교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이런 시도 또한 나름의 유익이 있지 싶습니다. 재해석되지 않은 순수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를 여러분이 맛보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저에게 가장 맞는, 더 나아가 나중에는 속뜻 강해 설교에 가장 최적화된 어떤 설교가 최종적으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봅니다.

 

내용이 제법 됩니다만 주님의 신령, 신성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빛 비추심을 구하며, 그 결과 이 시간이 우리도 천사들처럼 이루 말할 수 없이 감동하는 시간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 시간이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간상 전체적인 내용 이해에 별 영향 없는 선에서, 반복되는 내용이나 기타 내용들, 그리고 너무 어려워 많은 추가 설명이 필요한 내용들은 가능한 한 스킵하겠습니다. 그 부분들도 가능한 한 이 원고에 다 담아 놓았으니 이 스킵되는 부분들은 예배 후 시간 되실 때 이 원고를 참고해 주세요.

 

‘※’ 표시는 보충 설명을, 한 단락 이상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 표시로 마감, 주석 본문과 구분했습니다.

 

원고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영어는 이탤릭체를 썼습니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시작합니다.

 

먼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And Moses said unto Joshua)입니다.

 

※ 이런 표현은 거의 모든 단락 도입부마다 나오는 평범한 표현이지만, 그 속뜻의 의미는 의외로 중요하여 조금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싸우는 진리 안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신성하신 인플럭스(入流, influx)(Divine influx into fighting truth)인데, 그 이유는 세 가지, 곧 ‘이르는 것(saying)의 의미와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가 표상하는 바입니다. 먼저 ‘이르는 것(saying)의 의미입니다. 그 의미는 여기서는 인플럭스(influx),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표상하는) 싸우는 진리 안으로 들어가시는 인플럭스입니다. 이 인플럭스는 신성하신 인플럭스(Divine influx)입니다. 다음은 모세가 표상하는 바입니다. 모세는 신성하신 진리(Divine truth), 곧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시는 진리(the truth which proceeds immediately from the Lord)를 표상합니다. 이 진리, 곧 순수한 신성(purely Divine)이신 이 진리는 어떤 종류의 신앙이든 상관없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진리 되게 하십니다. 끝으로 여호수아가 표상하는 바입니다. 여호수아는 싸우는 진리(fighting truth)를 표상합니다. 여호수아가 싸우는 진리인 이유는, 그는 아말렉, 곧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을 상대로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 이 전투, 이 싸움은 진리라는 값을 치러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신성하신 진리의 인플럭스로 싸우는 진리입니다.

 

※ 위 ‘어떤 종류의 신앙이든 상관없이’라는 표현은, ‘주님을 향한 신앙이라면 모두 다’라는 의미이며,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을 진리 되게 하십니다’라는 표현은 ‘어떤 소위 신앙이라고 하면서 그 안에 주님의 신성이 진리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 신앙은 진리라고 할 수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 싸움의 대상이 ‘거짓’이기 때문에 ‘진리’로 싸워야 하는 것이며, 평범한 거짓이 아닌, 아말렉이라는 아주 지독한,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이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진리, 신성하신 진리의 인플럭스를 공급받는 진리로 싸우는 것입니다.

 

※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은 자신의 본성은 감추고 대신 부탁받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무대 위의 배우나 드라마,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와 관련, 흥미로운 글들이 있어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6번 글입니다.

 

어떤 형상이나 우상, 새긴 물건을 숭배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들면 그들의 환상이 제거될 수 있도록 보통 그들의 신이나 우상을 대신하는 어떤 영들에게 인도된다. 이 영들과 며칠간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환상이 벗겨지게 된다. 또 사람을 숭배한 사람들은 때로 그들이 숭배한 인물 앞으로 인도된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을 숭배한 많은 유대인의 경우가 여기 포함된다. 이들은 그들이 숭배했던 인물들이나 그 인물을 대신한 영들 앞으로 가게 된다. 그들이 가서 보고 그 인물들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으로 전혀 자기를 도울 힘이 없음을 알고 나면,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후 각자 살아온 삶에 따라 알맞은 곳으로 가게 된다. (HH.326)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그리고 사도들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 천국에 들어갔는지 천사들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은 대답했다. 그들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천국에 간 사람은 없고, 모두 이 세상에서의 삶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존경받지 않는다. 그들이 말씀 안에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내적 의미로 주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님의 신성과 신적 인성을 의미하고, 다윗은 주님의 신적 왕권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의 신적 진리들을 의미한다.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이 사람들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은 천국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이름을 천사들은 방금 설명한 대로의 주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천국에 있는 말씀(259항 참조)에는 그런 이름들이 나오지 않는다. 천국에 있는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성경 말씀의 내적 의미이기 때문이다.281

 

281. 말씀의 속뜻으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신성 그 자체와 신적 인성에 관한 주님을 의미한다. (AC.1893, 4615, 6098, 6185, 6276, 6804, 6847) 천국에서는 아브라함이 누군지 모른다. (AC.1834, 1876, 3229) 다윗은 신적 왕권에 관한 주님을 의미한다. (AC.1888, 9954) 열두 제자는 교회의 모든 것, 즉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주님을 표상한다. (AC.2129, 3354, 3488, 3858, 6397) 베드로는 신앙에 관하여, 야고보는 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리고 요한은 체어리티가 하는 일들에 관하여 각각 주님을 표상한다. (AC.3750, 10087)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열두 제자는 주님이 신앙과 사랑에 속한 진리와 선으로 심판하실 것을 상징했다. (AC.2129, 6397) 말씀에 나오는 인명, 지명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신 어떤 것들과 상태들로 바뀐다. 천국에서는 이들 이름들은 심지어 발음조차 할 수 없다. (AC.1876, 5225, 6516, 10216, 10282, 10432) 더욱이 천사들은 사람들을 보면 추상적으로 생각한다. (AC.8343, 8985, 9007) (HH.527) //

 

※ ‘내면의 악(interior evil)이라는 표현에서 영어 ‘interior’를 ‘내면’으로 번역했습니다. 보통 ‘내적’이라고 번역하는 영어 ‘internal’과 구별하기 위해서인데요, 이 둘의 차이는,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러니까 사과 한 알이 있을 때, 맨 안쪽 씨가 들어있는 심은 internal, 맨 바깥 껍질은 external, 그 중간 과육, 보통 우리가 먹는 부분이지요, 여기를 interior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interiorinternal을 포함하는 개념이지요.

 

※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두 호칭이 있는데 하나는, ‘(spirit)이고, 다른 하나는 ‘정령(genii)입니다. 전자를 보통 ‘악령’이라 하고, 후자를 보통 ‘악마’라고 합니다. 악령들은 ‘사탄’이라고 부르는 앞쪽 지옥에 살고, 악마들은 ‘마귀’라고 부르는 뒤쪽 지옥에 삽니다. 앞쪽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뒤쪽 지옥에 사는 사람들보다 덜 악합니다. 참고로, ‘사탄’, ‘마귀’는 어떤 우두머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지옥 내 지역을 말합니다. 보통 등장하는 대적들, 가령 애굽의 바로나 가나안 일곱 족속은 앞쪽 지옥을, 이 아말렉은 뒤쪽 지옥을 말합니다. 악령들은 진리를 공격하지만, 악마들은 선을 공격합니다. 이들이 지금 보고 있는 아말렉입니다. 주님은 이 두 지옥을 분리하셨습니다. 악령들의 지옥을 악마들의 지옥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악마들이 악령들의 지옥에 흘러들면, 악령들의 지옥은 초토화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주님이 지옥을 보호하신다 하는가 하실 수 있지만,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지옥에 갔어도 주님은 그들 역시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 역시 관련 내용 있어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11번 글입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인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처음부터 천사는 천사로 창조되어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고, 마귀 또는 사탄도 빛의 천사였다가 반역하여 그 일당과 함께 내쫓겨 지옥을 형성했다고들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계에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에 천사들은 무척 놀라고, 천국이야말로 교회 교리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 더욱 경악한다. 그러나 또한 그런 무지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많은 사실이 기독교 사회의 사람들에게 밝혀지게 되었고, 기독교가 종말을 맞아 어둠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 계시로 인해 그 어둠이 가능한 한 많이 걷히게 되었다고 천사들은 진심으로 기뻐한다.

 

[2] 그래서 천사들은 내가 그들의 다음 말을 증언해 주기를 원했다. 천국 전체에 처음부터 천사로 창조된 천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지옥에도 빛의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쫓겨난 악마는 없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전부 인류가 가서 이룬다. 천국은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으로 산 사람들로, 지옥은 지옥적 사랑과 신조로 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 마귀나 사탄은 지옥을 통칭하는 말이다. 마귀는 악마들이 모여 사는 뒤쪽 지옥을, 사탄은 악령들이 모여 사는 앞쪽 지옥을 말한다.213

 

[3] 천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사회가 천국과 지옥의 구성에 대해 잘못 믿는 것은, 해당 구절들을 오로지 글자 그대로 이해했을 뿐, 말씀에서 이끌어 낸 참된 교리로 깨우침이나 설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문자 상의 의미는 참된 교리로 설명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오도하고, 이것이 무지한 견해와 이설과 오류를 낳는 것이다.214

 

213. 지옥들, 즉 지긋지긋하게 끔찍한 곳들을 하나로 묶어 마귀와 사탄이라 하는 것이다. (AC.694) 세상에서 악마였던 사람들은 사후 악마가 된다. (AC.968)

 

214. 교회 교리는 반드시 말씀에 그 기원을 두어야 한다. (AC.3464, 5402, 6822, 6832, 10763, 10765) 교리가 없이는 말씀은 이해되어지지 않는다. (AC.9025, 9409, 9424, 9430, 10324, 10431, 10582) 참된 교리는 말씀을 읽는 사람들을 비추는 등이다. (AC.10400) 진정한 교리는 반드시 주님에 의해 빛을 받은 사람들로 말미암아야 한다. (AC.2510, 2516, 2519, 9424, 10105) 교리 없이 단지 겉 글자의 뜻 가운데만 있는 사람들은 신적 진리에 대해 들어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AC.9409, 9410, 10582) 그리고 많은 오류 가운데로 어지러이 나아가게 된다. (AC.10431) 말씀에 기원한 교회 교리로 가르침과 배움을 받은 사람들과 그저 겉 글자의 뜻으로만 가르침과 배움을 받은 사람들 간의 차이. (AC.9025) (HH.311) //

 

※ 이 원고 전반에 숫자와 그 앞에 AC, HH 같은 약어들이 붙어 있는데요, 숫자는 해당 저서 내 글 번호를 말하며, 약어는 해당 저서에 대한 공식 약어입니다. 그러니까 가령, AC.9025라 하면 Arcana Coelestia 9025번 글이라는 뜻이고, HH.311하면 Heaven and Hell 311번 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이렇게 약어들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마치 성경 신구약 약어처럼 말이지요.

 

※ 여기 인용문들을 볼드체 처리한 것은 이것이 주석 본문보다 더 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주석 본문과 인용문을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신성하신 진리 자체는 싸우지 않고, 대신 평화롭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의 신성하신 사랑(the Lord’s Divine love)에 속한 신성하신 선(Divine good)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 그대로는 싸울 수 없고, 대신 싸우는 진리가 필요한데, 이를 위해 먼저 진리와 선을 수호하는 일에 정말 진심인 천사들 속으로 흘러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싸우는 진리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지금 여호수아가 표상하는 ‘싸우는 진리(fighting truth)입니다. (AC.8595:1)

 

※ 말씀에서 위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처럼 ‘이르는 것(saying)은 우리처럼 누가 누구를 만나서 직접 말하는 그런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출발, 그 대상에게 흘러 들어가는 인플럭스(influx)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창3:9)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창8: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창12:1)

 

등이 다 그렇습니다. 태양계 내 모든 공간에 태양으로부터 발산되는 열과 빛이 충만하듯 천국도, 그리고 이 온 피조세계도 주님의 이런 인플럭스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한테는 그렇지 않은데요, 이는 마치 커텐을 치면 햇빛이 차단되는 것과 같아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그에게는 그 즉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인플럭스가 차단되어 그는 모든 좋은 것으로부터 제외되고,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는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향한 창문이 닫히는 것이지요. 대신 지옥을 향한 창문은 열리고 말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중간이 없습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항상 어느 쪽 창문이 하나 열려 있습니다. 중간 상태는 사후 아직 천국도 지옥도 갈 상태가 안 되어 준비 중인, 대기 중인 사람들한테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천국의 천사들과 중간 영계의 선한 영들은 주님의 이 인플럭스를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고, 모든 지옥의 영들과 중간 영계의 악한 영들은 주님의 이 인플럭스를 싫어하여 거절하는 사람들이라고 정리를 해도 되겠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4) //

 

[2] 여호수아가 이 진리를 표상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모세 이후 이스라엘 자손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고, 그리고 거기서 거기 사는 족속들과 싸웠는데요, 이런 이유로,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손에 칼을 들고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여호와의 군대 대장(the Prince of Jehovah’s army)으로 소개했습니다.

 

13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5:13-15)

 

※ 사실 오랫동안 저는 여호수아에 나오는 이 본문이 참 뚱딴지같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본문이 나오는지 그 이유를 몰랐으니까요.

 

칼을 빼어 손에 들고(a sword drawn in the hand)는 그 안에 힘, 파워가 있는, 싸우는 신성하신 진리를 말합니다. ‘(a sword)이 싸우는 진리라는 것은 AC.2799, 4499를, ‘칼집에서 꺼낸 칼(a drawn sword)이 거짓과 악을 대항, 계속 싸우는 진리라는 것은 AC.8294를, ‘(hand)이 힘, 파워라는 것은 AC.878, 4931–4937, 7518, 8050, 8153을,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the nations in the land of Canaan)이 싸움이라는 값을 치러야 하는 거짓들과 악들이라는 것은 AC.8504를 각각 참조하세요. (AC.8595:2)

 

 

다음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Choose us out men)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싸움을 위해 진리들을 모으는 것(it may draw up truths for the fight)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men)의 의미가 진리들(AC.265, 749, 1007, 3134)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택하는 것(Joshua choosing them)의 의미는 싸움을 위해 진리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싸우는 신성하신 진리를 표상하고, ‘그가 골라 함께한 사람들(the men whom he chose and joined to himself)은 싸우기 위해 함께 모인 진리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AC.8596)

 

 

다음은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and go out, fight against Amalek)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들을 대항하다(against the falsities from interior evil)인데, 그 이유는, 아말렉이 내면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들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위 AC.8593 참조) (AC.8597)

 

 

다음은 ‘내일 내가 산꼭대기에 서리라(tomorrow I stand on the top of the hill)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신성하신 진리하고 체어리티의 선하고의 결합, 그리고 그로 인한 인플럭스(the conjunction of truth Divine with the good of charity, and the consequent influx)인데, 그 이유는, 모세, 곧 산꼭대기에 서기로 한 모세의 표상이 신성하신 진리라는 것과 (이에 관해서는 위에서 자주 말씀드림), ‘서는 것(standing)의 의미가 결합 및 흘러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서는 것(standing)이 결합되는 걸 가리키는 이유는, 그가 이때 산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며, ‘(a hill)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흘러 들어가는 걸 가리키는 이유는, 그가 거기서 그 전투를 전망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는 걸로 말이지요. ‘(a hill)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합니다. (AC.6435) (AC.8598:1)

 

※ 위 내용에는 다소 좀 어리둥절한 아르카나, 곧 ‘(a hill)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는 아르카나가 나오는데요, 그래서 특별히 AC.6435 내용을 좀 보겠습니다.

 

다음은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even to the desire of the hills of an age)입니다.

 

이는 창세기 4926절, 즉 야곱이 죽기 전 아들들을 불러 일일이 후일을 이르는 중에 요셉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22-26)으로, 그 속뜻은 ‘천적 상호 사랑(celestial mutual love)입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산(the hills of an age)의 의미가 상호 사랑에 관한 것들(the things of mutual love)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뒤에 나오는데요,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even to the desire of the hills of an age)의 의미는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가 이 사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곧 ‘영원한 산(the hills of an age)이 상호 사랑임을 말씀의 다른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하기 전에, 먼저 요셉으로 표상되는 영적 교회 사람에게, 그가 도달하고자 애쓰는 이 상호 사랑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지금까지 자주 말씀드리고 보여드렸던 것처럼, 분명한 사실은, 천국을 구성하는 두 나라(kingdom)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와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인데요, 이 두 나라의 차이는, 천적 나라의 내적 선(the internal good)은 주님 사랑의 선(the good of love to the Lord)이고, 외적 선(its external)은 상호 사랑의 선(the good of mutual love)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사랑의 선 안에 있고, 신앙의 진리라고 하는 진리 안에는 있지 않습니다. 이 진리는 이 나라에서는 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진리라는 게 선과 분리된 진리가 되어서는 절대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걸 심지어 언급조차도 할 수 없는데요(AC.202, 203, 4448), 신앙의 진리 대신 이들한테는 상호 사랑의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나라에 관해서는, 그 내적 선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the good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이고, 외적 선이 신앙의 진리(the truth of faith)입니다. (AC.6435:1)

 

※ 좀 놀라울 수 있으나 천국의 두 나라 중 하나인 이 ‘영적 나라’는 원래는 없었다가 이스라엘 민족, 곧 유대인들을 위해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이들의 특성이 삼층천인 ‘천적 나라’에 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일층천이나 지옥으로 보내기엔 또 아니고... 하여 새롭게 만드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깊이 살피겠습니다.

 

[2] 이런 사실에서 분명한 건, 이 차이가 이 두 나라의 차이이며, 천적 나라의 외적 선은 영적 나라의 내적(internal)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the celestial of the spiritual)이라고 하는 중간 역할(the intermediate)을 통해서 말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천적 나라의 외적 선은 상호 사랑의 선이고, 영적 나라의 내적 선은 이웃 사랑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상호 사랑의 선은 이웃 사랑의 선보다 더욱 내면적(interior)인데요, 전자는 합리적인 것(the rational)에서 나오지만, 후자는 자연적인 것(the natural)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상호 사랑의 선은 더 내면적이고, 이웃 사랑의 선은 더 외면적이지만, 그럼에도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이들 선을 중간 역할을 통해 결합하시고, 그렇게 해서 또 이들 두 나라를 결합하십니다. (AC.6435:2)

 

[3] 천적 교회의 외적 선과 영적 교회의 내적 선,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이어지는 내용들에서 우리는 전자를 상호 사랑의 선이라 하고, 후자를 이웃 사랑의 선이라 할 텐데, 이 차이는 여태까지 본 적 없는 차이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먼저 알았으므로, 이제 이 영적 교회에 관한 이스라엘의 축복 중 하나인 이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even to the desire of the hills of an age)가 무슨 의미인지를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영적 나라가 체어리티의 선보다 더 높이, 심지어 천적 나라의 선인 상호 사랑의 선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이들 두 나라가 친밀하게 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표현의 속뜻입니다. (AC.6435:3)

 

[4] 예언서 말씀 중 무척 많은 구절에 ‘산과 언덕(mountains and hills)이 나오는데, 그 속뜻은 사랑의 선입니다. ‘(mountains)으로는 주님 사랑의 선, 곧 천적 나라의 내적인 것을, ‘언덕(hills)으로는 상호 사랑의 선, 곧 같은 나라의 외적인 것을 의미하는 반면, 영적 나라를 다루는 곳에서는, ‘(mountains)으로는 이웃 사랑의 선, 곧 이 나라의 내적인 것을, ‘언덕(hills)으로는 신앙의 진리, 곧 그 외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모두 내적이기도 하고 외적이기도 하며, 그분의 나라들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합니다. (AC.6435:4)

 

이제 위 도입 단락의 맨 끝 문장인, ‘(a hill)은 체어리티의 선을 의미한다’는 말의 의미, 곧 영적 나라의 내적 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임을, 그리고 그래야 아말렉이라는 고약한 적을 상대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이 내용과 비슷한 글이 있어 도움이 될까 하여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159번 글입니다.

 

해로 계신 주께서 천적 나라의 천사들에게 그들의 첫째, 둘째, 셋째 상태에 각각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를 나는 허락하심에 의해 볼 수 있었다. 나는 해로 계신 주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채를 내며, 불타고 빛나시는 모습을 보았다. 천사들이 첫째 상태에 있을 때 그들 눈에 해로서의 주님이 이렇게 보인다고 했다. 그 후 그 해 둘레에 크고 불투명한 띠가 보였는데, 이것 때문에, 처음에 그토록 빛나던 해의 타오름과 광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천사들이 둘째 상태에 있을 때, 해로서의 주님이 그들에게는 이렇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 띠는 점차 어두워지고, 해도 점점 불꽃이 줄어들다 마침내 흰 광채만 나게 되었다. 그들이 셋째 상태에 있을 때, 그들에게 해가 이렇게 보인다고 했다. 이런 후에, 그 흰 광채는 천국의 달을 향해 왼쪽으로 옮겨 가 달에 자기 빛을 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달은 평상시에 없던 광채로 빛났다. 이것이 천적 나라 사람들의 넷째 단계이자 영적 나라 사람들의 첫째 상태라고 했다. 두 나라가 이렇게 교대로 상태변화를 거치지만, 나라 전체가 한꺼번에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별로 하나씩 변화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변화는 일정한 것이 아니고, 조만간 오는 것이지만, 언제 올지는 모른다고 했다. 또 덧붙이기를, 해 자체에는 그런 변화나 이동이 없고, 그렇게 보일 뿐인데,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상태에 맞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가 진행됨에 따라 해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의 사랑이 강렬한 상태에 있을 때는 해가 불타고, 그 사랑이 줄어드는 데 따라 해의 타오름이 줄어들다가 마침내 희게 빛난다. 각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는 해의 화염과 광채를 변하게 하는 그 불투명한 띠를 보면 알 수 있다. (HH.159) //

 

[2] 체어리티의 선이 싸우는 진리(the fighting truth) 속으로 흘러 들어가 결합하는 것은 어떤 경우인지를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 신성(the Divine, 신, 주님)은 열심, 즉 선과 진리 수호에 진심인 사람들하고의 결합을 통해 싸우는 진리가 되십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싸우지만, 그러나 어떤 원한(enmity)이나 적개심(hostility) 때문이 아니라, 체어리티(charity)로 싸웁니다. 열심(zeal)은 분노(anger)하고는 다른 건데요, 그러니까 열심은 그 안에 체어리티의 선이 있으며, 그래서 열심은 단지 거짓과 악 안에 있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싸웁니다. 저들이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하게 하지 못하게,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지요. 하지만 분노는 다릅니다. 분노는 오로지 제거뿐 아니라 증오(hatred)와 복수(revenge)도 추구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데요, 자기 안에 있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열심은 심지어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자들한테까지도 그들한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또 그들이 선한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그들에게도 잘 하지만, 반면, 분노는 자기 안에 있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자기와 싸우는 모든 대상을 해치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선이든 악이든 말이지요. 이런 사실로 알 수 있는 건, 싸우는 진리 안으로 유입되는 체어리티의 선이 무슨 의미인지 하는 것입니다. (열심은 그 안에 선이, 분노는 악이 있다는 건 글 번호 4164, 4444 참조) (AC.8598:2)

 

 

다음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with the rod of God in thy hand)입니다.

 

이 표현의 속뜻은 ‘이것으로부터 힘, 파워가 있었다(from this there was power)인데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지팡이(the rod of God)는 ‘신성하신 능력(Divine power)을 의미(AC.4013, 4015, 4876, 4936, 7026)하고, ‘(hand)도 힘을 의미(AC.8595)하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with the rod of God in the hand)라고 하는 이유는, ‘지팡이(rod)는 외면의 힘, 겉에 보이는 힘을, ‘(hand)은 내면, 속에 있는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는 ‘지팡이(rod)는 자연적인 힘을, ‘(hand)은 영적인 힘을 의미(AC.6947, 7011)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힘, 파워가 있었다(from this there was power) 하는 이유는, 싸우는 진리는 그 안에 선에서 오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은 그 안에 있는 선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신성(the Divine)은 선 안에 계시며, 선을 통해 진리 안에는 계시지만, 선이 없는 진리 안에는 신성이 안 계시는, 그래서 그런 진리에는 힘, 능력이 없는 이유입니다. 진리의 모든 능력은 선에서 나온다는 건 글 번호 3563, 4931을 보세요. 선의 모든 능력은 신성에서 나온다는 건 뭐, 자명한 사실입니다. (AC.8599)

 

※ 위 ‘선이 없는 진리’란 실천하지 않는 진리, 실행되지 못하는 진리, 곧 앉은뱅이 신앙을 말합니다.

 

네, 이상입니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겨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이 한 구절뿐인데 실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아르카나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살짝 그 맛만 좀 보았습니다. 위 참조 글 번호들까지 샅샅이 읽다 보면 뭐, 그래도 책 한 권을 읽게 되니까요. 실제로 천사들에게는 이 모든 아르카나가 동시에 읽혀 무슨 형용할 수 없는 오케스트라 향연처럼 들린다고 합니다.

 

우리 눈엔 그저 밋밋한(?) 저 한글 문장이 그러나 내적 존재인 천사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권능과 신성함으로 살아 움직이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주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속히 그런 반열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아말렉은 저 뒤쪽 지옥, 곧 악마들의 지옥입니다. 이들의 사주를 받는 악령들이 풀려 이 지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도처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어쩌면 저들의 기운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너무도 교활하여 그 활동이나 존재 자체를 알 수도 없다 하니 그렇다면 저들조차 소위 아말렉이라 하는 지옥 정령들의 하수인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이를 위해 주님은 싸우는 천사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보내어 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십니다. 지금 우리 사회 여러 이런 ‘싸우는 진리들’로 수고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2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29(D1)-주일예배(2604, 출17,9, AC.8595-8617), '아말렉'의 속뜻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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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의 속뜻 (1)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17:8) And Amalek came, and fought with Israel in Rephidim. (Exdo. 17:8)

 

 

오늘부터 3주에 걸쳐 다룰 주제는 ‘아말렉(Amalek)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은 총 열여섯 절밖에 안 되는 작은 장이며, 거기서도 이 아말렉 본문은 8절로 16절까지 단일 본문임에도 이걸 3주씩이나 다루고자 함은, 주제의 특별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 담긴 아르카나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르카나의 특성상 비록 그 일점일획이어도 어느 하나 방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여기 이 아말렉 본문엔 매우 근본적인 아르카나가 여럿 들어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스베덴보리도 이 본문을 삼등분해서 다루고 있는데요, 저는 처음엔 모르고 그냥 1회에 걸쳐 다 다루려고 했지만 결국은 포기, 스베덴보리처럼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 ‘아르카나(arcana, 라틴어 arcanum의 복수, 秘義, 영어로는 secrets, 지상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놓으신 주님의 속뜻, 내적 의미)라는 개념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이는 또한 상응과 연결되어 있어 사실은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지상과 천국 간 상응을 말하며, 말씀이 기록된 원리)을 먼저 알아야 아르카나를 어렴풋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들을 다룰 수는 없어 아래와 같은 예로 잠깐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먼저 아말렉 두 번째 본문인 출애굽기 1710절로 13절 중 12절에 ‘해가 지도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상응에는 모든 능력이 들어있는데요, 이 상응을 따라 땅에서 행해지는 것은 하늘에서도 소용이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 이유는, 상응은 신성(the Divine)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상응 안에 있는 건데요, 그래서 신성, 곧 주님이 이들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과 신앙의 선이 신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상응으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천국에 있는 것들과 상응하도록 기록되었고, 그 결과 말씀에 신성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천국과 이 세상, 곧 하늘과 땅을 결합하게 하는데요, 땅에서 말씀이 읽힐 때, 천국 천사들은 그 속뜻 안에 있는 거룩함 가운데로 들어가기 때문, 곧 감동하기 때문입니다. Correspondences have all power, insomuch that what is done on earth according to correspondences avails in heaven, because correspondences are from the Divine. They who are in the good of love and of faith are in correspondence, and the Divine does all things that appertain to them, for from the Divine come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All the miracles recorded in the Word were don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 Word has been so written that every particular therein, even to the most minute, corresponds to things that are in heaven. Consequently the Word has Divine power; and it conjoins heaven with earth, for when the Word is read on earth, the angels in heaven are moved unto the holiness that is in the internal sense.

 

그러므로 우리는 예를 들면, 병 낫는 기도도 이 상응으로 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고, 평소 이 아르카나가 담긴 말씀 리딩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소리 내어 읽을 때, 우리에게 와 있는 천사들한테는 저런 일들이 일어난다니 말입니다. 저 때, 곧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내 안에서 천국과 지상 간 결합이 일어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다른 하나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322번 글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김은경 역입니다.

 

기독교인의 경우처럼, 비기독교인 가운데도 현명한 사람과 단순한 사람이 있다. 허락하심에 의해 나는 몇 시간, 또는 며칠간 양쪽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기독교인 중에는 고대인들처럼, 특히 아시아에 크게 자리 잡았고, 거기서 여러 민족에 전파된 종교인 고대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은 없다. 이들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그 현인(賢人)들 중 몇 사람과 아주 가깝게 대화하는 것이 내게 허락되었다. 당대 뛰어난 현인들 중 한 사람이자 학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람을 만난 나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떤 이유들로 인해 그가 키케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현인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와 지혜, 지성, 질서, 성경 말씀, 그리고 끝으로 주님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지혜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지혜 외에 다른 지혜는 없으며, 지혜는 삶 외에 다른 것에 입각할 수 없다. 또 그는 지성이란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질서는 지존자이신 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했으며, 그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지혜이며, 지성이라고 말했다. 말씀에 대해서는, 내가 성서의 예언서에서 몇 구절을 읽어 주자 그는 굉장히 기뻐했다. 특히 모든 이름과 낱말이 내적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아주 좋아했고, 현재의 지식인들이 이런 연구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나는 그의 사고와 마음의 내면이 열려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내적으로 너무도 감동하여,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신성함이 느껴져 더 이상 말씀을 들을 수 없노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 바이블 리딩, 곧 성경 읽기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 곧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말씀을 읽을 때, 그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놀라운 일들을 안다면 말입니다. 물론 소리 내어 읽든, 그냥 눈으로 읽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속뜻을 알고 있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그걸 충분히 감안하고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성경 66권 중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는 것만 ‘말씀(The Word)이며, 이는 구약은 창, 출, 레, 민, 신, 수, 삿, 삼상, 삼하, 왕상, 왕하, 시,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까지 총 29권이며, 신약은 마, 막, 눅, 요, 계5권 등 총 34권입니다. 그럼에도 나머지 신구약 32권을 성경에 포함하신 이유는 신앙생활에 유익한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글은 그저 참고만 해야지 여기서 무슨 교리를 뽑아내고 하면 안 되겠습니다. 주님의 아르카나가 들어있지 않은, 인간의 글, 사람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말렉에 대해서만 먼저 좀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8절,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에 대한 첫 기록은 아래 창세기 14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아브람이 사로잡혀 간 롯을 구하는 본문 가운데 당시 상황을 기숙한 본문이지요. 이는 사실은, 그러니까 속뜻으로는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의 인성 안에서 일어난 시험을 말합니다.

 

두 번째 기록입니다. 창세기 36장입니다.

 

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16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36:12, 16)

 

이 창세기 36장에 나오는 에서의 족보는 그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성한 자연적 선(the Lord’s Divine good natural)입니다. ‘에서(Esau)의 속뜻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들, 이런 표현들, 용어들이 많이 낯설 줄 압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런 속뜻 강해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창세기부터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순서대로 그 표현들, 용어들 및 설명들이 이해되니까요. 스베덴보리의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27년간 영계를 경험하며, 알게 된 수많은 개념을 어떻게 지상의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 새로 지어내고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출애굽기 설교는 이 17장으로 마치고, 창세기 1장부터 들어갈 생각입니다. 아마 여러 해 걸리지 싶은데요, 주께서 제게 기력을 더하여 주시면 계시록까지 좀 마치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표현 하나하나, 글 번호 하나하나를 다루기는 무리이지 싶고, 대략 중요 개념들 위주로 스케치를 하게 되지 싶습니다. 저의 풀이를 듣고 참고만 하셔서 전체적인 세세한 건 직접 이 주석을 가까이하여 읽으시기들 바랍니다. 분명 굳건한 신앙의 반석 위에 점점 세워져 감을 느끼실 겁니다.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의 속뜻은 ‘the falsity from interior evil’, 즉 ‘내적 악에서 나오는 거짓’입니다. 좀 알쏭달쏭하시지요? 다음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Interior evil is that which lies inwardly concealed with man, hidden in his will, and thence in his thought, no trace of which appears in his externals, as in his actions, speech, and face. They who are in such evil study by every method and art to hide and hoard it under the semblance of what is honorable and just, and under the semblance of the love of the neighbor; yet still they devise nothing else within themselves than how they can inflict evil, and so far as they can they do inflict evil by means of others, taking care that it should not appear to be from them; they also color over the evil itself, that it may not seem like evil. The greatest delight of their life is to meditate such things, and to attempt them in concealment. This is called interior evil. They who are in this evil are called “evil genii,” and in the other life are completely separated from those who are in exterior evil, and who are called “spirits.” (AC.8593)

 

살짝 의역을 좀 하자면,

 

내적 악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 안에 봉인된, 사람 속에 있는 것으로, 사람의 의지 안에,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의 생각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겉, 그러니까 사람의 행동이나 말, 표정 같은 걸로는 도무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이런 걸 몰래 감출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연구하는데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을 짐짓 영예와 공정, 정직을 추구하는 사람들인 양, 짐짓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양 꾸미지만, 그러나 여전히 어떻게 하면 악을 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을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그래야 탄로가 나지 않을 텐데 하는 것밖에는 궁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악에 색을 입혀 마치 악이 아닌 것 처럼 보이게 하는데요, 이들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이런 걸 깊이 생각하는 것이며, 몰래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걸 ‘내적 악’(interior evil)이라 하며, 이런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을 ‘악한 정령(精靈)들’(evil genii)이라 합니다. 사후 세상에서 이들은 ‘외적 악’(exterior evil) 가운데 있는, ‘영들’(spirits)이라 하는 자들하고는 완전히 격리되어 있습니다. (AC.8593)

 

좀 더 보충 설명이 이어지는데요, 영어 원본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악에서 나오는 거짓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이 거짓은 악한 영들의 악에서 나오는 거짓하고는 다릅니다. 이 거짓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입니다. 이 악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 공격하는 대상이 신앙의 진리들이 아닌, 신앙의 선들입니다. 이들은 타락한 애정들을 가지고 액션을 취하는데요, 그걸로 이들은 선한 생각들을 왜곡시키는데, 그 방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의 양심에 진짜 감쪽같이 어떤 액션을 취해 비뚤어진 양심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일은 타락한 애정을 호흡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이들 지옥의 정령급들은 사람을 공격할 때 절대 공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주 완강하게 저항할 것 같을 때도 말이지요. 대신 가만히 보다가 그가 낙심, 거의 포기할 것 같다 싶을 때, 그때 갑자기 공격, 그를 밀어 넘어뜨려 그로 하여금 완전히 끝장나게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넘어뜨린 아말렉인데요,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를 등지게 되고, 그 결과 가나안 땅 여러 족속을 두려워하게 됩니다.(14) (AC.8593:2)

 

이들 아말렉에 대해 읽다 보니 무시무시한데요... 저도 모르게 요즘 정치인들을 비롯, 온 나라를, 그리고 전 세계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과 세력, 기운들이 생각납니다. 솔직히 제 안에도 이런 아말렉의 속성이 살짝 좀 섞여 있는 것 같아 식은땀이 나기도 하고, 지난날 제가 겪었던 일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아말렉을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다음 주와 그다음 주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계속 살피겠습니다.

 

아래는 위에 나온 민수기 14장입니다. 먼저 13장 끝부분을 보면,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13:30-33)

 

14장입니다.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13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14이 땅 거주민에게 전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15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16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7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9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2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22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주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37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39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14)

 

엄청난 본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본문을 읽을 때, 천사들은 어땠을까요? 아마 수천수만 배의 감동 가운데 들어갔을 줄 믿습니다. 오늘 원고를 여러 번 되새김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2025-06-2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6-22(D1)-주일예배(2603, 출17,8-9, AC.8592-8599), '아말렉'의 속뜻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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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좀 어처구니없는 내 모습(2025/6/21)

 

평소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Arcana Coelestia’를 리딩하다 보면 지쳐서 잠깐 눕든지 스마트폰을 하던지 하는데요, 이 두 가지가 좀 어처구니없어 정리해 봅니다.

 

하나는, 제가 ‘지친다’는 겁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창세기, 출애굽기에 담긴 주님의 신성(The Divine)에 대한 내용인 아르카나(arcana)를 리딩하는데 말입니다. 천사들이 들으면 정말 기가 막혀 하겠어요...

 

영어라서 그런가요? 가끔 난해한 표현이 있어 막힐 때도 있지만... 그 정도는...

 

제가 아직 주님의 순수한 신성 접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저도 모르게 아직 신도 안 벗고 주님 앞에 서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3:5)

 

다른 하나는, 제가 ‘머리 좀 식힌답시고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본다’는 겁니다.

 

그것도 얼마나 본능적으로 보는지 모릅니다. 정말 기가 막힙니다.

 

천사들도 이럴까요? 천사들도 주님을 섬기다가 힘들어 머릴 좀 식힌답시고 다른 걸 찾을까요?

 

천사들은 늘 주님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고 합니다. 영계에서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자동적으로 얼굴과 몸이 돌아가기 때문인데, 천사들한테는 그 대상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이 그렇게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늘 주님을 향하게 하신답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전히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군요. 아...

 

그리고 한 가지, 지상에 사는 우리가 주님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해 고갤 돌리는 순간,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신성의 흐름, 곧 인플럭스가 차단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그만한 값을 지불하고도 유튜브를 꼭 보아야 하는지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이고...

 

앞으로는 주님의 입류(influx),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으로 이 주석도 읽고, 그리고 휴식도 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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