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예언서들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에스겔에서 말하기를,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겔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여기서 이성(the rational)은 ‘레바논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불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함,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은 기억 지식(the knowledges of the memory)을 의미하는데, 이들이 바로 그러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훨씬 더 명료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과 다른 많은 곳에서 ‘애굽’(Egypt)은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이성(reason)을 의미하며, ‘이스라엘’(Israel)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이 글은 AC.118에서 제시된 ‘힛데겔 강 = 이성의 명석함’, ‘앗수르 = 이성적 마음’이라는 정의를, 예언서 전체를 가로지르는 상응의 증언으로 확증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말씀이 스스로 이 해석을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에스겔에서 앗수르가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백향목은 곧고 높으며,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나무입니다. 이는 이성이 가진 구조적 힘과 통찰력을 나타냅니다. 이성은 인간 정신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능력이며, 사유의 높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나무가 자라는 조건은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라지 않았고, ‘물들’과 ‘깊은 물’, 그리고 ‘강들’로 인해 자랐습니다. 다시 말해, 이성은 유입에 의해 살아납니다.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개역개정 번역이 좀 이상함,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이 기억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성이 작동하는 실제 내부 구조를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들은 이성의 토양이자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방향을 갖지 못합니다. 이성은 이 기억 지식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고 연결하지만, 그 이성 자체도 위로부터의 흐름 없이는 왜곡되기 쉽습니다.
이사야의 인용은 이 질서를 더 넓은 구조 속에 배치합니다.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이 서로 왕래하며 하나의 복을 이룬다는 그림은, 인간 정신의 삼중 구조를 매우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입니다. 이 셋이 서로 단절되지 않고 연결될 때, 곧 기억 지식이 이성으로 정리되고, 이성이 지성으로 밝혀질 때, 그 전체가 ‘복’이 됩니다.
특히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라는 표현은, 기억 지식이 이성을 섬겨야 한다는 질서를 말합니다. 정보와 경험은 이성을 지배해서는 안 되며, 이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또한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하는 대목은, 이성 자체도 인간의 자랑이 아니라 ‘주님의 작품’임을 분명히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나의 기업’으로 불리는 것은, 지성이 주님의 목적과 직접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단순한 이해 능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살아내는 능력이며, 이는 인간 안에서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영역입니다.
AC.119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높고 강력하지만, 근원은 아니다. 기억 지식과 지성을 잇는 중간에 서서 섬길 때에만 참되며, 이 삼중 질서가 하나로 움직일 때, 인간 전체가 복이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겔31:3-4’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겔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이 구절이 AC.119에 인용된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앗수르=이성’이라는 상응을 단순 정의가 아니라 ‘말씀 자체의 증언’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개념을 먼저 제시한 뒤, 반드시 예언서의 장면을 통해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에스겔의 백향목 환상은 그 가운데서도 이성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먼저 이 구절은 ‘이성이 무엇인가’를 형상적으로 보여 줍니다. 앗수르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묘사된 것은, 이성이 가진 높이와 구조적 힘, 그리고 사유를 조직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곧고 높이 자라며 가지가 넓게 퍼지는 백향목처럼, 이성은 인간 정신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이며, 생각과 지식을 체계로 묶어 주는 중심 역할을 합니다.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이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나 AC.119에서 더 핵심적인 이유는 ‘이성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물들이 그것을 기르고’,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둘러 흐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이성의 생명은 자기 안에 있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유입’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AC.118–119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이성은 스스로 빛나는 능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흘러들어올 때만 명석해집니다.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이 에스겔 구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이성이 ‘기억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는 가지’라는 표현은, 이성이 추상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 지식과 개념들 속에서 자라고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앗수르(이성)는 애굽(기억 지식) 위에 서서 그것을 조직하지만, 동시에 그 재료에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AC.119에서 애굽, 앗수르, 이스라엘의 삼중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이 매우 적절한 근거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이성의 양면성’을 암시하기 때문에 인용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크며 위엄 있는 나무이지만, 그 생명은 물의 흐름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이 흐름이 유지될 때는 이성이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지만, 끊어질 때는 같은 이성이 교만과 왜곡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앗수르를 두고 긍정과 경계를 동시에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에스겔 구절은 세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에 AC.119에 인용됩니다. 곧, 이성이 얼마나 높고 강력한 기능인지,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유입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기억 지식과 연결된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장면 안에 모두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이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앗수르=이성’이라는 해석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위 겔31:3에서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를 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으로 번역했을까요?
짚으신 대로입니다.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는 직역하면 ‘그 가지(새순)가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었다’는 뜻인데, 개역개정의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은 원문을 그대로 옮긴 번역이라기보다 **문맥 전체를 고려해 ‘의미 중심으로 재구성한 의역’**에 가깝습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그 꼭대기(혹은 높은 부분)가 구름(혹은 빽빽함) 가운데 있었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구름’에 해당하는 단어가 실제 하늘의 구름을 가리킨다기보다, ‘두터움’, ‘빽빽함’을 뜻하는 말에서 온 것이어서, 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갈립니다. 영어 번역은 이 점을 따라 ‘thick boughs’, 곧 ‘빽빽한 가지들’로 풀었고, 개역개정은 그 이미지를 ‘높이 솟아 구름에 닿는 것’으로 이해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느냐 하면, 번역에는 두 가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이 주는 **전체 이미지와 인상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개역개정은 여기서 후자를 택해, ‘레바논 백향목의 압도적인 높이’를 강조하는 쪽으로 번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다’는 구조적 묘사보다, ‘구름에 닿을 만큼 높다’는 인상적 표현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 관점에서는, 영어 번역처럼 ‘빽빽한 가지들 가운데 있다’는 표현이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앗수르)이 기억 지식들(많은 가지들) 속에서 작동한다는 구조**를 읽기 때문입니다. 즉, 이성은 공중에 떠 있는 능력이 아니라, 수많은 개념과 지식 속에서 자라나는 기능이라는 점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은 틀린 번역이라기보다 ‘높이’를 강조한 의역이고, ‘among the thick boughs’는 ‘구조와 관계’를 드러내는 직역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일반 독자에게는 개역개정이 더 장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상응이나 내적 의미를 읽을 때는 영어 표현이 더 정밀하게 작동하는 번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3. ‘사19:23-25’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이 AC.119에 인용된 이유는, ‘애굽–앗수르–이스라엘’이라는 세 이름을 통해 **인간 내면의 세 층위, 곧 기억 지식, 이성, 지성의 올바른 연결 질서가 어떻게 이루어질 때 복이 되는가**를 한 장면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을 단순한 역사적 민족으로 보지 않고, 각각을 인간 정신의 기능으로 읽습니다. 곧 애굽은 기억 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다’는 말은, 기억 지식과 이성 사이에 단절이 아니라 ‘열린 통로’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즉, 지식이 이성으로 올라가고, 이성이 다시 지식을 정리하며 서로 왕래하는 상태입니다. 이어서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한다’는 표현은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기억 지식이 이성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함께 주님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지식이 이성을 섬기고, 이성이 주님을 향할 때 비로소 올바른 예배가 성립됩니다.
그리고 이 구조의 정점이 ‘이스라엘’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복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성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합하여 완성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성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분별하고 살아내는 능력이며,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 전체가 ‘복’이 됩니다. 그래서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라는 선언은, 이 세 층위가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이며, 각각 제자리에 있을 때 거룩해진다는 뜻입니다.
AC.119의 맥락에서 보면, 이 구절은 단순히 상응의 예를 하나 더 드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에스겔에서 ‘앗수르=이성’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보였다면, 이사야에서는 **그 이성이 기억 지식과 지성과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즉, 이성은 독립된 중심이 아니라, 아래로는 지식을 정리하고 위로는 지성으로 열려 있는 ‘중간 기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단절되지 않고, 주님을 향해 하나로 연결될 때, 그 전체가 복이 된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이성은 높지만 중심이 아니며, 올바른 질서 안에서만 참된 역할을 한다’는 AC.119의 핵심 주장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앗수르’
위 AC.119 본문에서 앞에서는 앗수르를 ‘사람의 이성적 마음(the rational mind), 곧 인간의 이성(the rational of man)을 의미한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이성(reason)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 둘, 곧 the rational과 reason은 다르다고 앞에서 읽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인용 구절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건가요?
좋은 지적이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서 ‘the rational(이성적 마음)’과 ‘reason(이성)’이 뒤섞여 보이는 것은 **개념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같은 영역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에서는 이 둘이 엄밀히 구별되므로, 그 차이를 분명히 잡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the rational’은 **하나의 ‘층위’ 혹은 ‘기관’**입니다. 곧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구조적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위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아래로 전달하고, 아래의 기억 지식을 받아 위로 올리는 ‘중간 장(場)’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the rational mind’라고 할 때는,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 기능적 영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반면 ‘reason’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 혹은 ‘활동’**입니다. 곧 그 이성적 마음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 즉 비교하고, 연결하고, 판단하고, 추론하는 **움직임 자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the rational’은 ‘이성이라는 자리’이고, ‘reason’은 그 자리에서 ‘이성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앗수르를 두고 어떤 곳에서는 ‘the rational’, 어떤 곳에서는 ‘reason’이라고 하느냐 하면, **본문이 강조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1장처럼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묘사될 때는, 그 높이와 구조, 곧 ‘이성적 마음이라는 존재 자체’가 강조되므로 ‘the rational’이 더 적합합니다. 반대로 이사야 19장처럼 ‘애굽과 왕래하고 섬기며 연결되는’ 장면에서는, 이성이 실제로 **지식을 정리하고 연결하는 작용**이 강조되므로 ‘reason’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용 구절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실체의 ‘측면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눈’이라는 기관과 ‘본다’는 행위를 구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눈이 있어야 보지만, 눈 자체와 보는 행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앗수르는 언제나 ‘이성의 영역’을 가리키지만, 어떤 문맥에서는 그것을 ‘구조’로 보느냐, 다른 문맥에서는 ‘작용’으로 보느냐에 따라 ‘the rational’과 ‘reason’이라는 표현이 달리 사용됩니다. 그래서 혼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두 각도에서 설명하는 일관된 사용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천적 인간의 이성과 기억 지식'(AC.118-121)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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