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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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일을 알았던 이유를 성경 중심의 삶에서 찾고, 이를 자신의 성경 연구와 ‘잇사갈 성경대학’ 설립의 근거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평생 연구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열정은 귀합니다. 특히 신학을 오래 공부했음에도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 자체를 공부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교리 체계와 신학 지식이 말씀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중요한 자각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교회의 전통이나 인간의 철학이 말씀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며, 모든 교리는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외침에는 분명 존중할 만한 중심이 있습니다.

 

다만 먼저 몇 가지 성경 본문의 사실관계는 바로잡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 유다 지파를 장자 지파라고 설명하지만, 육신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유다는 장자 지파라기보다 통치권과 지도력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유다에게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49:10)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또한 모세가 잇사갈 지파에게 ‘성전을 떠나지 말고 제사를 기뻐하며 살면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얻을 것’이라고 단독으로 축복한 것은 아닙니다. 신33:18-19은 스불론과 잇사갈을 함께 향한 축복입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특징을 말할 때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기보다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했다’는 본문 표현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대상12:32의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 이백 명’은 잇사갈 지파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세계사의 태초부터 종말까지를 파악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지파의 용사들과 지도자들을 열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당시 잇사갈 자손들은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가야 할 때를 분별했으며,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세’는 단순한 시대 예측이나 종말 연대표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대의 모든 사건과 미래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확대하기보다, ‘말씀의 진리 안에 있을 때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온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잇사갈은 단순히 성경을 많이 공부하는 학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두 지파는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요소를 나타내며, 각 지파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잇사갈은 이름의 뜻과 야곱의 축복을 통해 ‘보상’, ‘품삯’, ‘일의 결과’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창49:14-15에서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 묘사되며,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나귀’는 자연적 이성을, ‘짐을 멘다’는 것은 봉사와 쓰임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지혜는 지식을 많이 축적한 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제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유용하게 섬기는 데서 생기는 지혜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논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사람들이 ‘시세를 알았다’는 것을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씀을 연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동으로 영적 분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의 빛은 지식의 양보다 사랑의 방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배우면 그 진리는 내적으로 열리지만, 자기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배우면 같은 성경 지식도 닫힌 지식이 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수백 개의 과목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시세 분별로 이어지려면 먼저 ‘내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진리가 누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신학을 십 년 공부했지만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을 공부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걸음이 더 필요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자료를 더 많이 모으고, 고대 문헌과 유대교 해석과 주석을 더 깊이 조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료는 문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말씀의 신성은 그 자료들의 오래됨이나 희귀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문자 안에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공부’에서 ‘성경 공부’로 옮겨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다시 ‘성경 공부’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상에서는 ‘성경은 태초부터 요한계시록의 종말까지를 기록한 책이므로 성경을 공부하면 시세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 성경을 세계사의 연대표나 미래 예측의 암호책으로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태초’는 사람 안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첫 상태이며, ‘종말’은 옛 교회가 끝나고 새로운 영적 질서가 세워지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참된 목적은 세상에서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데 있지 않고, 내 안의 혼돈이 어떻게 질서가 되고, 자연적 사람이 어떻게 영적 사람이 되며, 자기 사랑의 옛 세계가 어떻게 끝나고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대상12:32의 ‘시세를 안다’는 말씀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때는 진리를 배워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시험을 견뎌야 할 때이며, 어떤 때는 악을 끊어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배운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할 때입니다. 잇사갈 자손이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형세를 잘 읽었다는 의미를 넘어,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표상합니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미래를 신비하게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여 ‘지금 무엇이 옳은가’를 밝히는 사람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830개의 과목을 만들었으며 그중 72과목을 뽑아 성경대학 과정을 운영한다고 말합니다. 이 열정과 노동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과목의 수보다 그 과목들이 사람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묻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놀라고, 뜨거워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은 좋은 출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탄과 열정은 아직 거듭남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때문에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던 태도가 부드러워졌는가, 정직과 책임과 체어리티의 삶이 자라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이는 감탄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증명됩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이 쓸 수 없는 신비한 책임을 깨닫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지성과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으로 ‘오직 하나님’을 외치면서도 자기 해석과 자기 업적, 자기 이름을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학문적 업적이 크지 않아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고 조용히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역시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대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저술과 자료를 입수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기보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보조 자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성경만’이라는 말은 자료의 범위를 뜻하기보다 최종 권위의 중심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외부 자료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말씀 위에 두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오직 성경’은 타당한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유대 문헌이나 초대교회 문서가 성경의 깊이를 자동으로 보증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전통 의존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매우 거룩하게 보았지만, 문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성전의 문과 같고, 그 안에는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버리고 숨은 의미만 찾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속뜻은 문자 위에 기초하며, 문자 안에서 보존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오직 성경’은 문자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상상으로 비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질서와 상응, 주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거듭남을 중심으로 문자의 깊이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 성경의 모든 책이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내적 의미가 연속적으로 담긴 책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록된 사도적 문서들을 구분합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모세오경과 여러 예언서는 내적 의미가 글자마다 연속적으로 담긴 말씀에 속하지만, 바울서신은 교회에 유익한 교리적 문서이면서도 같은 방식의 연속적 속뜻을 지닌 말씀으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이라는 말도 단순히 육십육 권을 동일한 방식으로 읽는다는 뜻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신적 질서와 중심을 분별하며 읽는다는 뜻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성경대학’이라는 이름에도 귀한 가능성과 함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잇사갈의 영성은 시대를 분석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고, 진리를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이름을 붙인 성경대학이라면 학생들에게 단지 놀라운 성경 지식이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자료를 제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배운 진리를 어떻게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선한 쓰임으로 바꿀 것인지, 어떻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분별하고 끊을 것인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시세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성경만 공부하고 싶은 분’을 초대하는 장면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 공부는 사람을 폐쇄된 지식 공동체 안으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체어리티와 겸손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다른 교파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게 되고, 자신들이 특별한 비밀을 아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부는 잇사갈의 지혜가 아니라 영적 교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선을 존중하며, 자신의 책임을 더 성실히 감당하게 된다면 그 공부는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의 가장 귀한 부분은 ‘성경에 관한 공부에서 성경 자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하는 데서 말씀의 속뜻을 보고, 말씀의 속뜻을 보는 데서 자기 삶을 비추며, 자기 삶을 비추는 데서 실제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 참된 잇사갈 사람이며, 시대의 사건을 많이 해석하는 사람보다 현재의 상태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분별하여 행하는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잇사갈의 능력은 성경 지식의 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 시대의 상태를 분별하고, 그때그때 마땅히 행할 선을 실천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 많이 읽겠다는 표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오직 주님께 배우고, 배운 진리를 자기 삶의 선한 쓰임으로 바꾸겠다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SY.33, ‘신학교 자퇴합니다’, 제가 본 것은 ‘추악한 거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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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1, ‘방언기도할 때, 3가지 생각하며 기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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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방언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방언을 의심해서는 안 되며, 방언할 때에는 세 가지 생각, 곧 ‘사탄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세워진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께 더 빨리 전달되고 응답받는다’, ‘우둔함이 제거되고, 지혜와 명철과 총명이 들어와 영·혼·육이 세워진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강사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로 규정하고,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선물을 내던지는 행위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까지 말합니다. 또한 방언의 소리가 단순하거나 반복적이더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말고, 계속 사용하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화되고, 삶의 돌파와 응답을 경험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강의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귀히 여기고, 기도를 지속하며, 영적 나태함에서 벗어나라는 긍정적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면, 이 강의는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하나의 발성 현상과 결합시키고, 그 현상에 일정한 영적 효능이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먼저 방언을 무조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선물이라고 전제한 뒤, 그것을 의심하는 마음을 악한 귀신이 넣어 주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인간의 이성과 분별력은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 안에서 이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선인지 살피기를 원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맹목적 확신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내적 동의입니다. 물론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의심과 혼란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문이나 검토를 악한 영의 역사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현상이 정말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자기 암시인지, 집단 분위기의 영향인지, 습관적으로 만들어진 소리인지 살피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분별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의심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심을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진리를 찾으려는 정직한 질문은 주님께서 주신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악한 삶을 고집하기 위해 일으키는 의심은 다른 문제입니다.

 

강사는 ‘내 방언이 정말 방언인가’라고 묻는 사람에게 그 질문을 멈추고, 무조건 계속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현상의 진위보다 그 현상이 어떤 내적 열매를 맺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방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겸손해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유창하고 강렬한 방언을 하더라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그대로 품고 있으며, 타인을 정죄하고, 거짓말하고,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자랑한다면 그 방언은 그의 거듭남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방언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정직과 체어리티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실제적인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신비함이나 기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이 선과 진리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특히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교리로도 지나친 주장입니다.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으며, 은사의 종류와 기능도 서로 다릅니다. 무엇보다 은사는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지, 개인의 영적 등급을 증명하는 표지가 아닙니다. 누군가 방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방언을 중단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더는 그에게 선물을 주지 않으신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에게 불필요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발성 현상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분별의 기회를 주지 않고 ‘의심하면 죄’라고 압박하면, 사람은 자유롭게 진리를 살피기보다 종교적 권위에 복종하여 자신의 판단을 억누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강요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자유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사람의 내면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방언을 ‘하늘나라 언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언어는 단순히 지상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반복 음절을 뜻하지 않습니다. 천사들의 말은 그들의 사랑과 사고에서 직접 흘러나오며, 그 말 안에는 지상의 언어보다 훨씬 풍부하고 완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천국의 말은 생각과 애정의 상응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천사들은 서로의 말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발성하는 소리를 곧바로 천국의 언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언어가 지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다는 것과, 뜻을 알 수 없는 모든 종교적 발성이 천국의 언어라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또한 강사는 고전14:2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를 근거로 ‘방언은 통역하거나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고전14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하며, 교회 안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방언은 본질적으로 절대 통역할 수 없다’는 주장은 해당 장 전체의 문맥과 조화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표현은 통역의 은사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보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듣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염려한 것도 바로 교회 공동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인해 세움을 얻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방언 그 자체보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 고전14의 중심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순절의 여러 언어 역시 단순히 뜻을 알 수 없는 신비한 발성이 아닙니다. 오순절 사건에서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다는 것은 복음이 여러 민족과 다양한 내적 상태에 전해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언어’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 곧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 언어의 기적은 사람이 무의미한 소리를 반복하는 데 있기보다, 서로 다른 상태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각자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입술을 여시는 목적은 진리가 전달되고, 선이 행해지며, 이웃이 세움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강의에서 제시하는 첫 번째 생각은 방언할 때마다 강철 같은 영적 방패가 세워져 사탄의 공격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영적 작용은 성경 본문이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직접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영적 공격을 막는 실제 방패는 진리에 대한 신앙과 선한 삶입니다. 엡6에서 말하는 ‘믿음의 방패’도 특정한 발성법이라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진리 안에 서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한 영들의 공격은 사람이 품고 있는 악한 욕망과 거짓 관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그 공격에 맞서는 길은 반복적인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거짓을 진리로 밝히고, 악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여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하면서도 미움과 복수심, 탐욕과 음욕, 거짓과 교만을 붙들고 있다면 소리가 그를 자동으로 보호하는 방패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유혹 가운데서 악을 거절한다면, 바로 그 진리가 실제적인 방패가 됩니다.

 

강사는 방언할 때 ‘지금 방패가 쳐지고 있다’고 계속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은 실제 영적 보호와 심리적 자기 암시를 혼동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반복하면 사람은 실제로 안정감이나 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곧 영계에서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환상이나 내적 느낌을 무조건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영적 세계의 사실은 개인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따라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강철 방패로 둘러싸이고 있다’는 심상을 반복하는 것보다, ‘주님, 제 안의 거짓을 보게 하시고 악을 거절할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실제 삶에서 진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실질적입니다.

 

두 번째 주장은 방언하면서 마음의 소원을 생각하면 성령께서 그 기도를 더 효과적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빨리 전달하시며, 그 결과 응답이 빨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역시 기도를 마치 영적 전송 속도의 문제처럼 이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한국어로 기도하든, 침묵 가운데 마음으로 기도하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든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의도와 필요를 이미 아십니다. 기도는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부터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주님의 마음을 바꾸거나 응답을 재촉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리고 정돈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참된 기도는 사람의 소원이 무조건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님께 강하게 밀어 올리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원함을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아래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소원 중에는 선한 것도 있지만,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실제로 자신과 이웃의 영원한 선을 위한 것인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면 소원이 빨리 응답된다’는 기대는 기도를 욕망 성취의 도구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이 소원을 반드시 빨리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요구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녀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 자체는 귀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방언을 많이 한다고 해서 자녀의 자유가 무시된 채 회심이 자동으로 앞당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부모의 기도는 자녀를 강제로 변화시키는 영적 압력이 아니라, 부모 자신이 더 지혜롭고 인내하며, 사랑으로 자녀를 대할 수 있도록 주님께 자신을 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녀를 정죄하고 통제하며, 자신의 종교적 기대를 강요한다면, 그 기도는 입술의 열심과 달리 자녀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은 방언할 때 사람의 우둔함과 연약함이 제거되고, 지혜와 명철과 총명이 부어지며, 영과 혼과 육이 점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전14:4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덕을 세운다’는 말을 지능이 높아지고, 총명이 자동으로 주입된다는 뜻으로 확대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세움’은 신앙의 강화와 영적 유익을 뜻할 수 있지만, 반복 발성을 통해 지혜가 자동으로 증가한다는 공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혜는 진리를 많이 알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할수록 그 진리는 사람의 의지와 결합하고, 그때 주님께서 더 깊은 이해를 열어 주십니다.

 

··’이 방언으로 세워진다는 설명도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서로 독립된 세 부분이 기계적으로 결합한 존재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은 가장 깊은 생명의 시작과 관련되고, ‘’은 육체를 벗은 뒤에도 살아가는 인간 전체이며, 육체는 지상에서 영이 활동하기 위한 외적 기관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방언을 통해 영과 혼과 육에 능력이 주입되는 과정이 아니라, 속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겉 사람을 질서 안에 두는 과정입니다. 지성과 의지, 생각과 행동, 속과 겉이 점차 하나의 질서로 정돈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강의는 방언을 많이 하면 ‘없어질 부분들이 제거되고’ 사람이 변화되어 성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에 따르면 악은 어떤 기도 행위의 반복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은 사람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저항할 때 물러납니다. 예를 들어, 분노가 많은 사람이 아무리 오래 방언하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분노의 악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이 방언하면서도 부정한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탐욕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성적 욕망에 끌리는 사람이 방언의 기름부음을 느끼면서도 음란한 시선과 행동을 끊지 않는다면, 그것이 성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듭남에는 반드시 자기 성찰, 회개, 악과의 싸움, 새로운 삶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 반복되는 ‘돌파’라는 표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언을 특정 방식으로 하면 응답과 성장과 변화의 돌파가 빠르게 일어난다는 가르침은 신앙을 일종의 영적 기술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매우 깊고 세밀하게 역사하며,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문제는 즉시 해결되지 않으며, 오랜 기다림과 실패와 낮아짐을 통해 사람의 자기 사랑이 드러나고, 정화되기도 합니다. 느린 과정이 반드시 믿음 부족의 결과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능력과 즉각적인 체험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진리를 붙들도록 기다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방언의 소리와 ‘기름부음’을 서로 연결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강의에서는 방언을 자신 있게 크게 하고, 특정한 생각을 품으면, 방언 자체에 기름부음이 넘치고, 힘 있게 뻗어 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영적 능력은 소리의 강도나 유창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국의 능력은 선과 결합한 진리에서 나옵니다. 악한 사람도 종교적으로 매우 열정적일 수 있고, 강렬한 음성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계의 악한 영들 역시 외적으로는 열심과 확신을 보이며,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감정과 반복되는 음절, 몸의 열감, 황홀감, 소리의 유창함을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현상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정직하게 하며,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의 위험은 방언을 의심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영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놓는다는 점입니다. 방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무시하는 사람, 악한 영의 의심에 사로잡힌 사람, 영적 발전이 멈춘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기능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집니다. 누군가는 가르침으로, 누군가는 섬김으로, 누군가는 위로와 자비로, 누군가는 조용한 충성과 정직으로 주님의 나라를 섬깁니다. 눈에 띄는 초자연적 은사가 반드시 더 높은 영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방언 경험을 무조건 거짓이나 자기기만으로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 기도가 깊은 집중과 헌신을 돕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정을 주님께 드리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면 그것을 자랑하거나 구원의 표지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말씀과 이성의 분별 아래 두어야 합니다. 방언 후에 자신이 더 사랑하고 용서하며 정직하게 살게 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강렬한 체험이라도 말씀의 진리와 체어리티의 삶에서 벗어난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방언이 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더 의지하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으로 이끈다면 그 열매 자체는 귀히 여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성령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가장 본질적인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신비한 음절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되는 선과 진리입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지만, 이웃을 살리는 친절한 말, 잘못을 인정하는 정직한 말,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는 위로의 말,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바르게 전하는 말은 천국의 애정이 지상 언어 안에 담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언어란 단지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애정이 진리의 형식을 입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할 때 가져야 할 가장 안전한 생각은 ‘방패가 생긴다’, ‘응답이 빨라진다’, ‘지혜가 자동으로 쏟아진다’는 확신이라기보다 다음과 같은 태도입니다. ‘주님, 이 기도가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저를 더 겸손하게 하시고, 제 악을 보게 하시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체험 자체를 사랑하거나 영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을 구하게 하십시오.’ 이러한 기도는 방언을 하든 하지 않든 모든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그 기도를 통해 사람의 의지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강의는 방언을 귀히 여기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격려한다는 점에서는 열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하고, 의심을 악한 귀신에게서 온 것으로 단정하며, 방언에 ‘보호’, ‘응답 가속’, ‘지혜 주입’, ‘성화’, ‘돌파’라는 효능을 직접 연결하는 것은 성도들을 체험 중심의 신앙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성령의 역사는 특정 음성 현상에 갇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신성한 진리이며, 인간의 이해를 밝히고, 의지를 움직여 선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가장 확실한 표지는 방언의 유창함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최종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그 방언이 사람을 실제로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방언을 한 뒤에도 더 쉽게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며, 방언하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고, 회개 없이 동일한 악을 반복한다면 그 방언은 거듭남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후에 자신의 잘못을 더 잘 보고,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섬긴다면 그 변화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많은 말보다, 알아들은 진리 하나를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참된 영적 돌파는 입술의 음절이 달라지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에 갇혀 있던 마음이 열려 주님과 이웃을 향하는 데 있습니다.

 

 

 

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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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0, ‘하나님의 속성 중 삼위일체는 정확히 무엇인가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첫머리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강의는 삼위일체를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진지한 시도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교회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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