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25)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 찬132, ‘주의 영광 빛나니’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15절로 20절, AC 글 번호로는 510번에서 51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20)

 

 

제목은

 

마할랄렐, 야렛, 에녹

 

 

이며, 다음은 이 특별한 AC 본문 리딩 예배를 위한 ‘3분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라틴 Arcana Coelestia, 영어 Secrets of Heaven, 天界秘義, 1749–1756,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 주석, 총 10,837개 글)를 따라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섯 날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을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일곱째 날의 안식에 이르러 사랑으로 살아가는 천적 인간으로 이끄십니다.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녔으며,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신의 감각과 ‘프로프리움’(proprium)을 신뢰하면서 이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더 깊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의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하여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다시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창5에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단순한 개인들의 출생과 죽음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의 계승과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에서 셋과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러한 쇠퇴가 단지 인식 능력의 약화가 아니라, 사랑과 선한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할랄렐과 야렛, 그리고 에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읽습니다. 특히 마할랄렐 교회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를 아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야렛을 거쳐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보존하여 후대에 전할 길이 준비됩니다.

 

오늘 특별히 기억할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510-515 요약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5:6-14, AC.496-509를 통하여 셋에서 에노스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다시 게난에서 마할랄렐로 이어지는 태고교회 후속 교회들의 계승을 살펴보았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perception)을 지닌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 이르면서 퍼셉션은 점차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변화를 열매나 씨앗의 가장 안쪽 알맹이에서 그것을 둘러싼 막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AC.503에서는 퍼셉션의 생명이 단순히 선과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 있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다음 말씀인 창5:15-20, AC.510-515를 읽습니다. 여기에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고, 야렛이 다시 에녹을 낳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나이, 자녀들의 출생과 죽음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쓰임의 생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주님께서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15절은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0에 따르면 ‘마할랄렐’(Mahalalel)은 다섯 번째 교회를, ‘야렛’(Jared)은 여섯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로부터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을 거쳐 이제 야렛이라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은 앞선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선과 진리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는 점차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511에서 마할랄렐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 능력이 더욱 개별적이고 명료한 것에서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감에 따라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도 마찬가지로 감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생명 또는 쓰임의 생명이 어떠한가에 따라 퍼셉션 능력도 그러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지난주 AC.503에서 배운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사랑이나 쓰임과 별도로 존재하는 특별한 지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선을 행하는 생명으로 살아 있을 때,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것은 천적인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많이 배운 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에 이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이 먼저 있었으며,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선이 중심이고 진리는 그 사랑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생명의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이 질서에 매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AC.511은 마할랄렐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상태’였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저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진리를 버리거나 거짓을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기쁨이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매우 작은 변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알아 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선을 섬기고, 선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은 실제 쓰임 가운데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진리를 아는 것 자체에서 얻는 기쁨이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보다 더 커지면, 진리와 사랑 사이의 질서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진리는 여전히 진리이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기쁨’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사랑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배우는 목적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무엇이 선인지 더 분명하게 이해하며, 이웃에게 더 지혜롭게 쓰임이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쁨은 선한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더 큰 목적이 되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일이 그 뒤로 밀려난다면, 진리가 사랑과 쓰임을 섬기는 본래의 질서는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퍼셉션이 왜 점차 흐려졌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특별한 영적 감각이나 신비한 인식 능력이 아니라, 사랑과 선으로부터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쓰임의 생명이 약해지면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능력도 함께 약해집니다. 마할랄렐 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한 것은 단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더 사랑하고 무엇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가 하는 내적 질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배우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깊이 공부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앎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로 인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선한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만큼 사랑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이웃을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말씀에 관한 지식이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은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선을 분별하고, 선을 사랑하며,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알게 되었는가?’뿐 아니라 ‘이 진리로 인해 나는 어떤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누구에게 어떤 쓰임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는 마할랄렐이 야렛을 낳은 뒤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2는 이 말씀들의 의미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고 간단히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날들’과 ‘연수’가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이 그 교회에 속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말씀이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같은 표현이 사용되더라도 각 교회가 지닌 진리와 선의 구체적인 어떠함은 그 교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마할랄렐의 자녀들과 죽음 역시 앞서 AC.511에서 설명한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할랄렐이 죽었다는 것은 마할랄렐 교회를 특징짓던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마할랄렐로부터 야렛이라는 다음 교회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창5에서 반복되는 ‘낳음’과 ‘죽음’은 한 교회의 상태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는 과정과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과정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이제 18절은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라고 합니다. AC.513에 따르면 야렛은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지금까지의 교회 계승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앞선 교회들에서는 퍼셉션이 어떻게 점차 쇠퇴했는가가 중심이었다면, 에녹에 이르러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것들이 어떻게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창5의 개요인 AC.464에서 에녹의 역할을 미리 밝혔습니다.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었던 이들이 있었으며, 이것이 ‘에녹’이라는 이름으로 의미되었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직접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퍼셉션한 진리를 따로 모아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배워서 진리를 알아 가는 방식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속 교회들에서 퍼셉션이 점차 흐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처럼 선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는 상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선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선과 진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후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통하여 진리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에녹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퍼셉션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교리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그것을 필요로 할 사람들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 안에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퍼셉션으로부터 나온 진리를 교리로 보존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만 에녹을 곧바로 훗날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녹 역시 태고교회 시대의 계승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 이전에 퍼셉션된 진리들이 후대를 위해 보존될 길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AC.5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야렛 교회에 관하여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입니다. 야렛이라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 교회의 어떠함은 앞선 마할랄렐과 뒤따르는 에녹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렛이 이 두 교회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5의 교회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마할랄렐에서는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진리들에서 오는 기쁨을 더 좋아하는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에녹에서는 이전에 퍼셉션되었던 것들을 교리로 모아 보존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야렛은 바로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야렛을 이해하려면 그 이름만 따로 떼어 어떤 독립적인 특징을 찾으려 하기보다, 마할랄렐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변화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야렛 교회가 이미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거나 특정한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14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야렛이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었으며,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과정과 그것이 교리로 보존되는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가 단절된 사건들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상태들의 연속임을 보게 됩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며, 마침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진리가 보존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화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처음의 퍼셉션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맞추어 선과 진리를 보존할 길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19절과 20절에서는 야렛이 에녹을 낳은 뒤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AC.515는 여기서 앞서 설명한 ‘날들’과 ‘연수’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면서,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매우 긴 수명이라는 문제를 직접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나이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나 므두셀라의 구백육십구 세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장 3절에 나오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을 함께 제시합니다.

 

이것은 창5의 계보를 읽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이 장에 나오는 이름들과 연수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개인의 생애나 수명 기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사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은 각각 교회를 의미하며, 그들에게 연결된 ‘날들’과 ‘연수’ 역시 그 교회들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의 중심은 한 개인이 실제로 962년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야렛으로 표현된 교회의 때와 상태가 말씀의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6:3의 백이십 년을 함께 언급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창5에서는 구백 년이 넘는 수명이 반복되지만, 바로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날이 백이십 년이라고 기록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숫자들을 모두 단순한 생물학적 수명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만 이것이 각 숫자에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가 임의로 계산하거나 추정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15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 연수들이 특정 개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창5의 이름들이 각각 교회를 의미하고 연수도 실제 수명이 아니라면,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뜻일까요? 여기에는 신중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창세기 초반의 계보는 현대적인 연대기나 전기 자료처럼 개인들의 생애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안에 표현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변화까지 아무런 실재가 없는 허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문자적 서술 안에서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의 영적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뜻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문자를 무시하거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 안에 담긴 내적 의미를 읽는 것입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 세를 살았다’는 말씀에서 단순히 그 숫자가 실제 수명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를 계시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창5는 기이할 만큼 오래 살았던 사람들의 족보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가 어떻게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거치며 변화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연수들이 자연적인 시간보다 교회의 때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서, 이 여러 교회가 실제 역사 속에서 얼마 동안 존속했는지, 또는 서로 어느 정도 같은 시대에 존재했는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515가 밝히는 것은 숫자의 속뜻이지 각 교회의 구체적인 역사적 존속 기간이나 공존 기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5의 숫자로 여러 교회의 역사적 연대표를 만들어 내기보다, 그 숫자들을 통하여 말씀께서 드러내시는 교회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의 AC.510-515를 하나로 모아 보면, 창5의 계보에는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랑과 쓰임의 질서 변화’입니다. 마할랄렐 교회에 이르러 진리를 아는 기쁨이 쓰임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버린 상태가 아니라, 진리가 섬겨야 할 사랑과 쓰임보다 진리 자체에서 얻는 기쁨을 더 좋아하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질서의 변화와 함께 퍼셉션도 더욱 일반적이고 흐릿한 것이 되어 갔습니다.

 

둘째는 ‘퍼셉션의 쇠퇴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리적 보존’입니다. 마할랄렐에서 야렛으로, 야렛에서 에녹으로 이어지는 동안 교회의 상태는 계속 변화하였습니다. 특히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의 중간 상태였으며, 에녹에 이르러서는 이전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교리로 만들어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없게 되는 가운데서도, 그 진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될 길이 준비된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통하여 드러나는 영적 역사’입니다. 마할랄렐의 팔백구십오 세와 야렛의 구백육십이 세는 단순한 개인의 수명 기록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가 지닌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누가 몇 년을 살았는가보다 각 교회가 어떤 선과 진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흐름을 함께 바라보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처음의 천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쓰임의 생명은 점차 감소하였고, 그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퍼셉션도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선과 진리의 근원이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달라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달라진 상태를 아시고 다음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이전 교회들이 받았던 선과 진리가 후대에 전달될 수 있도록 보존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에녹의 등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의 완전한 상태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곧바로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때에도, 변화된 상태에 맞추어 그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가 그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실제 삶에서 행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주신 진리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는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며 선한 쓰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이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받은 사랑이 실제 삶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나타날 때, 그 진리는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한 가지 질문 앞에 세워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아는 기쁨과 그 진리로 선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무엇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기쁨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할랄렐 교회에서 나타난 질서의 변화를 자신의 안에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진리를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자비로워지며, 작은 일에서도 이웃에게 선한 쓰임이 되기를 기뻐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상태가 약해지는 때에도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열심과 명료함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아시며, 그 상태에 맞추어 계속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전처럼 분명하게 보지 못할 때에도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가 다시 사랑과 선한 쓰임으로 이어질 길을 열어 주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교리를 통하여 진리를 보존할 길을 준비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창5:15-20은 단순히 마할랄렐과 야렛과 에녹이라는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가 아닙니다. 그 속뜻으로는 인간의 사랑과 퍼셉션이 어떻게 변해 갔으며, 그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 진리와 결합되어 실제로 선한 쓰임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창5:15-20, AC.510-515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아는 기쁨은 선을 행하는 기쁨을 섬겨야 하며,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고 약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 상태에 맞는 다음 길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내며, 우리의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510, 창5: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C.510-511)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And Mahalalel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Jared. (창5:15) AC.510 ‘마할랄렐’(Mahalalel)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섯 번째 교회를 의미하고, ‘야렛’(Jared)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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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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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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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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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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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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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20, AC.510-515 중 리딩 필독 두 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링크들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511, 창5:15, ‘마할랄렐’(Mahalalel)이라 하는 교회의 상태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창5:15) AC.511 퍼셉션의 능력이 감소하여, 더 개별적이고 분명하던 상태에서 더 일반적이고 어두운 상태로 바뀌어 간 것처럼, 사랑의 생명 곧 쓰임새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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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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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20261101, 성찬) 리딩 본문(창5:21-24, AC.516-522)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21-24, AC.516-522를 통하여 ‘에녹’(Enoch) 교회의 특별한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녹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이 퍼셉션했던 것들을 모아 교리로 만들고, 후대를 위하여 보존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특히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다음 주에는 이 특별한 표현의 속뜻을 살펴보면서, 퍼셉션이 점차 사라져 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어떻게 진리를 보존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25(D1)

 

2674, 3, 창5.3, 2026-10-25(D1)-주일예배(창5,15-20, AC.510-515),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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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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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가 관계를 끊을 성경적 근거를 찾는 쪽이라면,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는 관계를 지키고 싶지만 신앙의 차이와 감정의 상처 때문에 마음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저는 오히려 이 두 번째 고민 속에 체어리티(charity)가 시작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할 도리’를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를 좋아해야만 도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불편해도 필요한 안부를 묻고, 아플 때 살피고, 부모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드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가능한 범위에서 돕고,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에서 해야 할 책임을 감당한다면 그것 역시 체어리티의 실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하는 선행은 위선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선한 감정이 완전히 생긴 다음 선을 행하는 과정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이것이 주님 앞에서 옳다’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운데 우리의 사랑 자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속에서는 ‘가기 싫다’, ‘전화하기 싫다’, ‘왜 내가 먼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데도 ‘그래도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판단하여 행한다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합리성’(rationality)과 ‘자유’(freedom)가 작동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에 끌려가는 대신 무엇이 선한지를 보고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참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체어리티는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댁이나 처가에서 ‘우리 신앙을 인정하라’, ‘우리 예배나 종교행위에 참여하라’,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가르치게 하라’고 요구한다면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신앙을 조롱하거나 모욕한다면 ‘이런 대화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경계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그들의 신앙에 동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앞서 요한이서를 살펴보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짓과의 연합을 끊는 것’과 ‘체어리티를 끊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하겠습니다.’ 이 두 문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어려운 것은 바로 그다음입니다. 머리로는 ‘도리를 해야 한다’고 아는데 마음에서는 분노와 불쾌감과 억울함이 계속 올라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실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갈등을 ‘내가 교만해서 그렇다’고 자기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더라도 그 잘못을 붙잡고 ‘그러므로 나는 저 사람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악이 어느 순간 내 안의 악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에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여기서 체어리티는 감정보다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기 어렵더라도 필요한 선은 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으로서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나면 불편하더라도 일부러 모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계를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불행을 바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상당히 큰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지 ‘가족관계를 유지했는가?’가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할 도리를 다한다’는 것을 ‘예전처럼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관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를 줄이면서도 예의를 지킬 수 있고,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식사를 함께할 수 있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도울 수도 있습니다. 전화 한 통, 병문안, 필요한 도움,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모두 가능합니다. ‘친밀함’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같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잘 안 돼’라는 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신앙의 실패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곳에서 거듭남의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말 아무 갈등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신앙을 부정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에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선은 하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감정적으로 원수를 좋아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상대의 악 때문에 나까지 악의 질서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사울과 스데반을 생각하면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더 생깁니다. 내가 상대방의 교리를 명백한 오류라고 판단하더라도 그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사울 안에서 주님께서는 훗날의 바울을 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정통이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고 확신하는 내 안에 사울의 종교적 프로프리움이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영원한 상태는 주님께 남겨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흐리지 않으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들이 잘못했으니 변화시켜 주십시오’만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 거짓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해야 할 선은 버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잘못 때문에 제 안에 미움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으로 자리 잡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것은 하되 할 수 없는 것까지 억지로 떠맡지 않게 하시고, 어디까지 사랑하고 어디서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 분별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기도가 아니라, 그 잘못 때문에 내 영혼까지 함께 흐트러지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계를 얼마나 많이 유지했는가?’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이 관계 안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행동했는가?’입니다. 때로는 찾아뵙는 것이 그 답일 수 있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분명하게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상대방을 벌주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선과 진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다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라는 말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신앙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랑까지 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감정은 아직 따라오지 않더라도 주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선은 행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한 줄로 압축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어도 내가 해야 할 선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의 요한이서 이야기와 연결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거짓에는 참여하지 않되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는 것, 경계는 세우되 미움으로 절연하지 않는 것.’ 아마 바로 그 어려운 중간 지점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실제 삶의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SL.13,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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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 요한이서의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족 절연을 명령하는가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실제로 요한이서 1장 10-11절은 상당히 강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이 말씀만 떼어 놓으면 ‘잘못된 교리를 가진 사람과는 집안의 관계까지 끊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해 보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시댁, 혹은 처가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 말씀이 절연을 정당화하는 매우 강력한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서 전체의 문맥과 성경의 다른 말씀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함께 놓고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요한이서가 경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아야 합니다.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1:7)고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9절),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10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직접적인 상황은 단순히 ‘나와 교리가 다른 혈육, 혈연, 친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거짓 가르침을 가지고 신앙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11절의 이유도 중요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핵심은 사람과 인간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의 ‘집에 들인다’는 표현도 오늘날 누군가를 집에 잠깐 방문하게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읽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모였고 순회 교사와 전도자들이 신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가르쳤습니다.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절을 넘어 그의 사역을 후원하고 그에게 활동 기반을 제공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명령에는 ‘거짓 교사를 교회의 교사로 받아들이고 그의 활동을 지원하지 말라’는 매우 실제적인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면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원하지 말라’에 훨씬 가깝습니다.

 

특히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러므로 그 사람과 인간관계를 완전히 끊어라’로 확대할 때는 성경 전체와 충돌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불신자와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뜻으로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5:10). 더구나 부모와 가족을 공경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 한 구절을 근거로 ‘이단으로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인간적 사랑과 가족으로서의 모든 책임까지 중단해도 된다’는 보편적 원칙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교제’와 ‘동조’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의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으로 만나고 안부를 묻고 어려울 때 돕는다고 해서 그의 신학적 주장을 승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 사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미워하거나 가족관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charity)를 행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상대방이 믿는 모든 것을 옳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상대방 안의 선을 사랑하고 그의 참된 유익,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유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에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교리가 틀렸으므로 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진리를 지키려다가 체어리티를 잃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단’이라는 판단 자체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사울과 스데반을 살펴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 편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잘못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길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단 판정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짓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고 저 사람은 이단이다’라는 확신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되는 순간,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와 ‘그러므로 저 사람과 가족으로서의 관계도 끊어야 한다’ 사이에는 상당히 큰 거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댁의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집의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고, 자녀에게 그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세울 수도 있으며, 반복적인 개종 압박이나 모욕이 있다면 만남의 방식과 빈도를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자녀·형제의 인간적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을 요한이서 10절이 명령한다고 말한다면, 본문의 적용 범위를 상당히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반대편의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가족이니까 무조건 만나야 한다’는 것도 성경적 원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 폭력이나 학대, 지속적인 모욕, 강압적인 종교행위, 자녀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행동이 있다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강한 관계 제한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들은 이단이니까 요한이서가 절연하라고 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악과 해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그 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교리적 불일치’와 ‘실제적인 해악’을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문제에는 ‘프로프리움’(proprium)의 위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프로프리움은 ‘내가 싫다’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로, ‘나는 만나고 싶지 않다’를 ‘성경이 만나지 말라고 한다’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신앙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지키기 위해 이 관계를 제한하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과 분노와 상처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정당화하고 있는가?’ 이것은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분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울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종교적 확신은 때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이 붙으면 평소에는 하지 못할 냉혹한 행동까지 의로운 행동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이 정말 주님의 뜻인지 판단할 때에는 ‘내가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그 해석이 말씀 전체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서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오히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까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거짓을 후원하지 말고, 관계는 유지하더라도 악한 일에는 참여하지 말며, 체어리티를 행하되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사랑만을 내세워 모든 거짓을 용인하는 것도 잘못이고, 진리를 내세워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따라서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니까 연을 끊어도 돼. 요한이서에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서는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후원하여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이지, 교리가 다르다고 판단되는 가족과 모든 인간적·가족적 관계를 끊으라는 일반적인 절연 명령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요한은 거짓과의 연합을 끊으라고 했지, 체어리티까지 끊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것, 바로 그 둘을 함께 지키는 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SL.14,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시댁이, 처가가 이단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할 도리는 다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 진리를 지키면서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이 말에는 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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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12,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던 사울 - 열심보다 중요한 진리 사울(사도 바울의 회심 전 이름)은 하나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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