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3 심화

3.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의 번제에서도 나오고 양이나 염소의 번제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제물을 어차피 모두 불태울 것이라면 왜 굳이 내장과 정강이를 먼저 물로 씻어야 했을까요? 위생을 위한 절차라고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가 이 부분에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49(29:17)는 ‘내장을 씻는 ’이 가장 낮은 것들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속 사람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자연적 삶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낮은 것들은 자연계와 감각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자극과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감각의 즐거움과 오류가 쉽게 들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어 AC.10050(29:17)은 ‘정강이’를 자연적 인간의 외적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내장과 정강이를 씻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생각이나 종교적 감정만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낮고 바깥에 있는 자연적인 삶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변화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기도할 때 감동을 받으면 자신이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장과 정강이까지 씻으라’고 합니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바깥의 것까지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과 정강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문자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 돈을 사용하는 방식, 가족에게 보이는 태도,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행동, 오래 굳어진 습관, 자기 이익이 걸렸을 때 내리는 선택,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는 마음, 몸의 감각적 즐거움을 다루는 방식 같은 것들입니다. 신앙생활과 별개라고 생각하기 쉬운 바로 이런 영역이 자연적 인간의 실제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물로’ 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씻는 의식이 내적 정결을 표상하며, 물은 인간을 정결하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앙의 진리와 관계한다고 설명합니다(AC.9088, 40:31). 따라서 우리의 자연적 삶을 씻는 물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되는 교리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어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피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이다’라고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의해 씻긴다는 것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자기 삶을 살피고, 악이라고 알게 된 것을 실제로 피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악임을 아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원한을 내려놓기 위해 싸우는 것도 다릅니다.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것과 불편한 이웃을 실제로 선하게 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에 내려와 행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씻음’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장과 정강이를 없애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몸, 감각, 일, 재산, 인간관계, 취미와 일상생활 자체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연적 인간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정결하게 하셔서 속 사람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리고 씻긴 내장과 정강이는 마침내 다른 부분들과 함께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이것이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가장 낮고 바깥에 있어서 더럽혀지기 쉬웠던 것들이 진리의 물로 씻긴 후에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번제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신앙과 일상의 거리는 오히려 좁아집니다. 교회에 있을 때의 나와 집에 있을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고, 기도할 때의 나와 돈을 사용할 때의 내가 달라서는 안 되며, 말씀을 읽을 때의 나와 사람을 대할 때의 내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속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가장 바깥의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레위기 1장의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으라’는 짧은 규례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낮고 일상적인 부분까지 진리로 씻어 당신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부분까지 사랑의 불 위에 놓일 때 비로소 번제는 ‘전부’가 됩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3 1 심화 3)

 

 

 

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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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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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죽고 피를 흘린다는 모습이 주님의 죽음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구약의 희생제사를 ‘죄인이 받아야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사건의 예표’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번제는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도 희생제사와 번제의 최고 의미가 주님께 관한 것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번제와 예수 그리스도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는 매우 깊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는가?’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776(22:2)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말씀을 해설하면서 ‘번제로 드리는 ’이 주님께서 자신을 신성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께서 시험과 승리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신 과정과 연결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영화’입니다.

 

따라서 번제의 최고 의미에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성부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시고 성자께서 죄인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지옥의 모든 세력과 싸우시고 시험을 이기시며,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구속과 영화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그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며 가장 큰 시험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벌대속의 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성부는 진노하여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고 성자는 그 진노를 대신 받아 인간을 구해 내시는 분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구속을 이루신 분은 한 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성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붙잡고 있던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고, 인간이 다시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질서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신적 위격을 만족시키기 위한 형벌의 지불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감당하신 마지막 시험과 승리의 절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1장의 번제와 십자가의 관계도 훨씬 깊어집니다. 번제물 전체가 불 위에 드려지는 모습은 단지 ‘누군가 대신 죽는다’는 한 장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에 결합시키시는 영화의 전 과정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번제와 희생제사의 세세한 의식들이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AC.10057, 29:18).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영화와 우리의 거듭남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을 정복하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모든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수 있는 신적 생명과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되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거듭납니다.

 

그래서 희생제사와 번제는 최고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이고,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인간 안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점차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통하여 인성을 신성과 완전히 하나 되게 하셨고,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시험을 통과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 자체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다만 그 ‘우리를 위하여’를 ‘우리가 받아야 형벌의 정확한 양을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로만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지옥과 싸우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시험을 이기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 다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를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성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희생당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아니라, 친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화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 안에서도 거듭남이라는 또 하나의 번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하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주님의 영화가 우리 안에서는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번제와 십자가를 함께 바라볼 때 드러나는 더 깊은 연결입니다. (SW.3 1 심화 2)

 

 

 

SW.3 심화 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SW.3 심화3. ‘왜 내장과 정강이까지 물로 씻어야 했을까?’ 레위기 1장의 번제 규례 가운데 특별히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라는 규정입니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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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심화 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SW.3 심화1. ‘왜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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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명하셨을까?’

 

레위기 1장을 처음 읽는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 하나님께서는 굳이 동물을 죽여 제물로 드리게 하셨을까?’입니다. 소와 양과 염소의 목을 따고,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몸을 각 뜨고, 그것을 불에 태우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이런 동물의 죽음과 피와 불을 원하셨던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제사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22(8:20)는 번제와 희생제사가 내적 예배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와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가 각각 서로 다른 천적인 것들을 표상했으며, 크게 보아 짐승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새들은 신앙의 진리를 표상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짐승 자체가 아니라 그 짐승들이 표상하고 있는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사랑과 체어리티와 신앙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 자체에서도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삼상15:22). 미가 역시 수많은 번제물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을 말씀합니다(6:6-8). 호세아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십니다(6:6). 스베덴보리가 AC.922(8:20)에서 바로 이러한 말씀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외적 제사는 내적 예배를 담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적인 제사 형식이 필요했을까요? 고대의 표상교회에서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자연계의 사물과 행위들을 통해 표상되었습니다. 제단과 불과 피와 물,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들은 각각 천국의 실재를 표상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의 세세한 규례도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의 각 과정 안에 ‘천국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설명합니다(AC.10057, 29:18). 최고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주님의 영화에 관한 것이며, 상대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정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는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고, 화를 풀기 위해 동물을 죽여 피를 보여 드려야 한다’는 구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피는 신적 진리를 표상하고(AC.10046, 29:16),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과 관계하며, 제단의 불은 사랑을 표상합니다. 짐승의 종류들 역시 인간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애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 전체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고, 선과 진리가 그 안에 심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삶을 이루는 과정을 가시적인 의식으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AC.10143(29:42)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희생제사와 번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 선과 진리의 심음,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 전체가 거듭남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궁극적으로 짐승에게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무엇을 정결하게 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하시며, 어떻게 인간을 당신과 결합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동물의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그 외적 의식이 표상하고 있던 내적 실재였습니다. 인간이 악을 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며, 체어리티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제사였습니다. 외적 제사가 그 내적 실재와 분리되는 순간 제사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제사를 책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악을 행한다면 제사의 표상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소와 양과 비둘기를 제단에서 불사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레위기의 제사가 우리와 무관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외적 표상이 가리키던 실재를 우리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적인 삶까지 주님의 질서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짐승의 번제는 사라졌지만 그것이 표상하던 ‘살아 있는 예배’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을 읽으며 ‘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명하셨을까?’라고 묻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피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표상되는 인간의 거듭남이었습니다. 제단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참된 제사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는 것이며, 참된 번제는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되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SW.3 1 심화 1)

 

 

 

SW.3 심화 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SW.3 심화2. ‘번제는 정말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레위기 1장의 번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흠 없는 제물이 사람을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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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3, 레1, ‘전부를 불살라 - 번제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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