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nine hundred and five years, and he died. (5:10, 11)

 

AC.504

 

여기서도 이와 같이 ‘날’(days)과 ‘해’(years)의 숫자들, 또한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그리고 그가 ‘죽었더라’(dying)는 말은 앞에서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Here in like manner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and also “sons and daughters,” and his “dying,” signify like things.

 

 

해설

 

이 글은 새로운 설명을 더하기보다, 지금까지 확립된 해석의 ‘일관성을 다시 확인하는 결론 문장’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해석할 때마다, 혹시라도 독자가 어느 지점에서 문자적 이해로 되돌아갈 여지를 차단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으로, 동일한 해석 원리가 예외 없이 적용됨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days)과 ‘(years)의 숫자들은 앞서 누차 설명된 대로, 연대적 시간의 길이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교회가 거쳐 간 ‘상태의 지속과 변화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AC.504는 이 원리가 이미 충분히 확립되었음을 전제하고, 더 이상의 반복 설명 없이도 독자가 동일한 틀로 읽어야 함을 요구합니다. 이는 해석의 피로를 줄이기 위한 배려이자, 동시에 해석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자녀들’, 그러니까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역시 동일합니다. 여기서도 그것들은 개인의 자녀가 아니라, 해당 교회 상태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들’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진리와 선들이 언제나 교회의 상태에 상응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AC.504는 이 상응 원리가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다시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반복하면서도, 점점 더 간결하게 처리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제 이 표현을 들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퍼셉션의 소멸’을 떠올리도록 훈련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이 글의 특징은, 설명의 축소가 곧 의미의 축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504는 앞선 해석들이 단편적 설명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해석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날, 해, 자녀들, 그리고 죽음이라는 네 가지 요소는 더 이상 각각 따로 설명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함께 작동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단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설교자는 모든 구절을 매번 새롭게 설명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반복 속에서 형성된 이해를 신뢰합니다. 이미 충분히 설명된 원리는, 이후에는 간결하게 확인하는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태도입니다. 이는 청중을 존중하는 해석 방식이기도 합니다.

 

또한 AC.504는 창세기 5장이 단조로운 족보처럼 보이는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반복되는 표현들은 지루함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영적 구조가 여러 교회 상태에 걸쳐 적용됨’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반복은 변화 없음의 표시가 아니라, 동일한 생명 원리가 서로 다른 상태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창세기 5장을 하나의 긴 이야기로 읽게 됩니다. 각 인물, 각 교회 상태는 다르지만, 그들을 관통하는 해석의 열쇠는 동일합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자녀들을 낳고, 퍼셉션이 흐려질 때 교회는 죽음에 이릅니다. 날과 해는 그 과정을 표시하는 표지일 뿐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반복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신앙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전혀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준이 다른 상황에 적용’됩니다. 무엇이 생명인가, 무엇이 죽음인가라는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퍼셉션이며, 퍼셉션의 분명함과 소멸 여부가 모든 것을 가릅니다.

 

결국 AC.504는 말수가 적지만, 그만큼 강력한 확인을 제공합니다. ‘여기서도 이와 같이’라는 한마디 안에, 창세기 5장을 관통하는 모든 해석 원리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단을 지나며 독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같은 눈으로 다음 절들을 읽을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AC.503, 창5:9, ‘태고교회 퍼셉션 능력의 비밀’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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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창세기 본문 중 에서가 자기 아내들을 구하는 장면들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 3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27:46)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28:6-9)

 

그리고 아래는 이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서의 두 결혼(헷 족속 유딧, 바스맛)과 그로 인한 이삭, 리브가 마음의 ‘근심’, 그리고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까지 말하는 탄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방(헷)과의 혼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속뜻의 흐름에서는 ‘가정 내 갈등’ 자체가 핵심이라기보다 ‘교회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합(혼인)’이 어떻게 흐트러지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혼인’은 단지 가족사(史)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신앙/교리)가 결합하여 생명이 생겨나는 상태’를 대표적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딸(아내)을 맞이했는가’는 ‘어떤 종류의 정서, 욕구, 교리, 삶의 방식과 결합했는가’를 드러냅니다.

 

에서(자연적 선, 혹은 자연인의 강건한 에너지에 가까운 것)는 본래 ‘야곱(진리의 차원, 교리, 질서, 분별)’과 한 사람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연의 힘(에서)’은 ‘진리의 인도(야곱)’를 받아 ‘선의 도구’가 될 때 복된 자리에 놓입니다. 그런데 창26–28의 이 결혼 장면들은, ‘자연적 힘이 진리의 인도를 싫어하거나(혹은 무시하거나)’, 그 대신 ‘바깥의 것(외적 매력, 세상적 기준, 감각적, 자기중심적 기쁨)’과 결합해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입니다. 속뜻으로 말하면, ‘속 사람(이삭의 선, 리브가의 진리)’이 ‘겉 사람(에서의 삶)’의 잘못된 결합과 선택으로 인해 깊은 불일치와 불쾌, 곧 ‘양심의 고통’과 같은 상태를 겪는 것입니다.

 

특히 ‘헷 족속’은 단순히 ‘민족이 이방이다’라는 표지가 아니라,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주님과의 결합에 어긋나는 어떤 요소’—다시 말해 ‘내적 예배(주님 사랑)와 연결되지 않은 외적 예배’, 혹은 ‘진리의 빛이 아닌 감각과 습관이 주도하는 삶의 방식’ 같은 것을 대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적 삶이 자기에게 편하고 좋아 보이는 방식(외형상 그럴듯한 것)과 결합하는데, 그것이 주님께로 향한 내적 결합을 깨뜨리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결혼이요 가정의 확장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생명(선과 진리의 혼인)이 아닌 다른 결합’이 됩니다. 그러니 리브가가 ‘내 삶이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된 감정 표출이 아니라, ‘진리(리브가)의 입장에서 보아, 선과 진리의 계승이 끊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이라는 대목은, ‘진리의 계열(야곱)이 외적, 감각적 결합을 택하면, 교회(한 사람 안의 교회)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리브가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맞게 하려는 것’이 단지 ‘민족 순수성’이나 ‘좋은 혼처 찾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진리가 자기에게 합당한 정서, 선의 바탕을 얻어와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밧단아람(아람, 라반의 집)은 흔히 ‘외적 지식들, 기억-지식들, 교리적 재료들’이 모여 있는 영역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즉 야곱이 그곳으로 가서 아내를 맞는다는 것은, ‘진리(야곱)가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선의 바탕(애정, 삶의 습관, 실천의 토양)을 얻어와 결합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나안 사람의 딸’과 ‘헷 사람의 딸’은 ‘겉은 종교, 도덕, 문화로 포장되었으나 내적이 주님께로 열려 있지 않은 결합’을 대표할 수 있고, 반대로 ‘밧단아람에서의 결합’은 ‘진리가 주님의 섭리 아래서 순서를 갖추어 선과 결합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됩니다.

 

28:6-9에서 에서가 보이는 반응은 아주 인간적으로도 설득력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버지가 기뻐하지 못하네. 그럼 다른 방식으로라도 맞춰볼까?’ 그래서 에서는 ‘가나안 딸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보고,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수정’이고 ‘효도’ 같은 동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더 섬세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에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의 뜻(내적 이유)’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분(외적 신호)’에 머무를 위험이 큽니다. 즉 ‘내적 회개’가 아니라 ‘외적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가나안이 안 된다면 이스마엘 쪽은 어떨까?’ 하는 선택은, ‘내적 진리의 인도’가 아니라 ‘대안 탐색’으로 움직이는 자연인의 전형적인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마엘 계열은 성경 전체 상징 흐름에서 종종 ‘영적인 것과 분리된 합리성/지식, 혹은 외적 신앙과 내적 사랑의 불일치’ 같은 것을 대표하는 방향으로 읽힙니다(물론 문자적으로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자체로 단순 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본처들 외에’ 또 더한다는 표현까지 보면, 이것은 ‘정리와 순서의 회복’이 아니라 ‘혼합의 확대’에 가깝습니다. 속뜻에서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둔다’는 표상은, ‘한 삶이 여러 종류의 애정/교리를 뒤섞어 품는 상태’, 곧 ‘일관된 중심이 없는 결합’을 드러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시도는 ‘근본 문제의 치유’가 아니라 ‘겉모양의 조정’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 기쁨이 ‘주님 안에서의 질서’가 아니라 ‘관계의 표면’에서만 판단되면, 결과적으로 ‘내적 사람의 근심’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대목들을 설교자의 관점으로 풀어내면, 성도들에게는 꽤 현실적인 거울이 됩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며 감각적 선택을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눈치 보고 반응 보고, 다른 처방을 덧대는 방식’도 동일하게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주님이 다루시는 것은 ‘내가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과 결합했는가’입니다. 즉 ‘내 삶(자연적 욕구, 일상 습관, 즐거움, 자존심, 효율, 성공욕)’이 ‘주님의 진리’와 결합해 주님께로 향하는가, 아니면 ‘겉으로 그럴듯한 외적 기준’과 결합하여 내적 생명을 갉아먹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의 ‘근심’은 단지 부모 마음이 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적 교회가 외적 삶의 결혼 선택 때문에 숨이 막히는 상태’를 그립니다.

 

정리하면, (1) 에서의 헷 족속 결혼은 ‘자연적 힘이 외적, 감각적 삶의 방식과 결합하여 내적 선, 진리와 어긋나는 상태’를 보여주고, 그 결과가 (2)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곧 ‘내적 양심의 고통,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불쾌’로 나타납니다. (3) 리브가의 탄식과 야곱의 파송은 ‘진리가 합당한 선의 바탕과 결합하도록 주님이 순서를 세우시는 섭리’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4)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추가로 맞이하는 장면은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연인의 움직임’과 ‘혼합의 확대’라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단락들은 ‘가정사’라기보다 ‘한 사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이 어떤 길로 가는가’—‘주님 중심의 결합인가, 외형 중심의 결합인가’를 깊이 묻는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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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부터 생겨나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행의 행복과 기쁨이 없이는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가지지 못하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에 의해 그것은 생명을 받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그로부터 나온 신앙의 생명은, 쓰임새(use)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 곧 쓰임새의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무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곧 유용한 사람, 쓰임새의 사람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왜 ‘살아 있는 퍼셉션’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핵심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히 ‘옳고 그름을 아는 능력’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행복과 기쁨을 포함하는 능력’입니다. 이 기쁨이 빠진 퍼셉션은, 겉모습은 남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하나 일어납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 자체에 있지 않고, ‘행함에서 느끼는 기쁨’에 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행복과 기쁨이 없으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는 지식 중심 신앙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그것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앎은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생명을 ‘쓰임새를 행하는 가운데 있는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쓰임새(use)는 단순한 기능 수행이나 사회적 역할을 뜻하지 않습니다. 쓰임새는 ‘사랑에서 비롯되어 타인을 향해 흘러가는 선과 진리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닌, 자신의 생명이었기 때문에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자체가 쓰임새였고, 그 쓰임새 안에서 생명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생명은 쓰임새로부터, 쓰임새에 의해,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생명이 어떤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와 작용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뜻합니다. 생명은 저장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흘러갈 때 유지됩니다. 그래서 무익한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익한 것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결국 버려집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서 태고의 사람들은 주님의 닮음들, 즉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끊임없이 쓰임새로 흘러갑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도 사랑 안에서 살며, 그 사랑을 쓰임새로 드러냈기 때문에, 주님의 닮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닮음 때문에, 퍼셉션의 능력에 있어서 주님의 형상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퍼셉션은 추상적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 방식에 참여한 결과’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의 능력을 다시 정의합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능력이며,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말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로 분별하고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 분별은 사랑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지 않고,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앎은 행함을 위해 존재하며, 행함이 곧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퍼셉션의 생명입니다.

 

이 글은 오늘날 신앙의 상태를 매우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로 평가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저 아는 데서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의 경우, 퍼셉션은 이미 생명을 잃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봉사와 사역에 대한 이해도 바로잡아줍니다. 쓰임새는 억지로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표현’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쓰임새를 통해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교회가 지녔던 독특한 생명력입니다.

 

결국 AC.503은 퍼셉션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게 합니다. 퍼셉션은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이되, 그 생명은 선과 진리를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에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살아 있을 때, 퍼셉션은 살아 있고,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이 기쁨이 사라질 때, 퍼셉션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통찰은 태고교회의 이해를 넘어, 오늘 우리의 신앙과 사역을 깊이 점검하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AC.504, 창5:10-11,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Enosh lived after he begat Kenan eight hundred and fifte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Enosh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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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2, 창5:9, ‘사람’(아담), ‘셋’, ‘에노스’, 첫 세 교회와 이후 교회들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라 하는 이 세 교회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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