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8.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must be instructed in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AC.188)

 

마지막 문장에서 이 전환의 핵심이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이는 사후에 모든 것이 즉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 따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무지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생전의 삶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던 부분은 이후의 교육을 통해 보완되어야 합니다. (AC.188 해설)

 

그러면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 그때 스베덴보리가... , 그때 아무개 목사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전하던 것들에 대해 미리 진작 좀 귀 기울일 걸...’들 하나요?

 

 

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읽어 보면, 그런 경우는 분명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것이 흔히 생각하는 식의 아이고,내가 왜 그때 그 말을 안 들었을까!’ 하는 후회라기보다는, ‘이제야 알겠다’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뒤에도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지상에서 들었던 설교, 읽었던 책, 만났던 사람들, 심지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들까지도 내면에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생전에 어떤 진리를 접했던 사람은 사후에 그것이 다시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 내가 전에 들은 적이 있구나 하고 알아보게 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죽은 뒤 천사들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자신이 지상에서 들었던 말씀이나 진리를 떠올리는 영들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동시에, 예전에 들었지만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 그때 스베덴보리가...’, ‘, 그때 아무개 목사가...’라는 반응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려 하셨던 진리입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사후에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진리를 아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생전에 스베덴보리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을 사랑했고, 진실을 사랑했고, 양심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후에 오히려 매우 기쁘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 이것이 내가 막연히 사랑하던 것의 참모습이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스베덴보리를 수십 년 읽고도 자기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면, 사후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반드시 더 쉽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AC.188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정보 부족을 채우는 교육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삶과 애정이 무엇을 사랑해 왔는지를 진리의 빛 속에서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목사님의 질문을 읽으며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목사님께서는 지난 여러 해 동안 거의 매일같이 AC를 번역하고 해설하셨습니다. 조회 수가 많지도 않았고, 크게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때로는 누가 이걸 읽을까 하는 마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후 세계에서 어떤 영혼이 천사들의 가르침을 들으며 , 내가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 그때 누군가가 상응에 대해 설명했었는데...’, ‘, 그때 창세기 해설에서 이런 말을 했었는데...’ 하고 떠올린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그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무개 목사’라는 이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나를 준비시키고 계셨구나’라는 사실을 먼저 보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도, 목사님도, 그리고 수많은 설교자와 교사들도 결국은 그 준비 과정에 사용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도구들의 수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에서 행한 선한 봉사와 사랑의 수고가 잊히지 않는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따라서 어떤 영혼이 사후에 진리를 배우면서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이 길을 미리 알려 주었었구나 하고 깨닫는 일은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님께서 수년 동안 해 오신 AC 번역과 해설 작업은 바로 그런 종류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씨앗은 뿌릴 때는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어디에 떨어졌는지가 드러나니까요.

 

 

 

AC.188, 창3 앞,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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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8

 

그의 그다음 삶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가 그 말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His subsequent life is represented by his dismounting from the horse and walking on foot, because he cannot make the horse move from the place;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must be instructed in the knowledges of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이 단락은 AC.187에서 제시된 상징을 한 단계 더 진행시키며, 사후 여정이 본격적인 ‘배움의 단계’로 들어감을 보여 줍니다. 말에서 내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이전에 가능하다고 느꼈던 힘이나 자율성이 실제로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음을 깨닫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말 위에 있었으나, 그 말을 움직일 수 없었고, 결국 내려와 자신의 발로 걷게 됩니다.

 

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이는 이해의 능력, 곧 사고의 힘이 아직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님을 뜻합니다. 사후 초기에는 인간이 생전에 쌓아온 사고 습관이나 지적 능력을 그대로 사용하여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이해가 아직 생명과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걷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걷는 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삶의 실천, 곧 의지와 행위의 차원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제 사후의 삶이 단순한 인식이나 느낌의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제 관찰자나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배움의 과정 안으로 들어간 존재가 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 전환의 핵심이 분명히 제시됩니다.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이는 사후에 모든 것이 즉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서에 따라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무지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생전의 삶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던 부분은 이후의 교육을 통해 보완되어야 합니다.

 

이 단락은 결국, 사후의 삶이 자동적인 완성이나 즉각적인 충만이 아니라, 계속되는 성장과 학습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말에서 내려 걷는 모습은 겸손의 시작이며, 자신이 아직 배워야 할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각 사람이 이후 어디로 향하게 될지가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AC.188, 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AC.188.심화 1.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암시됩니다. and it is insinuated to him that 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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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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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7.심화

 

1.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한 젊은이가 말 위에 앉아 그것을 지옥을 향해 몰고 있으나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by a young man sitting on a horse and directing it toward hell, but the horse cannot move a step. (AC.187)

 

말 위에 앉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은, 인간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향적 성향, 곧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의 흔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시점의 인간이 아직 그러한 방향으로 실제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보호와 질서 안에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을 향한 가능성은 상()으로는 나타나지만, 그것이 곧바로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AC.187 해설)

 

자신의 이런 영적 실상을 정작 본인이 지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의 영으로서의 첫 출발 모습이 이런 상태라는 기술 앞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옷깃을 여미게 된다’는 느낌은 AC.187을 바르게 읽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반응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죽은 사람의 영광스러운 첫 출발을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인간 본성에 대한 매우 냉정한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AC.186에서는 방금 전까지 밝은 흰빛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변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온 기쁨과 행복이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187에서는 갑자기 젊은이가 말을 타고 지옥을 향해 가려 한다’는 상이 나타납니다. 이 전환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천사들의 보호 아래 깨어나더라도 자신의 own,  proprium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사람이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AC.186의 흐름상 그는 방금 영원한 생명에 들어온 기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지옥을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 본성을 얼마나 깊이 보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여기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말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 안에 악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동시에 주님의 보호도 함께 보여 줍니다. 방향은 지옥을 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의도는 있을 수 있으나 실행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가능성은 드러나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 죽은 직후에 곧바로 자기 본성의 가장 깊은 층까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그 후에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마치 의사가 중환자를 수술대에 올리자마자 모든 치료를 한꺼번에 하지 않고,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덧붙이신 정작 본인이 지각하는지는 모르겠다’는 생각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실 AC.187의 문맥을 보면, 이것은 그 사람 자신이 의식적으로 나는 지금 지옥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라기보다, 그의 상태가 영계의 상응 속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을 젊은이로 보고 말을 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상 전체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가능성과 성향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거의 모릅니다. 주님께서 조금만 빛을 비추시면 놀랄 만큼 많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그 사랑들 때문에 즉시 멸망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움직이지 못하듯, 주님의 섭리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187은 인간의 비참함보다 주님의 보호를 더 크게 보여 주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안에는 여전히 지옥을 향할 수 있는 방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을 아직 놓지 않으십니다. 말은 지옥을 향해 서 있지만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목사님께서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고 하신 그 반응이 AC.187이 의도한 가장 건강한 반응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아, 나도 내 안에 저런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오히려 이 장면을 더 깊이 이해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겸손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 아래 있는 인간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AC.187, 창3 앞, 생명력 넘치는 ‘젊음’의 상태에서 출발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7 그가 다음으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이끌려 가는 것은,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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