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왕래하며 가장 놀라워했던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배우자였던 사람들, 혹은 영적으로 결합된 부부들이 천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습을 보고, ‘결혼’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기록합니다.

 

 

1. 천국의 부부는 서로를 닮아 간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부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이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얼굴 생김새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 기운, 눈빛, 마음의 색깔이 서로 비슷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지만, 마음의 결합 속에서는 하나가 된다.’(‘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 후반부 요지) 이 ‘닮아감’은 억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서로의 선(善)과 진리(眞理)가 하나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상에서 말하자면, 너무 오래 함께 살아서 마음의 온도가 같은 사람들, 혹은 서로를 미리 알기라도 하듯 마음이 통하는 부부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2. 천국의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에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부부가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같은 진리, 같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보통 ‘배우자를 사랑한다’, ‘배우자에게 끌린다’가 출발점이지만, 천국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주님을 중심으로 동일한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 사랑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구조입니다. 즉, 영적 관점에서는 내가 주님을 향한 방향을 갖고 있고, 상대도 같은 방향을 갖고 있을 때, 그 둘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결혼을 ‘주님 안에서의 둘의 결합’이라고 부릅니다.

 

 

3. 천국의 부부 일치는 겉으로 보이는 조화가 아니라 속에서 일어난 결합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부부들이 겉으로 보기엔 조화롭고 평온하지만, 그 조화는 단순히 정서적 친밀감이나 성격 궁합 때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선과 진리를 통해 결합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기보다 갈등의 근원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지상의 결혼은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

 

지상에서는 서로 다른 배경, 성격, 상처로 인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 자연입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입니다.

 

천국의 결혼은 이미 성화된 두 마음의 결합

 

천국에서는 서로의 악과 상처, 오해의 뿌리가 제거된 뒤에 서로를 만나기 때문에 지상에서 흔한 갈등의 씨앗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부부는 억지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같아져서 하나가 됩니다.

 

 

4. 천국의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은 고요하지만 깊은 환희가 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부부들을 보며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은 말수가 적지만, 너무나 깊은 기쁨이 내면에서 흐른다.’ 그들의 기쁨은 흥분이나 큰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따뜻한 빛 속에 오래 있었던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된 기쁨입니다. 그는 이 기쁨을 ‘내면의 고요 속에서 우러나는 환희’라고 묘사합니다. 이것이 천국 부부의 특징입니다. 서로 말이 많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기 때문에 침묵조차 평안의 교류가 됩니다.

 

 

5. 스베덴보리를 감동시킨 장면, 손을 잡고 걷는 천국의 부부

 

스베덴보리는 어느 천국 사회에서 부부가 함께 산책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손을 가볍게 잡고,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천국의 정원을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영혼의 결합이란 무엇인가를 아주 깊이 깨닫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장면은 스베덴보리 생애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깊은 인상을 남긴 순간들 중 하나였습니다.

 

 

6. 지상의 결혼에 대한 실제적 메시지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부부를 본 뒤, 지상에서 결혼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남깁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천국 결혼의 준비 과정이다

 

지상에서는 갈등, 상처, 오해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겪으며 서로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된다면 그 결혼은 이미 천국적 결혼의 씨앗이 됩니다.

 

부부의 가장 큰 일치는 마음의 방향성이 같아지는 것

 

성격도, 취향도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향한 방향만 같으면 천국에서 ‘진짜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부부의 사랑은 죽음을 넘어간다

 

천국에서 부부가 다시 만나는 이유는 ‘법적 부부였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영적으로 결합된 부부는 죽음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SC.63, ‘AI의 발전과 상관없이 나는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유튜브를 통해 AI의 엄청난 발전을 보면서 불현듯 든 생각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ChatGPT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대략 10년쯤 걸리겠지 하며 하고 있는, 이 스베덴보리 저작 번역의 일이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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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냥 깨달아지고 납득되는 걸 이렇게 표현한 건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99에서 말하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것은 단순히 , 이해가 된다’, ‘납득이 된다’는 인지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측면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생명 쪽에서부터 이해가 열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안에서부터 질서를 잡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바깥에서 정보를 받아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을 떠올립니다. 책을 읽고, 설명을 듣고, 비교하고 판단해서 이게 맞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지요. 이건 기억 지식  이성  이해’로 올라가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AC.99에서 말하는 것은 그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먼저 어떤 생명의 흐름’, 곧 선과 진리의 감각이 들어오고, 그것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이해, 이성, 기억 지식의 영역을 안에서부터 밝히고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전혀 못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이게 이거였구나 하고 열리는 일이 생깁니다.

 

여기서 신앙을 통하여’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앙’은 단순히 교리를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살려고 할 때’, 곧 체어리티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할 때, 그때 그 사람 안에 주님과 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그 통로를 따라 인플럭스(influx), 즉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옵니다. 이 흐름이 바로 이해를 밝히는 실제 원인입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는 머리로 백 번 설명을 들어도 닫혀 있다가, 삶이 조금 바뀌는 순간 갑자기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이걸 그냥 깨달아지는 것 아닌가요?’라고 느끼신 것은 아주 정확한 감각입니다. 맞습니다,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나타납니다. 그런데 차이는 그 깨달음의 출처’에 있습니다. 단순한 지적 깨달음은 비교, 추론, 논증에서 나옵니다. 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빛’이 이해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안다’고 하지요. 이때의 앎은 판단의 결과라기보다 퍼셉션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와닿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말씀이나 아르카나 구절을 읽을 때, 평소에는 그냥 문장으로만 보이던 것이 어느 날은 이상하게 마음에 와닿고,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동시에 이건 이렇게 살아야겠구나’까지 함께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이해와 의지가 동시에 움직입니다. 단순히 맞는 말이네’가 아니라 이게 진짜다’라는 느낌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주님이 흘러들어오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인지 작용의 설명’이 아니라 영적 작용의 설명’입니다. 이해가 열리는 것은 결과이고, 그 원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입니다. 그리고 그 인플럭스는 아무 때나 임의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앙 안에서, 곧 진리를 살려는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 그 통로가 열립니다. 이 점이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AC.99의 이 표현은 이해가 잘 된다’는 말보다 훨씬 깊은 뜻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신앙이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와, 사람의 생각 구조 전체를 안에서부터 밝히고 정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깨달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이해를 만들어 내는 사건’입니다.

 

 

 

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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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심에도 불구하고,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으로부터, 곧 기억 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 인간한테는 거꾸로 되어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한테 있어서는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방의 에덴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부릅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은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때 그의 상태는, 그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그 안에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이 글은 AC.98에서 제시된 ‘에덴동산’의 구조를, ‘생명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도덕성이나 경건의 정도로 설명하지 않고, 오직 ‘유입이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문제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깊고도 실제적인 구분입니다.

 

먼저 영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이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식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이 유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걸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마치 자신이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즉, 유입은 있지만, 출처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영적 인간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성은 항상 ‘내가 이해했다’, ‘내가 판단했다’는 감각을 동반합니다. 이는 교만의 문제라기보다, 아직 질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흐름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꾸로 된 질서’입니다.

 

이에 반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는 ‘,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압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 인간은 더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차이는 오직 하나, ‘질서가 회복되었는가’입니다. 생명은 위에서 아래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거쳐 지성으로 흘러갑니다. 천적 인간은 이 흐름을 막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회복된 질서, 혹은 그 사람 자체를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부릅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가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의미의 층위를 한 단계씩 올립니다. 최고 의미에서는 이 동산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과 질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보편적 의미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나라, 그리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게 되는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은 개인 안에도 있고, 교회 전체 안에도 있으며, 하늘 전체 안에도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천적 인간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본래 목적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습니다. 이는 무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습니다. 사람이 퍼셉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각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생명이 올바른 질서로 흐를 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AC.99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 곧 그 질서 자체가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심화

 

1.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 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AC.99.심화 1.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다’ 위 AC.99 본문에 나오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 이성, 기억 지식 속으로 흘러들어오신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가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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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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