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AC.224 심화 1)

 

위 문장에서 창3은 아직 퍼셉션의 시대인데 왜 양심의 흔적 같은 표현이 나오나요? 양심은 홍수 후 고대교회 때 시작되는 거 아닌가요?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 말씀대로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 즉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는 기본적으로 퍼셉션(perception)의 시대에 속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AC.224를 해설하면서 제가 사용한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교리 체계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의 특징은 양심(conscience)이 아니라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추론이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Ancient Church)는 퍼셉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신 양심(conscience)이 주어졌습니다. 양심은 진리의 지식(knowledges of truth)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내적 판단 능력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사람들을 두고 ‘양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말하면, 신학적으로는 시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생깁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크게 약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는

 

그들은 여전히 얼마간의 퍼셉션(perception)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고 숨었습니다.’

 

실제로 AC.220 AC.221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제가 ‘양심의 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현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다 보니 나온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가까운 경험이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AC 해설이나 심화 원고에서는 그것보다 ‘퍼셉션의 잔재’, ‘남아 있는 지각’, ‘약해진 퍼셉션’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인용하신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과 퍼셉션(perception)의 잔재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지각할 수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이 표현이 스베덴보리의 인간 시대 구분, 즉 태고교회 = 퍼셉션(perception), 고대교회 = 양심(conscience)이라는 구조와 더 잘 맞습니다. 목사님께서 짚어 주신 부분은 AC 해설을 장기적으로 정리할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정확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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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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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심화

 

1. ‘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이 구절을 AC.224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창3의 후손들은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숨을 수 있었지만, 여기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그 자연적 선마저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의 증거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타락했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의 흔적이 있었고, 자기 상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뻔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자신의 악을 악으로 느끼는 능력 자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영적 상태는 훨씬 더 위험해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AC.217에서 스베덴보리는 포도나무를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를 자연적 선(natural good)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포도가 없다는 것은 영적 선이 사라졌다는 뜻이고, 무화과가 없다는 것은 자연적 선마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특히 AC.224의 문맥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중요합니다. 창3의 사람들은 아직 무화과 잎이라도 있었습니다. 즉 자연적 선의 흔적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무화과 자체가 없습니다. 자연적 선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잎사귀가 마른다’고 합니다. 잎은 진리에 대한 외적 지식이나 교리의 형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고, 남아 있던 외적 종교 형식마저 생명력을 잃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224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악한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의 후손들과 대비시키기 위해 인용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들은 숨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자연적 선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반면,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더 이상 숨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얼굴도 붉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남아 있던 자연적 선마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악 때문에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아직 주님께서 역사하실 여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는 훨씬 더 깊은 영적 황폐(vastation)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AC.224에서 렘8:12-13을 끌어오는 이유입니다. 창3의 사람들은 넘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고, 예레미야의 사람들은 그 마지막 남은 자연적 선마저 잃어버린 상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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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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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4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지각(percep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의 원인이 되며, 또한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conscience)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자비롭게 작용하지만, 사람이 처해 있는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람, 곧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이 후손의 상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의 상태였습니다.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숨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선마저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숨지도 않습니다. 그들에 관하여는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해설

 

AC.224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이 숨은 것은 완전한 악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어느 정도의 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사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숨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자연적 선은 아직 영적 선(spiritual good)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성향, 도덕적 감각, 수치심, 양심에 대한 반응 등을 포함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비록 타락하였지만, 아직 이 자연적 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 곧 자비와 평화와 선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악마적인 공포가 아니라 양심의 불편함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깊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습니다. 즉 양심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진단 기준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말씀을 읽다가 찔림을 받거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희망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잘못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로 그 상태를 묘사합니다.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으며 잎사귀마저 마른 상태입니다. 즉 선의 열매도 없고 진리의 열매도 없으며, 외적 신앙의 흔적조차 말라 버린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주님의 자비와 평화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언제나 동일하게 자비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의 임재를 평안으로 느끼고, 회개하는 사람은 그것을 양심의 책망으로 느끼며, 완전히 악한 사람은 그것을 불편함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결국 AC.22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이 숨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고,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의식할 수 있었으며, 여전히 자신의 벗음(nakedness)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남아 있는 선의 흔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의 아픔은 종종 영적 생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상태인 것입니다.

 

 

심화

 

1. ‘8:12-13

 

 

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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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심의 흔적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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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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