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8.심화

 

2. ‘우리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위 내용은 저 위 AC.298 해설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3:22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우리’라는 복수 표현입니다.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 ’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본문이라거나,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의논하시는 장면이라는 해석이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298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구절을 설명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도 함께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천국을 주님이 계시는 곳, 그리고 천사들이 사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모든 천사에게 흘러들어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 전체를 주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라고 부릅니다. 수많은 천사가 있지만, 모두 주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의 몸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교리와 연결됩니다. 그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그러니까 스스로 사랑하거나 지혜롭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천사들이 가진 모든 사랑과 지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유입(influx)이 단 한 순간이라도 끊어진다면, 천사는 즉시 천사일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주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권위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2 우리’라는 표현도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러 신적 존재가 서로 의논하거나 회의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천사들이 주님께 의견을 제시하거나 결정에 참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있는 천국 전체를 함께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천국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시며, 천국 역시 언제나 주님의 생명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때때로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의미에서 복수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말씀 전체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11:7에서도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며, 6:8에서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십니다. 이 모든 구절은 하나님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역사가 천국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질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언제나 주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왜 스베덴보리가 AC.298에서 굳이 이 문제를 언급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22는 사람이 타락한 직후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리거나 홀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천국 전체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하나 되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을 위한 회의가 아니라, ‘주님과 천국이 하나 되어 인간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신적 질서’를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어지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에서 배제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접하여 그것을 모독(profanation)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멸에 이르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러한 보호의 섭리는 주님 홀로의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주님과 하나 된 천국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적 역사입니다. 따라서 창3:22 우리’는, 여러 존재의 의견을 모으는 회의의 언어가 아니라, 주님과 천국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섭리의 언어라고 이해하는 것이 AC.298의 문맥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AC.298,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AC.298-304)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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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8, 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AC.298.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창3:22에 보면, 영역은 ‘the tree of lives’인데, 한역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창3:22의 Potts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t h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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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8.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3:22에 보면, 영역은 the tree of lives인데, 한역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3:22 Potts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forever.

 

이를 직역하면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에서도 취하여 먹고 영원히 살게 될까 하노라’가 됩니다. 여기에는 ‘fruit’(열매)라는 단어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먼저 이것은 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기보다, 언어의 관용 차이에서 비롯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와 영어에서는 ‘나무에서 취하여 먹다(take of the tree, eat)라는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듣는 사람은 당연히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열매이므로, 번역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열매’를 보충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경 번역으로서는 충분히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를 번역할 때에는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단순한 이야기나 역사로 읽지 않고, 모든 단어와 표현에 담긴 상응(correspondence)을 해설합니다. 따라서 어떤 단어가 원문에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대상은 ‘열매’가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29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에서도 취하여 먹는 것’을 곧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배우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핵심은 어떤 열매를 먹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에 접근하여 그것에 참여하는 것 자체’입니다. 만일 번역에서 ‘열매’를 중심에 놓으면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열매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생명나무’라는 상징 전체에 있습니다. 이것이 AC를 번역할 때 일반 성경 번역과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Potts의 번역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the tree of life’라고 번역하지만, Potts는 ‘the tree of lives’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의 형태를 더욱 충실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는 ‘חַיִּים(ḥayyîm)인데,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반드시 수량의 복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충만함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Potts는 이를 ‘lives’라고 번역, 원문의 형태를 가능한 한 보존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Potts의 영역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읽는 AC 영어판은 Potts의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Potts보다 선대의 사람이고, 또 스베덴보리는 라틴어로 기술했습니다. 따라서 AC를 번역할 때에는 Potts가 굳이 ‘tree of lives’라고 옮긴 이유도 함께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일반 영어 성경처럼 ‘tree of life’로 바꾸거나, 다시 한국어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로 의역해 버리면, 원문이 지닌 구조와 강조점이 상당 부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AC 번역에서는 일반 성경 번역보다 원문의 상징 구조를 더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번역은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에서도 취하여 먹고’ 또는 원문의 형태를 더욱 살려 ‘생명들의 나무에서도 취하여 먹고’와 같이 옮기는 것이 AC의 해설 방식과 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여기서 취하여 먹는 대상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는 편이 독자의 이해에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AC 번역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를 보여 줍니다. 일반 성경 번역은 읽기 쉽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우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 번역은 그 위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해설하는 상응의 중심 단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번역과 해설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독자는 원문과 해설 사이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298, 심화 2, ‘우리’

AC.298.심화 2. ‘우리’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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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8,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AC.298-304)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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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3:22)

 

AC.298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 처음에는 단수로 언급되었다가, 이어서 복수로 언급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것(knowing good and evil)은 그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지혜롭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하는 것은, 그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신비들까지 배우게 된다면, 그는 영원토록 결코 구원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영생할까(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The reason “Jehovah God” is first mentioned in the singular, and afterwards in the plural number, is 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the angelic heaven. The man’s “knowing good and evil” signifies that he had become celestial, and thus wise and intelligent;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means that he must not be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for then never to all eternity could he be saved, which is to “live to eternity.”

 

 

해설

 

이 글은 창3:22의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의미를 밝힙니다. 주님께서 막으신 것은 영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판보다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에는 단수로, 이어서는 복수의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은 결코 천사들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생명이 흘러드는 하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며, 천사들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님만을 의미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선과 악을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은 겉,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해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298은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이 단순한 경험이나 지식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천적 지각(perception)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지혜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다음 말씀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는 말씀을 기록된 겉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풉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주님과 사랑의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미 타락, 자기애와 세상 사랑 가운데 빠진 사람이 그 거룩한 신앙의 신비들까지 충분히 알게 되면,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모독(profanation)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 의도적인 거부가 되므로,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진리를 아끼셔서 숨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상태가 아직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더 깊은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자비라는 뜻입니다. 이는 앞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한 AC.301 이하의 내용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아직 모르는 상태에 머무는 편이 영적으로 훨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할까’도 겉뜻인 육체의 생명을 끝없이 유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생명은 언제나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 ‘영생할까’는 주님과 결합된 생명 가운데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신비를 모독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영생을 막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가능성을 끝내 잃게 되는 상태를 막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글은 창3 전체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타락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결코 인간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더 깊은 악과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더 높은 진리를 잠시 감추시며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은 은혜를 거두신 사건이 아니라, 장차 다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인간을 보존하시는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AC.298은 창3:22를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섭리가 가장 깊이 나타난 말씀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AC.298, 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AC.298.심화 1. ‘생명나무의 열매’(the tree of lives) 창3:22에 보면, 영역은 ‘the tree of lives’인데, 한역은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창3:22의 Potts 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t he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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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AC.298, 심화 2, ‘우리’

AC.298.심화 2. ‘우리’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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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7, 창3:21, ‘옷‘, 천적 선, 영적, 자연적 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7 천적 선은 옷 입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장 깊고 순진무구하기 때문입니다. 옷 입는 선은 천적 영적 선부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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