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6 1

마태복음 13, 씨 뿌리는 비유와 마음밭

이번 6강은 지금까지 배운 ‘기본 진리’ 일곱 과목을 정리하면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통해 전체 체계를 하나로 묶고, 이어질 요한계시록 공부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종합 강의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의 핵심을 ‘영적인 목표’, ‘신앙의 방향’, 그리고 ‘영적 가치관’의 정립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결국 ‘무엇을 추구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설명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정체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머릿속에 축적된 교리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느냐가 그의 내적 생명을 이루며, 결국 사후에도 그 지배적 사랑이 그 사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시작부터 ‘영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출발입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일곱 비유를 하나의 체계로 읽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서론으로,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ㆍ가라지 비유 등을 본론으로, ‘그물 비유’를 결론으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과 ‘666’을 해석하는 틀과 연결합니다. 특히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의 비유를 ‘14만 4천’의 성장ㆍ행실ㆍ생명과 연결하고, 가라지를 ‘666’ 또는 적그리스도적 영혼과 연결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이 서로 연결되어 인간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상태를 보여 준다는 큰 방향에는 상당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곧바로 요한계시록의 특정 숫자들과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는 방법론적으로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숫자는 단순한 암호나 특정 집단의 인원수가 아니라 ‘상태’와 ‘질’을 나타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144,000명의 특별한 성도 집단을 가리킨다기보다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 가운데 선과 진리가 온전히 결합된 상태를 표상합니다. ‘12’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나타내고, 그것이 확장되어 ‘144’, 다시 ‘천’과 결합한 ‘144,000’은 충만함과 완전성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을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성화된 성도들’이라고 이해하려는 강사의 영적 방향은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지만, 그것을 별도의 특수한 최상위 성도 계층처럼 굳혀 버리면 차이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숫자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기 안에서 결합되어 가는 것입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강사는 씨를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 밭을 ‘사람의 마음’으로 풀이합니다. 길가ㆍ돌밭ㆍ가시밭ㆍ좋은 밭은 각각 말씀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초점은 결국 ‘좋은 밭’에 있으며, 좋은 밭이어야 씨가 뿌리를 내리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씨’는 단순히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성경 지식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심기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선’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진리를 듣고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여 실제 삶에서 행할 때 비로소 씨가 열매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은 단순히 설교를 잘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이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강사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결실한다고 설명하면서 좋은 밭을 영적 성장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옮기면, 말씀의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고, 이해에 들어오고, 마침내 의지에 받아들여져 행위가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안다’에서 ‘원한다’로, 다시 ‘행한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단계까지 내려가야 씨가 열매가 됩니다.

 

여기서 강사의 설명 가운데 특히 눈여겨볼 부분이 있습니다. 강사는 사람이 자기 마음이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밭인지 좋은 밭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는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드러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시험’(temptation)에 관한 가르침과 매우 가까운 부분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에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해관계가 침해되고, 명예가 손상되고, 소유가 위협받고, 원하는 것이 좌절되는 순간 내면에 숨어 있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감추어진 악과 거짓이 밖으로 드러나고, 사람이 그것과 싸우면서 주님을 의지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어느 등급인가’를 판정하기 위한 검사가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 자기 상태를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악으로부터 실제로 벗어나게 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네 가지 밭을 네 종류의 사람으로만 고정하는 것보다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도 읽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 안에도 ‘길가’가 있고 ‘돌밭’이 있으며 ‘가시떨기’가 있고 ‘좋은 땅’이 있습니다. 어떤 진리에 대해서는 마음이 굳어 있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진리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제 희생이 요구되면 포기합니다. 또 어떤 진리는 받아들였지만 세상 염려와 욕망이 자라 그것을 질식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는 깊이 받아들여져 삶을 바꾸고 열매를 맺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의 ‘길가’를 갈아엎으시고, ‘돌’을 제거하시며, ‘가시’를 뽑으셔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씨 뿌리는 비유는 사람들을 네 부류로 분류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어디까지 들어와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강사는 이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들은 세상에서 빛과 향기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며, 가장 밝은 빛 가운데 산 사람들을 ‘교회 시대 이긴 자들’, 성화된 성도들, 순교자들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적당히 천국만 가면 되지’라는 태도를 버리고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삶을 수동적인 구원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주님께 가까워지고, 선과 진리를 더욱 풍성하게 받아들이며, 이웃을 더욱 온전히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천국 자체가 영원한 완성의 정지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완전해짐의 과정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매우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더 높은 영적 단계’, ‘더 밝은 빛’, ‘더 큰 상급’을 추구하는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의 영적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를 ‘생명책이라는 저금 통장’에 비유하여, 더 겸손하고 더 충성하고 더 인내하고 더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면 마치 더 많은 금액이 저축되는 것처럼 상급이 커진다고 설명합니다. 교육적 비유로서는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은 선행에 대한 외적 보수라기보다 ‘선 자체 안에 있는 기쁨’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김 자체에서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입니다.

 

그래서 ‘100만 원짜리 인내’, ‘10만 원짜리 선행’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주 미묘하게 proprium이 개입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참았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희생했다’, ‘나는 더 높은 영적 수준을 추구한다’는 자기의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천국적 선은 오히려 자기가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었던 것조차 주님에게서 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천사는 자신이 다른 천사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가장 깊이 아는 존재입니다. 영적 성장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높아질수록 자기는 낮아지고, 주님만 높아집니다.

 

강사가 ‘넓고 편하고 내가 좋은 것,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손해 보고, 불편하게 살고, 희생하는 좁은 길’을 강조하는 부분 역시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좁은 길의 본질은 고생 자체가 아닙니다. 일부러 가난하거나 불편하게 사는 것이 영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며, 자연적 즐거움을 버리는 것 자체가 거룩함도 아닙니다. 핵심은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보다 위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지고도 재물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도 그것을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금욕적으로 살면서도 자기의 거룩함을 사랑한다면 proprium은 더욱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 ‘무엇이 나를 지배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6강 초반부의 핵심인 ‘영적 가치관’이라는 말이 한층 깊어집니다. 영적인 사람은 단순히 세상을 싫어하고 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점차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밭’이 된다는 것도 어느 날 특별한 영적 계급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내 의지와 삶 속에서 자유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자기애의 딱딱한 길을 갈아엎고, 거짓의 돌을 걷어 내며, 세상 염려와 욕망이라는 가시를 제거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6강 1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상당히 좋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느 밭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을 ‘나는 네 부류 가운데 어느 등급의 사람인가?’로 묻기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내 안의 어디에서 막히고 있는가?’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도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원한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주님보다 자기 명예ㆍ소유ㆍ편안함을 더 사랑하여 말씀이 질식되고 있는 영역은 어디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아직 갈아엎어져야 할 우리의 ‘마음밭’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씨 뿌리는 비유가 매우 아름답게 바뀝니다. 중심은 밭의 우열이 아니라 ‘씨를 뿌리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길가에도 씨를 뿌리시고, 돌밭에도 뿌리시며, 가시떨기에도 뿌리십니다. 인간의 현재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말씀 주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주시고, 섭리 가운데 우리의 굳은 땅을 부드럽게 하시며, 돌을 드러내고, 가시를 보여 주시면서 마침내 열매 맺는 땅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궁극적인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심으시는 씨를 받아들이고, 자기 안에서 드러나는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며, 주님께서 선을 행하실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강조하는 ‘좋은 밭이 되어 열매를 맺으라’는 권면은 단순한 성화의 독려를 넘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거듭남이라는 더 깊은 지평으로 열립니다.

 

 

6 2

길가와 돌밭, 그리고 시험을 통한 마음밭의 드러남

6강 1부에서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 전체를 개관한 뒤, 이제 네 종류의 밭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네 밭을 단순히 네 종류의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표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 과정’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앞서 배운 성장론을 다시 불러오면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내 마음밭이 과연 어디에 해당하는가’를 시험받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매우 주의 깊게 볼 만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평상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는 모습과 시험 가운데 실제로 드러나는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거듭 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길가’입니다. 강사는 길가가 사람들에게 계속 밟혀 딱딱해진 땅이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미지에서 출발합니다. 씨가 떨어져도 흙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새가 와서 먹어 버립니다. 이를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면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마음, 세상일과 돈 버는 일 등에 온통 마음이 쏠려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비유의 문자적 의미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금 더 깊은 층위를 갖습니다. 말씀은 귀를 통하여 기억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아직 사람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삶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길가는 바로 그 첫 단계에서 진리가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딱딱하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마음이 딱딱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격이 고집스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 오랫동안 반복되어 하나의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마침내 마음의 길처럼 굳어진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길을 반복해서 밟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같은 욕망,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면 그것이 점차 자신의 생명 형태가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행동이었던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마침내 그 사람의 사랑과 성품으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진리가 ‘떨어질’ 수는 있어도 쉽게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삶을 바꾸는 진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가의 문제는 단순히 ‘불신자라서 복음을 거절한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에게도 길가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수없이 들어 이미 익숙해졌지만, 바로 그 익숙함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이 자기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안다’는 생각 자체가 길가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진리를 많이 아는 것과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은 전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자기의 지성과 명예를 높이는 데 사용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가 마음에 떨어졌다는 것과 씨가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장면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새는 문맥에 따라 생각, 이성적인 것, 지적인 것 등을 표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씨를 빼앗는 새이므로 진리를 소멸시키는 거짓한 사고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고 단지 표면에 머물러 있으면, 기존의 거짓한 사고와 세상적인 추론이 그것을 금세 빼앗아 갑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 보는데’, ‘세상은 원래 이렇게 사는 거야’, ‘모두 그렇게 하는데 나만 왜 그래야 하지?’ 하는 생각들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기존의 삶을 지배하던 사고방식이 말씀을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씨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마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길가가 영원히 길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비유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의 섭리와 거듭남은 굳은 마음을 그대로 판정하고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삶에서 여러 사건과 시험을 허용하시면서 굳어진 것을 깨뜨리십니다. 자신감이 무너지고, 자기 지혜의 한계를 발견하며,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를 경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이전에는 들어오지 않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너는 길가다’라고 판결하는 시험이라기보다 길가를 밭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돌밭’입니다. 길가와 돌밭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길가에서는 씨가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지만, 돌밭에서는 씨가 싹을 틔웁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문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좋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따라서 돌밭의 핵심은 진리를 거절하는 데 있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사람의 깊은 의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들으면 대단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성경의 의미가 열리고, 영계와 천국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며, 자신의 신앙 세계가 갑자기 넓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자신의 기존 욕망과 충돌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리를 정말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내가 이것을 포기해야 하는구나’, ‘이 말씀대로 살려면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는구나’, ‘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구나’, ‘이익이 되더라도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 뿌리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시험’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길가와 돌밭과 좋은 밭이 겉으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 교회에 앉아 있고, 모두 ‘아멘’하며, 모두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자기애와 충돌하는 순간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바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려는 새 의지와 자기애ㆍ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옛 욕망 사이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깊이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여기서 강사의 ‘하나님께서 시험하여 어느 밭인지 확인하신다’는 표현은 조금 다듬어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밭을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이미 아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그것을 알아야 하는 쪽은 오히려 인간 자신입니다. 더욱이 시험의 목적은 단순한 ‘확인’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실제적인 거듭남의 수단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악한 영들이 자극하는 자기애와 거짓이 드러나고, 사람이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에 저항할 때 선과 진리가 더욱 깊이 결합합니다. 시험 전과 시험 후의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통과한 영적 시험은 진리를 단순한 지식에서 생명의 진리로 내려보냅니다.

 

그래서 돌밭의 ‘돌’을 특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돌은 언제나 악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진리, 특히 낮은 차원에서 굳건하게 받쳐 주는 진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흙 아래 숨어 있어 뿌리가 깊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돌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는 마음속에 굳어진 거짓이나 자기 확신, 혹은 진리가 의지 안으로 내려가는 것을 가로막는 내적인 장애로 볼 수 있습니다. 겉에는 흙이 있으므로 씨가 싹을 틔웁니다. 신앙도 있고 감동도 있으며 열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내려가면 ‘나는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단단한 자기 자신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proprium의 문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뜻이 꺾이는 것은 싫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원하면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진리가 proprium의 표면을 장식하는 과정이 아니라, 진리가 그 안으로 내려가 그 질서를 바꾸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돌밭은 매우 종교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좋아하고 영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며 깊은 진리를 배우는 것을 즐기지만, 그 진리가 자기 삶을 건드리는 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 자체에도 매우 중요한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는 너무나 깊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 자체에서 큰 지적ㆍ영적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를 읽으며 ‘이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과, 그 진리가 실제 자기 생명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속뜻을 아무리 정확하게 이해해도 자기 삶에서는 여전히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있다면, 진리는 아직 충분히 뿌리내린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구조를 아무리 자세히 알아도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기억과 이해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밭에서 좋은 밭으로 가는 길은 ‘더 많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작은 진리 하나라도 실제로 행할 때 뿌리가 내려갑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용서하려고 애쓰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손해를 감수하고 정직을 선택하며, 자기 공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선을 행한 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순종들이 반복되면서 진리가 점차 의지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시험은 거듭남에서 제거되어야 할 불필요한 고통이 아니라 때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햇볕이 없었다면 돌밭의 씨도 한동안 잘 자라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햇볕이 뜨거워지자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식물을 말라 죽게 한 바로 그 태양이 좋은 밭의 식물에게는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열을 제공합니다. 문제는 태양이 아니라 뿌리입니다. 같은 시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신앙을 깊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시험을 통하여 사람을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험 가운데서 끊임없이 사람을 보호하시며,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나도록 허용하시고, 그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선택할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실제 싸움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몫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에 저항하면서도, 승리의 능력은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가 함께 움직이는 신비로운 지점입니다.

 

따라서 6강이 말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는 권면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밭인 사람으로 판정받으라’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드시도록 허용하라’입니다. 길가가 발견되면 절망할 것이 아니라 갈아엎어져야 할 곳을 발견한 것이고, 돌이 발견되면 신앙이 가짜였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거하시려는 내적 장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앞으로 나올 가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이란 처음부터 좋은 밭이었던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 같은 인간의 proprium을 끊임없이 다루시면서 마침내 말씀의 씨가 선 안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씨 뿌리는 비유의 중심은 점점 ‘나는 어느 밭인가?’에서 ‘주님께서 지금 내 밭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로 이동합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 같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자칫 사람을 분류하고 영적 등급을 매기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과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관점이 이번 강의가 강조하는 ‘영적 성장’을 훨씬 깊고도 복음적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씨는 주님의 진리이며, 그것을 살게 하는 생명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생명이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길과 돌과 가시를 주님 앞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진리가 의지와 삶 안으로 내려갈 때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서서히 ‘말씀이 열매 맺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6 3

가시밭에서 좋은 밭으로, 그리고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것

6강 2부에서 길가와 돌밭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의는 가시밭과 좋은 밭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에 대하여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직접 설명하십니다. 반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며, 마침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이 차이를 단순히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의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가시밭도 말씀을 듣습니다. 돌밭은 심지어 기쁨으로 받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그 말씀이 사람의 실제 생명 안에서 ‘열매’가 되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6강의 씨 뿌리는 비유 해설은 앞서 여러 강에서 반복되었던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핵심진리’의 중심 주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가시밭은 특히 흥미롭습니다. 길가처럼 씨가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도 아니고, 돌밭처럼 싹이 났다가 곧 말라 버린 것도 아닙니다. 씨가 자랍니다. 문제는 씨와 함께 ‘다른 것’도 자란다는 데 있습니다. 가시가 함께 자라 말씀의 기운을 막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시밭의 영적 위험을 더욱 미묘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하고, 교회생활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매력, 지위와 인정, 편안함과 자기 유익이 동시에 자라고 있습니다. 마침내 그것들이 말씀보다 더 강한 애정이 되면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결실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지배적 사랑과 직결됩니다. 문제는 재물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세상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재물을 관리하는 것은 자연계에서 필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랑의 질서에서 어디에 놓여 있느냐입니다. 재물이 쓰임을 위한 수단이면 질서 안에 있지만, 재물이 삶의 목적이 되어 주님과 이웃보다 더 사랑받기 시작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세상의 염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미래를 생각하는 것과, 세상적인 안전을 자기 생명의 궁극적 근거로 삼아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반드시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영적 생명을 질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가족을 주님보다 높이면 질서가 바뀝니다. 직업에 충실한 것은 선하지만 성공과 명예가 생명의 목적이 되면 가시가 됩니다. 교회 봉사 역시 선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그 봉사의 속을 차지하면 역시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적 지식도 그렇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것을 안다’는 자기 우월감의 재료가 된다면, 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proprium이 가시처럼 자라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우리가 ‘가시’를 너무 쉽게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하지 않도록 합니다. ‘저 사람은 돈을 사랑하니까 가시밭이다’라고 판단하기 전에, ‘내 신앙생활 안에서 말씀과 함께 자라고 있는 가시는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람의 인정을 원하는 마음, 진리를 전한다고 하면서 자기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얼마든지 가시가 될 수 있습니다. 가시는 씨를 뽑아 버리지 않습니다. 씨 옆에서 함께 자랍니다. 바로 이 때문에 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강사는 가시밭의 문제를 앞서 설명한 ‘연단’의 구조와 연결하고, 가시밭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다시 다음 연단의 과정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가시밭이 아닌 사람들은 ‘무리바 생수’를 마신 뒤 두 번째 연단으로 들어간다고 연결합니다. 여기서 ‘핵심진리’ 특유의 단계적 성장론이 다시 나타납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이 단계들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정된 시간표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더 깊은 애정이 시험받는다’는 방향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 다루어지고, 그다음에는 행동을 일으키는 욕망이, 더 깊어지면 그 욕망을 낳는 자기 사랑 자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네 번째 ‘좋은 밭’에 이르면 강사의 강조점은 아주 분명해집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합니다. 강사는 주님의 설명을 따라 좋은 밭의 사람을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을 실천하고,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감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의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어서 백 배를 맺는 사람도 있고, 육십 배, 삼십 배를 맺는 사람도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듣고 깨닫는다’와 ‘결실한다’ 사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달음 자체가 결실은 아닙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가 기억에 들어오는 단계가 있고, 이해성에서 깨닫는 단계가 있으며, 그것을 의지가 받아들여 사랑하는 단계가 있고, 마지막으로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좋은 밭은 이 전체 과정이 이어지는 상태입니다.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고,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감동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리가 삶으로 내려갑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열매’의 상응은 매우 분명합니다. 열매는 선한 삶, 곧 행위 가운데 나타난 선과 관계됩니다. 나무의 최종 목적이 잎이나 꽃에 머물지 않고 열매에 이르는 것처럼, 진리의 목적도 지식 자체에 머물지 않고 선에 이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잎이 돋는 것과 같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꽃이 피는 것과도 같지만, 그것이 이웃을 향한 실제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행과 쓰임은 신앙에 덧붙이는 부속물이 아니라 신앙이 생명을 얻어 밖으로 나타나는 완성입니다.

 

다만 여기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단순한 ‘영적 성적표’처럼 읽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의에서는 좋은 밭 안에서도 열매의 풍성함에 차이가 있다는 데 주목하며, 더 온전한 성품과 더 충성스러운 헌신을 향해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님 같은 겸손’, ‘예수님 같은 온유’, 세상 욕심에서 벗어난 삶과 충성스러운 헌신이라는 두 방향을 함께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더욱 온전해지도록 계속 성장하는 과정을 좋은 밭의 삶으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귀합니다. 좋은 밭도 ‘완성되어 더 이상 자랄 필요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열매 맺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적 완전함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성향과 쓰임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선과 진리의 정도도 다릅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모두 같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천국에서 경쟁이나 우열의식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한 천사가 다른 천사를 보며 ‘나는 백 배이고 너는 삼십 배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천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쓰임을 기쁨으로 행하며, 다른 이의 선을 자기 선처럼 기뻐합니다. 따라서 백 배와 육십 배와 삼십 배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몇 배짜리인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앞서 강의에서 등장했던 ‘더 높은 상급을 추구하라’는 표현에도 필요한 보완입니다. 영적 성장을 사모하는 것은 귀하지만, ‘나는 더 높은 천국에 가야 한다’, ‘나는 다른 성도보다 백 배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식으로 proprium이 개입하면 영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바로 그 열망이 자기애의 새로운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높은 상태는 ‘내가 높아지는 것’을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높은 천국적 사랑은 자기의 높음을 전혀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강사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 농부가 기뻐하듯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하는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을 등급별로 세워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안에 심으신 진리가 그 사람의 삶에서 사랑과 선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가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듯, 농부가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듯,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참된 인간으로 되어 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씨 뿌리는 비유가 끝나면서 강의는 두 번째 비유인 ‘겨자씨 비유’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하나님의 초점이 ‘좋은 밭’에 있다고 정리한 뒤, 겨자씨ㆍ누룩ㆍ진주와 보화의 비유를 바로 이 ‘아주 좋은 밭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시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비유들로 배치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강사 나름의 하나의 성장 체계로 연결하는 매우 독특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에서는 그 좋은 밭의 사람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양육하는’ 단계로 나아간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강사는 여기서 특히 ‘나무’와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드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를 ‘천국 백성을 양육하는 목양적인 사명, 목양적 사업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진리’라고 해석합니다. 즉 작은 씨가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새들이 깃드는 것처럼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마침내 다른 사람을 품고 양육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강의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의 영적 성장이 주로 ‘내가 어떻게 좋은 밭이 되는가’, ‘내가 어떻게 연단을 통과하는가’, ‘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라는 자기 자신의 거듭남에 초점이 있었다면, 겨자씨에서는 그 성장의 결과가 ‘다른 생명을 품는 것’으로 바뀝니다. 내가 자라는 목적이 나의 영적 완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다른 사람을 품고,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돕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은 매우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쓰임’이라는 말로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모든 존재의 기쁨은 쓰임에 있습니다. 천사는 자기 완성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몰두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지혜를 다른 이의 선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도 ‘나 혼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에게서 시선이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향하게 됩니다. 받은 진리와 선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쓰임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는 강사의 해석은 적어도 영적 적용의 차원에서 매우 아름다운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신앙의 시작이 자라 마침내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목회자가 된다’거나 ‘많은 제자를 거느리는 지도자가 된다’는 뜻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쓰임은 목회직보다 훨씬 넓습니다. 한 어머니가 자녀에게 선과 진리를 심어 주는 것도 쓰임이고, 한 직장인이 정직하게 자기 일을 하여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것도 쓰임이며, 아픈 사람을 돌보고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도 쓰임입니다. 천국의 나무는 반드시 강단 위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 ‘나무’는 일반적으로 퍼셉션이나 인식, 지적·영적 생명과 관련되며, ‘가지’와 ‘새’ 역시 그 문맥에 따라 진리의 인식과 사고의 여러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를 곧바로 ‘성화된 지도자가 다른 성도들을 목양한다’는 하나의 대응표로 고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강사의 설명은 ‘핵심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적용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겨자씨 비유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과 모세, 바울 등 여러 인물을 ‘나무’와 ‘그 가지에 깃드는 새’의 구조에 넣어 해석합니다. 바울의 경우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을 ‘출애굽’으로, 이후 다소에서 보낸 기간을 ‘광야 연단’으로, 그 뒤 바나바에게 불려 안디옥과 선교 현장으로 나간 것을 연단을 마친 뒤 다른 사람들을 양육하는 단계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경 인물들의 생애를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하나의 영적 성장 패턴으로 읽으려는 ‘핵심진리’ 특유의 해석법입니다.

 

여기서는 장점과 한계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점은 성경의 역사를 죽은 과거의 사건으로 두지 않고 ‘나에게도 출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으며 쓰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다’고 현재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소 생활을 정확히 ‘11년 광야 연단’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광야와 같은 영적 단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 본문 자체가 직접 말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은 ‘핵심진리’의 영적 독법으로 존중하여 듣되, 그것을 성경의 아르카나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과 바울의 생애를 다룰 때에는 우리가 이미 정한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도들의 서신은 복음서나 창세기ㆍ출애굽기ㆍ요한계시록처럼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속뜻, 곧 아르카나가 들어 있는 ‘말씀’과 같은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생애에서 영적 교훈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의 생애 사건 하나하나를 출애굽기의 상응처럼 취급하여 숨은 영적 단계표를 복원하는 데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강사가 겨자씨 비유에서 붙드는 ‘성장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는 중심은 충분히 살릴 만합니다. 이것은 5강에서 보았던 ‘익은 열매’의 개념도 보완해 줍니다.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는 자기완성의 선언이라면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이 ‘이제 주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한 쓰임으로 더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성숙은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삶과 그 제자들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특별히 의미 있게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한 사람에게 심긴 작은 씨가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하여 자라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에게서 말씀을 배우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생명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는다면,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그림이 왜 이 전승 안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유일한 속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이 자기에게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살리고 품는 쓰임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적용입니다.

 

결국 6강 3부에서 길가ㆍ돌밭ㆍ가시밭ㆍ좋은 밭의 흐름은 겨자씨 앞에서 새로운 방향을 얻습니다. 좋은 밭이 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것도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서 자라면 그 사람은 마침내 다른 생명을 위한 ‘쓰임’이 됩니다. 씨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것을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많이 아는 마음이 아니라 진리가 선이 되어 삶의 열매를 맺는 마음이며, 그 열매가 더욱 성숙하면 받은 선과 진리는 자기완성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적 유익을 위한 쓰임으로 흘러갑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의 방향이 ‘나의 구원’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쓰임’으로 넓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누룩 비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자씨가 영적 생명의 ‘성장과 확장’을 보여 준다면, 강사는 누룩 비유를 그 사람의 내면과 행실 전체가 변화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그림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6강 4부에서는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 ‘핵심진리’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충분히 따라가고, 이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에서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로 내려가는 과정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6 4

누룩과 진주, 보화 : ‘행실의 정결에서 생명의 소유

겨자씨 비유를 마친 강사는 이제 누룩 비유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이 전환에서 자신의 해석 구조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진주·보화 비유는 모두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장성한 겨자나무가 되어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성장과 쓰임’의 측면을 보여 준다면, 누룩은 그 사람의 ‘행실적인 측면’을 보여 주고, 진주와 보화는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측면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 강사는 강의 마지막 정리에서도 이 세 비유를 ‘장성한 겨자나무’, ‘행실이 정결해진 누룩’,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라는 세 그림으로 다시 하나로 묶습니다.

 

누룩 비유의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33절의 짧은 한 절입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강사는 이 장면을 아주 생활적인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따뜻한 곳에 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반죽 전체가 부풀어 오릅니다. 예전에는 이불을 덮어 놓고 밤새 발효시키기도 했다는 익숙한 경험까지 끌어옵니다. 중요한 것은 누룩이 밀가루의 한 부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핵심진리’가 이 장면에서 붙드는 것은 바로 ‘전부’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일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과 성품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누룩 비유를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을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겨자씨가 작은 생명이 자라 큰 나무가 되는 성장의 그림이었다면, 누룩은 안에 들어온 어떤 생명이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점차 전체를 변화시키는 그림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종교적인 한 부분만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의 몇 시간, 기도할 때의 마음, 성경을 읽을 때의 생각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인간관계와 직업생활, 재물 사용과 일상의 선택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속 사람에서 받아들인 것이 겉 사람 전체에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가루 서 말’이라는 표현은 그냥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 곧 완전하고 충만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서 말’이라는 표현도 단순한 밀가루의 양을 넘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완전한 과정이라는 방향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특정 AC 번호의 세부 상응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기보다, 본문의 ‘전부 부풀게 한’이라는 주님의 말씀 자체와 함께 읽는 편이 안전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의 한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의 삶 전체로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6강이 계속 강조해 온 ‘말씀의 실천’과도 연결됩니다. 말씀을 많이 알면서도 돈을 다루는 방식은 이전과 같고,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이전과 같으며, 자존심이 건드려졌을 때의 반응도 이전과 같다면 아직 누룩이 ‘전부’를 부풀게 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거듭남이 진행되면 이전에는 종교와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영역까지 주님의 질서가 들어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왜 이 물건을 사고 싶은지, 왜 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지, 왜 이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지까지 진리의 빛 아래 놓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사가 누룩을 ‘행실’과 연결한 것은 중요한 통찰입니다. 신앙의 진위가 결국 생활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행실의 정결’을 조금 더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겉 행동이 정돈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선행이라도 그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칭찬받기 위해 친절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금욕할 수도 있으며, 천국에서 더 높은 상급을 받으려는 자기 유익 때문에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행동은 선해 보여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에게 향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외적 행위의 교정에서 시작하여 그 행위를 낳는 의지의 변화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자기를 억제합니다. 이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중에는 그 악 자체를 싫어하고 선을 사랑하도록 의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면 안 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만, 점차 진실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때문에 보복하지 않지만, 점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이때 누룩이 단순히 외관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반죽 전체에 스며든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경계하라고 하셨고, 다른 문맥에서는 누룩이 악과 거짓이 퍼지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3장의 누룩도 악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에 기계적으로 하나의 뜻만 붙이는 암호표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친히 ‘천국은 … 누룩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누룩의 침투하고 변화시키는 성질이 천국의 확장과 변화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새는 언제나 이것’, ‘돌은 언제나 저것’, ‘누룩은 언제나 악’이라는 식으로 단어를 기계적으로 대입하면 말씀의 속뜻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자’도 문맥에 따라 주님의 신적 능력을 표상할 수도 있고, 파괴적인 악의 세력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단순한 상징 풀이와 다릅니다.

 

그리고 누룩 비유를 ‘행실의 변화’로 읽으면서도 하나 더 보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룩이 스스로 반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반죽 안에 들어가 그것을 변화시킵니다. 거듭남에서도 인간의 모든 자연적 기능이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격, 재능, 기억, 직업 능력, 인간관계, 자연적 애정 자체를 모두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새로운 사랑 아래서 질서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던 지성을 이제 쓰임을 위해 사용하고, 자기 명예를 위해 사용하던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소유를 자기만을 위해 쌓던 사람이 그것을 선한 쓰임에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새 중심 아래 재배열됩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에서 자주 나타나는 ‘육적인 것을 버린다’는 강한 표현을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것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연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자연적 몸과 감각과 애정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영적인 것 위에 올라가 지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인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아래 두어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올바른 질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가 자연적 삶 전체를 질서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단순히 ‘모든 행동이 완벽해진 사람’이라는 정적인 그림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전체에 점차 침투하여 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 안에 놓여 가는 거듭남의 과정’이라는 훨씬 역동적인 그림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강사가 누룩을 넣은 뒤 한나절 또는 밤새 기다리는 생활 경험을 언급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거듭남 역시 순간적인 선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에 걸쳐 진행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의 중요한 차이가 다시 나타납니다. 강의에서는 일정한 연단을 지나 행실이 정결해지고 ‘이긴 자’가 되는 상태를 비교적 분명한 단계로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며,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갑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내 전체가 이제 다 부풀었다’, 곧 ‘나는 완전히 성화되었다’고 자기 상태를 확정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proprium을 더 섬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강조하는 ‘행실의 정결’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들면 됩니다. 정결은 단순히 죄목 몇 가지를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행동을 일으키는 사랑 자체가 점차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지 않는다’에서 ‘나는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로, 다시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사랑한다’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누룩이 전체에 퍼지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이제 강의는 누룩 비유를 마치면서 진주와 보화 비유로 넘어갑니다. 원고에서도 강사는 누룩을 ‘인격적인 면에서의 행실적인 성장’이라고 정리한 직후,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46절의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읽습니다. 그리고 두 비유가 사실상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한 사람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여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구하던 장사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강사가 여기서 가장 강하게 붙드는 표현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진주 값은 얼마입니까?’ 그리고 ‘자기 소유를 몽땅 파는 값이 진주 값’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핵심진리’의 연단론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값진 진주, 곧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속한 것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강의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 원리를 욥의 세 번째 연단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육적인 소유를 내려놓게 된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깊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선 ‘자기 소유를 다 판다’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모든 신앙인이 재산과 가족과 직업을 실제로 잃어야 한다는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외적 형태의 삶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재산이 있었고 욥도 회복 후 다시 큰 재산을 가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소유의 유무보다 그 소유가 내 사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매우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자기 소유’라는 말을 더 깊이 들어가면 proprium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단지 집과 돈과 재산이 아니라 ‘이것은 내 것이다’, ‘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 ‘내 지혜는 내 것이다’, ‘내 선은 내가 행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proprium입니다. 이것이 훨씬 깊은 자기 소유입니다.

 

따라서 ‘모든 소유를 팔아 값진 진주를 산다’는 말씀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으면, ‘내가 가진 물건을 모두 없애야 주님을 얻는다’는 뜻보다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는 모든 자기 소유의식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방향이 더욱 깊습니다. 물론 실제 삶에서는 재물이나 명예, 관계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proprium의 지배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자리들입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전 재산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도 proprium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는 더 강한 자기 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와 교회의 선한 쓰임을 위해 관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통장의 액수만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주와 보화 비유는 5강에서 계속 다루었던 ‘자기부인’을 훨씬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자기부인은 단지 불편한 것을 참고 좋은 것을 포기하는 금욕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선의 근원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진리를 귀하게 여기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며, 자기 영광보다 이웃의 선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무엇인가를 잃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값진 진주’를 얻습니다.

 

여기에서 ‘기뻐하여’라는 말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억지로 모든 소유를 팝니다가 아니라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팝니다. 이것은 천국의 질서를 아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 것을 내려놓는 것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희생으로만 남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작은 것을 자유롭게 내려놓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돌멩이를 억지로 빼앗기는 것과, 훨씬 귀한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돌멩이를 놓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포기하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복수하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이 고통스럽고, 정직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하게 될수록 질서가 바뀝니다. 예전에는 포기라고 느꼈던 것이 나중에는 자유가 됩니다. 미움을 내려놓는 것이 손실이 아니라 해방이 되고, 자기 공로를 버리는 것이 낮아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평안이 됩니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실제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가 진주와 보화를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겨자씨의 ‘성장’, 누룩의 ‘행실’, 진주와 보화의 ‘생명’을 서로 보완하는 세 측면으로 봅니다. 마지막 정리에서도 ‘겨자나무가 된 성도’, ‘행실이 정결해진 누룩 같은 성도’, ‘값진 진주를 소유한 성도’는 결국 같은 상태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결정적인 보완을 붙이고 싶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고 할 때 그 생명이 인간의 독립적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받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값진 진주를 ‘소유한다’는 것도 ‘이제 신적 생명이 내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 자기 생명이라고 붙들던 proprium을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상태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설이 생깁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았을 때’ 비로소 참으로 풍성해집니다.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고,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을 때 주님의 진리를 받을 수 있으며, 자기 생명을 붙들지 않을 때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잃어서 비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천사도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할 때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랑과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이것이 천국적 proprium, 곧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인간 자신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새로운 의지와 생명은 사람이 자기 것처럼 누리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룩과 진주·보화 비유를 함께 놓으면 6강의 흐름이 상당히 선명해집니다. 누룩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겉 사람까지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고, 진주와 보화는 그 변화의 중심에서 무엇이 가장 귀한 것이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전자는 ‘내 삶 전체가 무엇에 의해 변화되고 있는가?’를 묻고, 후자는 ‘나는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두 질문은 사실 하나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느냐가 결국 그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값진 진주로 발견한 사람에게는 삶의 다른 것들이 새로운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재물도, 명예도, 가족도, 직업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사랑 아래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이 가장 값진 진주인 사람은 종교와 말씀까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최종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지배적 사랑이 바뀌면 누룩이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듯 삶의 나머지 모든 영역도 차츰 새로운 질서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라는 세 비유를 하나로 묶으려는 강사의 시도에는 흥미로운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성장하여 쓰임이 되고, 삶 전체가 변화되며, 마침내 가장 귀한 생명을 얻는다’는 흐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특별한 이긴 자 집단의 영적 등급’보다 모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선과 진리의 성장, 삶 전체의 질서화, 그리고 지배적 사랑의 변화로 넓혀 읽습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세 비유는 특정한 영적 엘리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서 지금 진행되어야 할 천국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6강의 분위기는 크게 바뀝니다.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의 밝은 측면으로 묶은 뒤, 강사는 그 반대편에 ‘가라지’를 놓습니다. 실제 강의의 전체 도식에서 앞의 비유들이 ‘14만 4천’과 연결된다면 가라지는 ‘666’, 곧 적그리스도적 상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6강 5부에서는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를 중심으로, ‘알곡과 가라지’,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 ‘추수와 세상 끝’, 그리고 강사가 이것을 ‘14만 4천 대 666’이라는 종말론적 구도로 연결하는 방식을 충분히 살펴본 뒤,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과 요한계시록 해석에서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전혀 다른 깊이로 열리는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6 5

가라지와 그물, ‘세상 끝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6강 전체의 결론

6강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앞의 겨자씨, 누룩,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가 ‘좋은 밭’에서 자라난 생명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 가라지 비유와 그물 비유에서는 선과 악의 분리, 곧 심판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강사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을 하나의 큰 구조로 묶으면서, 씨 뿌리는 비유를 일종의 서론으로,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영적으로 성장한 ‘이긴 자’의 모습으로, 가라지를 그 반대편에 있는 적그리스도적 상태로, 마지막 그물 비유를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분리와 결론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6강 전체가 결국 ‘말씀의 씨를 받은 사람이 어떤 생명으로 형성되며, 마지막에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알곡과 가라지가 ‘같은 밭’에서 함께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립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비로소 가라지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종들이 즉시 가라지를 뽑으려 하지만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과 악의 분리가 인간의 성급한 판단에 맡겨져 있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외적인 모습을 보고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쉽게 판단하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기다리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말씀은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종교생활만으로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심지어 똑같은 진리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 명예와 이익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겉 사람에서는 비슷해 보여도 속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분리는 인간의 외적 판정이 아니라 내적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 점에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는 말씀은 단순한 종말론적 시간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 선과 악이 충분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용합니다. 사람이 아직 변화될 수 있는 동안에는 악한 상태가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그의 영원한 상태가 확정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회개하고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현재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확정하는 것은 이 비유의 정신과 오히려 어긋날 수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는 다른 사람을 판별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먼저 자기 안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한 사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한동안 함께 존재합니다.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선한 애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싶은 마음,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과 자기 유익을 먼저 챙기려는 마음이 함께 나타납니다. 진리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를 자기 의를 세우는 데 사용하려는 proprium이 끼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어느 날 ‘나는 알곡이고 저 사람은 가라지’라고 사람들을 둘로 나누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의 선과 악을 점점 구별하시고 악을 분리하시며 선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굳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입되는 악과 거짓을 사람이 자기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의지의 것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생명에 속하게 됩니다. 반대로 유입되는 악을 죄로 알고 거부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그것은 자기 생명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사랑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곧 ‘나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동의하는가, 그것을 즐거워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악이라고 인정하고 물리치는가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악의 유입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으로 들어와 지배적 사랑이 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이 가라지 비유를 자신의 종말론적 체계 안에서 ‘666’과 연결합니다. 앞의 겨자씨·누룩·진주와 보화를 ‘14만 4천’과 연결하여 성화되고 이긴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가라지는 그 반대편의 적그리스도적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구조는 ‘핵심진리’의 전체적인 영적·종말론적 도식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선한 씨가 자라 완성되는 방향과 악한 씨가 자라 완성되는 방향을 서로 대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의 ‘666’은 어떤 특정한 악인 집단이나 미래의 한 적그리스도 세력을 표시하는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요한계시록 해설에서 ‘짐승의 수’는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여 구원의 전부로 만드는 교리와 그 상태의 질을 나타내는 매우 깊은 상응적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666인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사람 자체에 표지를 붙이는 것보다, ‘내 신앙 안에서도 진리와 신앙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666적 상태가 생길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훨씬 스베덴보리적인 접근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AC 창세기 4장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도 놀랍게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살아 있지만, 신앙이 자기 독립적인 것이 되어 사랑을 밀어내면 결국 아벨을 죽이는 가인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신앙만’의 교리도 본질적으로 같은 영적 문제를 다른 시대와 형식에서 보여 줍니다. 따라서 ‘666’을 밖에 있는 무서운 적그리스도를 찾아내는 표지로만 읽기보다, 진리가 사랑과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조차 어떻게 생명을 잃는지를 보여 주는 경고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보면 ‘알곡과 가라지’ 역시 교파나 집단을 나누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알곡이고 저 교회는 가라지다’, ‘우리 교리는 14만 4천이고 저들의 교리는 666이다’라는 식으로 사용되는 순간, 이 비유는 자기성찰의 말씀에서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로 바뀝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묻고 계시는 것은 ‘네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네 안에서 실제로 무엇이 자라고 있느냐?’입니다.

 

이제 가라지 비유의 마지막에는 ‘추수’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상 끝’을 문자적으로 우주와 지구가 소멸하는 날이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세상 끝’ 또는 ‘시대의 완성’은 자연계 자체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가 선과 진리를 완전히 잃어 더 이상 교회로 기능할 수 없게 된 마지막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때 영계에서 심판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역시 자연계의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육체로 부활하여 한 장소에 모여 재판받는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은 뒤 이미 영계에서 살아가며, 마지막 심판은 그 영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외적으로는 천국을 가장하고 선한 신앙인처럼 살았지만 내적으로는 악과 거짓을 사랑하던 상태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면서 외관이 벗겨지고, 각자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분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라지 비유와 매우 잘 맞습니다. 추수 전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외관상으로는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완전히 드러나면 더 이상 감출 수 없습니다. 사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지상에서 가지고 있던 외적 습관과 종교적 외관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중간영계에서 외적인 것이 점차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결국 자기 지배적 사랑과 같은 곳으로 갑니다. 누가 억지로 천국이나 지옥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이 그와 같은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본질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벌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가 사람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고, 각자가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에 따라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사랑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행복을 더 기뻐하는 천국 공동체 안에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단순한 ‘보상과 형벌의 장소’ 이전에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랑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제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비유인 ‘그물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다시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라고 설명하십니다. 가라지 비유와 거의 같은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함께 모이지만 마지막에는 분리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다’는 자연적 차원에 모여 있는 지식과 일반적인 진리의 영역과 연결될 수 있으며, 물고기는 그 가운데 살아 움직이는 자연적 지식과 인식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씀도 이와 관련하여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번 강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처음부터 별도의 그물에 잡힌 것이 아니라 ‘한 그물’ 안에 함께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 소속만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세례를 받고, 같은 성찬에 참여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내적 생명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외적 질서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곧 천국은 아닙니다. 천국은 사람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형성되는 내적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물’에 들어왔다는 것과 ‘좋은 물고기’가 되었다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들어온 것과 거듭난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교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진리가 곧 생명이 된 것도 아닙니다. 다시 6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씨가 뿌려졌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밭에 떨어졌으며, 뿌리를 내렸고, 가시를 이겨 내고, 마침내 열매가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태복음 13장의 여러 비유를 하나의 흐름으로 읽으려 한 강사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가’를 묻고, 겨자씨에서 ‘그 생명이 얼마나 성장하는가’를 묻고, 누룩에서 ‘그 생명이 삶 전체를 얼마나 변화시키는가’를 묻고, 진주와 보화에서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를 묻고, 가라지와 그물에서 ‘마침내 어떤 생명으로 드러나는가’를 묻습니다. 이 연결 자체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모든 것을 ‘14만 4천에 들어갈 것인가, 666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두 집단의 분류보다 훨씬 내적인 문제로 가져옵니다. 그것은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천국적 사랑인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 위에 두는 지옥적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겉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합니다. 설교자가 될 수도 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고, 수도자가 될 수도 있으며, 스베덴보리를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가장 깊은 목적이 자기 명예와 우월감이라면 외적 종교성만으로는 천국적 생명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이름 없이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고 이웃에게 정직하며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천국적인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종교적 지위를 갖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자리에서 실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좋은 밭의 열매도 결국 쓰임이고, 겨자나무의 가지도 다른 생명을 위한 쓰임이며, 누룩이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목적도 선한 쓰임이고, 값진 진주를 얻은 사람의 새 생명 역시 체어리티의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추수’도 두려움의 이미지에서 조금 달라집니다. 물론 악을 사랑하여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만든 사람에게 분리는 엄중합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의 분리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내 안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악을 분리하시고 선을 자유롭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작은 심판들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리가 비추어질 때마다 ‘이 생각은 주님에게서 오는 질서와 맞는가’,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분별하고 악을 거부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의 원리가 오늘의 회개 안에서도 작동합니다. 회개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며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빛 가운데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내 proprium에서 나온 것이구나’, ‘이것은 이웃을 해치는 사랑이구나’ 하고 보고, 주님께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구하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그 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분리들이 쌓이면서 사람의 영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6강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강사가 강조했던 것은 ‘영적 가치관’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가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는 그 가치관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밭’으로 나타났습니다. 길가는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였고,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깊지 않은 상태였으며, 가시밭은 말씀과 함께 세상 사랑이 자라 말씀을 질식시키는 상태였습니다. 좋은 밭에서는 말씀이 실제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겨자씨에서는 그 생명이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쓰임’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누룩에서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 삶의 일부에 머물지 않고 생각과 의지, 말과 행동 전체로 스며들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진주와 보화에서는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라는 지배적 사랑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그물에서는 결국 그 지배적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 선과 악의 분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보면 6강의 처음과 마지막이 정확히 만납니다. 처음에는 ‘영적 가치관’이라고 했고, 마지막에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실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결국 나의 영원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전혀 낯선 기준이 마지막 순간 갑자기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준비한다는 것도 죽기 직전에 어떤 자격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작은 선택에서 천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손해가 생겨도 정직을 선택하고, 미워할 이유가 충분해 보여도 보복을 거부하며, 선을 행한 뒤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판단보다 진리를 높이며, 받은 능력을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가운데 천국적 사랑이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반대로 지옥 역시 죽은 뒤 갑자기 주어지는 낯선 상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모든 것 위에 놓고, 다른 사람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거짓임을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붙들고, 악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그 사랑이 점차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회개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자연계에 있는 동안 사람은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가 계속 강조하는 ‘영적 성장’, ‘연단’, ‘이긴 자’, ‘익은 열매’라는 언어에는 귀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구원받았다’는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내지 않고, ‘그 믿음이 지금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라고 묻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바로 그 질문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몇 단계의 연단을 통과했는가’, ‘14만 4천에 속할 정도로 성화되었는가’, ‘다른 성도보다 높은 영적 등급에 도달했는가’로 가져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단순하고 더 깊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사랑하면 그것을 행하려 하며, 이웃을 사랑하면 그의 선을 원하게 되고, 선을 사랑하면 쓰임을 기뻐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6강의 씨 뿌리는 비유와 마지막 그물 비유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씨였습니다. 너무 작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씨가 자라고 마침내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열매와 생명의 질이 드러나 분리가 이루어집니다. 영적 생명도 그렇습니다. 아주 작은 선택 하나가 반복되면서 애정이 되고, 애정이 습관이 되며, 습관이 마침내 사랑의 형태를 이루어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날 ‘666의 사람’만이 아닙니다. 오늘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자라고 있지는 않은지,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영적 우월성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14만 4천에 들어가야 한다’는 욕망보다 오늘 받은 작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저는 6강의 가장 좋은 부분과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만난다고 봅니다. ‘좋은 밭이 되라.’ 그러나 그것은 영적 엘리트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의 씨가 네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겨자나무가 되라.’ 그러나 많은 사람 위에 서는 지도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받은 선과 진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쓰임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누룩처럼 전부 변화되라.’ 그러나 외적으로 흠 없는 종교인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삶의 가장 자연적인 영역까지 스며들게 하라는 뜻입니다. ‘값진 진주를 얻으라.’ 그러나 영적 보물을 자기 소유로 확보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proprium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가라지를 경계하라.’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가라지라는 이름표를 붙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서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는 악과 거짓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물이 가득 찰 때를 기억하라.’ 그러나 공포 속에서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형성되고 있는 지배적 사랑이 결국 나의 영원한 방향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6강의 다섯 부분은 하나로 모입니다. ‘말씀은 씨로 들어오고, 선 안에서 뿌리를 내리며, 시험 가운데 깊어지고, 삶 전체로 퍼져 열매가 되고, 마침내 그 열매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6강의 가장 중심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다시 AC의 아주 오래된 주제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진리가 선과 결합된 사람입니다.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 안에서 살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주인이 되는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으로 돌아가며, 결국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6강 전체를 한 문장으로 마무리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은 미래 어느 날 들어갈 장소이기 전에, 주님께서 말씀의 씨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심으시고, 거듭남 가운데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며, 마침내 사랑과 쓰임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하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렇게 보면 마태복음 13장의 마지막 질문은 ‘나는 14만 4천인가, 666인가?’가 아닙니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깊으며, 그래서 더욱 피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내 마음에 씨를 뿌리고 계시는데, 나는 그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으며, 그 말씀은 지금 내 삶에서 어떤 열매가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을 남기는 것으로 6강 5부, 그리고 6강 전체를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강 1부‘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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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 1

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 연단과 양심의 빛을 중심으로

이번 5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사가 신앙을 단순히 ‘진리를 알고 믿는 일’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의의 중요한 명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선한 지식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연단을 받는다’, 그리고 ‘선한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연단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려고 하는 순간 사람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분노가 올라오고, 참으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참아야 할 상황이 오면 불평과 짜증이 솟아납니다. 강사는 바로 이 지점을 ‘연단’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되는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의지와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삶이 된 진리만이 사람에게 실제로 속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가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진리와 반대되는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싸움,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말씀을 실천하려 하면 불편한 환경이 온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구조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보내신다기보다, 섭리 가운데 허용된 삶의 환경을 통하여 이미 사람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보내신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 후반에서도 강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를 붙여 주신다’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말을 조금 다듬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삶이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사랑들이 드러나는 상황을 허용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외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내 안에 이미 있던 분노와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의 다음 설명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연단받을 환경이 왔을 때 불평과 짜증이 올라오고 그것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면 연단의 기회를 피한 것이라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나는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빛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 영성 훈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연결하여 읽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안의 어떤 악을 실제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다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악이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실패의 순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을 보고 주님 앞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강의가 말하는 ‘양심의 빛’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양심을 사람의 ‘지성, 감정, 의지’를 밝혀 주는 기능으로 설명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5장 14절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인용하여, 말씀을 실천하고 연단받을수록 양심이 밝아져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것을 점차 분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구별하면 이번 강의를 더욱 정교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며 참인지를 내적인 방식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와 선이 내면에 자리 잡아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판별 장치가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양심의 질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어겼을 때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니까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 자체도 말씀의 참된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받을수록 양심의 빛이 더욱 밝아져서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칠수록,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더욱 열어 주시며 그 결과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더욱 섬세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아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어떤 영적 감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특히 강의가 ‘말씀의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선으로 옮겨지고, 선이 행위가 되며, 그것이 반복되어 삶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의의 ‘말씀 → 실천 → 내적 저항의 발견 → 회개 → 변화 → 더욱 밝아진 분별’이라는 흐름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면을 상당히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천국에 들어갈 만큼 100% 완전히 밝아져야 한다’는 강사의 표현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99.9도 안 되고 100% 완전히 양심이 밝아져야’ 가나안, 곧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간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이 지상에서 모든 악의 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그렇게 수학적인 완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주된 사랑으로 삼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생명을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 안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proprium이 남아 있으며, 천사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힘으로 100% 정결해진 사람들의 나라’라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의 악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 그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리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인간의 협력과 책임을 조금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구원의 능력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의 ‘연단’이라는 말도 조금 더 깊어집니다. 연단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진리를 붙들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과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연단의 본질은 ‘고난의 양’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내적 선택’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입니다’라는 말은 이번 5강 1부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악한 영들과 지옥의 인플럭스를 실제적인 것으로 가르치므로 모든 악을 단순히 인간 심리 내부의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옥이 사람을 강제로 악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악의 인플럭스가 사람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 곧 타락한 proprium과 결합할 때 그것이 ‘나의 악’으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싸움의 중심은 언제나 ‘저 사람이 문제다’에서 ‘이 일을 통해 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연단은 원수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드러난 내 안의 미움, 보복심,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 우월감과 싸우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의 역시 뒤이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자꾸 보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말하며, 이것을 ‘우리의 옛사람 애굽의 근성을 죽이는’ 과정, ‘자아를 깨뜨려 가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 역시 표현상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으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와 매우 가까운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5강 1부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진리는 삶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낸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자신이 사랑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내 사랑의 실제 상태가 드러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다가 무시당했을 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손해를 볼 상황이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로 그 순간이 실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안에 아직 이것이 있다’고 보여 주시는 거듭남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말씀의 실천 → 연단 → 양심의 밝아짐 → 선악의 분별’이라는 큰 흐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100% 완전 정결을 달성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인간적 완성론으로 가져가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삶이 되고, 그 삶 속에서 악이 드러나며,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여 그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 가운데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된다’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음을 점점 더 알고, 그러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욱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밝아진다’기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빛을 가리던 것들이 하나씩 물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또한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5 2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 ‘광야의 세 차례 연단과 거듭남의 여정

5강 1부에서 강사는 ‘말씀을 실천해야 연단을 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면서 양심의 빛이 점점 밝아지고 선악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 전체의 거대한 그림 하나에 올려놓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로 읽지 않고 한 사람이 구원받고 성장하여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는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세 차례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데 주목하면서 이것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차례 연단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지고 읽는 독자는 아마 상당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는 기본 방향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해석의 세부 내용은 앞으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광야-가나안’을 단지 수천 년 전 민족사의 지리적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거듭남의 질서로 읽는다는 발상 자체에는 매우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도식에서 애굽은 사람이 아직 육적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출애굽은 거기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건이며, 광야는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훈련되고 연단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 잡은 상태, 곧 ‘익은 열매’와 ‘이기는 자’의 상태로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즉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광야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완성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아주 중요한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실제로 거듭났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한 필수적인 시작이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이 되고 실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할 때에는 자기 안에 있는 반대되는 사랑들이 그대로 숨어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면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도 읽을 때에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깊은 상처를 준 사람 앞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제 손해가 닥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일종의 빛과 같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광야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특히 이 광야의 여정을 ‘세 차례 연단’으로 구조화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사건, 두 번째는 아말렉과의 전투, 세 번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력한 적들과의 전투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 세 단계를 요한일서의 ‘아이들-청년들-아비들’의 성장 단계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이스라엘이 거의 싸우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도망가며, 두 번째에서는 실제로 적과 싸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단계로 성장하고, 세 번째에서는 더욱 강한 적들과 싸우며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단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적 성장을 ‘악이 점점 줄어들어 편안해지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더 깊은 싸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싸울 힘조차 없어서 도망가던 사람이 조금 성장하면 실제로 싸우기 시작하고, 더 성장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적과 맞닥뜨립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역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왜 시험이 더 깊어지는가, 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악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불일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속사람을 열어 가실수록, 겉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싸움이 있으려면 싸울 두 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선과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proprium과 결합된 악과 거짓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초기에 별다른 내적 갈등이 없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보이기 시작하며, 이전에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애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양심의 형성과 함께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세 차례’라는 숫자를 실제 영적 성장의 고정된 단계처럼 사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시험을 거친다고 문자적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말씀의 상응 안에서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세 차례 전투’를 인간 거듭남의 완전한 시험 과정의 표상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영적 생애를 정확히 세 번의 시험으로 나누는 심리적 시간표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애 가운데 몇 번의 매우 큰 시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시험들이 오랜 기간 계속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동일한 악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그 사람의 유전적 성향, 삶의 환경, 받아들인 진리와 선, 자유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의 깊은 영적 의미를 존중하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싸우는가’입니다. 출애굽기의 첫 번째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립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듭남의 가장 근본적인 비밀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싸우지만 실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잘 모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면 되지’, ‘화를 내지 않으면 되지’, ‘욕심을 버리면 되지’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자기 의지력이 얼마나 약한지 발견합니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면 다시 분노하고,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명예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나는 나를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듯, 인간도 자기 힘으로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열린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결단하고 싸우고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광야는 ‘내가 얼마나 강한 영적 사람이 되는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자기 힘으로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선과 진리는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선했다고 해서 오늘도 자동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오늘도 자기 힘으로 그 진리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계속 주님에게서 흘러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연단’은 단순한 정신력 강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광야에서 강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자기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전쟁을 잘하는 백성이 되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이 점점 자기 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받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 곳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지므로 지금부터 정확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가나안 입성은 상당히 완성된 성화 상태를 가리킵니다.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을 이루며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세 연단은 그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나안’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 교회, 천국적인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 사람 안에서 모든 악의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제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배 질서가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예전에는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을 지배했지만, 거듭남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악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는 생명의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화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으므로 이제 익은 열매다’라는 자기 인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자기확신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겸손조차 자기 영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섬세합니다. 그래서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도를 측정하기보다 주님께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도식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아직 자기 힘이 없습니다. 청년의 상태에서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아비의 상태에서는 더 깊은 선과 지혜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세 단계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거듭남에 실제로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여러 상태의 연속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거듭남을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 야곱의 삶, 요셉의 이야기,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이 단지 각각 떨어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출애굽과 광야를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두 방식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핵심진리’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연결하면서도 그 연결을 주로 신앙적 유비와 성경구절 간의 조합을 통해 구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일정한 상응의 질서가 있으며, 인물·장소·숫자·사건 하나하나가 그 질서 안에서 연속적인 속뜻을 이룬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출애굽을 영적 성장으로 해석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토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알고 읽으면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을 더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와 비슷하니 결국 같은 것이다’라고 성급하게 동일시할 필요도 없고, 세부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안의 영적 통찰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이 해석은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의 질서를 통해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번 부분에서 그 공통된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오늘의 신앙 언어로 바꾸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고, 삶 속에서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이 긴 과정이 광야입니다.

 

그렇다고 광야가 구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광야가 있습니다. 만나도 광야에서 주어졌고, 반석의 물도 광야에서 주어졌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광야에서 함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존이 벗겨지고 주님의 인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시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주님에게서 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주님께서 더 깊은 곳을 다루고 계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5강 1부에서 다룬 ‘양심의 빛’과도 연결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어둠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나는 점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 더 잘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그것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심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5강 2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광야는 주님께서 진리를 삶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질서 있게 하시는 과정이고, 가나안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진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을 다스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세 차례 연단’도 훨씬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몇 번째 연단에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세 번째이든, 또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시험 가운데 하나이든, 모든 거듭남의 싸움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분이 열어 주신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뿐입니다.

 

다음 5강 3부에서는 강사가 이 ‘세 차례 연단’을 훨씬 구체적으로 펼쳐 가는 부분을 따라가겠습니다. 특히 ‘바로의 군대-아말렉-가나안 입성 전의 강적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지, 그리고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단계와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부터는 공용복 선생의 실제 연단 사례도 점차 등장하기 때문에, ‘핵심진리’가 말하는 영적 성장론의 독특한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5 3

첫째, 둘째, 셋째 연단 : 싸움의 대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강 2부에서는 강사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한 사람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는 큰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고 연단받는 과정이며, 가나안은 그 과정을 지나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가 되는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강사는 이 광야의 과정을 조금 더 세분하여 ‘세 차례 연단’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설명합니다. 첫째 연단은 애굽에서 나온 직후 바로의 군대에게 추격당하는 사건, 둘째 연단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는 사건, 셋째 연단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적들과 싸우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가 세 번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는 이 세 전투를 통하여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이 죄와 싸우는 방식과 깊이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오랫동안 종으로 살았고, 이제 막 바로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단계에서 백성은 스스로 싸워 승리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그 길을 지나가며, 뒤따라 들어온 애굽의 군대는 물에 잠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갓 출발한 사람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아직 죄와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입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깊은 악과 거짓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성질과 욕망과 습관들이 다시 뒤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옛것이 그대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가? 왜 예전 성질이 그대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구별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겉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던 악과 거짓의 질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일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속사람 쪽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데 겉 사람에는 오래된 습관과 애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이 둘이 실제로 질서를 이루도록 하는 긴 과정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애굽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무찌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 비추어 보면 아주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거듭남의 모든 싸움에서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실제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듭남마저 proprium의 사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연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다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만히 애굽 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가나안으로 옮겨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매우 독특한 균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여기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이제 두 번째 연단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실제로 싸웁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도망하던 백성이 이제는 전투에 참여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한 ‘청년’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무엇이 죄인지조차 잘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말씀을 알고 선악을 분별하며 실제로 죄와 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양심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싸움에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래에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고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의 근원이 인간의 전투 능력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사건에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는 상응을 통해 속뜻을 품고 있으며, 아말렉과의 전쟁 역시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모세의 손을 들면 기도가 강해져 이긴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현재 강의가 말하려는 영적 성장의 문맥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래에서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는 위에서 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와 잘 연결됩니다.

 

여기서 ‘청년’의 영성에는 한 가지 위험도 있습니다.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몇 가지 욕망을 이기고, 기도생활이 안정되고, 말씀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조언도 할 수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이제 꽤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자기애가 종교적인 자기애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개념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proprium은 반드시 돈과 성욕과 명예 같은 노골적인 욕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다’, ‘나는 시험을 많이 이겼다’, ‘나는 성화되었다’는 생각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욕망과 싸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proprium을 발견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성장이란 ‘점점 내가 강해지는 것’과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제로 더 절제할 수 있고, 더 분별할 수 있고, 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를 더욱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 능력이 커졌다고 느껴 주님에게서 독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자유롭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연단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 세 번째 연단은 가장 깊고 강한 싸움입니다. 이제 단순히 애굽에서 도망치거나 광야에서 아말렉 하나와 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강사는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와 연결하고, 결국 죄성의 깊은 뿌리까지 다루어 ‘익은 열매’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있을 때보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더 어려워집니다. 만일 영적 성장을 단순히 ‘점점 문제가 없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층층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악부터 다루어집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노골적인 분노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오면 더 미세한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선을 행하고도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이전보다 자기 안의 악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악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더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지만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까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먼지가 보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5강 1부에서 살펴본 ‘양심의 빛’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양심의 빛이 밝아질수록 선악을 더 세밀하게 분별하게 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이런 의미에서는 매우 깊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선악만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의 선악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낳은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옳은 말을 했지만 왜 그 말을 했는가?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가?’라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목적’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행위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목적, 그 목적에서 나오는 생각과 수단, 그리고 최종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에 따라 영적인 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일 수 있고,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헌금도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명성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연단을 단순히 ‘더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다’고 이해하기보다 ‘더 깊은 사랑의 층이 시험받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의미가 깊어집니다. 겉 행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거듭남의 핵심은 행동 목록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 번째 연단을 지나면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실제적이며 매우 깊은 변화입니다.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이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변화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소멸하여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악의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천사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 안으로 주님에게서 선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가 한순간이라도 끊긴다면 누구도 스스로 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완성은 ‘이제 나는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며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라는 말을 읽을 때도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열매는 분명 익어야 합니다. 진리가 단지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선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자기 자신을 익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인간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강사가 첫째·둘째·셋째 연단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결국 ‘싸움 없이 성숙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마음의 위로나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사랑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고백 이후에도 광야가 있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싸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다

 

 

 

5 4

내 속에 거하는 죄와 전적 부패 : 죄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에 뿌리박힌 실체인가

5강은 이제 연단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안의 죄 문제 그 자체로 깊이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숨어 있던 것’의 정체를 ‘죄성’이라고 부르면서 로마서 7장 20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강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결단했는데도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마음속에서 ‘죄의 법’이 일어나 결국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완전 타락’, ‘전적 부패’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말을 단순히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정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훨씬 구조적으로 이해합니다. ‘원죄가 영 속에 뿌리박혀서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에 죄의 법칙이 능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가 바로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 죄성이 잠잠해 있어서 자신도 그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동하여 마음을 지배하고 마침내 행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든 예를 따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앞으로는 오래 참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진리가 양심에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참습니다. 두 번째도 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쯤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합니다. 강사는 바로 그 순간을 ‘죄성이 발동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죄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자 오히려 자기 안에 말씀을 거역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중요한 영적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기 안의 어둠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살면서 화를 낼 때에는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누구나 그렇지’ 하고 지나갑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금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실제로 살려고 하면 이전에는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있던 어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서도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오면 그 진리와 반대되는 의지의 상태가 점차 드러납니다. ‘나는 이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아는데 왜 내 마음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라는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오히려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던 상태에서 이제 둘이 서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죄성을 ‘내 영 속에 뿌리박힌 것’, 더 나아가 ‘영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음란성, 시기, 혈기, 아집, 교만 같은 죄성이 인간 안에 뿌리박혀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설명하고, 이것을 ‘원죄’, ‘부패성’, ‘유전죄’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의 가장 내적인 영 자체에 악의 실체가 뿌리를 박고 있다는 그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곧 inmost는 악이 뿌리박혀 있는 장소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으로 유입하시는 가장 깊은 입구와 관련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갖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죄악으로 오염된 핵’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와 잘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인간에게 유전적 악이 있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에서 유전적 악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법적 ‘죄책’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 곧 악을 사랑하기 쉬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 죄책이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는 전통적인 원죄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자기 삶으로 만든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접점도 보입니다. 강의 자료에서 ‘원죄’라고 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행위 자체’를 원죄라고 하지 않고, 그 타락을 통하여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 곧 ‘부패성·유전죄’를 원죄라고 구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는 그들의 ‘자범죄’이고, 이후 인간에게 유전되는 죄의 성향을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죄성이 들어왔다’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다르지만, 조상의 범죄 행위 자체와 후손에게 이어지는 악의 성향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아담은 지구상 최초의 한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곧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 아담이 역사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그 순간 어떤 죄성이라는 것이 인류의 영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조 자체가 AC의 창세기 속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자기 이성, 곧 proprium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타락해 갔는가를 말씀의 속뜻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유전적 악은 일종의 ‘영적 유전자 속 죄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 축적되어 내려오는 사랑과 애정의 기울어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경향,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반복될 때 개인의 실제 악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죄로 여기고 거부하면 그 악은 비록 유전적 경향으로 존재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proprium’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하다’, ‘내가 옳다’고 느낍니다. 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 자체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제 자기 소유라고 믿고 주님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 proprium은 악과 거짓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죄론은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악한 물질이 박혀 있다’는 그림보다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려는 proprium의 질서’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잘못 들으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악은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핵심진리’와 만납니다. 강사는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를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죄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구나’라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도 한 가지 균형을 놓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악과 싸울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면 말을 삼켜야 하고, 거짓말할 기회가 생기면 진실을 말해야 하며, 탐욕이 올라오면 실제 행동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내가 내 의지력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의 균형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죄성이 환경을 만나면 발동한다’는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시험론으로 조금 바꾸어 읽으면 상당히 유익해집니다. 평소에는 자기 안의 어떤 악한 애정을 모르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거나, 무시당하거나, 성적 유혹을 받거나, 권력을 가질 기회가 생기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숨어 있던 사랑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환경이 그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통하여 이미 자기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기 상태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자기는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지 않을 때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지면 자신도 몰랐던 것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의 환경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충분히 건질 수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때 올라오는 모든 생각과 충동을 곧바로 ‘나 자체’라고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애정과 생각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유입되고, 악한 애정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유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를 선택합니다.

 

이 사실은 죄와 싸우는 사람에게 의외로 큰 자유를 줍니다. 갑자기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이 이것이구나’ 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스쳤다고 해서 ‘내 본질은 음란한 인간이구나’,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내 참된 자아는 살인적인 인간이구나’라고 곧바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라왔을 때 내가 그것을 기뻐하며 붙잡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정말 중요합니다. 유혹과 죄를 동일시하면 신앙생활은 끝없는 자기혐오로 갈 수 있습니다. 시험 가운데 악한 충동이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 안에 그 악과 싸우는 다른 생명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양편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의 ‘내 속에 거하는 죄’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 죄다’라고 읽는 것과 ‘내가 선을 원하면서도 나를 끌어당기는 악한 성향이 여전히 겉 사람 안에 있다’고 읽는 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전자는 ‘나는 본질적으로 죄 덩어리다’라는 자기규정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내 안에는 내가 싸워야 할 유전적이고 실제적인 악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악과 나를 분리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고 계신다’는 거듭남의 관점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가 AC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를 함께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집니다. 인간 안에 악의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인간 안에 은밀히 보존하십니다. 인간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리메인스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완전히 부패하여 안에는 오직 죄밖에 없는 존재’라고만 묘사하면 AC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전적 부패’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이 말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이라면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모든 층위가 악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의 리메인스조차 없으며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인간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는 강의의 설명입니다. 앞선 강의에서 강사는 정욕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보존하도록 주신 기능이지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이 말은 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참된 창조 목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악이 마귀에게서 어떤 ‘죄성 물질’처럼 인간의 영 속으로 이동해 들어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의 인플럭스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파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사랑하며 반복하여 자기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실제 악이 됩니다.

 

이것은 책임의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죄성이 마귀의 것이니 내가 죄를 지은 것은 결국 마귀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자기에게 유입되는 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면서 그것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책임이 생깁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악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선에 대해서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이 독특한 구조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나는 정말 비참한 신세구나’라는 자기 인식도 어느 지점까지는 의미가 있지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목적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로 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빛은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악을 끝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어둠을 발견한 이유는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보이는 순간에도 동시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죄성’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유전적 악·proprium·인플럭스’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죄는 훨씬 깊다. 환경만 주어지면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 힘을 믿지 말고 철저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악을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자유와 합리성을 지켜 주시면서 악을 당신에게서 분리해 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성을 형성하신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보완이 이번 5강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성의 깊이’를 강조하는 강의는 자칫 듣는 사람을 ‘내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거듭남론은 인간의 타락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깊다고 해도 주님의 역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의 유전적 악이 오래되었다 해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앞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연단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오직 악뿐이라면 싸움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악 사이에는 영적 시험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악이 움직일 때 갈등이 생깁니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보복하고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유리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갈등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5강 1부의 ‘양심’, 2부의 ‘광야’, 3부의 ‘세 차례 연단’, 그리고 이번 4부의 ‘죄성’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진리가 양심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그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통하여 광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깊어질수록 더 깊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점점 ‘내 힘으로는 이것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참된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전적 부패’를 ‘나는 존재 자체가 오직 악이다’라는 선언으로 읽기보다, ‘나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으므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고백으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존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존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제 5강은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깊은 죄성이 있다면 성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성은 실제로 뿌리째 없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자’, ‘익은 열매’인가?’입니다. 5강 5부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따라가면서, 공용복 선생의 ‘죄성 제거와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악의 제거, 혹은 악에서의 분리와 거듭남’ 사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5 5

이기는 자익은 열매’ : 성화의 완성은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인가

5강은 이제 지금까지의 연단론을 하나의 분명한 목표점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세 차례의 광야 연단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런 사람을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생명수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라고 표현하고, 신앙의 목표를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인들의 ‘신인 합일’ 등을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영적 완성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묶습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구원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믿었다’, ‘구원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실제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고, 죄와 싸우며 사랑과 성품이 변화되고, 결국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는 단지 어떤 교리적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영적 싸움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의 경주 이미지를 가져와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의 연단을 지나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면 ‘이기는 자’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강조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고,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며 악과 거짓을 실제로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는 ‘이기는 자’를 상당히 완결된 상태로 말합니다. 세 차례 연단을 모두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익은 열매’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표현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 사람 안에서는 죄성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악의 뿌리가 남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섬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분명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외적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실제로 새로워지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 역시 성화나 거듭남을 약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유전적 악과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안의 악은 주님의 역사로 억제되고 분리되며, 새로운 선의 질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의 ‘존재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그 사람의 자유롭고 기쁜 사랑의 중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천사에게 적용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 proprium만을 본다면 그 안에는 선이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완성은 ‘나는 이제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확신이 아니라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겼는가’입니다. 단순히 욕망 몇 가지를 억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김은 자기 의지력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바뀐 결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오히려 아주 좋은 비유가 됩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나무가 뿌리로부터 생명을 받아 충분한 시간 동안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거듭남도 한순간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이루어집니다. 익은 열매란 단순히 죄를 많이 안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된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익은 열매’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이 단일한 한 시점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른 과정과 시기가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다만 ‘첫 열매’, ‘둘째 열매’, ‘셋째 열매’를 고정된 등급표처럼 이해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무수한 차이와 상태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영적 등급을 측정하고 자랑하기 위한 체계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서로 다른 완전성을 이룹니다.

 

특히 ‘이기는 자’라는 말에는 영적 자부심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기는 자’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proprium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성화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기면, 자연적 명예욕이 종교적 명예욕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 성숙의 중요한 표지를 오히려 자기 상태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데서 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조금 더 빨리 내려놓고,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흔들림이 줄고, 예전에는 자기 이익만 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선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완성되었다’는 자기 판정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가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 가톨릭 영성의 ‘신인 합일’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배치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실재를 찾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변화되고, 더 깊은 내적 연합과 성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교파별 용어를 그대로 절대화하기보다 그 배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구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태도에 상당한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 교파나 교리의 차이만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선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신학 전통 안에서도 실제 선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해 살았던 사람은 천국적 상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표현이지만 어떤 공통된 영적 성장의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강사의 직관은 꽤 넓고 포용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인 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을 존재론적인 합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합(conjunction)은 있지만 동일화(identity)는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결합하지만,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따라서 ‘신인 합일’을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자유롭게 흐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그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결합’으로 이해한다면 상당 부분 대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존재가 신성과 하나의 본질이 된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혼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받는 그릇’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로 끊임없이 유입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참된 인간이 되지만 주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표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안에 이제 신적인 생명이 본질적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나는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읽는 경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 생명의 중심이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면류관’의 의미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면류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적 상급으로만 이해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상을 주신다’는 공로 사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은 선을 행하는 삶 자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선의 쓰임 안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외적 보상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와도 잘 연결됩니다. 열매가 익었다고 해서 나무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아 맺은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만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생명을 막는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며 주님의 인플럭스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강의에는 ‘성화는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는가, 죽은 뒤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도 등장합니다. 일부는 성화를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강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성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삶은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사후에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고 확정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실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도 선한 영들이 가르침을 받고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 사랑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회개의 인생이 사후에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잘못 배운 교리를 벗고 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상에서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한 사람이 단지 죽은 뒤 진리를 배워 천국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의 근본적인 방향은 살아 있는 동안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기는 자’라는 말은 미래의 특별한 몇 사람을 가리키는 영적 계급 명칭으로 보기보다, 지금 삶 가운데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모든 거듭남의 방향으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일찍, 어떤 사람은 더 늦게,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시험을 거치지만,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완전’의 의미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서도 지혜와 사랑은 영원히 증대합니다.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을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적 완전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계속 열려 있는 완전성입니다. 사람의 상태에 맞게 질서가 이루어졌지만 그 질서는 영원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다시 매우 적절해집니다. 익은 열매는 생명이 끝난 열매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열매입니다. 그 안에는 씨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성숙은 종착점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자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공용복 선생의 ‘이기는 자’ 개념에 덧붙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자기 힘으로 죄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영적 강자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기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보다 누가 이기게 하셨는지를 더 깊이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전신갑주’, ‘신인 합일’, ‘이기는 자’라는 서로 다른 표현들을 무리 없이 한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가장 깊은 핵심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실제 삶 안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악을 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진리를 행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체어리티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신앙의 목표는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익음’을 자기 상태에 대한 최종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실제 삶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익은 열매’는 영적 엘리트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향하는 겸손한 목표가 됩니다.

 

이제 5강은 이 추상적인 ‘이기는 자’의 개념을 실제 인물들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소화 데레사처럼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보다 작은 일에서 자기부인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이기는 자’가 거대한 영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잘 감당한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자료에서도 소화 데레사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5강 6부에서는 바로 이 ‘작은 승리’와 ‘일상의 성화’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 6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사람 : 소화 데레사와 생활 속 자기부인

5강은 지금까지 상당히 높은 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세 차례 연단’,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남’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영적 성숙을 아주 특별한 체험이나 극적인 희생, 혹은 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여기서 방향을 아주 현실적인 자리로 돌립니다. ‘큰 원수’보다 ‘작은 원수’, ‘큰 승리’보다 ‘작은 승리’,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을 강조하면서 소화 데레사를 소개합니다. 강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작은 원수들’이 생기며, 그때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같은 말씀을 붙들고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것은 잘 주어지지 않고 작은 것들이 주어진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대목은 5강 전체의 무게중심을 아주 중요한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면서 거대한 영적 전쟁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적 상태는 대단한 집회나 특별한 체험보다 생활 속의 작은 자극 앞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말 한마디, 내 뜻을 거스르는 작은 일, 피곤한데 누군가 부탁하는 상황, 별것 아닌 섭섭함,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반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사람 앞에 내놓을 만한 ‘영적 업적’도 없고, 누구에게 인정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가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강사가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그녀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소화’라는 말이 ‘작은 꽃’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큰 꽃처럼 화려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일들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했다고 소개합니다. 강의가 소화 데레사의 전 생애와 신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는 ‘작은 일의 충실함’이라는 영성의 한 특징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의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반드시 자연적 삶의 최종적인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이 생각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하며, 진리도 단지 기억과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진짜 시험장은 결국 일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작은 일’은 사실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의 아주 작은 행위 안에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최종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마지막 그릇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을 해도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다면 그 행위는 단순히 작은 외적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는 아주 사소한 예까지 듭니다.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에도 자기부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를 문자적으로 ‘몇 시에 일어났느냐’의 영성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훨씬 깊습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선한 쓰임’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에 필요한 충분한 휴식은 선한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맡은 책임을 외면한다면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욕구가 높은 목적을 방해할 때 그것을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돌보고 적절히 쉬며, 건강을 유지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을 줄이고, 음식을 줄이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소화 데레사 같은 성인의 금욕적 실천을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시대와 수도원 전통 안에서 행한 구체적인 수행을 그대로 복제한다고 해서 같은 영적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에서도 ‘어떤 영성가는 두 끼만 먹었다고 하면 나도 두 끼 먹어야지’ 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예가 등장합니다. 이런 열심이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사는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의 목적과 사랑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같은 두 끼 식사라도 한 사람에게는 절제의 훈련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영성을 과시하는 proprium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작은 승리’를 아주 직접적으로 풀어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왔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대하는 것, 집에서 ‘원수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반찬을 더 정성스럽게 해 주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즉시 방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등을 ‘이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표현은 매우 생활적이고 때로는 웃음을 섞지만, 강의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큰 악령을 쫓아내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바로 눈앞에서 자기 사랑의 충동을 꺾고 사랑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한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웃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호감이 있을 때 잘해 주는 것은 자연적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때 ‘내 기분’보다 ‘무엇이 선한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무조건 더 잘해 주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악 자체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폭력이나 착취를 행하고 있다면 그 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에게 더 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일을 참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경계를 세우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강의에서 남편의 폭력 같은 사례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부인과 오래 참음을 강조하다 보면 피해자가 폭력을 계속 견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 proprium의 보복심을 물리치는 것과 악한 행위를 방치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악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용서하면서도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한 순응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반찬을 더 맛있게 해 준다’는 강의의 재미있는 예도 그 행동 자체를 규칙으로 만들기보다 그 안의 영적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저 사람이 싫으니 나도 일부러 못되게 해야지’ 하는 보복의 proprium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 반감이 올라와도 그 반감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선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작은 자기부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강 3부에서 말했던 ‘세 번째 연단’의 깊이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악을 버리는 것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들어가면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납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 내가 옳다는 것을 꼭 확인받으려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법으로는 거의 문제 되지 않지만 영적 삶에서는 사랑의 질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작은 일’을 잘 감당한다는 것은 도덕적 완벽주의에 빠져 모든 표정과 감정을 감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방향이 점점 자연적 삶의 작은 부분까지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큰 원칙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를 꼭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상대를 살리려는가 아니면 이기려는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 정말 필요한가?’라고 잠깐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개념은 아주 풍성한 보완을 줍니다. 영적 삶의 중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발견하고 피한 뒤에는 실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에게 화를 안 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욕하지 않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이기는 것도 ‘나는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맡겨진 일을 유용하게 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영적 삶을 자기수련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옮겨 놓습니다. ‘나는 오늘 몇 번 자기를 부인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부인조차 자기 영적 성취의 목록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자기부인은 그 선을 방해하는 자기 사랑을 비켜 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꽃’이라는 이미지는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은 자기가 얼마나 큰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주님 앞에서 영적 가치는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이름 없는 성도, 큰 기관의 책임자와 가정에서 조용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외적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주님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이것은 천국의 쓰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에 맞는 서로 다른 쓰임을 수행합니다. 어떤 쓰임도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겉으로 작아 보이는 쓰임이라고 해서 천국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그 쓰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은 ‘작은 사람으로 만족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큰 책임을 맡기시면 그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큰 책임을 맡았다고 더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책임이 클수록 자기 명예와 지배욕이 섞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래서 큰 쓰임일수록 더 깊은 자기부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회와 사역에도 매우 직접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수천 명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어떤 순간에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큰 행사에서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실제적인 시험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한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면 아직 사랑이 자연적 삶의 작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작은 승리’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이유입니다.

 

또한 강사는 ‘작은 일 정도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신경 쓰면 할 수 있다’는 취지로 격려합니다. 여기에도 좋은 목회적 감각이 있습니다. 거듭남을 너무 거대한 목표로만 제시하면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칠 수 있습니다. ‘완전 성화해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릴 때, 오늘 내 앞에 있는 작은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말을 참는 것, 한 번 먼저 사과하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남의 공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그 작은 선을 행할 때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를 참았지만 그 힘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친절을 선택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할수록 작은 승리가 proprium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이기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이번에도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또 화를 냈다고 해서 ‘나는 거듭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를 보고 변명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원수’라는 강사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영적 의미에서 그 작은 원수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내 안의 반응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한마디 했는데 내 안에서 하루 종일 분노가 계속된다면, 문제의 중심은 그 한마디만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랑, 무시당하기 싫은 proprium, 내가 옳아야 한다는 고집이 함께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외부의 ‘작은 원수’가 내 안의 더 깊은 원수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상대방에게 억지로 좋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은 즉시 명령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별개로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해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내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점차 질서 있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의지와 행동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애정 자체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앞서갑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성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그것 때문에 행동을 조절합니다. 아직 마음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행하면,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억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작은 고행들의 수집이라기보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아주 작은 곳까지 선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식탁에서의 말 한마디, 싫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태도, 누군가의 결점을 보았을 때의 반응 같은 곳까지 주님의 질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거대한 관념 속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자연적 선택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강의를 보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론이 여기서는 갑자기 매우 낮고 평범한 자리로 내려옵니다. ‘익은 열매’가 되려면 엄청난 환상을 보아야 한다거나 거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중요한 중심을 계속 붙들게 합니다. 작은 자기부인의 목적도 결국 자기부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과 쓰임입니다. 내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그 참음으로 상대에게 선이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보다 그 희생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부인이 사랑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기 영성을 증명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다시 proprium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강 6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반드시 큰 전쟁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순간마다 자기 사랑보다 선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작은 승리의 생명조차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승리가 이웃을 향한 실제 쓰임으로 이어질 때 작은 행위 안에 천국의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 다시 더 깊은 자기부인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특히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과 고집,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다르게 대하려는 마음, 그리고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원고에서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자기’의 문제로 직접 지적합니다. 5강 7부에서는 바로 이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과 proprium의 관계를 중심으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5 7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 : 남을 보는 사람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으로

5강 6부에서는 소화 데레사를 통하여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순교나 특별한 영적 사건이 아니라,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배우자의 기분 나쁜 말을 보복으로 되갚지 않으며,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마다 자기 유익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자아가 잘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강사가 여기서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를 먼저 보는가?’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상대를 먼저 보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대체로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도 있지만, 무엇을 하자고 해도 늘 반대하고 ‘들이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 도움이 필요해졌다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아가 많이 깨어진 목회자’라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도울 수 있지만, 자아가 많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마음과 행동 어딘가에 차별이 드러난다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립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더 잘해 주고 싶고, 나를 들이받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proprium과 상당히 가까운 곳을 건드립니다. 다만 앞서 여러 번 구별했듯 강의가 사용하는 ‘자아’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완전히 동일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선을 덜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의 태도에 따라 내 사랑의 양이 달라지는 상태’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proprium과 매우 밀접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힙니다. 나를 인정해 주면 더 도와주고 싶고, 나에게 상처를 주면 ‘왜 내가 저 사람까지 도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적 공정성으로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상대가 내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보다 ‘지금 무엇이 선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누가 나에게 아무리 악을 행해도 무조건 똑같이 대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내적 목적이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인가’여야 합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분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복과 자기 유익이 판단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어 더 아픈 예를 듭니다. 오랫동안 정성껏 돌보아 주고 신앙생활을 도왔던 성도에게 목회자가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강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더 의지해서 그랬나 보다’라고 자기 쪽을 먼저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의 원인을 모두 자기 잘못으로 돌리라는 뜻으로 읽으면 위험하지만,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 일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의존과 기대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상당히 깊은 자기 성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구별해야겠습니다. 상대방의 배신은 상대방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의까지 ‘내 자아 때문이었다’고 떠안는 것은 건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특히 폭력이나 착취, 학대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기 성찰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자기비난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악은 저 사람의 책임이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과도한 사람 의존, 인정 욕구, 보답에 대한 기대,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악과 나의 proprium을 동시에 구별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 인상적인 문장은 ‘자아가 깨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설교 시간에 조는 성도를 예로 듭니다. 자아가 강한 목회자는 ‘어떻게 설교 시간에 저렇게 자는가’ 하고 성도를 탓할 수 있지만, 자아가 깨어진 목회자는 ‘내 설교가 부족해서 조는가 보다’ 하고 먼저 자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성도 역시 ‘목사님 설교가 형편없다’고 먼저 판단하기보다 ‘내가 기도가 부족한가?’라고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문자적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설교가 매우 부실할 수도 있고, 성도가 전날 밤새 일했기 때문에 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원인을 무조건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진리의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사가 말하는 영적 태도의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기 결백을 확보하고 상대방의 잘못부터 찾습니다. ‘나는 맞고 저 사람이 문제다’라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깨어질수록 그 자동적인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혹시 내가 볼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아주 깊게 만납니다.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진리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은 우리 장로님이 들어야 하는데’, ‘저 목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배우자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먼저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세상의 잘못된 교회를 찾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있는지를 보고, 바리새인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위선을 판단하기 전에 내 안의 자기 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지나치면 모든 상황에서 ‘내 탓인가?’만 반복하며 신경증적인 자기분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악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강의의 앞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이미 나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기는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기보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혈기와 아집과 고집이 강하고 자기반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일수록 연단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번 7부의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본다’는 주제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5강의 성장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proprium은 언제나 외부를 향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했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화를 낸 것은 저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외적 원인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외적 원인을 부정하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다. 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런데 왜 그 일이 내 안에서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이 속사람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상대방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다면 그 사건은 내 안의 다른 것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 ‘내 판단은 인정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사랑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자체를 보는 순간 외부 사건이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때 상대방은 더 이상 나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드러내 준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악을 정당화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모욕한 덕분에 내가 거듭났으니 그 모욕은 선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결과를 선을 위해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강의가 모든 생활 환경이 연단과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장점은 살리되, ‘그러니 악한 일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이 직접 시키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면 섭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실 수 있으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배신한 사건에서 ‘주님께서 저 사람에게 나를 배신하라고 시키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벌어진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사람 의존이나 명예욕, 보복심을 보게 하시고 거기서 나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을 하면 ‘모든 것이 연단이다’라는 강의의 언어도 훨씬 안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아’의 정체를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마음과 행실, 곧 ‘옛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며,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심리 현상이라기보다 말과 태도와 반응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은 반드시 외적 삶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즉시 공격하지 않으며, 상대가 나를 칭찬하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덜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 자체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들으면 인간의 자아 자체를 부수어 없애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께서 없애시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로운 개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 참된 개인이 됩니다.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내가 선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사랑의 종류도 다르고, 지혜의 형태도 다르고, 맡은 쓰임도 다릅니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성이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말을 ‘개성이 없어진다’,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한다’,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강의가 목회자에 대한 순종을 예로 들기 때문에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것이 곧 자아가 깨진 증거도 아니고, 목회자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한다고 자아가 강한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양심과 진리에 따라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동의했느냐 반대했느냐’가 아니라 그 동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진리를 위해 양심적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대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 역시 참된 자기부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유와 이성이 거듭남의 필수 조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유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들어가면 강의가 말하는 ‘순종’도 사람에 대한 맹목적 복종보다는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기 고집을 내려놓는 것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귀한 것은 강사가 이 자아의 문제를 목회자에게 먼저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성도를 나중에 차별하지 않는가, 설교 중 조는 성도를 보면서 즉시 그 사람을 탓하지 않는가, 자신이 돌보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성도 통제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자 자신의 내면에 적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려서 읽을 만합니다.

 

이것은 앞서 공용복 선생의 제자들에게서 느끼셨다는 ‘핵심진리에 자기 개인의 것을 함부로 섞지 않으려 하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받은 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가 실제 자기부인과 연결될 때에는 귀한 덕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승에 대한 충실함 역시 스스로 진리를 살피는 자유와 분별을 막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아가 깨어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을 ‘무슨 일이 생겨도 다 내 잘못이라고 하라’고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기에 앞서,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먼저 살펴라’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남의 티보다 자기 들보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자기 들보를 본 뒤에는 그것을 붙들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내가 역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가 회개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주님, 제 안에 이것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싶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 삶에서 다르게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선을 계속하고, 잘못을 지적받으면 한 번쯤 변명하지 않고 들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작은 행동들 속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실제로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멸시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를 칭찬하느냐 비난하느냐, 나에게 유익하냐 손해냐가 선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에게 실제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 전체의 ‘성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내려옵니다. 성화는 어떤 특별한 체험 뒤에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고 선언하는 상태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유익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는 데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익은 열매’라는 거대한 표현이 결국 ‘내게 잘해 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선을 베풀 수 있는가?’라는 아주 작은 질문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귀한 긴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 7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진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을 보면서도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자기 안의 자기 사랑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실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제 강의는 이 ‘자아가 깨어짐’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상태로 연결하면서, 단순히 상대에게 보복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성화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아가페 사랑’과 실제 인물들의 사례로 옮겨 갑니다. 원고에서도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함을 누리는 것’, 그리고 성화된 성도의 목표가 단순한 건강과 물질의 복이 아니라 그런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데 있다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5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과 ‘아가페’, 그리고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및 천적 사랑과 어떻게 구별하여 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 8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 아가페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성화의 실제 모습

5강은 이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문제로 가져갑니다. 앞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먼저 탓하기보다 자기 안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그런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강의가 성화의 실제 모습을 매우 높은 신비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상태’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앞에서 말한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자아가 깨어짐’이 결국 사랑이라는 한 지점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세 차례 연단’과 ‘이기는 자’를 단순히 강한 영적 전사가 되는 과정으로 읽었다면, 여기서 그 의미가 수정됩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것입니까? 결국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혈기와 아집과 고집, 보복심과 자기 의, 인정받으려는 욕망,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은 자연적 애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성화의 목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상태보다,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 앞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상태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체어리티(charity)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매우 깊은 교리를 알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자기에게 손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 지식과 체험만으로 그의 영적 상태를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시험하는 매우 깊은 말씀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도와주며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데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 심지어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조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근거가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에서 ‘무엇이 주님 앞에서 선한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호감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보기보다, 그 사랑의 실제 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감정적 호감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본질은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깊게는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감정의 따뜻함보다 훨씬 깊고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원수에게 반드시 따뜻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렸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해서 곧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은 기억과 자연적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당 기간 남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이유로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보복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려 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님 앞에서 거절하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자기 악에서 돌이켜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미 사랑의 방향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의 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에서 벗어나 선 가운데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원수의 악을 용납하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거짓말하고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그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잘못을 ‘사랑하니까’ 허용한다면 결국 자녀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시 범죄를 방치하는 것이 범죄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제지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그 사람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분별한 친절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사랑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과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악을 돕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 안의 악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의가 말하는 ‘원수와도 화평한다’는 것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반드시 관계를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졌다면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어떤 관계는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상대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질서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화평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앞부분의 가르침과 ‘원수를 사랑한다’는 이번 부분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상처를 받으면 즉시 자기 정당화를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반드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받았다는 사실 자체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상처는 실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은 그 상처를 붙잡아 자기 의와 보복심을 키우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받았을 때 그 상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로 만드는가, 아니면 주님께 가져가 자기 안에 일어나는 미움과 보복심을 보게 되는 계기로 삼는가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깊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기비난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그 사람을 생각하면 두렵고 괴로운데 ‘나는 사랑이 없어서 이렇다’고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의 회복과 영적 용서는 서로 관련되지만 반드시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거듭남의 과정도 사람의 상태를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시작도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붙잡지 않는 것,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 그 사람에게 실제 선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마음속에서 저주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5강 6부에서 살펴본 ‘작은 일에서 이기는 것’의 연장선입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 사랑’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웅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작은 자기부인이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사랑의 질서가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보복하지 않고, 내일 한 번 험담하지 않고, 다음에는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조금이나마 바랄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필요할 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먼저 행동을 이끌다가 점차 새로운 애정이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것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성에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를 제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 마음에서는 미워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살면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억지로 하던 선을 나중에는 사랑해서 하게 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화를 억누르는 것과 화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입을 다물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용서하려 하지만, 나중에는 상대가 악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성화된 사람’의 모습과 상당히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접점이 있습니다. 성화를 단순히 ‘죄성이 제거된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설명보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사랑이 형성된 상태’라는 실제 삶의 모습으로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까워집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여기에도 끝은 없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제 나는 완전 성화되었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자기 사랑의 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는 ‘나는 사랑이 많은 존재다’라고 자기 사랑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아가페’와 스베덴보리의 천적 사랑을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celestial)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 사랑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사랑이 의지 자체의 중심이 되어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인 상태와 관련됩니다. 영적(spiritual)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에 있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했으니 천적 인간이다’라고 단순히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사랑’을 신앙의 최고 열매로 놓는 방향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삶 속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깊은 주제와도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신앙이 아벨을 죽일 때, 곧 교리가 사랑을 밀어낼 때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높은 윤리적 명령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정통 교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면서 나를 비판한 사람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분리입니다. 바로 그 분리를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다시 결합시키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교리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선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 아래 있었느냐보다 그가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거짓은 진리가 아니므로 사후에는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지식 자체로 천국적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상대의 오류를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그의 멸망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무기로 사용하면 진리 자체는 옳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랑은 지옥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특히 무거운 문제입니다. 설교에서 잘못된 교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 속에 ‘나는 저 사람보다 옳다’는 기쁨이 들어 있다면 proprium이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상처를 주는 칼이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악을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왜 그것을 말하는가’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진리를 말하되 그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선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쓰임과 선입니다.

 

이 관점에서 ‘원수와 화평한다’는 말도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갈등하면서도 내적으로 상대의 선을 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를 막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으면서도 그 사람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반박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논쟁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하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멸시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원수를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면서 자기 안의 미움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폭로하는 데 능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proprium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5강 앞부분에서 강사가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라고 했던 말이 여기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외부의 원수가 사라져도 proprium이 그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다시 원수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과 화해해도 자기 사랑이 그대로라면 내일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렸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다루시는 것은 외부의 모든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대하는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분명히 보면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진리를 붙들면서도 상대를 멸시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사람이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의 훨씬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억지로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해’라고 자기 감정을 조작해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막는 자기 사랑과 보복심을 죄로 여기고 피할 때 조금씩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도 결국 은혜이며 동시에 거듭남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성화’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드러납니다. 성화를 ‘내 안의 죄성이 100% 제거되었다’는 자기 상태에 대한 선언보다, ‘전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던 사람에게 이제 선을 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랑의 변화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실제이고, 삶에서 확인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5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모든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면서도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고, 자기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가능한 자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랑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제 5강은 이러한 성화와 사랑을 실제 인물들의 삶에 더욱 구체적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강의 후반의 중요한 축인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적 체험이 점차 전면에 등장하며, 그의 1929년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의 승리와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핵심진리’의 틀 안에서 해석합니다. 5강 9부에서는 이 부분을 서둘러 스베덴보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먼저 강의가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충분히 따라간 뒤 ‘내주합일’, ‘그리스도의 생명’, ‘성화’를 스베덴보리의 ‘결합(conjunction)’ 및 주님의 인플럭스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5 9

이용도 목사의 생명내주합일’ :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5강은 이제 후반부의 중요한 인물인 이용도 목사에게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강사는 ‘말씀의 실천-연단-양심의 밝아짐-세 차례 연단-자아의 깨어짐-이기는 자-익은 열매-원수 사랑’이라는 긴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용도 목사의 삶과 체험을 이 전체 구조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특히 그의 1929년 무렵의 깊은 영적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을 통과한 사건으로 보고, 그 이후 나타난 그의 삶과 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의의 관심은 단순히 이용도 목사가 얼마나 유명한 부흥사였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깊은 연단을 통과한 뒤 ‘내가 사는 것’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강의가 말하는 ‘생명’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학적 명제를 알고 있다는 지적 신앙도 아닙니다. 강사가 이용도 목사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주’라는 말과 ‘합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성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때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에서 진리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는 분명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두 존재가 하나의 존재로 섞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conjunction)이 있지만 존재의 혼합이나 동일화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며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라 해도 신성 그 자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자기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생명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내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점점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 결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결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할수록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온전해집니다. 이것은 5강 7부에서 살펴본 ‘자아가 깨어진다’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부수어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인격 자체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그것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과 쓰임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과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각각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하나의 생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상당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 교리가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살 수도 있으며, ‘성령’을 말하면서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위는 결국 생명에서 드러납니다. 무엇을 고백하는가뿐 아니라 그 고백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그토록 심각하게 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영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욱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반드시 폭발해야 하고, 탐욕이 생기면 반드시 따라가야 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겉으로 자유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나는 화가 나지만 화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정직을 선택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자유가 생깁니다.

 

그 자유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이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교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빛을 받아 봅니다. 눈 안에 태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사랑하고 생각합니다. 거듭남은 그 유입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그릇이 질서 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이라는 강한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안전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신성과 인간 본질의 합일’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사이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계시고 인간은 인간으로 있으면서,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추상적인 신비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평가할 때도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의 열매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렬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음성을 들었거나 극심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는 영적 진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 인간의 교통 가능성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분별한 영적 체험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합니다.

 

영적 체험의 진위를 살피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그 체험 이후 사람이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해지는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면 섬기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과 선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원수를 더 미워하게 되는가, 아니면 사랑하려 하는가? 체험이 proprium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그 지배를 약하게 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지금까지 5강이 말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세 번째 연단을 통과했다’는 증거가 어떤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라면 5강 앞부분의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는 계속해서 ‘자기를 본다’, ‘자아가 깨어진다’, ‘작은 일에서 이긴다’, ‘원수를 사랑한다’를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용도 목사의 체험 역시 그 체험 자체보다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강의가 보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강조가 의미를 갖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착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면 그 생명이 반드시 사랑과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외적 열매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이 있으면 행위가 나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면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열매가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와 오늘날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십자가는 물론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예수께서 내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의 법정적 공식으로만 축소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거듭남과 삶이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형벌을 대신 받아 아버지의 진노를 만족시키신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까지 싸우시고 이기시며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하신 최후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 때문에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거듭남은 서로 경쟁하는 두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실제 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과 삶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를 읽으면 상당히 풍성해집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예수의 생명이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이 내 원수 관계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자기부인이 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을 믿는다면 옛사람과 다른 어떤 새로운 생명이 실제로 자라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나치게 주관적인 내적 체험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낀다’는 확신 자체가 객관적 기준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진리와 선이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진리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렬한 사랑과 일치감을 느껴도 그것이 말씀의 선과 진리에 반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자기 신격화로 이어진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내주합일’과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제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엄청난 영적 위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이 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과 주님의 진리를 함부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신적 인플럭스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언어를 입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합에는 오히려 겸손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특별하다’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내가 성화되었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인식입니다. 천사가 자기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내주합일’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보완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일’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그의 삶을 움직이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이용도 목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1929년 체험을 정말 ‘세 번째 연단의 완성’이라고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핵심진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을 존중하여 먼저 그대로 이해하되,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근거로 이용도 목사의 사후 영적 상태나 거듭남의 정확한 단계를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의 말과 삶,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랑의 방향을 보여 주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 절제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판정하는 렌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가르침과 삶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밝힌 영적 질서 안에서 더 정확하게 구별해 보는 렌즈에 가깝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살려고 했는지를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어디에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이 보이며 어디에서 신학적인 구별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교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신앙의 궁극적 증거가 사람의 변화된 사랑과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AC의 아주 근본적인 원리와 만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속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살아낸 것입니다. 지식은 기억에서 분리될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의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 이후에도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 지식을 축적했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가장 실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는 특별한 체험의 순간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 진실을 말하면 불리해질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생명’이 움직이는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5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동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황홀경도, 환상도, 특별한 계시도 아닙니다. 체어리티입니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 진실할 수 있는가,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다른 사람을 덜 멸시하는가,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을 더욱 주님께 돌리는가입니다. 바로 그 열매에서 결합의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5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사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전체 강의를 한데 모으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연단-죄성-자아의 깨어짐-성화-이기는 자-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큰 구조가 어디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깊이 만나는지, 그리고 ‘죄성의 완전 제거’, ‘전적 부패’, ‘세 차례 연단의 단계화’, ‘신인합일’ 등 어디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한지를 종합하여 5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5 10

연단에서 생명까지’ : 5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종합

5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말씀의 실천’, ‘양심의 빛’, ‘광야의 연단’, ‘세 차례 연단’, ‘죄성’, ‘전적 부패’, ‘자아의 깨어짐’,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원수 사랑’, 그리고 마지막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주합일’까지 긴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서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성장론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죄와 정욕이 드러나고, 그것을 회개하며, 자기중심성이 깨어지고, 마침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을 ‘익은 열매’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모든 성도가 연단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연단을 받아야만 익은 열매가 되고,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한 언어가 반복됩니다.

 

이런 전체 방향을 먼저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5강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신분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구원이 당신의 성품과 사랑과 일상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계속 묻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생명이 없으며, 진리는 선이 되고 행위가 되어야 실제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5강의 첫 출발점인 ‘말씀의 실천’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습니다. 강사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오히려 자기 안의 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인내를 배우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 드러나며, 자기부인을 배우면 자기 뜻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연단’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조금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구별되지 않던 선과 악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악을 비추어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사람에게 새로운 악을 넣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강의에는 반복하여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표현을 ‘삶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숨은 애정과 지배적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조금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를 당하면 분노가 올라오고, 재물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손해가 생기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환경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5강의 ‘연단’과 스베덴보리의 ‘시험’을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붙여 주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강합니다. 더 나아가 천년왕국 말기에 마귀가 풀리는 것까지 ‘연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의 섭리와 악의 허용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주님은 악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지옥의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주님이 저 사람에게 나를 괴롭히라고 시키셨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이미 발생한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자기애와 분노를 드러내고 그것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5강의 두 번째 큰 축은 ‘세 차례 연단’입니다. 출애굽 직후 바로의 추격, 광야에서의 아말렉 전쟁,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적들과의 전쟁을 인간의 영적 성장 세 단계와 연결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가나안 정복까지를 ‘세 번째 연단 과정’, 곧 광야 연단의 마지막 단계로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구조는 ‘신앙생활이 진행될수록 싸움의 대상이 더 깊어진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행동의 죄를 다루지만, 점차 인정욕구, 자기 의, 아집, 자기 영성에 대한 자부심처럼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반드시 ‘시험이 점점 적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내면이 열리면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수준의 진리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왜 이 말을 하는가? 상대를 살리려는가,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가?’라는 목적의 차원까지 들어갑니다. 행동에서 의도로, 의도에서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거듭남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연단’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셋’은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상응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모든 신앙인의 생애에 적용되는 고정된 영적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종류와 깊이와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는 영적 성장의 완전한 과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되, ‘나는 지금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를 판정하는 척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5강의 세 번째 큰 축은 ‘죄성’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선을 원하면서도 범죄하는 이유를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죄성’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전적 부패’와 연결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장 중요한 인간론적 보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유전적 악을 매우 심각하게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inmost 자체를 악의 뿌리가 박힌 곳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유입되는 가장 내적인 입구와 관계됩니다.

 

또한 조상의 죄책 자체가 법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도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유전되는 것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사람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실제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악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악한 충동이 스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인플럭스의 원리가 들어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자기 생각과 자기 애정처럼 느껴집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 책임과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악이 지옥에서 유입된다’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유입된 악을 사랑하여 받아들이면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5강의 ‘전적 부패’를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인간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가까워집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전혀 없고,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사람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어린 시절부터 리메인스를 저장하십니다.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선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그 안에서 은밀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강의 죄론은 ‘인간의 악이 얼마나 깊은가’를 매우 강하게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다’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합니다. 인간의 악만 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인간 자신이 모르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실제 영적 시험이 가능한 것도 인간에게 오직 악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가 그 악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의 네 번째 큰 축인 ‘자아의 깨어짐’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자아가 깨어진 사람의 특징을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보기보다 자기를 먼저 보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 목회자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성도라도 어려움을 당하면 차별하지 않고 돕는 사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자기 안의 사람 의존을 돌아보는 사례 등이 나옵니다. 이 통찰은 proprium의 문제와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모든 문제는 내 탓이다’라는 자기비난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실제로 악을 행했다면 그 악은 상대의 책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동시에 ‘이 사건을 통해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살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상대의 악과 자기 proprium을 함께 구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점점 외부에 놓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 교회가 문제다’, ‘저 목사가 문제다’, ‘저 사람이 자아가 강하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짓 교리를 비판하면서 자기 안의 자기 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음을 지적하면서 자기 안의 냉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자체가 proprium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5강의 다섯 번째 큰 축은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입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이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또 익은 열매는 말씀을 ‘99%’가 아니라 ‘100%’ 실천하는 사람이며, 빛 가운데 철저하게 회개하여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이라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바로 이 ‘100%’의 언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철저성을 강조하는 목회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유전적 악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절대적 무죄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완전함은 ‘나는 이제 자체로 완전하다’는 자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 선이 지배적 사랑이 된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악의 제거’라는 말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악이 인간에게서 독립적인 실체처럼 뽑혀 우주 밖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라기보다, 악이 분리되고 억제되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전에는 악을 기뻐해서 행했지만 이제는 그 악을 죄로 여기고 싫어하며 선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이고 깊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아름답게 읽는 방식은 ‘완전히 무결한 사람’보다 ‘주님의 선이 그의 삶에서 실제 열매를 맺게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공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받아 맺습니다. 인간도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행동과 쓰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진정 익은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보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 중간에 등장하는 아주 소박한 일상 사례들이 오히려 ‘익은 열매’의 의미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강사는 자신도 자주 패배한다고 솔직히 말하며, 가정에서 말 한마디와 혈기 하나를 다루는 것을 실제 ‘이김’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기는 자’가 너무 높은 영적 계급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을 생활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큰 신비 체험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말을 절제하는 것,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 작은 관계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예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크고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에서 사랑을 실천한 것을 성화의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종교적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업, 관계, 일상의 책임 안에서 나타납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마지막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은 머리 안의 선이 아니라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원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5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화’를 죄성 제거라는 추상적인 설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삶의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신앙의 완성은 결국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원수 사랑 역시 무분별한 용납과 같지 않습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폭력과 착취와 거짓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갑니다. 악을 제지하면서도 상대의 파멸을 즐기지 않고, 필요한 책임을 물으면서도 보복심에 지배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5강이 사랑으로 깊어지는 끝자락에 이용도 목사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수도적인 영성’,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 합일되는 성화·성결의 복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담는 복음’으로 설명하며, 기복신앙과 대조합니다. 이 표현은 5강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결국 죄를 많이 분석하고 연단의 단계를 공부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내주합일’을 결합(conjunction)의 언어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합쳐져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에 받아들여져 그 사람의 삶을 점점 질서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생명을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플럭스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거듭남은 이 인플럭스가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간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물리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의 가장 깊은 표지는 황홀한 체험보다 사랑과 진리의 열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용도 목사에 대한 강사의 높은 평가도 절제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는 그의 삶과 체험을 ‘세 번째 연단’, ‘성화’, ‘내주합일’의 틀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핵심진리’ 전통 안에서의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용도 목사의 정확한 영적 단계나 사후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적인 전기와 체험만으로 그의 내적인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기록된 삶과 메시지에서 자기부인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하는 열매가 보이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절제는 공용복 선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에 깊은 진리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공용복 선생의 모든 체계가 스베덴보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몇몇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실제 영적 통찰을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5강은 바로 그 균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 ‘자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넓혀야 한다’, ‘신앙은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다’, ‘정확한 세 차례 연단을 통과한다’, ‘100% 정결한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문자적인 종말론적 시간표 등을 절대적인 영적 구조로 만드는 부분은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종말론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의의 전체 성장론은 교회시대,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같은 문자적인 미래 시간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 자료에서는 일부 성도의 환난 전 휴거, 후 3년 반 등의 구조를 문자적인 종말 사건으로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사람들까지 실제 역사적 인구 집단으로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이런 이미지들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는 상응적 말씀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체계가 분명히 갈라집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지적하는 목적은 ‘누가 더 성경적인가’를 놓고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각의 말이 사람의 영적 삶에 무엇을 하려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종말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그 긴장을 미래의 달력에서 현재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대환란이 올 때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원적으로 ‘오늘 당신 안에서 무엇이 주인인가?’를 묻게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을 읽으면 종말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마지막 심판이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거짓의 외관이 벗겨지고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질서와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영계에 들어가면 자기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5강 전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강의는 그것을 ‘죄성과 정욕을 이기고 있는가’라고 묻고, ‘자아가 깨어졌는가’라고 묻고, ‘익은 열매인가’라고 묻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을 ‘당신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돈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자기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종교조차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면 돈과 지위와 지식과 재능은 모두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무엇이 주인인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자’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이기는 자는 강한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정복한 영적 영웅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점점 생명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여전히 자연적 욕구와 감정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서 질서를 찾습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개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삶의 최종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막되 미워하지 않는 것, 진리를 말하되 멸시하지 않는 것, 거리를 두어야 할 때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체어리티입니다.

 

‘내주합일’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처럼 독립적으로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면서, 그 사랑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표현하는 결합입니다.

 

그리고 ‘익은 열매’ 역시 자기 완성의 자격증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자연적 삶의 실제 열매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말로 자기 익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삶에서 나타납니다. 말투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5강이 이용도 목사의 ‘생명’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긴 죄론과 연단론의 마지막 목적이 ‘죄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진리를 배우는 것도 결국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는 ‘핵심진리’의 5강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 신앙에서 행하는 신앙으로, 행하는 신앙에서 사랑하여 행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말씀 때문에 참습니다.’ 나중에는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그 사람의 선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AC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은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독립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을 섬기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5강이 그토록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결국 이 문제와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5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연단을 많이 받아 자기 힘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죄로 알고 물리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점점 생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여기에 던지는 아주 좋은 질문 하나는 그대로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말씀은 지금 당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AC를 읽는 사람에게도 매우 필요한 질문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인플럭스와 proprium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것들이 실제 우리의 말과 관계와 선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핵심진리’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 연단과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 실제로 생명을 주시고 악을 물리치시는 분이 누구이며, 인간의 자연적 애정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하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들어가면 성화는 자기완성의 긴장에서 벗어나면서도 삶의 변화라는 엄중함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렇게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5강의 장점은 더욱 살아나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보완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욕망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격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신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진리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5강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깊고도 안전하게 읽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5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1부의 ‘말씀의 실천과 양심의 빛’에서 시작하여, 2부의 ‘출애굽-광야-가나안’, 3부의 ‘세 차례 연단’, 4부의 ‘죄성과 전적 부패’, 5부의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 6부의 ‘작은 일의 승리’, 7부의 ‘자아가 깨어짐’, 8부의 ‘원수 사랑과 체어리티’, 9부의 ‘이용도 목사와 생명의 내주합일’을 지나, 마지막 10부에서는 그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 삶이 되는 거듭남’이라는 한 중심으로 모았습니다. 앞선 1강부터 이번 5강까지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진리’의 가장 강한 문제의식도 이제 꽤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알고 믿는가’에서 멈추지 말고 ‘그 진리가 실제 당신의 생명이 되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오래 붙들어 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SY.59,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6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6강 1부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와 ‘마음밭’이번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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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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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 1

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사랑으로 보기

4강은 앞선 강의들과 연결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 광야의 연단, 영계의 구조와 사후의 상태 등을 비교적 큰 틀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그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실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죄론’을 시작합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도 명확하게 밝힙니다.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나타나는 어두운 마음과 몸의 행실과 생활’을 세밀하게 분별하고,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구별함으로써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 앞에서 물리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죄론을 ‘기본 진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과목 정도로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과목들을 꿰는 중심축으로 이해합니다. ‘입문’에서 말하는 휴거 성도의 자격도 죄 문제와 관계되고, ‘교회시대 이기는 자’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이며, ‘영계론’에서도 사후 심판과 천국·지옥의 문제가 결국 죄와 연결되고, ‘속죄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루며,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는 죄 문제를 해결한 성도들의 삶이고, ‘성장론’ 역시 죄와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핵심진리’의 목차와 여러 권의 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는 여러 교리를 병렬적으로 모아 놓은 책이라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변화되는가?’라는 하나의 문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출발점에는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 외적인 행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미움,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처음부터 훨씬 깊은 곳을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낳는 ‘죄성’과 ‘정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은 단순한 윤리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내면 해부’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만든 내 안의 무엇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 이전에 의지가 있고, 의지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에서 생각과 의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의 목적이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이익이라면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외관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관을 보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낳은 의지와 목적을 보십니다.

 

이번 강의에는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강사는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지금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여러분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강단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서 ‘자기 자랑’이 나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를 ‘타락한 정욕’에서 찾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은 이미 성적 욕망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내가 한 일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정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히 육체의 몇 가지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AC를 읽어 온 우리에게는 ‘proprium’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욕심이 많다’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그 ‘자기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타락한 의지 전체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음식과 성욕과 재물욕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proprium에 깊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달리 정결하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나는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proprium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강단 위의 자기 자신에게까지 칼날을 돌리는 것은 귀하게 볼 부분입니다. 죄론을 남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금세 위험해집니다. ‘저 사람은 탐욕스럽다’, ‘저 목사는 명예욕이 많다’, ‘저 성도는 육적이다’ 하면서 죄론이 타인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에게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론의 칼날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기본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회개는 타인의 악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살피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의에는 이 문제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재미있는 경험담도 등장합니다. 강사가 평신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주간 살아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하나님께 영광’,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하나님께 영광’ 하며 감사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그릇 밑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평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가 다소 우스워 보이지만 강사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당히 진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 하나가 바뀌자 내면의 상태가 즉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평온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면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생기고,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랑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거듭남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악은 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죄론’이 단순한 죄 목록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강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은 죄, 이것은 죄 아님’이라는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눈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었을 때 왜 기쁜가, 이것을 빼앗겼을 때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론은 추상적인 조직신학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실제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관찰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내 안에 이런 악이 있구나’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 삶에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일조차 proprium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까지 끊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정결하다’, ‘나는 이 정도로 연단받았다’는 또 하나의 자기 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방향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을 보지만 악만 바라보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악에서 얼굴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행합니다. 악을 제거하는 이유도 ‘아무 욕망도 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4강 첫머리에 흐르는 ‘정결’이라는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인간성의 삭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을 하나씩 없애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은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사랑하고 더욱 깊게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가 달라집니다. 자기만을 위한 기쁨에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쪽으로, 소유하는 기쁨에서 유용하게 쓰는 기쁨으로, 인정받는 기쁨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쪽으로 사랑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강의 첫 질문인 ‘무엇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한다면, 단순히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기보다 ‘우리 사랑의 질서가 정결해져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 아래 다른 모든 사랑들이 어떤 질서로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도 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4강은 이제 본격적인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정욕 자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능인데 타락하면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여러 욕망으로 세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랑의 질서’가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4강 2부에서 별도의 주제로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1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습니다. ‘죄를 알려면 먼저 행동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행동을 낳고 있는 내 안의 사랑과 목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는 목적은 자신을 정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랑의 질서를 주님께서 바로잡으실 수 있도록 자유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상당히 깊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4 2

정욕은 처음부터 악한 것이 아니다 : 창조된 애정과 타락한 욕망, 그리고 사랑의 질서

4강 1부에서 강사는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서 찾지 않고, 그 행동을 낳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내면을 움직이는 ‘정욕’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강의가 사용하는 ‘정욕’이라는 말의 범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욕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강의에서의 정욕은 훨씬 넓습니다. 강사는 그것을 크게 ‘애정’과 ‘욕망’으로 나누고, 애정에는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등이 있으며, 욕망에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삶을 움직이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구를 가리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정욕 자체가 처음부터 죄악된 것은 아니다’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고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연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이 기능들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자기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핵심진리’의 죄론을 모든 자연적 욕구를 악하게 보는 금욕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목에서 강사가 말하는 것은 ‘배고픔이 죄다’, ‘남녀간의 애정이 죄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죄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기능이 타락을 통하여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문제 삼는 것은 욕구의 ‘존재’보다 욕구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능들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적인 애정과 욕구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쉬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을 섬기면 선한 질서 안에 있지만,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 위로 올라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목적-원인-결과’의 질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는가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과 판단이 ‘원인’이 되며, 그것이 실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얻는 것과, 재산 자체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것은 외적으로는 모두 ‘돈을 버는 행위’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갖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 지위를 통하여 더 큰 유용성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섬기기 원한다면 명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성은 핑계가 되고 ‘내가 높아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proprium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1부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던 ‘말씀을 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타락한 정욕’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가 전도된 사랑’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다 정교하게 ‘사랑들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들은 서로 위아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주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는 이웃 사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그 자체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사랑’을 무조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병적인 자기부정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의 직업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사랑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다면 오히려 필요합니다. 문제는 ‘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 자기 사랑은 지옥적인 사랑으로 전도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진리’가 정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표현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으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의 기쁨은 자연계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만족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 만족을 느끼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결정적입니다.

 

가령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 자체는 악한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선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으면 불편해진다면 그때 숨어 있던 다른 사랑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동일한 선행이지만 내적으로는 두 사랑이 서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순수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봉사하면서도 감사받고 싶으며,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은 이런 혼합된 동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작은 선한 의도를 붙드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 섞여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조금씩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내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하지 않으니 나는 위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혼합된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일부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는 주님만을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랑 안에 아직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구나.’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악을 물리치면서 선한 동기가 점점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강한 자기 성찰은 매우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파헤쳐 ‘이것도 정욕, 저것도 정욕, 이것도 자기 만족’이라고만 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될수록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기라는 것은 없어져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자기 것처럼 행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말하는 ‘천적 proprium’, 곧 주님에게서 받은 새로운 own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은 ‘나’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짓된 ‘나’에서 참된 ‘나’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 ‘정욕을 죽인다’는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애정 자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고, 부부간의 애정을 죽이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기쁨을 없애고, 일을 성취하는 만족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애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애정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우상’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올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직관적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그것을 잃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애정이 있지만 그 모든 애정을 조직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목적으로 삼으면 다른 자연적 사랑들이 그 아래에서 질서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으면 종교적 행위조차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한 방법은 ‘무엇을 잃을 때 내가 가장 크게 흔들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돈을 잃을 때인가, 명예를 잃을 때인가, 사람의 인정을 잃을 때인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인가, 가족에 대한 내 뜻이 좌절될 때인가. 이런 순간에 평소 감추어져 있던 지배적 사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욕의 첫 번째 형태로 ‘혈육간의 애정’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마태복음 10장 37절, 곧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가져와, 가족 사랑조차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혈육간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거듭나면서 그것이 영적 사랑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내 자녀니까’, ‘내 부모니까’, ‘내 가족이니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혈연애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서 ‘이 사람이 주님께 속한 한 영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원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혈연을 넘어서는 체어리티가 그 자연적 사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영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꾼다면 혈육간의 애정이 높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의 영원한 선을 위해 때로는 바로잡아 주고, 부모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사랑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참된 사랑으로 만들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결국 자녀를 ‘나의 것’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그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애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질’을 변화시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행동 안에도 전혀 다른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뒤에도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번 4강의 ‘정욕’이라는 용어를 독자는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정욕’을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란한 욕망’과 동일시하면 강의 전체가 크게 왜곡됩니다. 이 강의에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라는 넓은 영역을 가리키며, 핵심 문제는 그것이 타락하여 ‘자기 만족’과 결합하고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설명 역시 ‘이 욕구가 존재하는 것이 죄인가?’보다 ‘이 욕구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작은 차이도 점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심진리’는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끊고’, ‘죽이는’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한 사랑을 물리치는 싸움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질서의 회복’으로 설명하는 데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서로를 보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언어는 악과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긴장을 일깨우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싸움의 목적이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아래 바른 질서로 되돌리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4강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욕이 있다’는 사실보다 ‘정욕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종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자연적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바로 그때 자연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선물로 주어진 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은 사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애정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이 가장 깊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사랑 아래 이웃 사랑과 자연적 애정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사람의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강의는 여기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비롯한 여러 정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을 통하여 식욕과 인간의 육적 요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강한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절제’와 ‘억압’, ‘시험’과 ‘거듭남’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것을 4강 3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 3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 : 억압이 아니라 주님 아래로 돌아오는 것

4강은 ‘정욕’을 인간에게 처음부터 악하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는 자연스럽게 매우 실천적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정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끊는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그 의미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구와 애정을 없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듭남은 곧 자기 억압이나 금욕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으며, 친구와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을 이 강의 자체의 앞뒤 맥락에서 읽어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뜻보다는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은 생각으로 ‘악이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까 봐, 처벌받을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강의의 강한 언어에는 단순히 악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실제로 싸우라는 중요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과 ‘악한 애정 자체가 사라진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욕망의 뿌리까지 이미 제거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데도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 안에서는 실제 전투가 일어납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proprium의 애정이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것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내적 충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초기에는 ‘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화가 난다고 즉시 화를 쏟아내지 않고, 욕심이 생긴다고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며, 음란한 욕망이 일어난다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계속 이를 악물고 평생 욕망을 눌러 놓는 상태가 천국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깊은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반복해서 죄로 알고 물리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악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약해지고 반대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이 훨씬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예전에는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쁜 것’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단순한 행동 교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행동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문제를 주님의 광야 시험과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로 읽습니다. 육체는 떡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떡보다 더 높은 곳, 곧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에는 분명한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주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필요에 지배당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음식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성욕은 결혼과 인류의 지속에 관계된 자연적 기능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도될 수 있습니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쉼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맡겨진 유용성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 역시 생활과 유용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소유 그 자체가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욕구가 어떤 질서 아래 있느냐’입니다.

 

다만 주님의 광야 시험을 ‘식욕을 절제하신 사건’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시험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절제한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계로부터 취하신 유전적 인간성을 통하여 지옥들과 싸우셨고, 계속되는 시험과 승리를 통해 그 인간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 역시 지옥 전체와의 신적 전투라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의 실천적 적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층위를 구별하면 됩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육체의 요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속뜻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전투와 영화라는 훨씬 깊은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전자의 적용을 폐기하기보다 후자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정욕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은 금식할 수도 있고, 술을 끊을 수도 있으며,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금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절제만으로는 사람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는 세상을 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고,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나는 명예를 초월한 영적인 사람’이라는 더 은밀한 명예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 자체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 하나를 억제했는데 그 에너지가 더 깊은 propr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싸우는 방식은 매우 독특한 긴장을 갖습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서 알아서 제거하시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결단하고, 피하고, 거절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와 인플럭스가 함께 작용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싸우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끊어라’,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언어에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 말을 ‘내 의지력으로 나를 정결하게 만들라’고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엄청난 자기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자기 의에 빠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악을 물리친다’고 이해하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역사가 동시에 살아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험’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단순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나는 이것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시험이 오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은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목적은 강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새로운 사람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의 거듭남 이야기와도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악한 영들과 선한 천사들의 인플럭스 사이에서 실제적인 영적 싸움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에게는 그것이 ‘내 생각’, ‘내 욕망’,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가운데 자유가 보존됩니다. 인간은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보기보다, 긴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하나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싸우고, 얼마 뒤 그보다 더 깊은 동기를 발견하고 또 싸우며, 어느 정도 정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은밀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평생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친 일이며, 그 깊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에서 ‘완전’이나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공용복 선생의 전통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앞으로 매우 중요한 대화가 필요해집니다. ‘죄성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체계 사이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유전적 악 자체가 마치 어떤 물질처럼 뽑혀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억제되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사랑하도록 변화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proprium만 놓고 보면 아무 선도 없음을 압니다. 바로 그 인정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나는 이제 악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내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압니다. 동시에 그것이 비참함이나 자기혐오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안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표현의 궁극적인 방향도 조금 달리 들립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아무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그 욕망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상태입니다. 배고픔은 있지만 음식이 주인은 아닙니다. 재산은 있지만 재물이 주인은 아닙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지만 가족이 주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삶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를 깊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성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배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요구,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악을 끊는 것 뒤에는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강한 금욕적 언어를 굳이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문자 그대로 자연적 욕망의 제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언어를 ‘사랑의 질서 회복’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아 줍니다. 정욕과 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생명 자체와 싸우지는 마십시오. 악을 끊으십시오. 그러나 선한 애정까지 잘라내지는 마십시오. 자기 사랑의 지배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보다 ‘누가 주인인가’입니다.

 

그래서 4강 3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애정과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그 지배를 끝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이 싸움은 단순한 억압에서 사랑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기뻐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원리를 혈육간의 애정과 가족 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복음서의 매우 강한 말씀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대환란’이라는 공용복 선생의 독특한 종말론적 틀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가까이 가다가 다시 분명하게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4강 4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 4

혈육의 사랑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 : 가족애의 제거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 그리고 대환란에 대한 중요한 구별

앞선 4강 2부와 3부에서 강사는 ‘정욕’이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 원리를 가장 민감한 영역 가운데 하나인 ‘혈육간의 애정’에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처럼 인간에게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도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매우 강한 말씀을 가져옵니다. 강의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혈육간의 애정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사랑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말라’, ‘자녀에게 정을 떼라’, ‘가족을 멀리할수록 영적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의 방향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폐기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와 배우자를 냉정하게 대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주님 사랑과 충돌할 때 무엇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양을 줄이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를 묻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혈연에 기초한 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영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의 선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연적 혈연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에는 체어리티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은 전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가 악을 행해도 무조건 감싸 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부모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선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악을 도와주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결국 그 자녀의 영원한 선을 해친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애정 안에 소유욕과 자기애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자식이니까’라는 이유로 선과 진리의 기준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면 자연적 혈연애 안으로 영적 사랑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내 것’으로 사랑하는 데서 주님께 속한 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궁극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잠시 관계 안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지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고, 상대의 진정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의 혈연관계 자체가 영원한 관계의 최종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상태가 드러나며, 같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합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부모와 자녀, 부부의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의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혈연 자체가 영원한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강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과 진리보다 앞세우는 자기중심적 애착을 끊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자연적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영적인 것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4강 전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중요한 보완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끊는다’, ‘죽인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전투적 표현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를 ‘질서’라는 언어로 보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강의는 가족애의 문제를 종말론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현재의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하면서 혈육간의 애정과 여러 정욕을 다룰 수 있지만, 앞으로 ‘7년 대환란’, 특히 ‘후 3년 반’과 같은 극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강의는 ‘반강제적으로’ 행실을 닦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환란을 실제 미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핵심진리’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 용어 차이가 아니라 말씀을 읽는 기본 방식의 차이와 관계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실제 역사적 미래 사건의 시간표와 연결하는 종말론적 틀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 주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각 시대 비교표’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회시대’, ‘대환란’, ‘천년그리스도왕국’, ‘새 하늘과 새 땅’ 등을 역사적 순서 안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은 자연계 우주의 물리적 파괴와 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결, 심판, 그리고 새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전쟁’도 단순히 미래의 군사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전투를 나타내며, 숫자와 기간 역시 말씀의 상응에 따라 영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7년’이나 ‘3년 반’을 미래 달력의 정확한 기간으로 놓고 종말의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존중하면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종말의 환난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에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상과 육에 붙들리지 말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강력한 목회적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의 영적 핵심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메시지를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7년의 정치·사회적 재난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시험받고, 기존의 종교적 외관이 무너지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영적 상태로 더 깊이 읽습니다.

 

특히 ‘반강제적으로 정결하게 된다’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자유’가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것은 인간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외부의 공포 때문에 악을 하지 않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악한 사랑이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환란 같은 극단적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어떤 사람은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비한 자동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지만, 환난이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거듭남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험과 강제를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만큼 내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보존됩니다. 선과 진리를 붙들 것인지, 악과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원하여 정욕을 끊지 않으면 나중에 환난을 통해 강제로 끊게 된다’는 식의 설명은 목회적으로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지금 자유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과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인간이 그것을 계속 거절할수록 자기 안의 악은 더욱 굳어질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은 그 사람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고, 거짓된 의존을 흔들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목회적 차이를 낳습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앞으로 대환란이 오니까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두려움에만 놓이면, 신앙의 중심이 자칫 미래의 재난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대환란이 내일 오든 오지 않든, 오늘 내 안에서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종말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말론도 갑자기 우리의 현재 삶 가까이로 옵니다. ‘마지막 때’는 단순히 먼 미래의 세계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오래된 영적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거짓이 무너지고, 내가 감추어 두었던 악이 드러나며,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세우시는 과정에는 작은 의미의 심판과 새 창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개인 심리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적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형성을 다룹니다. 다만 그 동일한 신적 질서가 개인의 거듭남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시 가족애의 문제로 돌아오면 강의가 왜 이 두 주제를 연결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내가 정말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를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나는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재산과 명예와 안전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사랑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대환란의 세부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의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냉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가족을 더욱 선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은 중요하지 않다’며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입은 proprium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맡겨진 이웃 가운데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식의 극단적인 영성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충실하게 돌보는 것도 유용성(use)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는 강한 말씀도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를 감정적 증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충돌하는 경우 어떤 자연적 애정도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우선성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말하면 모든 낮은 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 아래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영적 성장에 대한 도표’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핵심진리’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성경의 역사를 인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가족, 재산, 명예,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흔들리는 경험은 일종의 ‘광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평소 의지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광야의 목적 역시 단순한 박탈이 아닙니다. 옛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광야 뒤에는 가나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악을 버린 자리에는 선한 사랑이 들어와야 합니다.

 

결국 4강에서 반복되는 ‘끊는다’는 언어를 우리는 계속 이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자기중심적 소유욕을 끊는 것입니다.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물욕을 끊는다는 것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명예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직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결국 끊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전도된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무엇이든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내 자녀’, ‘내 재산’, ‘내 명예’, ‘내 사역’, 심지어 ‘내 신앙’, ‘내 성화’, ‘내 영성’까지 붙잡습니다. 거듭남은 이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녀도 주님의 것이고, 재산도 주님께서 유용성을 위해 맡기신 것이며, 사역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것을 더 충실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강 4부의 중심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더욱 참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핵심 역시 고난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고 그 자유 가운데 주님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 상당히 가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주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연적 애정은 내려와야 한다’는 데서는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자적 ‘7년 대환란’과 ‘후 3년 반’을 통해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정결해진다는 종말론적 틀에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는 같은 문제를 자유와 사랑, 영적 심판과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지키려 했던 ‘스베덴보리의 렌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리고 4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혈육간의 애정에서 다른 정욕들, 특히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자기 만족의 문제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시에 ‘악을 끊는 것’과 ‘성화된 사람이 되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도 생깁니다. 이 부분은 4강의 죄론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4강 5부에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4 5

죄성정욕은 어떻게 결합하는가 :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을 지배하는 생명의 문제

4강은 이제 한층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식욕·성욕·물욕·명예욕·수면욕 등으로 넓게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본래부터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위해 주신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어떻게 죄의 통로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이 둘이 결합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의 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정욕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자연적 기능입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식욕이 있고, 인류가 이어지도록 남녀간의 애정과 성적 기능이 있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혈육간의 애정이 있고, 자연계에서 살아가도록 사물과 소유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죄성’은 이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의 죄악된 성질이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께서 주신 정욕과 결합함으로써 그 정욕을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보존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한 기능이었던 정욕이 ‘자기 만족’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좋은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된 인간성’과 ‘타락한 인간성’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원하는 능력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몸과 자연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면 구원은 자연스럽게 ‘몸에서 벗어나는 것’, ‘감정을 없애는 것’, ‘욕구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처음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된 것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연적 차원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자연계의 삶도 버려야 할 저급한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더 높은 영적인 것을 받아 표현하는 최종적인 그릇입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순종하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으로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속사람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다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와 정욕과 결합한 것이다’라는 설명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조금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떤 악한 ‘물질’이나 ‘성질’이 마귀에게서 인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것처럼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인간 안에 독립적인 실체처럼 주입되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자기가 사랑하여 받아들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 내 안에 죄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만 말하면 자칫 악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한 인플럭스가 지옥에서 온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없애지 않습니다. 악이 밖에서 유입된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 악은 그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마침내 그의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때 그는 ‘악이 들어왔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내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이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고, 거듭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의 결합’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자연적 애정과 욕구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욕 자체가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절제되지 않고 오직 자기 쾌락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이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과 안전과 지배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진리조차 사람의 박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 만족’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2부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만족을 악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한 뒤 느끼는 기쁨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때의 기쁨도 있으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만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가’입니다.

 

이것은 죄를 분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쁩니다. 그 기쁨이 곧 자기중심적인 정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자 갑자기 화가 나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해 주었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순간 내 선행 안에 섞여 있던 다른 목적 하나가 드러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선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인정과 보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행한 선을 전부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흔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과 악이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나는 순수한 선으로 이것을 했다’거나 ‘전부 악한 동기였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보다, 선한 애정과 자기 사랑이 섞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혼합된 상태에서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합니다. 동시에 설교를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사랑까지 가짜였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느 날 후자의 동기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더 칭찬하거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내 안에 이것도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발견이 회개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작업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것을 좋아하니 정욕인가? 이것을 먹고 기쁘니 육적인가? 가족을 사랑하니 혈육의 정에 빠진 것인가? 칭찬을 받고 기쁘니 내 모든 사역이 거짓이었는가?’ 하는 식으로 가면 영적 삶은 자유를 잃고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그렇게 인간을 자기 내면에 갇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악을 발견하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운 뒤,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성과 정욕을 찾아낸다’는 강의의 요청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닥을 끝없이 파헤쳐 숨은 죄를 찾아내라는 뜻이라기보다, 실제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사람을 깎아내리는가,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가, 돈 때문에 진리를 양보하는가, 가족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가,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대상으로 보는가, 분노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악을 주님 앞에서 다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회개를 매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내적 악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모두 자기 힘으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싸우면 그 싸움을 통하여 더 깊은 내면이 열립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양파 껍질을 한꺼번에 벗기는 것처럼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리메인스’와 연결해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AC에서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를 시험과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 안에는 악밖에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AC의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온 것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고 보존하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죄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자기 안의 악을 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배후에는 이미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악을 보여 주시는 것은 정죄하여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영적으로 퇴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진리의 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성’이라는 말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죄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처럼 이해하면 ‘나는 존재 자체가 악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은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온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고 있으며 거듭날 수 있도록 자유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악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 죽인다’는 표현도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나에게서 선이 나온다’, ‘내 지혜로 진리를 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라고 여기는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갈수록 인간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참된 개성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애정과 유용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고유한 모습을 더 온전히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이 가진 강한 ‘자기부인’의 언어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는 매우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찾아내어 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합니다. 그 강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삶이 변해야 하고, 숨은 욕망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성화의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러나 누가 그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집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성을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성화는 쉽게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악이 물러난 자리는 반드시 선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탐욕을 끊었는데 체어리티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끊었는데 결혼의 거룩함과 상대방을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예욕을 끊었는데 유용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빈자리만 생긴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소유욕을 끊었는데 가족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사랑 자체가 메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악을 제거하는 과정’인 동시에 ‘선이 심어지는 과정’입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거짓이 제거되는 만큼 진리가 자리를 잡고, 악한 애정이 물러나는 만큼 선한 애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욕과 거듭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금욕은 ‘하지 않는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한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4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가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을 분별하고 철저히 자기 성찰하여 회개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론의 목적은 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실제 삶에서 그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적 사랑’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고, 지식도 그 사랑을 섬기며, 심지어 종교도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면 성경 지식마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적이면 자연적 재산과 능력과 지위까지 이웃의 유용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궁극적인 질문은 ‘내게 욕망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내 생명의 중심에서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성’과 ‘정욕의 결합’이라는 이번 강의의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proprium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는 것이 타락의 질서이며, 거듭남은 그 자연적 애정들이 다시 속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식욕, 같은 재산, 같은 가족, 같은 직업, 같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인간을 ‘욕망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에게도 애정이 있고 열망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순수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남보다 높아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수행하기를 기뻐하며, 자기 영광보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강 5부의 중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죄성의 문제는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만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욕망들을 하나씩 잘라내어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공용복 선생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다루라’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처럼 눈에 잘 보이는 욕망 몇 가지를 절제했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내가 옳아야 한다’,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 ‘내 신앙이 더 높아야 한다’는 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을 이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핵심진리’의 죄론과 AC의 거듭남 이해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실제로 싸우고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그 싸움에서 누구의 힘을 의지하고 있으며, 무엇이 당신의 새로운 사랑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라고 한 질문을 더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죄론은 단순한 금욕도, 단순한 교리도 아닌 실제 거듭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4강은 이러한 죄성과 정욕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가져가면서, 인간이 자신의 행실을 어떻게 살피고 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화’를 죄를 하나씩 제거하여 어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사람의 의지와 삶을 점점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까지 가장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4강 6부에서는 바로 그 ‘성화와 거듭남’의 문제를 중심으로 4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4 6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것 : 큰일보다 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성화는 사랑의 열매로 드러난다

4강의 마지막 흐름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죄성’과 ‘정욕’을 다시 매우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립니다. 강사는 죄론을 연구하는 목적을 단지 인간의 타락 구조를 설명하는 데 두지 않습니다. ‘죽은 행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행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철저한 회개생활도, 영적인 성장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론은 결국 ‘빛 가운데 사는 행실’과 ‘어둠 속에 사는 행실’을 생활 속에서 세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4강 전체의 초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죄성’, ‘정욕’, ‘타락’, ‘마귀’ 같은 상당히 무거운 단어들이 등장했지만, 강의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대한 악행 몇 가지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가운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작은 불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죄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활 구석구석의 죽은 행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사가 들었던 ‘밥그릇 밑의 죽은 바퀴벌레’ 이야기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에도 감사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불쾌한 상황 하나가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의 평안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강사는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평소에는 숨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이 환경의 자극을 만나 ‘행실’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내적인 사랑과 애정은 외적 상황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온유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고,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기대가 좌절되고, 몸이 불편해질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proprium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시험이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보고 불쾌해진 것 자체를 곧바로 영적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꼭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불결한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자연적 반응 자체는 창조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 자연적 반응이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나느냐입니다. 불편을 느끼는 것과 그 불편 때문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은 다릅니다. 싫은 맛을 느끼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다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영적인 악을 그대로 동일시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반응을 죄로 의심하는 과도한 자기검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식사에서 음식이 조금 짜더라도 짜증을 내기보다 물을 타서 먹든지 덜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작은 상황에서 ‘입으로 상급을 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상급을 보실 때 ‘큰 사업을 했는가, 큰 교회를 목회했는가, 많은 헌금을 했는가’ 같은 외적 규모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했는가’를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큰일을 했든 작은 일을 했든, 유명한 사람이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든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죄와 정욕을 회개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4강 전체에서 매우 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죄성 제거’,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 ‘이기는 자’, ‘익은 열매’ 같은 매우 높은 단계의 언어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만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성화를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단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의 끝으로 갈수록 성화의 현장이 다시 식탁과 말투와 사람 관계와 작은 불편으로 내려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생활의 종교’를 생각하면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며, 불의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종교적 활동만 해야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연계의 수많은 관계와 책임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삶으로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목회했는가’보다 ‘순간순간 사랑의 열매를 맺었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외적 결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 명예와 자기 지배를 향하고 있다면 영적인 성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정직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했다면 그 삶 안에는 실제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큰 상급’을 쌓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을 외부에서 별도로 지급되는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의 행위 안에는 이미 그 행위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선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상태가 천국적 상급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나중에 큰 상을 받는다’는 계산으로 선을 행하면 아직 자기 유익이 목적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선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웃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행하고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선과 상급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공로점수를 많이 모은 사람이 더 좋은 상품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쓰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내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받지 못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버리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은밀한 선행을 하라는 방향으로 강의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4강의 죄론이 도착하는 곳은 ‘죄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조금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익은 열매’가 되는 비교적 분명한 완성 단계가 강조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성화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며, 그런 사람들이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이 단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인간이 이곳에서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공용복 선생의 강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완성’을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 안의 모든 유전적 악이 존재론적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는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질서 아래 놓이고 억제되며, 인간은 그 악을 사랑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proprium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점은 ‘성화’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나는 죄성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생명과를 먹은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정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 proprium이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명예욕은 버렸지만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용복 선생의 전승 안에도 이 위험을 완화하는 매우 귀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 ‘훌륭한 성도는 무엇을 많이 가진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라 회개를 잘하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낮추지 말고 그대로 증거하되, 자신의 부족함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높은 ‘완전’의 언어와 함께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나는 이제 회개할 것이 없다’로 가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짐에 따라 자기 안의 더 미세한 동기까지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악만 죄로 보였는데,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의 자기 자랑,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감사받고 싶은 동기,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아집까지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퇴보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햇빛이 희미할 때는 방 안이 깨끗해 보이지만 강한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의 먼지까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자기 proprium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나는 내 안에서 악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더 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께 돌이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꽤 아름답게 만납니다. 완전함을 자기 무결점의 확신으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빛 앞에서 계속 자기 것을 내려놓으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회개’도 죄책감을 오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는 죄와 정욕을 ‘철저히 회개’하라고 반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회개에는 반드시 실제 생활의 변화가 포함됩니다. 악을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음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나서 오래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말을 삼키는 것이 회개의 실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생활 구석구석’과도 정확히 만납니다. 대단한 순교의 순간이 와야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오는 작은 선택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싶을 때 기다려 주는 것, 내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무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변명하지 않는 것, 불편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과 진리가 실제 자연적 삶 속에 내려옵니다.

 

다른 강의에서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들어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했다’고 설명하고, 생활 속의 ‘작은 원수’ 앞에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오래 참는다’는 말씀을 적용해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 것도 바로 이 전통의 일관된 방향을 보여 줍니다. 거대한 ‘익은 열매’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통해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익은 열매’를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높은 영적 상태의 자기 인식으로만 이해하면 평범한 성도는 언제나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관계와 작은 말과 작은 책임 안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열매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엌과 식탁과 사무실과 교회 복도와 전화 한 통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차원에까지 선과 진리가 내려와야 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실제 행위가 없다면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은 의지를 통하여 행위가 되어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행위가 영적인 것의 최종적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의 실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자연적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고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행실’의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으로 보이는 행실’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행실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설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식사하고, 일하지만 그 안을 움직이는 생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정과 자기 유익이 움직이면 외관은 선해도 내적인 성질은 달라지고, 체어리티와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면 일상적인 작은 행동 안에도 천국적 생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강 전체가 처음과 끝에서 아름다운 원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죄론을 왜 공부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렇다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답은 거대한 사건보다 ‘생활 구석구석’입니다. 결국 죄론은 지옥의 죄 목록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자리들에서 어떤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부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4강의 강점을 상당히 높이 보고 싶습니다. 죄를 추상적인 ‘원죄’나 법적인 유죄 상태로만 놓아두지 않고, 사람의 애정과 욕망과 행실까지 들어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죄 문제는 다 끝났다’는 식으로 삶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성품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긴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여기에 계속 보태는 것은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 애정과 욕망 자체를 악으로 만들지 말고 그 ‘질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죄와 싸우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셋째, 성화를 ‘죄가 전혀 없는 자기완성’보다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선과 진리가 삶의 기쁨이 되는 거듭남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죄를 안 짓는 사람’과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닙니다. 전자는 두려움이나 억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단지 악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완성 방향은 ‘하지 않음’에서 ‘사랑하여 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의 마지막 찬양의 ‘사랑으로 행하라’는 방향과도 잘 만납니다. 결국 오랜 죄론 강의의 마지막 말이 ‘죄를 무서워하라’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가 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벗는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정욕의 지배를 끊는 목적도 더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자기중심적 만족을 내려놓는 목적도 주님과 이웃의 선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4강 전체를 관통했던 ‘정욕’이라는 말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욕은 이 강의의 용법에서 인간의 애정과 욕망을 넓게 가리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주어졌지만 타락하여 자기중심적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 애정들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애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 다시 질서 있게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욕도 쓰임을 섬기고, 재물도 쓰임을 섬기며, 명예도 쓰임을 섬기고, 가족 사랑도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섬깁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린다’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훨씬 깊은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칭찬을 전혀 듣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 사랑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거듭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과 쓰임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자연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천국의 질서를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도 무위와 정지가 아니라 쓰임의 삶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그 쓰임의 기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강의 ‘생활 구석구석’이라는 표현은 아주 좋은 끝맺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영계 지식도, 복잡한 종말론도, 성화의 단계도 결국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생명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하루의 작은 관계들 속에서 악을 죄로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쓰임을 행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 잘하는 성도가 훌륭한 성도’라는 말도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 무엇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익은 열매’와 함께 읽으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을 지나치게 딱딱한 완전주의로만 읽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를 잘한다는 것은 자기 악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실제로 돌아서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지막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론의 목적은 인간을 죄에 사로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생명을 막고 있는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회개하고,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이렇게 깊어집니다. ‘그 열매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주님께서 그의 의지와 삶 안에 심어 자라게 하시는 선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4강은 6부로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처음에는 ‘죄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정욕’, ‘죄성’, ‘사랑의 질서’, ‘십자가에 못 박음’, ‘가족애와 대환란’, ‘성화와 거듭남’을 지나 마지막에는 ‘생활 구석구석의 사랑의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앞서 한 편으로 너무 압축해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따라오니 이 강의가 단순히 ‘욕망을 죽이라’는 금욕 강의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가’를 묻는 꽤 치밀한 죄론이라는 점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이 이 강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정욕의 제거’보다 ‘사랑의 질서 회복’,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 생명’ 쪽으로 한층 더 깊게 열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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