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는 ChatGPT, Gemini, Claude 같은 AI가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원어를 살피고, 여러 주석과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예화를 찾고, 설교 구조와 문장을 다듬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문제는 ‘AI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AI 여느냐’입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 홀로 서기도 전에 AI부터 열어 버릴 때, 아주 편리한 도구가 오히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상의 주장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을 연결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 구절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내는 지적 작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을 만지시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며,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교 준비 역시 단순한 ‘정보 수집해석구성전달’의 과정일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 인용하는 마이클 퀵의 경고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 자체와 충분히 씨름하지 않은 채 곧바로 주석으로 달려가면, 본문을 직접 만나는 대신 ‘다른 사람이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AI는 이 위험을 훨씬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책장에서 주석을 꺼내 펼치고 여러 페이지를 읽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본문 한 구절을 입력하고 ‘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와 설교 포인트 가지를 알려 ’라고 하면 몇 초 안에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 답이 틀렸느냐 맞았느냐만이 아닙니다. 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험합니다. 아직 설교자 안에서 질문조차 충분히 태어나지 않았는데 답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말씀 앞에서 때로 ‘모르는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지, 왜 어떤 구절 앞에서는 불편해지는지, 지금 이 말씀이 자신의 어떤 삶을 비추고 있는지를 조용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말씀은 단순한 연구 대상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런데 AI에게 너무 빨리 물으면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보다 ‘ 본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기 쉽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설교에서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설교자의 인격적인 만남과 묵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옳지만, 묵상 자체가 설교에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뜨거운 감정이나 눈물, 감동 자체가 신적 생명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참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확신을 주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AI보다 인간의 묵상이 우월하다’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구별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과 ‘주님에게서 오는 ’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과 능력으로 진리를 소유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묘하게 찾아옵니다. 많은 책을 읽고 원어를 알고 신학적 지식을 갖추었을 때뿐 아니라, 심지어 깊은 묵상과 영적 체험을 했을 때에도 ‘내가 깨달았다’는 자기 소유의 감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AI 역시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유혹을 보탭니다. 방대한 자료를 몇 초 만에 정리하고 멋진 문장과 구조까지 얻으면, 자신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실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 그다음 도구입니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읽기와 묵상, 그다음 주석과 AI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기도와 묵상자기 삶에 대한 성찰연구와 검증설교 구성’이라는 질서가 자연스럽습니다. AI는 이 가운데 ‘연구와 검증’과 ‘설교 구성’에서 매우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묵상하면서 발견한 생각이 본문의 문맥과 맞는지 검증하고, 자신이 놓친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확인하고, 반대되는 해석을 찾아보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내가 먼저 주님께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자리 자체를 AI에게 넘겨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AI를 늦게 사용할수록 오히려 AI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충분히 읽은 설교자는 AI가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건 본문의 흐름과 조금 다른데?’, ‘ 해석은 특정 신학 전통에 치우친 아닌가?’, ‘ 원어 설명은 확인이 필요하겠는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먼저 만나면 AI가 만들어 준 해석의 틀 안에서 이후의 본문 읽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 받은 답이 일종의 안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I 이전의 묵상은 영적 의미뿐 아니라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실질적인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AI 감동받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회개하거나 소망을 붙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AI에는 인간과 같은 영적 인격과 의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I를 통해 얻은 문장이나 자료가 영적으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 한 권, 주석 한 문장, 다른 사람의 설교 한 대목이 우리를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AI가 정리해 준 자료 역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는 외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에 생명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연결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것은 ‘아는 ’과 ‘사는 ’의 차이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동안 아직 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와 결합하고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AI 시대 설교의 진짜 위험도 ‘AI 설교문을 준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AI가 만들어 준 진리를 설교자가 자신의 기억과 지성에만 담아 둔 채,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삶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로 회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문은 훌륭한데 설교자를 통과하지 않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에서 인용한 ‘먼저 설교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않은 말씀은 회중의 가슴도 뜨겁게 없다’는 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뜨거움’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정서적 흥분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뜨거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말씀 앞에서 내가 버려야 것은 무엇인가?’, ‘내가 순종해야 것은 무엇인가?’, ‘오늘 진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이미 말씀은 머리에서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에는 오히려 설교자의 ‘고독’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연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정보가 너무 빨리 공급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펴고 아무 검색도 하지 않은 채 본문을 여러 번 읽는 시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그대로 머무는 시간, 설교거리를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제자리에 놓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영상의 마지막 권면이 힘을 얻습니다. ‘AI 열기 전에, 주석을 펴기 전에, 먼저 성경을 펴라.’ 이것은 단순한 설교 작성 요령이 아닙니다.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AI를 해석해야지 AI가 성경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고, 설교자가 AI의 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회중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AI가 아닙니다. AI는 설교자를 훌륭하게 도울 수도 있고, 설교자를 놀라울 정도로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검증하며 설교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본문을 읽고 씨름해야 할 시간을 생략한 채 완성된 답을 받아 갈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 질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AI 설교자의 지성을 도울 있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좋은 설교자는 AI를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가 아니라,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만큼은 결코 맡겨서는 되는지 아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AI에게 자료 조사와 비교와 정리와 편집을 맡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만큼은 설교자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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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강아지 마리 때문에 결혼이 깨진 이야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중심은 강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질서’, ‘서로 다른 애정의 우선순위’, 그리고 결혼 전에 반드시 드러나야 할 내면의 불일치가 드러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원고의 마지막에서 당사자도 결국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정리합니다. 이 표현은 이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본질에 가까이 갑니다.

 

먼저 남자에게 실제 개 물림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돗개에게 물려 응급실에 갔고 흉터까지 남았으며, 지금도 작은 개를 보아도 몸이 먼저 굳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아지를 싫어하는 편협한 남자’라고 단순하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공포는 머리로 ‘ 개는 나를 물지 않는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는 털, 침대, 식탁 주변의 동물 등에 대한 위생적 거부감도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반려견과 한집에서 없다’는 그의 결론 자체는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조건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결혼은 상대방에게 자기 애정을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이는 단순한 취미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나 5년 동안 함께 살았고, 여성은 몽이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경험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결혼하기 위해 여덟 살 된 몽이를 친정으로 보내라는 요구는 그녀에게 ‘강아지를 어디에 것인가?’라는 단순한 생활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의존해 살아온 존재에 대한 책임을 중간에서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양심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원고에는 몽이가 분리불안이 있고 노령기에 접어들어 환경 변화가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수의사의 설명까지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몽이를 계속 돌보기로 한 선택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애정’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삶의 질서가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생각과 말은 바뀔 수 있지만 깊은 애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강아지를 키울 것이냐 것이냐’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 있던 두 사람의 애정 구조가 몽이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남자는 결혼하면 부부와 앞으로 태어날 자녀를 중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싶어 했고,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삶 속에 가족으로 들어온 몽이를 그 가정 안에서도 계속 책임지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남자가 한 말 가운데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너는 강아지를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야. 그게 잘못됐다는 아니라 너한테는 그게 맞는 거고. 근데 나는 자식을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필요해.’ 표현에는 다소 거친 면이 있지만, 여기에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을 사랑하면 되는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사랑은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 자녀에 대한 사랑,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애정은 서로 경쟁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 위치에서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을 돌보고, 약한 존재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의존하는 생명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은 오히려 체어리티의 아름다운 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대쪽 질문도 필요합니다. ‘가족이다’라는 말이 곧 ‘인간 가족과 완전히 같은 위치이다’라는 뜻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고의 여성 자신도 이 문제 앞에서는 솔직합니다. ‘몽이가 아파서 병원 가야 하는 날과 아이 어린이집 행사 날이 겹쳤을 저는 어느 쪽을 먼저 챙겼을까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오히려 이 대목이 이 영상에서 가장 성숙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처음에는 ‘강아지를 버리라는 남자 가족을 지키려는 여자’라는 단순한 구도였지만, 여기서 여성은 자기 사랑의 질서까지 돌아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이 중요합니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선하지만, 사랑은 제자리에 놓여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려동물을 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더욱 온전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동물을 동물로서 지극히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면서도, 배우자를 배우자로 사랑하고 자녀를 자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랑을 모두 ‘누가 1순위인가?’라는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지만, 서로 다른 관계의 고유한 질서를 없애 버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남자의 모든 말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거른다’는 인터넷식 표현을 가져온 것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앞에서 그가 말한 트라우마, 위생 문제, 결혼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는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온 진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순간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을 ‘강아지 키우는 여자’라는 유형으로 묶어 버립니다. 이것은 사람을 그의 실제 성품과 삶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범주를 통해 보는 태도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외적 유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삶입니다. 반려견을 키운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배우자 사랑이나 모성애, 체어리티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친구들의 반응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남자는 강아지가 아니어도 결혼하고 나서 다른 이유로 트집 잡아. 손절해’라는 반응 역시 남자를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합니다. 한쪽 인터넷에서는 ‘강아지 키우는 여자를 거르라’ 하고, 다른 쪽 친구들은 ‘그런 남자는 손절하라’고 합니다. 재미있게도 양쪽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을 보지 않고 ‘ 유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런 식의 외적 분류보다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 ‘ 말과 선택을 움직인 애정은 무엇인가?’를 묻게 합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은 여성이 몽이의 존재를 결혼 이야기가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악의적인 은폐라고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결혼 상대에게 몽이가 자신의 삶에서 이 정도로 중요한 존재였다면, 사실은 훨씬 일찍 알려야 했습니다. 반려동물뿐 아니라 종교, 자녀 계획, 부모 부양, 재정, 거주지처럼 결혼 후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문제는 ‘나중에 상대가 이해해 주겠지’ 하고 미룰 사안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8개월 뒤가 아니라 처음 몇 번의 만남에서 드러났다면 두 사람 모두 훨씬 덜 상처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별을 실패라고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결혼 전에 드러났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만일 여성이 몽이를 친정에 보내고 결혼했다면 남편을 볼 때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몽이를 보냈다’는 원망이 생길 수도 있었고, 반대로 몽이를 데리고 결혼했다면 남편은 털 하나, 짖는 소리 하나, 병원 방문 하나에도 ‘내가 처음부터 된다고 했는데’라는 불만을 쌓았을 수 있습니다. 작은 생활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훨씬 깊은 애정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결혼 후에는 더 큰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정한 결혼의 이상은 단순히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내면이 점점 하나의 선과 진리를 향하면서 마음과 삶이 결합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에는 ‘우리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만큼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질서가 함께 살아갈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함께 갈 수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몽이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몽이가 아니었다면 한동안 보이지 않았을 두 사람의 깊은 차이를 드러내 주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질문, ‘5년을 같이 강아지와 8개월 만난 결혼 상대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도 사실 조금 다르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아지냐 남자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나에게 맡겨져 의존하며 살아온 생명에 대한 책임과 앞으로 배우자와 이루어 결혼의 책임을 어떻게 함께 질서 있게 세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질서 자체에 두 사람이 합의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이 악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의 중요한 토대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을 결혼 상대로 거르는 것이 합리적인가, 편견인가?’라는 질문에도 같은 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동물과 함께 사는 생활을 감당할 없으므로 그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나 ‘강아지 키우는 여자는 남편을 2순위로 두고 모성애도 부족하다’고 일반화한다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반려동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는 냉정하고 이기적이다’라고 일반화하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귀한 장면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여성이 ‘ 사람은 자기 인생에 맞는 사람을 고른 것이고 저는 인생에 맞는 가족을 지킨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데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몽이를 지켰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몽이를 어떤 질서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릴 것인가?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사랑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각각 제자리에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이별은 단지 ‘강아지 때문에 놓친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의 깊은 애정 구조를 발견한 사건입니다. 아픈 발견이었지만, 결혼한 뒤에 발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이 사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사는 일이기 이전에, 사람의 사랑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며 함께 살아갈 있는지를 확인하는 ’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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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덟 번째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성 크리스토포로스에 관한 오래된 기독교 전승을 소개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성 크리스토포로스, 곧 영어권에서 ‘Saint Christopher’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그의 전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강을 건너려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었다가 그 아이가 점점 세상보다 무거워지고, 마침내 그 아이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방식보다는 오랜 기독교 전승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리스토포로스는 처음부터 ‘가장 강한 존재’를 섬기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왕이라고 생각하여 왕을 찾아가 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사탄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다면 사탄이 왕보다 강하구나’ 하고 사탄을 찾아갑니다. 다시 사탄을 섬기다가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강한 분이구나’ 하며 그리스도를 찾아 나섭니다. 이 전승의 첫 부분만으로도 한 인간의 영적 여정을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선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씩 넘어가면서 마침내 참된 주권자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과정은 인간이 외적인 힘에서 내적인 힘으로 옮겨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먼저 눈에 보이는 힘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 재산, 지위, 명예, 육체적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처음 왕을 찾아간 것도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습니다. 왕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왕조차 두려워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그의 생각은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이 절대적인 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탄을 찾아갔다는 대목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선의 능력보다 악의 능력이 더 강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것 같고, 탐욕과 폭력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자기 욕망을 거리낌 없이 좇는 사람이 오히려 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악이 선보다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악에는 자체적인 생명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그것을 뒤틀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것은 궁극적인 힘일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마침내 사탄마저 두려워하는 그리스도를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더 강한 권력자를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그에게 뜻밖의 길을 알려 줍니다. 강가에서 강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어 건네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게 것이다.’ 가장 높은 분을 만나려는 사람에게 주어진 길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오래된 전승은 놀랍도록 복음적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까지 여행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찾아오는 사람을 등에 업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use)과 연결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는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길을 잃은 사람을 인도하며, 내가 가진 힘과 지식과 능력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토포로스에게는 큰 체격과 강한 육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힘을 ‘가장 강한 ’를 섬기는 데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힘의 참된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의 힘은 강한 자 곁에 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지 못하는 약한 사람을 등에 업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은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의 선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때 본래의 질서를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아이 하나가 나타나 자신을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평소처럼 아이를 등에 업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아이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마치 온 세상을 등에 짊어진 것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집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넌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떻게 어린아이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느냐고 묻자 아이는 자신이 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임을 밝힙니다.

 

이 장면은 전승 전체의 중심입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을 찾아다녔지만, 정작 그분은 힘센 왕이나 위엄 있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등에 업을 수 있는 작은 어린아이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아이 안에 세상을 짊어진 무게가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가장 작은 모습 안에 내적으로 가장 큰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보여 주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외형의 크기와 화려함을 보고 힘을 판단하지만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께 가까운 천사일수록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지혜가 깊을수록 자신의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압니다. 선이 많을수록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것은 지배하려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는 복음의 질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포로스라는 이름 자체도 이 이야기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Christophoros’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나르는 ’, 곧 ‘그리스도를 짊어진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조금 더 깊이 읽으면 단지 어느 날 어린 예수를 등에 업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삶 안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세상으로 운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되도록 부름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업고 강을 건넜지만,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지탱하고 있었겠습니까? 겉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가 어린 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크리스토포로스의 생명과 힘 자체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이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깨달으면 ‘ 일을 있도록 나를 붙들고 계셨던 분도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선의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도왔고, 내가 봉사했고, 내가 헌신했고, 내가 복음을 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자유롭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친 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선한 것은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공로가 끼어들지 않는 선입니다.

 

이 대목은 수도와 헌신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합니다. 수도생활이 깊어지고 희생이 커질수록 인간에게는 아주 미묘한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버렸다’, ‘나는 이렇게 희생했다’, ‘나는 평생을 바쳤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는 자기 공로입니다.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내적으로는 오히려 더 큰 ‘’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엄격하게 봅니다. 참된 자기 부인은 단순히 재산과 지위와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이 행한 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마음까지 내려놓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발견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강한 자의 곁에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등에 업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은 ‘주님은 어디에서 만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답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예배와 기도 가운데 만나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쓰임 가운데서도 만나십니다.

 

영상 후반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크리스토포로스가 박해를 받아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와 여러 유혹을 받았으나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순교 전승도 소개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칼과 화살 등의 기적적 세부는 성인전의 전승적 성격을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영적 중심은 분명합니다. 한번 참된 주인을 발견한 사람은 다시 이전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거듭남의 과정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오히려 그 진리가 실제로 자기 삶의 사랑이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들이 찾아옵니다. 진리를 알고 있을 때와 그 진리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는 다릅니다. 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와 자기 욕망을 포기해야 선을 선택할 수 있을 때도 다릅니다. 시험은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있는 지식에서 삶에 속한 것으로 옮겨 가게 합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서 ‘세상의 지배자는 왕도 사탄도 아니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이것은 이번 이야기의 중심을 잘 짚은 말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의지와 판단과 욕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의 계명이 충돌할 때 계명을 선택하고, 내 이익과 이웃의 유익이 충돌할 때 체어리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실제로 그 사람의 삶을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저는 오히려 화살도, 기적도, 순교도 아니라 ‘강가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주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특별한 계시도 없었고 천국이 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자기 힘으로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한 쓰임 속으로 그리스도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을 사랑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직하게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맡겨진 직분과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곳이 바로 ‘강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그때 내가 업고 건넌 사람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선 영상들과 연결해서 보면 흐름도 흥미롭습니다. ‘연못 이야기’에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산다는 것을 보았고, ‘사과나무 이야기’에서는 자기 지혜보다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것을 보았으며, ‘수도사 싸움’에서는 ‘ ’을 내려놓을 때 싸움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토포로스 이야기’에서는 주님께 받은 힘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릴 때 그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다른 수도사 이야기들이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아 이웃을 향하여 흘려보내는 ’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모입니다.

 

이번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강한 분을 섬긴다는 것은 가장 강한 자의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힘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의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며, 바로 체어리티의 길에서 인간은 자신이 찾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포로스가 평생 찾아다닌 ‘가장 강한 ’이 마침내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의 등에 올라왔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세상은 힘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래 있는가’로 측정하지만, 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으로 받쳐 있는가’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크리스토포로스가 그리스도를 등에 업었던 그날, 그의 큰 몸과 힘은 비로소 자기에게 주어진 참된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거듭남의 중요한 한 모습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가 얼마나 커질 것인가?’에서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누구를 건너게 것인가?’로 삶의 질문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SY.74, 강문호 수도사, ‘싸움을 할 수 없었던 두 수도사 - 하나님의 씨와 거듭남’ (20191224)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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