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그는 이 두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오랜 시간 설명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 자체는 진지하며, 본문을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충분히 엿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바라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의외로 로마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창세기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로마서를 펼치기 전에 먼저 창세기 2장과 3장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원리는 이미 창세기의 내적 의미 안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영적 질서를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태초부터 말씀 안에 심어 두신 질서를 교회에 적용하여 설명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로마서에서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법은 선악과를 먹는 사건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처음부터 악을 사랑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았고, 선과 진리를 거의 본능처럼 분별하는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뱀으로 상징되는 감각적 자아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인간 안에는 전혀 다른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던 질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질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proprium’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자아’라고 번역되지만, 단순한 개성이 아니라 ‘주님 없이 스스로 살려고 하는 자기 생명’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죄는 단순히 몇 가지 나쁜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은 어떤 법률 조항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질서가 되어 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말합니다. 이것 역시 로마서에서 처음 계시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주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이 그 원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그 생기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유입(influx)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창조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는 창세기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창세기의 영적 역사를 다른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선악과를 먹음’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그것을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는 교리적인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표상과 상응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 읽기가 현대 개신교와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열고,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원형이고, 로마서는 그 원형을 설명하는 적용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가장 깊은 샘은 언제나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으며, 바울은 그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안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번 설교를 읽기 시작하면, 관심의 중심도 조금 달라집니다. 설교자가 로마서의 단어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바울이 지금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열리는 순간, 로마서는 더 이상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생명의 질서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창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층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 말씀의 원형이라는 관점을 마음에 두고, 설교 자체를 살펴보겠습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전개합니다. 특히 그는 여기서 말하는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말하며, 여러 신학자의 견해를 검토한 끝에 자신이 내린 결론을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설교를 읽어 보면 단순히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원어를 살피고, 로마서 7장과 8장의 문맥을 연결하며,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주일설교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연구 태도는 존중받을 만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본문이 실제 무엇을 말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자세는 분명 귀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관련 구절을 모두 연결하고, 하나의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까지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 자체는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연구하여 창세기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속뜻을 먼저 이해한 다음, 그 빛으로 로마서를 읽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순서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죄의 법’, ‘하나님의 법’을 서로 비교하면서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이것은 본문을 충실히 읽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왜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었는가? 그 원형은 어디에, 그리고 이미기록되어 있는가?’

 

그 질문의 답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 안에 두 가지 질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주는 영원한 표상입니다. 하나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얻으려는 질서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자기 사랑은 하나의 법처럼 인간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은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이미 상징으로 보여 준 내용을 교리적인 언어로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바울이 무엇을 새롭게 말하는가?’가 아니라,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매우 독특합니다. 그는 사도들의 서신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서신들은 이미 계시된 진리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글이지, 창세기나 복음서처럼 모든 단어 안에 연속적인 아르카나(arcana)가 담겨 있는 말씀 자체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서신을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연구는 언제나 말씀의 원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설명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스베덴보리에게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속뜻 안에서 이미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죄의 지배, 인간의 내적 갈등, 성령의 생명, 거듭남, 자유로운 선택과 같은 주제들은 모두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의 창세기 해설에서 이미 긴 흐름으로 다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그 긴 이야기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설교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로마서를 읽고 창세기를 이해하려 한다면, 창세기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길을 따르면 순서는 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내적 의미를 통해 인간과 주님, 타락과 거듭남의 전체 구조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서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미 알고 있던 영적 질서를 교회의 삶에 적용하는 살아 있는 해설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는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제 설교자가 로마서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가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설명이 창세기의 원형과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조금씩 갈라지는지를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빛 속에서 설교를 다시 읽게 하는 새로운 독서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을 매우 존중하면서도, 바울의 서신을 창세기나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약성경의 중심이 바울서신처럼 여겨지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중심은 언제나 ‘말씀(The Word)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의미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흐르는 책들, 곧 모세 오경을 비롯, 여호수아, 사사기, 열왕기, 시편 및 선지서들과 복음서들, 그리고 계시록이 중심이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한 글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이번 설교를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를 매우 깊이 연구합니다. 그는 로마서 7장과 8장을 오가며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하나님의 법’이라는 표현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구는 분명 성실하며,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연구는 어디까지나 ‘적용’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원형은 이미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설교의 핵심인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은 로마서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 원형은 이미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모든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 중심의 질서에서 자기 중심의 질서로 옮겨 가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바울은 이 긴 영적 역사를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성령의 법’도 바울이 처음 만든 표현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주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 노아 시대에 남겨 두시는 리메인스(remains),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과정, 이삭과 야곱의 생애, 출애굽의 여정, 광야의 시험, 가나안 입성에 이르기까지, 말씀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시는 과정을 다양한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은 그 긴 흐름을 교회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바울을 이해하려면 먼저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칭의’, ‘성화’, ‘육신’, ‘성령’과 같은 바울의 용어를 기준으로 구약을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속뜻을 통해 인간의 창조와 타락, 거듭남과 구원의 질서를 이해합니다. 그런 다음 로마서를 읽으면, 바울은 새로운 교리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진리를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교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울의 권위를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복음을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말하며, 끊임없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종교를 시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서 성취된 진리를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에 설명하는 사명을 감당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서신은 말씀과 경쟁하는 책이 아니라, 말씀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먼저 창세기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읽고,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그 타락한 인간성을 입으시고, 영화(榮化)의 길을 걸으셨는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을 읽으면, 로마서의 한 절 한 절이 훨씬 깊고 입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 문장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질서를 요약하는 증언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설교자가 수십 분 동안 로마서의 단어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는 모습도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분명 귀한 연구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 진리를 주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어떤 표상으로 이미 보여 주셨는가?’ 바로 이 질문이 열릴 때, 우리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 말씀 자체가 품고 있는 더 깊은 아르카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성경 읽기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설교의 핵심 본문인 로마서 8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새로운 영적 원리를 계시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 들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언어로 설명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이 이번 해설의 중심입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2절을 설명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두 질서가 인간 안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죄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고, 성령께서 그 죄의 권세에서 사람을 해방하신다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바울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대립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창세기 3장으로 향합니다.

 

창세기의 속뜻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가장 바깥 자연적 인간, 곧 감각과 자기 판단만을 신뢰하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는 순간, 인간 안에서는 하나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전까지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하다’는 질서로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보기에는 좋다’는 질서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변화가 죄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죄는 어떤 행동을 먼저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자기 자신으로 이동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죄를 설명할 때 언제나 ‘사랑’을 먼저 말합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면 그 뒤에 수많은 죄가 열매처럼 맺히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중심이 되면 선과 진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납니다. 바울이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도 결국 이러한 자기 사랑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굳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무엇일까요? 많은 설교에서는 이것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주님께서 인간 안에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의지를 만들어 가시는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억누르는 힘 이전에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악이 즐거웠다면 이제는 선이 즐거워지고, 이전에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 기뻤다면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입니다.

 

이 점에서 로마서 8장은 창세기의 거듭남을 다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이삭이 제단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야곱이 씨름하는 것으로, 요셉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 거듭남을 보여 줍니다. 모두 서로 다른 역사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이러한 긴 영적 역사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설교에서는 죄와 성령의 싸움이 비교적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이 곧바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리메인스(remains)가 보존되고 자라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시고, 거듭남의 때가 되면 그것들을 하나씩 깨우십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는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온 주님의 섭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천국의 비밀에서 반복해서 강조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로마서 8장의 분위기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은 죄와 성령이 힘겨루기를 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신 거듭남의 역사가 마침내 사람 안에서 본격적으로 열리는 순간입니다. 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삶의 중심이 아닙니다. 생명의 질서가 조금씩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해방’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 모습입니다.

 

결국 로마서 8장을 창세기의 속뜻으로 다시 읽으면, 본문은 훨씬 넓은 풍경 속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은 단지 교리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지나, 복음서에서 주님 자신 안에서 완성된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마서는 비로소 창세기와 하나가 되고, 설교 역시 그 원형의 빛 속에서 더욱 깊고 풍성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설교 자체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을 매우 진지하게 연구합니다. 원어를 검토하고, 여러 주석가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본문의 문맥을 세밀하게 따라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 정도로 본문 자체를 붙들고 설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려는 자세와, 죄와 성화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려는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은 이번 설교의 분명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설교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구의 깊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연구의 출발점이 말씀의 원형이 아니라 바울의 설명이라는 점입니다. 설교자는 로마서 안에서 답을 찾기 위해 로마서를 계속 파고듭니다. 로마서 7장을 읽고 다시 8장을 읽으며, 바울의 표현 하나하나를 분석합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라면 같은 시간을 들여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펼쳤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결국 그 말씀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성경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관의 차이입니다. 만일 바울의 서신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성경 전체는 바울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먼저 있고, 바울은 그 말씀을 교회의 현실 속에 적용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중심이 아니라 안내자입니다. 안내자는 소중하지만, 목적지는 아닙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의 여러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설교자는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표현을 길게 설명하지만, 정작 왜 인간 안에 그런 ‘’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의 설명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태고교회와 선악과, 자기 사랑과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죄를 교리의 문제로 보기 전에 존재의 문제로 봅니다. 인간이 어떤 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랑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는 성령의 역사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 역시 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성령의 역사를 단순히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주님의 끊임없는 유입(influx)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매 순간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으로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한 체험을 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 동안 주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설명은 로마서만으로는 얻기 어려운 깊이이며, 바로 말씀의 속뜻이 열릴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입니다.

 

이번 설교를 접하면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설교자가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회개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하며, 죄와 타협하는 신앙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탤 것입니다. 죄를 끊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죄 없는 존재로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사랑을 품은 존재로 만드시려 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목표는 단순히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를 읽으며 가장 크게 떠오른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자는 마치 큰 나무의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식물학자와 같습니다. 가지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하고, 잎의 구조를 분석하며, 열매가 어떻게 맺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그 나무가 어떤 뿌리에서 자라고 있는지를 봅니다. 뿌리를 알면 가지도 이해되지만, 가지만 오래 연구해서는 뿌리까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번 설교를 읽으며 느낀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변승우 목사의 설교는 로마서를 매우 성실하게 읽은 설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라면 로마서를 읽기 전에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었을 것입니다. 이 두 방법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의 차이는 설교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통해 말씀을 이해하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통해 바울을 이해하려는 길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일관되게 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번 설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읽을 때 더욱 풍성해집니다. 설교 자체의 장점은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말씀의 원형인 창세기와 복음서의 빛 속에 다시 놓아 볼 때, 비로소 바울이 말하려 했던 진정한 깊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로마서는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구원의 질서를 교회의 언어로 아름답게 증언하는 글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를 끝까지 듣고 난 뒤 가장 크게 남는 인상은 설교자의 진지함입니다. 그는 로마서 82절을 가볍게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비교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결론을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본문보다 이야기나 예화를 앞세우는 설교가 많아지는 시대에는 이러한 진지한 연구 자체가 귀한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 설교를 다시 바라보면,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로마서를 이렇게까지 연구하는가?’입니다. 물론 로마서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바울은 새로운 하늘의 비밀을 처음 계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말씀 안에 계시되어 있던 진리를 교회의 현실에 맞게 풀어 설명한 사도입니다. 그렇다면 연구의 중심은 언제나 말씀 자체여야 하며, 사도들의 서신은 그 말씀을 이해하도록 돕는 귀한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성경 읽기와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로마서를 기준으로 창세기를 읽고, 갈라디아서를 기준으로 율법을 이해하며, 에베소서를 기준으로 복음서를 정리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그는 창세기와 복음서를 먼저 읽고,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창세기의 한 절을 설명하는 데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면서도, 바울의 한 절을 놓고 같은 방식의 연속적인 속뜻을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원형은 창세기와 복음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번 설교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승우 목사가 로마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만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창세기의 어떤 영적 질서를 교회에 설명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게 됩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의 법’은 선악과 사건으로 연결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창조와 거듭남의 역사로 연결됩니다. 또한 ‘육신’과 ‘성령’의 대립도 단순한 윤리적 갈등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주님 사랑이라는 두 생명의 질서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은 하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와 복음서,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다른 책들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역시 그 생명 밖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생명을 교회의 언어로 증언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깊이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바울을 끝없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의지하고 있는 말씀의 원형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 오히려 다시 확인하게 되는 사실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회개와 성화를 강조했으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사상과도 결코 멀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주제를 언제나 말씀 전체의 흐름 안에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구원 역사를 먼저 본 다음, 그 빛으로 바울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의 성경 읽기는 언제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향하고, 교리가 아니라 생명을 향합니다.

 

아마 이것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어떤 설교를 만나든 먼저 ‘이 설교가 어떤 본문을 설명하는가’를 묻기보다, ‘이 설교가 설명하는 영적 원형은 말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번 설교 역시 그런 시선으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로마서는 여전히 귀한 책이고, 바울은 여전히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우리를 언제나 그 증언 너머,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끕니다.

 

아마 이것이 이번 설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통찰일 것입니다. 설교를 바울의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눈으로 읽고, 그다음 바울을 읽는 것 바로 그때 로마서는 하나의 독립된 교리서가 아니라, 창세기에서 시작된 거듭남의 역사를 교회의 삶 속에 다시 들려주는 살아 있는 증언으로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성경적인 성경 읽기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Y.39, JMS 정명석, ‘깔짝거리지 말고 하라, 본격적으로 하라’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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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설교는 대한민국에서 JMS(기독교복음선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창설자 정명석의 설교입니다. 따라서 이 해설은 단순히 설교의 문장만을 떼어 놓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실제 어떤 신앙 체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지를 함께 고려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출처만으로 모든 내용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일부 좋은 내용만 보고 전체를 긍정하는 태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말씀 자체와 그 열매를 기준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적인 요소는 인정하고, 이어서 어디에서부터 중심이 달라지는지를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설교의 제목인 ‘깔짝거리지 말고 본격적으로 하라’는 표현은 매우 직설적입니다. 설교자는 신6:5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와 마5:48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를 본문으로 삼아, 신앙을 피상적으로 하지 말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러한 출발점 자체는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분적인 관심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함해야 하며, 신앙 역시 말이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하며, 참된 믿음은 선한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하라’는 첫 번째 권면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입니다.

 

설교는 이어서 ‘손과 얼굴만 씻지 말고 온몸을 씻어야 한다’, ‘휴지로 닦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샤워하듯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비유를 반복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이 비유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씻음’은 단순한 육체의 청결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회개를 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부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의지와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진리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가 ‘부분적인 신앙’을 경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주일 예배 한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직장, 인간관계와 양심, 말과 행동까지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도 함께 짚어야 합니다. 설교는 ‘온전하게 하라’는 말씀을 매우 강한 완전주의적 어조로 풀어 갑니다. 마치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거듭남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질서 있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오늘 하나의 악을 버리고, 내일 또 다른 거짓을 깨닫고, 그렇게 조금씩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오랜 인내와 반복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은 반드시 단번에 완성된다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하게 계속 나아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말씀의 정신에 더 가깝습니다.

 

설교는 이후 월명동 개발 이야기를 길게 소개합니다. 앞산을 얼마나 깎아야 하는지, 어디까지 측량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직접 기준을 정해 주셨다는 이야기, 거대한 바위를 옮기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등이 매우 자세하게 이어집니다. 처음 들으면 이것은 단순한 성공 사례처럼 보입니다. 작은 일도 대충 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교훈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일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하는 자세는 신앙인에게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계속될수록 그 중심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월명동이라는 특정 장소와 ‘선생’이라 불리는 특정 인물의 경험이 설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월명동을 직접 측량하셨고, 월명동은 하나님의 특별한 성전이며, 지구에서 가장 좋은 길지이고, 하나님께서 시대의 사명자를 그곳에 세우셨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창조주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특정 장소의 아름다움이 특정 인물의 절대적 사명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더욱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지형도 아닙니다. 참된 성전은 주님께서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는 인간의 마음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훌륭한 건축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이름 없는 작은 교회라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참된 성전입니다. 장소는 거룩함의 원인이 아니라, 거룩함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설교에는 개인적인 꿈과 영적 체험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꿈에서 배설물을 닦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이렇게 계시하셨다’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양심을 깨우치시고 깊은 깨달음을 주시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꿈과 느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직접 계시인지 여부는 반드시 말씀과 그 열매를 통해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영향을 누구보다 자세히 설명했지만, 동시에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동을 곧바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영적 체험은 언제나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은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중심이지만, 설교가 후반부로 갈수록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선생의 정신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 ‘항상 기준에 줄 맞추라’, ‘맞추지 않으면 서열에서 나와야 한다’는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설교의 중심축이 하나님에게서 특정 인간 지도자에게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설교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여기서 이 설교가 JMS라는 배경에서 선포된 설교라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설교 속 ‘선생’은 추상적인 스승이 아니라 정명석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선생을 증거하라’, ‘선생과 같이 하라’, ‘기준은 한 명이다’는 말은 일반적인 신앙 권면이 아니라, 실제 조직 안에서 지도자를 중심에 두는 신앙 구조를 반영하는 언어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를 단순한 열심의 권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배경을 알고 읽으면 설교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어 보면, 천국의 모든 천사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천사는 자기 이름을 증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줄을 맞추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오며, 천사는 그 선과 진리를 전달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지도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지 않고 주님께 인도합니다.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분별하도록 돕습니다. 만일 설교가 점점 지도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 질서가 뒤바뀌기 시작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설교는 또한 ‘하나님과 그 사명자에게 관심 없는 자는 대가를 받는다’, ‘선생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 ‘제자가 아니라 아저씨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6:5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 지도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있지만, 인간에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지도자도 주님을 대신할 수 없으며, 어떤 지도자도 신앙의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설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황금 신부천국’, ‘신부답게 영도 육도 깨끗이 하라’,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자는 천국에 간 자가 없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경건한 삶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이 지도자 중심의 신앙과 결합될 때는 매우 신중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이 설교자는 대한민국 법원에서 성범죄에 대해 유죄가 확정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와 ‘깨끗함’을 반복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성경적 권면만으로 읽을 수 없으며, 실제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흠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과 설교의 일치 여부를 묻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말보다 삶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천국을 말하고, 거룩함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더라도 실제 삶이 그것과 반대라면 그 사람의 말은 점차 생명을 잃게 됩니다. 참된 진리는 반드시 삶으로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화려한 언변이나 많은 계시 주장보다, 그의 삶이 주님의 계명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설교 전체를 한마디로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을 대충 하지 말라’, ‘회개를 형식적으로 하지 말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라’,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과 일을 살펴보라’는 권면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요소들은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특정 지도자의 권위를 강화하는 논리 속으로 흡수됩니다. 좋은 성경 구절과 생활의 지혜가 결국 인간 지도자를 절대화하는 구조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깔짝거림’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께만 향해야 할 사랑과 신뢰와 순종이 점차 한 인간에게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거듭남은 지도자를 얼마나 열심히 증거했느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자기애와 지배욕, 거짓과 탐욕을 얼마나 주님의 능력으로 버려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자신에게 묶으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나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사랑과 자유, 그리고 이성 안에서 자라갑니다.

 

결국 이 설교가 말하는 ‘본격적으로 하라’는 권면은 방향만 바로 잡는다면 매우 귀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격성’의 대상은 특정 지도자도, 특정 장소도, 특정 조직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말씀의 진리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일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하는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것이 신6:5가 말하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며, 또한 스베덴보리가 평생 일관되게 증언한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SY.40, 변승우 목사,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 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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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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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의 영토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여러 저작에서 ‘가나안 땅’은 주님의 나라, 곧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며, 한 사람 안에서는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거듭난 마음과 삶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 천국으로 이동하는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마음과 생활을 다스리도록 하는 거듭남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천년왕국은 주님이 재림할 때 가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은, 표현과 교리적 배경은 다르지만, 천국을 단지 미래의 장소로만 보지 않고 현재의 삶 속에서 시작되어야 할 영적 상태로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천국은 시간과 장소 이전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5장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경계는 현대 독자에게는 낯선 지명들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남쪽 경계, 동쪽 경계, 북쪽 경계, 서쪽 경계가 세밀하게 열거되기 때문에, 이 본문을 읽다가 그저 고대의 토지대장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는 불필요한 기록이 없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땅의 경계가 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질서와 한계를 나타냅니다. 각 지파는 천국과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선과 진리를 표상하며, 각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그 선과 진리가 활동하는 고유한 영역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능과 은사를 갖는 것이 아니듯, 천국의 모든 공동체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사랑의 선을 중심으로 하고, 어떤 공동체는 신앙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며, 또 어떤 공동체는 순종과 섬김의 선을 중심으로 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과 경계는 분열이나 차별이 아니라, 하나의 천국을 이루는 다양성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중에서도 유다 지파는 특별히 주님에 대한 사랑, 더 깊게는 주님의 신적 사랑과 천적 나라를 표상합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땅이 먼저 상세히 기술되는 것은 참된 교회의 모든 질서가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랑에서 나올 때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차갑고 논쟁적인 지식이 되기 쉽지만,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진리는 사람을 살리고 섬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는 이야기를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나는 얼마나 넓은 땅과 큰 복을 받을 것인가’보다 ‘내 안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어느 영역까지 다스리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말, 경제생활과 인간관계, 정치적 판단과 종교적 열심 가운데 어느 부분까지 주님의 사랑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이 본문에 대한 더 내적인 적용입니다.

 

설교자는 제비뽑기에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성경에는 실제로 중요한 일을 제비로 결정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도 제비로 이루어졌고, 요나의 책임을 가려낼 때도 제비를 뽑았으며,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정할 때도 제비를 사용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비는 인간의 계산과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가 ‘제비뽑기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었다’고 말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의지’라는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직접 원하시고 일으키신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행동을 미리 조종하는 결정론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을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으로 인도하는 신적 질서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시지만, 동시에 사람이 악을 선택할 자유도 억지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것을 허용하시고,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가 나오도록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허용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곧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말하면, 인간이 저지른 악과 거짓, 폭력과 불의를 하나님께 돌리는 위험이 생깁니다. 모든 일이 섭리의 바깥에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설교에서 가룟 유다의 제비와 죽음이 언급되면서, 그의 배반과 자살까지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간 사건처럼 설명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과 주님의 신적 성품을 함께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반과 자살을 명하시거나 예정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다는 자신의 욕망과 선택을 따라 주님을 배반했으며, 주님은 그 악한 선택까지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악을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셨다는 것과, 그 악을 미리 원하시고 강제로 행하게 하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 역시 사람들의 악의와 폭력이 주님의 뜻이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악을 받아 이기시고 인류 구원의 길로 바꾸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신적 섭리의 놀라움입니다. 섭리는 악을 악으로 명령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선택한 악조차도 궁극적으로 선을 위해 굴복시키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설교자가 설명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천지창조 전에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았다’는 예정론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며, 어느 누구도 지옥을 위해 창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운명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랑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며, 끊임없이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정은 특정한 사람만 구원하기로 정한 예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로 정하신 신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도 인간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무엇을 선택할지 미리 아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선택을 강제로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성향을 잘 알아 어떤 선택을 할지 예상한다고 해서, 자녀의 선택을 부모가 대신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주님의 예지는 인간의 예상과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지만, ‘아심’과 ‘행하게 하심’은 여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선택할 모든 가능성과 결과를 영원부터 아시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선을 선택하도록 가장 섬세하게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지워 버리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끝없이 선으로 이끄시는 사랑과 지혜의 통치입니다.

 

설교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과 여호수아와 갈렙의 긍정적인 태도를 대조한 부분은 목회적으로 귀 기울일 만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인도를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 인간적인 낙관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광야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겪는 시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곧바로 가나안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욕망과 습관, 두려움과 자기 신뢰가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은 마치 메마른 광야를 걷는 것 같은 시간을 지나갑니다. 그때 불평은 단순히 입으로 투덜거리는 행위보다,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고 이전의 악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내적 태도를 뜻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감사하면 더 큰 감사할 일이 생긴다’거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면 넓은 빌딩과 땅을 받는다’는 식의 적용은 조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는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한 영적 기술이 아닙니다. 참된 감사는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드리는 조건부 반응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영원한 선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태도입니다. 감사의 열매가 반드시 건물과 재산, 건강과 장수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감사는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마음을 지켜 주고,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며,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기업은 넓은 토지나 빌딩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큰 땅을 받은 이유를 ‘광야에서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연결하는 것도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속뜻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고 갈렙은 유다 지파에 속했으며, 두 사람은 각각 기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 전체가 받은 넓은 기업이 갈렙 한 사람의 긍정적인 태도에 대한 개인적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유다 지파의 위치와 기업은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질서 안에서 정해진 것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도 기업의 크기는 세속적 성공의 양을 나타내기보다, 각 선과 진리가 천국의 질서 안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범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으면 더 큰 부동산을 받는다’는 식으로 연결하기보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더 깊은 선과 진리를 맡기신다’고 이해하는 편이 본문의 영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설교에서는 ‘이방 사람과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오늘의 불신자들과 관계 맺는 문제로 적용하면서, 이방 사람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되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권면에는 신앙의 중심을 지켜야 한다는 진지한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의 거짓과 탐욕, 음란과 자기애에 쉽게 미혹될 수 있으므로,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 ‘이방 민족’은 단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한 사람 안에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된 사고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가나안 족속은 이웃집의 불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교만, 탐욕, 증오, 기만, 음란, 복수심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 밖에 있다고 해서 모두 멸해야 할 이방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영적으로는 가나안 족속의 상태에 있을 수 있으며, 교회 밖에서도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멀리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악과 거짓에 동의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그 사람 안의 악에는 동의하지 않고, 진리를 전하되 우월감이나 적대감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설교의 후반부로 갈수록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보다 정치적 주장과 국가적 위기론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특정 정치인, 정부, 선거관리 기관, 군부, 간첩, 부정선거, 연방제, 국민저항권 등에 대한 강한 주장들이 이어지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특정한 정치적 행동과 집회 참여를 촉구합니다. 이 주장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러한 말들이 예배 가운데 성도들의 내면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말씀의 설교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자신의 악을 보게 하며, 회개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적대와 공포가 말씀의 중심을 차지하면, 성도는 자기 안의 악보다 외부의 적을 더 크게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가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무엇을 생각할 때 기쁨을 느끼는가에 의해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며, 국가의 정의와 자유를 염려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확신이 증오와 모욕, 공포와 분노를 끊임없이 자극한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기독교’를 말하더라도 그 내적 정서는 천국의 사랑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은 같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의 종류에 따라 질서 있게 모이는 곳입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는가보다 그 입장을 어떤 마음으로 품고 표현했는가가 영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설교 중에는 ‘그놈’, ‘멍청하다’, ‘무식이 충만하다’, ‘인생 조진다’, ‘뒤진다’와 같은 거친 표현과, 특정 성도의 외모와 몸매, 나이와 죽음을 소재로 삼는 농담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설교자는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고 성도들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회중이 웃고 박수치며 설교자와 친밀하게 교감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배와 설교의 언어는 단순한 대중 연설이나 오락 프로그램의 언어와는 달라야 합니다. 말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사랑이 밖으로 드러나는 형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심이 아무리 크더라도, 사람의 존엄을 낮추거나 성도를 공개적으로 당황하게 하는 언어가 반복되면 그 열심의 그릇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여성 성도의 몸매를 ‘처녀 같다’고 평가하거나, 남편과 함께 몇 살에 ‘뒤지라’고 농담하는 방식은 친밀함이라는 이름 아래 넘어가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설교자의 권위 앞에서 성도는 불편함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천국적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상대의 수치를 덮으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사람의 인격을 세워 줍니다. 설교자의 유머도 성도를 웃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설교자 자신을 낮추거나 말씀의 진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더 온전한 열매를 맺습니다.

 

또한 설교자가 자신의 부흥회 경력, 교회와 한국 교회를 위해 한 일, 신학교 강의 경험, 정치적 영향력, 외국 대사와의 만남 계획 등을 길게 언급하는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역이 우연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회중에게 확신시키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많은 집회를 인도한 경험은 존중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영적 권위는 과거의 업적이나 많은 군중, 유명 인사와의 관계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참된 권위는 말씀이 지닌 진리와 설교자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람은 주님을 섬기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가’를 자기 정체성의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이때 사역은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조금씩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 중 구치소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스위든보그’(스베덴보리의 영어식 발음)와 ‘썬다 싱’의 이름을 불렀다는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설교자가 스베덴보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적어도 사후세계와 천국에 관한 증언을 남긴 인물로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전한 천국과 지옥의 가르침은 단순히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이 사후에 가는 곳은 이 세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과 일치한다고 설명합니다. 입술로 천국을 원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원하며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는 삶을 통해 천국이 사람 안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사랑과 말과 행동을 천국의 질서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설교 말미의 치유기도에는 병든 성도들을 향한 목회적 연민과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며,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사건을 믿고 성도들의 질병과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치유는 육체의 회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이해성이 열리는 것이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선한 삶을 실천하지 못하던 사람이 새롭게 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생명이 소멸된 상태에서 영적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치유기도는 육체의 병이 낫기를 구하는 동시에, 교만과 증오, 탐욕과 거짓, 절망과 불신이라는 내적 질병이 치유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직후 계좌를 안내하며 예물을 요청하는 장면도 헌금의 내적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헌금은 주님께 돈을 드려 복을 얻는 거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자발성과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며, 질병 치유나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와 직접 연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액수가 크더라도 자기 과시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내적으로는 빈 것이 될 수 있으며, 아주 작은 예물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에서 드린다면 주님 앞에서는 귀한 것이 됩니다.

 

이 설교 전체를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점은 강한 확신과 생동감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박물관 속의 옛이야기로 두지 않고, 오늘의 삶과 국가 현실, 개인의 감사와 믿음에 직접 연결하려고 합니다. 회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찬송과 기도,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면서 예배를 살아 있는 사건으로 만들려는 열정도 분명합니다. ‘가나안 땅을 지금부터 경험해야 한다’, ‘이방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광야에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메시지들은 신앙생활에 유익한 방향성을 품고 있습니다.

 

다만 이 귀한 열정이 더욱 온전한 영적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자유와 함께 설명하고, 허용된 일과 하나님께서 직접 뜻하신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또한 가나안의 적을 외부의 정치 세력이나 불신자에게 먼저 적용하기보다, 설교자와 회중 각자의 마음속 악과 거짓에 먼저 적용해야 합니다. 정치적 판단은 사실 확인과 절제를 거쳐 표현하고, 예배가 특정 진영의 동원 공간으로 변하지 않도록 말씀의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감사는 물질적 보상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하고, 믿음은 현실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신력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사는 충실함이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땅 분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큰 땅을 주실 것인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주님께서 내 안의 어느 영역까지 다스리고 계시는가’입니다. 내 정치적 생각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말투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고, 예배와 찬송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이웃을 판단하는 마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겠다는 열심은 크지만 정작 내 안의 교만과 분노는 가나안 족속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땅 나누기는 내 인생의 모든 영역을 주님께 드리고, 사랑과 진리가 각각 제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의 경계가 하나하나 정해졌듯, 거듭나는 사람의 삶에도 영적 경계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허용하지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증오를 허용하지 않으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 경계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되 모든 사건을 성급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단정하지 않고, 국가를 사랑하되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며, 진리를 지키되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해치지 않는 것이 가나안의 참된 경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 15장의 유다 지파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삶의 중심과 경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이 중심이 되면 진리는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악에서 건져 내는 빛이 되고, 권위는 사람을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섬기는 책임이 되며, 감사는 복을 끌어오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기쁨이 됩니다. 또한 섭리는 인간을 미리 조종하는 숙명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을 선택하도록 순간순간 이끄시는 주님의 부드럽고도 끈질긴 사랑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 설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단지 ‘제비뽑기에도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다’는 한 문장이 아닙니다. 더 온전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세상의 복잡한 사건들 속에서도 주님의 섭리는 결코 멈추지 않으며, 주님은 모든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비가 뽑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업을 받은 사람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가정과 교회, 직업과 재물, 건강과 영향력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 기업을 자기애와 지배욕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땅은 가나안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애굽과 바벨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가나안 정복은 밖에 있는 사람을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악을 주님의 능력으로 몰아내는 일입니다. 참된 땅 분배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부분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제 기능을 찾는 일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의 자유를 없애는 통제가 아니라, 그 자유를 보호하면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참된 감사는 고난을 부정하는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붙들고 선을 선택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참된 천년왕국은 특정 정치 세력이 승리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고 다스리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의 마지막 ‘땅 나누기’는 오래전 이스라엘의 영토 분배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 땅을 나누고 계십니다. 사랑이 다스려야 할 곳, 진리가 밝혀야 할 곳, 회개가 시작되어야 할 곳, 섬김이 이루어져야 할 곳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땅을 탐하거나 외부의 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자신의 기업을 정직하게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경계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자리 잡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며, 이 땅에서부터 경험해야 할 주님의 나라입니다.

 

 

 

SY.37, ‘약속을 지켜야 할 사람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예레미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약속을 깨뜨린 유다 백성’과 ‘약속을 지킨 레갑 자손’을 대비시키며, 신앙의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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