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5:4-20)

 

이 본문을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라는 제목으로 말씀 준비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님이 빛을 비추셔서 이 시간 우리 영과 육이 활짝 열려 모두 들을 귀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인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한, 어떤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어떻게 아나요? 보통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하거나 안수를 받거나, 아니면 여러 날 산에 올라 소위 산기도를 하거나 합니다. 성경 읽기도 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무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라는 책도 보고, 유튜브 등을 찾아보는 등 사안의 중요성이나 심각성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걸 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지요, 보통 결혼에 대하여, 직장, 직업에 대하여, 거주지에 대하여 등 말입니다. 비슷한 노력을 비기독교인들은 점집을 찾거나 사주를 보는 등 저마다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들을 씁니다. 왜들 이럴까요? 잘 모르겠어서이지요 주님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 겁니다. 비기독교인들의 경우는 신의 뜻을 잘 모르겠어서라고 하겠네요. 이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왜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뜻을 잘 모르는 걸까요?

 

한편으로, 그런데 여러분, 좀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럼 천국 천사들도 주님 뜻 알기 위해 우리처럼 금식기도 하고 그럴까요? 이건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요? 네, 맞습니다. 천사들은 지상에 사는 우리가 하는 이런 거 안 할 거 같아요. 아니, 안 합니다. 왜죠? 천사들은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알기 때문입니다. 안 그러면 그건 천사가 아니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거 안 합니다. 안 하고도 늘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또렷이 압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르게 그들은 알게 된 그 주님의 뜻을 마음을 다해 즉시 기쁘고 즐겁게 실행에 옮깁니다. 그들이 주님의 뜻을 순종, 즉시 실행에 옮길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더욱더 주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들은 100% 주님 뜻대로만 삽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자원하여 삽니다. 천사들과 주님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쌍방은 내 것이 모두 네 것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천사들의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즉 천사들은 즉시 아는데 우리는 왜 모를까요? 이것이 바로 퍼셉션의 차이입니다. ‘퍼셉션(perception)이란, 어떤 일과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 곧 그 일, 그 상황에 대한 그분의 선과 진리를 아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알게 된 주님의 선과 진리를 실천, 거기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 안에 머무르는 능력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안다는 건, 그 일을 주님의 진리 안에서 실천하여 주님의 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일까? 를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주님의 이 마태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퍼셉션 능력입니다. 우리와 천사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이 퍼셉션이라는 능력은 각 사람의 ‘착한 행실’만큼 생깁니다. 그리고 이 ‘착한 행실’은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세상을 향해 주님의 빛을 비추며, 세상에 필요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하면 할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천사들처럼 쉽게 알게 하십니다. 퍼셉션이 또렷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와 천사들의 퍼셉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주님 뜻을 알면 즉시 순종하는 반면, 우리는 그러지 않거든요. 저들은 주님 뜻 실천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데 우리는 안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들은 또렷하지만 우리는 희미하며, 저들은 생생하지만 우리는 흐릿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퍼셉션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 이름들의 순서는 바로 이 퍼셉션이 또렷한가, 흐릿한가의 순서입니다. 저 이름들, 그러니까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뒤에 더 나오는 므두셀라, 라멕, 그리고 노아까지, 이 이름들은 사실은 어느 한 개인들의 이름이 아니라 해당 시대를 관통하던 퍼셉션의 이름들입니다. 즉 첫 사람 아담 시대를 이끌던 퍼셉션을 일컬어 ‘아담(Adam, 사람)이라 이름한 것이며, 이런 퍼셉션으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아담’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Seth), ‘에노스(Enosh)도... 등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첫 교회인 아담의 퍼셉션만 제일 온전했고, 이후 갈수록 점점 더 모호하고 흐릿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하여 어떤 일에 대한 주님의 뜻을 즉시, 그리고 분명하게 알은 반면, 반대로 에녹, 므두셀라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이 중 이 에녹은 특별한데, 이 에녹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이런 퍼셉션의 온도차는 비유하자면, 한 가운데 씨앗이 있는 과일과도 같고, 방 한가운데 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과일의 중심으로 갈수록 근원이지만, 반대로 바깥 껍질 쪽으로 갈수록 근원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고, 방 한가운데로 갈수록 빛이 환하지만, 반대로 멀어질수록 빛이 흐릿해지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천적 인간이요, 안식일이고, 일곱째 날이었던 아담으로 갈수록 퍼셉션은 온전한 반면, 반대로, 즉 후손, 후대로 갈수록 흐릿해진 이유는, 아담으로 갈수록 선과 진리는 하나, 곧 앎은 삶을 섬겼던 반면, 그 반대 순서로 갈수록 진리는 선에서 분리되어 앎이 삶을 누르고 머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faith)이 체어리티(charity)의 머리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원래대로라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 체어리티가 입고 다니는 옷이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거기 담긴 내용인 체어리티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세상 종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세상을 떠받치는 건 창조주이신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선과 진리인데 이것이 남김없이 다 사라진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퍼셉션이 없는, 완전히 끊긴 상태가 바로 끝, 곧 종말이요, 최후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항상 각 교회 시대든, 한 국가, 한 개인이든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무슨 새로운 걸 시작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히 황폐해져야, 그래서 완전히 자기를 비워내야 그 빈 그릇에 주님의 새것을 담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누가복음 둘째 아들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13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15:13-20)

 

우리는 우리의 무슨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갈수록 주님의 선과 진리를 즉시, 그리고 생생하게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깨닫지 말고 웬만하면 그런 무슨 조짐이 보이면 얼른 돌이켜 그 무한 루프, 그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 악한 패턴에서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탈출이란, 위 누가복음 본문 맨 마지막 말씀처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곧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선택 등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바닥난 후, 드디어 주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때 반드시 위 둘째 아들처럼 ‘스스로 돌이키는’ 시간, 곧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오늘 설교로 여러분께 드리고 있지만, 사실은 지난날 제 얘기를 주님 앞에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2026-01-1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3, 26. 창5.2, 2026-01-11(D1)-주일예배(창5,4-20, AC.486-515),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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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04, 창5:1-3, 신년예배,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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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은 앞에 있었던 ‘마할랄렐’(Mahalalel)이라는 교회와, 뒤에 이어질 ‘에녹’(Enoch)이라는 교회로부터 알 수 있는데, 야렛은 이 두 교회 사이에 위치한 중간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Concerning the church called “Jared” nothing is related; but its character may be known from the church “Mahalalel” which preceded it, and the church “Enoch” which followed it, between which two it was intermediate.

 

 

해설

 

이 글은 태고교회의 전개에서 ‘말해지지 않은, 즉 언급되지 않은 단계의 의미를 읽는 법’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렛의 교회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중요하지 않거나 비어 있는 단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앞선 교회와 뒤따르는 교회 사이에 놓인 위치 자체가 그 성격을 드러낸다고 말해요.

 

야렛은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마할랄렐은 진리에서 오는 기쁨이 쓰임새에서 오는 기쁨보다 앞서기 시작한 단계였고, 에녹은 그 이후에 무엇인가가 특별히 보존되는 단계로 등장합니다. 이 두 상태 사이에 놓인 야렛은, 한쪽으로는 진리 중심의 경향이 더욱 굳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퍼셉션의 보존이 필요해질 만큼 약화되는 ‘과도기적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교회 상태를 항상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교회는 갑자기 생겨나거나 갑자기 사라지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다음 상태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야렛의 성격은 그 자체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앞뒤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에게 해석의 책임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읽기를 요구합니다. 이미 밝혀진 원리를 적용해 보라는 초대입니다. 마할랄렐에서 드러난 경향이 야렛에서 더 진행되었고, 그 결과 에녹이라는 보존의 단계가 필요해졌다는 흐름을 읽도록 이끕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교회 역사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매우 현실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어떤 시기는 뚜렷한 특징이나 사건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시기가 앞선 변화의 연장선에 있고, 이후의 중요한 전환을 준비하는 자리라면,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야렛의 교회는 바로 그런 상태를 상징합니다. 눈에 띄는 새로운 특징은 없지만, 이전의 변화가 누적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의 긴장과 무게를 품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때는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향이 이미 결정되고 그 결과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AC.514는 언급되지 않은 것을 통해 말하는 구절입니다.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교회 상태의 연속성과 점진성을 더 강하게 증언합니다. 야렛은 독립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앞선 마할랄렐과 뒤이은 에녹 사이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중간 단계였다는 것이지요.

 

 

 

AC.513, 창5: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C.513-514)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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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5:18)

 

AC.513

 

‘야렛’(Jared)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번째 교회를,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Jared,”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ixth church; by “Enoch” a seventh.

 

 

해설

 

이 글은 매우 간결하지만, 태고교회의 전개가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도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교회의 상태만을 지목합니다. 이는 독자가 이미 ‘이름 = 교회 상태’라는 해석 원리를 충분히 익혔다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야렛(Jared)으로 상징되는 여섯 번째 교회는, 퍼셉션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외적 구조와 매개에 크게 의존하는 단계였습니다.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지만, 중심의 생명은 더 두꺼운 외피 속에 감싸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단계까지는 아직 퍼셉션의 잔존이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에녹(Enoch)으로 상징되는 일곱 번째 교회가 등장합니다. 이 이름의 등장은 이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지요. 에녹은 곧 ‘보존’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퍼셉션이 계속 약화되는 흐름 속에서 주님께서 어떤 것을 ‘따로 보존하시는 단계’가 시작된다는 암시가 여기서 처음 주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AC.513은 단순한 목록의 연장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말기에 접어들며 ‘질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글’입니다. 여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로 넘어가면서, 교회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만으로 유지되기 어려운 지점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자연스러운 전승’이 아니라 ‘의도적인 보존’이라는 방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전환은 신앙 공동체나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익숙하게 발견됩니다. 어떤 단계까지는 살아 있는 인식과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것을 그대로 두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새로움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지키는, 즉 보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녹’의 등장은 쇠퇴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신호입니다. 퍼셉션이 약해졌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해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신다는 뜻이기도 해요. 이 점을 염두에 두면, 곧 이어질 에녹에 대한 설명이 훨씬 깊이 있게 읽히게 됩니다.

 

결국 AC.513은 태고교회의 연속성 안에서, 단순한 다음 단계의 언급을 넘어, ‘보존의 섭리가 시작되는 문턱’을 가리키는 글입니다. 짧지만, 이후 전개 전체의 방향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어요.

 

 

 

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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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2, 창5:16-17,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Mahalalel lived after he begat Jared eight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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