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7.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78:49-50)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 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78:49-50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당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사람들에게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영어 원문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an immission of evil angels’, 곧 ‘악한 천사들을 들여보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실제로 분노하시며, 인간에게 악한 영들을 보내어 벌하시는 것일까요? AC.357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직후, 매우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이며,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도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해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 이해와 말씀의 속뜻,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는 어느 순간 사랑하시다가 어느 순간 격분하여 악을 보내시는 식의 인간적인 감정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서 악을 향하면, 그 결과가 인간에게는 마치 주님께서 진노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외관에 따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이 점에서 시78:49-50과 사45:24을 함께 읽으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시78편만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노하신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45:24에서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바로 이 구절을 보조 구절로 인용하면서 ‘분노’의 실제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분노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반발하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주님께 분노할까요? AC.357의 앞부분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된 사람에게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선처럼 느껴집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 자기 명예가 높아지는 것, 자기가 옳다고 인정받는 것, 자기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질서는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만의 이익보다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지배하기보다 섬기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기보다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주님의 질서는 자기 욕망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AC.357에 따르면 악한 영들 가운데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결국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45:24의 ‘그에게 노하는 ’는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보조 구절이 됩니다.

 

따라서 시78편의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주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악한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경험하는 악의 결과가 말씀의 문자에서는 주님의 진노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말씀에 나타나는 ‘외관’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말씀도 그렇게 말하지만, 속뜻에서는 실제 원인이 인간의 악과 주님에게서의 이탈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특히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다’는 표현은 이 원리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AC.357은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같은 사랑에 따른 결합’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겉모습이나 말보다 사랑의 질이 사람을 서로 결합시킵니다. 같은 것을 사랑하는 영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 가운데 있는 영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 기만과 탐욕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는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는 악하므로 악한 영을 보내겠다’고 결정하여 그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애정이 그와 같은 애정을 가진 영적 사회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AC.357의 표현대로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한 영들에게 내버려 두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악에서 보호하시고, 악을 제한하시며, 가능한 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이 완강하게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삼을 때, 주님께서는 그 선택의 결과 자체가 전혀 나타나지 못하도록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택한 사랑에 따른 결과가 허용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78:50의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지나갈 길을 마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허용하신 ’이 주님께서 ‘행하신 ’처럼 기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판’에 대한 이해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심판을 하나님께서 위에서 사람을 바라보다가 ‘너는 선하므로 천국, 너는 악하므로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여 각각 다른 장소로 보내는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심판은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영적 사회로 스스로 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역시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집어넣는 감옥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보다 자기 사랑과 악을 더 사랑하게 된 영이 자기와 같은 사랑을 가진 곳으로 향한 결과입니다.

 

45:24의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와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는 대조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한쪽에는 여호와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여호와께 ‘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한 분이며 그분의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의 방향입니다. 주님께 향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공의와 힘을 발견하지만, 자기 사랑 때문에 주님의 질서에 반발하는 사람은 동일한 주님 앞에서 분노와 수치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누가 변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주님이 천사를 보내다가 갑자기 악한 천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의 질에 따라 악한 영들과 결합한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결과가 마치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시고 노하시며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원리를 다시 가인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AC.357이 왜 시78:49-50과 사45:24을 인용했는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창4에서 먼저 분노하는 쪽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와 거기에서 나오는 예배를 기뻐하시는데, 바로 그 질서가 가인에게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인이 분노합니다. 이것이 사45:24의 ‘그에게 노하는 ’의 원리와 같습니다.

 

결국 가인의 분노와 ‘여호와의 진노’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영적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거스르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고통과 악을 경험하면서는 그것을 마치 주님께서 자기에게 분노하여 내리신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 분노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는데, 그 결과가 주님의 진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문자적 외관과 속뜻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이나 악의 결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시78편의 죽음과 재앙 역시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을 주님의 분노나 보복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고,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사랑에 따라 영적 결합을 형성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순간에도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그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의 질서 밖에서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57이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그와 같은 영들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만들어 내는 결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도 주님은 가능한 한 악을 제한하시며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려고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시78:49-50을 사45:24과 함께 읽으면 ‘여호와의 진노’라는 표현의 방향이 뒤집혀 보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사랑에 따라 그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서 인간을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인의 분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경고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노하고 계신지를 먼저 묻기보다, ‘혹시 내가 주님의 질서에 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사랑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리와 체어리티에 반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벨을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8:49-50과 사45:24이 함께 보여 주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주님 안에 있는 인간적인 분노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인간이 그 사랑에서 돌아서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할 때, 그 악의 결과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자기와 같은 악한 영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질서조차 자신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심판 가운데서도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며, 분노의 근원 역시 주님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떠난 인간의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이 AC.357이 ‘가인의 분노’에서 시작하여 ‘여호와의 진노’까지 나아가 밝히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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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Cains anger was kindled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and evenfury,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와 다투던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45:24) 말합니다. 이로부터 분노(anger) 악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anger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성경에서 왜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연결합니다. 짧지 않은 한 단락 안에 인간의 악, 지옥의 상태, 말씀의 외관이라는 세 주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아직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킨 최종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체어리티가 떠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것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55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타락은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가 되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며, 이제 체어리티를 향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다음 단계가 아벨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매우 날카롭게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자연적인 분노를 무조건 자기 사랑이라고 단정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영적 의미의 분노, 특히 악에서 나오는 분노의 근원을 밝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그것을 막으면 반발이 일어나고, 그 반발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분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이 왜 분노했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것은 받아 주시지 않았다’는 형제간 질투가 아닙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옳고 자신이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의 존재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분노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사람은 때때로 ‘진리를 지키기 때문에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에 분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리, 자기의 신앙적 위치, 자기의 명예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를 ‘진리를 위한 열심’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AC.357은 그때 그 분노의 더 깊은 곳을 살펴보게 합니다.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배적 사랑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그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에 반발합니다.

 

여기에는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존재에게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에 따라 같은 주님의 질서가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것이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바로 그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께 분노합니다.

 

이 원리가 곧바로 성경의 ‘여호와의 진노’ 문제로 이어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감정이 격해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7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설명할 때 자주 다루는 ‘외관’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자기를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 즉 겉으로는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속뜻에서는 원인이 주님의 분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습니다.

 

78:49-50이 좋은 예입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한 천사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사람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애정에 따른 결합’의 원리와도 맞닿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영적 사회와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면 그에 상응하는 천국적 영향에 자신을 열고, 악과 거짓을 사랑하면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악한 영들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악한 영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형벌을 집행하기 위해 그들을 파견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의 사랑의 방향이 그들과의 결합을 불러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말을 단순한 인과응보 정도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와 같은 성질의 영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 그것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점점 가까워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면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상벌 이전에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셨다’는 시78:50의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을 말씀의 문자에서는, 즉 말씀은 겉으로는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표현한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악으로 향할 때, 그것을 무조건 제거하여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다만 섭리 안에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허용된 것이 겉으로는 때때로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이 점에서 AC.357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에게 사랑과 반대되는 인간적인 분노가 있다고 생각하면, 주님 안에 사랑과 진노라는 서로 상반된 두 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할 때, 그 사랑을 복으로 경험하고, 등을 돌려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동일한 신적 질서를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비유하자면 태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빛을 등지고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이 ‘태양이 내게서 빛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방향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비유이지만, AC.357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분노’의 외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은 다시 가인에게 돌아옵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이 분노합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의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묘사가 아니라 지옥적 사랑의 원리가 처음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의 AC.352-354와 대비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고, 그 사랑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반면 AC.357의 가인에게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갈등은 결국 이 두 사랑의 질서가 충돌하는 문제로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이 두 표현은 사실 하나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빈자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AC.357은 우리에게 분노 자체보다 그 분노의 ‘근원’을 보라고 합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거슬렸기에 분노하는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반발하는가, 주님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뜻과 명예와 판단을 지키기 위해 화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내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분노와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설 때 자기 사랑과 같은 성질의 악을 자기에게 끌어당기며,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78:49-50)

 

 

AC.357,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AC.357.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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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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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6

 

가인(Cain)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것이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at byCain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love, or a doctrine that admits of this separation; and thatto his offering he looked notsignifies that his worship was not acceptable,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AC.356은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글이라기보다 바로 앞 AC.355의 첫 부분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짧은 연결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두 가지 모두 ‘앞에서 설명했다’고 밝히므로, 여기서는 이미 나온 내용을 길게 반복하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분노’와 ‘안색이 변함’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다시 세워 놓았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전제는 ‘가인’입니다.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신앙과 사랑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까지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실제 삶에서 신앙과 사랑이 조금씩 멀어지는 상태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굳어지면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은 신앙으로 온전히 존재할 있다’는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됩니다.

 

두 번째 전제는 ‘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오는 예배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349에서 보았듯이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에서 분리된 예배는 외적 형식을 아무리 갖추고 있어도 살아 있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의할 것은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주님께서는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체어리티만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AC.353에서는 오히려 ‘신앙 역시 사랑에서 비롯될 때에는 천적’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는 ‘신앙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체어리티와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의 대비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앞의 AC.341에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AC.356에서 다시 확인하는 이유는 이제 가인의 더 깊은 내적 변화가 설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에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AC.355는 이것을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한 상태라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AC.356은 짧지만 가인의 타락 과정에서 하나의 경계선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인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의 제물은 무엇인가’, ‘ 그의 예배가 받아들여질 없는가’를 설명했다면, 이제부터는 그러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결국 AC.356의 핵심은 이미 확인한 두 사실을 다시 붙드는 데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그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다음 단계인 ‘분노’와 ‘안색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즉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결국 생각과 교리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까지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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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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