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즐겨찾기/Swedenborg on the Word 2026. 9. 15. 21:36※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해 밝혀 주신 말씀의 상응과 속뜻,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주님의 말씀 안에 이미 담겨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분명히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작업의 시작과 중심과 마지막에 계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SW.6, 레4,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 속죄제에 감추어진 악의 인식과 정결의 아르카나’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3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4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5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6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7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8또 그 속죄제물이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낼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9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내되 10화목제 제물의 소에게서 떼어냄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11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것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12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13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15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16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17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8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19그것의 기름은 다 떼어 제단 위에서 불사르되 20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21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 같이 불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22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3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24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25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26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27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28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29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30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31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32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33그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34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 제단 밑에 쏟고 35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4)
해설
레위기 4장에 들어서면 제사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레1의 번제에서는 사랑의 선으로부터 주님께 드리는 예배를 보았고, 레2의 소제에서는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의 예물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레3의 화목제에서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통하여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레4에서는 처음부터 ‘죄’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그리고 이 한 장에서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평민 한 사람의 경우를 차례로 다룹니다.
그렇다면 속죄제는 무엇을 표상할까요? 이 문제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이 매우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고 설명하면서, 바로 그 근거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따라서 레4를 읽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속죄제는 단순히 형벌을 면제받기 위한 제사가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 인간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표상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죄는 어떤 법적 장부에 기록된 항목만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며, 그것이 인간을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죄의 기록만 지워지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AC.10122(출29:36)는 속죄제가 ‘자연적 인간 안의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을 계속해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은 완전히 없어져 인간 자신의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물러나 있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에서 말하는 정결입니다.
레4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부지중에’ 범한 죄입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처음에는 자신이 범한 것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족장과 평민의 경우 특별히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악을 회개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악이 악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인간의 삶을 비추면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생각과 욕망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게 할 때 비로소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죄를 깨닫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책감이 없는 상태를 평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보지 못하던 악을 보게 되는 것이 주님께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내 안의 교만을 발견하고, 어떤 관계를 돌아보다가 내가 품어 온 미움을 발견하며, 선을 행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바로 그 발견에서 회개의 문이 열립니다.
흥미롭게도 레4에서는 죄를 범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제물과 피의 처리 방식이 달라집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와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에는 수송아지를 드리고, 그 피를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들에 바릅니다. 반면 족장이나 평민 한 사람이 범죄했을 때에는 피를 회막 안으로 가져가지 않고 번제단 뿔에 바릅니다. 이 차이는 우연한 의식상의 변형이 아닙니다. 대표교회의 모든 세부에는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나치게 빨리 ‘제사장 = 이것, 회중 = 저것, 족장 = 이것, 평민 = 저것’이라고 세밀한 상응을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현재 확보한 원전이 확실하게 보여 주는 핵심은 죄와 정결이 인간의 서로 다른 차원에 영향을 미치며, 그에 따라 정결의 표상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제사장과 온 회중의 경우 피가 성소 깊숙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그 죄의 영향이 예배와 교회의 더 내적인 차원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일곱’은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AC.716(창5:24)은 바로 레4:2-3, 6의 속죄제를 인용하면서,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도록 한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며 따라서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를 씻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기서 휘장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AC.9670(출26:31)은 성막의 휘장이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나누면서 동시에 이어 주는 ‘결합의 중간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지성소가 가장 내적인 천국과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을, 그 바깥 성소가 영적 천국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선을 표상한다면 휘장은 그 둘을 이어 주는 중간입니다. 따라서 레4에서 피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지는 장면은 정결하게 하는 신적 진리가 인간의 내적 삶 깊은 곳까지 미치는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어 피는 향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이것 역시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AC.2832(창22:13)는 ‘뿔’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바로 레4:3, 7의 제사장 속죄제와 레4:22, 25의 족장 속죄제, 레4:27, 30, 34의 개인 속죄제를 직접 인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성별과 정결과 속죄가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악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말씀의 진리가 ‘이것은 악이다’, ‘이 생각은 주님의 질서와 맞지 않는다’, ‘이 행동은 이웃을 해친다’고 구체적으로 보여 줄 때 인간은 비로소 악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단의 뿔, 곧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능력’에 피가 발라지는 장면은 속죄와 정결에서 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16(계5:6) 역시 레4:7, 25, 30, 34를 직접 인용하면서, 속죄와 정결이 제단의 뿔에서 이루어진 이유는 모든 속죄와 정결이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향단 자체는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예배가 주님께 받아들여지고 높여지는 것을 표상하고, 그 뿔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레4의 피는 단순히 죽음의 형벌을 대신 치렀다는 표지로만 읽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피의 긍정적이고 가장 깊은 의미는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과 속죄와 정결에서 피가 사용된 수많은 경우 가운데 레4:6-7, 17-18, 25, 30, 34도 직접 열거하면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레3에서 살펴보았던 ‘기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속죄제에서도 내장의 기름, 콩팥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을 떼어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레3에서 확인했듯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속죄가 악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부정적인 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물러나게 하신 뒤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주십니다. 정결의 목적은 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채워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악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서 정직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에서 체어리티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에서 진실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은 선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것이며, 그 자리에 주님께서 선을 심으십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여전히 제단의 불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수송아지의 나머지는 전혀 다른 처리를 받습니다.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까지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밖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이것 역시 매우 강한 원전 근거가 있습니다. AC.10038(출29:14)은 이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므로 ‘진영 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의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을 봅니다. 악은 거룩하게 만들어 제단에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악으로 인식되어 물러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변장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여 제거하십니다. 반면 그 인간 안에서 주님께 속한 선은 보존되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같은 수송아지 안에서도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지고, 악을 표상하는 나머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실제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악을 설명하고 합리화합니다. ‘성격이 원래 그렇다’, ‘상대가 먼저 그렇게 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 ‘그 정도는 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악을 드러냈을 때 필요한 것은 악을 자기 안에 계속 보관하면서 종교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악을 죄로 인정하고 피하며, 주님께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레4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죄를 범한 사람이 누구이든 속죄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온 회중도 잘못될 수 있으며, 족장도, 평민 한 사람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직분이 높다고 죄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가 동의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진리인 것도 아니며, 평범한 개인의 죄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동시에 각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물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수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서로 다른 동물이 서로 다른 선과 진리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각 동물을 레4의 네 계층에 기계적으로 대응시켜 세부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상태와 책임에 맞게 정결의 길을 마련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마지막에는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여기서 ‘사함’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목을 지워 주시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레4 전체의 긴 정결 의식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속죄제가 표상하는 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따라서 사함은 악을 붙들고 있으면서 법적 선언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에서 돌이킬 때 주님께서 그 악을 물러나게 하시고 인간을 선과 진리 안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4의 영적 질서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처음에는 ‘부지중’입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깨닫습니다’. 진리가 비춥니다. 그다음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남의 것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피가 뿌려지고 제단의 뿔에 발라집니다. 신적 진리가 정결하게 하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회복됩니다. 악에 해당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놀라운 그림입니다. 죄를 보지 못하던 사람이 말씀의 빛에서 죄를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으로 피하며, 악과 거짓이 물러난 자리에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죄책감에 인간을 붙잡아 두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발견한 인간에게 ‘여기에서 나올 길이 있다’고 보여 주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레4를 읽으며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죄인인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떤 악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보여 주고 계시는가?’, ‘그것을 정말 죄라고 인정하는가?’,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합리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려 하는가?’, ‘그 악이 물러난 자리에 어떤 선을 주님께서 심기 원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레4에서 가장 희망적인 말은 어쩌면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가 아니라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악이 있다는 사실은 두렵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시는 순간부터 정결의 길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도 주님에게서 오고, 악과 거짓을 제거하시는 능력도 주님에게서 오며, 그 자리에 선을 심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말씀은 선언합니다.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이것이 속죄제 안에 감추어진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SW.6 레4 해설)
심화
1.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할까?’
레위기 4장을 읽으면 현대 독자에게 가장 먼저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일부러 지은 죄도 아닌데 왜 속죄해야 하는가?’입니다. 레4는 반복해서 ‘부지중에 범하여’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도, 온 회중도, 족장도, 평민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라는 말은 인간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죄로 계산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 상태에 관한 매우 깊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자기가 보지 못하는 악과 거짓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보다 잘 모릅니다. 어떤 행동을 선한 의도에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바르게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상대를 지배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견을 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그 사람에게 그 악은 상당 부분 ‘부지중’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움은 내가 그것을 미움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사랑이 되지 않으며, 교만은 내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겸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교리를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빛입니다. 그 빛이 삶에 들어오면서 어느 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레4가 반복해서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순간은 정죄의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레4의 속죄제 규정들을 직접 인용합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목적은 인간을 죄책감 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 악과 거짓에서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입니다. 아직 보지 못할 때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뒤의 상태는 같지 않습니다. 보지 못했던 악을 보게 된 뒤에도 그것을 붙들고 정당화한다면 이제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하기 시작하면 거듭남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은 ‘나는 이제 죄가 별로 없다’는 느낌으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동기와 욕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퇴보의 표시가 아닙니다. 더 밝은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발견했을 때 낙심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아직도 이런 것이 내 안에 있는가?’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것을 왜 지금 보여 주셨는가?’입니다. 보여 주셨다면 피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신 것입니다.
레4의 속죄제는 바로 그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먼저 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진리를 통하여 정결하게 되고 악이 물러나며, 마침내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부지중에 지은 죄도 왜 속죄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 때문에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악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은 정죄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의 빛에서 보게 되는 순간, 거듭남의 새로운 문이 열립니다. (SW.6 레4 심화 1)
2.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
레위기 4장의 속죄제를 읽을 때 기독교인은 자연스럽게 십자가를 떠올립니다. 죄를 범한 인간 대신 흠 없는 제물이 죽고 피가 흘려지며, 마지막에는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고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무죄한 제물이 대신 받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레4를 읽으면 강조점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제물의 죽음과 피를 단순한 형벌의 이전으로 읽기보다 ‘인간을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의 구원 역사’로 읽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속죄제의 뜻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9(출29:14)는 속죄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설명에서 레4:3, 8, 14, 20, 21, 24, 25, 29, 33, 34를 직접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 한 문장은 레4를 바라보는 시선을 크게 바꿉니다. 속죄의 핵심이 ‘누가 형벌을 받는가?’보다 ‘인간에게서 무엇이 제거되는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가 나셔서 누군가를 처벌해야만 용서하실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인간 자신이 악과 거짓 안에 있음으로써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면 실제로 악과 거짓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겪으신 모든 시험의 마지막이며, 그 시험들을 통하여 지옥을 이기시고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지옥을 정복하시고 당신의 인성을 신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악과 거짓을 이길 능력이 주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제의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이 죄인 대신 벌하신 희생물’이라는 그림보다 훨씬 깊게 주님을 가리킵니다. 제사의 가장 높은 의미에는 주님의 영화가 있고, 상대적 의미에는 인간의 거듭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과 지옥의 세력을 이기신 그 신적 역사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 인간 안에서는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거듭남으로 나타납니다.
피의 의미도 여기에서 달라집니다. 피는 단순히 ‘누군가 죽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AC.4735는 구약의 성별·속죄·정결 의식에 사용된 피가 주님의 신적 인간에게서 발출하는 거룩한 것,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하며 레4:6-7, 17-18, 25, 30, 34를 직접 열거합니다.
왜 진리가 속죄에서 중요할까요? 진리가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인간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AC.2832(창22:13)는 레4의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규정을 직접 인용하면서 모든 속죄와 정결이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유는 진리가 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함’도 단순한 법정 선언으로 축소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을 계속 사랑하고 붙들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악을 없는 것으로 보아 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실제로 구원하기 원하시며, 그것은 인간이 악에서 돌이켜 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물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습니다. 레4의 피를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는 것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AC.716(창5:24)은 레4:2-3, 6을 직접 인용하면서 일곱이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은 속죄가 오직 주님에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결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깨달아야 하고, 인정해야 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에 응답할 때 악을 물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레4의 긴 제사 절차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가져오고, 진리로 정결하게 되고, 악이 제거되고, 선이 회복되며, 그 결과 ‘사함을 받으리라’는 선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속죄와 사함은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인가, 악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히 후자에 중심을 둡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결과가 인간에게 실제로 무엇을 이루는지를 더 깊이 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죄인인데도 죄인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실제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속죄제의 마지막에 ‘사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함은 악을 사랑한 채 형벌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을 받아 악의 지배에서 풀려나 주님과 다시 결합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속죄제는 바로 그 정결과 회복의 아르카나를 외적인 제사의 언어로 보여 줍니다. (SW.6 레4 심화 2)
3. ‘왜 수송아지의 기름은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진영 밖에서 불살랐을까?’
레위기 4장의 속죄제에는 얼핏 보면 매우 이상한 대비가 있습니다. 같은 수송아지인데 일부는 제단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내장과 콩팥 주변의 ‘기름’은 거룩한 제단 위에서 불사르지만,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 곧 나머지 전체는 진영 밖으로 가져가 불사릅니다.
왜 같은 제물 안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처리가 이루어질까요?
여기에는 매우 분명한 상응이 있습니다. 레3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름은 선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속죄제에서도 기름은 버려지지 않고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인간이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은 제거되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보존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반면 수송아지의 나머지를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장면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가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038(출29:14)은 수송아지의 살과 가죽과 똥을 진영 밖에서 불사르는 것이 그것들이 표상하는 악들을 지옥에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진영은 천국과 교회를 표상하고, 따라서 진영 밖은 천국과 교회가 아닌 곳, 곧 지옥을 표상합니다.
이어 AC.10040은 속죄제 수송아지의 살이 여기서는 사랑의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악’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살’이라는 상응도 문맥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속죄제라는 문맥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악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살은 언제나 이것’, ‘불은 언제나 이것’, ‘동물은 언제나 이것’처럼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면 안 됩니다. 말씀의 문맥과 계열이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도 선한 계열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악한 계열에서는 반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레4의 수송아지는 바로 이 원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름은 제단으로 올라갑니다. 악을 표상하는 것은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정결입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성이나 재능이나 자연적 삶 자체를 파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악한 사랑과 거짓을 분리하여 물러나게 하시고,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것들은 보존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지배욕은 제거되어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강한 의지는 선한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성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려는 교만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정결하게 된 이해는 진리를 보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인간을 무색무취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과 쓰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여 선을 섬기게 하십니다.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악이며, 주님에게서 온 선은 주님께 돌려집니다.
여기서 ‘진영 밖’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악은 조금 고쳐서 성소 안에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인정했다면 그것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미움을 ‘정의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고, 지배욕을 ‘책임감’이라고 이름 붙여 보관하며, 자기 자랑을 ‘간증’이라고 이름 붙여 성소 안에 들여놓아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그것이 악임을 보여 주었다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지옥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악을 보고 인정하고 피하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러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주님을 바라보며 악을 거부할 때 주님께서 그 악을 인간의 중심에서 밀어내십니다.
그래서 레4의 장면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름이 제단의 불꽃 속으로 올라갑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악을 표상하는 것들이 진영 밖으로 나갑니다. 선은 주님께 돌려지고 악은 제거됩니다.
바로 이것이 속죄제의 정결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단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이름 아래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의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악은 밖으로, 선은 주님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레4의 속죄제는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 안에서 제단으로 올라가야 할 것은 무엇이며,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은 감사함으로 그분께 돌리고, 말씀의 빛에서 악으로 드러난 것은 붙들거나 변명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이 두 움직임이 함께 일어날 때 인간의 자연적 삶은 조금씩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SW.6 레4 심화 3)
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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