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 많은 개신교인에게 이 질문의 답은 거의 당연하게 ‘그렇다’일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거나 심지어 큰 죄를 지으며 살았더라도 죽기 직전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입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3:42-43). 그렇다면 이 본문이 ‘죽기 5분 전이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확증하는 것일까요?

 

먼저 아주 중요한 것은 ‘임종 직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반대편의 또 다른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인간이 정한 시간표에 갇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향하여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우리가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평생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어떤 선과 진리가 보존되어 있었는지, 마지막 순간 어떤 내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주님만 아십니다. 따라서 ‘너무 늦었다’고 인간이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혀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마지막 순간 진실한 회심이 가능하다’는 것과 ‘평생 어떻게 살았든 죽기 직전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같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의 생각은 구원을 마치 임종 직전에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카드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평생 자기 사랑과 탐욕과 미움과 거짓을 사랑하며 살아도 마지막 순간 특정한 신앙고백만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즉시 반전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배적 사랑’(ruling love)입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형성해 갑니다. 선을 알고도 계속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을 즐기고 정당화하며 반복한다면 그것은 점차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반대로 넘어지고 실패하더라도 악을 죄로 여기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시 선을 향한다면 그 사람 안에서는 다른 방향의 사랑이 형성됩니다.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이 때문에 임종 직전의 회개를 생각할 때 ‘말’과 ‘내면의 변화’를 구별해야 합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누구라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예수님 믿겠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를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형벌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악 자체를 미워하여 주님께 돌아서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입술의 고백이 순간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수십 년 동안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의 방향까지 반드시 그 순간 바뀌었다고 인간이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모릅니다. 성경도 그의 생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마지막 장면뿐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장면에서도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른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눅23:39-41). 그는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무죄함을 인정하며, 주님의 나라를 인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를 해서 천국에 갔다’고 축소하면 오히려 본문에 나타난 강도의 내적 태도를 놓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강도의 내면을 완전히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가 한 몇 마디만 듣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전 생애와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죽기 직전에 이와 비슷한 문장을 말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는 구원 공식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아시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이것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일했고 어떤 사람은 거의 일이 끝날 무렵 들어왔지만 모두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마20:1-16). 주님의 은혜는 ‘너는 너무 늦었다’며 문을 닫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혼에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고 해서 젊어서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보다 구원에서 불리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늦게 온 품꾼은 포도원 밖에 그대로 있으면서 품삯만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늦게라도 주인의 부름을 받고 포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시에 불렸느냐’만이 아니라 부름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회심의 ‘시각’보다 회심의 ‘실재’입니다. 열 살에 주님을 믿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든 살에 주님을 알았다고 해서 너무 늦은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달력상의 날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삶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사랑이 선택과 행동을 통하여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만 믿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미래로 미루면서 오늘의 악을 계속 사랑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라는 생각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내가 무엇을 사랑하게 될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악을 반복할수록 그 악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향이 되며, 성향은 점차 사랑의 일부가 됩니다. 젊어서 평생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죽기 직전에 마음속 스위치를 한 번 눌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regeneration)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rationality)을 보존하시면서 사람의 사랑과 삶의 질서를 변화시키시는 실제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임종 직전 회개는 가짜라는 말인가?’라는 반론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지막 순간의 주님을 향한 돌이킴이 그 사람의 내면에 오래 보존되어 있던 선과 진리가 마지막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remains),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평생 하나님과 멀리 살았던 사람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내면의 역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임종의 회개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그것을 기계적인 구원 공식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자살한 사람의 장례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지막 몇 분만 보고 그 사람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행동 하나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마지막 고백 한마디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에 갔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이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 하나를 가지고 주님만이 보실 수 있는 한 사람의 전 생애와 내면을 판결하려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중요하지만, 마지막 순간만이 그 사람 전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도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오늘 죽어도 천국 갑니다’라는 말만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지만, 자칫 구원을 ‘죽은 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확보’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지 죽은 뒤 우리의 위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경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우리를 악에서 건져 내시고, 우리의 사랑을 변화시키시며,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천국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임종 전에라도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를 동시에 대답해야 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주님께 돌아가기에는 늦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 살아도 되고 마지막에 믿으면 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었다’는 시간이 없지만, 그 자비를 핑계로 오늘의 거듭남을 미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몇 분 전까지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런 시간의 경계선을 찾는 것 자체가 구원을 너무 외적으로 이해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실 때 나는 왜 내일로 미루는가?’입니다. 주님은 임종의 순간에도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바로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께 진실하게 돌아설 가능성을 인간이 닫을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의 신앙고백 하나가 평생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과 삶에 관계없이 자동으로 천국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하며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자비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없지만, 그렇다고 회개를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SL.16,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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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 이 말은 많은 개신교인에게 상당히 익숙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혹은 영어로 ‘Once saved, always saved’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귀중한 신앙적 확신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이나 매일의 성적표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한번 붙드신 사람을 쉽게 버리시는 분도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8). 그러므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오늘 구원을 잃었나? 다시 구원받아야 하나?’ 하며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건강한 신앙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아주 작은 문장 하나가 덧붙을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어떻게 살아도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주님의 손에서 나를 빼앗을 수 없다’와 ‘내가 끝까지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도 천국에 간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말이고, 후자는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많은 ‘끝까지’, ‘거하라’,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마24:13),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5:4).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주님은 이미 가지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빌2:12). 이런 말씀들은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유지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원을 어느 과거 시점에 취득한 뒤 금고에 넣어 둔 증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어떤 사람의 법적 신분만 바뀌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거듭남’(regeneration)의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사람의 사랑 자체가 점차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을 ‘내 이름이 구원자 명단에 올라갔는가?’로 생각하기보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구원을 취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치 어떤 날 인간이 큰 죄를 지으면 주님께서 ‘네 구원은 오늘부로 취소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선하게 만드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도, 선도, 천국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님을 향할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도 있으며, 선을 반복하여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한번 구원받았으니 끝’이라는 표현에는 뜻밖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은 나를 끝까지 붙드신다’는 신뢰라면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안전보장이 된다면 ‘프로프리움’(proprium)이 신앙의 언어를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자기 규정이 현재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품고 살아도, 거짓을 일삼아도, 탐욕을 사랑해도,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그래도 나는 3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구원의 확신이 오히려 회개를 막는 기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죄를 한 번 지으면 구원을 잃는 것일까요? 이것 역시 아닙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번의 범죄와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붙잡히신 결정적인 순간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가 그의 전 존재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곡했고 다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성경에는 심각한 악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번 넘어졌는가?’만이 아니라 그 악을 사랑하고 정당화하며 자신의 삶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죄로 깨닫고 주님께 돌아섰는가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잃는다’는 표현 자체도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지갑에 넣어 둔 구원증을 실수로 떨어뜨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본질적인 질문은 ‘나는 구원을 가지고 있는가, 잃어버렸는가?’보다 ‘나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내 사랑을 형성하고 있는가?’입니다. 천국은 외적으로 배정되는 장소이기 전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질서이며, 지옥 역시 외부에서 억지로 던져지는 형벌의 장소이기 전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는 삶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결국 사후에 드러나는 것은 과거 어느 날 내가 받은 자격증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을 통하여 내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형성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확신의 근거가 바뀝니다. ‘나는 그날 영접기도를 했으므로 무슨 일을 해도 안전하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오늘도 나를 악에서 건져 선으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오늘도 그 인도를 따르겠다’가 됩니다. 전자의 확신은 과거의 사건을 붙들지만, 후자의 확신은 살아 계신 주님을 붙듭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끝까지 붙드시지만 인간을 억지로 붙잡아 두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주신 자유 역시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느냐, 사랑하지 않으시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구원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변화시키시도록 허용하느냐입니다. 이것이 자유와 섭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 때문에 ‘끝까지 견디는 것’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신앙을 잘 지켰으므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듭남 전체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돌이나 기계처럼 구원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선과 진리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그 싸움의 능력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한번 구원받으면 끝,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은 유효한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는 끝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이후 어떤 악을 사랑하며 살아도 상관없다는 보증을 뜻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취소하려고 인간의 실수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을 구원하려 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그분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실제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 구원은 아직 유효한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구원하고 계실 때 나는 그분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한번 발급받으면 어떤 삶을 살아도 효력이 유지되는 자격증이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실제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나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을 꼭 살려서 표현한다면 저는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한번 구원하신 주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의 구원을 끝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SL.15,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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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 - 한 번의 영접과 일생의 거듭남

 

이 말에는 분명 복음의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요한복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자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영접’의 의미를 어느 순간 드린 기도나 입술의 고백 하나로 축소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이해할 때 생깁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훨씬 더 깊고 삶 전체에 걸친 일입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흔히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라고 기도했다면 그 날짜를 자신의 구원받은 날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런 기도는 매우 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돌아서서 주님을 향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특정한 형식의 ‘영접기도’를 한 번 했다는 사실 자체를 영원한 구원의 보증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접기도는 주님을 향한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지만, 그 기도 자체가 거듭남(regeneration)의 전 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여기에서 주님은 입술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구별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알고 주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문제 삼으십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구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장부에서 죄인의 신분을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외적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도 결국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사랑과 생각, 행동을 새롭게 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유명한 말씀도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말씀도 흔히 영접기도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원래 문맥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문 밖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입술로는 주님을 영접했지만 삶의 어떤 방들은 여전히 열어 드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만은 미워할 권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믿습니다. 그러나 내 욕망을 건드리는 말씀은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고백과 현재 내가 실제로 주님께 내어 드리고 있는 삶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생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아주 미묘한 형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처음에는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소유한 ‘구원 자격증’처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 악을 붙들고 있는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됩니다. 심지어 삶이 주님의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도 ‘그래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야’라는 확신이 자기 성찰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이 역설적으로 자기 확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그러므로 행위를 많이 해야 구원받는다’는 말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행을 쌓아 천국 입장권을 얻는 과정이 아닙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 안에서 악을 죄로 알고 물리치며 주님께서 주시는 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참된 신앙 안에서는 그 힘과 선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냐 행위냐’의 단순한 양자택일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믿음이 실제 삶에서 어떤 사랑과 행위가 되었는가’를 묻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믿음에 추가되어 구원의 점수를 높여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삶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는 것은 사과를 달아서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생명이 나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믿음은 체어리티(charity), 곧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과거형 ‘영접했으니’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적 신앙은 ‘언젠가 주님을 영접했는가?’뿐 아니라 ‘오늘도 주님을 영접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내 미움을 보여 주실 때 그것을 내려놓는 것, 내 거짓을 드러내실 때 인정하는 것, 내 욕심과 교만을 말씀으로 비추실 때 돌이키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해야 할 선을 보여 주실 때 행하는 것, 이것 역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접은 한 번의 사건인 동시에 일생에 걸친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거듭났나? 선행을 충분히 했나? 이 정도면 천국에 갈 수 있나?’ 하며 끊임없이 자기 상태를 측정하는 것도 결국 시선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내가 몇 점짜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에 있지 않고 나를 끝까지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그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테니 나는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는 일을 나는 거부하지 않겠다’는 신뢰를 포함합니다.

 

결국 질문은 ‘나는 언제 영접기도를 했는가?’에서 한 걸음 더 깊어져야 합니다. ‘내가 영접했다고 고백한 그 주님께서 지금 내 삶을 실제로 다스리고 계시는가? 나는 주님께서 악이라고 하시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과거 어느 날 받은 증명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살아 있는 결합이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구원받은 거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한 번 입술로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고백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를 내 삶 안으로 계속 받아들이며 그분이 나를 실제로 변화시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로 주님을 내 구원자로 선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일생의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이 내 사랑과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짧게 말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구원은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과거의 기억보다, 내가 영접한 주님께서 지금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가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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