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9-474 심화

1, ‘태고교회는 왜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는가?’

 

AC.470-471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시대의 사람들이 ‘집안’(house), ‘일가’(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별되어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 세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족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하나의 ‘집안’은 남편과 아내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집안에 속하여 섬기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집안이 서로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한 집에 함께 살지는 않으면서 하나의 ‘일가’를 이루었고, 다시 여러 일가가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조는 ‘집안-일가-민족’으로 점차 확대되는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구조를 설명하는 이유는 단순히 태고 시대의 사회생활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AC.471은 그들이 이렇게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가 ‘교회가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힙니다. 각 집안과 일가가 자기 부모에게 의존함으로써 부모로부터 이어진 사랑과 참된 예배 안에 머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혈연을 따라 집안과 일가가 구별되어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고유한 성격을 보존하는 교회적 질서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각 집안의 ‘고유한 성향’(geniu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녀뿐 아니라 먼 후손들에게까지 부모로부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이어졌으며, 그 특징이 얼굴과 여러 고유한 특성에서도 드러날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집안과 일가가 서로 무분별하게 뒤섞이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혈통의 보존을 넘어,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던 사랑과 신앙과 예배의 성격을 보존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구별’과 ‘분열’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집안과 일가는 서로 달랐지만, 그 다름 자체가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질서가 천국의 모습을 살아 있게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각 공동체는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다른 공동체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동체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태고교회의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 역시 서로 고유한 성격을 가지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게 표상’하였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를 하나의 획일적인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태고교회라는 큰 틀 안에는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이 있었고, 각각의 공동체에는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성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공동체에서 교리나 예배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모든 공동체가 동시에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고 전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집단이 기존의 사랑과 신앙의 질서에서 벗어나더라도 다른 집안과 일가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교회적 성격을 계속 보존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가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창4에서는 ‘가인’과 그 후손들의 이름 아래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변화와 분파들의 전개가 묘사되고, 창5에서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이어지는 과정이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어떤 교회 계열이 태고교회의 원래 질서에서 분리되거나 변질되었다고 해서, 태고교회에 속한 다른 모든 집안과 일가와 민족까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0-471이 보여 주는 공동체 구조는 같은 넓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교회 상태와 계열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은 남겨 두어야 합니다. AC.470-471만으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계열이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진행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두 번호가 직접 밝히는 것은 태고 시대의 교회가 여러 집안과 일가와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으며, 그 구별이 교회를 보존하고 천국의 여러 공동체를 표상하는 질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창4와 창5의 구체적인 관계는 관련 AC의 설명을 더 종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한 계열이 등장하면 이전의 모든 공동체가 사라지고 다음 하나의 교회로 통째로 교체된다’는 단선적인 그림만으로 태고교회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결국 태고교회의 하나 됨은 모든 집안과 일가가 똑같아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각 공동체가 주님께 받은 고유한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보존하면서도 모두가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천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서로 다르면서도 주님 안에서 하나의 천국을 이루듯, 태고교회의 집안과 일가와 민족도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공동체 질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 안의 하나 됨’이라는 천국의 질서를 지상에서 살아 있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AC.469-474 심화 1)

 

 

 

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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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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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은 처음부터 시청자의 감정을 한쪽으로 강하게 끌고 갑니다. 결혼 전에는 ‘요즘 누가 외벌이를 해? 나도 300 버는데 그걸 왜 놔?’라고 말했던 아내가 임신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도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남편은 월급 380만 원으로 세 식구의 생활비와 대출을 감당하면서 점심값까지 아끼는데, 아내는 어린이집 등원 후 친구들과 카페와 브런치 식당을 다니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제주 여행까지 갑니다. 영상 첫 장면부터 남편의 통장에는 11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나 요즘 숨 돌릴 틈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이라면 시청자가 남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먼저 영상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즘 여자들은 편하게 살려고 전업주부가 되려 한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자체도 육아 때문에 실제로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또한 전업주부라는 삶의 형태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에 영상이 정확하게 짚듯이 ‘문제는 전업주부라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 전에 한 사람이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가 그것을 알고 동의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선택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상의 진짜 문제가 드러납니다. ‘맞벌이냐 외벌이냐’가 아니라 ‘진실이 있었느냐’입니다. 남편은 결혼 전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혼자 벌어 대출을 갚고 아이까지 키울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우리 둘 다 계속 일하는 거 맞지?’라고 명시적으로 확인합니다. 아내는 ‘당연하지’라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그 대답을 기초로 결혼 후의 경제생활을 계산했고, 실제 신혼 1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적금을 붓고 내 집 마련을 계획합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연애 중 흘려들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결혼생활의 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그런데 영상 후반부에서 아내는 마침내 ‘나 다시 회사 다니고 싶지 않아. 애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 길로 돌아가기 싫어’라고 고백합니다. 남편에게 결정적으로 아팠던 것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결혼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적어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존중하시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참된 자유에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온전한 선택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중요한 사실을 감춘 채 그의 선택을 받아냈다면 외형적으로는 상대가 자유롭게 결정한 것처럼 보여도 그 자유의 토대는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예의’ 정도가 아닙니다. 배우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의 한 형태입니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자녀를 꼭 원한다’, ‘나는 부모를 모시고 살고 싶다’, ‘나는 빚이 이만큼 있다’ 같은 문제들은 결혼 전에 솔직하게 밝혀야 합니다.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을 얻기 위해 상대가 싫어할 만한 사실을 감추는 순간, 사랑은 이미 상대를 위한 사랑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랑’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아주 교묘하게 나타납니다. proprium은 언제나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얼굴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처음에는 ‘돌까지’라는 이유가 있었고, 돌이 지나자 ‘두 돌까지’, 다시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자 ‘아프면 누가 데리러 가느냐’, ‘경력 단절 여성을 누가 뽑아주느냐’라는 새로운 이유가 등장합니다. 남편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이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밝혀진 내면의 실제 이유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나는 다시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기만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이유를 나중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육아, 건강, 가족, 희생처럼 선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쉽습니다. ‘나는 편하고 싶다’고 말하면 양심에 걸리지만 ‘아이를 위해서다’라고 말하면 스스로도 선한 사람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명분보다 그 아래 있는 사랑, 곧 ‘무엇을 위해 이것을 원하는가’를 봅니다. 주님 앞에서는 명분보다 동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영상 속 아내의 지난 3년을 ‘놀았다’고 단순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출산과 초기 육아가 실제로 매우 힘든 노동이라는 사실은 영상 자체도 인정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 1년 동안 남편 역시 아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것 자체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례의 문제를 ‘밖에서 돈을 벌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 안의 노동 역시 실제 노동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시장가격보다 그 노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부부 사이의 ‘공동의 짐’이 무너졌다는 데 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도 처음부터 반드시 월 300만 원짜리 정규직 복귀는 아니었습니다. 하루 네 시간, 월 100만 원 정도라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영상의 표현대로 ‘우리 집 돈 문제를 둘이 같이 들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결혼은 모든 일을 정확히 50 대 50으로 나누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한 사람이 돈을 더 벌 수 있고,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이 육아를 더 맡을 수 있으며, 질병이나 실직이 생기면 한쪽이 거의 전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양이 똑같으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함께 지고 있느냐’입니다.

 

‘결혼애’(Conjugial Love, 1768, CL)에서 스베덴보리가 바라보는 결혼의 핵심 역시 두 사람이 점차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결혼에는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CL.215). 그렇다면 결혼생활에서 돈은 ‘당신 돈’과 ‘내가 쓸 돈’으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육아 역시 ‘당신이 맡아야 할 일’이 될 수 없으며, 집안일 역시 한 사람의 고정된 운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형편과 능력과 시기에 따라 역할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내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 속 가장 심각한 장면은 어쩌면 카페도 필라테스도 제주 여행도 아닙니다. 아내가 ‘당신 월급으로 못 사는 것도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 안에서는 남편의 노동이 이미 ‘우리 가정을 위해 한 사람이 감당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냥 매달 들어오는 380만 원으로 변해 있습니다. 남편이 점심값 6천 원을 아끼고, 야근하고, 막차를 타기 위해 뛰고, 회사에서 자리가 흔들릴까 두려워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인 월급만 남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기능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감동 주는 일본 여자와 눈치 주는 한국 여자’ 영상과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그 영상의 핵심은 ‘상대가 한 일을 알아봐 주는가’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도 남편이 무너진 이유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부담과 두려움이 배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상 후반부는 외벌이 남편들이 ‘수고했다’보다 ‘당신이 뭘 아느냐’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결국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편에게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전업주부의 가사와 육아를 남편이 ‘집에서 하는 게 뭐가 힘들어?’라고 말한다면 정확히 같은 오류입니다. 배우자의 수고를 보지 않고 그 역할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의 월급도 당연하지 않고 아내의 밥과 빨래와 육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이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당신도 원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감사가 사라지고 결혼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권리와 의무의 거래로 바뀌기 쉽습니다.

 

영상 속 아내에게 또 하나 나타나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 친구 남편들은 그런 거 안 따져’, ‘지은이 남편은 애 어린이집 보내면 필라테스라도 다니라고 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에 따르면 그 비교 대상의 경제적 조건은 이 가정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비교의 문제는 다른 가정의 ‘결과’만 가져오고 그 결과를 가능하게 한 조건은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집의 여행, 자동차, 주택, 육아 방식, 소비 수준만 바라보면 내 배우자는 계속 부족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 안에서 체어리티를 매우 빠르게 말라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힘들다’는 말이 한 사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남편도 생계 때문에 두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힘들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면 아내 역시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지쳤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가 더 힘든가’를 판정하는 경쟁이 아닙니다. 한쪽의 고통이 다른 쪽의 고통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나도 힘들어’라고 상대의 고통을 덮기 전에 ‘당신도 힘들었구나’를 말할 수 있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영상의 마지막 해결 과정에서 그래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남편은 결국 가계부 전체를 식탁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석 달 안에 하루 네 시간이든 재택이든 일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가족카드 한도를 줄이자’, ‘일을 시작하면 등원과 주말 오전은 내가 맡고 아이가 아프면 연차를 번갈아 쓰자’는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편이 아내를 굴복시켰다’고 읽을 장면은 아닙니다. 적어도 영상의 서사 안에서는 그동안 감정과 변명 속에 묻혀 있던 문제를 ‘현실의 숫자와 구체적인 역할’ 앞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도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결혼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은 명령과 압박이 아니라 진리와 자유입니다. 가계의 실제 형편을 함께 보고, 서로의 수고를 정확하게 말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무엇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진실하게 밝힌 뒤 두 사람이 자유롭게 공동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내가 돈을 버니 내 말을 들어라’도 잘못이고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웠으니 당신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져라’도 잘못입니다. 둘 다 자신의 기여를 상대를 지배할 권리로 바꾸는 순간 사랑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상에서 가장 아픈 지점은 어쩌면 돈도, 직장도, 카페도 아닙니다. ‘결혼 전에 알았더라면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은 상대의 자유로운 ‘예’를 받아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예’를 얻기 위해 중요한 진실을 감춘다면 상대는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보여준 사람에게 ‘예’라고 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나와 결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은 말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혼 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맞벌이할 거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낳으면 누가 어느 정도 일을 줄일 것인가?’,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가사와 육아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부모의 도움은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소비 수준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같은 질문입니다. 영상은 날짜와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모든 미래를 계약서처럼 정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숨기지 않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국 이 영상의 제목도 조금 달라집니다. ‘왜 이 여자는 전업주부를 원하게 되었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배우자에게 내 진짜 욕구를 얼마나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선한 명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은 영상 속 아내에게만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거듭남은 자기 욕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기 욕구를 진실의 빛 가운데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나는 직장에 돌아가기 싫다’면 먼저 그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에게도 솔직히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외벌이를 감당하기 두렵다’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두려움과 욕구를 진리 가운데 꺼내 놓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을 함께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월 380만 원도, 61만 원의 카페와 브런치 비용도, 1억 800만 원의 사라진 소득도 아닐 것입니다. 숫자는 문제를 보이게 했을 뿐입니다. 더 깊은 곳에는 ‘당신이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나는 나 자신을 진실하게 보여주었는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실한 나를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당신 책임’, ‘내 책임’을 넘어 ‘우리의 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결혼은 비로소 한 몸의 질서를 향해 갑니다. 한 사람이 돈을 벌든 둘이 벌든, 한 사람이 아이를 더 돌보든 둘이 정확히 나누든 그것은 가정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 안에 진실과 자유와 상호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결혼의 핵심은 ‘누가 더 많이 했는가’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두 사람이 자기성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서로의 선을 원하고 함께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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