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수도원에는 금붕어와 비단잉어 백여 마리가 사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어느 목사님의 제안으로 연못 바닥에 자갈을 깔고 정비하기로 했습니다. 포클레인을 불러 연못을 수리하려면 먼저 그 안의 물고기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직접 연못 안에 들어가 물고기들을 손으로 잡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자신들을 잡으려는 손이 죽이려는 손이 아니라 살리려는 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도망가는 물고기들을 보며 속으로 ‘야, 이놈들아. 잡혀라. 안 잡히면 포클레인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이 짧은 장면이 이번 영상 전체를 여는 하나의 영적 비유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먼저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섭리라 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잘 풀리고, 위험에서 벗어나며,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붙잡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과 반대로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며,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던 자리에서 갑자기 옮겨지는 것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연못 속 물고기의 눈으로 보면 자기를 붙잡는 손은 위협입니다. 그러나 연못 밖에서 전체 상황을 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손이 생명을 살리는 손입니다. 물고기는 곧 포클레인이 들어온다는 것을 모르지만 사람은 압니다. 이 작은 차이에서 인간과 주님의 시야가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눈앞의 순간을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십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좋은 것을 구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묻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과 실패를 단순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선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자유롭게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물고기에게는 붙잡힘이었지만 실상은 구원이었던 그 순간처럼 말입니다.
연못을 수리하는 동안 물고기들은 수도원에서 가장 큰 물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에 임시로 옮겨집니다. 그런데 넓은 연못에서 살던 물고기들에게 목욕탕은 답답했는지 자꾸 물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들을 다시 주워 넣으며 또 말합니다. ‘나오면 죽어. 물 안에 있어.’ 여기서 두 번째 영적 그림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잡혀야 산다’였고, 이제는 ‘안에 있어야 산다’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15장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인간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참된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도, 생각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그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시면서 마치 그것이 인간 자신의 것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래야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날수록 사람은 한 가지를 점점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은 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지는 실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가지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줄기와 뿌리에서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을 행해야 하고, 실제로 악을 피해야 하며,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맡겨진 쓰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이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질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동시에 선을 행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표현도 아름답게 들립니다. 물론 주님께 붙잡힌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끌고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지극히 존중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억지로 붙잡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깨달아 자유롭게 주님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나를 붙잡는 울타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거짓을 버려라’, ‘탐욕을 버려라’ 하는 말씀들이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계명들이 자신을 가두는 울타리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지켜 주는 울타리였음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를 생각하면 이것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물고기에게 물은 속박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 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는 질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주님의 계명은 생명을 억압하는 규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악을 마음껏 행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몇 순간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생명 자체를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자유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 점에서 proprium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끊임없이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자유다’, ‘내 판단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가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지의 모습입니다. 가지가 ‘나는 이제 줄기가 필요 없다’며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다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님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능력과 자기 의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영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이 없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한 사람의 인상적인 목회 현장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교회에서 어떤 오해가 생겨 약 십 년 동안 교회를 떠나 있던 사람이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무당이 굿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굿을 하던 무당이 갑자기 ‘여기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사람의 마음에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나는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나 있었는데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리고 그는 그 일을 계기로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고백일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났지만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리메인스’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남겨 두시고 보존하십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감동,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을 찾았던 경험 등은 모두 단순히 사라져 버리는 과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사람의 깊은 내면에 보존하시며,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의 신비입니다.
사람은 때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과 아무 관계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과거에 심어 두신 선과 진리를 함부로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한 말씀을 듣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다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겪다가 오래전에 묻혀 있던 것이 갑자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 나에게도 주님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중심은 기이한 현상 자체보다 ‘십 년 동안 기다리신 주님’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문호 수도사의 메시지가 참 따뜻해집니다. 인간은 주님을 놓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쉽게 놓지 않으십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끝까지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흘러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주님의 신적 섭리는 모든 순간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이 돌아설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시고,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보존하시며,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버렸는데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이 사람의 고백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로 들립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어 태양을 예로 듭니다. 지구와 태양의 관계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역시 스베덴보리의 세계에서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태양에 관하여 매우 중요하게 말합니다. 천국의 태양은 주님의 신적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은 사랑에, 빛은 지혜와 진리에 상응합니다. 자연계에서 태양의 열과 빛이 생명을 가능하게 하듯, 영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영적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연못의 물과 포도나무와 가지와 태양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물고기에게 물이 생명의 환경이고, 가지에게 포도나무가 생명의 근원이며, 자연계의 생명에게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듯, 인간의 영적 생명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가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영상 마지막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수도사의 삶을 ‘하나님만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룩한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 말이 전체 이야기를 잘 정리해 줍니다. 수도생활의 본질이 반드시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서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수도는 결국 매일의 삶에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에 있는 사람도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고, 시장과 직장과 가정 한복판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 깊이 거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붙잡는다’는 말 역시 다른 모든 인간관계를 버린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참으로 붙잡을수록 이웃을 더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갈 때 그것이 체어리티가 되고, 실제적인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줄기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신앙은 결국 그의 삶에서 선한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영상의 핵심을 ‘잡혀서 살아라’라는 강렬한 표현에서 시작하여 ‘붙어 있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열매를 맺어라’로 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나를 붙드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붙잡힘 → 거함 → 열매 맺음’입니다.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신앙은 단순한 고백을 넘어 삶이 됩니다.
연못에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금붕어에게 자신을 붙잡는 손이 살리는 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으며, 그 진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남은 물고기처럼 억지로 붙잡혀 옮겨지는 일이 아니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주님의 손길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가며 스스로 그 손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연못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열매를 맺듯,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며, 거듭남이란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점점 더 깊이 인정하면서 받은 사랑과 진리를 이웃을 위한 선한 열매로 돌려드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의 ‘잡혀서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마음에 담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먼저인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연못 속에서 주님의 손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에도, 좁고 답답하다며 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동안에도, 심지어 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주님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붙잡아 당신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연못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섭리이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신 말씀의 깊은 위로이기도 합니다.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https://youtu.be/ycpr_QuUjbc?si=heNUWptbnsCcOZsH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동방정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시오도르’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
bygrace.kr
'즐겨찾기 > 스베덴보리의 렌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SY.71, 정동수 목사,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로 성경 공부 바르게 하기, 잘못된 목사, 교리, 설교 분별 가능’ (0) | 2026.08.20 |
|---|---|
| SY.70, 김학철 교수, ‘아무도 본 적 없는데 천국은 존재할까?’ (0) | 2026.08.19 |
| SY.69, 전광훈 목사, 20260816,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0) | 2026.08.19 |
| SY.68, 강문호 수도사, ‘시오도르 수도사’ (20191215) (0) | 2026.08.19 |
| SY.67, 이동엽 목사, ‘전광훈 목사 발끝 만이라도 본받으라 하시는데...’ (1) | 2026.08.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