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6/06/2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6, ‘주 예수 이름 높이어’, 82, ‘성부의 어린 양이입니다.

 

오늘 3 네 번째, 본문은 창3:8-13이고, AC 글 번호로는 218번에서 233입니다.  

 

먼저 본문,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6-7)

 

제목은

 

네가 어디 있느냐 - 타락 이후에도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이며, 다음은 AC.218-233입니다. 그전에 먼저 오늘 범위에 대한 요약 설명 후, 전체 글 중 특별히 몇몇 글을 리딩하겠습니다.  

 

먼저 요약입니다.

 

 

오늘 리딩할 본문 전체의 큰 흐름은 창세기 38절로 13절까지, 곧 타락한 인간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숨는 장면에서 시작,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 그리고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인간 내면의 구조까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숲속에 숨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퍼셉션을 잃어 가면서도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은 상태, 곧 마지막 남은 퍼셉션과 자연적 선 가운데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글인 AC.218은 이 장면을 타락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퍼셉션의 마지막 흔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먼저 8절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귀로 들리는 외적 소리가 아니라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 곧 사람 안에 남아 있던 퍼셉션의 희미한 잔재로 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주님의 뜻을 직접 지각하던 사람들이었지만, 타락이 진행되자 그 지각, 즉 퍼셉션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마치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음성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기쁨으로 듣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듣습니다. 이는 주님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님의 음성이 순수한 상태에서는 평안과 기쁨이지만, 악을 의식하는 상태에서는 책망과 두려움으로 경험됩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는 단순한 저녁 시간이 아니라, 교회가 아직 완전한 밤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낮의 빛을 잃어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아직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어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태입니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숨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래서 이 숨음은 절망의 표시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아직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도 주님의 진노를 피해 달아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사랑, 모든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피한 것은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자비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자비의 얼굴을 피하다니요! 문제는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악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랑의 빛조차 불편하게 느끼며, 자기 상태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참고로,자비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은혜는 머리가 겸손한 사람들이 찾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연적 선 안으로 물러난 상태로 봅니다. 이미 천적 이노센스와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자연적 선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자연적 선은 완전한 영적 선은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줄 알고, 악을 악으로 느끼며, 자기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선한 바탕입니다. 특히 나무가 단수로 언급되는 것은, 이전에는 많았던 퍼셉션의 풍성함이 이제 거의 사라지고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처럼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본문의 해당 부분도 수많은 퍼셉션 가운데 단 하나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9절과 10절에서는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이 아담의 위치를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상태를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주님은 강제로 회개시키지 않으십니다. 먼저 사람에게 자기 상태를 보게 하시고, 스스로 말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질문은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너는 지금 어떤 사랑 안에 있느냐?’,너는 지금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상태를 묻는 영적 질문입니다.

 

AC.227228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퍼셉션, 내적 딕테이트, 양심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늘 영들과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악과 거짓으로 끌어가려 할 때, 천사들은 그것을 막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려 합니다. 이때 사람 안에는 내적 전투가 일어나며, 이것이 태고교회 사람에게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사람에게는 양심으로, 거듭나는 사람에게는 내적 딕테이트로 느껴집니다. 천사들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생각과 애정이 신앙의 진리사랑의 선에 맞는지, 반대되는지를 사람 자신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지각합니다.

 

11절로 13절에서는 책임 전가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네가 먹었느냐?’ 물으시자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변명 장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보고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이성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이 감각 파트에게 속임을 당했고, 결국 주님과 말씀을 그대로 믿기보다 먼저 자기 감각과 자기 판단으로 확인하려 하였습니다.

 

이후 AC.230-232는 그 타락의 뿌리를 더 넓게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말기의 주된 악은 세상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곧 재물을 쌓으려는 욕망보다, 자기 판단을 주님의 말씀보다 높이 두려는 욕망이 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악이 모든 시대의 교회에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홍수 이전 교회, 홍수 이후 고대교회, 유대교회, 주님 이후의 교회,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까지, 근본 악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믿는 것입니다.

 

AC.232는 이 문제를 현대적으로 더 무겁게 만듭니다. 옛사람들은 감각으로 불신했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기억 지식과 과학적 지식으로 그 불신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지식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 주님을 섬기려 하는 대신, 주님을 재판하는 법정이 될 때 어둠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AI와 과학 문명의 시대에도 매우 날카롭게 들립니다. 문제는 지식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으로 주님 없이도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AC.233은 이 흐름의 결론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계의 작은 것 하나도 완전히 알기 어려운데, 하물며 영적이고 천적인 생명의 신비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사람은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악으로 기울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임을 집니다. 반대로 선은 천사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 구조는 감각적 사고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인간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함께 보존되는 핵심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전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한 뒤에도 곧바로 완전히 버려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퍼셉션과 자연적 선을 통해 여전히 들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악을 의식할 때, 주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두려워하고 숨습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을 정죄하기보다 먼저 부르시고, 스스로 자기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 자기 감각과 자기 지식을 주님보다 위에 두면, 그 희미한 빛마저 어둠으로 바뀌고,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지 에덴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너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감각과 자기 지식 속에 숨어 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아래는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전체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218, 창3: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AC.218-225)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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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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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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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1, 창3:8, ‘그 날 바람이 불 때’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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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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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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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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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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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 창3:9-1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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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7, 창3:9-10, 지각(perception),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 양심(conscience) 및 시험(temptations)의 기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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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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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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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0, 창3:11-13,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랑’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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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1, 창3:11-13, ‘모든 교회 시대를 꿰뚫는 근본 악의 뿌리’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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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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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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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주님,

 

오늘 우리는 에덴동산에 숨은 아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지만, 우리는 때때로 두려움과 자기 생각 속에 숨어 주님의 음성보다 우리 자신의 판단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며, 오늘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랑으로 부르고 계심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과 진리를 지켜 주시고, 주님의 말씀 앞에서 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지식과 판단보다 주님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하시고, 숨거나 변명하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이시며 빛과 평화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6-28(D1)

 

 

 

주일예배(2026/06/21, 창3:6-7, AC.207-217),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의 내면 상태’

※ 오늘(2026/06/2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5, ‘큰 영화로신 주’, 찬81, ‘주는 귀한 보배’입니다. 오늘은 창3 세 번째, 본문은 창3:6-7이고, AC 글 번호로는 207번에서 217번입니다. 먼저 본문, 6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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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AC.233 [2])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특유의 ‘생명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악은 사람에게 귀속된다’는 구조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어서, 처음 읽으면 서로 충돌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하나씩 풀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은, 인간의 own, 곧 주님에게서 분리된 자기 자신만 놓고 보면 그 안에는 선과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 자체가 독립된 생명체처럼 스스로 선을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사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own으로 기울면, 그 방향은 자연히 자기 사랑, 세상 사랑, 거짓, 악으로 흐르게 됩니다.

 

둘째,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라는 말은, 사람 안에 악한 충동과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고립된 개인 심리만의 현상이 아니라 영계와의 연결 속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언제나 영들 및 천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한 애정과 진리는 천사들을 통해 주님에게서 들어오고, 악한 욕망과 거짓된 설득은 악한 영들과의 교류를 통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 그 악은 그 사람과 결합된 악한 영들을 통해 활동합니다.

 

셋째,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더 깊은 층위입니다. 악한 영들도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들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그 생명을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서 뒤틀어 받기 때문에, 그들에게서는 악한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악한 영이 ‘자기 힘으로’ 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악, 곧 그들의 지배적 사랑이 그들을 움직입니다. 사람도, 영도, 천사도 모두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차이는 그 생명을 어떤 사랑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넷째,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라는 말은, 여기서 책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악한 영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해서 사람이 꼭두각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삼을 자유가 있습니다. 악이 들어와도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합리화하고, 실행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작용하더라도,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 책임은 사람에게 귀속됩니다.

 

다섯째,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라는 말은 모든 문장의 기초입니다. 선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악한 사람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천사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고, 악한 영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사는 그 생명을 사랑과 선으로 받아들이고, 악한 영은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으로 뒤틀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태양 빛이 좋은 나무에는 열매를 맺게 하지만, 썩은 것에서는 악취를 일으키는 것처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그 받는 그릇의 상태에 따라 선으로도, 악의 활동처럼도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악의 근원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의 own과 그와 결합된 악한 영들의 상태에 있으며, 사람은 악한 영들의 영향을 받아 악을 행하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함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책임을 지며, 그럼에도 그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전기는 하나입니다. 좋은 기계에 들어가면 빛과 온기를 내고, 고장 난 기계에 들어가면 불꽃과 고장을 일으킵니다. 전기가 악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장치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주님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생명과 선이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의 구조가 받아들이면 악한 작용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악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AC.233, 창3:11-13,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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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3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기억 지식으로 탐구하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려 하거나, 갈빗대 하나가 가슴과 심장의 가장 미세한 섬유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연계의 숨은 것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아서, 사람이 그것들을 연구한다 해도 겨우 하나를 발견할까 말까 하며, 연구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오류에 빠집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하나에도 수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데, 하물며 영적, 천적 생명의 숨은 진리들을 연구할 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To explor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or for a rib to govern the finest fibrils of the chest and of the heart. He who would investigate the hidden things of nature, which are innumerable, discovers scarcely one, and while investigating them falls into errors, as is well known. How much more likely is this to be the case while investigating the hidden truth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ere myriads of mysteries exist for one that is invisible in nature!

 

[2] 예를 하나만 들어 봅시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다고 그 악한 영들이 스스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것으로 만든 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서며,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반대로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선을 행하거나 주님께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천사들 또한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고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감각과 기억 지식, 그리고 철학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다른 모든 영적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As an illustration take this single example: of himself man cannot but do what is evil, and turn away from the Lord. Yet man does not do these things, but the evil spirits who are with him. Nor do these evil spirits do them, but the evil itself which they have made their own. Nevertheless man does evil and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is in fault; and yet he lives only from the Lord. So on the other hand, of himself man cannot possibly do what is good, and turn to the Lord, but this is done by the angels. Nor can the angels do it, but the Lord alone. And yet man is able as of himself to do what is good, and to turn himself to the Lord. These facts can never be apprehended by our senses, memory-knowledge, and philosophy, but if these are consulted will be denied in spite of their truth. And it is the same all through.

 

[3]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서 감각과 기억 지식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단순히 의심(doubt)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부인(denial)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짙은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갖 정욕(cupidities)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믿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거짓으로부터 정욕과 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consult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in matters of belief, plunge themselves not only into doubt, but also into denial, that is, into thick darkness, and consequently into all cupidities. For as they believe what is false, they also do what is false. And as they believe that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has no existence, so they believe that there is nothing else but what is of the body and the world. And so they love all that belongs to self and the world, and in this way do cupidities and evils spring from what is false.

 

 

해설

 

이 글은 AC.232의 내용을 절정으로 끌고 가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감각과 기억 지식만으로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는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는 매우 강렬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현미경 없이 세균을 보려 하거나, 귀로 색깔을 들으려 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진리를 감각과 철학만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특히 2항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사람은 스스로 악을 행하지만, 동시에 악한 영들의 영향 아래 있다’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지만,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해야 한다’ 합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로 이것을 예로 듭니다. 감각과 철학만으로는 이런 진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면, 곧바로 ‘악한 영이 시켰다면 왜 내가 책임을 지나?’, ‘주님이 선을 행하게 하신다면 왜 내가 상을 받지?’,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면 자유는 어디 있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실제 구조를 보면,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영향(influx)을 받지만, 기계가 아니며, 주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악한 영들은 영향을 미치지만, 강제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책임을 지며, 동시에 도움을 받습니다. 이것은 감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동시에 참인 진리입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다루시는 인플럭스(influx)와 자유(freedom)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지 못하면, 결국 숙명론이나 자기 공로주의 가운데 하나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람이 영적, 천적 세계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는 것은 몸(body)과 세상(world)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과 세상만이 실재라고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 결과 거짓이 정욕을 낳고, 정욕이 다시 악을 낳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흥미로운 순서를 제시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악한 욕망 때문에 거짓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이 먼저이고, 그 거짓이 정욕과 악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즉 ‘영적인 것은 없다’, ‘천국은 없다’, ‘주님은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거짓이 자리 잡으면,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서 수많은 악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33은 단순한 철학 비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3에서 시작된 뱀의 길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주는 결론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확인해 보고 믿겠다’로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니 믿지 않겠다’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인 것은 없다. 몸과 세상만이 전부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거짓에서 정욕이, 정욕에서 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233에서 경고하는 가장 깊은 영적 어둠입니다.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 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AC.233.심화 1. ‘그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는 악을 행하고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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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2, 창3:11-13, ‘옛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 오늘날’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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