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가 인용한 구절들(4:23, 25 / 45:11-12 / 1:26 / 7:13-14 / 24:30)을 ‘사람’과 ‘인자’의 의미, 그리고 문자 의미와 속뜻의 관계라는 큰 축 위에 올려놓고 보면, 이 글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인간론, 기독론, 말씀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매우 높은 밀도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가 ‘주님 외에는 아무도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진술은,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사실의 정확한 진술입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서 ‘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주님에게서 유입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라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 불렀습니다. 즉 ‘사람’이란 내 안에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살아 있고 움직이는 상태이며, 그 근원이신 주님이야말로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관점이 서면, 예언서와 복음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왜 그렇게 자주, 그리고 결정적인 지점마다 등장하는지 비로소 맥이 잡힙니다.

 

4:23, 25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나라의 황폐, 질서 붕괴, 심판의 참상을 묘사하는 예언적 언어입니다. 그러나 AC.49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단순한 인구의 멸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사람됨’이 사라졌음을 말합니다. 사람됨은 사랑과 지혜, 곧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유입되어 마음(의지와 이해력)의 질서로 자리 잡은 상태인데, 그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의 빛이 꺼지면, 즉 이러한 사람됨이 사라지면 겉으로는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일하는 것 같아도 속뜻으로는 ‘사람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새들이 날아갔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새들은 이성적, 지적인 것, 곧 이해력의 활동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며, 새가 날아갔다는 말은 이해력이 진리의 빛에서 이탈하여 더 이상 위를 향해 날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레미야의 탄식은 단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공허와 흑암’ 상태, 혹은 교회의 황폐 상태를 묘사하는 본문이 됩니다.

 

45:11-12에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문자 의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입니다. 그러나 AC의 큰 흐름에서는 ‘창조하다, 만들다, 빚다’ 같은 표현이 예언서에서 자주 ‘거듭남’과 연결된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곧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은 생물학적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참된 사람됨’의 형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단수로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의 원형은 하나’라는 진술로 끌어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람됨을 만들지 못하고, 오직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서만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그래서 최고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속뜻으로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주님의 형상을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창조의 언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독법에서는 그 창조가 곧 새 창조, 즉 거듭남으로 번역됩니다.

 

1:26의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는, 왜 주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시는지를 보여 주는 핵심 증거로 사용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환상 언어이며, 인간이 신적 현실을 직접 담아낼 수 없기에 ‘사람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계의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49의 논지는 거꾸로 갑니다. 주님이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과 사람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상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형상과 연결된 결과이며, 그 형상이 ‘보좌’와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주님의 통치가 힘이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사람 같은 형상’이 가장 높은 자리인 보좌 위에 놓이는 것은, ‘사람됨’이 곧 신적 통치의 본질과 닿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7:13-14의 ‘인자 같은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자기 호칭과 직결됩니다. AC.49는 여기서 ‘인자’가 사실상 ‘사람’과 같은 말이라는 점을 전면에 세웁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고 그 통치가 영원하다고 말할 때, 속뜻은 ‘한 인간 지도자가 영원한 제국을 세운다’가 아니라, 주님이 참 사람으로서, 곧 사랑과 지혜의 결합으로서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선언입니다. 또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후에 마24:30과 연결되며, ‘구름’이 말씀의 문자 의미를 뜻한다는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 안에서 ‘사람’, 곧 인자로 인식되십니다. 그래서 인자 환상은 종말론적 장면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한 근본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24:30의 ‘인자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는 구절도, AC.49에서는 단순한 미래 사건의 예언으로 좁혀지지 않습니다. ‘구름’은 문자, ‘능력과 큰 영광’은 속뜻이라는 해석이 들어오면, 이 말씀은 곧 ‘문자 의미가 매개가 되어 속뜻이 열릴 때, 주님이 인자로 오신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단지 시간 속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속뜻이 열리기 전에는 사람들은 문자 속에 가려진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이 ‘사람’이심도 흐릿하게만 압니다. 그러나 속뜻이 열리면, 그 속뜻이 가리키는 바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나며, 거기서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즉 속뜻의 능력은 정보량이나 지적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과 연결되는 데서 나옵니다.

 

이 모든 인용 구절이 합쳐져 AC.49가 세우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하면서도 강력합니다. 주님은 최고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유입되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안에서 퍼셉션하고, 그것에 따라 살 때에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서에서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지 인구의 부재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부재이며, ‘사람을 창조한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거듭남에 의한 새 창조입니다. 또 주님이 ‘사람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인간의 형상이 신적 인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인자’의 구름-영광 언어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이 어떻게 연결되어 주님의 임재를 드러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는 창세기 1장의 ‘사람 창조’를 읽는 열쇠이자, 예수님이 왜 자신을 ‘인자’라 부르셨는지, 그리고 왜 말씀의 속뜻이 ‘능력과 영광’이라 불리는지에 대한 핵심 답변을 한 덩어리 안에 담고 있는 글입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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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1:26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걸 정확히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1:24, 25에도 각각 기는 것’, ‘땅에 기는 모든 것이 나오네요...

 

 

성경에서 ‘긴다’는 표현은 현대 한국어 감각으로 읽으면 다소 낯설고, 때로는 가치 판단이 섞인 표현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 2장과 그에 대한 AC의 해설에서 이 표현은 결코 경멸적이거나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움직임의 방식’,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가 작동하는 높이와 방향’을 나타내는 매우 정밀한 표현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단순히 ‘살아 있다/죽어 있다’로 나누지 않고,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지를 통해 그 상태를 드러냅니다. ‘긴다’는 말은 바로 그 가장 낮은 움직임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서 ‘기다’로 번역되는 동사들은 공통적으로 땅이나 물에 밀착된 움직임을 뜻합니다. 이는 위로 솟구치거나 공중을 가르는 움직임과 대조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체를 말할 때, 날아다니는 것, 헤엄치는 것, 기어다니는 것을 구분합니다. 이 구분은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상응의 언어’입니다. 날아다니는 것은 위를 향한 인식과 사고, 곧 이성적, 이해력의 차원을 가리키고, 물속을 헤엄치는 것은 기억과 지식의 차원을 가리키며, 기어다니는 것은 감각과 즉각적 반응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즉 ‘긴다’는 표현은 인간 안에서 ‘가장 아래층에서 작동하는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기는 것’을 악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AC에서 ‘기는 것’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 아직 위로 들어 올려지지 않은 상태를 뜻할 뿐, 본질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감각, 습관, 즉각적 욕구, 정서적 반응이라는 층위를 반드시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땅에 붙어 기듯 작동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먼저 생각하거나 분별하지 않고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긴다’는 표현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보면, 이 구조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빛이 먼저 생기고, 하늘과 물의 구분이 이루어지며, 그다음에 물고기와 새가 등장하고, 마지막에 땅의 짐승과 기는 것들이 나옵니다. 이는 시간 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위의 차원, 곧 진리의 빛과 이해력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아래 차원의 생명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만약 이 질서가 거꾸로 되면, 즉 감각과 욕구가 먼저 지배하면, 인간은 ‘기어다니는 삶’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땅에 기는 모든 것’은 인간 안에서 ‘생각 이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몸의 기억, 자동화된 습관, 감각적 쾌, 불쾌, 즉각적인 분노나 두려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반응해 버리는 정서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스스로 위를 보지 못합니다.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며, 주님은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질서 안으로 넣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점에서 AC의 인간 이해는 매우 통합적입니다. 거듭남은 영혼만 바뀌고 몸은 그대로 두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고상한 생각만 바뀌고 일상의 반응과 습관은 방치되는 과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와 작동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기는 것’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대상이 가장 낮은 층위까지 내려왔다는 표시이며, 인간 전체가 생명 안으로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설교나 번역에서 이 표현을 다룰 때 특히 조심해야 할 점이 여기 있습니다. ‘기는 것’을 하찮거나 천한 것으로 설명해 버리면, 성경의 의도를 정반대로 전달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장 낮은 차원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이 주님의 생명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기는 것을 멸하지 않으시고, 굽히고, 다스리고, 살리신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억압이 아니라 질서 부여입니다.

 

결국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 전체를 다루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신앙, 이해, 사랑은 머리에서만 끝나지 않고,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말투, 몸짓, 반사적인 감정, 반복되는 습관, 일상의 선택 속까지 주님의 질서가 스며들 때, 그때 비로소 ‘기는 것’도 살아 있는 혼, 즉 ‘생물’의 일부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긴다’는 말은 부끄러운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마지막 깊이를 드러내는 매우 정직한 성경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01-20(D3)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의 금식 기도와 방언에 대하여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금식 기도를 비롯, 각종 기도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 왜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열심의 표지’가 잘 보이지 않는가 많은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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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력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the 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the 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력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the living soul), ‘가축(the 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의미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요약이자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각 단계를 분리해서 설명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단계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무엇이 결정적인 차이인지 명확히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신앙의 원리로 말합니다. 이 신앙은 이해력에 속하며, 사람은 그 신앙을 통해 진리와 선을 확인하고 확증합니다. 이때 그의 사고와 말은 더 이상 무생물, 곧 못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 곧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물고기’와 ‘’가 등장합니다. 이는 기억-지식과 이성적, 지적 사고가 이제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여전히 그 중심이 이해력에 있습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 사람은 이해력의 신앙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나온 의지의 사랑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을 통해 삶으로 내려옵니다. 이때 등장하는 상징이 ‘생물’과 ‘짐승’(‘가축’)입니다. 이는 삶의 중심이 생각에서 애정과 행위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이 글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여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이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표현입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사람은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이해력의 차원, 곧 신앙의 확증과 말의 차원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 곧 의지 차원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생명의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 곧 ‘영적 인간’이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단순한 닮음이 아니라, ‘작동 방식의 닮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사랑으로 진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도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신앙만으로 말할 때는 아직 다섯 번째 상태이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동하여 삶으로 드러날 때 여섯 번째 상태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사람답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글입니다.

 

 

 

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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