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장르(?)중엔 탈북민들이 하시는 유튜브가 있습니다. 대부분 초대받는 게스트들은 북에서 태어나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시다 천신만고 사선을 넘어 겨우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신 이야기들입니다만... 가끔 북에서 나름 호의호식(?) 하시던 고위층들 중 북을 떠나야만 했던 불가피한 사정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여기서도 나름 호의호식(?)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이들의 태도나 이야기들을 시청할 때면 속에서 좀 거부감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이런 현실 속에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감정입니다. 탈북민 유튜브를 보다 보면, 극심한 굶주림과 억압, 인신매매와 강제노동, 가족의 죽음 같은 참혹한 일을 겪고 대한민국에 온 분들이 있는가 하면, 북한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위와 특권을 누리다가 권력투쟁이나 숙청, 신변의 위협 같은 사정으로 탈북한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북한에서 누리던 우월감이나 권력의식이 말과 태도 속에 남아 있는 듯 보이거나, 한국에 와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볼 때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먼저 그 사람의 외적인 신분보다 내적인 사랑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왕과 거지, 장군과 죄수, 고위층과 밑바닥 인생이 구분되지만, 사후에는 그런 외적인 조건이 모두 벗겨지고,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고위층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계급이나 이력보다 그 안의 사랑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서 과거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이 여전히 강하게 드러난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볍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렸던 특권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어 보거나, 권력의 언어와 우월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옛 사랑이 아직 살아 있다는 징후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입으로는 겸손한 말을 할 수 있지만, 그 말 속에 흐르는 정서와 사랑까지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거부감이 언제나 편견이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때로는 그 사람 안의 어떤 정서를 감지하는 분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최종 심판까지 우리가 맡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가 실제로 얼마나 회개했는지, 내적으로 얼마나 싸우고 있는지,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 거만해 보여도 안에서는 깊이 자신을 낮추고 있을 수 있고, 반대로 겸손한 말만 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자기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는 것과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기되, 우리에게 보이는 태도와 정서는 냉정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은 억지로 없애기보다 바르게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감정이 분별에서 나온 것이라면 무조건 눌러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미움과 멸시로 자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저 사람에게 아직 버리지 못한 자기 사랑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정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악을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람의 말과 태도를 오래 시청할수록 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평화를 잃는다면, 굳이 계속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영적 분별은 모든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내 속 사람을 흐리게 하는지를 알아차리고 적절히 거리를 두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어떤 콘텐츠가 내 안의 분노와 혐오를 계속 자극한다면, 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조용히 시청을 멈추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라면 이 거부감을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도 사용하게 했을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 우월감, 지배욕,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씨앗이 내 안에도 전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타인의 악을 분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같은 악의 뿌리가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여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분별은 정죄가 아니라 겸손으로 이어지고, 자비와 진리가 함께 자라게 됩니다.

 

 

 

SC.102, ‘분도 요셉 라브르’

ChatGPT, 혹시 아래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는 1957년 한국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ChatGPT인 저 조차 이번에 목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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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AC.279

그러므로 이 모든 구절을 연속적으로 살펴보면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All these verses then, taken in a series, involve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가 천적인 것으로부터 돌아섰다는 것 (14),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e celestial (verse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4)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결합시키기 위하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것 (15),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for the purpose of reuniting them (verse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5)

 

겉 사람이 돌아섰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것 (16), that combat arose in consequence of the external man averting itself (verse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6)

 

그 결과 비참함이 생겨났다는 것 (17), whence resulted misery (verse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7)

 

정죄가 뒤따랐다는 것 (18), condemnation (verse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8)

 

그리고 마침내 지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 (19). and at length hell (verse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9)

 

이러한 일들은 그 교회 안에서 네 번째 후손으로부터 홍수 때까지 차례로 일어났습니다. These things followed in succession in that church, from the fourth posterity down to the flood.

 

 

해설

 

AC.279는 창3 14절부터 19절까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한눈에 정리하는 요약 결론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각 절을 따로 설명해 왔지만, 여기서는 그것들이 서로 독립된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쇠퇴 과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첫 단계는 14절의 뱀입니다. 감각적 인간, 즉 인간의 감각 파트가 천적인 것에서 돌아서면서 타락이 시작됩니다. 원래 감각은 내적 인간, 즉 속 사람과 주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독립하여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가장 낮은 수준의 사고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뱀이 흙을 먹게 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15절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장차 세상에 오셔서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하실 것이 예언됩니다. 그래서 창3의 심판 가운데에도 이미 구원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타락의 역사 속에 심어진 최초의 복음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16절의 싸움입니다.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 즉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조화가 깨지면서 영적 전투가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임신하는 고통, 수고하고 자식을 낳음’으로 설명했습니다. 진리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일 자체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게 되고, 갈등과 수고를 동반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17절의 비참함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삶 전체가 고통스러워집니다.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겉 사람이 스스로를 저주받은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며, 사람은 더 이상 선과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18절의 정죄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다는 것은 선과 진리 대신 악과 거짓이 자라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타락은 단순한 약화가 아니라 적극적인 황폐와 왜곡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19절의 지옥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서 영적 생명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의 본질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과정이 ‘그 교회 안에서 네 번째 후손으로부터 홍수 때까지’ 진행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창3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 가운데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영적 쇠퇴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각적 독립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비참함과 정죄를 거쳐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AC.279는 창3:14-19 전체를 하나의 영적 연대기로 제시합니다. 곧 ‘감각의 반역 → 주님의 구원 약속 → 영적 전투 → 비참함 → 정죄 → 지옥’이라는 순서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단지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반복될 수 있는 영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이 과정의 한가운데에 놓인 15절, 곧 주님의 오심과 구원의 약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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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심화

 

4. ‘지옥 상태(infernal state)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단순히 사람이 죽은 뒤 가는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과 삶이 지옥의 사랑과 하나가 된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지옥은 먼저 사람 안에서 시작되며, 사후의 지옥은 그 내적인 상태가 완전히 드러난 결과입니다. 따라서 지옥(적) 상태’란 어떤 공간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신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천국(적) 상태가 형성되고,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유익과 지배를 최고의 목적으로 삼으면 점차 지옥(적) 상태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장소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입니다.

 

지옥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사랑이란 자신을 돌보는 건강한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과 세상, 심지어 주님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처음에는 작아 보여도 점차 지배욕으로 발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을 미워하고, 진리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 선보다 자신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사람은 점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기쁨이었던 말씀이 부담이 되고, 회개를 촉구하는 진리가 간섭처럼 느껴지며, 사랑과 섬김보다 인정과 성공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바로 지옥 상태가 깊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지옥은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날마다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조금씩 형성됩니다.

 

또한 지옥 상태는 거짓과 악이 서로를 강화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악한 사랑이 생기면, 사람은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은 다시 악한 사랑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이처럼 악과 거짓은 서로를 지탱하며, 사람의 마음을 점점 더 닫아 버립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옥을 단순히 악의 세계가 아니라, 악과 거짓이 완전히 결합된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도 지옥 상태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회개의 기회가 있으며,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보내셔서 사람을 돌이키려 하십니다. 유혹과 시련도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지옥 상태에서 벗어나 천국 상태로 옮겨 가도록 돕는 섭리의 도구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인정,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지옥 상태는 점차 무너지고 새로운 천국 상태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갑자기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사랑과 삶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사람은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것과 같은 분위기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반대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으로부터 형성된 천국 상태가 완전히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옥 상태(infernal state)는 죽음 이후의 형벌을 강조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상태입니다. 사람은 매일의 작은 선택을 통하여 천국 상태를 키워 갈 수도 있고, 지옥 상태를 굳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단순히 미래의 지옥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지옥 상태를 발견,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로 그것을 날마다 새롭게 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78, 창3:19,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AC.278‘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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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8, 심화 3, ‘정죄’(condemnation)

AC.278.심화 3. ‘정죄’(condemnation)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정죄’(condemnation)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화를 내시거나 벌을 선고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정죄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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