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창4에서 단순히 두 종류의 신앙을 정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어떻게 점차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는지를 보여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태고교회에는 처음부터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여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들이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AC.338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a thing by itself’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참된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출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차이를 너무 단순하게 두 종류의 신앙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AC.338이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그 신앙이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더 중요한 것으로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완성된 모습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분리가 처음 시작되어 점차 진행되는 과정까지 함께 보여 주는 이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부부의 관계로 생각하면 훨씬 쉽게 와닿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는 배려하고 존중하며 신의를 지키는 여러 원칙이 이미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굳이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20가지’를 벽에 붙여 놓지 않아도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배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신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사항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20가지’로 정리했다고 합시다. 이것 자체가 곧 사랑의 파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서로 사랑하면서 필요에 따라 생활의 원칙을 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어느 순간 이 원칙들이 사랑과 별개로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나는20가지 가운데19가지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14번을 어겼으니 잘못된 아내다’라고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이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래 사랑을 표현하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던 원칙이 오히려 사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원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구별’과 ‘분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는 그렇게 구별하여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은 어떤 관계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것을 서로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 말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큰돈이 오가거나 재산에 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서로 오해하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돈 계산을 분명히 한다’는 원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신뢰에서 떨어져 나와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독립된 원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본래 사랑과 감사, 신뢰와 돌봄이 먼저 있고, 돈에 관한 원칙도 그 사랑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한다’는 원칙이 그 사랑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관계의 앞자리를 차지한다면, 말 자체는 옳아도 듣는 사람은 무엇인가 ‘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어서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어 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계산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계산이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아니면 계산이 사랑과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는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훗날 서로 마음 상하지 않도록 계산을 분명히 하는 것과, 사랑과 상관없이 주고받은 것을 따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은 분별해야 한다’는 말은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보게 됩니다.
이 점은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한 말과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이후의 인간은 그와 같은 퍼셉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교리로 배우고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인간에게 필요한 거듭남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믿기만 하면 된다’, ‘교리를 바르게 알고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머물 때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미세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고 교리도 필요하며 진리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가치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참된 것 자체가 점차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반드시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을 주장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여 다른 진리들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끊어 버릴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AC.338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분리의 진행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가인의 ‘분노’와 ‘안색이 변함’이 나타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마지막에는 체어리티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창4는 바로 이 과정을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글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가인’은 어느 날 갑자기 체어리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이 사랑보다 앞서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악을 더 잘 보고 버리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아무리 그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우리는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AC.338이 보여 주는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데서 출발합니다. 부부 사이의 원칙이 사랑을 섬길 때에는 관계를 보호하지만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분명한 계산도 사랑을 섬길 때에는 서로를 보호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의 본래 질서를 바꾸어 버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기고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에는 참된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완전한 것이 되려 할 때 ‘가인의 분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이렇게 분리된 것을 다시 결합하시는 역사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에게 먼저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며, 마침내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신앙이 다시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신앙은 비로소 참된 신앙, 곧 신앙다운 신앙이 됩니다.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홀로 수도하던 이영길 수도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에게 함께 수도하며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영길 수도사는 ‘수도가 완성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수도의 완성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안의 ‘음란의 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눈물이 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이런 모습을 ‘수도사의 영성’으로 높이 평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영길 수도사가 오랫동안 여성을 전혀 만나지 않고 살아왔음에도 ‘아직 내 속에서 음란의 영이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는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외적 환경과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만나지 않는다고 음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악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외적인 자극을 차단했다고 해서 내적인 악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십 년 넘게 여자를 보지 않았는데도 아직 내 안에 음란이 남아 있다’는 고백은 오히려 자기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음란의 영이 완전히 빠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표현을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욕망은 어떤 외적 영이 몸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물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악한 애정에는 지옥의 영들이 인플럭스를 주지만, 그들이 사람 안에 어떤 독립된 실체로 ‘들어앉아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어떤 악을 즐거워할 때, 그 악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적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 악을 죄로 인식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 연결이 약해지고, 선한 영들과 천국의 인플럭스를 더 자유롭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음란의 영을 빼내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음란한 욕망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단순한 억압과도 다릅니다. 어떤 욕망이 떠오르지 않도록 환경을 차단하는 것과 그 욕망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외적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악이 내면에 그대로 잠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한다’고 인식하고 자유롭게 거절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점차 그 악의 즐거움 자체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영길 수도사의 고백에서 귀하게 볼 부분은 ‘나는 이미 수도자가 되었으니 순결하다’고 스스로 완성된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오랜 수도생활 후에도 자기 안의 남은 악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완전히 없어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생각에는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거듭남은 이 세상에서 한순간에 끝나는 완제품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거듭나며, 천국에 들어간 뒤에도 영원히 더 완전한 선과 지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어느 날 ‘이제 내 안에는 음란도 없고 자기 사랑도 없고 모든 악이 사라졌으니 수도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종착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proprium이 남아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성숙은 ‘나는 완성되었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의 깊어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영길 수도사는 자신이 본래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그렇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때가 수도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랑과 감사 자체는 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와 주님의 구원을 깊이 느끼면서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눈물이 난다는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감정의 강도와 영적 상태의 깊이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분노와 지배욕과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오랫동안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감정 표현의 강도가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십자가를 생각한 결과 내가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는가?’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셔야 하는데 그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셨다’는 단순한 형벌 대속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으로 싸우시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가장 큰 시험이었으며, 동시에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다는 것은 ‘내가 받을 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감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악과 지옥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어떤 싸움을 치르셨는지를 바라보고, 우리 역시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상 중 강 목사님은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법적 죄책으로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그 죄 때문에 정죄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 곧 유전악입니다. 사람은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자유롭게 악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그 악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죄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다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아담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뒤집어쓴 것’으로 이해하면 구원도 그 법적 형벌을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는 구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실제적인 악의 사랑과 그로 인해 뒤틀린 삶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 역시 단순히 죄책의 장부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악의 권세에서 실제로 건져 내어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역시 죄책감과 눈물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바뀌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상에서 이영길 수도사가 산속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 놓고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기억하며 세상의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수도 전통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이 영성의 목적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계에서의 삶으로 넘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재산과 지위와 육체를 모두 남겨 두고 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가고, 지배를 사랑했다면 그 욕망을 가지고 가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 역시 가지고 갑니다. 그러므로 무덤을 파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죽음의 준비는 매일 자기 안의 악한 사랑을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강 목사님은 이영길 수도사의 모습을 ‘사람 같지 않은 수도사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깊은 산속에서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곳에 십 년 넘게 홀로 머물고, 여성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무덤까지 준비해 놓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은 분명 현대인의 눈에는 놀랍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극단성에 대한 감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사람이 재산을 모두 버려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수도자’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사랑할 수 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 있으며, 무덤을 파 놓고 죽음을 묵상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산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알고, 자기 이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금욕의 양은 영성의 높이를 측정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영길 수도사의 수도생활을 낮추어 볼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상에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수도했음에도 아직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다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 고백이 진실했다면, 그것은 자기 완성을 과시하는 말보다 훨씬 수도적입니다. 십 년을 수행한 뒤에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신에게 있는 선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 많이 보고, 자기 의보다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더 깊이 보게 됩니다.
다만 이 영상 전체에서 수도의 완성이 ‘음란의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상태’로 압축되는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음란도 중요한 악이지만, 교만, 지배욕, 자기 공로, 복수심, 탐욕, 거짓, 타인을 업신여기는 마음 등도 모두 거듭남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적 욕망에서는 매우 자유로워졌어도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면 아직 깊은 거듭남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눈물은 거의 없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깊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완성’은 특정 욕망 하나가 사라지거나 특정 감정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는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완전한 종착점이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천사들은 완성된 채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자라갑니다.
이 영상은 수도가 단순한 외적 형식이 아니라 자기 내면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깊은 산속에 십 년 넘게 홀로 살았어도 자기 안의 음란을 문제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을 때에도 같은 사람인가? 외적 환경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것을 내적 변화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악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에 다시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수도의 목적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을 죄로 인식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거절하되, 실제로 악을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하시도록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수도의 완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도의 완성은 어떤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거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특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점점 더 정직하게 보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자기 사랑이 차지하던 자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더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영길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만한 장면은 어쩌면 깊은 산속 생활이나 미리 파 놓은 무덤보다 ‘십 년 넘게 수도했지만, 아직 내 안에 이것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영성은 ‘나는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보다, ‘주님, 제 안에는 아직도 주님께서 고쳐 주셔야 할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창4:1)
AC.338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man and Eve his wife)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처럼 태고교회를 말합니다. 그 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가인’(Cain)이라 합니다. 하와가 말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건,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말입니다. By the “man and Eve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as has been made known; its first offspring, or firstborn, is faith, which is here called “Cain”; her saying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ies that with those called “Cain,”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해설
AC.338부터 스베덴보리는 창4: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이하기 시작합니다. 앞의 AC.324-337이 창4 전체의 개요였다면, 이제부터는 본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그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다시 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태고교회를, 그들에게서 태어난 ‘가인’은 그 교회 안에서 처음 생겨난 어떤 교리적 변화를 나타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이것만 보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가인을 계속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태어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안에도 당연히 신앙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랑과 구별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8의 핵심 표현인 ‘faith wa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뜻을 풀면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AC.337에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가 바로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누군가가 ‘사랑은 필요 없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들어 있던 신앙을 따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미세한 변화처럼 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신앙은 본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으며, 그러므로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무엇으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랑’과 ‘신앙’을 구별하여 바라보고,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실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이 단계에서는 체어리티를 노골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 작은 분리에서 이후의 모든 문제가 시작될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부부간 준수 사항’의 비유가 여기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존중과 배려와 약속은 원래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들을 사랑에서 떼어 ‘부부생활 준수 사항’이라는 독립된 체계로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당장 사랑을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고, 나중에는 ‘사랑이 없어도 이 규칙만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본래의 질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의 시작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본 데서 시작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와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영어 번역은 ‘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고 되어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통하여 당시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신앙을 하나의 중요한 실재로 ‘인식하고 인정했다’는 것을 읽어 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신앙을 거짓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되고 중요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가인의 위험성은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에 속한 것을 굳이 사랑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세운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단’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이단은 언제나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 가운데 하나를 떼어 내어 전체보다 높이고, 본래 그것이 연결되어 있어야 할 다른 진리들과 분리하면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입니다. 교리도 필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고백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만드는 순간, 참된 것이 오히려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8에서 ‘처음 난 것’이라는 표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인이 시간적으로 태고교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한 개인이었다는 식으로만 이해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처음 갈라져 나온 교리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우리가 앞에서 계속 확인했듯 창4와 창5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몇 년 뒤에 누가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생명에서 어떤 교리의 흐름이 생겨났으며,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갖게 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신앙을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신앙을 개념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먼저이고,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구별’이 ‘분리’가 되고, 분리된 것이 마침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일 때, 그것이 가인의 길이 됩니다.
따라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이미 완성된 상태를 보여 주는 글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변화였습니다.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교리라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확신과 자기 우월성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 진리는 본래의 질서를 잃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버리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하면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다’라는 데 있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어느 날 갑자기 체어리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것을 둘로 떼어 바라보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미세한 시작점에서부터 교회의 쇠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이제 창4 본문을 따라 하나씩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표현을 만나게 됩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 곧 처음 난 것’을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단순히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잘 살펴보면, 스베덴보리가 창4에서 단순히 두 종류의 신앙을 정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어떻게 점차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는지를 보여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태고교회에는 처음부터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여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사랑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들이 사랑에 속한 것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따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a thing by itself’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참된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가인’의 출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차이를 너무 단순하게 두 종류의 신앙으로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38이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사랑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그 신앙이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고, 마침내 사랑과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더 중요한 것으로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끝까지 진행되면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완성된 모습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분리가 처음 시작되어 점차 진행되는 과정까지 함께 보여 주는 이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부부의 관계로 생각하면 훨씬 쉽게 와닿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는 배려하고 존중하며 신의를 지키는 여러 원칙이 이미 사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굳이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를 벽에 붙여 놓지 않아도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배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신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사항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로 정리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곧 사랑의 파탄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서로 사랑하면서 필요에 따라 생활의 원칙을 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어느 순간 이 원칙들이 사랑과 별개로 독립적인 중요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나는 20가지 가운데 19가지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을 어겼으니 잘못된 아내다’라고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본래 사랑을 표현하고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던 원칙이 오히려 사랑을 대신하게 됩니다. 원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사랑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구별’과 ‘분리’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는 그렇게 구별하여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은 어떤 관계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것을 서로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이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 말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큰돈이 오가거나 재산에 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서로 오해하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돈 계산을 분명히 한다’는 원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과 신뢰에서 떨어져 나와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독립된 원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본래 사랑과 감사, 신뢰와 돌봄이 먼저 있고, 돈에 관한 원칙도 그 사랑 안에서 서로를 보호하고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한다’는 원칙이 그 사랑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관계의 앞자리를 차지한다면, 말 자체는 옳아도 듣는 사람은 무엇인가 ‘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어서가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어 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계산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계산이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계산이 사랑과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는가?’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훗날 서로 마음 상하지 않도록 계산을 분명히 하는 것과, 사랑과 상관없이 주고받은 것을 따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은 분별해야 한다’는 말은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보게 됩니다.
이 점은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한 말과도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이후의 인간은 그와 같은 퍼셉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교리로 배우고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인간에게 필요한 거듭남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채 ‘믿기만 하면 된다’, ‘교리를 바르게 알고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머물 때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의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미세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고 교리도 필요하며 진리를 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생명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가치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참된 것 자체가 점차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단이나 교리의 왜곡도 반드시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을 주장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여 다른 진리들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끊어 버릴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8 이후의 가인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분리의 진행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됩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가인의 ‘분노’와 ‘안색이 변함’이 나타나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마지막에는 체어리티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창4는 바로 이 과정을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로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은 가인의 타락이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글이라기보다, 그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가인’은 어느 날 갑자기 체어리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바라보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분리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이 사랑보다 앞서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믿는 교리가 옳은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교리가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신의 악을 더 잘 보고 버리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살아 있는 신앙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아무리 그 교리 자체가 참되더라도 우리는 ‘가인의 분리’가 시작되는 지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AC.338이 보여 주는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닙니다. ‘가인’은 본래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데서 출발합니다. 부부 사이의 원칙이 사랑을 섬길 때에는 관계를 보호하지만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의 분명한 계산도 사랑을 섬길 때에는 서로를 보호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의 본래 질서를 바꾸어 버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사랑을 섬기고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에는 참된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완전한 것이 되려 할 때 ‘가인의 분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이렇게 분리된 것을 다시 결합하시는 역사입니다. 오늘날의 인간에게 먼저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시며, 마침내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우리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선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게 신앙이 다시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을 때, 신앙은 비로소 참된 신앙, 곧 신앙다운 신앙이 됩니다.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작은 변화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분리는 점점 깊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처음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을까요? 아직 작은 싹에 불과했을 때 그 방향을 돌려놓으셨다면 그렇게 심각한 결과까지 가지 않았을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섭리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막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유 가운데서만 사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통제하여 사랑에서 벗어나는 생각 자체가 생길 수 없도록 하셨다면, 겉으로는 태고교회의 아름다운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지되는 사랑은 더 이상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통제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강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인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하는 인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허용’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 한, 그 자유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과 함께 그것을 거절할 가능성도 따라옵니다. 만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 자체가 없다면 자유도 실제적인 자유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네 마음대로 하라’며 떠나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향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그 사람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허용은 무관심한 허용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가능한 한 생명 쪽으로 이끄시는 섭리 안에서의 허용입니다.
실제로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4:7)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알고 계셨고, 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신앙을 버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선과 체어리티에 연결하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에서도 마지막 선택을 가인에게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 할 때 그의 의지를 강제로 정지시키거나,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마음을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양심을 통하여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속뜻으로 보면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잘못된 상태에 있는 가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처음 읽을 때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330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훗날 바로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다른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현된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는 버리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랑에서 떼어 낸 신앙을 주님께서는 훗날 다시 체어리티와 연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 안에서도 다음 회복의 가능성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창3부터 계속 나타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떨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생명나무에 함부로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길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창4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을 때에도 신앙 자체를 없애지 않고 보존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옛 질서가 마침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은 계속 주님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것을 붙드시고 다음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주님께서는 인간을 애초에 잘못 선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대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선을 선택하는 자유만 남겨 두는 것은 실제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되, 그 자유가 파멸로 향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안에서 역사하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적극적인 개입’보다 훨씬 더 깊고 섬세합니다. 눈앞에서 기적을 일으켜 잘못된 길을 강제로 차단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섭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이성으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안에서 선한 애정을 일으키고 진리를 만나게 하며, 악의 결과를 통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 다시 돌아설 기회를 마련하며, 심지어 잘못된 선택 이후에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에게는 때로 그것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러한 인도가 오히려 섭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초신자의 눈으로 ‘주님께서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면 안 되었을까?’라고 묻는 것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더 이상 인간답게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할 수 없게 되는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을 보여 주시고, 경고하시고, 억제하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두셨으며, 인간이 끝내 잘못 선택했을 때조차 그 실패 속에서 구원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방치’와 ‘섭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그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가인이 될 자유까지 빼앗아 버리지는 않으셨지만, 가인이 다시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도 끝까지 닫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길을 거절했을 때조차 다음 회복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넘어지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생명을 향해 일어설 수 있는 길을 끝까지 마련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를 허용하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