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초청하게 될 텐데, 그때 이런 표현들, 그러니까 저희 교회는 가급적 선한 삶을 살고프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같은 문구를 사용하면 많이 이상할까요? 이런저런 교리적 배경으로 싸우고 다투느라 교회가 어수선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습니다만...

 

 

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표현 자체가 ‘이상하다’기보다, 그대로 사용하시면 오히려 ‘문을 먼저 좁혀 버리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22-124가 말하는 ‘경작하며 지키게’의 핵심은, 이미 선한 사람만 모으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온 사람 안에 있는 것을 경작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지켜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특히 거기서 말하는 ‘영적 인간’은 처음부터 선과 진리의 조화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서히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작점은 오히려 불완전하고 혼재된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만’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가장 필요한 사람들, 곧 아직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갈망은 있는 사람들조차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거나 스스로를 배제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거듭남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바로 그 의미에서 ‘경작’은 씨앗을 심고 돌보는 일이요, ‘지킴’은 잘못된 원리나 왜곡된 애착이 그 과정을 망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초대 문구는 ‘결과 상태’를 전제하기보다 ‘과정에의 참여’를 여는 쪽이 더 본질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싶고, 그 사랑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인간이 걷는 길, 곧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질서와도 정확히 맞닿습니다.

 

그래서 표현을 조금만 바꾸면 훨씬 자연스럽고, 동시에 AC의 정신에도 더 부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분들’이라는 단정적 표현 대신 ‘삶을 더 선하게 살아가고 싶으신 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 대신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길을 함께 찾고 싶으신 분들’처럼 ‘이미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을 부르는 방식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문은 열려 있으면서도 방향은 분명해집니다. 교회 안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초대 문구에서 걸러내는 방식이 아니라, 들어온 이후의 가르침과 공동체의 분위기, 곧 말씀과 삶의 일관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염려, 곧 ‘교리로 싸우는 어수선함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우 타당합니다. 다만 그것은 ‘누가 들어오느냐’보다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AC.122-124의 빛에서 보면, 참된 ‘지킴’은 외부인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질서’를 세워 외부에서 들어오는 혼란이 스스로 힘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문턱을 높여 조용해지는 곳’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의 질서가 분명하여 자연히 고요해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계획하시는 초대는 충분히 가능하고, 오히려 방향만 조금 다듬으시면 매우 건강한 형태가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교회는 이미 완성된 사람을 찾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 아래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곳입니다.’ 이 한 줄 안에 ‘경작’과 ‘지킴’, 그리고 ‘영적 인간의 길’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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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위 본문에,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뒷받침하는 무수한 근거들이 그의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는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거나 이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전제로 삼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는데, 이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상상으로 파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데를 읽으면서 많이 답답했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곧 창1:2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 같은데, 이런 사람에게 과연 빛이 비친다고 무슨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요? 시작될 수 있으니까 저 같은 사람도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답답함이 드는 지점이 아주 정확합니다. 그 문장은 ‘이 사람은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상태의 구조가 무엇으로는 열리지 않는가’를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곧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전제를 고수하는 한, 그 틀 안에서는 영적, 천적인 것이 스스로 들어올 통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빛이 전혀 비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빛은 다른 길로, 다른 층위로 먼저 들어옵니다.

 

1:2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단순한 무지라기보다, ‘내면의 질서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때 빛은 먼저 ‘이해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들어오기보다, ‘삶과 양심의 자리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들어옵니다. 사람은 여전히 ‘보아야 믿겠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일상 속에서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미세한 찔림, 어떤 선택 뒤에 남는 평안과 불편함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초기의 ‘’입니다.

 

중요한 점은, 빛이 처음부터 ‘보이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살게 하면서 나중에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질서에서는 이해가 먼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아주 조금 바뀌면서 그에 따라 이해가 서서히 열립니다’. ‘증명되면 하겠다’가 아니라, ‘아주 작은 선을 한 번 행해 보니, 그다음이 조금 보인다’는 식입니다. 이때 이성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대성을 내려놓고 섬기는 자리로 옮겨집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 안에는 이미 ‘리메인스(remains, 남겨진 것들)가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각, 진실에 대한 정직함, 선을 향한 미약한 기울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 리메인스가 빛을 받아 ‘밖의 강한 논리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반응’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여전히 회의하고 따지면서도, 속에서는 ‘그래도 이 길이 옳다’는 아주 조용한 동의가 자라납니다. 이것이 변화의 실제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논증으로 설득’이라기보다, ‘작은 순종과 작은 선의 실천’입니다. 아주 사소해 보여도 좋습니다. 진실을 한 번 더 말해 보기, 이익이 적어도 공정하게 선택해 보기, 타인을 한 번 더 배려해 보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선택을 할 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중심’에서 한발 물러서고, 그 틈으로 빛이 더 깊이 들어옵니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이해가 뒤따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미 경험하신 것처럼, 이 길은 ‘먼저 보고 믿는’ 길이 아니라, ‘조금 살다가 보게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연결되며, 이성이 더 넓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이때 사람은 깨닫습니다. ‘내가 닫혀 있었던 것이지,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정리하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는 사람도 변화는 시작됩니다. 다만 그 시작은 이해의 확증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선의 선택과 그에 따르는 미세한 내적 반응’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갈 때, 빛은 점점 ‘보이는 것’이 됩니다. 결국 변화의 문은 이성의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작은 순종과 겸손한 열림’에서 먼저 열립니다.

 

 

 

AC.129, 심화 1, ‘라틴어’

AC.129.심화 1. ‘라틴어’ 본문,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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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심화

 

1. ‘라틴어

 

본문, 학문을 배우는 것이 결코 금지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들은 삶에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부분 말인데요, 그래서 스베덴보리도 모든 저술을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기록한 것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저술을 라틴어로 기록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AC.129에서 말하는 원리, 곧 ‘신앙 안에 있는 사람도 세상의 학자들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원리를 실제로 구현한 선택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라틴어는 학문과 신학, 철학의 공통 언어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전하려는 내용이 단지 개인적 체험이나 종교적 감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검토되고 이해될 수 있는 진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가장 공적이고 검증 가능한 언어를 선택했습니다. 즉, 그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처럼 상징적이고 폐쇄적인 언어를 쓰지 않고, 오히려 누구나 접근 가능한 학문 언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 자체가 ‘신앙과 이성의 질서’를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AC.129의 맥락과 연결하면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이성, 기억 지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근원이 되느냐, 아니면 도구로 사용되느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학문 언어, 곧 라틴어를 사용하되, 그 안에 담는 내용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계시와 지혜에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식은 학자의 언어를 취하고, 내용은 하늘에서 온 것을 담은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라틴어 선택이 단순한 ‘전달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저술이 특정 교파나 지역에 묶이지 않고, 당시 학문 세계 전체를 향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자국어로만 썼다면, 영향력은 훨씬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틴어는 국경을 넘는 언어였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처음부터 ‘보편 교회를 향한 성격’을 갖게 됩니다.

 

더 깊이 보면,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와도 일치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지성, 이성, 그리고 기억 지식을 통해 ‘아래로 흘러가며 표현되는 구조’입니다. 라틴어라는 학문 언어는 그 마지막 표현 단계, 곧 기억 지식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그는 그 영역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온전히 사용하여 위에서 받은 것을 아래까지 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신학적 실천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늘의 진리는 세상의 언어를 통해서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 , 그 근원이 바뀌지 않는 한에서.’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기록한 것은 단지 시대적 관습 때문만이 아니라, AC.129의 원리, 곧 신앙과 학문, 계시와 이성이 충돌하지 않고,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작동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라고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129, 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AC.129.심화 2. ‘거짓된 것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한 사람’ 위 본문에, ‘그 원리가 아무리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의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 원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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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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