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2.심화

 

4. ‘유대인들

 

위 내용 중 만일 그들이 내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인데요,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며,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

 

 

좋습니다. 이 질문은 오히려 AC.302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이드 1.0에 따르면, 이 답은 AC.302만으로는 부족하며, ‘천국의 비밀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난날 어땠기에 주님의 섭리가 이렇게 진행되었나요?’

 

가이드 1.0에 따르면, 먼저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유대 민족은 본래부터 다른 민족보다 더 악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감추셨다’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상들의 죄 때문에 후손들이 영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전체 교리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랑과 자신의 삶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어느 민족에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AC.302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특별한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점차 쇠퇴해 온 과정과 연결됩니다. 태고교회는 내적 교회였고, 고대교회는 상응을 이해하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차 내적인 것을 잃고 외적인 것만 붙드는 상태로 기울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지막으로 세워진 대표, 그러니까 표상적 교회가 바로 유대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는 처음부터 내적 진리를 직접 가르치기 위한 교회가 아니라, 제사와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과 희생 제물 등 외적 예배를 통해 천국의 신비를 표상하도록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영적 진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장차 오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외적 표상으로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님의 섭리도 그 교회의 성격에 맞게 진행되었습니다. 만일 그 공동체 전체가 내적 진리를 충분히 알고도 계속 외적 욕망과 자기 사랑 가운데 머물렀다면,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인정한 진리를 스스로 훼손하는 profanation에 빠질 위험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빛만 허락하시고, 더 깊은 진리는 상응과 비유 속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AC.302가 요12:40과 마13:13을 인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좀 억울한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가이드 1.0에 따르면,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적 역할’이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더 낮은 천국에 가거나 더 적은 은혜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에서 선한 사람은 죽은 뒤 천사들에게 계속 교육을 받으며, 지상에서 알지 못했던 천국의 진리도 기쁘게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적게 배운 사람이든,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빛을 주시고, 다른 생에서도 계속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받은 계시의 양은 구원의 유불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AC.302에서 강조하는 것은 정반대의 원리입니다. 사람은 더 많은 진리를 받을수록 더 큰 책임도 함께 받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더 많이 열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열어 주지 않으시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빛을 주시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가장 알맞은 빛을 허락하시는 것이 참된 공평입니다.

 

결국 AC.302는 유대교회를 낮추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3:22 생명나무를 막으심’과 창3:24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 그리고 요12:40과 마13:13을 하나로 연결하면서, 주님께서는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언제나 사람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계시를 조절하신다는, 하나의 일관된 섭리의 법칙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것이 가이드 1.0에 따라 AC.302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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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심화 3, ‘마13:13’

AC.302.심화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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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가이드 1.0에 따르면, 마13:13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이지만, AC.302에서는 단순한 ‘교육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창3:22에서 시작된 주님의 보호 섭리가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핵심 성구로 인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반드시 창3:22-24, 요12:40, 마12:31-32, 히6:4-6, 히10:26-29와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이러한 보호 섭리를 상징합니다. AC.302는 이 동일한 원리가 유대교회와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서도 계속 역사하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마13:13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일부러 막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깊은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말씀은 비유와 상응 속에 감추어졌고, 사람들은 외적인 뜻만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AC.302의 답은 분명합니다.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단순한 교수법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는 자비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마13:13은 요12:40과 완전히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 요12:40에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표현하고, 마13:13에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표현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진리를 무리하게 열어 주지 않으심으로써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다시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연결됩니다. 성령은 신적 진리를 의미하며,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이미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인정한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계시를 조절하십니다.

 

AC.302에서 마13:13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길을 지키게 하신 그 동일한 자비의 섭리가 복음서에서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13:13의 비유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장래의 구원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보호의 장치였으며, AC.302는 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02, 심화 4, ‘유대인들’

AC.302.심화 4. ‘유대인들’ 위 내용 중 ‘만일 그들이 내적인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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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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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가이드 1.0에 따르면, 요12:40은 단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창3:22-24, AC.301-303, 13:13, 마12:31-32, 히6:4-6, 히10:26-29를 하나의 교리적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AC.302에서 스베덴보리가 요12:40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믿지 못하게 하신다’는 예정론적 사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 섭리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먹어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서 막으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그것을 거부하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301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AC.302는 바로 이 원리를 유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속 사람이나 천국의 내적 신비, 사후의 삶, 메시아의 참된 본질 등이 명확하게 계시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고, 만일 그들이 이러한 진리를 인정한 뒤 다시 그것을 거부하게 되면 profanation에 빠질 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이 문맥에서 요12:40은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보거나 인정하지 않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장차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을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눈을 멀게 하심’은 형벌이 아니라 보호이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은 버리심이 아니라 더 깊은 죄를 막으시는 섭리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곧이어 인용되는 마13:13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을 상응과 표상 속에 감추신 것도 같은 이유이며, 유대교회의 모든 의식과 제사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12:40과 마13:13은 서로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섭리를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요12:40은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긴밀히 연결됩니다.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이미 인정한 신적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아직 그 진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일입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먼저 인정한 뒤 배반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지, 아직 인정하지 못한 상태 자체가 가장 큰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AC.302에서 요12:40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의 계시가 언제나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한꺼번에 알려 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의 내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조금씩 여시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져 영원히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가이드 1.0에 따라 볼 때, 요12:40은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보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표현은 사람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지키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신 것과 동일한 자비의 섭리를 역사 속에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AC.302는 바로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요12:40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로써 창3:22-24, 요12:40, 마13:13, 마12:31-32, 히6:4-6, 히10:26-29는 모두 하나의 교리, 곧 ‘profanation을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AC.302, 심화 3, ‘마13:13’

AC.302.심화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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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2, 심화 1, ‘가이드 1.0’

AC.302.심화 1. ‘가이드 1.0’ ※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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