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심화

 

4.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30:26)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사30:26을 인용한 이유는 바로 앞에서 인용한 시72의 ‘’와 ‘’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72에서 ‘’는 사랑을, ‘’은 신앙을 의미하며, 특히 ‘달이 다할 때까지’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는 바로 이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채 따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는 천적 질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빛의 밝기가 강해지는 현상으로만 읽어서는 AC.337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속뜻으로 ‘’은 신앙을, ‘’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달빛이 햇빛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마침내 사랑과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태고교회 천적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은 사랑이고, 신앙은 신앙’이라는 식의 분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참인지 알았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337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가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바로 이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떼어 내어 독립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가 보여 주는 것은 가인의 분리와 정확히 반대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을 ‘’에서 떼어 놓았다면, 이사야의 말씀은 ‘달빛’이 다시 ‘햇빛’과 같아지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곧 신앙이 다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의 앞부분인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도 이 문맥에서 의미심장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AC.337에서 직접 이 부분을 세세하게 풀이하지는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인용된 말씀 전체의 흐름은 ‘상처를 싸매심’, ‘고치심’, 그리고 ‘달빛이 햇빛 같아짐’을 하나의 회복의 그림으로 보여 줍니다. 분리되고 손상된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AC.337의 주제인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도 주목할 만합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함과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로 자주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단순히 햇빛의 광도가 물리적으로 일곱 배 강해진다는 뜻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충만함과 그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질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이 더 밝아졌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사랑 자체의 충만함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부부간 준수 사항’의 비유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여러 원칙과 약속은 사랑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배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약속을 지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원칙이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달빛이 햇빛 같아지는’ 상태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신앙의 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을 표현하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의 거듭남과 연결되는 중요한 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처럼 처음부터 사랑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AC.337이 분명히 말하듯 오늘날에는 신앙이 먼저이고, 주님께서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해야 한다’며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의무로 행하던 것을 점차 사랑해서 행하게 됩니다. ‘해야 하니까 하던 것’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이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아름답게 와닿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알고 믿었던 진리가 점차 사랑의 것이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의 의지와 삶이 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진리이기 때문에 힘들게 순종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서 실제로 그 사람의 선을 바라게 된다면,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진리가 체어리티의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달빛’이 점차 ‘햇빛’과 같아지는 모습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30:26 AC.337에서 단순한 보충 성구가 아닙니다. 시72에서 제시한 ‘해는 사랑, 달은 신앙’이라는 상응을 더욱 깊게 보여 주면서, 참된 신앙의 완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완성은 신앙이 독립적으로 더욱 강해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사람이 믿는 진리가 곧 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진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가인’은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는’ 방향을 보여 주고, 사30:26은 그 둘이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리를 설명하는 AC.337에서 이 말씀을 끌어온 것입니다.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짧은 한 구절 안에,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고, 마침내 사랑과 하나가 되는 참된 교회의 질서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AC.337, 창4, ‘배경’ -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

AC.337 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가 왜곡된 것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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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3, ‘시72:1, 3, 5,7’

AC.337.심화 3. ‘시72:1, 3, 5,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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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심화

 

3. ‘72:1, 3, 5,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7 첫머리에서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인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핵심은 ‘’, ‘’, ‘산들’, ‘작은 산들’, 그리고 ‘평강’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 사랑을, ‘’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이 인용의 중심입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달은 해의 빛을 받아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인 또 하나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72의 해와 달은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해와 달이 존재하는 오랜 세월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 보면 사랑과 신앙이라는 교회의 두 핵심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독립된 두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가 중심입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고, ‘’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 나타나기 전 참된 교회의 질서입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높은 곳, 특히 산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의로 말미암아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천적 교회의 중심이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에서 ‘평강’이 흘러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평강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내적 평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는 마지막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이유를 놀랍게도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사랑과 완전히 결합되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고 하던 것이 마침내 ‘나는 이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생명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까지 연결합니다. 달이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해가 상징하는 사랑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2와 사30은 같은 천적 질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삶 자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 구절이 ‘가인’을 설명하는 AC.337에 필요한지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바로 이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는데, 가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을 ‘’에서 떼어 내듯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분리된 신앙을 그 자체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새로 주장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가장 근본적인 질서, 곧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온다’는 질서를 뒤집은 데 있었습니다.

 

이것을 앞서 살펴본 부부의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려하고 존중하던 부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 자체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따로 떼어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준수 사항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던 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시72는 바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하나였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generation of generations’, 곧 ‘대대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시72의 인용은 태고교회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사라진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져 이제는 먼저 신앙을 배우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가 필요해졌지만, 최종 목적은 여전히 신앙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길은 달라졌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목적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AC.337의 시72 인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72의 해와 달, 산들과 평강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였던 천적 질서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래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일이 왜 당시에는 그토록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해와 달’입니다. ‘’인 사랑이 먼저이고, ‘’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리고 완성에서는 달이 해와 하나가 되듯 신앙이 사랑과 하나가 됩니다. ‘가인’은 바로 이 둘을 갈라놓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시72는 단순히 천적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덧붙인 인용이 아니라, ‘가인의 분리’가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4, ‘사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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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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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분리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접하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한번 비유해 보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규칙이 없어서가 아니라, 규칙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명문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까 하여 신앙을 따로 언급하기조차 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 조항을 어겼으니 잘못했다’며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 없어도 이 규칙만 제대로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규칙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되고, 나중에는 오히려 그 원칙이 사랑보다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우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분리’처럼 보였지만, 그 분리가 계속되자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더니,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또 이런 반전도 있습니다.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와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그러한 삶을 계속하는 가운데 사랑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지만, 그 상태를 잃은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신앙으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은 신앙을 분명히 배우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가인’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로 나아가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그 무엇이 될 때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보면 가인과 셋의 차이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이 사랑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앞세우는 신앙이라면, 셋은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사랑보다 규칙을 앞세우고, ‘규칙만 지키면 된다’고 하는 것이 전자의 모습이라면, 이미 약해진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올바른 원칙을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면서 다시 서로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후자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규칙이 사랑에서 나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사랑과 분리한 일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신앙이나 교리를 명문화하는 행위 자체가 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하나였던 신앙을 사랑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에는 신앙이 그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고, 사랑이 무너진 뒤에는 주님께서 신앙으로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어느 경우든 목적은 같습니다. 신앙은 홀로서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분리’, 곧 ‘가인’이라는 ‘분리’를 이해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입니다.

 

 

 

AC.337, 심화 3, ‘시72:1, 3,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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