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7.심화

 

4. ‘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vine)가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fig tree)가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앞서 인용된 예레미야 8장이 선의 상실과 황폐를 말한다면, 요엘 2장은 그 반대로 선의 회복과 생명의 회복을 말하는 본문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것은 가뭄과 황폐가 끝나고 자연이 다시 살아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가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농업 회복의 예언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교회와 인간 안에 선과 진리가 다시 살아나는 상태를 묘사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영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것은 자연적 선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상생활 속의 정직, 양심, 이웃 사랑, 책임감 같은 선한 삶이 다시 열매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AC.216과 연결해 보면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창3에서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무화과 잎, 곧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그리고 AC.217에서는 무화과나무 자체가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요엘서의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는 말씀은 단순히 나무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 안에 남아 있던 선한 요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본 렘8:12-13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룹니다. 거기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했습니다. 영적 선도 자연적 선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요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힘을 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황폐(vastation) 이후의 회복(restoration)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람 안에 선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맨 앞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들짐승은 종종 인간 안의 선한 애정과 정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메마르고 황폐한 시기를 지나더라도, 결국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다시 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상응을 보여 주는 마지막 예로 인용됩니다. 포도나무는 영적 선,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둘이 함께 힘을 낸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신앙과 삶, 사랑과 행동이 함께 회복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가 선의 상실을 노래했다면, 요엘은 선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교회와 인간 안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희망의 약속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AC.217, 창3:7,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의 의미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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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3, ‘호9:10’

AC.217.심화 3.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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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심화

 

3.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포도(grapes)는 영적 선의 열매를, ‘무화과(figs)는 자연적 선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예레미야 8장에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는 말씀을 통해 교회의 황폐함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9장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며 기뻐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설명하기 위해 ‘광야에서 포도를 발견한 것’과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것’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광야는 원래 열매를 기대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포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뜻밖의 기쁨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에 따르면 포도는 영적 선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들 안에서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는 선을 발견하시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first ripe fig)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일반 무화과도 귀하지만, 첫 열매는 가장 먼저 익은 열매로서 특별히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자연적 선이 아니라, 갓 나타나기 시작한 순수하고 신선한 자연적 선의 상태로 이해합니다.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처음 나타나는 선한 의지와 순수한 삶의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7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포도와 무화과가 단순한 과일이라면, 왜 주님께서 그것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셨겠습니까?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 내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포도는 영적 선을, 무화과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발견하신 선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곧바로 슬픈 전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즉 처음에는 포도와 무화과처럼 아름다운 선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우상숭배와 자기 사랑으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3의 흐름과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순진무구함이 있었으나 점차 own으로 기울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포도와 무화과의 상징을 설명하기 위한 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를 대비시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아름답게 존재했지만, 결국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호9:10을 인용한 이유는, 포도가 영적 선의 열매를, 무화과가 자연적 선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특히 ‘광야의 포도’와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는 주님께서 인간과 교회 안에서 발견하시는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선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레미야 8장의 황폐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주님께서 원래 교회 안에서 보고자 하셨던 선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17, 심화 4, ‘욜2:22’

AC.217.심화 4. ‘욜2: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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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2, ‘렘8:12-13’

AC.217.심화 2.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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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 구절을 AC.217에서 인용한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spiritual good)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하며, 이 둘의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모든 선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이 구절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해서 읽습니다. 앞에서는 ‘그들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다’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AC.213 AC.216에서 이미 보았듯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보고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 사람들이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내적 저항이나 수치를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는 말은 그 원인을 설명합니다. 포도는 영적 선의 열매이고, 무화과는 자연적 선의 열매인데, 둘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진리를 사랑하는 영적 선도 사라졌고, 정직과 양심, 도덕성과 같은 자연적 선도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무화과나무보다 더 심각하게 포도나무를 먼저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선이 먼저 죽으면 결국 자연적 선도 오래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종교적 사랑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인간적 양심마저 무너집니다. 그 결과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잎사귀가 마른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잎은 흔히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외적 교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결국 잎까지 마른다는 것은 선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남아 있던 외적 종교 형식마저 생명력을 잃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AC.217에서 이 구절은 단순히 농작물의 흉작을 예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면적 황폐(vastation)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영적 선도 없고, 자연적 선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악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오늘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 악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는다’고 덧붙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끄러움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경고등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얼굴도 붉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매우 심각한 영적 진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AC.217에서 렘8:12-13을 인용한 이유는, 부끄러움을 잃은 상태와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는 상태가 사실상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선이 사라지면 포도가 없어지고, 자연적 선이 사라지면 무화과가 없어지며, 그 결과 사람은 악을 행하면서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 속에서 본 교회의 황폐한 모습인 것입니다.

 

 

 

AC.217, 심화 3, ‘호9:10’

AC.217.심화 3.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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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7, 심화 1, ‘마21:19’

AC.217.심화 1. ‘마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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