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AC.377

여기서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field)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밭을 안에 가지고 있는 분열을 의미합니다.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에 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이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ground)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 또는 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또는 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 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나쁜 생각이 들어오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교리만 머리로 정확히 알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 안에는 무엇이 심어지고 있는가? 내가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붙드는 신앙의 진리는 실제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진리를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원래 어떤 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님께서 안에 심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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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AC.376

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crying of bloods)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다. 폭력을 가하는 자들은 죄책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 crying of bloods signifies the accusation of guilt; for those who use violence are held guilty. As in David: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34:21) Evil shall slay the wicked, and they that hate the righteous shall be guilty. (Ps. 34:21)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Ezekiel: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날이 가까웠고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22:4) Thou city art become guilty by the blood which thou hast shed. (Ezek. 22:4)

 

해설

AC.376은 앞의 AC.373-375에서 전개된 설명을 아주 짧게 결론짓습니다. AC.373에서는 피들의 소리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피들이 부르짖는 이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374에서는 왜 피들이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피는 특히 미움을 의미하며,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고 할 수만 있다면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AC.375에서는 부르짖는 소리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황에 사용되지만 창4:10에서는 특별히 고발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76은 이 둘을 결합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자에게는 죄책이 있으므로, 그 폭력을 뜻하는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바로 그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죄책의 고발이라는 표현은 마치 아벨의 피가 주님 앞에서 가인을 고소하여 주님께서 비로소 범인을 알아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주님께서 모르셨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은 악 자체가 그 악을 행한 사람의 상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변명하거나 부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그 폭력 자체가 그 사람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부르짖음고발은 주님께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라기보다, 행해진 악의 본질과 책임이 영적 질서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짧은 번호에서 시34:21을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책이 있으리로다라는 말씀은 바로 앞 AC.374에서 설명한 미움과 이번 AC.376죄책을 직접 연결합니다. AC.374에서 미움은 체어리티와 반대되며 마음으로 형제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시편은 의인을 미워하는 가 죄책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미움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지나가는 불쾌한 감정이 아니라, 그것이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굳어져 이웃의 선을 해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실제 영적 책임과 연결되는 악입니다. 이 구절은 미움 체어리티에 대한 폭력 죄책이라는 AC.374-376의 흐름을 뒷받침합니다.

 

22:4은 그 연결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책이 있게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는 죄책이 한 문장 안에서 결합됩니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4:10피들이 부르짖는다죄책의 고발로 읽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단지 외적인 살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설명에 따르면 미움과 무자비함과 거기서 솟아나는 여러 불의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가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는 것이고, 그 피가 행위자에게 돌아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도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폭력을 가하는 자들은 죄책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고 해서 외적으로 어떤 해로운 결과가 발생하기만 하면 언제나 동일한 정도의 영적 죄책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죄책에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 알고도 선택한 악의 성질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맥에서 가인의 폭력은 우발적인 실수나 무지에서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앞에서 신앙을 체어리티와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완전히 거부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죄책은 그러한 내적 거부와 폭력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피들의 부르짖음은 가인의 앞선 말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아벨의 관계를 부인하고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책임을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AC.372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본래 체어리티의 지키는 ’, 곧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가인은 바로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6에서는 그 거부와 폭력이 죄책의 고발로 돌아옵니다. 책임을 부인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교리적으로 선언하더라도, 그 결과 체어리티가 훼손되었다면 그 결과 자체가 그 잘못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AC.376죄책을 주님께서 밖에서 인간에게 덧씌우시는 어떤 것으로 보기보다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한 악과 연결하여 읽게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임의로 죄책을 만들어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이 아벨에게 가한 폭력 자체가 죄책을 드러냅니다. 앞의 AC.357에서 여호와의 진노가 실제로 주님 안에 있는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상태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던 것과도 방향이 통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질서를 거슬러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그 악에 따른 상태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AC.376은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4:10피들의 부르짖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완성합니다.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고, 그 폭력에는 죄책이 있으며, 그러므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죄책이 고발되고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가인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피들은 부르짖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미움과 악을 합리화하고 책임을 부인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회개는 그 부르짖음을 억누르거나 변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의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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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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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4:10)

 

AC.375

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으로, 어떤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는 모든 경우에 적용되며, 또한 어떤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됩니다(32:17-18; 1:9-10; 65:19; 48:3). A voice crying and the voice of a cry are common forms of expression in the Word, and are applied to every case where there is any noise, tumult, or disturbance, and also on the occasion of any happy event (as in Exod. 32:1718; Zeph. 1:910; Isa. 65:19; Jer. 48:3).

 

17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18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32:17, 18)

 

9그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구역에서는 울음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9, 10)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65:19)

 

호로나임에서 부르짖는 소리여 황폐와 파멸이로다 (48:3)

 

그러나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합니다. In the present passage it denotes accusation.

 

해설

AC.375는 바로 앞 AC.373에서 피들이 부르짖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보충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부르짖는 소리라는 표현 자체가 언제나 죄책이나 고발을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부르짖는 소리부르짖음의 소리는 매우 넓게 사용되며, 소음이나 소동이나 혼란이 있을 때뿐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사용된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런 다음 그러나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과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를 보여 줍니다. 어떤 단어나 표현에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문맥과 그것이 결합하고 있는 다른 표상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출32:17-18을 인용하는 이유는 소리가 반드시 한 종류의 영적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진영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가 있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싸우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모세는 승리하거나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노래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소리는 어떤 집단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 소리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무엇 때문에 그 소리가 일어났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1:9-10과 렘48:3에서는 소리가 재앙과 파괴와 혼란에 연결됩니다. 심판과 황폐의 상태가 부르짖는 소리로 표현됩니다. 반면 사65:19에서는 정반대의 문맥이 나타납니다. 새롭게 된 예루살렘에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소리와 부르짖음은 어떤 내적 상태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네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각각의 구절에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붙이려는 것이 아니라, ‘소리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여러 상태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10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하는 이유도 단어 하나만 떼어 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 것은 바로 아벨의 피들입니다. 앞의 AC.374에서 보았듯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 특히 미움과 그 미움에서 솟아나는 온갖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부인했지만, 그가 소멸시킨 아벨의 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행해진 악의 영적 성질 자체가 그 죄책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고발역시 주님께서 어떤 외부의 증언을 들어야 비로소 가인의 죄를 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표현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인간의 내적 상태가 이미 드러나 있으며,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그 자체의 결과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들의 부르짖음은 주님께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고발이라기보다, 가인이 부인하고 감추려 한 악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말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사랑하고 의도하며 행한 것은 그의 영적 상태 안에 남아 있습니다.

 

AC.375는 짧지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점도 가르쳐 줍니다. ‘소리 = 고발’, ‘부르짖음 = 죄책이라고 사전식으로 외워서는 안 됩니다. 같은 표현도 문맥에 따라 싸움이나 소동, 혼란, 슬픔, 기쁨 등 서로 다른 상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와 뜻을 일대일로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과 그 안에서 표현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피는 것입니다. AC.375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서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고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결국 AC.375의 핵심은 마지막 한 문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책의 고발을 의미합니다.4:10에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흘리게 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AC.373피들의 부르짖음 = 죄책의 고발이라는 뜻을 먼저 제시하고, AC.374피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했다면, AC.375는 이제 부르짖는 소리가 왜 이 문맥에서 고발이 되는지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만,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결과 자체가 그의 죄책을 드러냅니다.

 

 

 

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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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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