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걱정하던 문제를 놓고 기도한 뒤 ‘이제 주님께 맡기자’고 마음먹으면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이 있고(시37:5),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벧전5:7). 그러므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은 분명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맡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결과를 주님께 맡긴다’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을 혼동합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내가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알아서 사람도 보내 주시고 돈도 마련해 주시며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야 할 결정과 책임을 미루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느1:4). 그러나 기도한 뒤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성벽을 세우시겠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무엇을 요청할지 준비했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에는 밤에 직접 성벽의 상태를 살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여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대적들이 공격하려 하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했습니다(느4:9). 이 한 구절에 맡김의 균형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동시에 ‘파수꾼을 두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지만 그것 때문에 현실적인 행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행27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모두가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배에서 몰래 도망하려 하자 바울은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행27:31).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해야 할 적절한 행동은 서로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기도한 뒤 공부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건강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필요한 치료와 생활 습관의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맡김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신이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출과 책임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뢰라기보다 책임 회피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말을 해 줄 수는 있지만 자녀 대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병원에 가고 치료를 받을 수는 있지만 결과까지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사업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일할 수는 있지만 시장과 다른 사람의 선택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반드시 용서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경계에서 참된 ‘맡김’이 시작됩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하나님 노릇을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들은 거듭남(regeneration)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선택과 행동을 대신해 버리신다면 인간은 주님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선을 행할 때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원리를 강조합니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심하고, 노력하고, 악을 거절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실제로 내가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생명 자체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한다’와 ‘주님께서 하신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차원을 함께 붙드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프로프리움’(proprium)의 두 가지 상반된 모습도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내가 다 해야 한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모든 결과의 주인으로 만드는 프로프리움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다른 모습의 프로프리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을 피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뢰는 이 두 극단 사이에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하면서도 결과의 주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9). 이것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뒤 당신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맡김은 행동의 중단이 아니라 끝까지 그 길을 살아 내는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맡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게 행동하면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밭을 돌봅니다. 그러나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하고 최선의 치료를 합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자녀의 마음과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할 수 없는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강제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상대방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는 계속 행하되, 그 사람의 자유와 최종적인 내면까지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체어리티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과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이시겠지’라고 하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약2:15-16). 기도는 행동을 대신하는 수단이 아니라 선한 행동을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반대편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다시 자기 의존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그때 맡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을 행한 뒤에도 결과가 내 뜻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 속에서도 주님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행동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뒤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다시 기도합니다. 기도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 바르게 보게 합니다. 행동은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에게서 받은 빛을 실제 삶으로 옮기는 과정입니다. 기도와 행동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 문제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사과해야 한다면 사과하고,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하고, 치료받아야 한다면 치료받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면 요청하며,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이미 지나간 과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최종적인 결과는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경계가 보일 때 맡김은 훨씬 구체적인 신앙이 됩니다.

 

‘주님, 제가 해야 할 것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고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맡김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제대로 맡기지 못했나?’라고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대신 보장해 주신다는 계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결과와 주님의 섭리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입니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어떤 문제는 오래 남아 있으면서 우리를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관계는 회복되고, 어떤 관계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이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겼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라는 말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교만과 불안을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러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 순간 맡김은 영적 방임으로 바뀝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책임까지 주님께 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선을 성실히 행한 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맡김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면서도, 선을 행할 힘과 결과의 궁극적인 주권은 모두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맡겼다’는 말 뒤에는 두 문장이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결과까지 내가 지배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두 문장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첫 번째가 빠지면 영적 방임이 되고, 두 번째가 빠지면 자기 의존이 됩니다.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빛과 힘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행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평안히 주님의 손에 놓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의 가장 깊은 뜻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제 몫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몫까지 제가 붙들고 있지도 않겠습니다.’

 

 

 

SL.28,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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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셔. 그러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가르치며, 참새 한 마리조차 하나님의 돌보심 밖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귀한 신앙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와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셨다’를 같은 뜻으로 만들어 버릴 때 생깁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그대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인과 전쟁, 학대와 배신, 거짓과 착취까지도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악을 금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악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모순에 빠집니다.

 

성경은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며(요삼1:11), 야고보는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약1:13).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하신 일을 주님께서 동시에 하기를 원하셨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악에서 돌이켜 선을 선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마침내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악을 원하시지는 않지만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해 일정 범위에서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악을 아예 막아 버리지 않으실까요? 이것은 인간의 ‘자유’(freedom)와 ‘합리성’(rationality)에 관계됩니다. 사람이 선을 선택하려면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악을 선택하려 할 때마다 초자연적으로 손을 붙잡아 막으신다면, 겉으로는 악이 없는 세상이 될지 몰라도 인간은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선을 강제로 행하는 것은 참된 선이 될 수 없으며, 사랑 역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계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주님을 향할 수 있는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허용이 방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허용하신다’는 말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허용은 신적 섭리 밖에 존재하는 별도의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한 더 큰 악으로 번지는 것을 제한하시고, 그 결과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악은 인간과 지옥에서 나오지만, 악을 제한하고 그 가운데서 선한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며 결국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 버리면 형들의 악한 선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훗날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형들이 의도한 것은 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선이었습니다. 같은 사건 안에서도 인간의 악한 의도와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구별됩니다.

 

십자가는 이 문제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신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언을 이용했으며, 군병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배신과 증오와 잔인함 자체를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악은 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그 악조차 주님의 구원 역사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인간과 지옥의 가장 깊은 악을 맞아 그것을 이기시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신적 섭리의 놀라운 깊이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어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악이 일어나도 그것이 당신의 궁극적인 선을 좌절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별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데려가셨습니다’라고 말하거나, 범죄 피해자에게 ‘이 일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면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악한 선택으로 고통받은 사람에게 그 악까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자신을 해친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두려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건의 이유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무 빨리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재해나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진과 홍수, 암과 감염병,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것을 보내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칙이 있고, 그 자연적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일도 일어납니다. 또한 인간의 탐욕과 무책임, 폭력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모든 원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의지 하나로 환원하면 자연적인 원인과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반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으신가? 막으실 수 있는데도 허용하셨다면 결국 뜻하신 것과 같은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입니다. 그러나 ‘막을 능력이 있음’과 ‘그 일을 원함’은 같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인이 된 자녀의 모든 잘못된 선택을 물리적으로 막을 능력이 없어서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통제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 부모와 주님의 섭리를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허용 = 찬성’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regeneration)과 직접 연결됩니다. 주님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고통 없는 자연적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자유롭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하여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당장 개입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묻지만,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보는 한순간보다 인간의 영원한 삶 전체를 보고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고통 앞에서 ‘다 하나님의 허용이니 받아들여라’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허용의 교리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체념을 강요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악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교리입니다. 학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벗어나야 하고, 폭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막아야 하며, 불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병이 생겼다면 치료해야 하고, 재난이 일어났다면 사람을 구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악과 고통 앞에서 수동적으로 있는 것은 신적 섭리를 믿는 태도와 다릅니다.

 

여기에서 ‘체어리티’(charity)가 중요해집니다. 체어리티란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실제적인 선과 유용한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을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일 거야’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그 사람 곁에 서고, 필요한 도움을 주고, 악을 막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돌보았습니다(눅10:33-35).

 

또한 이 구별은 인간의 책임을 보존합니다. 만일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저지른 잘못도 결국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근거가 약해집니다. ‘내가 화를 내고 상처를 주었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악의 책임을 주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악은 인간이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거부할 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자신의 악을 하나님의 섭리 뒤에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고백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직접 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지옥의 어떤 악도 주님의 궁극적인 선한 목적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주님께서는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인간을 선과 구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뜻하셨을까?’라고 묻는 것보다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편이 좋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원하셨는지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이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어떤 선을 이루기 원하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악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신적 섭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한쪽 극단에는 ‘세상일은 모두 우연이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고 원하신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훨씬 섬세하게 움직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섭리하시지만 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지만 인간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 악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니 일어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에는 귀한 신앙고백과 위험한 오해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러므로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다’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신적 섭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어난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직접 뜻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악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제한하고 인간을 가능한 선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비극을 만날 때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설명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때로는 왜 이런 일이 허용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악이 주님의 선보다 강하지는 않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가장 깊은 악을 행했지만, 그 악이 주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도 주님의 선한 목적을 최종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음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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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27,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

‘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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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 생겼어? 그럼 하나님께 복 받은 거고, 나쁜 일이 생겼어? 그럼 뭔가 잘못한 거지’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그런데 자꾸 나쁜 일이 생겨?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돌아봐야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매우 자연스럽게 듣는 말입니다. 취업이 되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병이 생기고, 사업이 어려워지고, 사고를 당하고,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혹시 하나님 앞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순종과 복, 불순종과 화를 연결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에는 분명 성경적인 뿌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너무 단순한 공식으로 만들어 ‘좋은 일 = 하나님의 복, 나쁜 일 = 내가 잘못한 결과’라고 모든 삶에 적용할 때 생깁니다.

 

성경은 실제로 죄와 그 결과를 연결합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면 그 악 자체가 삶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하면 신뢰를 잃고, 탐욕에 사로잡히면 관계가 깨지며, 무절제하게 살면 삶의 여러 영역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혹시 내가 고쳐야 할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은 없는가?’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오히려 거듭남에 필요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어려움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그러므로 네가 뭔가 잘못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강력하게 다루는 성경이 욥기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바로 이 공식을 가지고 욥을 바라보았습니다. 욥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니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까지 무너졌으니 욥이 하나님 앞에서 뭔가 큰 잘못을 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합니다(욥4:7). 얼핏 들으면 상당히 경건하고 논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서두에서 독자는 이미 욥의 고난을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끝없이 욥의 숨은 죄를 찾아내려 했던 이유는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나쁜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고방식을 직접 바로잡으셨습니다. 요9에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고난에 상응하는 죄인을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답하십니다(요9:3). 주님은 고난을 보고 곧바로 죄의 크기를 역산하는 인간의 습관을 깨뜨리십니다.

 

눅13에서는 더 충격적인 사례가 나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아마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고 하십니다(눅13:4-5). 비극을 당한 사람의 죄가 다른 사람보다 더 컸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고, 질병, 재난, 실패를 보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5:45). 자연계에서는 선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도 비가 내립니다. 선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성공할 수 있으며, 선한 사람도 병들 수 있고 악한 사람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형편만 보고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읽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73의 시인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흔들렸습니다. 그는 악인의 형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라고 탄식합니다(시73:4-5). 만일 ‘잘되는 사람 =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라는 공식이 옳다면 시인이 본 악인들은 하나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국 외적인 형통과 인간의 궁극적인 영적 상태가 같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물론 자연적인 복도 있습니다. 건강과 일용할 양식, 좋은 관계와 안전, 필요한 물질은 모두 감사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굳이 ‘이것은 복이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감사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하며,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면 됩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좋은 일을 ‘복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 복의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마5:3-10).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고 애통하고 박해받는 상태를 ‘복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외적인 환경이 얼마나 편안한가보다 인간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연계에서 우리가 좋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과 영원한 관점에서 실제로 선한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습니다. 돈이 많이 생기는 것이 자연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그 돈 때문에 탐욕과 교만이 더욱 강해진다면 그 사람의 영적 삶에는 오히려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경제적인 어려움 자체는 분명 고통스럽고 그것을 선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가난이나 실패를 보내셨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허용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간을 선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주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모든 질병과 사고, 실패와 재난을 ‘하나님께서 뜻하셨다’고 말하면 하나님을 악과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에서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이며 인간의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자연계에는 자연적인 질서와 인과관계가 있으며,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과 악으로 인해 수많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나쁜 일이 생겼으니 내가 뭔가 잘못했나?’라는 질문도 조금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필요합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삶의 습관 가운데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판단과 욕심, 준비 부족을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관계가 깨졌다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사건을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거듭남을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이 공식을 적용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병든 사람에게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거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생긴 부모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거나, 사업이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치신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자리에 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고통이 왜 허용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원인을 함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며, 그 사람이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체어리티’(charity)입니다.

 

반대로 좋은 일을 경험한 사람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니까 사업이 잘된다’, ‘내가 믿음이 좋으니까 자녀가 잘된다’, ‘기도를 많이 해서 건강하다’는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프로프리움’(proprium)을 키울 수 있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거기에서 ‘그러므로 잘 안 되는 사람은 나보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공을 영적 우월함의 증거로 삼는 순간, 감사가 교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받은 자연적인 좋은 것에 대한 가장 건강한 반응은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선한 쓰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면 그것을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 건강하다면 그 건강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사람이 될 것인지, 지위와 능력을 얻었다면 그것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복이 영적인 복과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진정한 복은 단순히 좋은 사건이 많이 생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복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우리의 ‘지배적 사랑’(ruling love)이 천국을 향하여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형편이 좋을 때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형편이 어려울 때도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의 관점에서 훨씬 깊은 복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면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거나 더 사랑받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는구나’, ‘내 믿음에 문제가 있구나’라고 자동으로 결론 내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고 그의 죄와 믿음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일은 감사할 선물이 될 수 있고 나쁜 일은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사건의 좋고 나쁨 자체가 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표는 아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이 압축하면 이것이겠습니다.

 

‘주님의 복은 내 삶에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천국의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겼어? 하나님께 복 받은 거야. 나쁜 일이 생겼어? 뭔가 잘못한 거지’라는 말은 절반의 진리를 담고 있지만 그대로 공식으로 만들면 위험합니다. 좋은 것은 주님께 감사하고, 어려움 앞에서는 자신을 겸손히 살피되, 형통한 사람을 의인으로 높이지도 말고 고난받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너무 빨리 설명했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사람의 사정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에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것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좋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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