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07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가 자연적 재난이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태고교회 말기에 인간 내면에서 일어난 전면적 붕괴 상태’를 가리킨다고 분명히 합니다. 그 붕괴의 핵심이 바로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왜곡된 욕구와 확신)입니다. 여기서 홍수는 물의 범람이 아니라, 왜곡된 욕구와 확신이 인간의 내면(internal, ) 전 영역을 덮어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즉,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더 이상 위에서 아래로 질서 있게 작동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뒤집혀 폭주하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먼저 ‘insane cupidities’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난 ‘의지의 붕괴’를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욕구 자체가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사랑은 주님을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욕구는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상태로 변했습니다. 이 욕구들은 단순히 강해진 것이 아니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할 능력 자체를 잃었기 때문에 ‘광적(insane)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 결합된 것이 ‘persuasions’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잘못된 생각이나 오류가 아니라, ‘자기 욕구를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끼게 만드는 내적 확신’입니다. AC.307의 문맥에서 이 확신은 외부의 어떤 진리도, 주님의 어떤 경고도 침투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설득될 수 없는 존재’가 되며,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만이 전부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 확신은 의지의 광기와 결합하여, 악을 악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것을 지혜와 자유로 착각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홍수를 바로 이 상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이 두 요소가 인간 전체를 ‘완전히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홍수처럼 물이 점점 차오르듯, 왜곡된 욕구와 확신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 작용하다가, 결국 인간의 사고, 감정, 기억, 판단을 전부 덮어 버립니다. 이 상태에서는 어떤 진리도 숨 쉴 공간이 없으며, 남아 있던 내적 생명의 통로들이 모두 차단됩니다. 그래서 홍수는 ‘죽음’의 상징이 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홍수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솟아났다는 점’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보통 진리나 지식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진리가 완전히 전도되어, 인간의 기억 지식과 감각적 사고가 통제 없이 넘쳐흐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지식들은 본래 질서 안에서는 유익했으나, 자기 사랑과 결합되자 생명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질식시키는 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가 곧 ‘홍수’가 되는 이유입니다.

 

AC.307에서 이 상태는 창3:24의 생명나무 길 차단과 직접 연결됩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이 생명나무에 접근한다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과 진리를 자기 욕구와 확신으로 오염시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홍수를 허용하시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 유형, 곧 노아로 상징되는 영적 인간을 일으키십니다. 이는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완전한 붕괴를 막기 위한 최종적 분리와 재구성’입니다.

 

결국 AC.307에서 ‘홍수’는 역사 이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 자기 인도로 완전히 전도될 때 도달하는 종말 상태’를 뜻합니다.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그 상태의 정확한 내적 정의이며, 홍수는 그것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총체적 상징입니다. 이 점에서 홍수는 심판이기 이전에, 주님의 섭리가 더 이상 그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는 표지입니다.

 

이 해석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이 자기 확신과 욕구에 완전히 잠식될 때,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으나 내적으로는 홍수 가운데 있는 상태가 됩니다. AC.307은 바로 그 지점을 향해, 홍수라는 강렬한 상징으로 우리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SC.13,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AC.307, 창3:24)의 속뜻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서 ‘cupidities’는 단순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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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에서 ‘cupidities’는 단순한 욕망이나 정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솟아나는 통제 불가능한 욕구’, 곧 의지의 왜곡을 뜻합니다. 이것이 ‘insane’으로 수식되는 이유는, 이 욕구들이 더 이상 이성이나 양심의 조절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욕구는 질서 안에서 목적을 향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욕구는 목적 자체가 자기 자신이며, 만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진리나 선도 훼손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강한 욕망이 아니라, ‘영적 질서로부터 이탈한 의지의 광기’입니다.

 

persuasions’는 단순한 생각이나 의견이 아니라, ‘그 욕구들을 정당화하고 절대화하는 내적 확신’을 가리킵니다. 이 확신은 외부로부터 설득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신념이며, 한 번 굳어지면 어떤 반대 증거나 진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persuasion’은 오류라기보다 ‘진리를 밀어내는 능동적 상태’로, 스스로를 참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강박적 확신입니다.

 

이 두 요소가 결합될 때, 인간의 내적 상태는 매우 위험해집니다. ‘insane cupidities’가 의지를 장악하고, ‘persuasions’가 이해를 장악하여, 의지와 이해가 함께 거짓된 방향으로 완전히 합류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인식이 사라지고, 오히려 선을 행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자기 기만의 완성 단계’입니다.

 

3:24에서 이 표현이 등장하는 맥락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과 불 칼은, 인간이 더 이상 그 상태로는 생명에 접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이 ‘광적인 욕구와 확신’의 상태로 생명나무,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선과 진리에 접근한다면, 그것을 더럽히고 파괴하게 되기 때문에 길이 차단됩니다. 차단은 형벌이 아니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자비’입니다.

 

따라서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는 단순히 타락한 인간의 도덕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붕괴 상태’를 가리킵니다. 욕구는 방향을 잃고, 확신은 검증을 거부하며,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3의 종결부에서 인간이 에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근본 이유입니다.

 

이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과 진리를 감각과 지식으로 재단하고, 자기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상태가 바로 이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의 현대적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창3:24는 과거의 신화적 장면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 인도로 전도될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종착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SC.14,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를 ‘홍수’(flood)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이유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가 자연적 재난이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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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2, 기독교인들은 로또하면 안 되나요?

오늘날 로또하는 기독교인들, 특별히 뭘 좀 해 볼려고 해도 종잣돈 자체가 없어 힘들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로또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 그러나 한편으로 아들들을 향하신 주님의 계획에 혹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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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2:5, 6)

 

AC.90

 

들에는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에는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일반적으로 그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그가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earth)이라 하지만, 천적 상태가 되면 ‘(ground)이라 하고, 또한 ‘(field)이라 합니다. 곧이어 ‘안개(mist)라 하게 될 ‘(rain)는, 싸움이 그친 뒤에 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의미합니다. By the “shrub of the field” and the “herb of the field” 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 “earth” while he remains spiritual, but “ground” and also “field” 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 which is soon after called “mist,” 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이 글은 창2:5-6에 나오는 자연적 이미지들을, 인간 내적 상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아주 간결하게 풀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초목(shrub)과 ‘채소(herb)를 식물학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의 총칭’으로 읽습니다. 즉, 이는 행동, 말, 습관, 외적 사고, 삶의 열매 전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산출물이 ‘겉 사람’한테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폄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겉 사람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열매의 성격은, 겉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그래서 같은 겉 사람이라도, 영적 상태일 때와 천적 상태일 때 부르는 이름이 달라집니다.

 

영적 상태에 있을 때, 겉 사람은 ‘’이라 합니다. 땅은 아직 경작의 방향이 외부 규범과 진리 중심으로 잡혀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때의 겉 사람은 아직도 싸움과 선택, 분별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산출하는 것들, 곧 ‘초목’과 ‘채소’는 존재할 수는 있지만, 아직 풍성하거나 안정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겉 사람이 천적 상태로 들어가면, 더 이상 ‘’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ground) 혹은 ‘(field)이라 합니다. 이는 단어 하나의 변화가 아니라, ‘겉 사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밭은 이미 목적과 질서가 정해진 땅입니다. 씨가 무엇인지 알고, 어디에 뿌려야 하는지가 분명한 상태입니다. 겉 사람은 이제 속 사람의 사랑과 퍼셉션을 그대로 받아,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이 차이는, 겉 사람의 산출물이 더 이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의 행위는 애써 만들어낸 선이 아니라, ‘속에서 흘러나온 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는 억지로 키운 식물이 아니라, 제때에 자연스럽게 자라는 생명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와 ‘안개’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 변화의 정서를 섬세하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는, 영적 단계에서의 교훈이나 진리의 강한 주입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안개’라 불릴 만큼 부드러운 것입니다. 이 안개는 싸움이 그친 뒤에 찾아오는 ‘평화의 평온함’을 뜻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상태에서 오는 평화는, 감정의 고조나 강렬한 체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조용하고, 넓게 퍼지며, 모든 것을 적셔 주는 안개와 같습니다. 이는 더 이상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성취의 흥분이 아니라, ‘질서가 자리를 잡았을 때의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이 안개는 겉 사람을 적십니다. 밭이 된 겉 사람은 이 평화의 평온함을 그대로 받아, 무리 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더 이상 비가 내려야만 살 수 있는 메마른 땅이 아니라, 이미 수분을 머금은 밭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외적 행위 하나하나가 긴장이나 계산에서 나오지 않고, 평온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AC.90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겉 사람은 더 이상 문제의 영역이 아니라, ‘표현의 영역’이 된다고 말입니다. 싸움은 이미 끝났고, 평화는 안개처럼 조용히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평온함 속에서, 겉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속 사람의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글은 짧지만, 천적 삶의 분위기를 가장 잘 전해 주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천적 상태는 웅장하거나 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조용하고 안정된 생명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온 지면을 적시는’ 안개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립니다.

 

 

 

AC.89, 창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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