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BU.009 | 불교(Buddhis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 - 발견된 법의 질서와 진리 자체이신 주님

 

해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사람을 존경하면서도, 때로는 그 진리가 발견자의 소유이거나 그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법칙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 법칙은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성립합니다. 불교는 부처와 진리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와 비슷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란 부처가 깨닫고 가르친 진리와 수행의 길을 뜻하며, ‘법’(法, dhamma 또는 dharma)은 문맥에 따라 가르침, 진리, 현상, 존재의 질서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불교에서 역사적 석가모니는 우주와 인간을 지배하는 법칙을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 낸 창조주가 아닙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하여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관한 진리를 통찰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존재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라는 명제는 초기불교의 중요한 자기 이해를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다만 여기서 ‘진리’라는 표현을 곧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적 진리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진리가 인간의 생각과 관계없이 성립한다는 주장과, 그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초기불교의 ‘상윳따 니까야’(相應部, Saṃyutta Nikāya) 12.20에 수록된 ‘인연경’(Paccaya Sutta)은 이 명제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이 경전은 부처들이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법의 안정성과 규칙성, 특정한 조건에 따른 발생의 질서는 그대로 성립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곧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이 일정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원리입니다. 특히 ‘무명’(無明, avijjā), 곧 존재의 실상과 고통의 발생 및 소멸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조건이 이어지고, ‘갈애’(渴愛, taṇhā)와 ‘집착’(執著, upādāna)을 거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의 고통이 지속된다고 설명합니다. 부처는 이러한 질서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분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진리의 객관성은 어떤 위대한 스승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임의로 새로운 법칙을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실제적인 질서를 깨달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을 모든 자연과학적 법칙이나 우주의 최초 원인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이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불교에서 연기는 무엇보다 고통과 ‘윤회’(輪廻, saṃsāra)의 발생 및 소멸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설명에는 인정할 만한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진리는 인간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권위에 따라 마음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며, 어떤 스승을 존경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주장이 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쉽게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그 안에 있는 진리까지 거부하기 쉽습니다. 종교 안에서도 유명한 지도자의 말이나 오래된 전통을 그 자체로 진리의 기준으로 삼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라면 누가 말했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그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고, 실제 삶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불교의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 183게송은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실천하며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부처들의 가르침이라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는 불교가 단순히 추상적인 세계의 법칙을 아는 데 머무르지 않고, 깨달은 진리를 실제 삶으로 옮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불교에서 말하는 선과 마음의 정화는 업과 윤회, 해탈이라는 교리적 맥락 안에 있으므로, 이를 기독교의 죄와 거듭남에 관한 설명과 아무런 차이 없이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진리의 근원을 어떻게 밝히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고 선언하고, 이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진리는 인간이 발견하고 설명하는 객관적인 법칙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서 인간에게 오셨다는 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SS, 1763) 1번에서 성경, 곧 말씀이 신적 진리 자체임을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룩한 까닭은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나 오랜 전통이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저작 SS.98은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궁극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신적 진리, 곧 말씀이 되셨음을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가 자신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진리를 발견하고 가르쳤다는 불교의 설명과 달리, 말씀은 주님이 진리 자체이시며 인간에게 진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단순히 가장 위대한 진리의 발견자나 깨달은 스승으로 이해하는 것은 새 교회의 교리와 부합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발견하여 비로소 진리와 하나가 된 존재가 아니라, 본래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이신 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불교가 법을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고 해서, 불교가 인간의 지혜를 절대화하거나 진리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는 부처조차 법의 질서를 임의로 바꾸는 창조주가 아니라 그것을 깨달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법신’(法身, dharmakāya)과 ‘진여’(眞如, tathatā) 등의 개념을 통하여 궁극적인 진리와 부처의 관계를 더욱 깊이 탐구합니다. 법신은 대승불교의 전통에 따라 부처의 진리적 차원이나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며, 진여는 현상의 참된 그러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기독교의 창조주 하나님이나 성육신하신 말씀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적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DLW, 1763) 4번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와 인간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리 깊은 진리를 통찰하더라도 진리 자체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신 개념을 단순히 인간이 자신을 신격화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두 전통의 차이는 인간이 진리를 존중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진리와 존재의 근원을 인격적이며 신적인 창조주에게서 찾는가, 아니면 연기와 공, 진여 등의 불교적 개념을 통하여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차이는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오히려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의 이해에 맞지 않는 의견을 무조건 배척하며, 진리를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프로프리움’(proprium)은 인간이 자기에게 고유하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 특히 자신의 지혜와 선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관련됩니다. 인간이 어떤 진리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자기 공로와 우월함의 근거로 삼는다면, 진리를 이해한 사실이 곧 영적 성숙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8번에서 천사들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천사들은 자신에게 있는 지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람 사이의 차이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자기 우월감의 근거로 삼기보다, 그 진리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유사성을 근거로 불교의 깨달음과 새 교회의 거듭남을 동일한 과정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진리가 인간의 생각과 독립적으로 성립한다는 사실은 그 진리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참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법을 듣는 것과 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은 구별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읽고 교리를 정확하게 아는 기독교인이라도 그 진리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식은 영적 생명과 결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위한 삶의 교리’(Doctrine of Life for the New Jerusalem, Life, 1763) 1번에서 모든 종교는 삶에 관계되며 종교적인 삶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은 교리적인 지식의 축적이나 종교적 정체성의 확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인정하는 바에 따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새 교회의 교리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악을 죄로 여겨 멀리하고, 그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불교의 수행 역시 무명과 집착을 극복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불교인은 실천을 중시하지만 기독교인은 믿음만을 중시한다는 식의 대조는 옳지 않습니다. 두 전통 모두 앎과 삶의 결합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진리의 근원과 영적 변화의 목적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불법은 부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진리다’라는 명제는 초기불교의 법 이해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설명입니다. 부처는 연기의 질서를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가르친 존재로 이해되며, 진리는 특정한 인간의 취향이나 권위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진리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귀중한 윤리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이 있다는 사실과, 그 법칙이 곧 말씀에서 말하는 신적 진리 자체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이시며, 주님은 진리를 발견한 인간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 자체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법과 말씀의 신적 진리를 동일시할 수 없으며, 불교의 깨달음을 주님에게서 오는 거듭남과 같은 것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동시에 불교인이 진실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할 때 그 안에 나타나는 진리와 선을 종교적 차이만으로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사랑으로 실천하는가를 살피는 일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이 참된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궁극적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이며, 참된 지혜는 그 진리의 근원을 인정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영적 생명과 결합합니다. (BU.009 해설)

 

요약

불법은 부처가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깨닫고 가르친 진리라는 설명은 초기불교의 연기법 이해에 부합합니다. 진리가 인간의 개인적 권위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으며, 진리를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에도 인정할 만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법을 말씀의 신적 진리와 동일시하거나, 부처의 깨달음을 주님의 신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 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주님은 진리를 발견한 존재가 아니라 진리와 생명 자체이시며, 인간과 천사는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진리 발견이라는 통찰을 인정하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그 진리를 받아들인 인간은 악을 멀리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합니다.

 

 

 

BU.008 ‘극단을 피하고 중도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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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IS.009 | 이슬람(Islam)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 초월성과 계시, 이해와 신앙

 

해설

이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理解, understanding)를 초월하시는 분이지만,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뜻을 계시(啓示, revelation)하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므로,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본질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슬람에서 ‘와흐이’(wahy)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예언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계시를 가리키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꾸란 42:51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시거나, 가림막 뒤에서 말씀하시거나, 사자를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16:44는 예언자에게 계시를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숙고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계시 이해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려 주신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유한한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한 분이시지만,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도록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슬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꾸란 47:24는 사람들이 꾸란을 깊이 숙고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며, 3:7은 경전 안에 의미가 분명한 구절들과 해석이 쉽지 않은 구절들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해석이 어려운 내용의 궁극적인 의미를 하나님만 아시는지,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도 일정하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문장 구조와 해석 전통에 따른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꾸란이 모든 계시를 인간의 이해 밖에 있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슬람 신학에는 이성(理性, reason)과 계시의 관계를 깊이 연구한 전통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무타질라파(Mu'tazila)는 신적 정의와 인간의 책임을 이해하는 데 이성의 역할을 크게 강조했으며, 아슈아리파(Ash'ariyya)는 계시의 권위를 중시하면서도 신학적 논증을 활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을 ‘이해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종교’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이성이 어디까지 권위를 가지며, 계시와 이성적 판단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는 이슬람 내부에서도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TCR, 1771) 347–348항에서 참된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주님께 나아가고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신앙(信仰, faith)은 인간의 이해를 정지시키고 어떤 명제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상태가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의 이해 안으로 들어와야 하며,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실천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해는 단순히 정보를 기억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능력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의 중요한 기능이며, 의지(意志, will)와 결합할 때 영적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말을 외적으로 반복할 수 있지만, 그러한 반복만으로 그 말이 자신의 내적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여전히 지식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해와 사랑, 진리와 선, 앎과 삶이 서로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한한 신적 본질을 인간의 유한한 사고 속에 완전히 담아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신적 무한성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 DP, 1764) 171–172항은 주님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인간을 자신의 이해와 판단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존재로 다루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진리를 제시하시고, 인간이 그것을 생각하고 분별하며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신적 계시는 인간의 이성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가 참된 빛을 받아 올바르게 기능하도록 하는 근거입니다. 신앙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자만도 아니며,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각 자체를 포기하는 태도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겸손하게 배우고, 자신이 이해한 만큼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신학 사이에는 계시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슬람에서 꾸란은 하나님이 무함마드에게 전달하신 최종적인 계시이며, 무함마드는 그 계시를 받은 예언자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말씀(Word)이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록을 넘어, 그 안에 신적 진리가 담겨 있으며 궁극적으로 주님 자신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신적 섭리’ 172항은 주님이 말씀 자체이시므로 말씀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님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요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하며, 14절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의 충만함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전달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과 스베덴보리의 차이는 계시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보다, 어떤 계시를 신적 말씀으로 인정하며 그 계시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나타내는가 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다만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꾸란과 성경이 동일한 방식으로 기록되었거나 동일한 영적 구조를 지닌다고 전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속뜻에 관한 가르침을 꾸란 전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계시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 자신의 지적 능력만으로 모든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the Sacred Scripture, SS, 1763) 26항에서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간 자신의 지성만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를 경계합니다. 말씀의 영적 의미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와 관련되므로,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진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을 임의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이해를 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과 자신의 지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해 자체가 아니라, 모든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자기중심적인 지성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신학적 지식을 소유하더라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만으로 말씀을 해석한다면, 그 지식은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신중하게 검토하며, 진리를 알게 된 만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은 이해와 신앙을 함께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영적 이해에는 합리적인 분별뿐 아니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실제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는 고백에 담긴 진리와 신학적 한계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므로 인간이 그분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고백은 참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를 알려 주시며, 인간은 그 계시를 진지하게 배우고 숙고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유로 계시된 내용에 관한 합리적 질문을 금지하거나, 종교적 권위자의 해석을 인간이 분별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이러한 위험은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질문을 막거나, 목회자의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자유를 약화시키는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의 계시관과 스베덴보리의 계시관 사이에 남아 있는 근본적인 차이는 성육신하신 주님과 성경의 신적 성격에 대한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서 진리를 배워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참된 신앙의 길로 제시합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무지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교리를 만났을 때 말씀을 더욱 살피고 진리를 구하기보다,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 질문을 중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자신이 오랫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영적 지식을 얻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이해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신앙은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성 앞에서는 겸손해야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진리 앞에서는 성실하게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계시의 목적은 인간을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앞에 무조건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알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에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이 문항이 남기는 질문은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인가, 없는 분인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께서 이해하도록 허락하신 진리를 얼마나 성실하게 배우고 있으며, 그 진리를 얼마나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IS.009 해설)

 

요약

이슬람이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시지만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꾸란 역시 인간에게 계시를 숙고하도록 요구하므로, 이슬람의 계시 신앙을 맹목적 복종이나 이성의 부정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무한한 신적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만, 주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이해하고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계시의 중심은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말씀의 진리는 그분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슬람의 초월성과 계시에 관한 고백 자체는 참되지만,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와 주님의 신성에 관한 이해에서는 중요한 교리적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를 포기하는 것도, 자신의 지성을 절대화하는 것도 아니라,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선행으로 실천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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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RC.009 | 천주교(Roman Catholic)의 교리와 신앙 속 진리와 오류 100선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 진리의 근거는 교회의 권위에 있는가, 주님의 말씀에 있는가?

 

해설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이것은 천주교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의 순종에 관한 명제입니다. 천주교는 신앙을 개인이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해석하여 선택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복음을 맡기셨으며, 사도들에게서 이어지는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가 보존되고 전달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이해에는 개인의 생각과 판단만으로 신앙을 결정하지 않고, 오랜 세월 교회가 보존해 온 진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어떤 교리가 참된 진리인 이유는 교회가 그것을 정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일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권위에 순종하여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일까요? 반대로 신자가 스스로 진리의 참됨을 살피고 질문하는 일은 교회에 대한 불순종일까요? 무엇보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신앙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번 명제는 교회의 교리와 권위를 모두 부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어디에서 권위를 얻으며, 그 가르침이 어떻게 인간 자신의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가를 묻는 문제입니다.

 

먼저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84–85항은 신앙의 유산이 성경과 성전에 담겨 교회 전체에 맡겨졌으며, 이를 권위 있게 해석하는 직무가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敎導權, Magisterium)에 맡겨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교도권은 로마 교황과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수행하는 공식적인 가르침의 직무를 뜻합니다. 천주교는 교도권이 단순히 신학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계시를 해석하고 신자들에게 신앙과 도덕에 관한 가르침을 전할 권한을 지닌다고 믿습니다. 특히 교리서 88항은 교도권이 계시에 포함된 진리나 그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진리를 결정적으로 제시할 때 ‘교의’(敎義, dogma)를 정의한다고 설명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교의를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인간의 생각으로 새로운 신적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도권이 계시의 유산을 보존하고 해석하며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한다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정한 진리’라는 표현도 천주교의 공식적인 관점에서는 교회가 임의로 만들어 낸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권위 있게 가르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86항은 교도권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섬기는 직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91–94항은 신자들이 계시의 진리를 이해하고 보존하며 그 이해를 더욱 깊게 하는 일에 참여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일반 신자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필요가 없고 교회가 말하는 내용을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리서 1783–1785항은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도권의 해석 권한은 개인 신자의 판단과 동일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교리서 87항은 신자들이 목자들의 가르침을 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하며, 890–892항은 교도권의 가르침이 지닌 권위와 그에 대한 신자의 동의를 구별하여 제시합니다. 여기서 모든 교회의 발언이 동일한 수준의 무류성을 지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주교는 결정적으로 선포된 교의와 그 밖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구별하며, 그에 따라 신자에게 요구되는 동의의 성격도 달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검토하려면 천주교의 공식적인 권위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그 구조가 진리의 참됨을 확인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 공동체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진리를 배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딤전3:15는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릅니다. 엡4:11-13은 주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르치는 직무를 주신 목적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불필요하거나 각 사람이 자신의 생각만으로 신앙을 형성하면 된다는 뜻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을 참된 신앙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행17:11은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바울이 전한 내용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경멸하지 않았지만, 그 가르침이 성경에 부합하는지를 살폈습니다. 또한 요8:31-32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중심은 어떤 인간 조직의 권위 그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담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일과 그 가르침을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는 일은 반드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올바른 교회의 가르침은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살펴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에 관한 교리’(Doctrine of Sacred Scripture, SS, 1763) 76항에서 교회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그 교회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 성경을 낭독한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서 어떤 교리를 이끌어 내며, 그 진리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말씀은 교회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자료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끊임없이 비추어 보아야 할 신적 진리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어떤 교리가 오랜 전통을 지녔거나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르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리가 참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하며, 그 말씀의 진리와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가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그 교리의 권위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의 지위나 제도의 역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가 실제로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 점에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HH, 1758) 351–352항은 특별히 중요한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지성과 지혜란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악인지를 내적으로 보고 이해하며 분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HH.352에서는 다른 사람이 참되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을 참이라고 믿고, 그 뒤에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찾아 확신하는 상태를 ‘거짓된 지성과 지혜’(spurious intelligence and wisdom)의 한 형태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어떤 주장을 이미 참이라고 확정한 뒤에는 그 주장이 실제로 거짓이더라도 여러 가지 논거를 찾아 참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배우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부모와 교사, 목회자와 교회를 통하여 신앙의 내용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가 구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 진리를 스스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신앙과, 그 진리가 참된 이유를 오직 가르친 사람의 권위에서만 찾는 신앙입니다. 특히 HH.352:2는 어린 시절 스승에게 배운 내용을 참되다고 믿었더라도 성장한 뒤 진리를 사랑하여 탐구하고, 그 진리의 참됨을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앞서 비판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배우는 것과 스스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서로 배척해야 할 행위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배우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받아들이는 단계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AC, 1749–1756) 7055:2에서도 같은 문제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의 교리를 따르면서도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교회가 가르쳤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전했다는 이유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경우를 설명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신적 진리와 관련된 가르침이 전달될 수 있지만, 그것이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내적인 인식과 충분히 결합한 상태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 자체를 사랑하고 특히 삶을 위하여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은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이 실제로 참된지 살피려 하며, 그 교리가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분별하려 합니다. 이 본문은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신앙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차이를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암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자기 자신의 이해 안에서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지 않았다면 아직 신앙의 내적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면서도 그것이 왜 참된지 이해하고자 말씀을 살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은 참된 신앙의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자가 교회보다 더 높은 개인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교리는 그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진리의 근원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곧 개인의 생각을 모든 진리보다 높이는 태도를 정당화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이해와 감각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것을 참이라고 확신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반드시 더 깊은 진리 안에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독립적인 판단 자체가 참된 신앙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9300:4에서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께서 그의 이해를 밝혀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깨달음은 인간 자신의 총명함이나 자율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분별은 교회가 말했으므로 무조건 참이라고 확신하는 태도뿐 아니라, 교회가 말했으므로 무조건 거짓이라고 판단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쳤는가보다 그 가르침이 실제로 말씀에 부합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이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 역시 참된 신앙의 길은 아닙니다.

 

이 문제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리를 믿는 것과 교리대로 살아가는 것의 관계입니다. 천주교는 교회가 정한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신앙의 목적이 완성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032–2038항은 교회의 가르침이 도덕적인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며, 2044항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한 행위가 복음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언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천주교가 신앙의 순종을 단순히 교리적 동의와 제도적 복종으로만 이해한다고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교리를 실천하는 일의 영적 의미를 더욱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규정을 지키는 이유가 교회의 처벌이나 주변의 평가가 두렵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외적인 순종에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규정 안에 담긴 진리가 실제로 주님의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 선을 실천한다면 더욱 내적인 신앙의 행위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understanding)와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려는 ‘의지’(will)를 함께 강조합니다. AC.9050은 믿음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인간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은 교리를 알고 동의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를 사랑하여 실제로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리를 지키는 행위가 귀중한 이유는 그 자체가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삶에서 실현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와 신자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말씀을 가르치고 교리를 정리하며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쓰임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처음부터 성경의 깊은 의미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체계적인 가르침과 공동체의 도움은 신앙의 성장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이 이러한 쓰임을 감당하려면 신자가 진리를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질문을 제기하는 일을 언제나 불순종으로 여기거나, 교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신앙의 부족으로 판단한다면 신자는 자신의 이해와 양심을 사용하기보다 외적인 권위에 의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자가 겸손하게 말씀을 배우고 진리의 참됨을 살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격려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은 더욱 깊은 영적 쓰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을 가톨릭 신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모든 천주교 신자가 교회의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교회 안에서 진리를 진지하게 배우고 연구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개신교 신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유명한 목회자의 해석을 무조건 참이라고 믿는다면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명제가 던지는 질문은 천주교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와 신자가 자신의 신앙이 진리 자체에 근거하는지, 아니면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권위에 근거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참된 신앙이 되는지 분명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온 진리를 가르치고, 신자가 그 진리를 이해하여 받아들이며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실천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일은 참된 신앙의 중요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했기 때문에 참되며,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곧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진리는 교회의 권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교회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만, 진리의 근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신앙의 목적은 어떤 교리 체계를 정확하게 보존하거나 제도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사랑하며 자신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을 위한 선한 쓰임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은 존중하되 그 가르침을 말씀보다 높여서는 안 되며, 자신의 이해와 양심을 사용하되 그것을 주님의 진리보다 높여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판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절대화하는 데 있지 않고, 둘 모두가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 앞에서 겸손하게 서는 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인간 조직이 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 안에 밝혀 주신 참된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실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를 넘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RC.009 해설)

 

요약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를 믿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라는 명제에는 신자가 개인적인 생각만을 절대화하지 않고 교회가 보존하고 가르치는 진리를 배우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도권이 성경과 성전에 담긴 계시를 권위 있게 해석한다고 가르치지만, 교도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다거나 임의로 새로운 신적 진리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신자의 양심과 이해, 진리에 대한 탐구와 사랑의 실천을 인정하므로, 천주교가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신앙의 전부로 가르친다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로마 교황과 주교들의 교도권에 특별한 해석 권한을 부여하고, 확정적으로 제시된 교의에 신자가 신앙의 동의로 응답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권위 구조는 스베덴보리의 진리 이해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는 SS.76에서 교회가 말씀으로부터 존재하며 말씀에 대한 이해에 따라 교회의 영적 성격이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HH.351–352에서는 다른 사람의 권위 때문에 어떤 가르침을 참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진리 자체를 사랑하여 그 참됨을 이해하는 신앙을 구별합니다. AC.7055:2 역시 교회의 교리가 참된 이유를 단지 권위 있는 사람들이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상태와, 진리를 진리 자체를 위하여 그리고 삶을 위하여 사랑하는 상태를 구별합니다. 따라서 오류의 핵심은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거나 신자가 올바른 교리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떤 교리가 참되다는 궁극적인 근거를 교회의 제도적 권위에서 찾고, 신자 자신의 이해와 진리의 분별보다 그 권위에 대한 동의를 앞세우는 데 있습니다. 다만 이 비판은 천주교뿐 아니라 모든 교회와 신자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그의 이름과 저작의 권위만을 내세우고 실제 말씀의 진리를 살피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한에서 참된 영적 쓰임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의 권위도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제는 ‘교회가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다’라는 의미에서는 참되지만, ‘교회가 정했기 때문에 참된 진리이며 그 권위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기준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교리의 출처를 주님의 말씀에서 찾고, 그 진리를 이해와 의지 안에 받아들여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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