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90

 

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에서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14수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시45:9-17) Kings’ daughters were among thy precious ones; at thy right hand doth stand the queen in the best gold of Ophir; the daughter of Tyre with a gift; the king’s daughter is all glorious within; of eyelet work of gold is her raiment; instead of thy fathers shall be thy sons, (Ps. 45:9-17)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딸’(daughter)에 의해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이 묘사됩니다. 이로부터 교회들은 선에 의해 ‘딸들’이라 불리는데, ‘딸 시온’(daughter of Zion), ‘딸 예루살렘’(daughter of Jerusalem)(사37:22 및 다른 많은 곳들)이 그러합니다. 또한 그들은 ‘내 딸 백성’(daughters of my people)(사22:4), ‘딸 다시스’(daughter of Tarshish)(사23:10), ‘딸 시돈’(daughter of Sidon)(사23:12), 그리고 ‘들에 있는 딸들’(daughters in the field)(겔26:6, 8)이라고도 불립니다. where the good and beauty of love and faith are described by the “daughter.” Hence churches are called “daughters” by virtue of goods, as the “daughter of Zion” and the “daughter of Jerusalem” (Isa. 37:22, and in many other places); they are also called “daughters of my people” (Isa. 22:4), the “daughter of Tarshish” (Isa. 23:10), the “daughter of Sidon” (verse 12), and “daughters in the field” (Ezek. 26:6, 8).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37:2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사22:4)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23:10, 12)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겔26:6, 8)

 

 

해설

 

말씀에서 ‘딸들’이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해석 체계에서 이미 확립된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AC.490은 이 원리를 다시 한번 시편과 예언서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 확증하며, 왜 교회가 자주 ‘딸’로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딸’이라는 표현이 결코 약하거나 부차적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시편에서 묘사되는 ‘왕의 딸’의 모습은 매우 화려하고 깊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오빌의 금으로 단장한 왕비, 안에 영광이 가득한 딸,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은 딸은 모두 외적 장식의 과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선의 내적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이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이전에, 내면에 충만한 선의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왕의 딸은 그 안에 영광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선이 언제나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는 선을 드러내고 보호하는 옷과 같고, 선은 그 안에 거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옷의 금빛을 말하면서도, 먼저 ‘안에 가득한 영광’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딸’이 선을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선은 교회의 생명이며, 교회가 교회답게 존재하게 하는 중심입니다.

 

이 원리로부터 교회가 ‘딸’로 불리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딸 시온’(daughter of Zion), ‘딸 예루살렘’(daughter of Jerusalem)이라는 표현은 지리적 명칭이 아니라, ‘선에 의해 규정된 교회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온은 사랑의 선과 연결되고, 예루살렘은 진리의 교리와 연결되지만, 두 경우 모두 ‘딸’이라는 표현을 통해 선이 중심임이 강조됩니다. 진리는 중요하지만, 교회를 교회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선입니다.

 

‘내 딸 백성’(daughters of my people)이라는 표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개별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백성 가운데서 살아 있는 선들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교회가 황폐해질 때, 성경은 종종 ‘딸들이 상하였다’, ‘딸들이 사로잡혔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람이 고통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선의 상태가 손상되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회복의 약속에서는 ‘딸들이 기뻐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선이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딸 다시스’(daughter of Tarshish), ‘딸 시돈’(daughter of Sidon), ‘들에 있는 딸들’(daughters in the field)과 같은 표현들도 모두 교회의 다양한 상태를 선의 관점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다시스와 시돈은 외적 지식과 상업적 교류로 상징되는 영역과 연결되는데, 그곳에서도 ‘딸’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은, 외적 영역일지라도 교회가 존재하는 한 ‘선의 관점에서 평가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들에 있는 딸들은 교리의 중심지 밖에 있는 선의 상태들, 곧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여전히 주님께 속한 선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용례는 창세기 5장에서 말하는 ‘딸들’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 딸들은 어떤 족장의 실제 딸들이 아니라, 그 교회 상태 안에서 형성되고 보존된 선들의 퍼져나감을 말합니다. 교회가 ‘딸들을 낳았다’는 말은, 그 교회가 선을 풍성히 지니고 있었고, 그 선이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떤 ‘딸들’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지식과 말, 활동과 제도는 많을지라도, 그 안에 살아 있는 선이 없다면, 성경의 언어로 말해 그것은 ‘딸이 없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규모가 작고 눈에 띄지 않더라도, 선이 살아 있다면, 그 교회는 ‘왕의 딸’처럼 안에 영광이 가득한 교회입니다.

 

결국 AC.490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시 세워 줍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외적 장식이나 성과가 아니라, ‘선의 충만함’에 있습니다. 성경이 교회를 ‘딸’이라 부르는 이유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주님과의 사랑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교회의 참된 영광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AC.489, 창5:4,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진리들과 선들을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 곧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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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89

 

‘자녀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퍼셉션하였던 진리들과 선들, 곧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이 예언서의 많은 말씀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을 보면, 또한 고대에도 교회의 잉태와 출산을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라 했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60:3-5)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Isa. 60:3–5)

 

라고 말하는데, 이 말씀에서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다윗의 시, 곧 시편에서는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144:11, 12)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Ps. 144:11–12)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이방인’(sons of the stranger)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하고, ‘우리 아들들’(our sons)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our daughters)은 선의 교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에서 또 말하기를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43:6, 8)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Isa. 43:6, 8)

 

라고 하는데, 이 말씀에서도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들을 의미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blind)은 진리들을 보게 될 자들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deaf)은 그것들을 순종하게 될 자들입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3:24)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Jer. 3:24)

 

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도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자손’(children)과 ‘아들들’(sons)이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29:22-24)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Isa. 29:22–24)

 

에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은 주님을 의미하고, ‘자손’(children)은 거듭난 자들로서 선과 진리에 대한 이해를 가진 자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또 이사야에서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54:1)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Isa. 54:1)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홀로 된 여인의 자식’(sons of the desolate)은 원시 교회, 곧 이방인의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하고, ‘남편 있는 자의 자식’(sons of the married wife)은 유대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에서도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Jer. 10:20)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자녀’(sons)는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또 where “sons” signify truths.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30:20)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Jer. 30:20)

 

에서도 ‘자손’(sons)은 고대 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9:13)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Zech. 9:13)

 

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랑에 속한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9에서 ‘자녀들’이라는 표현이 왜 창세기 5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성경 전체의 용례를 통해 체계적으로 증명합니다. 그의 핵심 주장은 간단하면서도 결정적입니다. 성경에서 ‘자녀들’, 곧 ‘아들들과 딸들’은 결코 생물학적 자녀를 의미하지 않으며, 대신 교회 안에서 탄생한 ‘진리들과 선들’, 곧 퍼셉션의 산물들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지 않으면,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끝없는 출산 기록으로만 보이게 됩니다.

 

말씀은 교회를 살아 있는 존재로 묘사하며, 교회가 잉태하고 출산한다고 말합니다. 이 출산은 육체의 출산이 아니라,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교회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교회의 잉태와 출산은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언어로 표현되었습니다. ‘아들들’은 이해 안에서 형성된 진리들이고, ‘딸들’은 의지 안에서 형성된 선들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항상 함께 태어납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확장될 때 단순히 사람이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풍성해진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빛 가운데 있을 때, 진리는 멀리서도 모여들고, 선은 사랑 안에서 보호받으며 자랍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다(enlarged)’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의 내적 상태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다윗의 시에서 ‘이방인(sons of the stranger)과 ‘우리 아들들(our sons)이 대조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이방인의 아들들’은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망한 말, 곧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반면 ‘우리의 아들들’은 참된 진리의 교리들이며, ‘우리의 딸들’은 선의 교리들입니다. 여기서 진리와 선은 이미 체계화된 교리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퍼셉션에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눈먼 자’와 ‘귀먹은 자’가 함께 언급되는 대목은 퍼셉션의 회복을 보여 줍니다. ‘눈먼 자’는 진리를 보지 못하던 자들이고, ‘귀먹은 자’는 선을 순종하지 못하던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아들들과 딸들’을 불러 모으실 때, 진리를 보고 선을 따르는 퍼셉션이 함께 회복됩니다. 이는 교회의 회복이 항상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을 동시에 포함함을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탄식과 약속의 말씀들에서도 ‘아들들과 딸들’은 반복해서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황폐해졌다고 말할 때, 성경은 ‘아들들과 딸들이 사라졌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와 선의 퍼셉션이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회복을 말할 때에는 ‘아들들이 이전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진리의 퍼셉션이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서에서 시온의 아들들이 용사의 칼처럼 일어난다는 표현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들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과 결합된 진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싸울 수 있는 힘이며, 거짓과 혼합되지 않은 퍼셉션의 힘입니다.

 

결국 AC.489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합니다. 그 족보는 누가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를 말하는 기록이 아니라, 각 교회 상태가 얼마나 많은 진리와 선을 퍼셉션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아들들과 딸들이 있었다’는 말은 그 교회가 살아 있었고, 퍼셉션의 출산이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우리는 오늘 우리의 교회가 과연 무엇을 낳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AC.490, 창5:4, ‘딸들’(daughters)은 교회, 특히 교회의 중심인 선을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 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에서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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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8, 창5:4, '날'(day) 상태, '해'(year)는 거기 담긴 성질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해들’(years)이 특별한 의미에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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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으로 상태들을 의미하고, ‘해들’(years)이 특별한 의미에서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에서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라고 말하는데, 이는 가증한 일을 행하여 죄악의 분량을 채운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전반적인 상태를 ‘날’(days)로, 특별한 상태를 ‘연한’(years)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 곧 시편에서도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라고 하는데, 이는 주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도 ‘장수’(days)와 ‘나이’(years)는 그의 나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에서는 ‘옛날’(days of old)은 태고교회의 상태들을, ‘지나간 세월’(years of the ages)은 고대 교회의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라고 말하는데, 이는 마지막 때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원수 갚는 날’(day of vengeance)은 정죄의 상태를,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는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에서도 ‘날’(days)과 ‘해’(years)는 모두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분명히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서에서는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2:1, 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날’(day)은 각각 어둠과 캄캄함, 구름과 흑암의 상태를 의미하며, 개별적으로도, 전체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스가랴서에서는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3:9, 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라 하고, 또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라고 말하는데, 이는 분명히 상태를 뜻합니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하는 날은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실은 십계명에서도 나타납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서 ‘생명이 길다’, ‘날이 길다’(days prolonged)는 것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문자적 의미에서는 ‘날’(day)이 시간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적 의미에 있는 천사들은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해와 달이 없어 시간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은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들과 그 변화들만을 압니다. 이로 인해 천사들 앞에서는 물질, 공간, 시간에 관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이 점은 에스겔 말씀의 겉뜻에서도 드러납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에서 ‘구름의 날’(day of cloud)은 거짓의 상태를, ‘여러 나라들의 때’(day of the nations)는 악의 상태를, ‘여호와의 날’(day of Jehovah)은 황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요엘서에서도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시간 개념이 제거되면, 그 자리에는 그때 존재하던 사물들의 상태에 대한 개념만 남습니다. 본 장에서 자주 언급되는 ‘날들’(days)과 ‘해들’(years)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88에서 ‘(days)과 ‘(years)가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거듭 확증합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창세기 5장의 족보를 시간표로 읽으려는 모든 시도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치밀한 논증입니다. 그는 예언서와 시편, 율법서 전반에 걸쳐 동일한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주며, 성경의 언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상태의 언어’임을 밝힙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과 ‘’가 함께 쓰일 때 그 역할이 항상 구분된다는 점입니다. ‘’은 어떤 상태가 전반적으로 어떠했는지를 말하고, ‘’는 그 상태가 어떤 성질을 띠고 있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정죄의 상태는 ‘원수 갚는 날’로, 구원의 상태는 ‘구속할 해’로 표현됩니다.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고, 그 상태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가 핵심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말하는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날’,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는 날’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시간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상태로 이해하면 분명해집니다. 진리와 거짓이 혼재되어 있으나, 끝내 주님의 빛이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한 날’(one day)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십계명에서 ‘날이 길다(days prolonged)는 약속 역시 같은 원리입니다. 이는 수명의 연장을 약속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의 안정되고 복된 상태를 뜻합니다. 만일 이것을 시간으로만 읽는다면, 말씀은 현실과 맞지 않는 약속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상태로 읽을 때, 이 약속은 지금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천사들의 관점입니다. 천사들은 시간 개념을 갖지 않으며, 오직 상태와 그 변화만을 압니다. 그래서 내적 의미에서는 시간, 공간, 물질과 같은 개념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사랑과 진리의 상태만이 남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모든 시간 표현은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외적 옷에 불과합니다.

 

이 원리가 창세기 5장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곳에서 말하는 ‘몇 날을 살았다’, ‘몇 해를 살았다’ 같은 표현들은 연대기가 아니라,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고, 그 상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기록한 것입니다. 숫자는 시간의 계산이 아니라, 상태의 질서에 대한 표시입니다.

 

결국 AC.488은 우리에게 성경 읽는 눈을 다시 훈련시킵니다. 시간이 보이면 상태를 물어야 하고, 연수가 나오면 그 안에 담긴 성질을 찾아야 합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족보는 더 이상 건너뛰어야 할 난해한 기록이 아니라, 교회가 걸어온 길을 가장 정밀하게 보존한 영적 연대기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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