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1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란 교회가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남겨두고 있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day)(night)의 의미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태고인들(the most ancient people)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과 밤의 시간들에 비유하였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을 때의 상태를 낮의 시간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상태가 그 날 바람이 불 때에 비유된 것은, 그들에게 아직도 자신들이 타락하였음을 알 수 있는 얼마간의 지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신앙(faith)의 상태는 (day), 신앙 없는 상태(no faith)(n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이르기를,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창세기 1장에 보면 사람의 거듭남(regeneration)의 상태들을 날들(days)이라 하고 있습니다.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해설

 

AC.221은 창세기 3장 8절의 ‘그 날 바람이 불 때’라는 표현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저녁 무렵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시간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묘사로 해석합니다.

 

그에 따르면 말씀에서 ‘낮’(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밤’(night)은 신앙과 진리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날 바람이 불 때’란 완전한 낮도 아니고, 완전한 밤도 아닌 상태, 곧 빛이 약해지고 어둠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 직후의 태고교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뱀의 설득을 받아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하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고, 양심의 소리와 퍼셉션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날 바람이 불 때’란 ‘자신들이 타락하였음을 알 수 있는 얼마간의 퍼셉션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 퍼셉션마저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잘못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주님의 음성을 두려워할 만큼의 영적 감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늘함’ 또는 ‘바람’(breath, air)이라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뜨거운 한낮의 강한 빛은 아닙니다. 이미 빛은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밤도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황혼과 같은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영적 상태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처음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에는 아직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찔리고, 악을 행하면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날의 서늘함’, 곧 ‘그 날 바람이 불 때’ 같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계속 그 음성을 무시하면 결국 밤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양심도 무디어지고, 진리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며, 잘못을 잘못으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도 같은 원리로 이해합니다. 거기서의 ‘첫째 날’, ‘둘째 날’ 등은 자연적인 24시간이 아니라 거듭남의 단계들입니다. 즉 말씀에서 ‘날’은 흔히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AC.221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음성을 들은 때는 완전한 밤이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날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은 양심이 살아 있었고, 아직은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심판의 순간이라기보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영적 감각이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매우 자비로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마지막 남은 빛을 통해 인간을 다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화

 

1.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이 구절을 AC.221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낮’(day)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있는 상태를, ‘밤’(night)은 신앙과 진리의 빛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단순히 시간이 있을 때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시간보다 상태(state)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낮’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비추는 상태이며, ‘밤’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일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이 아직 진리를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고, 회개할 수 있으며, 주님의 인도를 따를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반면 ‘밤이 오면 아무도 일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의 빛이 거부되고 신앙이 사라져 더 이상 영적 진보가 어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AC.221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the breath of the day)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표현을 태고교회 후손들이 아직 얼마간의 지각(perception)을 보유하고 있던 상태로 해석합니다. 즉 완전한 낮은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상태입니다. 빛은 약해지고 있었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요9:4는 AC.221에서 매우 적절한 증거 구절이 됩니다. 주님 자신도 ‘낮’과 ‘밤’을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밝은 낮과 같은 지각 가운데 있었지만, 점차 ‘날의 서늘함’으로 내려왔고, 결국 밤에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거듭남의 과정에도 적용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고, 양심의 소리에 응답할 수 있으며,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느낄 수 있을 때가 바로 ‘낮’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 빛을 거부하면 점차 ‘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이 있을 때 일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창3:8의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한낮의 밝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고,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 날 바람이 불 때’입니다.

 

그러므로 AC.221에서 요9:4를 인용한 이유는, 말씀의 ‘낮’과 ‘밤’이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신앙과 지각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며, 창3:8의 ‘그 날 바람이 불 때’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영적 빛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퍼셉션의 빛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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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0.심화

 

1. ‘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이 구절을 AC.220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소리(voice)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계시와 내적 딕테이트(interior dictat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220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8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설명하면서, 그 음성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던 지각(perception)의 희미한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을 인용하여, 말씀 전체에서 ‘소리’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은 이 구절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봅니다.

 

그에 따르면 ‘광야(wilderness)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교회, 또는 진리와 선이 희박해진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입니다. 창3의 후손들이 점차 지각, 곧 퍼셉션을 잃어 가던 상태와도 통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밝을 때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황폐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음성을 ‘주님의 오심에 대한 선포’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외치라’는 명령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설교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는 주님의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주님을 찾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자신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특히 AC.220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거듭난 사람들에게 있는 내적 딕테이트’와 연결합니다. 즉 이사야의 예언은 단지 세례 요한에 관한 역사적 예언이 아니라, 모든 거듭남의 과정에서 반복되는 영적 경험을 묘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내적 촉구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 길은 아니다’, ‘돌아가야 한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내면의 부르심을 바로 이런 ‘음성’, ‘소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AC.220에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한 이유는, 창3:8의 ‘여호와의 소리’가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내적 부르심이며, 신앙이 메마른 광야 같은 상태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 안에 울려 퍼지는 계시와 양심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퍼셉션(perception)에 비추어 보면, 이 구절은 더욱 특별하게 읽힙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밝은 대낮처럼 주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그 빛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퍼셉션의 밝은 빛 대신, 광야에서 들려오는 한 음성처럼 사람을 부르십니다. AC.220은 바로 그 음성의 정체를 설명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 영혼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사랑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AC.220, 창3:8, ‘거니시는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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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란 지각(perception)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마치 홀로 존재하며,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음 절에서 여호와께서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라고 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도 이와 같이 말합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여기서 광야(wilderness)는 신앙이 없는 교회(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를 의미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the Lord’s advent)에 대한 선포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알림(announcement)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the regenerate)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an internal dictate)가 있기 때문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해설

 

AC.220은 창세기 38절의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라는 말씀을 더욱 깊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앞의 AC.219에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소리’를 양심, 내적 깨달음, 내적 책망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거니시는(going to itself)이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도 완전히 모든 영적 지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 지각이 거의 사라져 버렸고, 마치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처럼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듣지 못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시지만, 사람은 더 이상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치 먼 곳에서 누군가 부르고 있는데도 자기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혀 그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주님은 찾으십니다. 인간은 듣지 않지만,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신약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지만, 스베덴보리는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에게 광야는 단순한 사막이 아니라 신앙이 사라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진리가 메말라 있고 영적 생명이 희박해진 상태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들리는 ‘외치는 소리’는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음성입니다. 즉 사람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양심의 소리, 마지막 진리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져도 주님은 여전히 부르고 계십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난 사람(the regenerate)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과는 다르지만,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께서 계속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양심을 자신의 생각이나 도덕 교육의 결과 정도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두신 영적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선을 행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권고, 악을 피하려 할 때 느끼는 내적 경고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이 희미하게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AC.220은 매우 따뜻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주님의 음성을 거의 잃어버렸을 때조차 그 음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니시는 소리’처럼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고, 주님은 계속 사람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주님은 양심과 내적 깨달음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심화

 

1. ‘40:3, 6

 

 

AC.220, 심화 1, ‘사40:3, 6’

AC.220.심화 1. ‘사40:3, 6’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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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9, 창3: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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