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1).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해 온 전통적 이해를 근본에서부터 해체합니다. 신앙을 단지 생각, 주님을 향한 생각, 혹은 교리 체계로 이해하는 모든 방식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런 오해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필연적으로 지적 활동으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사변적 사고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경건한 생각이나 태도로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해는 공통된 한계를 갖습니다.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핵심을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로 단정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앎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바를 실제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히 알고 있어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순종은 외적 규율 준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교리가 가리키는 사랑의 질서와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앙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주저 없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 둘이 신앙의 중심이며, 이것이 빠지면 신앙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주장은 윤리적 강조가 아니라, 구조적 진술입니다. 신앙의 모든 내용은 이 두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고 그 질서 안에 머무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질서가 삶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신앙은 머물 곳을 잃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자신의 해석으로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 자체로 확증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의 첫째와 둘째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 전체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란히 놓인 두 규범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질서의 두 측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더 나아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 전체, 곧 말씀 전체가 이 사랑의 질서를 설명하고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흐르는 하나의 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율법과 선지자’를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자 말씀 전체라고 정의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복잡한 체계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살도록 이끄는 하나의 목적을 가집니다.

 

AC.36은 신앙을 다시 삶의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순종이며,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AC.35, 창1:14-17, 사람 안의 두 역량,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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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이 글은 앞선 AC.34의 논의를 인간의 내적 구조 차원으로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감정과 이성의 단순한 결합체로 보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두 작용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질 때, 사람 안에는 하나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의도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삶은 일관되고, 내면과 외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신앙이 결합한 상태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생명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의지와 분리되거나 의지에 맞설 때, 인간의 내면은 분열됩니다. 신앙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부정하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해는 하늘을 말하고, 의지는 땅을 향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옳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니까 실제 삶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분열을 단순한 모순이나 미성숙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이해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사랑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으면, 이해가 아무리 하늘을 말해도 사람 전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열된 상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람 전체는 머리를 곤두박질치듯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협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냉정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흐르며, 의지는 그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만으로 판단된다면, 의지와 이해가 어긋난 대부분의 사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자비는 이해를 통해 의지를 서서히 교정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AC.35는 결국 인간의 신앙 문제를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다룹니다. 신앙이 말에만 머무를 때 왜 위험한지, 사랑 없는 신앙이 왜 겨울과 같은지를, 의지와 이해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내 이해와 내 의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말입니다.

 

 

 

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 겨울철 햇빛, 봄철 햇볕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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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을 언급하실 때,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뜰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 여기 이 ‘(flight)은 휴거를 말합니다.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결정적일 때 쓰신 것입니다. //

 

 

해설

 

이 글은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가장 단호하고도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단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실재처럼 단수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생명의 두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논증으로 제시하지 않고, 영계에서 직접 본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랑 자체로 인해 신앙의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배우거나 점검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너무도 충만해서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상태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들은 생명이 차갑고, 빛이 어두워서, 하늘의 문턱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지식의 시험장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을 입으로 부르고, 심지어 예언과 종교적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사랑의 삶이 없으면 하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내용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그 신앙과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었다는 고백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명확히 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로써 천적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생명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자연의 비유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철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굳어 있고, 생명은 잠든 상태가 아니라 사실상 죽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습니다. 빛과 열이 함께 작용하여, 모든 것이 살아나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유가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말씀의 보편적 표현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늘 자연의 질서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영적 질서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글의 의미를 개인의 마지막 순간까지 확장합니다. ‘(flight, 비행, 도피, 휴거)은 세상의 끝일 뿐 아니라, 각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상태, 곧 겨울 같은 삶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저세상에서 매우 비참한 상태로 이어집니다.

 

AC.34는 신앙의 진위를 가르는 가장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말로 증명되지 않고, 지식으로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삶 안에서만, 신앙은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AC.33, 창1:14-17, ‘사랑’, 생명과 기쁨의 근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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