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0.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 본문 중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0에서 말하는 ‘신앙에 속한 것들’은 ‘무엇이 옳고 참된지에 대한 이해와 인식’, 곧 진리에 속한 내용들이고, ‘사랑에 속한 것들’은 ‘그것을 실제로 좋아하고 행하려는 의지와 삶’, 곧 선에 속한 내용들입니다. 쉽게 말해, 전자는 ‘아는 것’, 후자는 ‘사는 것’입니다.

 

먼저 ‘신앙에 속한 것들’을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감정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가’를 아는 모든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교만하지 말라’, ‘용서하라’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 말씀을 읽고 깨닫는 내용, 설교를 듣고 ‘이게 옳다’고 이해하는 것, 상황을 분별하며 ‘이 길이 맞다’ 판단하는 것 등, 이런 것들이 전부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핵심은 ‘이해와 인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주로 머리와 생각의 영역, 곧 ‘이해(understanding)에 속합니다.

 

이제 ‘사랑에 속한 것들’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진리들이 실제로 ‘마음에 들어오고, 좋아지고,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정직하라’라는 거 아는 걸 넘어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좋다’ 느끼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 ‘용서하라’를 넘어서, 실제로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핵심은 ‘의지와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지(will)와 삶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 둘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방향을 제시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삶이 아닙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그 방향을 실제로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지도라면, 사랑은 발걸음입니다. 신앙이 빛이라면, 사랑은 따뜻함입니다. 둘이 함께 있어야 완전합니다.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앙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 그 사람을 배려하려고 마음을 쓰고, 시간을 내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사랑에 속한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며, 마음속에서도 교만을 경계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AC.60에서 이 둘을 함께 말하는 이유는, 거듭남이 이 두 영역에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감정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르게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 둘의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보통 ‘신앙  사랑’입니다. 먼저 알고, 그다음에 그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  신앙’입니다. 먼저 사랑이 있고, 그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옳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AC 전체에서 이 둘의 관계는 계속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에 대한 모든 이해와 인식이고, ‘사랑에 속한 것들’은 그것을 실제로 좋아하고 행하며 삶으로 드러내는 모든 의지와 행동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신앙은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것이고, 사랑은 그 옳은 것을 실제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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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소명 이후에도 사람들을 완전히 끊고 산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는 분명한 ‘내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세상적인 사교나 필요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쓰임’과 ‘영적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제한된 교류였지만, 그 속의 밀도는 매우 깊고 의도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명 이후 그의 삶의 중심은 글을 쓰는 일이었고, 그것도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받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시간은 사실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명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적 일의 흐름을 끊는가, 아니면 돕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업자, 지식인, 성직자들과 교류도 했지만, 그 모든 만남은 길게 이어지는 사교적 관계라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그러나 깊게’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즉,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선택된 접촉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사람은 단순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는 곧 자신이 어떤 영적 영향(influx)을 받는지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위적인 만남이나, 감정적 친분 중심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영들과의 교류까지 경험했던 그였기에, 외적 사람 뒤에 있는 내적 상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사람을 만나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이 만남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가’로 좁혀졌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위생’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을 나누는 것’ 자체에도 분명한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아무에게나 쉽게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매우 평범한 주제—정치, 과학, 일상—로 대화를 나누었고, 깊은 영적 내용은 책을 통해서만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배려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 속에서도 ‘내적 진리를 직접 주입하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외적 교제보다 내적 교제’를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짜 교류는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수많은 천사들과 더 깊이 교제하고 있었고, 지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삶의 밀도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항상 내적 중심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만남이 사명을 방해하는가, 돕는가’, 둘째,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 영적 영향을 주는가’, 셋째, ‘이 대화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입니다. 이 세 기준 아래에서 그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깊고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조용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극도로 밀도 높은 삶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바로 그 직감, 곧 ‘시간 시간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만남을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본래 밀도를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SC.50,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경우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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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1:31)

 

AC.60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 “very good,” 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 “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 전체 거듭남 과정의 ‘정점’을 짧지만 매우 밀도 있게 설명합니다. 앞선 모든 단계들이 ‘좋았더라’라고 평가되었지만, 마지막에만 ‘심히 좋았더라’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여기서 ‘심히’라는 표현은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태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앞선 단계들에서도 신앙은 존재했고, 선한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아직 완전히 하나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은 주로 이해에 속해 있었고, 사랑은 의지에 속해 있으되 아직 신앙을 충분히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진리는 ‘살아 있는 것’이 되기 직전의 상태, 혹은 부분적으로만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들이 ‘좋았더라’라고는 불리지만, ‘심히 좋았더라’라고까지는 불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AC.60에서 말하는 결정적 변화는,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신앙이 더 이상 단순한 이해나 인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이제 ‘무엇이 참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참을 말하고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 신앙은 사랑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결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단순한 협력이나 병렬이 아니라, ‘혼인 관계’로 이해합니다. 혼인에서는 둘이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각자의 고유함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이처럼 영적인 것들(신앙, 진리, 이해)과 천적인 것들(사랑, 선, 의지)이 결합할 때, 비로소 인간 안에 온전한 생명이 형성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위계적 서열이 아니라, 기능적 차이를 가집니다. 영적인 것은 빛에 가깝고, 천적인 것은 열에 가깝습니다. 빛만 있으면 사물을 볼 수는 있지만 살릴 수는 없고, 열만 있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나 빛과 열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발생합니다. ‘심히 좋았더라’라는 평가는 바로 이 ‘생명 발생의 완성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인간 안에서 더 이상 근본적인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는 의지와 다투지 않고, 신앙은 사랑을 변명하지 않으며, 선행은 억지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행함은 자연스럽고, 진리는 살아 있으며, 삶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완성, 곧 창조의 여섯째 날의 끝입니다.

 

그래서 이 평가는 도덕적 칭찬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언’입니다. 이제 인간 안에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이 자리 잡았다는 선언입니다. 이 때문에 앞선 모든 ‘좋았더라’를 포괄하면서도 초과하는 표현, 곧 ‘심히 좋았더라’가 사용됩니다. 이는 거듭남의 과정이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의 이행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AC.60.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위 AC.60 본문 중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해 주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C.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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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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