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6:26; 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6:26의 제사장 축복과 시4:6의 기도에는 공통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 안에 한 걸음 더 깊은 속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얼굴을 드심’이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할까요? 그 열쇠는 먼저 말씀에서 ‘얼굴’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마음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달라지고, 기뻐하면 밝아지며, 슬퍼하면 어두워지고, 분노하면 또 다른 모습이 됩니다. 특히 태고시대의 사람들은 내면과 얼굴이 완전히 일치하여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얼굴’은 단순히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존재의 내적인 상태를 표상하기에 매우 적합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내적인 것, 곧 신적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AC.35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간단하게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가장 내적인 것은 인간처럼 여러 감정이 서로 교대하는 상태가 아니라 변함없는 신적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을 향하여 흘러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민6:26의 의미가 깊어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가 어느 순간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비로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이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AC.358은 ‘주님께서  얼굴을 사람에게 드시는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52-35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AC.352에서는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AC.353에서는 ‘기름’이 천적인 것, 곧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하며, 체어리티와 체어리티의 모든 선도 천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사랑이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자비가 나오고, 그 자비를 인간이 받아들일 때 인간 안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것입니다.

 

4:6은 여기에 ‘’이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을 더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님의 얼굴은 단지 우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비춥니다.’ 이것은 AC.358 첫머리의 설명과 놀랍도록 잘 맞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서도 내적 애정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면, 말씀에서 주님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은 주님의 내적인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 저를 좋게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가  사랑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 가운데 살게 하소서’라는 깊은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칠 때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그의 선을 원하며,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여기에서 ‘평강’까지 연결하면 민6:26의 구조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얼굴을 드심과 평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사랑이 체어리티가 되어 인간의 내적 질서를 바로잡을 때 평강이 뒤따릅니다. 이 평강은 단순히 외부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얼굴을 든다’는 표현을 자연적인 의미와 혼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개를 들다’, ‘얼굴을 들다’라고 하면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358의 속뜻은 오히려 자기 높임과 반대입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때입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은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의 내면을 밝히고 그 사랑이 외적인 삶에 나타날 때 비로소 얼굴이 들립니다.

 

이제 이와 반대 방향의 표현인 렘3:12을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개역개정은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는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입니다. 직역하면 ‘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바로 AC.358에서 설명하는 ‘얼굴이 들림’과 ‘얼굴이 떨어짐’의 대조가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유입니다.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과 ‘긍휼’, 곧 자비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얼굴을 드시는 것은 자비에서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그 반대의 외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주님의 얼굴은 실제로 들렸다가 떨어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어떤 때에는 자비로운 얼굴로 인간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잘못하면 노한 얼굴로 바꾸시는 것일까요? AC.358의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실제로 변하는 쪽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57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되지만, 실제 분노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주님의 질서에 반발할 때,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됩니다. ‘얼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중단되어 얼굴이 실제로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함으로써 주님의 변함없는 자비를 다르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경우가 바로 그 예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인에게 얼굴을 떨어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AC.357에서 설명했듯이 체어리티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기주장을 강화하고,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에 분노하면서 가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 내적 변화가 ‘얼굴이 떨어짐’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렇게 민6:26과 창4의 가인을 나란히 놓으면 매우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며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체어리티를 거부하고 자기 사랑으로 돌아설 때 인간 자신의 얼굴이 떨어집니다. 주님의 얼굴은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의 얼굴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시4:6의 기도는 더욱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다시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미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얼굴, 곧 우리의 내적인 것이 주님을 향하도록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여 그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유입’과 ‘수용’의 질서도 들어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과 선은 끊임없이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비추시는 것은 신적 사랑과 자비의 유입을 나타내고, 인간의 얼굴이 들리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여 체어리티 가운데 들어가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하면 주님의 빛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얼굴이 들리는 삶은 결국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AC.351에서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58에서는 그 자비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주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향합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흘러옵니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의 얼굴에서 시작된 자비가 인간의 삶을 통해 이웃에게 전달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얼굴’의 상응은 매우 아름다운 순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얼굴은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드시면 그 자비에서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의 내적인 것이 변화하고, 그 체어리티가 다시 그의 얼굴과 삶을 통하여 빛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적 상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속에 있는 사랑이 겉으로 그대로 빛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떠나면 얼굴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질서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경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에 반발하면서 내면이 변했고, 그 변화가 ‘안색이 변했다’는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얼굴의 들림과 떨어짐은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거부하는가를 보여 주는 상응입니다.

 

따라서 민6:26의 축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축복입니다.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단순히 일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비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비가 인간에게 임하고, 그 자비가 인간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며, 그 체어리티로 인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평강을 누리기를 바라는 축복입니다.

 

4:6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역시 같은 깊이를 가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그분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를 향하여 계시는 주님의 얼굴, 곧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내적인 것이 돌이켜져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렘3:12은 바로 그 사실을 반대 방향에서 확인해 줍니다.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긍휼이 있는 자임이라.’ 그 이유는 주님 자신이 ‘긍휼이 있는 ’, 곧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설 수는 있어도 주님 안의 자비가 그 반대의 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세 구절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아름다운 질서가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그분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얼굴을 인간에게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이며, 그 얼굴이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선이 인간의 내면에 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이 ‘떨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는 주님의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시고,  자비가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며,  체어리티가 우리의 얼굴과 말과 행동과 모든 쓰임을 통하여 이웃에게 다시 빛나게 하소서.’ 이것이 AC.358이 ‘주님의 얼굴’이라는 말씀 속에서 열어 보여 주는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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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 얼굴이 떨어짐(falling) 상징적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태고시대의 사람들은 얼굴이 내면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든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가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를 있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로는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일을 괴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장과 기만은 당시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러므로 내적인 것들이 얼굴 상징되었습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에는 얼굴이 들렸다(lifted up) 하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얼굴이 떨어졌다(fall)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말씀에서처럼 주님께서도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s upon man) 표현됩니다. (6:26; 4:6) That by thefaces fallingis signifie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and of itsfalling.” The face, with the ancients, signified internal things, because internal things shine forth through the face; and in the most ancient times men were such that the face was in perfect accord with the internals, so that from a mans face everyone could see of what disposition or mind he was. They considered it a monstrous thing to show one thing by the face and think another. Simulation and deceit were then considered detestable, and therefore the things within were signified by the face. When charity shone forth from the face, the face was said to belifted up”; and when the contrary occurred, the face was said tofall”; wherefore it is also predicated of the Lord that helifts up his faces upon man,” as in the benediction (Num. 6:26; and in Ps. 4:6),

 

여호와는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6:26)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얼굴이 떨어진다(face falling)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예레미야에서 있습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the Lord gives charity to man. What is meant by theface falling,appears from Jeremiah: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 I will not make my face to fall toward you, for I am merciful, saith Jehovah. (Jer. 3:12)

 

여호와의 얼굴(face of Jehovah) 자비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lifts up his face) 것은 자비로 그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것을 상징하고, 반대가 얼굴을 떨어뜨리는 (makes the face to fall),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Theface of Jehovahis mercy, and when helifts up his faceupon anyone, it signifies that out of mercy he gives him charity; and the reverse when hemakes the face to fall,that is, when mans face falls.

 

 

해설

 

AC.358은 창4:5의 ‘안색이 변하니’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개역개정의 ‘안색이 변하다’는 자연스러운 번역이지만,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히브리적 표현과 영어 번역은 훨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his faces fell’, 곧 문자적으로는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얼굴’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상징하며, 얼굴이 ‘들리는 ’과 ‘떨어지는 ’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에게 ‘얼굴’이 내적인 것들을 상징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아름답습니다.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나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단순한 육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밖으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평안과 불안이 얼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말씀의 상응에서 얼굴은 인간의 내면을 나타내기에 매우 적합한 자연적 형상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시대 사람들에게 있었던 매우 특별한 상태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얼굴이 내면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성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태고인들이 표정을 잘 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아직 오늘날 인간처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속에 있는 애정과 생각이 얼굴을 통하여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얼굴로는 가지를 나타내면서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을 ‘괴물 같은 ’으로 여겼습니다.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속으로 불쾌해도 웃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친절한 얼굴을 할 수 있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상대방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어느 정도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AC.358이 말하는 것은 그런 예의나 자기 절제가 아니라 ‘가장과 기만(simulation and deceit)입니다. 실제 내면과 정반대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이것이 혐오스러웠다는 것은 그들의 천적 성품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내적 사랑에서 외적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속과 겉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속에는 하나를 품고 겉으로는 정반대를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삶의 질서를 찢어 놓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얼굴’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내적인 것을 상징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얼굴이 들린다’와 ‘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의 의미가 열립니다. 체어리티가 얼굴에서 빛날 때 얼굴은 ‘들렸다’고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떠나고, 내적 상태가 악한 방향으로 변하면 얼굴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의 내적 상태에서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그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57과 연결하면 그 과정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난 것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결과로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합니다. 즉 ‘분노’와 ‘얼굴의 떨어짐’은 서로 별개의 현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떠나자 내면 전체의 상태가 변하고, 그 변화가 ‘얼굴이 떨어짐’이라는 말씀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여기서 민6:26의 제사장 축복이 매우 중요한 반대 그림을 제공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을 ‘주님께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과 여호와께서 ‘얼굴을 드심’은 정확히 반대 방향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이 참으로 ‘들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일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실 때입니다. 자연적 의미에서 얼굴을 든다는 말은 자신감이나 당당함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지만, 속뜻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 사랑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인간의 내면을 밝게 할 때 그의 얼굴이 들립니다.

 

4:6의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얼굴이 ‘들리는 ’과 ‘빛나는 ’이 연결됩니다. AC.358 첫머리에서 ‘내적인 것들이 얼굴을 통해 빛난다’고 했던 것과 정확히 맞닿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인간에게 비친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의 내적인 것에서도 체어리티가 빛나게 됩니다.

 

3:12은 반대 표현을 통하여 같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면, ‘나의 얼굴을 너희에게 떨어뜨리지 아니하리니’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곧이어 나옵니다. ‘나는 긍휼이 있는 자임이라.’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고 설명합니다. ‘얼굴’과 ‘자비’가 직접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주님의 내적인 것을 상징하는데,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인간의 입장에서 그 자비와 체어리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도 바로 앞 AC.357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진노’와 동일한 원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얼굴 자체가 실제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로우셨다가 다음 순간 얼굴을 떨어뜨리고, 인간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AC.357에서 분노는 실제로 인간에게 속한 것이라고 했듯이, AC.358에서도 마지막에 ‘ 인간의 얼굴이 떨어지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 것은 주님께서 가인에게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심화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진노’와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인간에게는 주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방향을 바꾼 쪽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가인의 이야기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신앙과 사랑이 실제로 분리되기 시작했고, 그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가 생겼습니다. 이어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겼고, 그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노로 인해 ‘얼굴이 떨어집니다.’ 곧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것은 악이 인간 안에서 진행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교리적 오류처럼 시작된 것이 애정에 영향을 미치고, 애정의 변화가 결국 인간의 내적 상태 전체를 바꿉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교리는 단순한 지적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고, 어떤 거짓을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가와 연결되며, 그 사랑은 사람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사람 전체를 형성합니다.

 

AC.358에서 태고인들의 ‘얼굴과 내면의 일치’를 길게 설명하는 것도 이 때문에 중요합니다. 창4의 이야기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일어난 영적 변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속과 겉이 하나였던 천적 인간의 상태가 점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가장과 기만의 가능성이 생기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서로 달라질 수 있는 인간 상태로 내려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짧은 표현 안에는 이러한 깊은 변화까지 배경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속에 있는 것을 무조건 얼굴과 말로 드러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기만은 다릅니다. 화가 난다고 그대로 화를 쏟아내는 것이 속과 겉의 일치는 아닙니다. 거듭남의 목표는 내면의 악을 외면에 솔직하게 표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면 자체를 변화시키셔서 속에서 선을 사랑하고 겉에서도 그 선을 행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일치는 ‘악한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AC.358의 얼굴은 거듭남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로 체어리티를 주실 때, 내적인 것이 변화하고, 그 선이 외적 삶을 통해 빛납니다. 말과 행동, 표정과 관계, 일상의 쓰임 속에서 내적 사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얼굴이 들리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진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내면과 외면 모두가 어두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곧이어 주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표정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내적인 것들이 이렇게 변했느냐?’라는 영적 질문입니다.

 

결국 AC.358의 핵심은 ‘얼굴은 내면이 빛나는 자리’라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얼굴이 곧 내면을 나타냈습니다. 체어리티가 있을 때 얼굴은 들리고, 체어리티가 떠날 때 얼굴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드신다는 것은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안색이 변함’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의 AC.357이 ‘분노’를 통하여 체어리티가 떠나는 순간을 보여 주었다면, AC.358은 그 결과 인간의 ‘얼굴’, 곧 내면 전체가 변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실 때, 곧 우리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아들일 때,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서 빛납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얼굴이 들림’과 ‘얼굴이 떨어짐’이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표현 속에 감추어 놓으신 깊은 아르카나입니다.

 

### 인용 심화 판단

 

AC.358은 별도 심화 가치가 충분합니다. 특히 민6:26과 시4:6을 묶어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라는 주제로 다루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렘3:12을 반대 방향의 보조 구절로 함께 사용하면 ‘얼굴을 드심’과 ‘얼굴을 떨어뜨림’의 상응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또 하나는 본문 앞부분의 ‘태고인들은 얼굴과 내면이 완전히 일치했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별도의 성경 인용 심화라기보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속·겉 사람의 관계를 연결하는 주제 심화로 발전시킬 만합니다. 다만 현재 창4의 흐름에서는 첫 번째 심화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 블로그 제목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AC.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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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천국의 비밀, AC358, 창세기 4장, 가인의 안색, 얼굴의 속뜻, 태고교회, 체어리티, 속 사람과 겉 사람, 성경의 속뜻

 

 

심화

 

1. ‘여호와께서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6:26; 4:6)

 

 

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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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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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78:49-50)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78:49, 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45:24)

 

 

78:49-50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상당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사람들에게 보내시고, 심지어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영어 원문은 더욱 직접적입니다. ‘an immission of evil angels’, 곧 ‘악한 천사들을 들여보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실제로 분노하시며, 인간에게 악한 영들을 보내어 벌하시는 것일까요? AC.357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한 직후, 매우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이며,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도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해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주님 이해와 말씀의 속뜻,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질서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는 어느 순간 사랑하시다가 어느 순간 격분하여 악을 보내시는 식의 인간적인 감정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서 악을 향하면, 그 결과가 인간에게는 마치 주님께서 진노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외관에 따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다’,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셨다’고 표현합니다.

 

이 점에서 시78:49-50과 사45:24을 함께 읽으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시78편만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노하신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45:24에서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여호와께 노합니다. AC.357은 바로 이 구절을 보조 구절로 인용하면서 ‘분노’의 실제 소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분노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에 반발하는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주님께 분노할까요? AC.357의 앞부분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된 사람에게는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선처럼 느껴집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 자기 명예가 높아지는 것, 자기가 옳다고 인정받는 것, 자기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질서는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만의 이익보다 이웃의 선을 사랑하며, 지배하기보다 섬기고, 자기 공로를 주장하기보다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주님의 질서는 자기 욕망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AC.357에 따르면 악한 영들 가운데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그들에게 반발을 일으킵니다. 결국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45:24의 ‘그에게 노하는 ’는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보조 구절이 됩니다.

 

따라서 시78편의 ‘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주님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악한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경험하는 악의 결과가 말씀의 문자에서는 주님의 진노로 표현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말씀에 나타나는 ‘외관’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말씀도 그렇게 말하지만, 속뜻에서는 실제 원인이 인간의 악과 주님에게서의 이탈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특히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다’는 표현은 이 원리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AC.357은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같은 사랑에 따른 결합’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겉모습이나 말보다 사랑의 질이 사람을 서로 결합시킵니다. 같은 것을 사랑하는 영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 반대되는 사랑 가운데 있는 영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증오와 복수, 기만과 탐욕 같은 악을 자기 삶의 사랑으로 받아들일수록 그는 그와 같은 사랑 가운데 있는 악한 영들과 내적으로 가까워집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는 악하므로 악한 영을 보내겠다’고 결정하여 그들을 파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의 애정이 그와 같은 애정을 가진 영적 사회와 결합하는 것입니다. AC.357의 표현대로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인간을 악한 영들에게 내버려 두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악에서 보호하시고, 악을 제한하시며, 가능한 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자체를 파괴하면서까지 선을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사람이 완강하게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 사랑으로 삼을 때, 주님께서는 그 선택의 결과 자체가 전혀 나타나지 못하도록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택한 사랑에 따른 결과가 허용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78:50의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사’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진노가 지나갈 길을 마련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이것을 주님께서 악과 형벌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되는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허용하신 ’이 주님께서 ‘행하신 ’처럼 기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기원은 결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판’에 대한 이해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심판을 하나님께서 위에서 사람을 바라보다가 ‘너는 선하므로 천국, 너는 악하므로 지옥’이라고 외적으로 판결하여 각각 다른 장소로 보내는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심판은 인간의 내적 사랑이 드러나는 것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나고,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영적 사회로 스스로 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 역시 주님께서 분노하여 사람을 집어넣는 감옥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보다 자기 사랑과 악을 더 사랑하게 된 영이 자기와 같은 사랑을 가진 곳으로 향한 결과입니다.

 

45:24의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와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는 대조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한쪽에는 여호와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여호와께 ‘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한 분이며 그분의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인간의 방향입니다. 주님께 향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공의와 힘을 발견하지만, 자기 사랑 때문에 주님의 질서에 반발하는 사람은 동일한 주님 앞에서 분노와 수치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은 ‘누가 변했는가?’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에서 분노로 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자기 사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주님이 천사를 보내다가 갑자기 악한 천사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의 질에 따라 악한 영들과 결합한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게서 얼굴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결과가 마치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시고 노하시며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원리를 다시 가인의 이야기로 가져오면 AC.357이 왜 시78:49-50과 사45:24을 인용했는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창4에서 먼저 분노하는 쪽은 여호와가 아니라 가인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상징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체어리티와 거기에서 나오는 예배를 기뻐하시는데, 바로 그 질서가 가인에게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인이 분노합니다. 이것이 사45:24의 ‘그에게 노하는 ’의 원리와 같습니다.

 

결국 가인의 분노와 ‘여호와의 진노’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같은 영적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거스르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고통과 악을 경험하면서는 그것을 마치 주님께서 자기에게 분노하여 내리신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 분노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는데, 그 결과가 주님의 진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문자적 외관과 속뜻 사이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이나 악의 결과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시78편의 죽음과 재앙 역시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을 주님의 분노나 보복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은 실제 결과를 낳고,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사랑에 따라 영적 결합을 형성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순간에도 변하지 않지만, 인간이 그 사랑을 거부하면 사랑의 질서 밖에서 그 선택의 결과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57이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인간에게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그와 같은 영들과 결합하고 그 사랑이 만들어 내는 결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도 주님은 가능한 한 악을 제한하시며 인간을 선으로 돌이키려고 끊임없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시78:49-50을 사45:24과 함께 읽으면 ‘여호와의 진노’라는 표현의 방향이 뒤집혀 보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여호와께 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자기 사랑에 따라 그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께서 인간을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인의 분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경고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노하고 계신지를 먼저 묻기보다, ‘혹시 내가 주님의 질서에 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사랑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리와 체어리티에 반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아벨을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8:49-50과 사45:24이 함께 보여 주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주님 안에 있는 인간적인 분노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과 선 자체이십니다. 인간이 그 사랑에서 돌아서 자기 사랑과 악을 선택할 때, 그 악의 결과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자기와 같은 악한 영들을 자기에게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질서조차 자신에게 대적하는 진노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심판 가운데서도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이며, 분노의 근원 역시 주님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떠난 인간의 자기 사랑입니다. 이것이 AC.357이 ‘가인의 분노’에서 시작하여 ‘여호와의 진노’까지 나아가 밝히는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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