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이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애정의 본질(사랑의 종류)이 결합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 차례 관찰하면서 결국 확신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천국의 가족은 지상 혈연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이 서로 맞는 사람들로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지상 가족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더 진정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그 실제 모습을 깊이 있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천국에서의 가장 기본 원리, 혈연이 아니라 ‘내적 애정’(affection)이 가족을 형성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 중 하나가 ‘천국에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혈연은 자연계의 관계인 반면, 천국은 영적 친화성으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람들은 자연적 혈연보다, 영적으로 친근한 이들과 더 깊은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에서는 같은 종류의 선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여긴다.’ 즉, 천국 공동체란 비슷한 선(善)의 냄새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같은 종류의 선’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공동체를 ‘향기’와 ‘빛깔’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자비심 많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진리를 추구하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섬김과 겸손의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아이 같은 순전한 선을 가진 영들의 공동체 등, 이들은 마치 서로 ‘같은 영적 호흡’을 하듯 함께 있을 때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천국의 가족적 결합’이라 부릅니다.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새로운 방식의 따뜻한 가족’이 된다

 

스베덴보리가 발견한 아름다운 사실 하나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 완전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는 다른 방식의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성인 자녀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서로의 공동체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깊은 애정을 나눕니다. 신앙적, 성격적으로 가까웠던 형제자매는 종종 같은 층위의 천국에 있게 되어,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부부 중 영적 친화성이 같았던 경우에는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생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의 가족 관계는 지상에서보다 더 깊고, 더 진실하고, 더 자유롭다.’

 

 

천국의 한 공동체는 ‘영적 친화성’이 모여 이루는 가족 같은 사회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공동체는 단순한 모임이나 이웃이 아니라 ‘가족 같은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선배 같은 존재, 동료 같은 존재, 동생처럼 느껴지는 존재, 이웃 같은 존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각자는 자신과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가족의 재편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족들은 혈연의 형태는 없지만, 그 깊이는 지상의 가족보다 더 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비난, 질투, 오해, 상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가족과의 애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국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갖는다고 해서 지상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상의 가족은 천국에서도 사랑으로 기억되며, 서로의 평안을 기뻐한다.’ 즉,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인연입니다. 하지만 각자 영적으로 가장 편안한 공동체에 가기 때문에 모두 한 집에 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스베덴보리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실제로 영적 친화성이 매우 깊었던 가족이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 더 밝고 자유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둘 다 선을 사랑했다면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성인 자녀가 같은 천국 층위에서 자주 교류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은 형제자매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돕고 지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가족은 지상보다 더 온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가장 조화롭게 재구성된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확인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 천국에서는 혈연이 아니라 선(善)의 본질로 가족이 구성된다.

 

- 지상 가족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된다.

 

- 영적으로 친화성이 깊었던 가족은 천국에서도 특별히 가깝다.

 

- 영적 수준이 다르면 서로 왕래는 가능하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다.

 

- 천국 공동체는 서로를 가족처럼 느끼는 새로운 영적 질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슬픔 없이, 집착 없이, 평화와 기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어떤 관계도 어그러짐이 없다. 모든 결합은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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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다. 지상처럼 거리, 약속, 시간이 결정 요인이 아닙니다. 천국이나 중간 영계에서는 ‘영혼의 향방(향기)’이 곧 만남의 조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만남은 두 마음의 애정이 서로를 향해 열릴 때 이루어진다.’ 이 원리로 인해 가족 간에도 자주 보는 경우와 드물게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자주 만나는 가족, 애정의 기운이 서로를 자연히 가까이하게 하는 경우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여러 공동체에서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친척들이 자주 교류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이들이 자주 만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상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관계

 

지상에서 서로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아끼고, 도와주고, 영적 성장을 북돋아 주는 관계였다면, 영계에서도 그 ‘향방’이 일치합니다. 영계에서 사랑은 방향을 만들어 내는 힘입니다. 서로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는 영혼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불러냅니다.’

 

영적 친화성이 비슷한 경우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모두 신앙적으로 비슷한 깊이를 가진 경우, 형제자매가 모두 선한 본성을 유지한 경우, 남매가 서로의 삶을 도와주며 지낸 경우, 이들은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만나 삶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비슷한 선을 가진 이들은 천국에서 자주 교류한다.’

 

서로의 영적 기쁨을 북돋아 주는 관계

 

천국의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영적 기쁨이 더 밝아지는가?’를 아주 정확히 느낍니다. 그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자주 교류합니다. 가족 중에 이런 관계가 있었던 경우, 영계에서도 빈번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드물게 만나는 가족, 애정은 있지만, 상태가 다를 때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만, 영적 수준이 다르면 ‘자주 만나기 어렵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결코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서로 달라 애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둘의 영적 공기가 다를 때

 

스베덴보리는 자주 천국의 공기를 선함의 향기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주 깊은 천국적 신앙 단계인 반면, 아들은 비교적 외적 선의 단계라면, 둘은 서로를 보지만, 영적 호흡(affection)이 오래 합쳐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가능하나 길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짧은 기쁨, 그러나 온전한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좋아하지만, 정서의 깊이가 다를 때

 

어떤 가족은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지만, 영혼의 기질(애정의 종류)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천적(天的) 사랑’을 가진 유형(순전한 선)인 반면, 다른 사람은 ‘영적(靈的) 사랑’을 가진 유형(진리를 통한 선)일 경우,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만, 각자의 공동체로 돌아가야만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만남은 ‘특별한 일’처럼 반갑고 의미 있지만, 빈번한 일은 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사명이 다른 경우

 

천국 사람들은 각자 맡겨진 일, 주님과의 결합의 형태, 섬김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 사명의 깊이에 따라 서로를 자주 만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남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유 속에서 더욱 밝아진다.’ 즉, 자주는 아니어도 항상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거의 만나지 않는 가족, 영적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경우

 

이 경우는 ‘관계 단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영계에서는 서로 다른 애정은 서로를 향해 움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선한 삶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명예, 자기애, 세속적 욕망을 사랑했다면, 중간 영계에서라면 잠시 재회할 수는 있지만,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이때 천국인은 전혀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인은 악을 향해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정서의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론, 자주 만남은 사랑의 친화성이고, 드문 만남은 자유의 표현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의 가족 관계를 이렇게 종합합니다. 자주 만나는 경우는 서로 비슷한 선이거나 비슷한 신앙, 그리고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이거나 영적 공기가 비슷한 경우이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는 본질은 같으나 깊이가 다르거나, 서로를 사랑하지만, 영역(사명)이 다른 경우 등, 이럴 땐, 서로의 상태가 맞춰질 때만 만남이 허용된다. 그리고 거의 만나지 않는 경우는 본질의 사랑이 완전히 다른 경우이거나 영적 방향성이 전혀 반대인 경우이다.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메시지

 

스베덴보리는 이 내용을 정리하며, 아주 중요한 목회적 통찰을 남깁니다. ‘사랑의 깊이는 영원히 기억되고, 각자의 거처는 영적 본질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만남의 자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즉, 가족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랑의 형태가 영계의 형태에 맞게 변형되어 가장 순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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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0,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는가’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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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심화

 

1. 43:1-2, 4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동쪽(east)을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유입의 방향’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AC.98-101의 흐름을 보면, 그는 먼저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 ‘동쪽’은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이 자의적 해석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말씀 자체 안에서 ‘동쪽’이 실제로 주님의 영광이 오는 방향으로 사용되는 본문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에스겔 43장은 바로 그 점을 가장 웅장하고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선지자가 본 것은 단순히 동문이라는 건축 구조가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곧 동쪽은 주님의 영광, 주님의 음성, 주님의 임재가 들어오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창2:8의 ‘동방의 에덴’도 단순한 위치 설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스베덴보리는 읽는 것입니다.

 

특히 에스겔의 이 장면은 AC.101의 논리를 아주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라고 할 때, 여기서 ‘영광’은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신적 진리가 나타나는 광채이며,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은 그 진리의 충만한 울림을 뜻합니다. 그리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났다’고 할 때, 이 ‘’은 단순히 지면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받아 밝아지는 수용 영역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동쪽은 빛의 근원이 아니라, 빛의 근원 되시는 주님이 오시는 방향이고, 땅과 성전은 그 빛을 받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창2의 구조와 정확히 같습니다. 동쪽은 주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질서입니다. 에스겔 43장은 바로 이 ‘유입의 방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에 인용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에스겔 43장에서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이 동쪽과 관련 있다는 정도를 넘어서, ‘참된 성전은 동쪽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의 속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내적 성전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만, 그 안에 영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동쪽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열림의 방향’입니다.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는 말은, 천적 인간의 지성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둘 때, 그는 동쪽을 등지고 서게 됩니다. 그때 지성은 더 이상 영광으로 빛나지 않고, 자기 이성과 기억 지식으로만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동쪽’은 단순한 상징 하나가 아니라, 인간 생명의 질서가 바로 서 있는가, 아니면 뒤집혀 있는가를 가늠하는 결정적 표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동쪽’이라는 말은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반복되는 계시의 질서이며, 에스겔 43장은 그 질서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대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창2의 동쪽은 에스겔의 동쪽과 같은 동쪽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오는 방향, 성전을 밝히는 방향, 생명이 흘러드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동방의 에덴동산’은 단순히 아름다운 시작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으로 유입되는 천적 질서의 살아 있는 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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