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되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누구나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더 깊은 아르카나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woman)가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사실은,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해설

 

AC.152는 창2의 서술을 ‘문자 그대로 읽는 독법을 단호히 차단하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붙드는 태도 자체가 이미 이 본문이 경고하는 상태와 닮아 있음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먼저 그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이라는 표현으로 독자를 부드럽게 이끕니다. 이는 고도의 학문이나 신비 체험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본문이 스스로 허락하는 분별’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여자가 실제로 갈빗대에서 만들어졌다고 읽는다면, 이 본문이 담고 있는 깊은 층위는 전혀 열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열쇠는 ‘여자가 속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근거로, 여자가 곧 ‘own’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실제로 속일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어떤 대상이나 존재가 아니라, ‘오직 자기 안에 있는 own’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언제나 ‘나 자신처럼 보이기’ 때문에, 외부의 거짓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뱀은 3장에서 등장하지만, 속임의 실제 통로는 여자를 통해 열립니다. 즉, 악은 언제나 ‘own 안으로 초대될 때’ 비로소 힘을 갖습니다. 외부의 거짓이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공명하는 own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52는 여자를 비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own이 얼마나 미묘하고 위험한지를 드러내는 ‘자기 인식의 교리’입니다. own은 주님에 의해 살아날 수 있고, 실제로 허락된 것이지만, 동시에 속임의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긴장이 바로 창2의 끝과 창3의 시작을 연결합니다.

 

이 단락은 또한 앞서 AC.150의 ‘깊은 잠’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곧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own은 가장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속임은 언제나 외부에서가 아니라, ‘가장 친숙한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다음 단락들에서는 이 own이 어떻게 ‘사랑의 대상’이 되고, ‘하나의 몸’으로 인식되며, 결합의 언어로 포장되는지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지금 AC.152는 그 전환점 바로 앞에서, 독자의 눈을 한 번 더 깨어 있게 만드는 경고음과도 같습니다.

 

 

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위 본문은 그러니까 ‘여자’라는 own이 속였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러면 좀 이상한 게, 이 ‘여자’라는 own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own 아닌가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너무 이상한데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이상함이 바로 AC.152 부근의 가장 어려운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분명, 주님께서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그것을 vivify, 곧 살아 있게 하셨다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고 하니, 마치 주님께서 살려 주신 proprium 자체가 곧 속임의 원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으로부터 vivified된 proprium’ 자체와,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중심으로 붙잡아 버린 상태를 구분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열려 있는 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혀 버린 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 ‘여자’로 상징된 proprium은 아직 질서 안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as if his own’, 곧 ‘마치 자기 것 같은’ 자기감이었습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이 없으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생명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기감을 ‘받는 그릇’으로 머무르지 않고,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proprium은 방향이 바뀝니다.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흐르게 하던 구조였는데, 점점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구조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그 굳어진 방향이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입니다.

 

그래서 AC.152의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감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존재임을 잊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기 시작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의 proprium은 ‘창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안을 통과하여 인간이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해 주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느 순간 그 창문을 거울처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즉, 더 이상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 proprium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후 계속 ‘천사에게도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 열린 proprium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자기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반면 지옥적 proprium은 같은 자기감을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킨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라는 own이 속였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기감 자체가 본래 악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기감이 점점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실제로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생명처럼 붙잡기 시작했을 때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proprium 문제를 그렇게 무겁게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자기감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자기감 때문에 가장 깊이 미혹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나?’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된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own으로 놔두시지 굳이 ‘여자’로 만드셨어야 했나요? 처음 own으로 속는 거와 이 ‘여자’라는 나중 own으로 속는 거가 뭐가 다른가요?

 

 

바로 그 질문 때문에 창세기 2장과 3장이 그렇게 깊고도 두려운 본문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허무함’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결국 속을 거였다면 왜 굳이 vivify된 proprium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사실상 바로 그 지점을 오래 붙들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vivified proprium은 단순히 ‘속기 쉬운 개선판 자아’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인간이 단지 최초의 오리지널 proprium, 곧 죽어 있는 자기성 상태에만 머물렀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사랑하고 응답하는 존재는 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사랑은 강제로 주입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반드시 ‘내가 스스로 원한다’는 자기감(as if from himself)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여기서 vivified proprium이 등장합니다. 주님은 인간이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마치 자기 스스로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 있는 상호 관계 속 존재가 아니라, 거의 자동 기계 같은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의 죽은 proprium과 vivified proprium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죽은 proprium은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에는 진짜 천국적 사랑도, 자유로운 응답도 없습니다. 반면 vivified proprium은 주님의 생명이 통과하면서 인간 안에 살아 있는 자유와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 상태입니다. 즉, 인간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자유 때문에 타락 가능성도 함께 열린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모르셔서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전히 아시면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유 없는 선은 살아 있는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의 ‘여자’는 단순 타락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님과 실제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마지막 연결 구조입니다. 하지만 같은 구조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 삼기 시작할 때는 타락의 통로도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두려운 성격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own으로 속는 것’과 ‘vivified된, 여자라는 own으로 속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처음 죽은 proprium은 원래부터 닫혀 있고 생명 없는 자기성입니다. 그러나 vivified proprium은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허락된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후자의 타락은 단순 기계적 오류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 안에서 일어난 배반에 가깝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구속과 거듭남도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주님의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넘어질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넘어질 가능성까지 감수하시면서, 인간이 진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단순히 ‘실수할 수 없는 자동 순종 상태’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도록 형성된 존재들의 공동체가 됩니다.

 

 

 

AC.151, 창2:22,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주님’(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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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심화

 

1. 갈빗대라는 own 여자라는 own으로

 

그러니까 위 본문은 두 종류의 own, 즉 사람에게 두 종류의 own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 own,  갈빗대라는 own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중 own,  여자라는 own이 되었다는 말이죠?

 

 

네, 바로 그 뜻에 가깝습니다. AC.151의 흐름은 ‘두 개의 서로 독립된 proprium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 허락된 proprium의 상태가 점차 다른 방향과 성격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빗대’와 ‘여자’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실체라기보다, 하나의 proprium이 변화, 전개된 두 단계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처음의 proprium, 곧 ‘갈빗대’로 상징되는 것은 아직 비교적 수동적이고 미세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생기기 시작하는 단계이지, 아직 완전히 독립 선언을 한 상태는 아닙니다. 그래서 갈빗대는 몸에서 떼어낸 뼈처럼, 여전히 원래 생명 질서와 연결된 상태 안에 있습니다. 즉,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 아래 있으면서도, 인간 안에 자기감의 기초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자’로 표현될 때는, 그 proprium이 보다 적극적이고 자의식적인 구조로 나타납니다. 곧, 인간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고 응답하는 방향성이 더 분명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단순 보조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된 proprium의 살아 있는 구조를 뜻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곧바로 타락이나 악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AC 초기에서 스베덴보리는 계속 조심스럽게 설명합니다. 이 proprium은 처음에는 ‘as if his own’, 곧 ‘마치 자기 것 같은’ 것으로 허락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응답하기 위해 반드시 자기 자신처럼 느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갈빗대가 여자 되는 과정은, 자기감 자체의 형성과 성장 과정이라고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정리하신 표현, 곧 ‘처음 own인 갈빗대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중 own인 여자가 되었다’는 이해는 상당히 정확합니다. 다만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하면, ‘주님께서 허락하신 초기 proprium의 가능성이 점차 인간 안에서 더 살아 있는 자기성 구조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창세기 3장의 모든 긴장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proprium 자체는 처음부터 악으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proprium이 계속 주님께 열려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기 시작하느냐입니다. 즉, 갈빗대가 여자 되는 것 자체는 아직 질서 안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proprium이 자기중심으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타락의 방향이 열리게 됩니다.

 

 

 

AC.151, 창2:22,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주님’(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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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1

 

만드시고(build)는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입니다. ‘갈빗대(rib)는 아직 살아나지 않은 사람의 own을 뜻하며,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살아난 사람의 own을 뜻합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he brought her to the man)는 그 own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뜻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own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졌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으나, 다만 주님에 의해 살아난 own이었기 때문에 여자(woman)라 하였고, 이후에는 아내(wife)라 하였습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사건’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해 주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타락의 시작이나 단순한 보조적 존재의 창조로 보지 않고, ‘own에 대한 주님의 허락과 질서 부여’로 해석합니다.

 

먼저 ‘만드시고’로 옮긴 ‘짓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는 무에서 창조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운다’는 뜻입니다. 앞 단락들에서 인간은 자기의 own으로 기울어졌고, 그 결과 ‘갈빗대’, 곧 생명 없는 own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주님은 이 상태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build’입니다.

 

갈빗대’와 ‘여자’의 대비는 결정적입니다. 갈빗대는 살아 있지 않은 own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받은 own’입니다. 즉, 문제는 own 자체가 아니라, 그 own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own을 전혀 갖지 않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own을 갖되 그것이 주님에게서 살아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표현은, 이 살아난 own이 인간에게 실제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이는 시험이나 잠정적 상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허락된 상태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태고교회의 초기 조상들이 아니라, ‘그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천적 인간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요구를 즉시 파멸로 돌리지 않으십니다. own을 허락하시되, ‘여전히 주님에 의해 살아난 상태’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이 own은 ‘여자’라 불리고, 더 나아가 ‘아내’라 불립니다. 이는 질서 안에 있는 결합, 곧 이후에 나타날 외적, 내적 결합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이 단락은 매우 미묘한 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인도 욕망은 이미 위험을 내포하지만, 주님은 그 욕망을 즉각 제거하지 않으시고, ‘생명으로 감싸서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후 3장에서 드러날 긴장의 출발점입니다.

 

 

심화

 

1. 갈빗대라는 own여자라는 own으로

 

 

AC.151, 심화 1, ‘갈빗대’라는 own이 ‘여자’라는 own으로

AC.151.심화 1. ‘갈빗대’라는 own이 ‘여자’라는 own으로 그러니까 위 본문은 두 종류의 own, 즉 사람에게 두 종류의 own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처음 own, 즉 ‘갈빗대’라는 own이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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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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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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