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성막을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시설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로 읽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성막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성경 전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상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성막은 단순한 예표 정도가 아니라, 그 구조와 재료와 기구와 방향과 의식 하나하나가 천국과 주님,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상응하도록 주어진 거룩한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을 자세히 설명하는 출애굽기의 긴 기록은 불필요한 건축 설명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는 인간이 어떻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어떻게 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은 먼저 ‘미쉬칸’, 곧 장막을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고, 모세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인간이 힘겹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끊임없이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사랑과 진리를 끊임없이 흘려보내십니다. 문제는 주님이 멀리 계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거기서 나온 거짓들이 그 유입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의 ‘우리의 기도가 하늘까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계신 그분께 건네는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표현은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에덴을 설명하는 부분부터는 조금 더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아담을 ‘첫 번째 제사장’, 에덴을 ‘첫 번째 성전’으로 설명하면서, 창세기 2장의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성막 봉사에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연결합니다. 성경신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에덴은 무엇보다 실제 지리적 정원이나 최초의 성전 건물을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 곧 사랑과 퍼셉션을 통해 주님과 직접 교통하던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에덴이 ‘성전’이었다고 말한다면 건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의 내면 자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깊습니다. 성막은 잃어버린 에덴이라는 장소를 복원하는 모형이라기보다, 인간 안에서 무너진 천국의 질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과정을 표상한다고 보는 편이 스베덴보리에 더 가깝습니다.
영상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에덴 동쪽에 그룹과 불칼이 놓였고, 훗날 성막의 휘장에도 다시 그룹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쫓아내신 것으로 끝내신 게 아니라 돌아올 길을 다시 짜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연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단계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그룹은 단순히 화난 하나님께서 인간의 귀환을 막기 위해 세워 놓으신 경비병이 아닙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하여 그것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닫힌 길조차 심판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함에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는 것보다, 한동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오히려 구원의 섭리인 것입니다. 성막 휘장의 그룹 역시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것의 보호’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의 동쪽 문 하나를 강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제사장이든 평민이든 족장이든 이 문 하나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라는 교리적 공식으로만 읽기보다, 상응적으로 보면 더욱 풍성해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신분이나 지식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동쪽’은 주님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라는 자연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영계에서 천사들이 주님을 영적 태양으로 바라보는 질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막의 동쪽 입구는 단지 출입구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적 여정의 시작이 ‘주님을 향함’에 있음을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이르러서는 영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상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양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내 죄가 바로 그 순간 이 양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대속 신학에서 익숙한 설명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죄가 어떤 법적 실체처럼 한 존재에게서 다른 존재에게 이전된다고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 그리고 실제 삶에 속한 것이므로 다른 존재에게 법적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제물과 피는 죄의 물질적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사랑과 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정결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중심은 ‘죄인이 받을 형벌을 동물이 대신 받는다’는 데 있지 않고, 악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질서가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고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물두멍 역시 단순한 의식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물로 씻는 것은 말씀의 진리로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물은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의 진리에 상응합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감정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자신의 실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살피고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이 ‘깨끗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면 그 자리에서 씻기는 구조’라고 말한 것은 목회적으로는 따뜻한 표현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인간을 받아 주시지만, 받아 주신 인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으십니다. 성막의 길은 받아들임의 길인 동시에 정결과 거듭남의 길입니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등잔대와 진설병과 분향단이 등장합니다. 영상은 등잔대를 ‘나는 세상의 빛’, 진설병을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빛은 신적 진리를, 떡은 신적 선을 표상합니다. 인간에게 적용하면 등잔대의 빛은 이해를 밝혀 주는 진리이며, 떡은 의지를 살리고 영혼을 먹이는 사랑의 선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지혜’의 결합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도 아니고, 사랑만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랑과 지혜, 선과 진리가 주님 안에서는 완전히 하나이며,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도 이 둘이 다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향 역시 영상이 기도와 연결한 것처럼 성경에서 기도를 표상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단순히 인간의 말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향하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향기가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아름다운 문장을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선한 애정과 진실한 신앙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말없이 드리는 기도도 기도이고, 때로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는 것조차 주님을 향한 내적 애정이 있다면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지성소와 법궤에 대한 영상의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민족의 신전과 달리 이스라엘의 지성소에는 신상이 없고, 그룹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제한될 수 없는 분’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여기서 놀라운 전환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보이지 않는 신성을 ‘아버지’, 나타난 신적 인성을 ‘아들’, 그리고 그분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을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성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임재하시는 여호와와 복음서에서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신적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의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영상이 속죄소, 곧 카포렛 위에 피가 뿌려지는 장면을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보이는 건 깨어진 율법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피였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특별히 분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표현은 감동적이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실제 악은 그대로 두시면서 피를 보고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그런 법적 선언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시며, 다른 존재의 의를 인간에게 외적으로 덮어씌우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이 주님의 능력으로 악을 실제로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러므로 ‘덮음’이 있다면 죄를 감추어 하나님께 보이지 않게 하는 덮음이라기보다, 주님의 자비와 선이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속죄일의 반복과 그리스도의 ‘단번에’ 이루신 일을 연결하는 영상의 흐름 역시 히브리서에 충실한 전형적인 기독교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단번의 사건’을 형벌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성난 아버지를 달래거나 인간에게 내려질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들어오던 지옥의 세력을 직접 만나 싸우고 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 전체는 연속적인 시험과 승리의 과정이었으며, 십자가는 그 마지막 시험이자 마지막 승리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입으신 인간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속’과 ‘영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에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상의 장면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휘장은 단순히 하나님께 들어가는 법적 장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 사이의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동시에 인간이 주님의 신적 인성을 통해 신성에 접근할 수 있는 완전한 길이 열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인간은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를 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심으로 인간과 천국 사이의 질서를 회복하신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영상이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성막과 연결한 부분은 매우 좋습니다. ‘거하다’에 사용된 헬라어가 장막을 치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성육신 이해를 풍성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장막 가운데 임재하셨던 여호와께서 마침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흐름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잠시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가 벗으신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받은 유한한 인간적 요소를 시험과 승리를 통해 차례로 벗으시고, 그 자리에 자신 안의 신성으로부터 오는 신적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이전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신적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영상은 에덴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육신으로, 십자가에서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이 큰 방향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마지막의 ‘더 이상 성막이 필요하지 않은 날’은 단순히 먼 미래에 물리적인 새 지구가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그림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은 새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교회의 선과 진리 가운데 거하시며, 궁극적으로는 거듭난 인간의 내면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막의 완성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면, 성막은 ‘죄인이 피를 통해 법적으로 용서받아 하나님께 접근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을 보여 줍니다. 뜰에서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인간의 겉 사람에서 점점 더 깊은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여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놋에서 은으로, 다시 금으로 깊어지는 재료의 변화 역시 자연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다시 천적 차원으로 깊어지는 질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진리에 의한 정결이며, 등잔대의 빛은 신앙의 진리이고, 떡은 사랑의 선이며, 향은 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올라가는 예배이고, 가장 깊은 지성소는 주님과 인간의 내적 결합을 향합니다.
따라서 영상의 마지막 문장, ‘하나님은 멀리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던 겁니다’는 이 영상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건질 수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해 오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다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막의 목적은 우리가 잠깐 하나님을 방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주님의 거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 에덴에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안에 살았습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자 주님은 표상적인 성막과 성전을 통해 다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셨고, 마침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또 하나의 성막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마지막 질문은 ‘성막의 각 기구가 무엇을 예표하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이 거하실 성막은 어떻게 세워지고 있는가?’
성막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출애굽기의 낯설고 복잡한 치수와 재료와 기구와 의식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 시설의 설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그의 가장 깊은 속 사람까지 들어오시며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질서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나 제물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성막도 주님을 가리키고, 제사도 주님을 가리키며, 빛도 떡도 향도 법궤도 주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마침내 인간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결국 성막의 이야기는 ‘어떻게 죄인이 무서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가?’의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깊게는 ‘어떻게 주님께서 타락한 인간 안으로 다시 들어오셔서 그를 천국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 관점에서 보면 성막은 건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지도이고, 지성소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의 결합이며, 휘장이 열리는 것은 단순한 출입 허가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들어올 길이 다시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SY.16, 말씀나침반,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사탄을 창조했다’ (20260329)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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