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5:21)

 

AC.517

 

‘에녹’(Enoch)이라 하는 교회의 퀄러티는 이어지는 절들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The quality of the church “Enoch”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s.

 

 

해설

 

이 문장은 새로운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독자의 시선을 앞으로 이끄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름들을 통해 교회의 연속과 단계만을 간략히 언급해 왔다면, 여기서부터는 ‘에녹’의 교회가 지닌 고유한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즉, 단순한 나열에서 벗어나 ‘질적인 설명’으로 전환된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굳이 이 문장을 따로 적어 둔 것은, ‘에녹’이 태고교회의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교회들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쇠퇴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지만, 에녹의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어떤 것을 ‘보존하시는 섭리’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는 성급히 설명하지 않고, 다음 절들에서 차분히 그 성격을 풀어 갈 준비를 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문장은 말씀을 읽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보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며 흐름을 따라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그렇게 ‘기다리며 읽어야 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517은 태고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에녹이라는 전환점이 시작됨을 알리는 예고’입니다. 다음 절들에서 퍼셉션이 어떻게 보존되고, 교회의 생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게 되는지가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을 준비시키는 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교회를 의미합니다. By “Enoch,” as before said, is signified a seventh church; and by “Methuselah” an eighth.

 

 

해설

 

이 글은 짧지만, 창세기 5장 전체를 꿰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에녹’과 ‘므두셀라’를 단순히 앞선 이름들과 같은 선상에 두지 않고, 명확하게 ‘교회의 단계’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에녹을 ‘일곱 번째 교회’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이전의 흐름과 질적으로 다른 상태임을 분명히 하는 선언입니다.

 

앞선 여섯 단계, 즉 아담에서 야렛까지의 흐름은 하나의 큰 방향성을 공유합니다. 그것은 ‘퍼셉션이 점점 외적이 되어 가는, 그러니까 흐릿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주님과 직접 연결된 내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인간의 자의식, 외적 지식, 형식적 경건, 외적 생활 중심의 신앙으로 이동해 가는 과정이지요. 이 흐름은 쇠퇴이지만, 동시에 섭리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쇠퇴 자체를 막으시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보존하십니다.

 

그 보존의 결정적 형태가 바로 ‘에녹’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단순히 ‘야렛 다음에 나온 또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앞선 여섯 단계 전체를 수렴하고 정리하는 ‘별도의 교회’로 불립니다. 에녹은 ‘퍼셉션의 상태’라기보다, ‘퍼셉션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진리가 의식적으로 보존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사람들 전체가 직관적으로 주님을 아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 대신 진리가 정리되고, 저장되고, 훗날을 위해 보관되는 단계입니다.

 

이 점에서 에녹은 이전 교회들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앞선 단계들은 모두 ‘살았고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이는 그 상태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교회로 지속되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에녹은 이후 본문에서 ‘죽었더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에녹이 ‘종결된 교회’가 아니라, ‘보존된 교회’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므두셀라’를 여덟 번째 교회로 연결합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에녹을 특별한 예외처럼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에녹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에녹은 목적지가 아니라, 연결 고리입니다. 에녹이 진리를 ‘보존하는 교회’라면, 므두셀라는 그 보존된 진리가 실제 역사 속에서 ‘연장되고 지속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므두셀라가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기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장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 진리가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즉, 에녹을 통해 저장된 진리의 ‘씨앗’이, 므두셀라라는 단계에서 장기간 인류 안에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의 연장은 결국 노아의 교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AC.516은 단순한 주석 문장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창세기 5장이 ‘쇠퇴의 기록’이 아니라, ‘보존의 역사’임을 선언하는 열쇠 문장입니다. 인간의 퍼셉션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아는 교회가 끝날 때, 기억하는 교회를 일으키시고, 기억하는 교회가 위태로워질 때, 기록되고 보존되는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말하면, 에녹과 므두셀라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주님을 ‘자연스럽게’ 느끼지 못해도, 우리의 신앙이 형식적이고 외적으로 느껴져도, 주님께서는 그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진리를 보존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에녹의 상태라면, 우리는 ‘느끼지는 못해도 지키기는 하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므두셀라의 상태라면 ‘그 진리를 오래 견디며 다음 시대까지 넘겨주는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AC.515, 창5:19-20,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Jared lived after he begat Enoch eight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Jared were nine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he died. (5:19, 20)

 

AC.515

 

이 말씀의 의미 또한 앞서 나온 유사한 말씀들의 의미와 같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의 연령이 야렛의 경우 구백육십이(962) 년, 므두셀라의 경우 구백육십구(969) 년과 같이 그렇게까지 길었을 리 없다는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다음 장 셋째 절에서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는 대목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더 말씀드릴 내용들로부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해(years)의 숫자는 어떤 개인의 나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때와 상태들(times and states)을 의미합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also is similar to that of the like words above. That the ages of the antediluvians were not so great, as that of Jared nine hundred and sixty-two years, and that of Methuselah nine hundred and sixty-nine years, must appear to everyone, especially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at verse 3 of the next chapter, where we read, “Their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so that the number of the years does not signify the age of any particular man, but the times and states of the church.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6:3)

 

 

해설

 

이 글은 다시 한번 창세기 5장의 연령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짚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논쟁적으로 말하지 않고, 상식에 호소합니다. 야렛이 구백육십이(962) 년을 살았고, 므두셀라가 구백육십구(969) 년을 살았다고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 점을 굳이 길게 변증하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 제시된 해석 원리가 충분히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음 장에서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6:3)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점을 미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이것은 성경 자체가 문자적 연령 해석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만약 앞선 연령들이 실제 나이를 뜻한다면, 이 말씀은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연령을 교회의 상태와 때로 읽으면, 오히려 두 본문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여기서 다시 확인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해들의 숫자는 한 사람의 생물학적 수명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이 지속된 상태의 길이와 성격’을 말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표현은 생명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뜻이지, 육체가 오래 버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야렛이나 므두셀라의 ‘장수(長壽)는 교회의 어떤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선하든, 점차 쇠퇴하든, 중요한 것은 그 상태가 한동안 유지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숫자는 그 상태의 질과 지속성을 나타내는 언어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설명은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으로 신앙을 가늠하려 합니다. 신앙 연수가 길면 더 성숙할 것이라 기대하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시간 동안 어떤 상태가 유지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백 년이라도, 퍼셉션이 살아 있는 상태로 지낸 백 년과, 이미 생명이 약화된 상태로 지낸 백 년은 전혀 다릅니다. 창세기 5장의 숫자들은 바로 이 차이를 말하고자 합니다.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어떤 생명이 있었는가’가 본질입니다.

 

또한 이 글은 성경을 읽을 때 생기는 불필요한 논쟁을 조용히 정리해 줍니다. 연령의 역사적 정확성을 따지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그 연령이 가리키는 교회의 상태를 읽는 데 마음을 두라는 초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성경을 더 깊이 존중하는 방식으로 봅니다.

 

결국 AC.515는 앞서 반복해 온 원리를 다시 한번 단단히 고정합니다. 창세기 5장의 해와 연령들은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사를 기록한 언어입니다. 이 관점을 붙들 때, 이 장은 더 이상 낯선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퍼셉션과 사랑의 생명이 어떻게 이어지고 약화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깊은 기록으로 읽히게 됩니다.

 

 

 

AC.516,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C.516-517)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And Enoch lived sixty and five years, and begat Methuselah. (창5:21) AC.5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에녹’(Enoch)은 일곱 번째 교회를, ‘므두셀라’(Methuselah)는 여덟 번째

bygrace.kr

 

AC.514, 창5:18, ‘마할랄렐과 에녹 사이에 있는 야렛’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And Jared lived a hundred sixty and two years, and begat Enoch. (창5:18) AC.514 ‘야렛’(Jared)이라 하는 교회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격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