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4.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AC.154)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 own으로 주셨나요? 그리고 위 결과적으로라는 말은 왜 나왔나요? 모든 사람이 같은 출발선,  여자라는 새로운 own에서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요? 왜 누구는 흉측하고, 누구는 소년, 소녀’, 그리고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나요?

 

 

AC.154 AC 초반부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문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이다’,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표현은 처음 읽으면 거의 절망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own’은 단순 개성이나 자기감 전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먼저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첫 질문, “주님은 왜 이런 걸 사람의 own으로 주셨는가?”에 대해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사실 주님께서 ‘악 자체’를 인간에게 창조해 넣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자유로운 자기감(as if from himself)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사랑도 자유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기감을 점점 자기 독립 생명으로 굳히기 시작하면서, proprium은 주님께 열린 구조에서 자기 자신에게 닫힌 구조로 변질됩니다. 바로 그 닫힌 상태가 ‘악한 proprium’입니다.

 

즉, 원래 허락된 것은 살아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었는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중심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을 설명할 때 자꾸 방향성을 강조합니다. 주님께 열려 있는 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힌 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천사에게도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proprium입니다. 반면 지옥적 인간의 proprium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짚으신 ‘결과적으로(consequently)라는 단어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냥 “사람은 악이다”라고 툭 던지지 않습니다. 그는 논리 흐름을 만들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둔다면, 결과적으로(consequently) 인간은 악과 거짓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본래 독립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중심 삼는 순간 그는 점점 주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 결과 악과 거짓 안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결과적으로’는 단순 접속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 구조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왜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은 아주 깊은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여자’라는 vivified proprium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왜 어떤 영들은 흉측하고, 어떤 영들은 소년, 소녀처럼 보이며, 어떤 천사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인간은 모두 같은 ‘가능성 구조’ 안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방향으로 proprium을 사용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태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영계에서 외모는 단순 외형이 아니라 내면 사랑의 형태입니다. 자기 사랑과 지배욕 안에 굳어진 영은 점점 왜곡되고 흉측해집니다. 반면 주님께 열린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순수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 어린아이는 미성숙이 아니라, innocence,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최종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는 허락되지만, 그 자유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인간 존재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으로 굳어지고, 어떤 사람은 점점 주님께 열립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이 결국 영적 형상 전체를 만들어 냅니다.

 

즉, 같은 출발 구조는 주어졌지만, 같은 방향성과 같은 사랑은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바로 그 자유 안에서 자기 영원을 형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AC.154, 창2:22, own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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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22)

 

AC.154

 

악과 거짓은 언제나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며, 또한 사람의 own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영들의 세계에서 사람의 own에 속한 것들이 눈앞에 제시될 때, 그것들이 말로 묘사하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흉측하게 보인다는 점에서 나에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다만 own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어, own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살아난 사람의 own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특히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보이며,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꽃으로 엮은 화환이 가슴을 두르고 머리에는 관이 씌워진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에 대한 퍼셉션을 지니고 있습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own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진술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단락’에 속합니다. 이 단락은 인간론의 바닥을 끝까지 내려갔다가, 곧바로 구원의 가능성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한 치의 완화도 없이 선언합니다. 악과 거짓은 오직 사람의 own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동 일부가 악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own 자체가 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극단적으로 들리는 문장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을 비하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이 전제는 영들의 세계에서의 시각적 경험으로 뒷받침됩니다. own이 그대로 드러날 때, 그것은 가장 흉측한 형태로 보이며, 그 모습을 본 당사자조차도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흉측함이 ‘’이나 ‘정죄’의 결과가 아니라, ‘own의 본질적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의 생명이 덮이지 않은 own은 그 자체로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단락의 후반부는 방향을 완전히 바꿉니다. 동일한 ‘own’이라 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될 때’ 그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것은 더 이상 흉측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변화는 own이 제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체어리티와 순진함의 상태가 묘사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합니다. 체어리티로 살아난 이들은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 순진함 안에 있는 이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무력함이나 결핍의 상징이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상태’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음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이유는, own을 자기의 것으로 붙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분위기’, ‘가장 깊은 곳에서의 퍼셉션’이라는 표현은, 이 상태가 감정적 만족이나 외적 평안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서 오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이는 앞서 AC.92에서 말한 ‘평화의 고요’와도 정확히 상응합니다.

 

AC.154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own은 본질상 악이지만, 주님의 생명이 그것을 덮을 때, 동일한 own이 천국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핵심은 own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own을 주님께 내어드려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통찰은 이어지는 AC.155에서, 여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언어로 넘어가며, 또 다른 긴장을 불러오게 됩니다.

 

 

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AC.154, 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AC.154.심화 1. ‘사람의 own은 악 그 자체다’ 사람의 own은 곧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악과 거짓 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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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여자를 ‘만드시고’를 'build'라 하시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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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심화

 

2. ‘31:4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이 구절이 AC.153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타락과 황폐 이후에도 인간 안의 교회적 상태를 다시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AC.153의 중심 흐름은, proprium 때문에 무너진 인간 안의 천적 질서와 퍼셉션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재건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31:4는 바로 그 회복의 약속을 가장 따뜻하고 인격적인 언어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31:4에서 처녀 이스라엘’은 단순 민족 국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스라엘은 교회, 곧 진리와 주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처녀(virgin)는 아직 순수성과 수용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완전히 닫혀 버린 상태가 아니라, 다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교회 상태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다’입니다. 이것은 단순 외적 회복이나 민족 재건을 넘어서, 인간 안의 영적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거듭남은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것과 같습니다. proprium 중심으로 흩어진 인간 안의 생각과 사랑과 삶의 구조가, 다시 주님 중심 질서 안으로 재배열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앞의 사61:4와 흐름이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황폐한 도시와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운다고 했다면, 여기서는 그 회복이 더 인격적 관계 언어로 표현됩니다. 즉, 주님께서 단순 시스템을 복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과 다시 관계를 맺으시고, 그 존재를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소고를 들고 춤추며 나오리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춤과 기쁨은 단순 감정 폭발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루며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회복은 단순 죄 사함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다시 살아 있는 기쁨과 질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53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타락과 proprium으로 인해 무너진 인간 안의 교회 상태와 영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수 없지만, 주님은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듭남의 시작은 인간의 자기 재건이 아니라, 주님의 재건 역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깊은 위로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이 무너질 가능성을 모르고 자유를 허락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너질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과 자유를 허락하셨고, 동시에 그 무너짐 이후에도 다시 세우시는 길까지 준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AC.153의 이 흐름은 단순 심판 이후가 아니라, ‘재건하시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AC.153, 심화 1, ‘사61:4’

AC.153.심화 1. ‘사6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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