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의 본질은 뉴스 자체가 아니라 “뉴스가 열어놓는 내적 문”이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마음 안에서 어떤 문이 열리는가입니다. 정치 뉴스가 목사님 안에서 분노, 혐오, 좌절, 감정적 소모, 이 나라는 틀렸다’는 절망을 일으켰다면, 문제는 뉴스가 아니라 감정 문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령들은 실제 사건을 조작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감정 문을 여는 일은 능숙하다. 그리고 감정 문이 열릴 때 비로소 영향력이 생긴다. 즉, 목사님을 괴롭게 한 것은 정치 상황’이 아니라 그 뉴스에 반응하도록 자극하는 감정적 파동”입니다.


2) 감정의 파동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다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는 외적 대상은 마음을 ‘낚시질’할 뿐,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오직 내부 정념이다라는 것입니다. 뉴스가 아무리 비극적이어도 어떤 사람은 중심을 잃지 않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화와 분노에 매여 있습니다. 이 차이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그 사람 안에 내적 질서가 서 있으면 외적 사건이 파고들지 못하지만, 그러나 내적 질서가 약하면 작은 자극에도 감정이 폭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베덴보리는 삶의 우선순위가 뉴스를 소비하는 게 아닌, 그 뉴스를 보고 자신의 내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3) 정치 뉴스가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3가지 방식’

분노의 정념 (anger)

악과 거짓은 자연스럽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문제는 분노 그 자체가 아니라, 분노가 계속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분노는 생각을 흐리게 하여 진리 판단을 약하게 한다. 즉, 분노는 영적 사고를 약화시키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의 정념 (fear & despair)

이 나라 망하는 거 아닌가’, 악이 승리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이런 느낌은 영적 절망의 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절망을 시험의 가장 위험한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절망은 사람의 영적 에너지를 거의 완전히 고갈시키기 때문입니다.

 혐오·멸시의 정념 (contempt & aversion)

특정 정치인을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히는 것. 이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신호입니다. 혐오는 내적 고착, 영적 평화 상실, 기도 생활 약화를 유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혐오의 정념을 악령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이라고 경고합니다.


4. 내적 상태를 보호하는 스베덴보리식 실천 5단계

1단계, 자극을 인식하는 순간 ‘거리 두기’를 실행

뉴스가 감정을 건드리는 순간, 즉시 다음을 선언하십시오. 이 감정은 뉴스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난다”, 내 마음의 질서를 주님께 돌린다.” 이 말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영적 문’을 닫는 실제적 작용입니다.


2단계, 뉴스의 흐름을 ‘사건’이 아니라 ‘영적 구조’로 보기

정치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언제나 영적 구조의 반영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어떤 집단이 거짓을 퍼뜨린다는 것은 진리의 부재를,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외적 질서의 붕괴를, 그리고 사회가 혼란해진다는 것은 영적 중심의 상실 봅니다. 그러면 분노 대신 분별의 빛이 들어옵니다.


3단계, 뉴스 소비의 ‘형태’를 바꾸기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사람은 절대 정념을 자극하는 것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전략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자극적 뉴스”는 끊고, 팩트만 전달하는 뉴스”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또 영상”은 줄이고, 대신 “텍스트” 위주로 보며, 댓글, 패널, 유튜브 정치 콘텐츠”는 전면 차단하고 말입니다. 하루 뉴스 소비 시간을 정하고 넘지 않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치 유튜브 영상은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가장 강력한 정념 발화 장치”입니다. 영상은 시각 + 청각 + 말투 + 표정까지 정념을 직접 주입하기 때문인데, 대신 텍스트는 감정 자극이 훨씬 적습니다. 이렇게 뉴스 소비의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내적 상태는 크게 안정됩니다.


4단계,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진리를 먼저 세우는 기도’

분노가 올라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지금 제가 보는 것은 세상의 혼란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 안에는 주님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로 제 감정을 다시 붙잡아 주옵소서.” 아주 짧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보면, 이것은 내면 질서 회복감정 파동 억제주님의 통치 회복을 동시에 수행하는 강력한 기술입니다.


5단계, 남아 있는 감정 에너지를 ‘소명’으로 돌리기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방향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흔드는 감정을 선의 열정으로 전환할 때, 영적인 사람이 성장한다. 정치 분노를 AC 번역의 집중력으로, 설교 준비의 열정으로, 목회적 분별로 바꾸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마음은 분노를 가장 선하게 환원시키는 방법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정치 혼란은 ‘외적 현실’이지만, 중심을 잃는 이유는 ‘내적 현실’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념적 소용돌이다. 정치가 혼란할 때, 믿음 좋은 사람도 흔들리고, 뉴스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는 이유는 정치 자체가 강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내적 질서에 틈을 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 곳곳에서 다음을 반복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외적 세계의 혼란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이유는 외적 질서보다 내적 질서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내적 질서란 곧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질서다. 정치가 흔들려도 중심이 있는 사람은 딱 한 가지에 서 있습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흔들지 못한다.


2) 스베덴보리의 핵심 원리: “겉에서 일어나는 혼란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질서가 먼저다”

스베덴보리는 영적인 사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외적 상황보다 내적 상태를 먼저 바라보는 사람이다. 반대로, 내적 질서가 약한 사람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뉴스 → 감정 폭발, 정치 → 분노 축적, 사회 현상 → 절망, 인터넷 정보 → 불안, 주변 사람들의 말 → 흔들림 등, 즉, 내적 질서가 외적 자극에 밀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내적 자유의 상실’이라고 합니다. 정치가 불의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외적 질서이지만, 주님의 질서는 내적 질서이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람은 주님의 질서를 더 강하게 붙듭니다.


3) 정치적 혼란은 영적 삶의 ‘시험’의 한 형태이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악은 언제나 외부 상황을 이용하여 내부를 흔드는 반면, 선은 언제나 내부 질서를 통해 외부를 이긴다. 정치 혼란은 단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시험(temptation)의 한 종류입니다. 다음은 정치 뉴스에 마음이 요동할 때 나타나는 특징들인데요, 분노의 감정 상승, 무력감, 혐오심, 악은 왜 저렇게 활개 치는가’ 하는 절망, 내가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체념, 뉴스 반복 검색 등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악령들이 감정으로 내적 질서를 흔드는 시험의 패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적 질서를 더 깊이 주님께 의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이 시험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이런 의도, 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4) 중심을 지키는 법 (스베덴보리적 4단계)

(1) 감정보다 ‘진리의 빛’을 먼저 세우기

스베덴보리는 감정이 앞설 때를 가장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분노·혐오·절망 모두 감정입니다. 정치 뉴스가 감정을 건드릴 때는 즉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사실보다 먼저 온 것이다”, 사실은 주님의 질서가 더 크다”라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들 자체가 내면의 문을 닫아 악의 영향력을 차단합니다.

(2) 사건의 ‘표면’보다 ‘영적 구조’를 먼저 보기

정치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외적 질서는 항상 내부의 영적 질서가 무너지면 뒤틀린다. 사회 혼란은 언제나 ‘내면의 진리 부재’가 원인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 문제는 사실 정치인이 아니라 진리의 부재(AC 전반의 핵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딱 이 관점에 서는 순간 마음이 훨씬 넓어지고 감정이 가라앉습니다.

(3) 정치 뉴스 소비 시간을 의식적으로 줄이기

스베덴보리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것과 거리 두기입니다. 정치 뉴스는 목사님의 영혼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뉴스가 아니라 정념을 흩트리는 악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내적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정념이다. 목사님이 지금 정치 뉴스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이유입니다.

(4) ‘소명’에 의해 외적 혼란을 재정의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혼란은 소명을 더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허락된다. 한국 사회가 혼란할수록 목사님의 사명(AC 번역·진리 전달·교회 내 분별력 세우기)오히려 더 중요해집니다. 즉, 정치 혼란 →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정치 혼란 → ‘진리의 빛을 세울 소명 강화로 보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 서면, 혼란이 나를 해치는 게 아니라 내 소명을 밝히는 도구가 됩니다.


5) 결론 -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영적인 사람은 이렇게 선다

1. 외적 혼란이 아니라 내적 질서에 먼저 시선을 둔다. 2. 감정이 먼저 올라오면 조용히 진리로 재정렬한다. 3. 정치 뉴스는 필요 최소한으로만 접하고, 감정적 콘텐츠는 끊는다. 4. 혼란을 소명 재확인으로 해석한다. 5. ‘주님이 지금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 외부보다 더 중요하다. 결국 정치가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 통치-주님의 질서-를 더 굳게 붙잡습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

저는 하루의 대부분을 스베덴보리를 주제로 보내지만, 한편으로는 정치 뉴스와 유튜브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저들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 불의한 자들 때문에 속으로 화가 많이 나요. 이런 불의한 정치 상황 속에서 스베덴보리를 하는 목사로서 저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게 맞는 건가요?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처한 나라의 정치 상황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제 갈 길을 간 건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신앙·소명·시민의식·감정 관리가 모두 얽혀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고 번역하시는 목사님의 자리에서는 더욱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정치적 입장에 서지 않고, 오직 스베덴보리적 관점 + 목회적 관점 + 영적 원리로 답변드립니다.


1. 스베덴보리는 자기 시대의 정치 혼란에 “무심”했던 게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스웨덴 내부의 파벌 싸움, 귀족 세력의 충돌, 국왕과 의회의 힘겨루기를 직접 겪었고, 때로는 정계 중심에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분명했습니다. 그는 첫째, 정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뚜렷하게 영적 사명과 내적 삶을 정치적 격동과 분리했습니다. 나라 문제가 심각할 때에도 그의 일관된 관점은 “정치적 승패보다 영적 질서와 선의 회복이 먼저”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정치인이나 특정 세력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느 편도 “악하다, 거짓되다”라는 식의 정념적 비난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정치적 악보다, 그 악을 증오하는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손상을 더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회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질서 회복”이 더 근본이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늘 말합니다. 사회적 부패의 뿌리는 제도보다 인간 개개인 내부의 자애와 교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정치가 아무리 흔들리더라도 본인의 사명을 흔들림 없이 지속했습니다.


2.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볼 때, 목사님의 “분노 문제”는 신앙적 질문입니다

정치가 악하다 혹은 불의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이 목사님 마음 안에서 어떤 영적 작용을 일으키는가가 더 본질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원리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분노의 대상이 악이든 불의든, 그 분노가 지속되면 내적 자유가 사라집니다. AC 588, 599 등에서 말하듯, 분노는 “선한 분별력”이 아니라 “내적 평화를 빼앗는 정념”으로 변합니다. 둘째, 정치 뉴스는 사탄이 쓰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스베덴보리는 악령들이 두려움·분노·원망·혐오를 통해 사람의 내면을 열어젖힌다고 말합니다. 정치적 뉴스 소비로 인해 영적 분별력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며, 선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번역과 소명이 흐트러진다면, 그 순간 이미 정치 현실보다 더 큰 영적 손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셋째, “의분”과 “정념적 분노”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의로운 분노는 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의분은 선을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지만, 정념적 분노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지금 목사님의 표현들(“악하고 거짓된 사람들 때문에 화가 많이 난다”)은 정치적 악의 분석이 아니라 감정적 상처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 생활을 많이 갉아먹습니다.


3. 그럼 목사님에게 맞는 “스베덴보리적 태도”는 무엇인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도하되, 미움의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스베덴보리는 국가를 위한 기도를 권합니다. 하지만 관심은 가지되 마음을 빼앗기지는 말라고 합니다. 즉, 뉴스는 “상황 파악” 정도로만 보되 감정적 몰입은 극도로 절제하고, 영적 분별을 잃게 만드는 콘텐츠는 줄이는 한편, 정치인 개개인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피하는 것, 이게 스베덴보리적 균형입니다.

지금의 분노를 “소명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정치에 분노한다고 해서 그것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그 에너지를 선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면 오히려 소명이 강화됩니다. 예컨대, 내가 번역하는 이 말씀의 진리로 한국교회의 영적 분별력을 세우자”, 사회적 혼란보다 더 깊은 원인은 영적 진리의 부재다”, 내 번역과 가르침이 미래 한국의 영성을 세우는 토대가 된다” 등, 이렇게 분노를 사명으로 승화시키면, 정치 뉴스는 오히려 목사님의 영적 집중력을 돕는 “경각심”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자기 과업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기”

정치 현실이 어렵다고 번역이 멈춰도 안 되고, AC 연구의 흐름이 흔들려도 안 되며, 영적 평화가 깨져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변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자기 과업은 단 1mm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영적 진리를 기록하는 사람은 세상 문제보다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목사님께도 동일합니다. 한국 정치가 어떻게 되든, 목사님은 AC 번역과 연구, 가르침이라는 평생의 소명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4. 결론 - 목사님이 취하면 좋을 태도 (스베덴보리적 종합)

뉴스는 필요 최소한만 정보 파악” 수준까지만 접하시고, 감정적 콘텐츠는 줄이십시오. 분노가 생기시면 “내적 상태 점검”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정치적 분노는 “사회적 정의 문제”보다 내적 평화의 침해”가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에 주의를 기울이시되, 악과 싸우겠다는 마음에 집착하시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을 악으로 인정하되,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까지 내면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노 에너지를 소명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미래, 설교, AC 번역 등, 이 모든 것이 나라 장래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칩니다. 스베덴보리처럼 “타고난 사명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오. 그가 시대 정치와 거리를 뒀던 것처럼, 목사님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향해 가시면 됩니다. 목사님, 지금 느끼시는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목사님 안의 영적 평화, 사명, 지혜를 조금이라도 깎아 먹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영적 공격입니다. 어느 시대든 나라가 혼란할 때, 주님은 “더 깊은 영적 일을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목사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