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12. ‘검색이 없던 시절

 

스마트폰, PC가 없어 검색이라는 걸 할 수 없었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어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목사님 같은 의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성경 전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해설하다가 갑자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신명기, 복음서를 넘나들며 몇 구절씩 정확하게 끌어오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검색도 없던 시대에 이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선 가장 현실적인 답부터 말하자면, 스베덴보리는 당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평생 독서와 연구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대학 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성경과 고전 문헌 연구에 쏟아부은 사람입니다. 당시 학자들은 지금처럼 검색창에 입력하는 대신, 중요한 구절들을 직접 필사하고, 주제별로 정리하고, 머릿속에 축적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 자체가 현대인보다 훨씬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특히 성직자나 학자들은 성경을 반복해서 읽고 암송했습니다. 실제로 17, 18세기 유럽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의 상당 부분을 암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 정도의 독서량과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정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왜냐하면 AC를 읽다 보면 단순히 많이 외운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상응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여러 권에서 같은 상응을 가진 구절들을 정확하게 모아 오는 모습을 보면, 단순 암기 이상의 체계성이 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가 평소 만들어 두었던 방대한 노트와 색인(index)을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학자들은 오늘날 데이터베이스 대신 공통 주제집(commonplace book)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 ‘’, ‘’, ‘’, ‘’, ‘ 같은 주제를 적어 두고, 관련 구절들을 계속 정리하는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비슷한 작업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자신의 입장에 서면 또 다른 설명이 나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천사들과의 교통 가운데 말씀의 내적 의미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천사들에게서 성경 구절 번호를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먼저 성경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 그 위에서 내적 의미가 열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실제로 AC를 읽어보면 스베덴보리는 천사가 내게 이 구절을 알려주었다’기보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숙련된 음악가가 악보를 보며, 곡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하듯, 그는 말씀 전체 안에서 상응의 연결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 체험을 27년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천사들이 모든 것을 즉석에서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방대한 본문 인용과 문헌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AC를 보면 그는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성경 본문을 대조하고, 단어를 분석하고, 상응을 추적합니다. 즉 영계 체험이 그의 학문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학문과 성경 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느 성경 몇 장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원래부터 비범한 학자적 기억력과 평생의 성경 연구 때문이었고, 둘째, 방대한 노트와 색인 작업 때문이었으며, 셋째, 영계 체험을 통해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성을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해 구절을 찾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검색’을 하지만, 그는 기억’하고, ‘연결’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마치 성경 전체가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색 능력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내면에 살아 있었던 상태 말입니다.

 

 

 

AC.212, 창3:7, ‘interior dictate’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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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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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구절은 귀머거리와 맹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상태에 관한 예언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단순히 육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말을 듣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 말씀을 가리키며, 따라서 듣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도 육체적 시력 회복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어둠과 캄캄함은 영적으로는 무지와 거짓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사람이 이제 보게 된다는 것은, 이해가 열려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맹인’은 단순히 육체적 장애인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구절을 AC.212에 인용합니다. 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도 맹인의 눈이 본다’는 말은 이해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3:7 역시 같은 원리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와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해를 밝히실 때, 이전에는 어둠으로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의 소리가 마음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AC.212 전체의 논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역할도 합니다. 발람의 눈이 열린 사람’, 요나단의 눈이 밝아졌다’, 다윗의 눈을 밝히소서’, 에스겔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사야의 눈을 감기게 하라’, 모세의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까지 모두 하나의 원리를 증언합니다. 곧 말씀에서 ’은 이해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12에서 사29:1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표현이 이해의 계몽과 진리의 인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 역시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이해가 열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것을 뜻한다는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가 말하는 맹인의 눈이 본다’는 것은 단순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약속인 것입니다.

 

 

 

AC.212, 심화 10, ‘사42:7’

AC.212.심화 10. ‘사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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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이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며, ‘눈을 밝힌다’는 것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영적 이해를 열어 진리를 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실제 맹인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기적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 단지 맹인의 시력 회복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어지는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표현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눈먼 자’는 육체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감옥’과 흑암’은 거짓과 무지 안에 갇혀 있는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전체는 주님께서 인간을 무지와 거짓의 상태에서 건져 내어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사역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AC.212에서는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이 단순한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말씀은 의학적 치유의 의미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 이해를 열어 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다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이 구절은 AC.211 interior dictate’와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3:7에서 사람들은 아직 남아 있는 퍼셉션의 흔적에 의해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친히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즉 이해를 밝히시고, 진리를 보게 하시며, 거짓의 감옥에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의 이 예언은 복음서에서 실제로 성취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맹인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영적 의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이해의 눈을 뜨게 하시는 더 큰 사역을 보여 주는 상응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AC.212에서 사42:7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 전체에서 ’이 이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힌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던 사람들의 이해를 열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3:7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도 직접 연결됩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단순한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서 자신의 상태와 진리를 보게 되는 영적 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11, ‘사29:18’

AC.212.심화 11. ‘사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듣는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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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2, 심화 9, ‘신29:4’

AC.212.심화 9. ‘신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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