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335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이 상징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이 신앙을 (Seth)이라 합니다. (25)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324-334가 주로 ‘가인’으로 시작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AC.335부터는 그 종말 가운데서 주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를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바로 ‘셋’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새로운 신앙’입니다.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핵심은 신앙 자체에 있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앞세운 신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중요한 것으로 높였고,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신앙이며, 더 정확하게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느냐에 있습니다.

 

원문의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의 목적이 신앙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신앙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종착지가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태고교회 최초의 천적 인간에게는 본래 이러한 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여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곧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가 타락하면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은 최초의 태고교회 상태로 단순히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퍼셉션을 잃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의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35는 우리가 앞서 ‘가인의 표’를 다루면서 제기했던 질문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가인의 신앙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AC.330에서 그 이유는 ‘후에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에서 바로 그 일이 나타납니다. 가인적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길을 보존하셨기 때문에, 이제 ‘셋’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인의 표’와 AC.335의 ‘셋’은 서로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라멕을 다루면서 가졌던 의문에도 답을 줍니다.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면,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던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AC.335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교리적 계열에서는 신앙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향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는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입니다.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 질서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서 창4의 ‘셋’을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가인이 태어나고, 가인의 여러 후손이 이어진 뒤, 라멕과 그 자녀들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가 다시 셋을 낳는 것처럼 서술됩니다. 그렇게만 읽으면 가인 계열의 여러 세대가 모두 지나간 뒤에야 셋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셋은 단순히 ‘가인 계열이 끝난 뒤 역사적으로 등장한 한 사람’이라는 시간순의 의미보다, 가인으로 상징되는 분리된 신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신앙의 계열이 주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데 중심이 있습니다.

 

특히 창4:25에서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므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로 주어진 셋은 단순히 죽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또 하나의 아들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이후,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마련하신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래서 ‘셋’이라는 이름 자체가 교회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억지로 과거로 돌려놓지 않으십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상태가 이미 상실되었다면, 그 상태를 강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졌지만,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계속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적응과 섭리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셋’이 곧 홍수 이후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 시대 안에 있으며, 태고교회의 남은 계열 가운데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후 창5에서 셋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 역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다가 결국 홍수라는 종말에 이릅니다. 그 후에야 ‘노아’로 의미되는 고대교회가 일어나며, 그때에는 퍼셉션 대신 양심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과 ‘노아의 새로운 교회’를 구별하면서 읽어야 창4와 창5, 그리고 창6 이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분명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이미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어떤 것인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고백하는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자기 자신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는지, 삶을 선으로 이끄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셋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이지만 내적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신앙을 위하여 체어리티를 희생시키는 신앙’이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종속되지만, 후자에서는 신앙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수단이 됩니다. 신앙이 자신을 높이면 가인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면 셋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이야기는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이고, 셋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가인인가, 셋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신앙의 증거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 말씀과 교리가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신앙이 나를 다른 사람보다 옳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끄는가? 바로 이런 질문 앞에서 가인과 셋은 과거의 두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도 갈라지는 두 종류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 AC.334에서 우리가 오래 붙들었던 문장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진리가 자기 입장을 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신앙은 결국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위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셋의 신앙은 진리가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도록 자신을 내어줍니다.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세우는 신앙과,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5는 가인 계열의 어두운 이야기를 지나온 뒤 처음으로 매우 분명한 회복의 빛을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체어리티를 향한 주님의 뜻은 죽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너진 자리에서도 인간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여 다시 선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셋’은 바로 그 회복의 길을 의미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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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에서 ‘폭력을 가한다’는 말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신앙이나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니므로 어떻게 그것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억누르고 파괴하며, 더 나아가 자기의 악과 거짓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훨씬 심각한 것입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부터 살펴보면 이 차이가 잘 보입니다. 처음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고, 주님께서는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가인의 표’로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계속 발전하면서 체어리티는 소멸되고, 교리는 왜곡되고, 거기에서 다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4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제는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혀 모른다면,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가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 자체를 비틀어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제 그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진리를 자기 악에 복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폭력을 가한다’는 말에 훨씬 가까운 상태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과 진리를 알고도 거짓으로 바꾸는 것은 다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이용하여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욕망이나 권력,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고, 신앙의 언어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며, 하나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높인다면, 신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안의 진리는 거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붙잡아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속한 것에 가하는 영적인 폭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핵심에는 ‘질서를 뒤집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진리를 자기 악에 맞추어 바꾸면, 이제 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본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는데, 가인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섭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나중에는 신앙 자체도 왜곡됩니다.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마지막에는 ‘지배와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4:23의 라멕의 말이 바로 이것을 표상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여기서 사람과 소년을 죽이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한 살인 사건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세밀하게 다루게 되겠지만, 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죽인다’는 것이 곧 교회 안의 선과 진리라는 생명을 잃게 하는 영적인 폭력이라는 큰 그림을 먼저 붙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한 악보다 더 심각한 ‘모독’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이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을 모르면서 악을 행하는 것과 말씀을 붙들고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인간의 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혀 버립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34는 이것을 ‘그 모독이 극에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교회 차원에서 생각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체어리티가 약해졌다는 것과, 체어리티를 오히려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교회에서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교회의 권력이나 명예,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 전자는 쇠약이나 무지일 수 있지만, 후자는 선과 진리에 적극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악을 악이라고 지적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선과 진리의 본래 기능이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말씀을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합리화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AC를 많이 읽고 속뜻을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자신의 악을 보게 하고 고치게 하는 대신 ‘나는 남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우월감과 자기 사랑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는 proprium을 낮추기 위해 주어졌는데, proprium이 오히려 진리를 자기 것으로 붙잡아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아주 미세한 형태에서 시작되는 ‘진리에 대한 폭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분리에서 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되자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고, 신앙 자체가 사라지며, 마침내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자기 악과 거짓에 복종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바로 이것이 AC.334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표현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극에 이르렀을 때, ‘아다와 씰라’로 상징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 교회가 단순히 약해진 정도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안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회복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꺾어 이전 교회를 되돌리는 대신, 그 종말 가운데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결국 AC.334에서 말하는 ‘폭력’은 한 교회가 왜 종말에 이르고,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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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 교회가 이전 교회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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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 교회가 이전 교회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달했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여러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섭리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한 교회의 내적 생명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버리고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십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끝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일부러 이전 교회를 타락하게 하신 뒤 새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타락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proprium에서 비롯됩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모독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면 그 상태를 강제로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강제로 되돌린다면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파괴되고, 거듭남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그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허용의 한계 안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교회의 씨앗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종말은 인간이 만들어 내지만,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에서 AC.334는 앞에서 나눈 ‘가인의 표’에 관한 질문에도 다시 빛을 비춰 줍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특정 계열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 계열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모두 소멸시키고,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하는 극도의 상태에 이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더 큰 섭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상징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계열 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거의 소진되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 안에서 교회의 생명을 계속 보존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새 교회도 결국 라멕에서 나온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계보와 가족관계는 속뜻으로는 교회와 교리의 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적 가족관계를 그대로 영적 인과관계로 옮겨 ‘라멕의 악에서 새 교회가 태어났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은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동시에 존재하게 된 새로운 교회의 상태를, 가족과 계보라는 표상적 이야기 속에 함께 담아 보여 주고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아다와 씰라 계열이 ‘썩 괜찮아 보이는’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라멕의 타락을 계속 확대하는 또 하나의 이단 계열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새로운 교회’라고 부르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에게서 다시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긍정적인 의미는 우연한 예외가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교회 역시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큰 시대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홍수 이후 ‘노아’로 시작되는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과정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교회이며, 노아는 그 옛 천적 질서 자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된 뒤 시작되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앞서 정리한 것처럼,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나고, 주님께서는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 시대를 준비하십니다.

 

결국 AC.334의 핵심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된 바로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주님의 섭리에서는 반드시 모든 것의 끝은 아닙니다. 이전 교회의 생명이 끝날 수는 있지만, 교회 자체를 향한 주님의 뜻은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심지어 그것들에 폭력을 가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그러므로 AC.334는 교회의 가장 어두운 종말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종말보다 언제나 더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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