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2.심화
6.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 구절을 AC.212에서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단순한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 말씀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분명 눈이 있었고, 실제로 사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귀도 있었고,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다’와 ‘듣다’는 육체적 감각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이해와 수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눈으로 말씀을 읽을 수 있고, 귀로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입으로 신앙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닫혀 있고, 의지가 거부하고 있다면, 영적으로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의 백성들은 육체적으로는 정상인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맹인과 귀머거리였습니다.
이것은 AC.211의 ‘interior dictate’와도 연결됩니다. 창3:7에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는 이해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겔12:2의 사람들은 눈은 있으나 이해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 즉 한쪽은 내적 인식이 열리는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내적 인식이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본문은 그 이유를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고 밝힙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지능 부족이 아닙니다. 정보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진리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보게 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AC.212에서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만일 눈이 단순히 육체의 기관만을 의미한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이 이해를 의미한다면 이 말씀은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으로는 보았지만, 이해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겔12:2를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눈’이 이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창3:7의 ‘눈이 밝아져’도 육체적 시력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이며, 자신들의 상태를 인식하게 된 내적 자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백성들은 눈이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창3:7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상태를 보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AC.212, 심화 5, ‘나의 눈을 밝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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