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6, 17)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입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해설

 

이 글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가장 섬세하면서도 결정적인 경계선을 그어 줍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을 누리되 소유하지 않는다고 언급되었습니다. AC.80은 그 누림의 방식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서부터 무너지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즉, 문제는 ‘아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디,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아는 건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아는 지식 얻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허락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 지식은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앎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인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지 않고, ‘받아 인식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이라는 말이 다시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퍼셉션은 자기 내부에서 조합해 낸 결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이미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를 따져 묻지 않고, ‘이것이 선하다’는 것을 봅니다. 그의 앎은 판단 이전의 앎이며, 논증 이전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경고합니다. 이 지식이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질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은 곧 겉 사람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서 시작되는 앎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 기준’을 낳습니다. 이때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주님의 것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 되고,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이 경고는 더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the thing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외적 경험의 세계이고, 기억-지식은 그 경험을 축적한 정보의 창고입니다. 이것들은 본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때는 치명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신비는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비를 재단하려는 순간, 인간은 주님 위에 서서 신앙을 해부하려 들게 됩니다. 이때 순서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아니라, 인간의 빛으로 주님을 비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그의 천적 본성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도덕적 처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천적 본성은 ‘관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관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앎이 아니라, 앎으로 사랑을 통제하려는 순간, 천적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창2:16-17의 금지 명령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게 만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은, 지식을 얻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점을 바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중심의 판단으로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천적 상태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이는 한 번의 행동이 아니라, 앎의 방식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에덴동산 이야기는 더 이상 도덕적 시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모든 방식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질서 안에 있을 때만 자유’입니다.

 

AC.80은 그래서 아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파헤쳐질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할 대상’이라고 말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이 제자리를 지킬 때, 그것들은 삶을 돕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왕좌에 앉는 순간, 천적인 생명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됩니다.

 

 

 

AC.79, 창2:1-17 개요, '동산은 주님의 것'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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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에덴동산의 모든 이미지와 구조를 하나의 핵심 원리로 수렴시키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AC.77AC.78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질서 있게 묘사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AC.79는 그 풍성함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정확히 짚어 줍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과 같지만, 그는 그 동산의 주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이 천적 상태의 본질을 결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동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동산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사람의 내적 상태 자체가 에덴의 질서와 일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의 지성은 동산처럼 살아 있고, 그의 지혜는 강처럼 흐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은 질서 있게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의 공로나 성취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동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은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문장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가르는 가장 미세하면서도 본질적인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을 ‘내가 선택했고, 내가 지켰고, 내가 이루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며, 지금도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교한 표현을 씁니다.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지혜를 누립니다. 그는 선과 진리 안에서 살며, 그 안에서 깊은 기쁨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미묘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늘과 땅만큼 큽니다.

 

이 ‘소유하지 않음’은 결핍이나 박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만약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붙잡는 순간, 그는 그 동산을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고, 잃을까 두려워해야 하며, 스스로를 중심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아는 순간, 그는 돌보는 자로서 살게 되고,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평안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일곱째 날의 안식’입니다.

 

이 글은 인간의 자아 개념을 근본에서부터 재정의합니다. 우리는 흔히 ‘내 믿음’, ‘내 신앙’, ‘내 이해’, ‘내 깨달음’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말들은 아직 영적 단계의 언어입니다. 천적 단계에서는 그런 언어 자체가 점점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과 진리, 지혜와 생명이 ‘주님께 속해 있음이 너무나 자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은 창2:15의 ‘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합니다.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은 소유권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맡겨진 것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뜻입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 질서 자체가 동산을 지켜 줍니다. 그의 역할은 지배가 아니라 ‘동참’입니다.

 

이 지점에서 AC.79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이해이든, 신앙이든, 혹은 어떤 영적 통찰이든, 우리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에덴의 평화로운 풍경 속에, 아주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원리를 심어 둡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둘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소유하려는 순간 줄어들고, 맡길 때 충만해지는 이 역설이 바로 천적인 삶의 비밀입니다.

 

 

 

AC.80, 창2:1-17 개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오직 퍼셉션으로만' (16-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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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네 강' (10-14절)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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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0-14)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으로 의미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reason)이며, 넷째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으로서, 이것들은 겉 사람에 속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에덴동산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을 통해,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삶 전체로 확장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AC.77이 동산 자체를 지성의 형상으로 제시했다면, AC.78은 그 지성이 정체된 공간이 아니라, ‘흘러나가고 분화되는 생명’임을 밝힙니다. 지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강으로 표현됩니다.

 

지혜가 동산 가운데에 있다는 말은, 지혜가 지성의 중심이자 출발점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추상적 사유의 산물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옵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근원은 사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 안에 머무를 때, 지혜는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이 점에서 지혜는 획득물이 아니라 ‘유출물’입니다.

 

이 강은 하나로 시작하지만, 곧 네 갈래로 나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만 작동하지 않고, 인간의 내적, 외적 삶 전반으로 ‘질서 있게 분화’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네 강을 임의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한 위계와 방향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먼저 속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오고, 그다음에 겉 사람에 속한 두 강이 나옵니다. 이는 지혜의 흐름이 항상 안에서 밖으로 나아간다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이 ‘선과 진리’라는 설명은 매우 압축적이면서도 깊습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천적 상태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선은 의지의 선이며, 진리는 이해의 진리입니다. 이 둘이 하나로 흐를 때, 지혜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첫째 강이라는 사실은, ‘모든 지혜의 기초가 선과 진리의 결합’임을 뜻합니다.

 

둘째 강은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입니다. 여기서 지식(knowledge [cognitio])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해입니다. 첫째 강이 결합 자체라면, 둘째 강은 그 결합에 대한 ‘자각과 인식’입니다. 이 두 강은 모두 속 사람에 속합니다. 즉, 천적 인간의 지혜는 먼저 그의 내적 삶에서 형성되고, 그곳에서 충분히 질서 잡힙니다.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 흐름은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성은 지혜를 외적 삶 속에서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은 주인을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에서 흘러온 지혜를 ‘해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성은 셋째 자리에 놓입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입니다. 이는 경험, 학습, 언어, 문화 속에 축적된 모든 외적 지식입니다. 이것 역시 지혜의 흐름 안에 포함되지만, 가장 바깥 자리에 놓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은 중심이 아니라, ‘마지막에 도달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 역시 지혜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혼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네 강의 구조는 인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여 줍니다. 속 사람의 선과 진리,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이성과 기억-지식이 따라옵니다. 이 순서가 유지될 때, 인간의 삶은 통합됩니다. 그러나 이 순서가 뒤집히면, 곧바로 혼란이 시작됩니다. 기억-지식이나 이성이 중심이 되면, 지혜는 더 이상 위에서 흘러오지 않고, 아래에서 만들어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의 끝에서 다시 한번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혜로부터 나오며, 이 지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온다’고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구조 전체를 묶는 결론입니다. 네 강이 아무리 다양해 보여도, 그 근원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근원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AC.78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어떤 강들이 흐르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강들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과 진리에서 시작하여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아니면 기억-지식과 이성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의미를 만들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덴의 강들을 통해, 인간 지성의 가장 건강한 질서를 조용히 제시합니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네 종류 나무의 속뜻' (8-9절)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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