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2.심화

 

2.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가이드 1.0에 따르면, 요12:40은 단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창3:22-24, AC.301-303, 13:13, 마12:31-32, 히6:4-6, 히10:26-29를 하나의 교리적 흐름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AC.302에서 스베덴보리가 요12:40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일부러 믿지 못하게 하신다’는 예정론적 사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주님의 보호 섭리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먹어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서 막으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아직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천국의 가장 깊은 진리를 충분히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그것을 거부하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AC.301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AC.302는 바로 이 원리를 유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속 사람이나 천국의 내적 신비, 사후의 삶, 메시아의 참된 본질 등이 명확하게 계시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고, 만일 그들이 이러한 진리를 인정한 뒤 다시 그것을 거부하게 되면 profanation에 빠질 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따라서 계시를 제한하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였습니다.

 

이 문맥에서 요12:40은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보거나 인정하지 않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장차 더 큰 영적 파멸인 profanation을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눈을 멀게 하심’은 형벌이 아니라 보호이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은 버리심이 아니라 더 깊은 죄를 막으시는 섭리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곧이어 인용되는 마13:13과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을 상응과 표상 속에 감추신 것도 같은 이유이며, 유대교회의 모든 의식과 제사 역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12:40과 마13:13은 서로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섭리를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요12:40은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긴밀히 연결됩니다. 성령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이며,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이미 인정한 신적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아직 그 진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일입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먼저 인정한 뒤 배반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지, 아직 인정하지 못한 상태 자체가 가장 큰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AC.302에서 요12:40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의 계시가 언제나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한꺼번에 알려 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의 내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조금씩 여시며,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을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져 영원히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가이드 1.0에 따라 볼 때, 요12:40은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보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눈을 멀게 하셨다는 표현은 사람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니라,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지키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신 것과 동일한 자비의 섭리를 역사 속에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AC.302는 바로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요12:40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로써 창3:22-24, 요12:40, 마13:13, 마12:31-32, 히6:4-6, 히10:26-29는 모두 하나의 교리, 곧 ‘profanation을 막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거하는 말씀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체계를 이루게 됩니다.

 

 

 

AC.302, 심화 1, ‘가이드 1.0’

AC.302.심화 1. ‘가이드 1.0’ ※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2.심화

 

1. ‘가이드 1.0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체계 안에서 해석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문장이나 단락을 독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이 증언하는 하나의 교리 안에서 그 의미를 밝히는 해석 방법입니다.

 

이 원칙은 ‘천국의 비밀’뿐 아니라 ‘천국과 지옥’, ‘새 예루살렘과 그 교리’, ‘주님의 교리’, ‘참된 기독교’ 등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을 서로 연결하여 읽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따라서 어떤 구절의 의미를 판단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저작에서 같은 주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살펴봅니다.

 

가이드 1.0은 또한 성경과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저작이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혀 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먼저 말씀 자체를 존중하고, 이어서 스베덴보리가 그 말씀을 전체 교리 속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어느 한 구절도 고립되어 해석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창3:22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창3:24는 물론, 관련된 ‘천국의 비밀’의 다른 단락들과 복음서, 히브리서 등에서 동일한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각각의 본문이 하나의 교리 안에서 서로를 밝혀 주게 됩니다.

 

가이드 1.0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핵심 교리들이 여러 저작에 걸쳐 반복되고 발전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랑과 신앙, 자유와 섭리, 거듭남, 상응, 천국과 지옥, 그리고 profanation과 같은 주제들은 어느 한 권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단락만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기보다, 관련된 모든 설명을 종합하여 이해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러한 해석 방법은 스베덴보리 저작 전체의 교리적 일관성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느 한 문장이 다른 곳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에도, 먼저 전체 저작의 공통된 가르침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해당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부분은 전체에 의해 해석되고, 전체는 다시 부분을 더욱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결국 가이드 1.0의 목적은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여러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증언한 하나의 교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라가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원칙은 개인의 추측이나 단편적인 인용보다, 전체 저작의 조화와 일관성을 해석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모든 번역과 해설은 이러한 가이드 1.0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독자들께서는 각 단락을 개별적인 설명으로만 읽기보다,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이 하나의 유기적인 교리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관점에서 함께 읽으실 때, 말씀의 영적 의미와 그 깊이를 더욱 온전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bygrace.kr

 

AC.302, 창3:22, ‘AC.301 계속’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2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들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듣지 못했으며,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도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지와 둔함 가운데 붙들려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속 사람의 존재나 어떤 내적인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거나,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고 인정하게 된다면, 그들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을 profane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른 생에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뜻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12:40)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John 12:40).

 

또한 주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그 뜻을 설명하지 않으신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는 그들에게 감추어졌고, 그들의 교회의 표상들 속에 숨겨졌으며, 예언서의 문체 역시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정한 뒤에 그것을 모독하고 profane하는 사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해설

 

AC.302는 앞의 AC.301을 이어받아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먹어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을 계속 해설하는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막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는 것을 막으시는 무한한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그 자비로운 섭리가 실제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AC.302는 그 동일한 섭리가 이후 유대교회와 복음서에서도 계속 작용하였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유대인들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중심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인들이 사후 세계나 속 사람, 그리고 메시아에 관한 내적 진리를 분명히 배우지 못했던 이유를 그들의 지적 능력이나 민족적 열등성에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진리를 일부러 감추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계시를 제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요12:40과 마13:13도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길을 닫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적 진리를 받아들였다가 훗날 그것을 거부하여 profanation에 이르는 일을 막으시려는 자비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표상으로 주어졌고, 예언은 상응의 문체로 기록되었으며, 주님께서도 많은 진리를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모두 창3:22에서 시작된 동일한 보호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계속 나타난 모습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어떤 진리를 지식으로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삶과 의지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진리를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리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인정한 사람은, 그 진리와 자신의 내적 생명이 결합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profanation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알고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무지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profanation의 조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단순히 듣거나 배우는 것만으로는 profanation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 후, 다시 그것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악한 삶과 결합시키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일관되게 말하는 profanation의 본질입니다.

 

이 원리는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히6:4-6의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한 자’, 히10:26-29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자’는 모두 같은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서로 다른 본문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을 종합해 보면 모두 하나의 교리를 설명합니다. 곧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입니다.

 

AC.302는 주님의 계시가 왜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지는지, 왜 어떤 시대에는 내적 진리가 감추어졌는지, 왜 말씀이 상응과 표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많은 진리를 주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장차라도 회개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을 끝까지 지켜 주시는 것을 더 큰 목적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감추시는 일조차도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며, 창3:22에서 시작되어 창3:24의 그룹과 불칼로 나타난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 섭리는 유대교회와 복음서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가이드 1.0

 

 

AC.302, 심화 1, ‘가이드 1.0’

AC.302.심화 1. ‘가이드 1.0’ ※ 아래는 앞으로 자주 접하시게 될 ‘가이드 1.0’이라는 표현에 대한 설명입니다. ‘가이드 1.0’은 스베덴보리의 한 구절을 그의 전체 저작이 이루는 일관된 교리

bygrace.kr

 

2. ‘12:40

 

 

AC.302, 심화 2, ‘요12:40’

AC.302.심화 2. ‘요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

bygrace.kr

 

3.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Matt. 13:13).

 

 

가이드 1.0에 따르면, 마13:13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를 설명하는 구절이지만, AC.302에서는 단순한 ‘교육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창3:22에서 시작된 주님의 보호 섭리가 신약 시대에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핵심 성구로 인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반드시 창3:22-24, 요12:40, 마12:31-32, 히6:4-6, 히10:26-29와 하나의 교리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301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를 해설하면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생명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창3:24의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은 바로 이러한 보호 섭리를 상징합니다. AC.302는 이 동일한 원리가 유대교회와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서도 계속 역사하였음을 보여주는 단락입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마13:13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일부러 막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아셨기 때문에,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깊은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말씀은 비유와 상응 속에 감추어졌고, 사람들은 외적인 뜻만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AC.302의 답은 분명합니다. 만일 그들이 내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인정한 뒤 다시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profanation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단순한 교수법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보호하는 자비의 수단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마13:13은 요12:40과 완전히 같은 원리를 말합니다. 요12:40에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표현하고, 마13:13에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표현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감당하지 못할 진리를 무리하게 열어 주지 않으심으로써 더 큰 영적 파멸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다시 마12:31-32의 ‘성령을 모독하는 죄’와도 연결됩니다. 성령은 신적 진리를 의미하며,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이미 인정한 진리를 악과 결합시키는 profanat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히6:4-6과 히10:26-29 역시 모두 같은 원리를 설명합니다. 인정한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계시를 조절하십니다.

 

AC.302에서 마13:13을 인용한 이유는,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창3:22에서 생명나무를 막으시고, 창3:24에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길을 지키게 하신 그 동일한 자비의 섭리가 복음서에서도 변함없이 역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마13:13의 비유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숨기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장래의 구원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보호의 장치였으며, AC.302는 바로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AC.301, 창3:22, 두 번째 아르카나,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1 또 하나의 아르카

bygracetistory.tistory.com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