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24)

 

AC.313

 

여기서 첫 사람에 관하여 말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악(hereditary evil)이 그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일반적인 생각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사람(man)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이며, 그가 아담(Adam)이라 불리는 것은 사람이 (adamah)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사람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한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며, 그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전악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실제로 죄를 범하면,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하나의 본성(nature)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에서 나온 악은 그의 자녀들에게 심겨 유전적인 것이 됩니다. 이 유전악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부, 그리고 그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계속 더해지고 증대됩니다. 그래서 각 사람 안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범하는 실제의 죄들로 인해 더욱 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전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완전히 제거되어 무해한 상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부모의 악한 성향(inclinations)이 자녀들에게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한 가문은 다른 가문과, 심지어 한 민족은 다른 민족과도 구별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From what is here said of the first man, it is evident that all the hereditary evil existing at the present day did not come from him, as is falsely supposed. For it is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s here treated of under the name of “man”; and when it is called “Adam,” it signifies that man was from the ground, or that from being nonman he became man by regeneration from the Lord. This is the origin and signification of the name. But as to hereditary evil, the case is this. Everyone who commits actual sin thereby induces on himself a nature, and the evil from it is implanted in his children, and becomes hereditary. It thus descends from every parent, from the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their ancestors in succession, and is thus multiplied and augmented in each descending posterity, remaining with each person, and being increased in each by his actual sins, and never being dissipated so as to become harmless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Every attentive observer may see evidence of this truth in the fact that the evil inclinations of parents remain visibly in their children, so that one family, and even an entire race, may be thereby distinguished from every other.

 

 

해설

 

AC.313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져 온 ‘오늘날 모든 유전악은 아담 한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이해를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담’을 인류 최초의 한 개인으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세기에서 ‘사람(man)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태고교회이며,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주님께서 세우신 그 최초의 교회를 나타내는 표상적 이름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과 3장은 한 개인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라기보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주님에 의해 세워졌고, 어떻게 타락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담’이라는 이름도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이름은 ‘(adamah)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람이 본래 참된 사람이 아니었으나 주님에 의한 거듭남을 통하여 비로소 참된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새롭게 된 영적 인간, 곧 거듭난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한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교회와 그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적 이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의 형성과 전승 원리를 설명합니다. 유전악은 단 한 사람의 죄가 모든 후손에게 법적으로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 사람들이 실제로 행한 악이 그들의 성품을 형성하고, 그 성향이 자녀들에게 이어짐으로써 계속 축적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전악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쌓여 온 영적 유산입니다. 각 사람은 이미 수많은 조상들로부터 여러 형태의 유전악을 물려받아 태어나며, 거기에 자신의 실제 죄를 더함으로써 그 유전악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타락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점점 깊어져 온 과정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단지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의 삶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유전악과 실제의 죄를 분명히 구별합니다. 사람은 유전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것 때문에 곧바로 정죄받는 것은 아닙니다. 정죄는 그 유전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며, 실제 삶 속에서 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사람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성향 자체보다, 그것을 자신의 자유 가운데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갔는가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하여 외적인 행동을 어느 정도 절제할 수는 있지만, 유전적으로 내려온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뿌리 자체를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무해하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해하게 된다’는 것은 유전악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더 이상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억제하시고,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생명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여러 글에서도 거듭난 사람에게도 유전악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부모의 성향이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것은 일상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한 가문이나 한 민족에서도 공통된 성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한 육체적 유전 현상만이 아니라 영적 성향까지 포함한 유전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가문이나 민족이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형태의 유전악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 누구도 자신의 혈통이나 타고난 본성으로는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AC.313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을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역사 속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유전악은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죄가 기계적으로 전가된 결과가 아니라, 인류가 오랜 세월 실제의 악을 반복하여 선택함으로써 축적해 온 영적 유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듭남 역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유전악은 사람의 출발점일 뿐 최종 운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각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심으시고, 그를 다시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313에서 밝히는 유전악과 구원에 관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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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ree of lives vs tree of live

 

스베덴보리는 AC.312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수와 복수의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나무’는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 곧 사랑과 신앙, 또는 그로부터 나오는 삶을 나타냅니다. 특별히 ‘생명나무’는 주님 자신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단순히 영원히 사는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이 사용되었을까요? 여기서는 단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았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도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생명은 하나의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여러 차원의 생명이 서로 완전한 질서 가운데 결합된 충만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들(lives)이라는 복수 표현은 이러한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도 천국의 생명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무한한 생명의 다양한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생명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나의 생명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은 단순히 숫자의 복수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러한 천적 충만성 가운데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과 같은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 생명, 곧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향하여 점차 인도되는 형태를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들의 나무’보다 ‘생명나무’라는 단수 표현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2에서 왜 복수와 단수가 달라지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차이들까지도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의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해설은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원리들을 바탕으로 가능한 이해를 제시한 것이지, AC.312가 직접 밝힌 해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AC.312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서는 단수와 복수조차도 우연히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언어에서는 단순한 문체상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천사들의 언어에서는 단수와 복수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나무’의 차이를 설명하기보다, 그 차이 자체가 말씀의 신성을 증거하는 하나의 표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세 번째 예가 앞의 두 예보다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쪽  에덴’, ‘flame  sword’는 방향이나 순서의 변화이지만, ‘lives  life’는 ‘복수와 단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단어의 배열만이 아니라 ‘문법 자체(방향, 어순, 단, 복수)’까지도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AC.312는 결국 말씀의 신성이 문장 전체뿐 아니라 문법의 가장 작은 요소에까지 스며 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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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2, 심화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심화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사용된 표현이 ‘두루 도는 칼의 화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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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사용된 표현이 ‘두루 도는 칼의 화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며, 같은 상태를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두루 도는 화염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flame’과 ‘sword’의 결합 순서가 뒤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화염’ 또는 ‘’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그 정서를 뜻합니다. 선한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일어나는 악한 욕망을 뜻합니다. 한편 ‘’은 진리가 거짓과 싸우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 특별히 거짓된 추론과 persuas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화염’은 타락한 의지 안의 악한 사랑과 욕망을, ‘’은 그 악한 의지에서 나온 거짓과 파괴적인 persuasion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본래 상태에서는 의지 안의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의 퍼셉션과 지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자 같은 내적 질서가 전도(顚倒), 그러니까 거꾸로 뒤집혀, 악한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거짓된 사고와 persuasion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이 먼저이고, 거짓된 추론은 그 사랑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태를 표현할 때에는 ‘칼의 화염’, 곧 칼에 속한 화염이라기보다 ‘칼을 낳고 움직이는 화염’, 즉 ‘화염의 칼’이 더 적합했습니다. 이 어순은 악한 의지가 근원이고, 거짓된 이해가 그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를 조금 풀어 말하면, 홍수 이전 사람들은 먼저 어떤 거짓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 안에 있었고, 그 욕망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독립적으로 진리를 검토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의지가 원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10-311에서 그들의 persuasion이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호흡까지 압도할 만큼 치명적이었다고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 곧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이 반드시 의지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해 안에서 먼저 거짓을 배우거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복하여 확증한 뒤, 마침내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의 경우에는 ‘’, 곧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앞에 놓이고, 그 거짓에서 ‘화염’, 곧 악한 애착과 욕망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칼의 화염’, 곧 화염에 속한 칼이라는 순서로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와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의 차이와 정확히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홍수 이전 천적 인간의 본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지혜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질서가 타락했을 때에는 악한 의지에서 거짓된 이해로, 욕망에서 persuasion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화염’이 먼저이고, ‘’이 뒤따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은 이해에서 의지로, 진리에서 선으로 거듭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 질서가 악용될 경우에는 거짓된 이해에서 악한 의지로, 거짓의 확증에서 악한 사랑으로 진행될 수 있으므로 ‘’이 먼저이고 ‘화염’이 뒤따르게 됩니다.

 

두루 돈다(turning itself)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칼이 이리저리 회전한다는 시각적 묘사만은 아닙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이 서로를 계속 강화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서는 악한 욕망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이 다시 욕망을 확증하며, 더 강해진 욕망이 또 더 극단적인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의지와 이해가 서로를 쉬지 않고 강화하므로, 그들의 상태는 끊임없이 ‘두루 도는’ 화염과 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서로 먹고 자라면서 전체 마음을 점령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중심 목적은 그들의 악을 묘사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놓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죄의 상징인 동시에 보호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악한 의지와 거짓된 persuasion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에 접근한다면, 그들은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 모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 생명의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 화염과 칼은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사람에게서 빼앗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 때문에 그 길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이라는 어순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과 욕망이 근원이었고, 거짓과 persuasion은 그 사랑이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반면 후대 사람들에게서는 거짓된 이해와 확증이 먼저 형성되고, 그것이 점차 의지와 사랑을 불붙게 할 수 있으므로 ‘두루 도는 칼의 화염’이라는 반대 어순이 더 적합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두 단어의 위치가 바뀐 것뿐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홍수 이전 인간과 홍수 이후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서 전체가 그 차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AC.312에서 이 세부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밝힌 만큼, 이 해설 역시 말씀 속 무한한 아르카나를 모두 밝힌 것이라기보다, AC.310-312와 앞뒤 문맥을 토대로 그 핵심 구조를 가능한 범위에서 풀어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AC.312, 심화 3, ‘tree of lives’ vs ‘tree of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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