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강의는 인공지능 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강사의 출발점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깊이 공부하려면 수많은 주석과 사전과 참고서를 구입하고, 때로는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를 직접 찾아 읽어야 했지만, 이제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을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주석과 해석을 비교하고, 문맥을 확인하고, 관련 구절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일종의 ‘퀀텀 리프’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정도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AI를 제대로 사용하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넓게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에는 상당히 공감할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AI는 성경의 단어를 찾고, 여러 번역을 비교하고,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서로 다른 주석의 견해를 대조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강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이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AI에게 막연히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보다, 성경을 읽다가 구체적인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때 AI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AI 사용법을 넘어 상당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질문의 깊이는 대개 질문하는 사람의 이해의 깊이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는 좋은 질문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강사가 ‘성경을 몇 차례 읽고 어느 정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 가운데’ AI를 사용하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건전한 조언입니다. AI가 말씀을 읽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다가 생긴 질문을 더 깊이 탐구하는 보조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강의를 읽기 시작하면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 나타납니다. 강사가 성경 연구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제시하는 것이 바로 AI에게 미리 ‘페르소나’를 설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보존된 오류 없는 말씀으로 믿으며, 킹제임스 성경을 기준으로 하고,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며, ‘영해’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AI에게 먼저 입력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AI가 그 전제에 맞는 답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강사는 AI가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자가 자신의 신학적 기준을 먼저 주어야 한다고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보면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AI가 내놓은 답이 성경 자체의 결론인가, 아니면 내가 먼저 입력한 신학적 전제를 성경 자료를 이용해 정교하게 재구성한 결론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AI 시대의 성경 연구에서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AI에게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교회를 반드시 구분하고, 성경을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영적 해석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 로마서 9장부터 11장을 질문한다면, AI가 세대주의적 또는 그와 가까운 결론을 내놓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개혁주의적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답하라고 설정하면 전혀 다른 설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부들의 전통을 중심으로 해석하라고 하면 또 다른 답이 나올 것이며,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과 상응의 교리를 중심으로 해석하라고 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강사 자신도 AI 안에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등 여러 신학적 자료가 들어 있으며 질문자의 기준에 따라 답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AI의 대답이 내가 설정한 페르소나와 일치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 해석이 참이라는 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교리적 전제를 가지고 말씀을 읽는다는 사실을 매우 깊이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삶을 고치려 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올바른 해석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면서 말씀을 읽는가’입니다. 지성이 아무리 정교해도 의지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사람은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AI 사용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강사는 매우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결론을 AI에게 계속 밀어붙이면 AI가 결국 그 방향으로 맞춰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AI는 질문자가 듣고 싶어 하는 방향을 추론하여 그 방향으로 답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거 이렇게 볼 수 있잖아?’라고 계속 다그치면 결국 사용자가 원하는 설명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피하기 위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만 설명하라.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은 추측하지 말라’고 명령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문제는 AI에게 ‘본문이 말하는 것만 말하라’고 명령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해석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비유의 세부 요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며 그것을 ‘영해’ 또는 알레고리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여관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이천 년,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해석하는 식의 자의적인 대응을 비판합니다. 이 비판에는 충분히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런 원칙 없이 설교자의 상상력으로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붙인다면 성경은 얼마든지 설교자가 원하는 말을 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이런 자의적인 알레고리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모든 단어에 설교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붙여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 들어 있으며,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상응’에 따라 존재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천국의 비밀’에서 하나의 단어나 사물의 의미를 설명할 때에도 다른 수많은 성경 구절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상응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일관되게 나타나는지를 추적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은 강사가 비판하는 ‘영해’와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은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자의적인 알레고리는 ‘내가 이 사물에서 무엇을 연상하는가?’를 묻습니다. 반면 상응은 ‘말씀 안에서 이 자연적 사물이 영적으로 무엇과 일정하게 대응하는가?’를 묻습니다. 전자는 해석자의 상상력에 의존하지만, 후자는 말씀 전체에 흐르는 영적 질서를 찾으려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상응론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별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단순한 자의적 알레고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의 방법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 강의에서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를 AI에게 묻는 장면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AI는 강사가 설정한 원칙에 따라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거절과 복음의 이방인 확장이라는 역사적·문맥적 구조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층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혼인’ 자체가 말씀 전체에서 무엇을 상징하는지, ‘왕’과 ‘아들’, ‘잔치’, ‘초청’, ‘예복’이 각각 어떤 영적 실재와 상응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특히 혼인은 주님과 교회, 그리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것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따라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초청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정도를 넘어,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한 삶과 결합하지 않은 상태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핵심 주장인 ‘해석은 하나뿐이다’라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강사는 목사 백 명이 백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주셨을 리 없으며 ‘해석은 딱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말씀의 진리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무한히 상대화될 수 없다는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오히려 여러 층위의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안에 영적 의미가 있으며, 더 깊이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해석이 모두 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의 신적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의 의미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라는 말과 ‘말씀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있다’는 말은 반드시 충돌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 카이사르의 동전에 새겨진 ‘형상’을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국가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는 정교분리의 원리로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히려 역설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강사는 다른 곳에서는 본문에 없는 의미를 집어넣지 말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여기에서는 ‘카이사르의 형상’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을 연결하여 상당히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끌어냅니다. 이것이 반드시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을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연결하여 의미를 발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연결 자체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연결에 얼마나 일관되고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과 강사의 문자주의가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도 생깁니다.

 

반면 요한계시록 13장의 해석에서는 두 관점의 차이가 매우 커집니다. 강사는 짐승과 666을 미래에 나타날 세계적 적그리스도와 정치·경제적 통제 체제로 읽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미래주의적 종말론의 틀입니다. AI가 이 결론을 내놓은 것은 강사가 처음부터 그러한 성경관과 해석 원칙을 페르소나로 설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요한계시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습니다. 짐승, 용, 바벨론, 666 등은 미래 어느 시대에 등장할 특정 정치 지도자와 세계정부의 암호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진리가 어떻게 변질되고 신앙이 어떻게 체어리티와 분리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상태의 표상들입니다.

 

따라서 666도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암호화한 숫자를 찾는 문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숫자는 영적 상태와 질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누가 맞는가’를 판정하기 전에 두 사람이 성경을 바라보는 출발점 자체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강사는 ‘문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문자 안에 있는 영을 보지 못하면 말씀의 가장 깊은 목적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적 민족 회복을 강조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를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복음서나 요한계시록, 구약의 예언서와 동일한 의미에서 ‘말씀’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도들의 글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데 중요하지만, 구약의 말씀과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처럼 문자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 방식의 말씀은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로마서 9~11장을 다룰 때에는 이것을 ‘천국의 비밀’식 속뜻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사도적 교훈과 당시 교회의 역사적 문제를 다루는 문서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강의 후반부의 십일조와 성전 건축, 번영복음에 대한 비판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공감할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구약의 물질적 번영을 그대로 가져와 ‘신앙이 좋으면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거나, 예배당 건물을 구약의 성전과 동일시하여 건축 헌금을 영적 공로처럼 강조하거나,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두려움을 조성하는 방식은 신앙의 본질을 외적인 행위와 보상 체계로 축소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과 목적이 있는지를 봅니다. 같은 헌금을 하더라도 체면과 보상을 위해 하는 것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기쁘게 드리는 것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구약은 이스라엘, 신약은 교회’라고 나누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구약의 땅과 성전과 제사와 십일조가 왜 신약 시대에도 계속 말씀으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것들이 단순히 옛 이스라엘의 폐기된 제도에 관한 역사라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말씀으로 주어진 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속뜻을 봅니다. 성전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그로부터 교회를, 그리고 개인 안에서는 주님께서 거하시는 내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 제사와 제사장,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역시 모두 영적인 실재와 상응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그 말씀의 영적 의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심으로 그 표상이 가리키던 실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반복되는 ‘구약과 신약을 나누라’,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라’는 원리는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역사적 시대와 문자적 대상은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구약과 신약이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구원 과정 안에서 놀랍도록 연결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단순히 옛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를 표상하며,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은 인간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까지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을 바르게 나눈다’는 것은 성경을 서로 분리된 칸으로 잘라 놓는 일이 아니라, 문자적 차이는 정확히 구별하면서 그 안을 관통하는 하나의 신적 질서를 발견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AI와 연결될 때 이번 강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AI에게 올바른 페르소나를 설정하면 올바른 성경 해석을 얻을 수 있는가?’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적어도 엉뚱한 답을 줄이고, 사용자가 원하는 연구 전통과 용어와 방법론 안에서 일관된 답을 얻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페르소나는 ‘진리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어떤 렌즈를 통해 자료를 볼 것인가를 정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렌즈가 잘못되어 있으면 AI는 그 잘못된 렌즈를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을 하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돌아오는 경고입니다. AI에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답이 곧 스베덴보리의 진짜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천국의 비밀’, ‘천국과 지옥’, ‘주님’, ‘신적 섭리’, ‘참된 기독교’, ‘요한계시록 밝히기’ 등 실제 저작으로 돌아가 확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말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스베덴보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끊임없이 가리키는 ‘주님’을 더 알고,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삶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번 강의의 ‘목사의 권위’에 관한 말도 의미 있게 들립니다. 강사는 목사의 권위가 학위나 직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달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귀 기울일 만한 말입니다. AI 시대에는 성도가 설교 중 들은 내용을 집에 돌아가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특정 성경 구절이나 역사적 사실을 잘못 말하면 과거보다 훨씬 쉽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목사니까 믿으라’는 권위주의적 방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목사의 참된 권위는 단지 ‘정확한 성경 지식’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것과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이 바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입니다. AI 시대에는 오히려 지식의 양으로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AI가 몇 초 만에 목회자보다 훨씬 많은 자료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AI는 체어리티를 실천할 수 없고, 아픈 교인의 손을 잡아 줄 수 없으며, 한 영혼을 위해 밤새 기도할 수도 없고,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으며 주님 앞에서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정보가 흔해질수록 오히려 삶의 진실성이 목회자의 권위가 되는 시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목사를 없애는 도구라기보다 ‘목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다시 묻게 하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단순히 성경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AI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말씀을 통해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고,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이 되도록 돕는 사람이라면 AI는 오히려 매우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지식은 이해성에 속하지만, 구원은 결국 의지와 삶까지 변화하는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AI는 이해성을 크게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통해 이루시는 신적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가 말하는 ‘AI로 성경 공부를 바르게 하기’는 매우 유익한 출발점입니다. 문맥을 확인하고, 앞뒤 구절을 살피고, 관련 본문을 찾고, 여러 주석을 비교하고, 특정 설교자의 주장을 검증하고, 원어와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는 데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가 사용자의 선입견에 맞추어 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강사의 경고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경 연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정보 부족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AI 이전에도 있었고 AI 이후에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AI는 인간의 확증편향을 엄청난 지식과 논리로 강화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AI에게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요구하면, 과거에는 몇 권의 책을 뒤져야 얻을 수 있었던 논거를 몇 초 만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영적 훈련은 ‘AI를 얼마나 잘 다루는가’ 이전에 ‘나는 정말 진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증명을 원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페르소나’보다 더 깊은 문제입니다. AI에게 어떤 페르소나를 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말씀 앞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내가 주님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인지, 이미 가지고 있는 교리를 확인하려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을 논박할 무기를 찾으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삶을 고치려는 사람인지에 따라 같은 성경도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성경 해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상응을 많이 알고 천국의 구조를 많이 아는 것 역시 목적이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의 이해성 안으로 들어와 신앙이 되고, 그 신앙이 의지 안으로 들어가 체어리티가 되며, 마침내 삶 속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AI는 그 과정에서 놀라운 도서관이 될 수 있고, 훌륭한 검색 도구가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좋은 토론 상대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AI도 사람을 대신하여 주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어느 AI도 사람을 대신하여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성경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어떤 AI가 가장 성경을 잘 해석하는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성경을 읽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를 다시 말씀의 중심이신 주님께 돌려보냅니다. AI에게 좋은 질문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읽는 내가 주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행하는 것, 곧 신앙이 체어리티와 하나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스베덴보리에게는 ‘성경 공부를 바르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일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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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 고통과 구원, 그리고 삶의 의미

이번 영상은 앞의 영상보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훨씬 더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 예수를 알지 못한 사람의 구원, 양심, 하나님의 섭리, 고통과 악,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김학철 교수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의 천국·지옥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몇몇 통찰이 스베덴보리와 놀라울 만큼 가까워지는 한편, 결정적인 몇 지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은 단순히 ‘맞다, 틀리다’로 평가하기보다, 김학철 교수가 무엇을 해체하려 하는지 먼저 이해하고, 그 해체 이후 스베덴보리가 어떤 더 넓은 그림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담의 출발점은 ‘익숙함을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기독교를 잘 아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이 사라지는 순간 종교와 고전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경험 자체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읽어 온 창세기의 익숙한 문장들이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진 말씀으로 다시 열립니다. ‘’, ‘’, ‘’, ‘나무’, ‘동산’, ‘’, ‘여자’, ‘가인’, ‘아벨’ 같은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를 담은 말씀으로 새롭게 읽힙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을 안다’는 확신보다 말씀 앞에서 계속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김학철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해집니다. 김학철 교수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당과 지옥’의 이미지 상당 부분이 성경 자체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번역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천당’이나 ‘지옥’이라는 한국어 자체가 동아시아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말이며, 단테의 ‘신곡’ 같은 작품이 서구인의 지옥 이미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바실레이아’를 오늘날의 영토적 국가 개념보다 ‘통치’ 또는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주로 ‘죽어서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는 스베덴보리와 만나는 중요한 지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을 단순히 우주의 어느 장소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 가운데 하나는 천국이 본질적으로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영계에는 공간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의 공동체들이 있고, 집과 길과 산과 정원 같은 것들도 실제적으로 지각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자연계의 공간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영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김학철 교수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김학철 교수가 ‘신약 성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실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분명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사후세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후세계의 실재가 기독교에서 주변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을 인간의 종교적 상상이나 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로 보지 않고, 자연계와 함께 창조 질서를 이루는 실제 영계로 설명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천국은 장소인가, 상태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천국은 ‘상태가 공간으로 나타나는 세계’라고 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두 사람도 같은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공간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단순히 ‘죽어서 올라가는 저 위의 장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은유나 현재적 하나님의 통치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이되 자연계와 전혀 다른 법칙, 곧 사랑과 애정과 상응에 따라 형성되는 세계입니다.

 

이 차이는 지옥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게헨나’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말이며, 고대의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부정함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옥의 표현과 결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에서 다시 ‘상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 유황, 어둠, 구더기, 악취 같은 지옥의 표현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계의 물리적인 불과 유황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단순한 고대인의 문학적 상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옥적 사랑과 거짓의 실제 상태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가령 천국의 불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에 상응하지만, 지옥의 불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증오에 상응합니다. 같은 ‘’이라는 이미지가 사랑의 성질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문자적 지옥 이미지를 그대로 물질화하지도 않고, 반대로 그것을 신화나 은유로 해체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불지옥이 아니다’와 ‘지옥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로마서 2장의 양심을 이야기하고, 유스티누스의 ‘로고스의 씨앗’을 소개하며,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어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설명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구호가 성경 전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압축한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베덴보리와의 접점이 매우 큽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독교 세계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는가, 악을 악으로 여기고 선을 행하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선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사후에 천사들에게 진리를 배우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반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도 실제 삶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었다면, 그 외적 신앙고백 자체가 천국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몰랐으므로 지옥에 갔다’는 식의 단순한 판정은 스베덴보리의 구원 이해와도 맞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핵심은 행위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양심을 따라 선을 사랑하고 행했다면, 그 선의 근원은 본인이 당시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더라도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선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진리가 주어지고, 그는 자신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선의 근원이 주님이셨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최근 ‘아벨’과 체어리티를 읽으며 살펴보고 있는 내용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름으로만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구원의 자격증처럼 될 때, 바로 가인으로 상징되는 문제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가진 진리의 양은 제한되어 있더라도 그가 선을 사랑하고 양심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안에는 주님께서 이후 진리와 결합시키실 수 있는 토대가 있습니다.

 

그다음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설명하지 말라’는 부분도 매우 귀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울부짖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절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의 탄원을 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의 질문을 억압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울어 주는 책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부분은 목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와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섭리를 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할 말이 바로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신적 섭리의 개별적인 연결고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모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 하나만 보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자유, 수많은 사람의 관계와 선택,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동시에 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을 허용하셨는지 제가 압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섭리를 깊이 이해한 태도와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스베덴보리적 구별이 하나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면 신적 사랑의 본질과 충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오직 선만을 의도하시며,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악이 허용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섭리는 허용된 악에서 가능한 한 선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역사합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고양이 스케일링’ 비유처럼 ‘우리가 악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큰 하나님의 선일 수도 있다’는 설명은 일정 부분 도움이 되지만, 모든 고통에 그대로 적용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스케일링은 보호자가 직접 의도한 고통이며 그 자체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살인, 학대, 전쟁, 배신 같은 악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직접 계획한 ‘영적 스케일링’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이 매우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악을 선을 위한 수단으로 창조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이 자유 속에서 일으킨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악이 영원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선한 방향으로 굽히십니다.

 

영상에서 하나님의 전능을 ‘사랑의 전능성’이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프로그램해 놓고 인간을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파트너로 불러 혼돈에 질서를, 어둠에 빛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시는 분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가운데 ‘사랑의 전능성’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신관과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사랑, 신적 지혜, 신적 능력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사랑과 반대되는 자의적인 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원하고 지혜가 아는 것을 능력으로 이루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파트너’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과 동등한 창조의 공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할 능력과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야 자유로운 응답이 가능하지만, 실제 선과 진리의 생명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한다’고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자유와 겸손이 동시에 보존됩니다.

 

영상에서 부활을 ‘사후 정산’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역사적 배경을 따라 유대교의 부활 신앙이 불의하게 죽은 의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정의를 회복해 주신다는 신정론적 희망과 연결되어 발전했다고 설명합니다. 역사학적 설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생을 단순히 역사적 종교관념의 발전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가 죽은 직후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 있으며, 의식과 사고와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사후세계는 먼 미래에 이루어질 추상적인 ‘정산’이 아니라 죽음 직후부터 이어지는 실제적인 인간 생명의 연속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AC.320 이후에서 읽었던 내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감각과 사고와 언어가 자연계에서보다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성경의 사후세계 관심은 거의 없다’는 진술과 AC.320 이하에서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영계의 모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관점을 억지로 일치시키기보다 그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보다 그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라는 김학철 교수의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이 사람의 죄인가, 부모의 죄인가?’라는 인과관계의 질문에 매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방향을 바라보셨다는 설명, 그리고 불교의 ‘독화살 비유’를 가져와 원인을 모두 알아낸 뒤에야 사람을 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은 앞 영상에서 말한 ‘사랑의 급진성’과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것은 ‘쓰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설명보다 함께 앉아 있는 것이 쓰임이고, 때로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쓰임이며, 때로는 그의 말을 판단하지 않고 듣는 것이 쓰임입니다. 진리는 쓰임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고통받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진리의 목적을 거꾸로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의 아우슈비츠와 하나님의 고통에 관한 부분에서는 조금 더 신학적 주의가 필요합니다. 김학철 교수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이 전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면서 죽는다’는 발상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현대 신학의 특정한 문제의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보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적 사랑과 신적 전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우리가 ‘전능’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자유를 매 순간 물리적으로 차단하신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으며, 사랑도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전능은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인간을 가능한 한 악에서 선으로 이끄시고, 지옥이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질서를 유지하시는 전능입니다. 이것은 힘이 부족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는 부분은 이번 영상 가운데 스베덴보리와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인간은 행복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오히려 행복을 얻기 어렵고, 자신이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를 실제로 행할 때 행복은 ‘선물처럼’ 따라온다고 말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돕고 돌보고 사랑하며 자신의 가치가 누군가에게 실제 기쁨이 될 때 삶의 의미가 발생하고, 그 의미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use)이라는 개념과 매우 가까이 놓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천사들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선한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행하는 기쁨 가운데 삽니다. 그 결과로 천국의 기쁨이 흘러듭니다. 행복은 목적이라기보다 사랑이 올바른 방향으로 흐를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김학철 교수가 소개한 ‘너는 살면서 기쁨을 발견했느냐, 그리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느냐?’라는 이야기는 비록 성경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고립된 개인의 쾌락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느끼는 사랑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수록 천국의 질서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기뻐할수록 천국적 사랑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들어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기여하면 삶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에 완전히 이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타인을 도우면서도 자기 공로를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선함을 확인하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쓰임의 가장 깊은 질은 ‘무엇을 했느냐’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해서 그것을 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결국 다시 지배적 사랑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영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흐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익숙한 관념을 의심하라’고 말하고, 중간에서는 ‘예수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도 양심과 사랑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후반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모두 설명하려 하기보다 함께 울고 사랑하라’고 하고, 마지막에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은 ‘종교적 관념보다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이번 영상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도 끊임없이 삶을 봅니다. 무엇을 믿는다고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사랑했는가,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봅니다. 사후에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끄는 것도 외적인 종교 명칭이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죽음은 그 사랑을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계의 외적 제약이 벗겨지면서 사람이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 대담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도 나타납니다. 김학철 교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를 해체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관심을 돌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의 오류를 해체하면서도 사후세계 자체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영원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사후세계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의 삶은 영계와 분리된 별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첫 단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영상의 천국과 지옥에 관한 핵심을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 이미지일 뿐이다’라는 방향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있으며, 죽음 뒤에는 그 사랑에 상응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선행에 대한 외적 상금이 아니며 지옥은 잘못에 대한 외적 형벌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판결하여 강제로 지옥에 던지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자유롭게 형성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같은 생명을 가진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이들에게 끌립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래서 ‘상벌’이기 전에 ‘사랑의 귀결’입니다.

 

이 점을 알면 영상의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훨씬 깊은 답이 가능해집니다. 핵심은 그가 지상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느냐만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빛 안에서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양심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따라 어떻게 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정인의 사후 운명을 함부로 판정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믿어도 상관없다’는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며, 사후에 선한 사람은 그 근원을 더 분명하게 배우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영상에서 가장 오래 남겨 둘 만한 질문은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습니까?’보다 마지막에 나온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두 질문이 사실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시작되는 낯선 삶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랑하고 선택하고 행하는 것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진실보다 체면을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내 우월함을 사랑하고 있는지, 용서보다 복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씩이라도 진실과 선과 쓰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질문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이유도 죽은 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담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학철 교수가 말하듯 천국을 단순한 사후의 보상 장소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도 시작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자연계에서 시작된 인간의 내적 생명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며, 여기에서 형성된 사랑은 영계에서 더욱 분명한 자신의 형체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있습니다’라고만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도록 우리를 이끌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천국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그것과 영원히 함께 살아도 좋습니까?’ 천국과 지옥을 가장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사후세계의 지도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어떤 사랑이 나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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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형제(brother)가 이를 상징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그 신앙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자손으로 ‘체어리티’가 등장하며, 이를 ‘아벨’과 ‘형제’가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처음부터 두 개인의 형제 관계를 중심으로 읽기보다,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상징한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후 창4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자기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아벨을 계속 가인의 ‘형제’라고 하는 데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을 때에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섬세하게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AC.338에서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했고, AC.341에서는 ‘두 번째 자손’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을 시간순으로 ‘먼저 신앙이 생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오히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질서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째와 둘째는 자연적인 출생 순서를 그대로 영적 우선순위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창4의 계보와 출생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나타나는지를 고대의 출생과 계보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과 함께 나오는 것이 ‘양 치는 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치는 자’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단순한 감정이나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는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하여 실제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체어리티의 삶입니다. 따라서 ‘양을 친다’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히 목축업에 종사한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선을 돌보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양 떼’라는 표현도 이와 잘 어울립니다. 말씀에서 양은 순진함과 선, 그리고 주님께 인도받는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목자는 양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길을 잃지 않도록 돌봅니다. 그러므로 ‘양 치는 자’라는 모습에는 체어리티가 무엇인지가 매우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엇을 옳다고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다른 사람의 선을 돌보고 보살피며 섬기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해석하여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칫 ‘농사’ 자체에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여기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농사하는 자’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에 몰두하면서 체어리티는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41의 마지막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가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4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명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외형상 아무리 정교하고 확고한 신앙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신앙의 생명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처음은 반드시 명백한 거짓에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AC.340에서 보았듯이, 원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리가 계속되면 결국 신앙은 자신의 형제인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AC.341은 그 결과를 미리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생각했던 ‘부부생활 준수 가이드 20가지’의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생활의 원칙과 약속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보다 규칙이 중심이 되어 ‘나는 20가지를 모두 지켰으니 좋은 배우자다’라고 주장한다면 이상해집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배려는 사라졌는데 규칙 준수만 남았다면, 결혼의 형식은 유지해도 결혼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와 신앙의 고백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것이 되면 신앙의 본래 생명을 잃습니다.

 

앞서 떠올리셨던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관한 비유도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 자식 간에도 돈 계산은 분명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는 경우에 따라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재정 문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를 지탱하던 사랑과 신뢰보다 ‘계산의 원칙’이 더 근본적인 자리에 올라가 버린다면 관계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원칙이 사랑을 섬기는 동안에는 유익하지만, 사랑에서 독립하여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리도 바로 이런 종류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AC.341의 ‘형제’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중요하냐 사랑이 중요하냐’, ‘신앙이 먼저냐 행위가 먼저냐’라고 서로 맞세우는 순간 이미 가인의 문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밀어내지 않으며, 참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형제’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배우며 올바른 방향을 얻습니다.

 

여기서 ‘양 치는 자’와 ‘농사하는 자’의 대비도 단순한 두 직업의 대비를 넘어섭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을 돌보고 실제로 행하는 삶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4의 질문은 결국 ‘누가 더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진리가 실제로 어떤 사랑을 품고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참된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지식과 신앙이 이웃을 향한 선으로 이어지는지, 다른 사람을 돌보고 용서하고 섬기는 체어리티로 나타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진리 없는 막연한 친절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로부터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지를 분별하며 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41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을 마련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양 치는 자’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농사하는 자’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판단의 기준을 조금도 흐리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앞으로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열쇠가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참된 신앙이기를 그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창4의 비극은 아벨만 죽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를 죽이는 순간, 가인이 붙들고 있던 ‘신앙’ 역시 그 본래의 생명을 잃는다는 데 더 깊은 비극이 있습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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