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곧 이단들(heresies)을 다루며, 그 후에 에노스(Enosh)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는 창4는 가인과 아벨, 가인의 후손들, 그리고 마지막에 셋과 에노스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의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으로는 태고교회가 점차 쇠퇴하면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분리되고, 그 결과 여러 교리적, 교회적 계열이 생겨나는 과정,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를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했고, 그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perception)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분리된 독립적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하나였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체어리티(charity)와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특정한 교리를 전체인 것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AC.324가 말하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heresies’를 ‘이단들’이라고 번역하더라도,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특정 교단이나 단체에 대한 판정보다,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되고 절대화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합니다. 부분적인 진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라는 전체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를 신앙의 전부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후 가인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표상하게 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 역시 단순한 형제 살해를 넘어,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뒤, 마침내 체어리티를 무시하고 소멸시키는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나 AC.324의 두 번째 절반은 전혀 다른 방향을 보여 줍니다. 교리들이 분리되고,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에노스’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교회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일으켜진 것입니다. 인간은 교회를 분리하고 변질시키지만,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전의 교회가 더 이상 본래의 상태로 존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마련하십니다.

 

창4:26의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 교회와 연결됩니다. 최초 태고교회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받아 주님을 예배하던 가장 깊은 천적 상태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주님과 인간의 연결 자체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예배의 형태도 달라졌고, 주님께서는 그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한 족보상의 출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구원의 길을 계속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생명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신 것은, 인간을 영원히 생명에서 쫓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창4에서는 그 보호의 섭리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속되는지가 나타납니다. 인간이 가장 순수했던 천적 상태를 잃고, 교리와 신앙마저 분열시키더라도, 주님께서는 생명나무의 길 자체를 없애지 않으시고 인간이 다시 그 생명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교회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심화

 

1. ‘창4와 창5는 나란히 진행된 두 계열 이야기’

 

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셋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에 어딘가 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창4를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이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본 게 되는데... 이건 좀... 차라리 창4 따로, 창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갑자기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그대로 시간순으로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태어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그 긴 세월 동안 나이만 먹다가 뒤늦게 셋을 낳았다는 것인지, 또 태고교회는 가인 이후, 오랫동안 어두운 상태에 있다가 셋 이후에야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창4와 창5를 그렇게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두 장은 동일한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을 각각 집중하여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4는 특히 태고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질의 흐름, 곧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보여 줍니다. 반면 창5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을 거쳐 노아에 이르는 태고교회의 주된 계승선을 따로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모두 끝난 뒤에 창5의 셋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두 계열은 상당 부분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나란히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나란히’라는 말도 모든 인물의 출생 연대를 정확히 맞추어 역사적 동시성을 확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보다 ‘상태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가인,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단지 개인만이 아니라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고,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서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한쪽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다음, 동시에 다시 다른 계열로 돌아가 이번에는 그 계열의 역사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은 반드시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대표되는 한 계열에서 셋으로 대표되는 다른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그 셋 계열을 다시 처음부터 붙잡아 노아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역사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줍니다. 즉 창4와 창5는 ‘먼저 가인 계열, 그 모든 역사가 끝난 다음 셋 계열’이라는 관계라기보다,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계열을 각각 추적한 두 개의 서술’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만 이것을 너무 단순하게 ‘가인 계열은 악한 계열이고, 셋 계열은 선한 계열이다’라고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점차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면서 변질되어 간 데 있습니다. 또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완전한 상태로 노아까지 내려간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점차 쇠퇴하여 결국 홍수라는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두 계열 모두 태고교회라는 거대한 영적 역사 안에 있으며, 다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라는 명칭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교회 한 세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손 교회들을 거쳐 홍수 직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교회 시대를 포괄합니다. 그 안에는 가장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교리적 계열도 있고, 그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새로운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의 어두운 모습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순간 태고교회 전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AC.324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두 흐름입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갈라지고 교리들이 분리되어 여러 ‘heresies’가 생겨나지만, 주님에게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창4와 창5는 바로 이 두 흐름이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서로 다른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이 관점을 처음부터 가지고 읽으면, 앞으로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가 단순한 고대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분리되고 쇠퇴하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생명의 계보를 보존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거대한 영적 역사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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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서사라 목사의 ‘하나님께 묻는 삶’

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장 12절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태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하나님께 묻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병들었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낸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묻지 않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태도’라고 전개합니다.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이 ‘묻기’는 단순히 성경을 읽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차원을 넘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말, 그리고 마음속으로 즉시 들어오는 응답까지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사소통으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입니다.

 

먼저 이 설교의 중심 명제 자체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만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이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오류 가운데 하나는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지혜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지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에는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하시야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이 점에서는 적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아하시야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관한 답을 어디에서 구했느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영적으로 넓혀 읽으면 인간이 삶의 근원과 방향을 주님에게서 찾지 않고 자기 지성, 세속적 판단, 욕망, 미신, 또는 다른 어떤 피조된 것에서 찾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는 질문은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 됩니다. ‘나는 실제로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으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통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 애정과 욕망에 따라 사물을 보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그 사람의 사랑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참이라고 보고, 무엇을 중요하다고 판단하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혹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자신을 살피는 태도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묻는 사람’은 단순히 신비한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게 보면 자기 뜻을 절대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도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는 성경에 이미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용서를 명한다면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용서할까요?’라고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디로 이사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처럼 성경에 구체적인 답이 적혀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개인적 계시나 음성이 성경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존중하려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고 기다리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입’, 그리고 훈련이 깊어질 경우 질문하자마자 마음속으로 오는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답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에는 응답을 얻기 위해 금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훈련이 많이 되어’ 물으면 거의 즉시 응답이 온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자주 묻는 훈련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깊어지고 응답을 더 빨리 알 수 있다고 권합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할 것입니다. 영계로부터 인간에게 생각과 애정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애정이 인플럭스를 통해 들어온다고 끊임없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을 ‘생산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흐름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마음 안으로 어떤 생각이 들어온다’는 서사라 목사의 경험 자체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곧바로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떤 생각이 내 안에 분명하게 들어왔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판단은 전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는 오히려 이 둘을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고, 악한 영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으며, 자신의 기억과 애정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경험되는 수많은 사고도 있습니다. 더욱이 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사람의 생각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출처를 모르면 그것을 완전히 ‘내 생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강렬하거나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서사라 목사의 ‘자꾸 묻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 방식을 알게 되고, 훈련되면 거의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표현은 장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하루의 삶을 주님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 뜻을 내려놓으려는 훈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주일예배나 교리적 고백에 가두지 않고 일상 전체로 가져오게 합니다. ‘갈까요, 말까요, 이것을 할까요, 저것을 할까요’ 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면에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질문 → 내면의 응답 → 하나님의 뜻 확인’이라는 거의 자동적인 체계로 굳어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수 있고,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생긴 생각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반복적으로 어떤 응답을 기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응답’이라고 해석할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응답을 얼마나 빨리 듣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진리와 선에 의해 얼마나 새로워지고 있느냐입니다. 천국은 음성을 잘 듣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게 바꾸어 표현한다면, ‘주님의 뜻을 알려 달라고 계속 신비한 신호를 요구한다’기보다 ‘말씀 앞에서 자기 욕망과 판단을 내려놓고, 이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살피며,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행할 힘을 주님께 구한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듭니다. 주님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매 순간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하며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마침내 자기 생명처럼 살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합니다. 설교를 그대로 밀어붙이면 자칫 ‘하나님께 물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묻지 않아서 실패했다’는 구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교자는 ‘우리 인생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취지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히 사는 사람도 외적으로는 실패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항상 외적 성공의 정답을 알려 주는 체계가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실수와 고난까지도 허용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인도하시는 무한히 깊은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묻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보다 ‘묻는 사람은 실패 속에서도 주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다윗 역시 늘 완벽한 선택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죄를 범한 뒤에도 다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모든 선택에서 초자연적 정답을 미리 전달받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달을 때 그것을 자기 합리화로 덮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인정하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설교 후반의 ‘영에 속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먼저 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자동자막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전체 문맥에서는 이 뜻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겉 사람에게 즉각 솟아나는 충동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속 사람의 더 높은 원리 아래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온다고 곧 말하지 않고, 욕망이 생긴다고 곧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 판단이 옳아 보인다고 즉시 결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그 ‘멈춤’의 다음 단계가 반드시 ‘어떤 내적 음성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 양심, 이성적 숙고,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 책임, 현실적 조건을 함께 살피는 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보다 낮은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보존하면서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모든 결정을 직접적인 음성에 의존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라 목사의 설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서사라 목사의 언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대화적’입니다. 사람이 묻고 하나님께서 답하시며, 그 응답을 알아듣는 능력이 훈련을 통해 발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통은 대부분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선을 흘려보내시고, 천국을 통해 진리를 비추시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그의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강렬한 체험보다 오히려 어느새 선을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며, 악을 싫어하게 된 변화가 주님의 임재를 더 깊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사라 목사의 영적 체험 전체를 앞으로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았는가’, ‘무슨 음성을 들었는가’, ‘누구를 만났는가’만으로 참과 거짓을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게 됩니다. ‘그 체험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 외적 현상에 집착하게 하는가, 아니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게 하는가? 개인에게 주어진 말을 절대화하게 하는가, 아니면 말씀의 보편적 진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가?’ 결국 영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그 체험의 화려함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중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므로 내가 알아서 산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이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나는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점입니다. 또한 성경에 이미 명백히 주어진 명령을 개인적 응답으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구분도 중요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주님의 뜻을 구하라는 권면 역시 거듭남의 실제와 접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묻는다’를 ‘내면에서 특정한 문장 형태의 응답을 받아내는 것’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이성을 통해, 이웃을 통해, 현실의 질서를 통해, 때로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섭리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인도는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라는 개별 질문에 대한 즉답보다, 그 사람이 선한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버려야 할 핵심 메시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심은 상당히 소중합니다. ‘주님께 묻고 살아라.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 주님을 네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 다만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면 훨씬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네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의 음성이라고 여기지는 말라. 말씀의 진리와 선, 이웃 사랑, 이성과 자유 안에서 그것을 살펴라.’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묻는 삶’의 가장 성숙한 모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것 할까요, 저것 할까요?’라고 답을 받아 움직이는 삶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거듭남을 거쳐 주님의 뜻이 점차 자기 마음의 사랑이 되고, 그래서 특별한 음성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진실을 선택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는 상태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부모에게 매 순간 ‘이거 해도 돼요?’라고 묻지만, 성장할수록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여 묻지 않아도 그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의 성숙도 어쩌면 그와 같습니다. 주님께 묻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기 생명 안에 새겨져 살아 있는 ‘대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번 서사라 목사의 첫 설교가 앞으로 이어질 천국·지옥 체험 해설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이 설교만 보아도 서사라 목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인간은 그 음성을 실제로 듣고 분별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천국 방문, 주님과의 대화, 천국 인물들과의 만남 등을 살펴볼 때도 결국 핵심 질문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경험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영계로부터 오는 경험은 어떤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할 때 서사라 목사의 증언을 성급히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 잡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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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장 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못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될 것을 미리 다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내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다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저 정치인이 문제다’, ‘저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네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법’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그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그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의 전쟁을 오늘 우리의 전쟁으로 읽는 가장 내적인 길입니다.

 

 

 

SY.38, 전광훈 목사, 20260802,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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