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2:23-24,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라는 내용을 가리켜 유튜브에서 성경 역사상 가장 난해한 구절이라 하며 대문짝만하게 다루는 걸 보았습니다. 겉뜻으로만 보면 정말 그러지 싶은데요, 이 말씀의 속뜻을 알고 싶습니다.

 

 

이 본문은 겉뜻 그대로만 보면 매우 거칠고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처럼 보입니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이런 장면들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영적 상태와 교회의 질서’를 보여 주는 상응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여기서 핵심은 ‘아이들을 벌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조롱하고 거부하는 상태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상징적 계시입니다. 이 전제를 놓치면 이 장면은 잔혹하게만 보이지만, 상응의 빛에서 보면 매우 엄중한 영적 법칙을 드러내는 본문입니다.

 

먼저 ‘엘리사’는 단순한 한 인물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교리’를 상징합니다. 엘리야가 떠나고 엘리사가 뒤를 잇는 구조 자체가 ‘옛 상태에서 새 상태로의 계승’, 곧 진리의 전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벧엘’은 문자 그대로는 장소이지만, 영적으로는 ‘교회’ 혹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벧엘은 종종 ‘타락한 예배’, 즉 외형만 남고, 내적 진리가 사라진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참된 진리가 타락한 교회 상태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그다음 ‘작은 아이들’이 나와 조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단순한 어린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아이’는 상태를 나타내며, 특히 ‘미성숙한 이해, 혹은 왜곡된 단순한 생각’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읍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상태에서 나온 사고’임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진리를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그것을 비웃고 거부하는 교회의 생각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외친 ‘대머리여 올라가라’라는 말은 더욱 결정적입니다. 성경에서 ‘머리털’은 ‘진리의 가장 외적 표현, 곧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대머리’라는 것은 ‘진리가 겉모습까지도 제거된 상태’, 곧 ‘말씀의 외적 진리마저 부정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조롱은 단순한 놀림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올라가라’는 말은 ‘여기서 사라져라, 우리에게 필요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결국 ‘진리를 완전히 배척하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이제 ‘엘리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는 부분을 보면, 이것 역시 사람이 분노하여 저주했다기보다 ‘영적 법칙이 작동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주님의 본성과 질서, 곧 진리와 선의 전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으로 저주한다’는 것은 ‘그 질서에 의해 결과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이 누군가를 임의로 벌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끝까지 조롱하고 거부하는 상태가 스스로 파괴를 불러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암곰 둘이 나와 사십이 명을 찢었다’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은 말씀의 ‘외적 의미’, 특히 그것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하여 사용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암곰’이라는 표현은 그 왜곡된 상태가 ‘강하게 감정적이고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은 종종 ‘선과 진리의 결합’ 혹은 그 반대로 ‘왜곡된 결합’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거짓과 악이 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십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시험과 심판의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는 수로,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상태가 끝까지 차올랐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 전체는 ‘진리를 조롱하고 거부하는 교회의 상태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본문은 ‘하나님이 아이들을 잔인하게 벌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경멸하고 배척하는 상태가 어떤 영적 결과를 낳는가’에 대한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모르고 있는 상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을 비웃고 밀어내며 자기 확신 속에 머물게 될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진리를 받아들일 길이 닫히고, 결국 자기 안의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본문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향한 겸손과 경외를 잃지 말라’는 깊은 영적 권면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SC.64,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부부, ‘두 사람 같으나 하나인 삶’

스베덴보리가 천국을 왕래하며 가장 놀라워했던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배우자였던 사람들, 혹은 영적으로 결합된 부부들이 천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가는가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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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26, ‘구세주를 아는 이들’, 70, ‘피난처 있으니입니다.

 

오늘은 2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85번에서 99번입니다. 그 주간 진도에 맞추는 본문이다 보니 절과 절 사이가 중첩될 수 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2:2-8)

 

이 본문을

 

안식 안에서 열리는 에덴,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85, 창2:2-3, 창2 '안식'의 확장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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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 창2:2-3, ‘안식’의 구조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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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창2:2-3, 영계의 질서로 본 '안식'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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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안식’, 정체성의 변화, '하나님의 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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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천적 인간의 형성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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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0, 창2:5-6, ‘초목과 채소’, 천적 인간의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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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1, 창2:5-6, ‘비, 안개’, 천적 상태의 평온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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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2, 창2:5-6, '안식', 평화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 겉 사람 전체를 적시는 상태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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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천적 인간의 상태’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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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4, 창2:7, 겉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 되는 과정(AC.94-9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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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겉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사랑의 생명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 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 그의 신앙,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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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오해 바로잡기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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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호흡 자체가 영적 상태와 직결되어 있었던 태고교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이 ‘숨 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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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 ‘동산’(garden)은 지성(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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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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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범위 중 메인으로 읽은 AC.99번 글은 얼핏 그동안 우리가 읽어 온,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냥 스윽 읽고 지나칠 만한 본문 중에서 심화로 살핀 네 가지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시선을 이런, 어쩌면 ‘평범한 표현들’에 잠시 머무르게 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이성은 주님의 빛을 받을 때, 본연의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됨을 확인합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록해 나가신 이 AC 본문들 역시 그 깊이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깊고 어려워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자 마음먹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열려 천국 빛 아래 있게 되며, 그 순간 천국 천사들처럼 모든 게 이해되어짐을 컨펌(confirm)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선을 의도함’, ‘사랑하기로 마음먹음’입니다. 이 안전한 삶의 태도 안에서 우리는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4-19(D1)

 

2647, 2, 창2.2, 2026-04-19(D1)-주일예배(창2,2-8, AC.85-99), ‘안식 안에서 열리는 에덴,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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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12, 창2:1-3, AC.67-84),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 창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절,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창2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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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심화

 

4.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

 

 AC.99 본문에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으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여기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게 뭔가요? 선행 내용에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들까지도라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열려 있다는 건 어떤 건지, 그리고 그것이 왜 주님으로부터인지요?

 

 

AC.99에서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허락을 받는다’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정도를 넘어서, 사람 안의 모든 기능, 즉 생각, 관념, 말, 행동 등이 닫힌 자기중심의 회로’가 아니라 위로 연결된 상태’에서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인플럭스(influx)가 통하는 상태’,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막힘없이 들어와 그 사람의 내부 질서를 형성하고, 그 질서가 그대로 바깥 표현으로 흘러나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열림(opened)은 문 하나가 열린다는 이미지보다, 전체 구조가 위를 향해 정렬되고 소통이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먼저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이 열려 있다’는 것을 보겠습니다. 보통 우리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만들어진다고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생각의 형식’은 우리 것이지만 생명’은 위에서 온다고 봅니다. 사람이 자신과 세상 중심으로 살 때는 그 생각이 주로 감각, 기억 지식, 자기 이익의 논리에서 구성됩니다. 이때는 생각이 닫혀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방향으로 자신을 둘 때, 같은 기억 지식과 이성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위에서 비추는 빛을 받습니다. 그러면 생각의 배열이 달라지고, 관념들이 서로 충돌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무엇이 더 본질적인지 자연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생각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같은 주제를 말해도, 한쪽은 방어와 정당화의 논리로 흘러가고, 다른 쪽은 진리와 선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차이가 생깁니다.

 

다음으로 말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나 자기표현을 넘어, 안에 형성된 질서가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이 생각의 외적 형태라고 보는데, 생각이 주님으로부터 비치고 정렬되면 말도 그 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말이 줄고, 과장이나 왜곡이 줄며, 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 말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억지로 조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그렇게 열려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동이 열려 있다’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행동은 의지의 외적 표현인데, 의지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의 영향 아래 있을 때, 그 사람의 선택과 행위는 점점 일관된 방향을 갖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주 평범한 일, 그러니까 말 한마디, 선택 하나일지라도 그 안에는 이미 위에서 내려온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중심의 계산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더 깊은 기준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행동이 열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주님으로부터’라고 말하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생명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생명을 받는 그릇’이지, 스스로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이 진리와 선을 실제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평소에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특별한 환상을 보거나 비범한 체험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근원’을 바르게 두고, 실제로 그 근원으로부터 오는 흐름이 막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열림’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AC.99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처럼, 사람이 지성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두기 시작할 때, 그리고 진리를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할 때, 그때 비로소 이 통로가 열립니다. 반대로 내가 이해하고 판단한다’는 자리에 계속 서 있으면, 겉으로는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이 흐름은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점점 살아나고, 어떤 사람은 점점 더 자기 확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리하면, ‘그의 모든 생각과 관념들, 심지어 말과 행동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위를 향해 정렬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생각–말–행동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인간 활동이지만, 그 근원과 흐름이 달라진 상태이며,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AC.99, 창2:8, 생명의 질서에서 본 ‘에덴동산’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한테 있어서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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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AC.99.심화 3.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 위 AC.99 본문에 ‘가장 내적인 의미, 곧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는’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왜 ‘가장 내적인 의미’가 ‘보편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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