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첫 강의를 듣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출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점입니다. 강사는 한국 개신교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수도 전통을 다시 세워 보고 싶다는 상당히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사학교를 단순한 신학교나 성경공부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고 책을 읽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선명한 문제의식, 곧 ‘한국 개신교에 수도(修道)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는 지식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첫 강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강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지식의 축적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알려지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아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해한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에서 행위로 나오며, 마침내 삶의 습관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따라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도사학교가 처음부터 ‘또 하나의 신학 공부’를 지향하지 않고, ‘사람의 변화’를 지향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장점입니다.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한국 개신교의 ‘목회자 중심적 성공 모델’에 대한 불만입니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확장하고, 목회자로서 사회적 위치를 얻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반드시 같은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입니다. ‘,,’ 같은 표현을 비롯, 강사는 교회가 물질과 성공을 좇으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을 상당히 강하게 경계합니다. 이것은 표현의 강약을 떠나서 매우 성경적인 문제제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깊어집니다. 교회의 타락은 먼저 제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뒤집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종교와 진리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 겉으로는 여전히 교회이고, 설교와 예배와 성경이 존재하더라도 속에서는 이미 질서가 전도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수도를 요청하는 이유를 단순히 ‘가톨릭에는 수도원이 있으니 개신교에도 수도원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더 깊은 동기는 ‘목회 성공이라는 궤도 밖에서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귀한 문제의식입니다. 목사라는 직함도, 교회의 크기도, 설교 능력도, 학위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묻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만납니다. 영계에서는 직함이나 사회적 외관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수도사학교의 방향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강의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훈련과 절제와 고행이 강조됩니다. 수도원 생활의 엄격함, 추위와 배고픔, 단순한 음식, 침묵, 걷기, 불편한 잠자리, 금식과 같은 경험들이 소개되고,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몸으로 견디고 경험하는 훈련이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강사가 경험한 여러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동안 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한 사람들,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경외도 느껴집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이고, 삶의 습관을 바꾸려면 일정한 규율도 필요합니다. 자기 욕망을 무조건 따라가지 않는 훈련 역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르며, 사람은 자기 안의 악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제와 훈련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현대 그리스도교가 지나치게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삶의 훈련을 잃어버렸다면, 수도 전통이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고생하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proprium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추운 곳에서 잔다고 자기 사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침묵한다고 내면의 교만이 저절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떨어져 산다고 세상 사랑이 자동으로 정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수도생활 자체를 자기 공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버렸다. 나는 금식한다. 나는 고행한다. 나는 수도자다’라는 새로운 형태의 proprium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적 자아를 버리고 종교적 자아를 얻은 것뿐이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이 강의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생깁니다. 수도사학교가 추구하는 외적 훈련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침묵도 수단이고, 금식도 수단이며, 독서도 수단이고, 공동생활도 수단입니다. 심지어 수도원도 수단입니다.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주님 앞에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물리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의지와 삶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도원이 도움이 된다면 수도원은 귀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첫 학기 과정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상당히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강의 후반부에서 강사는 A4 용지를 기준으로 요약하고, 인상 깊은 내용을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쓰게 하는 식의 과제를 설명합니다. 한 달에 일정량의 글을 제출하게 하고, 많은 책을 읽게 하는 상당히 강도 높은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보다 ‘읽은 것이 자기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쓰라’는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기억에만 머물러서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들어온 진리가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자신의 상태를 비추는 빛이 되며, 의지와 행위에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다만 여기에도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내 삶과 연결한다’는 것이 단순한 자기성찰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진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기 위한 심리학적 도구가 아니라, 무엇이 주님의 질서이고, 무엇이 그 질서에 반하는지를 분별하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독서 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만이 아니라 ‘이 진리가 내 안에서 어떤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나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끄시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까지 들어가면 수도사학교의 독서와 글쓰기 훈련은 단순한 인문학적 독서가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자기성찰로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역시 그렇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불편을 견디며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성냄, 경쟁심, 인정 욕구, 지배욕, 질투, 조급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수도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혼자 산속에 앉아 있을 때는 자신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러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 보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뜻대로 되어야 편안한 사람인지 금방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공동생활은 매우 강력한 영적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악을 단순히 억누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규칙 때문에 화를 참는 것과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행동 교정일 수 있지만 후자는 거듭남입니다. 수도학교의 엄격한 규칙이 사람을 단정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칙 자체가 사람의 속 사람을 새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속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외적 규율은 그 역사를 위한 질서를 제공할 뿐입니다.

 

이 점에서 첫 강의에서 느껴지는 ‘강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고,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훈련을 통과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강사는 과정 중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으며, 끝까지 남는 소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사람은 반드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힘을 강하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악을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싸우는 힘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을 때일지도 모릅니다. 금식에 성공하고, 침묵에 성공하고, 독서량을 채우고, 남들이 포기한 훈련을 끝까지 견디고, 마침내 ‘수도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때, proprium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취하기 쉽습니다. ‘나는 해냈다’가 되는 순간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갈수록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수도의 외적 엄격함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강의 중 역사 부분은 조금 다르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니므롯, 세미라미스, 담무스, 태양신 숭배, 바벨론 종교가 이후의 여러 종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큰 역사적 틀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강사가 말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하나님 신앙이 인간의 욕망과 권력, 우상숭배와 결합하면서 변질되고, 교회 역시 언제든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 자체는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러나 세미라미스와 담무스를 중심으로 고대 바벨론 종교에서 후대의 가톨릭 및 기독교 관습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역사 서술은 이 자료만으로 사실이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적 사실성은 별도의 검증 대상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바벨론’을 어떻게 보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의 핵심은 단순히 어떤 고대 종교의 계보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바벨론’은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사람을 지배하려는 사랑, 곧 종교적인 것을 자기 권력과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벨론은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만 찾을 수도 없고, 특정 교단에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에게도 바벨론이 있을 수 있고, 수도자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타락한 교회를 떠나 순수한 수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순간, 바벨론의 원리는 그 사람 안에서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첫 강의의 역사적 도식을 오히려 훨씬 더 날카로운 영적 질문으로 바꾸어 줍니다. ‘어느 교회가 바벨론인가?’가 아니라 ‘내 안의 바벨론은 무엇인가?’입니다. ‘어느 종교가 타락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의 것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에 더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깊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사가 수도 전통을 개신교가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수도원이 가톨릭보다 먼저 존재했던 기독교적 유산이며, 그러므로 개신교가 수도 전통 자체를 가톨릭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버릴 필요가 없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 침묵, 절제, 독신 또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 생활, 노동과 묵상 등 수도적 요소들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교파가 수도원의 소유권을 갖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 안에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수도복을 입는 것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에는 과정을 마친 사람과 수도복, 수도사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수도복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겸손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애정입니다. 같은 수도복을 입은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주님의 종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보통 신자와 다른 특별한 영적 사람이다’라는 마음으로 입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동일하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여기서 수도사학교의 이름 자체도 흥미로워집니다. 나중에 ‘수도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명칭 변경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학교보다 ‘수도’를 배우는 학교라는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는 특정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명칭 변경의 실제 이유를 단정하는 말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바라본 의미입니다. 진정한 수도는 ‘나는 수도사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고, 날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며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첫 강의에서 가장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사는 완성된 체계를 가르치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을 ‘우리끼리 시작한다’,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아무의 전통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되지’라는 취지의 말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는 개척자의 서툶과 동시에 진정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학생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경험하고 배우면서 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첫 학기 일정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수도원 규칙서라기보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수도적 삶을 어떻게 실제로 가르쳐 볼 것인가’를 처음 실험해 본 흔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것을 전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말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게 할 수 있고, 금식은 욕망의 힘을 보게 할 수 있으며, 공동생활은 proprium을 드러내고, 독서는 이해를 열며, 글쓰기는 자신의 상태를 성찰하게 하고, 노동은 관념적인 신앙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입니다. 이 훈련들이 ‘훌륭한 수도자’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하면 자기완성의 종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도록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물리치는 삶’으로 향한다면 매우 유익한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수도 전통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 나옵니다. ‘왜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에서는 세상에서 맡은 직업과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고, 이웃에게 유용한 일을 하면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의 현장은 반드시 수도원이 아닙니다. 가정도 수도원이 될 수 있고, 직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으며, 목회 현장도 수도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을 감당하며 돈을 사용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는 그 복잡한 일상 속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실제 모습이 끊임없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거듭남을 위한 특별한 ‘훈련장’이 될 수는 있어도, 거듭남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수도사학교가 품었던 이상과 스베덴보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상당히 넓은 접점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지식을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자기 욕망을 그대로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물질과 성공에 사로잡힌 종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 실제 훈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 등은 서로 깊이 만납니다. 차이는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생깁니다.

 

수도사학교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한 사람 만들기’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층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과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듯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의지를 심으시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가장 깊은 자리는 산속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만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첫 강의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읽어도 좋겠습니다. ‘이 강의는 세상을 버리는 수도자를 만들려는 시도라기보다, 세상에 삼켜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싶었던 한 개신교 목회자의 몸부림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proprium이며, 사람이 정말 들어가야 할 수도원은 외딴 장소 이전에 주님 앞에 열리는 자신의 내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첫 강의를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역사 설명에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고, 금욕과 외적 훈련에는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수도자라는 특별한 신분을 강조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흐르는 질문은 매우 진지합니다. ‘목회자가 되고도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을 많이 알고도 자기 욕망대로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커지고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수도사학교는 그 답을 ‘수도’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질문에 아주 깊은 곳에서 답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할 곳은 ‘’입니다. 진리가 기억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의지로, 의지에서 행위로 내려와 마침내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발견하고, 수많은 시험을 통과합니다. 외적으로는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도 그 사람 안에서는 치열한 수도생활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 수도원에 살아도 자기 사랑을 붙들고 있다면 내적인 수도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강의와 첫 학기 일정표를 함께 놓고 보면, 어쩌면 이 학교가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가장 깊은 것은 ‘수도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귀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갈망을 더 안쪽으로 인도합니다. 수도복에서 삶으로, 고행에서 회개로, 자기훈련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에서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분리로, 그리고 ‘특별한 수도자’가 되는 데서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된 사람’이 되는 데로 말입니다. 저는 이 첫 강의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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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내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것’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삶’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내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갈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한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말,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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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번 검증에서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자동자막 때문에 제가 앞선 해설에서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고 잘못 이해했던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링크와 자동자막을 함께 주시면, 이런 고유명사와 역사적 일화는 가능한 범위에서 먼저 확인한 뒤 해설하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SY.49, 강문호 목사, ‘갈보리교회 은퇴사’ (20191201)

※ 위 제목의 ‘SY’는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

bygrac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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