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1:9에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이 그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5의 마지막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선’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이번 번호는 그 이유를 다시 설명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가 직접 밝힌 의미를 중심으로, 민수기의 기록과 주님께서 이 사건을 언급하신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놋뱀은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민21장의 문자적 기록에서 백성들은 뱀에게 물려 죽어 갔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달자,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기록에서 놋뱀은 단순히 사람이 만들어 낸 치료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신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요3:14-15에서 이 사건을 자신에게 연결하셨습니다. ‘모세가광야에서뱀을든것같이인자도들려야하리니이는그를믿는자마다영생을얻게하려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놋뱀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은 민수기의 사건은, 주님께서 들리시는 일과 그분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일에 연결됩니다. 이 연결은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낸 비유가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왜 놋뱀을 특별히 주님의 ‘감각적·자연적선’이라고 설명했을까요? AC.425에서 놋은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또한 그는 놋뱀 전체가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외적인 차원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 번호만을 근거로 뱀과 놋의 의미를 각각 분리한 뒤, 주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되는 전 과정을 상세히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 관한 설명은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다룬 해당 번호와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놋뱀이 주님을 표상한다는 사실과,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뱀이 언제나 주님을 뜻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 창3장의 뱀과 민21장의 놋뱀은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5에서 일반적인 뱀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만든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른 모든 뱀의 기록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자연적인 것이 주님과 무관한 낮은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하게 합니다. AC.425는 자연적 선을 나타내는 놋을 설명하다가 마지막에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언급합니다. 자연적인 것에 관한 설명이 주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선행이 주님의 신적 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힌 것은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놋뱀은 AC.425에서 놋의 의미를 확인하는 마지막 사례이면서, 그 의미가 주님께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의 백성들은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고,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인자가 들리시는 일과 영생에 연결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한다고 밝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살피는 일이 단순한 재료의 상응을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상되시는지를 이해하는 데까지 이어짐을 보게 됩니다. (AC.425심화1)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
오늘날세상사람들은‘놋’(brass)이자연적선을뜻한다는사실을알지못합니다.또한말씀에등장하는모든금속이속뜻으로는각각고유한의미를지닌다는사실도알지못합니다.이를테면‘금’(gold)은천적선을,‘은’(silver)은영적진리를,‘놋’(brass)은자연적선을,‘쇠’(iron)는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다른금속들도마찬가지이며,‘나무’(wood)와‘돌’(stone)역시저마다고유한의미를지닙니다. 궤와성막과성전을만드는데사용한‘금’,‘은’,‘놋’,‘나무’도이러한것들을나타냅니다.이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나중에설명하겠습니다.이러한의미는예언서에서도분명하게드러납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It is unknown to the world at the present day that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and also that every metal mentioned in the Word has a specific signification in the internal sense—as “gold,” celestial good; “silver,” spiritual truth; “brass,” natural good; “iron,” natural truth; and so on with the other metals, and in like manner “wood” and “stone.” Such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gold,” “silver,” “brass,” and “wood,”used in the ark and in the tabernacle and in the temple,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at such is their signification is manifest from the prophets, as from Isaiah:
이말씀은주님의오심과그분의나라,그리고천적교회에관한것입니다.‘놋대신금’(forbrassgold)은자연적선대신천적선을,‘쇠대신은’(forironsilver)은자연적진리대신영적진리를뜻합니다.‘나무대신놋’(forwoodbrass)은육체적선대신자연적선을,‘돌대신쇠’(forstonesiron)는감각적진리대신자연적진리를뜻합니다. 에스겔에서는다음과같이말합니다. treating of the Lord’s advent, of his kingdom, and of the celestial church. “Forbrassgold,” signifies for natural good celestial good; “forironsilver,” signifies for natural truth spiritual truth; “forwoodbrass,” signifies for corporeal good natural good; “forstonesiron,” signifies for sensuous truth natural truth. In Ezekiel:
이말씀은두로에관한것입니다.두로는영적·천적부요함을지닌사람들을뜻하며,‘놋그릇’(vesselsofbrass)은자연적선을가리킵니다. speaking of Tyre, by which are signified those who possess spiritual and celestial riches; “vesselsofbrass” are natural goods.
여기서도‘돌’(stones)은감각적진리를,‘쇠’(iron)는자연적진리,곧이성적진리를,‘놋’(brass)은자연적선을뜻합니다. 에스겔은다음과같은모습을보았습니다. where also “stones” denote sensuous truth; “iron,” natural, that is, rational truth; and “brass,” natural good. Ezekiel saw:
여기서도‘놋’은자연적선을뜻합니다.사람의‘발’(foot)이자연적인것을표상하기때문입니다.이와비슷하게다니엘에게도다음과같은모습이나타났습니다. where again “brass” signifies natural good, for the “foot” of man represents what is natural. In like manner there appeared to Daniel,
‘놋뱀’(brazenserpent, 민21:9)이주님의감각적·자연적선을표상했다는사실은앞에서살펴보았습니다. That the “brazenserpent” (Num. 21:9) represented the sensuous and natural good of the Lord may be seen above.
모세가놋뱀을만들어장대위에다니뱀에게물린자가놋뱀을쳐다본즉모두살더라(민21:9)
해설
AC.425는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쇠’의 속뜻을 더 넓은 말씀의 문맥에서 확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금속들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금은 천적 선, 은은 영적 진리, 놋은 자연적 선, 쇠는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 구별은 금속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에도 각각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궤와 성막과 성전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재료들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이번 번호는 모든 재료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두발가인과 직접 관련된 놋과 쇠의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먼저 사60:16-17은 금속과 재료들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여 보여 줍니다. ‘놋대신금’은 자연적 선 대신 천적 선을, ‘쇠대신은’은 자연적 진리 대신 영적 진리를 뜻합니다. 이어 ‘나무대신놋’은 육체적 선 대신 자연적 선을, ‘돌대신쇠’는 감각적 진리 대신 자연적 진리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주님의 오심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천적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재료 교체는 단순히 값싼 물건을 값비싼 물건으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구절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거듭남의 단계표로 곧바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425는 각각의 재료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만, 사람이 육체적 선에서 자연적 선으로, 다시 천적 선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과정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자연적 선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감으로, 천적 선을 특정한 감정 상태로 정의하지도 않습니다. 우선 말씀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으로 구별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겔27:13에서는 ‘놋그릇’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두로의 무역에 관한 기록이며, 스베덴보리는 두로가 영적·천적 부요함을 지닌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문맥에서 ‘놋그릇’은 자연적 선을 나타냅니다. 앞의 AC.424에서 세공업자가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 또는 그 기억지식과 관련되었다면, 이번 번호에서는 두로의 상품 가운데 등장하는 놋그릇을 통해 자연적 선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다만 ‘그릇’이라는 말에 별도의 의미를 더하여 인간의 마음이나 교리의 그릇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이번 번호가 직접 제시한 설명은 아닙니다.
겔27:13에 등장하는 ‘두발’이라는 이름도 창4장의 ‘두발가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AC.425는 이 두 이름의 관계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름이 비슷하고 놋이 함께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인물이 동일한 속뜻을 지닌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히는 것은 두로의 의미와 ‘놋그릇’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신8:9에서는 ‘돌’, ‘쇠’, ‘놋’이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돌을 감각적 진리로, 쇠를 자연적 진리, 곧 이성적 진리로, 놋을 자연적 선으로 풀이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자연적 진리를 ‘이성적진리’라고도 표현합니다. 앞에서 쇠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이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돌은쇠’라는 표현을 감각적 진리가 실제로 이성적 진리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본문이 밝힌 두 진리의 구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겔1:7은 놋의 의미를 ‘발’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에스겔이 본 네 생물, 곧 그룹들의 발은 광낸 놋처럼 빛났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하므로, 그 발에 나타난 놋 역시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놋이 자연적 선이라는 설명과 발이 자연적인 것을 표상한다는 설명이 서로 맞물립니다. 그러나 ‘광낸놋’이 정결하게 된 자연적 선의 특정한 상태를 뜻한다거나, 이 환상의 모든 신체 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이번 번호에서 밝히지는 않습니다.
단10:5-6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용합니다. 다니엘이 본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고 우바스의 금띠를 띠었으며, 팔과 발은 광낸 놋과 같았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금과 놋이 한 형상 안에 함께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금이 천적 선을, 놋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환상은 놋이 자연적 선을 나타낸다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됩니다. 다만 이 번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팔과 허리와 몸의 각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민21:9의 ‘놋뱀’을 언급합니다. 그는 놋뱀이 주님의 감각적·자연적 선을 표상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고 말합니다. 앞의 인용들이 놋의 의미를 여러 말씀에서 확인하는 사례였다면, 놋뱀은 그 의미가 주님과 직접 관련되는 사례입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앞선 해설을 가리키므로, 놋뱀의 의미는 별도의 심화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AC.425는 금속과 재료의 속뜻을 통해 선과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특히 이사야와 에스겔, 신명기와 다니엘의 말씀은 ‘놋은자연적선,쇠는자연적진리’라는 앞선 설명을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놋뱀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자연적 선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주님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창4장의 두발가인이 다루는 놋과 쇠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AC.425해설)
렘10:8-9에서 우상은 다시스의 은과 우바스의 금, 청색 실과 옷으로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스베덴보리는 AC.424에서 이 장면을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이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이 말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의 내용을 가져와 자기 가르침을 꾸민다는 사실입니다.
이 설명은 말씀을 인용하는 행위와 말씀의 참된 뜻을 가르치는 일을 구별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정확하게 인용하더라도, 그 구절들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모아 놓는다면 그 인용만으로 가르침의 참됨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을 설명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입니다. 먼저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꾸미기 위해 말씀의 내용들을 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새긴우상’과 예레미야의 ‘헛된것들의교훈’은 이 문제를 함께 보여 줍니다. 이사야에서는 사람이 자기 상상으로 거짓을 만들어 진리처럼 보이게 가르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그 거짓을 꾸미기 위해 말씀에서 여러 내용을 모아들입니다. 두 구절 모두 거짓이 단순히 아무런 근거 없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장식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424는 모든 잘못된 해석이 반드시 의도적인 속임수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직접 설명하는 대상은 자기 생각으로 만든 거짓을 꾸미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금과 은의 의미도 이 문맥에서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이 우상을 선처럼 보이게 하고, 은이 진리처럼 보이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금과 은이 귀한 재료라는 사실이 우상을 참된 것으로 바꾸어 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하고 참된 말씀의 표현을 가져와 장식한다고 해서, 그 표현들로 꾸민 가르침의 중심까지 저절로 참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는 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 점은 AC번역과 해설을 작성하는 우리의 작업에도 적용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관련 구절을 찾아 덧붙이는 것과, 해당 구절의 문맥 및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뜻을 확인하는 것은 다릅니다. 본문이 직접 말한 내용, 관련 저작에서 확인한 내용,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생각해 낸 적용을 구별하면 말씀을 자기 생각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해석의 자유를 없애자는 뜻이 아니라, 해석의 근거를 분명히 하자는 뜻입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우상 제작 장면은 ‘성경구절이들어있으니참된가르침이다’라는 판단이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지적하는 문제는 말씀의 내용을 가져와 이미 만들어 놓은 거짓을 꾸미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인용할 때 그 구절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살피고, 자신의 생각과 본문의 뜻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AC.424심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