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3:24)

 

AC.285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대하여. 이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기억 지식(memory-knowledge)마저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더럽고 추한 사랑과 그릇된 확신(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 속에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이것을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his being 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in that they were deprived of all memory-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ere left to their own filthy loves and persuasions; this being provided lest they shoul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which is signified by his being “driven out, and cherubim being made to dwell at the garden, with the flame of a sword,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verse 24)

 

 

해설

 

AC.285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영적 쇠퇴가 마침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앞선 AC.284에서는 다섯 번째 후손이 모든 선과 진리를 잃고 거듭나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기억 지식마저 잃어버리고, 오직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 속에서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사람이 배우고 기억하는 모든 외적 진리와 지식 저장소로 설명합니다. 말씀의 내용, 신앙의 교리, 선과 악의 구별, 하나님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기억 지식은 거듭남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바탕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기억 속에 진리를 심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점차 그의 삶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후손은 이러한 기억 지식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을 잊어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존중마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모든 판단의 기준은 자신의 욕망과 자기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더럽고 추한 사랑과 그릇된 확신’ 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럽고 추한 사랑(filthy loves)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돌보는 자연스러운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과 심지어 주님까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사랑입니다. 또한 ‘그릇된 확신(persuasions)은 거짓을 단순히 믿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진리가 제시되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굳어진 거짓된 신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사람의 rational까지 지배,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악을 선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상태조차도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고 설명하는 점입니다. 그는 ‘이것은 그들이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모독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모독(profanation) 때문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진리를 충분히 알고 인정한 뒤,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악과 결합시키면, 단순히 무지한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 파괴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때로는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더 큰 멸망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이러한 보호를 창3:24에서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로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죄인을 막아 세우시는 심판의 장면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그룹은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보호의 상징입니다. 그룹은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존재입니다. 또한 ‘두루 도는 불칼’은 거룩한 진리를 함부로 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신적 진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국에서 쫓아내시는 장면이 아니라,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는 장면입니다.

 

AC.285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가장 낮은 영적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가 그곳에서도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은 선과 진리를 잃고, 자기 사랑과 거짓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까지도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억지로 주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을 보호하심으로써 장차 다시 회복될 가능성을 남겨 두십니다. 그러므로 창3:24의 그룹과 불칼은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주는 마지막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filthy loves

 

AC.285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자기 자신의 더럽고 추한 사랑(filthy loves) 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럽다(filthy)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좋지 않다거나 죄가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주님을 향해야 할 사랑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뒤집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근본적으로 왜곡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삶은 결국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은 생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생각은 사랑을 섬기고, rational은 사랑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주님을 향하면 사람 전체가 천국을 향하게 되고,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하면 사람 전체가 지옥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랑을 인간 생명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더럽고 추한 사랑’이란 단순히 욕심이 많거나 성격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의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심지어 선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어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지배하려 하고,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하고 미워하는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결국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filthy’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고상하게 꾸며질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천사들은 사랑 자체를 보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악취를 풍기는 더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더럽고 추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영계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사람을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과 쉽게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먼저 악한 사랑을 품고, 그다음에는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짓은 다시 악한 사랑을 더욱 굳게 만듭니다. 그래서 AC.285는 ‘더럽고 추한 사랑’과 ‘그릇된 확신(persuasions)을 나란히 말합니다. 사랑은 의지를 지배하고, 그릇된 확신은 이해를 지배하여 사람 전체를 거짓된 삶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조차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그러한 사랑 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악을 원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더 높은 진리와 신앙의 거룩한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러한 상태에서 거룩한 진리까지 충분히 알고도 그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모독(profanation)에 빠져 훨씬 더 깊은 영적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그 상태에 두신 것은 버리심이 아니라 보호하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사람 안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삶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주님 사랑 아래 있을 때에는 질서 안에 있지만,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그것은 ‘더럽고 추한 사랑’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사랑을 완전히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을 주님 사랑 아래 두어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AC.285의 ‘더럽고 추한 사랑’은 모든 악의 근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돌아서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랑이며, 결국 사람의 생각과 의지, 삶 전체를 지배, 진리마저 왜곡시키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문은,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까지도 모독으로부터 보호, 언젠가 다시 진리와 생명의 길로 돌아올 가능성을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줍니다. 이것이 AC.285가 전하는 가장 깊은 자비의 메시지입니다.

 

 

2. ‘persuasions’

 

AC.285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더럽고 추한 사랑’(filthy loves)과 ‘그릇된 확신’(persuasions) 속에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ersuasions’는 단순한 의견(opinion)이나 믿음(belief)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persuasion은 거짓이 사람의 의지와 생각에 깊이 결합하여, 아무리 진리가 제시되어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어진 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그릇된 확신’, ‘망상적 확신’, 또는 ‘완고한 확신’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를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퍼셉션을 통하여 진리를 알고 있었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거짓이 반복되고 굳어지면서 마침내 진리를 완전히 밀어내는 강력한 확신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persuasion입니다.

 

이러한 persuasion은 단순히 잘못된 생각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제를 잘못 이해할 수 있고, 새로운 진리를 배우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persuasion은 이미 사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나 증거만으로는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진리를 사랑해서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사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논리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persuasion은 지성 문제가 아니라 의지와 사랑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persuasion을 위험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이 이해에만 머물러 있을 때에는 아직 고쳐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사랑과 결합하여 persuasion이 되면, 사람은 거짓을 자신의 생명처럼 붙들게 됩니다. 그 결과 진리를 들을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거짓을 더욱 굳게 방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진리를 밀어내는 상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 말기 persuasion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집’보다 훨씬 강한 상태였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그들의 persuasion이 너무 강하여, 다른 영들의 생각과 자유까지 억누를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거짓을 너무나 절대적인 것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진리를 생각하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persuasion은 영계에서도 매우 위험한 상태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AC.285에서는 ‘더럽고 추한 사랑’과 ‘그릇된 확신’을 함께 말합니다. 더럽고 추한 사랑은 사람의 의지를 지배하고, persuasion은 사람의 이해를 지배합니다. 의지가 악한 사랑에 사로잡히고, 이해가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히면, 사람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지옥 상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동시에 이것이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신앙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persuasion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천적 진리까지 충분히 알고 그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들은 모독(profanation)에 빠져 훨씬 더 깊은 영적 파멸을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더 큰 악에 빠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persuasion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진리보다 더 신뢰하고, 자신의 욕망을 지키기 위하여 말씀을 왜곡, 아무리 분명한 진리가 제시되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그 거짓은 점차 persuasion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 진리를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은 persuasion이 아니라 참된 신앙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85가 경고하는 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자기 사랑이 만들어 낸 거짓을 끝까지 붙드는 영적 완고함이며, 동시에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마음의 상태입니다.

 

 

 

AC.284, 창3:20-24, ‘창3:23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284 다섯 번째 후손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3:23)

 

AC.284

 

다섯 번째 후손에 대하여. 이들은 모든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고, 거듭나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3) Of the fifth posterity, which was deprived of all good and truth, and was reduced to the state in which they had been previous to regeneration, which is meant by his being “sent forth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verse 23)

 

 

해설

 

AC.284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영적 쇠퇴가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앞선 AC.283에서는 네 번째 후손에게서 자연적 선마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다섯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완전히 무너지고, 결국 모든 선과 진리를 잃어버리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약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 기반 자체가 거의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모든 선과 진리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는 언제나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신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선과 진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삶으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선과 진리가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과거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을 통하여 얻었던 모든 영적 유익을 스스로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원래 거듭나기 전의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태고교회 후손들도 처음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누렸지만, 점차 그것을 거절한 결과 다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창3:23에서는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라는 말씀으로 나타냅니다. 여기서 에덴동산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 교통하며 천적 생명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나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이상 그러한 생명 안에 머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언제나 사람의 상태를 사람의 눈높이에서 표현하기 때문에, 마치 주님께서 내보내신 것처럼 말씀하지만, 실제 원인은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은 사람의 자연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땅을 간다, 경작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천적 퍼셉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외적 차원에서 힘겹게 진리와 선을 배워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영적 생명이 이제는 수고와 오랜 과정을 통하여 조금씩 회복되어야 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도 함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다시 땅을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경작은 씨를 뿌리고 돌을 골라내며 열매를 기다리는 긴 과정입니다. 이것은 비록 높은 천적 상태는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거듭남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현재 상태에 맞는 길을 마련하시고, 그 길을 따라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은 때때로 이전보다 신앙이 식고, 말씀의 기쁨을 잃으며, 주님과 멀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진리를 배우고 선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비록 에덴동산의 기쁨은 잃었을지라도, 땅을 경작하는 새로운 삶을 통하여 다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AC.284는 태고교회의 다섯 번째 후손이 가장 낮은 영적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섭리는 그곳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택으로 선과 진리를 잃을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십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AC.285, 창3:20-24, ‘창3:24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285 여섯 번째와 일곱

bygrace.kr

 

AC.283, 창3:20-24, ‘창3:22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3:22)

 

AC.283

 

네 번째 후손에 대하여. 이들에게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소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 곧 거듭나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the celestial things of faith)을 배웠다면 오히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22절) Of the fourth posterity, in which natural good began to be dissipated, and which, had they been created anew or instructed i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would have perished, which is meant by,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verse 22)

 

 

해설

 

AC.283은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가 세대를 거치며, 어떻게 점차 낮아졌는지를 설명하는 연속적인 개요 가운데 하나입니다. AC.282에서 첫 번째 후손에게는 천적 영적 선이 있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후손에게는 자연적 선이 남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네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적 선마저 점차 소멸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성이 약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적 바탕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연적 선’은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 나타나는 순박함, 온순함, 정직함, 인정, 이웃에 대한 호의와 같은 선을 말합니다. 이러한 선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에는, 비록 높은 퍼셉션이나 천적 사랑을 잃었더라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붙드시고, 더 깊은 거듭남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후손에게서는 감각과 자기 사랑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 자연적 선조차 흩어지고 소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곧 이들이 만일 거듭나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배웠다면 오히려 멸망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보통은 사람이 높은 진리를 많이 알수록 더 구원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높은 진리를 아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상태가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높은 진리가 주어지면, 그것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모독의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 퍼셉션, 순진, 자비와 같은 가장 높은 신앙의 내용들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머리로 배우는 교리가 아니라, 의지와 삶 전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룩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자연적 선마저 거의 소멸한 사람에게 이러한 천적인 것들이 주어지면, 그는 그것을 참으로 사랑하거나 살아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입과 지식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과 삶으로는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왜 멸망으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려면 모독(profanation)의 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를 때보다, 진리를 알고 인정한 뒤에 그것을 부정하고 악한 삶과 섞을 때 더 위험한 상태에 빠집니다.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을 결합하면 사람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뒤섞이며, 그 결과 주님께서 사람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질서 자체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진리를 때로는 알지 못하게 하시고, 더 외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십니다.

 

3:22의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는 말씀도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손을 든다’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취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생명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과 그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천적인 것을 차지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한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참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거룩한 것과 결합한 상태가 굳어져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을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형벌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깊은 모독과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인 것에 접근하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자연적 선마저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는 높은 천적 진리를 직접 주시는 것보다, 더 낮고 외적인 질서 안에 머물게 하시는 편이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더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AC.283은 진리가 많을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네 번째 후손은 자연적 선이 소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직접 받으면 그것을 모독하여 오히려 멸망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심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이 단락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더 많은 계시를 주시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거룩한 것을 가리시는 방식으로도 나타난다는 깊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AC.284, 창3:20-24, ‘창3:23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AC.284 다섯 번째 후손에

bygrace.kr

 

AC.282, 창3:20-24, ‘창3:21 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AC.282 그 첫 번째 후손에 관하여, 그 안에는 천적 영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