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3.심화

 

1.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이 구절을 AC.223에서 인용한 이유는, 사람이 악 가운데 있을 때 느끼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는 경험이 실제로는 주님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상태 변화 때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얼굴을 가리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고,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AC.222에서 이미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화, 사랑, 모든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라면, 그 사랑의 얼굴을 실제로 돌리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인간의 체험에 따라 말한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은 악 가운데 들어가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양심은 약해지고, 진리는 희미해지고, 기도도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마치 하나님께서 멀어지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멀어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 점에서 사59:2는 창3의 아담과 하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서 숨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고 말합니다. 숨어 있는 쪽은 인간이고, 찾으시는 쪽은 주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죄는 주님의 사랑을 멈추게 하는 힘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입니다. 마치 태양이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스스로 문을 닫고 커튼을 치면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움은 태양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빛을 막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었다’는 말은 사실상 ‘너희 죄가 너희로 하여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의 얼굴이지만, 죄악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AC.223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결코 자비를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사랑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결코 먼저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사랑과 own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사59:2를 인용한 이유는, 창3의 ‘그들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주님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을 멀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심판의 말씀이기 전에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죄는 주님의 사랑을 없애지 못합니다. 다만 그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을 가릴 뿐입니다. 그래서 창3의 아담이 숨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에도,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자비와 평화의 얼굴로 그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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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3:8)

 

AC.223

 

주님의 얼굴(the face of the Lord)이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을 의미한다는 사실로부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자비로 바라보시며, 결코 누구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돌리시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얼굴을 돌립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또 여기 창세기에서는 그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말하고 있습니다.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해설

 

AC.223은 앞 절(AC.222)의 내용을 더욱 분명하게 결론짓는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외면하시고, 노하셔서 얼굴을 돌리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정반대의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주님의 얼굴은 자비(mercy), 평화(peace), 사랑(love), 선(good) 자체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태양과 같으시며, 그 사랑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태양이 특정 사람에게만 빛을 비추고 다른 사람에게는 등을 돌리는 일이 없는 것처럼, 주님의 사랑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왜 ‘주께서 얼굴을 숨기셨다’거나 ‘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나올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인간의 체험에 따른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얼굴을 돌린 쪽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 속으로 들어갈수록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결국 그것을 피하려 하게 됩니다.

 

이사야 592절도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었다’고 하지, ‘그가 얼굴을 돌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죄가 장벽이 된 것입니다. 마치 두꺼운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3장의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주님이 아담을 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곧이어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십니다. 찾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숨는 쪽은 인간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기 싫어하고, 기도하기 싫어하고,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종종 ‘주님이 멀리 계신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로 멀어진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같은 사랑으로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의 상태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23은 매우 위로가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얼굴은 언제나 자비와 평화를 향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주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얼굴을 향해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숨었지만, 주님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의 영적 삶 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화

 

1. ‘59:2

 

 

AC.223, 심화 1, ‘사59:2’

AC.223.심화 1.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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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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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심화

 

4. ‘63:7-9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이 구절을 AC.222에서 인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얼굴(the faces of Jehovah)이 심판이나 진노가 아니라 사랑(love), 자비(mercy), 긍휼(pity), 구원(salvation)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3:8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먼저 말씀 전체에서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아름다운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이사야 63장을 인용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his faces)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마치 주님 앞에 서 있는 어떤 천사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히 한 천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에게 다가오는 신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자비’, ‘사랑’, ‘긍휼’, ‘구원’이라는 단어들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맥 속에서 ‘자기 앞의 사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이미 ‘얼굴’이라는 표현을 자비와 사랑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라는 구절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멀리 떨어져 인간을 심판하는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태를 아시고,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끊임없이 구원하려 하시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표현은 주님의 사랑의 본성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진노나 보복의 언어가 없습니다. 구원의 동기는 오직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여호와의 얼굴’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창3의 장면이 더욱 깊이 이해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AC.222에 따르면 그 얼굴은 사랑의 얼굴이며 자비의 얼굴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을 멸하려는 얼굴을 피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려는 얼굴을 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악을 의식하게 되면 주님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미루고, 말씀을 멀리하고, 영적인 것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의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숨는다고 해서 사랑이 진노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사야 63장은 주님의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얼굴이며, 사랑으로 구속하고 자비로 품어 주는 얼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 자체를 ‘그 얼굴의 사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AC.222에서 사63:7-9를 인용한 이유는, 창3의 ‘여호와의 얼굴’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얼굴은 두려움의 근원이 아니라 사랑의 근원입니다. 아담이 두려워한 것은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의 빛 아래 드러난 자기 자신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창3을 매우 따뜻하게 비추어 줍니다. 인간은 숨었지만, 그를 찾으시는 분은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구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담이 피한 얼굴은 심판자의 얼굴이 아니라, 이사야가 노래한 바로 그 ‘사랑과 자비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AC.222,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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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2, 심화 3, ‘시4:6’

AC.222.심화 3. ‘시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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