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그리고 그밖에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로서,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의 증언과 내용 전개를 잠시 멈추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는 방식 자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메타적 설명입니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으로 말하는가’를 밝힙니다. 이 한 문장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독자에게,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가르쳐 주는 안내문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선 글들에서 사후 삶, 영적 교통, 소생의 상태 같은 내용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런 내용들을 성경 본문 해설 한가운데에 그대로 끼워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내적 의미를 따라가던 독자의 인식 흐름이 끊기게 되고, 성경 본문과 증언 사이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 본문을 얼마나 엄중하게 다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 다시 말해 그 어떤 독자에게도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경 본문 위에 덧씌우거나 본문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말씀대로, 그 고유한 흐름과 질서를 따라 해설되어야 하며, 개인적 증언이나 추가 설명은 그 질서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식이 바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는 임의적 선택이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구조입니다.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그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입니다. 그 사이, 즉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그 내적 의미만이 놓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르카나는 하나의 혼합된 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가 질서 있게 공존하는 책’이 됩니다.

 

또한 그는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는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분리된 부록처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본문 해설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등장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무질서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 속에서 기능적으로 배치됩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을 ‘드러내고 싶은 만큼’ 드러내지 않고, ‘말씀의 질서가 허락하는 만큼만’ 드러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표현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수사가 아닙니다. 그는 이 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배열의 권한조차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말할지 뿐 아니라, 어디에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까지도 허락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스스로를 계시의 주체가 아니라, ‘질서 안에서 봉사하는 증언자’로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이해하면, 아르카나를 읽다가 느끼게 되는 독특한 리듬, 그러니까 본문 해설과 영적 세계에 대한 설명이 교차하면서도 결코 뒤섞이지 않는 리듬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그것은 글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차원을 동시에 붙잡으려다 모두 놓쳐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AC.71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책을 서두르지 말라’, ‘각 층위를 그 자리에 두고 읽으라’, ‘말씀과 증언을 섞지 말고, 연결하되 혼동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단지 아르카나를 위한 독서 지침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 전체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앞선 AC.70에서 ‘죽음은 삶의 계속, 연속’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제시되었다면, AC.71은 그 주제를 어떻게 질서 있게 풀어 갈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용의 진실성만큼이나, 그것을 담는 형식과 위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담아 두었습니다.

 

 

 

AC.70, 창2 앞, '사람이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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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 거부’,장기 기증’,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스베덴보리는 어떤 조언을 할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한 번에 묶어 주셨습니다. ‘연명 치료 거부’, ‘장기 기증’, ‘무빈소 장례’는 모두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불안을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이런 제도를 언급했는가?’라는 1차 질문을 넘어서, ‘그가 영계, 죽음, 몸, 장례를 바라보는 일관된 원리’에 따라 각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연명 치료 거부에 대하여

 

생명은 기계적으로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전이’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이 몸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 생명은 심장, 호흡, 기계적 기능에 있지 않다

* 생명은 ‘의지와 이해’, 곧 ‘사랑과 진리의 결합’에 있다

* 육체는 영이 머무는 동안만 유용한 도구다

 

따라서 ‘의식도 없고, 내적 삶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오직 기계적 연장만 이루어지는 상태라면, 그것을 ‘신앙적 의무’로 무한히 연장해야 할 이유는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식의 연장을 ‘자연 질서에 대한 집착’으로 볼 가능성이 큽니다.

 

생명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떠나려 하고 있는데, 육체만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은 신적 섭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태도일 수 있다

 

즉, ‘연명 치료 거부는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가 아니라’ ‘영이 자연스럽게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2. 장기 기증에 대하여

 

몸은 영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맡겨진 도구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사후의 사람은 이 땅의 육체와는 아무런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다

 

영계에서의 몸은 ‘전혀 다른 영적 몸’’이며, 지상의 심장, 간, 각막, 피부와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1749-1756)에서 말하는 ‘상응(相應, correspondence) 개념을 빌리면,

 

* 육체는 ‘상응물’이지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영의 상태이며, 사랑의 질(, quality)이다

 

따라서 ‘사후에 육체 일부가 남아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이웃을 살리는 도구로 쓰이는 몸은 그 사람의 사랑이 마지막까지 자연계에 남긴 흔적이다

 

장기 기증은

 

*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 부활을 방해하지 않으며

* 오히려 ‘이웃 사랑의 자연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무빈소 장례에 대하여

 

죽은 이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스베덴보리는 장례 의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 그는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난다

* 그리고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된다

 

즉, ‘빈소에 누워 있는 육체는 이미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 ‘남은 자들의 정서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 과도한 형식

* 체면을 위한 장례

* 슬픔을 연출하는 절차

 

이런 것들은 필수가 아닙니다.

 

무빈소 장례’는 충분히 스베덴보리적 정신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장소에 묶이지 않고, 추모는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조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각자가 마음에서 주님 앞에 고인을 맡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영적인 의미는 충만합니다.

 

 

4. 세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연명 치료 거부 → ‘영의 자유를 존중하라

* 장기 기증 → ‘육체를 사랑의 마지막 도구로 내어주라

* 무빈소 장례 → ‘죽은 이를 땅에 붙잡아 두지 말라

 

이 모든 판단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이 선택이 죽음을 부정하려는 집착인가, 아니면 생명의 연속을 신뢰하는 태도인가?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진짜 신앙은 죽음 이후를 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스베덴보리는 게이, 레즈비안 같은 성적 편향이나 혹은 성형이나 성전환 등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런 주제에 대해 성도들에게 뭐라고 답을 주어야 할까요? 1.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 :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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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알 수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하루나 한 주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 달 동안,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이 세상에서처럼 똑같이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자기들이 그랬듯, 또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삶은 계속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the other life) 안에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연속(a continuation of life)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제 서론의 방향을 분명히 바꿉니다. AC.67-69가 ‘이런 증언이 가능한 이유’와 ‘인간 본성의 구조’를 설명했다면, AC.70은 그 전제 위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는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밝힙니다. 그 첫 주제가 바로 ‘사람이 소생될 때’, 다시 말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과정 중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죽음을 단절이나 소멸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죽음을 ‘들어감’으로, 곧 이동이 아니라 ‘상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특히 눈여겨볼 표현은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깨어남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사람은 죽어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던 상태가 ‘다른 방식으로 의식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라는 표현보다,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씁니다.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증언이 어떻게 확인되었는지를 말합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그래서 더 충격적입니다. 그는 육체 안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사후에 다시 말하고, 함께 있었으며, 그 시간이 하루나 한 주가 아니라 ‘여러 달’, 심지어 ‘거의 일 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방식은 ‘이 세상에서와 똑같이’였습니다. 이는 사후 세계가 막연한 안개 속의 상태가 아니라, ‘의식, 기억, 관계가 지속되는 실제적 삶’임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감상이나 신비적 분위기를 전혀 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합니다. 그 담담함 자체가 이 경험을 ‘비범한 사건’이 아니라 ‘확인된 사실’로 제시합니다. 마치 누군가가 ‘나는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듯, 그는 ‘나는 그들과 말했고, 함께 지냈다’고 말합니다. 이 어조는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진술의 무게를 크게 만듭니다.

 

사후에 만난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반응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 살 때, 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더 이상 삶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책망이나 비난도 없습니다. 다만 순수한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후의 삶은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기에, 그것을 부정하던 과거의 자신과 타인의 상태가 오히려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불신을 지적하지만, 그것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무지의 문제’, 더 정확히는 ‘겉 사람에 너무 깊이 잠긴 상태의 결과’로 암시합니다. 육체의 감각과 세상의 질서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으면, 생명이 그 너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육체를 벗어나면, 그 불신은 즉시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문장은 이 글의 정점입니다. ‘사실상 육체의 죽음 이후에 하루도 거의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긴 공백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그는 죽음과 사후 삶 사이에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 사후관 전체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다른 국면입니다. 끊어지는 것은 육체와의 관계이지, 의식과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채로 다른 삶의 양식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낯선 곳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형성되어 온 삶의 성향과 애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AC.70은 그래서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약 죽음을 끝으로 이해한다면,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집착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지속, 연속’으로 이해한다면, 이 땅의 삶은 준비이자 전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아르카나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이야기를 이 글에서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삶은 다음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AC.67-69가 ‘말씀이 왜 다른 삶, 즉 사후 시작되는 삶을 향하는가’를 설명했다면, AC.70은 이제 그 다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실제 경험에 근거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아르카나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상세한 증언’으로 전개됩니다.

 

 

 

AC.69, 창2 앞, '겉 사람의 지배가 약화되고, 속 사람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면'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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