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4:9)

 

AC.371

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퍼셉션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습니다.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심이 딕테이트를 때에도 말씀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Jehovah speaks) 합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the Lord says) 하는 것보다 흔한 표현은 없습니다. By the speaking of Jehovah the most ancient people signified perception, for they knew that the Lord gave them the faculty to perceive. This perception could continue no longer than while love was the principal. When love to the Lord ceased, and consequently love toward the neighbor, perception perished; but insofar as love remained, perception remained. This perceptive faculty was proper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faith became separated from love, as in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charity was given through faith, then conscience succeeded, which also gives a dictate, but in a different way,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conscience dictates, it is in like manner said in the Word that Jehovah speaks; because conscience is formed from things revealed, and from knowledges, and from the Word; and when the Word speaks, or dictates, it is the Lord who speaks; hence nothing is more common, even at the present day, when referring to a matter of conscience, or of faith, than to say, the Lord says.

 

해설

AC.371은 지금까지 태고교회와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혀 온 퍼셉션과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를 스베덴보리 자신이 매우 명료하게 정리하는 중요한 단락입니다. 특히 바로 앞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는데, 이제 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퍼셉션을 의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왜 양심이 그 뒤를 잇게 되었으며, 양심을 통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71은 단순한 한 구절의 어휘 풀이를 넘어, 태고교회와 홍수 후 고대교회의 내적 영적 구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핵심 단락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지각하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단순한 직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했습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외부에서 배운 뒤 그것이 옳은지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선을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자체가 그들의 내면을 질서 있게 하고 있었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의 조건을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 퍼셉션은 사랑이 주된 것이었던 동안에만 계속될 있었습니다.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소유한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들의 생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사라지면 퍼셉션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치고, 결과 이웃을 향한 사랑도 그치자 퍼셉션은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퍼셉션이 어느 날 갑자기 주님에 의해 회수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랑에서 멀어진 만큼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도 함께 약해지고 소멸된 것입니다.

 

이 설명은 가인의 계열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가인은 태고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후대의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가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태고교회 전성기의 순수한 퍼셉션이 온전히 있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퍼셉션이 처음부터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AC.371사랑이 남아 있는 만큼 퍼셉션도 남아 있었다고 직접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AC.370에서 스베덴보리가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가인의 상태에서는 사랑이 크게 훼손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퍼셉션의 흔적까지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71은 결정적인 역사적·영적 전환을 설명합니다. ‘ 퍼셉션의 능력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사람들에게서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지게 되었을 때에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계속 구별해 온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 사이의 차이입니다. 태고교회의 질서는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안에서 신앙과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된 뒤에는 인간이 먼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 주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렇다고 양심이 퍼셉션의 낮은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 역시 딕테이트를 주지만 방식은 다르다고 명시합니다. 퍼셉션과 양심은 모두 인간에게 내적으로 무엇인가를 알려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이지만 그 근거와 작용 방식이 다릅니다. 퍼셉션은 사랑의 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방식이고, 양심은 계시된 진리와 신앙의 지식, 특히 말씀으로부터 형성되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내적으로 말해 주는 영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안에서 어떤 강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모두 퍼셉션이나 양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양심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토대로 형성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내적 음성이 아닙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운데 형성됩니다. 특히 말씀으로부터 받은 진리가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그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내적으로 제지하고, 그 진리에 따라 행하려 할 때 이끄는 것이 양심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것을 진리라고 확신하면 왜곡된 양심이 형성될 가능성도 있으며, 참된 양심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배우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살려는 의지가 함께 중요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이 왜 양심에도 사용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말하거나 딕테이트를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양심이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어 있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말씀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적으로 말할 때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을 두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었고,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으로 형성된 양심의 딕테이트를 두고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같지만 내적 방식은 다릅니다.

 

이 설명은 바로 앞 AC.359-360에서 생겼던 난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당시 가인이 태고교회 문맥에 있으므로 이것을 곧바로 홍수 후 고대교회의 완성된 양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했습니다. AC.371은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했음을 확인해 주면서도 한 가지를 더 밝혀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바로 이 단락에서 직접 구별합니다. 따라서 AC.359-360conscience를 단순한 실수라고 보거나 임의로 perception으로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만을 근거로 가인에게 후대 영적 인간과 동일한 양심이 있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AC.370-371이 보여 주듯 가인의 시대는 사랑과 함께 퍼셉션이 쇠퇴해 가는 과정 안에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 내적 딕테이트를 설명하면서 문맥에 따라 퍼셉션과 양심에 관련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정확한 관계를 본문 이상으로 체계화하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구별을 보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371은 또한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사랑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는 외적인 순종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따라 살면서 주님께서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면, 점차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데서 벗어나 선 자체를 사랑하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말도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과 선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시며, 신앙의 진리는 인간이 그 사랑과 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오늘날 신앙생활과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양심이나 신앙에 관한 일을 말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매우 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신성화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71은 그 반대의 기준을 줍니다. 양심은 계시된 것들과 지식들,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적 음성이나 확신이 정말 주님의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proprium에서 나온 생각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근거는 인간 자신의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중심적인 토대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한 표현 속에 서로 다른 두 시대의 영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만큼 퍼셉션도 사라졌습니다. 홍수 후에는 인간의 상태가 달라졌고, 말씀과 계시된 진리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퍼셉션도 양심도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를 붙들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고대교회의 양심을 혼동하지 않으면서도, 두 경우 모두에서 왜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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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9)

 

AC.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said unto Cain) 것은 체어리티, 아우 아벨(brother Abel)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의미합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으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결과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 어디 있느냐’,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습니다.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아벨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 그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하는가? 신앙이 체어리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 믿는 진리가 어떻게 이웃의 선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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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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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 함께 주를 경배하세’, 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 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따라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 따르면서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4에서는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4:6-8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질서가 뒤집힐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있습니다. 따라서 4:7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 이제 단순히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이단이 생길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가지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사람의 의지를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 죽은 예배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있습니다.

 

AC.364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마귀,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그리고 AC.364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강한 자기 의지나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있습니다.

 

AC.365 관계를 불꽃 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겨울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 바로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수도 있습니다.

 

AC.367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라 하신 8:21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신앙에, 행하는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 진리를 듣는 것과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 AC.366에서 교리를 상징한다고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 밭에 감추인 보화 말씀에서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수도 있습니다.

 

AC.369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4:8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있습니다. 바로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분리 죽은 행위 죽은 예배 분노 내적인 것들의 변화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깊은 진리를 안다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걸음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 어디까지 나아갈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질서가 회복될 우리의 신앙은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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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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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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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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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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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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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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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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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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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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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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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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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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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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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1.00MB
성찬.pdf
0.12MB

 

 

 

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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