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1

홍수 이전 태고교회의 악,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악, 그리고 유대교회(the Jewish church)의 악과 주님 오신 후 이방인의 새 교회(the new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의 악,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악도 모두 같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이나 말씀(the Word)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들(their own senses)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앙이 없게 되며, 신앙 없는 곳에는 이웃 사랑(the love of the neighbor)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모두 거짓과 악이 됩니다. The evi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before the flood, as well as that of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also that of the Jewish church, and subsequently the evil of the new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fter the coming of the Lord, and also that of the church of the present day, was and is that they do not believe the Lord or the Word, but themselves and their own senses. Hence there is no faith, and where there is no faith there is no love of the neighbor, consequently all is false and evil.

 

 

해설

 

이 글은 AC.194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온 창3의 해설을 하나의 원리로 요약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류 역사의 여러 시대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홍수 이전의 태고교회,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 유대교회, 주님 강림 이후의 교회, 그리고 현재의 교회까지 언급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시대의 근본적인 악이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종교 형식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타락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주님과 말씀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더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AC.229의 내용을 더욱 확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믿기 전에 먼저 확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감각과 자기 이성을 신앙의 재판관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태도가 이후 모든 교회 시대에도 반복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평생 학자로 살았고, 과학자였으며,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성이 주님 위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태도는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납득해야만 주님 말씀을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창3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때문에 신앙이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최종 권위로 삼기 시작하면, 사실상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이 사라지면 체어리티(charity)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AC.231의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과 사랑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 신앙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신앙이 사라지면 체어리티도 결국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기 시작한 사람은 결국 이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결과는 모두 거짓과 악이 된다.’

 

이 말은 처음에는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이 최종 기준이 되면, 진리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고, 선도 자기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변질됩니다. 그 결과 진리는 거짓으로, 선은 악으로 변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210own, AC.215의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 AC.229의 ‘먼저 확인한 후 믿겠다’를 따라오신 흐름으로 보면, AC.231은 그 모든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결론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특정 시대만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태고교회도, 고대교회도, 그리고 유대교회와 기독교회, 현재 교회도 같은 위험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 본성입니다.

 

그래서 AC.231은 단순한 역사 해설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는 먼저 외부 박해 때문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창3에서 본 최초의 타락은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반복되는 영적 원형(archetype)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두 길 사이에 서 있습니다. 주님과 말씀을 신뢰하는 길,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 감각을 신뢰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AC.231은 인류 역사의 모든 비극이 후자의 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AC.230, 창3:11-13,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랑’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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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30

이 후손들의 지배적인 악(ruling evil)은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존재하는 만큼의 세상 사랑(the love of the world)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집안과 가족 안에서 살았으며, 재산을 축적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The ruling evil of this posterity was the love of self, without their having at the same time so much of the love of the world as exists at the present day; for they dwelt within their own households and families, and had no desire to accumulate wealth.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그는 여기서 자기 사랑(love of self)과 세상 사랑(love of the world)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모든 악의 두 큰 뿌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려는 사랑입니다. 남보다 높아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자신의 판단을 최고로 여기려는 경향입니다. 반면 세상 사랑은 재물과 소유와 부를 축적하려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이미 자기 사랑에는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AC.229에서 본 것처럼,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되었고, 믿기 전에 먼저 자기 감각과 이성으로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의 특징입니다. 자기 자신이 최종 심판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 사랑은 오늘날만큼 발전하지 않았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대규모 국가나 상업 체계를 이루고 살지 않았으며, 주로 가족과 씨족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부를 무한히 축적하거나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욕망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보통 우리는 자기 사랑과 탐욕을 하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둘을 구별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는 관심이 없어도 자기 자랑과 자기 우월감에는 깊이 빠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명예에는 관심이 없어도 돈과 소유에 강하게 집착할 수 있습니다.

 

AC.230에 따르면 태고교회 말기의 사람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려는 욕망보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지를 따르려는 욕망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창3의 이야기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부자가 되라고 유혹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잡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너희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본질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기 높임이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인간 역사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시각도 보여줍니다. 그는 인류의 타락이 한 번에 완성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 사랑이 커졌고, 후대에 이르러 세상 사랑도 함께 커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은 이미 심각하게 타락했지만, 오늘날 인간들이 보이는 온갖 형태의 탐욕과 물질주의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30의 핵심은,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을 무너뜨린 주된 악은 재물욕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거대한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자기 판단을 주님의 지혜보다 높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는 바로 그것이 모든 타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은 현대 독자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세상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가, 아니면 자기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가?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후자가 더 깊고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랑조차도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가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의 비극은 재물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님보다 더 신뢰하려는 자기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AC.231, 창3:11-13, ‘모든 교회 시대를 꿰뚫는 근본 악의 뿌리’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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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 창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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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3:11-13)

 

AC.229

 

이 말씀의 의미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분명합니다. 곧 인간의 이성 파트가 자신의 own, 즉 자기 사랑(the love of self)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속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 결과 자신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여호와 하나님께서 실제 뱀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며, 사실 그런 뱀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serpent)으로 의미되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자체에게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이 감각들(the senses)에 의해 속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음에도 불구, 자기 사랑(self-love) 때문에 주님(the Lord)과 그분에 대한 신앙(faith)에 관하여 들은 것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하고 나서야 믿으려 하였다는 것입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the rational of man suffered itself to be deceived by its own, because this was dear to him (that is, by the love of self), so that he believed nothing but what he could see and feel. Everyone can see that Jehovah God did not speak to a serpent, and indeed that there was no serpent, neither did he address the sensuous part that is signified by the “serpent”; but that these words involve a different meaning, namely, that they perceived themselves to be deluded by the senses, and yet, in consequence of self-love, were desirous of ascertaining the truth of what they had heard concerning the Lord, and concerning faith in him, before they believed it.

 

 

해설

 

AC.229는 창세기 3장의 뱀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뱀이 말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뱀과 대화하셨다 생각하는 것은 말씀의 본래 의미를 놓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뱀(the serpent)은 인간의 감각 파트,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가장 바깥 부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뱀의 유혹이란 결국 인간 안 감각적 사고가 이성을 설득,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뜻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하나 설명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거부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지적 부족함이 아니라 자기 사랑(self-love)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종종 ‘증거가 부족해서 믿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증거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원래 퍼셉션(perception)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직접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빛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자기 이성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는 사실상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

 

내 경험과 내 판단으로 확인되면 받아들이겠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타락의 핵심입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성이 주님의 빛 아래에서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참된 이성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타락한 이성은 진리가 옳은지 틀린지를 자기 기준으로 재판하려 합니다.

 

그래서 AC.229는 매우 현대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종종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믿겠다’, ‘내가 납득되면 받아들이겠다’, ‘내 경험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건강한 질문과 탐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경고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숨어 있는 이성은 결코 충분한 증거를 얻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받아들이려는 의지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미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감각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재판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가? 우리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해될 때만 믿으려 하는가?

 

스베덴보리에게 타락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곧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참이다’라는 자리에서 ‘내가 납득해야 참이다’라는 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뱀이 인간의 이성을 설득한 방식이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AC.230, 창3:11-13,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을 지배하던 사랑’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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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8, 창3:9-10,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의 정교함'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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