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2

 

영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그릇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하여 사실은 그 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하여 미리 형성된 관념 때문에 이걸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저세상에 들어갔을 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세요. 안 믿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영들은 시각(sigh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인데,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 정오의 빛으로는 거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이 머물며 사물을 보는 그 빛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영들은 또한 청각(hearing)을 가지고 있으며, 그 청각 또한 육체의 청각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잘 들립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거의 끊임없이 저와 말해 왔습니다. 다만 그들의 말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후각(the sense of smell)도 있으며, 이에 관해서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는 지극히 섬세한 촉각(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겪는 고통과 고문도 이 촉각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감각은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단지 촉각의 여러 차이와 다양한 형태일 뿐입니다. 그들은 또한 육체 안에 있을 때 가졌던 것들로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욕망과 애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맑고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그들의 생각에 속한 하나의 관념 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 안에 들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게 서로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 가운데 무엇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요컨대 영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 그리고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육체 안에서 살 때에도 실제로 감각한 것은 영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각합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벗어 버리면 감각은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해집니다. 생명은 감각 활동에 있습니다. 감각이 없다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AC.321에서 간략히 언급한 내용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장하는 글입니다. 앞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사고, 그리고 언어 능력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주장을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말의 능력으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심 주장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 감각을 잃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오히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한 감각을 누리게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영이 감각을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을 ‘그릇된 생각(false notion)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영을 희미한 기운이나 형체 없는 의식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보거나 듣거나 만질 수도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영은 사람의 실질적인 내적 인간, 속 사람이며, 육체는 영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바깥 도구입니다. 따라서 감각의 근원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게 있습니다.

 

영들이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볼 뿐 아니라 지상의 한낮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은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의 빛은 자연계의 태양 빛과 같은 물질적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 진리의 빛이며, 그 빛 안에서 천사들은 사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상태까지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의 시각은 단순히 더 밝게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상태를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보는 능력입니다.

 

청각 역시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분명합니다. 영계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전달입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골라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이 생각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들의 언어는 짧은 표현 안에도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까지 함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이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하다(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는 뜻입니다.

 

촉각에 관한 설명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감각이 촉각과 관련되며, 다른 감각들은 촉각의 여러 차이와 형태라고 말합니다. 이는 감각의 본질이 어떤 대상과의 접촉과 반응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각은 빛과의 접촉이며, 청각은 소리의 진동과의 접촉이고, 후각은 냄새의 기운과의 접촉입니다. 더 깊은 의미에서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바깥의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촉각은 모든 감각의 가장 일반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과 고문도 촉각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에게 고통을 가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욕망이 외적으로 드러나며, 악한 영들은 서로의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상태에 직접 접촉합니다. 그 접촉이 그들에게 고통과 괴로움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의 영들은 서로의 선한 사랑과 지혜에 접촉하면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같은 영적 감각 능력이 사랑의 상태에 따라 천국에서는 행복이 되고 지옥에서는 고통이 됩니다.

 

이 글은 욕망과 애정도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후에 사람이 전혀 다른 욕망을 새로 갖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형성한 주된 사랑이 육체의 외적 제약을 벗고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거나 억제할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과 얼굴과 말과 행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삶은 새로운 성품을 얻는 삶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진짜 성품이 드러나는 삶입니다.

 

사고 능력에 관한 설명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idea) 안에는 지상에서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계의 생각이 단순히 더 빠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관념은 자연적 관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내적입니다. 자연계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의 제약을 받지만, 영계의 생각은 애정과 의미, 관계와 목적을 하나의 관념 안에 함께 담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생각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하려면 많은 문장과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능력이 곧 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들도 지상보다 더 예리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자기 사랑과 거짓을 확증하는 데 사용합니다. 선한 영들과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지혜와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능력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이 어떤 사랑을 섬기고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와 뼈와 그것들에 따르는 불완전함을 제외하면 더 완전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이 글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은 불완전한 인간의 잔재가 아니라 완전한 인간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몸이 아니라 영적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형상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인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은 이 글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오감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에 반응하며, 무엇을 기쁨과 고통으로 느끼는가를 포함한 생명 전체의 수용 능력을 뜻합니다. 천국의 생명은 선과 진리를 섬세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생명이며, 지옥의 생명은 자기 사랑과 거짓에만 반응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참되다고 느끼며, 무엇과 결합하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AC.322는 죽음 뒤의 삶이 지상보다 희미하고 비현실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선명하고 실제적이며, 완전한 삶임을 가르칩니다. 육체는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자연계에 나타내는 도구이며, 육체가 벗겨지면 영의 감각과 생각과 애정은 본래의 힘을 더욱 자유롭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은 뒤 덜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성품에 따라 더욱 온전하고 분명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심화

 

1. ‘공주농아교회를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면서 반대로 농아(聾啞)인들, 그러니까 못 듣고, 말 못 하는 분들 생각과 그분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시는, 저의 친구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이 ‘육체적 장애’를 갖고 살아가시는 분들에 대해서 좀 깊이 다루어 주세요.

 

 

AC.322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농아인교회와 농아목회, 그리고 지상에서 듣고 말하는 육체적 기능에 제한을 지닌 채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 한국 교계에서는 오랫동안 ‘농아인교회’, ‘농아목회’라는 명칭을 사용해 왔으므로 여기서도 그 현장 용어를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이분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에는 육체적 청각과 음성언어의 제한을 영 자체의 결핍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AC.322의 핵심은 육체의 눈과 귀가 감각의 근원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감각하는 주체는 영이라고 말합니다. 귀는 자연계의 소리를 영에게 전달하는 기관이며, 혀와 성대는 영의 생각과 애정을 자연계의 음성으로 나타내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청각 기관의 손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음성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영적 청각이나 생각하고 교통하는 능력까지 결여된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통로가 제한된 것이지, 그 사람의 영이 불완전하거나 인간성이 덜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보고 듣고 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더 온전한 사람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사람의 본질이 육체의 기능에 있지 않고, 의지와 이해, 사랑과 생각을 지닌 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지 못하는 몸, 보지 못하는 몸, 걷지 못하는 몸은 그 사람의 영적 가치나 영원한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자연계에서 영이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 통로가 제한된 상태이지, 영 자체가 손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322는 농인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청각은 단순히 물리적 소리를 더 크게 듣는 능력이 아닙니다. 영계의 말은 생각과 애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교통입니다. 지상에서는 음성, 문자, 표정, 몸짓과 같은 외적 기호를 거쳐야 하지만, 영계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애정이 그 표현 안에 함께 담깁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도 육체를 벗은 뒤에는 다른 영들과 온전히 교통할 수 있으며, 지상에서 겪었던 의사소통의 장벽도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인의 지상 삶을 단지 ‘사후에 고쳐질 결핍’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농인은 지금 이 땅에서도 불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수어는 부족한 몸짓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 신앙과 예배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음성언어로 말씀을 받고 기도하듯, 농인은 수어와 시각적 언어를 통하여 말씀을 받고 기도하며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음성보다 그의 마음의 애정과 의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수어로 드리는 기도는 음성으로 드리는 기도보다 조금도 덜 온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말도 언제나 육체적 청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귀로 설교를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수어와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참되게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청각과 영적 청각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소리를 감지하는 기관의 상태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여 사랑과 삶으로 응답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서 ‘말한다’는 것도 음성을 낸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농인이 손과 얼굴과 몸의 움직임으로 수어를 사용할 때, 그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수어는 얼굴 표정과 공간, 움직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애정과 관계를 풍성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인을 ‘말 못 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실제 언어 능력과 인간적 교통을 충분히 보지 못하는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농인 목회 역시 단순히 음성 설교를 수어로 옮기는 보조적 사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농인의 언어와 문화와 삶의 경험 안에서 말씀이 육화되도록 섬기는 온전한 목회입니다. 농인 공동체에는 청인 중심 사회에서 겪는 고립, 교육과 정보 접근의 어려움,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농인 목회자는 단순한 통역자가 아니라, 그들의 언어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기쁨과 상처를 함께 나누며, 교회가 참된 영적 공동체가 되도록 섬기는 목회자입니다.

 

특히 교회는 농인을 일방적인 도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는 질문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농인 공동체는 언어가 반드시 소리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교통의 본질이 음성이 아니라 생각과 애정의 나눔이라는 사실, 몸 전체가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계의 언어, 곧 생각과 애정이 표현 전체에 담기는 언어를 이해하는 데 특별한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장애를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육체적 장애를 곧바로 영적 결함의 표지로 해석하는 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몸은 유전, 질병, 사고, 환경 등 수많은 자연적 원인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각 사람이 처한 조건 안에서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고, 그가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는 소리로 말씀을 받고, 누군가는 문자로, 누군가는 수어와 표정과 관계를 통하여 받습니다. 통로는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여기에는 목회적으로도 중요한 경계가 있습니다. 농인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귀가 열리고 말하게 되는 기적’만을 목표로 삼으면, 당사자는 현재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치유를 구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주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인격이며, 그의 언어와 공동체, 그리고 신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치유는 신체 기능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립이 교통으로, 배제가 공동체로, 수치가 존엄으로 바뀌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AC.322의 마지막 문장인 ‘감각하는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는 말씀도 단순히 감각기관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은 감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 다른 사람의 애정과 필요를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귀가 밝아도 이웃의 아픔을 듣지 못할 수 있고, 자연적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매우 깊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깊이는 청력의 수치나 발음의 정확성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며, 주님과 이웃에게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사후에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금 온전한 인간이며, 다만 자연계의 특정 감각 통로에 제한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후에는 그 제한이 벗겨지고, 그동안 영 안에 있었던 생각과 애정과 교통의 능력이 훨씬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이미 사람이었던 자신이 육체의 제약 없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22는 농인들을 향해 ‘언젠가 귀가 열릴 것이니 지금의 삶을 견디라’고만 말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인들에게 ‘육체의 귀를 인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듣는 이는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참으로 말하는 이는 사랑과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농인을 섬기시는 그 목사님의 사역은 바로 이 영적 듣기와 말하기가 수어라는 아름다운 언어를 통하여 교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귀한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21, 창4 앞, ‘사후 두 번째 상태, 삶의 질이 더 완전해짐’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육체 안에서 살 때보다 감각 기능을 훨씬 더 뛰어나게 사용하며,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또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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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은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신학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은 어디에 가든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이 먼저 장소가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사랑의 상태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따라서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에서 본 세속성과 권력욕은 특별히 신학교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인 것처럼 느끼는 자기애의 본성이 드러난 사례일 뿐입니다. 같은 자기애는 교회 안에서도, 신학교 안에서도, 일반 회사에서도,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은 신학교를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상의 가장 큰 장점은 김성준 장로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입니다. 처음 그는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 선행 자체보다 그 선행 속에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같은 봉사를 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여 할 수도 있고,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할 수도 있으며, 두 동기가 오랫동안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사의 비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든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사랑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은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젊은 목사는 그의 적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속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복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입니다. 외적으로는 ‘더 배우고 싶다’는 아름다운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사랑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일한 행동이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사랑이 다르면, 영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학을 공부하는 행위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왔는지, 명예욕에서 나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영상은 바로 그 점을 비교적 잘 드러냅니다. 김성준 장로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높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애의 도구로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이 영상에서 신학교의 부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교수의 금전 거래, 성적 조작, 목회의 취업화, 유튜브 알고리즘 중심의 설교 등은 현대 교회의 여러 병폐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절제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 특정 신학교나 목회 현장을 일반화하는 근거로 삼기보다,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세속적 사랑이 거룩한 것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거룩한 직분일수록 자기 사랑이 침투하면 가장 심각한 형태의 모독(profanation)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신학교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평신도에게도, 목회자에게도, 신학자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매우 인상적인 부분은 김성준 장로가 신학교를 떠난 뒤 빈 예배당에서 자신의 교만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시험의 결말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험은 상대방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의 악을 보게 만드는 데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내 안에도 같은 교만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리하고 제거하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김성준 장로가 흘리는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라 거듭남의 첫 번째 눈물입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히브리어나 조직신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빌립보서 2장을 통하여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다만 ‘자기를 비웠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성이 비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 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추며, 시험을 통하여 영광화의 길을 걸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움’은 신성을 버린 사건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 점을 덧붙인다면 신학적으로도 훨씬 균형 잡힌 설명이 될 것입니다.

젊은 목사와 장로가 서로 회개하는 장면 역시 좋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둘 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로에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천국 공동체의 원리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지혜가 주님께로부터 흘러온다는 사실을 깊이 알기 때문에 서로 배우는 기쁨 속에서 산다고 설명합니다. 장로의 경험과 젊은 목사의 학문이 경쟁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인 ‘진정한 신학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서 배운다’는 문장은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그대로 읽으면 마치 신학 공부 자체가 불필요한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지식을 경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방대한 신학을 평생 연구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는 지식이 사랑을 섬길 때만 살아 있는 지혜가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표현은 ‘진정한 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삶 속에서 배우는 사랑이 하나 될 때 완성된다’일 것입니다. 지식 없는 사랑은 쉽게 미신이 되고, 사랑 없는 지식은 쉽게 교만이 됩니다. 천국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곳입니다.

이 영상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젊은 목사의 교만보다 먼저 김성준 장로 자신의 교만을 보게 하셨고, 신학교의 세속성보다 먼저 그의 마음속 세속성을 드러내셨으며, 결국 그를 높은 자리의 신학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환경이 바뀌는 데 있지 않고 사랑이 바뀌는 데 있습니다. 신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본질이며, 이 이야기에서 가장 깊이 읽어야 할 영적인 의미입니다.

 

 

 

SY.32,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네요’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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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는 고백에서 시작하여, 잇사갈 지파가 시대를 분별하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일을 알았던 이유를 성경 중심의 삶에서 찾고, 이를 자신의 성경 연구와 ‘잇사갈 성경대학’ 설립의 근거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평생 연구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열정은 귀합니다. 특히 신학을 오래 공부했음에도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 자체를 공부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교리 체계와 신학 지식이 말씀 자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중요한 자각을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교회의 전통이나 인간의 철학이 말씀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며, 모든 교리는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외침에는 분명 존중할 만한 중심이 있습니다.

 

다만 먼저 몇 가지 성경 본문의 사실관계는 바로잡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 유다 지파를 장자 지파라고 설명하지만, 육신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유다는 장자 지파라기보다 통치권과 지도력의 대표 지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유다에게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49:10)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또한 모세가 잇사갈 지파에게 ‘성전을 떠나지 말고 제사를 기뻐하며 살면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얻을 것’이라고 단독으로 축복한 것은 아닙니다. 신33:18-19은 스불론과 잇사갈을 함께 향한 축복입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밖으로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그들이 백성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과 모래에 감추어진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특징을 말할 때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기보다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했다’는 본문 표현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대상12:32의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 이백 명’은 잇사갈 지파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세계사의 태초부터 종말까지를 파악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본문은 다윗에게로 모여든 여러 지파의 용사들과 지도자들을 열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당시 잇사갈 자손들은 사울의 시대가 끝나고 다윗에게 왕권이 넘어가야 할 때를 분별했으며,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세’는 단순한 시대 예측이나 종말 연대표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대의 모든 사건과 미래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확대하기보다, ‘말씀의 진리 안에 있을 때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온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잇사갈은 단순히 성경을 많이 공부하는 학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두 지파는 교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모든 요소를 나타내며, 각 지파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잇사갈은 이름의 뜻과 야곱의 축복을 통해 ‘보상’, ‘품삯’, ‘일의 결과’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창49:14-15에서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 묘사되며,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 ‘나귀’는 자연적 이성을, ‘짐을 멘다’는 것은 봉사와 쓰임의 삶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지혜는 지식을 많이 축적한 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제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유용하게 섬기는 데서 생기는 지혜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의 논지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더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사람들이 ‘시세를 알았다’는 것을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씀을 연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동으로 영적 분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성의 빛은 지식의 양보다 사랑의 방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배우면 그 진리는 내적으로 열리지만, 자기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배우면 같은 성경 지식도 닫힌 지식이 됩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수백 개의 과목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참된 시세 분별로 이어지려면 먼저 ‘내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 진리가 누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신학을 십 년 공부했지만 ‘성경에 대하여 공부했지 성경을 공부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걸음이 더 필요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한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자료를 더 많이 모으고, 고대 문헌과 유대교 해석과 주석을 더 깊이 조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료는 문자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말씀의 신성은 그 자료들의 오래됨이나 희귀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문자 안에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그 속뜻을 통해 천국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공부’에서 ‘성경 공부’로 옮겨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다시 ‘성경 공부’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상에서는 ‘성경은 태초부터 요한계시록의 종말까지를 기록한 책이므로 성경을 공부하면 시세를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칫 성경을 세계사의 연대표나 미래 예측의 암호책으로 이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태초’는 사람 안에 새 교회가 시작되는 첫 상태이며, ‘종말’은 옛 교회가 끝나고 새로운 영적 질서가 세워지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참된 목적은 세상에서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데 있지 않고, 내 안의 혼돈이 어떻게 질서가 되고, 자연적 사람이 어떻게 영적 사람이 되며, 자기 사랑의 옛 세계가 어떻게 끝나고 주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대상12:32의 ‘시세를 안다’는 말씀도 이 관점에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때는 진리를 배워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시험을 견뎌야 할 때이며, 어떤 때는 악을 끊어야 할 때이고, 어떤 때는 배운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할 때입니다. 잇사갈 자손이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형세를 잘 읽었다는 의미를 넘어, 현재의 상태에서 어떤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표상합니다. 참된 영적 지도자는 미래를 신비하게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여 ‘지금 무엇이 옳은가’를 밝히는 사람입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830개의 과목을 만들었으며 그중 72과목을 뽑아 성경대학 과정을 운영한다고 말합니다. 이 열정과 노동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서 과목의 수보다 그 과목들이 사람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묻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놀라고, 뜨거워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은 좋은 출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탄과 열정은 아직 거듭남 그 자체가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때문에 이전에 사랑하던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던 태도가 부드러워졌는가, 정직과 책임과 체어리티의 삶이 자라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깊이는 감탄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로 증명됩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이 쓸 수 없는 신비한 책임을 깨닫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지성과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으로 ‘오직 하나님’을 외치면서도 자기 해석과 자기 업적, 자기 이름을 중심에 둘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수가 적고 학문적 업적이 크지 않아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고 조용히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역시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그냥 성경만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대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저술과 자료를 입수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라기보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보조 자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성경만’이라는 말은 자료의 범위를 뜻하기보다 최종 권위의 중심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외부 자료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말씀 위에 두지 않고,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오직 성경’은 타당한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유대 문헌이나 초대교회 문서가 성경의 깊이를 자동으로 보증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전통 의존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매우 거룩하게 보았지만, 문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성전의 문과 같고, 그 안에는 영적 의미와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자를 버리고 숨은 의미만 찾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속뜻은 문자 위에 기초하며, 문자 안에서 보존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오직 성경’은 문자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상상으로 비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질서와 상응, 주님의 구원 역사와 인간의 거듭남을 중심으로 문자의 깊이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또한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 성경의 모든 책이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내적 의미가 연속적으로 담긴 책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기록된 사도적 문서들을 구분합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모세오경과 여러 예언서는 내적 의미가 글자마다 연속적으로 담긴 말씀에 속하지만, 바울서신은 교회에 유익한 교리적 문서이면서도 같은 방식의 연속적 속뜻을 지닌 말씀으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이라는 말도 단순히 육십육 권을 동일한 방식으로 읽는다는 뜻보다, 주님께서 말씀 안에 두신 신적 질서와 중심을 분별하며 읽는다는 뜻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잇사갈 성경대학’이라는 이름에도 귀한 가능성과 함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잇사갈의 영성은 시대를 분석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고, 진리를 삶의 짐으로 받아들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의 이름을 붙인 성경대학이라면 학생들에게 단지 놀라운 성경 지식이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자료를 제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배운 진리를 어떻게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선한 쓰임으로 바꿀 것인지, 어떻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분별하고 끊을 것인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이웃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시세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성경만 공부하고 싶은 분’을 초대하는 장면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 공부는 사람을 폐쇄된 지식 공동체 안으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체어리티와 겸손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다른 교파와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게 되고, 자신들이 특별한 비밀을 아는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공부는 잇사갈의 지혜가 아니라 영적 교만을 낳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의 선을 존중하며, 자신의 책임을 더 성실히 감당하게 된다면 그 공부는 주님께서 주시는 빛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영상의 가장 귀한 부분은 ‘성경에 관한 공부에서 성경 자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그 갈망은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자체를 공부하는 데서 말씀의 속뜻을 보고, 말씀의 속뜻을 보는 데서 자기 삶을 비추며, 자기 삶을 비추는 데서 실제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이 참된 잇사갈 사람이며, 시대의 사건을 많이 해석하는 사람보다 현재의 상태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분별하여 행하는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잇사갈의 능력은 성경 지식의 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 시대의 상태를 분별하고, 그때그때 마땅히 행할 선을 실천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관점을 한마디 더 보탠다면 이렇습니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 많이 읽겠다는 표어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오직 주님께 배우고, 배운 진리를 자기 삶의 선한 쓰임으로 바꾸겠다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SY.33, ‘신학교 자퇴합니다’, 제가 본 것은 ‘추악한 거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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