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창4:26)
AC.336
신앙으로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즉 또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 (26절)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반드시 이어서 읽어야 하는 글입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상징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셋’입니다. 그런데 AC.33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 자체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셋’은 새로운 신앙이고,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된 상태가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그 교회의 이름 역시 ‘에노스’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를 단순히 셋의 아들 한 사람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25-26은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다시 에노스를 낳았다는 가족의 계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교회의 내적 변화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인 ‘가인’이 체어리티인 ‘아벨’을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셋’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그 결과 생겨난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에노스’입니다. 그러므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은 속뜻으로 보면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특히 원문의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곧 ‘신앙으로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AC.335에서도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곧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하나의 길이며 수단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그의 의지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준비됩니다. 그러므로 셋과 에노스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주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이 점은 가인과 셋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가인 역시 신앙이었지만,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그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앞세웠고,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열매로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였지만, 셋의 신앙은 에노스를 낳습니다. 전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질서이고, 후자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입니다. 창4의 두 계열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인상적인 구조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사람’[homo]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초반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사용할 때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교회 역시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살아 있을 때, ‘사람’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노스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짐으로써 교회가 다시 참된 인간적인 형상을 갖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앞의 태고교회와의 연속성과 차이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최초의 태고교회 역시 ‘사람’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적 인간으로서 사랑에서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에노스로 의미되는 교회는 이미 그런 최초의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이제는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사람’이라 불리지만, 그 사람이 되는 과정과 교회의 상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굳이 ‘another man’, 곧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곧 ‘이것이 그 교회의 이름입니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한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교회적 상태의 이름입니다. 앞에서 ‘가인’, ‘아벨’, ‘에녹’,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읽었던 것처럼, ‘셋’과 ‘에노스’ 역시 그러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아예 ‘그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하므로, 창세기 초기의 계보를 단순한 개인들의 족보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26은 단 두 절이지만, 창4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4에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인 ‘가인’으로부터 여러 교리의 변화가 전개되어 마침내 ‘라멕’에 이르는 한편,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인 ‘셋’과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진 ‘에노스’로 이어지는 또 다른 교회의 흐름도 함께 나타납니다. 가인이 상징하는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교리를 왜곡하며, 여러 이단으로 갈라져,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이와 나란히 주님께서는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으며, 그렇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연결된 교회를 ‘에노스’라고 하셨습니다.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아마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는 새로운 교회였다’고 하지 않고, 굳이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면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몸의 형태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게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더 깊게는 그 둘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다면 교회의 외형은 남아 있을 수 있어도 그 안의 인간다운 생명은 점점 사라집니다. 가인이 바로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체어리티와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결국 신앙마저 소멸되었습니다. 반대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자, 비로소 ‘또 하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되면서 교회 안에 참된 영적 생명이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순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체어리티의 삶을 완성된 형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옳기 때문에’ 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더라도 말씀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점차 그 사람 안에 선을 사랑하는 애정을 심으십니다. 처음에는 신앙으로 행하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에서 행하는 삶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셋과 에노스의 관계는 개인의 거듭남에도 매우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셋’은 내가 아직 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진리를 따라 살아보려는 상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하는 동안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되고, 이웃의 행복을 실제로 바라게 되며,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에도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기계적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신앙을 일정 기간 가진 뒤 그다음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식의 시간표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거듭남 과정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님에 의해 결합됩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느냐입니다. 전자의 방향이 가인이라면 후자의 방향이 셋이며, 그 결과 나타나는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이 에노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5와 AC.336은 하나의 아름다운 짝을 이룹니다. ‘셋’은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낳기 위한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는 그 신앙을 살아 있는 신앙답게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다시 결합될 때, 스베덴보리는 그 교회를 ‘또 하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AC.336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도 아주 짧게 보여 줍니다.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체어리티가 다시 삶으로 나타날 때,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교회는 주님 앞에서 다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서 무너졌던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셋과 에노스에게서 다시 연결되는 것, 이것이 창4 마지막 두 절이 보여 주는 회복의 아르카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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