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심화

 

8. ‘blasphemy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독’으로 번역됩니다. 이는 거룩한 것에 대해 욕하거나 모욕, 또는 하나님이나 말씀을 공개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로 말과 행동의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이름을 조롱하거나, 말씀을 모욕하거나, 거룩한 것을 악의적으로 비웃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의 모독’ 또는 ‘거룩한 것의 더럽힘’으로 번역되며,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훨씬 더 깊은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거룩한 것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인정한 거룩한 것을 의도적으로 악과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profanation은 말보다 삶과 의지의 상태에 관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욕한다면, 그것은 blasphemy일 수는 있어도 반드시 profanation은 아닙니다. 그가 거룩한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면, profanation의 핵심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목사이거나 장로로서 성경을 잘 알고, 주님의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탐욕이나 권력, 사기를 위해 이용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하고 있으므로 profanation의 위험이 매우 큽니다.

 

가룟 유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며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존경을 표시했지만, 바로 그 거룩한 친교의 표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blasphemy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profanation을 보여줍니다.

 

성경에도 이 둘은 어느 정도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blasphemy against the Holy Spirit, 12:31-32)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입으로 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정한 신적 진리를 끝내 거부하고 악과 결합하는 상태, 곧 profanation과 깊이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blasphemy’ 가운데는 스베덴보리의 의미로 보면 profanation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blasphemy’는 거룩한 것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행위, 즉, ’과 관련된 모독이라면,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결합하는 내적 상태, 곧 ’과 관련된 모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profanation에는 어느 정도의 신성모독적 요소가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blasphemy profanation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두려워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profanation은 사람의 가장 깊은 영적 차원에서 거룩한 것과 악이 하나로 섞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3:22-24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근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AC.301, 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위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반드시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그의 저작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신학 체계로 읽어보면, AC 천국과 지옥’, 그리고 결혼애’의 서술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는 어디에서도 자살하면 모두 지옥에 간다’는 일반 원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애’에는 자살자들에 대한 매우 어둡고 음침한 영계의 모습이 묘사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핏 보면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이 대개 한 부류의 사람들’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데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서 어떤 지옥 영들의 모습을 묘사한다고 해서 모든 악인이 똑같은 상태라는 뜻이 아니듯,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도 모든 자살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내적 상태를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례로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언제나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를 낳은 내적 사랑과 의지가 더 중요합니다. 같은 자살이라도 그 원인은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극심한 우울과 정신적 혼란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어떤 이는 불치병의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또 어떤 이는 깊은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무너집니다. 반면 어떤 이는 교만과 분노, 복수심, 자기애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마지막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은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결혼애’에 묘사되는 어두운 자살자들은 대부분 이미 자기애와 절망, 증오, 복수심 같은 지옥적 사랑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자살은 지옥 상태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내적 상태가 마지막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주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를 낳은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반대로 AC.182 이하와 천국과 지옥’에서 제시되는 원리는 훨씬 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죽는 모든 사람을 천사들을 통해 맞이하시고,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그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 원리에는 자살자만을 예외로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상위 원리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애’의 사례를 AC 천국과 지옥’의 보편 원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자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 매우 심각한 영적, 정신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한 번의 행위만으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애’가 특정한 상태의 자살자들을 보여주는 사례집이라면, AC 천국과 지옥’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주님의 섭리와 심판의 원리를 설명하는 교리서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애’를 읽다가 자살자들의 어두운 모습을 보더라도 그것을 모든 자살자의 운명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장면은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 지경까지 이르게 한 내적 사랑이 얼마나 어두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계의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를 종합하면, 최종적인 판단은 언제나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 사랑과 삶 전체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메시지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AC.301, 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AC.301.심화 8. ‘blasphemy와 profanation’ 이 둘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blasphemy’는 보통 ‘신성모

bygrace.kr

 

AC.301, 심화 6, ‘자살’

AC.301.심화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1.심화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는 죽는 마지막 몇 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dominant love)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그 상태를 드러내는 계기이지, 그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았으며,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혼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살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한순간만으로 그의 평생의 내적 상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평정을 되찾고,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82 이하에서 보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의 충격 속에서도 사랑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보호하십니다. 그 보호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악한 삶을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과, 평생 선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자살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기준은 사망 원인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언제나 그 사람의 전체 삶과 의지의 방향에 둡니다.

 

물론 이것이 자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며, 많은 경우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비극 자체가 곧 영원한 정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반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이는 순간의 극심한 절망 속에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평생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후에는 지상의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상태가 드러나며, 모든 판단은 완전한 공의와 동시에 완전한 자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 답변은 AC.182 이하에서 보이는 ‘죽은 직후 이어지는 천사들의 보호’, HH에서 반복되는 ‘지배적 사랑에 따른 사후 상태’, 그리고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큰 원리와도 잘 일치합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은 유가족들에게도 막연한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AC.301, 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AC.301.심화 7. ‘결혼애’에 나오는 자살자들 위 ‘자살’에 대한 답변과 달리 스베덴보리의 ‘결혼애’에서는 자살을 매우 어둡게 기술하고 있는 걸로 읽었던 것 같아요... 좋은 질문입니다. 사

bygrace.kr

 

AC.301, 심화 5, ‘가룟 유다’

AC.301.심화 5.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죄는 profanation으로 보아야 하나요? 스베덴보리의 profanation 개념에 비추어 보면, 가룟 유다의 죄는 단순한 배신을 넘어 profanation의 성격을 매우 강하게 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