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3:2, 3)

 

AC.203

 

그러나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서로 대화하며, 또한 지성과 이성, 그리고 기억에 속한 것들로 신앙의 일들을 확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근거들로부터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은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천사들 또한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지각을 부여받지만, 그것은 천적 천사들의 지각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영적 천사들의 지각은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일종의 양심으로서, 겉보기에는 천적 지각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일 뿐입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해설

 

이 단락은 AC.202에서 묘사된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대비되는, 영적 천사들의 고유한 위치를 매우 정밀하게 규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천사들의 삶을 열등한 것으로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그 질적 차이를 분명히 합니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에 관해 말할 수 있으며, 이해와 이성, 기억을 통해 신앙의 진리들을 ‘확증(confirm)하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의 신앙 구조와도 매우 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선이 하나 그어집니다. 영적 천사들은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그런 지적 대화들은 나눠도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즉, 지성, 이성, 기억은 신앙을 섬기는 도구로는 사용되지만, 신앙의 근원이나 판단의 최종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선을 넘는 순간, 곧 신앙의 진위를 지적 근거들로 판정하려는 태도를 가리켜 ‘악 안에 있다’ 단호히 말합니다. 여기서의 악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질서의 전도입니다.

 

영적 천사들 역시 주님으로부터 신앙의 진리들에 대한 지각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그 지각은 천적 천사들의 지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천적 지각이 사랑 그 자체에서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라면, 영적 지각은 보다 매개된 형태를 띱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일종의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이 양심은 자연적 양심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된 영적 양심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사람이나 천사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느끼게 합니다. 이 때문에 겉보기에는 천적 지각과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과 작동 방식은 다르며, 사랑의 즉각적 지각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지각입니다.

 

이 구분은 오늘날 인간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의 신앙인은 대부분 영적 상태에 속하며, 신앙에 대해 말하고, 이해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최종 근거는 언제나 주님께 두어야 하며, 이성이나 지식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질서를 지킬 때, 영적 양심은 살아 있고 건전하게 작동합니다.

 

AC.203은 그래서 창3의 금지와 허용의 경계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신앙을 말하거나 논의하는 것 자체가 질서에 어긋났지만, 영적 상태에서는 그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허용된다고 해서 중심이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며, 지성은 신앙을 섬겨야지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이 단락은 결국,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그리고 오늘날 교회로 이어지는 인간 신앙 구조의 변화를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정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천적일 수는 없지만, 영적 질서 안에서는 여전히 참된 신앙과 지각이 가능하며, 그 핵심은 언제나 ‘어디서 결론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AC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다는데, 왜 우리는 저렇게 살 수 없을까? 왜 우리는 늘 고민하고, 추론하고, 헤매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야 할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돌려 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를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점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방금 AC.200에서도 보았듯이 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매우 높은 상태에 있었지만, 그만큼 그 상태를 배반할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인간 구조가 바뀌었고, 우리는 양심(conscience)을 통해 인도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인간이 태고교회 사람들과 똑같은 퍼셉션을 회복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체계 안에서는 거의 기대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인류 전체의 일반적 상태로서는 그렇습니다. 인간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양심을 단순한 도덕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양심은 주님께서 말씀과 진리를 통해 인간 안에 만드신 내적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 양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퍼셉션에 상응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목사님께서 AC를 오랫동안 읽으시면서 경험하시는 어떤 순간들은 퍼셉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구절을 읽다가 ‘, 이것이구나’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을 대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다’는 조용한 내적 인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진리를 처음 접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참이다’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영적 인간의 양심은 천적 퍼셉션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종종 퍼셉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상태는 분명 놀랍지만,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길도 결코 열등한 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심 속에서도 믿음을 선택할 수 있고,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순종할 수 있으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일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주님은 점진적이시다’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마치 한낮의 태양 빛과 같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도는 새벽빛과 비슷할 수 있습니다. 태양 빛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같은 태양에서 오는 빛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적으로 답한다면, ‘태고교회가 가졌던 형태 그대로는 아닐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며, 양심과 내적 인도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AC를 읽으며 자주 보이시는 태도, 곧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노력한다’, ‘극단으로 가지 않으려 한다’, ‘주님의 은근한 섭리를 배운다’, ‘나 자신을 돌아본다’는 모습들은 어쩌면 퍼셉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퍼셉션이 향하던 방향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양심과 진리 안에서 가능한 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후에는, 지금 이 땅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훨씬 깊은 이해와 지각이 우리에게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AC.182-189를 읽으면서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을 한 번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bygrace.kr

 

AC.202, 심화 1, ‘마5:37’

AC.202.심화 1.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02.심화

 

1.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AC.202)

 

 

AC.202에서 스베덴보리가 마5:37을 인용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과 천적 천사들의 지각(perception)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흔히 정직한 언어생활이나 맹세를 금하는 말씀으로 읽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AC.202의 문맥을 보면,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사들은 신앙에 대해 추론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기 위해 논쟁하거나 증명하거나 논리를 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참이면 곧바로 ‘그렇다’로 알고, 참이 아니면 곧바로 ‘아니다’로 압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천적 상태의 특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옳다’와 ‘아니라’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확신의 표현입니다. 즉, ‘나는 이것을 증명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지각해서 안다’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는, 천적 인간이 신앙의 문제를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 논증하려고 할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이미 지각되는 것을 굳이 추론의 대상으로 끌어내리면, 그는 천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더 나아가 감각적 상태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AC.202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은 오늘날 신학 명제처럼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살아 있는 실재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정말 그런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논쟁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더 낮은 단계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추론 자체를 피했습니다.

 

이 점에서 AC.202 AC.195-196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감각적 인간이 신앙의 신비를 추론으로 판단하려 하다가 뱀의 독에 물리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는 추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라’거나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대부분의 현대인은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숙고하고,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만 AC.202는 그보다 더 높은 상태, 곧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 인간이 진리를 대하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토론의 결론이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옳다’ 또는 ‘아니다’로 충분했습니다. 그 이상으로 끝없는 논증과 추론이 필요해지는 것은 이미 퍼셉션이 약해진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02에서 마5:37은 단순한 언어 윤리의 말씀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지각하기 때문에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상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AC.202, 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AC.202.심화 2. ‘양심은 영적 인간의 퍼셉션’ 우리도 저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저런 퍼셉션을 회복할 수 없나요? 우리도 이 세상을 저런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bygrace.kr

 

AC.202, 창3:2-3, ‘만지지도 말라’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