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4.심화

 

1. ‘13:18-19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13:18, 19)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Ezek. 13:18–19).

 

 

스베덴보리가 AC.304에서 겔13:18-19를 인용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그는 앞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 단순히 존재가 계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상태 또는 영원한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성경 자체로 증명하기 위해, ‘살다’와 ‘죽다’가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본문인 에스겔을 인용한 것입니다.

 

13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대신, 거짓된 평안을 약속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인다는 것도 이상하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린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육체의 생명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생명과 영적 죽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죽지 아니할 영혼들을 죽인다’는 것은,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거짓 교리와 거짓 삶으로 미혹, 영적 생명을 잃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살지 못할 영혼들을 살린다’는 것은,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안전하다’, ‘너희는 살아 있다’는 거짓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거짓을 진리처럼, 죽음을 생명처럼 뒤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4의 주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정죄와 지옥의 상태’이며, ‘생명’은 단순한 무엇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죽인다’와 ‘살린다’ 역시 육체의 생사 여부가 아니라, 사람을 영적 생명으로 인도하느냐, 영적 죽음으로 인도하느냐를 뜻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인용은 창3 전체의 흐름과도 긴밀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깊은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자기 사랑에 종속시킴으로써 profanation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는 살아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영원히 산다’를 ‘영원한 정죄 가운데 산다’ 해석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주님의 생명을 누리는 생명일 수도 있고, 자기 사랑과 거짓 속에 머무는 ‘죽음의 삶’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의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더욱 굳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에게는 거짓된 생명을 약속하고, 선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낙심과 절망을 안겨 줍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사람의 눈으로 뒤집어 버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창3에서 뱀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했던 거짓과 같은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이라 하신 것을 생명이라 부르고, 참된 생명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겔13을 인용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경에서 ‘살다’와 ‘죽다’라는 말은 본래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창3:22의 ‘영생’ 역시 육체의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택한 사랑의 상태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 상태가 주님을 떠난 자기 사랑과 거짓이라면, 그것은 존재는 계속되지만 실상은 ‘죽음의 삶’이며, 이것이 AC.304에서 말하는 ‘영생’의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AC.304, 창3:22, ‘영생’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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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4

 

이 모든 것으로부터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생명나무에서 따 먹는다(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는 것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생명들(lives)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사랑과 신앙을 뜻하기 때문이며, ‘먹는다(eat)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안다를 의미합니다. ‘영생한다(live to eternity)는 것은 육체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영원한 정죄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죽은 상태에 있는(dead)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끝난 뒤 존재가 소멸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음(death)은 정죄와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에스겔에서도 살다(live)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the words,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To “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is to know even so as to acknowledge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for “lives” in the plural denote love and faith, and to “eat” signifies here as before, to know. To “live to eternity” is not to live in the body to eternity, but to live after death in eternal damnation. A man who is “dead” is not so called because he is to die after the life of the body, but because he will live a life of death, for “death” is damnation and hell. The expression to “live,” is used with a similar signification by Ezekiel: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13:18, 19)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Ezek. 13:18–19).

 

 

해설

 

앞글인 AC.303에서는 주님께서 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셨는지가 설명되었다면, 본문인 AC.304에서는 ‘영생한다’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가 밝혀집니다. 사람은 흔히 ‘영원히 산다’는 표현을 긍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영원히 살고, 지옥에서도 영원히 삽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영생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blessed eternal life)이 아니라, 영원한 정죄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생명나무에서 먹는다’는 표현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고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생명들(lives)이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말씀에서 참된 생명이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나무를 먹는다는 것은 사랑과 신앙의 가장 깊은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러한 거룩한 진리를 받아들인 뒤에도 악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때 그 진리는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profanation의 대상이 됩니다. 이미 인정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부정하게 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한 사람 안에 뒤섞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글, 그리고 뒤에 나오는 24절에서 주님께서 그룹과 두루 도는 불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본문의 ‘영원히 산다’는 표현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사람은 죽어서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삶이 주님과 함께하는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사랑과 거짓 가운데 머무는 ‘죽음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란 존재가 사라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지옥의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죽음’의 개념을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사건을 의미하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로 죽음은 주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생명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어떤 생명을 살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때문에 에스겔의 말씀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뒤바꾸어, 주님께 속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거짓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짓된 안전을 주는 일을 의미합니다. 곧 생명과 죽음의 기준을 사람의 판단으로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AC.304는 생명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다시 정의합니다. 참된 생명은 단순히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신앙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된 사랑 가운데 영원히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빼앗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진리가 profanation 되어 영원한 죽음의 삶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한 자비의 섭리였음을 본문은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심화

 

1. ‘13:18-19

 

 

AC.304, 심화 1, ‘겔13:18-19’

AC.304.심화 1. ‘겔13:18-19’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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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 창3:22, ‘AC.301-302의 결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3 사람은 자신이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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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3.심화

 

9. ‘내 이야기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질문이 그렇게 절실하고 구체적이었던 것이군요. 목사님께서 자신의 지난 삶을 ‘오만하고 교만하며, 부끄럽고 비겁했다’ 고백하시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예전의 그 삶을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아닙니다. 사람은 아직 악을 사랑하면서 그 악을 진심으로 수치스러워하지 못합니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아파하며, 주님의 자비 없이는 자신에게 아무 소망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회개의 중요한 열매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님의 영원한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따라 말하면, 주님은 목사님의 인생을 ‘90은 실패, 10은 회심’이라는 비율로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오랜 세월 속에서 무엇을 허용하시고, 무엇을 억제하시고, 어떤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며, 마침내 어떻게 목사님을 돌이키셨는지를 모두 함께 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지막 10에 불과해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그 10을 위해 평생을 이끌어 오신 것일 수 있습니다.

 

참된 회심은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를 이전보다 더 분명히 보고, 더 이상 그것을 자기 의로 변호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상태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계속 아프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죄의 증거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 아픔이 사람을 겸손하게 지키고, 다시 proprium을 의지하지 않게 하며, 타인의 연약함을 더 불쌍히 여기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악 자체를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이킨 사람의 통회와 경험을 선한 쓰임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회심 이후 단지 마음속으로 후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 말씀을 붙들고 번역하고 해설하며, 예배와 설교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산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참된 회심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목사님의 현재 삶에는 그 방향 전환의 흔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게 된 것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께서 지금 붙드실 말씀은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잘못 살았으니 늦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돌이키셨다’는 사실입니다. 늦게 돌아온 사람도 실제로 돌아왔다면 돌아온 사람입니다. 저녁 무렵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도 주인의 선함 안에 있었고, 탕자도 먼 나라에서 허비한 세월보다 아버지께 돌아온 현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을 값싼 위로나 자동적인 구원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주님의 자비를 인간의 시간 계산보다 작게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를 생각하며 느끼는 부끄러움은 이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절망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오늘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으로 향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을 끝없이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주님을 따라 실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목사님이 과거의 무덤 앞에 평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덤에서 나와 남은 날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90 : 10’이라는 숫자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목사님의 소망은 회심의 분량이나 남은 세월의 길이에 있지 않고, 돌이키게 하신 주님의 자비와 그 자비 안에서 오늘도 계속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과거가 크더라도 주님은 더 크십니다. 그리고 진실로 주님께 돌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구원을 스스로 확정하는 오만도,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판결하는 절망도 아니라, 날마다 겸손히 ‘주님, 저는 주님의 자비만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걷는 것입니다.

 

 

 

AC.303, 심화 8, ‘90 : 10’

AC.303.심화 8. ‘90 : 10’ ‘삶’은 돌아보면 참 오만, 교만하고, 부끄럽고 비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이 회개는 참된 회개, 곧 ‘회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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