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3.심화

 

1. ‘현상(appearance)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lly done, but it is only an appearance. (AC.183)

 

이는 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실제로는 내적 상태의 변화이지만, 경험하는 주체에게는 외적 움직임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AC.183 해설)

 

 AC.183 본문과 해설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설명

 

 

AC.183의 이 문장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핵심은 ‘영계의 현상은 가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계의 물질적 사건도 아니다’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it is only an appearance’라고 할 때, 이것은 ‘허상’이나 ‘착각’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적 상태가 영계의 감각 안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appearance’를 너무 약하게 ‘겉보기’ 정도로만 이해하면 부족하고, 너무 강하게 ‘실재가 아닌 환상’으로 이해해도 곤란합니다. 영계에서의 appearance는 내적 실재가 감각 가능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AC.183에서 천사들이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다는 묘사는 실제로 어떤 천사가 육체의 눈꺼풀이나 막을 손으로 벗겨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자연적 육체의 눈으로 보는 상태가 아니며, 여기서 열리는 눈도 자연적 눈이 아닙니다. 실제 변화는 그 사람의 내적 인식, 곧 영적 빛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적 변화가 경험하는 사람 본인에게는 마치 눈을 덮고 있던 막이 벗겨지는 외적 사건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영계에서 ‘장소’, ‘움직임’, ‘’, ‘’, ‘’, ‘’, ‘’ 같은 것들이 모두 내적 상태의 표현이라는 스베덴보리의 큰 원리와 연결됩니다. 영계에서 누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실제 공간 이동이라기보다 더 내적인 선과 진리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며,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더 외적이고 낮은 애정 상태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영들에게는 그것이 실제 길, 실제 이동, 실제 빛과 어둠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영계의 현상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와 다른 방식으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은 ‘실재’와 ‘현상’의 관계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우리가 보통 ‘실재’는 물질적이고, ‘현상’은 그것을 눈으로 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 순서가 다릅니다. 영계의 더 깊은 실재는 애정과 사고, 곧 사랑과 신앙의 상태이고, 그 실재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 현상입니다. 따라서 AC.183의 ‘appearance’는 실재보다 낮은 것이기는 하지만, 실재와 무관한 거짓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상은 그 사람의 상태를 정확히 드러내는 상응적 표현입니다.

 

이 점에서 AC.183의 장면은 매우 섬세합니다. 천사들이 눈의 막을 벗겨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이제 ‘생각만 하던 상태’에서 ‘보는 상태’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AC.182에서 그는 이전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생각만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즉, 내적 의식은 있었지만, 아직 영계의 빛 안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AC.183 appearance는 바로 이 전환, 곧 생각의 내적 흐름이 시야의 형식으로 열리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왼쪽 눈’이라는 표현도 그냥 해부학적 묘사가 아니라, 이해의 측면, 특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성의 측면과 관련된 표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 보는 기능, 곧 이해를 뜻하고, ‘’은 그 이해를 가리고 있던 불투명한 상태를 뜻합니다. ‘코의 중격 쪽으로 말려 벗겨진다’는 묘사는 호흡과 생명, 그리고 내적 감각의 통로가 열리는 느낌을 동반한 상징적 현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지나치게 도식화하여 ‘왼쪽 눈은 반드시 이것, 코의 중격은 반드시 이것’이라고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appearance’라고 선을 긋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의 환상과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에스겔이 본 생물들, 요한계시록의 보좌와 유리 바다와 말들, 다니엘의 짐승들 같은 장면들은 단순한 상상이나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영적 상태와 질서가 영계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환상은 물질세계의 사진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구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적 실재가 상응의 방식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83의 해설을 조금 더 깊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천사들의 작용은 실제로는 영혼의 지각을 여는 내적 작용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마치 눈의 막이 벗겨지는 물리적 사건처럼 경험됩니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라 상응적 현상입니다. 다만 자연계의 물질적 방식으로 실제인 것은 아니며, 영적 상태가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번역문에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일 뿐입니다’라고 하신 것은 전체적으로 좋습니다. 다만 ‘실재가 아니라’라는 표현은 독자에 따라 ‘그러면 가짜인가?’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 해설에서는 반드시 보완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 실재가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허위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적, 물질적 방식으로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적 실재는 그 사람의 내적 상태 변화이며, 그 상태 변화가 눈의 막이 벗겨지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덧붙이면 안전합니다.

 

 

 

AC.183, 창3 앞, ‘인간의 지각 속에서 경험되는, 빛의 사용이 주어지는 과정’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3 이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제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왼쪽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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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3

 

이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제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로 인해 눈이 열리고 빛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I was shown how these angels work.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in order that the eye might be opened and the use of light be granted.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lly done, but it is only an appearance.

 

해설

 

이 단락은 AC.182에서 말한 ‘빛의 사용이 주어지는 과정’이 인간의 지각 속에서는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하는 일을 물리적, 해부학적 행위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그것을 거의 물리적 사건처럼 지각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실제로는 내적 상태의 변화이지만, 경험하는 주체에게는 외적 움직임처럼 느껴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왼쪽 눈’이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눈은 이해를, 특히 진리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며, 왼쪽은 이성적, 지적 측면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왼쪽 눈의 막이 제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이성의 사용이 방해받던 상태에서 벗어나 이해의 기능이 열리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혹은 ‘겉껍질’은 실제 기관이 아니라, 이해를 가로막고 있던 이전의 상태, 곧 혼탁한 사고, 자기중심적 관념, 또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사유의 층을 뜻합니다. 그것이 제거되는 것처럼 보일 때, 비로소 ‘눈이 열리고’, 앞 단락에서 말한 ‘빛의 사용’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진리가 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질 준비가 된 진리가 작동하기 시작함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묘사가 ‘실재’가 아니라 ‘현상’임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가 상징을 문자 그대로 오해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선을 긋습니다. 천사들이 실제로 눈의 막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하면서 그것이 감각적으로 그렇게 지각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영계의 작용이 언제나 내적이며, 외적 형상은 그 내적 변화가 의식에 번역된 결과임을 보여 줍니다.

 

이 단락은 결국, 인간이 사후에 ‘본다’는 것이 시각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인식의 질서가 열리는 문제임을 아주 섬세하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앞선 AC.182의 ‘생각만 하고 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제 비로소 ‘보는 상태’로 넘어가는 전환이 여기서 구체적 이미지로 제시됩니다.  

 

 

심화

 

1. ‘현상(appearance)

 

 

AC.183, 심화 1, ‘현상’(appearance)

AC.183.심화 1. ‘현상’(appearance) 그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오직 그렇게 보이는 현상(appearance)일 뿐입니다. To the man it appears as if this were 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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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왼쪽 눈’(left eye)

 

그들은 마치 왼쪽 눈의 막을 코의 중격 쪽으로 말아 벗겨내는 것처럼 보였으며, They seemed to as it were roll off the coat of the left eye toward the septum of the nose, (AC.183)

 

위 AC.183 본문에서 왜 ‘왼쪽 눈’?

 

 

좋은 질문입니다. 사실 AC.183을 읽으면서 ‘왜 하필 눈인가?’보다 더 나아가 ‘왜 하필 왼쪽 눈인가?’를 묻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곧바로 ‘왼쪽 눈 = 무엇’이라고 직접 해설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베덴보리의 전체 상응 체계와 다른 저작들을 참고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우선 가장 넓은 의미에서 ‘눈’은 이해(intellect) 또는 진리에 대한 인식을 상징합니다. 말씀 전체에서 눈은 단순한 시각 기관이 아니라 ‘보는 능력’, 곧 이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눈이 열린다’는 것은 대개 이해가 열리는 것을, ‘눈이 멀다’는 것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182에서 영적 천사들이 와서 ‘빛을 사용하는 능력’을 주는 장면 바로 다음에 AC.183에서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묘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실제 주제는 이해의 개방입니다.

 

그런데 왜 ‘왼쪽 눈’일까요? 스베덴보리의 상응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른쪽과 왼쪽이 서로 다른 기능을 나타냅니다. 가장 넓게 말하면, 오른쪽은 선(good) 또는 의지(will) 쪽에, 왼쪽은 진리(truth) 또는 이해(understanding) 쪽에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천국의 대인간(Maximus Homo) 구조에서도 오른편은 사랑과 선의 측면, 왼편은 신앙과 진리의 측면과 연결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이 원리를 AC.183에 적용한다면, 여기서 열리고 있는 것은 사랑의 기관이라기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해의 기관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천적 천사들의 보호 아래 사랑과 평안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영적 천사들이 와서 ‘빛의 사용’을 주려고 합니다. 영적 천사들의 특징은 사랑보다 진리, 지각보다 이해의 빛에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열리는 것은 바로 진리를 보는 측면, 곧 ‘왼쪽 눈’인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두 눈’이 아니라 ‘왼쪽 눈’만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지금 일어나는 변화가 인간 전체의 완성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능의 개방을 말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아직 그는 천국의 완전한 지혜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사물을 분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 첫 단계의 빛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진리가 모두 충만하게 결합된 상태라기보다, 먼저 진리를 인식하는 창이 열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흐름을 보면, AC.184에서는 희미한 빛이 보이고, AC.185에서는 지각이 전달되며, AC.186에서는 자신이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왔음을 알게 됩니다. 즉 AC.183은 일종의 ‘영적 시력의 개안식’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왼쪽 눈은 이해의 눈, 진리를 보는 눈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지나친 기계적 해석은 피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it is only an appearance’라고 덧붙입니다. 다시 말해, 실제로 영혼의 왼쪽 눈에 어떤 막이 있었고 그것이 제거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변화는 내적 상태의 변화이며, 그 변화가 그 사람에게는 ‘왼쪽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C.183의 ‘왼쪽 눈’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영적 천사들이 주는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해의 기능이 열리는 현상이, 그 사람에게는 마치 왼쪽 눈의 막이 벗겨지는 것처럼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AC 전체 문맥과도 가장 잘 어울리는 해석으로 보입니다.

 

 

 

AC.182, 창3 앞,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AC.182-189)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The Entrance Into Eternal Life Of Those Who Are Raised From Death AC.182 천적 천사들이 소생된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를 떠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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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심화

 

2. 그 땅의 들짐승

 

 AC.45 해설 하단에 이 글은 그 땅의 들짐승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지 안에서도 더 낮은 층위를 구분합니다. 들짐승은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욕정과 쾌락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질서 안으로 들어와야 할 대상입니다. 거듭남은 욕정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의 통치 아래에서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 참 감동적입니다. 혹시 그러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실제 일상 속에서는 매 순간 바로 이 욕정과 쾌락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실제 삶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또렷하게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욕정과 쾌락을 질서 안으로 두는 방법은 그것을 직접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싸워서 뿌리 뽑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의 질서 아래에 두어 방향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원리를 하나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욕정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같은 욕망이라도, 주님 아래 있으면 선을 섬기는 도구가 되고, 자기 사랑 아래 있으면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이 됩니다. 그래서 핵심은 제거가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누구인가’입니다.

 

이걸 일상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시작됩니다. 첫 단계는 ‘알아차림’입니다. 어떤 욕정이나 쾌락이 올라올 때, 그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지금 이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걸까?’ 하고 한 발짝 떨어져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질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 욕정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방향을 바꾸는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 하면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럼 이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데 쓰자’라고 바꾸면, 같은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쾌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끊으려 하면 반발이 생기지만, 그것을 더 건강하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옮기면, 점점 자리를 찾아갑니다. 이것은 ‘억제’가 아니라 ‘재배치’입니다.

 

세 번째는 ‘작은 절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극단적인 금욕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작은 선택에서 질서를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예를 들어,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번 참는 것, 더 가지려는 마음에서 한 번 멈추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지 않는 것 등, 이런 작은 절제들이 쌓이면서, 욕정은 점점 ‘주인이 아니라 종의 자리’로 내려옵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네 번째는 가장 중요한데,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빠지면, 앞의 모든 과정이 결국 자기 노력으로 끝나버립니다. 욕정과 싸우다 보면 금방 느끼게 됩니다. ‘이건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 이건 제 것이 아니라, 저를 끌고 가는 힘입니다. 주님이 다스려 주세요.’ 하고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진짜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 곧 영적 전투는 직접 싸우는 것, 곧 내가 이 ‘욕정과 쾌락’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넘기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고  방향을 바꾸고  작은 절제로 길을 내고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일상에서 가능한 실제적인 길입니다.

 

이 과정은 빠르게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거듭남의 평생 과정’으로 봅니다. 그래서 어떤 욕정이 계속 올라온다고 해서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가’입니다. 예전에는 그대로 끌려갔다면, 이제는 한 번 멈추고,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주님께 돌리는, 즉 이럴 수만 있다면, 이것은 이미 이 질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없애시기보다, 그것이 우리를 끌고 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욕정과 쾌락을 다스리는 길은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사랑 아래 두어 방향과 자리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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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 1. ‘태고 시대’ AC.45 본문에 ‘태고 시대’가 나오는데요, 기독교 배경이 없는 분들은 대뜸 ‘석기 시대’를 떠올리실 겁니다. 동굴에서 살며, 돌연장을 사용, 사냥을 하며 살았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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