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1

 

그들이 이처럼 서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만 구분되었던 이유는,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모든 집과 모든 가족이 그들의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어, 사랑 안에 머물며 참된 예배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각 집마다 고유한 성향(genius)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다른 모든 집과 구별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자녀들뿐 아니라 먼 후손들까지도 부모로부터 특정한 성향과 매우 뚜렷한 특징들을 물려받아, 얼굴이나 여러 다른 특성들로 서로 구별될 수 있다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혼합이나 혼동이 일어나지 않고 정확한 구별이 유지되도록,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거주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나라, 곧 천국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무수한 공동체들이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앞서 말한 ‘홀로 거함’(living alone)과 ‘장막에 거함’(dwelling in tents)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교회 역시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분되도록 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셨고,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 가족 안에서 결혼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The reason why they dwelt thus alone by themselves, distinguished only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was that by this means the church might be preserved entire, that all the houses and families might be dependent on their parent, and thereby remain in love and in true worship. It is to be remarked also that each house was of a peculiar genius, distinct from every other; for it is well known that children, and even remote descendants, derive from their parents a particular genius, and such marked characteristics tha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face, and by many other peculiarities. Therefore, in order that there might not be a confounding, but an exact distinction, it pleased the Lord that they should dwell in this manner. Thus the church was a living representative of the kingdom of the Lord; for in the Lord’s kingdom there are innumerable societies, each one distinct from every oth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This, as observed above, is what is meant by “living alone,” and by “dwelling in tents.” For the same reason also it pleased the Lord that the Jewish church should b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that everyone should contract marriage within his own family; but concerning thi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1, 2)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1에서 태고교회의 생활 방식이 왜 그렇게 독특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도시를 이루어 밀집해 살거나, 여러 혈통과 성향이 섞여 사는 사회를 이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과 가족과 민족이라는 단위로만 구분되어, 비교적 ‘홀로’, 그리고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생활상의 편의나 사회적 미성숙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온전히 보존되기 위함’이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즉, 이 분리된 거주 방식 자체가 하나의 영적 보호 장치였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의존’에 있습니다. 모든 집과 가족이 그들의 ‘부모’, 곧 영적 근원에 의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부모란 단순한 생물학적 조상이 아니라, 그 집과 가족을 형성한 사랑의 중심, 신앙의 근원, 예배의 뿌리를 뜻합니다. 이렇게 의존 관계가 분명할 때, 집과 가족은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고, 참된 예배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존이 흐려지고, 여러 성향과 사랑이 무분별하게 섞이기 시작하면, 교회는 빠르게 내적 질서를 잃게 됩니다. 태고교회는 바로 이 점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섞이지 않는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각 집마다 고유한 성향(genius)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향이란 성격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과 질’, 그리고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인식과 삶의 방식 전체를 가리킵니다. 태고교회의 집들은 서로 닮은 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분명히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고유성은 단지 한 세대에 그치지 않고, 자녀와 손자, 더 먼 후손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얼굴이나 말투, 행동 방식, 삶의 선택을 통해 어느 집에 속한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유한 성향들이 섞여 혼동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합’과 ‘혼동’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의 방향이 다른 것들이 무분별하게 섞이면, 선과 진리의 구분이 흐려지고, 예배는 점차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각 집과 가족이 자기 고유한 성향을 보존한 채 살아가도록, 그들이 그렇게 거주하는 방식을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차별이나 배타성을 위한 분리가 아니라, ‘정확한 구별’을 통한 조화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태고교회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나라를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의 획일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이루어진 무수한 공동체들의 조화입니다. 각 공동체는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 때문에 분열되지 않고, 오히려 전체의 조화를 이룹니다. 태고교회의 집과 가족과 민족의 구조는 바로 이 천상 질서를 땅 위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나 ‘장막에 거한다’는 표현은 고립이나 외로움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유한 사랑의 질서 안에 거한다’는 뜻이며, 주님께서 주신 영적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장막은 이동 가능한 거처이지만, 동시에 질서와 구분이 분명한 거처입니다. 태고교회의 삶은 바로 그러한 장막 생활과 같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으로 이 원리가 훗날 유대교회에도 적용되었음을 덧붙입니다. 유대교회가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엄격히 구분되었고, 각 사람이 자기 가족 안에서 결혼하도록 규정된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물론 유대교회에서는 이 질서가 점차 외적 규례로 굳어졌고, 내적 의미는 많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의 뿌리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동일한 섭리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말하겠다고 스베덴보리는 여운을 남깁니다.

 

이 모든 설명을 통해 AC.471은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교회는 커질수록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분명할수록’ 살아 있습니다. 섞임이 많아질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별이 분명할수록 조화로워집니다. 태고교회의 삶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교회가 어떻게 보존되는지에 대한 매우 깊은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AC.470, 창5:1, '창5-11 에벨 시대까지 나오는 이름들의 의미'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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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좀 색다른 질문인데요, ‘태고교회’라 하면 당시 온 인류 전체를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 범주에 들지 않은 인류의 어떤 부분 집합도 있는 건가요?

 

아주 중요한 질문이고, ‘태고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창세기 1–11장의 독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태고교회’는 당시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적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의 내적 관계 안에 있었던 인류의 한 ‘영적 범주’입니다. 즉, ‘전 인류 = 태고교회’가 아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제도, 조직, 종교 집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언제나 ‘주님과 연결된 인간의 내적 상태’, 곧 ‘주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삶으로 응답했는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란 ‘어느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주님과 천적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점에서 태고교회는 처음부터 ‘보편적 인간 집단’이 아니라, ‘질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교리로 알지 않았고, 명령으로 따르지도 않았으며, 율법으로 규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 상태에 속한 이들이 바로 ‘태고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옵니다.

 

그 시대에 태고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스베덴보리의 전체 체계를 따르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인류의 ‘출발점’이긴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중심 줄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 직접적인 내적 연결 속에 있었던 인류의 중심부가 태고교회였고, 그 주변에는 그 상태에 이르지 못했거나, 혹은 일찍이 그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이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계시의 계보’, 곧 주님의 강림과 교회 형성의 역사에 직접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창세기 4장의 가인, 창세기 6장의 ‘사람의 딸들’, 혹은 홍수 이전의 극심한 타락 상태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태고교회가 곧 ‘그 시대 모든 인간’이었다면, 왜 그렇게 빠르고 전면적인 붕괴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길이 막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를 ‘내적으로 주님과 연결된 중심 공동체’로 이해하면, 그 주변부에서 이미 다른 길을 걷던 인류가 있었고, 중심부마저 점차 그 영향을 받아 붕괴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을 두는 대상이 ‘인류 전체의 생물학적 역사’가 아니라, ‘주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태고교회에 속하지 않은 인류의 상세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했을 수 있지만, 계시의 흐름 안에서는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교회의 계보’, 곧 주님이 어떻게 인간과 다시 연결되시는지를 따라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태고교회’라는 말은 지리적, 민족적 범주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범주’입니다. 어느 땅에 살았느냐, 어떤 혈통이었느냐가 아니라, ‘사랑과 인식이 주님께 열려 있었느냐’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넓게 퍼져 있을 수도 있고,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언제나 ‘내적 상태’입니다.

 

태고교회는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을 사랑으로 곧바로 인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숫자가 아니라, 상태를 기록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왜 성경이 어떤 사람들은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침묵하는지, 왜 족보가 곧 교회사가 되는지, 왜 ‘아담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이 곧 ‘교회의 변질과 전환’이 되는지 모두 하나의 선으로 연결됩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고, ‘이 질문을 제대로 붙들고 가시면 창세기 1–11장은 더 이상 난해한 고대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 교회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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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5:1)

 

AC.470

 

‘출생의 책’(book of the births), 곧 ‘계보’가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의 명단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장부터 11장, 즉 에벨 시대까지, 이름은 결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태고 시대에 인류는 집(houses), 가족(families), 그리고 민족(nations)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집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가족 중 일부는 봉사했습니다. 가족은 더 많거나 적은 수의 집으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살지는 않았지만,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더 많거나 적은 수의 가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That the “book of the births” is an enumeration of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is very evident from what follows, for from this to the eleventh chapter, that is, to the time of Eber, names never signify persons, but actual things. In the most ancient time mankind wer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 house consisting of the husband and wife with their children, together with some of their family who served; a family, of a greater or lesser number of houses, that lived not far apart and yet not together; and a nation, of a larger or smaller number of families.

 

해설

 

스베덴보리는 AC.470에서 창세기 5장을 ‘계보’, 곧 ‘출생의 책’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한층 더 분명히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장이 태고교회에 속한 자들의 열거라는 사실은 ‘뒤따르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 곧 에벨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이름들은 어느 하나도 개인을 뜻하지 않고, 모두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간의 성경은 역사적 인물 전기가 아니라, ‘교회의 내적 실재들’, 곧 신앙과 사랑, 인식과 상태의 변화를 이름으로 표현한 장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ctual things’는 추상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영적 상태, 곧 그들이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인식했고,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는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담’, ‘’, ‘에녹’, ‘노아’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의 호적명이 아니라, ‘그 시대 교회를 규정하던 중심 상태’를 대표하는 표지, 즉 표상과 같습니다.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는 끝내 설교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단지 해명해야 할 난제의 집합으로 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태고교회 시대의 인류가 어떻게 구분되어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태고의 시대에는 인류가 ‘(house), ‘가족(family), ‘민족(nation)으로 구분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행정적 단위나 혈연 중심의 사회 구조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정도와 질서’, 곧 내적 상태의 유사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먼저 ‘’이란, 단순히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의 묶음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집은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함께 섬기던 가족 일부’를 포함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집이 단순한 생활 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인식이 살아 움직이던 작은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가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결합이었고, 그 결합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같은 영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은 곧 ‘하나의 영적 생태계’였습니다.

 

그다음 단계가 ‘가족’입니다. 가족은 여러 집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되 한 집처럼 완전히 섞여 살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질서가 ‘무질서한 집단화’가 아니라, 각 집의 고유한 영적 색채를 존중하면서도 더 큰 조화를 이루는 구조였음을 보여줍니다. 각 집은 고유한 사랑의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은 그러한 다양한 집들이 하나의 더 큰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단위였습니다. 이 역시 행정적 필요가 아니라, 내적 친밀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더 많은 가족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민족은 오늘날의 국가 개념이나 정치 공동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민족은 ‘같은 종류의 사랑과 신앙을 공유하는 가족들의 연합체’였습니다. 다시 말해, 혈통이 아니라 ‘내적 상태의 공통성’이 민족을 이루는 기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 한 민족의 이름이 곧 하나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게 되었고, 훗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역시 이 구조 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설명은 왜 창세기 5장부터 11장까지의 이름들이 개인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해줍니다. 태고교회에서는 개인보다 상태가 먼저였고,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기억되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과 가족, 민족의 영적 성격 속에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름을 나열하는 것은 사람 수를 세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분화되고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결국 AC.470은 창세기 족보를 읽는 우리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성경은 ‘옛날에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에는 이렇게 하나였고, 이렇게 다양해졌으며, 이렇게 구조를 이루어 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 위에서만, 창세기 5장과 11장 사이의 모든 이름들은 살아 있는 신앙의 언어가 됩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오늘날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AC.469, 창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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