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71, 정동수 목사,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로 성경 공부 바르게 하기, 잘못된 목사, 교리, 설교 분별 가능’
즐겨찾기/스베덴보리의 렌즈 2026. 8. 20. 08:09※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강의는 인공지능 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강사의 출발점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에는 성경을 깊이 공부하려면 수많은 주석과 사전과 참고서를 구입하고, 때로는 영어로 된 방대한 자료를 직접 찾아 읽어야 했지만, 이제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을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주석과 해석을 비교하고, 문맥을 확인하고, 관련 구절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일종의 ‘퀀텀 리프’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정도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AI를 제대로 사용하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넓게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에는 상당히 공감할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AI는 성경의 단어를 찾고, 여러 번역을 비교하고,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서로 다른 주석의 견해를 대조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강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이 먼저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AI에게 막연히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보다, 성경을 읽다가 구체적인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때 AI가 훨씬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AI 사용법을 넘어 상당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질문의 깊이는 대개 질문하는 사람의 이해의 깊이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는 좋은 질문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강사가 ‘성경을 몇 차례 읽고 어느 정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는 가운데’ AI를 사용하라고 권하는 것은 매우 건전한 조언입니다. AI가 말씀을 읽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다가 생긴 질문을 더 깊이 탐구하는 보조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강의를 읽기 시작하면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 나타납니다. 강사가 성경 연구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제시하는 것이 바로 AI에게 미리 ‘페르소나’를 설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보존된 오류 없는 말씀으로 믿으며, 킹제임스 성경을 기준으로 하고,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며, ‘영해’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AI에게 먼저 입력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AI가 그 전제에 맞는 답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번 강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강사는 AI가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자가 자신의 신학적 기준을 먼저 주어야 한다고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보면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AI가 내놓은 답이 성경 자체의 결론인가, 아니면 내가 먼저 입력한 신학적 전제를 성경 자료를 이용해 정교하게 재구성한 결론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AI 시대의 성경 연구에서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AI에게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교회를 반드시 구분하고, 성경을 가능한 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영적 해석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 뒤 로마서 9장부터 11장을 질문한다면, AI가 세대주의적 또는 그와 가까운 결론을 내놓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개혁주의적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답하라고 설정하면 전혀 다른 설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부들의 전통을 중심으로 해석하라고 하면 또 다른 답이 나올 것이며, 스베덴보리의 ‘천국의 비밀’과 상응의 교리를 중심으로 해석하라고 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강사 자신도 AI 안에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등 여러 신학적 자료가 들어 있으며 질문자의 기준에 따라 답의 방향이 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AI의 대답이 내가 설정한 페르소나와 일치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 해석이 참이라는 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말씀을 읽을 때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교리적 전제를 가지고 말씀을 읽는다는 사실을 매우 깊이 다룹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삶을 고치려 합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올바른 해석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면서 말씀을 읽는가’입니다. 지성이 아무리 정교해도 의지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사람은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 생각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AI 사용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강사는 매우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결론을 AI에게 계속 밀어붙이면 AI가 결국 그 방향으로 맞춰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입니다. AI는 질문자가 듣고 싶어 하는 방향을 추론하여 그 방향으로 답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거 이렇게 볼 수 있잖아?’라고 계속 다그치면 결국 사용자가 원하는 설명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피하기 위해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만 설명하라.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은 추측하지 말라’고 명령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문제는 AI에게 ‘본문이 말하는 것만 말하라’고 명령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해석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비유의 세부 요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며 그것을 ‘영해’ 또는 알레고리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여관은 교회, 두 데나리온은 이천 년,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해석하는 식의 자의적인 대응을 비판합니다. 이 비판에는 충분히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런 원칙 없이 설교자의 상상력으로 모든 사물에 의미를 붙인다면 성경은 얼마든지 설교자가 원하는 말을 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이런 자의적인 알레고리와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모든 단어에 설교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붙여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 들어 있으며,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상응’에 따라 존재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천국의 비밀’에서 하나의 단어나 사물의 의미를 설명할 때에도 다른 수많은 성경 구절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상응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일관되게 나타나는지를 추적합니다.
바로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은 강사가 비판하는 ‘영해’와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은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자의적인 알레고리는 ‘내가 이 사물에서 무엇을 연상하는가?’를 묻습니다. 반면 상응은 ‘말씀 안에서 이 자연적 사물이 영적으로 무엇과 일정하게 대응하는가?’를 묻습니다. 전자는 해석자의 상상력에 의존하지만, 후자는 말씀 전체에 흐르는 영적 질서를 찾으려 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상응론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구별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단순한 자의적 알레고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의 방법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 강의에서 마태복음 22장의 혼인 잔치 비유를 AI에게 묻는 장면은 이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AI는 강사가 설정한 원칙에 따라 이 비유를 이스라엘의 거절과 복음의 이방인 확장이라는 역사적·문맥적 구조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의 층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혼인’ 자체가 말씀 전체에서 무엇을 상징하는지, ‘왕’과 ‘아들’, ‘잔치’, ‘초청’, ‘예복’이 각각 어떤 영적 실재와 상응하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특히 혼인은 주님과 교회, 그리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 되는 것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상응입니다. 따라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초청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정도를 넘어,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선한 삶과 결합하지 않은 상태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이번 강의의 핵심 주장인 ‘해석은 하나뿐이다’라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강사는 목사 백 명이 백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주셨을 리 없으며 ‘해석은 딱 한 가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말씀의 진리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무한히 상대화될 수 없다는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오히려 여러 층위의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 안에 영적 의미가 있으며, 더 깊이 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해석이 모두 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의 신적 진리가 서로 다른 차원의 의미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라는 말과 ‘말씀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있다’는 말은 반드시 충돌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 카이사르의 동전에 새겨진 ‘형상’을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하는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국가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는 정교분리의 원리로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히려 역설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강사는 다른 곳에서는 본문에 없는 의미를 집어넣지 말라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여기에서는 ‘카이사르의 형상’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의 형상’을 연결하여 상당히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끌어냅니다. 이것이 반드시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읽을 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연결하여 의미를 발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연결 자체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연결에 얼마나 일관되고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과 강사의 문자주의가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도 생깁니다.
반면 요한계시록 13장의 해석에서는 두 관점의 차이가 매우 커집니다. 강사는 짐승과 666을 미래에 나타날 세계적 적그리스도와 정치·경제적 통제 체제로 읽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미래주의적 종말론의 틀입니다. AI가 이 결론을 내놓은 것은 강사가 처음부터 그러한 성경관과 해석 원칙을 페르소나로 설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 밝히기’에서 요한계시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습니다. 짐승, 용, 바벨론, 666 등은 미래 어느 시대에 등장할 특정 정치 지도자와 세계정부의 암호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진리가 어떻게 변질되고 신앙이 어떻게 체어리티와 분리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상태의 표상들입니다.
따라서 666도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암호화한 숫자를 찾는 문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숫자는 영적 상태와 질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누가 맞는가’를 판정하기 전에 두 사람이 성경을 바라보는 출발점 자체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강사는 ‘문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는 ‘문자 안에 있는 영을 보지 못하면 말씀의 가장 깊은 목적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9장부터 11장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적 민족 회복을 강조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를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복음서나 요한계시록, 구약의 예언서와 동일한 의미에서 ‘말씀’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도들의 글이 교회에 매우 유익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데 중요하지만, 구약의 말씀과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처럼 문자 하나하나에 연속적인 속뜻이 들어 있는 방식의 말씀은 아니라고 구별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로마서 9~11장을 다룰 때에는 이것을 ‘천국의 비밀’식 속뜻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사도적 교훈과 당시 교회의 역사적 문제를 다루는 문서로 읽는 편이 적절합니다.
강의 후반부의 십일조와 성전 건축, 번영복음에 대한 비판에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공감할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구약의 물질적 번영을 그대로 가져와 ‘신앙이 좋으면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거나, 예배당 건물을 구약의 성전과 동일시하여 건축 헌금을 영적 공로처럼 강조하거나,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두려움을 조성하는 방식은 신앙의 본질을 외적인 행위와 보상 체계로 축소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 어떤 사랑과 목적이 있는지를 봅니다. 같은 헌금을 하더라도 체면과 보상을 위해 하는 것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기쁘게 드리는 것은 영적으로 전혀 다른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구약은 이스라엘, 신약은 교회’라고 나누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구약의 땅과 성전과 제사와 십일조가 왜 신약 시대에도 계속 말씀으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것들이 단순히 옛 이스라엘의 폐기된 제도에 관한 역사라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말씀으로 주어진 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속뜻을 봅니다. 성전은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신적 인성을, 그로부터 교회를, 그리고 개인 안에서는 주님께서 거하시는 내적 인간을 표상합니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 제사와 제사장,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역시 모두 영적인 실재와 상응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그 말씀의 영적 의미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오심으로 그 표상이 가리키던 실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반복되는 ‘구약과 신약을 나누라’,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라’는 원리는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역사적 시대와 문자적 대상은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구약과 신약이 한 분 주님과 하나의 구원 과정 안에서 놀랍도록 연결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단순히 옛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를 표상하며,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은 인간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인도되는 과정까지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을 바르게 나눈다’는 것은 성경을 서로 분리된 칸으로 잘라 놓는 일이 아니라, 문자적 차이는 정확히 구별하면서 그 안을 관통하는 하나의 신적 질서를 발견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AI와 연결될 때 이번 강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AI에게 올바른 페르소나를 설정하면 올바른 성경 해석을 얻을 수 있는가?’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적어도 엉뚱한 답을 줄이고, 사용자가 원하는 연구 전통과 용어와 방법론 안에서 일관된 답을 얻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페르소나는 ‘진리를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어떤 렌즈를 통해 자료를 볼 것인가를 정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렌즈가 잘못되어 있으면 AI는 그 잘못된 렌즈를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작업을 하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돌아오는 경고입니다. AI에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답이 곧 스베덴보리의 진짜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천국의 비밀’, ‘천국과 지옥’, ‘주님’, ‘신적 섭리’, ‘참된 기독교’, ‘요한계시록 밝히기’ 등 실제 저작으로 돌아가 확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말을 인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스베덴보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가 끊임없이 가리키는 ‘주님’을 더 알고,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진리를 삶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이번 강의의 ‘목사의 권위’에 관한 말도 의미 있게 들립니다. 강사는 목사의 권위가 학위나 직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달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귀 기울일 만한 말입니다. AI 시대에는 성도가 설교 중 들은 내용을 집에 돌아가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특정 성경 구절이나 역사적 사실을 잘못 말하면 과거보다 훨씬 쉽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목사니까 믿으라’는 권위주의적 방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목사의 참된 권위는 단지 ‘정확한 성경 지식’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것과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이 바로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입니다. AI 시대에는 오히려 지식의 양으로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AI가 몇 초 만에 목회자보다 훨씬 많은 자료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AI는 체어리티를 실천할 수 없고, 아픈 교인의 손을 잡아 줄 수 없으며, 한 영혼을 위해 밤새 기도할 수도 없고,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으며 주님 앞에서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정보가 흔해질수록 오히려 삶의 진실성이 목회자의 권위가 되는 시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AI는 목사를 없애는 도구라기보다 ‘목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다시 묻게 하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단순히 성경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면 AI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말씀을 통해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고,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이 되도록 돕는 사람이라면 AI는 오히려 매우 좋은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지식은 이해성에 속하지만, 구원은 결국 의지와 삶까지 변화하는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AI는 이해성을 크게 도울 수 있지만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거듭남은 오직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통해 이루시는 신적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강의가 말하는 ‘AI로 성경 공부를 바르게 하기’는 매우 유익한 출발점입니다. 문맥을 확인하고, 앞뒤 구절을 살피고, 관련 본문을 찾고, 여러 주석을 비교하고, 특정 설교자의 주장을 검증하고, 원어와 역사적 배경을 확인하는 데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가 사용자의 선입견에 맞추어 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강사의 경고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경 연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정보 부족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AI 이전에도 있었고 AI 이후에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AI는 인간의 확증편향을 엄청난 지식과 논리로 강화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AI에게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요구하면, 과거에는 몇 권의 책을 뒤져야 얻을 수 있었던 논거를 몇 초 만에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영적 훈련은 ‘AI를 얼마나 잘 다루는가’ 이전에 ‘나는 정말 진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증명을 원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페르소나’보다 더 깊은 문제입니다. AI에게 어떤 페르소나를 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말씀 앞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내가 주님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인지, 이미 가지고 있는 교리를 확인하려는 사람인지, 다른 사람을 논박할 무기를 찾으려는 사람인지, 아니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삶을 고치려는 사람인지에 따라 같은 성경도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성경 해설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도 바로 여기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상응을 많이 알고 천국의 구조를 많이 아는 것 역시 목적이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의 이해성 안으로 들어와 신앙이 되고, 그 신앙이 의지 안으로 들어가 체어리티가 되며, 마침내 삶 속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AI는 그 과정에서 놀라운 도서관이 될 수 있고, 훌륭한 검색 도구가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좋은 토론 상대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AI도 사람을 대신하여 주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어느 AI도 사람을 대신하여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성경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어떤 AI가 가장 성경을 잘 해석하는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성경을 읽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우리를 다시 말씀의 중심이신 주님께 돌려보냅니다. AI에게 좋은 질문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읽는 내가 주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행하는 것, 곧 신앙이 체어리티와 하나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스베덴보리에게는 ‘성경 공부를 바르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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