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6에서 말하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단순히 ‘일주일에 하루 쉬는 종교적 관습’이 아니라, 원래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점차 외적 규례로만 남게 된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됩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시면, 왜 스베덴보리가 안식일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외적 준수’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지 분명해집니다.
먼저 유대교회에서 안식일은 철저히 ‘거룩하게 구별된 날’이었습니다.Bible전체를 보아도 안식일 규례만큼 엄격하게 지켜진 계명은 드뭅니다. 불을 피우는 것, 일하는 것, 심지어 아주 사소한 행위까지 제한되었고, 이를 어기면 매우 중한 처벌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강도 높은 규례는 단순한 종교적 열심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이 원래 ‘주님과의 결합’, 곧 가장 깊은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지키기 위해 외적 형태라도 엄격히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는 잊히고 ‘형식’만 남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랑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 주님 안에서 평안에 들어가는 상태’를 의미했는데, 유대교회에서는 이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라는 외적 규칙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곧 ‘행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내적 의미, 곧 주님 안에서의 안식은 거의 의식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이해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하신 사건들은, 단순히 규례를 완화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억압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날이며, 형식이 아니라 상태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흐름을AC.86에서 짚습니다. 유대교회는 내적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외적 형태를 통해서라도 그 거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규례가 그렇게까지 엄격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상응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그 속뜻은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통찰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외적 형식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내적 의미와 연결되지 않을 때는 쉽게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적 의미만 강조하고 외적 삶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 역시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방향은 항상 이 둘을 연결하는 데 있습니다.
정리하면, ‘유대교회의 안식일 전통’은 원래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라는 가장 깊은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내적 의미가 사라지면서 외적 규례로만 남게 된 사례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스베덴보리는 이 외적 형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던 본래의 의미를 다시 열어 주는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보시면AC.86의 의도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6
‘여섯째 날’(sixth day)이 된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할 때,곧 이 상태는 여기서 처음으로 다루어지는 상태인데,바로‘안식일 저녁’(eve of the sabbath)이라는 것으로,유대교회가 전통적으로 저녁부터 거룩하게 지켜온 안식일은 바로 이때를 표상하는 것입니다.천적 인간은 곧 말씀드릴‘아침’(morning)입니다.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23:54)
해설
이 글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2장의 안식 구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밀하게 나누어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를 단번에 도달하는 완성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시작과 성숙을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합니다.AC.86은 바로 그 첫 단계, 곧 ‘안식일 저녁’을 다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저녁’이 여전히 어둠의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1장에서의 저녁은 혼돈이나 무지의 상태였지만, 여기서의 저녁은 전혀 다릅니다. 이는 이미 여섯째 날, 곧 영적 질서가 완성된 이후의 저녁입니다. 다시 말해, ‘빛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 오는 저녁’이며, 안식을 향해 기울어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적 인간이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아직 완전한 천적 인간은 아니지만, 중심이 이미 이동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이 앞서던 질서에서, 사랑이 점점 주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는 전이 상태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기보다는, ‘어디에 머물 것인가’가 문제 됩니다.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는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안식일이 아침이 아니라 저녁부터 시작된다는 점은, 안식이 인간의 활동이나 성취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안식은 먼저 내려놓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을 때, 안식의 문이 열립니다.
이 ‘저녁’은 아직 빛이 완전히 드러난 상태는 아니지만, 더 이상 어둠으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기대가 깃든 저녁’입니다. 주님께서 안식 안에서 무엇을 이루실지를 기다리는 상태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멈추고 주님의 일하심을 허락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저녁은 두려움의 시간이 아니라, 조용한 전환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을 ‘아침’이라고 부르겠다고 예고합니다. 이는 다음 단락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내용이지만, 이미 여기서 방향은 분명합니다. 저녁은 시작이고, 아침은 완성입니다. 저녁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턱이고, 아침은 안식 그 자체입니다.
이 구조를 통해 우리는 안식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안식은 단번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천천히 밝아오는 상태’입니다. 먼저 저녁이 있고, 그다음에 아침이 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옮겨 가는 한 인간 안의 변화입니다.
AC.86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나는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가, 아니면 이미 안식의 저녁에 들어서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안식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며,따라서일곱째날이거룩하게구별되어안식일이라불렸다는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았던아르카나입니다.이는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인해사람들은영적인간과천적인간사이에큰차이가있음에도불구하고,둘을같은것으로여겨왔습니다.그차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또는‘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말하자면,이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로부터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seventhday,”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seventhday”or“sabbath,”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불립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고있는태고교회는그뒤를이은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안식일인일곱째날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같은것이법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법궤가나아간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하였고,법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하였습니다.그러므로법궤가떠날때모세가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본성은이와같아서그는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desire)이됩니다.이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이여기서는‘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기쁨을누리는데,이것은‘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으로의미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which is his“desire.”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앞의 AC.84에서 제시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부터 말합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이 연결은 중요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고 악과 거짓을 멸시하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3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85는 이 모든 설명을 ‘안식일’이라는 하나의 표상 안에 모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 사람에게서 독립적으로 어떤 높은 영적 상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의 근원이신 주님의 형상이 그 사람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막2:28의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그자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참된 인간성의 원형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이 ‘사람’이며 ‘안식일’인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의 의미가 단순히 노동을 멈추는 것에서 크게 확장됩니다. 안식은 주님의 나라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평화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한 휴식의 표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다음에는 이 안식의 원리가 교회와 개인에게 차례로 적용됩니다. 먼저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가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님의 안식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의미는 태고교회라는 과거의 한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82의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82에서는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그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이라는 표상이 주님에게서 주님의 나라로, 교회로, 그리고 한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천적 질서가 이루어질 때 그 사람도 안식일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곧 주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이라고 분명히 제한합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거듭난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원형과 형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식에 앞서는 것이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말한 여섯 날 동안의 ‘주님의일’과 연결됩니다. 거듭남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악과 거짓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이끄시는 과정은 싸움과 시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싸움은 안식을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영적 질서가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매우 넓은 원리로 밝힙니다. ‘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제도는 외적인 생활 규정에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안식을 표상했습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예도 같은 구조를 보여 줍니다.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가는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쉬는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법궤가 떠날 때 모세는 ‘여호와여일어나사주의대적들을흩으시고’라고 말하고, 법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이스라엘종족들에게로돌아오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감’과 ‘쉼’의 대비입니다. 나아감에는 대적과 싸움이 있고, 쉼에는 주님의 임재와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관계를 또 다른 성경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광야의 여정이 싸움과 시험이라면 법궤의 쉼은 그 싸움 뒤에 오는 평화입니다.
민10:33에서 법궤가 ‘그들의쉴곳을찾기위하여’ 앞서 갔다는 표현도 이 때문에 인용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을 끝없는 싸움 속에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며, 그 목적은 주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AC.85의 가장 깊은 설명은 [3]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13-14를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사야는 안식일에 ‘네길로행하지아니하며네오락을구하지아니하며’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AC.85에서 안식의 가장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근원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자기중심적 뜻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주님의 뜻이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되는 명령으로 남지 않고 ‘그의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1의 천적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며,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도록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과 그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가장 깊은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강제와 안식의 차이입니다. 외부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사랑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신도 원하게 되면, 순종과 자유가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는다’는 말을 인간의 의지 자체가 제거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이 의지가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가 주님의 선과 결합되어 새롭게 질서를 얻습니다. 본문도 주님의 뜻이 ‘그의뜻’이 된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뜻에서 주님과 결합된 뜻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79-80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되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5에서는 행동과 의지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을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AC.79의 ‘소유’, AC.80의 ‘앎’, AC.85의 ‘뜻과행동’은 서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지 않으며, 자기 뜻을 궁극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점점 더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 안에 놓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의 ‘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을 내적인 평화와 행복으로, ‘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을 외적인 평온과 기쁨으로 풀이합니다. 즉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는 천적 상태에는 내적 평화와 외적 평온이 함께 따릅니다.
이것은 평화를 단순히 외부 환경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먼저 내적인 것입니다.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고, 악과 선이 계속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상태가 그쳤기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질서가 외적인 삶에도 평온과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천적 인간에게 자연계의 고난이나 불편, 질병이나 손실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과 평화는 우선 영적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외적 형편이 언제나 평탄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입니다.
AC.85를 이렇게 읽으면 안식일의 속뜻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않는날’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여섯 날 동안에는 싸움과 수고가 있지만 일곱째 날에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싸움이 안식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외적 준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자체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도록 제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표상이 가리키는 내적 실재입니다. 외적인 안식일은 인간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내적 안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번 번호는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는 데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안식은 인간 안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심리적 평온이 아닙니다. 주님이 안식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안식이며, 주님의 형상이 된 천적 인간도 안식일이 됩니다.
따라서 안식의 중심은 결국 주님입니다. 주님 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과 AC.85의 안식은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얻는 평온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뜻이 물러가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됨으로써 오는 평화입니다.
이 점에서 AC.85는 안식과 자유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적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뜻과 악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실제로 종이지만, 주님의 선을 사랑하여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AC.81에서 시작된 ‘죽은사람,영적인간,천적인간’의 차이가 여기까지 오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인 결박에 의해 억제되고,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며,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여 자유롭게 행합니다. AC.85는 그 천적 자유의 내면을 ‘주님의선하신뜻이그의뜻이되는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안식은 단순히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싸움이 사라진 자리를 공백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 채웁니다.
결국 AC.85의 흐름은 하나입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입니다. 주님의 천적 교회도 안식일이며,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도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이 됩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과 시험이 있지만,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될 때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따라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달력의 일곱째 날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거듭남의 일을 이루셔서, 사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뜻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이며,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주님의 안식일입니다. (AC.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