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명은 그에게‘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7절)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해설
이 글은 창세기2장의 중심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보여 주었다면,AC.76은 그 모든 것의 근원인 ‘생명 자체가 어디서 오는가’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의 생명을 어떤 능력이나 구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가지로 설명합니다. ‘불어넣어짐’(the breathing)입니다. 생명은 생성되거나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생물학적 호흡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숨은 곧 ‘영적 생명의 흐름’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육체가 살 수 없듯이, 주님의 숨이 사람 안에 불어오지 않으면 그 어떤 지식과 이성도 참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스스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불어넣다’는 동작은 매우 친밀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멀리서 명령하거나 외부에서 조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 가까이 다가와, 직접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이 장면은 창조의 기술적 순간이 아니라, ‘관계의 순간’입니다. 생명은 관계 속에서 주어집니다. 주님과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연결이 곧 생명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쓴 ‘breath of lives’, 곧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에 특히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생명이 단일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사람 안에는 여러 층위의 생명이 동시에 흐르고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 감각의 생명, 사고의 생명,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명은 각각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입니다. 그 근원이 바로 주님입니다.
이 점에서AC.76은 앞선AC.73-74와 깊이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의 사람이며, 주님의 안식이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쉬신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의 흐름이 방해 없이 통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천적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는 긴장이나 자기 점검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오는 숨결’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고요함이 있고, 그의 행위에는 억지가 없습니다.
또한 이 글은 인간의 생명을 소유 개념에서 완전히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흔히 ‘내 생명’, ‘내 삶’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표현은 근본적으로 부정확합니다. 생명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할수록, 그는 그 생명의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수록, 그는 더 충만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이 ‘불어넣어짐’의 이미지는 사후 생명(삶)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서AC.70에서 ‘죽음은 생명(삶)의 계속’이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이 숨이 끊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적 호흡이 멈출 때, ‘영적 호흡은 더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으며, 그 생명(삶)은 여전히 주님의 숨에 의해 유지됩니다.AC.76은 이 사실을 창조의 장면 속에 미리 새겨 넣습니다.
결국 이 글은 창세기2장의 모든 후속 내용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에덴동산, 생명나무, 네 강, 그리고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삶은 모두 이 생명의 숨이 계속해서 불어오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상징은 단지 도덕적 교훈이나 신화적 이미지로 남을 뿐입니다.
그래서AC.76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무엇을 아느냐, 무엇을 하느냐 이전에, ‘어디서 숨 쉬느냐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는 주님의 숨으로 삽니다. 그 숨이 그 안에 머무는 한, 그의 삶은 살아 있으며, 그의 안식은 실제입니다.
그의지식과이성(knowledgeandrationality,scientificumetrationale)은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로묘사됩니다. (5-6절)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AC.75는 창2:1-17개요의 세 번째 항목입니다. AC.73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뒤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과이성’이 말씀에서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사랑과 퍼셉션에 의해 인도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은 영적 인간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다.
원문은 ‘scientificumetrationaleejus’라고 합니다. 여기서 ‘scientificum’은 영어 번역에서 ‘knowledge’로 옮겨졌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지식’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학문적 지식에만 한정해서 이해하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이 말은 인간이 감각과 경험, 교육 등을 통하여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인 여러 앎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성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rationale’는 이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현재 해설처럼 ‘scientificum은경험과학습으로쌓인지식이고rationale는그지식이질서잡혀이해로올라간상태’라고 너무 간단하게 두 층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AC에서 지식, 이성,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정교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AC.75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창2:5-6의 자연적 이미지들이 그것들을 묘사한다는 사실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지식과 이성을 묘사하는 것이 ‘초목과채소’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나무는높이자라지만초목과채소는땅가까이자라므로지식과이성이중심이아니라섬기는자리에있다는뜻’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갑니다. AC.75는 식물의 높낮이를 근거로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상응을 설명할 때에는 자연물의 외형에서 우리가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상응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AC작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초목은낮으니까겸손’, ‘나무는높으니까높은지혜’, ‘안개는부드러우니까은밀한은혜’와 같이 자연적 이미지에서 곧바로 영적 의미를 추론하면 아름다운 묵상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시적 연상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와 관련되므로, 가능한 한 해당 AC의 직접적인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안개가 ‘주님으로부터오는직접적인계시나교훈이아니라내적으로스며드는생명의영향’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다시 비와 안개를 ‘위에서아래로강하게주입되는방식’과 ‘안에서밖으로부드럽게흘러가는방식’으로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AC.75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로 묘사된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안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창2:6을 직접 해설하는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요의 역할은 앞으로 펼쳐질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가 본문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볼 수 있도록 큰 대응 관계를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이성’이 ‘초목과채소’라는 자연적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큰 틀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현재 해설이 강조한 ‘천적인간에게지식과이성이필요없다는뜻이아니다’라는 점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AC.75자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etrationale’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이 사랑과 퍼셉션이라고 해서 그가 이성을 사용하지 않거나 자연적 지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적인간은지식과이성을가장바른자리에둔사람이다’, ‘지식은사랑을섬기고이성은선을밝힌다’, ‘그의지식은날카롭기보다온화하고그의이성은논쟁적이기보다투명하다’는 기존 표현은 이번에는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천적 인간 이해와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지만, 뒤의 ‘온화하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우리의 문학적 묘사입니다.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과 우리의 묵상을 분명히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AC.73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AC.75의 위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3은 창2전체의 주체가 어떤 인간인지를 먼저 밝혔습니다. 그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입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일곱째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5는 이제 그 사람 안의 특정한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을 가리킵니다. 개요가 점차 천적 인간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5를 ‘천적인간의인식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가능하지만, 그 구조 전체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되고,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이 각각 구별되어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을 주의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과이성’과 뒤에 나올 ‘지성’을 너무 빨리 하나의 ‘인식능력’으로 묶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일단 그 구별을 존중해야 합니다.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무엇을 뜻하고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창2:5-6의 문자적 본문도 이 관점에서 다시 보입니다. ‘들에는초목이아직없었고밭에는채소가나지아니하였으며’, ‘안개만땅에서올라와온지면을적셨더라’는 문장은 자연적 창조의 장면만을 읽을 때에는 식물이 생겨나기 전 땅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75는 속뜻에서 이 표현들이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관계된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묘사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AC.75단계에서는 ‘왜아직초목과채소가없다고하는가?’, ‘왜비가아직내리지않았는가?’, ‘왜땅을갈사람이없다고하는가?’, ‘왜안개가땅에서올라오는가?’를 모두 답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들이 뒤의 상세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개요와 상세 해설의 역할을 구별하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영적인간에게는진리가먼저이고천적인간에게는선이먼저’라는 원리를 사용했습니다. 이 큰 구별 자체는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나 AC.75에서 ‘그래서천적인간은지식을쌓거나이성을단련한다는감각이거의없다’고까지 나아가는 것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이 외적인 교육이나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창2의 천적 인간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퍼셉션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앞으로 관련 AC가 직접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천적인간에게도지식과이성이존재하지만그것들의질서와역할은그의천적상태안에서이해해야한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또 ‘안식의상태에들어간사람은더이상지식과이성을통해하나님께도달하려하지않는다.그는이미주님안에있다’는 기존 표현도 수정하겠습니다. ‘이미주님안에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고, AC.75의 표현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기본 질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상태를 ‘이제더이상배울필요도,생각할필요도,분별할필요도없는상태’처럼 그리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이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단순화를 막아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천적 생명의 질서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독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천적 인간을 ‘이성을초월했으므로이성이필요없는사람’으로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중심이라고 해서 진리와 지식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여러 능력은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각각의 쓰임을 갖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우리의지식과이성은나무처럼자신을드러내는가,아니면초목과채소처럼삶을섬기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빼겠습니다. 질문 자체는 좋은 묵상이지만 ‘나무=자기과시,초목과채소=겸손한섬김’이라는 상응을 먼저 만들어 낸 뒤 그 위에 적용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AC해설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을 정확히 세우고, 그 위에서 적용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AC.75의 역할은 훨씬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창2의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말씀은 그것들을 ‘안개로적셔지는땅에서난초목과채소’라는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형상으로 묘사되는지는 뒤에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 가지 정도면 충분합니다. 첫째, AC.73부터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다시 거듭남의 문맥입니다. 둘째, 창2의 주체는 천적 인간입니다. 셋째, 그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창2:5-6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이 큰 구조를 먼저 붙들고 뒤의 상세 해설로 들어가면 각각의 상응을 억지로 앞당겨 해석하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차례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73에서는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 AC.74에서는 ‘천적인간은일곱째날’, 그리고 AC.75에서는 ‘그의지식과이성은초목과채소로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요는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AC.76에서는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 곧 그 천적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생명의숨’을 통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AC.75는 천적 인간을 지식이나 이성이 없는 신비적인 존재로 그리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들이 말씀 안에서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되는지를 알려 주는 개요입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초목과 채소와 땅과 안개의 세부적인 의미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읽기입니다.
AC.74는 바로 앞 AC.73을 한 걸음 더 이어 갑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을때,그는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어있던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렇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을 ‘일곱째날’이라고 부르며,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창1의 여섯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을 하나의 거듭남의 연속으로 연결합니다. 창1의 여섯 날은 자연계 창조의 시간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섯 날을 지나 이제 일곱째 날에 이른 인간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일곱째날’은 단순히 일주일의 마지막 하루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거듭남이 천적 상태에 이른 인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천적인간이일곱째날에들어간다’고 하지 않고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날’은 단순한 자연적 시간 단위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이 어느 날 경험하는 휴식 시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상태 자체를 나타냅니다. 창1의 여섯 날 역시 같은 관점에서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어 왔으며, 이제 그 연속이 일곱째 날이라는 천적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날에 ‘주님께서쉬신다’고 할까요? 우선 이것을 주님께서 더 이상 일하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생명과 섭리와 역사가 멈추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2의 ‘안식’은 주님의 활동 중단을 뜻하는 자연적 휴식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속뜻에서는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어떤 새로운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이 의미는 뒤의 개별 절 해설에서 훨씬 자세히 설명될 것이므로 AC.74라는 개요에서 너무 앞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창1흐름을 생각하면 기본 방향은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와 중간 단계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하면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하고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악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능력까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쉬신다’는 표현을 ‘인간이아무것도하지않게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천적 인간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며 쓰임을 행합니다. 문제는 활동의 유무가 아니라 그 활동의 근원이 누구에게 있다고 여기는가입니다. 거듭남의 질서가 깊어질수록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주장하는 것이 물러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역사하게 됩니다. ‘안식’의 의미는 뒤의 AC.85에서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의 방향을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주님이사람안에서편히거하실수있는상태이기때문에주님의안식이라고부른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AC.74자체가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주님이거하신다’와 ‘주님이쉬신다’는 표현을 바로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주님의안식’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두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이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AC.74는 또한 창1의 여섯째 날과 창2의 일곱째 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의 인간은 이미 영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을 아직 거듭나지 못한 낮은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의 거듭남 과정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이미 매우 중요한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창2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섯째날의신앙에머물러서는안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영적 인간이 반드시 천적 인간이라는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야 하고, 영적 상태는 불완전한 신앙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AC.73에서 살펴보았듯, 창1-2의 이 특정한 거듭남 서술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개요의 순서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인간은아직여섯째날에머문사람이고천적인간만완성된사람이다’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의 에덴 이야기가 나타내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창1과 창2의 속뜻을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 안에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안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을 모두 마치고 활동을 중단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천국적 삶은 무활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서 천국의 생명은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멈추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싸움과 활동의 질서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해설처럼 이 한 문장에서 곧바로 ‘천국은사랑에서나오는활동이수고로느껴지지않는상태’라고 사후 천국의 삶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설명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천국 이해와 연결할 수 있지만, AC.74의 직접적인 주제는 사후 천국이 아니라 거듭난 천적 인간입니다. 바로 앞 AC.72까지 사후세계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서 AC.73이후에도 계속 사후세계 문맥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AC.73부터는 분명히 창2:1-17의 속뜻 개요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AC.74의 ‘안식’은 우선 현재의 거듭남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일곱째 날이며, 그 상태를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이것이 ‘주님의안식’인지, 왜 일곱째 날이 복되고 거룩한지에 대해서는 뒤의 개별 절 해설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4는 개요로서 아주 절제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며,그날에주님께서쉬신다’고 합니다. 이 짧은 등식을 먼저 기억해 두면 뒤에서 창2:2-3을 자세히 해설할 때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훨씬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에덴동산의 모든 묘사도 같은 문맥 안에 놓입니다. AC.75부터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어 에덴동산과 나무들과 강이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차례로 개요로 제시됩니다. 즉 창2:1-17전체는 바로 이 ‘일곱째날의인간’, 곧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렇다고 에덴의 모든 내용이 단순히 ‘안식이후의삶’을 묘사한다고 미리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의 표상에는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이후에는 천적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지혜를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경계까지 등장합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모든것이완성되어이제아무위험도없는상태’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창2의 뒤쪽으로 갈수록 인간의 proprium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AC.73과 AC.74를 함께 놓으면 창2의 출발점이 분명해집니다. AC.73은 ‘죽어있던사람이영적인간이되었을때,그는그다음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이된다’고 하여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과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전환은 이 개요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창1에서 인간을 단계적으로 거듭나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도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여 주님께 안식을 제공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을 천적 상태로 인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인간의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표지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어떤 질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AC.74가 창2의 첫머리에 놓는 두 번째 열쇠입니다. AC.73의 첫 번째 열쇠가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였다면, AC.74의 두 번째 열쇠는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며,그날에주님께서쉬신다’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개요들은 이 일곱째 날의 인간, 곧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