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1:2)

 

AC.17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 하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결과 영적, 천적 (spiritual and heavenly life)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earth void and empty,and also theground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empty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thick darkness,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가운데 먼저 혼돈, 공허, 흑암을 해설합니다. 바로 앞 AC.16에서 창세기의 창조가 사람의 창조, 곧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으므로, 이제 창조가 시작되기 전의 땅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사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부르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직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1:2는 단순히 창조 이전 우주의 물리적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기 전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혼돈(void)공허(empty)는 막연히 뒤섞이고 텅 빈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말을 정확히 구별하여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사람 안에 막연한 종교성을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것들이 사람의 삶 안에서 질서를 이루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이 없다, 진리가 없다는 이 표현을 근거로 거듭남 이전 사람의 모든 외적 선행이나 모든 자연적 진실성을 무가치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7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사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진리가 아직 생명 있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어떻게 보존되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가 없는 이 상태에서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흑암을 어리석음무지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지식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가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에 대한 무지이며, 그 결과 영적, 천적 삶에 속한 모든 에 대한 무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일에는 상당히 영리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것에는 흑암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AC.17흑암은 지적 능력의 부족보다 주님과 영적 생명에 관한 빛이 아직 사람의 의식과 삶 안에서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렘4:22-23을 인용합니다. 먼저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는 말씀은 AC.17에서 흑암어리석음과 주님 신앙에 관한 무지라고 설명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곧 주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영적 어리석음과 무지의 근본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이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연적 총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영적 선을 아는 지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AC.17어리석음을 세상적인 무능이나 지적 결핍으로 오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4:23은 창1:2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하는데,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창1:2와 거의 그대로 겹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우연한 어휘의 유사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과 그들의 영적 상태를 두고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돈과 공허가 물질적 우주의 최초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AC.16에서 창조가 거듭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AC.17에서는 혼돈과 공허 역시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음을 예레미야를 통해 확인하는 셈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AC.16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heaven)이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earth)가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에 빛이 없다는 표현도 AC.17흑암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속 사람 자체가 주님에게서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사람에게 영적 빛이 드러나 그의 의식과 삶을 밝혀 주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AC.18AC.19에서는 이 어둡고 황폐한 상태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므로, AC.17만으로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적 상태 전체를 닫힌 체계처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AC.17의 진단은 매우 엄중하지만 절망을 선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혼돈은 선의 없음, 공허는 진리의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사람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빛을 비추심으로써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17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인간론이라기보다, 왜 우리에게 주님의 새 창조가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거듭남의 첫 진단이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17 해설)

 

심화

1.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앞당겨 수는 없을까?’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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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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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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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태초 또한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시기를 포함하는데, 이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a new creation)라고 합니다.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각각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The most ancient time is calledthe beginning.By the prophets it is in various places called thedays of old[antiquitatis] and also thedays of eternity.Thebeginningalso involves the first period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for he is then born anew, and receives life. Regeneration itself is therefore called anew creationof man. The expressions tocreate,toform,tomake,in almost all parts of the prophetic writings signify to regenerate, yet with a difference in the signification. As in Isaiah: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러므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the Maker), 그리고 창조자(the Creator)라고 불리시는데, 같은 선지서에서, And therefore the Lord is called theredeemer,theformer from the womb,themaker,and also thecreator; as in the same prophet: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In David: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heaven)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earth)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뒤에 이어질 내용에서 있습니다. Thatheaven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earththe external man before regeneration may be seen from what follows.

 

해설

AC.16부터 스베덴보리는 창1:1의 각 표현을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첫 표현은 태초(the beginning)입니다. 그는 먼저 태초가 태고, 곧 가장 오래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선지서에서는 이를 옛날(the days of old) 또는 영원(the days of eternity)이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시간 개념 자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AC.16에서 중요한 것은 이 태초가 문자적으로 먼 옛 시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하는 첫 시기까지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거듭남을 시작할 때 그는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그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시작, 곧 영적인 태초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앞의 AC.4에서 이미 창세기 1장이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고 밝힌 것과 직접 연결됩니다. 1:1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시작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생명을 받는다는 말도 육체적 생명을 새로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매여 있던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생명으로 깨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순한 성격 개선이나 종교적 습관의 보완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질서를 이루어 가시는 창조입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43:7을 인용합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 또는 한 백성을 두고 창조하다, 짓다, 만들다라는 세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이유는 선지서의 창조 언어가 단지 우주나 인간의 최초 창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속하도록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동시에 이 세 동사가 모두 같은 뜻으로 무의미하게 반복된 것이 아니라 각각 의미의 차이를 가진다고 밝힙니다. 다만 AC.16에서는 그 차이를 아직 자세히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세 동사를 임의로 세 단계에 정확히 배당하기보다는 말씀은 거듭남을 여러 측면에서 창조·형성·만듦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정도로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어지는 사43:15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는 말씀은 새 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앞에서 주님을 구속자, 태에서부터 지으신 , 만드신 , 창조자라고 부른다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자라는 호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AC.16의 문맥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고, 형성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듭남이 창조라면 그 창조자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선택하며 순종하지만, 그 안에서 생명을 주시고 실제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점이 이 인용의 핵심입니다.

 

102:18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는 말씀은 창조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의 백성은 육체적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창조함을 받을 백성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이 표현은 사람이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적절한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자연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창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씀 안의 창조에는 최초의 물질적 창조를 넘어선 영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된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것은 새 창조가 단순한 내면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향하는 새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네 번째 인용인 시104:30은 이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는 창조새롭게 하다가 한 구절 안에서 나란히 나타납니다. 바로 이 때문에 AC.16거듭남은 창조라는 설명과 매우 잘 맞습니다. 주님의 영이 보내어질 때 그들이 창조되고, 그 결과 지면이 새로워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핵심은 주님의 생명과 역사가 사람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시104:30주의 을 성령론 전체로 확대하거나 지면AC.16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겉 사람과 반드시 일대일로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이 구절이 담당하는 직접적인 역할은 창조가 곧 새롭게 함과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 네 인용을 함께 놓고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창조라고 한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43:7에서는 사람이 창조되고, 지어지고, 만들어지며, 43:15에서는 주님이 창조자라고 불리시고, 102:18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이 다시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라고 불리며, 104:30에서는 주님의 영으로 창조됨새롭게 이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네 구절은 따로따로 흩어진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논증을 이룹니다. 말씀의 선지적 언어에서 창조는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별도의 인용 구절 심화가 없어도 AC.16에서 왜 이 네 본문을 가져왔는지가 충분히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창1:1(heaven)(earth)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예고합니다. 은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는 겉 사람을 의미하며,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너무 앞서갈 필요는 없습니다. AC.16이 아직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속뜻에서 읽을 때, 우주 창조의 언어가 동시에 인간의 내적·외적 존재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질서 지어지는 거듭남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16의 중심은 간결합니다. 태초는 사람의 거듭남이 시작되는 첫 시기를 포함하고, 거듭남은 창조이며, 그 새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 새 창조가 속 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로 이루어지는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16 해설)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심화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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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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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AC.15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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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 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14:6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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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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