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17)

 

AC.73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을 , 그는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 (1)

 

해설

AC.73부터 창2:1-17의 본격적인 개요가 시작됩니다. 바로 앞 AC.67-72에서는 다른 에 관한 기록을 왜 밝히는지,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기록을 AC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서론을 마치고 다시 말씀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AC.73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는 말을 앞에서 다룬 사후 소생의 연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다시 창1부터 계속되어 온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AC.73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1의 속뜻에서 이미 보았듯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아직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1의 여섯 날은 그러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새롭게 되어 마침내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창2에서는 그다음 상태, 곧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는 상태가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3은 창1과 창2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한 문장입니다. 1과 창2가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이 더 깊어지는 연속된 질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에서 죽어 있던 인간이 영적 인간이 되었고,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천적 인간이라는 두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살펴본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입니다. 그의 거듭남에서는 신앙에 속한 진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 인도됩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의식되고, 그것을 통해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서는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영적 인간은 머리로 알고 천적 인간은 행동으로 산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하고 체어리티를 행합니다. 차이는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지각됩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창1에서 이미 살펴본 양심퍼셉션의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신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해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인도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퍼셉션입니다. 그는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단지 외적으로 배운 규칙에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그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2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AC.73의 한 문장만 가지고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으로 발전해야 하며, 영적 인간은 단지 미완성 단계에 불과하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창1-2의 연속적인 속뜻에서는 한 인간의 거듭남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상태를 거쳐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에서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이후의 고대교회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순서를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73as is now treated of’,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론을 잠시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설할 창2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는 말입니다. 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창조의 완성을 말하지만, 속뜻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이제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가는 새로운 단계와 연결됩니다.

 

현재 제목과 해설에서 이 변화를 완성을 향한 생명의 상승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조금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창2의 천적 상태가 앞선 상태보다 더 내적인 상태라는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은 상승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입니다. 이를 지나치게 위계적인 상승 과정으로 표현하면 영적 인간이나 영적 천국이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라는 창2:1의 구체적인 속뜻은 AC.82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AC.73에서 미리 모든 세부 상응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3은 개요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1에서 영적 인간이 사람이 2에서는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큰 흐름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1의 여섯째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의 관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1에서 인간은 여섯 날의 거듭남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목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끊임없이 싸우는 상태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점점 더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것을 내려놓으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선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다음 AC.74에서는 바로 이 천적 인간을 일곱째 이라고 부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73은 여섯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내적 의미를 한 문장으로 예고하는 역할도 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것도 인간이 완전무결해져 더 이상 아무 변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미리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4 이하에서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은 여섯 날 동안 인간이 경험한 거듭남의 싸움과 수고가 천적 상태에서는 다른 질서로 바뀐다는 정도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현재 해설에서 AC.73을 사후 삶과 연결하여 죽은 뒤에도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계속 성장한다고 설명했던 부분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0-72가 사후세계에 관한 글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읽기 쉬웠지만, AC.71에서 이미 사후세계 기록과 말씀 본문 해설을 구별하여 배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사후 소생에 관한 내용을 장의 끝에서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했고, 이제 AC.73에서는 그 주제를 잠시 내려놓고 창2의 말씀 해설로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AC.73죽어 있던 사람AC.70의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과 동일한 문맥이 아닙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육체적 죽음이나 사후세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죽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으며, 지금 AC.73에서는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문맥을 따라 어떤 종류의 죽음을 말하는지 구별해야 합니다.

 

사후세계는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이며,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느냐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가 달라진다는 기존 해설도 여기서는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상태가 변화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간다는 더 큰 주제는 별도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3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후에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바뀌어 간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구별까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AC.73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명료합니다. 거듭남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단번에 가장 내적인 상태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새롭게 됩니다. 1은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까지의 여섯 날을 보여 주었고, 이제 창2는 그다음 천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순서를 인간 자신의 성취 단계로 이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질서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인간의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1 전체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빛을 있게 하신 분도, 궁창을 만드신 분도, 땅에서 싹이 나게 하신 분도, 광명체를 두신 분도, 생물을 번성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들이 속뜻에서 거듭남의 단계들을 가리킨다면 인간의 영적 창조 역시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이 되는 것 역시 그 연속선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AC.73은 짧지만 창1 전체와 창2 전체 사이에 놓인 중요한 다리입니다. 1의 여섯 날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동시에 창2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을 , 그는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됩니다.이것이 지금부터 창2:1-17에서 펼쳐질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알고 창2를 읽으면 에덴동산 이야기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덴은 단순히 인류 최초의 아름다운 정원에 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 강과 네 갈래,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이 모두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어 차례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3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이 전환 하나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1에서 주님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영적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상태를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창1과 창2를 이어 주는 AC.73의 핵심이며, 이제부터 시작되는 에덴동산의 속뜻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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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다’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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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SC.59, 결혼 안 한 스베덴보리가 'Conjugial Love'를 저술?

스베덴보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께서는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결혼과 자녀를 통해 겪는 풍성한 기쁨과 때로는 무거운 아픔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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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7,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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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위치를 알고 읽으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예고입니다. 바로 앞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 해설 사이에 끼워 넣으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겠다고 했습니다. AC.72는 바로 그 원칙에 따라 장의 끝에서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AC.72는 독립적으로 떨어진 선언이 아니라 AC.71의 직접적인 결론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겠다고 했으므로, 이제 창2 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장의 끝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은 편집 원칙이고 AC.72는 그 원칙이 앞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를 보여 주는 첫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조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72 다음에 곧바로 소생 과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AC.73부터는 창2:1-17의 개요와 절별 속뜻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장의 본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사후 소생에 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72이제 바로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 장의 끝에서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안내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 두면 AC의 독특한 구성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번 예고의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지는가입니다. 바로 앞 AC.70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짧게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소생될 ’,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으며, 육체의 죽음 후 다른 삶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그때 제시한 주제를 창2 해설이 끝난 뒤 구체적으로 다루겠다고 다시 한번 예고하는 셈입니다.

 

죽음에서 일으켜져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는 raised from the dead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위로 상승한다는 상응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소생하여 의식적인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서 AC.70에서 사용한 resuscitated와 같은 주제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또 이것은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69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몸을 입은 이라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 사람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에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자연적 소생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의 삶이 끝난 사람이 영으로서 의식적인 삶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장의 끝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영원한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에도 본문보다 너무 많은 의미를 넣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지만 AC.72는 여기서 영원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뜻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생명이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AC.70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생명과 지옥의 생명도 구별해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도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AC.72에서는 아직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그 전환 과정이 앞으로 설명될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AC.67부터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이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말한다고 하기보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추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1의 기존 심화를 비공개하기로 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이 내용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그 허락이 직접적인 음성으로 주어졌는지, 내적 지각으로 알게 되었는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사후세계 기록을 개인적 호기심이나 임의의 공개가 아니라 주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의 또 다른 의미는 독자에게 앞으로의 독서 순서를 알려 준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이 죽을 때의 소생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창2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2:1-17에서 일곱째 날,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강과 그 네 갈래 등 매우 중요한 속뜻을 차례로 살피게 됩니다. 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죽음과 소생에 관한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을 실제로 이해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해서 창세기 본문 해설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반대로 창세기 본문만 해설하고 영계에 관한 경험을 모두 별개의 책으로 떼어 내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 해설을 중심축으로 진행하면서, 그와 깊이 관련된 다른 삶의 본성을 별도의 연속된 기록으로 함께 제시합니다. AC.72는 그 두 흐름 사이에서 독자에게 주제는 장의 끝에서 다시 이어질 이라고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AC.67부터 AC.72까지를 한 묶음으로 보면 그 준비 과정도 상당히 치밀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므로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으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이런 기록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설명했고, 이제 AC.72에서는 그 배열에 따라 창2의 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 예고합니다.

 

따라서 AC.72이제부터 실제 사후세계 체험담이 시작된다는 신호로 이해하면 약간 이릅니다. 실제로 다음 AC.73부터는 다시 말씀 본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AC.72는 지금까지의 사후세계 서론을 잠시 닫으면서 동시에 창2 해설이 끝난 뒤 이어질 다음 기록의 주제를 미리 표시하는 글입니다. 일종의 다음 사후세계 기록의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2는 매우 짧지만 독자를 길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다른 이라는 큰 주제를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다음 글부터 창2 본문 해설로 돌아가면 독자는 그 주제가 끝난 것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지금은 말씀 본문으로 돌아가지만 이 장의 끝에서 다시 그 주제를 이어 받아,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2의 핵심은 이 한 문장 그대로 붙들면 충분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가.이것이 창2 해설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주제입니다. AC.70에서 선언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명제가 그때부터는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관찰했다고 증언하는 구체적인 소생의 과정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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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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