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SC.59, 결혼 안 한 스베덴보리가 'Conjugial Love'를 저술?

스베덴보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께서는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결혼과 자녀를 통해 겪는 풍성한 기쁨과 때로는 무거운 아픔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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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7,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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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위치를 알고 읽으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예고입니다. 바로 앞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 해설 사이에 끼워 넣으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겠다고 했습니다. AC.72는 바로 그 원칙에 따라 장의 끝에서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AC.72는 독립적으로 떨어진 선언이 아니라 AC.71의 직접적인 결론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겠다고 했으므로, 이제 창2 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장의 끝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은 편집 원칙이고 AC.72는 그 원칙이 앞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를 보여 주는 첫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조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72 다음에 곧바로 소생 과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AC.73부터는 창2:1-17의 개요와 절별 속뜻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장의 본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사후 소생에 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72이제 바로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 장의 끝에서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안내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 두면 AC의 독특한 구성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번 예고의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지는가입니다. 바로 앞 AC.70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짧게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소생될 ’,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으며, 육체의 죽음 후 다른 삶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그때 제시한 주제를 창2 해설이 끝난 뒤 구체적으로 다루겠다고 다시 한번 예고하는 셈입니다.

 

죽음에서 일으켜져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는 raised from the dead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위로 상승한다는 상응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소생하여 의식적인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서 AC.70에서 사용한 resuscitated와 같은 주제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또 이것은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69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몸을 입은 이라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 사람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에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자연적 소생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의 삶이 끝난 사람이 영으로서 의식적인 삶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장의 끝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영원한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에도 본문보다 너무 많은 의미를 넣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지만 AC.72는 여기서 영원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뜻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생명이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AC.70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생명과 지옥의 생명도 구별해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도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AC.72에서는 아직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그 전환 과정이 앞으로 설명될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AC.67부터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이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말한다고 하기보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추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1의 기존 심화를 비공개하기로 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이 내용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그 허락이 직접적인 음성으로 주어졌는지, 내적 지각으로 알게 되었는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사후세계 기록을 개인적 호기심이나 임의의 공개가 아니라 주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의 또 다른 의미는 독자에게 앞으로의 독서 순서를 알려 준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이 죽을 때의 소생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창2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2:1-17에서 일곱째 날,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강과 그 네 갈래 등 매우 중요한 속뜻을 차례로 살피게 됩니다. 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죽음과 소생에 관한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을 실제로 이해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해서 창세기 본문 해설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반대로 창세기 본문만 해설하고 영계에 관한 경험을 모두 별개의 책으로 떼어 내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 해설을 중심축으로 진행하면서, 그와 깊이 관련된 다른 삶의 본성을 별도의 연속된 기록으로 함께 제시합니다. AC.72는 그 두 흐름 사이에서 독자에게 주제는 장의 끝에서 다시 이어질 이라고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AC.67부터 AC.72까지를 한 묶음으로 보면 그 준비 과정도 상당히 치밀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므로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으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이런 기록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설명했고, 이제 AC.72에서는 그 배열에 따라 창2의 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 예고합니다.

 

따라서 AC.72이제부터 실제 사후세계 체험담이 시작된다는 신호로 이해하면 약간 이릅니다. 실제로 다음 AC.73부터는 다시 말씀 본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AC.72는 지금까지의 사후세계 서론을 잠시 닫으면서 동시에 창2 해설이 끝난 뒤 이어질 다음 기록의 주제를 미리 표시하는 글입니다. 일종의 다음 사후세계 기록의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2는 매우 짧지만 독자를 길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다른 이라는 큰 주제를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다음 글부터 창2 본문 해설로 돌아가면 독자는 그 주제가 끝난 것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지금은 말씀 본문으로 돌아가지만 이 장의 끝에서 다시 그 주제를 이어 받아,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2의 핵심은 이 한 문장 그대로 붙들면 충분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가.이것이 창2 해설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주제입니다. AC.70에서 선언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명제가 그때부터는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관찰했다고 증언하는 구체적인 소생의 과정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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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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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밖에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은 별도로 합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은 매우 짧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전체 구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로운 사후세계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지금부터 그런 내용들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죽음에서 영원한 삶으로의 소생 등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들을 앞으로 계속 밝히겠지만, 그것들을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러한 내용들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밝힐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은 서로 관계없는 일화들의 모음이 아니라 일정한 연결과 순서를 가진 하나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절과 구절을 차례로 해설하는 가운데 이 내용들을 조금씩 나누어 삽입하면, 사후세계에 관한 설명 자체의 흐름이 끊기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창세기 본문 해설의 흐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C의 중심적인 진행 방식은 말씀의 본문을 절별로 따라가며 그 안의 속뜻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매번 그 사이에 길게 삽입하면 말씀 해설의 연속 역시 끊어질 수 있습니다. AC.71은 이 두 종류의 내용을 아예 서로 무관한 것으로 분리하겠다는 뜻이라기보다, 각각의 내용이 가진 연속성을 보존하기 위해 배치상의 구별을 두겠다는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덧붙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AC를 읽다 보면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독특한 구성입니다. 창세기 한 장의 해설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장을 마친 뒤에 사후세계, 영들과 천사들, 천국과 지옥, 인간과 영계의 관계 등에 관한 별도의 기록들이 이어집니다. AC.71은 그 구조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배열임을 직접 알려 줍니다.

 

여기서 in some order’,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사후세계에 관한 경험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관련된 내용들을 가능한 한 연결하여 제시하려 합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아도 그 점이 보입니다. AC.67에서는 왜 다른 에 관한 것을 밝히는지 설명했고, AC.68에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알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으며, AC.69에서는 인간이 몸을 입은 이기 때문에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이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님을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마침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으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별개의 일화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가 조금씩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이후의 AC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각 장의 처음이나 끝에 나오는 영계 기록을 단순한 부록이나 여담으로 생각해서 건너뛸 필요가 없습니다. AC.67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과 관계되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들은 창세기 속뜻 해설과 전혀 무관한 덧붙임이 아닙니다. 다만 내용 자체의 연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본문 해설과 구별된 자리에 묶어서 제시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영계 기록을 창세기 본문보다 더 중요한 내용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1의 표현은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인 진행축은 여전히 말씀 본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를 절별로 해설하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별도로 사후세계와 영적 세계에 관한 기록들을 일정한 순서로 덧붙입니다. 따라서 AC에는 말씀의 속뜻 해설영계에 관한 경험적 기록이라는 두 흐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진행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 흐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밖에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은 별도로 한다고 덧붙입니다. 즉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은 언제나 장의 처음과 끝에서만 등장하는 절대적인 편집 규칙은 아닙니다. 말씀을 해설하는 과정에서도 관련되는 내용이 있으면 부수적으로 언급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1은 기계적인 형식 규칙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각 장의 처음과 끝에 관련 내용을 모아 배열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 중에도 언급할 수 있다는 편집 원칙을 제시합니다.

 

이 마지막 단서 때문에 기존에 사이,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내적 의미만이 놓인다고 설명했던 것은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1 자신이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곧 본문 중에도 부수적으로 들어오는 내용이 있다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구조는 본문에서는 영계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분리가 아니라, 큰 덩어리의 설명은 장의 처음과 끝에 모으고 필요에 따라 관련 내용을 본문에서도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또 장의 처음이라는 위치에 그 자체로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라고 했지만 AC.71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이유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최종본에서는 그 이유에 머무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AC.71에서도 다시 나타납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자신이 마음대로 영계 경험을 공개하고 배열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저술 사명을 개인적인 선택이나 지적 기획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한 표현에서 어디에 무엇을 배치할지까지 주님께서 직접 지시하셨다거나 AC 편집 배열 전체가 단어 하나까지 직접 계시된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1은 그런 세부적인 계시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밝히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이렇게 배열하여 제시하는 일도 주님의 자비로 허락된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었는지는 이 글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AC.71은 짧지만 우리의 AC 작업에도 유익한 편집 원칙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내용이 중요하다고 해서 관련되는 모든 것을 한 본문 안에 넣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본문 해설의 흐름과 별도 주제의 흐름이 각각 살아 있도록 구별하고, 꼭 필요한 연결만 적절한 자리에서 하는 것이 오히려 독자가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적용이지, 스베덴보리가 직접 우리에게 편집 지침을 명령한 것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최종 검토에서 성경 인용이나 다른 AC 번호가 나온다고 매번 별도 심화를 만들지 않고, 본문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경우에만 심화를 남기려는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통합니다. 내용이 많아질수록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본문에 속하고 무엇이 별도의 설명으로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AC.71이 직접 말하는 편집 목적도 결국 관련된 내용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되는 것을 피하는 데 있습니다.

 

AC.70AC.71의 관계도 이렇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고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말하며 소생이라는 큰 주제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곧바로 창세기 2장의 절별 해설 사이에 계속 삽입하지 않습니다. AC.71에서 이러한 사후세계 관련 내용들을 별도의 연속된 묶음으로 배치하겠다고 설명하고, 이어 AC.72에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예고합니다. 바로 이 편집 원칙이 실제 구조로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의 핵심은 거창한 계시의 질서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에는 그 자체의 연결과 순서가 있으므로 말씀의 절별 해설 사이에 흩어 놓지 않고,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묶어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필요한 경우에는 본문 중에도 관련 내용을 부수적으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알고 AC를 읽으면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독특한 구성의 이유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72, 창2 앞,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다’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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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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