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분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해설
AC.15는 바로 앞 AC.14의 선언을 한 단계 더 깊게 합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5는 이에 대해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AC.14와 AC.15는 서로 떨어진 두 선언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장을 자신의 신학적 설명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요14:6, 8-11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이 긴 인용의 핵심은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대답하신 데 있습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이 AC.15에 인용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라는 선언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은 아버지를 주님과 떨어진 또 다른 신적 존재로 찾아서는 안 된다는 AC.15의 논지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두 분이 단순히 같은 목적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다만 AC.15는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단락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와 주님의 신적 인성에 관한 모든 교리를 이 짧은 번호 안으로 미리 끌어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핵심, 곧 천국에서는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요14:6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도 같은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단지 아버지께 데려다주는 외적인 통로나 중간 단계이고, 그 뒤에 주님과 별도로 만나야 할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AC.15의 인용 흐름과 맞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고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인용한 것은 인간의 시선을 주님 너머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AC.15는 짧지만 이후 AC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AC.14가 ‘주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했다면, AC.15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신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요14:6, 8-11을 길게 인용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후 거듭남과 천국과 말씀의 속뜻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시선을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서 둘로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AC.15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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