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1

광명체들(great luminaries) 사랑과 신앙을 뜻하고, 또한 해와 달과 (sun, moon, and stars)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에서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great luminaries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sun, moon, and stars,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끄듯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땅에 베풀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무리가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주민들로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해가 지지 아니하며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영원한 빛이 되고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위에 펴신 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 빛들을 지으신 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등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luminaries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모든 것이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사람을 통하여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은 앞의 AC.30에서 밝힌 광명체들, 곧 사랑과 신앙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고, 이어서 그것들이 밝아지는 말씀을 인용하며, 마지막에는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의 중심은 단순히 해는 사랑, 달은 신앙이라는 하나의 대응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될 때 말씀은 그것을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표현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빛과 광명체의 밝아짐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겔32:7-8은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바로와 애굽을 다룬다고 하면서, 말씀에서 그것들이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감각이나 기억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적 삶과 배움에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과 기억 속 지식만을 최종 원리로 삼아 영적인 것을 그 아래 두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질서가 뒤집힐 때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것으로 묘사되며, 에스겔의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장면이 바로 그 상태를 표현합니다.

 

13:9-10과 욜2:1-2,10도 같은 방향의 증거입니다. 두 본문 모두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여호와의 이나 각 선지서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심판의 구체적인 교리나 별개의 상응을 덧붙이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사라지는 상태가 말씀에서 자연적 광명체의 어두워짐으로 반복하여 표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1의 넷째 날에서는 광명체가 나타나 빛을 비추지만, 이 선지서들에서는 그 반대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AC.31은 어두워짐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60:1-3,20에 이르면 방향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말씀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빛이 이르렀고, 다시는 해가 지지 아니하며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이라는 표현은 앞의 어두워진 해와 달과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광명체의 어두워짐이라면,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새롭게 되는 상태는 해와 달이 지속해서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곧바로 특정한 후대 교단명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1의 직접 문맥에서는 주님의 강림으로 어둠 속에 빛이 임하여 교회가 새롭게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그것을 개별적인 거듭남에도 적용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새로움과 한 사람의 거듭남이 같은 빛의 질서 안에서 함께 언급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둠 가운데 있는 곳에 빛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136:5-9와 시148:3-4의 인용은 이러한 광명체의 언어가 선지서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창조와 찬양의 언어 안에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36은 창세기와 매우 유사하게 하늘과 땅과 물, 큰 광명체, 낮을 주관하는 해, 밤을 주관하는 달과 별을 차례로 말합니다. 148은 해와 달과 밝은 별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AC.31은 이 자리에서 해와 달과 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더 확장하기보다, 이러한 말씀 전체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뜻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다음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앞의 선지서와 시편에서 확인한 광명체의 의미가 예배의 표상 안에서도 나타났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계속 켜 두도록 명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불과 기름과 저녁과 아침의 모든 세부 상응을 지금 미리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그 상세한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밝히겠다고 유보합니다.

 

다만 AC.31은 그 등불의 가장 중심적인 의미만큼은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0의 마지막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이, 이제 주님께서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신다는 표현으로 다시 확인됩니다.

 

따라서 AC.31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외적 지식보다 무조건 내적인 감정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기억 지식은 제자리에 있을 때 유용합니다. 다만 그것들이 가장 높은 원리가 되어 사랑과 신앙을 지배하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영적 광명체는 어두워집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사랑과 신앙을 다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실 때,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에게 빛이 임하고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인용은 흩어진 성경 증거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32, 13, 2는 사랑과 신앙의 소멸을 어두워진 광명체로 보여 주고, 60은 주님의 오심과 거듭남을 다시 밝아진 광명체로 보여 주며, 시편들은 동일한 광명체의 언어를 창조와 찬양 안에서 확인하고, 27의 등불은 그 사랑과 신앙을 실제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하늘의 천체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빛이 어떻게 살아나고 또 어떻게 가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언어가 됩니다. (AC.31 해설)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 심화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된다는 것은?’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바로와 애굽에 관하여 ‘단지 감각과 단지 기억 지식의 원리’(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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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0 교회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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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심화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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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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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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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14-17)

 

AC.30

광명체들(great luminaries)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great luminaries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까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까지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luminaries; love being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set in the expanse of heaven,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나타나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단순히 해와 달의 상징으로 바로 풀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무엇이며, 특히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출발점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확신이나 교리 지식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를 인용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0에 인용된 직접적인 이유는 먼저 달로 상징되는 신앙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생명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개역개정의 후반부가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라고 번역되어 있어 신앙과 삶의 순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하게 하지만, AC.30은 여기서 그 어휘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초점은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처음은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fides scientifica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기억하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의 살아 있는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입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배우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입니다. 이 마지막 신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입니다.

 

이 세 단계는 앞에서 지나온 창조의 날들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이 창1:3-13생명 없는 것들로 표상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생명 있는 것들로 표상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 없는이라는 말은 기억 지식이나 이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AC.29에서 열매까지 나타났는데도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었던 이유도 이 문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AC.30에서 처음으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함께 등장하고, 이것들이 광명체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광명체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시키지 않고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스스로 생명을 가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두 광명체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라틴어 표현에서도 읽어 냅니다. 그는 sit luminaria라는 단수 표현과 sint luminaria라는 복수 표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사랑과 신앙이 둘로 분리된 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와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자연계의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속 사람 안의 사랑은 열과 같고, 신앙은 빛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둘의 근원과 수용에 있습니다. 광명체가 하늘의 궁창에 놓인다는 것은 속 사람 안에 놓인다는 뜻이며,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놓입니다. 즉 사랑은 의지와 연결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의 근원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빛이 물체에 비쳐 그 안에서 보이더라도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처럼, 인간 안에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그릇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이 오직 주님의 자비라는 AC.30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넷째 날의 전환점은 단순히 신앙을 많이 아는 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던 신앙이 이해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조차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 근원이 주님임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앞의 날들에서 준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 사랑이라는 큰 광명체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작은 광명체의 빛 아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이 넷째 날의 광명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AC.30 해설)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 심화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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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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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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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저작, 예컨대 ‘Arcana Coelestia’나 ‘Heaven and Hell’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단어 선택이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homo’를 쓰고, 어떤 곳에서는 ‘vir’를 쓰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homo’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인간’, ‘사람’, ‘인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자도 포함하는 ‘human being’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homo’는 인간 종 전체를 가리키거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omo’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며,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homo’를 씁니다. 예컨대 인간이 ‘의지와 이해’를 가진 존재라는 점, 또는 인간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할 때 ‘homo’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일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vir’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인 남자’, ‘남성’, 또는 ‘용기 있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라틴어에서 ‘vir’는 단순히 남성이라는 뜻뿐 아니라 ‘용기’, ‘덕성’, ‘남자다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vir’에서 ‘virtus’(덕, 용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 라틴어에서도 ‘vir’는 보통 ‘남자’, ‘남편’, 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vir’는 종종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 또는 ‘특정한 인격적 주체’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omo’는 인간 전체, 곧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homo’는 남녀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며,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속한 인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vir’는 보통 ‘이해 또는 진리의 측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남자를 ‘이해 또는 진리’, 여자를 ‘의지 또는 선’과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맥락에서 ‘vir’는 진리를 담당하는 측면, 즉 이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1:26의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사람’은 라틴어로 ‘homo’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2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등장할 때는 ‘vir’와 ‘mulier’가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니라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vir’는 종종 ‘진리의 사람’, ‘이해의 사람’을 의미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진정한 인간’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을 사랑할 때 비로소 ‘homo’가 된다고 합니다. 즉 ‘homo’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to become a man’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homo’는 ‘인간 일반’, ‘인류’, ‘남녀를 포함한 사람’, 더 깊게는 ‘주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vir’는 ‘남성’, ‘남편’, 또는 상징적으로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 ‘homo’가 나오고 어떤 구절에서 ‘vir’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구절이 ‘인간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남성적 또는 진리의 측면’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단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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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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