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속뜻,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한 그는 죽은 상태이지만, ‘아닙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고백하면서 그는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전자는 식물, 후자는 동물로 표현되었습니다. 수중 생물(the creeping thing)로 표현된 겉 사람의 기억-지식, 새(fowl)로 표현된 속 사람의 합리와 지성 모두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 생물이 됩니다. ‘생물’(the living soul)은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인데요,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 오직 주님만이 선하시며, 주님만이 선의 근원이십니다. 달이 해의 빛을 받아 반사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주님의 선을 덧입을 수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 그만큼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로부터 정말 철저히 분리된 존재입니다.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 탤런트 김혜자 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듭남 스케줄 전체를 우리에게 맞추십니다. 우리더러 주님의 스케줄에 맞추라 하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주님은 과연 진정한 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the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못 움직이는 것으로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후자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이나 ‘물고기들’(fishes)이 기억-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새로운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모두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납니다 ^^

 

[3] ‘새’(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에서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로운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새’(bird)도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to make a new covenant)하시기 때문입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AC.41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human and living)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alive)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the 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the 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e 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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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절,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속뜻, 주님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큰 광명체를 두시고, 선과 악, 빛과 어둠을 환히 비추게 하셨습니다. 다시 저녁 상태, 아침 상태가 되면서 더욱 우상향, 네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습니다.

 

 

AC.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의미하며, 그래서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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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06(D1)-주일예배(2498, 눅12,8-12),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pdf
0.37MB

https://youtu.be/s-FaLBfUOmw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의 속뜻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눅12:8-12)

 

 

우리나라에서 시민운동은 대략 1980년대에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졌고, 당시 운동권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시민단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적인 시민운동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민운동과 생계 활동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진 후, 결국 정계에 진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 윤석열 정부가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는 우리나라 시민운동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다 돈과 관련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쩐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민운동의 태생적 역할은 정부나 지자체에 대한 비판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두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을 겨누는 진리 안에 반드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무자비한 칼과 같아서 세상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영적 시민운동가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요, 오늘날에는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 하셨는데, 여기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만 가지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요, 그것이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 해설’ 794번 글 3번 항은,

 

사람은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 마음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영적 마음은 속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고,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다. 속 사람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겉 사람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이고, 속 사람과 무관하게 겉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이다. (AE.794:3)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일이든지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진실하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속 사람이 아닌, 겉 사람으로부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에 대한 시인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시인하실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진실합니다. 그러나 부인하신다면 그 일은 언제나 거짓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주님을 ‘인자’(人子, Son of Man, 사람의 아들)라고 부를 때, 인자는 주님의 본질인 선과 진리 중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인자는 진리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은 선의 측면에서 주님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천국의 천사들이나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의미를 얼마든지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못 해석하더라도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하십니다. ‘성령’은 천국 천사들의 진리인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inner meaning)를 뜻합니다. 성령이 말씀의 내적 의미를 뜻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신 것으로,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 또는 받으라 하신 것은 ‘감추어졌던 내적 진리를 이제 드러내 보여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임의로 왜곡함으로써 내적 진리까지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모든 구절 안에는 선과 진리 간 결혼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 또는 진리를 임의로 없애거나 분리하는 것은 선과 진리의 결혼이라는 말씀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 778번 글 4번 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선과 진정한 진리는 말씀의 영적 의미 안에 들어있다. 그것들이 말씀의 자연적 의미 안에 있을 때는 모두 옷을 입고 있고, 몇 군데만 옷을 입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우리는 외견상의 선이요 진리라고 부른다. (AE.778.4)

 

이 말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의 일부만 볼 수 있고, 전체는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안에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가 대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속에 진정한 선과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어느 곳일까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9절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라든가,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것이 믿음과 삶의 행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오신 주님이 곧 진리이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문자적인 뜻만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서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해석할 때,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잘못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문자적인 진리와 내적 진리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문자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적 진리 또는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내적 진리를 이단의 진리라고 비난합니다. 거짓 진리를 진리로 굳게 믿는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정을 아시고, 11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회당은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주님 당시 회당은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을 조정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이나 권세 있는 자에게 끌려가는 것은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으로 무장한 거짓 교리의 신봉자들과 교리적 논쟁을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때 그 순간 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끔 내적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문자적인 진리를 앞세워 공격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의 현란한 지식과 화술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두려움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현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든 얻지 못하든 우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만족한다. 부를 얻거나 명예를 얻는다고 다른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으며, 비천한 상황이 와도 낙담하거나 기죽지 않는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원한 행복의 상태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다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땅한 말이 떠오르면 말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면 됩니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주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날 먹을 것만, 즉 일용할 양식만 거두고, 내일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속뜻으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입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판을 치는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의 속 사람의 소리,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겨누는 진리의 칼로 자신의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겉 사람으로부터 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실합니다. 주님은 또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말씀을 안다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그들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넘어서 내적 진리까지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진리를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체험’ 2706번 글을 보면, ‘천사들은 내적 진리에 반하는 욕망의 습관을 끊지 못하는 것도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새 교회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더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적 진리에 대해 비교적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깊이, 그리고 많이 아는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적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고, 모든 일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에게 닥치는 일들이 영원한 행복을 위한 주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우쭐대거나 나쁜 일이 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담담하게 견딘다면 결국 평화와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주님을 시인하고 성령을 거역하지 않으며,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20-05-24(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0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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