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7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38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눅21:29-38)
마태복음 21장 18, 1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8, 19)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 위에 세워진 자연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지식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이고요,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럼에도 말씀에 따른 삶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말세에 사랑, 즉 삶이 없는 교회는 결국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걸 뜻합니다. 말씀에는 주님의 저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은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자신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주님 당시 유대교회가 그렇게 무너졌고, 그 후에 세워질 교회들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는 걸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예언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들이 무너지고, 새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오늘 본문 29절로 3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여기 무화과나무는 낡은 교회를 대신해 주님께서 새로 세우시는 새 교회를 뜻합니다. 새 교회는 말씀의 내적 의미 위에 세워진 내적인 교회, 즉 영적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교회인 새 교회를 왜 자연적 교회를 표상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했을까요?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는 진리만 있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교회는 본래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그 진리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의 새 교회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삶에 있어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각박할 때가 많습니다. 따지기를 좋아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자주 다툽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 이스마엘처럼 말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스마엘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처음 생기는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에서 비롯한 합리성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합리성이며, 들나귀처럼 다투기를 좋아하는 합리성입니다. 그것이 새 교회의 처음 상태입니다.
※ 실제로 한국 새 교회의 경우(대략 한 8, 90년?)도 그렇고, 미국 새 교회의 경우(대략 한 200년?)도 그렇고,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런 내부 다툼과 그로 인한 혼란의 시간들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따로 무슨 여러 분파를 만들어 갈라져 나가지는 않은 걸 보면 개신교와는 좀 다르구나 싶습니다. 새 교회 신앙은, 구원론 하나만 가지고 비교해 볼 때,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는 같이 간다는 것, 즉 신앙 고백이 그럴듯해도 삶이 안 받쳐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신앙인 반면, 개신교 신앙은, 물론 신앙 고백과 삶이 같이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러나 ‘오직 믿음’이라는 신앙 고백만 분명하면 일단 구원은 받는다는, 사람이 무엇이며, 영이라고도 하는 속 사람에 관한 바른 지식이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상한 신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화과나무에 싹이 난다는 것은 처음 새 교회에 주어지는 내적 진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애(charity), 곧 체어리티의 신앙을 뜻합니다. 이전 교회의 신앙이 믿음만의 신앙이었다면, 새 교회의 신앙은 체어리티의 신앙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통해 새 교회인들은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체어리티라는 선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깝다고 했습니다. 여름은 선한 삶이라는 신앙의 열매를 맺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말세에 낡은 교회의 심판과 새 교회의 출현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교회에 대한 심판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새 교회가 나타나기도 전에 인류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것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심장이 병들었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바로 심장부터 떼어내 버리면, 그 사람은 수습할 겨를도 없이 사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편으로 새 교회라는 새로운 심장을 준비하시고, 한편으로는 병든 심장에 손을 대십니다. 그렇게 해서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낡은 교회에 남아서 새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 이와 관련, 제가 고민한 아래 제 블로그 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사람들에 관한 네 가지 경우 (2024/8/22)
제가 위와 같은 글을 준비한 이유는 제 오랜 개신교 경험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개신교 교회를 다니시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분명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는 분들도 다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금 하신 위 말씀 중, ‘그렇게 해서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렇지 않고 낡은 교회에 남아서 새 교회를 배척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라는 위 말씀은 개신교회를 다니신다고 무조건 저렇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가운데 아주 악한 사람들, 즉 삶은 나 몰라라 하시면서 ‘오직 믿음’만 주장, 그걸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시는 분들과, 교리도 대충, 체어리티도 대충, 그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이라는 걸 하는 이유가 그래도 복은 받고 싶고, 어두운 기운들은 또 피하고 싶은, 거의 기복 신앙과 다름없는, 이렇게 두 경우 다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분들한테만 해당되는 말씀이지 싶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무자비하게 지옥으로 던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를 밝히 열어 보여 주시고, 그 진리를 선택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 당시 유대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도 어쩌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임재와 심판에 대해 ‘계시록 해설’ 414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악한 사람에게는 사망이 있고, 선한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 (AE.414)
그러니까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에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인류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심판의 날에 대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까? 34절, 35절입니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심판의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며, 그날에는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가 덫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존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새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모두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말씀에서 방탕하고 술에 취하는 것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욕망을 좇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보다는 세상의 악과 거짓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본래 말씀에서 마시거나 먹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으로는 의지라는 생명을 만들고, 진리를 가지고는 이성이라는 생명을 만듭니다. 말세에는 주님이 주신 것이 아닌, 세상 것에 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말하고, 진실을 거짓으로 몰아 공격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있는 악으로부터 오로지 거짓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방탕하고 술취한 것이며, 지옥이 놓은 덫에 걸려든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자아의 욕망과 세상 욕망이라는 덫에 걸리면 악의 유혹을 거절할 힘을 잃게 되고, 나중에는 악과 거짓을 즐기게 됩니다. 계시록 6장 16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심판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계6:16)
여기서 산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악을 뜻하고, 바위는 그런 악에서 비롯한 거짓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악한 사람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두려워하고, 오히려 자아의 악과 거짓에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말씀에서는 주님을 인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인자라고 할 때는 거룩한 인간이신 주님 안에 있는 진리의 속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주님 안에 있는 선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시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선으로서의 주님은 대적할 수 없지만, 진리로서의 주님은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는 것은, 심판 때에 진리와 함께 있음에 기뻐하고 평안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늘 기도하고 깨어 있었던 사람들만이 느끼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기도하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기도하는 것은 외적으로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경건한 말과 행동, 기도와 예배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에 비해 깨어 있는 것은 내적으로 경건한 삶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주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것이 신앙인의 정신적 활동이라면 기도는 육신의 활동이며 둘은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혼탁하고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에 관한 염려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만 바라보다 보면 금방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일을 할 때도 언제나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볼 때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의 삶은 신앙인들에게 어떤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다고 합니다. 낮은 진리의 지각이 밝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의 외적인 삶은 그때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면에 밤은 진리의 지각이 흐릿할 때입니다. 그때는 말씀을 읽더라도 깨달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럴 때 말을 많이 하거나 왕성한 활동을 하면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조용히 주님께 마음을 모으고 주님의 사랑으로 내면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낮이 되었을 때 더욱 밝은 진리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이 외적인 경건의 상태이며 기도하시는 상태라면, 감람산에서 쉬시는 것은 내적인 경건의 상태요 깨어 있음의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당신의 그런 삶을 따르기를 원하시고,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이 많고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주시고 삶으로 보여 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둠이 걷히고 혼란한 일들도 정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3:2)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사람들에 관한 네 가지 경우
아래 며칠 전 올린 글이 다소 산만해 보여 조금 정돈해 보았습니다.
전자, 그러니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 줄여서 ‘교리’라 하겠습니다. 이것과 후자, 곧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실천, 역시 줄여서 ‘체어리티’라 하겠습니다. 이 각각에 대한 진심 여부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교리도 진심, 체어리티도 진심
2. 교리엔 진심, 체어리티는 별로
3. 교리엔 별로, 체어리티는 진심
4. 교리도 별로, 체어리티도 별로
먼저 1번, ‘교리도 진심, 체어리티도 진심’의 경우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우가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그러니까 겉보기엔 가능합니다. 제가 이런 경우들을 목격했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겉보기’라 한 것은, 이분들이 ‘체어리티’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잘 모르시고 오해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나오며, 주님에 대한 사랑과 애정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분들은 “나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애정도 있다. 분명히 느낀다.” 하시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주님을 사랑하면서 이 ‘오직 믿음’의 교리에 진심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의 교리는 교리화만 지난 16세기에 루터가 했을 뿐, 사실 그 기원은 아득히 저 멀리 창세기 ‘가인’이라는 사람들한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 이 ‘오직 믿음’의 교리와 체어리티가 절대 어울릴 수 없다, 함께할 수 없다 하는 이유는, 첫째는 이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선과 진리를, 체어리티와 신앙을 따로 떼어놓겠다는 것이며, 그렇게 해도 구원을 받는다, 천국을 갈 수 있다 가르치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사람의 내면이 어떤 건지를 잘 모르는 무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엇이며, 영이라고도 하는 속 사람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만든 교리여서 저런 그럴듯하지만 매우 이상한 교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 루터, 칼빈 등이 ‘말씀’(The Word)인 줄 알고 사용했던 사도들의 서신서들은 사실은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안에 하늘의 비밀을 담아놓으신 성경만이 ‘말씀’이며, 천사들에게는 이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 위 ‘가인이라는 사람들’이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에 관하여는 아래 링크부터 시작, 창4 관련 링크들을 주욱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체어리티의 참, 거짓에 대한 구분은 그 숨은 동기가 무엇인가를 살피면 됩니다. 즉 이웃을 향한 그 체어리티를 행하는 동기가 자기 사랑이면 거짓, 주님 사랑이면 참인 것이지요. 이 ‘체어리티’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오직 믿음’의 교리가 왜 오류인지에 대한, 더욱 정돈된 글들을 준비,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정돈만 하겠습니다.
2번,‘교리엔 진심, 체어리티는 별로’의 경우입니다. 아마 이 경우가 거의 최악일 것 같은데요, 이분들이 곧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며,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찾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개신교인들 중에는 ‘나는 설마 아니겠지...’ 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데요, 우리는 자기 마음속 숨은 동기를 잘 모르거나 속는 경우가 의외로 참 많음을 볼 때, 그건 정말 모르는 겁니다. 참으로 주님이 빛을 비추어 주셔야 우리 눈이 밝아짐을 고백합니다.
참고로, 저는 평소 기독교인과 개신교인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는데요, 전자는 후자의 상위(?) 개념으로, 정교회, 카톨릭, 개신교 등, 그리고 기타 예수 그리스도에 그 뿌리를 둔 모든 기독 신앙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갈래입니다.
그러니까 이 2번의 경우가 제가 며칠 전 올린 글에서 ‘제발 이런 사람은 되지 마세요!’ 거듭거듭 극구 말린 경우가 되겠습니다.
세 번째인 3번,‘교리엔 별로, 체어리티는 진심’의 경우입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 당시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 생, 1772 졸한 사람인데,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는 거의 미지의 대륙이었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오랜 기간 영계를 방문, 그곳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천국에 참 많이 와 있더랍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요? 아프리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지금도 모든 대륙, 수많은 인종과 종교를 망라, 그 가운데 체어리티의 삶을 살며,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깃든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을 가까이한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올라가고 있겠지요.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의 신성의 나라로, 생전에 자기 안에, 그러니까 자기 속 사람 안에 이 주님의 신성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주님도 그를 천국에 머무르게 하실 방법이 없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성은 체어리티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데요, 아래 요한복음 말씀에서 확인하세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가까이하고, 그 계명대로 사는 것, 이것이 체어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4번,‘교리도 별로, 체어리티도 별로’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역시 거의 끝에서 두 번째를 달리지 싶은데요, 이런 분들은 교회를 왜다니시는 걸까 싶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고, 그냥 복과 구원만 받으며, 살면서 여러 악한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고자 일종의 보험으로 다니시는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분들 역시 지옥 열차표를 예약하신 분들인데요, 왜냐하면 이런 분들의 속 사람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 정체는 자기 사랑의 사람들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는 또 다녀야 하는, 그래서 비록 몸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눈은 세상을 향하고 있는, 그래서 세상 사랑의 사람들이기도 한, 참 안타까운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위 1번, 3번의 경우는 천국 가는 황폐화 과정을 밟되 1번은 지독하게, 3번은 가볍게 밟습니다. 2번, 4번 역시 이 과정을 밟지만, 이분들의 경우는 지옥에 들어가기 위해 밟는 경우인데, 그래서 안타깝다 한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니시는 교회를 그만 두시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우시면, 일단 계속은 다니시되, 1번, 3번은 그나마 괜찮지만,2번, 4번은 반드시 피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건, 위 네 가지 경우에는 없는데요, 참된 교리로 올바른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하나 됨을 가르치는 교리이며, 어떤 신앙이 구원의 신앙이 되려면, 신앙 고백과 함께 체어리티의 삶이 받쳐주는, 그런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래 창4, ‘아벨’이라 하던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부디 이 권면을 마음으로 받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는 모든 분께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빛을 비추심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선량하지만, ‘오직 믿음’(Sola Fide),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사후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접한 후, 그 전반적인 걸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부터, 그러니까 지난 한 4, 5년 동안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그래서 늘 개운치가 않았던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기록은, 어떻게 보면 결국 이 ‘오직 믿음’의 교리로 사는 삶에 대한 대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며, 저의 오랜, 지난날 개신교인으로서의 삶 동안 혈육과 친구, 지인들의 거의 백 프로가 모두 위 제목에 해당하는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리신 모든 계시의 결론은,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 가는 게 아닌, 각 사람의 내면, 곧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여야 갈 수 있는,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은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을 삶과 생활 가운데 실천하기 때문에, 당연히 천국에 합당한 속 사람의 상태가 되며, 그러므로 그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현 개신교, 그리고 기독교인 중에서 비록 ‘오직 믿음’의 교리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겉보기에 삶과 생활, 일상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같은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의 선한 삶으로만 보면 그가 스베덴보리를 통한 주님의 새로운 계시의 사람인지, 아니면 ‘오직 믿음’의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후덕하고 선량하다가도, 이 ‘오직 믿음’ 교리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태도가 돌변, 표정이 굳어지는 그런 분들이라면 말입니다.
저는 지난 수년간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및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마지막 글 번호는 10837)를 가급적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최근 이에 대한 무슨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어 이렇게 나름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실마리’라 함은 다름 아닌, ‘황폐함의 과정’ 또는 ‘황폐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영어로는 Vastations라는 과정을 말하며, 다음은 이와 관련된 요약들과 해당 글 번호들입니다. 해당 글은 위 ‘천계비의’, 즉 라틴어 Arcana Coelestia의 글 번호를 말합니다. 혹시 아래 해당 번호의 글들 또한 읽어 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글을 열어 거기서 해당 pdf들을 다운받으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pdf들은 영어입니다.
내세에는 황폐함의 과정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생을 마감하고 내세에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것이다 (AC.698, 7122, 7474, 9763).Vastations are effected in the other life, that is, those that pass into the other life from the world are vastated (n. 698, 7122, 7474, 9763).
선한 사람들은 거짓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나고, 반면 악인들은 진리에 대해 황폐화가 일어난다 (AC.7474, 7541, 7542).The well-disposed are vastated in respect to falsities, while the evil are vastated in respect to truths (n. 7474, 7541, 7542).
선한 사람들이 겪는 황폐함의 과정은 지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과정인데, 이것들은 세상에 살 동안 함께했던 것들이다 (AC.7186, 9763).The well-disposed undergo vastations that they also may be divested of what pertains to the earth and the world, which they had contracted while living in the world (n. 7186, 9763).
또한 악과 거짓의 제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님한테서 나오는 천국 선과 진리의 유입을 위한 여지, 그리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AC.7122, 9330).Also that evils and falsities may be removed, and thus there may be room for the influx of goods and truths out of heaven from the Lord, and ability to accept these (n. 7122, 9330).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은 그런 것들이 제거될 때까지는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천국에 있는 것들을 방해하고, 그들과 조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AC.6928, 7122, 7186, 7541, 7542, 9763).Elevation into heaven is impossible until such things have been removed, because they obstruct heavenly things and are not in harmony with them (n. 6928, 7122, 7186, 7541, 7542, 9763).
천국으로 올려지는 사람들은 그래서 미리 준비된다 (AC.4728, 7090).Those who are to be raised up into heaven are thus prepared for it (n. 4728, 7090).
준비도 되기 전, 천국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AC.537, 538).It is dangerous to come into heaven before being prepared (n. 537, 538).
황폐함의 과정을 마치고,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의 내적 밝아짐과 기쁨의 상태,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는 리셉션에 관하여 (AC.2699, 2701, 2704) The state of enlightenment and the joy of those who come out of vastation and are raised up into heaven, and their reception there (n. 2699, 2701, 2704).
이들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지역을 가리켜 낮은 땅이라고 한다 (AC.4728, 7090).The region where those vastations are effected is called the lower earth (n. 4728, 7090).
그 지역은 지옥들로 빙 둘러싸인 발바닥 아래이다. 그곳에 대한 설명(AC.4940–4951, 7090)과 그곳을 경험한 이야기(AC.699) That region is under the soles of the feet surrounded by the hells; its nature described (n. 4940–4951, 7090); from experience (n. 699).
그 무엇보다 훨씬 더 감염되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 지옥들이란 무엇인가 (AC.7317, 7502, 7545) What the hells are which more than others infest and vastate (n. 7317, 7502, 7545).
선한 사람들을 감염시켜 황폐하게 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피하며, 그들로부터 돌아선다 (AC.7768).Those that have infested and vastated the well-disposed are afterwards afraid of them, shun them, and turn away from them (n. 7768).
이들 감염과 황폐함의 과정은 악과 거짓의, 들러붙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며, 그들의 질과 양에 따라 계속된다 (AC.1106–1113).These infestations and vastations are effected in different ways in accordance with the adhesion of evils and falsities, and they continue in accordance with their quality and quantity (n. 1106–1113).
일부는 이 황폐함의 과정을 진심으로 기꺼이 원한다 (AC.1107).Some are quite willing to be vastated (n. 1107).
일부는 두려워하면서 이 과정을 밟는다 (AC.4942).Some are vastated by fears (n. 4942).
일부는 세상에서 행한 악과 세상에서 한 거짓된 생각들로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이 악과 거짓 때문에 근심하고 양심의 큰 고통을 겪는다 (AC.1106).Some by being infested with the evils they have done in the world, and with the falsities they have thought in the world, from which they have anxieties and pangs of conscience (n. 1106).
일부는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영적 감금 상태에 있는, 그런 식으로 이 과정을 지나는데, 이 상태는 진리에 관한 무지와 진리를 차단하는 상태다 (AC.1109, 2694).Some by spiritual captivity, which is ignorance of truth and interception of truth, combined with a longing to know truths (n. 1109, 2694).
일부는 잠드는 식으로, 일부는 깨어 있음과 잠이 든, 그 중간 상태에 있는 식으로 (AC.1108) Some by sleep; some by a middle state between wakefulness and sleep (n. 1108).
자기가 한 일을 공으로 여긴 사람들한테는 자신들이 마치 장작을 패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AC.1110).Those that have placed merit in works seem to themselves to be cutting wood (n. 1110).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엄청한 다양함으로 (AC.699) Others in other ways, with great variety (n. 699).
그러니까 간단히(?) 정리하면,
1. 이 황폐함의 과정은 천국 갈 사람한테도, 지옥 갈 사람한테도 공평하게 일어난다. 다만 전자한테는 악과 거짓 등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후자한테는 선과 진리 등 지옥에는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을 떼어내는 과정이다. 참고로, 말이 떼어낸다지 실제로는 생살을 찢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2. 이 과정은 그 확신한 정도에 따라 매우 혹독, 오래 걸리거나 그냥 슬쩍 금방 지나가기도 한다. 즉 가령,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녔어도 그것보다는 일상 가운데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힘쓴 사람은 이 과정이 가볍게 지나간다. 그에게는 떼어낼 게 별로 없어서다. 만일 그가 이런 교회가 아닌, 신앙과 체어리티의 일치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녔더라면, 이 떼어냄의 과정은 그야말로 훨씬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전에 어쩔 수 없이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게 되어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그런 교리보다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참된 신앙으로 이웃 사랑에 힘쓰며 산 사람은 의도치 않게 붙은 이런 교리적 오류들만 좀 떼어내는 약간의 과정을 밟은 후, 천국으로 올라간다.
3. 당연한 결론이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를 크게 확신, 비록 목숨을 걸었어도 실제 그의 삶이 천국에 부합하지 않으면, 즉 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면 그는 천국에 올라갈 수 없다. 그리고 역시 당연한 결론인데,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는 건 그가 겉 보기에 무슨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았든 그 숨은 동기, 심지어 본인조차 몰랐던 그 진짜 동기가 바로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에서 마틴 루터를 만나 그와 오랜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특히 이 주제, ‘오직 믿음’의 교리와 관련, 왜 이런 교리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자기가 이 아이디어를 교리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자 천사들이 그런 짓을 하지 말라 계속 권했지만, 그 당시 이런 교리 없이는 카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가 없어서 부득이 계속 강행하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루터 관련,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4. 참고로, 위 ‘낮은 땅’이라는, 이 황폐함의 과정이 진행되는 곳은 지옥에 인접한 곳으로, 특히 ‘발바닥 아래’ 같은 표현은 천국 전체가 사람 모습이라는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8장, ‘천국 전체는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All Heaven in the Aggregate Reflects a Single Man)와 57장, ‘주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신다. 영이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The Lord Casts No One into Hell; This Is Done by the Spirit)에 관한 아래 스캔들을 읽어 보라.
등입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태생적으로 온통 이런 환경이었으면, 무슨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너무 교리, 교리 하지 않으시는 것이 나중을 생각하면 보다 나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교리보다는 실천에 더 집중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결론입니다. 저는 사람의 사후, 그가 선한 삶을 살았으면, 즉 선과 사랑, 애정과 신앙의 삶을 살았으면, 비록 그에게 생전에 의도치 않게 덕지덕지 붙어 떼어내야 할 신앙적 오류들이 좀 있더라도 그런 걸 끝까지 떼어내시고, 순도 백 프로의 사람으로 만들어 천국에 올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는, 이제는 제 주변, 제 혈육이 비록 이 새로운 계시에 대해 시큰둥해하거나 적의를 드러내며 저를 멀리한다 하여도 전처럼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가 사후엔 좀 더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 안타깝지만, 그러나 그가 선한 삶, 곧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았으면 그는 결국천국으로 올려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오직 믿음’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힘써 고백하더라도 실제 그 삶이, 그리고 그 하는 모든 행위의 숨은 동기가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이었던 사람들은 그가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한 신앙인이었어도 사후 그는 천국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들의 나라가 아닌,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60여 년, 저 역시 이 ‘오직 믿음’의 신앙생활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므로 저희 부모님을 비롯, 장인, 장모 네 분 모두 천국 가셨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네 분 모두 배움은 조금 부족하셨어도 이 땅에서 정말 선한 삶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늘 이글이 유익, 도움 되셨기를 바라며, 그 결과 주변 나와 생각이 다른 신앙의 지인들이 혹 계시더라도 전과 달리 넉넉한 심령, 후덕하심과 여유로우심으로 대하실 수 있기를 권합니다. 타교단과 교파, 심지어는 타종교에 속한 분들한테까지도 말입니다. 사람의 사후, 주님은 오직 그의 안에 천국에 합당한 주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는가만 보십니다. 타종교, 즉 교회 밖 사람들에 관하여는 아래 스캔을 읽어보세요. 말씀(The Word)이 없는 교회 밖 세상 나라와 종족들을 포함한, 주님의 공정하신 구원 시스템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