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4–43)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많은 사람이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교회가 주님에게서 멀어질 때는 언제나 말씀을 왜곡했고, 그렇게 해서 말씀의 내적인 것, 곧 내용물인 사랑은 없애고, 외적인 것, 곧 그릇인 신앙만 남겨 놓았습니다. 아담의 태고교회가 그랬고, 노아의 고대교회와 모세의 유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오셨을 때, 유대교회 사람들은 외적으로만 경건할 뿐 내적으로는 아주 부패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5)라 하시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후반,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진리를 왜곡하는 걸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황이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23, 24절입니다.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19:23, 24)
여기 겉옷은 나눠 가지고,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갖기로 했다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의 속뜻이 진리임을 생각하면, 여기 주님의 겉옷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속옷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감춰진 내적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겉옷만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가지는 건, 마지막 때 교회들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 훼손하고, 내적 의미는 훼손하지 못하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의 내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허락되지 않아 모르는 걸 훼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성서 시대 ‘옷’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면,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이때는 샌들, 터번, 겉옷, 허리띠 및 속옷을 함께 ‘옷’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겉옷’은 여러 히브리 표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입는 옷’이 아니라 ‘덮는 옷’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룻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등에 나오는 옷에 대한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이 룻이 말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의 의미가 현대 유대인 예배에도 그대로 이어져 예배 중 겉옷을 펼쳐서 가족을 보호하는 의미의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 중, 하잔이라 하는 찬양 인도자가 민6:24-26, 제사장의 축복을 낭송하면, 각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어깨에 걸친 기도 숄, 즉 탈릿을 펼치며, 이때 아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 가장의 보호 아래 들어간다는 그런 순서가 있습니다.
※ 여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그런데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seamless)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화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고대인들의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옷’에 대한 개념으로 인해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사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생활풍습 이야기’)
그 밖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군인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렸다고 했는데, 그것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래 포도주는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신 포도주는 말씀을 왜곡하고 조작해 만든 거짓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이 주신 진리를 실천, 진실한 삶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교회들은 말씀 안에 담긴 신앙과 사랑, 진리와 선을 서로 분리,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그것이 이들이 주님께 신 포도주를 드리는 것입니다.
35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주님이 고초를 당하시는 동안,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과 군인들은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백성과 관리, 군인은 각각 어떤 사람들일까요? 백성(people)은 영적 의미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을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요? 대중은 보통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리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를 이끄는 진리, 또는 질서가 와해 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구성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자신의 안전만 생각합니다. 바로 그들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구경만 하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그러고 있을 때, 관리들과 군인들은 주님을 비웃고 희롱했습니다. 여기서 관리(ruler)는 교회의 지도자인 성직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군인은 교리에 밝은 사람, 이를테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입니다. 교리에 밝은 사람, 또는 추상적인 의미로 교리를 군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교회가 진리 아닌 것과 맞서 싸울 때 교리를 내세워 싸우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의 마지막 때 교회가 주님과 사도들을 핍박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핍박은 여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라고 비웃고 희롱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우리에 대한, 말씀을 겉뜻으로만 믿어 온 기존 교회들의 태도가 저런 것입니다.
군중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가운데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가 붙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에서는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19:19-20)
유대인의 왕이라고 할 때, 유대는 선을 뜻하고, 왕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은 주님은 선에서 비롯한 진리이며, 그러므로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진리는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선이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곧 신적 진리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 로마, 즉 라틴어로 패에 적어 십자가 위에 붙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는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성(聖) 문서에 특별한 설명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그 내적 의미를 통해 신적 진리이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렇게 해서 영화롭게 되신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말씀의 내적 의미는 라틴어로 처음 기록된 후 나중에 다른 여러 언어로 옮겨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관리들 말고도 주님을 비웃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 중 한 사람인데요, 그에 대해 39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중 하나는 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조롱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로하시고, 함께 우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데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모두가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그 많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 오늘 설교는 전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전부 포함해서 결국은 주님을 배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저는 이 부분에서 좀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영육 간 치유하시는 능력이 흘러 들어가 병 고침의 효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고침 받은 사람의 내면이 어떠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즉 나중에 배신할, 그런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육안으로 보고 구경했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고침 받은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은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보고요, 그러므로 유대인 전체, 유대교회 전체를 거론할 때, 가급적 이들은 빼고 언급해야 하지 않나 저는 생각합니다.
새 교회 가르침 ‘참된 기독교’ 539번은 신앙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지워진 두 가지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자기 자신을 검토한 다음 (주님께) 간구하고 고백하는 일이다. 간구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고, 자기가 뉘우치는 악에 대항할 힘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과 애정을 구하는 것이다.... 고백은 자신의 악을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기가 비천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539, 이순철 역) There are two duties incumbent on man, to be done after examination, namely, supplication and confession. The supplication should be that the Lord may be merciful, that he may give power to resist the evils that have been repented of, and that he will provide inclination and affection for doing good,
Since apart from the Lord man can do nothing (John 15:5).
The confession will be that he sees, recognizes, and acknowledges his evils, and finds himself to be a miserable sinner. (TCR.539)
신앙인이라면 늘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살피면서 잘못이 있으면 반성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그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끝내는 주님을 대적하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반성이나 회개 같은 신앙의 습관이 나중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보이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 거듭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22:31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또 눅16:22절 이하에서도 거지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사후에 영으로 부활하는 것과 영생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의 왼편에 있던 행악자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을 조롱한 것은 신앙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하게 진리를 대적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반면에 주님의 오른편에 있던 행악자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의 간구와 고백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른편에 있었던 행악자처럼 우리도 진실한 간구와 고백으로 매일 살아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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