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끌린 뒤, 뜻밖에 천국으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영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는 이제서야 비로소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천국의 기쁨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깨달았으며, 이제는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in his inmost being), 육체의 삶에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어떤 쾌락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육체적 쾌락을 더럽다고 불렀습니다. Certain spirits who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joy were unexpectedly taken up into heaven after they had been brought into such a state as to render this possible, that is to say a state in which their bodily things and fanciful notions were lulled into quiescence. From there I heard one saying to me that now for the first time he felt how great is the joy in heaven, and that he had been very greatly deceived in having a different idea of it, but that now he perceived in his inmost being a joy immeasurably greater than he had ever felt in any bodily pleasure such as men are delighted with in the life of the body, and which he called foul.

 

 

해설

 

이 글은 앞선 AC.540의 설명을 ‘결론처럼 확증해 주는 실제 증언’입니다. 앞에서는 천국의 기쁨이 단계적으로 가르쳐진다고 설명되었고, 여기서는 그 과정을 실제로 통과한 한 영의 고백이 제시됩니다. 이 고백은 설명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주목할 점은, 이 영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기 전에 어떤 상태에 놓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공상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끌립니다. 이는 곧 감각 중심의 욕망, 상상에 의존한 기대, 자기 방식의 천국 그림이 모두 가라앉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 상태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천국이 열려 있어도 사람은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천국으로 ‘노력해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뜻밖에’ 들어 올려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천국의 접근이 인간의 계산이나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상태가 맞을 때 주어지는 은총’임을 보여 줍니다. 준비가 되었을 때, 길은 열립니다.

 

그가 처음으로 말한 고백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뜻입니다. 그는 천국을 몰랐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상상이 얼마나 쉽게 참된 영적 실재를 왜곡하는지를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이 영이 느낀 기쁨은 단순히 더 강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느낀다’고 말합니다. 즉, 이 기쁨은 감각이나 감정의 표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을 채우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비교의 언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느꼈던 모든 육체적 쾌락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전에 즐거워하던 육체적 쾌락을 ‘더럽다’고 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기준이 바뀐 데서 나오는 평가’입니다. 밝은 빛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어둠이 더럽게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은 더 높은 차원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전의 즐거움이 본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신앙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이전에 당연하게 여기던 만족들이 점점 그 빛을 잃습니다. 이것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결과가 아니라, ‘더 깊은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AC.541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은 우리가 포기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엇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동안에는, 우리는 낮은 기쁨을 최고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적절한 때에 우리의 내면을 잠잠하게 하시고, 상태를 준비시키시면, 사람은 비로소 말로 다 할 수없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이 증언은 천국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천국을 경험한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 고백은 긴 설명보다 더 분명합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이 말이야말로,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 줍니다.

 

 

 

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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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움과 세상적 기쁨을 통해서만 상상합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이야말로 비교해 보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더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선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 수 있도록, 그들은 먼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낙원들로 인도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천국의 낙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참된 천국의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더 깊은 내적 존재(inmost being)에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interior states of joy)를 체험하도록 허락받습니다. 그다음에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로 인도되며, 그들은 그것이 전혀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으로 그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역시 내적 감각의 가장 깊은 곳(inmost feeling)까지 이르는 순수함의 상태(a state of innocence)로 인도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들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허락받습니다. Almost all who come into the other life are ignorant of the nature of heavenly happiness and bliss, because they know not the nature and quality of inward joy. They form a conception of it merely from the delights and joys of the body and the world. What they are ignorant of they suppose to be nothing, the truth being that bodily and worldly joys are relatively non-existent and foul. In order therefore that those who are well disposed may learn and may know what heavenly joy is, they are taken in the first place to paradises that surpass every conception of the imaginatio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and they suppose that they have arrived in the paradise of heaven; but they are taught that this is not true heavenly happiness, and are therefore permitted to experience interior states of joy which are perceptible to their inmost being. They are then transported into a state of peace, even to their inmost being, and they confess that nothing of it is at all expressible or conceivable. And finally they are introduced into a state of innocence, also to their inmost feeling. In this way are they permitted to learn the nature of true spiritual and celestial good.

 

 

해설

 

이 글은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인간이 천국의 기쁨을 왜 오해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만 상상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도 세상에서 경험한 즐거움, 곧 쾌락, 만족, 편안함, 성취감 같은 것의 연장선에서 그려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근본적인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은 진짜 기쁨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과 같고, 더 나아가 오염된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차원의 차이’를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은 설명으로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체험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먼저 사람들은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천국에 도착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천국의 행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낙원은 여전히 외적 감각과 상상에 가까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롭지만, 아직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채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다음 단계로 이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번에는 내적 존재 깊숙이까지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입니다. 이 기쁨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옳다’고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더욱 인상적입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르는 평화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공통된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그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언어와 개념이 도달하지 못하는 차원의 상태입니다. 이 평화는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질서 안에 놓인 상태’에서 오는 안정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순수함의 상태입니다. 이는 도덕적 무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상태, 곧 주님의 생명이 아무 저항 없이 흐를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계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참된 영적 선과 천적 선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태 안에 있음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천국을 가르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천국은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깊은 신앙의 실재는 개념으로 주입될 수 없고, 삶의 상태 속에서만 조금씩 열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항상 외적 단계에서 내적 단계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사람을 이끄십니다.

 

AC.540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천국의 기쁨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그 차원에 맞는 상태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주님께서 질서 있게 인도하시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은 천국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천국에 대한 가장 깊은 소망을 조용히 키워 줍니다. 설명할 수 없고, 그릴 수 없지만, ‘실재하며 점점 더 깊어지는 선과 기쁨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541, 창5 뒤, ‘천국 기쁨에 비하면 더럽기까지 한 이 세상 쾌락’

AC.541 천국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던 어떤 영들이, 그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곧 육체적인 것들(bodily things)과 공상적인 생각들(fanciful notions)이 잠잠해진 상태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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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9, 창5 뒤,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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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자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에게서 나는 시체 같은 악취(cadaverous stench)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만일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자신이 사라질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래 땅으로 내던져졌는데, 단지 천국의 첫 문턱에서 간음과 반대되는 영역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who during his life in the body had made light of adulteries, was in accordance with his desire admitted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As soon as he came there he began to suffer and to be sensible of his own cadaverous stench, until he could endure it no longer. It seemed to him that if he went any farther he should perish, and he was therefore cast down to the lower earth, enraged that he should feel such torment at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merely because he had arrived in a sphere that was contrary to adulteries. He is among the unhappy.

 

 

해설

 

이 글은 앞선 두 단락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생생한 방식으로, ‘상태의 불일치가 낳는 고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가 천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설명이나 판단 이전에, 즉각적인 감각과 고통으로 드러납니다.

 

이 영은 생전에 간음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는 단순히 특정 행위를 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사랑과 결합의 질서를 내적으로 무너뜨린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간음은 도덕적 규범 위반을 넘어, 사랑의 질서, 곧 하늘의 질서를 왜곡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한 상태는 천국의 영역과 본질적으로 상극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은 자신의 바람, 곧 자기가 원해서 천국의 첫 문턱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원하면 가까이 가게 하시되, 그 결과를 스스로 체험하게 하십니다. 강제로 막지 않으시고, 설명으로 대신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은 환희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자기 자신의 시체 같은 악취를 느꼈다’는 대목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부여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천국의 영역에서는 거짓과 왜곡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 내면의 실상이 감각으로 체험됩니다.

 

이 악취는 실제 냄새라기보다, 사랑의 질서에 반하는 상태가 천국의 감각 안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보여 주는 상응 표현입니다. 천국의 순수한 사랑의 영역에 비추어질 때, 왜곡된 사랑은 생명 없는 것, 곧 ‘죽음의 냄새’로 체험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면 ‘사라질 것 같다’는 감각은, 그 상태가 천국 안에서는 존속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결국 그는 아래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 역시 처벌이라기보다, ‘존재가 견딜 수 있는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느낀 감정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거나 깨닫기보다, 분노합니다. 천국의 문턱에서 이런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이는 그의 내적 태도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짧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는 불행한 자들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불행은 외부적 형벌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 상태와 질서의 불일치가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국을 향한 욕망은 있었지만, 천국의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결과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장면은 매우 무겁고도 정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천국을 원하는가, 아니면 천국의 삶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단지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 존재의 감각과 방향을 결정합니다. 천국은 그 방향이 맞을 때에만 안식이 됩니다.

 

AC.539는 천국을 도덕적 판결의 법정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은 ‘자기 자신을 피할 수 없는 거울’로 나타납니다. 그 거울 앞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거울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비추어진 것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본문은, 회개와 변화가 왜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지를 가장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AC.540, 창5 뒤, ‘외적 기쁨에서 내적 기쁨으로, 기쁨에서 평화로, 평화에서 순수함으로’

AC.540 사후 세계로 오는 거의 모든 이들은 천국의 행복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옵니다. 이는 내적 기쁨의 본질과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오직 육체적 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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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8, 창5 뒤, ‘천국은 같은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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