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9, ‘찬송하는 소리 있어’와 찬64, ‘기뻐하며 경배하세’입니다.
오늘은 창1 두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20번에서 23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3-5)
이 본문을
‘빛이 있으라’, 거듭남의 시작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걸 선이라, 그런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건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첫 번째 상태’를 언급하지만, 앞선 AC.7의 첫 상태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상태는 완전한 어둠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은 아직 선과 진리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들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합니다. 이 ‘알기 시작함’이 바로 빛의 최초 침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의 상태를 매우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들에게 선이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유익한 것이고, 진리란 그러한 사랑을 정당화해 주는 생각들입니다. 이때의 선과 진리는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무지가 바로 영적 어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잉태’(conceived anew)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아직 출생이나 성숙이 아니라, 생명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는 매우 불편한 깨달음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기 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주님의 선은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그는 단지 도덕적 기준의 문제를 넘어, ‘주님의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나 윤리적 목표가 아니라, ‘인격적 근원’을 지닌 실재가 됩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라는 말씀은, 신앙이 단순한 교리 동의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른 채 선과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국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선언이에요. 요한복음 1장의 인용은 이 인식을 더욱 깊게 확증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이 말씀은 거듭남의 첫 인식이 왜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여 줍니다. 빛은 항상 먼저 비치며, 어둠은 그 빛에 의해 비로소 어둠임이 드러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첫 상태는 그래서 매우 미세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행하지도,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합니다. 선과 진리가 자신 위에 있으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식의 싹이 트는 것입니다. 이 작은 전환이 이후 모든 거듭남의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 AC.20은 빛의 첫 인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스스로를 빛으로 계시하시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빛 앞에서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선을 향해 눈을 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은 방향을 갖게 되며,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4, 5)
AC.21
‘빛’(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선’(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맞는 것들(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whatsoever is man’s own)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빛’과 ‘어둠’을 단순한 대비 개념이 아니라, ‘근원에 따른 구분’으로 명확히 정의합니다. 빛을 선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빛은 스스로 선한 것이 아니라, 선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과 진리는 어떤 독립적인 속성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무슨 자산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이에 반해 ‘어둠’은 단순히 무지나 지식의 결핍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둠을, 거듭남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로 정의합니다. 즉,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던 상태 전체가 어둠입니다. 이 정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어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둠은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판단과 가치관 속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어둠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본성(propri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본성은 거듭남 이후에도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으며, 때때로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빛을 한 번 보는 사건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빛이고 무엇이 거짓된 빛인지를 지속적으로 분별하는 여정이 됩니다. 이 분별이 바로 영적 성숙의 핵심이에요.
라틴어 'proprium'에 대하여
※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bygrace.kr
이 글에서 제시되는 ‘낮’과 ‘밤’의 비유는 이러한 근원적 구분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됩니다. 낮과 밤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하는 근원의 문제입니다. 낮에는 태양이 지배하고, 밤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듯이, 영적 삶에서도 주님이 중심이 될 때는 낮이고, 자기가 중심이 될 때는 밤입니다.
이러한 대비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 깨어 있음과 잠듦의 이미지들은 모두 같은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이 우연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인간의 내적 상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일관된 언어라고 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조 역시, 단순한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밤에서 낮으로, 자기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 이후에도 경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어둠은 한 번 물리치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영적 삶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삶입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는지, 무엇이 아직도 자기에게서 나오는지를 묻는 이 분별이 없으면, 어둠은 다시 빛으로 위장합니다.
결국 AC.21은 빛과 어둠을 감정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기준은 언제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것은 빛이며 낮이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어둠이며 밤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엄격한 기준 위에서만, 거듭남의 길은 혼란 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상태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무엘에서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가 오신 그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그늘과 혼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거짓이 섞여 있고, 신앙이 부재한 상태로, 인간의 내면이 아직 주님의 빛에 의해 질서 잡히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거듭남이 반드시 거치는 영적 이동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저녁’을 사람 자신의 것, 곧 본성(proprium)에 속한 모든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자신의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선처럼,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신앙이 없는 상태이며, 영적 실재에 비추어 보면 어둠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으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이 구분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에게서인가 사람 자신에게서인가의 문제이며, 거듭남은 바로 이 근원 인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묘사되는 ‘아침 빛’은 이 상태를 매우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구름 없는 밝은 빛, 비 뒤에 돋아나는 연한 풀은 모두 주님의 임재로 인해 생명이 새롭게 발생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퍼셉션으로 인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때 진리는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빛이 됩니다. 연한 풀이 돋아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선한 삶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주님의 세상 오심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이며, 바로 그 상태 속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에 ‘저녁’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의 ‘주야’라는 표현은, 교회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다시 빛을 받기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아침’은 단지 과거의 탄생 사건만을 가리키지 않고, 신앙이 없는 상태 속으로 주님이 새롭게 임하시는 모든 순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창조 사역의 리듬을 드러냅니다. AC.22는 이처럼 성경의 시간 언어를 상태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말씀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살아 있는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날’(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날’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날’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 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날’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날’이 곧 ‘때’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한 시대의 날들은 주님의 뜻이 성취되면 끝나고, 성취되지 않으면 연장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날’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날’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 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날’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날’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 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아멘
여러분, 거듭 권하지만, 주중에 이 원고를 계속 읽고 또 읽고 하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은 꼭 필요할 때에만 하시고 말입니다. 말씀과의 거리가 나와 하나님 사이 관계를 알게 해준다는 것처럼 스마트폰 역시 그렇습니다. 스마트폰과 가까우면 주님은 멀고, 반대로 스마트폰에서 물러나면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스마트폰으로 말씀과 원고 보는 걸 제외하고는 여러분, 가급적 스마트폰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SNS도 가급적 절제하시고, 이런저런 알림도 웬만하면 다 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가급적 한발 물러나시기를, 그래서 그 빈자리를 주님이 오셔서 곁에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2-22(D1)
'즐겨찾기 > 한결같은교회.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일예배(2026/02/15, 창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0) | 2026.02.15 |
|---|---|
| 주일예배(2026/02/08, 창5:32), '노아, 그리고 셈, 함, 야벳의 속뜻' (0) | 2026.02.07 |
| 주일예배(2026/02/01, 창5:28-31), '노아, 인류를 위한 주님의 위로' (2) | 2026.02.01 |
| 주일예배(2026/01/25, 창5:25-27), '퍼셉션 이야기 (심화)' (2) | 2026.01.25 |
| 주일예배(2026/01/18, 창5:21-24), '에녹, 퍼셉션을 교리로 보존한 사람들' (1) | 2026.01.1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