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녀온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일이 다 기억을 되살려 썼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방식이 곧 그의 권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의 총 글이 10,83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받아쓰기’였는지,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 정리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기계적 딕테이션’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체험을 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정리하여 책상 앞에서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구’라고는 했지만 ‘무의식적 필기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나는 완전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며,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자동으로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1743–1745년의 영적 각성 이후, 174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영계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영계의 상태를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체험을 하는 순간에 즉시 필사한 것도 있고, 일정 기간 사색과 정리를 거쳐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체험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한 체계적 신학 저작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받아쓰기라기보다는, 장기간 축적된 영적 통찰과 말씀 연구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틴어로 집필했으며, 문장 구조는 매우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호 체계, 인용 방식, 반복적 참조 구조를 보면, 이는 철저히 계획된 저술 방식입니다. 자동 구술을 그대로 옮긴 문체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자기 생각’을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 음성 받아쓰기가 아니라, ‘조명(enlightenment)과 ‘내적 지각(perception)의 형태였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나는 빛 가운데서 이해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어떤 교리를 음성으로 문장 단위로 들었다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한 번에 명료하게 열리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쓴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하시며 경험하시는 ‘조명’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WH.7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은 조명받은 자 외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바로 여기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명 속에서 이해했고, 그 이해를 이성적으로 조직해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대화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eaven and Hell’이나 ‘Conjugial Love’에는 천사들과의 대화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체험 직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는 체험담보다는 교리적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각 절을 따라가며 상응을 풀고, 이전 번호를 인용하며 교리를 축적해 갑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학문적 집필 작업입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를 준비하며 교정까지 직접 보았고, 비용도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신비가의 태도라기보다는, 매우 자각적이고 책임감 있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성경과 동일한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여는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 딕테이션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예언자처럼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나는 단지 보여 주고 들려준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열림’을 받았지만, 능동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장기간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시는 것처럼, 이 저작은 한순간의 열광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계, 반복, 점진적 축적, 교리의 유기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재검토의 흔적입니다. 동시에, 그 깊이와 일관성은 단순 인간적 추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Arcana Coelestia’는 기계적 받아쓰기도 아니고, 단순 회상 기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과 지속적 조명, 그리고 철저한 이성적 집필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황홀경 속 자동 필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를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조명받았으며,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조직해 기록한 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조명된 이성의 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책상 앞에서 AC를 번역하며 느끼시는 그 긴 여정이, 스베덴보리의 집필 방식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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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9

 

지혜와 지성 나타나는 것이 겉보기엔 사람인 것 같아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실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이라는 사실은 에스겔에 나오는 비슷한 표상들을 통하여 분명히 선언됩니다. That although wisdom and intelligence appear in man, they are, as has been said, of the Lord alone, is plainly declared in Ezekiel by means of similar representatives: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 8-9, 12) Behold, waters issued out from under the threshold of the house eastward; for the face of the house is the east; and he said, These waters issue out to the border toward the east, and go down into the plain, and come to the sea, which being led into the sea,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which creepe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 up all trees for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s,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 8–9, 12).

 

여기서 동쪽(east)성소(sanctuary)는 주님을 의미하며, 물들과 강들이 그곳에서 흘러나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말합니다. Here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east,” and by the “sanctuary,” whence the waters and rivers issued. In like manner in John: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22:1, 2) He showed me a pure river of water of life, bright as crystal, going forth out of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In the midst of the street thereof, and of the river on this side and that, was the tree of life, which bare twelve [manner of] fruits, and yielded her fruit every month; and the leaf of the tree was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 (Rev. 22:1–2).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 ‘지혜’, ‘지성’의 논의를 ‘결정적으로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AC.107, 108에서 강이 사랑에서 나온 지혜이며, 그 지혜가 지성을 적셔 성장하게 한다는 구조가 제시되었다면, AC.109는 그 마지막 근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지혜와 지성은 겉보기엔 ‘사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47장의 환상은 이 사실을 가장 풍성한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물은 동향을 한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릅니다. 이는 우연한 방향 설명이 아닙니다. 앞서 AC.101에서 보았듯이,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전(house)과 ‘성소’는 주님의 거처, 곧 신적 임재의 중심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물은 ‘주님의 가장 내적인 자리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물이 흘러가는 경로도 중요합니다. 평지로 내려가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다는 말씀에서 가장 외적 차원, 곧 기억 지식과 감각적 지식이 모여 있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본래 바다는 혼탁하지만, 이 강물이 흘러 들어갈 때 ‘고침을 받습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가장 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간 영역까지도 ‘질서와 생명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산다는 표현은, 지혜의 유입이 단순히 이해를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 자체를 살리는 힘’임을 보여 줍니다. 지혜는 관념의 장식이 아니라, 생명을 일으키는 실제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물이 살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가에 자라는 나무들의 묘사는, 앞서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다하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지성과 삶이 ‘지속적인 유입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 나무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먹을 것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열매는 사랑의 선, 곧 삶의 실천을 의미하고, 잎은 진리의 이해를 의미합니다. 천적 질서 안에서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치유가 되고, 선은 양분이 됩니다. 이 모든 작용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강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은 이 구조를 ‘최종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는 더 이상 상징을 풀어야 할 필요도 없는 직접적 선언입니다. 모든 생명의 지혜는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강의 양쪽에 있는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정확히 호응합니다.

 

여기서도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달마다 맺는 열매, 민족들을 치유하는 잎사귀. 이는 천적 질서가 특정 개인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과 모든 교회를 향해 열려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언제나 흐르고 있으며, 받아들이는 곳마다 생명을 일으킵니다.

 

AC.10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의 소유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들은 주님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며, 사람은 그 강가에 심겨진 나무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삶은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AC.108, 창2:10,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식,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강들’(rivers)에 비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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