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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46:11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무엇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강 목사님은 은퇴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수도원의 영성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았다고 이해했고, 그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여러 나라의 수도원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도 전통을 공부했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곳이 그리스의 아토스산(Mount Athos)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은 그리스 영토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자치권을 가진 정교회 수도 공동체이며, 현재 20개의 주요 수도원이 있습니다. 수도 전통은 적어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여성의 출입을 제한하는 ‘아바톤(avaton) 전통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강 목사님은 아토스산을 ‘수도사들의 나라’처럼 묘사합니다. 표현 자체는 다소 과장될 수 있지만, 그곳이 일반적인 수도원 하나와 다른 독특한 공동체라는 점은 맞습니다. 아토스산은 하나의 반도 전체에 여러 수도원과 스케테, 은수처가 분포하며, 행정적으로도 자치적인 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약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천 명이 넘는 수도사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UNESCO도 아토스산을 오랜 정교회 수도 전통의 중심지로 소개합니다.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영상에서 강 목사님이 특히 놀라워하는 것은 ‘여성이 들어오지 않는 남성 수도 공동체가 천 년 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아토스산에는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전통이 있으며, 이는 중세부터 제도화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즉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여성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외적 환경은 수도자의 정결을 돕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정결을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음란과 욕망은 외부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애정과 사랑의 질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전혀 없는 장소에서도 사람은 음란한 상상과 자기 사랑을 품을 수 있고, 반대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순결한 결혼애와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어떤 수도사가 ‘하와 한 명만 들어와도 이곳은 무너진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이야기는 수도 전통 안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성을 남성 수도자의 영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외적 위험 요소처럼 보는 순간, 인간 안의 욕망에 대한 책임이 외부 대상에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근원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결은 여성을 보지 않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소유하려는 사랑이 변화되어 상대를 하나의 인격과 영적 존재로 존중하게 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는 남녀의 차이를 창조질서 안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참된 결혼애를 천국의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성 자체를 영적 위험으로 이해하는 수도적 감수성과 스베덴보리의 결혼 이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도자의 독신은 개인의 소명과 훈련이 될 수 있지만, 남녀의 결합 자체가 더 낮은 영적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결혼애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표상하며, 천국의 질서와 깊은 상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상에는 아토스산 수도사들이 죽으면 일정 기간 매장한 뒤 뼈를 다시 꺼내 납골당에 보존하는 관습도 소개됩니다. 이러한 관습은 실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육체의 덧없음을 기억하고 죽은 수도사들을 공동체 안에서 계속 기억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인스타그램)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해골과 뼈는 인간의 참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영으로 계속 살아가며, 자연적 육체만 세상에 남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뼈를 바라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도 언젠가 뼈가 된다’가 아니라 ‘내가 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아토스산 수도자들의 모습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모습’으로 이해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상당히 귀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명예에서 거리를 두고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을 더 소유하고, 더 경험하고, 더 유명해질 것인가가 삶의 중심이 되기 쉽기 때문에,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수도자의 모습은 사람에게 강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도 옆 사람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영적 수준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정죄한다면 그 기도는 아직 사랑과 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생활 속에서 맡은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자신의 악을 피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수도원에 살지 않아도 실제로 주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아토스산의 수도 전통을 바라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외적 극단성을 영적 깊이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천 년 동안 여성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수도사들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사실, 죽은 뒤 뼈를 다시 거두어 납골당에 둔다는 사실, 세상과 단절된 산속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은 모두 강렬한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외적인 희생의 크기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실제로 얼마나 약해졌으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자라났는가가 기준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세상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수도원 안에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명예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은수자가 되면서도 ‘나는 특별한 수도자’라는 자기 의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proprium의 매우 미세한 모습입니다. 반대로 큰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며 살아도 자신의 재물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여기고, 정직하게 사용하며, 이웃을 위해 유용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자연적 삶 안에는 천국적인 질서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강 목사님 자신이 ‘한국 사람으로서 이곳을 밟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말을 수도원마다 들었다고 소개합니다. 이 부분은 영상 자체에서 단순한 여행 경험이나 놀라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종류의 경험에서도 아주 조용한 경계를 하나 세웁니다. 영적인 길에서 ‘내가 최초다’, ‘내가 특별한 곳에 갔다’, ‘나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영성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수록 그것을 자기 특별함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더 깊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경험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선한 쓰임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영적 질서에 맞습니다.

 

영상에서 언급되는 ‘성 뽀르피리오스’는 아마 현대 정교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성 포르피리오스(St. Porphyrio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 목사님은 그의 수도생활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아토스산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수도자의 비범한 체험이나 영적 능력 자체보다, 그 삶을 통해 주님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신비한 체험을 동경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특별한 현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실제로 보고 천사와 영들과 대화한 사람이었지만, 흥미롭게도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런 체험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가장 안전한 길은 말씀을 읽고, 계명을 따라 악을 피하며, 자신의 직업과 관계 속에서 선한 쓰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반복합니다. 영적 세계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연계에서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수도사들의 신비 체험 역시 ‘어떻게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보다 ‘그 체험 때문에 그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선한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강 목사님은 영상 마지막에서 아토스산과 같은 수도 영성이 한국 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고 싶어 이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취지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에 익숙한 반면, 그보다 훨씬 오래된 동방교회의 수도 전통이나 초기 기독교의 금욕적 영성은 상대적으로 낯설기 때문입니다. 다른 기독교 전통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전통이 오래되었다거나 낯설고 신비롭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더 깊은 영성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전통은 결국 말씀과 주님의 질서라는 기준 아래에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수도원 영성이 한국 교회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우리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세상 사랑에 얼마나 붙들려 있는가?’일 것입니다. 수도자들이 재산과 명예와 결혼을 포기한 모습을 보며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나는 내가 가진 재산과 지위와 관계를 어떤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수도자의 외적 포기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형식이 아니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내려놓는 내적 포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아토스산의 가장 깊은 영성을 스베덴보리식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토스산의 천 년 수도 전통과 철저한 금욕은 현대의 신앙인에게 강한 질문을 던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깊이는 얼마나 세상과 단절했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강 목사님이 감탄했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라는 말을 조금 더 깊게 다듬는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 모든 사람과 모든 쓰임을 주님의 질서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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