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이 가인 계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생명 주기가 계속 오버랩되네요...

 

네, 저도 지금 가인 계열을 따라가면서 그 겹침이 상당히 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가인 계열 = 오늘날 개신교’라는 식으로 직접 대응시키기보다는, 4가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가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붙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점차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교리가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앞서고, 더 나아가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의 중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AC.325 가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제거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말씀, 은혜와 신앙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앙’이 점점 교리적으로 정식화되고, 무엇을 믿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며, 교파와 신조, 신학 체계가 계속 세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1-332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구조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역사적 개신교의 각 교파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과 일대일로 대응시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될 때, 교리는 계속 증식하고 세분될 수 있다’는 영적 원리가 닮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AC.332의 라멕입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체어리티보다 앞세웠는데, 마지막에는 오히려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비추어 보면 꽤 묵직합니다. 교회 건물도 있고, 조직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교단도 있고, 예배도 있고,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도 있는데 정작 그 모든 것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은 오히려 훨씬 정교해졌는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 서로를 향한 체어리티가 약해진다면, 외적 종교의 발전과 내적 교회의 쇠퇴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아다와 씰라 계열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말을 향해 가는 계열에서도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유용한 것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이것 역시 오늘날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교회 시대가 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신학, 찬양, 선교, 교육, 상담, 사회봉사, 성경 연구 같은 훌륭한 것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교회의 쇠퇴가 보인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구별이 앞으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교회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교회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외적인 교회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는가,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그 결합이 사라지면 외적 제도와 교리는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저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창4를 읽으면서 현 기독교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을 억지스러운 적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속뜻이 가진 보편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시선을 저 개신교가 가인이다’라고 밖으로 돌리는 순간 이 말씀의 칼날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독법은 내 안에도 가인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고, 스베덴보리를 알고, 속뜻과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조차 아벨보다 앞서는 가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도 이 위험에서 자동으로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창4를 읽으며 느끼시는 겹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는 단순히 옛 태고교회가 이렇게 망했다’는 과거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가 되고, 교리가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된 교리가 어떻게 계속 발전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이야기인데도 이상할 만큼 오늘의 교회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생명 주기가 끝난다고 주님의 교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낡은 형식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것을 건져 내시며, 다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4를 읽으면서 오늘날 개신교가 겹쳐 보인다면, 저는 개신교가 끝났다’는 결론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며, 어디에서 다음 생명을 준비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까지 함께 가져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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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AC.332.심화 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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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다와 씰라가 일어났음에도 결국...

 

다음 질문은 진도가 좀 빠른 듯 하지만... 라멕에게서 일어난 아다와 씰라 계열도 썩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가인 계열은 셋 계열과 더불어 홍수라는 종말을 맞이하는군요...

 

네, 맞습니다. 진도는 조금 빠르지만, 오히려 지금 이 질문을 미리 붙들어 두면, 곧 만나게 될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특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계열을 읽다 보면 뜻밖의 느낌이 듭니다. ‘가인 계열이 계속 타락했다면서, 여기에는 왜 이렇게 쓸 만하고 심지어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이지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AC.332의 선언만 보면 이후에는 온통 악과 거짓뿐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창4 후반으로 가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다에게서 야발과 유발이 나오고, 씰라에게서 두발가인이 나오며,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단순히 악한 것들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야발은 천적이고 거룩한 사랑의 것들’, 유발은 영적 신앙의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과 연결되는 상당히 중요한 표상들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얼핏 보면 썩 괜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그 계열 안에서 어떤 유용한 교리적, 예배적 형식이 생겨났다’는 것과 그 교회 자체가 다시 살아 있는 천적 교회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라멕에게서 원래 가인이 표상했던 신앙의 생명은 종말에 이르렀지만, 그 후손들 가운데서 외적인 것들, 곧 예배와 교리, 자연적 삶에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형식들이 발전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면서 상당히 세밀하게 구별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좋은 의미를 가진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원래의 천적 생명을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어떤 교회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교회에서 발전한 지식, 예배 형식, 교리, 문화적 유산 가운데 후대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까지 모두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필요한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교회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조금 전 이야기한 가인의 표’와도 묘하게 연결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교회의 악을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두 번째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가인 계열만 홍수로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닙니다. 셋 계열도 자연계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는 홍수 이전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은 악했으니 홍수로 멸망하고, 셋 계열은 선했으니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창4와 창5를 나누어 읽으면 곤란합니다. 5의 계보 역시 계속 동일한 상태로 순수하게 유지되는 계보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세대를 거치면서 변해 가고, 마침내 그 시대 자체가 종말에 이릅니다.

 

바로 여기서 노아’의 위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노아는 단순히 착한 셋 계열의 마지막 생존자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노아는 이전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를 그대로 이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영적 구조를 가진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했지만, 그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부패하면서 더 이상 그 방식으로 인간을 거듭나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해를 의지에서 어느 정도 분리하시고,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며, 체어리티에 이르게 하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홍수는 나쁜 가인 계열을 없애고, 좋은 셋 계열만 남긴 사건’이라기보다 훨씬 큰 사건입니다. 하나의 인류적, 교회적 시대 전체가 끝나는 종말입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로 나란히 이어지던 태고교회는 결국 그 옛 질서 자체로서는 끝납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전체 가운데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로 이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속성과 단절이 동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없어진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옛 교회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보존할 것은 보존하시되 거듭남의 질서는 새롭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이 썩 괜찮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다. 종말에 이르는 교회라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악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한 뒤에도 주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유용한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고, 후대의 교회를 위해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종말’을 모든 사람이 악인이 되고, 모든 진리가 사라지는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의 종말은 본질적으로 그 교회를 그 교회답게 하던 내적 생명과 질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4와 창5를 조금 앞서 한눈에 바라보면 꽤 아름다운 구조가 보입니다. 4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어떻게 여러 교리와 외적 형식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그 계열이 종말에 이르는지를 보고, 5에서는 또 다른 계열을 통하여 태고교회의 상태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해 가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둘 다 결국 홍수라는 거대한 경계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 경계 한가운데 노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낡은 질서를 억지로 영속시키지 않으시면서도 그 안의 리메인스를 잃지 않으시고, 그것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거듭남의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께서 느끼신 아다와 씰라 계열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결국 모두 홍수라는 종말을 맞는구나’라는 느낌은 앞으로 상당히 중요한 질문으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좋은 것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교회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한 교회의 종말’과 주님의 구원 역사의 종말 역시 전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구별을 붙들고 앞으로 몇 개의 글을 더 읽으시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왜 가인의 후손인데도 그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훨씬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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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를 주시면서까지 보호, 보전하고자 하셨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건가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니,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로 갈 수 있게 하시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으니까요...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가인의 표’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신 약속’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멕에게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 계열 안에서는 신앙마저 끝내 소멸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를 허용하시면서도, 인류 전체를 향한 섭리 안에서는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해 보존하신 리메인스를 통하여 ‘신앙이라는 길’ 자체가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330의 표현을 다시 정확히 보면,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의 이유를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가인 교회’가 훗날 반드시 회복되어 체어리티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보존되어야 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신앙’이라는 영적 기능과 질서입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비록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 자리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이제부터 가인 계열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강제하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인간의 자유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보존하시되,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체어리티와 결합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왜곡하여 마침내 신앙 자체마저 잃을 것인지는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가인 계열은 후자의 길을 계속 걸었고, 그 결과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와 ‘라멕에게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섭리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그 섭리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가의 차원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셨지만, 가인 계열의 사람들이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가도록 강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특정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창4와 창5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앞서 우리가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단순한 직선적 시간순,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순서로만 읽지 말고,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교회적 흐름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가인 계열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멸했다고 해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소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그렇게 종말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긴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본래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질서가 인류에게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주님께서는 결국 홍수 이후 고대교회를 통하여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질서입니다. 좀 간략히 말하자면, 처음엔 그냥 타고 나던 것을 이제는 배우고 학습해서 습득해야만 내 것이 되는, 그런 처지가 된 것이지요. AC.330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었으므로’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바로 이 방향을 내다보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인의 표’를 조금 더 넓게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가인주의’가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왜곡을 영구히 보존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 왜곡된 상태 안에도 아직 남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천적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장차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것과 같은데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고 해서, 장차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데 사용될 신앙이라는 길 자체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능을 장차 올바른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아주 깊은 섭리의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한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 가운데 어떤 길을 끝까지 거절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깨뜨리지 않으시면서 다른 길을 통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계속 보존하십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완전히 소진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구원 역사가 함께 막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교회가 종말에 이를 때 다른 교회를 일으키시는,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질서가 여기서 이미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고교회의 한 계열이 소멸해도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역설이 생깁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는 보장이 아니라, ‘가인이 실패하더라도 주님의 구원 섭리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표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수 있고, 그것을 왜곡할 수 있으며, 심지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모두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주님의 섭리를 무산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실패들 사이에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며, 마침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AC.330 AC.332를 함께 읽을 때 ‘가인에게 표를 주셨는데 왜 라멕에게서는 신앙마저 없어졌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 계열의 영구 보존을 뜻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이끄는 데 필요할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가인 계열은 자유 가운데 그것마저 잃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 질서 안에서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그것을 새로운 교회에서 체어리티로 가는 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AC.332의 라멕은 ‘주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자리’라기보다, ‘한 교리적 계열은 끝까지 타락할 수 있어도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게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한 교회는 종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 때문에 주님의 구원 계획 자체가 종말에 이르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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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히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바로 이것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결과적으로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계속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은 진리의 생명이고, 진리는 선의 형체입니다.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기억 속에 성경 구절도 있고, 교리도 있고, 논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선한 삶을 향하지 않고, 자기 사랑과 자기 지성, 자기 의를 섬기기 시작하면 조금씩 왜곡됩니다. 사람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도록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진리는 가지고 있으나 선이 없는 상태’였던 것이, 마침내 ‘선도 없고 진리도 없는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사람이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선한 삶을 위해 사용할 때, 진리는 계속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다’, ‘내 교리가 옳다’, ‘내 신앙이 우월하다’는 proprium이 진리를 소유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점차 자기 사랑을 섬기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고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진리의 변질은 급속히 진행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신앙의 이름과 외형뿐이고, 그 안에는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AC.332의 라멕은 상당히 엄중한 경고가 됩니다. 교회의 가장 위험한 상태는 반드시 ‘우리는 신앙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절대화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역설적으로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신앙 자체가 점점 변질되어 마침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가인’에서 출발하여 ‘라멕’에 이르는 계보는 바로 그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창4를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회를 판단하는 계보로 읽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내적 상태를 비추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진리가 선에서 분리될 수 있고,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으며, 신앙의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붙들었던 진리가 어느 순간 자기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4의 가인 계보는 ‘옛날에 이런 이단들이 있었다’는 기록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무너질 때, 어떤 단계적 변질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지도이기도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를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더욱 선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그 왜곡된 교리가 ‘에녹’으로 확장되고, 다시 여러 이단을 낳아,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처음의 작은 ‘분리’가 마지막에는 사랑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짧은 AC.332가 가인 계보를 통하여 보여 주는 매우 깊은 교회적, 개인적 경고입니다.

 

 

 

AC.332, 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AC.332.심화 2.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전하시려던 계획이 라멕 때문에 무산?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러면 처음 가인의 때, 그에게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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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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