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2, 심화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즐겨찾기/AC 창3 2026. 7. 29. 20:23AC.312.심화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사용된 표현이 ‘두루 도는 칼의 화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며, 같은 상태를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두루 도는 화염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flame’과 ‘sword’의 결합 순서가 뒤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화염’ 또는 ‘불’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그 정서를 뜻합니다. 선한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일어나는 악한 욕망을 뜻합니다. 한편 ‘칼’은 진리가 거짓과 싸우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 특별히 거짓된 추론과 persuas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화염’은 타락한 의지 안의 악한 사랑과 욕망을, ‘칼’은 그 악한 의지에서 나온 거짓과 파괴적인 persuasion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본래 상태에서는 의지 안의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의 퍼셉션과 지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자 같은 내적 질서가 전도(顚倒), 그러니까 거꾸로 뒤집혀, 악한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거짓된 사고와 persuasion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이 먼저이고, 거짓된 추론은 그 사랑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태를 표현할 때에는 ‘칼의 화염’, 곧 칼에 속한 화염이라기보다 ‘칼을 낳고 움직이는 화염’, 즉 ‘화염의 칼’이 더 적합했습니다. 이 어순은 악한 의지가 근원이고, 거짓된 이해가 그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를 조금 풀어 말하면, 홍수 이전 사람들은 먼저 어떤 거짓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 안에 있었고, 그 욕망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독립적으로 진리를 검토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의지가 원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10-311에서 그들의 persuasion이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호흡까지 압도할 만큼 치명적이었다고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 곧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이 반드시 의지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해 안에서 먼저 거짓을 배우거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복하여 확증한 뒤, 마침내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의 경우에는 ‘칼’, 곧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앞에 놓이고, 그 거짓에서 ‘화염’, 곧 악한 애착과 욕망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칼의 화염’, 곧 화염에 속한 칼이라는 순서로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와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의 차이와 정확히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홍수 이전 천적 인간의 본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지혜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질서가 타락했을 때에는 악한 의지에서 거짓된 이해로, 욕망에서 persuasion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화염’이 먼저이고, ‘칼’이 뒤따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은 이해에서 의지로, 진리에서 선으로 거듭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 질서가 악용될 경우에는 거짓된 이해에서 악한 의지로, 거짓의 확증에서 악한 사랑으로 진행될 수 있으므로 ‘칼’이 먼저이고 ‘화염’이 뒤따르게 됩니다.
‘두루 돈다’(turning itself)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칼이 이리저리 회전한다는 시각적 묘사만은 아닙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이 서로를 계속 강화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서는 악한 욕망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이 다시 욕망을 확증하며, 더 강해진 욕망이 또 더 극단적인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의지와 이해가 서로를 쉬지 않고 강화하므로, 그들의 상태는 끊임없이 ‘두루 도는’ 화염과 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서로 먹고 자라면서 전체 마음을 점령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중심 목적은 그들의 악을 묘사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놓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죄의 상징인 동시에 보호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악한 의지와 거짓된 persuasion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에 접근한다면, 그들은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 모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 생명의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 화염과 칼은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사람에게서 빼앗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 때문에 그 길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이라는 어순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과 욕망이 근원이었고, 거짓과 persuasion은 그 사랑이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반면 후대 사람들에게서는 거짓된 이해와 확증이 먼저 형성되고, 그것이 점차 의지와 사랑을 불붙게 할 수 있으므로 ‘두루 도는 칼의 화염’이라는 반대 어순이 더 적합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두 단어의 위치가 바뀐 것뿐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홍수 이전 인간과 홍수 이후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서 전체가 그 차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AC.312에서 이 세부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밝힌 만큼, 이 해설 역시 말씀 속 무한한 아르카나를 모두 밝힌 것이라기보다, AC.310-312와 앞뒤 문맥을 토대로 그 핵심 구조를 가능한 범위에서 풀어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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