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31:14)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31:14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사49, 사55, 시18과 동일한 원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 한 절을 깊이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간결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시31:14은 ‘여호와여’라고 주님을 부른 뒤, 곧이어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같은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에 따른 의도적인 구별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여’라는 부름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 자신을 향한 신뢰를 나타냅니다. 사람은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분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의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는 고백은 그 주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실제로 역사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를 나타냅니다.AC.300은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한 절은AC.300의 핵심 논지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한 분 주님을 가리키면서도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신적 능력이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구별되면서도 하나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300에서 시31:14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한 절 안에 함께 나타나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을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사49, 사55, 시18과 같은 원리를 더욱 간명하게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18: 2, 28-29, 3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8:2, 28-29, 31을 인용한 이유도 앞의 이사야 본문들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는 시편 전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시18은 다윗이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 속에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자연스럽게 교차하여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한 뒤 곧이어 ‘나의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합니다. 또28절에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고,29절에서는 ‘주를 의뢰하고’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가 나란히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31절에서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고 하여 두 이름을 다시 함께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라는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피난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석, 요새, 산성이라는 표현은 모두 변하지 않는 신적 존재와 보호를 상징하며, 이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도우시고 힘을 주시며, 승리를 이루시는 능력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는 말씀에서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어둠을 밝히고 원수를 이기게 하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AC.300은 바로 이러한 점을 들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신적 능력과 작용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28절의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은AC.30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결합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입니다.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31절은 이러한 논의를 결론짓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는 말씀은 참된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이심을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동일하신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다만 ‘여호와’는 그분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그 신적 본질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는 것입니다.
AC.300에서 시18:2, 28-29, 3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시편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앞서 인용된 사49와 사55의 경우와 같은 원리를 또 다른 말씀을 통해 확인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사55:7을 인용한 이유 역시 앞의 사49:4-5와 같습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사55:7은 ‘악인은 그의 길을,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한 뒤, 이어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합니다. 같은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 연이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말씀은 같은 뜻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면, 그 이름마다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구별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사람이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죄를 떠나 회개하는 것은 단순히 생활을 조금 고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proprium을 떠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 곧 모든 생명의 근원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에서는 주님의 긍휼과 용서가 실제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측면이 강조됩니다. 용서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사람 안에서 효력을 나타내는 작용이며,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AC.300의 중심 논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말씀은 어떤 때에는 ‘여호와’만 사용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만 사용하며, 또 어떤 때에는 이처럼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합니다. 이것은 문체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생명 자체를 강조할 때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 존재가 능력으로 역사하여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측면을 강조할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AC.300에서 사55:7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나란히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에서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본질과 존재를,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람을 향해 역사하는 신적 능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역시 창1에서 ‘하나님’이,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되는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4, 5)
스베덴보리가AC.300에서 사49:4-5를 인용한 목적은 이사야 전체를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같은 문맥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를 나타낸다는AC.300의 주장을 성경으로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49:4에서는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말합니다. 이어지는5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라고 하면서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매우 짧은 문맥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 나란히 사용되는 것을 주목합니다. 만일 두 이름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굳이 구별하여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불필요한 반복을 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이름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여호와’는 판단하시고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신적 존재를 나타냅니다. 반면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는 말씀에서는 능력과 힘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는 측면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인용은 또한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의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창1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이며,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신적 능력이 함께 나타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사49:4-5는 이러한 구별이 창세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인용된 것입니다.
AC.300에서 사49:4-5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단순한 동의어나 문체상 반복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각각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구별하여 나타낸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 곧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것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서는 언제나 어떤 비밀한 이유(a secret reason)로 주님을 때로는 단지 ‘여호와’(Jehovah)로, 때로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으로, 또 때로는 먼저 ‘여호와’(Jehovah)라고 한 다음 ‘하나님’(God)으로, 그리고 또 때로는 ‘주 여호비’(Lord Jehovih)로, 때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으로, 때로는 단지 ‘하나님’(God)으로만 부릅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 첫째 장에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복수로 말씀하시는 곳에서도 주님을 오직 ‘하나님’(God)으로만 부릅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을 다루는 다음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으로 부르지요. 주님을 ‘여호와’(Jehovah)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시거나(is) 살아 계시기(lives) 때문이며, 따라서 그분의 본질(essence)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God)으로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분의 능력(power)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이 구별이 나타나는 말씀의 여러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49:4-5, 사55:7, 시18:2, 28-29, 31, 시31:14)As regards the first arcanum—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it is to be observed that in the Word, always for a secret reason, the Lord is sometimes called merely “Jehovah,” sometimes “Jehovah God,” sometimes “Jehovah” and then “God,” sometimes the “Lord Jehovih,” sometimes the “God of Israel,” and sometimes “God” only. Thu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where it is also said, in the plural,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he is called “God” only, and he is not called “Jehovah God” until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He is called “Jehovah” because he alone is or lives, thus from essence; and “God,” because he can do all things, thus from power; as is evident from the Word, where this distinction is made. (Isa. 49:4, 5; 55:7; Ps. 18:2, 28, 29, 31; 31:14)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사49:4, 5)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18: 2, 28-29, 31)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31:14)
이러한 이유로 사람과 말하였던 모든 천사나 영을,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다 여겨질 때는 ‘신’(God)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는 시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On this account every angel or spirit who spoke with man, and who was supposed to possess any power, was called “God,” as appears from David: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시82:1) God hath stood in the congregation of God, he will judge in the midst of the gods (Ps. 82:1);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시89:6)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ened to Jehovah? (Ps. 89:6).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서도 ‘신들’(gods)이라고 합니다. 시82:6, 요10:34-35 참조 Men also as being possessed of power are called “gods,” as in Ps. 82:6; John 10:34, 35.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82:6)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10:34-35)
모세 역시 ‘바로에게 신’(a god to Pharaoh) 같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Moses also is said to be “a god to Pharaoh.” (Exod.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7:1)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어에서 ‘하나님’(God)이라는 말은 복수형인 ‘엘로힘’(Elohim)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스스로는 가장 작은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제로 그들 자신도 이를 인정합니다. 그들의 능력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은 오직 주님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첫째 장에서처럼 어떤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때에는 주님을 복수로 호칭합니다. 여기에서도 천적 인간은 사람인 까닭에 주님과 비교될 수 없고, 오직 천사들과만 비교될 수 있었으므로,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지혜롭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word “God” in the Hebrew is in the plural number—“Elohim.” But as the angels do not possess the least power of themselves, as indeed they acknowledge, but solely from the Lord, and as there is but one God, therefore by “Jehovah God” in the Word is meant the Lord alone. But where anything is effected by the ministry of angels, a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he is spoken of in the plural number. Here also because the celestial man, as man, could not be put in comparison with the Lord, but with the angels only, it is sai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that is, is wise and intelligent.
해설
AC.300은 앞의 AC.299에서 제시된 첫 번째 아르카나, 곧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에서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서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말씀에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주 여호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여러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체상의 변화나 같은 대상을 여러 방식으로 부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각각의 이름은 그 문맥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신적 속성과 역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어떤 이름이 선택되었는가는 언제나 내적 의미와 관련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천사와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존재와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생명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십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생명, 곧 그분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시거나 살아 계신다’ 한 것은 피조물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와 생명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냅니다. ‘여호와’가 주님의 존재와 생명 자체를 나타낸다면, ‘하나님’은 그 신적 생명과 본질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본질과 능력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 자체이신 분이 곧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49:4-5, 사55:7, 시18과 시31을 언급한 것은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각각 본질과 능력이라는 구별된 의미를 지니고 사용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창1에서는 주님을 일관되게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창1의 내적 의미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점차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땅이 구별되며, 식물과 광명체, 그리고 생물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과정은 사람의 거듭남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장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형성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전면에 나타나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창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납니다. 창2는 창1과 별개의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을 거쳐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를 다룹니다. 이때에는 단지 주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뜻하는 ‘하나님’과 존재와 생명을 뜻하는 ‘여호와’가 함께 사용되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1과 창2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은 각 장이 다루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말씀에서 천사와 영,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때때로 ‘신들’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본래부터 신적 본질이나 독립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사나 사람이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받아 전달하고, 주님의 권위 아래에서 어떤 일을 수행할 때에는 그들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능력을 뜻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타나는 능력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것이며, 그들은 그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시82:1, 시89:6, 시136:2-3은 주님으로부터 능력과 권위를 받은 존재들을 가리켜 ‘신들’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모든 능력 위에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시82:6과 요10:34-35는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의 권위를 맡은 사람들을 가리켜서도 이러한 의미에서 ‘신들’이라 하였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출7:1에서 모세가 바로에게 ‘신’ 같이 된다 한 것은 모세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주님의 말씀과 권위를 대표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된 핵심은 천사나 사람에게 ‘신’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더라도 그들의 능력이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히브리어 ‘엘로힘’이 복수형이라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럿이시라는 뜻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능력이 천국의 수많은 천사와 그들의 다양한 사역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음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가 있고,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도 다양하지만, 그 모든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복수형은 능력의 근원이 여럿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능력이 여러 형식과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한테서는 가장 작은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참된 천사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이 모두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선하거나 참되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유입된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천사는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형식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들’이라 하는 천사들과 ‘여호와 하나님’이신 주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능력을 받아 ‘신들’이라 불릴 수는 있지만, 결코 ‘여호와’라 불릴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생명을 받는 존재이고,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천사는 능력을 받는 존재이고, 주님은 능력 자체이시며, 그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존재와 능력이 하나로 결합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궁극적으로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AC.300은 ‘여호와 하나님’이 오직 주님을 뜻한다 하면서도, 동시에 천국도 포함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과 천국이 같은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천국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주님과 천국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주님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역사하지 않습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을 받아 하나의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문맥에서는 주님과 천국이 함께 포함되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와 창3:22의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에 나오는 ‘우리’를 이해하는 원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하나님이 서로 의논한다는 뜻이 아니며, 주님께서 천사들의 조언이나 동의를 필요로 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께서 천국 질서, 그러니까 천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을 창조, 거듭남, 그리고 인도하시므로 복수 표현이 사용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말 역시 주님께서 천사의 도움 없이는 어떤 일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홀로 행하시되, 천국과 세계를 일정한 질서에 따라 다스리십니다. 그 질서 안에서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을 받아 각자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천사들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창1:26의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이 주님께서 천국 전체를 통하여 사람의 거듭남을 이루시는 신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창3:22의 ‘우리 중 하나같이’에서도 사람은 주님과 비교된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 비교된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며 생명을 받는 존재이므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적이고 지혜로운 상태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주님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들과 같이 선과 악을 알고 지혜롭고 총명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악을 안다’는 것은 본래 주님으로부터 선을 지각하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천적 인간의 지혜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자신의 판단으로 선악을 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알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천사들과 같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proprium으로부터 선악을 알려 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받던 참된 지혜는 자기 자신한테서 지혜를 얻으려는 상태로 변질되었습니다. AC.300은 이 타락의 전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창3:22의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며, 사람이 주님이 아니라 천사들과 비교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AC.300의 중심은 이처럼 주님과 천국을 구별하면서도 그 관계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천국은 그 생명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사들은 주님과 분리되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능력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본질과 능력이 하나이신 주님을 뜻하며, 주님께서 천국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문맥에서는 그분과 결합한 천국도 함께 포함하여 뜻합니다.
따라서 창1:26과 창3:22의 복수 표현은 하나님의 본질이 여럿이라는 뜻도 아니고, 천사들이 주님과 동등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분 주님께서 그분의 생명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천국 전체를 통하여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AC.299에서 예고되고, AC.300에서 밝혀진 첫 번째 아르카나, 곧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299
여기에는 두 가지 아르카나(arcana)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은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일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Here are two arcana: first, that “Jehovah God” signifies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 secondly,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해설
AC.299는 앞의 AC.298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두 가지 중요한 교리를 다시 정리하면서, 이제부터 그것들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겠다는 서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두 가지 아르카나’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르카나’란 인간의 자연적 사고만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주님의 계시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을 말합니다.
첫 번째 아르카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물론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주님만이 아니라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있는 천국까지 함께 포함하여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천국이 주님과 대등한 또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 전체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받아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22의 ‘우리’(us)라는 표현도 여러 신적 존재의 회의가 아니라, 주님과 하나 된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이 교리는 스베덴보리의 천국관 전체와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혼자 힘으로 사랑하거나 지혜롭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지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유입(influx)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주님과 분리된 독립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말씀에서는 어떤 경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두 번째 아르카나는 더욱 놀랍습니다.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는 신앙의 신비를 많이 알수록 영적으로 더욱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원리를 말합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가장 깊은 신앙의 신비까지 알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파멸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들은 주님 자신과 천국 질서에 관한 가장 거룩한 진리들입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충분히 알고도 자신의 악한 사랑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왜곡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모독(profanation)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한 사람 안에서 뒤섞어 버리므로, 영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창3:22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며,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것은 영생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에 접근, 그것을 모독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감추신 것은 은혜가 아니라, 더 큰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자비였습니다.
이처럼 AC.299가 제시하는 두 가지 아르카나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과 천국의 완전한 하나 됨을 보여 주고, 둘째는 그 주님께서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세심하게 섭리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3:22는 단순히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내쫓으시는 장면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자비 가운데 보호하시는 섭리의 시작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위 내용은 저 위AC.298해설에 나오는 내용인데,이게 무슨 뜻인가요?
창3:22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우리’라는 복수 표현입니다.
And Jehovah God said,Behold,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께서‘나’가 아니라‘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 구절은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본문이라거나,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의논하시는 장면이라는 해석이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AC.298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구절을 설명합니다.그는‘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도 함께 의미한다고 말합니다.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천국’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일반적으로 우리는 천국을 주님이 계시는 곳,그리고 천사들이 사는 장소로 생각합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천국은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가 모든 천사에게 흘러들어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된 공동체입니다.그래서 그는 천국 전체를‘주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라고 부릅니다.수많은 천사가 있지만,모두 주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의 몸처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교리와 연결됩니다.그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그러니까 스스로 사랑하거나 지혜롭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천사들이 가진 모든 사랑과 지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만일 그 유입(influx)이 단 한 순간이라도 끊어진다면,천사는 즉시 천사일 수 없게 됩니다.다시 말해,천국은 주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권위가 아니라,주님의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창3:22의‘우리’라는 표현도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여기서 주님께서‘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러 신적 존재가 서로 의논하거나 회의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또한 천사들이 주님께 의견을 제시하거나 결정에 참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 주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있는 천국 전체를 함께 포함하는 표현입니다.주님은 언제나 천국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시며,천국 역시 언제나 주님의 생명 안에서 움직입니다.그러므로 말씀은 때때로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는 의미에서 복수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말씀 전체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예를 들어,창11:7에서도‘자,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하시며,사6:8에서도‘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십니다.이 모든 구절은 하나님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주님의 신적 역사가 천국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질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언제나 주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왜 스베덴보리가AC.298에서 굳이 이 문제를 언급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창3:22는 사람이 타락한 직후의 장면입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버리거나 홀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오히려 천국 전체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하나 되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합니다.그러므로‘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을 위한 회의가 아니라, ‘주님과 천국이 하나 되어 인간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신적 질서’를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이어지는‘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주님께서는 인간을 영생에서 배제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접하여 그것을 모독(profanation)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멸에 이르는 것을 막으셨습니다.이러한 보호의 섭리는 주님 홀로의 행위이면서도,동시에 주님과 하나 된 천국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신적 역사입니다.따라서 창3:22의‘우리’는,여러 존재의 의견을 모으는 회의의 언어가 아니라,주님과 천국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섭리의 언어라고 이해하는 것이AC.298의 문맥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창3:22에 보면,영역은‘the tree of lives’인데,한역은‘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왜 이런 차이가?
창3:22의Potts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lest he put forth his hand,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and eat,and live forever.
이를 직역하면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에서도 취하여 먹고 영원히 살게 될까 하노라’가 됩니다. 여기에는 ‘fruit’(열매)라는 단어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한글 성경은 ‘생명나무의 열매도 따먹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먼저 이것은 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기보다, 언어의 관용 차이에서 비롯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와 영어에서는 ‘나무에서 취하여 먹다’(take of the tree, eat)라는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듣는 사람은 당연히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열매이므로, 번역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열매’를 보충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경 번역으로서는 충분히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Arcana Coelestia를 번역할 때에는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단순한 이야기나 역사로 읽지 않고, 모든 단어와 표현에 담긴 상응(correspondence)을 해설합니다. 따라서 어떤 단어가 원문에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대상은 ‘열매’가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AC.29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에서도 취하여 먹는 것’을 곧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을 배우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핵심은 어떤 열매를 먹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에 접근하여 그것에 참여하는 것 자체’입니다. 만일 번역에서 ‘열매’를 중심에 놓으면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열매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생명나무’라는 상징 전체에 있습니다. 이것이AC를 번역할 때 일반 성경 번역과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Potts의 번역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the tree of life’라고 번역하지만,Potts는 ‘the tree of lives’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문의 형태를 더욱 충실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는 ‘חַיִּים’(ḥayyîm)인데,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 복수형입니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반드시 수량의 복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충만함이나 완전함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Potts는 이를 ‘lives’라고 번역, 원문의 형태를 가능한 한 보존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Potts의 영역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읽는AC영어판은Potts의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Potts보다 선대의 사람이고, 또 스베덴보리는 라틴어로 기술했습니다. 따라서AC를 번역할 때에는Potts가 굳이 ‘tree of lives’라고 옮긴 이유도 함께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일반 영어 성경처럼 ‘tree of life’로 바꾸거나, 다시 한국어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로 의역해 버리면, 원문이 지닌 구조와 강조점이 상당 부분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AC번역에서는 일반 성경 번역보다 원문의 상징 구조를 더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번역은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에서도 취하여 먹고’ 또는 원문의 형태를 더욱 살려 ‘생명들의 나무에서도 취하여 먹고’와 같이 옮기는 것이AC의 해설 방식과 더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해설에서 ‘여기서 취하여 먹는 대상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해 주는 편이 독자의 이해에도 훨씬 도움이 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AC번역에서 중요한 원칙 하나를 보여 줍니다. 일반 성경 번역은 읽기 쉽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우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AC번역은 그 위에 한 단계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해설하는 상응의 중심 단어를 가능한 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래야 번역과 해설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독자는 원문과 해설 사이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AC.298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 처음에는 단수로 언급되었다가, 이어서 복수로 언급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것’(knowing good and evil)은 그가 천적 인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지혜롭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하는 것은, 그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신비들까지 배우게 된다면, 그는 영원토록 결코 구원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영생할까’(live to eternity)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The reason “Jehovah God” is first mentioned in the singular, and afterwards in the plural number, is 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the angelic heaven. The man’s “knowing good and evil” signifies that he had become celestial, and thus wise and intelligent;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means that he must not be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for then never to all eternity could he be saved, which is to “live to eternity.”
해설
이 글은 창3:22의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를 설명합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의 의미를 밝힙니다. 주님께서 막으신 것은 영생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더 깊은 영적 파멸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심판보다도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에는 단수로, 이어서는 복수의 의미를 띠게 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은 결코 천사들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신적 생명이 흘러드는 하나의 큰 사람(Maximus Homo)이며, 천사들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주님만을 의미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의미합니다. 여기서 복수의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판단과 섭리가 천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선과 악을 아는 것’에 대한 설명은 겉,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해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298은 여기서 말하는 ‘아는 것’이 단순한 경험이나 지식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천적 지각(perception)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즉, 천적 인간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지혜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다음 말씀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는 말씀을 기록된 겉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풉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주님과 사랑의 생명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미 타락, 자기애와 세상 사랑 가운데 빠진 사람이 그 거룩한 신앙의 신비들까지 충분히 알게 되면,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모독(profanation)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 의도적인 거부가 되므로, 영적 상태는 훨씬 더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신비들(the mysteries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진리를 아끼셔서 숨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상태가 아직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더 깊은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자비라는 뜻입니다. 이는 앞에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를 설명한 AC.301 이하의 내용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아직 모르는 상태에 머무는 편이 영적으로 훨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할까’도 겉뜻인 육체의 생명을 끝없이 유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에서 생명은 언제나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 ‘영생할까’는 주님과 결합된 생명 가운데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신비를 모독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영생을 막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가능성을 끝내 잃게 되는 상태를 막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글은 창3 전체의 중요한 결론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타락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결코 인간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더 깊은 악과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진리를 허락하시고, 때로는 더 높은 진리를 잠시 감추시며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은 은혜를 거두신 사건이 아니라, 장차 다시 생명에 이를 수 있도록 인간을 보존하시는 자비로운 섭리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AC.298은 창3:22를 심판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섭리가 가장 깊이 나타난 말씀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
AC.297에서 스베덴보리는 창3:21의 ‘가죽옷’을 해설하면서, 말씀에서 ‘옷’이 단순한 육체의 의복이 아니라 선을 둘러싸고 그것을 드러내는 영적, 자연적 차원의 것들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천적 선은 가장 내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로는 옷을 입지 않은 것과 같으며, 그 천적 선에서 나오는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이 그것을 둘러싸는 ‘옷’이 됩니다. 계4:4의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상응을 보여 주기 때문에AC.297에 인용된 것입니다.
먼저 ‘이십사 장로들’은 문자 그대로 스물네 명의 특정 인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열둘은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며, 이십사는 열둘이 배가된 수로서 교회와 천국에 속한 모든 진리와 선을 충만하게 나타냅니다. 또한 ‘장로들’은 지혜 있는 자들,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십사 장로들은 천국과 교회에 속한 모든 선과 진리, 또는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선이 진리를 통하여 밝고 순수하게 나타났음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흰색은 빛과 상응하고, 빛은 신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리는 선과 분리된 지식이나 교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장로들이 주님의 보좌 주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주님의 선을 섬기고 드러내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흰옷’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둘러싸고 나타내는 순수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AC.297의 논지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선 자체가 가장 내적인 것이며,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은 그것을 둘러싸는 의복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계4:4에서도 장로들의 내적 지혜와 선은 눈에 직접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고, 그들이 입은 ‘흰옷’을 통해 나타납니다. 곧 보이지 않는 내적 선이 보이는 진리의 형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옷’이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온 진리를 의미하는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보좌들 위에 앉아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앉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 확고히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하며, ‘보좌’는 심판과 통치, 더 깊게는 신적 진리에 기초한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 안에 굳게 서 있으며, 그 진리에 따라 판단하고 살아가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들의 옷은 단지 그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나타난 형상입니다.
‘머리에 금관을 썼다’는 사실은 흰옷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머리’는 가장 내적이고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며, ‘금’은 사랑의 선, 특히 천적 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머리의 금관은 그들의 모든 지혜와 진리 가장 높은 곳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흰옷이 진리를 의미한다면, 금관은 그 진리를 지배하고 생명을 주는 선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계4:4에는 ‘금관’이라는 선과 ‘흰옷’이라는 진리가 함께 나타나며, 진리가 선을 입혀 드러낸다는AC.297의 메시지를 완전하게 보여 줍니다.
이 구절은 창3의 ‘가죽옷’과도 대비되면서 연결됩니다. 창3:21의 가죽옷은 태고교회 사람이 천적 상태를 잃은 뒤, 주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보다 외적인 영적, 자연적 선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을 위한 자비로운 보호의 옷이었습니다. 반면, 계4:4의 흰옷은 거듭난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순수한 진리의 옷입니다. 가죽옷은 인간의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주신 외적 보호를 강조하고, 흰옷은 선과 진리가 다시 조화를 이룬 천국적 상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둘 다 내적 생명을 외적으로 둘러싸고 나타내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옷’의 상응에 속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계4:4를AC.297에서 인용한 이유는, 말씀에서 ‘옷’이 일관되게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금관은 가장 내적 사랑의 선을, 흰옷은 그 선에서 나오는 순수한 진리를,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선과 진리 안에 확고히 세워진 천국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선이 가장 내적 중심에 있고, 영적 선과 자연적 진리가 그것을 옷처럼 둘러싸고 드러낸다는AC.297의 구조를 매우 선명하게 증명하는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