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5

 

태고의 사람들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짐승과 새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하는 관습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에도 남아 있었고, 예언자들 가운데서도 보존되었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 파트를 그들은 (serpents)이라고 했는데, 이는 뱀이 땅에 바짝 붙어 살아가듯이, 감각적인 것들이 육체에 가장 가까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성질 하는 자들 자신을 (serpents)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들, 즉 땅의 것, 몸의 것, 세상의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많이 이성질을 하기 때문에,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한 것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 주님 주신 이성(理性, reason)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걸 저는 앞으로 ‘이성질’이라 하겠습니다. 도둑질, 이간질처럼 말입니다. 우리말 표현이 없어 제가 만들었습니다.

 

[2] 이와 같이 시편은 추론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자들, 곧 이성질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여기서 지혜로운 자의 말이나 지혜의 음성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러한 이성질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합니다. 이로부터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뱀은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속담이 되었습니다. 아모스서에는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5:19, 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여기서 벽에 손을 댄다(hand on the wall)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를 뜻하며, 거기서 여기 묘사된 눈멀음(blindness)이 나옵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서에서는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여기서 애굽(Egypt)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들로부터 신적인 것들에 대해 이성질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뱀의 소리(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눈멀음을 북방 백성(people of the north)이라 합니다. 욥기에서는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버터의 강들(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며, 추론, 즉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론들을 독사의 독(poison of the asp), ‘살모사의 혀(viper’s tongue)라 합니다. 뱀에 관해서는 아래 14절과 15절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해설

 

이 단락은 ‘’이라는 상징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에 실제로 사용되던 언어 체계였음을 밝힙니다. 태고의 사람들은 인간 안의 기능들을 짐승이나 새에 ‘비교,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곧바로 그렇게 ‘불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의 언어가 표상적 사고 그 자체였음을 뜻하며, 자연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체계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감각적인 것을 ‘’이라 부른 이유는 매우 질서 정연합니다. 뱀이 땅에 가장 가까이 사는 존재이듯이, 감각은 인간 안에서 육체와 가장 가까운 층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감각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차원의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상위 질서를 대신하여 신앙의 판단 기준이 될 때, 그것은 곧 ‘’이 됩니다. 그래서 감각의 증거에 근거한 신앙의 추론을 ‘뱀의 독’이라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추론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로부터 추론하는가’입니다. 감각적인 것, 곧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할 때, 그 추론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비시키는 독이 됩니다. 이러한 추론을 하는 자들 자신이 ‘’이라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편과 예언서들의 인용은, 이러한 이해가 스베덴보리의 독창적 해석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징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뱀의 독’, ‘귀를 막는 독사’, ‘뱀의 소리’라는 표현들은 모두, 지혜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완고한 감각 중심의 추론을 가리킵니다. 특히 ‘뱀이 귀를 막는다’는 속담은, 감각적 추론이 자기 폐쇄성을 지닌다는 점을 매우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아모스서의 ‘벽에 손을 댄다’는 표현은 자기에게서 나온 힘과 감각에 대한 신뢰를 뜻합니다. 이는 인간이 주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기 판단에 기대는 상태를 말하며, 그 결과는 빛이 아니라 어둠, 곧 영적 눈멀음입니다. 이 어둠은 외적 무지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상태에서 오는 어둠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애굽’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 근거한 신적 추론을 뜻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애굽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용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가 ‘북방’, 곧 빛이 없는 방향으로의 인도라는 점은, 감각 중심의 사고가 필연적으로 영적 냉기와 어둠으로 향함을 보여 줍니다.

 

욥기의 ‘꿀과 버터의 강들’은 영적, 천적 선과 진리를 뜻하지만, 단순한 추론자들, 곧 이성질만 하는 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각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추론은 다시 한번 ‘독사의 독’과 ‘살모사의 혀’로 규정됩니다.

 

AC.195는 결국 창3의 ‘’을 악마적 존재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합니다. 뱀은 인간 안에 있는 감각적 사고이며, 그것이 신앙의 주도권을 잡을 때, 가장 간교한 것이 됩니다. 이 단락은 창3:1의 배경에 깔린 인간 인식 구조 전체를 해부하듯 드러내며, 이후 이어질 ‘저주’와 ‘형벌’의 의미를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심화

 

1. ‘이성(理性, reason)

 

 

AC.195, 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AC.195.심화 1. ‘이성질’(理性, reason) 이로부터 또한 감각의 증거에 근거,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추론하는 것들, 곧 이성질(理性질)하는 것들을 ‘뱀의 독’(poison of a serpent)이라 했고, 그러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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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40:3

 

 

AC.195, 심화 2, ‘시140:3’

AC.195.심화 2. ‘시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AC.195에서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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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8:3-5

 

 

AC.195, 심화 3, ‘시58:3-5’

AC.195.심화 3. ‘시58:3-5’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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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19-20

 

 

AC.195, 심화 4, ‘암5:19-20’

AC.195.심화 4. ‘암5:19-20’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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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6:22-24

 

 

AC.195, 심화 5, ‘렘46:22-24’

AC.195.심화 5. ‘렘46:22-24’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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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16-17

 

 

AC.195, 심화 6, ‘욥20:16-17’

AC.195.심화 6. ‘욥20:16-17’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욥20:16, 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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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6, 창3:1, ‘뱀’의 시대적 확장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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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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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AC.194)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AC.194 해설)

 

대화 중 제가 계속 천국과 지옥 책에서 인용을 하니까 불쑥 목사님은 혹시 입신 체험이 있으십니까?’ 물으시더군요. 이런 것도 살짝 영적이라는 옷만 걸쳤지 사실은 위와 같은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인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만일 그분이 단순히 ‘목사님은 그런 체험이 있으십니까?’ 하고 궁금해서 물으신 것이라면, 그것 자체를 곧바로 AC.194의 상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내용을 들으면 그 사람의 경험과 배경을 궁금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질문 속에 ‘입신 체험이 없으면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권위가 없다’, ‘체험이 없으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AC.194가 말하는 방향과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왜냐하면 AC.194의 핵심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지 않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흥미롭게도 자신의 영계 체험을 사람들에게 믿음의 근거로 삼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여러 곳에서 자신이 본 것들이 말씀의 진리를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체험이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체험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읽고 ‘스베덴보리가 정말 천국을 다녀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AC.194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먼저 보고, 먼저 확인하고, 먼저 감각적으로 납득한 뒤에야 믿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는 저 체험이 사실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내용이 말씀과 인간 영혼의 실제를 놀랍도록 설명하는 것 같다’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태도입니다. 여기서는 감각적 증거보다 진리 자체를 먼저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겪으신 상황도 아마 이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랫동안 스베덴보리를 읽으며 ‘그가 실제로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 설명이 왜 이렇게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하게 드러내는가?’에 더 깊이 끌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반대로 ‘그래서 목사님도 입신 체험이 있습니까?’를 먼저 묻습니다.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 방향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을 보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설명이 인간의 삶과 말씀의 진리를 밝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94를 기준으로 보면, ‘입신 체험이 있어야 믿겠다’는 태도는 어느 정도 ‘보고 느껴야 믿겠다’는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것 자체까지 곧바로 뱀의 상태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AC를 읽으며 반복해서 감탄하시는 지점, 곧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는데 왜 이런 의미는 보지 못했을까?’ 하는 반응은 감각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빛에 대한 반응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을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참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 둘의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AC.194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순서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먼저이고 체험이 나중이어야 하는데, 체험이 먼저이고 진리가 나중이 되어 버리는 상태 말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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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4

 

여기서 (serpent)은 사람이 신뢰하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와 같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사람의 own을 각각 뜻합니다. 그리고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상태, 곧 의심의 상태가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해설

 

이 단락은 창3:1을 읽는 해석의 초점을 아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문제는 ‘뱀이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을 신뢰하기 시작했는가에 있습니다. ‘’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안에 두어진 신뢰의 자리입니다. 즉, 인간이 진리의 판단 기준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감각에 두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들짐승’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뜻한다는 설명은, 이 타락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겉 사람의 애정들이 이제 감각적 판단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며, 이는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자’가 여전히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점은 앞선 AC.191–19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여기서 자신의 own(proprium)이란, 자율적 판단과 자기 사랑을 포함하는 인간 중심의 내적 원리를 말합니다. 감각은 이 own과 결합, 의심이라는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뱀의 말은 직접적인 부정이나 반항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이라는 표현은 노골적인 거절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미묘한 의심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이는 진리를 부정하는 단계 이전에 반드시 나타나는 상태로,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중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상태를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교회 전체의 급격한 붕괴가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심화된 변화임을 뜻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이것이 아직 ‘첫 번째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단계는 곧바로 불신이나 반역으로 나아간 상태가 아니라, 의심이 막 시작된 단계입니다. 의심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태이며,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기 이전의 마지막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AC.194는 창3:1을 인간 타락의 극적인 장면으로 읽기보다, 신앙이 감각의 심문대에 오르게 되는 최초의 순간으로 읽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의심의 시작이, 이후 모든 붕괴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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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5, 창3:1, ‘뱀’(serpent)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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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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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심화

 

3. ‘3 소개

 

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理想)을 보여 주고, 창2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에덴의 삶을 보여 준다면, 창3은 그 상태가 어떻게 변질되고 전도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창2와 창4 사이에 놓인 창3은 단순히 한 사건을 기록하는 장이 아니라, 왜 인류 역사가 창2의 에덴에서 창4의 가인과 아벨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연결 고리입니다. 만일 창3이 없다면 창4는 이해할 수 없고, 창4가 없다면 창3의 결과도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창3은 흔히 말하는 ‘인류 최초의 범죄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것’, 곧 자신의 own(proprium)을 사랑하기 시작한 인간의 내적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창2의 마지막에서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상태에 있었으나, 창3에서는 감각을 통해 진리를 판단하려 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창3의 핵심은 선악과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판단하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하는 인간’으로 변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3 1-13절, 14-19절, 20-24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영적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3:1-13은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뱀의 제안, 여자의 동의, 남자의 승인, 선악과를 먹음, 눈이 열림, 수치심, 숨음, 변명까지의 전 과정이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각이 먼저 제안하고, 애정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그것을 승인하는 구조가 단계적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 판단을 신뢰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장입니다. 동시에 AC.193이 말하듯, 아직 완전한 멸망은 아닙니다. 여전히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과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남아 있습니다.

 

3:14-19는 ‘타락의 결과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심판은 법정 판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판은 상태의 결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뱀, 여자, 남자에게 각각 주어지는 말씀은 처벌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방향이 어떤 상태를 낳는지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특별히 15절의 ‘여자의 후손’은 타락의 한복판에서 주어지는 최초의 복음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위한 주님의 구원 계획이 처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3:20-24는 ‘보존과 새로운 시작’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추방 이야기로만 읽지만,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보호 이야기로 읽습니다. 가죽옷은 보호를 의미하고, 에덴에서의 추방은 형벌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꽃 검도 인간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AC.307에 이르면, 이것은 태고교회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노아 교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리메인스가 보존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3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에덴의 인간이 자신의 own을 사랑하기 시작하여 타락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한복판에서도 장차의 구원과 보존을 준비하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와 창4 사이에서 창3이 맡는 역할도 바로 이것입니다. 창2는 ‘인간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창4는 ‘타락 이후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3은 그 둘 사이에서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창2가 에덴이라면, 창4는 역사이고, 창3은 에덴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단순히 성경의 초반부 한 장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류 전체의 영적 역사, 나아가 한 사람의 거듭남과 타락, 회복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장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창1-2가 ‘주님의 창조’를 보여 준다면, 창3은 ‘인간의 선택’을 보여 주고, 창4는 ‘그 선택의 열매’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3은 창세기 전체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심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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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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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C.193)

 

스베덴보리는 저런 표현이 저런 의미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주님이 곁에서 풀어 주시는 것을 딕테이션한 건가요? 저 본문, 저런 표현들은 정말 평생 익숙한 본문이지만, 단 한 번도 저는, 그리고 우리는 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심지어 제가 신대원 시절 접한 어느 주석가들도 역시 말이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결국 ‘스베덴보리는 저런 의미를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에 대해 상당히 분명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저런 의미를 문법 연구나 역사 연구, 혹은 뛰어난 추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씀의 내적 의미는 천국 안에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즉, 저런 해석은 주석학의 결과라기보다 계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 서문들과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곁에 앉아 한 절 한 절 ‘이것은 이런 뜻이다’라고 받아쓰게 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약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그가 경험한 것은 오히려 ‘내적 시야가 열린 상태에서 천사들과 영들의 세계를 보고, 그 세계와 말씀 사이의 상응을 동시에 지각하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그 내용이 곧바로 말씀의 특정 구절들과 연결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또 말씀을 읽을 때 문자 안에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천국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보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AC를 읽어 보면 ‘천사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해설에서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부분은 역사 기록 이전에 이미 내적 의미를 담기 위해 기록된 대표적인 고대 말씀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이 열렸다’,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에덴동산’, ‘’, ‘선악과’ 같은 표현들은 처음부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천국에서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창세기 3장을 읽어 왔지만, ‘눈이 열렸다’를 ‘지각의 남은 흔적’으로 이해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선악을 알게 되었다’,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는 ‘죄를 의식하게 되었다’ 정도로 이해합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지은 뒤에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왜 숨는가?’, ‘왜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는가?’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그런 반응 자체가 없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서 그는 ‘아직 지각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질문의 핵심은 사실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런 연결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도 AC를 읽을 때 종종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눈이 열렸다’와 ‘지각의 남은 흔적’을 연결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와 ‘아직 남아 있는 내적 양심’을 연결하는 것은 보통의 주석가들이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을 역사나 문학으로 읽는 차원을 넘어, 인간 영혼의 상태를 묘사하는 언어로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지나친 상상이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AC를 읽으며 ‘어떻게 이런 의미를 볼 수 있었지?’라는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표현하신 놀라움도 사실 후자에 속합니다.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지만, 저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반응이 아니라, 본문 자체가 갑자기 새로운 깊이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런 질문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 의미는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햇빛을 받은 뒤에야 보이지 않던 색채가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모든 해석이 반드시 맞다’는 논리적 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AC를 오래 읽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정말 무언가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말입니다.

 

제가 목사님과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 느끼는 것은,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신뢰하게 된 이유도 결국 논리적 논증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창세기나 말씀의 어떤 구절들을 읽을 때, ‘, 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이 설명이 오히려 인간 영혼의 실제 경험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받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AC.193의 ‘눈이 열렸다’와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를 ‘지각의 남은 흔적’으로 읽는 대목도, 단순히 기발한 해석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평생 주장한 한 가지 원리, 곧 ‘말씀은 인간 영혼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원리의 한 사례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독자들이 목사님처럼 멈춰 서서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을 본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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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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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AC.193)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AC.193 해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참으로 우리 주님은 점진적인 신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은근하시고, 인내하시고, 조금씩 맞추어 나가십니다. 반면, 저는 참 다릅니다. 저는 단절에 능하고, ‘극단적이며, ‘모 아니면 도일 때가 많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익숙하며, ‘종교적 신념을 주님께 충성하는 걸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긍휼의 마음이 많음에도 말입니다. 청년 시절,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6학년 5반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리고 이 AC를 통해서 그동안 정말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게 흐르는 핏속에는 저런 혈기가 도사리고 있다가 틈을 보아 고개를 쳐드는 걸 봅니다. 그래서 아내든 자식이든, 그리고 누구 다른 신앙 지인이든, 저들에게 입 여는 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지요. 상대방의 선의를 보자 속으로 다짐하며 대화에 임하는 중에도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사실 AC.193의 주제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AC.1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타락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자신이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지각이 완전히 꺼졌다면, 부끄러움도 없고, 숨으려 하지도 않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고 부릅니다.

 

목사님 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와 극단성, 단절의 성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혹시 내가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렵다’,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쓴다’, ‘예전보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AC.193의 관점에서 보면, 이 후자의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혈기가 있는 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대한 충성이라고만 여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보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여전히 자신의 own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AC.193의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의 이야기이지만, 영적 원리는 지금도 같습니다. 자기 안의 거친 부분을 보고, 그것이 누군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은 이미 무감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단절에 능하다’, ‘극단적이다’, ‘모 아니면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수년 동안 AC를 읽고 번역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감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점진성입니다. 주님의 인내입니다. 주님의 기다리심입니다. 주님의 섬세한 섭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것에 깊이 끌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종종 그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을 부수기보다, 그 강한 부분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목사님께서 청년 시절부터 가지고 계셨던 결단력, 철저함,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own과 결합될 때입니다. 그때는 사람을 자르고, 단절시키고, 상처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향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가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를 향한 꾸준함, 말씀을 향한 충성, 수년 동안 한 길을 걷는 인내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경험하시는 갈등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된 성향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하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목사님이었다면 아마 그 질문 자체를 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하는 마음이 자라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혈기는 올라올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난 사람 안에 옛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고 질서 안에 놓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자기 own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AC.193을 읽으며, 저는 목사님을 향해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지각의 흔적을 보존하셨습니다. 홍수 직전의 인류 안에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창3의 타락 한복판에서도 자연적 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난 긍휼의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는 마음 역시 함부로 사라지게 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를 더 선명하게 보고 계시지만,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 혈기보다도 그 혈기를 보며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더 주의 깊게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AC.193이 보여 주는 주님은 완전함을 찾으시는 분이라기보다, 꺼져 가는 심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불씨를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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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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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두른 것(7),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부끄러워한 것(8-9), 그리고 그들의 인정과 고백(10-13)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nd from the fig-leaves of which they made themselves girdles (verse 7), and from their shame or hiding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verses 8–9), as well as from their acknowledgment and confession (verses 10–13),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해설

 

이 단락은 창3을 전면적인 붕괴나 즉각적인 영적 사망으로 읽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균형점을 제시합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자기 사랑과 감각 중심의 사고로 인해 질서가 무너졌음이 분명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었다는 장면은 이들이 여전히 무엇이 부끄러운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가장 외적인 선, 곧 자연적 차원의 선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선에 머물러 있지는 않지만, 외적 삶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선을 지키려는 성향이 남아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그들의 선은 질적으로 낮아졌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악을 즐거워하며 뻔뻔해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상태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끄러움의 정서가 살아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아직 양심의 기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 이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인정과 고백 역시 결정적입니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질문을 이해하고 응답하며, 자기 인식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근거로, ‘자연적인 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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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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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소개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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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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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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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2.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AC.192)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AC.192 해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

 

 

그 긴장은 매우 건강한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AC.192를 읽으며 가장 위험한 반응은 ‘, 저건 태고교회 이야기구나’, ‘저건 저 사람들 이야기구나’ 하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혹시 내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게 된다면, 이미 창3을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읽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창3을 해설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한때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서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래서 뱀도, 여자도, 남자도 결국 우리 안에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AC.192에서 이성이 처음부터 주범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은 흔히 ‘이성이 문제다’ 또는 ‘생각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섬세합니다. 먼저 감각이 제안합니다. ‘정말 그런가?’, ‘직접 확인해 보자.’ 그다음 애정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래, 나도 알고 싶다.’, ‘내가 직접 판단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등장하여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성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원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자신이 논리 때문에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사랑이 방향을 정했고, 이성은 그 길을 포장했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은 목사님께는 익숙한 주제이겠지만,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보다 ‘사랑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는 의지를 따라갑니다. 사고는 애정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대개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반대되는 사랑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라는 말은 사실 매우 중요한 자기 인식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마음속으로는 원하는 답을 정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답을 지지하는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충분히 생각해 보니 이 결론이 맞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이성적인 과정 같지만, 실제로는 애정이 먼저 방향을 정하고 이성이 뒤따라온 경우일 수 있습니다.

 

3의 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버려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그다음 ‘직접 확인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가 판단하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는가?’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92는 우리를 의심 많은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각을 의심하고,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너 자신의 own을 의심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반대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보다 주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께서 AC.190부터 192까지 읽으며 반복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창3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작은 선택들의 구조를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염려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런 흐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가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AC.206의 사람들은 자기 눈이 완전히 열렸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면 AC.189가 말하는 천국으로 인도되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인식’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그 긴장 자체가 이미 AC.189의 의미에서 말하는 자기 인식의 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 안에도 뱀의 제안, 애정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사람은 적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AC.192를 읽으며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가장 희망적인 사람은 ‘주님, 혹시 제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 보이시는 반응은 후자에 훨씬 더 가까워 보입니다.

 

 

 

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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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AC.192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1-6)

 

 

해설

 

이 단락은 AC.191에서 제시된 내적 구조가 실제 작동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감각 파트, 곧 ‘’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랑의 차원인 ‘여자’를 먼저 움직입니다. 이는 인간 안에서 감각적 사고가 직접 이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애정을 흔들어 놓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설득하여 탐구하게 하였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노골적인 부정이나 거절이 아니라, ‘확인해 보자’, ‘정말 그런지 살펴보자’라는 태도를 뜻합니다. 즉, 주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를 신뢰의 영역에 두지 않고, 감각과 이성의 심문 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바로 이 단계의 본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는 행위 자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방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먼저 받아들이는 대신, 감각과 이성으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바로 이 ‘먹음’에 해당합니다.

 

이때 탐구의 대상은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도덕적 규범이나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본래 내적 지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각으로 확인하려 하자, 이미 질서의 붕괴가 시작된 것입니다. 감각은 이 영역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왜곡됩니다.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3:1-6에 담긴 영적 의미이며, 태고교회의 세 번째 상태가 실제로 굳어지는 지점입니다.

 

AC.192는 결국, ‘왜 인간이 믿지 않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본 원인을 드러냅니다. 믿지 않게 된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자리에 감각과 이성을 앉혔기 때문입니다.  

 

 

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AC.192, 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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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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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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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1.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AC.191)

 

여기서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영적 인식의 단절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내적 지각을 통해 진리를 알았으나,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 증거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 전환이 곧 타락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AC.191 해설)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

 

 

네, 맞습니다. AC.191을 깊이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창3의 타락을 단순히 도덕적 범죄나 불순종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타락의 시작을 ‘무엇을 행했는가’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했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감각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그것이 건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C.191을 처음 읽으면 ‘그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감각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심판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 안에서 지각했고, 그다음 감각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살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먼저 있었고, 감각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가장 바깥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AC.191의 상태에서는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제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한가 보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건전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곧 영적 세계의 문을 닫는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면 천국, 사랑, 신앙,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고,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것 전체를 판단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래서 AC.191의 문제는 경험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감각은 원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을 최종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는 감각이 이해를 섬겨야 하는데, 이해가 감각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감각을 비추어야 하는데, 이제는 감각이 주님의 빛을 심사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엄청난 문제인지 AC.195-196에 가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해 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과학주의나 무신론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은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느낌이 와야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본질적으로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먼저 믿고 나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나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고 나서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라고 하신 말씀은 AC.191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사실 창3의 뱀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네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시작은 음란이나 폭력이나 살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훨씬 뒤의 결과들입니다. 가장 처음의 타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감각을 판단하던 사람’이 ‘감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전체는 바로 그 한 번의 방향 전환이 인류에게 얼마나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1은 짧지만, 실은 창3 전체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구절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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