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27, 창4:5-6, '창4 개요'(AC.324-337) -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의 속뜻

 

창4 개요

 

327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로 묘사하신 것입니다. (5-6절) That the state of those who were of separated faith became evil, is described by 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 (verses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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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6, 창4:3-5, '창4 개요'(AC.324-337) - '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의 속뜻

 

창4 개요

 

326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라 합니다. (3-4절)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4-5) The worship of each is described, that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by the “offering of Cain”; and that of charity, by the “offering of Abel.” (verses 3–4) That worship from charity was acceptable, but not worship from separated faith. (verses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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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5, 창4:1-2, '창4 개요'(AC.324-337) -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남, '가인'과 '아벨'의 속뜻

 

창4 개요

 

325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자선, 기부, 이웃사랑) 아벨이라 하였습니다. (1-2) 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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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4, '창4 본문, 개요'(AC.324-337) -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또는 이단들, 그리고 '에노스'라고 하는 새 교회

 

창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324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또는 이단들을 여기서 다루며, ‘에노스’라고 하는, 나중에 일어난 새 교회도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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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3, 창4 앞,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 4장 끝에 다룰 몇 가지 사례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323

본 장 끝에 자기들이 세상에서 지낼 동안 이와는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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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2, 창4 앞,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 영들은 몸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정교한 감각들을 갖게 된다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322

영들은 몸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정교한 감각들을 갖지 못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수천 번 반복된 경험을 통해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의 본성에 관한 선입견 때문에 이런 거 믿는 걸 영 내켜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내세에 오면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됨으로써 이런 사실들을 안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처음 장소에서 영들은 시력을 갖는데요, 그들이 빛 가운데 살기 때문이며, 선한 영들, 천사 같은 영들, 그리고 천사들은 지상 정오의 빛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그레이트한 빛 가운데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내게 될, 그리고 보게 될 이 빛에 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즉 허락을 받아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영들은 또한 듣는데요, 이 듣기 또한 얼마나 정교한지 몸에 있을 때 가졌던 청력하고는 정말이지 비교가 안 됩니다. 수년간 그들은 정말 계속해서 저랑 얘길 했는데요, 그들의 스피치에 관해서도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냄새도 맡을 수 있으며, 이 또한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정교한 촉감 또한 갖고 있는데요, 그래서 지옥에서 겪는 아픔과 고통이 여기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감각은 촉감과 관련이 있는데요, 촉감 관점에서 보면, 다른 감각들, 즉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하는 것들은 그저 촉감의 다양한 변형일 뿐입니다. 그들은 몸 안에 있었을 때 가졌던 것들하고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욕구와 애정(affections) 또한 갖고 있는데요, 이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영들의 생각은 그들이 몸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또렷(distinctness)합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 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 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 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 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 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 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 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 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 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세상 살 때 가졌던 천 개의 아이디어 속에 들어있는 것보다 지금 그들의 단 한 개 아이디어 속에 들어 있는 게 더 많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할 때, 아주 날카롭고 섬세, 총명 및 탁월하게 하는데, 이는 만일 사람이 이들의 스피치가 정말 얼마나 초월적인지를 조금이라도 지각하게 된다면 소리를 지르며 열광할 정도입니다. 요약하자면, 사람한테 있는 건 영들한테도 다 있습니다. , 더 퍼펙트하게 있습니다. 살과 뼈,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결함은 빼고 말이지요. 영들은, 심지어 몸 안에서 지낼 동안 감각을 느낀 것도 사실은 영이었고, 감각 능력이 몸 안에서 몸을 장악했어도 여전히 그건 몸에 속한 게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몸을 벗게 된 지금 영 본연의 감각은 그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퍼펙트함을 영들은 알고 지각합니다. 삶은 감각의 구현으로 이루어집니다. 감각을 못 느끼면 삶도 없지요. 이런 게 바로 감각의 능력이며, 이런 게 바로 삶이고, 누구라도 살필 수 있는 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 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 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 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 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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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1, 창4 앞,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 몸 안에 있을 때와 영이 되었을 때, 이 두 상태의 차이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321

두 번째 일반적인 사실은 영은 몸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엑설런트한 감지 능력과, 초월적 사고 및 언어 능력을 즐긴다는 것으로, 이 두 상태의 차이는 차라리 아예 비교 불가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영들은 주님이 리플렉션(reflection, 反射)을 선물로 주실 때까지는 이런 걸 깨닫지 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 이 ‘리플렉션을 선물로 주신다(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는 게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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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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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31(D1)-주일예배(2537, 눅24,1-12, 부활절), '다시 살아나신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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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신 주님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오늘은 부활절, 주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9216번 글 2번 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에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하신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이 없는 진리, 못 움직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창조의 순서 중 식물부터 먼저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걸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고 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계시,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이 계시를 지난 2017년 가을에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을 준비하시면서 수도사 학교(후에 수도 학교로 개명)를 시작하셨는데, 첫 학기 종강 때인 그해 초여름, 강사로 오신 시흥 영성수련원 원장 박희진 수도사의 권유로 저는 그 후 틈틈이 대전 바이블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면서 거기 주교재인 ‘핵심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에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이지요. 나중에 혹시나 하여 저의 지난날 일지를 보니 과거 제가 부사역자로 있던 교회에서 제가 돌보던 어느 목장 목자를 통해 제 생애 처음으로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들었더군요. 목장원 중 한 분이 이 이름으로 모이는 무슨 이상한 성경공부 모임에 다닌다는 그런 상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이단 분파, 신천지 같은 덴 줄 알고 금했죠. 그때가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아무튼, 지난 2017년 1학기부터 1기생으로 출발한 저는 그때부터 접하는 모든 내용이 지난 50여 년 알아 오던 모든 기존 교리 내지는 신앙의 결을 내려놓고,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스베덴보리 연구회 출판, ‘위대한 선물’로 시작, 이어 그의 많은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지옥’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이끄심으로 현재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 번역과 함께 이런저런 나름의 활동, 즉 유튜브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특히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골수도 정말 특이한 골수인 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완전 그 근본부터 다른 이 아르카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처음엔 요나처럼 도망가기 바빴던 저를 그러나 끊임없이 권하시되 마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듯’ 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신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옴짝달싹, 마치 칡넝쿨처럼 옭아맨,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 교리를 모두 잘라내 치워주셨던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끄심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유대교인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바울이, 그러나 주님을 만나 자기들의 DNA에 새겨진 것과도 같았던 유대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을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왜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과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에 대해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그 자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감히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

 

아멘

 

2023-04-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4-03-3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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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20, 창4 앞,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AC.320-323) - 사후, 혼(souls), 즉 수련 영들(修練, novitiate spirits)의 생활

 

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320

다음은 사후 혼(souls), 즉 수련 영(修練, novitiate spirits)의 생활이라는 일반적 주제에 관해 제가 진술할 수 있는 것인데요, 많은 영계 방문 경험으로 저는, 사람이 내세(來世, the other life)에 들어오면 자기가 지금 내세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자기는 아직도 이 세상에 있는 줄로, 심지어 여전히 몸 안에 있는 줄로 여긴다는 걸 알았습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

 

※ 사후 첫 번째 상태는 선으로든 악으로든 어느 한쪽으로 온전해지는 상태, 즉 천국 갈 영은 천국에서는 쓸데가 없는 악을, 지옥 갈 영은 지옥에서는 쓸데없는 선을 떼어내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걸 가리켜 ‘수련’(修練, novitiate)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 즉 자기가 영이라는 말을 듣고는 놀람과 경악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요, 두 가지 이유, 하나는, 그가 보기에 자기는 지금 감각이나 욕구 및 생각하는 것에 있어 너무나도 사람과 똑같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기는 세상 살 동안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거나, 어떤 사람들처럼, 영이라는 게 지금 자기가 발견한 그런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기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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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319, 창3 뒤, '영생(永生, Eternal Life)으로 들어감 (계속)'(AC.314-319) - 즉시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의 영접을 받고,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사람

 

영생(永生, Eternal Life)으로 들어감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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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또 다른 경우를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즉시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의 영접을 받고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조금 머물다가 천국으로 옮겨지는 훨씬 더 많은 경우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I saw another also who was immediately translated into heaven by the angels, and was accepted by the Lord and shown the glory of heaven; not to mention much other experience respecting others who were conveyed to heaven after some lapse of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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