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1:20)

 

AC.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붙어 속 사람 안에 놓이고, 겉 사람이 그 빛을 받게 되면, 그러면 사람은 비로소 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그를 가리켜 거의 살아있다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그가 선을 행해도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 걸로 알았고, 진리를 말해도 그 진리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오는 건 그게 무엇이든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로부터는 그 자체로 선한, 그런 선을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생각하거나, 선한 것을 원하거나, 따라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로 보아도 누구에게나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After the great luminaries have been kindled and placed i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receives light from them, then the man first begins to live. Heretofore he can scarcely be said to have lived, inasmuch as the good which he did he supposed that he did of himself, and the truth which he spoke that he spoke of himself; and since man of himself is dead, and there is in him nothing but what is evil and false, therefore 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insomuch that he cannot, from himself, do good that in itself is good. That man cannot even think what is good, nor will what is good, consequently cannot do what is good, except from the Lord, must be plain to everyone from the doctrine of faith, for the Lord says in Matthew: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한 선은 오직 하나뿐인 참된 선의 근원에서만 올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Nor can any good come except from the real fountain of good, which is one only, as he says in another plac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2]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사람을 다시 살리실 때, 곧 거듭남으로 생명으로 일으키실 때에는,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때 사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그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를 이끌어 나중에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퍼셉션으로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진리와 선은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자기가 말하는 모든 진리가 사실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게 되면, 그는 먼저 물속의 기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땅 위를 나는 새들(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에 비유되고, 또한 짐승들(beasts)에 비유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가리켜 생물(living souls)이라고 합니다. Nevertheless when the Lord is resuscitating man, that is, regenerating him, to life, 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 for at that time he is incapable of conceiving otherwise, nor can he in any other way be led to believe, and afterwards to perceive, that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lone. While man is thinking in such a way his truths and goods are compared to the “tender grass,” and also to the “herb yielding seed,” and lastly to the “tree bearing fruit,” all of which are inanimate; but now that he is vivified by love and faith, and believes that the Lord works all the good that he does and all the truth that he speaks, he is compared first to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and to 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and also to “beasts,” which are all animate things, and are called “living souls.”

 

 

해설

 

이 글은 넷째 날 이후에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는 점을 인간의 거듭남 관점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사람은 빛을 받고, 선과 진리를 배우며, 겉으로는 신앙적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아직 ‘살아있다’, 즉 ‘살아있는 상태’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 사람이 여전히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죽어 있으며, 그 안에는 악과 거짓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정확히 규정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 근원과 단절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선해 보이는 행위도 본질적으로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는 참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성경 말씀으로도 확증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시며,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선과 진리의 근원이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한 교리적 인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때, 처음부터 그에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런 성숙한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며, 동시에 주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런 단계가 아니고서는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선과 진리는 연한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됩니다. 이것들은 성장과 생산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못 움직이는, 생명 없는 것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선과 진리가 아직 사랑과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이 결합하고, 사람이 선과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는,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물속의 기는 것들, 하늘을 나는 새들, 그리고 짐승들은 모두 움직이고, 반응하고, 생명을 표현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때 비로소 사람은 ‘생물(living souls)이 됩니다.

 

이 글은 거듭남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오해조차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태조차, 더 깊은 진리와 퍼셉션으로 이끌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은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자비와 지혜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글입니다.

 

 

심화

 

1.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

 

처음에는 사람이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걸 허락하신다(he permits him at first to suppose that he does what is good and speaks what is true from himself)는 이 문장은 저를 정말 놀라게 하며, 그래서 깊이 감동하게 합니다. 저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저의 지난날을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주님이 나에게도 저런 사랑과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놀라움’과 ‘아찔함’은 사실 AC.39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체험적으로 붙드신 반응입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의 깊은 비밀’, 곧 자비의 실제 작용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온 시간 속에 이미 조용히 작동해 왔던 것입니다.

 

이 문장의 뜻을 조금 더 또렷하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그것을 그대로 들이대면, 사람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혹은 반발하여 더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음에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것이다라고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와 자발성을 지켜 주시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한다고 느낄 때만, 그 행위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안에 책임과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고백하신 것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때 내가 했던 것들이 정말 다 내가 한 것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 어떤 깨달음, 어떤 돌이킴 등, 그 순간에는 내가 한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인도와 보호가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AC.39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은 처음에는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질수록 우리는 알게 됩니다. ‘, 이것이 내 것,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주님이 나를 이끌어 오신 거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허락(permit)이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그 생각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단계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처음 걸을 때, 부모가 손을 놓아 주면서도 뒤에서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내가 걷는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보호 속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완전히 개입해 버리면, 아이는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완전히 내버려두면 넘어져 다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사이에서, ‘자유를 주시면서도 보호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만일 저런 자비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감정은 매우 깊은 영적 통찰입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의 보호가 한순간만 거두어져도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보호가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조용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자비의 특징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나 끊임없이 지켜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한 단계 더 나아가 우리를 이끕니다. 처음에는 ‘내가 한다’고 생각하게 하시지만, 점점 빛이 밝아지면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힘을 받는다는 상태’, 곧 ‘마치 자기로부터인 것처럼(as if from oneself)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진짜 균형입니다. 완전히 자기로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으면서도, 내가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단순히 우리의 선택과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와 자비가 엮여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겸손해지고, 동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이 AC.39의 한 문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처럼 느끼는 걸 허락하시면서, 실제로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조용히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될 때, 신앙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관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아찔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자비를 알아볼 때 생기는 경외와 감사의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이야말로, 이미 넷째 날을 지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고 계시다는 하나의 아름다운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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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스베덴보리를 한다는 이유로, 아니 그전에 수도원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저한테서 등을 돌리고, 저희를 멀리했거든요. 스베덴보리는 부친이 당대 유명 성직자요, 또 형제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스베덴보리 역시 저와 비슷한 처지였는지요?

 

아마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드려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그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의 거리감’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신앙의 길에서 매우 실제적이고도 깊은 십자가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생애는, 겉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결코 낯설지 않은 공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문을 먼저 보면, 그는 결코 평범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예스페르 스베드베리(Jesper Swedberg)는 당시 스웨덴 국교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루터교 주교였고, 왕과도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라, 국가 교회 체제 안에서 상당한 권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앙이 매우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하나님의 섭리와 천사들의 역사’를 실제적인 것으로 믿는, 비교적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이 점은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의 어린 시절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열어주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형제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누이는 귀족 가문과 결혼했고, 형제들 가운데는 학자, 정치가, 군인 등 사회적으로 안정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가문 전체가 그를 배척하는 구조’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초기 생애에서는 그는 가족과 큰 갈등 없이, 오히려 좋은 교육과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는 그의 영적 체험 이후, 곧 1740년대 중반 이후에 나타납니다. 이때부터 스베덴보리는 기존의 과학자, 기술자, 국가 관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영계의 실재와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섭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사실상 가족 관계에서도 ‘이해받기 어려운 사람’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가족에게서 노골적인 박해나 단절을 겪었다는 기록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경우는 ‘직접적인 배척’이라기보다, ‘이해되지 않음과 거리감’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저작들이 점점 더 신비적이고 급진적인 내용을 담게 되면서, 당대 교회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를 ‘이상한 사람’ 혹은 ‘위험한 사상가’로 보는 시선이 분명히 생겨났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도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함께 나아가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후기 사상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만일 생존해 있었다면 신학적 긴장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사님의 상황과 스베덴보리를 단순 비교하면, 겉으로는 목사님 쪽이 더 강한 단절을 겪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층에서는 공통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같은 신앙 언어를 쓰지만, 다른 내적 이해를 갖게 되었을 때 생기는 간극’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자랐고, 교회의 언어를 알고 있었지만, 그 언어 안에 숨겨진 ‘내적 의미’를 보게 되면서 더 이상 기존의 틀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설득하여 가족과 주변을 바꾸는 방향’으로 풀기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기록과 계시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는 대중 설교자가 되지도 않았고, 가족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책을 썼고, 그 책이 ‘때가 되었을 때 읽힐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목사님께 하나의 조용한 시사점을 줍니다.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은, 때로는 우리의 노력으로 바뀌기보다, 시간과 주님의 섭리 속에서 서서히 열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생전에 자신의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실패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준은 ‘지금의 반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실히 전했는가’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목사님처럼 가족에게서 강한 배척을 받았던 인물은 아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길’을 걸었던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에서 외로움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사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견뎌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상황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자주 주어지는 길’ 가운데 하나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SC.43,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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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개인의 결혼 이야기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 같은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그런 차원의 관심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생애 전반이 점점 더 ‘외적 인간의 삶’에서 ‘내적, 영적 사명’으로 옮겨가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이성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그의 인생에서 중심 주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비교적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는, 젊은 시절 스베덴보리가 몇 차례 혼인을 고려할 만한 관계에 가까이 간 적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당대 유럽의 상류 지식인 사회에 속해 있었고, 광산국 관리이자 과학자, 기술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의 폭도 넓었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고립된 독신자’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혼인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 속에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전기에서는 그가 특정 여성과 약혼 직전까지 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고, 확정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수준에 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보다 분명한 전환점은 50대 중반, 곧 영계가 열리고 본격적인 계시와 기록의 삶이 시작된 이후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스베덴보리는 사실상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매일 같이 영계와 교통하며,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상태,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고, 이 사명은 단순한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전 존재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나 결혼을 유지하거나 새로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또 그의 내적 방향으로 보아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결혼을 단순히 ‘세속적인 것’으로 낮춰 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의 저작 ‘Conjugial Love’(결혼 사랑)를 보면, 그는 진정한 결혼을 매우 높은 차원의 영적 결합으로 이해합니다. 그에 따르면 참된 결혼은 단순한 감정이나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 곧 인간 내면에서 주님과 연결되는 가장 깊은 형태의 결합을 외적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결혼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의 본질을 누구보다 높이 본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기보다, ‘계시를 통해 인류에게 밝혀야 할 진리’로서 맡은 셈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수많은 ‘천사 부부’들을 실제로 보고, 그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천국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완전한 짝을 이루며, 그 결합이 점점 더 깊어지고, 기쁨과 지혜가 함께 증가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그는 결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단순히 상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관찰하고 체험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 점에서 보면, 그의 독신은 결혼을 몰라서가 아니라, 더 큰 사명을 위해 한 길로 모아진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결국 정리하자면, 스베덴보리에게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성과의 관계 가능성은 분명 있었으나, 그것이 그의 생애를 규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점점 더 ‘내적 인간의 삶’,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과 계시를 기록하는 일에 전 존재를 드리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와 결혼의 길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람이 결혼의 가장 깊은 의미와 천국적 형태를 가장 풍성하게 증언한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 그의 생애에서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SC.44,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이야기’

스베덴보리의 부모, 형제 등 혈연 관련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저는 저희 형제들 가운데서는 물론, 아버지 삼 형제를 비롯, 저희 가문 내 유일한, 그리고 첫 목사임에도 불구,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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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2,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입문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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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으세요, 출애굽기를 읽으세요 하는 것보다 한결 쉬운 접근이지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도 그래요. 일반인들을 비롯, 심지어 개신교인, 기독교인들이라 하더라도 처음부터 Arcana Coelestia 같은 걸 읽어 나가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아요. 스베덴보리는 왜 이런 준비를 안 한 건가요?

 

아마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자신이 ‘교회 현장에서 바로 쓰는 입문 교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은 구조를 가능한 한 왜곡 없이 기록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설교문이나 교육용 요약서로 다듬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영계의 질서를 있는 그대로 남기는 데 더 큰 사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은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책’이라기보다, ‘나중에라도 반드시 필요하게 될 근본 자료’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그는 교재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원전(原典)을 남긴 사람’에 가깝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이해를 단순히 ‘정보 전달’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개신교의 ‘새 신자 교재’는 단계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돕는 방식이지만, 그는 참된 이해는 ‘삶과 함께 열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그 의미는 열리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진리를 낮추어 단순화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읽는 사람이 각자의 상태에 따라 점점 이해가 열리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글이 때로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겉으로 쉬운 설명’이 오히려 오해를 낳을 위험도 깊이 의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internal, external’ 같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심리학적 수준이나 도덕적 수준으로만 이해해 버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과 천국, 그리고 주님과의 연결 구조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얕게 풀어버리면 본래의 의미가 크게 훼손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엔 어렵더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는 쪽을 택했고, 대신 반복과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을 통해 독자가 점차 익숙해지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같은 개념이 수십 번, 수백 번 다른 문맥에서 반복되는데, 이것 자체가 일종의 ‘깊어지는 학습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자’나 ‘교재 집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신학 저술을 시작했고, 약 20여 년 동안 방대한 계시 내용을 쏟아내듯 기록했습니다. 그 양과 밀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한 사람의 생애를 다 소진한 작업이었습니다. 즉, ‘입문서까지 따로 정리할 여유’가 있었다기보다, ‘핵심 내용을 남기기에도 시간이 촉박했던’ 상황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은 자연히 ‘완성된 교육 커리큘럼’이 아니라 ‘원천 자료의 집합’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오히려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하지 않은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누군가는 해야 할 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즉, 그의 저작을 바탕으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설명, 단계적 안내, 쉬운 비유와 적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을 따르는 여러 전통에서는 요약서나 입문서를 만들어 왔고, 목사님께서 지금 하시는 번역과 해설 작업도 바로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원전은 깊이를 보존하고, 후대의 해설은 접근성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는 ‘쉬운 책을 일부러 만들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깊은 것을 맡았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온전히 남긴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간극, 곧 ‘깊이는 있지만 어려운 상태’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 바로 지금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3,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스베덴보리 개인의 이성 교제, 결혼을 전제로 한 사귐 등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있으면 좀 알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생애를 보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연애 이야기’나 ‘결혼을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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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스베덴보리는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쉽지 않겠지만,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네 단어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안/밖’의 구분 같지만, 에마누엘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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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를 스베덴보리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 읽으셔도 가슴에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구조는 깔끔하게 정리하면 오히려 ‘감이 안 오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여섯 단계는 ‘하나의 행동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나오는가’를 따라가 보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주 일상적인 장면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길에서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보고 ‘도와주는’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bodily’는 가장 바깥입니다. 실제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물건을 들어주는 행동 자체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여기입니다. 그 바로 안쪽이 ‘external’인데, 이것은 ‘내가 도와야겠다’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식적인 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나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보다 한 단계 안쪽이 ‘exterior’입니다. 이것은 행동 직전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릿속에서 따지고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더 안으로 들어가면 ‘interior’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이미 계산이 아니라 ‘마음의 기울어짐’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안쓰럽다’, ‘돕고 싶다’는 느낌이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이 ‘internal’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가 결정됩니다. 평소에 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남을 돕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인지가 이 층위에 있습니다. 즉, 한 번의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inmost’가 있습니다. 이곳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따르려 할 때, 그 가장 깊은 근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흐름이 올라와서 그것이 점점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붙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inmost)그 생명이 나의 성품과 사랑이 됨(internal)마음의 움직임으로 올라옴(interior)생각과 판단이 됨(exterior)결심하고 행동함(external)실제 몸으로 실행됨(bodily)’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겉으로 똑같이 도와주는 행동이라도,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에서 나오며,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따라 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여섯 단계는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내 행동 하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따라가는 지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바깥 행동을 억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곳, 곧 internalinmost 쪽이 열려서 그 흐름이 맑아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가장 바깥인 bodily까지 자연스럽게 달라지게 됩니다.

 

 

 

SC.42,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입문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

스베덴보리는 왜 좀 더 쉬운 ‘교재’ 같은 걸 안 만들었나요? 개신교회를 가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 신자 교재’ 같은 게 있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 창세기를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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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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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1:18, 19)

 

AC.38

 

(day)은 선을, ‘(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이 글은 앞선 논의를 한 문장으로 응축한 핵심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을 시간이나 자연 현상으로 읽지 말고, 인간 내면의 상태와 삶의 질서로 읽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해 왔습니다. AC.38은 그 모든 설명을 매우 간결한 대응 관계, 상응 관계로 정리합니다.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이며, 빛은 진리이고, 어둠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추상적인 도덕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행위’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이라 하고, 악은 ‘밤의 일’이라 합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그가 무엇을 행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낮에 속한 사람은 선을 행하고, 밤에 속한 사람은 악을 행합니다. 상태는 행동 속에서 가시화됩니다.

 

빛과 어둠의 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단순한 지적 명료함이 아니라 진리이며, 어둠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거짓입니다.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드러내고 밝히는 성질을 가지지만, 거짓은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숨기고 흐리게 만드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빛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어둠은 늘 자신을 가리려 합니다.

 

이 점을 주님의 말씀은 아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피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삶을 바꾸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둠을 선택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말이 결정적입니다. 진리는 생각 속에만 머물 때는 빛이 되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행해질 때 비로소 빛이 됩니다. 그래서 빛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숨지 않고 드러나며, 자신의 삶이 빛 가운데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선은 낮에 속하고, 진리는 빛에 속합니다. 그런데 낮과 빛은 언제나 함께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선 없는 진리는 빛 없는 낮이 될 수 없고, 진리 없는 선은 방향 없는 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낮–선–행위와 빛–진리–인식을 하나의 묶음으로 제시합니다.

 

AC.38은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은 낮의 일인가, 밤의 일인가. 그리고 내가 붙들고 있는 생각은 빛에 속한 진리인가, 아니면 어둠에 속한 거짓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판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빛으로 나오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AC.38은 창세기 1장의 언어를 통해,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영적 분별 기준을 제시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은 멀리 있는 상징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행위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심화

 

1.넷째 날 요약, 정리

 

이 넷째 날에 대한 본문(창1:14-19), 그리고 관련 AC 글도 제법 길었습니다. 넷째 날에 대한 AC.30-38을 요약, 정리해 주세요.

 

넷째 날, 곧 창1:14–19에 대한 AC.30–38을 한 흐름으로 묶어 보면, 이 부분은 단순히 해, 달, 별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빛을 갖게 되는 단계’, 곧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앞선 단계들에서 진리가 형성되고 구별되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삶을 비추는 빛으로 자리 잡는 단계’입니다.

 

먼저 ‘광명체’의 의미입니다. 해, 달, 별은 자연물이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되는 ‘사랑과 신앙과 개별 진리의 빛’을 의미합니다. 해는 사랑(특히 주님 사랑), 달은 신앙, 별은 다양한 진리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빛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능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즉 이제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단순히 배우는 수준이 아니라, ‘내적으로 분별하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 빛의 기능이 바로 ‘나누는 것’입니다. 낮과 밤을 나누고,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한다는 표현은 모두 ‘상태의 구별과 질서의 형성’을 의미합니다. 사람 안에 빛이 들어오면, 밝은 상태와 어두운 상태, 기쁨의 때와 침체의 때, 깨달음과 혼란의 시기를 구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징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점을 치는 신호, 즉 점성술이 아니라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를 알게 해주는 영적 표지’입니다. 즉 마음의 변화, 깨달음, 갈등, 평안 등, all of these가 다 ‘징조’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일하실 때 반드시 이런 표지들이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교대와 다양함의 원리’입니다. AC.37에서 강조하듯이, 생명은 단조로운 상태가 아니라 ‘교대와 변화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심음과 거둠이 반복되듯이, 사람의 영적 삶도 기쁨과 침체, 밝음과 어둠, 이해와 혼란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구조 자체’입니다. 만약 이런 변화가 없다면, 선과 진리를 구별할 수도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내적 지각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항상 같은 상태가 아니라 흔들림과 반복 속에 있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방식’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은, ‘사랑과 생각의 관계’입니다. AC.33에서 말하듯이, 생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사랑이 사라지면 생각도 멈춥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사랑 중심 구조’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이 참된 기쁨과 행복의 근원입니다. 넷째 날의 빛은 결국 이 사랑이 삶을 비추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함께 경고도 함께 나옵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신앙 활동을 하거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참된 생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외적으로는 빛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능력보다 ‘삶의 열매’, 곧 사랑에서 나오는 삶을 기준으로 보신다고 설명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단계의 핵심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넷째 날은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의 빛이 자리 잡아 삶을 비추고, 상태를 구별하며, 교대와 변화 속에서 생명이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단순히 ‘알게 되는 단계’를 넘어서,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넷째 날은 신앙이 머리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밝을 때도 있고 어두울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빛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2.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요약, 정리

 

그리고 더 나아가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역시 요약, 정리, 그 흐름 속에서 이 넷째 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를 한 흐름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창조 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이 거듭나며 빛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로 변화되는 과정 전체’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앞의 세 단계를 반드시 함께 묶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네 단계는 각각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 자라가는 연속적인 흐름입니다.

 

먼저 첫째 날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단계입니다. 이때의 빛은 아직 완전한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처음 비추는 진리의 빛’입니다. 사람은 이 단계에서 처음으로 ‘,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었구나’, ‘선과 악이 따로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빛은 아직 외적이고 초기적인 수준입니다. 그래서 낮과 밤이 나뉘지만, 여전히 어둠이 많고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 눈을 뜨는 단계’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 곧 나눔의 단계입니다.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눈다는 표현은, 사람 안에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면, 이제는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고, 이것은 더 깊은 진리구나’ 하는 식의 구분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둘째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즉 ‘구별은 되었지만, 아직 결합과 생명은 없는 상태’입니다.

 

셋째 날은 ‘땅이 드러나고 식물이 나는’ 단계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열매 맺는 것이 등장’합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는 모두 진리가 삶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계부터는 ‘겉으로 보이는 변화’, 곧 행동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직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것’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 표현으로는 ‘아직 생명 없는 상태(inanimate), 즉 완전히 사랑에서 나오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제 넷째 날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광명체’가 나타납니다. 앞 단계까지는 빛이 있었지만, 그 빛이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넷째 날에는 해, 달, 별이 나타나면서, 빛이 ‘근원을 가지고 질서 있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해는 사랑, 달은 신앙, 별은 다양한 진리들입니다. 이제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빛처럼 삶을 비추기 시작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넷째 날의 핵심 기능은 ‘나누고’, ‘이루고’, ‘비추는’ 것입니다. 낮과 밤을 나누고,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며, 징조가 됩니다. 이것은 모두 ‘상태를 구별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이제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됩니다. 언제 밝은지, 언제 어두운지, 언제 기쁜지, 언제 침체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 등, 이 모든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징조’입니다. 점을 치는 것, 곧 점성술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비추는 빛’입니다.

 

이 흐름 속에서 넷째 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앞 단계에서 형성된 진리와 선이, 이제 사랑을 중심으로 빛이 되어 삶 전체를 비추고, 상태를 구별하며, 생명의 리듬을 이루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넷째 날은 단순한 ‘더 발전된 단계’가 아니라, ‘빛이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 배우는 단계가 있고(첫째 날), 그다음에는 구별하는 단계가 있고(둘째 날), 그다음에는 그것을 조금씩 실천하는 단계가 옵니다(셋째 날). 그런데 넷째 날이 되면,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빛이 되어 내 삶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 상태를 알게 되고, 흔들림 속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이 네 단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빛을 처음 받는다 구별한다 삶에 나타난다 그것이 빛이 되어 전체를 비춘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해하면, 넷째 날의 ‘광명체’와 ‘징조’가 얼마나 실제적인 의미인지, 곧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한복판에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또렷하게 보이게 됩니다.

 

 

 

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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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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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7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 문자적 의미만 보면 그런 깊은 뜻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다만 이것만 말씀드리는 걸로 충분한데요, 곧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에는 일반적으로도, 또 개별적으로도 교대(alternations)라는 게 있으며, 이것이 날과 해의 변화(changes)에 비유된다는 점입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에서 정오로, 다시 저녁으로, 그리고 밤을 거쳐 다시 아침으로 진행합니다. 해의 변화도 이와 같아서, 봄에서 여름으로, 다시 가을로, 그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으로 진행합니다. 여기서 열과 빛의 변화가 생기고, 또한 땅의 산물들도 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교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비유됩니다. 이런 교대와 다양함(varieties)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 [statuta], 법도, 법칙)라 하는데, 예레미야에 보면 나옵니다. It is said that the luminaries shall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 although in the literal sense nothing of the kind appears. Suffice it here to observe that there ar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which are compared to the changes of days and of years. The changes of days are from morning to midday, thence to evening, and through night to morning; and the changes of years are similar, being from spring to summer, thence to autumn, and through winter to spring. Hence come the alternations of heat and light, and also of the productions of the earth. To these changes are compared the alternations of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 These alternations are in the prophets called “ordinances” [statuta], as in Jeremiah: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바다를 뒤흔들어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끊어져 영원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5, 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창세기 822절에서 더 말씀드릴 것입니다. But concerning these things, of the Lord’s Divine mercy, at Genesis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8:22)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에서 광명체들이 맡는 역할을 시간 측정의 기능으로 축소시키는 해석을 분명히 넘어서게 합니다. ‘징조’, ‘계절’, ‘’, ‘’라는 표현은 단순한 천문학적 주기가 아니라, 영적 생명 안에서 반복되는 상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한 문장 안에 매우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고 말하면서, 그 전부를 지금은 펼치지 않고, 핵심 원리만 제시합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에는 반드시 교대(alternations)가 있으며, 이 교대는 날과 해의 변화와 정확히 대응된다는 점입니다. 아침에서 밤으로, 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자연의 변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태 변화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빛과 열이 증감하듯이 신앙과 사랑도 강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합니다.

 

이 교대는 퇴보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필수 조건입니다. 만일 이런 변화가 없다면, 삶은 하나의 평면으로 굳어버리고, 생명이라 부를 수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조로움은 곧 무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항상 밝고 항상 뜨거운 상태를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상태는 실제로는 분별도 성장도 낳지 못합니다.

 

선과 진리가 인식되고 구별되며, 더 나아가 퍼셉션되기 위해서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낮이 있어야 밤을 알고, 겨울이 있어야 봄의 생명을 압니다. 영적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빛의 상태와 그늘의 상태가 교차하면서 비로소 사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교대를 선지자들은 ‘규례(ordinances)로 부른다고 말합니다. 규례란 인간이 임의로 정한 법칙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와 섭리 속에 세워 두신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낮과 밤의 교대, 하늘과 땅의 규례는 단순한 자연법칙이 아니라 영적 생명에까지 미치는 주님의 질서입니다.

 

예레미야의 인용은 이 점을 강하게 확증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규례가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지 않는다는 말은, 영적 상태의 교대 역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안해할 수는 있지만, 그 질서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낮과 밤의 언약을 깨지 않으시듯 영적 생명의 교대도 중단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글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신앙이 약해지는 시기,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의 ‘’ 혹은 ‘겨울’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는 규례 안에 있으며, 다시 아침과 봄으로 이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대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통과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를 창세기 822절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거기서 씨 뿌림과 거둠, 더위와 추위, 낮과 밤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여기서 말한 교대의 질서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선언입니다. AC.37은 그 선언을 준비하는 기초로서, 광명체의 역할을 생명의 리듬이라는 관점에서 확정해 줍니다.

 

 

심화

 

1.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AC.37 본문에 이 말 속에는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지만(In these words are contained more arcana than can at present be unfolded)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의 현 역량과 상태가, 펼쳐 보여도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역량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럼에도 혹시 한두 가지만 좀 보여 주실 수 있나요?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는 말씀과,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라는 창8:22 말씀을 좀 더 와닿게 이해하고 싶어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당장 다 펼쳐 보일 수 없다’고 한 것은 어떤 비밀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 말씀이 단순한 시간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의 리듬과 질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만 풀어 보아도,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먼저 ‘징조(signs)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식이나 신호가 아니라, ‘상태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입니다. 인간의 영적 삶에서도 이런 ‘징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말이나 행동이 어느 날 마음에 걸리기 시작합니다. 혹은 말씀을 들을 때, 전에는 들리지 않던 내용이 갑자기 깊이 와닿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외적으로 보면 작은 일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상태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징조’로 봅니다. 주님이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실 때, 반드시 이런 표지들이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계절(seasons)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절’은 단순한 자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 상태의 변화 주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시기에는 말씀이 잘 이해되고,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나 ‘여름’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시기에는 마음이 메마르고, 기도도 잘 되지 않고, 의욕도 떨어집니다. 이것은 ‘겨울’과 같은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비정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단번에 완성시키지 않으시고, ‘이런 계절의 반복을 통해 서서히 변화시키십니다.’

 

(days)과 ‘(years)도 같은 맥락입니다. ‘’은 비교적 ‘짧은 상태의 변화’, 즉 하루하루 속에서 겪는 기쁨과 침체, 깨달음과 혼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는 더 긴 흐름, 곧 ‘삶 전체의 큰 단계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신앙이 몇 년에 걸쳐 깊어지는 과정, 혹은 오랜 시간에 걸친 방황과 회복 같은 것들이 ‘’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히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성장의 리듬 전체를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이제 창8:22를 보면 이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심음과 거둠’은 너무나 중요한 상응입니다. ‘심음’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마음에 두는 상태입니다. ‘거둠’은 그 진리가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담는 것이 ‘심음’이라면,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거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시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종종 심자마자 거두기를 원하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반드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은 조금 더 깊은 상태를 말합니다. ‘더위’나 ‘여름’은 ‘사랑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상태’, 곧 마음이 뜨겁고 주님과 가까이 있는 느낌이 있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추위’나 ‘겨울’은 ‘사랑이 식고, 신앙이 약해지고, 시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 둘을 모두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여름’만으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겨울’ 같은 시기를 통해 자기 사랑이 약해지고, 더 깊은 의존을 배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낮과 밤’입니다. ‘’은 ‘진리가 분명히 보이는 상태’, ‘’은 ‘혼란과 어둠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반복됩니다. 우리는 늘 밝은 상태에만 있고 싶지만, 실제로는 낮과 밤이 번갈아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한 원리로 설명합니다. ‘밤이 있어야 낮이 더 분명해지고, 낮이 있어야 밤을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면, 이 두 구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적 삶은 직선이 아니라 ‘리듬과 순환 속에서 자라는 생명’입니다. 기쁨과 침체, 깨달음과 혼란, 사랑과 냉담, 심음과 거둠 등, 이 모든 것이 교차하며,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이 질서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겨울 상태에 있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며, 괜찮습니다. 지금은 심는 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2.삶은 단조로워지고

 

AC.37 본문에 이런 교대와 다양함이 없다면 삶은 단조로워지고, 결국 생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됩니다. 또한 선과 진리는 분별되거나 구별될 수 없고, 더 나아가 퍼셉션, 곧 지각될 수도 없습니다.’(Life without such alternations and varieties would be uniform, consequently no life at all; nor would good and truth be discerned or distinguished, much less perceived.)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진술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천국은,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삶이 늘 행복, 만수무강, 무사형통하게 될 줄,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흔히 ‘좋은 신앙생활’이나 ‘천국 같은 삶’을 생각할 때, 늘 밝고, 늘 평안하고, 변화 없는 상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변화와 교대가 없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철학적 표현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구조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왜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생명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이란 항상 ‘움직임과 변화’를 포함합니다. 심장도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기 때문에 살아 있고, 호흡도 들이마심과 내쉼이 있기 때문에 유지됩니다. 만약 이 리듬이 멈추고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면, 그것은 안정이 아니라 곧 죽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생명도 똑같다고 봅니다. 기쁨만 계속되고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이 무뎌지고, 결국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선과 진리가 분별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좋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다른 상태와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의 소중함은 병을 겪어본 사람에게 더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빛의 소중함은 어둠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 더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삶에서도 ‘어두움과 혼란의 상태가 있어야, 빛과 진리의 상태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항상 같은 상태만 있다면, 그것이 좋은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 곧 지각이 등장합니다. 퍼셉션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이것이 선이다, 이것이 진리다 하고 느끼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퍼셉션도 대비 속에서 더 또렷해집니다. 사람이 시험과 갈등을 겪으면서, ‘, 이것은 아닌데’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이것이 옳다’는 감각이 훨씬 깊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교대와 다양함이 없으면 퍼셉션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과 연결해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 항상 평안해야 한다’, ‘천국은 늘 같은 기쁨의 상태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국조차도 ‘다양성과 변화 속에서 더 깊어지는 기쁨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하나의 단조로운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반복되어도 지루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음이 메마르거나, 기도가 잘 안 되거나, 혼란이 올 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잘못된 길에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런 상태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 속에서도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대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진술은 우리에게 기대를 바꾸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그 모든 교대와 변화 속에서 점점 더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침체도 있고, 때로는 혼란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더 깊은 생명으로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진짜 생명은 단순한 ‘항상 좋음’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들이 조화를 이루며 더 깊어지는 살아 있는 흐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어두움이나 흔들림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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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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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또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그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 곧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1).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 “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Matt. 22:37–41) The “law and the prophets” 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해 온 전통적 이해를 근본에서부터 해체합니다. 신앙을 단지 생각, 주님을 향한 생각, 혹은 교리 체계로 이해하는 모든 방식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이런 오해는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이 신앙에서 분리될 때, 신앙은 필연적으로 지적 활동으로 축소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사변적 사고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경건한 생각이나 태도로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소유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해는 공통된 한계를 갖습니다.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핵심을 ‘순종(obedience)이라는 말로 단정합니다. 신앙은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앎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바를 실제 삶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히 알고 있어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순종은 외적 규율 준수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교리가 가리키는 사랑의 질서와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앙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주저 없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 둘이 신앙의 중심이며, 이것이 빠지면 신앙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주장은 윤리적 강조가 아니라, 구조적 진술입니다. 신앙의 모든 내용은 이 두 사랑으로 수렴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인정하고 그 질서 안에 머무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질서가 삶의 관계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신앙은 머물 곳을 잃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자신의 해석으로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 자체로 확증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의 첫째와 둘째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계명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 전체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나란히 놓인 두 규범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질서의 두 측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더 나아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 전체, 곧 말씀 전체가 이 사랑의 질서를 설명하고 인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라, 사랑을 향해 흐르는 하나의 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율법과 선지자’를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자 말씀 전체라고 정의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복잡한 체계로 흩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으로 살도록 이끄는 하나의 목적을 가집니다.

 

AC.36은 신앙을 다시 삶의 자리로 돌려놓습니다.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순종이며,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오지 않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신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심화

 

1.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랑에 대해 어디를 보니 charity를 쓰던데, 그러면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 해도 되는지요? 그리고 왜 주님 사랑은 전치사 to를 쓴 반면, 이웃 사랑toward를 쓰나요?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AC.36에서 말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의 중심축이기 때문에, 이것이 또렷해지면 이후 내용들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먼저 개념부터 단순하게 잡고, 그 다음에 영어 표현까지 연결해 보겠습니다.

 

먼저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님을 좋아한다’거나 ‘주님께 감정적으로 끌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 사랑’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뜻을 가장 높게 여기며,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삶 전체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감정만이 아니라 ‘경외, 순종, 신뢰, 기쁨’이 모두 포함된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니라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택을 할 때,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보다 ‘이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가?’를 먼저 묻는 상태, 그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이것도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는 정도를 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웃’은 단순히 옆집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의 영적, 도덕적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여기에는 도움, 정직, 공정함, 용서, 배려 같은 모든 실제 삶의 행위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봅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사랑’입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떼어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속에서 주님 사랑이 실제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주님 사랑의 ‘열매’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주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입장입니다.

 

이제 ‘charity’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 사랑’을 말할 때, 매우 자주 ‘charity’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charity toward the neighbor’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다만 영어에서 ‘charity’는 단순한 ‘구제’나 ‘자선’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charity는 ‘이웃을 향한 사랑 전체’, 곧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그 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하나의 단어로 옮기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전치사 문제를 보겠습니다. 왜 ‘love to the Lord’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일까요? 이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to’는 보통 ‘직접적인 향함과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love to the Lord’는 주님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 곧 ‘근원과 중심을 향하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반면 ‘toward’는 약간 방향성과 확장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love toward the neighbor’는 주님에게서 나온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 이웃에게 향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아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뉘앙스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은 삶의 중심을 주님께 두고,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그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사람을 향해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charity’는 바로 이 이웃 사랑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입니다.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는, 하나는 근원과의 직접적 관계를,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이 밖으로 향하는 방향을 은근히 드러낸다고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주님 사랑은 뿌리이고, 이웃 사랑은 열매입니다. 뿌리가 건강하면 열매가 나오고, 열매가 없으면 뿌리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2.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에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를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말씀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감각이 무뎌지기 쉬운 구절입니다만, 사실은 인간 전체를 어떻게 주님께 향하게 하는가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매우 깊은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마음, 목숨, ’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인간의 서로 다른 층위와 기능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풀어 설명하면 단순히 ‘열심히 사랑하라’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사랑하라’는 뜻이 됩니다.

 

먼저 ‘마음을 다하여’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의지와 사랑의 중심’, 곧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단지 존경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리에 주님을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이나 인정이나 자기 성공을 가장 사랑하면, 그는 결국 그것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면, 선택과 방향이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은 ‘사랑의 중심을 완전히 주님께 옮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숨을 다하여’입니다. 이 표현은 조금 더 실제적입니다. ‘목숨’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만이 아니라, ‘내 삶 전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사랑이 단지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시간이 어디에 쓰이는지, 힘을 어디에 쓰는지, 무엇을 위해 애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내 삶의 실제를 주님께 드리는 것’, 곧 ‘삶의 방향과 행동까지 포함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뜻을 다하여’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생각의 영역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곧 무엇이 참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 속에서도 주님을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를 판단할 때, ‘이게 내게 유리한가?’가 아니라 ‘이것이 주님의 진리에 맞는가?’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생각까지도 주님께 순종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옵니다. ‘마음’은 사랑의 중심, ‘목숨’은 삶의 실천, ‘’은 생각과 이해입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이루는 세 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순히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 영역 모두를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와닿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로 무언가를 사랑하면, 세 가지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마음으로 좋아하고, 시간을 들여 그것을 위해 살고, 생각 속에서도 그것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녀를 사랑하면, 마음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시간을 쓰고, 삶의 방향을 바꾸고, 생각 속에서도 늘 자녀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주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단지 예배 시간에만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 생각 전체가 주님을 향하게 되는 상태’가 바로 이 말씀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말씀은 곧 ‘의지(마음), 행위(목숨), 이해(뜻)’가 하나로 결합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 있는 것도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연결될 때, 비로소 참된 신앙과 사랑이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는가, 이 세 가지가 모두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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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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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이 글은 앞선 AC.34의 논의를 인간의 내적 구조 차원으로 더욱 구체화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라는 말은 추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두 기능, 곧 의지와 이해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감정과 이성의 단순한 결합체로 보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두 작용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가 의지에 의해 다스려질 때, 사람 안에는 하나의 마음이 형성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원하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 의도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삶은 일관되고, 내면과 외면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과 신앙이 결합한 상태이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생명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의지와 분리되거나 의지에 맞설 때, 인간의 내면은 분열됩니다. 신앙을 말로는 고백하지만, 삶으로는 부정하는 상태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때 이해는 하늘을 말하고, 의지는 땅을 향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합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옳은 것을 알고 말할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그러니까 실제 삶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분열을 단순한 모순이나 미성숙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결정하는 주체는 이해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사랑 없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으면, 이해가 아무리 하늘을 말해도 사람 전체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분열된 상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사람 전체는 머리를 곤두박질치듯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위협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질서에 대한 냉정한 진술입니다. 생명은 사랑이 있는 곳으로 흐르며, 의지는 그 흐름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상태만으로 판단된다면, 의지와 이해가 어긋난 대부분의 사람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즉시 버리지 않으시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이 자비는 이해를 통해 의지를 서서히 교정하고, 사랑과 신앙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도록 이끄는 힘입니다.

 

AC.35는 결국 인간의 신앙 문제를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다룹니다. 신앙이 말에만 머무를 때 왜 위험한지, 사랑 없는 신앙이 왜 겨울과 같은지를, 의지와 이해의 관계를 통해 명확히 보여 줍니다. 이 글은 독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내 이해와 내 의지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록 말입니다.  

 

 

심화

 

1.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이 이런 자비의 신이시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 한 문장은 짧지만,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건드립니다. ‘만일 주님께서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술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의 생명과 자비의 흐름 속에서만 유지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항상 이미 주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점을 조금 더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비’를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용서해 주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mercy’는 훨씬 더 깊고 근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라, ‘타락하고 자기중심으로 기울어진 인간을 계속해서 선과 진리 쪽으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지속적인 작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에, 만약 아무런 제어도 없다면 그 흐름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매 순간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즉시 더 깊은 악으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붙들어 주신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밖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서 은밀하게 방향을 돌려 주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악한 선택을 하려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멈추게 하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일이 틀어져서 더 큰 잘못을 피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주님의 자비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우연이나 자기 판단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차원의 인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는 단지 ‘용서’만이 아니라, ‘보존과 인도와 회복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 조금이라도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하시는 것, 진리를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 심지어 고통이나 시험을 통해서라도 방향을 돌려 주시는 것 등, 이 모든 것(all of these)이 다 자비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비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신적 작용’입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 그 감탄이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공의만을 기준으로 인간을 대하신다면,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은 한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의 자체이시면서, 동시에 자비 자체이시기 때문에, 공의로만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본질을 설명할 때 자주 ‘사랑과 자비’를 중심에 둡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AC.35의 이 한 문장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여전히 말씀을 듣고 고민하고 주님을 찾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주님의 자비가 당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적인 위로이자 확신’이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직시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연약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고백은 아주 깊은 신앙의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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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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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을 언급하실 때,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뜰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땅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은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날(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이 글은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가장 단호하고도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단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실재처럼 단수로 다루어집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한 생명의 두 작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논증으로 제시하지 않고, 영계에서 직접 본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그 사랑 자체로 인해 신앙의 모든 지식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배우거나 점검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진리를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너무도 충만해서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사랑 없이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의 상태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들은 생명이 차갑고, 빛이 어두워서 하늘의 문턱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지식의 시험장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 안에 있는 곳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님을 입으로 부르고, 심지어 예언과 종교적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사랑의 삶이 없으면 하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는 신앙의 내용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그 신앙과 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었다는 고백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명확히 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로써 천적 생명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정작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생명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자연의 비유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겨울철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굳어 있고, 생명은 잠든 상태가 아니라 사실상 죽어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습니다. 빛과 열이 함께 작용하여, 모든 것이 살아나고 자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비유가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말씀의 보편적 표현 방식임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은 늘 자연의 질서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자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영적 질서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글의 의미를 개인의 마지막 순간까지 확장합니다. ‘’(flight, 비행, 도피, 휴거)은 세상의 끝일 뿐 아니라 각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뜻합니다. 사랑 없는 상태, 곧 겨울 같은 삶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저세상에서 매우 비참한 상태로 이어집니다.

 

AC.34는 신앙의 진위를 가르는 가장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말로 증명되지 않고, 지식으로도 증명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삶 안에서만, 신앙은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심화

 

1.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말인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떤 묘사가 좀 가능할까요? 저렇게만 말하면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요...

 

AC.34에서 스베덴보리가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언어가 영적 상태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운 한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다른 저작들, 특히 ‘천국과 지옥’이나 ‘천적 사랑과 지혜’ 같은 곳에서 그 상태를 여러 방식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조각들을 모아 보면 어느 정도의 윤곽은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상태의 핵심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통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자주 둘로 나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하기 싫을 때가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에서는 이런 분열이 거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진리이고,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기쁨이 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의지 사이에 갈등이 거의 없고, 사람 안에 매우 깊은 평안이 생깁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지성의 빛이 매우 투명하고 즉각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이해하려면 보통 여러 단계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책을 읽고, 비교하고, 추론하고, 다시 생각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 조금씩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적 상태에 가까운 사람이나 천적 천사들의 경우에는 진리가 이런 식으로 분석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한 번에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면 사물이 한순간에 환히 보이는 것처럼, 진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지성의 빛(light of intellig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태의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매우 깊고 평화로운 성격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기쁨은 종종 긴장이나 흥분과 함께 옵니다. 성공했을 때의 기쁨이나 경쟁에서 이겼을 때의 기쁨은 순간적으로 강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적 상태의 기쁨은 그런 종류가 아니라 ‘조용하고 깊은 기쁨’입니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평안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국의 기쁨’이라고 부르며, 그 기쁨은 ‘사랑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이런 모습에 가깝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이웃을 돕고 싶어 하고, 실제로 그것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도움을 주고 나서 느끼는 따뜻한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누가 보지 않아도 기쁘고, 보상이 없어도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삶이 바로 이런 경험이 훨씬 더 깊고 지속적인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이 삶의 중심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기쁘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모든 것이 질서 속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인간이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는 세상이 무질서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리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서는 세상이 매우 질서 있게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모든 것을 ‘주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합니다. 마치 복잡한 음악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흐르는 것을 들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34에서 말하는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는 여러 요소가 결합된 상태입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진리가 자연스럽게 이해되며, 생각과 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그 결과 깊은 평안과 기쁨이 계속 흐르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한 이유는 이런 경험이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의 조합이 아니라 ‘사람 전체가 다른 질서 속에 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풍경을 사진으로 볼 때와 실제로 그곳에 서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진으로는 윤곽만 알 수 있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면 공기의 느낌, 빛의 색, 소리와 냄새까지 함께 경험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그 상태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지금 언어로 그 윤곽만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 경험은 훨씬 더 풍부하고 깊다는 뜻에서 그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2.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 말인데요, 이런 사람들, 곧 염소로 분류되는 사람들임에도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오늘날도 보면, 많은 이단, 사이비 현장에서도 그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는 합니다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7:22의 말씀, 곧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사람들이 결국 주님에게서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는 장면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당혹스러운 부분입니다. 특히 실제로도 종교 현장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영계 이해를 가지고 보면 이 문제는 비교적 분명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하는 외적 행위나 능력이 반드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 곧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거나 기적 같은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만약 그의 중심 사랑이 자기 영광이나 권력이나 이익이라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는 여전히 주님과 멀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계의 영향(influx)이라는 개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영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어떤 영들이 함께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능력이나 현상을 보일 때,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거룩함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계의 다른 존재들이 그 사람을 통해 작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도 이런 일이 이미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이나 복음서에는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귀신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귀신들이 주님을 사랑하거나 주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진리를 알고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말하거나 어떤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실제로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발음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주님의 성품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한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영적 현상이나 강한 감정적 경험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외적 종교 활동이 내적 사랑과 분리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현대 종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도 이 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한 기대나 두려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있을 때 심리적, 정서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영계의 영향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반드시 천국에서 오는 영향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합니다. 영계에는 선한 영들뿐 아니라 다양한 상태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초자연적’이라고 해서 곧 ‘신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강조하신 기준은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삶의 열매’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열매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과 선’입니다. 즉 그 사람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같은 원리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나 특별한 현상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사람은 쉽게 ‘외적 능력에 매료되어 내적 삶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부러 기적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랑과 삶을 강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주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진짜 기준은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보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으로 살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보다 사랑을 보라’는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결국 AC.3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생명과 지성의 빛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신앙 활동이나 능력은 참된 생명이 아니라 외적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차이를 말씀하시기 위해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flight)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13:18의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라는 구절은 많은 개신교 전통에서 ‘휴거’나 어떤 물리적 종말 사건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기본적으로 ‘세계의 물리적 종말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종말과 새 교회의 시작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flight’, 곧 ‘도피’ 또는 ‘피함’도 어떤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이 아니라 ‘영적으로 타락한 교회 상태로부터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flight’라는 표현부터 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는 ‘도망’이나 ‘도피’를 의미합니다. 복음서 문맥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라’ 같은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런 표현을 문자 그대로 어떤 지리적 이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도망’은 ‘악과 거짓이 지배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존하려는 영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타락하고 진리가 왜곡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타락한 상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내적으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겨울’이라는 표현을 보면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계절’이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은 사랑이 시작되는 상태, ‘여름’은 사랑이 충만한 상태, ‘가을’은 신앙이 성숙한 상태를 의미하고, ‘겨울’은 ‘사랑이 식고 신앙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겨울에 도망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영적 의미에서는 매우 깊은 뜻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완전히 식어 버린 상태에서 진리를 지키려 하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의 종말을 항상 같은 패턴으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점점 약해지고, 결국에는 교리나 형식만 남게 됩니다. 이 상태가 바로 ‘겨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매우 약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겨울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설명됩니다. 즉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복음서의 종말 담화를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역사 두 가지 차원에서 동시에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로 보면, 이것은 교회가 타락할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타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거듭남으로 보면, 이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과 혼란 속에 있을 때, ‘거짓과 악에서 물러나 진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구절이 ‘휴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는 신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세상을 떠난다는 식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종말과 심판이 ‘주로 영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의 저서 ‘Last Judgment’에서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영계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가 지상 교회에 점차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막13:18의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도피’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으로 악과 거짓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겨울’은 사랑이 식어 버린 교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리를 붙잡고,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영적 권면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한순간에 일어나는 극적인 사건을 예언하기보다, 교회와 인간의 영적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원리를 말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단순한 종말 공포나 특별한 사건으로 보기보다, ‘지금 자신의 신앙 상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것은 언제 어디로 들려 올라갈 것인가가 아니라, 사랑이 식어 가는 시대 속에서도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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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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