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는 natural, spiritual, celestial(heavenly)로 표기할 수 있는 이 세 종류의 상태는 곧 사람을 영적으로 구분한 상태이며, 각각 일층천, 이층천, 삼층천에 상응하지만, 한편으론 ‘거듭남’의 관점에서 본 구분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건 거의 책을 쓰는 수준이 될 것 같아 아주 단순하게 비유적으로만 살짝 말씀드립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그래서 여전히 흙이 묻어 있고 아직 다듬지 않은 거친 채소나 농장의 과일, 그리고 육류나 생선 등의 식재료들의 상태, 바로 이 상태를 가리켜 자연적이라 하며, 영적으로는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창1:2의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 상태를 말합니다.
다음은 저런 식재료들을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상태, 이 상태를 가리켜 영적이라 하며, 창1:3-31의 천지창조의 육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를 말합니다. 첫째 날, 둘째 날... 등으로 구분한 이 순서를 따라 사람은 점점 성숙, 마침내 거듭남의 최종단계, 그러니까 이제 요리를 시작해도 될 단계가 됩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어도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아름다운 요리가 되려면 결정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 곧 창조주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이 사랑의 열로 변화된 최종 상태, 이 상태가 바로 천적이라는 상태입니다. 창2:1-17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4-9)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두 번째 시간으로, 원래 본문은 2장 4절로 17절, 제목은 ‘에덴동산의 속뜻’이지만 한 번에 다루기에는 너무 길어 세 등분, 3주에 걸쳐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 4절로 9절, ‘에덴동산’의 속뜻 (1)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과 인용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4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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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내력’(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은 천적 인간의 형성, 즉 천적 인간을 빚으신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이 천적 인간을 빚으심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모든 내용을 보면 아주 분명한데요,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이상 5절),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7절), 나중에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19절) 등 이들에 대한 지으심은 이미 앞 장에서 다룬 내용들임에도 불구, 여기서 다시 다루는 걸 보면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 사실들을 보면 더 분명한데요, 먼저 주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을 다룬 앞장에선 간단히 ‘하나님’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또 여기선 ‘땅’(ground)과 ‘들’(field)(5절)을 함께 언급하는 반면, 앞에선 ‘땅’(earth)만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오늘 본문 구절인 이 4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언급되다가 나중에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이는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 빚으심(reformation), 곧 개혁이 영적 인간의 경우는 ‘땅’, 즉 겉 사람에서 시작하지만, 천적 인간은, 지금 다루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데, 이 천적 인간의 경우에는 속 사람, 즉 ‘하늘’에서 시작한다는 것 등 이런 여러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여기는 또 다른 사람을 다루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창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과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창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인 ‘하나님’이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창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어떤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
5, 6절,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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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초목’(the shrub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the herb of the field)는 보통은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모든 걸 의미합니다. 겉 사람은 사람이 아직 영적(靈的, spiritual)일 동안은 ‘땅’(earth)이라고 하지만,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이 되면 ‘땅’(ground) 및 ‘들’(field)이라고 합니다. 바로 뒤에 ‘안개’(mist)로 언급되는 ‘비’(rain)는 싸움이 그친 뒤 오는 천국 평화의 평온함, 고요함(the tranquility of peace, the peaceful calm)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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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 이런 것들은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그 상태가 바뀌어 간다는 게 무엇인지를 먼저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지각할 수조차 없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아주 깊이 감춰진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영적 상태에 있는 동안은 겉 사람은 아직 속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하려 하거나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아직 일종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적 상태가 되면, 그때는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하고 섬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싸움도 그치고, 평온함이 시작되지요. (AC.87 참조)
※ 지난날 국민 드라마 ‘허준’(1999) 생각이 납니다. 거기 보면 주인공 허준과 그가 처음 몸담았던 경남 산청 유의태와 그의 아들 유도지, 그리고 유의태가 걷어 딸처럼 기르는 아름다운 예진 아씨가 나옵니다. 도지는 준의 걸출한 등장과 연모하던 예진의 마음이 준에게로 향하는 데 앙심을 품고 오랜 세월, 심지어 궁궐 내의원에 들어가서까지도 준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내의원으로서 함께 임금을 모시는 입장이면서도 사사건건 준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함께 노인이 된 후에는 진심으로 준을 아끼고 존경하며 따르게 되지요. 이 겉 사람, 속 사람 관계가 꼭 저들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87번 글 앞부분 인용입니다.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the sabbath), 즉 ‘쉼’(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치기 때문인데, 이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나기 때문이며, 그래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고, 또한 그동안 전투를 치른 장본인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쉬시는 것, 곧 주님이 ‘안식하시니라’(rested) 하는 것입니다... //
※ 거듭 성 프란치스코(1182(?)-1226)나 성 분도 요셉 라브르(1748-1783) 같은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이들의 전기를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들은 스베덴보리(1688-1772)를 알지도, 또 스베덴보리처럼 무슨 영계를 수십 년 왕래하며 체험한 바도 없지만, 그리고 지금 이런 아르카나도 접한 적 없지만, 참으로 겉 사람과 속 사람의 하나 됨, 합일에까지 이른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 ‘안개’가 바로 이 평온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증기와도 같아서 마치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수분 공급을 받아 촉촉해지는 것과 같지요.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라 하는 것들, 특별히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마음과 기억, 곧 이성적인 생각들과 팩트 기반 지식에 속한 것들이 이 평온함, 평화의 샘(the offspring of peace)에서 나옵니다.
※ 땅에 비가 내리고 안개로 축축해져야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가 자라듯 사람도 심령 상태가 평화, 평온해야 하늘에 기반을 둔 학습 능력과 합리적인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 이 번역의 일만 놓고 보아도 분명합니다. 나랏일과 여타 사적 일로 마음이 힘들면 번역도 잘 안 되지만, 심령이 평안하면 주님의 빛도 훨씬 더 환하게 느껴지며, 번역도 참 잘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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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거짓 때문에 생기는 싸움이나 불안이 사라질 때, 겉 사람이 맛보는 천국의 평화, 평온의 어떠함은 천국 평화의 상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제32장, ‘천국 안의 평화의 상태’ 284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천사들이 누리는 평화를 조금이라도 감지할 수 있다. 사람은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은 천국의 평화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느낄 수도 없다. 사람의 지각 능력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고 기능이 몸에서 들려 올라가 영의 차원에 머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천사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천국의 평화가 느껴진 것도 그런 방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평화를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이 부적합하여 그 평화 그대로를 말로 옮길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마음의 평안에 비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
이 상태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그런 건데, 단순히 싸움이 끝났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 평화로부터 뻗어 나가며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생명입니다. 평화의 기쁨에서 그 생명이 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이 이때 이 상태에서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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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 인간의 상태, 이 사람한테 선물로 주어진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 곧 비가 내려 대지가 리프레쉬 되는 걸로 표현된 상태, 그리고 악하고 거짓된 것의 종노릇한 데서 구원받은 상태 등 이런 것이 천적 인간의 상태인데, 그래서 에스겔에서 주님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25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26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27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31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겔34:25-27, 31)
그리고 이런 효과가 ‘셋째 날’에도 있다는 말씀이 호세아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일곱째 날’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3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2-3)
※ 말씀에 나오는 숫자들 역시 그 속뜻이 있는데, 특히 ‘7’(일곱)처럼 ‘3’(셋)과 ‘12’(열둘)가 비슷하게 ‘완전함’, ‘전부’ 등의 뜻을 갖습니다.
이 상태를 비유하여 ‘들의 풀’(the growth of the field)이라 함을 에스겔, 고대교회에 관해 말씀하시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겔16:7)
이렇게도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사60:21)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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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그의 겉 사람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5절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를 보면, 그의 겉 사람은 전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는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그의 겉 사람 또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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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구절, 즉 5, 6절에서는 겉 사람의 생명, 즉 그의 신앙의 생명, 이해(understanding)의 생명을 다루었다면, 본 절에서는 그의 사랑의 생명, 의지의 생명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투에 임하면서도 사실은 그를 따르며 섬기는 걸 내켜 하지 않았고, 그래서 겉 사람은 아직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적 인간이 되어가면서 겉 사람은 속 사람에게 복종, 그를 섬기기 시작하며, 신앙의 생명, 사랑의 생명으로 변화되어 가면서 또한 ‘사람’이 됩니다. 그를 준비시키는 것은 신앙의 생명이지만, 그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 거듭, 신앙은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 그의 생명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를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인간이라 한다면, 채소, 과일 등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은 영적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먹기 좋은 훌륭한 음식, 요리가 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며, 그렇게 해서 나오는 최종 상태가 바로 천적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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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고대에, 그리고 말씀에서 ‘코’(nostrils, 콧구멍)는 향기(odor)의 결과 감사했던 모든 것, 곧 어떤 ‘향기로운 아이디어’(the idea of fragrance)가 떠오를 때 맛보는 모든 즐거운 걸 말합니다. 여기서 향기는 퍼셉션(perception)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 가령,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s)나 주님, 주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들에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같은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신앙에 관련된 것을 무척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르시기를, ‘여호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곧 주님이 임명하신 자를 가리켜 ‘콧김’(애4:20)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애4:20)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라 하심으로써 같은 걸 상징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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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지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후에 그 후손들로 내려오면서 연속적으로 변했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것들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매우 친숙했고, 내세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만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또한 요한복음에서 사람의 거듭남을 이야기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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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a garden)은 지성(intelligence)을, ‘에덴’(Eden)은 사랑을, ‘동방’(the east)은 주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동방의 에덴동산’(the garden of Eden eastward)은 천적 인간의 지성(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천적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성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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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인간에게 있어 생명이나 생명의 질서(order, 순서)는 이렇습니다. 주님이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심에도 불구, 아직 그의 겉 사람은 그의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억과 이성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생명 혹은 생명의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이 사랑과 사랑의 신앙을 통해서 그의 이해, 이성 및 기억에 속한 것들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거기엔 더 이상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싸움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것이 실상이라는 것을 지각합니다(perceives). 영적 인간일 동안 이때까지 뒤집혔었던 질서가 천적 인간이 되면서 회복되었다는 걸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질서, 혹은 사람을 가리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창설하신 동산’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the inmost sense)으로는, 이는 또한 보편적인(universal) 뜻이기도 한데, 바로 주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있게 될 그곳이지요. 그때 아직 지상에 있는 그의 상태는 천국 천사들과 함께하는 상태, 마치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사고(thoughts)와 사고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언행도 모두 열린(open) 상태이며,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온 것들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안에는 천적 영적인 것들이 담깁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하나에 다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인데, 이 생명은 그로 하여금 퍼셉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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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은 지성, ‘에덴’은 사랑이라는 것은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여기 ‘사막’(wilderness), ‘기뻐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나 사랑과 관련된 것들인 반면, ‘광야’(desert), ‘즐거워함’(gladness), ‘창화하는 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나 이해에 속한 것들에 관한 표현입니다. 전자는 ‘에덴’, 후자는 ‘동산’에 관련되는데, 그 이유는, 이 선지자는 이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해서 늘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더욱 깊은 의미에 관해서는 10절에서 다루겠습니다.
※ ‘에덴동산’에서 ‘에덴’은 천적인 것에, ‘동산’은 영적인 것에 각각 상응한다는 말입니다.
101
주님이 ‘동’(東, the east)이시라는 것 또한 말씀에 나오는데요, 에스겔입니다.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겔43:1-2, 4)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였던 유대교회에서 성전 건물 앞에서 기도할 때, 그들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여 돌렸던 거룩한 관습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가 ‘동’이셨기 때문입니다.
※ 어떤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안에 천국의 두 키워드 중 하나인 이노센스(innocence, 純眞)가 있어야 하듯, 어떤 지성 역시 주님과 천국으로 말미암은 것이 되려면, 그 순서, 질서가 올바른 순서, 질서여야 합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통해 위에서부터 내려와야지, 거꾸로 세상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얼핏 비슷해 보여도 그 본성과 정체는 완전 정반대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2
‘나무’(A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a 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 곧 진리를 알게 하는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a 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 곧 선을 알게 하는 퍼셉션을,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 즉 그저 기억일 뿐인 지식, 그러니까 감각적 증거,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103
여기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상징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영적 인간이면 달라지는데, 주제의 성격에 따라 서술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4
오늘날은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 여기서 말하는 ‘오늘날’은 1750년대(이 주석의 작성 연대는 1749-1756) 유럽을 말하지만, 퍼셉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건 270여 년이 지난 오늘날(2025년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 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 여부에 대한 어떤 내적 감각(a certain internal sensation)으로, 태고교회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던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 이 퍼셉션은 정말 완벽한데 그들은 이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자신들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 그들에게 다가오는 아무개가 어떤 자인지, 심지어 그가 다가오는 것만 가지고도, 그리고 그의 한 조각 생각만 가지고도 그가 어떤 자인지 등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한테는 이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양심조차 없으며,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이 양심이 뭔지 모르고, 퍼셉션이 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입니다.
※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the faith thence derived)이란, 신앙은 신앙인데 사랑으로 말미암는 신앙,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하는 가슴 신앙을 말합니다. 지식에서만 나오는 신앙, 즉 머리 신앙이 아니고 말입니다.
말씀에서 ‘마음’(the heart)이라고 하는 이 의지는 사람과 천사한테 있어 주님의 주된 소유(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그러니까 사람과 천사한테 있는 주님의 소유, 그 소유권이 주님한테 있는 것들 중 메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록 기술(記述), 즉 적기는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러나 의지나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탐욕(cupidity)이 사람의 것입니다. 흔히들 이걸 의지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의지는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 가운데’인 반면, 사람한테는 의지는 전혀 없고 대신 그저 탐욕만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랑과 신앙, 곧 모든 생명이 말미암는,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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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 ‘생명나무’, 곧 사랑 및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기반한 신앙 등,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2장 두 번째 시간인 ‘에덴동산’의 속뜻 (1)을 번역, 설명을 곁들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이 천적 인간을 어떻게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어떻게 만드시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하는 첫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느끼셨겠지만 우리의 이 주일설교는 일반적인 설교와 다릅니다. 설교라기보다는 무슨 주석 낭독회에 가까운데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이렇게 방향을 잡은 이유는, 원전을 건드리기 싫어서입니다. 어쭙잖은 저의 역량으로 괜히 임의로 풀다가 큰 사고를 칠까 봐서이지요. 역시 느끼셨겠지만, 저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1749-1756)라는 주석을 주님의 말씀과 거의 동급으로 봅니다. 이 주석이 기록된 방식 때문인데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주석은 주님이 직접 곁에서 계시하시고 스베덴보리는 그걸 그대로 받아적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성경이 기록된 방식입니다. 물론 주님은 그런 중에도 술자(述者), 곧 받아적는 사람의 퍼스낼러티를 허용하셔서 술자, 이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의 어떤 특성들이 군데군데 스며드는 걸 허용하셨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주일 설교는 마치 굉장한 고액 강의를 수강하듯 들으시며 복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시라고 이 원고와 함께 제 블로그에도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이기 때문인데요, 누구하고는 한 끼 점심 식사 하는데 10억이라는 데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만 숨을 못 쉬어도 죽는 이 대기 속 공기, 산소를 그러나 주님은 한 푼도 안 받으시고 거저 우리 모든 인류와 피조물에게 주시지요.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걸 고마워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말씀에 대한, 그리고 이 아르카나 설교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여 드리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4-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유명한 ‘선악과’ 본문입니다. 이 본문의 속뜻은,
...참됨과 선함에 익숙해지는 데 있어 주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퍼셉션으로는 괜찮지만, 자아와 세상으로 말미암는 건 안 된다는 것, 즉 우리가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에 속한 걸 가지고 조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AC.126)
인데요, 여기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에 관한 설명을 아래 곁들입니다.
‘감각과 기억에 속한 것’은 감각적 증거와 세속적 지식에 의존, 주님의 신성인 선과 진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일체의 것으로,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십일 금식기도나 천일 예배, 불교의 참선, 면벽 수련(달마의 구 년 면벽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삼천 배, 오천 배 같은 불교의 절하는 법), 하안거, 동안거 등은 물론, 다양한 종교의 각종 종교적 수행 등인데요, 이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 五慾: 수면욕, 식욕, 색욕, 명예욕, 재물욕, 七情: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오(惡), 욕(慾), 애(愛)) 문제를 좀 어떻게 건드려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신앙의 신비를 좀 알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 지식, 곧 세상에서 지식을 추구하여 학자가 되더니 그 지식으로 신의 세계에 발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극 초월적 극기 수행을 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오만가지 세상 지식을 머리가 터질 듯이 추구하여 다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구원을 추구한다거나 천국 가기를 희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위에서 밝힌 대로 신앙의 천적인 면만 파괴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만 전념하고자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 가령 성 프란치스코라든지, 성 분도 요셉 라브르라든지 하는 분들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데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이런 수도적 삶을 추구한 게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기에도 너무 바빠 자기를 사랑할 틈이 없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는 사람들을 영생, 영혼 구원 등의 관점으로 나누면 대략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그 첫째는, 신앙생활을 일종의 사후 대비 보험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쪽 발은 이생, 다른 발은 저생에 걸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 중심의 삶을 사는 거엔 그닥 관심이 없으며, 그렇다고 무슨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걸 몹시 불편해하며, 웬만하면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잘살다가 천국 가는 게 좋은 거 아니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균형 잡힌 영성’이니‘건강한 신앙생활’이니 하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둘째는, 영생을 추구하다가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대체로 차갑고 딱딱하며, 날이 서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 이지적이지만 사실은 사랑보다는 신앙과 그 교리를 늘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주님을 추구하다가 덤으로 영생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한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아주 희귀하며 이런 분들이 계셔서 한 도시가, 한 나라가 소멸되지 않습니다. 마치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제목 그대롭니다.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한다는 건 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마치 각종 금은보화, 보물이 가득한 집에 열쇠 없는, 그래서 절대 열 수 없는 큰 자물쇠를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열쇠가 없으니 아무리 값비싼 재물이 가득해도 열고 들어갈 수가 없고, 결국 그런 집, 그런 창고가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어떻게 자식이 자기 부모를 부끄러워하겠나, 어떻게 자기 부모를 수치스러워하겠나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요, 가령, 부모, 특히 아버지가 너무 무책임하여 자기 하고픈 것만 하며 사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이럴 경우, 연약한 어머니가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고스란히 짊어지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자녀는 장성한 후에 그 아버지를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수 있지요. 본인도 괴로워하면서 말입니다.
※ 위 경우는 주님의 부르심 있어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서 일어난 일이라 부득이하였고, 이후 더욱 크신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의 책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러면 안 됩니다. 뭐 당연한 결론이지만 말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 모든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하나님의 대리인, 그러니까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의 모습으로 지금 내 곁에, 지금까지 내 삶 가운데 계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상 아버지에 대한 나의 태도가 곧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며, 그렇다면 천국 창고인 저 보물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 곧 지상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됩니다. 마치 어느 나라 대사에 대한 태도가 그를 파송한 그 나라에 대한 태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비유하자면 저마다 하늘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이 보물 창고를 열고 거기 가득한 보물을 꺼내 쓸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저마다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문제는 이 창고를 여는 열쇠는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주인 마음에 들어야 그 창고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아버지를 주시고, 그 아버지에 대한 태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5, 48)
굳이 세상 아버지가 꼭 선인일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그 아버지를 하나님의 표상,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대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제 할 도리만 다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죄를 굳이 자식인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런 부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큰 불경이 되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지상 아버지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상과 벌은 하나님이 따로 매기실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그간 살면서 봐온 정말 맘에 안 드는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공경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더라도 눈 딱 감고 자식 된 도리, 주께 하듯 아버지를 대하면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동하여 기꺼이 그 창고 열쇠를 주실 것입니다. 삶이 계속 막히고, 경제적 어려움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싶으면 이 ‘아버지’라는, ‘부모’라는 일종의 치트 키를 잘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치트 기마저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6:5-8)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5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골3:22-25)
잠깐 쉰다고 무심코 스마트폰이나 PC를 켜 웹툰이나 유튜브, 인터넷이나 게임 등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영적 실상을 알게 되면 정신이 번쩍 나는 아주 안타까운 습관입니다. 우리는 못 느끼지만, 이때 하늘, 곧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천국 입류(入流, influx)의 유입이 끊기고,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옥의 각종 위험에 노출,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멀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걸로 창세기부터 말씀을 읽거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말씀에 들어있는 아르카나(arcana, 秘義, 주님이 겉 글자 안에 담아두신 속뜻, 천국 천사들이 사용하는 성경은 이 아르카나로 기록되어 있음)를 통해 크게 감동, 주님이 자기들한테 주신 큰 능력과 권능으로 우리를 지켜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더 이상 무방비 상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상하게 일상 중 일이 계속 꼬이고, 악과 거짓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며,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지금 내 상태가 지옥 영들이 가까이하기 알맞은 상태는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 지옥은 모두 상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비슷하면 가까이, 다르면 멀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내 속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 천국이 내게 열릴 수도, 지옥이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일상 중에도 늘 천국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늘 천국과 연결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말씀 생활입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 게임 등으로 보내는 시간들이 제법들 되실 텐데, 이제는 의지를 사용하셔서 조금씩 스마트폰의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의 일상들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편리하게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창세기 2장 3절까지를 창세기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들(창1:2 혼돈, 공허, 흑암의 상태)이거나 영적 인간(靈的, spiritual man)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창1:3-2:3)한테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2장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창1:1-창2:3까지가 하나, 창2:4부터가 또 하나,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아래 말씀처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 또한 분명히 나오는 걸로 보아 그렇다면 분명 천적 인간의 시작이기도 하여 좀 어리둥절한 게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이 함께 쓰인 데에는 무슨 아르카나가 있는 건지 아직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면 공유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두 호칭, ‘여호와’와 ‘하나님’은 각각 선(good)과 진리(truth) 혹은 사랑(love)과 신앙(faith)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人性, The Divine Human)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1-3) 1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Gen. 2:1-3)
※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2장 3절까지를 1장으로 했었어야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인데, 아직 영적으로 죽어있는, 즉 아직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도 안 된 사람이거나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중인 사람들, 곧 거듭남의 과정 중인 사람들한테는 주님의 신성의 두 호칭인 ‘여호와’와 ‘하나님’ 중 후자가 해당되며,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내내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 그게 이 2장 3절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호칭은 4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것이죠. 참고로 이 두 호칭은 각각 선과 진리 혹은 사랑과 신앙으로 연결되며, 거듭남이 완료되어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진리로, 그러니까 신앙으로 먼저 주님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치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중 먼저 이해로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하나님’ 호칭이 나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것처럼,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예수’는 선 또는 사랑,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2장 첫 시간, 천지창조 일곱째 날, 곧 거듭남 일곱 번째 상태인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1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이 말씀은 인간이 이제 영적으로 ‘여섯째 날’이 되었음을, 즉 ‘여섯째 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충분히 영적임을 의미합니다. ‘천’(天, heaven)은 그의 속 사람(internal man), 곧 내적 존재(inner being)를, ‘지’(地, earth)는 그의 겉 사람(external), 즉 외적 존재(outer being)를 말합니다. ‘만물’(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말하며, 이는 앞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상징된 것입니다...
(AC.82)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자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합니다. 이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기 때문, 즉 협력, 제휴, 힘을 합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랑, 즉 천적 원칙(the celestial principle)이 주요 원리(the principal)가 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나 영적인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보다는 사랑이, 영적인 거보다는 천적인 거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곧 천적인 걸 우선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
2-3절,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C.84-88)
천적 인간(天的, celestial man, heavenly person)이 ‘일곱째 날’입니다. 주님이 육 일간 일하신 결과이기에 이 천적 인간을 가리켜 ‘그가 하시던 일’(his work)이라고 합니다. 그때 모든 전투, 곧 갈등, 충돌이 그치며, 그 결과 그런 주님의 상태를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시니라’(to rest from all his work)라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이 일곱째 날을 특별히 성별(聖別), 히브리어로 ‘안식’(rest)이라는 뜻의 ‘שבת’(샤바트, the sabbath)라고 합니다. 이런 과정으로 사람은 창조되고(created), 형성되며(formed) 만들어집니다(made). 이 모든 것이 말씀들로부터 아주 분명합니다.
(AC.84)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일이라 하셨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밝혀진 적 없는 아르카나(arcana, 秘義)입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고, 영적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거의 없습니다. 앞서 81번 글을 보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사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 이런 무지의 결과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습니다. 일곱째 날 관련,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혹은 ‘안식일’(sabbath)인 것과 관련, 주님은 자신이 진정한 안식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8)
이는 주님이 참 인간이시며, 진정한 안식일이심을 의미합니다.
※ 49번 글(창1:26)에,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구성원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한테도 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고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참 인간, 참 사람은 오직 홀로 주님 한 분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하십니다.
[2]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이후 이 교회를 계승한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더 가장 주님의 안식일(the sabbath of the Lord)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주님의 안식일을 후대의 모든 교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이어지는 가장 내적(inmost) 교회들, 즉 후대 교회들의, 주님과 가장 가까운, 가장 깊은 부분 역시 안식일이었다는 말이지요. 모든 거듭나는 사람 역시 그가 천적이 되면, 즉 그가 천국 본성을 발전시키면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그가 주님의 모양(a likeness of the Lord)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육 일간의 전투 혹은 수고가 선행합니다.
※ 59번 글(창1:30) 일부 인용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것들이 유대교회에서 육 일간의 수고와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도입된 어느 것 하나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표상(representative) 아닌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명이 궤(the ark, 여호와의 법궤)로도 표상되었습니다. 궤가 나아갈 때와 궤가 쉴 때로 말이지요. 궤가 광야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으로는 영적 전투와 시험(combats and temptations)을, 그리고 궤가 쉬는 것으로는 일종의 평화의 상태(a state of peace)를 표상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궤가 나아갈 때, 모세는 말하기를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10:35-36)
위 민수기 본문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쉴 곳을 찾은’(민10:33) 것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라 하였습니다.
[3]천적 인간의 쉼(The rest of the celestial man)을 이사야에서는 안식일을 가지고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14)
이것이 천적 인간의 질(質, quality)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his own desire), 즉 욕망이 아닌, 주님의 선하신 즐거움(good pleasure), 곧 그분의 뜻을 따르는데, 이것이 그의 ‘즐거움’(desire)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내적 평화와 행복(internal peace and happiness)을 누립니다. 이것이 위 말씀,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의 의미이며, 동시에 그는 겉으로도 평온과 큰 기쁨(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을 누리는데, 이것이 바로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의 의미입니다.
※ 천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이 상태는 천국 그 자체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평화와 쉼 가운데 있으며, 주님도 쉼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이 주님과 이미 결합하였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수고롭게 일하지 않는데요, 이는 그들이 모두 이때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천적 인간의 다른 표현입니다.
(AC.85)
‘여섯째 날’이 된(has become) 영적 인간이 이제 천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is beginning to be) 상태를 여기서 먼저 다루고 있는데, 이때가 유대교회에서 말하는 ‘안식일 저녁’(the eve of the sabbath)입니다. 안식일의 거룩함을 저녁부터 지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천적 인간은 이제 말씀드릴 ‘아침’입니다.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23:54)
※ 유대인의 안식일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 일몰부터 일곱째 날인 토요일 일몰까지입니다. 이와 관련된 걸 하나 말씀드리면, 유대 지역 일몰이 보통 오후 5시라고 할 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때가 오후 3시쯤이라 두 시간 만에 장례를 치러야 하는 아주 촉박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관련 본문들을 읽으시면 한결 와닿으실 겁니다. 하나 더, 유대인들은 결코 월요일, 화요일... 같은 요일 명칭을 쓰지 않습니다. 그 영어식 표현의 유래가 고대 앵글로 색슨계 신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창세기 1장 표현대로 첫째 날, 둘째 날... 같은 명칭을 사용합니다.
(AC.86)
천적 인간을 가리켜 ‘안식일’(the sabbath) 또는 ‘쉼’(the rest)이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천적이 될 때 전투가 그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다가옵니다. 이들이 있으면 악한 영들은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전투를 치른 장본인, 당사자가 이 사람 본인이 아니라 홀로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안식하시니라’ 하는 것입니다.
※ 사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 두 곳에서 각각 파송된 천사들과 지옥의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천사 둘과 지옥의 영 둘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다가 이때, 즉,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옥의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AC.87)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라 합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해 지금까지 싸워오셨고(has fought for), 지금까지 그를 창조해 오셨으며, 지으시고 만들어 오셨기(has created, formed, and made)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하는 것이며, 한 번 더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지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한 일’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에,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11-12, 18, 21)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새 창조, 혹은 거듭남은 오직 주님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AC.88)
이상으로 창세기 2장 첫 번째 시간인 ‘일곱째 날, 안식일’의 속뜻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인 안식일 관련, 우리가 흔히 오해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바로잡으면서, 이것을 오늘의 결론 삼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렘17:24-25)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아서는 절대로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해야 한다. 천국 천사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즉 자기들로 말미암아서는 그 어떤 것도 의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심지어 더 나아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말이다. 그들과 주님과의 결합은 이런 걸로 되어 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한테서 나오는,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모든 것은 선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생명의 지적, 의지적 둘 다 아주 작은 데까지 흘러들어오며, 그 결과 신앙과 체어리티(charity)의 개별적, 전반적인 것들한테까지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것이 말입니다.
오늘 전체 본문입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1-3)
창조의 육(六) 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 중 셋째 날 풀, 채소, 나무 창조에서 다섯째 날 수중 생물과 공중의 새, 그리고 여섯째 날 땅의 짐승 창조로 바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인 넷째 날에 두 큰 광명체를 창조하신 이유는, 머리 신앙, 지식 신앙,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신앙, 그러니까 잘난 체하는 신앙에서 가슴 신앙, 고백 신앙,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는 신앙, 그러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의 신앙으로 넘어가려면 중간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불이 궁창이라는 속 사람 안에 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 사람 안에 일단 이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의 불이 켜지면, 그때부터 그동안 차갑고 냉랭하던, 그래서 못 움직이던(inanimate) 식물 신앙이 이제는 따뜻하고 온기 넘치는, 움직이는(animate) 신앙, 살아있고 생기 넘치는 동물 신앙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의 모든 힘과 능력이 우리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그리고 우리 몸 각 지체와 부분 및 각종 장기로 흘러들어오며, 영육 간 우리 몸 전체가 천사의 돌봄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각종 장애와 질병, 묶임과 매임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말씀이지요. 아멘, 할렐루야!
아, 그리고 한 가지! 그런데 이 두 큰 광명체가 속 사람 안에 창조되는 것은 본인이 원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저 식물 신앙에만 머무를 뿐, 주님의 이 두 큰 광명체, 곧 사랑과 신앙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리 주위에서 무슨 중보 기도를 해도 소용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저런 영적 전투란 전투는 다 겪은 후, 그러니까 갈 데까지 다 간 후에야 겨우 원하게 됩니다. 이마저도 사실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지만요. 그러니까 질러가면 되는 길을 괜히 빙 돌아가지 마시고 얼른 하루속히 주님께 엎드리시고, 주님의 두 큰 광명체,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내 속 사람 안에 창조되어 불이 환하게 켜지기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귀신이 들렸거나 거의 식물인간이 되어 몇 년째 누워계시는 등 그러니까 얼핏 우리 보기에 자력으로는 주님을 구하실 수 없을 것 같은 분들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 속 사람이 준비되어 주님의 말씀, 곧 천국의 능력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분들한테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서 수많은 사례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속 사람이 중요합니다. 천국도, 치유도, 묶임과 매임에서 풀림도 모두 속 사람의 상태와 그 역량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는 그저 거들 뿐입니다. 본인이 원해야 합니다. 특히 속 사람이 말이죠.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5-20)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24-31) 28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Gen. 1:24-31)
창세기 속뜻 강해, 오늘은 1장, 천지창조 여섯째 날, 곧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에 관한 두 번째 내용이며, 이로써 1장을 마감하게 됩니다.
※ 제가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주석 원본을 가급적 원본 그대로 소개하는,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요즘 주일 설교라 할 수 없는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쉽게 풀어 전하겠답시고 감히 손댔다가 완전 엉뚱한 소리 하는, 큰 참사가 날까 봐서입니다. 저는 아직은 그냥 살짝살짝 추임새 넣는 정도로도 충분하며, 이마저도 사실 제게 와있는 천사들의 퍼셉션(perception)을 조금 알아듣는 것이어서 안전하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그걸 수용하는 사람의 영적 역량, 곧 그 사람의 영적 눈높이에 맞춰 그 깊이가 조절되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 여전히 주석 원본은 볼드체로, 메시지를 겸한 설명, 곧 추임새는 ‘※’로 구분합니다.
시작합니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AC.55)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 즉 신앙(faith)과 사랑(love) 간 결합을 일종의 결혼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이 결혼의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good)을 ‘생육’(fruitfulness), 모든 진리(truth)를 ‘번성’(multiplications)이라 하였습니다.
※ 실제로 천국 역시 남녀의 결혼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상처럼 무슨 ‘아이를 낳는’ 몸 결혼이 아닌,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마음의 결혼, 곧 전혀 다른 결혼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0장, ‘천국 안의 결혼’(Marriages in Heaven)을 읽어보세요.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그들은 너를 얻고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 (겔36:11-12)
※ 위 구절 중 일부만 볼드인 이유는 원본에서는 거기만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후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먼저 진리에 속한 ‘수가 많고’(multiplication)가 언급되고, 그다음에 선에 속한 ‘번성하게’(fruitfulness)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닌, 앞으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 아직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그 최종 목표가 영적 인간이며, 이때는 늘 진리가 먼저입니다. 그렇다는 건 거듭난 후 일곱째 날인 천적 인간이 되면 이때부터는 선이 먼저라는 말이 되겠지요. 일단은 신앙으로 출발, 나중엔 사랑으로라고 해도 같은 말입니다.
[2]이해가 의지와, 즉 신앙이 사랑과 연합할 때, 주님은 이 사람을 일종의 ‘결혼한 땅’(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62:4)
이때 열리는 열매들이 진리에 속하였으면 ‘아들들’이라 하고, 선에 속하였으면 ‘딸들’이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말씀에 아주 자주 나옵니다.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12:50)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데요, 이렇듯 지상 혈연의 천국 상응을 늘 염두에 두는 태도가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오바(over)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데요, 자기 사랑이라는 욕심에 잠식된 자녀 사랑이 아닌, 오직 주님 사랑 안에 잘 보존된 정말 깨끗하고 순결한 자녀 사랑, 내 자식, 내 손주를 보더라도, 또 내 부모, 내 조부모 등 내 가문을 보더라도 그걸 주님 나라의 선과 진리가 이 세상에 구현된 걸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며, 주님의 열두 제자같이 말입니다. 이건 영적 시야에 관한 문제라, 그리고 혈연이라는 건 평생에 걸친 문제라 정말 중요한 얘깁니다.
[3]진리와 선이 많아졌을 때, 땅은 ‘충만한’(replenished) 상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됩니다.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실 때, 즉 사람을 돌보실 때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32)
‘겨자씨 한 알’(A 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the least of all seeds)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는 그가 자기 스스로 그 선을 행하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의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던 그가 거듭남의 어떤 상태 가운데 있게 되면서 그의 안에 뭔가 선한 게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4]결국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점점 자라 ‘풀’(herb)이 되더니, 마침내 결합이 완성되면서 ‘나무’(a tree)가 되어, ‘공중의 새들’(the birds of the heavens)이 ‘그 가지에 깃들게’(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됩니다. ‘공중의 새들’은 진리나 지적인 것들을, ‘그 가지에 깃들게’는 기억-지식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때뿐 아니라 영적 인간이 되는 동안은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하신 것입니다.
(AC.55)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AC.56-57)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천적인 것들(celestial things)로만 기뻐합니다. 그것들이 그의 생명에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천적 양식(celestial food)이라고 합니다. 영적 인간(靈的, The spiritual man)은 영적인 것들(spiritu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 이유 역시 그것들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이며, 이번엔 영적 양식(spiritual food)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인간(自然的, The natural man)은 자연적인 것들(natural things)로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들이 맞기 때문인데, 이르기를 양식(food)이라고 하며, 주로 기억-지식으로 구성됩니다.
※ 그러니까 영적 인간이 자연적 인간더러, 천적 인간이 영적 인간이나 자연적 인간더러 ‘당신은 왜 이런 거에 관심이 없느냐?’, 혹은 ‘당신은 왜 이런 걸 이해를 못하느냐?’라든지, 반대로 자연적 인간이 영적 인간이나 천적 인간더러,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더러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 혹은 ‘당신은 왜 늘 천국, 천국만 하느냐?’라며 무시, 조롱, 비난, 멸시 같은 걸 하면 안 됩니다. 저마다 자기 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것이 선과 진리에 관한 거라면 말입니다.
(AC.56)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새(use)와 관련된 모든 진리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인데, 여기서 ‘열매’(fruit)는 주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씨 가진 나무’(seed producing fruit)는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씨 가진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천적 양식을 나무의 열매라 하는 것은 다음 장을 보면 분명한데요, 다음 장에서는 천적인 사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서 하신 주님 말씀들만 인용합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는 ‘성소’(the sanctuary)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열매’는 그들의 양식이 될 지혜이며, ‘잎사귀’는 ‘약재료’(medicine)라는 이름으로 쓰임 받게 될 지성입니다. 한편, 영적 양식을 ‘풀’(herb)이라고 하는 건 시편을 보면 나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1-2)
※ 다음은 ‘쓰임새’(use)와 관련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2장, ‘천국의 기쁨과 행복’(Heavenly Joy and Happiness, HH.395-414) 402번 글입니다.
천국의 모든 즐거움은 쓰임새 안에 모아져 있고 나타나 있다. 그것은 쓰임새가 천사들이 지닌 사랑과 이타심에서 비롯된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천사는 그의 쓰임새에 맞게 그가 쓰임새를 사랑하는 정도만큼 즐거움을 누린다. 천국의 모든 즐거움이 쓰임새에서 나온 즐거움임은 사람 몸의 오감에 비해 보면 알 수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는 각기 그 쓰임에 따른 고유한 즐거움이 있다. 시각에는 아름다움과 형태가, 청각에는 조화된 소리가, 후각에는 향기가, 미각에는 맛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각각의 감각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고찰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상응원리를 알면 그 기능을 더 완전하게 알 수 있다. 시각에 고유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시각이 사고력, 즉 내적 시각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청각에 고유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청각은 주의집중을 통해 사고력과 의지 둘 다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후각은 뇌와 폐에 작용하고, 미각은 위장을 거쳐 간접적으로 온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기능 때문에 각기 고유한 즐거움이 있다. 촉각의 더 순수하고 정묘한 즐거움인 결혼의 즐거움이 다른 모든 즐거움보다 뛰어난 이유는 그것이 인류의 증가와 그에 따른 천사의 증가에 공헌하는 쓰임새 때문이다. 그런 여러 가지 즐거움이 오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든 즐거움이 쓰임새 안에 있고, 쓰임새에 달려 있는 곳인 천국이 그 안으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
(AC.57)
30절,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AC.58-59)
동일인, 곧 영적 인간의 자연적 음식을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자연적 속성을 ‘땅의 모든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모든 새’(the fowl of the heavens)로 상징하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 시편을 보면, 거기 그의 자연적, 영적 양식 둘 다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시104:14)
여기서 ‘가축’(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앞 구절들인 11, 12절에서 언급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둘 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시104:11-12)
(AC.58)
여기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적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자연적 속성,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합니다.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 안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아주 정상이며, 적어도 본인이 목회자라면 교인 하나하나, 성도 하나하나를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모두 안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악과 거짓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태생적으로 지옥에 적합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 사람은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이렇게 천국과 지옥에서 파송된 두 종류의 천사들과 악한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두 명의 천사와 두 명의 악한 영들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이나 지옥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일생이며,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 그를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그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은 개혁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인생 막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회심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지요. 악한 영들이 아무리 끈질겨도 그들이 우리 주님의 한결같으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무슨 의로운 습관을 결심했지만 반나절이 못 되어 또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똑같은 결심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더라도,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나는 나 자신을 정말 못 믿겠다 하더라도 이런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결심, 다시 정진하는 태도, 자세가 필요합니다.
※ 주님은 우리와 달리 우리 안의 악을 한방에 어떻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 악조차 우리의 생명이심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놀라우심은 그 악조차 우리를 돌이키시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이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일정 간격으로 사람에게 계속 주십니다.
※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보잘 없는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래서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 들게 하시는 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즉 악한 영들이 주는 것은 짝퉁, 모조품, 가짜인 반면,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이 진품, 정품, 진짜라는 것입니다.
[2]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AC.59)
31절,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AC.60-63)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AC.60)
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AC.61)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AC.62)
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 다음은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60장, ‘지옥 영들의 악독함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술책들’(The Malice and Heinous Artifices of Infernal Spirits, HH.576-581) 577번 글입니다.
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2]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3]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 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위 292, 293번 글 참조). 그러나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4]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끊임없이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HH.577) //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 인간은 그릇, 천적 인간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 목표는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 인간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 인간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30) //
(AC.63)
이상으로 창세기 1장 여섯째 날에 관한 2주에 걸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섯째 날 전체 본문을 다시 한번 봉독합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24-31)
창조의 육(六) 일, 곧 사람의 거듭남 여섯 단계에 관한 이 전체 이야기 중 특별히 말씀드리고자 하는 한가지는 셋째 날 풀, 채소, 나무 창조에서 다섯째 날 수중 생물과 공중의 새, 그리고 여섯째 날 땅의 짐승 창조로 바로 넘어가지 않고, 중간에 넷째 날 두 큰 광명체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잘난 체하는 신앙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애정의 신앙으로 넘어가려면 중간에 사랑과 신앙이라는 불이 켜져야 한다는 것인데요, 이 점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주146. 천국 전체 모든 천사 사회는 주님의 신적 질서(His Divine order)에 따라 주님에 의해 정렬된다. 천국을 만드는 것은 천사들과 함께하는 주님의 신성(the Divine of the Lord)이기 때문이다 (AC.3038, 7211, 9128, 9338, 10125, 10151, 10157). The entire heaven in respect to all angelic societies, is arranged by the Lord in accordance with His Divine order, since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with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n. 3038, 7211, 9128, 9338, 10125, 10151, 10157). 천국 형태에 관하여 (AC.4040–4043, 6607, 9877). Concerning the heavenly form (n. 4040–4043, 6607, 9877).
주147. 천국의 형태는 신적 질서에 일치하는 형태다 (AC.4040–4043, 6607, 9877). The form of heaven is a form in accordance with the Divine order (n. 4040–4043, 6607, 9877).
주148. 신적 진리는 질서에 관한 법이다 (AC.2447, 7995). Divine truths are the laws of order (n. 2447, 7995). 사람은 그가 질서를 따라 사는 만큼만, 즉 그가 신적 진리를 따라 선 안에 있는 만큼만 사람이다 (AC.4839, 6605, 6626). Man is a man to the extent that he lives in accordance with order, that is, to the extent that he is in good in accordance with Divine truths (n. 4839, 6605, 6626). 신적 질서의 모든 것은 사람 안에 모이며, 사람은 신적 질서가 사람 형태로 창조된 것이다 (AC.4219, 4220, 4222, 4223, 4523, 4524, 5114, 6013, 6057, 6605, 6626, 9706, 10156, 10472). All things of Divine order are gathered up in man and he is from creation Divine order in form (n. 4219, 4220, 4222, 4223, 4523, 4524, 5114, 6013, 6057, 6605, 6626, 9706, 10156, 10472). 사람은 선과 진리로 태어나는 게 아닌, 악과 거짓, 즉 신적 질서에 반(反) 하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무지 상태로 태어난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새로 태어나야 할, 즉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일은 주님의 신적 진리로 일어나며, 이를 통해 그는 질서 안으로 인도될 수 있다 (AC.1047, 2307, 2308, 3518, 3812, 8480, 8550, 10283, 10284, 10286, 10731). Man is not born into good and truth, but into evil and falsity, that is, into the opposite of Divine order, and consequently into pure ignorance; and for this reason he must needs be born anew, that is, be regenerated, which is effected by means of Divine truths from the Lord, that he may be introduced into order (n. 1047, 2307, 2308, 3518, 3812, 8480, 8550, 10283, 10284, 10286, 10731). 주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즉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하시는데, 이는 천국 형태대로 하신다는 뜻이다 (AC.5700, 6690, 9931, 10303). When the Lord forms man anew, that is, regenerates him, He arranges all things in him in accordance with order, which means, into the form of heaven (n. 5700, 6690, 9931, 10303).
주149. 천국의 모두는 생명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이를 일러 생명의 익스텐션(extension)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저마다 가진 선의 양과 질에 따라 천사 사회들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AC.8794, 8797). Everyone in heaven has communication of life, which may be called its extension into angelic societies round about, according to the quantity and quality of his good (n. 8794, 8797). 사고와 애정(Thoughts and affections)에는 그런 익스텐션이 있다 (AC.2470, 6598–6613). Thoughts and affections have such extension (n. 2470, 6598–6613). 이들은 그 지배적 애정에 따라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 (AC.4111). They are united and separated in accordance with the ruling affections (n. 4111).
주150. 천국이든 이 세상이든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사는 오직 단 하나의 생명이 있다 (AC.1954, 2021, 2536, 2658, 2886–2889, 3001, 3484, 3742, 5847, 6467). There is only one Life, from which all, both in heaven and in the world, live (n. 1954, 2021, 2536, 2658, 2886–2889, 3001, 3484, 3742, 5847, 6467). 그 생명은 위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온다 (AC.2886–2889, 3344, 3484, 4319, 4320, 4524, 4882, 5986, 6325, 6468–6470, 9276, 10196). That life is from the Lord above (n. 2886–2889, 3344, 3484, 4319, 4320, 4524, 4882, 5986, 6325, 6468–6470, 9276, 10196). 그것은 어떤 놀라운 방식으로 천사들과 영들, 그리고 사람들에게로 흐른다 (AC.2886–2889, 3337, 3338, 3484, 3742). It flows into angels, spirits, and men, in a wonderful manner (n. 2886–2889, 3337, 3338, 3484, 3742). 주님은 주님의 신적 사랑으로부터 흘러들어오시는데, 이 사랑은 자기 것이 다른 사람 것 되기를 의도하는 그런 사랑이다 (AC.3472, 4320). The Lord flows in from His Divine love, which is such that what is its own it wills should be another’s (n. 3472, 4320). 이런 이유로, 생명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사람 안에 있는 것 같고,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AC.3742, 4320). For this reason life appears to be in man, and not flowing in (n. 3742, 4320). 천사들의 기쁨을 나는 지각하였고(perceived), 그들이 내게 한 말, 곧 자기들은 자기들의 힘으로가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을 듣고 컨펌하였다 (AC.6469). Of the joy of angels, perceived and confirmed by what they told me, because of their not living from themselves but from the Lord (n. 6469). 악인들은, 생명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이라는 사실 받아들이는 걸 매우 꺼려한다 (AC.3743). The evil are unwilling to be convinced that life flows in (n. 3743). 주님의 생명은 또한 악인들에게도 흘러들어온다 (AC.2706, 3743, 4417, 10196). Life from the Lord flows in also with the evil (n. 2706, 3743, 4417, 10196). 하지만 그들은 선을 악으로, 그리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런 존재이며, 그런 게 그가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AC.4319, 4320, 4417), But they turn good into evil, and truth into falsity; for such as man is such is his reception of life, illustrated (n. 4319, 4320, 4417).
주151. 생각은 주변 영들과 천사들의 사회들 안으로 퍼붓듯 쏟아진다 (AC.6600–6605). Thought pours itself into societies of spirits and of angels round about (n. 6600–6605). 그러면서도 그 사회들의 생각을 바꾸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AC.6601, 6603). Still it does not move or disturb the thoughts of the societies (n. 6601, 6603).
주152. 선은 자신의 진리를, 진리는 자신의 선을 인식한다 (AC.2429, 3101, 3102, 3161, 3179, 3180, 4358, 5704, 5835, 9637). Good recognizes its truth, and truth its good (n. 2429, 3101, 3102, 3161, 3179, 3180, 4358, 5704, 5835, 9637). 이런 식으로 선과 진리는 결합한다 (AC.3834, 4096, 4097, 4301, 4345, 4353, 4364, 4368, 5365, 7623–7627, 7752–7762, 8530, 9258, 10555). In this way good and truth are conjoined (n. 3834, 4096, 4097, 4301, 4345, 4353, 4364, 4368, 5365, 7623–7627, 7752–7762, 8530, 9258, 10555). 이것은 천국의 인플럭스로 인한 효과다 (AC.9079). This is effected by influx from heaven (n. 9079).
주153. 주님의 직접 입류와 천국을 경유하는 간접 입류가 있다 (AC.6063, 6307, 6472, 9682, 9683). There is direct influx from the Lord and mediate influx through heaven (n. 6063, 6307, 6472, 9682, 9683). 만물의 가장 작은 것으로도 흐르는 주님의 직접 입류가 있다 (AC.6058, 6474–6478, 8717, 8728). There is a direct influx of the Lord into the minutest parts of all things (n. 6058, 6474–6478, 8717, 8728). 천국들을 경유하는 주님의 간접 입류 (AC.4067, 6982, 6985, 6996). Of the mediate influx of the Lord through the heavens (n. 4067, 6982, 6985, 6996).
주154. 천적 천사들은 영적 천사들이 하듯 진리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진리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이다 (AC.202, 597, 607, 784, 1121, 1384, 1398, 1442, 1919, 7680, 7877, 8780, 9277, 10336). The celestial angels do not think and speak from truths, as the spiritual angels do, because they have from the Lord a perception of all things of truth (n. 202, 597, 607, 784, 1121, 1384, 1398, 1442, 1919, 7680, 7877, 8780, 9277, 10336). 진리에 관해서는 천적 천사들은 예, 예, 아니오, 아니오 한다. 반면, 영적 천사들은 진리에 대해 그게 옳은지 아닌지를 이성을 가지고 따진다 (AC.2715, 3246, 4448, 9166, 10786,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를 설명하는 글들). In respect to truths the celestial angels say, Yea, yea, or Nay, nay; but the spiritual angels reason about them whether they are true or not (n. 2715, 3246, 4448, 9166, 10786, where the Lord’s words, “Let your speech be Yea, yea, Nay, nay; what is beyond these is from evil” [Matt. 5:37] are explained).
주155. 영적 나라 사람들은 진리 안에, 천적 나라 사람들은 선 안에 있다 (AC.863, 875, 927, 1023, 1043, 1044, 1555, 2256, 4328, 4493, 5113, 9596). Those in the spiritual kingdom are in truths, and those in the celestial kingdom are in good (n. 863, 875, 927, 1023, 1043, 1044, 1555, 2256, 4328, 4493, 5113, 9596). 영적 나라의 선은 이웃 사랑의 선이며, 이 선은 그 본질상 진리이다 (AC.8042, 10296). The good of the spiritual kingdom is the good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this good in its essence is truth (n. 8042, 10296).
주156. 말씀에서 ‘올바름’(righteousness)은 선으로, ‘공평함’(judgment)은 진리로 서술되며, 그래서 ‘올바름과 공평함으로 행함’은 선과 진리를 의미한다 (AC.2235, 9857). In the Word “righteousness” is predicated of good, and “judgment” of truth, therefore “to do righteousness and judgment” means good and truth (n. 2235, 9857). ‘큰 공평’은 신적 질서의 법, 곧 신적 진리를 의미한다 (AC.7206). “Great judgments” means the law of Divine order, thus Divine truths (n. 7206).
주157. 말씀 예언서 파트에 나오는 ‘다윗’은 주님을 의미한다 (AC.1888, 9954). By “David” in the prophetic parts of the Word, the Lord is meant (n. 1888, 9954).
주158. 말씀에서 ‘시온’은 교회, 특히 천적 교회를 의미한다 (AC.2362, 9055). In the Word “Zion” means the church, and specifically the celestial church (n. 2362, 9055).
주159. 모든 사람과 공동체, 또한 자기 나라와 교회, 그리고 범우주적 의미에서 주님의 나라는 일종의 이웃이며, 이들 상태에 맞춰 선을 사랑함으로 이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다. 즉 이웃은 이들의 선, 곧 반드시 먼저 고려 되어야 할 공동선(common good)이다 (AC.6818–6824, 8123). Every man and every community, also one’s country and the church and in the universal sense the kingdom of the Lord, is a neighbor, and to do good to these from love of good in accordance with their state is to love the neighbor; that is, the neighbor is the good of these, which is the common good that must be consulted (n. 6818–6824, 8123). 사회적 선(Civil good) 또한, 그러니까 정의(justice) 또한 하나의 이웃이다 (AC.2915, 4730, 8120–8123). Civil good also, which is justice, is a neighbor (n. 2915, 4730, 8120–8123). 그래서 이웃 사랑은 인간 삶의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 또한 모든 역할(function)과 모든 일에 있어 공정함(what is just)에 대한 사랑으로 공정하게 행하는 것, 이 모두가 이웃 사랑이다 (AC.2417, 8121–8124). Therefore charity toward the neighbor extends itself to all things and each thing of the life of man; and loving good and doing good from love of good and truth, and also doing what is just from a love of what is just in every function and in every work, is loving the neighbor (n. 2417, 8121–8124).
주160. 두 종류의 다스림이 있다. 하나는 이웃 사랑으로부터, 다른 하나는 자기 사랑으로부터다 (AC.10814). There are two kinds of rule, one from love toward the neighbor, the other from love of self (n. 10814). 이웃 사랑에서 나오는 다스림으로부터 모든 선과 모든 행복이 흐른다 (AC.10160, 10814). From the rule that is from love toward the neighbor flow all goods and all happinesses (n. 10160, 10814). 천국에서는 아무도 자기 사랑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두 남을 섬기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이웃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큰 능력의 근원이다 (AC.5732). In heaven no one desires to rule from the love of self, but all desire to minister, which means to rule from love to the neighbor; this is the source of their great power (n. 5732). 자기 사랑이라는 다스림으로부터 모든 악이 흘러들어온다 (AC.10038). From rule from the love of self all evils flow in (n. 10038).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정부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AC.7364, 10160, 10814). When the loves of self and the world had begun to prevail men were compelled to subject themselves to governments as a means of security (n. 7364, 10160, 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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