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삶 동안 내가 가장 원하는 것 (2025/10/31)

 

 

천사들에게는 정말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the exquisite perception)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이걸로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갈지 말지를 지각합니다. 천사들은 들어가는 것의 퀄리티(quality, )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풀로(fully)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로 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것보다도 더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AC.228)

 

저는 여전히 이 퍼셉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바로는 천사 개개인에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음성 내지는 깨달음 같은 게 아닐까 합니다. 영계에서는 어떤 영이 무엇을 궁금해하면 하늘로부터 즉시 어떤 답을 들을 수 있다고 하니까요. 영 또는 천사 개개인의 주님을 향한 사랑 및 내면의 열림에 따라 그 들을 수 있는 퍼셉션 또한 다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아직 몸 안에 있는 저는 그럼에도 불구, 이 지상에서 저 천사들처럼 주님의 퍼셉션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정말로 소망합니다. 제가 아는 퍼셉션의 첫 번째 주된 기능이 바로 어떤 것, 어떤 상황, 어떤 일이 주님의 선과 진리로 말미암음인지를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매사에 먼저 이걸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저 글처럼 범사에 얼마나 온전한 타이밍에 무엇을 할 수 있게 될까요? 뭘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등 말입니다.

 

제가 아직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천사들의 이런 퍼셉션을 원하는 이유는 천사들처럼 저도 주님의 뜻 알고 따르는 일에 완전할 수 있었으면 해서입니다. 제가 천사들처럼 저럴 수만 있다면 제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그 정체를 꿰뚫어 보고 결코 보이는 겉모습으로 판단, 일을 그르치는 짓을 더 이상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겠지요.

 

부디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한발 물러나 영원하신 주님의 아르카나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남은 삶 살다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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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이 오동작하는 이유 (2025/10/30)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

 

여기 아담이라 하는 사람은 인간 이성(reason)을 말하며, 아내라 하는 여자는 인간의 본성(own, self)을, 그리고 이 본문 관련된 뱀은 사람의 감각 파트(sensuous part)를 말합니다.

 

2만 하더라도 거기 등장하는 첫 아담은 온전한 아담, 그러니까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의 전형과도 같았던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때는 이성도, 본성도, 그리고 감각 파트도 모두 오직 주님 사랑에 오리엔티드된 상태였습니다. 즉, 태고교회의 시조, 시초인 첫 태고교회(2:1-17)는 흠잡을데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2:18-25) 태고교회부터 슬그머니 자기 사랑(love of self)이 시작되더니, 세 번째(3:1-13), 그리고 지금 창3 두 번째 단락인 네 번째(3:14-19)에 이르러서는 그 처지가 거의 지옥과도 같은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데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것, 곧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은 항상 그 상태가 똑같은 게 아닙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영적이어서 모두 속 사람에게 속한 것이며, 또 속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니까 그 순서가 주님, 속 사람, 겉 사람일 때는 이 모든 것이 정상 작동, 더없이 생생하지만, 반대로 겉 사람, 속 사람, 주님 순일 때는 비정상 작동, 속이 텅 빈 껍데기들이 되어 숱한 역기능의 연속이 됩니다.

 

가령 인간 이성의 경우, 선과 악, 옳고 그름 등 초롱초롱해야 할 일들에 대해 엉망진창, 뒤죽박죽, 이랬다저랬다, 내로남불 등의 상태, 작태를 남발하게 되지요. 이성이라는 주님 주신 빛나는 능력은 사라지고, 전에 그걸 담았던 껍데기, 빈 그릇만 남았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이번엔 거기에 지옥의 모든 것이 들어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천국의 정반대입니다.

 

이것이 주님 사랑과 자기 사랑의 정반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순서, 곧 주님, 속 사람, 겉 사람의 순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일도, 사람도, 그리고 모든 것이 범사에 평안하고 형통하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지금 내 삶이 뭔가 문제가 있고, 꼬이고 막혔다면, 그건 순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얼른 순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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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는 일과 만나는 사람의 정체 (2025/10/29)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세요.

 

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원하는 행동을 하세요.

 

얼핏 무슨 처세와 아부를 권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것쯤은 제 글을 구독하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들 계시죠.

 

잠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25:11)

 

말뿐이겠습니까?

 

사무실에서, 현장에서 우리가 저럴 수 있으려면 눈치도 있어야 하고, 일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설 줄도 알아야 하고, 팀장의 입장, 관리자의 입장에 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전에 기업에 있을 때, 과거 이명박 대통령의 현대 시절, 정주영 회장을 도와 함께 일할 때, 그는 항상 두세 가지 안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당시 부서 전산 담당이었던 저는 부장님이 시키시는 일 외에도 가령, 내일 수원 내려가 관련 부서 전체 회의 시 분명 개발 및 영업에서 원하는 자료들이 있을 텐데... 하며, 따로 늦은 밤까지 남아 두세 가지 안과 자료들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네, 맞습니다. 부장님이 아주 흡족해하시는 일이 많으셨고, 이런 일로 저는 여러 유관 부서에 알려졌으며, 향후 사업본부 전체의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팀으로 발탁되어 가기도 했습니다.

 

원치 않게 제 얘기를...

 

이 모든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3:22-24)

 

당시 이 구절들을 심비(心碑)에 새길 정도로 가까이하여 늘 떠올렸던 결과였습니다.

 

지금의 일과 사람은 모두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즉, 지금 하고 있는 이 일과 만나는 사람은 사실은 주님이 그 안에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이 주신 일과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면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무척 기뻐하시는 결과가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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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상할 일이 생길 때 (2025/10/28)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4-9)

 

살다 보면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위 본문에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처럼 말입니다. 저들이 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걸 보면, 저 길은 하나님과 모세의 인도를 받아 가던 행로였던 것 같고, 그럼에도 그 길이 마음이 상할 정도로 험한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상하면 틈이 생깁니다. 지옥 기운이 엿볼 틈 말입니다. 우리 안에 이 지옥의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들어오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옛날 연탄 때던 시절, 방바닥 틈으로 연탄가스가 새서 아침이면 난리가 나던 것처럼, 상황이 좀 어려워졌다고 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는 지옥문이 열리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마음 관리를 잘 못하여 이런 상태가 되면 안 되는 게, 우리 마음이 이 지경이 되면 보호, 하늘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되면 지옥 악령들에게 휘둘리게 되어 영육이 무방비 상태가 되고, 그 결과 보통은 매사 지혜와 총명이 사라져 바보 같은 선택을 연거푸 하게 되며, 몸에도 여러 악한 기운이 들어와 여기저기 아프고 병이 생기게 됩니다.

 

비록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고 그 길로 따라갔음에도 이런 마음이 상할 정도의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저들처럼 바로 원망과 비난의 대상을 찾는 대신, ‘이 상황 역시 주님이 허락하심이지’ 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것도 주님의 허락 없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것이 명백히 우리의 실수 때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건 범사에 주님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늘 복과 형통의 연속이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걸 주님을 사랑하고 참으로 신앙하는 기회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옥이, 악한 영들이 ‘아, 이 사람은 뭘 어떻게 해도 끄떡도 안 하네. 방법이 없네...’ 포기하고 물러가도록 말입니다. 영혼의 근육이 생기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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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사람들 (2025/10/27)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 곧 자연적 인간은 밭에서 갓 수확한, 흙이 묻고 거친 채소라 할 수 있습니다. 날 것 그대로이며,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1:2) 상태의 인간입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며,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 천적 생명(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잘 다듬고 정성껏 씻어 준비한 식재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이 시작되어 진행 중인 상태(1:3-31)입니다. 사람은 이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모두 여섯 단계의 상태변화를 경험하며, 처음엔 날 것 그대로이던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여 신앙하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이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머리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천적 인간은 훌륭한 요리로 변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잘 준비된 식재료들이 이런 요리로 변화되려면 최종적으로 열을 가해야 하는데 이 열이 바로 사랑이지요. 사랑이신 주님처럼 모든 걸 사랑으로 하는 사람들, 그래서 삼층천 주님 닮은 모양이 된 사람들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일의 사람들이지요. 거듭남이 완성된 사람들(2:1-17)이며,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덤으로 얻는 사람들입니다. 가슴 신앙의 사람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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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3:7-13, AC.211-233)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13)

 

 

창세기 속뜻 주석설교,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3:1-13 오늘은 그 후반부인 7절로 13,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설명을 곁들이며 살피겠습니다. 참고로, 창3은 모두 세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개요입니다. (반복)

 

190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191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92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창세기의 실제 역사는 아브라함부터입니다. 창1-창11, 그러니까 태고교회, 고대교회는 실제 역사가 아니고 수천수만 년의 세월을 간추려 마치 무슨 스토리 텔링처럼 기술한 기록입니다.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는 45, 6억 년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지구에 언제부터 인류가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창세기는 노코멘트합니다. 성경, 곧 말씀은 무슨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아르카나를 지상 언어로 담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여기 두 번째 후손, 세 번째 후손 등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 각각의 후손들이 살았던 실제 역사적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창5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에 따르면 태고교회는 대부분 8, 9백 년을 살았던 걸 보면, 그리고 그 숫자들 역시 단순 숫자, 그러니까 9백 년을 살았다고 해서 정말로 9백 년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장구한 어떤 세월을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실제로는 수천수만 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또 여기 등장하는 인물명들 또한 사실은 그 이름으로 불렸던 어떤 신앙, 어떤 신학, 어떤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창11까지는 모든 이름과 숫자가 다 이런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니까요. 주님은 생각하시기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 굳이 그런 장구한 옛날 역사까지 시시콜콜 다 알 필요는 없겠다 하시는 것 같습니다.

 

 

193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지각했는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와 그들이‘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hearing the voice of Jehovah)(7, 8)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에게 아직 퍼셉션이 남아 있음과,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7), 부끄러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을(8, 9)뿐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모습(10-13)들을 볼 때, 아직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도 남아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연적 선이란 선은 선인데 그 안에 악이 섞여 있는 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천적이지도, 영적이지도 않은 대부분의 선, 즉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선은 순수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절 별 속뜻입니다.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C.211-21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는 그들이 어떤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을 듣고 자기들이 ‘벗은 줄’(naked)을 알게 되었다, 즉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면서도 빛이 없어 자기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자는 줄을 모르던 사람이 어느덧 동이 터 빛이 비치자 그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212

‘눈이 밝아져’(eyes opened)가 무슨 내적 음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Balaam)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man whose eyes are opened)(24: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 한글 개역 개정에서는 ‘감았던’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위 영역을 보면 분명 ‘’, 혹은 ‘밝아진’입니다. ‘전엔 감았으나 지금은 뜬’, 차라리 이렇게 번역했더라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악하다는 내적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eyes saw), 즉 자신의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걸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더욱 말씀을 보면, ‘눈’(eyes)은 종종 이해(the understanding)와 거기서 나오는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 therefro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3)

 

여기 ‘눈’(eyes)은 이해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에서도 보면, 의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는’(have eyes to see, and see not)(12:2)족속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12:2)

 

이사야입니다.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6:10)

 

위 말씀은 그들로 볼 수 없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엔 ‘어? 사람들이 깨닫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그걸 막으시는 거지?’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게 그들에겐 더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상, 그들은 오히려 깨닫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돌이켜 배신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냥 그 정도에 머무를 텐데, 알고 나서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는 그의 사후 상태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이 신성모독의 죄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이 신성모독의 삶을 산 사람은 그 영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오염된다는 건, 영의 상태가 어느 하나의 상태로 가지를 못하는 것, 즉 하나를 생각하면 곧이어 그 반대되는 게 뒤따라 그 둘 사이에서 찢어지는 고통을 겪게 되는 걸 말합니다. 신성모독은 영적 ‘배신’입니다. 많은 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배신’이라는 거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29:4)

 

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the will)를, ‘눈’(eyes)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he should open the blind eyes)(42:7)라 하십니다.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42:7)

 

계속해서 이사야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29:18)라 하십니다.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2:25)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를 ‘그들이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워하거나 하지 아니하니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로 읽고는 이노센스를 의미하는 걸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워함’(being ashamed)의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 절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아 자신들을 숨겼다’(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라는 데를 보면 말입니다. 이는 이노센스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요, 창피이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악이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이 ‘벌거벗음’이라는 것은 이노센스의 유무에 따라 완전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어떤 수치스럽고 악한 걸로 사용되며, 전도된(顚倒, perverted)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23:29)

 

계시록에서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15)

 

신명기에서는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입어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으리라’(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하시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28:42, 43)



214

그들은 자신의 본성(own)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벌거벗겨졌다’(naked)고 합니다. 본성, 즉 자기 자신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결국 진리와 선에 대하여 ‘벌거벗겨진’(naked) 상태이고, 그 결과는 악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라는 옷을 입어야 천국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이 옷이 다 벗겨져서 악과 거짓의 알몸 상태가 되면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215

인간의 본성(man’s own)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저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영들이 스스로 하는 말, 곧 주님 말씀이 아닌, 영들 본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무슨 말이든 언제나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음을 제가 알게 될 때마다, 저는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이며,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말은 진리임을 자기들은 정말 철저히 확신하고 있으니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계는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몸으로 살짝 가릴 수 있어 겉과 속이 달라도 시치미 떼고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몸을 벗고 가는 데라 선이든 악이든 어느 한쪽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영계 체험과 증언을 통해 사람의 자아, 인간 본성이라는 게 실제로는 어떤 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임을 알았다’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으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퍼셉션은 어떤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은 건지 아닌지를 알게 해 주는 영적 통찰력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즉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같은 말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인 일들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이성적 접근을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걸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곧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그 결과 짙은 어둠,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47:10, 11)

 

예레미야에서는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51:17)

 

‘만든 신상’(graven image)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우상’(molten image)은 악, 곧 인간의 본성 속 악입니다.



216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잎을 엮어’(sew leaves together)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 ‘치마로 삼았더라’(make themselves girdles)는 부끄러워했다는 것입니다. 태고인들은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만,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들어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된 걸 그들은 부끄러워했다는 그런 묘사입니다.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vine)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fig tree)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위한 것임을 오늘날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사라졌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이 표현들이 나오는 데들을 보면, 여전히 이런 의미를 뜻하거나 포함하고 있지요. ‘포도원’(vineyard)과 ‘무화과나무’(fig tree)와 관련, 주께서 비유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입니다.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땅, 곧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vine)와 ‘무화과나무’(fig tree) 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호세아입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 (9:10)

 

요엘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C.218-225)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내면의 소리(an internal dictate, an inner dictate, the inner call)입니다. 그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건데요,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perception)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겁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그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소유하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마치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에 있는 ‘동산 나무 사이에’(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여기 가장 안쪽(inmost)을 ‘사이에’(midst)라 하며, ‘나무’(tree)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어서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인 양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소리’(voice)가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voice of Jehovah)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 경고하기, 그리고 또 그 결과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천둥소리를 ‘여호와의 소리’(voice of Jehovah)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10:7)

 

시편입니다.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68:32, 33)

 

‘옛적 하늘들의 하늘’(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하며, ‘소리’(voice)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계속해서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29:3-5, 7-9)

 

이사야입니다.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30:30, 31)

 

 

(쉬는 시간)



220

‘거니시는 소리’(voice going to itself)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말하자면 마치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를 보면, 거기서도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담을 부르시며’의 ‘부르시며’는 ‘shouted’에 가까운 ‘called’입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깊이 잠긴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시매’라 표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나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한테는 이런 소리가 천둥번개의 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3, 6)

 

‘광야’(wilderness)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교회를, ‘외치는 자의 소리’(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입니다. 거듭난 사람들과 그 안에 내면의 소리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요.



221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기간, 곧 교회에 아직 어느 정도 퍼셉션이 남아 있던 기간을 의미함이 분명한 것은 ‘낮’(day)과 ‘밤’(night)의 상징 때문입니다. 태고인들은 교회의 상태를 낮과 밤의 때들과 비교했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었을 때를 낮으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이 상태가 ‘그날’(of the day)의 숨 또는 바람으로 비교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밤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의 퍼셉션이 아직 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 상태(they were fallen)는 숨, 호흡, 생명이 없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또한 신앙의 상태를 ‘낮’(day)으로, 신앙이 없는 상태를 ‘밤’(night)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9:4)

 

같은 이유로,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들을 창세기 1장에서 ‘날들’(days)이라 하였습니다.



222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악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그 내면의 소리를 두려워함이라는 것은 그들의 대답인 10절 말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를 보면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낯’(face of Jehovah) 혹은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강 및 모든 선이라는 것이 다음 축복의 말씀들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6:25, 26)

 

시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4:6)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자비를 가리켜 ‘자기 앞의 사자’(angel of faces)라 하고 있습니다.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63:7-9)



223

‘주의 낯’(face of the Lord)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이시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주님은 만물을 향해 자비로우시며,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신 반면, 오히려 사람, 그러니까 악 중에 있을 때 얼굴을 돌려버리는 자는 바로 그 사람 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하신 이사야 말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와, 그리고 여기 ‘그들이 자기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말씀을 보면 말입니다.



224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즉 ‘여호와의 낯’(faces of Jehovah)은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들 역시 같습니다. 이들 퍼셉션과 양심은 늘 자비롭게 작동하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둘의 수용되는 정도는 달라집니다. 이 사람의 상태, 곧 태고교회 이 후손의 상태는 일종의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자연적 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두려워하며 스스로 숨습니다만, 반면, 이 선조차 없는 사람들은 숨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일말의 수치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812, 13절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위 217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8:12, 13)



225

‘동산 나무 사이에’(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그 안에 ‘나무’(tree)라 하는 퍼셉션이 조금 있는 자연적 선을 말한다는 것은 전에 천적 인간이 거주했던 곳이 ‘동산’(garden)임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모든 선과 진리를 가리켜 ‘동산’(garden)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이지 않으면 선이 아닙니다. 그곳으로부터이거나 그곳을 통해서 퍼셉션은 주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 가장 안쪽을 가리켜 ‘사이’(midst)라 하며, 말씀 어디에서나 같습니다.

 

9, 10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C.226-228)

 

226

‘부르시며’(crying), ‘동산에서 나는 소리’(voice in the garden),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숨었나이다’(hiding themselves)의 의미들은 앞서 지금까지 주욱 설명했습니다. 말씀에서 먼저 사람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묻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말이지요. 그러시는 이유는 그가 시인하고 자백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27

오늘날(1750년 즈음 유럽)은 퍼셉션, 내적 음성(internal dictate) 및 양심의 기원을 좀 알 수 있었으면 하는 데 비해 실제 알려진 건 거의 없는 상황인지라 제가(Swedenborg, 스베덴보리, 1688-1772) 이 주제로 무슨 말씀을 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엄청난 사실은,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지배가 시작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들의 방향을 바꾸느라 애를 쓰며, 이렇게 전투가 발생합니다. 사람이 퍼셉션, 딕테이트 및 양심을 통해 점점 더 민감해져 가는 게 바로 이 전투입니다. 이것들과, 또 시험을 통해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 수 있는데요, 그가 영과 천사들에 관한 말들을 듣고도 전혀 안 믿을 정도로 육()의 일들에 아주 깊이 잠긴 그런 사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이런 영적 전투를 수백 번 느껴도 여전히 말하기를, 그런 건 다 상상이며 마음이 어수선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이런 영적 전투를 느끼고, 수천수만 번 수년 동안이나 지속, 아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이 전투를 일으키는 영들이 누구며 무슨 일을 하고, 그리고 어디 출신인지, 언제 오고 언제 떠나는지 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228

천사들에게는 정말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이걸로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반대되는 어떤 것에 들어갈지 말지를 지각합니다. 천사들은 들어가는 것의 퀄리티(quality, )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혼자 하는 것 보다’라는 표현은 ‘자기에게 와 있는 천사들의 도움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관하여 아래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292번 글을 읽어 보세요.

 

각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이 와있다. 선한 영들을 통해서는 사람은 천국과 결합되고,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과 결합된다. 이 영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 영계에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앞으로 특별히 다룰 것이다. 이 영들이 사람에게 오면 사람의 기억 전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생각 전체에 들어간다. 이때 악한 영은 사람의 악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선한 영은 선한 기억과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들은 자기들이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의 모든 기억과 생각이 자기 것인 줄 안다. 또 그들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태양계 내의 것은 아무것도 그들 시각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204 주께서는 영들이 자기가 사람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하신다. 만일 그들이 알아차리면 사람에게 말을 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악한 영의 경우, 사람을 파괴하려 들기 때문이다. 악한 영들은 지옥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을, 즉 그의 신앙과 사랑을 파괴하고, 사람의 몸까지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이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에게서 온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도 사람에게서 온 것인데도 그들은 자기가 하는 생각과 말이 자기 것인 줄 믿는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것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도록 그들이 모르는 제재를 받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험의 결과로 사람과 영들과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204.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과 영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 사람은 영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AC.697, 2796, 2886, 2887, 4047, 4048, 5846–5866, 5976–5993) 자기에게 와있는 영들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AC.5993) 사람은 영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들 또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C.5862) 영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에게 속한, 우리 태양계 내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AC.1880)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풀로(fully)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로 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것보다도 더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11-1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C.229-233)

 

229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는 앞서 설명되어 온 내용으로 분명한데요,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인 면이 자아, 본성으로 말미암아 속아 넘어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인간 자신에게 무척 소중해서, 이걸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는 자기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거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은 뱀하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 실제로 뱀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뱀’(serpent)으로 상징된 감각적인 걸 특정하지도 않으셨다는 것이며, 대신 이 구절들에는 다른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이들 감각으로 인해 속았음을 지각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자기 사랑의 결과, 그들은 주님과 주님 신앙에 관해 귀로 들어온 것들의 사실 여부를 자기들이 믿기 전에 먼저 좀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230

이들 네 번째 후손을 지배하는 악은 자기 사랑이었고, 동시에 세상 사랑은 오늘날(1750년대 유럽) 볼 수 있는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의 가정과 권속들 내에서 지냈고,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31

홍수 전 있었던 태고교회의 악, 뿐만 아니라 홍수 후인 고대교회의 악, 그리고 또 유대교회의 악 및 새 교회, 즉 주님 오신 후 시작된 이방교회의 악, 그리고 또 오늘날 현 교회의 악까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 모든 악은 주님이나 말씀을 안 믿고, 대신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있는 감각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은 신앙이라는 게 없고, 신앙이 전혀 없는 곳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없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요 악이 된 것입니다.



232

오늘날은, 그러나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입니다.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기억-지식들, 즉 새로운 과학 지식들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감각마저 불신하게 된 건데요, 이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로 인한 이 어두움의 엄청난 실상을 알면 아마 기절할 듯 놀라 자빠질 겁니다.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는 이 주석을 1749년에 시작, 1756년에 마쳤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15세기 후반,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동안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 세계관으로 세계관의 이동, 가치관의 이동을 이끌었고, 16, 17세기 근대 과학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계시 중심에서 인간 이성 및 실험, 관찰 중심으로 옮겨간 것이지요. 스베덴보리가 이 주석을 기록하던 18세기 중엽 유럽의 상황을 이런 흐름 속에서 생각해 보면, 저 ‘새로운 과학 지식들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감각마저 불신하게 된 건데요, 이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로 인한 이 어두움의 엄청난 실상을 알면 아마 기절할 듯 놀라 자빠질 겁니다’라는 말에 묻어 있는 안타까움이 조금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마저도 2025년 현재의 문명급 과학기술에 비하면 거의 3백 년 전 과학 지식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233

기억-지식들, 곧 세상 학문과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겠다는 것만큼이나, 그리고 갈비뼈 하나로 가슴과 심장의 극히 미세한 근육들을 움직여 보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19:24)

 

정말 거칠고 투박한 것, 네, 정말 훨씬 더 거칠고 투박하지요!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기억-지식에 관한 것을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지으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허락으로 스베덴보리 57세 때 시작, 세상을 떠날 때까지 27년간 계속된 영계 체험을 통해서 영들과 천사들, 그리고 주님에 대하여 알게 된 그로서는 그에 비해 이 세상 지혜와 지식, 학문적 성과라는 것들이 얼마나 초라하고 하등한 것인지가 아주 생생하게 대비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의 셀 수 없이 많은 비밀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은 거의 단 하나도 발견하기 어렵고, 또 잘 알려진 대로, 조사하는 중에 그만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영적 천적 삶 가운데 숨겨진 진리들을 조사하는 동안에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합니다. 거기에는 자연계에서는 볼 수도 없는 것 하나 안에도 얼마나 많은 무수한 신비들이 존재하는지 모르니까요!

 

[2] 한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면은, 사람은 스스로 악을 행하고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이 그러는 것이며, 악한 영들 역시 그들 자신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자신의 본성으로 만들어 온 악 자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사람이 악을 행하여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며, 사람이 죄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또 한편으로,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도, 주님을 향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천사들에 의해 행해집니다. 그런데 이 역시 천사들이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할 수 있고, 주님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가진 감각이나 기억-지식, 철학 같은 걸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런 것들에 대한 자문을 구하게 되면, 이 모든 게 사실임에도 불구, 모조리 부정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늘 똑같습니다.

 

[3]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 분명한 사실은, 믿음의 문제들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답을 찾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의심과 부인, 즉 깊은 흑암과, 그 결과 온갖 탐욕 가운데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된 것을 믿고 거짓된 것을 행하기 때문이며, 또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대신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들만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들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며, 이런 식으로 거짓된 것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탐욕과 악을 행합니다.

 

 

이상으로 창세기 3장 첫 번째 단락인 창3:1-13을 오늘은 그 후반부인 7절로 13절, ‘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역시 설명을 곁들이며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창3 두 번째 단락인 14절로 19절을, ‘3,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부터 홍수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2주에 걸쳐 살피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 주는 월의 첫 주 성찬 있습니다. 다음 주는 벌써 11월이군요. 환절기 감기 걸리지 마세요. 몸의 건강과 관련,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몸과 천국 간 일대일 상응을 기억하시고, 몸 아픈 부위에 대한 천국 내 해당 공동체들의 활기와 생명, 그리고 사랑이 흘러들어와 머무르기를 어린아이처럼 구하는 상응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본문과 개요, 한 번 더)

 

 

설교

2025-10-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15. 2025-10-26(D1)-주일예배(창3,7-13, AC.211-233),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눈이 밝아짐’.pdf
0.67MB
15. 영문 원본, 창3,7-13, AC.211-233.pdf
0.09MB

 

 

 

 

14. AC.190-210,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창3:1-6), 2025/10/19(D1)

‘창3, 태고교회 세 번째, 네 번째 후손, 뱀과 여자’(창3:1-6, AC.190-210)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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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결정짓는 두 가지 태도 (2025/10/24)

 

 

하나는 로드쉽(lordship)이고, 다른 하나는 오너쉽(ownership)입니다.

 

먼저 로드쉽입니다. 사전적 의미를 좀 확장하여 ‘주종(主從)관계를 명확히 함’, 즉 ‘주님의 주(主) 되심을 시인, 인정함’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과거와 달리 우리는 누구의 종(從)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이런 주종관계가 솔직히 와닿지 않지만, 삶 가운데 오직 주님만이 나의 주인(主人)이심을 명심하고 사는 것, 이것이 참된 의미의 인생입니다.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오너쉽 문제로 연결됩니다. 오너쉽이란 소유권, 즉 누구의 것이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즉 타고난 재능과 소유, 환경과 상황 등에 대한 일체의 소유권을 오직 주님께만 두는 태도, 이것이 참된 의미의 인생을 사는 열쇠입니다.

 

이런 태도들이 인생을 결정짓는 열쇠가 되는 이유는,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들은 천국을 위해 잘 준비되며, 그의 안에 천국이 있어 생전에도 천사들처럼 천국의 모든 것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인생이 나중에 참 잘 살았다 할 수 있으려면 인생을 다 산 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천국 생활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생전에 그 속 사람이 잘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주 되심과, 모든 것이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정말 결정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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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련과 앞이 캄캄함은 다 내가 자초하는 것 (2025/10/23)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홍수 직전까지 존재했던, 지금 여기 다루고 있는 이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은, 신앙의 진리라는 게 무엇이며, 주님이라는 분은 뉘신지,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말 같은 거 듣기를 더 이상 내켜 하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일과 몸에 관한 일에 너무도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잠긴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언급될 때마다, 그들은 듣기 싫어 외면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는 바로 이런 혐오를 말합니다. 그래서 또한 유대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오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는 그런 캐릭터들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만나를 보고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주님의 표상이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하찮은 음식’(vile bread)이라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한테 불 뱀(fiery serpents)을 불러들이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5, 6)

 

더욱 놀라운 사실은, 천적인 것들을 가리켜 그들이 울면서, ‘역경의 빵’(bread of adversity), ‘비참의 빵’(bread of misery), ‘눈물의 빵’(bread of tears)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천적인 것들은 역경과 비참이라는 상태로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의 구절에서, 혐오하면서 받은 것을 가리켜,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 하고 있습니다. (AC.276)

 

다음 말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14:28) 생각납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14:26-30)  

 

이런 말씀들도 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59:2)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8)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그 신적 본성상 누구를 미워하며 벌주고, 원망하고 저주하실 수 없으십니다. 보복하여 죽이고 지옥에 처넣으실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오해할 수 있게 기록하신 이유는, 선악 간 모든 일에, 그리고 세상만사 길흉화복 모든 일에 오직 주님만이 다스리시는 줄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모든 복과 화는 주님의 나라, 이 세상 질서와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그러니까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끝까지,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주님의 선을 이루게 됩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사실은 비록 우리가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런 실상에도 불구하고 그런 우리의 실수와 어리석음들을 주님은 우리를 성장, 성숙, 거듭나게 하시는 일련의 재료로, 도구로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완악하고 완강하여 이마저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뭐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시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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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사람이 되고 언제 들짐승이 되는가 (2025/10/22)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8)

 

‘가시덤불과 엉겅퀴’(thorn and the thistle)는 저주와 황폐함(vastation)을,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말합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에게 아주 일반적으로밖에는 뭘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겉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 있게 되면, 사람은 그때는 들짐승처럼 삽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는 걸로는 사람이지만, 속 사람과 분리되어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들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면에서 비슷하며, 유기적 형태로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이성적으로 그럴듯한 걸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얼핏 보기엔 완전히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영적 실체(the spiritual substance)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걸로 주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인플럭스(入流,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를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저런 인간, 곧 저런 들짐승 같은 겉 사람 안에서는 반대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는 것입니다. (AC.272)

 

천국은 주님의 신성(神性, Divien), 곧 선과 진리의 나라입니다. 이들 주님의 선과 진리는 천적, 영적이어서 천사들은 이것이 그들의 양식입니다.

 

사람와 동물의 차이는 사람한테는 가장 깊은 곳에 이 주님의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remains)라는 게 주님에 의해 보관되는 반면, 동물한테는 그런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한테는 지옥에서 악령들이 와있고, 천국에서 천사들이 와있는데, 각 사람에게 와있는 천사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를 가지고 그를 돕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저마다 리메인스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일지라도 그가 주님을 싫어하며, 자기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 곧 리메인스 두기를 언짢아하면, 성인이 되어갈수록 그의 리메인스 창고는 점점 텅텅 비게 되어 고갈, 결국 그는 들짐승이 됩니다. 겉모습은 사람이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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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자와 창3 여자는 다른 여자 (2025/10/21)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세 번째 상태를 다루는데요, 이 상태는 자신의 본성을 사랑할 정도로 원하던(so desired its own as to love it) 상태입니다. (AC.190)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신들의 감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것도 안 믿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본문에서는 감각적인 건(the sensuous part)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즉 자신의 본성을 향한 사랑은 ‘여자’(woman)로, 그리고 이성적, 합리적인 건(the rational) ‘남자’(man)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AC.191)

 

이런 배경 가운데 ‘뱀’(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 주님 신앙에 관한 것들이 과연 그런지를 알아보게 하였는데, 이것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으로, 사람의 이성이 동의한 것은 ‘그도 먹은지라’(the man that he did eat)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6)

 

그러니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사람을 저런 말로 속일 수는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한테는 저런 속삭임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런 말에 넘어가고 안 넘어가고는 본인이 가진 자아의 퀄러티, 즉 속 사람의 역량 문제인데요, 그러니까 천사들이라면 저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그 자아가 백 퍼센트 주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의 귀가 어떤 속삭임에 솔깃해하는가를 관찰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 본성, 내가 하고 있는 이 사랑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나오는, 뱀에게 속아 넘어가는 여자는 창2 후반에 나오는 여자와 다른 여자입니다. 저 창2 후반 본문은 두 번째 후손 이야기이지만, 여기는 세 번째 후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안 좋게 변한, 자기 사랑에 더욱 기울어진 상태가 된 후손 이야기인데, 두 번째 후손만 되었어도 안 속았을 저런 속삭임에 이들은 그만 쉽게 넘어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뱀은 인간의 감각 파트를 말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 그러니까 영, 지혜, 지성, 이성, 지식 및 감각 등 여러 파트로 구성된 존재로서, 이 중 가장 낮은 파트인 몸에 속한 감각을 ‘’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천적 인간은 이 몸의 감각 또한 거듭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몸의 감각이 더 이상 여기서 말하는 뱀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육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한테는 지옥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적 인간이며, 일곱 번째 상태, 곧 안식일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AC.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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