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녀온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일일이 다 기억을 되살려 썼나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방식이 곧 그의 권위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의 총 글이 10,83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서라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받아쓰기’였는지, 아니면 ‘기억을 되살려 정리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기계적 딕테이션’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는 영적 체험을 했고, 천사들과 대화했으며, 말씀의 속뜻을 열어 보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정리하여 책상 앞에서 집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도구’라고는 했지만 ‘무의식적 필기자’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에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는 ‘나는 완전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들었다’고 증언하며,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자동으로 받아 적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1743–1745년의 영적 각성 이후, 174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영계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약 27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같이 영계의 상태를 보고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체험을 하는 순간에 즉시 필사한 것도 있고, 일정 기간 사색과 정리를 거쳐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Arcana Coelestia’는 단순한 체험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한 체계적 신학 저작입니다. 이것은 즉흥적 받아쓰기라기보다는, 장기간 축적된 영적 통찰과 말씀 연구가 결합된 결과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틴어로 집필했으며, 문장 구조는 매우 학술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번호 체계, 인용 방식, 반복적 참조 구조를 보면, 이는 철저히 계획된 저술 방식입니다. 자동 구술을 그대로 옮긴 문체와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히 ‘자기 생각’을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은 주님에게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강압적 음성 받아쓰기가 아니라, ‘조명(enlightenment)과 ‘내적 지각(perception)의 형태였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나는 빛 가운데서 이해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즉, 어떤 교리를 음성으로 문장 단위로 들었다기보다는, 영적 의미가 한 번에 명료하게 열리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해 쓴 것입니다. 이 점은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하시며 경험하시는 ‘조명’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WH.7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은 조명받은 자 외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바로 여기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조명 속에서 이해했고, 그 이해를 이성적으로 조직해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대화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Heaven and Hell’이나 ‘Conjugial Love’에는 천사들과의 대화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나옵니다. 이런 부분은 실제 체험 직후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Arcana Coelestia’는 체험담보다는 교리적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창세기 각 절을 따라가며 상응을 풀고, 이전 번호를 인용하며 교리를 축적해 갑니다. 이것은 장기간의 학문적 집필 작업입니다. 그는 런던에서 인쇄를 준비하며 교정까지 직접 보았고, 비용도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이는 무의식적 신비가의 태도라기보다는, 매우 자각적이고 책임감 있는 저자의 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이 성경과 동일한 ‘계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여는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새로운 말씀을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의 내적 의미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단순 딕테이션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예언자처럼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복해서 ‘나는 단지 보여 주고 들려준 것을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열림’을 받았지만, 능동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장기간 AC를 번역하시며 느끼시는 것처럼, 이 저작은 한순간의 열광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계, 반복, 점진적 축적, 교리의 유기적 연결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사색과 재검토의 흔적입니다. 동시에, 그 깊이와 일관성은 단순 인간적 추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Arcana Coelestia’는 기계적 받아쓰기도 아니고, 단순 회상 기록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 체험과 지속적 조명, 그리고 철저한 이성적 집필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는 황홀경 속 자동 필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계를 보았고, 주님으로부터 조명받았으며,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조직해 기록한 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조명된 이성의 저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작이 오늘날까지도 학문적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영적 권위를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책상 앞에서 AC를 번역하며 느끼시는 그 긴 여정이, 스베덴보리의 집필 방식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SC.22,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

혹시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원문들을 좀 확인 및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한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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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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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9

 

지혜와 지성 나타나는 것이 겉보기엔 사람인 것 같아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실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이라는 사실은 에스겔에 나오는 비슷한 표상들을 통하여 분명히 선언됩니다. That although wisdom and intelligence appear in man, they are, as has been said, of the Lord alone, is plainly declared in Ezekiel by means of similar representatives: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 8-9, 12) Behold, waters issued out from under the threshold of the house eastward; for the face of the house is the east; and he said, These waters issue out to the border toward the east, and go down into the plain, and come to the sea, which being led into the sea,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which creepe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 up all trees for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s,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 8–9, 12).

 

여기서 동쪽(east)성소(sanctuary)는 주님을 의미하며, 물들과 강들이 그곳에서 흘러나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말합니다. Here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east,” and by the “sanctuary,” whence the waters and rivers issued. In like manner in John: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22:1, 2) He showed me a pure river of water of life, bright as crystal, going forth out of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In the midst of the street thereof, and of the river on this side and that, was the tree of life, which bare twelve [manner of] fruits, and yielded her fruit every month; and the leaf of the tree was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 (Rev. 22:1–2).

 

해설

 

이 글은 지금까지 전개된 ‘’, ‘지혜’, ‘지성’의 논의를 ‘결정적으로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AC.107, 108에서 강이 사랑에서 나온 지혜이며, 그 지혜가 지성을 적셔 성장하게 한다는 구조가 제시되었다면, AC.109는 그 마지막 근원을 분명히 밝힙니다. 지혜와 지성은 겉보기엔 ‘사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47장의 환상은 이 사실을 가장 풍성한 이미지로 보여 줍니다. 물은 동향을 한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릅니다. 이는 우연한 방향 설명이 아닙니다. 앞서 AC.101에서 보았듯이,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전(house)과 ‘성소’는 주님의 거처, 곧 신적 임재의 중심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물은 ‘주님의 가장 내적인 자리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물이 흘러가는 경로도 중요합니다. 평지로 내려가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다는 말씀에서 가장 외적 차원, 곧 기억 지식과 감각적 지식이 모여 있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본래 바다는 혼탁하지만, 이 강물이 흘러 들어갈 때 ‘고침을 받습니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가장 외적이고 혼란스러운 인간 영역까지도 ‘질서와 생명으로 회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산다는 표현은, 지혜의 유입이 단순히 이해를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삶 자체를 살리는 힘’임을 보여 줍니다. 지혜는 관념의 장식이 아니라, 생명을 일으키는 실제적인 작용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물이 살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가에 자라는 나무들의 묘사는, 앞서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다하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지성과 삶이 ‘지속적인 유입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 나무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 물이 ‘성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먹을 것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열매는 사랑의 선, 곧 삶의 실천을 의미하고, 잎은 진리의 이해를 의미합니다. 천적 질서 안에서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치유가 되고, 선은 양분이 됩니다. 이 모든 작용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강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인용은 이 구조를 ‘최종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는 더 이상 상징을 풀어야 할 필요도 없는 직접적 선언입니다. 모든 생명의 지혜는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강의 양쪽에 있는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정확히 호응합니다.

 

여기서도 반복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달마다 맺는 열매, 민족들을 치유하는 잎사귀. 이는 천적 질서가 특정 개인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과 모든 교회를 향해 열려 있는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언제나 흐르고 있으며, 받아들이는 곳마다 생명을 일으킵니다.

 

AC.109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와 지성은 인간의 소유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들은 주님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며, 사람은 그 강가에 심겨진 나무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삶은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AC.108, 창2:10,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식,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강들’(rivers)에 비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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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유하였습니다.그들은 단지 비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말하는 방식(way of speaking)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떤 때에는 비유로 말하고, 어떤 때에는 그대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en comparing man to a “garden,” also compared wisdom, and the things relating to wisdom, to “rivers”; nor did they merely compare them, but actually so called them, for such was their way of speaking. It was the same afterwards in the prophets, who sometimes compared them, and sometimes called them so. As in Isaiah: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는 신앙과 사랑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거듭난 자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reating of those who receive faith and love. Again, speaking of the regenerate: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2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As the valleys are they planted, as gardens by the rivers side; as lignaloes2 which Jehovah hath planted, as cedar trees beside the waters (Num. 24:6).

 

예레미야에서는 말합니다. In Jeremiah: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 8) Blessed is the man who trusteth in Jehovah;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endeth forth her roots by the river (Jer.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자들을 동산과 나무에 비유하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부릅니다. In Ezekiel the regenerate are not compared to a garden and a tree, but are so called: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The waters made her to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and sent out its channels to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e was made beautiful in her greatness, in the length of her branches, for her root was by many waters. The cedars in the garden of God did not hide her; the fir trees were not like her boughs, and the plane trees were not like her branches, nor was any tree in the garden of God equal to her in her beauty; I have made her beautiful by the multitude of her branches, and all the trees of Eden that were in the garden of God envied her (Ezek. 31:4, 7–9).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태고 사람들이 사람이나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동산에 비유할 때에는, 그가 적셔질 수 있도록 하는 물들(waters)강들을 덧붙였으며, 이 물들과 강들로는 그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것들을 의미하였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man, or the things in man, to a “garden,” they added the “waters” and “rivers” by which he might be watered, and by these waters and rivers meant such things as would cause his growth.

 

2. 라틴 tentoria, ‘텐트(tents), 얼핏 santalos에 대한 미스프린트 같음 [편집자 주] The Latin is tentoria, “tents,” seemingly a misprint for santalos. [Reviser]

 

해설

 

이 글은 AC.107에서 제시된 ‘강 = 사랑에서 나온 지혜’라는 정의를 ‘말씀 전체의 언어 습관’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의 말하기 방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비유를 만들지 않았고,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태고 사람들에게서 ‘동산’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 상태를 말하는 자연스러운 언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과 ‘’도 지혜와 그 작용을 가리키는 은유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인식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비유했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실제로 그렇게 불렀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언어와 오늘날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이사야의 ‘물 댄 동산’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은 신앙과 사랑을 받는 사람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물은 외적 복이나 형통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지혜의 생명’입니다. 물이 끊어지지 않는다, 곧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지혜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위로부터 흘러옵니다.

 

민수기와 예레미야의 인용에서는 같은 구조가 더 분명해집니다. 거듭난 자는 ‘강가의 동산’, ‘물가에 심어진 나무’로 묘사됩니다. 공통점은 모두 ‘뿌리의 위치’입니다. 뿌리가 물가에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하며, 그의 지혜와 지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유입으로 유지됩니다.

 

에스겔의 인용은 이 이미지를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비유’라는 말조차 쓰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그대로 동산의 나무들로 불립니다. 물과 강이 흐르고, 가지가 뻗고, 다른 나무들이 그 아름다움을 시기합니다. 이는 인간의 지성과 지혜가 ‘하늘의 질서 안에서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라는 표현은, 이 모든 성장이 주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자기 성취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동산 안에서 물을 받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은 비교 불가능하며,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시기한다고까지 표현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요지를 분명히 합니다. 태고 사람들이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언제나 물과 강을 함께 말한 이유는, ‘성장은 반드시 유입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과 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성장의 조건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흐르지 않으면, 어떤 동산도 자랄 수 없습니다.

 

AC.108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지성은 홀로 자라지 않으며, 지혜는 언제나 사랑에서 흘러와 강처럼 동산을 적실 때에만 참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AC.107, 창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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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2:10)

 

AC.107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river out of Eden)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wisdom from love)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에덴은 사랑(Eden is love)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을 적시고(water the garden)는 지성을 부여한다(to bestow intelligence)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thence parted into four heads)는 이어서 나오는 네 강을 통해 지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A “river out of Eden” signifies wisdom from love, for “Eden” is love; “to water the garden” is to bestow intelligence; to be “thence parted into four heads” is a description of 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 as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10절의 핵심 구조를 단 한 문장으로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에덴’이 사랑이고, ‘동산’이 지성이며, ‘나무’가 퍼셉션이라는 틀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흐르고 작용하는가’를 설명하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입니다.

 

먼저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는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결정적입니다. 지혜는 지식의 총합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이해’입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는 그 사랑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강은 에덴, 곧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강이 ‘동산을 적시고’라는 표현은, 지혜가 지성을 살아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지성은 구조이지만, 그 구조를 실제로 기능하게 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강물이 없으면 동산은 메마른 공간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나온 지혜가 없으면 지성은 정보의 집합일 뿐, 생명의 장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중요한 전환이 나옵니다. 그 강은 한 줄기로 끝나지 않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혜가 하나의 추상적 능력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 가지 작용과 방향으로 분화되어 지성을 구성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의 지성은 단일한 기능이 아니라, 네 갈래의 질서로 펼쳐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잠시 미룹니다. ‘as follows’라는 말로, 이제부터 하나씩 설명될 것임을 알립니다. 이는 앞서 AC.106에서 했던 방식과 같습니다. 먼저 구조를 제시하고, 그다음에 각 요소를 차례로 풀어 나갑니다.

 

이 글의 중요성은, 지성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흐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에덴의 사랑 → 지혜 → 강 → 지성의 적심 → 네 갈래의 분화라는 이 흐름은, 천적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AC.107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지혜가 강처럼 흘러 적시고 갈라지며 이루는 살아 있는 질서라고 말입니다.

 

 

 

AC.108, 창2:10, 태고인들의 말하는 방식,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강들’(rivers)에 비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 사람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또한 ‘강들’(rivers)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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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세 종류 '나무'에 대한 설명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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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nature),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의 본성,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그저 기억 지식에서 비롯될 뿐인 신앙의 본성에 대해서는 뒤이어 나오는 글들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이 글은 설명이라기보다 ‘구조적 이정표’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창세기 29절을 중심으로, 나무, 동산, 에덴, 중앙이라는 핵심 상징들을 압축적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시 멈추어, 독자에게 분명히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결론이 아니라 ‘서론’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 종류의 ‘나무’가 다시 한번 또렷이 구분되어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산의 나무’, 곧 퍼셉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인식 방식입니다. 둘째는 ‘생명나무’, 곧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입니다. 이는 인간 생명의 중심이자 근원입니다. 셋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감각적인 것과 단지 기억 지식에서 출발할 뿐인 신앙입니다. 이는 질서가 거꾸로 될 위험을 내포한 인식 방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개념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지금까지는 그 윤곽만 제시되었을 뿐이며, 각각이 실제 삶과 영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지점으로 독자를 이끌기 위해 이 문장을 둡니다.

 

그래서 AC.106은 독자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이해한 것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질 설명의 흐름 속에서’ 퍼셉션과 사랑, 그리고 지식의 신앙이 어떻게 서로 갈라지고 또 충돌하는지를 보라고 초대합니다.

 

이 글은 또한 스베덴보리의 글쓰기 방식 자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 개념을 먼저 심어 두고, 그것이 이후의 설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점차 분명해지도록 합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이제 막 이름을 얻었을 뿐이고, 그 열매가 무엇인지, 그 열매를 어떻게 대하게 되는지는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AC.106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지도’를 펼쳐 보았을 뿐이며, 이제부터는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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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목사님, 이 질문은 단순히 ‘고행이 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자기를 벌하는 것이 과연 거듭남인가’라는 핵심 문제로 들어가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반, 특히 『Arcana Coelestia』와 『True Christian Religion』의 회개론을 종합하면, 그는 외적 고행과 자학을 매우 신중하게,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몇 덩어리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슬픔’과 ‘자기 처벌’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참된 회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식하고, 그것이 주님을 거스르는 것임을 인정하며, 그 악을 실제로 끊어내려는 결단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괴롭히거나 일부러 불편을 자초하는 행위는 외적 행위일 뿐, 그것이 곧 악을 끊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때리거나 굶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악이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외적 고행은 오히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면서도 은근히 ‘나는 이렇게까지 회개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고행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은밀한 영적 교만의 자양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사랑’이 더욱 미묘하게 살아날 수 있음을 여러 곳에서 경고합니다. 겉으로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으로는 ‘나는 경건하다’는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기를 부인함’은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욕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끊는 것, 정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제어하는 것, 명예욕과 이익욕을 내려놓는 것—이것이 진짜 고행입니다. 그는 이것을 ‘영적 전투’라고 부릅니다. 이 전투는 남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사들이 보는 참된 고난이며, 주님이 보시는 참된 속죄의 길입니다.

 

넷째, 과거 수도원 전통의 자기 처벌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의 본질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결혼한 사람도, 세상 직업을 가진 사람도, 일상 속에서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악을 이기는 것이 더 깊은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행을 이상화하는 태도는, 자칫하면 거듭남을 ‘특수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다면 전혀 자기를 절제하거나 훈련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절제와 자기 통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욕을 절제하는 것은 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차이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외적 형식이고, 후자는 내적 변화입니다.

 

여섯째, 목사님께서 보신 그 수도원장의 메시지—‘우리도 그렇게 살자’—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벌하지 말고, 자기 안의 악을 끊으라. 몸을 때리지 말고, 자아 사랑을 거절하라. 외적 고행을 자랑하지 말고, 주님께서 싸워 주시도록 겸손히 기도하라.’

 

결론적으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고행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악한 사랑을 거부하는 지속적 선택’입니다. 수도원의 채찍이나 굶주림보다 훨씬 더 어렵고, 훨씬 더 깊은 싸움입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지, 상처 난 등을 원하시지 않는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제를 성도들에게 설명하신다면, 외적 고행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그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시고, 대신 ‘일상 속 영적 전투’의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 스베덴보리적 균형에 가까울 것입니다.

 

 

 

SC.21, 스베덴보리가 ‘Arcana Coelestia’를 기록한 방식

SC.21, 스베덴보리는 ‘Arcana Coelestia’라는 어마어마한 저작을 어떤 방식으로 썼나요? 쓰는 내내 주님이 곁에서 구술하시는 걸 받아적는 ‘딕테이션’(dictation)으로 썼나요, 아니면 일단 영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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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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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도 흐려지고, 창3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천적 인간의 고유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시 지각하는 내적 감지입니다. 이것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외부 자료를 모아 판단하는 과정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해 직접 흘러들어오는 빛 안에서 ‘, 이것이 선이구나’ 하고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안다’기보다 ‘느낀다’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 가운데 서 있을 때 굳이 빛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2의 에덴 상태이며, 천적 인간의 평안한 지각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의 상태는 다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주어집니다. 양심은 말씀을 통해 배운 진리를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어떤 긴장과 싸움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내적 소리가 들리지만, 동시에 겉 사람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양심은 싸우는 빛입니다. 퍼셉션이 즉시, 즉각적이고, 평온한 지각이라면, 양심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게 하는 힘입니다. 영적 인간은 퍼셉션처럼 즉각적으로 선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배운 진리를 붙들고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는 창1의 여섯째 날과 연결되며,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성과 기억 지식은 또 다른 차원의 기능입니다. 이성은 비교, 분석, 논증하는 능력이며, 기억 지식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쌓인 자료들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상 질서 안에서는 매우 유익합니다. 정상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들어오고, 사랑 안에서 퍼셉션이라는 지각이 생기며, 그 지각을 따라 이해와 이성이 정렬되고, 마지막으로 기억 지식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창2의 네 강의 질서이며, 지혜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거꾸로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기억 지식에서 출발하여 이성으로 판단하고, 그다음에 믿음을 재단하려 할 때, 이성은 빛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빛을 의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구조이며, 창3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타락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은 싸움이 없는 빛, 양심은 싸우며 붙드는 빛, 이성은 방향에 따라 빛을 돕기도 하고 어둠을 강화하기도 하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창2는 퍼셉션의 시대를 보여 주고, 창3은 이성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대개 퍼셉션의 상태는 아니며, 양심과 이성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목표는 이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위에서 오는 빛에 복종하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해와 사고가 정렬될 때, 우리는 비록 천적 인간은 아닐지라도, 그 질서를 따라 걷는 영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C.20,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를 벌주기'에 대해

SC.20, 과거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비롯, 사람이 무슨 죄를 지으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벌을 주며 고행을 마다 않았던 여러 예를 들며, 우리도 그러고 살자는 어느 수도원장의 유튜브를 보았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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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profanation’(신성모독)에 관하여

SC.18,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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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8, Emanuel Swedenborg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에 대하여

 

 

Emanuel Swedenborg의 ‘Arcana Coelestia’에서 말하는 ‘profanation’(신성모독, 神性冒瀆)은 단순한 신성모독이라는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의식적으로 결합시키는 상태’를 가리키는 깊은 영적 개념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이미 알고 인정한 신적 진리를, 이후에 의도적으로 거슬러 악한 삶과 결합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지나 실수, 연약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알고도’, 그리고 ‘내적으로 접촉하고도’ 그것을 배반하는 데 있습니다. 즉 진리와 악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되는 것이 profanation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늘과 지옥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은 질서 있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profanation은 이 둘을 한 사람 안에서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질서를 파괴합니다. 그 결과, 내면이 분열되고 찢기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죄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죄는 회개로 분리될 수 있지만, profanation은 결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는 ‘태고교회’의 몰락을 설명하면서 profanation을 중심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 있었으나, 점차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서 내면의 진리와 외적 삶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의 ‘홍수’는 단순한 자연 사건이 아니라, 이런 혼합이 극에 달해 ‘광적인 욕망과 확신’이 사람을 덮어버린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것이 profanation의 집단적 결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profanation에도 여러 등급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깊은 것은 진리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의지와 결합시킨 뒤, 그것을 배반하는 경우입니다. 이해 차원에서만 인정했던 진리를 나중에 떠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깊습니다. 왜냐하면 의지와 결합되지 않은 진리는 아직 사람의 중심과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깊은 진리를 주지 않으시고, 때로는 진리를 잊게 하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리를 모르는 상태가, 알고도 모독하는 것보다 덜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악의 혼합을 막으려는 자비의 관점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알고 따르면서도 배반함으로써 깊은 profanation의 예로 제시됩니다. 반면 베드로는 연약함으로 부인했지만, 내면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에 회복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바벨탑은 신적 진리를 자기 영광과 권세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종교적 profanation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profanation에 빠진 사람은 사후에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단순한 지옥의 고통과는 다른, 내적 분열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자비가 끝까지 작용하여 가능한 한 이런 상태를 막으신다고 강조합니다.

 

profanation 교리는 공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며, 삶과 결합된 진리는 거룩합니다. 그것을 자기 사랑의 도구로 삼지 않을 때, 진리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하면 내면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거룩한 것은 주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히 받고 삶으로 지켜야 한다는 점이 profanation 교리의 핵심입니다.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

SC.19, ‘퍼셉션’(perception), ‘양심’(conscience), 그리고 ‘이성’(reason, rational faculty, the rational)에 대하여 창세기 2장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퍼셉션’, ‘양심’,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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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17,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

AC.19(창1:2) 본문 중 리메인스에 관한 설명 가운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AC.19에서 리메인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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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7)

 

AC.2803

 

신적 진리는 아들이며, 신적 선은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489, 491, 533, 1147, 2633 참조). 그리고 아버지는 선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리의 잉태와 출생이 선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진리는 다른 어떤 근원으로부터도 존재할 수 없고 나타날 수 없습니다 (existere). 이는 여러 차례 보인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아들이 신적 진리이고, ‘아버지가 신적 선인 까닭은, 신적 본질과 인성의 결합, 그리고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곧 선과 진리의 신적 혼인,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천적 혼인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곧 주님 안에는 무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관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오직 모든 선과 진리의 있음나타남(esse et existere), 곧 선 자체와 진리 자체라는 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 자체가 아버지이며, 진리 자체가 아들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신적 혼인이 있으므로,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That Divine truth is the “son,” and Divine good the “father,”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on” as being truth (see n. 489, 491, 533, 1147, 2633); and of a “father” as being good; and also from the conception and birth of truth, which is from good. Truth cannot be and come forth [existere] from any other source than good, as has been shown many times. That the “son” here is Divine truth, and the “father” Divine good, is because the union of the Divine essence with the human, and of the human essence with the Divine, is the Divine marriage of good with truth, and of truth with good, from which comes the heavenly marriage; for in Jehovah or the Lord there is nothing but what is infinite; and because infinite, it cannot be apprehended by any idea, except that it is the being and the coming forth [esse et existere] of all good and truth, or is good itself and truth itself. Good itself is the “father,” and truth itself is the “son.” But because as before said there is a Divine marriage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the father is in the son, and the son is in the father,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0, 11) Jesus saith unto Philip,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10–11).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10:36, 38) Jesus said to the Jews, Though ye believe not me, believe the works; that ye may know and believe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in the Father (John 10:36, 38).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9, 10, 21) I pray for them; for all mine are thine, and thine are mine; and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John 17:9, 10, 21).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1, 32);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1) Now is the son of man glorified, and God is glorified in him; if God be glorified in him, God shall also glorify him in himself. Father, glorify thy son, that thy son also may glorify thee (John 13:31–32; 17:1).

 

[2] 이로부터 주님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어떠한지(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것은 상호적이고 교호적인(mutual and alternate) 결합, 다시 말해 서로 안에 거하는(reciprocal) 결합입니다. 이 결합이 바로 신적 혼인(the Divine marriage)이라 불리는 것이며, 이로부터 천적 혼인(the heavenly marriage)이 내려오는데, 이것이 곧 하늘에서의 주님의 나라 자체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말씀되어 있습니다. From this may be seen the nature of the union of the Divine and the human in the Lord; namely, that it is mutual and alternate, or reciprocal; which union is that which is called the Divine marriage, from which descends the heavenly marriage, which is the Lord’s kingdom itself in the heavens —thus spoken of in John: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4:20) In that day ye sha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e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1-23, 26) I pray for them, that they all may be one, as thou Father art in me and I in thee, that they also may be one in us, I in them and thou in me; that the love wherewith thou hast loved me may be in them, and I in them (John 17:21–23, 26).

 

이 천적 혼인이 선과 진리, 그리고 진리와 선의 혼인이라는 것은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2508, 2618, 2728–2729 이하 참조). That this heavenly marriage is that of good and truth, an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n. 2508, 2618, 2728–2729 and following numbers).

 

[3] 그리고 신적 선은 신적 진리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고, 신적 진리 또한 신적 선 없이 존재하거나 나타날 수 없으며, 둘은 상호적으로 서로 안에 있으므로, 신적 혼인은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곧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And because Divine good cannot be and come forth without Divine truth, nor Divine truth without Divine good, but the one in the other mutually and reciprocally, it is therefore manifest that the Divine marriage was from eternity; that is, the son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the son,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John: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7:5, 24) And now O Father, glorify thou me with thyself,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John 17:5, 24).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은 또한 시간 안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태어나 영화롭게 된 것이 바로 그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 간다고, 곧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여러 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But the Divine human which was born from eternity was also born in time; and what was born in time, and glorified, is the same. Hence it is that the Lord so often said that he was going to the Father who sent him; that is, that he was returning to the Father. And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3,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the Word is Divine truth itself),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the sam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3, 14; see also John 3:13; 6:62).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3)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62)

 

 

해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 기독론의 핵심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 신적 선’, ‘아들 = 신적 진리’라는 상응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구조를 밝히는 선언입니다. 신적 선은 ‘있음(esse)이고, 신적 진리는 그 있음이 드러난 ‘나타남(existere)입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형상을 입고 이해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고, 진리는 사랑이 스스로를 표현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선에서 태어나며, 선 없이는 진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결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사랑이 자신을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삼위에 대한 전통적 오해가 풀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위격을 세 존재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본질과 표현’, ‘사랑과 그 사랑의 지혜’, ‘선과 진리’라는 구분을 합니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다르지만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선과 진리는 서로를 전제로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알게 하기를 원하고, 진리는 사랑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친밀함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호 내재, 곧 존재의 상호 침투를 말합니다.

 

이 상호 내재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적 혼인’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고, 진리가 선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이루는 상태입니다. 선이 진리 안에 있을 때, 진리는 생명을 가집니다. 진리가 선 안에 있을 때, 선은 질서와 방향을 가집니다. 만약 선만 있고 진리가 없다면 그것은 맹목적 충동이 되고,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면 그것은 차갑고 죽은 지식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이 둘이 완전하게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동시에 진리 자체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신적 혼인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라는 말씀은, 시간 이전에 이미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의 완전한 결합이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시간 안에서 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진리입니다. 성육신은 영원한 진리가 시간 속에 나타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던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된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던 선이 인간적 형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영원부터 나신 신적 인성’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인성이 단순한 피조적 육체가 아니라, 신적 진리의 영원한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영화롭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신성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장소 이동이 아니라, 인성의 완전한 신성화, 곧 나타남이 본질과 완전히 하나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교리는 단지 기독론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 거듭남의 원리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신적 혼인에서 하늘의 혼인이 흘러나옵니다. 하늘의 혼인은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인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우되, 그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려 하나, 무엇이 참된지 모르면 그것은 왜곡됩니다. 거듭남은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과정입니다. 진리가 의지 속으로 내려와 사랑이 되고, 사랑이 다시 진리를 통해 질서를 얻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적 혼인’이며, 이것이 곧 주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예수와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은 지혜로 드러나며, 그 지혜는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곧 신적 진리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인간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적 사랑을 만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설교적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 사랑과 결합시킬 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재는 곧 우리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상태로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은 신비적 표현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인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생기는 실제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AC.2803은 삼위 이해, 성육신 이해, 하늘의 구조, 인간 거듭남의 원리를 하나로 묶는 핵심 단락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입니다. 그 완전한 결합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결합이 우리 안에서 모형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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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20:7)

 

AC.2533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And now restore the man’s wife

 

이 말이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교리의 영적 진리를 되돌려 놓으라는 뜻임은 아내가 영적 진리(spiritual truth)를 의미한다는 데서 분명합니다 (2507, 2510 참조). 또한 사람은 교리 그 자체(doctrine itself)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상태에서 주님을 표상하는데, 그가 사람이라 불릴 때에는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천적 진리(celestial truth)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에서 사람은 지성(the intellectual)을 뜻합니다 (158, 265, 749, 915, 1007, 2517 참조). 그러므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것은 교리의 영적 진리를 오염 없이 되돌려 놓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합리적 요소의 오염 없이라고 한 것은,그녀를 돌려보내야 할 아비멜렉이 합리적인 것들과 관련된 교리, 곧 교리의 합리적 요소들(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2510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should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ife” as being spiritual truth (see n. 2507, 2510);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man” as being doctrine itself; for Abraham (by whom the Lord in that state is represented), when called a “man” signifies celestial truth, which is the same as doctrine from a celestial origin; for in the internal sense a “man” is the intellectual (see n. 158, 265, 749, 915, 1007, 2517). Hence it is evident that to “restore the man’s wife” is to render up the spiritual truth of doctrine without taint. That it means without taint from the rational is because Abimelech, who was to restore her, signifies doctrine that has regard to rational things, or what is the same, the rational things of doctrine (n. 2510).

 

[2]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이므로 인간은 물론 천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신은 더 깊고 높은 생각에서 사고하면서도 아이들의 기질과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마치 바위 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 단순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가르치는 천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이고 영적인 지혜 안에 있으나, 배우는 이들의 이해를 넘어서 말하지 않고 단순하게 말하며, 점차적으로 그들의 이해가 자라도록 이끕니다. 만일 천사적 지혜의 높이에서 그대로 말한다면, 단순한 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여 신앙의 진리와 선으로 인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 안에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합리적인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가장 높은 상태에서 지각하는 그 의미조차도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 기원과 그 자체에 있어 하늘 전체도 작은 일부조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문자로는 사소하고 거칠게 보일 뿐입니다. It was said above that although the doctrine of faith is in itself Divine, and therefore above all human and even angelic comprehension, it has nevertheless been dictated in the Word according to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The case herein is the same as it is with a parent who is teaching his little boys and girls: when he is teaching, he sets forth everything in accordance with their genius, although he himself thinks from what is more interior or higher; otherwise it would be teaching without their learning, or like casting seed upon a rock. The case is also the same with the angels who in the other life instruct the simple in heart: although these angels are in celestial and spiritual wisdom, yet they do not hold themselves above the comprehension of those whom they teach, but speak in simplicity with them, yet rising by degrees as these are instructed; for if they were to speak from angelic wisdom, the simple would comprehend nothing at all, and thus would not be led to the truths and goods of faith. The case would be the same if the Lord had not taught in the Word in accordance with man’s comprehension, in a rational manner. Nevertheless in its internal sense the Word is elevated to the angelic understanding; and yet that sense, in its highest elevation in which it is perceived by the angels, is infinitely below the Divine. It is hence manifest what the Word is in its origin, and thus in itself; and that it thus everywhere involves more things than the whole heaven is capable of comprehending, even as to a small part, although in the letter it appears so unimportant and so rude.

 

[3] 주님이 곧 말씀이심은, 말씀이 그분한테서 나오며 그분이 말씀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That the Lord is the Word, because the Word is from him and he is in the Word, is evident in John: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 4, 14)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only-begotten of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 4, 14; see also Rev. 19:11, 13, 16).

 

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1, 13, 16)

 

주님이 말씀이시므로 그분은 또한 교리이십니다. 그 자체로 신적인 교리는 오직 그분뿐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Lord is the Word, he is also doctrine; for there is no other doctrine which is itself Divine.

 

 

해설

 

이 구절은 창세기 20장의 중심에서 울리는 하나의 영적 명령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말은 단순히 한 여인을 원래 남편에게 돌려보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정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리의 질서를 바로 세우라는 명령이며, 진리와 합리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라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사라는 ‘영적 진리’를 의미하고, 아브라함은 ‘천적 기원의 교리’, 곧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교리를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은 ‘합리적 단계의 교리’, 즉 인간의 이해와 사유를 통하여 형성되는 교리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진리가 합리성에 의해 소유되거나 지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합리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봉사해야 합니다.

 

오염 없이 돌려보내라’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합리성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귀한 능력입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스스로를 기준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납득한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려 합니다. 이때 교리는 인간의 사고 구조에 맞추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리는 점점 인간 중심적으로 변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 요소의 오염’입니다. 오염이란 반드시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인간의 자아와 결합되어 순수성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자기 사랑이나 명예욕, 혹은 지적 우월감과 결합될 때, 그것은 이미 순수한 교리의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깊은 신학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신앙의 교리는 그 자체로는 신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물론 천사조차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교리를 인간의 이해에 맞게, 합리적인 형식으로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교리가 본래 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합리적 단계를 거쳐야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말씀은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무한하신 주님께서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말씀은 문자라는 옷을 입고, 인간의 사고 틀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본질은 여전히 신적이며 무한합니다.

 

여기서 부모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부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깊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르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고 수준이 아이의 수준으로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이 조정된 것뿐입니다. 천사들이 단순한 자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적, 영적 지혜 안에 있지만, 배우는 이의 상태에 맞추어 단순하게 말합니다. 이 점은 목회 사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설교자는 깊은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듣는 이들의 상태에 맞추어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리를 변질시켜서는 안 됩니다. 낮추되, 왜곡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질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의 구조 자체를 보여 줍니다. 말씀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단순하고 때로는 거칠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는 천사적 이해로까지 고양됩니다. 그리고 그 천사적 이해조차 신적 본질에 비하면 무한히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겉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 전체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 문자만 보고 판단하면 얕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를 인식하면, 그 안에 무한한 질서와 조화가 펼쳐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동시에 교리이시다’라는 선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교리는 어떤 학파나 신학 체계의 산물이 아닙니다. 교리는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며, 주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리를 왜곡하면, 주님에 대한 인식도 왜곡됩니다. 이 점에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명령은 매우 엄중합니다. 교리의 영적 진리를 인간의 합리성 속에 가두지 말고, 본래의 주인께 돌려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우리 각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진리를 이해의 틀 안에 가두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해를 진리 아래 두고 있습니까? 합리성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자가 아니라 도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교리의 영적 진리가 먼저이며, 합리성은 그 진리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질서이며, 이것이 거듭남의 길입니다.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라는 이 명령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내면에서 반복되어야 할 영적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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