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2)’ (AR.서문, 2023/6/6)

 

 

오늘은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온 천국과 지상의 모든 교회, 그리고 모든 종교의 기초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런 올바른 생각(a just idea of God), 즉 신관(神觀)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결합이 있고, 이 결합을 통해 빛과 지혜, 그리고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AR.서문) For the whole heaven is founded upon a just idea of God, and the whole church on earth, and in general all religion; since by that idea there is conjunction, and by conjunction light, wisdom, and eternal happiness. (Pref. to A. R)

 

※ 이 글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Wherein are disclosed the arcana there foretold which have hitherto remained concealed, 1766) 의 ‘저자 서문’(Author’s Preface)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위 내용은 계시록 속뜻 주석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계시록이 어떤 책이며, 지난 역사 가운데 사람들이 이 계시록을 어떻게 풀어왔는지, 그리고 1757년에 영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때 형성된 새 하늘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는지, 또 이 새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교회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다음 말씀들, 곧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21:9-10)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9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계19:7, 9)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1-2, 5)

 

를 통해 확인하여 주며, 또 계속해서 기독교인들의 천국은 고대인들의 천국 아래 있다는 것과, 이 기독교인들의 천국에는 주님 성육신 이후 주님을 세 인격 아래 한 분 하나님(one God under three persons)으로 예배하면서, 동시에 세 신에 대한 생각(an idea of three gods)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만 입장이 허용되었다는 것, 그 이유는 기독교계 전체가 이 입장, 곧 세 인격의 삼위일체(the trinity of persons)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 하여튼 주님에 관한 이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라는 정확한 신관을 소유해야만 천국에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그에 합당한 위치를 배정받는다는 등의 전반적인 배경 가운데 기술된, ‘계시록 속뜻’(Apocalypse Revealed) 서문 전체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모든 종교의 기초가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인들은 유독 이런 표현에 매우 민감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나중에 이 문제 역시 깊이 다루겠지만, 지금은 이 한 가지, 곧 그럼,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자녀가 아닌가? 인류 전체의 퍼센티지를 볼 때, 오히려 기독교는 일부에 지나지 않은데... 그러면 나머지 7, 80%의 타종교인들은 무조건 지옥 가는가? 저들이 타종교, 타문화권에서 태어난 게 저들의 죄인가? 주님이 그렇게 불공정하신 분인가? 이런 참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차별, 구별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구원에 대한 오해, 말씀을 겉 글자로만 이해, 너무 폭력적으로 적용하며, 또 사람의 사후, 즉시 천국 아니면 지옥에서 눈뜨는 줄로만 아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주님의 시야, 주님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라며, 이 주제가 좀 급하신 분들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틈틈이 탈북자들의 유튜브 채널을 봅니다. 저들의 무슨 드라마 같은, 사선을 넘어 생명의 나라로 넘어오는 그 파란만장한 사연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모두 제가 지상에서 천국을 사모하는 치열한 노력과 상응하기 때문인데요, 저들의,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은 이 땅에 태어나 감사할 줄 모르고, 교만하고 나태함 가운데 있는 저로 하여금 마음을 다잡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만 62세가 됩니다. 이젠 만나이만 쓴다네요 ^^ 제가 이 지상에서 얼마나 더 머무르게 될까요? 날이 갈수록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 제가 살아온 지난날, 그리고 선친께서 당부하신 통일되면 꼭 황해도 해주 선산을 찾으라신 당부 말씀 등... 이런 걸 보면 제가 이젠 정말 육학년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저는 수년 전 수도원 공부를 하면서부터 지상 생활의 그 무엇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임종하는 그날까지 주님 의지하며,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주님의 메시지들, 곧 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번역하며 소개하는 삶에 매진하고자 합니다. 저의 사랑하는 모든 구독자님들 또한 저와 이 길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3-06-06(D3)

한결같은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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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NESIS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THE CONTENTS

 

AC.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중생(重生, regeneration,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AC.7

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중생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고 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것,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두신 것들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인애, 자선, 기부 등)와 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걸 자기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지요.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위를 하다니 아,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하면서 말이지요. 이런 선을 ‘풀’(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의 영향을 받고, 신앙의 빛을 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의 결과이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의 애정으로, 그리고 빛을 받은 신앙으로 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이제 신앙과 체어리티는 그의 속 사람 안에서 활활 불타오르는데, 이를 두 ‘광명체’(luminaries)라고 합니다. The fourth state is when the man becomes affected with love, and illuminated by faith. He indeed previously discoursed piously, and brought forth goods, but he did so in consequence of 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 and not from faith and charity; wherefore faith and charity are now enkindled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alled two “luminaries.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믿음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살아 움직이는데,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하늘의 새’(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The fifth state is when the man discourses from faith,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ruth and good: the things then produced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heavens.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때입니다.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일컬어 ‘생물’(living soul)과 ‘가축’(beast)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바로 행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일컬어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인 삶(생활, 생명)은 신앙에 속한 지식들과 체어리티에 속한 행위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며, 또 유지됩니다. 이런 지식들과 행위들을 일컬어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삶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아 기쁜 삶이 되고 유지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主,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인 사람(天的,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AC.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대부분은 첫 번째 상태까지만입니다. 그중 일부만 두 번째, 그 밖의 사람들이 세 번째, 네 번째나 다섯 번째, 그리고 아주 적은 수가 여섯 번째에 이르고,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속뜻

THE INTERNAL SENSE

 

 

AC.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the Lord)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식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In the following work, by the name Lord is meant the savior of the world, Jesus Christ, and him only; and he is called “the Lord” without the addition of other names. Throughout the universal heaven he it is who is acknowledged and adored as Lord, because he has all sovereign power in the heavens and on earth. He also commanded his disciples so to call him, saying,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And after his resurrection his disciples called him “the Lord.

 

 

AC.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In the universal heaven they know no other father than the Lord, because he and the father are one, as he himself has said: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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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

 

AC.1

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crets of heaven)이 들어있으며,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일반적이든 아니든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들에 대해 심지어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으실 텐데요, 그 이유는 겉 글자나 글자의 뜻만 가지고 살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과 규례(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에 관한 것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말씀 안에는 내적인 것들(internal things)이 들어있는데, 이는 아주 몇 군데 주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하시고 설명하신 것들, 예를 들어, 희생제물이라는 것은 주님을 의미한다든지,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의미하며,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천국의 가나안, 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또 낙원도 유사한 의미를 갖는데, 이런 예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외적인 것들(the external things)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AC.2

그러나 기독교계는 아직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아니, 가장 작은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一點一劃,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인 것들을 상징하고, 그 안에 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대해 이렇게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말씀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토록 놀라운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이라는 것이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주님이 하신 것이며,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 그리고 종교적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런 건 주님의 말씀이라 할 수도, 그 안에 무슨 생명이 있다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생명에 속한 것들을 빼고,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적이든 구체적이든 그 안, 즉 말씀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 관한 것이라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생명이라는 것이 비롯될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적으로는(內的, inwardly) 주님에 관한 게 아닌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게 아니며, 또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 주님이 담기지 않은 그 어떤 표현도, 다시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주님에 관한 게 아닌 그 어떤 표현도 신성(神性, Divine)하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 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AC.3

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계에서 알려진 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된 인간의 경우와 같은데요, 속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서는 겉 사람은 그저 몸(the body), 육(肉)일 뿐이며, 그건 곧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그리고 겉 사람을 살아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건 속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속 사람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말씀도 겉 글자만 놓고 보면, 마치 영혼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AC.4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 안에 그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첫 장에서는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고 불리는 에덴동산, 그리고 최초의 피조물인 아담이라는 것 외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거기서 다른 무엇을 가정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 이러한 모든 것이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곧 창세기 첫 장은 그 내적 의미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또는 그의 중생, 특히 가장 오래된 교회를 다루고 있는 등, 이러한 모든 표현 안에 아르카나가 포함되지 않은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될 것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AC.5

이런 사실은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경우인데요, 그래서 저는 지난 수년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계속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제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곧 주님의 신성하신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저는 그 결과, 저세상에서 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들의 여러 상태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요, 사후 영(영혼)들의 상태, 곧 지옥으로 알려진, 불성실한 자들의 통탄할 만한 상태와, 천국으로 알려진, 충실한 사람들의 축복받은 상태, 그리고 특히 천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믿음의 교리에 관하여 등, 이런 여러 내용들에 대하여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 곧 주님의 거룩하신 허락으로 말미암음입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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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신관(神觀, a just idea of God)의 중요성 (1)’ (2023/6/5)

 

오늘부터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을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요,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생각의 중요성(Importance of a just Idea of God)

2.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God is One)

3. 하나님이 바로 사람이시다(God is very Man)

4. 하나님은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God is not in Space)

5. 신적 본질 그 자체는 바로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6. 신적 사랑과 신적 지혜는 실체이며, 형체이다(The Divine Love and the Divine Wisdom are Substance and Form)

7.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시다(God is Love itself and Life itself)

8. 신적 사랑의 본성(The Nature of the Divine Love)

9.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영원하심(The Infinity and Eternity of God)

10. 하나님의 전능하심(The Omnipotence of God)

11.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The Omniscience of God)

12. 하나님의 편재(遍在)하심(The Omnipresence of God)

13. 하나님에 관한 건 오직 계시로만 알 수 있음(Knowledge respecting God only possible by Revelation)

 

 

각 제목마다 서너 개씩의 아티클로 진행되지 싶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생각은 교회와 종교, 그리고 예배에 관한 모든 것 안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특히 신학적 주제들은 다른 모든 것보다 윗자리(above all others)를 차지하는데요, 그중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최상석(the supreme place)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만일 이것이 거짓이면 그로 말미암은 모든 것 또한 거짓이거나 거짓이 되지요. 이런 지극히 높은 것은 또한 가장 내적(the inmost)이기도 해서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일련의 것들에 대한 본질(the very essence of all)이 됩니다. 이 본질은, 일종의 영혼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일련의 그 이어지는 것들에 대한 어떤 몸, 즉 자기를 닮은 어떤 몸을 형성합니다. 본질은 그 이어지는 것들을 따라 쭈욱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진리들 위에 빛을 비추는데, 만일 이 본질이 잘못되면 심지어 자기가 가진 무슨 흠과 오류들을 가지고 이어지는 그 아래 것들을 감염시키기도 합니다... (BE.40) ...the idea of God enters into all things of the church, religion, and worship; and theological matters have their residence above all others in the human mind, and the idea of God is in the supreme place there; wherefore if this be false, all beneath it, in consequence of the principle from whence they flow, must likewise be false or falsified; for that which is supreme, being also the inmost, constitutes the very essence of all that is derived from it; and the essence, like a soul, forms them into a body, after its own image; and when in its descent it lights upon truths, it even infects them with its own blemish and error... (BE.40)

 

※ 위 글은 스베덴보리 저, ‘새 교회 교리에 대한 개략적 설명’(A Brief Exposition of the Doctrine of the New Church, Which Is Meant by “The New Jerusalem” in the Book of Revelation, 1769) 중 ‘새 교회 교리들에 대한 스케치’(A sketch of the doctrinals of the New Church) 6번 ‘그 신학 교리(dogmas)는 인격들(persons)에 관한 어떤 삼위일체(a trinity), 그러니까 세 분 하나님(three Gods)에 대한 생각이 거부된 후, 대신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이신 한 분 하나님(one God)에 대한 생각이 받아들여진 후에야 오류로 보입니다.’(The dogmas of that theology appear to be erroneous after the idea of a trinity of persons, and thence of three Gods, has been rejected, and the idea of one God in whom is the Divine Trinity is received in its stead.)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들입니다.

 

1. 위 내용은 주님을 세 분 하나님, 곧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및 성령 하나님으로 나누는 입장의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래서 ‘첫 단추를 잘 끼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참고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나는 자주 이 문제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천국에서는 신을 셋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사들은 한결같이 단언했다. 그들은 신이 한 분이심과 그 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지상에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도 신이 세 분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세 신 사이를 헤매기 때문이며, 천국에서는 한 분을 생각하면서 셋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서의 언어는 생각이 직접 전달되는 것, 즉 소리나는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 때 신을 셋으로 나누어 그 각각을 별개로 인정한 사람들, 그래서 신관을 주님 한 분으로 모으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사람의 생각이 전체에 전달되기 때문에, 만일 입으로는 한 분을 말하면서 셋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드러나고 거부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진리와 선을 분리하지 않은 사람들,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놓지 않은 사람들은 사후에 영계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주님께 대한 천국의 관념, 즉 주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생활이 따르지 않은 신앙인, 참 신앙의 교훈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그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HH.2)

 

 

2. 한 분 주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의 속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겉 사람이십니다. 우선은 이렇게만 말씀드립니다. 당분간 이 일종의 조직신학의 여정 중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비롯, 신적 삼위일체에 관한 보다 깊은 내용을 접하시게 되는데, 그때 좀 더 깊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인간이 영과 육,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되어 있고, 또 활동하는 것과도 같겠습니다.

 

 

3. 다음은 성령에 관한 기술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소중히 간직한 모든 성직자는 영계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후 사흘째 되는 날에) 처음에 신적 삼위일체(the Divine Trinity), 특히 성령(the Holy Spirit)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데요, 성령은 그 자체로 무슨 신(a God)이 아니라, 유일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행되는 신적 활동(the Divine operation proceeding from the one and omnipresent God)이 말씀에서 성령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TCR.138)

 

성령에게서 주님의 인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안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침대와 같아서 사람들은 교리 안에 있는 것을 편안해한다 했습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모든 것 역시 주님의 어떤 거룩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거룩한 질서인 교리의 세계, 주님 말씀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교회의 교리의 세계로 주님의 빛을 구하며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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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30(D1)-주일예배(2497, 눅12,1-7),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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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FnU2GV7-DY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눅12:1-7)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떤 일에 대해 이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둘이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직 주님만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후에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일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AE.794:3) In this world no one can determine whether works are from the Lord or from man, since in external form the two kinds appear alike, but they can be distinguished by the Lord alone, and after man’s life in the world their origin is disclosed (Matt. 10:26, 27; Mark 4:22; Luke 8:17; 12:2, 3, 8, 9). (AE.794:3)

 

우리 사회 전반에 종북(從北) 또는 종중(從中) 좌파의 사람들이 주도하는 거짓 선동의 거대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후쿠시마 오염수 선동, 양평 IC 선동이 있습니다. 이번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사례는 다행히 교사들 스스로 전교조의 개입을 원천 차단, 저들이 무슨 선동질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들의 모든 움직임을 선동 또는 괴담이라 하는 이유는 저들의 주장이 거의 다 사실과 진실이 심각하게 결여된, 거짓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4.15 부정선거로 다수당이 된 게 99% 분명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 문재인 전 정권 사람들, 그리고 민노총을 비롯, 방송, 언론 노조와 정부 각 부처 산하 곳곳에 심어놓은 저들 좌파의 사람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모두 다 거짓과 위선, 곧 겉과 속이 너무나 다른 모습들을 봅니다. 물론 우파 보수라 하여 이 거짓과 위선의 사람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 3항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떤 일에 대해 이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아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았다 할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그 둘이 똑같기 때문이지요. 오직 주님만 구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후에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이 일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AE.794:3)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 있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 있는데, 겉으로 보면 비슷,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일을 함에 있어 선 또는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겉으로는 선과 진리이신 주님의 일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속에 사사로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은 언제나 거짓된 위선의 일입니다. 위선자들의 행동은 건전한 사람들의 이성을 파괴하고 분별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미워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위선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1절입니다.

 

1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무리 수만 명이 모였는데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무리가 모였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선은 없고 진리만 많이 있다는 뜻인데요, 교회 안에 선은 없고 진리만 있을 때는, 그런 교회에서는 교인들끼리 서로 다투고, 서로에 대한 중상과 비방으로 심하면 교회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예견,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사람들은 자칫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위선자들은 자신도 해치지만 주변 사람들까지 해치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특별히 경계하셨습니다. 2절, 3절입니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남을 비방하거나 중상하는 사람들은 대개 대놓고 비방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누가 들을까 아주 은밀하게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고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셨습니다.

 

※ 다음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48장, ‘두고 가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After Death Man Is Possessed of Every Sense, and of All the Memory, Thought, and Affection That He Had in the World, Leaving Nothing Behind except His Earthly Body) 462번 글로, 여기에 바로 이 구절들에 대한 의미가 나옵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 전체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경우를 통해 보아왔다. 기록할 만한 많은 것 중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세상에서 지은 자기 죄와 악행을 부인하는 영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스스로 결백하다고 믿지 못하도록 그들의 기억에서 생의 초기부터 말년까지의 모든 행위가 차례로 꺼내져 재현되었는데 주로 간음과 음탕한 행위들이었다.

 

악한 기술로 남을 속이고 훔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사기행각과 도둑질도 연달아 모두 드러났는데 그중 많은 것은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당시 그들 마음속에 뒤섞여 있던 모든 생각, 의도, 즐거움과 두려움까지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재판과 관련, 뇌물을 받고 돈을 번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기억으로 조사받았고, 처음 직책을 맡은 때부터 그만둔 날까지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자세한 뇌물의 액수와 가치, 받은 일시, 당시 그들의 마음 상태와 의도까지 수백 가지가 떠올라 눈앞에 상영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그들이 그런 행위를 기록해 둔 수첩까지 한 장 한 장 펼쳐져 읽힌다.

 

처녀들을 유혹해 수치스럽게 했거나 순결을 빼앗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기억으로부터 범행이 자세하게 떠오르고 재현된다. 처녀들과 여자들의 얼굴, 장소, 그때 했던 말들과 의도가 실제처럼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장면을 눈으로 볼 때처럼 즉각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 상영이 몇 시간씩 계속된다.

 

남을 중상하는 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비방과 중상이 그때 사용한 단어들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것을 들었다. 세상에서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어 왔음에도, 비방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것을 듣고 있던 사람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재생되고 상영되었다.

 

사기로 친척의 유산을 가로챈 사람이 있었다. 그도 같은 심판을 거쳐 판결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들 사이에 오간 서류와 편지가 읽혀지는 것이 내 귀에 들렸는데, 그것은 한 글자도 빠짐이 없다고 했다.

 

바로 그 사람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이웃을 몰래 독살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밝혀진 과정은 이렇다. 그가 발밑에 구덩이를 파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 구덩이에서 한 사람이 마치 무덤에서 나오듯이 나와서 그를 향해 외쳤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그러자 그 살인자가 친절하게 말을 거는 모습, 잔을 건네주는 모습, 게다가 그 행위를 하기 전에 그가 한 생각과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자 그는 지옥을 판결받았다.

 

한마디로 모든 악한 영에게는 그의 모든 악과 범행과 약탈과 사기와 속임수가 밝히 드러나고, 그의 기억에서 떠올려져 죄과가 충분히 입증된다. 또 모든 상황이 전부 공개되므로 이것을 부인할 여지가 없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천사가 조사할 때, 그가 한 달 동안 생각한 것이 하루하루 일어난 그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되살려지는 것도 보았다.

 

이상의 사례들로, 사람은 자기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간다는 것과 사후에 만인 앞에 드러나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주님 말씀도 그것을 의미한다.

 

2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눅12:2-3)

 

(HH.462)

 

계속해서 4절, 5절입니다.

 

4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 15장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

 

말씀처럼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사람들, 즉 영적인(spiritual) 사람들이 주님의 친구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육신을 죽이는 재물이나 지위,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natural) 사람의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에 대해 계시록 해설 696번 글 23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사람의 두려움은 악한 삶과 교리의 거짓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을까, 또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의 두려움은 세상 재물이나 지위,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행여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6, 7절입니다.

 

6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말씀에서 ‘참새 다섯 마리’는 신앙인의 지혜를 형성하는 작은 진리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돈을 받고 참새를 파는 것은 눈앞의 이득을 위해 진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참새 하나도 잃어버리는바 되지 않게 하겠다고 하시고요,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머리털’은 몸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계에서의 신앙인의 삶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여러 행동과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머리털입니다. 따라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뿐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의도까지 모두 아신다는 뜻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참 많지요. 그리고 바로 수치심과 후회와 같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의도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면 주님께서는 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조금 했더라도 진리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는 영적인 두려움뿐 아니라 세상의 권세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혼란과 진통은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와 우리 안에 있는 악과 거짓 간 싸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큰 싸움을 시험이라고 부르고요, 작은 싸움을 발효(醱酵)라고 부릅니다. 발효란 술이 익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 발효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발효 과정을 거쳐 술의 맑은 원액과 찌꺼기가 분리되는 것처럼 영적인 발효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이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뒤섞여 있는 한 사회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우리 사회가 거듭나려면 영적인 시험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선자와 진실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가려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생활로 인해 주님이 주신 사랑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3-14)

 

아멘

 

 

원본

2020-05-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5(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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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3(D1)-주일예배(2496, 눅11,43-54),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pdf
0.44MB

https://youtu.be/a1jkIAFXH7U

 

 

주님이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들을 매우 엄히 꾸짖으신 이유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43-54)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속으로는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선한 말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에 대해 속으로는 정신 나간 생각들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번듯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겉만 하얗고 속은 무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AE.659:10) Those who think evil about God and the neighbor but speak well, and those who think insanely about truths of faith and goods of love but speak sanely, such inwardly are sepulchers whited without, (AE.659:10)

 

※ 위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1장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계11:9) 주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난 2020년 4월 19일 주일설교인 이 설교 원본에는 앞서 15일에 있었던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내용이 좀 길게 나와서 이를 생략, 본문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지금이야 이 선거가 99% 부정선거였음을 우파 보수 및 건전한 중도에서는 알게 되었고, 이걸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나 그 때를 기다리며,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때만 해도 저쪽 사람들이 설마 그런 엄청난 장난을 칠 줄은 일반 국민들은 정말 그 어느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정황이 느껴지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그때 그 결과가 너무나 이상했거든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두 얼굴 등 당시 분위기로 보아 총선 때 저들의 폭망이 너무나 예견되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새인들을 매섭게 꾸짖으십니다.

 

※ 복음서에는 바리새인, 율법사, 서기관 등의 명칭들이 나오는데요, 이들은 모두 종교적으로는 다 바리새인이며, 다만 그 사회적 역할에서 좀 다를 뿐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던 사람들에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며 용서하셨던 주님, 그러나 그런 주님이 유독 이 바리새인들에게만은 매우 엄격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주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모두 위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 깊은 위선을 미워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교활한,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데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오히려 이웃에게 경각심이라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독이 든 이빨을 감춘 독사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슬며시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의 분별력을 어지럽히고 때로는 양심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사들의 눈에는 이들 위선자들은 마치 독이 있는 뱀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이며, 주님의 빛 가운데 있어서 그 내면, 곧 그 속 정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영계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지상에서 이런 위선자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내면에 영적인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빛과 육의 눈으로는 그들의 영적 정체를 볼 수 없으며, 그래서 세상에서는 많은 경우, 이들 위선과 거짓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속임과 사기를 당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주님 눈에 비친 이런 위선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여기서 ‘회당’과 ‘시장’은 모두 교회를 뜻합니다. 특별히 시장도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시장에서 물품들이 유통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선과 진리의 지식이 유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높은 자리’는 뭘까요? 높은 자리는 주님, 또는 주님이 계신 천국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위선자들은 교회의 직분을 이용해 스스로 주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이웃을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악하기만 한 자들은 보통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만 그러나 위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넘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결국 천국의 신성한 것에다 세상의 것을 섞어버리는데요, 그것은 주님 앞에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서로 섞는 것을 말씀에서는 영적 간음에 비유합니다.

 

※ 이런 ‘영적 섞음’이 특히 그 속 사람에게 아주 치명적인 이유는 다른 건 주님이 어떻게 해보실 수 있지만, 이 각 사람의 영의 변질은 주님조차 어찌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마5:37)만 하는 삶을 살든지, 비록 좀 삐뚤어지고, 못되게 굴더라도 최소한 잔머리 굴려 겉 다르고 속 다른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平土葬)한 무덤은 봉분이 없이 평평하게 만든 무덤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무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 다음은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월절 한 달 전인 아달월 15일부터 성전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준비에 들어간다. 성전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오는 모든 길들을 보수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도로 보수’와는 다른 개념이다. 성서 시대의 가난한 자들은 땅을 대충 파서 시체를 묻었는데,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는 흙을 조금만 파도 석회암 바위가 나오기 때문에 깊이 앞 수가 없었다. 이들의 무덤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 ‘평토장한 무덤’(unmarked grave)이었고, 깊이 파서 묻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뼈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몸이 무심코 무덤이나 시체에 닿았다가는 레위기적으로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그런 상태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 파견단은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에서 이러한 평토장한 무덤을 찾아 회칠로 표시하는 일을 했다. 순례자들은 이 표시를 보고, 길을 우회해서 갔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시체 접촉으로 인한 부정을 피할 수 있었다.

 

말씀에서 무덤은 본래 거듭남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지옥을 의미합니다.

 

※ 천사들은 사람이 지상에서 죽어 장사 되면 반드시 영계에서 깨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계속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말씀에 나오는 ‘무덤’이나 ‘장사하다, 땅에 묻다’ 등의 표현들이 나오면 그걸 거듭남, 새롭게 일어남, 생명 등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것은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에는 지옥이 들어앉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마23:27)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불쾌함을 토로합니다.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것은 위선자가 진리의 소리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주님과 이웃을 대할 때, 주님께서는 양심을 통해 그를 타이르십니다. 어떻게 타이르실까요? 교회의 직분은 이웃을 섬기는 자리이지 섬김받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니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때 위선자들은 그것이 진리의 소리인 줄 알면서도 몹시 불편해합니다. 이 율법교사가 지금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외면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것은 그가 주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알 수 있는데요, 영적 의미로 ‘선생’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만약 주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위선자들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죽일 듯이 미워했습니다. 주님은 율법교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46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신앙인들에게 부여된 짐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짐입니다. 만약 교회의 성직자들이 교인들을 주님께로 온전히 이끈다면 성도들의 짐은 아주 가볍고 쉬운 짐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짐을 대신 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진리를 왜곡해 가르치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주님으로부터 떼어놓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 함께 가 아니라 교인들 혼자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워놓고 정작 자신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 안에 안주합니다. 그것이 지기 어려운 짐을 교인들에게 지우고 자기는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 성직자들의 모습입니다.

 

교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그것에 대해 50절과 5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창세 이후로’는 주님께서 인류에게 최초로 교회를 세워주신 이후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서 비롯한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선지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흘린 피’는 뭘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가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또 아벨(창4:10-11)과 사가랴(대하24:20-22)가 피 흘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사랑, 또는 체어리티(charity, 仁愛)를 말살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벨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체어리티, 또는 사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해진 이러한 폭력들은 유대교회에서는 모세의 율법보다 장로의 전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믿음과 사랑이 분리된 믿음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더럽힌 죄를 타락한 교회와 성직자들이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지식의 열쇠는 말씀의 능력이며, 그러므로 천국을 여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는 위선자들이 말씀을 왜곡해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인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을 걱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특히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나무라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 하시고, 독사의 자식이라 비난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선지자를 죽인 자, 말씀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막는 자라 하십니다. 참으로 신랄하고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 안의 위선자들을 특히 꺼리신 이유는, 그들이 교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 아니라 그들에게서 체어리티의 신앙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위선은 매우 무서운 죄입니다.

 

주님을 죽이고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봐도 위선자들이 얼마나 진리를 혐오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진리로 인해 그동안 쌓아놓은 세상 것들, 이를테면 명성이나 평판과 재물 같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애써 외면하려 하고, 때로는 주님을 책잡았던 바리새인들처럼 책을 잡아 진리를 말살하려고 합니다.

 

진리를 향하는 길은 참으로 좁고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 안에서 자신의 위선과 악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매일같이 선의와 진실을 키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되기를 힘쓰기, 선과 진리 실천함에 있어 잔머리 굴리는 대신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까, 그것이 곧 주님 말씀이니까 실천, 실행에 옮기기, 주님 말씀하신,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의 삶에 힘쓰기 등 솔직담백, 순진무구, 좀 부족하고 모자라서 실수는 하되 악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2:9)

 

아멘

 

원본

2020-04-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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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0(D5)-매일예배(2495, 눅11,37-42),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pdf
0.37MB

https://youtu.be/s95W5lrf6xM

 

 

잔과 대접의 겉’, ‘안에 있는 것’,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의 속뜻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11:37-42)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3) And as man has an internal spiritual and an external natural, and the internal is conjoined with heaven and the external with the world, it follows that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5)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의 겉보다는 속을 깨끗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분문 3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어느 바리새인이 주님께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자 주님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말씀에서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내적으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이나 규례들은 철저히 지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 곧 그 정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바리새인’ 하면 겉으로만 거룩해 보일 뿐 내적으로는 악하고,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중에는 주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말씀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마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걸 의미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바리새인이 주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는 것은 위선자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려고만 할 뿐 그대로 사는 데는 그다지 뜻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데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위선자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진리를 배우기 원하면 밀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바리새인이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유대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38절에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말합니다. 이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30:17-21)

 

주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에 수족을 씻도록 명령하신 까닭은, 손과 발을 씻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악을 씻어내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식전에 손 씻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어 마치 율법처럼 지켰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위생 때문에라도 손을 씻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손을 씻는 것은 주님에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때 먼저 자신의 악 씻어내기를, 즉 ‘아, 내 안에 악이 있으니 이대로는 주님을 뵈옵지 못하겠다...’ 하며, 먼저 회개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손 씻는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외관이나 세련된 예배 의식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항상 긍지로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주님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음식을 담는 잔과 대접에 비유하시면서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하십니다.

 

여기서 ‘’과 ‘대접’이 무엇일까요? 잔과 대접은 사람의 겉 사람을 뜻합니다. 겉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신 것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럴 경우, 겉으로는 선하고 진실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목적이나 의도는 항상 이기적이며 악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모두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어느 공직자의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언변 뒤에 숨겨진 불순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은 불결한 위선자들입니다.

 

※ 2019년, 20년 상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을 구제할 때 겉 사람으로만 하면 안 되고, 속 사람과 함께, 즉 속 사람으로부터 받은 걸 가지고 겉 사람을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라야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

 

여기서 내적,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속 사람을, 외적, 자연적이라는 것은 겉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매일같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정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 당시 유대의 성직자들은 박하와 운향과 같은 값비싼 향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십일조가 속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도 속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분들 중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여 간혹 외적인 걸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 각자의 능력에 맞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웃을 구제하는 것 등이 모두 외적인 예배입니다. 내적 예배는 외적인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진리와 선 그 자체를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예배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61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과 결합하고 상응을 통해 가장 마지막 최종적인 것과 결합합니다. 그때 첫 번째 진리는 마지막 진리 안에서 힘을 얻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진리가 마지막 진리 안에 있고, 마지막 진리를 통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AC.8610) For interior things are conjoined with exterior and finally with the last or ultimat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n the truth which is first has strength in that which is last, because it is in this and acts by means of it. (AC.8610)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12)

 

※ 여기서 ‘모세’는 주님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내적인 것, 곧 내적 진리 또는 첫 번째 진리는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진리(the truth Divine)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외적인 진리, 또는 마지막 진리는 글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진정한 진리이며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완전하고 힘이 있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말씀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곧 모든 재앙과 액화가 따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이기적 욕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옥을 향한 문, 곧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만 말하고 행동하는 위선자들은 환난 중에 화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마시고,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시험으로 고통받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5:16)

 

아멘

 

원본

2020-03-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

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8(D3)-매일예배(2494, 눅11,29-3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pdf
0.38MB

https://youtu.be/RVBFeMhcl_o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11:29-36)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in the love of uses)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by means of its members)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TCR.403:2) Who does not also comprehend that all the works that a man does with his body are done according to the state of his mind in the head; and if the mind is in the love of uses, the body by means of its members accomplishes them? And this is so, because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are in the head, and in their derivatives in the body, as the will is in deeds, and the thought in speech, (TCR.403:2)

 

 

※ 아래 에피소드는 원본에 나오는 서울 새 교회 에피소드이지만 저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어떤 큰 교회에 다니는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새 교회와 기성교회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하나님을 믿기만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고 행해야 한다 했고, 둘째는,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겉뜻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속뜻으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데 다만 우리 눈에 보이게 육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 안에는 영적 의미, 즉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 의미, 즉 겉뜻과 속뜻을 함께 알아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인 되시는 분이 제 말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그분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신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은 각자의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을 할 일은 아니라 말씀드리며, 대화를 마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주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유대교회의 교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장로의 전통이라는 생활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율법보다 더 소중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사람의 법이지 하나님의 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절) 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셨지요. 어느 시대에나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라면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람의 전통을 지키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주님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리에 뜻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악한 세대’라 하시고,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셨을까요?

 

요나는 타락한 도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도망치다가 결국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을 구한 선지자입니다. 요나가 그렇게 니느웨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래의 배 속에 가두어 사흘 밤과 낮을 지내게 하십니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머무는 사흘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주님이 당하신 지독한 시험을 표상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혹독한 시험을 견디신 이유는 인류에게 세상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복을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하늘의 복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시고, 또 30절에서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세상 영광을 위한 기적이 아니고, 하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찾아온 시바의 여왕이나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방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이나 요나는 모두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의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까요? 계시록 해설 351번 글 2번 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내려오며, 중심이 되는 빛으로부터 주위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처 내려오는 진리의 빛은 처음에는 교회로 내려오고, 다음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그 외연(外延)을 이루는 수많은 종교의 교리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와 연결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열왕기상 11장에서는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3절)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단순히 솔로몬 왕이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은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종교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해 주님과 결합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 왕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는데 정작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모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희미한 진리의 빛 안에 있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데, 가장 밝은 빛 안에 있으면서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의 표적만을 요구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고, 오직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403번 글 2번 항에는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애정이 영향을 받으며, 그것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34절에서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고, 눈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온전하다면 말이나 행실도 바르고 온전할 것이며,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잘못되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실도 잘못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했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 곧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변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갔던 귀신이 자기보다 더 나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전보다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나 요즈음이나 진리 안에 있다 자부하면서도 정작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영의 눈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닫힌 사람은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며, 참된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진실을 왜곡하면서도 잘못인 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주변과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영의 눈이 어두워 주변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그 진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에 의해 진리가 ‘등경 위에 올려놓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항상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며, 그래야 언제나 바르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7:8)

 

아멘

 

원본

2020-02-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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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6(D1)-주일예배(2493, 눅11,24-28),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pdf
0.39MB

https://youtu.be/2Cjvo55u5Ok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4-28)

 

 

영적 자유(Spiritual freedom)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 (DP.73:6) Spiritual freedom is from love of eternal life. Into this love and its enjoyment only he comes who regards evils as sins and therefore does not will them, and who also looks to the Lord. (DP.73:6)

 

 

사람들은 보통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일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기와 함께 있는 영들의 영향 아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2887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한테는 악한 영들(evil spirits)과 천사들이 늘 함께 와있습니다.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하고,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하고 커뮤니케이션합니다. 만일 사람한테서 이들 악한 영들과 천사들을 떼어내면(to be taken away), 사람은 순식간에 그 의도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능력(willing and thinking)을, 그 결과 생명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게(be devoid of)됩니다. (AC.2887) With man there are evil spirits constantly, and also angels; by the spirits he communicates with the hells, and by the angels with the heavens. If these spirits and angels were to be taken away from him, he would in a moment be devoid of willing and thinking, thus of life. (AC.2887)

 

이런 사실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인류에게 새롭게 오픈하신 영적 실상입니다. 이런 실상을 알고 인류가 더 이상 속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요, 즉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 관련, 지옥의 기운이 시작될 때, 얼른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 안의 악한 영들이 하는 거야!’라고 하며, 거기서 한발 물러나 그런 기운에 발 담그지 않고, 대신 반대로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 관련, 천국의 인도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사후에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는 것일까요? 아무 힘이 없는데도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를 통해 항상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항상 악령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지옥에 어울리게 된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끌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의 영들은 기를 쓰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특히 오늘날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속삭입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 수 없으며, 그러니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고 교묘하게 설득합니다. 그때 세상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 곧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신앙을 ‘행위 신앙’,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이라 하며 거부합니다. 바로 그들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도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험을 통해 겸손하여져서 이제는 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각종 사고나 사람들에게 버림받음 같은 시험들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거치면서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은 실제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곧 평소 입만 살았지 실제상황에서는 악과 거짓을 이길 힘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 세상 것들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높았던 마음이 낮아질 때, 이제 그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때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주님에 의해 쫓겨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체어리티의 신앙이 자신의 신앙이라 분명하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동안 그가 이런 고백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옥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 또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부심이 잘 없어지질 않습니다. 그럴 경우, 지옥의 영들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가 아니라 자꾸 자신의 진리와 선, 곧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으로 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세상 즐거움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예전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면 마음 한쪽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려 하는데, 다른 한쪽은 자꾸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 보면 싸움에서 질 때가 많고, 거듭남은 계속 뒷걸음질 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더러운 귀신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숨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반대하던 영입니다. 주님이 그를 쫓아내시자 귀신은 쉴 곳을 찾아 ‘물 없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물 없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물 없는 곳은 진리는 없고, 거짓과 악만 있는 곳입니다. 물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귀신들, 즉 지옥의 악령들은 바로 그런 곳에 삽니다. 그래서 물 없는 곳을 찾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이 귀신은 처음 나온 집, 곧 그 사람한테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5절에서는 이 귀신이 전에 살았던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청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물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진리는 없고, 악과 거짓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는 이유는, 비록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주님보다는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정욕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없고, 여전히 자아에서 비롯된 진리와 정욕만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집이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이제 다른 귀신들과 함께 거기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것을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산다’ 했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한 상태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영들이 그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파괴해 버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의 내면을 귀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짓기를 반복할 때, 점점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 선과 진리를 남기지 않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드리다 보니 마치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네요...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진리를 전파하실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얼핏 들으면 이 말은 주님을 낳은 마리아를 찬양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처럼 하늘과 땅으로부터 찬송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이 피조세계에서 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은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사시는 동안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人性, human), 곧 유전악의 속성을 가진 인성을 모두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 신적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마리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의 여인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신앙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은 체어리티의 교리를 통해 각 사람에게 태어나시며,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잉태하는 태’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뜻하고, ‘주님을 먹이는 젖’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화답하시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체어리티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새 교회, 새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체어리티의 교리를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은 실행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체어리티의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해 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을 쫓아내시면 그걸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나갔던 영들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조금씩 파괴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진리와 선들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스스로 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버릇, 자신을 믿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고,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73번 글을 보면, ‘영적 자유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유의지를 키우지 못하면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더라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다니엘 4장 16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곱 귀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우리 안에 선과 진리가 완전히 파괴되고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매 순간 나쁜 영들을 거절해야, 즉 내게 와있는 악한 영들이 하는 악하고 거짓된 생각들과 나를 분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악하고 어두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라면서 말이지요. 그 대신, 천사들의 손을 잡고, 즉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주시는 천국의 밝고 환한 생각들을 받아들여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아멘

 

원본

2020-02-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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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3(D5)-매일예배(2492, 눅11,14-23),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pdf
0.40MB

https://youtu.be/ojMWf5bNsT4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11:14-23)

 

 

‘육정’(肉情, the will of the flesh)과 ‘사람의 뜻’(the will of man)(요1:13)은 떼어놓는 것(what disjoin)인 반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결합하는 것(what conjoin)이며, 그래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sons of God)이라, 그분의 ‘자손’(seed)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천국을 주시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AC.1608:2) For the will of the flesh and the will of man are what disjoin; but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what conjoin; therefore they in whom are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they who are born of God. And because they are born of God, they are called “sons of God,” and are his “seed,” to whom is given the heavenly kingdom. (AC.1608:2)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4, 13)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바울 시대에도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것을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이며,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대해 잘못 가르치기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른바 대속과 믿음만의 신앙을 만들어 내어 이 역시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밝히신 바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표를 받거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입국 요건만 충족되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 입국 요건이란 다름 아닌, 당사자의 속 사람, 곧 영의 상태가 천국 상태이면 되는 것입니다. 영계는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의 사후 영의 상태가 천국에 맞으면 천국으로, 지옥에 맞으면 지옥으로 배정되는, 그런 시스템인 것이지요. 중요한 건, 각 사람의 영, 곧 속 사람의 상태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과 결정의 영역이지 이걸 누가 대신, 곧 주님이라도 대신 해주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 주님이 해주실 수 있는 범위는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배경, 즉 선악 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自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 삶이 지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면 그걸 주님이 오셔서 바로잡아 주셨고, ‘자, 그동안은 태생적으로 어려웠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네 결정과 선택에 달렸으니 잘 해보렴. 내가 네 평생 네 곁에서 끝까지 도와주마...’ 하시는 것이지요. 이 정도가 ‘대속’과 ‘구속’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방금 말씀드린 ‘자유’와 ‘구속’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속이란 인류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영적 자유를 되찾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인간의 영적 상태는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부활하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에 눌려있던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자유의 회복이며, 인간의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스스로 하듯, 즉 자기 의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선한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서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치시지 않은 진리, 즉 ‘대속’의 복음과 ‘오직 믿음’의 교리를 전하고, 또 그렇게 믿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의 내면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인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로막는 지옥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사람들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통해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에 대한 입장과 주관, 집착과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주님이 말을 못 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인정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그동안 그의 안에 있는 지옥의 영들이 진리를 방해했기 때문인데, 만약 그가 주님 앞에 진심으로 겸손해진다면,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은 그에게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고, 아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시라는 것과,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게서 풀려나 비로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주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주님에 대해, 그리고 체어리티의 신앙에 대해 고백할 때, 잘못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을 이단 신앙이라고 비난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15절과 1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주님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냈을 때,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높은 거처의 주인’이란 뜻으로 자세한 건 인터넷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누군가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것은 지옥의 바알세불로부터 오는 신앙, 즉 이단 신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체어리티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12장에서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마12: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 주시더라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은 주님이 모진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표상하는데요,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지고 지옥의 시험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때 그런 우리의 신앙이 하늘로부터 오는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라는 것이 저절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체어리티의 신앙은 바알세불의 신앙이 아니라 지옥의 바알세불과 맞서 싸우는 신앙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알세불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신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알세불의 신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바로 인간의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장’은 자아에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강한 자가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진리와 선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믿는 것입니다. 가끔 자신의 판단력과 의지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만 선하게 보일 뿐 본질에 있어서는 악하고 거짓된 것이며, 그렇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강한 자’는 지옥의 영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지옥의 영들이 와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나 진리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도움 없이 인간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지옥의 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영들에 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믿던 무장과 재물을 모두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주님께서는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즉 ‘나와 함께해야 한다’ 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가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헤치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만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 하려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견실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하려고 하는 걸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나를 버리는 길이며, 나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자꾸 멀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길이야말로 의로운 길이고, 구원의 길, 진정한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주님은 또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화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파당을 지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한 분 주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눕니다.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흔들림 없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러하신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6)

 

아멘

 

 

원본

2020-01-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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