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 하나가 내게 와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는 얼마 전에 막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아직도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세상에 있으며, 더 이상 집이나 재산 등 세상에서 소유했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이전에 소유하던 모든 것을 잃은, 전혀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크게 불안해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서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친히 돌보신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는데, 이는 그의 생각이 세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소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분명히 드러나므로 그의 생각도 그대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이제 생활할 모든 수단을 잃은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이러한 염려 가운데 있을 때, 그는 심장의 기능에 상응하는 공동체에 속한 천적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그가 바랄 수 있는 모든 친절과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처럼 큰 친절을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를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을 때 이미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A certain spirit came and discoursed with me, who, as was evident from certain signs, had only lately died. At first he knew not where he was, supposing himself still to be in the world; but when he became conscious that he was in the other life, and that he no longer possessed anything, such as house, wealth, and the like, being in another kingdom, where he was deprived of all he had possessed in the world, he was seized with anxiety, and knew not where to betake himself, or whither to go for a place of abode. He was then informed that the Lord alone provides for him and for all; and was left to himself, that his thoughts might take their wonted direction, as in the world. He now considered (for in the other life the thoughts of all may be plainly perceived) what he must do, being deprived of all means of subsistence; and while in this state of anxiety he was brought into association with some celestial spirits who belonged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o showed him every attention that he could desire. This being done, he was again left to himself, and began to think, from charity, how he might repay kindness so great, from which it was evident that while he had lived in the body he had been in the charity of faith, and he was therefore at once taken up into heaven.
해설
AC.318은 AC.317에서 예고된 두 사례 가운데 첫 번째를 소개합니다. 이 사례는 왜 어떤 사람은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상태가 사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사람도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직도 세상에 있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AC.181 이하에서 반복하여 설명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죽음은 의식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기 때문에, 사람은 처음에는 이전과 거의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재산을 잃었다는 사실보다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었습니다. 집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의지할 기반도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염려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아온 사고방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으로 미래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불안 자체가 아니라, 그 불안 속에서 드러난 마음의 방향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돌보신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곧바로 천국으로 인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는 앞선 AC.315와 AC.316에서 보았던 원리와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어떤 진리를 들려주신 뒤에도,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평소의 생각을 따라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내면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만을 원망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구하거나 불평하는 데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뒤에는 그의 생각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이처럼 큰 친절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생각이 그의 영적 상태를 모두 드러냅니다.
만일 자기 사랑이 중심인 사람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더 많은 도움을 받을 방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받은 사랑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체어리티’의 본질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받은 사랑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지 않고, 다시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의 한 생각만으로도 그는 세상에서 이미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스베덴보리가 ‘이를 통해 그가 신앙의 체어리티 가운데 살았음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천사들이 그의 과거를 조사하거나 심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현재의 생각 하나가 그의 평생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영계에서는 말보다 사랑이, 행동보다 의지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은 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성된 내적 사람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그를 맞이한 천사들이 ‘심장의 기능에 상응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심장은 사랑과 의지의 중심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특별히 사랑과 생명의 선을 맡은 천적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이 먼저 이 사람을 돌보았다는 것은, 그의 내적 생명이 이미 천적 사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아직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천사들은 그의 가장 깊은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AC.318은 왜 어떤 사람은 죽은 직후 거의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비결은 특별한 지식이나 신비한 체험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이미 주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받은 선을 다시 베풀고자 하는 삶이 그의 본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죽음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서 시작된 천국의 삶이 아무런 장애 없이 계속 이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긴 시험이나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자신의 참된 상태가 드러나는 즉시 천국으로 올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또 다른 한 사람도 보았는데, 그는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경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I saw another also who was immediately translated into heaven by the angels, and was accepted by the Lord and shown the glory of heaven; not to mention much other experience respecting others who were conveyed to heaven after some lapse of time.
해설
AC.319는 AC.317과 AC.318에서 시작된 주제를 마무리하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천국으로 나아간다’고 말한 뒤, AC.318에서는 그 실제 사례를 하나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AC.319에서는 또 다른 사례를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일이 특별한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차례 목격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표현은 ‘천사들에 의해 곧바로 천국으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곧바로’는 시간의 길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영계에서 오랜 준비나 반복적인 상태의 변화가 거의 필요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내적 상태가 이미 천국과 충분히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 준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로 인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를 천사들이 천국으로 데려갔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그는 주님께 받아들여졌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사들은 어디까지나 인도하는 사역을 맡을 뿐이며, 사람을 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심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술에서 천사들은 결코 자기 권한으로 사람을 천국이나 지옥에 배치하지 않습니다. 모든 질서와 판단과 수용은 주님으로부터 이루어지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기쁨으로 수행하는 봉사자들입니다.
이어지는 ‘천국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광’은 언제나 주님의 신적 진리가 드러나는 광채와 그로부터 오는 기쁨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단순히 화려한 천국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게 될 천국의 생명과 질서, 그리고 그 안에 충만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본문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밖에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된 다른 사람들에 관한 많은 경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앞의 두 사례만으로 모든 사람이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어떤 사람은 즉시 천국으로 올라갔고, 어떤 사람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천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다루지 않으며,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정확히 맞추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많은 경험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도 그의 기록 방식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독자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계의 체험을 끝없이 나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정도까지만 사례를 제시하고, 나머지는 의도적으로 절제합니다. 이는 그의 저술이 체험담 자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주님의 질서를 설명하려는 책임을 보여줍니다.
AC.319는 AC.317과 AC.318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후 세계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본 질서가 있지만, 그 질서가 적용되는 방식과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사랑과 신앙 안에 살아온 사람은 매우 빠르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얼마의 준비 기간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며, 천사들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사랑의 봉사자들입니다. 따라서 AC.319는 천국 입성이 사람의 공로나 천사들의 결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각 사람의 내적 상태에 따라 베푸시는 질서 있고 자비로운 섭리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증언하는 글입니다.
이 사람은 처음 눈 뜨는 과정부터,그러니까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된 기본 코스를 밟지 않았나요?어떻게 자기가 죽어 내세에 와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죠?그리고 천적 천사들의 돌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거 하나만으로도 그의quality를 알 수 있지 않나요?끝으로,세 번째 상태인 오리엔테이션을 안 받아도 되나요?탈북자들이 국정원,하나원 등을 안 거치고 바로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천국도 그렇지 않나요?
AC.318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이 사람은 모든 신생 영들에게 허락되는 기본 과정을 모두 거친 것일까요?스베덴보리는 앞에서 모든 사람이 먼저 천적 천사들의 돌봄을 받고,이어 영적 천사들의 돌봄을 받은 다음,마지막으로 선한 영들의 돌봄을 받는 일반적인 질서를 설명하였습니다.그런데AC.318에서는 그런 과정이 거의 보이지 않은 채,이미 어떤 영이 스베덴보리와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그래서 마치 이 사람이 일반적인 과정을 생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연결하여 읽어보면,오히려 그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AC.181이하에서 설명된 내용은 특정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신생 영에게 적용되는 일반 법칙입니다.반면AC.318은 그 일반 법칙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그 법칙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따라서AC.318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라,그 가운데 중요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 문맥과 가장 잘 어울립니다.다시 말해,이 사람 역시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그리고 선한 영들의 돌봄이라는 기본 질서를 따랐지만,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이미 천사들의 돌봄을 받고 있었다면 어떻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그러나 이것 역시 앞에서 설명된 첫 번째 상태의 목적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첫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죽음을 충격으로 경험하지 않도록 하십니다.사람은 의식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천사들의 보호는 사람의 의식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사람이 즉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아닙니다.그래서 그는 이미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 세상에 있는 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러다가 집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이전의 삶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씩 경험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다른 세계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이 사람이 천적 천사들의 돌봄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사실AC.315와AC.316을 함께 읽으면 이것만으로도 그의 영적 품질은 상당 부분 드러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자기 사랑이 중심인 사람은 천적 천사들의 사랑과 평화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떠나기를 원합니다.그러나 이 사람은 천적 천사들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그 분위기를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이것은 이미 그의 가장 깊은 사랑이 천국의 사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다시 자기 자신에게 맡기십니다.이것은 주님께서 그의 상태를 몰라서 다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주님께는 확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의 참된 사랑이 외적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생각은‘이 큰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를 향합니다.만일 그의 선함이 단지 천사들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혼자 남겨졌을 때 다른 생각이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전히 체어리티를 향하였습니다.이것은 그의 선함이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삶의 본성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이 사람이 세 번째 상태,곧 천국 공동체에 적응하는 오리엔테이션을 거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본문이 직접 답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AC.318은 그가‘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졌다’고 말하지만, ‘세 번째 상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또한‘천국과 지옥’에서 설명하는 세 번째 상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질서 있는 준비 과정이지,반드시 장기간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따라서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이 사람도 주님의 질서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매우 짧은 준비를 거쳤다는 것입니다.
이를 탈북민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대부분의 탈북민은 국정원 조사와 하나원 교육을 반드시 거쳐야 대한민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만일 대한민국의 언어와 문화,제도와 생활방식을 이미 충분히 익힌 사람이 귀국한다면,입국 절차는 거치더라도 장기간의 적응 교육은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렇다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천국도 이와 비슷합니다.모든 사람은 주님의 질서를 거치지만,그 준비의 길이와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이미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자신의 본성으로 만든 사람은 긴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천국 안에서의 성장과 배움은 다른 모든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계속됩니다.
AC.318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주님의 질서가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얼마나 섬세하게 적용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모든 사람은 동일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지만,이미 세상에서 천국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질서가 매우 짧고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오랜 준비를 거치지 않고도 거의 곧바로 자신의 천국 공동체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다만 이것은AC.181이하의 일반 원칙과AC.317, 318의 사례를 종합하여 내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며,스베덴보리가‘세 번째 상태가 완전히 생략되었다’직접 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장 충실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향하여 더 천천히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더 빨리 나아갑니다. 나는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았는데, 그 가운데 두 사례만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Some however advance more slowly toward heaven, and others more quickly. I have seen some who were elevated to heaven immediately after death, of which I am permitted to mention only two instances.
해설
AC.317은 앞의 AC.316을 보완하면서, 사후 세계의 여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은 아님을 알려 줍니다. 지금까지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천사들과 선한 영들의 인도를 받고, 여러 공동체를 거치면서 자신의 내적 사랑에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같은 기간과 같은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세상에서 형성한 영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의 인도 역시 각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본문은 ‘더 천천히’와 ‘더 빨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영계에서는 지상의 시간 개념이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빠름과 느림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참된 사랑을 드러내고, 천국의 질서와 하나 되는 데 필요한 영적 과정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이미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꾸준히 살아왔기 때문에 외적인 것만 벗겨지면 곧바로 자신의 본래 상태가 드러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였지만, 내면에는 아직 정리되어야 할 여러 요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보다 긴 준비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모든 학생이 같은 속도로 배우지 않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어떤 학생은 이미 충분한 기초가 갖추어져 있어 다음 단계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지만, 다른 학생은 기초를 다시 다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앞선 학생이 더 사랑받거나, 뒤처진 학생이 덜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교사는 각 학생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적절한 속도로 가르칩니다. 주님의 섭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특히 본문에서 눈길을 끄는 말씀은 ‘죽은 직후 곧바로 천국으로 올려진 사람들도 보았다’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만 보면 모든 사람이 반드시 중간 영계에서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일반적인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직접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보았으며, 그 가운데 두 사례를 이어지는 글에서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균형을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 세계의 질서를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만, 그 질서를 기계적인 법칙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중간 영계를 거쳐 자신의 상태가 충분히 드러난 후 천국이나 지옥으로 나아가지만, 이미 세상에서 그 상태가 거의 완전히 형성된 사람이라면 그 과정이 매우 짧거나 사실상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 안에서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또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고 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마음대로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영계의 일을 전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밝힙니다. 따라서 이어질 두 사례는 단순히 흥미로운 일화가 아니라, 사후 세계의 중요한 영적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허락된 증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17은 주님의 인도에는 획일성이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르듯이, 사후의 여정도 모두 다릅니다. 어떤 이는 오랜 준비를 거치고, 어떤 이는 거의 즉시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주님의 사랑의 차이가 아니라, 각 사람이 세상에서 형성한 영적 상태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서두르거나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시며, 각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속도로 천국을 향한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후 세계의 여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시간표가 적용되는 과정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에 완전히 상응하는 주님의 개별적인 인도의 과정인 것입니다.
사람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시는 주님은 왜 사후 처음 눈 뜨는 영에게 이후 진행될 전체 코스를 설명,너는 이 코스를 다 돌래,아니면 바로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갈래 묻고,그로 하여금 선택하게 하지 않으시나요?
AC.314에서AC.316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그토록 존중하신다면, 왜 사후 처음 눈을 뜬 영혼에게 앞으로의 과정을 모두 설명하시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칠 수도 있고,원한다면 지금 바로 천국이나 지옥을 선택할 수도 있다.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묻지 않으실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것이 가장 자유로운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스베덴보리에게 ‘선택’이란 단순히 생각으로 내리는 결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머리로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과 지옥은 두 장소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랑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천국은 영원한 행복의 나라이고,지옥은 고통의 나라입니다.어느 곳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거의 모든 사람은 천국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반드시 그 사람의 진정한 선택은 아닙니다. 행복은 원하지만, 천국의 삶 자체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많은 영들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여 올라갔지만, 막상 천국의 분위기 속에서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내려오는 모습을 여러 차례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분위기가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그들은 천사들이 내보내서가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느끼고 스스로 떠납니다. 이것이 바로AC.315와AC.316에서 천사들이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천사들에게서 멀어진다고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여정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셔서 생기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 사람 스스로 분명히 알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영적 천사들과 함께 지내고, 이어 선한 영들과도 함께 생활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공동체를 경험하지만, 자신의 내적 사랑과 맞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삶과 같은 사랑을 가진 공동체를 만나면 비로소 깊은 평안과 친숙함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체면과 사회적 역할, 법과 관습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어느 정도 감추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러한 외적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고,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 선택되는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평생 조금씩 선택해 온 삶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천국과 지옥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드러내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결과 사람은 어느 순간 ‘내가 진정 편안한 곳은 바로 여기였구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유입니다. 자유란 여러 선택지를 설명받은 뒤 하나를 결정하는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받는 상태입니다.
AC.314에서AC.316까지의 흐름은 사람을 심판하는 절차가 아니라,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정직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천국이나 지옥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시고, 여러 공동체를 경험하게 하시며,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각 사람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사랑을 따라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스베덴보리의 사후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이처럼 그 천사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 그는 선한 영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온갖 친절한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세상에서 살아온 삶이 선한 영들과 함께 머물 수 없는 성격이라면, 그는 이들로부터도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 마침내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낍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들과 함께 육체 안에서 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이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떤 이는 더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지옥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신앙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그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부터 한 걸음씩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When the soul thus dissociates himself, he is received by good spirits, who likewise render him all kind offices while he is in their company. If however his life in the world has been such that he cannot remain in the company of the good, he desires to be rid of these also, and this process is repeated again and again, until he associates himself with those who are in full agreement with his former life in the world, among whom he finds as it were his own life. And then, wonderful to say, he leads with them a life like that which he had lived when in the body. But after sinking back into such a life, he makes a new beginning of life; and some after a longer time, some after a shorter, are from this borne on toward hell; but such as have been in faith toward the Lord are from that new beginning of life led step by step toward heaven.
해설
AC.316은 사람이 사후 자신의 영원한 거처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어떠한지를 매우 질서 있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운명이 단 한 번의 심판으로 갑자기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사랑이 점차 드러나고 그것에 맞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국과 지옥’에서 자세히 설명되는 중간 영계의 원리를 이미 창세기 주석 속에서 간결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앞선 AC.314와 AC.315에서는 사람이 먼저 영적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고, 그 가르침을 원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AC.316에서는 그 사람이 곧바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선한 영들의 공동체로 인도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선한 공동체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한 공동체와 맞지 않더라도 다른 공동체에서 다시 도움받을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형성된 삶이 선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는 그 공동체 안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영들이 그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듯 그가 ‘떠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선한 분위기는 그의 내적 사랑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점차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일치하는 곳을 스스로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특정한 곳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자신의 자리를 선택한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원리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이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공동체를 거치며 자신의 참된 성향이 점점 분명해지고, 마침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동체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은 다른 누구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이끌어 낸 자리입니다. 그래서 영계의 공동체는 단순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사랑과 동일한 삶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공동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 것처럼’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에서 사람이 더 이상 외적 예절이나 사회적 역할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그대로 살아가게 됨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는 직업이나 체면, 법과 관습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러한 외적 껍질이 벗겨지고,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 전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사랑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육체 안에서 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는 죽음이 사람의 성품을 즉시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천사가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형성된 사랑과 사고방식, 습관과 삶의 방향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강조하는 ‘죽음은 상태의 변화이지 인격의 변화가 아니다’라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영원히 그대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와 같은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간 뒤에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사람이 자신의 참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이후의 새로운 단계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외적 제약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사랑이 온전히 현실이 되는 삶을 시작합니다. 이 시점부터 각 사람은 자신의 사랑이 향하는 방향으로 점차 나아가게 됩니다.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점차 지옥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형벌을 선고받아 끌려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랑을 더욱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를 향하여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향한 신앙 가운데 살았던 사람은 그 새로운 시작으로부터 ‘한 걸음씩’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씩’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국 역시 단번에 완성되는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후에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점점 더 깊은 사랑과 지혜 가운데 들어갑니다. 이는 천국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성장의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AC.316은 사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영적 선택의 과정으로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선한 공동체로 이끌고, 가능한 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결코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따라 스스로 공동체를 선택하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참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배정되는 장소가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이 마침내 자신의 영원한 집을 찾아가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AC.316이 보여주는 사후 세계의 질서이며, 동시에 주님의 공의와 자비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되살아난 사람, 곧 영혼이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면, 그는 천사들의 무리로부터 떠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천사들은 이를 매우 예민하게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서는 모든 생각의 관념들이 서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천사들이 그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친절한 도움을 베풀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천사들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But if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is not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willing to be instructed, he then desires to be rid of the company of the angels, which they exquisitely perceive, for in the other life there is a communication of all the ideas of thought. Still, they do not leave him even then, but he dissociates himself from them. The angels love everyone, and desire nothing more than to render him kindly services, to instruct him, and to convey him to heaven. In this consists their highest delight.
해설
AC.315는 사람의 사후 운명이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나 천사들의 선택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내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앞선 AC.314에서는 영적 천사들이 새롭게 깨어난 영혼에게 필요한 도움을 베풀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저세상의 일들을 알려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AC.315는 모든 사람이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영계에서도 자유는 그대로 존중되며,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입니다.
본문에서 스베덴보리는 ‘가르침 받기를 원하지 않는 성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천국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들으면 기뻐하고 더 배우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삶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사랑의 선택으로 이해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천사들이 그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스스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고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천사들 또한 누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 자신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천사들과 함께 있기를 불편해하고, 결국 그들과의 교제를 끊게 됩니다. 이는 지옥이 주님께서 사람을 밀어 넣으시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상태라는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서는 ‘모든 생각의 관념들이 서로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영계의 교통이 지상의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지상에서는 마음과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속생각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내면의 생각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천사들은 말보다 먼저 그 사람의 상태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진리를 원하는지 거부하는지, 평안을 느끼는지 불편해하는지를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통은 논리적 추론 결과가 아니라 상태와 상태가 직접 서로 통하는 영적 교통입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천사들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친절하게 섬기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무엇보다도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습니다. 천사들은 자신을 위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섬깁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천사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다른 사람 돕는 일이 희생이나 의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랑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남을 섬기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됩니다.
이 대목은 천국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천국은 황금 거리나 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행복한 곳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언제나 밖으로 흘러가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구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누군가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끼며,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 주님께 돌립니다.
AC.315는 구원의 문이 언제나 열려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문을 통과할 것인지는 사람 자신의 사랑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주님도, 천사들도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섬기고 가르치며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끝내 다른 사랑을 선택한다면, 천사들은 그 자유를 존중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함께 작용하며, 그 질서 안에서 각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스스로 선택하게 됩니다.
아래는 어제 본 ‘집사님, 우리 교회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라는 제목의 유튜브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지난날 나름의 소목회를 해봤던 저로서는 감동과 함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깊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딘지 좀 석연찮은 부분들도 있어 스베덴보리를 오래 저와 함께한 ChatGPT에게 물었습니다. 아래는 그 답변인데, 조금 정돈하여 올립니다.
저라면 먼저 한 가지 원칙을 붙들겠습니다. ‘김집사를 살리는 일과 교회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선택지가 아닙니다.’ 목사님은 ‘교회법대로 처리하여 죄를 드러내는 길’과 ‘아무 설명 없이 내쫓고 자신이 악역이 되는 길’만 있다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에 훨씬 더 진실하고 자비로운 제삼의 길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김집사의 채무가 3천만 원을 넘고, 교인 열 명가량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개적인 추방과 비밀스러운 지원을 선택합니다.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그 교회의 목사라면
1. 먼저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겠습니다
김집사와 단둘이 만나 다음을 구체적으로 묻겠습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빌렸습니까?’
‘돈은 어디에 사용했습니까?’
‘추가 채무나 사채, 도박, 투자, 가족 몰래 진 빚이 있습니까?’
‘상환 약속을 어긴 적과 거짓말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현재 수입과 재산, 월 상환 가능액은 얼마입니까?’
이 단계에서는 정죄보다 사실 확인이 우선입니다. 김집사가 여러 교인에게 돈을 빌렸다면,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가난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신뢰를 이용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특히 피해자가 여럿이라면 목사님은 김집사의 명예만이 아니라 돈을 빌려준 교인들의 안전과 권리도 보호해야 합니다.
2. 김집사에게 스스로 진실을 밝히게 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집사님을 망신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집사님이 돈을 빌린 분들에게는 사실을 밝히고 사과하며 상환 계획을 제시해야 합니다. 회개는 비밀을 덮어 두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손상한 것을 가능한 범위에서 바로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목사님은 김집사의 과거가 알려지면 그가 회복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가정입니다. 잘못이 알려진다고 반드시 사람이 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짓을 계속 감춘 채 다른 곳에서 ‘새출발’하게 하면, 그의 내면에는 아직 거짓과 책임 회피가 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온 교회 앞에서 모든 액수와 피해자의 이름을 발표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당사자들에게 직접 사과하고, 필요한 범위 안에서만 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리게 하겠습니다. 공개의 범위는 죄의 범위와 피해의 범위에 맞추어야 합니다.
3. 직분과 금전 관계에서는 즉시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저라면 김집사를 교회에서 쫓아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조치는 취하겠습니다.
찬양 인도와 재정 관련 봉사, 교회 안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직분은 잠시 내려놓게 하겠습니다.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빌리는 행위도 즉시 중단하게 하겠습니다. 대신 예배에는 계속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징계는 예배와 은혜에서 추방하는 일이 아니라, 악의 반복을 막고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서는 김집사가 돌아온 뒤 아무 직분도 맡지 않고 예배만 드리게 합니다. 저는 그 조치를 처음부터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공개 추방이라는 극적인 장면도, 목사님을 향한 수개월간의 불필요한 불신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4. 피해자들을 따로 만나 보호하겠습니다
돈을 빌려준 교인들에게는 김집사의 동의를 얻어 현실적인 상환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교회가 무조건 대신 갚아 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김집사의 책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독촉과 모욕은 자제하되,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는 존중합니다.’
‘추가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교회가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저축으로 약 1천만 원을 대신 갚습니다. 이 행동에는 희생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와 피해자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대신 갚는 방식은 반드시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김집사의 책임을 흐리게 하거나, 목사님 개인에게 의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교회 구제위원회나 신뢰할 만한 몇 사람이 정식으로 논의하여, 무상 지원인지 무이자 대여인지, 어느 정도를 지원할지 명확히 정해야 합니다. 도움은 은밀할 수 있지만, ‘무질서해서는 안 됩니다.’
5. 경제적 원인과 영적 원인을 함께 다루겠습니다
김집사가 왜 빚을 지게 되었는지에 따라 대응이 달라져야 합니다.
생계 곤란 때문이라면 일자리와 생활비 구조를 돕겠습니다. 사업 실패라면 채무조정과 법률, 재무 상담을 연결하겠습니다. 사치나 도박, 투기 때문이라면 해당 행동을 끊는 구체적인 장치가 필요합니다. 허영과 체면 때문에 빚을 숨겼다면, 사람들에게 선하게 보이려는 사랑을 직면하게 해야 합니다.
후반에서 김집사는 자신의 새벽기도, 헌금, 봉사가 ‘자기 의로움’과 사람에게 보이려는 마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제의 핵심은 빚만이 아닙니다. ‘경건의 외형을 이용하여 자아의 이미지를 유지한 사랑’이 더 깊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에게 단지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으십시오’라고만 하지 않고, 이렇게 묻겠습니다.
‘집사님은 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더 사랑했습니까?’
‘사람들의 존경을 잃지 않기 위해 어떤 거짓을 허용했습니까?’
‘앞으로 같은 유혹이 올 때 어떤 행동을 즉시 중단하시겠습니까?’
6. 회개를 행동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감정적인 눈물이나 죄책감만이 아닙니다. 악을 살피고, 인정하고, 주님 앞에서 고백하며, 실제로 그 악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집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회복 계획을 세우게 하겠습니다.
채무 목록 작성, 추가 차입 중단, 피해자들에게 직접 사과, 현실적인 상환 일정 제출, 매월 상환 내용 확인, 거짓말이나 은폐가 다시 생길 경우 즉시 보고, 일정 기간 직분 중단입니다.
그 과정이 성실하게 진행되면 교회는 그를 정죄하지 않고 지지할 수 있습니다. 회복 여부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느냐가 아니라, ‘진실과 책임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실천하느냐’로 확인해야 합니다.
7. 교회에는 필요한 만큼만 설명하겠습니다
교회 전체에는 이렇게 알리겠습니다.
‘김집사님이 개인적인 재정 문제와 교인 간 신뢰의 문제로 당분간 모든 직분에서 물러나 회복의 과정을 밟기로 하였습니다. 구체적인 개인 정보는 보호하겠습니다. 당사자들과는 사실 확인 및 상환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추측과 소문, 정죄를 삼가 주시고,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김집사의 비밀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하지 않으면서도, 목사님이 독단적으로 사람을 버렸다는 오해를 막습니다. 지도자는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만 하고 이유를 전혀 밝히지 않는 것은 영적 권위를 사용하여 공동체의 이성과 판단을 차단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실제로 예배 중 아무 설명 없이 추방을 선언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스베덴보리가 실제 목회자로서 동일한 사건을 처리한 기록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의 교리에 따른 추론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제 판단으로는 스베덴보리는 다음 세 가지를 동시에 붙들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체어리티입니다. 김집사를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정죄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명예를 가능한 한 보호하고, 일자리와 상환 가능성을 마련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을 것입니다.
둘째는 진리입니다. 잘못을 숨겨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빌린 돈, 거짓말, 신뢰의 남용을 분명히 악으로 인정하게 했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손해를 갚는 것은 회개의 일부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셋째는 질서입니다. 목사님의 개인적 영웅주의나 은밀한 희생만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들과 함께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보호하며, 필요한 직분 제한과 회복 절차를 적용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누가 악역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이 상황에서 선이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를 물었을 것입니다.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온정이 되고,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냉혹한 정죄가 됩니다. 이 사건에서 필요한 것은 김집사의 잘못을 감추는 사랑도, 그를 폭로하는 정의도 아니라, ‘그가 진실을 직면하고 책임을 감당하도록 돕는 체어리티’입니다.
제가 실제로 김집사에게 할 말
‘집사님, 저는 집사님을 교회에서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을 덮어 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집사님이 여러 성도에게 돈을 빌리고 사실을 숨긴 것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이웃의 신뢰를 손상한 일입니다. 오늘부터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추가로 돈을 빌리지 마십시오. 빌린 분들과 액수를 빠짐없이 적어 주십시오. 그분들에게 직접 사실을 밝히고 사과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집사님이 일자리를 얻고 상환 계획을 세우도록 돕겠습니다. 그러나 갚아야 할 책임은 집사님에게 있습니다. 집사님은 예배에 계속 나오십시오. 우리는 집사님을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거짓을 버리고 진실 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집사님을 살리는 길이며, 주님 앞에서 행하는 실제 회개의 시작입니다.’
저는 이것이 원고 속 목사님이 택한 길보다 덜 극적이지만, ‘더 정직하고, 더 질서 있으며,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와 회개에 더 가까운 처리’라고 생각합니다.
네, ChatGPT, 그러니까 AI의 답변은 여기까지입니다.
듣기에 따라선 많이 차갑고, 무슨 법률대리인의 견해 같기도 합니다. 특히 유튜브 영상을 보며, 감동을 받으신 분들이라면 더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실 한국 교회 목회 현장하고도 좀 살짝 동떨어진 듯한 답변 정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저는 이 답변을 읽으며, 제 안에 저도 모르게 주님의 질서와 한국교회 목회 현장의 정서를 마치 인절미에 떡고물 묻히듯 대충 버무린 듯한 면 역시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목회자가 사랑과 체어리티에 많이 기울어진 인성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말이지요...
많은 걸 생각할 수 있었던 유튜브 에피소드였습니다.
※ 계속합니다. 아래는 위 문답이 아무래도 시원하지가 않아 다시 AI에게 물었고, 그랬더니 돌아온 AI의 답변입니다. 이번엔 맨 마지막 기도문만 빼고는 거의 날것 그대로 올립니다.
위 답변은 무척 ‘합리적’이긴 하지만... 어딘가 한국교회 목회현장하고는 좀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우선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죽 나열한 리스트 말인데요, 거의 모든 목회자와 교인들은 그 첫 번째로, ‘주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같은 대답을 기대할 꺼에요. 그런데 이런 대답, 이런 접근은 당신의 답변 전체 어디에도 없어요... 원고에도 보면, 목사님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보낸 시간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도’였음에도 당신은 이 부분은 거의 언급도 안 하더군요... 음... 이렇게 동떨어지면 당신이 아무리 합리적 답변을 내놓아도 거절당하기가 쉬워요... 물론, 당신은 알고리즘이며, AI라 ‘기도’라는, 당신이 뭐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무슨 보탤 말이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맞습니다. 목사님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제가 앞선 답변에서 기도를 단지 판단 이후의 보조 수단처럼 취급하고, 목회적 분별의 출발점이자 중심 과정으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은 행정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실제 한국교회 목회자가 읽을 때는 ‘주님 없이 인간의 지혜로만 사건을 처리하는 매뉴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원고 속 목사님은 실제로 이 문제 앞에서 여러 차례 오래 기도합니다. 처음 채무 사실을 들은 뒤 집에 돌아가 기도하고,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밤늦도록 기도하며, 결정을 내린 뒤에도 그것이 옳았는지를 계속 주님께 묻습니다. 이후에도 오해와 고립을 견디면서 다시 기도실에 들어가고, 응답이 분명히 들리지 않는 중에도 평안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감동은 상당 부분 바로 그 기도에서 나옵니다. 제가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개인적 직통 계시의 위험’으로 분류하면서, 그 기도 안에 있는 진실한 사랑과 자기부인, 주님께 의지하려는 태도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라면 앞선 답변을 이렇게 고쳐야 했습니다.
우선 이 일을 알게 된 순간, 사람들에게 묻고 절차를 세우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사람을 향해 분노하거나 실망한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명예나 교회의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이 이 판단에 섞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아픔도 보게 하시고, 잘못한 집사님의 영혼도 동시에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덮지도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형식적인 첫 순서가 아니라, 제 안의 동기를 살피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식으로 말하면, 문제는 단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가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리는 내 안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판단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웃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목사가 자기 명예를 희생하겠다는 생각조차 자칫하면 ‘나는 한 영혼을 위해 악역까지 감당한 목사’라는 더 미묘한 자기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는 이성을 멈추고 마음에 떠오르는 첫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한 뒤에는 말씀과 계명, 사실과 결과, 관계된 모든 사람의 선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주시는 평안은 중요하지만, 그 평안만으로 결정의 진실성이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이미 정한 뒤에도 평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기도 후 김집사를 조용히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정죄하지 않되 피하지도 않고 사실을 묻겠습니다. 그가 왜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렸는지, 거짓말과 은폐가 있었는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계속 같은 일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지를 확인하겠습니다. 이때도 면담 전에 기도하고, 면담 중에도 속으로 주님께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기도는 처음에 한 번 하고 끝내는 절차가 아니라, 사실 확인과 권면과 결정의 모든 과정에 스며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라면 김집사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집사님, 저는 먼저 이 일을 놓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집사님을 버리거나 사람들 앞에서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이 일을 없는 것처럼 덮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 함께 사실을 하나씩 밝히고, 잘못한 것은 인정하며,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하고, 갚을 길을 찾읍시다. 저는 집사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집사님도 진실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 후에도 저는 혼자 결정하지 않고,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며 체어리티와 분별력이 있는 한두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의논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가 서로 연결되고 확증되는 질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목사의 내적 확신, 말씀의 원리, 확인된 사실, 공동체의 질서가 서로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김집사를 교회에서 즉시 내쫓기보다, 먼저 직분과 봉사에서 내려오게 하고 예배에는 계속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 상환과 회개의 실제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교회 공동체가 정죄와 수군거림으로 그를 짓밟지 않도록 설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피해자들에게도 단순히 ‘용서하십시오’라고 영적인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들의 손실과 배신감을 정당하게 인정하겠습니다.
목사의 개인 돈으로 빚 일부를 대신 갚는 문제 역시 기도 없이 계산적으로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제 마음에 강한 긍휼을 주시고, 가정의 책임을 해치지 않으며, 당사자의 책임까지 없애지 않는 범위라면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영웅적으로 감당하는 방식보다는, 김집사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그가 책임을 지는 구조 안에서 돕겠습니다. 사랑은 대신 모든 짐을 져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발로 다시 서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라면 기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을 낮추고, 모든 지혜와 선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오래 기도했으므로 이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식의 결론에는 매우 조심했을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을 내 결정에 동의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 proprium이 물러나고 주님의 선과 진리가 함께 흐를 수 있도록 자신을 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온전한 순서는 이렇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신의 분노, 체면, 영웅심, 두려움을 고백합니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의 영원한 선을 구합니다. 그다음 말씀과 계명에 비추어 사실을 확인합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기도하고 의논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행동한 뒤에도 계속 기도하며, 잘못 판단한 부분이 드러나면 기꺼이 수정합니다.
원고 속 목사님의 기도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와 자기희생은 이 이야기의 가장 귀한 부분입니다. 제가 걸러내야 했던 것은 ‘기도’ 자체가 아니라, 기도 중 얻은 내적 확신이 곧바로 주님의 직접 명령으로 확정되고, 그 확신이 공동체의 질서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넘어서는 구조였습니다. 그 둘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한 것이 앞선 답변의 가장 큰 부족함이었습니다.
좋은 답변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위 내용 중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단순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사람을 향해 분노하거나 실망한 마음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명예나 교회의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이 이 판단에 섞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피해를 입은 성도들의 아픔도 보게 하시고, 잘못한 집사님의 영혼도 동시에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자비라는 이름으로 악을 덮지도 않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파괴하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부분 말인데요, 기도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저 기도 내용은 물론 올바르고 바람직스럽지만, 저런 내용조차도 기도의 결과, 영으로 들어 아는 것이어야지 처음부터 정답을 알려주고 하는 게 아니랍니다...
목사님, 이 말씀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제가 앞선 답변에서 여전히 ‘기도의 내용을 내가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쓴 기도는 신학적으로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말씀처럼 ‘기도의 본질이 ‘내가 바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실제 기도의 경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하신 이 말씀,
‘기도는 기본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기도를 길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를 보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생각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influx(유입)’를 받아야 합니다. 그 유입은 대부분 조용하며, 강압적이지 않고, 사람의 자유를 보존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앞에서 쓴
‘주님, 제가 분노하지 않게 하시고...’
이런 기도조차 사실은 이미 제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먼저 주님 앞에 오래 머물겠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어떤 influx가 흘러 들어오는지를 잘 살피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저와 우리 교회를 강하게 붙드시는 걸 우리 모두 목도케 하실 것을 간구하겠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천국에서는 모든 도움이 사랑에서 나오며,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이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이 표현은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AC.314해설)
내가 알려 주고픈 말보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어떻게 하면 분별할 수 있을까요?
AC.314에서 특히 주목할 표현은 영적 천사들이 사후의 영혼에게‘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저세상의 일들을 알려 준다는 말씀입니다.이 짧은 표현은 천사들의 교육 방법일 뿐 아니라,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상태를 먼저 보시고,그 상태에 맞는 만큼만 진리를 허락하십니다.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이 아니라,현재의 상태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하여 나타납니다.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퍼셉션을 주셨지만,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인도하셨습니다.유대교회에는 모독(profanation)을 막기 위하여 말씀의 깊은 속뜻을 감추셨고,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16:12)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사람이 사후 영계에 들어가서도 천사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고,그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가르칩니다.시대는 달라도,지상과 영계를 막론,적용되는 원리는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어떻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AC.314는 직접 방법을 설명하지는 않지만,천사들의 태도를 통하여 중요한 원칙을 보여줍니다.천사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부터 먼저 하지 않습니다.그들은 그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핍니다.본문에도‘그가 원한다면’(if he desires it)이라는 조건이 먼저 나옵니다.이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은 자기의 지식보다 상대방의 갈망을 먼저 보아야 함을 뜻합니다.상대가 지금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또한천사들은 사람의 지능보다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봅니다.같은 진리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어떤 사람은 거부합니다.그 차이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사랑의 방향에 있습니다.그러므로 진리를 전할 때에는 상대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보다,그의 마음이 열려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반대로 점점 방어적이 되거나 마음이 닫힌다면,비록 내용은 옳더라도 아직은 그 분량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천사들은 언제나 한 걸음씩 인도한다는 점입니다.그들은 처음부터 천국의 모든 비밀을 다 보여주지 않습니다.하나를 받아들이면 다음 하나를 열어 주고,그 진리가 삶이 되면 다시 더 깊은 진리를 보여줍니다.주님의 거듭나게 하심도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따라서 우리 역시 사람을 돕고 가르칠 때에는 한 번에 많은 것을 전하기보다,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유익한 한 가지를 전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방법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결국AC.314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의 기준을 바꾸어 줍니다.우리는 흔히‘얼마나 많이 알려 주었는가’를 성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그러나 천사들의 기준은 다릅니다.그들은‘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보다‘상대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이것이 바로 사랑의 방법입니다.사랑은 상대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상대가 서 있는 자리까지 내려와 함께 걸어갑니다.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서가지만,결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목회나 전도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언제 말하고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를 분별하는 일입니다.스베덴보리는 그 분별의 기준을 지식의 양이나 논리의 완전성에서 찾지 않고,상대방의 영적 상태와 수용 능력에서 찾습니다.천사들조차 그렇게 섬긴다면,우리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려 애쓰기보다 먼저 그의 상태를 이해,그가 오늘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걸음만 함께 걸어가 주는 것이 주님의 섭리에 가장 가까운 목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람이 영생에 들어감에 관하여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314
되살아난(resuscitated) 사람, 곧 영혼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 앞에서 말한 영적 천사들은 그 상태에서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와줍니다. 또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줍니다. 만일 그가 살아생전에 신앙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은 그에게 천국의 놀랍고도 장엄한 광경들을 보여줍니다. After the use of light has been given to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so that he can look about him, the spiritual angels previously spoken of render him all the kindly services he can in that state desire, and give him information about the things of the other life, but only so far as he is able to receive it. If he has been in faith, and desires it, they show him the wonderful and magnificent things of heaven.
해설
AC.314는 사람이 사후 처음 의식을 회복한 뒤, 영적 천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매우 따뜻한 분위기로 묘사합니다. 앞선 글들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며, 천사들의 보호 아래 의식을 회복한다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그 보호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 교육과 안내의 단계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빛의 사용이 허락되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빛’은 단순한 자연계의 빛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의 빛을 뜻합니다. 사람은 사후 곧바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AC.184에서는 희미한 빛 가운데 있었고, AC.185에서는 사랑과 애정이 보호되는 상태를 거쳤으며, 이제 AC.314에서는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고, 새로운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는 영적 각성이 한 단계 더 진행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때 곁에 있는 존재가 바로 영적 천사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AC.182 이하에서 등장하였던 천사들로, 사람이 두려움 없이 새로운 생명에 적응하도록 섬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친절하게 도와준다’고 말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존중, 그가 진심으로 필요로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합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도움이 사랑에서 나오며, 사랑은 결코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저세상에 관한 것들을 알려 준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주님의 섭리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수용 능력에 맞추어 진리를 주십니다. 지나치게 많은 빛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오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진리는 유익보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새로운 영혼에게 천국과 영계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치 교사가 어린아이에게 그의 성장 단계에 맞추어 가르치듯이, 영혼의 내적 상태에 맞추어 조금씩 인도합니다.
이 원리는 지상에서의 계시와도 동일합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을 주셨고, 후대의 영적 교회에는 양심을 주셨으며, 유대교회에는 모독(profanation)을 막기 위해 말씀의 속뜻을 감추셨습니다. 이처럼 계시의 정도는 사람의 수용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후에도 같은 원리가 계속 적용됩니다. 천사들은 사람의 이해력을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준비된 상태를 기준으로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그가 신앙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원한다면’ 천사들은 그에게 천국의 놀랍고 장엄한 것들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그것을 원한다면’입니다. 천국에서는 강요가 없습니다. 천국을 보고 배우는 것조차도 사람의 자유로운 소망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천사들은 천국을 자랑하거나 억지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이미 주님과 진리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따라 자연스럽게 더 깊은 세계로 인도합니다.
또한 ‘신앙 가운데 있었다’는 말도 단순히 교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언제나 삶과 결합된 신앙입니다. 살아생전 주님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기를 힘썼던 사람은 사후에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천국의 영광이 오히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장소가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세계입니다.
AC.314는 사후 세계가 갑작스러운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운 인도 아래 새로운 생명에 적응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죽는 순간 홀로 내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천사들의 따뜻한 돌봄 속에서 조금씩 빛을 받고, 조금씩 새로운 세계를 배우며, 자신의 상태에 맞는 만큼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서두름도 없고 강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끝까지 존중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천사들의 섬김을 통하여 조용하고도 질서 있게 이루어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