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님, 지금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진입, 윤석열 대통령을 체포하고자 저 불의한 수많은 무리가 모여 모의하고 있고, 그에 비하면 소수인, 그리고 이럴 때 당연히 대통령을 지켜야 할 경찰도, 군도, 법원도, 심지어 대통령실과 정부 행정 관료들조차 대통령을 향해 등을 돌리거나 딴청을 부리는 등 대통령 경호처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 가운데 있는 이때...
8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18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19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읍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가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그들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20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여시매 그들이 보니 자기들이 사마리아 가운데에 있더라 21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하니 22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소서 하는지라 23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왕하6:8-23)
저 엘리사의 때에 일어난 일이 지금 대통령 관저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분연히 일어나 주께 속한 모든 주의 자녀들에게 천사들에게 입혀 주시는 얇은 보호막을 입혀 주셔서, 이 강추위와 더불어 모든 지옥의 기운들로부터 영육간 어디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간밤 한남동 관저 앞 도로변 상황을 박완석 라이브로 계속 보다가 저분들은 이 강추위 한복판에 아랑곳없이 저렇게 애들을 쓰시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서 이 무슨... 하는 맘에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드러눕지도 못하고 앉아 기도하며 자다 깨다를 반복, 토막잠 자던 중 새벽 5시, 얼른 유튜브를 켜니 아이고...
어떤 분은 그 추운 아스팔트 바닥에 호일을 돌돌, 마치 김밥처럼 말아 주무시고 계신 분, 그 시간에 청년들이 애들을 쓰며, 누구는 연사로, 누구는 자원봉사로... 그리고 저만치 열 대가 넘어 보이는 대형 버스의 엔진 소리, 보니 애국 후원자들께서 보내주신 ‘난방 버스’, 아... 세상에! 어르신들, 이곳에서 몸 녹이시라고... 아이고, 주님, 순간 울컥...
요 며칠 계속 이 급변 정국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의 애를 써서인가 오늘은 제법 몸에 무리가 오고, 두통이 있습니다. 곰곰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에 원망과 분노, 저주의 기운을 받아들여 깜빡, 제 안에 벌어진 틈을 따라 지옥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 서둘러 수습,
‘오, 주님, 주님도 때로는 노를 발하셨지만, 그러나 주님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여서 주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시대 저 이재명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온 나라 전반에 퍼져 있는 이 독버섯 같은, 암세포 같은 불의한 자들로 정말 화가 많이 나지만, 그러나 참으로 주님 안에서 분노하고 싶습니다. 오, 주님, 저를 붙들어 주셔서 제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않는, 분을 내다가 지옥문이 열리는 우를 범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기도하기를,
‘오, 주님,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그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어도 전혀 몸이 상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주님의 선, 곧 주님의 올바름을 사랑하는 저분들을 지켜주시고, 역시 일체 몸 상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님 안에서 안전하게 나라를 사랑하여 지옥의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살 동안 다음과 같은 믿음, 곧 자신들이 행하는 선과 자신들이 믿는 진리는 모두 자신들한테서 나오는 것이라고, 즉 자신들의 본성, 그러니까 능력상 그게 맞다 믿으며 살아온 영들은 천국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선행을 자기 공로로 여기고,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한테서나 볼 수 있는 믿음인데요, 하지만 천사들은 그런 영들을 피합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어리석다 하며, 도둑들로 보기 때문인데요, 어리석다 하는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니고 말입니다. 도둑들로 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이 공급하시는 걸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의 것을 훔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천국 천사들의 믿음, 곧 천사 자신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는 믿음을 역행하는 것입니다.Such spirits as have confirmed themselves during their life in the world in the belief that the good they do and the truth they believe is from themselves, or is appropriated to them as their own (which is the belief of all who place merit in good actions and claim righteousness to themselves) are not received into heaven. Angels avoid them. They look upon them as stupid and as thieves; as stupid because they continually have themselves in view and not the Divine; and as thieves because they steal from the Lord what is his. These are averse to the belief of heaven,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in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HH.1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장, '천국을 이루는 것은 주님의 신성이다'(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HH.7-12)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9-12)
진리의 확신이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오게 되면 맹세에 의한 확신이 되지만,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으로 내려온다면 그건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속 사람 안에서 진리는 자신의 빛 가운데서 나타나지만,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 안에서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내적인 천국, 또는 삼 층 천국의 가장 밝은 빛 안에 있는 천적 천사들은 진리에 대해 추론하지 않고 논쟁하지도 않으며, 단지 예, 아니오 라고만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깨닫고 지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9166:2, 이순철 역) When the confirmation of truth descends into the external ma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t is effected by an oath. It is otherwise when it descends into the external through the internal; for in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its own light, but in the external apart from the internal man, truth appears in darkness. From this it is that the celestial angels, who are in the inmost or third heaven, being in the highest light, do not even confirm truths by reasons, still less do they debate or reason about them, but merely say Yea, or Nay. This is because they perceive and see truths from the Lord. (AC.9166:2)
※ 다음은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당시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해 포부는 겸손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 앞에, 또는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연초에 품었던 생각들을 지켜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과 다투기도 하고 서로 상처를 받습니다. 저도 새해 벽두에 연말에 거래했던 가구점 주인하고 다툼이 좀 있었습니다. 아내가 나이가 들면 침대 생활을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지난 연말에 침대를 주문했는데 사정이 생겨 취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가구점 주인은 주문을 취소할 경우, 10%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전에 고지도 없이 그런 규정을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게 옳으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결국 위약금 없이 주문이 취소되긴 했는데, 그러고 나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신앙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투지 말고 손해를 보는 편이 옳은가요, 아니면 시비를 끝까지 가리는 게 주님 앞에 옳은 일인가요?
오늘 본문 9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화평하게 하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 교회에서 말하는 평화나 화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천국의 비밀’ 1038:2번 글을 보면,
천국의 평화는 천사들 간의 상호적 사랑 안에만 있다.“peace” signifies the kingdom of the Lord, and the kingdom of the Lord consists in mutual love, in which alone is peace.
고 합니다. 상호적 사랑이란 한마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천국에서 이웃 사랑을 상호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국의 천사들은 색깔은 다르나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그 진리를 서로 존중하고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들끼리는 상대방의 진리를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다투는 일이 없고, 평화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에서는 같은 일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진리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에도 어떤 진리에 대해 의견이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고,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웃이 거짓을 말하는데도 자신의 진리를 버리고, 이웃의 생각을 따라야 할까요? 그것이 화평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되 상대의 진실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판단하는 일인데, 주님께서는 겉 사람의 얕은 지식으로 진리를 추론하지 말고, 속 사람으로부터 유입되는 진리를 통해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주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고 하신 것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니라 겉 사람의 지식만으로 진리를 판단할 때는 자칫 자아의 욕망에 휘둘릴 수 있음을 경계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자아가 끼어들면 진리가 쉽게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게 화평케 하는 일인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장에는 주님께서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거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모두 성전 밖으로 쫓아내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21:12-13)
주님이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것은 성경 전체에서 처음 있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교회 안에 말씀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장사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당시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말씀을 이용해 재물을 모으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장사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에서 진리가 바로 서야 함을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 다음은 이와 관련된 배경 이야기입니다. 류모세 저, ‘열린다 성경, 성전 이야기’ 인용입니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이 상점에서 성전 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양,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안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수확물과 가축 가운데 흠이 없는 것을 가져와야 했지만, 안나스 가문은 자신의 상점에서 구입한 제물만 바치도록 함으로써 가장 수지맞는 이권에 개입하였다. 당시 이런 일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과의 결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사장은 로마 총독에게 엄청난 뇌물을 리베이트로 바침으로써 대제사장직을 얻을 수 있었고, 꾸준한 뇌물공여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 안나스 가문은 로마에 엄청난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는데, 이처럼 극도로 타락한 종교 세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 그룹은 로마와 한패로 인식되었다. 66년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메나헴이 가장 먼저 제사장 가문을 학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11장에는,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눅11:37-끝)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주님이 미워하신 건 인간 바리새인이 아니라 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서 주님의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만큼 거짓을 미워합니다. 하물며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지옥의 악과 거짓이 얼마나 미우셨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때 주님의 분노는 속된 인간의 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신성한 분노입니다.
주님이 악과 거짓을 상대로 늘 과격하셨던 건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을 때는 몸이 찢겨나가고, 종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을 아셨음에도 당신 자신을 위해 어떤 변명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인간 안에 있는 자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언제나 수치와 굴욕을 두려워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들이 닥칠 때, 할 수만 있다면 그것들로부터 달아나려 합니다. 영화롭게 되기 전 주님의 인성(human) 안에도 자아의 그런 원초적인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모든 고난을 묵묵히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때로는 진리를 위해 분연히 맞서 싸우셨고, 때로는 자아의 욕구를 누르시며, 고난을 견뎌내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화평을 주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그와 같은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 하신 주님께서 이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는 복이 있다 하십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 말씀에서 의란 뭘까요? ‘참된 기독교’ 96번은
의는 하나님의 질서를 뜻하고, 의를 실천하는 것은 의로움과 진실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것Divine order is righteousness. Righteousness is acquired only so far as man practices righteousness; and this he does so far as he acts towards the neighbor from a love of what is righteous and true;
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란 진리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베푸는 걸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원한다고 악한 사람에게 흉기를 내어 주거나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파는 건 의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를 위한 일이 박해를 받는 이유가 뭘까요?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로운 사람의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주님은 진실하지 않은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고,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강도요 삯꾼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과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선자와 삯꾼들에 의해 박해받으셨고, 결국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속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교훈은 이웃을 사랑하되 진리를 따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각이 곧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진리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진리와 거짓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대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추론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는 진리와 거짓을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겉 사람의 생각으로 속 사람에 속한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으로 진리의 빛이 흘러들어올 때,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머리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방법으로 이웃의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과 연합할 때, 비로소 화평케 하는 자, 의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을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때로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에게 주시는 상이 새해를 맞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2)
천국 천사들은 시인하기를, 모든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자신들로부터 말미암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고 주님은 자기들 안에 있는 주님의 것 안에 계시지, 자기들의 것 안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The angels of heaven acknowledge all good to be from the Lord, and nothing from themselves, and the Lord dwells in them in His own and not in their own. (HH.8)
또 그들은 말하기를, 이 유일한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이 원천은 주님이신데, 나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과 신적 진리밖에 없다고, 그리고 각 사람은 이것, 곧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신적 선과 신적 진리를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즉 선과 진리를 신앙과 생활(생명)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안에 있는 천국을 발견하지만, 거부하거나 질식시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옥으로 만든다고 한다.Again, they say that from this one fountain of life, which is the Lord, nothing goes forth except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and that each one is affected by these in accordance with his reception of them—those who receive them in faith and life find heaven in them while those who reject them or stifle them change them into hell; (HH.9:2)
이것이 천사들의 믿음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선행에 대한 감사를 전부 거절하고, 만일 누군가가 선을 그들, 곧 천사들의 공로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화를 내고 물러선다. 그들은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 지혜로운 건 오직 내가 열심히 해서야라거나, 나는 내 힘으로 이렇게 선행을 하는 거야라고 믿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을 그들은 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건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 자체를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으로 말미암은 선이라고 한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천국을 이루는 선이라고, 이 선이 곧 주님이시라고 그들은 말한다.This being the belief of the angels they refuse all thanks for the good they do, and are displeased and withdraw if anyone attributes good to them. They wonder how anyone can believe that he is wise from himself or does anything good from himself. Doing good for one’s own sake they do not call good, because it is done from self. But doing good for the sake of good they call good from the Divine; and this they say is the good that makes heaven, because this good is the Lord. (HH.9:3)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 안에 내적으로 주님이 계시지만, 사람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렇지 않다.Good from the Lord has the Lord inwardly in it, but good from one’s own has not.(HH.9:3)
순진함은 신앙의 진리와 사랑의 선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모든 것이 심기는 바탕이 된다.and in innocence all things of heaven can be implanted, for it is a receptacle of the truth of faith and of the good of love. (HH.330)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김은경 역), 37장, ‘천국의 어린이들’(Little Children in Heaven)
이번 신정 연휴를 3세, 0세 손주들과 보내면서 더더욱 위 기술(記述)을 깊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2-6)
※ 2024년 올 한 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자주 들었던 이름과 키워드들은 아마도 ‘이재명’과 ‘부정선거’, 그리고 ‘탄핵’ 등이었겠고, 가장 많은 시간을 썼던 건 유튜브 정치 클립들 보기이지 싶습니다. 주님과 보낸 시간이 아니고 말입니다. 정말 부끄럽지요... ‘이젠 좀 절제해야지...’ 하다가도 날마다 순간순간 들려오는 소식들, 특히 부정선거 소식과 그로 인한 거짓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가슴에 열불이 나고, 마음이 정말 힘들었던, 정말 원치 않는 스트레스로 저뿐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대다수 보수 우파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더더욱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이번 달에 터진 윤석열 대통령의 구국의 비상계엄으로 인해 나라가 광란의 도가니로 돌변, 급기야 거대 야당은 이때다 싶어 대통령을 국회 탄핵 소추시키고, 엊그제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애쓰고 있던 한덕수 국무총리마저 탄핵 소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고, 급기야 국내 정세 불안으로 환율 상승, 나라의 경제가 안 그래도 어려운 때, 더욱 휘청거리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저 거짓의 정당은 탄핵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기도하기를, ‘주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러 간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을 해코지하려던 소돔 백성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처럼 지금 이 나라 좌파들의 눈을 어둡게 하사 저들로 스스로 망하게 하옵소서’라고까지 하지 않았겠습니까?
9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19:9-11)
이제 사흘 후인 글피면 2025년 1월 1일 새해인데도 지난 성탄절 때도 그랬지만, 송구영신을 앞두고도 온 나라 백성의 주된 관심은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에만 있어 불안, 초조, 암담한 상황입니다. 검찰, 경찰, 공수처를 비롯, 모든 언론, 방송, 심지어 여론 조사 기관들마저 한통속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법원과 헌재에도 좌파들의 독버섯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주님 오시던 로마 시대라면 모르겠는데, 그로부터 이천년이 지난 21세기 2024년 말임에도 이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데요, 지금이 이럴진대, 주님 오시던 이천년 전 상황은 더욱더 어땠을까요? 오래전 모세를 통해 주님은 율법, 곧 지상의 언어로 된 ‘말씀’(The Word)을 주셨고, 이 ‘말씀’에 기반한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앞선 두 교회 시대인 태고교회, 고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이 ‘표상’(表象, representative) 교회, 유대 교회라고도 하는 이 교회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 타락, 결국 주님의 모든 선과 진리가 황폐해지는 상태, 곧 종말에 이르게 되자, 이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항상 새로운 교회는 이전 교회가 생명을 다할 때 일어납니다. 이것이 현 기독교회의 시작입니다. 이런 상황을 BC 8세기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예언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그 속뜻으로는 하나의 교회 시대가 교체되는,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의 몇 배, 몇십 배나 더 혼란스러웠을 때인데요, 그때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보면서, 오늘 이런 나라 안팎 혼란의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깨닫고자 송년 주일예배 본문으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빛을 비춰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설교 원본은 작년 서울 새 교회 송년 주일예배 원고입니다. 그래서 도입 부분을 올해 사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여리고 연약한 신앙을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에게 처음 신앙이 생길 때의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우리 인간처럼 신앙이 연한 순 같이 연약할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언젤까요? 주님이 아직 어리셨을 때, 자기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과 그를 통해 자기가 세상에 오신 이유를 처음 아셨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그때의 주님의 연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과 같다는 것은 그 당시 주님에게 있는 진리, 또는 신앙이 그렇게 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른 땅은 주님의 겉 사람인 인성(human)의 상태를 뜻하는데, 처음에는 주님의 인성 안에 진리가 별로 없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없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고운 모양이란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합니다.
※ 우리는 그동안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으로만 이해, 실제로 주님의 외모가 그다지 별로였다, 주님은 보잘 것 없는 외모의 소유자이셨다, 그러니 자신의 외모가 맘에 안 드시는 여러분, 힘을 내시라는 식으로 설교도 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어왔지만, 그러나 이 말씀의 속뜻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말씀의 속뜻을 모르면 정말 이렇게 정반대의 엉뚱한 풀이와 적용을 하게 되는 걸 봅니다.
그랬던 주님이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몸과 마음이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유월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랍비들과 성경에 대해 토론하기에 이릅니다. 누가복음 2장은 그때 랍비들의 반응을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전합니다. 내면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외모 또한 아름답게 변합니다.
※ 주님의 질서, 곧 주님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출발,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내면에서 외면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주님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셨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 즉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았을, 누가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았을, 자기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그래서 그런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어린이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아기였을 때에도 이미 몇몇 사람에게는 그러셨는데요, 아래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말입니다.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21-38)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주님에게서 하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 영적으로는 맹인이요, 귀머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맹인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6장 말씀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말씀에는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며 주님을 배척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군가를 판단할 때, 겉모습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집안은 어떤지, 또는 돈은 많이 버는 지로 판단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힘이 있었고, 주님에 의해 많은 병자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했습니다. 나사렛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 여기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이때는 이미 ‘요셉’은 세상을 떠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고 멸시하고 함부로 대할 때, 주님은 말할 수 없이 슬프셨을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모독하며, 그렇게 그런 식으로 영적으로 죽어가는 게 안타까우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죄인처럼 끌고 가 때리고 침 뱉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벌을 받아 고난당하는 것이라고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불법을 저지르거나 신성을 모독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원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 주님의 이런 모습을 저는 참으로 본받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들로 제 마음이 힘들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리면, 그때마다 주님은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어땠겠니?’ 그럴 때 저는 ‘어휴, 주님...’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시 제게 ‘너는 나를 사랑하여라. 그래서 누구든지 내가 사랑하면 너도 그를 사랑으로 대하거라.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즉 사랑하기 때문에 하도록 하여라’ 하십니다. 그럴 때, 제 눈빛이 돌아오며, 초롱초롱해집니다. 마음도 가벼워지고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주님은 그런 모욕과 조롱을 스스로 자원하셨을까요? 본문 5절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주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궁극적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365번 글 31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한 사람들에게 평화란 천국과 영원한 삶을 뜻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천국과 지옥의 모든 것을 당신의 질서 가운데로 끌어내려 굴복시키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인성 안으로 불러들인 시험을 통해 인성을 영화롭게 만드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해설 365:31, 이순철 역) Therefore “peace” here signifies heaven and eternal life to those who are conjoined with Him; for the human race could by no means be saved if the Lord had not reduced all things in the hells and in the heavens into order, and at the same time glorified His Human, and these were accomplished by temptations admitted into His Human. (AE.365:31)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지옥을 이기심으로 당신 안의 신성과 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렇게 해서 신성한 인간(Divine Human)인 동시에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주님이 살인자와 강도와 같은 인간들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유전 악 인성을 영어로는 human이라 하고, 영화되신 인성을 Divine Human이라 합니다. 이 Divine Human에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그 의미가 무한합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에서 양은 본래 순진한 사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즉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욕망을 좇아 마음대로 사는 자들이 양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셔서 온갖 멸시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견디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높고 높은 천국에서 낮고 비천한 땅으로 스스로 내려오셔서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오직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주님이 얼마나 인자하고 겸손한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도 끝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 앞에 지극히 낮은 자세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롭게 되시기 전 주님의 인성은 무한한 신성이신 아버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얼마나 겸손하셨는지는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 대제사장과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받으실 때는 자신을 위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은 그것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닮겠다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분개합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돌아와도 참지를 못합니다. 모든 게 사랑이 없고 신앙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또한 주님은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시절이던 때 오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주께서 이런 나라 안팎 사정에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소위 독립군들에게 힘을 보태시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은 정치와 군사에는 일체 함구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만 전파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닮아야 할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겸손하지 못했던 일,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리하여 오래 참지 못했던 일, 이웃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던 일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또한 필요하다면 손에 손, 총칼을 들고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더 깊은 상대, 곧 저들 식민 지배계급의 사람들 안에서, 인류의 안에서 숨어 활동하며, 무대 뒤에서 조종하여 인류를 자기들 뜻대로 부리는 지옥을 상대하시기 위해 인류를 깨우시고, 각 사람을 그 무너진 기초에서부터 다시 세우시는 일에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주님처럼, 우리 중에 누구는 그 형편과 사정에 따라 광화문으로, 또 누구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며, 변화된 삶, 곧 일터와 직장에서 자기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드러내는 생활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구호를 외쳐도 절대 무슨 악한 기운, 그러니까 지옥에서 오는 기운을 일체 배제하며, 비록 마이크를 잡아도 이런 나라 사랑의 마음 주시는 주님께 그 공과 고마움, 영광을 온전히 돌리고, 자기는 뒤로 물러나며 자기를 부인하는, 천사들의 겸손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2024년 송년 주일, 이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에게 주님의 그런 은혜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9-30)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35:4-9)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에 대해 자기와 같은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인성만 보고 동시에 신성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고, 주님 안의 하나님과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인 것처럼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에 관한 교리 21, 이순철 역) At the present day many think of the Lord no otherwise than as of a common man like themselves, because they think solely of his human, and not at the same time of his Divine, when yet his Divine and his human cannot be separated. For the Lord is God and man, and God and man in the Lord are not two, but one person, yes, altogether one, just as soul and body are one man, (L.21)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성도들과 함께 찬송과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교회가 빛 그 자체이신 주님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고,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말씀에서는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막과 메마른 땅, 용이 사는 곳은 우리 주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다음은 작년 이맘때 국내 및 국외 정세입니다. 이 설교의 원본이 작년 성탄절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1년 후인 오늘은 국내적으로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및 초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이슈 및 각종 대규모집회, 국외적으로는 다음 달인 2025년 1월, 미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그에 따른 국제 정세의 급변 등 그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간 첨예한 대립 상황은 여전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힘없는 사람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쫓아내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복을 꾀하고,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싸움의 당사자들은 자기의 입장과 명분만 고집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늘어나 전통적인 결혼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최근에는 급기야 어느 종교의 지도자가 동성애자 부부를 축복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그러면 나라 안 사정은 어떨까요? 80년대 말에 참교육을 하겠다고 처음 교사들의 노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일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순진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북쪽의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킨 지도자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를 통해 이 나라를 빈곤에서 구한 지도자 역시 그들에게는 반역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뒤집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권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들 교사의 권위는 자기가 가르친 학생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교육계뿐 아니라 정치와 사법, 언론 등의 직업군과 산업 현장 곳곳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지고 있고, 종교계의 부패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사막이요 메마른 땅이며, 용이 사는 곳의 모습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양심적인 사람들은 사는 게 힘듭니다.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두 번 시류에 따라 눈을 질끈 감기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처음 가졌던 마음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두려움에 떠는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쁘게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이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과 지옥의 영들은 그들이 괴롭히던 선한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던 애굽의 군대가 모세가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홍해의 깊은 바다에 잠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원이며 보복입니다.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더라 31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14:26-31)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원하실까요? 그것에 대해 본문 5절로 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한편으로는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한편으로는 낡은 교회를 폐하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앞의 말씀에서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는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는 새 교회의 출현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거듭나는 것과 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새 교회는 거듭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서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우리 모두 맹인이며, 귀머거리이고 절름발이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이치를 진리로 믿고 따르는데 그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 것들에 매여 있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에 눈뜰 수 없습니다. 그건 주님에 대해, 사후의 삶에 대해, 영원히 사는 이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맹인의 상태입니다. 진리를 모르면 또 귀머거리라고 했습니다. 귀머거리라는 건 진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귀는 진리에 순종하는 의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절름발이는 무슨 뜻일까요?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삶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의 조화를 이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영적 진리를 모를 때 사람들은 세상 법이나 도덕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건 세상 사람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후 육신의 옷을 벗고 영계에 들어갈 때, 속에 감추었던 추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 걸 보더라도 진리가 없는 절름발이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진리로 맹인의 눈을 밝히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시며, 절름발이들을 사슴과 같이 뛰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기존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앞의 말씀에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새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속뜻으로는 진리와 진리에 따른 삶이 없는 황폐한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말씀에서는 또 그런 교회들을 용이 눕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승냥이’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뜻으로 용은 무슨 뜻일까요? 기존 교회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즉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하나님을 믿는 교리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부터 삶을 분리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러면 새 교회에서는 주님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한 분 주님 안에 세 본질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지만, 인간 앞에 나타나실 때는 진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실 때는 진리의 능력, 즉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면, 아들은 사랑에서 발현되는 진리이고, 성령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본질인 사랑과 진리로부터 발현되는 진리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과 온전히 결합할 수 있으며, 그때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 교회들은 신관에 있어서는 한 분 하나님을 셋으로 나누고, 신앙관에 있어서는 믿음으로부터 사랑을 떼어놓음으로써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시고, 그를 통해 주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라고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로부터 참된 진리가 샘솟듯 솟아남을 의미합니다. 물과 시내는 참된 진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교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본문 8절에는 새 교회를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는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본래 악과 거짓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진리의 능력을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파괴하는 거짓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은 신앙인을 유혹하는 불결한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오신 후에는 어떤 거짓이나 추악한 욕망도 새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 때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면 카드를 손수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카드 속 그림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썰매를 타고 눈 덮인 숲길을 달리고 숲속에 작은 교회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림 속의 교회처럼 새 교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불빛과 빛은 온 세상을 밝히는 가장 밝고 힘 있는 진리입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고 지옥을 이기신 능력의 진리로 다시 새 교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 ‘하나님의 섭리’ 33: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주님은 정욕이라고 하는 악한 사랑과 그 애정이 제거되는 만큼만 사람들과 가까이 결합하신다. 이 사랑과 애정들은 자연적 사람 안에 있으며, 사람이 자연적 사람으로부터 하는 일은 뭐든 스스로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악을 제거해야 하며, 그런 만큼 주님은 가까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그에게 결합시키신다. (이순철 역) the Lord can conjoin himself more closely to a man only as the love of evil is removed along with its affections, which are lusts. These lusts reside in the natural man. What a man does from the natural man he feels that he does of himself. For his part, therefore, a man should remove the evils of that love; so far as he does, the Lord comes nearer and conjoins himself to him. (DP.33:2)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세상 정욕을 멀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때 주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정욕들이 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올라 지배하려는 것,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 물질적인 쾌락 그 자체를 즐기는 것 등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 안으로 오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랑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탄식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지만, 세상을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럴수록 능력의 진리로 오신 주님을 믿고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을 맞아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성도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과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35:1-3, 10)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1-7)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탄생 이야기는 주님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지만, 그 내적 의미, 즉 속뜻은 많이 다릅니다. 내적 의미로 주님의 탄생은 주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내적 진리로 오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것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1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는 본래 그 기원이 된 줄리어스 씨저(Gaius Julius Caesar)의 이름입니다. 씨저는 로마 황제의 기원이 된 사람입니다. 클레오파트라로 유명한 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양자요, 조카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로마 황제가 됩니다. 신약 말씀에서는 ‘가이사’를 로마 황제를 칭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습니다.
※ 신약에 나오는 가이사들은 ① 오늘 본문의 가이사 아구스도(B.C. 27–A.D. 14) ②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디베료(A.D. 14–37, 눅3:1; 막12:14) ③ 로마에 거주하던 모든 유대인을 추방한 글라우디오(A.D. 41–54, 행17:7, 18:2) ④ 바울이 로마에 상소했을 때 가이사(A.D. 54–68, 행25:11) 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저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님 당시에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 즉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며, 바로 그가 주님께서 탄생하실 즈음에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호적을 한다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는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몇 군데 나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1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세어 보라 명령하시고요, 또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일까요?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살피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에게 선과 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들의 종류와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말씀에 나오는 인구조사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그 속뜻, 곧 영적 의미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 선과 진리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는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서 인구조사라 하면 결국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했을까요?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또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직 사람들 안에 진정한 진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시기 전 상태의 사람들 안에 있는 진리는 세상 진리입니다.
※ 여기 ‘주님이 각 사람의 내면에 오신다’는 표현을 개신교식으로 표현하면, ‘각 사람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이지 싶습니다. 뭔가 살짝 2% 부족합니다만...
이 진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이기는 하지만, 가장 낮은 차원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가이사 아구스도는 그 속뜻으로는 세상 진리나 규범, 또는 세상 법도를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참된 진리를 전혀 모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규범, 또는 말씀의 글자의 뜻으로부터 이해한 진리,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때가 가이사 아구스도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던 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때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의 영에 따라 인구조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 안에 선하고 진실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실까요? 우리 안의 선과 진리의 특성을 왜 살피실까요? 그것을 아셔야 각 사람에게 맞는 구원의 섭리를 펼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레뇨’가 아니라 ‘수리아’입니다. 수리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데, 주님 당시에는 아람이라고 불리던 곳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종 엘리에셀을 보내 아들 이삭의 짝으로 리브가를 밧단 아람이라는 곳에서 구해 온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란이라고도 하는, 이 아람에 사는 외삼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런 기록의 속뜻이 무엇일까요? 수리아 또는 아람은 선과 진리를 인식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람이 선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뜻하는 까닭은, 아람은 원래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들이 살았던 지역이며, 그러므로 아람이라는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고대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나오는 아람, 또는 시리아가 그 속뜻으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인식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시리아 반군이 대를 이어 54년간 세습하던 아주 악명높은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무슨 주님의 섭리 있으심이지 싶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선과 진리를 인식할까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내주시면, 그것을 바로 인식,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합리(合理, rational)라는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떤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떤 모양인지를 보는 능력이 합리입니다. 이성(理性)이라 해도 될까요? 다시 말하면 합리라는 의식 속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형상화됩니다. 그래서 이삭과 야곱이 아내를 아람에서 만나는 것은 합리를 통해 진리를 만나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시리아, 즉 아람에서 가장 먼저 인구조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사람의 내면을 살피시는 시기는 우리가 합리(合理)라는 능력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 전에 아시는 것과, 우리가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우리를 살피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호적을 시작했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피시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앞부분은 전반적으로 주님이 오시는 시대적 상황, 즉 한 사람의 내면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전반적 정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3절입니다.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서 고향이라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성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과 5절에는 베들레헴 동네라는 말이 나오는데, 동네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말씀에서 고향, 성읍, 동네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각 사람의 종교적 신념을 나타낸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는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는, 주님께서 각 사람을 그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을 선하다 하실까요?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리를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은 그런 사람을 선하게 여기십니다.
※ 여기 ‘자기 종교의 교리 가운데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라고 굳이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교리 가운데 보면, 몹시 악한, 누가 보아도 지옥으로 말미암은 교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교리, 곧 거기 녹아있는 주님의 신성은 선하고 진실합니다.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녹아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종교에 주님의 신성이 녹아져 들어가게 하셨고, 그러므로 자기 종교에 녹아져 있는 주님의 신성에 생전에 건강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거기서 모두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김은경 역) 321번 글 인용입니다.
나는 많은 경우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 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 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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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절과 5절에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대해 말합니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와,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호적 하러 올라가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 속뜻으로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 족속은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 족속은 언제부터 주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었을까요? 아람 시절부터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람, 또는 수리아(시리아)의 상태는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상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래전부터 시작된 길고 긴 과정을 거쳐 오늘 그 자손 요셉은 지금 다윗의 집 족속, 즉 주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위 ‘아람 시절’이란 말은 요셉이 아람, 곧 수리아에서 실제 살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적 의미, 곧 우리 모두 누구나 다 개인 신앙 발전 과정에서 수리아 시절, 아람 시절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 진리와 선을 깨닫는 시기, 우리 안의 합리와 이성을 통해 진리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는 말이지요.
5절에서는 요셉 혼자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다윗의 동네를 향하는데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경우처럼 그 내면에 교회가 존재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교회를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선과 진리가 바로 요셉과 마리아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만 하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는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아직 교회가 세워졌다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주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고, 마침내 주님께서 내적 진리로 그들에게 임재하시기까지 걸리는 기나긴 여정을 나타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진리를 알기까지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녔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안 다음에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말할 수 있게 된 건 또 언제부터입니까? 대개는 내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면서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직 그 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니 주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이 주님을 알고,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길입니까? 오늘 말씀에서는 단순히 ‘요셉이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올라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실 아주 길고 험난한 여정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길을 처음 가기 시작할 때,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냥 하루 이틀 걸어가면 되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을 기를 쓰고 가다 보면 언젠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의 시작인 갈릴리 나사렛 동네는 주님을 알기 전 이방인의 교리 가운데 있었던 상태이고요, 유대 땅에 들어온 것은 주님의 교회에 소속, 기적적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이 탄생하시는 곳 베들레헴에 당도했습니다. 6절입니다.
6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으로 오실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가 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7절에서는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첫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 가운데로 내적 진리이신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적 진리이신 것은, 아기가 강보에 싸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데요, 강보는 그 영적 의미로는 가장 순수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의 진리는 사랑이 없는 진리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교리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는 지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사랑을 동반한 내적 진리로 오셨습니다. 그 주님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가장 순수한 진리, 그 안에 사랑이 있는 진리가 우리 내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 합니다. 구유는 말의 먹이를 담는 통입니다. 건초 같은 걸 담는 통입니다. 그리고 말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유는 말씀에서 얻는 진리, 또는 교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구유의 먹이를 먹고 사는 것처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이해력은 말씀의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자리기 때문에입니다. 그래서 구유는 말씀의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가 구유에 누웠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또는 교리의 지식 안으로 오시는 겁니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오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을 읽으면서 교리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관의 속뜻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여관이 없다는 것은 유대교회 어디에도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모두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아주 오래전부터, 즉 주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시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도 나름의 종교가 있고, 신념이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종교와 그의 진리를 존중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것을 요셉이 유대 땅으로 오기 전 갈릴리에 살던 시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섭리를 펼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땅에서 유대 땅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가장 순수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가장 순수한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그 속에 선이 있는 진리이며, 능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진리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믿음 가운데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진정한 진리를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삶을 실제로 산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카톨릭에 보면 사람 이름 앞에 ‘성’(聖)을 붙여 성인이다, 성자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성’, 즉 ‘거룩하다’는 표현은 오직 주님한테만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 아무개, 성자 아무개 할 때의 그 취지와 의도는 그 사람을 주님과 동등으로 여기고자 함이 아니라 그가 그만큼 주님을 본받아 살았음을 존중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 점을 간과하여 부주의하게 그 성인을 거의 숭배까지 하는 사람들과 그런 경향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본래 취지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 앞에 ‘성’을 쓴다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그렇게 못 살지만 그렇게 살다 간 그 사람, 즉 그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여 주님이 그와 함께하신 그 모든 기록을 읽고,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 용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며, 그래서 저는 여러분더러 가급적 성인전을 읽으시라 권하는 편입니다.
그전에는 어떻습니까?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라 안팍으로 어수선한 이때, 주님의 그런 은혜가 성탄을 맞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5:2)
주님은 스베덴보리(1688-1772, 스웨덴) 생전에 창세기, 출애굽기를 친히 풀어 주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당시 관례처럼 자신의 글에 번호들을 매겼는데, 창세기 50장, 출애굽기 40장까지 글 번호가 10,837번까지 갔으며, 걸린 기간은 1749년에서 1756년이고, 라틴어로 기록했습니다. 이 저작의 이름은 ‘Arcana Coelestia’, 역시 라틴어이며, 천계비의(天界秘義)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약어로는 AC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 주석을 쓸 때, 곁에 주님이 계셔서 딕테이트하시면, 자기는 그저 받아적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오늘날의 프린터 역할만 했다는 말이지요. 그는 성경 외에 그 어떤 세상 책도 참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해 전부터 스베덴보리의 여러 Writings를 작업 중인데, 특별히 그 메인은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입니다. 위 라틴 제목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창세기는 다분히 그 기록된 겉 글자의 뜻인데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천지를 육 일 만에 창조하셨고, 인류 첫 번째 인간은 아담이다라는 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체가 이렇게 읽지요.
그러나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어 보시면 단번에 느끼시겠지만, 우리가 알던 창세기, 출애굽기하고는 많이, 아니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은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을 여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는, 그리고 아담은 인류 최초의 교회로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닫힌 마음으로 읽으시면, 무척 당황하시거나 화가 나실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이‘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로 읽는 걸 ‘속뜻으로 읽는다’ 하고, 기존처럼 읽는 걸 ‘겉뜻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되어 있는 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하나 되어 살듯, 말씀 역시 속뜻과 겉뜻이 하나 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건 어느 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 즉 육은 친숙, 익숙하지만, 자신의 영은 무척 낯설듯, 우리 중에 아직 자기 영을 본 사람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겉뜻이라는 그릇 안에 속뜻이라는 내용이 담긴 것이지요!
그러니까, 도저히 속뜻으로는 못 읽겠다, 너무 어렵고, 거부감이 심하게 든다 하시면, 겉뜻으로만 읽으며, 신앙생활 하시면 됩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겉뜻이라는 그릇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속 사람이 천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뜻이 와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겉 글자에 담아놓으신 주님의 신성을 실천,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번역, 속뜻으로 주님 말씀 읽는 걸 소개하는 이유는, 그 유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며, 이것이 천국 천사들이 말씀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이 속뜻으로 푼 창세기가 이해가 되시고, 와닿으시면 정말 복 받으신 겁니다. 그런 분이 만 명 중 한 명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친히 풀어 주셨다는 사실에 닻을 내리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 곧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하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의 도우심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