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주님이 직접 부르셨을까?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눅5:27-39)

 

 

오늘날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이 기독교계에 만연하고, 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미혹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자연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사랑과 부에 대한 사랑은 자연적인 사람 고유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그런 사랑을 인정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사람은 악과의 싸움을 통해서만 개혁되고, 개혁이 되어야 그것을 알 수 있다. 신앙으로 개혁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악과 싸우기 전에는 사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존재할 수 없다. (AE.1189:3, 이순철 역)

 

※ AE(Apocalypse Explained, 계시록 해설) 위 1189번 글 3번 항에 대한 Ager 영역 및 Whitehead 개정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s the love of rule and the love of riches prevail universally in the Christian world, and these loves at this day are so deeply rooted that it is not known that they in any wise lead astray, it is important that their quality should be set forth. They lead every man astray who does not shun evils because they are sins; for he who does not thus shun evils does not fear God, and therefore remains natural. And as the love of ruling and the love of riches are the natural man’s own loves, he does not see with any interior acknowledgment what the quality of those loves is in him. This he does not see unless he is reformed, and he can be reformed only by combat against evils. It is believed that he can be reformed by faith; but there can be no faith of God in man until he fights against evils. (AE.1189:3, Ager 역)

 

이는 계시록 18장 23절,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에 관한 주석 중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And the voice of bridegroom and of bride shall not be heard in thee any more)에 대한 내용입니다. //

 

 

오늘 본문 27, 8절입니다.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 가버나움 세관 앞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레위라는 이름의 세리가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주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게 다가가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그러자 놀랍게도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여기 레위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태입니다. 레위는 그렇게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 레위는 그들의 원수인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세리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힘없는 동족,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도 보면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부역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순경이며 관공서 및 은행이며... 등, 물론 그들이 다 악인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거의 대부분 정말 지독한 악인들이었습니다. 어떨 땐 본토 일본 사람들보다도 더 말이지요. 참고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레위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이유는 레위라는 이름과 세리라는 직업의 내적 의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속뜻으로, ‘레위’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세리’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보면,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며,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모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교회 밖의 이방인 가운데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을 택해 제자로 삼으신 걸 의미합니다. 여기 교회 밖의 사람들이란, 마지막 때 타락한 교회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새 교회에서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즉 자신의 직업에 관한 일들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근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하찮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 자체를 위해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말입니다.

 

※ 자신의 직업과 관련, 물론 선한 직업이겠지요, 그리고 직업을 쓰임새(use)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생각, 이 쓰임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어떤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생각, 또 이 쓰임, 이 직업과 관련된 모든 것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으며, 관련된 사람들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지 싶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레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레위에게 다가가셔서 ‘나를 따르라’ 하셨고, 레위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도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그리고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 과거 삼십 대 중반에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주님께 보답하고자 교회 직원의 삶을 선택했던 저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중요한 결정에 비해 허점투성이였던 그 과정에도 불구, 저의 그런 면을 보시고, 주님은 오늘날 이렇게 스베덴보리를 알게 하시고, 그의 일을 이어받게 하신 건 아닐까 깊은 생각에 잠겨 봅니다.

 

29절입니다.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주님의 제자가 된 레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는 이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그러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문을 여는 사람은 바로 레위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의 집에서 열린 잔치는, 그 속뜻으로는 레위가 베푼 잔치가 아니고요, 주님을 향해 문을 여는 자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여 그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진리와 선을 자신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0절입니다.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구약 규례에서는 부정한 사람이나 죄인들이 제사의 예물 먹는 것을 금했습니다.

 

20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21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무슨 물건을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7:20-21)

 

이 규례의 의미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들은 진리와 선을 소유하면 안 된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악한 사람들이 진리와 선을 가지게 되면 진리와 선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신성모독이며, 그래서 이런 것은 당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신성모독’(神性冒瀆, sacrilege)에 관해 전에 제가 정리한 글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성정상, 그들이 깨닫고 알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 모독의 길을 걸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두려움은 그것이 사람의 영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덕지덕지 붙어 있기만 한 악은 나중에 주님이 떼어내시면 되지만, 영 자체가 변질되어 더럽혀지면, 그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노아의 홍수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멸망 때, 사실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이들, 곧 네피림을 포함한 이들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은 지금도 지옥 저 한쪽 구석에서 지옥의 다른 영들을 해치지 못하게 따로 격리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신성모독의 폐해는 이토록 정말 지독한 것입니다. //

 

이 규례 속에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는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는 인간의 전통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그 전통 지킬 것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께서 세리와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그토록 미워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방을 들으신 주님께서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말씀에서 ‘의사’는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질병으로 상징되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병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자 스스로 자기의 병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건강한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것입니다.

 

※ 이들에 대한 또 다른 주님 말씀이 하나 생각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

 

주님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다시 주님께 말합니다. 33절입니다.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조금 전에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부정한 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식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어요. 금식의 전통은,

 

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30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레16:29-30)

 

하신 규례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렇게 금식은 회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볼 때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 전통을 전혀 지키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내적 의미로 ‘금식’(禁食)은 자기에게 진리와 선이 없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진리를 많이 알고 있고, 또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시험받을 때입니다. 시험 가운데 ‘나에게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구나, 진리와 선이 나한테는 하나도 없구나’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시험 중에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심하게 다투거나, 또 악한 유혹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오, 주님! 저에게는 진리와 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며 주님께 매달립니다. 바로 그것이 금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진정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기 위한 그런 금식이었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보다 스스로 진실하고 선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6)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1-12)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신랑’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 집 손님들’은 회개를 통해 주님과 하나 되는 사람, 즉 주님과 결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과정에서 이미 자신에게 진리와 선은 없고, 대신 악과 거짓만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백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이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을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하셨던 것입니다. 혼인 잔치는 주님이 주시는 진리와 선을 먹고 마시는 곳이며, 그것을 통해 주님과 결혼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비난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그날’은 타락한 교회가 문을 닫을 때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는’ 것은 그때 교회가 주님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있어도 주인이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 빈껍데기뿐인 교회만 있는 날이 그날이며, 신랑을 빼앗기는 때입니다. 주님은 그동안 교회들이 아무리 주님을 배반하더라도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스스로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과의 통로를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마지막 때 신랑을 빼앗기는 모습입니다.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 역시 타락한 모든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새 옷’은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고요, ‘낡은 옷’은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들을 나타냅니다. 포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로운 교회의 진리를 나타내며, ‘낡은 가죽 부대’는 이전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유대교회의 장로의 전통이라던가,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신앙만의 교리, 즉 ‘오직 믿음’의 교리가 바로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그러한 낡은 가죽 부대로는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새 진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설령 받는다 하더라도 이전의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고, 새로운 진리도 쓸데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교회에 오신 분들은 대개 이전 교회의 잘못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셨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교리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가죽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전의 것을 여전히 가진 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면 결국 둘 다 못쓰게 됩니다. 그런 진리를 가지고는 더 이상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이 타락한 교회의 진리를 고수하고 새로운 진리를 배척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묵은 포도주’는 이전 교회의 낡은 진리들이고요, ‘새 포도주’는 새로운 진리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쌓아 놓은 진리 체계 허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거듭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타락한 교회가 신랑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라 하시는 말씀에서 주님의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집니다.

 

※ 저 역시, 아니 저는 정말 묵은 포도주 버리는 걸 지독하게도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 읽는 걸 무슨 종교적 금서(禁書) 읽는 걸로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를 아시고 평범하지 않은 어떤 특별한 접근, 곧 먼저 영계에 대한 입문으로 정원 목사의 글들을 읽게 하신 후, 이어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서사라 목사 등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게 하신 후, 강문호 목사님을 통해 수도원, 수도사의 세계로 이끄셨고, 공용복 선생의 시흥영성수련원 등을 알게 하신 후, 그곳을 통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 특히 침례교에서 바로 스베덴보리로 점프하는 건 저 같은 사람한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주님은 이렇게 준비의 준비의 준비를 통해 차근차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네비게이토식 제자훈련이 참 신앙인 줄 알았고, 그게 전부인 줄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즈음 저는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이 매우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식구들 한분 한분의 모습에서 교회의 성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이 성장은 아닙니다. 저는 성도들의 내면에 다양한 보석들이 있고, 그것이 점점 더 아름답게 빛을 내고 있음을 매일 봅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빛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회개와 겸손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라고도 부르는 레위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죄인이었습니다. 조국이 아니라 로마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었고요, 대부분 직위를 이용, 동족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늘 회개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레위를 기억하시고 마침내 그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런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하고 음식을 함께 드신다 비난하고, 금식을 하지 않는다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회개의 기회를 계속해서 놓쳤습니다. 급기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끝내 주님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며, 사후에 영계에 가서야 자기에게 선과 진리가 없음을 깨닫고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세상에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세리와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가 있고요, 회개하는 자와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우리 속에도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의 말을 듣지 말고, 늘 겸손한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자의 말을 듣지 않고, 늘 회개하는 자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같이 낡은 진리들을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흠 없는 진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새 교회 모든 성도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는 영광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사61:10)

 

아멘

 

원본

2017-12-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3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29. 2023-03-30(D5)-매일예배(2446, 눅5,27-39), '레위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주님이 직접 부르셨을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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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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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

 

 

7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눅3:7-14)

 

물로 씻는 것과 세례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에게서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러한 것을 표상하고 뜻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에서 마치 정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유대 교회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통해 천국과 결합했을 때, 천국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 거하셨다. (AE.724:8, 이순철 역)

 

※ 이 AE(Apocalypse Explained) 724:8번 글에 대한 Ager 영역본은 아래와 같고,

 

The washing and baptizing itself did not indeed purify them from falsities and evils, but only represented and thence signified purification from them; nevertheless, this was received in heaven as if they were themselves purified. It was thus that heaven was conjoined to the people of that church by means of the baptism of John; and when heaven was thus conjoined to them, the Lord, who was the God of heaven, could manifest Himself to them there, teach them, and abide among them... (AE.724:8, Ager 역)

 

이는 계시록 12장 5절의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남자라’에 대한 주석 일부입니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요단강 근처에서 요한이 회개의 세례, 침례를 가르칠 때,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로 왔습니다.

 

※ 신약 성서 원어인 헬라어 원전에 의하면 ‘침례’(浸禮, baptism, 헬, βἀπτισμα)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한글 성경에 ‘세례’(洗禮)가 된 것은, 광복 전 남한에서 성경 한글화 작업으로 각 교단이 모였을 때, 침례교만 빠졌기 때문인데, 침례교만 빠진 건 침례교 대표가 연락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교단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 큰 도시 위주로 움직인 반면, 침례교만 유독 내륙 오지 선교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래서인지 일본은 그냥 원어를 그대로 표기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교회의 낡은 교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진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새로운 말씀을 의미하고, ‘침례’는 말씀을 통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의 개혁이며, 동시에 신앙의 전향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교회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진리가 신선해서, 또 어떤 이는 요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도 있었고,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만 순종할 줄 아는 단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7요한이 침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비밀’ 4533번에는 천국에서는 사기꾼들이나 위선자들이 천사들 앞에 나타날 때 독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 AC(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4533번 글에 대한 Clowes 영역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내용을 조금 더 추가했습니다.

 

But when the same are looked at by the angels of heaven, that luminosity is instantly dissipated, and they appear with totally different faces, each according to his genius. Some are dusky and black like devils; some have ghastly faces like that of a corpse; some have almost no face at all, and instead of a face there is a mass of hair; some are like grates of teeth; some like skeletons; and what was still more strange, some are like monsters, the deceitful are like serpents, and the most deceitful are like vipers, while others appear differently. (AC.4533, Clowes 역)

 

이는 창세기 34장 주석 클로징 글인 큰 사람의 눈과 빛에 관한 상응 관련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기 ‘큰 사람’이라는 표현은 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천국 전체가 한 사람 모습이라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영어로는 ‘The Grand Man’이라고 합니다. //

 

그러니까 요한이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 무리 전체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위선자들(the most deceitful)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다시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노하시거나 사람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진노’란 주님이 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심을 말합니다. 위선자와 거짓말쟁이는 마치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혐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후에 육신의 옷을 벗게 되면 진리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피할 수 없다는 진노는 주님의 진노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분노이며 적개심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여기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앞의 ‘아브라함’은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오만함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상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세상만 믿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즉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 우상을 믿었던 아브라함, 즉 아브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돌들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돌들’은 감각의 진리를 뜻합니다.

 

감각의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눈이나 코, 입, 손과 발 같은 감각으로 이해하는 진리가 감각 진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은 진리를 이해하는 수단으로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떻습니까? 태양은 그대로 있고 지구가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을 통해 얻는 정보가 모두 진리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감각의 진리를 믿을까요? 주님보다 자신을 더 믿고, 주님이 주시는 내적 기쁨보다 감각이 주는 쾌감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29:13)라고 한탄하셨고, 요한 역시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말한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동안의 위선과 악행을 버리고, 진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9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말씀에서는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나무’는 사람의 지성, 즉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자연계에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사람을 종종 나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나무의 뿌리에 도끼가 놓였다고 합니다. ‘도끼’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는 위선자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뿌리에 그들의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모두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없으니 당연히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들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라 하고,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마다 찍혀’는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들이 결국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모두 잃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불에 던져지리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설명할 것도 없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지옥을 불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곳이 유황불이 펄펄 끓는 곳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곳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탐욕의 불길이 그렇게 뜨겁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순수하지 않은 어떤 것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고, 그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옥의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욕망의 열기가 한도 끝도 없이 발산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씀에서는 유황불로 표현합니다.

 

※ 다음은 이 ‘지옥불’(infernal fire) 관련, ‘천국과 지옥’ 59장, ‘무엇이 지옥 불이고 이를 가는 것인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참고하세요.

 

‘지옥의 불’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을 행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고, 이전 장에서 밝힌 것처럼,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욕망이 그러하므로 지옥이 열리면, 큰 화재가 났을 때와 같은 연기와 불이 거기 보인다. 자기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탁한 불이, 세상 사랑이 우세한 지옥에서는 불꽃을 내는 불이 보인다. 그러나 지옥이 닫히면, 이 불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연기가 응집한 것 같은 어두움이 보인다. 그래도 그 불은 여전히 안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거기서 뿜어나오는 열기로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화재 뒤의 폐허에서 나는 열기 같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열된 용광로에서 나는 열기 같고, 어떤 곳에서는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는 열기와 같다. 이 열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그의 욕망을 자극하고, 악한 사람 안에서는 미움과 복수심을, 병약자에게는 광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위에 말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불이고, 열이다. 그들은 몸 안에 있을 때도 영이 그런 지옥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불은 하나의 외관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자기가 탄다는 느낌이 없고, 단지 세상에서와 같은 체온을 느낄 뿐이다. 이런 외관상의 불은 상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불에 상응한다. 그리고 영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상응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다. (HH.571) //

 

10절입니다.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요한에게 묻는 사람들은 적어도 말씀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으려고 하는 신앙인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독사의 자식’이라 불리는 위선자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저들 독사의 자식들과는 달리 비록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그래도 진리에 순종하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자기 소유를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속뜻으로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은 진리를 말합니다. 왜 옷이 진리를 의미하느냐 하면, 진리는 선의 드러남, 즉 선의 겉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자체로는 보이지 않고 진리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진리를 옷으로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먹을 것’은 선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양식은 곧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옷 두 벌 있는’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자아에서 나오는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진실한 것과 자아에서 오는 거짓된 것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옷 두 벌 있는 자’라는 상태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상태가 이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중에서 인간의 것을 버리라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인간의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장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전도를 위해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진리라야 능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선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세리를 거의 매춘을 하는 사람 정도로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12절, 13절 말씀입니다.

 

12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성(聖) 문서에서는 ‘세리’가 무슨 뜻인지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고, 그러므로 진리와 선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 진리와 선에 대한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요한의 문답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진리를 배울 때,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대로 받고, 그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영적 능력만큼 진리도 주시고, 선도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자기의 영적 역량보다 더 많은 진리를 받을 때, 그것을 더럽히거나 남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을 남용한다는 것은, 진리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스스로 높아지려 하거나, 또는 물질적 이득을 보기 위해 진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을 남용하고 더럽히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 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진리를 욕심낼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마음대로 진리를 추론, 그렇게 해서 왜곡합니다. 주님은 ‘그러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세리들에게 하는 말은 진리를 배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권고입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세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14절입니다.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여기서 군인은 누구입니까? 군인은 영적인 군인을 말합니다. 영적인 ‘군인’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순한 욕망과 싸우고, 진리에 따르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는 사람이 주님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군인은 신앙인들의 삶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의 지식을 배우는 측면이고, 후자는 배운 것을 실천하는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세리와 군인은 모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는 지옥의 군대로 변합니다. 그것은 유대 교회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지옥의 군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는 한글 성경 번역이구요, 영어 성경에는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폭행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사람’은 진리를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폭행하지 말라’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더럽히는 것일까요? 진리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진리에 위배 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추론하고 왜곡하는 것 또한 진리를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군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열심히 실천하다 보면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말씀을 마음대로 추론하여 이른바 장로의 전통이라고 하는 인간의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이 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를 할 때, 손을 씻지 않는다 타박을 하고,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먹었다 흠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며 나무라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들이 모두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며, ‘사람을 폭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아까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전통을 어겼다며 주님의 제자들과 주님을 비난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거짓 진리를 가지고 참된 진리를 비방하는 행동들입니다. 유대 교회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이는 것을 말씀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때리고, 침을 뱉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주님 당시에만 있었던 일들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흠집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표상하는 요한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들이 지옥의 편에 서서 진리를 비방하고 욕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말했습니다. 주님의 군사들이 받는 급료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군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할 때, 주님은 급료를 주세요. 그 ‘급료’란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와 선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진리와 선을 사랑합니까? 진리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일상의 삶 가운데로 끌어내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아직 진리에 대한 애정은 충분치 않지만, 주님의 군사로서 진리를 위해 싸울 때, 주님께서는 급료를 주세요. 주님의 군대에 합당한 급료를 주십니다. 그 급료가 바로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고 명예를 원하지만, 우리와 같이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진리와 선에 대한 애정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급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십니다. 족하라, 즉 만족하라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그것을 기뻐하고 다른 세속의 것들을 바라지 말라는 뜻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도 부족하지 않게 주십니다. 다만 세상의 것들을 목적으로 삼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온 것처럼, 오늘날에도 새 교회 진리를 혼자 배우거나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스스로 진리를 안다 자부하면서도 진리를 따라 살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내적으로 보면 위선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시고, 또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경고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보다 자기의 지성을 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도 ‘두 벌 옷을 갖지 말라’ 주의를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이나 애정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사랑만 가지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아의 말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기적인 욕심에 휘둘리게 되고,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어느 만큼은 위선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위선을 벗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된 기독교 784항에서는 ‘거짓이 있는 곳에 참된 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거짓의 뿌리가 뽑혀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목회자로부터 시작해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일어나야 한다’ (이순철 역)고 합니다.

 

※ TCR(True Christian Religion, 참된 기독교) 784번 글에 대한 영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For where falsities have already been implanted what is new cannot enter until the falsities have been rooted out, and this will take place with the clergy, and so with the laity; (TCR.784, Ager 역)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교회의 낡은 가르침, 교회의 낡은 습관들이 있다면 그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진리가 온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2장 22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가졌던 낡은 습관들을 매일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 교회가 세워집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 모든 가족과, 또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62:11)

 

아멘

 

원본

2017-03-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3-17(D6)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017. 2023-03-17(D6)-매일예배(2434, 눅3,7-14), '침례(세례) 요한의 메시지'.pdf
0.52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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