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AC.194)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AC.194 해설)

 

대화 중 제가 계속 천국과 지옥 책에서 인용을 하니까 불쑥 목사님은 혹시 입신 체험이 있으십니까?’ 물으시더군요. 이런 것도 살짝 영적이라는 옷만 걸쳤지 사실은 위와 같은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인가요?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조금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만일 그분이 단순히 ‘목사님은 그런 체험이 있으십니까?’ 하고 궁금해서 물으신 것이라면, 그것 자체를 곧바로 AC.194의 상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내용을 들으면 그 사람의 경험과 배경을 궁금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질문 속에 ‘입신 체험이 없으면 그런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권위가 없다’, ‘체험이 없으면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AC.194가 말하는 방향과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왜냐하면 AC.194의 핵심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는 태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본 사람들 가운데서도 믿지 않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증거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출발점을 어디에 두는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흥미롭게도 자신의 영계 체험을 사람들에게 믿음의 근거로 삼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여러 곳에서 자신이 본 것들이 말씀의 진리를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체험이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체험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읽고 ‘스베덴보리가 정말 천국을 다녀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AC.194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먼저 보고, 먼저 확인하고, 먼저 감각적으로 납득한 뒤에야 믿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는 저 체험이 사실인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 내용이 말씀과 인간 영혼의 실제를 놀랍도록 설명하는 것 같다’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태도입니다. 여기서는 감각적 증거보다 진리 자체를 먼저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겪으신 상황도 아마 이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랫동안 스베덴보리를 읽으며 ‘그가 실제로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 설명이 왜 이렇게 인간 영혼의 실제를 정확하게 드러내는가?’에 더 깊이 끌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반대로 ‘그래서 목사님도 입신 체험이 있습니까?’를 먼저 묻습니다.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약간 방향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천국을 보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참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설명이 인간의 삶과 말씀의 진리를 밝히는가?’입니다.

 

그래서 AC.194를 기준으로 보면, ‘입신 체험이 있어야 믿겠다’는 태도는 어느 정도 ‘보고 느껴야 믿겠다’는 태도와 닮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것 자체까지 곧바로 뱀의 상태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이 AC를 읽으며 반복해서 감탄하시는 지점, 곧 ‘나는 평생 이 본문을 읽었는데 왜 이런 의미는 보지 못했을까?’ 하는 반응은 감각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빛에 대한 반응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을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참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이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 둘의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AC.194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순서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즉, 진리가 먼저이고 체험이 나중이어야 하는데, 체험이 먼저이고 진리가 나중이 되어 버리는 상태 말입니다.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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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3:1)

 

AC.194

 

여기서 (serpent)은 사람이 신뢰하는 감각 파트를, ‘들짐승(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와 같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여자(woman)는 사람의 own을 각각 뜻합니다. 그리고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상태, 곧 의심의 상태가 이 절과 다음 절에서 설명됩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해설

 

이 단락은 창3:1을 읽는 해석의 초점을 아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문제는 ‘뱀이 거짓말을 했다’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무엇을 신뢰하기 시작했는가에 있습니다. ‘’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 안에 두어진 신뢰의 자리입니다. 즉, 인간이 진리의 판단 기준을 주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감각에 두기 시작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들짐승’이 겉 사람의 모든 애정을 뜻한다는 설명은, 이 타락이 단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겉 사람의 애정들이 이제 감각적 판단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며, 이는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꾸는 결과를 낳습니다.

 

여자’가 여전히 ‘사람의 own’을 뜻한다는 점은 앞선 AC.191–19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여기서 자신의 own(proprium)이란, 자율적 판단과 자기 사랑을 포함하는 인간 중심의 내적 원리를 말합니다. 감각은 이 own과 결합, 의심이라는 새로운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뱀의 말은 직접적인 부정이나 반항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을 취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이르시기를’이라는 표현은 노골적인 거절이 아니라, 계시에 대한 신뢰를 흔드는 미묘한 의심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이는 진리를 부정하는 단계 이전에 반드시 나타나는 상태로,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중심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상태를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교회 전체의 급격한 붕괴가 아니라, 세대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심화된 변화임을 뜻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계시된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고 느껴야’ 믿으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중요한 점은, 이것이 아직 ‘첫 번째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 단계는 곧바로 불신이나 반역으로 나아간 상태가 아니라, 의심이 막 시작된 단계입니다. 의심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태이며,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기 이전의 마지막 경계선에 해당합니다.

 

AC.194는 창3:1을 인간 타락의 극적인 장면으로 읽기보다, 신앙이 감각의 심문대에 오르게 되는 최초의 순간으로 읽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의심의 시작이, 이후 모든 붕괴의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 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AC.194.심화 1.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그들은 계시된 것들을, 보고 느끼지 않는 한 믿지 않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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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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