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0.심화

 

5.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과 현대의 일반적 해석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홍수’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영적 의미에 둡니다. 그에게 홍수는 무엇보다도 태고교회 말기의 광적인 욕망들과 확신들(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의 범람을 뜻합니다. AC 전반을 읽어보면, 그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단순한 자연재해의 기록으로 해설하지 않고, 교회의 상태와 인간 내면의 변화를 묘사하는 말씀으로 해설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홍수는 없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곳에서 고대인들 사이에 실제 홍수 전승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듯한 표현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지구 전체가 몇 미터 물에 잠겼는가’가 아니라,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이런 쪽에 있습니다. ‘설령 실제 물의 재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왜 주님은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그 답은 교회의 멸망과 보존’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독자들 사이에서도 약간 견해가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큰 지역적 홍수가 있었고, 그것이 말씀에서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 여부와 상관없이 말씀의 본질은 영적 의미에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AC의 흐름만 놓고 보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물 이야기’를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수백 개의 글에 걸쳐 설명하는 것은 물의 높이나 방주의 크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붕괴와 노아 교회의 보존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적 관점에서 가장 안전한 표현은 이럴 것 같습니다.

 

홍수에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핵심은 물의 재앙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구원 섭리이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AC를 따라오신 경험으로 보셔도,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11장을 읽을 때, 독자의 시선을 역사적 사건보다 영적 실재 쪽으로 계속 돌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질문은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보다 홍수는 내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입니다.

 

다만 실제로도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예/아니오로 답해야 한다면, 스베덴보리는 실제 홍수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말씀의 본질적 의미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쪽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AC.200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물의 재앙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종말과 그 이후 인류 구조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AC.200, 심화 4, ‘홍수’(the flood)

AC.200.심화 4. ‘홍수’(the flood) 홍수 the flood (AC.200)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홍수’(the flood)는 단순히 지구 전체를 덮은 물의 재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 문자에는 물로 세상이 덮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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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수(the flood)

 

홍수 the flood (AC.200)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홍수(the flood)는 단순히 지구 전체를 덮은 물의 재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 문자에는 물로 세상이 덮이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태고교회 말기의 영적 상태, 곧 인간이 진리와 선을 완전히 뒤섞어 버린 결과 일어난 영적 파멸을 의미합니다.

 

특히 AC에서는 홍수를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광적인 욕망들과 확신들’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욕망(cupidities)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구들이고, 확신(persuasions)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신념들입니다. 태고교회 말기 사람들은 단순히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악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내면은 마치 범람하는 물에 잠기듯 거짓과 악으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 의미의 홍수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홍수를 물보다도 범람’이라는 상태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종종 진리를 의미하지만, 반대로 거짓도 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홍수의 물은 영혼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거짓된 생각들과 왜곡된 확신들을 상징합니다. 그것들이 너무 많아져 더 이상 선과 진리가 숨 쉴 공간이 없게 된 상태가 바로 홍수입니다.

 

AC.200의 문맥에서는 특별히 홍수가 인간 구조의 전환점으로 등장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직접 지각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각이 자기 own과 결합되면서 엄청난 영적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인류 전체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인간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홍수 이후의 인간입니다. 이제 사람은 직접 지각하는 대신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양심을 통해 인도받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홍수는 단순한 심판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태고교회의 종말이면서 고대교회의 출발입니다. 천적 인간의 시대가 끝나고, 영적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경계선입니다.

 

또한 홍수는 역사 속 한 번의 사건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개인의 삶에서도 홍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혀 더 이상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때, 그의 내면에도 일종의 홍수가 발생합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그 안에 남겨 두신 리메인스를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될 때, 그것은 노아가 방주를 통해 보존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AC.200 홍수’를 읽을 때는 단순히 노아 시대의 대홍수’라고 생각하기보다, ‘태고교회 말기의 영적 붕괴’, ‘악한 욕망과 거짓된 확신의 범람’, 그리고 인류를 보존하기 위한 주님의 구조적 개입’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에게 홍수는 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재난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 재난 속에서도 인류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AC.200에서 홍수는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은 영적 전환점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AC.200, 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AC.200.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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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깊은 지각을 가진 사람이 더 안전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믿어야 한다’, ‘배워야 한다’, ‘연구해야 한다’의 상태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여 알게 되는 것을 그들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훨씬 위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르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거스르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어떤 사람이 주님의 섭리를 의심한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주님의 섭리를 거의 보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내적으로 지각하면서도 자기 own을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배반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의식적인 반전(反轉)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말하는 ‘선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거스르는 상태’의 위험성입니다. 그는 이런 상태를 영적 세계에서 가장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 가운데 하나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가 악과 결합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인간은 그렇게 높은 지각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따라서 넘어질 수도 있고, 오해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한동안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회복될 여지도 훨씬 많습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상태까지는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배신하는 것과, 모든 사랑을 다 받고 자란 성인이 의식적으로 부모를 배신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후자의 배신이 훨씬 깊고 심각한 이유는, 무엇을 배반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후 인간의 상태를 단순한 하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분명 태고교회보다 낮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 보호받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전만큼 높이 오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이전만큼 깊이 추락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능력의 감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더 이상 태고교회 수준의 지각을 갖지 못하지만, 그 대신 그 지각을 완전히 뒤집어 멸망에 이르는 위험에서도 어느 정도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AC.200의 맥락에서 보면, 홍수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더 낮아졌지만 동시에 더 안전해졌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어떤 것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보존하기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상태로 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AC.200이 보여 주는 매우 깊은 섭리의 한 모습입니다.

 

 

 

AC.200, 심화 4, ‘홍수’(the flood)

AC.200.심화 4. ‘홍수’(the flood) 홍수 the flood (AC.200)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홍수’(the flood)는 단순히 지구 전체를 덮은 물의 재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 문자에는 물로 세상이 덮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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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AC.200.심화 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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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상태 변화’, 주님의 섭리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AC.2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화는 단순한 타락이나 퇴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가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허용된 섭리적 전환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태고교회의 방식, 곧 선에서 곧바로 진리를 보는 방식이 그 상태 그대로 타락과 결합되었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로부터 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인류를 보존하셨습니다. (AC.200 해설)

 

 

이 대목은 AC.200 전체뿐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교회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보통 우리는 태고교회에서 고대교회로, 천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의 변화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타락’, ‘쇠퇴’, ‘퇴보’라는 관점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는 맞습니다.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지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즉시 아는 상태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 변화는 단지 인간이 타락한 결과만이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섭리 가운데 허용되고 준비된 변화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매우 깊이 결합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악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거스르는 사람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래서 홍수 이전 인류의 비극은 단순히 악해졌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각과 깊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own과 결합시켰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홍수 전 인류의 멸망입니다. AC.310 이하에서 설명되는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도 바로 그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악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왜곡한 상태 말입니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시는 섭리를 행하셨습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선에서 진리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존재가 됩니다. 즉,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나중이었던 구조에서, 신앙이 먼저 주어지고, 사랑이 뒤따르는 구조로 바뀌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낮아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를 위한 보호 장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천천히 배우고, 조금씩 이해하고, 점진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전보다 덜 높아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안전해졌습니다.

 

그래서 AC.200은 인간 역사 전체를 보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쇠퇴를 단순히 방치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쇠퇴 속에서도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구조를 마련하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홍수 이후 인류의 생존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목사님께서 자주 감탄하시는 주님의 ‘점진성’과 ‘보호하시는 섭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주님은 인간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지 않으실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종종 가장 높은 상태를 즉시 회복시키기보다, 현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 안에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마치 중병을 앓은 사람이 예전의 건강을 당장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먼저 생명을 보존하고, 서서히 회복하도록 치료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고교회의 상실은 분명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손실 속에서도 인류 전체가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변화는 홍수 이후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것입니다’라는 한 문장은 단순한 역사 설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보다 더 크신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점점 낮아졌지만, 주님은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익히고, 양심을 따라 조금씩 거듭나는 방식 자체가 바로 그 섭리의 결과인 것입니다.

 

 

 

AC.200, 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AC.200.심화 3. ‘더 낮아졌지만 더 안전해진’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깊은 지각을 배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AC.200 해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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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0, 심화 1, ‘[quod scirent]’

AC.200.심화 1. ‘[quod scirent]’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에게는 아는 것[quod scirent]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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