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한 오멜을 여호와 앞과 증거판 앞에 간수하다 (출16:30-36)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16:30-36) And the people rested on the seventh day. And the house of Israel called the name of it Manna;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and the taste of it was like that of a cake in honey. And Moses said, This is the word which Jehovah hath commanded, Fill an omer with it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to the end that they may see the bread wherewith I fed you in the wilderness, when I brought you forth from the land of Egypt. And Moses said unto Aaron, Take an urn, and put the omer full of manna therein, and lay it up before Jehovah, to be kept for your generations. As Jehovah commanded Moses, and Aaron laid it up before the Testimony to be kept. And the sons of Israel did eat the manna forty years, until they came to a land inhabited; they did eat the manna until they came unto the border of the land of Canaan. And an omer is the tenth part of an ephah (Exod. 16:30-36).
※ 이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등을 모두 ‘이스라엘’ 하나로 통칭하겠습니다.
※ 그리고 ‘주님께서’라는 표현은 ‘주님이’, ‘주님은’ 등으로 하겠습니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30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은 선과 진리가 결합해 하나 되는 걸 의미하고, 그러므로 거듭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진리는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행하는 것이 선, 다른 말로는 선은 실행된 진리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실천될 때, 그것은 곧 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선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진리는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셨지요. 그런데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주님이 절대적으로 도와주셔야 하는데요, 그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만나’(Manna)라고 하는 선을 보내주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끌어 올리셔요. 그러니까 만나라는 선을 받기 전의 우리 의지는 마치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 짐승과 같아서 계속 아래만, 즉 지옥만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는데,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라는 선을 받고는 비로소 우리의 의지가 주님과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때 의지와 생각이 하나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를 받아먹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인데요, 오늘 말씀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비로소 만나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은 만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요, 그처럼 주님으로부터 만나라고 하는 선이 처음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우리 역시 그것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만나가 처음 흘러들어올 때, 그것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진리의 선이라고 하는 만나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하고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선’(the good of truth)이라는 것은 진리 모양을 한 선이라는 뜻인데요,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던 진리가 판단하고 분별하는 냉정한 진리였다면, 이 진리는 따뜻하고 포용하는 그런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평화이며 기쁨입니다.
※ 예를 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창2:6) 상태,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시는’(창2:3) 상태,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한 상태, 깜깜한 밤을 보내고 고요한 아침이 시작되는 상태, 추운 겨울을 지나 파릇파릇 봄이 시작되는 상태 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그 이름을 만나라고 했다는 건 그들이 이제 만나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말씀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것에 대한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안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만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건 그들이 만나라는 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그들이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라든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의 안에 빛, 곧 주님으로 말미암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세상 빛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는 이 빛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말씀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리와 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하지요.
※ 어떤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건 세상 진리로 주님의 진리를 판단하려는 거고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주님의 진리로 세상 진리를 살피는 겁니다. 이것이 퍼셉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잘못된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잘못된 종교나 거짓을 가르치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만나는 주님이 진실한 사람들에게만 열어주시는 참된 진리이고 선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문에서는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라고 합니다. 말씀에서 씨앗(seed) 또는 흰 것(white)은 진리를 말하는데요,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주님이 씨앗을 진리에 비유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깟씨 같이 희고’는 만나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특성을,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는 선의 특성을 말합니다. 과자(cake)는 선을 뜻하는데요, 이것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26:26)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떡이나 빵, 과자는 모두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꿀 섞은 과자’는 선으로부터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뜻합니다. 선 안에는 이렇게 그 자체로 내재 되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못 느낄 뿐이죠. 따라서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만나를 먼저 진리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느낀 그 진리는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었던 교리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진리였습니다. 그 속에는 선이 들어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꿀 같은 기쁨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은 이제 만나가 주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32절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십니다.
32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여호와께서는 만나에 대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광야는 시험을 뜻하는데요, 따라서 이 말씀은 거듭나기 위해 내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 곧 영적 전쟁을 하는 신앙인들에게는 만나가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만나에서 나오는 능력, 곧 만나가 주는 기쁨이 없으면 진리를 삶으로, 생활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나 없는 삶은 마치 죽도록 일을 하는데도 앞이 안 보이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만나가 꼭 필요합니다.
33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여기서 ‘항아리’(urn)는 만나라는 선을 담는 그릇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진리를 준비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리는 곧 만나 담는 항아리인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야 하고요, 시간을 내 말씀을 읽고, 또 교리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걸 아는 만큼, 그리고 그 지식을 삶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만큼 주님은 우리가 가진 진리 속에 만나를 넣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일상 생활 가운데 살아내는 만큼 만나 항아리가 점점 커진다는 겁니다. 항아리로 표상되는 그 진리 안에 만나라는 선이 담길 때, 비로소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선과 진리의 결합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겁니다.
‘오멜’(omer)은 곡식 같은 걸 계량하는 단위입니다. 그것에 대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그러니까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로 오멜과 ‘에바’(ephah)가 있는데 오멜은 에바의 십 분의 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십’(ten, 10)이라는 수가 들어가면 ‘충분하다’라는 속뜻을 가집니다. 그 겉 표현이 크든 작든 상관없는데요, 그래서 ‘십 분의 일’(1/10, the tenth part of)도 같은 의미입니다. ‘십 분의 일’ 역시 그 속뜻으로는 ‘충분하다’라는 뜻입니다. 요약, 정리하면, 항아리에 만나를 한 오멜 담는다는 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선을 주실 때 각자의 그릇에 따라 충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그릇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말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멜은 십 분의 일 에바이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각자의 그릇에 넘치도록 충분하게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시험을 이길 능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는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100도가 되지 않으면,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 이 숫자 ‘10’의 속뜻을 가지고 ‘십일조’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의 십 분의 일만 가지고도 주님은 우리가 사실은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으로 여기시는데요, 이를 알면, 우리가 우리 소득의 십 분의 일, 곧 십일조를 주께 드릴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은 각자의 그릇 크기만큼 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길 수 있는 만큼만 주님은 시험을 허락하셔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3)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충분히 받아야 하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한 오멜을 담으라 하셔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담는다기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 역할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먼저 진리를 열심히 배워야 하고요,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으라’시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여호와 앞에 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진리나 선은 바로 주님 자신이셔요. 그렇기 때문에 만나라는 선이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올 때, 동시에 주님도 우리 안으로 임하신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간수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뜻이고, ‘너희 대대로’라는 말은, 만나는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교회 사람들을 뜻하는데요, 이 영적 교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천적 교회’(the celestial church), ‘영적 교회’(the spiritual church)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여기서 ‘영적 교회’란 진리를 통해 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곧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진리가 먼저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만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듭날 때까지는 만나가 필요하며, 거듭난 다음에는 만나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는 이 말씀은 그것이 영적 교회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처방이라는 걸 꼭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4절에서 아론 역시 이스라엘에게 또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34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말씀은 33절 말씀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3절에서는 만나를 담아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하고, 34절에서는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증거판’(the two tables of the testimony)입니다. 증거판은 여호와, 곧 주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십계명을 친히 기록하신 돌판(the tables of stone)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1:18)
증거판은 하나님의 법, 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증거판이 그렇게 주님을 나타내고 신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성막 가장 깊은 곳에 증거판을 담은 괘를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는 증거판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판은 법으로서, 또는 진리로서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면, 만나를 여호와 앞에 간수하라 할 때 여호와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35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사람이 사는 땅,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를 먹었다고 합니다.
10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11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12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수5:10-12)
여기서 사람이 사는 땅, 가나안 땅은 바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매일 같이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아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천국은 선이 충만한 곳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고 선이 사람을 살립니다. 물론 진리와 선이 함께 사람을 살리죠. 그런데 먼저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으로부터 모든 능력이 나옵니다. 마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모든 생물이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사람이 사는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의 삶과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완전히 다르게 표현하는데요,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삶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랑하는 사십(40) 년으로, 그리고 한 주간의 엿새(6)로 표현하고, 그리고 천국에 들어간 이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으로, 그리고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7) 날, 곧 안식일로 표현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의 인도를 받아 선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듭난 다음에는 반대로 선의 인도를 받습니다. 즉 선의 인도를 받아 진리를 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나는 거듭나기 전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보낸 40년 동안,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진정한 진리가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도 얼마든지 진실인 것처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입증할 수 있었고,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진리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진리를 진리로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 주님한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새 교회 분이라고 해서, 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건 좀 놀라운, 좀 불편한 진실입니다. 진리를 적용할 때는 냉정하면 안 되지만, 그러나 엄격하게는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보면 그것이 엄격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기술하신 창, 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521번 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교회의 교리에서 배운 진리에 따라 행하려고 할 때, 그 진리는 그에게 선이 되며 그는 그것을 진정한 진리로 믿게 된다... (이순철 역, 출16:32, ‘깟씨 같이 희고’) The good of truth which is with those who are of the spiritual kingdom is implanted in the intellectual part, for there is formed by the Lord in this part a new will, which is that the man wills to do according to the truth that he has drawn from the teaching of his church; and when he wills and does this truth, it becomes with him good, and is called “spiritual good,” and also “the good of truth.” That this is really truth, he indeed believes, because he has faith from the teaching; (AC.8521:2, Exod. 16:32, ‘And it was like coriander seed, white’)
그러므로 먼저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진리를 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내적인 것들을 외적인 것 안에 담는 일입니다. 외적인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필요 없는 게 절대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없는 내적인 것은 기초 없는 집과 같아서 그냥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모든 내적인 것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곳이 바로 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가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분별하는 눈이 열립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좋아하는 물건을 모아 두듯 취미 삼아 무슨 소장품 모아 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살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진리를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을 수 있고, 또 진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지성 안에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시는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려는 마음조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우리 조상들부터 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인간의 지성 안에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새 의지를 심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그냥 쌓아두기만 하다가 끝날 겁니다.
새로운 의지를 따라 진리를 행하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찾아오는데 그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하는 우리들은 주님께 만나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기에 충분한 만나를 준비해 놓고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만나를 한 오멜 담아 여호와 앞에 두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꼭 머릿속에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었듯, 우리도 매일 같이 만나를 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우님들이 이 만나의 맛이 어떤지, 그리고 어느 때 주님으로부터 이 만나가 내 안에 흘러 들어오는지 하는 그 느낌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모든 교우님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5:37-38)
아멘
원본
2016-06-19(D1)
청주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5-06-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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