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4(D3)-매일예배(2488, 눅10,38-42),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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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8-42)

 

 

교회 교세가 너무도 미약,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계시록 12장, 아들을 낳는 여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곤 합니다. 계시록 12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5-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들을 낳은 여자’는 새 교회, 곧 주님 오셔서 새롭게 시작하실 새 예루살렘 교회, 인류의 다섯 번째가 될, 그리고 더 이상은 없는 마지막 영원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이 새 교회는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 세워집니다. 즉 기존의 교회들이 믿음과 삶의 행위를 분리시켜서 완전히 타락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교회들의 문을 닫으시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늘 그러셨습니다. 인류의 교회사를 보면, 지금이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앞 모든 교회 시대마다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새 교회, 그러나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하실 교회를 말씀에서는 ‘여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는 ‘아들’은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새로운 교리이며 말씀입니다.

 

새 교회 교리가 처음 나타날 때, 기존 교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을 지탱하고 있던 교리가, 그리고 지금은 ‘오직 믿음’의 교리가 한 번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새 교회가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말씀에서는 ‘여자가 광야로 피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초목이 자라지 않는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런 광야 한 가운데 이 새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런 이유로 해서 처음에는 새 교회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만 명 중 하나도 쉽지 않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주님의 때가 이르면 빠르게 부흥이 된다고 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여자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천이백육십일은 새 교회가 열악한 상태에서 차츰 부흥이 되는 기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새 교회가 처음에 얼마나 열악한지, 그리고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저는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새 교회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며, 때가 되면 크게 부흥할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예비하신 천이백육십일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손 놓고 그냥 주님이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 마르다라는 여인을 만나셨다는 겁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마음속에 교회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닙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구요, 여기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주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 진리를 선한 마음 가운데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에 선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끌어당겨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하나로 결합하려고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선한 마르다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참 진리이신 분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마르다의 믿음의 상태는 어땠을까요? 주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셨다는 사실로부터 마르다의 믿음이 어떤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을’은 신앙의 외적인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같은 것이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과 비교되는 것으로 좀 더 큰 성읍이 있지요. ‘성읍’은 신앙의 내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읍이 중심에 있고, 마을은 그 바깥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신앙은 외적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가 성읍에 살지 않고, 마을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신앙과 외적 신앙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한 마디로, 내적 신앙은 진리를 알면 바로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반면, 외적 신앙은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는데 삶으로는 옮기지 않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믿음은 후자의 신앙입니다. 39절에는 마르다와 비교되는 그의 동생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은, 주님은 진리이신 분 아닙니까? 그리고 발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요? 그래서 ‘주님의 발’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발치에 마리아가 앉아있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로부터 내적 진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했는데,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뜻이지요? 그렇게 보면, 마리아의 신앙이 언니 마르다보다는 더 내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언니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쁩니다. 그런 동생이 언니 마르다의 눈에는 한가로워 보이기만 합니다. 심지어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40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눈에 띄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바쁜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이고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장이 많아지고, 자기가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할 때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런 상태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주님에게서 물러나 자기 일 돕기를 원합니다. 마르다처럼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마리아 같은 내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눈치 없이 이기적이며,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자기 신앙이 마리아의 신앙보다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주님께서는 마르다가 불필요한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또 선교, 전도 활동 등은 교회의 재정과 역량에 맞게 가능한 한 단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것이 과연 주님을 위한 일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모든 일들이 목회자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거나, 또는 교인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숨은 동기로 하는 일들은 모두 외적인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시고, 그것에 따라서 일의 경중과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마리아가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일을 빼앗지 말라 하십니다. 그 일을 그만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의 번역은 다릅니다. ‘한 가지 일로 족하니라’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이라고 하니 정말 한 가지 일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게 아니고요, 여기서 ‘하나’는 속뜻으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로 족하다’는 것은 선한 일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번잡하게 여러 가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또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여러 가지 하는 일 중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선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순수하게 교회를 위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좀 불순한 목적이 들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게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겉으로 표 나는 일이 있고, 표가 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표가 나는 일을 하려고 하고요, 심지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용이 없고 보여주기식의 일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 것은 선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나 표가 나든지 말든지 꼭 필요한 일만을 묵묵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은 쓰임새에 충실한 일입니다. 천국은 쓰임새의 나라요, 천국 모든 구성원은 모두 이 쓰임새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르다는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행하기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가 이 바쁜 와중에 한가로이 주님 말씀이나 듣고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한 가지 일에 족하라고 충고하십니다. 한 가지 일은 앞에 말씀드린 대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달리 동생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선하게 보시고, 그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빼앗지 말라 언니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구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교회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수천 명의 성가대가 찬양을 하더라도, 교인들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외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 안에는 반드시 내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새 교회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새 교회의 미래가 머지않아 눈부시게 펼쳐질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2)

 

아멘

 

원본

2019-11-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4(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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