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6(D5)-매일예배(2489, 눅8,22-25), '호수를 건너가는 동안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말씀의 속뜻'.pdf
0.40MB

https://youtu.be/EGd-vV7cIac

 

 

 

호수를 건너가는 동안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말씀의 속뜻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눅8:22-25)

 

 

어느 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되셨습니다. 배가 진행되는 동안 주님이 잠깐 잠이 드셨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배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금방 배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제자들은 이대로 그냥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잔뜩 겁을 먹고, 잠이 드신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렇게 외치듯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잠깐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마치 바람 앞에 등불처럼 떨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게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며 떨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를 들으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람과 파도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다가 조용, 잔잔해졌습니다. 오늘 말씀의 줄거리가 여기까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제자들의 모습이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쩜 이리도 흡사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어떤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이렇게 온전히 믿을 수 없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오늘은 그러한 문제들을 본문의 영적인 의미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22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본문에는 ‘하루는’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영어 성경에는 ‘어느 날’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시간’은 어떤 뜻입니까? 각자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어느 날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 각자가 도달해 있는 어떤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상태는 물론 사람마다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상태에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상태에 있고... 다 다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요, 여기서 ‘’는 뭘까요? 배는 교리를 나타냅니다. 배가 없으면 바다를 건널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교회의 교리를 모르면 거듭남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교리를 모르면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은지 그런 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배는 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호수’는 물이 많기 때문에, ‘바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지옥을 의미합니다. 보통 ‘’은 진리를 의미하지요. 세례의 관점에서는. 그러나 반대로는 거짓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수는 물이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의미로는 지식을, 바다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진리의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거짓이 많은 곳, 그러니까 지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 것은 신앙인들이 지옥의 항해를 뚫고, 교리에 따라 거듭남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리에 따라 거듭남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그냥 배만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배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교리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님이 계실 때, 교리는 살아있는 교리가 됩니다. 교리나 진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교리가 살아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큰바람이 불더니 파도가 일어 배를 덮쳤습니다. 그 광경을 23절에서는,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셨다고 합니다. 시편 121편 4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런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이 잠이 드셨답니다. 주님께서 잠이 드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문자 그대로 주님이 잠이 드셨다는 것이 아니구요, 신앙인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믿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세상의 것들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중심에는 이기심과 세속적 욕망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말씀에서는 이런 상태를 주님이 주무시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시시때때로 지옥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모든 악과 거짓의 물결을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계셔야만 주님이 그것을 막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은 지옥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수많은 악과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그 악과 거짓들이란, 지옥이 인간의 머릿속으로 불어넣는 수많은 생각과 추측들입니다. 그 생각과 추측들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실제 상황을 부풀리거나 그 실제 상황을 왜곡하는 겁니다. 지옥은 우리에게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를 않습니다. 그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든 왜곡해서 오해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런 경험은 너무나도 많으실 겁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가 매일 수많은 일을 겪고,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겪을 때, 우리가 느끼는 느낌이 있는데요, 주님이 함께 계실 때는 언제나 긍정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지옥이 그 많은 정보를 왜곡해서 우리한테 전달합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필시 저 사람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기 때문일꺼야... 라고 그 사람의 진심을 의심하거나,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주어도 저거는 뭐 어떤 다른, 또 다른 무슨 좋지 않은 의도가 있을꺼야 이렇게 추측하게 만든다거나 등등 이런 것들이 다 지옥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왜곡된 정보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한 것’은 영적 시험을 의미합니다. 24절에는, 시험 가운데서 신앙인들이 극도의 불안을 느끼면서 주님을 찾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우리가 시험이 올 때, 어떤 느낌입니까? 싸움 아닙니까?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힘센 사람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는 주님께서 앞장서셔서 그 싸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시는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믿거나 자기 자신의 지혜를 믿을 때는 우리는 혼자 싸워야 하며, 그때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롭니다. 그래서 거짓의 유혹에 넘어갈 때, 신앙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바로 주님을 깨웠다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의 삶에서는 시험이 시작되더라도 한동안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도 해보려고 하고, 저렇게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옥은 점점 더 우리의 목을 죕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시험이 깊어질 때는 이웃을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기도 어렵고, 이웃에게 너그럽게 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조차 힘에 부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옥에서 오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 중에는, 시험을 받을 때는 큰 실수를 하기도 하고, 작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이웃에게 주기도 하지요. 그런 식으로 시험의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때 비로소 신앙인들은 ‘주여, 제가 죽겠나이다. 제 힘으로는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이렇게 외치면서 주님의 손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잠들어 계신 주님을 깨우는 순간입니다. 그때 주님은 깨셔서 미칠 듯이 부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서 부글거리던 모든 의심과 오해,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불순한 욕망이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바람과 파도가 딱 멎는 것 같이,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 같이 그렇게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시험은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기 전에는 시험은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험은 오직 주님을 의지할 때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참된 기독교’ 123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옥은 마치 괴물이나 사자와 같아서 주님이 족쇄를 채우시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 혼자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TCR.123)

 

유튜브 영상 가운데는 사람이 호랑이와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는 그런 영상이 있습니다. 그 호랑이가 바로 지옥의 모습입니다. 먹이를 쫓는 사자나 호랑이가 얼마나 집요하게 덤빕니까? 지옥이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우리한테 달려드는데요, 그래서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적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지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람이 멈췄을 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이르셨을 때, 주님의 제자들의 반응은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였습니다.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두려워하고’는 주님을 아직 잘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설사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섭리, 주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궁극적으로는 주님께서 바른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원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그 기적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무슨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기적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가 아주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같은 인간과 다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적은 신성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런 기적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 다른 기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을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시험을 이길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은 바람을 잠재우는 기적을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에, 주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지옥이라는 데가 어떤 곳, 어떤 상태임을, 그 속성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그동안, 오랫동안 가까이서 주님을 모셔 왔기 때문에,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봤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고요, 중풍 들린 자를 걷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기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천 명을 먹이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 주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주님을 가까이서 아는, 잘 아는,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것을 마태복음 13장 54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4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예수를 배척한지라 (마13:54-57)

 

주님은 그들에게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진리가 정작 교회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교회는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과 사랑을 분리,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따로 떼어놓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비밀’ 3868번 글을 보면, ‘믿음은 이웃 사랑에서 비롯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의 형상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일종의 의지와 같은 것이구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뭡니까? 진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진립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진리를 많이 알아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 가운데는 주님이 계시지 않구요, 그런 믿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바람과 파도가 높을수록 이웃을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니까 이것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막 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올 때,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도 아무렇게나 하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주님과 이웃과 교회를 위해 나를 돌보고 바로 세우는 것은, 그러므로 언제나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의 곳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8:31)

 

아멘

 

원본

2018-11-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6(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